옛신앙 2005년 11월 13일 [제9권 46호] ◆ 매주 발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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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하였으며"(렘 6:16). |
옛신앙
Old-time Faith www.oldfaith.net |
'옛신앙'이란, 옛부터 하나님의 선지자들과 주의 사도들이 가졌던 신앙, 오직 정확 무오(無誤)한 하나님 말씀인 신구약 성경에만 근거한 신앙, 오늘날 배교와 타협의 풍조에 물들지 않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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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884 서울 마포구 합정동 364-1
합정동교회 김효성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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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오전설교: "중생(重生, 거듭남)" 요한복음 3:3, 5,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오늘 읽은 본문에 보면,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밤에 예수님께 찾아왔습니다. 그는 당시에 경건하고 보수적인 바리새인이었고 사회적 신분이 있는 유대인의 관원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밤에 찾아온 것은 아마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께 말하기를, 자신은 그가 행하신 기적들을 볼 때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님인 줄 안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2: 23에 보면, 예수께서는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계셨고 거기서 기적들을 행하셨습니다. 니고데모는 그것을 보았거나 들었던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선지자로 인정하였습니다. 그는 다른 이들처럼 예수님을 거짓된 인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르게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께서는 니고데모의 말에 대답하시면서 중생(重生) 즉 거듭남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중생의 의미와 필요성 혹은 중요성, 중생의 방법, 중생의 증거 등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말씀은 니고데모가 아직 중생하지 못했음을 암시합니다. 예수님을 바로 알지 못한 사람은 니고데모처럼 아직 중생하지 못한 자입니다. 이것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중생(重生)이란 죽었던 영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본문 3절에 '거듭남'이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거듭남은 육신적 개념이 아니고 영적 개념입니다. 그래서 주께서는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영의 거듭남에 대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람의 육은 모태에서 나왔지만 그 영은 다시 날 필요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영의 다시 남이 중생입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자신들의 죄로 인하여 영적으로 죽어 있다고 말합니다. 에스겔 18:20은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고 말합니다. 에베소서 2:1은 우리가 과거에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들이었다고 말합니다. 영의 죽음은 영이 없다는 뜻이 아니고 영이 제 기능, 특히 경건과 도덕성의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로마서 6:23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말합니다. 모든 죄인은 이미 영적으로 죽어 있고 또 육적으로도 죽음을 향해 가고 있고 장차 영원히 지옥의 형벌 즉 성경에서 둘째 사망이라고 불리우는 죽음을 죽을 것입니다. 죄의 보응인 죽음은 이렇게 포괄적인 의미를 가집니다. 죄로 인하여 죽었던 영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 중생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께서는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고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인류를 향하신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목표입니다. 그 나라는 영원한 나라입니다(벧후 1:11). 다니엘 2:44은 하늘의 하나님께서 장차 영원히 망하지 않는 한 나라를 세우실 것을 예언했습니다. 그것이 신약 시대에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워지는 나라입니다. 신약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의 시작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담대히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했습니다(행 28:31).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는 영생의 나라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생 복락을 누릴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소망은 영생의 소망입니다. 디도서 1:2에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께서 영원한 때 전부터 영생을 약속하셨습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복된 소망입니다. 요한복음 3:16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말합니다. 영생이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구원입니다. 구원은 영생의 구원입니다. 요한복음은 '영생'에 대해 많이 증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그 영생은 죄사함으로 말미암아 옵니다. 죽음이 죄 때문에 왔었기 때문에 영생은 죄사함으로 말미암습니다. 죽었던 영은 죄사함으로 다시 삽니다. 그것이 중생입니다. 사람이 중생하지 않고서는 영생할 수 없습니다. 영원히 복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중생해야 합니다. 중생은 우리 모두에게 꼭 필요한 일입니다. 사람은 어떻게 중생할 수 있습니까? 중생의 방법은 무엇입니까? 본문 3절에 '거듭나지'라는 원어는 한 단어가 아니고 '거듭'이라는 단어와 '난다'는 단어인데, 이 중에 '거듭'이라는 원어(아노덴)는 '거듭'이라는 뜻도 있지만, '위로부터'라는 뜻도 있습니다(요 3:31). 거듭나는 것은 또한 위로부터, 하나님께로부터 나는 것입니다. 주께서는 본문 5절에서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증거하십니다. '물과 성령으로'라는 말은 중생의 방법을 보다 명확하게 증거합니다. 물은 죄씻음을 상징합니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물로 더러운 것을 씻습니다. 물은 씻는 것을 상징합니다. 에스겔 36:25은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신약교회의 세례 의식은 죄씻음을 상징합니다. 세례의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를 상징합니다. 그러나 죄씻음은 실상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 곧 구원의 말씀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5:3에 보면,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또 에베소서 5:26에서 바울은 주께서 교회를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또 사도 베드로는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고 편지를 썼습니다(벧전 1:23). 사람이 거듭나려면 맑은 물로,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속죄의 피로, 복음 진리의 말씀으로 먼저 죄씻음을 받아야 합니다. 주께서는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중생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은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구주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죄인들의 죽은 영들을 다시 살리십니다. 주께서 죽은 나사로를 불러 살리시듯이, 성령께서는 죽은 영들을 불러 일으키십니다. 성령께서는 "죽은 영들아, 일어나라, 살아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중생은 성령께서 하시는 구원 사역입니다. 성령께서는 복음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죄인에게 적용시키십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6장에서 말하기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고 했습니다(고전 6:9-11). 또 바울은 디도서 3:5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다"고 말합니다. 중생은 성령 안에서,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집니다. 이와 같이, 사람은 물과 성령으로, 즉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와 복음 진리의 말씀으로 그리고 성령의 역사로 중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중생했는지 여부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사람이 중생한 증거는 무엇입니까? 중생의 첫번째 증거는 회개입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눅 24: 47). 사도들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회개함으로 죄사함 혹은 죄 없이 함을 받으라고 외쳤습니다(행 2:38; 3:19). 회개는 죄를 깨닫고 죄를 버리는 것, 곧 죄의 청산이며 참된 회개는 행위의 변화를 가져옵니다. 참된 회개, 곧 행실의 변화는 곧 중생의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에서 말하기를,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하나님께로부터 나지--원문의 뜻] 아니하니라"고 한 것입니다(3:9-10). 중생의 두 번째 증거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4절로 16절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생의 구원을 얻음을 증거합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마가복음 16:16에 보면, 부활하신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마지막 명령을 하시면서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빌립보 옥의 간수에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증거했던 것입니다(행 16:31).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그리고 믿는 자만, 구원을 받습니다. 그가 중생한 자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5:1에서 증거하기를,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라고 했습니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 이름을 믿는 자는 구원을 받은 자요 곧 그가 중생한 자이며 영생을 얻은 자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 예수께서는 중생의 필요성과 중요성, 중생의 방법과 중생의 증거를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물과 성령으로 죄씻음을 받고 다시 나지 않으면 결코 영생의 나라인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죄인은 자신의 죄값을 따라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며 그 사망은 두려운 지옥의 형벌을 포함합니다. 그러므로 죽은 영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 공로와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다시 살아나야 합니다. 누구든지 중생해야 영생의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중생했습니까? 중생은 신비한 사건이지만, 우리는 회개와 믿음으로 그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추하고 더러운 죄악들을 다 버리고 새 삶을 살아야 합니다. 누구든지 회개해야 죄씻음을 받을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이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은 다 구주 예수께로 나와야 합니다. 죄를 다 청산하십시오. 회개에 합당한 열매, 곧 행위의 변화를 나타내십시오. 그리고 오직 구주 예수 그리스도만 믿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회개하고 예수 믿는 자를 구원하십니다. 죄를 회개하고 구주 예수를 믿는 것이 구원의 길입니다. 또 그것이 중생의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길입니다. 여러분은 모든 죄를 회개하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습니까? 아직 그렇게 하지 않은 분이 있다면 지금 그렇게 하십시오. 내일로 미루지 마십시오. 내일은 여러분의 시간이 아닙니다. 지금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시오. ------------------------------------------------------------------------------------ 교리강해: "칭의(稱義)" 성경에서 구원은 칭의(稱義, 의롭다 하심)로 표현된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33문답은 칭의에 대해 답하기를, "칭의(稱義)는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의 행위인데, 그것에서 그는, 우리에게 전가(轉嫁)되고 믿음으로만 받는 그리스도의 의 때문에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그 앞에서 의로운 자로 용납하십니다"라고 한다. 성경이 말하는 칭의는 다음 몇 가지의 성격을 가진다. 첫째로, 칭의는 법정적(法廷的, forensic)이다. 즉 그것은 하나님의 법정에서의 선언인 것이다. 온 세상의 심판주이신 하나님께서는 하늘 법정에서 예수 믿는 자들을 의롭다고 선언하신다. 그것은 죄인의 죄책(罪責, guilt; 법적 책임)을 제거시키는 것이며 죄인으로서의 신분을 의인의 신분으로 회복시켜 주시는 것이다. 성화와 비교해 볼 때, 칭의는 죄책의 제거이며, 성화는 죄성 혹은 부패성의 극복이다. 또 중생, 회심, 성화는 사람의 내적, 인격적, 실제적 변화이지만, 칭의는 사람의 외적, 신분적, 법적 변화이다. 그것은 사람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고 사람 밖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칭의 혹은 '의롭다 하다'는 성경 용어가 사람을 실제로 의롭게 만든다는 뜻이 아니고 '의롭다고 인정한다'는 뜻이라는 것은 다음의 여러 구절들에서 분명하다. 출애굽기 23:7, "나는 악인을 의롭다 하지 아니하겠노라." 신명기 25:1, "사람과 사람 사이에 시비가 생겨서 재판을 청하거든, 재판장은 그들을 재판하여 의인은 의롭다 하고 악인은 정죄할 것이며." 잠언 17:15, "악인을 의롭다 하며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자는 다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느니라." 이사야 5:23, "그들은 뇌물로 인하여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에게서 그 의를 빼앗는도다." '의롭다 하다'는 히브리어 히츠디크는 정죄(定罪)라는 말과 대조되는 법적, 재판적 용어이지, 사람의 내면적 의(義)의 덕을 서술하는 것이 아니다. '의롭다 하다'는 헬라어 디카이오오도 법적, 재판적 의미를 가진다. 로마서 8:33, 34,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갈라디아서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로마서 3:21, 22, "이제는 율법 외에(코리스 노무, '율법과 별개로, 율법과 관계 없이')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 . .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로마서 4: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둘째로, 칭의는 하나님의 전적 은혜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로마서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로마서 5: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그러므로 사람은 율법을 행함으로가 아니고 오직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의 골자이다. 로마서 3: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결론을 내리노라]." 로마서 4:4, 5, ". . .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셋째로, 칭의는 즉각적이며 완전하다. 로마서 5:1, 9,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는 원어(디카이오덴테스, 부정과거분사)는 문법적으로 반복이나 진행의 의미가 아니고 단순한 사건을 나타낸다. 로마서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곧 육신을 좇지 않고 성령을 좇아 행하는 자들--전통본문]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히브리서 10:10,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헤기아스메노이, 완료시제)." 히브리서 10:14,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테텔레이오켄, 완료시제)." 그러므로 칭의는 믿음의 크고 작음 혹은 많고 적음의 정도에 관계되지 않는다. 작은 믿음일지라도 진실한 믿음이라면 칭의를 얻기에 충분한 믿음이다. 우리의 믿음이 우리를 의롭게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믿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보혈로 우리의 죄를 깨끗이 씻으시고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로 인정받게 하신다. 사람은 어떻게 의롭다 하심을 얻는가? 칭의는 우리의 선한 행위들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다. 이사야 64:6,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로마서 3:20,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로마서 3:21, "율법 외에"(코리스 노무, '율법과 관계 없이'). 로마서 4:4, 5,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로마서 3: 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율법의 행위와 관계 없고 오직]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갈라디아서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엑스 에르곤 노무)가 아니고, 오직 믿음을 통해서(디아 피스데오스)이다. 그러나 믿음이 의로 간주된다고 해서(롬 4:3, 9), 믿음 자체가 의로 간주된다거나 믿음 자체가 효력을 가진다고 볼 것은 아니다. 믿음은 단순히 칭의의 수단일 뿐이며 그 효력은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로마서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에베소서 2: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다시 말해,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믿음 때문에'(디아 피스틴)가 아니고 단지 '믿음을 통하여'(디아 피스테오스)이다. 어떤 이들(알미니우스주의)은 믿음 자체가 의로 간주된다고 본다. 그러나 믿음은 기관차와 객차를 연결하는 연결쇠와 같다. 물론 객차가 가려면 먼저 연결쇠로 기관차와 연결되어야 하지만, 객차를 끄는 것은 연결쇠가 아니고 기관차이다(박형룡, 구원론, 299쪽). 야고보서 2:14-26의 말씀은 사도 바울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 밝히 증거한 이신칭의(以信稱義)의 복음과 충돌한다고 보일지도 모른다: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 .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 . .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 . .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使者)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그러나 우리는 바울의 복음과 야고보의 교훈을 충돌시켜서는 안 된다고 본다. 바울은,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소위 율법주의에 반대하여,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 율법적 행위로가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임을 강조하였다. 즉 그는 율법적 행위의 의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의를 구별하며 구원 진리를 설명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참 믿음이 사랑으로 행동하며 의에 순종하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갈라디아서 5: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로마서 6: 17, 18,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한편, 야고보는, 율법 폐기론이나 혹은 그것이 빠지기 쉬운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에 반대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는 믿음이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선행을 동반함을 강조하였다. 즉 그는 행함이 없는 믿음과 행함이 있는 믿음을 구별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죄인이 행함이 없는 믿음만으로는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며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표현하였고, 이런 문맥에서 그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바친 순종의 행위를 인용한 것이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진리는 구약 시대에도 성도들에게 적용되었는가? 그렇다고 본다. 하나님께서 범죄한 아담과 하와를 에덴 동산에서 내어보내시기 전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것은 이 은혜의 구원을 암시하였다(창 3:21). 아담과 하와의 아들 아벨은 양을 죽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는데 이것은 그가 하나님의 은혜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음을 의미한다(창 4:4). 특히, 아브라함의 경우는 구약 시대 성도에게도 이 원리가 적용됨을 증거한다. 창세기 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바울은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자가 없다고 증거한다(롬 3:20). 또 요한계시록에는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계 13:8)고 증거하였다. 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말하기를, "구약 아래서 믿는 자들의 칭의는, 이 모든 점들에서, 신약 아래서 믿는 자들의 칭의와 동일하다"(11:6)고 하였다. 신자는 언제 의롭다 하심을 얻는가? 택한 백성들을 위한 칭의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 속에 계획되어진 것이고 역사적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과 부활로 확립되었지만, 그들을 위한 칭의가 영원 전에 이루어졌다거나 십자가 위에서 이루어졌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로마서 4:25,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로마서 8:30,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또한, 온 세상의 심판주이신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심판 때에 구원받은 성도들을 죄 없다고, 의롭다고 공적으로 선포하실 것이지만, 성도들의 칭의가 그 때 이루어진다고 보아서도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분명히 가르치기 때문이다. 죄인의 칭의는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이루어진다. 마지막 심판 때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내리실 의롭다는 선언은 그들이 믿음으로 이미 받은 칭의의 확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요한복음 5:24,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정죄]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로마서 8:33, 34,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 ◈ 우리는 성경의 근본 교리들을 보수하고, 자유주의 신학과 천주교회의 배교를 포용하는 타협과, 은사운동의 혼란을 반대하고, 또 그런 자들과 교제하는 자들도 책망하기를 원한다. 우리는 오늘날도 성경 말씀의 정로(正路)를 붙들고 그 길로 가는 교회들이 부흥 발전하기를 기도하며, 또 그런 자들과 교제하기를 원한다. ----------------------------------------------------------------------- ♣ www.oldfaith.net에 올려져 있는 현대교회문제와 현대교회문제 자료집 및 옛신앙지(특별호) 등의 자료들을 참고하십시오.
전화: (02) 334-8291, 팩스: (02) 337-4869 ◈ 책 안내 ●김효성, 신약성경강해. 1192면. 20,000원(송료 포함). ●김효성, 현대교회문제 자료집. 330면. 5,000원(송료 포함). ● 김효성, 현대교회문제: 배교, 타협, 혼란 ● 조영엽, 왜 열린 예배는 잘못되었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