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신앙 2005년 7월 24일 [제9권 30호] ◆ 매주 발행 ◆ |
|||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하였으며"(렘 6:16). |
옛신앙
Old-time Faith www.oldfaith.net |
'옛신앙'이란, 옛부터 하나님의 선지자들과 주의 사도들이 가졌던 신앙, 오직 정확 무오(無誤)한 하나님 말씀인 신구약 성경에만 근거한 신앙, 오늘날 배교와 타협의 풍조에 물들지 않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
|
121-884 서울 마포구 합정동 364-1
합정동교회 김효성 목사, |
|||
주일오전설교: 귀히 쓰는 그릇 디모데후서 2:21,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사람이 존귀한 인간으로 이 세상에 태어났으면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을 살다가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목적을 가지시고 우리를 창조하셨고 또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선한 일을 힘쓰게 하기 위해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큰 집에는 금그릇과 은그릇뿐 아니라 나무그릇과 질그릇이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습니다. 주인의 밥상에 놓는 밥그릇이나 국그릇을 위해서는 귀한 그릇이 사용될 것입니다. 집에 귀한 손님이 찾아오면 평소에는 쓰지 않고 보관해 놓던 귀한 그릇을 꺼내어 사용할 것입니다. 그러나 쓰레기통이나 오물통을 위해서는 천한 그릇을 쓸 것입니다. 주께서는 달란트 비유에서 사람에 따라 어떤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어떤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어떤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신다고 했습니다(마 25 :14, 15).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신 재능이 각각 다르고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주신 은사도 각각 다릅니다. 한 몸에 많은 지체들이 있고 그 기능이 각각 다르듯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요 그 지체들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재능과 은사가 어떠하든지 간에 우리가 하나님께 귀히 쓰이는 그릇이 되는 길에 대해 교훈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집에서 귀히 쓰이는 그릇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우주의 창조자시요 섭리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가치 있는 삶을 살다가 그 앞에 서야 할 것입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집에서 귀하게 쓰이려면 사상적으로 깨끗한 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 21절에서 사도는 말씀하기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이런 것'이란 앞에서 말한 후메내오와 빌레도의 이단 사상들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귀히 쓰일 자들은 이런 이단 사상들로부터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진리의 나라입니다. 거짓말은 진리가 아니며 진리의 나라에 합당치 않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구원을 알지 못하고 천국과 영생을 알지 못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다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하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들은 다 구원을 받고 진리의 바른 지식을 가져야 합니다. 구원받은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세상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구원과 내세에 대해 바른 지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한 지식은 성경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든 진리를 바르게 파악하고 알고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적 기독교가 무엇인지 바르게 알고 그 신앙을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세계에서 바른 진리의 지식과 신앙고백은 기본적입니다. 여기에 진리의 세계와 비진리의 세계의 차이가 있고 교회와 세상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 15절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일꾼들은 무엇보다 진리의 말씀을 옳게 이해하고 해설할 줄 아는 자이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는 때때로 잘못된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들어옵니다. 본문에 나오는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고 가르침으로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고 있었습니다(18절). 그들의 말은 독한 암과 같았습니다(17절). 역사상, 천주교회나 기타 여러 이단 종파들이 기독교의 이름으로 잘못된 이단 사상들을 가르쳐왔고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이나 기타 여러 현대적 사조들이 이단적입니다. 우리는 사상적으로, 교리적으로 깨끗해야 합니다. 거기에 보수신앙의 중요성이 있습니다. 거기에 개혁주의 신학의 중요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참 선지자들과 주의 진실한 사도들이 받았고 지켰던 그 신앙을 오늘날도 지키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옛신앙이요 그 길이 옛길 곧 바른 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렘 6:16). 예레미야 당시의 유다 사람들은 그 하나님의 명령을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신앙의 열조들이 걸었던 그 옛적 길 곧 선한 길을 걸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6장에서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교훈을 거스려「너희가 배운 교리, 역사적 기독교를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고 했습니다(롬 16: 17). 또 그는 영적 아들 디모데에게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라「바른 말의 윤곽 혹은 개요를 지키라」"고 말했습니다(딤후 1:13, 14). 야고보의 형제 유다는 유다서에서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고 권면했습니다(유 3). 사상적으로, 교리적으로 깨끗하고 건전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교회에서 귀하게 쓰임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성경 읽기와 성경 연구를 통해 전통적, 정통적 기독교 신앙 곧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잘 파악하고 믿으며 교리적 오류들을 분별하고 배격해야 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집에서 귀하게 쓰이는 그릇은 윤리적으로도 깨끗해야 합니다. 아무리 값비싼 그릇이라도 더러운 그릇은 귀하게 쓸 수 없습니다. 먼저 잘 씻어야 합니다. 특히 안을 잘 씻어야 합니다. 그러나 때가 찌들면 잘 씻어지지 않습니다. 귀한 그릇은 더러워지지 않도록 잘 보관했다가 필요한 때 즉시 써야 합니다. 이와 같이, 아무리 재능과 은사가 있어도, 도덕적으로 깨끗지 못한 자는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받을 수 없습니다. 먼저 잘 씻어야 합니다. 특히 안을 잘 씻어야 합니다. 즉 철저히 회개해야 합니다. 때가 찌들면 잘 씻어지지 않듯이, 사람이 자신의 죄악된 말들과 행실들을 방치해두면, 나중에 회개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죄를 지적받을 때마다 즉시 즉시 회개해야 합니다. 본문 22절에서 사도 바울은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고 교훈했습니다. 세상은 온갖 죄악들로 가득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죄가 없는 나라요 의로운 나라입니다. 교회는 비록 불완전하지만 하나님의 나라의 시작입니다. 교회는 세상에서 죄로부터 구원을 받은 자들의 거룩한 모임입니다. 죄인들은 그들의 모든 죄를 뉘우치고 그것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하나님의 영원한 지옥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죄들 중에 대표적인 것 하나는 정욕의 죄 곧 음란의 죄입니다. 성도는 음란의 죄로부터 깨끗해야 합니다. 또 본문에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라는 말씀은 참 교회의 모습을 보입니다. '깨끗한 마음'은 모든 죄를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만 진실하게 믿는 마음입니다. 세상적 동기를 가지고서가 아니고 순수한 마음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고 그를 섬기며 그의 명령을 따라 서로 사랑함을 실천하는 그들이 참 교회입니다. 또 참 교회는 의를 추구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미 법적으로 의를 얻었지만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하는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또 우리는 믿음으로 행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모든 불신앙과 의심을 버리고 믿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또 우리는 사랑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주께서는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요 13:34).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며 가장 고상한 덕이고 우리가 영원히 간직해야 할 성품입니다. 천국에서도 우리는 서로 사랑할 것입니다. 또 우리는 화평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우리 속에는 싸움의 씨앗이 되는 교만과 시기와 미움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온유하고 겸손해야 하며 서로를 이해하고 용서하려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죄악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므로 악이 그와 함께 유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교만한 자와 행악자를 미워하십니다(시 5:4, 5). 시편 15편은 정직하고 의롭게 행하고 진실한 말을 하며 남을 비난하지 않고 남에게 악을 행치 않는 자들이 하나님의 장막과 그의 성산에 거할 만한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거주민들의 특징이 그러하다면, 하나님께서 윤리적으로 깨끗한 자들을 귀한 그릇으로 쓰실 것이라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집에서 귀하게 쓰이는 그릇은 특히 온유한 그릇이어야 합니다. 본문 24절부터 26절까지에서 사도 바울은 말씀하기를,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저희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좇게 하실까 함이라"고 합니다. 26절을 다시 번역하면, "마귀에게 사로잡혀 그 뜻을 따랐던 저희로 깨어 그 올무에서 벗어나게 하실까 함이라"입니다. 이 구절은 한마디로 온유한 인격이 되라는 교훈입니다. 온유함은 주의 일을 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덕목입니다. 죄악된 세상의 특징은 강포함입니다. 노아 시대 홍수 심판 전의 세상의 특징은 강포함이었습니다. 창세기 6:11, 13은 그 당시의 세상에 강포가 충만했다고 증거합니다. 예레미야 6:6은 멸망을 받을 예루살렘성에는 오직 포학한 것만 있었다고 증거합니다. 죄악된 인간 본성은 포학함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1:29). 또 성령의 열매에는 온유함이 포함되어 있습니다(갈 5:22, 23).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는 온유한 자이었습니다. 민수기 12:3에는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온유한 인격을 지도자로 세우셨고 그를 들어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귀한 종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를 주신 것은 그를 쳐서 너무 자고(自高)하지 않게 하심이었습니다(고후 12:7).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벧전 5:5). 하나님께서 사람을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십니다(시 75:6, 7). 주께서는 친히 말씀하시기를,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하셨고(마 20:26, 27), 또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하셨습니다(마 23:12). 하나님께서는 온유하고 겸손한 자를 들어 쓰십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세상과 교회는 완연히 구별됩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구원과 천국과 영생을 알지 못하고 죄 가운데 낙을 누리며 방황하고 있습니다. 그 목적지는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와 형벌의 장소인 지옥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이제는 하나님의 뜻을 좇아 의와 거룩과 선을 추구하는 자들의 모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같이 부족한 자들을 구원하신 목적은 하나님의 선한 일을 위해 쓰시기 위함인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귀하게 쓰이려면 우리는 우선 사상적으로 깨끗한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늘 성경을 읽고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진리의 바른 지식, 곧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파악하고 확신해야 하고 천주교회나 자유주의 이단 사상뿐 아니라 오늘날 여러 가지 비성경적 운동들을 경계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귀하게 쓰이려면 우리는 윤리적으로도 깨끗한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죄악을 버리고 거룩함과 선함과 진실함으로 단장되어야 합니다. 비록 타고난 재능과 받은 은사가 부족할지라도, 깨끗한 그릇은 귀하게 쓰임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깨끗한 그릇을 사용하십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귀하게 쓰이려면 우리는 특히 온유한 인격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온유하고 겸손한 자를 들어 쓰십니다. 교만한 자는 하나님의 일을 어그러뜨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고 교회에 해를 끼치게 됩니다. 교만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무서운 악입니다. 그러나 온유하고 겸손한 일꾼들은 교회에 덕을 세우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받는 일꾼들이 됩시다. ----------------------------------------------------------------------- 주일오후설교: 은혜언약(계속) 은혜언약에는 법적 측면과 생명적 측면이 있다. 은혜언약에는 법적 측면이 있다. 신자의 자녀들은 구약시대에 합법적으로 은혜언약 안에 참여하였다. 이것은 할례의 규례에서 잘 증거된다. 이스라엘 백성은 남자 아이들이 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아야 했다(창 17:7, 10, 12). 애굽에서 나와 광야를 거쳐 모압 평지에 이른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 다시 언약을 맺었을 때 성인 남자들뿐 아니라 그들의 아내들과 유아들까지 다 포함되었다(신 29:10-12). 은혜언약의 이러한 법적 측면은 신약 아래서도 계속 유지된다. 사도행전 16:31,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고린도전서 7:14,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 법적 측면에서 볼 때 은혜언약 안에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주로 진실히 믿는 성인들이며,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자녀들이고, 셋째는 법적으로 언약 안에 들어와 있는 비(非)중생자들이다. 이 세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형식적 교인들이거나 위선자들이다. 예를 들어, 구약시대에 이스마엘이나 에서나 불신앙적 유대인들은 다 은혜언약의 규례들에 참여하고 그 언약의 책임 아래 있었고 어느 정도 그 언약의 특권을 누렸으나 은혜언약의 참백성이 아니었다. 그러나 은혜언약에는 생명적 측면이 있다. 택함 받은 모든 사람은 중생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실제로 새 생명을 얻고 새 삶,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삶을 산다. 형식적 교인들과 중생한 성도들은, 비록 우리가 그들을 정확히 구별할 수는 없어도, 그들의 행위를 통해 확인된다. 데살로니가전서 1:3, 4,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 . . 기억함이니,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요한일서 3:10,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우리는 단지 법적으로만 아니고 생명적으로 언약 백성이 되어야 한다. 은혜언약은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에 다르게 집행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언약의 집행 방식의 차이일 뿐이며, 두 언약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먼저, 구약시대를 살펴보자. 은혜언약은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께서 뱀 곧 사탄에게 하신 선언에서 제일 처음 암시되었다. 창세기 3:15,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이 구절은 '원시 복음'이라고 보통 불리운다. '여자의 씨'는 메시야를 예표하였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4:4에서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라고 말했을 때 그는 이 원시 복음을 염두에 둔 것이 확실하다. 은혜언약은 또한 노아와의 언약에서도 나타났다. 노아와의 언약은 두 가지이었다. 첫번째는 홍수 심판으로부터의 구원의 약속이었다(창 6:17, 18). 그 구원은 방주를 통해 이루어질 것이었다. 그 방주는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은혜의 구원을 예표한다. 은혜언약은 또 아브라함과의 언약에서도 아주 명료하고 충분하게 나타났다. 이 언약은 하나님과 정식으로 맺어졌고 그 표로서 할례의 규례가 주어졌다(창 17:9- 14). 이 언약은 아브람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얻은 의에 근거하였다(창 15:6). 이 언약은 민족적이며 또한 세계적이었다(창 12:2, 3; 22:18). 이 언약은 물질적이며 또 영적이었다. 이 언약은 신약 교회에도 적용된다(롬 4: 16; 갈 3:29). 은혜언약은 또 시내산 언약에서도 나타났다. 시내산 언약은 구약을 대표한다. 구약(舊約, 옛언약)은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과 맺으신 언약으로 정의된다. 모세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책에 기록하고 그 책을 백성 앞에서 낭독하였으며 그 책을 '언약서'라고 불렀고 또 제물의 피를 백성 앞에 뿌렸는데 그 피를 '언약의 피'라고 불렀다(출 24:1-8). 시내산 언약은 율법의 형식으로 주어졌다. 모세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율법은 도덕법, 재판법, 의식법으로 구성되었는데, 여기에서 특히 도덕법과 의식법이 중요하였다. 도덕법은 외적으로는 행위언약적 요구를 강조하는 듯하였다. 도덕법의 요구는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는 말로 요약된다. 그러나 도덕법의 의도(意圖)는 행위언약의 갱신이 아니고 은혜언약을 위한 보조이었다. 사람이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을 뿐이요 그것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한다(롬 3:20). 한편, 의식법은 예수 그리스도와 구속(救贖)의 은혜를 증거한다. 예를 들어, 제사 제도와 성막 제도, 특히 지성소의 법궤와 속죄소의 규례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예표하였다. 여기에 시내산 언약 혹은 구약의 은혜언약적 성격이 증거된다. 레위기 4:20, "제사장이 그것[속죄 제물]으로 회중을 위하여 속죄한즉 그들이 사함을 얻으리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7:5, "그들[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그 약속된 메시야로 말미암아 완전한 죄사함과 영원한 구원을 얻었었다." 신약(新約, 새언약)이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를 믿는 사람들과 맺으신 언약이다. 예레미야는 신약시대를 예언하였었다(렘 31:31). 예수께서는 마지막 만찬 때에 새 언약을 선포하셨다. 누가복음 22:20,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사도 바울은 그 사실을 증거했고(고전 11:25) 또 율법 시대와 복음 시대를 '구약'과 '신약'(새 언약)이라는 말로 구별하였다(고후 3:6, 14). 신약시대의 특징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구약에 예표(豫表)되고 암시되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단번 속죄 사역이 실제로 이루어졌다(히 7:27; 9:11, 12). 그러므로 구약은 예표적, 그림자적, 임시적이었다면, 신약은 성취적, 실체적(實體的), 최종적, 영원불변적이다. 둘째로, 구약은 인간의 율법적 행위가 강조되었으나, 신약은 복음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은혜가 강조되었다(요 1:17). 로마서 3:21, 22, "이제는[신약시대에] 율법 외에[율법과 별개로]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그러나 율법은 신약 아래서도 유익하다(딤전 1:8). 셋째로, 구약은 외적이고 의식적(儀式的)인 면이 많이 있었으나 신약은 내적이며 영적이다. 고린도후서 3: 6,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군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儀文)「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성령]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성령은 살리심이니라]." 넷째로, 구약은 민족적이었으나 신약은 세계적이다. 이스라엘 민족에 국한되었던 선민(選民) 사상은 사라졌고, 은혜의 복음이 온 세계의 모든 나라들과 족속들에게 전파되고 있다. 마태복음 28:19,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요한계시록 7: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 물론 신약에도 하나님의 선택의 진리는 여전하고 오히려 더 분명하게 증거되어 있다(요 17:9; 롬 9:16; 11:5; 엡 1:4). 구약과 신약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우선, 택자들을 구원하시는 중보자 혹은 구주가 동일하시다. 요한계시록 13:8,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사도행전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디모데전서 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히브리서 13: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진리가 동일하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창 15:6). 출애굽은 하나님의 은혜의 사건이었다. 구약의 의식법, 특히 제사와 성막 제도는 사람이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그리고 하나님의 예비하신 속죄 제물로 구원얻는다는 사실을 잘 증거한다. 구약의 성도들은, 히브리서 11장이 증거하는 대로, 믿음의 사람들이었다. 선지자들도 의인이 믿음으로 살 것을 말씀했다. 이사야 7:9, "만일 너희가 믿지 아니하면 정녕히 굳게 서지 못하리라." 하박국 2:4,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한다. 율법은 사람의 죄를 깨닫게 해줄 뿐이다.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공로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구약과 신약은 본질적으로 서로 다른 두 개의 언약들이 아니고, 본질적으로 동일한 한 언약, 즉 은혜언약의 두 가지 표현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7: 6, "본질이 다른 두 개의 은혜언약들이 있는 것이 아니요, 다양한 시행들 아래 있는 동일한 한 언약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이 은혜언약으로 구원을 얻었다. 죄인들은 어느 시대나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그리고 유일하신 중보자와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으로 구원을 받는다. 구약시대에는 오실 메시야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고 신약시대에는 오신 메시야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 구원받은 모든 성도는 항상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거해야 한다. "우리의 의는 이것뿐 예수의 피밖에 없다!" 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완전한 의(義) 안에서 의의 삶을 구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서로 사랑하기를 실천해야 한다. ----------------------------------------------------------------------- ◈ 우리는 성경의 근본 교리들을 보수하고, 자유주의 신학과 천주교회의 배교를 포용하는 타협과, 은사운동의 혼란을 반대하고, 또 그런 자들과 교제하는 자들도 책망하기를 원한다. 우리는 오늘날도 성경 말씀의 정로(正路)를 붙들고 그 길로 가는 교회들이 부흥 발전하기를 기도하며, 또 그런 자들과 교제하기를 원한다. ----------------------------------------------------------------------- ♣ www.oldfaith.net에 올려져 있는 현대교회문제와 현대교회문제 자료집 및 옛신앙지(특별호) 등의 자료들을 참고하십시오.
전화: (02) 334-8291, 팩스: (02) 337-4869 ◈ 책 안내 ●김효성, 현대교회문제 자료집. 330면. 5,000원(송료 포함). ● 김효성, 현대교회문제: 배교, 타협, 혼란 ● 조영엽, 왜 열린 예배는 잘못되었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