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신앙 2005년 8월 7일 [제9권 32호] ◆ 매주 발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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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하였으며"(렘 6:16). |
옛신앙
Old-time Faith www.oldfaith.net |
'옛신앙'이란, 옛부터 하나님의 선지자들과 주의 사도들이 가졌던 신앙, 오직 정확 무오(無誤)한 하나님 말씀인 신구약 성경에만 근거한 신앙, 오늘날 배교와 타협의 풍조에 물들지 않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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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884 서울 마포구 합정동 364-1
합정동교회 김효성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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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전설교: 허무한 세상, 소망의 하나님 시편 39:6, 7,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본문은 다윗이 죽을 병에 걸렸을 때 인생의 허무함을 철저히 깨닫고 그의 소망을 하나님께 둔다고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참 소망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 세상을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합니까? 세상의 허무함을 사람이 보통 때는 잘 느끼지 못하지만, 죽을 병에 걸렸다거나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구가 죽었을 때 조금 느끼게 되는 줄 압니다. 세상이 허무한 것은 인간의 죽음 때문입니다. 죽음 앞에 설 때 우리는 삶이 너무 짧다는 것을 느끼고 또 그 복잡다난했던 우리의 삶이 헛되고 무의미하다고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의 날을 손 넓이만큼 되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손 넓이는 10센티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는데, 인생의 긴 여정을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또 그는 그의 일생이 하나님 앞에는 없는 것 같다고 말합니다. 사람의 일생은 영원에 비추어 볼 때 그리고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서 볼 때 한 점에 불과하고 그것은 없는 것 곧 무(無)에 가깝습니다. 삶의 지나온 시간들이 긴 과정같이 보이지만, 얼마나 빠르게 지나갔는지요. 세월의 흐름을 아무도 막을 수 없고 사람이 늙는 것은 아무도 멈추게 할 수 없었습니다. 청소년 시절이 훌쩍 지나가고 어느덧 흰 머리가 많아지는 것이 인생의 삶입니다. 머잖아 우리 모두는 죽음 앞에 서게 될 것인데, 죽음으로 마감될 우리의 일생이라는 것은 너무 짧고 영원에 비추어 볼 때 없는 것 곧 무(無)에 가깝습니다. 모세도 시편 90편에서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 . .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라고 말했습니다(시 90:9-10, 12). 그는 그의 길고 힘들었을 삶의 과정들을 한순간이라고 표현했던 것입니다. 이 짧은, 혹은 긴, 삶의 여정에서 우리가 해 온 많은 일들, 우리가 이룬 많은 업적들, 우리가 쌓았고 모았던 많은 재산과 부(富), 우리의 날마다의 분주복잡했던 생활, 우리의 모든 성공과 성취들이 결국 우리의 죽음 앞에서 무슨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그것들은 다 헛되고 무의미한 것들이 아닙니까? 죽음 앞에 선 다윗은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뿐"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사람이 육신적으로 건강하던 때도, 물질적으로 부요하던 때도 결국 훗날에 죽고 마는 인생이라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또 다윗은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는 인생을 '그림자'라고 표현합니다. 사물의 실체는 없어지지 않고 있지만, 그것의 그림자는 생겼다가 커지고 작아졌다가 없어져버립니다. 인간은 죽는 존재이니 그것은 그림자와 같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실체는 없습니까? 또 돈을 벌고 모으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중요한 목표일 것인데, 그가 죽고 나면 그 모은 재물을 다른 사람이 취할 것이니, 그것이 그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이러한 허무한 세상에 소망을 두고 사는 것은 허무한 삶이 아닙니까? 다윗은 죽음 앞에서 세상의 삶의 헛됨을 깨닫고 그의 소망을 하나님께 둔다고 고백합니다.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그는 인간의 삶의 참 목표와 참 가치를 깨닫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진리는 인생이 허무한 세상에 소망을 두지 말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단순히 돈 버는 데만 마음을 쓴다면, 사람이 단순히 육신의 쾌락에만 마음을 쓴다면, 그것은 인간의 참된 삶의 목표와 가치를 잃어버린 것이라는 말입니다. 인간은 돈 버는 기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돈은 세상의 생활을 위해 어느 정도 또 어느 기간 동안 필요할 뿐이지 그것이 삶의 목표가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인생을 그보다 더 고상한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또 인간이 육신의 쾌락만 추구한다면 짐승보다 나을 것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짐승도 그 정도의 것을 원할 것입니다. 인간은 그 정도의 존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인생은 그보다 훨씬 더 고상한 것을 추구해야 할 존재라는 말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인간의 삶의 참 목표와 가치를 하나님께 두라고 가르칩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소망을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우리의 모든 소망을 하나님께 두어야 하는 첫번째 이유는 하나님은 영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시작과 끝이 있는 존재, 즉 출생의 날과 죽음의 날이 있는 존재이지만, 하나님은 홀로 영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맨 처음 말씀인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천지 창조 이전부터 계신 영원하신 분이심을 증거합니다. 맨 처음에 온 우주와 천지만물을 만드신 하나님은 홀로 영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출 3:16) 곧 영원자존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원히 스스로 계신 자는 하나님뿐이십니다. 모세는 시편 90편에서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고 고백했습니다(시 90:1, 2). 하나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이시요 그에게만 죽지 않음이 있습니다(딤전 6:16). 세상의 모든 피조물은 다 죽을 수 있고 또 모든 사람은 다 죽지만, 하나님은 죽지 않으시고 또 죽으실 수도 없는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소망을 하나님께 두는 것은 피조물이 창조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일입니다. 그것이 가장 합당한 삶의 목표와 가치가 아닙니까? 그 외의 것들은 다 저급한 가치들이고 다 변하는 것들, 허무한 것들입니다. 인생이 그런 것들에 가치를 두면 그도 결국 허무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창조의 근본되신 하나님, 영원하신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모든 소망을 하나님께 두어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그가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위한 하나님의 가장 큰 복은 영생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목적도 이것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말씀하기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셨고(요 3:16), 또 말씀하기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요 6: 40). 영생 곧 영원한 복된 생명과 삶은 오직 하나님 안에 그리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모든 소망을 하나님께 두어야 하는 세 번째 이유는 그가 우리를 지키시고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선한 목자시요 우리의 영육의 필요들을 공급해주시고 특히 환난에서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은 고백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했습니다(시 23:1-3). 우리는 인생의 목자되신 하나님을 떠나 길 잃은 양처럼 방황하지 말고 오직 그에게 소망을 두고 그를 의지하며 살아야 합니다. 허무한 세상 속에서 오직 하나님 안에만 허무함이 없습니다. 만일 이 세상에 하나님이 안 계시다면, 만일 천국과 영생이 없다면,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은 다 허무할 것입니다. 무신론은 결국 허무주의입니다. 유물주의도 결국 허무주의입니다. 황금만능주의도, 쾌락주의도 결룩 다 허무주의입니다. 하나님 없는 모든 것이 결국 허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천국이 있고 영생이 있기 때문에 이제 우리의 삶은 허무하지 않습니다. 허무한 이 세상에서 허무하지 않는 하나님과 그의 진리들을 붙듭시다. 그러면 하나님을 소망하는 성도의 세상 생활은 어떠합니까? 그것은 세상의 허무함만을 생각하고 슬프고 우울하게 사는 생활이 아닙니다. 성도의 생활은 허무주의적이거나 염세주의적이지 않습니다. 물론, 성도의 삶은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거나 육체적 쾌락을 추구하는 삶도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육체의 쾌락을 추구하는 자는 가시밭에 떨어진 씨와 같아서 새 생명이 자라지 못하고 실패하고 만다고 가르치셨습니다(눅 8:14).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성도의 삶은 금욕주의적인 것도 아닙니다. 성경은 금욕주의를 가르치지 않습니다(딤전 4:3-5). 하나님을 소망하는 성도의 삶은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주신 것들을 감사히 누리고 즐깁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헛되다고 가장 강조하여 가르친 전도서는 사람이 세상에서 수고하는 가운데 먹고 마시는 것이 복이라고 반복해서 말했고(전 2:24; 5:18; 8:15), 또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세상을 즐겁게 살라고 가르쳤습니다(전 9:9). 또 하나님을 소망하는 성도는 세상 것들에 욕심을 내지 않고 절제하며 살고 또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로 만족하며 삽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아무에게든지 제재를 받지 아니하리라. 식물은 배를 위하고 배는 식물을 위하나 하나님이 이것 저것 다 폐하시리라. 몸은 음란을 위하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며 주는 몸을 위하시느니라"고 했고(고전 6:12, 13), 또 말하기를,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고 했습니다(딤전 6:7, 8). 성도의 삶은 절제와 자족의 삶입니다. 또 하나님을 소망하는 성도는 이 세상 사는 동안 오직 하나님의 명하신 일들을 힘써 행합니다. 그것은 세상의 허무함을 강조한 전도서의 결론적 교훈이기도 합니다. 전도서 12:13은,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고 말했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이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생각하고 그를 위해 살기를 원합니다. 세상의 모든 일들이 다 헛되지만, 하나님의 명하신 일들을 행하는 것은 결코 헛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 했습니다(고전 15:58). 성경이 증거하는 하나님의 가장 기뻐하시는 일은 택하신 영혼들을 구원하는 일과 구원받은 영혼들을 온전케 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세상에서 하신 일이요 승천하시면서 그의 제자들에게 부탁하신 일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는 세상이 허무함을 압시다. 인간은 돈 버는 기계 정도가 아니고 육체의 쾌락을 위해 사는 존재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그보다 훨씬 더 고상하고 존귀한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에 너무 빠져 살지 맙시다. 죽음이 우리 앞에 올 때 세상의 모든 삶이 헛되다는 것을 알고 이 헛된 세상의 것들에 종노릇하듯 살지 맙시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소망을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께 둡시다. 그것이 인간의 정로(正路)입니다. 우리의 모든 소망을 영원하신 하나님께만 둡시다. 우리의 모든 소망을 우리에게 영생을 선물로 주셨고 또 그의 긍휼을 구하는 자들에게 지금도 주시는 하나님께만 둡시다. 우리의 모든 소망을 항상 우리를 지키시고 인도하시고 영육의 필요들을 공급하시고 특히 환난 날에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께만 둡시다. 우리는 허무한 세상 속에서 우리의 모든 소망을 오직 하나님께만 둡시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삶은 세상에서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감사히 누리고 즐기며 사는 것이며 그러나 욕심을 품지 않고 절제하며 또 하나님이 이미 주신 것들로 자족하며 사는 것이며 오직 하나님의 명하신 일들에 힘쓰는 것입니다. 우리는 특히 하나님의 일이 영혼들을 구원하는 일과 구원받은 영혼들이 온전케 되는 일인 것을 깨닫고 그 일을 위해 힘쓰는 자들이 됩시다. 허무한 세상에서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삽시다. ----------------------------------------------------------------------- 주일오후설교: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 둘째로, 하나님의 속성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돌려진다. 예를 들어, 예수께서는 자신이 제자들과 함께 항상 있겠다고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18: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마태복음 28:20,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승천하신 예수께서 땅 위의 제자들과 항상 함께 계신다는 것은 피조물의 속성이 아니고 하나님의 속성이다. 피조물은 장소의 제약을 받지만,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다. 또한, 구약의 선지자들은 메시야의 영원하심에 대해 증거하였고 또 예수께서도 친히 자신의 영원하심을 증거하셨다. 이사야 9:6, "영존하시는 아버지." 미가 5:2,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영원한 날들로부터]니라." 요한복음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맨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요한복음 17:5,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창세 전'은 영원을 가리킨다. 요한계시록 22: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이 표현은 그의 영원하심을 증거한다. 예수께서는 또한 신적 지식을 나타내셨다. 마태복음 9:4, "예수께서 그 생각「자신을 참람하다고 판단하는 서기관들의 생각」을 아시고." 요한복음 2:24, 25,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친히 사람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마태복음 17:27,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요." 예수님의 지식은 초인간적이요 신적이다. 예수께서는 또한 신적 능력을 가지신 자로 증거되었다. 요한복음 10:37, 38,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이와 같이 성경은 한마디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속성들을 가지고 계심을 밝히 증거하는 것이다. 골로새서 2: 9은 이 사실을 요약하여 "그[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셨다"고 표현하였다. 셋째로, 하나님의 사역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돌려진다. 우선,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일에 관여하신 자 곧 창조자로 증거한다. 요한복음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골로새서 1: 16,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이] . . . 다 그로 말미암고." 창조는 피조물의 사역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역이다. 또 성경은 예수께서 만물을 붙드시고 천지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자로 증거한다. 히브리서 1:3,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고." 마태복음 11: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마태복음 28:18,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이것도 피조물의 사역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역이다. 또한 그는 신적 권위를 가지신 자로 말씀하시고 교훈하셨다. 마태복음 5:22, 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 . . .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특히 그는 땅 위에 계실 때 많은 기적들을 행하셨다. 그는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고(문둥병, 중풍병, 열병, 혈루병 등에 걸린 자들, 소경, 벙어리, 앉은뱅이 등) 죽은 자들을 살리셨고(나인성 과부의 외아들, 회당장 야이로의 외동딸, 나사로) 떡 기적들을 행하셨고 바다의 풍랑을 잔잔케 하셨다. 그것들은 다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일들이었다. 요한복음 10:37, 38,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예수께서는 또한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셨고 그들을 죄에서 자유케 하신다고 말씀하셨다. 마가복음 2:5, 7, 10,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 . . (유대인들이 말하되)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 . .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히브리서 1: 3,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요한복음 8:36, "아들이 너희를 「죄에서」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예수께서는 또한 사람들에게 참된 안식을 주신다. 마태복음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하나님 외에 인간에게 참안식을 줄 수 있는 자가 누구이겠는가? 피조물 중에는 없다. 예수께서는 또한 우리들의 기도를 들어주신다. 요한복음 14:13, 14,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 . .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기도의 응답은 피조물의 영역에 있지 않다. 그것은 확실히 하나님의 일이다. 예수께서는 또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신다. 요한복음 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요한복음 16:7, "내가 그[성령]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하나님의 영을 보내실 수 있는 자는 하나님뿐이시다. 예수께서는 마지막 날 세상의 모든 사람을 심판을 하실 것이다. 요한복음 5: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마태복음 25: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디모데후서 4:1,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넷째로, 하나님의 영광이 예수 그리스도께 돌려진다. 아들 예수께서는 아버지와 나란히 언급되심으로써 신적인 영광을 받으신다. 마태복음 28:19,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고린도후서 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또한, 예수께서는 친히 자신의 신적 영광을 선포하셨다. 마태복음 12:6,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요한복음 10: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요한복음 16:15,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자신을 하나님이라 주장한다고 그를 돌로 치려 하였다(요 10:31-33). 예수께서는 아버지와 함께 찬양과 경배를 영원히 받으실 분이시다. 빌립보서 2:10, 11,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특히 요한계시록은 주 예수께 아버지와 동등한 영광을 돌린다. 요한계시록 5:12, 13,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이와 같이,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 하나님의 명칭들, 하나님의 속성들, 하나님의 사역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돌림으로써 예수께서 참하나님이심을 증거한다. 우리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영광을 알고 확신하자. 신적 구주께서 벌레와 같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 아, 이것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놀라운 사실이며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이다! 이 사실과 이 은혜를 깨닫는 자마다 우리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신 그를 위해 살게 될 것이다. ----------------------------------------------------------------------- 현대사회문제: 아프리카에서의 에이즈(AIDS) 「Calvary Contender, December 2004.」 에이즈(AIDS)는 아프리카에서 매일 전쟁과 기근과 홍수보다 더 많은 수인 약 6,000명을 죽인다. 보츠와나에서의 생명 가망의 연수는 44세로 떨어졌다. 그곳에는 70,000명의 고아들이 있다. 우간다는 에이즈 전염병을 퇴치하는 첫 번째 아프리카 국가가 되었고, 거기에서 에이즈는 미국이 기금을 지원하는 금욕/ 피임기구/ 예방 프로그램을 통해 극적으로 감소하였다 동성결혼 인정한다? 「김은홍 기자, “동성결혼 인정한다,” 기독신문, 2005. 7. 13, 23쪽.」 미국 연합그리스도교회가 동성결혼을 인정했다. 애틀랜타 주 조지아 월드 컨퍼런스 센터에서 총회 회기 중인 6월 4일 아침(현지 시간) 연합그리스도교회 총회 대의원들이 “성(gender)을 따지지 않는 커플들” 곧 게이와 레즈비언, 양성애자와 성전환자 커플들의 “동등한 결혼의 권리를 확언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결혼 평등 결의안’을 80퍼센트에 가까운 찬성으로 가결했다. 연합그리스도교회의 총회 결의는 산하 지역 교회에 강제력을 행사하지는 못하지만, 이번 ‘결혼 평등 결의안’ 채택으로, 이 교단은 미국 주류 교단 가운데서 게이「남성 동성애자」와 레즈비언「여성 동성애자」, 양성애자와 성전환자의 결혼을 교단 차원에서 인정한 첫 교단이 됐다. 결의안 가결 뒤 가진 기자회견에서 이 교단 대표회장 존 토머스 목사는 미국 독립 기념일인 “바로 오늘 7월 4일에 우리 연합그리스도교회 총회는 자유를 선언하는 용기 있는 행동을 했다”고 결의안 채택에 의미를 부여했다. 「참으로 말세의 가증스러운 교회의 현실이다!」 강정구 교수의 망언(妄言) 「배성규 기자, “미군 개입안했다면 한국戰 빨리 끝나 사상자도 적었을 것… 맥아더는 원수,” 조선일보, 2005. 7. 28, A2쪽.」 강정구(姜禎求) 동국대 사회학과 교수는 27일 "남의 집안 싸움인 통일내전(한국전쟁)에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전쟁은 한 달 이내에 끝났을 것이고 사상자도 남북한 합쳐 1만명 미만이었을 것”이라고 했다. 강 교수는 2001년 8·15 행사 참가차 북한을 방문, 김일성 생가라는 만경대의 방명록에 ‘만경대 정신 이어 받아 통일위업 이룩하자’는 글을 남긴 바 있다. 강 교수는 이날 친노(親盧) 인터넷매체인 데일리 서프라이즈에 기고한 칼럼에서 최근 인천 자유공원의 맥아더 장군 동상 철거 논란과 관련, “맥아더는 (한국민에게) 생명의 은인이 아니라 생명을 앗아간 원수”라면서 이같이 썼다. 강 교수는 6·25 전쟁에 대해 “후삼국시대 견훤과 왕건이 삼한통일 대의를 위해 서로 전쟁을 했듯이 북한 지도부가 시도한 통일전쟁이었다”고 했다. 그는 또 “미군이 군사통치한 남쪽은 전투와 폭동의 연속이었지만 북쪽은 안정을 누리며 친일청산과 사회경제 개혁이 이뤄졌다”고 했다. 「참으로 통탄할 반한(反韓)적 사상이다!」 ------------------------------------------------------------------------------- ◈ 우리는 성경의 근본 교리들을 보수하고, 자유주의 신학과 천주교회의 배교를 포용하는 타협과, 은사운동의 혼란을 반대하고, 또 그런 자들과 교제하는 자들도 책망하기를 원한다. 우리는 오늘날도 성경 말씀의 정로(正路)를 붙들고 그 길로 가는 교회들이 부흥 발전하기를 기도하며, 또 그런 자들과 교제하기를 원한다. ----------------------------------------------------------------------- ♣ www.oldfaith.net에 올려져 있는 현대교회문제와 현대교회문제 자료집 및 옛신앙지(특별호) 등의 자료들을 참고하십시오.
전화: (02) 334-8291, 팩스: (02) 337-4869 ◈ 책 안내 ●김효성, 현대교회문제 자료집. 330면. 5,000원(송료 포함). ● 김효성, 현대교회문제: 배교, 타협, 혼란 ● 조영엽, 왜 열린 예배는 잘못되었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