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신앙  2005년 6월 5일 [제9권 23호]   ◆ 매주 발행 ◆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하였으며"(렘 6:16).

 

 

옛신앙

 

Old-time Fai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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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신앙'이란, 옛부터 하나님의 선지자들과 주의 사도들이 가졌던 신앙, 오직 정확 무오(無誤)한 하나님 말씀인 신구약 성경에만 근거한 신앙, 오늘날 배교와 타협의 풍조에 물들지 않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121-884 서울 마포구 합정동 364-1 합정동교회  김효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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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전설교:                         "하나님을 경외한 아브라함"

구약에 하나님을 경외한 대표적 인물들 중의 한 사람은 아브라함입니다. 그는 육신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인 동시에, 영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든 신약교회 성도들의 조상입니다. 로마서 4:16,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아브라함에 대해 성경은 창세기 12장부터 24장까지 여러 장에 걸쳐 증거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은혜를 살피면서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께 그런 은혜를 받아 좋은 신자로 살다가 하나님께 가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함

무엇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경외한 사람이었습니다. 노아 시대의 홍수 심판 이후 노아의 세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을 통해 온 세상에 인류가 번성하였으나 그들이 시날 평지에서 바벨탑을 쌓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었습니다. 노아의 아들 셈의 자손들도 부패하였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를 구별하셨고 그 가정을 우상 숭배의 도시 갈대아 우르로부터 불러내셨고 하란이라는 곳으로 이주시켜 거기서 살게 하셨습니다(창 11:31).

어느 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그가 조카 롯과 더불어 하란을 떠날 때의 나이는 75세이었습니다. 그 때 그의 아버지 데라는 145세이었을 것이고 데라는 그 후에도 60년을 하란에서 더 살았다고 생각됩니다.

아브라함이 고향과 친척들, 그리고 더욱이 아버지의 집을 떠나는 것은 인간적으로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가족과 친척들은 사람이 세상을 사는 데 많은 힘과 도움이 됩니다. 옛날에는 더욱 그러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들과 분리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것은, 후에 여호수아의 증거대로, 그의 고향 사람들과 친척들과 아버지 집이 다른 신들을 섬겼기 때문이었습니다(수 24:2).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그 명령에 순종했고 하나님의 은혜로 그 어려운 결단을 내렸고 고향도, 친척들도, 아버지의 집도 떠났습니다.  

그는 마침내 하나님의 지시하신 땅인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창 12:5). 그는 그 곳에서 하나님께 단을 쌓았고(창 12:7) 또 장막을 옮길 때마다 하나님께 단을 쌓고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창 12:8). '단을 쌓았다'는 말은 하나님께 짐승 제물로 제사를 드렸다는 뜻이고, 그가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께 찬송과 기도를 올렸다는 뜻입니다. 창세기 13장에 보면, 그가 애굽에 내려가서 얼마 동안 살다가 다시 돌아와서도 처음에 단을 쌓았던 곳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고(창 13:4) 그들의 가축의 목자들 간의 다툼으로 조카 롯과 헤어진 후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할 때도 그는 거기서 하나님을 위해 단을 쌓았습니다(창 13:18). 이와 같이 그는 시시때때로 하나님께 단을 쌓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던 것입니다.

창세기 15장에 가보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 때 그는 가나안 땅에 들어온 지 아마 7, 8년은 되었을 때이기 때문에(창 16:3을 비교하면) 그의 나이가 벌써 80이 넘었는데도 자녀 출산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는 확실히 하나님의 능력과 신실하심을 믿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의(義)로 여기셨습니다(창 15:6).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경외한 것은 특히 그가 100세에 얻었던 외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청천벽력 같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을 때 가장 잘 드러났습니다. 그 사건은 창세기 22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2절)는 하나님의 명령은 인간적으로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종들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3일 길을 가서 하나님의 지시하신 곳에서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죽이려 하였습니다(3-10절).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막으시고 그 아들을 죽이지 못하게 하셨지만, 아브라함은 그 아들을 죽인 것이나 마찬가지이었습니다. 그는 정말 하나님의 명령대로 순종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12절).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경외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에 절대 순종하려 했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그를 두려워하는 자마다 그를 섬기며 순종할 것입니다.

선한 인격을 지님

둘째로, 아브라함은 선한 인격을 지닌 자이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아브라함에게 있는 선한 인격의 여러 면모를 증거해줍니다. 우선, 그의 가축의 목자들과 롯의 가축의 목자들이 서로 다투었을 때, 아브라함은 롯에게 우리는 한 골육이니 우리의 목자들이 서로 다투게 말자고 말하면서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左)하면[왼편으로 가면] 나는 우(右)하고[오른편으로 가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고 말했습니다(창 13:9). 그것은 좋은 땅에 대한 그의 욕심 없음과 양보심을 보여줍니다.

창세기 14장에 보면, 그는 시날왕과 그 연합군이 소돔 지역을 침입해 조카 롯을 포로로 잡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평소에 집에서 길리고 연습한 318명의 가신들을 이끌고 그들을 쫓아가 그들을 쳐서 파하고 조카 롯과 그 외의 잡혔던 사람들과 재물을 다 찾아왔던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조카 롯을 위해 자기 목숨도 아끼지 않은 사랑과 용기를 지닌 행동이었습니다. 또 승리하고 돌아올 때 소돔왕이 그를 영접하며 되찾은 물품을 취하라고 말할 때 아브라함은 그에게 말하기를,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致富)케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창 14:22, 23). 이것은 그가 물질에 대한 욕심을 가지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창세기 18장에 보면, 어느 날 그의 집에 손님 세 명이 찾아왔을 때 아브라함은 달려가 몸을 굽혀 그들을 영접하였고 그들이 자기 집에서 쉬어갈 것을 권하고 급히 떡과 고기를 준비케 하여 정성껏 대접하였습니다(창 18:1 -8). 그것은 그의 선하고 너그러운 성품을 증거합니다. 사도 바울은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이 감독의 자격 요건이 되는 선한 인격의 한 면모라고 말했습니다(딤전 3:2). 또 히브리서는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고 증거했는데(히 13:2), 이것은 아브라함의 사건을 기억케 합니다.

또 창세기 23장에 보면,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가 죽었을 때 헷 족속에게 매장지를 요청하면서 두 번이나 그들에게 몸을 굽혔고 정당하게 값을 주고 매장지를 구입했습니다(창 23장). 그 땅 주인이 그에게 거저 주겠다고 했으나 그는 땅값을 받으라고 말하며 정당하게 계산해주었습니다. 이 사건은 그의 겸손함과 또 돈 거래에 있어서 정확함과 부당한 욕심 없음을 증거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경외했던 아브라함은 양보심, 물질적 욕심 없음, 사랑, 용기, 너그러움, 겸손 등의 아름다운 덕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연약도 있었음

그러나 아브라함에게는 연약도 있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가나안 땅에 들어온 후 그 땅에 기근이 들자 애굽으로 내려간 것이나 또 애굽에서 사람들이 자기를 죽이고 아내를 빼앗을까봐 아내를 누이라고 말한 것은 그의 연약이었습니다. 애굽왕 바로는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왕궁으로 취하여 들였고 그 일로 인해 아브라함을 후대하여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약대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시므로 아브라함은 아내를 다시 찾을 수 있었습니다(창 12:10-20).

또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의 말을 듣고 그의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취한 것도 그의 연약이었다고 생각됩니다. 하갈은 자신의 잉태함을 깨닫고 그 여주인을 멸시하였고 이 일로 인해 사라는 하갈을 학대하였으므로 아브라함의 가정에는 갈등이 생기게 되었습니다(창 16장). 사라가 하나님의 은혜로 이삭을 낳은 후에는 그 갈등이 더욱 커졌습니다. 어느 날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이 사라의 아들 이삭을 희롱함으로 사라는 그 여종과 아들을 내어쫓으라고 아브라함에게 요구했고 창세기 21:11에 보면 아브라함은 그 아들 때문에 그 일이 깊이 근심이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1부 1처의 하나님의 뜻을 어길 때 가정에는 불화와 갈등이 생기는 법입니다.

창세기 20장에 보면, 아브라함은 그랄 땅에 우거했을 때도 겁이 나서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말했고 그랄왕 아비멜렉은 사라를 취하였으나 하나님께서 밤에 꿈에 아비멜렉에게 나타나셔서 그를 죽음으로 위협하시고 사라를 아브라함에게 돌려보내게 하셨습니다(창 20장). 아브라함은 연약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연약을 불쌍히 여기셨고 위험할 때 그를 도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복주심

이렇게 경건하고 선한 인격을 가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이었습니다. 맨처음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셨을 때에도 그는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고(창 12:2, 3) 또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왔을 때 그는 그에게 나타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창 12:7).

하나님께서는 그 후에도 몇 번 아브라함에게 이것과 동일한 약속을 하셨습니다. 창세기 13장과 17장에도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그에게 주실 것을 말씀하셨고(13:14-17; 17:8), 창세기 18장과 22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으로 큰 민족과 강대한 나라를 만드실 것과 그의 자손으로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18:18; 22:17, 18). 특히 아브라함의 자손을 통해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약속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사함과 영생의 복이 온 세상에 주어질 것을 예언한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그를 경외하고 그의 뜻대로 선한 삶을 살았던 아브라함을, 비록 그에게 연약들이 없지 않았지만, 복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24:1은 증거하기를, "아브라함이 나이 많아 늙었고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복을 주셨더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믿는 이들의 조상입니다. 우리는 그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놀라운 구원의 복을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온 세상에 전파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와 그의 십자가 대속의 피로 죄씻음을 받고 그를 믿음으로 영생의 복을 얻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믿는 모든 자들에게 의와 거룩과 영생과 평강과 힘과 기쁨이 되셨습니다. 여러분 중에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신 분은 없습니까? 여러분은 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죄사함과 의와 거룩과 영생의 구원을 받았습니까?

또 우리는 성경이 증거하는 아브라함의 생애의 발자취를 살펴보면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귀한 은혜와 경건과 선한 성품을 본받기를 원합니다.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가는 곳마다 하나님께 예배의 단, 찬송의 단, 기도의 단을 쌓고 그의 이름을 부르며 또 그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며 살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경건한 삶입니다. 이것은 인생이 가져야 할 가장 귀한 삶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없이 사는 무신론적이고 세속주의적인 삶을 버리고 하나님을 알고 그를 두려워하고 사랑하고 섬기며 순종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아브라함처럼 양보심이 있고 세상적, 물질적 욕심을 버리고 형제 사랑과 용기, 또 손님 대접으로 나타나는 너그러움, 그리고 특히 겸손의 덕을 갖춘 선한 인격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경건함과 선한 성품을 가진 자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기도 제목이요 우리의 삶의 목표이며, 성경 전체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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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일오후설교:                                 죄의 구별

모든 사람들의 죄는 원죄(原罪)와 자범죄(自犯罪)로 구별된다.

   원죄(原罪)

원죄란, 아담의 범죄로 인해 모든 사람이 갖고 태어나는 죄책과 부패성을 가리킨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6:3, "그들은 모든 인류의 뿌리이었으므로, 그들로부터 일반적 출생법으로 태어나는 모든 후손들에게 이 죄의 죄책이 전가(轉嫁)되었고, 죄로 인한 그 동일한 죽음과 부패성이 전달되었다."

우선, 아담의 첫 범죄의 죄책이 모든 인류에게 돌려졌다. 그러므로 아담의 후손인 인류는 죄책을 가진 죄인의 신분으로 출생한다.

아담의 죄책이 모든 인류에게 전가되었다는 사실은 특히 로마서 5장에서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고(15, 17절) 많은 사람이 정죄되었고(16, 18절) 많은 사람이 죄인되었음(19절)을 강조함으로써 밝히 증거된다. 뿐만아니라, 기타 성경과 경험이 증거하는 죄의 보편성, 정죄(定罪)의 보편성, 그리고 죽음의 보편성은 죄의 전가의 사실을 확증한다.

죄는 보편적 현상이다. 열왕기상 8:46,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 욥기 14:4,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에서 낼 수 있으리이까? 하나도 없나이다." 시편 51: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시편 58:3,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전도서 7:20,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않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 로마서 3:10, 23,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 . .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죄의 보편성은 인간의 이성과 경험으로도 인정된다. 플라톤, "눈 멀고 머리 많은 맹수와 같은 만가지의 악이 네 속에 있다." 이방 종교들에서 볼 수 있는 고행(苦行)이나 금욕주의는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는 강력한 증거이다. 괴테, "나는 나 역시 범하지 않을 수 있는 허물을 보지 못한다."

또한 모든 인류는 하나님의 심판과 정죄(定罪) 아래 있다. 로마서 3:19, ". . .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에베소서 2:3, "우리도 다른 이들과 같이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요한복음 3:5, 6,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모든 사람이 정죄 아래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

또한 모든 인간이 죽는다. 로마서 5: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심지어 자신의 의지로 죄를 지을 수 없어 보이는 유아들까지도 죽음에는 예외가 아니다.

죄의 전가의 사실은 분명하지만, 죄의 전가의 방식에 대해서는 역사상 일치된 이해가 없었다. 어떤 이들은 모든 인간이 하나의 통일체로서 아담 안에 존재하였고 그가 범죄하였을 때 그 안에서 함께 실제적으로 혹은 실체적(實體的)으로 범죄하였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을 '실재론'(實在論)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인간의 공통적 실체'라는 개념은 성경적 근거와 합리적 타당성을 가지는 것 같지 않다. 또한 로마서 5장에서의 원죄와 칭의의 대조가 실재론의 생각에 부합하지 않아 보인다. 또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들의 관계가 실체적(實體的) 관계라기보다 언약적 관계라고 생각된다. 또 아담의 최초의 범죄 외의 다른 죄들에 대한 책임은 어떻게 되는가? 특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인간으로서 죄가 없으셨다는 사실은 실재론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워 보인다.

다른 이들은 모든 인간이 출생할 때 아담의 부패성을 전달받으며 그 부패성에서 실제적 죄가 나오므로 죄책이 전가된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을 '간접 전가론'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부패성의 전달은 죄책이 이미 전가된 결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죄책의 전가가 없이 부패성의 전달이 허용될 수 없을 것이다. 또 로마서 5장은 모든 인간의 죄와 정죄와 죽음을 한 사람 아담의 죄에 기인한다고 말하지, 그 자손들의 죄들에 기인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또 로마서 5장의 원죄와 칭의의 대조는 이 견해에 부합하지 않아 보인다. 즉 성도의 칭의는 그리스도의 의로운 성질을 전달받아서 의롭게 살므로 받는 의가 아니다.

그러므로 개혁신학은 대체로 아담이 모든 인간의 언약적 대표자로서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었으므로 아담의 죄책은 모든 인간에게 즉시 전가되었고 부패성은 그 자손들에게 유전되었다고 생각한다. 이것을 '직접전가론' 혹은 '언약론적 견해'라고 부른다.

이 견해의 근거들은 로마서 5장에서 한 사람 아담의 죄와 많은 사람들의 죄와 정죄와 죽음이 직접 관련된다는 점과 아담의 죄의 전가와 그리스도의 의(義)의 전가가 직접 대조된다는 점에 있다. 또 성경에는 이러한 연대적(連帶的) 책임과 형벌의 예들이 있다. 출애굽기 20: 5, 6,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3, 4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민수기 14:33, "너희 자녀들은 너희의 패역한 죄를 지고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40년을 광야에서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여호수아 22:20, "세라의 아들 아간이 바친 물건에 대하여 범죄하므로 이스라엘 온 회중에 진노가 임하지 아니하였었느냐?"

신명기 24:16에 아버지의 죄로 아들이 죽임을 당하지 않는다는 말씀이 있으나, 그것은 사회의 공적 재판 규례를 가리킨 것이며, 에스겔 18:4에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는 것도 죄 없이 죽는 법이 없다는 하나님의 공의를 변호하는 말씀이다. 이 말씀들은 성경 다른 곳에서 증거된 죄의 전가의 진리와 모순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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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사회문제:                              북한 정치범수용소의 실태

[미래한국, 2005년 4월 30일자(9쪽)에 실린 탈북민 서길산 씨의 증언.]

북한 정치범수용소 중 몇 곳을 체험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소개한다.

함경남도 요덕군 정치범수용소는 부지 면적이 남한의 두 개 구보다 크고 사방이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골짜기에 있다.

'완전통제구역'과 '불완전통제구역'으로 나뉘어 있으며 공장, 탄광, 목재 가공공장, 농장이 있다.

'완전통제구역'에는 죄가 심하다고 판정받은 정치범, 신앙인들이 수용되어 있는데 독신생활을 하게 된다. 여기서는 일반적으로 종신형을 살기에 살아서 바깥세상에 나갈 수 있는 희망이 없다.

'불완전통제구역'은 '혁명화 구역'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주로 연좌제로 가족들이 짐승 취급을 받으며 강제 노동과 사상 단련을 한다. 5~30년 혹은 죽을 때까지 생활한다.

하루 3~4시간의 휴식이 허용되고 나머지는 꼬박 중노동을 해야 한다. 여기서 보통 2년 정도 지나면 병이 생기고 10년 된 사람은 보기에도 끔찍한 송장 모습이다.

경비군인들이 항상 감시막 위에 중화력무기를 설치해 놓고 머리를 45도 각도로 숙이며 걸어다니는 죄인들을 굽어본다. 줄지어 다니는 10~20명씩의 죄인들마다 '선생님'으로 불리는 보위원들이 권총을 차고 쫓아 다닌다. 죄인들은 서로 감시해야 할 의무가 있으며 서로 소곤거리거나 땅 위의 개미를 주워 먹다가 들키면 병신이 되도록 맞는다.

그야말로 '야만의 제국'인 수용소에서 인간의 생명이 얼마나 비참하게 죽어가는가를 그곳을 보지 않은 사람은 믿어지지 않을 것이다.

평양시 사동구역 미림동에서 승호구역 방향으로 대동강 기슭을 따라 4km 정도 올라가면 대동강 남쪽에 특수구역이 보인다. 주민 거주 지역과 떨어진 이곳은 수용소다.

교화소로 알고 있는 사람도 있는데 2m 높이의 철조망이 1m 간격으로 평행되게 두 겹으로 둘러싸였고 철조망 다음 3~5m 들어가면 5m 정도의 콘크리트 담장이 막혀 있다.

그 안의 모습은 밖에서 볼 수 없다. 다만 20m 높이로 솟아 있는 굴뚝 2개가 보인다. 50m 간격으로 감시막이 담장보다 더 높게 있으며 항상 사격태세의 군인이 있다. 정문은 1개뿐인데 낮엔 굳게 잠겨 있고 밤에만 문이 열리고 닫힌다.

그곳의 군인들의 말에 의하면 "죽어도 아깝지 않을 반동놈들이 갇혀 있는 것"이라고 한다. 여의도 면적 만한 그 감옥은 대동강가의 모래터처럼 낮은 지대이다. 그 옆에 낮은 둔치가 있는데 수문도 보인다.

수문을 열면 물은 곧장 수도 밑에 사발 받쳐 놓은 모양의 감옥 전체를 수장시킬 수 있게 되어 있다. 지형 전반의 연관성을 모르고 보면 알 수 없는데 하나하나 따져보면 알게 된다.

만약 전쟁이 일어나면 정치범 감옥의 정치범들을 먼저 죽여버려야 한다는 말은 일반 주민들 사이에는 흔한 말이다.

승호구역 화천수용소(현재 다른 곳으로 이전됐음)는 사방 50m 이상의 절벽으로 둘러싸인 함정 같은 골짜기다. 하나뿐인 문을 막아 놓고 위에서 물사격을 하거나 수류탄을 던지면 그 안의 죄인들 수천 명은 '독안의 쥐' 신세로 당하게 된다.

이 정치범수용소에 수용된 사람들은 자유와 민주를 부르짖다가, 하나님을 증거하다가, 김부자에게 항거하다가 '반역자'가 되어 비참한 신세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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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성경의 근본 교리들을 보수하고, 자유주의 신학과 천주교회의 배교를 포용하는 타협과, 은사운동의 혼란을 반대하고, 또 그런 자들과 교제하는 자들도 책망하기를 원한다. 우리는 오늘날도 성경 말씀의 정로(正路)를 붙들고 그 길로 가는 교회들이 부흥 발전하기를 기도하며, 또 그런 자들과 교제하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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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성, 현대교회문제 자료집. 330면. 5,000원(송료 포함).

● 김효성, 현대교회문제: 배교, 타협, 혼란

● 조영엽, 왜 열린 예배는 잘못되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