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신앙 2006년 12월 17일 [제10권 51호] ◆ 매주 발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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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하였으며"(렘 6:16). |
옛신앙
Old-time Faith www.oldfaith.net |
'옛신앙'이란, 옛부터 하나님의 선지자들과 주의 사도들이 가졌던 신앙, 오직 정확 무오(無誤)한 하나님 말씀인 신구약 성경에만 근거한 신앙, 오늘날 배교와 타협의 풍조에 물들지 않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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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884 서울 마포구 합정동 364-1
합정동교회 김효성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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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오전설교: 노아의 축복과 저주 [창세기 9장 18-19절]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비라. 노아의 이 세 아들로 좇아 백성이 온 땅에 퍼지니라. 온 인류는 노아의 세 아들 셈과 함과 야벳으로부터 나왔다. 인류는 본래 한 아버지에게서 나왔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모든 사람을 한 가족같이 여기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마땅하다. 함은 '가나안의 아비'라고 표현된다. 22절에도 함을 '가나안의 아비 함'이라고 말한다. 또 25절은 가나안이 저주를 받아 그 형제들의 종들의 종이 되리라는 노아의 말과, 26절과 27절은 가나안이 셈의 종이 되고 또 야벳의 종이 되리라는 말을 기록한다. 또 창세기 10:15-20은 함이 구스, 미스라임, 붓, 가나안 등 네 아들을 낳았고 또 가나안은 북쪽 시돈에서부터 남쪽 가사까지 흩어져 살았던 가나안 자손의 아버지라고 좀더 자세하게 증거한다. 창세기를 기록한 모세가 함을 '가나안의 아비'라고 반복해 표현하고 또 가나안에 대한 예언을 반복해 기록한 것은 장차 그들이 들어가 얻을 가나안 땅의 원주민이 누구의 자손이며 그들이 왜 저주를 받아 진멸(殄滅)되어야 하며 이스라엘 백성은 왜 그 땅을 기업으로 차지해야 하는지에 대해 암시하는 것이다. 물론, 후에 그 땅의 거주민들이 매우 우상숭배적이고 음란했으므로 하나님의 심판은 공의로웠다(레 18:3, 25; 신 7:1-5). 창세기에는 가나안 땅에 대한 언급이 32번이나 나온다(구약성경 전체에 90회). 예를 들어,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려다가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고(창 11:31),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하란을 떠나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창 12:5). 하나님은 그에게 그 땅을 그의 자손에게 주리라고 약속하셨고(창 12:6), 그는 가나안 땅에 거하였다(창 13: 12; 16:3). 후에 야곱은 밧단 아람에서 가나안 땅으로 돌아왔고(창 31:18; 33:18; 35:6; 37:1), 마침내 가나안 땅에 묻혔다(창 50:5, 13).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이었다. [20-21절]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노아는 농사일을 시작하였다. 그는 포도원을 만들었다. '포도나무를 심었다'는 원어는 '포도원을 만들었다'는 뜻이다. 노아는 포도 수확을 하였고 포도주를 만들었고 그것을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 채로 있었다. 그것은 노아의 큰 실수이었다. 성경에서 포도주가 기쁨의 음료수로 여겨지기도 하지만(신 14:26; 시 104:15), 술 취하는 죄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죄로 분명하게 증거되어 있다(고전 6: 10; 갈 5:21). 술 취함은 사람으로 하여금 바른 정신과 판단력을 잃고 실수하고 범죄케 한다. 그러므로 성경은 "술 취하지 말라"고 말했고(엡 5:18), "그것을 보지도 말라"고 했다(잠 23:31). 노아의 실수는 인간의 본성의 부패성과 연약을 잘 드러낸다. 노아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완전했지만(창 6:9) 엄격한 의미에서 그런 것은 아니다. 노아도 실수가 있었다.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의인은 아무도 없다.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얻고 또 어느 정도 의로운 삶을 살 수 있을 뿐이다. 경건한 노아의 실수는 우리 모두에게 금주(禁酒)의 교훈이 된다. 더욱이 오늘날의 술은 적은 양으로도 사람을 취하게 만들기 때문에, 우리는 완전 금주(禁酒)의 좋은 전통을 지키는 것이 좋다. [22절]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고하매. '하체'라는 원어(에르와 ????????)는 '벌거벗음 혹은 음부(陰部)'라는 뜻이다. 함의 잘못은 부모에 대한 경외심이 없고 성에 대해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 없는 것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말았어야 했고 즉시 얼굴을 돌리고 옷 같은 것으로 그것을 가렸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그 부끄러운 장면을 형제들에게 말하기까지 하였다. 오늘 시대는 지나친 노출을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시대이다. 성인 영화나 비디오, 인터넷 음란물이 세상을 더럽히고 있다. 부부 관계나 성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고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은밀한 것이며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드러내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시대는 부끄러운 시대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시대이다. 오늘 시대가 그러하다. [23절] 셈과 야벳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에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그러나 셈과 야벳은 달랐다. 그들은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버지의 벌거벗음을 가렸다. 그들은 얼굴을 돌이켜 아버지의 벌거벗음을 보지 않았다. 셈과 야벳에게는 아버지에 대한 공경심과 경외심이 있었고 성에 대한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 있었다. 그것은 자식으로서 또 인간으로서 올바른 태도이었다. [24-25절] 노아가 술이 깨어 그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술이 깬 노아는 그 작은 아들 곧 함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았고 함의 아들 가나안을 저주하였다.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들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종들의 종'이라는 표현은 가장 낮은 종이라는 표현이다. 또 26절과 27절에서 노아는 가나안이 셈의 종이 되고 또 야벳의 종이 되리라고 저주하였다. 부모에 대한 경외심이 없었던 함은 저주받을 만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씀하셨고(출 20:12) 또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라"고 하셨다(레 19:3). 또 신명기 27:1에는 "그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고 말씀하였다. 함의 아들에 대한 노아의 저주는 함에 대한 저주보다 더 큰 저주이었다. 부모와 자녀는 연관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에서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3, 4대까지 이르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출 20:5). 복된 무모의 자녀는 복되지만, 저주받는 부모의 자녀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부모가 범죄하면 그 자녀들에게 화가 미친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서라도 조심해야 한다. 또한 노아의 저주는 가나안 족속들의 멸망의 이유를 설명해준다. 물론 실제적으로도 가나안 족속들은 심히 음란하고 우상숭배적이었다(레 18:24-25; 신 7:1 -2). 저주는 의인들에게 임하지 않고 악인들에게 임한다. 노아의 저주는 예언적이었고 공의롭게 성취되었다. [26절]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다른 한편, 노아는 셈을 축복하였다. '셈의 하나님 여호와'라는 표현은 복된 말이다. 하나님은 만복의 근원이시며 하나님만 인간에게 복을 주실 수 있다. 하나님이 셈과 함께하시니 셈은 복을 받은 자이다. 과연 셈족은 참 종교의 전파자가 될 것이다. 참 종교는 셈족에서 발견될 것이다. 참된 경건은 셈족을 통해 전달된 유산이었다. 하나님의 복은 셈족을 통해 이어져 왔다. 이스라엘 민족은 셈족이었고 그 족속을 통해 세상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다(롬 9:5). [27절]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노아는 야벳도 축복하였다. 그에게는 창대케 되는 복이 선언되었다. 이것은 특히 문화적, 경제적 번창을 의미하는 것 같다. 야벳 족속은 서구 문명을 건립한 자들이다. 그들은 과연 번창하는 복을 받았다.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라는 말은 야벳 족속이 셈의 종교적 복에 참여할 것을 암시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이것은 이방인 구원에 대한 예언이다. 야벳의 자손들인 유럽인들은 셈의 자손인 유대인들이 전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었다. 그들은 셈의 장막, 곧 셈의 자손인 유대인들에 의해 시작된 교회에 들어왔다. [28-29절] 홍수 후에 노아가 삼백오십년을 지내었고 향년이 구백오십세에 죽었더라. 노아는 아담 후 천 년경에 출생하여 이천 년경에 죽었다. 그는 인류 역사의 한 획을 그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노아와 128년이나 교제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세상의 초기 역사가 경건한 아브라함에게까지 생생하게 전달되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본문에서 우리는 여러 가지 교훈을 얻는다. 첫째로, 우리는 술 취하지 말자. 술 취함은 실수와 범죄의 원인이며 의인 노아에게라도 부끄러운 기록을 남기게 하였다. 그것은 오늘날 천국 길을 가로막는 큰 죄악이다. 둘째로, 우리는 부모님을 공경하자. 비록 그들이 실수한 경우에라도, 우리는 그들을 공경하고 그들의 실수를 쉽게 남에게 전하지 말고 은밀하게 덮어드리는 자가 되자. 그런 자녀들은 복을 받을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성에 대한 염치를 가지자. 우리는 노출을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이 음란한 세대를 본받지 말고, 거룩함과 정절, 그리고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을 가지자. 그것이 성에 대한 올바른 태도이다. 넷째로, 우리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녀들을 축복하자.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셈의 복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셈의 복을 얻었다. 우리는 이 구원의 복을 감사하며 우리의 자녀들도 이 복을 누리도록 기도하고 축복하고 권면하며 본을 보이자. ----------------------------------------------------------------------- 지난오후설교: 의식법들--절기, 십일조 구약의 율법에는 도덕법, 재판법, 의식법(儀式法) 등 세 가지 종류가 있는데, 그 중에 의식법은 할례, 성막 제도, 제사, 절기, 음식, 정결, 십일조 등에 대한 법이다. 의식법은 일차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특히 그의 속죄사역을 예표적으로 보이며, 도덕법에 의해 드러난 죄를 씻는 방법을 예시한다. 그러나 의식법은 또 도덕적 교훈도 준다. 예를 들어, 할례는 언약에 당연히 내포된 성결과 순종을 교훈한다. 제사들은 일차적으로 속죄를 예표하지만 또한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순종과 헌신과 감사와 교제의 삶도 교훈한다. 절기들은 우리의 모든 시간이 하나님의 것임을 교훈하며, 정, 부정의 음식에 관한 법은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삶을 교훈한다. 또 십일조는 모든 물질이 하나님의 것임을 교훈한다. 의식법이 보이는 도덕적 교훈들은 신약 시대에도 여전히 중요하다. 우리는 눈과 귀와 마음의 할례를 받아 거룩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온전한 순종과 헌신과 감사를 드리며 그와 항상 교제해야 한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을 기억하며 섬겨야 한다. 또 우리는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또 우리는 물질적 소득의 십분의 일뿐 아니라 그 이상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구약의 의식법은 신약 아래서 폐지되었고 더 이상 신약 성도를 속박하지 않는다. 신약 성도는 더 이상 구약의 의식법의 의무 아래 있지 않다. 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9:3은 "이 모든 의식법은 이제 신약 아래서 폐지되었다"고 말했다. 특히 히브리서는 의식법을 포함하여 율법 제도의 폐지를 분명히 가르쳤다. 히브리서 7:18-19, "전엣 계명이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폐하고 (율법은 아무것도 온전케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 히브리서 8:13,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 히브리서 10:1,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다음의 성경 구절들도 이 사실을 밝히 증거한다. 골로새서 2:16-17,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안식일들]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판단]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로마서 14:5-6,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날을 중히 여기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지 아니하고--전통사본]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그러므로 어떤 이가, 예를 들어, 오늘날 유월절을 지키는 것이 성경에 명령된 바라고 주장한다면, 그 주장은 잘못이다. 성경에는 유월절만 지키라고 명령하지 않고 열 가지의 절기들에 대해 다 명령하였으며 그뿐 아니라 할례와 제사도 명령하였다. 우리가 구약의 의식법을 지키지 않는 것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순종하는 것이다. 의식법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은 구약의 절기를 지키는 것이 성경적인 것이 아니고 지키지 않는 것이 성경적이다. 그러면 신약 교회에서 부활절이나 맥추절, 추수감사절, 성탄절 등을 지키는 것은 잘못이며 무의미한 일인가?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그것들을 지킨다면, 그것은 그것들이 성경에 명령되었기 때문이 아니고 단지 그것들이 가지는 종교적 의미와 유익 때문이다. 부활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감사의 뜻이 있고, 맥추절은 겨울이 지난 후 처음 한 추수에 대한 감사의 뜻이 있고, 추수감사절은 가을에 하는 모든 추수에 대한 감사의 뜻이 있다. 성탄절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에 대한 감사의 뜻이 있다. 그런 절기들은 교회가 스스로 정하여 지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절기들을 지키거나 안 지키는 것 때문에 서로 판단하거나 정죄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십일조는 십분의 일이라는 뜻이다. 십일조(十一條)의 '조'(條)라는 말은 '세금'(租)이라는 뜻이 아니고 '가지'라는 뜻이다. 십일조라는 말은 단순히 열 개 중의 하나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헌금의 표준으로 소득의 십일조를 드릴 것을 명령하셨다. 레위기 27:30-33, "땅의 십분 일 곧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분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께 성물이라. 사람이 그 십분 일을 속(贖)하려면 그것에 그 오분 일을 더할 것이요 소나 양의 십분 일은 막대기 아래로 통과하는 것의 열째마다 여호와의 거룩한 것이 되리니 그 우열(優劣)을 교계(較計)하거나 바꾸거나 하지 말라. 바꾸면 둘 다 거룩하리니 속(贖)하지 못하리라." 신명기 14:22-23, "너는 마땅히 매년에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곧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먹으며 또 네 우양의 처음 난 것을 먹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울 것이니라." 말라기 3:8-10,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십일조는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열매들이나 소나 양의 새끼들 등에서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선지자 말라기는 말하기를,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므로 하나님의 백성이 온전한 십일조를 하나님의 집에 드려야 한다고 하였다(말 3:8-10). 십일조는 레위 사람들에게 주어 생활비로 쓰게 하였고, 레위 사람들의 십일조는 제사장들에게 주어 생활비로 쓰게 하였다. 또 매 3년 끝에는 십일조를 저축하여 두어서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들로 먹게 하라고 하였고(신 14:28-29) 이것은 아마 매년 드리는 십일조에 추가되는 것일 것이다. 십일조나 첫열매의 헌금은 하나님의 풍성한 복이 약속되어 있다. 말라기 3:10,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잠언 3:9-10,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구약의 의식법은 신약 아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고 따라서 폐지되었다. 그러나 그 법들에 담긴 원리들은 신약 아래서도 우리의 생활 지침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에 명하신 최소한의 헌금이다. 구약의 율법은 우리의 생활 원리를 보인다. 그러므로 신약 시대라고 해서 너무 반작용하여 물질적 소득 전부를 내가 쓸 수 있는 돈으로 여겨서는 안 될 것이다. 십일조 규례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지만 구약 시대보다 못한 방향으로가 아니라 더 풍성한 방향으로 성취되었다. 그러므로 신약 시대의 헌금은 십일조 이상이 바람직하다. 구약보다 더 풍성한 은혜를 받은 신약 성도는 소득의 십일조 이상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1) 고린도후서 8:7,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같이 이 은혜[헌금하는 일]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 십일조와 첫열매에 대해 약속하신 하나님의 복도 신약 성도에게 적용된다고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복을 원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가장 귀한 것을 먼저 그에게 드려야 할 것이다.
1) 박윤선 박사는 말하기를, "교회가 이것[십일조 헌납]을 법제화 할 것은 아니고 그 이상 헌금이나 비록 그 이하 헌금도 감심으로 하도록 권장해야 한다. 그 이유는 신자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원하는 마음으로 해야 되기 때문이다. . . . 그런데 신자들이 구원의 은혜를 감사하여 즐거움으로 드리는 헌금은 십일조 이상을 바치게 되어진다"고 하였다. 박윤선, 에스라·느헤미야 주석, 163쪽. ◈ 우리나라가 하나님의 긍휼 가운데 한미동맹을 견고히 하고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를 유지함으로 평안하고 경제도 회복되도록 기도합시다. ----------------------------------------------------------------------- ◈ 우리는 성경의 근본 교리들을 보수하고, 자유주의 신학과 천주교회의 배교를 포용하는 타협과, 은사운동의 혼란을 반대하고, 또 그런 자들과 교제하는 자들도 책망하기를 원한다. 우리는 오늘날도 성경 말씀의 정로(正路)를 붙들고 그 길로 가는 교회들이 부흥 발전하기를 기도하며, 또 그런 자들과 교제하기를 원한다. ----------------------------------------------------------------------- ♣ www.oldfaith.net에 올려져 있는 현대교회문제와 현대교회문제 자료집 및 옛신앙지(특별호) 등의 자료들을 참고하십시오.
전화: (02) 334-8291, 팩스: (02) 337-4869 ◈ 책 안내 ●김효성, 신약성경강해. 1192면. 18,000원(송료 포함). ●김효성, 현대교회문제 자료집. 330면. 4,000원(송료 포함). ● 김효성, 현대교회문제: 배교, 타협, 혼란 ● 조영엽, 왜 열린 예배는 잘못되었는가? [추천하는 책] ◆ 김성욱, 대한민국 적화보고서. 355쪽. 13,000원. --오늘 우리 사회의 이념적 문제를 잘 증거한 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