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신앙 2006년 4월 02일 [제10권 14호] ◆ 매주 발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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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하였으며"(렘 6:16). |
옛신앙
Old-time Faith www.oldfaith.net |
'옛신앙'이란, 옛부터 하나님의 선지자들과 주의 사도들이 가졌던 신앙, 오직 정확 무오(無誤)한 하나님 말씀인 신구약 성경에만 근거한 신앙, 오늘날 배교와 타협의 풍조에 물들지 않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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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884 서울 마포구 합정동 364-1
합정동교회 김효성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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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오전설교: "기브온 사람들" 여호수아 9:23, "그러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나니 너희가 영영히 종이 되어서 다 내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나무 패며 물 긷는 자가 되리라." 여호수아 9장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중 여리고성과 아이성을 정복했을 때, 기브온 사람들이 꾀를 내어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족장들에게 나아와 그들을 속이고 자기들과 조약을 맺게 함으로 멸망을 당하지 않고 구원얻은 일을 기록합니다. 우리는 오늘 아침 본장에 기록된 사건에 관계된 몇 가지 사실들을 묵상함으로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기브온 사람들은 자신들을 위해 꾀를 내었습니다. 본장 1절과 2절을 보면, 요단 서편 산지와 평지와 레바논 앞 대해변에 있는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의 모든 왕은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성과 아이성을 정복한 일을 듣고 모여서 일심으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로 더불어 싸우려고 하였습니다. 그 때 히위 사람이었던(7절) 기브온 사람들은 가나안 족속들의 연합적 행동에서 이탈하였고 자신들의 살 길을 찾았습니다. 그들은 여호수아가 여리고성과 아이성에 행한 일을 듣고 한가지 꾀를 냈습니다. 그들은 사신들의 모양을 꾸미되 해어진 전대와 해어지고 찢어져서 기운 가죽 포도주 부대를 나귀에 싣게 하고 그 발에는 낡아 기운 신을 신고 낡은 옷을 입고 다 마르고 곰팡이 난 떡을 예비하게 하였습니다. 그 사신들은 길갈 진으로 와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자기들이 원방에서 왔으니 자기들과 약조하자고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너희가 우리 중에 거하는 듯하니 우리가 어떻게 너희와 약조할 수 있으랴"고 대답하자, 그들은 여호수아에게 "우리는 당신의 종이니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여호수아가 "너희는 누구며 어디서 왔느뇨?"라고 묻자, 그들은 대답하기를, 그들이 이스라엘에 대한 소문을 들었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과 그가 애굽에서 행하신 모든 일을 들었고 요단 동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들의 두 왕 곧 헤스본왕 시혼과 바산왕 옥에게 행하신 모든 일도 들었다고 했습니다. 또 본장 24절에 보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 종 모세에게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고 그 모든 거민을 멸하라고 명하신 사실도 들었습니다. 기브온 장로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하신 일들과 하신 말씀에 대해 듣고 그것을 무시하지 않고 두려워했고 어떻게 하면 그 멸망으로부터 건짐을 받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꾀를 낸 것은 바로 이런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이 떡은 우리가 당신들에게로 오려고 떠나던 날에 우리들의 집에서 오히려 뜨거운 것을 양식으로 취하였더니 보소서 이제 말랐고 곰팡이 났으며 또 우리가 포도주를 담은 이 가죽 부대도 새것이더니 찢어지게 되었으며 우리의 이 옷과 신도 여행이 심히 길므로 인하여 낡아졌나이다." 기브온 사신들의 말은 거짓말이었고 그들의 모양은 자신들이 지어낸 것이었지만, 그들의 중심에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던 것입니다. 둘째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족장들은 큰 실수를 하였습니다. 그들은 기브온 사신들의 꾀와 거짓말과 위장(僞裝)에 속아 넘어갔습니다. 본장 14절, 15절에 보면,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은 어떻게 할 것을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고 그들과 화친하여 그들을 살리리라는 언약을 맺고 회중 족장들이 그들에게 맹세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 사신들과 언약을 맺은 후 3일이 지나자, 그들은 그들이 거주하는 기브온, 그비라, 브에롯, 기럇여아림 등의 성읍에 도착했고 그 사신들이 그 성읍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족장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브온 사신들에게 맹세하였기 때문에 그들을 치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큰 실수를 한 것이었고 온 회중은 그들을 원망하였습니다. 족장들은 온 회중에게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로 그들에게 맹세하였은즉 이제 그들을 건드리지 못하리라. 우리가 그들에게 맹세한 맹약을 인하여 진노가 우리에게 임할까 하노니 이렇게 행하여 그들을 살리리라." 성급한 결정은 잘못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잠언 19:2은 "지식 없는 소원은 선치 못하고 발이 급한 사람은 그릇하느니라"고 교훈합니다. 그러나 경건한 다윗은 무슨 일을 행할 때, 사무엘하 5장 19절이나 23절에 기록된 대로 먼저 하나님께 묻곤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항상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고 받아야 하며 그래야 실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수로 한 맹세라 할지라도, 하나님과 한 맹세는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시편 15:4은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아니하는' 자가 하나님의 장막에 거할 자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참으로 두려워하는 자는 맹세를 지킬 것입니다. 후에 사울왕은 잘못된 열심으로 기브온 사람들을 죽였고 그 결과 다윗 시대에 3년 간의 극심한 기근이 이스라엘 땅에 임했는데, 그것은 기브온 사람을 죽이지 않겠다는 옛맹세를 어겼기 때문이었습니다(삼하 21:1-2). 하나님의 이름으로 한 맹세는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맹세를 어기는 자는 큰 화를 당할 것입니다. 셋째로, 기브온 사람들은 죽임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본장 21절을 다시 번역하면, "무리에게 이르되 그들을 살리고 족장들이 그들에게 이른 대로 그들로 온 회중을 위하여 나무 패며 물 긷는 자가 되게 하라 하였더라." 22절과 23절에 보면, 여호수아는 기브온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우리 가운데 거주하거늘 어찌하여 우리는 너희에게서 심히 멀다 하여 우리를 속였느냐? 그러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나니 너희가 영영히 종이 되어서 다 내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나무 패며 물 긷는 자가 되리라." 그 때 기브온 사람들은 대답했습니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종 모세에게 명하사 이 땅을 다 당신들에게 주고 이 땅 모든 거민을 당신들의 앞에서 멸하라 하신 것이 당신의 종에게 분명히 들리므로 당신들을 인하여 우리 생명을 잃을까 심히 두려워하여 이같이 하였나이다. 보소서 이제 우리가 당신의 손에 있으니 당신의 의향에 좋고 옳은 대로 우리에게 행하소서." 기브온의 장로들은 다른 성읍들의 장로들과 달랐습니다. 그들은, 본장 3절 말씀대로, 여호수아가 여리고성과 아이성에 행한 일들을 들었습니다. 또 그들은, 9절, 10절의 말씀대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행하신 모든 일과 또 요단 동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곧 헤스본왕 시혼과 아스다롯에 있는 바산왕 옥에게 행하신 모든 일을 듣고 그 하나님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그들은, 24절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고 그것을 멸하라고 모세에게 하신 말씀을 듣고 두려워했습니다. 즉 기브온 장로들에게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인정하는 믿음과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만일 그들의 마음이 교만하고 완악하였다면 그들은 그런 꾀도 내지 못했을 것이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굴복하려고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거짓을 말한 것은 잘못이지만, 그 멸망의 위기 앞에서 그들 속에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인정함과 두려워함이 있었고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은혜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멸망당할 상황에서 살아 남는 길은 그것밖에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보아도 그 외에 다른 길이 없어 보입니다. 그들에게는 나무패며 물 긷는 자가 되는 것이 큰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죽임을 당할 처지이었기 때문에 그런 신분이라도 감사했을 것입니다. 26절, 27절에 보면, 여호수아는 기브온 사람들을 이스라엘 자손의 손에서 건져서 죽이지 못하게 하였고 그들로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회중을 위하며 여호와의 단을 위하여 나무 패며 물 긷는 자를 삼았습니다. 그들은 멸망당할 직전에 기이하게, 예외적으로 구원을 받았던 것입니다. 본장의 사건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받을 수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실수를 통해 교훈을 받을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하나님께 묻지 않고 기브온 사람들과 언약을 맺었고 맹세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큰 실수이었습니다. 사람의 성급한 말과 행동은 실수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모든 일에 있어서 고요히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을 살피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를 의지하며 그의 인도하심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는 기브온 사람들이 구원받은 사실에서도 교훈을 받습니다. 기브온 사람들은 며칠 후면 멸망당할 처지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 듣고 그를 인정하고 두려워하고 있었고 자신들의 임박한 멸망을 깨닫고 두려워하고 있었고, 비록 거짓된 꾀를 사용하긴 하였지만 구원을 받았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의 진리가 온 세상에 전파되고 있고 또 이 세상이 장차 멸망한다는 사실도 선포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오늘날에는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오는 자마다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기쁜 소식도 전파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여호수아 당시보다 훨씬 나은 상황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렇게 구원을 받은 자들입니다. 또 지금도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 자신이 멸망당할 처지에 있는 것을 알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구원을 얻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구원을 받습니다. 셋째로, 우리는 기브온 사람들이 나무 패며 물 긷는 종들이 되었다는 사실에서도 교훈을 받습니다. 그들은 비록 종이 되었지만 죽는 것보다는 나았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떠합니까? 멸망당할 죄인인 우리가 구원을 얻었습니다. 영원한 지옥 불못에 들어갈 죄인인 우리가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러면 구원받은 우리가 이제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이 무거운 짐이 되겠습니까? 이제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이 짐스러운 일이 되겠습니까? 이제 우리의 몸을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의를 위하여, 선한 일을 위하여 바치는 것이 불평스러운 일이 되겠습니까? 우리의 몸과 마음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즐거이 드립시다. 로마서 12:1은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즐거이 하나님의 종들이 됩시다. ----------------------------------------------------------------------- 귀한 글들: 성화(聖化)에 관하여 [로버트 트레일 목사(Rev. Robert Traill); 영국, 켄트주의 크란브르크 교구목사.] 성화(聖化)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말로 표현하기보다 느끼는 것이 훨씬 나은 것입니다. 성화는 중생과 같은 것, 인간 전체의 갱신과 같은 것입니다. 성화란 새 피조물을 만들고 형성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불쌍한 영혼에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심고 새겨 넣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도가 다음과 같이 말한 것과 같습니다: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갈 4:19); "우리가 또한 하늘의 형상을 입으리라"(고전 15:49).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닮은 사람은 꼭 두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을 닮았으면 이 사람을 닮은 대로, 저 사람을 닮았으면 저 사람을 닮은 대로, 그 닮은 사람과 함께 대접을 받을 것입니다. 그 닮은 사람이란 바로 첫째 아담과 둘째 아담입니다. 원래 사람은 첫째 아담과 닮았으며 또 사단을 닮았습니다. 왜냐하면 사단과 타락한 첫째 아담은 서로 닮았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라고 우리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요 8:44). 그리고 첫째 아담은 "창세로부터 살인자"였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류를 죽음으로 몰아 넣었으니까요. 첫째 아담의 모든 후손들은 사단의 자녀입니다. 여기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그리고 또 모든 자녀들은 둘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를 닮았습니다. 그래서 그들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완성될 때, 그들은 완전한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고전 15:49). 이 말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우리는 죄 중에서 비참하게 태어났으므로 땅의 형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덤 속에서 썩는 것으로 보아 땅의 형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에 의해 죄씻음을 받을 때, 하늘에 속한 아담의 형상을 가집니다. 우리가 정화(淨化)되어감에 따라 이 형상은 우리 속에서 점점 커져 갑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과 육체가 인간이신 그리스도를 꼭 닮게 되었을 때, 하늘에 속한 아담의 형상을 완전하게 지니게 되며, 완전한 행복을 누리며, 온전히 거룩하여집니다. 그 때는 바로 그리스도가 그 자신의 능력으로 죽음을 정복하였던 것처럼,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죽음을 정복했을 때입니다. 성도들이 얼마큼 그리스도 예수와 닮은 것인지는, 부활 때까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마치 환하게 빛나는 수없이 많은 작은 태양들처럼 성도들이 무덤에서 일어날 때까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속하면 어떤 모습과 같을까요? 비록 물질계를 초월한 그리스도의 영광은 영원토록 그의 것이며, 그의 특권일 것이지만 우리도 그 주님을 비슷하게 닮을 것입니다. 어떤 점에서 칭의(稱義)와 성화(聖化)가 비슷합니까? 여러 가지 점에서 그러합니다. 첫째로, 그것들은 그 창시자가 같다는 점에서 서로 비슷합니다. 의롭다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요 거룩하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롬 8:33). "나는 너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임이라"라는 말씀은 구약성경에 흔히 있는 말씀입니다(출 31:13; 레 20:8). 둘째로, 둘 다 값없이 주는 은혜로 말미암았다는 기원과 발생에 있어 둘은 비슷합니다. 의롭다 하심은 값없이 주는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거룩하게 하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 3: 5). 둘 다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셋째로, 둘 다 같은 한 사람을 향해 일어난다는 점에서 비슷합니다. 의롭다함을 입은 사람은 동시에 거룩함을 입습니다. 거룩함을 입은 사람은 동시에 의롭다함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선민, 구속함을 입은 모든 사람들은 이 두 가지의 복이 기들 위에 임하는 것입니다. 넷째로, 시간에 관해서도 서로 같은데, 시간상 동시에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말할 때, 우리가 시간에 대해 말하거나 생각해 보는 것은 어려운 문제입니다. 이들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항상 동시에 일어납니다. 거룩하게 되기 전에는 사람은 의롭게 되지 않습니다. 동시에 같은 은혜가 역사합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고전 6:11)고 했습니다. 다섯째로, 같은 수단, 즉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작용이라는 점에서 같습니다. 우리는 말씀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은 약속으로 우리에게 영생의 판결을 내려 주었습니다. 우리는 또한 같은 말씀의 능력으로 거룩하여졌습니다.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요 15:3).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라고 사도 바울은 말했습니다. 여섯째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영생을 얻는데 똑같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같습니다. 순서가 같다는 것이 아니라 필요성이 동등하다는 말입니다. 즉, 의롭다함을 받지 아니한 사람이 구원받지 못하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거룩함을 입지 아니한 사람은 구원받지 못할 것입니다. 칭의를 받지 아니한 어떠한 사람도 구원받을 수 없으며, 거룩해지지 아니한 어떤 사람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영생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둘 다 똑같이 필요합니다. 어떤 점에서 칭의와 성화가 다릅니까? 이것은 실천과 일상생활에 관련된 중요한 문제인데, 그 점에서 둘은 다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대로 둘은 많은 점에서 일치합니다. 그러나 또 여러 면에서 다르기도 합니다. 첫째로, 칭의는 사람의 인격의 신분에 관한 하나님의 역사이며, 성화는 사람의 본성에 대한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이 둘은 매우 다릅니다. 이제 비유를 들어서 설명하겠습니다. 칭의는 범죄자에게 사형선고를 면제해 주는 재판장이신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그렇지만 성화는 우리의 죽을 병을 치료하시는 의사이신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법정에 나온 한 범죄자가 대역죄로 심문을 받았습니다. 그 동일한 범죄자가 죽을 병을 가지고 있었고, 그의 범죄에 대해 비록 사형 선고를 내릴 재판관이 없다 할지라도 그는 그 병으로 인해 죽을 것입니다. 그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길은, 그가 대역죄로 사형을 당하지 않도록 법적으로 선고를 면제해 주는 은혜의 행위입니다. 그렇지만 이 사면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의 질병이 치료되지 않는다면, 재판장이 사형선고를 전면적으로 사면해 주었어도 그 사람은 후에 곧 죽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말하기를, 칭의란 은혜를 베푸는 재판장으로서의 하나님의 행위이며, 성화는 인정 많은 의사로서의 하나님의 행위라고 한 것입니다. 다윗은 이 둘을 결합시켰습니다. 시편 103:3,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범죄행위가 있다 할지라도 그 죄악이 너희를 멸망케 아니하리라고 약속해 주셨는데, 이것이 칭의입니다. 또 죄악의 권세 안에 있다 할지라도 그 죄악이 너희를 멸망케 아니하리라고 하셨는데, 이것이 성화입니다. 둘째로, 칭의는 사람의 의를 평가하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성화는 우리 속에 한 의(義)를 주입시키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칭의와 성화 이 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는데, 칭의는 의를 뒤집어 씌움으로 말미암고, 성화는 의를 주입함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칭의에 있어서, 하나님의 선고는 다음과 같이 진행됩니다. 그리스도께서 그 생명을 바쳐 죽으시고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심으로 이루신 의는 범죄한 죄인에게는 사면으로 간주됩니다. 죄인이 하나님의 법정에 서서 "이 사람이 하나님의 법을 어겼는가?"라는 질문을 받을 때, 하나님은 "그렇다"고 대답하십니다. 그 가련한 죄인의 양심도, "예, 저는 그것을 수없이 많이 어겼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율법이 그대를 정죄하고 그대의 범죄 때문에 죽게 하지 않는가?" 그 사람은 "예"라고 답하고 하나님의 법도 "예"라고 말합니다. 율법은 "죄를 범한 영혼은 마땅히 죽어야 한다"는 것밖에 모릅니다. 그러면 이 사건에서 소망은 없습니까? 있습니다. 복음의 은혜가 이 희망을 보여줍니다. 자기 자신이 죄를 지고 우리 죄 때문에 죽은 분이 계십니다. 그리고 그의 의는 불쌍한 죄인의 의로 간주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를 용서받습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행하셨고 고난당하신 것을 하나님께서는 우리 때문에, 우리 대신, 우리의 유익을 위해 우리의 칭의로 간주하시는 것입니다. 성화 문제에 대해 말하자면, 성령께서는 사람의 영혼 속에 거룩함을 집어 넣어 주십니다. 성령께서 의를 주입시킨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구별하는 것보다 훨씬 분명하게 구별해서 의와 거룩함, 이 두 말을 사용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 의와 거룩함은 따로 취급해야 합니다. 우리의 의는 우리 밖에 있고, 우리의 거룩함은 우리 안에 있으며 그것은 우리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분명히 구별하고 있습니다.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빌 3:9). 의는 우리의 것이 아니었으며, 거룩함은 우리 자신의 것이었습니다. 의는 우리 자신이 일해서 얻은 것이 아니요, 성화는 우리 안에 내재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자신의 것입니다. 우리의 의는 본래부터 우리의 것이 아니었고 가지고 태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긴 것이고, 영원토록 그리스도 안에 살아 있으며, 오직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으며,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거룩함은, 원래는 우리의 것이 아니었을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천적으로 우리의 것입니다. 거룩함은 우리 안에 있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구별했던 점입니다.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빌 3:9). 칭의는 완전하나 성화는 불완전합니다. 둘 사이의 큰 차이가 있습니다. 칭의는 완전해서, 어떤 정도를 용납지 않으며, 쇠퇴의 여지가 없으며, 중단되지 않고, 방해받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성화는 이 모든 것이 끼어들 여지가 있습니다. 제가 칭의는 완전하다고 말할 때, 그 의미는. 의롭다 함을 입은 사람은 모두 똑같이 완전히 의로워진 것이라는 점입니다. 오늘 이 세상에 살아가고 있는 가장 보잘 것 없는 신자라고 하더라도 사도 바울만큼 의로워진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신자는 모두, 비록 앞으로 천년 후에라 할지라도 꼭 지금만큼 의로워진 것입니다. 칭의는 그 칭의를 함께 나누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원토록 완전한 것입니다. 칭의에는 어느 정도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이것입니다. 즉 칭의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義)이며, 우리가 그것을 받을 자격이 있은 것은 은혜를 베푸신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하신 조처로 말미암은 것이고 그래서 칭의는 영원히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누가 능히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롬 8:33-34). 그렇지만 성화는 불완전하고 미완성이며 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저 사람보다 더 성화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던 바로 그 시간에 사도 바울은, 오늘 이 시간에 살아있는 어떤 사람보다 더 성화되었다고 나는 믿습니다. 성화는 그것을 나누어 가지고 있는 사람에 따라 크게 차이가 납니다. 또 같은 사람에 있어서도 다르게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신자, 즉 진정으로 성화되어 가고 있는 사람은 그 전보다는 지금이 더 거룩하고 더 성화되어 있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는 것입니다(고후 7:1).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완전히 의로워져야 한다고 요구하는 곳은 어느 곳에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완전한 의를 이루어 주셨고 우리는 이 완전한 의 (義) 가운데 서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기 위하여 조심하고 힘써야 합니다. 천국에 가 있는 성도는 전에 이 세상에 있었을 때보다는 더 거룩합니다. 왜냐하면 천국에서 완전히 거룩하여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그 전보다 더 의로워진 것은 아닙니다. 천국에 있는 성도라고 해서 이 땅에 있는 성도보다 더 의로운 것은 아닙니다. 단지 천국에 있는 성도는 그렇다는 사실을 더 잘 알고 있으며, 그들이 비춰보고 있는 그 빛의 영광이 그것을 더 환하게 더 분명히 알게 해 줍니다. ◈ 우리나라의 이념적 안정을 위해 기도합시다. ----------------------------------------------------------------------- ◈ 우리는 성경의 근본 교리들을 보수하고, 자유주의 신학과 천주교회의 배교를 포용하는 타협과, 은사운동의 혼란을 반대하고, 또 그런 자들과 교제하는 자들도 책망하기를 원한다. 우리는 오늘날도 성경 말씀의 정로(正路)를 붙들고 그 길로 가는 교회들이 부흥 발전하기를 기도하며, 또 그런 자들과 교제하기를 원한다. ----------------------------------------------------------------------- ♣ www.oldfaith.net에 올려져 있는 현대교회문제와 현대교회문제 자료집 및 옛신앙지(특별호) 등의 자료들을 참고하십시오.
전화: (02) 334-8291, 팩스: (02) 337-4869 ◈ 책 안내 ●김효성, 신약성경강해. 1192면. 20,000원(송료 포함). ●김효성, 현대교회문제 자료집. 330면. 5,000원(송료 포함). ● 김효성, 현대교회문제: 배교, 타협, 혼란 ● 조영엽, 왜 열린 예배는 잘못되었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