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신앙 2006년 3월 26일 [제10권 13호] ◆ 매주 발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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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하였으며"(렘 6:16). |
옛신앙
Old-time Faith www.oldfaith.net |
'옛신앙'이란, 옛부터 하나님의 선지자들과 주의 사도들이 가졌던 신앙, 오직 정확 무오(無誤)한 하나님 말씀인 신구약 성경에만 근거한 신앙, 오늘날 배교와 타협의 풍조에 물들지 않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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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884 서울 마포구 합정동 364-1
합정동교회 김효성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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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오전설교: "아이성을 정복함" 여호수아 8:1,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 군사를 다 거느리고 일어나 아이로 올라가라. 보라 내가 아이 왕과 그 백성과 그 성읍과 그 땅을 다 네 손에 주었노니."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은 아이성과의 첫번째 전투에서는 아간의 범죄 때문에 패배하였으나 두 번째 전투에서는 승리하였고 아이성을 정복하였습니다. 여호수아 8장은 아이성 정복에 대해 기록하면서 몇 가지 진리를 증거합니다. 첫째로, 아이성 전투의 승리는 하나님의 허락하심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세상 만사를 작정하시고 주장하십니다. 시편 저자는 성령 안에서 고백하기를,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라고 했고(시 115:3), 또 "여호와께서 무릇 기뻐하시는 일을 천지와 바다와 모든 깊은 데서 다 행하셨도다"라고 했습니다(시 135:6).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 가운데 일어나는 것들입니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마 10:29). 세상에 지극히 작은 일 하나라도 하나님의 뜻과 상관 없이 일어나지 않음을 증거하신 것입니다. 무슨 선한 일이든지 하나님이 허락하셔야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성령의 감동 가운데 욥은 고백하기를, "하나님이 빼앗으시면 누가 막을 수 있으며 무엇을 하시나이까 누가 물을 수 있으랴"라고 했고(욥 9:12), 솔로몬도 성령의 감동으로 말하기를,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고 했습니다(전 7:13). 하나님께서 구부러뜨리시면 아무도 펼 수 없고 하나님께서 펴시면 아무도 구부러뜨릴 수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심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아이성 정복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심으로 가능했습니다. 본문 1절에는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 군사를 다 거느리고 일어나 아이로 올라가라. 보라 내가 아이 왕과 그 백성과 그 성읍과 그 땅을 다 네 손에 주었노라"고 합니다. 여호수아 8:7에 보면, 여호수아는 매복할 군사들에게 복병 작전을 설명하면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손에 붙이시리라"고 말했습니다. 여호수아 8:18에 보면, 하나님께서도 여호수아에게 "내가 이 성읍을 네 손에 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이성을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의 손에 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이 그 두 번째 아이성 전투에서 승리하도록 작정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 전투에서 승리한 것은 하나님의 작정과 허락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슨 일이든지 뜻하시면, 그 일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허락하심은, 물론 하나님 편에서는 그의 기뻐하시는 뜻이었지만, 이스라엘 편에서는 악을 제거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사람의 죄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가로막습니다. 죄악은 사람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가로막습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선지자는 말하기를,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고 했고(사 59:1-2), 예레미야 선지자는 "너희 죄가 너희에게 오는 좋은 것을 막았느니라"고 증거했습니다(렘 5:25). 죄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실 수 있는 모든 좋은 것을 막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아간의 죄를 징벌했을 때 승리의 허락을 받게 된 것입니다. 죄가 제거되었을 때 승리가 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승리를 허락하셨습니다. 둘째로, 아이성 정복은 복병술을 사용함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아이성을 이스라엘의 손에 주셨고 승리를 허락하셨지만, 그것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인간이 할 몫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의 방식입니다.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는 제2 원인이나 수단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긍정하고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를 믿는 성도는 소극적 태도를 가져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의 성취에는 보통 우리가 해야 할 몫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우리의 몫을 함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우리의 몫을 성실히 행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습니다. 두 번째의 아이성 전투에서 이스라엘이 해야 할 몫은 복병술을 사용하는 것이었습니다. 본문 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너는 성 뒤에 복병할지니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지시를 그대로 실행했습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복병 전술을 설명했고 군사들 중 처음에는 3만 명을, 그리고 후에 추가로 5천 명을, 아이성의 서쪽 곧 뒷편에 매복시켰습니다. 그는 아침 일찍부터 아이성을 공격했습니다. 아이성 왕과 군사들은 급히 대처했습니다. 그 때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군대는 거짓 패하여 아이성 군사들을 유인해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아이성 왕과 모든 군사들은, 패하여 도망가는 듯한 이스라엘 군대를 추격하는데 여념이 없어서 성문을 열어 놓은 채 그들을 따라갔습니다. 이 때 여호수아는 자신이 들고 있던 창을 높이 들었습니다. 우리 말 성경에 '단창(短槍)'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키돈)는 '짧은 창'이 아니고, '던질 수 있는 가느다란 긴 창(dart, javelin)'을 가리킵니다. 여호수아가 창을 높이 든 것은 하나의 신호였습니다. 이스라엘의 복병들은 여호수아의 신호에 따라 숨었던 곳에서 나와 성을 점령했고 그 성에 불을 놓았습니다. 아이성 왕과 군사들은 그제야 자신들의 경솔함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들은 이제 양쪽으로 공격을 받는 '독 안에 든 쥐'처럼 되었고 그 날 그 전투에서 아이성의 남녀 모든 사람들 12,000명이 다 죽었습니다. 지난 번 여리고 성 정복 때는 가축들을 다 죽이고 노략물들 중 금은동철(金銀銅鐵)은 하나님께 바치고 그 나머지는 다 불살랐으나, 아이성 전투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 성의 가축과 노략물을 취할 수 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 2절, "오직 거기서 탈취할 물건과 가축은 스스로 취하라." 사실상 사람들이 죄악된 것이지 동물이나 물건들이 죄악된 것은 아닙니다. 그것들은 다 조물주 하나님이 주신 자연적 혜택들이었고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죄인들에게서 빼앗아서 자기 백성에게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과 허락대로 그들은 그 성읍의 가축들과 노략한 것을 취하였습니다(27절). 그런 후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은 아이성을 불사르고 영원한 무더기를 만들었습니다. 또 그들은 아이성의 왕을 저녁 때까지 나무에 매달았다가 해질 때 그 시체를 나무에서 내려 성문 어귀에 던지고 돌로 큰 무더기를 만들었습니다. 그 전쟁은 처참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우상숭배와 음란으로 심히 더러워졌던 가나안 땅의 한 성 아이는 이렇게 완전히 멸망을 당했고 이스라엘은 그 두 번째 전투에서 이렇게 승리하였습니다. 셋째로, 여호수아 8장은 이런 일을 기록한 후 여호수아가 모세의 지시대로 복과 저주를 선언한 사실을 증거합니다. 본장 30절 이하에 보면, 아이성을 정복한 후 여호수아는 여호와 하나님을 위하여 에발산에 한 단을 쌓았습니다. 그것은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한 것과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철 연장으로 다듬지 아니한 새 돌로 만든 단이었습니다. '새 돌'이라는 히브리어(아바님 쉘레모스)는 '온전한 돌들' 즉 '깍지 않은 돌들'이라는 뜻입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지시대로 즉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그렇게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단 위에 여호와께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고 여호수아는 그 돌들 위에 모세의 기록한 율법을 기록하였습니다. 그런 후 온 이스라엘과 그 장로들과 유사들과 재판장들과 본토인뿐 아니라 이방인까지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레위 사람 제사장들 앞에서 궤의 좌우에 서되 절반은 그리심산 앞에, 절반은 에발산 앞에 섰습니다. 그것은 여호와의 종 모세가 명령한 대로였습니다. 신명기 27장에 보면,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희가 요단을 건넌 후에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요셉과 베냐민은 백성을 축복하기 위하여 그리심산에 서고, 르우벤과 갓과 아셀과 스불론과 단과 납달리는 저주하기 위하여 에발산에 서라"고 명령하였었습니다(신 27:12-13). 이스라엘 백성을 두 부류로 나누어 서게 한 후, 여호수아는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축복과 저주하는 율법의 모든 말씀을 낭독하였습니다. 본장 35절은 "모세의 명한 것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온 회중과 여인과 아이와 그들 중에 동거하는 객들 앞에 낭독하지 아니한 말이 하나도 없었더라"고 기록합니다. 축복과 저주의 말씀을 낭독한 것은 복과 저주의 선언과 같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과 뜻을 재확인하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복과 저주의 두 길을 주시고 그들로 선택하게 하셨습니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하면 그들은 복을 얻으며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과 형통을 누릴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거역하면 그들은 죄를 짓는 것이요 저주와 화를 당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복과 저주의 이 두 길은 세상에서도 그러하고 궁극적으로 내세에서도 그러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법을 거역하고 죄를 지으면 결코 복을 얻지 못하고 평안과 형통을 누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십니다. 그러나 사람이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씻음을 받고 하나님의 법을 즐거이 순종한다면 이 세상에서도 복을 받고 평안과 형통을 누리며 장차 확실히 영광의 천국에 들어갈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해보면, 아이성 정복의 사건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와 교훈은 무엇입니까? 무엇보다 첫째는 하나님의 주권 진리입니다. 아이성 정복 즉 아이성의 두 번째 전투에서의 승리는 하나님의 허락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세상 만사는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대로 이루어집니다. 개인도, 가정도, 교회도, 국가도, 온 세계도 그러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지 않으시면 되어질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허락하시면 무슨 일이든지 다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하나님의 주권적 작정과 섭리를 믿읍시다. 둘째는 우리의 의무에 대한 진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믿어야 할 뿐 아니라 또한 인간의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아이성 정복은 하나님의 허락하신 일이었지만,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복병 전술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것은 소극주의적 태도를 갖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의 의무들을 성실히 행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교훈하신 바대로 의롭고 선한 삶을 살아야 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가정에서는 좋은 남편, 좋은 아내, 좋은 부모, 좋은 자녀가 되어야 하고, 사회에서는 좋은 시민, 좋은 직장인, 좋은 상사, 좋은 직원이 되어야 하고, 교회에서는 좋은 성도, 모범적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셋째는 우리가 죄를 짓지 않고 순종할 때 복을 기대할 수 있다는 진리입니다. 아이성의 첫번째 전투에서 실패한 이유는 아간의 범죄 때문이었습니다. 죄는 실패의 원인, 불행의 원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얻고 모든 죄를 철저히 버리고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성경의 교훈대로 순종하며 거룩하고 의롭게 선하고 진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을 받은 후에도 여전히 죄를 짓는다면 우리는 결코 복과 평안과 형통을 누리지 못할 것이지만, 우리가 말씀에 순종한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도 복과 평안과 형통을 풍성하게 누리다가 영광의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된 삶, 평안과 형통의 삶을 원한다면, 우리는 죄 짓지 말고 항상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 지난오후설교: 교회의 직분 여자 목사와 여자 장로는 성경적이지 않음(계속) 고린도전서 14:34-37,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혹은 '너희 아내들')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임이라.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 이 말씀도 여자들이 교회 앞에 나서서 말하고 가르치는 것을 금한다. 그 이유는 첫째로 율법의 말씀 때문이다. 34절, "율법에 이른 바와 같이." 어떤 율법을 가르치는가? 예를 들면, 창세기 2:18,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창세기 3:16,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창세기 18:12,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둘째로 그것은 주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37절, "주의 명령인 줄 알라." 에베소서 5:22,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베드로전서 3:1, 5-6, "아내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 . .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같이." 사도들의 교훈은 곧 주의 교훈이다. 신구약은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는 책이다. 셋째로 그것은 교회의 보편적 규율이기 때문이다. 34절,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오늘날 파괴적인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으로 성경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기 전까지 모든 교회는 이 성경적 교훈과 원리에 대해 이의(異議)를 말하지 않았다. 위에 인용된 두 성경 구절은 다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교훈을 옛 시대의 사고방식과 풍습에 제약을 받은 사도의 인간적인 발언이나 사상으로 보는 것은, 거기에 제시된 다섯 가지의 이유들의 정당성을 무시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사도들의 글인 신약의 신적 권위에 대항하는 큰 잘못이며 죄악이다. 데살로니가후서 2:15, "형제들아,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을 지키라." 박형룡 박사는 강조하여 말하기를, 여자 목사와 여자 장로를 금하는 것은 2천년 전의 한 지방 교회의 풍습이 아니고 만고 불변의 진리라고 하였다(145- 148쪽). 남녀 평등과 여성 안수를 주장하는 신학자들이 인용하는 성경 구절들은 앞에서 인용된 두 성경 구절에 비추어 이해되어야 한다. 고린도전서 11:11,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갈라디아서 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이 구절들은 교회의 직분에 있어서 남녀 평등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구원의 복에 있어서 남녀가 동등하다는 뜻이다. 또한 신약의 만인 제사장의 진리도 가정과 교회 안에서 남녀 역할의 차등과 구별을 가르치는 말씀들과 충돌되게 이해해서는 안 된다. 물론, 신약시대의 복음사역에 여자들의 역할이 컸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누가복음 8:2, 3,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또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예수님과 12제자들]를 섬기더라." 로마서 16장에는 뵈뵈, 브리스길라, 마리아 등 복음을 위해 많이 수고한 여자들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여자에게는 자녀 출산과 양육이라는 특별한 사역이 있다. 디모데전서 2:15,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서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여자는 자녀들을 해산함으로써 그 낮은 지위가 회복된다. 훌륭한 남자 배후에는 훌륭한 어머니가 있다. 임시직 한국 교회는 필요에 따라 위의 세 가지 직분 외에 몇 가지의 직분들을 더 만들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치리권에 따라 행한 것으로 정당성을 가진다. 그러나 이런 임시직은 성경에 나와 있지 않은 것으로서 교회가 자체의 유익을 위해 임의로 혹은 임시적으로 설치한 직분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첫째로, 전도사는 담임목사의 조력자이다. 지교회는 그 필요와 경제적 여건에 따라 담임목사의 추천과, 당회와 제직회의 승인으로 전도사들을 세우거나 청빙한다. 전도사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서 담임목사의 목회 사역을 돕는다. 둘째로, 권사는 여성도들 가운데서 목사와 당회의 지도 아래 병환자와 궁핍한 자와 환난 당한 자와 시험 중에 있는 자 등을 심방하여 위로하며 권면하는 직분이다. 한국교회는 비교적 여성도들이 많았기 때문에 특별히 이런 직분의 필요성을 느꼈던 것 같다. 권사는 흠 없이 여러 해 신앙 생활을 한 자로서 그의 행위가 복음에 적합하고 생활이 모범되고 건전한 판단력과 주위의 좋은 평판을 가진 자이어야 할 것이다. 셋째로, 남녀 서리집사는 임시로 집사의 직무를 하게 하는 직분으로서 그 임기는 1년이다. 한국교회에만 독특한 이 직분은 본래 집사직을 위한 예비 과정이었을 것이다. 디모데전서 3:10, "이에 이 사람들을 먼저 시험하여 보고 그 후에 책망할 것이 없으면 집사의 직무를 하게 할 것이요." 또 한국의 초대교회에 남성도가 많지 않아서 부득이 여자 서리집사도 허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서리집사가 정식 집사로 인식되고 안수집사는 한 단계 높은 직분으로 인식되는 것이나 서리집사의 수가 일반 교인들에 비해 많은 것은 잘못된 인본주의적 풍조라고 생각된다. 시험에 들까봐 시행치 못하고 있으나, 서리집사 제도는 없애는 것이 성경적으로 옳다고 본다. 모두가 동의하면 없애는 것이 좋을 것이다. 직분에로의 부르심 교회의 직분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2:28,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고린도전서 12:4, 5,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어떻게 성도를 부르셔서 어떤 직분을 가지도록 하시는 것인가? 우리는 어떻게 어떤 직분에로의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신할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교회의 직분자들을 부르실 때 옛날처럼 음성으로(출 3:4; 삼상 3:4-10; 마 4:19; 행 9:4; 13:2) 부르시는 것이 아니고, 내면적으로 부르신다. 하나님의 내면적 부르심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된다. (1)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그 직분을 위해 헌신하려는 간절한 소원을 주신다. 빌립보서 2:13, "너희 안에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디모데전서 3:1, "미쁘다 이 말이여,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하면 선한 일을 사모한다 함이로다." (2)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그 직분을 위한 재능과 은사를 주신다. 로마서 12:6-8,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권위(勸慰)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고린도전서 12:28,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세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 . .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3) 하나님께서는 그 직분을 위해 그의 길을 여시고 인도하신다. 이런 깨달음과 경험은 주로 교회 안에서 다른 사람들의 추천과 요청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님께서 성도를 어떤 직분에 부르시는 것은 외적으로는 교회 즉 성도들의 요청과 찬성을 통해 이루어진다. 교회가 청하지 않고 찬성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어떤 직분에 임직될 수 없을 것이다. 또 교회는 어떤 이를 어떤 직분에 세울 때 그에게 안수를 베푼다. 안수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공식적 표와 증거이다. 그는 안수를 통해 그 직분을 위해 구별된다. 사도행전 6:5, 6,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 . . 택하여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사도행전 13:2, 3,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사도 시대의 안수는 어떤 신비한 능력을 수반했던 것 같다. 사도행전 8:17, "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디모데전서 4:14,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받을 때에 예언으로 말미암아 받은 것을 조심 없이 말며." 그러나 오늘날 안수는 일반적으로 직분의 구별을 상징하는 것 외에 다른 어떤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고 생각된다. 직분의 성격 교회의 모든 직분은 단순히 명예직이 아니고 봉사의 직분이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큰 자는 섬김을 받는 자가 아니고 섬기는 자이다. 마태복음 20:26, 27,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마태복음 23:11, 12,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그러므로 교회에서 더 중요한 직분을 가지는 자는 겸손히 하나님과 성도들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겸손은 성도들이 영적으로 성숙한 가장 중요한 표이다. 익은 벼가 고개를 숙이듯이, 성숙한 신자는 겸손하다. 교회의 직분을 가진 자들은 다 그러해야 할 것이다. ◈ 우리나라의 이념적 안정을 위해 기도합시다. ----------------------------------------------------------------------- ◈ 우리는 성경의 근본 교리들을 보수하고, 자유주의 신학과 천주교회의 배교를 포용하는 타협과, 은사운동의 혼란을 반대하고, 또 그런 자들과 교제하는 자들도 책망하기를 원한다. 우리는 오늘날도 성경 말씀의 정로(正路)를 붙들고 그 길로 가는 교회들이 부흥 발전하기를 기도하며, 또 그런 자들과 교제하기를 원한다. ----------------------------------------------------------------------- ♣ www.oldfaith.net에 올려져 있는 현대교회문제와 현대교회문제 자료집 및 옛신앙지(특별호) 등의 자료들을 참고하십시오.
전화: (02) 334-8291, 팩스: (02) 337-4869 ◈ 책 안내 ●김효성, 신약성경강해. 1192면. 20,000원(송료 포함). ●김효성, 현대교회문제 자료집. 330면. 5,000원(송료 포함). ● 김효성, 현대교회문제: 배교, 타협, 혼란 ● 조영엽, 왜 열린 예배는 잘못되었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