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신앙 2006년 12월 03일 [제10권 49호] ◆ 매주 발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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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하였으며"(렘 6:16). |
옛신앙
Old-time Faith www.oldfaith.net |
'옛신앙'이란, 옛부터 하나님의 선지자들과 주의 사도들이 가졌던 신앙, 오직 정확 무오(無誤)한 하나님 말씀인 신구약 성경에만 근거한 신앙, 오늘날 배교와 타협의 풍조에 물들지 않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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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884 서울 마포구 합정동 364-1
합정동교회 김효성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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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오전설교: 무지개 언약(창 9:8-17) [8-10절]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한 아들들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가 내 언약을 너희와 너희 후손과 너희와 함께한 모든 생물 곧 너희와 함께한 새와 육축과 땅의 모든 생물에게 세우리니 방주에서 나온 모든 것 곧 땅의 모든 짐승에게니라.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그와 함께한 자들에게 언약을 세우셨다. 8-17절의 본문에 '내가 . . . 세우리니' 혹은 '내가 . . . 세운'이라는 말이 세 번 나온다(11, 12, 17절). 또 하나님께서는 그 언약을 '내 언약'이라고 표현하신다(9, 15절). 언약의 대상은 노아와 그 아들들과 그들의 후손과 또 그들과 함께한 모든 생물들, 즉 새들과 육축들과 땅의 짐승들, 즉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과 자연계 전체이었다. 언약은 하나님의 섭리 방식이었다. 그는 에덴 동산에서 순종을 조건으로 아담과 언약을 맺으셨었다(창 2:16-17). 또 그는 노아와 언약을 맺으시며 방주를 만들게 하셨다(창 6:18). 또 그는 후에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며 그 표로 할례를 명하셨다(창 17:7). 또 그는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셨고 그 표로 안식일을 주셨다(겔 20:12, 20). 이것이 구약 시대를 대표하는 옛언약 곧 구약이다. 또 그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사람들과 새언약 곧 신약을 세우셨다. 새언약의 조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것이며 세례는 그 표이다. 언약은 하나님의 섭리 방식이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통해 자신을 낮추시며 스스로를 제한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겸손의 한 표현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은 인간 사회의 계약과 달랐다. 인간 사회의 계약은 서로간의 동의 아래 이루어지는 쌍방적 약속이지만, 하나님의 언약은 일방적 약속이다. 그것은 일종의 명령, 즉 약속 있는 명령이었다. [11절]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침몰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와 함께한 자들에게 세우신 언약의 내용은 그가 다시는 홍수로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않겠다는 것, 즉 땅을 멸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15절에서도 그는 "다시는 물이 모든 혈기 있는 자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지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의 약속이었다. 자동차 사고를 경험한 자가 자동차 운전을 두려워하고 꺼려하듯이, 홍수 심판 후에 사람들과 새들과 짐승들은 비가 많이 오면 혹시 다시 홍수가 있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언약을 통해 그들에게 이러한 두려움을 제거하시고 평안과 위로를 주시기를 원하셨다. 그러므로 이 언약은 모든 사람들과 생물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보편적 호의와 은혜이었다. 물론, 세계적 홍수 심판은 다시 없을 것이나, 부분적, 지역적 홍수는 있을 것이며, 소돔과 고모라 성의 유황불비 심판이나 가나안 땅의 완전한 진멸 같은 지역적 심판도 있을 것이다. 또 마지막 날 세상에는 불 심판도 있을 것이다(벧후 3:6-7). 그러나 상당한 평안이 오랫동안 온 땅에 지속될 것이다. 본문 12, 16절에서, 이 언약은 "영세(永世)까지" 세우는 언약이며 "영원한" 언약이라고 표현된다. 이것은 이미 창세기 8:21-22에서 암시되었었다: ". . . 내가 전에 행한 것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12-14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나와 너희와 및 너희와 함께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영세까지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라.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의 세상과의 언약의 증거니라. 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증거 혹은 증표로 무지개를 주셨다. '무지개'라는 원어는 '활(bow)'이라는 뜻이다. 무지개(rainbow)는 물방울로 만들어진 활 모양이다. 무지개는 언약의 증표로 주어졌다. '증거'라는 원어는 '표(sign), 증표(pledge)'라는 뜻이다. 17절도 무지개가 하나님이 세우신 언약의 증표임을 말한다. 증표는 하나님의 언약의 확실함과 견고함을 나타낸다. 13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라고 말씀하셨고, 14절에는 "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이라고 하셨다. 16절에도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있으리니"라고 말씀하신다. 무지개는 비가 온 후 아직 공중에 물방울이 많이 있을 때 햇빛이 물방울에 굴절되어 일곱 가지 색깔을 내는 신비로운 모양이다. 비가 개었어도 사람들이나 새들과 짐승들이 홍수에 대한 두려움을 가질 만한 때에 하나님께서는 공중에 구름 사이에 무지개를 주실 것이다. 줄과 화살이 없는 활 모양의 그 무지개는 사람에게 공포를 주는 활이 아니고 위로를 주는 활이 될 것이다. [15-16절] 내가 나와 너희와 및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의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이 모든 혈기 있는 자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지라.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있으리니 내가 보고 나 하나님과 땅의 무릇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된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 [17절] 하나님이 노아에게 또 이르시되 내가 나와 땅에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세운 언약의 증거가 이것이라 하셨더라. 15절과 16절에서 하나님께서는 그가 무지개를 보실 때 그가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겠다고 말씀하신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다시는 홍수로 세상을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약속을 잊지 않고 지키시겠다는 뜻이다. 무지개의 의미가 여기에 있었다. 비가 내릴 때마다 사람들은 홍수 심판을 기억하고 두려움을 가질 것이지만, 비가 갠 후 하늘에 생기는 무지개를 볼 때 그들은 다시는 홍수로 심판하지 않으시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할 것이다. 무지개는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제거하고 마음의 평안과 위로를 줄 것이다. 본문을 통해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얻는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감사하자. 사람은 부족투성이의 존재이며 세상도 그러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시는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는 사람들과 생물들 속에 있을 홍수 심판의 두려움을 제거하시고 그 대신 위로를 주셨다. 하나님께서 옛세상에 무서운 홍수 심판을 시행하셨으나 그는 이제 모든 사람들과 생물들에게 위로를 주시는 것이다. 무지개 언약은 마지막 심판 전까지 상당한 기간 동안 자연 세계의 안전 보장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크신 자비와 긍휼이다. 우리는 그 자비와 긍휼을 감사하자.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자.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언약하시고 언약의 증표를 주셨다. 무지개는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내용을 확증하는 표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확실하고 믿을 만함을 증거한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며 특히 그의 약속에 있어서 그러하시다. 그는 신약 교회의 성도에게 주신 약속에 있어서도 그러하시다.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이다(딛 1:2).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영생이 있다(요일 5:13). 하나님의 뜻은 택한 백성의 부활과 영생이다(요 6:39-40). 그는 우리에게 하신 부활과 영생의 약속을 반드시 지키실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그의 약속을 믿자. 셋째로, 그러나 비록 더 이상 홍수 심판은 없지만,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이 남아 있다. 그것은 불 심판이다(벧후 3:7).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마지막 지옥 불 심판이 경고되어 있다. 불의한 자들은 천국을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다(고전 6:9-10). 회개하지 않는 모든 죄인은 지옥 불못에 던지울 것이다(계 21:8).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죄를 다 버리고 모든 죄를 다 회개해야 하며 오직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만 믿고 하나님의 명령대로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 ----------------------------------------------------------------------- 지난오후설교: 성수 주일(聖守主日)의 근거 구약의 안식일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될 참 안식을 예표하였다. 이 예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죄의 결과로 왔던 땅의 저주와 인생의 수고와 죽음(창 3:17)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으로 극복되었다. 예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에게 참 안식을 주셨다. 마태복음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안식일의 주인이시다. 마가복음 2:28,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골로새서 2:16-17,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판단]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초기의 교부들은 관례적으로 이 계명을 예표라고 불렀는데 그 까닭은 그것이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폐지된 한 날의 외적 준수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이 계명의 의식적 부분이 폐지되었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 . . . 말하자면 그는 안식일의 참된 성취이시다. . . .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미신적인 날들의 준수를 완전히 피해야 한다. 그러나 구약의 안식일은 또한 성회로 모이는 날, 즉 하나님께 공적 예배를 드리는 날이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구약 안식일의 성취는 위축된 경건 생활로의 성취가 아니고 풍성한 경건 생활로의 성취가 되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신약의 성도들은 구약의 성도들보다 더 자원적으로 하루 이상을 구별하여 지킬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의 섭리 가운데 주일을 교회의 공적 예배의 날로 주셨으므로, 신약의 성도들은 짐스러운 마음으로가 아니고 자원함과 즐거움으로 이 날을 거룩히 지켜야 할 것이다. 칼빈은 강조하기를, 안식일 계명이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폐지되었으나 오늘날도 교회의 공적 모임이 여전히 필요하며 따라서 신약교회는 주일을 공적 모임의 날로 힘써 지켜야 한다고 하였다. 또 개혁교회의 정통적 도르트 대회(1618-19년)는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하나님의 율법의 제4계명에는 의식적 요소와 도덕적 요소가 있다. 의식적 요소는 창조 이후 제7일의 휴식과, 특별히 유대인들에게 부과된 그 날의 엄격한 준수이었다. 도덕적 요소는 어떤 특정한 날이 종교를 위해 적합하다는 사실과, 그 목적을 위해 종교와 그것의 거룩한 묵상을 위해 필요한 만큼의 휴식이 요구된다는 사실에 있다. 유대인들의 안식일이 폐지되었으므로, 주일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엄숙하게 성별되어야 한다. 사도들의 시대 이후, 그 날은 이미 초기의 카톨릭 교회에 의해 지켜져 왔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1:7은 안식일에 관해, "그것은 세상의 시초부터 그리스도의 부활 때까지는 주간의 마지막 날이었고, 그리스도의 부활 때부터는 주간의 첫째 날로 바뀌었고 성경에서 주일로 불리우고 그리스도인의 안식일로서 세상 끝날까지 계속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신약성경은 교회의 공적 모임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또 엿새 동안의 육체적 노동으로부터의 휴식은 신약시대에도 필요하다. 초대 교회는 모이는 교회로서 후시대를 위해 본이 된다. 사도행전 1:13-15, "들어가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니 . . .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모인 무리의 수가 한 120명이나 되더라." 사도행전 2:1,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사도행전 2:42,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사도행전 2: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사도행전 2: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교회는 모이는 데 의미가 있고 모일 때 힘이 있다. 교회는 모이지 않으면 무의미하고 무기력하다. 교회는 모여야 함께 기도하고 말씀을 배우고 교제할 수 있다. 교회는 모일 때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 성령의 감동의 역사가 일어난다. 마귀는 교회의 모임을 두려워하며 그것을 폐하려 한다. 그러나 참된 교회는 모여야 한다. 히브리서 10:23-25,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교회는 공적 예배의 날이 필요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과 안식을 위해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 곧 주일을 신약교회의 공적 예배의 날로 주셨다. 교회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사도 시대 때부터 일곱째 날 대신 첫째 날 곧 주일에 모이기를 시작하였다. 드로아의 성도들은 안식일 후 첫째 날 곧 주일에 떡을 떼려고 모였다(행 20:7).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게 매주 첫날 곧 주일에 각 사람이 이익을 얻은 대로 헌금하라고 교훈하였다(고전 16:1-2). 하나님께서 주일을 구별하셨다는 추가적 증거들도 있다. 성령께서 강림하신 날인 오순절은 주일이었다(행 2:1-4; 레 23:15-16). 또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의 내용이 된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날이 '주의 날' (계 1:10) 곧 주일이었다. 사도시대 직후의 여러 교부들도 주일 집회에 대해 말하였다. 주후 70-100년경 바나바 서신의 저자는 "우리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제8일을 기쁨으로 지킨다"고 말하였다. 2세기초 익나시우스도 "만일 옛 습관들로 살았던 자들이 새로운 소망에 이르러, 더 이상 안식일들을 지키지 않고 주일을 따라 그들의 삶을 산다면 . . . 만일 그러하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를 떠나 살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였다. 순교자 저스틴(165년경에 순교)도 "그 도시에 사는 자들뿐 아니라 그 나라에 사는 자들도 다 일요일이라고 불리우는 날에 성경 읽기와 기도와 권면과 성찬을 위해 모이곤 하였다. 그 회중은 일요일에 모였는데, 그것은 이 날이 하나님께서 어두움을 변화시켜 세상을 창조하신 첫째 날이기 때문이며 우리 주 예수께서 이 날에 부활하셨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다. 2세기말, 터툴리안도 "우리는 일요일을 기쁜 날로 즐거이 지킨다. 주일에 우리는 금식하거나 무릎 꿇고 기도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하였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은 교회의 공적 예배와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위해 꼭 필요하다. 주일을 거룩히 지키는 일이 식어지면 교회는 쇠잔해질 수밖에 없다. 대체로 주일 없이 사는 자는 하나님 없이 사는 자리로 나아간다. 주일을 구별할 줄 모르는 사회는 불경건하고 부도덕한 사회로 타락하고 말 것이다. 영국의 청교도 신학자 죤 라일(John C. Ryle)은 말하기를, "영국 기독교의 번성과 부패는 기독교인의 안식일 보존에 달려 있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대의 안식일을 제거해 보라. 그러면 그대의 종교는 곧 없어지게 될 것이다. 일반적 규칙으로, 사람의 걸음은 안식일 없는 데(No Sabbath)로부터 하나님 없는 데(No God)로 나아간다"고 하였다. 우리는 교회의 공적 예배와 우리 자신의 영적 성장을 위해 주일을 매우 귀하게 생각하고 거룩히 구별해야 한다. 예수 믿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도들 간의 거룩한 교제를 나누기 위해 이 날에 교회로 모이기를 힘써야 한다. ----------------------------------------------------------------------- 현대교회문제: 6·25가 내전(內戰)이라니 [김영호, "6·25가 內戰이라니…," 조선일보, 2006. 11. 24, A34쪽; 성신여대 국제정치학 교수.] 노무현 대통령이 캄보디아 방문 중 6·25전쟁을 '내전(內戰)'이라고 표현, 논란이 일고 있다. 동포간담회에서 과거와 달리 한국의 국제적 위상이 매우 높아졌다는 것을 설명하는 가운데 '내전'이라는 말을 비유적으로 사용한 것이다. 대통령의 '내전' 발언은 자신의 역사인식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라나는 청소년의 역사관에도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6·25전쟁을 '내전'으로 보는 역사관은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정통성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 되기 때문이다. '내전'이란 말을 쓰게 되면 북한의 침략으로 일어난 6·25 전쟁의 책임을 남북이 나눠져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전쟁 발발 직후 소련이 자신의 전쟁 개입을 은폐하기 위해 6·25전쟁을 공식적으로 '내전'이라고 부르기 시작하면서 이 용어가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전쟁 발발 직후 당시 안드레이 그로미코 소련 부외상은 앨런 커크 소련주재 미국대사에게 남한이 38선상에서 먼저 국경분쟁을 유발하여 북한이 반격을 가하면서 전면전으로 비화되었다고 주장했다. 소련은 전쟁 개입 사실을 은폐하고 내정불간섭의 원칙을 내세워 유엔과 미국의 참전을 막기 위해 6·25전쟁을 '내전'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 이후 이러한 소련의 선전이 좌파 언론 및 학자들에 의해 받아들여지면서 내전론이 널리 유포되기 시작했다. 소련이 남침 작전계획을 직접 작성하고 대규모 전쟁 지원을 했다는 소련문서가 공개되면서 소련의 주장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이미 판명되었다. 6·25전쟁을 내전으로 보는 역사관은 한국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 참전한 유엔의 역할에 대해 부정적이다. 남북한 사이에 민족끼리 일으킨 전쟁인데 유엔이 개입한 것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유엔 감시하의 자유선거 후 유엔총회 승인을 거쳐 탄생했다. 그런 한국이 위기에 처했을 때 유엔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한국의 공산화는 신생 국제기구였던 유엔의 위신에 심대한 타격을 가해서 그 기구의 존재 자체를 위협했을 것이다. 한국과 유엔은 일종의 운명공동체였던 것이다. 내전론적 역사인식은 유엔의 승인 하에 탄생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북한의 주장과 맥이 닿아 있는 것이다. 내전론적 역사관은 반미적 역사인식에 서 있다. 내전으로 시작된 전쟁에 미국이 유엔군의 주력 부대로서 개입한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맥아더 동상 끄집어내리기 움직임도 이런 주장에서 나온다. 소규모 내전으로 끝날 전쟁이 미국의 개입과 함께 중공군의 참전을 불러와서 전쟁이 장기화되고 피해 규모가 커졌다고 내전론적 역사관은 주장한다. 이 주장은 완전히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미국의 개입으로 '내전'이었던 전쟁이 '국제전'으로 비화되었다는 주장은 전혀 사실무근이다. 북한, 소련, 중국 공산 3국이 전쟁 이전부터 긴밀하게 사전 협의하고 합의한 후에 일으킨 전쟁이었다는 점에서 6·25전쟁은 처음부터 자유진영과 공산진영 사이의 '국제전'의 성격을 띠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사실을 무시한 채 미국 참전을 비판하는 내전론적 주장은 한미동맹을 부정하는 반미적 역사인식의 소산이다. 소련의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한국을 돕기 위한 유엔과 미국의 역할을 부정하는 내전론적 역사관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내전'에 의해 적화되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옳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처럼 내전론적 역사인식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정체성을 심각하게 훼손시키고 있다. 6·25전쟁에서 한국과 세계의 젊은이들이 피를 흘려 싸운 이유는 자유, 민주주의, 인권이라는 대한민국의 핵심적 가치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오늘날 북한 주민의 비참한 인권 상황을 보면 내전론적 역사인식은 어떠한 이유에서도 정당화될 수 없다. 노무현 정부는 역사 바로 세우기와 역사 청산에 열을 올릴 것이 아니라 6·25전쟁과 관련된 잘못된 역사인식부터 스스로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 우리나라가 하나님의 긍휼 가운데 한미동맹을 견고히 하고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를 유지함으로 평안하고 경제도 회복되도록 기도합시다. ----------------------------------------------------------------------- ◈ 우리는 성경의 근본 교리들을 보수하고, 자유주의 신학과 천주교회의 배교를 포용하는 타협과, 은사운동의 혼란을 반대하고, 또 그런 자들과 교제하는 자들도 책망하기를 원한다. 우리는 오늘날도 성경 말씀의 정로(正路)를 붙들고 그 길로 가는 교회들이 부흥 발전하기를 기도하며, 또 그런 자들과 교제하기를 원한다. ----------------------------------------------------------------------- ♣ www.oldfaith.net에 올려져 있는 현대교회문제와 현대교회문제 자료집 및 옛신앙지(특별호) 등의 자료들을 참고하십시오.
전화: (02) 334-8291, 팩스: (02) 337-4869 ◈ 책 안내 ●김효성, 신약성경강해. 1192면. 20,000원(송료 포함). ●김효성, 현대교회문제 자료집. 330면. 5,000원(송료 포함). ● 김효성, 현대교회문제: 배교, 타협, 혼란 ● 조영엽, 왜 열린 예배는 잘못되었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