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신앙  2006년 4월 30일 [제10권 18호]   ◆ 매주 발행 ◆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하였으며"(렘 6:16).

 

 

옛신앙

 

Old-time Fai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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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신앙'이란, 옛부터 하나님의 선지자들과 주의 사도들이 가졌던 신앙, 오직 정확 무오(無誤)한 하나님 말씀인 신구약 성경에만 근거한 신앙, 오늘날 배교와 타협의 풍조에 물들지 않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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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오전설교:                               "하솔의 연합군을 멸함"

여호수아 11:6,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내일 이맘때에 내가 그들을 이스라엘 앞에 붙여 몰살시키리니 너는 그들의 말 뒷발의 힘줄을 끊고 불로 그 병거를 사르라."

여호수아 11장은 하솔의 연합군을 멸한 사건과 가나안 전쟁이 그친 것을 기록합니다. 1절부터 15절까지는 하솔의 연합군을 멸한 사건을 증거하고, 16절부터 마지막 절까지는 가나안 전쟁이 그친 것에 대해 전체적으로 묘사합니다. 본장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받습니다.

첫째로, 이스라엘 백성은 거대한 대적자들을 직면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 중부로 진입해서 여리고성을 비롯하여 그 주위를 진멸하고 그 다음 남부를 진멸하였을 때, 그 소식을 들은 가나안 땅 북부의 성들은 연합하여 이스라엘과 싸우려 했습니다. 그들의 우두머리는 갈릴리 바다의 서북쪽에 위치한 하솔이라는 성이었습니다(10절).

본장 1절 이하에 보면, 하솔 왕 야빈은 이스라엘에 대한 소식을 듣고 마돈 왕 요밥과 시므론 왕과 악삽 왕과 북방 산지와 긴네롯 남쪽 아라바와 평지와 서방 돌의 높은 곳에 있는 왕들과 동서편 가나안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산지의 여부스 사람과 미스바 땅 헤르몬산 아래 히위 사람들에게 사람을 보내었고 그들은 모든 군대를 거느리고 나와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메롬 물가에 함께 진 쳤습니다. 본문은 그 군사들의 수가 많아 해변의 많은 모래 같고 말과 병거도 심히 많았다고 증거합니다. 가나안 땅 북부의 연합군은 거대한 세력이었습니다.

전쟁은 두렵고 힘든 일이며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는 일입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전쟁도 항상 그러하였습니다. 가나안 땅의 이 북부 전쟁도 거대한 대적을 상대해야 하는 두려운 전쟁이었습니다.

더욱이 16절 이하에 가나안 전쟁을 총정리하면서, 21 -22절에는 가나안 땅에는 아낙 자손들이 있었다고 증거합니다: "그 때에 여호수아가 가서 산지와 헤브론과 드빌과 아납과 유다 온 산지와 이스라엘의 온 산지에서 아낙 사람을 멸절하고 그가 또 그 성읍들을 진멸하였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의 땅 안에는 아낙 사람이 하나도 남음이 없고 가사와 가드와 아스돗에만 약간 남았었더라." 아낙 자손은 거인이었습니다. 민수기 13:33에 보면, 가나안 땅에 보낸 열두 정탐군들은 보고하기를,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런 거인들을 상대해야 했고 그것은 심히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둘째로, 그렇지만 다른 전쟁들과 같이 이 전쟁에서도 하나님께서는 그 두려운 대적자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붙여주셨습니다. 본문 6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내일 이맘때에 내가 그들을 이스라엘 앞에 붙여 몰살시키리니 너는 그들의 말 뒷발의 힘줄을 끊고 불로 그 병거를 사르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따라 여호수아는 모든 군사와 함께 메롬 물가로 가서 갑자기 그들을 습격했고 여호와께서 그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셨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그들을 격파하고 큰 시돈과 미스르봇 마임까지 쫓고 동편에서는 미스바 골짜기까지 쫓아가서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고 쳐서 죽였습니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입니다(삼상 17:47). 전쟁의 승패는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손에 달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족속들을 다 멸하시려고 뜻하셨기 때문에 또 그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셨기 때문에 하솔의 거대한 연합군들은 패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본장 20절은 가나안 전쟁에서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가 어떠하였는지에 대해 증거합니다. "그들의 마음이 강퍅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러 온 것은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 그들로 저주받은 자 되게 하여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시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진멸하려 하심이었더라." 가나안 족속들이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려 한 것도,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나 이스라엘의 호의를 받지 못한 것도, 또 그들이 결국 처참하게 패배하고 죽임을 당한 것도 다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아래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우상숭배와 음란의 충만한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셋째로, 여호수아는 이 전쟁에서도 하나님께 순종하였고 그의 지시와 명령대로 행하였습니다. 본문 7절 이하에 보면, 여호수아는 모든 군사와 함께 메롬 물가로 가서 갑자기 습격하여 하솔의 연합군을 격파하였고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고 다 멸하였습니다. 본문 9절은 "여호수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행하여 그들의 말 뒷발의 힘줄을 끊고 불로 그 병거를 살랐더라"고 기록합니다.

또 본장 10절 이하에 보면, 여호수아는 돌아와서 하솔을 취하고 그 왕을 칼날로 쳐 죽이고 그 가운데 모든 사람을 칼날로 쳐서 완전히 멸하여 호흡이 있는 자는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고 불로 하솔을 살랐으며 또 그 왕들의 모든 성읍과 그 모든 왕을 취하여 칼날로 쳐서 진멸하여 여호와의 종 모세의 명한 것과 같이 하였습니다.

또 14-15절은 기록하기를, "이 성읍들의 모든 재물과 가축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탈취하고 모든 사람은 칼날로 쳐서 진멸하여 호흡이 있는 자는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께서 그 종 모세에게 명하신 것을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명하였고 여호수아는 그대로 행하여 여호와께서 무릇 모세에게 명하신 것을 하나도 행치 아니한 것이 없었더라"라고 합니다.

가나안 전쟁은 두렵고 힘든 일이었지만, 여호수아는 하나님과 모세의 명령대로 온전히 순종하여 승리하였습니다. 16절 이하는 가나안 전쟁에 대해 전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증거합니다.

여호수아가 이같이 그 온 땅 곧 산지와 온 남방과 고센 온 땅과 평지와 아라바와 이스라엘의 산지와 그 평지를 취하였으니 곧 [맨 남쪽으로는] 세일로 올라가는 할락산에서부터 [맨 북쪽으로는] 헤르몬산 아래 레바논 골짜기의 바알갓까지라. 그 모든 왕을 잡아 쳐죽였으며 여호수아가 그 모든 왕과 싸운 지는 여러 날이라. 기브온 거민 히위 사람 외에는 이스라엘 자손과 화친한 성읍이 하나도 없고 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쳐서 취한 바 되었으니.

또 23절은 결론적으로 증거하기를, "이와 같이 여호수아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신 말씀대로 그 온 땅을 취하여 이스라엘 지파의 구별을 따라 기업으로 주었더라.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라고 합니다.

다음 장인 여호수아 12장은 여호수아가 정복한 성들의 왕들을 열거하는데, 거기에는 요단강 동편에 있었던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과 함께, 요단강 서편에 있었던 여리고 왕과 아이 왕 등으로 시작하여 31명의 왕이 언급됩니다. 이들이 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또 하나님의 역사하심 속에서 가나안 전쟁에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죽임을 당했던 왕들입니다. 여호수아 12장은 가나안 전쟁에서 정복한 성들의 목록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여호수아 11장은 가나안 땅 북부의 하솔 성과 그 주위의 여러 성들의 거대한 연합군을 물리친 사건과 가나안 전쟁 전반에 대한 결론적 증거을 기록합니다. 본장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받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가나안 족속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가나안 족속들은 우상숭배와 음란의 죄가 가득하였고 마침내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심판하십니다. 노아 시대 홍수심판이 그러했고 소돔 고모라의 유황불비 심판이 그러했습니다. 가나안 땅의 죄악된 거민들은 이스라엘의 정복을 통해 심판했습니다. 이스라엘이라 하더라도 죄 가운데 살 때 바벨론 군대를 오게 하여 멸망시켰습니다. 우리는 가나안 족속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죄악들을 다 회개해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는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성도의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성도들이 세상이나 세상의 것들을 너무 크게 여기거나 두려워할 때 불신앙에 떨어지고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마 16:24). 자기 부정은 곧 세상 부정입니다. 또 그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고 먼저 그의[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6:31, 33).

하나님께서 명하신 성도의 의무는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하나님께 참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둘째, 우리는 영적으로 성장하여 죄 짓지 말고 의와 선과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말과 행위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도들이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 힘써야 할 의무입니다.

신앙생활은 영적 전쟁입니다. 마귀의 시험과 세상의 죄악된 풍조와 우리 자신의 남은 죄성은 우리의 신앙생활을 위협하고 방해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성도의 의무를 다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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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일오후설교:                                        세례(계속)

세례의 정당한 방식은 무엇인가? 교회 역사상 일반적으로 인정된 세례의 방식들은 세례받는 자의 머리에 물을 뿌리거나 붓거나 혹은 그를 물 속에 담그는 것이다.

침례교회는 물에 담그는 것(침수 浸水, immersion)만이 세례의 정당한 방식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① 원어에서 '세례준다'는 말(밥티죠)이 '물에 담근다'는 의미이며, ② 물 속에 담그는 것(침수)만이 세례의 근본적 의미인 죽음과 부활의 상징을 표현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성경은 세례의 방식을 명확히 지시하지 않는다. 더욱이, 다음 네 가지의 사실들을 고려할 때 침수만을 고집하는 침례교회의 입장은 정당하지 못하다고 본다.

첫째로, 신약성경에 '세례준다'는 헬라어(밥티죠)는 일차적으로 '물에 담그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지만 반드시 그것만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물에 담근다'는 뜻 외에 '깨끗케 한다,' '씻는다' 등의 뜻도 가진다. 예를 들면, 마가복음 7:4, "시장에서 돌아와서는 물을 뿌리지(밥티죠, '씻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 . . . 잔과 주발과 놋그릇과 식탁들을 씻음이러라(밥티죠)." 히브리서 9: 10, "여러 가지 씻는 것(밥티스모이스)."

둘째로, 신약성경에서 세례의 예들은 세례가 물에 담그는 방식이었음을 증거하지 않는다. 마태복음 3: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이것은 단지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기 위해 요단강에 내려가셨음을 증명할 뿐이다. 사도행전 8:38-39,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주고 둘이 물에서 올라갈새." 또 오순절에 3천 명이 받았던 세례(행 2:41)나 빌립보 간수의 온 가족이 밤에 받았던 세례(행 16:33)는 물에 담그는 방식이었을 가능성이 더 적다.

초대교회의 관습에서도 세례가 물에 담그는 방식만이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주후 100년경의 디다케는 흐르는 물이나 다른 물에서 하는 세례뿐 아니라 또한 머리에 물을 세 번 붓는 방식에 대해 언급한다(7:3). 또 에드워드 로빈손은 말하기를, "아직 보전된 어떤 세례용 돌항아리는 너무 작아서 세례 지원자의 몸 전체를 담글 수 없다. 또 실상 매우 믿을 만하고 상당히 오래된 몇 개의 기념물들은 물을 붓는 세례들을 보여 주는데, 예컨대 콘스탄틴 황제의 세례의 경우 등이 그러하다"고 하였다.

셋째로, 세례의 의미는 반드시 물에 담그는 것만을 요구하지 않는다. 세례의 기본적 의미인 죄씻음은 물을 붓거나 뿌림으로도 충분히 표현된다. 구약성경은 피나 물을 뿌림으로 죄를 깨끗게 함을 풍부하게 증거한다. 레위기 1:5, "제사장들은 그 피를 가져다가 회막 문앞 단 사면에 뿌릴 것이며." 레위기 4:6, "그 제사장이 손가락에 그 피를 찍어 여호와 앞 곧 성소 장 앞에 일곱 번 뿌릴 것이며." 에스겔 36:25,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죽음과 부활은 세례에 내포된 의미이지만 세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결과이다. 로마서 6: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골로새서 2:12,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따라서 세례 자체가 반드시 죽음과 부활의 상징을 나타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넷째로, 복음의 보편적 성격은 '물에 담그는 것만 정당하다'는 주장에 반대된다. 예컨대, 심각한 병자들, 사막 지방, 추운 지방의 경우들에 세례 대상자들을 물 속에 담그는 것은 부적합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세례 방식 즉 물을 뿌리거나 물을 붓거나 물 속에 담그는 세례 방식들이 다 정당하다고 본다. 세례에서 중요한 것은 물이라는 상징물이지 물의 양(量)이 아니라고 본다.

세례의 대상에 관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고백하는 신자들과 그들의 자녀들에게 세례가 베풀어져야 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인정된다. 그러나 침례교회는 유아세례가 옳지 않다고 주장한다. 침례교회가 유아세례를 반대하는 이유는, ① 유아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바른 신앙을 고백할 수 없고, ② 성경에 유아세례에 대한 명확한 명령이나 예가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유아세례를 거부한 것은 종교개혁 당시 재세례파(再洗禮派, Ana-baptists)에게서 볼 수 있었던 입장이었다. 재세례파는 유아세례를 부정했고 신앙을 고백하며 순종하는 신자들에게만 세례를 주고 그들만 교회의 구성원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비록 성경에 유아세례를 베풀라는 명확한 지시가 없지만, 우리는 유아세례가 성경적으로 또 역사적으로 정당하다고 본다. 그 이유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구약이나 신약이나 하나님의 은혜언약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은혜언약은 아브라함의 언약에서 나타났는데, 그 표는 할례이었다. 거기에서 유아들은 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음으로써 하나님의 언약에 참여하였다. 창세기 17:12, "대대로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혹 너희 자손이 아니요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무론하고 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영적으로 말하면, 아브라함의 언약은 신약 아래서도 유효하다. 로마서 4:16,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갈라디아서 3:29,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특히, 하나님께서는 구약 아래서 믿는 가정에서 태어난 유아들을 언약 백성으로 받아들이신 후 그들을 언약 공동체에서 제외하신 적이 없기 때문에, 신약 아래서도 유아들은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지 결코 이방인이 아니다. 믿는 가정에서 태어난 유아들은 하나님의 기업이요 선물이다.

이와 같이, 은혜언약이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사실이 유아세례의 근거이다. 구약에서 유아들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었듯이, 신약에서도 그러하다. 사실, 신약 시대는 구약 시대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더 풍성히 나타난 시대이다. 요한복음 1: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둘째로, 유아들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 바울의 태도는 유아세례를 지지한다. 예수께서는 신자들의 유아들을 영접하셨고 그들을 천국백성으로 여기셨다. 마가복음 10:14, 16, "어린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 . . [그] 어린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누가복음 18:15, "사람들이 . . .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또 사도 바울은 신자의 자녀를 거룩하다고 불렀고, 교인으로 간주하여 교훈하였다. 고린도전서 7:14, "이는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었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었음이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원문 직역). 에베소서 6:1,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셋째로, 신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가정 구원의 약속과 가족 세례의 예들은 유아세례를 지지한다. 사도행전 2: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사도행전 16:31,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또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루디아와 그 집[가족들]이 다 세례를 받았고(12-15절), 빌립보 간수와 그 가족들도 다 세례를 받았다(32-34절).

넷째로, 신약교회의 역사는 유아세례를 지지한다. 유아세례는 신약교회의 매우 초기로부터 행해져왔던 전통적, 보편적 의식이며 종교개혁 시기에 재세례파가 반대하기까지는 반대를 받은 적이 없는 의식이다.

주후 2세기의 폴리갑은 86세에 순교할 때 자신이 86년 간 그리스도의 종이었다고 말했다. 순교자 저스틴은, 그의 당시 60세나 70세의 남녀 그리스도인들 중 "유아 때부터 그리스도의 제자이었던" 자들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레니우스는,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통해 중생하는 모든 연령의 사람, 즉 영아들과 유아들과 소년들과 청년들과 노인들을 구원하려고 오셨다"고 말했다. 이러한 말들은 유아세례의 정당성과 조화된다.

3세기의 오리겐은 "유아세례는 교회가 사도들로부터 받은 확정된 풍습이다"라고 말하였다. 주후 253년경의 카르타고 회의는 유아세례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유아들이 제8일 이전에 세례받을 것인가에 대해서만 토의하였고 그렇게 하기로 결정하였다.

사도 시대에 이방인 가정이 유대교로 개종할 때 유아들을 포함하여 온 가족이 세례를 받고 입교하였고, 이러한 풍습은 하나님의 섭리로 신약교회에 이어졌음에 틀림 없다.

처음 4세기 동안 오직 두 명의 교부들만 유아세례의 연기를 주장하였다. 터툴리안은 이방인 부모의 자녀들에게 베푸는 세례에 관해 말한 것이었고, 나지안저스의 그레고리는 3살 될 때까지 연기할 것을 권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두 사람은 다 자기 견해에 대한 정당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였다. 어거스틴은 "유아세례의 교리가 교회 회의들에 의해 제정되지 않았으나 전세계교회가 보편적으로 시행한다는 사실을 볼 때, 그 교리는 아마 사도들의 권위로 확정되었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유아세례에 대한 여러 가지 반론들이 있다. 첫번째 반론은 신약성경에 유아세례에 대한 직접적 혹은 명백한 명령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구약시대에 유아들을 언약 백성으로 간주하신 후 그들을 제외시키신 적이 없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증거한다.

두 번째 반론은 신약성경에 유아세례에 대한 분명한 예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도행전에 기록된 가정 세례의 예들은 당시의 유대교의 풍습을 볼 때 유아세례를 포함하였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정당하다.

세 번째 반론은 세례의 조건은 신앙고백이며 유아는 신앙을 고백할 수 없으므로 세례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마가복음 16:16 같은 말씀은 성인들을 두고 하신 것이며 유아들을 두고 하신 말씀이 아니다. 또 침례교인들도 유아들을 집안의 이방인으로 보지 않을 것이다.

네 번째 반론은 유아세례와 성인세례의 근거가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례의 근거는 '은혜언약'이며 성인들은 신앙고백을 통해 은혜언약 안에 들어 오지만, 유아들은 출생을 통해 들어 온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다섯 번째 반론은 유아들은 성찬식에 참여할 수 없으므로 세례받는 것이 합당치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아들을 성찬 참여에 제외시키는 것은 단지 성찬 참여에는 분별력이 요구되기 때문이다(고전 11:27-28).

여섯 번째 반론은 유아세례 받은 자들의 생활이 해이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아세례를 받은 사람들의 잘못된 삶이 유아세례의 부당성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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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문제:                          탄식스러운 대학생들의 탈선

[사설: "대학을 탈선(脫線) 운동권으로부터 지켜내야 한다," 조선일보, 2006. 4. 21, A35쪽.]

고려대가 19일 열린 교무위원회에서 지난 5일의 교수 억류사건을 주도한 학생 7명에 대해 출교(黜校) 처분을 내렸다. 출교는 학적(學籍) 자체가 지워지고 재(再)입학·복학(復學)이 허용되지 않는 가장 무거운 징계다.

징계받은 학생들은 5일 오후부터 이튿날 아침까지 16시간 동안 보직교수 9명을 본관 건물 2층과 3층 사이 계단 공간에 억류했었다. 총학생회장 선거에 나선 한 출마 후보측이 작년에 통합된 병설(倂設) 보건대 2-3학년 학생들에게도 총학생회장 선거 투표권을 달라고 요구하며 벌어진 일이다. 교수를 감금한 학생들은 교수들이 화장실에 가는 것만 허용했다. 물 한 컵 마시고 오겠다는 학생처장에게 어떤 학생은 자기가 마시던 물병을 던져 주었다고 한다. "시키는 대로 하는 개가 되지 마십시오"라는 폭언(暴言)도 했고, 자정 넘어 자장면을 배달시켜 시멘트바닥에 놓고 교수들에게 먹으라고 했다고도 한다. 한마디로 사람되기는 틀린 학생들이다.

이 학생들은 어쩌다가 이런 길로 접어들었을까. 누구한테서 그런 막된 행동을 배웠을까. 그들 동아리는 모여서 우리 전통에 관해 무슨 토론을 벌였으며, 우리 역사에 관한 무슨 책을 읽었고, 세계의 추세에 관해서는 무슨 생각을 나눴을까. 운동권(運動圈) 경력을 훈장 삼아 지금 권력 주변에 기생(寄生)하는 사람들처럼 끼리끼리 모여 예의범절을 모르는 상스러운 몸가짐을 익히고, 자기 나라 역사를 불의(不義)와 기회주의가 승리한 역사라고 쓴 걸 역사책이라고 읽고, 세계의 기운(氣運)에 대한 시대착오적 토론을 벌였던 것은 아닐까.

이런 일은 어쩌다 한 번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고려대에선 지난 2월 학생들의 입학처 점거농성이 있었고 3월엔 경영대학장이 등록금 인상에 반대하는 학생들과 충돌해 팔에 세 바늘을 꿰매는 부상을 당했다. 연세대 총학생회는 등록금 인상을 철회하라며 지금도 3주째 본관 점거농성을 벌이고 있다. 그 총학생회는 '(점거농성을 하는) 본관에서 영화 상영을 하니 보러 오라'는 안내문을 인터넷에 올렸다고 한다.

대학교는 이 나라의 법이 닿지 않는 무법지대(無法地帶)가 아니다. 어떤 수단을 쓰더라도, 어려운 살림의 부모 허리를 짓누르며 시대착오적 이념(理念)을 장난감이라도 되는 양 주무르는 걸로 허송세월하는 운동권들로부터 공부하는 학생을 보호해야 한다.

◈ 우리나라의 이념적 안정을 위해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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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성경의 근본 교리들을 보수하고, 자유주의 신학과 천주교회의 배교를 포용하는 타협과, 은사운동의 혼란을 반대하고, 또 그런 자들과 교제하는 자들도 책망하기를 원한다. 우리는 오늘날도 성경 말씀의 정로(正路)를 붙들고 그 길로 가는 교회들이 부흥 발전하기를 기도하며, 또 그런 자들과 교제하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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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ww.oldfaith.net에 올려져 있는 현대교회문제와 현대교회문제 자료집 및 옛신앙지(특별호) 등의 자료들을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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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안내

김효성, 신약성경강해. 1192면. 20,000원(송료 포함).

김효성, 현대교회문제 자료집. 330면. 5,000원(송료 포함).

● 김효성, 현대교회문제: 배교, 타협, 혼란

● 조영엽, 왜 열린 예배는 잘못되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