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신앙  2006년 2월 19일 [제10권 8호]   ◆ 매주 발행 ◆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하였으며"(렘 6:16).

 

 

옛신앙

 

Old-time Faith

www.oldfaith.net

   '옛신앙'이란, 옛부터 하나님의 선지자들과 주의 사도들이 가졌던 신앙, 오직 정확 무오(無誤)한 하나님 말씀인 신구약 성경에만 근거한 신앙, 오늘날 배교와 타협의 풍조에 물들지 않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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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오전설교:                                     "라합의 붉은 줄"

여호수아 2:18, "우리가 이 땅에 들어올 때에 우리를 달아내리운 창에 이 붉은 줄을 매고 네 부모와 형제와 네 아비의 가족을 다 네 집에 모으라."

모세가 죽은 후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고 격려하시고 그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면 형통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격려와 약속으로 힘을 얻었고 백성들에게 3일 안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에 들어갈 것이라고 알린 후 싯딤에서 두 사람을 정탐꾼으로 가나안 땅에 은밀히 보냈습니다.

가나안 땅과 여리고 성을 정탐하러 보냄을 받은 두 사람은 라합이라 하는 기생의 집에 유숙하였습니다. 두 정탐꾼이 그 집에 들어간 것은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밤 그들을 수상히 여긴 사람이 있었고 여리고 왕은 이스라엘 사람 몇이 이 땅을 탐지하기 위해 들어왔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그 정탐꾼들에게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14절에 그 정탐꾼들이 라합에게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땅을 주실 때에는"이라고 말한 것이라든지, 24절에 그들이 돌아가 여호수아에게 보고할 때 "진실로 여호와께서 그 온 땅을 우리 손에 붙이셨으므로 그 땅의 모든 거민이 우리 앞에서 간담이 녹더이다"라고 말한 것을 보면, 그들은 옛날 아들 이삭의 아내를 구하라고 보냄을 받았던 아브라함의 종처럼(창 24장) 믿음이 있었음에 틀림없고, 또 그들이 맡은 일은 하나님이 주신 선한 일이었음 틀림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리고 성에 들어간 그 날 밤에 큰 어려운 일을 당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라합을 통해 그 위기를 모면케 해주셨습니다. 정탐꾼들이 그 집에 들어간 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여자가 자기들을 숨겨 주리라고 생각지 못했을 것이지만, 그 여자는 그들을 이끌고 지붕에 올라가서 그 지붕에 벌여놓은 삼대에(히브리어 베피슈테 하에츠는 '아마포 줄기들로'라는 뜻) 숨겨주었고 또 그들을 찾는 자들에게 말하기를, "과연 그 사람들이 내게 왔었으나 그들이 어디로서인지 나는 알지 못하였고 그 사람들이 어두워 성문을 닫을 때쯤 되어 나갔으니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하되 급히 따라가라. 그리하면 그들에게 미치리라"고 하였습니다. 라합은 큰 위험을 무릅쓰고 그들을 숨겨주었습니다. 그들은 기이하게 위기를 모면했습니다.

하나님의 선한 일들에는 때때로 어려움이 있고 성도들의 정상적 삶 속에도 때때로 환난과 고난이 있지만, 모든 일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일어나고(마 10:29) 환난도 하나님의 허락 속에서 오며(사 45:5-7),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결코 고난 중에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고전 10:13).

정탐꾼들을 숨겨준 라합은 여리고 성의 기생이었습니다. '기생'이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조나는 오늘날 말로 '매춘녀 혹은 창녀'라는 뜻입니다. 라합은 천한 신분과 천한 직업의 사람이었습니다. 왜 그가 그런 직업을 가졌는지, 왜 그가 그런 일을 했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는 너무 가난한 환경 때문에 그런 일을 하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혹은 그것이 쉽게 돈을 버는 길이라고 생각해서나 혹은 돈을 버는 다른 길을 몰라서 그런 일을 하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혹은 실수로 혹은 어리석어서 그런 데 빠졌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람의 육체의 젊음이나 미모는 한 때뿐이며 꽃이 시드는 것같이 사람의 육체는 조만간 늙고 병들게 될 것입니다. 또 그 전에라도 사람의 심령은 그런 비정상적 삶 속에서는 참 만족과 평안을 얻지 못하고 끝없이 방황하게 될 것입니다. 이 허무하고 수고로운 세상에서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최소한의 행복은 그런 비정상적인 생활 속에서는 맛볼 수 없습니다. 잠언과 전도서가 말하는 대로, 정상적 부부생활과 가정생활은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누리게 하신 행복입니다.

라합이 창녀의 생활을 얼마 동안 했는지 모르나 그는 그런 생활 속에서 죄책감을 느꼈고 하나님을 찾게 되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죄악됨을 깨달을 때 하나님을 찾을 수 있습니다. 자신이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께로 나올 수 없고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라합은 하나님을 찾았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세리와 죄인들과 창녀들이 회개하고 구원을 받은 것처럼(마 9:10; 21:31, 32), 라합은 하나님을 믿는 참 믿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라합의 믿음은 그가 그 정탐꾼들에게 한 고백 속에 나타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이 그것입니다. 그는 그 두 정탐꾼들이 눕기 전에 지붕에 올라가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백성이 다 너희 앞에 간담이 녹나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라.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하지에[하늘 위에서와 땅 아래에서] 하나님이시니라"(9- 11절).

라합은 그들에게 "나는 하나님이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 안다"고 말합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그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그 백성 이스라엘에게 주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가 그런 믿음을 가지게 된 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들을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올 때 홍해를 기적으로 건넌 소식을 들었고 또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을 전멸시킨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런 소식들이 그를 믿음의 자리로 인도하였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롬 10:17). 라합은 또 이스라엘로 인하여 가나안 백성이 심히 두려워하고 낙담하고 있으며 그들의 마음이 녹았고 정신을 잃었다고 말합니다.

라합은 하나님의 은혜로 참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하늘 위에서와 땅 아래에서 하나님이시니라"고 말했습니다. 참 하나님을 아는 것이 구원이요 영생입니다. 주님은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7:3).

오늘날 기독교 안팎에서 종교다원주의가 유행합니다. 종교다원주의는 각 종교는 다 한 하나님을 추구하고 있고 다 한 하나님께로 가는 구원의 길이라고 말합니다. 이 세상에 절대적 진리나 절대적 종교는 없다고 말합니다. 한 종교만 옳고 다른 종교들은 틀렸다고 하는 것은 예의 없는 생각이요 편협함과 독선이라고 말합니다. 다원화 사회 속에서 모든 사상, 모든 종교를 존중하면서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기독교는 기독교대로 진리이지만, 다른 종교들은 그 종교들 나름대로 진리이며 이것이 바람직한 현대적 종교 형태라고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런 종교다원주의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이런 종교다원주의는 구약 시대에 바알과 아세라 숭배가 충만했던 배교의 시대의 모습에 불과합니다. 성경에 계시된 참 하나님은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는 계명을 첫째 계명으로 주셨습니다(출 20:3). 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속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사 44:6). 선지자 예레미야는 증거하기를, "오직 여호와는 참 하나님이시요 사시는[살아계신] 하나님이시요 영원한 왕이시라. 그 진노하심에 땅이 진동하며 그 분노하심을 열방이 능히 당치 못하느니라. 너희는 이같이 그들에게 이르기를 천지를 짓지 아니한 신들은 땅 위에서, 이 하늘 아래서 망하리라 하라"고 했습니다(렘 10:10, 11). 또 시편은 증거하기를, "만방의 모든 신은 헛 것이요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라고 합니다(시 96:5). 참되신 그 하나님을 아는 것이 가장 큰 복입니다.

라합은 그 참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인지 모릅니다. 죄악된 가나안 땅에서, 죄악된 일을 직업으로 삼고 살았던 라합, 그가 어떻게 이런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되었는지! 그러나 이것은 이방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구원 의지의 나타남이었습니다. 라합의 구원은 그 예표(豫表)입니다. 더욱이, 라합은 신약성경에서 메시야의 족보에도 기록됩니다. 마태복음 1:5은 증거하기를,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았다"고 했습니다. 이새는 다윗의 아버지이었고 다윗의 자손으로 우리 구주 예수께서 오셨던 것입니다.

본문 12-13절에 보면, 라합은 정탐꾼들에게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면서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으니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여 나의 부모와 남녀형제들과 그들에게 있는 모든 자들을 살려주기를 이제 여호와로 맹세하고 진실한 표를 내라'고 요청하였습니다. 라합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정복할 것을 확신했고 또 자기 가족들이 살 수 있는 길은 그들에게 긍휼을 구하는 길밖에 없음을 알았기 때문에 이렇게 요청한 것입니다.

정탐꾼들은 그의 요청대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고 그에게 말하기를, "네가 우리의 이 일을 누설치 아니하면 우리의 생명으로 너희를 대신이라도 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땅을 주실 때에는 인자하고 진실하게 너를 대우하리라"고 했습니다. 17절과 20절에는 두 번이나 "네가 우리로 서약케 한 이 맹세에 대하여"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맹세는 하나님 앞에서 하는 약속이며 그것을 어기면 하나님 앞에 죄가 되므로 죽을 수밖에 없는 엄숙한 행위입니다. 그것은 사람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엄숙한 약속입니다.

라합은 집이 성벽 위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창에서 줄로 달아내렸고 또 그들에게 말하기를, "따르는 사람들이 너희를 만나지 못하도록 산으로 가서 거기서 사흘을 숨었다가 따르는 자들이 돌아간 후에 너희 길을 가라"고 했습니다. 그 때 정탐꾼들은 그에게 이렇게 약속했습니다. "네가 우리로 서약케 한 이 맹세에 대하여 우리가 허물이 없게 하리니 우리가 이 땅에 들어올 때에 우리를 달아내리운 창에 이 붉은 줄을 매고 네 부모와 형제와 네 아비의 가족을 다 네 집에 모으라. 누구든지 네 집 문을 나서 거리로 가면 그 피가 그의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우리는 허물이 없으리라. 그러나 누구든지 너와 함께 집에 있는 자에게 누가 손을 대면 그 피는 우리의 머리로 돌아오려니와 네가 우리의 이 일을 누설하면 네가 우리로 서약케 한 맹세에 대하여 우리에게 허물이 없으리라"(17-20절). 라합은 그들의 약속대로 붉은 줄을 창문에 매었습니다.

여호수아 6:25에 보면, 여호수아는 여리고 성을 정복했을 때 기생 라합과 그 아비의 가족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살려주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라합은 그 멸망의 땅에서, 그 멸망의 때에 하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 붉은 줄은 라합과 그의 가족들에게 생명줄이며 구원의 줄이었습니다. 그것은 애굽에서 장자 재앙의 때에 심판의 천사를 피하기 위해 이스라엘 집의 대문 문지방과 문설주에 발랐던 유월절 어린양의 피와 같았습니다(출 12:6-8, 13). 이것들은 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보혈을 상징합니다. 그 피를 믿는 자마다 하나님의 마지막 대심판의 진노를 피할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죄씻음을 받고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라합은 천한 신분과 직업의 이방 여인이었지만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모든 사람은 멸망할 도시에 사는 죄인들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예수를 믿을 수 있습니까? 그에 대한 소식을 들음으로써, 즉 성경을 읽고 들음으로써 믿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과거의 죄가 아무리 클지라도, 지금 하나님께로 나아와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히 믿읍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를 마음의 문에 바르고, 마음의 창에 붉은 줄을 맵시다. 주 예수를 믿는 자마다 그와 그의 집이 구원을 받습니다(행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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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오후설교:                                   교회의 권세

주께서는 교회에 세 가지 권세 혹은 권위를 주셨다.

첫째는 가르치는 권세 즉 교훈권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고 보수(保守)하는 권세이다. 예수께서는 사도들에게 말씀을 전파하고 가르치라고 명령하셨다. 마태복음 28:18-20,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이 권세는 교회에 계승되었다. 디모데후서 2:2,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디모데후서 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항상 힘쓰라."

또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변호하고 보수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변호하였다. 빌립보서 1:7,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바가 됨이라." 디모데전서 3:15, "이 집[교회]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교회는 진리의 수호자요 전파자이다. 하나님은 진리를 교회에 위탁하셨다. 그러므로 교회는 진리를 보수하며 보존하고 모든 사람들 앞에 제시하고 변호해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 교회는 이 권세에 근거하여 성경을 연구하고 교리 체계 즉 신학을 정립하며 신조나 신앙고백서 등을 작성한다. 교회의 밝은 미래는 하나님의 진리들을 성실히 연구하고 보수하고 전파하는 데 있다.

둘째는 다스리는 권세 즉 치리권(治理權)이다. 이것은 교회가 질서를 유지하고 그 거룩함을 지키기 위한 권세이다. 주께서는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가 질서 있게 운영되기를 원하신다. 고린도전서 14:33,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고린도전서 14:40, "모든 것을 적당하게[바르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 교회가 헌법과 규칙들을 제정하는 것은 이 권세에 근거한 것이다.

또 주께서는 교회가 거룩함을 지키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권세를 사용하여 교리적 혹은 윤리적 오류에 떨어진 자들에게 권징을 행사한다. 고린도전서 5:2, 13,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 "외인들은 하나님이 판단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쫓으라." 그러므로 교회가 정당하게 시행한 권징은 효력을 가진다. 마태복음 18: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권징의 원리는 구약에서도 밝히 나타나 있다. 구약율법 중 재판법은 신정국가인 이스라엘의 사회법으로서 오늘날 세속국가에 직접 적용될 수 없으나, 그 원리가 교회에 적용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레위기 20:10,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교회는 간음하는 자들을 포용해서는 안 된다. 특히 신명기 13장은 이단자나 거짓 신비주의자를 제거하라고 가르치면서, 이단자나 거짓 신비주의자를 확인했을 경우 그를 "긍휼히 보지 말며 애석히 여기지 말며 덮어 숨기지 말고 . . . 용서 없이"(8, 9절) 죽임으로 너희 중에서 악을 제거하라고 명령하였다(5절). 또 어느 한 성읍이 이단이나 거짓 신비주의에 미혹되었을 때는 그것을 확인하면 그 성읍을 다 진멸하라고 하였다(12-15절). 이것은 오늘날 제명 출교에 해당된다.

권징의 목적은 네 가지다. 첫째는 범죄자를 회개시키기 위함이고, 둘째는 악의 전염을 방지하기 위함이고, 셋째는 주의 명예를 보호하기 위함이고, 넷째는 하나님의 진노를 방지하기 위함이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30:3). 권징의 방식은 세 단계이다. 첫째는 권계(勸戒, 권면과 책망)이고, 둘째는 일시적 수찬 정지(受餐停止--성찬에 참여함을 일시적으로 금지함)이고, 셋째는 제명 출교이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30:4).

권징은 매우 중요하다. 권징은 주께서 교회에 명령하신 것이므로, 교회가 악을 행하는 자들에 대해 성실히 권징하지 않는다면 주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이다. 주께서는 권징을 행하지 않은 교회들을 책망하셨다. 요한계시록 2:14, 20,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칼빈은 말하기를, "따라서, 그리스도의 구원의 교리가 교회의 영혼이듯이, 권징은 그 힘줄의 역할을 하며, 그것을 통해 몸의 지체들은 각자 제자리를 지키며 단합한다. 그러므로, 권징을 제거하거나 그것의 회복을 방해하려 하는 모든 자는, 그들이 이것을 고의적으로 하든지 무지해서 하든지 간에, 참으로 교회의 궁극적 와해(瓦解)에 기여하고 있다"고 하였다(기독교강요, 4. 12. 1).

마태복음 13장의 곡식과 가라지 비유에서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29절)는 주의 말씀은 무엇인가? 이것은 교회에서 권징을 폐하신 말씀이 아니고, 전체 교회의 완전 정화가 심판의 날까지 보류된다는 것을 보일 뿐이다. 이것은 현실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성경의 다른 구절들에서 밝히 계시하신 바대로, 각 교회나 교단은 자체의 정화(淨化)를 위해 최선을 다해 성실히 노력해야 한다.

셋째로, 주께서는 교회에 서로를 섬기는 권세, 즉 봉사권을 주셨다. 이것은 교회가 자체 안에 있는 가난한 자들을 돕고 병자들을 위로하는 행위에서 나타난다. 교회의 권위는 섬기는 권위이다. 섬기는 일은 예수님의 지상 사역의 일부분이었다. 마태복음 4:23,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섬김에 대해 교훈하셨다. 마태복음 20:25-28,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태복음 25:35-36, 40,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초대 교회 성도들은 서로 섬기는 일에 힘썼다. 사도행전 2:44, 45,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사도행전 6:1, "매일 구제에." 로마서 12:13,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고린도후서 8:4,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갈라디아서 2: 10,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 생각하는 것을 부탁하였으니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써 행하노라." 야고보서 5: 14, 15,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베드로전서 4:9, 10,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하고 각각 은사를 받은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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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문제:                                        '무국적 인권위'의 잠꼬대

[사설: "세금만 축내는 '무국적 인권위'의 잠꼬대," 조선일보, 2006. 1. 11,  A31쪽.]

국가인권위원회는 9일 공무원·교사의 정치활동 허용, 국가보안법과 사형제의 폐지, 철도·수도·전기·통신 등 공익사업장 파업에 대한 직권중재제도의 폐지 또는 축소를 정부에 권고하는 ‘국가인권정책 기본계획’을 확정했다. 인권위는 이와 함께 집회와 시위에서 장소·시간 제한의 폐지, 그리고 ‘노동의 가치가 같으면 보수도 같아야 한다’는 원칙에 따른 비정규직 근로자에 대한 보호대책을 세울 것도 권고했다.

인권위가 이날 발표한 내용은 인권위가 더 이상 존재할 필요가 없다는 자기 고백이라 할 만하다. 대학 수험생의 수능 답안지 수준도 안 되는 이런 보고서를 만들라고 국민 세금을 200억원 이상 축내게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명백해진 것이다. 법과 원칙을 ‘주어진 여건 속에서 어떤 방법을 통해’ 최대한으로 실현시킬 것인가를 판단하기 위해 교육이란 것이 있는 것이고 전문가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주어진 현실의 여건’과 ‘실현 방법’은 나 몰라라 하고 교과서의 원칙을 앵무새처럼 외우는 것이라면 전문가도, 전문기관도 필요 없는 것이다.

공무원·교사 조직이 정치에 뛰어들고 밤중 집회와 시위를 허용하고 노조 파업으로 전기와 철도와 수도와 통신이 끊긴다면 그건 무법(無法)천지이지 나라가 아니다. 그런데도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가인권위가 무능·무책임한 무국적자 집단의 잠꼬대만도 못한 이런 내용을 계획이라고 발표한 것이다.

인권위는 헌법도, 헌법재판소도 무시했다. 무시한 것인지 무지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헌법재판소가 관련 헌법 규정에 따라 밤중 옥외 집회·시위 제한(1994년), 사형제(1996년), 직권중재(2003년), 국가보안법의 찬양·고무죄와 초·중등 교사의 정치활동 금지(2004년)를 합헌(合憲)이라고 결정한 모든 것을 뒤집으라는 것이다. 인권위 말대로 하려면 먼저 헌법을 바꾸고, 바뀐 헌법에 따라 헌재가 과거 결정을 바꿔야 하는 일이다.

인권위는 자신들의 생각이 유엔 규약 등 국제 기준에 맞는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미국은 공무원에게 정치헌금 기부 등 제한적 정치활동을 허용하면서도 교사의 정치활동은 금지하고 있고, 일본 역시 공무원·교사의 정치활동을 금하고 있다. 하긴 무능하고 무책임한 무국적 집단의 눈에 이런 외국의 예가 보이기라도 하겠는가.

◈ 우리나라의 이념적 안정을 위해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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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성경의 근본 교리들을 보수하고, 자유주의 신학과 천주교회의 배교를 포용하는 타협과, 은사운동의 혼란을 반대하고, 또 그런 자들과 교제하는 자들도 책망하기를 원한다. 우리는 오늘날도 성경 말씀의 정로(正路)를 붙들고 그 길로 가는 교회들이 부흥 발전하기를 기도하며, 또 그런 자들과 교제하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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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ww.oldfaith.net에 올려져 있는 현대교회문제와 현대교회문제 자료집 및 옛신앙지(특별호) 등의 자료들을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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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안내

김효성, 신약성경강해. 1192면. 20,000원(송료 포함).

김효성, 현대교회문제 자료집. 330면. 5,000원(송료 포함).

● 김효성, 현대교회문제: 배교, 타협, 혼란

● 조영엽, 왜 열린 예배는 잘못되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