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신앙  2006년 10월 15일 [제10권 42호]   ◆ 매주 발행 ◆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하였으며"(렘 6:16).

 

 

옛신앙

 

Old-time Faith

www.oldfaith.net

   '옛신앙'이란, 옛부터 하나님의 선지자들과 주의 사도들이 가졌던 신앙, 오직 정확 무오(無誤)한 하나님 말씀인 신구약 성경에만 근거한 신앙, 오늘날 배교와 타협의 풍조에 물들지 않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121-884 서울 마포구 합정동 364-1 합정동교회  김효성 목사,
02-334-9874,  Fax: 02-337-4869,  E-mail:
oldfaith@oldfaith.net


지난오전설교:                                   5장: 아담의 자손들

[1-2절] 아담 자손의 계보1)가 이러하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2)

[3-5절] 아담이 일백 삼십세에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3)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아담이 셋을 낳은 후 팔백년을 지내며 자녀4)를 낳았으며 그가 구백삼십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6-20절] 셋은 일백오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구백십이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에노스는 구십세에 게난을 낳았고 게난을 낳은 후 팔백십오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구백오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게난은 칠십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백사십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구백십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마할랄렐은 육십오세에 야렛을 낳았고 야렛을 낳은 후 팔백삼십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팔백구십오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야렛은 일백육십이세에 에녹을 낳았고 에녹을 낳은 후 팔백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구백육십이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21-24절] 에녹은 육십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삼백육십오세를 향수하였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25-31절] 므두셀라는 일백팔십칠세에 라멕을 낳았고 라멕을 낳은 후 칠백팔십이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는 구백육십구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라멕은 일백팔십이세에 아들을 낳고 이름을 노아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라멕이 노아를 낳은 후 오백구십오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는 칠백칠십칠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32절] 노아가 오백세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창세기 5장은 아담의 자손들에 대해 증거하는데 세 가지로 정리해볼 수 있다. 첫째로, 아담의 자손들은 오랫동안 살았고 많은 자녀들을 출산하였다. 그들 중 다수는 노아 시대의 홍수 심판 전까지, 약 10대에 걸쳐 거의 900세 이상씩 장수하였다. 아담은 930세를 살았다. 아담의 8대손 므두셀라는 969세로 가장 오래 살았다. 아담의 10대손 노아까지도 950세를 살았다(창 9:29).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의 본래의 몸은 건강하였고 환경도 좋았던 것 같다.

그러나 노아 시대의 홍수 심판 후 사람의 수명은 600세로 그리고 점차 200세 이하까지로 급격히 줄어들었다(창 11:10-26). 노아의 아들 셈의 수명은 600세이었고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205세를 살았다. 홍수 심판 때 지구 대기권에 큰 변화가 일어났던 것 같고 그 변화로 인해 사람의 몸이 빨리 노쇠해지기 시작하였음이 분명하다.

홍수 심판 전에, 사람들은 오래 살면서 아들들과 딸들을 출산하였다. 아담은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았다. 자녀들은 부모의 외모와 기질을 이어받아 출생하였다. 아담의 자손들의 오랜 수명과 다산(多産)으로 인해 땅에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러나 노아와 같이 500세가 되기까지 자녀를 얻지 못한 일도 있었다. 노아는 500세가 되기까지 자녀가 없었고 500세가 된 후에 세 아들을 낳았다. 그들이 세 쌍둥이었는지 아니면 몇 년 간격으로 얻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성경은 자녀가 하나님의 기업과 상급임을 말한다(시 127:3). 하나님께서 허락지 않으시면 사람이 원해도 자녀를 가질 수 없을 것이다(출 23:26; 호 9:11).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녀를 허락지 않으신 일은 노아에게 영적으로 큰 유익이 되었음에 틀림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경건하게 훈련시키고 크게 쓰시려는 사람들에게 불임(不姙)의 고통을 주셨다. 아브라함 당시에는 보통 30세 전후에 결혼하였는데(창 11:11-24), 아브라함은 결혼한 지 약 70년 동안 자녀가 없었다. 이삭도 결혼한 지 20년이 되도록 자녀를 얻지 못했다(창 25:21, 26). 한나도 여러 해 동안 자녀가 없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고 한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사무엘을 아들로 얻었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롬 8:28).

둘째로, 아담의 자손들은 땅 위에서 오랫동안 살았지만 마침내 다 죽었다. 창세기 5장의 중요한 한 특징은 '죽었더라'는 말의 반복이다(5, 8, 11, 14, 17, 20, 27, 31절; 총 8번 나옴). 아담부터 노아의 아버지 라멕까지 에녹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들에게 다 '죽었더라'는 말이 사용되었다. 에녹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담의 자손들이 다 죽었다.노아의 아버지 라멕은 홍수 심판이 시작되기 5년 전에 죽었고 노아의 할아버지 므두셀라는 홍수 심판이 있기 직전이든지 아니면 홍수 심판 때에 죽었다. 노아의 많은 형제들과 사촌들도 홍수 심판 때에 다 죽었다. 홍수 때 살아남은 자는 노아의 가족 여덟 식구뿐이었다.

사람이 죽은 것은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경고하신 말씀대로 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었다(창 2:16- 17). 또 아담이 범죄한 후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고 선언하셨었다(창 3: 19). 하와에게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창 3:4)고 말한 뱀의 말 곧 마귀의 말은 거짓이라는 것이 확실히 증명되었다.

사람의 죽음은 근본적으로 죄 때문에 왔다. 죄의 형벌이 죽음이라는 것은 성경의 대진리이다. 사도 바울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말했고(롬 6:23), 또 한 사람을 통해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를 통해 사망이 왔다고 했고(롬 5:12), 또 말하기를,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다고 하였다(고전 15:21). 죄 때문에 모든 사람이 죽었고 또 죽을 것이다.

셋째로, 그러나 에녹은 예외적으로 죽지 않고 하나님께로 올라갔다. 에녹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고 그는 365세를 살았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였고,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다(21-24절).

아담의 자손들 가운데 오직 에녹에게만 '죽었더라'는 말이 빠져 있다. 그는 죽지 않고 하나님께로 영접되었다. 히브리서는 말하기를,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고 했다(히 11:5). 그가 죽지 않고 하나님께로 갔다는 말은 그의 승천을 가리킨다. 그는 후에 엘리야가 승천하였듯이(왕하 2:11), 또 우리 주 예수께서 승천하셨듯이(행 1:9-11), 그는 하나님이 계신 곳, 천국으로 올라갔다. 에녹의 승천은 세상너머에 하나님이 계신 영광의 천국이 있음을 증거한다.

에녹은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과 달랐다. 그는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본문은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두 번이나 말한다. 한마디로, 에녹은 경건한 사람이었다. 대략적으로 말해, 에녹은 아담 후 622년에 출생하여 987년까지 365년간 살았다. 에녹은 아담과 308년 동안 같이 살았고 셋이나 에노스와는 평생 같이 살았다. 경건했던 그는 그들을 통해 하나님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우고 확신했을 것이다.

경건함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생활, 즉 하나님과 교제하는 생활을 말한다. 사람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다. 물론 그는 하나님의 뜻을 어긴 모든 죄를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즐거이 순종해야 한다.

성경은 경건한 삶을 가르친다. 시편 1:1-3은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고 말한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복된 삶이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미쁘다 이 말이여 모든 사람들이 받을 만하도다.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진력하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고 하였다(딤전 4:7-10).

다른 이들의 900년 가까이의 일생에 비하면, 에녹은 365년의 짧은 지상 생애를 살았지만, 본장에 나오는 아담의 자손들 중에 가장 복된 삶을 살았다. 말씀과 기도의 삶, 그것이 바로 우리 주 예수께서 세상에서 사셨던 삶이요 그가 친히 우리에게 가르치셨던 복된 삶이다.

본장의 내용에서 얻는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자녀 출산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임을 알자.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신 후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말씀하셨다(창 1:28). 시편 127편은 말하기를,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이것이 그 전통[화살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저희가 성문에서 그 원수와 말할 때에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고 하였다(시 127:3-5). 부모가 자녀들을 많이 낳아 잘 기른다면 참으로 복되다. 디모데전서 5:10은 나이든 여성들의 선한 행실의 한 증거로 자녀를 양육한 것을 꼽았다. 우리는 자녀 출산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임을 알고 그 일을 귀히 여기고 사모하자.

둘째로, 우리는 영생의 세계를 믿고 소망하자.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께로 올리웠다. 인간에게는 죽음너머의 세계가 있다. 에녹이 올라간 세계가 있다. 하나님이 계신 세계가 있다. 선지자 엘리야가 올리운 곳이 있다. 우리 주 예수께서 올리우신 곳이 있다. 온전케 된 의인들의 영들이 있는 곳이 있다(히 12:23). 하나님이 계신 영광의 천국이 있다.

예수께서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요 14:1-3). 사도 바울은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노라"고 말했다(고후 5:1). 사도 요한은 새 하늘과 새 땅과 새 예루살렘에 대해 증거하였다(계 21:1-2). 우리는 천국을 확신하고 소망하자.

셋째로, 우리는 에녹의 경건을 본받자. 사도 바울은,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고 교훈하였다(딤전 4:8). 우리는 에녹처럼 경건함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하나님이 계신 영광의 천국에 다 들어가자.

-----------------------------------------------------------------------

지난오후설교:                                   공예배(公禮拜)

공예배(公禮拜)는 구원받은 성도들의 기본적 의무이다.

예배의 대상

공예배의 대상은 삼위일체되신 하나님이시다. 출애굽기 20: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신명기 6: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시편 96:5, "만방의 모든 신은 헛것이요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 이사야 44:6,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속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 이사야 45:5-7,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나니 나 밖에 신이 없느니라. . . . 해 뜨는 곳에서든지 지는 곳에서든지 나 밖에 다른 이가 없는 줄을 무리로 알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예레미야 10: 10, "오직 여호와는 참 하나님이시요 사시는 하나님이시요 영원한 왕이시라." 요한계시록 5:12-13, "(천사들이)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 . .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예배와 제사

신약 시대의 공예배는 구약 시대의 성전 제사의 대치물인가? 그렇지 않다. 구약 시대의 성전 제사는 일차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의 예표이며 또한 성도들의 신앙 생활의 상징이었다. 넓은 의미에서 공예배도 하나의 제사이지만, 예배만 제사라는 관념은 비성경적이다. 신약 시대에는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가 제사이며 그런 의미에서 예배도 제사일 뿐이다. 로마서 12:1,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히브리서 13:15-16,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예배의 순서

공예배의 요소들은 찬송, 기도, 설교 혹은 강론, 헌금 등이다. 고린도전서 14:26,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계시와 방언과 통역함은 신약성경이 완성된 후에는 중단됨). 사도행전 2:42,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히브리서 13:15,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고린도전서 16:2, "매 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利, 이익)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빌립보서 4: 18, "에바브로디도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공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순서는 설교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단순히 예배 의식을 행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악을 버리고 의와 선을 행하는 것이다. 전도서 5:1, "너는 하나님의 전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저희는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 사무엘상 15:22-23,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邪術)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邪神)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호세아 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누가복음 10:41-42,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그러나 한가지가 필요하다].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예배의 목표

공예배의 목표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다. 공예배가 성도에게 영적 유익을 주는 것은 단지 부수적일 뿐이다. 찬송과 기도도 그러하다. 우리는 예배 의식을 사람의 기분에 맞추려 하거나 회중을 즐겁게 하도록 조정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공예배의 초점은 하나님께 대한 단체적 경배이다. 예배 시 설교까지도 목사는 두렵고 떨림으로 먼저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뜻을 성실히 선포하려 해야 하고 회중은 하나님의 말씀을 성심으로 받으려 해야 한다. 그럴 때 그것은 전하는 자나 받는 자들에게 은혜와 유익이 될 것이다.

예배의 방식

예배의 바른 방식은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드려지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유일한 중보자요 제사장이시다. 그를 통해서만 죄인이 구원을 받고, 그를 통해서만 성도가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가 그를 섬기며 예배할 수 있다. 에베소서 5:20,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골로새서 3: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히브리서 13:15,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와 의를 힘입지 않고서 드려지는 예배는 다 인본주의요, 윤리 종교에 불과하다.

둘째로 예배는 영과 진리로 드려져야 한다. 요한복음 4: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프뉴마 πνε?μα)(spirit, 영, 심령 혹은 성령)과 진정(알레데이아 ?λ?θεια)(truth, 진리 혹은 진심)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신약의 예배는 어떤 장소나 시간이나 형식에 구속되지 않고, 두세 사람이 예수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서는 어디에서나 또 언제나 하나님께 드려질 수 있으며 어떤 외형적 형식에도 얽매이지 않는다. 인간의 부패성은 종교를 형식화하고 의식화(儀式化)하려는 경향이 있으나 우리는 그러한 잘못을 경계해야 한다.

각  주

1) '자손의 계보'라는 원어(톨레도스)는 창세기에 10번 나오는데, '대략'(2:4; 36:1, 9), '계보'(5:1), '사적'(6:9), '후예'(10:1; 11:10, 27; 25:12), '약전'(37:1) 등으로 번역되었다.

2) 본장과 창세기 11장과 28장, 출애굽기 12:40, 열왕기상 6:1 등을 참고하면, 하나님께서 천지만물과 사람을 창조하신 연대는 대략 주전 약 4115년이 된다. J. B. Payne은 창세기 11:32의 해석의 차이로 창조 연대를 주전 약 4175년으로 본다.

3) '낳다'는 원어(얄라드의 히필형)는 '낳게 한다'는 뜻으로 '아버지가 된다'는 의미이다. 칼형은 주로 여자가 아이를 낳는다는 뜻으로 사용되지만, 남자에게도 22회나 사용되었고 히필형은 170회 이상 사용되었다.

4) 원문은 '아들들과 딸들'이라고 되어 있음.

 ◈ 우리나라의 이념적 안정을 위해 기도합시다.

-----------------------------------------------------------------------

◈ 우리는 성경의 근본 교리들을 보수하고, 자유주의 신학과 천주교회의 배교를 포용하는 타협과, 은사운동의 혼란을 반대하고, 또 그런 자들과 교제하는 자들도 책망하기를 원한다. 우리는 오늘날도 성경 말씀의 정로(正路)를 붙들고 그 길로 가는 교회들이 부흥 발전하기를 기도하며, 또 그런 자들과 교제하기를 원한다.

-----------------------------------------------------------------------

♣ www.oldfaith.net에 올려져 있는 현대교회문제와 현대교회문제 자료집 및 옛신앙지(특별호) 등의 자료들을 참고하십시오.

책 안내

 전화: (02) 334-8291, 팩스: (02) 337-4869

◈ 책 안내

김효성, 신약성경강해. 1192면. 20,000원(송료 포함).

김효성, 현대교회문제 자료집. 330면. 5,000원(송료 포함).

● 김효성, 현대교회문제: 배교, 타협, 혼란

● 조영엽, 왜 열린 예배는 잘못되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