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신앙  2006년 10월 22일 [제10권 43호]   ◆ 매주 발행 ◆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하였으며"(렘 6:16).

 

 

옛신앙

 

Old-time Fai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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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신앙'이란, 옛부터 하나님의 선지자들과 주의 사도들이 가졌던 신앙, 오직 정확 무오(無誤)한 하나님 말씀인 신구약 성경에만 근거한 신앙, 오늘날 배교와 타협의 풍조에 물들지 않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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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오전설교:                              창세기 6장: 방주를 만듦

       1-4절, 일부다처(一夫多妻)의 풍조

[1-2절]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사람들이 땅 위에 번성할 때 그들에게서 딸들이 났는데 하나님의 아들들은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았다. 본문의 '하나님의 아들들'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우선, 그들은 천사들을 가리킬 수 없다. 왜냐하면, 첫째, 천사는 본질상 사람과 결혼할 수 없기 때문이며(눅 20:35-36), 둘째, 하나님께서는 이런 일에 대해 천사들에게 징벌하지 않으시고 사람들에게 징벌하셨기 때문이다(3절). 본문의 '하나님의 아들들'은 경건한 셋의 자손들을 가리켰고, '사람의 딸들'은 불경건한 가인의 자손들을 가리켰다고 본다. 그렇다면, '하나님의'라는 말은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경건한, 거룩한'이라는 뜻을 가지고, '사람의'라는 말은 '사람에게 속한, 사람의 본성 그대로의'라는 뜻을 가질 것이다.

본문은 가인의 자손에게서는 이미 일부다처(一夫多妻)의 악이 나타났으나(창 4:19), 이제 셋의 자손들 가운데서도 그런 풍조가 보편화되었음을 말하는 것 같다. 일부다처의 풍조는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사람의 육체적 감정과 욕구대로 행하는 악한 일이었다.

[3-4절]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이십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일부다처의 풍조에 대해 불쾌해 하시며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고 말씀하셨다. 영어성경들은 "영원히 사람과 함께하지 아니하리니"라는 말을 "항상 사람과 다투지 아니하리니"라고 번역하였다. 사람의 죄악성은 하나님의 은혜로 어느 정도 통제되며 이로 인해 사람이 극도로 죄악된 상태에 떨어지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버려두시면 그가 심히 부도덕한 상태에 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위해 120년의 기간을 남겨두셨다. 하나님의 심판은 결코 성급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셨고 사람들에게 회개할 시간을 충분히 주셨다. 당시에 땅에 '네피림' 즉 '거인들'이 있었고 또 셋의 자손들도 가인의 자손들을 취하여 고대에 유명한 용사들을 낳았다. 그러나 세상은 더욱 부패해져갔다.

 5-12절, 심히 악한 세상과 의인 노아

[5-7절]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 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노아 시대에 사람들의 죄악은 점점 커 갔고 그들의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은 항상 악하였다.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셨다. '한탄하다'는 말은 하나님의 슬픔을 인간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타락과 부패를 원치 않으셨으나 사람들은 스스로 그 길을 택하였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들과 동물들과 새들을 다 멸하기로 결심하셨다. 이것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결심이었다.

[8절]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 아담의 자손들은 누구나 죄인으로서 원죄의 죄책과 부패성을 가지고 태어나며 노아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않았다면 그도 죄 가운데 살았을 것이고 다른 사람들처럼 멸망을 받았을 것이지만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

[9-10절] 노아의 사적(事蹟)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그가 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

노아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그의 의로운 삶으로 증거되었다. 노아는 의롭고 완전한 자이었다. 의롭다는 말은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것을 말하며, 완전하다는 말은 책망할 것이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 물론 이 말은 절대적 의미는 아니다. 절대적 의미에서 이 세상에 의인이나 완전한 자는 아무도 없다.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로 다른 사람들과 여실하게 다른 인격자이었다. 그의 중심은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자 하였다. 또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그것은 경건한 삶을 가리킨다.

[11-12절]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패괴하여 강포가 땅에 충만한지라.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패괴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패괴함이었더라.

노아 시대의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패괴하였다. 본문에는 '패괴함'이라는 말이 세 번이나 나온다. '패괴하다'는 원어(솨카드)는 '부패되다, 더러워지다'는 뜻이다. 사람들의 패괴함의 한 특징은 '강포함'이었다. 노아 시대에는 강포함이 온 땅에 충만하였다. 세상은 양심과 도덕이나 법과 질서가 없고, 힘과 폭력만 있는 공포 사회이었다.

  13-22절, 방주를 만들라

[13-16절]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짓되 그 안에 간들을 막고 역청으로 그 안팎에 칠하라. 그 방주의 제도는 이러하니 장이 삼백 규빗, 광이 오십 규빗, 고가 삼십 규빗이며 거기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중하 삼층으로 할지니라.

사람들의 부패함과 강포함 때문에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실 날, 곧 세상의 끝날이 가까워오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120년이나 참고 기다리시며 사람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충분히 주셨으나, 세상의 도덕적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그래서 마침내 그 끝날이 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세상을 심판하시고 멸망시키실 것을 말씀하시고 방주를 지을 것을 명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심판하시는 중에서도 구원의 계획을 가지셨다. 그는 멸망할 세상으로부터 노아와 그 가족들을 구원하기를 뜻하셨고 이 일을 위해 그로 하여금 방주를 만들게 하신 것이었다.

방주는 나무로 만든 네모난 큰 배이었다. '잣나무'라고 번역된 원어(고페르)는 소나무나 전나무의 일종이라고 한다. 방주의 크기는, 한 규빗을 약 50cm로 보면, 길이가 약 150m, 너비가 약 25m, 높이가 약 15m이었다. 방주는 3층으로 되었고 그 안에는 많은 칸들이 있었다. 위에서부터 50cm 아래로 창문 한 개가 있었고 문은 옆으로 있었다. 방주의 안팎은 역청으로 칠하였다. 역청(피치)은 원유를 증유시킨 뒤에 남은 검은 찌꺼기를 가리킨다. 그것은 좋은 방수제이었다.

어떤 구약 학자에 의하면, 방주의 부피는 오늘날 소 20마리나 양 100마리를 실은 짐승운반차 2,000대 분량이라고 하며, 오늘날 양보다 큰 짐승은 290종, 양부터 토끼까지의 크기는 757종, 토끼보다 작은 것은 1,358종이 있다고 하는데, 방주는 이런 동물들 한 쌍씩과 그것들을 위한 충분한 사료를 싣기에 넉넉한 공간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17-21절]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식(氣息) 있는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자가 다 죽으리라.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자부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어 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케 하되 새가 그 종류대로, 육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각기 둘씩 네게로 나아오리니 그 생명을 보존케 하라. 너는 먹을 모든 식물(食物)을 네게로 가져다가 저축하라. 이것이 너와 그들의 식물(食物)이 되리라.

하나님께서는 홍수를 통해 땅을 멸하실 것을 선언하셨다. 원문에서는 '내가'라는 말(아니 힌니)이 강조되어 있다. 홍수를 일으켜 모든 생명체를 죽이실 자는 바로 하나님 자신이시다. 세상을 창조하신 그가 바로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언약을 세우겠다고 말씀하신다.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의 약속을 받은 것이었다.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로 방주를 예비하였고 그것을 통해 홍수 심판을 피하였다. 노아가 구원받은 것은 자신의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모든 생물들이 암수 한 쌍씩 노아에게 나아올 것이며 노아는 그것들을 방주 속으로 들여 그 생명들을 보존해야 했다. 또 그는 그것들이 방주 안에 있는 동안 먹을 식물도 준비하고 저장해야 했다. 이 일들이 노아에게 주어진 임무이었다.

[22절] 노아가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노아는 하나님의 명하신 그 일들을 다 준행하였다. 특히 방주 짓는 일은 심히 어렵고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그는 그 큰 방주를 짓는 데 아마 수십년 혹은 100년은 걸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일을 위해 자기와 자기 아들들의 시간과 물질과 노력을 다 쏟았음에 틀림 없다. 방주 짓는 일은 그에게 부업이 아니고 본업이 되었을 것이다. 물론 그는 친척들이나 이웃 사람들에게 조롱과 비난을 받았을 것이며, 아마 '미쳤다'는 소리도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낙심치 않고 하나님의 명하신 대로 방주를 지었다. 그는 하나님의 일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드렸고 하나님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하였다.

창세기 6장을 통해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첫째로, 우리는 세상에 죄가 가득해지면 하나님의 심판이 가까움을 알아야 한다. 13절,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이 말씀은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오늘날도 세상에는 온갖 불경건과 세속주의와 방탕과 음란과 육신적 쾌락 등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하다. 죄의 결과는 지옥 형벌이다. 우리가 세상과 함께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지 않으려면, 우리는 모든 죄를 경계하며 그것들을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회개하고 버려야 한다. 여러분은 다 그렇게 하였는가?

둘째로, 우리는 노아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경건하고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노아는 성도의 본이다. 물론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않으면 의인이 될 수 없다.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증거는 그의 경건하고 의로운 삶이다.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하나님과 동행하며 의로운 삶을 살았다. 그는 하나님의 명하신 바를 다 준행하였다. 그와 같이,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경건하고 의로운 삶을 살기를 원한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은혜로 구주 예수를 믿고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교훈대로 경건하고 의롭고 선한 삶을 성실하게 힘쓰자.

셋째로, 노아가 지은 방주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방주는 노아의 8식구들에게 장차 땅에 임할 홍수 심판에서 구원받을 유일한 수단이 되었다. 노아의 방주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할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과 지옥 형벌로부터 죄인을 구원하는 방주이시다. 그는 회개하는 죄인에게 구원의 방주가 되신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 그러나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영생을 얻는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셨다(요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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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오후설교:                                        찬송

찬송이란 하나님을 높이어 노래하는 것, 곧 하나님의 이름과 그의 속성들과 그가 하신 일들을 인정하고 높이어 노래하는 것을 가리킨다. 찬송가 19장, "내 영혼아 찬양하라, 주님 앞에 엎드려/ 구속하신 넓은 은혜 높이 찬양하여라." 찬송가 책에서 직접 하나님을 높이어 찬송하는 가사들은 55장 이전에 '찬양과 경배'라는 주제의 가사들과 73장부터 203장까지의 가사들 중의 다수이다.

성도의 노래들에는 하나님을 직접 찬송하는 것들뿐 아니라, '영적인 노래들'도 있다. 에베소서 5:19, "시와 찬미와 신령한[영적인]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성도의 기도와 간증, 위로와 권면의 말이 여기 속한다. 찬송가 책의 많은 노래들은 이런 부류의 것이다. 예를 들어, 278장, "사랑하는 주님 앞에 형제 자매 한 자리에/ 크신 은혜 생각하여 즐거운 찬송부르네/ 내 주 예수 본을 받아 모든 사람 내 몸같이/ 환난 근심 위로하고 진심으로 사랑하세." 이렇게 보면, 찬송가 책 이름은 '찬송가'라고 하기보다는 '찬송들과 영적 노래들'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성도의 찬송과 영적 노래는 물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그 첫째 목적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또한 부수적으로이지만 사람들에게 교훈과 유익을 주는 목적도 가진다. 골로새서 3: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라." 이 말씀의 원문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게 하며 모든 지혜로, 시와 찬미와 영적인 노래들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마음에 감사함으로 주께 찬양하라"고 번역될 수 있다. 이것은 찬송과 영적 노래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뿐 아니라, 회중에게 교훈을 주는 의미도 있음을 증거한다. 신명기 3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한 노래를 가르치게 하셨는데, 그 목적은 이스라엘의 패역함을 깨우치시기 위함이었다. 찬송과 영적 노래에는 이와 같이 사람들에게 교훈과 유익을 주는 목적도 있다.

우리는 왜 하나님을 찬송해야 하는가? 첫째로, 하나님은 창조자이시므로 우리는 그를 찬송해야 한다. 피조물인 우리는 창조자의 이름과 그 영광, 그 무한하신 지혜와 능력, 그 풍성하신 선과 인자를 마땅히 찬송해야 한다. 요한계시록 4:10-11, "24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둘째로, 하나님은 구원자이시므로 우리는 그를 찬송해야 한다. 시편 96:2, "여호와께 노래하여 그 이름을 송축하며 그 구원을 날마다 선파할지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도 우리로 하여금 그를 찬송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에베소서 1:6, 12, 14,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는 죄와 영원한 지옥 형벌로부터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으로 구원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찬송해야 한다. 구원의 경험과 지식과 감격이 없는 자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찬송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구원받은 자마다 그를 높이고 자랑하고 찬송해야 할 것이다.

요한계시록 5:9,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 . .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요한계시록 7:9-10,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 하니." 요한계시록 14:1, 3,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14만 4천이 섰는데 . . .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救贖)함을 얻은 14만 4천인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을 찬송해야 하는가? 첫째로, 우리는 바른 가사로 하나님을 찬송해야 한다. 세상 음악은 단지 육신적 감정과 갈망을 토로하는 것이지만, 성도의 찬송과 노래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내용과 하나님 앞에서 간증하고 감사하고 고백하며 간구하는 내용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아무 가사의 노래나 찬송이 될 수는 없다. 찬송에서 가사는 곡보다 중요하다. 따라서 찬송가책의 노래들도 다 똑같이 가치 있는 것이 아니고 그 가사의 내용에 따라 더 가치 있는 것도 있고 덜 가치 있는 것도 있을 수 있다.

찬송의 가사는 우선 복음 진리에 일치해야 한다. 그 내용은 창조자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것이어야 할 뿐만 아니라, 특히 죄와 영원한 지옥 형벌로부터 구원하신 주의 은혜를 감사하고 찬송하는 것이어야 한다. 속죄는 기독교 진리의 핵심이며 진수이다. 그러므로 속죄의 찬송들은 가장 귀한 찬송들이다. 예를 들어, 145장, "오 거룩하신 주님." 147장, "주 달려 죽은 십자가." 186장, "내 주의 보혈은." 188장, "만세반석 열리니." 189장, "마음에 가득한 의심을." 196장, "날 구원하신 예수를." 200장, "주의 피로 이룬 샘물." 210장, "내 죄사함 받고서 예수를 안 뒤." 403장, "나 위하여 십자가의."

뿐만 아니라, 찬송의 가사는 성경의 교리 체계에도 일치해야 한다. 성경의 교리 체계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잘 요약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한국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에 의해 쓰여진 어떤 노래는 찬송이나 영적인 노래가 되기에 부적합하다(예를 들어, 261장, "어둔 밤 마음에 잠겨." 272장, "인류는 하나되게 지음받은 한 가족"). 자유주의 교단들과의 연합 활동은 이런 오류의 포용을 초래하였다. 신성한 찬송가 책 안에 찬송답지 않은 가사들이 포함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근심시키고 노엽게 할 일이다.

우리가 쓰는 통일찬송가는 한국교회의 영적 퇴보의 산물이다. 한국 교회가 여러 해 동안 썼던 새찬송가의 서문에는 이런 말이 있었다. "1959년 예장 총회가 WCC를 탈퇴하고 에규메니칼 운동 반대를 결의한 후 그 때까지의 '합동찬송가' 출판 사업도 에큐메니칼 계획의 하나라는 것을 선언하고 그와 인연을 끊음과 동시에 . . . . 이것은 영구히 한국 기독교계 보수 진영 전체의 찬송가책이 되기를 기원하고 그치는 바이다." 이것이 바른 정신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의 보수적 교회들은 이런 정신에서 퇴보하였다. (계속)

 ◈ 우리나라의 이념적 안정을 위해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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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성경의 근본 교리들을 보수하고, 자유주의 신학과 천주교회의 배교를 포용하는 타협과, 은사운동의 혼란을 반대하고, 또 그런 자들과 교제하는 자들도 책망하기를 원한다. 우리는 오늘날도 성경 말씀의 정로(正路)를 붙들고 그 길로 가는 교회들이 부흥 발전하기를 기도하며, 또 그런 자들과 교제하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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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효성, 현대교회문제: 배교, 타협, 혼란

● 조영엽, 왜 열린 예배는 잘못되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