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신앙  2006년 9월 10일 [제10권 37호]   ◆ 매주 발행 ◆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하였으며"(렘 6:16).

 

 

옛신앙

 

Old-time Fai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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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신앙'이란, 옛부터 하나님의 선지자들과 주의 사도들이 가졌던 신앙, 오직 정확 무오(無誤)한 하나님 말씀인 신구약 성경에만 근거한 신앙, 오늘날 배교와 타협의 풍조에 물들지 않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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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오전설교:                                       여자를 만드심

창세기 2:18-25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던 날, 처음 여자를 만드신 목적과 방법, 그리고 결혼에 관해 증거한다.

[18절]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못하다고 여기시며 그를 위해 '돕는 배필'을 만드시기를 뜻하셨다. 아담이 홀로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 수 있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위해 여자를 만드시고 가정을 이루게 하시기를 원하셨다. 물론 거기에는 자녀 출산이라는 하나님의 뜻도 있었다. 아담은 결혼을 통해 자녀들을 땅에 출산하여야 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작정하신 기쁘신 뜻이었다.

'돕는 배필'이라는 원어(에제르 케네그도)는 문자적으로는 '그 앞에 늘 있는 돕는 자'라는 뜻이다. 영어성경들은 '그에게 맞는(혹은 적합한) 돕는 자'라는 뜻으로 번역하였다. 우리 말에 '배필'(配匹)이라는 말은 '짝'이라는 뜻인데 좋은 번역 같다. 하나님께서 여자를 만드신 목적은 남자를 위해 항상 그의 곁에 있어서 그와 교제하고 그를 위로하고 그를 도와주는 짝이 되게 하기 위함이었다. 여자는 남자를 돕는 짝이 되게 하기 위해 창조되었다.

남자와 여자는 둘 다 하나님의 형상이며 동등한 영적 특권을 누리지만, 이 세상에서 그들의 역할은 다르다. 여자는 남자를 돕는 자로 지음을 받았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여자를 만드신 뜻이었다. 여자가 자신의 본래의 역할을 다할 수 있는 곳은 바로 가정에서다. 여성이 좋은 주부가 되는 것은 여성으로서 가장 중요한 일이다.

모범적 여인상을 가르친 성경은 잠언 31:10-31이다. 거기에 보면, 모범적 여인을 '현숙한 여인'이라고 표현하며 그 값은 진주보다 크다고 말한다. '현숙한'이라는 원어(카일)는 '힘 있는, 훌륭한'이라는 뜻이다.      

현숙한 아내는 가정에서 자기 남편을 잘 내조(內助)하는 여인 즉 아내로서의 역할을 유능하게 잘 행하는 여인이다. 그 본문에 보면, 그 여인은 "살아 있는 동안 그 남편에게 선을 행하고"(12절), "양털과 삼을 구하여 부지런히 손으로 일하며"(13절), "밤이 새기 전에 일어나서 그 집 사람에게 식물을 나눠주며 여종에게 일을 정하여 맡기며" (15절), "간곤한[가난한] 자에게 손을 펴며 궁핍한 자를 위하여 손을 내밀며"(20절), "그 집안일을 보살피고 게을리 얻은 양식을 먹지 아니하는" 자이며(27절) 그 자녀들은 일어나 그에게 감사하고 그 남편은 그를 칭찬한다고(28절) 묘사되어 있다.

[19-20절]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본절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순서를 말하지 않고 단지 사람 창조에 대해 좀더 자세히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새와 들짐승도 흙으로 지으신 후 그것들을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셨다. 사람이나 짐승의 몸은 다 흙으로 지음받았으므로 죽을 때 다 흙으로 돌아간다(전 3:20). 아담은 모든 육축과 새들과 들짐승들에게 이름을 지어주었다. 여기에 아담의 지혜가 잘 드러나고 생물을 다스리도록 창조된 그의 권위가 잘 나타난다. 그러나 그런 생물들은 아담과 본질적으로 달랐기 때문에 그것들 중에는 그에게 돕는 배필이 될 자가 없었다.

[21-22절]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본문은 하나님께서 여자를 어떻게 만드셨는지를 알려준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셨고 그의 갈빗대 하나를 취하셨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셨다. 이와 같이, 처음 여자는 아담의 갈빗대로 만들어졌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여자를 만드실 때 아담을 만드실 때처럼 흙을 사용하여 독립된 한 사람을 만들지 않으셨다. 그는 아담의 갈빗대를 사용하여 여자를 만드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의도를 잘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별개의 두 인격체를 만들지 않으셨다. 그는 한 사람을 만드시고 그의 갈빗대로 다른 한 사람을 만드셨다. 즉 여자는 남자의 갈빗대로 환원될 수 있는 자이었다. 그 둘은 한 몸처럼, 한 인격처럼 살아야 할 자들이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바이었다.

하나님께서 아담의 갈빗대를 사용하신 것은 뜻이 있어 보인다. 그는 아담의 머릿뼈나 발뼈를 사용하지 않으셨고 그의 갈빗대를 사용하셨다. 그것은 여자가 남자를 지배하거나 남자의 짓밟힘을 받는 존재가 아니고 사랑의 대상인 것을 잘 나타낸다. 가슴은 사랑의 품이다. 사람이 사랑하면 가슴이 뛰고 사랑에 실패하면 가슴이 아프다. 아내를 구박하거나 학대하는 남편은 자신의 갈빗대를 스스로 치는 자와 같다. 부부는 진심으로 서로 사랑해야 하는 관계이다.

[23절]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잠에서 깨어난 아담은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행하신 일을 알았다. 그는 자기 눈 앞에 서 있는 아름다운 여인이 하나님께서 바로 그의 갈빗대로 그를 위해, 그를 돕는 배필로 만들어주신 아내임을 알았다. 그는 그 여자를 보고 "이 사람은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다"라고 외쳤다. 그는 그 여자가 자기 몸의 소중한 한 부분이며 자기가 가슴으로 사랑해야 할 대상임을 알았다. 그는 그를 여자라고 불렀다. 히브리어로 '남자'는 이-쉬라고 하고 '여자'는 잇솨라고 한다. 이-쉬에게서 나온 그는 잇솨라고 불리운 것이다.

[24절]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본절은 결혼의 의미를 잘 말해준다. '떠난다'는 원어(아자브)는 '버린다'는 뜻이다. 물론 이것은 자녀가 부모에 대해 가지는 효도의 의무를 부정하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혼이 부모와의 관계에서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 말해준다. 사람은 어릴 때 부모의 보호와 감독 아래 있으나 커서 결혼한다는 것은 이제 부모 곁을 떠나 독립된 한 가정을 이룬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모와의 관계에서 결혼은 부모를 떠나 독립된 가정을 이루는 것이다.

이것은 결혼시키는 부모 입장에서도, 결혼하는 자녀 입장에서도 알아야 할 사실이다. 부모가 결혼한 자녀를 자기의 통제 아래 두려고 할 때 갈등이 생긴다. 효도는 자녀 편에서 자발적으로 하는 것이며, 부모가 교훈은 할 수 있어도 강요할 수 없는 것이다. 부모는 결혼한 자녀 가정의 독립성을 인정해야 하며 자녀도 결혼 후에는 부모의존적인 태도를 버려야 한다.

결혼은 또한 부부간의 관계에서 보면 연합하여 한 몸이 되는 것이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사랑은 연합이다. 사랑의 노래인 아가서에서 신부는 신랑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표현하기를,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라고 한다(아 2:16; 6:3). 이것이 사랑의 성격이다. 사랑하는 부부는 서로 상대에게 붙잡혀 산다.

결혼한 남자는 부모를 떠나 아내와 연합하여 한 몸이 된다. 결혼은 부모와 자식의 관계보다 더 밀접한 관계이다. 부모와 자녀는 한 몸이 아니지만 부부는 한 몸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이며 그가 정하신 뜻이다. 부부는 이 세상의 그 어떤 관계보다도, 부모보다도, 친구보다도 더 가까운 관계이다. 부부는 한 사람처럼 살아야 한다. 즉 삶의 목적과 방식이 하나이어야 하며 돈주머니가 하나이어야 한다. 결혼의 이러한 원리를 알고 사는 부부들은 복되다.

부부가 한 몸으로 사는 성경적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요약하면 사랑과 순종이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여자는 바로 자신의 갈빗대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고 말하고, 또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한다(엡 5:25, 28).

또 성경에는 "남편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했다(벧전 3:7).

지금부터 3,500년 전, 모세도 하나님의 법을 기록하기를, "사람이 새로이 아내를 취하였거든 그를 군대로 내어 보내지 말 것이요 무슨 직무든지 그에게 맡기지 말 것이며 그는 일년 동안 집에 한가히 거하여 그 취한 아내를 즐겁게 할지니라"고 하였다(신 24:5). 성경이 남편들에게 교훈하는 바는 아내에 대한 바로 이런 사랑과 배려이다.

한편,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해야 한다. 성경은 아내의 의무를 순종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에베소서 5: 22-24은 말하기를,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고 한다.

또한 베드로전서 3:1-6은 교훈하기를, "아내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같이 너희가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그의 딸이 되었느니라."

이와 같이, 사랑과 순종으로 부부는 한 몸이 되며 거기에 부부관계의 행복이 있다. 사랑과 순종이 없는 부부는 하나님이 의도하신 연합의 복을 모를 것이다. 자기 아내를 구박하는 남편이나 자기 남편을 무시하는 아내는 스스로 하나님이 주시는 행복을 포기하는 자들이다.

[25절]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처음 사람들은 순수하였고 그들에게는 아직 죄악된 생각이나 감정이 없었다. 부끄러움은 선악의 비교 의식에서 생기는 것 같다. 아직 악이 없는 상태에서는 부끄러움도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다 부패된 성정(性情)을 가지고 있으므로 늘 조심하지 않으면 넘어지기 쉽다.

본문이 주는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여자는 자신의 본래의 역할을 알아야 하겠다. 여자는 본래 남자를 돕는 배필로 창조되었다. 현숙한 여인은 그 남편을 돕는 역할을 유능하게 수행하는 아내이다. 그러므로 모든 여자는 결혼을 귀하게 여기며 자신이 현숙한 아내, 즉 남편을 돕는 좋은 배필이 되기를 소원해야 할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결혼의 의미를 잘 알아야 하겠다. 우리가 결혼시키는 부모라면 결혼한 자녀가 독립된 가정을 이룬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고, 우리가 결혼한 자녀라면 이제는 부모를 의존하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 결혼은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한 몸이 되는 것이다.

셋째로, 부부가 된 자들은 사랑과 순종으로 한 몸이 되어야 하겠다. 성경에 교훈한 대로, 남편은 아내를 참으로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참으로 순종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부부의 생활은 참으로 복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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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오후설교:                                  기독교 윤리

      기독교 윤리의 개념

일반적으로, 윤리 혹은 도덕이란 사람의 올바른 행위 원리들을 말한다. '윤리'라는 영어 에식(ethic)은 헬라어 에도스에서 나왔는데, 그 말은 습관이나 관습을 가리킨다. 윤리학 혹은 도덕 철학이란 그것들을 연구하는 학문을 말한다.

윤리는 옛부터 철학의 주요한 세 가지 주제인 존재, 지식, 선 중의 하나인 선(善)의 문제로 연구되어왔다. 역사상 윤리에 대한 여러 견해가 있었다. 예를 들어, 에피큐러스 학파는 개인에게 감각적 즐거움을 주는 것을 선이라고 보았고, 공리주의는 인류 전체의 유익과 즐거움이 되는 것을 선이라고 보았다. 한편, 근세에 유명한 칸트는 양심의 명령을 따라 행하는 것을 선이라고 보았다.

현대에 와서, 실존주의는 사람이 스스로 선택하는 모든 것을 선이라고 보고, 실용주의는 사람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을 선이라고 본다. 분석철학에서는, 어떤 이들은 선을 사람의 욕구와 별개의 것이며 직관에 의해서만 파악될 수 있다고 보며, 다른 이들은 선을 사람의 도덕 감정의 표현일 뿐이며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없다고 본다.

사실, 하나님 없는 죄인들에게서 참된 윤리 개념과 기준을 기대할 수 없다. 일반 윤리는 어둡고 혼미하다. 양심에 근거하여 윤리적 선을 말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불가능한 이상(理想)에 불과하다. 참된 윤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구원받은 성도들에게서만 말할 수 있다.

일반 윤리의 다양하고 복잡한 개념과 달리, 기독교 윤리란 단순히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계시하여 주신 올바른 생활 원리들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뜻과 그의 말씀은 윤리의 근거이므로 하나님 안에서만 참 윤리를 말할 수 있고 그가 주신 성경을 통해서만 참 윤리를 논할 수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 윤리학이란 하나님의 특별 계시의 기록인 성경에 나타난 성도들의 올바른 생활 원리들에 대한 체계적 지식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기독교 윤리의 기준

기독교 윤리, 즉 그리스도인의 생활 원리의 기준은 성경이며 오직 성경뿐이다. 성경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모든 인생들에게, 그리고 특히 성도들에게, 최종적, 절대적 권위이다. 일반 윤리의 개념과 같이, 사람의 전통이나 관습이, 개인이나 사회의 유익과 즐거움과 행복이, 심지어 사회의 여론이 윤리의 기준이나 최종적 권위가 될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만 최종적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2, "성경 즉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의 명칭 아래 현재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모든 책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 . . . 이 모든 책들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믿음과 생활의 법칙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행위에 절대 권위를 가진다는 것은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한 명령을 주셨을 때부터 분명하였다. 하나님의 명령은 온전하게 지켜져야 했다. 그러나 아담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김으로써 범죄하였고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셨을 때에도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인생의 삶의 정확무오한 규범이라는 것은 분명하였다. 신명기 4: 39-40, "너는 오늘날 상천하지(上天下地)에 오직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다른 신이 없는 줄을 알아 명심하고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규례와 명령을 지키라." 신명기 5:32-33,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대로 너희는 삼가 행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모든 도(道)를 행하라."

예수께서도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처음부터 증거하셨다. 마태복음 4:4, "기록되었으되." 마태복음 15: 2-3,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유전(遺傳)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 요한복음 10:35,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사도 바울도 구약성경의 신적 권위와 자신들의 가르침의 불변적 권위를 증거한다. 디모데후서 3:16- 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데살로니가후서 2:15, "형제들아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전해 들은 내용]을 지키라."

근래에 세속사회의 윤리적 상대주의 혹은 상황주의의 영향을 받은 신학자들은 성경을 절대적 윤리 규범으로 인정하지 않았다(예컨대, 죠셉 플레처, 에밀 부룬너, 라인홀드 니이버, 죤 로빈손 등). 또 어떤 이들은 윤리적 절대주의를 표방하면서도 특수 상황에서 윤리적 규범들이 서로 충돌할 경우 더 작은 악이나 더 나은 선을 택할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상황에서의 성도들의 행동 원리를 성경에 밝히 계시하셨다고 믿는다. 우리는 성경의 생활 교훈과 행위 규범이 결코 애매모호하지 않다고 믿는다. 시편 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디모데후서 3: 16-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성경은 하나님의 속성과 뜻을 계시하며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기초요 기준인 것이다. 레위기 11:45,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마태복음 5:48,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그러나 여기에 즉시 성경 해석의 문제가 뒤따른다. 하나님의 속성과 '감추인 뜻'은 불변적이지만(말 3:6; 약 1:17), 하나님의 '드러난 뜻'은 때때로 변경되었다. 특히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의 생활 방식은 많은 차이가 있다. 구약의 율법들 중에는 신약 아래서 그대로 적용될 수 없는 것들도 있다. 예를 들어, 의식법과 재판법이 그러하다. 구약의 율법들 중 도덕법만 영속적이며 신약 시대에도 적용된다. 우리는 성경을 건전하게 해석하고 적용하여 오직 성경의 교훈대로만 살아가야 한다.

 ◈ 우리나라의 이념적 안정을 위해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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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성경의 근본 교리들을 보수하고, 자유주의 신학과 천주교회의 배교를 포용하는 타협과, 은사운동의 혼란을 반대하고, 또 그런 자들과 교제하는 자들도 책망하기를 원한다. 우리는 오늘날도 성경 말씀의 정로(正路)를 붙들고 그 길로 가는 교회들이 부흥 발전하기를 기도하며, 또 그런 자들과 교제하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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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효성, 현대교회문제: 배교, 타협, 혼란

● 조영엽, 왜 열린 예배는 잘못되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