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신앙 2006년 11월 26일 [제10권 48호] ◆ 매주 발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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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하였으며"(렘 6:16). |
옛신앙
Old-time Faith www.oldfaith.net |
'옛신앙'이란, 옛부터 하나님의 선지자들과 주의 사도들이 가졌던 신앙, 오직 정확 무오(無誤)한 하나님 말씀인 신구약 성경에만 근거한 신앙, 오늘날 배교와 타협의 풍조에 물들지 않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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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884 서울 마포구 합정동 364-1
합정동교회 김효성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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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오전설교: 하나님께 감사하라 오늘날같이 교육, 경제, 사회 여건이 어렵고 불만스럽고 불안하여 직장을 구하는 많은 젊은이들과 일반 서민들의 마음이 우울하고 침체되고 불안한 때에 성도에게 여전히 기쁨과 감사함이 가능한 것인가? 천지가 변함이 없듯이, 하나님이 변함이 없으시듯이, 하나님의 교훈은 변함이 없고 성도의 삶의 길도 변함이 없다. 성도의 삶을 지시하는 하나님의 교훈 중의 하나가 감사하라는 것이다. 그 교훈은 변함이 없다. 추수감사절은 구약의 초막절의 모범에 근거한다. 구약의 초막절은 추수감사의 의미가 있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신명기 16장에 증거된 대로, 이스라엘 백성은 가을에 곡식과 포도주 수확을 끝내고 창고에 저장한 후에 7일 동안 초막절을 지켜야 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모든 소산과 일에 복주심을 인해 크게 즐거워하며 지키는 절기이었다. 또 그 때 그들은 하나님께 힘껏 감사의 예물을 드려야 했다. 사람이 수고하였지만 자라게 하고 결실케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신비하게도 한 알의 씨가 100배의 열매를 맺게 하셨다. 그는 우리에게 또다시 풍성한 추수의 계절인 가을을 주셨다. 그는 추수를 통해 우리에게 육신의 양식을 풍성하게 주신다. 구약의 초막절은 이런 추수의 의미뿐 아니라,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40년 동안 광야에서 생활하였던 날들을 회고하게 하는 뜻도 있었다. 그래서 레위기 23:40 이하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그 절기 때에 7일 동안 초막에서 거해야 했다. 초막(숙코스)은 나뭇가지로 만든 임시 거처를 말한다. 그래서 초막절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 생활을 회고할 때 하나님께 감사할 것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오랫동안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그들을 크신 긍휼과 기이한 능력으로 구원해주셨다. 또 그는 그들을 거칠고 위험한 광야의 길을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셨고 낮의 뜨거운 햇볕과 밤의 차가운 추위를 견디게 하셨다. 그 뿐만 아니라, 신명기 8:3-4의 말씀대로, 그는 그들에게 날마다 만나를 양식으로 내려주셨고, 그들의 의복이 해어지지 않고 그들의 발이 부릍지 않게 하셨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구원하셨고 인도하셨고 공급하셨던 것이다. 오늘 추수감사절을 지키는 우리의 감사의 이유는 무엇인가? 물론 우리도 이 결실의 계절인 가을에 하나님께서 주신 수확의 일을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초막절에 광야 생활을 회고하며 감사했던 것처럼, 오늘 우리도 이 날 하나님의 구원과 인도하심과 공급하심을 기억하며 감사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같은 죄인들을 사랑하셔서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셨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하게 씻어주셨고 영생의 천국을 선물로 약속하셨다. 우리는 죽어도 주께서 다시 오실 때 부활할 것을 믿게 되었다. 지옥갈 우리, 벌레와 같이 무가치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천국 백성이 된 것이다. 이 어찌 감사한 일이 아닌가. 또 하나님께서는 우리 속에 성령님을 보내어 주셔서 영원히 우리 속에 거하게 하셨고 우리를 인도하게 하셨다. 성경은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였다(롬 8: 14). 성령께서는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에게 감동하시고 교훈하시고 우리를 위로 격려하시고 혹은 책망하신다. 우리의 삶 속에 세상의 모든 좋고 나쁜 일들이 많이 일어나지만, 그 모든 일은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우리의 성화를 이룬다(롬 8:28). 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육의 필요를 공급하시고 채워주신다. 그는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셔서 우리를 푸른 풀밭과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신다(시 23:1 -2). 그는 우리에게 믿음을 주셨고 교회를 주셨으며 믿음의 친구들을 주셨다. 그는 또 우리에게 상당한 건강을 주셨고 직장을 주셨으며 일용할 양식을 주셨다. 또 그는 우리에게 자유로운 대한민국을 주셨고 이제까지 평안한 환경을 주셨다. 세상에는 믿음 없는 자들도 많고 교회를 알지 못하는 자들, 믿음의 친구가 없는 자들도 많다. 세상에는 몸이 병약한 자들도 많고 직장이 없는 자들도 많으며 일용할 양식이 부족하여 염려하는 자들도 많다. 세상에는 신앙의 자유가 없는 곳도 많고 전쟁과 재난으로 고통당하는 곳도 많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많은 좋은 것들을 주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수 믿고 구원받은 성도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범사에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 마태복음 6장에 보면, 주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고 또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고 하셨다(마 6:25, 31-32). 우리에게 건강상의 문제가 있을지라도, 경제상의 문제가 있을지라도, 우리에게 사회불안의 문제가 있을지라도, 우리는 염려치 말아야 한다. 염려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이 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믿는 자가 할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다 알고 계시고 그는 무슨 도움이든지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전능자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을 염려하는 대신에 오직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기도하되 감사함으로 기도하라고 성경은 가르쳐준다(빌 4:6-7). 이스라엘 백성은 이 믿음을 갖지 못하고 어려울 때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고 하나님을 거역하였다. 그것이 구약 민수기에서 볼 수 있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이다. 그들은 어려울 때마다 '어찌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이 광야로 인도하셨는고 하고 불평 원망하였다. 그것은 곧 그들을 구속하셨고 그들을 인도하시고 그들 가운데 계셨던 하나님을 멸시하고 그를 부인하고 불신하는 행동이었다(민 14:11).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저 이스라엘 백성처럼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거나 불신하고 거역해서는 안 된다(고전 10:10). 그것은 범죄하는 일이다. 우리는 모든 일을 우리의 유익을 위해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데살로니가전서 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그가 주신 복이다. 단지 우리는 경건하고 의롭게 살면서 그렇게 해야 한다. 우리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는 주의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의식주의 필요를 아시고 공급하시고 채우실 것이지만, 단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믿음과 순종으로 사는 것이 필요하다. 죄를 짓는 자는 하나님께로부터 아무런 좋은 것을 기대할 수 없다. 그러므로 시편 1:1-3은,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고 말했다. 악을 버리고 악한 자와 친근히 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묵상하고 그 교훈대로 살기를 힘쓰는 자가 영육의 복을 누리며 그의 하는 모든 일에 형통함을 경험할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교훈 안에는 각자의 직업에 근면하고 우리의 할 일에 힘쓰라는 교훈도 있다. 하나님께서 범죄의 벌로 첫사람 아담에게 선언하신 대로, 사람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도록 되어 있다(창 3:19). 또한 안식일 계명의 말씀대로, 엿새 동안 자기의 모든 일을 힘써 행한 자가 안식일을 지킬 자격이 있다(출 20:9). 또 성경은 우리에게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고 가르쳤고(엡 4:28), 또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하였다(살후 3:10, 12). 그러므로 성도는 쉽게 벌고 쉽게 쓰려는 어떤 이들의 잘못된 생각과 행실을 본받지 말고, 적은 소득이라도 의롭고 정당하게 땀흘리며 벌려고 해야 하고 또 적절하고 근검절약하게 쓰려고 해야 한다(잠 16:8).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이유는 초막절 정신과 비슷하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구원을 감사해야 하고 또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공급하심을 감사해야 한다. 우리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처한 형편을 아시고 우리를 도우실 수 있고 또 도우실 것이다. 단지 우리는 경건하고 의롭게 살면서 그렇게 해야 한다. 결코 쉽게 돈을 벌려고 하지 말자. 적은 소득이라도 의롭게, 정당하게 땀흘리며 벌려고 하자. 하나님께서는 잠시도 우리를 잊은 적이 없으시고 또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우리는 오직 살아계신 주권적 섭리자 하나님을 믿고 모든 염려를 버리고 그 앞에서 평안 가운데 바르고 성실하게 살아가자. ----------------------------------------------------------------------- 지난오후설교: 하나님을 찬송하자 시편 96:1-2,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지어다. 여호와께 노래하여 그 이름을 송축하며 그 구원을 날마다 선파할지어다." 찬송은 일반 노래와 다르다. 찬송은 하나님을 높이어 부르는 노래이다. 찬송은 호흡이 있는 자는 누구나 마땅히 불러야 할 노래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과 생물들을 만드셨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은 찬송의 방법에 대해 몇 가지 교훈을 준다. 첫째로, 본문은 새 노래로 하나님을 찬송하라고 말한다. 1-2절,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지어다. 여호와께 노래하여 그 이름을 송축하며 그 구원을 날마다 선파할지어다." 새 노래는 옛노래와 대조하는 말이다. 옛노래는 어릴 때 학교에서 부르던 동요와 민요나 명곡,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했을 때 불렀던, 그리고 지금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즐겨 부르는 유행가들을 가리킨다. 그것은 자연을 노래한 것이든가, 아니면 주로 남녀의 사랑과 만남과 헤어짐과 그리워함 등 자신의 감정들을 노래한 것이다. 그러나 새 노래는 사람이 하나님을 알고 그의 크신 구원의 은혜를 체험한 후에 그의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노래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낡아지거나 메마르지 않고 날마다 새롭기 때문에 성도의 구원의 노래는 새 노래이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멸망당한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긍휼이 아침마다 새롭다고 고백하였다(애 3:21-23). 신약 성도들의 노래도 새 노래이다. 그것은 나 같은 죄인, 지옥에 던지워야 마땅했던 나, 벌레 같은 나를 위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고 그를 믿음으로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신 구원이 너무 놀랍고 귀하여 하나님을 높이어 노래하는 것이다. 그것은 성도들의 구원의 노래이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5:9에 보면, 24장로들은 어린양께서 성도들을 십자가의 피로 사셔서 하나님께 드리셨다는 내용의 새 노래를 불렀다. 또 요한계시록 14:3은 땅에서 구원받은 14만 4천인이 그들만 부를 수 있었던 새 노래를 불렀다고 말한다. 신약 성도의 찬송은 새 노래이다. 그것은 날마다 새로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대해 감사 감격하면서 부르는 노래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 옛날 노래들을 버리고 새 노래로 하나님을 찬송하자. 둘째로, 본문은 하나님을 극진히 찬송하라고 말한다. 4-5절, "여호와는 광대하시니 극진히 찬양할 것이요 모든 신보다 경외할 것임이여 만방의 모든 신은 헛 것이요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 '극진히'라는 말은 '최고로'라는 뜻이다. 우리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높임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 세상에 하나님보다 더 높은 자, 더 훌륭하고 위대한 자, 더 존귀한 자는 없다. 우리 하나님은 훌륭한 대통령보다도, 훌륭한 선생님보다도, 훌륭한 과학자보다도 더 높임을 받으셔야 할 분이시다. 세상에 신이라고 부르는 것들이 많이 있지만, 우리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만드신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나와 함께한 자 없이 홀로 하늘을 폈으며 땅을 베풀었느니라"고 말씀하셨다(사 44:24). 또 그는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 "오직 여호와는 참 하나님이시요 사시는 하나님이시요 영원한 왕이시라," "천지를 짓지 아니한 신들은 땅 위에서, 이 하늘 아래서 망하리라"고 말씀하셨다(렘 10:10-11).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극진히, 최고로 찬송해야 한다. 셋째로, 본문은 우리가 거룩한 아름다움으로 하나님을 찬송하라고 말한다. 6-9절, "존귀와 위엄이 그 앞에 있으며 능력과 아름다움이 그 성소에 있도다. 만방의 족속들아 영광과 권능을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예물을 가지고 그 궁정에 들어갈지어다.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온 땅이여 그 앞에서 떨지어다." 하나님께는 존귀와 위엄과 능력과 아름다움이 있다. 하나님의 이름은 바로 존귀와 위엄과 능력과 아름다움을 가진 이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를 찬송할 때 그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려야 할 것이다. 즉 그의 존귀와 위엄과 능력과 아름다움에 합당하게 찬송해야 할 것이다. 특히 '아름답고 거룩한 것'이라는 원어(하데랏 코데쉬)는 직역하면 '거룩함의 아름다움'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찬송할 때 거룩하고 아름답게, 즉 경건하고 거룩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음악적으로도 가장 아름답게 부르도록 노력해야 한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찬송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교훈한다. 첫째, 우리는 새 노래, 즉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하고 감사 감격하여 노래해야 한다. 성도들의 노래는 새 노래, 즉 구원의 노래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날마다 새롭기 때문에 성도의 노래는 결코 낡아지거나 메마르지 않는 새 노래이다. 새 노래로 하나님을 찬송하자. 둘째, 우리는 하나님을 극진히, 최고로, 최대로 찬송해야 한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훌륭하고 가장 존귀한 분이시다. 세상의 다른 모든 신은 헛 것이지만, 우리 하나님은 하늘과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최고의 영광, 최고의 찬송을 드려야 한다. 극진히 하나님을 찬송하자. 셋째, 우리는 거룩한 아름다움으로 하나님을 찬송해야 한다. 우리는 찬송할 때 우리 자신의 기분을 좋게 하기 위해서나 우리의 육신의 만족을 위해서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또 아름답게 찬송을 불러야 할 것이다. 거룩한 아름다움으로 하나님을 찬송하자. ----------------------------------------------------------------------- 현대교회문제: 전쟁을 피하기 위해 정말 필요한 것 [유용원, "전쟁을 피하기 위해 정말 필요한 것," 조선일보, 2006. 11. 4, A30쪽; 군사전문기자.] 제2차 세계대전을 돌아볼 때 많은 사람들의 궁금증을 가장 많이 불러일으키는 것 중의 하나는 왜 독일보다 강력한 지상군 전력(戰力)을 가졌던 프랑스 등 연합군이 제대로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독일군에 허무하게 무너져 한 달 만에 프랑스가 항복했는가 하는 점이다. 개전 당시 공군력은 독일이 우위에 있었다. 반면 전차는 연합군이 3000대로 독일(2400대)보다 많았고, 야포도 1만1200문 대(對) 7700문으로 연합군이 우위에 있었다. 독일의 승리에는 대규모 기계화부대와 급강하 폭격기 등 공군력을 효과적으로 결합시킨 이른바 전격전(電擊戰)이라는 새로운 작전 개념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지도자와 국민들의 전의(戰意)와 사기 등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변수도 프랑스를 비롯한 연합군의 참패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전문가들의 평가도 적지 않다. 독일의 프랑스 침공 전 영국의 체임벌린 수상은 독일의 체코 침공을 눈감아 주는 등 영국과 프랑스의 외교는 전쟁을 피한다는 명분 아래 잇단 협상을 통해 독일에 양보를 거듭했다. 그러나 이는 히틀러의 야심을 더 키워주는 결과만 초래했다. 정치·사회적으로도 분열돼 정권이 자주 교체되는 상황이었다. 독일의 선전전(戰)으로 최전방의 프랑스 병사들 사이엔 독일군이 '사악하지 않은 친구'로까지 통하게 됐다고 한다. 최고 지휘관의 소극성도 문제였다. 당시 프랑스 육군 최고사령관 가믈랭 장군은 월등한 전력을 가진 독일 공군의 보복 공격을 두려워해 독일군 집결지에 대한 연합군 공군의 공습을 허용하지 않고 공군의 활동을 요격과 정찰에만 국한시켰다. 전쟁을 두려워하고 피하기 위해 소극적인 태도로만 일관할 경우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지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반대로 전쟁의 위협에 정면으로 맞서 싸웠을 경우 어떻게 됐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들도 우리 가까이에서 찾아볼 수 있다. 1976년 도끼만행사건 때 한·미 양국군은 사건의 발단이 된 미루나무 절단작전을 펼치면서 북한군이 공격해올 경우 개성 인근까지 진격해 보복한다는 작전을 세웠다. B-52 폭격기와 공격용 헬기 등을 현장 인근 상공에 투입해 대규모 무력시위도 벌였다. 요즘 분위기 같으면 전면전 확전(擴戰)이 우려된다며 난리가 벌어질 법한 조치였다. 그러나 북한군은 조용히 지켜보기만 했고 김일성은 뒤에 이 사건에 대해 유감을 표시, 이례적으로 사실상 사과까지 했다. 1999년 연평해전 때 북한 경비정들의 잇단 NLL 침범에 대해 우리 해군은 무력 충돌을 각오하고 고속정들이 '몸'으로 부딪치는 밀어내기 작전을 폈다. 북한군의 선제사격에 대해선 몇 배로 총·포탄을 쏟아부으며 응사(應射), 2척의 북한 함정을 격침시켰지만 더 이상 확전되지는 않았다. 북한의 핵실험 이후 정치권이나 사회 일각에서 "전쟁이냐, 평화냐 양자 택일하라" "그러면 전쟁을 하자는 것이냐"는 말들이 자주 나오고 있다.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은 지난 2일 북핵 문제 해결 전략과 관련,"어떤 가치도 평화 위에 두지 않을 것"이라며 "평화를 최고의 가치에 두고 관계를 관리해 나가면 우리는 평화가 깨지는 일이 없도록 충분히 관리해 나갈 수 있다"고 말했다. 당연하고 좋은 말씀이다. 하지만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들이 새겨둬야 할 격언이 하나 있다. '전쟁은 전쟁을 준비하는 자를 피해가고, 전쟁을 두려워하는 자에게는 달려든다.' ◈ 우리나라가 하나님의 긍휼 가운데 한미동맹을 견고히 하고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를 유지함으로 평안하고 경제도 회복되도록 기도합시다. ----------------------------------------------------------------------- ◈ 우리는 성경의 근본 교리들을 보수하고, 자유주의 신학과 천주교회의 배교를 포용하는 타협과, 은사운동의 혼란을 반대하고, 또 그런 자들과 교제하는 자들도 책망하기를 원한다. 우리는 오늘날도 성경 말씀의 정로(正路)를 붙들고 그 길로 가는 교회들이 부흥 발전하기를 기도하며, 또 그런 자들과 교제하기를 원한다. ----------------------------------------------------------------------- ♣ www.oldfaith.net에 올려져 있는 현대교회문제와 현대교회문제 자료집 및 옛신앙지(특별호) 등의 자료들을 참고하십시오.
전화: (02) 334-8291, 팩스: (02) 337-4869 ◈ 책 안내 ●김효성, 신약성경강해. 1192면. 20,000원(송료 포함). ●김효성, 현대교회문제 자료집. 330면. 5,000원(송료 포함). ● 김효성, 현대교회문제: 배교, 타협, 혼란 ● 조영엽, 왜 열린 예배는 잘못되었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