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신앙  2006년 1월 15일 [제10권 3호]   ◆ 매주 발행 ◆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하였으며"(렘 6:16).

 

 

옛신앙

 

Old-time Fai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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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신앙'이란, 옛부터 하나님의 선지자들과 주의 사도들이 가졌던 신앙, 오직 정확 무오(無誤)한 하나님 말씀인 신구약 성경에만 근거한 신앙, 오늘날 배교와 타협의 풍조에 물들지 않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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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오전설교: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라는 구약의 용어는 카할에다인데, 이 말들의 차이는 없는 것 같고 흩어져 살고 있든지 모여 있든지 간에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 이 말은 '회중' 혹은 '총회'로 번역된다. '교회'라는 말은 신약에서 에클레시아이며 이 말은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무리를 가리킨다.

교회란 무어라고 정의될 수 있는가? 개혁교회의 신앙고백들은 교회에 대해 성경의 교훈대로 바르게 진술하였다. 벨직 신앙고백(1516년) 27조, "(하나의 공동적 혹은 세계적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 모두의 구원을 기대하고, 그의 피로 죄 씻음을 받고, 성령으로 거룩케 되고 인침을 받은 참 그리스도인 신자들의 거룩한 회중이요 모임이다." 제2 스위스 신앙고백(1566년) 17장, "교회는 세상에서 불러 모으신 신실한 자들의 무리이다. . . . [교회는] 모든 성도들의 교통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5장 1, 2절, "무형적(無形的)인 공동적 혹은 세계적 교회는 그것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아래 하나로 모여진, 모여지는, 또 모여질 선택된 자들의 수 전체로 구성되며;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아내요 몸이요 충만이다," "복음 아래서 역시 공동적 혹은 세계적인 유형적(有形的) 교회는 전에 율법 아래서와 같이 한 국가에 국한되지 않으므로 참 종교를 고백하는 세계에 흩어져 있는 모든 자들과 그들의 자녀들로 구성되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요 하나님의 집과 가족이니 이 교회 밖에는 구원의 일반적 가능성이 없다."

개혁신학은 한마디로 교회를 '성도들의 교통'이라고 정의하였다. '교통'이라는 말은 '연합과 교제'를 의미한다. 교회는 성도들이 영적으로 연합하여 하나님께 예배하며 서로 사랑으로 교제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교회의 공적 집회들과 활동들로 나타난다. 이와 같이 교회는 어떤 건물이나 외적 조직을 의미하지 않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의 모임을 가리키는 것이다. 교회라는 말이 성경에 사용된 예들을 살펴보면서 이 사실을 확인해보자.

마태복음 16:18,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이 구절은 신약성경에서 제일 처음 '교회'라는 말이 나온 곳이다. 주께서는 교회의 건립이 하나님의 계획이며 자신의 중요한 사역임을 증거하셨다. '내 교회'라는 말은 구약의 하나님의 백성과 구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무리를 가리켰다.

사도행전 2:47,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그 교회에 더하게 하시니라"(전통사본). 이 구절은 사도행전에서 처음 '교회'라는 말이 나오는 곳인데, 이 말은 특별한 뜻을 가졌다기보다 단순히 예수 믿고 예루살렘 다락방에 모였던 제자들과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고 세례받았던 3천 명의 신입교인들의 모임을 가리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이 구절은 교회가 예수 믿는 성도들의 모임을 가리킴을 나타낸다.

사도행전 5:11,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사도행전 9: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들이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전통사본). 사도행전 13:1,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이 구절들은 교회가 단순히 예수 믿는 성도들의 모임을 가리킴을 보인다. 사실, 사도 시대의 교회들은 오늘날처럼 어떤 특별한 명칭을 가진 것이 아니었고 심지어 특별한 예배당도 없었다.

로마서 16:5, "저의 교회[그들의 집에 있는 교회]에게도 문안하라." 고린도전서 16:19, ". . .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및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 골로새서 4:15,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과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에 문안하고." 빌레몬서 1, 2, ". . . 동역자 빌레몬과 및 자매 압비아와 및 우리와 함께 군사 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게 편지하노니." 이 구절들이 증거하듯이, 사도 시대의 교회는 흔히 어떤 성도의 집에서 모인 무리를 가리켰다. '성도의 집에 있는 교회'라는 표현은 교회의 본질을 잘 보인다. 교회는 어느 곳에서 하나님께 예배하며 서로 교제하기 위해 모인 모임을 가리켰다. 그것은 어떤 외적 조직체가 아니었다.

에베소서 1: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본문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표현한다. 예수 믿고 구원얻은 모든 성도는 다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룬다. 고린도전서 12: 13, "우리가 . . .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그것은 하나님의 거대한 가족이며 집이다. 에베소서 2: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가족]이라." 에베소서 2:20, 21,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또 본문은 교회를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라고 표현한다. 이것은 교회가 세계적인 교회가 될 것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개인적으로, 단체적으로 교회가 건립되고 거룩하고 온전케 되기를 원하신다. 주께서 교회에 목사를 세우시는 것도 "성도를 온전케 하며 . . .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다(엡 4:12). 하나님의 목적은 구원받은 성도들을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다(엡 5:27). 하나님의 뜻은 성도 개개인이 거룩하고 흠 없는 온전한 자로 나타나는 것이요 그들의 연합체인 교회가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교회가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교회는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임이다. 성도들은 에베소서 1:4-14이 증거하는 대로 창세 전에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구속(救贖)함을 얻고 하나님의 복음을 믿음으로 성령의 인치심을 받은 자들이다. 이러한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들의 수는 온 세상에 충만케 될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목표이다. 이와 같이 교회의 본질은 구원받은 성도들의 연합과 교제에 있다. 여러분은 교회의 참 회원인가?

교회는 완성된 것이 아니고 지금 건설 중에 있다. 에베소서 2:20-22,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주께서 교회에 목사들을 세우신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다(엡 4:12).

그러나 교회가 단순히 한 조직체가 아니므로, 교회 건립은 단순히 외형적 건립이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교회의 건립이 단순히 예배당 건축이나 교인수의 증가이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신약시대에 예배당 건축을 명령하신 적이 없다. 예배당은 교회의 모임을 위해 필요해서 건축하는 것뿐이다. 교인수나 헌금 액수 등도 비록 복음의 결실을 측정하는 요소들이 될 수 있을지라도 교회의 본질적 요소는 아니다.

교회 건립은 오직 영적 건립이어야 한다. 주께서는 교회가 거룩하고 흠이 없는 영광스러운 교회가 되기를 원하신다. 교회 건립은 순수한 복음 진리를 선포하여 결신자들을 얻고 그들을 성경 말씀으로 성실히 가르쳐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인격적으로 성장하도록 양육하는 것이다. 교회 건립에 있어서는 한 명의 영혼의 구원과 그 영혼의 영적 성장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교회는 교인들, 즉 세례교인 혹은 입교인을 신중히 받아들여야 한다. 지교회 목사와 당회는 교인들의 신앙고백을 성실히 확인해야 한다. 만일 교회가 이 기본적 의무에 성실하지 않는다면 교회와 세상을 구별하는 선이 흐려지고 말 것이다. 오늘날 교회의 부패는 부분적으로 이 점에 있어서 교회가 불성실하였기 때문에 왔다. 신명기 23:2, 3, "사생자는 여호와의 총회[교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 . .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신명기 22:9, "네 포도원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라."

또 교회에 직분이나 회의 등의 조직은 비록 그것들이 필요하지만 본질적이지 않고 단지 부수적일 뿐이다. 천주교회는 교황을 교회의 조직을 교회의 본질로 보며, 그렇기 때문에 이 조직을 떠나서는 교회가 없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외적 조직이란 본질적이지 않으며 더욱이 하나님의 진리에서 이탈된 조직은 하나님 앞에서 무의미하고 무가치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가증스럽다.

또 교회에서 성경적, 역사적 바른 교훈의 계승은 외적 조직의 계승과 비교할 수 없이 근본적으로 중요하다. 교회는 사도들로부터 전수되어 온 역사적 기독교 신앙 곧 옛신앙을 믿고 고백하고 전파해야 한다. 교회에서 바른 교훈의 계승이 없는 단순한 조직의 계승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어떤 교회 혹은 교단이 아무리 찬란한 역사적 전통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사도들로부터 전달된 역사적 기독교 신앙의 유산이 계승되지 않는다면 그들의 역사와 전통은 전혀 무의미하며 참 교회의 계승이 되지 못한다. 예를 들어, 한국의 보수적 장로교회들이 평양신학교의 초대 교장이었던 마포삼열 박사나 총회신학교의 기둥과 같았던 박형룡 박사의 바른 신앙을 지키고 전수하지 못한다면, 그 전통과 역사는 아무 의미가 없다.

교회에서 바른 신학의 교육과 전수(傳授)는 생명같이 중요하다. 신학은 하나님의 진리의 체계적 바른 지식이며 역사적 개혁신학은 성경적으로 바른 신학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개혁신학을 바르게 연구하고 파악하며 또 후대에게 성실히 가르치고 전달해야 한다. 모든 진실한 성도들은 참 교회 건립을 위해 힘써야 한다.

천주교회에 의하면, 교회는 "하나의 무형적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하나의 유형적 머리인 로마 교황청의 베드로의 후계자를 가진 지금까지 지구상에 살았던 모든 신실한 자들의 단체"라고 정의된다. 즉 교황을 우두머리로 한 교회의 외적 조직은 교회의 본질적 요소인 것이다.

그러나 교황 중심의 성직 조직이 교회의 본질이라고 보는 천주교회의 교회관은 성경적으로 옳지 않다. 교회의 조직은 필요하며 존중되어야 하지만, 그것이 교회의 본질은 아니다. 교회는 성경이 증거하는 대로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임이다. 더욱이, 교회의 목사나 회의나 전통이 성경 교훈에서 이탈하였을 경우, 그것은 결코 권위를 가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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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문제:                                          전·의경들의 인권 문제

[사설: "인권위원회에 戰·義警 인권 항의하러 가는 부모들," 조선일보, 2006. 1. 5, A31쪽.]

서울 송파구 가락본동 국립경찰병원 5층 전·의경 병동의 527·531·551호에는 작년 11월 15일 여의도 농민 시위 때 다친 전·의경 12명이 아직도 입원해 있다. 두 전경은 턱이 깨졌고, 다섯 전경은 손가락과 팔이 부러졌고, 네 전경은 무릎과 발목이 골절됐고, 한 전경은 어깨 근육이 뒤틀린 것이다. 경찰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왔던 김한영 상경은 영동세브란스 병원으로 옮겨져 지난 3일 뇌수술을 받았다. 여의도 농민 시위 때 부상해 경찰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전·의경은 모두 220명, 그중 52명이 장·단기 입원치료를 받았다.

시위 때마다 이렇게 부상을 당하는 전·의경들의 부모들이 오는 7일 서울 경찰청 앞에서 폭력시위 추방을 위한 집회를 열고 인권위원회까지 행진을 하기로 했다. 인생이 구만리 같은 나이에 팔 부러지고 다리 으스러지고 턱뼈가 산산조각이 난 전·의경들의 부모가 인권위원회의 ‘인권’이 무엇인지 확인하고 항의하러 나선 것이다.

경찰병원 551호에 입원 중인 1기동대 소속 장우진 일경은 맨 앞줄에 섰다가 시위대에 끌려들어가 고립된 채 수십명에게 두들겨 맞았다. 쇠파이프에 팔을 맞고는 방패까지 놓친 상태였다. 경찰병원에 입원해 보니 왼쪽 팔을 빼고는 온 몸이 망가졌고 오른쪽 다리는 뼈가 부러졌다. 최동훈 이경의 경우는 날아온 돌멩이에 오른쪽 턱뼈가 으스러졌다. 수술을 받고 두 달 동안 죽만 먹는 바람에 체중은 10㎏이나 줄었다.방석모(防石帽)도 쇠파이프 앞에선 스무 살 젊은이를 보호하지 못한다. 이재성 상경은 방석모의 아크릴 보호대가 쇠파이프에 깨지면서 아크릴 조각이 눈을 찔러 서울대병원으로 옮겨져 각막 이식수술까지 받았다.

여의도 농민시위가 있었던 작년 11월 15일 밤 경찰병원 응급실은 야전병원과 다름없었다. 응급실 시설이 밀려드는 전·의경 부상자들을 감당하지 못해 간호사들은 부상자들 가슴에 번호표를 붙여놓고는 등받이도 없는 기다란 의자에 누이고 응급치료를 할 수밖에 없었다.

전·의경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은 대나무 중간을 가로로 분질러 끝이 여러 가닥으로 갈라진 대나무창이다. 경기경찰청 소속 김두현 상경은 지난 7월 10일 경기도 평택에서 벌어진 ‘미군기지 확장반대 시위’ 때 이 대나무창이 얼굴의 방석 철망을 뚫고 들어오면서 눈을 찔러 두 차례 수술에도 불구하고 눈이 멀게 됐다. 스무 살에 한쪽 눈을 잃은 이 전경과 그 부모의 마음이 어땠을지는 물어볼 필요가 없다. 전체 4만 7000명의 전·의경 중에서 작년 한 해 동안 747명이 시위현장에서 이렇게 다쳤고 그중 540명이 경찰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여의도 시위 때 돌멩이에 턱뼈가 으스러진 최동훈 이경의 아버지 최성규씨는 “국가에 충성할 생각 말고 제발 뒤로 빠져서 몸이나 살라고 얘기하고 싶다”고 말했다. 여의도 폭력시위가 남긴 결과는 쇠파이프에 팔다리가 망가진 젊은이들과 그런 젊은이를 지휘했다고 쫓겨난 경찰청장뿐이다.

전·의경들은 국가의 부름을 받아 병역의 의무를 다하고 있는 우리 아들이고 우리 이웃의 아들이다. 이 아들들이 무슨 이유로 소한·대한 찬바람 속에서 거리에 쭈그려 앉아 식은 도시락밥을 먹어야 하고 온몸을 시위대의 쇠파이프 앞에 내놓아야 하는가. 눈이 멀고 팔다리가 병신 되면 ‘공권력은 특수한 권력이니 그 책임은 일반 국민과 달리 특별히 무겁게 다뤄야 한다’고 옳은 말씀을 하신 대통령이 보상해줄 것인가. 폭력시위 주동자로 몇 년 징역을 살고 나온 사람들은 그게 훈장이 돼 국회의원·장관이 되는 게 이 나라 실정이다.

과연 이 정부의 대통령 아들, 장·차관 아들, 인권위원장의 아들들이 폭력시위대의 쇠파이프에 맞아 팔다리 뼈가 으스러져도 높은 분들은 ‘공권력은 특수한 권력이니…’ 하는 공자님 같은 말씀을 읊조릴 수 있을까.  

    김정일의 지령(指令)

[류근일, "김정일의 指令," 조선일보, 2006. 1. 10, A30쪽.]

2006년은 김정일식 ‘우리 민족끼리’와 그에 반대하는 진영 사이의 더 첨예한 격돌의 한 해가 될 것이다. 김정일은 북한 관영매체들의 신년 공동사설에서 그 싸움을 이렇게 규정하고 지시한 바 있다. “남조선에서 반보수 대련합을 이룩하는 것이 중요하다… 남조선의 각계각층 인민들은 ‘신보수’의 결탁과 도전을 진보의 대련합으로 짓부셔 버리고 매국 반역집단에 종국적 파멸을 안겨야 한다.” 한마디로 2006년 남한 좌파들의 최우선적인 임무는 이른바 ‘신보수’를 초장에 박살내는 것임을 지령한 문건이다.

그러면서 사설은 그냥 ‘보수우익’이라 하지 않고 굳이 ‘신보수’라는 말을 썼다. 왜 그랬을까? 아마도 뉴 라이트 운동 등, 최근의 새로운 차세대 반(反)김정일 투쟁세력의 등장을 의식한 말일지도 모른다. 김정일 집단은 김대중-노무현 정권 출현 이후 남한 보수세력의 정치적 도덕적 생명력은 거의 수명을 다한 줄로 알았을 수도 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게도 어느 날 갑자기 전통적 보수는 아니지만 새로운 반(反)김정일 투쟁세대가 태어나더니 제법 매서운 공격을 가해 오는 게 아닌가? 게다가 노무현 정권의 인기는 곤두박질을 치는데 한나라당의 지지율은 자꾸만 올라갔다. 국제사회의 북한인권 비판도 거세지고….

남한에는 이제 자기들과 맞서 싸울 인기 있는 우익이 거의 죽었다고 생각했던 김정일로서는 이것은 분명 ‘변괴’가 아닐 수 없다. 아니, 이 ‘좌파 대세’에 대드는 ‘신보수’라니? 이거 그냥 놔두었다가는 안 되겠다 싶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김정일은 새해 벽두부터 남한의 ‘동무’들에게 지령을 내린 것이다. “독초는 제때에 뿌리뽑아 제거해 버려야 한다” 운운하면서.

그런데도 노무현 정권은 이 중차대(?)한 시기에 계속 전통적 지지층으로부터도 인심을 잃어가면서 심지어는 열린우리당과도 개각(改閣)이 어떠니 하며 상쟁이나 벌이고 있다. 그래서 김정일이 훈수를 둔 것이다. “(제살 뜯어먹는 다른 짓 다 그만두고) 반보수 대련합이나 빨리 하라”고. 맞는 말이다. 김정일에게 중요한 것은 노무현 정권의 ‘정치’가 아니라 남한 내부의 ‘반(反)김정일 무드’의 리바이벌일 터이니까.

김대중씨도 자기 입장에서 비슷한 우려를 표명한 바 있다. 기껏 대통령 만들어 주었더니 김대중 집권시 도감청을 수사하지 않나, 자기한테 표 찍어 주었던 유권자들을 정면으로 엿 먹이지를 않나, ‘정치인 김대중’이 평생을 바쳐 끌어모은 ‘범(汎) 진보 대연합’ 진영을 하루아침에 갈라놓지를 않나… 그래서 그는 다시 한번 나서기로 한 것이다. 노무현 그룹에 대해 “전통적 지지층을 복원해야 한다”고 따끔하게 충고한 것도, 그리고 다시 김정일을 찾아가기로 작정한 것도, 다 그런 ‘김대중식’ 특유의 순발력이 낳은 자구책이었을 것이다. 마치 “노무현 당신이 못하면 내가 나서겠다”는 형국이다.

어쩌면 금년에 있을 것으로 보이는 ‘김정일-김대중 전략회의’의 공동 대책사항의 핵심은 보지 않아도 너무나 뻔하다. “어떻게 하면 ‘우리 민족끼리’ 노선이 직면한 안팎의 도전을 극복하고 상황을 다시 압도적으로, 그리고 돌이킬 수 없이 유리하게 대세화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다. 현재의 추세대로라면 금년의 지방선거를 계기로 열린우리당이 지리멸렬해질 수도 있다. 미국의 북한 위조달러 수사, 북한 인권참상의 세계적인 쟁점화도 핵공갈로 막아지지 않는 골칫거리다. 그래서 이 모든 ‘불리한 상황’을 한꺼번에 뛰어넘을 메가톤급 ‘우리 민족끼리 통일’의 대(大) 이벤트를 만들어 내려 할 것이다.

대한민국은 이런 통일전선을 이겨내 오늘의 성공사례를 이룩했다. 이제 그 망령이 오도된 ‘민족주의’의 물살을 타고 다시 엄습하고 있다. 이것을 ‘반(反)김정일 대연합’으로 싸워 이기지 못하면 2006년은 태극기 대신 한반도기(旗)가 ‘정통’이 되는 원년이 될지도 모른다. 선택은 우리 각자의 몫이다.

    '남북연방제' 음모(陰謀)로 대격변 예상

[홍관희, "'南北연방제' 음모(陰謀)로 大격변 예상," 미래한국, 2006. 1. 2, 5쪽; 洪官憙, 안보전략연구소장.]

다사다난하기만 했던 2005년이 저물고, 2006년 새해가 밝았다. 2005년은 국내적으로 친북·좌익 세력의 노골화된 대한민국 파괴 기도에 맞서 자유·보수·우익 세력이 처절한 투쟁을 벌인 한 해였다. 그동안 ‘남북 화해·협력’ ‘한반도 평화’ 등의 허구적 논리에 맞서, 대한민국 세력은 자유민주주의 이념과 국가의 정통성, 한·미 동맹, 그리고 자유통일의 대의(大義)를 선포했다.

그리고 이를 위한 투쟁에 있어, 최소한의 ‘교두보(橋頭堡)’를 확보한 한 해가 아니었나 평가된다. 맥아더 장군 동상 사건과 강정구 사건을 통해, 우리 국민들은 ‘적어도 이것은 용인할 수 없다’라는 국체 수호에 관한 최소한의 심리적 ‘마지노선’을 구축한 것이다. 앞으로 이 교두보를 어떻게 확대·팽창하여, 향후 더욱 가열될 친북·반역 세력의 준동을 막고, 국체·국기를 지켜낼 수 있을지가 우리의 과제이다.

국제적으로 2005년 동북아 정세는 ‘혼돈’을 벗어나지 못했다. 북한 핵문제는 김정일정권의 페이스에 말려 전혀 그 해결 모멘텀을 찾지 못했다. 중국은 남한 내 친북정권의 부상을 적극 활용하면서 김정일정권을 노골적으로 지원하고 수많은 탈북민들을 북송하며, 남북한 등거리 정책을 일관되게 추구해 왔다.

일본이 미국 곁으로 바싹 다가간 것이 특기할 만하다. 미국의 입장에서, 남한이 반미(反美)로 돌아서고 있는 마당에, 서태평양과 동북아에서 중국의 패권적 팽창을 억지하고 안정과 질서를 유지함에 있어 일본은 강력한 우군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미·일 동맹의 강화는 한국의 반미(反美)로 나타난 불가피한 부산물이다.

2006년 동북아는 핵, 인권 외에 추가 현안으로 부상한 북한의 ‘범죄 행위’와 12·16 장관급회담에서 보여진 바, 과도한 남북 유착, 그리고 미국의 새로운 동북아 전략 대두 가능성과 함께 시작되고 있다.

북한은 핵포기, 인권개선을 향한 국제사회의 압박에 ‘마이동풍(馬耳東風)’으로 대응하며, 위조달러·마약밀매 등 ‘범죄행위’를 계속하면서, 그야말로 ‘브레이크 없는 돌진’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 동안 한반도 정책을 놓고 고심하던 미국이 ‘원칙은 양보 안한다’는 방향으로 정립해 나가는 분위기이다. 이 점은 특히 달러 위조 등 북한의 ‘범죄 행위’를 놓고 표면화되고 있다. 러시아 대사를 지낸 중량급 인사 알렉산더 버시바우를 주한 미 대사로 보낸 부시 행정부의 뜻을 여기서 읽을 수 있다. 그는 지금 정부와 의회 등 미 조야(朝野)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또한 총선거가 마무리되면서 이라크 정세가 안정화되면, 미국은 한반도에 총력을 집중할 수 있는 여유를 얻게 된다.

정동영 장관이 급거 방미(訪美)하여 ‘한반도 평화’의 미명 하에 동북아에서의 미국 역할을 축소시키고, 한반도 주변 미국 군사력의 역할에 어떤 획기적 변동을 추구하려 기도하고 있으나, 이러한 친북·반역적 음모는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한반도 안보는 주한미군과 한반도 해역에 포진하고 있는 강력한 미국 군사력에 의하여 유지되어 왔다. 노무현정권이 이러한 기본적 안보 구도를 훼손하면서까지 무절제한 남북관계를 진행시킨다면 이는 한반도에 심각한 위기를 불러올 것이다.

노무현정권이 내정(內政)에서 수세로 몰리게 되자, ‘막가식’ 행태를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사학법 처리가 그렇고 남북관계가 그렇다.

대부분의 국민과 야당, 교육계, 그리고 기독교-천주교계가 온통 나서서 사학법 개정안 통과에 강한 이의를 표하였으면, 대통령이 거부권 행사를 할 수 있는 여유를 보이는 것이 대화를 축으로 하는 민주정치의 본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전교조를 지지하는 친북정권은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듯이 한마디로 거부하고 ‘악법’을 발효시키려는 태도이다.

여기에 남북관계는 어떠한가? 그 동안 황우석 파동과 북한 범죄행위 논쟁으로 주목을 끌지 못했지만, 남북관계에 매우 중요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 16일 남북장관급회담에서 채택된 공동보도문은 ① 상대방의 사상·체제를 ‘존중한다’는 것과 ② 이를 위한 ‘실천적 조치들’을 취해 나가기로 합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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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의 이념적 안정을 위해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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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성경의 근본 교리들을 보수하고, 자유주의 신학과 천주교회의 배교를 포용하는 타협과, 은사운동의 혼란을 반대하고, 또 그런 자들과 교제하는 자들도 책망하기를 원한다. 우리는 오늘날도 성경 말씀의 정로(正路)를 붙들고 그 길로 가는 교회들이 부흥 발전하기를 기도하며, 또 그런 자들과 교제하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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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성, 현대교회문제 자료집. 330면. 5,000원(송료 포함).

● 김효성, 현대교회문제: 배교, 타협, 혼란

● 조영엽, 왜 열린 예배는 잘못되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