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신앙 2007년 8월 12일 [제11권 32호] ◆ 매주 발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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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하였으며"(렘 6:16). |
옛신앙
Old-time Faith www.oldfaith.net |
'옛신앙'이란, 옛부터 하나님의 선지자들과 주의 사도들이 가졌던 신앙, 오직 정확 무오(無誤)한 하나님 말씀인 신구약 성경에만 근거한 신앙, 오늘날 배교와 타협의 풍조에 물들지 않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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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884 서울 마포구 합정동 364-1
합정동교회 김효성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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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오전설교: 형 에서를 만남 [창세기 33:1-4] 야곱이 눈을 들어 보니 에서가 400인을 거느리고 오는지라. 그 자식들을 나누어 레아와 라헬과 두 여종에게 맡기고 여종과 그 자식들은 앞에 두고 레아와 그 자식들은 다음에 두고 라헬과 요셉은 뒤에 두고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 형 에서에게 가까이 하니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아서 안고 목을 어긋맞기고 그와 입맞추고 피차 우니라. 야곱은 에서가 400인을 거느리고 오는 것을 보았다. 그는 자식들을 나누어 레아와 라헬과 두 여종에게 맡기고 여종과 그 자식들은 앞에 두고 레아와 그 자식들은 다음에 두고 라헬과 요셉은 뒤에 두고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갔다. 아내들과 자식들을 세 무리로 나눈 것은 그가 아끼는 정도를 나타내는 것 같다. 그는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형 에서에게 가까이 나갔다. 같은 나이의 쌍둥이인 야곱이 형 에서를 향해 몸을 입곱 번 땅에 굽힌 것은 그의 겸손함을 나타낸다. 야곱은 하란에서의 20년간의 혹독한 고난을 통해 확실히 겸손한 인격으로 변하였다. 에서는 달려와서 야곱을 안고 목을 어긋맞기고 그와 입맞추었고 그들은 피차 울었다. 에서의 마음은 변화되었다. 동생에 대한 미움과 적개심이 사라졌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었고 야곱의 기도의 응답이었다. 사람의 마음을 주장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에서의 마음을 변화시키신 이는 하나님이시다. 야곱의 마음에서 두려움을 제거하신 이도 하나님이시다. 이 모든 일을 하나님이 하셨다. [5-7절] 에서가 눈을 들어 여인과 자식들을 보고 묻되 너와 함께한 이들은 누구냐? 야곱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의 종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이니이다. 때에 여종들이 그 자식으로 더불어 나아와 절하고 레아도 그 자식으로 더불어 나아와 절하고 그 후에 요셉이 라헬로 더불어 나아와 절하니. 에서는 눈을 들어 여자들과 그 자식들을 보고 야곱에게 너와 함께 한 이들이 누구냐고 물었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들이라고 대답하였다. 자녀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자이다. 자녀는 하나님의 기업과 상급이다(시 127:3). 야곱에게는 이 믿음이 있었다. 또 그는 에서 앞에서 자신을 '당신의 종'이라고 겸손히 불렀다. 본장에서 그는 자신을 두 번 종이라고 불렀다(5, 14절). 그 때 여종들이 그 자식들로 더불어 나아와 절하고 레아도 그 자식들로 더불어 나아와 절하고 그 후에 요셉이 라헬과 더불어 나아와 절하였다. 그들은 야곱이 아끼는 순서대로 나아와 절하였다. [8-11절] 에서가 또 가로되 나의 만난 바 이 모든 떼는 무슨 까닭이냐? 야곱이 가로되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함이니이다. 에서가 가로되 내 동생아 내게 있는 것이 족하니 네 소유는 네게 두라. 야곱이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형님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청컨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푸셨고 나의 소유도 족하오니 청컨대 내가 형님께 드리는 예물을 받으소서 하고 그에게 강권하매 받으니라. 에서는 또 그가 만난 모든 떼들, 즉 아홉 떼나 되는 짐승들이 무엇 때문인지 물었다. 야곱은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함이니이다"라고 대답하였다. '내 주'라는 말(아도니)이 본장에서 다섯 번 나온다(8, 13, 14, 14, 15절). 이것은 야곱의 겸비함과 동시에 형 에서에 대한 그의 뉘우침을 나타낼 것이다. 그가 하나님의 복을 사모한 것은 좋았고 또 콩죽 한 그릇으로 장자권을 샀으니 축복받을 정당성도 있었지만, 아버지를 속이고 형의 복을 가로챈 것은 잘못이었다. 야곱은 과거의 자신의 이런 과오를 인정하고 뉘우치는 마음으로 자신을 낮추면서 형을 '내 주'(나의 주)라고 불렀을 것이다. 사람이 자신을 낮춘다고 낮아지는 것이 아니다. 자신을 낮추는 자는 오히려 높아지며 큰 자가 된다. 겸손한 자가 큰 자이다. 예수께서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말씀하셨다(마 20:26-27). 에서가 처음에 사양하였지만, 야곱은 자기가 형에게 은혜를 얻었다면 그의 예물을 받으라고 간청한다. 그는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라고 말한다. 야곱의 선물은 진심의 선물이었고 기쁨의 선물이었다. 에서는 야곱의 강권함으로 그 선물을 받았다. [12-14절] 에서가 가로되 우리가 떠나가자. 내가 너의 앞잡이가 되리라. 야곱이 그에게 이르되 내 주도 아시거니와 자식들은 유약하고 내게 있는 양떼와 소가 새끼를 데렸은즉 하루만 과히 몰면 모든 떼가 죽으리니 청컨대 내 주는 종보다 앞서 가소서. 나는 앞에 가는 짐승과 자식의 행보대로 천천히 인도하여 세일로 가서 내 주께 나아가리이다. 에서는 "우리가 떠나가자. 내가 너의 앞잡이가 되리라"고 말한다. 인간은 연약하여 용서하면서도 약간의 감정이 남아 있을 수도 있다. 에서의 감정이 그러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야곱은 겸손히 이해를 구하며 사양한다. "내 주도 아시거니와 자식들은 유약하고 내게 있는 양떼와 소가 새끼를 데렸은즉 하루만 과히 몰면 모든 떼가 죽으리니 청컨대 내 주는 종보다 앞서 가소서. 나는 앞에 가는 짐승과 자식의 행보대로 천천히 인도하여 세일로 가서 내 주께 나아가리이다"라고 그는 말한다. 야곱은 본문에서 에서를 '내 주'라고 세 번 불렀고 자신을 '그의 종'(원문)이라고 불렀다. 잠언 15:1은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고 말한다. [15-17절] 에서가 가로되 내가 내 종자 수인을 네게 머물리라. 야곱이 가로되 어찌하여 그리 하리이까? 나로 내 주께 은혜를 얻게 하소서 하매 이 날에 에서는 세일로 회정하고 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짐승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은 고로 그 땅 이름을 숙곳이라 부르더라. 또 에서가 "내가 내 종자 수인을 네게 머물리라"고 말하자, 야곱은 다시 "어찌하여 그리 하리이까? 나로 내 주께 은혜를 얻게 하소서"라고 말한다. 그는 겸손한 마음으로 형 에서를 '내 주'라고 부르며 그의 은혜얻기를 구하였다. 어려움이 즉시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마침내 에서와의 갈등이 해소되고 야곱은 그 고민스러운 문제에서 승리하였다. 그 날 에서는 세일로 돌아갔고 야곱은 숙곳에서 자기를 위해 집을 짓고 짐승을 위해 우릿간을 지었고 그 땅 이름을 숙곳이라고 불렀다. '숙곳'(숙코스)은 '천막들'이라는 뜻이다. 거주할 천막 혹은 집을 세웠다는 것은 어느 정도 심적, 환경적 안정을 찾았다는 뜻이다. [18-20절] 야곱이 밧단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에 이르러 성 앞에 그 장막을 치고 그 장막 친 밭을 세겜의 아비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은 100개로 사고 거기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하였더라. 야곱은 밧단아람에서부터 가나안 땅 세겜 성에 이르러 성 앞에 그 장막을 쳤다. '평안히'라는 원어(솰렘)는 고대 헬라어 70인역과 라틴어 벌케이트역이나 옛날 영어성경(KJV)은 '살렘'이라고 번역했다. 다시 말해, 그것들은 본문을 "가나안 땅에 있는 살렘 즉 세겜성에 이르러"라고 번역했다. 그렇다면 구약성경에 살렘이라는 말이 두 번 나온 셈이다(창 14:18). 근래의 영어번역들(NASB, NIV)은 '평안히'라고 번역하지만, '살렘'이라는 고대 번역이 옳을지도 모른다.1) 야곱은 세겜 성 앞에 장막친 밭을 세겜의 아비 하몰의 아들들에게서 돈을 주고 샀다. '은'이라는 원어(케시타)는 옛시대의 무게 단위인데, 은인지 금인지 불분명하다고 한다(BDB, KB). 거기에서 야곱은 단을 쌓았다. '단'(미즈베아크)은 '짐승 제사를 드린 단'을 암시한다. 단을 쌓은 것은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찬송하며 기도하고 속죄와 헌신의 제사를 드리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야곱의 경건을 나타낸다. 노아는 방주에서 나와 하나님께 단을 쌓았고(창 8:20), 아브라함은 여러 번 단을 쌓았으며(창 12:7, 8; 13:18; 22:9), 이삭도 하나님께 단을 쌓았다(창 26:25). 이제 야곱도 하나님께 단을 쌓은 것이다. 창세기 33장을 통해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얻는다. 첫째로, 우리는 야곱같이 하나님의 도우심과 기도 응답을 체험하기를 원한다. 두려움과 심적 고통으로 부르짖었던 야곱에게 문제의 해결과 평안을 주신 이는 바로 하나님이시다. 우리의 모든 문제의 해답은 하나님께 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시고 우리의 처한 환경을 주장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 중심으로 살자.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므로 항상 기도 응답과 그의 도우심을 체험하자. 둘째로, 우리는 겸비한 자가 되자. 야곱은 고난을 통해 겸비한 인격으로 변화되었다. 고난은 겸손 훈련을 위해 유익하다. 겸손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필수적인 덕이다. 예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다(마 11:29). 사도 바울은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교훈하였다(빌 2:3).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께 단을 쌓는 생활을 힘쓰자. 하나님께 단을 쌓는 자는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며, 육신 생활에서도 성공할 것이다. 무엇이 하나님께 단을 쌓는 것인가?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또 교회적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찬송과 기도를 올리며 그가 주신 말씀을 묵상하고 실천하기를 결심하는 것이 하나님께 단을 쌓는 것이다. 잠언 3:6,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 지난오후설교: 헌신, 성화와 상 헌신 헌신은 성도의 삶의 매우 기본적인 원리이다. 그것은 성도의 삶의 시작이다. 참된 헌신으로부터,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모든 도덕적 삶이 나온다. 로마서 12:1-2,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헌신(獻身)은 몸을 드린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구약에 번제로 상징되었다. 번제(燔祭)는 번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여러 조각들로 자르고 그 조각들과 머리와 기름을 번제단 위에 벌여 놓고 물로 깨끗이 씻은 내장과 정강이와 더불어 그 전부를 불사르는 제사이었다(레 1:6-9). 번제는 온전한 헌신과 순종을 상징하였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번제물이 되셨고 온전한 헌신과 순종의 본이 되셨다. 몸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삶의 일부분의 문제가 아니라 삶 전체의 문제이다. 몸이라는 말 속에는 우리의 가진 모든 것이 포함된다. 몸은 우리의 재능과 목소리, 우리의 건강과 힘, 우리의 시간과 수고, 우리의 돈과 생명까지 다 포함된다. 우리의 몸이 없으면 이런 것들은 다 우리에게 무의미하고 무가치하며 없는 것과 같다. 몸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며 하나님의 뜻을 위해 온전히 순종하며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랐던 제자들은 주님과 복음을 위해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들이었다(막 10:29). 헌신은 제자의 길과 같다. 또 마게도냐 교인들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림으로 성도 섬기는 헌금에 참여하기를 간절히 구하였고 극한 가난 중에서도 풍성한 헌금을 넘치도록 하였다(고후 8:2-5). 또 하나님께 헌신한 바울은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말했다(행 20:24). 성도는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말미암은 구원의 은혜 때문에 헌신한다. 헌신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감사하는 우리의 응답이다. 로마서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고린도후서 5:15,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이와 같이 성도의 헌신은 이방 종교의 금욕적 행위와 같이 구원의 공로를 이루는 방법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은혜로 이미 주신 구원의 결과요 열매이다. 이제 우리의 몸이 우리 것이 아니고 주의 피값으로 사신 바 되었으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몸을 드려 그의 영광을 위하고 그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살아야 한다. 고린도전서 6:19-20,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로마서 14:7-8,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하나님께 헌신하려면, 성도는 먼저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를 알아야 하며 그의 뜻을 분별해야 한다. 로마서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되, 그 일부분만 아니라 그 전체를, 즉 그의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도록 힘써야 한다. 하나님의 모든 뜻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읽고 배우고 묵상하며 바르게 이해함으로써, 즉 성경에 정통함으로써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분별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삶을 살 수 있다. 디모데후서 3:16-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성화와 상(賞) 그리스도인의 선한 인격과 생활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성화는 점진적이다. 중생은 영적 출생이며 성화는 영적 성장이다. 사람이 출생한 후 자라듯이, 성도는 영적으로 중생한 후에 점점 성화된다. 중생(重生)과 회개와 칭의는 단회적(單回的)이며 즉각적이지만, 성화는 중생에서 시작되어 일평생 동안 계속되는 점진적 과정이다. 야곱의 생애를 흔히 성화에 비교하듯이, 성도의 일생은 성화의 훈련 과정이다. 성도들의 성화는 오랜 기간과 많은 훈련들이 필요하다. 구원받은 성도가 점점 더 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살지만, 성화는 매우 더디어 보인다. 또한 성화는 지상에서 불완전하다. 육신의 죄악성은 죽을 때까지 완전히 극복되지 않는다. 이것은 성경이 증거하며 경험이 인정하는 바이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성도의 구원은 불완전한 성화에 의존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완전한 단번 속죄의 의(義)에 의존한다. 성경은 중생한 그리스도인에게도 끊임 없는 내적 싸움이 있음을 증거한다(롬 7:7-26). 성도가 혹 의식적 죄들로부터 떠나는 성숙함을 가졌다 할지라도 탐심과 마음의 음욕과 미움 등의 죄를 떠나기는 어려워 보이며, 더욱이 온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제일 큰 계명을 지키기에는 매우 미달된다. 성도는 죽을 때 그 영혼이 거룩함에 있어서 완전케 되어 즉시 영광의 천국에 들어간다(히 12:23). 그것은 성도가 죽을 때 그 영이 즉시 천국에 들어갈 것을 가르친 성경 구절들(눅 23:43; 고후 5:8; 빌 1:23 등)에 당연히 내포된 진리이다. 또한 장차 몸의 부활 때, 성도는 비로소 영육으로 완전케 될 것이다. 우리의 성화 과정에서의 선행들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상을 약속하셨다. 상(賞)은 선행과 봉사의 정도에 따라 각각 다를 것이다. 마태복음 5:11-12,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요한계시록 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특히, 복음을 위해 수고하는 자들에게 각각 수고하고 충성한 만큼의 상이 약속되어 있다. 고린도전서 3:8, 14, "심는 이와 물 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선행이 하나님께 상을 받을 만한 공로가 되지 못하며 성도가 받을 그 상조차도 실상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성화는 하나님의 은혜이며 우리의 선행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과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은 우리에게서 나오지 않고 오직 성령에게서 나온 것이다. 또 우리의 선행은 하나님의 도덕적 기준에 비추어볼 때 여전히 부족하고 불완전하기 때문에 공로가 되지 못한다. 우리의 의는 여전히 예수님의 보혈 공로밖에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도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고 말해야 마땅하다(눅 17:10). ----------------------------------------------------------------------- 현대사회문제: 중·조 우호조약의 한 구절 [박승준, "평화체제의 걸림돌 '중·조 우호조약'," 조선일보, 2007. 7. 14, A3쪽에서.] "중국과 북한이 46년째 해마다 잊지 않고 기념식을 갖는 중조상호우호협력조약의 골자는 제2조다. '이 조약을 맺은 쌍방 중 일방이 어떤 국가나 몇 개 국가 연합 세력의 무장공격을 받거나 전쟁상태에 빠지면 이 조약을 맺은 다른 일방은 즉각 전력을 다해 군사 및 기타 원조를 제공한다'는 조항이다. "이 조약은 체결된 뒤 46년간 한 번도 개정된 일이 없다. '중국과 조선 두 나라는 마르크스 레닌주의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원칙에 따라 . . .'라는 전문도 그대로 살아 있다. 요즘 들어서는 중국측이 더욱 적극적으로 이 조약을 되새기게 하고 있다." ◈ 우리나라의 이념적 안정을 위해 기도합시다. ----------------------------------------------------------------------- ◈ 우리는 성경의 근본 교리들을 보수하고, 자유주의 신학과 천주교회의 배교를 포용하는 타협과, 은사운동의 혼란을 반대하고, 또 그런 자들과 교제하는 자들도 책망하기를 원한다. 우리는 오늘날도 성경 말씀의 정로(正路)를 붙들고 그 길로 가는 교회들이 부흥 발전하기를 기도하며, 또 그런 자들과 교제하기를 원한다. ----------------------------------------------------------------------- ♣ www.oldfaith.net에 올려져 있는 현대교회문제와 현대교회문제 자료집 및 옛신앙지(특별호) 등의 자료들을 참고하십시오.
전화: (02) 334-8291, 팩스: (02) 337-4869 ◈ 책 안내 ●김효성, 신약성경강해. 1192면. 18,000원(송료 포함). ●김효성, 현대교회문제 자료집. 330면. 4,000원(송료 포함). ●김효성, 기독교 교리 개요. 96쪽. 1,000원 ●김효성, 기독교 교리 개요(중국어 역). 96쪽. [추천하는 책] ◆ 김효성, 공산주의 비평. 28쪽. 무료. ◆ 김성욱, 대한민국 적화보고서. 355쪽. 13,000원. ◆ 이상돈,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 559쪽. 18,000원. --오늘 우리 사회의 이념적 문제를 잘 증거한 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