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신앙 2007년 10월 21일 [제11권 42호] ◆ 매주 발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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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하였으며"(렘 6:16). |
옛신앙
Old-time Faith www.oldfaith.net |
'옛신앙'이란, 옛부터 하나님의 선지자들과 주의 사도들이 가졌던 신앙, 오직 정확 무오(無誤)한 하나님 말씀인 신구약 성경에만 근거한 신앙, 오늘날 배교와 타협의 풍조에 물들지 않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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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884 서울 마포구 합정동 364-1
합정동교회 김효성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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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오전설교: 베냐민을 봄 [창세기 43장 1-5절] 그 땅에 기근이 심하고 . . . . 가나안 땅에 기근이 심하였고 야곱과 그 아들들은 애굽에서 가져온 곡식을 다 먹었다. 야곱은 아들들에게 말했다. "다시 가서 우리를 위하여 양식을 조금 사라." 애굽과 가나안 땅 일대에 닥친 여러 해의 극심한 기근은 그 시대 사람들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었을 것이다. 야곱 가족들이 살 던 가나안 땅에도 기근이 온 것은 야곱의 아들들이 22년 전에 지은 죄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기근은 대개 그 거민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다. 그러나 기근 중에도 애굽에 양식이 있었던 것은 요셉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이었고 또 야곱의 아들들이 애굽에서 양식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베푸신 은혜이었다. 야곱의 아들들의 행위를 생각하면 은혜받을 여지가 없겠지만,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야곱을 긍휼히 여기셨다. 하나님께서는 기근의 때에도 자기 백성에게 생존할 길을 주신다(시 33:18-19; 욥 38:41; 마 6:26-33). 야곱의 아들 유다는 아버지에게 말했다. "그 사람이 엄히 우리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 너희 아우가 너희와 함께하지 아니하면 너희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아버지께서 우리 아우를 우리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내려가서 아버지를 위하여 양식을 사려니와 아버지께서 그를 보내지 않으시면 우리는 내려가지 아니하리이다." [6-10절] 이스라엘이 가로되 . . . . 야곱이 말했다. "너희가 어찌하여 너희에게 오히려 아우가 있다고 그 사람에게 고하여 나를 해롭게 하였느냐?" 그들은 말했다. "그 사람이 우리와 우리의 친족에 대해 자세히 묻기를, 너희 아버지가 그저 살았느냐? 너희에게 아우가 있느냐 하기로 그의 말에 대답한 것이라. 그가 너희 아우를 데리고 내려오라 할 줄을 우리가 어찌 알았으리이까?" 그 때 유다가 다시 말했다. "저 아이를 나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곧 가리니 그러면 우리와 아버지와 우리 어린 것들이 다 살고 죽지 아니하리이다. 내가 그의 몸을 담보하오리니 아버지께서 내 손에 그를 물으소서. 내가 만일 그를 아버지께 데려다가 아버지 앞에 두지 아니하면 내가 영원히 죄를 지리이다. 우리가 지체하지 아니하였더면 벌써 두 번 갔다 왔으리이다." 이전에 요셉을 팔 때 앞장서서 제안했던 유다이지만, 지금은 다른 형제들보다 앞서서 자신이 베냐민의 몸을 담보하겠다고 말한다. 그는 과거의 잘못을 많이 반성한 것 같다. [11-14절] 그들의 아비 이스라엘이 . . . . 야곱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굶어죽느냐 아니면 베냐민을 함께 보내어 양식을 구하게 하느냐 둘 중에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베냐민을 잃을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했으나 그를 함께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때 야곱은 먼저 애굽의 그 통치자를 위해 선물을 준비하였다. 그는 가나안 땅의 아름다운 소산 중 유향 조금과 꿀 조금과 향품과 몰약과 비자와 파단행을 준비하였다. 비자는 견과들(nuts)을 가리키고 파단행(巴旦杏)은 편도들(almonds, 아몬드)을 가리킨다. 야곱은 그 통치자를 위해 정성의 선물을 준비하였다. 또 야곱은 양식값을 두 배 넣었다. 지난 번에 어떤 착오로 돈이 지불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돈계산이 정확한 자,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않는 자이었다. 그것은 좋은 인격의 요소이다. 이런 요소는 장로와 집사의 한 자격요건이 된다(딤전 3:3[전통본문], 9). 야곱은 막내 아들 베냐민을 그들과 함께 보내며 말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야곱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였고 하나님의 은혜받기를 소원하였다. 참 신앙은 사람들이나 땅의 것들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주권적 섭리자이신 하나님을 알고 그의 주권적 처분에 모든 것을 의탁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온전케 만들고 계셨다. 그는 이미 돈 계산이 정확한 도덕성이 있었다. 그는 전능자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거기에 더하여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세상의 가장 귀한 것을 포기케 하시고 오직 주권자 하나님 한 분만 바라며 의지하게 하셨다. 그것이 그에게서 사랑하는 아내 라헬을 먼저 데려가신 뜻이며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빼앗아가신 뜻이었고 또 지금 남은 베냐민까지 포기케 하시는 뜻이었다. 그는 베냐민을 포기하였지만, 그 대신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였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하나님뿐이었다. [15-18절] 그 사람들이 그 예물을 취하고 . . . . 야곱의 아들들은 그 예물을 취하고 갑절 돈을 자기들의 손에 가지고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에 내려가 요셉의 앞에 섰다. 요셉은 베냐민이 그들과 함께 있음을 보고 그 청지기에게 말했다. "이 사람들을 집으로 인도해 들이고 짐승을 잡고 준비하라. 이 사람들이 정오에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니라." 청지기는 요셉의 명대로 하여 그들을 요셉의 집으로 인도하였다. 야곱의 아들들은 요셉의 집으로 인도되자 두려워하였다. 그들은 말했다. "지난 번 때에 우리 자루에 넣여 있던 돈의 일로 우리가 끌려드는도다. 이는 우리를 억류하고 달려들어 우리를 잡아 노예를 삼고 우리의 나귀를 빼앗으려 함이로다." [19-24절] 그들이 요셉의 청지기에게 . . . . 그들은 요셉의 청지기에게 가까이 나아가 그 집 문앞에서 그에게 말했다. "내 주여 우리가 전일에 내려와서 양식을 사가지고 객점에 이르러 자루를 풀어본즉 한 사람의 돈(케세프 이쉬)이 그대로 자루 입구에 있기로 우리가 도로 가져왔고 양식 살 다른 돈도 우리가 가지고 내려왔나이다. 우리의 돈을 우리 자루에 넣은 자는 누구인지 우리가 알지 못하나이다." 청지기는 말했다. "너희는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 너희 하나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재물을 너희 자루에 넣어 너희에게 주신 것이니라. 너희 돈은 내가 이미 받았느니라." 요셉의 청지기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또 그는 시므온을 그들에게로 이끌어내고 그들을 요셉의 집으로 인도하고 물을 주어 발을 씻게 하였고 그 나귀들에게 먹이를 주었다. [25-28절] 그들이 여기서 먹겠다 함을 . . . . 그들은 거기서 음식을 먹겠다 함을 듣고 예물을 정돈하고 요셉이 정오에 오기를 기다렸고 요셉이 집으로 오자 그들은 그 집으로 들어가서 그 예물을 그에게 드리고 땅에 엎드려 절했다. 요셉은 그들에게 안부를 물으며 말했다. "너희 아버지, 너희가 말하던 그 노인이 안녕하시냐? 지금까지 생존하셨느냐?" 그들은 "주의 종 우리 아비가 평안하고 지금까지 생존하였나이다"라고 대답하며 머리 숙여 절했다. [29-31절] 요셉이 눈을 들어 . . . . 요셉은 눈을 들어 자기 어머니의 아들, 자기 동생 베냐민을 보고 "너희가 내게 말하던 너희 작은 동생이 이냐?" 하고 그에게 "소자여 하나님이 네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말했다. 요셉은 아우를 인해 마음이 타는 듯하므로 급히 울 곳을 찾아 안방으로 들어가서 울고 얼굴을 씻고 나와서 그 정을 억제하고 음식을 차리라 말했다. [32-34절] 그들이 요셉에게 따로 하고 . . . . 일하는 자들은 요셉에게 따로 하고 그 형제들에게 따로 하고 배식하는 애굽 사람에게도 따로 상을 차렸다. 애굽 사람은 히브리 사람과 같이 먹으면 부정을 입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요셉 앞에 맏형부터 막내까지 나이 순서대로 앉히우자 서로 이상히 여겼다. 요셉이 자기 식물로 그들에게 주었고 베냐민에게는 다른 사람보다 5배나 더 주었다. 그들은 마시며 요셉과 함께 즐거워하였다. 요셉이 처음부터 형들을 용서치 않은 것은 그들에게 회개할 시간을 준 것일 것이다. 그가 양식을 살 돈을 그들의 자루에 도로 넣은 것을 보면 그들을 아주 미워한 것은 아니었던 것 같지만, 형들에 대한 그 자신의 감정도 정리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는 그 동생 베냐민은 보고 싶었으나 자기를 판 형들은 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보면, 그들에 대한 그의 감정도 상당히 풀린 것 같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요셉이 그래도 낫다. 그는 지금 자기를 팔았던 형들을 용서하고 너그러이 대하고 있다. 우리는 창세기 43장을 통해 몇 가지 교훈을 얻는다. 첫째로, 우리는 기근 중에도 하나님만 의지하자. 가나안 땅에 기근이 극심했으나 애굽에는 양식이 있었다. 땅에 기근이 심해도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예비하신다. 공중의 새를 먹이시고 들의 백합화를 입히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의식주의 필요를 아시고 주실 것을 믿자. 그러므로 땅의 것을 염려하지 말고 오직 주권적 섭리자 하나님만 의지하고 그의 뜻대로, 그의 계명대로 의롭고 선하게만 살아가자(마 6:33). 둘째로, 우리는 야곱처럼 땅의 것을 다 포기하고 하나님만 의지하자. 야곱은, 강제적으로지만 라헬도, 요셉도, 베냐민도 포기했다. 주께서는 부자 청년에게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다(마 19:21). 또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다(눅 14:33). 그것이 제자의 길이며 그것이 영적으로 온전케 되는 길이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바라며 살자. 셋째로, 우리는 요셉처럼 원수같은 형들도 너그러이 용서하자. 이것이 주께서 성경에서 교훈하신 온전함이다. 성경은 말하기를,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했다(엡 4:32). -------------------------------------------------------------------------- 지난오후설교: 은사운동 비평 은사운동은 예언, 방언, 병고침 등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가 역사상 계속 있었고 오늘날도 있다고 주장한다. 오늘날 오순절파 뿐만 아니라 또한 전통적 교단들 내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견해를 가진다. 그러나 은사운동은 다음과 같이 비평되어야 한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성경 외에 다른 계시들과 예언들을 주신다는 주장은 성경이 하나님의 충족한 말씀, 최종적 권위의 말씀, 즉 우리의 신앙과 생활의 정확무오한 유일의 규범이라는 믿음에 모순된다. 어떤 이는 하나님께서 오늘날 성경과 동일한 내용을 계시하신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러한 계시의 필요성이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사도 시대 후 1900년 기독교 역사상 성령의 내면적 활동을 통해 그의 종들과 백성들에게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기억나게 하셨다. 그러므로 성령의 새로운 계시 활동을 통해 동일한 내용을 받는다는 것은 전혀 불필요한 일이다. 주께서는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에서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눅 16:31)고 말씀하심으로 성경이 구원을 위해 충족하다는 사실을 증거하셨다. 또 요한계시록 22:18-19은 이 책에 무엇을 더하거나 빼거나 하지 말라고 교훈했다. 물론 하나님의 주권을 부정할 자는 없다. 주신 이도, 거두신 이도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면 거두신 은사도 다시 주실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1900년간 거두어 가신 것은 그의 섭리의 방식이었다. 사도 시대 이후 기독교 역사는 기적 행함의 역사가 아니고 십자가 복음을 전한 역사이었다. 바울은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말했다(고전 1:22-23). 중생과 회개의 내면적 기적은 늘 있었지만, 외적 기적은 오랫동안 사라졌다. 특별한 경우 기도의 응답으로 병고침을 받는 것은 예외적이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의 충족한 말씀으로 일해 오셨다. 성경은 사람의 구원과 새생활을 위해 충족한 수단이었다. 성경을 믿고 성경대로 사는 삶은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삶이었다. 신자들은, 어느 시대든지 하나님의 백성들을 떠난 적이 없었던, 말씀을 통한 성령의 잔잔한 내면적 활동 속에서 만족을 누렸다. 그러므로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의 계속을 주장하는 은사운동은 성경의 충족성과 종결성에 모순되며 성경을 통해 역사하신 하나님의 섭리의 방식에 반대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은사들이 아니고, 성경말씀에 대한 바른 지식과 성실한 순종이다. 둘째로, 은사운동은 말씀 중심의 신앙생활을 무시하고 성령 체험을 강조한다. 즉 신앙생활을 성경말씀보다 은사 체험에 의존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기적 체험에 근거하지 않고 십자가의 속죄의 복음에 근거한 새 생활이다. 바울은 기적을 전하지 않고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했다(고전 1:22-23). 또 사도 시대의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전달하고 확증하기 위함이었고 부분적, 일시적, 초보적 성격의 것이었고 그에 비해 성경은 하나님의 온전한 계시의 말씀이다. 또 방언, 예언 등의 은사보다 중요한 것은 사랑의 인격과 삶이다(고전 13장). 전통적으로 교회는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바른 지식과 믿음 또 진리대로 사는 바른 삶을 강조해 왔다. 그것이 옛길이며 건전한 길이다. 그것이 성경적 기독교다. 고린도교회는 성령의 은사들을 소유한 교회이었지만(고전 1:7) 영적으로 어린아이였다(고전 3:1). 영성의 표는 그리스도인다운 인격과 삶이지, 어떤 은사가 아니다. 은사는 영성의 표나 척도가 될 수 없다. 신구약성경은 초자연적 은사들의 경험보다 성도들의 바른 지식과 바른 인격과 삶을 더욱 중시하고 강조한다(신 13:1-5; 사 8:20; 마 7:22-23; 살후 2:9-12).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을 사모하거나 구하거나 중요하게 여기지 말고, 오직 성경을 읽고 연구하고 믿고 순종하고 전파하는 것으로 충분한 줄 알자. 오늘날도 그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역사와 새롭게 하시고 부흥케 하시고 성장케 하시는 역사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확신하자. 셋째로,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이 교회역사상 계속 존재하였고 오늘날 교회들 안에도 과연 존재하는가? 첫째, 계시와 예언에 대하여, 요한계시록 22:18은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오늘날 성경 외에 계시와 예언을 말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라고 판단된다. 교회 역사는 은사주의의 주장에 반대된다. 둘째, 방언에 대하여, 은사운동은 성령세례의 증거는 방언이라고 주장하며 이 은사는 모든 성도들의 필수적 은사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 방언은 외국어이었다. '방언'이라는 헬라어는 '언어'를 가리킨다. 또 방언을 통역한다는 사실도 방언이 언어적 성격을 가졌음을 암시한다. 언어가 아닌 소리를 통역한다는 것은 불합리하다. 그러나 오늘날 방언 현상은 대체로 외국어의 성격을 갖지 않는다. 더욱이, 방언 현상은 역사상 기독교의 이름을 가진 어떤 불건전한 단체나 이단 종파에도 있었고 기독교 밖에도 있었다. 그러므로 방언 같은 현상이 다 하나님께서 주신 방언 은사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또 은사운동에서 방언 훈련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분명히 인위적이며 비성경적이다. 성경 시대의 방언은 훈련을 통한 것이 아니고 심지어 방언하기를 구한 것도 아니었다. 방언 훈련은 명백히 인위적인 일이다. 그러면 오늘날의 방언 현상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섭리의 방식과 성경의 충족성에 비추어 볼 때,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일 가능성은 매우 작다. 오히려, 많은 비평가들은 오늘날 방언 현상이 심리적 현상이거나 위조품이거나 심지어 마귀에게서 기원한 것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병고침에 대해서도, 오늘날 병고침의 은사가 있는가? 성경에서의 병고침의 사례들은 즉각적이고 비제한적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은사운동의 소위 병고침과 신유의 은사들은 이러한 특징들을 가지는 것 같지 않다. 또 병고침의 현상 자체가 성령의 은사임을 증거하는 것은 아니다. 병고침의 현상은 기독교 안팎의 신비주의적 집단들에서 있어 왔다. 넷째로, 은사운동은 교회연합운동과 함께 가고 있다. 은사주의자들은 성령을 받았다고 자부하는 반면, 바른 교리들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그들은 자유주의 교회들이나 천주교회를 배격하지 않고 오히려 세계 교회들이 성령 안에서 하나됨을 강조하고 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의 순복음 교단은 교회협의회(NCC)에 속해 있다. 또 조용기 목사, 폴 크라우취, 잭 헤이포드, 죤 윔버 등의 은사주의자들은 로버트 슐러의 자서전에 추천사를 실었는데, 로버트 슐러는 자유주의적이고 혼합주의적이고 연합주의적 인물이다. 그는 오래 전에 죄에 대한 바울의 교훈과 결별했고,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자신을 힌두교인과 이슬람교인과 단절시키기 때문에 더 이상 그런 이름으로 불리우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천국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요 기독교가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고 설교하지 않는다. 그러나 은사주의자들은 이런 인물을 위해 추천사를 썼다. 1987년 성령과 세계전도 대회에 관한 북미 대회에서 한 예언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심지어 개신교회와 천주교회의 통합을 선언하였다. 이러한 미혹의 예언은 그 대회에서 제재되지 않았다. 이와 같이, 은사운동은 잘못된 교회연합운동을 촉진시킨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영적으로 메마른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 되고 성령의 충만하심 속에 살아야 한다. 에베소서 5:18,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데살로니가전서 5:19, "성령을 소멸치 말라." 만일 현대교회에 영적 침체가 있다면, 그것은 어떤 이의 주장처럼 '전통적인 경직된 성령론' 때문이 아니고, 역사상 자주 그러했듯이, 목사들과 신도들의 죄와 불순종, 세상과 분리되기보다는 세상을 따라가며 세상과 타협하는 인본주의적 삶에 기인한다. 그러므로, 교회의 참된 부흥은 신자들의 성령세례나 은사 체험 같은 어떤 단회적 혹은 반복적 사건에 있지 않고, 오직 성경말씀에 근거한 철저한 회개와 참된 믿음과, 그 말씀대로 사는 온전한 순종의 삶에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은사운동은 하나님께서 현대교회에 주신 부흥의 표가 아니고 영적 어두움과 혼란을 추가시키는 일일 뿐이다. 이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참 교회들과 신자들은 마땅히 은사운동의 위험을 인식하고 그 운동을 경계해야 한다. 마태복음 24: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 ◈ 배교와 타협과 혼란의 시대에 바른 길을 붙들자. ◈ 우리나라의 이념적 안정을 위해 기도합시다. ----------------------------------------------------------------------- ◈ 우리는 성경의 근본 교리들을 보수하고, 자유주의 신학과 천주교회의 배교를 포용하는 타협과, 은사운동의 혼란을 반대하고, 또 그런 자들과 교제하는 자들도 책망하기를 원한다. 우리는 오늘날도 성경 말씀의 정로(正路)를 붙들고 그 길로 가는 교회들이 부흥 발전하기를 기도하며, 또 그런 자들과 교제하기를 원한다. ----------------------------------------------------------------------- ♣ www.oldfaith.net에 올려져 있는 현대교회문제와 현대교회문제 자료집 및 옛신앙지(특별호) 등의 자료들을 참고하십시오.
전화: (02) 334-8291, 팩스: (02) 337-4869 ◈ 책 안내 ●김효성, 신약성경강해. 1192면. 18,000원(송료 포함). ●김효성, 기독교윤리. 225면. 4,000원(송료 포함). ●김효성, 현대교회문제 자료집. 330면. 4,000원(송료 포함). ●김효성, 기독교 교리 개요. 96쪽. 1,000원 ●김효성, 기독교 교리 개요(중국어 역). 96쪽. [추천하는 책] ◆ 김효성, 공산주의 비평. 28쪽. 무료. ◆ 김성욱, 대한민국 적화보고서. 355쪽. 13,000원. ◆ 이상돈,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 559쪽. 18,000원. --오늘 우리 사회의 이념적 문제를 잘 증거한 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