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신앙 2007년 8월 19일 [제11권 33호] ◆ 매주 발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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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하였으며"(렘 6:16). |
옛신앙
Old-time Faith www.oldfaith.net |
'옛신앙'이란, 옛부터 하나님의 선지자들과 주의 사도들이 가졌던 신앙, 오직 정확 무오(無誤)한 하나님 말씀인 신구약 성경에만 근거한 신앙, 오늘날 배교와 타협의 풍조에 물들지 않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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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884 서울 마포구 합정동 364-1
합정동교회 김효성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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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오전설교: 디나 사건 [창세기 34장 1-4절] 레아가 야곱에게 낳은 딸 디나가 그 땅 여자를 보러 나갔더니 . . . . 본장은 야곱이 가나안 땅 세겜에 거할 때 그의 가정에 생긴 좋지 않은 일을 기록한다. 그것은 그의 아내 레아가 그에게 낳은 딸 디나가 그 땅 여자들을 보러 나갔다가 히위 족속 중 하몰의 아들 그 땅 추장 세겜에게 강간을 당한 일이었다. 이것은 야곱에게 고통스럽고 수치스런 일이었다. 야곱에게는 고난이 많았다. 하란에서뿐 아니라 가나안 땅에 돌아온 후에도 그는 이런 고통의 일을 당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야곱이 당한 가정적 고통은 하나님의 징책이라고 생각된다. 하나님께서는 하란에서 야곱에게 그의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하시며 그가 서원했던 벧엘을 회상시키셨다. 창세기 31:3, "여호와께서 야곱에게 이르시되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창세기 31:13, "나는 벧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그러나 야곱은 가나안 땅 세겜에 도착하여 땅을 사고 거기 거하려 하였다(창 33:17-19). 세겜과 벧엘 간의 직선거리는 약 30킬로미터이며 벧엘에서 이삭이 거주했던 헤브론까지는 약 45킬로미터이다. 야곱이 벧엘이나 헤브론으로 가려 생각하였다면 그 곳에서 땅을 사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그 곳에서 땅을 산 것은 옳지 않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디나 사건을 통해 야곱을 징책하시고 그가 그 곳에 머물지 않고 떠나게 하셨다고 생각된다. 야곱이 하란을 떠날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그가 외삼촌 라반의 아들들의 불평어린 말들을 듣고 또 라반의 안색이 전과 같지 않음을 보고 그의 마음이 불편했을 때 그에게 그 곳을 떠나라고 말씀하셨었다(창 31:1-2). 하나님께서는 이번에도 환경적으로 야곱을 불편케 하신 후에 그 곳을 떠나게 하셨다. 창세기 35:1,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그러므로 디나 사건은 야곱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징책이었다고 생각된다. 본장은 또한 세겜 땅의 추장 세겜의 잘못된 사랑에 대해서도 증거한다. 세겜은 야곱의 딸 디나를 보고 한 눈에 반한 것 같다. 그는 그를 끌어들였고 강간하여 욕되게 하였다. '강간하다'라는 원어는 '동침하다'는 뜻이다. 세겜의 마음은 디나에게 끌렸고 그 소녀를 사랑하였다. '연련(戀戀)하다'는 원어(다바크)는 '붙들다, 끌리다'는 뜻이다. 그는 그 아비 하몰에게 그 소녀를 자기 아내로 얻게 해주시기를 청하였다. 세겜의 감정은 인간적으로 이해될지라도 그의 행위는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의 행위는 이기적인 것이었다. 그가 한 부족의 추장이므로 그 지역에서 상당한 권세를 가졌겠지만, 그것이 그의 도덕적 탈선을 정당화시키지는 못한다. 오히려 디나 사건은 한 권세자의 도덕적 탈선을 드러낼 뿐이다. [5-7절] 야곱이 그 딸 디나를 그가 더럽혔다 함을 들었으나 . . . . 야곱은 세겜이 딸 디나를 더럽혔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자기 아들들이 들에서 목축을 하였기 때문에 그들이 돌아오기까지 잠잠하였다. 세겜의 아비 하몰은 야곱에게 말하러 왔다. 야곱의 아들들은 들에서 그 사실을 듣고 돌아왔다. 세겜이 야곱의 딸 디나를 강간하여 아버지 이스라엘과 그들 모두에게 부끄러운 일 곧 행치 못할 일을 행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근심하고 심히 노하였다. 강간은 부끄러운 일이며 일어나서는 안 될 부도덕한 일이었다. [8-12절] 하몰이 그들에게 이르되 . . . . 하몰은 그들에게 그의 아들 세겜이 마음으로 디나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으니 그를 세겜에게 주어 아내를 삼게 하기를 청하였다. 8절의 '연련하다'는 원어(카솨크)는 '애정을 가지다'는 뜻이다. 하몰은 또 그들에게 그 땅에 거하여 서로 통혼(通婚)하며 서로 거래하자고 말하며 그들이 신부 값으로 어떤 큰 예물을 청구하여도 듣겠다고 말하였다. 세겜은 디나에게 반했고 인간적으로 그를 사랑했다. 19절도 "그가 야곱의 딸을 사랑함이며"라고 기록한다. 여기에 '사랑한다'는 원어(카페츠)는 '기뻐한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본장은 세겜이 야곱의 딸 디나에게 끌렸고 사랑했으며 친절히 말했고(3절) 애정을 가졌고(8절) 기뻐하였다고 증거한다(19절). 세겜은 디나를 사랑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참 사랑이 못 되었다. 그의 사랑은 강간이라는 행위로 나타났다. 그것은 정당치 못한 행위이었다. 혼전 동침은 하나님 앞에서 불법이며 죄이다. 참 사랑은 상대방을 위하고 배려하며, 이기적 사랑은 자기 욕망일 뿐이다. 야곱은 라헬을 사랑하므로 7년을 수일같이 참았다(창 29:20).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고 성경은 말한다(고전 13:4-5). [13-17절]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과 그 아비 하몰에게 속여 대답하였으니 . . . . 야곱의 아들들은 하몰과 세겜을 대면했을 때 그들에게 속여 대답하였다. 그것은 세겜이 그 누이 디나를 더럽혔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대답하기를, 할례받지 않은 자에게 우리 누이를 주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기 때문에 할 수 없으나 만일 그들의 모든 남자들이 할례를 받고 우리같이 되면 서로 통혼하고 우리가 함께 거하여 한 민족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18-24절] 그들의 말을 하몰과 그 아들 세겜이 좋게 여기므로 . . . . 하몰과 세겜은 그들의 제안을 좋게 여겨 그 성 사람들에게 설득하여 그들로 할례를 받게 하였다. 그들은 그 제안을 받아들임으로 야곱의 소유가 결국 다 자신들의 소유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 성의 모든 남자들은 추장 세겜의 요청대로 할례를 받았다. [25-29절] 제삼일에 미쳐 그들이 고통할 때에 . . . 그러나 제3일 되어 그들이 고통할 때, 야곱의 두 아들, 디나의 오빠 시므온과 레위는 갑자기 성을 엄습하여 그 모든 남자를 죽이고 칼로 하몰과 그 아들 세겜을 죽이고 디나를 데려왔고 야곱의 여러 아들들은 그 성으로 가서 노략하였다. 이것은 그들이 그 누이를 더럽힌 일에 대한 보복이었다. 세겜의 잘못된 사랑의 결과는 그와 그 성 전체가 야곱의 아들들의 보복을 받는 것으로 끝났다. [30-31절]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에게 이르되 . . . 야곱은 시므온과 레위를 책망하며 그 땅의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이 그와 그 집을 쳐서 멸망시킬 것을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 행위의 정당성을 주장하듯이 "그가 우리 누이를 창녀같이 대우함이 가하니이까?"고 아버지께 반문하였다. 야곱의 아들들이 하몰에게 속여 대답한 것이나 그들을 죽인 것은 옳지 않은 행동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허용하셨다. 하나님께서 그 행동을 인정하신 것은 아닐지라도 그것을 허용하셨다. 야곱의 아들들에게는 의로운 분노가 있었다. 세겜이 디나를 욕보인 행위는 이스라엘에게 부끄러운 일이며 행해서는 안 될 악한 일이었다(7절). 그러므로 본장은 세겜이 야곱의 딸 디나를 더럽혔다고 두 번이나 기록한다(13, 27절). 그것은 세겜이 받은 보복이 도덕적으로 마땅함을 보이는 것 같다. 강간은 분명히 벌받을 큰 악이다. 창세기 34장은 두 가지 교훈을 준다. 첫째로, 본장은 성도에게 고난이 많음을 보인다. 야곱은 하나님의 명령하신 가나안 땅으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큰 근심거리가 또 생겼다. 성경은 의인에게 고난이 많다고 말한다(시 34:19). 욥은 하나님께 왜 우리를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분초마다 시험하시나이까?"라고 아뢰었다(욥 7:18). 히브리서 12:8은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고 말한다. 성도는 조금만 잘못을 행해도 하나님의 징책을 경험한다. 만일 그런 징계가 없다면 그는 하나님의 참 자녀가 아닐 것이다. 많은 경우에, 고난은 우리의 부족 때문에 온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당할 때 우리 자신을 성찰해야 한다. 그러므로 전도서 7:14은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고 말한다. 우리에게 고난이 닥칠 때 우리는 자신을 성찰하고 마음에 깨달아지고 기억나는 부족과 실수와 죄를 회개하고 고치기를 결심해야 한다. 우리는 어중간한 신앙생활을 하지 말고 확실히 하나님을 섬기며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둘째로, 본문은 우리가 지켜야 할 도덕이 있음을 보인다. 하나님을 잘 모르는 이방인들에게도 어느 정도 도덕성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도덕적 분별력인 양심을 주셨다. 살인과 간음이 죄악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을 명확한 도덕법으로 주셨다. 십계명은 우리가 지켜야 할 생활 원리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 그는 온 세상의 창조자요 섭리자이시기 때문이다. 여호와 하나님 외에는 다른 신이 없다. 우리는 부모님을 공경하고 순종해야 한다. 우리는 살인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간음하지 말아야 한다. 정조는 건전한 인격성의 기본적 요소이다. 우리는 도적질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거짓 증거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남의 것을 탐내지 말아야 한다. 탐심에서 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 증거 등 온갖 죄악이 나오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 죄의 결과는 죽음과 불행이다. 세겜은 디나를 강간함으로 인해 그와 그의 종족이 큰 화를 당하였다. 그 성의 모든 남자들은 죽임을 당했고 자녀들과 여자들은 사로잡혔다. 사람은 순간적인 자기 욕망을 제어하지 못함으로 범죄하고 큰 불행에 떨어진다. 죄의 값은 죽음이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는 회개치 않고 구주 예수를 믿지 않는 모든 죄인을 영원한 지옥 불못에 던지실 것을 분명히 선언하셨다(계 21:8).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원하시는 바는 경건과 도덕성, 즉 거룩과 의와 선함과 사랑과 진실함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포도나무 비유에서 열매라고 말씀하신 그것이다(요 15:8). 우리의 신앙생활의 목표는 경건하고 도덕적인 인격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성경을 주야로 묵상하며 그 교훈대로 살면, 우리는 큰 평강을 누릴 것이다(사 48:17-18). ---------------------------------------------------------------------- 지난오후설교: 1. 자유주의 신학의 본질 현대 교회가 직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신학의 변질이다. 신학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체계적 지식을 말한다. 다수의 현대 신학들은 교회가 전통적으로 믿고 고백해온 하나님의 진리들을 버리고 표류하고 있다. 우리는 그것들을 통틀어 자유주의 신학이라고 부른다. 자유주의 신학은 한마디로 이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 역사적 대교단들의 신학교들은 이런 자유주의 신학 사상들을 포용하거나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지배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가 자유주의 신학에 대해 논하는 까닭은 그것이 기독교 역사상 가장 이단적 사상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이단을 분별하고 배격하라고 분명히 가르친다. 만일 우리가 자유주의 신학에 물든다면 우리의 신앙 생활은 죽고 말 것이다. 신자의 신앙 사상이 부패하면, 그의 경건하고 도덕적인 삶도 부패할 것이다. 교회가 세상과 별로 다르지 않다면, 죄 씻음을 받고 지옥 형벌로부터 구원받는 감격이 없다면, 사람이 구태여 교회에 나올 이유가 없을 것이다. 사탄은 교회들로 하여금 자유주의 신학을 배격하지 않고 은근히 받아들이게 하고 또 목사들의 사상을 변질시켜 마침내 교회 전체를 변질시키려 하고 있다. 우리는 사탄의 이러한 교묘하고 치밀한 배교 운동을 분별하고 물리쳐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유주의 신학이 얼마나 이단적이며 적그리스도적인 사상인가를 잘 분별하고 비판해야 한다. 하나님의 진실한 자녀들은 이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대처해야 한다. 자유주의 신학은 성경의 비평적 연구 방식에서 나왔다. 중세 시대의 사람들은 교회의 권위에 맹목적으로 순종했었다. 그러나 중세가 무너지고 개인의 자유와 인간 이성의 권위를 발견한 사람들은 성경에 대해서도 비평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고등비평이라고 불리우는 잘못된 성경연구방식이다. 또 경험할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이성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한 철학자 칸트(Kant)의 사상은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게다가, 과학의 발달이나 다윈의 진화론 등의 사상은 사람들로 하여금 성경을 더욱 의심과 불신앙의 눈으로 보게 하였다. 자유주의 신학은 이런 배경에서 시작되고 성장하였다. 성경적 기독교와 자유주의 신학은 무엇이 다른가? 성경적 기독교는 기독교를 바른 교리들에 근거한 생활과 경험이라고 이해하며 그 교리들은 확실하고 불변적이라고 보지만,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를 교리들과 별개의 어떤 경험이나 생활로 보며 교리들은 시대마다 변할 수 있고 변해야 한다고 본다.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 교리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교리를 경시하는 이런 태도는 자유주의 신학의 초기로부터 볼 수 있었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쉴라이엘마허는 종교의 핵심이 이성적 증명과 토론이 아니고 감정이며 하나님은 한 경험, 한 살아있는 존재라고 주장하였다. 릿츨도 종교는 이론적이어서는 안 되며 구원받는 것은 새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하르낙도 사람이 경험한 종교만 고백될 수 있고 다른 모든 신조나 신앙고백은 예수님의 견해에 의하면 위선적이고 파멸적이라고 주장하였다. 쉴라아엘마허, 릿츨, 하르낙은 모두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선구자들이었다. 이와 같이, 자유주의 신학은 처음부터 기독교의 본질을 교리와 별개의 경험이나 생활에서 찾으려고 하였다. 이들에 의하면, 기독교의 전통적 교리는 중요하지 않고 현대의 철학적, 과학적 도전 앞에 변경될 수 있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자유주의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교리는 변경될 수 있으며 단지 하나님께서 악의 세력을 이기실 것이라는 신념이 기독교의 본질이라고 본다.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에 대한 과학적 반론을 염려하여 기독교의 독특한 교리들을 버리고 종교의 일반적 원리들을 기독교의 본질로 삼으려 하였다. 그러나 성경적 기독교는 교리를 중시한다. 우리는 기독교가 바른 교리들에 근거한 생활과 경험이라고 이해한다. '교리'는 진리를 말로 표현한 것을 말한다. 교리는 기독교에 본질적이다. 또 기독교 교리들은 확실하고 불변적이다. 그것은 시대마다 변할 수 없다. 교리가 기독교에 본질적이라는 사실은 기독교의 기원을 살펴볼 때 분명하다. 처음 기독교 전파자들은 어떤 경험이나 생활 교훈을 전하지 않았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사실들을 전했고 이 사실들의 설명이 곧 교리이다. 바울은 지혜의 말이나 기적을 전하지 않고 오직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였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전하였다(고전 1:22-23; 15:3-4).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은 하나의 역사적 사실이지만, 그가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은 속죄의 교리이다. 이와 같이, 기독교는 처음부터 교리적 내용을 가지고 있었다. 또 교리가 기독교에 본질적이라는 사실은 바른 교리를 보수하고 이단을 배격하라는 성경 교훈들에서도 증거된다. 디모데후서 1:13, "너는 . . .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라." 로마서 16:17,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디도서 3:10,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 더욱이, 기독교 교리들은 확실하고 불변적이다. 이 사실은 그것들이 하나님의 속성들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진실하시며 거짓 증거를 미워하시고(출 20:16; 잠 6:16-19) 또 불변하시다(시 102:26-27). 또한 기독교 교리들의 확실성과 불변성은 기독교 복음의 성격에 의해서도 확증된다. 기독교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들에 기초하였고 그 사건들이 실제로 일어났다면 그 내용은 확실하고 불변적일 수밖에 없다. 또 기독교 복음은 많은 기적들과 목격자들의 증언들에 의해 확증되었다(행 2:22; 요 21:24). 기적은 어떤 진리를 확증하는 표가 되기 때문에 '표적'이라고 불린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자신이 보고 전한 바를 순교의 피로 확증하였다. 그러므로 복음의 내용인 기독교 교리들은 확실하고 불변적이다. 성경은 복음 진리의 확실성과 불변성을 분명하게 선언한다. 갈라디아서 1:8-9,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기독교 복음은 명확하고 고정된 내용이며 아무도 거기에 무엇을 더하거나 뺄 수 없다. 교회의 의무는 단지 성경에 밝히 계시된 그 내용을 바르게 파악하고 후시대에 전하는 것뿐이다. 그러면, 자유주의 신학의 본질은 무엇인가? 자유주의 신학은 결국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지 않는 사상이다. 자유주의 신학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초자연적 계시들을 인정치 않고 성경에 기록된 모든 기적을 인정치 않는다. 자유주의 신학은 성경에 계시되고 증거된 모든 교리들을 인정치 않는다. 한마디로, 자유주의 신학은 성경을 인간이 쓴 오류투성이의 책, 신화적인 책으로 보는 것이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자 중에 비교적 보수적이라고 알려진 칼 바르트도 아담의 창조와 타락의 이야기가 그 자체로는 거짓이라고 단언하였고 또 "아브라함과 모세와 같은 인물들이 후대의 신화 제작의 산물들이든지 아니든지 무슨 문제가 되는가[!]"라고 담대히 말하였다. 또 그는 성경에 오류가 있다고 단언하였다. C. H. 다드는 성경의 외적 권위는 절대적이지 않으며 하나님의 계시 진리는 객관적 형태로 주어지지 않는다고 단언했고 심지어 성경의 무오성을 주장하는 것은 종교와 공중 도덕에 위험물이라고까지 말하였다. 그러나 이런 사상은 성경 자체의 증언과 정반대이다(시 19:7-8; 눅 1:1-4; 요 20:30-31; 21:24; 행 2:22; 히 2:3-4; 마 5:18; 요 10:35; 딤후 3:16; 계 22:18-19). 성경이 믿을 만한 책이며 우리의 신앙생활의 표준인 신적 권위의 말씀이라는 것은 모든 개신교회가 공통적으로 믿는 기본적 신념이다. 바른 성경관은 기독교 신앙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이다. 성경이 우리의 신앙과 생활의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라고 믿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기초이다. 그러므로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가 포용할 수 있는 한계를 넘었다. 그것은 예수님 당시에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믿지 않았던 사두개파적 불신앙과 같다(마 22:29). 그것은 한마디로 이단이다. 우리는 성경을 믿는 자가 되어야 하고 이단을 배격해야 한다. ◈ 우리나라의 이념적 안정을 위해 기도합시다. ----------------------------------------------------------------------- ◈ 우리는 성경의 근본 교리들을 보수하고, 자유주의 신학과 천주교회의 배교를 포용하는 타협과, 은사운동의 혼란을 반대하고, 또 그런 자들과 교제하는 자들도 책망하기를 원한다. 우리는 오늘날도 성경 말씀의 정로(正路)를 붙들고 그 길로 가는 교회들이 부흥 발전하기를 기도하며, 또 그런 자들과 교제하기를 원한다. ----------------------------------------------------------------------- ♣ www.oldfaith.net에 올려져 있는 현대교회문제와 현대교회문제 자료집 및 옛신앙지(특별호) 등의 자료들을 참고하십시오.
전화: (02) 334-8291, 팩스: (02) 337-4869 ◈ 책 안내 ●김효성, 신약성경강해. 1192면. 18,000원(송료 포함). ●김효성, 현대교회문제 자료집. 330면. 4,000원(송료 포함). ●김효성, 기독교 교리 개요. 96쪽. 1,000원 ●김효성, 기독교 교리 개요(중국어 역). 96쪽. [추천하는 책] ◆ 김효성, 공산주의 비평. 28쪽. 무료. ◆ 김성욱, 대한민국 적화보고서. 355쪽. 13,000원. ◆ 이상돈,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 559쪽. 18,000원. --오늘 우리 사회의 이념적 문제를 잘 증거한 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