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신앙  2009년 12월 13일 [특별156호]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하였으며"(렘 6:16).

 

 

옛신앙

 

Old-time Fai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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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신앙'이란, 옛부터 하나님의 선지자들과 주의 사도들이 가졌던 신앙, 오직 정확 무오(無誤)한 하나님 말씀인 신구약 성경에만 근거한 신앙, 오늘날 배교와 타협의 풍조에 물들지 않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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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문제:                       햇볕정책의 한계

[황장엽, "햇볕정책의 한계," 미래한국, 2009. 8. 19, 37쪽; 전 노동당 국제비서, 북한민주화위원회 위원장.]  

햇볕정책은 탈선한 대북정책이다. 김정일은 많은 죄악을 저질렀기 때문에 특권의 지위를 버리고 개혁개방의 길로 나갈 수 없다. 수백만 북한주민을 굶겨 죽이고, 온 나라를 감옥으로 만들었다. 외화를 위조하고 마약거래와 테러행위를 서슴없이 자행하는 범죄집단이다. 한국의 원조(햇볕)를 개혁개방에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독재체제를 강화하고 남침 야망을 실현하는 데 이용하고 있다. 김정일은 개혁개방 의사를 표현한 일도 없고 잘못을 시인하고 반성한 일도 없으며 독재체제가 달라진 증거가 없다. 한국은 경제적으로 비할 바 없이 우월할 뿐만 아니라 미국과의 동맹으로 군사적으로도 우위에 있다. 김정일은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며 일으키면 멸망을 앞당길 뿐이다.

햇볕정책 주창자들의 말처럼 김정일이 독재의 옷을 벗었는가. 김정일의 독재사상은 선군사상으로 더 악화됐고 핵무장이라는 새옷으로 갈아입었다. 핵무기로 한국의 좌파반미용공 세력을 강화할 야망을 드러내고 있다. 햇볕정책 결과 남한에서 민주주의 옷을 벗는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다.

진보와 평화의 탈을 쓴 햇볕정책 주창자들은 활보하고 있고 북한의 인권 유린을 규탄하는 세계 여론까지 무시하며 탈북민의 비참한 생활에 대해 눈감고 있다.

지금 북한주민의 고통은 일제 시대를 능가한다. 그때는 굶어죽는 일이 없었고 정치범 수용소에서 죽어가는 일, 수십만 탈북민이 외국에서 헤매다가 다시 붙잡혀 고통받는 일이 없었다. 청년들이 군대에 끌려가 10년, 13년 동안 수령을 위해 죽도록 훈련받는 일도 없었고 6·25 같은 동족상잔의 비극도 없었다. 한국이 막대한 외화까지 주며 북한의 민족반역집단과 공조를 약속하고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적 정체성을 버리려 하는가. 이 죄가 을사5적[을사보호조약]보다  가볍다고 할 수 없다.

미국 뿐 아니라 중국도 남침을 반대하고 있다. 북한은 남침을 하면 그들이 멸망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햇볕정책의 공로처럼 얘기해서는 안 된다.

햇볕정책 주창자들은 북한 독재집단을 돕지 않으면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무는 격이라고 한다. 그러나 북한은 중국과 러시아의 지지를 받고 있다. 북한을 도와주면 더 강하게 돼 상대를 협박해 굴복하게 한다. 한국이 북한에 완전 굴복하게 되면 굳이 공격하지 않을 것이다.

김정일 독재집단을 도와주어야 북한에서 자본주의가 자라날 수 있다는 주장은 한심한 국민 기만이다. 김정일은 중국식 개혁개방도 반대하는데 자본주의적 자유민주주의를 받아들일 리 없다. 중국도 북한에 자유민주주의가 들어오는 것을 반대한다. 북한에 원조해서 자유민주주의가 자란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햇볕정책으로 한국 국민은 귀중한 것을 잃었다. 첫째, 민주주의적 정체성을 수호할 정신을 빼앗겼다. 민주주의와 좌파 용공정책을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이 상실됐다. 좌파의 책동을 민주주의 당파싸움으로 바라보는 형편이다. 둘째, 한국 발전의 생명선인 한미동맹을 약화시켰다. 한미일 공조체계도 흔들렸다.

햇볕정책 지지자들의 좌경 반미 정체가 뚜렷하게 표현되고 있다. 그들은 기만 술책에 매달리고 있다.

첫째, 냉전에서 미국이 승리한 것도 햇볕정책의 결과라는 것이다. 미소간의 종합적 국력의 격차가 크게 벌어져 소련과 소련 진영을 내부적으로 와해시키는 기본 요인이 됐다. 둘째, 남북이 협조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차마 김정일 집단과의 협조라는 표현을 쓰지 못하고 남북간의 협조라는 말을 써서 반미·반민주주의적 정체를 은폐하려는 교활한 책동을 쓰고 있다.

김정일 정권은 북한 주민을 대표할 자격도 없고 통일에 대해 말할 수 없다. 햇볕정책 주창자는 가면을 벗고 국민을 속이지 말아야 한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더는 속임수에 넘어가지 말아야 한다.

 

역사를 어지럽히지 말라

[고정일, "역사를 어지럽히지 말라," 조선일보, 2009. 11. 28, A30쪽; 소설가, 동서문화 발행인.]  

1940년 독일군이 파리를 점령하자, 프랑스는 '비시 나치괴뢰' 정부가 들어선다. 1905년부터 일본은 공식적 조약에 의거해 조선을 통치한다. 프랑스가 점령당한 기간은 4년 남짓, 일본이 조선을 지배한 기간은 40년이 넘는다. 2차대전 당시 쿠브 뒤 뮈르빌은 비시 정권 재무관료였지만, 드골 정권에서 10년 넘게 외상·총리를 지냈다. 모리스 파퐁은 나치협력 전력에도 예산부장관에 올랐다. 더 충격적인 것은 미테랑 대통령이 비시 정권 협력자였음은 '비밀 아닌 비밀'이었다. 이들의 행위는 조국을 위한 불가피한 처신으로 인정받았다.

1924년 조선일보 발행권을 인수한 우창 신석우는 월남 이상재를 찾아 민족의 장래와 신문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조선일보를 다시 왜놈 앞잡이들에게 넘길 수 없다며 사장을 맡아달라 호소했다. 월남은 한참 생각하다 민족 계몽육성에 힘써야 한다며 이 제의를 받아들인다. 우창은 경영과 지면을 대대적으로 혁신해 나갔다.

하루는 월남이 편집국에 들어서자 마침 총독부에서 나온 일본인 관리가 기사를 당장 빼라고 난리를 치고 있었다. 이때 월남은 77세 노인답지 않게 벽력같은 호통을 쳤다. "이놈들아 정신 차려!" 담당기자를 나무람인지 총독부 관리를 나무람인지 분명치 않았으나 움찔 놀란 그 관리는 슬그머니 물러갔다. 그러자 월남은 기자에게 "걱정할 것 없네. 그대로 진행하게." 이렇게 수시로 격려하고는 했다.

어느 날 월남을 방문한 일제 거물 오사키(尾峙行雄)가 대뜸 입을 열었다. "일본과 조선은 부부 같은 사이인데, 남편이 조금 잘못했다 해서 아내가 들고일어나서야 되겠소?" 그 말은 일본을 남편으로, 조선을 아내로 비유, 3·1 독립운동을 넌지시 비난한 것이었다. 오사키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월남은 말을 받았다. "그러나 정당한 부부가 아니고 만일 강간폭력으로 맺어진 부부라면 어떻게 하겠소?" 오사키는 낯 뜨거워 말 한마디 못하고 물러났다. 월남이 세상을 뜨자 독립협회 동지였던 서재필 이승만은 "월남은 거인이었고, 그의 비범한 탁론과 강직한 기백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애도했다.

우창 또한 독립운동가였다. 그는 1919년 4월 임시정부 첫 의정원회의에서 '대한'을 국호로 제안, 공화제를 의미하는 '민국(民國)'을 붙임으로써 '대한민국'이라는 정식 국호가 탄생한다. 1927년 3월 우창은 사장에 취임했다. 그는 6년 6개월 동안 가산 42만원의 거금을 조선일보에 쏟아 부었다. 그러나 전 재산을 바치고도 적잖은 빚을 안고 회사를 떠나야만 했다. 우창은 뒷날 "일제하 신문사 사장이란, 욕과 고생은 많을지언정 외국신문 사장처럼 결코 영예스러운 자리는 못 되는 것"이라고 탄식한다.

파인 김동환은 감정이 풍부했다. 조선일보사 편집국 창문을 통해 저물어 가는 저녁놀을 바라보면서 "아!" 감탄을 하면 학예부장 안석주는 "이크, 파인의 감격이 또 시작됐군!" 놀렸다. 그가 시를 쓰고 안석주가 삽화를 그린 여러 작품들이 돋보인다. "북극에는 날마다 밤마다 눈이 오느니/ 회색하늘 속으로 눈이 퍼부슬 때마다/ 눈속에 파뭇기는 하-연 북조선이 보이느니"('적성을 손가락질하며'에서).

파인은 함북 경성에서 태어나 서울 중동학교와 일본 동양대 문과를 졸업했다. 조선일보 기자로 재직하던 1929년 월간 '삼천리'를 창간하며 잡지 명편집자로 이름을 날린다.

1933년 7월 우창과 조만식의 간청으로 사장으로 취임한 계초 방응모(1884~1950·납북)는 과단성 있게 사업을 펼쳤다. 50만원의 거액을 투입, 조선일보를 주식회사로 바꾸자 사세는 욱일승천의 기세였다. 한편 계초는 드러나지 않게 독립운동을 후원했다. 안창호가 경성의전병원에 입원했을 때 선뜻 500원을 냈다. 그가 1938년 3월 10일 운명하자 계초 등이 낸 조위금으로 장례를 지냈다. 독립운동가 김동삼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했을 때 장례를 치른 이도 그였다. 계초는 상해 임정 기관지를 찍는 데 위험을 무릅쓰고 활자와 자금을 제공했다.

1940년 8월 10일, 일제 발악은 극에 달하여 조선일보를 폐간시킨다. 1945년 조선일보 복간호가 나온 날 상해 임정 주석 백범 김구는 환국했다. 백범은 바쁜 일정 속에 '有志者事竟成'(유지자사경성·뜻 지닌 자 성취할 수 있다)이란 축하 휘호를 써 보냈다. 우남 이승만도 일제강점기 민족계몽에 앞장섰음을 치하, 조선일보 부활 축전을 보낸다.

일제 강점 40년 국내의 민족계몽운동은 외국의 독립운동보다 더 온갖 수모를 인내하는 형극의 길이 아닐 수 없었다. 저서 '지식인들의 아편'에서 프랑스 정치사회학자 레이몽 아롱은 말한다. "어설픈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역사의 진실을 어지럽히지 말라."

 

'과거'는 '외국'이나 같다

[유종호, "'과거'는 '외국'이나 같다," 조선일보, 2009. 12. 5, A31쪽; 前연세대 교수·문학평론가.]

일본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중반까지 우리에게 식민지주의 실천의 적대적 타자(他者)로 등장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서구 근대 문물을 신속하게 수용해서 근대화 추구의 선구적 모형으로 체감되기도 했다. 이러한 양면성은 우리의 대(對)일본 태도에도 불가피하게 양면성을 부여했고, 그것은 최남선·이광수 등의 '초기 반일(反日)'과 '후기 친일(親日)'이란 모순된 표층구조의 심층을 이룬다.

게다가 저들의 한국 지배는 사실상 반세기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또 일제 말 8년간은 '국민총동원 체제'라는 고도로 조직된 20세기 특유의 광신적 전체주의 체제가 극히 효율적으로 작동한 전시(戰時)였다. 이런 특수 사정은 당시의 제반 현상을 저항과 협조, 반일과 친일이란 이분법으로 접근하는 것을 피상적이고 비현실적이게 한다. 그런 맥락에서 최근 대통령소속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행위' 명단 발표는 우리의 마음을 심히 착잡하게 한다.

친일행위자를 양산한 것은 조선조의 몰락이다. 해방은 도둑처럼 왔다지만 망국은 갑자기 오지 않았다. 혹독한 왜란과 호란을 두 번씩 겪으면서도 속수무책이었던 역대 암주(暗主)와 그 측근들이 망국을 초래했다. 인과관계의 규명 없이 사회현상은 파악될 수 없다. 조선조의 붕괴는 대체권력인 점령군에게 굽실거리는 친일행위자의 양산을 야기했다. 친일파 양산의 원인 제공자인 역대 암주와 매국적 지배층의 명단도 작성 보완해야 일관성이 있고 취지에도 맞다.

'친일행위자'에도 적극적 원조가 있고 피동적 관련자가 있다. 경중(輕重)의 차이가 있다. 한말의 오적(五賊)을 비롯해서 작위 받은 '조선 귀족', 합병의 공로 다툼을 벌인 일진회원, 중추원 참의, 총독부 고관 등에 대해 토를 달 사람은 없다. 그런데 중죄인에 해당하는 이들 원조(元祖) 친일파와 일제강점기 말기에 강제적으로 동원된 인사를 일괄처리하는 것은 형평에 어긋날 뿐 아니라 자칫 역사 이해를 오도하기 쉽다.

영국 작가 L P 하틀리가 1953년에 낸 '중개자'란 소설은 "과거는 외국이다. 거기서 사람들은 다르게 산다"는 말로 시작된다. 이 말은 그 후 격언이 되다시피 했다. 왜 과거가 외국인가? 우리는 외국을 알지 못하며 외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많은 공부와 노력이 필요하다. 과거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그만큼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먼 과거건 근접 과거건 외국이기는 마찬가지다.

특히 1941년 이후의 전시 상황은 겪어보지 않고는 상상하기 어렵다. 모든 사람이 일본 군부가 독점적으로 제공하는 정보만을 접할 수 있었다. 일본의 저명한 배우 겸 만담가는 일본군이 압수한 미국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1942년 12월 싱가포르에서 보고 비로소 이기지 못할 전쟁이란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그 기술과 규모에 압도되어 무기에서도 열세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일본 본토의 주류도 이 지경이었으니 식민지에서는 오죽했을 것인가?

이런 판국에 모든 성인남자가 삭발해야 했고 전투모 아닌 모자를 쓰면 불심검문을 받았다. 집에서 쓰는 놋대야나 놋수저까지 내놓게 했다. 꿈도 일본말로 꾸라고 훈시했다. 10세 안팎의 초등학생을 솔뿌리 캐기 강제노역에 동원했다. 20세 안팎의 제 나라 청년들을 자살특공대로 동원하며 미쳐 날뛴 저들이 식민지의 명망가들을 어떻게 대했을 것인가? 그 실정에 대한 고려가 없다는 것은 '일제강점기'란 말을 무효화시키는 처사가 아닌가? 강제점령이 아니라 합의에 의한 국권 양도라는 저들 논리를 뒷받침해 주는 것이 아닌가?

근접 과거에 대한 연구 소홀, 역사의 모호성에 대한 인식 부족, 인간판단의 어려움에 대한 고뇌가 보이지 않는 기계적 분류와 나열은 반드시 시정되고 보완돼야 할 것이다.

 

노 전(前) 대통령 묘소에 보고서 바친 친일진상규명위원들

[사설, "노 전(前) 대통령 묘소에 보고서 바친 친일진상규명위원들," 조선일보, 2009. 12. 1, A39쪽.]

 성대경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과 상임위원, 일부 위원들이 28일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에 있는 노무현 전 대통령 묘소를 찾아가 '친일반민족행위 진상 보고서' 발간을 보고하고 보고서를 바쳤다고 한다. 성 위원장은 "(노무현) 대통령님 재임 중 청와대에서 드렸던 약속을 오늘 지키게 됐다"며 "대통령님이 살아계셨으면 누구보다 기뻐하셨을 것"이라고 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활동과 보고서 발간에는 377억원의 국가 예산이 들어갔다. 그렇다면 우선 세금을 낸 국민에게 보고서 발간 과정을 보고하고 그다음 나라를 되찾고 지키기 위해 목숨 바친 순국선열을 모신 독립기념관이나 국립현충원을 찾아가 보고서를 바치는 게 순서다. 그런데 규명위는 보고서를 낸 27일엔 보도자료 한 장 달랑 내고 바로 이튿날 노 전 대통령 묘소로 내려가 보고서를 바쳤다는 것이다.

강만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초대 위원장은 보고서에 실은 축사에서 "노 전 대통령이 당선인 시절 '취임하면 과거 청산을 해야겠으니 그때 도와달라'고 했다"고 밝혔다. 친일진상규명위는 2003년 노 전 대통령이 취임한 직후 첫 3·1절 기념사에서 "대한민국 역사는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한 역사"라고 대한민국 역사를 규정한 뒤 만들어졌다. 노 전 대통령이 진상규명위의 활동 지침을 미리 제시했던 셈이다. 진상규명위는 이번에 발간한 보고서에서 일제 말 강요에 의해 학병 권유 강연에 나갔거나 총독부 관변단체에 이름을 올렸어도 대한민국 헌법을 기초하고, 나라 발전에 큰 공을 세운 인재(人材)들을 길러내고, 6·25 전쟁 때 벼랑에 몰린 대한민국을 구하고, 종교·예술·언론 각 분야에서 오늘의 대한민국 토대를 만든 사람들은 가혹하게 친일 인사로 낙인 찍으면서도 좌파계열이거나 월북해 북한에서 고위직을 지낸 사람들 이름은 교묘하게 뺐다.

친일진상규명위는 11명의 위원 가운데 과반수 찬성으로 '친일반민족행위' 여부를 결정했다. 11명의 위원 중 노무현 대통령과 당시 여당에서 추천한 위원이 6명을 넘었다. 따라서 이들만 한목소리를 내면 누구든 '친일 반민족 행위자'의 멍에를 뒤집어쓸 수밖에 없었다. 실무 조사를 맡았던 50여명의 조사관이 과거 어떤 논문을 썼고, 어떤 이념적 성향을 갖고 있으며, 누구의 제자로 어떤 과정을 거쳐 채용됐는지 베일에 가려져 있다. 이 조사관들은 위원들이 자기들 의견에 반대 의사를 표시하면 노골적으로 반발·항명하며 사실상 파업을 벌였고 이 때문에 어느 위원은 회의에 나오지를 않게 됐다는 증언도 있다.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의 활동 진상을 규명할 진상조사위가 필요해진 셈이다.

 

탈북 여성의 뺨을 타고 흘러내린 굵은 눈물

[사설, "탈북 여성의 뺨을 타고 흘러내린 굵은 눈물," 조선일보, 2009. 12. 5, A31쪽.]

 4일 아침 신문들에 굵은 눈물 줄기를 선글라스 아래로 쏟아내며 흐느끼는 여인의 얼굴 사진이 크게 실렸다. 여인의 눈물은 쉼 없이 볼을 타고 흘러내려 턱에 방울로 맺혀 있었다. 여인은 깊이 눌러쓴 모자와 큰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리고 기자회견에 나와 북한의 처참한 인권상황을 증언한 탈북 여성이었다. "중국으로 탈출해 한국 남자와 아들을 낳고 살다 2003년 4월 북한으로 끌려갔다. 보위부원들이 '한국 종자를 낳았다'며 벌을 세웠고, 하루 한 끼만, 그것도 죽을 줬다. 나는 먹지 않고 두 살 아들이 울 때 조금씩 먹이면서 아들을 살려야겠다는 각오로 버텼다." 다른 탈북 여성의 증언 때 회견장은 더욱 조용해졌다. "2005년 8월 임신 7개월 때 중국에서 붙잡혀 북한으로 송환된 뒤 수용소에서 아들을 낳자 북한 관리자들이 '중국 아이를 낳았다며' 갓 태어난 아이를 엎어놓아 2시간 만에 질식사시켰다."

3일 두 여인이 참석한 서울 프레스센터 기자회견은 북한 김정일 위원장을 반(反)인도적 범죄 혐의로 국제형사재판소(ICC)에 제소하려는 민간 조사위원회가 마련했다. 증언자들은 "수용소에서 체계적인 고문과 구타를 당했고 여자들은 성적 수치와 폭행을 겪었다. 우리에게 가해졌던 범죄에 대한 책임을 묻고자 한다"고 말했다. 북한 권력을 고발하는 탄원서에는 북한 수용소의 모진 삶을 버텨낸 150명의 탈북자들이 서명했다.

북한은 함남 요덕을 비롯한 6곳의 정치범 수용소에 15만 4000여명을 가둬놓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탈북자들은 지난 몇년 한국·미국·유럽의 의회와 인권단체를 찾아다니며 북한 수용소에서 2차대전 때 나치 수용소보다 더한 고문과 강제노동, 성추행, 영아 살해가 자행되고 있다고 증언하고 있다. 미국 피터슨연구소의 마커스 놀랜도 선임연구원이 중국 내 탈북자 1346명과 한국 내 탈북자 300명을 조사해 지난달 발표한 설문결과에서 탈북자의 55%가 "북한 수용소에서 생체실험을 당했다"고 했다. "신생아 살해를 경험했다"는 응답자도 5%나 됐고, 30%는 1990년대 후반 북한 대기근 때 가족이 굶어 죽었다고 했다.

우리는 북한 동포들의 비참한 삶을 너무도 많이 듣고 보았다. 그래서 어느새 그 끔찍하고 처참한 모습을 보고서도 감각이 무뎌졌고 이제는 체념한 채 외면하는 듯한 분위기까지 나타나고 있다. 북한 인권운동가 수전 숄티 여사는 "훗날 역사는 북한 주민들이 고통받을 때 대한민국은 무엇을 했는지 물을 것"이라고 했다. 지금 이대로라면 우리는 아무 대답도 할 것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