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신앙  2009년 12월 6일 [특별155호]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하였으며"(렘 6:16).

 

 

옛신앙

 

Old-time Fai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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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신앙'이란, 옛부터 하나님의 선지자들과 주의 사도들이 가졌던 신앙, 오직 정확 무오(無誤)한 하나님 말씀인 신구약 성경에만 근거한 신앙, 오늘날 배교와 타협의 풍조에 물들지 않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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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교회문제:            W.C.C총회 반대 성명서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고려)는 제10차 W.C.C. 한국(부산)총회 개최반대에 관한 성명서를 발표하였다(기독교보, 2009. 10. 10, 10쪽). 그 내용을 싣는다.

"오는 2013년 한국 부산 벡스코에서 W.C.C.(World Council of Churches) 제10차 총회 개최 뉴스의 보도 앞에 경악스러움을 금치 못한다. W.C.C.는 기독교 이름을 가장하고, 공존, 평화, 환경, 인권, 하나 됨(일치) 드의 모토를 사용하여 정통 기독교를 저해하는 이른바 반(反)성경, 반(反)기독, 반(反)교회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이에 본 고단 제59회 총회(2009. 9. 22)는 이를 한국교회의 사탄적 재앙으로 규정하고, 강력히 반대하고 투쟁할 것을 결의했다.

[반대와 투쟁 사유]

-W.C.C.는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 기독교만이 아니라 타종교를 통해서도 가능하다는 종교다원주의를 주장하기 때문이다.

-W.C.C.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인간이 저술한 하나의 역사책이라는 인본주의 성경관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W.C.C.는 '영혼 구원'이 아닌 정치적 해방과 경제적 착취로부터의 해방, 그리고 사회 구조적인 악으로부터의 해방이 구원이라는 세속적 구원론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W.C.C.는 각 종교에 나타난 영적 능력과 신비를 동일한 성령의 역사로 보는 범신론적 종교혼합주의를 주장하기 때문이다.

-W.C.C.는 종교다원주의를 근거로, '복음전파'를 금할 뿐 아니라, 각 종교 간의 대화를 통해 각자 자기 종교를 잘 믿으면 된다는 선교 무용론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W.C.C.는 사회주의운동, 공산주의운동, 인권운동, 민주화운동 등에 주력해온 기독교 이름의 정치단체이기 때문이다.

[제의]

-진리를 사랑하고, W.C.C.의 모든 어둠의 불의들에서 주님의 교회를 지키기를 원하는 한국의 모든 보수교단들은 이 일에 공동으로 제휴할 것을 제의한다."

예장 합동 총회장의 담화문

[서정배, "담화문," 기독신문, 2009. 11. 4, 1쪽;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총회장.]

성 삼위 하나님의 은혜가 교단 산하 교회와 한국 교회 위에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세계교회협의회(WCC) 2013년 차기 총회 한국 유치에 대하여 교단 산하 노회와 교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드립니다.

우리 총회는 1948년에 개최된 WCC 창립총회에 대표를 파견하였습니다. 그러나 1959년 11월 24일 서울 승동교회당에서 모인 총회에서 WCC를 영구탈퇴하기로 결의하였습니다. 그리고 1965년 9월 23일-28일까지 서울 숭동교회당에서 모인 제50회 총회에서 "세계교회협의회(WCC)와 한국기독교회협의회(NCC)와 관계되는 단체와는 본 총회 원칙과 정책에 의하여 본 교단 교직자들은 개인 자격으로도 관계할 수 없고, 강단 교류를 할 수 없다"고 결의하였습니다.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는 1948년 8월 22일 암스테르담에서 44개국 147개 교회대표들이 모여 창설하였습니다. 그 후 시카코의 에반스톤(1954), 인도의 뉴델리(1961), 스웨덴의 웁살라(1968), 케냐의 나이로비(1975), 캐나다의 밴쿠버(1983), 호주의 캔버라(1991), 짐바브웨(1998) 브라질 남부 포르토알레그레(2006)등에서 열렸습니다.

회의 내용을 보면 우리의 신앙과 함께 하고 일치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외형적인 연합 강조, 저개발국가의 혁명 옹호, 공산권 교회들과 공산주의자들이 대거 WCC회원 가입, 인종차별 투쟁사업으로 무기 지원, 공산주의 게릴라 단체 지원, 로마 교황청과 불교 힌두교 모슬렘교 유대교 등의 참석, 모든 종교 인정, 다른 종교들도 결국은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라는 종교다원주의 인정, 집회 장소에 캐나다계 원주민들의 우상을 내걸음, 교수가 초혼제와 풍물울 발표하며 착취당했다는 하갈과 광주 .천안문에서 죽은 영혼들을 불러내는 초혼제를 열어 이를 성령의 강림으로 표현, 타종교와의 일치와 대화 협조를 최대 목표를 삼음, 궁극적으로 로마 카톨릭과 이방종교마저도 하나가 되는 것, WCC 내 많은 자유주의 교회 지도자들은 성경의 영감 무오 등을 믿지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죽음 부활 승천 재림 등을 믿지 않음, 교황의 절대 무오설이나 마리아 승천설 등도 모두 인정,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음을 인정하고 회교 불교 힌두교 유대교의 회의를 지원, 공산주의 마르크스주의적 세속적 종말관 수용, 구원은 자본주의로부터의 해방 계급사회에서의 해방, 동성애자들이 만든 교회 인정, 인종차별 투쟁 특별기금 원조로써 전 세계 19개 폭력단체 지원 등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WCC와 함께 할 수 없고 일치 될 수 없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고 하였습니다(고후 6:14-17). 또한 예수께서 두아디라 교회가 "여자 이세벨을 용납" 한 것을 책망하였습니다(계 2:20)

WCC 총회는 7-8년에 한 번 개최되며 전 세계 349개 회원교단의 교단 대표 및 취재진 등 4천여 명이 참석합니다. 그래서 세계교회협의회(WCC)가 종교올림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말에 현혹되지 말고 하나님에 대하여 어떻게 믿을 것과,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성경이 교훈한 것을 잘 분별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현대사회문제

외눈박이 친일반민족조사위의 발표보고

 [사설: "외눈박이 친일반민족조사위의 발표를 보고," 조선일보, 2009. 11. 28, A31쪽.]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27일 1905-1945년 일본 제국주의 강점 시기 1005명의 친일 반민족 행위 결정 내용을 담은 보고서를 발간하였다.

보고서에는 이완용 박제순처럼 조선왕조의 고관(高官)으로 일제에 붙어 나라를 팔아먹는 데 앞장선 대가로 작위를 받거나 친일 단체인 일진회 회장 이용구처럼 일왕에게 한일합병 청원서를 제출한 공로로 한일합방 공로 은사금(恩賜金)을 받았던 인물, 그리고 총독부 고위 관료로서 일제의 조선민족 말살 통치기구에서 핵심 역할을 했던 인물, 헌병·밀정·고등계 형사로서 독립운동가를 체포·고문해 죽음에 이르게 하고 일제의 손발이 돼 악질적으로 동포를 학대·탄압했던 인물들이 포함돼 있다.

이들은 대부분 광복 직후인 1949년 친일세력 청산을 위해 만들어졌던 반민족행위처벌특별위원회(反民特委)가 조사를 위해 작성했던 명단에 이미 올라 있던 인물들이다. 반민특위는 극악했던 일제의 민족 말살 통치 시기를 막 빠져나왔던 시기에 만들어져 국민 전체가 누가 일제를 위해 진짜로 몸과 마음을 팔았고, 누가 진짜 일제의 앞잡이로서 동포의 손에 수갑을 채우고 고문했는가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던 상황에서 활동했다. 반민특위 위원과 조사관들은 비밀 독립운동 단체의 회원으로서 일제의 통치에 맞선 독립운동가나 일제가 강제 징집했던 학병을 탈출해 중국 본토나 만주에서 광복군에 가담했던 인사들이었다. 조사관의 이름과 경력은 당시 언론에 공개됐다. 조사관들의 독립운동 체험과 국민들의 생생한 기억이 종합돼 작성한 반민특위 조사 대상이 688명이었다. 반민특위 총무과장 겸 조사관을 지낸 이원용씨는 "광복 직후의 친일파 청산 의지는 지금보다 훨씬 강했다. 반민특위가 작성했던 명단이 그 당시의 최선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이번에 4년 동안 377억원의 예산을 들인 조사결과라며, 60년 전 반민특위가 작성한 688명에 300여명을 추가하면서 유진오 백낙준 김활란 고황경 이숙종 등 교육계 인사, 김동인 김기창 서정주 유치진 노기남 등 문화·종교계 인사, 방응모 김성수 등 언론계 인사, 백선엽 신현준 등 군 원로들을 추가로 포함시켰다. 일제 말 전시동원 체제에서 일제의 강요로 학병 권유 연설을 했거나 그런 내용의 글을 썼거나 일제가 조선의 유지(有志)와 지식인들을 강제로 얽어매 조직했던 임전보국단 등 전쟁 지원을 위한 일제 관변 단체에 이름을 올렸다는 게 이유다.

그러나 일제의 학병 권유 강연장 단상(壇上)에는 일제가 강제로 동원한 조선의 유지들이 연사(演士)로 앉아 있었고, 단하(壇下)의 청중석에는 일제가 강제로 동원한 연희전문 보성전문 학생들이 앉아 있었다. 단상·단하가 함께 일제에 강제로 끌려나왔지만 이 자리가 진심을 말할 수 없는 자리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단상·단하가 나라 잃은 백성들의 설움을 안으로 삼키며 함께 울었다는 것을 세상이 모두 알고 있었다. 광복 후 학병 권유 연설장에서 연사들의 선동에 떠밀려 학병에 지원했다고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단하의 학생으로서 훗날 반민특위 조사관이 됐던 이들은 진짜 악질적 부일(附日) 협력자를 제외하고는 강제동원된 연사들을 문제 삼지 않았던 것도 이 때문이다. 언론에 학병 권유문을 발표한 사람 중에 자기가 진짜 일왕(日王)의 자식이나 된 듯이 날뛰던 무리도 있었다. 반민특위는 물론이고 당시 국민은 그들이 누군지 다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반민특위의 명단에는 그들의 이름만 올라 있었다.

일제 강압 통치하에서 중국과 미국으로 탈출했던 극소수 인사를 제외한 당시 조선의 지도급 인사들은 조선이 이민족(異民族)의 압제를 벗어나 독립의 날을 기약(期約)하려면 교육을 통해 인재를 키우고 언론을 통해 민족의 잠든 얼을 일깨우고 종교를 통해 정신적 자주(自主) 인간으로 재탄생해야 한다는 데 뜻을 같이했다. 태평양전쟁에 광분(狂奔)한 일제는 바로 이 대목을 약점으로 잡고 학교 문을 닫겠다, 신문사를 폐간하겠다, 교회 문을 닫겠다고 위협했던 것이다. 그러나 좌우 대립의 어느 한편에 서서, 처참한 식민지 현실에 무지(無知)하거나 무지한 체하는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과 조사관들은 유진오 백낙준이 보성전문·연희전문 학생들에게 민족의 진로를 일깨웠던 1000번의 강의에는 일부러 귀를 막고, 신채호 문일평 한용운이 우리 말 우리 글이 일제에 목 졸려 죽음에 몰리던 상황 속에서 한글을 붙들고 조선일보 동아일보 지상(紙上)을 통해 고구려의 웅대한 혼(魂), 백제의 영화(榮華), 신라 화랑(花郞)의 충용(忠勇)을 들어 잠든 민족의 정신을 일깨운 수천 편의 논설에는 눈을 감고, 노기남이 명동성당에서 무거운 짐을 진 식민지 백성을 어루만지던 강론을 애써 모른 체하며, 김활란 고황경이 봉건의 틀에 갇혀 숨죽여 살던 조선 여성을 해방시키려 노력했던 외로운 고투(苦鬪)를 외면한 채 그들 이마에 친일 부역자(附逆者)의 도장을 마구잡이로 찍어냈다.

광복 후 대한민국 헌법을 기초한 유진오, 그리고 백낙준은 고려대학과 연세대학 총장으로 두 대학을 세계의 대학으로 키우는 기틀을 만들었고, 김활란 고황경은 이화여대와 서울여대의 오늘을 일궜으며, 백선엽은 북한의 6·25 침략으로 낙동강변까지 밀려났던 전세(戰勢)를 다부동 전투의 선두에 서서 뒤엎어 대한민국을 지켜냈고, 신현준은 해병대를 이끌어 북한군을 몰아내고 9·28 서울 수복 후 중앙청을 탈환했으며, 소설가 김동인, 화가 김기창, 시인 서정주, 극작가 유치진 등은 모두 20세기 한국 예술의 밑거름을 뿌렸고, 김성수와 방응모는 자신의 전 인생과 전 재산을 민족언론, 민족학교의 건립에 쏟아부었다. 이들 중 상당수는 6·25 때 북한군에 피랍돼 이북(以北) 산하에 외롭게 뼈를 묻어야 했다.

외눈박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대한민국 수립 60년이 지난 지금 대한민국을 만들고 지키고 키운 이들을 친일의 오명(汚名) 속에 빠뜨려 파묻으려 하는 것은 과연 누구의 이익을 위해서이고 누구를 쓰러뜨리기 위해서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를 만든 전(前) 대통령은 취임 직후인 2003년 3·1절 기념사에서 "한국 현대사는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한 역사"라고 규정했다. 만일 대한민국이 정말 그런 나라였다면 오늘 우리가 5000년 역사 이래 처음으로 세계의 선진국을 목전(目前)에 두고 민족의 힘을 모을 수 있었겠는가. 이제 그들이 대답할 차례다.

'극일(克日) 대한민국'이 '친일파 나라'라니

 [박효종, "'극일(克日) 대한민국'이 '친일파 나라'라니," 조선일보, 2009. 12. 1, A38쪽; 서울대교수, 윤리교육과.]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친일파'로 낙인찍히면 갈 곳이 없다. 그야말로 세세대대로 '주홍글씨'가 새겨진 옷을 입고 살아야 한다. 연례행사처럼 이루어지는 대통령의 사면 대상도 될 수 없을뿐더러 그렇다고 일본이 "자신들보다도 더 일본을 사랑했던 한국인"이라고 하여 받아주는 것도 아니다.

더욱이 친일의 굴레를 쓴 사람들은 더 이상 우리 곁에 있지 못해 자기 변호조차 할 수 없으니 영락없이 부관참시를 당하는 판국이다. 그렇기에 민간기구도 아닌 국가기관이 친일 여부를 가늠할 때는 그야말로 역사와 민족 앞에 무한책임을 진다는 결연한 태도로 임해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당사자 본인에게도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짓는 일인 동시에 민족공동체가 이미 받은 깊은 상처에 소금까지 뿌리는 비열한 행위가 될 수밖에 없다.

최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모두 1005명의 친일행위자 명단을 발표했는데, 특징이라면 과거 반민특위가 작성한 명단에 교육계, 문화·종교계, 군 원로인사들을 대거 추가했다는 점이다. 이 명단을 보면서 드는 의구심이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재판에 임하는 재판관이 반드시 지켜야 할 규범인 "다른 편의 말을 들어라(audi alteram partem)"라고 하는 철칙을 왜 그토록 무시했을까 하는 점이다. 위원들이 편향된 역사의식과 특정이념에 사로잡혔기 때문이었을까. 이번처럼 부정확하고 제한된 자료에 의존하면서도 유족들의 이의제기를 대부분 묵살한다면 고발자만 있고 자기변호를 할 수 없었던 중세기의 마녀재판과 무엇이 다른가.

식민통치 35년이란 긴 세월이었다. 그랬기에 이 땅에 봄이 와도 '우리의 봄'이 아니라 '일제의 봄'이었고 하늘이 파래도 '우리의 하늘'이 아니라 '일제의 하늘'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땅과 하늘은 빼앗겼지만, 영혼까지 잃지는 않았다. 한 민족이 영혼을 잃지 않았다는 것은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다. 미국은 남북전쟁을 치른 후 노예해방을 했지만, 정작 남부의 많은 노예들은 그 자유를 반기지 않았다. 어떻게 살아갈까 하는 걱정이 앞섰던 그들은 몸만 노예가 아니라 마음도 노예였던 것이다. 아무리 하늘을 힘차게 날던 독수리도 긴 세월 닭장에 가두어 놓으면 닭처럼 되어 날기를 거부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그렇지 않았다. 몸은 묶여 있었으나 마음은 자유를 갈구하고 있었다. 일본말을 쓰고 창씨개명을 하며 신사참배를 하고 학도병이나 정신대에 끌려 나갈 수밖에 없었지만 일제가 패망하자 한결같이 약속이나 한 듯 "만세"를 부르며 거리로 뛰쳐나왔다. 신사참배를 했건 창씨개명을 했건 "천황 만세"를 외치며 할복자살한 한국인은 없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혹독한 일제하에서도 민족혼이 살아 숨쉬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어디선가 그 민족혼을 끊임없이 불어넣은 사람들이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들이 누구인가. 그들이야말로 대부분 언론인과 교육자, 종교인과 문인으로 활동한 사람들인데, 규명위는 일제시대를 살아남은 사람들이라고 하여 친일로 규정한 것이다.

조선의 지도급 인사였던 그들에 대해 일제는 더욱더 삼엄한 감시를 했고 특정행위를 강요했다. 그 결과 한두 개의 행적을 남겼을는지 모르나, 친일 부역자는 아니었다. 드러내놓고 저항은 하지 않았으나, 속으로는 민족혼을 고취했던 사람들이며, 일제에 무력으로 맞선 전사는 아니었으나, 수모를 당하면서도 민족혼이 잠들지 않도록 노심초사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해방이 되자 해외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들과 더불어 극일의 대한민국을 세우고 지키는 데 크게 헌신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규명위가 이들을 친일파로 단죄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승리했다"는 좌파들의 해묵은 주장을 두둔하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혼미한 해방정국에서도 대한민국을 일구어낸 건국 세력을 모욕하기 위함인가.

옛날에 형제들이 싸우면서 서로 "병신"이라고 욕하면 어른들이 타이르던 말이 있다. "형이 병신이면 동생은 뭐지?" 하는 되물음이었다. 아버지 세대를 친일파로 낙인찍으면 후손들은 항일 세대가 될 수 있는가. 가혹한 식민통치 아래 신음하던 아버지 세대는 형언할 수 없는 상처를 받은 피해자인데 "일제가 얼마나 악랄했으면 그렇게 했겠느냐"라는 말을 하기보다 마치 가해자처럼 "너 때문에 우리 민족이 얼마나 고통받았는지 아느냐"라는 식으로 몰아붙인다면 인민재판식 '아버지 죽이기'에 다름 아니다.

고대 로마인들은 나라의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마다 "누구에게 이익이 되는가" 라는 뜻의 '퀴 보노(cui bono)'라는 질문을 했다. 한창 민족의 역량을 모아 앞으로 나아가야 할 시점에서 식민시대를 살았다고 하여 친일의 굴레를 씌워 건국·호국세력을 욕보이면 누구에게 이익이 되는지 규명위에 묻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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