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페이지

사무엘 강해

김효성 목사

2023년 2월 1일 수정

자료 내려받기

 

머리말

 

주 예수 그리스도(마 5:18; 요 10:35)와 사도 바울(갈 3:6; 딤후 3:16)의 증거대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라는 고백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매우 기본적이고 중요하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진술된 대로(1:8), 우리는 성경의 원본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오류가 없이 기록되었고 그 본문이 “그의 독특한 배려와 섭리로 모든 시대에 순수하게 보존되었다”고 믿는다. 이것은 교회의 전통적 견해이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에서 전통적 히브리어 마소라 본문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며 야곱 벤 카임에 의해 편집한 제2 랍비 성경(봄버그판)을 표준적 본문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본다.

성경은 성도 개인의 신앙생활뿐 아니라, 교회의 모든 활동들에도 유일한 규범이다. 오늘날처럼 다양한 풍조와 운동이 많은 영적 혼란의 시대에,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가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묵상하기를 원하며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든 뜻을 알기를 원한다.

성경을 가지고 설교할지라도 그것을 바르게 해석하고 적용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올 것이다(암 8:11).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오고 있다. 많은 설교와 성경강해가 있지만, 순수한 기독교 신앙 지식과 입장은 더 흐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요구되는 성경 해석과 강해는 복잡하고 화려한 말잔치보다 성경 본문의 바른 뜻을 간단 명료하게 해석하고 잘 적용하는 것일 것이다. 사실상, 우리는 성경책 한 권으로 충분하다. 성경주석이나 강해는 성경 본문의 바른 이해를 위한 작은 참고서에 불과하다. 성도는 각자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성경을 읽어야 하고, 성경주석과 강해는 오직 참고서로만 사용해야 할 것이다.

 

제목차례

[사무엘상]

1장: 사무엘의 출생

2장: 엘리와 그 아들들의 죄

3장: 사무엘을 부르심

4장: 엘리의 죽음

5장: 블레셋에 재앙을 내리심

6장: 블레셋 사람들이 법궤를 돌려보냄

7장: 사무엘이 다스림

8장: 이스라엘이 왕을 요구함

9장: 사울이 사무엘을 만남

10장: 사울이 왕으로 선택됨

11장: 길르앗 야베스를 구원함

12장: 사무엘의 마지막 교훈

13장: 사울이 합당치 않게 제사 드림

14장: 요나단이 블레셋을 물리침

15장: 아말렉을 다 멸하지 않음

16장: 다윗에게 기름부음

17장: 다윗이 골리앗을 죽임

18장: 사울이 다윗을 미워함

19장: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 함

20장: 요나단이 다윗과 언약함

21장: 다윗이 아히멜렉에게 들림

22장: 사울이 제사장들을 죽임

23장: 다윗이 광야 요새로 피함

24장: 다윗이 사울의 옷자락을 벰

25장: 나발과 아비가일

26장: 다윗이 사울의 창과 물병만 취함

27장: 다윗이 블레셋으로 내려감

28장: 사울이 신접한 자에게 물음

29장: 다윗이 참전(參戰)을 모면함

30장: 다윗이 아말렉과 싸움

31장: 사울과 그 아들들의 죽음

 

[사무엘하]

1장: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슬퍼함

2장: 다윗이 유다의 왕이 됨

3장: 아브넬의 죽음

4장: 이스보셋의 죽음

5장: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됨

6장: 법궤를 옮겨옴

7장: 다윗에게 주신 약속

8장: 다윗의 승전들

9장: 므비보셋을 선대함

10장: 암몬 자손들을 물리침

11장: 다윗의 범죄

12장: 나단 선지자를 통한 책망

13장: 압살롬이 암논을 죽임

14장: 압살롬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옴

15장: 압살롬의 반역

16장: 시므이가 다윗을 조주함

17장: 후새의 모략

18장: 압살롬의 죽음

19장: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옴

20장: 세바의 반란

21장: 3년 기근

22장: 다윗의 시

23장: 다윗의 마지막 말, 다윗의 용사들

24장: 인구조사의 죄 

 

 

 서론

히브리어 성경은 사무엘서와 열왕기서가 각각 한 권씩이다. 주전 1세기경 성경을 필사한 서기관들(마소라 학자들)은 구약성경의 각 책에 있는 모든 절 수나 단어 수 등을 각 책의 끝에 기록했는데(이것을 마소라 피날리스 masora finalis라고 부름) 사무엘서와 열왕기서는 그것이 하나씩뿐이다. 봄버그판 이후 근래의 히브리어 성경은 둘씩으로 분리했다. 사무엘하 끝에는 이 책 곧 사무엘서의 절의 총계가 1506(엘레프 웨카메쉬 메오스 웨쉿솨)이라고 쓰여 있다. 헬라어 70인역(Septuagint)은 사무엘서와 열왕기서를 다 ‘왕국의 책’이라고 불렀고 각각 2권씩 즉 열왕기 1, 2, 3, 4이다. 그러나 라틴어 벌게이트역(Vulgate)은 영어성경과 한글성경처럼 이 책들을 사무엘상하와 열왕기상하로 나누어 불렀다.

사무엘서는 저자저작 연대가 분명하지 않으나, 그 내용의 범위를 볼 때 솔로몬 때나 그 이후 유다 나라의 한 선지자에 의해 기록되었을 것이다. 특히 사무엘상 27:6에 “아기스가 그 날에 시글락을 그에게 주었으므로 시글락이 오늘까지 유다 왕에게 속하니라”는 말은 이 책의 저작 연대가 남북 왕국이 나뉜 후임을 보인다.

사무엘상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 시대의 역사를 기록한다. 사울의 통치연대는 주전 1050-1010년이라고 본다. 사무엘상 1-8장은 선지자 사무엘의 활동에 대해, 사무엘상 9-15장은 사울 왕의 활동에 대해, 그리고 사무엘상 16-31장은 다윗의 피난 생활에 대해 증거한다. 사무엘상의 특징적 진리는 교만과 불순종이 사람의 실패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사울 왕의 실패를 통해 잘 증거되었다.

사무엘하는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인 다윗 시대의 역사를 기록한다. 다윗의 통치연대는 주전 1010-970년이라고 본다. 사무엘하 1-10장은 다윗 왕의 승리적 통치에 대해, 사무엘하 11-24장은 다윗 왕의 범죄와 고난에 대해 증거한다. 사무엘하의 특징적 진리는 첫째, 하나님께서 다윗 왕에게 메시아의 약속을 주셨다는 것과, 둘째, 하나님께서 성도의 죄에 대해 징계하신다는 것이다. 후자는 다윗 왕의 범죄와 그가 받은 징벌을 통해 잘 증거되었다.

 

본문 혹은 각주에 자주 사용된 약어

KJV

영어 King James Version.

NASB

영어 New American Standard Version.

NIV

영어 New International Version.

LXX

고대 헬라어 70인역.

Syr 

고대 수리아어역.

It 

고대 라틴어역.

Vg

고대 라틴어 Vulgate역.

BDB

Brown-Driver-Briggs, Hebrew Lexicon of the O. T.

KB

Koehler-Baumgartner, Lexicon in Veteris Testamenti Libros.

Langenscheidt 

Langenscheidt's Pocket Hebrew Dictionary.

NBD

The New Bible Dictionary. IVP.

Poole

Matthew Poole, A Commentary on the Holy Bible

JFB

Jamieson-Faussett-Brown, A Commentary.

 

 

 

사무엘상

 

1장: 사무엘의 출생

[1-2절]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라 하는 자가 있으니 그는 여로함의 아들이요 엘리후의 손자요 도후의 증손이요 숩의 현손이더라. 그에게 두 아내가 있으니 하나의 이름은 한나요 하나의 이름은 브닌나라. 브닌나는 자식이 있고 한나는 무자(無子)하더라.

본장은 선지자 사무엘의 출생에 대해 증거한다. 사무엘은 에브라임 산지에 살았던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의 아들이었다. 엘가나는 역대상 6장의 증거대로 레위 지파 사람이다(6:28, 34-38). 그러면 ‘에브라임 사람’이라는 말은 ‘에브라임 지파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고, ‘에브라임 지역의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에게는 두 아내가 있었다. 경건했어야 할 그가 두 아내를 가진 것은 하나님의 뜻을 어긴 일이었다. 하나님의 뜻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혼하는 것 곧 일부일처(一夫一妻)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면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긴다.

[3-5절] 이 사람이 매년에 자기 성읍에서 나와서 실로에 올라가서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며 제사를 드렸는데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여호와의 제사장으로 거기 있었더라. 엘가나가 제사를 드리는 날에는 제물의 분깃을 그 아내 브닌나와 그 모든 자녀에게 주고 한나에게는 갑절을 주니 이는 그를 사랑함이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니.

엘가나는 두 아내를 가진 부족이 있었으나 하나님을 섬기는 경건함도 있었다. 그는 매년 실로에 올라가 여호와께 경배하며 제사 드렸다. 당시에 성막은 실로에 있었다. 엘가나는 제사를 드리는 날에 제물의 분깃을 한나에게 갑절을 주었으나1) 여호와께서는 그로 아이를 갖지 못하게 하셨다. 자녀의 임신과 출산은 하나님께 달려 있다. 그는 사람의 생사화복(生死禍福)을 주관하시는 섭리자이시다.

[6-8절]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므로 그 대적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동하여 번민케 하더라. 매년에 한나가 여호와의 집에 올라갈 때마다 남편이 그같이 하매 브닌나가 그를 격동시키므로 그가 울고 먹지 아니하니 그 남편 엘가나가 그에게 이르되 한나여,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뇨?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뇨?

엘가나의 가정에는 한 아내의 시기와 심히 격동함과 다른 아내의 번뇌로 평안이 없었다. 브닌나는 교만했고 남에 대한 동정과 배려가 없었으며 한나는 보통 여자들처럼 연약하고 예민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갈등은 남편의 차별적 사랑 때문에 더욱 커졌다.

[9-11절] 그들이 실로에서 먹고 마신 후에 한나가 일어나니 때에 제사장 엘리는 여호와의 전 문설주 곁 그 의자에 앉았더라. 한나가 마음이 괴로와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서원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한나는 기도의 사람이었다. 그의 기도 생활은 심적 고통 중에 단련되었을 것이다. 그가 자녀를 갖지 못한 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었다. 그것은 그의 신앙과 인격 훈련을 위해 주신 일이었다. 그는 고통 중에 더욱 간절히 하나님을 사모하며 기도했고 심지어 서원 기도를 했다. 서원은 스스로 자신을 하나님께 묶는 간절한 기도이다.

[12-18절] 그가 여호와 앞에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 엘리가 그의 입을 주목한즉 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동하고 음성은 들리지 아니하므로 엘리는 그가 취한 줄로 생각한지라. 엘리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 한나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나의 심정을 통한 것뿐이오니 당신의 여종을 악한 여자로 여기지 마옵소서.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은 나의 원통함과 격동됨이 많음을 인함이니이다. 엘리가 대답하여 가로되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의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가로되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수색(愁色)이 없으니라.

한나는 여호와 앞에 오랫동안 기도했다. 그는 형식적으로 기도한 자가 아니고 참으로, 진실하게, 간절하게 기도한 자이었다.

[19-23절] 그들이 아침에 일찌기[일찍이] 일어나 여호와 앞에 경배하고 돌아가서 라마의 자기 집에 이르니라. 엘가나가 그 아내 한나와 동침하매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신지라. 한나가 잉태하고 때가 이르매 아들을 낳아 사무엘이라 이름하였으니 이는 내가 여호와께 그를 구하였다 함이더라. 그 사람 엘가나와 그 온 집이 여호와께 매년제와 그 서원제를 드리러 올라갈 때에 오직 한나는 올라가지 아니하고 그 남편에게 이르되 아이를 젖떼거든 내가 그를 데리고 가서 여호와 앞에 뵈게 하고 거기 영영히 있게 하리이다. 그 남편 엘가나가 그에게 이르되 그대의 소견에 선한 대로 하여 그를 젖떼기까지 기다리라. 오직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이에 그 여자가 그 아들을 양육하며 그 젖떼기까지 기다리다가.

엘가나가 그 아내 한나와 동침했고 여호와께서 그 여자를 생각하심으로 한나는 임신했고 때가 되어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사무엘’(쉐무엘)이라고 지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들으심을 받았다’는 뜻이라고 보인다(쉐무아엘). 한나는 그 아들을 양육하며 젖떼기까지 기다렸다. 아이가 젖떼는 나이는 보통 2-3살이었다.

[24-28절] 젖을 뗀 후에 그를 데리고 올라갈새 수소 셋과 가루 한 에바와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가지고 실로 여호와의 집에 나아갔는데 아이가 어리더라. 그들이 수소를 잡고 아이를 데리고 엘리에게 가서 한나가 가로되 나의 주여, 당신의 사심으로 맹세하나이다. 나는 여기서 나의 주 당신 곁에 서서 여호와께 기도하던 여자라. 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 여호와께서 나의 구하여 기도한 바를 허락하신지라.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 하고 그 아이는 거기서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한나는 사무엘을 젖뗀 후 그를 데리고 수소 셋과 밀가루 한 에바와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가지고 실로의 여호와의 집에 나아갔다. 한나는 생각에 변함이 없었고 하나님께 한 서원을 그대로 지켰다.

본장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엘가나 가정의 불화는 일부일처의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데서 시작되었고 브닌나의 교만과 시기 질투심은 그 불화를 증폭시켰다. 사람의 모든 불행은 죄 때문에 온다. 죄는 슬픔과 불행을 가져온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여 의를 행하는 자는 평안을 누릴 것이다(사 48:17-18). 우리는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야 하고 그때 가정에 평안도 있을 것이다.

둘째로, 한나는 아이를 갖지 못한 문제와 마음의 고통이 있었고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동시키므로 마음이 괴로워 울고 음식도 먹지 못했으나 그 고통 때문에 더욱 하나님을 찾았고 의지했고 그에게 기도했고 마침내 기도의 응답을 얻었다. 그는 간절히 기도했고 서원하며 기도했고 그의 기도는 마침내 응답을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한나를 생각하셨고 그를 긍휼히 여기셨고 그로 임신케 하셨고 아들을 낳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한나의 구한 것을 허락하셨다. 기도는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다. 주께서는,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강청의 기도, 즉 끈질긴 기도를 하며 또 낙망치 말고 기도하라고 교훈하셨다(마 7:7-8; 눅 11장; 18장). 우리는 어떠한 어려운 상황에서도, 어떠한 마음의 고통 중에서라도 낙심치 말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셋째로, 한나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아들을 주시면 그를 평생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서원했고 그 약속을 지켰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을 참으로 경외한 표이었다. 서원은 하나님과의 약속이다. 사람이 사람과 약속한 것도 자신이 지킬 수 없는 불가항력적 상황이 아니라면 지켜야 하는데, 하물며 하나님과 약속한 것이랴! 시편 15:4는 하나님의 집에 거할 자는 마음에 서원한 것이 해로울지라도 변치 않는 자라고 말했다. 우리는 하나님께 서원하거나 약속한 것이 있으면 반드시 지켜야 한다.

 

 

2장: 엘리와 그 아들들의 죄

1-11절, 한나의 기도

본문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한나의 기도이다. 한나는 하나님께 서원하며 아들을 주시기를 기도했고 그의 응답을 받아 사무엘을 낳았다. 그는 아이를 젖뗀 후에 그의 서원대로 실로의 하나님의 집에 올라가 그 아이를 바친 후(1:28) 하나님께 이 기도를 올렸다.

[1절] 한나가 기도하여 가로되 내 마음이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를 인하여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을 인하여 기뻐함이니이다.

한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즉 하나님의 호의와 기도 응답 때문에, 그의 마음에 즐거움을 얻었다. 또 그의 뿔은 여호와를 인하여 높아졌다. ‘뿔’은 ‘힘’을 가리킨다. 그는 전에 낙심하고 고민하였으나, 이제 힘을 얻게 되었다. 또 그의 입은 그의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다. 그의 원수들은 브닌나와 그 주위의 사람들을 가리킬 것이다. 그는 전에 그들 앞에서 할 말이 없었으나 이제는 말할 내용과 힘을 얻었다. 그가 이렇게 마음이 즐겁고 힘을 얻고 입이 열린 것은 그가 하나님의 구원을 인해 기뻐하기 때문이다. ‘그의 구원’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아들을 주심으로 번민과 슬픔에서 그를 건져주신 일을 가리킬 것이다.

[2절]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

‘거룩하신 이’는 모든 피조물들보다 초월하신 자라는 뜻이다. 그가 하나님을 거룩하신 이라고 부른 까닭은 주밖에 다른 이가 없고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시기 때문이다. ‘반석’은 사람이 의지하고 피할 곳, 곧 피난처를 말한다. 하나님같이 지혜와 권능이 있으시고 살아서 활동하시는 자는 없고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시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경외하고 의지하는 자들의 피난처시요 구원자이시다.

[3절]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보시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며 사람의 행동을 달아보시는 자이시다. 그는 사람들이 지식과 도덕성이 심히 부족함과 그들의 교만하고 오만함을 알고 계시며 그들이 심히 부패하였고 선을 행하기에 무력함을 알고 계신다. 그는 사람의 선악 여부와 선악의 정도를 달아보신다. 그는 모든 것을 공의로 판단하시고 심판하시고 보응하신다.

[4절] 용사의 활은 꺾이고 넘어진 자는 힘으로 띠를 띠도다.

사람들은 사람의 현재의 상태만 본다. 어떤 이는 용사이며 어떤 이는 넘어진 자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미래의 상태를 섭리하신다. 하나님의 섭리는 때때로 사람들의 기대와 정반대이기도 하다. 그는 용사들의 활이 꺾이게도 하시고 넘어진 자들, 즉 연약하고 무력한 자들이 힘을 얻어 일어나게도 하신다. 이런 일들은 다 섭리자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이며 사람들의 기대와 정반대이다.

[5절] 유족하던 자들은 양식을 위하여 품을 팔고 주리던 자들은 다시 주리지 않도다. 전에 잉태치 못하던 자는 일곱을 낳았고 많은 자녀를 둔 자는 쇠약하도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환경 여건을 정반대로 변화시키기도 하신다. 그는 사람들의 기대와 전혀 다르게 물질적 여유를 가지던 자가 먹을것을 위해 노동을 하게도 하시고, 주리던 자가 다시 주리지 않게도 하신다. 전에 잉태하지 못하던 자가 일곱 자녀를 낳게도 하시고, 많은 자녀를 둔 자가 쇠약하게도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의 물질적 여유나 자녀들의 많음을 자랑할 것이 없고 그것을 의지할 것도 없다.

[6-7절]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하나님께서는 주권적 섭리자이시다. 그는 사람들의 생사화복(生死禍福)을 주관하시는 자이시다. 한나는 신명기 32:39의 진리를 알고 있었다고 보인다.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와 함께하는 신이 없도다. 내가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 자 없도다.” 이사야 45:7도 같은 진리를 말한다.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8절]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드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위(位)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이는]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 위에 세우셨도다.

사람의 생명도, 돈도, 존귀와 영광도 다 하나님의 섭리의 손 안에 있다. 왜냐하면 땅의 기둥들이 여호와의 것이며,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 위에 세우셨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창조자이시기 때문에 그가 또한 온 세상을 통치하시고 주관하신다는 뜻이다. 창조자 하나님께서는 또한 섭리자 하나님이시라는 말이다.

[9절] 그가 그 거룩한 자들(카시도)2)[그의 성도]의 발을 지키실 것이요 악인으로 흑암 중에서 잠잠케 하시리니 힘으로는 이길 사람이 없음이로다.

하나님께서 그의 성도의 발을 지키신다는 것은 그의 성도로 실족치 않고 범죄치 않게 지키신다는 뜻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을 재앙 중에 던져 잠잠케 하실 것이며 마침내 지옥 캄캄한 흑암에 던지실 것이다. 회개치 않고 악을 행하던 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땅 위에서도, 또 장차 지옥에서도 변명할 말이 없을 것이다. 그들은 악의 벌을 받을 것이다. 심판자 하나님을 이길 사람은 아무도 없다.

[10절]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 하늘 우뢰로 그들을 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땅끝까지 심판을 베푸시고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로다 하니라.

‘자기 왕’이나 ‘자기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는 궁극적으로 메시아 곧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킬 것이지만, 또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왕 같은 제사장과 성령의 기름 부음 받은 자가 된 신약 성도들도 가리킬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시시때때로 우리에게 힘을 주신다.

[11절] 엘가나는 라마의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그 아이는 제사장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기니라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신 거룩하신 자이시고 사람의 행동을 달아보시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며 사람을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며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 주권적 섭리자이시다. 그는 온 세상에 사는 사람들을 선악간에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이시다. 우리는 섭리자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 한다. 참 하나님을 아는 것이 영생이요(요 17:3) 행복이다.

둘째로, 한나는 하나님을 인하여 즐거워했고 하나님을 인하여 힘을 얻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성도들의 발을 지키시며 그의 왕,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들에게 힘을 주신다. 우리는 섭리자 하나님 안에서 살아야 한다. 그는 우리의 모든 문제들의 해답이 되시며 우리의 기쁨과 힘이 되신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교훈하였고(빌 4:4) 또 “내게 능력 주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고백하였다(빌 4:13 전통본문). 우리는 우리의 기쁨과 힘이 되시는 하나님 안에서 살아야 하고 날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힘을 받아 누려야 한다.

 

12-36절, 엘리와 그 아들들의 죄

[12-17절]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자(베네 벨리야알)[벨리알의 아들들, 무가치한 자들(NASB), 악한 자들(NIV)]라.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더라. 그 제사장들이 백성에게 행하는 습관은 이러하니 곧 아무 사람이 제사를 드리고 그 고기를 삶을 때에 제사장의 사환이 손에 세 살 갈고리를 가지고 와서 그것으로 남비에나 솥에나 큰 솥에나 가마에 찔러 넣어서 갈고리에 걸려 나오는 것은 제사장이 자기 것으로 취하되 실로에서 무릇 그 곳에 온 이스라엘 사람에게 이같이 할 뿐 아니라 기름을 태우기 전에도 제사장의 사환이 와서 제사 드리는 사람에게 이르기를 제사장에게 구워 드릴 고기를 내라. 그가 네게 삶은 고기를 원치 아니하고 날것을 원하신다 하다가 그 사람이 이르기를 반드시 먼저 기름을 태운 후에 네 마음에 원하는 대로 취하라 하면 그가 말하기를 아니라. 지금 내게 내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억지로 빼앗으리라 하였으니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

사람이 창조자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혜와 지식의 시작이며 근본이며, 그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 모든 불행의 원인이다. 엘리의 아들들은 비록 제사장이었지만 하나님을 알지 못한 무가치한 자들이었고 그들의 종교생활은 생명 없는 형식에 불과했다. 그들은 제사장의 몫인 가슴과 앞넓적다리 외에 제사 드린 자들의 몫을 취한 것으로 보이며 심지어 제물의 기름을 단 위에 불사르기 전에도 제물을 취하려 했다(레 7:34). 그들은 제사를 멸시하는 큰 죄를 범하고 있었다.

[18-21절] 사무엘이 어렸을 때에 세마포 에봇을 입고 여호와 앞에 섬겼더라. 그 어미가 매년제를 드리러 그 남편과 함께 올라갈 때마다 작은 겉옷을 지어다가 그에게 주었더니 엘리가 엘가나와 그 아내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게 후사를 주사 이가 여호와께 간구하여 얻어 드린 아들을 대신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니 그들이 그 집으로 돌아가매 여호와께서 한나를 권고하사 그로 잉태하여 세 아들과 두 딸을 낳게 하셨고 아이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자라니라.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는 매년 실로에 올라갈 때 사무엘에게 작은 겉옷을 지어다 주었다. 하나님께서는 한나에게 세 아들과 두 딸을 더 낳는 은혜를 주셨다. 아이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자랐다.

[22-26절] 엘리가 매우 늙었더니 그 아들들이 온 이스라엘에게 행한 모든 일과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과 동침하였음을 듣고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느냐? 내가 너희의 악행을 이 모든 백성에게서 듣노라. 내 아들아, 그리 말라. 내게 들리는 소문이 좋지 아니하니라.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으로 범과케 하는도다. 사람이 사람에게 범죄하면 하나님이 판결하시려니와 사람이 여호와께 범죄하면 누가 위하여 간구하겠느냐 하되 그들이 그 아비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음이었더라. 아이 사무엘이 점점 자라매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더라.

엘리는 매우 늙었고 그 아들들이 온 이스라엘에게 행한 모든 일과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출 38:8)과 동침하였음을 들었다. 그가 아들들에게 그 잘못을 지적했으나, 그들은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들은 교만하고 완악했다. 그들이 이처럼 완악한 마음을 가진 것은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기 때문이었다.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여부는 그의 행실의 변화를 보고 알 수 있다. 아이 사무엘은 점점 자랐고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았다.

[27-30절] 하나님의 사람이 엘리에게 와서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 조상의 집이 애굽에서 바로의 집에 속하였을 때에 내가 그들에게 나타나지 아니하였느냐?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내가 그를 택하여 나의 제사장을 삼아 그로 내 단에 올라 분향하며 내 앞에서 에봇을 입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이스라엘 자손의 드리는 모든 화제를 내가 네 조상의 집에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나의 처소에서 명한 나의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바아트)[(발로) 차며](BDB, KJV, NASB)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의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스스로 살찌게 하느냐?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영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

하나님의 사람이 엘리에게 왔다. 하나님께서는 옛 시대에 그의 뜻을 전달하기 위해 하나님의 사람들을 예비하시고 보내시고 사용하셨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다. 오늘날에는 성경이 하나님의 살아 있는, 충만한 말씀이며,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고 바르게, 충실하게 전하는 설교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하나님의 사람이다.

하나님의 사람은 엘리에게 그의 아들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을 발로 차고 멸시했으나 그가 그 아들들을 하나님보다 더 중히 여겼다고 말했다. 그의 아들들의 죄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멸시한 것이었고 그의 죄는 그 아들들을 엄히 책망하며 징벌치 않은 것이었다. 자기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는 자기 자녀의 죄를 엄히 징벌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람은 또 엘리 자손들의 제사장직이 계속되지 못하고 폐해지리라고 선언하였다. 그 이유로 그는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길 것임이니라”(원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멸시하는 것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멸시하면 그는 우리를 멸시하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존중히 여기면 그도 우리를 더욱 사랑하시고 귀히 여기실 것이다.

[31-34절] 보라, 내가 네 팔(제로아)[‘팔’(KJV), ‘힘’(BDB, NASB, NIV)]과 네 조상의 집 팔을 끊어 네 집에 노인이 하나도 없게 하는 날이 이를지라. 이스라엘에게 모든 복을 베푸는 중에 너는 내 처소의 환난(차르)[곤경, 재난]을 볼 것이요 네 집에 영영토록 노인이 없을 것이며 내 단에서 내가 끊어 버리지 아니할 너의 사람이 네 눈을 쇠잔케 하고 네 마음을 슬프게 할 것이요 네 집에 생산하는 모든 자가 젊어서 죽으리라. 네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한 날에 죽으리니 그 둘의 당할 그 일이 네게 표징이 되리라.

하나님께서는 엘리의 자손들이 그를 슬프게 하고 그의 집에 영원히 노인이 없을 것이며 그의 두 아들인 홉니와 비느하스가 한 날에 죽을 것이며 그것이 그에게 증표가 되리라고 선언하셨다.

[35-36절] 내가 나를 위하여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키리니 그 사람은 내 마음, 내 뜻대로 행할 것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리니 그가 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영구히 행하리라. 네 집에 남은 사람이 각기 와서 은 한 조각과 떡 한 덩이를 위하여 그에게 엎드려 가로되 청하노니 내게 한 제사장의 직분을 맡겨 나로 떡 조각을 먹게 하소서 하리라 하셨다 하니라.

하나님께서 일으키실 ‘충실한 제사장’, 그의 마음과 그의 뜻을 행할 자,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견고한 집을 세우실 사람,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영구히 행할 사람은 제사장 사독을 가리킨 것 같다. 열왕기상 2:35, “제사장 사독으로 아비아달을 대신하게 하니라.”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엘리의 아들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멸시했고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과 동침하는 죄를 지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고 그의 계명을 지킬 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고 범죄치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을 참으로 알아야 한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영생이다.

둘째로, 엘리의 아들들은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하는 죄를 범하였다. 제사를 멸시하는 것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다. 우리는 진실한 마음과 정성으로 또 시간을 잘 지켜서 하나님께 예배드려야 한다(요 4:24).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을 멸시하지 말고 소중히 여겨야 한다.

셋째로, 엘리는 그의 아들들의 죄들을 엄히 징벌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보다 그의 아들들을 더 사랑했기 때문이다. 주 예수께서는 사람이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다”고 말씀하셨다(마 10:37). 우리는 가족들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해야 한다.

 

 

3장: 사무엘을 부르심

[1절] 아이[소년](NASB, NIV)3)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異像)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하나님께서는 옛 시대에 이상이나 꿈을 통해서 혹은 직접적으로 나타나셨다(민 12:6; 히 1:1). 그러나 때가 되어 그는 그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다. 예수께서는 사람이 되신 하나님이시다(요 1:14). 그는 하나님의 특별계시들 중의 특별계시이시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며 자신과 자신의 뜻을 나타내신다. 사도 바울은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말씀이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는 말씀이라고 말했다(딤후 3:16-17).

[2-9절]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때에 그가 자기 처소에 누웠고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 엘리에게로 달려가서 가로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가로되 나는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 그가 가서 누웠더니 여호와께서 다시 사무엘을[사무엘아 하고](KJV, NASB, NIV)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일어나서 엘리에게로 가서 가로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대답하되 내 아들아, 내가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 하니라.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한 때라. 여호와께서 세 번째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일어나서 엘리에게로 가서 가로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엘리가 여호와께서 이 아이[소년]를 부르신 줄을 깨닫고 이에 사무엘에게 이르되 가서 누웠다가 그가 너를 부르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라. 이에 사무엘이 가서 자기 처소에 누우니라.

하나님께서는 어느 날 밤 사무엘을 부르셨다. 그는 반복해서 음성으로 사무엘을 부르셨다. 그는 미디안 광야, 호렙산 부근에서 모세를 부르실 때도 음성으로 부르셨다(출 3:4).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온 후 호렙산에 모였을 때 그는 불과 구름과 나팔소리와 함께 내려오셨고 음성으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셨다(출 19:19).

[10-14절]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가로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이스라엘 중에 한 일을 행하리니 그것을 듣는 자마다 두 귀가 울리리라. 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말한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그 날에 그에게 다 이루리라. 내가 그 집을 영영토록 심판하겠다고 그에게 이른 것은 그의 아는 죄악을 인함이니 이는 그가 자기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자신들을 저주하되](NASB)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그러므로 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맹세하기를 엘리 집의 죄악은 제물이나 예물로나 영영히 속(贖)함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노라.

하나님께서 엘리의 집을 영영토록 심판하겠다고 말씀하신 것은 그의 아는 죄악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그가 자기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엘리의 집에 대해 맹세하기를, “엘리 집의 죄악은 제물이나 예물로나 영영히 속함을 얻지 못하리라”고 하셨다. 죄는 하나님의 징벌을 가져온다.

[15-18절] 사무엘이 아침까지 누웠다가 여호와의 집 문을 열었으나 그 이상(異像)을 엘리에게 알게 하기를 두려워하더니 엘리가 사무엘을 불러 가로되 내 아들 사무엘아 하니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가로되 네게 무엇을 말씀하셨느냐? 청하노니 내게 숨기지 말라. 네게 말씀하신 모든 것을 하나라도 숨기면 하나님이 네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사무엘이 세세히 말하고 조금도 숨기지 아니하니 그가 가로되 이는 여호와시니 선하신 소견대로 하실 것이니라 하니라.

사무엘은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엘리에게 숨김없이 다 말하였다.

[19-21절]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 말로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의 온 이스라엘이 사무엘은 여호와의 선지자로 세우심을 입은 줄을 알았더라.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다시 나타나시되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여호와의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자기를 나타내시니.

하나님께서는 사무엘과 함께 계셨다. 하나님께서 사람과 함께하심은 사람의 경건과 믿음과 의와 관계가 있다(시 5:4-6). 하나님께서는 또 사무엘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셨다. 또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온 이스라엘 백성은 사무엘이 여호와의 선지자로 세우심을 입은 줄을 알았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실로에서 그의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다시 나타나셨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말씀의 충만함을 얻어 백성에게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선포하고 가르칠 것이다.


본장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성경으로 말씀하신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딤후 3:16).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사모해야 하며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성경을 열심히 읽어야 한다.

둘째로, 엘리는 자녀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않다가 마침내 온 가정이 멸망당했다. 우리는 우리 자신만 성경을 읽지 말고 우리 자녀들도 성경을 읽도록 권면하고 부모로서 성경말씀으로 자녀들을 교훈하기를 힘써야 한다. 에베소서 6:4,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우리는 자녀 교육을 잘 해야 한다. 가정의 행복은 부부와 자녀들, 즉 가족들의 경건과 평안에 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엘리와 함께하지 않으시고 그를 징벌하셨으나, 사무엘과는 함께하셨다. 엘리는 무지함과 죄 가운데 있었고 사무엘은 하나님을 경외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성경 읽고 기도하기를 힘쓰며 그의 계명을 순종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길이다.

 

4장: 엘리의 죽음

[1-2절] 사무엘의 말이 온 이스라엘에 전파되니라. 이스라엘은 나가서 블레셋 사람과 싸우려고 에벤에셀 곁에 진치고 블레셋 사람은 아벡에 진쳤더니 이스라엘을 대하여 항오를 벌이니라. 그 둘이 싸우다가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 앞에서 패하여 그들에게 전쟁에서 죽임을 당한 군사가 4천명 가량이라.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 말씀하시는 때가 되었다. 블레셋과의 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은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일어난다.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패하여 4천명 가량이 죽었다.

[3-4절] 백성이 진으로 돌아오매 이스라엘 장로들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로 오늘 블레셋 사람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하니 이에 백성이 실로에 보내어 그룹 사이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의 언약궤를 거기서 가져왔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언약궤와 함께 거기 있었더라.

이스라엘 백성의 장로들은 백성들의 죄악과 제사장들의 부패 때문에 하나님께서 징벌하시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회개해야 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가져오면 승리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큰 잘못이었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는다면, 언약궤는 아무런 힘이 없을 것이다. 종교 의식 자체에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종교 의식보다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자의 마음이 더 중요하다. 참 회개와 믿음과 순종이 없는 종교 의식은 무의미하고 오히려 가증스러울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선지자를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사 1:12-13).

[5-11절] 여호와의 언약궤가 진에 들어올 때에 온 이스라엘이 큰 소리로 외치매 땅이 울린지라. 블레셋 사람이 그 외치는 소리를 듣고 가로되 히브리 진에서 큰 소리로 외침은 어찜이뇨 하다가 여호와의 궤가 진에 들어온 줄을 깨달은지라. 블레셋 사람이 두려워하여 가로되 신(神)이 진에 이르렀도다 하고 또 가로되 우리에게 화로다. 전일(前日)에는 이런 일이 없었도다. 우리에게 화로다. 누가 우리를 이 능한 신들의 손에서 건지리요. 그들은 광야에서 여러 가지 재앙으로 애굽인을 친 신들이니라. 너희 블레셋 사람들아, 강하게 되며 대장부가 되어라. 너희가 히브리 사람의 종이 되기를 그들이 너희의 종이 되었던 것같이 말고 대장부같이 되어 싸우라 하고 블레셋 사람이 쳤더니 이스라엘이 패하여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고 살륙이 심히 커서 이스라엘 보병의 엎드러진 자가 3만이었으며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더라.

여호와의 언약궤가 진에 들어올 때 온 이스라엘이 큰 소리로 외치자 땅이 울렸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옛날 애굽 사람들을 치셨던 일들과 애굽에서 나온 후의 많은 일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여호와의 궤가 진에 들어온 것을 알고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더욱 마음을 강하게 가지기를 서로 격려하였다.

이번 전투에서도 이스라엘은 패하여 3만명이나 죽었다. 또 하나님의 궤는 블레셋 사람에게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언하신 대로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의 그 두 아들에게 이와 같이 죽음의 벌을 내리셨다.

[12-15절] 당일에 어떤 베냐민 사람이 진에서 달려나와 그 옷을 찢고 그 머리에 티끌을 무릅쓰고 실로에 이르니라. 그가 이를 때는 엘리가 길 곁 자기 의자에 앉아 기다리며 그 마음이 여호와의 궤로 인하여 떨릴 즈음이라. 그 사람이 성에 들어오며 고하매 온 성이 부르짖는지라. 엘리가 그 부르짖는 소리를 듣고 가로되 이 훤화하는[떠들썩한] 소리는 어찜이뇨? 그 사람이 빨리 와서 엘리에게 고하니 때에 엘리의 나이 98이라. 그 눈이 어두워서 보지 못하더라.

엘리는 길 곁 자기 의자에 앉아 전쟁의 결과를 기다리며 특히 그 마음이 언약궤로 인해 떨렸다. 그의 나이는 98세이었다.

[16-18절] 그 사람이 엘리에게 고하되 나는 진중에서 나온 자라. 내가 오늘 진중에서 도망하여 왔나이다. 엘리가 가로되 내 아들아, 일이 어찌 되었느냐? 소식을 전하는 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 앞에서 도망하였고 백성 중에는 큰 살륙이 있었고 당신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임을 당하였고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나이다. 하나님의 궤를 말할 때에 엘리가 자기 의자에서 자빠져 문 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으니 나이 많고 비둔한 연고라. 그가 이스라엘 사사가 된 지 40년이었더라.

두 아들이 죽었고 하나님의 궤가 빼앗겼다는 말을 들었을 때 엘리는 자기 의자에서 자빠져 문 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는데 나이가 많고 몸이 둔한 까닭이었다. 그는 이스라엘 사사가 된 지 40년이었다.

[19-22절] 그의 며느리 비느하스의 아내가 잉태하여 산기[해산할 때]가 가까왔더니 하나님의 궤 빼앗긴 것과 그 시부(媤父)와 남편의 죽은 소문을 듣고 갑자기 아파서 몸을 구푸려 해산하고 죽어갈 때에 곁에 섰던 여인들이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라. 네가 아들을 낳았다 하되 그가 대답지도 아니하며 관념치도[관심을 두지도] 아니하고 이르기를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고 아이 이름을 이가봇[영광이 없다]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의 궤가 빼앗겼고 그 시부(媤父)와 남편이 죽었음을 인함이며 또 이르기를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므로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였더라.

그의 아들 비느하스의 아내는 임신하여 해산할 때가 가까웠는데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다는 것과 시아버지와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갑자기 아파서 몸을 구푸려 해산하였고 죽어가고 있었다. 그는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에 대답하지도 않은 채 “영광이 이스라엘에게서 떠났다”고 말하며 그 아이의 이름을 ‘이가봇’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하나님의 궤가 빼앗겼고 시아버지와 남편이 죽었기 때문이다.


본장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엘리 집에 선언된 심판은 그대로 이루어졌다.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한 날에 죽었다(2:34). 하나님께서는 노아 시대에 온 세상에 홍수 심판을 선언하시고 그대로 이루셨다. 그는 롯의 시대에 소돔성의 심판을 선언하시고 그대로 이루셨고, 후에 예루살렘 성의 멸망을 선언하시고 그대로 이루셨다. 하나님의 심판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그는 오늘날 세상에 불 심판을 경고하신다(벧후 3:7). 그 심판은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마지막 불 심판과 지옥 형벌을 두려워하고 그 심판을 대비해야 한다.

둘째로, 엘리와 두 아들은 하나님 앞에서 끝까지 회개치 않다가 마침내 죽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모든 사람에게 회개를 명하신다. 사도행전 17: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세례 요한은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고 말하였다(마 3:10). 요한계시록 2장-3장에 보면, 주께서는 에베소와 버가모와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회개하라고 말씀하셨다(계 2:5, 16; 3:19). 우리는 모든 죄를 회개해야 한다.

셋째로,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여호와의 언약궤를 가져오면 전쟁에서 이길 줄로 생각했으나, 하나님께서 함께하지 않으시면 언약궤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하나님의 언약궤 자체에 힘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가 그를 전심으로 믿고 의지하며 순종할 때 나타난다. 역대하 17:9,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호세아 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주 예수께서는 외식하는 유대 지도자들, 즉 십일조를 드리지만 의(義)와 사랑과 믿음을 버린 자들,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한 자들,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한 자들을 책망하셨다(마 23:23, 25, 28). 외식은 큰 죄악이다. 우리는 종교적 형식주의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5장: 블레셋에 재앙을 내리심

[1-3절] 블레셋 사람이 하나님의 궤를 빼앗아 가지고 에벤에셀에서부터 아스돗에 이르니라. 블레셋 사람이 하나님의 궤를 가지고 다곤의 당에 들어가서 다곤의 곁에 두었더니 아스돗 사람이 이튿날 일찌기[일찍이]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그 얼굴이 땅에 닿았는지라. 그들이 다곤을 일으켜 다시 그 자리에 세웠더니.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과의 전쟁에서 이겼고 하나님의 궤를 빼앗아 가지고 그들이 섬기는 신 다곤의 당에 들어가서 그것을 다곤 곁에 두었다. 하나님의 궤는 포로처럼 잡혀와 이방인 신전 안에 이방인 신상 곁에 놓여졌다. 이스라엘 하나님의 법궤는 이방신 다곤 앞에 굴복된 것 같았다. 그런데 아스돗 사람들이 이튿날 일찍 일어나 보니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 엎드러져 그 얼굴이 땅에 닿아 있었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었다. 그런 일은 분명히 여호와 하나님 외에는 하실 자가 없었다. 그들은 다곤을 일으켜 다시 그 자리에 세웠다.

[4-5절] 그 이튿날 아침에 그들이 일찌기[일찍이]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얼굴이 땅에 닿았고 그 머리와 두 손목은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다곤의 몸둥이만 남았더라. 그러므로 다곤의 제사장들이나 다곤의 당에 들어가는 자는 오늘까지 아스돗에 있는 다곤의 문지방을 밟지 아니하더라.

그 이튿날 아침에는 그 신상이 또 엎드러졌을 뿐 아니라, 머리와 두 손목이 끊어져 문지방에 있었다. 다곤을 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어제보다 더 크셨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블레셋 사람들 가운데서 자신의 살아계심과 크신 위엄과 능력을 증거하셨다.

[6-7절] 여호와의 손이 아스돗 사람에게 엄중히 더하사 독종의 재앙으로 아스돗과 그 지경을 쳐서 망하게 하니 아스돗 사람들이 이를 보고 가로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우리와 함께 있게 못할지라. 그 손이 우리와 우리 신 다곤을 친다 하고.

하나님께서는 다곤 신상을 치셨을 뿐 아니라, 독종 재앙으로 아스돗과 그 지경을 쳐서 큰 해를 주셨다. ‘독종’이라는 원어(오펠)는 ‘(부어오르는) 종기’를 가리킨다.4) 아스돗 사람들은 이 재앙이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내리신 것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 독종의 재앙은 하나님께서 내리신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방 세계에서 그의 살아계심을 나타내신 일이었다.

[8-9절] 이에 보내어 블레셋 사람의 모든 방백을 모으고 가로되 우리가 이스라엘 신의 궤를 어찌할꼬. 그들이 대답하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가드로 옮겨가라 하므로 이스라엘 신의 궤를 옮겨갔더니 그것을 옮겨간 후에 여호와의 손이 심히 큰 환난을 그 성에 더하사 성읍 사람의 작은 자와 큰 자를 다 쳐서 독종이 나게 하신지라.

블레셋 모든 방백들이 의논하고 그 궤를 가드로 옮기자 여호와의 손이 가드 성에 심히 큰 환난을 더하셨고 그 성의 작은 자나 큰 자를 다 쳐서 독종이 나게 하셨다. 그 독종은 전염성을 가진 종기이었다.

[10-12절] 이에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에그론으로 보내니라. 하나님의 궤가 에그론에 이른즉 에그론 사람이 부르짖어 가로되 그들이 이스라엘 신의 궤를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와 우리 백성을 죽이려 한다 하고 이에 보내어 블레셋 모든 방백을 모으고 가로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보내어 본처로 돌아가게 하고 우리와 우리 백성 죽임을 면케 하자 하니 이는 온 성이 사망의 환난을 당함이라. 거기서 하나님의 손이 엄중하시므로 죽지 아니한 사람들은 독종으로 치심을 받아 성읍의 부르짖음이 하늘에 사무쳤더라.

가드 사람들이 하나님의 궤를 에그론으로 보내자 에그론 사람들은 자기들을 죽이려고 한다고 부르짖으며 블레셋 모든 방백들을 모아 이스라엘 하나님의 궤를 그 본 처소로 돌려보내자고 의논했다. 사망의 환난이 극심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었다.


본장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블레셋 사람들이 섬기는 다곤을 엎드러뜨리셨고 그 머리와 두 손목을 끊어지게 하셨고 아스돗과 가드와 에그론 거민들을 독종 재앙으로 치셨다. 다곤은 죽은 신, 생명 없는 우상에 불과했다. 여호와께서는 온 세상의 유일한 하나님이시며 천지만물을 창조하셨고 홀로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다른 신들은 사람들이 고안하여 만들어낸 가짜 신들이며 우상들에 불과하다. 시편 96:5, “만방의 모든 신은 헛것이요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시고 참되시다. 우리는 살아계시고 참되신 여호와, 창조자 하나님만 믿고 섬기며 따라야 한다.

둘째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궤를 다시 찾아오는 것이 불가능하였으나 그 불가능한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블레셋 땅에 독종 재앙을 내리심으로 그들로 하여금 그 법궤를 이스라엘 땅으로 돌려보내게 하셨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자이심을 믿었고 바랄 수 없는 중에 하나님을 믿고 바랐다(롬 4:17-18). 우리는 어떤 어려운 상황이나 고난 중에서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자비와 능력을 믿고 의지하며 그에게 기도하고 그를 소망해야 한다.

셋째로, 사사 엘리의 손자는 이스라엘에게서 영광이 떠났다는 뜻으로 이가봇이라는 이름을 얻었으나(삼상 4:21), 하나님께서는 그 블레셋 사람들의 땅에서 그의 능력으로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을 옹호하셨다. 이사야 42:8,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이것은 다니엘서의 진리와도 통한다. 다니엘은 바벨론 나라에서 포로의 신분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때, 그 곳에서도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느부갓네살, 벨사살, 다리오 등 이방인들의 왕들은 다니엘의 하나님을 찬양하였다(단 2:47; 3:28-30; 4:37; 6:25-27). 우리는 영광의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6장: 블레셋 사람들이 법궤를 돌려보냄

본장은,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과의 전쟁에서 이겨 여호와의 법궤를 취하였으나 그것이 그들 성읍들에 큰 독종 재앙을 가져온 고로 그것을 이스라엘 땅으로 돌려보내게 된 일을 증거한다.

[1-4절] 여호와의 궤가 블레셋 사람의 지방에 있은 지 일곱 달이라. 블레셋 사람이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을 불러서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의 궤를 어떻게 할꼬? 그것을 어떻게 본처로 보낼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라. 그들이 가로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보내려거든 거저 보내지 말고 그에게 속건제를 드려야 할지니라. 그리하면 병도 낫고 그 손을 너희에게서 옮기지 아니하는 연고도 알리라. 그들이 가로되 무엇으로 그에게 드릴 속건제를 삼을꼬? 가로되 블레셋 사람의 방백의 수효대로 금독종 다섯과 금쥐 다섯이라야 하리니 너희와 너희 방백에게 내린 재앙이 일반임이니라.

하나님의 법궤가 7개월간 이방인들의 땅에 빼앗겨 있었다. 그러나 그 기간은 하나님께서 블레셋 땅에 재앙을 내리시고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신 기간이기도 했다. 블레셋 사람들은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을 불러 물었고 그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은 그 재앙이 하나님께서 내리셨으므로 블레셋 사람들의 방백들의 수효대로 금독종 다섯과 금쥐 다섯을 속건제물로 삼아 본 처소로 돌려보내어야 한다고 말했다.

[5-6절] 그러므로 너희는 너희 독종의 형상과 땅을 해롭게 하는 쥐의 형상을 만들어 이스라엘 신께 영화를 돌리라. 그가 혹 그 손을 너희와 너희 신들과 너희 땅에서 경하게 하실까 하노라. 애굽인과 바로가 그 마음을 강퍅케 한 것같이 어찌하여 너희가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겠느냐? 그가 그들 중에서 기이하게 행한 후에 그들이 백성을 가게 하므로 백성이 떠나지 아니하였느냐?

그들이 쥐의 형상을 말한 것은 독종의 재앙이 쥐가 전염시킨 병이었음을 보인다. 또 그들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애굽에서 내리신 열 가지 재앙들을 기억하면서 마음을 강퍅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7-9절] 그러므로 새 수레를 만들고 멍에 메어 보지 아니한 젖 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소에 메우고 그 송아지들은 떼어 집으로 돌려보내고 여호와의 궤를 가져다가 수레에 싣고 속건제 드릴 금 보물은 상자에 담아 궤 곁에 두고 그것을 보내어 가게 하고 보아서 궤가 그 본 지경길로 올라가서 벧세메스로 가면 이 큰 재앙은 그가 우리에게 내린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를 친 것이 그 손이 아니요 우연히 만난 것인 줄 알리라.

그들은 이 재앙이 과연 이스라엘 하나님께서 내리신 것인지 확인하기를 원했다. 그 송아지들을 떼어 집으로 돌려보낸, 멍에 메어보지 않은 젖소 두 마리가 처음 메는 새 수레를 메고 곧장 목적지로 가리라고 기대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제안을 한 것이다. 벧세메스는 레위인들의 성읍이었다(수 21:16).

[10-12절] 그 사람들이 그같이 하여 젖 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메우고 송아지들은 집에 가두고 여호와의 궤와 및 금쥐와 그들의 독종의 형상을 담은 상자를 수레 위에 실으니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까지 따라가니라.

블레셋의 방백들은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것은 그들이 그 재앙에서 피할 다른 길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 암소들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아마 그 떼어놓은 새끼들을 생각하며 울었겠지만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갔다. 하나님께서는 암소들까지도 감동하시고 인도하셔서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증거하셨다.

[13-16절] 벧세메스 사람들이 골짜기에서 밀을 베다가 눈을 들어 궤를 보고 그것의 보임을 기뻐하더니 수레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 큰 돌 있는 곳에 이르러 선지라. 무리가 수레의 나무를 패고 그 소를 번제로 여호와께 드리고 레위인은 여호와의 궤와 그 궤와 함께 있는 금 보물 담긴 상자를 내려다가 큰 돌 위에 두매 그 날에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께 번제와 다른 제를 드리니라. 블레셋 다섯 방백이 이것을 보고 그 날에 에그론으로 돌아갔더라.

벧세메스 사람들은 골짜기에서 밀을 베다가 눈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보고 기뻐하였다. 그 수레는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 큰 돌 있는 곳에 이르러 멈추었다. 무리는 수레의 나무를 패고 그 소를 번제로 여호와께 드렸다. 레위인들은 여호와의 궤와 그 궤와 함께 있는 금 보물 담긴 상자를 내려다가 큰 돌 위에 두었다. 그 날 벧세메스 사람들은 여호와께 번제들과 다른 제사들을 드렸다. 블레셋의 다섯 방백들은 이것을 보고 그들에게 임한 재앙이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내리신 재앙이었음을 확인하였고 그 날에 에그론으로 돌아갔다.

[17-18절] 블레셋 사람이 여호와께 속건제로 드린 금독종은 이러하니 아스돗을 위하여 하나요 가사를 위하여 하나요 아스글론을 위하여 하나요 가드를 위하여 하나요 에그론을 위하여 하나이며 드린 바 금쥐는 여호와의 궤를 놓은 큰 돌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견고한 성읍과 시골 동리 곧 다섯 방백에게 속한 사람의 모든 성읍의 수효대로였더라. 그 돌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에 오늘까지 있더라.

블레셋 사람들이 여호와께 속건제로 드린 금독종 다섯은 아스돗과 가사와 아스글론과 가드와 에그론의 방백들을 위해 각각 하나씩이었고, 드린 금쥐 다섯은 그들에게 속한 성읍들의 수효대로라고 보인다. 물론 그 다섯은 본문의 표현대로 모든 성읍들을 대표하였다.

[19-21절]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 고로 그들을 치사 (5만) 70인5)을 죽이신지라. 여호와께서 백성을 쳐서 크게 살륙하셨으므로 백성이 애곡하였더라. 벧세메스 사람들이 가로되 이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를 우리에게서 뉘게로 가시게 할꼬 하고 사자들을 기럇여아림 거민에게 보내어 가로되 블레셋 사람이 여호와의 궤를 도로 가져왔으니 너희는 내려와서 그것을 너희에게로 옮겨가라.

큰 사고가 생겼다. 그것은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 고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치셔서 5만 70명이 죽임을 당한 사고이었다. 이것은 블레셋 전쟁에서 죽은 3만 4천명보다(삼상 4:2, 10) 더 큰 숫자이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리신 추가적 징벌이었다. 벳세메스 사람들은 하나님께 대한 참된 두려움이 없었다. 그들이 하나님께서 금하신 하나님의 거룩을 침범한 것은 큰 죄이었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쳐서 많이 죽게 하셨다. 그들은 크게 애곡하였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심히 두려워하였고 기럇여아림 거민들에게 여호와의 궤를 가져가기를 원하였다.


본장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블레셋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에게 깨달음을 주셔서 법궤를 이스라엘 땅으로 돌려보내게 섭리하셨다. 그는 자기 영광을 이방인들에게 빼앗기지 않으셨다. 그는 세상에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며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항상 돌려야 한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암소까지도 주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이전에 나귀의 입을 열어 선지자 발람을 책망하신 적이 있으셨다(민 22:28). 그는 자기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사람들의 마음은 물론이고, 심지어 이성 없는 짐승까지도 감동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며(잠 3:6) 그의 주권적 섭리를 믿고 의지하며 그를 따라야 한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블레셋 사람을 독종 재앙으로 크게 치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의 거룩을 침범한 벳세메스 사람도 5만 70명이나 죽게 하셨다. 창조자와 섭리자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시고 지극히 거룩하시고 두려우시다.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지혜와 지식의 근본이며 시작이다. 우리는 창조자와 섭리자이신 하나님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기쁘게 섬겨야 한다(히 12:28).

 

7장: 사무엘이 다스림

[1-4절] 기럇여아림 사람들이 와서 여호와의 궤를 옮겨 산에 사는 아비나답의 집에 들여놓고 그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히 구별하여 여호와의 궤를 지키게 하였더니 궤가 기럇여아림에 들어간 날부터 20년 동안을 오래 있은지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나하)[슬퍼하며 여호와를 구하니라](BDB, KJV, NASB, NIV).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 섬기라.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제하고 여호와만 섬기니라.

블레셋 사람들이 돌려보낸 하나님의 궤는 기럇여아림으로 보내졌다. 기럇여아림은 바알라(수 15:9; 대상 13:6) 혹은 기럇바알(수 15:60; 18:14)로도 불린다. 법궤는 기럇여아림에 들어간 날부터 20년 동안 오래 거기에 있었다. 성막이 있었던 실로는 엘리 제사장이 하나님의 징벌로 죽은 후 황폐케 되었다고 보인다(렘 7:12, 14; 26:6, 9).

이스라엘 온 족속은 슬퍼하며 하나님을 구하였다. 20년의 세월이 흐른 후, 사무엘은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선지자와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활동하게 되었다. 그의 나이는 아마 40세 전후쯤 되었을 것이다.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이방신들을 섬기고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큰 진노를 받을 만한 일이다. 하나님의 사람 사무엘은 그들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이스라엘 백성의 영적 각성은 참된 회개로 시작되어야 했다. 그것은 모든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만 섬기는 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사무엘의 교훈을 순종했다. 그들은 이방신들과 우상들을 없애고 여호와 하나님만 섬겼다.

[5-6절] 사무엘이 가로되 온 이스라엘은 미스바로 모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리라 하매 그들이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그 날에 금식하고 거기서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라.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니라.

사무엘은 그들에게 미스바 기도회를 제안했다. 온 이스라엘 백성은 미스바에 모였다. 그들은 물을 길어 하나님 앞에 부었다. 물을 붓는 것은 자신들의 불결과 죄악을 인정하고 정결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는 뜻이 있다고 본다. 그들은 그 날 금식하고 그들의 죄를 고백하였다. 사무엘은 미스바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렸다. ‘다스린다’는 원어(솨파트)는 ‘재판한다’는 뜻인데, 그것은 그가 사사로서 백성을 재판하고 하나님의 공의를 시행하였음을 나타낸다.

[7-9절] 이스라엘 자손이 미스바에 모였다 함을 블레셋 사람이 듣고 그 방백들이 이스라엘을 치러 올라온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듣고 블레셋 사람을 두려워하여 사무엘에게 이르되 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쉬지 말고 부르짖어 우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게 하소서. 사무엘이 젖 먹는 어린양을 취하여 온전한 번제를 여호와께 드리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응답하셨더라.

이스라엘 백성은 큰 위기에 직면했다. 국가적 대 각성이 일어나려 한 때에 마귀의 시험이 닥친 것이었다. 개인의 신앙 성장과 교회의 부흥의 과정에는 반드시 위기들이 있다. 그것은 사탄의 시험이다. 그러나 회개한 이스라엘 백성은 그 위기를 잘 대처하였다. 기도는 바른 위기대처법이다. 성도가 기도하면 어떤 위기라도 잘 극복할 수 있다. 사무엘은 젖 먹는 어린양을 취하여 온전한 번제를 하나님께 드리고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했다. 온전한 번제는 하나님의 속죄의 은혜를 의지하고 온전한 헌신을 각오하는 뜻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과 그 백성의 기도에 응답하셨다.

[10-11절] 사무엘이 번제를 드릴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가까이 오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블레셋 사람에게 큰 우뢰를 발하여 그들을 어지럽게 하시니 그들이 이스라엘 앞에 패한지라. 이스라엘 사람들이 미스바에서 나가서 블레셋 사람을 따라 벧갈 아래에 이르기까지 쳤더라.

그 날에 하나님께서는 블레셋 사람들에게 큰 천둥을 발하여 그들을 어지럽게 하셨고 그들은 이스라엘 군대 앞에서 패하였고 이스라엘은 큰 승리를 거두었다. 하나님의 방법은 너무 쉬웠다. 큰 천둥을 조금 사용하신 것뿐인데, 그것으로 그 전쟁은 승패가 갈리었다.

[12-14절]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가로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에벤 하아제르)[도움의 돌]이라 하니라. 이에 블레셋 사람이 굴복하여 다시는 이스라엘 경내에 들어오지 못하였으며 여호와의 손이 사무엘의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을 막으시매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았던 성읍이 에그론부터 가드까지 이스라엘에게 회복되니 이스라엘이 그 사방 지경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도로 찾았고 또 이스라엘과 아모리 사람 사이에 평화가 있었더라.

에벤에셀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념하는 돌이었다. 블레셋 사람들은 전쟁에서 패한 후 다시는 이스라엘 경내에 들어오지 못했고 이스라엘은 그 사방의 땅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도로 찾았다.

[15-17절]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되 해마다 벧엘과 길갈과 미스바로 순회하여 그 모든 곳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렸고 라마로 돌아왔으니 이는 거기 자기 집이 있음이라. 거기서도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며 또 거기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더라.

사무엘은 사는 날 동안에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15절 이하에 세 번 나오는 ‘다스린다’는 원어도 6절의 말과 같이 ‘재판한다’는 단어이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사사로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공의를 시행하며 재판하였고 그들을 다스렸다. 그는 해마다 벧엘과 길갈과 미스바로 순회하여 그 모든 곳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그는 사사의 직무를 부지런히 수행하였다. 또 그는 세 성을 순회한 후에 라마로 돌아왔는데, 거기에 그의 집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거기서도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렸다. 또 그는 거기서 여호와 하나님을 위하여 단을 쌓았다. 선지자 사무엘은 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섬기는 사람이었다.

본장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신들을 버리고 전심으로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순수한 경건을 원하신다. 그는 우리가 하나님만 믿고 따르기를 원하신다. 영적 각성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이방신들을 버리고 하나님만 섬기는 순수한 경건과 그 결단으로 일어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의 은혜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그를 간절히 사모할 때까지 때때로 우리를 버려두신다. 그러나 그의 때에 그는 참 회개와 믿음과 영적 각성을 우리에게 허락하신다. 우리는 모든 죄를 철저히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말씀을 온전히 순종해야 한다.

둘째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지자 사무엘의 교훈을 순종하여 모든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만 섬기기로 결심한 때 위기가 찾아왔다. 블레셋 사람들이 쳐들어온 것이다. 신앙의 부흥과 성장 과정에는 마귀와 악령들의 시험이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도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는 많은 고난을 받으셨고 유대인들의 공회와 총독 빌라도의 법정에서 정죄되셨고 십자가에 죽으셨고 무덤에 묻히셨고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그 일을 이루셨다. 사도 바울은 세계 복음화를 시작한 그의 전도사역에서 많은 고난을 경험했다. 우리는 개인적, 교회적 신앙 부흥과 성장의 과정에 위기가 있고 마귀의 시험이 있음을 기억해야 하고, 그때 두려워하거나 당황하지 말고 인내하며 잘 대처해야 한다.

셋째로, 이스라엘 백성이 직면한 블레셋의 침공을 이길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에게 기도하는 것밖에 없었다. 오늘날도 마귀와 악령들의 온갖 시험을 이기는 길은 속죄신앙과 온전한 순종 중에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밖에 없다. 신앙 부흥과 성장에서 직면하는 영적 위기를 극복하는 길은 믿음과 기도뿐이다. 기도는 위기를 극복하는 성도들의 바른 방법이다. 성경과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람들은 기도로 위기를 극복한 자들이었다. 그것이 성경과 교회 역사가 증거하는 바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도우시는 에벤에셀의 하나님이시다.

 

 

8장: 이스라엘이 왕을 요구함

[1-3절] 사무엘이 늙으매 그 아들들로 이스라엘 사사를 삼으니 장자의 이름은 요엘이요 차자(次子)의 이름은 아비야라. 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사사가 되니라. 그 아들들이 그 아비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이(利)(베차)[불의한 이익]를 따라서 뇌물을 취하고 판결을 굽게 하니라.

사무엘은 늙었을 때 그의 아들들로 이스라엘의 사사를 삼았다. 그들은 이스라엘 땅의 가장 남쪽에 있는 브엘세바에서 아버지의 일들을 도운 듯하다. 그러나 그 아들들은 아버지 사무엘의 행위를 따르지 않았고 불의한 이익을 따라 뇌물을 취하였고 판결을 굽게 하였다.

사무엘은 몇 가지 점에서 잘못하였다. 첫째로, 그는 자녀 교육에서 실패하였다. 그는 나라를 잘 다스리기 위해 힘썼지만 가정을 돌보는 데는 실패하였다. 그는 먼저 가정을 잘 다스렸어야 하였다. 둘째로, 그는 그 아들들의 인격을 잘 모르고 사사로 세웠다. 그는 필경 보통 부모들처럼 자기 아들들을 좋게만 보는 편견을 가졌다. 셋째로, 그는 자기 아들들에 대해 권징을 시행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 아들들에 대해 엄격하지 않았다. 그는 그들에게서 사사직을 박탈하지 않았다.

[4-5절]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모여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열방과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

이스라엘 장로들은 사무엘이 늙었고 그 아들들이 바르게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장래를 위해 왕을 세우기를 요청하였다.

[6-9절]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 한 그것을 사무엘이 기뻐하지 아니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날까지 그들이 모든 행사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김같이 네게도 그리하는도다. 그러므로 그들의 말을 듣되 너는 그들에게 엄히 경계하고 그들을 다스릴 왕의 제도를 알게 하라.

사무엘은 이스라엘 장로들이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고 한 요청을 기뻐하지 않았다. 그것은 이제까지 그가 이스라엘의 통치자의 역할을 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율법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따라 나라를 공의로 다스리고자 힘썼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요청을 허락하셨지만 기쁜 허락은 아니었다. 그는 그의 뜻 가운데 그들의 요청을 허락하셨으나 그들의 요구가 결국 하나님을 버린 것임을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그들은 신정주의(神政主義)를 버리고 왕정주의(王政主義)를 택한 것이고 그것은 열방을 본받은 것이었다. 하나님의 교회가 이 세상을 본받는 것은 옳지 않다.

[10-18절] 사무엘이 왕을 구하는 백성에게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일러 가로되 너희를 다스릴 왕의 제도가 이러하니라. 그가 너희 아들들을 취하여 그 병거와 말을 어거케 하리니 그들이 그 병거 앞에서 달릴 것이며 그가 또 너희 아들들로 천부장과 오십부장을 삼을 것이며 자기 밭을 갈게 하고 자기 추수를 하게 할 것이며 자기 병기와 병거의 제구를 만들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너희 딸들을 취하여 향료 만드는 자와 요리하는 자와 떡 굽는 자를 삼을 것이며 그가 또 너희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의 제일 좋은 것을 취하여 자기 신하들에게 줄 것이며 그가 또 너희 곡식과 포도원 소산의 십일조를 취하여 자기 관리와 신하에게 줄 것이며 그가 또 너희 노비와 가장 아름다운 소년과 나귀들을 취하여 자기 일을 시킬 것이며 너희 양떼의 십분 일을 취하리니 너희가 그 종이 될 것이라. 그 날에 너희가 너희 택한 왕을 인하여 부르짖되 그 날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지 아니하시리라.

사무엘은 왕을 구하는 백성에게 그들을 다스릴 왕의 제도에 대해 말하였다. 본문에 ‘취한다’는 말이 여섯 번 나온다.6) 백성을 다스리고 다른 나라들과 견줄 수 있는 왕의 권세를 유지하려면 많은 사람들이 수고해야 할 것이다. 왕은 권세를 가지고 백성을 지배하는 자가 될 것이다. 그때 백성은 그들이 선택한 왕을 인해 고통을 당하여 부르짖을 것이지만, 여호와께서는 그들에게 응답하지 않으실 것이다.

[19-22절] 백성이 사무엘의 말 듣기를 거절하여 가로되 아니로소이다. 우리도 우리 왕이 있어야 하리니 우리도 열방과 같이 되어 우리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 사무엘이 백성의 모든 말을 듣고 여호와께 고하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들의 말을 들어 왕을 세우라 하시니 사무엘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성읍으로 돌아가라 하니라

이스라엘 백성은 사무엘의 말 듣기를 거절하였다.


본장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사무엘은 자녀 교육에 실패하였다. 그의 아들들은 그 아버지의 행위를 따르지 않았고 불의한 이익을 따라 뇌물을 취하여 판결을 굽게 하였다. 사무엘은 선지자의 일, 사사의 일은 잘 감당했으나 아들들을 바르게 교육하지는 못하였다. 교회의 일, 나라의 일도 중요하지만, 실상 먼저 자신의 일과 가정의 일이 중요하다. 그러나 부모가 자녀들을 바로 교육하는 것은 가장 어려운 일인 것 같다.

둘째로, 사무엘은 경건과 도덕성이 없는 자기 아들들을 사사로 세웠다. 사역의 계승은 세습적 방식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그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사역을 계승할 만한 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사사의 자격이 없는 자들이었고 마땅히 징벌을 받아야 할 자들이었다. 교회는 경건과 도덕성에 있어서 흠 없는 자들을 직분자들과 봉사자들로 세워야 한다.

셋째로, 이스라엘 장로들과 백성들은 하나님을 버렸고 하나님의 종 사무엘을 버렸고 열방같이 왕을 세우기를 원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왕이시며 성경은 우리의 삶의 정확무오한 유일한 규칙이다. 장로교회가 다수결주의를 택하지만 그것은 성경 진리 안에서일 뿐이다. 성경 진리를 떠난 다수결주의는 인본주의이다. 교회는 하나님만 왕으로 모시고 성경만 신앙생활의 유일한 규칙으로 믿고 행해야 한다.

 

 

9장: 사울이 사무엘을 만남

[1-4절] 베냐민 지파에 기스라 이름하는 유력한 사람이 있으니 그는 아비엘의 아들이요 스롤의 손자요 베고랏의 증손이요 아비아의 현손이라. 베냐민 사람이더라. 기스가 아들이 있으니 그 이름은 사울이요 준수한(바쿠르 와토브)[빼어나고 잘 생긴] 소년[청년]이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잘 생긴] 자가 없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는 더하더라. 사울의 아비 기스가 암나귀들을 잃고 그 아들 사울에게 이르되 너는 한 사환을 데리고 일어나 가서 암나귀들을 찾으라 하매 그가 에브라임 산지와 살리사 땅으로 두루 다니되 찾지 못하고 사알림 땅으로 두루 다니되 없고 베냐민 사람의 땅으로 두루 다니되 찾지 못하니라.

베냐민 지파 기스의 아들 사울은 인물이 빼어나고 잘 생긴 청년이었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는 더한 자이었다. 어느 날 아버지 기스는 암나귀들을 잃고 그 아들에게 그것들을 찾게 하였다. 사울은 아버지의 명한 대로 에브라임 산지와 살리사 땅 등을 두루 다녔으나 찾지 못하였다. 본문에 ‘두루 다녔다’는 말이 세 번 반복해 나오는 것은 사울이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부지런히 행하였음을 보인다.

[5-10절] 그들이 숩 땅에 이른 때에 사울이 함께하는 사환에게 이르되 돌아가자. 내 부친이 암나귀 생각은 고사하고 우리를 위하여 걱정하실까 두려워하노라. 대답하되 보소서, 이 성에 하나님의 사람이 있는데 존중히 여김을 받는 사람이라. 그가 말한 것은 반드시 다 응하나니 그리로 가사이다. 그가 혹 우리의 갈 길을 가르칠까 하나이다. 사울이 그 사환에게 이르되 우리가 가면 그 사람에게 무엇을 드리겠느냐? 우리 그릇에 식물이 다하였으니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릴 예물이 없도다. 무엇이 있느냐? 사환이 사울에게 다시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내 손에 은 한 세겔의 사분 일이 있으니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려 우리 길을 가르치게 하겠나이다. (옛적 이스라엘에 사람이 하나님께 가서 물으려 하면 말하기를 선견자에게로 가자 하였으니 지금 선지자(先知者)(나비 prophet)라 하는 자를 옛적에는 선견자(先見者)(로에 seer)라 일컬었더라.) 사울이 그 사환에게 이르되 네 말이 옳다. 가자 하고 그들이 하나님의 사람 있는 성으로 가니라.

그들이 숩 땅에 이른 때에 사울은 부친이 그들을 걱정하실까 염려하여 돌아가려 하였으나, 그의 수종자가 이 성에 하나님의 사람이 있는데 그에게 가서 묻자고 제안하였다. 사울은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또 약간의 예물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나아갔다.

[11-14절] 그들이 성을 향한 비탈길로 올라가다가 물 길러 나오는 소녀들을 만나 그들에게 묻되 선견자가 여기 있느냐? 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있나이다. 보소서, 그가 당신보다 앞섰으니 빨리 가소서. 백성이 오늘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므로 그가 오늘 성에 들어오셨나이다. 당신들이 성으로 들어가면 그가 먹으러 산당에 올라가기 전에 곧 만나리이다. 그가 오기 전에는 백성이 먹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가 제물을 축사한 후에야 청함을 받은 자가 먹음이라. 그러므로 지금 올라가소서. 금시로 만나리이다 하는지라. 그들이 성읍으로 올라가서 그리로 들어갈 때에 사무엘이 마침 산당으로 올라가려고 마주 나오더라.

사울이 사무엘을 찾아간 때는 그 성에 제사가 있는 날이었다. 그 당시에는 성막 제사가 정상적으로 행해지지 않았던 것 같다. 법궤가 있었던 실로는 황폐해졌고 법궤는 기럇여아림에 방치되어 있었던 것 같다(삼상 7:2). 사울과 그 수종자는 길에서 사무엘을 만났다.

[15-17절] 사울의 오기 전 날에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알게 하여 가라사대 내일 이맘때에 내가 베냐민 땅에서 한 사람을 네게 보내리니 너는 그에게 기름을 부어 내 백성 이스라엘의 지도자를 삼으라. 그가 내 백성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리라. 내 백성의 부르짖음이 내게 상달하였으므로 내가 그들을 돌아보았노라 하시더니 사무엘이 사울을 볼 때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이는 내가 네게 말한 사람이니 이가 내 백성을 통할하리라[다스리리라] 하시니라.

사울의 오기 전날에 여호와께서는 그 일을 사무엘에게 알게 하셨다. 하나님의 섭리는 자연스럽게, 우연하게, 그러나 신기하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의 방식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 날 사울을 그와 같이 사무엘에게 보내셨다.

[18-21절] 사울이 성문 가운데 사무엘에게 나아가 가로되 선견자의 집이 어디인지 청컨대 내게 가르치소서. 사무엘이 사울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선견자니라. 너는 내 앞서 산당으로 올라가라. 너희가 오늘날 나와 함께 먹을 것이요 아침에는 내가 너를 보내되 네 마음에 있는 것을 다 네게 말하리라. 사흘 전에 잃은 네 암나귀들을 염려하지 말라. 찾았느니라. 온 이스라엘의 사모하는 자가 누구냐? 너와 네 아비의 온 집이 아니냐? 사울이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이스라엘 지파의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 사람이 아니오며 나의 가족은 베냐민 지파 모든 가족 중에 가장 미약하지 아니하니이까?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말씀하시나이까?

사무엘은 자신이 선견자라고 사울에게 말한 후 그에게 암나귀를 찾았다는 것과 이스라엘이 사모하는 자가 바로 그라는 것을 말했다. 사울은 자신이 속한 베냐민 지파가 이스라엘 지파 중 가장 작은 지파이며 자기 가족이 그 중 가장 미약한 가족이라고 겸손히 말했다.

[22-24절] 사무엘이 사울과 그 사환을 인도하여 객실로 들어가서 청한 자 중 수석에 앉게 하였는데 객은 30명 가량이었더라. 사무엘이 요리인에게 이르되 내가 네게 주며 네게 두라고 말한 그 부분을 가져오라. 요리인이 넓적다리와 그것에 붙은 것을 가져다가 사울 앞에 놓는지라. 사무엘이 가로되 보라, 이는 두었던 것이니 네 앞에 놓고 먹으라. 내가 백성을 청할 때부터 너를 위하여 이것을 두어서 이때를 기다리게 하였느니라. 그 날에 사울이 사무엘과 함께 먹으니라.

사무엘은 준비시켜 둔 부분을 사울 앞에 두어 먹게 하였다.

[25-27절] 그들이 산당에서 내려 성에 들어가서는 사무엘이 사울과 함께 지붕에서 담화하고 그들이 일찌기[일찍이] 일어날새 동틀 때 즈음이라. 사무엘이 지붕에서 사울을 불러 가로되 일어나라. 내가 너를 보내리라 하매 사울이 일어나고 그 두 사람 사울과 사무엘이 함께 밖으로 나가서 성읍 끝에 이르매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사환으로 우리를 앞서게 하라. 사환이 앞서매 또 가로되 너는 이제 잠간[잠깐] 서 있으라.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네게 들리리라.

그들은 산당에서 내려가 성에 들어가서는 사무엘이 사울과 함께 지붕에서 담화하였다. 유대 땅의 집들은 지붕이 평평하여 여러 용도로 쓰였다. 그들은 동틀 때 즈음 일찍이 일어났다.


본장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사무엘에게 보내셨다. 그는 사무엘에게 “내일 이맘때에 내가 베냐민 땅에서 한 사람을 네게 보내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의 섭리는 아주 자연스럽게, 우연한 일같이, 자발적으로 이루어졌다. 사울은 아버지의 암나귀를 찾으러 이곳저곳을 다니다가 사무엘이 있는 동네까지 오게 되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우연하게, 또 자발적으로 이 동네까지 오게 되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반적 섭리의 방식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모든 일들의 배후에 있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깨달아야 한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장점이 있는 사울을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택하셨다. 사울의 장점은 무엇이었는가? 그는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였고 자기의 맡은 일을 부지런히 하였고 아버지께서 걱정하실까 염려했고 자기의 수종자의 제안도 들을 줄 알았고 하나님의 사람에게 예의를 갖출 줄 알았고 또한 자신을 작게 여긴 겸손한 사람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장점들이 있는 사울을 택하셨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좋은 점들은 본받아야 한다. 우리는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해야 하며 자기의 맡은 일을 부지런히 해야 하며 아랫사람의 제안도 좋은 것은 들을 줄 알아야 하고 자신을 작게 여기는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셋째로, 그러나 사울은 그의 장점을 끝까지 잘 지키지 못했다. 그는 끝까지 겸손하지 못하고 교만하였고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실패자가 되었다. 시작은 좋았지만 끝이 나빴다. 우리는 우리의 일생을 아름답게 마치기를 원한다. 사울의 실패의 원인은 교만 때문이다. 교만은 불순종으로 나가며 결국 패망을 가져온다. 사울이 끝까지 겸손하지 못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겸손과 순종은 은혜 받은 표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겸손히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

 

 

10장: 사울이 왕으로 선택됨

[1-4절] 이에 사무엘이 기름병을 취하여 사울의 머리에 붓고 입맞추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네게 기름을 부으사 그 기업의 지도자를 삼지 아니하셨느냐? 네가 오늘 나를 떠나가다가 베냐민 경계 셀사에 있는 라헬의 묘실 곁에서 두 사람을 만나리니 그들이 네게 이르기를 네가 찾으러 갔던 암나귀들을 찾은지라. 네 아비가 암나귀들의 염려는 놓았으나 너희를 인하여 걱정하여 가로되 내 아들을 위하여 어찌하리요 하더라 할 것이요 네가 거기서 더 나아가서 다볼 상수리나무에 이르면 거기서 하나님께 뵈려고 벧엘로 올라가는 세 사람이 너와 만나리니 하나는 염소 새끼 셋을 이끌었고 하나는 떡 세 덩이를 가졌고 하나는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가진 자라. 그들이 네게 문안하고 떡 두 덩이를 주겠고 너는 그 손에서 받으리라.

사울을 만나 함께 식사하고 지붕 위에서 밤늦도록 담화했던 사무엘은 새벽에 일어나 사울과 함께 밖으로 나가 성읍 끝에 이르러 잠시 서게 한 후에 기름병을 취하여 사울의 머리에 붓고 입맞추고, “여호와께서 네게 기름을 부으사 그 기업의 ‘지도자’(나기드)(혹은 ‘통치자’)를 삼지 아니하셨느냐?”고 말했다. 기름을 붓는 것은 성령을 부으셔서 그를 그 직분에로 구별함을 상징한다. 또 사무엘은 사울에게 하나님의 뜻을 확인할 몇 가지 구체적인 징조들도 말하였다.

[5-8절] 그 후에 네가 하나님의 산에 이르리니 그 곳에는 블레셋 사람의 영문[수비대]이 있느니라. 네가 그리로 가서 그 성읍으로 들어갈 때에 선지자의 무리가 산당에서부터 비파와 소고와 저와 수금을 앞세우고 예언하며 내려오는 것을 만날 것이요 네게는 여호와의 신이 크게 임하리니 너도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 사람[다른 사람]이 되리라. 이 징조가 네게 임하거든 너는 기회를 따라 행하라. 하나님이 너와 함께하시느니라. 너는 나보다 앞서 길갈로 내려가라. 내가 네게로 내려가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리니 내가 네게 가서 너의 행할 것을 가르칠 때까지 7일을 기다리라.

‘비파’(네벨)는 작은 하아프이며, ‘소고’(小鼓)는 손에 들고 치는 작은 북이며, ‘저’는 피리이며, ‘수금’(킨노르)은 작은 현악기다. ‘새 사람’이라는 원어(이쉬 아케르)는 ‘다른 사람’(KJV, NASB)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이전과 다른 사람이라는 뜻이다.

[9-13절] 그가 사무엘에게서 떠나려고 몸을 돌이킬 때에 하나님이[하나님께서] 새 마음을 주셨고 그 날 그 징조도 다 응하니라. 그들이 산에 이를 때에 선지자의 무리가 그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신이[영께서] 사울에게 크게 임하므로 그가 그들 중에서 예언을 하니 전에 사울을 알던 모든 사람이 사울의 선지자들과 함께 예언함을 보고 서로 이르되 기스의 아들의 당한 일이 무엇이뇨? 사울도 선지자들 중에 있느냐 하고 그 곳의 어떤 사람은 말하여 이르되 그들의 아비가 누구냐 한지라. 그러므로 속담이 되어 가로되 사울도 선지자들 중에 있느냐 하더라. 사울이 예언하기를 마치고 산당으로 가니라.

사울이 사무엘에게서 떠나려고 몸을 돌이킬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새 마음(레브 아케르)[다른 마음](KJV)을 주셨고 그 날 그 징조들도 다 이루어졌다. 그들이 산에 이를 때에 선지자의 무리가 그를 영접했고 하나님의 영께서 사울에게 크게 임하시므로 그는 그들 중에서 예언을 하였다. 그는 예언하기를 마치고 산당으로 갔다.

[14-16절] 사울의 숙부가 사울과 그 사환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디로 갔더냐? 사울이 가로되 암나귀들을 찾다가 얻지 못하므로 사무엘에게 갔었나이다. 사울의 숙부가 가로되 청하노니 사무엘이 너희에게 이른 말을 내게 고하라. 사울이 그 숙부에게 말하되 그가 암나귀들을 찾았다고 우리에게 분명히 말하더이다 하고 사무엘의 말하던 나라의 일은 고하지 아니하니라.

[17-19절] 사무엘이 백성을 미스바로 불러 여호와 앞에 모으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고 너희를 애굽인의 손과 너희를 압제하는 모든 나라의 손에서 건져내었느니라 하셨거늘 너희가 너희를 모든 재난과 고통 중에서 친히 구원하여 내신 너희 하나님을 오늘날 버리고 이르기를 우리 위에 왕을 세우라 하도다. 그런즉 이제 너희 지파대로 천 명씩 여호와 앞에 나아오라 하고.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을 미스바로 불러 여호와 앞에 모았다. 이스라엘 백성이 왕을 요구한 것은 하나님의 왕 되심을 거절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셨다. 그는 그들의 선택이 얼마나 잘못되었고 허망한 것인가를 깨닫게 하실 것이다.

[20-24절] 사무엘이 이에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가까이 오게 하였더니 베냐민 지파가 뽑혔고 베냐민 지파를 그 가족대로 가까이 오게 하였더니 마드리의 가족이 뽑혔고 그 중에서 기스의 아들 사울이 뽑혔으나 그를 찾아도 만나지 못한지라. 그러므로 그들이 또 여호와께 묻되 그 사람이 여기 왔나이까? 여호와께서 대답하시되 그가 행구[물건더미] 사이에 숨었느니라. 그들이 달려가서 거기서 데려오매 그가 백성 중에 서니 다른 사람보다 어깨 위나 더 크더라. 사무엘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여호와의 택하신 자를 보느냐? 모든 백성 중에 짝할 이가 없느니라 하니 모든 백성이 왕의 만세를 외쳐 부르니라.

사무엘은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가까이 오게 했다.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 베냐민 지파의 사울이 뽑혔다. 그가 백성 중에 서자 다른 사람보다 어깨 위나 더 컸다. 모든 백성은 왕의 만세를 외쳤다.

[25-27절] 사무엘이 나라의 제도를 백성에게 말하고 책에 기록하여 여호와 앞에 두고 모든 백성을 각기 집으로 보내매 사울도 기브아 자기 집으로 갈 때에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된 유력한 자들은 그와 함께갔어도 어떤 비류[무가치한 자들](NASB)는 가로되 이 사람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겠느냐 하고 멸시하며 예물을 드리지 아니하니라. 그러나 그는 잠잠하였더라.

사무엘은 나라의 제도를 백성에게 말하고 책에 기록하여 성소에 두었다. 사울을 따르는 자들도 있고 그를 멸시하는 자들도 있었다.


본장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택하신 일꾼을 준비시키시며 세우셨다. 그는 사울을 선지자 사무엘에게 보내셨고 그에게 기름을 부으셨고, 징조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고 확신케 하셨고 성령께서 그에게 새 마음을 주셨고 새 사람이 되게 하셨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친히 작정하시고 친히 이루신다. 고린도전 서 12:4-6,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랑하는 교회를 위해 작정하시고 준비시키신 일꾼들을 주실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일꾼들을 주시기를 소원하며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작정하시고 예비하신 이스라엘의 지도자 사울은 백성 중에서 합법적 방법으로 선택되었다. 모든 회중이 모여 그를 선택했다. 물론 교회의 직분자들은 회중의 모범이 될 만한 자이어야 한다. 사도행전 6:3,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사도 바울은 교회의 감독(장로)들을 세우려 할 때 우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를 세워야 할 것을 교훈하였다(딤전 3:2). 책망할 것이 없다는 말은 지식과 도덕성과 인격에 있어서 온전함이 있음을 뜻한다. 우리는 교회의 봉사자들을 선택하려 할 때 성경의 교훈과 합법적 방법을 따라야 한다.

셋째로, 사울이 왕으로 선택되었을 때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된 자들은 그와 함께갔으나 어떤 자들은 그를 멸시했다. 하나님의 일이 합법적으로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반대하는 자들이 있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멸시하고 불평하고 반대하는 자가 되지 말고 한 마음, 한 뜻, 한 사랑으로 협력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빌립보서 1:27,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가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일심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2:2-4,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2:14,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우리는 하나님의 일에 불평하고 반대하는 자가 되지 말고 이해하고 협력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11장: 길르앗 야베스를 구원함

[1-3절] 암몬 사람 나하스가 올라와서 길르앗 야베스를 대하여 진치매 야베스 모든 사람이 나하스에게 이르되 우리와 언약하자. 그리하면 우리가 너를 섬기리라. 암몬 사람 나하스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 오른눈을 다 빼어야 너희와 언약하리라. 내가 온 이스라엘을 이같이 모욕하리라. 야베스 장로들이 이르되 우리에게 이레[7일] 유예를 주어 우리로 이스라엘 온 지경에 사자를 보내게 하라. 우리를 구원할 자가 없으면 네게 나아가리라 하니라.

요단강 동편에서 암몬 사람 나하스가 길르앗 야베스를 향해 전쟁을 선포하였다. 암몬은 요단강 동편 길르앗 지방 동쪽 얍복강 남쪽에 있는 나라이었다. 암몬 사람 나하스는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 뿐만 아니라 또한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모욕하였다(2절).

[4-8절] 이에 사자가 사울의 기브아에 이르러 이 말을 백성에게 고하매 모든 백성이 소리를 높여 울더니 마침 사울이 밭에서 소를 몰고 오다가 가로되 백성이 무슨 일로 우느냐? 그들이 야베스 사람의 말로 고하니라. 사울이 이 말을 들을 때에 하나님의 신[영]에게 크게[갑자기] 감동되매 그 노가 크게 일어나서 한 겨리 소를 취하여 각을 뜨고 사자의 손으로 그것을 이스라엘 모든 지경에 두루 보내어 가로되 누구든지 나와서 사울과 사무엘을 좇지 아니하면 그 소들도 이와 같이 하리라 하였더니 여호와의 두려움이 백성에게 임하매 그들이 한 사람같이 나온지라. 사울이 베섹에서 그들을 계수하니 이스라엘 자손이 30만이요 유다 사람이 3만이더라.

야베스 사람들이 보낸 사자가 기브아에 와 이 소식을 전하자 모든 백성은 소리를 높여 울었다. 사울은 밭에서 돌아오다가 그 광경을 보고 그 상황을 알고 하나님의 영에게 갑자기 감동되었고 크게 분노하였다. 사울은 사람들을 이스라엘 모든 지경에 두루 보내었다. 여호와의 두려움이 모든 백성에게 임했고 모든 백성은 다 한 사람같이 모였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30만명이었고 유다 사람들은 3만명이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었다.

[9-11절] 무리가 온 사자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길르앗 야베스 사람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내일 해가 더울 때에 너희가 구원을 얻으리라 하라. 사자들이 돌아가서 야베스 사람들에게 고하매 그들이 기뻐하니라. 야베스 사람들이 이에 가로되 우리가 내일 너희에게 나아가리니 너희 소견에 좋을 대로 우리에게 다 행하라 하니라. 이튿날에 사울이 백성을 3대에 나누고 새벽에 적진 중에 들어가서 날이 더울 때까지 암몬 사람을 치매 남은 자가 다 흩어져서 둘도 함께한 자가 없었더라.

무리들은 야베스 사람들이 보낸 사자들에게 내일 그들을 돕겠다고 말했다. 이튿날 사울은 백성을 셋으로 나누고 새벽에 적진 중에 들어가서 날이 더울 때까지 암몬 사람들을 쳤고 함께한 자가 하나도 없이 다 흩어졌다. 이스라엘의 큰 승리요 암몬의 완전한 패배이었다.

[12-15절] 백성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사울이 어찌 우리를 다스리겠느냐 한 자가 누구니이까? 그들을 끌어내소서. 우리가 죽이겠나이다. 사울이 가로되 이 날에는 사람을 죽이지 못하리니 여호와께서 오늘날 이스라엘 중에 구원을 베푸셨음이니라. 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오라. 우리가 길갈로 가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 모든 백성이 길갈로 가서 거기서 여호와 앞에 사울로 왕을 삼고 거기서 여호와 앞에 화목제를 드리고 사울과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거기서 크게 기뻐하니라.

사울은 자신을 높이거나 자랑치 않았고 하나님께서 그 전쟁에서 그들로 이기게 하셨고 그들을 암몬 자손들의 손에서 구원하셨음을 인정하고 고백하였다. 사무엘은 모든 백성을 길갈로 모으고 여호와 앞에서 사울을 왕으로 삼았고 여호와 앞에 화목제를 드렸고 사울과 이스라엘 모든 사람들은 거기서 크게 기뻐하였다.


본장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성령께서는 사울을 크게 감동하셨고 암몬 족속들에게 대응하게 하셨다. 역사상, 하나님의 사람들은 다 성령의 사람이었다. 요셉은 하나님의 영이 그 속에 계신 자이었다(창 41:38). 모세의 수종자 여호수아도 성령께서 그 속에 계신 자이었다(민 27:18). 사사들도 다 성령을 받아 그 능력으로 활동했던 자들이었다(사 3:10; 6:34; 11:29; 13:25). 다니엘도 “그의 안에는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는 자”라고 불리었다(단 4:8, 18). 주님의 사도들은 성령의 능력을 받아 땅끝까지 주님의 증인이 되었다(행 1:8). 성령께서는 신약 성도들 속에 오셨고 영원히 거하시며 떠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생활과 봉사생활에 있어서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의 능력을 힘입고 의지하며 행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을 의지하여 살며 일해야 한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계획하신 일들을 위하여 친히 일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긴급히 필요한 때 사울에게 성령으로 오셔서 그를 감동하시며 일하게 하셨고, 이스라엘 백성의 단합이 필요한 때 모든 백성의 마음에 두려움을 주셔서 사울의 말을 듣고 한 사람같이 모여오게 하셨다. 그는 그 일을 친히 이루셨다. 사도 바울은,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고 말하였다(고전 3:6-7).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작정하신 일들을 친히 이루시는 섭리자이심을 알고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고 모든 일들을 그에게 맡기고 우리의 할 바를 담대히 행해야 한다.

셋째로, 사울의 고백대로,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원을 베푸셨다. 그들을 전쟁에서 이기게 하신 이는 바로 하나님이셨다. 전쟁의 승패는 하나님께 있다. 세상에서의 우리의 삶은 전쟁과 같다. 우리는 성령을 따라 행함으로써 몸의 죄성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다(갈 5:16). 교회의 건립은 오직 하나님의 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슥 4:6). 우리는 항상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는 자가 될 수 있다(고후 2:14). 우리는 우리에게 능력 주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빌 4:13).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날 영적 전쟁과 같은 우리의 삶과 봉사에 있어서 승리가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굳게 믿고 의지하며 담대히 행해야 한다.

 

12장: 사무엘의 마지막 교훈

[1-5절] 사무엘이 온 이스라엘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가 내게 한 말을 내가 다 듣고 너희 위에 왕을 세웠더니 이제 왕이 너희 앞에 출입하느니라. 보라, 나는 늙어 머리가 희었고 내 아들들도 너희와 함께 있느니라. 내가 어려서부터 오늘날까지 너희 앞에 출입하였거니와 내가 여기 있나니 여호와 앞과 그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내게 대하여 증거하라. 내가 뉘 소를 취하였느냐? 뉘 나귀를 취하였느냐? 누구를 속였느냐? 누구를 압제하였느냐? 내 눈을 흐리게 하는 뇌물을 뉘 손에서 취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그것을 너희에게 갚으리라. 그들이 가로되 당신이 우리를 속이지 아니하였고 압제하지 아니하였고 뉘 손에서 아무것도 취한 것이 없나이다. 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내 손에서 아무것도 찾아낸 것이 없음을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증거하시며 그 기름 부음을 받은 자도 오늘날 증거하느니라. 그들이 가로되 그가 증거하시나이다.

사무엘은 경건하고 도덕적인 지도자이었다. 그는 청렴결백하였다. 그는 그의 직분을 남용하여 다른 이의 소나 나귀를 취한 적이 없었고 누구를 속인 적도 없었고 누구를 압제한 적도 없었고 뇌물을 받은 적도 없었다. 그의 청렴결백함은 모든 백성들도 인정한 바이었다. 그는 모든 사람 앞에서 도덕적으로 인정받고 칭찬받는 참 지도자이었다. 사무엘은 이 점에서 모든 시대의 지도자들과 교회의 직분자들에게 모범이 된다. 사도 바울은 감독 즉 장로의 첫 번째 자격 요건이 ‘책망할 것이 없는 것’이라고 말하였다(딤전 3:2; 딛 1:6).

[6-11절] 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모세와 아론을 세우시며 너희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이는 여호와시니 그런즉 가만히 섰으라. 여호와께서 너희와 너희 열조에게 행하신 모든 의로운 일에 대하여 내가 여호와 앞에서 너희와 담론[변론]하리라. 야곱이 애굽에 들어간 후 너희 열조가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을 보내사 그 두 사람으로 너희 열조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 이 곳에 거하게 하셨으나 그들이 그 하나님 여호와를 잊은지라. 여호와께서 그들을 하솔 군장 시스라의 손과 블레셋 사람의 손과 모압 왕의 손에 붙이셨더니 그들이 치매 백성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섬기므로 범죄하였나이다. 그러하오나 이제 우리를 원수들의 손에서 건져내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를 섬기겠나이다 하매 여호와께서 여룹바알과 베단[삼손, 야일, 바락(70인역) 등으로 추측함]과 입다와 나 사무엘을 보내사 너희를 너희 사방 원수의 손에서 건져내사 너희로 안전히 거하게 하셨거늘.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과거의 역사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어떻게 행하셨고 그들은 하나님께 어떻게 행하였는지 말했다. 그는, 모세와 아론을 세우시며 그들의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이가 여호와시라고 말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낸 자는 모세가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이셨다. 하나님께서는 역사를 주관하시는 섭리자이시다. 그는 특히 자기 백성을 돌보시며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신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그들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이방인들의 신들을 섬김으로 범죄했고,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그들을 이웃 나라들의 손에 붙이셔서 고난을 당하게 하셨다. 그러나 그들이 그 고난 중에서 부르짖으며 회개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사사들을 구원자로 보내셔서 그들을 건져주셨고 다시 평안을 얻게 하셨다.

[12-15절] 너희가 암몬 자손의 왕 나하스의 너희를 치러 옴을 보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너희의 왕이 되실지라도 너희가 내게 이르기를 아니라. 우리를 다스릴 왕이 있어야 하겠다 하였도다. 이제 너희의 구한 왕, 너희의 택한 왕을 보라. 여호와께서 너희 위에 왕을 세우셨느니라. 너희가 만일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그 목소리를 듣고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지 아니하며 또 너희와 너희를 다스리는 왕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좇으면 좋으니라마는[거역하지 아니하면, 너희와 너희를 다스리는 왕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좇을 것이라(원문). 그러나]7) 너희가 만일 여호와의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면 여호와의 손이 너희의 열조를 치신 것같이 너희를 치실 것이라.

[16-18절] 너희는 이제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너희 목전에 행하시는 이 큰 일을 보라. 오늘은 밀 베는 때가 아니냐? 내가 여호와께 아뢰리니 여호와께서 우뢰[천둥]와 비를 보내사 너희가 왕을 구한 일 곧 여호와의 목전에 범한 죄악이 큼을 너희로 밝히 알게 하시리라. 이에 사무엘이 여호와께 아뢰매 여호와께서 그 날에 우뢰[천둥]와 비를 보내시니 모든 백성이 여호와와 사무엘을 크게 두려워하니라.

추수하는 때는 비가 안 오는 건기(乾期)이지만, 사무엘이 여호와께 아뢰자 여호와께서는 그 날에 천둥과 비를 보내셨고 모든 백성들은 여호와와 사무엘을 크게 두려워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왕을 구한 일이 크게 악한 일임을 천둥과 비로 밝히 알게 하셨다.

[19-25절] 모든 백성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당신의 종들을 위하여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우리로 죽지 않게 하소서. 우리가 우리의 모든 죄에 왕을 구하는 악을 더하였나이다. 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라. 너희가 과연 이 모든 악을 행하였으나 여호와를 좇는데서 돌이키지 말고 오직 너희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섬기라. 돌이켜 유익하게도 못하며 구원하지도 못하는 헛된 것을 좇지 말라. 그들은 헛되니라. 여호와께서는 너희로 자기 백성 삼으신 것을 기뻐하신 고로 그 크신 이름을 인하여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요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치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도(道)로 너희를 가르칠 것인즉 너희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신 그 큰 일을 생각하여 오직 그를 경외하며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진실히 섬기라. 만일 너희가 여전히 악을 행하면 너희와 너희 왕이 다 멸망하리라.

모든 백성은 그들이 왕을 구한 일이 하나님 앞에 크게 악한 일임을 깨달았다.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이 비록 왕을 구하는 이 일에서 큰 악을 행했지만 하나님을 떠나지 말고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며, 또 그들을 유익하게도 못하며 구원하지도 못하는 헛된 우상을 따르지 말라고 강조하였다. 이스라엘을 택하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크신 이름 때문에 그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또 사무엘은 그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하지 않고 선하고 의로운 말씀으로 그들을 가르칠 것이라는 그의 결심을 말하였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의무는 분명했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들의 마음을 다해 그를 섬겨야 하였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 악을 행하면 그들은 결국 다 멸망하고 말 것이다.


본장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하나님께서 주권적 섭리자이심을 증거했다. 그는 출애굽 사건과 그 후의 하나님의 징벌과 구원 등의 일들을 말했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왕이시며 그의 왕권을 부정하는 것이 결국 멸망할 큰 악이며 그러나 그들이 회개하면 그들이 하나님의 긍휼과 평안을 얻을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권적 섭리자이시며 우리의 왕이심을 믿어야 한다.

둘째로, 이스라엘 열조들은 하나님을 잊었고 그의 왕권을 부정하였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잊지 말고 그를 왕으로 알고 경외하고 섬기며 순종해야 하고, 이방의 헛된 신들과 우상들을 섬기지 말아야 한다. 그것들은 우리를 유익하게도 못하며 구원하지도 못하는 헛된 것들이다. 우리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고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를 사랑하고 믿고 의지하며 섬기고 순종해야 한다.

셋째로,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치 않겠다고 말했고 또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선하고 의로운 도로 가르치겠다고 말했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목사들과 장로들과 교사들과 권찰들이 본받아야 할 말씀이다. 우리는 개인적으로나 함께 모여서나 목사와 직분자들과 교인들을 위해 기도하기를 쉬지 말아야 한다. 또 우리는 개인적으로 성경 읽기를 힘쓰고 교회에서 성경말씀을 바르게 전하고 듣기를 사모하며 또 그것을 실천함으로 평안과 형통을 누리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 모두는 늘 말씀의 교훈과 기도로 살아야 한다.

 

 

13장: 사울이 합당치 않게 제사 드림

[1-4절] 사울이 왕이 될 때에 40세라. 그가 이스라엘을 다스린 지 2년에 이스라엘 사람 3천을 택하여 그 중에서 2천은 자기와 함께 믹마스와 벧엘산에 있게 하고 1천은 요나단과 함께 베냐민 기브아에 있게 하고 남은 백성은 각기 장막으로 보내니라. 요나단이 게바에 있는 블레셋 사람의 수비대를 치매 블레셋 사람이 이를 들은지라. 사울이 온 땅에 나팔을 불어 이르되 히브리 사람들은 들으라 하니 온 이스라엘이 사울의 블레셋 사람의 수비대를 친 것과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의 가증히 여김이 되었다 함을 듣고 길갈로 모여 사울을 좇으니라.

1절 원문은 “사울이 1년을 다스리니라”인 것 같다(MT, KJV).8) 본장은 사울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지 2년에” 즉 그의 통치 초기에 그가 범한 실수의 일을 전한다. 요나단이 게바에 있는 블레셋 사람의 수비대를 친 것이 발단이 되어 이스라엘과 블레셋과 전쟁을 하게 되었을 때의 일이었다. 백성들은 길갈로 모여 사울을 좇았다.

[5-7절]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과 싸우려 하여 모였는데 병거가 3만이요 마병이 6천이요 백성은 해변의 모래같이 많더라. 그들이 올라와서 벧아웬 동편 믹마스에 진치매 이스라엘 사람들이 위급함을 보고 절박하여 굴과 수풀과 바위틈과 은밀한 곳과 웅덩이에 숨으며 어떤 히브리 사람들은 요단을 건너 갓과 길르앗 땅으로 가되 사울은 아직 길갈에 있고 그를 좇은 모든 백성은 떨더라.

블레셋의 병력은 막강하였고 이에 비교하면 이스라엘 군대는 소수이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위급하여 숨을 만한 곳들로 다 숨고 심지어 어떤 이들은 요단강 동쪽으로 피신하기까지 하였다.

[8-12절] 사울이 사무엘의 정한 기한대로 이레를 기다리되 사무엘이 길갈로 오지 아니하매 백성이 사울에게서 흩어지는지라. 사울이 가로되 번제와 화목제물을 이리로 가져오라 하여 번제를 드렸더니 번제 드리기를 필하자 사무엘이 온지라. 사울이 나가 맞으며 문안하매 사무엘이 가로되 왕의 행한 것이 무엇이뇨? 사울이 가로되 백성은 나에게서 흩어지고 당신은 정한 날 안에 오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은 믹마스에 모였음을 내가 보았으므로 이에 내가 이르기를 블레셋 사람은 나를 치러 길갈로 내려오겠거늘 내가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치 못하였다 하고 부득이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

사울은 사무엘의 정한 기한대로 7일을 기다렸지만 그가 오지 않았고 백성이 그에게서 흩어지고 있었다. 그는 번제와 화목제물을 가져오게 해 번제를 드렸다. 일반인은 드릴 수 없는 제사를 드린 것이다. 사무엘은 아론의 자손 제사장이 아닌 레위인이었지만(대상 6:22, 28)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선지자의 직무와 제사 직무를 맡기셨다.

[13-18절]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니스칼타)[어리석게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영히 세우셨을 것이어늘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그 백성의 지도자를 삼으셨느니라 하고 사무엘이 일어나 길갈에서 떠나 베냐민 기브아로 올라가니라. 사울이 자기와 함께한 백성을 계수하니 6백명 가량이라.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과 그들과 함께한 백성은 베냐민 게바에 있고 블레셋 사람은 믹마스에 진쳤더니 노략군들이 3대로 블레셋 사람의 진에서 나와서 한 대는 오브라 길로 말미암아 수알 땅에 이르렀고 한 대는 벧호론 길로 향하였고 한 대는 광야를 향한 스보임 골짜기가 내려다 보이는 지경 길로 향하였더라.

사무엘은 사울에게 왕이 어리석게 행하였다고 분명하고 직선적이게 말하였다. 하나님의 뜻과 명령을 어기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또 사무엘은 그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처분을 전했다. 개인의 생사화복(生死禍福)과 나라의 흥망성쇠(興亡盛衰)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일을 섭리하시는 자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어야 한다.

[19-23절] 때에 이스라엘 온 땅에 철공이 없어졌으니 이는 블레셋 사람이 말하기를 히브리 사람이 칼이나 창을 만들까 두렵다 하였음이라. 온 이스라엘 사람이 각기 보습[쟁기날]이나 삽[곡갱이]이나 도끼나 괭이[혹은 ‘낫’]를 벼리려면[날카롭게 하려면] 블레셋 사람에게로 내려갔었는데 곧 그들이 괭이나 삽이나 쇠스랑이나 도끼나 쇠채찍이 무딜 때에 그리하였으므로 싸우는 날에 사울과 요나단과 함께한 백성의 손에는 칼이나 창이 없고 오직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에게만 있으니라. 블레셋 사람의 부대가 나와서 믹마스 어귀에 이르렀더라.

당시에, 이스라엘 온 땅에는 철공이 없었다. 블레셋 사람들이 히브리 사람들 곧 이스라엘 사람들이 칼이나 창을 만들까봐 없앤 것이었다. 그러므로 싸우는 날에 사울과 요나단과 함께한 백성들의 손에는 칼이나 창이 없었고 오직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에게만 있었다. 그 전쟁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른 도구들을 들고 참여하였다.


본장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사울이 전쟁에 나가기 전에 하나님께 번제를 드린 것은 믿음의 행위가 아니었다. 참 믿음은 불순종으로 나타날 수 없다. 믿음의 본질은 순종이다. 참된 믿음은 순종으로 나타나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참으로 믿고 인내하며 순종해야 한다.

둘째로, 사울이 하나님의 뜻을 어긴 것은 하나님보다 사람들과 환경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잠언 29:25,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사람이 섭리자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사람들과 환경만 볼 때 범죄하기 쉽다. 우리는 사람들이나 환경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순종해야 한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폐하시고 그의 마음에 합한 자를 세우기를 원하셨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범사에 그를 인정하고 그의 계명에 순종하는 자를 가리킨다. 그는 이 세상에서도 평안을 얻고 형통할 것이며 장차 영생의 나라에 넉넉히 들어갈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기를 소원해야 한다.

 

14장: 요나단이 블레셋을 물리침

1-23절, 요나단이 블레셋을 물리침

[1-5절] 하루는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자기 병기를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건너편 블레셋 사람의 부대에게로 건너가자 하고 그 아비에게는 고하지 아니하였더라. 사울이 기브아 변경 미그론에 있는 석류나무 아래 머물렀고 함께한 백성은 6백명 가량이며 아히야는 에봇을 입고 거기 있었으니 그는 이가봇의 형제 아히둡의 아들이요 비느하스의 손자요 실로에서 여호와의 제사장이 되었던 엘리의 증손이었더라. 백성은 요나단의 간 줄을 알지 못하니라. 요나단이 블레셋 사람의 부대에게로 건너가려 하는 어귀 사이 이편에도 험한 바위가 있고 저편에도 험한 바위가 있는데 하나의 이름은 보세스요 하나의 이름은 세네라. 한 바위는 북에서 믹마스 앞에 일어섰고 하나는 남에서 게바 앞에 일어섰더라.

블레셋 사람들과 이스라엘 사람들은 전쟁 중에 대치 상태에 있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매우 어렵고 위태한 상황에 있었다. 요나단은 믿음이 독실한 사람이었고 블레셋 사람들을 먼저 공격하고자 하는 믿음의 소원을 가지고 있었다. 엘리의 증손인 아히야는 에봇을 입고 사울과 함께 있었다. 그는 제사장의 직무를 행하고 있었다.

[6-10절] 요나단이 자기 병기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 할례 없는 자들의 부대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 병기 든 자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의 마음에 있는 대로 다 행하여 앞서 가소서. 내가 당신과 마음을 같이하여 따르리이다. 요나단이 가로되 보라, 우리가 그 사람들에게로 건너가서 그들에게 보이리니 그들이 만일 이같이 우리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너희에게로 가기를 기다리라 하면 우리는 우리 곳에 가만히 서서 그들에게로 올라가지 말 것이요 그들이 만일 이같이 말하기를 우리에게로 올라오라 하면 우리가 올라갈 것은 여호와께서 그들을 우리 손에 붙이셨음이니 이것이 우리에게 표징이 되리라 하고.

요나단은 블레셋 사람들을 하나님의 언약의 표인 할례가 없는 자들 곧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지 못하는 자들이라고 말했다. 그는 하나님께서 할례의 표를 가진 이스라엘을 위해 일하시고 그들을 도우실 것을 기대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결코 외면치 않으실 것이다. 또 요나단은 하나님의 구원이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려 있지 않다고 말했다. 이것은 옛날 가나안 정탐 때 여호수아와 갈렙이 가졌던 믿음이었고, 또 후에 골리앗과 대항해 싸웠던 다윗의 믿음이었다.

[11-15절] 둘이 다 블레셋 사람의 부대에게 보이매 블레셋 사람이 가로되 보라, 히브리 사람이 그 숨었던 구멍에서 나온다 하고 그 부대 사람들이 요나단과 그 병기 든 자를 대하여 가로되 우리에게로 올라오라. 너희에게 한 일을 보이리라 한지라. 요나단이 자기 병기 든 자에게 이르되 나를 따라 올라오라. 여호와께서 그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셨느니라 하고 요나단이 손발로 붙잡고 올라갔고 그 병기 든 자도 따랐더라. 블레셋 사람들이 요나단 앞에서 엎드러지매 병기 든 자가 따라가며 죽였으니 요나단과 그 병기 든 자가 반일경(半日耕) 지단(地段)[반나절 일할 만한 넓이의 들판] 안에서 처음으로 도륙한 자가 20인 가량이라. 들에 있는 진과 모든 백성 중에 떨림이 일어났고 부대와 노략군들도 떨었으며 땅도 진동하였으니 이는 큰 떨림(케르닷 엘로힘)[하나님의 떨림]이었더라.

하나님께서는 요나단의 소원대로 그에게 표증을 주셨다. 요나단은 블레셋 진으로 올라갔고 그 병기 든 자도 따랐다. 블레셋 사람들은 요나단 앞에서 엎드러졌다. 하나님께서는 그때 블레셋 진영 뿐만 아니라, 그 땅에도 큰 진동을 주셨다. ‘큰 떨림’이라는 원어는 ‘하나님의 떨림’이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요나단과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떨림으로 도우셨고 블레셋 사람들을 치셨다.

[16-19절] 베냐민 기브아에 있는 사울의 파숫군[파수꾼]이 바라본즉 허다한 블레셋 사람이 무너져 이리 저리 흩어지더라. 사울이 자기와 함께한 백성에게 이르되 우리에게서 누가 나갔는지 점고(點考)[점을 찍듯 수를 셈]하여 보라 하고 점고한즉 요나단과 그의 병기 든 자가 없어졌더라. 사울이 아히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궤를 이리로 가져오라 하니 그때에 하나님의 궤가 이스라엘 자손과 함께 있음이라. 사울이 제사장에게 말할 때에 블레셋 사람의 진에 소동이 점점 더한지라. 사울이 제사장에게 이르되 네 손을 거두라 하고.

베냐민 기브아에 있는 사울의 파수꾼이 바라보니 허다한 블레셋 사람들이 무너져 이리저리 흩어지고 있었다. 사울은 요나단과 그의 병기 든 자가 없어졌음을 확인했다. 그는 아히야에게 하나님의 궤를 가져오게 했고 하나님께서는 적진에 더욱 큰 소동과 혼란을 주셨다.

[20-23절] 사울과 그와 함께한 모든 백성이 모여 전장(戰場)[전쟁터]에 가서 본즉 블레셋 사람이 각각 칼로 그 동무를 치므로 크게 혼란하였더라. 전에 블레셋 사람과 함께하던 히브리 사람이 사방에서 블레셋 사람과 함께 와서 진에 들어왔더니 그들이 돌이켜 사울과 요나단과 함께한 이스라엘 사람과 합하였고 에브라임 산지에 숨었던 이스라엘 모든 사람도 블레셋 사람의 도망함을 듣고 싸우러 나와서 그들을 추격하였더라. 여호와께서 그 날에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므로 전쟁이 벧아웬을 지나니라.

사울과 그와 함께한 모든 백성은 모여 전쟁터에 가서 보았다. 그들이 가 보니 블레셋 사람들은 각각 칼로 그 동료를 치므로 크게 혼란해 있었다. 또 전에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하던 히브리 사람들이 사방에서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와서 진에 들어왔었는데, 그들이 돌이켜 사울과 요나단과 함께 한 이스라엘 사람과 합했다. 또 에브라임 산지에 숨었던 이스라엘 모든 사람들도 블레셋 사람들의 도망함을 듣고 싸우러 나와 그들을 추격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을 도우셨고 블레셋 사람들을 패하게 하셨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사울의 아들 요나단에게 귀한 은혜를 주셨다. 그의 부친 사울은 믿음의 결함을 가진 자이었으나, 그의 아들 요나단은 믿음이 독실한 자이었다. 믿음은 반드시 가족 관계에 따라 이어지지 않는다. 열왕의 역사를 볼 때에도, 경건한 히스기야에게서 므낫세라는 심히 악한 왕이 출생했으나, 반면에 악한 므낫세에게서는 매우 경건한 손자 요시야가 출생했다. 하나님의 은혜는 가족 관계를 초월한다. 경건한 가정에서 믿음의 사람이 나오는 것은 일반적이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다. 우리 중에는 불신 부모님 밑에서 태어나 자랐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주 예수님 믿고 구원 얻고 하나님 섬기는 자들도 있지만, 반대로 부모님은 믿음이 있으나 자녀가 믿음이 없는 경우도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만 구해야 한다. 우리의 구원도, 성화도 하나님의 은혜로만 된다.

둘째로, 요나단은 세상적인, 외적인 조건을 넘어서 하나님을 믿었다. 군사력을 비교한다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블레셋 전쟁에서 틀림없이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요나단은 살아계신 하나님과 그의 능력을 믿고 의지했다. 그것이 참 믿음이다. 참 믿음은 사람의 조건, 세상적, 외적 조건을 초월하여 하나님을 믿는 것,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것이다. 요나단의 믿음은 우리에게 본이 된다. 전에 가나안 땅을 정탐했던 열두 정탐꾼들 중에 여호수아와 갈렙의 믿음이 그러했고, 후에 블레셋 사람들의 장수 골리앗과 싸웠던 소년 다윗의 믿음도 그러했다. 우리는 창조자와 섭리자이신 영원하신 하나님과 그의 크신 능력을 믿어야 한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이 전쟁에서 요나단과 이스라엘 백성을 도우셨고 승리케 하셨다. 그는 블레셋 진영에 큰 떨림을 주셨고 땅도 진동케 하셨고 그들이 서로 죽이는 큰 혼란에 떨어지게 하셨고, 또 블레셋 사람들과 연합했던 히브리 사람들이 사울과 요나단의 편으로 돌아서게 하셨고 또 에브라임 산지에 숨었던 이스라엘 모든 사람도 용기를 내어 내려와서 이스라엘을 돕고 도망가는 블레셋 사람들을 추격케 하셨다. 이 모든 일들을 하나님께서 하셨다. 그것들은 다 하나님께서 도우시고 역사하신 일들이었다. 그 전쟁의 승리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전쟁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전쟁 같은 인생의 삶도 그러하다. 우리는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만 살아야 한다.

 

24-52절, 요나단이 죽음을 면함

[24-30절] 이 날에 이스라엘 백성이 피곤하였으니 이는 사울이 백성에게 맹세시켜 경계하여 이르기를 저녁 곧 내가 내 원수에게 보수(報讎)하는 때까지 아무 식물이든지 먹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지어다 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백성이 식물을 맛보지 못하고 그들이 다 수풀에 들어간즉 땅에 꿀이 있더라. 백성이 수풀로 들어갈 때에 꿀이 흐르는 것을 보고도 그들이 맹세를 두려워하여 손을 그 입에 대는 자가 없으나 요나단은 그 아비가 맹세로 백성에게 명할 때에 듣지 못하였으므로 손에 가진 지팡이 끝을 내밀어 꿀을 찍고 그 손을 돌이켜 입에 대매 눈이 밝아졌더라. 때에 백성 중 하나가 고하여 가로되 당신의 부친이 맹세로 백성에게 엄히 명하여 말씀하시기를 오늘날 식물을 먹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지어다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백성이 피곤하였나이다. 요나단이 가로되 내 부친이 이 땅으로 곤란케 하셨도다. 보라, 내가 이 꿀 조금을 맛보고도 내 눈이 이렇게 밝았거든 하물며 백성이 오늘 그 대적에게서 탈취하여 얻은 것을 임의로 먹었더면 블레셋 사람을 살륙함이 더욱 많지 아니하였겠느냐?

[31-35절] 그 날에 백성이 믹마스에서부터 아얄론에 이르기까지 블레셋 사람을 쳤으므로 그들이 심히 피곤한지라. 백성이 이에 탈취한 물건에 달려가서 양과 소와 송아지들을 취하고 그것을 땅에서 잡아 피 있는 채 먹었더니 무리가 사울에게 고하여 가로되 보소서, 백성이 고기를 피채 먹어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사울이 가로되 너희가 무신(無信)[불신실]하게 행하였도다. 이제 큰돌을 내게로 굴려오라 하고 또 가로되 너희는 백성 중에 흩어져 다니며 이르기를 사람은 각기 소와 각기 양을 이리로 끌어다가 잡아먹되 피 있는 채 먹어서 여호와께 범죄하지 말라 하매 그 밤에 모든 백성이 각각 자기의 소를 끌어다가 거기서 잡으니라. 사울이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으니 이는 그가 여호와를 위하여 처음 쌓은 단이었더라.

그 날에 백성이 믹마스에서부터 아얄론에 이르기까지(약 20킬로미터) 블레셋 사람을 쳤으므로 그들이 심히 피곤했다. 그들은 요나단의 말에 힘을 얻고 탈취한 물건에 달려가서 양과 소와 송아지들을 취하여 피채(혹은 ‘피째’) 먹었다. 피채 먹는 것은 하나님께서 분명히 금하신 일이었다(레 3:17; 7:26-27; 17:10, 14; 19:26). 거기서 사울은 여호와를 위해 처음 단을 쌓았다. 사울은 분명히 경건함이 부족하였다.

[36-42절] 사울이 가로되 우리가 밤에 블레셋 사람을 쫓아 내려가서 동틀 때까지 그들 중에서 탈취하고 한 사람도 남기지 말자. 무리가 가로되 왕의 소견에 좋은 대로 하소서 할 때에 제사장이 가로되 이리로 와서 하나님께로 나아가사이다 하매 사울이 하나님께 묻자오되 내가 블레셋 사람을 쫓아 내려가리이까? 주께서 그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시겠나이까 하되 그 날에 대답지 아니하시는지라. 사울이 가로되 너희 백성의 어른들아, 다 이리로 오라. 오늘 이 죄가 뉘게 있나 알아보자.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노니 내 아들 요나단에게 있다 할지라도 반드시 죽으리라 하되 모든 백성 중 한 사람도 대답지 아니하매 이에 그가 온 이스라엘에게 이르되 너희는 저편에 있으라. 나와 내 아들 요나단은 이편에 있으리라. 백성이 사울에게 말하되 왕의 소견에 좋은 대로 하소서 하니라. 이에 사울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아뢰되 원컨대 실상을 보이소서 하였더니 요나단과 사울이 뽑히고 백성은 면한지라. 사울이 가로되 나와 내 아들 요나단 사이에 뽑으라 하였더니 요나단이 뽑히니라.

사울이 그 밤에 블레셋 사람을 쫓아갈지 여부를 하나님께 물었으나 하나님께서는 대답지 않으셨다. 사울은 그 원인이 무엇인지, 누구에게 잘못이 있는지 알기 위해 제비를 뽑았는데, 요나단이 뽑혔다.

[43-46절] 사울이 요나단에게 가로되 너의 행한 것을 내게 고하라. 요나단이 고하여 가로되 내가 다만 내 손에 가진 지팡이 끝으로 꿀을 조금 맛보았을 뿐이오나 내가 죽을 수밖에 없나이다. 사울이 가로되 요나단아,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내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고 또 더하시리라. 이는 요나단아, 네가 정녕 죽을 것임이니라](KJV).9) 백성이 사울에게 말하되 이스라엘에 이 큰 구원을 이룬 요나단이 죽겠나이까?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옵나니 그의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할 것은 그가 오늘 하나님과 동사(同事)하였음[함께 일하였음]이니이다 하여 요나단을 구원하여 죽지 않게 하니라. 사울이 블레셋 사람 따르기를 그치고 올라가매 블레셋 사람이 자기 곳으로 돌아가니라.

요나단이 과연 잘못했는가? 그가 사울의 맹세를 듣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잘못은 그렇게 큰 것은 아니었을 것이며, 결과적으로 사울의 경솔함과 요나단의 무고함이 드러났다고 본다. 그러나 요나단이 꿀을 찍어먹은 행위는 사울의 경솔한 맹세와 저주에 관계되어 있었다. 그러나 백성들은 사울 왕의 뜻을 거스르며 요나단이 하나님과 함께 일하였으므로 그를 죽일 수 없다고 방어하였다.

[47-52절] 사울이 이스라엘 왕위에 나아간 후에 사방에 있는 모든 대적 곧 모압과 암몬 자손과 에돔과 소바의 왕들과 블레셋 사람을 쳤는데 향하는 곳마다 이기었고 용맹 있게 아말렉 사람을 치고 이스라엘을 그 약탈하는 자의 손에서 건졌더라. 사울의 아들은 요나단과 리스위와 말기수아요 그 두 딸의 이름은 이러하니 맏딸의 이름은 메랍이요 작은 딸의 이름은 미갈이며 사울의 아내의 이름은 아히노암이니 아히마아스의 딸이요 그 군장의 이름은 아브넬이니 사울의 숙부 넬의 아들이며 사울의 아비는 기스요 아브넬의 아비는 넬이니 아비엘의 아들이었더라. 사울의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과 큰 싸움이 있었으므로 사울이 힘있는 자나 용맹 있는 자를 보면 그들을 불러 모았더라.

사울은 이스라엘 왕위에 나아간 후에 이웃 나라들을 이겼다. 그는 사방에 있는 모든 대적 곧 모압과 암몬 자손과 에돔과 소바의 왕들과 블레셋 사람을 쳤는데 향하는 곳마다 이겼고 용맹 있게 아말렉 사람을 치고 이스라엘을 그 약탈들의 손에서 건졌다. 그의 아들은 요나단과 리스위와 말기수아요 두 딸의 이름은 메랍과 미갈이며 그의 아내는 아히노암이었다. 그의 군장은 그의 사촌 아브넬이었다.

사울의 사는 날 동안 블레셋 사람들과 큰 전쟁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왕의 경건과 의는 그가 다스리는 나라의 평안을 가져오고 왕의 불경건과 죄는 그 나라의 근심과 걱정을 가져온다.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쟁을 위해 힘있고 용맹한 자들을 보면 그들을 불러모았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사울 왕은 하나님 앞과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경솔하게 맹세했고 또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나님 앞에서 경솔히 맹세하게 했다. 맹세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하는 말이나 약속이다. 우리는 맹세를 함부로, 경솔하게 하지 말고 매우 신중하게 해야 한다. 우리는 맹세뿐 아니라, 모든 말을 신중히 해야 한다. 잠언 15:28,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도.” 야고보서 1:19,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더디하라].”

둘째로, 사울은 경솔히 맹세하였고 그 맹세를 그대로 지키지 않았다고 보인다. 그러나 사사 입다는 하나님께 한 무지한 서원이라도 그대로 시행했다. 그는 암몬 사람들과의 전쟁에 나가기 전에 하나님께 서원한 대로 승전하고 돌아오는 그를 맨 처음 영접한 자인 그의 딸을 하나님께 번제물로 드렸다(삿 11:35, 39).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향한 입다의 경외심을 귀하게 보셨다. 하나님께 한 맹세를 지키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표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의 성산에 거할 수 있는 자는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않는 자라고 말했다(시 15:4).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맹세하며 약속한 것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

셋째로, 요나단은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은 도구가 되었다. 백성들은 그를 하나님과 동사(同事)한 자, 즉 함께 일한 자로 인정하였다(45절). 하나님께서는 믿음 있고 충성된 사람들과 함께 일하신다. 사도 바울은 자신들을 하나님의 동역자라고 말했다. 고린도전서 3:9,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고린도후서 6:1,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우리는 하나님과 동사(同事)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과 동사(同事)하며 동역(同役)하는 자가 되려면, 하나님과 같은 생각과 같은 뜻을 가지고 하나님께 대한 굳건한 믿음과 충성을 가져야 한다. 아모스 3:3, “두 사람이 의합(意合)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으며.” 또 깨끗한 그릇, 즉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자가 쓰임을 받는다(딤후 2:21).

 

 

15장: 아말렉을 다 멸하지 않음

[1-3절]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어 왕에게 기름을 부어 그 백성 이스라엘 위에 왕을 삼으셨은즉 이제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을 내가 추억하노니(파카드)[기억하노니(KJV), 벌하노니(NASB)]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먹는 아이와 우양과 약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아말렉은 에서의 손자이었고 아말렉 족속은 그 자손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말렉을 심판하시되 어린아이들과 젖먹이들까지, 심지어 가축들까지 다 죽이게 하셨다. 하나님의 심판은 참으로 무섭다.

[4-9절] 사울이 백성을 소집하고 그들을 들라임에서 계수하니 보병이 20만이요 유다 사람이 1만이라. 사울이 아말렉 성에 이르러 골짜기에 복병하니라. 사울이 겐 사람에게 이르되 아말렉 사람 중에서 떠나 내려가라. 그들과 함께 너희를 멸하게 될까 하노라.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 애굽에서 올라올 때에 너희가 그들을 선대하였느니라. 이에 겐 사람이 아말렉 사람 중에서 떠나니라. 사울이 하윌라에서부터 애굽 앞 술에 이르기까지 아말렉 사람을 치고 아말렉 사람의 왕 아각을 사로잡고 칼날로 그 모든 백성을 진멸하였으되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키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낮은 것은 진멸하니라.

겐 사람들은 모세의 장인의 종족으로(삿 1:16)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 애굽에서 올라올 때 그들을 선대하였다. 사울은 하윌라에서부터 애굽 앞 술에 이르기까지 아말렉 사람들을 쳤으나, 아말렉 왕 아각과 그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을 남기고 다 죽이기를 기뻐하지 않았다. 사울의 행위는 하나님의 명령을 명백히 거역한 행위이었다.

[10-12절] 여호와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내가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이루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려고 아침에 일찌기[일찍이] 일어났더니 혹이 사무엘에게 고하여 가로되 사울이 갈멜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돌이켜 행하여 길갈로 내려갔다 하는지라.

하나님의 후회(後悔)하심(11, 35절)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성정을 가지신 것처럼 표현하는 비유적 표현 방법이다. 사무엘은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었다. 사울은 갈멜에서 자기를 위해 기념비를 세웠다. 그것은 사울이 자신을 드러내려 했음을 보인다.

[13-21절]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른즉 사울이 그에게 이르되 원컨대 당신은 여호와께 복을 받으소서.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행하였나이다. 사무엘이 가로되 그러면 내 귀에 들어오는 이 양의 소리와 내게 들리는 소의 소리는 어찜이니이까? 사울이 가로되 그것은 무리가 아말렉 사람에게서 끌어온 것인데 백성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을 남김이요 그 외의 것은 우리가 진멸하였나이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가만히 계시옵소서. 간밤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신 것을 왕에게 말하리이다. 가로되 말씀하소서. 사무엘이 가로되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여호와께서 왕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시고 또 왕을 길로 보내시며 이르시기를 가서 죄인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되 다 없어지기까지 치라 하셨거늘 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의 악하게 여기시는 것을 행하였나이까?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나는 실로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여 여호와께서 보내신 길로 가서 아말렉 왕 아각을 끌어왔고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였으나 다만 백성이 그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길갈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취하였나이다.

사울은 아각을 포함하여 아말렉 사람들과 가축들을 남김 없이 다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불순종의 구실을 백성이 하나님께 제사하려 하기 때문이었다고 돌렸다.

[22-23절]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邪神)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진리로 사울을 책망하였다. 사무엘의 책망의 요점은 세 가지다. 첫째,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 둘째, 거역과 불순종은 사술(邪術)이나 우상숭배의 죄와 같다. 왜냐하면 불순종은 실상 자기 자신을 하나님보다 앞세우는 데서 나오기 때문이다. 셋째, 왕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하나님께서도 왕을 버리셨다.

[24-26절]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 청하오니 지금 내 죄를 사하고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나로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나는 왕과 함께 돌아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이다 하고.

사울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구했고 자기가 범죄한 까닭은 백성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그를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다고 다시 말했다.

[27-31절] 사무엘이 가려고 돌이킬 때에 사울이 그의 겉옷자락을 붙잡으매 찢어진지라. 사무엘이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나라를 왕에게서 떼어서[찢어서] 왕보다 나은 왕의 이웃에게 주셨나이다.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치 않으심이니이다. 사울이 가로되 내가 범죄하였을지라도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의 앞과 이스라엘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나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이에 사무엘이 돌이켜 사울을 따라가매 사울이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사무엘이 가려고 돌이킬 때에 사울이 그의 겉옷자락을 붙잡으니 그것이 찢어졌다. 그것은 사울의 왕국이 분열되기 시작할 것을 암시한다. 사울은 자신의 잘못했음을 인정하면서도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높이며 하나님께 경배하게 함으로 체면을 세워주기를 원하였다.

[32-35절] 사무엘이 가로되 너희는 아말렉 사람의 왕 아각을 내게로 이끌어오라 하였더니 아각이 즐거이 오며 가로되 진실로 사망의 괴로움이 지났도다 하니라. 사무엘이 가로되 네 칼이 여인들로 무자(無子)케 한 것같이 여인 중 네 어미가 무자(無子)하리라 하고 그가 길갈에서 여호와 앞에서 아각을 찍어 쪼개니라. 이에 사무엘은 라마로 가고 사울은 사울 기브아 본집으로 올라가니라. 사무엘이 죽는 날까지 사울을 다시 가서 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사울을 위하여 슬퍼함이었고 여호와께서는 사울로 이스라엘 왕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더라.

사무엘은 사울이 이행치 못한 하나님의 뜻을 그 대신 직접 이행하였다. 그러나 그는 죽는 날까지 사울을 다시 가서 보지 아니하였다.


본장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사울의 부분적 순종, 적당한 순종은 실상 불순종이었다.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는 우리의 온전한 순종이다. 하나님께서는 사울로 왕을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고 그를 버리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과 교훈을 가감하지 말고 온전히 순종해야 한다.

둘째로,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은 사술(邪術)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邪神)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기의 생각을 더 높이는 교만에서 나온 것이다. 불순종은 사람이 자신을 섬기는 것과 같다. 우리는 자기를 부정해야 한다. 우리는 자기라는 우상을 깨뜨려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해야 한다.

셋째로, 사울은 백성을 두려워하여 하나님 명령을 순종치 못했다. 잠언 29:25,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우리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사도들은 유대 지도자들의 말보다 하나님 말씀을 순종했다. 바울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았다(갈 1:10). 우리는 사람을 두려워 말고 하나님만 두려워하고 기쁘시게 해야 한다.

 

 

16장: 다윗에게 기름부음

[1-5절]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너는 기름을 뿔에 채워 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 아들 중에서 한 왕을 예선[준비]하였음이니라. 사무엘이 가로되 내가 어찌 갈 수 있으리이까? 사울이 들으면 나를 죽이리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암송아지를 끌고 가서 말하기를 내가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러 왔다 하고 이새를 제사에 청하라. 내가 너의 행할 일을 가르치리니 내가 네게 알게 하는 자에게 나를 위하여 기름을 부을지니라. 사무엘이 여호와의 말씀대로 행하여 베들레헴에 이르매 성읍 장로들이 떨며 그를 영접하여 가로되 평강을 위하여 오시나이까? 가로되 평강을 위함이니라. 내가 여호와께 제사하러 왔으니 스스로 성결케 하고 와서 나와 함께 제사하자 하고 이새와 그 아들들을 성결케 하고 제사에 청하니라.

어느 날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들 중의 한 사람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준비하라고 명하셨다.

[6-10절] 그들이 오매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그 앞에 있도다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마음]을 보느니라. 이새가 아비나답을 불러 사무엘의 앞을 지나게 하매 사무엘이 가로되 이도 여호와께서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이새가 삼마로 지나게 하매 사무엘이 가로되 이도 여호와께서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이새가 그 아들 일곱으로 다 사무엘 앞을 지나게 하나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들을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고.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보는 것처럼 사람의 용모와 신장을 보지 않으시고 그 마음을 보신다. 이새의 여덟 아들들 중 엘리압, 아비나답, 삼마 등 일곱 아들들은 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얻지 못하였다.

[11-13절] 또 이새에게 이르되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 이새가 가로되 아직 말째가 남았는데 그가 양을 지키나이다.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보내어 그를 데려오라. 그가 여기 오기까지는 우리가 식사 자리에 앉지 아니하겠노라. 이에 보내어 그를 데려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여호와의 영께서 다윗에게 힘있게 임하셨더라](NASB).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

이새의 말째 아들 다윗은 그 얼굴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용모도 보기에 좋았다. 여호와께서는 사무엘에게 그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말씀하셨다. 이 날 이후 다윗은 하나님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었다.

[14-17절]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그를 번뇌케 한지라. 사울의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왕을 번뇌케 하온즉 원컨대 우리 주는 주의 앞에 모시는 신하에게 명하여 수금 잘 탈 줄 아는 사람을 구하게 하소서.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왕에게 이를 때에 그가 손으로 타면 왕이 나으시리이다. 사울이 신하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잘 타는 사람을 구하여 내게로 데려오라.

사울에게는 큰 변화가 생겼다. 여호와의 영께서 그를 떠나셨고 여호와의 부리신 악령이 그를 번뇌케 하였다. ‘여호와의 부리신 악령’(루아크 라아 메에스 예호와)(14절) 또는 ‘하나님의 부리신 악령’(루아크 엘로힘 라아)[하나님의 악한 영](15, 16, 23절)이라는 원어는 악령들도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음을 보인다. 욥기의 처음 부분에 증거된 대로, 사탄은 하나님의 허락 속에서만 사람에게 재앙을 줄 수 있다(욥 1:12; 2:6).

[18-23절] 소년 중 한 사람이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을 본즉 탈 줄을 알고 호기(豪氣)(깁보르 카일 )[힘있는 용사]와 무용(武勇)(이쉬 밀카마)[전사(戰士)]과 구변(口辯)이 있는(네본 다바르)[말에 지혜와 분별력이 있는] 준수한(이쉬 토아르)[외모가 단정한] 자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더이다. 사울이 이에 사자를 이새에게 보내어 이르되 양치는 네 아들 다윗을 내게로 보내라 하매 이새가 떡과 한 가죽부대의 포도주와 염소 새끼를 나귀에 실리고 그 아들 다윗의 손으로 사울에게 보내니 다윗이 사울에게 이르러 그 앞에 모셔 서매 사울이 그를 크게 사랑하여 자기의 병기 든 자를 삼고 이새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청컨대 다윗으로 내 앞에 모셔 서게 하라. 그가 내게 은총을 얻었느니라 하니라.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이를 때에 다윗이 수금을 취하여 손으로 탄즉 사울이 상쾌하여 낫고 악신은 그에게서 떠나더라.

다윗은 수금 잘 타며 힘있는 용사와 전사(戰士)이며 말에 지혜와 분별력이 있고 외모도 단정한 사람이었다. 그는 사울을 위해 수금을 타는 소년으로 발탁되었다. 그로 사울을 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는 이렇게 신기하게 조금씩 진행되고 있었다.


본장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사람의 마음 중심을 보신다. 사람의 마음은 그의 인격을 나타낸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늘 점검해야 한다. 성도는 이제 교만하고 죄악된 마음을 버리고 경건하고 겸손하고 깨끗한 마음을 늘 지켜야 한다. 잠언 4:23,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둘째로, 다윗은 사무엘에게 기름 부음을 받은 후 성령의 감동을 받았다. 신약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얻었고 성령께서 그 안에 거하시는 복을 얻었다. 우리는 영원히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를 위로하시고 거룩한 길로 인도하시며 시시때때로 우리에게 필요한 지혜와 힘을 주시는 성령님께 늘 감사해야 한다.

셋째로, 하나님의 영께서는 사울을 떠나셨고 그의 부리신 악령이 그를 번뇌케 하고 괴롭게 했다. 그것은 그가 교만하여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범죄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떠나시고 버리신 사람은 비참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른 믿음과 순종으로 살고 하나님의 버림을 받을까 두려워하고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지 않도록 늘 조심해야 한다.

 

17장: 다윗이 골리앗을 죽임

[1-7절] 블레셋 사람들이 그 군대를 모으고 싸우고자 하여 유다에 속한 소고에 모여 소고와 아세가 사이의 에베스담밈에 진치매 사울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여서 엘라 골짜기에 진치고 블레셋 사람을 대하여 항오를 벌였으니 블레셋 사람은 이편 산에 섰고 이스라엘은 저편 산에 섰고 사이에는 골짜기가 있었더라. 블레셋 사람의 진에서 싸움을 돋우는 자가 왔는데 그 이름은 골리앗이요 가드 사람이라. 그 신장은 여섯 규빗 한 뼘[약 290cm]이요 머리에는 놋투구를 썼고 몸에는 어린갑(魚鱗甲)을 입었으니 그 갑옷의 중수가 놋 5천 세겔[약 60kg]이며 그 다리에는 놋경갑(脛甲)[정강이 갑옷]을 쳤고 어깨 사이에는 놋단창(短槍)을 메었으니 그 창자루는 베틀채 같고 창날은 철 6백 세겔[약 7kg]이며 방패 든 자는 앞서 행하더라.

왕이 범죄하면 나라에는 어려운 일이 생긴다. 의는 나라로 평안케 하지만, 불의는 나라로 평안을 잃게 하고 쇠약해지게 한다.

[8-11절] 그가 서서 이스라엘 군대를 향하여 외쳐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서 항오를 벌였느냐? 나는 블레셋 사람이 아니며 너희는 사울의 신복이 아니냐? 너희는 한 사람을 택하여 내게로 내려보내라. 그가 능히 싸워서 나를 죽이면 우리가 너희의 종이 되겠고 만일 내가 이기어 그를 죽이면 너희가 우리의 종이 되어 우리를 섬길 것이니라. 그 블레셋 사람이 또 가로되 내가 오늘날 이스라엘의 군대를 모욕하였으니 사람을 보내어 나로 더불어 싸우게 하라 한지라. 사울과 온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의 이 말을 듣고 놀라 크게 두려워하니라.

사울과 이스라엘 군사들은 골리앗의 말을 듣고 놀라 크게 두려워하였다. 범죄한 사울 왕과 그의 군사들에게는 용기가 없었다.

[12-16절] 다윗은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 이새라 하는 자의 아들이었는데 이새는 사울 당시 사람 중에 나이 많아 늙은 자로서 여덟 아들이 있는 중 그 장성한 세 아들은 사울을 따라 싸움에 나갔으니 싸움에 나간 세 아들의 이름은 장자 엘리압이요 그 다음은 아비나답이요 제3은 삼마며 다윗은 말째라. 장성한 삼인은 사울을 좇았고 다윗은 사울에게로 왕래하며 베들레헴에서 그 아비의 양을 칠 때에 그 블레셋 사람이 40일을 조석(朝夕)[아침저녁]으로 나와서 몸을 나타내었더라.

다윗의 나이는 아마 20세 전후이었을 것이다(삼상 18:5, 13 참조).

[17-23절] 이새가 그 아들 다윗에게 이르되 네 형들을 위하여 이 볶은 곡식 한 에바와 이 떡 열 덩이를 가지고 진으로 속히 가서 네 형들에게 주고 이 치스 열 덩이를 가져다가 그들의 천부장에게 주고 네 형들의 안부를 살피고 증표를 가져오라. 때에 사울과 그들과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엘라 골짜기에서 블레셋 사람과 싸우는 중이더라. 다윗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양을 양 지키는 자에게 맡기고 이새의 명한 대로 가지고 가서 진영에 이른즉 마침 군대가 전장(戰場)에 나와서 싸우려고 고함하며 이스라엘과 블레셋 사람이 항오를 벌이고 양군(兩軍)이 서로 대하였더라. 다윗이 그 짐을 짐 지키는 자의 손에 맡기고 군대로 달려가서 형들에게 문안하고 그들과 함께 말할 때에 마침 블레셋 사람의 싸움 돋우는 가드 사람 골리앗이라 하는 자가 그 항오에서 나와서 전과 같은 말을 하매 다윗이 들으니라.

다윗은 아버지 이새의 심부름으로 전쟁터에 갔고 골리앗이 하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그의 걸음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었다.

[24-27절]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그 사람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그 앞에서 도망하며 더러는 가로되 너희가 이 올라온 사람을 보았느냐? 참으로 이스라엘을 모욕하러 왔도다. 그를 죽이는 사람은 왕이 많은 재물로 부하게 하고 그 딸을 그에게 주고 그 아비의 집을 이스라엘 중에서 자유하게 하시리라. 다윗이 곁에 섰는 사람들에게 말하여 가로되 이 블레셋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의 치욕을 제하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대우를 하겠느냐?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 누구관대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 백성이 전과 같이 말하여 가로되 그를 죽이는 사람에게는 여차 여차히 하시리라 하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은 골리앗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도망했으나,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는 그의 말을 들은 소년 다윗은 의분하였다.

[28-30절] 장형 엘리압이 다윗의 사람들에게 하는 말을 들은지라. 그가 다윗에게 노를 발하여 가로되 네가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왔느냐? 들에 있는 몇 양을 뉘게 맡겼느냐?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 다윗이 가로되 내가 무엇을 하였나이까? 어찌 이유가 없으리이까 하고 돌이켜 다른 사람을 향하여 전과 같이 말하매 백성이 전과 같이 대답하니라.

맏형 엘리압은 동생 다윗을 오해하여 그를 그릇되이 책망하였다.

[31-37절] 혹이 다윗의 한 말을 듣고 그것을 사울에게 고하였으므로 사울이 다윗을 부른지라. 다윗이 사울에게 고하되 그를 인하여 사람이 낙담하지 말 것이라. 주의 종이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리이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기에 능치 못하리니 너는 소년이요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임이니라. 다윗이 사울에게 고하되 주의 종이 아비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떼에서 새끼를 움키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었나이다.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또 가로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가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

다윗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용기로 골리앗과 싸워보려는 마음이 있었다. 그는 사울에게 자기를 내보내 주시기를 청했다. 그는 큰 믿음을 가진 자이었다. 그의 믿음은 양 치는 일을 통해 자랐음에 틀림없다. 성도의 믿음은 일상생활에서 단련을 받고 성장한다. 신앙생활은 평소 생활이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평소 실력이다.

[38-40절] 이에 사울이 자기 군복을 다윗에게 입히고 놋투구를 그 머리에 씌우고 또 그에게 갑옷을 입히매 다윗이 칼을 군복 위에 차고는 익숙치 못하므로 시험적으로 걸어 보다가 사울에게 고하되 익숙치 못하니 이것을 입고 가지 못하겠나이다 하고 곧 벗고 손에 막대기를 가지고 시내에서 매끄러운 돌 다섯을 골라서 자기 목자의 제구 곧 주머니에 넣고 손에 물매를 가지고 [그] 블레셋 사람에게로 나아가니라.

다윗은 사울의 군복을 벗고 손에 막대기를 가지고 시내에서 매끄러운 돌 다섯을 골라 자기 주머니에 넣고 손에 물매를 가지고 골리앗에게로 나아갔다. 다윗의 무기는 막대기와 물매와 물맷돌 다섯 개이었다. 그러나 다윗의 진짜 무기는 그의 가슴속에 있는 하나님을 믿는 진실한 믿음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였고 믿었다.

[41-47절] 블레셋 사람이 점점 행하여 다윗에게로 나아오는데 방패 든 자가 앞섰더라. 그 블레셋 사람이 둘러보다가 다윗을 보고 업신여기니 이는 그가 젊고 붉고 용모가 아름다움이라. 블레셋 사람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나아왔느냐 하고 그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하고 또 이르되 내게로 오라. 내가 네 고기를 공중의 새들과 들짐승들에게 주리라.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短槍)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다윗에게는 참 믿음에서 나온 거룩한 의분이 있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를 모욕하는 자를 친히 징벌하실 것을 확신했다. 또 그는 전쟁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하나님의 구원이 칼과 창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확신하였다. 그것은 참된 믿음이며 바른 믿음이었다. 그의 믿음은 모든 시대, 모든 성도에게 본이 된다.

[48-54절] 블레셋 사람이 일어나 다윗에게로 마주 가까이 올 때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로 마주 그 항오를 향하여 빨리 달리며 손을 주머니에 넣어 돌을 취하여 물매로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 이마에 박히니 땅에 엎드러지니라. 다윗이 이같이 물매와 돌로 블레셋 사람을 이기고 그를 쳐죽였으나 자기 손에는 칼이 없었더라. 다윗이 달려가서 블레셋 사람을 밟고 그의 칼을 그 집에서 빼어내어 그 칼로 그를 죽이고 그 머리를 베니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 용사의 죽음을 보고 도망하는지라. 이스라엘과 유다 사람들이 일어나서 소리지르며 블레셋 사람을 쫓아 가이와 에그론 성문까지 이르렀고 블레셋 사람의 상한 자들은 사아라임 가는 길에서부터 가드와 에그론까지 엎드러졌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블레셋 사람을 쫓다가 돌아와서 그들의 진을 노략하였고 다윗은 블레셋 사람의 머리를 예루살렘으로 가져가고 갑주(甲冑)[갑옷(KJV), 무기들(NASB, NIV)]는 자기 장막에 두니라.

다윗의 물맷돌은 한번에 명중하였다. 골리앗은 즉시 땅에 엎드러졌다. 이것은 다윗이 한 것이라기보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기적이요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다윗은 그의 칼로 그의 머리를 베었고 이스라엘은 큰 승리를 얻었다.

[55-58절]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향하여 나감을 사울이 보고 군장 아브넬에게 묻되 아브넬아, 이 소년이 뉘 아들이냐? 아브넬이 가로되 왕이여, 왕의 사심으로 맹세하옵나니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하매 왕이 가로되 너는 이 청년이 누구의 아들인가 물어보라 하였더니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블레셋 사람의 머리가 그 손에 있는 채 아브넬이 그를 사울의 앞으로 인도하니 사울이 그에게 묻되 소년이여, 누구의 아들이뇨? 다윗이 대답하되 나는 주의 종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이니이다.


본장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다윗의 믿음은 평소에 양을 치면서 단련된 믿음이었다고 보인다. 우리는 평소의 생활에서 믿음을 준비해야 한다. 우리는 평소에 성경을 열심히 읽고 듣고 배우고 묵상하며 평소에 기도하기를 힘쓰고 평소에 죄 짓지 말고 성경말씀을 믿고 순종함으로써 우리의 믿음이 날마다 자라고 견고하게 되도록 힘써야 한다.

둘째로, 다윗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군대인 이스라엘을 모욕하였던 골리앗을 향하여 의분이 넘쳤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우심과 구원을 확신했고 하나님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않음도 확신했다. 우리는 어려운 문제를 만났을 때 믿음으로 잘 대처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 앞에 어떤 골리앗과 같은 원수나 어려운 문제가 있든지 간에, 우리는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굳건한 믿음으로 잘 대처해 나가야 한다.

 

 

18장: 사울이 다윗을 미워함

[1-5절]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연락되어(니크쉐라)[결합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니라. 그 날에 사울은 다윗을 머무르게 하고 그 아비의 집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허락지 아니하였고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 요나단이 자기의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그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하였더라. 다윗이 사울의 보내는 곳마다 가서 지혜롭게 행하매 사울이 그로 군대의 장을 삼았더니 온 백성이 합당히 여겼고 사울의 신하들도 합당히 여겼더라.

다윗이 블레셋 장수를 죽인 후 사울 왕 앞에 불려와 자신의 가정에 대해 말할 때 요나단의 마음은 다윗의 마음과 결합되었고 요나단은 그를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였고 그와 언약을 맺었다. 요나단은 신분을 초월하여 믿음과 헌신의 일치된 마음으로 다윗과 친구가 되었다. 다윗은 지혜롭게 행하였고 사울은 그를 군대의 장으로 삼았고 백성들도 그 일을 합당하게 여겼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모든 계명에 순종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지혜를 얻을 것이다.

[6-9절] 무리가 돌아올 때 곧 다윗이 [그] 블레셋 사람10)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여인들이 이스라엘 모든 성에서 나와서 노래하며 춤추며 소고와 [기쁨과](MT, KJV, NASB) 경쇠(솰리쉼)[아마, 트라이앵글(BDB)]를 가지고 왕 사울을 환영하는데 여인들이 뛰놀며 창화하여 가로되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사울이 이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가로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의 더 얻을 것이 나라밖에 무엇이냐 하고 그 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

무리가 돌아왔을 때, 즉 다윗이 그 블레셋 사람 즉 골리앗을 죽이고 돌아왔을 때, 여인들은 이스라엘 모든 성에서 나와 노래하며 춤추며 소고와 경쇠를 가지고 왕 사울을 환영했다. 사울은 여인들의 경솔한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말했다. 그는 그의 왕위가 다윗 때문에 위태하다고 생각했고 그러한 마음은 다윗에 대한 미운 감정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교만한 경쟁심은 사람에게 큰 시험거리이다.

[10-12절] 그 이튿날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힘있게 내리매 그가 집 가운데서 야료하는[난폭히 떠드는] 고로 다윗이 평일과 같이 손으로 수금을 타는데 때에 사울의 손에 창이 있는지라. 그가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다윗을 벽에 박으리라 하고 그 창을 던졌으나 다윗이 그 앞에서 두 번 피하였더라.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사울이 그를 두려워한지라.

다윗을 향한 사울의 미움은 그를 살해하려는 행위로 나타났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셨고 다윗과 함께 계셨으므로, 사울은 다윗을 두려워했다. 악인들은 실상 마음으로 의인들을 두려워한다.

[13-16절] 그러므로 사울이 그로 자기를 떠나게 하고 천부장을 삼으매 그가 백성 앞에 출입하며 그 모든 일을 지혜롭게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니라. 사울이 다윗의 크게 지혜롭게 행함을 보고 그를 두려워하였으나 온 이스라엘과 유다는 다윗을 사랑하였으니 그가 자기들 앞에 출입함을 인함이었더라.

다윗은 자신의 직위의 강등에 연연하지 않고 백성 앞에 출입하며 모든 일을 지혜롭게 행하였다. 성도는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빛을 나타낸다. 여호와께서는 다윗과 함께 계셨고, 사울은 다윗의 크게 지혜롭게 행함을 보고 그를 두려워하였다. 다윗에게 고난은 있었지만, 옛날 요셉이 그러했듯이, 하나님께서는 그와 함께하셨고, 또 그는 지혜롭게 처신하였고 백성들은 그를 사랑하였다.

[17-19절]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내 맏딸 메랍을 네게 아내로 주리니 오직 너는 나를 위하여 용맹을 내어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라 하니 이는 그가 생각하기를 내 손을 그에게 대지 말고 블레셋 사람의 손으로 그에게 대게 하리라 함이라. 다윗이 사울에게 이르되 내가 누구며 이스라엘 중에 내 친속이나 내 아비의 집이 무엇이관대 내가 왕의 사위가 되리이까 하였더니 사울의 딸 메랍을 다윗에게 줄 시기에 므홀랏 사람 아드리엘에게 아내로 준 바 되었더라.

다윗은 자신의 가문과 신분의 미천함을 아는 겸손한 자이었다.

[20-23절] 사울의 딸 미갈이 다윗을 사랑하매 혹이 사울에게 고한지라. 사울이 그 일을 좋게 여겨 스스로 이르되 내가 딸을 그에게 주어서 그에게 올무가 되게 하고 블레셋 사람의 손으로 그를 치게 하리라 하고 이에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오늘 다시 내 사위가 되리라 하니라. 사울이 그 신하들에게 명하되 너희는 다윗에게 비밀히 말하여 이르기를 보라, 왕이 너를 기뻐하시고 모든 신하도 너를 사랑하나니 그런즉 네가 왕의 사위가 되는 것이 가하니라 하라. 사울의 신하들이 이 말로 다윗의 귀에 고하매 다윗이 가로되 왕의 사위 되는 것을 너희는 경한 일로 보느냐? 나는 가난하고 천한 사람이로라 한지라.

사울은 다윗이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죽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을 낮은 자라고 생각하는 겸손한 인물이었다.

[24-27절] 사울의 신하들이 사울에게 고하여 가로되 다윗이 여차여차히 말하더이다. 사울이 가로되 너희는 다윗에게 이같이 말하기를 왕이 아무 폐백[결혼지참금]도 원치 아니하고 다만 왕의 원수의 보복으로 블레셋 사람의 양피[포피] 일백을 원하신다 하라 하였으니 이는 사울의 생각에 다윗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 죽게 하리라 함이라. 사울의 신하들이 이 말로 다윗에게 고하매 다윗이 왕의 사위 되는 것을 좋게 여기므로 만기가 되지 못하여서 다윗이 일어나서 그 종자와 함께 가서 블레셋 사람 2백명을 죽이고 그 양피[포피]를 가져다가 수대로 왕께 드려 왕의 사위가 되고자 하니 사울이 그 딸 미갈을 다윗에게 아내로 주었더라.

사울은 여하튼 다윗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 죽게 하려고 궁리하였으나, 다윗은 왕의 요구를 만족시켰고 미갈을 아내로 맞이했다.

[28-30절] 여호와께서 다윗과 함께 계심을 사울이 보고 알았고 사울의 딸 미갈도 그를 사랑하므로 사울이 다윗을 더욱 더욱 두려워하여 평생에 다윗의 대적이 되니라.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나오면 그들의 나올 때마다 다윗이 사울의 모든 신하보다 더 지혜롭게 행하매 이에 그 이름이 심히 귀중히 되니라.

사울은 여호와께서 다윗과 함께 계심을 보고 알았고 그를 더욱 더욱 두려워했고 다윗의 이름은 심히 귀중히 여김을 받았다.


본장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지혜와 믿음과 의와 겸손함을 주셨다. 잠언이 증거하는 대로,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함과 믿음, 또 그의 계명을 순종하여 의롭고 선하게 사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고 그의 계명대로 바르게 살지 않는 자는 어리석은 자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지혜를 사모해야 하며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신 지혜를 받아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를 굳세게 믿고 의지하고 그의 계명대로 의롭고 선하고 겸손하게만 살아가야 한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다윗과 늘 함께하셨다. 12절,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사울이 그를 두려워한지라.” 14절,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니라.” 하나님께서는 그를 경외하고 그의 계명대로 의와 선을 행하는 자와 늘 함께하시고 그런 자의 주위의 사람들도 그런 자를 사랑하고 존중할 것이다. 잠언 3:3-4, “인자와 진리로 네게서 떠나지 않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

셋째로, 다윗은 사울에게 미움과 핍박을 받기 시작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제자들로 경건하고 바르게 살고자 하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의 미움이나 비난과 핍박을 받을 각오도 해야 한다. 요한복음 15: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디모데후서 3: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19장: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 함

[1-3절] 사울이 그 아들 요나단과 그 모든 신하에게 다윗을 죽이라 말하였더니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다윗을 심히 기뻐하므로 그가 다윗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 부친 사울이 너를 죽이기를 꾀하시느니라. 그러므로 이제 청하노니 아침에 조심하여 은밀한 곳에 숨어 있으라. 내가 나가서 너 있는 들에서 내 부친 곁에 서서 네 일을 내 부친과 말하다가 무엇을 보거든 네게 알게 하리라 하고.

사울이 딸들을 다윗에게 주겠다고 말했던 것은 그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 죽게 하려고 은밀하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삼상 18:17, 25). 그러나 이제 그는 공개적으로 다윗을 죽이려 했다. 그러나 그의 아들 요나단은 다윗을 매우 기뻐하므로 그 사실을 그에게 알려주었다.

[4-7절] 요나단이 그 아비 사울에게 다윗을 포장하여[좋게 말하여] 가로되 원컨대 왕은 신하 다윗에게 범죄치 마옵소서. 그는 왕께 득죄하지[죄를 짓지] 아니하였고 그가 왕께 행한 일은 심히 선함이니이다. 그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을 죽였고 여호와께서는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큰 구원을 이루셨으므로 왕이 이를 보고 기뻐하셨거늘 어찌 무고히[까닭 없이] 다윗을 죽여 무죄한 피를 흘려 범죄하려 하시나이까? 사울이 요나단의 말을 듣고 맹세하되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그가 죽임을 당치 아니하리라. 요나단이 다윗을 불러 그 모든 일을 알게 하고 그를 사울에게로 인도하니 그가 사울 앞에 여전히[전과 같이] 있으니라.

요나단은 그 조언의 근거로 다윗이 왕께 죄를 짓지 않았고 그가 왕께 행한 일은 매우 선했다고 말하며 그 증거로 다윗이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그 블레셋 사람을 죽인 것과 여호와께서 온 이스라엘을 위해 큰 구원을 이루셨으므로 왕도 그것을 보고 기뻐하였었음을 들었다. 요나단이 제시한 바는 다 정당한 내용이었다. 그때 사울은 요나단의 말을 듣고 다윗을 죽이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

[8-10절] 전쟁이 다시 있으므로 다윗이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워 그들을 크게 도륙하매[죽이매] 그들이 그 앞에서 도망하니라. 사울이 손에 단창을 가지고 그 집에 앉았을 때에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악령]이 사울에게 접하였으므로 다윗이 손으로 수금을 탈 때에 사울이 단창으로 다윗을 벽에 박으려 하였으나 그는 사울의 앞을 피하고 사울의 창은 벽에 박힌지라. 다윗이 그 밤에 도피하매.

사울은 이와 같이 다윗을 죽이려는 마음을 다시 드러내었다.

[11-13절] 사울이 사자들을 다윗의 집에 보내어 그를 지키다가 아침에 그를 죽이게 하려 한지라. 다윗의 아내 미갈이 다윗에게 일러 가로되 당신이 이 밤에 당신의 생명을 구하지 아니하면 내일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고 미갈이 다윗을 창에서 달아 내리우매 그가 도망하여 피하니라. 미갈이 우상을 취하여 침상에 뉘고 염소털로 엮은 것을 그 머리에 씌우고 의복으로 그것을 덮었더니.

사울은 이제 다윗을 죽이려는 자신의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다윗을 죽이려는 그의 의지는 확고했다. 그러나 그는 그 일을 즉시 시행하지 않고 ‘아침에’ 그를 죽이려고 지체하다가 죽일 기회를 놓쳤다. 사람의 작은 생각 하나, 계획 하나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진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 길을 계획하여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여호와이시다(잠 16:9). 다윗의 아내 미갈은 그 밤에 그가 도피하도록 도왔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다윗을 인도하셨다.

[14-17절] 사울이 사자들을 보내어 다윗을 잡으려 하매 미갈이 가로되 그가 병들었느니라. 사울이 또 사자들을 보내어 다윗을 보라 하며 이르되 그를 침상채 내게로 가져오라. 내가 그를 죽이리라. 사자들이 들어가 본즉 침상에 우상이 있고 염소털로 엮은 것이 그 머리에 있었더라. 사울이 미갈에게 이르되 너는 어찌하여 이처럼 나를 속여 내 대적을 놓아 피하게 하였느냐? 미갈이 사울에게 대답하되 그가 내게 이르기를 나를 놓아 가게 하라. 어찌하여 나로 너를 죽이게 하겠느냐 하더이다 하니라.

미갈은 분명히 부친 사울에게 거짓말을 했으나 그의 의도는 선하였다. 그는 부녀 관계의 정 때문에 판단력이 흐려지지는 않았다. 그는 다윗이 옳고 부친 사울이 잘못되었다고 바르게 생각하였다.

[18-21절] 다윗이 도피하여 라마로 가서 사무엘에게로 나아가서 사울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다 고하였고 다윗과 사무엘이 나욧으로 가서 거하였더라. 혹이 사울에게 고하여 가로되 다윗이 라마 나욧에 있더이다 하매 사울이 다윗을 잡으려 사자들을 보내었더니 그들이 선지자 무리의 예언하는 것과 사무엘이 그들의 수령[우두머리]으로 선 것을 볼 때에 하나님의 신[영]이 사울의 사자들에게 임하매 그들도 예언을 한지라. 혹이 그것을 사울에게 고하매 사울이 다른 사자들을 보내었더니 그들도 예언을 한 고로 사울이 세 번째 다시 사자들을 보내었더니 그들도 예언을 한지라.

다윗의 도피 생활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사무엘상의 나머지 부분은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 하고 다윗이 그를 피해 도피한 여러 해의 일들을 기록한다(삼상 20:1; 21:10; 22:1; 23:26; 27:1). 사울은 다윗이 있는 라마 나욧으로 세 차례나 사람들을 보내어 잡으려 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하나님의 영께서 임하셨고 그들이 예언도 하였다.

[22-24절] 이에 사울도 라마로 가서 세구에 있는 큰 우물에 이르러 물어 가로되 사무엘과 다윗이 어디 있느냐? 혹이 가로되 라마 나욧에 있나이다. 사울이 라마 나욧으로 가니라. 하나님의 신이 그에게도 임하시니 그가 라마 나욧에 이르기까지 행하며 예언을 하였으며 그가 또 그 옷을 벗고 사무엘 앞에서 예언을 하며 종일 종야에 벌거벗은 몸으로 누웠었더라. 그러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 하니라.

사울이 직접 라마로 갔으나 하나님의 영께서 그에게도 임하셨고 그도 예언을 하였다. 사무엘이 있었던 라마 나욧에는 하나님의 영의 강력한 역사가 있었다. 사울이 다윗을 잡으려고 그의 사자들을 보내고 심지어 자신이 직접 온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비상하게 역사하셔서 그 사자들이나 사울 자신이 다윗을 잡거나 해치지 못하게 하셨다. 언제나 그러하듯이, 하나님께서는 비상한 때에 비상하게 역사하신다.


본장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다윗은 친구 요나단에게 인정받는 자이었다. 요나단은 다윗을 죽이려는 아버지께 그가 왕께 죄를 짓지 않았고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않고 블레셋 사람 골리앗을 죽였고 왕도 그것을 보고 기뻐하였다고 말했다. 우리는 우리를 아는 믿는 형제들에게 인정받는 자가 되어야 하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도 그래야 한다(딤전 3:7).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4:8에서 우리가 무슨 일에서나 참되며 옳으며 정결하며 사랑할 만하며 칭찬할 만한 해야 한다고 교훈하였다. 

둘째로, 다윗은 착한 자이었지만, 사울은 그를 죽이려 하였다. 그는 다윗을 죽이려고 단창을 던졌고 그의 사자들을 보내어 침상째 가져오게 했다. 그는 다윗이 도피한 라마 나욧으로 그의 사자들을 세 번이나 보내었고 그런 다음 자신이 직접 그를 잡으려고 갔다. 세상 사람들은 때때로 성도들을 핍박한다. 요한복음 15: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성도들은 세상 사람들의 미움과 핍박을 각오하며 살아야 한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보호하셨다. 그는 다윗에게 그를 변호하는 친구 요나단을 주셨고 또 다윗의 아내 미갈이 민첩하게 그를 돕게 하셨다. 또 그는 다윗을 잡으러 온 사울의 사자들이나 사울에게 직접 개입하셔서 그들로 다윗을 잡지 못하게 하셨다. 이 모든 일들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보호하시는 섭리의 일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랑하는 종들과 성도들을 세상에서 위험한 일로부터 보호하신다. 시편 91:1, 7,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 “천인이 네 곁에서, 만인이 네 우편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못하리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어려운 현실을 두려워하지 말고 살아계신 주권적 섭리자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고 그의 보호하심을 믿고 바르고 선하고 진실하게만 살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들을 전도자로 내어 보내시며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마 10:30-31).

 

 

20장: 요나단이 다윗과 언약함

[1-4절] 다윗이 라마 나욧에서 도망하여 와서 요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무엇을 하였으며 내 죄악이 무엇이며 네 부친 앞에서 나의 죄가 무엇이관대 그가 내 생명을 찾느뇨? 요나단이 그에게 이르되 결단코 아니라.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 내 부친이 대소사를[크고 작은 일을] 내게 알게 아니하고는 행함이 없나니 내 부친이 어찌하여 이 일은 내게 숨기리요. 그렇지 아니하니라. 다윗이 또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네게 은혜 받은 줄을 네 부친이 밝히 알고 스스로 이르기를 요나단이 슬퍼할까 두려운즉 그로 이를 알게 하지 아니하리라 함이니라. 그러나 진실로 여호와의 사심과 네 생명으로 맹세하노니 나와 사망의 사이는 한걸음뿐이니라.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 마음의 소원이 무엇이든지 내가 너를 위하여 그것을 이루리라.

요나단은 그의 부친이 다윗을 죽이지 않겠다고 맹세한 말을 믿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말하기를 “나와 사망의 사이는 한걸음뿐이라”고 했다. 다윗은 이처럼 죽음의 경계선에서 피신하는 삶을 살았다. 요나단은 다윗을 돕겠다고 말했다.

[5-11절] 다윗이 요나단에게 이르되 내일은 월삭인즉 내가 마땅히 왕을 모시고 앉아 식사를 하여야 할 것이나 나를 보내어 제3일 저녁까지 들에 숨게 하고 네 부친이 만일 나를 자세히 묻거든 그때에 너는 말하기를 다윗이 자기 성 베들레헴으로 급히 가기를 내게 허하라 간청하였사오니 이는 온 가족을 위하여 거기서 매년제를 드릴 때가 됨이니이다 하라. 그의 말이 좋다 하면 네 종이 평안하려니와 그가 만일 노하면 나를 해하려고 결심한 줄을 알지니 그런즉 원컨대 네 종에게 인자히 행하라. 네가 네 종으로 여호와 앞에서 너와 맹약케 하였음이니라. 그러나 내게 죄악이 있거든 네가 친히 나를 죽이라. 나를 네 부친에게로 데려갈 것이 무엇이뇨? 요나단이 가로되 이 일이 결코 네게 있지 아니하리라. 내 부친이 너를 해하려 결심한 줄 알면 내가 네게 이르지 아니하겠느냐? 다윗이 요나단에게 이르되 네 부친이 혹 엄하게 네게 대답하면 누가 그것을 내게 고하겠느냐?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오라, 우리가 들로 가자 하고 두 사람이 들로 가니라.

다윗은 요나단 앞에서 겸손하게 자신을 ‘네 종’이라고 세 번 표현하였다. 요나단은 부친의 결심을 그에게 알려주겠다고 약속하였다.

[12-17절]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증거하시거니와 내가 내일이나 모레 이맘때에 내 부친을 살펴서 너 다윗에게 대한 의향이 선하면 내가 보내어 네게 알게 하지 않겠느냐? 그러나 만일 내 부친이 너를 해하려 하거늘 내가 이 일을 네게 알게 하여 너를 보내어 평안히 가게 하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나 요나단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여호와께서 내 부친과 함께하신 것같이 너와 함께하시기를 원하노니[만일 내 부친이 너를 해치기를 기뻐하신다면 여호와께서 요나단에게 그렇게 하시고 더 하실지어다. 그러나 나는 네 귀에 알려 너로 가게 하리니 네가 평안히 갈 것이며 여호와께서 내 부친과 함께하신 것같이 너와 함께하시기를 원하노라](KJV이 비슷함). 너는 나의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의 인자를 내게 베풀어서 나로 죽지 않게 할 뿐 아니라 여호와께서 너 다윗의 대적들을 지면에서 다 끊어버리신 때에도 너는 네 인자를 내 집에서 영영히 끊어 버리지 말라 하고 이에 요나단이 다윗의 집과 언약하기를 여호와께서는 다윗의 대적들을 치실지어다 하니라.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하므로 그로 다시 맹세케 하였으니 이는 자기 생명을 사랑함같이 그를 사랑함이었더라.

하나님의 섭리는 신기했다. 사울은 다윗을 잡아죽이려 애썼지만, 그의 아들 요나단은 다윗편이었고 다윗을 살게 할 생각을 확고히 하였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다윗을 대적하는 자를 치시기를 맹세하며 소원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의 칼날로부터 다윗을 이런 방법으로 보호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을 이와 같이 보호하신다.

[18-23절]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내일은 월삭인즉 네 자리가 비므로 네가 없음을 자세히 물으실 것이라. 너는 사흘을 있다가 빨리 내려가서 그 일이 있던 날에 숨었던 곳에 이르러 에셀 바위 곁에 있으라. 내가 과녁을 쏘려 함같이 살 셋을 그 곁에 쏘고 아이를 보내어 가서 살을 찾으라 하며 내가 짐짓 아이에게 이르기를 보라, 살이 네 이편에 있으니 가져오라 하거든 너는 돌아올지니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네가 평안 무사할 것이요 만일 아이에게 이르기를 보라, 살이 네 앞편에 있다 하거든 네 길을 가라. 여호와께서 너를 보내셨음이니라. 너와 내가 말한 일에 대하여는 여호와께서 너와 나 사이에 영영토록 계시느니라.

요나단은 하나님 앞에서 다윗을 살리며 자유로이 도피하게 할 뜻을 분명히 하였고 그것을 알려줄 방책까지 제시하였다. 요나단은 그것이 자기가 그를 보내주는 것이 아니고 “여호와께서 그를 보내신다”고 표현하였다. 그는 다윗을 위한 일이 하나님의 일임을 믿었다.

[24-29절] 다윗이 들에 숨으니라. 월삭이 되매 왕이 앉아 음식을 먹을 때에 왕은 평시와 같이 벽 곁 자기 자리에 앉았고 요나단은 섰고 아브넬은 사울의 곁에 앉았고 다윗의 자리는 비었으나 그러나 그 날에는 사울이 아무 말도 아니하였으니 이는 생각하기를 그에게 무슨 사고가 있어서 부정한가보다 정녕히 부정한가보다 하였음이더니 이튿날 곧 달의 제2일에도 다윗의 자리가 오히려 비었으므로 사울이 그 아들 요나단에게 묻되 이새의 아들이 어찌하여 어제와 오늘 식사에 나오지 아니하느뇨? 요나단이 사울에게 대답하되 다윗이 내게 베들레헴으로 가기를 간청하여 가로되 청컨대 나로 가게 하라. 우리 가족이 그 성에서 제사할 일이 있으므로 나의 형이 내게 오기를 명하였으니 내가 네게 사랑을 받거든 나로 가서 내 형들을 보게 하라 하였으므로 그가 왕의 식사 자리에 오지 아니하였나이다.

[30-34절] 사울이 요나단에게 노를 발하고 그에게 이르되 패역부도(悖逆不道)의 계집[패역하고 반항적인 여인]의 소생아, 네가 이새의 아들을 택한 것이 네 수치와 네 어미의 벌거벗은 수치 됨을 내가 어찌 알지 못하랴. 이새의 아들이 땅에 사는 동안은 너와 네 나라가 든든히 서지 못하리라. 그런즉 이제 보내어 그를 내게로 끌어오라. 그는 죽어야 할 자니라. 요나단이 그 부친 사울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그가 죽을 일이 무엇이니이까?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사울이 요나단에게 단창을 던져 치려 한지라[요나단을 치려고 단창을 던졌더라]. 요나단이 그 부친이 다윗을 죽이기로 결심한 줄 알고 심히 노하여 식사 자리에서 떠나고 달의 제2일에는 먹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 부친이 다윗을 욕되게 하였으므로 다윗을 위하여 슬퍼함이었더라.

요나단은 아버지의 그런 정치적 염려나 그로 인해 죄 없는 다윗을 죽이려는 불의하고 악한 태도를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아들 요나단의 항의하는 말을 들은 사울은 그를 치려고 단창을 던졌다. 요나단은 그의 부친이 다윗을 죽이기로 결심한 것을 알았다. 그는 심히 노하여 식사 자리에서 떠났고 달의 제2일에는 먹지 않았다. 이는 그 부친이 다윗을 욕되게 하였으므로 다윗을 위해 슬퍼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친구에 대한 진실한 사랑의 표현이었다.

[35-42절] 아침에 요나단이 작은 아이를 데리고 다윗과 정한 시간에 들로 나가서 아이에게 이르되 달려가서 나의 쏘는 살을 찾으라 하고 아이가 달려갈 때에 요나단이 살을 그의 위로 지나치게 쏘니라. 아이가 요나단의 쏜 살 있는 곳에 이를 즈음에 요나단이 아이 뒤에서 외쳐 가로되 살이 네 앞편에 있지 아니하냐 하고 요나단이 아이 뒤에서 또 외치되 지체말고 빨리 달음질하라 하매 요나단의 아이가 살을 주워가지고 주인에게로 돌아왔으나 그 아이는 아무런지 알지 못하고 요나단과 다윗만 그 일을 알았더라. 요나단이 그 병기를 아이에게 주며 이르되 이것을 가지고 성으로 가라. 아이가 가매 다윗이 곧 바위 남편에서 일어나서 땅에 엎드려 세 번 절한 후에 피차 입맞추고 같이 울되 다윗이 더욱 심하더니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우리 두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영원히 나와 너 사이에 계시고 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계시리라 하였느니라. 다윗은 일어나 떠나고 요나단은 성으로 들어오니라.

요나단은 하나님 앞에서 맹세하며 다윗과 약속했던 바를 그대로 지켰다. 그는 다윗을 평안히 가게 했다. 다윗은 일어나 땅에 엎드려 세 번 절한 후에 피차 입맞추고 같이 울었다. 그는 요나단보다 더욱 심히 울었다. 그런 후 그 둘은 여호와께서 그들과 그들의 자손 사이에 영원히 계실 것을 맹세하며 서로 헤어졌다.


본장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보호하도록 섭리하셨다.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라마 나욧까지 찾아왔고 다윗은 그를 피하여 다니는 신세이었고 “나와 사망의 사이는 한걸음뿐이니라”고 말할 정도이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기로 결심한 것은 요나단에게 격노하며 단창을 던졌을 때 더욱 분명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신기하게도 사울의 아들 요나단을 통하여 다윗의 피신을 도우셨다. 요나단은 하나님 앞에서 맹세하며 다윗을 위하였고 다윗의 대적을 저주했고 다윗을 평안히 가게 하겠다고 약속하였고 그 약속을 지켰다. 이 모든 일이 다윗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위험한 상황에 처한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는 주권적 섭리자이시다(시 91:1).

둘째로, 요나단은 하나님 앞에서 다윗이 평안히 가게 할 것을 약속하며 맹세하였고(12-13, 17절) 그 맹세를 지켰다. 42절,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우리 두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영원히 나와 너 사이에 계시고 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계시리라 하였느니라.” 후에 다윗도 요나단과의 맹세를 지켰다. 그는 요나단에게 남은 아들인 므비보셋을 선대하여 요나단 때문에 그에게 은총을 베풀었고 사울의 사환 시바와 사울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주었고 므비보셋은 항상 다윗의 식탁에서 먹었고 다윗은 그를 자신의 아들들 중 하나처럼 대우했다(삼하 9:1, 7, 10-11). 사람이 맹세를 지키는 것은 하나님을 참으로 경외하는 증거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 앞에서 한 발언이나 약속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

셋째로, 요나단과 다윗의 관계는 신앙 안에서 맺어진 진실한 우정의 관계, 심히 아름다운 인간 관계이었다. 18장에서 두 번(18:1, 3), 본장에서도 한번(17절),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의 생명같이 사랑하였다고 증거되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주께서는 말씀하셨다(요 15:13). 요나단은 왕권에 대한 욕심을 가지고 그릇된 판단을 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았다. 또 다윗은 왕자 요나단에게 겸손한 예의를 가지고 대했다(7-8절, 41절).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는 순수한 신앙적, 사랑의 관계로서 본이 된다. 주께서는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다. 우리는 가족 간의 사랑은 물론이거니와, 신앙 안에서 참으로 서로 사랑하는 교우들 관계가 되어야 한다.

 

 

21장: 다윗이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들림

[1-4절] 다윗이 놉에 가서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이르니 아히멜렉이 떨며 다윗을 영접하며 그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네가 홀로 있고 함께하는 자가 아무도 없느냐? 다윗이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이르되 왕이 내게 일을 명하고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보내는 바와 네게 명한 바 일의 아무것이라도 사람에게 알게 하지 말라 하시기로 내가 나의 소년들을 여차 여차한 곳으로 약정하였나이다. 이제 당신의 수중에[손에] 무엇이 있나이까? 떡 다섯 덩이나 무엇이든지 있는 대로 내 손에 주소서. 제사장이 다윗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항용[늘 먹는] 떡은 내 수중에[손에] 없으나 거룩한 떡은 있나니 그 소년들이 부녀를 가까이만 아니하였으면 주리라.

다윗이 아히멜렉에게 한 말은 거짓말이다. 거짓말은 나쁘다. 특히 거짓말로 다른 이에게 해를 끼치는 경우가 그렇다. 그러나 이 경우는 다른 이에게 해를 끼치는 것은 아니고 단지 자기의 도피가 알려질까 봐 염려한 사람의 연약성 때문에 한 거짓말이었다. 그는 아마 며칠 동안 음식을 먹지 못했던 것 같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은 먹을 것이 없을 정도로 힘든 지경에 있었다. 그가 거짓말을 한 것은 잘못이었지만, 그 거짓말은 하나님의 긍휼로 용서함을 얻었던 것 같다.

‘거룩한 떡’은 성소의 떡상 위에 차려 놓는 열두 덩이의 떡을 가리킨다. 그것들은 제사장들이 거룩한 곳에서 먹을 수 있었던 떡이었다(레 24:9). 그러나 아히멜렉은 떡 다섯 덩이를 요청하는 경건한 다윗의 어려운 상황을 동정하여 그것을 주려 하였다. 그는 다윗이 하나님의 사람이요 하나님편에서 선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사무엘상 22장에 보면, 그는 그 일을 하나님께 물었고 그의 지시를 받았던 것 같다(삼상 22:10, 13, 15).

[5-6절] 다윗이 제사장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참으로 3일 동안이나 부녀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나이다. 나의 떠난 길이 보통 여행이라도 소년들의 그릇이 성결하겠거든 하물며 오늘날 그들의 그릇이 성결치 아니하겠나이까 하매 제사장이 그 거룩한 떡을 주었으니 거기는 진설병 곧 여호와 앞에서 물려낸 떡밖에 없음이라. 이 떡은 더운 떡을 드리는 날에 물려낸 것이더라.

‘그릇’이라는 말은 ‘몸’을 가리킨다. 제사장은 그 거룩한 떡을 다윗에게 주었다. 그것은 율법을 어긴 것 같은 일이었다. 법이 중요하지만, 특별한 경우 사랑과 긍휼이 법보다 더 중요함을 보이는 일이다. 주께서는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먹음으로 안식일을 범했다고 비난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이 사건을 인용하신 후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2:7).

[7절] 그 날에 사울의 신하 한 사람이 여호와 앞에 머물러 있었는데 그는 도엑이라 이름하는 에돔 사람이요 사울의 목자장이었더라.

‘머물러 있다’는 원어(네차르)는 ‘구류된, 머물러 있는’이라는 뜻으로 도엑은 어떤 서원 때문에 성소에 머물러 있었던 것 같다(BDB). 그는 악하고 간사한 자이었고 후에 사울 앞에서 이 일을 잘못 보고하여 사울로 오해케 함으로써 많은 제사장들을 죽게 하였다.

[8-9절] 다윗이 아히멜렉에게 이르되 여기 당신의 수중에[손에] 창이나 칼이 없나이까? 왕의 일이 급하므로 내가 내 칼과 병기를 가지지 못하였나이다. 제사장이 가로되 네가 엘라 골짜기에서 죽인 블레셋 사람 골리앗의 칼이 보자기에 싸여 에봇 뒤에 있으니 네가 그것을 가지려거든 가지라. 여기는 그밖에 다른 것이 없느니라. 다윗이 가로되 그 같은 것이 또 없나니 내게 주소서.

다윗이 아히멜렉에게 그 칼을 받았을 때 그는 아마 전에 하나님의 은혜로 골리앗을 죽였을 때의 일을 기억하며 힘을 얻었을 것이다.

[10-11절] 그 날에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도망하여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가니 아기스의 신하들이 아기스에게 고하되 이는 그 땅의 왕 다윗이 아니니이까?[이 다윗은 그 땅의 왕이 아니니이까?](원문의 액센트; KJV, NIV). 무리가 춤추며 이 사람의 일을 창화하여 가로되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한지라.

다윗에게는 여전히 사울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그 날에 그는 일어나 도망하여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갔다. 가드는 유대 땅의 서쪽 블레셋 지역에 있는 성이었다. 그러나 그가 가드 왕에게로 간 것은 실수이었다. 그의 두려움은 그로 실수케 하였다. 우리는 믿음이 부족할 때 두려워하게 되고 그 두려움은 우리로 실수하고 범죄하게 만든다. 가드는 다윗에게 안전하고 평안한 곳이 아니었다.

[12-15절] 다윗이 이 말을 그 마음에 두고 가드 왕 아기스를 심히 두려워하여 그들의 앞에서 그 행동을 변하여 미친 체하고 대문짝에 그적거리며[끼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흘리매 아기스가 그 신하에게 이르되 너희도 보거니와 이 사람이 미치광이로다. 어찌하여 그를 내게로 데려왔느냐? 내게 미치광이가 부족하여서 너희가 이자를 데려다가 내 앞에서 미친 짓을 하게 하느냐? 이자가 어찌 내 집에 들어오겠느냐 하니라.

다윗은 가드 왕 아기스를 심히 두려워하여 그들의 앞에서 그 행동을 변하여 미친 체하고 대문짝에 끼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흘렸다. 아기스의 신하들에게 갇힌 다윗으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본장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다윗은 연약하여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거짓말을 하였다. 비록 하나님께서 그의 연약성을 불쌍히 여겨 그것을 용서하셨다 할지라도 그 거짓말은 잘못이다. 우리는 거짓말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모든 거짓을 버려야 한다. 에베소서 4:25,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둘째로, 다윗은 부족이 없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어주셨다. 그는 가드 왕 아기스에게서 쫓겨난 후 “내가 여호와께 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라고 썼다(시 34:4). 우리는 고난 중에 낙심치 말고 하나님만 굳게 믿고 그에게 기도하며 바르고 선하고 진실하게만 행해야 하고 그것이 승리의 길이다.

 

22장: 사울이 제사장들을 죽임

[1-2절] 그러므로 다윗이 그 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 형제와 아비의 온 집이 듣고는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 장관이 되었는데 그와 함께한 자가 4백명 가량이었더라.

[3-5절] 다윗이 거기서 모압 미스베로 가서 모압 왕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어떻게 하실 것을 내가 알기까지 나의 부모로 나와서 당신들과 함께 있게 하기를 청하나이다 하고 부모를 인도하여 모압 왕 앞에 나아갔더니 그들이 다윗의 요새에 있을 동안에 모압 왕과 함께 있었더라. 선지자 갓이 다윗에게 이르되 이 요새에 있지 말고 떠나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 다윗이 떠나 헤렛 수풀에 이르니라.

다윗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알기 원하였으나 아직 그것이 분명치 않았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구체적인 뜻은 때때로 금방 알려지지 않기도 한다. 그때에 선지자 갓이 다윗에게 와서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고 말하였다. 유다 땅은 다윗이 사울에게 잡혀 죽을 위험이 있는 땅이었으나, 성도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땅을 떠나서는 안 된다.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 하는 그 옳지 않은 일은 유대 땅에서 백성들에게 알려져야 하였다. 백성들은 다윗의 정당성을 이해하고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하였다. 다윗은 선지자 갓의 말에 즉시 순종하였다.

[6-8절] 사울이 다윗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함을 들으니라. 때에 사울이 기브아 높은 곳에서 손에 단창을 들고 에셀나무 아래 앉았고 모든 신하들은 그 곁에 섰더니 사울이 곁에 선 신하들에게 이르되 너희 베냐민 사람들아, 들으라. 이새의 아들이 너희에게 각기 밭과 포도원을 주며 너희로 천부장, 백부장을 삼겠느냐? 너희가 다 공모하여 나를 대적하며 내 아들이 이새의 아들과 맹약하였으되 내게 고발하는 자가 하나도 없고 나를 위하여 슬퍼하거나 내 아들이 내 신하를 선동하여[격려하여] 오늘이라도 매복하였다가 나를 치려 하는 것을 내게 고발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내 신하’는 다윗을 가리킨다. 사울은 바른 판단을 하지 못했다. 그의 신하들이 다윗과 공모하여 그를 대적하지 않았고 그의 아들 요나단이 다윗을 격려해 아버지 사울을 치도록 하지 않았다. 사울은 잘못 생각하고 판단했다. 그것은 큰 실수요 인격의 큰 결함이며 죄이었다.

[9-10절] 때에 에돔 사람 도엑이 사울의 신하 중에 섰더니 대답하여 가로되 이새의 아들이 놉에 와서 아히둡의 아들 아히멜렉에게 이른 것을 내가 보았었는데 아히멜렉이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묻고 그에게 식물도 주고 블레셋 사람 골리앗의 칼도 주더이다.

에돔 사람 도엑의 말은 마치 사실을 말하는 것같이 보이기도 하지만, 실상 아히멜렉이 다윗과 공모라도 한 것처럼 오해를 줄 수 있는 말이었다. 만일 도엑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이었다면, 그는 다윗이 의롭고 충성된 자이며 사울에게 죽임을 당할 만한 악한 일을 하지 않은 자임을 알았을 것이며, 또 아무 잘못이 없는 제사장들이 사울에게 오해를 받아 죽임을 당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사울에게 충성했지만, 그것은 도덕적으로 악하고 잘못된 충성이었다. 다윗은 시편 52편에서 그에 대하여, “네 혀가 심한 악을 꾀하여 날카로운 삭도같이 간사를 행하는도다. 네가 선보다 악을 사랑하며 의를 말함보다 거짓을 사랑하는도다”라고 말하였다(시 52:2-3).

[11-13절] 왕이 보내어 아히둡의 아들 제사장 아히멜렉과 그 아비의 온 집 곧 놉에 있는 제사장들을 부르매 그들이 다 왕께 이른지라. 사울이 가로되 너 아히둡의 아들아, 들으라. 대답하되 내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사울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새의 아들과 공모하여 나를 대적하여 그에게 떡과 칼을 주고 그를 위하여 하나님께 물어서 그로 오늘이라도 매복하였다가 나를 치게 하려 하였느뇨.

사울은 뒤에 그 제사장들을 죽이는 죄목으로 역시 이 죄를 언급하였다(17절). 사울의 판단은 여기서도 잘못되었다. 아히멜렉과 제사장들은 다윗과 공모하여 사울을 대적하지 않았고 그런 이유로 다윗에게 떡을 주었거나 골리앗의 칼을 준 것이 아니었다. 잘못된 판단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큰 잘못이요 큰 죄악이다.

[14-15절] 아히멜렉이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왕의 모든 신하 중에 다윗같이 충실한 자가 누구인지요? 그는 왕의 사위도 되고 왕의 모신(謀臣)[측근 참모]도 되고 왕실에서 존귀한 자가 아니니이까? 내가 그를 위하여 하나님께 물은 것이 오늘이 처음이니이까? 결단코 아니니이다. 원컨대 왕은 종과 종의 아비의 온 집에 아무것도 돌리지 마옵소서. 왕의 종은 이 모든 일의 대소간에 아는 것이 없나이다.

아히멜렉의 말은 사실이었을 것이다. 그는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 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고 또 다윗이 도피 중이었음도 알지 못했을 것이며, 더욱이 다윗과 공모(共謀)한 것도 아니었다.

[16-19절] 왕이 가로되 아히멜렉아, 네가 반드시 죽을 것이요 네 아비의 온 집도 그러하리라 하고 왕이 좌우의 시위자에게 이르되 돌이켜 가서 여호와의 제사장들을 죽이라. 그들도 다윗과 합력하였고 또 그들이 다윗의 도망한 것을 알고도 내게 고발치 아니하였음이니라 하나 왕의 신하들이 손을 들어 여호와의 제사장들 죽이기를 싫어한지라. 왕이 도엑에게 이르되 너는 돌이켜 제사장들을 죽이라 하매 에돔 사람 도엑이 돌이켜 제사장들을 쳐서 그 날에 세마포 에봇 입은 자 85인을 죽였고 제사장들의 성읍 놉의 남녀와 아이들과 젖 먹는 자들과 소와 나귀와 양을 칼로 쳤더라.

사울 왕은 제사장 아히멜렉의 변명을 받아들이지 않고 에돔 사람 도엑을 시켜 제사장들을 쳐서 그 날에 세마포 에봇 입은 자 85명을 죽였고 제사장들의 성읍 놉의 남녀와 아이들과 젖 먹는 자들과 소와 나귀와 양을 칼로 쳤다. 사울의 잘못된 판단들은 마침내 큰 실수와 큰 죄악을 범하였다. 하나님의 백성 중 무죄한 사람 하나를 죽이는 것도 하나님 앞에서 큰 죄악인데, 무죄한 제사장들과 그 가족들을 이처럼 죽이다니 하나님께서 얼마나 노여워하셨을까? 그러나 이 비극적 사건은 하나님의 예언의 성취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예전에 엘리에게 “보라, 내가 네 팔과 네 조상의 집 팔을 끊어 네 집에 노인이 하나도 없게 하는 날이 이를지라”고 말씀하셨었다(삼상 2:31). 그의 심판의 예언은 엘리의 증손자 때에 와서 이루어진 것이다. 아히멜렉은 비느하스의 손자요 엘리의 증손이었다(삼상 14:3).

[20-23절] 아히둡의 아들 아히멜렉의 아들 중 하나가 피하였으니 그 이름은 아비아달이라. 그가 도망하여 다윗에게로 가서 사울이 여호와의 제사장들 죽인 일을 다윗에게 고하매 다윗이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그 날에 에돔 사람 도엑이 거기 있기로 그가 반드시 사울에게 고할 줄 내가 알았노라. 네 아비 집의 모든 사람 죽은 것이 나의 연고로다. 두려워 말고 내게 있으라. 내 생명을 찾는 자가 네 생명도 찾는 자니 네가 나와 함께 있으면 보전하리라 하니라.

이러한 비극적 사건 속에서도 하나님의 긍휼로 아히멜렉의 아들 하나가 피신했다. 그가 아비아달이었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은 많은 제사장들이 죽임을 당한 것이 자신 때문이라고 자책하였다.


본장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도엑의 말 한마디는 무고한 제사장들 85명을 죽게 하는 참혹한 일을 가져왔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바른 인격이 아니었다. 말은 인격의 표현이다. 우리가 무슨 무익한 말 하나를 하든지 마지막 날에 심판을 받을 것이다(마 12:36). 우리는 항상 바르고 덕스러운 말을 하는 온전한 인격자가 되어야 한다(엡 4:29).

둘째로, 사울은 도엑의 말을 듣고 잘못된 판단을 하였고 그의 잘못된 판단은 마침내 제사장들 85명과 그 아내들과 자녀들을 살해하는 집단 학살의 참극을 가져왔다. 사울의 죄는 매우 컸다. 우리는 범사에 잘못된 판단을 하지 말고 바르고 건전한 판단을 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셋째로, 죽은 제사장들은 불행해 보이나, 사람의 죽음은 다 불행이 아니고, 성도의 죽음은 성도가 천국 가는 시간이다(시 73:24; 눅 23:43; 고후 5:8). 그러므로 사람은 단지 오래 사는 것보다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하다. 한 사람의 출생과 죽음과 일생은 하나님의 작정된 바이므로, 우리는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기며 바르고 선하게만 살아야 한다.

 

 

23장: 다윗이 광야 요새로 피함

[1-5절] 혹이 다윗에게 고하여 가로되 보소서, 블레셋 사람이 그일라를 쳐서 그 타작마당을 탈취하더이다. 이에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내가 가서 이 블레셋 사람을 치리이까?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이르시되 가서 블레셋 사람을 치고 그일라를 구원하라 하시니 다윗의 사람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유다에 있기도 두렵거든 하물며 그일라에 가서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치는 일이리이까? 다윗이 여호와께 다시 묻자온대 여호와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일어나 그일라로 내려가라. 내가 블레셋 사람을 네 손에 붙이리라 하신지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일라로 가서 블레셋 사람과 싸워 그들을 크게 도륙하고 그들의 가축을 끌어오니라. 다윗이 이와 같이 그일라 거민을 구원하니라.

하나님께서는 고난의 도피생활 중에서도 다윗과 함께하셨고 그의 사람들을 그에게 복종케 하셨고, 또 블레셋 사람들의 침략과 탈취로 어려움을 당한 그일라 사람들을 구원하는 선한 일을 하게 하셨다.

[6-12절] 아히멜렉의 아들 아비아달이 그일라 다윗에게로 도망할 때에 손에 에봇을 가지고 내려왔었더라. 다윗이 그일라에 온 것을 혹이 사울에게 고하매 사울이 가로되 하나님이 그를 내 손에 붙이셨도다. 그가 문과 문빗장이 있는 성에 들어갔으니 갇혔도다. 사울이 모든 백성을 군사로 불러모으고 그일라로 내려가서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에워싸려 하더니 다윗이 사울의 자기를 해하려 하는 계교를 알고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에봇을 이리로 가져오라 하고 다윗이 가로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여, 사울이 나의 연고로 이 성을 멸하려고 그일라로 내려오기를 꾀한다 함을 주의 종이 분명히 들었나이다. 그일라 사람들이 나를 그의 손에 붙이겠나이까? 주의 종의 들은 대로 사울이 내려오겠나이까?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주의 종에게 일러 주옵소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가 내려오리라. 다윗이 가로되 그일라 사람들이 나와 내 사람들을 사울의 손에 붙이겠나이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들이 너를 붙이리라.

에봇에는 판결 흉패라는 것이 달려 있고 그 안에는 우림과 둠밈이라는 물건이 들어 있었다(출 28:30). 그것은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뜻을 묻는 용도로 쓰였다(민 27:21; 삼상 28:6). 그러므로 에봇은 때때로 하나님께 어떤 일을 묻는 일에 언급되었다고 본다(삼상 23:9; 30:7).

다윗이 그일라에 온 것을 안 사울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자기 손에 붙였다고 좋아하면서 모든 백성을 군사로 모으고 그일라로 내려가서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에워싸려 하였다. 그때 다윗은 하나님께 물었다. 그는 그일라를 돕고자 했을 때에도 하나님께 물었고, 사울이 그일라를 포위하려 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도 하나님께 물었다. 기도의 생활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의 생활이다. 기도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표시이다.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 교통하는 자는 그의 뜻을 분별하고 확신할 수 있다. 우리는 무슨 일을 계획하든지 첫째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성경말씀을 묵상하기를 힘써야 한다.

[13-14절] 다윗과 그의 사람 6백명 가량이 일어나 그일라를 떠나서 갈 수 있는 곳으로 갔더니 다윗이 그일라에서 피한 것을 혹이 사울에게 고하매 사울이 가기를 그치니라. 다윗이 황무지 요새에도 있었고 또 십 황무지 산골에도 유하였으므로 사울이 매일 찾되 하나님이 그를 그의 손에 붙이지 아니하시니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다시 정처 없는 도피의 방랑의 길을 떠났다. 그일라 사람들은 배은망덕했다. 그들은 그들을 구원해준 다윗과 그의 사람들에 대해 바른 생각을 하지 못하였다. 다윗은 이곳저곳에서 안정 없는 도피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경외하는 다윗을 그냥 버려두지 않으셨고 그를 지키시고 보호하셨다. 14절, “사울이 매일 찾되 하나님이 그를 그의 손에 붙이지 아니하시니라.”

[15-18절] 다윗이 사울의 자기 생명을 찾으려고 나온 것을 보았으므로 그가 십 황무지 수풀에 있었더니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일어나 수풀에 들어가서 다윗에게 이르러 그로 하나님을 힘있게 의지하게 하였는데[하나님 안에서 그의 손을 힘있게 하였는데] 곧 요나단이 그에게 이르기를 두려워 말라. 내 부친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요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부친 사울도 안다 하니라. 두 사람이 여호와 앞에서 언약하고 다윗은 수풀에 거하고 요나단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요나단은 다윗이 있는 수풀에 들어가 그로 하나님을 힘있게 의지하게 했다. 요나단은, 신앙의 친구요 하나님의 사람인 다윗을 격려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심신으로 피곤했을 다윗을 요나단을 통해 위로하시고 격려하셨다. 요나단은 그에게 말했다. “두려워 말라. 내 부친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요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부친 사울도 안다.” 요나단은 하나님의 뜻과 백성의 뜻을 아는 자이었고 겸손한 자이었다. 그는 믿음의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여호와 앞에서 다시 언약하였다(삼상 20:16).

[19-23절] 때에 십 사람들이 기브아에 이르러 사울에게 나아와 가로되 다윗이 우리와 함께 광야 남편 하길라산 수풀 요새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하온즉 왕은 내려오시기를 원하시는 대로 내려오소서. 그를 왕의 손에 붙일 것이 우리의 의무니이다. 사울이 가로되 너희가 나를 긍휼히 여겼으니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혹이 내게 말하기를 그가 심히 공교히 행동한다 하나니 너희는 가서 더 자세히 살펴서 그가 어디 은적(隱迹)하였으며[자주 나타났으며] 누가 거기서 그를 보았는지 알아보고 그가 숨어 있는 모든 곳을 탐지하고 실상을[확실하게] 내게 회보하라. 내가 너희와 함께 가리니 그가 이 땅에 있으면 유다 천천인 중에서 그를 찾아내리라.

십 사람들은 사울과 다윗의 관계에서 누가 옳고 그른지를 알지 못하는 무지한 자들이요 단지 인간적으로 사울을 동정하였고 하나님의 사람 다윗을 죽이려는 악한 사울 왕에게 잘못된 충성을 바치려 하였다. 그들에 대한 사울의 축복은 무익한 말에 불과하였다. 사울에게는 다윗을 반드시 찾아 죽이겠다는 마음밖에 없었다.

[24-29절] 그들이 일어나 사울보다 먼저 십으로 가니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광야 남편 마온 황무지 아라바에 있더니 사울과 그의 사람들이 찾으러 온 것을 혹이 다윗에게 고하매 이에 다윗이 바위로 내려 마온 황무지에 있더니 사울이 듣고 마온 황무지로 다윗을 따라가서는 사울이 산 이편으로 가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산 저편으로 가며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급히 피하려 하였으니 이는 사울과 그의 사람들이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에워싸고 잡으려 함이었더라. [그러나](KJV, NASB) 사자가 사울에게 와서 가로되 급히 오소서. 블레셋 사람이 땅을 침로하나이다. 이에 사울이 다윗 쫓기를 그치고 돌아와서 블레셋 사람을 치러 갔으므로 그 곳을 셀라하마느곳[분리의 바위(고대 역본들, BDB, NIV 각주), 도피의 바위(게세니우스, NASB)]이라 칭하니라. 다윗이 거기서 올라가서 엔게디 요새에 거하니라.

다윗은 점점 위험해지고 있었을 때 블레셋 사람들의 침략으로 그 위기를 모면하였다.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위급할 때 비상한 방식으로 그를 도우셨다. 다윗은 거기서 올라가 엔게디 요새에 거하였다. 엔게디는 사해(死海) 중서부에 있는 곳으로 도피자들의 좋은 은신처로 사용된 곳이었다. 다윗은 피신의 고난을 통해 믿음과 거룩함의 선한 인격으로 단련을 받았다.


본장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하나님의 사람 다윗은 많은 고난의 여정을 통과했다. 그는 약 10여년 간의 피난 생활을 경험했다. 그는 메시아와 신약 성도의 모형이 되었다. 성도들에게는 많은 고난이 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버려두지 않으셨고 그와 함께하셔서 그의 길을 지도하셨고 그를 사울의 칼날로부터 지키셨고 요나단을 보내어 그를 위로 격려하기도 하셨고 또 위기에 처한 다윗을 블레셋 사람들의 침입을 통해 비상하게 도우셨다. 그는 믿음 있는 신약 성도들도 이처럼 도우신다. 성도에게는 고난 중에도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다.

셋째로, 다윗은 고난 중에도 늘 하나님을 의지하였고 먼저 하나님께 무엇을 묻고 하나님의 뜻을 확인한 후에 행하였고 또 양심에 거리끼는 죄악된 일을 멀리한 인물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성도와 함께하신다. 오늘날 우리도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말씀과 기도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하나님만 믿고 성경말씀만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과 성경말씀을 믿는 믿음으로만 살아야 한다.

 

24장: 다윗이 사울의 옷자락을 벰

[1-3절] 사울이 블레셋 사람을 따르다가 돌아오매 혹이 그에게 고하여 가로되 보소서, 다윗이 엔게디 황무지에 있더이다. 사울이 온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을 거느리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찾으러 들염소 바위로 갈새 길가 양의 우리에 이른즉 굴이 있는지라. 사울이 그 발을 가리우러 들어가니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 굴 깊은 곳에 있더니.

엔게디는 석회석 굴들이 많은 산이며 거기 있는 어떤 굴들은 수백 명 혹은 수천 명 들어갈 수 있는 큰 굴들이라고 한다. ‘그 발을 가리운다’는 원어(리하세크 엣 라글라우)는 ‘용변을 본다’(NASB)는 점잖은 표현이다(BDB).

[4-7절] 다윗의 사람들이 가로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붙이리니 네 소견에 선한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자락을 가만히 베니라. 그리한 후에 사울의 옷자락 벰을 인하여 다윗의 마음이 찔려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 다윗이 이 말로 자기 사람들을 금하여 사울을 해하지 못하게 하니라. 사울이 일어나 굴에서 나가 자기 길을 가니라.

다윗은 자기 눈앞에 있는 자신의 이익보다 하나님의 이름과 권위를 더 크게 생각했다. 그는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자는 하나님께서만 친히 폐하실 수 있다고 믿었다. 로마서 14:4에서 사도 바울도 이와 비슷한 진리를 말하기를,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고 하였다.

[8-11절] 그 후에 다윗도 일어나 굴에서 나가 사울의 뒤에서 외쳐 가로되 내 주 왕이여 하매 사울이 돌아보는지라. 다윗이 땅에 엎드려 절하고 사울에게 이르되 다윗이 왕을 해하려 한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을 왕은 어찌하여 들으시나이까? 오늘 여호와께서 굴에서 왕을 내 손에 붙이신 것을 왕이 아셨을 것이니이다. 혹이 나를 권하여 왕을 죽이라 하였으나 내가 왕을 아껴 말하기를 나는 내 손을 들어 내 주를 해치 아니하리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였나이다. 나의 아버지여, 보소서. 내 손에 있는 왕의 옷자락을 보소서. 내가 왕을 죽이지 아니하고 겉옷자락만 베었은즉 나의 손에 악이나 죄과가 없는 줄을 아실지니이다. 왕은 내 생명을 찾아 해하려 하시나 나는 왕에게 범죄한 일이 없나이다.

다윗은 사울이 신하들의 잘못된 보고를 듣고 있음을 말하며 자신의 결백을 당당하게 증거하였다. 그는 사울에게 악을 행치 않았다.

[12-15절] 여호와께서는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사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려니와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 옛 속담에 말하기를 악은 악인에게서 난다 하였으니 내 손이 왕을 해하지 아니하리이다. 이스라엘 왕이 누구를 따라 나왔으며 누구를 쫓나이까? 죽은 개나 벼룩을 쫓음이니이다. 그런즉 여호와께서 재판장이 되어 나와 왕 사이에 판결하사 나의 사정을 살펴 신원(伸寃)하시고 나를 왕의 손에서 건지시기를 원하나이다.

다윗은 오직 하나님의 판단을 구했다. 그는 앞으로도 자신이 나서서 왕을 해하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12절,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 13절, “내 손이 왕을 해하지 아니하리이다.” 그는 겸손하게 자신을 죽은 개와 벼룩에 비교했다(14절). 그는 하나님의 공의의 보응만 믿었다. 12절, “여호와께서는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사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응하시려니와.” 15절, “그런즉 여호와께서 재판장이 되어 나와 왕 사이에 판결하사 나의 사정을 살펴 신원하시고[억울함을 풀어주시고] 나를 왕의 손에서 건지시기를 원하나이다.”

[16-19절] 다윗이 사울에게 이같이 말하기를 마치매 사울이 가로되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목소리냐 하고 소리를 높여 울며 다윗에게 이르되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 네가 나 선대한 것을 오늘 나타내었나니 여호와께서 나를 네 손에 붙이셨으나 네가 나를 죽이지 아니하였도다. 사람이 그 원수를 만나면 그를 평안히 가게 하겠느냐? 네가 오늘날 내게 행한 일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네게 선으로 갚으시기를 원하노라.

다윗의 선한 처신은 사울을 감동시켰고 울렸다. 그는 사울을 선대했고 사울은 다윗이 자신을 선대하였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다윗의 선한 처신은 원수 사울의 인정과 원수의 축복까지 이끌어내었다.

[20-22절] 보라, 나는 네가 반드시 왕이 될 것을 알고 이스라엘 나라가 네 손에 견고히 설 것을 아노니 그런즉 너는 내 후손을 끊지 아니하며 내 아비의 집에서 내 이름을 멸하지 아니할 것을 이제 여호와로 내게 맹세하라. 다윗이 사울에게 맹세하매 사울은 집으로 돌아가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요새로 올라가니라

다윗이 왕이 되고 그를 통하여 이스라엘 나라가 견고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작정하신 바이었고 그의 섭리의 목표이었다.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온갖 노력을 했으나 결국 그에게 굴복하게 되었다.


본장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다윗은 사울에게 원수를 갚지 않았다. 그것은 우리가 본받을 만한 태도이다. 주께서는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마 5:44 전통본문; 눅 6:27-28). 사도 바울도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친히 원수를 갚지 말라”고 교훈하였다(롬 12:17, 19). 우리는 스스로 원수를 갚지 말아야 한다.

둘째로, 다윗은 자신이 원수를 갚으려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공의로 판단하시고 선악간에 보응하실 것을 믿었고 그의 억울함을 하나님께만 의탁했다(12, 15절). 사도 바울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고 말했다(롬 12:19). 우리도 모든 일을 공의의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공의로운 판단에 맡겨야 한다.

셋째로, 다윗은 사울을 선대하였고 겸손함과 예절을 지켰고 자신의 결백함을 정정당당하게 증거하였다(17-18, 20절). 사도 바울은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교훈했다(롬 12:21). 그것은 우리가 악한 자들에게 끝까지 선을 행함으로 그들의 악을 이겨야 한다는 뜻이다.

 

 

25장: 나발과 아비가일

[1-3절] 사무엘이 죽으매 온 이스라엘 무리가 모여 그를 애곡하며 라마 그의 집에서 그를 장사한지라. 다윗이 일어나 바란 광야로 내려가니라. 마온에 한 사람이 있는데 그 업이 갈멜에 있고 심히 부하여(NASB, NIV)11) 양이 삼천이요 염소가 일천이므로 그가 갈멜에서 그 양털을 깎고 있었으니 그 사람의 이름은 나발이요 그 아내의 이름은 아비가일이라. 그 여자는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우나 남자는 완고하고(카쉐)[(성격이) 거칠고, 완고하고] 행사가 악하며 그는 갈멜 족속[갈렙 족속](원문)12)이었더라.

[4-8절] 다윗이 광야에 있어서 나발이 자기 양털을 깎는다 함을 들은지라. 다윗이 이에 열 소년을 보내며 그 소년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갈멜로 올라가 나발에게 이르러 내 이름으로 그에게 문안하고 이같이 그 부하게 사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평강하라. 네 집도 평강하라. 네 소유의 모든 것도 평강하라. 네게 양털 깎는 자들이 있다 함을 이제 내가 들었노라. 네 목자들이 우리와 함께 있었으나 우리가 그들을 상치 아니하였고 그들이 갈멜에 있는 동안에 그들의 것을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나니 네 소년들에게 물으면 그들이 네게 고하리라. 그런즉 내 소년들로 네게 은혜를 얻게 하라. 우리가 좋은 날에 왔은즉 네 손에 있는 대로 네 종들과 네 아들 다윗에게 주기를 원하노라 하더라 하라.

[9-11절] 다윗의 소년들이 가서 다윗의 이름으로 이 모든 말을 나발에게 고하기를 마치매 나발이 다윗의 사환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뇨? 근일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내가 어찌 내 떡과 물과 내 양털 깎는 자를 위하여 잡은 고기를 가져 어디로서인지 알지도 못하는 자들에게 주겠느냐 한지라.

나발은 다윗이 골리앗을 쳐죽인 일에서 그의 믿음과 충성됨이나 또 지금 그가 어떻게 애매히 고난을 당하고 있음에 대해 몰랐을 리 없었으나, 다윗을 존중하거나 돕고자 하는 마음이 전혀 없었다.

[12-13절] 이에 다윗의 소년들이 돌이켜 자기 길로 행하여 돌아와서 이 모든 말로 그에게 고하매 다윗이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칼을 차라. 각기 칼을 차매 다윗도 자기 칼을 차고 4백명 가량은 데리고 올라가고 2백명은 소유물 곁에 있게 하니라.

[14-17절] 소년 중 하나가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에게 고하여 가로되 다윗이 우리 주인에게 문안하러 광야에서 사자들을 보내었거늘 주인이 그들을 수욕하였나이다. 우리가 들에 있어 그들과 상종할 동안에 그 사람들이 우리를 매우 선대하였으므로 우리가 상하거나 잃은 것이 없었으니 우리가 양을 지키는 동안에 그들이 우리와 함께 있어 밤낮 우리에게 담이 되었음이라. 그런즉 이제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을 알아 생각하실지니 이는 다윗이 우리 주인과 주인의 온 집을 해하기로 결정하였음이니이다. 주인은 불량한 사람(벤 벨리야알)[벨리알의 아들, 무가치한 자, 악한 자]이라. 더불어 말할 수 없나이다.

나발은 다윗과 그의 소년들을 모욕했다. 그는 자기 고집만 가득하고 남의 말을 듣거나 고려하지 않는 자이었다. 그것은 어리석은 자의 모습이다. 성도는 자기 고집대로 행하지 말아야 한다(딛 1:7).

[18-22절] 아비가일이 급히 떡 2백 덩이와 포도주 두 가죽부대와 잡아 준비한 양 다섯과 볶은 곡식 다섯 세아[약 36.5리터](1세아는 약 7.3리터)와 건포도 백 송이와 무화과뭉치 이백을 취하여 나귀들에게 싣고 소년들에게 이르되 내 앞서 가라. 나는 너희 뒤에 가리라 하고 그 남편 나발에게는 고하지 아니하니라. 아비가일이 나귀를 타고 산 유벽한 곳으로 좇아 내려가더니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자기에게로 마주 내려오는 것을 만나니라. 다윗이 이미 말하기를 내가 이 자의 소유물을 광야에서 지켜 그 모든 것을 하나도 손실이 없게 한 것이 진실로 허사라. 그가 악으로 나의 선을 갚는도다. 내가 그에게 속한 모든 것 중 한 남자라도 아침까지 남겨두면 하나님은 다윗에게 벌을 내리시고(LXX, NIV)[다윗의 원수들에게 벌을 내리시고](MT, KJV, NASB)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아비가일이 급하게 음식을 준비하여 다윗에게 나아간 것은 매우 지혜로운 일이었다. 지혜는 바르고 민첩한 판단을 돕는다. 지혜로운 사람은 바르고 민첩하게 행동할 수 있다.

[23-28절] 아비가일이 다윗을 보고 급히 나귀에서 내려 다윗의 앞에 엎드려 그 얼굴을 땅에 대니라. 그가 다윗의 발에 엎드려 가로되 내 주여, 청컨대 이 죄악을 나 곧 내게로 돌리시고 여종으로 주의 귀에 말하게 하시고 이 여종의 말을 들으소서. 원하옵나니 내 주는 이 불량한 사람 나발을 개의치 마옵소서. 그 이름이 그에게 적당하니 그 이름이 나발(나발)(‘미련하다’는 뜻)이라. 그는 미련한 자니이다. 여종은 내 주의 보내신 소년들을 보지 못하였나이다. 내 주여, 여호와께서 사시고 내 주도 살아계시거니와 내 주의 손으로 피를 흘려 친히 보수(報讐)하시는 일을 여호와께서 막으셨으니 내 주의 원수들과 내 주를 해하려 하는 자들은 나발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여종이 내 주에게 가져온 이 예물로 내 주를 좇는 이 소년들에게 주게 하시고 주의 여종의 허물을 사하여 주옵소서. 여호와께서 반드시 내 주를 위하여 든든한 집을 세우시리니 이는 내 주께서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심이요 내 주의 일생에 내 주에게서 악한 일을 찾을 수 없음이니이다.

나발은 미련한 자이었다. 그러나 그의 아내 아비가일은 지혜롭고 겸손했다. 그는 본장에서 다윗을 향해 ‘내 주’[나의 주](아도니)라는 말을 열두 번이나 사용하며(원문) 또 자신을 여러 번 ‘여종’이라고 표현한다. 그는 젊은 부잣집 여주인이었으나 다윗 앞에서 겸손히 처신하였다. 지혜로운 자는 겸손하지만, 미련한 자는 교만하다. 아비가일은 또 다윗이 어떤 자인지 알았다. 그는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해 든든한 집을 세우실 것을 알았고, 다윗이 하나님의 싸움을 싸우고 있음을 알았고, 그의 삶 전체에서 악한 일을 찾을 수 없음도 알았다.

[29절] 사람이 일어나서 내 주를 쫓아 내 주의 생명을 찾을지라도 내 주의 생명은 내 주의 하나님 여호와와 함께 생명싸개 속에 싸였을 것이요 내 주의 원수들의 생명은 물매로 던지듯 여호와께서 그것을 던지시리이다.

아비가일은 또 하나님께서 다윗을 끝까지 보호하시고 그의 원수들을 파하시리라고 믿었다. 사람이 한 집에 살아도 한 사람은 다윗을 몰랐고 대접하기는커녕 오히려 모욕하였고, 다른 한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지혜가 있어서 다윗에 대해 또 하나님의 뜻에 대해 바르게 알았다. 지혜와 어리석음의 차이는 너무 컸다.

[30-31절] 여호와께서 내 주에 대하여 하신 말씀대로 모든 선을 내 주에게 행하사 내 주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신 때에 내 주께서 무죄한 피를 흘리셨다든지 내 주께서 친히 보수(報讐)하셨다든지 함을 인하여 슬퍼하실 것도 없고 내 주의 마음에 걸리는 것도 없으시리니 다만 여호와께서 내 주를 후대하신 때에 원컨대 내 주의 여종을 생각하소서.

아비가일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이스라엘의 지도자 곧 왕으로 세우실 것을 알았다. 그것은 선지자 사무엘이 그에게 기름을 부었을 때 확실하였다. 아비가일에게는 그런 믿음과 확신이 있었다. 그는 장차 왕위에 오를 다윗에게 흠이 되는 일이 없기를 소원하였다.

[32-35절] 다윗이 아비가일에게 이르되 오늘날 너를 보내어 나를 영접케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또 네 지혜를 칭찬할지며 또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오늘날 내가 피를 흘릴 것과 친히 보수(報讐)하는 것을 네가 막았느니라. 나를 막아 너를 해하지 않게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노니 네가 급히 와서 나를 영접지 아니하였더면 밝는 아침에는 과연 나발에게 한 남자도 남겨두지 아니하였으리라. 다윗이 그가 가져온 것을 그의 손에서 받고 그에게 이르되 네 집으로 평안히 올라가라. 내가 네 말을 듣고 네 청을 허락하노라.

[36-38절] 아비가일이 나발에게로 돌아오니 그가 왕의 잔치 같은 잔치를 그 집에 배설하고 대취(大醉)하여 마음에 기뻐하므로 아비가일이 밝는 아침까지는 다소간 말하지 아니하다가 아침에 나발이 포도주가 깬 후에 그 아내가 그에게 이 일을 고하매 그가 낙담하여 몸이 돌과 같이 되었더니 한 열흘 후에 여호와께서 나발을 치시매 그가 죽으니라.

의인은 사자같이 용감하지만, 악인은 그렇게 용감하지 못하다.

[39-42절] 다윗이 나발의 죽었다 함을 듣고 가로되 나발에게 당한 나의 욕을 신설(伸雪)하사[억울함을 풀어주사] 종으로 악한 일을 하지 않게 하신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나발의 악행을 그 머리에 돌리셨도다 하니라. 다윗이 아비가일로 자기 아내를 삼으려고 보내어 그에게 말하게 하매 다윗의 사환들이 갈멜에 가서 아비가일에게 이르러 그에게 일러 가로되 다윗이 당신을 아내로 삼고자 하여 우리를 당신께 보내더이다. 그가 일어나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가로되 내 주의 여종은 내 주의 사환들의 발 씻길 종이니이다 하고 급히 일어나서 나귀를 타고 따르는 처녀 다섯과 함께 다윗의 사자들을 따라가서 다윗의 아내가 되니라.

아비가일은 믿음이 있고 겸손하고 봉사 정신도 가진 자이었다.

[43-44절] 다윗이 또 이스르엘 아히노암을 취하였더니 그들 두 사람이 자기 아내가 되니라. 사울이 그 딸 다윗의 아내 미갈을 갈림에 사는 라이스의 아들 발디에게 주었더라.


본장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나발은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고 거칠고 악하며 하나님의 뜻을 알지도 못했고 다윗에 대해 몰랐고 그를 동정하거나 돕기는커녕 오히려 그를 모욕했던 미련한 자이었다. 그의 생의 즐거움은 술취함이었다. 우리는 나발같이 되지 말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윗보다 크신 주님이시다. 우리는 나발같이 불경건, 완고함, 악함, 미련함, 술취함 등을 본받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를 사랑하고 그의 교회와 성도들을 사랑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둘째로, 아비가일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지혜롭고 겸손한 자이었다. 그는 자기에게 닥친 상황을 지혜롭고 민첩하게 대처했다. 그는 다윗을 바르게 알았고 그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았고 다윗이 지금 하나님의 싸움을 싸우고 있고 하나님께서 그를 보호하시고 마침내 그의 뜻을 다 이루실 것을 확신했다. 이것은 놀라운 지식이며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또 그는 봉사와 섬김의 정신도 가졌다. 우리는 아비가일의 지혜를 본받아야 한다. 우리는 다윗보다 크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며 살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따르고, 그를 사랑하고 그의 뜻을 따라 성도들을 사랑하며 선을 행해야 한다.

 

 

26장: 다윗이 사울의 창과 물병만 취함

[1-5절] 십 사람이 기브아에 와서 사울에게 이르러 가로되 다윗이 광야 앞 하길라 산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사울이 일어나 십 황무지에서 다윗을 찾으려고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과 함께 십 황무지로 내려가서 광야 앞 하길라 산 길가에 진치니라. 다윗이 황무지에 있더니 사울이 자기를 따라 황무지로 들어옴을 깨닫고 이에 탐정을 보내어 사울이 과연 이른 줄 알고 일어나 사울의 진친 곳에 이르러 사울과 넬의 아들 군대장관 아브넬의 유하는 곳을 본즉 사울이 진 가운데 누웠고 백성은 그를 둘러 진쳤더라.

[6-8절] 이에 다윗이 헷 사람 아히멜렉과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아우 아비새에게 물어 가로되 누가 나로 더불어 진에 내려가서 사울에게 이르겠느냐? 아비새가 가로되 내가 함께 가겠나이다. 다윗과 아비새가 밤에 그 백성에게 나아가 본즉 사울이 진 가운데 누워 자고 창은 머리 곁 땅에 꽂혔고 아브넬과 백성들은 그를 둘러 누웠는지라. 아비새가 다윗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오늘날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붙이셨나이다. 그러므로 청하오니 나로 창으로 그를 찔러서 단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 내가 그를 두 번 찌를 것이 없으리이다.

다윗은 또 한번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를 맞았다.

[9-12절] 다윗이 아비새에게 이르되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또 가로되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 죽을 날이 이르거나 혹 전장(戰場)에 들어가서 망하리라.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치는 것을 여호와께서 금하시나니 너는 그의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가자 하고 다윗이 사울의 머리 곁에서 창과 물병을 가지고 떠나가되 깨든지 이를 보든지 알든지 하는 사람이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로 깊이 잠들게 하셨으므로 그들이 다 잠이었더라.

다윗은 하나님을 두려워했고 그에게는 범사에 범죄치 않고 의롭고 신실하게 살려는 마음이 있었다. 그는 또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공의로우신 처분을 믿는 섭리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의 생애와 그의 평안과 불행을 홀로 주관하시는 이는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13-16절] 이에 다윗이 건너편으로 가서 멀리 산꼭대기에 서니 상거가 멀더라. 다윗이 백성과 넬의 아들 아브넬을 대하여 외쳐 가로되 아브넬아, 너는 대답지 아니하느냐? 아브넬이 대답하여 가로되 왕을 부르는[왕에게 외치는] 너는 누구냐? 다윗이 아브넬에게 이르되 네가 용사가 아니냐? 이스라엘 중에 너 같은 자가 누구냐? 그러한데 네가 어찌하여 네 주 왕을 보호하지 아니하느냐? 백성 중 한 사람이 네 주 왕을 죽이려고 들어갔었느니라. 네 행한 이 일이 선치 못하도다.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너희 주를 보호하지 아니하였으니 너희는 마땅히 죽을 자니라. 이제 왕의 창과 왕의 머리 곁에 있던 물병이 어디 있나 보라.

[17-20절] 사울이 다윗의 음성을 알아 듣고 가로되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음성이냐? 다윗이 가로되 내 주 왕이여, 내 음성이니이다. 또 가로되 내 주는 어찌하여 주의 종을 쫓으시나이까? 내가 무엇을 하였으며 내 손에 무슨 악이 있나이까? 청컨대 내 주 왕은 이제 종의 말을 들으소서. 만일 왕을 격동시켜 나를 해하려 하는 이가 여호와시면 여호와께서는 제물을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마는 만일 인자(人子)들이면 그들이 여호와 앞에 저주를 받으리니 이는 그들이 이르기를 너는 가서 다른 신들을 섬기라 하고 오늘날 나를 쫓아내어 여호와의 기업에 붙지 못하게 함이니이다. 그런즉 청컨대 여호와 앞에서 먼 이 곳에서 이제 나의 피로 땅에 흐르지 말게 하옵소서. 이는 산에서 메추라기를 사냥하는 자와 같이 이스라엘 왕이 한 벼룩을 수색하러 나오셨음이니이다.

다윗은 겸손히 처신했다. 그는 사울을 ‘내 주 왕이여’(17절), ‘내 주는’(18절), ‘내 주 왕은’(19절)이라고 높여 불렀고, 또 자신을 ‘주의 종’이라고 불렀고 메추라기와 벼룩이라고 겸손히 표현하였다(20절).

[21-25절] 사울이 가로되 내가 범죄하였도다. 내 아들 다윗아, 돌아오라. 네가 오늘 내 생명을 귀중히 여겼은즉 내가 다시는 너를 해하려 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어리석은 일을 하였으니 대단히 잘못 되었도다. 다윗이 대답하여 가로되 왕은 창을 보소서. 한 소년을 보내어 가져가게 하소서. 여호와께서 각 사람에게 그 의와 신실을 갚으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오늘날 왕을 내 손에 붙이셨으되 나는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치기를 원치 아니하였음이니이다. 오늘날 왕의 생명을 내가 중히 여긴 것같이 내 생명을 여호와께서 중히 여기셔서 모든 환난에서 나를 구하여 내시기를 바라나이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내 아들 다윗아,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네가 큰 일을 행하겠고 반드시 승리를 얻으리라 하니라. 다윗은 자기 길로 가고 사울은 자기 곳으로 돌아가니라.

사울은 큰 충격과 감동을 입었음이 분명하였다. 그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자신의 행위가 참으로 어리석었음을 인정했다. 다윗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믿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과 보응을 믿어야 한다. 사울은 엔게디 황무지에서 다윗을 축복한 데(삼상 24:19-20) 이어 두 번째로 그를 축복하였다.


본장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다윗은 정당한 이유 없이 자기를 죽이려 한 사울 왕을 죽일 두 번째 기회를 얻었으나 그를 죽이지 않았다. 그는 사울이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하나님의 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가 그를 죽인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는 믿음의 태도이었다. 우리는 범사에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만 살아야 한다.

둘째로,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 한 사울에게 ‘내 주 왕이여’라고 정중한 존칭어를 사용하였고 또 자신을 메추라기에 비교했고 벼룩이라고 겸손히 표현하였다. 그의 고난은 그를 더욱 겸손케 하는 훈련 과정이었을 것이다. 교만은 큰 죄악이다. 우리는 자신을 크게 여기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항상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하고 겸손하게 처신해야 한다.

셋째로, 다윗은 자기 자신이 사울에게 보복하려 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공의로운 처분을 믿었다. 우리는 우리를 미워하고 핍박하는 원수를 우리 자신이 갚을 것이 없다.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공의롭게 보응하실 것이기 때문에 오직 그에게 맡기면 된다. 하나님께서는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말씀하셨다(신 32:35; 롬 12:19). 우리는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의 공의로운 처분을 기다리면 된다.

 

27장: 다윗이 블레셋으로 내려감

[1-4절]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망하리니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피하여 들어가는 것이 상책[최선]이로다. 사울이 이스라엘 온 경내에서 나를 수색하다가 절망하리니 내가 그 손에서 벗어나리라 하고 일어나 함께 있는 6백인으로 더불어 가드 왕 마옥의 아들 아기스에게로 건너가니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각기 가족을 거느리고 가드에서 아기스와 동거하였는데 다윗이 그 두 아내 이스르엘 여자 아히노암과 나발의 아내 되었던 갈멜 여자 아비가일과 함께하였더니 다윗이 가드에 도망한 것을 혹이 사울에게 고하매 사울이 다시는 그를 수색하지 아니하니라.

다윗은 사울의 칼을 두려워하고 자기 사람들의 안전을 염려하는 마음이 있었다. 이것은 사람의 연약이었다. 다윗은 벌써 여러 번 하나님의 돌보심과 보호하심과 도우심을 체험했었으나 또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 인간적 지혜를 사용해 이방인 왕 아기스의 도움을 얻으려 했다. 다윗은 전에도 아기스에게로 도망한 적이 있었으나(삼상 21:10) 겨우 위기를 모면했었고 그 후에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갓을 통해 그가 유다 땅에 머물어야 할 것을 지시하셨었다(삼상 22:5). 유다 땅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이었다. 두려움과 염려는 불신앙을 만들었고 그 불신앙은 자기 생각을 따라 행하는 실수의 행위로 나타났다.

그것은 하나님 대신 자신의 인간적 지혜를 의지함이요 결국 사람을 의지함이었다. 믿음의 사람 다윗에게 이런 연약이 있었다. 휼륭한 믿음의 인격에게도 이런 연약이 있었다. 사람은 다 연약하다. 중생한 성도도 그 속에 이런 연약함이 있다. 아브람도 기근 때에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그의 아내를 잃어버릴 뻔하였었다(창 12:10-20).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의 은혜가 필요하다. 그러나 사울 왕은 다윗이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도망한 것을 듣고 다시는 그를 잡으려 뒤쫓지 않았다.

[5-7절] 다윗이 아기스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께 은혜를 받았거든 지방 성읍 중 한 곳을 주어 나로 거하게 하소서. 당신의 종이 어찌 당신과 함께 왕도(王都)에 거하리이까? 아기스가 그 날에 시글락을 그에게 주었으므로 시글락이 오늘까지 유다 왕에게 속하니라. 다윗이 블레셋 사람의 지방에 거한 날 수는 일년 넉 달이었더라.

[8-12절]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올라가서 그술 사람과 기르스 사람과 아말렉 사람을 침로하였으니 그들은 옛적부터 술과 애굽 땅으로 지나가는 지방의 거민이라. 다윗이 그 땅을 쳐서 남녀를 살려두지 아니하고 양과 소와 나귀와 약대와 의복을 취하고 돌아와서 아기스에게 이르매 아기스가 가로되 너희가 오늘은 누구를 침로하였느냐? 다윗이 가로되 유다 남방과 여라무엘 사람의 남방과 겐 사람의 남방이니이다. 다윗이 그 남녀를 살려 가드로 데려가지 아니한 것은 그의 생각에 그들이 우리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다윗의 행사가 이러하여 블레셋 사람의 지방에 거하는 동안에 이같이 행하는 습관이 있다 할까 두려워함이었더라. 아기스가 다윗을 믿고 말하기를 다윗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심히 미움을 받게 하였으니 그는 영영히 내 사역자가 되리라 하니라.

다윗은 아기스를 속임으로 그의 신임을 얻었다. 그러나 사무엘상 29장에 가보면, 다윗은 블레셋 땅에 거함으로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이스라엘 나라를 치는 전쟁에 참여할 뻔하였다. 그가 하나님의 은혜로 그 위기를 모면하였으나 하마터면 자기 민족 이스라엘을 자기 손으로 치는 낭패를 당할 뻔하였었다. 불신앙은 인간적 행위, 곧 죄악된 행위를 낳고 그것은 또 추가적인 범죄를 낳는다. 다윗이 블레셋으로 내려간 것은 확실히 그의 연약이었다. 그러나 다음 장들에서 보듯이, 하나님께서는 거기서도 다윗과 함께하셨고 사울과의 전쟁을 모면케 하셨고 사울 왕과 그 아들들은 그 전쟁에서 죽게 하셨다.


본장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다윗이 블레셋 땅으로 내려간 것은 잘못이었다. 그것은 그의 연약이었다. 그가 블레셋 땅으로 내려간 길은 시험의 길이며 범죄하는 길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을 주셨다. 그 땅은 하나님께서 선조들에게 약속하셨던 땅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언제나 그 땅을 떠나지 말아야 했다. 이사야는 말하기를,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말을 의뢰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앙모치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거니와 여호와께서도 지혜로우신즉 재앙을 내리실 것이라. . . . 애굽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며 그 말들은 육체요 영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 손을 드시면 돕는 자도 넘어지며 도움을 받는 자도 엎드러져서 다 함께 멸망하리라”고 하였다(사 31:1-3). 우리는 블레셋 땅으로 내려가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오늘날 성도들이 환난 날에 교회를 떠나서 세상으로 돌아가지 말아야 함을 보인다. 우리는 하나님의 참된 교회 안에 늘 거해야 하며 또 시시때때로 그 교회에 모여 예배하기를 힘써야 한다(히 10:25).

둘째로, 다윗은 때때로 거짓말을 했다. 하나님의 백성의 특징은 의와 사랑과 진실이다. 중생한 자는 반복해서 범죄하거나 죄 중에 머무르지 않고 의를 행하고 형제 사랑을 실천한다(요일 3:9-10). 요한계시록 22:15와 21:8은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지옥에 던지운다고 경고하였다. 우리는 항상 정정당당하게 살고 범사에 진실해야 하고 서로에게 진실한 것만을 말해야 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선의의 거짓말도 하지 말아야 한다.

셋째로, 하나님의 사람, 믿음의 사람 다윗에게도 염려와 두려움이 있었다. 이것은 사람들의 공통적 연약성이다. 그 연약 때문에 그는 블레셋 땅으로 내려갔다. 그것은 잘못이었다. 우리가 우리의 연약성을 극복하는 길은, 늘 깨어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밖에 없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고 말씀하셨다(마 26:41). 사도 베드로라도 위기의 때에 주를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다. 우리는 늘 깨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섭리자 하나님만 의지해야 한다.

 

 

28장: 사울이 신접한 자에게 물음

[1-2절] 그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쳐서 싸우려고 군대를 모집한지라. 아기스가 다윗에게 이르되 너는 밝히 알라. 너와 네 사람들이 나와 한가지로 나가서 군대에 참가할 것이니라. 다윗이 아기스에게 이르되 그러면[참으로] 당신이 종의 행할 바를 아시리이다. 아기스가 다윗에게 이르되 그러면 내가 너로 영영히 내 머리 지키는 자를 삼으리라 하니라.

다윗에게 어려운 시험이 왔다. 실상 그가 블레셋 땅으로 내려간 것이 시험의 시작이었다. 그가 어떻게 자기 민족과의 전쟁에 참여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지금 이 일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사람이 한번 잘못된 길에 발을 디디면 또다른 시험거리가 오는 것 같다.

[3-7절] 사무엘이 죽었으므로 온 이스라엘이 그를 애곡하며 그의 본성 라마에 장사하였고 사울은 신접한 자와 박수를 그 땅에서 쫓아내었었더라. 블레셋 사람이 모여 수넴에 이르러 진치매 사울이 온 이스라엘을 모아 길보아에 진쳤더니 사울이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보고 두려워서 그 마음이 크게 떨린지라. 사울이 여호와께 묻자오되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지 아니하시므로 사울이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 내가 그리로 가서 그에게 물으리라. 그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엔돌에 신접한 여인이 있나이다.

사울은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보고 크게 두려워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담력을 잃게 된다. 잠언 28:1,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니라.” 사울이 여호와께 간구했으나 여호와께서는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우림’은 대제사장의 에봇에 넣는 물건이다. 하나님께서 사울의 기도에 응답지 않으신 것은 그가 범죄함으로 버림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 잠언 15:29, “여호와는 악인을 멀리하시고 의인의 기도를 들으시느니라.”

사울이 자신이 전에 그 땅에서 추방한(9절)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고 명령한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었다. 사울은 불순종하여 범죄함으로 두려워했고, 하나님께 기도했으나 응답을 받지 못했고, 이제 또다른 죄, 더 큰 죄를 짓고자 한다. 하나님께 묻지 않고 귀신에게 묻는 것은 제1, 2계명을 범하는 참으로 큰 죄악이다.

[8-11절] 사울이 다른 옷을 입어 변장하고 두 사람과 함께 갈새 그들이 밤에 그 여인에게 이르러는 사울이 가로되 청하노니 나를 위하여 신접한 술법으로 내가 네게 말하는 사람을 불러 올리라. 여인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사울의 행한 일 곧 그가 신접한 자와 박수를 이 땅에서 멸절시켰음을 아나니 네가 어찌하여 내 생명에 올무를 놓아 나를 죽게 하려느냐? 사울이 여호와로 그에게 맹세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네가 이 일로는 벌을 당치 아니하리라. 여인이 가로되 내가 누구를 네게로 불러 올리랴? 사울이 가로되 사무엘을 불러 올리라.

사울은 다른 옷을 입어 변장하고 밤에 신접하는 여인에게로 갔다. 그는 그 일이 잘못이며 위법임을 알았고 양심적으로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남의 눈을 피해 변장했고 밤에 그 여인에게로 갔던 것이다. 그는 그에게 신접한 술법으로 사무엘을 불러 올리기를 요청하였다. 그는 여호와로 맹세하면서 여호와께서 금하신 일을 하였다.

[12-14절] 여인이 사무엘을 보고 큰 소리로 외치며 사울에게 말하여 가로되 당신이 어찌하여 나를 속이셨나이까? 당신이 사울이시니이다. 왕이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라. 네가 무엇을 보았느냐? 여인이 사울에게 이르되 내가 신(엘로힘)[‘신들’(KJV), ‘한 영’(NIV), ‘한 신적 존재’(NASB)]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나이다. 사울이 그에게 이르되 그 모양이 어떠하냐? 그가 가로되 한 노인이 올라오는데 그가 겉옷을 입었나이다. 사울이 그가 사무엘인 줄 알고 그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니라.

신접술은 악령들의 활동이다. 악령도 제한적으로 신기한 일들을 행한다. 그 여자는 자기에게 찾아온 사람이 사울임을 악령의 감동으로 알아보았고 그의 요청대로 한 신적 존재를 불러 올렸다.

[15-19절]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불러 올려서 나로 분요케[어지럽게, 소란케] 하느냐? 사울이 대답하되 나는 심히 군급[다급]하니이다. 블레셋 사람은 나를 향하여 군대를 일으켰고 하나님은 나를 떠나서 다시는 선지자로도, 꿈으로도 내게 대답지 아니하시기로 나의 행할 일을 배우려고 당신을 불러 올렸나이다.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너를 떠나 네 대적이 되셨거늘 네가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여호와께서 나로 말씀하신 대로 네게 행하사 나라를 네 손에서 떼어 네 이웃 다윗에게 주셨느니라. 네가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치 아니하고 그의 진노를 아말렉에게 쏟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오늘날 이 일을 네게 행하셨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너와 함께 블레셋 사람의 손에 붙이시리니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으리라. 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 군대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 붙이시리라.

본문은 그 신접한 여인이 사무엘을 불러 올렸고 그의 말을 대언했다고 표현한다. 본문은 ‘사무엘이 . . . 이르되,’ ‘사무엘이 가로되’라고 표현하고(15, 16절), 또 그가 사울과 그의 아들들이 그 다음날 죽을 것을 예언하기도 했다(19절). 또 20절에서도 ‘사무엘의 말을 인하여’라는 표현이 나온다. 그러나 그 여인이 불러 올린 자가 진짜 사무엘인가? 본문의 표현에 근거하여 그렇다는 견해도 있지만, 성경 전체의 빛 아래서 우리는 이것이 악령의 활동이었다고 본다.13)

매튜 풀은 그 이유들을 몇 가지로 정리해 말한다. 첫째로, 신접술은 하나님께서 금하신 방법이다. 신명기 18:9-1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거든 너는 그 민족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 것이니 그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복술자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의 중에 용납하지 말라. 무릇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둘째로, 신접술로 나타난 사무엘은 사울의 경배를 받았다. 14절, “사울이 그가 사무엘인 줄 알고 그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니라.” 이것은 사람에게 합당치 않은 일이라고 본다. 그가 진짜 사무엘이었다면, 그의 발 앞에 엎드렸던 고넬료에게 일어서라고 한 베드로처럼 말하였을 것이라고 본다(행 10:25-26).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후에 사울의 그 행위를 정죄하셨다. 역대상 10:13-14, “사울의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저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저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돌리셨더라.”

넷째로, 신접술에 의해 올라왔다고 하는 사무엘이라는 영은 땅에서 올라왔다. 13절, “여인이 사울에게 이르되 내가 신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나이다.” 그러나 구약시대에도 의인은 하늘의 안식에 들어간다. 전도서 3:20-21,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시편 73:24,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구약 성도도 죽은 후에 영광에 들어갔다고 본다. 또 하늘에 올라간 의인의 영은 다시 땅으로 내려올 수 없고(눅 16:26), 또 하나님께서 악령의 활동인 신접술에 의해 사무엘을 땅으로 내려보내실 리도 없다.

다섯째로, 악령도 강한 추측으로 어느 정도 미래를 예측하며 예견하기도 한다. 무당들도 신기한 일을 하며 어느 정도 미래를 예측하며 예견한다. 마태복음 24:11, [종말의 열 가지 징조들 중에]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20-25절] 사울이 갑자기 땅에 온전히 엎드러지니 이는 사무엘의 말을 인하여 심히 두려워함이요 또 그 기력이 진하였으니 이는 그가 종일 종야에[온종일 낮과 밤에] 식물을 먹지 못하였음이라. 그 여인이 사울에게 이르러 그 심히 고통함을 보고 그에게 이르되 여종이 왕의 말씀을 듣고 나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왕이 내게 이르신 말씀을 청종하였사오니 그런즉 청컨대 이제 여종의 말을 들으사 나로 왕의 앞에 한 조각 떡을 드리게 하시고 왕은 잡수시고 길 가실 때에 기력을 얻으소서. 사울이 거절하여 가로되 내가 먹지 아니하겠노라. 그 신하들과 여인이 강권하매 그 말을 듣고 땅에서 일어나 침상에 앉으니라. 여인의 집에 살진 송아지가 있으므로 그것을 급히 잡고 가루를 취하여 뭉쳐 무교병을 만들고 구워서 사울의 앞에와 그 신하들의 앞에 드리니 그들이 먹고 일어나서 그 밤에 가니라.

사울이 신접한 여인을 만난 것은 그를 더욱 절망케 했을 뿐 아무런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거짓된 신비주의는 참된 해답이 아니다.


본장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다윗에게 어려운 시험이 왔다. 실상 블레셋 땅으로 내려간 것이 시험의 시작이었다. 사람이 한번 잘못된 길에 발을 디디면 또다른 시험거리가 오는 것 같다. 우리는 무슨 일을 결정하여 행할 때 많이 기도하고 생각하고 판단하여 행해야 한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사울의 기도에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응답하지 않으셨다. 그것은 그에게 참된 회개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물론 회개는 하나님의 은혜로 된다. 우리는 다 부족한 자이므로 때때로 실수하고 넘어질 수 있으나 죄를 깨달을 때 그 죄를 철저히 회개하고 버리고 하나님의 모든 계명들에 순종하는 것이 중요하다. 모든 문제의 해결은 하나님의 은혜로 회개함에 있다. 우리는 범죄했을 때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회개하고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해야 한다.

셋째로,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두려워 떨었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 신접한 여인에게 찾아갔다. 그것은 잘못을 더하는 일이었다. 우리가 이 세상 사는 동안 우리에게 닥친 모든 어려운 일들은 전쟁과 같다. 죄인은 전쟁 때에 두려워 떨 수밖에 없다. 그러나 구원과 승리는 오직 하나님께서 주신다(시 3:8). 우리는 어려운 일들과 위기 상황에서 오직 회개하고 하나님만 의지하며 기도하며 순종하며 행해야 한다.

 

29장: 다윗이 참전(參戰)을 모면함

[1-3절] 블레셋 사람들은 그 모든 군대를 아벡에 모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스르엘에 있는 샘 곁에 진쳤더라. 블레셋 사람의 장관들은 수백씩 수천씩 영솔하여 나아가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아기스와 함께 그 뒤에서 나아가더니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가로되 이 히브리 사람들이 무엇을 하려느냐? 아기스가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에게 이르되 이는 이스라엘 왕 사울의 신하 다윗이 아니냐? 그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여러 날 여러 해로되 그가 망명하여 온 날부터 오늘까지 내가 그의 허물을 보지 못하였노라.

블레셋 사람들과 이스라엘 사람들 간에 전쟁이 일어났다. 두 진영은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 아기스는 다윗에게 참전(參戰)을 요구하였었다(삼상 28:1). 다윗은 그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을 것이다. 본장에서 ‘장관’(세렌)(2, 6, 7절)과 ‘방백’(사르)(3, 4절)은 동의어로 쓰이는 것 같다. 블레셋 장관들은 블레셋 다섯 성읍들의 통치자들이었을 것이다. 아기스는 그들에게 다윗에 대하여 그가 블레셋 땅에 거하며 흠 없게 행하였다고 좋게 증거하였다.

이와 같이, 다윗은 블레셋 땅에 내려와 1년 4개월 이상 살면서(삼상 27:7) 자신과 자기 사람들의 안전을 위하여 아기스의 종으로 처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아기스가 이스라엘 사람들과의 전쟁에 참여하기를 요청하였을 때 거절할 수 없었고 그에게 충성심을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 동족과 싸우기를 원치 않았을 것이다. 다윗으로서는 참 난감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는 이 난감한 상황을 어떻게 모면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기도했을 것이다.

다윗이 이러한 상황에 떨어진 것은, 그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인간적 생각으로 블레셋 땅으로 피하여 내려왔기 때문이었다고 본다. 그는 전에도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피하였다가 미친 척하고 도망하다시피 나온 적이 있었고(삼상 21장), 또 모압 땅으로 피하였을 때도 선지자 갓이 그에게 와서 유다 땅으로 돌아가라고 지시한 적도 있었다(삼상 22장). 성도가 인간적인 생각으로 행하면 낭패를 당할 것이다. 우리는 범사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성경 교훈과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를 따라 바른 길로 행해야 한다.

[4-5절]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그에게 노한지라. 블레셋 방백들이 그에게 이르되 이 사람을 돌려보내어 왕이 그에게 정하신 그 처소로 가게 하소서. 그는 우리와 함께 싸움에 내려가지 못하리니 그가 전장에서 우리의 대적이 될까 하나이다. 그가 무엇으로 그 주와 다시 화합하리이까? 이 사람들의 머리로 하지 아니하겠나이까? 그들이 춤추며 창화하여 가로되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던 이 다윗이 아니니이까?

아기스의 말을 들은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은 그에게 노하였다. 그들은 다윗의 참전이 자기들에게 위태한 일이라고 판단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판단이었고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신 은혜이었다.

[6-8절] 아기스가 다윗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네가 정직하여 내게 온 날부터 오늘까지 네게 악이 있음을 보지 못하였으니 나와 함께 군중에 출입하는 것이 나의 소견에는 좋으나 장관들이 너를 좋아하지 아니하니 너는 돌이켜 평안히 가서 블레셋 사람의 장관들에게 거슬려 보이게 말라. 다윗이 아기스에게 이르되 내가 무엇을 하였나이까? 내가 당신의 앞에 오늘까지 있는 동안에 당신이 종에게서 무엇을 보셨기에 나로 가서 내 주 왕의 원수와 싸우지 못하게 하시나이까?

아기스는 다윗에게 그가 정직하게 또 선하게 행하였다고 증거했다.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라는 말은 아기스가 다윗에게 영향을 받았음을 보이는 것 같다. 다윗이 아기스에게 충성을 고백했으나, 그것은 그의 본심이 아니었을 것이다. 비록 그의 중심을 보일 수는 없었을지라도, 그는 속으로 다행이라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을 것이다.

[9-11절] 아기스가 다윗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내 목전에 하나님의 사자같이 선한 것을 내가 아나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은 말하기를 그가 우리와 함께 전장에 올라가지 못하리라 하니 그런즉 너는 너와 함께 온 네 주의 신하들로 더불어 새벽에 일어나라. 너희는 새벽에 일어나서 밝거든 곧 떠나라. 이에 다윗이 자기 사람들로 더불어 일찍이 아침에 일어나서 떠나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돌아가고 블레셋 사람은 이스르엘로 올라가니라.

아기스는 다윗을 하나님의 사자와 같이 선하다고 좋게 증거하였다. 옛날 아브라함도 헷 족속에게 인정을 받았다(창 23:6). 다니엘도 그를 시기하였던 동료 총리들과 방백들에게 아무 부족을 보이지 않았다(단 6:4-5). 아브라함과 다윗과 다니엘 등은 다 이방인들 앞에서 정직하고 흠 없고 선한 인격자로 인정과 존경을 받았다.


본장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다윗이 자기의 동족과 싸워야 할 뻔했던 위기를 모면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섭리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연약한 다윗을 돌아보시고 도우시고 위기에서 건져주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한 도우심을 믿어야 한다. 고린도전서 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섭리만 믿고 의지해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성도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롬 8:28).

둘째로, 다윗은 블레셋 땅에 1년 4개월 이상 살면서 가드 왕 아기스에게 선한 증거를 얻었다. 우리는 주위의 불신자들이 우리에 대해 선한 증거를 할 수 있을 정도로 하나님 경외하고 계명 순종하며 바르게 살기를 힘써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위기 속에서도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으시고 도우시고 건지실 것이다. 신명기 28장의 복의 약속은 여전히 유효하다. 계명을 순종하는 자는 복되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하나님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져주신다(시 34:19). 사도 요한은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고 말하였다(요일 3:21-22).

 

30장: 다윗이 아말렉과 싸움

[1-6절]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제3일에 시글락에 이를 때에 아말렉 사람들이 이미 남방과 시글락을 침로하였는데 그들이 시글락을 쳐서 불사르고 거기 있는 대소 여인들을 하나도 죽이지 아니하고 다 사로잡아 끌고 자기 길을 갔더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성에 이르러 본즉 성이 불탔고 자기들의 아내와 자녀들이 사로잡혔는지라. 다윗과 그와 함께한 백성이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를 높여 울었더라. (다윗의 두 아내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과 갈멜 사람 나발의 아내 되었던 아비가일도 사로잡혔더라.) 백성이 각기 자녀들을 위하여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이 크게 군급하였으나[곤욕스러웠으나] 그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하나님의 사람 다윗의 사람들이 거했던 성에 왜 이런 불행한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다. 인생의 여정에는 때때로 불행한 일들이 일어난다. 그러나 다행히, 아말렉 사람들은 시글락 거민을 하나도 죽이지 않고 다 끌고 갔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블레셋 군대에서 제외되어 삼일 만에 돌아왔으므로 그들을 뒤쫓아갈 수 있었다. 여러 날 전쟁을 치룬 후이었더라면 그들을 뒤쫓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성에 이르렀을 때 성은 이미 불탔고 아내들과 자녀들은 사로잡혀간 후이었다. 사람들은 그 자녀들 때문에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는 말까지 하였고 다윗은 그 말을 듣고 크게 곤욕스러웠으나, 여호와 하나님을 힘입고 용기를 얻었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은 어려울 때에 그가 평소에 섬겼던 여호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힘과 용기를 얻었다. 그러므로 그는 시편 18:1에서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라고 고백하였다.

[7-10절] 다윗이 아히멜렉의 아들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청컨대 에봇을 내게로 가져오라. 아비아달이 에봇을 다윗에게로 가져오매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내가 이 군대를 쫓아가면 미치겠나이까? 여호와께서 대답하시되 쫓아가라. 네가 반드시 미치고 정녕 도로 찾으리라. 이에 다윗과 그와 함께한 6백명이 가서 브솔 시내에 이르러는 뒤떨어진 자를 거기 머물렀으되 곧 피곤하여 브솔 시내를 건너지 못하는 2백인을 머물렀고 다윗은 4백인을 거느리고 쫓아가니라.

다윗은 아히멜렉의 아들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에봇을 가져오도록 청하였다. 에봇은 거기에 붙은 판결흉패 속에 든 우림과 둠밈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민 27:21; 삼상 23:9). 다윗은 여호와께 묻고 하나님의 뜻을 안 후에 그들을 뒤쫓았다.

[11-15절] 무리가 들에서 애굽 사람 하나를 만나 다윗에게로 데려다가 떡을 주어 먹게 하며 물을 마시우고 무화과 뭉치에서 뗀 덩이 하나와 건포도 두 송이를 주었으니 그가 낮 사흘, 밤 사흘을 떡도 먹지 못하였고 물도 마시지 못하였음이라. 그가 먹고 정신을 차리매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너는 뉘게 속하였으며 어디로서냐? 가로되 나는 애굽 소년이요 아말렉 사람의 종이더니 사흘 전에 병이 들매 주인이 나를 버렸나이다. 우리가 그렛 사람의 남방과 유다에 속한 지방과 갈멜 남방을 침로하고 시글락을 불살랐나이다.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그 군대에게로 인도하겠느냐? 그가 가로되 당신이 나를 죽이지도 아니하고 내 주인의 수중에 붙이지도 아니하겠다고 하나님으로 맹세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당신을 이 군대에게로 인도하리이다.

무리가 들에서 애굽 사람 하나를 만나 다윗에게로 데려왔고 그가 밤낮 사흘을 굶었으므로 그에게 떡과 물을 주고 또 무화과 뭉치 중에 한 덩이와 건포도 두 송이도 주어 먹게 했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자비와 동정심이 있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아말렉 사람들을 뒤쫓는 중에서도 죽어가는 한 불쌍한 이방 소년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그에게 베푼 자비로 인해 하나님의 뜻 가운데 그 소년을 통해 그 아말렉 사람들이 진친 곳으로 인도함을 얻었다.

[16-20절] 그가 인도하여 내려가니 그들이 온 땅에 편만하여 블레셋 사람의 땅과 유다 땅에서 크게 탈취하였음을 인하여 먹고 마시며 춤추는지라. 다윗이 새벽[저녁]부터14) 이튿날 저물때까지 그들을 치매 약대 타고 도망한 소년 4백명 외에는 피한 사람이 없었더라. 다윗이 아말렉 사람의 취하였던 모든 것을 도로 찾고 그 두 아내를 구원하였고 그들의 탈취하였던 것 곧 무리의 자녀들이나 빼앗겼던 것의 대소를 물론하고 아무것도 잃은 것이 없이 다윗이 도로 찾아왔고 또 양떼와 소떼를 다 탈취하였더니 무리가 그 가축 앞에 몰고 가며 가로되 이는 다윗의 탈취한 것이라 하였더라.

다윗은 아말렉 사람이 취했던 모든 것을 도로 찾았고 그 두 아내를 구원하였고 그들의 탈취하였던 것 곧 무리의 자녀들이나 빼앗겼던 것의 크고 작은 모든 것을, 아무것도 잃은 것이 없이 도로 찾아왔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도로 찾게 해주셨다. 그들은 또 수고에 대한 보상과 같이 아말렉 사람들의 양떼와 소떼를 다 취하였다.

[21-25절] 다윗이 이왕에 피곤하여 능히 자기를 따르지 못하므로 브솔 시내에 머물게 한 2백인에게 오매 그들이 다윗과 그와 함께한 백성을 영접하러 나온지라. 다윗이 그 백성에게 이르러 문안하매 다윗과 함께 갔던 자 중에 악한 자와 비류들이 다 가로되 그들이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은즉 우리가 도로 찾은 물건은 무엇이든지 그들에게 주지 말고 각 사람의 처자만 주어서 데리고 떠나가게 하라 하는지라. 다윗이 가로되 나의 형제들아,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를 치러 온 그 군대를 우리 손에 붙이셨은즉 그가 우리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이같이 못하리라. 이 일에 누가 너희를 듣겠느냐? 전장에 내려갔던 자의 분깃이나 소유물 곁에 머물렀던 자의 분깃이 일반일지니 같이 분배할 것이니라 하고 그 날부터 다윗이 이것으로 이스라엘의 율례와 규례를 삼았더니 오늘까지 이르니라.

악한 자들은 어디에나 있다. 그러나 다윗은 그들이 취한 노획물들이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들이며 또 백성의 다수가 똑같이 나누어야 할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그 악한 자들의 주장을 눌렀다.

[26-30절] 다윗이 시글락에 이르러 탈취물을 그 친구 유다 장로들에게 보내어 가로되 보라, 여호와의 원수에게서 탈취한 것을 너희에게 선사하노라 하고 벧엘에 있는 자와 남방 라못에 있는 자와 얏딜에 있는 자와 아로엘에 있는 자와 십못에 있는 자와 에스드모아에 있는 자와 라갈에 있는 자와 여라므엘 사람의 성읍들에 있는 자와 겐 사람의 성읍들에 있는 자와 홀마에 있는 자와 고라산에 있는 자와 아닥에 있는 자와 헤브론에 있는 자에게와 다윗과 그의 사람들의 왕래하던 모든 곳에 보내었더라.

다윗은 시글락에 이르러 그 전쟁 노획물을 그 친구 유다 장로들에게 보내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얻은 것을 나눌 줄 알았고 그것으로써 동족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그의 사랑을 표시하였다.


본장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다윗은 아말렉 사람들의 침략으로 성이 불타고 아내들과 자녀들이 잡혀가는 큰 피해를 당했다. 인생의 여정에는 때때로 어려운 일들이 있다. 많은 경우, 그 어려운 일들은 우리의 실수와 부족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징벌이다(히 12:7-8). 그러나 때로는 까닭 없이 당하는 고난, 즉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격의 훈련을 위해 주시는 고난도 있다. 그것이 욥이 당했던 혹독한 고난이었고(욥 1:9; 2:3) 또 사도 바울의 육체의 가시이었다(고후 12:7-10).

둘째로, 다윗은 크게 곤욕스러웠을 때 하나님으로 힘을 얻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며 행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도우셨고 그에게 좋은 결과를 주셨다. 다윗은 시글락을 침략하였던 아말렉 사람들을 쫓아가 싸워 이겼고 빼앗겼던 것을 다 도로 찾아왔다. 그는 그 승리가 하나님의 은혜임을 증거했다. 우리도 세상 사는 동안 어려운 일을 만날 때에 섭리자 하나님만 의지하며 믿음으로 행해야 한다.

셋째로, 다윗은 아말렉 사람들에게 버려져 죽을지도 몰랐을 애굽인 소년에게 먹을 것을 주었고, 그 전투에서 지쳐 뒤쳐졌던 동료 유대인들 200명에게 전쟁 노획물을 균등하게 나눠주었고, 또 그 전투에서 승리한 후 유다 장로들에게 선물을 보내었다. 그는 인간 관계에서 선함과 너그러움을 가졌다. 남을 사랑하는 선한 마음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의 요소이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항상 호의와 자비와 사랑을 가져야 한다.

 

 

31장: 사울과 그 아들들의 죽음

[1-3절]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치매 이스라엘 사람들이 블레셋 사람 앞에서 도망하여 길보아 산에서 엎드러져 죽으니라.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과 그 아들들을 쫓아 미쳐서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 아비나답과 말기수아를 죽이니라. 사울이 패전하매 활 쏘는 자가 따라 미치니 사울이 그 활 쏘는 자를 인하여 중상(重傷)한지라(와야켈 메오드)(은의 칼 미완료형)[심한 고통 중에 있은지라](BDB), 중상한지라(KJV, NASB, NIV)].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쳤고 이스라엘 사람은 블레셋 사람 앞에서 도망하여 길보아 산에서 엎드러져 죽었다. 그 전쟁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패배했다. 블레셋 사람들은 사울과 그 아들들을 쫓아 미쳐서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 아비나답과 말기수아를 죽였다.

[4-6절] 그가 병기 든 자에게 이르되 네 칼을 빼어 나를 찌르라. 할례 없는 자들이 와서 나를 찌르고 모욕할까 두려워하노라 하나 병기 든 자가 심히 두려워하여 즐겨 행치 아니하는지라. 이에 사울이 자기 칼을 취하고 그 위에 엎드러지매 병기 든 자가 사울의 죽음을 보고 자기도 자기 칼 위에 엎드러져 그와 함께 죽으니라. 사울과 그 세 아들과 병기 든 자와 그의 모든 사람이 다 그 날에 함께 죽었더라.

사울은 끝까지 싸우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것은 의로운 용사의 모습은 아니었다. 비록 사람의 구원은 하나님의 공의롭고 선하신 판단과 처분에 달려 있다고 보지만, 자살은 성도들에게 합당치 않은 큰 죄악이다. 사울과 그 세 아들들은 그 날에 다 함께 죽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울 왕국에 내리신 공의로운 징벌이었다.

[7-10절] 골짜기 저편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과 요단 건너편에 있는 자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도망한 것과 사울과 그 아들들의 죽었음을 보고 성읍들을 버리고 도망하매 블레셋 사람들이 이르러 거기 거하니라. 그 이튿날 블레셋 사람들이 죽은 자를 벗기러 왔다가 사울과 그 세 아들이 길보아 산에서 죽은 것을 보고 사울의 머리를 베고 그 갑옷을 벗기고 자기들의 신당과 백성에게 전파하기 위하여 그것을[사자들을](NIV; 원문에는 없지만 뜻은 그러하다고 보임) 블레셋 사람의 땅 사방에 보내고 그 갑옷은 아스다롯의 집에 두고 그 시체는 벧산 성벽에 못 박으매.

이스라엘 왕 사울은 목 베임을 당했고 그 시체는 성벽에 못 박혔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이보다 더한 수치가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악한 사울과 이스라엘 백성이 이렇게 모욕적인 패배를 당케 하셨다.

[11-13절] 길르앗 야베스 거민들이 블레셋 사람들의 사울에게 행한 일을 듣고 모든 장사가 일어나 밤새도록 가서 사울과 그 아들들의 시체를 벧산 성벽에서 취하여 가지고 야베스에 돌아와서 거기서 불사르고 그 뼈를 가져다가 야베스 에셀나무 아래 장사하고 7일을 금식하였더라.

요단강 건너편의 길르앗 야베스는, 사울이 왕으로 선택되고 아직 임직하기 전 암몬 사람들의 침입을 당했을 때 사울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소집하여 구원해주었던 곳이다. 그 거민들은 그들의 왕 사울의 은혜를 기억했던 것 같고 그에 대한 선한 보답을 잊지 않았다.

사울의 결말은 전쟁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죽음이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의 삶은 이렇게 슬프고 불행한 죽음으로 끝났다. 사울 왕 시대의 역사를 기술하는 이스라엘 왕국의 첫 번째 역사책인 사무엘상은 이와 같이 사울의 비극적 죽음의 사건으로 끝난다.


본장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사울은 블레셋 전쟁에서 중상을 입고 자살하여 죽었다. 그것은 의로운 용사의 모습은 아니었다. 사울의 최후는 비참하였다. 그의 생은 자살로 끝났다. 후에 다윗을 배반하고 그 아들 압살롬 편에 섰던 아히도벨도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삼사 17:23). 예수님의 열두 사도 중 하나이었던 가룟 유다도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마 27:5). 그러나 자살은 옳지 않다. 자살은 하나님 앞에서 죄이다. 자살은 사람의 생명을 존중하는 바른 태도가 아니다. 사람의 생명은 세상의 다른 피조물들의 생명과 달리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신 고귀한 것이다. 특히 어떤 잘못을 범한 자가 자살로 그의 생을 마감하는 것은 비겁한 일이다. 그것은 사회 정의를 혼란시키고 다른 이들에게 본이 되지 않는 일이다. 그가 사회의 지도자라면 더욱 그러하다. 또 법을 아는 자가 자신의 비리를 덮고 가족에게 돌아갈 벌을 피하는 방법으로 자살을 사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으나 그것을 사과하고 합당한 처벌을 받는 것이 옳다. 자살하는 자의 심적 고통의 상황은 동정할 수 있지만, 자살은 인정되어서는 안 될 악이다.

둘째로, 사울의 죽음은 그의 죄들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보응이었다. 사울이 범한 죄들은 무엇이었는가? 첫째로, 그는 사무엘을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어긴 일이었다(삼상 13:9, 13). 둘째로, 그는 아말렉을 다 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지 않고 아말렉 왕 아각을 살려두었다(삼상 15:9). 그의 부분적 순종은 불순종이었다. 셋째로, 그는 죄 없는 다윗을 계속 죽이려 했다(삼상 18-26장). 넷째로, 그는 제사장들이 다윗과 공모했다고 잘못 판단하여 85명을 죽였다(삼상 22장). 다섯째로, 그는 신접한 여자에게 물었다. 그것은 율법을 어긴 죄이었다(신 18:10-11). 그의 이러한 죄들에 대한 보응으로 그는 결국 죽고 만 것이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의 생은 실패의 생이었다. 그가 범한 죄들의 보응과 결말은 죽음이었다. 그가 지키려던 왕권 보존의 노력은 그의 죽음으로 허사가 되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종 다윗의 원수를 갚으셨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핍박하고 죽이려 한 사울의 죄를 모른 체하지 않으셨고 그의 죽음으로 그 죄를 갚으셨다. 하나님께서는 공의의 심판자이시고 성도들을 핍박하는 자들을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이시다. 이 세상에는 공의의 심판자 하나님께서 계신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원수를 갚으려 하지 말고 오직 살아계신 섭리자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로마서 12:19,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믿고 늘 바르고 담대하게 살아가야 한다.

 

 

사무엘하 1장: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슬퍼함

사무엘하는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인 다윗의 역사를 기록한다.

[1-4절] 사울의 죽은 후라. 다윗이 아말렉 사람을 도륙하고 돌아와서 시글락에서 이틀을 유하더니 제3일에 한 사람이 사울의 진에서 나왔는데 그 옷은 찢어졌고 머리에는 흙이 있더라. 저가 다윗에게 나아와 땅에 엎드려 절하매 다윗이 저에게 묻되 너는 어디서 왔느냐? 대답하되 이스라엘 진에서 도망하여 왔나이다. 다윗이 가로되 일이 어떻게 되었느뇨? 너는 내게 고하라. 저가 대답하되 군사가 전쟁 중에서 도망하기도 하였고 무리 중에 엎드러져 죽은 자도 많았고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도 죽었나이다.

다윗은 시글락으로 돌아온 후 제3일이었을 때에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의 죽음의 소식을 들었다. 그가 아기스를 따라 그 전쟁에 참여했다가 제3일에 시글락으로 돌아왔었고 또 아말렉 사람들을 치는 데 적어도 하루 종일을 썼으므로(삼상 30장) 그때는 그가 블레셋 군대에 참여하러 나갔을 때로부터 약 7일이 되는 때이었다. 즉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쟁이 시작된 지 1주일 만에 죽은 것이다. 그 전쟁은 하나님께서 사울을 죽게 하시기 위한 전쟁이었다. 다윗이 그 전쟁에 블레셋 군대로 참여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이었다. 만일 그가 참여했더라면, 그는 자기 동족 이스라엘 백성에게 사울과 요나단과 이스라엘 군사들을 죽였다는 비난을 받게 되었을 것이다.

[5-10절] 다윗이 자기에게 고하는 소년에게 묻되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의 죽은 줄을 네가 어떻게 아느냐? 그에게 고하는 소년이 가로되 내가 우연히 길보아 산에 올라보니 사울이 자기 창을 의지하였고 병거와 기병은 저를 촉급히[급히] 따르는데 사울이 뒤로 돌이켜 나를 보고 부르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한즉 내게 이르되 너는 누구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나는 아말렉 사람이니이다 한즉 또 내게 이르되 내 목숨이 아직 내게 완전히 있으므로 내가 고통에 들었나니 너는 내 곁에 서서 나를 죽이라 하시기로 저가 엎드러진 후에는 살 수 없는 줄을 내가 알고 그 곁에 서서 죽이고 그 머리에 있는 면류관과 팔에 있는 고리를 벗겨서 내 주께로 가져왔나이다.

[11-16절] 이에 다윗이 자기 옷을 잡아 찢으매 함께 있는 모든 사람도 그리하고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과 여호와의 백성과 이스라엘 족속이 칼에 죽음을 인하여 저녁때까지 슬퍼하여 울며 금식하니라. 다윗이 그 고한 소년에게 묻되 너는 어디 사람이냐? 대답하되 나는 아말렉 사람 곧 외국인의 아들이니이다. 다윗이 저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 죽이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냐 하고 소년 중 하나를 불러 이르되 가까이 가서 저를 죽이라 하매 그가 치매 곧 죽으니라. 다윗이 저에게 이르기를 네 피가 네 머리로 돌아갈지어다. 네 입이 네게 대하여 증거하기를 내가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죽였노라 함이니라 하였더라.

다윗은 자기 옷을 잡아 찢었다. 그것은 사람이 몹시 슬프고 괴로울 때 하는 행동이었다. 또 다윗은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과 여호와의 백성과 이스라엘 족속이 칼에 죽음을 인하여 저녁때까지 슬퍼하여 울며 금식했다. 다윗에게 사울의 죽음을 알려준 소년이 죽임을 당한 것은 자기가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왕을 죽였다고 보고했기 때문이다. 사무엘상 31:4는 사울이 스스로 칼에 엎어져 죽었다고 증거하지만, 그 소년은 자기가 죽였다고 말했다가 죽임을 당한 것이다.

[17-20절] 다윗이 이 슬픈 노래로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을 조상(弔喪)하고[애도하고] 명하여 그것을 유다 족속에게 가르치라 하였으니 곧 활 노래라. 야살의 책에 기록되었으되 이스라엘아, 너의 영광이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도다. 이 일을 가드에도 고하지 말며 아스글론 거리에도 전파하지 말지어다. 블레셋 사람의 딸들이 즐거워할까, 할례 받지 못한 자의 딸들이 개가를 부를까 염려로다.

17절 이하는 다윗이 사울 왕과 그 아들 요나단의 죽음을 애도(哀悼)하는 마음으로 지은 노래이다. 다윗은 이 슬픈 노래로 사울 왕과 그 아들 요나단을 슬퍼하였고 또 명하여 그것을 유다 족속에게 가르치라고 했다. 활 노래는 활을 사용해 연주한 노래라는 뜻 같다. 야살의 책은 여호수아 10:13에도 언급된 책으로 옛날부터 내려온 기록물인 것 같다. 사울 왕과 그의 아들 요나단은 이스라엘 나라의 영광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이제 길보아 산들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의 이 수치스런 패전의 소식, 곧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울 이 소식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기를 바랐다.

[21-25절] 길보아 산들아, 너희 위에 우로(雨露)[비와 이슬]가 내리지 아니하며 제물 낼 밭도 없을지어다. 거기서 두 용사의 방패가 버린 바 됨이라. 곧 사울의 방패가 기름 부음을 받지 않음같이 됨이로다. 죽은 자의 피에서, 용사의 기름에서 요나단의 활이 물러가지 아니하였으며 사울의 칼이 헛되이 돌아오지 아니하였도다. 사울과 요나단이 생전에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자러니 죽을 때에도 서로 떠나지 아니하였도다. 저희는 독수리보다 빠르고 사자보다 강하였도다. 이스라엘 딸들아, 사울을 슬퍼하여 울지어다. 저가 붉은 옷으로 너희에게 화려하게 입혔고 금 노리개를 너희 옷에 채웠도다. 오호라, 두 용사가 전쟁 중에 엎드러졌도다. 요나단이 너의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사울 왕과 요나단은 이전에 여러 전쟁들에서 항상 승리하였으나 길보아 산에서 블레셋 사람들과 한 전투에서 패배했다. 비록 사울 왕이 그의 원수이었지만, 다윗은 사울 왕과 요나단의 장점을 인정했다. 사울 왕과 그 아들 요나단은 평소에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자들이었다. 또 그들은 독수리보다 빠르고 사자보다 강한 용사들이었다.

[26-27절]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승하였도다.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으며 싸우는 병기가 망하였도다 하였더라.

다윗은 특히 요나단의 사랑을 기억하고 애도했다. 그는 요나단이 자기에게 심히 아름답다고 말했고 또 요나단이 여인의 사랑보다 더 큰 사랑으로 그를 사랑했다고 표현했다. 그는 사울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했다. 그는 옷을 찢고 저녁까지 애통하며 금식했고, 그의 죽음을 도왔다고 자랑스레 말한 아말렉 소년을 즉석에서 처단했고 후에 그의 슬픔을 표현한 애가를 지어 유다 사람들에게 부르게 했다.


본장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다윗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사랑하였다. 특히 그는 그의 친구 요나단을 사랑하였다. 그는 그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하였다. 또 그가 사울의 죽음을 슬퍼한 것은 그가 이스라엘 백성의 왕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반란자나 배신자의 마음가짐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가장 사랑해야 하며 그의 나라인 교회를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을 사랑해야 한다. 그러므로 주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다(요 13:34). 주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자기 희생의 사랑의 본을 보이셨으므로 우리도 다른 성도들을 향해 참된 사랑, 온전한 사랑으로 사랑해야 한다. 사도 바울도 에베소서 5:2에서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고 교훈하였다. 우리는 이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의 교회와 성도들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로, 다윗은 오랫동안 자기를 죽이려 했던 원수 사울의 죽음이 그에게 마음의 위로와 기쁨이 될 수 있었을 것이지만, 그는 그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했다. 주께서는 우리가 이런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교훈하셨다. 누가복음 6:27-28,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사도 바울도 같은 교훈을 하였다. 로마서 12:14, 19-21,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우리의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미워하고 우리를 해치는 원수까지도 끝까지 사랑해야 한다.

 

 

2장: 다윗이 유다의 왕이 됨

[1-4절] 그 후에 다윗이 여호와께 물어 가로되 내가 유다 한 성으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올라가라. 다윗이 가로되 어디로 가리이까? 가라사대 헤브론으로 갈지니라. 다윗이 그 두 아내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과 갈멜 사람 나발의 아내 되었던 아비가일을 데리고 그리로 올라갈 때에 또 자기와 함께한 종자들과 그들의 권속들을 다 데리고 올라가서 헤브론 각 성에 거하게 하니라. 유다 사람들이 와서 거기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유다 족속의 왕을 삼았더라.

다윗은 중대한 일을 결정할 때마다 먼저 하나님께 물었다. 주권적 섭리자 하나님을 범사에 인정하는 자는 하나님께 항상 기도할 것이다. 그는 자기와 함께한 사람들과 그 가족들을 다 데리고 올라가서 헤브론 각 성에 거하게 하였다. ‘헤브론 각 성’이라는 표현은 헤브론이 여러 마을들로 구성된 큰 도시이었음을 보인다. 헤브론은 하나님께서 주신 다윗의 안정된 거처가 되었다. 유다 사람들은 와서 거기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유다 족속의 왕을 삼았다. 그것은 선지자 사무엘이 그에게 기름을 부었던 때로부터 약 10여년 후의 일이었다고 본다. 다윗이 헤브론에서 유다 족속의 왕이 된 날 수는 7년 6개월이었다(삼하 2:11). 사무엘하 5:4-5, “다윗이 30세에 위(位)[왕위]에 나아가서 40년을 다스렸으되 헤브론에서 7년 6개월 동안 유다를 다스렸고 예루살렘에서 33년 동안 온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스렸더라.” 다윗이 이스라엘을 다스렸던 전체 통치연대는 주전 1010-970년경이었다.

[4-7절] . . . 혹이 다윗에게 고하여 가로되 사울을 장사한 사람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니이다 하매 다윗이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에게 사자들을 보내어 가로되 너희가 너희 주 사울에게 이처럼 은혜(케세드)[자비]를 베풀어 장사하였으니 여호와께 복을 받을지어다. 너희가 이 일을 하였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은혜(케세드)[자비]와 진리로 너희에게 베푸시기를 원하고 나도 이 선한 일을 너희에게 갚으리니 이제 너희는 손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할지어다. 너희 주 사울이 죽었고 또 유다 족속이 내게 기름을 부어 저희의 왕을 삼았음이니라.

다윗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되기를 원하였다. 그는 사울의 추종자들에 대해 서운한 감정을 가지지 않았고 감정적으로 보복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는 본래부터 이스라엘의 합법적 왕정에 대해 반란이나 반역 같은 생각을 가지지 않았다. 그는 사울의 추종자들을 징벌하기를 원치 않고 소위 화합정치를 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는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을 축복하며 그들의 선하고 충성된 행위에 대해 보상하기를 원하였던 것이다.

[8-11절] 사울의 군장 넬의 아들 아브넬이 이미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데리고 마하나임으로 건너가서 길르앗과 아술과 이스르엘과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온 이스라엘의 왕을 삼았더라.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비로소 이스라엘 왕이 될 때에 나이 40세며 두 해 동안 위(位)[왕위]에 있으니라. 유다 족속은 다윗을 따르니 다윗이 헤브론에서 유다 족속의 왕이 된 날 수는 일곱 해 여섯 달이더라.

이스라엘 전체의 화합은 시간이 필요했다.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은 나이 40세에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고 2년간 왕위에 있었다. 그러나 유다 족속은 다윗을 따랐고, 다윗은 헤브론에서 7년 6개월간 유다 족속의 왕이 되었다. 이스라엘 나라는 두 나라로 분리되어 있었다. 두 나라 간의 갈등은 몇 년간 계속되었다.

[12-17절] 넬의 아들 아브넬과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신복들은 마하나임에서 나와서 기브온에 이르고 스루야의 아들 요압과 다윗의 신복들도 나와서 기브온 못가에서 저희를 만나 앉으니 이는 못 이편이요 저는 못 저편이라. 아브넬이 요압에게 이르되 청컨대 소년들로 일어나서 우리 앞에서 장난하게[시합하게] 하자. 요압이 가로되 일어나게 하자 하매 저희가 일어나 그 수효대로 나아가니 베냐민과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편에 열둘이요 다윗의 신복 중에 열둘이라. 각기 적수의 머리를 잡고 칼로 적수의 옆구리를 찌르매 일제히 쓰러진지라. 그러므로 그 곳을 헬갓핫수림[날카로운 칼의 들판]이라 일컬었으며 기브온에 있더라. 그 날에 싸움이 심히 맹렬하더니 아브넬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의 신복들 앞에서 패하니라.

이처럼 같은 민족 간에 갈등과 싸움, 죽임과 죽음이 있었다.

[18-23절] 그 곳에 스루야의 세 아들 요압과 아비새와 아사헬이 있었는데 아사헬의 발은 들노루같이 빠르더라. 아사헬이 아브넬을 쫓아 달려가되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아브넬의 뒤를 쫓으니 아브넬이 뒤를 돌아보며 가로되 아사헬아, 너냐? 대답하되 내로라. 아브넬이 저에게 이르되 너는 좌편으로나 우편으로나 치우쳐서 소년 하나를 잡아 그 군복을 빼앗으라 하되 아사헬이 치우치기를 원치 않고 그 뒤를 쫓으매 아브넬이 다시 아사헬에게 이르되 너는 나 쫓기를 그치라. 내가 너를 쳐서 땅에 엎드러지게 할 까닭이 무엇이냐? 그렇게 하면 내가 어떻게 네 형 요압을 대면하겠느냐 하되 저가 치우치기를 싫어하매 아브넬이 창 뒤끝으로 그 배를 찌르니 창이 그 등을 꿰뚫고 나간지라. 곧 그 곳에 엎드러져 죽으매 아사헬의 엎드러져 죽은 곳에 이르는 자마다 머물러 섰더라.

그 곳에 스루야의 세 아들 요압과 아비새와 아사헬이 있었다. 스루야는 다윗의 누이이었다(대상 2:16). 그러면 요압과 아비새와 아사헬은 다윗의 조카들이다. 아사헬은 비록 그의 발이 들노루같이 빨랐으나 불행하게도 그 싸움에서 아브넬의 창 뒤끝에 찔려 죽었다.

[24-29절] 요압과 아비새가 아브넬의 뒤를 쫓아 기브온 거친 땅의 길 가 기아 맞은편 암마 산에 이를 때에 해가 졌고 베냐민 족속은 함께 모여 아브넬을 따라 한 떼를 이루고 작은 산꼭대기에 섰더라. 아브넬이 요압에게 외쳐 가로되 칼이 영영히 사람을 상하겠느냐? 마침내 참혹한 일이 생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네가 언제나 무리에게 그 형제 쫓기를 그치라 명하겠느냐? 요압이 가로되 하나님이 사시거니와 네가 흔단[틈의 실마리]의 말을 내지 아니하였더면 무리가 아침에 다 돌아갔을 것이요 그 형제를 쫓지 아니하였으리라 하고 나팔을 불매 온 무리가 머물러 서고 다시는 이스라엘을 쫓아가지 아니하고 다시는 싸우지도 아니하니라. 아브넬과 그 종자들[부하들]이 밤새도록 행하여 아라바를 지나 요단을 건너 비드론 온 땅을 지나 마하나임에 이르니라.

[30-32절] 요압이 아브넬 쫓기를 그치고 돌아와서 무리를 다 모으니 다윗의 신복 중에 19인과 아사헬이 궐(闕)이 났으나[비었으나] 다윗의 신복들이 베냐민과 아브넬에게 속한 자들을 쳐서 360명을 죽였더라. 무리가 아사헬을 베들레헴에 있는 그 아비 묘에 장사하고 요압과 그 종자들[부하들]이 밤새도록 행하여 헤브론에 이를 때에 날이 밝았더라.


본장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다윗은 헤브론으로 올라가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먼저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그것이 믿음이다. 잠언 3:6은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고 말했다.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자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믿는 자이며 그런 자는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기며 범사에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다. 우리는 쉬지 말고, 범사에, 항상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살전 5:17).

둘째로, 다윗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왕 사울을 위해 한 선한 일에 대해 듣고 그들을 축복하며 그들에게 선하게 보응하기를 원하였다. 성경 교훈의 요점은 우리가 선한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주의 말씀은 우리가 세상에서 선을 행해야 한다는 뜻이다(마 5:14-16). 아모스 5:14는 너희는 살기 위해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라고 말하였다. 선한 일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이다(딛 2:14). 우리는 항상 선한 일을 도모하고 선한 일 하기를 힘써야 한다.

셋째로, 사울은 죽고 다윗은 하나님의 응답과 지시를 따라 헤브론으로 올라가 왕이 되었으나 고난이 다 끝난 것은 아니었다. 그를 죽이려 했던 사울은 죽었으나 이스라엘 나라가 둘로 나뉘어 갈등을 겪게 되었다. 사울의 군장 아브넬은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데리고 마하나임으로 건너가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다. 다윗이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되기 위해서는 아직 7년 반의 세월이 더 필요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비록 사람들이 보기에는 더딘 것 같지만 이렇게 이루어져 가고 있었다. 우리는 때때로 고난의 긴 시간을 잘 참고 견디어야 한다.

 

 

3장: 아브넬의 죽음

[1절]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매 다윗은 점점 강하여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

하나님의 뜻은 대세(大勢)를 통해 점점 드러났다.

[2-5절] 다윗이 헤브론에서 아들들을 낳았으되 맏아들은 암논이라,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의 소생이요; 둘째는 길르압이라, 갈멜 사람 나발의 아내 되었던 아비가일의 소생이요; 셋째는 압살롬이라, 그술 왕 달매의 딸 마아가의 아들이요; 넷째는 아도니야라, 학깃의 아들이요; 다섯째는 스바댜라, 아비달의 아들이요; 여섯째는 이드르암이라, 다윗의 아내 에글라의 소생이니, 이는 다윗이 헤브론에서 낳은 자들이더라.

일부다처(一夫多妻)는 하나님께서 옛 시대에 더러 허용하셨으나 하나님의 본래의 뜻은 아니다. 하나님의 뜻은 분명히 일부일처(一夫一妻) 곧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혼이다(창 2:24; 딤전 3:2).

[6-11절]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있는 동안에 아브넬이 사울의 집에서 점점 권세를 잡으니라. 사울에게 첩이 있었으니 이름은 리스바요 아야의 딸이더라. 이스보셋이 아브넬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내 아버지의 첩을 통간하였느냐? 아브넬이 이스보셋의 말을 매우 분히 여겨 가로되 내가 유다의 개 대강[개 머리]이뇨? 내가 오늘날 당신의 아버지 사울의 집과 그 형제와 그 친구에게 은혜를 베풀어서 당신을 다윗의 손에 내어주지 아니하였거늘 당신이 오늘날 이 여인에게 관한 허물을 내게 돌리는도다.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맹세하신 대로 내가 이루게 아니하면 하나님이 아브넬에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라. 그 맹세는 곧 이 나라를 사울의 집에서 다윗에게 옮겨서 그 위(位)[왕위]를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이스라엘과 유다에 세우리라 하신 것이니라 하매 이스보셋이 아브넬을 두려워하여 감히 한 말도 대답지 못하니라.

아브넬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하신 약속을 알고 있었으나 사울에 대한 충성 때문에 그 아들 이스보셋을 섬겼다. 그러나 왕과 감정의 골이 생겼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왕국을 허무시는 일이었다.

[12-16절] 아브넬이 자기를 대신하여 사자들을 다윗에게 보내어 가로되 이 땅이 뉘 것이니이까? 또 가로되 당신은 나로 더불어 언약하사이다. 내 손이 당신을 도와 온 이스라엘로 당신에게 돌아가게 하리이다. 다윗이 가로되 좋다, 내가 너와 언약하려니와 내가 네게 한가지 일을 요구하노니 나를 보러 올 때에 위선 사울의 딸 미갈을 데리고 오라. 그렇지 않으면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고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에게 사자들을 보내어 이르되 내 처 미갈을 내게로 돌리라. 저는 내가 전에 블레셋 사람의 양피[포피] 일백으로 정혼한 자니라. 이스보셋이 보내어 그 남편 라이스의 아들 발디엘에게서 취하매 그 남편이 저와 함께 오되 울며 바후림까지 따라왔더니 아브넬이 저에게 돌아가라 하매 돌아가니라.

다윗은 온 이스라엘을 통일시키는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가 미갈을 데려오라고 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고려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신분 즉 자신이 사울 왕의 사위임을 보이기를 원했던 것 같다. 인간적으로 볼 때, 다윗은 사울의 왕가를 이을 만한 인물이었다. 그것은 사울을 좋아하고 따랐던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얻고 이스라엘 나라를 통합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또 그가 미갈을 데려오려 한 것은, 부수적으로, 미갈이 그의 합법적 아내임을 나타내고, 또 사람의 결혼이 사람이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누구도 무효화할 수 없는 관계임을 보인다. 주께서는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9:6).

이스보셋이 순순히 다윗의 청을 들어준 것을 보면 그 배후에 다윗과의 약속을 지키려는 아브넬의 역할이 있었을 것이다. 라이스에게는 무정하게도 보이지만, 실상 그가 미갈과 결혼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무효이었다. 왜냐하면 미갈은 다윗과 결혼한 자이었기 때문이다.

[17-21절] 아브넬이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말하여 가로되 너희가 여러번 다윗으로 너희 임금 삼기를 구하였으니 이제 그대로 하라. 여호와께서 이미 다윗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 종 다윗의 손으로 내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블레셋 사람의 손과 모든 대적의 손에서 벗어나게 하리라 하셨음이니라 하고 아브넬이 또 베냐민 사람의 귀에 말하고 이스라엘과 베냐민의 온 집이 선히 여기는 모든 것을 다윗의 귀에 고하려고 헤브론으로 가니라. 아브넬이 종자 20인으로 더불어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아가니 다윗이 아브넬과 그 함께한 사람을 위하여 잔치를 배설하였더라. 아브넬이 다윗에게 고하되 내가 일어나 가서 온 이스라엘 무리를 내 주 왕의 앞에 모아 더불어 언약하게 하고 마음의 원하시는 대로 모든 것을 다스리시게 하리이다. 이에 다윗이 아브넬을 보내매 저가 평안히 가니라.

‘이스라엘과 베냐민의 온 집이 선히 여기는 모든 것’은 다윗이 이스라엘 나라 전체의 왕이 되는 것이다. 다윗은 온 이스라엘의 연합이라는 대의(大義)를 위해 원수의 군장(軍長)을 포용하고 선대했다. 아브넬의 뜻은, 비록 하나님의 허락하심이 있어야 되는 것이지만, 다윗의 보기에 좋은 것이었다. 그러므로 다윗은 그를 평안히 보냈다.

[22-26절] 다윗의 신복들과 요압이 적군을 치고 크게 노략한 물건을 가지고 돌아오니 아브넬은 이미 보냄을 받아 평안히 갔고 다윗과 함께 헤브론에 있지 아니한 때라. 요압과 그 함께한 모든 군사가 돌아오매 혹이 요압에게 고하여 가로되 넬의 아들 아브넬이 왕에게 왔더니 왕이 보내매 저가 평안히 갔나이다. 요압이 왕에게 나아가 가로되 어찌 하심이니이까? 아브넬이 왕에게 나아왔거늘 어찌하여 저를 보내어 잘 가게 하셨나이까? 왕도 아시려니와 넬의 아들 아브넬의 온 것은 왕을 속임이라. 왕의 출입하는 것을 알고 모든 하시는 것을 알려 함이니이다 하고 이에 다윗에게서 나와서 사자들을 보내어 아브넬을 쫓아가게 하였더니 시라 우물가에서 저를 데리고 돌아왔으나 다윗은 알지 못하였더라.

요압은 자기 동생을 죽인 아브넬에 대해 미워하는 나쁜 감정과 그가 다윗을 속이려고 왔다는 잘못된 선입관을 가지고 있었다.

[27-30절] 아브넬이 헤브론으로 돌아오매 요압이 더불어 종용히 말하려는 듯이 저를 데리고 성문으로 들어가서 거기서 배를 찔러 죽이니 이는 자기의 동생 아사헬의 피를 인함이더라. 그 후에 다윗이 듣고 이르되 넬의 아들 아브넬의 피에 대하여 나와 내 나라는 여호와 앞에 영원히 무죄하니 그 죄가 요압의 머리와 그 아비의 온 집으로 돌아갈지어다. 또 요압의 집에서 백탁병자[유출병자](KJV, NASB)나 문둥병자[나병환자]나 지팡이를 의지하는 자나 칼에 죽는 자나 양식이 핍절한 자가 끊어지지 아니할지로다 하니라. 요압과 그 동생 아비새가 아브넬을 죽인 것은 저가 기브온 전쟁에서 자기 동생 아사헬을 죽인 까닭이었더라.

요압의 행동은 비겁하고 악한 행위이었다. 아브넬은 자기 방어를 하지 않은 상태이었다. 또한, 요압의 행동은 사사로운 감정으로 대의(大義)를 어그러뜨리는 어리석은 행위이었다. 대의가 무엇인가? 그것은 이스라엘 전체를 통합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아브넬이 계획한 바이었고(9-10절), 다윗과 언약한 내용이었고(12-13절, 21절), 그것은 온 이스라엘 백성이 선히 여기는 것이었다(19절). 그러나 사사로운 감정 때문에 요압의 눈에는 그 대의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31-34절] 다윗이 요압과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옷을 찢고 굵은 베를 띠고 아브넬 앞에서 애통하라 하니라. 다윗 왕이 상여를 따라가서 아브넬을 헤브론에 장사하고 아브넬의 무덤에서 소리를 높여 울고 백성도 다 우니라. 왕이 아브넬을 위하여 애가를 지어 가로되 아브넬의 죽음이 어찌하여 미련한 자의 죽음 같은고. 네 손이 결박되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착고[차꼬]에 채이지 아니하였거늘 불의한 자식의 앞에 엎드러짐같이 네가 엎드러졌도다 하매 온 백성이 다시 그를 슬퍼하여 우니라.

아브넬은, 비록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지 못했고 또 이제까지 다윗과 원수 관계이었지만, 사울 왕가를 지킨 정당하고 충성된 군장이었다고 본다. 그는 용기를 가지고 다윗에게 와서 온 이스라엘의 통합을 의논하고 그것을 실행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애석하게도 죽임을 당한 것이다. 그것은 다윗의 의도한 바가 아니었다. 다윗은 아브넬의 죽음을 매우 애도했고 온 백성도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울었다.

[35-39절] 석양에[아직 해 지기 전에](KJV, NASB) 뭇 백성이 나아와 다윗에게 음식을 권하니 다윗이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해 지기 전에 떡이나 다른 것을 맛보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라 하매 온 백성이 보고 기뻐하며 왕이 무슨 일을 하든지 무리가 다 기뻐하므로 이 날에야 온 백성과 온 이스라엘이 넬의 아들 아브넬을 죽인 것이 왕의 한 바가 아닌 줄을 아니라. 왕이 그 신복에게 이르되 오늘 이스라엘의 방백이요 또는 대인이 죽은 것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이 되었으나 오늘날 약하여서 스루야의 아들인 이 사람들을 제어하기가 너무 어려우니 여호와는 악행한 자에게 그 악한 대로 갚으실지로다 하니라.


본장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다윗은 이스라엘의 통합이라는 대의(大義)를 위해 아브넬과도 화해했다. 하나님께서 신약교회에 주신 대의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참 교회의 건립과 확장이다. 주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셨다(마 28:19-20). 우리는 개인의 이익과 명예와 행복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참 교회의 건립과 확장이라는 이 대의를 중시하고 이 대의를 위해 사는 자가 되어야 한다.

둘째로, 다윗은 선악을 구별하였고 잘못된 것은 자기의 군장 요압의 잘못이라도 악이라고 단정하였고 적의 군장이라도 불의하게 당한 죽음은 진심으로 슬퍼하였다. 그것이 바른 처신이다. 우리는 범사에 바르게 생각하고 선악을 구별하고 판단하고 항상 바르게 처신해야 한다.

셋째로, 아브넬의 계획은 실패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좌절시키신 일이었다. 실상 아브넬은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기를 원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었으나 그 뜻에 복종하지 않았다. 그도 하나님 앞에서 선한 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사람의 계획은 실패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실패치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 시편 33:10-11, “여호와께서 열방의 도모를 폐하시며 민족들의 사상을 무효케 하시도다. 여호와의 도모는 영영히 서고 그 심사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하나님의 뜻은 때때로 사람의 계획과 달리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낙심치 말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순종하며 살아가야 한다.

 

 

4장: 이스보셋의 죽음

[1-4절]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아브넬의 헤브론에서 죽었다 함을 듣고 손맥이 풀렸고 온 이스라엘이 놀라니라.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에게 군장(사레 게두딤)[부대들의 장] 두 사람이 있으니 하나의 이름은 바아나요 하나의 이름은 레갑이라. 베냐민 족속 브에롯 사람 림몬의 아들들이더라. 브에롯도 베냐민 지파에 속하였으니 일찍 브에롯 사람들이 깃다임으로 도망하여 오늘까지 거기 우거함이더라. 사울의 아들 요나단에게 절뚝발이 아들 하나가 있으니 이름은 므비보셋이라. 전에 사울과 요나단의 죽은 소식이 이스르엘에서 올 때에 그 나이 다섯 살이었는데 그 유모가 안고 도망하더니 급히 도망하므로 아이가 떨어져 절게 되었더라.

믿음의 사람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 다섯 살부터 절뚝발이가 된 것은 불행한 일이었으나 그에게 오히려 유익이 되었다. 만일 그가 다리를 절지 않았더라면 그는 작은 아버지 이스보셋이 죽었을 때 그를 이어 왕이 되어 다윗과 싸우게 되었을 것이며 그 싸움은 이스보셋처럼 실패할 싸움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다리를 전 것 때문에 왕이 되지 못하였다. 또 그는 몇 년 후에 다윗의 사랑과 후대를 받았다. 성도에게는 불행같이 보이는 일까지도 결과적으로 자신에게 유익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롬 8:28).

[5-8절] 브에롯 사람 림몬의 아들 레갑과 바아나가 행하여 볕이 쬘 때 즈음에[대낮에] 이스보셋의 집에 이르니 마침 저가 낮잠을 자는지라. 레갑과 그 형제 바아나가 밀을 가지러 온 체하고 집 가운데로 들어가서 그 배를 찌르고 도망하였더라. 저희가 집에 들어가니 이스보셋이 침실에서 상 위에 누웠는지라. 저를 쳐죽이고 목을 베어 그 머리를 가지고 밤새도록 아라바 길로 행하여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 왕에게 이스보셋의 머리를 드리며 고하되 왕의 생명을 해하려 하던 원수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머리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오늘 우리 주 되신 왕의 원수를 사울과 그 자손에게 갚으셨나이다.

5, 6, 9절에, 레갑이 바아나보다 먼저 언급된 것은 동생이 그 일을 주동했음을 보이는 것 같다. 그들은 그를 위해 충성을 맹세했을 그들의 왕 이스보셋을 살해하였으니 이것은 큰 배신이었고 하나님 앞에서 심히 악한 일이었다. 그들의 행위와 말은 기회주의적이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유익을 위해 자기들의 왕을 살해한 것이지, 진정 다윗과 이스라엘을 위해 한 일이 아니었다. 더욱이, 의로운 왕을 그 침상에서 살해한 것은 선한 일이 아니고 매우 악한 일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울 왕의 악행을 그의 가정에 이런 식으로 갚으셨다. 사울과 세 아들은 전쟁터에서 이방 블세셋 사람들의 칼에 죽게 하셨고, 이스보셋은 배신자들인 두 군장의 칼에 죽게 하셨다. 그러나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은 다리를 절기 때문에 왕위를 잇지 못하게 하셨다. 사울의 인간적 생각과 계산은 완전히 실패했다. 또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억울함과 원통함을 이렇게 보복하셨다.

[9-12절] 다윗이 브에롯 사람 림몬의 아들 레갑과 그 형제 바아나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 생명을 여러 환난 가운데서 건지신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전에 사람이 내게 고하기를 사울이 죽었다 하며 좋은 소식을 전하는 줄로 생각하였어도 내가 저를 잡아 시글락에서 죽여서 그것으로 그 기별의 갚음을 삼았거든 하물며 악인이 의인을 그 집 침상 위에서 죽인 것이겠느냐? 그런즉 내가 저의 피 흘린 죄를 너희에게 갚아서 너희를 이 땅에서 없이하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소년들을 명하매 곧 저희를 죽이고 수족을 베어 헤브론 못가에 매어달고 이스보셋의 머리를 가져다가 헤브론에서 아브넬의 무덤에 장사하였더라.

다윗은 모든 일을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행하려 하였다. 그는 그의 생명을 여러 환난 가운데서 건지신 여호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가리켜 맹세하며 말하였다.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었다. 그것이 경건이다. 다윗은 자기들의 왕을 살해한 자들의 악행을 처벌하였다. 만일 그런 죄악을 허용한다면, 이 세상이 얼마나 악하고 무질서하게 되겠는가? 또 그는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이스보셋이 그의 원수 사울의 아들이었지만 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와 예우를 지켰다.


본장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은 절뚝발이였으나 그의 결함 때문에 다윗과 싸우는 왕이 될 수 없었다. 성도에게는 불행같이 보이는 일들도 유익한 결과가 될 수 있다. 로마서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빌립보서 4:6-7,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둘째로, 레갑과 바아나는 자기가 충성을 맹세했던 왕을 죽였다. 배신자와 기회주의자는 자기 유익을 위해 변하는 자이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 진리의 사람이 아니다. 우리는 배신자나 기회주의자가 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죽도록 충성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고린도전서 4:2,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요한계시록 2:10,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충성은 항상 또한 끝까지 자기 위치를 지키는 것이다. 또 충성된 자는 한 입으로 두말 하지 않는다. 디모데전서 3:8, 11, “집사들도 단정하고 일구이언(一口二言)을 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 박이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 “여자들도 이와 같이 단정하고 참소하지[남을 그릇되이 비난하지] 말며 절제하며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할지니라.”

셋째로,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 했던 원수 사울에 대해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에 대한 공경과 예의를 끝까지 지키려 하였고 그의 아들에 대해서도 그러했으나 이스보셋 왕을 배신하고 살해했던 레갑과 바아나에 대해서는 악을 악으로 바르게 분별하고 판단했고 그 악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공경과 예의를 끝까지 지키라고 교훈하시는 동시에 의롭게 행하고 악을 용납하지 말 것도 교훈하신다.

 

5장: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됨

[1-3절]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아와 말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는 왕의 골육이니이다. 전일(前日) 곧 사울이 우리의 왕이 되었을 때에도 이스라엘을 거느려 출입하게 한 자는 왕이시었고 여호와께서도 왕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며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 이에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헤브론에 이르러 왕에게 나아오매 다윗 왕이 헤브론에서 여호와 앞에서 저희와 언약을 세우매 저희가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다윗을 향하신 또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제야 이해하게 하셨다. 그들은 다윗이 자기들의 지도자로서 적절하고 하나님의 뜻도 그러하였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스라엘 모든 장로들은 하나님의 감동 가운데 다윗과 온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다. 다윗은 하나님의 때가 되어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움을 입었다.

[4-5절] 다윗이 30세에 위(位)[왕위]에 나아가서 40년을 다스렸으되 헤브론에서 7년 6개월 동안 유다를 다스렸고 예루살렘에서 33년 동안 온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스렸더라.

다윗은 아마 20세 이전에 선지자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받았고 10여년 동안 고난의 피신 생활을 했고 30세에 유다 왕이, 또 37세에 이스라엘 왕이 되었다. 그는 70세까지 이스라엘을 통치하였다. 다윗과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는 이렇게 이루어졌다.

[6-9절] 왕과 그 종자들[부하들]이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 땅 거민 여부스 사람을 치려 하매 그 사람들이 다윗에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소경과 절뚝발이라도 너를 물리치리라 하니 저희 생각에는 다윗이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함이나 다윗이 시온 산성을 빼앗았으니 이는 다윗성이더라. 그 날에 다윗이 이르기를 누구든지 여부스 사람을 치거든 수구(水口)[물길 통로]로 올라가서 다윗의 마음에 미워하는 절뚝발이와 소경을 치라 하였으므로 속담이 되어 이르기를 소경과 절뚝발이는 집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더라. 다윗이 그 산성에 거하여 다윗성이라 이름하고 밀로에서부터 안으로 성을 둘러 쌓으니라.

다윗은 우선 이스라엘 나라의 수도를 건립하려 했다. 그는 여부스 사람들이 거하는 시온 산성 곧 예루살렘을 후보지로 정했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이며 가나안 족속들은 다 멸하여야 할 족속들이었다. 다윗 왕과 그의 부하들은 예루살렘으로 가서 시온 산성, 즉 요새이었던 시온성을 빼앗았다. 그것이 다윗성이다.

[10-12절]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 두로 왕 히람이 다윗에게 사자들과 백향목과 목수와 석수를 보내매 저희가 다윗을 위하여 집을 지으니 다윗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세우사 이스라엘 왕을 삼으신 것과 그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그 나라를 높이신 것을 아니라.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섭리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점점 강성해 갔고 하나님께서는 그와 함께하셨다. 의인은 처음부터 강하지는 못해도 점점 강해진다. 잠언 4:18,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거니와.”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를 세우셔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신 것을 깨달았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길을 열기도 하시고 막기도 하신다.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는 이는 바로 주권적 섭리자 하나님이시다.

[13-16절] 다윗이 헤브론에서 올라온 후에 예루살렘에서 처첩들을 더 취하였으므로 아들과 딸들이 또 다윗에게서 나니 예루살렘에서 그에게서 난 자의 이름은 삼무아와 소밥과 나단과 솔로몬과 입할과 엘리수아와 네벡과 야비아와 엘리사마와 엘랴다와 엘리벨렛이었더라.

다윗은 사람의 연약성을 지닌 사람이었다. 사람은 몸의 연약성을 가진 존재이다. 다윗은 헤브론에서 이미 여섯 명의 아내와 여섯 명의 아들을 가졌었다(삼하 3:2-5). 그는 헤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온 후에 아내와 첩들을 더 취했고 11명의 아들과 또 딸들을 낳았다. 그러면 다윗의 아들들은 모두 17명이다. 일부일처(一夫一妻)가 하나님의 뜻이지만, 옛날 아직 진리의 지식이 많지 않은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일부다처(一夫多妻)를 허용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연약성을 가진 다윗을 성별하여 이스라엘의 왕과 지도자를 삼으셨다.

[17-21절] 이스라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았다 함을 블레셋 사람이 듣고 다윗을 찾으러 다 올라오매 다윗이 듣고 요해처(要害處)[요새]로 나가니라. 블레셋 사람이 이미 이르러 르바임 골짜기에 편만한지라. 다윗이 여호와께 물어 가로되 내가 블레셋 사람에게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저희를 내 손에 붙이시겠나이까?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말씀하시되 올라가라. 내가 단정코[반드시] 블레셋 사람을 네 손에 붙이리라 하신지라. 다윗이 바알브라심에 이르러 거기서 저희를 치고 가로되 여호와께서 물을 흩음같이 내 앞에서 내 대적을 흩으셨다 하므로 그 곳 이름을 바알브라심[‘주께서 깨뜨리셨다’는 뜻]이라 칭하니라. 거기서 블레셋 사람들이 그 우상을 버렸으므로 다윗과 그 종자들[부하들]이 치우니라[치워버리니라].

다윗이 이스라엘 나라의 왕이 되었을 때 어려운 일이 곧 생겼다. 이스라엘 백성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나라의 왕을 삼았다 함을 블레셋 사람들이 듣고 다윗을 잡으러 올라온 것이었다. 구약교회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진행할 때 이처럼 어려운 일이 생겼다. 이런 다급한 때 다윗은 먼저 하나님께 물었다. 또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자기 손에 붙이실 수 있음을 알았다. 그는 하나님께서 주권자이심을 믿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가 창조자이시며 주권적 섭리자이심을 믿는 것이며 그렇게 믿는 자는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며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 다윗은 그 전쟁에서 승리하였고 이방인들의 우상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깨끗이 다 제거하였다.

[22-25절] 블레셋 사람이 다시 올라와서 르바임 골짜기에 편만한지라.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온대 가라사대 올라가지 말고 저희 뒤로 돌아서 뽕나무 수풀 맞은편에서 저희를 엄습하되 뽕나무 꼭대기에서 걸음 걷는 소리가 들리거든 곧 동작하라. 그때에 여호와가 네 앞서 나아가서 블레셋 군대를 치리라 하신지라. 이에 다윗이 여호와의 명대로 행하여 블레셋 사람을 쳐서 게바에서 게셀까지 이르니라.


본장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다윗은 선지자 사무엘에게 기름 부음을 받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목자로 택하신 자라는 선언을 받고 약 10년간 고난의 피신 생활을 한 후 유다 족속의 왕이 되었고 그 후에 또 7년 반이 더 지난 후 비로소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 하나님의 일은 때때로 더디게 이루어지므로 우리는 오래 참고 기다려야 한다. 예수께서는 마지막 때에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질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다(마 24:12-13).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믿고 참고 기다려야 한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다윗과 함께하셨다(10절). 옛날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했고 노아도 그러했다. 요셉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으로 형통한 자가 되었고 히스기야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므로 형통한 자이었다. 성령께서는 구원 얻은 성도 안에 거하신다. 그것은 성도에게 매우 큰복이며 특권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며 친밀한 교제를 체험하려면,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를 믿고 의지하고 그의 계명들을 순종하여 정직한 삶을 살아야 한다. 잠언 3:32, “대저 패역한 자는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거니와 정직한 자에게는 그의 교통하심이 있으며.”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을 사모하며 체험해야 한다.

셋째로, 하나님의 뜻대로 이스라엘의 왕이 된 다윗과 그의 나라에도 블레셋 사람들의 침공이라는 고난이 두 번 연거푸 있었으나 그 고난의 때에 다윗은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믿었다. 성도들에게도 이 세상 사는 동안 많은 고난이 있으나(시 34:19) 고난 중에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굳게 믿고 기도로 대처하며 그의 선한 인도하심을 구하며 그의 기도 응답과 지시에 순종해야 한다. 우리는 고난의 때에 더욱 기도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믿고 순종하며 그의 선한 인도하심을 따라 행해야 한다.

 

6장: 법궤를 옮겨옴

[1-5절] 다윗이 이스라엘에서 뺀 무리 3만을 다시 모으고 일어나서 그 함께 있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바알레유다로 가서 거기서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오려 하니 그 궤는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이름하는 것이라. 저희가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그 새 수레를 모니라. 저희가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하나님의 궤를 싣고 나올 때에 아효는 궤 앞에서 행하고 다윗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잣나무로 만든 여러 가지 악기와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양금(메나아네아)[딸랑이 종류의 악기](BDB, KB)과 제금[심벌즈](KJV, NASB)으로 여호와 앞에서 주악하더라.

다윗은 블레셋과 전쟁을 치룬 후 이 일을 행하였다. 바알레유다는 기럇 여아림이었다(수 15:9). 하나님의 궤는 그 곳에 20년간 방치되었던 것 같다(삼상 7:1-2). 웃사와 아효가 하나님의 궤를 싣고 나올 때 다윗과 이스라엘 백성은 잣나무로 만든 악기들을 연주했다.

다윗이 하나님의 궤를 다윗성으로 가져오려 한 것은 그의 경건성을 나타낸다. 10명이면 충분할 일이지만, 3만명이나 동원하여 이 일을 도모한 것은 그가 이 일을 얼마나 크고 중요한 일로 여겼는지를 보인다. 본장에는 ‘하나님의 궤’라는 말이 일곱 번, ‘여호와의 궤’라는 말이 일곱 번, 합하여 14번이나 나온다. 역대상 13:3에 보면, 다윗은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궤를 옮겨오자. 사울 때에는 우리가 궤 앞에서 묻지 아니하였느니라”고 말했다. 사무엘상 14:18에 보면, 사울도 한번 아히야에게 하나님의 궤를 가져오게 하여 하나님께 물은 적이 있었으나, 사울은 항상 하나님의 궤 앞에서 묻지는 않았다고 보인다.

그러나 다윗의 경건성은 달랐다. 시편 132편에 보면, 다윗은 하나님의 성막을 찾기 위해 매우 근심하였고 그는 편한 잠을 잘 수 없었고 그러다가 에브라다의 나무 밭에서 그것을 찾았다고 증거하였다(1-9절). 다윗에게는 하나님을 사모하는 이런 간절한 경건함이 있었다. 하나님의 궤는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 있는 거룩한 기구로서 그가 계신 표이었다. 하나님의 궤를 사모한 것은 하나님을 사모한 것이며 그의 말씀을 사모한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사모하고 그것을 믿고 사랑하고 순종하기를 원한 경건한 성도이었다.

[6-11절] 저희가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의 잘못함을 인하여 진노하사 저를 그 곳에서 치시니 저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여호와께서 웃사를 충돌하시므로 다윗이 분하여 그 곳을 베레스웃사라 칭하니 그 이름이 오늘까지 이르니라. 다윗이 그 날에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요 하고 여호와의 궤를 옮겨 다윗성 자기에게로 메어 가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고 치우쳐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 간지라. 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을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

다윗의 간절한 소원으로 시도된 그의 첫 번째 시도는 실패하였다. 그들이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렀을 때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는데,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웃사의 잘못함을 인하여 진노하셔서 그를 그 곳에서 치셨고 웃사는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었다. 여호와께서 웃사와 충돌하시므로 다윗은 마음이 상하여 그 곳을 ‘베레스웃사’ 곧 ‘웃사를 치심’이라고 불렀다.

다윗의 첫 번째 시도가 실패한 원인은 하나님의 법궤를 가져오는 일을 하나님의 규례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민수기 4:15에 보면, 성막의 성소와 그 모든 기구들은 아무나 만지지 말고 오직 레위 자손 중 고핫 자손이 메어야 했다. 역대상 15:13에 보면, 다윗은 그것을 깨닫고 “전에는 너희가 메지 아니하였으므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를 충돌하셨나니 이는 우리가 규례대로 저에게 구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고 고백했다. 하나님의 일은 열심만 가진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일은 겸손히 하나님의 규례와 교훈대로, 지식과 덕을 가지고 행해지고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12-15절] 혹이 다윗 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궤를 인하여 오벧에돔의 집과 그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 한지라. 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성으로 올라갈새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행하매 다윗이 소와 살진 것으로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때에 베 에봇을 입었더라.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부르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 오니라.

다윗은 두 번째에는 그 궤를 규례대로 어깨에 메고 옮겼다. 본문에는 ‘메고,’ ‘메어’라는 말들(알라)이 나오지만(12, 15절) 그 단어는 ‘가져 올라온다’는 뜻이다. 그러나 13절의 ‘멘 사람들’이라는 표현에서 ‘메다’는 원어(나사)는 ‘어깨에 짊어지다, 메다’는 뜻이다.

[16절] 여호와의 궤가 다윗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저를 업신여기니라.

다윗의 아내 미갈은 다윗의 경건과 간절한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여호와의 궤가 성으로 들어올 때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마음에 그를 업신여겼다. 그는 다윗이 하나님을 얼마나 사모하며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는지 그  심정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에게는 그런 믿음이 없었다.

[17-19절] 여호와의 궤를 메고 들어가서 다윗이 위하여 친 장막 가운데 그 예비한 자리에 두매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 앞에 드리니라.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 드리기를 마치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백성에게 축복하고 모든 백성 곧 온 이스라엘 무리의 무론 남녀하고 떡 한개와 고기(에쉬파르)[대추야자떡](KB, NASB, NIV) 한 조각과 건포도떡 한 덩이씩 나눠주매 모든 백성이 각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번제는 하나님의 속죄의 은혜를 구하며 그에게 온전히 헌신함을 다짐하는 뜻이 있고 화목제는 속죄의 은혜를 구하는 동시에 하나님과 화목하고 교제함을 나타내는 뜻이 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를 구했고 온전한 헌신을 각오했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사모하였다.

[20-23절] 다윗이 자기의 가족에게 축복하러 돌아오매 사울의 딸 미갈이 나와서 다윗을 맞으며 가로되 이스라엘 왕이 오늘날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날 그 신복의 계집종의 눈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다윗이 미갈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저가 네 아비와 그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로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 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 한지라. 그러므로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으니라


본장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다윗은 부족이 없지 않지만, 그의 장점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간절히 사모한 것이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궤를 다윗성으로 모셔오기를 간절히 사모한 데서 나타난다. 그러나 다윗의 아내 미갈은 다윗의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모하는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를 업신여겼다(16, 20절). 우리는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간절히 사모해야 한다. 신명기 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시편 73:25,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성경을 힘써 읽어야 한다.

둘째로, 법궤를 가져오려는 다윗의 처음 시도가 실패한 것은 하나님의 규례대로 법궤를 메고 옮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역대상 15:13, “전에는 너희가 메지 아니하였으므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를 충돌하셨나니 이는 우리가 규례대로 저에게 구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우리는 성경 교훈을 가감치 말고 좌우로 치우치지 말고 믿고 행해야 한다(신 4:2; 5:32). 성경의 목적은 사람이 구원을 얻게 하는 것과 온전케 하는 것이다(딤후 3:16-17). 우리는 거룩하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7장: 다윗에게 주신 약속

[1-3절] 여호와께서 사방의 모든 대적을 파하사 왕으로 궁에 평안히 거하게 하신 때에 왕이 선지자 나단에게 이르되 볼지어다, 나는 백향목 궁에 거하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 있도다. 나단이 왕께 고하되 여호와께서 왕과 함께 계시니 무릇 마음에 있는 바를 행하소서.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평안을 주셨다. 그는 섭리자이시다. 다윗의 승리와 평안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었다. 하나님의 궤를 다윗성으로 가져온 다윗은 하나님의 궤가 휘장 가운데 있는데 자신이 백향목 궁에 거하는 것을 죄송스럽게 생각했다. 그는 하나님을 정성껏 섬기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고 하나님을 위해 성전을 건축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성전 건축의 생각은 다윗의 자원적 마음에서 나왔다.

[4-7절] 그 밤에 여호와의 말씀이 나단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나를 위하여 나의 거할 집을 건축하겠느냐?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부터 오늘날까지 집에 거하지 아니하고 장막과 회막에 거하며 행하였나니 무릇 이스라엘 자손으로 더불어 행하는 곳에서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먹이라고 명한 이스라엘 어느 지파에게 내가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나단에게 특별한 감동 중에 말씀하셨다.

[8-11절] 그러므로 이제 내 종 다윗에게 이처럼 말하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 데서 취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고 네가 어디를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세상에서 존귀한 자의 이름같이 네 이름을 존귀케 만들어 주리라. 내가 또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한 곳을 정하여 저희를 심고 저희로 자기 곳에 거하여 다시 옮기지 않게 하며 악한 유(類)[유의 사람들]로 전과 같이 저희를 해하지 못하게 하여 전에 내가 사사를 명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와 같지 않게 하고 너를 모든 대적에게서 벗어나 평안케 하리라. 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이루고[세우고].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다윗을 이스라엘의 주권자 곧 왕으로 삼았고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에 정착케 하셨음을 친히 증거하셨고 또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세우리라”고 약속하셨다. 다윗은 하나님을 위해 집 곧 성전을 짓기를 소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위해 집을 세우실 것이라고 약속하신 것이다. 그 집은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세우실 나라 곧 신약교회를 가리켰다고 본다.

[12-17절] 네 수한[날들]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位)[왕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내가 네 앞에서 폐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카스디)[나의 자비]을 빼앗은 것같이 그에게서는 빼앗지 아니하리라.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네 앞에서](MT, KJV, 한글 42판(1982)]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位)[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나단이 이 모든 말씀과 이 모든 묵시대로 다윗에게 고하니라.

이 예언과 약속은 일차적으로 다윗의 아들 솔로몬에게서 이루어질 일들에 관한 것이라고 보지만, 더 깊고 완전한 의미에서 그것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메시아에 관한 일들이라고 본다. 솔로몬의 왕국은 결국 실패하고 망하였다. 그러나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는 영원히 견고하게 세워질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한 마리아에게 천사는 그가 잉태하여 낳을 자는 다윗의 왕위를 받을 자이며 영원히 야곱 집에서 왕노릇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고 말했다(눅 1:31-33). 그것이 천국으로 이어질 신약교회이다.

원문 15절에 ‘내 은총’[나의 자비]이라는 말이 문장의 서두에 나와 강조되어 있다. 다윗에게 주신 이 모든 예언들과 약속들은 하나님의 자비에서 비롯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인류의 구원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의 행위이시다.

[18-22절]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가로되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오며 내 집은 무엇이관대 나로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 주 여호와여, 주께서 이것을 오히려 적게 여기시고 또 종의 집에 영구히 이를 일을 말씀하실 뿐 아니라 주 여호와여, 인간의 규례대로 하셨나이다. 주 여호와는 종을 아시오니 다윗이 다시 주께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 주의 말씀을 인하여 주의 뜻대로 이 모든 큰 일을 행하사 주의 종에게 알게 하셨나이다. 여호와 하나님이여, 이러므로 주는 광대하시니 이는 우리 귀로 들은 대로는 주와 같은 이가 없고 주 외에는 참 신이 없음이니이다.

다윗 왕은 시시때때로 하나님께 기도할 줄 아는 경건한 사람이었다. 본장 18절부터 마지막까지는 그의 기도 내용이다. 그는 이 기도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면서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의 약속을 그대로 다 이루시기를 소원하였다. 다윗은 18절 이하에서 하나님을 ‘주 여호와’라고 여섯 번이나 반복해 불렀다(18, 19, 20, 25, 28, 29절). 또 그는 하나님을 ‘여호와 하나님’(22, 25절), 또 ‘만군의 여호와’(27절)라고도 불렀다. ‘여호와,’ 특히 ‘주 여호와’는 하나님의 영원자존하심과 주권적 섭리자 되심을 나타내는 명칭이다. 다윗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과 작정은 그의 주권적 섭리 가운데 이루어질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주권적 작정과 섭리 가운데 다윗의 집에 영구히 이루어질 일 곧 메시아 왕국에 관한 일을 말씀하셨다.

[23-26절] 땅의 어느 한 나라가 주의 백성 이스라엘과 같으리이까? 하나님이 가서 구속(救贖)하사 자기 백성을 삼아 주의 명성을 내시며 저희를 위하여 큰 일을, 주의 땅을 위하여 두려운 일을 애굽과 열국과 그 신들에게서 구속(救贖)하신 백성 앞에서 행하셨사오며 주께서 주의 백성 이스라엘을 세우사 영원히 주의 백성을 삼으셨사오니 여호와여, 주께서 저희 하나님이 되셨나이다. 여호와 하나님이여, 이제 주의 종과 종의 집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을 영원히 확실케 하옵시며 말씀하신 대로 행하사 사람으로 영원히 주의 이름을 높여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 하게 하옵시며 주의 종 다윗의 집으로 주 앞에 견고하게 하옵소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크신 은혜를 고백하며 그가 이 은혜를 끝까지 견고케 하시기를 소원했다.

[27-29절]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의 종에게 알게 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집을 세우리라 하신 고로 주의 종이 이 기도로 구할 마음이 생겼나이다. 주 여호와여, 오직 주는 하나님이시며 말씀이 참되시니이다. 주께서 이 좋은 것으로 종에게 허락하셨사오니[약속하셨사오니](KJV, NASB, NIV) 이제 청컨대 종의 집에 복을 주사 주 앞에 영원히 있게 하옵소서.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사오니 주의 은혜(베라카)[복]로 종의 집이 영원히 복을 받게 하옵소서 하니라.


본장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위해 사방의 모든 대적을 파하셨고 그를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고 또 그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실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을 ‘주 여호와’(6번), ‘여호와 하나님’(2번) 불렀다. ‘주 여호와’는 그가 주권적 섭리자이심을 뜻한다. 창조자 하나님께서는 우리 개인의 생애와 국가와 세계의 미래를 홀로 섭리하신다. 우리는 주권적 섭리자 하나님을 굳게 믿어야 한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사울에게서 자비를 거두셨듯이 다윗에게서는 거두지 않겠다고 말씀하셨다. 다윗과 사울의 차이는 다윗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다는 점이다. 구원 얻은 자와 멸망하는 자의 차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안 받고의 차이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의 값없으신 호의이다. 그것은 큰복이다. 하나님께서는 신약 성도들에게 은혜를 주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고 그 은혜를 감사해야 한다.

셋째로,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해 집을 세우실 것이며 그의 아들을 통해 그의 나라와 그 나라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실 것이라는 약속은 메시아 약속이었다. 그것은 이사야에게 주신 예언이었고(사 9:6-7) 또 마리아에게 주신 예언이었다(눅 1:31-33).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큰 구원의 은혜와 복을 이미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구원의 복을 감사히 누리며 주님만 믿고 따라야 한다.

 

8장: 다윗의 승전들

[1-2절] 이 후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쳐서 항복 받고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메덱암마(메섹 하암마)[‘모성(母城, 어머니 도시)의 권세’ 즉 ‘으뜸 되는 성’(NASB)]를 빼앗으니라. 다윗이 또 모압을 쳐서 저희로 땅에 엎드리게 하고 줄로 재어 그 두 줄 길이의 사람은 죽이고 한 줄 길이의 사람은 살리니 모압 사람이 다윗의 종이 되어 조공을 바치니라.

다윗은 이스라엘 남서쪽 해변에 있는 블레셋 사람들을 쳐서 복종시켰다. 그는 블레셋 사람을 쳐서 항복 받고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메덱암마를 빼앗았다. 역대상 18:1은 “이 후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쳐서 항복 받고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가드와 그 동네를 빼앗고”라고 기록한다. 가드는 블레셋 성들 중 대표적 성이었던 것 같다. 다윗은 또 이스라엘 남동쪽에 있는 모압을 쳐서 그들을 굴복시켰다.

[3-6절] 르홉의 아들 소바 왕 하닷에셀이 자기 권세를 회복하려고 유브라데 강으로 갈[갔을] 때에 다윗이 저를 쳐서 그 마병 1천 7백과 보병 2만을 사로잡고 병거 1백승의 말만 남기고 그 외의 병거의 말은 다 발의 힘줄을 끊었더니 다메섹 아람 사람들이 소바 왕 하닷에셀을 도우러 온지라. 다윗이 아람 사람 2만 2천을 죽이고 다메섹 아람에 수비대(네치빔)[‘대표부들’(BDB), ‘부대들, 수비대들’(KB, Langenscheidt)]를 두매 아람 사람이 다윗의 종이 되어 조공을 바치니라.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

다윗은 또 이스라엘 북동쪽에 있던 소바 왕을 복종시켰다. 역대상 18:4는 “그 병거 1천승과 기병 7천과 보병 2만을 빼앗고 그 병거 1백승의 말만 남기고 그 외의 병거의 말은 다 발의 힘줄을 끊었더니”라고 기록한다. ‘마병’과 ‘기병’은 같은 단어(파라쉼)이다. 사무엘하는 역대상에 언급된 ‘병거’(레케브)를 생략한 것 같다. 역대상 18:4의 기병 7천과 사무엘하 8:4의 마병 1천 7백의 차이는 분류상의 차이, 즉 포함과 생략의 차이이든지, 필사상 오류로 인한 것일 것이다. 고대 헬라어 70인역과 히브리어 사해사본은 사무엘하 본문이 역대상과 같이 병거 1천과 기병 7천이라고 되어 있다. 다윗은 다메섹 아람에 수비대를 두었다. 다윗은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여러 전쟁들에서 위기와 죽음을 모면하게 하셨고 다윗에게 승리를 주셨던 것이다.

[7-12절] 다윗이 하닷에셀의 신복들의 가진 금방패를 빼앗아 예루살렘으로 가져오고 또 하닷에셀의 고을 베다와 베로대에서 매우 많은 놋을 빼앗으니라. 하맛 왕 도이가 다윗이 하닷에셀의 온 군대를 쳐서 파하였다 함을 듣고 그 아들 요람을 보내어 다윗 왕에게 문안하고 축복하게 하니 이는 하닷에셀이 도이로 더불어 전쟁이 있던 터에 다윗이 하닷에셀을 쳐서 파함이라. 요람이 은 그릇과 금 그릇과 놋 그릇을 가지고 온지라. 다윗 왕이 그것도 여호와께 드리되 저가 정복한 모든 나라에서 얻은 은금 곧 아람과 모압과 암몬 자손과 블레셋 사람과 아말렉에게서 얻은 것들과 소바 왕 르홉의 아들 하닷에셀에게서 노략한 것과 같이 드리니라.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로 승리하여 얻은 전쟁 노획물들을 다 하나님께 드렸다. 그는 물질에 대한 욕심을 갖지 않았다고 보인다.

[13-14절] 다윗이 염곡[소금 골짜기]에서 에돔 사람15) 1만 8천을 쳐죽이고 돌아와서 명예를 얻으니라. 다윗이 에돔에 수비대를 두되 온 에돔에 수비대[대표부들 혹은 부대들]를 두니 에돔 사람이 다 다윗의 종이 되니라.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더라.

[15-18절] 다윗이 온 이스라엘을 다스려 모든 백성에게 공(公)과 의(義)를 행할새 스루야의 아들 요압은 군대장관이 되고 아힐룻의 아들 여호사밧은 사관(史官)이 되고 아히둡의 아들 사독과 아비아달의 아들 아히멜렉은 제사장이 되고 스라야는 서기관이 되고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는 그렛 사람과 블렛 사람을 관할하고 다윗의 아들들은 대신이 되니라.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을 공의롭게, 바르게 통치하였다.


본장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왕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이기게 하셨다. 6절,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 14절,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더라.” 하나님께서는 전쟁들에서 다윗을 도우셨고 위기와 죽음을 모면하게 하셨고 그를 구원하셨고 원수를 물리치고 승리케 하셨다. 사도 바울은 세상의 모든 어려운 일들에서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으로 인해 넉넉히 이긴다고 증거했다(롬 8:37-39). 하나님께서는 그의 진실한 성도들을 도우실 것이다. 우리는 세상 사는 동안 늘 하나님의 도우심을 사모해야 하며 또 그것을 체험해야 한다.

둘째로, 다윗은 전쟁의 승리로 많은 노획물을 얻었지만 그것에 욕심을 내지 않았고 그것들을 다 하나님께 바쳤다. 그는 돈을 사랑하지 않았다고 보인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과 돈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마 6:24). 탐심은 우상숭배이다. 우리는 돈을 사랑하거나 돈에 종이 되지 말고 모든 돈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

셋째로, 다윗은 공의로 나라를 통치하였다. 그것은 좋은 왕의 모습이었다. 세속 사회에서 공의의 통치는 도덕질서를 바로 세우는 것이다. 또 공의로 통치되는 사회는 자유와 인권이 존중되는 사회이다. 그런 사회에서 사람들은 자유롭게 힘써 일함으로 자기를 발전시키고 돈을 벌고 상당한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 성경은 주인이 종을 함부로 위협하지 말고(엡 6:9) 부모가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엡 6:4)고 교훈하였고, 또 사람이 근면하게 일함으로써 유여함을 누리라(엡 4:28; 행 20:33-35)고 교훈하였다. 비록 우리가 이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고 천국에만 우리의 소망을 두고 살지만, 우리는 우리나라가 자유와 인권이 존중되고 공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나라가 되도록 기도하고 또 힘써야 한다.

 

 

9장: 므비보셋을 선대함

[1-6절] 다윗이 가로되 사울의 집에 오히려 남은 사람이 있느냐? 내가 요나단을 인하여 그 사람에게 은총(케세드)[자비]을 베풀리라 하니라. 사울의 종 하나가 있으니 그 이름은 시바라. 저를 다윗의 앞으로 부르매 왕이 저에게 묻되 네가 시바냐? 가로되 종이 그로소이다. 왕이 가로되 사울의 집에 남은 사람이 없느냐? 내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총[자비]을 베풀고자 하노라. 시바가 왕께 고하되 요나단의 아들 하나가 있는데 절뚝발이니이다. 왕이 저에게 묻되 그가 어디 있느냐? 시바가 왕에게 고하되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 있나이다. 다윗 왕이 사람을 보내어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서 저를 데려오니 사울의 손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 다윗에게 나아와서 엎드려 절하매 다윗이 가로되 므비보셋이여 하니 대답하되 주의 종이 여기 있나이다.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은 절뚝발이였다. 전에 사울과 요나단의 죽은 소식이 이스르엘에서 왔을 때에 나이가 다섯 살이었는데 유모가 그를 안고 급히 도망하다가 떨어뜨려 두 발이 다 절게 되었다(삼하 4:4). 다윗 왕은 사람을 보내어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서 그를 데려오게 하였다. 로드발은 요단강 북쪽, 요단강 건너편 이스라엘 변방에 있었던 마을이다. 다윗은 요나단과의 언약과 맹세(삼상 20:15, 42)를 지키기를 원했고 그의 아들에게 자비를 베풀기를 원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한 언약과 맹세를 지키려 하였다.

[7-13절] 다윗이 가로되 무서워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비 요나단을 인하여 네게 은총[자비]을 베풀리라. 내가 네 조부 사울의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먹을지니라. 저가 절하여 가로되 이 종이 무엇이관대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왕이 사울의 사환 시바를 불러서 이르되 사울과 그 온 집에 속한 것은 내가 다 네 주인의 아들에게 주었노니 너와 네 아들들과 네 종들은 저를 위하여 밭을 갈고 거두어 네 주인의 아들을 공궤하라[공급하며 섬기라]. 그러나 네 주인의 아들 므비보셋은 항상 내 상에서 먹으리라 하니라. 시바는 아들이 열 다섯이요 종이 스물이라. 시바가 왕께 고하되 내 주 왕께서 온갖 일을 종에게 명하신 대로 종이 준행하겠나이다 하니라. 므비보셋은 왕자 중 하나처럼 왕의 상에서 먹으니라. 므비보셋에게 젊은 아들 하나가 있으니 이름은 미가더라. 무릇 시바의 집에 거하는 자들은 므비보셋의 종이 되니라. 므비보셋이 항상 왕의 상에서 먹으므로 예루살렘에 거하니라. 그는 두 발이 다 절뚝이더라.

다윗은 므비보셋에게 어떤 자비를 베풀었는가? 그는 우선 그에게 그의 조부 사울의 밭을 다 도로 주었다. 또 그는 사울의 종 시바에게 네 주인의 아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며 섬기라고 명하였다. 이와 같이 다윗의 자비는 물질적 배려로 표현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므비보셋을 인격적으로 사랑으로 대우했다. 그는 두 발이 다 절뚝이는 절뚝발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아들들 중 하나처럼 대우하여 항상 그의 밥상에서 먹게 하겠다고 말하며 그렇게 했다. 본문은 이 사실을 강조하여 네 번이나 언급한다. 7절,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먹을지니라.” 10절, “네 주인의 아들 므비보셋은 항상 내 상에서 먹으리라.” 11절, “므비보셋은 왕자 중 하나처럼 왕의 상에서 먹으니라.” 13절, “므비보셋이 항상 왕의 상에서 먹으므로 예루살렘에 거하니라.” 다윗은 므비보셋을 자기 아들처럼 인격적으로 사랑으로 대우했다.


본장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다윗은 요나단과 맺은 언약 곧 그가 하나님 앞에서 한 맹세와 언약을 지켰다. 사무엘상 20:42,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우리 두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영원히 나와 너 사이에 계시고 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계시리라 하였느니라.”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한 맹세와 약속은 잘 지켜야 한다. 신명기 23:21,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것을 네게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네게 죄라.” 시편 15:4, “[주의 성산에 거할 자는]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아니하며.” 모든 성도는 세례 받을 때, 결혼할 때, 교회 직분을 받을 때 서약을 한다. 우리는 그런 세례 서약, 결혼 서약, 임직 서약 등을 잘 지켜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한 맹세와 약속, 곧 서원과 서약을 잘 지켜야 한다.

둘째로, 다윗은 요나단의 아들 절뚝발이 므비보셋, 인간적으로 불쌍한 그에게 자비를 베풀었다. 사람들은 재산이나 학력이나 세상적 지위가 없는 사람들을 무시한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해야 하며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까지도 사랑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과 뜻이며 하나님께서 성경에 교훈하신 우리의 생활의 규칙이다. 레위기 19:18,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주 예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원수까지도 사랑하며 우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베풀며 우리를 모욕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고 교훈하셨다(마 5:44 전통본문; 눅 6:27-28). 우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비와 호의를 베푸는 자가 되어야 한다.

셋째로, 다윗의 므비보셋에게 한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의 예표이었다. 다윗은 므비보셋에게 물질적 배려를 했고 또 인격적 사랑으로 대우하였다. 주께서는 다윗이 므비보셋에게 베푼 것과 비교할 수 없는 큰 자비를 우리에게 베푸셨다. 우리는 하나님께 사랑을 입을 만한 자들이 아니었으나 그는 우리에게 크신 자비와 은혜를 베풀어주셨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께서는 전에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었던 우리를 사랑하셨고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은혜로 구원해주셨다(엡 2:3-5). 또 그는 우리로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을 회복케 하셨고(요 1:12) 천국의 기업을 상속받는 자들이 되게 하셨다(롬 8:15-17). 또 그는 우리가 나그넷길 같은 이 세상 사는 동안 우리에게 마음의 평안과 위로를 주시고 또 물질적 필요, 즉 의식주의 필요도 공급해주신다. 또 시시때때로 우리의 길을 지도하시고 위험에서 지켜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베푸신 구주 하나님의 모든 자비와 은혜와 사랑을 항상 감사해야 한다.

 

10장: 암몬 자손들을 물리침

[1-5절] 그 후에 암몬 자손의 왕이 죽고 그 아들 하눈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 다윗이 가로되 내가 나하스의 아들 하눈에게 은총을 베풀되 그 아비가 내게 은총을 베푼 것같이 하리라 하고 그 신복들을 명하여 그 아비 죽은 것을 조상(弔喪)[조문]하라 하니라. 다윗의 신복들이 암몬 자손의 땅에 이르매 암몬 자손의 방백들이 그 주 하눈에게 고하되 왕은 다윗이 조객을 보낸 것이 왕의 부친을 공경함인 줄로 여기시나이까? 다윗이 그 신복을 보내어 이 성을 엿보고 탐지하여 함락시키고자 함이 아니니이까? 이에 하눈이 다윗의 신복들을 잡아 그 수염 절반을 깎고 그 의복의 중동볼기까지[가운데 볼기까지] 자르고 돌려보내매 혹이 이 일을 다윗에게 고하니라. 그 사람들이 크게 부끄러워하므로 왕이 저희를 맞으러 보내어 이르기를 너희는 수염이 자라기까지 여리고에서 머물다가 돌아오라 하니라.

암몬 자손의 방백들은 그들의 주 하눈에게 다윗의 조문객들이 이 성을 엿보고 탐지하여 함락시키려고 왔다고 잘못된 조언을 하였고 하눈은 그들의 조언을 듣고 그 조문객들을 잡아 그 턱수염 절반을 깎고 그 의복의 가운데를 볼기까지 자르고 돌려보냈다. 이와 같이 하눈은 다윗과 그의 조문객들을 오해하였고 그들을 매우 모욕하였다.

[6-8절] 암몬 자손이 자기가 다윗에게 미움이 된 줄 알고 사람을 보내어 벧르홉 아람 사람과 소바 아람 사람의 보병 2만과 마아가 왕과 그 사람 1천과 돕 사람 1만 2천을 고용한지라. 다윗이 듣고 요압과 용사의 온 무리를 보내매 암몬 자손은 나와서 성문 어귀에 진을 쳤고 소바와 르홉 아람 사람과 돕과 마아가 사람들은 따로 들에 있더라.

다윗의 선한 행위가 어려운 문제로 돌아왔다. 이 세상은 요동하는 바다 같아서 때때로 예상하기 어려운 환난이 일어난다. 이런 환난은 사탄의 끊임없는 활동 때문에 혹은 사람의 연약과 부족 때문에 오며, 때로는 하나님의 깊으신 뜻 가운데 사람편에서는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중에도 온다. 이 전쟁은 암몬 자손들이 먼저 시작한 전쟁이었다. 그들이 잘못을 저질러 놓고 겁이 나서 그들 스스로 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다윗편에서 그것은 방어적 전쟁이었다. 방어적 전쟁은 언제나 정당성을 가진다. 그 전쟁이 하나님의 징벌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께서는 그 전쟁을 도우실 것이다.

[9-14절] 요압이 앞뒤에 친 적진을 보고 이스라엘의 뺀 자 중에서 또 빼서 아람 사람을 대하여 진치고 그 남은 무리는 그 아우 아비새의 수하에 붙여 암몬 자손을 대하여 진치게 하고 가로되 만일 아람 사람이 나보다 강하면 네가 나를 돕고 만일 암몬 자손이 너보다 강하면 내가 가서 너를 도우리라. 너는 담대하라. 우리가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담대히 하자.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요압과 그 종자[부하들]가 아람 사람을 향하여 싸우려고 나아가니 저희가 그 앞에서 도망하고 암몬 자손은 아람 사람의 도망함을 보고 저희도 아비새 앞에서 도망하여 성으로 들어간지라. 요압이 암몬 자손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요압과 아비새라는 경건한 용장들을 주셨다. 요압은, 비록 때때로 다윗의 뜻과 다르게 행했지만,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믿는 믿음이 있었고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실 것을 바랐다. 그는 그 전쟁을 믿음으로 대처하고 있었다.

[15-19절] 아람 사람이 자기가 이스라엘 앞에서 패하였음을 보고 다 모이매 하닷에셀이 사람을 보내어 강 건너편에 있는 아람 사람을 불러내매 저희가 헬람에 이르니 하닷에셀의 군대장관 소박이 저희를 거느린지라. 혹이 다윗에게 고하매 저가 온 이스라엘을 모으고 요단을 건너 헬람에 이르매 아람 사람들이 다윗을 향하여 진을 치고 더불어 싸우더니 아람 사람이 이스라엘 앞에서 도망한지라. 다윗이 아람 병거 7백승의 사람과 마병 4만을 죽이고 또 그 군대장관 소박을 치매 거기서 죽으니라. 하닷에셀에게 속한 왕들이 자기가 이스라엘 앞에서 패함을 보고 이스라엘과 화친하고 섬기니 이러므로 아람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다시는 암몬 자손을 돕지 아니하니라.

아람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스라엘 사람들 앞에서 패하였음을 보고 모였고 소바 왕(삼하 8:3) 하닷에셀은 강 건너편에 있는 아람 사람들을 더 불러내었으나 이스라엘 앞에서 패하여 도망하였다. 그 전쟁은 다윗의 완전한 승리이었고 암몬은 큰 해를 당하였다.


본장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암몬 왕 하눈은 방백들의 잘못된 조언 때문에 결국 큰 낭패를 당했다. 잘못된 말을 하는 것은 악한 일이다. 우리는 사람들의 말들을 다 믿지 말고 잘 분별하고 조심해서 듣고 믿어야 한다. 우선, 그가 믿을 만한 건전한 사람인가를 분별해야 한다. 잠언 14:15, “어리석은 자는 온갖 말을 믿으나 슬기로운 자는 그 행동을 삼가느니라.” 우리는 사람들의 잘못된 조언들을 조심해야 한다.

둘째로, 암몬 왕 하눈은 방백들의 잘못된 조언 때문에 다윗의 조문객들을 오해했다. 잘못된 판단과 또 거기서 나오는 잘못된 정죄는 불의한 죄악이다. 우리는 잘 모르는 것은 그냥 하나님께 맡겨야 하고 잘못된 추측으로 범죄치 말아야 한다. 고린도전서 4:5,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우리는 남을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셋째로, 다윗은 선한 마음으로 조문객을 보냈는데, 하눈과 그의 신하들은 그들을 모욕했다. 사람을 모욕하는 것은 나쁜 일이다. 선을 악으로 갚는 것은 큰 악이다. 우리는 사람에게 친절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며(마 5:44)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하고(롬 12:17, 21), 특히 다른 사람을 모욕하지 말아야 한다.

넷째로, 다윗은 선을 행하다가 어려움을 당했으나 믿음으로 잘 대처하였다. 갈라디아서 6: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에베소서 6:10-11,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는 예상치 못한 어려움을 두려워 말고 그런 때에도 하나님만 의지하고 바르게만 살고 오직 믿음으로 대처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고 승리케 하실 것이다.

 

 

11장: 다윗의 범죄

본장은 다윗의 범죄, 즉 그의 간음죄와 살인죄에 대하여 증거한다. 성경은 진실한 증거들의 책이다. 성경은 옛 시대의 믿음의 사람들의 좋은 면뿐 아니라, 그들의 실수와 범죄에 대해서도 증거한다.

[1절] 해가 돌아와서(릿슈밧 핫솨나)[봄이 와서](BDB, NASB, NIV) 왕들의 출전할 때가 되매 다윗이 요압과 그 신복과 온 이스라엘 군대를 보내니 저희가 암몬 자손을 멸하고 랍바를 에워쌌고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으니라.

다윗이 범죄한 때는 이스라엘 군대가 전쟁 중이었던 비상한 때이었다. 따뜻한 봄이 왔고 그가 군대장군 요압과 그 부하들과 온 이스라엘 군대를 보내어 암몬 자손을 멸하고 랍바성을 포위하고 그 성을 정복하려 한 때이었다. 사람은 고난 중에는 깨어 기도하지만, 평안할 때, 승리할 때 마음이 해이해지고 범죄하기 쉽다. 그러나 우리는 그때에도 깨어 기도하며 해이하지 않고 범죄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2-5절] 저녁 때에 다윗이 그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지붕 위에서 거닐다가 그 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와 보이는지라. 다윗이 보내어 그 여인을 알아보게 하였더니 고하되 그는 엘리암의 딸이요 헷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아니니이까? 다윗이 사자를 보내어 저를 자기에게로 데려오게 하고 저가 그 부정함을 깨끗케 하였으므로16) 더불어 동침하매 저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여인이 잉태하매 보내어 다윗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잉태하였나이다 하니라.

다윗은 낮잠을 자고 일어난 것 같다. 전쟁 중인 때에 그가 낮잠을 잔 것은 왕으로서 충실한 생활은 아니었다. 다윗의 범죄는 보는 데서 시작되었고, 그 다음에 알아보게 하였고, 그 다음에 데려오게 하였고, 그 다음에 더불어 동침하였다. 하와는 선악과를 본즉 따먹을 마음이 생겼었다(창 3:6).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으면 마음에 이미 간음한 것이다(마 5:28). 사람이 범죄치 않으려면 보는 것부터 조심해야 한다. 모든 사람 속에는 죄성이 있다. 경건한 다윗 속에도 그런 죄성이 있었다. 예레미야 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로마서 7: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6-13절] 다윗이 요압에게 기별하여 헷 사람 우리아를 내게 보내라 하매 요압이 우리아를 다윗에게로 보내니 우리아가 다윗에게 이르매 다윗이 요압의 안부와 군사의 안부와 싸움의 어떠한 것을 묻고 저가 또 우리아에게 이르되 네 집으로 내려가서 발을 씻으라 하니 우리아가 왕궁에서 나가매 왕의 식물이 뒤따라 가니라. 그러나 우리아는 집으로 내려가지 아니하고 왕궁 문에서 그 주의 신복들로 더불어 잔지라. 혹이 다윗에게 고하여 가로되 우리아가 그 집으로 내려가지 아니하였나이다. 다윗이 우리아에게 이르되 네가 길 갔다가 돌아온 것이 아니냐? 어찌하여 네 집으로 내려가지 아니하였느냐? 우리아가 다윗에게 고하되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영채[막사] 가운데 유하고 내 주 요압과 내 왕의 신복들이 바깥 들에 유진(留陣)하였거늘 내가 어찌 내 집으로 가서 먹고 마시고 내 처와 같이 자리이까? 내가 이 일을 행치 아니하기로 왕의 사심과 왕의 혼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나이다. 다윗이 우리아에게 이르되 오늘도 여기 있으라. 내일은 내가 너를 보내리라. 우리아가 그 날에[그 날과 또 다음날에] 예루살렘에 유하니라. (이튿날) 다윗이 저를 불러서 저로 그 앞에서 먹고 마시고 취하게 하니 저녁때에 저가 나가서 그 주의 신복으로 더불어 침상에 눕고 그 집으로 내려가지 아니하니라.

다윗은 자신의 범죄를 숨기기 위하여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불러왔으나 우리아는 집으로 내려가 자기 아내와 함께 자지 않았다. 그는 참으로 충성스런 군인이었다. 다윗은 그를 그 날과 다음날에도(원문, KJV, NASB, NIV) 예루살렘에 유하게 했으나, 그는 집으로 내려가지 않았다. 자신의 간음죄를 감추려는 다윗의 계획은 실패하였다.

[14-17절] 아침이 되매 다윗이 편지를 써서 우리아의 손에 부쳐 요압에게 보내니 그 편지에 써서 이르기를 너희가 우리아를 맹렬한 싸움에 앞세워 두고 너희는 뒤로 물러가서 저로 맞아 죽게 하라 하였더라. 요압이 그 성을 살펴 용사들의 있는 줄을 아는 그 곳에 우리아를 두니 성 사람들이 나와서 요압으로 더불어 싸울 때에 다윗의 신복 중 몇 사람이 엎드러지고 헷 사람 우리아도 죽으니라.

아침이 되자 다윗은 한 무서운 편지를 요압에게 써서 우리아의 손에 보내었다. 그것은 최전선에 우리아를 앞세워 죽게 하라는 지시를 담은 것이었다. 다윗은 자신의 죄를 숨기려다가 충실한 신하 우리아를 고의적으로 죽게 하는 사악한 살인죄까지 범하였다. 그는 한가지 죄를 감추려다가 큰 죄를 또 지었다. 그것도, 단순한 살인이 아니고 충성된 신하를 고의적으로 죽게 한 참으로 악한 살인이었다.

[18-21절] 요압이 보내어 전쟁의 모든 일을 다윗에게 고할새 그 사자에게 명하여 가로되 전쟁의 모든 일을 네가 왕께 고하기를 마친 후에 혹시 왕이 노하여 네게 말씀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성에 그처럼 가까이 가서 싸웠느냐? 저희가 성 위에서 쏠 줄을 알지 못하였느냐? 여룹베셋의 아들 아비멜렉을 쳐죽인 자가 누구냐? 여인 하나가 성에서 맷돌 윗짝을 그 위에 던지매 저가 데벳스[데베스]에서 죽지 아니하였느냐? 어찌하여 성에 가까이 갔더냐 하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왕의 종 헷 사람 우리아도 죽었나이다 하라.

[22-25절] 사자가 가서 다윗에게 이르러 요압의 모든 보낸 일을 고하여 가로되 그 사람들이 우리보다 승하여 우리를 향하여 들로 나온 고로 우리가 저희를 쳐서 성문 어귀까지 미쳤더니 활 쏘는 자들이 성 위에서 왕의 신복들을 향하여 쏘매 왕의 신복 중 몇 사람이 죽고 왕의 종 헷 사람 우리아도 죽었나이다. 다윗이 사자에게 이르되 너는 요압에게 이같이 말하기를 이 일로 걱정하지 말라. 칼은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죽이느니라. 그 성을 향하여 더욱 힘써 싸워 함락시키라 하여 너는 저를 담대케 하라 하니라.

[26-27절] 우리아의 처가 그 남편 우리아의 죽었음을 듣고 호곡하니라. 그 장사를 마치매 다윗이 보내어 저를 궁으로 데려오니 저가 그 처가 되어 아들을 낳으니라. 다윗의 소위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

본장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다윗은 암몬 자손을 멸하고 랍바성를 에워쌌을 때 범죄하였다. 그는 고난 중에는 크게 범죄한 것 같지 않으나, 나라가 안정되고 힘이 있었을 때 큰 죄를 범한 것이다. 고린도전서 10: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우리는 고난의 때보다 평안하고 물질적 여유가 있을 때 더 조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평안할 때에 마음이 해이해져서 범죄하기 쉽기 때문이다.

둘째로, 다윗은 경건한 사람이었지만, 그 마음 속에 사람의 죄악성이 있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에게도 죄성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늘 조심하는 수밖에 없다. 사도 베드로도 주 예수께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말하였으나, 주님의 예언대로 그 날 밤 닭 울기 전에 세 번 주님을 모른다고 말했다(마 26:33-35; 69-75). 주 예수께서는 그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었다(마 26:41). 로마서 7:22-24,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우리는 우리 속에 죄성이 있음을 깨닫고 범죄치 않도록 늘 기도하며 조심해야 한다.

셋째로, 다윗은 처음 범죄했을 때 그것을 숨기지 말고 즉시 하나님께 고백하며 회개하지 않다가 또다른 죄를 지었다. 그는 간음죄를 숨기려다 살인죄까지 지은 것이다. 우리는 처음 죄를 깨달았을 때 숨기지 말고 회개해야 한다. 잠언 28:13,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이사야 1: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요한계시록 3: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우리는 처음 범죄하고 양심적으로 그것을 깨달을 때 그것을 숨기지 말고 즉시 회개해야 한다.

 

 

12장: 나단 선지자를 통한 책망

[1-4절] 여호와께서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시니 와서 저에게 이르되 한 성에 두 사람이 있는데 하나는 부하고 하나는 가난하니 그 부한 자는 양과 소가 심히 많으나 가난한 자는 아무것도 없고 자기가 사서 기르는 작은 암양 새끼 하나뿐이라. 그 암양 새끼는 저와 저의 자식[자식들]과 함께 있어 자라며 저의 먹는 것을 먹으며 저의 잔에서 마시며 저의 품에 누우므로 저에게는 딸처럼 되었거늘 어떤 행인이 그 부자에게 오매 부자가 자기의 양과 소를 아껴 자기에게 온 행인을 위하여 잡지 아니하고 가난한 사람의 양 새끼를 빼앗아다가 자기에게 온 사람을 위하여 잡았나이다.

범죄한 다윗에게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나단을 보내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다윗을 버려두지 않으셨고 나단을 보내어 그 죄를 깨우치셨고 그로 회개하도록 도우셨다.

[5-6절] 다윗이 그 사람을 크게 노하여 나단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저가 불쌍히 여기지 않고 이 일을 행하였으니 그 양 새끼를 4배나 갚아 주어야 하리라.

다윗은 그러한 사람은 죽어야 마땅하며 그가 빼앗은 양은 네 배나 갚아 주어야 마땅하다고 옳게 판단하였다. 세상에 그런 나쁜 사람이 또 어디 있겠는가. 사람은 자기의 잘못에 대해서는 관대하고 무디지만, 남의 잘못에 대해서는 날카롭게 보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7-9절] 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 사람이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기를 내가 너로 이스라엘 왕을 삼기 위하여 네게 기름을 붓고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고 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네 주인의[주인에게 속했던] 처들을 네 품에 두고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네게 맡겼느니라. 만일 그것이 부족하였을 것 같으면 내가 네게 이것저것을 더 주었으리라.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뇨?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죽이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도다.

나단은 다윗에게 “당신이 그 사람이라”고 말했다. 나단은 참으로 충성되고 용기 있는 선지자이었다. 세상에는 바른 판단을 못하거나 바른 판단을 해도 바른 말을 못하는 목사들이 많은 것 같다. 사람들의 기분이나 맞추려는 아첨꾼들과 거짓 교사들이 세상에는 많은 것 같다. 그러나 나단은 하나님의 충성되고 용기 있는 선지자이었다.

‘네 주인에게 속했던 처들을 네 품에 두었다’는 표현은 다윗의 아내들이 사울 왕국에 속했던 자들이었다는 뜻일 것이다. 다윗이 사울의 처들을 취했다고 생각되지는 않으며 또 성경이 그런 암시를 하지도 않는다. 다윗은 특히 우리아를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의 처를 빼앗았다고 표현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행위를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여긴 것이며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일임을 지적하셨다. 죄란 하나님의 계명을 업신여기고 그의 인격과 권위를 모독한 일이다.

[10-12절]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여호와께서 또 이처럼 이르시기를 내가 네 집에 재화(災禍)[재앙]를 일으키고 내가 네 처들을 가져 네 눈앞에서 다른 사람에게 주리니 그 사람이 네 처들로 더불어 백주에[대낮에] 동침하리라.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이스라엘 무리 앞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 하셨나이다.

나단은 다윗에게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을 선언하였다. 하나님의 징벌은, 첫째, ‘칼이 네 집을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는 것이었다. 다윗의 집안에는 형제간에 서로 죽임과 부자간에 서로 죽임이 있을 것이다. 둘째, ‘다른 사람이 대낮에 네 처들을 범하리라’는 것이었다. 다윗은 후에 그런 고통스런 일을 당할 것이다.

[13-15절]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대답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이 일로 인하여 여호와의 원수로 크게 훼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당신의 낳은 아이가 정녕 죽으리이다 하고 나단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다윗은 즉시 나단에게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고 말했다. 다윗은 자기의 잘못을 숨기거나 변명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숨길 수 없고 변명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선지자를 통해 전달된 하나님의 지적 앞에서 겸손히 엎드렸다. 그는 참으로 회개하였다. 모든 죄인에게 필요한 것은 “제가 하나님께 범죄하였습니다”라는 이 진실한 한마디의 고백이다.

나단은 즉시 하나님의 용서를 선포했다. 누구든지 진심으로 죄를 고백하고 뉘우치고 회개하면 즉시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용서가 모든 징벌의 면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 선포된 징벌은 그대로 시행될 것이다. 죄에 대한 징벌의 대가는 참으로 두려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이미 선포된 징벌에 더하여, 나단은 다윗에게 ‘당신의 낳은 아이가 정녕 죽으리라’고 말했다. 또 그런 징벌의 이유는 하나님의 원수들로 크게 비난할 거리를 얻게 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15-19절] . . . 우리아의 처가 다윗에게 낳은 아이를 여호와께서 치시매 심히 앓는지라. 다윗이 그 아이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되 금식하고 안에 들어가서 밤새도록 땅에 엎드렸으니 그 집의 늙은 자들이 곁에 이르러 다윗을 일으키려 하되 왕이 듣지 아니하고 저희로 더불어 먹지도 아니하더라. 이레 만에 그 아이가 죽으니라. 그러나 다윗의 신복들이 아이의 죽은 것을 왕에게 고하기를 두려워하니 이는 저희가 말하기를 아이가 살았을 때에 우리가 말하여도 왕이 그 말을 듣지 아니하셨나니 어떻게 그 아이의 죽은 것을 고할 수 있으랴. 왕이 훼상하시리로다[마음이 상하시리로다] 함이라. 다윗이 그 신복들의 서로 수군거리는 것을 보고 그 아이가 죽은 줄을 깨닫고 그 신복들에게 묻되 아이가 죽었느냐? 대답하되 죽었나이다.

우리아의 처가 다윗에게 낳은 아이를 여호와께서 치시므로 그가 심히 앓았다. ‘우리아의 처’라는 표현은 그 여자가 낳은 아이가 다윗의 아이이지만, 그가 우리아의 처이었을 때 임신한 아이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불법적으로 임신하여 낳은 아이를 죽이셨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다윗은 그 아이를 위해 하나님께 7일 동안 금식하며 기도했지만 그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바꾸지 못하였다. 그 아이는 마침내 7일 만에 죽었다.

[20-23절] 다윗이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고 궁으로 돌아와서 명하여 음식을 그 앞에 베풀게 하고 먹은지라. 신복들이 왕께 묻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는 위하여 금식하고 우시더니 죽은 후에는 일어나서 잡수시니 어찜이니이까? 가로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어니와 시방은[이제는] 죽었으니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저에게로 가려니와 저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다윗은 그 아이의 죽은 것을 듣고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고 왕궁으로 돌아와서 명하여 음식을 그 앞에 베풀게 하고 먹었다.

[24-25절] 다윗이 그 처 밧세바를 위로하고 저에게 들어가 동침하였더니 저가 아들을 낳으매 그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선지자 나단을 보내사 그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심을 인함이더라.

다윗은 ‘그의 처’ 밧세바를 위로하고 그에게 들어가 동침하였는데,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였다. 여호와께서는 그를 사랑하셔서 선지자 나단을 보내어 그 이름을 여디디야, 곧 ‘여호와께 사랑을 입은 자’라고 하셨다. 그는 충성된 신하 우리아의 아내이었던 밧세바를 이렇게 위로하셨고 그에게 은혜를 베푸셨다.

[26-31절] 요압이 암몬 자손의 왕성(王城)[수도] 랍바를 쳐서 취하게 되매 사자를 다윗에게 보내어 가로되 내가 랍바 곧 물들의 성을 쳐서 취하게 되었으니 이제 왕은 남은 군사를 모아 진치고 이 성을 쳐서 취하소서. 내가 이 성을 취하면 이 성이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을까 두려워하나이다. 다윗이 모든 군사를 모아 랍바로 가서 쳐서 취하고 그 왕의 머리에서 보석 있는 면류관을 취하니 그 중량이 금 한 달란트[약 30킬로그램]라. 다윗이 머리에 쓰니라. 다윗이 또 그 성에서 노략한 물건을 무수히 내어오고 그 가운데 백성들을 끌어내어 톱질과 써레질과 도끼질과 벽돌구이를 하게 하니라.17) 암몬 자손의 모든 성을 이같이 하고 다윗과 모든 백성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니라.


본장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다윗의 죄는 단지 우리아에게나 밧세바에게 지은 죄가 아니고 하나님의 계명을 업신여긴 행위이었고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한 것이었다(9, 13절). 죄는 하나님의 계명을 업신여긴 행위이며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는 것이다. 우리가 죄의 이 성격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죄를 멀리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모든 죄가 하나님 앞에서 짓는 죄라는 죄의 심각성을 깨달아야 한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죄를 인정하고 회개한 다윗의 죄를 즉시 용서하셨지만, 그에게 선언한 징벌은 그대로 이루어지게 하셨다. 그는 칼이 그의 집을 영영히 떠나지 않게 하셨고 다른 사람이 그의 처들을 대낮에 범하게 하셨고 밧세바가 낳아준 아이가 죽게 하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이며 또 그의 선하심이기도 하다. 만일 하나님의 그런 징벌이 없다면, 죄성을 가진 사람은 또다시 쉽게 죄를 짓는 잘못을 범할 것이다. 우리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 무섭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혹시 범죄했을지라도 다윗처럼 회개해야 한다. 하나님의 징벌이 있을지라도 땅 위에서 받는 하나님의 징벌은 오히려 작고 가벼운 것이다. 장차 죄인들이 받을 지옥 형벌은 더 크고 무서운 것이다. 그러므로 범죄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지만, 혹 범죄했을 때라도 우리는 다윗처럼 겸손하고 솔직하게 하나님 앞에 엎드려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징벌과 훈련을 달게 받아야 한다.

 

13장: 압살롬이 암논을 죽임

[1-2절] 그 후에 이 일이 있으니라. 다윗의 아들 압살롬에게 아름다운 누이가 있으니 이름은 다말이라. 다윗의 아들 암논이 저를 연애하나 저는 처녀이므로 어찌할 수 없는 줄을 알고 암논이 그 누이 다말을 인하여 심화(心火)로[마음에 고민이 되어] 병이 되니라.

“그 후에 이 일이 있으니라”는 말씀은 다윗의 범죄에 대해 하나님께서 선언하신 징벌이 실제로 이루어졌음을 보인다. 암논이 여동생을 연애한 것은 율법이 금하는 잘못된 일이었다(레 18:9).

[3-6절] 암논에게 요나답이라 하는 친구가 있으니 저는 다윗의 형 시므아의 아들이요 심히 간교한(카캄)[약삭빠른(shrewd)(NASB, NIV), 교활한(subtle)(KJV)] 자라. 저가 암논에게 이르되 왕자여, 어찌하여 나날이 이렇게 파리하여 가느뇨? 내게 고하지 아니하겠느뇨? 암논이 말하되 내가 아우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연애함이니라. 요나답이 저에게 이르되 침상에 누워 병든 체하다가 네 부친이 너를 보러 오거든 너는 말하기를 청컨대 내 누이 다말로 와서 내게 식물을 먹이되 나 보는 데서 식물을 차려 그 손으로 먹여주게 하옵소서 하라. 암논이 곧 누워 병든 체하다가 왕이 와서 저를 볼 때에 왕께 고하되 청컨대 내 누이 다말로 와서 내가 보는 데서 과자 두어 개를 만들어 그 손으로 내게 먹여 주게 하옵소서.

요나답은 암논에게 나쁜 친구이며 나쁜 조언자이었다.

[7-14절] 다윗이 사람을 그 집으로 보내어 다말에게 이르되 네 오라비 암논의 집으로 가서 저를 위하여 음식을 차리라 한지라. 다말이 그 오라비 암논의 집에 이르매 암논이 누웠더라. 다말이 밀가루를 가지고 반죽하여 그 보는 데서 과자를 만들고 그 과자를 굽고 그 남비를 가져다가 그 앞에 쏟아 놓아도 암논이 먹기를 싫어하고 가로되 모든 사람을 나가게 하라 하니 다 저를 떠나 나가니라. 암논이 다말에게 이르되 식물을 가지고 침실로 들어오라. 내가 네 손에서 먹으리라. 다말이 자기의 만든 과자를 가지고 침실에 들어가 그 오라비 암논에게 이르러 저에게 먹이려고 가까이 가지고 갈 때에 암논이 그를 붙잡고 이르되 누이야 와서 나와 동침하자. 저가 대답하되 아니라, 내 오라비여, 나를 욕되게18) 말라.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마땅히 행치 못할 것이니 이 괴악한 일(네발라)[어리석은 일]을 행치 말라. 내가 이 수치를 무릅쓰고 어디로 가겠느냐? 너도 이스라엘에서 괴악한 자[어리석은 자들] 중 하나가 되리라. 청컨대 왕께 말하라. 저가 나를 네게 주기를 거절치 아니하시리라 하되 암논이 그 말을 듣지 아니하고 다말보다 힘이 세므로 억지로 동침하니라.

암논이 다말에게 행한 근친상간, 그것도 강제적 근친상간은 심히 어리석은 죄악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 가운데서 있을 수 없는 악한 일이다. 그러나 그는 이 어리석은 악을 행하였다.

[15-19절] 그리하고 암논이 저를 심히 미워하니 이제 미워하는 미움이 이왕 연애하던 연애보다 더한지라. 곧 저에게 이르되 일어나 가라. 다말이 가로되 가(可)치 아니하다. 나를 쫓아 보내는 이 큰 악은 아까 내게 행한 그 악보다 더하다 하되 암논이 듣지 아니하고 그 부리는 종을 불러 이르되 이 계집을 내어보내고 곧 문빗장을 지르라 하니 암논의 하인이 저를 끌어내고 곧 문빗장을 지르니라. 다말이 채색옷19)을 입었으니 출가하지 아니한 공주는 이런 옷으로 단장하는 법이라. 다말이 재를 그 머리에 무릅쓰고 그 채색옷을 찢고 손을 머리 위에 얹고 크게 울며 가니라.

암논의 연애는 참 사랑이 아니고 육신적 욕망임이 드러났다.

[20-22절] 그 오라비 압살롬이 저에게 이르되 네 오라비 암논이 너와 함께 있었느냐? 그러나 저는 네 오라비니 누이야, 시방은[지금은] 잠잠히 있고 이것으로 인하여 근심하지 말라. 이에 다말이 그 오라비 압살롬의 집에 있어 처량하게 지내니라. 다윗 왕이 이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노하니라. 압살롬이 그 누이 다말을 암논이 욕되게 하였으므로 저를 미워하여 시비간에 말하지 아니하니라.

[23-29절] 2주년 후에 에브라임 곁 바알하솔에서 압살롬의 양털을 깎는 일이 있으매 압살롬이 왕의 모든 아들을 청하고 왕께 나아와 말하되 이제 종에게 양털 깎는 일이 있사오니 청컨대 왕은 신복들을 데리시고 이 종과 함께 가사이다. 왕이 압살롬에게 이르되 아니라, 내 아들아, 우리가 다 갈 것이 없다. 네게 누를 끼칠까 하노라. 압살롬이 간청하되 저가 가지 아니하고 위하여 복을 비는지라. 압살롬이 가로되 그렇게 아니하시려거든 청컨대 내 형 암논으로 우리와 함께 가게 하옵소서. 왕이 저에게 이르되 그가 너와 함께 갈 것이 무엇이냐 하되 압살롬이 간청하매 왕이 암논과 왕의 모든 아들을 저와 함께 보내니라. 압살롬이 이미 그 사환들에게 분부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암논의 마음이 술로 즐거워할 때를 자세히 보다가 내가 너희에게 암논을 치라 하거든 저를 죽이라. 두려워 말라. 내가 너희에게 명한 것이 아니냐? 너희는 담대히 용맹을 내라 한지라. 압살롬의 사환들이 그 분부대로 암논에게 행하매 왕의 모든 아들이 일어나 각기 노새를 타고 도망하니라.

압살롬의 미움은 2년이 지난 후에도 변함이 없었다. 사람의 미움의 감정은 참으로 오래가는 것 같다. 압살롬은 미움 때문에 보복하였지만, 하나님 앞에서 어리석은 잘못을 행하였다. 그것은 자신이 나서서 죽일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며 왕이 해야 할 일이었다. 고의적 살인은 하나님 앞에서 사형에 해당하는 악행으로 간주된다. 출애굽기 21:14, “사람이 그 이웃을 짐짓 모살(謀殺)하였으면 너는 그를 내 단에서라도 잡아내려 죽일지니라.”

[30-33절] 저희가 길에 있을 때에 압살롬이 왕의 모든 아들을 죽이고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다는 소문이 다윗에게 이르매 왕이 곧 일어나서 그 옷을 찢고 땅에 엎드러지고 그 신복들도 다 옷을 찢고 모셔 선지라. 다윗의 형 시므아의 아들 요나답이 고하여 가로되 내 주여, 소년 왕자들이 다 죽임을 당한 줄로 생각지 마옵소서. 오직 암논만 죽었으리이다. 저가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욕되게 한 날부터 압살롬이 결심한 것이니이다. 그러하온즉 내 주 왕이여, 왕자들이 다 죽은 줄로 생각하여 괘념하지[마음을 쓰지] 마옵소서. 암논만 죽었으리이다.

압살롬이 왕의 모든 아들들을 죽였다는 잘못된 소문이 다윗에게 이르자 왕은 곧 일어나서 그 옷을 찢고 땅에 엎드러졌다.

[34-39절] 이에 압살롬은 도망하니라. 파수하는 소년이 눈을 들어 보니 뒷산 언덕길로 여러 사람이 오더라. 요나답이 왕께 고하되 왕자들이 오나이다. 종의 말한 대로 되었나이다. 말을 마치자 왕자들이 이르러 대성통곡하니 왕과 그 모든 신복도 심히 통곡하니라. 압살롬은 도망하여 그술 왕 암미훌의 아들 달매에게로 갔고 다윗은 날마다 그 아들을 인하여 슬퍼하니라. 압살롬이 도망하여 그술로 가서 거한 지 3년이라. 다윗 왕의 마음이 압살롬에게 향하여 간절하니 암논은 이미 죽었으므로 왕이 위로를 받았음이더라.

그술 왕 달매는 압살롬의 외할아버지이다(삼하 3:3). 37절의 ‘그[그의] 아들’은 압살롬을 가리키기보다 암논을 가리킨다고 본다.


본장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암논의 이복여동생에 대한 근친상간적인 행위나 압살롬의 형제 살해는 다 하나님 앞에서 매우 악한 일이다. 근친상간은 율법에 금지된 일이며 압살롬의 보복도 하나님 앞에서 허용될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공적 처벌을 대신하는 개인적 보복을 금하셨다. 이런 일들은 다윗의 간음죄와 살인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었다. 우리는 이런 일들을 거울삼아 범죄치 말아야 한다.

둘째로, 암논은 친구 요나답의 조언 때문에 범죄하였고 그 결과 그는 죽임을 당했다. 그는 자기의 실수에 대해 이런 큰 대가를 받은 것이다. 잘못된 조언을 받은 것이 이런 큰 비극을 가져왔다. 잠언 13:20,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 고전 15:33-34,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우리는 나쁜 친구를 멀리해야 한다.

셋째로, 다윗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은 무서웠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선언하신 대로 다윗의 가정에 아들들 사이에서 동생이 형을 칼로 죽이는 비극적 사건이 일어났다. 다윗의 마음의 고통은 심히 컸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징계와 징벌을 두려워해야 한다.

 

14장: 압살롬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옴

[1-7절] 스루야의 아들 요압이 왕의 마음이 압살롬에게로 향하는 줄 알고 드고아에 보내어 거기서 슬기 있는 여인 하나를 데려다가 이르되 청컨대 너는 상제[상주]된 것처럼 상복을 입고 기름을 바르지 말고 죽은 사람을 위하여 오래 슬퍼하는 여인같이 하고 왕께 들어가서 여차여차히 말하라고 할 말을 그 입에 넣어주니라. 드고아 여인이 왕께 고할 때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가로되 왕이여, 도우소서. 왕이 저에게 이르되 무슨 일이냐? 대답하되 나는 참 과부니이다. 남편은 죽고 아들 둘이 있더니 저희가 들에서 싸우나 말려 줄 사람이 아무도 없으므로 저가 이를 쳐죽인지라. 온 족속[혹은 ‘친족’]이 일어나서 왕의 계집종 나를 핍박하여 말하기를 그 동생을 죽인 자를 내어 놓으라. 우리가 그 동생 죽인 죄를 갚아 저를 죽여 사자(嗣子)[후사] 될 것까지 끊겠노라 하오니 그러한즉 저희가 내게 남아 있는 숯불을 꺼서 내 남편의 이름과 씨를 세상에 끼쳐두지 아니하겠나이다.

다음장의 사건을 포함해 전체적으로 볼 때 요압의 이러한 생각과 계획은 옳지 못하고 성급하였고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다.

[8-11절] 왕이 여인에게 이르되 네 집으로 가라. 내가 너를 위하여 명령을 내리리라. 드고아 여인이 왕께 고하되 내 주 왕이여, 그 죄는 나와 내 아비의 집으로 돌릴 것이니 왕과 왕위는 허물이 없으리이다. 왕이 가로되 누구든지 네게 말하는 자를 내게로 데려오라. 저가 다시는 너를 건드리지도 못하리라. 여인이 가로되 청컨대 왕은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생각하사 원수 갚는 자로 더 죽이지 못하게 하옵소서. 내 아들을 죽일까 두려워하나이다. 왕이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 아들의 머리카락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그 여인은 왕에게서 아들을 보호하겠다는 맹세까지 이끌어내었다.

[12-14절] 여인이 가로되 청컨대 계집종을 용납하여 한 말씀으로 내 주 왕께 여쭙게 하옵소서. 가로되 말하라. 여인이 가로되 그러면 어찌하여 왕께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대하여 이 같은 도모를 하셨나이까? 이 말씀을 하셨으니 왕께서 죄 있는 사람같이 되심은 그 내어쫓긴 자를 집으로 돌아오게 아니하심이니이다. 우리는 필경 죽으리니 땅에 쏟아진 물을 다시 모으지 못함 같을 것이오나 하나님은 생명을 빼앗지 아니하시고 방책을 베푸사 내어쫓긴 자로 하나님께 버린 자가 되지 않게 하시나이다.

그 여인은 요압의 지시한 대로 다윗이 압살롬을 돌아오게 하지 않는 것이 잘못이라고 암시하였다. 그는 암논의 죽음이 이미 쏟아진 물 같으니 어찌 할 수 없으나 도피한 압살롬은 용납해야 하지 않는가 하고 아버지 다윗의 동정심에 호소한 것이다.

[15-17절] 이제 내가 와서 내 주 왕께 이 말씀을 여쭙는 것은 백성들이 나를 두렵게 하므로 계집종이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왕께 여쭈면 혹시 종의 청하는 것을 시행하실 것이라. 왕께서 들으시고 나와 내 아들을 함께 하나님의 산업에서 끊을 자의 손에서 종을 구원하시리라 함이니이다. 계집종이 또 스스로 말하기를 내 주 왕의 말씀이 나의 위로가 되기를 원한다 하였사오니 이는 내 주 왕께서 하나님의 사자같이 선과 악을 분간하심이니이다. 원컨대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과 같이 계시옵소서.

그 여인은 왕을 두려워해서인지 다시 그가 처음에 자신에 관해 한 말이 사실인 것처럼 얼버무리며 앞에서 한 말을 반복하였다.

[18-20절] 왕이 그 여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네게 묻는 것을 숨기지 말라. 여인이 가로되 내 주 왕은 말씀하옵소서. 왕이 가로되 이 모든 일에 요압이 너와 함께하였느냐? 여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내 주 왕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옵나니 무릇 내 주 왕의 말씀을 좌로나 우로나 옮길 자가 없으리이다. 왕의 종 요압이 내게 명하였고 저가 이 모든 말을 왕의 계집종의 입에 넣어주었사오니 이는 왕의 종 요압이 이 일의 형편을 변하려 하여 이렇게 함이니이다. 내 주 왕의 지혜는 하나님의 사자의 지혜와 같아서 땅에 있는 일을 다 아시나이다 하니라.

다윗은 그의 말이 요압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즉시 알아차렸다.

[21-24절] 왕이 요압에게 이르되 내가 이 일을 허락하였으니 가서 소년 압살롬을 데려오라. 요압이 땅에 엎드려 절하고 왕을 위하여 복을 빌고 가로되 내 주 왕이여, 종의 구함을 허락하시니 종이 왕 앞에서 은혜 받은 줄을 오늘날 아나이다 하고 일어나 그술로 가서 압살롬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오니 왕이 가로되 저를 그 집으로 물러가게 하고 내 얼굴을 보지 말게 하라 하매 압살롬이 자기 집으로 가고 왕의 얼굴을 보지 못하니라.

다윗 왕은 요압을 불러 그 일을 허락했고, 요압은 일어나 그술로 가서 압살롬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왔다. 그러나 왕은 그를 그의 집으로 물러가게 하고 왕의 얼굴을 보지 않게 하였다. 그것은 다윗의 마음이 아직 그를 용납할 수 없었음을 보인다. 그의 의로운 양심은 그의 형을 살해한 아들 압살롬을 아직 용납할 수 없었다.

[25-27절] 온 이스라엘 가운데 압살롬같이 아름다움으로 크게 칭찬받는 자가 없었으니 저는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흠이 없음이라. 그 머리털이 무거우므로 연말마다 깎았으며 그 머리털을 깎을 때에 달아본즉 왕의 저울로 2백 세겔[약 2.3킬로그램]이었더라. 압살롬이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낳았는데 딸의 이름은 다말이라. 얼굴이 아름다운 여자더라.

압살롬은 외모가 아름다웠지만 마음이 경건하고 착하지는 못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외모보다 그 중심을 중요하게 여기신다.

[28-31절] 압살롬이 이태 동안을 예루살렘에 있으되 왕의 얼굴을 보지 못하였으므로 요압을 왕께 보내려 하여 사람을 보내어 부르되 오지 아니하고 또다시 보내되 오지 아니하는지라. 압살롬이 그 종에게 이르되 보라, 요압의 밭이 내 밭 근처에 있고 거기 보리가 있으니 가서 불을 놓으라. 압살롬의 종들이 그 밭에 불을 놓았더니 요압이 일어나 압살롬의 집으로 와서 압살롬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네 종들이 내 밭에 불을 놓았느냐?

다윗은 돌아온 아들의 얼굴을 2년 동안이나 보기를 원치 않았다. 압살롬이 그 형 암논을 죽인 지 5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아버지 다윗의 양심은 아직도 형을 죽인 그의 살인죄를 용서할 수 없었다.

[32-33절] 압살롬이 요압에게 대답하되 내가 일찍 사람을 네게 보내어 너를 이리로 청한 것은 내가 너를 왕께 보내어 고하게 하기를 어찌하여 내가 그술에서 돌아오게 되었나이까? 이때까지 거기 있는 것이 내게 나았으리이다 하려 함이로라. 이제는 네가 나로 왕의 얼굴을 보게 하라. 내가 만일 죄가 있으면 왕이 나를 죽이시는 것이 가하니라. 요압이 왕께 나아가서 그 말을 고하매 왕이 압살롬을 부르니 저가 왕께 나아가 그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어 절하매 왕이 압살롬과 입을 맞추니라.

압살롬은 자신의 과거의 일에 대해 철저하게 반성하지 못한 것이 분명하였다. 그는 자신이 죽어야 마땅하였던 죄인이며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것만 해도 과분한 일이며 감히 아버지 다윗의 얼굴을 보기를 원할 수 없는 처지라는 것을 인식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그술에서 돌아온 것을 오히려 후회하고 원망했고 왕의 얼굴 보기를 요구했다. 다윗과 아들 압살롬은 겉으로 화목하게 되었으나, 다윗 왕이 압살롬의 살인 행위에 대해 공의로 처리하지 않은 일은 여전히 남아 있었고, 압살롬이 불완전하게 회개한 사실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것은 후에 다윗 왕국에 재앙의 불씨가 될 것이었다.


본장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다윗이 암논의 강간을 용납한 것이나 압살롬의 살인을 용납한 것은 잘못이었다. 강간한 자와 살인한 자를 사형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법이다(레 20:17; 출 21:14). 왕의 아들이라고 예외일 수 없다. 압살롬은 평생 도피 생활을 하든지 돌아와 사형 당해야 했다. 그러나 다윗은 그들의 죄를 양심적으로 용납할 수 없었으나 암논의 죄를 징벌하지 않았었고 압살롬을 공의로 처리하지도 않았다. 그는 압살롬을 돌아오게 허용했고 또 그와 화해하는 것 같은 모양까지 취했으나, 그것은 분명히 그의 실수이었다고 본다. 우리는 무슨 일을 처리할 때 동정으로 하지 말고 바르고 공의롭게 처리해야 한다.

둘째로, 압살롬은 자신의 죄를 철저히 깨닫고 회개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율법에 따라 죽어야 할 죄인임을 인식치 못했다. 우리는 압살롬처럼 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지옥 갈 죄인들이었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을 얻었고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롬 3:22) 하나님과 화목하였고(롬 5:1)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과 특권을 회복했음을 알고(요 1:12) 하나님의 은혜에 늘 감사하며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해야 한다.

 

 

15장: 압살롬의 반역

[1-6절] 이 후에 압살롬이 자기를 위하여 병거와 말들을 준비하고 전배(前陪)[경호원들] 50명을 세우니라. 압살롬이 일찌기[일찍이] 일어나 성문 길 곁에 서서 어떤 사람이든지 송사가 있어 왕에게 재판을 청하러 올 때에 그 사람을 불러서 이르되 너는 어느 성 사람이냐? 그 사람의 대답이 종은 이스라엘 아무 지파에 속하였나이다 하면 압살롬이 저에게 이르기를 네 일이 옳고 바르다마는 네 송사 들을 사람을 왕께서 세우지 아니하셨다 하고 또 이르기를 내가 이 땅에서 재판관이 되고 누구든지 송사나 재판할 일이 있어 내게로 오는 자에게 내가 공의 베풀기를 원하노라 하고 사람이 가까이 와서 절하려 하면 압살롬이 손을 펴서 그 사람을 붙들고 입을 맞추니 무릇 이스라엘 무리 중에 왕께 재판을 청하러 오는 자들에게 압살롬의 행함이 이 같아서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도적하니라.

압살롬은 사람들의 마음을 도적질하였다. 그의 말과 행동은 매우 계산적이고 가식적이었다고 본다. 사람들은 그의 말과 행동에 속아넘어갔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간사한 말과 행동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그런 사람을 복 주지 않으신다. 압살롬의 최후는 비참할 것이다.

[7-12절] 4년 만에 압살롬이 왕께 고하되 내가 여호와께 서원한 것이 있사오니 청컨대 나로 헤브론에 가서 그 서원을 이루게 하소서. 종이 아람 그술에 있을 때에 서원하기를 만일 여호와께서 나를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하시면 내가 여호와를 섬기리이다 하였나이다. 왕이 저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하니 저가 일어나 헤브론으로 가니라. 이에 압살롬이 정탐을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 두루 보내어 이르기를 너희는 나팔소리를 듣거든 곧 부르기를 압살롬이 헤브론에서 왕이 되었다 하라 하니라. 그때에 압살롬에게 청함을 받은 2백명이 그 사기(事機)를[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아무 뜻 없이 예루살렘에서 저와 함께 갔으며 제사 드릴 때에 압살롬이 사람을 보내어 다윗의 모사(謀士) 길로 사람 아히도벨을 그 성읍 길로에서 청하여 온지라. 반역하는 일이 커가매 압살롬에게로 돌아오는 백성이 많아지니라.

‘4년 만에’라는 구절(70인역의 일부, 옛 수리아어역)은 히브리어 원문에는 ‘40년 끝에’(믹케츠 아르바임 솨나)라고 되어 있다(MT, NASB; KJV는 ‘40년 후에’). 그것은 압살롬의 반역이 다윗의 통치 말년에 일어난 사건임을 보인 것 같다. 다윗의 나이가 많았던 것 같고, 그에게 반역의 바람이 강하게 불어왔다.

[13-18절] 사자가 다윗에게 와서 고하되 이스라엘의 인심(人心)이 다 압살롬에게로 돌아갔나이다 한지라. 다윗이 예루살렘에 함께 있는 모든 신복에게 이르되 일어나 도망하자.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 한 사람도 압살롬에게서 피하지 못하리라. 빨리 가자. 두렵건대 저가 우리를 급히 따라와서 해하고 칼로 성을 칠까 하노라. 왕의 신복들이 왕께 고하되 우리 주 왕의 하고자 하시는 대로 우리가 행하리이다 하더라. 왕이 나갈 때에 권속을 다 따르게 하고 후궁 열 명을 남겨 두어 궁을 지키게 하니라. 왕이 나가매 모든 백성이 다 따라서 벧메르학[‘멀리 떨어진 곳에’라는 뜻 같음](KJV, NIV)에 이르러 머무니 모든 신복이 그 곁으로 지나가고 모든 그렛 사람과 모든 블렛 사람과 및 왕을 따라 가드에서 온 6백인이 왕의 앞으로 진행하니라.

백성의 인심(人心)은 참으로 변화무쌍했다. 우리는 사람을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 다윗과 그 측근의 신복들은 급히 궁을 떠나 피신했다. ‘그렛 사람들’은 블레셋 출신 사람들이라고 한다(BDB). 반역의 때에도 다윗을 따르는 여러 사람들과 용사들과 신복들이 있었다.

[19-23절] 그때에 왕이 가드 사람 잇대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도 우리와 함께 가느냐? 너는 쫓겨난 나그네니 돌아가서 왕과 함께 네 곳에 있으라. 너는 어제 왔고 나는 정처 없이 가니 오늘날 어찌 너로 우리와 함께 유리하게 하리요? 너도 돌아가고 네 동포들도 데려가라. 은혜와 진리가 너와 함께 있기를 원하노라. 잇대가 왕께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과 우리 주 왕의 사심으로 맹세하옵나니 진실로 내 주 왕께서 어느 곳에 계시든지 무론 사생(死生)하고[죽든지 살든지] 종도 그 곳에 있겠나이다. 다윗이 잇대에게 이르되 앞서 건너가라 하매 가드 사람 잇대와 그 종자들과 그와 함께한 아이들이 다 건너가고 온 땅 사람이 대성통곡하며 모든 인민이 앞서 건너가매 왕도 기드론 시내를 건너가니 건너간 모든 백성이 광야 길로 향하니라.

[24-26절] 사독과 그와 함께한 모든 레위 사람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메어다가 내려놓고 아비아달도 올라와서 모든 백성이 성에서 나오기를 기다리더니 왕이 사독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궤를 성으로 도로 메어 가라. 만일 내가 여호와 앞에서 은혜를 얻으면 도로 나를 인도하사 내게 그 궤와 그 계신 데를 보이시리라. 그러나 저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기뻐하지 아니한다 하시면 종이 여기 있사오니 선히 여기시는 대로 내게 행하시옵소서 하리라.

사독과 그와 함께한 레위 사람들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메어왔다. 경건한 자들은 빠른 판단력을 가지고 다윗과 입장을 같이하였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자이었다. 그는 겸손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그의 처분만 바라며 그 처분에 순종하려 하였다.

[27-29절] 왕이 또 제사장 사독에게 이르되 네가 선견자가 아니냐? 너는 너희의 두 아들 곧 네 아들 아히마아스와 아비아달의 아들 요나단을 데리고 평안히 성으로 돌아가라. 너희에게서 내게 고하는 기별이 올 때까지 내가 광야 나룻터에서 기다리리라. 사독과 아비아달이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도로 메어다 놓고 거기 유하니라.

다윗은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동시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사독과 아비아달을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하고 그들로부터 그 곳의 소식을 전해 듣기를 원하였다. 사독과 아비아달은 다윗의 조언대로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도로 메어다 놓고 거기 유하였다.

[30-31절] 다윗이 감람산 길로 올라갈 때에 머리를 가리우고 맨발로 울며 행하고 저와 함께 가는 백성들도 각각 그 머리를 가리우고 울며 올라가니라. 혹이 다윗에게 고하되 압살롬과 함께 모반한 자들 가운데 아히도벨이 있나이다 하니 다윗이 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대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 하니라.

다윗은 은혜를 악으로 갚는 아들 압살롬의 반역을 피해 큰 슬픔과 고통의 심령으로 맨발로 울면서 감람산 길을 올랐다. 또 그는 고통스런 피신의 길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며 기도하였다.

[32-37절] 다윗이 하나님을 경배하는(이쉬타카웨)[경배하곤 하였던](NIV) 마루턱에 이를 때에 아렉 사람 후새가 옷을 찢고 흙을 머리에 무릅쓰고 다윗을 맞으러 온지라. 다윗이 저에게 이르되 네가 만일 나와 함께 나아가면 내게 누를 끼치리라. 그러나 네가 만일 성으로 돌아가서 압살롬에게 말하기를 왕이여, 내가 왕의 종이니이다. 이왕에는 왕의 부친의 종이었더니 내가 이제는 왕의 종이니이다 하면 네가 나를 위하여 아히도벨의 모략을 패하게 하리라.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이 너와 함께 거기 있지 아니하냐? 네가 궁중에서 무엇을 듣든지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에게 고하라. 저희의 두 아들 곧 사독의 아히마아스와 아비아달의 요나단이 저희와 함께 거기 있나니 무릇 너희 듣는 것을 저희 편으로 내게 기별할지니라. 다윗의 친구 후새가 곧 성으로 들어가고 압살롬도 예루살렘으로 들어갔더라.

다윗은 하나님의 지혜로 후새를 예루살렘 성으로 돌려보내었다.


본장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압살롬은 사람들의 마음을 도적질한 간사한 자이었고 또 아버지의 은혜를 반역의 악으로 갚은 자이었다. 형을 살해했던 그는 율법에 따라 사형되어야 마땅했다. 그를 살려둔 다윗의 처사는 하나님 앞에서 잘못이었지만, 당사자인 압살롬에게는 은혜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의 은혜를 반역의 악으로 갚았다. 우리는 압살롬처럼 간사한 자, 은혜를 배반하는 반역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둘째로, 다윗의 간음죄와 살인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과 훈련은 참으로 혹독하였다. 아들 압살롬은 그를 반역했고 백성들의 마음은 돌아섰고 그의 모사 아히도벨도 그를 배신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께서 주신 그 고난을 달게 받았고 고난 중에도 낙심치 않고 섭리자 하나님을 의지했다. 우리는 고난 중에 묵묵히 섭리자 하나님만 의지해야 한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죽음을 각오하며 입장을 같이한 충성된 동료 잇대, 옷을 찢으며 산언덕으로 달려온 믿을 만한 친구 후새, 바른 판단력으로 다윗과 뜻을 같이한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 그 외에 많은 신실한 자들을 다윗에게 주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윗보다 크신 왕이시다. 오늘날 잇대, 후새, 사독과 아비아달, 신실한 600명 등은 누구인가? 우리는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그를 따라야 하고 뜻을 같이하며 목숨 바쳐 충성할 일꾼들과 성도들이 되어야 한다.

 

16장: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함

[1-2절] 다윗이 마루턱을 조금 지나니 므비보셋의 사환 시바가 안장 지운 두 나귀에 떡 2백과 건포도 1백 송이와 여름 실과 1백과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싣고 다윗을 맞는지라. 왕이 시바에게 이르되 네가 무슨 뜻으로 이것을 가져왔느뇨? 시바가 가로되 나귀는 왕의 권속들로 타게 하고 떡과 실과는 소년들로 먹게 하고 포도주는 들에서 곤비한 자들로 마시게 하려 함이니이다.

비록 사울 가문의 종이었지만, 시바는 자기에게 집과 일할 터전을 준 다윗의 은혜에 보답하는 마음을 가졌다. 그의 마음이 진심이 아니었다면 그 혼란스런 때, 그는 피난길에 오른 왕을 대접하기 위해 그런 음식물을 정성껏 가져올 수 없었을 것이다.

[3-4절] 왕이 가로되 네 주인의 아들이 어디 있느뇨? 시바가 왕께 고하되 예루살렘에 있는데 저가 말하기를 이스라엘 족속이 오늘 내 아비의 나라를 내게 돌리리라 하나이다. 왕이 시바더러 이르되 므비보셋에게 있는 것이 다 네 것이니라. 시바가 가로되 내가 절하나이다. 내 주 왕이여, 나로 왕의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니라.

시바의 주인,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은 잠시 배은망덕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사무엘하 19:24-27에, “사울의 손자 므비보셋이 내려와서 왕을 맞으니 저는 왕의 떠난 날부터 평안히 돌아오는 날까지 그 발을 맵시 내지 아니하며 그 수염을 깎지 아니하며 옷을 빨지 아니하였더라. 예루살렘에서 와서 왕을 맞을 때에 왕이 저에게 물어 가로되 므비보셋이여, 네가 어찌하여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더뇨? 내 주 왕이여, 왕의 종 나는 절뚝발이이므로 내 나귀에 안장을 지워 타고 왕과 함께 가려 했더니 나의 종이 나를 속이고 종 나를 내 주 왕께 참소했나이다”라고 기록한 것을 보면, 누구의 말이 옳은지 알 수 없으나, 므비보셋이 잠시 그러했다가 마음을 고쳐먹은 것 같다.

[5-8절] 다윗 왕이 바후림에 이르매 거기서 사울의 집 족속 하나가 나오니 게라의 아들이요 이름은 시므이라. 저가 나오면서 연하여 저주하고 또 다윗과 다윗 왕의 모든 신복을 향하여 돌을 던지니 그때에 모든 백성과 용사들은 다 왕의 좌우에 있었더라. 시므이가 저주하는 가운데 이와 같이 말하니라. 피를 흘린 자여, 비루한 자(이쉬 합벨리야알)[벨리알의 사람, 무가치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 대신에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붙이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인 고로 화를 자취하였느니라.

사울의 집 족속이라도, 시바는 종의 신분이지만, 다윗을 이해하고 동정하며 은혜를 보답하려 했고, 시므이는 다윗을 오해하고 멸시하며 저주했다. 시므이는 사울 가문에 대한 사랑 때문에, 다윗에 대해 잘못된 지식과 편견을 가지고 있었고 그릇되이 그를 저주했다. 사람이 이처럼 잘못된 지식과 편견을 가지면 그릇되이 남을 저주할 수 있다. 다윗은 시므이의 저주의 말처럼 그런 사람이 아니다. 다윗은 사울을 죽이지 않았고 또 죽이려 하지도 않았다. 그는 사울을 죽일 기회가 두 번 있었지만, 그를 죽이지 않았다. 그는 사울 앞에서 잘못을 범한 것이 없었다. 그는 ‘벨리알의 사람’이나 ‘무가치한 자’가 아니었다.

[9-14절]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왕께 여짜오되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청컨대 나로 건너가서 저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 왕이 가로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저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그러면]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 또 아비새와 모든 신복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두라.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주시리라 하고 다윗과 그 종자들이 길을 갈 때에 시므이는 산비탈로 따라가면서 저주하고 저를 향하여 돌을 던지며 티끌을 날리더라. 왕과 그 함께 있는 백성들이 다 곤비하여 한곳에 이르러 거기서 쉬니라.

다윗은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있었다. 그는 자기에게 닥친 어려운 모든 일이 다 하나님의 섭리의 손 안에서 일어났음을 믿고 있었다. 그는 시므이의 저주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일어난 일임을 인식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 일을 주셨다면, 그 일의 해결책도 하나님 안에 있음을 믿고 있었다. 그것이 섭리 신앙이다. 우리에게 닥친 모든 어려운 문제의 해답은 바로 섭리자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15-19절] 압살롬과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이르고 아히도벨도 저와 함께 이른지라. 다윗의 친구 아렉 사람 후새가 압살롬에게 나아올 때에 저에게 말하기를 왕이여, 만세, 왕이여, 만세 하니 압살롬이 후새에게 이르되 이것이 네가 친구를 후대하는 것이냐? 네가 어찌하여 네 친구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느냐? 후새가 압살롬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내가 여호와와 이 백성 모든 이스라엘의 택한 자에게 속하여 그와 함께 거할 것이니이다. 또 내가 이제 누구를 섬기리이까? 그 아들이 아니니이까? 내가 전에 왕의 아버지를 섬긴 것같이 왕을 섬기리이다 하니라.

후새가 압살롬에게 자신이 여호와와 그 백성에게 속하기를 원한다고 한 말은 진실일 것이다. 그가 압살롬을 섬기겠다는 말도 그에게 바른 조언을 주겠다는 뜻으로 본다면 반쯤 진실일 것이다.

[20-23절] 압살롬이 아히도벨에게 이르되 너는 어떻게 행할 모략을 우리에게 가르치라. 아히도벨이 압살롬에게 이르되 왕의 아버지가 머물러 두어 궁을 지키게 한 후궁들로 더불어 동침하소서. 그리하면 왕께서 왕의 부친의 미워하는 바 됨을 온 이스라엘이 들으리니 왕과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의 힘이 더욱 강하여지리이다. 이에 사람들이 압살롬을 위하여 지붕에 장막을 치니 압살롬이 온 이스라엘 무리의 눈앞에서 그 부친의 후궁들로 더불어 동침하니라. 그때에 아히도벨의 베푸는 모략은 하나님께 물어 받은 말씀과 일반이라. 저의 모든 모략은 다윗에게나 압살롬에게나 이와 같더라

아히도벨의 모략과 압살롬의 행위는 얼마나 패륜적인 행위인가! 사람이 악해지면 이렇게 악해진다. 압살롬은 아버지를 반역하였고 그의 후궁들 곧 자기의 모친과 같은 이들을 범하였고 아버지를 죽이려 하였다. 그러나 압살롬의 이런 패륜적 행위는 다윗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로 이미 예언된 내용이었다. 사무엘하 12:10-12,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여호와께서 또 이처럼 이르시기를 내가 네 집에 재화(災禍)를 일으키고 내가 네 처들을 가져 네 눈앞에서 다른 사람에게 주리니 그 사람이 네 처들로 더불어 백주(白晝)에[대낮에] 동침하리라.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이스라엘 무리 앞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 하셨나이다.”


본장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시므이의 저주는 잘못된 지식과 편견을 가지고 한 저주이었다. 그런 잘못된 저주는 헛된 저주이며 하나님 앞에서 큰 죄악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저주하지 말고, 특히 그릇되이 저주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그런 큰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둘째로, 시바는 비록 종이었지만 피난하는 다윗과 그와 함께한 자들을 위해 정성껏 많은 음식을 준비해 왔다. 혼란하고 어려운 그때에 그것은 사랑과 진실과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주께서 전도하실 때 막달라 마리아와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들은 자기들의 소유로 주님과 제자들을 섬겼다(눅 8:1-3). 바울의 후년의 쓸쓸한 사역의 때에 오네시보로는 그를 자주 유쾌케 하고 로마 감옥에까지 그를 찾아와 그의 위로가 되었다(딤후 1:16-18). 우리는 그런 자들과 같이 하나님을 위해 선한 일을 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셋째로, 다윗은 자기를 저주하는 시므이의 저주까지도 하나님께서 시키신 일이라고 믿었다. 그는 자신에게 닥친 어려운 일들이 하나님의 섭리로 된 일들이며 그 해결도 섭리자 하나님의 손안에 있음을 믿었다. 우리도 그런 섭리 신앙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하시는 줄 알고 하나님만 의지하며 그에게 기도하고 하나님의 선한 뜻에 순종해야 한다. 섭리자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는 승리할 것이다.

 

 

17장: 후새의 모략

[1-4절] 아히도벨이 또 압살롬에게 이르되 이제 나로 하여금 사람 1만 2천을 택하게 하소서. 오늘밤에 내가 일어나서 다윗의 뒤를 따라 저가 곤하고 약할 때에 엄습하여 저를 무섭게 한즉 저와 함께 있는 모든 백성이 도망하리니 내가 다윗 왕만 쳐죽이고 모든 백성으로 왕께 돌아오게 하리니 무리의 돌아오기는 왕의 찾는 이 사람에게 달렸음이라. 그리하면 모든 백성이 평안하리이다. 압살롬과 이스라엘 장로들이 다 그 말을 옳게 여기더라.

과연 아히도벨의 머리는 비상했다. 그는 바로 그 밤이 다윗을 죽이기에 절호의 기회라고 잘 판단하였다. 압살롬과 이스라엘 장로들도 다 그의 말을 옳게 여겼다. 다윗에게 위기가 닥치려 하였다.

[5-10절] 압살롬이 이르되 아렉 사람 후새도 부르라. 우리가 저의 말도 듣자 하니라. 후새가 압살롬에게 이르매 압살롬이 저에게 말하여 가로되 아히도벨이 여차여차히 말하니 우리가 그 말대로 행하랴? 그렇지 않거든 너는 말하라. 후새가 압살롬에게 이르되 이때에는 아히도벨의 베푼 모략이 선치 아니하니이다 하고 또 말하되 왕도 아시거니와 왕의 부친과 그 종자들은 용사라. 저희는 들에 있는 곰이 새끼를 빼앗긴 것같이 격분하였고 왕의 부친은 병법에 익은 사람인즉 백성과 함께 자지 아니하고 이제 어느 굴에나 어느 곳에 숨어 있으리니 혹 무리 중에 몇이 먼저 엎드러지면 그 소문을 듣는 자가 말하기를 압살롬을 좇는 자 가운데서 패함을 당하였다 할지라. 비록 용감하여 사자 같은 자의 마음이라도 저상하리니[힘을 잃으리니] 이는 이스라엘 무리가 왕의 부친은 영웅이요 그 종자들도 용사인 줄 앎이니이다.

중요한 일을 결정해야 할 때에 압살롬에게 후새의 말도 들어보고 싶은 생각이 든 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었다. 모든 일이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의 손 안에 있다. 후새의 반론의 이유는 그럴 듯하였다.

[11-14절] 나의 모략은 이러하니이다. 온 이스라엘을 단부터 브엘세바까지 바닷가의 많은 모래같이 왕께로 모으고 친히 전장(戰場)에 나가시고 우리가 그 만날 만한 곳에서 저를 엄습하기를 이슬이 땅에 내림같이 저의 위에 덮여 저와 그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을 하나도 남겨두지 아니할 것이요 또 만일 저가 어느 성에 들었으면 온 이스라엘이 줄을 가져다가 그 성을 강으로 끌어들여서 그 곳에 한 작은 돌도 보이지 않게 할 것이니이다 하매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르되 아렉 사람 후새의 모략은 아히도벨의 모략보다 낫다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려 하사 아히도벨의 좋은 모략을 파하기로 작정하셨음이더라.

후새는 한 대안을 말했다. 그는 압살롬이 온 이스라엘을 모아 직접 전장(戰場)에 나가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하였다. 그의 조언을 들은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렉 사람 후새의 모략은 아히도벨의 모략보다 낫다”고 말했다. 본문 14절은, “이는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려 하사 아히도벨의 좋은 모략을 파하기로 작정하셨음이더라”고 말한다.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주권적 작정과 섭리 안에서 되어진 것이다. 그것은 다윗이 얼마 전에 하나님께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해달라고 한 기도의 응답이기도 하였다.

[15-16절] 이에 후새가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에게 이르되 아히도벨이 압살롬과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여차여차히 모략을 베풀었고 나도 여차여차히 모략을 베풀었으니 이제 너희는 빨리 사람을 보내어 다윗에게 고하기를 오늘밤에 광야 나룻터에서 자지 마시고 아무쪼록 건너가소서 하라. 혹시 왕과 그 좇는 자들이 몰사할까 하노라 하니라.

후새는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에게 말하였다. 그 반역의 때에,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그를 돕는 자들, 곧 후새와 두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 같은 이들을 주셨던 것이다.

[17-20절] 그때에 요나단과 아히마아스가 사람이 볼까 두려워하여 감히 성에 들어가지 못하고 에느로겔 가에 머물고 어떤 계집종은 저희에게 나와서 고하고 저희는 가서 다윗에게 고하더니[고하려 하더니] 한 소년이 저희를 보고 압살롬에게 고한지라. 그 두 사람이 빨리 달려서 바후림 어떤 사람의 집으로 들어가서 그 뜰에 있는 우물 속으로 내려가니 그 집 여인이 덮을 것을 가져다가 우물 아구를 덮고 찧은 곡식을 그 위에 널매 도무지 알지 못할러라. 압살롬의 종들이 그 집에 와서 여인에게 묻되 아히마하스와 요나단이 어디 있느냐? 여인이 가로되 그들이 시내를 건너가더라 하니 저희가 찾아도 만나지 못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니라.

하나님께서는 두 제사장들 뿐만 아니라, 그들의 두 아들, 요나단과 아히마아스, 어떤 여종, 또 바후림의 어떤 사람과 그 집 여인 등이 다 다윗을 돕는 자가 되게 하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이었고 경건하고 선한 다윗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바후림의 그 집 여인은 압살롬의 종들에게 거짓말을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전쟁 상황에서 그의 연약과 그 중심을 긍휼히 여기셨던 것 같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선한 일을 위해서라도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21-22절] 저희가 간 후에 두 사람이 우물에서 올라와서 다윗 왕에게 이르러 고하여 가로되 당신들은 일어나 빨리 물을 건너가소서. 아히도벨이 당신들을 해하려고 여차여차히 모략을 베풀었나이다. 다윗이 일어나 모든 백성과 함께 요단을 건널새 새벽에 미쳐서 한 사람도 요단을 건너지 못한 자가 없었더라.

다윗의 사람들은 새벽이 되어 한 사람도 요단을 건너지 못한 자가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다윗과 그 일행들을 도피케 하셨고 그래서 그들은 그 날 밤의 그 위험한 상황을 모면하였다.

[23절] 아히도벨이 자기 모략이 시행되지 못함을 보고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서 자기 집에 이르러 집을 정리하고 스스로 목매어 죽으매 그 아비 묘에 장사되니라.

아히도벨은 일이 잘못되었다고 판단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24-26절] 이에 다윗은 마하나임에 이르고 압살롬은 모든 이스라엘 사람과 함께 요단을 건너니라. 압살롬이 아마사로 요압을 대신하여 군장을 삼으니라. 아마사는 이스라엘 사람20) 이드라라 하는 자의 아들이라. 이드라가 나하스의 딸 아비갈과 동침하여 저를 낳았으며 아비갈은 요압의 어미 스루야의 동생이더라. 이에 이스라엘 무리와 압살롬이 길르앗 땅에 진치니라.

아마사는 요압의 이모의 아들, 곧 요압과 외사촌간이었다.

[27-29절] 다윗이 마하나임에 이르렀을 때에 암몬 족속에게 속한 랍바 사람 나하스의 아들 소비와 로데발 사람 암미엘의 아들 마길과 로글림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국한문, ‘바실래’]가 침상과 대야와 질그릇과 밀과 보리와 밀가루와 볶은 곡식과 콩과 팥과 볶은 녹두와 꿀과 뻐더와 양과 치스를 가져다가 다윗과 그 함께한 백성으로 먹게 하였으니 이는 저희 생각에 백성이 들에서 시장하고 곤하고 목마르겠다 함이더라.

바르실래는 나이 80세인 노인이며 큰 부자이었다(삼하 19:32). 그들의 방문과 세심한 배려의 마음과 구체적인 도움은 어려움에 처한 다윗과 그 무리들에게 큰 위로와 도움과 힘이 되었을 것이다.


본장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배은망덕한 반역자인 압살롬이 아히도벨의 좋은 모략을 버리고 후새의 모략을 선택한 것은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 안에서 되어졌다. 14절, “이는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려 하사 아히도벨의 좋은 모략을 파하기로 작정하셨음이더라.” 세상의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 안에 있다. 우리는 세상의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주권적 작정과 섭리 안에 있음을 믿어야 한다.

둘째로, 압살롬을 돕던 아히도벨은 일이 잘못되었다고 판단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악인의 결말은 좋지 못하다. 악인들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동안만 활개친다. 그러나 그들은 마침내 망할 것이며, 장차 지옥의 형벌을 받을 것이다(계 21:8). 악한 자들의 마지막은 멸망이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고난 받는 다윗에게 후새, 사독과 아비아달, 그들의 아들들 요나단과 아히마하스, 한 여종, 바후림의 한 집 여인 같은 돕는 자들을 주셨고, 또 소비와 마길과 바르실래같이 물질적으로 돕는 자들도 주셨다. 오늘날도 우리가 하나님만 섬기며 바르게 산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도 그렇게 도우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고난 중에서라도 낙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기도하며 바르게만 살아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위로와 도우심을 경험할 것이다.

 

 

18장: 압살롬의 죽음

[1-5절] 이에 다윗이 그 함께한 백성을 계수(計數)하고 천부장과 백부장을 그 위에 세우고 그 백성을 내어 보낼새 3분지 1은 요압의 수하에, 3분지 1은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동생[아마 ‘형’] 아비새의 수하에 붙이고 3분지 1은 가드 사람 잇대의 수하에 붙이고 백성에게 이르되 나도 반드시 너희와 함께 나가리라. 백성들이 가로되 왕은 나가지 마소서. 우리가 도망할지라도 저희는 우리에게 주의하지 아니할 터이요 우리가 절반이나 죽을지라도 우리에게 주의하지 아니할 터이라. 왕은 우리 만 명보다 중하시오니 왕은 성에 계시다가 우리를 도우심이 좋으니이다. 왕이 저희에게 이르되 너희가 선히 여기는 대로 내가 행하리라 하고 문 곁에 서매 모든 백성이 백 명씩 천 명씩 대를 지어 나가는지라. 왕이 요압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명하여 가로되 나를 위하여 소년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접하라[대하라] 하니 왕이 압살롬을 위하여 모든 군장에게 명령할 때에 백성들이 다 들으니라.

이제 다윗을 따른 백성과, 압살롬이 소집한 이스라엘 군대가 전투를 치르게 되었다. 백성들은 압살롬의 목표를 이해하기 때문에 다윗이 직접 전쟁에 나가는 것을 간곡히 만류하였다. 왕은 요압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나를 위해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하라고 명하였다.

[6-9절] 이에 백성이 이스라엘을 치러 들로 나가서 에브라임 수풀에서 싸우더니 거기서 이스라엘 무리가 다윗의 신복들에게 패하매 그 날 그 곳에서 살륙이 커서 2만에 이르렀고 그 땅에서 사면으로 퍼져 싸웠으므로 그 날에 수풀에서 죽은 자가 칼에 죽은 자보다 많았더라. 압살롬이 다윗의 신복과 마주치니라. 압살롬이 노새를 탔는데 그 노새가 큰 상수리나무 번성한[빽빽한] 가지 아래로 지날 때에 압살롬의 머리털이 그 상수리나무에 걸리매 저가 공중에 달리고 그 탔던 노새는 그 아래로 빠져나간지라.

정말 어이없는 일이었다. 큰 용사인 압살롬이 머리털이 나뭇가지에 걸려 공중에 매달려 죽임을 당하게 되다니!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압살롬이 그렇게 최후를 맞이하게 하셨다.

[10-15절] 한 사람이 보고 요압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보니 압살롬이 상수리나무에 달렸더이다. 요압이 그 고한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보고 어찌하여 당장에 쳐서 땅에 떨어뜨리지 아니하였느뇨? 내가 네게 은 열 개와 띠 하나를 주었으리라. 그 사람이 요압에게 대답하되 내가 내 손에 은 천 개를 받는다 할지라도 나는 왕의 아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우리가 들었거니와 왕이 당신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명하여 이르시기를 삼가 누구든지21) 소년 압살롬을 해하지 말라 하셨나이다. 아무 일도 왕 앞에는 숨길 수 없나니 내가 만일 거역하여 그 생명을 해하였더면 당신도 나를 대적하였으리이다. 요압이 가로되 나는 너와 같이 지체할 수 없다 하고 손에 작은 창 셋을 가지고 가서 상수리나무 가운데서 아직 살아 있는 압살롬의 심장을 찌르니 요압의 병기를 맡은 소년 열이 압살롬을 에워싸고 쳐죽이니라.

요압은 압살롬을 죽였고, 압살롬은 이렇게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16-18절] 요압이 나팔을 불어 백성들로 그치게 하니 저희가 이스라엘을 따르지 아니하고 돌아오니라. 무리가 압살롬을 옮겨다가 수풀 가운데 큰 구멍에 던지고 그 위에 심히 큰 돌무더기를 쌓으니라. 온 이스라엘 무리가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니라. 압살롬이 살았을 때에 자기를 위하여 한 비석을 가져 세웠으니 이는 저가 자기 이름을 전할 아들이 없음을 한탄함이라. 그러므로 자기 이름으로 그 비석을 이름하였으며 그 비석이 왕의 골짜기에 있고 이제까지 압살롬의 기념비라 일컫더라.

그 전쟁은 이렇게 압살롬의 죽음으로 다윗의 무리의 승리로 끝났다. 18절은 압살롬이 자기 이름을 전할 아들이 없었다고 말하나, 사무엘하 14:27에 보면, 압살롬은 아들 셋과 딸 하나가 있었다. 그러면 그 아들들은 하나님의 징벌로 사고나 병으로 죽은 것 같다(Poole).

[19-27절]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가 가로되 청컨대 나로 빨리 왕에게 가서 여호와께서 왕의 원수 갚아 주신 소식을 전하게 하소서. 요압이 저에게 이르되 너는 오늘 소식을 전하는 자가 되지 말고 다른 날에 전할 것이니라. 왕의 아들이 죽었나니 네가 오늘날 소식을 전하지 못하리라 하고 구스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가서 본 것을 왕께 고하라 하매 구스 사람이 요압에게 절하고 달음질하여 가니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가 다시 요압에게 이르되 청컨대 아무쪼록 나로 또한 구스 사람의 뒤를 따라 달음질하게 하소서. 요압이 가로되 내 아들아, 왜 달음질하려 하느냐? 이 소식으로 인하여는 상을 받지 못하리라 하되 저가 아무쪼록 달음질하겠노라 하는지라. 요압이 가로되 그리하라 하니 아히마아스가 들길로 달음질하여 구스 사람보다 앞서니라. 때에 다윗이 두 문 사이에 앉았더라. 파숫군[파수꾼]이 성문루에 올라가서 눈을 들어 보니 어떤 사람이 홀로 달음질하는지라. 파숫군[파수꾼]이 외쳐 왕께 고하매 왕이 가로되 저가 만일 혼자면 그 입에 소식이 있으리라 할 때에 저가 차차 가까이 오니라. 파숫군[파수꾼]이 본즉 한 사람이 또 달음질하는지라. 문지기에게 외쳐 이르되 보라, 한 사람이 또 혼자 달음질한다 하니 왕이 가로되 저도 소식을 가져오느니라. 파숫군[파수꾼]이 가로되 나 보기에는 앞선 사람의 달음질이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의 달음질과 같으니이다. 왕이 가로되 저는 좋은 사람이니 좋은 소식을 가져오느니라.

[28-33절] 아히마아스가 외쳐 왕께 말씀하되 평강하옵소서[평안이니이다, 모든 일이 잘되었나이다(KJV, NASB, NIV)] 하고 왕의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여 가로되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양하리로소이다. 그 손을 들어 내 주 왕을 대적하는 자들을 붙여 주셨나이다. 왕이 가로되 소년 압살롬이 잘 있느냐(솰롬)[평안하냐]? 아히마아스가 대답하되 요압이 왕의 종 나를 보낼 때에 크게 소동하는 것을 보았사오나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였나이다. 왕이 가로되 물러나 곁에 서 있으라 하매 물러나서 섰더라. 구스 사람이 이르러 고하되 내 주 왕께 보할 소식이 있나이다[왕께서 좋은 소식을 받으소서](MT, NASB). 여호와께서 오늘날 왕을 대적하던 모든 원수를 갚으셨나이다. 왕이 구스 사람에게 묻되 소년 압살롬이 잘 있느냐(솰롬)[평안하냐]? 구스 사람이 대답하되 내 주 왕의 원수와 일어나서 왕을 대적하는 자들은 다 그 소년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심히 요동하여] 문루(門樓)(성문 위의 방)로 올라가서 우니라. 저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

압살롬이 원수 같은 아들이었지만, 다윗은 “내가 너를 대신해 죽었더면” 하고 그를 불쌍히 여기며 그의 죽음을 심히 슬퍼하였다.


본장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아버지의 은혜를 반역의 악으로 갚아 아버지의 왕위를 빼앗았던 배은망덕하고 불효막심하고 악한 아들 압살롬은 큰 상수리나무 가지에 머리털이 걸려 공중에 매달렸고 요압의 작은 창에 심장이 찔려 죽임을 당했다. 패기만만하였던 그 반역자 압살롬은 이렇게 허무하고 비참하게 죽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악한 자를 이렇게 징벌하셨다. 우리는 공의의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그 손을 들어 왕을 대적한 자들을 패하게 하셨고 다윗에게 승리와 회복을 주셨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승리는 하나님께 있다. 그는 반역자 압살롬을 징벌하셨고, 비록 실수와 흠이 있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고 바르게 살려했던 다윗에게 승리를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경건한 의인에게 승리를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만 살고 의롭고 선하게만 살아야 한다. 그것이 인생의 모든 싸움에서 승리하는 길이다(고후 2:14; 요일 5:3-4).

셋째로, 다윗은 반역자 아들에 대해 너그러운 마음을 가졌다. 그는 군장들에게 “나를 위하여 소년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하라,” “누구든지 소년 압살롬의 목숨을 지키라”고 말했고 그가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마음이 심히 아파 성문 위의 방에 올라가 압살롬의 이름을 여러 번 부르며 울었다.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좋았겠다고 말한 다윗의 심정은 죄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심정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원수 같은 우리를 위하여 자기 독생자를 내어주셨다. 로마서 5:10,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그러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교훈하셨다(눅 6:27-28). 우리는 압살롬을 향한 다윗의 선한 심정, 곧 하나님의 심정을 본받아 모든 사람에게 너그럽게 대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한다.

 

 

19장: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옴

[1-8절] 혹이 요압에게 고하되 왕이 압살롬을 위하여 울며 슬퍼하시나이다 하니 왕이 그 아들을 위하여 슬퍼한다 함이 그 날에 백성들에게 들리매 그 날의 이김이 모든 백성에게 슬픔이 된지라. 그 날에 백성들이 싸움에 쫓겨 부끄러워 도망함같이 가만히 성으로 들어가니라. 왕이 얼굴을 가리우고 큰 소리로 부르되 내 아들 압살롬아,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니 요압이 집에 들어가서 왕께 말씀하되 왕께서 오늘 왕의 생명과 왕의 자녀의 생명과 처첩들의 생명을 구원한 모든 신복의 얼굴을 부끄럽게 하시니 이는 왕께서 미워하는 자는 사랑하시며 사랑하는 자는 미워하시고 오늘 장관들과 신복들을 멸시하심을 나타내심이라. 오늘 내가 깨달으니 만일 압살롬이 살고 오늘 우리가 다 죽었더면 왕이 마땅히 여기실 뻔하였나이다. 이제 곧 일어나 나가서 왕의 신복들의 마음을 위로하여 말씀하옵소서. 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옵나니 왕이 만일 나가지 아니하시면 오늘밤에 한 사람도 왕과 함께 머물지 아니할지라. 그리하면 그 화가 왕이 젊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당하신 모든 화보다 더욱 심하리이다. 왕이 일어나 성문에 앉으매 혹이 모든 백성에게 고하되 왕이 문에 앉아 계시다 하니 모든 백성이 왕의 앞으로 나아오니라. 이스라엘은 이미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더라.

다윗의 슬픔은 어느 정도 정당했다. 그는 아버지로서 아들을 참으로 사랑하였다. 또 그는 반역자인 아들 압살롬을 죽이기를 진심으로 원치 않았다. 요압이 압살롬을 죽인 것은 왕의 명령을 어긴 잘못된 행위이었지만, 다윗은 그의 슬픔이 백성의 얼굴을 부끄럽게 했다는 요압의 충고를 받아들였다. 그것은 백성을 배려하고 단합을 생각해서이었다. 여기에 다윗의 겸손과 자제력과 포용력이 나타나 있다.

[9-10절] 이스라엘 모든 지파 백성들이 변론하여 가로되 왕이 우리를 원수의 손에서 구원하여 내셨고 또 우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나 이제 압살롬을 피하여 나라에서 나가셨고 우리가 기름을 부어 우리를 다스리게 한 압살롬은 싸움에 죽었거늘 이제 너희가 어찌하여 왕을 도로 모셔 올 일에 잠잠하고 있느냐 하니라.

백성들의 마음은 주권적 섭리자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었다.

[11-15절] 다윗 왕이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에게 기별하여 가로되 너희는 유다 장로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왕의 말씀이 온 이스라엘이 왕을 궁으로 도로 모셔 오자 하는 말이 왕께 들렸거늘 너희는 어찌하여 궁으로[왕을 그 궁으로](원문, KJV, NASB, NIV) 모시는 일에 나중이 되느냐? 너희는 내 형제요 내 골육이어늘 어찌하여 왕을 도로 모셔 오는 일에 나중이 되리요 하셨다 하고 너희는 또 아마사에게 이르기를 너는 내 골육이 아니냐? 네가 요압을 대신하여 항상 내 앞에서 군장이 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시기를 바라노라 하셨다 하라 하여 모든 유다 사람들로 마음을 일제히 돌리게 하매 저희가 왕께 보내어 가로되 왕은 모든 신복으로 더불어 돌아오소서 한지라. 왕이 돌아와 요단에 이르매 유다 족속이 왕을 맞아 요단을 건네려 하여 길갈로 오니라.

다윗은 모든 유다 백성들의 마음을 일제히 돌리게 하였다. 다윗은 여론을 중시했다. 그는 그들의 마음을 거스르거나 분열시키며 왕위에 복귀하기를 원치 않았다. 또 그는 반란군의 장군인 아마사에게 그를 요압 대신 군장으로 삼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전달케 했다. 그것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단합을 위한 것이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잘못을 범한 때 아마사에게만 잘못을 묻는 것은 적절치 않을 것이다. 다윗은 이스라엘 전체를 생각하는 왕다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16-23절] 바후림에 있는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급히 유다 사람과 함께 다윗 왕을 맞으려 내려올 때에 베냐민 사람 1천명이 저와 함께하고 사울의 사환 시바도 그 아들 열 다섯과 종 스무 명으로 더불어 저와 함께하여 요단강을 밟고 건너 왕의 앞으로 나아오니라. 왕의 가족을 건네려 하며 왕의 선히 여기는 대로 쓰게 하려 하여 나룻배가 건너가니 왕이 요단을 건너려 할 때에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왕의 앞에 엎드려 왕께 고하되 내 주여, 원컨대 내게 죄 주지 마옵소서. 내 주 왕께서 예루살렘에서 나오시던 날에 종의 패역한 일을 기억하지 마옵시며 마음에 두지 마옵소서. 왕의 종 내가 범죄한 줄 아옵는 고로 오늘 요셉의 온 족속 중 내가 먼저 내려와서 내 주 왕을 영접하나이다.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대답하여 가로되 시므이가 여호와의 기름 부으신 자를 저주하였으니 그로 인하여 죽어야 마땅치 아니하니이까? 다윗이 가로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기로 너희가 오늘 나의 대적이 되느냐? 오늘 어찌하여 이스라엘 가운데서 사람을 죽이겠느냐? 내가 오늘날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을 내가 알지 못하리요 하고 시므이에게 이르되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 하고 저에게 맹세하니라.

베냐민 사람 시므이도 급히 유다 사람들과 함께 다윗 왕을 맞으려 내려왔다. 그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빌었다. 다윗은 그를 죽이지 않았다. 그의 이런 행동도 회개하는 죄인에 대한 긍휼과 이스라엘의 단합을 위한 그의 마음을 보인다. 그를 저주하던 자가 그 앞에 굴복하였다. 이처럼 다윗은 이스라엘 나라의 단합과 일치를 위해 자신의 미움의 감정을 자제하였고 백성의 여론을 중시했고, 겸손과 인내와 관용의 덕을 보였다. 그것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덕성이다.

[24-30절] 사울의 손자 므비보셋이 내려와서 왕을 맞으니 저는 왕의 떠난 날부터 평안히 돌아오는 날까지 그 발을 맵시 내지 아니하며 그 수염을 깎지 아니하며 옷을 빨지 아니하였더라. 예루살렘에서 와서 왕을 맞을 때에 왕이 저에게 물어 가로되 므비보셋이여, 네가 어찌하여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더뇨? 대답하되 내 주 왕이여, 왕의 종 나는 절뚝발이이므로 내 나귀에 안장을 지워 타고 왕과 함께 가려 하였더니 나의 종이 나를 속이고 종 나를 내 주 왕께 참소하였나이다. 내 주 왕께서는 하나님의 사자와 같으시니 왕의 처분대로 하옵소서. 내 아비의 온 집이 내 주 왕 앞에서는 다만 죽을 사람이 되지 아니하였었나이까? 그러나 종을 왕의 상에서 음식 먹는 자 가운데 두셨사오니 내게 오히려 무슨 옳음이 있어서 다시 왕께 부르짖을 수 있사오리이까? 왕이 저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또 네 일을 말하느냐? 내가 이르노니 너는 시바와 밭을 나누라. 므비보셋이 왕께 고하되 내 주 왕께서 평안히 궁에 돌아오시게 되었으니 저로[그로] 그 전부를 차지하게 하옵소서 하니라.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도 내려와서 왕을 맞았다. 그는 왕이 떠난 날부터 평안히 돌아오는 날까지 그 발을 맵시 내지 않았고 그 수염을 깎지 않았고 그 옷을 빨지 않았다.22) 그는 다윗의 고난에 동참하는 생활을 했고 이제 왕의 귀환으로 만족했다. 그는 처음에는 잘못 생각했을지 몰라도(삼하 16:3) 후에는 그의 말대로 그러했을 것이다.

[31-39절]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가 왕을 보내어 요단을 건네려고 로글림에서 내려와서 함께 요단에 이르니 바르실래는 매우 늙어 나이 80세라. 저는 거부(巨富)인 고로23) 왕이 마하나임에 유할 때에 왕을 공궤[음식을 후원하고 공급]하였더라. 왕이 바르실래에게 이르되 너는 나와 함께 건너가자. 예루살렘에서 내가 너를 공궤하리라. 바르실래가 왕께 고하되 내 생명의 날이 얼마나 있삽관대 어찌 왕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리이까? 내 나이 이제 80세라. 어떻게 좋고 흉한 것을 분간할 수 있사오며 음식의 맛을 알 수 있사오리이까? 어떻게 다시 노래하는 남자나 여인의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사오리이까? 어찌하여 종이 내 주 왕께 오히려 누를 끼치리이까? 종은 왕을 모시고 요단을 건너려는 것뿐이어늘 왕께서 어찌하여 이 같은 상으로 내게 갚으려 하시나이까? 청컨대 종을 돌려보내옵소서. 내가 내 본성(本城) 부모의 묘 곁에서 죽으려 하나이다. 그러나 왕의 종 김함이 여기 있사오니 청컨대 저로 내 주 왕과 함께 건너가게 하옵시고 왕의 처분대로 저에게 베푸소서. 왕이 대답하되 김함이 나와 함께 건너가리니 내가 너의 좋아하는 대로 저에게 베풀겠고 또 네가 내게 구하는 것은 다 너를 위하여 시행하리라 하니라. 백성이 다 요단을 건너매 왕도 건너가서 바르실래의 입을 맞추고 위하여 복을 비니 저가 자기 곳으로 돌아가니라.

바르실래는 겸손히 왕의 요청을 거절하며 그 대신 김함을 부탁했다. 그는 욕심이 없고 선하고 친절하였고 왕을 진심으로 섬겼다.

[40-43절] 왕이 길갈로 건너오고 김함도 함께 건너오니 온 유다 백성과 이스라엘 백성의 절반이나 왕을 호행[호위]하니라. 온 이스라엘 사람이 왕께 나아와서 고하되 우리 형제 유다 사람들이 어찌 왕을 도적하여 왕과 왕의 권속과 왕을 좇는 모든 사람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네었나이까 하매 유다 모든 사람이 이스라엘 사람에게 대답하되 왕은 우리의 지친(至親)[가까운 친척]인 까닭이라. 너희가 어찌 이 일에 대하여 분내느냐? 우리가 왕의 물건을 조금이라도 먹었느냐? 왕께서 우리에게 선물 주신 것이 있느냐? 이스라엘 사람이 유다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는 왕에 대하여 십분을 가졌으니 다윗에게 대하여 너희보다 더욱 관계가 있거늘 너희가 어찌 우리를 멸시하여 우리 왕을 모셔오는 일에 먼저 우리와 의논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나 유다 사람의 말이 이스라엘 사람의 말보다 더 강경하였더라.

왕이 길갈로 건너오고 김함도 함께 건너왔다. 온 유다 백성과 이스라엘 백성의 절반이나 왕을 호위하며 함께 왔다. 왕을 모시는 일에 유다 사람들의 말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말보다 더 강경하였다.


본장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다윗은 이스라엘 나라의 단합과 일치를 위해 요압을 처단하지 않았고 그의 조언을 받아들였고 자기를 저주했던 시므이를 죽이지 않았고 또 압살롬의 군장 아마사를 자기의 군장으로 삼겠다고 맹세로 약속했다. 오늘날 우리는 진리와 의를 어김이 아니라면 하나님의 교회의 단합과 일치를 위해 모든 겸손과 온유와 인내와 관용과 너그러움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에베소서 4:1-3,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둘째로, 므비보셋과 바르실래 등은 다윗의 고난에 동참했다. 므비보셋은 왕의 떠난 날부터 평안히 돌아오는 날까지 그 발을 맵시 내지 않았고 그 수염을 깎지 않았고 그 옷을 빨지 않았다. 바르실래는 다윗의 피신 기간에 다윗과 그와 함께한 자들을 위해 물질적으로 도왔다. 사도 바울은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말하였다(골 1:24). 우리는 주의 고난에 동참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20장: 세바의 반란

압살롬의 반란을 이제 막 제압했을 때 또 반란이 일어났다. 세상은 사람들의 불완전함과 마귀의 활동들이 많은 세상이다.

[1-2절] 마침 거기 난류(이쉬 벨리야알)[악한 사람] 하나가 있으니 베냐민 사람 비그리의 아들 세바라 하는 자라. 저가 나팔을 불며 가로되 우리는 다윗과 함께할 분의(分誼)[몫]가 없으며 이새의 아들과 함께 할 업(業)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각각 장막으로 돌아가라 하매 이에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 좇기를 그치고 올라가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좇으나 유다 사람들은 왕에게 합하여 요단에서 예루살렘까지 좇으니라.

압살롬을 제압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중에 세바의 반란이 있었다. 세바는 교만하고 악한 사람이었다. 잠언 17:11, “악한 자는 반역만 힘쓰나니.” 그는 바른 판단력을 가지지 못했다. 온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윗 좇기를 그치고 올라가 세바를 좇았으나, 유다 사람들은 왕에게 합하여 예루살렘까지 좇았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다인들과의 다툼으로 감정이 상했던 것 같다. 그들은 이성적으로 행하지 않았고 감정에 따라 행동한 것 같다. 사람들의 여론은 바람과 같다. 그것은 안정이 없다. 그것은 때때로 이성적이지 않고 매우 감정적이다.

[3절] 다윗이 예루살렘 본궁에 이르러 전에 머물러 궁을 지키게 한 후궁 열 명을 잡아 별실에 가두고 먹을 것만 주고 더불어 동침치 아니하니 저희가 죽는 날까지 갇혀서 생과부로 지내니라.

다윗은 궁을 지키게 했던 후궁 열 명을 별실에 가두고 먹을 것만 주고 더불어 동침치 않았다. 아무리 반역자인 왕의 명령이라도, 그들은 악한 일에 대해서 죽음으로 저항했어야 했다. 골육지친과의 동침은 그들이 범해서는 안될, 율법이 금한 큰 죄악이었다(레 18:6).

[4-7절] 왕이 아마사에게 이르되 너는 나를 위하여 3일 내로 유다 사람을 소집하고 너도 여기 있으라. 아마사가 유다 사람을 소집하러 가더니 왕의 정한 기한에 지체된지라. 다윗이 이에 아비새에게 이르되 이제 비그리의 아들 세바가 압살롬보다 우리를 더 해하리니 너는 네 주의 신복들을 거느리고 쫓아가라. 저가 견고한 성에 들어가서 우리들을 피할까 염려하노라 하매 요압을 좇는 자들과 그렛 사람들과 블렛 사람들과 모든 용사들이 다 아비새를 따라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쫓으려고 예루살렘에서 나와서.

아마사가 지체하자, 다윗 왕은 아비새를 보냈다. 아마사가 왜 지체했는지 알 수 없으나 그는 어떻게든 왕의 명령을 지켰어야 했다. 왕의 명령 불수행은 그에게 죽음이라는 예상치 못한 비극을 가져왔다.

[8-13절] 기브온 큰 바위 곁에 이르매 아마사가 맞으러 오니 때에 요압이 군복을 입고 띠를 띠고 집에 꽂은 칼을 허리에 매었는데 저가 행할 때에 칼이 빠져 떨어졌더라. 요압이 아마사에게 이르되 형은 평안하뇨 하며 오른손으로 아마사의 수염을 잡고 그 입을 맞추려는 체하매 아마사가 요압의 손에 있는 칼은 주의치 아니한지라. 요압이 칼로 그 배를 찌르매 그 창자가 땅에 흐르니 다시 치지 아니하여도 죽으니라. 요압과 그 동생 아비새가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쫓을새 요압의 소년 중 하나가 아마사의 곁에 서서 가로되 요압을 좋아하는 자와 다윗을 위하는 자는 요압을 따르라 할 때에 아마사가 길 가운데 피 속에 굴어졌는지라[뒹굴어졌는지라]. 그 소년이 모든 백성의 섰는 것을 보고 아마사를 큰길에서부터 밭으로 옮겼으나 거기 이르는 자도 다 멈추어 서는 것을 보고 옷을 그 위에 덮으니라. 아마사를 큰길에서 옮겨가매 사람들이 다 요압을 따라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쫓아가니라.

아마사가 요압의 손에 있는 칼을 주의하지 않은 순간적 부주의가 목숨을 잃는 일이 되었다. 한 나라의 군장의 목숨이 이렇게 허무하게 끊어졌다. 요압이 칼로 그를 찌른 것은 압살롬과 함께 반역하였다는 것에 대한 미움과 또 자기 대신 이스라엘의 군장으로 임명되었다는 것에 대한 시기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왕의 뜻을 거스른 무례하고 악한 일이었다. 그는 예전에 이스보셋의 장군 아브넬을 죽였었고(삼하 3:27) 이번에는 아들 압살롬과 군장 아마사를 죽였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단합을 전혀 고려치 않은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14-17절] 요압이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 두루 행하여 아벨과 벧마아가와 베림 온 땅에 이르니 그 무리도 다 모여 저를 따르더라. 이에 저희가 벧마아가 아벨로 가서 세바를 에우고 그 성읍을 향하여 해자[성밖으로 둘러 판 못] 언덕 위에 토성(土城)을 쌓고 요압과 함께한 모든 백성이 성벽을 쳐서 헐고자 하더니 그 성에서 지혜로운 여인 하나가 외쳐 가로되 들을지어다, 들을지어다, 청컨대 너희는 요압에게 이르기를 이리로 가까이 오라. 내가 네게 말하려 하노라 한다 하라. 요압이 그 여인에게 가까이 가니 여인이 가로되 당신이 요압이니이까? 대답하되 그러하다. 여인이 저에게 이르되 여종의 말을 들으소서. 대답하되 내가 들으리라.

세바의 반란과 그를 따르는 이스라엘 백성의 여론, 요압의 무례한 행동 등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다윗과 그의 나라를 선히 인도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세바를 제압하셨고 이스라엘의 여론을 잠잠케 하셨다. 그것은 한 지혜로운 여인을 통해 이루어졌다.

[18-22절] 여인이 말하여 가로되 옛 사람들이 흔히 말하기를 아벨에 가서 물을 것이라 하고 그 일을 끝내었나이다. 나는 이스라엘의 화평하고 충성된 자 중 하나이어늘 당신이 이스라엘 가운데 어미 같은 성을 멸하고자 하시는도다. 어찌하여 당신이 여호와의 기업을 삼키고자 하시나이까? 요압이 대답하여 가로되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다.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다. 삼키거나 멸하거나 하려 함이 아니니 그 일이 그러한 것이 아니니라. 에브라임 산지 사람 비그리의 아들 세바라 하는 자가 손을 들어 왕 다윗을 대적하였나니 너희가 저만 내어주면 내가 이 성읍에서 떠나가리라. 여인이 요압에게 이르되 저의 머리를 성벽에서 당신에게 내어 던지리이다 하고 이에 여인이 그 지혜로 모든 백성에게 말하매 저희가 비그리의 아들 세바의 머리를 베어 요압에게 던진지라. 이에 요압이 나팔을 불매 무리가 흩어져 성읍에서 물러나서 각기 장막으로 돌아가고 요압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왕에게 나아가니라.

그 지혜로운 여인은 반란자 세바를 제거하였고 아벨 성을 구원했다. 그뿐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의 반역적 여론을 잠재웠고 이스라엘의 분열을 막았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압살롬의 반역에 이어 닥친 추가적 환난을 그 지혜로운 여인을 통해 피하게 인도하셨다.

[23-26절] 요압은 이스라엘 온 군대의 장관이 되고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는 그렛 사람과 블렛 사람의 장관이 되고 아도니람은 감역관이 되고 아힐룻의 아들 여호사밧은 사관이 되고 스와는 서기관이 되고 사독과 아비아달은 제사장이 되고 야일 사람 이라는 다윗의 대신(大臣)이 되니라.

‘대신’이라는 원어(코헨)는 ‘제사장’이라는 뜻이지만, 때때로 ‘주요 관리’라는 뜻으로도 사용되었다(삼하 8:18; 20:26; 왕상 4:5).


다윗은 압살롬으로 인한 고통이 가시기도 전에 세바의 반란으로 인해 고통을 당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선히 수습케 하셨다.

본장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세바는 ‘난류’ 즉 ‘벨리알의 사람’ ‘악하고 무가치한 자’로 반역을 도모하였으나 그의 마지막은 목 베임을 당한 것이었다. 잠언 17:11은 “악한 자는 반역만 힘쓰나니 그러므로 그에게 잔인한 사자가 보냄을 입으리라”고 말한다. 우리는 세바와 같은 반역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집에서는 부모님을 공경하고 순종하고, 교회에서는 교역자들과 장로들을 존중하고 그들의 성경적 교훈과 인도에 순복하며, 사회에서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일꾼들인 위정자들을 존경하고 그들의 합법적 지도를 따라야 한다. 그것이 옳은 길이다.

둘째로, 사람들의 여론은 참고할 만하기는 하지만 때때로 바람같이 허무하다. 사람들은 때때로 선동을 당하기도 한다. 사람이 여론만 의지하면 아무 일도 하지 못한다. 그는 옛날 이야기에 당나귀를 이고 가는 어리석은 사람처럼 될 것이다. 요한복음 2:24, “예수[예수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우리는 여론을 너무 믿지 말아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복잡한 세상에서 압살롬의 반역이든지 세바의 반란이든지 그 무슨 일이든지 염려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믿고 바르게만 살아야 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고 국가의 흥망성쇠를 주장하시고 세계의 역사를 주장하시는 주권적 섭리자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어려운 일이나 두려운 일을 염려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믿고 그의 계명을 순종하며 바르게만 살아가야 한다.

 

21장: 3년 기근

[1-6절] 다윗의 시대에 연부년(年復年)[연이어 계속] 3년 기근이 있으므로 다윗이 여호와 앞에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는 사울과 피를 흘린 그 집을 인함이니 저가 기브온 사람을 죽였음이니라 하시니라. 기브온 사람은 이스라엘 족속이 아니요 아모리 사람 중에서 남은 자라. 이스라엘 족속들이 전에 저희에게 맹세하였거늘 사울이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위하여 열심이 있으므로 저희 죽이기를 꾀하였더라. 이에 왕이 기브온 사람을 불러 물으니라. 다윗이 저희에게 묻되 내가 너희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내가 어떻게 속죄하여야 너희가 여호와의 기업을 위하여 복을 빌겠느냐? 기브온 사람이 대답하되 사울과 그 집과 우리 사이의 일은 은금에 있지 아니하오나 이스라엘 가운데서 사람을 죽이는 일은 우리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 왕이 가로되 너희의 말하는 대로 시행하리라. 저희가 왕께 고하되 우리를 학살하였고 또 우리를 멸하여 이스라엘 경내에 머물지 못하게 하려고 모해(謀害)한 [그] 사람의 자손 일곱을 내어 주소서. 여호와의 빼신[택하신] 사울의 고을 기브아에서 우리가 저희를 여호와 앞에서 목매어 달겠나이다. 왕이 가로되 내가 내어 주리라 하니라.

다윗의 시대에 3년 동안 계속해서 매년 기근이 있었다. 이 기근은 그 원인을 생각할 때 다윗의 통치 초기에 있었던 것 같다. 이전 시대의 죄악에 대한 형벌이 때때로 후시대에 전달된다. 3년 동안 계속된 그 기근의 피해는 심각하였을 것이다. 그것은 온 백성의 생존의 문제이었다. 다윗은 그 심각한 국가적 재난을 당하여 여호와 앞에 간구하였다. 기도는 성도가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다. 기도 생활은 성도의 믿음에 비례한다. 믿음이 큰 사람은 하나님께 간절한 기도를 많이 드릴 것이지만, 믿음이 작은 사람은 약한 기도를 그것도 조금 드릴 것이며, 믿음이 없는 사람은 어려운 일을 당해도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할 줄 모를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믿음의 사람 다윗의 기도에 대해 응답하셨다. 그러나 그 응답은 그 기근 자체를 당장 거두시는 응답이 아니고, 그 기근의 원인을 알게 하시는 응답이었다. 그 기근의 원인은 사울이 이스라엘 백성이 기브온 사람들에 대해 하나님께 한 맹세를 어긴 죄악 때문이었다. 다윗은 기브온 사람들을 불러 물었고 그들의 요구대로 사울의 자손 일곱을 그들에게 내어주어 목매어 달게 하였다.

[7-9절] 그러나 다윗과 사울의 아들 요나단 사이에 서로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한 것이 있으므로 왕이 사울의 손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은 아끼고 이에 아야의 딸 리스바에게서 난 자 곧 사울의 두 아들 알모니와 므비보셋과 사울의 딸 메랍24)에게서 난 자 곧 므홀랏 사람 바실래의 아들 아드리엘의 다섯 아들을 잡고 저희를 기브온 사람의 손에 붙이니 기브온 사람이 저희를 산 위에서 여호와 앞에 목매어 달매 저희 일곱 사람이 함께 죽으니 죽은 때는 곡식 베는 처음 날 곧 보리 베기 시작하는 때더라.

다윗은, 어려운 일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공의를 세우는 일이므로 그 일을 즉시 시행하였다. 죄는 벌을 받아야 했다. 죄는 자기만 망케 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손도 망케 한다. 기브온 사람들은 사울의 자손들을 여호와 앞에 목매어 달았다. 그들은 한 날에 함께 죽었다.

[10-14절] 아야의 딸 리스바가 굵은 베를 가져다가 자기를 위하여 반석 위에 펴고 곡식 베기 시작할 때부터 하늘에서 비가 시체에 쏟아지기까지 그 시체에 낮에는 공중의 새가 앉지 못하게 하고 밤에는 들짐승이 범하지 못하게 한지라. 이에 아야의 딸 사울의 첩 리스바의 행한 일이 다윗에게 들리매 다윗이 가서 사울의 뼈와 그 아들 요나단의 뼈를 길르앗 야베스 사람에게서 취하니 이는 전에 블레셋 사람이 사울을 길보아에서 죽여 벳산 거리에 매어 단 것을 저희가 가만히 가져온 것이라. 다윗이 그 곳에서 사울의 뼈와 그 아들 요나단의 뼈를 가지고 올라오매 사람들이 그 달려 죽은 자들의 뼈를 거두어다가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의 뼈와 함께 베냐민 땅 셀라에서 그 아비 기스의 묘에 장사하되 모두 왕의 명대로 좇아 행하니라. 그 후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으시니라.

다윗은 길르앗 야베스에서 사울의 뼈와 그의 아들 요나단의 뼈를 가지고 올라오게 하였고 또 달려 죽은 그 일곱 아들들의 뼈를 거두어다가 함께 베냐민 땅 셀라에서 그 조상 기스의 묘에 장사하게 하였다. 그것은 사울 가정에 내려진 그 슬픈 징벌의 사건에 대해 다윗이 베풀 수 있었던 최선의 배려이었다. 그 후에야 하나님께서 그 땅을 위해 기도를 들으셨다. 막힌 기도의 문이 열렸고 기도 응답이 왔다. 죄는 기도 응답을 가로막는다. 그러나 죄를 회개하고 청산할 때 기도의 문이 열리며 기도의 응답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15-22절] 블레셋 사람이 다시 이스라엘을 치거늘 다윗이 그 신복들과 함께 내려가서 블레셋 사람과 싸우더니 다윗이 피곤하매 장대한 자의 아들 중에 삼백 세겔 중 되는 놋창을 들고 새 칼을 찬 이스비브놉이 다윗을 죽이려 하므로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다윗을 도와 그 블레셋 사람을 쳐죽이니 다윗의 종자들이 다윗에게 맹세하여 가로되 왕은 다시 우리와 함께 전장(戰場)에 나가지 마옵소서. 이스라엘의 등불이 꺼지지 말게 하옵소서 하니라. 그 후에 다시 블레셋 사람과 곱에서 전쟁할 때에 후사 사람 십브개가 장대한 자의 아들 중에 삽을 쳐죽였고 또다시 블레셋 사람과 곱에서 전쟁할 때에 베들레헴 사람 야레오르김의 아들 엘하난이 가드 골리앗의 아우 라흐미를 죽였는데 그 자의 창 자루는 베틀채[베틀 장대] 같았더라. 또 가드에서 전쟁할 때에 그 곳에 키 큰 자 하나는 매 손과 매 발에 가락이 여섯씩 모두 스물 네 가락이 있는데 저도 장대한 자의 소생이라. 저가 이스라엘 사람을 능욕하므로 다윗의 형 삼마의 아들 요나단이 저를 죽이니라. 이 네 사람 가드의 장대한 자의 소생이 다윗의 손과 그 신복의 손에 다 죽었더라.

3년 기근이 해결된 후 연거푸 네 번의 전쟁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다 승리케 하셨다. 다윗의 신하들은 다윗에게 “왕은 이스라엘의 등불을 끄지 마옵소서”(원문)라고 말했다. ‘등불’이라는 말은 ‘기쁨, 행복’을 상징한다(BDB). 왕의 생존과 건강은 백성의 기쁨과 행복과 평안이다. 가드의 장수들은 다윗의 부하들의 손에 다 죽었다.


본장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사울의 죄는 다윗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의 평안을 빼앗아갔다. 그들은 혹독한 기근을 경험해야 하였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 기근을 거두어주시기를 간구했지만, 그 기도는 응답되지 않았다. 한 해만이 아니고 두 해, 세 해나 그 재난은 계속되었다. 이사야 59:1-2,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예레미야 5:25, “너희 허물이 이러한 일들을 물리쳤고 너희 죄가 너희에게 오는 좋은 것을 막았느니라.” 죄는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복을 가로막고 우리의 기도의 응답을 가로막는다. 죄가 재앙의 원인이다.

둘째로, 믿음의 사람 다윗이라도, 국가적 재난인 3년 기근을 해결하고 경제적 사회적 안정과 평안을 회복하려면, 먼저 죄를 청산하여야 했다. 14절, “그 후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으시니라.” 죄의 청산이 중요했다. 죄를 청산하기 전에는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수 없었고 기도의 응답도 주지 않으셨다. 그러나 죄가 청산되었을 때, 그들은 기도의 응답을 얻었고 또 그 결과로 평안의 복을 얻을 수 있었다. 기도 응답을 받고 복을 얻으려면 우리는 먼저 죄를 청산해야 한다.

셋째로, 다윗과 그 백성은 3년간 계속된 기근을 당하고서야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았던 것 같고 그 재난의 고통이 심해진 후에야 진지하게 하나님 앞에 엎드렸던 것 같다. 그들은 한 해 기근이 들었을 때는 그것을 하나님께서 내리신 재난이라고 심각하게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내년에는 기근이 없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힘든 한 해를 지났을지 모른다. 그러나 다음해에도 기근이 있었고, 또 그 다음해에도 있었다. 기근은 3년간 계속되었다. 그제서야 그들은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우리는 우리의 현실 상황을 민감하게 인식하고 그 원인을 빠르게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죄는 빨리 깨닫고 빨리 청산할수록 좋다.

 

 

22장: 다윗의 시

1-20절, 하나님께서는 나의 반석이심

[1-3절] 여호와께서 다윗을 모든 대적의 손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그 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씀으로 여호와께 아뢰어 가로되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높은 망대시요 나의 피란처시요 나의 구원자시라. 나를 흉악[강포](MT, KJV, NASB)에서 구원하셨도다.

본장은 시편 18편의 내용이다. 여호와께서 다윗을 모든 대적의 손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날에 다윗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아뢰었다. 다윗은 하나님을 ‘나의 반석’과 ‘나의 요새’라고 말하였다. ‘반석’은 낮에 뙤약볕이나 폭우를 피할 수 있고 밤에 추위를 피할 수 있는 곳, 곧 세상에서 당하는 환난을 피하는 피신처를 말한다. ‘요새’는 적의 침략을 막을 수 있는 성, 곧 옛날 북한산성, 남한산성 같은 산성이나 오늘날에 군대의 전쟁지휘소인 지하벙커 같은 것을 말한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반석, 우리의 요새, 우리를 건지시는 자이시다.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라는 원문은 “내가 피할 나의 바위이신 하나님이시요”라고 번역할 수 있다(MT, KJV). 다윗은 또 하나님을 ‘나의 방패, 나의 구원의 뿔, 나의 높은 망대, 나의 피란처, 나의 구원자’라고 말하였다. ‘구원의 뿔’은 ‘구원의 힘’ 곧 능력 있는 구원자라는 뜻이다. ‘높은 망대’는 적의 침공으로부터 안전한 곳이다. 다윗은 또 하나님께서 우리를 강포에서 구원하시는 자이시라고 말하였다. ‘강포’는 악한 자들의 강포함 혹은 난폭한 자들을 가리킬 것이다. 이 세상에는 강포하고 난폭한 자들이 많이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모든 강포한 자들과 그 모든 강포에서 우리를 건져주신다.

[4-7절] 내가 찬송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사망의 물결이 나를 에우고 불의(벨리야알)[무가치한 자, 불경건한 자(KJV), 멸망(NASB, NIV)]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음부[무덤]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아뢰었더니 저가 그 전(殿)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나의 부르짖음이 그 귀에 들렸도다.

다윗은 과거의 경험이 미래의 구원을 확신하게 만듦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찬송받으실 여호와이시다. 왜냐하면 그는 온 세상을 홀로 창조하셨고 홀로 섭리하시며 자기 백성을 죄와 사망과 원수들에게서 건지시는 자이시기 때문이다. 다윗은 또 사망의 물결이 그를 에우고 멸망의 창수가 그를 두렵게 했으며 무덤의 줄이 그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그에게 이르렀다고 말하였다. 다윗에게 닥친 환난은 죽음과 멸망으로 이끄는 환난이었다.

그러나 다윗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그의 들으심을 체험하였다. 그것이 성도의 체험이며 특권이다. 세상에는 많은 환난이 있지만,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계시고 그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시다. ‘그 전(殿)’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전 곧 하늘 처소인 천국과 땅의 처소인 성막을 가리킬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계신 천국과 땅의 성전에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

[8-9절] 이에 땅이 진동하고 떨며 하늘 기초가 요동하고 흔들렸으니 그의 진노를 인함이로다. 그[그의] 코에서 연기가 오르고 [그의] 입에서 불이 나와 사름이여, 그 불에 숯이 피었도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셔서 원수들에게 진노하셨음을 증거한다. 본문은 천둥과 번개와 지진 등을 묘사했다고 보인다. ‘그의 코’ 또는 ‘그의 입’은 신인동형적(神人同形的) 표현, 즉 하나님께서 사람의 모양을 가지신 것처럼 비유적으로 묘사하는 것이다.

[10-13절] 저가 또 하늘을 드리우고 강림하시니[구부리고] 그 발 아래는 어둑캄캄하도다. 그룹을 타고 날으심이여, 바람 날개 위에 나타나셨도다. 저가 흑암 곧 모인 물과 공중의 빽빽한 구름으로 둘린 장막을 삼으심이여, 그 앞에 있는 광채로 인하여 숯불이 피었도다.

‘저가 하늘을 구부리고 강림하신다’는 표현도 비유적인 표현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땅에 내려오시고 빽빽하고 어두운 비구름과 바람과 번개를 사용하여 그의 진노를 원수들에게 발하신다.

[14-16절]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뇌성을 발하시며 지존하신 자가 음성을 내심이여, 살을 날려 저희를 흩으시며 번개로 파하셨도다. 이럴 때에 여호와의 꾸지람과 콧김을 인하여 물밑이 드러나고 땅의 기초가 나타났도다.

다윗은 또 하늘의 천둥 뇌성과 번개와 바람을 하나님의 음성, 그의 꾸지람과 콧김이라고 표현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연현상들을 일으시키고 그것들을 자유로이 사용하신다. 그것들은 사람들에게 여전히 두려운 일이며 확실히 사람의 능력을 초월한 하나님의 손길이다.

[17-20절] 저가 위에서 보내사 나를 취하심이여, 많은 물에서 나를 건져내셨도다. 나를 강한 원수와 미워하는 자에게서 건지셨음이여, [이는] 저희는 나보다 힘센 연고로다. 저희가 나의 재앙의 날에 내게 이르렀으나 여호와께서 나의 의지가 되셨도다. 나를 또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고 나를 기뻐하시므로 구원하셨도다.

‘많은 물’은 그가 직면한 큰 환난을 가리킨다. ‘위에서 보내사’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보내셨다는 뜻이라고 본다. 다윗이 사면으로 피하기 어려운 곤란을 당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천사들을 동원하셔서 그를 건져주셨다. 그를 미워하는 원수들은 그보다 힘이 강하였지만,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비상한 방법으로 그를 도우셨다. 다윗은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였고 하나님께 기도하였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건져주셔서 그를 넓은 곳, 곧 평안하고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셨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하신 까닭이 “그가 나를 기뻐하셨기 때문이라”고 고백하였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세상에는 많은 환난이 있고 악한 자들로 인한 강포한 일들이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반석과 요새, 우리의 방패와 높은 망대, 우리의 피난처와 구원자가 되신다. 우리는 참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그는 영원 전부터 스스로 계신 여호와 하나님, 살아계신 참 하나님이시며 온 세상의 창조주와 섭리자이시며 지혜와 능력이 무한하시다. 그 하나님을 아는 것이 참된 지혜요 지식이다. 또 그는 선하심과 긍휼과 자비도 무한히 많으시다. 특히 그는 그의 명령을 거역하고 멸망하는 인류 가운데 일부를 그의 자비와 긍휼로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 대속 사역을 이루심으로 그들을 죄와 지옥 형벌로부터 구원하셨다. 또 그는 구원 얻은 백성이 세상에 사는 동안, 영육의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주신다. 우리는 살아계시고 참되신 그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세상에 사는 동안 당하는 환난 중에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기도는 하나님을 알고 믿는 자들의 특권이다. 우리가 환난 중에 기도하면 그는 하늘에 계신 성전에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면 그는 우리를 우리의 원수들에게서 구원해주실 것이다. 비록 우리를 미워하는 원수들이 우리보다 힘이 셀지라도, 살아계신 전능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켜주시고 건져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환난 중에 오직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하나님만 소망하며 하나님 앞에서 그의 계명대로 바르게만 살아가야 한다. 첫 사람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김으로써 낙원에서 쫓겨났었다. 죄는 죽음과 불행의 원인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우리 자신과 세상의 불행의 근본 원인을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왔으므로 우리는 다시는 세상의 헛된 것들, 곧 돈과 육신의 쾌락과 몸의 죄성을 따라 살지 말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나라인 천국을 소망하며 하나님의 계명 곧 성경에 계시된 진리와 교훈에 순종하며 의롭고 선하게 살아야 한다.

 

21-51절, 내 의를 따라 상 주심

[21-25절]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상 주시며 내 손의 깨끗함을 좇아 갚으셨으니 이는 내가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악을 행하여 내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그 모든 규례를 내 앞에 두고 그 율례를 버리지 아니하였음이로다. 내가 또 그 앞에 완전하여 스스로 지켜 죄악을 피하였나니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내 의(義)대로, 그 목전에 내 깨끗한 대로 내게 갚으셨도다.

다윗은 하나님의 공의의 보응에 대해 말한다. ‘의’(義)는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하여 율법대로 행한 것을 가리킨다. ‘손의 깨끗함’은 손으로 악을 행치 않았음을 말한다.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의 도를 지키고 그 모든 규례를 늘 기억하여 버리지 않고 지켰다고 말한다. 또 ‘완전하다’는 말은 흠이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그것은 자신의 의지로 악을 행치 않는 인격적 성숙함을 말한다. 성도의 율법 순종과 인격적 성숙함은 담대함을 얻게 하고 하나님의 기도 응답을 가져온다. 사도 요한은,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으리라”고 말하였다(요일 3:21).

[26-28절]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특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리심[거스르심]을 보이시리이다.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자를 살피사 낮추시리이다.

다윗은 자신이 체험한 대로 하나님의 공의의 보응에 대해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자비한 자에게는 그의 자비를 보이시며, 흠 없는 자에게는 그의 온전하신 능력과 응답을 주시며, 깨끗한 자에게는 그의 의로우심을 보이신다. 그러나 사특한 자 곧 하나님의 교훈을 거스르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노와 분을 나타내신다. 하나님께서는 고난받는 성도들을 구원하시고 교만한 자들을 살피시고 낮추신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공의로운 보응을 내리신다.

[29-32절] 여호와여, 주는 나의 등불이시니 여호와께서 나의 흑암을 밝히시리이다.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에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벽을 뛰어넘나이다.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정미(精美)하니[제련되었으니, 흠이 없으니] 저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에게 방패시로다. 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바위뇨?

다윗이 하나님을 ‘나의 등불’이라고 표현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지식과 의, 그의 기쁨과 행복이 되심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야 할 의(義)의 길을 밝히 보이시고 우리에게 기쁨과 행복이 되신다. 다윗은 하나님 때문에 무지와 죄, 슬픔과 불행을 극복할 수 있었다. 그의 힘과 용기도 하나님을 의뢰함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의뢰하며 적군에 달렸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벽을 뛰어넘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하고 제련된 광석같이 깨끗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믿고 지킬 만한 거룩한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에게 피하는 자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을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방패 되심을 체험할 것이다.

[33-37절] 하나님은 나의 견고한 요새시며 나를 온전한 곳으로 인도하시며[나의 길을 온전케 하시며] 나의 발로 암사슴 발 같게 하시며 나를 나의 높은 곳에 세우시며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니 내 팔이 놋활을 당기도다. 주께서 또 주의 구원의 방패를 내게 주시며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 내 걸음을 넓게 하셨고 나로 실족지 않게 하셨나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견고한 요새와 같으시다. 하나님 안에 거하는 자는 안전하다. 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길을 온전케 하신다. 또 그는 우리의 발을 암사슴 발같이 힘있게 하시고 활기 있게 하신다. 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전쟁의 기술도 가르쳐 주셔서 잘 싸우게 도우신다. 그는 우리의 가장 훌륭한 훈련 교관이시다. 또 그는 그의 구원의 방패를 주셔서 원수들의 공격을 잘 막게도 하신다. 또 그는 우리를 도우셔서 우리의 걸음이 실족하지 않게 하신다.

[38-43절] 내가 내 원수를 따라 멸하였사오며 저희를 무찌르기 전에는 돌이키지 아니하였나이다. 내가 저희를 무찔러 파하였더니 저희가 내 발 아래 엎드러지고 능히 일어나지 못하였나이다. 이는 주께서 나로 전쟁케 하려고 능력으로 내게 띠 띠우사 일어나 나를 치는 자로 내게 굴복케 하셨사오며 주께서 또 내 원수들로 등을 내게로 향하게 하시고 나로 나를 미워하는 자를 끊어버리게 하셨음이니이다. 저희가 둘러보아도 구원할 자가 없었고 여호와께 부르짖어도 대답지 아니하셨나이다. 내가 저희를 땅의 티끌같이 부스러뜨리고 거리의 진흙같이 밟아 헤쳤나이다.

다윗은 그의 원수들을 다 무찔렀다. 그는 그들을 다 굴복시켰고 그들을 땅의 티끌같이 부스러뜨렸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시고 도우시므로 가능하였던 일이었다. 다윗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체험하였고 확신했다.

[44-46절] 주께서 또 나를 내 백성의 다툼에서 건지시고 나를 보존하사 열방의 으뜸을 삼으셨으니 내가 알지 못하는 백성이 나를 섬기리이다. 이방인들이 내게 굴복함이여 저희가 내 풍성(風聲)을 듣고 곧 순복하리로다. 이방인들이 쇠미(衰微)하여 그 견고한 곳에서 떨며 나오리로다.

다윗의 왕정 생활은 외부의 원수들만 있지 않았고 백성들의 다툼과 소요도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까지도 도우셨다. 그는 그를 백성의 다툼에서 건지셨고 그를 보존하셨다. 또 하나님께서는 그를 이방 나라들 위에 높이셨고 이방인들이 그 앞에 굴복하고 그에게 떨며 나오게 하셨다. 한 국가의 평안도, 대외 관계도 다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다스리시는 섭리자이시다.

[47-51절] 여호와는 생존하시니 나의 바위를 찬송하며 내 구원의 바위이신 하나님을 높일지로다. 이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보수(報)하시고 민족들로 내게 복종케 하시며 나를 원수들에게서 나오게 하시며 나를 대적하는 자 위에 나를 드시고 나를 강포한 자에게서 건지시는도다. 이러므로 여호와여,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리이다. 여호와께서 그 왕에게 큰 구원을 주시며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인자(仁慈)를 베푸심이여, 영원토록 다윗과 그 후손에게로다 하였더라.

여호와께서는 살아계신 참 하나님이시다. 그는 다윗의 원수들에게 공의로 보복하셨고 그들을 그 앞에 굴복케 하셨고 또 이방 나라들도 그에게 복종케 하셨다. 다윗의 왕정 생활은 국내외적으로 어려움이 없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와 함께하셨고 그를 도우셨다. 그의 승리적 생애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을 찬송하며 그에게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다윗은 많은 원수들을 만났지만 두려워하지 않았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의롭고 깨끗하고 완전하게 살고자 애썼다. 하나님께서는 공의의 보응자이시다. 우리의 원수는 우리를 해치는 악한 사람들뿐 아니고 죄와 죽음과 마귀와 악령들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만 유지한다면, 그 어떤 원수도 문제될 것이 없다. 사람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이는 주권적 섭리자 하나님이시다. 그는 우리의 원수들을 다 물리치실 수 있고 물리쳐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만 의지하고 바르게만 살아야 한다.

둘째로, 다윗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힘으로 원수들과 싸웠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방패와 요새가 되셨으며 그의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는 가장 뛰어난 훈련 교관이 되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 진리의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믿음의 방패와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엡 6:10-18).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힘으로 강한 전사들처럼 원수들과 싸우며 어려운 문제들을 다 이길 수 있다.

셋째로, 다윗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찬송하였다. 우리의 모든 복과 모든 힘과 그 성취는 다 하나님의 은혜이다. 우리의 우리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고전 15:10). 창조자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시며 현재도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섭리자이시며 우리를 죄와 죽음과 지옥 형벌에서 구원하셨고 날마다 우리를 돌보시고 도와주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살아계신 섭리자 하나님만 찬송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려야 한다.

 

 

23장: 다윗의 마지막 말, 다윗의 용사들

[1-7절] 이는 다윗의 마지막 말이라. 이새의 아들 다윗이 말함이여, 높이 올리운 자, 야곱의 하나님에게 기름 부음 받은 자,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 자가 말하도다. 여호와의 신이 나를 빙자하여 말씀하심이여, 그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의 바위가 내게 이르시기를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 저는 돋는 해 아침 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고 비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으니라 하시도다. 내 집이 하나님 앞에 이 같지 아니하냐?[비록 내 집이 하나님 앞에 이 같지 아니할지라도](KJV, BDB) 하나님이 나로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세우사 만사에 구비하고 견고케 하셨으니 나의 모든 구원과 나의 모든 소원을 어찌 이루지 아니하시랴? 그러나 사악한 자는 다 내어버리울 가시나무 같으니 이는 손으로 잡을 수 없음이로다. 그것들을 만지는 자는 철과 창자루를 가져야 하리니 그것들이 당장에(바솨벳)[그 곳에서](KJV, NASB) 불사르이리로다 하니라.

본문은 다윗의 마지막 말이다. 이새의 아들 다윗은 ‘높이 올리운 자,’ ‘야곱의 하나님에게 기름 부음 받은 자,’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 자’이었다. 그는 비천한 가문에서 태어났고(삼상 18:23) 아버지의 양을 치던 자이었으나(삼상 16:11) 이스라엘의 왕으로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았고 높이 올리웠고 본래 구변과 음악의 재능이 있었고(삼상 16:18) 성령의 감동으로 많은 시를 지었다.

다윗은 여호와의 영의 감동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온 우주의 가장 높으신 통치자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의 계명과 법도대로 공의롭게 사람들을 다스리는 왕은 참된 왕이다. 그런 왕에게는 돋는 해와 아침 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은 맑고 밝은 은혜, 곧 슬픔과 불행이 없는, 영광스러운 복이 준비되어 있고, 또 비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은 생명감 넘치는 은혜가 예비되어 있다. 다윗은 비록 완전하지는 못했을지라도 그 중심이 하나님을 향했고 하나님께서는 그와 영원한 언약을 맺으셨고 그에게 모든 좋은 것을 약속하시며 보장하셨다. 그러므로 다윗은 그의 모든 구원 곧 죄악된 일들과 여러 가지 환난과 죽음으로부터의 구원과 그의 모든 소원을 다 이루게 될 것을 확신하고 기대했다. 또 그는 악한 자들이 내어버림을 받고 가시나무같이 불태워질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8-12절] 다윗의 용사들의 이름이 이러하니라. 다그몬 사람 요셉밧세벳이라고도 하고 에센 사람 아디노라고도 하는 자는 군장의 두목이라. 저가 한 때에[한번에](KJV, NASB) 8백인을 쳐죽였더라. 그 다음은 아호아 사람 도대의 아들 엘르아살이니 다윗과 함께한 세 용사 중에 하나이라. 블레셋 사람이 싸우려고 모이매 이스라엘 사람들이 물러간지라. 세 용사가 싸움을 돋우고 저가 나가서 손이 피곤하여 칼에 붙기까지 블레셋 사람을 치니라. 그 날에 여호와께서 크게 이기게 하셨으므로 백성들은 돌아와서 저의 뒤를 따라가며 노략할 뿐이었더라. 그 다음은 하랄 사람 아게의 아들 삼마라. 블레셋 사람이 떼를 지어 녹두나무가 가득한 밭에 모이매 백성들은 블레셋 사람 앞에서 도망하되 저는 그 밭 가운데 서서 막아 블레셋 사람을 친지라. 여호와께서 큰 구원을 이루시니라.

8-39절까지는 다윗의 용사들 37명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다윗과 다윗 왕국 곧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운 충성된 용사들이었다. 그들은 다윗에게 힘과 위로가 되었다. 8-12절에는 우선 그 용사들 중 대표적인 세 명의 이름과 그들의 용맹한 업적이 기록되어 있다.

첫 번째 인물은 요셉밧세벳 혹은 아디노라는 자이다. 그는 군장의 두목인데, 한 때에 800인을 쳐죽였다. 역대상 11:11에는 그의 이름이 ‘야소브암’이며 한때에 300인을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본절에 800인은 아마 여러 번 죽인 수를 합한 것일 것이다(델리취).

두 번째 인물은 엘르아살이다. 그도 세 용사 중 하나이다.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려고 모였으나 이스라엘 사람들이 물러갔을 때, 그 세 용사는 싸움을 돋우었고 그는 나가서 손이 피곤하여 칼에 붙기까지 블레셋 사람들을 쳤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크게 이기게 하셨으므로 사방으로 물러갔던 백성들은 돌아와 그의 뒤를 따라가며 노략할 뿐이었다. 엘르아살의 업적은 하나님의 도우신 은혜이었다.

세 번째 인물은 삼마이다. 블레셋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녹두나무가 가득한 밭에 모였고 이스라엘 백성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도망쳤을 때, 삼마는 그 밭 가운데 서서 막아 블레셋 사람들을 쳤다. 여호와께서는 큰 구원을 이루셨다. 그의 큰 업적도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13-17절] 또 삼십 두목 중 세 사람이 곡식 벨 때에 아둘람 굴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아갔는데 때에 블레셋 사람의 떼가 르바임 골짜기에 진쳤더라. 그때에 다윗은 산성에 있고 블레셋 사람의 영채는 베들레헴에 있는지라. 다윗이 사모하여 가로되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누가 나로 마시게 할꼬 하매 세 용사가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충돌하고 지나가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길어 가지고 다윗에게로 왔으나 다윗이 마시기를 기뻐 아니하고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드리며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이는 생명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갔던 사람들의 피니이다 하고 마시기를 즐겨 아니하니라. 세 용사가 이런 일을 행하였더라.

그 다음의 세 명의 용사들은 다윗을 위해 목숨의 위험을 무릅쓰고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충돌하고 지나가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길어 가지고 다윗에게로 왔다. 그것은 무모하게 보일 정도로 용감하고 충성된 행동이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며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드렸고 그것을 마시기를 즐거워하지 않았다.

[18-23절] 또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아우[아마 ‘형’](대상 2:16) 아비새니 저는 그 3인의 두목이라. 저가 창을 들어 3백인을 죽이고 그 삼인 중에 이름을 얻었으니 저는 3인 중에 가장 존귀한 자가 아니냐? 저가 저희의 두목이 되었으나 그러나 첫 3인에게는 미치지 못하였더라. 또 갑스엘 용사의 손자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니 저는 효용한 일을 행한 자라. 일찌기[일찍이] 모압 아리엘의 아들[혹은 ‘사자 같은 사람들’(KJV)] 둘을 죽였고 또 눈 올 때에 함정에 내려가서 한 사자를 죽였으며 또 장대한 애굽 사람을 죽였는데 그의 손에 창이 있어도 저가 막대를 가지고 내려가서 그 애굽 사람의 손에서 창을 빼앗아 그 창으로 죽였더라.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가 이런 일을 행하였으므로 세 용사 중에 이름을 얻고 30인보다 존귀하나 그러나 첫 3인에게는 미치지 못하였더라. 다윗이 저를 세워 시위대 장관을 삼았더라.

그 다음의 세 용사의 우두머리는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아우[아마, 형] 아비새이다. 또 한 사람은 갑스엘 용사의 손자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이다. 다윗은 그를 세워 시위대 장관을 삼았다. 그 다음에, 본문에 빠진 한 사람이 있다. 두 번째 3인 중, 아비새와 브나야 외에 나머지 한 명은 누구인가? 그는 아마 요압일 것이다. 그래야 모두 37명이 된다(39절). 요압은 말년에 다윗을 거역하였기 때문에(삼하 18:14; 20:10; 왕상 1:7) 그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다윗의 통치 기간에 그는 분명히 중요한 용사들 중 한 명이었다.

[24-39절] 요압의 아우 아사헬은 30인 중에 하나요 또 베들레헴 도도의 아들 엘하난과 하롯 사람 삼훗과 하롯 사람 엘리가와 발디 사람 헬레스와 드고아 사람 익게스의 아들 이라와 아나돗 사람 아비에셀과 후사 사람 므분내와 아호아 사람 살몬과 느도바 사람 마하래와 느도바 사람 바아나의 아들 헬렙과 베냐민 자손에 속한 기브아 사람 리배의 아들 잇대와 비라돈 사람 브나야와 가아스 시냇가에 사는 힛대와 아르바 사람 아비알본과 바르훔 사람 아스마웻과 사알본 사람 엘리아바와 야센의 아들 요나단과 하랄 사람 삼마와 아랄 사람 사랄의 아들 아히암과 마아가 사람의 손자 아하스배의 아들 엘리벨렛과 길로 사람 아히도벨의 아들 엘리암과 갈멜 사람 헤스래와 아랍 사람 바아래와 소바 나단의 아들 이갈과 갓 사람 바니와 암몬 사람 셀렉과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병기 잡은 자 브에롯 사람 나하래와 이델 사람 이라와 이델 사람 가렙과 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도합이 37인이었더라.

24-39절은 그 나머지 31명의 용사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처음 여섯 명과 더불어, 다윗의 용사들은 모두 37인이었다. 맨 마지막에는 다윗에 의해 고의로 죽임을 당했던 헷 사람 우리아도 들어 있다.


본장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만왕의 왕이시며 온 세계 교회의 주님이며 머리이시다. 그는 의로 세상을 다스리신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영원한 언약을 맺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거하며 감사해야 한다. 골로새서 2:6-7,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우리는 그의 말씀 안에 거하며 그를 믿고 충성해야 한다.

둘째로, 다윗에게는 용감하고 충성된 37명의 용사들이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윗보다 크신 만왕의 왕이시다. 그는 열두 제자들과 바울을 사도로 세우셨고, 그 후에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목사들과 장로들과 많은 봉사자들을 세우셨다. 그는 주의 제자된 우리 모두에게 용감하고 충성된 삶을 교훈하신다. 누가복음 14:26-27,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디모데후서 2:3,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라.”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가 되어 그를 위해 죽도록 충성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봉사해야 한다. 다윗의 용사들 중에 대표적으로 엘르아살과 삼마가 하나님의 은혜로 큰 승리의 업적을 이루었듯이, 하나님의 교회의 일꾼들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일한다. 바울은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 고백하였다(고전 15:10). 그것이 바른 고백이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했다(벧전 4:11).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도우심으로 주를 섬기며 충성해야 한다.

 

 

24장: 인구조사의 죄

본장은 다윗이 인구조사를 한 죄와 하나님의 징벌을 기록한다. 이 사건은 다윗의 생애에 기록될 만한 두 가지의 큰 실수 중 하나이다.

[1절]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저희를 치시려고 다윗을 감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

다윗의 인구조사의 실수는 하나님의 진노에서 비롯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진노하셨기 때문에 다윗의 실수와 범죄를 허락하셨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진노하신 까닭은 그들이 압살롬의 반역과 세바의 반란 때에 그들을 따랐기 때문일 것이다(삼하 15:12; 20:2). 반역자들을 따르는 일은 하나님께서 진노하실 큰 죄악이다. 역대상 21:1은 같은 사건을 기록하면서 “사단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고 말한다. 그 구절의 ‘격동하다’는 원어와 본절의 ‘감동시키다’는 원어는 동일하다(수스). 사탄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안에서 활동할 수 있을 뿐이다. 다윗이 백성의 인구조사를 한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뻐하는 대신에 군인들의 수와 군대의 세력을 의지하고 자랑하려는 교만의 죄악이라고 보인다. 하나님께서 버려두시면 경건한 다윗이라 할지라도 사탄의 시험에 떨어져 큰 죄를 지었다.

[2-9절] 왕이 이에 그 곁에 있는 군대 장관 요압에게 이르되 너는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로 다니며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인구를 조사하여 그 도수(都數)[백성의 수]를 내게 알게 하라. 요압이 왕께 고하되 이 백성은 얼마든지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백 배나 더하게 하사 내 주 왕의 눈으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그런데 내 주 왕은 어찌하여 이런 일을 기뻐하시나이까 하되 왕의 명령이 요압과 군대장관들을 재촉한지라. 요압과 장관들이 이스라엘 인구를 조사하려고 왕의 앞에서 물러나서 요단을 건너 갓 골짜기 가운데 성읍 아로엘 우편 곧 야셀 맞은편에 이르러 장막을 치고 길르앗에 이르고 닷딤홋시 땅에 이르고 또 다냐안에 이르러서는 시돈으로 돌아서 두로 견고한 성에 이르고 히위 사람과 가나안 사람의 모든 성읍에 이르고 유다 남편으로 나와서 브엘세바에 이르니라. 저희 무리가 국중(國中)을 두루 돌아 아홉 달 스무 날 만에 예루살렘에 이르러 요압이 인구 도수(都數)[백성의 수]를 왕께 고하니 곧 이스라엘에서 칼을 빼는 담대한 자가 80만이요 유다 사람이 50만이었더라.

역대상 21:5에는 “이스라엘 중에 칼을 뺄 만한 자가 110만명이요 유다 중에 칼을 뺄 만한 자가 47만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유다 사람 50만명은 47만명에 대한 어림수일 것이다. 사무엘하와 역대상 21장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숫자의 차이는 본문에 ‘담대한 자’라는 말(카일)에 있다고 본다. 20세 이상의 남자들의 수효는 110만명이지만, 그 중 용감한 자들의 수가 80만명이라는 뜻일 것이다.

[10-13절] 다윗이 인구수를 조사한 후에 그 마음에 자책하고 여호와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 다윗이 아침에 일어날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다윗의 선견자된 선지자 갓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가서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네게 세 가지를 보이노니 너는 그 중에서 하나를 택하라. 내가 그것을 네게 행하리라 하셨다 하라. 갓이 다윗에게 이르러 고하여 가로되 왕의 땅에 7년 기근이 있을 것이니이까? 혹시 왕이 왕의 대적에게 쫓겨 석 달을 그 앞에서 도망하실 것이니이까? 혹시 왕의 땅에 3일 동안 온역[무서운 전염병]이 있을 것이니이까? 왕은 생각하여 보고 나를 보내신 이에게 대답하게 하소서.

다윗은 잘못 생각하여 인구를 조사하는 실수를 했지만, 곧 깨닫고 돌이켰다. 우리는 미련한 자이어서 실수하고 범죄할 수 있지만, 그 죄를 깨닫는 즉시 돌이켜야 한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다윗의 선견자인 갓을 통해 7년 기근,25) 3달 피난, 3일 무서운 전염병의 세 가지 중 하나를 택하라고 말씀하셨다. 그 셋은 다 무서운 재앙들이었다.

다윗이 하나님께 회개했는데, 왜 하나님의 징벌이 선언되었는가? 사람이 죄를 회개해도 벌을 받는가? 또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 이전의 구약사건이니까 그러한가? 우리는 ‘벌’이라는 말을 분명히 정의할 필요가 있다. 만일 벌이 죄에 대한 정확한 대가를 의미한다면, 죄의 벌은 죽음과 지옥에 던지움이며 죄인이 회개하면 이런 벌은 없다. 그러나 만일 벌이 이런 엄격한 진노의 형벌 말고 훈련을 위한 징계와 매도 포함한다면, 죄를 회개해도 이런 벌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 가운데 성도에게 주어진다. 이것은 사랑의 징계와 훈련이다. 이러한 징계는 신약성경 히브리서 12장에 증거된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받은 신약 성도들에게도 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들도 죄 짓는 일을 두려워하고 멀리해야 한다. 우리가 죄를 짓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것이다.

[14-17절] 다윗이 갓에게 이르되 내가 곤경에 있도다.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크시니 우리가 여호와의 손에 빠지고 내가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않기를 원하노라. 이에 여호와께서 그 아침부터 정하신 때까지 온역[무서운 전염병]을 이스라엘에게 내리시니 단부터 브엘세바까지 백성의 죽은 자가 7만인이라. 천사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그 손을 들어 멸하려 하더니 여호와께서 이 재앙 내림을 뉘우치사 백성을 멸하는 천사에게 이르시되 족하다. 이제는 네 손을 거두라 하시니 때에 여호와의 사자가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 곁에 있는지라. 다윗이 백성을 치는 천사를 보고 곧 여호와께 아뢰어 가로되 나는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삽거니와 이 양 무리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청컨대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비의 집을 치소서 하니라.

피신생활의 혹독한 경험을 했던 다윗은 사람들의 핍박과 죽음의 위협을 피해 피신하는 것 대신 다른 것을 구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그 아침부터 정하신 때까지 이스라엘에게 무서운 전염병을 내리셨고 이스라엘 땅의 최북단 단부터 최남단 브엘세바까지 백성의 죽은 자가 7만명이었다.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였으니 자신과 자신의 아버지 집을 치시기를 하나님께 겸손하게 고하였다.

[18-25절] 이 날에 갓이 다윗에게 이르러 고하되 올라가서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으소서 하매 다윗이 여호와의 명하신 바 갓의 말대로 올라가니라. 아라우나가 바라보다가 왕과 그 신복들이 자기를 향하여 옴을 보고 나가서 왕의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가로되 어찌하여 내 주 왕께서 종에게 임하시나이까? 다윗이 가로되 네게서 타작마당을 사서 여호와께 단을 쌓아 백성에게 내리는 재앙을 그치게 하려 함이로라. 아라우나가 다윗에게 고하되 원컨대 내 주 왕은 좋게 여기시는 대로 취하여 드리소서. 번제에 대하여는 소가 있고 땔 나무에 대하여는 마당질하는 제구와 소의 멍에가 있나이다. 왕이여, 아라우나가 이것을 다 왕께 드리나이다 하고 또 왕께 고하되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을 기쁘게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 왕이 아라우나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값을 주고 네게서 사리라. 값 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 하고 은 50세겔로 타작마당과 소를 사고 그 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니 이에 여호와께서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으시매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이 그쳤더라

아라우나는 왕에게 번제의 소와 땔나무 등을 드리겠다고 말하였다. 그는 즐거이 자신의 소유물을 바치기를 원했다. 그는 경건하고 충성된 인물이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의 제사를 위해 정당한 값을 주고 그 땅과 제물을 사기를 원하였다. 왕은 은 50세겔로 타작마당과 소를 샀다. 역대상 21:25는 “그 기지값으로 금 600세겔을 달아주었다”고 기록한다. 그것은 그 타작마당과 제물들의 값 뿐만 아니라, 그 주위의 상당한 땅을 포함하는 값일 것이다. 다윗은 그 곳에서 여호와를 위해 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다. 번제는 속죄와 함께 완전한 헌신을 상징하며 화목제는 속죄와 함께 하나님과의 화목과 교제 회복을 상징한다. 여호와께서는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으셨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내리신 재앙을 멈추게 하셨다.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은 후에 성전이 세워지는 중요한 땅이 되었다. 역대상 22:1에 보면, 다윗은 그 땅을 “이는 여호와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이스라엘의 번제단이라”고 불렀다. 또 역대하 3:1은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 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 아비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고 기록하였다. 옛날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그 외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려 하였던 그 모리아 산, 그리고 이제 다윗이 이스라엘과 자신의 죄를 속하기 위해 번제와 화목제를 올렸던 그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이 바로 솔로몬의 성전이 세워질 곳이었다. 다윗이 그 타작마당을 산 것은 성전 대지를 확보한 일이 되었다. 하나님의 일은 신기하게 진행되었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다윗은 마귀의 시험에 떨어져서 인구 조사하는 죄를 지었다. 우리는 잠시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마귀의 시험에 떨어지고 죄의 유혹에 넘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말씀하셨다(마 26:41). 그러므로 우리는 늘 깨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한다.

둘째로, 다윗은 잠시 동안이라도 하나님 대신 군인들의 수효와 군대의 세력을 의지하고 기뻐하려 했다. 우리는 세상적인 것, 물질적인 것, 인간적인 것을 의지하거나 자랑하지 말고 언제나 하나님만 의지하고 기뻐해야 한다. 우리는 불신앙과 교만의 죄에 떨어지지 않아야 한다.

셋째로, 다윗의 죄는 하나님의 무서운 징벌을 가져왔다. 우리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을 두려워하고 죄를 깨달을 때 즉시 철저히 회개함으로 씻음 받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의만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을 실천하고 하나님의 징계와 훈련을 달게 받아야 한다.

 

미주


1) ‘갑절’이라는 원어(마나 아카스 압파임)는 ‘얼굴의 몫’이라는 뜻이다. 영어성경들은 'a worthy portion'(가치 있는 몫)(KJV), 'a double portion'(갑절)(NASB, NIV) 등으로 번역한다.

2) 원문에는 카시도 ‘그의 성도’라고 쓰여 있으나(케팁), 마소라 학자들은 카시다우 ‘그의 성도들’로 읽으라(케레)고 제안한다. 영어성경들은 후자를 취했다. 'his saints'(KJV, NIV), 'His holy ones'(NASB). 그러나 가급적 원문에 쓰여진 대로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3) ‘아이’라는 원어(나아르)는 ‘아이, 소년, 청년’이라는 뜻이 있다.

4) 오펠테코르라는 말과 동의어인 것 같다. 오펠은 사무엘상 5-6장에 다섯 번(5:6, 9, 12; 6:4, 5), 테코르는 두 번(6:11, 17) 사용되었다. 오펠은 엉덩이 부분에 생기는 종양을 가리키는 것 같다(BDB). 헬라어 70인역(LXX)과 옛날 영어성경(KJV)은 이런 뜻을 반영한다.

5) 쉬브임 이쉬 카밋쉼 엘렙 이쉬는 ‘70명, 5만명’이라는 말로서, ‘5만 70명’으로 보는 것이 가장 좋고, 고대 헬라어 70인역이나 권위 있는 영어역들(KJV, NASB)도 그렇게 번역하였다.

6) 원문에 ‘취한다’는 동사(라카)가 네 번 나오며(11, 13, 14, 16절), 15절과 17절에서는 ‘십일조를 취한다’는 단어(아사르)가 사용되었다.

7) 히브리어 본문과 영어역 KJV, NASB의 본문은 필자의 번역과 같다. 그러나 영어역 ASV, NIV의 본문은 한글개역성경의 본문과 같다.

8) 마소라 본문에는 숫자가 없고 헬라어 70인역은 1절을 생략했다.

9) 전통적 히브리어 마소라 본문은 이러하나, 고대의 역본들(LXX, Syr, Vg), 많은 히브리어 사본들, 및 영어 NASB는 한글개역본문과 같다.

10) 본절뿐 아니라, 17장에 여러 번 나오는(40, 41, 43, 45, 48, 48, 49, 50, 51, 54, 55, 57, 57절 등) ‘블레셋 사람’이라는 원어(합플리쉬티)는 ‘그 블레셋 사람’이라는 뜻으로 블레셋 장수 골리앗을 가리켰다.

11) 가돌 메옷은 단순히 ‘심히 큰 자’(KJV)라는 뜻이다.

12) 우리 말에 ‘갈멜 족속’(LXX)이라는 원어(켈립보 [케팁], 칼립비[케레])는 ‘갈렙 족속’이라는 뜻이다(Vg, Targ, KJV, NASB, NIV).

13) Luther, Calvin을 비롯하여 Matthew Poole, Matthew Henry, 박윤선, 이병규 등이 이런 견해를 가진다.

14) ‘새벽’이라는 원어(네쉐프)는 ‘새벽 어두움’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보통은 ‘저녁 어두움’ 즉 ‘황혼’을 가리킨다(BDB, NIV).

15) 히브리어 마소라 본문은 ‘아람’이라고 읽지만(KJV, NASB), 6개의 히브리어 사본들과 고대 헬라어 70인역과 고대 수리아어역은 시편 60편의 제목과 역대상 18:11-12과 같이 ‘에돔’이라고 읽는다. 원문은 ‘에돔’이라고 보이며 히브리어 레쉬(ר)와 달렛(ד)은 글자가 비슷하기 때문에 필사상의 오류가 생긴 경우인 것 같다.

16) 영어역인 NASB는 “그 여인은 그의 부정함을 깨끗케 하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는 뜻으로 번역했다. 그러나 전통적 히브리어 마소라 본문의 액센트를 고려하면 한글개역처럼 번역할 수 있다(KJV, NIV도 그러함).

17) 원문을 직역하면, “[그들을] 톱 안에와 쇠 써레 안에와 쇠 도끼 안에와 벽돌 가마 안에 두었다”이다. 그것은 그들을 그렇게 죽였다는 뜻인지도 모른다(아마 KJV, NASB). 그러나 한글개역처럼 번역하기도 한다(NIV).

18) ‘욕되게 하다’라는 원어 인나는 'humble'(BDB), 'force'(KJV), 'violate'(NASB) 등으로 번역된다.

19) ‘채색옷’이라는 원어(케소넷 팟심)는 ‘손바닥이나 발바닥까지 닿는 긴 옷’(BDB, NASB)이나 ‘채색옷’(KJV)을 가리킨다.

20) 역대상 2:17은 ‘이스마엘 사람’이라고 되어 있다.

21) LXX, Syr, Vg (나를 위해)로 읽고 NASB, NIV가 따름.

22) ‘맵시낸다’와 ‘깎는다’는 원어(아사)는 ‘한다’는 뜻으로 발을 씻거나(BDB) 가꾸고(KJV, NASB, NIV) 수염을 깎는 것을 가리켰다고 본다.

23) 원문(이쉬 가돌 메오드)은 ‘매우 위대한 사람’이라는 뜻이지만(KJV, NASB), 문맥상 ‘거부’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NIV).

24) 전통적 히브리어 마소라 본문에는 ‘미갈'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사본상의 오류인 것 같다. 2개의 사본과 헬라어 칠십인역의 일부와 수리아어역은 ‘메랍’이라고 되어 있다. 옛날 영어성경(KJV)은 전자를 따랐으나 근래의 영어성경들(NASB, NIV)과 한글개역은 후자를 따른다. 사무엘상 18:19는 메랍의 남편이 므홀랏 사람 아드리엘이라고 증거하였다.

25) 역대상 21:12는 ‘3년’이라고 되어 있다. 헬라어 70인역의 본문은 ‘3년’으로 되어 있다. 영어성경 NIV는 ‘3년’이라는 본문을 취한다. 만일 3년이 맞다면, 이것은 히브리어 전통(마소라)본문의 필사상의 오류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