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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강해

김효성 목사

2018년 1월 11일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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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리말

우리는 신구약 66권의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의 신앙과 생활에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임을 믿는다. 성경은 개인의 신앙생활뿐 아니라, 교회의 모든 활동에도 유일한 규범이다. 오늘날처럼 영적으로 혼란한 시대, 다양한 풍조와 운동이 많은 시대에, 우리는 여전히 성경으로 돌아가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묵상하기를 원하며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든 뜻을 알기를 원한다.

욥기의 저자는 전통적으로 욥 자신이거나 모세라고 본다.1) 어떤 이들은, 비록 욥의 사건은 족장 시대의 것일지라도, 욥기는 솔로몬 시대에 쓰였다고 보며,2) 다른 이들은 심지어 욥기가 욥과 그 친구들의 실제 대화를 정확하게 쓴 역사가 아니고 하나의 드라마라고 한다. 그러나 욥기는 희곡이 아니고 역사적 내용이다. 풀(Poole)은 말했다.

본서는 허구나 비유가 아니고 참된 역사이다. 그것은 우리가 거기에서 장소들, 인물들, 사물들과 그 상황들에 대한 정확하고 명확한 진술들(2:11; 42:14 등)을 가진 그 책의 전체 문맥으로부터, 또 에스겔 14:14와 야고보서 5:11같이 그를 경건과 인내의 참되고 두드러진 예로 말하는 성경의 후대 저자들로부터 충분하게 분명하다.3)

욥기 내용은 모세 이전 주전 2천년경의 족장 시대에 적합하다. 그것은 특히 욥의 오랜 수명(약 200세 이상)4)이나 제사 방식이나 이스라엘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 등에서 추론할 수 있다. 또 욥기의 배경은 이방 세계다. 욥기는 ‘하나님’이라는 명칭을 112회 사용하며( 54회, 엘로아흐 41회, 엘로힘 17회) 여호와라는 명칭은 32회만 사용한다.5) 또 구약성경의 다른 부분에 17회밖에 나타나지 않는 ‘전능자’(솻다이)라는 명칭이 31회나 사용된다. 이런 점도 욥기가 족장 시대의 사건이고 그 시대에 쓰여졌음을 보인다.

욥은 ‘우스 땅’에 사는 자이었다(1:1). 우스 땅은 에돔 지역이었다고 본다(애 4:21). 헬라어 70인역의 욥기 끝에는 욥을 아브라함의 5대손인 에돔 사람(에서의 자손)으로 증거하는 흥미로운 내용이 있다.

그의 이름은 전에는 요밥이었고, 그는 아라비아 아내를 취하여 엔논이라는 이름의 아들을 낳았다. 또 그 자신은 에서의 아들들 중 하나인 그의 아버지 자레와 그의 어머니 보소라의 아들이었으므로 그는 아브라함의 5대손이었다. 또 이들은 에돔을 다스리는 왕들이었고 . . . . 또 그에게 온 친구들은 에서의 자손들 중 데만 사람들의 왕 엘리파스와 소캐 사람들의 군주 발닷과 미내 사람들의 왕 소발이었다.6)

욥기의 주요 내용은 욥의 고난과 회복이다. 본서의 특징적 진리는 고난이다. 성도가 당하는 고난에는 (1) 죄에 대한 징벌로 받는 고난이 있다. 그것은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공의이다. 그러나 성도에게는 (2) 특정한 죄에 대한 징벌이 아니고 단지 신앙 인격의 훈련을 위한 고난도 있다. 바울이 당한 고난(고전 4:11-13; 고후 6:6-10; 11:23-27)은 이런 고난이었다. 욥의 고난도 그런 고난이었다. 성도는 이런 고난을 각오해야 한다(마 5:10-11; 행 14:22; 빌 1:29; 골 1:24; 딤후 3:12)

 

제목 차례

 1장: 욥이 재산과 자녀를 잃음      

 2장: 욥이 자기 건강까지 잃음 

 3장: 욥이 자기 생일을 저주함  

 4장: 엘리바스--죄 없이 망한 자가 없다  

 5장: 엘리바스--하나님의 징계는 복되다 

 6장: 욥--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았다  

 7장: 욥--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 

 8장: 빌닷--네 자녀들이 범죄했기 때문이다 

 9장: 욥--하나님과 쟁변할 자 없다   

10장: 욥이 하나님께 탄원함      

11장: 소발--욥에게 회개를 촉구함  

12장: 욥--하나님께서는 악인의 형통을 허용하셨다 

13장: 욥--나의 허물과 죄를 알게 하소서  

14장: 욥--허무한 인생으로 쉬게 하소서  

15장: 엘리바스--악인은 일평생 고통을 당한다 

16장: 욥--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다

17장: 욥--의인은 그 길을 독실히 행함 

18장: 빌닷--악인의 빛은 꺼진다   

19장: 욥--나의 구속자가 살아계시다   

20장: 소발--악인은 하나님의 벌을 받는다  

21장: 욥--어찌하여 악인이 형통한가?  

22장: 엘리바스--악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23장: 욥--나의 가는 길을 그가 아신다  

24장: 욥--하나님께서 악인의 심판을 지연하신다    

25장: 빌닷--사람은 하나님 앞에 의롭지 않다   

26장: 욥--하나님의 지식과 능력은 측량할 수 없이 크다

27장: 욥--악인은 하나님의 보응을 받는다 

28장: 욥--지혜는 고귀하다      

29장: 욥--옛날은 복되었다    

30장: 욥--그러나 지금은 고난 중에 있다 

31장: 욥--나는 의롭게 살았다  

32장: 엘리후가 말을 시작함   

33장: 하나님은 자신을 다 알리지 않으심    

34장: 하나님은 불의하지 않으심          

35장: 사람의 선악은 하나님께 영향을 주지 못함  

36장: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공의로우심     

37장: 하나님은 능력이 크심                

38장: 하나님께서 자신을 증거하심    

39장: 동물 세계가 주의 손 안에 있음  

40장: 네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41장: 온 천하의 것이 내 것이다   

42장: 욥의 회개와 회복  

 

 

1장: 욥이 재산과 자녀를 잃음

1-5절, 의인 욥

[1절]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 . . .

본문은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말한다. ‘우스 땅’은 에돔 지역이었던 것 같고(애 4:21), 욥은 아브라함 시대 사람이거나 그의 몇 대 안의 자손이었던 것 같다.7)

본문은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고 말한다. ‘순전하다’는 원어()는 비교적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인격을 가리킨다. 성경이 노아가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고 증거할 때(창 6:9), ‘완전한’이라는 말도 같은 뜻이다. 또 성경이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는 자이어야 한다고 말할 때도(딤전 3:2) 같은 뜻이다. 우리는 성경말씀에 비추어 또 자기 양심에 비추어 책망할 것이 없는 삶을 살기를 힘써야 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4:4에서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한다”고 간증하였고,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3:21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는다”고 말했다.

또 욥은 정직하였다. ‘정직함’은 올바름, 기준에 맞음이라는 뜻이며 의롭다는 말과 같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대로 바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아야 한다. 또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자이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경건의 본질이요(잠 1:7) 그럴 때 사람이 악을 떠날 수 있다(잠 16:6). 노아나 다니엘도 그러했다.

[2절] 그 소생은 남자가 일곱이요 여자가 셋이며.

본문은 “그 소생은 남자가 일곱이요 여자가 셋이며”라고 말한다. 욥은 많은 자녀들을 둔 성도이었다. 자녀 출산은 하나님의 뜻이다. 창세기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물론, 자녀를 안 주시는 경우도 있었다. 노아는 500세 이후에 세 아들을 낳았다(창 5:32). 아브라함도 100세에 한 아들을 얻었다. 그러나 자녀 출산은 하나님의 일반적인 뜻이다.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다”(시 127:3). 자녀 출산과 양육은 힘든 일이지만, 복되고 보람 있는 일이다.

욥은 자녀들을 낳아 기르면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우리는 수고롭고 복잡한 삶의 현실 속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뜻을 행해야 한다. 에녹도 그러하였다. 창세기 5:21-22, “에녹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독신(獨身)은 신앙생활하기에 좋을 수 있다. 그러나 정상적인 신앙생활은 현실도피적인 생활이 아니다. 정상적 신앙생활은 현실 속에서 수고하면서 사는 생활이다. 그것은 결혼한 사람들이 자녀들을 낳아 기르며 가정을 이끌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생활이다.

가정은 사회의 기본 단위이며 성도의 일차적 경건 훈련의 장소이다. 우리는 가정에서 경건한 부모를 통해 하나님을 경외함과 그 계명대로 의롭고 선하게 사는 법을 배운다. 우리는 가정에서 믿음과 사랑, 겸손과 인내, 순종과 용서 등을 실습한다. 가정에서 잘 생활하는 자가 바르고 좋은 인격일 것이다. 디모데전서 3:4-5,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단정함으로 복종케 하는 자라야 할지며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아보리요).”

[3절] 그 소유물은 양이 7천이요 약대가 3천이요 소가 5백 . . . .

본문은, “그 소유물은 양이 7천이요 약대가 3천이요 소가 5백 겨리(천 마리)요 암나귀가 5백이며 종도 많이 있었으니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자라”고 말한다. 동방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후처의 자손들이나(창 25:1-6), 아브라함의 여종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의 자손들이나(창 25:12-18), 에서의 자손들을 가리킬 것이다(창 36장).

욥은 물질적 부요함이 있었다. 세상의 모든 재물은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며 하나님의 소유물이며 재물의 복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에게도 복을 주시므로 그가 창대하고 왕성하여 거부(巨富)가 되어 양과 소가 떼를 이루었었다(창 26:12-14).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순종하는 자에게 몸의 소생과 토지의 소산과 가축들의 새끼의 복을 약속하셨다(신 28:4).

그러나 물질적 부요는 신앙생활에 큰 방해물이다. 주께서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며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고 말씀하셨다(마 19:23-24). 왜냐하면 부자는 마음이 해이해지고 교만해지고 하나님 대신 재물을 의지하기 쉽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교훈하였다(딤전 6:9-10).

그러나 부자인 욥은 하나님의 은혜로 경건하였다. 그는 교만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경외하였고 세상을 사랑하지 않았고 재물에 종노릇하지 않았다. 그는 욥기 31:24에서 “내가 언제 금으로 내 소망을 삼고 정금더러 너는 내 의뢰하는 바라 하였던가”라고 고백할 수 있었다.

[4-5절] 그 아들들이 자기 생일이면 각각 자기의 집에서 잔치를 . . . .

본문은, “그 아들들이 자기 생일이면 각각 자기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그 누이 셋도 청하여 함께 먹고 마시므로 그 잔칫날이 지나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더라”고 말한다. 욥의 자녀들은, 아마 다 성장한 후에도, 생일이면 각각 자기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누이들까지 청하여 함께 먹고 마셨다. 그들은 서로 간에 형제애가 좋았다. 욥의 가정은 부모와 자녀간에 또 형제들 간에 사랑과 순종과 우애가 있는 좋은 가정이었다.

그런데 욥은 그 잔칫날이 지나면 자기 자녀들이 혹시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염려하여 그들을 집으로 불러 성결케 하였고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하나님게 번제를 드렸다. 욥은 죄의 심각성과 성결의 필요성을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경건과 거룩함과 온전함뿐 아니라, 자녀들의 경건과 거룩함과 온전함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는 육신적 차원에서 자녀를 위할 뿐 아니라, 영적 차원에서 자녀를 위하였다. 그는 자녀들의 구원과 신앙 인격을 위해, 죄짓지 않게 하기 위해, 혹 지은 죄를 씻음받게 하기 위해 힘썼다. 그는 부모로서 열 명의 자녀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그러하였다.

본문은 “욥의 행사는 항상 이러하였더라”고 말한다. 그는 한두 번 그렇게 한 것이 아니고, 그의 행사가 항상 그러하였다. 그것은 참된 자녀 사랑이다. 부모에게 주는 성경의 교훈의 핵심은 자녀를 바르게 양육하라는 것이다. 에베소서 6:4는,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말하였다.

욥은 모든 성도들에게 본이 된다. 첫째로,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였고 순전하고 흠이 없었고 의롭고 정직하고 악을 떠났다. 둘째로, 욥은 많은 자녀들을 낳아 기르면서도 하나님을 잘 섬겼다. 셋째로, 욥은 물질적으로 부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잘 섬겼다. 물질적 부요는 많은 경우 시험거리가 되지만,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렇지 않았다. 넷째로, 욥은 자녀들의 거룩함을 위해 힘썼다. 자녀들을 경건하고 거룩하고 선한 인격이 되도록 지도하는 것은 부모의 첫 번째 의무이다.

 

6-22절, 욥이 재산과 자녀들을 잃음

[6-7절]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 . . .

본문은,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단도 그들 가운데 왔는지라.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땅에 두루 돌아 여기 저기 다녀왔나이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천사들을 가리킴이 분명하다. 욥기 38:7은 하나님께서 땅의 기초를 놓을 때 새벽 별들이 함께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쁘게 소리하였다고 말한다.

사탄은 천사들 중 하나이다. 그는 타락한 천사이다. 그의 타락의 죄는 교만이었다(딤전 3:6). 사탄은 실재(實在)한다. 에덴 동산에서 하와를 범죄케 했던 뱀은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가 활동한 짐승이었다고 본다. 요한계시록 12:9는 ‘큰 용, 옛 뱀’이 바로 사탄이라고 말한다.

사탄은 땅에 두루 돌아다니며 활동한다. 그는 세상 사람들을 죄 짓게 하고 성도들과 하나님의 일들을 대적하고 어지럽히며 파괴시킨다. 그는 거짓말쟁이요 살인자이며(요 8:44) 다윗을 격동시켜 인구조사를 하게 하였고(대상 21:1)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대적하였다(슥 3:1). 그는 예수님을 시험한 자요(마 4장) 사람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복음을 깨닫지 못하고 믿지 못하게 하며(고후 4:4) 세상의 죄악된 유행과 풍조를 조장한다(엡 2:2). 그는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벧전 5:8). 그는 온 천하를 꾀는 자이다(계 12:9).

사탄의 권세는 크다. 그는 이 세상 임금(요 12:31), 이 세상 신(고후 4:4), 공중에 권세 잡은 자(엡 2:2)라고 불리우며 요한일서 5:19는 온 세상이 악한 자 안에 처해 있다고까지 말한다. 그러나 사탄은 마침내 지옥에 던지울 것이다. 요한계시록 20:10은,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최종적으로]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운다”고 예언하였다.

[8절]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 . . .

본문은,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고 말한다.

욥은 하나님의 보시기에 순전하고 정직하고 경건하고 악에서 떠난 자이었다. 즉 그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의인이었다. 사람의 판단과 평가는 완전치 못하다. 사람은 다른 이의 중심을 알지 못하고, 그의 외모만 보기 쉽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귀한 종 바울을 비난하고 욕하고 악평하였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평가가 아니고 하나님의 평가이다. 잠언 16:25는,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고 말한다. 구약성경은 열왕들의 역사를 기록할 때, 그가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자이었는지, 악한 자이었는지를 기록하였다. 솔로몬은 늙었을 때 하나님 앞에서 온전치 못하였다(왕상 11:4). 아사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고(왕상 15:11), 오므리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왕상 16:25), 아하시야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왕상 22:52). 열왕기상하에는 29번, 역대하에는 11번, 총 40번 ‘하나님 보시기에’ 혹은 ‘하나님 앞에서’라는 표현이 나온다.8)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치 말고 정직하고 의롭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 또 그는 남을 볼 때도 외모만 보지 말고 그의 중심을 살펴보려 하고 그의 신앙인격을 유의해 보아야 한다.

[9-11절]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욥이 어찌 까닭 . . . .

본문은,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라고 말했다고 말한다.

사탄의 비난은, 욥이 까닭 없이, 순수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고 물질적 복 때문에 섬긴다는 것이다. 즉 욥의 신앙은 기복(祈福)신앙이라는 것이다. 욥의 신앙이 기복신앙인가? 욥이 하나님을 섬기는 동기가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시는 물질적 복 때문인가? 그러면 물질적 복이 없으면 하나님을 섬기는 일도 중단될 것이다. 그가 물질적 복을 받지 못하면 하나님도 버릴 것이다. 하나님 때문에 고난을 받거나 순교하는 것은 상상도 못할 것이다. 기복신앙은 고난을 견디기 어렵고 순교는 더욱 불가능할 것이다.

성경은 순수한 신앙을 가르친다. 예수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6:24). 씨 뿌리는 비유 중에, 돌밭에 떨어진 씨는 환난과 시험에 넘어지는 경우를 가리켰다(마 13:20-21). 사도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한다고 말했다(행 14:22). 또 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고 말했고(빌 1:29), 또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라고 증거했다(롬 14:7).

[12절]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 . . .

본문은,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단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사탄에게 욥의 소유물을 주관하는 권세를 주셨다. 손은 힘을 상징한다. 사탄은 세상의 것을 상당히 주장한다. 그는 욥의 모든 재산을 없애고 모든 자녀를 죽이기도 하였다. 누가복음 4:6에 보면, 사탄은 예수께 말하기를, 나에게 절하면 천하만국의 권세와 영광을 너에게 주리라, 이것이 나에게 주어진 것이므로 내가 나의 원하는 자에게 그것을 준다고 하였다. 사탄은 상당한 권세를 가졌다.

그러나 사탄은 오직 하나님의 허락 속에서만 또 하나님의 허락하신 한계 안에서만 그 권세를 가지며 그것을 사용하고 활동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온 세상에 유일한 주권자이시다. 그는 사탄과 악령들도 주장하신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많은 귀신들을 쫓아내셨다. 귀신들은 심지어 돼지 속에 보내시기를 그에게 간구하였었다(마 8:31). 세상 끝에 하나님께서는 사탄과 악령들을 지옥에 던져 넣으실 것이다(계 20:10).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고난을 허락하심은 유익케 하시는 깊은 뜻이 있다. 사람은 평안할 때 교만해지고 해이해지고 범죄하거나 탈선하고 세상을 사랑하고 하나님과 천국을 잊어버리기 쉽다. 그러나 사람이 고난을 당하면 세상의 헛됨을 알고 죄를 멀리하고 더 거룩해지며 더 하나님만 사모하고 의지하며 천국을 소망하게 되고 또 무엇보다 겸손해진다(시 119:67, 71; 고후 1:8-9; 12:7).

[13-22절] 하루는 욥의 자녀들이 그 맏형의 집에서 식물을 . . . .

욥은 하루아침에 큰 재앙을 당하였다. 하루는 욥의 자녀들이 그 맏형의 집에서 식물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실 때에 사자가 욥에게 와서 말했다. “소는 밭을 갈고 나귀는 그 곁에서 풀을 먹는데 스바 사람이 갑자기 이르러 그것들을 빼앗고 칼로 종을 죽였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 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그가 아직 말할 때에 또 한 사람이 와서 말했다. “하나님의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양과 종을 살라 버렸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 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그가 아직 말할 때에 또 한 사람이 와서 말하였다. “갈대아 사람이 세 떼를 지어 갑자기 약대에게 달려들어 그것을 빼앗으며 칼로 종을 죽였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 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그가 아직 말할 때에 또 한 사람이 와서 말했다. “주인의 자녀들이 그 맏형의 집에서 식물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시더니 거친 들에서 대풍(大風)이 와서 집 네 모퉁이를 치매 그 소년들 위에 무너지므로 그들이 죽었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 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그때, 욥은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말했다. “내가 모태에서 적신(赤身)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욥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이며 그가 주관하심을 인정하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렸다. 그는 이 모든 일에서 범죄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않았다. 열 정탐꾼의 불신앙적 보고를 받고 밤새도록 통곡하며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했던 이스라엘 백성과는 너무 대조가 된다. 욥의 신앙과 의로운 인격은 고난 가운데서 더욱 빛났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사탄과 악령들이 성도들에게 때때로 고난을 주지만 오직 하나님의 허락 안에서만 줌을 알고 두려워하지 말자. 둘째로, 우리는 욥처럼 물질적 복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되지 말고, 즉 기복 신앙을 가진 자가 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순수한 신앙을 가지고 바르게만 살자. 셋째로, 우리는 재산과 자녀들을 잃었으나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찬송하며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을지니이다”라고 말한 욥처럼, 고난 중에도 하나님을 원망치 말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며 그가 주시기도 하고 취하시기도 함을 인정하자.

 

 

2장: 욥이 자기 건강까지 잃음

[1-6절] 또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서고 . . . .

본문은 “또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서고 사단도 그들 가운데 와서 여호와 앞에 서니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땅에 두루 돌아 여기 저기 다녀왔나이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네가 나를 격동하여 까닭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그가 오히려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켰느니라”고 말한다. 욥에게 닥친 재앙은 사탄이 준 것이지만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된 것이며 욥은 그런 고난 속에서도 믿음을 지켰다.

본문은,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사람이 그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지라. [그러나]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고 말한다. 사람의 생명이 귀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희생해도 자기 생명이 보존되면 만족하지만, 그러나 이제 몸이 병들어 죽음의 위협이 생기면, 믿음을 버리고 하나님께 욕하는 죄를 범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사탄은 끝없이 변론하고 반론하고 주의 종들과 성도들을 비난하고 공격하는 송사쟁이이다.

본문은 또,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를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지니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깊으신 뜻 가운데서 사탄의 활동을 범위를 정해 어느 정도 허용하신다.

[7-10절] 사단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 . . .

본문은 “사단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나게 한지라.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허락을 받은 사탄은 악한 피부병으로 욥을 쳤다. 심각한 악창이 온 몸에 났다. 욥은 너무 가려워서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조각으로 몸을 긁었다.

본문은 또,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하였다고 말한다. 욥의 아내는 남편을 동정하고 위로하기는 커녕 그를 몹시 구박하였다. 그러나 욥은 믿음 없는 아내의 구박에도 낙망치 않고 더욱 믿음으로 나아갔다. 신자는 돛단배와 같다. 돛단배는 바람이 있어야 앞으로 잘 나아간다. 신자는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 더욱 하나님께로 나아가며 그에게 기도하고 그를 의지하고 그의 계명을 지킨다.

본문은, “[욥이] 이르되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고 말한다. 이것은, “주신 자도 하나님이시요 취하신 자도 하나님이시라”는 신앙고백(1:21)보다 더 진전된 고백이다. 욥은 모든 일이 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임을 전제하고 사람이 하나님께 복을 거저 받았으면 재앙도 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만일 사람들이 복받는 것을 좋아하면서 재앙받을 때 원망한다면 이기적인 태도이며 이치에 맞지 않다는 것이다.

욥의 고백은, 사람이 하나님의 주권적 처분에 겸손히 순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극히 크신 지혜와 선으로 사람의 모든 일을 섭리하심을 믿어야 하고, 고난 중에도 참고 기다려야 한다.

[11-13절] 때에 욥의 친구 세 사람이 그에게 이 모든 재앙이 . . . .

본문은, “때에 욥의 친구 세 사람이 그에게 이 모든 재앙이 임하였다 함을 듣고 각각 자기 처소에서부터 이르렀으니 곧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라. 그들이 욥을 조문하고 위로하려 하여 상약(相約)하고 왔다”고 말한다. 욥의 친구 세 사람은 욥의 소식을 듣고 그를 위로하러 서로 약속하고 왔다. 데만 사람은 에서의 자손이며(대상 1:45), 수아 사람은 아마 아브라함의 첩(필레게쉬)[=후처] 그두라의 자손일 것이다(대상 1:32; 창 25:2).

그들은 경건하고 존귀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욥의 고난이 심각함을 알았다. 본문은, “눈을 들어 멀리 보매 그 욥인 줄 알기 어렵게 되었으므로 그들이 일제히 소리질러 울며 각각 자기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 7일 7야(夜)를 그와 함께 땅에 앉았으나 욥의 곤고함이 심함을 보는 고로 그에게 한 말도 하는 자가 없었더라”고 기록한다. 욥은 사람들이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쇠약하였다. 또 그들은 일제히 소리질러 울며 겉옷을 찢었고 하늘을 향해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렸다. 사람이 괴로움이 심하면 겉옷을 찢는다. 르우벤은 구덩이에 요셉이 없음을 보았을 때 겉옷을 찢었었다(창 37:29). 또 욥의 친구들은 7주야를 그와 함께 땅에 앉았으나 한 말도 못하였다. 욥의 큰 고통은 이렇게 묘사되고 증거되었다.

그러나 욥의 고통의 기간이 긴 것 같지는 않다. 1차 재앙은 하루에 되었고(13절) 2차 재앙은 1차 재앙 후, 몇 일 안 되어서이었고, 친구들의 방문도 2차 재앙 후, 몇 일 안 되어서였던 것 같다. 욥기 3장부터 42장까지의 내용은 방문하여 7일 후, 하루 동안의 일이라고 본다. 그러면 욥의 고난은 1-2달간(욥 7:3) 이상이지는 않았던 것 같다.

우리는 사탄의 끝없는 비난과 말장난을 경계하고, 또 그의 어떤 시험도 잘 대처하자. 우리는 오직 성경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믿고 섬기자.

우리는 고난당할 때 하나님을 원망치 말고, 오직 그의 절대주권과 그의 지혜와 선을 믿고 그를 의지하고 말로라도 그에게 범죄치 말자.

우리는 욥의 극심한 고난을 기억하자. 그 기간이 제한적일지라도, 그 정도는 극심하였다. 우리는 고난 중에 오직 하나님만 바라고 의지하자.

 

 

3장: 욥이 자기 생일을 저주함

[1-10절] 그 후에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니라. . . .

욥의 친구들이 욥을 방문한 지 7일 후에, 욥은 입을 열어 자기 생일을 저주하였다. 사람은 평안할 때 자기의 생일을 중히 여기며 서로의 생일을 축하하기도 한다. 그러나 심각한 고통 중에서는 생일이 결코 기쁜 날이 아니다. 욥이 그러했다. 그는 말을 내어 말했다.

“나의 난 날이 멸망하였었더라면, 남아(男兒)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었더라면, 그 날이 캄캄하였었더라면, 하나님이 위에서 돌아보지 마셨더라면, 빛도 그 날을 비취지 말았었더라면, 유암[어둠]과 사망의 그늘이 그 날을 자기 것이라 주장하였었더라면, 구름이 그 위에 덮였었더라면, 낮을 캄캄하게 하는 것이 그 날을 두렵게 하였었더라면, 그 밤이 심한 어두움에 잡혔었더라면, 해의 날 수 가운데 기쁨이 되지 말았었더라면, 달의 수에 들지 말았었더라면, 그 밤이 적막하였었더라면, 그 가운데서 즐거운 소리가 일어나지 말았었더라면, 날을 저주하는 자[자들] 곧 큰 악어를 격동시키기에 익숙한 자[자들]가 그 밤을 저주하였었더라면, 그 밤에 새벽 별들이 어두웠었더라면, 그 밤이 광명을 바랄지라도 얻지 못하며 동틈을 보지 못하였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이는 내 모태의 문을 닫지 아니하였고 내 눈으로 환난을 보지 않도록 하지 아니하였음이로구나.” 8절의 ‘날을 저주하는 자들 곧 큰 악어를 격동시키기에 익숙한 자들’은 마술사들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은 욥이 그들을 인정한다는 뜻이라기보다 사람들의 일반적 생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본다.

[11-19절]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었던가. . . .

욥은 계속 말한다.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었던가. 어찌하여 내 어미가 낳을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무릎이 나를 받았던가. 어찌하여 유방이 나로 빨게 하였던가. 그렇지 아니하였던들 이제는 내가 평안히 누워서 자고 쉬었을 것이니 자기를 위하여 거친 터를 수축한 세상 임금들과 의사들(counselors)[모사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요 혹시 금을 가지며 은으로 집에 채운 목백들(사림 ‘방백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며 또 부지중에 낙태한 아이 같아서 세상에 있지 않았겠고 빛을 보지 못한 아이들 같았었을 것이라. 거기서는 악한 자가 소요를 그치며 거기서는 곤비한 자가 평강을 얻으며 거기서는 갇힌 자가 다 함께 평안히 있어 감독자의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거기서는 작은 자나 큰 자나 일반으로 있고 종이 상전에게서 놓이느니라.”

[20-26절] 어찌하여 곤고한 자에게 빛을 주셨으며 마음이 . . . .

욥은 또 말한다. “어찌하여 곤고한 자에게 빛을 주셨으며 마음이 번뇌한 자에게 생명을 주셨는고. 이러한 자는 죽기를 바라도 오지 아니하니 그것을 구하기를 땅을 파고 숨긴 보배를 찾음보다 더하다가 무덤을 찾아 얻으면 심히 기뻐하고 즐거워하나니 하나님에게 둘러 싸여 길이 아득한 사람에게 어찌하여 빛을 주셨는고. [이는] 나는 먹기 전에 탄식이 나며 나의 앓는 소리는 물이 쏟아지는 것 같구나[같음이로다]. [이는] 나의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나의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미쳤음이로다]. 평강도 없고 안온도 없고 안식도 없고 고난(로게즈 ‘격동, 소동’)만 임하였구나.” 욥은 고통 중에서 죽음과 무덤을 심히 사모한다. 사람은 극심한 고난 중에 죽음을 사모하게 된다. 엘리야도 그러했다(왕상 19:4). 그러나 실상 천국은 모든 성도가 이 세상보다 더욱 사모할 만하다(고후 5:8; 빌 1:23).

우리는 이 세상의 고난과 허무를 미리 깨닫고 세상을 사랑하지 말자(요일 2:15-17). 우리는 오직 하나님과 천국만 소망하자(시 39:5-7).

 

 

4장: 엘리바스--죄 없이 망한 자가 없다

[1-11절]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대답하여 가로되 누가 네게 . . . .

데만 사람 엘리바스는 대답하여 말하였다. “누가 네게 말하면 네가 염증이 나겠느냐?(라아 ‘싫증이 나겠느냐?’) 날지라도 누가 참고 말하지 아니하겠느냐? 전에 네가 여러 사람을 교훈하였고 손이 늘어진 자면 강하게 하였고 넘어져 가는 자를 말로 붙들어 주었고 무릎이 약한 자를 강하게 하였거늘 이제 이 일이 네게 임하매 네가 답답하여 하고 이 일이 네게 당하매 네가 놀라는구나.”

“네 의뢰가 경외함에 있지 아니하냐? 네 소망이 네 행위를 완전히 함에 있지 아니하냐?” 다시 번역하면, “너의 경외함이 네 확신이 아니냐? 네 행위를 완전히 함이 네 소망이 아니냐?”(NASB, NIV).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내가 보건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 다 하나님의 입 기운에 멸망하고 그 콧김에 사라지느니라. 사자의 우는 소리와 사나운 사자의 목소리가 그치고 젊은 사자의 이가 부러지며 늙은 사자는 움킨 것이 없어 죽고 암사자의 새끼는 흩어지느니라.”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할 때 장래를 확신케 되고 행위를 완전히 할 때 장래를 소망케 된다. 의인과 정직한 자는 결코 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악을 계획하고 행하는 자들은 재앙을 당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보응을 받을 것이다. 사자 같은 자들이라도 그 이가 부러지고 먹이가 없어 죽고 흩어질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의 보응은 신약성경도 여전히 증거하는 성경 진리이다(갈 6:7).

[12-21절] 무슨 말씀이 내게 가만히 임하고 그 가는 소리가 . . . .

데만 사람 엘리바스는 계속 말하였다. “무슨 말씀이 내게 가만히 임하고 그 가는 소리가 내 귀에 들렸었나니 곧 사람이 깊이 잠들 때쯤하여서니라. 내가 그 밤의 이상(異像)으로 하여 생각이 번거로울 때에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러서 모든 골절이 흔들렸었느니라. 그때에 영이 내 앞으로 지나매 내 몸에 털이 주뼛하였었느니라. 그 영이 서는데 그 형상을 분변치는 못하여도 오직 한 형상이 내 눈앞에 있었느니라. 그때 내가 종용한[조용한] 중에 목소리를 들으니 이르기를 인생이 어찌 하나님보다 의롭겠느냐? 사람이 어찌 그 창조하신 이보다 성결하겠느냐? 하나님은 그 종이라도 오히려 믿지 아니하시며 그 사자라도 미련하다 하시나니 하물며 흙 집에 살며 티끌로 터를 삼고 하루살이에게라도[나방(moth) 앞에서도](KJV, NASB) 눌려 죽을 자이겠느냐? 조석[아침부터 저녁] 사이에 멸한 바 되며 영원히 망하되 생각하는 자가 없으리라. 장막 줄(이스람)[‘그들의 탁월함’ (KJV) 혹은 ‘그들의 줄’(NASB, NIV)]을 그들에게서 뽑지 아니하겠느냐? 그들이 죽나니 지혜가 없느니라.”

인생이 아무리 의롭고 거룩하다 해도 창조자 하나님보다 더하겠는가? 인생은 하나님 앞에서 의(義)를 내놓을 것이 없는 죄인이다. 더욱이, 인간은 흙으로 지어진 존재요 그의 삶은 덧없이 짧고 허무하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다(사 40:6; 벧전 1:24). 또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거룩하시고 의로우셔서 인생을 공의로 심판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자신의 부족과 허무를 깨닫고 겸손히 하나님만 경외하고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고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 하나님과 천국과 영생만 사모해야 한다.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죄와 부족, 또 비천과 허무를 깨닫고 겸손히 하나님만 의지하고 소망하고 섬기자. 또 모든 죄와 악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명령만 순종하며 그의 말씀대로 의롭게 행하자. 그러나 의인에게도 여러 가지 신앙 훈련의 고난이 있음을 알자.

 

 

5장: 엘리바스--하나님의 징계는 복되다

1-16절, 고난 중에 하나님의 공의를 생각하라

[1-2절] 부르짖어 보아라. 네게 응답할 자가 있겠느냐? 거룩한 . . . .

엘리바스는 계속 말한다. “부르짖어 보아라. 네게 응답할 자가 있겠느냐? 거룩한 자 중에 네가 누구에게로 향하겠느냐? [이는] 분노가 미련한 자를 죽이고 시기[화]가 어리석은 자를 멸하느니라.” ‘시기’라는 원어(키느아)는 ‘화’라는 뜻도 있다(BDB).

사람이 왜 분노하고 화를 내는가? 하나님께 다 맡기지 않고 교만하고 욕심을 부리고 불만하고 미워하고 시기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한 마디로,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본문은 “분노가 미련한 자를 죽이고 화가 어리석은 자를 멸한다”고 말한다. 분노와 화는 미련하고 어리석은 자의 특징이며, 그것은 미련하고 어리석은 자를 죽인다. 그것은 심령에 해가 되게 하며 사람으로 마귀의 시험에 떨어지기 쉽게 만든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4:26-27은,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고 말하였다. 뿐만 아니라, 분노와 화는 오늘날 의학 상식처럼 알려진 바와 같이 몸의 질병들의 원인이 된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모든 일을 맡기고 그 마음에 온유와 겸손, 자족함과 이웃 사랑이 있으면, 분노와 화를 많이 줄일 수 있고 또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여기에 사람이 건강하게 사는 방법도 있다. 즉 사람이 건강하려면,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떠나며(잠 3:7-8), 마음을 평안케 하며 과로하지 말고 적당히 노동 혹은 운동을 하고 골고루 영양을 섭취하되 가급적 소식(小食)해야 한다.

[3-7절] 내가 미련한 자의 뿌리박는 것을 보고 그 집을 당장에 . . . .

엘리바스는 또 말한다. “내가 미련한 자의 뿌리박는 것을 보고 그 집을 당장에 저주하였노라. 그 자식들은 평안한 데서 멀리 떠나고 성문에서 눌리나 구하는 자가 없으며 그 추수한 것은 주린 자가 먹되 가시나무 가운데 있는 것도 빼앗으며 올무가 그의 재산을 향하여 입을 벌리느니라.” 미련한 자는 그 자녀들도, 그 재산도 다 복되지 못하다. 사람은 다 미련한 죄인이므로 하나님의 은혜로 지혜를 얻지 못하면 그 자신도, 그의 자녀도, 그의 재산도 복되지 못할 것이다.

엘리바스는 또 말한다. “[이는] 재앙은 티끌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요 고난은 흙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아니지만],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같음이라].” 모든 인생의 고난과 불행은 타고난 것과 같다. 그것은 근원적으로 첫사람 아담의 범죄에 기인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여자에게 잉태와 해산의 고통을 선언하셨고, 아담에게는 땀흘리는 수고의 삶을 선언하셨다(창 3장).

인간의 삶은 그 자체가 고난이며 고난으로 충만하다. 욥은 인간의 삶을 전쟁이나 품꾼의 날에 비교하였고, 또 인생이 괴로움이 가득하다고 말하였다(욥 7:1; 14:1). 야곱은 자신이 지나온 130년을 ‘험악한 세월’이라고 표현하였고(창 47:9), 하나님의 종 모세는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라고 고백하였다(시 90:10).

인생의 평안과 영생은 죄인의 구주이신 예수님 안에만 있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고(마 11:28), 또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고 말씀하셨다(요 14:27).

[8-11절] 나 같으면 하나님께 구하고 내 일을 하나님께 . . . .

엘리바스는 또 말한다. “나 같으면 하나님께 구하고 내 일을 하나님께 의탁하리라. 하나님은 크고 측량할 수 없는 일을 행하시며 기이한 일을 셀 수 없이 행하시나니 비를 땅에 내리시고 물을 밭에 보내시며 낮은 자를 높이 드시고 슬퍼하는 자를 흥기시켜 안전한 곳에 있게 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는 크고 측량할 수 없는 일들, 기이한 일들을 셀 수 없이 많이 행하셨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그가 행하신 기이한 일들로 가득하다. 시편 104:24는, “여호와여, 주의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저희를 다 지으셨으니 주의 부요가 땅에 가득하니이다”라고 말한다. 식물의 세계, 동물의 세계가 다 그러하다.

또한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 사역이 그러하다. 하나님께서는 거대한 우주를 운행하시고 천지만물을 주관하신다. 그는 수없이 많은 짐승들과 새들과 물고기들을 기르시고 먹이신다. 시편 104:27은, “이것들이 다 주께서 때를 따라 식물 주시기를 바라나이다”라고 말한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구원 계획을 가지고 인류 역사를 섭리하신다. 그는 아브라함을 불러 이스라엘 민족을 만드셨다. 그는 요셉의 생애를 섭리하셨고, 모세의 생애를 섭리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많은 기이한 일들을 행하셨다. 그는 특히 엘리야와 엘리사를 통해, 또 다니엘과 세 친구들에게 기이한 일들을 주셨다.

그는 마침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고 그의 기적, 죽음, 부활을 통해 복음을 확증하셨고 신약교회를 세우셨고 자기 백성에게 천국의 산 소망을 주셨다. 그는 오늘 우리 개인의 영육의 삶도 섭리하신다. 그는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롬 8:28).

[12-16절] 하나님은 궤휼한 자의 계교를 파하사 그 손으로 . . . .

엘리바스는 또 말한다. “하나님은 궤휼한 자의 계교를 파하사 그 손으로 하는 일을 이루지 못하게 하시며 간교한 자로 자기 궤휼에 빠지게 하시며 사특한 자의 계교를 패하게 하시므로 그들은 낮에도 캄캄함을 만나고 대낮에도 더듬기를 밤과 같이 하느니라.”

하나님께서는 간교한 자들, 세상적으로 지혜로우나 심령이 비뚤어져 있고 패역한 자들의 계획과 계교를 다 파하신다. 그것들을 다 헛되게 하신다. 그러므로 시편 9:15-16은, “열방은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짐이여, 그 숨긴 그물에 자기 발이 걸렸도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알게 하사 심판을 행하셨음이여, 악인은 그 손으로 행한 일에 스스로 얽혔도다”라고 말하였다. 또 고린도전서 3:19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 있는 자들을 자기 궤계에 빠지게 하신다고 말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죽이려다 팔아버린 일을 결국 헛되게 하셨다. 그는 모르드개와 유다 민족을 죽이려던 하만의 계획도 헛되게 하셨고 도리어 그와 그의 동료들이 죽임을 당케 하셨다. 또 그는 은 30에 주님을 배신했던 가룟 유다의 계획을 헛되게 하셨다. 유다는 그가 받은 돈을 유대 지도자들에게 도로 갖다준 후에 목매어 죽었다. 예수께서는 저 악한 유대 지도자들과 또 주님을 배신한 제자에 의해 십자가에 내어준 바 되었으나 삼일 만에 부활하셨다.

본문은 또, “하나님은 곤비한 자를 그들의 입의 칼에서, 강한 자의 손에서 면하게 하시나니 그러므로 가난한 자가 소망이 있고 불의가 스스로 입을 막느니라”고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의 처분이며 또한 긍휼의 처분이다. 하나님께서는 고난받는 성도들은 결코 버려두지 않으시며 악한 자들의 입과 손에서 건져내 주실 것이다.

우리는 아주 정당한 일 외에는, 분노하지 말자. 우리는 모든 일을 다 하나님께 맡기고 오직 온유와 겸손, 의와 선, 사랑과 자족함으로 살자.

인생은 고난의 삶을 사는 존재이다. 그것은 근원적으로 죄에서 왔다. 우리는 오직 인생의 참 평안과 영생이 되신 구주 예수 안에 거하자.

하나님께서는 공의로 권선징악의 기이한 일을 행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을 행치 말고 악한 자들의 계교도 두려워 말고, 오직 창조자이시며 섭리자이신 하나님만 의지하고 그의 계명대로만 행하자.

 

17-27절, 하나님의 징계는 복되다

[17절]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 . . .

본문은,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경책을 업신여기지 말지니라”고 말한다. 하나님께 징계받는 것은 복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징계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이기 때문이다. 잠언 3:12는,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같이 하시느니라”고 말한다. 또 히브리서 12:8은,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징계는 유익이 많다. 우선, 하나님의 징계는 우리로 죄를 멀리하고 거룩한 삶을 힘쓰게 만든다. 시편 119:67은,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라고 말하고, 시편 119:71은,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고 말한다. 또 히브리서 12:10-11은,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라고 말한다.

또 하나님의 징계는 우리로 하나님만 의지하며 소망하게 만든다. 다윗은 죽을병에 걸렸을 때 땅의 것들이 그림자같이 헛됨을 깨닫고 고백하기를,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라고 고백하였다(시 39:6-7). 사도 바울도 아시아에서 극심한 환난을 당하고 사형 선고를 받은 것 같은 죽을 고생을 했을 때 이를 통해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는 법을 배우고 깨달았다(고후 1:8-9).

[18-19절]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 . . .

본문은 앞절에 대한 이유의 구절이다. 원문에는 ‘이는’이라는 말로 시작된다. “[이는]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 손으로 고치시나니 여섯 가지 환난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 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게 하시며[하심이라].”

하나님의 징계는 징계 자체로 끝나지 않고 유익을 주시고 회복의 은혜를 주신다. 부모는 자녀를 훈계하고 책망하고 벌을 주고 또 필요한 경우 매를 들지만 그의 잘못을 바로 잡아 주려 함이며 매를 때린 후에도 상처에 약을 발라준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매를 때리시고 고통을 내리시지만, 그 고통에서 우리를 건져 주시고 그 고통을 물리쳐 주시고 회복시켜 주신다. 징계는 우리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다. 최종 심판이 무서운 것이지, 현실의 징계는 감사한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여섯 가지 환난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일곱 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우리에게 미치지 못하게 하신다. 이것은 우리가 여섯 번이나 일곱 번 잘못을 해서 징계를 받아도 회개하면 구원해주시고 재앙을 막아 주신다는 뜻이다. 사람은 부족해서 실수하고 그 실수를 반복하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을 아시고 오래 참으시고 우리가 진심으로 회개할 때 고쳐 주시고 구원해 주신다.

주께서는 세 번이나 그를 부인했던 베드로가 통회자복했을 때 그의 큰 실수를 용서하시고 그에게 찾아오셨고 그에게 “내 양을 치라”는 사명을 다시 주셨다. 주께서는 그의 부활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않았던 믿음 없는 도마에게까지도 찾아와 그의 믿음을 새롭게 하셨다. 주께서는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서로 용서하라고 교훈하셨다(마 18:22). 이것이 죄인들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이다.

[20-21절] 기근 때에 죽음에서, 전쟁 때에 칼 권세에서 너를 . . . .

본문은, “기근 때에 죽음에서, 전쟁 때에 칼 권세에서 너를 구속하실 터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기근으로부터 지키시고 건지신다. 시편 33:18-19도 “여호와는 그 경외하는 자 곧 그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살피사 저희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시며 저희를 기근시에 살게 하시는도다”라고 말한다. 모든 생물이 다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때를 따라 식물 주시기를 바란다(시 104:27). 하나님은 공중의 새를 먹이시고 기르시는 자이시다(마 6:26). 하나님께서는 심지어 까마귀 새끼가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으며 먹을 것이 없어서 오락가락할 때에 그것을 위해 먹을 것을 예비하시는 하나님이시다(욥 38:41).

또 하나님께서는 전쟁 때에도 우리를 칼 권세에서, 즉 오늘날 말로 하면 총알이 빗발치며 포탄이 여기저기서 터지는 상황에서도 우리를 보호하시고 건지신다. 사무엘상 23:14는, 사울이 다윗을 죽이기 위해 많은 군사들을 동원하여 매일 찾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그의 손에 붙이지 않으셨다고 증거한다.

본문은 또, “네가 혀의 채찍을 피하여 숨을 수가 있고 멸망이 올 때에도 두려워 아니할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람들의 비난의 말들로부터도 피하여 숨게 하신다. 시편 31:20은, “주께서 저희를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비밀히 장막에 감추사 구설의 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리이다”라고 말한다. 또 하나님께서는 멸망이 올 때도 피할 길을 주신다. 시편 91편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피난처가 되셔서 새 사냥꾼의 올무와 극한 염병에서 건지실 것이므로 성도는 흑암 중에 행하는 염병과 백주에 황폐케 하는 파멸을 두려워 아니한다고 고백한다(시 91:1-8).

[22-23] 네가 멸망과 기근을 비웃으며 들짐승을 두려워 아니할 . . . .

본문은 “네가 멸망과 기근을 비웃으며 들짐승을 두려워 아니할 것”이라고 말한다. 성도는 멸망과 기근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어떤 종류의 멸망이든지, 어떤 정도의 굶주림이든지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공급하심을 믿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징계로 고난을 주시지만, 우리가 진실히 회개할 때 그 고난으로부터 우리를 건져주실 것이다.

또 성도는 들짐승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리와 늑대, 또는 멧돼지 등의 들짐승들은 농작물을 해치고 사람도 해친다. 하나님께서는 신명기 32:24에서 죄에 대한 징벌로서 들짐승의 이를 보내실 것을 경고하셨다. 에스겔 선지자도 반복해서 하나님께서 징벌의 방법으로 칼과 기근과 사나운 짐승과 온역을 보내실 것을 예언하였다(겔 5:17; 14:21; 33:27). 에스겔 14:21,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네 가지 중(重)한 벌 곧 칼과 기근과 사나운 짐승과 온역을 예루살렘에 함께 내려 사람과 짐승을 그 중에서 끊으리니 그 해가 더욱 심하지 않겠느냐?”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회개하며 순종하는 자기 백성을 들짐승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하시고 지켜주실 것이다.

본문은 “밭에 돌이 너와 언약을 맺겠고 들짐승이 너와 화친할 것임이라”고 말한다. 밭의 돌들은 땅을 농사짓기에 적합하지 않게 만든다. 또 날카롭고 뽀족한 돌들은 밭갈 때 손과 발을 상하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밭에 돌이 우리와 언약을 맺게 하실 것이다. 또 들짐승도 우리와 화목케 하실 것이다. 들짐승이 우리에게 위협이나 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에스겔 34:25에는 하나님께서 회복의 시대에 악한 짐승을 그 땅에서 그치게 하실 것이라는 약속이 있다.

[24-27절] 네가 네 장막의 평안함을 알고 네 우리를 살펴도 . . . .

본문은, “네가 네 장막의 평안함을 알고 네 우리를 살펴도 잃은 것이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장막의 평안함이란 가정과 가족들의 평안함, 즉 가족들의 건강과 일용할 양식과 거처의 평안과 화목 등을 가리킬 것이다. 그것들은 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복을 거두시면, 가족들에게 질병과 궁핍과 불화가 찾아올 것이다.

또 우리를 살펴도 잃은 것이 없다는 것은, 양들이 병에 걸려 죽거나 짐승에게 찢겨 죽는 것들이 없이 다 건강하다는 뜻이다. 그것은 오늘 말로 우리의 재산과 기업과 공장과 가정의 물질생활에 어려움이 없이 평안한 것을 말한다. 땀흘려 일하는 것은 모든 인생의 의무이지만, 그 수고의 대가를 누리고 물질적 유여함을 유지하는 것은 복이다. 신명기 28:4-5는,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면, 몸의 소생과 토지의 소산과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본문은 또, “네 자손이 많아지며 네 후예가 땅에 풀 같을 줄을 네가 알 것이라. 네가 장수(長壽)하다가 무덤에 이르리니 곡식단이 그 기한에 운반되어 올리움 같으리라. 볼지어다, 우리의 연구한 바가 이 같으니 너는 듣고 네게 유익된 줄 알지니라”고 말한다. 우리의 자손들의 수적 번식은 하나님의 복이다. 다산(多産)은 하나님의 복이다(시 127: 4-5). 자녀들은 하나님의 기업이며 상급이다(시 127:3). 또 흰머리와 장수(長壽)도 하나님의 복이다. 하나님께서는 부모 공경에 대해 장수의 복을 약속하셨다(출 20:12). 또 잠언은 “늙은 자의 아름다운 것은 백발”이며 또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고 말했다(잠 20:29; 16:31). 사람이 일생을 살며 원숙한 인격자로서 임종을 맞는 것은 복이다.

하나님의 징계는 복되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표이기 때문이며 또 유익이 많기 때문이다. 징계는 우리를 거룩케 만들고 믿음 있게 만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징계를 달게 받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일곱 가지 환난에서 우리를 건지시고 기근과 전쟁과 사람들의 비난과 들짐승에게서 우리를 지켜주신다. 또 그는 우리의 가정에 평안을 주시고 생업에 복을 주시며 물질적 여유를 주시고 장수(長壽)와 다산(多産)의 복도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섭리자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회개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바르게 살기만 힘써야 한다.

 

 

6장: 욥--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았다

[1-7절] 욥이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분한을 달아 보며 나의 . . . .

욥의 대답이다. “나의 분한(카아스)[고통]을 달아 보며 나의 모든 재앙을 저울에 둘 수 있으면 [좋겠도다. 이는 그것이] 바다 모래보다도 무거울 것이라[것임이로다]. 그럼으로 하여 나의 말이 경솔[성급]하였구나. [이는] 전능자의 살이 내 몸에 박히매 나의 영이 그 독을 마셨나니 하나님의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여 치는구나. 들나귀가 풀이 있으면 어찌 울겠으며 소가 꼴이 있으면 어찌 울겠느냐? 싱거운 것이 소금 없이 먹히겠느냐? 닭의 알 흰자위가 맛이 있겠느냐? 이런 것을 만지기도 내 마음이 싫어하나니 못된 식물같이 여김이니라.”

욥의 고난은 재산의 상실, 자녀들의 죽음, 몸의 병이었다. 이것은 전능자의 화살이며 하나님이 주신 두려움이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고난이었다. 즉 욥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인정하였다. 욥은 하나님께서 주셨다가 하나님께서 취하셨다고 고백했었고(1:21),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 하나님께서 재앙도 주신다고 고백했었다(2:10).

그러면 해결책도 하나님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재앙에서 그를 구원하실 수 있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형편을 회복시키실 수 있고, 또 하나님께서는 복을 다시 주실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신명기 32:39에서,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와 함께 하는 신이 없도다. 내가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 자 없도다”라고 말씀하셨다.

[8-13절] 하나님이 나의 구하는 것을 얻게 하시며 나의 . . . .

욥은 또, “하나님이 나의 구하는 것을 얻게 하시며 나의 사모하는 것 주시기를 내가 원하나니 이는 곧 나를 멸하시기를 기뻐하사 그 손을 들어 나를 끊으실 것이라”고 말한다. 욥은 극심한 고통 중에 하나님께서 자기 생명을 끊으시고 데려가시기를 간구하였다. 그는 사람의 생명이 하나님의 것이며 사람이 스스로 자기 목숨을 끊어서는 안 됨을 알고 있었으므로 하나님께 간구한 것이다.

욥은 또 말한다. “그러할지라도[나를 죽게 하실지라도] 내가 오히려 위로를 받고 무정한[무자비한, 혹독한] 고통 가운데서도 기뻐할 것은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지(카카드)[부인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내가 무슨 기력이 있관대 기다리겠느냐? 내 마지막이 어떠하겠관대 오히려 참겠느냐? 나의 기력이 어찌 돌의 기력이겠느냐? 나의 살이 어찌 놋쇠겠느냐? 나의 도움이 내 속에 없지 아니하냐? 나의 지혜[성공](NIV)가 내게서 쫓겨나지 아니하였느냐?”

욥은 혹독한 고통 중에서도 위로를 받고 기뻐한다고 고백하였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요 기쁨이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하지 않은 까닭에 얻은 위로와 기쁨이었다. 시편 119편의 저자도 “[하나님의 말씀은] 나의 곤란 중에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음이니이다,” “주의 법이 나의 즐거움이 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내 고난 중에 멸망하였으리이다”라고 고백하였다(시 119:50, 92). 성도에게는 위로와 기쁨의 비밀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신비한 위로와 기쁨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교인들이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도 넘치는 기쁨을 가졌고 극한 가난 속에서도 풍성한 연보를 하였다고 증거하였다(고후 8:2).

[14-23절] 피곤한 자 곧 전능자, 경외하는 일을 폐한 자를 . . . .

욥은 말한다. “피곤한 자 곧 전능자, 경외하는 일을 폐한 자를 그 벗이 불쌍히 여길 것이어늘 나의 형제는 내게 성실치 아니함[거짓되이 행함]이 시냇물의 마름 같고 개울의 잦음 같구나.”

욥은 지금 피곤해 있고 하나님을 경외함을 포기할 지경에 있다. 그러나 그를 위로하러 온 그의 친구들은 그를 불쌍히 여기지 않고 그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마치 우기(雨期) 외에는 말라 있는 시내(와디 wadi라고 부름)와 같다.

욥은 또 말한다. “얼음이 녹으면 물이 검어지며 눈이 그 속에 감취었을지라도 따뜻하면 마르고 더우면 그 자리에서 아주 없어지나니 떼를 지은 객들이 시냇가로 다니다가 돌이켜 광야로 가서 죽고[그 길들은 굽어지고 없어지는도다](KJV, NASB). 데마의 떼들이 그것을 바라보고 스바의 행인들도 그것을 사모하다가 거기 와서는 바라던 것을 부끄리고[바라던 것 때문에 부끄러워하고] 낙심하느니라. 너희도 허망한 자라. 너희가 두려운 일을 본즉 겁내는구나. 내가 언제 너희에게 나를 공급하라 하더냐? 언제 나를 위하여 너희 재물로 예물을 달라더냐? 내가 언제 말하기를 대적의 손에서 나를 구원하라 하더냐? 포악한 자의 손에서 나를 구속(救贖)하라 하더냐?”

욥의 친구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일진대 고난당하는 친구를 동정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상대방의 마음과 그의 고통스런 처지를 이해하고 같은 마음과 감정을 가져야 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라”고 교훈하였고(엡 4:32), 사도 베드로는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체휼하며[같은 감정을 가지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라”고 교훈하였다(벧전 3:8).

[24-30절] 내게 가르쳐서 나의 허물된 것을 깨닫게 하라. 내가 . . . .

욥은, “내게 가르쳐서 나의 허물된 것을 깨닫게 하라. 내가 잠잠하리라. 옳은 말은 어찌 그리 유력한지. 그렇지만 너희의 책망은 무엇을 책망함이뇨? 너희가 말을 책망하려느냐? 소망이 끊어진 자의 말은 바람 같으니라. 너희는 고아를 제비 뽑으며 너희 벗을 매매할 자로구나”라고 말한다.

욥은 친구들의 책망이 잘못된 책망이라고 말한다. 그는 남의 허물을 구체적으로 지적함이 없는 막연한 책망은 잘못이라고 말한다. 그는 “내게 가르쳐서 나의 허물된 것을 깨닫게 하라”고 말한다. 또 그는 남의 말꼬리나 잡는 책망도 잘못이라고 말한다. 절망하는 자의 말은 바람 같은데 그 말꼬리나 잡고 책망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또 그는 그들의 책망이 동정심이 없는 책망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너희는 고아를 제비뽑으며 너희 벗을 매매할 자”라고 말한다.

우리가 남을 책망하려면 그의 허물을 정확히 알고 지적하는 책망을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결코 상대방의 말꼬리나 잡는 자가 되지 말고 그의 말의 중심내용에 대해 논하며 잘못된 점을 책망해야 할 것이다. 또 우리의 책망은 동정심을 가진 것이어야 할 것이다.

욥은 자신의 의로움에 대해 확신한다. 그는 말한다. “이제 너희가 나를 향하여 보기를 원하노라. 내가 너희를 대면하여 결코 거짓말하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돌이켜 불의한 것이 없게 하기를 원하노라. 너희는 돌이키라. 내 일이 의로우니라. 내 혀에 어찌 불의한 것이 있으랴. 내 미각이 어찌 궤휼을 분변치 못하랴.”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 4장에서 자신이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한다고 고백하였다(고전 4:4). 우리는 자책할 것이 없을 때 담대함을 얻을 것이다(요일 3:21).

우리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알자. 우리는 우리의 모든 현실이 하나님께서 주신 현실로 깨닫자. 나의 평안과 행복을 내가 이룬 것이라고 생각지 말고 나의 고난을 남의 탓으로 돌려 원망과 불평을 하지 말자. 우리는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자.

우리는 죄를 멀리하고 양심에 거리낌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자책할 것이 없는 의로운 삶을 삶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자.

우리는 계산적이고 이해타산적이거나 기회주의적이지 말고, 변함 없는 참 사랑과 동정심을 가지고 고난당하는 이웃을 불쌍히 여기고 위로하고 구제하자. 또 우리는 남에게 잘못된 권면이나 책망을 하지 말자.

 

 

7장: 욥--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

[1-5절] 세상에 있는 인생에게 전쟁이 있지 아니하냐? 그 날이 . . . .

욥은 계속 말한다. “세상에 있는 인생에게 전쟁(차바)[힘든 노동](BDB, NASB, NIV)이 있지 아니하냐? 그 날이 품꾼의 날과 같지 아니하냐? 종은 저물기를 심히 기다리고 품꾼은 그 삯을 바라나니 이와 같이 내가 여러 달째(야르케 솨웨)[헛된 달들 동안](욥이 고난받은 기간) 곤고를 받으니 수고로운 밤이 내게 작정되었구나. 내가 누울 때면 말하기를 언제나 일어날꼬, 언제나 밤이 갈꼬 하며 새벽까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는구나. 내 살에는 구더기와 흙 조각이 의복처럼 입혔고 내 가죽은 합창(合瘡)되었다가(라가)[굳었다가] 터지는구나.”

세상에는 평안이 없다. 모세는 인생의 7, 80년 생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라고 말했다(시 90:10). 주께서는 인생을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이라고 표현하셨다(마 11:28). 욥은 여러 달 동안 혹독한 고난을 경험하고 있었다. 세상에 고난이 있는 까닭은 근원적으로는 인간의 죄로 인해 땅이 저주를 받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아담에게 “땅은 너로 인해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고 말씀하셨다(창 3:17).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평안을 주셨다(마 11:28; 요 14:27). 또 하나님께서는 장차 참된 안식의 세계인 천국을 우리에게 기업으로 주실 것이다(롬 14:17).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은 이미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서 안식을 누린다(히 4:9-11).

[6-10절] 나의 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니 소망 없이 보내는구나. . . .

욥은 또, “나의 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니 소망 없이 보내는구나. 내 생명이 한 호흡 같음을 생각하옵소서. 나의 눈이 다시 복된 것을 보지 못하리이다”라고 말한다. 천을 짜는 베틀의 북은 쉴새없이 빠르게 움직인다. 욥은 자신의 날들이 베틀의 북보다 빠르다고 표현한다. 인생의 삶은 쏜살같이 빠르고 흐르는 물같이 신속하다. 모세는 7, 80년의 일생이 날아가듯이 신속히 간다고 말하였다(시 90:10). 한 주간이 빨리 지나가고 한 해가 빨리 지나가며 어느덧 황혼이 찾아온다.

또 욥은 자신의 삶이 소망이 없고 한 호흡 혹은 바람(루아크 וּר) 같고 복된 것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삶은 짧고 허무하다. 다윗은 시편 39편에서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 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뿐이니이다.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말하였다(시 39:5-6). 야고보서를 쓴 야고보는 우리의 생명을,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라고 표현하였다(약 4:14).

욥은 본문에서 또, “나를 본 자의 눈이 다시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고 주의 눈이 나를 향하실지라도 내가 있지 아니하리이다. 구름이 사라져 없어짐같이 음부[무덤]로 내려가는 자는 다시 올라오지 못할 것이오니 그는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겠고 자기 처소도 다시 그를 알지 못하리이다”라고 말한다. 인간의 삶이 짧고 덧없이 빠르기 때문에, 사람이 죽고나면 다른 사람들이 그를 지상에서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다. 죽음으로 인생의 지상의 삶은 끝난다.

[11-16절] 그런즉 내가 내 입을 금하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 . . .

욥의 고통은 영혼의 고통이었다. 그는 “그런즉 내가 내 입을 금하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아픔을 인하여 말하며 내 영혼의 괴로움을 인하여 원망하리이다. 내가 바다니이까? 용[바다 짐승, 바다 괴물, 고래]이니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나를 지키시나이까?”라고 말한다. 그는, ‘내 마음의 아픔’ ‘내 영혼의 괴로움’에 대해 말한다. 그는 몸의 고통뿐 아니라, 마음과 영혼의 고통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의 이유를 알지 못할 때, 또 믿음이 약해지거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를 때 생기는 고통이다. 그는 자신이 모든 것을 포용하는 바다인가, 또는 풍랑을 두려워하지 않는 바다 짐승인가라고 묻는다.

또 욥은 침상에서도 평안치 못했다. 그는 “혹시 내가 말하기를 내 자리[침대]가 나를 위로하고 내 침상이 내 수심(愁心)을 풀리라 할 때에 주께서 꿈으로 나를 놀래시고 이상(異像)으로 나를 두렵게 하시나이다”라고 말한다. 침상은 하루하루 피곤한 인생에게 휴식의 공간이다. 그러나 욥은 침상에서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무서운 꿈으로 인해 놀라고 이상(異像)으로 인해 두려움을 가졌다.

이러한 고통 중에서 욥은 죽는 것을 소원하여 말한다. “이러므로 내 마음에 숨이 막히기를 원하오니 뼈(에쳄)[아마 ‘뼈의 쑤심’] (BDB)보다도 죽는 것이 나으니이다. 내가 생명을 싫어하고 항상 살기를 원치 아니하오니 나를 놓으소서. 내 날은 헛것이니이다.” 그는 이미 자기 생일을 저주하였었다(욥 3:1). 또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멸하기를 기뻐하시고 그 손을 들어 그를 끊으시기를 사모하였었다(욥 6: 8-9). 이제 그는 몸의 고통보다 숨이 막혀 죽는 것을 원한다.

[17-19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크게 여기사 그에게 . . . .

욥은 하나님께서 인생을 살피신다고 말한다. 그는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크게 여기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아침마다 권징하시며(파카드)[살피시며] 분초마다 시험하시나이까? 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나의 침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귀중하게 여기시고 마음을 두신다. 시편 8:4도,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라고 말하며, 시편 144:3도,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알아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관대 저를 생각하시나이까?”라고 말한다. 사람은 죄가 많고 부족한 존재인데, 하나님께서는 그를 귀중하게 여기시고 선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아침마다, 분초마다 살피시고 시험하신다. 그는 사람을 잠시라도, 침 삼킬 동안이라도 내버려두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섭리는 전포괄적이다. 그는 우리의 모든 삶,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을 살피신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않는다(시 121:4). 시편 139:1-4는,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라고 말한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다고 말씀하셨다(마 10:30). 요한계시록 2:23에서, 주께서는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이 수고로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참 평안을 누리자. 또 우리는 영원하고 충만한 안식의 세계인 천국만 사모하자.

[20-21절] 사람을 감찰하시는 자여, 내가 범죄하였은들 주께 . . . .

욥은 “사람을 감찰하시는 자여, 내가 범죄하였은들 주께 무슨 해가 되오리이까?”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감찰하시는 하나님’(창 16:13)이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우리의 생각을 아시고 우리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우리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고 우리의 혀의 말을 다 아신다(시 139:2-4).

후반부의 원문은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이다(MT, KJV). 세상에 죄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욥은 자신의 부족과 죄를 인정한다. 또 그는 죄의 보상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느낀다. 하나님의 엄격한 공의 앞에 의인은 아무도 없다. 욥기 34:21은, “하나님은 사람의 길을 주목하시며 사람의 모든 걸음을 감찰하신다”고 말한다. 또 히브리서 4:12-13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고 말한다.

성도는 오직 하나님의 용서와 진심의 순종으로 조금 의로운 삶을 산다. 그러나 욥은 지금 하나님께서 그의 죄를 용서치 않으시고 그를 주목하셔서 그의 심령으로 무겁고 피곤하게 하신다고 말한다. “어찌하여 나로 과녁을 삼으셔서 스스로[내 자신에게] 무거운 짐이 되게 하셨나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내 허물을 사하여 주지 아니하시며 내 죄악을 제하여 버리지 아니하시나이까? 내가 이제 흙에 누우리니 주께서 나를 부지런히 찾으실지라도 내가 있지 아니하리이다.” 하나님의 용서가 아니고서는 사람은 자신의 죄에 대해 아무 해결책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용서를 간청한다.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는 이 빠른 세월의 흐름 속에서 헛된 세상일에 시간을 다 쓰지 말고 세월을 아끼고 지혜를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며 오직 믿는 일과 주 안에서 선한 일들에 힘쓰자(엡 5:15-17).

우리는 평안할 때, 즉 심령의 평안, 몸의 건강, 물질적 여유, 침상에서의 평안이 있을 때, 하나님께 감사하며 열심히 살자. 그러나 고난이 올 때 우리는 욥을 기억하고 또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자.

우리는 무익한 존재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귀중히 여기시고 우리의 모든 삶을 살피심을 감사하며, 오직 믿음으로 살고 또 선하게만 살자.

우리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부족투성이의 죄인임을 인정하자. 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죄와 칭의를 감사하며 천국을 사모하자.

 

 

8장: 빌닷--네 자녀들이 범죄했기 때문이다

[1-7절] 수아 사람 빌닷이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어느 때까지 . . . .

본장은 수아 사람 빌닷의 말이다. 빌닷은 말하였다. “네가 어느 때까지 이런 말을 하겠으며 어느 때까지 네 입의 말이 광풍과 같겠는가. 하나님이 어찌 심판을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 네 자녀들이 주께 득죄하였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붙이셨나니[만일 네 자녀들이 주께 죄를 범하였고 주께서 그들을 그 죄(죄책 혹은 죄의 형벌)에 붙이셨다면](KJV, NASB), 네가 만일 하나님을 부지런히 구하며 전능하신 이에게 빌고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그가] 정녕 너를 돌아보시고 네 의로운 집으로 형통하게 하실 것이라.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빌닷은 욥의 자녀들이 범죄함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벌하여 데려가신 것이라고 말한다. 빌닷의 말은, 욥에게는 해당되지 않으나, 옳은 말이다. 그것은 율법에 밝히 계시된 일반적 진리이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므로 인간의 죄에 대해 공의로 벌하신다. 사람이 범죄할 때, 그는 그 자신이나 그의 자녀를 죽이기도 하신다(계 2:23).

그러므로 사람은 회개해야 한다. 사람이 회개할 때 하나님은 그를 용서하시고 받으시고 회복시키실 것이다. 잠언 28:13,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요한계시록 3: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또 회개하는 자는 현재 미약할지라도 장차 심히 창대케 되는 복을 누릴 것이다.

[8-10절] 청컨대 너는 옛시대 사람에게 물으며 열조의 터득한 . . . .

욥의 친구 빌닷은 또 말한다. “청컨대 너는 옛시대 사람에게 물으며 열조의 터득한 일을 배울지어다. ([이는] 우리는 어제부터 있었을 뿐이라. 지식이 망매하니[없으니]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와 같으니라[같음이니라].) 그들이 네게 가르쳐 이르지 아니하겠느냐? 그 마음에서 나는 말을 발하지 아니하겠느냐?”

옛시대 사람의 말과, 열조의 터득한 일은 옛길, 검증된 길이며 선한 길이다. 신명기 32:7에서, 모세도,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비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이르리로다”라고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옛날부터 사람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셨다. 그는 에녹에게, 노아에게, 아브라함에게, 모세에게, 다윗에게 자신을 나타내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만나며 그의 음성을 들었던 경건한 선조들의 증언과 지혜는 유익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서도 말씀하기를,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고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고 하셨다(렘 6:16).

그것은 과거에 매이거나 미래지향적 태도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시대가 바뀌어도 바뀌지 않으며 어느 시대에나 가감해서는 안 된다. 기독교는 시대마다 변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진리의 변질을 경계해야 한다. 사도들을 통해 선포되고 전수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은 없다(갈 1:7-8). 보수신앙은 귀한 것이다. 데살로니가후서 2:15는, “이러므로 형제들아,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전해진 내용]을 지키라”고 말했다. 성경은 옛부터 주신 하나님의 말씀의 저장소이다. 그것은 영적 보화의 창고이다.

[11-19절] 왕골이 진펄이 아니고 나겠으며 갈대가 물 없이 . . . .

“왕골(고메)[파피루스 나무]이 진펄이 아니고 나겠으며 갈대가 물 없이 자라겠느냐? 이런 것은 푸르러도 아직 벨 때 되기 전에 다른 풀보다 일찍이 마르느니라.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의 길은 다 이와 같고 사곡한(카네프)[불경건한] 자의 소망은 없어지리라.”

빌닷은 하나님을 잊어버린 불경건한 자를 파피루스 나무나 갈대에 비교한다. 그것들은 진펄이나 물에서 왕성히 자라지만 아직 푸르를 때 다른 풀보다 일찍 말라버린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불경건한 자는 하나님 대신 사람이나 돈이나 세상 권력을 의지하는데, 사람은 변하고 연약하고 악하고 돈은 있다가 없어지고 세상 권력도 허무하다.

빌닷은 또 말한다. “그 믿는 것이 끊어지고 그 의지하는 것이 거미줄 같은즉 그 집을 의지할지라도 집이 서지 못하고 굳게 잡아도 집이 보존되지 못하리라. 식물이 일광을 받고 푸르러서 그 가지가 동산에 벋어가며 그 뿌리가 돌무더기에 서리어서[감기어서] 돌 가운데로 들어갔을지라도 그곳에서 뽑히면 그 자리도 모르는 체하고 이르기를 내가 너를 보지 못하였다 하리니 그 길의 희락은 이와 같고 그 후에 다른 것이 흙에서 나리라.” 악인들의 믿는 것은 거미줄 같다. 또 그들은 한때 왕성한 것 같아도 곧 자취를 찾을 수 없이 뽑히는 식물 같다.

이사야 2:22는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라고 말했고, 잠언 23:5는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날개를 내어 하늘에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고 했고, 시편 20:7은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고 했다. 사람과 돈과 재물을 의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20-22절] 하나님은 순전한 사람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악한 . . . .

빌닷은 또, “하나님은 순전한 사람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악한 자를 붙들어 주지 아니하신다”고 말한다. ‘순전한 자’라는 원어()는 ‘완전한 자, 온전한 자,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라는 뜻이다.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의 뜻과 계명대로 사는 자를 가리킨다. 그런 자가 ‘의인’이다. 성경은 노아나 욥이나 다니엘을 ‘의로운 자’라고 부른다(창 6:9; 욥 1:1; 겔 14:14, 20). 하나님께서는 그를 재앙 가운데 버려두지 않으시고 그를 도우시고 건지시고 그에게 능력을 베푸신다. 시편 34:19는,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라고 말하고, 또 시편 37:25는,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라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는 붙들어 주지 아니하신다. 그는 악한 자의 기도는 응답하지 않고 재앙에서 건져주지 않으신다.

빌닷은 또, “웃음으로 네 입에, 즐거운 소리로 네 입술에 채우시리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의인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풍성히 주신다. 그러므로 다윗은,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라고 고백하였다(시 4:7).

빌닷은 또, “너를 미워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입을 것이라. 악인의 장막은 없어지리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창 12:3). 하나님께서는 의인을 미워하는 자를 미워하시고 그런 자로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신다. 그는 그런 악인의 장막을 없어지게 하시고 그런 자로 패망케 하신다.

사람이 범죄하면 자기와 자기의 자녀들이 망하며 죽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죄를 회개해야 한다. 이 진리는 옛날부터 검증된 진리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이다. 그러므로 성경대로 사는 것이 복된 삶이다. 악한 자의 삶은 허무하다. 하나님 대신 사람과 돈과 세상 권력을 의지하는 것은 헛되다. 그러나 순전한 사람은 버림을 받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죄를 회개하고, 사람과 돈과 세상 권력을 의지하지 말고, 또 하나님 앞에서 범죄치 말자. 성경을 읽고 성경의 교훈대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 안에서 의와 선을 행하자.

 

 

9장: 욥--하나님과 쟁변할 자 없다

1-15절, 하나님과 쟁변할 자 없다

[1-4절] 욥이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진실로 그 일이 그런 줄을 . . . .

욥은 친구들이 옳은 말을 한다고 말한다. 그들의 말은 다 진리이지만, 단지 그 적용이 적절치 않았다. 욥은 “내가 진실로 그 일이 그런 줄을 알거니와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고 말한다. 하나님은 세상의 표준이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다 죄인이다.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과 같다(사 64:6). 의인은 하나도 없다(롬 3:10).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롬 3:20-22).

그러나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 안에서 의롭게 살아야 한다. 주께서는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다(마 5:20). 그 의는 그리스도의 속죄의 의뿐 아니라, 성도의 성심의 율법 준행도 내포한다고 본다.

욥은 또, “사람이 하나님과 쟁변하려 할지라도 천 마디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리라”고 말한다. 유한한 죄인인 인생이 어떻게 거룩하시고 무한하신 하나님과 말로라도 다툴 수 있겠는가? 인생은 오직 겸손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의 말씀을 묵상하고 지키고 실천하고 또 기도에 힘써야 할 뿐이며, 하나님과 다투려 해서는 안 된다.

욥은 또 말하기를, “하나님은 마음이 지혜로우시고 힘이 강하시니 스스로 강퍅히 하여 그를 거역하고 형통한 자가 누구이랴”고 한다. 사람이 그의 마음을 굳게 하고 하나님을 거역한다면, 그는 형통한 자가 될 수 없다. 복의 근원 되신 하나님을 대적하고 거역하는 자는 이 세상에서와 오는 세상에서 결코 아무 좋은 것도 기대할 수 없다.

[5-11절] 그가 진노하심으로 산을 무너뜨리시며 옮기실지라도 . . . .

욥은 또, “그가[하나님께서] 진노하심으로 산을 무너뜨리시며 옮기실지라도 산이 깨닫지 못하며 그가 땅을 움직여 그 자리에서 미신즉 그 기둥이 흔들린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죄악에 대하여 노하시면 산을 무너뜨리시고 옮기시며 땅을 움직이실 것이다. 그는 지진을 주실 것이다. 성경은 세상 종말의 징조들 중의 하나로 지진을 말한다(마 24:7; 계 16:17-20).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재앙이다.

욥은 또 “그가 해를 명하여 뜨지 못하게 하시며 별들을 봉하신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낮에도, 밤에도 어두움을 주실 수 있고 또 주신다. 출애굽기 10:23에 보면, 애굽에 내린 열 가지 재앙들 중 아홉 번째 재앙에서 하나님께서는 애굽 온 땅에 3일 동안 캄캄한 흑암을 주셨다. 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달리셨을 때 정오부터 오후 3시까지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였다(마 27:45).

욥은 또 “그가 홀로 하늘을 펴시며 바다 물결을 밟으신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을 홀로 창조하셨고 바다도 주장하신다. 욥은 또 “[그가] 북두성(곰 자리)과 삼성(오리온 자리)과 묘성(황소 자리)과 남방의 밀실(별 자리들)을 만드셨으며 측량할 수 없는 큰 일을, 셀 수 없는 기이한 일을 행하시느니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하늘의 별들을 주관하는 자이시다. 또 그는 기적의 하나님, 기적을 행하는 하나님이시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많은 기적들을 행하셨음을 증거한다.

욥은 또 “그가 내 앞으로 지나시나 내가 보지 못하며 그가 내 앞에서 나아가시나 내가 깨닫지 못하느니라”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영이시므로 그의 지나가심과 활동을 사람이 알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셔서 지금도 활동하시는 하나님이시다.

[12절] 하나님이 빼앗으시면 누가 막을 수 있으며 무엇을 . . . .

욥은 또, “하나님이 빼앗으시면 누가 막을 수 있으며 무엇을 하시나이까 누가 물을 수 있으랴”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다. 그는 천지만물을 주셨고 우리의 생명을 주셨고 우리의 가족을 주셨다. 그는 우리의 건강을, 우리의 재물을, 우리나라를, 그리고 우리의 모든 좋은 환경여건을 주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또한 빼앗으시는 하나님이시다.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의 소유물이므로 하나님은 그 주신 모든 것을 빼앗으실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주로 사람의 죄에 대한 징벌로, 주신 것을 빼앗으신다. 그러나 간혹 성도의 훈련을 위해 그것을 빼앗기도 하신다. 그는 생명을 빼앗아 죽게도 하시고, 가족을 빼앗아 고아와 과부가 되게도 하시고, 건강을 빼앗아 아프게도 하시고, 재물을 빼앗아 가난하게도 하신다. 그는 국가를 빼앗아 나라 없는 설움을 당케도 하시고, 좋은 환경을 빼앗아 고난을 당케도 하신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빼앗으시는 것, 곧 하나님이 내리시는 재앙을 피하거나 막아낼 힘이 없다. 그는 단지 하나님의 은혜로 그 고난을 참고 견딜 수 있을 뿐이다. 하나님께서 죽이시면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고 가족을 취하시면 고아와 과부가 될 수밖에 없고 건강을 취하시면 아플 수밖에 없고 재물을 취하시면 가난할 수밖에 없고 나라를 취하시면 방랑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 항의할 수 있는 자는 없다.

즉, 하나님은 주권자이시다. 신명기 32:39,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와 함께 하는 신이 없도다. 내가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 자 없도다.” 에베소서 1:11,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

[13-15절] 하나님이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시나니 라합을 돕는 . . . .

욥은 또 말한다. “하나님이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시나니(혹은 ‘아니하시면’[KJV]) 라합[바다 괴물]을 돕는 자들[라합의 동류들]이 그 아래 굴복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감히 대답하겠으며 무슨 말을 택하여 더불어 변론하랴.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감히 대답하지 못하고 나를 심판하실 그에게 간구하였을 뿐이라.”

하나님의 공의의 진노는 참으로 두렵다. 바다 괴물과 그 동류들도 그 앞에 굴복할 정도로 두렵다. 하물며 연약한 인간인 우리가 하나님의 그 위엄 앞에 어떻게 서서 감히 하나님 앞에 무어라고 대답하며 변론할 수 있겠는가. 비록 우리가 의로울지라도 하나님 앞에 대답할 수 없고 우리를 심판하실 하나님, 엄위하신 그에게 간구할 수 있을 뿐이다. 욥은 하나님의 엄위하심, 하나님의 능력, 특히 하나님의 두려운 진노를 알고 있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행위의 의(義)가 내세울 것이 없는 의(義)임을 인정하고 있다.

우리 인간의 의는 하나님 앞에 보잘것없다. 인간은 자신의 행위의 의로 하나님 앞에 담대히 서지 못한다. 신약성경이 증거하는 바와 같이,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을 뿐이다. 빌립보서 3:9는,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고 말했다. 또 히브리서 10:19는,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다”고 말한다. 우리의 자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뿐이다. 우리의 담대함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뿐이다. 물론 여실한 순종은 더욱 평안과 담대함을 줄 것이지만(요일 3:21-22).

인생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지 못하다. 욥은 친구들의 말대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인정한다. 하나님께서는 엄위하신 심판자이시다. 그는 지혜와 힘이 강하시다. 그러므로 사람은 그를 거역할 수 없다. 또 하나님께서는 주권자이시다. 그가 빼앗으시면 막을 수가 없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엄위하신 절대주권자이심을 알자. 또 우리는 우리의 의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임을 알자.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십자가 의 안에서 의롭게 살아야 한다.

 

16-24절, 고난 중에 하나님만 바라보자

[16절] 가령 내가 그를 부르므로 그가 내게 대답하셨을지라도 . . . .

욥은 또 말하기를, “가령 내가 그를 부르므로 그가 내게 대답하셨을지라도 내 음성을 들으셨다고는 내가 믿지 아니하리라”고 한다. 욥의 말은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기를 힘써야 한다. 주께서는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라고 교훈하셨다(눅 18:1). 사도 바울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교훈했고(살전 5:17) 또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말했다(빌 4:6-7). 기도는 성도의 특권이며 영적 호흡과 같다.

또 욥은 기도의 응답을 부인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 올리는 우리의 기도는 응답된다. 기도는 응답을 받는 데 가치가 있다. 시편 65:2는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고 증거한다. 주께서도,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말씀하셨고(마 7:7-8), 또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고 하셨다(요 14:14).

본문은 우리가 기도 응답을 받을 때 교만치 말아야 할 것을 보인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마치 우리만 특별히 사랑하시는 것처럼 생각하지 말고 특히 과장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비천한 피조물이며 부족하고 누추한 죄인이다. 그러므로 기도의 응답을 받았어도, 우리의 부족한 점들을 생각하면 감히 무엇을 자랑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께 겸손과 두려움으로 감사해야 할 뿐이다. 기도의 응답은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 때문에 영적 교만에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17-20절] 그가 폭풍으로 나를 꺾으시고 까닭 없이 내 상처를 많게 하시며 나로 숨을 쉬지 못하게 하시며 괴로움으로 내게 채우시는구나. . . .

욥은 또, “그가 폭풍으로 나를 꺾으시고 까닭 없이 내 상처를 많게 하시며 나로 숨을 쉬지 못하게 하시며 괴로움으로 내게 채우시는구나”라고 말한다. 욥은 자신이 당하는 큰 고통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 중에라도 불평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그 고난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인정해야 한다.

욥은 또 “힘으로 말하면 그가 강하시고 심판으로 말하면 누가 그를 호출하겠느냐?”고 말한다. ‘그를 호출한다’는 원어(요이데니)는 ‘나를 호출한다’는 뜻이다(MT, BDB, KJV).9) 본문은, 내가 호출을 당하여 엄위하신 하나님과 대면하여 말하지 못할 것이라는 뜻이다.

욥은 또,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내 입이 나를 정죄하리니 가령 내가 순전할지라도 나의 패괴함을 증거하리라”고 말한다. 욥은 고난 중에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부족을 느낀다. 엄격한 기준으로 보면, 나는 죄인이며 내 속에는 사악함과 부패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실상 항변할 자격도, 항변할 담력도 없는 인생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 고난이 하나님의 징계라 할지라도 그것을 달게 받고, 또 훈련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참고 견뎌야 한다. 베드로전서 4:12-13은,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고 말한다. 우리의 위로자와 구원자는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21절] 나는 순전하다마는 내가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 . . .

욥은, “나는 순전하다마는 내가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내 생명을 천히 여기는구나”라고 말한다. “나는 순전하다마는”이라는 말은 문맥상 “나는 순전할지라도”라는 뜻 같다(KJV, NIV). ‘순전함’이라는 원어()는 ‘완전함, 흠 없음’이라는 뜻이다. 욥은 양심에 가책되는 것이 없는 순전한 삶을 살았다. 욥기 6:10,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지 아니하였음이니라.” 욥기 6:29, “너희는 돌이키라. 내 일이 의로우니라.” 욥기 9:20,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내 입이 나를 정죄하리니 가령 내가 순전할지라도 나의 패괴함을 증거하리라.”

“내가 나를 돌아보지 않는다”는 원문은 “나는 나의 영혼을 알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것은, 그가 지금 왜 이런 처지에 있는지, 그 이유가 무엇인지 또 그 결말이 어떨지 알지 못한다는 뜻이든지, 혹은 앞절과 더불어 그가 자신의 온전함과 의를 하나님 앞에서 주장할 수 없다는 뜻이든지, 혹은 뒤따르는 구절과 함께, 고난 중에 심히 피곤해서 자신의 생명을 돌아보며 존중할 힘이 없다는 뜻일 것이다.

또 그는 “내 생명을 천히 여기는구나[멸시하리로다]”라고 말한다. 욥은 자신의 건강이 회복될 가망성이 없고 너무 고통스럽기 때문에 살고 싶은 의욕도 버리고 있었다. 욥은 욥기 6:8-9에서 “하나님이 나의 구하는 것을 얻게 하시며 나의 사모하는 것 주시기를 내가 원하나니 이는 곧 나를 멸하시기를 기뻐하사 그 손을 들어 나를 끊으실 것이라”고 말하였고, 7:15-16에서는 “이러므로 내 마음에 숨이 막히기를 원하오니 뼈[뼈의 쑤심]보다도 죽는 것이 나으니이다. 내가 생명을 싫어하고 항상 살기를 원치 아니하오니 나를 놓으소서. 내 날은 헛것이니이다”라고 말하였다.

[22-24절] 일이 다 일반이라. 그러므로 나는 말하기를 하나님이 . . . .

욥은 또 말한다. “일이 다 일반이라. 그러므로 나는 말하기를 하나님이 순전한 자나 악한 자나 멸망시키신다 하나니 홀연히 재앙(쇼트)[매, 채찍]이 내려 도륙될[사람들을 죽일] 때에 무죄한 자의 고난(맛사)[절망(BDB, KB, NASB, NIV) 혹은 시련(KJV)]을 그가 비웃으시리라. 세상이 악인의 손에 붙이웠고 재판관의 얼굴도 가리워졌나니[그가 그 재판관들의 얼굴을 가리우셨으니] 그렇게 되게 한 이가 그가 아니시면 누구이뇨?”

하나님께서는 의인에게 때때로 고난과 재앙을 내리신다. 그는 악인에게 주시는 것과 비슷하게 의인에게도 고난을 주신다. 의인도 자연적 재해나 교통사고 등을 당한다. 또 악한 세상에서 의인이 불의한 재판을 받고 고통을 받기도 한다. 또 보통 그 재난이 욥의 경우처럼 일시적이지만, 어떤 경우는 순교의 죽음으로 끝나기도 한다.

세상 사람들이 보면 성도에게 닥친 이런 고난은 이해하기 어려운 불행 같은 일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영생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큰 일이나 큰 불행도 아니며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고난 중에도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증거하고 믿음을 증거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믿고 진리가 진리이기 때문에 믿는 것이 참 믿음, 순수한 믿음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6:24).

그러나 많은 경우,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악인들을 공의로 심판하신다. 시편 58:11은, “때에 사람의 말이 진실로 의인에게 갚음이 있고 진실로 땅에서 판단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하리로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고 또 기도의 응답을 믿어야 한다. 또 우리는 기도의 응답을 받았을 때에도 교만치 말아야 한다. 인생은 비천하고 누추한 존재이므로 항상 겸손과 두려움으로 처신해야 한다.

모든 고난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의인에게도 고난이 있다. 내가 순전할지라도 나의 의를 주장할 수 없고 나의 패괴함을 느낄 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신 고난을 달게 받고 하나님만 바라야 한다. 죄가 있으면 회개하고 생각나는 죄가 없으면 참고 인내하자.

 

25-35절, 고난의 해결책

[25-26절] 나의 날이 체부보다 빠르니 달려가므로 복을 볼 수 . . . .

욥은 또, “나의 날들이 체부(루츠)[달리는 자]보다 빠르도다. 그것들은 질주하며 복을 보지 못하도다. 그 지나가는 것이 빠른 배 같고 움킬 것에게 날아 내리는 독수리와도 같구나”라고 말한다.

욥은 고난 중에 자기의 날들이 빨리 지나감을 고백하였다. 그는 그의 날들이 달리는 자보다 빠르며 빠른 배와 같고 먹이를 낚아채려고 날아 내려오는 독수리와 같다고 말한다. 시편 90:5는 사람의 일생이 잠깐 자는 것 같고 아침에 돋는 풀 같다고 말하고, 시편 90:10은 사람의 날들이 신속히 가니 날아간다고 말한다. 옛 사람들은 세월이 화살 같다고 표현하였고 흐르는 물과 같다고도 하였다.

욥은 그 고난의 날들의 빠른 흐름 속에서 이제는 행복을 볼 수 없었다. 사람의 일생은 고난의 길이다. 우리의 세월도 빠르게 지나가고 있다. 우리는 이 빠른 세월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떤 삶이 인간의 정로(正路)요 복된 삶인가? 에베소서 5:15-17은,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고 말한다.

그러면 주의 뜻이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고 섬기는 것이다. 성경의 요점은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수님을 믿고 따르라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하나님을 찬송하고 기도에 항상 힘써야 한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성경에 명하신 선한 일들에 힘쓰는 것이다. 그것은 전도와 구제 등을 포함한 하나님과 이웃들을 위한 선한 봉사의 일들에 힘쓰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선한 일을 하게 하기 위함이시다(딛 2:14).

[27-28절] 가령 내가 말하기를 내 원통함을 잊고 얼굴빛을 고쳐 즐거운 모양을 하자 할지라도 오히려 내 모든 고통을 두려워하오니 . . . .

욥은 또 말한다. “가령 내가 말하기를 내 원통함[혹은 불평]을 잊고 얼굴빛을 고쳐 즐거운 모양을 하자 할지라도 오히려 내 모든 고통을 두려워하오니 주께서 나를 무죄히 여기지 않으실 줄을 아나이다.”

욥은 자신의 고난의 두 가지 가능한 대책을 언급한다. 하나는 그의 원통함 혹은 불평을 잊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자신의 얼굴빛을 기쁘고 즐겁게 하는 것, 즉 마음을 기쁘게 가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대책은 잠시 도움이 되거나 많이 수련하면 약간은 도움이 될지 모르나, 참된 대책이 되지는 못한다. 그것은 불완전한 대책일 뿐이다.

계속 그의 몸이 아프고 계속 그의 환경이 심히 어려운데, 어떻게 그것이 참된 대책이 되겠는가? 그는 그의 모든 고통을 두려워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무죄(無罪)히 여기지 않으실 줄을 안다고 말한다. 즉 하나님께서 그를 죄인처럼 고통 가운데 버려두실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망각이나 인위적 기쁨은 대책이 되지 못한다.

그러면 참된 대책, 완전한 대책은 어디에 있는가? 참되고 완전한 대책은 하나님의 도우심에 있다. 하나님께서 그의 심령에 참된 평안과 위로를 주셔야 가능하고, 하나님께서 그의 몸의 건강을 회복시켜 주시고 그의 환경을 회복시켜 주셔야 참 대책이 될 것이다.

주께서는 우리에게 참 대책, 완전한 대책이 되신다. 주께서는 친히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셨다(요 14:27). 또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축원하였다(살후 3:16).

[29-31절] 내가 정죄하심을 입을진대 어찌 헛되이 . . . .

욥은 또, “내가 정죄하심을 입을진대 어찌 헛되이 수고하리이까? 내가 눈 녹은 물로 몸을 씻고 잿물로 손을 깨끗이 할지라도 주께서 나를 개천에 빠지게 하시리니 내 옷이라도 나를 싫어하리이다”라고 말한다. 욥은 본문에서 인간의 죄책(罪責)의 문제를 말한다.

욥은 자신이 당하는 고난이 하나님의 정죄하심 같다고 표현한다. 죄인에게 고난의 징벌을 주시듯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고난을 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고난을 벗어나려는 모든 수고, 예컨대 망각하는 것이나 마음과 얼굴을 기쁘고 즐겁게 가지는 것 등이 헛될 것이다.

또 그는 자신이 눈 녹은 물로 몸을 씻고 잿물 즉 비누로 손을 깨끗이 씻을지라도 주께서 그를 개천에 빠지게 하실 것이라고 표현한다. 그것은 그가 인간의 죄악된 본성이 가지는 죄악된 생각, 죄악된 감정, 죄악된 말, 죄악된 행위들을 완전히 벗어버리지 못함을 나타내는 것 같고, 더욱이 하나님께서 주신 고난이 그것을 증거하는 것 같다는 뜻일 것이다. 그래서 그는, 깨끗한 옷을 더러운 몸에 입지 않듯이, 그의 옷이라도 그의 죄악된 몸을 싫어할 것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면 인간의 고난의 해결책, 인간의 죄책의 해결책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인간 속에나 인간의 행위나 노력에 있지 않다. 인간의 고난의 해결책은 오직 하나님 안에 있고, 인간의 죄책의 해결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와 성령의 위로에 있다. 사도 바울은 담대히 증거하기를,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고 하였다(롬 8:33-34).

[32-35절] 하나님은 나처럼 사람이 아니신즉 내가 그에게 . . . .

욥은 또 말한다. “하나님은 나처럼 사람이 아니신즉 내가 그에게 대답함도 불가하고 대질하여 재판할 수도 없고 양척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도 없구나.”

욥은 하나님께서 육신이 아니시고 영이시며 크신 위엄을 지니신 영이시므로 단지 육신적으로 대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의 위엄 앞에서 감히 대답할 수 없다고 말한다. ‘대질하여 재판할 수 없다’는 말은 ‘함께 법정에 갈 수 없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원고가 되시고 욥이 피고가 되든지, 아니면 욥이 원고가 되고 하나님께서 피고가 되시든지 간에, 그가 법정에 가서 자신의 고난의 정당성을 따져볼 수 없다는 뜻일 것이다. 또 그 둘 사이에 판결할 자도 없다고 말한다.

욥은 또, “주께서 그 막대기를 내게서 떠나게 하시고 그 위엄으로 나를 두렵게 하지 아니하시기를 원하노라. 그리하시면 내가 두려움 없이 말하리라. 나는 본래 그런 자가 아니니라”고 말한다. ‘나는 본래 그런 자가 아니다’(웨로켄 아노키 임마디)는 말은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도다’라는 뜻이다(MT, KJV, NASB, NIV).

욥은, 하나님께서 고난의 막대기로 그를 치셨고 그를 누르시며 그 위엄으로 그를 두렵게 하시므로 하나님의 위엄 앞에서 그에게 감히 무슨 말씀을 할 수 없다고 말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 막대기를 그에게서 떠나게 하시면 그가 무엇을 말할 수 있겠으나 지금 그의 처지는 그렇지 않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욥의 심적 고통과 방황의 해결책은 오직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께서 그 고난과 징계의 막대기를 거두시는 데 있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평강과 위로를 주시는 데 있다.

고난 중에 망각과 인위적 기쁨은 참된 대책이 되지 못한다. 고난 중에 참된 대책과 해결책은 하나님뿐이시다. 하나님께서만 우리에게 죄사함으로 인한 내면적 평안과 위로를 주시고 육신적, 환경적 구원과 회복을 주실 수 있다. 인간의 죄책의 해결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와 성령의 위로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그의 긍휼만 바라자.

우리는 빠른 세월의 흐름 속에서 오직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지혜롭게 또 경건하게 살고,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선한 일들을 힘쓰자.

 

 

10장: 욥이 하나님께 탄원함

[1-7절] 내 영혼이 살기에 곤비하니 내 원통함을 발설하고 . . . .

욥은 또 말한다. “내 영혼이 살기에 곤비하니 내 원통함을 발설하고 내 마음의 괴로운 대로 말하리라. 내가 하나님께 아뢰오리니 나를 정죄하지 마옵시고 무슨 연고로 나로 더불어 쟁변하시는지 나로 알게 하옵소서.” 욥은 극심한 고통 중에서 하나님께서 그를 그 고난 중에 두신 이유를 질문하며 그것을 알기를 원한다.

또 그는, “주께서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학대하시며 멸시하시고 악인의 꾀에 빛[호의의 빛]을 비취시기를 선히 여기시나이까? 주의 눈이 육신의 눈이니이까? 주께서 사람의 보는 것처럼 보시리이까?”라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악한 꾀를 품는 악한 자들을 징벌치 않으시고 호의를 베푸시는 것 같음에 대해 묻는다. 또 그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외모로 보고 악한 자를 선한 자로 잘못 판단하기 쉬우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중심을 보시고 공의로 판단하지 않으시는가라고 반문한다(삼상 16:7).

욥은 또, “주의 날이 어찌 인생의 날과 같으며 주의 해가 어찌 인생의 날과 같기로 나의 허물을 찾으시며 나의 죄를 사실(査實)하시나이까? 주께서는 내가 악하지 않은 줄을 아시나이다. [그러나] 주의 손에서 나를 벗어나게 할 자도[자가] 없나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달리 사람의 모든 것을 단숨에, 완전히, 정확하게 파악하시고 판단하시며, 또 자신이 악하지 않음도 아실 것이지만, 자신이 현실의 고난을 피할 수 없다고 말한다.

[8-12절] 주의 손으로 나를 만드사 백체를 이루셨거늘 이제 . . . .

욥은 또, “주의 손으로 나를 만드사 백체를 이루셨거늘 이제 나를 멸하시나이다. 기억하옵소서. 주께서 내 몸 지으시기를 흙을 뭉치듯 하셨거늘 다시 나를 티끌로 돌려보내려 하시나이까?”라고 말한다. 욥은 하나님께서 친히 손으로 인간을 만드셨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맨 처음에 흙으로 인간의 몸을 만드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을 죽게 하시면, 그 몸은 다시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욥은 또 “주께서 나를 젖과 같이 쏟으셨으며 엉긴 젖처럼 엉기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라고 말한다. 인간의 몸과 신체기관의 시작은 참으로 신비롭다. 엉긴 젖 같은 작은 수정란이 어떻게 정교한 인간의 몸과 각 기관이 되는지 참으로 신비롭다.

욥은 또 “[하나님께서] 가죽과 살로 내게 입히시며 뼈와 힘줄로 나를 뭉치셨다”고 말한다. 인간의 몸은 9,000억개 이상 아마 수조 개의 세포들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또 인간의 몸에는 200개 이상의 뼈들과 600개 이상의 근육들이 있다고 한다. 또 눈, 귀, 코, 입 외에 약 130개의 많은 기관들이 여러 계통들을 구성한다고 하는데, 예를 들면, 위와 식도와 내장과 간 등으로 구성된 소화기 계통, 코와 폐 등으로 구성된 호흡기 계통, 피와 심장 등으로 구성된 순환기 계통, 임파와 호르몬 등으로 구성된 내분비 계통, 뇌, 척추, 신경 등으로 구성된 신경계통, 그리고 비뇨기 계통 등이 그러하다고 한다. 몸의 구조는 참 정교하다.

욥은 또, “생명과 은혜를 내게 주시고 권고하심으로 내 영을 지키셨나이다”라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몸뿐 아니라 생명을 주셔서 살아 움직이게 하셨는데, 그것은 그 몸 속에 영을 주셨기 때문이다. 영 혹은 영혼은 인간의 생명 원리이다.

[13-17절] 그러한데 주께서 이것들을 마음에 품으셨나이다. . . .

욥은 또, “그러한데 주께서 이것들을 마음에 품으셨나이다. 이 뜻이 주께 있은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말한다. ‘이것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고난의 일들, 현재의 재앙들을 가리킨다고 본다.

욥은 또 “내가 범죄하면 주께서 나를 죄인으로 인정하시고 내 죄악을 사유치 아니하시나이다”라고 말한다. 욥은 자신이 범죄한 적이 없다고 말하지 않고, 자신이 범죄한 적이 있으나 하나님의 사죄를 믿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지금 그는 고통 중에서 그것에 의문을 가진다.

욥은 또 “내가 악하면 화가 있을 것이오며 내가 의로울지라도 머리를 들지 못하올 것은 내 속에 부끄러움이 가득하고 내 환난을 목도함이니이다”고 말한다. 욥은 자신이 악하면 화를 받을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하는데도 머리를 들 수 없다. 왜냐하면 그에게 많은 환난과 수치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욥은 또, “내가 머리를 높이 들면 주께서 사자처럼 나를 사냥하시며 내게 주의 기이한 능력을 다시 나타내시나이다. 주께서 자주자주 증거하는 자를 갈마들여[번갈아 가며] 나를 치시며 나를 향하여 진노를 더하시니 군대가 갈마들어 치는 것 같으니이다”라고 말한다.

욥의 경우와 같이, 의인에게도 때때로 고난이 있고 그 고난 중에 하나님의 뜻을 잘 모를 때도 있다. 그러나 그때에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며 또 우리를 향해 선한 뜻과 목적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로마서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또 우리는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이 없을지라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의탁해야 한다(사 50:10).

[18-22절] 주께서 나를 태에서 나오게 하셨음은 어찜이니이까? . . .

욥은, “주께서 나를 태에서 나오게 하셨음은 어찜이니이까? 그렇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기운이 끊어져 아무 눈에도 보이지 아니하였을 것이라. 있어도 없던 것같이 되어서 태에서 바로 무덤으로 옮겼으리이다”라고 말한다. 욥은 극심한 고난 중에서, 차라리 태어날 때 죽어서 태어났더라면 태에서 곧바로 무덤으로 옮겼을 것이라고 말한다.

욥은 또, “내 날은 적지 아니하니이까? 그런즉 그치시고 나를 버려두사 저으기 평안하게 하옵소서”라고 말한다. ‘저으기’라는 말은 ‘조금이라도’라는 뜻이다. 욥은 고난 중에 자신의 일생이 짧음을 더욱 느낀다. 시편 39:5에서 다윗도 죽음 앞에서 인생이 손넓이만큼 되고 없는 것같이 짧다고 고백하였다. 욥은 이 짧은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시는 고난을 그치시고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눈길과 손길을 거두시기를 소원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려두셔서 조금이라도 평안을 얻게 해 달라고 구한다. 참 평안은 하나님께로부터만 온다. 민수기 6:2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요한복음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데살로니가후서 3:16, “평강의 주께서 친히 . . .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욥은 또, “내가 돌아오지 못할 땅 곧 어둡고 죽음의 그늘진 땅으로 가기 전에 그리하옵소서. 이 땅은 어두워서 흑암 같고 죽음의 그늘이 져서 아무 구별(세데르)[질서]이 없고 광명도 흑암 같으니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죽음의 그늘진 땅, 곧 무덤에 들어가기 전, 지금 이 짧은 세상에서 하나님께로부터 평안 얻기를 간구한다.

욥은 무슨 까닭으로 나와 쟁변하시나이까라고 하나님께 탄원하며 또 그의 몸을 만드시고 그 속에 생명의 영을 주신 하나님께서 그의 죄를 용서치 않으시고 그에게 고난을 주시고 친구들이 번갈아가며 그를 치게 하신다고 아뢴다. 그는 죽기 전에 조금이라도 평안 주시기를 원한다.

우리는 고난의 이유를 모를 때라도 당황치 말고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한 뜻이 계실 것을 믿고 참고 인내하자. 우리는 하나님께서만 우리에게 회복과 평안을 주실 수 있음을 알고 하나님만 바라고 의지하자. 우리는 오직 하나님 앞에서 양심적으로 바르게만 살아가자.

 

 

11장: 소발--욥에게 회개를 촉구함

[1-6절] 나아마 사람 소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말이 많으니 어찌 . . . .

나아마 사람 소발이 대답하여 말하였다. “말이 많으니 어찌 대답이 없으랴. 입이 부푼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함을 얻겠느냐? 네 자랑하는(바드)(혹은 ‘어리석은’)(BDB) 말이 어떻게 사람으로 잠잠하게 하겠으며 네가 비웃으면 어찌 너를 부끄럽게 할 사람이 없겠느냐? 네 말이 내 도는 정결하고 나는 주의 목전에 깨끗하다 하는구나.” 소발은 욥이 자기의 말이 정결하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다고 말한다고 증거한다. 그렇다. 욥은 자신이 악하지 않다고 말하였다.

소발은 또 말하기를, “하나님은 말씀을 내시며 너를 향하여 입을 여시고 지혜의 오묘로 네게 보이시기를 원하노니 이는 그의 지식이 광대하심이라. 너는 알라. 하나님의 벌하심이 네 죄보다 경하니라”고 한다. “하나님의 벌하심이 네 죄보다 경하다”는 원문은 “하나님께서 너의 악을 네게 다 돌리지 아니하신다”는 뜻이다(BDB).

소발의 말은 일반적으로는 맞는 말이다. 단지 그것이 욥의 경우에 해당되지 않는 것은 욥의 고난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엄격한 벌은 죽음, 곧 지옥형벌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택한 백성의 죄를 용서하시며, 비록 징벌하셔도 엄격히 하지는 않으신다. 시편 103:10,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에스라 9:13, “우리 하나님이 우리 죄악보다 형벌을 경하게 하시고.” 우리의 구원과 평안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로 말미암은 것이다.

[7-9절] 네가 하나님의 오묘를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 . . .

소발은 계속 말한다. “네가 하나님의 오묘를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온전히 알겠느냐? 하늘보다 높으시니 네가 어찌 하겠으며 음부[지옥]보다 깊으시니 네가 어찌 알겠느냐? 그 도량은 땅보다 크고 바다보다 넓으니라.” ‘도량’이라는 원어(밋다)는 ‘연장, 외연(extension)’이라는 뜻으로, 크기나 길이를 가리킨다.

사람은 하나님의 본체와 그의 지혜와 지식을 알 수 없고, 하나님의 섭리의 모든 일들, 그 목적과 그 방법도 알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인간의 지혜로 알 수 없고 오직 성경말씀을 통해 또 하나님의 성령의 깨닫게 하심으로 조금 알 수 있을 뿐이다.

욥기 5:9, “하나님은 크고 측량할 수 없는 일을 행하시며 기이한 일을 셀 수 없이 행하시나니.” 시편 145:3, “여호와는 광대하시니[크시니, great]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광대하심[크심]을 측량치 못하리로다.” 신명기 29:29,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

전도서 3:11,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始終)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전도서 8:17, “하나님의 모든 행사를 살펴보니 해 아래서 하시는 일을 사람이 능히 깨달을 수 없도다. 사람이 아무리 애써 궁구할지라도 능히 깨닫지 못하나니 비록 지혜자가 아노라 할지라도 능히 깨닫지 못하리로다.” 로마서 11: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고린도전서 1: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10-12절] 하나님이 두루 다니시며 사람을 잡아 가두시고 . . . .

소발은 또, “하나님이 두루 다니시며 사람을 잡아 가두시고 개정(開廷)하시면[모이게 하시면, 법정을 여시면] 누가 능히 막을소냐?”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주권적 섭리자 되심을 고백한 것이다. 또 그는 “하나님은 허망한 사람을 아시나니 악한 일은 상관치 않으시는 듯하나 다 보시느니라”고 말한다. 주권자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모든 행위, 특히 사람의 모든 악한 행위를 보시고 판단하시고 보응하신다.

소발은 그러나 “허망한 사람은 지각이 없나니 그 출생함이 들나귀 새끼 같으니라”고 말한다. 원문은, “들나귀 새끼가 사람으로 태어난다면, 허망한 사람이 지각이 있으리라”(NASB)고 번역할 수 있다. 본문은 들나귀 새끼가 사람으로 태어날 수 없듯이, 허망한 사람이 지각을 가지지 못할 것이라는 뜻이라고 본다.

시편 10편에 보면, 악인들은 잘못 생각한다. 4절, “악인은 그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치 아니하신다 하며.” 11절, “저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잊으셨고 그 얼굴을 가리우셨으니 영원히 보지 아니하시리라 하나이다.” 13절, “어찌하여 악인이 하나님을 멸시하여 그 마음에 이르기를 주는 감찰치 아니하리라 하나이까?” 물론 악인들의 이러한 생각은 큰 잘못이며 큰 착각이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모든 일을 감찰하신다. 14절,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잔해와 원한을 감찰하시고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 15절, “악인의 팔을 꺾으소서. 악한 자의 악을 없기까지 찾으소서.” 히브리서 4:12-13,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들의]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13-14절] 만일 네가 마음을 바로 정하고 주를 향하여 손을 . . . .

소발은 또, “만일 네가 마음을 바로 정하고[가다듬고, 준비하고] 주를 향하여 손을 들 때에 네 손에 죄악이 있거든 멀리 버리라. 불의로 네 장막에 거하지 못하게 하라”고 말한다. 그의 말은 옳은 말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소원을 아뢸 때 우리 손에 죄악이 있으면 우리는 그것을 멀리 버려야 하고 회개해야 한다. 또 우리는 죄와 불의가 우리의 장막에 거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우선, 우리는 우리의 손에 죄악이 있지 않도록 해야 한다. 손은 우리 몸의 매우 중요한 지체이다. 우리는 손으로 사물을 만지고 붙잡고 물건을 집고 또 옮긴다. 우리의 손은 우리의 행위를 가리킨다. 이사야 1:15는,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인간은 손으로 우상을 섬기며 살인하고 간음하고 도적질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손이 깨끗한지 항상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는 죄악을 멀리해야 한다. 죄는 무서운 질병이나 더러운 오물과 같다. 우리는 밖에 나갔다 오면 건강 위생을 위해 손을 비누로 한두 번 깨끗이 씻는다. 이와 같이, 죄성의 잔재를 가진 우리는 이 죄와 마귀의 시험이 많은 세상에 살 때 우리의 손이 죄로 더러워지기 쉬우므로 늘 손을 씻듯이 죄를 회개하고 죄를 멀리 버려야 한다.

또 우리는 불의로 우리의 장막에 거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장막’은 집 곧 가정을 말한다. 사람은 자기 집에서부터 잘 해야 한다. 사람은 가족이 함께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 아간은 멸망할 물건을 장막 땅 속에 묻었다가 온 가족이 멸망을 당하였다(수 7장). 아나니아 부부는 함께 하나님과 사도 베드로를 속이다가 즉사하였다(행 5장).

[15절] 그리하면 네가 정녕 흠 없는 얼굴을 들게 되고 굳게 서서 . . . .

소발은 또 말한다. “그리하면 네가 정녕 흠 없는 얼굴을 들게 되고 굳게 서서 두려움이 없으리라.” ‘그리하면’은 앞절에 말한 대로 “그가 손에 죄악이 있으면 그것을 멀리 버리고 불의로 그의 장막에 거하지 못하게 한다면”이라는 뜻이다. 본문은 담대함의 비결을 말한다.

‘네가 정녕’이라는 말은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확실하다는 뜻이다. 소발의 말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일반적인 진리와 일치한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얼굴을 못 든다. 죄를 짓고도 얼굴을 드는 자가 있다면 그는 뻔뻔한 자이거나 위선적인 자일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죄를 멀리하고 의를 행하면 담대함을 가질 것이다. 하나님의 계명을 행하는 자는 불안함이나 두려움이 없을 것이다.

성경은 담대함의 비결이 의를 행하는 데 있음을 증거한다. 레위기 26:36, “내가 그들[계명을 어기는 자들]의 마음으로 약하게 하리니 그들은 바람에 불린 잎사귀 소리에도 놀라 도망하기를 칼을 피하여 도망하듯 할 것이요 쫓는 자가 없어도 엎드러질 것이라.” 여호수아 1:7- 8,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시편 119:6, “내가 주의 모든 계명에 주의할 때에는 부끄럽지 아니하리이다.” 잠언 28:1,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니라.” 요한일서 3:21,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죄는 양심의 불안과 두려움을 가져오지만, 의는 양심의 평안과 담대함을 준다.

[16-17절] 곧 네 환난을 잊을 것이라. 네가 추억할지라도 물이 . . . .

소발은 또 말하기를, “곧 네 환난을 잊을 것이라. 네가 추억할지라도 물이 흘러감 같을 것이라”고 한다. 인간은 자신의 죄 때문에 환난을 당하는 경우가 많다. 신명기 28장은 범죄하는 사람이 재앙을 당할 것이라고 말하였고, 이사야 48:22는 악인에게 평강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손을 깨끗이 하고 악을 철저히 회개하면 그 환난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환난에서 그를 건져주실 것이다. 그는 곧 환난을 잊을 것이며 추억할지라도 물이 흘러감 같을 것이다. 와디(wadi)라는 강은 비가 온 직후에는 요란스런 물소리를 내며 흐르지만, 비가 그치고 얼마 지나면 흐르던 물은 다 없어져버리고 다 말라버리고 조용해진다. 회개한 자에게도 그렇다. 지금 아무리 환난이 요란한 강처럼 흐른다 할지라도, 그것은 곧 지나갈 것이다.

소발은 또, “네 생명의 날이 대낮보다 밝으리니 어두움이 있다 할지라도 아침과 같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어두움은 환난을 가리키고 대낮이나 아침은 평안과 행복을 가리킨다. 회개하며 의를 행하는 자는 평안을 얻고 행복한 삶을 누릴 것이다.

신명기 28:2-6은,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고 말한다. 또 이사야 48:18은, “슬프다, 네가 나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였도다. 만일 들었더면 네 평강이 강과 같았겠고 네 의가 바다 물결 같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의는 평강을 가져온다.

[18-20절] 네가 소망이 있으므로 든든할지며 두루 살펴보고 . . . .

소발은, “네가 소망이 있으므로 든든할지며 두루 살펴보고 안전히 쉬리라”고 말한다. 성도는 소망이 있다. 하나님이 우리의 소망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키시고 도우시며 좋은 길로 인도하신다. 다윗은 하나님이 그의 반석이시며 요새시며 방패시요 산성이시라고 고백하였다(시 18:2). 성도는 하나님께 소망을 둔다. 또 하나님을 소망하는 성도에게는 안전함과 편안히 쉼이 있다. 그러므로 시편 3:5-6은,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천만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이다”라고 말한다.

소발은 또, “네가 누워도 두렵게 할 자가 없겠고 많은 사람이 네게 첨을 드리리라”고 말한다. ‘첨을 드린다’는 원어(킬라, 피엘형)는 ‘호의를 구한다’는 뜻이다. 그 어떤 사람도, 원수 마귀까지도 성도를 두렵게 하지 못하고, 도리어 그에게 호의를 구하는 자가 많을 것이다.

소발은 또, “그러나 악한 자는 눈이 어두워서 도망할 곳을 찾지 못하리니 그의 소망은 기운이 끊침이리라”고 말한다. 악한 자는 불경건하고 부도덕한 자, 회개치 않는 자를 가리킨다. 악한 자는 눈이 어두워 재앙을 피하여 도망할 곳을 찾지 못한다. 그는 재앙을 피할 수 없고 거기에서 구원을 받을 수 없다. 그러므로 잠언 10:25는, “회리바람이 지나가면 악인은 없어져도 의인은 영원한 기초 같으니라”고 말하였고, 잠언 24:16은,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고 말하였다.

소발은 “그의 소망은 기운이 끊침이리라”고 말한다. ‘기운이 끊친다’는 말은 영혼의 호흡이 끊어진다는 뜻으로 죽는다는 말이다. 악인은 소망이 없다. 악인의 소망은 절망이다. 그의 소망은 죽음뿐이다.

하나님의 벌하심은 우리의 죄보다 가볍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죄나 자기 자신의 죄라도 다 알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위를 정확히 다 아신다. 또 그는 공의로 모든 일을 판단하시고 보응하신다. 자기 백성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벌하심이 우리의 죄보다 가볍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징벌에 대해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말고 달게 받아야 하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을 구해야 한다.

악인은 환난을 피하지 못하고 멸망하고 말 것이다. 죄는 환난의 원인이며 악은 불행을 가져온다.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손을 깨끗이 하고 우리 집을 깨끗이 해야 한다. 우리는 허망한 사람이 되지 말고, 주권자 하나님과 그의 감찰하심을 아는 지혜를 구하며 얻고 특히 악을 버리고 힘써 선을 행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손을 살펴보고 혹 죄가 있으면 즉시 그것을 회개하고 멀리 버려야 한다. 또 불의가 우리 집에, 우리 가정에 거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담대함을 얻고 환난에서 구원을 얻고 평안과 기쁨을 누릴 것이다.

 

 

12장: 욥--하나님께서는 악인의 형통을 허용하셨다

[1-6절] 욥이 대답하여 가로되 너희만 참으로 사람이로구나. . . .

욥은 대답해 말했다. “너희만 참으로 사람이로구나. 너희가 죽으면 지혜도 죽겠구나. 나도 너희같이 총명이 있어 너희만 못하지 아니하니 그 같은 일을 누가 알지 못하겠느냐? 하나님께 불러 아뢰어 들으심을 입은 내가 이웃에게 웃음 받는 자가 되었으니 의롭고 순전한 자가 조롱거리가 되었구나. 평안한 자의 마음은 재앙을 멸시하나 재앙이 실족하는 자를 기다리는구나.”

욥은 자신의 경건과 도덕적 삶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응답을 받았음을 증거한다. 그는 자신의 의로움과 순전함을 확신한다. 그러나 그는 지금 친구들에게 조롱을 받고 있고, 지금 실족하는 자같이 재앙을 당하고 있다고 말한다. 원문의 5절은 영어성경들과 같이 “발이 미끄러지는 자는 평안한 자의 생각에서 멸시를 받는 등불 같구나”(KJV), 또는 “평안한 자는 발이 미끄러지는 자들을 위해 준비된 재앙을 멸시하는구나”(NASB, NIV)라고 번역된다.

욥은 또, “[그러나] 강도의 장막은 형통하고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자가 평안하니 하나님이 그 손에 후히 주심이니라”고 말한다. 소발은 앞장에서 욥의 재앙이 그의 죄의 결과이므로 죄를 회개하라고 욥에게 말했는데, 욥은 이제 그의 논리를 반박한다. 재앙이 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면 왜 강도의 장막이 형통하고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자가 평안한가라고 반문한다. 과연, 세상에는 그런 일이 있다. 시편 73편 같은 성경도 악인의 평안과 형통에 대해 말한다(4-5, 12, 14절).

[7-12절] 이제 모든 짐승에게 물어 보라. 그것들이 네게 . . . .

욥은 또, “이제 모든 짐승에게 물어 보라. 그것들이 네게 가르치리라. 공중의 새에게 물어 보라. 그것들이 또한 네게 고하리라. 땅에게 말하라. 네게 가르치리라. 바다의 고기도 네게 설명하리라”고 말한다.

욥은 악한 자들이 형통하다는 것은 자연계도 아는 진리라고 말한다. 자연계는 강한 것들이 약한 것들을 잡아먹는 약육강식의 세계다. 사자와 호랑이는 약한 짐승들을 잡아먹고, 독수리나 매는 약한 새들을 잡아먹고, 상어 같은 큰 물고기들은 작은 물고기들을 잡아먹는다.

욥은 또, “이것들 중에 어느 것이 여호와의 손이 이를 행하신 줄을 알지 못하랴. 생물들의 혼(네페쉬 )[생명]과 인생들의 영(루아크)[호흡]이 다 그의 손에 있느니라. 입이 식물의 맛을 변별함같이 귀가 말을 분변하지 아니하느냐? 늙은 자에게는 지혜가 있고 장수하는 자에게는 명철이 있느니라”고 말한다.

이 모든 자연계의 현상은 하나님의 손이 행하신 것들이다. 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들, 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는 것들이다. 인간 세계에서 악한 자들이 활개치고 일시적으로 형통한 것도 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이며 다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일들이다.

이런 도덕적 무질서는 창조 세계의 본래의 모습은 아니다. 인간이 범죄하고 타락한 이후, 세상은 본래의 도덕성과 질서와 아름다움을 잃어버렸고 악화되어 이렇게 혼란스러운 세상이 된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이 있고 천국에서는 완전한 의의 회복이 있을 것이지만, 현실 세계에서는 악인이 형통한 일들이 있다. 이 사실은 단순히 권선징악(勸善懲惡)의 도덕 개념으로는 이해되지 않는다.

[13-25절] 지혜와 권능이 하나님께 있고 모략과 명철도 그에게 . . . .

욥은 계속 말한다. “지혜와 권능이 하나님께 있고 모략과 명철도 그에게 속하였나니 그가 헐으신즉 다시 세울 수 없고 사람을 가두신즉 놓이지 못하느니라. 그가 물을 그치게 하신즉 곧 마르고 물을 내신즉 곧 땅을 뒤집나니 능력과 지혜가 그에게 있고 속은 자와 속이는 자가 다 그에게 속하였으므로[속하도다.] 모사(謀士)[고문들]를 벌거벗겨 끌어가시며 재판장으로 어리석은 자가 되게 하시며 열왕의 맨 것을 풀어[푸시며] 그들의 허리를 동이시며 제사장들을 벌거벗겨 끌어가시고 권력이 있는 자를 넘어뜨리시며 충성된 자의 말을 없이 하시며 늙은 자의 지식을 빼앗으시며 방백들에게 멸시를 쏟으시며 강한 자의 띠를 푸시며 어두운 가운데서 은밀한 것을 드러내시며 죽음의 그늘을 광명한 데로 나오게 하시며 만국을 커지게도 하시고 다시 멸하기도 하시며 열국으로 광대[확창]하게도 하시고 다시 사로잡히게도 하시며 만민의 두목들[우두머리들]의 총명을 빼앗으시고 그들을 길 없는 거친 들로 유리하게 하시며 빛 없이 캄캄한 데를 더듬게 하시며 취한 사람같이 비틀거리게 하시느니라.”

개인들의 생사화복(生死禍福)과 국가들의 흥망성쇠(興亡盛衰)는 다 지혜와 권능, 모략과 명철이 충만하신 하나님께 달려 있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에서 유일하신 주권적 섭리자이시다. 그는 자연만물을 주관하시고 세상 나라들을 주관하신다.

또 세상에는 악인들이 형통하고 의인들이 고통당하는 일들이 있다. 세상에는 인간의 도덕적 기준에 맞지 않는 일들이 있다. 또 세상에는 인간의 능력 밖의 일들, 즉 사람이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 그러나 그런 것들도 다 주권자 하나님의 손 안에서 되어지는 것들이다.

욥은 자신의 경건과 도덕적인 삶을 확신하고 있다. 그러나 세상에는 악인의 형통함이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개인의 생사화복과 국가의 흥망성쇠를 홀로 다 주관하신다.

우리는 세상의 도덕적 무질서로 인해 당황하거나 낙심치 말자.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믿자.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믿자. 우리는 오직 경건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절대순종하고 의롭고 선하게만 살자. 의인은 결국 승리할 것이며 악인은 결국 망할 것이다.

 

 

13장: 욥--나의 허물과 죄를 알게 하소서

[1-12절] 나의 눈이 이것을 다 보았고 나의 귀가 이것을 듣고 . . . .

욥은 계속 말한다. “나의 눈이 이것을 다 보았고 나의 귀가 이것을 듣고 통달하였느니라. 너희 아는 것을 나도 아노니 너희만 못한 내가 아니니라. 참으로 나는 전능자에게 말씀하려 하며 하나님과 변론하려 하노라. 너희는 거짓말을[거짓말로] 지어내는 자(토펠)[바르는 자, 더럽히는 자]요 다 쓸데없는 의원이니라. 너희가 잠잠하고 잠잠하기를 원하노라. 이것이 너희의 지혜일 것이니라. 너희는 나의 변론을 들으며 내 입술의 변명을 들어 보라. 너희가 하나님을 위하여 불의를 말하려느냐? 그를 위하여 궤휼을 말하려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낯을 좇으려느냐?[그를 위해 편벽됨을 보이려느냐?](NASB, NIV) 그를 위하여 쟁론하려느냐? 하나님이 너희를 감찰하시면 좋겠느냐? 너희가 사람을 속임같이 그를 속이려느냐? 만일 가만히 낯을 좇을진대[편벽됨을 보일진대] 그가 정녕 너희를 책망하시리니 그 존귀가 너희를 두렵게 하지 않겠으며 그 위엄이 너희에게 임하지 않겠느냐? 너희 격언은 재 같은 속담이요 너희의 방어하는 것은 토성(土城)이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를 바르게 이해하고 파악해야 할 뿐 아니라, 그 진리를 바르게 적용해야 한다. 사람이 아무리 바른 말, 좋은 말이라도 잘못 적용하면, 그것도 계속 잘못 적용하면, 그는 거짓말로 더럽히는 자가 되고 쓸데없는 의원과 같이 될 것이다. 또 그의 말은 불의하고 거짓된 말이 되고, 남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재 같은 속담”이며 “토성(土城)”이 될 것이다.

[13-19절] 너희는 잠잠하고 나를 버려두어 말하게 하라. 무슨 . . . .

욥은 또 말한다. “너희는 잠잠하고 나를 버려두어 말하게 하라. 무슨 일이 임하든지 내가 당하리라. 내가 어찌하여 내 살을 내 이로 물고 내 생명을 내 손에 두겠느냐?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소망이 없노라(MT, ASV).10)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변백[변호]하리라. 사곡한[불경건한] 자는 그의 앞에 이르지 못하나니 이것이[그는](KJV) 나의 구원이 되리라. 너희는 들으라.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설명을 너희 귀에 담을지니라. 보라 내가 내 사정을 진술하였거니와 내가 스스로 의로운 줄 아노라. 나와 변론할 자가 누구이랴. 그러면 내가 잠잠하고 기운이 끊어지리라.”

욥은 친구들의 지적과 책망에 대하여 자신이 의롭다고 주장한다. “보라, 내가 내 사정을 진술하였거니와 내가 스스로 의로운 줄 아노라”(18절). 그는 앞에서도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였었다. 욥기 9:21, “나는 순전하다마는.” 10:7, “주께서는 내가 악하지 않은 줄을 아시나이다.” 또 12:4에서, 그는 자신을 “의롭고 순전한 자”라고 표현하였다.

욥은 또 하나님께서 자신을 죽이실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겠다고 말한다. 15절,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소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변호하리라.” 또 욥은 자신의 구원을 기대한다. 16절, “불경건한 자는 그의 앞에 이르지 못하나니 이것이 나의 구원이 되리라.” 그는 자신이 불경건한 자가 아니며 하나님께서 그의 구원이 되리라고 믿고 있다.

[20-28절] 오직 내게 이 두 가지 일을 행하지 마옵소서. . . .

욥은 또 말한다. “오직 내게 이 두 가지 일을 행하지 마옵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얼굴을 피하여 숨지 아니하오리니 곧 주의 손을 내게 대지 마옵시며 주의 위엄으로 나를 두렵게 마옵실 것이니이다. 그리하시고 주는 나를 부르소서. 내가 대답하리이다. 혹 나로 말씀하게 하옵시고 주는 내게 대답하옵소서. 나의 불법과 죄가 얼마나 많으니이까? 나의 허물과 죄를 내게 알게 하옵소서. 주께서 어찌하여 얼굴을 가리우시고 나를 주의 대적으로 여기시나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날리는 낙엽을 놀래시며 마른 검불을 따르시나이까? 주께서 나를 대적하사 괴로운 일들을 기록하시며 나로 나의 어렸을 때에 지은 죄를 받게 하시오며 내 발을 착고[차꼬]에 채우시며 나의 모든 길을 살피사 내 발자취를 한정하시나이다. 나는(웨후)[그는](KJV) 썩은 물건의 후패함 같으며 좀먹은 의복 같으니이다.”

욥은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행하심을 알고 그가 그의 손을 자기에게 대어 죽게 하지 마시고 그의 위엄으로 자기를 두렵게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면서(21절) 자기에게 주신 고난의 이유를 알기를 원한다.

욥은 자신의 죄 문제를 생각한다. 그는 “나의 불법과 죄가 얼마나 많으니이까? 나의 허물과 죄를 내게 알게 하옵소서”라고 말하며(23절), 또 “주께서 나를 대적하사 괴로운 일들을 기록하시며 나로 나의 어렸을 때에 지은 죄를 받게 하시오며”라고 말한다(26절).

욥은 또한 자신의 비천함을 고백한다. 그는 자신을 ‘날리는 낙엽’과 ‘마른 검불’이라고 표현하고(25절), 자신이 ‘썩는 물건의 후패함’과 같고 ‘좀 먹은 의복’ 같다고 말한다(28절). 사람은 병으로 죽음 직전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자신에 대한 바른 가치 평가를 한다.

진리를 잘못 적용하는 것은 거짓말하는 것과 같고 쓸데 없는 의원의 처방과 같다. 욥은 계속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한다(9:21; 10:7; 12:4). 그는 하나님께 그의 허물과 죄를 그에게 알게 해주시기를 기도한다.

우리는 성경을 자세히 읽고 묵상함으로써 바르게 해석하고 바르게 적용하자. 또 우리는 욥처럼, 바울처럼(고전 4:4), 요한처럼(요일 3:21) 자책할 거리가 없는 자가 되고, 또 고난 중에 참고 하나님만 바라자.

 

 

14장: 욥--허무한 인생으로 쉬게 하소서

[1-2절] 여인에게서 난 사람은 사는 날이 적고 괴로움이 가득하며 . . . .

욥은 또, “여인에게서 난 사람은 사는 날이 적고 괴로움이 가득하며 그 발생함이 꽃과 같아서 쇠하여지고 그림자같이 신속하여서 머물지 아니하거늘”이라고 말한다. 그는 인생의 삶에 대해 말한다.

욥은 우선, 인생의 삶이 짧다고 말한다. 1절, “여인에게서 난 사람은 사는 날이 적고.” 야고보서 4:14도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고 말하였다. 인생은 짧다.

욥은 또한 인생의 삶이 괴로움이 가득하다고 말한다(1절). 야곱도 바로 앞에 섰을 때, 자신의 나이가 130세요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다고 말했다(창 47:9). 모세도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라고 말했다(시 90:10).

욥은 또한 인생의 삶이 꽃과 같이 쇠한다고 말한다. 2절, “그 발생함이 꽃과 같아서 쇠하여지고.” 시편 103:15도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고 말하며, 이사야 40장도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며,”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고 말했다(사 40:6, 8). 꽃은 아름다우나 오래가지 못하고 얼마 후에 시들고 만다. 인생의 영광과 아름다움이 그와 같다.

욥은 또 인생의 삶이 그림자같이 신속하다고 말한다. 2절, “그림자같이 신속하여서 머물지 아니하거늘.” 성경은 다른 곳에서도 인생이 그림자와 같이 머무름이 없다고 말한다(대상 29:15; 시 39:6; 144:4). 시편 90:10은 인생의 삶이 날아가듯 신속히 간다고 표현하였다.

[3-4절] 이와 같은 자를 주께서 눈을 들어 살피시나이까? 나를 . . . .

욥은 또 말한다. “이와 같은 자를 주께서 눈을 들어 살피시나이까? 나를 주의 앞으로 이끌어서 심문하시나이까?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서 낼 수 있으리이까? 하나도 없나이다.”

욥은 앞에서 인간의 삶을 풀 같은 인생, 꽃 같은 인생, 그림자 같은 인생, 한마디로 허무한 인생이라고 증거하였다. 그는 이제 하나님께서 이렇게 허무한 존재인 인생을 눈을 들어 살피시나이까, 이런 나를 주의 앞으로 이끌어서 심문하시나이까라고 반문한다.

또 그는 인생이 다 죄로 인해 더러워져 있는 존재이며 이런 인생에게서 어떻게 깨끗한 것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엄격히 심판하시면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깨끗한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뜻이다. 모든 인류가 다 깨끗지 못하며 죄성을 가진 죄인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성경이 밝히 증거하며 우리가 인정하는 진리이다.

창세기 8:21,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레위기 12장에 의하면, 여인은 출산 후 속죄제물로 자신을 속죄해야 하였다. 그것은 인간이 죄 가운데 출생하는 죄인임을 나타낸다. 욥기 15:14, “사람이 무엇이관대 깨끗하겠느냐? 여인에게서 난 자가 무엇이관대 의롭겠느냐?” 시편 51: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예레미야 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요한복음 3:5,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모든 사람에게 중생이 필요하다. 로마서 3:10-12,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5-6절] 그 날을 정하셨고 그 달수도 주께 있으므로 그 제한을 . . . .

욥은 또 말하기를. “그 날을 정하셨고 그 달수도 주께 있으므로 그 제한을 정하여 넘어가지 못하게 하셨사온즉 그에게서 눈을 돌이켜 그로 쉬게 하사 품꾼같이 그 날을 마치게 하옵소서”라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일생을 다 정하셨다. 그는 우리가 언제 태어나서 언제 죽을 지를 다 정하셨다. 하나님의 정하신 그 제한된 날들 동안 우리는 세상에 살고 그 날이 끝나면 죽는다. 하나님의 정하신 그 제한을 아무도 넘어가지 못한다. 다니엘은 하나님께서 벨사살 왕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고 주장하신다고 말했다(단 5:23).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일생도 작정하시고 주장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날 밤 한 부자 농부의 영혼을 불러가실 수 있듯이(눅 12:16-20), 그는 우리의 영혼도 언제든지 그의 정한 때에 불러가실 수 있다.

이제 욥은 하나님께서 품꾼 같은 삶을 사는 자신에게 생이 마칠 때까지 평안 주시기를 소원한다. 평안의 삶은 세상에서 가장 복된 삶이 아닌가?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로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한다고 고백하였다(시 4:8). 또 그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의 영혼은 평안히 거할 것이라고 증거하였다(시 25:13). 주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셨다(요 14:27). 사도들은 서신들에서 반복해서 성도들에게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였다(롬 1:7; 고전 1:3 등).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후서 3:16에,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노라. 주는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실지어다”라고 썼다.

[7-22절] 나무는 소망이 있나니 찍힐지라도 다시 움이 나서 . . . .

욥은 또 말한다. “나무는 소망이 있나니 찍힐지라도 다시 움이 나서 연한 가지가 끊이지 아니하며 그 뿌리가 땅에서 늙고 줄기가 흙에서 죽을지라도 물 기운에 움이 돋고 가지가 발하여 새로 심은 것과 같거니와, 사람은 죽으면 소멸되나니 그 기운이 끊어진즉 그가 어디 있느뇨? 물이 바다에서 줄어지고 하수[강]가 잦아서 마름같이 사람이 누우면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하늘이 없어지기까지 눈을 뜨지 못하며 잠을 깨지 못하느니라. 주는 나를 음부[무덤]에 감추시며 주의 진노가 쉴 때까지 나를 숨기시고 나를 위하여 기한을 정하시고 나를 기억하옵소서. 사람이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 나는 나의 싸우는[고난의] 모든 날 동안을 참고 놓이기를[변화가 오기까지](KJV, NASB) 기다렸[기다리]겠나이다. 주께서는 나를 부르셨[부르시]겠고 나는 대답하였[대답하]겠나이다. 주께서는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아껴 보셨겠나이다[사모하시리이다]. 그러하온데[이는] 이제 주께서 나의 걸음을 세시오니 나의 죄를 살피지 아니하시나이까?[살피지 아니하심이니이다.] 내 허물을 주머니에 봉하시고 내 죄악을 싸매시나이다. [그러나] 무너지는 산은 정녕 흩어지고 바위는 그 자리에서 옮겨가고 물은 돌을 닳게 하고 넘치는 물은 땅의 티끌을 씻어 버리나이다. 이와 같이 주께서는 사람의 소망을 끊으시나이다. 주께서 사람을 영영히 이기셔서 떠나게 하시며 그의 얼굴빛을 변하게 하시고 쫓아 보내시오니 그 아들이 존귀하나 그가 알지 못하며 비천하나 그가 깨닫지 못하나이다. 오직 자기의 살이 아프고 자기의 마음이 슬플 뿐이니이다.”

인생은 허무하다. 짧고 괴로움이 가득하고 꽃같이 쇠하고 그림자같이 신속하다. 인생은 죄악되다. 더러운 것에서 나온 더러운 존재이다. 이런 깨달음 속에서 욥은 참 안식과 몸의 변화 곧 부활을 소망하며 기대한다.

인생은 허무하나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과 평안과 천국의 영광을 주신다. 죄인인 인생은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의 보혈을 믿음으로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얻는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몸의 부활을 약속하셨다. 성경은 몸의 부활을 밝히 증거한다(고전 15:42-44, 51-52). 우리는 사도신경의 고백대로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을 믿는다. 부활의 첫열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증거이시다(고전 15:12-22). 우리는 부활을 소망하며 참고 기다리자.

 

 

15장: 엘리바스--악인은 일평생 고통을 당한다

[1-6절]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대답하여 가로되 지혜로운 자가 . . . .

욥의 친구 데만 사람 엘리바스는 대답하며 말했다. “지혜로운 자가 어찌 헛된 지식으로 대답하겠느냐? 어찌 동풍으로 그 품에 채우겠느냐? 어찌 유조(有助)치 아니한[도움이 되지 않는] 이야기, 무익한 말로 변론하겠느냐? 참으로 네가 하나님 경외하는 일을 폐하여 하나님 앞에 묵도(黙禱)하기를 그치게 하는구나. 네 죄악이 네 입을 가르치나니 네가 간사한 자의 혀를 택하였구나. 너를 정죄한 것은 내가 아니요 네 입이라. 네 입술이 너를 쳐서 증거하느니라.”

엘리바스는 욥에 대해 여러 말로 잘못된 비난을 쏟아내었다. 그는 욥의 말이 ‘헛된 지식,’ ‘무익한 말,’ ‘불경건한 말,’ ‘간사한 자의 혀’라고 비난하였다. 욥의 친구들은 욥이 죄의 형벌을 받는 것이라고 말했고 욥은 자신의 고난이 어떤 특정한 죄 때문이 아니라고 변호했던 것인데, 엘리바스는 계속 욥을 정당하지 않게, 그릇되이 비난한 것이다.

참된 성도도 친구들에게 이런 오해를 당할 수 있다. 욥의 고통은 경제적, 가정적, 신체적 고통뿐 아니라, 친구들의 비난까지 겹친 것이었다. 그러나 모든 고난이 어떤 특정한 죄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욥기에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요 욥기의 중심적 교훈이다.

우리는 친구에게 바른 조언을 주어야지 잘못된 조언을 주거나 그를 함부로 정죄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경우에 맞는 말을 해야 한다(잠 25:11). 또 잘 알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불확실한 주관적 판단을 하지 말고 하나님의 완전한 판단에 맡기는 것이 옳다(고전 4:5).

[7-10절] 네가 제일 처음 난 사람이냐? 산들이 있기 전에 네가 . . . .

엘리바스는 또 말한다. “네가 제일 처음 난 사람이냐? 산들이 있기 전에 네가 출생하였느냐? 하나님의 모의(謀議)[은밀한 회의](NASB)를 네가 들었느냐? 지혜를 홀로 가졌느냐? 너의 아는 것이 무엇이기로 우리가 알지 못하겠느냐? 너의 깨달은 것이 무엇이기로 우리에게는 없겠느냐? 우리 중에는 머리가 세기도 하고 연로하기도 하여 네 부친보다 나이 많은 자가 있느니라.”

엘리바스는 욥의 확고한 지식과 신념에 대해 반박하면서 그 친구들 가운데는 나이 많은 자도 있고 심지어 욥의 부친보다 나이 많은 자가 있으며 나이 많은 자들은 젊은 자보다 지혜와 지식이 더 많은 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는 옳은 말이다.

율법은, “너는 센 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라”고 말했다(레 19:32). 욥기 12:12도 “늙은 자에게는 지혜가 있고 장수하는 자에게는 명철이 있느니라”고 말한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은 그 부친 솔로몬의 생전에 그 앞에 모셨던 노인들의 조언하는 바를 버리고 자기와 함께 자라난 소년들의 조언을 따라 포학한 말로 백성에게 대답하며 행함으로 이스라엘 왕국의 분열을 초래했다(왕상 12:6-20).

그러나 영적 진리는 반드시 연령에 비례하지 않는다. 시편 119:100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지키는 자가 노인보다 더 명철하다고 말했다. 주께서는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라고 기도하셨다(마 11:25). 예수님 당시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은 나이와 세상 경험이 많은 자들이었지만, 그 심령이 무지하고 완고하였고 영광의 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하였다.

[11-13절] 하나님의 위로와 네게 온유하게 하시는 말씀을 네가 . . . .

엘리바스는 또, “하나님의 위로와 네게 온유하게 하시는[말씀하시는] 말씀을 네가 어찌 작다 하느냐?”고 말한다. 그가 말한 ‘하나님의 위로와 네게 온유하게 말씀하시는 말씀’은, 친구들이 욥에게 한 충고들, 즉 그의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들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는 자기들의 충고들을 하나님의 위로와 온유한 말씀이라고 말하며 욥이 왜 그것들을 무시하느냐고 꾸짖는다. 그러나 실상 욥의 친구들의 충고들은 하나님의 위로와 온유한 말씀이 아니었다.

엘리바스는 또, “어찌하여 네가 마음에 끌리며 네 눈을 번쩍여 네 영으로 하나님을 반대하고 네 입으로 말들을 내느냐?”고 말한다. ‘네 눈을 번쩍여’라는 표현은 불쾌하고 적대적인 마음을 눈으로 표현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는 욥이 그런 눈빛을 하면서 그의 영으로 하나님을 반대하고 그의 입으로 말들을 낸다고 말한다. 그러나 실상 욥은 하나님을 대적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고난의 이유를 알지 못하여 괴로워하고 친구들의 잘못된 조언 때문에 마음이 상하였던 것뿐이다. 욥의 말은 친구들을 반대한 것이지 하나님께 대항하는 것은 아니었다. 엘리바스가 욥의 말들을 하나님을 반대하고 대적하는 불경건한 말로 이해한 것은 큰 잘못이었다.

사람은 하나님의 진리를 바르게 알지 못하거나 상대방의 마음을 바르게 알지 못할 때 이런 실수를 하게 되고 상대방을 잘못 평가하거나 정죄하게 된다. 다윗은 그를 대적하는 악한 자들이 종일 그의 말을 곡해하였다고 말했었다(시 56:5). 또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고 하셨다(요 16:2).

[14-16절] 사람이 무엇이관대 깨끗하겠느냐? 여인에게서 난 . . . .

엘리바스는 또 말한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깨끗하겠느냐? 여인에게서 난 자가 무엇이관대 의롭겠느냐? 하나님은 그 거룩한 자들을 믿지 아니하시나니 하늘이라도 그의 보시기에 부정하거든 하물며 악을 짓기를 물 마심같이 하는 가증하고 부패한 사람이겠느냐?”

엘리바스는 사람이 깨끗하지 못하며 악을 짓기를 물 마심같이 하는 가증하고 부패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수아 사람 빌닷도 그와 비슷하게 욥기 25:4-6에 말하기를,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부녀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랴. 하나님의 눈에는 달이라도 명랑치 못하고 별도 깨끗지 못하거든 하물며 벌레인 사람, 구더기인 인생이랴”고 하였다. 사람의 죄성과 그 결과로 인한 심한 비천함과 불행은 가히 벌레와 구더기에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욥은 절대적 의미에서 사람이 깨끗하고 의롭다고 말한 것이 아니었다. 욥은 자신의 죄악됨에 대해 욥기 14:4에서,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서 낼 수 있으리이까? 하나도 없나이다”라고 분명히 말했다. 욥이 자신을 의롭다고 말한 것은 단지 자신이 하나님 앞에 큰 벌을 받을 만한 어떤 특정한 죄가 없다는 것을 뜻하였다. 평소에 욥은 하나님 앞에서 양심적으로나 이성적으로 거리낄 것이 없었다. 엘리바스가 증거한 사람의 전적 부패성은 진리이지만, 그가 그것을 욥에게 적용하려 한 것은 무리하였고 적절치 않았다.

인간의 전적 부패성은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의 실패에서, 또 사사시대의 반복된 범죄에서, 또 구약의 이스라엘 왕국의 멸망에서 밝히 증거된 진리이다. 특히 선지자 예레미야는 인간의 마음이 만물보다 심히 부패하였고 선을 행하기에 무능함을 증거하였다(렘 17:9; 13:23).

[17-19절] 내가 네게 보이리니 나를 들으라. 내가 본 것을 . . . .

엘리바스는 또 말한다. “내가 네게 보이리니 나를 들으라. 내가 본 것을 설명하리라. 이는 곧 지혜로운 자들이 그 열조에게서 받아 숨기지 아니하고 전하여 온 것이라. 이 땅은 그들에게만 주셨으므로 외인은 그들 중에 왕래하지 못하였었느니라.”

엘리바스는 지혜자들이 그 열조로부터 받아 숨기지 않고 전해준 것, 곧 인간의 전통적 지혜의 말을 욥에게 말하고자 한다. “이 땅은 그들에게만 주셨으므로 외인은 그들 중에 왕래하지 못하였었느니라”는 말은 그 열조들의 지혜가 외부의 것과 섞이지 않고 순수하게 보존되고 전달되어졌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전통은 완전하지 못하다. 그것은 좋은 것도 있으나 좋지 않은 것도 있다. 심지어 교회적 전통도 그러하다. 교회 역사는 교회의 부패를 증거한다. 예수님 당시에도, 바리새인들은 떡 먹을 때에 손을 씻는 장로들의 유전을 지켰으나 부모 공경에 대한 하나님의 계명은 소홀히 하고 있었다. 어느 날 그들은 주의 제자들이 떡 먹을 때 손을 씻지 않는다고 그들을 비난하였다. 그때 주께서는 책망하시듯이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거늘 너희는 가로되 누구든지 아비에게나 어미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마 15:3-6).

[20-24절] 그 말에 이르기를 악인은 그 일평생에 고통을 당하며 . . . .

엘리바스는 계속 말한다. “그 말에 이르기를 악인은 그 일평생에 고통을 당하며(미스콜렐)[고통으로 몸을 뒤틀며] 강포자의 햇수는 작정되었으므로(니츠페누)[혹은 ‘저장되었으므로’] 그 귀에는 놀라운(페카딤)[두려움의, 두려운 일들의](KJV, NASB, NIV) 소리가 들리고 그 형통할 때에 멸망시키는 자가 그에게 임하리니 그가 어두운 데서 나오기를 바라지 못하고[자신이 어두운 데서 나오리라고 믿지 못하고] 칼날의 기다림이 되느니라. 그는 유리하며 식물을 구하여[양식을 위해 방황하며] 이르기를 어디 있느냐 하며 흑암한 날이 가까운 줄을 스스로 아느니라. 환난과 고통이 그를 두렵게 하며 싸움을 준비한 왕처럼 그를 쳐서 이기리니.”

엘리바스가 전하는 열조들의 지혜의 말은 악인이 일평생 고통을 당한다는 것이다. 악인은 일평생 고통으로 몸을 뒤틀며 강포자는 그 죽음의 날이 언제 찾아올 지 모르나 다 작정되어 있다. 악인의 귀에는 두려운 일들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린다. 그는 형통할 때에 멸망시키는 자가 그에게 임할 것이다. 잠언 10:24, “악인에게는 그의 두려워하는 것이 임하거니와.” 악인은 자신이 그 환난에서 회복될 것이라고 믿지 못하며 칼날을 기다리다가 죽음을 맞을 것이다. 또 그는 양식이 부족하여 그것을 얻으려 방황하며 재앙의 날이 가깝다는 것을 안다. 환난과 고통은 그를 두렵게 하고 싸움을 준비한 왕처럼 그를 이길 것이다. 악인에게 질병, 기근, 전쟁 등 육체적, 경제적, 사회적 재앙이 있다는 것은 레위기 26장이나 신명기 28장에 기록된 하나님의 진리이며 하나님의 공의의 원리이다.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사 48:22; 57:21). 단지, 이 진리가 욥의 경우에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뿐이다.

[25-27절] 이는 그 손을 들어 하나님을 대적하며 교만하여 . . . .

엘리바스는 또, “이는 그 손을 들어 하나님을 대적하며 교만하여 전능자를 배반함이니라. 그는 목을 굳게 하고 두터운 방패로 하나님을 치려고 달려가나니 그 얼굴에는 살이 찌고 허리에는 기름이 엉기었고”라고 말한다. 본문은 악인이 고통을 당하는 이유를 말한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을 향해 그 손을 들며 전능자를 향해 거만하게 행하기 때문이다. ‘교만하여 배반한다’는 원문(이스갑바르)은 ‘거만하게 행한다’는 뜻이다(BDB, NASB). 고의적 불경건은 대단히 큰 죄악이다. 하나님께서는 의와 선의 근거이시며 이유이시다. 모든 죄는 불경건에서 나온다.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악을 떠난다(잠 16:6). 그러나 교만한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그 대신 자기 자신을 높이고 의지하며 거기에서 모든 죄가 나온다. 인간이 창조주이시며 전능자이신 하나님을 대적하다니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본문은 또 악인이 목을 굳게 하며 자기 방어물로 무장하며 하나님을 향해 달려들듯이 대적한다고 표현한다. 27절은 악인이 거만하게 하나님을 대적하는 까닭을 말한다. “[이는](원문) 그 얼굴에는 살이 찌고 허리에는 기름이 엉기었음이니라.” 악인이 거만하게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은 그가 몸이 건강하고 물질적 유여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사람이 몸이 아프고 물질적 어려움이 있으면 겸손히 하나님을 찾지만, 몸이 건강하고 물질적 여유가 있으면 자기 만족에 빠지고 영적으로 둔해지고 죄에 대한 감각이 무디어져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리에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창조자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일이 아닌가?

[28-30절] 그는 황무한 성읍, 사람이 살지 아니하는 집 . . . .

엘리바스는 또 말한다. “그는 황무한 성읍, 사람이 살지 아니하는 집, 돌무더기가 될 곳에 거하였음이니라[거하는도다]. 그는 부요하지 못하고 재산이 항상 있지 못하며 그 산업(민람)11)이 땅에서 증식하지 못할 것이며 흑암한 데를 떠나지 못하리니 불꽃이 그 가지를 말릴 것이라. 하나님의 입김에 그가 떠나리라.” ‘흑암한 데’는 환난과 재앙을 가리키며, ‘불꽃’은 하나님의 진노의 불꽃을 가리키며, ‘가지’는 사람의 자녀들이나 그가 벌여놓은 일들을 가리킬 것이다.

엘리바스는 악인의 보응에 대해 말한다. 악인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황무한 성읍, 사람이 살지 않는 집, 돌무더기가 될 곳에 거할 것이다. 그가 사는 도시와 성읍이 황폐할 것을 말한다. 또 악인은 비록 지금 부요함을 누리고 상당한 재산과 소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그것이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 그의 부요함은 끝나고 그의 재산은 항상 있지 못하며 그의 소득도 땅에서 쇠하여질 것이다. 즉 그의 경제적 유여함이 끝나고 궁핍이 찾아올 것이다.

악인은 환난과 재앙을 떠나지 못하며 그것이 항상 그를 따라다닐 것이다. 또 하나님의 진노의 불꽃은 그의 자녀들이나 그가 벌여놓은 일들을 쇠잔케 할 것이다. 그리고 악인은 마침내 하나님의 입김, 곧 그의 진노의 입김으로 멸망하고 말 것이다. 악인의 보응은 확실하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율법에서 말씀하신 바이다. 그것은 또한 사람이 양심으로 느끼는 바이며 또 삶 속에서 경험하는 바이다.

[31-35절] 그는 스스로 속아 허망한 것을 믿지 말 것은 허망한 . . . .

엘리바스는 계속 악인의 보응에 대해 말한다. “그는 스스로 속아 허망한 것을 믿지 말 것은 허망한 것이 그의 보응이 될 것임이라. 그의 날이 이르기 전에 그 일이 이룰 것인즉 그 가지가 푸르지 못하리니 포도열매가 익기 전에 떨어짐 같고 감람 꽃이 곧 떨어짐 같으리라. 사곡한(카네프)[불경건한] 무리는 결실이 없고 뇌물을 받는 자의 장막은 불탈 것이라. 그들은 악한 생각을 배고 불의(아웬)[헛된 것]를 낳으며 마음에 궤휼[거짓]을 예비한다 하였느니라.”

본문은 악인이 스스로 속아 허망한 것을 믿다가 허망한 결과를 당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가 가졌다고 생각한 것은 결국 다 공허해질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과 징벌이다. 만일 그가 처음부터 그것의 헛됨을 깨달았다면 그는 세상 것들에 대한 생각과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과 영원한 천국과 영생을 크게 여기며 사모하였을 것이다.

악인은 ‘그의 날’ 곧 그의 번창하고 성공하는 날이 이르기 전에 ‘그 일’ 곧 하나님의 공의의 보응을 받게 될 것이다. 그의 자녀들이나 그가 벌여놓은 일들은 잘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마치 포도나무에서 익지 않은 열매가 떨어지는 것 같고 감람나무에서 감람 꽃이 떨어지는 것 같을 것이다. 악인은 잘되는 것 같다가 멸망할 것이다.

악인들은 불경건하고 뇌물을 받는 자들인데 결실이 없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선하고 복된 열매를 맺지 못한다. 또 그들의 장막, 그들의 집과 가정은 불탈 것이다. 그들은 악한 생각을 마음에 품고 헛된 것을 행하며 또 거짓된 것을 마음에 준비할 뿐이다. 의인과 악인의 삶은 판연히 다르고, 악인은 공의의 보응을 받을 것이다.

엘리바스는 욥에 대해 잘못된 비난을 쏟아내었다. 욥의 친구들 중에는 나이 많은 자도 있었다. 그러나 단지 노인들의 말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그들의 비난처럼 욥은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았다. 우리는 이웃에 대해 성경에 입각하여 바른 판단을 하고 바른 조언을 주어야 한다.

사람의 전통, 심지어 교회의 전통도 완전치 못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들을 너무 중시하지 말아야 한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완전하다(시 19:7-8). 우리는 성경의 말씀만 굳게 지켜야 한다(살후 2:15). 우리의 신앙과 생활의 정확무오한 유일의 규칙은 오직 신구약 성경뿐이다.

욥은 친구들의 말대로 인간이 악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한다. 인간은 성경의 증거하는 대로 전적으로 부패하였고 무능력해졌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된다. 욥이 변명하고 있는 것은 단지 자신이 특정한 죄 때문에 하나님의 벌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악인들이 일평생 재앙과 고통을 당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이다. 그 이유는 그들의 교만과 불경건 때문이다. 우리는 거만하게 하나님을 대적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악인들의 성읍은 황폐해질 것이다. 그들이 지금 누리는 물질적 부요는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환난과 재앙이 임하고 그들이 하는 일들은 쇠잔하고 잘 되는 것 같다가 멸망할 것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인식하고 그들의 형통을 부러워하거나 불평하거나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모든 교만을 버리고 자신이 피조물이며 죄성을 가진 부족한 존재임을 인식해야 한다.

우리는 모든 악을 버리고 교만과 불경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성경에 계시되고 증거되고 기록된 하나님의 뜻과 그의 교훈들과 계명들을 힘써 배우며 의와 선만 구하며 행하자.

 

 

16장: 욥--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다

[1-5절] 욥이 대답하여 가로되 이런 말은 내가 많이 들었나니 . . . .

욥은 대답하여 말했다. “이런 말은 내가 많이 들었나니 너희는 다 번뇌케 하는(아말)[고통을 주는] 안위자로구나. 허망한 말이 어찌 끝이 있으랴. 네가 무엇에 격동되어 이같이 대답하는고. 나도 너희처럼 말할 수 있나니 가령 너희 마음이 내 마음 자리에 있다 하자. 나도 말을 지어 너희를 치며 너희를 향하여 머리를 흔들 수 있느니라. 그래도 입으로 너희를 강하게 하며 입술의 위로로 너희의 근심을 풀었으리라(카사크)[덜었으리라](KJV, NASB, NIV).”

욥은 친구들을, ‘번뇌케 하는 혹은 고통을 주는 안위자’라고 표현한다. 그의 친구들은 고난이 죄의 형벌이라는 생각만 가지고 그 생각을 욥에게 줄곧 적용하였다. 그들의 충고는 욥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고 도리어 고통과 슬픔을 더하였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은 진리이지만, 욥의 고난은 단순히 신앙 인격의 성숙을 위한 것이었다.

욥은 만일 친구들이 자기 같은 처지에 있다면, 자기도 그들을 비난하며 책망하며 그들을 향해 머리를 흔들며 그들을 멸시할 수 있다고 말한다. 물론 욥의 이러한 말은 자신이 그렇게 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그들의 행위에 빗대어 가상적으로 말한 것이라고 본다. 그는 그런 때에도 자신은 입으로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였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사랑이요 긍휼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기를 원하신다. 에베소서 4:32는 우리에게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라”고 교훈하였다.

[6-8절] 내가 말하여도 내 근심이 풀리지 아니하나니 잠잠한들 . . . .

욥은 또, “내가 말하여도 내 근심이 풀리지 아니하나니 잠잠한들 어찌 평안하랴”고 말한다. 일반적으로는 사람이 말하지 않고 잠잠히 있는 것보다 다른 이들에게 말하는 것이 그의 마음의 근심을 푸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근본 문제의 해결이 없이는 그의 근심을 완전한 해소시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욥은 심각한 고난 중에서 말해도 잠잠해도 평안을 얻지 못하고 있다고 고백한다.

욥은 또, “이제 주께서 나를 곤고케 하시고 나의 무리를 패괴케 하셨나이다”라고 말한다. ‘나의 무리’라는 원어(아다시)는 욥에게 딸린 식솔들, 즉 욥의 가족들과 종들을 가리킬 것이다(BDB, NIV). ‘패괴케’라는 말은 ‘황폐케’라는 뜻이다. 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곤고케 하셨고 자기 가족들을 황폐케 하셨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이 심신으로 곤고하고 자기 자녀들이 다 죽고 자기 아내도 낙심하여 자기를 위로하는 대신 욕하고 자신의 재산을 다 잃어버린 것 등이 다 하나님께서 주신 일들이라고 고백한 것이다.

욥은 또, “주께서 나를 시들게 하셨으니 이는 나를 향하여 증거를 삼으심이라. 나의 파리한 모양이 일어나서 대면하여 나의 죄를 증거하나이다”라고 말한다. 원문에는 ‘나의 죄’라는 말은 없다(KJV, NASB, NIV). 욥은 자신이 심신으로 쇠잔케 된 것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말하며 그의 파리한 모습이 그를 대적하여 증거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우리 말 번역처럼 그가 고난 중에 자신의 죄를 생각하게 된다는 뜻일 것이다. 성도는 비록 욥처럼 어떤 특정한 죄가 없을지라도 고난 중에 “내가 무슨 죄가 있는가?” 하고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9-14절] 그는 진노하사 나를 찢고 군박하시며 나를 향하여 . . . .

욥은 또, “그는 진노하사 나를 찢고 군박(窘迫)하시며 나를 향하여 이를 갈고 대적이 되어 뾰족한 눈으로 나를 보신다”고 말한다. 욥은 자신의 고난을 하나님의 진노로 표현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마치 사나운 짐승처럼 그를 찢으시며 대적하신다고 말한다. ‘군박하다’는 원어(사탐)는 ‘대적하다’는 뜻이다. 또 욥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향해 이를 가시고 뾰족한 눈으로 보신다고 표현한다. 뾰족한 눈은 사랑과 동정의 마음이 아니고 미움과 진노의 마음을 나타낸다.

욥은 또, “무리들은 나를 향하여 입을 벌리며 나를 천대하여 뺨을 치며 함께 모여 나를 대적하는구나”라고 말한다. ‘입을 벌린다’는 말은 남을 해치거나 비난한다는 뜻일 것이다. 그의 친구들은 그를 위문하기 위해 와서는 그를 혹독하게 비난하였다. 그들은 차라리 오지 않았으면 더 나았을 것이다. 또 이웃 사람들은 그를 천대하여 뺨을 치며 함께 모여 그를 대적하였다. 욥은 또, “하나님이 나를 경건치 않은 자에게 붙이시며 악인의 손에 던지셨구나”라고 말한다. 경건치 않은 자와 악인은 아마 욥의 가축들을 탈취해간 이웃 나라 사람들을 가리킬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욥을 그들의 손에 붙이셨다.

욥은 또, “내가 평안하더니 그가 나를 꺾으시며 내 목을 잡아던져 나를 부숴뜨리시며 나를 세워 과녁을 삼으시고 그 살(라브)[궁수]로 나를 사방으로 쏘아 인정 없이 내 허리를 뚫고 내 쓸개로 땅에 흘러나오게 하시는구나. 그가 나를 꺾고 다시 꺾고 용사같이 내게 달려드시는도다”라고 말한다. 욥은 자신에게 닥친 그 무섭고 혹독한 고난이 주권적 섭리자 하나님께서 내리신 것임을 확실하게 증거한다.

[15-17절] 내가 굵은 베를 꿰어매어 내 피부에 덮고 내 뿔을 . . . .

욥은 또, “내가 굵은 베를 꿰어매어[꿰매어] 내 피부에 덮고 내 뿔을 티끌에 더럽혔구나”라고 말한다. 굵은 베는 꺼칠하여 감촉이 좋지 않다. 그러나 사람은 자신을 낮추어 금식할 때나 심히 슬플 때 보통 굵은 베옷을 입는다. 욥이 굵은 베옷을 입은 것은 그의 슬픔과 고통과 탄식을 나타낸다. 또 그는 자신의 뿔, 곧 힘과 영광이 티끌에 더럽혔다고 말한다. 욥은 힘도 없었고 영광도 잃어버렸고 더러워졌다.

욥은 또, “내 얼굴은 울음으로 붉었고 내 눈꺼풀에는 죽음의 그늘이 있구나”라고 말한다. 사람이 마음의 고통이 심하여 많이 울 때 그 얼굴도 붉게 상기된다. 또 욥은 자기의 눈꺼풀에는 죽음의 그늘이 있다고 표현한다. 그것은 그가 많이 울어 그 눈이 쇠해졌고 그의 기력도 쇠하여 곧 죽을 사람처럼 눈꺼풀이 감기게 되었다는 뜻일 것이다.

욥은 또, “그러나 내 손에는 포학이 없고 나의 기도는 정결하니라”고 말한다. ‘포학’이라는 원어(카마스)는 ‘강포, 악행’이라는 뜻이다(BDB). “내 손에는 포학이 없고”라는 원문은 “내 손에 악행이 없음에도 불구하고”라는 뜻이다(Gesenius). 욥은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도, 앞에서도 여러 번 말했지만, 자신이 악하지 않았음을 고백한다.

욥은 또, “나의 기도는 정결하다”고 말한다. 그는 고난 중에도 기도의 줄을 놓지 않았다. 그는 계속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그가 기도했다는 사실 자체가 그의 믿음을 증거한다. 믿음이 없는 자는 하나님께 기도하지 못한다. 또 욥은 거짓과 위선의 말로가 아니고 진실과 진심의 말로 기도하였다. 그것이 정결한 기도이다. 욥은 믿음으로 기도하였고 진실과 진심으로 기도하였다.

[18-22절] 땅아 내 피를 가리우지 말라. 나의 부르짖음으로 쉴 . . . .

욥은 또, “땅아 내 피를 가리우지 말라. 나의 부르짖음으로 쉴 곳이 없게 되기를 원하노라”고 말한다. ‘내 피’는 욥이 잘못 행하여 남의 피를 흘린 일을 가리키는 것 같다. 자신이 남의 피를 흘린 잘못이 있다면 그것을 감추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뜻일 것이다. 그는 정정당당하게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를 원한다. 또 그는 그의 부르짖음으로 쉴 곳이 없게 되기를 원한다. 즉 그의 부르짖는 기도의 소리가 그치지 않고 계속 하나님께 올려지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는 고난 중에서도 낙심치 않고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내어놓고 부르짖어 기도하였다.

욥은 또, “지금 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고 나의 보인(保人)이 높은 데 계시니라”고 말한다. ‘보인(保人)’이라는 원어(사헤드)는 ‘증인’(에드)과 동의어이다(BDB). 영어성경들은 ‘옹호자’라고 번역했다(KJV, NASB, NIV). 욥은 하늘에 그의 증인이 계시다고 말한다. 그는 욥의 중심을 아시고 공의로 판단하시고 증거하실 것이다.

욥은 또, “나의 친구는 나를 조롱하나 내 눈은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고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와 인자와 그 이웃 사이에 변백하시기를 원하노니 수년이 지나면 나는 돌아오지 못할 길로 갈 것임이니라”고 말한다. 욥의 친구들은 그를 조롱하고 있으나 욥은 낙망치 않고 하나님을 바라며 눈물로 호소한다. “하나님, 저의 중심을 살피시고 제가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살고 바르고 선하게 살고자 애쓴 것을 증거하여 주옵소서.” 욥은 자신이 수년이 지나면 돌아오지 못할 길, 곧 죽음의 길로 갈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죽기 전에 그가 옳은지 아니면 친구들이 옳은지 하나님의 판단을 받고 하나님의 증거를 보기를 원한다. 그래야 그가 평안히 죽을 수 있을 것이다.

욥의 친구들은 고통을 주는 자들이었다. 욥은 하나님께서 그를 곤고케 하셨고 그의 가정을 황폐케 하셨고 그를 대적하셨으나, 그의 손에는 강포나 악행이 없었고 그의 기도는 정결하다고 말한다. 또 욥은 그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께만 호소한다. 우리는 친구에게 고통을 주는 자가 되지 말고,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가지고 바른 말로 충고하고 권면하고 위로하는 자가 되자.

우리는 고난 중에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자. 하나님의 주권 진리는 성경 진리이다(창 45:8; 룻 1:21). 욥은 이 믿음을 가졌다. 우리도 이 믿음을 가지고, 고난을 주신 이가 하나님이시요 그것을 거두어주실 이도 하나님이신 줄 알고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자.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바라고 의지하며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 앞에서만 바르게 살자. 우리는 평소에 경건하고 의롭고 정직하고 선한 삶을 살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 계신 우리의 증인이시다.

 

 

17장: 욥--의인은 그 길을 독실히 행함

[1-5절] 나의 기운이 쇠하였으며 나의 날이 다 하였고 무덤이 . . . .

욥은 또, “나의 기운이 쇠하였으며 나의 날이 다 하였고 무덤이 나를 위하여 예비되었구나”라고 말한다. 그는 몸의 병으로 인해 기운이 쇠하였고 살날이 다 하였고 이제 죽어 무덤에 들어갈 일만 남았다고 말한다. 이것은 모든 병자들이 겪는 심적 과정이기도 하다.

욥은 또, “나를 조롱하는 자들이 오히려 나와 함께 있으므로 내 눈이 그들의 격동함을 항상 보는구나”라고 말한다. 그는 그를 조롱하는 친구들이 그와 함께 있고 그의 눈이 그들의 격동함을 항상 보고 있다. 이것은 그를 더욱 피곤하게 하고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다.

욥은 또, “청컨대 보증물을 주시고 친히 나의 보주(保主)가 되옵소서. 주 외에 나로 더불어 손을 칠 자[나를 보증할 자]가 누구리이까?”라고 말한다. 그는 심신의 피곤과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보증자가 되셔서 보증물을 주실 것을 요청한다. 자신이 죄 때문에 고난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거해 달라고 그에게 요청하는 것이다.

욥은 또, “주께서 그들의 마음을 가리어 깨닫지 못하게 하셨사오니 그들을 높이지 아니하시리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친구들의 마음에 깨달음을 주지 않으셨다고 말한다. “친구를 지적하여 해를 받게 한 자의 자식들은 눈이 멀지니라”는 5절은, “친구들에게 아첨의 말을 하는 자의 자식들은 눈이 쇠할지어다”라는 뜻일 것이다(KJV). 그것은 그가 친구들에게 아첨의 말을 하지 않는다는 뜻 같다.

[6-9절] 하나님이 나로 백성의 이야깃거리가 되게 하시니 그들이 . . . .

욥은 또, “하나님이 나로 백성의 이야깃거리가 되게 하시니 그들이 내 얼굴에 침을 뱉는구나”라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극심한 고난 가운데 던지셔서 백성의 이야깃거리가 되게 하셨고 그들이 심지어 그의 얼굴에 침을 뱉는다고 표현한다.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을 것이다. 건강하고 부요할 때는 그 앞에 친근히 하고 감히 그를 무시하지 못하던 사람들도 그가 재산과 자녀와 건강을 잃으니 그를 떠나가고 그를 비웃고 그를 멸시하는 것이다. 그것이 세상의 모습이다.

욥은 또, “내 눈은 근심으로 하여 어두워지고 나의 온 지체는 그림자 같구나”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눈이 근심으로 인하여 어두워졌다고 말한다. 또 그의 온 지체가 그림자 같다는 말은 그의 사지백체도 쇠하여져서 그의 눈으로 보기에 그림자같이 희미하다는 뜻이거나 그의 몸이 쇠해서 그림자같이 죽어 없어질 것 같다는 뜻일 것이다.

욥은 또, “정직자는 이를 인하여 놀라고 무죄자는 사곡한[불경건한 자] 자를 인하여 분을 낸다”고 말한다. 욥은 자신을 정직자와 무죄자로 표현했고, 그의 친구들을 포함해 그를 비방하는 이웃들을 불경건한 자로 표현하며, 자신이 그들로 인해 놀라고 분을 낸다고 말한다.

욥은 또, “그러므로[그러나](NASB, NIV) 의인은 그 길을 독실히 행하고[굳게 붙들고] 손이 깨끗한 자는 점점 힘을 얻느니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고난의 현실을 인해 놀라고 친구들의 공박에 대해 화와 분이 나지만, 자신을 ‘의인’과 ‘손이 깨끗한 자’라고 표현하면서 스스로 자신의 길을 굳게 붙들기를 원하며 점점 힘을 얻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참된 성도들에게 큰 위로가 된다.

[10-16절] 너희는 다 다시 올지니라. 내가 너희 중에서 . . . .

욥은 또 말한다. “너희는 다 다시 올지니라. 내가 너희 중에서 지혜자를 찾을 수 없느니라. 나의 날이 지나갔고 내 경영, 내 마음의 사모하는 바가 다 끊어졌구나.” ‘사모하는 바’라는 원어(모라쉐)는 ‘품은 생각’이라는 뜻이다(BDB). 욥은, 친구들이 다 무지하며 또 자신의 날이 지나갔고 그의 계획과 마음에 품은 생각이 다 끊어졌다고 말한다. 그가 계획하고 그 마음에 생각했던 바는 그의 건강과 행복 등을 포함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제 그 모든 것들이 다 끊어졌다고 말한다. 그는 이제 자신이 오직 죽음 앞에 직면해 있다고 느낀다.

욥은 또, “그들은 밤으로 낮을 삼고 빛이 어두운데[어두움 때문에(KJV), 어두움 앞에서(NASB, NIV) 가깝다 하는구나”라고 말한다. 본절의 ‘그들’은 악인들을 가리키든지(NIV), 아니면 그가 마음에 생각했던 것들을 가리킬 것이다(Amplified Bible). 전자라면, 악인들은 밤을 낮처럼 보낸다는 뜻일 것이다. 후자라면, 내 마음에 품은 생각들이 밤에서 낮까지 계속된다는 뜻일 것이다. 후반부의 ‘어두움’은 심적 고통을 가리킨다고 본다.

욥은 또, “내 소망이 음부로 내 집을 삼음에 있어서 침상을 흑암에 베풀고 무덤더러 너는 내 아비라, 구더기더러 너는 내 어미, 내 자매라 할진대 나의 소망이 어디 있으며 나의 소망을 누가 보겠느냐? 흙 속에서 쉴 때에는 소망이 음부 문으로 내려갈 뿐이니라”고 말한다. 그는 이제 죽음을 생각할 뿐이다. 인간적으로는 절망이 있을 뿐이다. 이것이 고난 가운데 있는 욥의 심정과 심리이다.

우리는 고난 중에 오직 하나님만 바라자. 욥은 고난 중에서 하나님만 바라고 하나님께 호소하였다. 하나님은 모든 문제의 해답이시다. 오늘날도 고난받는 성도에게는 하나님만 바라는 믿음과 인내가 필요하다.

우리는 고난 중에도 오직 믿음으로 바르게만 살자. 참된 성도는 때때로 이유 없는 고난에 떨어지고 그런 현실 때문에 놀라고, 또 그를 오해하고 비방하는 자들로 인해 마음이 상하고 화가 날 수 있지만, 그러나 그는 그때에도 자기 길을 굳게 붙들고 믿음으로 바르게만 살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우리의 부활과 천국을 소망하며 낙심치 말자. 죽음 앞에 선 인생에게 참 소망과 위로는 하나님께서 주신 주의 재림과 천국과 부활과 영생의 소망뿐이다.

 

 

18장: 빌닷--악인의 빛은 꺼진다

[1-4절] 수아 사람 빌닷이 대답하여 가로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 . . .

수아 사람 빌닷이 대답하여 말하였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말을 찾겠느냐? 깨달으라. 그 후에야 우리가 말하리라.” 빌닷이 욥에 대해 ‘너희’라고 말한 것은 욥에게 그를 지지하는 몇 명의 사람들이 있었음을 보이는 것 같다. 그러나 빌닷이 말하는 주된 대상은 욥이다. “말을 찾는다”는 원어는 “말에 올무를 놓는다”는 뜻이다(BDB, NASB). 빌닷은 욥이 친구들의 말에 올무나 놓고 있다고 비난한다. 그는 욥에게 심지어 “깨달으라”고까지 말한다. 그는 욥을 무지한 자로 몰아댄다.

빌닷은 또 “어찌하여 우리를 짐승으로 여기며 부정하게 보느냐?”고 말한다. ‘부정하게 본다’는 원어(타마)는 (1) 어리석게 여기다(게세니우스, BDB, NASB, NIV), (2) 부정하게 여기다(KJV)는 뜻을 가지는데, 전자가 더 적절한 것 같다. 욥은 친구들에 대해 17:4에서 “주께서 그들의 마음을 가리어 깨닫지 못하게 하셨다”고 말했었다.

빌닷은 또 욥을 “너 분하여 스스로 찢는 자야”라고 부른다. 원문은 “그는 자신의 분노 중에 자신을 찢는도다”라는 뜻이다(KJV). 사람들은 하나님의 공의의 섭리에 불평하고 대항하여 분노를 품으며 자신을 찢고 상하게 만든다. 애굽에서 나왔던 이스라엘 선조들은 광야에서 항상 하나님을 향해 불평하고 원망하며 멸망을 자초하였다(민 11:1; 14:1-3; 20:4; 21:5). 물론 그것은 욥의 경우에는 적절치 않았다.

빌닷은 또, “너를 위하여 땅이 버림을 당하겠느냐? 바위가 그 자리에서 옮기겠느냐?”고 말한다. 하나님의 공의는 불변적이라는 뜻이다.

[5-10절] 악인의 빛은 꺼지고 그 불꽃은 빛나지 않을 것이요 . . . .

빌닷은 또, “악인의 빛은 꺼지고 그 불꽃은 빛나지 않을 것이요 그 장막 안의 빛은 어두워지고 그 위의 등불은 꺼질 것이요”라고 말한다. 빛과 불꽃은 삶의 기쁨과 행복을 가리킬 것이다. 악인의 기쁨과 행복은 사라질 것이다. 그의 가정의 기쁨과 행복도 사라질 것이다. 잠언 13:9는 “의인의 빛은 환하게 빛나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느니라”고 말했고, 잠언 24:20은 “대저 행악자는 장래가 없겠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리라”고 말했다. 악인의 기쁨과 행복은 사라질 것이다.

빌닷은 또, “그 강한 걸음이 곤하여지고 그 베푼 꾀에 스스로 빠질 것이라”고 말한다. 악인들은 일시적으로는 그 걸음이 강한 것 같고 그의 베푸는 꾀가 형통하게 될 것 같다. 그러나 그의 강한 걸음은 곧 곤하여지고 그는 자기가 베푼 꾀에 스스로 빠질 것이다.

빌닷은 “이는 그 발이 스스로 그물에 들어가고 얽는 줄을 밟음이며 그 발뒤꿈치는 창애에 치이고 그 몸은 올무에 얽힐 것이며 그를 동일 줄이 땅에 숨겼고 그를 빠뜨릴 함정이 길에 베풀렸음이라”고 말한다.악인이 스스로 망하는 까닭은 그의 발이 스스로 자기가 만든 그물에 들어가고 올무의 줄을 밟기 때문이다. 그의 발뒤꿈치는 창애에 치이고 그 몸은 올무에 얽힐 것이다. 빌닷은 그를 동여맬 줄이 땅에 숨겨 있고 그를 빠뜨릴 함정이 길에 베풀려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악인은 자기의 올무에 자기가 걸린다. 에스더서에 나오는 하만은 그 생생한 예이다. 악한 하만은 착한 모르드개를 달아 죽이려고 집뜰에 높이 25미터의 장대를 만들었으나 그 자신이 거기에 달려 죽임을 당했다(에 7장). 다니엘을 모함하여 사자굴에 던져 죽게 하려 했던 악한 동료들도 그 처자들과 함께 사자굴에 던지웠다(단 6장).

[11-15절] 무서운 것이 사방에서 그를 놀래고 그 뒤를 쫓아올 . . . .

빌닷은 또 “무서운 것이 사방에서 그를[악인을] 놀래고 그 뒤를 쫓아올 것이라. 그 힘은 기근을 인하여 쇠하고 그 곁에는 재앙이 기다릴 것이라”고 말한다. 악인에게는 도적이나 강도나 무서운 짐승이나 무서운 질병과 큰 사고 같은 무서운 것이 임하여 사방에서 그를 놀래며 그 뒤를 쫓아올 것이다. 잠언 10:24는, “악인에게는 그의 두려워하는 것이 임하거니와”라고 말한다. 또 악인의 힘은 기근으로 쇠해질 것이며 그의 곁에는 무서운 재앙이 기다릴 것이다.

빌닷은 또 “그의 백체가 먹히리니 곧 사망의 장자가 그 지체를 먹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의 백체가 먹히리니”라는 원문은 “그것이 그의 피부의 부분들을 먹으리니”라는 뜻이다(NIV). ‘그것’은 그에게 임한 재앙을 말할 것이다. 재앙이 그의 피부의 부분들을 해할 것이며 마침내 그는 사망에 이르게 될 것이다.

빌닷은 또 “그가 그 의뢰하던 장막에서 뽑혀서 무서움의 왕에게로 잡혀간다”고 말한다. 그 의뢰하던 장막에서 뽑힌다는 말은 가족들의 안정을 잃어버린다는 뜻이며, 또 ‘무서움의 왕’에게 잡혀간다는 말은 평안을 잃고 극한 두려움에 떨어진다는 뜻이라고 본다.

빌닷은 또, “그에게 속하지 않은 자가 그 장막에 거하리니 유황이 그 처소에 뿌려질 것이라”고 말한다. “그에게 속하지 않은 자가 그 장막에 거한다”는 원문은 “그에게 속한 것은 아무것도 그의 장막에 거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든지(BDB, NASB), 혹은 “그것[무서움의 왕]이 그 장막에 거하므로 그것이 더 이상 자기 것이 아니리라”는 뜻일 것이다(게세니우스). 또 유황이 그 처소에 뿌려질 것이라는 말은 그 집이 완전히 불태워지고 완전히 멸망할 것이라는 뜻이라고 본다.

[16-21절] 아래서는 그 뿌리가 마르고 위에서는 그 가지가 찍힐 . . . .

빌닷은 또, “아래서는 그 뿌리가 마르고 위에서는 그 가지가 찍힐 것이며”라고 말한다. 악인은 그와 그 가정이 일시적으로 번창하는 것 같아도 결국 자신도, 그의 자녀들도 다 멸망할 것이다.

빌닷은 또, “그의 기념[기억]이 땅에서 없어지고 그의 이름이 거리에서 전함이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의인들의 기억은 세상에 오래 남고 후세의 사람들에게 전해지지만, 악인들의 기억은 땅에서 빠르게 사라지고 그의 이름은 거리에서 다른 사람에게 전함도 없을 것이다. 멸망의 예(例)로서 외에는, 아무도 그를 기억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빌닷은 또, “그는 광명 중에서[광명에서] 흑암으로 몰려 들어가며 세상에서 쫓겨날 것이라”고 말한다. 악인들도 세상에서 일시적으로 기쁨과 행복을 누리지만 곧 불행 속으로 몰려 들어가며 또 세상에서도 쫓겨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심판 전까지는 세상을 적어도 양심 있는 자들에 의해 어느 정도 유지되게 하실 것이다.

빌닷은 또, “그는 그 백성 가운데서 아들도 없고 손자[자손]도 없을 것이며 그의 거하던 곳에는 한 사람도 남은 자가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악인은 대를 이을 자들이 없을 것이며 또 그가 부요하였을 때 그의 집에 머물었거나 드나들던 많은 사람들도 다 그를 떠날 것이다.

빌닷은 또, “그의 날을 인해 뒤에 오는 자가 앞선 자의 두려워하던 것같이 놀라리라. 불의한 자의 집이 이러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의 처소도 그러하니라”고 말한다. 건강하고 부요하고 행복했던 자가 어떻게 그렇게 완전히 망할 수 있는지 이전 사람들도, 후대 사람들도 놀랄 것이다. 이와 같이, 악인은 자기 자신만 망할 뿐 아니라 또한 그의 집과 가정도, 가족들까지 멸망할 것이다.

빌닷이 말한 하나님의 공의는 옳은 말이다. 악인은 일시적으로 강하고 형통한 듯하나 자기 만든 올무에 스스로 걸리고 그의 기쁨과 행복은 곧 사라질 것이다.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고 질병, 사고 등 무서운 것들이 임할 것이다. 악인은 그 자신도, 그의 자녀들도 다 멸망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기억하고 모든 악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믿음 없고 무지한 자처럼 하나님의 공의의 섭리에 불평하거나 대항하지 말고 범사에 주권자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고 오직 하나님의 계명대로 경건하게 또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만 살아야 한다.

 

 

19장: 욥--나의 구속자가 살아계시다

[1-12절] 욥이 대답하여 가로되 너희가 내 마음을 번뇌케 하며 . . . .

욥은 대답하여 말한다. “너희가 내 마음을 번뇌케 하며 말로 꺾기를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 너희가 열 번이나 나를 꾸짖고 나를 학대하고도 부끄러워 아니하는구나. 내가 과연 허물이 있었다 할지라도 그 허물이 내게만 있는 것이니 너희가 참으로 나를 향하여 자긍하며 내게 수치될 행위가 있다고 증명하려면 하려니와 하나님이 나를 굴하게 하시고 자기 그물로 나를 에워싸신 줄은 알아야 할지니라.”

우리는 바른 충고라도 한두 번 한 후 그가 그것을 듣지 않으면 더 이상 할 것이 없을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 아닌 사람은 없겠으나 욥은 사람 앞에서는 지적받을 잘못을 한 적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의롭게 살려고 애쓴 자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고난을 주셨고 욥은 친구들이 그것을 알기를 원한다.

욥은 또 말한다. “내가 포학[해]을 당한다고 부르짖으나 응답이 없고 간구할지라도 신원함[재판받음]이 없구나. 그가 내 길을 막아 지나지 못하게 하시고 내 첩경에 흑암을 두셨으며 나의 영광을 벗기시며 나의 면류관을 머리에서 취하시고 사면으로 나를 헐으시니 나는 죽었구나[갔구나]. 내 소망을 나무 뽑듯 뽑으시고 나를 향하여 진노하시고 원수같이 보시는구나. 그 군대가 일제히 나아와서 길을 수축하고 나를 치며 내 장막을 둘러 진쳤구나.” 하나님께서는 욥의 부르짖음을 듣지 않으셨고 그를 향해 진노하시며 그에게 큰 재앙을 내리시는 것 같았다. 욥은 이제 자신이 죽은 자와 같고 소망이 없다고 말한다.

[13-22절] 나의 형제들로 나를 멀리 떠나게 하시니 나를 아는 . . . .

욥은 또 말한다. “나의 형제들로 나를 멀리 떠나게 하시니 나를 아는 모든 사람이 내게 외인이 되었구나. 내 친척은 나를 버리며 가까운 친구는 나를 잊었구나. 내 집에 우거한 자와 내 계집종들은 나를 외인으로 여기니 내가 그들 앞에서 타국 사람이 되었구나. 내가 내 종을 불러도 대답지 아니하니 내 입으로 그에게 청하여야 하겠구나. 내 숨을 내 아내가 싫어하며 내 동포들도 혐의하는구나”[내 형제들에게도 꺼림을 받는구나](BDB, NASB, NIV). 하나님께서는 욥의 형제들과 친지들과 가까운 친구들로 그를 멀리 떠나게 하시고 심지어 그의 집에 우거한 자들과 그의 종들과 그의 여종들도 그를 무시하고 박대하며 그의 숨결을 그의 아내와 그의 형제들도 싫어하게 하셨다.

욥은 또 말한다. “어린아이들이라도 나를 업신여기고 내가 일어나면 나를 조롱하는구나. 나의 가까운 친구들이 나를 미워하며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돌이켜 나의 대적이 되었구나. 내 피부와 살이 뼈에 붙었고 남은 것은 겨우 잇꺼풀뿐이로구나. 나의 친구야,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기라. 나를 불쌍히 여기라. 하나님의 손이 나를 치셨구나.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처럼 나를 핍박하느냐? 내 살을 먹고도 부족하냐?” 어린아이들도 그를 업신여겼고 그를 조롱하였고 그의 가까운 친구들은 그를 미워하며 그의 사랑하는 사람들은 대적이 되었다. 그는 피부와 살이 뼈에 붙었고 남은 것은 겨우 잇꺼풀뿐이었다. 욥은 하나님의 손이 그를 치셨다고 말하면서 친구들에게 하나님처럼 그를 핍박하거나 비난하지 말고 그를 불쌍히 여기라고 말한다. 까닭 없이 고난받는 친구에게 필요한 것은 불쌍히 여김과 위로의 말이다.

[23-26절] 나의 말이 곧 기록되었으면, 책에 씌어졌으면 . . . .

욥은, “나의 말이 곧 기록되었으면, 책에 씌어졌으면, 철필과 연으로 영영히 돌에 새겨졌으면 좋겠노라”고 말한다. 욥의 시대에 글자와 기록하는 방법이 있었고 책이 있었고 돌에 새기는 일이 있었음을 보인다. 욥의 소원대로 그의 일들이 자세히 욥기라는 책에 기록되었다.

욥은 또,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욥의 구속자(救贖者)시요 우리의 구주이신 메시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생활하실 것을 증거하는 놀라운 계시 지식이다. 이것은 성령의 감동으로 주신 참으로 놀라운 지식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으로 성취되었다. 요한복음 1:14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도 이 귀한 사실을 약간 알게 하셨다.

욥은 또,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고 말한다. ‘육체 밖에서’라는 원어(밋베사리)는 ‘내 육체로’(in my flesh)(KJV, NIV), ‘내 육체로부터’(from my flesh) (NASB), 혹은 ‘내 육체 밖에서’(apart from flesh)(BDB, NIV 난외주) 등으로 번역될 수 있다. ‘내 육체로’ ‘내 육체로부터’는 아마 ‘부활하여’라는 뜻을 내포할 것이다. 그것은 부활 신앙과 부활 소망을 보인다. ‘내 육체 밖에서’는 ‘영으로’라는 뜻일 것이다. 즉 이 구절은 욥이 죽어 그의 몸이 썩는다 할지라도, 영으로 하나님이신 메시아를 볼 것이라는 뜻이든지, 아니면 장차 부활하여 그를 볼 것이라는 뜻일 것이다.

[27-29절] 내가 친히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 . . .

욥은 또, “내가 친히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외인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급하구나”라고 말한다.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외인처럼 하지 않는다”는 말은 “다른 사람이 아니고 내 눈이 보리라”는 뜻이라고 본다(KJV, NASB, NIV). 욥은 자기를 구원하실 구주의 살아계심을 확신한다. 또 “내 마음이 초급하다(칼라)”는 원문은 “내 마음이 내 속에서 쇠하다”는 뜻이다(BDB, KJV, NASB). 욥은 자기 눈이 메시아를 볼 것을 확신한다. 그러나 그는 또한 지금 마음의 쇠약함이 있음을 고백한다.

욥은 또, “너희가 만일 이르기를 우리가 그를 어떻게 칠꼬 하며 또 이르기를 일의 뿌리가 그에게 있다 할진대”라고 말한다. 원문에는 ‘그에게’라는 말이 ‘나에게’()라고 되어 있으나 그것은 말하는 자의 입장에서 표현된 것이라고 보며, ‘일’은 친구들의 비난이나 욥의 고난을 가리킬 것이다. 친구들은 욥을 비난하고 공박하고 있다. 그들은 그들의 비난의 근원이나 욥의 고난의 원인이 욥 자신에게 있다고 말하는 것일 것이다. 다시 말해, 자신들의 비난이 욥의 잘못 때문이라는 뜻, 즉 욥이 자신을 의롭다고 여기기 때문이라는 뜻이거나 욥이 자기의 잘못 때문에 고난을 받는다는 뜻일 것이다.

욥은 이제, “너희는 칼을 두려워할지니라. 분노는 칼의 형벌을 부르나니 너희가 심판이 있는 줄을 알게 되리라”고 말한다. 그는 친구들의 비난이 하나님 앞에서 잘못이며 하나님의 분노와 심판을 피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분노와 심판을 두려워하며 그들의 잘못된 마음과 행동을 고쳐야 할 것이다.

욥은 사람 앞에서 지적받을 잘못을 한 적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의롭게 살려고 애쓴 자이었으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고난을 주셨고 그의 부르짖음을 외면하셨고 그를 향해 진노하고 큰 재앙을 내리시는 것 같았다. 욥의 형제들, 친지들, 친구들, 그의 아내, 심지어 그의 여종들까지도 그를 멀리하며 싫어하였다. 그들은 그를 불쌍히 여기지 않았고 위로하지 않았다. 그러나 욥은 그의 구속자(救贖者)가 살아 계시고 후일에 땅에 서실 것을 알았고 그가 신적인 존재이실 것을 확신하였다.

성도는 땅 위에서 때때로 이유를 알지 못하는 고난을 당하지만, 그러나 낙심치 말자. 우리는 사람들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고 끝까지 참고 기다리자. 우리는 지금도 살아계신 우리의 구속자(救贖者)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만 믿고 의지하자. 또 우리는 하나님의 최종적 공의의 심판만 믿고 하나님 앞에서 바르고 선하게만 살자.

 

 

20장: 소발--악인은 하나님의 벌을 받는다

[1-11절] 나아마 사람 소발이 대답하여 가로되 그러므로 . . . .

나아마 사람 소발이 대답하여 말하였다. “그러므로 내 생각이 내게 대답하나니 이는 내 중심이 초급함이니라. 내가 나를 부끄럽게 하는 책망을 들었으므로 나의 슬기로운[깨닫는] 마음이 내게 대답하는구나. 네가 알지 못하느냐? 예로부터 사람이 이 세상에 있어 옴으로 악인의 이기는 자랑도 잠시요 사곡한(카네프)[불경건한] 자의 즐거움도 잠깐이니라.” 소발은 악인의 결말에 대해 말한다. 악인의 형통과 자랑은 잠시이고, 또 불경건한 자의 기쁨과 즐거움도 잠깐이다.

소발은 또, “그 높기가 하늘에 닿고 그 머리가 구름에 미칠지라도 자기의 똥()처럼 영원히 망할 것이라. 그를 본 자가 이르기를 그가 어디 있느냐 하리라. 그는 꿈같이 지나가니 다시 찾을 수 없을 것이요 밤에 보이던 환상처럼 쫓겨가리니 그를 본 눈이 다시 그를 보지 못할 것이요 그의 처소도 다시 그를 보지 못할 것이며”라고 말한다. 악인은 지위가 심히 높아진다 할지라도 마침내 자기의 배설물과 같이 지극히 비천하게 되며 다시 그를 볼 수 없도록 영원히 망할 것이다.

소발은 또, “그의 자녀들이 가난한 자에게 은혜를 구하겠고 그도 얻은 재물을 자기 손으로 도로 줄 것이며 그 기골[뼈들]이 청년같이 강장하나 그 강장함이 그와 함께 흙에 누우리라”고 말한다. 악인과 그 자녀들은 물질적으로 극히 가난해질 것이며, 또 그들은 한때 육체적으로 강건하나 그 강건함과 그 기운도 쇠잔하고 말 것이다.

[12-19절] 그는 비록 악을 달게 여겨 혀 밑에 감추며 아껴서 . . . .

소발은 또 말한다. “그는 비록 악을 달게 여겨 혀 밑에 감추며 아껴서 버리지 아니하고 입에 물고 있을지라도 그 식물이 창자 속에서 변하며 뱃속에서 독사의 쓸개가 되느니라. 그가 재물을 삼켰을지라도 다시 토할 것은 하나님이 그 배에서 도로 나오게 하심이니 그가 독사의 독을 빨며 뱀의 혀에 죽을 것이라.”

악인의 악하게 모은 재물은 자기에게 독이 될 것이다. 그가 비록 악을 달게 여겨 혀 밑에 감추며 아껴서 버리지 않고 입에 물고 있을지라도 그 식물이 창자 속에서 변하며 뱃속에서 독사의 쓸개와 같이 쓰게 되고 독이 될 것이다. 그가 재물을 삼켰을지라도 하나님이 그 배에서 도로 나오게 하심으로 다시 토할 것이다. 악인의 악은 결국 자신에게 독이 되어 그를 죽게 만들 것이다. 이웃을 미워함이나 속임이나 도적질하거나 탈취하는 것 등이 다 그러할 것이다.

소발은 또 말한다. “그는 강 곧 꿀과 엉긴 젖이 흐르는 강을 보지 못할 것이요 수고하여 얻은 것을 도로 주고 삼키지 못할 것이며 매매하여 얻은 재물로 즐거워하지 못하리니 이는 그가 가난한 자를 학대하고 버림이요 자기가 세우지 않은 집을 빼앗음이니라.”

악인은 물질적 복을 누리지 못할 것이다. 그는 ‘꿀과 엉긴 젖이 흐르는 강’ 즉 복된 환경(출 3:8; 신 32:13-14)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는 자기가 수고하여 얻은 것을 도로 주고 자신이 먹고 즐기지 못할 것이며, 매매하여 얻은 재물도 자기에게 즐거움과 행복이 되지 못할 것이다. 악인이 망하는 이유는, 가난한 자를 학대하고 버리는 일이나 자기가 세우지 않은 집을 빼앗은 일 등의 악행 때문이다.

[20-29절] 그는 마음에 족한 줄을 알지 못하니 그 기뻐하는 . . . .

소발은 악인에 대해 계속 말한다. “그는 마음에 족한 줄을 알지 못하니[편안함이 없으며] 그 기뻐하는 것[원하는 것]을 하나도 보존치(혹은 [재앙으로부터] 건지지) 못하겠고 남긴 것이 없이 몰수히 먹으니 그런즉 그 형통함이 오래지 못할 것이라.” 악인은 편안함이 없고 먹을것이 남지 않고 형통함이 오래지 못할 것이다.

소발은 또, “[그가] 풍족할 때에도 곤액[재난]이 이르리니 모든 고통하는 자의 손이 그에게 닿으리라. 그가 배를 불리려 할 때에 하나님이 맹렬한 진노를 내리시리니 밥 먹을 때에 그의 위에 비같이 쏟으시리라”고 말한다. 악인은 풍족함을 누릴 때 갑자기 재난들이 닥치며 또 모든 고통하는 자들도 손을 펼쳐 그에게서 무엇을 취하려 할 것이다. 또 그가 배불리 무엇을 먹으려 할 때에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가 비처럼 그에게 내릴 것이다.

소발은 또, “그가 철 병기를 피할 때에는 놋활이 쏘아 꿸 것이요 몸에서 그 살을 빼어 낸즉 번쩍번쩍하는 촉이 그 쓸개에서 나오고 큰 두려움이 그에게 임하느니라”고 말한다. 악인은 하나님의 재앙을 피할 수 없고, 그 재앙은 그에게 치명적이며 큰 두려움이 될 것이다.

소발은 또 말한다. “모든 캄캄한 것이 그의 보물을 위하여 쌓이고 사람이 피우지 않은 불이 그를 멸하며 그 장막에 남은 것을 사르리라. 하늘이 그의 죄악을 드러낼 것이요 땅이 일어나 그를 칠 것인즉 그 가산이 패하여 하나님의 진노하시는 날에 흘러가리니 이는 악인이 하나님께 받을 분깃이요 하나님이 그에게 정하신 산업이니라.” 그에게는 절망적 어두움이 임하며 하나님의 불이 그를 멸하며 하늘과 땅이 그의 죄악을 드러내며 그와 그의 가산을 쳐서 없앨 것이다.

악인은 일시적으로 풍족함과 건강함과 형통을 누리지만 그는 오래 가지 못하고 갑자기 망할 것이다. 그는 지극히 비천해질 것이다. 그와 그 자녀들은 가난해질 것이다. 그의 모은 재물은 그에게 독이 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내리시는 공의의 징벌과 심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시적이고 헛된 세상적 영광을 크게 여기지 말고 그것을 구하거나 부러워하지도 말자. 우리는 모든 악을 버리고 심판자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만 소망하고 가난한 자를 학대하지 말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구제하고 오직 의롭고 선하게만 살자.

 

 

21장: 욥--어찌하여 악인이 형통한가?

[1-7절] 욥이 대답하여 가로되 너희는 내 말을 자세히 들으라. . . .

욥은 대답하여 말한다. “너희는 내 말을 자세히 들으라. 이것이 너희의 위로가 될 것이니라. 나를 용납하여 말하게 하라. 내가 말한 후에 또 조롱할지니라. 나의 원망이 사람을 향하여 하는 것이냐? 내가 어찌 초급하지 아니하겠느냐? 너희는 나를 보아라. 놀라라. 손으로 입을 가리우라. 내가 추억하기만 하여도 답답하고 두려움이 내 몸을 잡는구나. 어찌하여 악인이 살고 수(壽)를 누리고 세력이 강하냐?”

하나님의 공의에 비추어 보면, 악인은 죽어야 하고 단명(短命)해야 하고 세력이 소멸되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즉시 시행되는 것이 아니다. 최종적으로는 그렇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섭리는 반드시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다 알지 못한다. 어떤 때는, 아니, 빈번하게 악인이 건강하게, 오랫동안 살고 그 세력도 강하다.

하나님께서 악인의 심판을 지연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로, 그것은 하나님의 자비와 오래 참으심 때문이다. 둘째로, 그것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셔서 마지막 심판 때에 불평할 수 없게 하시기 위함이다(롬 2:4). 셋째로, 그것은 악인을 다른 사람의 심판과 징계의 도구나 최종심판을 이루시는 도구로 사용하시기 위함이다. 잠언 16:4,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그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도 도구로 쓰셨다. 그러나 악인은 마침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8-12절] 씨가 그들의 앞에서 그들과 함께 굳게 서고 자손이 . . . .

욥은 악인의 외적 번창에 대해 계속 말한다. “[악인의] 씨가 그들의 앞에서 그들과 함께 굳게 서고 자손이 그들의 목전에서 그러하구나.” 악인의 자녀들이 번창하고 성공하는 경우가 있다. 오늘날 말로 하면, 그들은 좋은 학교에 진학하고 좋은 직장에 취직하는 것이다.

욥은 또 “그 집이 평안하여 두려움이 없고 하나님의 매가 그 위에 임하지 아니하며”라고 말한다. 악인에게 가정적 평안이 있고 하나님의 징벌이 없는 경우도 있다. 세상에는 이런 경우가 종종 있다. 욥은 욥기 12:6에서도 “강도의 장막은 형통하고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자가 평안하니 하나님이 그 손에 후히 주심이니라”고 말하였다.

본문에서 욥은 또 “그 수소는 영락없이 새끼를 배게 하고 그 암소는 새끼를 낳고 낙태하지 않는구나”라고 말한다. 목축업은 옛날 근동 거주민들의 주업이었다. 가축의 출산은 기업 번창의 주된 요소이었다. 본문은 악인의 기업이 쇠하지 않고 번창하는 것을 말한다. 오늘날 말로 하면, 악한 직장인의 매월 타는 봉급은 증가하고 악한 기업가가 경영하는 기업의 순이익은 증가하는 것을 말한다.

욥은 또 “그들은 아이들을 내어보냄이 양떼 같고 그 자녀들은 춤 추는구나”라고 말한다. 악인들은 자녀들을 많이 낳아 잘 기르며 그 자녀들에게는 즐거움과 행복이 있어 보인다.

욥은 또 “그들이 소고(小鼓)와 수금으로 노래하고 피리 불어 즐기며”라고 말한다. 악인들은 심지어 어른들이나 아이들이나 소고(小鼓)와 수금으로 노래하고 피리를 불며 즐긴다. 그들은 악기들을 연주하며 노래하고 유흥을 즐기는 여유를 가지는 것이다.

[13절] 그 날을 형통하게 지내다가 경각간에 음부에 내려가느니라.

욥은 또 말하기를, “[악인은] 그 날을 형통하게 지내다가 경각간에 음부에 내려가느니라”고 한다. ‘경각간에’라는 원어(베레가)는 ‘한 순간에, 갑자기, 평안히’라는 뜻이다(BDB). 본절은 악인의 빠르고 고통 없는, 평화로운 죽음을 묘사하는 것 같다(NIV). 시편 73:4는,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라고 말한다.

인생의 삶이 이 세상이 전부이며 이 세상뿐이라면, 악인의 고통 없는 평안한 죽음은 당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19에서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금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 말하였다. 왜냐하면 주의 사도들과 초대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 때문에 고난과 핍박을 받았고 순교도 당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의 영혼은 불멸하고 모든 사람에게는 죽은 후의 세계가 있다. 또 하나님의 최종적인, 공의의 심판이 있다. 전도서 12:14는,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고 말하고, 히브리서 9:27은,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말한다.

주께서 누가복음 16:19 이하에 기록케 하신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는 죽은 후의 세계가 있고 선악간의 보응이 있음을 잘 교훈한다. 또 주께서는 마태복음 5:10-12에서 말씀하셨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14-16절] 그러할지라도 그들은 하나님께 말하기를 우리를 . . . .

욥은 악인에 대해 계속 말한다. “그러할지라도 그들은 하나님께 말하기를 우리를 떠나소서. 우리가 주의 도리 알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나이다.” ‘그러할지라도’(NIV)라는 원어()는 ‘그러므로’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KJV). 악인은 건강하고 형통하고 평안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지 않고 오히려 배척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거절하고 멀리한다. 또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배우기를 즐거워하지 않는다.

욥은 또 말한다. “[악인은] 전능자가 누구기에 우리가 섬기며 우리가 그에게 기도한들 무슨 이익을 얻으랴 하는구나.” 악인은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께 예배하려는 마음이 도무지 없다.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쓸데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불경건하며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다.

욥은 또, “그들의 복록이 그들의 손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니라. 악인의 계획은 나와 판이하니라”고 말한다. 악인들이 평안과 형통을 누리는 것은 그들 자신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신 은혜이다. 그러나 악인의 생각과 욥의 생각은 완전히 다르다.

악인은 불경건하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참 경건이 필요하다. 잠언 1:7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혹은 시작]이라”고 말했다. 모든 사람은 피조물이며 하나님 안에 살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창조하신 세계 안에서 살고 있고 하나님의 공급하심 속에서 살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햇빛을 받고 비를 맞고 공기를 마시며 살고 있다(행 17:25-28). 그러므로 인간의 죄들 가운데 하나님을 부정하거나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는 죄가 가장 근본적인 죄이다. 이론적인 혹은 실제적인 무신론은 인간의 죄 중에 가장 근본적인 죄이다.

[17-26절] 악인의 등불이 꺼짐이나 재앙이 그들에게 임함이나 . . . .

욥은 또, “악인의 등불이 꺼짐이나 재앙이 그들에게 임함이나 하나님이 진노하사 그들을 곤고케 하심이나 그들이 바람 앞에 검불같이, 폭풍에 불려 가는 겨같이 되는 일이 몇 번이나(캄마)[얼마나 자주] 있었느냐?”고 말한다. 악인의 행복이 그치고 재앙이 그에게 임하고 그가 하나님의 진노로 곤고케 되고 폭풍 앞에 불려가는 검불같이 되는 일이 즉시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뜻이다.

욥은 또 “하나님이 그의 죄악을 쌓아 두셨다가 그 자손에게 갚으신다 하거니와 그 몸에 갚으셔서 그로 깨닫게 하셔야 할 것이라. 자기의 멸망을 자기의 눈으로 보게 하시며 전능자의 진노를 마시게 하셔야 할 것이니라”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 자손에게가 아니고 악인에게 직접 징벌하셔서 그로 깨닫게 하셔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욥은 또 “[이는] 그의 달수가 진하면 자기 집에 대하여 무슨 관계가 있겠느냐 [함이라]. 그러나 하나님은 높은 자들을 심판하시나니 누가 능히 하나님께 지식을 가르치겠느냐?”고 말한다. 그는 만일 악인이 죽고 나면, 그 자손의 불행이 그에게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그러나 누가 감히 심판자 하나님을 가르칠 수 있겠는가고 말하는 것이다.

욥은 또, “어떤 사람은 죽도록 기운이 충실하여 평강하며 안일하고 그 그릇에는 젖이 가득하며 그 골수는 윤택하였고 어떤 사람은 죽도록 마음에 고통하고 복을 맛보지 못하였어도 이 둘이 일반으로 흙 속에 눕고 그 위에 구더기가 덮이는구나”라고 말한다. 그는 이 세상에서 선악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보응이 다 시행되지 않는 경우들이 있다고 말한다. 전도서 8:11도, “악한 일에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않으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라고 말했다.

[27-34절] 내가 너희의 생각을 알고 너희가 나를 해하려는 . . . .

욥은 또 말한다. “내가 너희의 생각을 알고 너희가 나를 해하려는 궤휼(메짐마)[악한 생각]도 아노라. 너희의 말이 왕후의 집이 어디 있으며 악인의 거하던 장막이 어디 있느뇨 하는구나.” ‘왕후’라는 원어(나디브)는 ‘존귀한 자’라는 뜻이다. 악한 군주를 생각케 된다. 친구들은 악한 군주나 악인의 집이 다 패망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욥은 대답한다. “너희가 길 가는 사람들에게 묻지 아니하였느냐? 그들의 증거를 알지 못하느냐? 악인은 남기워서 멸망의 날을 기다리움이 되고 멸망의 날을 맞으러 끌려나감이 된다 하느니라.” 욥은 길 가는 사람들도, 악인이 죽은 후 최종적 심판을 받으리란ㄴ 것을 알지만, 그가 세상에서 평안히 죽는 일이 있음을 말하려 한다.

욥은 또 말한다. “누가 능히 그의 행위를 면박하며 누가 능히 그의 소위를 보응하랴마는 그를 무덤으로 메어 가고 사람이 그 무덤을 지키리라. 그는 골짜기의 흙덩이를 달게 여기고 그 앞선 자가 무수함같이 모든 사람이 그 뒤를 좇으리라. 이러한즉 너희의 위로가 헛되지 아니하냐? 너희의 대답은 거짓뿐이니라.”

악인이 살아 있는 동안 그 앞에서 그의 행위를 면박하고 그의 행위에 대해 보응할 수 있는 자가 없겠지만, 악인은 평안히 무덤에 묻히며 그의 장례식에는 많은 사람들의 행렬이 그의 앞과 그의 뒤에 있을 것이며, 또 많은 사람이 그런 길을 밟을 것이다. 이와 같이 악인이 세상에서 평안히 살다가 평안히 죽는 경우들이 종종 있다. 그러나 죽음 후에는 하나님의 최종적인 심판이 있을 것이다.

악인은 때때로 형통한 것 같다. 그는 장수하고 세력이 강하다. 그의 자녀들은 번창한다. 오늘날 말로 하면, 그들은 진학도 잘 하고 취직도 잘 한다. 그의 사업도 번창하며 그는 물질적 유여함을 누린다. 또 그는 평안한 임종을 한다. 그는 참으로 형통한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거나 불평하지 말아야 한다(잠 23:17; 24:1, 19-20).

악인은 불경건하다.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께 예배드리거나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는다. 또 그는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기 때문에 온갖 죄악된 일들을 행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롭고 선하게만 살아야 한다.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 즉시 시행되지 않는다. 어떤 때는 하나님께서 악인을 그 당대에 갚으시지 않는다. 악인은 죽을 때까지 건강하고 평안하며 장례식도 화려하다. 그러나 우리는 악인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을 알자. 그것은 때때로 땅 위에서 이루어진다(시 58편; 시 73편). 그러나 만일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심판을 예비하셨고 그 날에 악인에 대해 공의로 심판하실 것이다.

 

 

22장: 엘리바스--악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1-3절]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대답하여 가로되 사람이 어찌 . . . .

데만 사람 엘리바스는 대답하기를, “사람이 어찌 하나님께 유익하게 하겠느냐? 지혜로운 자도 스스로 유익할 따름이니라. 네가 의로운들 전능자에게 무슨 기쁨이 있겠으며 네 행위가 온전한들 그에게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완전충족하시다. 그의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다. 그는 영원자존(永遠自存)하신다. 그는 영광이 충만하시다. 그는 지혜와 능력도 충만하시다. 그는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시다. 사람이 하나님께 무슨 유익을 드릴 것이 없다. 사람의 의나 행위의 온전함은 그에게 무슨 이익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완전충족하시다. 욥기 35:7-8도, “네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네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네 악은 너와 같은 사람이나 해할 따름이요 네 의는 인생이나 유익하게 할 뿐이니라”고 말한다.

물론 사람의 죄는, 비록 하나님께 손해되는 것은 없으나, 하나님을 노엽게 한다. 죄는 하나님의 권위와 속성에 반대되는 것이므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이 따른다. 이와 같이, 사람의 의도 자기에게 유익할 뿐이다. 신명기 10:13은,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계명의 순종은 자신에게 행복이 되고 불순종은 자신에게 불행이 된다.

[4-11절] 하나님이 너를 책망하시며 너를 심문하심이 너의 . . . .

엘리바스는 또, “하나님이 너를 책망하시며 너를 심문하심이 너의 경외함을 인함이냐? 네 악이 크지 아니하냐? 네 죄악이 극하니라”고 말한다. 그는 욥의 죄악이 크다고 그릇되게 단정한다. 비록 그가 욥의 악행을 잘못 추측하지만, 그가 말하는 악은 분명히 악이다.

엘리바스는 “[욥이] 까닭 없이 형제의 물건을 볼모 잡으며[담보로 취하며] 헐벗은 자의 의복을 벗기며 갈한 자[피곤한 자]에게 물을 마시우지 아니하며 주린 자에게 식물을 주지 아니하였구나”라고 말한다. 까닭 없이 형제의 물건을 담보로 취하거나 헐벗은 자의 옷을 벗기는 것은 악한 일이다. 성경은 이웃의 옷을 담보물로 취했으면 해 지기 전에 돌려보내라고 가르쳤고(출 22:26) 또 맷돌을 담보물로 취하지 말라고 했다(신 24:6). 그것은 옷 없이 추운 밤을 지내거나 맷돌 없이 식사를 준비하는 어려움을 고려한 것이다. 또 피곤한 자에게 물을 마시우지 않고 주린 자에게 음식을 주지 않는 것도 악한 일이다. 성경은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식물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우라”고 말했다(잠 25:21). 구제하지 않는 것은 악한 일이다.

엘리바스는 또 말한다. “권세 있는 자가 토지를 얻고 존귀한 자가 거기서 사는구나. 네가 과부를 공수로[빈손으로] 돌아가게 하며 고아의 팔을 꺾는구나.” 권세자에게 토지를 제공하고 존귀한 자에게 거기에 살게 배려하면서도, 과부는 돕지 않고 빈손으로 돌려보내고 고아의 팔을 붙들어주지 않고 오히려 꺾고 학대하는 것은 악한 일이다.

엘리바스는 또, “이러므로 올무들이 너를 둘러 있고 두려움이 홀연히 너를 침범하며 어두움이 너로 보지 못하게 하고 창수가 너를 덮느니라”고 말한다. 악인은 하나님의 공의의 보응을 받을 것이다.

[12-14절] 하나님이 높은 하늘에 계시지 아니하냐? 보라, 별의 . . . .

엘리바스는 또, “하나님이 높은 하늘에 계시지 아니하냐? 보라, 별의 높음이 얼마나 높은가?”라고 말한다. 하늘이 얼마나 높은가? 그것은 끝없이 높다. 별들이 얼마나 높은 곳에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그 별들보다 더 높이, 더 멀리 계신다. 그러나 전지전능하시고 무한하신 그분은 땅 위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다 아시고 공의로 판단하신다.

엘리바스는 또 말한다. “그러나 네 말은 하나님이 무엇을 아시며 흑암 중에서 어찌 심판하실 수 있으랴. 빽빽한 구름이 그를 가리운즉 그가 보지 못하시고 궁창으로 걸어다니실 뿐이라 하는구나.” 엘리바스에 의하면, 욥은, 하나님께서 너무 높이 멀리 계셔서 모든 악인의 행위를 다 알지 못하시며, 빽빽한 구름과 흑암 때문에, 그것을 바르게 판단하지 못하신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추측이었다. 욥은 하나님께 대해 그런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엘리바스가 묘사한 그런 사람은 분명히 악인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늘 높이 멀리 떨어져 계셔도 모든 사람의 행동을 다 아시고 빽빽한 구름과 흑암 가운데서도 다 아신다. 오늘날 사람이 만든 인공위성도 고성능, 초정밀 카메라가 있어 하늘에서 지구 위의 일들을 상당히 자세히 알아낸다. 또 적외선 카메라는 밤에도 물체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식별할 수 있다. 시편 139:1-4, 12,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취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일반이니이다.”

[15-20절] 네가 악인의 밟던 옛적 길을 지키려느냐? 그들은 . . . .

엘리바스는 또, “네가 악인의 밟던 옛적 길을 지키려느냐?”고 말한다. 그는 욥이 악인의 밟던 옛적 길을 지키려 한다고 그릇되이 비난한다. 악인이 밟던 옛적 길은 죄악된 길 곧 불경건하고 부도덕한 길인데 욥은 그런 길을 걸으려 하지 않았다. 엘리바스는 또 “그들은 때가 이르기 전에 끊어버리웠고 그 터는 하수로 인하여 함몰되었느니라”고 말한다. ‘그 터는 하수로 인해 함몰되었다’는 원문은 ‘그 터는 강물에 흘러 내려가는도다’는 뜻이다. 악인은 결국 망한다는 뜻이다.

엘리바스는 또, “그들이 하나님께 말하기를 우리를 떠나소서 하며 또 말하기를 전능자가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하실 수 있으랴 하였으나 하나님이 좋은 것으로 그 집에 채우셨느니라. 악인의 계획은 나와 판이하니라”라고 말한다. 악한 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떠나시기를 원한다. 아니, 실상은 그들 자신이 하나님을 멀리한다. 또 그들은 그의 능력을 무시하고 부정한다. 그러나 실상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모든 좋은 것들을 주셨다. 그들이 땅에서 누렸던 모든 좋은 것들은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었다. 다윗은 말하기를,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고 하였다(대상 29:14). 야고보서 1:17도,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온다”고 말했다.

엘리바스는 또, “의인은 보고 기뻐하고 무죄자는 그들을 비웃기를 우리의 대적들이 참으로 끊어졌고(원문) 그 남은 것(이스람)[그들의 풍성함](BDB, NASB)이 불사른 바 되었다 하느니라”고 말한다. 의인들은 악인들의 멸망을 본다는 뜻이다. 악인은 결국 망한다.

[21-22절]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 . . .

엘리바스는 또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하나님과 친근히 하고 화목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청컨대 너는 그 입에서 교훈을 받고 그 말씀을 네 마음에 두라”고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친근히 해야 한다. 그것은 말씀과 기도의 삶이다. 신명기 10:20,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 . . 그에게 친근히 하고.” 야고보서 4:8,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또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해야 한다.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하였다. 로마서 5:10,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과 화목케 된다. 또 성도는 믿음과 회개와 순종으로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계속 누린다.

엘리바스는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고 말한다. 성경이 말하는 복은 평안의 복이다. 그 평안은 몸의 건강과 경제적 안정과 가정적 행복과 사회적 평안을 다 포함한다. 물론 그 마지막 복은 영생이다. 시편 1편은 악을 멀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가 복되며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고 그의 하는 일들이 다 형통할 것이라고 말한다. 시편 119:165는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저희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라는 복된 말씀을 증거한다. 디모데전서 4:8은,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고 말한다. 그 약속은 건강과 경제 안정과 가정적, 사회적 평안, 및 영생을 포함한다.

[23-26절] 네가 만일 전능자에게로 돌아가고 또 네 장막에서 . . . .

엘리바스는 또, “네가 만일 전능자에게로 돌아가고 또 네 장막에서 불의를 멀리 버리면 다시 흥하리라”고 말한다. 원문을 정확히 번역하면, “만일 네가 전능자에게로 돌아간다면, 너는 다시 세워지리라(혹은 회복되리라). 너는 네 장막에서 불의를 멀리할지니라.”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 곧 참된 회개이다. 하나님 없이 살던 사람이 하나님을 알고 그의 교훈을 받으며 그를 사랑하고 의지하고 섬기며 순종하며 사는 것이다. 그것이 믿음이요 경건이다. 그러면 병들었던 인격이 새로워지고 불행했던 환경이라도 회복될 것이다. 또 모든 사람은 자기의 장막 곧 집에서 불의를 멀리해야 한다. 자신이 죄와 불의를 멀리해야 할 뿐 아니라, 자기의 집 곧 자기의 아내와 자녀들도 죄를 멀리하게 해야 한다. 그것이 참된 회개요 회개의 열매를 맺는 일이다.

엘리바스는 또, “네 보배(베체르)[금]를 진토에 버리고 오빌의 금을 강가의 돌에 버리라. 그리하면 전능자가 네 보배가 되시며 네게 귀한 은이 되시리니 이에 네가 전능자를 기뻐하여 하나님께로 얼굴을 들 것이라”고 말한다.

사람이 세상의 보화를 마음에 큰 가치로 품고 살면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 주께서는 누가복음 14:33에서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사람이 세상의 보화를 버려야 하나님을 참 보화로 깨닫고 모실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자기에게 유익하던 모든 것을 다 해롭게 여기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를 얻기 위해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고 고백하였다(빌 3:7-8). “주 예수보다 귀한 것은 없다.”

[27-28절] 너는 그에게 기도하겠고 그는 들으실 것이며 너의 . . . .

엘리바스는 또 “너는 그에게 기도하겠고 그는 들으실 것이며 너의 서원한 것을 네가 갚으리라”고 말한다. 사람이 하나님을 친근히 하고 하나님과 화목하며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그가 하나님의 교훈을 받고 불의를 버리고 물질 사랑을 끊고 하나님을 보화로 삼으면, 그는 기도의 응답을 얻을 것이다. 또 그러면 감사해서 서원을 갚게 될 것이다. 죄는 기도의 응답을 가로막는다. 시편 66:18,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나 사람이 의를 행하면 기도의 응답을 얻을 것이다. 주께서는,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말씀하셨다(요 15:7). 또 사도 요한은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고 말했다(요일 3:21-22).

엘리바스는 또 “네가 무엇을 경영하면 이루어질 것이요 네 길에 빛이 비취리라”고 말한다. 사람이 하나님을 친근히 하고 하나님과 화목하고 하나님의 입의 교훈을 받고 불의를 멀리하고 하나님을 보화로 삼으면, 그는 무엇을 경영하든지 이루어질 것이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형통케 하심을 경험할 것이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 중심으로 행하는 자는 그 계획하는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것은 기도의 응답과도 연관된다. 주께서는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고 말씀하셨다(요 14:14). 하나님과 동행하는 의인들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소원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룰 것이다.

[29-30절] 네가 낮춤을 받거든 높아지리라고 말하라. 하나님은 . . . .

엘리바스는 또, “네가 낮춤을 받거든 높아지리라고 말하라.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구원하시느니라”고 말한다. 성도에게는 낮춤 곧 고난이 있다. 성도에게 때때로 질병, 가난, 원수들, 핍박 등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그 고난에서 건지시고 높이신다. 시편 34:19는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라고 말한다. 잠언 24:16도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특히 겸손한 자를 구원하신다. 잠언 3:34,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

엘리바스는 또 “무죄한 자가 아니라도 건지시리니 네 손이 깨끗함을 인하여 그런 자가 건지심을 입으리라”고 말한다. 하나님께 돌아온 자, 그 장막에서 불의를 버린 자, 세상 사랑을 버리고 하나님을 보배로 삼은 자는 기도 응답을 받고 무엇을 경영하면 이루어지고 고난 중에서 구원을 받을 뿐 아니라, 그로 인하여 다른 사람도 구원을 얻을 것이다. 의인은 다른 사람이 구원을 얻는 데 중간 역할을 할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범죄함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샀을 때 모세는 그들을 멸하시려는 하나님 앞에 서서 그들의 용서를 간청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돌이키게 하였고 그의 진노를 막았다(출 32:9-14). 또 야고보서 5:15는,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고 말하였고, 요한일서 5:16은,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고 말했다.

엘리바스는 욥이 악을 행했다고 단정한다. 그는 욥이 까닭 없이 형제의 물건을 담보로 취하고 헐벗은 자의 옷을 벗기며 피곤한 자에게 먹을것을 주지 않고 과부를 돕지 않고 고아의 팔을 돕지 않고 하나님이 알지 못한다고 말하며 하나님을 배척했다고 말한다. 또 엘리바스는 악인이 결국 멸망할 것이라고 말한다.

엘리바스는 그러므로 욥에게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말한다. 그러면 모든 복, 즉 평안과 건강과 경제적 안정과 가정적, 사회적 평안을 얻을 것이라고 말한다. 또 그는 욥에게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말한다. 또 그는 욥에 그의 보배를 버리고 하나님을 보배로 삼으라고 말한다. 그러면 그가 기도 응답을 받고 그의 경영하는 일이 이루어지고 그가 높임을 받고 구원을 받고 또 남도 구원할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엘리바스의 말 자체는 옳으며 하나님의 율법에 계시된 공의의 원리라고 본다. 엘리바스의 문제는 그 공의의 원리가 욥의 경우에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욥은 그가 말한 대로 그렇게 악한 자가 아니다. 욥은 이미 하나님과 친근히 지내며 정직하고 의롭게 산 자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엘리바스의 말을 통해서도 교훈을 얻는다. 우리는 모든 악을 버리고 하나님과 화목하고 하나님을 보배로 삼고 그를 사랑하며 오직 의롭고 선하게만 살고 이웃을 구제하기를 힘써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기도의 응답을 받을 것이며 우리의 하는 모든 일이 이루어질 것이며 또 우리 자신뿐 아니라 남도 구원하는 자가 될 것이다.

 

 

23장: 욥--나의 가는 길을 그가 아신다

[1-5절] 욥이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오늘도 혹독히 원망하니 . . . .

욥은 대답하여 말한다. “내가 오늘도 혹독히 원망하니 받는 재앙[그의 손](NASB, NIV)이 탄식보다 중함이니라.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 발견할 곳을 알꼬. 그리하면 그 보좌 앞에 나아가서 그 앞에서 호소하며 변백[변론]할 말을 입에 채우고 내게 대답하시는 말씀을 내가 알고 내게 이르시는 것을 내가 깨달으리라.”

욥은 극심한 재앙의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께 나아가 호소하기를 원하며 또 고난의 이유를 알기를 원한다. 우리는 고난 중에 낙심치 말고 하나님과 멀어지지 말고 하나님께로 더 나아가야 할 것이다.

환난 때는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할 때이다. 하나님께서는,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고 시편 50:15에 약속하셨다. 야고보서 5:13은,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고 교훈한다. 고난당할 때가 곧 하나님께 기도할 때이다. 또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고 말한다(약 4:8).

주께서는 불의한 재판관 비유에서 우리가 고난 중에 낙망치 말고 기도하라고 교훈하셨다(눅 18장). 그러나 기도는 믿음을 필요로 한다. 믿음이 있어야 고난 중에 낙망치 않고 기도할 수 있다. 우리는 이미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셔서 지금도 살아계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 우리는 그 믿음을 굳게 가지고 기도해야 한다.

[6-7절] 그가 큰 권능을 가지시고 나로 더불어 다투실까? 아니라. . . .

욥은 말하기를, “그가 큰 권능을 가지시고 나로 더불어 다투실까? 아니라. 도리어 내 말을 들으시리라. 거기서는 정직자가 그와 변론할 수 있은즉 내가 심판자에게서 영영히 벗어나리라”고 한다. “내 말을 들으시리라”는 원문(야심 비)은 “내게 [힘을(KJV) 혹은 관심을(NASB)] 주시리라”는 뜻이다. 욥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믿었다.

하나님께서는 권능이 많으시지만 무조건 피조물들과 그 권능으로 다투며 위협하지 않으신다. 그는 겸손히 그에게 나오는 자를 용납하신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감히 전능자 하나님과 변론하였다. 그는 하나님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라고 말하면서 소돔과 고모라 성의 멸망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아뢰었다(창 18:23, 27).

또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시기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고 하셨다(사 1:18).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낮추시어 인간과 변론하기를 원하셨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6:37에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인자하셔서 그에게 나오는 자들을 용납하시고 회개하는 자들을 용서하시고 정직한 자들의 기도를 들어주신다. 그러므로 시편 34:8은,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하였고, 시편 65:2는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라고 말했다.

[8-9절]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 . . .

욥은,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편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편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라고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섬길 때 믿음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이다(요 4:24). 영은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다. 우리는 우리의 육신의 눈으로 하나님을 뵈올 수 없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6:16에서 하나님을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라고 표현하며 증거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신 무한하신 영이시다. 그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고 말씀하셨다(렘 23:24). 그러므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교제하려면 믿음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않는다”고 고린도후서 5:7에서 말하였고, 히브리서 11:27은 모세가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같이 하여 참았다”고 증거하였다.

신자는 보이지 않는 영이신 하나님을 믿고 섬기며, 지금 보이지 않는 내세의 영광의 천국을 믿고 소망한다. 이사야 50:10, “너희 중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가 누구뇨?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자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할지어다.” 로마서 8:24-25,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고린도후서 4:18,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10절]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 . . .

욥은 또,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고 말한다.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이라는 원어(베카나니)는 단순히, ‘그가 나를 시험하셨으니’라는 뜻이다(BDB).

욥은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신다”고 말한다. ‘나의 가는 길’이란 그가 이제까지 생각하고 소원하고 뜻한 것, 그가 이제까지 걸어온 길, 그가 지금도 걷고 있는 길을 가리킨다. 욥의 친구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를 오해하고 그릇되이 비방하고 있지만,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그의 마음과 그의 길을 정확히 아신다.

또 욥은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고 말한다.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이라고 번역하면 그가 그 시련을 통해 그의 인격이 단련된다는 것을 뜻할 것이다. 환난과 시험이 성도의 인격을 단련시키며 온전케 만드는 것은 사실이다. 로마서 5:3-4는,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고 말했다.

그러나 본문은 단순히, “그가 나를 시험하셨으니(혹은 시험하셨다면)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는 뜻이라고 본다. 그것은, 그가 앞에서 하나님의 보좌에 나아가 그의 당한 환난의 일에 대해 하나님께 묻고 공정한 판단을 받기를 원하며 하나님께서 자기의 친구들의 비난들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증거해 주시기를 원한 내용에 이어진다고 보인다(Matthew Poole, Matthew Henry, 재미슨-포셋-브라운 주석). 욥은, 그의 마음과 그의 길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그를 시험하셨으니, 그가 정금 같은 자로 인정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11-12절]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 . . .

욥은 또 말한다.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일정한 음식보다 그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구나.”

욥은 자신의 발이 그의 걸음 곧 하나님의 명하신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그의 길 곧 하나님의 명하신 교훈을 지켜 치우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의 걸음’ ‘그의 길’은 하나님의 명령과 교훈을 가리킨다. 세상 사람들은 각자 자기의 생각대로 살아간다.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의 교훈대로 살아야 한다. 잠언 6:23은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고 말했고, 시편 119:105는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말했다. 사도 바울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고 증거하였다(딤후 3:16).

욥은 또 그의 입술의 명령 곧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지 아니하였고 일정한 음식 곧 날마다 그에게 필요한 양식보다 그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다고 고백한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육신의 양식에 비교하였다. 우리가 육신의 생명과 건강을 위해 일정한 음식을 먹듯이, 우리는 영혼의 생명과 건강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지켜야 한다.

주께서는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4:4).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귀히 여기며 그 말씀을 묵상하고 힘써 지켜야 한다. 주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말씀하셨고(마 28:20), 사도 바울은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을 지키라”고 교훈하였다(살후 2:15).

[13-17절]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킬까? . . .

욥은 또 말한다.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킬까? 그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

‘뜻이 일정하다’는 원어(베에카드)는 ‘한 마음을 가지신다’(in one mind)(KJV) 혹은 ‘유일하시다’(unique)(NASB)는 뜻이라고 본다. 하나님께서는 한 마음, 변치 않는 마음, 일정한 뜻을 가진 유일하신 자이시다. 그와 비교할 자는 세상에 아무도 없다. 그의 뜻을 돌이킬 자는 아무도 없다. 그는 그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을 다 행하시는 자이시다. 그는 주권적 섭리자이시다. 시편 115:3,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

그는 욥을 향해 작정하신 것을 다 이루실 것이다. 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셨다.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 . . 내가 말하였은즉 정녕 이룰 것이요 경영하였은즉 정녕 행하리라”(사 46:10-11).

욥은 또 말한다. “그러므로 내가 그의 앞에서 떨며 이를 생각하고 그를 두려워하는구나. 하나님이 나로 낙심케 하시며 전능자가 나로 두렵게 하시나니 이는 어두움으로 나를 끊지 아니하셨고 흑암으로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셨음이니라.” 17절은 다시 번역하면, “이는 내가 어두움 앞에서 끊어지지[죽지] 아니하였고 그가 어두움을 내 얼굴에서 가리지 아니하셨음이라.” 지금 욥은 주권자 하나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하며 또 낙심한다. 그는 죽기를 원했으나 하나님께서 허락지 않으셨고 그 대신 이 혹독한 고난을 경험케 하셨다.

욥은 고난 중에 하나님을 찾았다. 우리는 고난 중에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기도하자. 하나님께서는 그를 찾는 자,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에게 나아가는 자를 결코 물리치지 않으실 것이다.

욥은 하나님께서 그의 가는 길을 아신다고 확신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일정한 뜻을 가지셨고 그의 작정하신 것을 다 이루실 것을 믿었다. 욥은 지금 하나님의 시험을 통과하고 있다. 그것은 그에게 연단의 기회이었다. 그는 그것을 통해 정금같이 성화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작정하시고 섭리하시는 길로 가고 있음을 믿고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우리도 고난을 통해 정금같이 나올 것을 믿자.

욥은 평소에 하나님의 교훈을 따랐고 하나님의 말씀을 일정한 음식보다 귀히 여겼다. 우리는 날마다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일을 힘쓰자. 매일 성경 읽는 일을 하루 세끼 밥을 먹는 것보다 더 귀중하게 여기자.

 

 

24장: 욥--하나님께서 악인의 심판을 지연하신다

[1-4절] 어찌하여 전능자가 시기를 정하지 아니하셨는고. . . .

욥은 또, “어찌하여 전능자가 시기를 정하지 아니하셨는고. 어찌하여 그를 아는 자들이 그의 날을 보지 못하는고”라고 말한다. ‘정한다’는 원어(차판)는 ‘저장하다’는 뜻이다. 다시 번역하면, “어찌하여 날들이 전능자 앞에 저장되지 않았으며 그를 아는 자들이 그의 날들을 보지 못하였는고.” ‘날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날을 가리킨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악인들의 심판을 지연하심을 말한 것이다.

욥은 또 말한다. “어떤 사람은 지계표를 옮기며 양떼를 빼앗아 기르며 고아의 나귀를 몰아가며 과부의 소를 볼모 잡으며 빈궁한 자를 길에서 몰아내나니 세상에 가난한 자가 다 스스로 숨는구나.”

욥은 악인에 대해 묘사한다. 땅의 경계표를 옮기는 것은 악한 일이다. 신명기 19:14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어 얻게 하시는 땅 곧 네 기업된 소유의 땅에서 선인(先人)의 정한 네 이웃의 경계표를 이동하지 말지니라”고 말했다. 또 양떼를 빼앗아 기르는 것이나, 고아의 나귀를 몰아가며 과부의 소를 볼모 잡는 것이나, 또 빈궁한 자를 길에서 몰아내는 것도 악한 일이다. 시편 68:5는 하나님께서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고 표현하였고, 신명기 10:18은, “[그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신원하시며[억울함을 갚아주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사 그에게 식물과 의복을 주신다”고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고아와 과부, 또 가난한 자들을 동정하시고 도우시는 하나님이시다.

[5-12절] 그들은 거친 땅의 들 나귀 같아서 나가서 일하며 먹을 . . . .

욥은 또 말한다. “그들은 거친 땅의 들나귀 같아서 나가서 일하며 먹을것을 부지런히 구하니 광야가 그 자식을 위하여 그에게 식물을 내는구나. 밭에서 남의 곡식을 베며 악인의 남겨 둔 포도를 따며 의복이 없어 벗은 몸으로 밤을 지내며 추위에 덮을 것이 없으며 산중 소나기에 젖으며 가리울 것이 없어 바위를 안고 있느니라. 어떤 사람은 고아를 어미 품에서 빼앗으며 가난한 자의 옷을 볼모 잡으므로 그들이 옷이 없어 벌거벗고 다니며 주리면서 곡식단을 메며 그 사람의 담 안에서 기름을 짜며 목말라하면서 술틀을 밟느니라. 인구 많은 성중에서 사람들이 신음하며 상한 자가 부르짖으나 하나님이 그 불의(티플라)[보기 흉함, 불미함](BDB)를 보지 아니하시느니라.”

욥은 가난한 자들에 대해 묘사한다. 세상에는 악한 자들로 인하여 신음하며 부르짖는 가난한 자들이 많이 있다. 입을 옷이 없고 겨울에 따뜻한 방이 없고 먹을 음식이 충분히 없고 마실 물이 충분히 없는 자들이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악인들의 불의한 일과 그 가난한 자들의 신음을 돌아보지 않으시는 것 같은 일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변하지 않았고 그의 심판도 없어지지 않았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형제들 중 하나가 주릴 때에 그에게 먹을것을 주고 그가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히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고 옥에 갇혔을 때에 방문하는 것이다(마 25:35-40). 그런 행동이 이웃 사랑, 형제 사랑의 실천이다. 성경은 우리의 원수라도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고 교훈한다(롬 12:20). 또 이 세상에서 악인에 대한 심판이 시행되지 않는 것 같아도 하나님의 최종적 심판은 죽지 않았다.

[13-17절] 또 광명을 배반하는 사람들은 이러하니 그들은 . . . .

욥은 또, “또 광명을 배반하는 사람들은 이러하니 그들은 광명의 길을 알지 못하며 그 첩경에 머물지 아니하는 자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빛은 참 지식과 의를 가리킨다. 하나님은 빛이시다(요일 1:5). ‘빛의 길’을 걷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의롭고 선하고 진실한 삶을 사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빛을 배반하는 사람들은 빛의 길을 알지 못하고 그 길에 머물지 않는 자들, 곧 십계명을 저버리고 불경건하고 불의하고 악하고 거짓된 삶을 사는 자들을 가리킨다.

욥은 또 말한다. “사람을 죽이는 자는 새벽에 일어나서 가난한 자나 빈궁한 자를 죽이고 밤에는 도적같이 되며, 간음하는 자의 눈은 저물기를 바라며 아무 눈도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고 얼굴을 변장하며, 밤에 집을 뚫는 자는 낮에는 문을 닫고 있은즉 광명을 알지 못하나니, 그들은 다 아침을 흑암같이 여기니 흑암의 두려움을 앎이니라.”

욥은 살인하는 자, 간음하는 자, 도적질하는 자를 예를 들어 말한다. 이들은 다 어두움의 사람들, 곧 어두운 시간에 일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빛을 싫어하고 빛을 두려워한다. 예수께서도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라고 말씀하셨다(요 3:20).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빛의 자녀들이다. 우리는 빛된 생활을 해야 한다. 주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다(마 5:14). 로마서 13:13은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라”고 말했고, 에베소서 5:8-9는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고 했다.

[18-25절] 그들은 물 위에 빨리 흘러가고 그 산업은 세상에서 . . . .

욥은 악인들에 대해 또, “그들은 물 위에 빨리 흘러가고 그 산업은 세상에서 저주를 받나니 그들이 다시는 포도원 길로 행치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악인들은 빨리 쇠잔할 것이고 그 산업은 저주를 받고 그들은 다시 포도원의 소산을 즐기지 못할 것이다.

욥은 또, “가뭄과 더위가 눈 녹은 물을 곧 말리나니 음부가 범죄자에게도 그와 같은 것인즉 태가 그를 잊어버리고 구더기가 그를 달게 먹을 것이라. 그는 기억함을 다시 얻지 못하나니 불의가 나무처럼 꺾이리라”고 말한다. 범죄자는 곧 죽어 무덤에 묻힐 것이다. 그를 낳은 태, 곧 그의 모친도 그를 잊어버리고 벌레가 그 시체를 먹을 것이다. 그는 사람들이 기억지 못하고 나무처럼 꺾일 것이다.

욥은 또 말한다. “그는, 잉태치 못하므로 해산치 못한 여인을 학대하며 과부를 선대치 아니하는 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그 권능으로 강한 자들을 보존시키시니 살기를 바라지 못할 자도 일어나는구나.” 악인은 슬픈 여인들을 동정치 않고 도리어 학대한다. 22절은 아마, “또 그는 그 권능으로 강한 자들을 이끌도다. 그가 일어나니 아무도 생명을 확신하지 못하도다”라는 뜻 같다(KJV)(Poole). 악인들은 다른 동료들을 끌어들이고 사람들은 그 악한 자들을 두려워한다.

욥은 또 말한다. “하나님이 그들을 호위하사 평안케 하시나 그 눈은 그들의 길에 있구나. 그들은 높아져도 잠시간에 없어지나니 낮아져서 범인(凡人)처럼(as all other)(KJV) 제함을 당하고 곡식 이삭같이 베임을 입느니라. 가령 그렇지 않을지라도 능히 내 말을 거짓되다 지적하거나 내 말이 헛되다 변박할 자 누구랴.” 하나님께서는 얼마간 그들을 평안케 하시나 주목하시고 잠시 후에 멸망케 하실 것이다.

악인은 땅의 경계표를 옳기고 앙떼를 빼앗아 기르며 고아의 나귀와 과부의 소를 볼모잡으며 빈궁한 자를 몰아낸다. 살인자나 간음하는 자나 도적은 다 어두움의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죽지 않았다. 악인은 얼마간 평안을 누릴지 모르나, 결국 쇠잔해질 것이다.

우리는 악을 행치 말자. 우리는 살인하지 말고 간음하지 말며 도적질하지 말자.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와 선을 행하자.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남에게 선을 베풀며 구제하며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자. 또 우리는 의인과 악인을 향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확신하자.

 

 

25장: 빌닷--사람은 하나님 앞에 의롭지 않다

[1-6절] 수아 사람 빌닷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은 권능과 . . . .

수아 사람 빌닷이 말한다. “하나님은 권능과 위엄을 가지셨고 지극히 높은 곳에서 화평[평안]을 베푸시느니라. 그 군대를 어찌 계수할 수 있으랴. 그 광명의 비췸을 입지 않은 자가 누구냐?”

‘권능’이라는 원어(하메쉘)는 ‘다스림, 통치권’을 가리키고, ‘위엄’이라는 원어(파카드)는 ‘두려움’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통치권과 두려움을 가지신 주권자로서 땅에 평안을 주신다. 땅 위에 사는 사람들 중에 하나님의 은총의 빛을 받지 않은 자가 없다.

빌닷은 또 말한다. “그런즉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부녀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랴. 하나님의 눈에는 달이라도 명랑치[밝지] 못하고 별도 깨끗지 못하거든 하물며 벌레인 사람, 구더기인 인생이랴.”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지 못하고 깨끗지 못하다. 사람은 죄로 인해 죽고 썩는 존재로 비천해졌다. 인생은 벌레와 같다. 이사야 41:14,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인간은 허무하고 죄악되다. 이것은 염세주의 사상이 아니고 사실이고 현실이다. 자신이 피조물임과 죄인임을 깨닫는 자는 하나님 앞에 겸비해진다.

인간의 존귀함은 오직 하나님의 형상, 곧 참된 지식과 의에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 의를 회복하였으므로 이제 노아나 욥이나 다니엘처럼 하나님 앞에서 그의 계명을 순종함으로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게만 살아가야 한다(창 6:9; 욥 1:1; 단 1:8; 겔 14:14).

우리는 벌레 같은 인생임을 알고 하나님 앞에 겸손하자.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만 의지하고 실제로 의로운 삶을 살도록 힘쓰자.

 

 

26장: 욥--하나님의 지식과 능력은 측량할 수 없이 크다

[1-14절] 욥이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힘없는 자를 참 잘 도왔구나. . . .

욥이 대답하였다. “네가 힘없는 자를 참 잘 도왔구나. 기력 없는 팔을 참 잘 구원하였구나. 지혜 없는 자를 참 잘 가르쳤구나. 큰 지식을 참 잘 나타내었구나. 네가 누구를 향하여 말을 내었느냐? 뉘 신[누구의 호흡 혹은 영]이 네게서 나왔느냐? 음령들(레파임)[죽은 자들]이 큰 물[바다]과 수족(水族)[거기 거하는 것들] 밑에서 떠나니 하나님 앞에는 음부[지옥]도 드러나며 멸망의 웅덩이도 가리움이 없음이니라. 그는 북편 하늘을 허공에 펴시며 땅을 공간에 다시며[하나님께서 영감하신 놀라운 과학적 발언!] 물을 빽빽한 구름에 싸시나 그 밑의 구름이 찢어지지 아니하느니라. 그는 자기의 보좌 앞을 가리우시고 자기 구름으로 그 위에 펴시며 수면에 경계를 그으셨으되[구름과 비를 주장하심], 빛과 어두움의 지경까지 한정을 세우셨느니라. 그가 꾸짖으신즉 하늘기둥이 떨며 놀라느니라[천둥]. 그는 권능으로 바다를 흉용케 하시며 지혜로 라합[큰 바다 짐승]을 쳐서 파하시며 그 신[영]으로 하늘을 단장하시고 손으로 날랜 뱀을 찌르시나니 이런 것은 그 행사의 시작점이요 우리가 그에게 대하여 들은 것도 심히 세미한 소리뿐이니라. 그 큰 능력의 우뢰야 누가 능히 측량하랴.”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셨고 홀로 섭리하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그가 우리의 하나님,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시다. 우리의 고난의 현실도 그의 손 안에 있다.

우리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창조주, 섭리자 하나님만 바라고 의지하자. 또 고난 중에서도 우리의 모든 문제를 오직 하나님께 맡기자.

 

 

27장: 욥--악인은 하나님의 보응을 받는다

[1-6절] 욥이 또 비사를 들어 가로되[그의 이야기를 말하되] . . . .

욥은 또 그의 이야기를 말한다. “나의 의를 빼앗으신 하나님, 나의 영혼을 괴롭게 하신 전능자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나의 생명이 아직 내 속에 완전히 있고 하나님의 기운이 오히려 내 코에 있느니라.) 결코 내 입술이 불의를 말하지 아니하며 내 혀가 궤휼[거짓]을 발하지 아니하리라. 나는 단정코 너희를 옳다 하지 아니하겠고 죽기 전에는 나의 순전함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 내가 내 의를 굳게 잡고 놓지 아니하리니 일평생 내 마음이 나를 책망치 아니하리라.”

욥은 하나님께 맹세하면서 바른 말, 진실한 말을 하겠다고 말한다. 의와 진실은 하나님의 속성이요 하나님의 나라의 덕이지만, 불의와 거짓은 마귀의 속성이요 마귀 왕국의 악이다. 사람은 교만과 무지와 욕심 때문에 악하고 거짓된 말을 한다. 그러나 구원받은 성도는 모든 악하고 거짓된 말을 버리고 의와 진실만을 말해야 한다(엡 4:25).

욥은 죄 때문에 재앙을 당했다는 친구들의 비난을 단호히 거부한다. 그는 평소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롭고 선하게 살았고 그 마음이 그를 책망할 일이 없다고 증거하며 자신의 순전함을 말한다. 욥은 앞에서도 자신의 순전함을 여러 번 말했었다(욥 6:10; 10:7; 13:18).

물론 우리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의를 이루셨고 우리는 그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그러나 우리는 평소에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으로 의롭게 살아야 하고 양심적으로 자신을 책망할 것이 없도록 살아야 한다(고전 4:4).

[7-12절] 나의 대적은 악인같이 되고 일어나 나를 치는 자는 . . . .

욥은 악인의 허망함에 대해 증거한다. 그는, “나의 대적은 악인같이 되고 일어나 나를 치는 자는 불의한 자같이 되기를 원하노라. 사곡한 자가 이익을 얻었으나 하나님이 그 영혼을 취하실 때에는 무슨 소망이 있으랴”라고 말한다. ‘사곡한 자’라는 원어(카네프)는 ‘불경건한 자’(BDB)라는 뜻이다. 불경건한 자가 불의하게 이익을 얻었을지라도 그가 죽을 때 그에게 무슨 소망이 있겠는가.

주께서는,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고 말씀하셨다(마 16:26). 또 그는 풍년 만난 어리석은 농부의 비유에서 하나님께서 그 부자 농부에게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고 말씀하셨다고 이야기하셨다(눅 12:20). 잠언 14:32는, 의인은 죽음에도 소망이 있지만, 악인은 환난에 엎드러진다고 말하였다.

욥은 또, “환난이 그에게 임할 때에 하나님이 어찌 그 부르짖음을 들으시랴. 그가 어찌 전능자를 기뻐하겠느냐? 항상 하나님께 불러 아뢰겠느냐?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내가 너희에게 가르칠 것이요 전능자의 뜻을 내가 숨기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다 이것을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주 허탄한 사람이 되었는고”라고 말한다.

악인은 평소에 하나님을 무시하고 그의 교훈을 멸시하였기 때문에 환난의 날에 하나님을 불러도 그가 응답지 않으실 것이다(잠 1:28). 실상, 악인들은 하나님을 기뻐하지 않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지도 않는다. 오직 성도만 하나님을 사모하며(시 73:25) 그에게 쉬지 않고 기도하며(살전 5:17) 또 환난 날에 응답을 받는다(시 50:15).

[13-23절] 악인이 하나님께 얻을 분깃, 강포자가 전능자에게 . . . .

욥은 악인의 받는 보응에 대해 말하기를, “악인이 하나님께 얻을 분깃, 강포자가 전능자에게 받을 산업은 이것이라. 그 자손이 번성하여도 칼을 위함이요 그 후예는 식물에 배부르지 못할 것이며 그 남은 자는 염병으로 묻히리니 그의 과부들이 울지 못할 것”이라고 한다.

악인의 많은 자녀들은 전쟁에서 죽을 것이며 그 후손은 양식에 배부르지 못하고 기근을 당할 것이다. 또 남은 자들은 전염병으로 죽을 것이며 그의 과부들은 울지 못할 것이다. 그들이 울지 못하는 까닭은 너무 충격적이기 때문이거나,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기뻐하기 때문이거나, 그들 자신도 그의 학대 때문에 신음했기 때문일 것이다.

욥은 또 말한다, “그가 비록 은을 티끌같이 쌓고 의복을 진흙같이 예비할지라도 그 예비한 것을 의인이 입을 것이요 그 은은 무죄자가 나눌 것이며 그 지은 집은 좀의 집 같고 상직군[포도원 지키는 자]의 초막 같을 것이며.” 악인이 아무리 열심히 살아 은을 많이 저축하고 의복도 많이 예비할지라도, 그의 돈과 의복, 곧 그의 재산은 다른 이들에게 돌려질 것이며 그의 집도 허물어질 것이다.

욥은 또 말한다. “부자로 누우나 그 조상에게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요 눈을 뜬즉 없어졌으리라. 두려움이 물같이 그를 따라 미칠 것이요 폭풍이 밤에 그를 빼앗아갈 것이며 동풍이 그를 날려보내며 그 처소에서 몰아내리라. 하나님이 그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쏘시나니[던지시니] 그가 그 손에서 피하려 하여도 못할 것이라. 사람들이 박장(拍掌)하며[박수치며] 비소(誹笑)하고[비웃고] 그 처소에서 몰아내리라.” 악인의 죽음은 복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을 사정없이 치시고 취하여 가실 것이며 사람들도 그를 비웃을 것이다.

악인은 허망하다. 그는 죽을 때에 소망이 없고 환난 날에 그를 도울 자가 없다. 특히 그가 받을 보응은 매우 두렵다. 그는 참으로 가련한 자이다. 그의 자녀들도 그러할 것이다. 우리는 결코 악을 행치 말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와 그 의만 믿고 의지하며 평소에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살고 또 거리끼는 모든 죄를 버리고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여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만 살자.

 

 

28장: 욥--지혜는 고귀하다

[1-14절] 은은 나는 광이 있고 연단하는 금은 나는 곳이 있으며 . . . .

욥은 또 말한다. “은은 나는 광이 있고 연단하는 금은 나는 곳이 있으며 철은 흙에서 취하고 동(銅)은 돌에서 녹여 얻느니라. 사람이 흑암을 파하고 끝까지 궁구하여 음예와 유암 중의 광석을 구하되 사람 사는 곳에서 멀리 떠나 구멍을 깊이 뚫고 발이 땅에 닿지 않게 달려 내리니 멀리 사람과 격절되고 흔들흔들 하느니라.” 사람은 캄캄함을 무릅쓰고 매우 깊은 갱도를 파고 발이 땅에 닿지 않는 곳에 매달려 내려가서 흑암 속에서 금은동철의 광석을 찾고 그런 것들을 캐낸다. 귀중한 것들을 얻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그런 일을 한다.

욥은 또 말한다. “지면은 식물을 내나 지하는 불로 뒤집는 것 같고[영감된 과학적 발언이다!] 그 돌 가운데에는 남보석이 있고 사금(砂金)도 있으며 그 길은 솔개도 알지 못하고 매의 눈도 보지 못하며 위엄스러운 짐승도 밟지 못하였고 사나운 사자도 그리로 지나가지 못하였느니라. 사람이 굳은 바위에 손을 대고 산을 뿌리까지 무너뜨리며 돌 가운데로 도랑을 파서 각종 보물을 눈으로 발견하고 시냇물을 막아 스미지 않게 하고 감취었던 것을 밝은 데로 내느니라.”

욥은 또 말한다. “그러나 지혜는 어디서 얻으며 명철의 곳은 어디인고? 그 값을 사람이 알지 못하나니 사람 사는 땅에서 찾을 수 없구나. 깊은 물이 이르기를 내 속에 있지 아니하다 하며 바다가 이르기를 나와 함께 있지 아니하다 하느니라.” 사람이 세상에 있는 좋은 것들을 노력하면 얻지만, 지혜는 어디서 얻을 수 있는가?

[15-22절] 정금으로도 바꿀 수 없고 은을 달아도 그 값을 당치 . . . .

욥은 또 말한다. “[지혜는] 정금으로도 바꿀 수 없고 은을 달아도 그 값을 당치 못하리니 오빌의 금이나 귀한 수마노나 남보석으로도 그 값을 당치 못하겠고 황금이나 유리라도 비교할 수 없고 정금 장식으로도 바꿀 수 없으며 산호나 수정으로도 말할 수 없나니 지혜의 값은 홍보석보다 귀하구나. 구스의 황옥으로도 비교할 수 없고 순금으로도 그 값을 측량하지 못하리니.”

욥은 지혜의 가치가 참으로 크다고 말한다. 그것은 돈 몇 천만원이나 몇 억원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그 어떤 보석보다도 가치 있다. 잠언 3:14-15도,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너의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말했다.

욥은 또, “그런즉 지혜는 어디서 오며 명철의 곳은 어디인고? 모든 생물의 눈에 숨겨졌고 공중의 새에게 가리어졌으며 멸망과 사망도 이르기를 우리가 귀로 그 소문은 들었다 하느니라”고 말한다. 멸망과 사망에 들어간 자들은 지혜에 대해 소문을 들었다고 말한다. 그것은 그들이 지혜가 없어서 거기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지혜보다 심히 가치 없는 것에 가치를 두고 살고 있지 않는가. 사람들은 헛된 세상 것에 큰 가치, 모든 가치, 아니 절대가치를 두고 살고 있다. 그러나 전도서는 해 아래의 모든 것이 헛되다고 증거하였다. 예수께서도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셨다(요 6:27). 사람이 참 지혜의 가치성을 깨닫는다면, 그는 세상의 허무한 것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나와 하나님을 믿고 그의 뜻과 계명을 행하며 살 것이다.

[23-28절] 하나님이 그 길을 깨달으시며 있는 곳을 아시나니 . . . .

욥은 또 말한다. “하나님이 그 길을 깨달으시며 있는 곳을 아시나니 이는 그가 땅끝까지 감찰하시며 온 천하를 두루 보시며 바람의 경중을 정하시며 물을 되어 그 분량을 정하시며 비를 위하여 명령하시고 우뢰의 번개를 위하여 길을 정하셨음이라. 그때에 지혜를 보시고 선포하시며 굳게 세우시며 궁구하셨고 또 사람에게 이르시기를 주를 경외함이 곧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라 하셨느니라.”

지혜가 세상의 금은보석보다 가치 있으나 사람이 지혜를 알지 못하지만, 온 세상을, 땅끝까지 감찰하시고 온 천하를 두루 보시는 하나님, 바람의 무게를 다시고 바닷물의 분량을 재실 수 있고 비와 우뢰와 번개를 주장하시는 하나님, 곧 창조자시요 섭리자이신 하나님께서는 지혜의 길을 아시고 그 있는 곳을 아신다. 그는 지혜를 보셨고 찾아내셨고 선포하셨고 굳게 세우셨다.

그는 사람들에게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라고 말씀하셨다. 욥의 이 말은 잠언에 증거된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한다. 잠언은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 계명을 따라 의롭고 선하게 사는 것이 지혜임을 증거한다. 하나님은 온 우주의 창조자요 섭리자이시기 때문에, 사람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지혜와 지식을 말할 수 없다. 모든 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그를 아는 데로부터 나온다.

또 하나님의 뜻이 그가 주신 십계명에 대표적으로 나타나 있으므로, 십계명을 알고 지키며 악을 떠나는 것이 지혜와 명철이며, 십계명을 어기고 악을 행하는 것이 어리석음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다(잠 8:13).

우리는 세상의 모든 것이 헛됨을 깨닫고 세상의 것들에 가치를 두고 살지 말고 참된 지혜를 구하자. 예수께서는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셨다(요 6:27). 참된 지혜는 온 세상의 창조자이시요 섭리자이신 유일하시고 영원하신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 하나님을 알고 그를 경외하며 그의 뜻을 행하는 것이 지혜이며 그렇지 않은 것이 어리석음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지혜를 얻어 영육의 복과 현세와 내세의 복을 누리자.

 

 

29장: 욥--옛날은 복되었다

[1-3절] 욥이 또 비사를 들어 가로되 내가 이전 달과 하나님이 . . . .

욥은 또 말한다. “내가 이전 달과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시던 날에 지내던 것같이 되었으면―그때는 그의 등불이 내 머리에 비취었고 내가 그 광명을 힘입어 흑암에 행하였었느니라.”

욥은 지난 날들에 하나님께서 그를 보호하셨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재난과 재앙으로부터 보호하신다. 신명기 32:10,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같이 지키셨도다.” 시편 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시편 91:1,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

욥은 또 지난 날들에 하나님의 등불이 그의 머리에 비취었고 그가 그 광명을 힘입어 흑암에 행하였었다고 말한다. ‘그의 등불’이나 ‘그 광명’은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의 빛, 곧 그를 기쁘게 하시고 행복케 하시는 빛이다. 민수기 6:24-26에 기록되어 있는 대제사장의 축도는 다음과 같았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욥의 과거는 복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복이었다. 그는 지금 고난 가운데서 그 복된 시간을 사모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한다.

[4-6절] 나의 강장하던 날과 같이 지내었으면―그때는 하나님의 . . . .

욥은 또, “나의 강장하던 날과 같이 지내었으면―그때는 하나님의 우정이 내 장막 위에 있었으며”라고 말한다. 욥은 과거에 그가 누렸던 가정적, 영적 복을 회상한다. ‘강장하던’이라는 원어(코레프)는 ‘추수의 때’라는 뜻이다(BDB). 그것은 인생의 전성기와 결실기를 가리킨다고 본다. 욥은 그때 하나님의 우정이 그의 장막 위에 있었다고 말한다. ‘우정’이라는 원어(소드)는 ‘회의, 의논, 친밀함’이라는 뜻이다(BDB). 욥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었다. 시편 25:14는, “여호와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라고 말한다.

욥은 또, “그때는 전능자가 오히려 나와 함께 계셨으며 나의 자녀들이 나를 둘러 있었으며”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은 인생의 가장 큰 복이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만복의 근원이시기 때문이다. 욥은 가정적인 행복을 누렸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그는 여러 명의 자녀들을 낳았고 그 자녀들이 잘 자랐다.

욥은 또 말하기를, “뻐터가 내 발자취를 씻기며 반석이 나를 위하여 기름시내를 흘려 내었으며”라고 한다. 욥은 물질적으로도 유여한 복을 받았다. 그의 양들과 소들은 수가 많아서 우유를 많이 만들어 내었고 뻐터도 많이 만들어 내었고 그것을 먹고 남을 정도이었다. 또 “반석이 나를 위하여 기름시내를 흘려 내었다”는 말은 돌밭 같은 곳에서도 감람나무가 번성하여 감람유를 풍성하게 산출하였다는 뜻일 것이다. 다시 말해, 욥은 물질적 풍성함을 누렸던 것이다.

이와 같이 욥은 가정적, 물질적 복을 누렸다. 그것은 다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복이었다. 인간의 영육의 복은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그는 만복의 근원이시다. 그것은 신명기 28장에 밝히 증거되어 있다.

[7-17절] 그때는 내가 나가서 성문에 이르기도 하며 내 자리를 . . . .

욥은 과거의 삶을 회상한다. “그때는 내가 나가서 성문에 이르기도 하며 내 자리를 거리에 베풀기도 하였었느니라. 나를 보고 소년들은 숨으며 노인들은 일어나서 서며 방백들은 말을 참고 손으로 입을 가리우며 귀인들은 소리를 금하니 그 혀가 입천장에 붙었었느니라. 귀가 들은즉 나를 위하여 축복하고 눈이 본즉 나를 위하여 증거하였었나니.” 과거에는 소년들뿐 아니라, 노인들과 방백들과 귀인들까지도 욥을 존경하며 욥 앞에서 말을 조심하였다.

욥은 또 말한다. “이는 내가 부르짖는 빈민과 도와줄 자 없는 고아를 건졌음이라. 망하게 된 자도 나를 위하여 복을 빌었으며 과부의 마음이 나로 인하여 기뻐 노래하였었느니라. 내가 의로 옷을 삼아 입었으며 나의 공의는 도포와 면류관 같았었느니라.” 이웃 사람들이 욥을 존중했던 까닭은 그가 의롭고 선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부르짖는 가난한 자나 도와줄 자 없는 고아를 건져내었고 망하게 된 자나 과부도 도와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망하게 된 자가 그를 위해 축복하고 과부도 그로 인해 기뻐 노래하였다. 선한 삶은 하나님의 뜻이며 모세의 율법과 잠언과 구약성경 전체에서 강조된 바이다.

욥은 또, “나는 소경의 눈도 되고 절뚝발이의 발도 되고 빈궁한 자의 아비도 되며 생소한 자의 일을 사실(査實)하여 주었으며 불의한 자의 어금니를 꺾고 그 잇사이에서 겁탈한 물건을 빼어 내었었느니라”고 말한다. 욥의 삶은 선한 삶이었다. 그는 약자들을 위해 공의를 세웠었다. 이렇게 의롭고 선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이웃 사람들은 그를 존경하였고 그 앞에서 말도 조심하였던 것이다.

[18-20절] 내가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내 보금자리에서 . . . .

욥은 이전에 가졌던 기대를 말한다. “내가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내 보금자리에서 선종(善終)하리라. 나의 날은 모래같이 많을 것이라. 내 뿌리는 물로 뻗어나가고 내 가지는 밤이 맟도록[밤새도록] 이슬에 젖으며 내 영광은 내게 새로와지고[새로워지고] 내 활은 내 손에서 날로 강하여지느니라 하였었노라.”

‘내 보금자리’는 그의 가정을 가리킨다. 날이 모래같이 많다는 것은 장수(長壽)한다는 뜻이다. 욥은 자신이 하나님께서 주신 가정적 행복 속에서 평안히 오래 살다가 생을 잘 마치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사람의 생명의 끝이나 내일의 행복과 불행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 안에 있다.

또 욥은 자신의 삶을 나무에 비유한다. 그는 자신의 삶이 그 뿌리가 물로 뻗어나가고 그 가지가 밤새도록 이슬에 젖어 충분한 수분을 취하는 푸른 나무처럼 복되었다고 표현한다. 시편 1:1-3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지하며 악을 멀리하고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는 시냇가의 나무와 같다고 말했다. 또 욥은 자기의 영광과 형통이 영속적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의 영광이 더욱 새로워지고 그의 세력과 힘이 날로 강하여지리라고 생각했다.

물론,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이므로 그렇게 생각한 것이 교만한 일은 아닐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평안과 장수의 복을 약속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높고 깊으신 뜻은 아무도 모르며 그의 섭리하시는 길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다. 사람은 자신의 내일의 일이나 행복과 불행을 알지 못하고 예측하지 못한다.

[21-25절] 무리는 내 말을 들으며 나의 가르치기를 잠잠히 . . . .

욥은 전날에 자신이 지도자적인 위치에 있었다고 말한다. “무리는 내 말을 들으며 나의 가르치기를 잠잠히 기다리다가 내가 말한 후에 그들이 말을 내지 못하였었나니 나의 말이 그들에게 이슬같이 됨이니라. 그들이 나 바라기를 비같이 하였으며 입을 벌리기를 늦은 비 기다리듯 하였으므로.” 사람들은 욥의 말을 이슬같이, 단비같이 여기며 사모하였다. 악인의 말은 악하고 파괴적이지만, 의인의 말은 가치가 있고 남에게 유익을 준다. 잠언은 “의인의 혀는 천은(天銀)과 같다”고 말하며(잠 10:20), 또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 같다”고 말하였다(잠 12:18). 사무엘상 3:19는,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 말로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라고 말한다.

욥은 또, “그들이 의지 없을 때에 내가 함소하여 동정하면 그들이 나의 얼굴 빛을 무색하게 아니하였었느니라”고 말한다. 본절의 원문은, “내가 그들을 보고 웃을지라도 그들이 그것을 믿지 않으며 나의 얼굴빛을 무색케 아니하리라”는 뜻 같다(KJV). 사람들은 욥이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고 비웃는 인격이 아님을 인정하고 믿었다는 뜻 같다. 그들은 욥의 얼굴빛이 무색하게, 즉 그가 무안하게 하지 않았다.

욥은 또한, “내가 그들의 길을 택하고 으뜸으로 앉았었나니 왕이 군중(軍中)에[군대 가운데] 거함도 같았고 애곡하는 자를 위로하는 사람도 같았었느니라”고 말한다. 욥은 사람들의 길을 택해주었다. 또 그는 왕이 군대 가운데 거함같이 그들 중에 으뜸으로 앉았고, 또 애곡하는 자들 중에 위로하는 사람 같았다. 욥은 참으로 지도자적 위치에 있었던 경건하고 선하고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욥은 자신의 지나간 날들을 회고한다. 그때에는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그의 기쁨이 있었고 그의 친밀함이 그의 장막 위에 있었고 뻐터와 기름이 풍성하였다. 즉 가정적 행복과 물질적 유여함이 있었다. 그는 사람들의 존경도 받았다. 그것은 그가 선한 구제의 일들에 힘썼기 때문이었다. 그는 사람들 가운데서 말에 권위를 가진 지도자적 위치에 있었다.

우리는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가지자. 그것은 말씀과 기도의 삶과 순종의 삶을 통해 이루어진다. 하나님께서는 만복의 근원이시므로 그와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자는 복되다. 그는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그의 기쁨을 누릴 것이고 가정적 행복과 물질적 유여함을 가지게 될 것이다.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계명대로 의와 선을 실천하자. 욥은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였고 고아들을 돌아보았고 장애인들을 도왔다. 그런 삶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이며 사람들도 존경하는 삶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이며 어두운 세상에서 빛이 되는 삶이다.

 

 

30장: 욥--그러나 지금은 고난 중에 있다

[1-8절] 그러나 이제는 나보다 젊은 자들이 나를 기롱하는구나. . . .

욥은 또 말한다. “그러나 이제는 나보다 젊은 자들이 나를 기롱하는구나. 그들의 아비들은 나의 보기에 나의 양떼 지키는 개 중에도[개들과 함께] 둘 만하지 못한 자니라. 그들은 장년의 기력이 쇠한 자니 그 손의 힘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랴. 그들은 곧 궁핍과 기근으로 파리하매 캄캄하고 거친 들에서 ‘마른 흙을 씹으며’(BDB, NASB) 떨기나무 가운데서 짠 나물도 꺾으며 대싸리[댑싸리] 뿌리로 식물을 삼느니라. 무리는 도적을 외침같이 그들에게 소리지름으로 그들은 사람 가운데서 쫓겨나서 침침한 골짜기와 흙구덩이와 바위 구멍에서 살며 떨기나무 가운데서 나귀처럼 부르짖으며 가시나무 아래 모여 있느니라. 그들은 본래 미련한 자의 자식이요 비천한 자의 자식으로서 고토에서 쫓겨난[고토로부터 채찍질을 받은](BDB, NASB) 자니라.”

세상에는 존귀한 자도 있고 천한 자도 있다. 인격 훈련이 잘 되고 재산이 있고 사회적 신분이 있는 자들이 있는 반면에, 인격 훈련을 잘 받지 못하고 가난하고 사회적 신분이 없는 자들이 있다. 욥은 예전에는 존경을 받는 존귀한 자이었다. 그는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였다. 그는 많은 재산도 있었고 사회적 신분도 있었다. 그러나 그가 병들고 재앙으로 가난해졌을 때, 그는 여지없이 비천한 상태에 떨어졌다. 그는 지금 비천한 젊은이들의 조롱을 받고 있다. 사람의 존귀함이라는 것이 도대체 어떤 의미와 가치가 있는 것인가?

[9-15절] 이제는 내가 그들의 노래가 되며 그들의 조롱거리가 . . . .

욥은 계속 말한다. “이제는 내가 그들의 노래가 되며 그들의 조롱거리가 되었고 그들은 나를 미워하여 멀리하고 내 얼굴에 침 뱉기를 주저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내 줄[활줄](NASB)을 늘어지게 하시고 나를 곤고케 하시매 무리가 내 앞에서 굴레를 벗었음이니라. 그 낮은 무리가 내 우편에서 일어나 내 발을 밀뜨리고 나를 대적하여 멸망시킬 길을 쌓으며 도울 자 없는 그들이 내 길을 헐고 내 재앙을 재촉하는구나. 성을 크게 파괴하고 그 파괴한 가운데로 몰려 들어오는 것같이 그들이 내게로 달려드니 놀람이 내게 임하는구나. 그들이 내 영광을 바람같이 모니 내 복록이 구름같이 지나갔구나.”

이전에 존귀했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으나 병들고 가난해진 욥은 지금 비천한 자들의 핍박을 받고 있다. 그들은 욥을 조롱하고 미워하며 침뱉고 있다. 욥은 이 고난을 하나님께서 자신을 곤고케 하신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욥의 발을 밀뜨리고 멸망시킬 길을 쌓고 그의 길을 헐고 재앙을 재촉하며 그에게 달려든다.

세상에는 때때로 의인들에게 이런 핍박이 있다. 예수께서 당하신 핍박은 그러한 유의 핍박이었다. 로마 군병들은 예수의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씌웠고 희롱하며 침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 머리를 쳤다(마 27:29-30). 대제사장의 하속들은 그를 손바닥으로 때렸다(막 14:65). 시편 22:6은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라고 메시아의 고난을 말했다. 사도들도 주리고 목말랐고 헐벗고 매맞았고 정처가 없었다. 사도 바울은 자신들이 세상의 더러운 것들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다고 고백하였다(고전 4:9-13).

[16-23절] 이제는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녹으니 환난날이 나를 . . . .

욥은 또 말한다. “이제는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녹으니[직역하면, ‘내 영혼이 내 위에 부어지며’] 환난날이 나를 잡음이라. 밤이 되면 내 뼈가 쑤시니 나의 몸에 아픔이 쉬지 아니하는구나. 하나님의[혹은 ‘나의 병의’(KJV)] 큰 능력으로 하여 옷이 추하여져서 옷깃처럼 내 몸에 붙었구나. 하나님이 나를 진흙 가운데 던지셨고 나로 티끌과 재 같게 하셨구나.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나 주께서 대답지 아니하시오며 내가 섰사오나 주께서 굽어보시기만 하시나이다. 주께서 돌이켜 내게 잔혹히 하시고 완력으로[강한 손으로] 나를 핍박하시오며 나를 바람 위에 들어 얹어 불려가게 하시며 대풍 중에[폭풍의 소란함 속에](BDB) 소멸케 하시나이다. 내가 아나이다. 주께서 나를 죽게 하사 모든 생물을 위하여 정한 집으로 끌어가시리이다[이는 주께서 나를 죽게 하시며 모든 생물을 위하여 정한 집으로 끌어가실 것을 내가 앎이니이다].”

욥은 지금 극심한 고통 가운데 있다. 그의 마음은 물같이 녹았고, 그의 몸은 뼈가 쑤시고 아픔이 쉬지 않으며, 그의 옷은 추하여졌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진흙에 던지셨고 티끌과 재 같게 하셨다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지만 응답하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잔혹히 하셨고 강한 손으로 핍박하셨다고 말하며 또 그로 바람에 불려가게 하시고 폭풍의 소란함 속에 소멸하게 하시며 그를 죽이려 하신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은 욥보다 더 심한 고통이었다. 시편 22편은 “나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라고 예언하였다(14-16절).

[24-31절] 그러나 사람이 넘어질 때에 어찌 손을 펴지 아니하며 . . . .

욥은 또 말한다. “그러나 사람이 넘어질 때에(베이)[폐허더미에서] 어찌 손을 펴지 아니하며 재앙[불행한 일]을 당할 때에 어찌 도움을 부르짖지 아니하겠는가? 고생의 날 보내는 자를 위하여 내가 울지 아니하였는가? 빈궁한 자를 위하여 내 마음에 근심하지 아니하였는가? 내가 복을 바랐더니 화가 왔고 광명을 기다렸더니 흑암이 왔구나. 내 마음이 어지러워서[내 창자가 끓어오르고] 쉬지 못하는구나. 환난날이 내게 임하였구나. 나는 햇볕에 쬐지 않고 검어진 살을 가지고[혹은 ‘슬퍼하며’] 걸으며 공회 중에 서서 도움을 부르짖고 있느니라. 나는 이리의 형제요 타조의 벗이로구나. 내 가죽은 검어져서 떨어졌고[벗겨졌고] 내 뼈는 열기(熱氣)로 하여 탔구나. 내 수금은 애곡성(哀哭聲)이 되고 내 피리는 애통성(哀痛聲)이 되었구나.”

본문은 욥이 고난 중에 가진 슬픔을 묘사한다. 그는 과거에 고생하는 자를 위해 울고 빈궁한 자를 위해 근심했었다. 그러나 그에게 큰 슬픔이 왔다. 그는 복을 바랐으나 화가 왔고, 광명 즉 기쁨과 행복을 기다렸으나, 흑암 즉 슬픔과 불행이 왔다. 그의 창자는 지금 끓어오르고 있다. 그는 햇볕에 그을리지 않았으나 살이 검어졌다. 그것은 그의 슬픔의 표시이었다. 그는 이리의 형제처럼, 타조의 벗처럼 살고 있다. 그의 살갗은 검어져서 벗겨졌고 그의 뼈는 열기로 인해 탔다. 그의 수금과 비파는 슬픔의 노래, 애통과 애곡의 노래의 악기가 되었다.

성도는 때때로 욥처럼 고난 중에 슬퍼할 때가 있다. 다윗은,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라고 말했고(시 55:17), 또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으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라고 말했다(시 56:8).

인간의 가치는 외적인 데 있지 않고 내적인 데, 즉 경건과 도덕성에 있다. 욥은 지금 비천한 자들에게 조롱을 당하고 있으나 그는 비천한 자가 아니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존귀한 성도이다.

사람이 당하는 고난의 현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욥은 자신이 당하는 고난의 현실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알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사화복(生死禍福)을 홀로 주관하시는 섭리자이시다.

욥의 고난은 의인의 고난의 예표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과 순교자들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위해 고난을 받았다.

우리는 고난 중에 믿음과 인내로 승리하자. 특히 대환난 시대에, 우리는 섭리자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며 오래 참고 견뎌야 한다(계 13:10).

 

 

31장: 욥--나는 의롭게 살았다

1-23절, 나는 의롭게 살았다 (1)

[1-4절] 내가 내 눈과 언약을 세웠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 . . .

욥은 또 말한다. “내가 내 눈과 언약을 세웠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 그리하면 위에 계신 하나님의 내리시는 분깃이 무엇이겠으며 높은 곳에서 전능자의 주시는 산업이 무엇이겠느냐? 불의자에게는 환난이 아니겠느냐? 행악자에게는 재앙이 아니겠느냐? 그가 내 길을 감찰하지 아니하시느냐? 내 걸음을 다 세지 아니하시느냐?”

욥은 처녀에게 주목치 않았다. 주께서는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마 5:28). 성도는 보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죄는 보는 데서부터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사람이 범죄하면 하나님의 복을 기대하기 어렵다. 사람은 범죄하면 이미 가진 복도 잃어버린다. 죄는 하나님의 복을 가로막고 빼앗아간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복을 원한다면 모든 죄를 버려야 한다.

욥은 불의한 자와 행악하는 자에게 재앙이 임할 것을 알고 있다. 욥은 악인이 재앙을 당한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가 친구들과 변론하는 것은 단지 모든 고난이 죄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욥기의 주요 진리는 성도의 고난 중에는 죄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닌 고난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주님의 고난이요 주의 제자들의 고난이었다. 그러나 악인의 징벌은 욥도 인정하는 진리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길을 감찰하시고 그의 걸음을 다 세신다. 그는 사람의 품은 마음, 생각과 뜻, 의도와 의향을 아신다. 그는 그것들이 의롭고 선한지 아니면 불의하고 악한지도 판단하시고 보응하신다.

[5-8절] 언제 나의 행위가 허탄하였으며 내 발이 궤휼에 빨랐던가. . . .

욥은 또 말한다. “언제 나의 행위가 허탄하였으며 내 발이 궤휼에[거짓에] 빨랐던가. 그리하였으면 내가 공평한 저울에 달려서 하나님이 나의 정직함[순전함]을 아시게 되기를 원하노라.” 세상 사람들은 악하고 헛된 것을 구하고 그 발걸음이 거짓에 빠를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의 기본적 덕은 진실함이다. 욥은 자신이 하나님의 공평한 저울에 달려 자신의 정직함이 드러나기를 원한다. 이것은 평소에 하나님 앞에서 성실하게 순종한 자가 아니고서는 가질 수 없는 담대함이다. 성도의 담대함은 성실한 순종의 삶에서 나온다.

욥은 또 말한다. “언제 내 걸음이 길에서 떠났던가. 내 마음이 내 눈을 따라갔던가. 내 손에 더러운 것이 묻었던가. 그리하였으면 나의 심은 것을 타인이 먹으며 나의 소산이 뿌리까지 뽑히는 것이 마땅하니라.” ‘길’은 정로(正路) 즉 의의 길을 가리킨다. 욥은 인생의 정로를 지켰고 그 길을 떠나지 않았다. 또 그는 자신의 눈을 따라가지 않았다. 사람의 눈은 육신적인 것과 감각적인 것에 빠지기 쉽다. 그러므로 성도는 육신의 눈에 보이는 것에 이끌려 살아서는 안 된다. 또, 욥은 자신의 손에 더러운 것, 즉 죄 되는 것이 묻지 않았다고 말한다.

욥은 만일 자신이 정로에서 떠났든지, 그의 마음이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 헛되고 죄악된 것에 빠졌든지, 그의 손에 더럽고 죄악된 것이 묻었다면, 그의 심은 것을 다른 사람이 먹고 그의 거두는 것이 뿌리까지 뽑히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의 보응이며 징벌이다. 그러나 욥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비록 지금 이해할 수 없는 고난 가운데 있지만, 그는 하나님의 계명의 정로를 떠나지 않았고 헛되고 죄악된 것을 좇지 않았다. 그는 승리할 것이다.

[9-12절] 언제 내 마음이 여인에게 유혹되어 이웃의 문을 . . . .

욥은 또 말한다. “언제 내 마음이 여인에게 유혹되어 이웃의 문을 엿보아 기다렸던가. 그리하였으면 내 처가 타인의 매를 돌리며 타인이 더불어 동침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는 중죄(重罪)라. 재판장에게 벌받을 악이요 멸망하도록 사르는 불이라. 나의 모든 소산을 뿌리까지 없이할 것이니라.”

욥은 간음과 음란을 조심하였다. 이웃의 문을 엿보아 기다리는 것은 이미 유혹을 받아 은밀한 만남의 기회를 노리는 것이다. 성도는 그런 은밀한 만남을 하지 말아야 한다. 만일 성도가 음란죄에 떨어지면 고통스러운 결과를 경험할 것이다. 그는 경제적 파탄을 당하고 그의 처는 남의 종이 되어 남의 맷돌을 돌리는 신세가 될 것이며 심지어 다른 사람이 그와 동침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로 보응하시는 자이시다. 죄를 지으면 죄의 보응을 하시고 남을 해치면 남의 해를 받게 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이시며 그의 도덕질서이다.

간음의 죄는 중죄(重罪)이다. ‘중죄’라는 원어(짐마)는 ‘악한 일’이라는 뜻이다. 간음의 죄는 매우 악한 일이다. 그것은 재판장에게 벌받을 악이다. 성경은 간음의 죄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레위기 20:10,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姦夫)와 음부(淫婦)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모든 죄, 특히 간음과 음란의 죄는 불과 같다. 불이 나무나 집이나 물건들을 모두 다 사르듯이, 모든 죄, 특히 간음은 복된 모든 좋은 것들을 다 없앤다. 그것은 우리의 모든 소산을 뿌리까지 없이할 것이다. 의는 평강과 형통을 가져오지만, 죄는 불행과 재앙을 가져온다.

[13-15절] 남종이나 여종이 나로 더불어 쟁변할 때에 내가 . . . .

욥은 또, “남종이나 여종이 나로 더불어 쟁변할 때에 내가 언제 그의 사정을 멸시하였던가. 그리하였으면 하나님이 일어나실 때에는 내가 어떻게 하겠느냐? 하나님이 국문하실 때에는 내가 무엇이라 대답하겠느냐?”고 말한다. 욥은 자신이 종의 사정을 멸시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종이 무엇을 잘못했을 때 엄하게 꾸짖는 것은 정당한 일이지만, 종이 무엇을 불평하거나 호소할 때 그것을 듣는 것은 그의 인격을 존중하는 것이다. 에베소서 6:9, “[상전들아, 너희도] 공갈을 그치라.”

욥은 만일 그가 종을 멸시하였더라면 하나님께서 그를 심판하러 일어나 심문하실 때 하나님께 대답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다 하늘에 계신 크신 재판장 앞에서 서게 될 것을 안다면, 우리는 죄를 짓지 말아야 하고 사람을 멸시하는 잘못도 행치 말아야 한다. 우리는 남을 멸시할 만큼 그렇게 흠이 없는 인격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엄격하게 심판하신다면 우리는 그 앞에 머리를 들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남을 존중하는 심정을 가져야 한다.

욥은 또, “나를 태 속에 만드신 자가 그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우리를 뱃속에 지으신 자가 하나가 아니시냐?”고 말한다. 그는 자신이나 종이 다 하나님의 창조물임을 말한다. 잠언 22:2, “빈부가 섞여 살거니와 무릇 그들을 지으신 이는 여호와시니라.” 한 부모가 낳아 기른 자녀들이 서로 우애 있게 지내야 하듯이, 한 하나님께서 만드신 인류는 넓은 의미에서 한 형제들로서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 우리는 세상에 있는 가난한 자나 부자나, 귀한 자나 천한 자나 막론하고 다 하나님의 창조물임을 알고 서로를 귀히 여겨야 한다.

[16-23절] 내가 언제 가난한 자의 소원을 막았던가. 과부의 . . . .

욥은 또 말한다. “내가 언제 가난한 자의 소원을 막았던가. 과부의 눈으로 실망케 하였던가. 나만 홀로 식물을 먹고 고아에게 먹이지 아니하였던가. 실상은 내가 젊었을 때부터 고아를 기르기를 그의 아비처럼 하였으며 내가 모태에서 나온 후로 과부를 인도하였었노라. 내가 언제 사람이 의복이 없이 죽게 된 것이나 빈궁한 자가 덮을 것이 없는 것을 보고도 나의 양털로 그 몸을 더웁게 입혀서 그로 나를 위하여 복을 빌게 하지 아니하였던가. 나를 도와주는 자가 성문에 있음을 보고 내가 손을 들어 고아를 쳤던가. 그리하였으면 내 어깨가 어깨뼈에서 떨어지고 내 팔 뼈가 부러짐이 마땅하니라. 나는 하나님의 재앙을 심히 두려워하고 그 위엄을 인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느니라.”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와 고아와 과부를 돌보시는 하나님이시다그는 고아와 과부의 억울한 일을 들어주신다(신 10:18; 시 68:5). 그는 율법에서 가난한 자를 해롭게 하지 말고 구제하라고 친히 명하셨다(출 22:22; 신 15:7-8).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므로 가난한 자를 돌아보는 것은 성도가 마땅히 힘써야 할 일이다. 잠언 14:31,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존경하는 자니라.”

사도들은 가난한 자들을 돌아보는 일을 힘썼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본래 힘써 행했다고 말했다(갈 2:10). 야고보는 참된 경건은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는 것이라고 말했다(약 1:27). 그러나 가난한 자를 돌아보는 삶은 결코 자신을 빈곤하게 만드는 삶이 아니다. 잠언 11:24-25는,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고”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라고 말하였다.

우리는 간음과 음란을 조심하자. 우리는 욥처럼 이성에 대해 늘 깨끗한 마음과 단정한 태도로 대하자. 간음과 음란은 재앙을 받을 큰 죄악임을 인식하자. 우리가 이런 죄에 떨어지면, 하나님께 복 받기를 기대할 수 없고 육신적 질병이나 경제적 파탄을 당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거짓을 멀리하고 진실하게 살자. 우리는 정로를 벗어나 우리의 눈을 따라가지 말고 정당하고 진실하게 살고 부족한 점들을 진실하게 고백하며 회개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잃지 말자.

우리는 선하게 살자. 우리는 이웃을 멸시하지 말고 우리의 권한 아래 있는 자들에게까지도 인격적으로 대하고 그들을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또 우리는 가난하고 어려운 자들을 구제해야 한다. 그것이 신구약성경에 밝히 계시된 하나님의 뜻이며 성도가 힘써야 할 선한 삶이다.

 

24-40절, 나는 의롭게 살았다 (2)

[24-28절] 내가 언제 금으로 내 소망을 삼고 정금더러 너는 내 . . . .

욥은 또 말한다. “내가 언제 금으로 내 소망을 삼고 정금더러 너는 내 의뢰하는 바라 하였던가. 언제 재물의 풍부함과 손으로 얻은 것이 많음으로 기뻐하였던가. 언제 태양의 빛남과 달의 명랑하게 운행되는 것을 보고 내 마음이 가만히 유혹되어 손에 입맞추었던가. 이 역시 재판장에게 벌받을 죄악이니 내가 그리하였으면 위에 계신 하나님을 배반한 것이니라.” 해와 달을 보고 ‘손에 입맞추는 것’은 그것을 사모하고 공경하는 마음을 나타낸다고 본다.

욥은 재물을 의지하거나 소망하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우리는 재물을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마 6:24). 물질적 부요는 신앙생활에 오히려 방해거리가 된다. 주께서는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이 말씀을 가로막아 결실치 못하게 한다고 말씀하셨고(마 13:22),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기보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더 어렵다고 하셨다(마 19:23-24). 사도 바울도 말하기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라고 하였다(딤전 6:9-10).

욥은 또 해와 달을 섬기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그는 재물에 대한 애착을 해와 달을 섬기는 우상숭배와 연관해 말했다. 해와 달을 섬기는 것이 우상숭배이듯이, 재물을 사랑하는 것도 우상숭배이기 때문일 것이다. 골로새서 3:5는 “탐심은 우상숭배”라고 말하였다.

[29-30절] 내가 언제 나를 미워하는 자의 멸망을 기뻐하였으며 . . . .

욥은 또 말한다. “내가 언제 나를 미워하는 자의 멸망을 기뻐하였으며 그의 재앙 만남을 인하여 기운을 뽐내었던가. 실상은 내가 그의 죽기를 구하는 말로 저주하여 내 입으로 범죄케 아니하였느니라.”

욥은 그를 미워하는 자의 멸망을 기뻐하지 않았고 그가 재앙당함을 인해 뽐내지 않았다. 그는 원수의 영혼을 저주하는 죄를 범치 않았다. 욥은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그의 뜻을 실행한 착한 성도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에 “원수를 갚지 말라”고 명령하셨다(레 19:18). 또 잠언 17:5는 “사람의 재앙을 기뻐하는 자는 형벌을 면치 못할 자니라”고 말하며, 잠언 24:17-18은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 여호와께서 이것을 보시고 기뻐 아니하사 그 진노를 그에게서 옮기실까 두려우니라”고 한다. 오바댜 12절에 보면,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 그것을 방관하고 기뻐했던 에서의 자손들은, “네가 형제의 날 곧 그 재앙의 날에 방관할 것이 아니며 유다 자손의 패망하는 날에 기뻐할 것이 아니며 그 고난의 날에 네가 입을 크게 벌릴 것이 아니라”는 책망을 들었다.

누가복음 6:27-28에 보면, 예수께서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로마서 12장에서 사도 바울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교훈하였다(롬 12:19-21).

[31-32절] 내 장막 사람의 말이 주인의 고기에 배부르지 않은 . . . .

욥은 또 말한다. “내 장막 사람의 말이 주인의 고기에 배부르지 않은 자가 어디 있느뇨 하지 아니하였었는가. 나그네로 거리에서 자게 하지 아니하고 내가 행인에게 내 문을 열어 주었었노라.”

‘내 장막의 사람들’은 그의 집에 있는 종들을 가리킬 것이다. 그들은 욥의 삶을 가까이서 본 자들이다. 그들은, 그의 고기로 배부르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또 그가 나그네로 거리에서 자게 하지 않았고 그의 집 문을 열어주었다고 증거하였다. 하나님께 대한 참 경건은 그의 뜻을 실천하는 구제와 나그네 대접 등의 선행으로 표현된다.

아브라함도 평소에 나그네를 잘 대접하였다. 그는 자기 집에 찾아온 손님들을 기쁘게 영접하며 고운 가루로 만든 떡과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의 고기와 뻐터와 우유로 대접하였다(창 18:1-8). 소돔에 살았던 롯도 날이 저물 때 소돔성에 온 나그네를 간청하여 집으로 들이고 그들을 위해 식탁을 베풀고 급히 누룩 없이 떡을 구웠다(창 19:1-3). 사사기 19장에 보면, 기브아에 살았던 한 노인도 해가 저물어 밭에서 일하고 돌아오다가 성읍 거리에서 한 나그네를 보고 집에 영접하여 먹을것을 대접하였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나그네를 영접하고 즐거이 대접하였다.

신약성경도 우리에게 나그네 대접하기를 힘쓰라고 말한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주께서 하신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영생에 들어갈 자들은 주의 형제가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한 자들이었다. 로마서 12:13에서 사도 바울은,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고 교훈하였고, 히브리서 13:2는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고 교훈하였다.

[33-37절] 내가 언제 큰 무리를 두려워하며 족속의 멸시를 . . . .

욥은 또 말한다. “내가 언제 큰 무리를 두려워하며 족속의 멸시를 무서워함으로 잠잠하고 문에 나가지 아니하여 타인처럼 내 죄악을 품에 숨겨 허물을 가리었었던가.” ‘타인처럼’(케아담)이라는 원어는 ‘아담처럼’(KJV, NASB)이라는 말이다.

욥은 자기 자신이 사람들의 멸시를 두려워하여 자기 죄악과 허물을 숨기지 않았다고 말한다. 다윗도 그러하였다. 그는 선지자 나단 앞에서 자신의 죄를 그대로 인정하였다(삼하 12:13). 또 그는 인구조사를 한 후에도 마음에 자책하고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였다(삼하 24:10, 17).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숨기면 우리의 마음의 고통은 클 것이며,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그 고통 중에 그냥 버려두실 것이지만,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의 심령에 평안을 주실 것이다(시 32:3-5; 요일 1:8-10).

욥은 또 말한다. “누구든지 나의 변백(辨白)을 들을지니라. 나의 서명이 여기 있으니 전능자가 내게 대답하시기를 원하노라. 내 대적의 기록한 소송장이 내게 있었으면 내가 어깨에 메기도 하고 면류관처럼 머리에 쓰기도 하며 내 걸음의 수효를 그에게[하나님께] 고하고 왕족처럼 그를 가까이 하였으리라.” ‘걸음의 수효’라는 표현은 자신의 모든 삶의 여정을 의미한다. ‘왕족처럼’이라는 말은 ‘존귀한 자처럼’이라는 뜻으로 그가 당당하게 재판관에게 나아가는 모습을 표현한다.

욥은 자신의 결백을 담대히 말하며 자기를 송사하는 대적자들과 변론하기를 원한다. 또 그는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기를 원한다. 의인의 마음은 담대하다. 잠언 28:1은,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니라”고 말하였다.

[38-40절] 언제 내 토지가 부르짖어 나를 책망하며 그 이랑이 . . . .

욥은 또 말한다. “언제 내 토지가 부르짖어 나를 책망하며 그 이랑이 일시에 울었던가. 언제 내가 값을 내지 않고 그 소산물을 먹고 그 소유주로 생명을 잃게 하였던가. 그리하였으면 밀 대신 찔레가 나고 보리 대신 잡풀이 나는 것이 마땅하니라 하고 욥의 말이 그치니라.”

욥은 자신의 토지에 대해서나 그 소산에 대해 불법한 일을 하지 않았다고 말하며, 그의 토지가 부르짖어 그를 책망하거나 그의 밭이랑들이 함께 우는 일이 없었다고 말한다. 그는 정당하게 땅을 샀고 또 그 땅에 농작물을 경작하였다. 그는 그 경작을 누구에게 맡겼다면 그에게 정당한 수고의 대가를 지불하였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거나 그가 부당하게 남의 토지를 빼앗으므로 그로 생명을 잃게 하였다면, 그는 자기 밭에서 밀 대신 찔레가 나고 보리 대신 잡풀이 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의 징벌을 각오하는 것이다.

경건한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가 죽었을 때 그 매장할 무덤을 얻기 위해 헷 족속에게 요청하였고 그에게 땅을 거저 주겠다는 이가 있었으나 그에게 은 400을 지불하고 아내의 무덤으로 막벨라 굴을 샀다(창 23:9, 16). 의로운 다윗은 인구 조사한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내리신 온역의 재앙을 피하기 위해 번제를 드리고자 했을 때 제사드릴 땅과 소와 나무 등의 제사 재료를 상당한 값을 주고 샀다(삼하 24:24). 옛 시대에 경건한 사람들의 이러한 행위는 우리에게 본이 된다.

신약성경은 우리가 도적질하거나 남의 것을 빼앗지 말고, 우리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고(엡 4:28), 우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고(살전 4:11),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고(살후 3:12), 또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교훈한다(살후 3:10).

우리는 헛된 우상숭배를 하지 말자. 우리는 돈도 사랑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만 즐거움과 가치와 소망을 두고 살며 하나님만 섬기자.

우리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며 선대하자. 나그네들에게도, 심지어 원수에게라도 그렇게 하자. 우리는 우리를 미워하는 자의 재앙당함을 기뻐하지 말고 그를 불쌍히 여기고 그를 위해 기도하고 선을 베풀자.

우리는 양심에 가책되는 일이 없게 거리낌 없이 살고 죄를 감추지 말자. 우리는 자신의 죄와 부족을 고백함으로 하나님의 용서를 얻어야 하고, 사람들 앞에서도 담대하게 행해야 한다.  우리는 특히 상거래를 할 때 정당하게 하자. 우리는 남의 수고에 대해 정당한 대가를 주고 폐를 끼치지 말고 범사에 정당하게 살고 자기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자.

 

 

32장: 엘리후가 말을 시작함

[1-5절] 욥이 스스로 의롭게 여기므로 그 세 사람의 대답이 . . . .

욥기 32장부터 37장까지 긴 부분은 엘리후의 말이다. 본문은, “욥이 스스로 의롭게 여기므로 그 세 사람의 대답이 그치매 람 족속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노를 발하니 그가 욥에게 노를 발함은 욥이 하나님보다 자기가 의롭다 함이요 또 세 친구에게 노를 발함은 그들이 능히 대답지는 못하여도 욥을 정죄함이라. 엘리후가 그들의 나이 자기보다 많으므로 욥에게 말하기를 참고 있다가 세 사람의 입에 대답이 없음을 보고 노를 발하니라”고 말한다.

람 족속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인 엘리후는 분명히 욥의 친구들과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는 매우 경건한 자이었고, 욥의 친구들과 달리, 그의 판단은 매우 건전하였다고 보인다. 욥의 세 친구들의 말이 끝나자, 엘리후는 그들에게 노를 발하였다.

엘리후가 욥에게 노한 것은 그가 하나님보다 자기를 의롭다 하고 자기를 정당화하기 때문이었다. 욥은 자신이 양심에 크게 가책되는 악을 행하지 않았다는 확신 속에서 자신을 고난 속에 두신 하나님의 섭리에 항의하였다. 우리는 어떤 어려운 역경에서도 생각으로나 말로나 행실로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 의롭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또 엘리후가 세 친구에게 노를 발한 것은 그들이 욥에게 대답하지 못하면서 욥을 정죄하기 때문이었다. 남을 부당하게 정죄하는 것도 나쁜 일이다. 잠언 17:15는, “악인을 의롭다 하며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자는 다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느니라”고 말했다.

[6-10절]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발언하여 가로되 . . . .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는 또 말하였다. “나는 연소하고 당신들은 연로하므로 참고 나의 의견을 감히 진술치 못하였노라. 내가 말하기를 날이 많은 자가 말을 낼 것이요 해가 오랜 자가 지혜를 가르칠 것이라[직역하면, ‘날들이 말할 것이요 많은 해들이 지혜를 가르칠 것이라’](KJV, NASB, NIV) 하였으나 사람의 속에는 심령이 있고 전능자의 기운이 사람에게 총명을 주시나니 대인(大人)이라고 지혜로운 것이 아니요 노인이라고 공의를 깨닫는 것이 아니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내 말을 들으라. 나도 내 의견을 보이리라.”

엘리후는 욥이나 그 친구들과 달리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그들이 말하는 동안 잠잠히 참고 있었고 감히 그의 의견을 말하지 못했다. 그것은 노인들이 일반적으로 인생 경험이 많아 젊은이들보다 더 지혜롭기 때문이다. 그들이 경건과 도덕성을 구비한다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러므로 엘리후는 “날이 많은 자가 말을 낼 것이요 해가 오랜 자가 지혜를 가르칠 것이라”고 말한다. 디도서 2:3-4도 늙은 여자들이 젊은 여자들을 가르치라고 교훈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 사람 속에는 영이 있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기운 혹은 영감(KJV)이 그에게 총명을 주시기 때문에, 세상에서 높은 자라고 반드시 지혜로운 것이 아니고 노인이라고 반드시 공의를 깨닫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 그러므로 잠언 1:7은 참 지혜가 하나님을 경외함에서 나온다고 말했고, 잠언 2:6은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신다고 말했다. 또 시편 119:97-100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깨닫는 자는 원수보다, 스승보다, 노인보다 더 지혜롭게 된다고 말하였다.

[11-14절] 내가 당신들의 말을 기다렸고 당신들이 할 말을 . . . .

엘리후는 또 말한다. “내가 당신들의 말을 기다렸고 당신들이 할 말을 합당하도록 하여 보는 동안에 그 변론에 내 귀를 기울였더니 자세히 들은즉 당신들 가운데 욥을 꺾어 그 말을 대답하는 자가 없도다. 당신들이 혹시라도 말하기를 우리가 지혜를 깨달았었구나. 그를 이길 자는 하나님이시요 사람이 아니라 하지 말지니라. 그가 내게 말을 내지 아니하였으니 나도 당신들의 말처럼 그에게 대답지 아니하리라.”

“할 말을 합당하도록 하여 보는 동안에”라는 원어는 “할 말을 찾는 동안에”라고 번역할 수 있다. 12절의 ‘꺾는다’는 원어(야카크)는 ‘깨우친다, 잘못을 증명한다’는 뜻이다. ‘이긴다’는 원어(나다프)는 ‘찌르다, 패배시키다, 치다’는 뜻이다. 14절의 ‘그’는 욥을 가리킨다.

엘리후는 욥의 친구들이 욥을 깨우치거나 욥의 잘못을 증명하지 못했고 욥의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는 그들이 마치 지혜를 깨닫고 하나님의 지혜로 욥을 책망한 것처럼 말하지 말라고 한다.

잠언 10:20-21은, “의인의 혀는 천은과 같고” “의인의 입술은 여러 사람을 교육한다”고 말하고, 잠언 25:11은,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니라”고 한다. 우리는, 물론, 잘못을 행한 자에게는 충고와 책망의 말을 해주어야 할 것이다. 잠언 27:5-6은,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 친구의 통책은 충성에서 말미암은 것이나 원수의 자주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바르게 행하는 자에게는 위로의 말도 할 수 있어야 한다. 이사야 50:4는, “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라고 말한다.

[15-22절] 그들이 놀라서 다시 대답하지 못하니 할 말이 . . . .

엘리후는 또 말한다. “그들이 놀라서 다시 대답하지 못하니 할 말이 없음이로구나. 그들이 말이 없이 가만히 서서 다시 대답지 아니한즉 내가 어찌 더 기다리랴. 나도 내 본분대로 대답하고 나도 내 의향을 보이리니 내게 말이 가득하고 내 심령이 나를 강박함이니라. 보라 내 가슴은 봉한 포도주 같고 새 가죽 부대가 터지게 됨 같구나. 내가 말을 발하여야 시원할 것이라. 내 입을 열어 대답하리라. 나는 결코 사람의 낯을 보지 아니하며 사람에게 아첨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아첨할 줄을 알지 못함이라. 만일 그리하면 나를 지으신 자가 속히 나를 취하시리로다.”

엘리후는 나이 많은 다른 이들의 말을 인내하며 들었고 이제 자신이 대답할 몫을 말하고자 한다. 그는 마치 봉한 포도주같이, 새 가죽부대가 터지게 됨같이 할 말로 가득하다고 말한다. 성도는 쓸데없는 말을 많이 하지 말고 상대방의 말을 잘 듣고 신중히 생각하고 판단하여 말하는 것이 좋다. 의인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한다(잠 15:28).

엘리후는 또 자신이 사람의 낯을 보지 않고 사람에게 아첨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아첨의 말은 일종의 거짓말이다. 아첨은 악한 일이다. 잠언 26:28, “거짓말하는 자는 자기의 해한 자를 미워하고 아첨하는 입은 패망을 일으키느니라.” 잠언 29:5, “이웃에게 아첨하는 것은 그의 발 앞에 그물을 치는 것이니라.”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의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거하시느니라”고 말했다(살전 2:5). 그러나 이단자들은 원망하며 불만을 토하며 그 정욕대로 행하고 그 입으로 자랑하고 이익을 위해 아첨한다(유 16).

엘리후는 욥이 하나님보다 자기를 의롭다 하므로 또 친구들이 욥의 잘못을 증명치 못하면서 그를 정죄하므로 그들에게 노를 발하였다.

우리는 욥처럼 의롭게 살아야 하지만, 그러나 고난 중에서 잠시라도 우리 자신이 하나님보다 의롭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우리는 욥의 친구들처럼 정당한 이유를 가지지 않고 남을 정죄해서도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많이 읽고 묵상함으로써 참 지혜를 얻자. 그래서 남에게 유익한 충고를 주고 또 위로의 말도 주자.

우리는 무슨 말이든지 성급히 말하지 말고 깊이 생각한 후에 말하자.우리는 결코 남에게 진실이 없는 아첨의 말을 하지 말자.

 

 

33장: 하나님은 자신을 다 알리지 않으심

[1-7절] 그런즉 욥이여 내 말을 들으며 나의 모든 말에 귀를 . . . .

엘리후는 또 말한다. “그런즉 욥이여, 내 말을 들으며 나의 모든 말에 귀를 기울이기를 원하노라. 내가 입을 여니 내 혀가 입에서 동하는구나. 내 말이 내 마음의 정직함을 나타내고 내 입술이 아는 바를 진실히 말하리라. 하나님의 신[영]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느니라[살게 하시느니라]. 네가 할 수 있거든 일어서서 내게 대답하고 내 앞에 진술하라. 나와 네가 하나님 앞에서 일반이니 나도 흙으로 지으심을 입었은즉 내 위엄으로는 너를 두렵게 하지 못하고 내 권세로는 너를 누르지 못하느니라.”

엘리후는 욥에게 자기 마음의 정직함을 나타내고 자기가 아는 바를 진실하게 말하겠다고 말한다. 죄인의 마음은 거짓되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거짓됨을 증거했고(렘 9:4-6), 또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하였다(렘 17:9). 그러나 성도는 거짓을 버리고 항상 진실을 말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교훈하기를,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고 하였다(엡 4:25).

엘리후는 자신이 욥보다 나은 것처럼 높은 마음을 가지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영이 자기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자기를 살게 하셨고 자기나 욥이나 다 흙으로 지음받은 존재라고 말하였다. 그는 허풍이나 허세를 품지 않고 겸손한 자세로 말하기를 원한다. 엘리후의 이런 마음은 우리가 본받을 만한 바르고 선한 마음이다.

[8-12절] 네가 실로 나의 듣는데 말하였고 나는 네 말소리를 . . . .

엘리후는 또 말한다. “네가 실로 나의 듣는데 말하였고 나는 네 말소리를 들었느니라. 이르기를 나는 깨끗하여 죄가 없고 허물이 없으며 불의도 없거늘 하나님이 나를 칠 틈을 찾으시며 나를 대적으로 여기사 내 발을 착고[차꼬]에 채우시고 나의 모든 길을 감시하신다 하였느니라. 내가 네게 대답하리라. 이 말에 네가 의롭지 못하니 하나님은 사람보다 크심이니라.”

욥은 자신이 깨끗하고 죄가 없으며 허물과 불의도 없다고 생각하였다. 성도가 거리낌 없이 사는 것은 좋은 일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순종하는 삶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일이다. 사도 바울은 공회 앞에서, “형제들아, 오늘날까지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고 말했고(행 23:1), 고린도전서 4:4에서는,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한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거리낌 없이 사는 것이 하나님을 비난하는 구실이 되어서는 안 된다. 엘리후는 욥이 “하나님이 나를 칠 틈을 찾으시며 나를 대적으로 여기사 내 발을 차꼬에 채우시고 나의 모든 길을 감시하신다”고 말했다고 말한다. 욥기 13:24, 27에 기록된 대로, 욥은 하나님께서 그를 대적하시고 그의 발을 차꼬에 채우신다고 표현하였다. 그러므로 엘리후는 “내가 네게 대답하리라. 이 말에 네가 의롭지 못하니 하나님은 사람보다 크심이니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지혜와 지식과 능력에 있어서 또 의와 선에 있어서 사람보다 크시다. 하나님의 철저한 공의 앞에서 우리 모두는 여전히 부족한 죄인이다. 또 고난은 우리에게 믿음과 겸손과 거룩을 위해 유익하다. 고난은 인생의 허무함과 천국의 가치를 더욱 깨닫게 해준다.

[13-18절] 하나님은 모든 행하시는 것을 스스로 진술치 . . . .

엘리후는 또 말한다. “하나님은 모든 행하시는 것을 스스로 진술치 아니하시나니 네가 하나님과 변쟁(辯爭)함은 어찜이뇨? 사람은 무관히 여겨도 하나님은 한번 말씀하시고 다시 말씀하시되 사람이 침상에서 졸며 깊이 잠들 때에나 꿈에나 밤의 이상 중에 사람의 귀를 여시고 인치듯 교훈하시나니 이는 사람으로 그 꾀를 버리게 하려 하심이며 사람에게 교만을 막으려 하심이라. 그는 사람의 혼으로 구덩이에 빠지지 않게 하시며 그 생명으로 칼에 멸망치 않게 하시느니라.”

엘리후의 말은 옳다. 하나님은 모든 행하시는 바에 대하여 스스로 진술하지 않으신다. 그는 진술하실 의무가 없으시다. 그러므로 그의 행하시는 일을 우리가 다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여서 그와 변론하려는 태도는 옳지 않다. 사람은 하나님의 섭리에 잠잠히 순응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바는,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은 제한적이라는 것과 하나님의 본심은 고난이 아니고 평안이라는 것이다. 예레미야 애가 3:33,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 시편 30:5, “그 노염은 잠깐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또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이다(롬 8:28).

그러나 하나님은 항상 침묵하지는 않으신다. 그는 옛 시대에 여러 방식으로 말씀하셨고 지금은 성경을 통해 말씀하신다. 단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무감각할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의 귀를 여시고 인치듯이 확실히 교훈하신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목적은 사람으로 그 꾀를 버리고 교만하지 않게 하시고 그로 파멸의 구덩이에 떨어지지 않고 죽임을 당하지 않게 하시기 위함이다.

[19-26절] 혹시는 사람이 병상의 고통과 뼈가 늘 쑤심의 징계를 . . . .

엘리후는 또 말한다. “혹시는 사람이 병상의 고통과 뼈가 늘 쑤심의 징계를 받나니 그의 마음은 식물을 싫어하고 그의 혼은 별미를 싫어하며 그의 살은 파리하여 보이지 아니하고 보이지 않던 뼈가 드러나서 그의 혼이 구덩이에, 그의 생명이 멸하는 자에게 가까워지느니라.” 엘리후는 사람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심각한 병으로 고통을 당하는 경우에 대해 말한다. 그 사람은 뼈가 늘 쑤시며 입맛이 떨어져 음식 먹기를 싫어하고 살이 빠져 수척하며 보이지 않던 뼈가 튀어 나와서 그의 영혼은 죽음의 구덩이에 가까워진다.

엘리후는 또 말한다. “그럴 때에 만일 일천 천사[혹은 ‘사자(使者)’] 가운데 하나가 그 사람의 해석자로 함께 있어서 그 정당히 행할 것을 보일진대[보인다면] 하나님이[그로] 그 사람을 긍휼히 여기사 이르시기를[그를 긍휼히 여겨 말하게 하기를](NASB) 그를 건져서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하라. 내가 대속물을 얻었다 하시리라[하게 하라]. 그런즉 그 살이 어린아이보다 연하여져서 소년 때를 회복할 것이요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므로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사 그로 자기의 얼굴을 즐거이 보게 하시고 사람에게 그 의를 회복시키시느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때 만일 그에게 단 한 명의 사자라도 해석자로 있다면 그는 그를 긍휼히 여기며 옳은 것 곧 하나님의 뜻을 전달할 것이다. 그것은, “그를 건져서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하라. 내가 대속물을 얻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의 살은 어린아이보다 연해져서 소년 때를 회복할 것이며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므로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그로 자기 얼굴을 즐거이 보게 하시고 사람에게 그의 의를 회복시키실 것이다. 그는 회복될 것이다.

[27-33절] 그가 사람 앞에서 노래하여 이르기를 내가 전에 . . . .

엘리후는 또 말한다. “그가 사람 앞에서 노래하여 이르기를 내가 전에 범죄하여 시비(야솨르)[옳은 것]를 바꾸었으나 내게 무익하였었구나. 하나님이 내 영혼을 건지사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하셨으니 내 생명이 빛을 보겠구나 하리라.” ‘사람 앞에서 노래하여’라는 원문(야쇼르 알 아나쉼)은 ‘사람들을 보며’(KJV)라는 뜻이다. 죄의 징계로 극심한 병의 고통을 받은 그는 사람들을 보며, ‘내가 전에 범죄하여 옳은 것을 바꾸었으나 내게 무익하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내 영혼을 죽음의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건지셨고 내 생명이 빛 곧 기쁨과 행복을 누리리라’고 간증할 것이다.

엘리후는 또 “하나님이 사람에게 이 모든 일을 재삼 행하심은 그 영혼을 구덩이에서 끌어 돌이키고 생명의 빛으로 그에게 비취려 하심이니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여러 번 이런 징계의 고난을 주시는 목적은 그로 하여금 죽음의 구덩이에서 건지시고 생명의 빛 즉 영생의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하려 하심이다. 엘리후는 ‘구덩이’라는 말을 여러 번 했는데(18, 22, 24, 28, 30절), 그것은 죽음의 구덩이이며 결국 멸망의 구덩이인 지옥을 암시한다. 하나님의 구원은 사망의 구덩이로부터의 구원이며 결국 지옥으로부터의 구원이다.

엘리후는 또 말한다. “욥이여, 귀를 기울여 내게 들으라. 잠잠하라. 내가 말하리라. 만일 할 말이 있거든 대답하라. 내가 너를 의롭게 하려[의롭다 하려] 하노니 말하라. 만일 없으면 내 말을 들으라. 잠잠하라. 내가 지혜로 너를 가르치리라.” 엘리후는 모든 일을 정당히 판단하고 말하려 한다. 그는 욥이 옳으면 옳은 것을 인정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는 욥이 할 말이 없으면 내 말을 들으라고 말한다.

엘리후는 욥이 자신의 의와 성결을 주장하며 하나님을 비난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욥처럼 의롭게 살아야 하지만, 고난 중에 하나님의 섭리를 의심하거나 불평하거나 비난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행하시는 것을 스스로 진술치 않으신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의 섭리를 다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하나님과 변론하려 하지 말고 잠잠히 참고 믿고 순응하고 복종해야 한다.

하나님의 본심은 우리에게 고난을 주는 것이 아니고 평안을 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며 사람으로 교만치 않게 하시고 멸망에서 구원을 얻게 하신다. 비록 우리가 하나님의 징계로 병상에 던져져도, 그의 긍휼과 대속의 은혜로 회복될 것이다.

 

 

34장: 하나님은 불의하지 않으심

1-15절, 하나님은 불의하지 않으심

[1-4절] 엘리후가 말을 이어 가로되 지혜 있는 자들아, 내 말을 . . . .

엘리후는 또 말한다. “지혜 있는 자들아, 내 말을 들으며 지식 있는 자들아, 내게 귀를 기울이라. 입이 식물의 맛을 변별함같이 귀가 말을 분별하나니 우리가 스스로 옳은 것은 택하고 무엇이 선한가 우리끼리 알아보자.”

엘리후는 사람의 입이 식물의 맛을 분별하듯이 사람의 귀가 말을 분별하므로 우리가 스스로 옳은 것을 택하고 선한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세상에는 선과 악, 의와 불의가 섞여 있다. 어리석은 자는 아무 말이나 함부로 말하고(잠 12:18), 또 아무 말이나 다 믿지만(잠 14:15), 지혜로운 자는 듣는 것을 분별하고 말하는 것도 조심한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고 말씀하셨다(사 55:8-9). 주께서는 베드로에게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책망하셨다(마 16:23).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의롭고 선한 것을 분별하는 지혜로운 성도가 되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교훈하였고(롬 12:2), 또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교훈하였다(살전 5:21-22).

[5-9절] 욥이 말하기를 내가 의로우나 하나님이 내 의를 . . . .

엘리후는 또 말한다. “욥이 말하기를 내가 의로우나 하나님이 내 의를 제하셨고 내가 정직하나 거짓말장이[거짓말쟁이]가 되었고 나는 허물이 없으나 내 상처가 낫지 못하게 되었노라 하니 어느 사람이 욥과 같으랴. 욥이 훼방하기[조롱하기]를 물마시듯 하며 악한 일을 하는 자들과 사귀며 악인과 함께 다니면서 이르기를 사람이 하나님을 기뻐하나 무익하다 하는구나.” ‘내가 정직하나 거짓말쟁이가 되었다’는 원문은 ‘내가 나의 의를 거슬러 거짓말을 하랴?’라고 번역할 수 있다(KJV, NASB).

욥은 전에 “나의 의를 빼앗으신 하나님, 나의 영혼을 괴롭게 하신 전능자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결코 내 입술이 불의를 말하지 아니하며 내 혀가 궤휼[거짓]을 발하지 아니하리라”고 말했다(욥 27:2, 4). 욥은 또 나는 허물이 없으나 내 상처가 낫지 못한다고 말했다. 이처럼 그는 자신이 어떤 죄를 짓지 않았다고 진심으로 말했다.

그러나 욥이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조롱했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아무리 고난 중에 한 말이라도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은 잘못이다. 또 욥이 악한 일을 하는 자들과 사귀며 악인과 함께 다니면서 말하기를 사람이 하나님을 기뻐하나 무익하다고 말했다면 그것도 잘못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악한 자들과 더불어 살면서 악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고 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세상에서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여러 가지 점에서 유익이 많다. 고난은 우리에게 교정의 유익뿐 아니라, 예방의 유익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경우에라도 사람이 하나님을 기뻐하나 아무 소용도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10-15절] 그러므로 너희 총명한 자들아, 내 말을 들으라. . . .

엘리후는 또 말한다. “그러므로 너희 총명한 자들아, 내 말을 들으라. 하나님은 단정코 악을 행치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단정코 불의를 행치 아니하시고 사람의 일을 따라 보응하사 각각 그 행위대로 얻게 하시나니 진실로 하나님은 악을 행치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공의를 굽히지 아니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악을 행치 않으시고 불의를 행치 않으신다. 그는 각 사람을 그 행위대로 공의롭게 심판하시고 보응하신다. 이것은 성경의 기본 진리이다(전 12:14; 롬 2:6). 엘리후가 왜 이런 말을 하는가? 그것은, 아마, 욥도 하나님의 엄격한 잣대로 보면 흠과 점이 없지 않으므로 그가 당한 고난이 하나님의 공의의 처분 안에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 같다.

엘리후는 또 말한다. “누가 땅을 그에게 맡겼느냐? 누가 온 세계를 정하였느냐? 그가 만일 자기만 생각하시고 그 신과 기운을 거두실진대 모든 혈기 있는 자가 일체로 망하고 사람도 진토[흙]로 돌아가리라.” ‘그가 만일 자기만 생각하시고’라는 원문은 ‘그가 만일 자기의 결심대로(NASB) 혹은 자기의 의도하신 대로(NIV) 하시면’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온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뜻대로 자기 영과 자기 호흡을 거두신다면, 세상의 모든 생명체들과 모든 사람들은 다 죽어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만큼 하나님은 세상 만물에 대한 소유권과 통치권을 가진 주권자이시다. 그러나 그는 그 권한을 다 사용치 않으시고 우리에게 많은 은혜와 선을 베푸셨고, 우리는 그의 선하신 섭리 속에 살아왔고 지금도 살고 있는 것이다.

욥이 자신은 의롭고 정직하나 하나님께서 그의 의를 제하셨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조롱하며 비방하는 일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악과 불의를 행치 않으신다. 엄격한 잣대로 보면, 욥도 흠과 점이 없지 않으며 그의 당한 고난도 하나님의 공의의 처분 안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을 인정하고 그의 의로우심을 의심치 말고 그의 섭리를 조롱하거나 비방치 말자. 또 어떤 고난 중에라도 하나님을 믿고 인내하며 그의 계명에 순종하여 의와 선을 행하자.

 

16-37절, 하나님은 공의의 섭리자이심

[16-20절] 만일 총명이 있거든 이것을 들으며 내 말소리에 귀를 . . . .

엘리후는 또 말한다. “만일 총명이 있거든 이것을 들으며 내 말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공의를 미워하는 자시면 어찌 치리하시겠느냐? 의롭고 전능하신 자를 네가 정죄하겠느냐?”

하나님께서는 공의를 미워하시는 자가 아니시고 의롭고 전능하신 자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를 다 이해하지 못할 때에도 우리는 그의 섭리를 비난하거나 조롱하지 말고 겸손히 또 잠잠히 순응해야 한다. 실상 우리는 죄악된 세상 속에 살면서 부족들과 실수들이 없지 않고 우리 속에는 죄성이 남아 있음을 안다.

엘리후는 또 말한다. “그는 왕에게라도 비루하다 하시며 귀인들에게라도 악하다 하시며 왕족을 외모로 취치 아니하시며 부자를 가난한 자보다 더 생각하지 아니하시나니 이는 그들이 다 그의 손으로 지으신 바가 됨이니라. 그들은 밤중 순식간에 죽나니 백성은 떨며 없어지고 세력 있는 자도 사람의 손을 대지 않고 제함을 당하느니라.”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아니하신다. 그는 왕족이나 부자를 평민이나 가난한 사람보다 더 생각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다 그의 손으로 지은 바 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외적 영광과 아름다움은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가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실상 그렇게 가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사람은 밤중에 순식간에 죽어가며 심지어 세력 있는 자도 사람이 손을 대지 않고 제함을 당한다.

히스기야 왕 때 앗수르 군대가 유다를 공격했을 때 여호와의 사자는 나가서 하룻밤에 앗수르 진중에서 18만 5천명을 쳤다(사 37:36). 유다 왕 헤롯이 백성의 칭찬을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았을 때 주의 사자는 곧 그를 쳤고 그는 충이 먹어 죽었다(행 12:21-23).

[21-22절] 하나님은 사람의 길을 주목하시며 사람의 모든 . . . .

엘리후는 또, “하나님은 사람의 길을 주목하시며 사람의 모든 걸음을 감찰하시나니 악을 행한 자는 숨을 만한 흑암이나 어두운 그늘이 없느니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모든 길, 즉 그들의 모든 행위를 주목하시고 감찰하신다. 또 그는 공의로 모든 일을 보응하신다. 특히 악을 행한 사람은 숨을 만한 흑암이나 어두운 그늘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동생을 죽인 가인의 악행을 보셨고(창 4:9-10), 동생을 팔아넘긴 요셉의 형들의 악행을 보셨다(창 45:4-8).

시편 139편 저자는 말하기를,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라고 하였다(1-4, 7-8절).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아모스를 통해 말씀하시기를, “내가 그 남은 자를 칼로 살륙하리니 그 중에서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며 그 중에서 하나도 피하지 못하리라. 저희가 파고 음부로 들어갈지라도 내 손이 거기서 취하여 낼 것이요 하늘로 올라갈지라도 내가 거기서 취하여 내리울 것이며 갈멜산 꼭대기에 숨을지라도 내가 거기서 찾아낼 것이요 내 눈을 피하여 바다 밑에 숨을지라도 내가 거기서 뱀을 명하여 물게 할 것이요 그 원수 앞에 사로잡혀 갈지라도 내가 거기서 칼을 명하여 살륙하게 할 것이라. 내가 저희에게 주목하여 화를 내리고 복을 내리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고 하셨다(암 9:1-4).

[23-25절] 하나님은 사람을 심판하시기에 오래 생각하실 것이 . . . .

엘리후는 또 말하기를, “하나님은 사람을 심판하시기에 오래 생각하실 것이 없으시니 세력 있는 자를 조사할 것 없이 꺾으시고 다른 사람을 세워 그를 대신하게 하시느니라. 이와 같이 그들의 행위를 아시고 그들을 밤사이에 엎으신즉 멸망하나니”라고 한다.

세상의 재판은 확실한 증거들을 수집하고 확인하는 데 오랜 시간, 때로는 수년의 시간이 필요하다. 사람의 지혜와 지식은 매우 제한적이고 심히 불완전하기 때문에 때때로 무엇을 바르게 판단할 능력이 부족하고 그것을 적절하게 제시하고 변론하는 것도 쉽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완전한 지혜와 지식으로 즉시 바른 판단을 하신다.

또 그는 그 바른 판단에 의거하여 그의 능력으로 권세자를 꺾으시고 그를 폐하시고 다른 사람을 세우기도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의 행위를 다 아시고 밤 사이에 그들을 엎으시고 멸망시키신다. 하나님의 심판은 완전하시고 참으로 엄위하시다. 그러므로 다니엘 4장은 하나님을,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며 또 지극히 천한 자로 그 위에 세우시는” 자라고 증거하였다(단 4:17, 25, 32).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그의 행하시는 일들의 완전함과 엄위함을 잊지 말고 그 앞에 잠잠하고 그의 섭리에 겸손히 순응해야 한다. 그가 우리에게 환난을 주실 때 우리는 그의 섭리를 조롱하거나 비난하지 말고 불평하거나 원망하지도 말아야 한다. 혹시 생각나는 죄가 있으면 철저히 회개해야 하고 그런 것이 없으면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면서 잠잠히 참고 기다려야 한다.

[26-28절] 그들을 악한 자로 여겨 사람의 목전에서 치심은 . . . .

엘리후는 또 말한다. “그들을 악한 자로 여겨 사람의 목전에서 치심은 그들이 그를 떠나고 그의 모든 길을 무관(無關)히 여김이라. 그들이 이와 같이 하여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이 그에게 상달케[이르게] 하며 환난받는 자의 부르짖음이 그에게 들리게 하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을 모든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서 징벌하신다. 하나님께서 악인들을 징벌하시는 까닭은,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고 그의 모든 길을 무관(無關)히 여기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떠났다는 말은 그를 경외하지 않고 섬기지 않고 하나님의 법과 명령을 지키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들은 사람이 마땅히 행해야 할 기본 의무를 저버렸다.

또 그들이 하나님의 모든 길을 무관히 여겼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일이나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명하신 모든 일에 대해 관심이 없다는 뜻이다. 선지자 이사야는 “[악인들이] 연회에는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저와 포도주를 갖추었어도 여호와의 행하심을 관심치 아니하며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고 말했다(사 5:12). 악인들은 하나님과 그의 뜻에 대해 무지하고 무관심하다. 그들은 하나님의 섭리도, 하나님의 계명도 알지 못한다.

그 결과, 그들로 인해 사람들이 고통과 해를 당하고 호소할 곳이 없어서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그 부르짖음이 하나님께 상달된다. 야고보는 “보라 너희 밭에 추수한 품군[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고 말했다(약 5:4).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들의 부르짖음을 잘 들으시고 그들의 억울한 사정을 동정하시고 악인들에게 보응하실 것이다.

[29-30절] 주께서 사람에게 평강을 주실 때에 누가 감히 . . . .

엘리후는 또 “주께서 사람에게 평강을 주실 때에 누가 감히 잘못하신다 하겠느냐?”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서 환난과 고통을 거두시고 평안을 주실 수 있다. ‘잘못하신다고 하다’는 원어(야르쉬아)는 ‘(악하다고) 정죄하다’는 뜻이다(BDB, NASB).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평안을 주실 때 아무도 그것을 정죄하지 못한다.

엘리후는 또 “주께서 자기 얼굴을 가리우실 때에 누가 감히 뵈올 수 있으랴. 나라에게나 사람에게나 일반이시니”라고 말한다. ‘얼굴을 가리우신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호의를 거두시고 환난에 버려두신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시기로 뜻하시면 그의 은혜와 도우심을 얻을 자가 아무도 없다. 이것은 개인에게나 국가에게나 일반이다. 한국의 예루살렘이라 불리었던 평양시는 많은 신자들과 무고한 사람들의 피를 흘린 공산 독재사회의 수도가 되었다. 그러나 그 도시는 일제시대에 신사참배를 가결한 장로교 총회가 열렸던 도시이었다. 그 도시의 현재는 공의의 하나님의 엄위하심을 보인다.

엘리후는 또 “이는 사특한 자로 권세를 잡아 백성을 함해(陷害)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한다. ‘사특한 자’라는 원어(카네프)는 ‘불경건한 자’(BDB, NASB, NIV)라는 뜻이다. 불경건한 통치자는 자신이 백성 앞에서 의와 사랑을 실행하는 것처럼 처신하지만, 실상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으므로 불법을 행하고 자기 욕심을 채우는 악한 자이다. ‘함해한다’는 원어는 ‘올무에 걸린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셔서 그런 악한 자가 권력을 잡지 못하게 하실 것이며 자기 백성들로 그들의 압제의 올무에 걸리지 않게 하실 것이다.

[31-37절] 누가 하나님께 아뢰기를 내가 징계를 받았사오니 . . . .

엘리후는 또 말한다. “누가 하나님께 아뢰기를 내가 징계를 받았사오니 다시는 범죄치[패역하게 행치] 아니하겠나이다. 나의 깨닫지 못하는 것을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악을 행하였으면 다시는 아니하겠나이다 한 자가 있느냐?” 하나님께 징계를 받는 사람은 자신의 죄와 패역함을 깨닫고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며 혹 알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나의 깨닫지 못하는 것을 내게 가르치소서”라고 그에게 아뢰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악인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엘리후는 또 “하나님이 네 뜻대로 갚으셔야 하겠다고 네가 그것을 싫어하느냐? 그러면 네가 스스로 택할 것이요 내가 할 것이 아니니 너는 아는 대로 말하라”고 말한다. 33절은 번역하기 어렵고 영어번역들도 다양하다. ‘싫어하다’는 원어(마아스)는 ‘거절하다, 멸시하다’는 뜻이다. 본절 전반부는 아마, “네가 멸시하였기 때문에, 그가 네 판단대로 보응하시겠느냐?”일 것이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판단대로 보응하지 않으심을 말하는 것 같다. 사람의 판단은 심히 불완전하고 부족하다. 우리는 자신의 판단을 내세워서는 안 될 것이다.

엘리후는 또 말한다. “총명한 자와 내 말을 듣는 모든 지혜 있는 자가 필연 내게 이르기를 욥이 무식하게 말하니 그 말이 지혜 없다 하리라. 욥이 끝까지 시험받기를 내가 원하노니 이는 그 대답이 악인과 같음이라. 그가 그 죄 위에 패역을 더하며 우리 중에서 손뼉을 치며 하나님을 거역하는 말을 많이 하는구나.” 엘리후는 욥이 지혜와 지식이 없이 자신의 죄 위에 하나님께 패역한 말을 더한다고 지적한다. 사람이 고난 중에서라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말을 하는 것은 잘못이다. 욥의 부족이 여기에 있다고 보인다.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와 전능의 섭리를 확신하자. 하나님께서는 지혜로우시고 공의로우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즉각적 지식과 공의의 판단과 엄위한 보응을 깨닫고 그의 섭리를 다 이해하지 못할 때라도 그의 지혜와 의로우심과 능력을 믿고 의심치 말자.

우리는 악한 자들처럼 살지 말자. 악한 자들은 하나님의 법을 떠나며 하나님의 일에 무관심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공의로 그들을 다스리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모든 악을 멀리하고 하나님의 법을 힘써 지키며 그의 하시는 일에 관심을 가지자.

우리는 고난 중에 하나님의 처분에 순응하자. 우리는 고난 중에 겸손히 우리 자신을 살피며 혹시 우리의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 속에 악한 요소가 없었는지 반성해야 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구해야 하며, 모든 일을 오직 공의와 긍휼의 주권적 섭리자 하나님의 처분에 맡기며 참고 기다려야 한다. 우리는 결코 고난 중에 하나님께 불평하거나 원망하는 말을 하지 말고 또 패역한 말도 해서는 안 된다.

 

 

35장: 사람의 선악이 하나님께 영향을 주지 못함

[1-8절] 엘리후가 말을 이어 가로되 네가 이것을 합리하게 . . . .

엘리후는 또 말을 잇는다. “네가 이것을 합리[합당]하게 여기느냐? 네 생각에 네가 하나님보다 의롭다 하여 이르기를 유익이 무엇인고 범죄한 것보다 내게 이익이 무엇인고 하는구나. 내가 너와 및 너와 함께 있는 네 동무들에게 대답하리라. 너는 하늘을 우러러 보라. 네 위의 높은 궁창을 바라보라.”

2-3절을 다시 번역하면, “네가 이것을 합당하게 여기느냐? 네 생각에 네가 하나님보다 의롭다 하느냐? 이는 네가 이르기를, 주께 유익이 무엇인고, 범죄한 것보다 내게 이익이 무엇인고 함이니라.” ‘궁창’이라는 원어(솨카크)는 ‘구름’을 가리킨다(BDB, KJV, NASB).

엘리후는 또 말한다. “네가 범죄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해(害)]이 있겠으며 네 죄악이 관영한들 하나님께 무슨 관계가 있겠으며 네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네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네 악은 너와 같은 사람이나 해할 따름이요 네 의는 인생이나 유익하게 할 뿐이니라.”

사람은 하나님보다 의롭지 않다. 자기는 의로운데 하나님이 자기를 정죄하신다는 생각은 옳지 않다. 하나님의 섭리는 지극히 공의로우시다. 우리의 의로운 행위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께 아무 유익을 드리지 못한다. 그것은 단지 남에게 유익을 주거나 자신에게 유익할 뿐이다. 사람의 죄도 하나님께 해를 끼치지 못하고 자신에게와 타인에게 해를 끼칠 뿐이다. 물론 하나님은 죄를 징벌하실 것이다.

[9-16절] 사람은 학대가 많으므로 부르짖으며 세력 있는 자의 . . . .

엘리후는 계속 말한다. “사람은 학대가 많으므로 부르짖으며 세력 있는 자의 팔에 눌리므로 도움을 부르짖으나 나를 지으신 하나님 곧 사람으로 밤중에 노래하게 하시며 우리를 교육하시기를 땅의 짐승에게 하심보다 더하게 하시며 우리에게 지혜 주시기를 공중의 새에게 주심보다 더하시는 이가 어디 계신가 말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구나.” 사람들은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을 참으로 찾지 않는다.

엘리후는 또 말한다. “그들이 악인의 교만을 인하여 거기서 부르짖으나 응락하는 자가 없음은 헛된 부르짖음은 하나님이 결코 듣지 아니하시며 전능자가 돌아보지 아니하심이라.” 믿음 없는 자들의 부르짖음은 하나님의 응답하심을 받지 못하는 헛된 부르짖음일 뿐이다.

엘리후는 또, “하물며 말하기를 하나님은 뵈올 수 없고 일의 시비는 그 앞에 있으니 나는 그를 기다릴 뿐이라 하는 너랴”라고 말한다. 본절은 아마, “참으로 네가 말하기를 내가 그를 보지 못한다고 하나, 판단이 그 앞에 있으니 너는 그를 간절히 기다리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은 것 같다(BDB, KJV). 성도는 고난 가운데 비록 하나님을 뵈올 수 없으나 그가 모든 일을 공의롭게 판단하실 것을 믿고 오직 그를 간절히 바라고 기다려야 한다. 그것이 참된 믿음이다.

엘리후는 또, “하나님이 진노하심으로 벌을 주지 아니하셨고 횡포(파쉬 )[어리석음](BDB)를 심히 살피지 아니하셨으므로 이제 너 욥이 헛되이 입을 열어 지식 없는 말을 많이 하는구나”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진노하여 보응하신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엄한 공의의 심판 앞에 설 의인은 세상에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성도는 고난 가운데서 헛된 말, 지식 없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의의 부족함을 인식하고 고난 중에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의를 내세우지 말고 또 그의 섭리를 어리석게 비난하지 말자.

우리는 고난 중에 참으로 하나님을 찾자. 우리는 환난 중에라도 모든 일을 판단하실 이가 하나님이심을 깨닫고 하나님만 간절히 기다리자.

 

 

36장: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공의로우심

[1-7절] 엘리후가 말을 이어 가로되 나를 잠간 용납하라. 내가 . . . .

엘리후는 말을 이어 말했다. “나를 잠깐 용납하라. 내가 네게 보이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오히려 할 말이 있음이라. 내가 먼데서 지식을 취하고 나를 지으신 자에게 의를 돌려보내리라. 진실로 내 말이 거짓이 아니라. 지식이 구비한 자가 너와 함께 있느니라.” 엘리후는 자신이 하나님의 참된 지식을 소유하였고 하나님께 정당성을 돌리겠고 자신의 말은 올바르고 진실하다고 말한다.

엘리후는 또 말한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나(카비르)[능력이 많으시나] 아무도 멸시치 아니하시며 그 지능(코아크 레브)[마음(지혜)의 힘]이 무궁하사 악인을 살려 두지 않으시며 고난받는 자를 위하여 신원(伸寃)하시며 그 눈을 의인에게서 돌이키지 아니하시고 그를 왕과 함께 영원히 위에 앉히사 존귀하게 하시며.”

하나님은 전능하시지만(창 18:14; 욥 42:2; 렘 32:17) 아무도 멸시치 않으신다. 그는 사람과 대화하시고 언약을 맺으신다. 심지어 그는 아브라함과 변론하셨고 모세와도 변론하셨다(창 18:22-33; 출 32:30-34; 민 14:11-23). 그는 고아를 돌아보시며 도우시는 자이시다(시 10:14). 또 그는 지혜가 많으신 하나님이시다(욥 12:13). 또 그는 악인을 살려두지 않으시고 죽이시며 고난받는 자들의 억울함을 갚아주신다. 그는 공의의 심판자이시다. 특히 그는 의인에게서 눈을 돌이키지 않으시고(시 34:15) 그를 왕과 함께 영원히 위에 앉히시고 존귀케 하신다(시 113:6-8; 시 75:10). 하나님은 공의와 긍휼의 통치자이시다.

[8-12절] 혹시 그들이 누설에 매이거나 환난의 줄에 얽혔으면 . . . .

엘리후는 또 말한다. “혹시 그들이 누설에 매이거나 환난의 줄에 얽혔으면 그들의 소행과 허물을 보이사 그 교만한 행위를 알게 하시고 그들의 귀를 열어 교훈을 듣게 하시며 명하여 죄악에서 돌아오게 하시나니.” ‘누설(縷絏)’이라는 우리말은 ‘포승줄’을 가리키는 말인데, 그 원어(직킴)는 ‘(죄수를 묶는) 차꼬들’이라는 뜻이다.

사람들이 죄수들이나 포로들처럼 포승줄이나 차꼬들에 묶이거나 환난의 줄에 매였으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소행과 허물을 보이셔서 그들의 교만한 행위, 즉 그들이 교만하고 높은 마음으로 처신한 것을 알게 하신다. 사람들의 교만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악을 행하게 만든다. 하나님께서는 또 그들의 귀를 여셔서 교훈을 듣게 하시고 명하여 죄악에서 돌이키게 하시고 돌아오게 하신다. 그것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이다. 시편 119:67,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하나님의 징계는 우리의 유익을 위하며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신다(히 12:10).

엘리후는 또 말한다. “만일 그들이 청종하여 섬기면 형통히 날을 보내며 즐거이 해를 지낼 것이요 만일 그들이 청종치 아니하면 칼에 망하며 지식 없이 죽을 것이니라.” 고난받는 자들 중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하나님의 훈계를 듣고 그를 순종하고 섬기는 자들이다. 그런 자들은 고난에서 건짐을 받고 형통한 날과 즐거운 해를 보낼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자들이다. 그런 자들은 결국 칼에 망하며 지식 없이 죽을 것이다. 이사야 1:19-20,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키우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13-14절] 마음이 사곡한 자들은 분노를 쌓으며 하나님께 . . . .

엘리후는 또 말한다. “마음이 사곡한 자들은 분노를 쌓으며 하나님께 속박을 받을지라도 도우심을 구하지 아니하나니 그들은 젊어서 죽으며 그 생명이 남창과 함께 망하려니와.” ‘사곡한’이라는 원어(카네프)는 ‘불경건한’이라는 뜻이다(BDB, NASB). ‘남창(男娼)’이라는 원어(케데쉼)는 ‘몸을 파는 남자들’을 가리킨다.

불경건한 자들은 온갖 악을 행한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미련한 자들은 경건한 부모의 훈계를 멸시한다(잠 1:7). 사람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인해 악에서 떠나게 되며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으면 악을 좋아하게 되어 있다(잠 16:6). 또 악을 행하게 되면 하나님의 진노를 쌓게 된다. 처음에는 평안할지 모르나 마침내 재앙을 당할 것이다.

그런 자는 하나님께 속박을 받을지라도, 즉 하나님의 징벌로 어떤 환난을 당할지라도, 하나님께 회개하며 도우심을 간구하지 않는다. 요한계시록 9:20-21에 보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그들의 우상숭배와 살인과 음행의 죄를 회개치 않는다고 말하였다. 회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우리는 회개할 만할 때에 회개해야 한다.

또 그런 자는 젊어서 죽으며 그 생명이 남창과 함게 망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장수(長壽)는 하나님의 복이며 단명(短命)은 그의 징벌이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유일한 신으로 섬기며 그의 규례와 명령을 지킬 때 장수의 복을 얻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다(신 4:39-40; 5:32-33; 11:8-9). 궁극적으로, 사도 바울은 우리가 경건과 의 가운데 삶으로써 영생을 취하라고 교훈하였다(딤전 6:11-12). 그러나 불경건한 자는 젊어서 죽을 것이며 남창(男娼)들, 즉 음란한 자들과 함께 망할 것이다. 불경건은 모든 죄의 근본이다.

[15-16절] 하나님은 곤고한 자를 그 곤고할 즈음에 구원하시며 . . . .

엘리후는 또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곤고한 자를 그 곤고할 즈음에 구원하시며 학대당할 즈음에 그 귀를 여시나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너를 곤고함에서 이끌어 내사 좁지 않고 넓은 곳으로 옮기려 하셨은즉 무릇 네 상에 차린 것은 살진 것이 되었으리라.”

하나님께서는 곤고한 자들, 즉 그를 경외하며 곤고할 때에 부르짖는 자들을 그 곤고할 즈음에 구원하신다. 시편 34:6-7,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여호와의 사자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 치고 저희를 건지시는도다.” 고린도전서 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또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학대당할 즈음에 그들의 귀를 여신다. 시편 119:67, 71,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욥을 포함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의인들을 곤고함에서 이끌어 내셔서 좁지 않고 넓은 곳으로 옮기려 하셨다. 또 욥의 밥상에 차린 모든 것은 살진 것이 되었을 것이다. 시편 34:8- 10,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17-18절] 이제는 악인의 받을 벌이 네게 가득하였고 심판과 . . . .

엘리후는 또 말한다. “이제는 악인의 받을 벌이 네게 가득하였고 심판과 공의가 너를 잡았나니 너는 분격함을 인하여 징책을 대적하지 말라. 대속(代贖)함을 얻을 일이 큰즉 스스로 그릇되게 말지니라.”

18절은 번역하기가 매우 어려워 보인다. ‘징책’이라는 원어(세페크)는 어떤 히브리어 사전(BDB)은 ‘조롱,’ ‘징책,’ ‘풍부’라는 뜻을 제시하고, 다른 사전(Langenscheidt)은 ‘침[때림],’ ‘징책,’ ‘조소,’ ‘풍부’ 등의 뜻을 제시하고, 또 다른 사전(KB)은 뜻을 제시하지 않았다.

영어성경들은 ‘침(때림)’, ‘조소’, ‘부요’ 등 다양하게 번역한다. KJV, “분노가 있기 때문에 그가 너를 쳐서 데려가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게 되면 큰 대속물도 너를 구할 수 없으리라.” ASV, “분노가 일어나 네가 징책을 대적하게 하지 않게 하고 대속물의 큼이 너로 곁길로 가지 못하게 하라.” NASB, “분노가 너를 조소하는 데로 이끌지 않도록 주의하라. 또 대속물의 큼이 너로 곁길로 가지 못하게 하라”(이것이 가장 나은 번역인 것 같다). NIV, “아무도 부요로 너를 유혹하지 못하도록 하라. 큰 뇌물이 너로 곁길로 가지 못하게 하라”(NIV는 ‘분노’라는 단어를 빠뜨렸는데, 그것은 잘못이라고 본다).

본문은 분노를 조심하라는 뜻만큼은 분명하다. 엘리후는 욥이 악인의 벌 같은 고난을 받는 중에 분노함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조롱하는 죄를 짓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우리는 분노를 조심해야 한다. 시편 37:8,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 에베소서 4:26-27,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야고보서 1:20,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19-23절] 너의 부르짖음이나 너의 세력이 어찌 능히 너의 . . . .

엘리후는 “너의 부르짖음이나 너의 세력이 어찌 능히 너의 곤고한 가운데서 너로 유익하게 하겠느냐?”고 말한다. ‘부르짖음’이라는 원어(슈아)는 ‘부르짖음’ 혹은 ‘부요’라는 뜻이다. 영어성경들 이 말을 ‘부요’라고 번역한다. KJV, “그가 네 부요를 귀중히 여기겠는가? 아니라. 금도 모든 힘의 세력도 아니라.” NASB, “네 부요와 네 힘의 모든 세력이 너를 곤경으로부터 지키겠는가?” NIV, “네 재산이나 네 모든 힘있는 노력들이 네가 곤란에 처하지 않도록 너를 지탱하겠느냐?”

엘리후는 또 말한다. “너는 밤 곧 인생이 자기 곳에서 제함을 받는 때를 사모하지 말 것이니라. 삼가 악으로 치우치지 말라. [이는] 네가 환난보다 이것을 택하였느니라.” ‘밤 곧 인생이 자기 곳에서 제함을 받는 때’는 ‘죽는 때’를 가리킨다. 그는 욥에게 비록 고난 중에서라도 밤 곧 죽음을 사모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는 또 욥에게 ‘악으로 치우치지 말라’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악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조롱하는 태도를 가지는 것을 말한다. “네가 환난보다 이것을 택하였음이니라”는 구절에 ‘이것’은 앞에서 말한 ‘악’을 가리킨다.

엘리후는 또 말한다. “하나님은 그 권능으로 큰 일을 행하시나니 누가 그같이 교훈을 베풀겠느냐? 누가 그를 위하여 그의 길을 정하였느냐? 누가 말하기를 주께서 불의를 행하셨나이다 할 수 있으랴.” ‘큰 일을 행하신다’는 원어는 ‘높임을 받으신다’(NASB, NIV), ‘존귀하게 행하신다’(BDB)는 뜻이다. 하나님은 권능과 위엄을 가지고 인생에게 교훈을 베푸시고 행할 바를 다 작정하시고 항상 의롭게 행하신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그를 향하여 모든 인생은 두려움을 가져야 하고 함부로 대항하는 말이나 조롱하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24-33절] 너는 하나님의 하신 일 찬송하기를 잊지 말지니라. . . .

엘리후는 또 말한다. “너는 하나님의 하신 일 찬송하기를 잊지 말지니라. 인생이 그 일을 노래하였느니라. 그 일을 모든 사람이 우러러 보나니 먼데서도 보느니라. 하나님은 크시니 우리가 그를 알 수 없고 그 연수를 계산할 수 없느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의 일들을 알고 그를 찬송해야 한다. 하나님의 일들은 세상의 모든 사람이 우러러 보고 먼 곳에서도 본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구속사역은 오늘날 온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찬송한다. 우리 하나님은 크신 하나님이시다. 그는 존재와 지혜와 능력과 선하심이 지극히 크시다. 그의 연령은 계산할 수 없다. 그는 영원부터 영원까지 스스로 계신 하나님이시다.

엘리후는 또 말한다. “그가 물을 가늘게 이끌어 올리신즉 그것이 안개 되어 비를 이루고 그것이 공중에서 내려 사람 위에 쏟아지느니라. 구름의 펴임(spreading)과 그의 장막의 울리는 소리를 누가 능히 깨달으랴. 그가 번개 빛으로 자기의 사면에 두르시며 바다 밑도 가리우시며 이런 것들로 만민을 징벌하시며 이런 것들로 식물을 풍비(豊備)히 주시느니라. 그는 번개 빛으로 그 두 손을 싸시고 그것을 명하사 푯대를 맞추게 하시나니 그 울리는 소리가 풍우를 표시하고 육축에게까지 그 올라오는 것을 표시하느니라.”

하나님께서는 땅과 바다와 호수 등에서 물을 가늘게 이끌어 올리셔서 구름을 만드시고 땅 위에 풍성한 비를 내리신다. 천둥과 번개는 그가 내리시는 것들이다. 그는 그것으로 사람을 징벌하시고 이스라엘의 대적들을 패하게도 하신다. 한나는 하나님께서 하늘 우뢰로 그들을 치시리라고 기도하였다(삼상 2:10).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지만 아무도 멸시하지 않으신다. 그는 지혜가 많으시며 악인을 공의로 심판하시고 고난받는 자들의 억울함을 갚아주신다. 그는 환난을 통하여 인간의 교만과 악을 깨우치시고 교훈하신다. 만일 그들이 그의 교훈을 청종하면 그들이 형통할 것이나, 만일 그들이 그의 교훈을 청종치 않으면 그들은 결국 멸망할 것이다.

마음이 사곡한 자들 곧 불경건한 자들은 온갖 악을 행한다. 그들은 환난을 당해도 회개치 않는다. 그들은 결국 음행하는 자들처럼 망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경건하게 살자. 모든 악을 버리자. 또 환난 날에 자신을 성찰하고 회개하고 하나님께 기도하자.

엘리후는 욥이 고난 중에 분노함으로 하나님을 조롱하는 죄를 짓지 말아야 하고 권능과 위엄으로 행하시는 하나님께 함부로 대항하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우리는 고난 중에 분노함으로 하나님을 조롱하는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 함부로 불평하거나 원망하는 말이나 특히 대항하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37장: 하나님은 능력이 크심

[1-13절] 이로 인하여 내 마음이 떨며 자기 처소에서 떠나느니라. . . .

엘리후는 또 말한다. “이로 인하여 내 마음이 떨며 자기 처소에서 떠나느니라[뛰느니라]. 하나님의 음성 곧 그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들으라. 들으라. 그 소리를 천하에 퍼치시며 번개 빛으로 땅끝까지 이르게 하시고 그 후에 음성을 발하시며 위엄의 울리는 음성을 내시고는 그 음성이 들릴 때에 번개 빛을 금치 아니하시느니라. 하나님이 기이하게 음성을 울리시며 우리의 헤아릴 수 없는 큰 일을 행하시느니라.”

천둥과 번개에 대한 묘사이다. 천둥은 ‘하나님의 음성’으로 표현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헤아릴 수 없는 큰 일들을 행하신다.

엘리후는 또 말한다. “눈을 명하여 땅에 내리라 하시며 적은 비와 큰비도 그 같이 내리게 하시느니라. 그가 각 사람의 손을 봉하시나니 이는 그 지으신 모든 사람으로 그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짐승들은 숨는 곳으로 들어가서 그 굴에 머물며 남방 밀실에서는 광풍이 이르고 북방에서는 찬 기운이 이르며 하나님의 부시는 기운에 얼음이 얼고 물의 넓이가 줄어지느니라. 그가 습기로 빽빽한 구름 위에 실으시고 번개 빛의 구름을 널리 펴신즉 구름이 [그의] 인도하시는 대로 두루 행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무릇 그의 명하시는 것을 세계상[온 세상의 지면에]에 이루려 함이라. 혹 징벌을 위하며 혹 토지를 위하며 혹 긍휼 베푸심을 위하여 구름으로 오게 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천둥과 번개, 적은 비와 큰비, 남방의 광풍과 북방의 찬 기운, 물의 얾, 습기와 빽빽한 구름 등을 다 주관하신다.

[14-24절] 욥이여, 이것을 듣고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기묘하신 . . . .

엘리후는 말한다. “욥이여, 이것을 듣고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기묘하신 일을 궁구하라. 하나님이 어떻게 이런 것들에게 명령하셔서 그 구름의 번개 빛으로 번쩍 번쩍하게 하시는지 네가 아느냐? 구름의 평평하게 뜬 것과 지혜(데임)[지식]가 온전하신 자의 기묘한 일을 네가 아느냐? 남풍으로 하여 땅이 고요할 때에 네 의복이 따뜻한 까닭을 네가 아느냐? 네가 능히 그와 함께 하여 부은 거울 같은 견고한 궁창을 펼 수 있느냐? 우리가 그에게 할 말을 너는 우리에게 가르치라. 우리는 어두워서 진술하지 못하겠노라.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을 어찌 그에게 고할 수 있으랴. 어찌 삼키우기를 바랄 자가 있으랴.”

20절 후반절은 “만일 사람이 말한다면, 정녕 그는 삼키울 것이라”는 뜻일 것이다(KJV). 엘리후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기묘한 일들, 예를 들어 구름과 번개와 따뜻한 바람, 그리고 ‘부은 거울 같은 견고한 궁창’ 등에 대해 사람이 다 알 수 있겠는가고 묻는다.

엘리후는 또 말한다. “사람이 어떤 때는 궁창의 광명을 볼 수 없어도 바람이 지나가면 맑아지느니라. 북방에서는 금빛이 나오나니 하나님께는 두려운 위엄이 있느니라. 전능자를 우리가 측량할 수 없나니 그는 권능이 지극히 크사 심판이나 무한한 공의를 굽히지 아니하심이니라.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를 경외하고 그는 마음에 지혜롭다 하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시느니라.”

어두운 비구름은 때때로 해를 가리지만 바람이 지나가면 하늘이 맑아진다. 우리는 전능자 하나님을 다 측량할 수 없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은 그가 계시하신 작은 분량만큼이다. 하나님께서는 권능이 지극히 크시고 심판이나 무한한 공의를 굽히지 아니하신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연만물과 그 현상들을 주관하심을 알자. 그의 능력을 알자. 또 우리는 자연만물과 그 현상들까지도 하나님께 맡기자.

하나님은 참으로 전능하시고 엄위하시며, 그의 뜻대로 구름과 비를 주관하신다. 그러므로 사람은 겸손히 섭리자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

 

 

38장: 하나님께서 자신을 증거하심

1-24절, 하나님께서 자신을 증거하심 (1)

[1-7절]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 가운데로서 욥에게 말씀하여 . . . .

그때에 여호와께서 폭풍 가운데로서 욥에게 말씀하셨다. “무지한 말로 이치(에차)[의논, 조언]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하나님께서 폭풍 가운데서 말씀하신 것은 그의 위엄과 불쾌함을 나타내시는 것 같다. 욥과 그 친구들은 자신들을 반성하며 두려움과 겸비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야 할 것이다. 욥의 문제는 하나님을 대항하는 불경건이나 사악함에 있는 것이 아니고 단지 무지와 사려 깊지 못함에서 나온 불평스런 말에 있었다고 본다.

하나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누가 그 도량을 정하였었는지[측량하였는지], 누가 그 준승[(목공일에 쓰는) 줄]을 그 위에 띄웠었는지 네가 아느냐? 그 주초(柱礎)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이 돌은 누가 놓았었느냐?” 하나님께서 땅의 기초를 놓을 때 욥은 존재하지도 않았었다. 이 모든 일을 행한 이는 하나님뿐이시다. 그가 홀로 이 일을 행하셨다(사 44:24). 만일 사람이 하나님의 드러난 창조 세계의 일들도 모른다면, 그는 하나님의 감추인 섭리의 일들에 대해 아는 것처럼 처신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또, “그때에 새벽별들이 함께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쁘게 소리하였었느니라”고 말씀하신다.  새벽별들은 하나님의 아들과 동의어로 쓰였고, 그것은 천사들을 가리켰다(욥 1:6).

[8-11절] 바닷물이 태에서 나옴같이 넘쳐흐를 때에 문으로 . . . .

하나님께서는 또 말씀하신다. “바닷물이 태에서 나옴같이 넘쳐흐를 때에 문으로 그것을 막은 자가 누구냐? 그때에 내가 구름으로 그 의복을 만들고 흑암으로 그 강보(카술라)[포대기]를 만들고 계한[경계]을 정하여 문과 빗장을 베풀고 이르기를 네가 여기까지 오고 넘어가지 못하리니 네 교만한 물결이 여기 그칠지니라 하였었노라.”

바닷물은 때때로 물 무더기와 같다. 시편 33:7, “저가 바닷물을 모아 무더기같이 쌓으시며.” 그러나 바닷물이 무더기같이 넘쳐흐를 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막으셨다. 하나님께서는 구름으로 그의 의복을, 흑암으로 그의 포대기를 만드셨고 문을 만들고 빗장을 지르듯이 바닷물의 경계선을 정하시고 “네가 여기까지 오고 넘어가지 말며 네 교만한 물결이 여기 그치라”고 말씀하셨다. 바닷가의 모래 벌판은 바닷물이 넘지 못하게 하나님께서 주신 경계선이다(렘 5:22).

많은 물이 바다로 흘러 들어가지만, 바다는 넘치지 않는다. 많은 양의 물이 수증기로 증발하여 비와 눈이 되기 때문이다. 때때로 땅을 삼킬 듯이 밀려오는 바다 물결과 거대한 파도는 심히 두렵다. 거대한 바다는 때때로 큰배들과 노련한 선원들도 삼킨다. 타이타닉 호 같은 거대한 배도 파선되었다. 넓은 바다와 거센 파도 때문에 실종된 사람들은 그 시신조차도 찾기가 쉽지 않다. 스나미 같은 해일은 그 주위의 마을들을 황폐케 만든다. 사람은 바다 물결을 제어하거나 제압할 수 없다. 기습적인 폭우와 홍수도 속수무책의 재앙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일을 주장하신다. 기상 이변을 조정하실 수 있는 자는 하나님 외에 아무도 없다. 바다와 풍랑을 잔잔케 하실 수 있는 자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마 8:27).

[12-15절] 네가 나던 날부터 아침을 명하였었느냐? 새벽으로 . . . .

하나님께서는 또 말씀하신다. “네가 나던 날부터 아침을 명하였었느냐? 새벽으로 그 처소를 알게 하여 그것으로 땅끝에 비취게 하고 악인을 그 가운데서 구축한[쫓아낸] 일이 있었느냐? 땅이 변화하여 진흙에 인친 것 같고 만물이 옷같이 나타나되 악인에게는 그 빛이 금한 바 되고 그들의 높이 든 팔이 꺾이느니라.”

하나님께서는 날마다 지구의 자전(自轉)을 통해 아침을 오게 하신다. 그가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침이 오지 않을 것이다. 새벽빛이 온 땅에, 땅끝까지 순식간에 비취게 하시는 이는 바로 하나님이시다.

빛이 비치면 땅이 변한다. 어두울 때는 혼돈뿐이었으나, 빛이 비추면 땅은 진흙에 도장을 찍은 것같이, 예쁜 옷같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산들도, 들들도, 풀들도, 나무들도, 새들과 짐승들도 밝은 빛 아래서 각각 다양하고 아름다운 색깔과 모양을 드러낸다. 하나님께서는 일곱 가지 색깔의 빛, 즉 무지개에서 잘 드러나고 프리즘을 통해 관찰되는 그 빛을 만드셨고 천지만물과 인간들을 위해 친히 주셨다.

그러나 새벽빛은 또한 악인을 쫓아낸다. 악인은 밝은 빛을 싫어하고 어두운 밤을 좋아한다. 욥기 24:15-17, “간음하는 자의 눈은 저물기를 바라며 아무 눈도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고 얼굴을 변장하며, 밤에 집을 뚫는 자는 낮에는 문을 닫고 있은즉 광명을 알지 못하나니 그들은 다 아침을 흑암같이 여기니 흑암의 두려움을 앎이니라.”

악인들에게는 빛이 없다. 악인들은 빛을 미워하고 두려워하며 그 대신 어두움을 좋아한다. 빛은 사람에게 기쁨과 평안과 행복을 상징하기도 한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의 빛을 거두신다. 악인에게는 참된 기쁨과 평강과 행복이 없다. 또 악인의 높이 든 팔은 껶여진다.

[16-18절] 네가 바다 근원에 들어갔었느냐? 깊은 물밑으로 걸어 . . . .

하나님께서는 또 말씀하시기를, “네가 바다 근원(네베크)[샘]에 들어갔었느냐? 깊은 물밑으로 걸어 다녔었느냐? 사망의 문이 네게 나타났었느냐? 사망의 그늘진 문을 네가 보았었느냐? 땅의 넓이를 네가 측량하였었느냐? 다 알거든 말할지니라”고 하신다.

깊은 바다 속에는 아마 많은 샘들이 있을 것이다. 노아 홍수 때 ‘큰 깊음의 샘들’이 터졌다고 성경은 말한다(창 7:11). 전문 잠수부(다이버)들이 바다 속으로 들어가지만(보통은 수중 30미터 정도 들어간다고 함), 그것은 깊은 바다(보통 5-6km, 최저 약 11km)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잠수함도 물의 압력 때문에 아주 깊은 바다 속으로는 들어가지 못하고 특별한 탐사선도 겨우 900미터 정도 내려간다고 한다. 사람은 바다 속에 대해 지극히 조금 알고 있을 뿐이다. 깊은 물밑으로 걸어 다녀본 사람은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친히 이 모든 것을 만드셨고 그것을 아시며 그것을 주관하시는 자이시다.

하나님께서는 또 ‘사망의 문,’ ‘사망의 그늘진 문’에 대해 언급하신다. 그것은 죽음과 무덤을 가리킬 것이나, 혹시 악인들을 위해 예비된 지옥의 문을 가리킬지도 모른다. 사람은 죽음너머의 세계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며 지옥의 문, 그리고 그 문으로 들어간 세계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한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서만 아시는 세계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땅의 넓이를 네가 측량하였었느냐?”라고 물으신다. ‘측량하다’는 원어(힛본네타)는 ‘지각(知覺)하다, 이해하다’는 뜻이다. 우리는 이 광활한 지구의 넓이를 느낄 수 없다. 오늘 우리도 땅의 크기를 수학적 어림 계산으로만 알 수 있을 뿐이다.

[19-24절] 광명의 처소는 어느 길로 가며 흑암의 처소는 어디냐? . . .

하나님께서는 또 말씀하신다. “광명의 처소는 어느 길로 가며[광명이 거하는 길이 어디이며] 흑암의 처소는 어디냐? 네가 능히 그 지경으로 인도할 수 있느냐? 그 집의 길을 아느냐? 네가 아마 알리라. 네가 그때에 났었나니 너의 연수(年數)가 많음이니라.” 우리가 경험하는 빛은 주로 태양에서 나오는데, 우리는 태양에 대해, 빛의 이치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흑암의 처소도 알지 못한다. 21절은 반어법(反語法)이다. 그것은, 비록 욥이 나이가 많을지라도 빛의 거하는 길과 어두움의 처소를 알지 못함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하나님께서는 또 말씀하신다. “네가 눈 곳간에 들어갔었느냐? 우박 창고를 보았느냐? 내가 환난 때와 전쟁과 격투의 날을 위하여 이것을 저축하였노라.”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눈 곳간과 우박 창고를 두시고 죄인을 징벌하실 때 그것을 사용하시고(계 16:21) 죄인들을 징벌하기 위해 폭풍과 폭우와 우박을 사용하신다(사 30:30; 겔 13:11, 13). 예를 들어, 여호수아가 기브온 족속을 위해 아모리 다섯 왕들의 연합군들과 싸웠을 때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큰 덩어리 우박들을 내려 여호수아를 도우심으로 아모리인들 중에 이스라엘 자손의 칼에 죽은 자보다 우박에 죽은 자가 더 많게 하셨다(수 10:11).

하나님께서는 또, “광명이 어느 길로 말미암아 뻗치며 동풍이 어느 길로 말미암아 땅에 흩어지느냐?”고 말씀하신다. 본문은 빛이 나뉘어 뻗쳐 나가는 길이나, 동풍이 땅에 흩어지는 길에 대해 말한다. 사람은 빛이 나뉘는 길이나 동풍의 길을 알지 못한다. 빛은 1초에 30만 킬로미터[지구를 약 일곱 바퀴 반 도는] 빠르기로 달리면서 뻗치어 나간다. 또 눈에 보이지 않는 동풍에 대해서는 사람이 파악하기 어렵다.

하나님께서는 욥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깨우쳐주신다. 하나님께서는 홀로 땅의 기초를 놓으셨다. 그는 바닷물을 주장하시는 섭리자이시다. 그는 빛 자체이시고 세상의 빛을 주관하시는 섭리자이시며 친히 만물과 사람들에게 빛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바다 근원과 사망의 문과 땅의 넓이를 아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빛과 눈 곳간과 우박 창고를 아시고 동풍의 길도 아신다. 우리는 창조자요 섭리자이신 하나님의 능력과 위엄 앞에 두려움과 겸비함으로 엎드려야 하고 무지하게 하나님께 도전적이고 불평적인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욥에게 그런 부족이 있다면, 그는 그것을 뉘우쳐야 할 것이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모든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25-41절, 하나님께서 자신을 증거하심 (2)

[25-30절] 누가 폭우를 위하여 길을 내었으며 우뢰의 번개 길을 . . . .

하나님께서는 또 말씀하신다. “누가 폭우를 위하여 길을 내었으며 우뢰의 번개 길을 내었으며 사람 없는 땅에, 사람 없는 광야에 비를 내리고 황무하고 공허한 토지를 축축하게 하고 연한 풀이 나게 하였느냐?” 폭우가 쏟아져 홍수가 날 때 그 폭우를 주장하고 그 홍수를 주장하는 이가 누구인가? 누가 그 물길을 내었는가? 사람이 그것을 예측하였더라면 재난을 피했을 것이나 예측하지 못하므로 때때로 물에 쓸려 죽고 집도 떠내려간다. 또 누가 천둥과 번개의 길을 내었는가? 사람은 그 길을 알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없는 광야와 황무하고 거친 들판에 비를 내려 땅을 축축케 하시고 연한 풀이 나게 하셨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연만물 속에서 행하시는 일들에 대해 조금 알 뿐이요 그 신비한 현상들의 이치를 다 알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또 말씀하신다. “비가 아비가 있느냐? 이슬방울은 누가 낳았느냐? 얼음은 뉘 태에서 났느냐? 공중의 서리는 누가 낳았느냐? 물이 돌같이 굳어지고 해면이 어느니라.” 비와 이슬방울이 어떻게 생기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사람은 수증기가 어떻게 공중의 서리가 되는지 혹은 물이 어떻게 얼음이 되는지 그 이치를 알지 못한다. 우리는 물이 섭씨 0도가 되면 언다는 것을 알지만, 왜 그것이 그래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왜 온도가 내려가면 이슬이 생기고 얼음이 생기는 것인지 알지 못한다. 창조 세계는 신비로 가득하다. 하나님께서는 신비한 일을 많이 행하신다. 욥기 5:9, “하나님은 크고 측량할 수 없는 일을 행하시며 기이한 일을 셀 수 없이 행하시나니.” 그는 “측량할 수 없는 큰 일을, 셀 수 없는 기이한 일을 행하신다”(욥 9:10).

[31-33절] 네가 묘성을 매어 떨기 되게 하겠느냐? 삼성의 띠를 . . . .

하나님께서는 또 말씀하신다. “네가 묘성을 매어 떨기 되게 하겠느냐? 삼성의 띠를 풀겠느냐? 네가 열두 궁성을 때를 따라 이끌어 내겠느냐? 북두성과 그 속한 별들을 인도하겠느냐?” 옛날부터 사람들은 밤하늘의 별들을 관찰하며 별자리들의 이름을 붙였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중 몇 가지를 말씀하셨다. 욥도 앞에서 이런 별자리들을 언급하면서 하나님께서 그 별들을 다 만드셨다고 말한 적이 있다(욥 9:9). ‘묘성(昴星)’(키마)은 플레아데스 별자리(Pleiades) 혹은 황소자리 별자리로서 일곱 개의 별들로 되어 있고, ‘삼성(參星)’(케실)은 오리온 별자리(Orion)로서 세 개의 별들로 되어 있다. ‘열두 궁성(宮星)’(맛자로스)과 ‘북두성(北斗星)’(아이쉬)은 아마 열두 궁성 별자리와 큰 곰 별자리를 각각 가리킬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네가 묘성 곧 황소자리 별자리의 일곱 별을 묶었느냐, 또 삼성 곧 오리온 별자리의 세 별을 풀겠느냐고 물으신다. 그는 또 네가 열두 궁성 별자리를 때를 따라 이끌어 내겠느냐고 말씀하시고 또 큰 곰 별자리의 별들을 인도하겠느냐고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또 “네가 하늘의 법도를 아느냐? 하늘로 그 권능을 땅에 베풀게 하겠느냐?”고 말씀하신다. “하늘로 그 권능을 땅에 베풀게 하겠느냐?”는 말은 땅에 대한 해와 달과 별들의 영향을 다스릴 수 있는가라는 뜻이라고 본다. 거대하고 광활한 우주 공간인 저 하늘에 떠 있는 무수히 많은 별들 그리고 그것들이 여러 모양들을 이루며 규칙적이게 제자리를 지키는 현상들은 참으로 신비하다. 이것은 피조물인 사람이 조금도 관여할 수 없는 영역이다. 하나님의 이런 질문들에 대해 욥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34-38절] 네 소리를 구름에 올려 큰 물로 네게 덮이게 . . . .

하나님께서는 또 욥에게 “네 소리를 구름에 올려 큰물로 네게 덮이게 하겠느냐?”고 말씀하신다. 욥의 목소리가 구름에 도달하기도 어렵겠지만 설령 도달했다 할지라도 구름이 그의 말에 복종치 않을 것이다. 그런 일은 욥이든지 누구든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또 욥에게 “네가 번개를 보내어 가게 하되 그것으로 네게 우리가 여기 있나이다 하게 하겠느냐?”고 말씀하신다. 하늘의 번개를 주관하고 그것에게 명령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 것은 욥이든지 누구든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또 욥에게 “가슴 속의 지혜는 누가 준 것이냐? 마음 속의 총명은 누가 준 것이냐?”고 물으신다. 사람은 확실히 짐승들과 다르다. 물론 사람은 범죄한 이후 하나님을 아는 참 지혜를 잃어버렸고 심히 무지하고 허무한 것을 추구하고 사는 상태에 있지만, 확실히 짐승들과는 다르다. 사람에게는 짐승들에게 없는 높은 수준의 지혜와 이성과 도덕성이 있다. 그런데 이런 지혜와 총명은 누가 준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또, “[그러나] 누가 지혜로 구름을 계수하겠느냐? 누가 하늘의 병을 쏟아 티끌로 진흙을 이루며 흙덩이로 서로 붙게 하겠느냐?”고 말씀하신다. 본문은 “[그러나] 누가 지혜로 구름을 계수하겠느냐? 티끌이 굳어질 때와 흙덩이가 서로 붙을 때, 누가 하늘의 병을 기울일 수 있느냐?”라는 뜻이다(NASB, NIV). 사람은 자신의 지혜로 구름들의 수를 셀 수 없으며 하늘의 물병을 기울여서 단단하게 굳어지는 티끌과 딱딱하게 붙어버리는 흙덩이를 부드럽게 할 능력이 없다. 욥이든지 누구든지 사람은 구름과 비를 명령할 힘이 없다. 그런 일은 오직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이다.

[39-41절] 네가 암사자를 위하여 식물을 사냥하겠느냐? 젊은 . . . .

하나님께서는 또 욥에게 말씀하신다. “네가 암사자를 위하여 식물을 사냥하겠느냐? 젊은 사자의 식량을 채우겠느냐? 그것들이 굴에 엎드리며 삼림에 누워서 기다리는 때에니라.” ‘암사자’라는 원어(라비)는 ‘사자’라는 뜻이며, ‘젊은 사자’라는 원어(케피림)는 ‘젊은 사자들’이라는 복수명사이다. 사자는 동물의 왕이라고 불리는 사납고 날렵한 짐승이다. 그것은 100 내지 250킬로그램의 체중을 가지고도 시속 60킬로미터 이상의 속도로 달려가 얼룩말, 영양, 기린, 사슴, 물소, 멧돼지 등을 사냥한다. 낮에는 보통 나무 그늘에서 쉬고 밤에 활동하며 열 마리나 스무 마리씩 떼를 지어 산다. 사람이 사자를 위해 먹이를 사냥할 수 없고 젊은 사자들의 식욕을 채울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또, “까마귀 새끼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먹을 것이 없어서 오락가락할 때에 그것을 위하여 먹을 것을 예비하는 자가 누구냐?”라고 말씀하신다. 까마귀는 성경에서 자주 언급되는 새이다. 노아 홍수 때에 노아는 물이 걷힌 후 창문을 열고 맨 먼저 까마귀를 내어보냈다. 시편 147:9는 하나님께서 “들짐승과 우는 까마귀 새끼에게 먹을것을 주시는도다”라고 말하며, 주께서도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고 말씀하셨다(눅 12:24). 까마귀 새끼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오락가락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에게 먹을것을 주신다. 이 세상 모든 동물들은 다 하나님의 선하신 배려와 공급 속에 살고 있다(시 104:27-29). 하나님께서는 모든 세상 만물을 섭리하신다.

우리는 전지전능하신 창조자 하나님을 안다고 하지만 정말 조금 알 뿐이다. 그는 폭우와 우뢰와 번개 길을 내시고 이슬방울과 얼음과 서리를 주관하신다. 그는 하늘의 별들을 홀로 창조하셨고 운영하신다. 그는 구름과 번개와 비를 주장하신다. 그는 사자와 까마귀 같은 모든 동물에게 먹을것을 주신다. 그는 자연세계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창조자요 섭리자이신 지극히 크신 하나님, 그 지혜와 능력이 무한하신 하나님 앞에서 두려운 마음으로 겸손하게 엎드려 그를 경배하며 그의 위대하심과 그의 지혜와 능력과 자비하심을 찬송하고 잠잠히 그의 섭리에 순응하고 그의 모든 계명에 순종하자.

 

39장: 동물 세계가 주의 손 안에 있음

[1-4절] 산염소가 새끼 치는 때를 네가 아느냐? 암사슴의 새끼 . . . .

하나님께서는 또 욥에게 말씀하신다. “산(山)염소가 새끼 치는 때를 네가 아느냐? 암사슴의 새끼 낳을 기한을 네가 알 수 있느냐? 그것이 몇 달 만에 만삭(滿朔)되는지 아느냐? 그 낳을 때를 아느냐?”

‘산염소’라는 원어(야알레-살라)는 ‘바위의 영양(羚羊)’이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네가 산염소의 새끼 낳는 때를 아느냐, 암사슴의 새끼 낳을 기한을 아느냐, 또 그것이 몇 달 만에 만삭이 되는지 아느냐라고 물으신다. 산염소 같은 짐승은 다른 동물이 접근하기 어려운 험준한 바위와 바위 사이 또는 동굴에 두 마리 내지 다섯 마리씩 무리를 지어 생활한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런 산염소나 산양, 암사슴 같은 짐승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모르고 있다. 사람이 그런 짐승들에 대해 아는 것이란 지극히 조금뿐이다.

하나님께서는 또, “그것들은 몸을 구푸리고 새끼를 낳아 그 괴로움을 지내어 버리며 그 새끼는 강하여져서 빈들에서 길리우다가 나가고는 다시 돌아오지 아니하느니라”고 말씀하신다. “그 괴로움을 지내어 버리며”라는 구절은 “그 고통(산고 産苦)을 던져버리며”라는 뜻이다.

산염소나 사슴들은 몸을 구푸리고 새끼를 낳고 그 출산의 고통을 던져버리며 그 새끼들은 강해지고 들판에서 자라다가 어미를 떠나가고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암사슴 같은 짐승은 새끼를 낳은 후 1년 정도 키우지만, 그 후 어린 사슴은 어미를 떠나 독립해 나간다고 한다.

[5-12절] 누가 들나귀를 놓아 자유하게 하였느냐? 누가 빠른 . . . .

하나님께서는 또 욥에게 말씀하신다. “누가 들나귀를 놓아 자유하게 하였느냐? 누가 빠른 나귀의 매인 것을 풀었느냐? 내가 들로 그 집을, 짠 땅으로 그 사는 처소를 삼았느니라. 들나귀는 성읍의 지꺼리는 것[요란한 것]을 업신여기니 어거하는 자의 지르는 소리가 그것에게 들리지 아니하며 초장이 된 산으로 두루 다니며 여러 가지 푸른 것을 찾느니라.” 들나귀는 집에서 기르는 나귀와 그 성질이 다르다. 들나귀는 들이나 척박한 벌판을 거처로 삼고 자유로이 산다. 그것은 성읍 사람들의 요란한 소리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사람들이 그것을 제어하려고 소리를 질러도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또 그것은 초장을 찾아 산을 두루 다니며 여러 가지 먹을 만한 푸른 것을 찾아다닌다.

하나님께서는 또 말씀하신다. “들소가 어찌 즐겨 네게 복종하며 네 외양간에 머물겠느냐? 네가 능히 줄로 들소를 매어 이랑을 갈게 하겠느냐? 그것이 어찌 골짜기에서 너를 따라 쓰레[써레=논이나 밭의 흙을 고르게 하는 도구]를 끌겠느냐? 그것의 힘이 많다고 네가 그것을 의지하겠느냐? 네 수고하는 일을 그것에게 맡기겠느냐? 그것이 네 곡식을 집으로 실어 오며 네 타작 마당에 곡식 모으기를 그것에게 의탁하겠느냐?” 집에서 키우는 소는 순하게 길들여져서 외양간에 매어두기도 하고 논이나 밭을 갈게도 하고 써레를 끌게도 하지만, 들소는 그렇지 않다. 그것은 사람에게 복종치 않기 때문에 외양간에 머물게 할 수도 없으며 밭이나 논의 일을 위해 사용할 수도 없다. 비록 그것이 힘이 많아도, 사람은 그것을 의지할 수 없고 자신의 수고하는 일을 그것에게 맡길 수 없다. 사람은 그것에게 곡식을 집으로 실어 오는 일이나 타작마당에 곡식을 모으는 일을 맡길 수 없다.

[13-18절] 타조는 즐거이 그 날개를 친다마는 그 깃과 털이 . . . .

하나님께서는 또 욥에게 “타조는 즐거이 그 날개를 친다마는 그 깃과 털이 인자를 베푸느냐?”고 말씀하신다. 영어성경들은 본절을 다양하게 번역했다. KJV, “네가 공작들에게 멋있는 날개를 주었느냐? 또는 타조들에게 날개와 깃털을 주었느냐?” NASB, “타조들의 날개들은 사랑스런 날개와 깃털을 가지고 즐거이 퍼드덕거리도다.” NIV, “타조의 날개들은 즐거이 퍼드덕거리나 황새의 날개와 깃털에 비교할 수 없도다”(‘비교할 수 없도다’라는 구절은 임의로 첨가됨). NASB의 번역이 언어적으로 또 문맥적으로 가장 나은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또 말씀하신다. “그것이 알을 땅에 버려두어 모래에서 더워지게 하고 발에 깨어질 것이나 들짐승에게 밟힐 것을 생각지 아니하고 그 새끼에게 무정함이 제 새끼가 아닌 것처럼 하며 그 구로(劬勞)한 것이 헛되게 될지라도 괘념치[마음에 두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 내가 지혜를 품부하지[주지] 아니하고 총명을 주지 아니함이니라. 그러나 그 몸을 떨쳐 뛰어갈 때에는 말과 그 탄 자를 경히 여기느니라.” 암타조는 6-8개의 알을 모래 위의 오목한 곳에 낳고 40일 가량 버려두어 부화시키는데, 발에 깨어지거나 다른 들짐승에게 밟힐 것을 생각지 않고 마치 자기 새끼가 아닌 것처럼 그것에 대해 무정하고 그것이 깨어져도 마음을 쓰지 않는다고 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것에게 지혜와 총명을 주지 아니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조가 뛰어갈 때는 말 탄 자를 무시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사람을 태운 경주마는 시속 약 72킬로미터로 달리지만, 타조는 보통 시속 64킬로미터, 최고 145킬로미터로까지 달릴 수 있기 때문이다.

[19-25절] 말의 힘을 네가 주었느냐? 그 목에 흩날리는 갈기를 . . . .

하나님께서는 또 욥에게 말씀하신다. “말의 힘을 네가 주었느냐? 그 목에 흩날리는 갈기를 네가 입혔느냐? 네가 그것으로 메뚜기처럼 뛰게 하였느냐? 그 위엄스러운 콧소리가 두려우니라. 그것이 골짜기에서 허위고 힘있음을 기뻐하며 앞으로 나아가서 군사들을 맞되 두려움을 비웃고 놀라지 아니하며 칼을 당할지라도 물러나지 아니하니.” 19절의 ‘갈기’는 말의 목덜미에 난 긴 털을 가리키고, 21절에 ‘허위다’라고 번역된 원어(카파르)는 ‘앞발로 친다’는 뜻이다.

말은 힘이 좋은 짐승이다. 그 목에 흩날리는 갈기는 그 힘의 상징이다. 옛시대에 말은 전쟁의 필수적 도구이었다. 말은 또한 겁이 없는 짐승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자기를 위협해도 움츠리지 않는다. 그의 위엄스러운 콧소리는 두렵다. 말은 골짜기에서 앞발로 치며 달리고 자기 힘을 과시하고 앞으로 전진하며 적군들을 맞아 싸운다. 그것은 두려움을 비웃고 놀라지 않으며 칼을 만나도 물러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또 말씀하신다. “그 위에서는 전동과 빛난 작은 창과 큰 창이 쟁쟁하며 땅을 삼킬듯이 맹렬히 성내며 나팔 소리를 들으면 머물러 서지 아니하고 나팔 소리 나는 대로 소소히[쓸쓸히] 울며 멀리서 싸움 냄새를 맡고 장관의 호령과 떠드는 소리를 듣느니라.” 23절의 ‘전동(箭筒)’(‘전통’이라고도 발음함)은 ‘화살통’을 가리킨다. 25절 전반절은 “나팔 소리 가운데 ‘힝힝’ 하고 울며”라고 번역할 수 있다.

말은 그 위에서 화살통과 빛난 큰 창과 작은 창들이 쟁쟁하는 소리를 내며 땅을 삼킬 듯 맹렬히 성내고 나팔 소리를 들어도 머물러 서지 않으며 나팔 소리 가운데 ‘힝힝’[혹은 ‘하, 하’] 하고 울며 멀리서 싸움 냄새를 맡고 장관의 호령과 떠드는 소리를 듣는다.

[26-30절] 매가 떠올라서 날개를 펼쳐 남방으로 향하는 것이 . . . .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매와 독수리에 대해 말씀하신다. “매가 떠올라서 날개를 펼쳐 남방으로 향하는 것이 어찌 네 지혜로 말미암음이냐? 독수리가 공중에 떠서 높은 곳에 보금자리를 만드는 것이 어찌 네 명령을 의지함이냐?”

그는 욥에게 매가 떠올라서 날개를 펼쳐 남방으로 향하는 것이 어찌 네 지혜로 말미암음이며 독수리가 공중에 떠서 높은 곳에 보금자리를 만드는 것이 어찌 네 명령을 의지함이냐고 물으신다. 매는 작은 것은 25cm 정도이지만, 큰 것은 66cm 정도나 되며 날개를 펴면 날개폭이 119cm나 되는 것도 있으며, 독수리는 매보다 좀더 커서 크기가 보통 80-90cm가 되고 날개폭은 약 2m가 된다고 한다. 또 독수리는 부리가 약 5cm나 되고 끝이 2.5cm 정도 아래로 굽어져 있다. 하나님께서 그의 지혜로 이런 새들을 만드셨고 섭리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또 “그것이 낭떠러지에 집을 지으며 뾰족한 바위 끝이나 험준한 데 거하며 거기서 움킬 만한 것을 살피나니 그 눈이 멀리 봄이며 그 새끼들도 피를 빠나니 살륙당한 자 있는 곳에는 그것도 거기 있느니라”고 말씀하신다.

독수리는 높은 나무 위나 높은 산 절벽이나 바위 끝에 둥지를 만든다고 한다. 독수리와 매는 동물들 중에서 시력이 가장 좋은데, 매의 시력은 사람보다 약 8배나 더 좋아 하늘에서도 쥐를 선명하게 볼 수 있다고 한다. 또 그것들은 작은 동물들을 잡아먹으며 짐승의 시체도 먹는다. 예수께서도 이런 비슷한 말씀을 하셨다. 그는 시체가 있는 곳에는 독수리도 있다고 말씀하셨다(마 24:28; 눅 17:37).

사람은 어떤 동물들에 대해 아는 것이 매우 적고 모르는 것이 많으나,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친히 만드셨고 그것들의 구조와 생리를 잘 아신다. 그는 다른 동물이 접근하기 어려운 험준한 바위들 사이나 동굴에 무리 지어 생활하는 산염소나 암사슴을 만드셨고, 들이나 척박한 벌판을 거처로 삼고 자유로이 사는 들나귀와 들소를 만드셨다. 그는 자기 낳은 알에 대해 무정하지만 경주마보다 빠른 타조를 지으셨고 그 성질과 생리를 잘 아신다. 그는 힘있고 겁 없는 말을 만드셨다. 그는 낭떠러지에 집을 짓는 매와 독수리를 만드셨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들을 다 창조하셨고 섭리하신다. 온 세상이 창조주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능하신 창조자시며 주권적 섭리자이신 하나님 앞에 사람이 지식과 능력이 지극히 제한적인 피조물이며 부족한 존재임을 깨닫고 겸손히 엎드려 우리의 무지와 무능과 부족을 고백하고 오직 그를 경배하고 섬겨야 하며 또 감히 그와 변론하려 하지 말아야 한다.

 

 

40장: 네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1-9절] 여호와께서 또 욥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변박하는 자가 . . . .

여호와께서 또 욥에게 말씀하신다. “변박하는 자(잇소르)[책망하는 자, 비난하는 자](BDB, KB)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하나님과 변론하는 자는 대답할지니라.” 욥은 하나님께 몇 번 그런 유의 말을 하였다(욥 9:30-31; 13:24; 27:2). 하나님께서는 이 점에서 욥을 책망하신다. 그때 욥은 “나는 미천하오니(칼라)[보잘것없사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내가 한두 번 말하였사온즉 다시는 더하지도 아니하겠고 대답지도 아니하겠나이다”라고 말하였다.

여호와께서는 폭풍 가운데서 욥에게 또 말씀하셨다.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네가 내 심판을 폐하려느냐?(한글 국한문의 ‘피하려느냐’는 잘못임.) 스스로 의롭다 하려 하여 나를 불의하다 하느냐? 네가 하나님처럼 팔이 있느냐? 하나님처럼 우렁차게 울리는 소리를 내겠느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판단과 섭리가 정당함을 엄위하게 증거하신다. 하나님의 판단과 섭리는 가장 지혜롭고 의롭고 선하다. 욥은 자기 의를 변호하려고 하나님을 정죄해서는 안 된다. 의로운 성도도 하나님 앞에서는 여전히 부족한 존재이며 많은 단련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섭리는 항상 정당하다. 또 성도의 고난은 언제나 유익하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합력하여 우리의 성화를 이루실 것이다(롬 8:28).

[10-14절] 너는 위엄과 존귀로 스스로 꾸미며 영광과 화미를 . . . .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또, “너는 위엄과 존귀로 스스로 꾸미며 영광과 화미를 스스로 입을지니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욥으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거리를 더 느끼고 그에게 복종케 하시려고 하신 반어적 표현이다. ‘화미(華美)’라는 원어(하다르)는 ‘광채’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위엄과 존귀로 자신을 꾸미시고 영광과 광채를 스스로 입으셨지만(시 96:6), 욥은 그렇게 자신을 꾸밀 수 없고 영광과 광채를 입지도 못한다. 그것이 하나님과 사람의 차이이다.

하나님께서는 또, “너의 넘치는 노를 쏟아서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 낱낱이 낮추되 곧 모든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 낮추며 악인을 그 처소에서 밟아서 그들을 함께 진토에 묻고 그 얼굴을 싸서 어둑한 곳에 둘지니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넘치는 노를 쏟으셔서 모든 교만한 자를 보시며 낱낱이 낮추시며 악인을 그 처소에서 밟아서 그들을 다 무덤 속에, 어둑캄캄한 곳에 묻히게 할 수 있으시지만(사 2:11, 12, 17), 사람인 욥은 교만한 자를 보고 낮출 힘이 없고 악인을 제압하거나 징벌하여 정당하게 그를 무덤에 들어가게 할 능력도 없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의 현실이다. 이 세상에는 권선징악(勸善懲惡)의 도덕 질서가 세워지지 못하고 사람들이 고통과 탄식 속에 그런 상황을 관망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절실히 요청되기도 한다.

하나님께서는 또, “그리하면 네 오른손이 너를 구원할 수 있다고 내가 인정하리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결국 “네가 그렇게 하지 못하니 내 앞에 순복하고 내가 너를 향해 섭리하는 일에 대해 잠잠하라”는 뜻이다. 사람은 하나님과 비교할 수 없는 존재이다.

[15-24절] 이제 소같이 풀을 먹는 하마를 볼지어다. 내가 너를 . . . .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또 말씀하신다. “이제 소같이 풀을 먹는 하마를 볼지어다. 내가 너를 지은 것같이 그것도 지었느니라.” ‘하마’라고 번역된 원어(베헤모스--KJV, NASB, NIV)는 옛날 학자들은 ‘코끼리’로 보았고 근래 학자들은 ‘하마(河馬)’라고 본다(BDB, KB). 본문의 묘사는 그 두 동물에 어느 정도 다 해당되는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또 “그 힘은 허리에 있고 그 세력은 배의 힘줄에 있고 그 꼬리 치는 것은 백향목이 흔들리는 것 같고 그 넓적다리 힘줄은 서로 연락되었으며 그 뼈는 놋관 같고 그 가릿대는 철장 같으니”라고 말씀하신다. 하마는 꼬리가 보통 56cm이며 코끼리는 1m라고 한다. ‘가릿대[갈비대]’라는 원어(게렘)는 ‘뼈’라는 뜻이다(BDB).

하나님께서는 또 말씀하신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물[행하신 일들] 중에 으뜸이라. [그러나]그것을 지은 자가 칼[송곳니를 가리킨 듯함]을 주었고[혹은 ‘그의 칼로 그에게 가까이 할 수 있도다’](NIV) 모든 들짐승의 노는 산은 그것을 위하여 식물을 내느니라. 그것이 연 줄기 아래나 갈밭 가운데나 못 속에(비차)[늪 속에] 엎드리니 연 그늘이 덮으며 시내 버들이 둘렀구나. 하수가 창일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놀라지 않고 요단강이 불어 그 입에 미칠지라도 자약하니(이브타크)[자신만만하니, 담대하니] 그것이 정신 차리고 있을 때에 누가 능히 잡을 수 있겠으며 갈고리로 그 코를 꿸 수 있겠느냐?” 하마는 몸무게가 보통 1톤(1,000kg) 이상, 가장 큰 것은 2.6톤이 되며, 코끼리는 보통 5톤이고 가장 큰 것은 6.6톤이 된다. 그것들은 다 풀이나 땅의 식물을 먹고 강이나 늪에서 잘 지낸다.

인생은 전능자 하나님과 다툴 수 없다. 욥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미천함을 느낀다. 하나님의 놀라운 창조물인 하마나 코끼리는 하나님의 크신 지혜와 능력을 증거한다. 이런 창조물 앞에서 사람은 그렇게 대단한 존재가 아님을 실감한다. 하나님은 지혜롭고 의로운 섭리자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록 의롭게 산다 할지라도 고난 중에서 하나님을 정죄해서는 안 되며 하나님의 섭리를 항상 인정하며 겸손히 인내하며 순복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의 이유를 잘 알지 못하는 경우에라도 우리는 잠잠히 하나님을 앙망하고 믿고 의지하고 복종해야 한다.

 

 

41장: 온 천하의 것이 내 것이다

[1-11절] 네가 능히 낚시로 악어를 낚을 수 있겠느냐? 노끈으로 . . . .

하나님께서는 또 말씀하신다. “네가 능히 낚시로 악어를 낚을 수 있겠느냐? 노끈으로 그 혀를 맬 수 있겠느냐? 줄로 그 코를 꿸 수 있겠느냐? 갈고리로 그 아가미를 꿸 수 있겠느냐?” 본문에 ‘악어’라는 원어(리브야산)는 고래나 악어 같은 ‘큰 바다짐승’을 가리킨다(BDB, KB). 영어성경들은 원어의 발음대로 리브야산(leviathan)이라고 번역했다(KJV, NASB, NIV). 사람이 낚시로 악어나 고래를 낚거나 끈으로 그 혀를 매거나 줄로 그 코를 꿰거나 갈고리로 그 아가미를 꿰는 것은 다 불가능한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또 말씀하신다. “그것이 어찌 네게 연속 간구하겠느냐? 유순한 말로 네게 이야기하겠느냐? 어찌 너와 계약하고 영영히 네 종이 되겠느냐? 네가 어찌 새를 놀리는 것같이 그것을 놀리겠으며 네 소녀들을 위하여 그것을 매어 두겠느냐?” 이런 일은 다 불가능하다. 악어는 길이가 보통 3-4미터 정도이며 무게는 200 내지 250킬로그램 정도이다. 화석은 예전에 15미터 정도의 것도 있었음을 보인다. 청색 고래(blue whale)는 바다 짐승 중 가장 큰 짐승으로서 길이가 30미터 정도까지 자라고 무게는 200톤(2,000kg) 이상이 된다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또 말씀하신다. “어찌 어부의 떼가 그것으로 상품을 삼아 상고들[상인들] 가운데 나눌 수 있겠느냐? 네가 능히 창으로 그 가죽을 찌르거나(테말레)[채우거나](KJV, NASB, NIV) 작살로 그 머리를 찌를 수[채울 수] 있겠느냐? 손을 그것에게 좀 대어 보라. 싸울 일이 생각나서 다시는 아니하리라. 잡으려는 소망은 헛것이라. 그것을 보기만 하여도 낙담하지 않겠느냐?[엎드러지리라.]” 어부들은 물고기를 잡듯이, 창이나 작살로 악어 혹은 고래를 잡아 어(魚)시장에 내어 팔 수 없을 것이다. 사람은 그 짐승을 잡으려 손을 대어도 그것이 대어들면 놀라 엎드러질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또 말씀하신다. “아무도 그것을 격동시킬 용맹이 없거든 능히 나를 당할 자가 누구냐? 누가 먼저 내게 주고(NASB)(히크디마니)(혹은 ‘나보다 앞서 행하여’) 나로 갚게 하였느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악어나 고래도 제어하고 이길 용맹이 있는 자가 없거든, 하물며 그런 짐승을 만드신 하나님을 당할 사람이 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홀로 온 천하만물을 만드셨고 그 모든 것의 소유자요 주관자이시다.

[12-34절] 내가 악어의 지체와 큰 힘과 훌륭한 구조에 대하여 . . . .

하나님께서는 또 악어 혹은 고래의 구조와 움직임에 대해 말씀하신다. “내가 악어의 지체와 큰 힘과 훌륭한 구조에 대하여 잠잠치 아니하리라. 누가 그 가죽을 벗기겠으며 그 아가미 사이로 들어가겠는고. 누가 그 얼굴의 문을 열 수 있을까. 그 두루 있는 이가 두렵구나. 견고한 비늘은 그의 자랑이라. 서로 연함이 봉한 것 같구나. 이것, 저것이 한데 붙었으니 바람도 그 사이로 들어가지 못하겠고 서로 연하여 붙었으니 능히 나눌 수도 없구나.”

하나님께서는 또 말씀하신다. “그것이 재채기를 한즉 광채가 발하고 그 눈은 새벽 눈꺼풀이 열림 같으며 그 입에서는 횃불이 나오고 불똥이 뛰어나며 그 콧구멍에서는 연기가 나오니 마치 솥이 끓는 것과 갈대의 타는 것 같구나. 그 숨이 능히 숯불을 피우니 불꽃이 그 입에서 나오며 힘이 그 목에 뭉키었고 두려움이 그 앞에서 뛰는구나.”

하나님께서는 또 말씀하신다. “그 살의 조각들이 서로 연하고 그 몸에 견고하여 움직이지 아니하며 그 마음이 돌같이 단단하니 그 단단함이 맷돌 아랫짝 같구나. 그것이 일어나면 용사라도 두려워하며 경겁하여 창황하며[당황하며] 칼로 칠지라도 쓸데없고 창이나 살이나 작살도 소용이 없구나.” 12-34절은 설명할 것이 없어 보인다.

하나님께서는 계속 말씀하신다. “그것이 철을 초개같이, 놋을 썩은 나무같이 여기니 살[화살]이라도 그것으로 도망하게 못하겠고 물맷돌도 그것에게는 겨같이 여기우는구나. 몽둥이도 검불같이 보고 창을 던짐을 우습게 여기며 그 배 아래는 날카로운 와륵[기와조각] 같으니 진흙 위에 타작 기계같이 자취를 내는구나.” 30절에 “날카로운 기와조각들이 그 아래 있다”는 원문은 “그 아래는 날카로운 기와조각들 같다”는 뜻 같다(NASB).

하나님께서는 또 말씀하신다. “깊은 물로 솥의 물이 끓음 같게 하며 바다로 젖는 향기름 같게 하고 자기 뒤에 광채나는 길을 내니 사람의 보기에 바닷물이 백발 같구나. 땅 위에는 그것 같은 것이 없나니 두려움 없게 지음을 받았음이라. 모든 높은 것을 낮게 보고 모든 교만한 것의 왕이 되느니라.” ‘낮게 본다’고 번역된 원어(라아)는 그냥 ‘본다’는 뜻이지만(KJV, NASB) 문맥적으로는 한글개역성경의 번역대로 ‘낮게 본다’는 뜻 같다(NIV).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심은 욥이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리고 잠잠히 그의 섭리에 순복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욥기가 계시하는 대로, 성도에게 오는 고난은 두 종류가 있다. 우리의 부족 때문에 오는 고난의 경우는, 우리가 그 고난을 달게 받으면서 우리의 부족을 깨닫고 회개하고 하나님의 회복케 하시는 은혜를 구해야 한다. 그러나 욥처럼 어떤 특정한 죄를 지은 것 같지 않은데도 당하는 고난의 경우, 우리는 하나님께 불평하거나 대항하는 말을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과 섭리의 지극히 지혜롭고 공의롭고 선하심을 인정하고 그 뜻과 섭리에 겸손히 복종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기다려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에 항상 겸손과 두려움으로 순복하자.

 

 

42장: 욥의 회개와 회복

[1-6절]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주께서는 . . . .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말했다. “주께서는 무소불능(無所不能)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는 전능자이시며 무엇을 계획하시고 이루시는 주권자이시다. 2절의 ‘경영’이라는 원어(메짐마)는 ‘생각, 목적, 계획’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전능하신 주권적 섭리자 하나님께 사람은 겸손히 복종해야 한다. 3절에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라는 말은 38:2에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그대로 되받아 말한 것 같다. ‘이치’라는 원어(에차)는 ‘의논, 뜻’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가리킨다고 본다. 욥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그것에 대해 도전적인 말들을 하였다. 이제 그는 그런 말들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을 받아들인다. 우리는 잘 모르는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에 대해 무례한 말을 삼가야 한다.

욥은 하나님께 또 말했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여,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욥은 과거에 선진들이나 다른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에 대해 귀로 듣기만 하였으나 이제 하나님을 눈으로 뵈옵는다고 고백한다. 욥이 하나님을 눈으로 뵈옵는다고 표현한 것은 하나님의 친 음성을 듣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회개한다. 그는 의로운 자이었지만 고난 중에 하나님의 섭리에 전적으로 순복하지 못하고 몇 번 도전적인 말을 하였다. 이제 그는 자신의 그 무례한 말까지 회개하는 것이다. 욥은 그가 당한 고난과 그의 부족을 통해 보다 더 성숙한 인격으로 자라고 있었다.

[7-9절]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데만 사람 . . . .

여호와께서는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욥의 세 친구들에게 노하셨다. 그 까닭은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말이 욥의 말같이 정당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욥은 그 친구들보다 하나님에 대해 비교적 바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단지 그는 자신이 의롭게 사는데 왜 하나님께서 그를 고난 중에 두시는가 하고 불평스런 말을 했었다. 그러나 욥의 세 친구들은 욥의 고난이 그와 그의 자녀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줄곧 말했었다. 그것은 정당한 이유 없이 욥을 정죄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당한 이유 없이 남을 정죄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큰 죄악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노하신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욥의 친구들에게 또 말씀하셨다. “그런즉 너희는 수송아지 일곱과 숫양 일곱을 취하여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의 우매한 대로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 번제 같은 제사 형식은 모세 시대 이전부터 널리 퍼져 있었음이 분명하다. ‘번제’는 속죄와 헌신과 순종을 상징하는 제사이었다. 욥에게 잘못된 말을 했던 친구들은 욥에게 가서 그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자신들을 위해 번제를 드려야 했다. 사람에게 잘못한 것은 그 사람에게 가서 푸는 것이 옳다.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은 가서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명하신 대로 행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었으나, 인간의 고난이 하나님의 징벌 때문에 온다고만 알고 있었고 욥을 그릇되이 정죄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욥이 드린 번제를 받으셨고 그들의 잘못을 용서하셨고 그 중심을 받으셨다.

[10-17절] 욥이 그 벗들을 위하여 빌매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 . . .

욥이 그 벗들을 위해 빌매 여호와께서는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그에게 이전의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셨다. 자신을 비방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선한 일이다. 주께서는 우리를 핍박하는 원수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셨다(마 5:44). 욥이 그 친구들을 위해 빌 때 하나님께서는 욥의 곤경을 돌이키셨다. 그는 욥에게 이전 소유보다 갑절을 주셨다. 물질의 복도 하나님의 복이다(창 26:12-13).

욥이 회복되자, 그의 모든 형제와 자매들과 또 전에 알던 자들이 다 와서 그 집에서 그와 함께 음식을 먹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내리신 모든 재앙에 대하여 그를 위해 슬퍼하며 위로하고 각각 금 한 조각12)과 금고리 하나씩 주었다. 그것은 욥에게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욥의 노년에 복을 주셔서 처음 복보다 더하게 하셨다. 그는 양 14,000마리와 약대 6,000마리와 소 1,000겨리[2,000마리]와 암나귀 1,000마리를 두었고,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낳았다. 그는 첫째 딸을 여미마라 이름하였고 둘째 딸을 긋시아라 이름하였고 셋째 딸을 게렌합북이라 이름하였다. 전국 중에 욥의 딸들처럼 아름다운 여자가 없었다. 사람의 외적인 아름다움도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다. 욥은 그들에게 그 오라비들에게처럼 기업을 주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욥에게 물질적 유여함과 가정적인 행복을 주셨다.

그 후에 욥은 140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4대를 보았고 나이 늙고 기한이 차서 죽었다. 욥은 장수하였다. 그는 200세 이상을 살았다고 추측된다.13) 그의 연령을 보면, 욥은 아브라함과 이삭 때의 인물이라고 보인다. 아브라함은 175세, 이삭은 180세를 살았다.

우리는 고난 중에 무례하게 하나님의 섭리를 판단하지 말고, 겸손히 믿고 참고 순종하자. 나의 죄로 인한 징계의 고난이라면 즉시 회개해야 하지만, 이유를 잘 알 수 없는 고난이라면, 하나님의 뜻에 맡기며 참고 기다려야 하고 결코 하나님의 섭리에 도전하는 불평스런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욥기의 교훈이다.

우리는 욥의 친구들처럼 고난당하는 이웃에 대해 함부로 정죄하지 말아야 하고 특히 그의 고난의 이유를 잘 알지 못하는 경우 더욱 그러해야 한다. 모든 고난이 다 특정한 죄의 징벌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잘못을 행한 사람이 와서 사과하면 용서해야 하며 그를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그것이 사랑으로 행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또 오늘 우리 모두에게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이웃의 잘못을 용서하라고 교훈하셨다(마 18:22).

하나님의 본심은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는 것이 아니고 평안을 주시는 것이다. 예레미야 애가 3:33,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고 그에게 복종하자. 우리는 욥처럼 경건하고 의롭게 흠과 점이 없이 온전하게 살아야 하고, 그러나 고난 중에 잠잠히 기다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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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1) Matthew Poole, Albert Barnes, A. R. Fausset 등. 탈무드는 모세로 봄(Baba Bathra 14b).

2) Luther, Keil & Delitzsch, E. J. Young, M. F. Unger, G. L. Archer 등.

3) Matthew Poole, A Commentary on the Holy Bible, I, 921.

4) 욥의 자녀들은 10명이었고 자녀들이 어느 정도 컸다고 보면(1:2) 30세쯤 결혼하여 약 30-40년이 지났다고 볼 수 있으며, 고난 후 140년을 더 살았으니(42:16) 200세는 넘었을 것이다. 헬라어 70인역 본문은 “170년을 더 살았으며 그의 연령이 240세이었더라”고 되어 있다.

5) 구약성경에는 엘로힘이 2570회, 여호와가 약 6823회 사용되었다(BDB).

6) Lancelot Brenton, The Septuagint Version: Greek and English, p. 698.

7) 헬라어 70인역 후기(後記)는, 우스 땅이 에돔과 아라비아 국경 Ausis땅이며, 욥은 에서의 아들 자레의 아들, 즉 아브라함의 5대손이었다고 말한다.

8) 왕상 15:3, 5, 14; 16:7; 왕하 3:2; 8:18, 27; 10:30; 12:2; 13:2, 11; 14:3, 24; 15:18, 24, 28; 16:2; 17:2; 18:3; 21:2; 22:2; 23:32, 37; 24:9, 19; 대하 14:2; 24:2; 25:2; 26:4; 27:2; 28:1; 29:2; 33:2; 34:2; 36:5, 12.

9) 근래의 영어성경들(NASB, NIV)은 한글개역성경처럼 “그를 호출하겠느냐?”고 번역하였다. 이것은 문맥을 따라 원문을 고쳐 읽은 것이라고 본다.

10) 마소라 본문의 읽기이다. 그러나 LXX, Syr, Targ, Vg, KJV, NASB, NIV 등은 부정어 를 인칭대명사 로 읽으며, “비록 그가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를 의뢰하리라”고 번역한다.

11) 원어의 뜻은 분명치 않은 것 같다(BDB, KB). 그러나 사전들이 제안하는 뜻은 ‘소득’(BDB), ‘재산’(Langenscheidt, H olladay)(NIV) 등이다.

12) ‘금 한 조각’이라는 원어(케시타 에카스)는 단순히 ‘한 개’라는 말로서, ‘개’라는 원어(케시타)(창 33:19과 수 24:32에도 쓰임)는 그 정확한 무게를 알지 못하는 단위라고 한다(BDB, NBD).

13) 그가 30세쯤 결혼하였고 두 번이나 자녀를 10명 낳는데 30년쯤 지났다고 가정한다면, 욥은 적어도 210세 이상을 산 것이다. 헬라어 70인역(LXX)은 욥이 170년을 더 살았고 그의 연령이 240세이었다고 기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