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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 강해

김효성 목사

2023년 2월 1일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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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주 예수 그리스도(마 5:18; 요 10:35)와 사도 바울(갈 3:6; 딤후 3:16)의 증거대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라는 고백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매우 기본적이고 중요하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진술된 대로(1:8), 우리는 성경의 원본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오류가 없이 기록되었고 그 본문이 “그의 독특한 배려와 섭리로 모든 시대에 순수하게 보존되었다”고 믿는다. 이것은 교회의 전통적 견해이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에서 전통적 히브리어 마소라 본문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며 야곱 벤 카임에 의해 편집한 제2 랍비 성경(봄버그판)을 표준적 본문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본다.

성경은 성도 개인의 신앙생활뿐 아니라, 교회의 모든 활동들에도 유일한 규범이다. 오늘날처럼 다양한 풍조와 운동이 많은 영적 혼란의 시대에,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가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묵상하기를 원하며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든 뜻을 알기를 원한다.

성경을 가지고 설교할지라도 그것을 바르게 해석하고 적용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올 것이다(암 8:11).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오고 있다. 많은 설교와 성경강해가 있지만, 순수한 기독교 신앙 지식과 입장은 더 흐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요구되는 성경 해석과 강해는 복잡하고 화려한 말잔치보다 성경 본문의 바른 뜻을 간단 명료하게 해석하고 잘 적용하는 것일 것이다. 사실상, 우리는 성경책 한 권으로 충분하다. 성경주석이나 강해는 성경 본문의 바른 이해를 위한 작은 참고서에 불과하다. 성도는 각자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성경을 읽어야 하고, 성경주석과 강해는 오직 참고서로만 사용해야 할 것이다.

 

 제목차례

 1장: 해 아래의 모든 것이 헛됨 

 2장: 쾌락도, 지혜도, 수고도 헛됨  

 3장: 모든 일이 때가 있음 

 4장: 학대, 시기, 친구 없음  

 5장: 하나님을 경외함, 재물이 헛됨 

 6장: 낙이 없는 삶 

 7장: 지혜와 어리석음이 대조됨 

 8장: 왕에게 복종하라 

 9장: 사람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음 

10장: 작은 어리석음 

11장: 구제, 선행, 근면, 즐거운 삶

12장: 사람의 본분

 

                                      

서론

전도서의 저자는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1:1) 솔로몬이다. 저자는 큰 지혜를 많이 얻었고(1:16), 은금과 왕들의 보배와 처와 첩들을 많이 두었고(2:8) 잠언을 많이 지었다(12:9)고 말한다. 그것은 솔로몬에게 가장 적합하다. 열왕기상 4:29-30, 32,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지혜와 총명을 심히 많이 주시고,” “저가 잠언 3천을 말하였고 그 노래는 일천 다섯이며.” 10:23, “솔로몬 왕의 재산과 지혜가 천하 열왕보다 큰지라.” 11:3, “왕은 왕후가 700인이요 빈장[첩]이 300인이라.” 그는 후년에 인생을 회고하며 본서를 썼을 것이다.

본서가 솔로몬이 쓰지 않았고 후대의 어떤 저자가 썼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1) 이러한 견해에 대한 가장 유력한 증거로 주장된 것은 언어적 자료들 즉 단어들과 문법 구조가 후대의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전도서의 어휘, 어형론, 구문 구조, 문체 등은 히브리 저작들의 어느 시대에도 일치하지 않는다고 한다.2)

본서는 언어와 문체에서 아가서와 공통점이 가장 많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을 여호와(הוהי)로 부르지 않는 것은 전도서와 아가서 두 권뿐이다.3) 이 사실은 본서가 솔로몬의 저작이라는 내적인 증거들 중에 중요한 한가지 점이기도 하다.

성경의 각 책들은 특징적 주제를 가진다고 본다. 시가서들도 그러하다. 욥기의 특징적 주제는 고난이며, 시편은 기도와 찬송, 잠언은 지혜, 아가서는 사랑이다. 하나님께서는 신구약성경 66권이 도서관같이 다양한 주제들의 책들로 구성되어 풍성한 교훈이 되게 하셨다.

전도서의 특징적 주제는 허무이다. 전도서에는 ‘헛되다’는 말(헤벨)이 38번 나온다. ‘헛되다’는 원어는 원래 ‘수증기, 입김’이라는 뜻이며(잠 21:6; 사 57:13) ‘사라지는 것, 덧없는 것, 무가치한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BDB). 또 본서에는 ‘해 아래’라는 표현도 29번이나 나온다. 본서는 초두에도, 맨 마지막에도 세상의 모든 것이, 해 아래서 하는 모든 일이 헛되다는 사실을 강조한다(1:2; 12:8). 이런 사상은 단순한 허무주의나 염세주의와 다르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헛되다는 것은 현실이며 사실이다. 우리는 오히려 이런 사실 때문에 영생하시는 하나님과 영원한 천국을 바라본다. 그러므로 본서는 마지막 부분에서 교훈하기를,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는 말한다(12:13).


본문 혹은 각주에 자주 사용된 약어

KJV

영어 King James Version

NASB

영어 New American Standard Version

NIV

영어 New International Version

LXX  

고대 헬라어 70인역   

Syr

고대 수리아어역

It 

고대 라틴어역

Vg

고대 라틴어 Vulgate역

BDB

Brown-Driver-Briggs, Hebrew Lexicon of the O. T

KB

 Koehler-Baumgartner, Lexicon in Veteris

               Testamenti Libros

Langenscheidt 

Langenscheidt Pocket Hebrew Dictionary.

NBD

The New Bible Dictionary. IVP.

Poole

Matthew Poole, A Commentary on the Holy Bible

JFB

Jamieson-Faussett-Brown, A Commentary.

 

 


1장: 해 아래의 모든 것이 헛됨

[1-2절]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헛되다’는 원어(헤벨)는 원래 ‘수증기’나 ‘입김’이라는 뜻인데(잠 21: 6; 사 57:13) ‘사라지는 것, 덧없는 것, 무가치한 것’을 점차 뜻하게 되었다(BDB). 전도자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헛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3-4절]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하는 모든 수고가 그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에게 아무 유익이 없다. 자기에게는 아무 유익이 없고 다만 뒤의 사람들에게 약간의 유익이 있을 뿐이며, 그 사람도 또 죽을 것이므로 결국은 헛되다는 말이 된다. 이와 같이 한 세대는 가고 또 한 세대는 온다. 수천년의 인류 역사가 이렇게 진행되어 왔다.

[5-7절] 해는 떴다가 지며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그 강물이 흘러 나왔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느니라].

자연만물은 날마다 반복된 일을 한다. 해는 떴다가 지며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간다.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던 곳으로 돌아간다.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다시 증발하여 하늘의 비구름이 된다.

[8절]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

자연만물의 이런 반복을 생각하면 만물이 피곤하다고 표현할 수 있다. 만물만 그런 것이 아니다. 사람도 만족이 없는 생활을 하고 있다. 눈은 더 아름다운 것을 추구하지만 만족함이 없고 귀도 더 아름다운 것을 추구하지만 들어도 마음의 욕구에 차지 않는다.

[9-11절]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는 새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 오래 전 세대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이전 세대[혹은 ‘것들’]를 기억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가 기억함이 없으리라.

세상의 모든 일들은 반복된다. 물론 과학문명에서 발명이라는 것이 있고 지식과 기술의 발전이라는 것도 있다. 그러나 인간 본성의 문제, 죄의 문제, 인간 관계의 문제, 종교적 문제, 도덕적 문제, 남을 미워하고 속이고 자기의 욕심을 추구하는 것, 돈 사랑, 육체적 쾌락 사랑, 명예심, 교만 등의 일들은 하나도 새로운 것이 없고 변한 것이 없다. 죄인인 사람들은 늙고 병들고 죽는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과 사건들이 지나가고 우리의 기억에서 희미해진다. 또 다음 세대들도 우리에 대해 똑같이 그러할 것이다. 해 아래는 새것이 없다.

[12-13절] 나 전도자는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

하늘 아래서 사람이 행하는 모든 일은 결국 괴로운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셔서 수고하게 하신 것이다. 삶은 괴로운 것이다. 아기를 출산할 때부터 심한 고통이 있고 출산된 아기도 울면서 세상의 삶을 시작하고 인생의 여정 전체가 수고로운 삶이다.

[14절]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사람이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은 다 헛되며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 사람이 바람을 잡아보려 해도, 그래서 그것을 잡았다 생각하고 그것을 보아도 아무것도 없는 바람뿐인 것처럼, 사람의 모든 행사는 지나고 보면 공허하고 그가 죽고나면 더욱 그러하다. 사람이 출생하여 학교에 가고 학교를 나오면 취직하고 결혼하고 또 자녀를 출산하고 기르고 학교에 보내고 졸업하면 취직하고 또 결혼한다. 사람은 세상에서 이렇게 하다가 하나씩 죽는 공허한 삶을 사는 것이다.

[15절] 구부러진 것을 곧게 할 수 없고 이지러진 것을 셀 수 없도다.

사람이 늙으면 허리도 구부러지고 그 구부러진 허리는 곧게 할 수 없다. 또 이지러진 것 곧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셀 수 없다. 사람은 나이가 많아 늙으면 없어진 시력을 회복하기 어렵고, 없어진 청력도 회복하기 어렵고, 없어진 기억력과 기력도 회복하기 어렵다.

[16-18절] 내가 마음 가운데 말하여 이르기를 내가 큰 지혜를 많이 얻었으므로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자보다 낫다 하였나니 곧 내 마음이 지혜와 지식을 많이 만나 보았음[체험했음]이로다. 내가 다시 지혜를 알고자 하며 미친 것과 미련한 것을 알고자 하여 마음을 썼으나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것인 줄을 깨달았도다. [이는]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더함이니라].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원문)는 부친 다윗을 포함하여 이전 세대의 모든 지혜자들을 가리킬 것이다. 솔로몬은 하나님께로부터 큰 지혜를 많이 얻어서 그 지혜의 마음으로 세상의 모든 일을 살펴보고 묵상하였으나 번뇌와 근심만 더할 뿐이었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이 세상의 헛됨을 알아야 한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헛되다(2절).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헛된 영광과 만족을 구하지 말고 세상적 지혜와 지식도 구하지 말아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영원하신 하나님만 바라야 한다. 이것이 성경 특히 전도서가 우리에게 교훈하는 바이다(전 12:13). 창조자, 섭리자 하나님께서만 영원하시고 헛되지 않으시다. 하나님만 의미가 있으시고 가치가 있으시다. 하나님 안에 영생이 있고 참된 평안과 만족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과 천국만 믿고 소망하고 그의 계명만 순종해야 한다.

 

2장: 쾌락도, 지혜도, 수고도 헛됨

[1-11절] 나는 내 마음에 이르기를 자, 내가 시험적으로 너를 즐겁게 하리니 너는 낙을 누리라 하였으나 본즉 이것도 헛되도다. 내가 웃음을 논하여 이르기를 미친 것이라 하였고 희락을 논하여 이르기를 저가 무엇을 하는가 하였노라. 내 마음에 궁구하기를 내가 어떻게 하여야 내 마음에 지혜로 다스림을 받으면서 술로 내 육신을 즐겁게 할까 또 어떻게 하여야 어리석음을 취하여서 천하 인생의 종신토록 생활함에 어떤 것이 쾌락인지 알까 하여 나의 사업을 크게 하였노라. 내가 나를 위하여 집들을 지으며 포도원을 심으며 여러 동산과 과원을 만들고 그 가운데 각종 과목을 심었으며 수목을 기르는 삼림에 물 주기 위하여 못을 팠으며 노비는 사기도 하였고 집에서 나게도 하였으며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보다도 소와 양떼의 소유를 많게 하였으며 은금과 왕들의 보배와 여러 도(道)의 보배를 쌓고 또 노래하는 남녀와 인생들의 기뻐하는 처와 첩들을 많이 두었노라. 내가 이같이 창성하여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보다 지나고 내 지혜도 내게 여전하여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분복이로다. 그 후에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

솔로몬은 육신의 즐거움이 헛됨을 말한다. 그는 웃음을 미친 것이라고 표현한다. 그는 술을 마시며 각종 사업을 크게 벌렸다. 집들을 짓고 포도원, 동산, 과원을 만들고 각종 과목을 심고 못을 파고 소와 양떼를 많게 하고 은금과 보배를 쌓고 노래하는 자들과 첩들을 많이 두었다. 그러나 나중에 그 모든 것들이 헛되고 무익함을 깨달았다.

[12-17절] 내가 돌이켜 지혜와 망령됨과 어리석음을 보았나니 왕의 뒤에 오는 자는 무슨 일을 행할꼬. 행한 지 오랜 일일 뿐이리라. 내가 보건대 지혜가 우매보다 뛰어남이 빛이 어두움보다 뛰어남 같도다. 지혜자는 눈이 밝고 우매자는 어두움에 다니거니와 이들의 당하는 일이 일반인 줄을 내가 깨닫고 심중에 이르기를 우매자의 당한 것을 나도 당하리니 내가 어찌하여 지혜가 더하였던고. 이에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이것도 헛되도다. 지혜자나 우매자나 영원토록 기억함을 얻지 못하나니 후일에는 다 잊어버린 지 오랠 것임이라. 오호라, 지혜자의 죽음이 우매자의 죽음과 일반이로다. 이러므로 내가 사는 것을 한하였노니 이는 해 아래서 하는 일이 내게 괴로움이요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임이로다.

12절의 ‘망령됨’이라는 원어(홀렐로스)는 ‘미친 것’이라는 뜻으로(madness)(KJV, NASB, NIV) 전도서에만 나온다(1:17; 2:12; 7: 25; 9:3; 10:13). 솔로몬은 지혜가 우매함보다 나으나 지혜자의 죽음이 우매자의 죽음과 일반이며 지혜자나 우매자나 영원히 기억함을 얻지 못하며 후일에는 다 잊어버린 지 오랠 것이기 때문에 결국 다 헛되다고 말한다. 우리는 일시적인 것, 시간적인 것, 지나가는 것에 가치를 두지 말아야 한다. 다윗은 시편 39편에서 우리의 일생이 손 넓이만큼밖에 안되고 그림자 같다고 말하였다(시 39:5-6). 사도 바울도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며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고 말하였다(고후 4:18).

[18-23절] 내가 해 아래서 나의 수고한 모든 수고를 한하였노니[싫어하였나니] 이는 내 뒤를 이을 자에게 끼치게 됨이라. 그 사람이 지혜자일지 우매자일지야 누가 알랴마는 내가 해 아래서 내 지혜를 나타내어 수고한 모든 결과를 저가 다 관리하리니 이것도 헛되도다. 이러므로 내가 해 아래서 수고한 모든 수고에 대하여 도리어 마음으로 실망케 하였도다. 어떤 사람은 그 지혜와 지식과 재주를 써서 수고하였어도 그 얻은 것을 수고하지 아니한 자에게 업으로 끼치리니 이것도 헛된 것이라. 큰 해로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으로 소득이 무엇이랴.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도 헛되다. 본문에는 ‘수고’라는 말이 10번이나 나온다. 모든 수고가 헛된 까닭은 그가 수고하여 이룬 모든 결과를 그의 뒤에 오는 사람이 누리고 관리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많이 수고하지만, 그것의 결과를 즐기는 시간은 너무 짧다. 그래서 솔로몬은 마음으로 실망하였다고 말한다. 사람은 자기가 수고하여 얻은 것을 자기가 별로 쓰지 못하고 다음 사람에게 유업으로 넘기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밤에도 쉬지 못하는 그 수고는 수고한 당사자에게 헛되고 큰 해가 되는 일일 뿐이다.

[24-26절]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가운데서 심령으로 낙(樂)(토브 בוֹט)[좋은 것, 행복]을 누리게 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는 것이로다. 먹고 즐거워하는 일에 누가 나보다 승하랴. 하나님이 그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나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저로 모아 쌓게 하사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주게 하시나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솔로몬은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가운데서 심령으로 낙을 누리게 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는 것이로다”라고 말한다. 전도서는 하나님께서 세상에 사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즐거움에 대해 반복해 말한다(3:13; 5:18; 8:15).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즐겁게 살기를 원하신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육신의 쾌락, 세상의 지혜와 지식, 세상의 모든 수고가 다 헛됨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육신의 쾌락을 추구하지 말고 지혜와 지식을 자랑하지 말고 세상일들만 힘쓰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주께서는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라”고 말씀하셨고(요 6:27), 시편 39:5는 사람의 일생을 손 넓이만큼과 같고 없는 것과 같고 그 든든히 선 때도 참으로 허사뿐이라고 말했다.

둘째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어야 하고 그가 주시는 복과 즐거움을 누려야 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은 구원의 은혜와 천국 소망의 즐거움이며 또 하나님께서 주시는 육의 양식으로 인한 즐거움도 포함한다. 그것은 다 성도가 땅에서 누리는 복이다.

 

3장: 모든 일이 때가 있음

1-13절, 시간과 영원

[1-8절] 천하에 범사가 기한[정한 때]이 있고 모든 목적[일]이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잃을[포기할]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1절의 ‘기한’이라는 원어(제만)는 ‘정한 때’(BDB, NASB)라는 뜻이고, ‘목적’이라는 원어(케페츠)는 ‘기쁨, 목적, 일’(BDB)이라는 뜻이다. 모든 일에는 정한 때가 있다. 하늘 아래서 이 세상의 모든 일에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이루려고 작정하신 때가 있다.

사람은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다. 그것은 사람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 사람은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 세상에 출생하고 자기가 원치 않아도 죽음을 맞이한다. 씨를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다. 사람을 죽일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다. 어떤 사람은 병이나 사고로 갑자기 죽기도 하고, 또 하나님의 은혜로 치료되기도 한다. 집을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다. 사람이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다. 사람이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다. 돌이 필요하지 않고 오히려 장애가 되어 던져버릴 때가 있고 돌을 모아서 집을 짓거나 담을 세울 때가 있다. 사랑하는 여인을 안을 때가 있고 안아서는 안 될 때가 있다. 어떤 귀한 물건은 끝까지 찾을 때가 있고 어떤 것은 조금 찾다가 포기할 때가 있다. 어떤 것은 쓸모가 있어서 지킬 때가 있고 어떤 것은 쓸모가 없어 버릴 때가 있다. 어떤 천은 찢어버릴 때가 있고 어떤 천은 찢어진 부분을 꿰맬 때가 있다. 어떤 일에는 대의(大義)를 위해 잠잠할 때가 있고 어떤 일에는 사실을 증거하고 변명할 때가 있다. 어떤 경우에는 큰 죄인이라도 사랑해야 할 때가 있고 어떤 경우에는 가족이라도 미워해야 할 때가 있다. 어떤 경우는 이웃 나라와 전쟁해야 할 때가 있고 어떤 경우는 화해해야 할 때가 있다.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있다. 다니엘 11장은 “작정된 기한”이라는 말을 세 번 했다(단 11:27, 29, 35). 개인의 삶도, 하나님의 나라와 참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도 그러하다. 주 예수께서는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고 말씀하셨다(막 1:15).

[9-11절] 일하는 자가 그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이익이 있으랴!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일하는 자는 그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이익이 있는가? 사람의 일하는 수고는 물질적 유여함이라는 유익이 있지만, 결국 늙고 죽을 것이므로 영속적 가치와 유익은 없다. 하나님께서는 수고로운 삶을 사람들에게 주셨다. 그러나 그가 창조하신 하늘과 땅, 산과 들과 바다는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을 따라 매우 아름답다. 또 그는 사람이 이 지나가는 세상, 늙고 쇠하고 죽고 마는 삶 속에서 장수(長壽)를 복으로 누리게 하셨고 또 영생을 사모하게 하셨다. 사람은 시간의 제한 속에 살지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하시는 일들의 시종(始終)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다. 사람은 이 세상의 창조의 때나 이 세상의 종말의 때를 알지 못하고 자기 자신의 출생의 때와 자기 자신의 죽음의 때도 알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또 우리의 삶에서 많은 일들을 행하시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들의 시작과 끝을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가장 지혜롭고 선하신 뜻대로 또 자기 백성의 유익을 위해 모든 일들을 행하실 것이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빨리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인생의 참 의미와 가치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영원하신 창조자와 섭리자이신 하나님 안에 있다. 개인과 세계의 모든 근원적 질문에 대한 대답은 오직 하나님 안에 있고 그의 말씀 안에 있다.

[12-13절] 사람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을 또한 알았도다.

본문은 수고로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두 가지 선물에 대해 말한다. 첫째는 기쁨과 즐거움이고, 둘째는 선을 행하는 것이다.

사람이 수고로운 삶 속에서도 기뻐하고 먹고 마시며 낙을 누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며 복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즐거움은 물론 우선 영적인 즐거움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복은 먹는 것과 마시는 것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안과 즐거움에 있다(롬 14:17). 기쁨은 성령의 열매이다(갈 5:22). 빌립보서의 주요 교훈은 기뻐하라는 것이다. 성도는 주 안에서 기뻐하는 삶을 살 수 있고 살아야 한다. 항상 기뻐하는 삶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다(살전 5:16). 그러나 이 즐거움은 또한 주 안에서 누리는 육신적 즐거움도 포함한다. 전도서는 이 사실을 여러 번 증거했다. 전도서 2:24,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가운데서 심령으로 낙을 누리게 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는 것이로다.” 3:22, “그러므로 내 소견에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이는 그의 분복이라.” 5: 18, “사람이 하나님의 주신 바 그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낙을 누리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내가 보았나니 이것이 그의 분복이로다.” 8:15, “이에 내가 희락을 칭찬하노니 이는 사람이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보다 해 아래서 나은 것이 없음이라.” 9:9,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이는 네가 일평생에 해 아래서 수고하고 얻은 분복이니라.”

기독교는 쾌락주의도 아니지만 금욕주의도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식물을 감사히 먹고 마시며 즐거워한다. 사도 바울은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고 할 것이나 그것은 미혹케 하는 귀신의 가르침이며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므로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고 말하였다(딤전 4:1-5).

또 우리가 선을 행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며 복이다. 우리는 선한 일을 하도록 지으심을 받은 자들이며(엡 2:10), 주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셔서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었다(딛 2:14). 우리가 세상에서 선을 행하는 것은 구주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의 형상의 모습이다. 이것은 사람의 본래의 모습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모든 일은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조급하지 말고 하나님의 작정하시고 섭리하시는 때를 기다리며 그의 인도하심을 따라 행해야 한다.

둘째로, 시간 속에 사는 인생의 참 의미와 가치는 영원하신 하나님 안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알기를 힘쓰고 그의 말씀인 성경 배우는 것을 가장 큰 복으로 알고 또 죄로 인해 참 지식을 잃어버렸던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믿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세상에서 구원의 은혜와 영생의 소망과 현세의 복들을 인해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하나님의 계명대로 선을 행해야 한다.

 

14-22절, 인생은 죽는 존재임

[14절] 무릇 하나님의 행하시는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더 할 수도 없고 덜 할 수도 없나니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으로 그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

세상의 허무함과 대조하여 하나님의 행하시는 모든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하시며 그의 행하시는 일들도 그러하다. 하나님의 작정하신 바, 곧 그가 창조하신 세상과 그 운행이, 또 그가 섭리하시는 일들이 영원하다. 시편 33:11, “여호와의 도모[뜻]는 영영히 서고 그 심사[생각]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이사야 51: 6, “나의 구원은 영원히 있고 나의 의는 폐하여지지 아니하리라.”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의 뜻과 섭리하시는 일에 무엇을 더하거나 뺄 수 없다. 그는 거기에 무엇을 더하거나 뺄 지혜와 힘도 없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자이시요 사람은 피조물이며, 하나님께서는 전능자이시요 사람은 보잘것없는 풀과 같은 존재이며 무지하고 무능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을 참으로 아는 순간, 그 앞에 두려워 떨 수밖에 없고 하나님의 전지, 전능하신 존재와 그의 전지, 전능하신 섭리 앞에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욥기 23:13-15,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킬까. 그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그의 앞에서 떨며 이를 생각하고 그를 두려워하는구나.”

[15절] 이제 있는 것이 옛적에 있었고 장래에 있을 것도 옛적에 있었나니 하나님은 이미 지난 것을 다시 찾으시느니라.

이 세상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일들은 다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 속에서 이루어진다. 해 아래는 참으로 새것이 없다(전 1:9).

[16절] 내가 해 아래서 또 보건대 재판하는 곳에 악이 있고 공의를 행하는 곳에도 악이 있도다.

세상에서 재판하는 법정은 법이 바르게 집행되어야 하며 공의가 행해져야 하는 곳이다. 의(義)는 하나님의 법에 맞는 것이다. 그것은 보통 사회법에도 맞고 또 이성과 사리와 양심에도 맞고 거짓되지 않고 치우치지 않는 것이다. 그렇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여 법정에도 불의와 악이 있다. 이것이 옛날부터의 현실이다. 왜 그러한가? 그것은 법관들도 죄인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든 욕심, 물질욕, 명예욕, 잘못된 선입관, 잘못된 사상과 이념, 인간적 친분 관계, 권력의 눈치 등의 이유로 법정에서까지 불의를 행하는 것이다.

[17절]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의인과 악인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니 이는 모든 목적과 모든 일이 이룰 때가 있음이라 하였도다.

본문은 감사하게도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말한다. 모든 일들이 때가 있고, 하나님께서 의인과 악인을 공의로 심판하시는 때가 있다. 창조자 하나님께서는 공의로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다. 전도서 12:14,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로마서 2:6-8,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요한계시록 20: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하나님의 크고 흰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18절]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인생의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저희를 시험하시리니 저희로 자기가 짐승보다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노라.

전도자는 앞에서 말한 대로 법정에 악이 있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심판의 필요성을 재확인했을 뿐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시험하셔서 그가 짐승보다 다름이 없음을 깨닫게 하시는 뜻이 있다고 말한다. 법정에서의 악과 불의, 억울함과 학대당함을 통해 사람은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게 되고 또 다른 사람들도 사람이 아무것도 아니며 짐승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음을 깨닫게 된다.

[19-21절] 인생에게 임하는 일이 짐승에게도 임하나니 이 둘에게 임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이의 죽음같이 저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사람이 짐승보다 낫지 않다는 깨달음은 그 둘이 동일하게 호흡을 하다가 결국 동일한 죽음을 당한다는 사실을 통해 더욱 분명해진다. 사람의 몸은 짐승의 몸과 똑같이 흙으로 돌아간다. 하나님께서 사람도, 짐승도 다 흙으로 만드셨기 때문이다(창 2:7, 19; 시 104:29). 물론 사람의 혼(루아크)[영]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루아크) [호흡]은 땅으로 내려간다. 사람의 영혼은 짐승과 달리 불멸적이며(마 10:28)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아 영생(永生)이나 영벌(永罰)을 받지만, 짐승의 호흡은 불멸적이지 않고 죽으면 없어진다.

[22절] 그러므로 내 소견에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이는 그의 분복이라. 그 신후사(身後事)[죽은 후의 일]를 보게 하려고 저를 도로 데리고 올 자가 누구이랴.

‘자기 일’이란 사람이 세상에서 하는 다양한 직업과 책임과 취미의 일들을 가리킬 것이다. 사람은 개인적으로 일상생활에서 다양한 일들을 행한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주신 재능과 교회에 주신 직분과 은사는 다양하다. 로마서 12:68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에 섬기는 일, 가르치는 일, 권위하는[권면하고 위로하는] 일, 구제하는 일, 다스리는 일, 긍휼을 베푸는 일 등 여러 은사들을 주셨다.

모든 사람이 자기의 하는 일을 즐거워하며 행하는 것이 복된 일이다. 전도서 2:24는 사람이 수고하는 중에 심령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복되다고 말했고, 3:12-13도 사람이 사는 동안 기뻐하며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다. 주부는 즐거운 마음으로 집안일을 해야 한다. 현숙한 여인은 부지런히 손으로 집안일을 하는 자이다(잠 31:12, 13, 15, 27). 사도 바울은 젊은 여자들이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집안일을 하라고 교훈했다(딛 2:5). 사도 베드로는 장로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교인들을 돌보아야 한다고 권면했고(벧전 5:2-3), 바울은 성도들이 즐거움으로 헌금하며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고 교훈했고(고후 8:1-3; 9:2), 또 종들이 단 마음으로 육신의 주인들을 섬겨야 한다고 말했다(엡 6:5-8; 딛 2:9-10).

사람이 이 세상 사는 동안에 즐거워하며 사는 것은 하나님의 손에서 나는 것이며(2:24) ‘하나님의 선물’(3:13)이다. 그가 죽은 후에 될 일을 보게 하려고 그를 다시 살려 데려올 자가 없다. 그러므로 사람은 살아 있는 동안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이 복인 줄 알고 하나님께서 주신 현실 속에서 항상 즐거워하며 일하고 살아야 한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영원하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작정하시고 섭리하신다. 우리는 하나님만 경외하고 의지하고 순종해야 한다. 모든 육체는 풀 같고 그 영광은 꽃과 같으나 하나님의 말씀을 세세토록 있다(벧전 1:24-25). 하나님 안에만 영원한 생명이 있다.

둘째로, 사람은 자신이 죽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겸손히 하나님만 의지하고 소망해야 한다. 우리는 의를 행해야 하는 법정에도 불의가 있는 것을 볼 때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며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에 다 죽으며 이 점에서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존재임을 인정해야 한다.

셋째로, 사람은 이 세상 사는 동안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 그것은 그의 분복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께서 주신 일로 생각하며 즐거움으로 해야 한다.

 

4장: 학대, 시기, 친구 없음

[1-3절]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보았도다. 오호라, 학대받는 자가 눈물을 흘리되 저희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저희를 학대하는 자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저희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 그러므로 나는 살아 있는 산 자보다 죽은 지 오랜 죽은 자를 복되다 하였으며 이 둘보다도 출생하지 아니하여 해 아래서 행하는 악을 보지 못한 자가 더욱 낫다 하였노라.

세상에는 학대받는 자들이 있다. 그들이 눈물을 흘리지만 그들을 위로하는 자가 없다. 학대하는 자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학대받는 자들에게는 위로자가 없다. 세상에 불의, 학대, 억울함 등이 있음을 볼 때, 세상은 분명 이상적이지 않고 살 만한 좋은 곳이 못된다. 이것은 사람의 죄로 인해 세상이 악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죽은 자가 더 복되며, 아니, 아예 태어나지 않은 자가 더 복되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 전도서 12:14,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또 성경이 밝히 증거하는 대로, 내세(來世)가 있다. 의인에게는 복된 천국이 있고 악인에게는 심히 두려운 지옥이 있다. 또 이 세상에서도 고난 중에 하나님의 위로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위로의 하나님이시다. 고린도후서 1:3-4, “[그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4절] 내가 또 본즉 사람이 모든 수고와 여러 가지 교묘한 일로 인하여 이웃에게 시기를 받으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여러 가지 교묘한 일’(콜 키쉐론 함마아세)이라는 원어는 ‘일의 모든 솜씨, 성취, 성공’(BDB, KB)이라는 뜻이다. 사람이 모든 수고를 하고 일을 성공해도 오히려 그로 인해 다른 사람의 시기를 당하니, 그것도 헛된 일이라는 것이다. 서로 사랑하고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는 좋은 인간관계는 세상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이 세상은 생존경쟁과 시기 질투의 싸움터와 같다.

[5-6절] 우매자는 손을 거두고 자기 살을 먹느니라. 한 손에만 가득하고 평온함이 두 손에 가득하고 수고하며 바람을 잡으려는 것보다 나으니라.

‘손을 거둔다’는 말은 ‘손을 모은다’는 뜻이다. 그것은 게으른 자의 모습을 묘사하는 것이다(잠 6:10; 24:33). 사람의 수고가 헛되다고 하여서 게으름이 행복은 아니다. 우매자는 게으르고 손으로 일하기를 싫어한다. ‘자기 살을 먹는다’는 말은 우리말에 ‘제 살을 깎아 먹는다’는 말과 같다. 우매자의 게으름은 결국 자신을 망친다.

소득이 많은 것도 반드시 좋은 것이 아니다. 그것이 헛되고 마음의 고생뿐일 때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적은 소득이라도 평온함이 있는 것이 더 낫다(잠 15:16-17). 행복은 소득의 많음에 있지 않고 마음의 평안에 있다. 그런 평안은 하나님께서 주신다(살후 3:16; 사 48:18).

[7-8절] 내가 또 돌이켜 해 아래서 헛된 것을 보았도다. 어떤 사람은 아들도 없고 형제도 없으니 아무도 없이 홀로 있으나 수고하기를 마지아니하며 부를 눈에 족하게 여기지 아니하면서도 이르기를 내가 누구를 위하여 수고하고 내 심령으로 낙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고 하나니[하고 묻지 아니하나니](NASB; KJV도 비슷함) 이것도 헛되어 무익한 노고로다.

어떤 사람은 쉬지 않고 수고하여 돈을 번다. 그는 번 돈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것을 쓰고 즐길 줄 모르고 계속 벌기만 한다. 그에게는 돈을 버는 목적이 없다. 그는 아들도 없고 형제도 없고 낙을 누릴 줄도 모르고 일만 한다. 그러므로 그의 수고는 참으로 헛되다. 사람이 돈을 버는 기계인가? 무엇을 위해 수고하고 돈을 벌어야 하는가?

사람은 삶의 바른 목표가 필요하다. 그것은 첫째로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이다. 이사야 43:7,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둘째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다. 디도서 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돈을 버는 것보다, 돈을 어떻게 쓰느냐가 더 중요하다. 우리는 돈을 쓸 때 우선 순위를 정해야 한다. 첫째는 하나님을 위해, 즉 전도와 교회 건립을 위해 쓰고, 둘째는 나를 위해 적당히, 절약해 쓰고, 셋째는, 주의 이름으로 이웃을 위해 구제하는 데 써야 한다.

[9-10절]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동료]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두 사람이 서로 협력하면 무슨 일이든지 더 잘 하고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또 둘 중에 하나가 혹 실수하거나 낙심할 때에도 다른 사람이 그를 붙들어 주고 그를 위로, 격려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붙들어줄 친구가 없는 사람은 불행할 것이다.

[11-12절]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두 사람의 친근한 교제는 서로에게 기쁨과 힘이 될 것이다. 또 두 사람이 단합하면, 어려운 일이 올 때 잘 이겨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친구들 간의 교제와 협력은 유익하다. 서로 미워하고 시기하고 다투는 것은 서로에게 해를 줄 뿐이다. 그러므로 갈라디아서 5:15는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고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주께서 명하신 선한 일들에서 일심단합하기를 원하신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같이 하라”고 교훈하였다(살전 5:11).

[13-16절] 가난하여도 지혜로운 소년[청년]은 늙고 둔하여 간함을 받을 줄 모르는 왕보다 나으니 저는 그 나라에서 나면서 가난한 자로서 옥에서 나와서 왕이 되었음이니라. 내가 본즉 해 아래서 다니는 인생들이 왕의 버금으로 대신하여 일어난 소년[청년]과 함께 있으매 저의 치리를 받는 백성들이 무수하였을지라도 후에 오는 자들은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늙은 왕은 교만하고 완고하고 미련하여서 바른 조언과 충고를 받을 줄 모르나, 그런 왕보다는 가난하여도 지혜로운 청년이 더 낫다.  본문은 한 청년이 자기 나라에서 가난한 자로 나서 자랐고 고난을 받아 옥에도 들어간 적이 있지만, 하나님의 기이한 섭리로 왕이 되었다고 말한다. 본문은 요셉의 경우를 말한 것 같다. 요셉은 왕은 아니지만, 왕의 제2인자로 왕을 대신해 통치하였다. 백성들은 늙은 왕 대신에 왕이 된 그 청년을 지지하고 그의 통치받기를 좋아하였다.

16절의 ‘후에 오는 자들’은 다음 세대의 사람들과 왕들을 가리키는 것 같다. 한 때 사람들의 환영을 받았던 그는 다음 세대에서는 사람들의 배척을 받기도 한다는 뜻이다. 세상의 권력은 무상하며 사람들의 여론도 변화무쌍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해야 한다.


본장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학대와 시기가 있는 세상에서 오직 공의의 심판자 하나님을 위로자로 삼아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비록 소득이 적어도 평온한 삶을 구해야 한다. 인생의 참 행복은 마음의 평안에 있다. 하나님께서는 참 평안을 주신다.

셋째로, 우리는 단지 돈을 벌기 위해 수고하는 허무한 사람이 되지 말고, 삶의 바른 목표를 정하고 하나님과 교회와 하나님의 일과 선한 일을 위해 수고해야 하고 또 돈을 쓸 때도 우선순위를 정해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하나님을 섬김과 주 예수님을 믿음에 있어서 지식과 생각의 일치와 겸손과 사랑의 덕으로 서로 좋은 친구가 되고 좋은 동역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일심단합하여 참 교회를 세워나가야 한다.

 

5장: 하나님을 경외함, 재물이 헛됨

1-7절, 말씀 듣기, 기도, 서원

[1절] 너는 하나님의 전에 들어갈 때에 네 발[네 발걸음들](원문)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저희는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

구약시대의 성전은 하나님의 집이다. 신약교회도 하나님의 집이라고 불린다(딤전 3:15).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에 우리의 발을 삼가야 한다. ‘네 발걸음들’이라는 말은 우리의 마음가짐과 행동을 가리킬 것이다.

본문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자들의 마음가짐과 행동을 가르친다. 본문은 하나님께 가까이 해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이는 우매자는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뜻은 단순히 예배의식을 행하는 것이 아니고 그를 경외하고 악을 버리고 의와 선을 행하는 것이다.

사무엘은 사울 왕에게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나이다”라고 말하였다(삼상 15:22). 호세아 6:6에서 하나님께서는, “나는 인애(仁愛)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그를 대접하려고 분주한 마르다보다 말씀을 듣는 마리아를 칭찬하기를,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한가지가 필요하니라(전통본문).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다(눅 10:41-42).

[2-3절]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 일이 많으면 꿈이 생기고 말이 많으면 우매자의 소리가 나타나느니라.

우리는 교회에서나 어디에서나 하나님께 기도할 때 성급한 마음으로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높으신 초월자이시며, 사람은 유한하고 낮고 비천한 피조물이며 죄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 말을 적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기도해야 하고, 수다스럽게, 무례하게 기도해서는 안 된다. 또 본문은 “일이 많으면 꿈이 생기고 말이 많으면 우매자의 소리가 나타나느니라”고 말한다. 일이 많으면 헛된 생각도 생기고, 또 말이 많으면 어리석은 말도 생긴다.

일반적으로, 지혜자는 말을 아끼고 신중하게 말하는 자이다. 잠언 10:19,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잠언 15:28,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도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느니라.” 잠언 17:27, “말을 아끼는 자는 지식이 있고 성품이 안존한 자는 명철하니라.” 우리는 기도할 때도 그러해야 한다. 주께서는 우리가 기도할 때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고 말씀하셨다(마 6:7-8).

[4-7절] 네가 하나님께 서원하였거든 갚기를 더디게 말라. 하나님은 우매자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서원한 것을 갚으라. 서원하고 갚지 아니하는 것보다 서원하지 아니하는 것이 나으니 네 입으로 네 육체를 범죄케 말라. 사자 앞에서 내가 서원한 것이 실수라고 말하지 말라. 어찌 하나님으로 네 말 소리를 진노하사 네 손으로 한 것을 멸하시게 하랴. 꿈이 많으면 헛된 것이 많고 말이 많아도 그러하니 오직 너는 하나님을 경외할지니라.

‘서원’은 하나님께 맹세로 약속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서원하면 갚기를 더디하지 말아야 한다. 민수기 30:2는,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하였거나 마음을 제어하기로 서약하였거든 파약(破約)하지 말고 그 입에서 나온 대로 다 행할 것이니라”고 말한다. 시편 15:4, “[주의 성산에 거할 자는]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아니하며.” 입다는 암몬과의 전쟁에 나갈 때 하나님께 서원하였고 그가 승리하고 돌아올 때 그를 맞았던 외동딸을 번제로 드렸다(삿 11:30-31, 34-35, 39). 한나는 하나님께 아들 주시기를 구하며 서원하였고 사무엘을 얻은 후 그를 하나님께 바쳤다(삼상 1:10-11, 26-28).

그러나 우매자는 쉽게 서원하고 쉽게 잊어버리고 지키지 않는다. 하나님을 참으로 경외함이 그에게 없기 때문이다. 사울 왕이 그런 자이었다. 그는 맹세한 것을 쉽게 저버렸다. 서원하고 그것을 갚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 벌받을 죄가 된다. 신명기 23:21,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것을 네게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네게 죄라.”

본문은 또, “꿈이 많으면 헛된 것이 많고 말이 많아도 그러하니 오직 너는 하나님을 경외할지니라”고 말한다.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신중히 기도하며 서원하고 서원한 것은 꼭 지켜야 한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하나님의 뜻은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이다. 종교 의식보다 말씀 듣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예배드릴 때 설교 말씀을 듣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할 때 성급한 마음으로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 드릴 제목들을 생각하며 한가지씩 차근하게 하나님께 아뢰어야 한다. 우리의 기도는 인격적인 기도이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섬기고 무엇을 서원할 때는 매우 신중하게 해야 하고, 또 서원한 것은 해(害)가 되어도 반드시 갚아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가 마땅히 해야 할 바이다.

 

8-12절, 학대, 재물의 유익과 폐해

[8-9절] 너는 어느 도에서든지 빈민을 학대하는 것과 공의를 박멸하는 것을 볼지라도 그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 [이는] 높은 자보다 더 높은 자가 감찰하고 그들보다 더 높은 자들이 있음이니라. [더욱이](KJV) 땅의 이익은 뭇사람을 위하여 있나니 왕도 밭의 소산을 받느니라.

본문은, “너는 어느 도에서든지 빈민을 학대하는 것과 공의를 박멸하는 것을 볼지라도 그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말한다. 세상에는 가난한 자를 학대하고 공의를 박멸하는 악한 자들이 있다. 이 세상은 악한 세상이다. 우리는 그것을 놀라지 말아야 한다.

본문은, “[이는] 높은 자보다 더 높은 자가 감찰하고 그들보다 더 높은 자들이 있음이니라”고 말한다. 문맥상 또 성경의 교훈적 성격을 생각할 때, 이 말씀은 하나님에 대해 말씀한 것이라고 보인다. 땅 위의 높은 관리들보다 더 높은 자, 즉 온 우주에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계시다. 세상에서는 높은 관리가 낮은 자의 행위를 감독하지만, 그것은 불완전하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을 두루 감찰하시고 공의로 판단하시고 보응하신다. 그러므로 야고보서 5:1, 4,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 “보라, 너희 밭에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본문은 또, “[더욱이]4) 땅의 이익은 뭇사람을 위하여 있나니 왕도 밭의 소산을 받느니라”고 말한다. 땅의 이익, 즉 밭에서 나는 소산(所産)(곡식, 채소, 과일, 열매, 기름 등)은 모든 사람들에게도 또 왕에게도 똑같이 유익을 준다. 거기에는 왕과 평민의 구별이 없다. 그러므로 권세자들은 가난한 서민들을 무시하지 말고 학대하지 말아야 한다. 모든 사람은 서로를 필요로 하고 서로 존중하며 살아야 한다.

[10절]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탐심은 더 가지려는 마음이다. 탐심은 끝없는 수렁과 같아 탐심을 가진 자는 만족이 없다. 사람은 탐심을 버려야 그 부족감을 극복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경은 탐심을 정죄하며 경계하였다.

출애굽기 20:17,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 누가복음 12:15,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에베소서 5:3, 5,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탐심은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큰 죄악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는 부족함이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믿고 체험하기 때문이다. 시편 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마태복음 6:31-32,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성도는 세상에 사는 동안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자족하며 살 수 있다(딤전 6:7-8; 히 13:5).

[11-12절] 재산이 더하면 먹는 자도 더하나니 그 소유주가 눈으로 보는 외에 무엇이 유익하랴. 노동자는 먹는 것이 많든지 적든지 잠을 달게 자거니와 부자는 배부름으로 자지 못하느니라.

재물의 유익이 많지만, 재물이 많아지면 그것을 쓰는 자도 많아진다. 한 사람의 쓸 수 있는 재물의 양은 제한적이다. 한 사람이 먹는 세 끼 밥의 양도 제한적이다. 너무 많이 먹으면 배탈이 나거나 비만으로 해가 될 뿐이다. 실상, 재산이 많은 주인은 눈으로 그것을 보는 즐거움을 가질 뿐이지, 그것을 혼자서 다 쓰는 것은 아니다.

노동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땀 흘리며 일하기를 원하시며 또 그런 자에게 복을 주신다. 노동하는 자는 먹는 것이 많든지 적든지 잠을 달게 잔다. 그러나 부자는 단잠을 못 잔다. 사람은 배가 너무 부르면 단잠을 자지 못하기도 하고 부자는 보물을 도적 맞을까봐 편안한 잠을 자지 못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 돈은 유익이 있지만, 개인이 쓸 수 있는 돈의 양은 제한적이고, 또 재산이 많으므로 단잠을 자지 못하는 일도 있는 것이다. 이것이 재물의 유익과 폐해이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는 재물을 최고 가치로 여기며 살아서는 안 된다. 성경은 오히려 재물을 경계하고 부자 되려는 마음을 버리라고 가르친다. 시편 62:10, “포학을 의지하지 말며 탈취한 것으로 허망하여지지 말며 재물이 늘어도 거기 치심(置心)치[마음을 두지] 말지어다.” 잠언 23:4,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라] . . .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디모데전서 6:9-10,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윤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사람은 가난한 자들을 학대하지 말고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이 있고 또 세상은 모든 사람들의 수고를 통해 먹을 것을 얻기 때문이다.

둘째로, 탐심은 만족이 없고 일종의 우상숭배이다. 우리는 탐심을 다 버리고 섭리자 하나님을 믿고 항상 자족한 마음으로 살아가야 한다.

셋째로, 재물은 유익도 있지만 폐해도 있다. 우리는 마음을 물질에 두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두고 하나님께 부요한 자가 되어야 한다.

 

13-20절, 재물의 헛됨, 복된 삶

[13-14절] 내가 해 아래서 큰 폐단[심한 폐해] 되는 것을 보았나니 곧 소유주가 재물을 자기에게 해 되도록 지키는 것이라. 그 재물이 재난을 인하여 패하나니 비록 아들은 낳았으나 그 손에 아무것도 없느니라.

“그 재물이 재난을 인하여 패한다”는 말은 “재난을 인해 그 재물을 잃어버렸다”는 뜻이다. ‘재난’은 도난, 사기, 화재, 교통사고, 중한 병 등을 가리킬 것이다. 돈을 많이 소유한 자가 돈을 쓰지도 않고 아꼈는데, 재난을 당해 다 소비하고 자기 자녀를 먹일 음식거리를 살 돈도 없는 것이다. 재물은 참 허무한 것이다. 그러므로 잠언 23:5는,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날개를 내어 하늘에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고 말하였고, 사도 바울도 재물을 ‘정함이 없는 재물’이라고 말하였다(딤전 6:17).

재물은 정함이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신앙에 방해물과 시험거리가 된다. 주께서는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고 실패하는 경우를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로 비유하셨고(마 13:22) 또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려우며 심지어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말씀하셨다(마 19:23-24). 또 바울도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라고 교훈하였다(딤전 6:9-10). 재물은 허무하기도 하고 위험하기도 하다.

[15-16절] 저가 모태에서 벌거벗고 나왔은즉 그 나온 대로 돌아가고 수고하여 얻은 것을 아무것도 손에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이것도 폐단[심한 폐해]이라. 어떻게 왔든지 그대로 가리니 바람을 잡으려는 수고가 저에게 무엇이 유익하랴.

사람은 평생 동안 많은 재물을 벌고 재난이 없이 그것을 누린다 할지라도, 죽을 때는 빈손으로 죽는다. 사람은 모태에서 빈손으로 나왔고 죽을 때도 빈손으로 죽는다. 그는 금은보석이나 돈이나 예금 통장을 가지고 갈 수 없다. 그는 수의 한 벌, 관 한 개로 족하다!

그래서 본문은 사람의 그러한 삶을 ‘심한 폐해’라고 표현하고 또 ‘바람을 잡으려는 수고’ 곧 헛된 수고라고 표현한다. 사람이 일평생 돈을 번다고 수고하였으나 결국 허무하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시편 49:10-12는 말하기를, “저가 보리로다. 지혜 있는 자도 죽고 우준하고 무지한 자도 같이 망하고 저희의 재물을 타인에게 끼치는도다. 저희의 속생각에 그 집이 영영히 있고 그 거처가 대대에 미치리라 하여 그 전지(田地)를 자기 이름으로 칭하도다.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치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셨고(눅 12:15), 풍년을 만난 어리석은 농부의 비유에서 하나님께서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라고 말씀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눅 12:20).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고 교훈하였다(딤전 6:7-8).

[17절] 일평생을 어두운 데서 먹으며 번뇌(카마스 하르베)[많은 고민](KJV, NASB)와 병과 분노가 저에게 있느니라.

본문은 세상적, 물질적 욕심을 가진 사람의 삶이 곤고하고 불행함을 증거한다. 사람은 일평생 어두운 데서 먹는다. 그는 시간적으로도 새벽에 일어나 밤늦게까지 일한다. 또 사람은 양심에 거리끼는 죄 가운데 살면서 기쁨과 평안이 없고 근심과 걱정, 우울함과 긴장이 많다. 모세의 말대로, 사람은 그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다(시 90:10). 주 예수께서는 사람을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라고 표현하셨다(마 11:28).

또 사람은 질병도 있다. 신체적인 병도 있지만, 마음의 병도 있다. 병원은 각종 병으로 고생하는 환자들로 항상 붐빈다. 또 사람은 분노도 있다. 곤고한 세상에서 사람들은 신경질과 짜증을 부리고, 불평과 불만, 미움과 적개심을 품고 사는 일들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은 그것과 다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항상 기뻐하며 살고(살전 5:16) 평안의 주께서 때마다 일마다 주시는 하나님의 평안을 누리며 산다(살후 3:16). 또 그들은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보인다(빌 4:5). 또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떠나는 자들은 몸도 건강하다(잠 3:7-8). 또 그들은 범사에 감사하며 살고(살전 5:18) 그들을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고 그들을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한다(마 5:44). 또 그들은 부지런하게 자기 일을 하고, 이 세상 사는 동안 비록 부자는 아니라 할지라도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자족하며 사는 법을 배우며 실천한다(딤전 6:8).

[18절] 사람이 하나님의 주신 바 그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낙(혹은 ‘행복’)을 누리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내가 보았나니 이것이 그의 분복이로다.

사람의 일평생은 하나님께서 주신 시간이다. 사람의 출생과 죽음은 하나님의 작정 안에 있다. 사람은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이 세상에 태어나고 또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죽는다. 사람의 일생은 수고와 슬픔으로 가득하다(시 90:10). 인생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존재와 같다(마 11:28). 그것은 죄의 결과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는 죄의 형벌로 종신토록 수고하며 얼굴에 땀을 흘려야 땅의 소산을 먹을 것이라고 선언하셨고 하와에게는 해산하는 수고를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창 3:17). 그러나 이 저주받은 세상, 수고로운 세상에서 먹고 마시며 낙을 누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신 분복이다.

[19-20절] 어떤 사람에게든지 하나님이 재물과 부요를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며 분복을 받아 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 저는 그 생명의 날을 깊이 관념치 아니하리니 이는 하나님이 저의 마음의 기뻐하는 것으로 응하심이니라.

본문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재물과 부요를 주셔서 누리게 하시는 것과 수고하는 중 즐거움을 얻게 하시는 것, 또 사람이 자신의 일생의 길이가 얼마나 될지, 그가 언제 죽게 될지 별로 생각지 않고 마음에 기뻐하며 사는 것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라고 말한다. 수고롭고 허무한 이 세상의 삶 속에서 사람이 즐거워하며 사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라는 것이 전도서의 한 진리이다.

전도서 2:24는,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가운데서 심령으로 낙을 누리게 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는 것이로다”라고 말했고, 전도서 3:13은 그것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했다. 또 전도서 9:9는,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에]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라고 말했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재물은 정함이 없을 뿐 아니라 신앙에 방해물과 시험거리가 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재물을 감사히 사용하지만, 재물을 더 가지려고 욕심내거나 그것을 의지하거나 자랑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천국만 소망하며 살아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물질에 대한 탐심을 버려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세상 사는 동안 의식주의 필요를 주실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만 소망하며 세상에서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자족하며 살아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세상 사람처럼 평생 어두운 데서 슬픔과 번뇌와 병과 분노 중에 살지 말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평안과 건강으로 살아야 한다. 수고롭고 허무한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즐거움은 하나님의 복이요 우리의 분복이다. 우리는 그것을 감사함으로 누려야 한다.

 

6장: 낙이 없는 삶

[1-2절] 내가 해 아래서 한가지 폐단[폐해, 불행한 일] 있는 것을 보았나니 이는 사람에게 중한 것(랍바)[많은 일, 흔한 일](NASB)이라. 어떤 사람은 그 심령의 모든 소원에 부족함이 없어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하나님께 받았으나 능히 누리게 하심을 얻지 못하였으므로 다른 사람이 누리나니 이것도 헛되어 악한 병이로다.

본문이 말하는 어떤 사람은 물질적 부나 세상적 성공에 대한 소원을 가졌고 또 그것을 하나님께 받았다. 그는 돈을 많이 벌었고 재산을 모았고 또 세상적으로도 출세하여 명예도 얻었다. 그러나 그는 몸에 심각한 병이 들었거나 큰 환난과 재난 때문에 그것을 누릴 힘이 없었고, 그 대신에 다른 사람이 그것을 누렸다. 참 기가 막힌 불행이었다. 세상에는 그런 일이 많이 있다. 세상의 행복은 사람이 계획하고 예상한 대로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행복은 그의 지혜와 능력 안에 있지 않고 섭리자 하나님 안에 있다. 그래서 본문은 그런 상황을 ‘헛되어 악한 병’이라고 표현하였다.

[3-6절] 사람이 비록 일백 자녀를 낳고 또 장수하여 사는 날이 많을지라도 그 심령에 낙이 족하지 못하고 또 그 몸이 매장되지 못하면 나는 이르기를 낙태된 자가 저보다 낫다 하노니 낙태된 자는 헛되이 왔다가 어두운 중에 가매 그 이름이 어두움에 덮이니 햇빛을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나[못하니] 이가 저보다 평안함이라. 저가 비록 천년의 갑절을 산다 할지라도 낙을 누리지 못하면 마침내 다 한곳으로 돌아가는 것뿐이 아니냐?

사람이 100명의 자녀를 낳고 장수한다 할지라도 수고로운 세상에서 심령의 낙을 누리지 못한다면, 또 그 몸이 매장되지도 못한다면, 낙태된 자가 그보다 더 나을 것이다. 낙태된 자는 이 세상의 슬픔도, 불행도, 허무도 알지 못하고 죽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사람이 천년의 갑절을 산다고 할지라도 낙을 누리지 못한다면 결국 다 한곳 즉 무덤으로 들어갈 것이니 오래 산 것이 무슨 의미와 가치가 있는 것인가? 그러므로 100명의 자녀를 낳은 것이나 1,000년의 갑절을 사는 것이 아무런 복이 되지 못한다. 이스라엘 왕 아합은 왕의 권세와 영광을 누렸고 자녀를 70명이나 낳았으나 자신은 전쟁에서 죽었고, 그 아내 이세벨은 예후의 반란 때 창문에서 내려 던지워 죽임을 당하였고, 그의 아들들 70명은 공부하는 도중에 모조리 목베어 죽임을 당하였다. 한두 명의 자녀라도, 길지 않은 생이라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 속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참된 행복이다.

[7-9절] 사람의 수고는 다 그 입을 위함이나 그 식욕(네페쉬)[영혼,욕구, 식욕](BDB)은 차지 아니하느니라. 지혜자가 우매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뇨? 인생 앞에서 행할 줄을 아는 [그] 가난한 자는 무엇이 유익한고. 눈으로 보는 것이 심령의 공상(할라크 나페쉬)[‘영혼의 걸음,’ ‘영혼의 욕구하는 바’(NASB), ‘욕구의 방랑’(KJV, NIV)]보다 나으나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사람의 수고는 결국 다 그의 입을 위한 것, 즉 먹고사는 그의 육신의 생활을 위한 것이지만, 그 식욕은 차지 아니한다. 식욕뿐 아니라, 영혼의 만족도 끝이 없어 보인다. ‘그 가난한 자’는 앞에서 말한 지혜자를 가리키는 것 같다. 지혜자가, 비록 가난할지라도, 사람들 앞에서 처신하는 일이나 그래서 돈을 버는 일에서 우매자보다 분명히 나은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도 다 허무하다. 그의 수고가 그에게 참 만족을 주지 못하고 그들은 다 똑같이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눈으로 보는 것은 실제로 낙을 누리는 것을 말한다. ‘심령의 공상’은 ‘영혼의 욕구하는 바’를 가리켰다고 본다. 심령으로 아무리 좋은 욕구를 가져도 실제로 먹고 마시며 낙을 누리는 것보다 못하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수고한 후 먹고 마시는 것도 결국 헛되며 공허하다.

[10절] 이미 있는 무엇이든지 오래 전부터 그 이름이 칭한 바 되었으며 사람이 무엇인지도 이미 안 바 되었나니 자기보다 강한 자와 능히 다툴 수 없느니라.

해 아래는 새것이 없다(전 1:9-10). 하늘도, 땅도, 산도, 바다도, 해와 달과 별들도 옛날부터 불러오던 이름들이다. 만물이 다 그러하고 사람도 그러하다. 사람은 창조 때부터 사람(아담)이라고 불리었다. 또 사람이 무엇인지도 이미 안 바 되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존귀하게 지음 받았으나 그의 몸은 흙으로 지음 받아 연약하며 죄를 지은 후에는 늙고 병들고 죽는 자가 되었다. 사람은 피조물이요 죄인이다. 그의 허무함과 불행은 특히 그의 죄인 됨에서 나왔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교만해서는 안 된다. 사람은 자기보다 강한 자, 즉 창조주 하나님과 다툴 수 없다. 그는 창조주 앞에 두려움과 겸손함으로 엎드려야 한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자신을 티끌과 같다고 고백했다(창 18:27). 욥기 25:6은 인생을 벌레와 구더기라고 표현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라고 부르셨다(사 41:14). 많은 고난을 받았던 사도 바울은 자신을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다”고 말하였다(고전 4:13). 이런 존재인 사람이 하나님과 다투는 것은 교만한 일이요 무지하고 어리석은 일이다. 사람은 오직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겸손하게 섬기며 그의 모든 말씀을 다 믿고 순종해야 한다.

[11절] 헛된 것을 더하게 하는 많은 일(데바림)[‘말들,’ 혹은 ‘일들’]이 있나니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하랴.

솔로몬은 많은 일들을 해보았다(전 2장). 그는 집들도 건축해 보았고 포도원과 과원도 만들어 보았으며 합창단도 만들어 보았다. 그러나 사람이 말이 많으면 헛된 말도 늘어나고 일이 많으면 헛된 일도 증가한다. 세상에 헛되지 않은 것은 무엇이며 참으로 유익하고 영원한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12절] 헛된 생명의 모든 날을 그림자같이 보내는 일평생에 사람에게 무엇이 낙(토브 ‘좋은 것, 행복’)인지 누가 알며 그 신후(身後)에[그의 후에] 해 아래서 무슨 일이 있을 것을 누가 능히 그에게 고하리요.

사람의 일생은 그림자같이 덧없이 지나간다. 시간의 흐름은 붙들어 둘 자가 없고 빠르고 허무하다. 그러므로 욥은 “여인에게서 난 사람은 사는 날이 적고 괴로움이 가득하며 그 발생함이 꽃과 같아서 쇠하여지고 그림자같이 신속하여서 머물지 아니하는도다”라고 말했고(욥 14:1-2), 다윗은 “사람은 헛것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으니이다”라고 말하였고(시 144:4), 또 “주 앞에서는 우리가 우리 열조와 다름이 없이 나그네와 우거한 자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머무름이 없나이다”고 고백하였다(대상 29:15). 또 야고보는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고 말했다(약 4:14). 이런 인생에게 무슨 낙이 있고 무슨 행복이 있는가? 또 죽은 후에 그의 집이나 그의 일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누가 알겠는가?


본장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우리 소원을 재물에 두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두어야 한다. 우리는 이제까지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앞으로도 인도하실 하나님, 사람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고 만복의 근원 되신 섭리자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며 섬겨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먹고 마시고 낙을 누림이 하나님의 주신 복이긴 하지만 그것조차도 헛됨을 알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평안의 복을 항상 구하며 누려야 한다. 우리는 물질의 복, 자녀의 복, 장수(長壽)의 복을 구하지 말고 하나님의 평안의 복 안에 거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 피조물이며 죄인임을 알고, 결코 하나님과 다투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세상의 일들이 다 헛됨을 알고 창조자, 섭리자 하나님을 겸손히 섬기며 믿고 의지하고 그에게만 소망을 두고 그가 주신 성경책에 계시된 대로 그의 모든 계명에 순종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 즉 믿는 일과 계명 순종의 일을 힘써야 한다.

 

7장: 지혜와 어리석음이 대조됨

1-7절, 좋은 이름, 초상집, 우매자

[1절] 아름다운 이름(토브 쉠)[좋은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좋은 이름은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다. 좋은 이름은 경건하고 선한 사람이 죽은 후에 그에게 붙여지는 이름을 가리킨다. 예를 들면, 경건한 사람, 의로운 사람, 선한 사람 등의 이름이다. 보배로운 기름은 값비싼 향유를 가리킨다. 좋은 이름은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다. 값비싼 향유는 잠시 동안 좋은 향기를 내지만, 그것은 물질적 향기에 불과하고 얼마 되지 않아 사라지고 없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좋은 이름은 오랫동안 사람들의 기억 속에 또 역사 속에 남는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하늘로 올리운 자로 오래 기억되며, 노아는 의인이요 완전한 자요 하나님과 동행한 자로 오래 기억된다. 아브라함은 믿음과 순종의 사람으로 오래 기억되며, 다윗은 믿음과 찬송의 사람으로 오래 기억되며, 히스기야는 경건한 자로 오래 기억된다. 이들은 다 후대의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기억되고 있다.

죽는 날은 출생하는 날보다 낫다. 죽는 날은 사람이 일생을 마감하는 날이다. 그 날 의인은 그의 의로운 생을 정리하고 결산하며 그의 이름을 남긴다. 주 예수께서는 가장 좋은 이름을 남기셨다. 죽는 날은 또 의인이 죄와 슬픔, 질병과 고통이 없는 곳으로 들어가는 날이다. 그러나 출생한 날은 사람이 생을 시작한 날로서 어떻게 살지 미지수이다. 믿음으로 살고 의롭게 살면 그 생이 복되지만, 믿음 없이 살고 죄만 짓고 살면 그의 생은 큰 화가 된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배신하고 악한 자들에게 그를 팔아 넘겼던 가룟 유다는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던 제게 좋을 뻔한 자’(마 24:26)이었다.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난 것보다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다가 죽었느냐가 훨씬 더 중요하다.

[2-4절]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이는]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함으로 마음이 좋게 됨이니라.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낫다. 사람이 잔칫집에 가서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면 죽음에 대해 생각할 기회가 없고 경건하고 바르고 근신하고 절제하는 생활에 대해서도 잊어버리기 쉽다. 그러나 상을 당한 집에 조문하러 가면,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자신의 삶을 반성하게 될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죽으며 그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 유익하다. 사람은 죽음을 생각하며 진실하고 정직해야 하고, 또 죽음을 생각하며 하나님 앞에서 죄악된 일, 책망받을 일, 양심에 거리끼는 일, 시간을 낭비하는 일을 버려야 한다.

또 슬픔은 웃음보다 낫다. 왜냐하면 사람은 얼굴에 근심함으로써 마음이 좋게 되기 때문이다. 사람이 웃을 때는 자기 부족과 연약을 잊어버리고 죽음의 일도 잊어버리기 쉽고 자신을 반성하고 회개하며 죽음을 대비할 기회를 놓치기 쉽다. 그러나 사람이 자기 자신을 살피며 자신의 범죄와 하나님의 징벌 때문에 슬퍼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할 때는 심령에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 회복의 은혜를 얻게 될 것이다. 특히 회개의 슬픔은 유익이 많다. 주께서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다(마 5:4).

그러므로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고 우매자의 마음은 즐겁게 노는 집에 있다. 우매자들은 잔칫집에 모여든다. 그들은 현재의 육신적 즐거움을 좋아한다. 그러나 지혜자들은 잔칫집에보다 초상집에 참석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거기에서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그것을 더욱 가다듬게 되고 내세를 준비하는 지혜를 얻기 때문이다.

[5절] 사람이 지혜자의 책망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나으니라.

책망을 좋아하는 자가 없고 책망 자체는 듣는 자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무겁게 하지만, 경건한 자의 바른 지적과 책망은 유익을 준다. 책망을 듣는 자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고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잠언 6:23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고 말하였고, 잠언 27:5-6은,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 친구의 통책은 충성에서 말미암은 것이나 원수의 자주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고 말했다. 또 옛날부터 참 선지자는 책망의 설교를 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나와 너 이전 선지자들이 자고로 여러 나라와 큰 국가들에 대하여 전쟁과 재앙과 염병을 예언하였느니라”고 말했다(렘 28:8). 책망을 잘 듣는 것이 복이다.

우매자의 노래는 듣기는 좋으며 마음을 즐겁게 할지 모르나 아무 유익이 없다. 그것은 전도서 2:2에서 전도자가 웃음을 논하여 미친 것이라고 표현하고 희락을 논하여 저가 무엇을 하는가라고 말한 것과 같다. 선지자 아모스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유다 백성들이 비파에 맞춰 헛된 노래를 지절거렸다고 증거하며 책망하였다(암 6:5).

사람의 참 의미와 가치는 하나님 안에서만 있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의 창조자요 섭리자이시기 때문이다. 구주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는 하나님의 계명을 힘써 순종해야 하고, 그럴 때 현세와 내세에 풍성한 평안과 복을 누릴 것이다.

[6-7절] [이는] 우매자의 웃음소리는 솥 밑에서 가시나무의 타는 소리 같으니 이것도 헛되니라[헛됨이니라]. [참으로](KJV) 탐학이 지혜자를 우매하게 하고 뇌물이 사람의 명철을 망케 하느니라.

우매자의 노래 소리보다 지혜자의 책망을 듣는 것이 더 나은 이유는 우매자의 웃음소리가 솥 밑에서 가시나무의 타는 소리 같으며 이것도 헛되기 때문이다. 솥 밑에서 가시나무의 타는 소리는 일시적으로는 요란하지만 곧 그친다. 우매자의 웃음소리도 그러하다.

또 탐학은 지혜자를 우매하게 하고 뇌물은 사람의 명철을 부패시킨다. ‘탐학’이라는 원어(오쉐크 ק)는 남을 위협하여 강압적으로 빼앗는 이익을 가리킨다(BDB). 이것은 개인에게나 국가에 다 적용된다. 성경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람하거나 우상숭배를 하거나 후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토색하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고 교훈한다(고전 5:11).

강제로 빼앗는 것은 탐심에서 나온다. 탐심은 죄악이다. 롯의 아내는 재산에 대한 애착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뒤를 돌아보므로 소금기둥이 되었다(창 19:26). 아간은 여리고 정복 때 시날산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약 2.3kg, 또 약 600g의 금덩이 하나를 탐했다가 그의 가족들과 함께 아골 골짜기에서 돌에 맞아 죽었다(수 7장).

또 뇌물은 사람의 눈을 어둡게 하고 명철을 부패시킨다. 출애굽기 23:8, “너는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오직 의롭게 번 적은 소득만 복이 된다. 잠언 16:8, “적은 소득이 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나으니라.”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보배로운 기름보다 좋은 이름을 귀히 여겨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지 사람의 생일을 축하하지 말고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고 선하게 살다가 죽기를 사모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잔칫집보다 초상집에 참석해야 한다. 우리는 죽음에 대해 생각하며 준비하고, 경건하고 선하게 살며 악을 멀리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세상의 유행가나 우매자들의 노래를 좋아하지 말고, 오히려 하나님의 종들의 책망과 믿는 교우들의 권면을 좋아해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우매자의 기쁨을 버리고 토색과 탐심과 뇌물을 멀리하며 정직하게 번 돈으로 살고 불의의 이익을 구하지 말아야 한다.

 

8-14절, 겸손과 인내, 불평, 지혜, 섭리

[8절]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고 참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보다 나으니.

‘일의 끝’은 일이 성취되어 좋은 결과를 얻는 것을 말한다. 무슨 일이든지 잘 계획하고 시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일을 잘 진행하고 예상치 못한 어려움들을 잘 이기고 치명적 실수 같은 것을 막아 그 일을 완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어떤 일을 잘 성취하려면 인내가 필요하고 또 인내는 겸손한 마음을 가질 때만 가능하다. 이 세상에서 성공한 자들은 많은 실패를 경험했어도 낙심치 않고 오래 참은 자들이다. 겸손과 인내는 성공적인 삶의 필수적 덕목이다. 신앙생활도 비슷하다. 예수께서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승리한 신자를,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라고 말씀하셨다(눅 8:15). 참된 믿음은 인내로 결실하는 믿음이다.

[9절] 급한 마음[영]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 노는 우매자의 품에 머무름이니라.

우리는 급한 마음으로 노를 내지 말아야 한다. 노는 우매자의 품에 머무르기 때문이다. 물론, 정당한 노가 있다. 불의를 보고 노하는 것은 정당하다. 하나님의 의로우신 진노가 있다(나 1:6). 예수께서 채찍으로 양이나 소를 성전에서 내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신 의분도 있다(요 2:15). 핍박하는 악인들에 대해 하나님의 공의의 징벌을 호소한 시편의 글들도 이런 의미에서이었다.

그러나 사람의 생각과 감정은 지나치고 잘못되기 쉽다. 그러므로 잠언은 미련한 자가 분노를 당장에 나타내고 속히 노하며 그 노를 다 드러낸다고 말한다(잠 12:16; 14:17; 29:11). 또 야고보는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고 말하며(1:20) 성내기를 더디 하라고 교훈하였다(1:19). 그것은 인내의 한 면모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본받는 것이다. 잠언은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며 슬기로운 자이며 용사보다 낫다고 말한다(잠 14:29; 19:11; 16:32). 사도 바울은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성내지 않는다고 말했고(고전 13:4-5), 또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라”고 교훈하였다(엡 4:31-32).

[10절] 옛날이 오늘보다 나은 것이 어찜이냐 하지 말라. 이렇게 묻는 것이 지혜가 아니니라.

우리는 옛날이 오늘보다 나았다는 불평어린 평가를 버리는 것이 좋다. 실상, 옛날에도 어려운 일들은 있었을 것이고 더 많았을 수도 있다. 오늘날 우리의 현실이 어떠하든지, 우리는 모든 현실을 겸손히 긍정하고 감사히 받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우리에게 현재 어떤 어려움이 있다면, 우리는 그 원인을 생각하며 자신을 성찰해야 할 것이다. 만일 그것이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라면 즉시 회개하며 달게 받아야 하겠지만, 만일 그것이 단지 하나님께서 주신 훈련 과정이라면 참고 견뎌야 할 것이다. 우리는 어려운 현실을 만날 때마다 하나님의 긍휼과 도우심과 돌보심을 구해야 하며 또 주권적 섭리자 하나님을 의지하고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게 살면서 미래의 평안을 기대하며 참고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돌아보면, 하나님께 감사할 일들이 많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그의 징책하심보다 크다. 사사기는 111년의 징계의 햇수와 296년의 평안의 햇수를 증거한다. 시편 30:5는, “그 노염은 잠깐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고 말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길을 예비하신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필요를 공급하셨고 우리를 인도하셨고 이곳까지 우리를 도우신 에벤에셀의 하나님이시다.

[11-12절] 지혜는 유업같이 아름답고 햇빛을 보는 자에게 유익하도다. 지혜도 보호하는 것이 되고 돈도 보호하는 것이 되나 지식이 더욱 아름다움은 지혜는 지혜 얻은 자의 생명을 보존함이니라.

‘햇빛을 보는 자’는 모든 살아 있는 자들을 가리킨다. 지혜는 물려받은 기업같이 모든 살아 있는 자들에게 유익하다. 부모로부터 받는 유산은 물질적 유여함을 주는 좋은 것이다. 본문은 지혜와 돈이 다 보호하는 것이 되지만, 지식과 지혜가 돈보다 더 낫다고 말한다.

돈이 있으면 영양 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고 따뜻한 옷을 입을 수 있고 편안한 집에서 살 수 있고 몸이 아프면 좋은 의사와 약의 치료를 받을 수 있다. 또 돈이 있으면 자녀도 좋은 교육을 받게 할 수 있다. 이처럼 돈은 우리의 건강과 우리의 자녀를 보호하는 점이 있다.

이와 같이, 지혜도 우리를 보호한다. 지혜는 잘못된 빚 보증을 하지 않게 함으로 재산을 보호한다. 지혜는 우리를 게으르지 않게 함으로 가난으로부터 보호한다. 지혜는 교만하여 서로 다투지 않게 함으로 인간 관계를 보호해준다. 무엇보다, 지혜는 우리를 죄와 불행으로부터 보호해주며 우리의 자녀도 죄와 불행으로부터 보호해준다.

특히, 지혜가 더 아름다운 이유는 지혜가 지혜 얻은 자의 생명을 보존하기 때문이다. 지혜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그것을 보존한다. 지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를 의지하며 죄를 버리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여 영생에 이르게 한다. 잠언 3:13-18은, 지혜가 정금보다 진주보다 귀하며 그 오른편에 장수(長壽)가, 그 왼편에 부귀가 있고 그 길은 즐거움과 평안의 길이며 마침내 생명나무의 열매 곧 영생을 누리게 된다고 말했다.

[13-14절]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좋고 나쁜 일들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일어난다.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곧게 할 자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45:7에서,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해야 한다(잠 3:6).

사람은 내일에 일어날 일을 알지 못하고 다음 순간에 일어날 일도 알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현실을 좋은 날과 힘든 날,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을 섞어 두셔서 장래 일을 짐작치 못하게 하셨다. 우리는 내일 일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다(약 4:14).

그러므로 본문은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고 말한다. 우리는 형통하고 좋은 날에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다. 그러나 곤고한 날, 즉 어려운 일이 있는 날에는 생각해야 할 것이다. 야고보서 5:13은,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고 말했다. 특히, 우리는 곤고한 날을 만나면 우리 자신에게 어떤 부족이 없는지, 어떤 죄가 없는지 우리 자신을 반성해야 할 것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겸손과 인내를 가지고 해야 한다. 세상에 쉬운 일은 아무것도 없으나, 무슨 일이든지 겸손과 인내로 하면 잘 될 것이다. 신앙생활도 이치가 비슷하다. 우리는 겸손과 인내로 하나님과 주님을 섬겨야 한다.

둘째로, 쉽게, 급히 노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우매자의 행위이다. 우리는 노하기를 더디 해야 하고 남을 불쌍히 여기며 살아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어려운 현실을 불평하지 말고 범사에 섭리자 하나님을 인정하고 항상 감사하며 그를 의지하고 그에게 간구해야 한다.

넷째로, 지혜는 부모의 유산보다 더 귀하다. 우리는 지혜를 사모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에 순종함으로 지혜자가 되어야 한다.

다섯째로, 우리는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항상 섭리의 하나님을 인정하고 의지하고 의탁해야 한다.

 

15-22절, 지혜로운 처신, 지혜

[15-18절] 내가 내 헛된 날에 이 모든 일을 본즉 자기의 의로운 중에서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 중에서 장수하는 악인이 있으니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케 하겠느냐?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 말며 우매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느냐? 너는 이것을 잡으며 저것[이것]을 놓지 마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

세상에는 아벨처럼 다른 사람의 미움과 핍박을 받아 일찍 죽임을 당하는 의인이 있고, 사람들 앞에 드러나지 않고 은밀하고 교묘하게 악을 행하고 하나님께서도 내버려두심으로 장수(長壽)하는 악인도 있다. 그러므로, 본문은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사람들 앞에서 너무 드러나게 자신의 의를 나타내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 사람 앞에 드러내는 의는 바리새인들의 의처럼 외식적인 의가 되기 쉽다. 또 그런 사람은 자신을 크게 여기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기 쉽고 그러면 그는 주위 사람들의 반감을 사고 해를 입기 쉬울 것이다.

본문은 또한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 말며 우매자도 되지 말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적당히 악인이 되라는 뜻은 아니다. 성경은 어떤 경우에도 악을 권장하지 않는다. 본문은 드러나게 악한 자는 사회적 제재를 당하고 감금이나 벌을 받고 심한 경우는 사형도 당하여 회개할 기회가 없기 때문에 드러난 악인이 되지 말라는 뜻이라고 본다.

본문은 또한 “너는 이것을 잡으며 이것을 놓지 마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너무 드러나게 의를 행하고 의인인 척하지도 말고 너무 드러나게, 무모하게 악을 행해서도 안 된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이런 잘못들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19-20절] 지혜가 지혜자로 성읍 가운데 열 유사보다 능력이 있게 하느니라.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

본문은 지혜의 가치와 지혜의 유익을 증거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지혜는 잠언에서 교훈한 그 지혜이다. 그것은 세상적, 육신적 지혜가 아니고, 영적, 천적, 신적 지혜이다. 이 지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으로서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얻고 또 하나님의 뜻을 행함으로, 즉 의와 선과 진실을 행함으로 더욱 많아지는 것이다.

지혜는 지혜자로 성읍 가운데 열 유사(有司)보다 능력이 있게 한다. 성읍의 유사 즉 관원은 세상에서 지혜와 권세가 있는 자이다. 그는 보통 일반 사람들보다 이해력, 판단력, 언변, 용기가 더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얻은 자는 성읍의 열 유사보다 더 지혜롭고 더 능력이 있는 자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시편 119편의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를 원수보다, 스승보다, 노인보다 지혜롭게 한다고 고백했다(97-100절). 또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가 바벨론의 박사들보다 열 배나 더 나았다(단 1:20).

본문은 “[왜냐하면]()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없음이니라]”고 말한다. 본문은 참 지혜가 열 유사보다 나은 이유가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즉 왕들도, 관원들도 다 죄인이며 부족한 인생들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아무리 세상적으로 유능하고 권세 있는 자라도, 자신의 무지와 편견과 욕심을 이길 수 없고, 세상의 악한 풍조를 이길 수 없고, 마귀의 시험이나 죄의 유혹을 피하거나 이길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가 아니고서는 세상의 지혜자들도 범죄하고 불행할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지혜가 아니다.

[21-22절] 무릇 사람의 말을 들으려고 마음을 두지 말라. 염려컨대 네 종이 너를 저주하는 것을 들으리라. 너도 가끔 사람을 저주한 것을 네 마음이 아느니라.

우리는 무슨 일을 할 때 좋은 친구의 의견과 충고를 들을 필요가 있다. 나라의 통치자는 백성의 의견을 들을 필요가 있다. 남의 의견을 듣지 않는 자는 실수하기 쉽고 독선적이거나 편협하기 쉽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들의 모든 말에 마음을 두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의 말에는 정확하지 않거나 잘못된 내용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람들의 말만 들으면 무슨 일에 확신과 용기를 가질 수 없고 낙심하거나 우왕좌왕하여 아무 일도 못하기 쉽다.

느헤미야서에 보면,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의 중건을 위해 유대 땅에 총독으로 왔을 때, 산발랏, 도비야, 게셈 등은 그를 대적하였고 그를 해치려 하였다. 그들은 느헤미야가 유다 사람들로 더불어 모반하려 하여 성을 건축하고 왕이 되려 한다는 거짓말을 퍼뜨렸다. 그것은 느헤미야를 두렵게 하고 그와 그의 동료들의 손을 피곤하게 하여 하나님의 일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한 것이었다(느 6장).

오늘날도 사탄은 하나님의 종들을 낙심케 하여 하나님의 바른 일들을 못하게 하려 한다. 사도 바울은 전도사역에서 매 맞음, 갇힘, 자지 못함, 먹지 못함 등 많은 고난을 받았고 또 영광도 얻고 욕도 먹고 악한 이름도 얻고 아름다운 이름도 얻었으나(고후 6:5-8) 낙심치 않았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에 계시된 대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확신하여 그 뜻을 충성되이 행하는 것이다(엡 5:15-17).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의를 행해도 은밀히 하고 드러날 경우에도 자신을 자랑하지 말고 높은 마음이나 잘못된 생각으로 남을 정죄하지 말고, 또 드러나게 악을 행하지도 말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지혜를 얻어 이런 잘못들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둘째로, 지혜는 지혜자로 성읍 가운데 열 유사보다 능력이 있게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가 주시는 지혜로 바르게 살아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무슨 일을 할 때 사람들의 의견을 참고는 하지만 그 모든 말에 마음을 쓸 것은 없다. 우리는 하나님께만 충성해야 한다.

 

23-29절, 사람의 무지함, 하나님 형상의 회복

[23-24절] 내가 이 모든 것을 지혜로 시험하며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지혜자가 되리라 하였으나 지혜가 나를 멀리하였도다. 무릇 된 것이(마 쉐하야)[이미 있는 것도] 멀고 깊고 깊도다. 누가 능히 통달하랴.

솔로몬은 지혜로 이 모든 것 곧 세상의 모든 일을 이해하려고 힘썼고 스스로 지혜자가 되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그는 참 지혜에 이르지 못했고 참 지혜는 그와 거리가 멀었다. 솔로몬은 무릇 된 것, 즉 이미 가지고 있는 지혜도 너무 멀고 깊어서 다 파악하지 못하였다.

본문은 사람의 지식의 한계성 곧 사람의 무지함을 증거한다. 사람이 무엇을 꽤 아는 것같이 생각하는 것은 교만이며 또 하나의 무지(無知)일 뿐이다. 우주만물에 대한 사람의 지식은 지극히 미미하고 지극히 단편적인 지식일 뿐이다. 우주는 사람이 파악하기에는 너무 광대하고 광활하며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사람이 파악할 수 없이 높고 깊으시다. 여기에 사람의 겸손과 하나님 경외의 이유가 있다.

욥기 36:26에서 엘리후는 “하나님은 크시니 우리가 그를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선지자 이사야는 “보라, 그[하나님]에게는 열방은 통의 한 방울 물 같고 저울의 적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니,” “그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같이, 빈 것같이 여기시느니라”고 증거하였다(사 40:15, 17).

[25-26절] 내가 돌이켜 전심으로 지혜와 명철을 살피고 궁구하여 악한 것이 어리석은 것이요 어리석은 것이 미친 것인 줄[‘어리석은 것 곧 미련한 것과 정신 없는 것의 악’(KJV), ‘어리석은 것의 악과 미련한 것과 정신 없는 것’5)]을 알고자 하였더니 내가 깨달은즉 마음이 올무와 그물 같고 손이 포승 같은 여인은 사망보다 독한 자라. 하나님을 기뻐하는[기쁘시게 하는] 자는 저를 피하려니와 죄인은 저에게 잡히리로다.

이 세상에는 어리석고 악하고 정신 없는 일들이 많다. 솔로몬은 그 모든 일들을 살피고 연구하고자 했다. 특히 남자가 아내를 잘 만나는 것은 큰복이다. 잠언은 슬기롭고 현숙한 아내가 하나님께로서 오고 그 값이 진주보다 귀하다고 말하였다(잠 19:14; 31:10). 그러나 마음이 올무와 그물 같고 손이 포승줄 같은 여인은 사람을 죄악과 사망으로 이끈다. 솔로몬은 그런 여자를 “사망보다 독한 자”라고 부른다. 이것은 그의 실패의 경험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가 나이 늙었을 때 왕비들은 그의 마음을 돌이켜 다른 신들을 좇게 했다(왕상 11:4).

또 그는 잠언에서 다투는 여인에 대해 여러 번 말했다. 그는 다투는 아내가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 같다고 말했고(19:13; 27:15) 그런 여자와 큰 집에 살기보다 광야나 지붕 모퉁이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낫다고 말했다(21:9, 19). 그런 여자의 남편은 마음에 큰 고통을 당하고 결국 불행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라는 원어는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자’라는 말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KJV, NASB, NIV)’라는 뜻이라고 본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은 그런 여자를 피할 수 있지만, 죄인은 그런 여자에게 잡혀 결국 큰 낭패를 당할 것이다.

[27-28절] 전도자가 가로되 내가 낱낱이 살펴 그 이치를 궁구하여 이것을 깨달았노라. 내 마음에 찾아도 아직 얻지 못한 것이 이것이라. 일천 남자 중에서 하나를 얻었거니와 일천 여인 중에서는 하나도 얻지 못하였느니라.

솔로몬은 하나님의 진리와 인생에 대해 참으로 깨닫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 중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천 명의 남자들 중에 겨우 한 명을 찾았고(아마 자신을 가리킨 듯함) 천 명의 여자들 중에서는 하나도 찾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 여자들은 아마 그가 거느렸던 700명의 왕비와 300명의 첩들을 가리켰을 것이다. 실상, 온 세상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만 참 지혜자이시다. 그의 모친 마리아까지도 그와 비교할 수 없는 비천한 죄인에 불과하다. 사도 바울은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고전 1:21). 참 지혜는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질 수 있다.

[29절] 나의 깨달은 것이 이것이라. 곧 하나님이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은[그들은](원문) 많은 꾀(킷쉐보노스)[고안들, 계획들]를 낸 것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첫 사람 아담을 본래 정직하게 만드셨다. 처음 사람은 본래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도덕적 중립 상태로 지음 받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도덕적으로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상태로 지음을 받았다(엡 4:22-24). 그러나 첫 사람 아담이 범죄한 후, 사람들은 많은 꾀를 내었고 많은 악한 것들을 생각하고 계획하였다. 창세기 8:21,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예레미야 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그의 하시는 모든 일들에 대해 우리 자신의 무지함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오직 겸손히 엎드리며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며 그를 섬겨야 한다. 로마서 11: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악행은 미련함이다.

둘째로, 우리는 마음이 올무와 그물 같고 손이 포승 같은 여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그런 아내를 둔 남자는 마음에 큰 고통을 당하는 불행한 자이다. 우리는 마음이 올무와 그물 같고 손이 포승 같은 자가 되지 말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선하고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본래의 형상인 정직하고 선한 인격을 회복해야 한다. 이것이 구원과 성화이다. 에베소서 4:22-24,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우리는 성령을 좇아 몸의 죄성을 죽여야 한다.

 

8장: 왕에게 복종하라

1-8절, 지혜자의 얼굴, 왕에게 복종, 불확실한 미래

[1절] 지혜자와 같은 자 누구며 사리의 해석을 아는 자 누구냐? 사람의 지혜는 그 사람의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하나니 그 얼굴의 사나운 것(오즈) [엄함(NASB, NIV), 사나움, 대담함(boldness)(KJV)](BDB)이 변하느니라.

본문에서 지혜자와 사리의 해석을 아는 자는 동일시되는 것 같다. 사리의 해석을 안다는 말은 세상의 일들, 즉 하나님의 섭리의 일들의 이치, 그 원인과 진행 방향과 예상되는 결과, 그 바른 대처 방식 등을 안다는 뜻이라고 본다. 이렇게 사리의 해석을 아는 사람의 지혜는 그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하며 그 얼굴의 사나운 것을 변하게 한다. 사람의 얼굴은 마음의 표현이다. 사람의 마음의 기쁨은 기쁜 얼굴로, 사람의 마음의 슬픔은 슬픈 얼굴로 나타나며, 또 마음의 겸손은 겸손한 얼굴로, 마음의 교만은 교만한 얼굴로 나타나고, 마음의 착함은 선한 얼굴로, 마음의 간교함은 간사한 얼굴로 나타난다.

사람의 무지함은 마음에 긴장과 두려움을 갖게 하고 얼굴을 굳게 하고 엄하게 하고 사납게 만들 것이다. 잠언 21:29도, “악인은 그 얼굴을 굳게 하나 정직한 자는 그 행위를 삼가느니라”고 말했다. 그러나 지혜는 사람의 얼굴을 밝게 하고 얼굴의 엄함과 사나움을 없애줄 것이다. 지혜는 마음에 이해심, 여유, 평안, 선함을 가지게 하고 그것은 밝고 평온한 얼굴로 나타날 것이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했던 스데반은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고 성경은 말한다(행 6:15).

[2절] 내가 권하노니 왕의 명령을 지키라. 이미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였음이니라.

왕이 임직할 때 백성들은 보통 왕에게 충성할 것을 맹세한다. 역대상 11:3, “이에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헤브론에 이르러 왕에게 나아오니 다윗이 헤브론에서 여호와 앞에서 저희와 언약을 세우매 저희가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니.” 백성은 왕에게 복종해야 한다. 로마서 13:12는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고 말했다. 우리는 합법적 권위에 복종해야 한다.

[3절] 왕 앞에서 물러가기를 급거히[급하게] 말며 악한 것을 일삼지 말라. [이는] 왕은 그 하고자 하는 것을 다 행함이니라.

‘물러가기를 급하게 한다’는 말은 ‘무례하게, 반항적이게 행한다’는 뜻이다. 또 ‘일삼는다’는 원어(아마드)는 ‘계속하다, 고집하다, 참여하다(NASB)’(BDB)는 뜻이다. 우리는 왕 앞에서 무례하지 말아야 하고 또 악에 계속 머물거나 고집하지 말아야 한다.

[4절] 왕의 말은 권능이 있나니 누가 이르기를 왕께서 무엇을 하시나이까 할 수 있으랴.

선지자 사무엘이 사울 왕에게, 선지자 나단이 다윗 왕에게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기도 했으나, 보통은 왕의 행동을 지적할 사람이 없고 지적하기가 매우 어렵다. 백성이 왕의 명령을 따르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단지, 왕의 명령이 하나님의 계명에 어긋날 때에는 따를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땅의 왕보다 높으신 하늘에 계신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니엘이나 그 세 친구들은 왕의 명령을 어겼고(단 3, 6장),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도 유대인 사회의 최고기관인 공회의 명령을 어겼다(행 4:19).

[5-6절] 무릇 명령을 지키는 자는 화를 모르리라. 지혜자의 마음은 시기와 판단(미슈파트)[조치](NASB, NIV)을 분변하나니 무론 무슨 일에든지 시기와 판단[조치]이 있으므로 사람에게 임하는 화가 심함이니라.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자는 시기와 조치를 분별해 재앙을 경험치 않을 것이다. 이사야 48:18, “슬프다, 네가 나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였도다. 만일 들었더면 네 평강이 강과 같았으리라.” 그러나 지혜가 없는 자는 그렇지 못하여 그에게 임하는 재앙이 심할 것이다.

[7-8절] 사람이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장래 일을 가르칠 자가 누구이랴. 생기(루아크)[영(KJV), 바람(NASB, NIV)]를 주장하여 생기[영]로 머므르게 할 사람도 없고 죽는 날을 주장할 자도 없고 전쟁할 때에 모면할 자도 없으며 악이 행악자를 건져낼 수도 없느니라.

사람은 장래의 일을 알지 못한다(약 4:14). 내일도 계속 평안할지, 내일 어떤 재앙이 임할지 아무도 모른다. 또 사람은 자신의 생명이나 다른 사람의 생명을 한 시간이라도 연장할 수 없고(마 6:27) 죽음의 시간을 한 시간이라도 지연시킬 수 없다. 호흡이 떠나갈 때는 아무도 그것을 막지 못하고 호흡이 떠나가며, 죽음이 찾아올 때면 아무도 그것을 막지 못하고 죽음의 순간을 맞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람은 미래를 확신하지 못한 채 살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자,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자, 하나님의 주시는 지혜를 얻은 자는 가장 선하고 가장 지혜로운 삶을 살 수 있다. 그는 꼭 필요한 때에 최선의 결정을 하며 살 수 있다. 그것은 그 자신의 지혜로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도우심과 간섭하심으로 하는 것이다. 시편 25:12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뇨? 그 택할 길을 저에게 가르치시리로다”라고 말하였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지혜자의 얼굴은 밝고 사나움이 없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마음에 지혜와 이해심과 여유를 얻어 우리의 사나운 얼굴이 밝고 평온한 얼굴로 변화되기를 원한다.

둘째로, 우리는 위에 있는 권세자들에게 복종해야 한다. 그들이 하나님을 거역하지 않는 한, 그들을 존중하고 그들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셋째로, 미래의 일을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불확실한 미래를 지혜롭고 안전하게 살아가려면,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지하고 그의 명령에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

 

9-17절, 악인, 인생의 낙, 하나님에 대한 지식

[9-13절] 내가 이런 것들을 다 보고 마음을 다하여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살핀즉 사람[한 사람]이 사람[다른 사람]을 주장하여 [자신을] 해롭게 하는(KJV, NIV) 때가 있으며 내가 본즉 악인은 장사지낸 바 되어 무덤에 들어갔고 선을 행한 자는 거룩한 곳에서 떠나 성읍 사람의 잊어버린 바 되었으니[내가 본즉 성소에 드나들던 악인들은 장사지낸 바 되어 그들이 그렇게 행하던 성읍에서 잊어버린 바 되었으니](MT, KJV, NASB) 이것도 헛되도다. 악한 일에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않으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 [어떤] 죄인이 백 번 악을 행하고도 장수하거니와 내가 정녕히 아노니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 앞에서 경외하는 자가 잘될 것이요 악인은 잘되지 못하며 장수하지 못하고 그 날이 그림자와 같으리니 이는 [그가] 하나님 앞에 경외하지 아니함이니라.

일시적으로 혹은 예외적으로 악인이 평안하고 형통한 경우가 있으나(욥 21:7-13a),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일반 진리는 권선징악(勸善懲惡)이다(롬 2장).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 곧 죄 짓는 일을 큰 잘못으로 알고 두려워하며 피하고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대로만 살려고 하는 자들은 잘될 것이며 평안하고 건강하고 장수하고 형통할 것이며 그들이 영생을 얻고 영원한 복을 누릴 것이다.

그러나 악을 행하는 자들, 곧 하나님을 경외할 줄 모르고 자신의 무지와 욕심과 죄성을 따라 행하며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자들은 잘되지 못하며 평안치 못하며 영생하지 못하며 죽음과 불행을 당할 것이다. 이 세상에서 벌을 받지 않는 자는 마지막 심판과 지옥 형벌이 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을 다 받을 것이다.

[14절] 세상에 행하는 헛된 일이 있나니 곧 악인의 행위대로 받는 의인도 있고 의인의 행위대로 받는 악인도 있는 것이라. 내가 이르노니 이것도 헛되도다.

이 세상에는 고난을 받는 의인도 있고 평안을 누리는 악인도 있다. 전도서 7:15도, “내가 내 헛된 날에 이 모든 일을 본즉 자기의 의로운 중에서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 중에서 장수하는 악인이 있으니”라고 말했다. 욥기 21:7은, “어찌하여 악인이 살고 수(壽)를 누리고 세력이 강하냐?”고 말했고, 시편 73:4는, “저희는[악인들은]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라고 말했다.

[15절] 이에 내가 희락을 칭찬하노니 이는 사람이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보다 해 아래서 나은 것이 없음이라. 하나님이 사람으로 해 아래서 살게 하신 날 동안 수고하는 중에 이것이 항상 함께 있을 것이니라.

허무한 세상, 수고로운 세상, 싸움이 있고 도덕적인 무질서가 있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복은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이다. 이것은 쾌락주의를 가르친 것이 아니고 허무하고 수고로운 세상에서 창조주 하나님께서 주신 위로와 복을 말한 것이다.

우리는 금욕주의에나 쾌락주의에 치우치지 말고 먹고 마시며 낙을 누리는 복이 하나님께서 주신 복인 줄 깨닫고 감사히 누려야 한다. 전도서 2:24,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가운데서 심령으로 낙을 누리게 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는 것이로다.” 전도서 3:13,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을 또한 알았도다.” 전도서 5:18, “사람이 하나님의 주신 바 그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낙을 누리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내가 보았나니 이것이 그의 분복이로다.”

[16-17절] 내가 마음을 다하여 지혜를 알고자 하며 세상에서 하는 노고(勞苦)를 보고자 하는 동시에 (밤낮으로 자지 못하는 자도 있도다.) 하나님의 모든 행사를 살펴보니 해 아래서 하시는 일을 사람이 능히 깨달을 수 없도다. 사람이 아무리 애써 궁구할지라도 능히 깨닫지 못하나니 비록 지혜자가 아노라 할지라도 능히 깨닫지 못하리로다.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들, 즉 해 아래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일들에 대해 사람은 지혜를 다해 연구하고 살펴도 그 원인, 그 이유, 그 진행 방향, 그 목적지를 다 깨달을 수 없다. 사람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들을 다 알 수 없다. 전도서 3:11,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始終)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하나님께서는 그 존재 자체와 그 지혜와 지식과 능력이 무한하시지만, 사람은 심히 유한한 존재이다. 무한자와 유한자의 차이는 무한하다. 그러므로 욥기 11:7은, “네가 하나님의 오묘를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온전히 알겠느냐?”고 말하였고, 또 로마서 11:33은,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라고 말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많은 일들을 감추시는 것은 우리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지하게 하려 하심이다. 이사야 50:10은,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자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할지어다”라고 말했다. 그것이 믿음이다. 또 신명기 29:29는,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고 말했다. 우리는 계시된 말씀을 믿고 행한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악인은 일시적으로 잘되고 장수하는 경우가 있으나 결국 망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힘써 행하며 모든 악을 멀리해야 한다.

둘째로, 세상에는 도덕적 무질서가 있어 보이는 경우가 없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를 믿어야 하고, 이 수고로운 세상에서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복을 감사히 누려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다 알지 못하고 성경에 계시된 바와 지나온 경험을 통해 조금 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읽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더욱 알고 그를 믿고 의지하고 그에게 순종해야 한다.

 

9장: 사람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음

1-6절, 하나님의 섭리, 죽음, 생명

[1절] [이는] 내가 마음을 다하여 이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펴본즉 의인과 지혜자나 그들의 행하는 일이나 다 하나님의 손에 있으니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은 모두 그 미래임이니라.

원문에 ‘이는’이라는 말은 앞장 끝절에서 해 아래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모든 일을 사람이 능히 깨달을 수 없는 이유를 보인다. 그 이유는 이 세상의 모든 일, 모든 사람의 일들이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고 그것들이 다 하나님의 주권적 작정과 섭리대로 되기 때문이다. 세상에서는 악인이 형통하기도 하고 의인이 고난을 당하기도 하므로 우리는 현재의 상황으로 사람을 판단할 수 없고 또 그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도 알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일들을 그의 뜻대로 섭리하시는 자이시다. 이사야 45:7,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시편 115:3,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 시편 135:6, “여호와께서 무릇 기뻐하시는 일을 천지와 바다와 모든 깊은 데서 다 행하셨도다.”

하나님께서는 특히 자기 백성들, 즉 의인들과 지혜자들을, 비록 그들이 고난 가운데 있을지라도, 특별히 돌보신다. 신명기 33:3, “여호와께서 백성을 사랑하시나니 모든 성도가 그 수중(手中)[손 안]에 있으며 주의 발 아래에 앉아서 주의 말씀을 받는도다.” 주께서는,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고(요 10:28), 또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말하였다(롬 8:28).

[2-3절]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모든 것이 일반이라. 의인과 악인이며 선하고 깨끗한 자와 깨끗지 않은 자며 제사를 드리는 자와 제사를 드리지 아니하는 자의 결국이 일반이니 선인과 죄인이며 맹세하는 자와 맹세하기를 무서워하는 자가 일반이로다.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일반인 그것은 해 아래서 모든 일 중에 악한 것이니[악한 것이라.] 곧 인생의 마음에[더욱이, 인생의 마음은] 악이 가득하여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다가 후에는 죽은 자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

본문은 모든 사람의 마지막이 똑같음을 증거한다. 이것은 세상에서의 외형적인, 현상적인 일을 두고 말한 것이다. 모든 사람은 늙고 병에 걸리기도 하고 또 마침내 다 죽는다. 이것은 의인과 악인에게 구별이 없어 보인다. 또, 아브라함과 욥처럼 의인도 물질적 부요의 복을 누리지만, 어떤 경우에는, 악인도 물질적 부요의 복을 누린다(욥 21:7-13; 시 73:3-5, 12). 또 아합처럼 악인이 전쟁에서 죽기도 하나(왕상 22:35), 요시야처럼 의인도 전쟁에서 죽기도 한다(왕하 23:29). 본문은 이런 일들이 “해 아래서 모든 일 중에 악한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의 악은 도덕적 개념보다는 ‘큰 고통’이라는 뜻이다.

더욱이, 본문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악이 가득하고 일평생에 미친 마음이 있고 또 마침내 죽은 자들에게로 돌아간다고 말한다. 이것이 세상에서 더욱 불행한 사실이다. 사람의 마음은 심히 부패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다(렘 17:9). 이 세상에서 죄와 죽음은 가장 큰 불행이다. 그러나 거기에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필요가 있고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의 필요성이 있고 심령의 변화와 거룩하고 의로운 삶으로의 변화의 가치가 있다.

[4-6절] [이는] 모든 산 자 중에 참여한 자가 소망이 있음은[있음이로다. 이는](MT, KJV)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나음이니라. [이는] 무릇 산 자는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르며 다시는 상도 받지 못하는 것은 그 이름이 잊어버린 바 됨이라. 그 사랑함과 미워함과 시기함이 없어진지 오래니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에 저희가 다시는 영영히 분복이 없느니라.

본문은 생명의 가치가 큼을 증거한다. 개는 짐승 중에 보잘것없는 짐승이며 사자는 동물의 왕이라고 불리는 짐승이지만,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 왜냐하면 죽은 사자는 더 이상 아무 힘도 쓰지 못하고 다른 사자나 짐승에게 먹잇감이 될 뿐이기 때문이다.

본문은 모든 산 자가 소망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산 사람에게 인생의 불행을 피할 길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죽은 자에게는 그런 길이 없다. 산 자에게만 죄와 죽음에서 구원받을 길이 있고, 영생의 길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초기부터 이 길을 보이셨다. 영생은 거짓이 없는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약속하신 것이다(딛 1:2). 그것은 아담과 하와에게 입혀 주신 가죽옷이 암시한 바이었고 옛날부터 주신 제사제도나 성막제도와 성전제도에서 암시된 뜻이었다.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는 아무 보상도 받을 수 없다. 그의 이름은 잊혀져 버리고 만다. 그의 사랑함도, 미워함도, 시기함도 다 없어져 버린다. 해 아래서 행한 모든 일에 대해 그는 이제 아무 분복도 누리지 못한다. 그러나 모든 살아 있는 자는 자신이 죽을 줄을 알고 그 죽음을 대비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죄와 불행을 깨닫고 회개하고 고치고 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자로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고 성화를 위해 힘쓸 수 있다. 산 자와 죽은 자의 차이는 크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세상의 모든 일이 하나님의 주권적 작정과 섭리 안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그의 계명들에 순종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세상의 가장 큰 불행이 죄와 죽음이며 가장 큰 행복이 사람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단번에 대속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은 구원과 영생임을 알아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생명의 가치를 깨닫고 허무한 세상 것과 바꾸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죄를 멀리하며 내세를 준비해야 한다.

 

7-10절, 기쁘게 삶, 즐거운 부부, 근면

[7-8절]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지어다. 이는 하나님이 너의 하는 일을 벌써 기쁘게 받으셨음이니라. 네 의복을 항상 희게 하며 네 머리에 향기름을 그치지 않게 할지니라.

성도의 정상적인 생활은 슬프고 우울하거나 금욕주의적이지 않다. 전도서는 반복해서 사람이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이 수고로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인생의 분복이라고 말했다(전 2:24; 3:13; 5:18; 8:15).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4:3-4에서 “[속이는 영이]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 터이나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라고 말했고, 골로새서 2:20-23에서는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는 의식주의나 몸을 괴롭게 하는 금욕주의가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구원받은 성도가 몸의 죄성을 따르는 것을 금하는 성화(聖化)의 바른 방법도 아니라고 말하였다.

성도는 기쁨으로 음식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마시고 옷을 항상 깨끗하게 빨아 입고 머리에 향기름을 바를 수 있다. 구약 성도들은 추수 때에 기쁨의 잔치를 했다. 성도는 하나님 안에서 기쁘고 즐겁게, 밝고 활달하게 살아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그의 하는 일들을 기쁘게 받으셨기 때문이다. 특히 신약성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과 하나님 자녀의 특권을 얻은 자들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교훈하였다(빌 4:4).

[9절]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이는 네가 일평생에 해 아래서 수고하고 얻은 분복이니라.

허무하고 수고로운 세상의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복은 즐거이 음식을 먹고 마시며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사는 것이다. 물론, 부부가 바른 믿음 안에서 인격적으로 서로 사랑함이 있어야 한다. 잠언 12:4는, “어진 여인은 그 지아비의 면류관이나 욕을 끼치는 여인은 그 지아비로 뼈가 썩음 같게 하느니라”고 말하였다. 부부는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아내들은 교회가 주께 복종함같이 자기 남편에게 복종해야 하고, 남편들은 주께서 교회를 사랑하심같이 자기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엡 5:22, 25). 잠언은 “네 샘으로 복되게 하라.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 그는 사랑스러운 암사슴 같고 아름다운 암노루 같으니 너는 그 품을 항상 족하게 여기며 그 사랑을 항상 연모(戀慕)하라”고 교훈하였다(5:18-19).

결혼과 부부의 사랑은 사람들로 세상에서 음행에 떨어지지 않게 하는 목적도 있다. 그러므로 결혼한 남편과 아내는 부부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 고린도전서 7:1-5,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면, 독신(獨身)도 하나님을 위해 유익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환난 시대에는 독신이 더 유익하다고 말했었고 또 결혼한 사람이 주의 일에 전념하지 못하고 아내를 기쁘게 하기 위해 세상일을 염려하게 된다고 말하였다(고전 7:26-28, 32-34).

[10절] 무릇 네 손이 일을 당하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무덤]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첫 사람 아담에게 “땅을 정복하라”고 명령하셨고(창 1:28) 에덴 동산을 만드시고 그들을 거기에 두시고 그것을 다스리며 가꾸고 경작하게 하셨다(창 2:15). 일과 노동은 사람의 창조 때부터 사람에게 명하신 하나님의 뜻이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 계명을 주실 때에도 ‘엿새 동안 힘써 너희의 모든 일을 행하고 제7일에 쉬라’고 말씀하셨다(출 20:9-10). 그러므로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힘써 일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사람이 일하지 않고 게으른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악한 일이다. 잠언 6:6-11은 근면을 교훈하면서 게으른 자는 개미에게 가서 지혜를 배울 것과 게으름이 가난의 원인임을 말했다. 일할 수 있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증거요 건강하다는 표이며 내가 무엇인가에 쓸모가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사람이 죽어 무덤에 들어가면 거기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지혜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지금 살아 있을 때 게으르지 말고 힘써 일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각자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고 명했고, 또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교훈했다(살전 4:11; 살후 3:10). 우리는 힘써 일하되 바르고 선한 일을 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착한 행실을 사람들에게 보이라고 교훈하셨다(마 5:16).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우리로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하심이다(딛 2:14).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성도들은 이 세상을 슬프고 우울하게 살지 말고, 기쁘고 즐겁게, 밝고 활달하게 살아야 한다.

둘째로, 결혼한 자는 즐겁고 복된 부부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것은 허무하고 수고로운 이 세상의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복이다.

셋째로,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 게으르지 말고 힘을 다해 일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할 일들에 충실하되 특히 선한 일에 힘써야 한다.

 

11-18절, 시기와 우연, 지혜자, 지혜자의 말

[11-12절]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보니 빠른 경주자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유력자(깁보림)[강한 자들]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자라고 식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 명철자라고 재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 기능자(요데임)[지식 있는 자들, (전문적 지식과) 기술이 있는 자들]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니 이는 시기(時期)와 우연이 이 모든 자에게 임함이라. 대저 사람은 자기의 시기를 알지 못하나니 물고기가 재앙의 그물에 걸리고 새가 올무에 걸림같이 인생도 재앙의 날이 홀연히 임하면 거기 걸리느니라.

물론, 더딘 경주자보다 빠른 경주자가 더 낫고, 약한 자보다 강한 자가 더 낫고, 어리석고 미련한 자보다 지혜롭고 명철한 자가 더 낫고, 지식과 기술이 없는 자보다 지식과 기술이 있는 자가 더 낫다. 사람이 자기 일을 열심히 하다 보면 그 일에 숙달되고 전문가가 될 것이다. 각양의 직업을 가진 사람도, 주부인 여자도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근면함이 삶의 성공을 결정짓는 충분한 요인은 아니다. 빠른 경주자도 경기하는 날에 몸이 안 좋거나 출발 시에 실수하거나 달리다가 넘어지거나 다른 이와 부딪혀 실패할 수 있다. 또 전쟁의 승리도 단지 군사력에만 있지 않다. 모든 일들은 시기(時期)와 우연에 영향을 받는다. 사람은 갑자기 닥칠 재앙의 때를 예측하지 못한다. 물고기가 그물에 걸리고 새가 올무에 걸리듯이, 재앙이 사람에게 갑자기 임한다. 폭풍, 폭우, 폭설, 지진 같은 천재지변도, 무서운 전염병이나 큰 건물이나 대형 구조물의 붕괴 사고, 큰 화재나 교통 사고도, 어음 부도나 기업의 파산도, 또 국가적 혹은 세계적 경제공황도 다 사람들의 예상 밖에 있다.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일들을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야고보서 4:13-16,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利)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우리는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고 고백해야 한다.

[13-16절] 내가 또 해 아래서 지혜를 보고 크게 여긴 것이 이러하니 곧 어떤 작고 인구가 많지 않은 성읍에 큰 임금이 와서 에워싸고 큰 흉벽을 쌓고 치고자 할 때에 그 성읍 가운데 가난한 지혜자가 있어서 그 지혜로 그 성읍을 건진 것이라. 그러나 이 가난한 자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도다. 그러므로 내가 이르기를 지혜가 힘보다 낫다마는 가난한 자의 지혜가 멸시를 받고 그 말이 신청(信聽)되지[그 말을 듣지] 아니한다 하였노라.

지혜는 효능과 유익과 장점이 있다. 어떤 작고 인구가 많지 않은 성이 이웃의 큰 나라 왕의 공격을 받았을 때, 한 가난한 지혜자가 그 성을 구원해내었다. 지혜는 힘보다 낫고 병기보다 나았다. 사무엘하 20장에 보면, 다윗 시대에 베냐민 사람 세바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요압이 그를 좇아 아벨이라는 성을 포위하고 그 성을 멸하려 하였는데, 그때 그 성에 지혜로운 한 여인이 나서서 요압과 대화해 세바의 머리를 내어줌으로써 그 성을 구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지혜자를 쉽게 잊어버리고 기억하지 않고 그를 멸시하고 그의 말을 듣지 않는다. 이것이 무지한 세상의 모습이다.

[17-18절] 종용히[조용히] 들리는 지혜자의 말이 우매자의 어른의 호령보다 나으니라. 지혜가 병기보다 나으니라. 그러나 한 죄인이 많은 선을 패궤케 하느니라[파괴하느니라]

17절은 지혜자들의 말들이 우매자들의 통치자의 호령보다 조용하게 잘 들린다는 뜻 같다. 어리석은 어른은 큰 소리로 자기의 생각을 주장한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우매한 말들이다. 그것들은 하나님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는 말들이다. 그러나 지혜자의 말들은 경건하고 도덕적인 말들, 즉 의롭고 선한 말들이며, 그것들은 비록 조용하게 말해질지라도 유익하여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사람들이 그 말들을 통해 유익을 얻는다. 잠언 10:20-21은 “의인의 혀는 천은(天銀)과 같거니와 악인의 마음은 가치가 적으니라. 의인의 입술은 여러 사람을 교육하나 미련한 자는 지식이 없으므로 죽느니라”고 말했다.

본문은 지혜가 병기보다 낫다고 말한다. 그것은 전쟁에서 지휘관들의 전략 회의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인다. 전쟁에서 전략적 지혜는 병기보다 중요하다. 아무리 좋은 무기들을 가지고 있어도 전략적 지혜가 없으면 전쟁에서 이길 수 없을 것이다.

또 본문은 한 죄인이 많은 선을 파괴시킨다고 말한다. 아군의 1급 군사기밀을 적군에서 넘긴 한 명의 스파이는 아군을 패배케 만들 것이다. 다윗의 아들 암논의 친구 요나답의 어리석고 악한 제안으로 인하여 암논은 여동생 다말을 강제로 욕보였고 그것은 자신의 죽음을 가져왔고(삼하 13장) 다윗 가정에 매우 수치스럽고 매우 고통스런 일이 되었다. 성경은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진다고 말했고(고전 5:6), 또 악한 친구들이 선한 행실을 더럽힌다고 말하였다(고전 15:33). 한 사람의 악한 행위가 많은 선을 파괴시킨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인생의 모든 일들에는 시기(時期)와 우연이 있다. 때때로 그것들이 사람의 일들의 성공과 실패를 결정하기도 한다. 그것들은 사람의 손 안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의 손 안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만 경외하고 그에게 모든 일을 맡기며 그의 인도하심만 구하고 오직 우리의 할 의무를 다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우매한 자가 되지 말고 지혜자가 되어야 하고 또 지혜자의 경건하고 도덕적인 말을 통해 유익을 얻는 자가 되어야 한다. 지혜는 병기보다 낫다. 그러나 한 죄인이 많은 선을 파괴시킨다.

 

10장: 작은 어리석음

1-7절, 우매함, 공순함, 직분자

[1절] 죽은 파리[파리들]가 향기름으로 악취가 나게 하는 것같이 적은 우매가 지혜와 존귀로 패하게 하느니라.

우매함이 무엇인가? 우매함은 불경건하고 부도덕한 것이다. 사람에게는 죄성(罪性)이 있으므로 사람의 생각과 감정과 판단, 또 말과 행동에는 우매함이 있다. 그것은 겉보기에는 또 세상적으로는 지혜일지 몰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어리석은 것이다.

지혜는 무엇인가?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다. 그것은 성령의 감동으로 하는, 그리고 성경 교훈에 따른, 생각과 판단, 말과 행동이다. 로마서 8:5-6은,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성령]을 좇는 자는 영[성령]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성령]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고 말하였고, 갈라디아서 5:16은, “성령의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말하였다. 야고보서 3:17은,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다”고 말하였다.

아무리 냄새가 좋은 향기름도 파리 한 마리가 거기에 빠져 죽으면 얼마 안 있어 파리가 썩어 악취가 날 것이다. 이처럼 작은 우매함이 사람의 지혜와 존귀함을 더럽힌다. 성도는 선한 인격의 향기를 나타내야 하는데, 말로나 행위로 나타나는 그의 작은 우매함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의 인격을 추하게 만드는 것이다.

[2-3절] 지혜자의 마음은 오른편에 있고 우매자의 마음은 왼편에 있느니라. 우매자는 길에 행할 때에도 지혜가 결핍하여 각 사람에게 자기의 우매한 것을 말하느니라.

오른편은 힘이 있는 쪽, 언제나 사용할 수 있는 쪽을 말할 것이다. 사람은 보통 오른손을 쓰고, 왼손을 쓰는 자는 예외적이다. 왼편은 힘을 쓰기 불편한 쪽, 유용성이 적은 쪽을 가리킬 것이다. 그것은 게으른 사색, 탁상공론(卓上空論), 말뿐이고 실천이 없는 생각을 가리킬 것이다. 지혜자는 생각하는 대로 실천하는 자이지만, 우매자는 말만하고 행치 않는 외식자들과 같은 자들이다(마 23:3).

우매자는 길에 행할 때에도 지혜가 결핍하여 각 사람에게 자기의 우매한 것을 말한다. ‘길에 행할 때에도’라는 말은 큰 일에서 뿐 아니라 그의 일상적 말과 행동에서도 그렇다는 뜻일 것이다. 사람은 마음 속에 있는 것을 말로나 행위로 나타낸다. 우매자는 일상생활에서 말과 행동을 통해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우매함을 드러낸다.

마음은 사람의 행동의 근원이다. 사람은 죄악되므로 악하고 미련한 마음에서 악하고 미련한 말과 행동이 나온다. 주 예수께서는 외식하는 유대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2:34-35). 또 그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15:19-20). 사람은 마음의 변화를 받아 거룩해져야 한다.

[4절] 주권자가 네게 분을 일으키거든 너는 네 자리를 떠나지 말라. 공순(恭順)이 큰 허물을 경하게 하느니라.

‘주권자가 네게 분을 일으키거든’이라는 원문은 ‘주권자의 영[감정]이 너를 향해 일어나거든’ 즉 ‘주권자가 네게 분을 내거든’이라는 뜻이다. 주권자가 언제 분을 내는가? 보통 상대방이 잘못이 있을 때 그렇다. 본문은 그때 자리를 떠나지 말라고 말한다. 자리를 떠나는 행동은 상대방의 분을 감정으로 대응하는 태도이다. 그것은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지 않는 태도이며 자신의 완고한 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한 태도는 목이 곧고 완악하며 교만하고 패역한 태도이다.

그러나 공순함은 큰 허물을 가볍게 할 것이다. ‘공순’이라는 원어(마르페)는 ‘치료’라는 뜻이지만, ‘침착함, 평정, 온유함’이라는 뜻도 있다(BDB, KB). ‘공순’은 잘 번역된 말이라고 보인다. 주권자가 화를 낼 때 공순한 자는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그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상대의 책망을 달게 받는 겸손한 태도이다. 사람은 누구나 크고 작은 부족이 있고 이런저런 실수와 잘못을 범할 수 있지만, 단지 그것을 인정하고 윗사람의 책망을 달게 받고 자신의 잘못을 고치려는 마음이 있는가가 중요하다.

공순함은 큰 허물을 가볍게 할 것이다. 주께서는 회개하는 형제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셨다(마 18:22).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상한 마음을 받으시고(시 51:17) 우리가 죄를 회개할 때 용서해주신다(요일 1:9). 유다의 악한 왕 므낫세라 할지라도 그가 앗수르로 잡혀가는 큰 고난을 당하자 하나님 앞에서 크게 겸비하여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긍휼을 베푸셨고 그로 예루살렘에 돌아와 다시 얼마 동안 왕위에 있게 하셨다(대하 33:11-13).

[5-7절] 내가 해 아래서 한가지 폐단 곧 주권자에게서 나는 허물인 듯한 것을 보았노니 우매자가 크게 높은 지위를 얻고 부자가 낮은 지위에 앉는도다. 또 보았노니 종들은 말을 타고 방백들은 종처럼 땅에 걸어 다니는도다.

본문은 “내가 해 아래서 한가지 폐단 곧 주권자에게서 나는 허물인 듯한 것을 보았노라”고 말한다. 원문은 ‘주권자[통치자]에게서 나오는 허물과 같은 한가지 폐단’이라고 되어 있다(KJV, NASB).

본문은 그 한 예로 우매자가 크게 높은 지위를 얻고 부자가 낮은 지위에 앉는 경우를 말한다. 우매자는 하나님을 경외치 않고 부도덕하고 불성실하고 게으른 자인데, 그는 그에게 적합지 않고 그가 감당치 못할 크게 높은 지위을 얻었다. 그러나 반대로 부자는 낮은 지위에 앉았다. 여기에서는 부자와 지혜자가 동의어로 쓰인 것 같다. 성경에 나오는 나발 같은 미련한 부자도 있지만(삼상 25:2-3, 25), 지혜로운 부자도 많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도덕적이고 근면하며 하나님의 복을 받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일반적 상식이 뒤바뀐 상황이 있다는 것이다.

본문은 또 종들이 말을 타고 방백들이 종처럼 땅에 걷는 경우도 말한다. 종들은 일반적으로 배울 기회를 많이 가지지 못하고 배운 것이 적으므로 지식이 부족하고 인격성, 도덕성, 지도력, 판단력, 포용력이 부족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자가 높은 지위를 얻어 말을 타고 다니고, 반면에 배울 기회가 많아 배운 것이 많고 지식과 인격성과 도덕성을 갖춘 방백들이 종처럼 땅에 걸어다니게 된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일들은 아마 미련한 통치자가 등장함으로써 하급 관리들을 잘못 등용한 때문일 것이다.

교회에서든지 국가에서든지 일꾼을 잘 등용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교회는 성경의 교훈대로 자격자들을 직분자로 세워야 하며 국가도 이념과 도덕성과 인품 등 자질 있는 자를 세워야 할 것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죽은 파리가 향기름으로 악취가 나게 하듯이, 적은 우매가 지혜와 존귀로 패하게 한다. 성도는 하나님의 지혜와 은혜를 항상 구하고 의로움과 선함으로 단장해야 할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평소에도 지혜를 말하는 지혜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죄씻음 받고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로서 날마다 성령을 따라 행함으로 몸의 죄성을 이기고 경건하고 거룩하고 선한 언행을 해야 할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윗사람이 화를 낼 때 자리를 박차고 떠나지 말아야 한다. 겸손한 마음으로 공순하게 행할 때 큰 허물도 가볍게 될 것이다.

넷째로, 우리는 우리 교회가 건전한 지식과 식견, 좋은 인격과 재능을 가진 봉사자들을 추천하고 세우기 위해 기도하고 힘써야 한다.

 

8-20절, 보응, 지혜의 유익, 복된 나라

[8-9절] 함정을 파는 자는 거기 빠질 것이요 담을 허는 자는 뱀에게 물리리라. 돌을 떠내는 자는 그로 인하여 상할 것이요 나무를 쪼개는 자는 그로 인하여 위험을 당하리라.

함정을 파는 자는 거기 빠질 것이다. 남을 해치려는 계획을 세우는 자는 자신이 해를 당하게 될 것이다. 시편 7:15, “저가 웅덩이를 파 만듦이여, 제가 만든 함정에 빠졌도다.” 시편 57:6, “저희가 내 앞에 웅덩이를 팠으나 스스로 그 중에 빠졌도다.” 파사의 왕후가 된 에스더 때에 왕의 악한 최고위 신하 하만이 한 예이었다(에 5장; 7:10).

또 담을 허는 자는 뱀에게 물릴 것이다. 담을 헌다는 말은 남의 땅을 취하려고 경계가 되는 담을 헌다는 뜻이라고 본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에서 도적질하지 말라고 명하셨을 뿐 아니라, 또 율법에서 땅의 경계표를 이동시키지 말라고 교훈하셨다. 신명기 19:14, “네 기업된 소유의 땅에서 선인(先人)의 정한 네 이웃의 경계표를 이동하지 말지니라.” 잠언도 선조가 세운 옛 지계석[땅 경계의 표가 되는 돌]을 옮기지 말라고 교훈하였다(잠 22:28; 23:10).

또 돌을 떠내는 자는 그로 인해 상할 것이며 나무를 쪼개는 자는 그로 인해 위험을 당할 것이다. ‘떠내다’는 원어(나사)는 ‘(채석장에서) 떠내다’ 혹은 ‘제거하다’는 뜻이며(BDB), ‘쪼개다’는 원어(바카)는 ‘쪼개다’ 혹은 ‘뚫다’는 뜻이다(BDB). 이것은 땅의 경계석을 옮기든지, 남의 밭이나 과수원 울타리를 침범하는 행위를 가리킨 것 같다. 자기 땅을 넓히려고 담을 헐거나 땅의 경계표를 옮기거나 남의 소산을 취하려고 울타리를 뚫는 자는 뱀에게 물리거나 상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악행을 공의로 징벌하신다.

[10-11절] 무딘 철 연장 날을 갈지 아니하면 힘이 더 드느니라. 오직 지혜는 성공하기에 유익하니라. 방술을 베풀기 전에 뱀에게 물렸으면 술객은 무용하니라.

본문은 지혜의 필요성과 유용성을 말한다. 무딘 철 연장 날을 갈지 아니하면 힘이 더 든다. 이것은 목수들이 잘 알고 주부들도 부엌에서 쓰는 칼날이 무디면 고기를 썰 때 힘들다는 것을 잘 안다. 이와 같이, 지혜가 없으면 무슨 일이든지 하기 힘들고 지혜가 있으면 무슨 일이든지 하기 쉽다. 지혜는 성공하기에 유익하다. 잠언 3:15-18은 지혜의 복됨을 잘 증거했다.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너의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 그 우편 손에는 장수(長壽)가 있고 그 좌편 손에는 부귀[부와 존귀]가 있나니 그 길은 즐거운 길이요 그 첩경은 다 평강이니라.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

본문은 또, “방술을 베풀기 전에 뱀에게 물렸으면, 술객은 무용하니라”고 말한다. ‘술객’으로 번역된 원어(바알 할라숀)는 ‘혀의 주인, 달변가’라는 뜻이다. 뱀을 다루는 마술사는 뱀에게 말을 해 뱀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게 한다. 본문은 마술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고 비교하여 말하는 것뿐이라고 본다. 마술은 속임수도 있고 악령의 역사도 있다고 본다. 출애굽기에 보면, 애굽의 술객들은 그 술법으로 그들의 지팡이가 뱀이 되게도 하였고 강물로 피가 되게도 하였고 개구리로 땅에 올라오게도 하였다(출 7-8장).

그러나 사람이 방술을 베풀기 전에 뱀에게 물렸으면 술객은 무용하다. 아무리 달변가라 해도 이미 닥친 그 해를 피하거나 모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미리 지혜를 가지고 조치했어야 했다.

[12-15절] 지혜자의 입의 말은 은혜로우나 우매자의 입술은 자기를 삼키나니 그 입의 말의 시작은 우매요 끝은 광패니라. 우매자는 말을 많이 하거니와 사람이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신후사(身後事)[그가 죽은 후에 있을 일]를 알게 할 자가 누구이냐? 우매자들의 수고는 제각기 곤하게 할 뿐이라. 저희는 성읍에 들어갈 줄[들어가는 길]도 알지 못함이니라.

지혜자의 말과 우매자의 말은 너무 다르다. 지혜자의 말은 은혜롭고 덕스럽다. 그러나 우매자의 말은 어리석고 거칠다. 어리석은 자들은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고 하나님의 뜻과 계명을 행함이 없는 자들이며 그들에게서는 경건과 선행을 기대할 수 없다. 우매자의 입술은 자기를 삼킨다. 그 입의 말의 시작은 우매이며 끝은 광패이다.

갈라디아서에 증거된 대로, 사람이 육신의 소욕을 따라 산 결과는 분쟁과 시기와 분냄 등이지만,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화평과 자비와 선함과 온유를 포함한다(갈 5:19-23). 야고보도 야고보서 3:14-17에서 독한 시기와 다툼은 세상적, 정욕적, 마귀적 지혜이며, 위로부터 난 지혜는 성결하고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다고 증거하였다.

본문은 또, “우매자는 말을 많이 하지만 사람이 장래 일을 알지 못하니 그가 죽은 후에 있을 일을 알게 할 자가 누구이냐?”고 말한다. 우매자가 말을 많이 하는 것은 자신을 똑똑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아는 척을 많이 하고 쓸데없는 말, 헛된 말을 많이 한다. 그러나 그는 실상 자신의 장래 일을 알지 못하고 죽은 후의 일은 더더욱 알지 못한다. 사람의 지식은 지극히 제한적이다.

본문은 또, “우매자들의 수고는 제각기 곤하게 할 뿐이라. 저희는 성읍에 들어갈 줄도[들어가는 길도] 알지 못함이니라”고 말한다. 성에 들어가는 길은 아이들도 아는 길이다. 천국 가는 길은 아이들도 알 수 있는 길이다. 그러나 우매자는 돈 벌기 같은 세상일들에 바빠 천국 가는 중요한 일도 알지 못한다. 그들의 수고는 자신들을 피곤하게 할 뿐이다. 그들은 참 평안과 휴식의 세계를 알지 못한다.

[16-20절] 왕은 어리고 대신들은 아침에 연락하는 이 나라여, 화가 있도다. 왕은 귀족의 아들이요 대신들은 취하려 함이 아니라 기력을 보하려고 마땅한 때에 먹는 이 나라여, 복이 있도다. 게으른즉 석가래가 퇴락하고 손이 풀어진즉 집이 새느니라. 잔치는 희락을 위하여 베푸는 것이요 포도주는 생명을 기쁘게 하는 것이나 돈은 범사에 응용되느니라. 심중에라도 왕을 저주하지 말며 침방(寢房)[침실]에서라도 부자를 저주하지 말라. 공중의 새가 그 소리를 전하고 날짐승이 그 일을 전파할 것임이니라.

왕이 나이가 어리고 경건과 지혜와 지식, 경험도 부족하고 판단력과 지도력, 선함, 인내, 용기, 포용력 등도 부족하고 대신들은 자기 일에 충실치 않고 게을러 아침부터 술이나 마시는 나라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왕이 귀족의 아들로 자라 좋은 인격자이며 하나님을 경외함과 지혜와 지식, 판단력과 지도력, 또 백성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며 맡겨진 직무에 충실한 덕을 있고 대신들도 기력을 보충하기 위해 필요한 때 음식을 먹는 그런 나라는 복이 있을 것이다.

사람의 손이 게으르면 그의 집이 무너지고 지붕이 샐 것이다. 나라의 이치도 비슷하다. 19절은 그들이 쾌락을 위해 잔치하고 기쁨을 위해 포도주를 마시며 모든 일을 돈으로 처리하려 한다는 뜻 같다. 그렇게 해이하고 게으른 통치자들이 있는 나라는 화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마음으로라도 왕을 저주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권세자들을 세우신 줄 알고 그들을 존중하고 비방하지 말고 주 안에서 복종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롬 13:1-7; 딤전 2:1-2). 또 우리는 침실에서도 부자를 저주하지 말아야 한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함정을 파는 자는 거기 빠질 것이요 담을 허는 자는 뱀에게 물릴 것이다. 하나님께서 악을 행하는 자에게 공의로 보응하심을 깨닫고 우리는 남에게 악을 행치 말아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지혜의 필요성과 유용성을 깨닫고 실생활에서 항상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며, 짧은 인생을 지혜롭게 살기를 소원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악하고 파괴적인 우매자가 되지 말고, 남에게 유익을 주는 선하고 덕스럽고 은혜로운 말을 하는 지혜자가 되어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통치자들과 백성이 게으르지 않고 경건하고 도덕적이고 근면하며 자기의 일들에 충실한 나라가 되기를 기도해야 한다.

 

11장: 구제, 선행, 근면, 즐거운 삶

[1-2절] 너는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나눠줄지어다. 무슨 재앙이 땅에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함이니라.

우리는 구제할 때 먹는 음식을 물 위에 던지듯이, 또 일곱 사람이나 여덟 사람에게 나눠주듯이 후하게 해야 한다. 성경은 구제에 대해 ‘흩어 구제한다’는 표현을 하며(시 112:9; 잠 11:24), 우리가 구제할 때 인색한 마음으로 하지 말고 너그러이 하라고 말한다. 신명기 15:7-8, 10, “네 손을 움켜쥐지 말고 . . . 그 요구하는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 “구제할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우리는 구제한 것을 여러 날 후 찾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보상하실 것이다. 신명기 15:10, “이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범사와 네 손으로 하는 바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잠언 11:25,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잠언 19:17,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꾸어드리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 누가복음 6: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본문은 땅에 무슨 재앙이 임할지 알지 못한다고 말한다. 구제한 돈보다 도적이나 사고로 잃는 돈이 더 많게 될 수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6:1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3-4절] 구름에 비가 가득하면 땅에 쏟아지며 나무가 남으로나 북으로나 쓰러지면 그 쓰러진 곳에 그냥 있으리라. 풍세를 살펴보는 자는 파종하지 아니할 것이요 구름을 바라보는 자는 거두지 아니하리라.

본문은 재앙에 대한 설명이라고 본다. 폭우가 쏟아지면 나무들이 남으로나 북으로 쓰러질 것이다. 사람이 나무같이 죽고나면 아무 일도 못한다. 재앙의 날과 죽음의 날이 찾아올 것이다. 재앙의 날에는 사람들이 은을 거리에 던지며 금을 더러운 물건같이 여길 것이다(겔 7:19). 그때 우리는 더 이상 선을 행할 힘도 기회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재앙을 당하기 전에 또 우리의 목숨이 있는 동안 선을 행해야 한다. 잠언 3:27은 “네 손이 선을 베풀 힘이 있거든 마땅히 받을 자에게 베풀기를 아끼지 말라”고 말한다. 갈라디아서 6:10은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고 말한다. 또 야고보서 4:17은,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고 말한다.

“풍세를 살펴보는 자는 파종하지 아니할 것이요 구름을 바라보는 자는 거두지 아니하리라”는 말은 바람을 보고 파종을 미루거나 구름을 보고 추수를 늦추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그러나 농사하는 자는 웬만한 어려움은 각오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그의 계명에 합한 선한 일을 할 때 어려움이 예견되어도 또 어려운 일이 좀 있을지라도 낙심치 말고 선을 행해야 한다. 갈라디아서 6:9는,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말한다. 전도도, 구제와 선행도 그러하다.

[5-6절] 바람의 길이 어떠함과 아이 밴 자의 태에서 뼈가 어떻게 자라는 것을 네가 알지 못함같이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네가 알지 못하느니라. 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거두지 말라. 이것이 잘될는지, 저것이 잘될는지, 혹 둘이 다 잘될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고 임의로 부는 바람의 길을 알지 못하고 또 아이 밴 여인의 태에서 아기의 뼈가 어떻게 자라는지 알지 못한다. 이처럼 우리는 모든 일을 성취하시는(아사)[행하시는] 하나님의 일들을 알지 못한다. 실상, 바람도, 생명의 잉태와 성장도 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이다. 세상의 크고 작은 모든 일들이 다 그렇다. 요셉이 형들의 미움을 받아 애굽에 종으로 팔려 갔을 때, 또 그가 시위대장의 아내의 유혹을 거절했다가 억울하게 옥에 갇혔을 때, 아무도 그가 애굽 총리가 되리라고 상상치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이한 섭리 가운데 그를 총리가 되게 하셨다. 농부가 씨를 심고 물을 주지만,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구원이나 성화의 일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기회 있는 대로, 힘있는 대로, 선을 행하고 말씀을 널리 전파해야 한다.

[7-8절] 빛은 실로 아름다운(마소크)[즐거운](BDB, NASB) 것이라. 눈으로 해를 보는 것이 즐거운(토브)[좋은] 일이로다. 사람이 여러 해를 살면 항상 즐거워할지로다. 그러나 캄캄한 날이 많으리니 그 날을 생각할지로다[그러나 사람이 여러 해를 살고 그 모든 해들을 기뻐할지라도 어두움의 날들을 기억할지로다. 이는 그것들이 많음이라]. 장래 일은 다 헛되도다.

태양 빛은 일곱 가지의 색깔을 띠는 아름다운 빛이다. 이 빛으로 만물의 형상과 색깔이 드러난다. 사람이 대낮의 불타는 태양을 직접 쳐다볼 수는 없으나, 일출이나 일몰의 아름다운 태양은 볼 수 있다.

빛은 기쁘고 즐거운 시간을 상징하고 어두움은 슬프고 고통스런 시간을 상징한다. 사람은 인생의 긴 여정을 사는 동안 하나님을 의지하고 의롭게 살며 기쁘고 즐겁고 밝게 인생을 살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인생의 여정에 슬픈 날, 고통의 날도 많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세상의 삶은 슬픔과 피곤과 고통이 많고 심지어 의인이 당하는 핍박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며 앙망하는 자는 항상 새 힘을 얻고(사 40:31) 또 고난 많은 세상을 이길 것이다(요일 5:4).

[9-10절]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 눈이 보는 대로 좇아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 그런즉 근심으로 네 마음에서 떠나게 하며 악으로 네 몸에서 물러가게 하라. 어릴 때와 청년의 때가 다 헛되니라.

청년의 때는 꿈과 소망이 있고 무슨 일이든지 하려는 소원이 많은 때이다. 사람이 늙을수록 꿈과 소망이 점점 줄어들고 마침내 다 없어지고 죽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청년의 때에 기쁨과 즐거움으로 살고, 하고 싶은 일을 해볼 수 있다. 너무 우울하거나 의기소침하거나 짜증스럽게 살지 말고 쾌활하고 씩씩하게 사는 것이 좋다. 그러나 모든 일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죄 짓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청년 때에 무슨 일이든지 해볼 수 있으나 오직 죄 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본문은 청년 때의 생활 원리 두 가지를 교훈한다. 이것은 우리들 모두에게도 유익하다. 첫째는 기쁘게 살라는 것이다. 슬픔과 근심은 우리의 심신을 피곤케 하고 해롭게만 한다. 이 세상에는 항상 고난이 있다. 그러나 섭리자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기쁘게 살 수 있다. 둘째는 악을 조심하라는 것이다.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을 누리되 악을 행치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장차 그가 우리의 모든 행위들을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본장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식물을 물 위에 던지듯이 일곱이나 여덟에게 나눠주어야 한다. 구제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과 명령이다. 구제는 남에게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도 복이 된다.

둘째로, 우리는 재앙을 당하기 전에 또 목숨이 있는 동안 선을 행해야 한다. 우리는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의 뜻과 성경 교훈에 맞는 선한 일이라면 크고 작은 어려움이 예상되더라도 낙심치 말고 행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세상의 모든 일들을 행하시며 이루시는 이가 하나님이심을 알고 우리의 모든 일들을 다 하나님께 맡기며 살고, 오직 하나님께서 명하신 우리의 의무를 날마다 충실히, 부지런히 행해야 한다.

넷째로, 성도들과 특히 청년들은 세상을 기쁘게 살고 원하는 일들을 행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심판을 기억하고 악을 행치 말아야 한다.

 

12장: 사람의 본분

[1-4절]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 그런 날에는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떨 것이며 힘있는 자들이 구부러질 것이며 맷돌질하는 자들이 적으므로 그칠 것이며 창들로 내어다 보는 자가 어두워질 것이며 길거리 문들이 닫혀질 것이며 맷돌 소리가 적어질 것이며 새의 소리를 인하여 일어날 것이며 음악하는 여자들은 다 쇠하여질 것이며.

사람에게는 곤고한 날, 아무 낙이 없는 때가 온다. 사람은 그런 날이 오기 전, 즉 청년의 때에 창조자 하나님을 기억해야 한다. 2절부터 6절까지의 말씀은 사람의 노년기를 묘사한 것이라고 본다.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다는 것은 사람의 얼굴과 눈빛이 쇠해짐을 말하는 것 같다.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는 것은 많은 눈물을 흘린 다음에 또 다른 근심거리가 생기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떠는 것은 자기 몸을 지키는 손과 팔이 떨리는 것을 말하고, 힘있는 자들이 구부러지는 것은 등과 무릎이 구부러지고 약해지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맷돌질하는 자들이 적으므로 그치는 것은 이가 많이 빠져 음식을 잘 씹지 못하는 것을 가리키고, 창들로 내어다 보는 자가 어두워지는 것은 눈이 어두워 침침해지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길거리 문들이 닫혀지는 것은 입의 말이 적어지고 귀도 어두워지는 것을 가리키고, 새의 소리를 인해 일어나는 것은 이른 새벽 새 소리에도 잠을 깨는 것을 말하고, 음악하는 여자들이 쇠해지는 것은 목소리가 쇠해지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5절] 그런 자들은 높은 곳을 두려워할 것이며 길에서는 놀랄 것이며 살구나무가 꽃이 필 것이며 메뚜기도 짐이 될 것이며 원욕이 그치리니 이는 사람이 자기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고 조문자들이 거리로 왕래하게 됨이라.

높은 곳을 두려워하는 것은 연로한 자들이 높은 곳에 서기를 두려워하는 것을 가리키고, 길에서 놀라는 것은 길을 걸을 때도 놀라는 것을 말한다. 살구나무가 꽃이 피는 것은 머리가 백발이 되는 것을 가리킬 것이다. 또 메뚜기가 짐이 되는 것은 작은 일도 힘들어하는 것을 말하고, 원욕(願慾)이 그치는 것은 욕구가 없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이렇게 사람은 쇠약해져서 죽고 조문객들이 방문한다.

[6절] 은줄이 풀리고 금 그릇이 깨어지고 항아리가 샘 곁에서 깨어지고 바퀴가 우물 위에서 깨어지고.

은줄이 풀리는 것은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신경조직이나 근육이 약해지는 것을 말하고, 금 그릇이 깨어지는 것은 사람의 뇌가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 같다. 항아리가 샘 곁에서 깨어지고 바퀴가 우물 위에서 깨어지는 것은 좌우에 방을 가진 심장과, 동맥, 정맥의 혈관이 그 기능을 그치는 것을 가리키는 것 같다.

[7-8절]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죽음은 몸과 영혼의 분리, 즉 영혼이 몸을 떠나는 현상이다. 사람이 죽으면 몸은 흙으로 돌아가고 그 영혼은 하나님께로 돌아가 심판을 받는다. 죽은 후의 영혼은 천국 혹은 지옥에 들어간다. 전도자는 또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고 말한다. 이것은 전도서의 주제이기도 하다. 죽음은 이 세상의 삶이 허무하다는 것을 잘 증거한다.

[9절] 전도자가 지혜로움으로 여전히 백성에게 지식을 가르쳤고 또 묵상하고 궁구하여 잠언을 많이 지었으며.

성경은 하나님과 우주에 대한 참된 지식을 전하며 가르친다. 성경 전체는 한마디로 지혜와 지식의 말씀이다. 솔로몬은 지혜의 말씀인 잠언 3천 개를 말하였다(왕상 4:32).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서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깨닫고 받은 지혜의 지식을 하나님의 영의 감동으로 기록한 것이다. 그 내용들은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신 것들이지만, 인간 저자가 받고 묵상하고 연구하며 가르친 지식이다. 성경은 참으로 지혜와 지식의 보배로운 창고이다. 성경은 성도들을 노인보다, 스승보다, 또 원수보다 지혜롭게 한다(시 119:98-100).

[10절] 전도자가 힘써 아름다운 말을 구하였나니 기록한 것은 정직하여 진리의 말씀이니라.

‘아름다운 말’이라는 원어(디브레 케페츠)는 ‘기뻐할 만한 말들’이라는 뜻이다. 성경은 우리가 기뻐할 만한 말씀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복되고 좋은 말씀일 뿐 아니라, 내게 기쁨이 되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편 119:24는, “주의 증거는 나의 즐거움이요”라고 말했고 시편 119:92는, “주의 법이 나의 즐거움이 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내 고난 중에 멸망하였으리이다”라고 말했다.

또 성경에 기록된 내용은 정직하여 진리의 말씀이다. 성경은 인생과 우주의 참된 이치에 대해 증거하는 진리의 말씀이다. 주 예수께서는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라고 말씀하셨다(요 17:17). 시편 19:8은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한다”고 말했고, 잠언 1:1-3은 잠언이 사람들로 하여금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며 지혜롭게, 의롭게, 공평하게, 정직하게 행할 일에 대하여 훈계를 받게 하기 위해 쓰여졌다고 말한다.

[11절] 지혜자의 말씀은 찌르는 채찍 같고 회중의 스승의 말씀은 잘 박힌 못 같으니 다 한 목자의 주신 바니라.

성경은 찌르는 채찍같이 또는 뾰족한 막대기같이, 또 잘 박히는 못과 같이 듣는 모든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책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바른 길을 지시해주고 또 우리의 잘못을 지적해주고 잘 박힌 못같이 우리 심령에 박혀 기억되고 활동한다. 그러므로 디모데후서 3:16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고 말하였다. 또 성경은 한 목자께서 주신 말씀이다. 그 목자는 하나님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참된 목자이시다(시 23:1; 80:1). 성경은 하나님의 권위로 주신 말씀, 곧 우리의 신앙생활에 정확무오한 법칙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12절] 내 아들아, 또 경계를 받으라. 여러 책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케 하느니라.

본문은 “더욱이 내 아들아, 그것들로부터 교훈을 받으라”고 번역할 수 있다(KJV). ‘그것들’은 성경말씀들을 가리킨다. 우리는 큰 유익이 있는, 하나님의 권위를 가진 성경말씀으로 교훈을 받고 경계를 받아야 한다. 성경은 교훈과 책망을 주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세상에는 많은 종류의 책들이 있다. 이 세상에서 책들을 만드는 일과 그것들을 연구하는 일은 끝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에게는 오직 한 권의 책이 있다. 그 책이 중요하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며 그 책을 공부하는 것이 인생에게 가장 중요하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며 거기에는 다른 무슨 책들이나 다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특별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13절]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일의 결국을 다 들었다”는 말씀은 전도서에서 말한 대로 세상의 모든 일, 즉 해 아래서 하는 모든 일이 다 헛되며 사람의 모든 수고와 즐거움도 그러하다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결론적으로 이 허무한 세상에서 사람의 본분은 무엇인가? ‘본분’이라는 원어()는 ‘모든 것’이라는 뜻이다. 본문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는 것, 그것이 사람이 행해야 할 본분이며 사람이 행해야 할 모든 것이라고 말한다. 이 진리는 성경의 다른 여러 말씀과도 일치한다.

신명기 10:12-13,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미가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즉, 사람의 본분은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게 사는 것이다.

[14절] [이는]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심판하실 것임이니라].

본문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 사람의 본분인 이유를 말한다.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켜야 하는 까닭은, 하나님께서 마지막 심판 날에 사람의 모든 행위, 심지어 사람의 은밀한 행위까지도 선악간에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은 대법원의 최종적, 확정적 판결과 같다. 사람이 거기에서 정죄되면 천국에서 제외되고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정직하고 선하게 살아야 한다.


본장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사람은 청년의 때에, 즉 노년기를 맞아 몸의 모든 기관들이 점점 쇠약해지고 마침내 죽음에 이르기 전에, 세상에서 육신의 죄악된 욕망을 따라 허무한 삶을 살지 말고,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를 경외하고 그를 믿고 섬기며 천국을 소망하고 성경말씀에 순종하여 정직하게 살고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성경이 지혜와 지식의 말씀, 기뻐할 만한 복된 말씀, 정직한 말씀, 진리의 말씀, 하나님의 권위로 인쳐진 하나님의 말씀이며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말씀임을 깨닫고 성경을 사랑하여 규칙적으로 읽고 묵상하며 믿고 실천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이 세상의 부귀와 권세와 영광, 그리고 육신의 모든 즐거움이 다 일시적이며 지나가는 것들이며 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된 것임을 알고, 또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을 기억하고,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는, 사람의 본분을 다해야 한다.

 

 미주

1) 포로 후기의 것으로 봄. 자유주의자들 외에, Hengstenberg, Delitzsch, Lange, E. J. Young, H. C. Leupold 등이 이런 견해를 취함.

2) Gleason L. Archer, Jr., 김정우 역, 구약총론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85), 551쪽.

3) 위의 책, 560쪽.

4) 는 보통 ‘그리고, 또’라고 번역되지만, 영어성경은 ‘더욱이’(more- over)(KJV), ‘결국’(after all)(NASB) 등으로 번역하였다.

5) 원문에 ‘미련한 것’이라는 단어(웨핫시켈루스) 아래 붙은 분리액센트(티프카 )는 이 번역을 지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