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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애가 강해

김효성 목사

2018년 1월 12일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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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우리는 신구약 66권의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의 신앙과 생활에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임을 믿는다. 성경은 개인의 신앙생활뿐 아니라, 교회의 모든 활동에도 유일한 규범이다. 오늘날처럼 영적으로 혼란한 시대, 다양한 풍조와 운동이 많은 시대에, 우리는 여전히 성경으로 돌아가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묵상하기를 원하며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든 뜻을 알기를 원한다.

예레미야 애가의 저자는 선지자 예레미야이며, 예루살렘 멸망 후에 썼을 것이다. 예레미야 애가의 주요 내용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슬퍼함이다. 본서의 특징적 진리는 하나님의 진노이다. 본서에는 ‘진노’ ‘노’라는 말이 14회, ‘원수’ ‘대적’이라는 말이 24회, 또 ‘멸망’ ‘황폐’라는 말이 19회 나온다. 예루살렘 멸망의 원인은 죄 때문이다. 예루살렘은 그 거민들의 죄가 많으므로(1:5), 그들이 크게 범죄하므로(1:8),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였으므로(1:18), 나의 모든 죄악을 인하여(1:22), 우리의 범죄함과 패역함 때문에(3:42), 내 백성의 죄가 소돔의 죄악보다 중하므로(4:6), 그 선지자들의 죄와 제사장들의 죄악을 인하여(4:13), 우리의 범죄함을 인하여(5:16) 멸망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 이스라엘이라 할지라도 범죄할 때에 심히 노하셨다. 또 본서는 인간의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긍휼로 말미암음을 계시한다. 5:21,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셌사오니.” 이것은 성경 전체의 요지이다.

부수적으로, 본서는 어크로스틱(acrostic)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어크로스틱 형식이란 각절이 알파벳 순서로 시작되는 것을 말한다. 1, 2, 4장은 각각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로 시작되는 22절로 구성되었고, 3장의 66절은 세 절씩 알파벳 순서로 시작된다. 단지 2:16-17; 3:46-51; 4:16-17은 ע과 פ의 순서가 바뀌었다. 그러나 5장은 어크로스틱 형식을 사용하지 않고 있다.

 

본문 혹은 각주에 자주 사용된 약어

KJV

영어 King James Version

NASB

영어 New American Standard Version

NIV

영어 New International Version

LXX

고대 헬라어 70인역

Syr

고대 수리아어역

It 

고대 라틴어역

Vg   

고대 라틴어 Vulgate역

BDB

Brown-Driver-Briggs, Hebrew Lexicon of the O. T.

KB

Koehler-Baumgartner, Lexicon in Veteris Testamenti Libros

NBD

The New Bible Dictionary. IVP.

Poole

Matthew Poole, A Commentary on the Holy Bible

JFB

Jamieson, Faussett, Brown 주석

박윤선

박윤선, 구약주석.

 

제목 차례

1장: 예루살렘의 황폐함을 슬퍼함

2장: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

3장: 선지자의 고통과 소망 

4장: 예루살렘 거민을 낮추심

5장: 이스라엘의 회복을 간구함

 

 

예레미야 애가는 선지자 예레미야가 쓴 슬픔의 노래이다. 이 책은 예루살렘 멸망을 보면서 쓴 선지자의 고통스런 심령에서 나온 표현들이요 그의 눈물로 얼룩져 있는 글들이다.


 

1장: 예루살렘의 황폐함을 슬퍼함

1-6절, 슬프다, 이 성이여

[1절] 슬프다, 이 성이여. 본래는 거민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 . . .

예레미야는 말한다. “슬프다, 이 성이여, 본래는 거민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히 앉았는고. 본래는 열국 중에 크던 자가 이제는 과부 같고 본래는 열방 중에 공주 되었던 자가 이제는 조공 드리는 자가 되었도다.” 히브리어 원문대로 읽으면, “백성이 가득하던 성이 어찌하여 적막히 앉았는고. 그것이 과부같이 되었도다. 열국들 중에 크고 지방들 중에 공주이었던 그가 종이 되었도다”(KJV).

예루살렘 성은 거민의 수가 심히 줄었다. 바벨론 군대의 침입과 전쟁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어떤 이들은 사방으로 도망쳤으며 또 많은 이들은 포로로 잡혀갔기 때문에 이제 예루살렘 성의 거민의 수는 매우 조금이며 성은 적막한 곳이 되었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 성을 과부와 같다고 표현한다. 남편의 사랑을 받으며 가족들을 위하여 식사 준비, 빨래, 청소 등 가사의 일로 바쁘게 생활하는, 그러나 행복한, 보통 여인들과 대조하여 한가하고 쓸쓸하며 행복과 낙이 없이 지내는 과부에다 비유한 것이다.

또 예레미야는 열국들 중에 크고 지방들 중에 공주같이 존귀하던 성 예루살렘이 이제는 종이 되었다고 표현한다. 예루살렘 성은 다윗 왕의 성이며 솔로몬 왕의 성이며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성이었다. 그 성은 세상적으로도 부귀와 권세와 영광이 있었던 성이었다. 그곳은 이스라엘 영토 중에서 가장 귀한 곳이며 유다의 여러 성읍들 중에서 가장 귀한 곳이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 성은 경건한 성도들이 가장 사랑하고 즐거워했던 성이었다. 그러므로 시편 137편의 저자는 말하기를,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지 아니하거나 내가 너를 나의 제일 즐거워하는 것보다 지나치게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지로다”라고 하였다(시 137:6). 그러나 이제 이 아름다운 성이 바벨론 관리들의 종처럼 그들의 지배와 통제를 받고 있으며 그 거민들은 학대와 강제 노역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2절] 밤새도록 애곡하니 눈물이 뺨에 흐름이여. 사랑하던 자 . . . .

예레미야는 또 말한다. “밤새도록 애곡하니 눈물이 뺨에 흐름이여. 사랑하던 자 중에 위로하는 자가 없고 친구도 다 배반하여 원수가 되었도다.” 본절의 주어는 예루살렘 성이다. 그것은 선지자 자신을 포함하여 그 성의 모든 거민들을 가리킬 것이다. ‘밤새도록’이라는 원어(발라옐라)는 ‘밤에’라는 뜻이다.

그 성의 거민들은 밤에 애곡하였다. 왜 그들이 밤에 애곡하였는가? 그들이 아마 낮에는 노역으로 수고로운 시간을 보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밤에, 즉 좀 쉬고 웃고 해야 할 시간에 쉬지 못하고 웃지 못하고 애곡한다는 뜻일 것이다.

또 예루살렘 성을 사랑하던 모든 자들 중에 위로하는 자가 없고 모든 친구도 배반하여 원수가 되었다. 전에 이스라엘과 유다가 강한 때에는 조공을 바치고 친근히 하고 동맹관계를 맺었던 이웃 나라들이 많았으나 예루살렘이 멸망할 당시에는 그들이 다 등을 돌렸다. 이웃 나라들과의 튼튼해 보이던 동맹관계가 하루아침에 깨지는 것은 역사에서도 종종 볼 수 있는 일이다.

[3절] 유다는 환난과 많은 수고로 인하여 사로잡혀 갔도다. . . .

예레미야는 또 말한다. “유다는 환난과 많은 수고로 인하여 사로잡혀 갔도다. 저가 열방에 거하여 평강을 얻지 못함이여. 그 모든 핍박하는 자가 저를 쫓아 협착한 곳에 미쳤도다.” 유다가 ‘환난과 많은 수고로 인하여’ 사로잡혀 갔다는 말은 영어성경들의 번역대로 유다 백성이 환난과 많은 수고를 당하는 중에(NASB) 혹은 수고를 당한 후에(NIV) 포로로 사로잡혀갔다는 뜻일 것이다. 그들은 이방 나라들에 거하여 충분한 잠과 휴식을 취하지 못하였다.

[4절] 시온의 도로가 처량함이여, 절기에 나아가는 사람이 . . . .

예레미야는 또 말한다. “시온의 도로가 처량함이여, 절기에 나아가는 사람이 없음이로다. 모든 성문이 황적하며 제사장들이 탄식하며 처녀들이 근심하며 저도 곤고를 받았도다.” ‘처량함’이라는 원어(아벨롯)는 ‘애곡함’이라는 뜻이다(BDB, KJV, NASB, NIV). 이것은 시적 표현이다. 도로들은 애곡하는 것 같았다. 그것은 기쁜 절기에 나아가는 사람들이 없기 때문이다. 또 모든 성문은 황폐하고 적적하며 제사장들이 탄식하며 처녀들이 근심하고 고통을 당하며 그 성 자체가 곤고한 상태에 있었다.

[5-6절] 저의 대적이 머리가 되고 저의 원수가 형통함은 저의 . . . .

예레미야는 또 말한다. “저의 대적이 머리가 되고 저의 원수가 형통함은 저의 죄가 많으므로 여호와께서 곤고케 하셨음이라. 어린 자녀들이 대적에게 사로잡혔도다. 처녀 시온의 모든 영광이 떠나감이여, 저의 목백은 꼴을 찾지 못한 사슴이 쫓는 자 앞에서 힘없이 달림 같도다.” 유다 백성의 대적들은 그들의 머리가 되고 그의 원수들은 형통했다. 하나님께서는 신명기 28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법을 순종하면 열국 가운데서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겠다고 약속하셨고(13절), 반대로 그들이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않으면 그들 중에 우거하는 이방인들이 머리가 되고 그들은 꼬리가 될 것이라고 경고하셨다(43-44절). 유다 백성이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고 많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곤고케 하셨다.

사람이 다 죄인이지만 죄가 작을 경우 하나님께서 그렇게 무섭게 징계하시지는 않는 것 같으나, 사람이 많은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무섭게 징벌하신다. 그들은 곤고함을 당하였고 그들의 어린 자녀는 사로잡혔고 시온의 모든 영광이 떠나갔다. 그들의 방백들은 꼴을 찾지 못해 힘없이 달리는 사슴과 같았다. 노아의 시대에도 사람들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하고 온 땅이 하나님 앞에서 패괴하고 강포가 땅에 가득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홍수로 그 온 땅과 거기 거하는 생물들을 멸하셨다(창 6:5, 11, 13). 그러므로 우리는 죄가 많다고 깨달을 때뿐 아니라, 조금 있을 때에도 회개해야 한다. 죄를 회개치 않고 고집하면 큰 벌을 받고 결국 멸망하게 된다.

1절로 6절까지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세상의 부귀와 영화와 권세를 크게 여기거나 의지하지 말자. 예루살렘의 영광은 그 거민들이 범죄할 때 다 상실되었고 예루살렘은 멸망하고 황폐케 되었다. 세상의 부귀와 영화는 다 없어질 것들이다. 땅의 모든 것은 헛되다(전 1:2).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영광은 풀의 꽃과 같다(사 40:6).

둘째로, 우리는 인간 친구를 너무 신뢰하지 말자. 인간 친구는 어느날 우리를 배신하고 떠나갈 수 있다. 그는 어느 날 더 이상 나의 친구가 아니고 나의 원수가 될 수 있다. 그는 내가 참으로 필요한 때 나의 위로와 도움이 되지 못할 수 있다. 우리는 사람을 의지하지 말자.

셋째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경외하고 의지하고 그의 명령만 순종하자. 그것이 인간의 본문이며 성경의 요지이다(전 12:13). 또 이것이 평강과 형통의 길이다(사 48:18). 이런 맥락에서 주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초월하는 삶을 살라고 교훈하셨다(눅 14:26-27, 33).

 

7-11절, 그 결말을 생각지 않음

[7절] 예루살렘이 환난과 군박을 당하는 날에 옛날의 모든 . . . .

예레미야는 말한다. “예루살렘이 환난과 군박(窘迫)을 당하는 날에 옛날의 모든 즐거움을 생각함이여, 백성이 대적의 손에 빠지나 돕는 자가 없고 대적은 보고 그 황적(荒寂)함을 비웃도다.”

‘군박’이라는 원어(메루드)는 ‘집이 없음, 정처 없음’을 뜻한다. 예루살렘 거민들은 지금 환난을 당하고 정처 없이 행하고 있다. 사람들은 옛날의 모든 즐거움을 생각한다. 옛날에는 성안에 평화와 즐거움이 있었다. 또 먹을것도 넉넉하였고 가족과 이웃 간의 사랑의 교제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들에게 환난과 정처 없음뿐이다.

또 백성은 대적의 손에 빠졌다. 본서에는 ‘대적’(차르 9번)이나 ‘원수’(오옙 , 15번)라는 말이 24번이나 나온다. 백성이 대적의 손에 빠진다는 말은 대적이 지배하고 학대한다는 말이다. 이긴 자는 진 자를 지배하며 진 자는 이긴 자에게 자유를 빼앗긴다.

또 이런 상황에서도, 예루살렘을 돕는 자가 없었다. 예루살렘은 스스로도 자신을 지킬 힘이 없었고 그가 믿었던 애굽의 도움도 얻지 못했다. 물론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지도 못하였다. 사람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지 못하는 것은 가장 불행한 일이다.

또 대적들은 예루살렘의 황적(荒寂)함을 비웃었다. ‘황적함’이라는 원어(미슈밧)는 ‘멸절’이라는 뜻이라고 한다(BDB). 예루살렘은 멸망하였고 대적들은 그 상황을 비웃었다. 예루살렘은 불쌍하기 그지없는 처지가 되었다.

[8절] 예루살렘이 크게 범죄하므로 불결한 자같이 되니 전에 . . . .

예레미야는 말한다. “예루살렘이 크게 범죄하므로 불결한 자같이 되니 전에 높이던 모든 자가 그 적신(赤身)[벌거벗음]을 보고 업신여김이여, 저가 탄식하며 물러가도다.”

예루살렘의 근본적 문제는 그 거민들이 크게 범죄한 데 있었다. 작은 죄는 하나님께 쉽게 용서받기도 할 것이지만, 사람이 큰 죄를 지으면 하나님께서 그를 멸망시키실 수밖에 없다. 소돔과 고모라 성은 그 거민들 중에 의인 10명이 없어서 멸망을 당하였다. 예레미야 5:1에 보면, 예루살렘 성은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어서 하나님의 용서를 받지 못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시지만, 죄를 끝까지 회개치 않는 자를 반드시 벌하신다.

예루살렘의 죄는 또한 ‘불결함’이라는 말로 표현되었다. 죄는 도덕적 불결이다. 예루살렘 거민들이 우상을 섬기고 부도덕하게 행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보기에 좋지 못하고 더럽고 추한 모습이다. 이런 불결함 때문에 그들은 멸망을 당한 것이고 육신적으로도 낮아지고 상하고 찢기고 더러워진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은 다 부서져 공개되었고 왕궁도 공개되고 왕후와 공주들과 궁녀들은 다 짓밟힘을 당했다. 이전에 예루살렘을 높이던 모든 자들, 즉 예루살렘에 조공을 바치러 왔던 이웃 나라들이 이제는 예루살렘의 벌거벗은 모습을 보고 업신여긴다. 예루살렘 거민들 자신도 탄식하며 물러갔다.

[9절] 저의 더러움이 그 치마에 있으나 결국을 생각지 . . . .

예레미야는 또 말한다. “저의 더러움이 그 치마에 있으나 결국을 생각지 아니함이여, 그러므로 놀랍게 낮아져도 위로할 자가 없도다. 여호와여, 원수가 스스로 큰 체하오니 나의 환난을 감찰하소서.”

‘저의 더러움이 그 치마에 있다’는 말은 예루살렘의 영적 음란의 죄를 묘사한 것 같다. 예루살렘은 심히 죄악되었고 더러웠으나 그 결말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의 미래가 복이 될지 화가 될지를 생각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자신의 현재의 일들만 보고 안심하며 즐겼지, 자신의 미래를 대비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예루살렘 성은 놀랍게 낮아졌다. 그 부요하고 영화롭고 평화로웠던 성의 멸망을 누가 상상이라도 했겠는가! 그러나 지금 이렇게 수치와 궁핍을 당하고 있어도 예루살렘을 위로할 자가 아무도 없었다. 사람은 어려울 때 위로의 말에 큰 힘을 얻는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라”고 권면하였다(살전 5:14). 성령께서는 보혜사 곧 우리의 위로자로 오셨다. 그러나 예루살렘에게는 위로자가 없었다.

‘원수가 스스로 큰 체하오니’라는 말은 ‘원수가 거대해졌사오니’라는 뜻이다. 원수들은 거대한 세력이 되었고 예루살렘은 미약해졌다. 이런 처지에서,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여호와여, 나의 환난을 감찰하소서”라고 호소한다. 죄로 인하여 징벌을 받는 성도에게도 한가닥 소망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긍휼을 입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돌아보시면 그는 어떤 곤란 중에서도 구원을 얻을 것이다.

[10절] 대적이 손을 펴서 보물을 빼앗았나이다. 주께서 이미 . . . .

예레미야는 또 말한다. “대적이 손을 펴서 보물을 빼앗았나이다. 주께서 이미 이방인을 금하여 주의 공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셨사오나 저희가 성소에 들어간 것을 예루살렘이 보았나이다.” 성전은 이스라엘에게 가장 귀한 곳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 거룩한 성소로 이스라엘과 이방을 구별하셨다. 그러나 이방인이 성소를 짓밟고 그곳에 들어갔고 성도들은 이제 그것을 보고 탄식한다.

[11절] 그 모든 백성이 생명을 소성시키려고 보물로 식물들을 . . . .

예레미야는 또 말한다. “그 모든 백성이 생명을 소성시키려고 보물로 식물들을 바꾸었더니 지금도 탄식하며 양식을 구하나이다. 나는 비천하오니 여호와여, 나를 권고하옵소서.” 예루살렘에 거하는 백성에게는 먹을 것이 심각하게 부족하였다. 그들은 보물로 식물들을 바꾸어 먹었고 지금도 탄식하며 양식을 구하고 있다. 선지자는 예루살렘의 형편을 대신해 “나는 비천하오니”라고 표현한다. ‘비천하다’는 원어(졸렐라)는 ‘무가치하다’는 뜻이다(BDB). 이스라엘은 무가치하게 되었다. 그러나 선지자는 다시 하나님께 호소한다. “여호와여, 나를 권고하옵소서.” 멸망당하는 이스라엘의 남은 소망은 그것뿐이다. 하나님의 돌아보심 외에는 아무런 희망이 없다.

7절로 11절까지는 요약하면, 첫째, 예루살렘의 멸망의 상황에 대한 묘사이다. 예루살렘은 옛날의 즐거움을 기억할 뿐 지금은 고통과 슬픔뿐이다. 그들은 자유가 없고 돕는 자도 없고 원수의 비웃음을 받으며 벌거벗겨지고 탄식하고 있다. 그들은 놀랍게 낮아졌고 위로하는 자도 없다. 원수는 커졌고 성전은 짓밟혔으며 먹을것이 심각히 부족하였고 심히 비천하고 무가치한 자가 되었다. 둘째, 예루살렘 멸망의 원인은 그들의 큰 죄와 불결 때문이었다(8-9절). 그들은 도무지 미래를 대비치 않았다. 셋째, 멸망하는 예루살렘에 소망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뿐이다. “여호와여 . . . 나의 환난을 감찰하소서”(9절). “여호와여, 나를 권고하옵소서”(11절). 죄인의 소망은 오직 하나님께 있다.

우리는 우리의 현재를 점검하고 미래를 대비하자. 어떻게 대비해야 할까? 우리는 모든 죄를 버리고 하나님 중심으로 삶으로써 대비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구해야 하며,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고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평강을 누릴 것이다. 이사야 48:18, “네가 나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였도다. 만일 들었더면 네 평강이 강과 같았겠고.” 또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의 보호를 체험할 것이다. 이사야 43: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 . .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라.” 또 우리는 이 세상 사는 동안 의식주의 공급함도 받을 것이다. 마태복음 6:33, “너희는 먼저 그의[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12-17절, 주께서 징벌하심

[12절] 무릇 지나가는 자여 너희에게는 관계가 없는가? 내게 . . . .

예레미야는 말하기를, “무릇 지나가는 자여, 너희에게는 관계가 없는가? 내게 임한 근심 같은 근심이 있는가? 볼지어다, 여호와께서 진노하신 날에 나를 괴롭게 하신 것이로다”라고 한다.

유다 땅을 지나는 자들은 유다 백성의 근심과 고통에 대해 무관심한 것 같았다. 그들은 유다 백성의 고통을 동정하지 않았다. 사람이 먹을것이 풍족하고 평안할 때 주위의 가난한 자들에게 무관심한 것도 잘못이다(겔 16:49). 예수께서는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주 안에 있는 형제가 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 되고 헐벗고 병들고 옥에 갇혔을 때 돌아보지 않는 것은 지옥 형벌을 받을 죄라고 말씀하셨다(마 25:42-43). 고난받는 이웃을 돌아보지 않는 것은 죄악이다.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시지만 진노하시는 날이 있다. 그는 진노하신 날에 유다 백성을 괴롭게 하셨다. 역사상 하나님의 심판의 날이 종종 있었고 마지막으로 온 세상을 공의로 심판하실 날이 올 것이다(롬 2:5). 유다의 멸망은 하나님께서 진노하시고 심판하신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평안도 주시지만 환난도 주신다(사 45:7). 세상의 모든 일은 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다(롬 11:36). 참새 한 마리라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마 10:29). 그러므로 우리는 무슨 일이든지 외적인 현상만 보지 말고 그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보아야 한다.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라는 잠언 3:6의 교훈은 바로 하나님의 섭리를 믿으라는 뜻이다.

[13절] [그가] 위에서부터 나의 골수에 불을 보내어 이기게 . . . .

선지자는 또 말한다. “[그가] 위에서부터 나의 골수에 불을 보내어 이기게 하시고 [그가] 내 발 앞에 그물을 베푸사 나로 물러가게 하셨음이여, [그가 나를] 종일토록 고적(孤寂)하여 곤비케 하셨도다.”

“위에서부터 나의 골수에 불을 보내어 이기게 하셨다”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의 뼈들에 불같은 고통을 보내셔서 견딜 수 없게 하셨다는 뜻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그의 발 앞에 그물을 베푸셔서 그로 물러가게 하셨고 종일토록 쓸쓸하여 곤비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을 하셨다. 인생이 누리는 복도, 화도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에게 불같은 화를 내리셨다.

[14절] 내 죄악의 멍에를 그 손으로 묶고 얽어 내 목에 올리사 . . . .

예레미야는 또 말한다. “내 죄악의 멍에를 그 손으로 묶고 얽어 내 목에 올리사 내 힘을 피곤케 하셨음이여, 내가 당할 수 없는 자의 손에 주께서 나를 붙이셨도다.”

하나님께서는 유다의 죄악들과 그 결과를 손으로 묶고 얽어 그의 목에 올리셨고 그의 힘을 피곤케 하셨다. 또 주께서는 그가 당할 수 없는 자의 손에 그를 붙이셨다. ‘주께서’라는 원어(아도나이)는 ‘주인, 주권자’를 가리키는 말이며, 15절에도 두 번 더 나온다.

모세의 율법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만일 하나님의 법을 순종하면 그들 다섯 명이 원수 백 명을 쫓고 그들 백 명이 원수 만 명을 쫓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으나, 반면에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법을 순종치 않으면 원수에게 지고 세계 만국으로 흩어질 것이라고 경고하셨다(레 26:7-8, 17). 유다의 패배는 이 율법대로 된 것이었다.

[15절] 주께서 내 지경 안 모든 용사를 없는 것같이 여기시고 . . . .

예레미야는 또, “주께서 내 지경 안 모든 용사를 없는 것같이 여기시고 성회를 모아 내 소년들을 부수심이여, [주께서] 처녀 유다를 술틀에 밟으셨도다”라고 말한다. ‘없는 것같이 여기셨다’는 원어(실라 hl;s;)는 ‘경멸하셨다’(BDB), ‘거절하셨다’(KB, NASB, NIV)는 뜻이다. 주께서는 유다 지경 안의 모든 군사들을 경멸하며 거절하셨고 대회를 열어 그 청년들을 죽게 하셨다. 원문에는 ‘처녀 유다’ 앞에 “주께서”라는 말이 또 있다. 주께서는 처녀 유다를 술틀에 밟으셨다. 유다는 큰 고통과 굴욕과 멸망을 당하였다.

[16절] 이를 인하여 내가 우니 내 눈에 눈물이 물같이 . . . .

예레미야는 또 말한다. “이를 인하여 내가 우니 내 눈에 눈물이 물같이 흐름이여, 나를 위로하여 내 영을 소성시킬 자가 멀리 떠났음이로다[이는 내 영혼을 소생시킬 위로자가 나를 멀리 떠났음이로다]. 원수들이 이기매 내 자녀들이 외롭도다.” ‘이를 인하여’라는 말은 앞에서 말한 하나님의 징벌과 고통과 멸망을 가리킨다. ‘외롭다’는 원어(쇼메밈)는 ‘황폐하고 쓸쓸하다’는 뜻이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의 참혹한 멸망의 현실 앞에서 울었다. ‘내 눈에’라는 말이 원문에는 두 번 반복되었다(에니 에니). 선지자의 눈에서는 비오듯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위로자이신 하나님께서는 유다를 멀리 떠나셨고 돕지 않으셨다. 원수들은 유다 백성을 이겼고 유다 자손들은 황폐하고 쓸쓸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왜 유다 백성을 멀리 떠나셨는가? 하나님께서 사람을 멀리 떠나시는 것은 한가지 경우뿐, 즉 사람이 범죄하기 때문이다. 이사야 59:1-2는,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라”고 말하였고, 에스겔 8:6은, “그들이 여기서 크게 가증한 일을 행하여 나로 내 성소를 멀리 떠나게 하느니라”고 했다.

[17절] 시온이 두 손을 폈으나 위로할 자가 없도다. 여호와께서 . . . .

예레미야는 또 말한다. “시온이 두 손을 폈으나 위로할 자가 없도다. 여호와께서 야곱의 사면에 있는 자를 명하여 야곱의 대적이 되게 하셨으니 예루살렘은 저희 가운데 불결한 자 같도다.”

시온이 두 손을 펴는 것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습이며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시온을 위로할 자가 없다. 하나님께서도 그를 위로하지 않으시고 사람들 중에도 위로자를 찾을 수 없다. 유다의 사면에 있는 자들이 그들의 대적이 된 것은 하나님의 명령 곧 작정대로 된 것이었다. 하나님의 작정대로 예루살렘은 그들 가운데 불결한 자같이 되었다.

세상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다. 그러므로 요셉은 형들에게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고 말했고(창 45:8), 다윗은 자기를 저주하는 시므이에 대해 “저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며 “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라고 말했다(삼하 16:10-11).

12절로 17절까지도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해 증거한다. 예루살렘은 근심과 고통 가운데 있고 골수까지 아팠고 넘어졌고 황폐하고 쓸쓸하며 곤비하였다. 그들의 군대는 경멸과 죽임을 당했고 유다는 짓밟혔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비오듯 눈물을 흘린다. 유다의 멸망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며 여호와께서 명하신 일이다. 멸망의 때에 유다에게는 위로자가 없었다. 멸망의 원인은 그들의 죄악 때문이었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믿자. 유다의 멸망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다. 그는 세상의 크고 작은 모든 일, 좋고 나쁜 모든 일을 다 섭리하신다. 우리는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만 의지하자. 둘째로, 우리는 죄를 멀리하자. 예루살렘의 멸망의 이유는 그들의 죄 때문이었다. 우리가 세상에서 조심해야 할 일은 오직 죄 짓지 않는 것이다. 죄는 모든 좋은 것을 빼앗고 가로막고 모든 재앙을 가져온다. 죄는 불행과 사망의 원인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죄로부터 구원받고 의롭고 거룩하게 사는 것이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유일한 위로자이시다. 전쟁터 같은 세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가장 큰 복이며 위로와 승리의 길이다.

 

18-22절, 나의 거역과 패역 때문에

[18절] 여호와는 의로우시도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 . . .

예레미야는 말한다. “여호와는[여호와 그는] 의로우시도다. [이는]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였도다[거역하였음이로다]. 너희 모든 백성들아, 내 말을 듣고 내 근심을 볼지어다. 나의 처녀와 소년들이 사로잡혀 갔도다.”

‘여호와 그는’이라는 원문의 표현은 강조적 표현이다. 여호와 그는 의로우신 하나님이시다. 의롭다는 말은 ‘기준에 맞다’는 뜻이다. 그 기준은 하나님 자신, 즉 하나님의 속성, 그의 뜻, 그의 계명과 율법이다. 하나님의 법은 사람의 양심에도 쓰여져 있다.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일만 하신다. 그는 도덕적이시다. 그의 심판은 의롭다. 이것은 의인에게는 감사한 일이지만 악인에게는 두려운 일이다.

예레미야가 하나님을 의롭다고 말하는 까닭은 유다의 멸망이 그의 공의로운 처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레미야는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였음이로다”라고 말한다. 예레미야가 무슨 큰 죄를 지었다는 뜻이 아니다. 물론 그 자신도 부족한 인간이었지만, 그는 지금 유다 민족을 대표하여 유다의 죄악됨을 하나님 앞에 아뢰는 것이다. 유다의 멸망은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까닭에 왔다. 그들의 죄는 사망과 불행을 가져왔다. 죗값은 사망과 불행이다.

예레미야는 “너희 모든 백성들아, 내 말을 들으라”고 말한다. 그는 유다 백성들에게 지금이라도 이 재앙이 하나님의 공의의 처분이요 우리의 죄 때문에 온 것을 알라고 말하는 것일 것이다. 또 그는 그들이 그의 근심을 보라고 말한다. 죄는 불행과 재앙을 가져오고 근심을 가져오지만, 의는 평강과 기쁨을 가져온다. 또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의 소년 소녀들을 “나의 처녀와 소년들”이라고 부르며 그들이 사로잡혀 갔다고 말한다. 그들은 2세들이요 다음 시대를 책임질 자들이며 미래의 소망이다. 그러나 그들이 사로잡혀 갔고 노예가 되었고 인간의 기본적 권리를 다 빼앗긴 자가 되었다. 이제 유다 나라의 소망은 없어졌고 미래는 사라졌다.

[19절] 내가 내 사랑하는 자를 불렀으나 저희가 나를 속였으며 . . . .

예레미야는 또 말한다. “내가 내 사랑하는 자를 불렀으나 저희가 나를 속였으며 나의 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소성[회복]시킬 식물을 구하다가 성중에서 기절하였도다.”

‘내 사랑하는 자들’은 유다의 이웃 나라들, 어려울 때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던 동맹국들을 가리키는 것 같다. 어려울 때 친구가 진짜 친구인데, 그들은 전에는 유다와 친근한 교류가 있었지만, 유다가 어려울 때 관심과 동정을 가지지 않았고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았다. 그들은 유다를 속였고 동맹으로서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또 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자기 영혼을 회복시킬 음식을 구하다가 성중에서 기절하고 죽어 갔다. 인간의 생명을 유지시킬 가장 기본적인 것들이 부족하였다. 당장 먹을 양식들이 없었다.

[20절] 여호와여, 돌아보옵소서. 내가 환난 중에서 마음이 . . . .

예레미야는 말한다. “여호와여, 돌아보옵소서. [이는] 내가 환난 중에서 마음이 괴롭고 마음이 번뇌하오니[번뇌함이니이다]. [이는] 나의 패역이 심히 큼이니이다. 밖으로는 칼의 살육이 있고 집에는 사망 같은 것이 있나이다.”

예레미야의 마음은 괴롭고 번뇌하였다. 평안이 없었다. 행복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호소하며 기도한다. 그는 하나님을 찾고 그의 이름을 부른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아는 자이며 하나님을 믿는 자이다. 하나님을 알고 믿고 의지하는 자마다 어려운 문제를 가지고 있을 때 낙심치 않고 하나님께 기도할 것이다.

또 예레미야는 유다의 번뇌와 고통, 즉 그 재앙의 원인이 무엇인지 말한다. 그것은 그의 패역이 심히 컸기 때문이었다. 유다 백성은 죄 때문에, 큰 죄 때문에 지금 심한 고통과 불행 가운데 떨어졌다. 길거리에는 칼의 살육이 있었고 집 안에는 사망 같은 것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과 질병과 부상으로 인해 죽어가고 있었다.

[21절] 저희가 나의 탄식을 들었으나 나를 위로하는 자가 없고 . . . .

예레미야는 또 말한다. “저희가 나의 탄식을 들었으나 나를 위로하는 자가 없고 나의 모든 원수가 나의 재앙을 들었으나 주께서 이렇게 행하심을 기뻐하나이다. 주께서 반포하신 날을 이르게 하시리니 저희가 나와 같이 되겠나이다.”

‘저희’는 본절 중간에 나오는 ‘나의 모든 원수들’을 가리킬 것이다. 그들은 유다 백성의 탄식을 들었지만 그들 중에는 유다를 위로하는 자가 없었다. 고난당하는 자에게 위로의 말이 큰 힘이 되므로 성경은 성도가 고난 중에 하나님의 위로를 체험함으로 고난당하는 자를 위로하는 자가 되라고 교훈하지만(고후 1:4), 유다 백성은 그런 위로의 말을 들을 수 없었다. 원수들은 유다 백성의 재앙을 들었으나 주께서 그렇게 행하심을 기뻐하였다. 그들은 무정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의 부족과 악함을 알지 못하는 무지한 자들이었다.

본절은 또한 유다의 멸망이 주께서 행하신 일이었음을 증거한다. 그것은 주권자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었다. 이미 앞의 12절, 17절은 여호와께서 진노하셔서 그 사면에 있는 자들을 대적이 되게 하셨음을 말했고, 14절과 15절은 주(아도나이, 3번)께서 유다를 원수의 손에 붙이셨고 그 용사들을 죽게 하셨고 유다를 밟으셨다고 말했다.

본절의 마지막 구절은 다시 번역하면, “주께서 선언하신 날을 오게 하셨나이다. 그러나 저희는 나와 같이 되리이다.” ‘이르게 한다’는 원어(헤베사)는 완료형이다. 한글개역과 영어성경들은 원수 나라들의 멸망을 가리키는 말로 번역했다. 물론 히브리어 완료형은 예언적 의미나 확신과 소원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완료형의 일반적 뜻대로 번역하는 것이 더 나아 보인다. ‘그러나’라는 연결어가 없이 주제가 유다로부터 원수 나라들로 바뀌는 것은 자연스럽지는 않으나 끝부분은 원수들의 멸망을 말한다고 보인다.

그러므로 이 구절의 앞부분은 유다의 멸망을 가리킨다고 보인다. 유다의 멸망은 하나님께서 선언하신 바대로 된 일이었다. 그는 그가 선언하신 그 날을 오게 하셨다. 심판과 멸망의 그 날은 기어코 오고야 말았다. 그러나 유다의 원수들도 멸망할 것이다.

[22절] 저희 모든 악을 주 앞에 나타내시고 나의 모든 죄악을 . . . .

예레미야는 또 말한다. “저희 모든 악을 주 앞에 나타내시고 나의 모든 죄악을 인하여 내게 행하신 것같이 저희에게 행하옵소서. [이는] 나의 탄식이 많고 나의 마음이 곤비하니이다[곤비함이니이다].”

예레미야는 유다의 멸망이 그들의 모든 죄악 때문임을 다시 고백한다. 18절과 20절에 이어 본문에서 세 번째로 언급한 말씀이다. 유다의 멸망은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했기 때문에(18절), 그들의 패역이 심히 컸기 때문에(20절), 또 그들의 모든 죄악 때문에(22절) 온 것이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바벨론 등의 원수 나라들도 유다와 똑같이 그들의 죄 때문에 멸망을 당하게 하시기를 하나님께 탄원한다. 바벨론의 죄란 우상숭배, 부도덕함, 무정함, 포학함 등의 죄악이다. 또 마지막 문장 앞에는 원문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다. 예레미야는 자신이 이렇게 탄원하는 것이 그의 탄식이 많고 그의 마음이 곤비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유다 나라가 하나님 앞에 범죄하였으나 바벨론 백성 앞에 범죄한 것은 아니었다. 바벨론 사람들이 유다 백성에게 행한 강포와 악행, 유다 백성이 그들에게 당한 억울한 학대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공의로 심판하실 날이 있을 것이다.

18절부터 22절까지의 내용의 요점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유다 멸망의 비참함이다. 유다의 멸망으로 예레미야는 근심, 고통, 번뇌, 탄식, 곤비함이 있었다. 유다의 소년소녀들은 포로로 잡혀갔고 유다는 동맹국들에게 속임을 당했고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먹을것이 없어 기진해 죽어갔고 칼에 죽은 자나 굶주리거나 병에 걸려 죽는 자가 가득했고 위로하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둘째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이다. 18절, “여호와는 의로우시도다. 이는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였음이로다.” 유다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했기 때문에(18절), 심히 큰 패역함 때문에(20절), 모든 죄악 때문에(22절)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받아 멸망한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공의로우시다. 하나님께서는 의와 불의, 선과 악을 공정하게 판단하시며 공정하게 보응하신다. 이 공의는 장차 바벨론에게도 또 마지막 날 온 세상에도 적용될 것이다.

본문은 몇 가지 교훈을 준다. 첫째로, 우리는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 죄는 고통과 근심, 번뇌와 곤비함, 굶주림과 포로로 잡혀감, 살육과 사망의 원인, 즉 멸망의 원인이다. 반면에, 의는 생명과 평강과 기쁨의 원인이다(사 48:18). 우리는 모든 죄를 버리고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사람이나 세상의 것을 의지하지 말자. 유다는 동맹국들이 있었으나 전쟁 때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속임을 당했다. 자녀들은 포로로 잡혀갔고 식물들은 고갈되었다. 사람을 의지하는 자는 절망할 때가 올 것이다. 우리는 사람이나 세상을 의지하지 말자.

셋째로, 우리는 징벌 중에서라도 회개해야 한다. 유다 백성은 재앙을 당하면서도 금방 회개하지 않았다. 선지자만 그들을 대표해 회개의 기도를 올릴 뿐이었다. 재앙을 당하면 모든 사람이 회개하는 것이 아니다. 요한계시록 9:20,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그 손으로 행하는 일을 회개치 아니하고 오히려 여러 귀신과 또는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 은, 동과 목석의 우상에게 절하고.” 회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행 11:18). 우리는 징벌 중에서라도 회개하자.

 

 

2장: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

1-10절,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

[1절] 슬프다, 주께서 어찌 그리 진노하사 처녀 시온을 . . . .

예레미야는 말한다. “슬프다, 주께서 어찌 그리 진노하사 처녀 시온을 구름으로 덮으셨는고. 이스라엘의 아름다운 것을 하늘에서 땅에 던지셨음이여, 진노하신 날에 그 발등상을 기억지 아니하셨도다.” 유다의 멸망은 주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었다. 원문에는 ‘주께서’라는 말(아도나이)이 4번 나오고(1, 2, 5, 7절), ‘여호와께서’라는 말이 2번 나온다(6, 8절). 하나님께서는 복도 주시지만 재앙도 내리신다. 재앙은 인간의 죄에 대한 그의 징벌이다.

유다의 멸망은 하나님께서 불같이 진노하심으로 왔다. 1절, “진노하사 . . . 진노하신 날에.” 2절, “노하사.” 3절, “맹렬한 진노로.” 4절, “노를 불처럼.” 애가서 전체에 ‘진노’라는 말이 열 네 번이나 나온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에 대해 불같이 진노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진노의 구름으로 예루살렘을 덮으셨다. 마치 폭우가 쏟아지기 전에 검은 구름이 하늘을 캄캄하게 만들며 두려움을 주듯이, 하나님께서는 진노의 구름으로 예루살렘을 덮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아름다운 것을 하늘에서 땅에 던지셨다. ‘아름다운 것’이라는 원어(티프에렛)는 ‘아름다움, 영광’이라는 뜻이다.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은혜로 그를 섬기며 그의 계명을 지키는 동안에는 기쁨과 평화와 사랑이 넘쳤고 질서가 있었고 물질적 유여함이 있었고 또 군사적으로도 강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을 저버리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않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셔서 이스라엘의 아름다움을 하늘에서 땅에 던지셨다.

또 하나님께서는 그 진노하신 날에 그의 발등상을 기억지 아니하셨다. 그의 발등상은 그의 임재(臨在)가 있는 성전을 가리킨 것 같다. 시편 132:7은 “우리가 그의 성막에 들어가서 그 발등상 앞에서 경배하리로다”고 말한다. 유다와 예루살렘이 멸망하는 날, 예루살렘 성전은 더 이상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의 대상이 되지 못하였다.

[2-3절] 주께서 야곱의 모든 거처를 삼키시고 긍휼히 여기지 . . . .

예레미야는 말한다. “주께서 야곱의 모든 거처를 삼키시고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셨음이여, 노하사 처녀 유다의 견고한 성을 헐어 땅에 엎으시고 나라와 방백으로 욕되게 하셨도다. 맹렬한 진노로 이스라엘 모든 뿔을 자르셨음이여, 원수 앞에서 [그의] 오른손을 거두시고 맹렬한 불이 사방으로 사름같이 야곱을 사르셨도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집을 부수시고 긍휼히 여기지 않으셨다. 그는 유다의 견고한 성들을 헐어 땅에 엎으셨고 나라와 방백들을 욕되게 하셨다. 그는 맹렬한 진노로 이스라엘의 모든 뿔을 자르셨다. 뿔은 힘과 영광을 상징한다. 그는 원수 앞에서 그의 오른손 곧 힘있는 손을 거두셨다. 그는 이스라엘을 돕지 않으셨다. 그는 맹렬한 불이 사방을 사름같이 야곱을 사르셨다. 그는 유다의 모든 귀하고 영광스러운 것들을 천하고 무가치하게 만드셨다.

[4절] 원수같이 활을 당기고 대적처럼 오른손을 들고 서서 눈에 . . . .

예레미야는 또 말한다. “원수같이 활을 당기고 대적처럼 오른손을 들고 서서 눈에 아름다운 모든 자를 살육하셨음이여, 처녀 시온의 장막에 노를 불처럼 쏟으셨도다.” 하나님께서는 유다에게 원수같이 행하셨다. ‘원수’ 혹은 ‘대적’이라는 말이 애가서에 24번이나 나온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벗이라 불리었고(사 41:8),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내가 너를 대적하는 자를 대적하겠다”라고 말씀하셨었다(사 49:25). 그러나 그는 지금 그들에게 원수같이 행하시는 것이다.

그는 원수같이 활을 당기시고 오른손을 들고 서서 눈에 아름다운 모든 자들을 살육하셨다. 본문은 바벨론 군대의 살육을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라고 말한다. 세상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섭리로 행해진다. 그러므로 전쟁을 막고 평화를 유지하는 길은 다른 데 있지 않고 온 백성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 의와 선을 행하는 데 있다.

[5-6절] 주께서 원수같이 되어 이스라엘을 삼키셨음이여, 모든 . . . .

예레미야는 또 말한다. “주께서 원수같이 되어 이스라엘을 삼키셨음이여, 모든 궁을 삼키셨고 견고한 성들을 훼파하사 처녀 유다에 근심과 애통을 더하셨도다. 성막을 동산의 초막같이 헐어버리시며 공회 처소를 훼파하셨도다. 여호와께서 시온 가운데서 절기와 안식일을 잊어버리게 하시며 진노하사 왕과 제사장을 멸시하셨도다.”

주께서는 원수같이 이스라엘 백성을 멸망시키셨다. 그는 모든 궁과 견고한 성들을 파괴하셨고 유다 백성에게 슬픔과 애통을 더하셨다. 그는 하나님의 성막을 동산의 초막같이 헐어버리시며 유다 백성이 시간을 정하여 모이는 집회 장소를 다 부수셨다. 시온에서 절기와 안식일은 잊혀졌고 왕과 제사장들은 멸시를 당하였다.

[7-8절] 여호와께서 또 자기 제단을 버리시며 자기 성소를 . . . .

예레미야는 또 말한다. “여호와께서 또 자기 제단을 버리시며 자기 성소를 미워하시며 궁장(宮墻)[궁궐벽]을 원수의 손에 붙이셨으매 저희가 여호와의 전에서 훤화하기를 절기날과 같이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처녀 시온의 성을 헐기로 결심하시고 줄을 띠고 훼파함에서 손을 거두지 아니하사 성과 곽으로 통곡하게 하셨으매 저희가 함께 쇠하였도다.” 주께서는 성전의 제단과 성소를 미워하셨고 궁궐벽을 원수의 손에 붙이셨다. 원수들은 하나님의 전에서 시끄럽게 떠들었다. 주께서는 시온성을 헐기로 결심하시고 손을 펴서 그 성을 부수셨다. 성벽은 다 허물어졌고 사람들은 그 광경을 보고 통곡했다.

[9-10절] 성문이 땅에 묻히며 빗장이 꺾여 훼파되고 왕과 . . . .

예레미야는 말한다. “성문이 땅에 묻히며 빗장이 꺾여 훼파되고 왕과 방백들이 열방 가운데 있으며 법이 없으며(KJV, NASB, NIV) 그 선지자들은 여호와의 묵시를 받지 못하는도다. 처녀 시온의 장로들이 땅에 앉아 잠잠하고 티끌을 머리에 무릅쓰고 굵은 베를 허리에 둘렀음이여, 예루살렘 처녀들은 머리를 땅에 숙였도다.”

성문이 땅에 묻히고 문빗장이 꺾여 파괴되고 왕과 방백은 이방인들 가운데 포로로 끌려가고 법이 없는 무법천지가 되었다. 선지자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계시를 받지 못했다. 장로들은 할 말을 잃고 땅에 잠잠히 앉았고 티끌을 머리에 무릅쓰고 굵은 베를 허리에 둘렀다. 더 이상 품위도, 권위도, 영광도 없었다. 평소에 명랑하던 처녀들도 슬픔과 고통 중에 머리를 땅에 숙였다.

유다와 예루살렘의 멸망은 하나님께서 크게 진노하심으로 이루어졌다. 하나님께서는 유다를 하늘에서 땅에 던지셨고 삼키셨고 엎으셨고 뿔을 자르셨고 불로 사르셨고 살육하셨고 진노를 쏟으셨고 훼파하셨다. 또 그는 왕과 방백들과 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처녀들과 유다 나라의 아름다운 모든 자들을 다 벌하셨다. 또 그는 모든 거처와 견고한 성들과 모든 뿔과 모든 궁과 성전과 제단과 집회 장소와 성과 성벽을 다 부수시고 허무셨고 불태우셨으며, 또 절기와 안식일을 폐하셨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하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참 지혜와 지식의 시작이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 되지 말자.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은 곧 멸망이요 불행이다. 그러려면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그의 교훈을 순종함으로 의를 행해야 한다. 죄는 우리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지만, 의는 하나님과 친구 되게 한다. 여기에 성도들의 세상 사는 방법이 있다. 우리는 믿음과 의와 순종으로만 살자. 거기에 평안과 기쁨과 승리가 있다.

 

11-22절, 하나님께서 내리신 형벌

[11절] 내 눈이 눈물에 상하며 내 창자가 끓으며 내 간이 땅에 . . . .

예레미야는 말한다. “내 눈이 눈물에 상하며 내 창자가 끓으며[아프며] 내 간이 땅에 쏟아졌으니 이는 처녀 내 백성이 패망하여 어린 자녀와 젖먹는 아이들이 성읍 길거리에 혼미[기진]함이로다.” 예레미야는 유다 나라가 패망하여 어린 자녀들과 젖먹는 아이들이 성읍 길거리에서 기진함을 보고 그의 눈이 눈물에 상하며 그의 창자가 아프며 그의 간이 땅에 쏟아진다고 말한다. 회개하라고 외쳐도 회개치 않았던 예루살렘이지만, 예레미야는 그래도 그 성을 사랑한다.

[12-13절] 저희가 성읍 길거리에서 상한 자처럼 혼미하여 . . . .

예레미야는 또 말한다. “저희가 성읍 길거리에서 상한 자처럼 혼미하여 그 어미의 품에서 혼이 떠날 때에 어미에게 이르기를 곡식과 포도주가 어디 있느뇨 하도다. 처녀 예루살렘이여, 내가 무엇으로 네게 증거하며 무엇으로 네게 비유할꼬. 처녀 시온이여, 내가 무엇으로 네게 비교하여 너를 위로할꼬. 너의 파괴됨이 바다같이 크니 누가 너를 고칠소냐?” 어린아이들은 엄마 품에서 죽어가면서 “엄마, 밥 좀 주세요. 엄마, 포도 쥬스 주세요” 하고 말하였다. 예루살렘의 멸망이 바다같이 커서 예레미야는 그것을 무엇과 비교하여 말할 수 없었고 위로할 말이 없었고 그것을 고칠 길이 없었다.

[14절] 네 선지자들이 네게 대하여 헛되고 어리석은 묵시를 . . . .

예레미야는 또 말한다. “네 선지자들이 네게 대하여 헛되고 어리석은 묵시를 보았으므로 네 죄악을 드러내어서 네 사로잡힌 것을 돌이키지 못하였도다. 저희가 거짓 경고와 미혹케 할 것만 보았도다.” 예루살렘 성의 멸망의 원인들 중의 하나는 거짓 선지자들의 거짓 예언들이었다. 그들은 헛되고 어리석은 묵시를 보았고 예루살렘 거민들에게 거짓된 위로와 헛된 소망을 전하였다. 그들은 부드러운 말만 했고 유다 백성의 죄를 책망하거나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므로 유다 백성은 자기들의 죄를 깨닫지 못했고 죄로부터 떠나지 않다가 마침내 바벨론에 의해 멸망을 당하고 포로로 사로잡혀갔던 것이다.

[15-16절] 무릇 지나가는 자는 다 너를 향하여 박장(拍掌)하며 . . . .

예레미야는 또 말한다. “무릇 지나가는 자는 다 너를 향하여 박장(拍掌)하며 처녀 예루살렘을 향하여 비소하고[비웃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기를 온전한 영광이라, 천하의 희락이라 일컫던 성이 이 성이냐 하며 너의 모든 원수는 너를 향하여 입을 벌리며 비소하고 이를 갈며 말하기를 우리가 저를 삼켰도다. 우리가 바라던 날이 과연 이 날이라. 우리가 얻기도 하고 보기도 하였다 하도다.” 지나가는 자들은 웃고 “온전한 아름다움, 천하의 희락이라고 일컫던 성이 이 성이냐?”고 조롱하였다. 모든 원수들도 입을 벌려 비웃고 이를 갈며 그들이 이겼고 그들이 바라던 날이 바로 이 날이라고 말하였다.

[17절] 여호와께서 이미 정하신 일을 행하시고 옛날에 명하신 . . . .

예레미야는 또 말한다. “여호와께서 이미 정하신 일을 행하시고 옛날에 명하신 말씀을 다 이루셨음이여,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고 훼파하사 원수로 너를 인하여 즐거워하게 하며 너의 대적의 뿔로 높이 들리게 하셨도다.” 이런 참혹한 예루살렘 멸망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미 작정하신 일을 행하신 것이며 옛날에 명하신 말씀을 이루신 것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파괴한 것이 아니었고, 천지의 대주재자 하나님께서 유다를 긍휼히 여기지 않으시고 그 성을 파괴하고 원수들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이었다. 주권적 섭리자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들을 행하신 것이었다.

[18-19절] 저희 마음이 주를 향하여 부르짖기를 처녀 시온의 . . . .

예레미야는 말한다. “저희 마음이 주를 향하여 부르짖기를 처녀 시온의 성곽아, 너는 밤낮으로 눈물을 강처럼 흘릴지어다. 스스로 쉬지 말고 네 눈동자로 쉬게 하지 말지어다. 밤 초경에 일어나 부르짖을지어다. 네 마음을 주의 얼굴 앞에 물 쏟듯 할지어다. 각 길머리에서 주려 혼미한 네 어린 자녀의 생명을 위하여 주를 향하여 손을 들지어다 하였도다.” 18절의 ‘저희’는 내용상 유다 백성을 가리킨다.

예레미야는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고 밤낮 눈물을 강처럼 흘리며 외치라고 말한다. 그는 그들이 밤 초경에 일어나 부르짖고 마음을 하나님의 얼굴 앞에 물 쏟듯 하며 각 길머리에서 굶주려서 기진한 어린 자녀들의 생명을 인해 하나님을 향해 손을 들라고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께 회개와 간구의 기도를 올리라는 뜻이다. 손을 들고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께 항복하는 심정으로, 절대 순종을 각오하는 심정으로, 간절히 기도하는 것을 뜻한다. 예루살렘 성의 멸망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임을 안다면, 이제 남은 것은 하나님께 회개하며 간구하는 것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20-21절] 여호와여 감찰하소서. 뉘게 이같이 행하셨는지요. . . .

예레미야는 또 말한다. “여호와여 감찰하소서. 뉘게 이같이 행하셨는지요. 여인들이 어찌 자기 열매 곧 손에 받든 아이를 먹으오며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어찌 주의 성소에서 살육을 당하오리이까. 노유(老幼)는 다 길바닥에 엎드러졌사오며 내 처녀들과 소년들이 칼에 죽었나이다. 주께서 진노하신 날에 죽이시되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고 살육하셨나이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의 참담한 현실을 감찰해주시기를 호소한다. 특히 그는 여인들이 자기 열매[자녀] 곧 손에 받든 아이들을 먹었다고 말한다. ‘손에 받든’이라는 원어(티푸킴)는 ‘안고 어르는’(dandling)(BDB) 혹은 ‘건강하게 다 기른’(KB, NASB)이라는 뜻이다. 제사장들과 선지자들도 성소에서 살육을 당했고 노유(老幼) 즉 노인들과 청년들도 다 죽임을 당해 길바닥에 엎드러졌으며 처녀들과 소년들도 칼에 죽었다. 주의 진노의 날에 주께서는 유다 백성을 긍휼히 여기지 않으셨고 다 죽이셨다.

[22절] 주께서 내 두려운 일을 사방에서 부르시기를 절기에 . . . .

예레미야는 또 말한다. “주께서 내 두려운 일을 사방에서 부르시기를 절기에 무리를 부름같이 하셨나이다. 여호와께서 진노하신 날에 피하거나 남은 자가 없었나이다. 내 손에 받들어 기르는 자를 내 원수가 다 멸하였나이다.” 절기에 무리를 부르듯 하나님께서는 두려운 일들을 사방에서 불러 예루살렘에 임하게 하셨다. 그의 진노하시는 날에 피하거나 남은 자가 없었다. 원수들은 아이들도 다 죽였다.

본문은 몇 가지 교훈을 준다. 첫째로, 죄의 값은 멸망이다. 온전한 아름다움, 천하의 희락이라고 불리던 예루살렘 성은 완전히 멸망했다. 어린아이들은 굶주려 기진하여 죽어갔고, 오랫동안 먹지 못했던 부모들은 심지어 자기 자녀들을 잡아먹기까지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신 날에 그들을 죽이셨다. 그의 진노를 피하거나 남은 자가 없었다. 원수들은 어린것들도 다 죽였다. 죄를 짓는 자들은 결국 다 망한다.

둘째로, 우리는 거짓된 설교를 분별해야 한다. 선지자들은 거짓말을 했고 거짓된 평안과 헛된 소망만 전했다. 그들은 정작 백성의 죄를 드러내거나 책망하지 않았다. 선지자들의 거짓된 설교는 백성들을 멸망의 길로 인도하였다. 죄를 책망하고 의의 길을 지시하는 바른 설교는 참으로 중요하다. 죄인에게 평안을 전하는 것은 속이는 설교이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 중심으로만 살아야 한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하나님께서 옛부터 정하신 일을 이루신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행하시는 주권자이시다. 복도 화도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그는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만 의지하고 모든 죄를 버리고 하나님의 모든 계명에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 거기에 건강과 일용할 양식, 평안과 행복과 영생이 있다.

 

 

3장: 선지자의 고통과 소망

1-33절, 진노 중에도 소망이 있음

[1-3절] 여호와의 노하신 매로 인하여 고난당한 자는 내로다. . . .

예레미야는 말한다. “여호와의 노하신 매로 인하여 고난당한 자는 내로다[나는 여호와의 노하신 매로 인한 고난을 본 자로다](원문). [그는] 나를 이끌어 흑암에 행하고 광명에 행치 않게 하셨으며 종일토록 손을 돌이켜 자주 자주 나를 치시도다[그는 참으로 나를 대적하시고 종일토록 거듭 그의 손을 드시는도다].”

유다 백성의 고통은 하나님께서 내리신 진노의 매이었다. 그것은 그들의 죄 때문에 온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의 징벌인 동시에 그들에게 회개하라고 재촉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흑암 중에 행하도록 이끄셨다. 광명은 기쁨과 행복을 가리키고, 흑암은 슬픔과 불행을 가리킨다. 유다 백성이 현재 처한 상황은 흑암이다. 슬픔과 고통, 불행과 죽음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징계의 손을 유다 백성을 향해 펴시고 종일토록 거듭 징벌하셨다.

[4-6절] 나의 살과 가죽을 쇠하게 하시며 나의 뼈를 꺾으셨고 . . . .

예레미야는 또, “나의 살과 가죽을 쇠하게 하시며 나의 뼈를 꺾으셨고[부수셨고] 담즙[고통]과 수고를 쌓아 나를 에우셨으며 나로 흑암에 거하게 하시기를 죽은 지 오랜 자 같게 하셨도다”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의 살과 가죽을 쇠하게 하셨고 그들의 뼈를 부수셨다. 유다 백성은 그 전쟁 중에 먹지도 못하고 마음을 쓰고 매 맞고 넘어짐으로 온 몸이 상하고 찢기고 뼈가 부서지고 상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고통과 수고로 그들을 둘러싸셨고 그들로 죽은 지 오랜 자 같게 고통과 불행에 가득히 에워싸이게 하셨다.

[7-9절] 나를 둘러싸서 나가지 못하게 하시고 나의 사슬을 . . . .

예레미야는 또 말한다. “나를 둘러싸서 나가지 못하게 하시고 나의 사슬을 무겁게 하셨으며 내가 부르짖어 도움을 구하나 내 기도를 물리치시며 다듬은 돌을 쌓아 내 길을 막으사 내 첩경을 굽게 하셨도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둘러싸서 그들로 나가지 못하게 하셨고 그들의 사슬을 무겁게 하셨다. 유다 백성은 바벨론 군인들의 감시 아래 감금되어 자유가 없었고 도피할 곳도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부르짖어 도움을 구하는 기도를 듣지 않으셨고 그 기도를 물리치셨다. 그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지 못했다. 하나님께서는 다듬은 돌을 쌓아 그들의 길을 막으시며 그들의 첩경을 굽게 하셨다. 그는 그들이 그 국가적 재난에 대처하기 위해 의논하고 세운 계획들을 막으셨고 잘못된 방향으로 가게 하셨다.

[10-13절] 저는 내게 대하여 엎드리어 기다리는 곰과 은밀한 . . . .

예레미야는 또 말한다. “저는 내게 대하여 엎드리어 기다리는 곰과 은밀한 곳의 사자 같으사 나의 길로 치우치게 하시며 내 몸을 찢으시며 나로 적막하게 하셨도다. 활을 당기고 나로 과녁을 삼으심이여, 전동[화살통]의 살로 내 허리(킬레요사이)[나의 콩팥]를 맞추셨도다.” 하나님께서는 엎드려 기다리는 곰과 은밀한 곳의 사자같이 그들을 위협하여 곁길로 가게 하셨고 그들의 몸을 찢으셨고 그들로 적막하게, 쓸쓸하고 비참하게 만드셨다. 또 그는 숙련된 궁수처럼 활을 당기고 과녁을 맞추듯이 그들의 내장을 맞추셨다.

[14절] 나는 내 모든 백성에게 조롱거리 곧 종일토록 그들의 . . . .

예레미야는 또, “나는 내 모든 백성에게 조롱거리 곧 종일토록 그들의 노래거리가 되었도다”라고 말한다. 본절은 선지자가 자신에 대해 말한 것이다. 유다 백성은 바벨론 침공을 받아 멸망을 당하면서도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선지자 예레미야를 조롱하고 멸시하였다.

[15-18절] 나를 쓴 것으로 배불리시고 쑥으로 취하게 하셨으며 . . . .

예레미야는 또, “나를 쓴 것으로 배불리시고 쑥으로 취하게 하셨으며 조약돌로 내 이를 꺾으시고 재로 나를 덮으셨도다”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에게 고통으로 배불리시고 취하게 하셨고 그들의 이를 꺾으셨고 그들의 몸이 재로 더러워지게 하셨다.

예레미야는 또 말한다. “주께서 내 심령으로 평강을 멀리 떠나게 하시니 내가 복을 잊어버렸음이여,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힘과 여호와께 대한 내 소망이 끊어졌다 하였도다.”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에게 평강이나 형통의 복을, 잊혀진 옛 이야기가 되게 하셨고 그들의 힘과 소망을 끊으셨다. 백성들에게는 낙심과 절망만 있었다.

[19-23절]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 . .

예레미야는 또 말한다. “내 고초와 재난(마루드)[안정 없음, 방황함](BDB, NASB, NIV)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내 심령이 그것을 기억하고 낙심이 되오나 중심에 회상한즉 오히려 소망이 있사옴은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주의 크신 자비로 인해 우리가 다 멸망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의 크신 긍휼이 다함이 없음이니이다](KJV, NIV).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

유다 백성은 하나님의 징벌로 큰 고난을 당하고 정처 없이 방황하고 있다. 그것은 쑥과 담즙과 같이 그들의 심령에 쓴 고통이다. 또 이런 고통 가운데서 그들은 낙심하고 있다. 그러나 선지자는 낙망할 만한 큰 고난 중에도 소망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크신 자비와 긍휼에 근거한 소망이다. 이것은 성경 전체의 중요한 진리이다. 죄로 인해 회복 불가능하게 된 죄인들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에 근거한다. 또 이 소망은 그의 크신 성실하심에 근거한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크신 자비와 긍휼에 근거하고 그의 성실하심으로 이루어진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아침마다 새롭다.

[24-26절]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 . . .

예레미야는 또 말한다.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저를 바라리라 하도다. 무릇 기다리는 자에게나 구하는 영혼에게 여호와께서 선을 베푸시는도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예레미야는 남은 이스라엘을 대표하여,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저를 바라리라”고 고백한다. 이것은 경건한 고백이다. 땅의 것을 재산과 기업으로 삼는 자는 땅이 불탈 때 그의 소망이 땅과 함께 사라질 것이지만, 하나님을 재산과 기업과 복으로 삼는 자는 그 소망과 영광이 영원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생의 참 소망이 되신다. 그는 우리의 기쁨과 힘과 위로가 되신다. 그는 그를 기다리며 구하는 자에게 선과 복을 베푸신다.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리는 것이 믿음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믿고 의지하며 소망하는 자에게 선을 베푸신다. 시편 62:1,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

[27-30절] 사람이 젊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 혼자 . . . .

예레미야는 또 말한다. “사람이 젊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 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 메우셨음이라. 입을 티끌에 댈지어다. 혹시 소망이 있을지로다. 때리는 자에게 뺨을 향하여 수욕으로 배불릴지어다.” 유다 백성은 지금 하나님의 징벌로 큰 고난 가운데 있다. 그러나 젊었을 때 멍에를 메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단련을 받아서 거룩하고 온전한 인격이 되어 인생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지금 당하는 고난의 멍에는 하나님께서 친히 메우신 것이니 잠잠히 메는 것이 좋고 입을 티끌에 대듯이 겸손히 또 잠잠히 하나님 앞에 굴복하며 고난을 당하는 것이 좋다.

[31-33절] 이는 주께서 영원토록 버리지 않으실 것임이며 . . . .

예레미야는 또 말한다. “이는 주께서 영원토록 버리지 않으실 것임이며 저가 비록 근심케 하시나 그 풍부한 자비대로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 고난받는 유다 백성이 소망 중에 인내하며 대처할 수 있는 이유는, 주께서 그들을 영원토록 버리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주께서 비록 근심케 하셨지만 그의 풍부한 자비대로 긍휼히 여기실 것이다. 주께서는 즐거운 마음으로 인생을 고생케 하거나 근심케 하신 것이 아니다. 그는 택자들을 향해 크신 자비와 긍휼을 가지셨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오직 죄를 멀리하자. 죄는 하나님의 진노를 가져오고 우리에게 고난과 불행을 초래한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있어서 죄 짓지 않는 것은 최상의 길이다. 의는 충만한 평강을 가져오며(사 48:18) 몸의 건강까지도 보장된다(잠 3:7-8).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본심을 깨닫자. 이스라엘 백성은 죄 때문에 큰 징벌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본심은 인간에게 고난을 주는 것이 아니다. 33절,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 하나님은 선하시며 모든 좋은 것을 주신다. 평강과 행복은 본래 인간을 위해 예비된 바이다. 죄로 인해 모든 것이 파괴되고 상실되었으나,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 사역으로 죄와 멸망에서 구원을 받았다(롬 3:23-24).

셋째로, 우리는 고난 중에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야 한다. 21-22절, “중심에 회상한즉 오히려 소망이 있사옴은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26절,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난을 달게 받으면서 잠잠히 긍휼의 하나님만 바라고 죽는 날까지 의와 선을 힘써 행하자. 그것이 성도의 본분이며 승리하는 길이다.

 

34-66절, 하나님의 구원을 사모함

[34-36절] 세상에 모든 갇힌 자를 발로 밟는 것과 지극히 . . . .

예레미야는 말한다. “세상에 모든 갇힌 자를 발로 밟는 것과 지극히 높으신 자의 얼굴 앞에서 사람의 재판을 굽게 하는 것과 사람의 송사를 억울케 하는 것은 다 주의 기쁘게 보시는 것이 아니로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악한 일들을 결코 인정치 않으신다.

[37-39절] 주의 명령이 아니면 누가 능히 말하여 이루게 하랴. . . .

예레미야는 또 말한다. “주의 명령이 아니면 누가 능히 말하여 이루게 하랴. 화, 복이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입으로 나오지 아니하느냐?” 예레미야는 유다 백성에게 임한 재앙이 하나님의 명령으로 이루어졌음을 암시한다. 하나님께서는 ‘주’(아도나이) 즉 주권자이시다. 세상의 모든 일들은 그의 주권적 작정과 섭리의 일들이다. 예레미야는 애가 2:17에서도 “여호와께서 이미 정하신 일을 행하시고 옛날에 명하신 말씀을 다 이루셨음이여”라고 말하였다.

예레미야는 사람의 복과 재앙이 다 지극히 높으신 자 곧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온다고 말한다. 그것이 섭리자 하나님을 아는 신자의 바른 지식이요 바른 고백이다. 룻기에 나오는 나오미는 모압 땅에서 당한 고난을 하나님의 손이 그를 친 것이며 하나님께서 그를 징벌하셨고 그를 괴롭게 하신 것이라고 고백하였었다(룻 1:13, 21).

예레미야는 또 “살아 있는 사람은 자기 죄로 벌을 받나니 어찌 원망하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징벌을 받는 사람은 고난 중에 하나님께 원망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공의의 통치자이시며 사람은 자기의 심은 대로 복과 화를 거둔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이런 깨달음이 있지 않아서 어떤 이는 악의 보응에 대해 원망하며 불평한다.

[40-41절] 우리가 스스로 행위를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 . .

예레미야는 또 말한다. “우리가 스스로 행위를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마음과 손을 아울러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들자.” 탕자의 비유에서 허랑방탕하던 둘째 아들이 심히 가난하고 곤고해졌을 때 제정신이 들었고(눅 15:17)(KJV, NASB) 아버지 집에 돌아갈 마음을 가졌듯이, 오순절에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마음에 찔려 회개하고 하나님께 나아와 세례를 받았듯이(행 2:37-38, 41), 사람은 자신의 행위를 살피고 회개하여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

또 예레미야는 유다 백성들에게 우리의 마음과 손을 아울러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들자고 말한다. 마음과 손을 든다는 말은 진지하고 간절한 기도의 모습을 말한다.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온 자는 하나님께 진지하고 간절한 기도를 올릴 것이다. 유다 나라의 소망은 오직 참된 회개와 간절한 기도에 있다. 하나님의 긍휼이 아니고서는 그 나라는 다시 세워지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42-43절] 우리의 범죄함과 패역함을 주께서 사하지 . . . .

예레미야는 또 말한다. “우리의 범죄함과 패역함을 주께서 사하지 아니하시고 진노로 스스로 가리우시고 우리를 군축(窘逐)하시며 살육하사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셨나이다.” 그는 유다의 멸망의 원인이 그들의 범죄함과 패역함 때문임을 암시한다. 하나님께서는 유다의 범죄함과 패역함을 용서치 않으셨고 진노로 자신을 가리우셨고 그들을 내쫓으셨고 죽이셨고 긍휼을 베풀지 않으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보응과 심판이요 징벌이었다. 죄가 죽음과 모든 불행의 원인이다. 죄가 유다와 예루살렘의 멸망의 원인이다. 실상, 그 외에 다른 원인은 없다. 이것은 모든 시대에 중요한 기본적 진리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의 평안과 내세의 영원한 생명을 구하는 자마다 죄 문제의 해결을 얻어야 하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이치이다.

[44-47절] 주께서 구름으로 스스로 가리우사 기도로 상달치 . . . .

예레미야는 또 말한다. “주께서 구름으로 스스로 가리우사 기도로 상달치 못하게 하시고 우리를 열방 가운데서 진개(塵芥)와 폐물을 삼으셨으므로 우리의 모든 대적이 우리를 향하여 입을 크게 벌렸나이다. 두려움과 함정과 잔해와 멸망이 우리에게 임하였도다.”

하나님께서는 구름으로 자신을 가리우셨고 유다 백성의 기도가 그 앞에 상달치 못하게 하셨다. 유다 백성은 하나님의 은혜의 날에 그를 찾지 않다가 징벌과 환난의 날에 그를 찾았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기도를 듣지 않으셨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열방 중에 진개(塵芥)와 폐물을 삼으셨다. ‘진개’라는 원어(세키)는 ‘쓰레기, 찌꺼기’라는 뜻이다(BDB). 모든 대적은 그들을 향해 입을 크게 벌리고 조롱하고 멸시하였다. 그 날은 그들에게 수치와 치욕의 날이었다. 두려움과 함정과 잔해와 멸망이 그들에게 임하였다.

[48-51절] 처녀 내 백성의 파멸을 인하여 내 눈에 눈물이 . . . .

예레미야는 또 말한다. “처녀 내 백성의 파멸을 인하여 내 눈에 눈물이 시내처럼 흐르도다. 내 눈의 흐르는 눈물이 그치지 아니하고 쉬지 아니함이여,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살피시고 돌아보시기를 기다리는도다. 나의 성읍의 모든 여자를 인하여 내 눈이 내 심령을 상하게 하는도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 멸망의 참혹한 재앙 앞에서 하염없이 울었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시내처럼 흘렀고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그는 하늘에 계신 주권자 하나님께서 그들을 살피시고 돌아보시기를 기다렸다.

[52-54절] 무고히 나의 대적이 된 자가 나를 새와 같이 심히 . . . .

예레미야는 또 말한다. “무고히 나의 대적이 된 자가 나를 새와 같이 심히 쫓도다. 저희가 내 생명을 끊으려고 나를 구덩이에 넣고 그 위에 돌을 던짐이여, 물이 내 머리에 넘치니 내가 스스로 이르기를 이제는 멸절되었다 하도다.” 선지자가 자신만을 두고 말하는지 그 백성을 대표해서 말하는지 불분명하지만, 후자인 것 같다. 선지자 자신은 동족에게 핍박을 받았지만, 유다 백성은 바벨론 군인들에게 핍박을 받았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범죄했고 바벨론 사람들 앞에서 잘못한 것은 없으나 바벨론 군인들은 까닭 없이 그들을 새같이 심히 쫓았다. 대적자들이 예레미야를 물 없는 구덩이에 던진 적이 있었으나(렘 38:6) 53절의 말씀은 비유적인 것 같다. 유다 백성은 고난의 깊은 구덩이에 던지웠고 물이 그 머리에 넘쳤다. 그들은 아직 목숨이 끊어진 것은 아니나 거의 죽은 것과 다름없었다.

[55-56절] 여호와여, 내가 심히 깊은 구덩이에서 주의 이름을 . . . .

예레미야는 또 말한다. “여호와여, 내가 심히 깊은 구덩이에서 주의 이름을 불렀나이다. 주께서 이미 나의 음성을 들으셨사오니 이제 나의 탄식과 부르짖음에 주의 귀를 가리우지 마옵소서.” ‘탄식’이라는 원어(레와카)는 ‘호흡’이라는 뜻이다. 예레미야는 절망적 상황에서 주의 이름을 불렀다. 하나님께서는 주님이시다. 그는 모든 일을 주권적으로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절망적 상황에서 주권자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은 성도만의 특권이다. 또 그것은 모든 어려운 문제의 해결책이기도 하다. 유다 백성은 과거에 하나님의 응답을 여러 번 체험하였다. 그런 체험에 근거하여 그는 현재의 고난 중에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한다.

[57-59절] 내가 주께 아뢴 날에 주께서 내게 가까이 하여 . . . .

예레미야는 또 말한다. “내가 주께 아뢴 날에 주께서 내게 가까이 하여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하셨나이다. 주여, 주께서 내 심령의 원통을 펴셨고[송사들을 변호하셨고] 내 생명을 속하셨나이다. 여호와여, 나의 억울을 감찰하셨사오니 나를 위하여 신원(伸寃)하옵소서.”

예레미야는 과거에 하나님께 기도하였을 때 주께서 그에게 가까이 오셔서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신 것을 고백한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도 응답의 첫 단계는 마음의 평안이다. 구체적인 응답은 그 다음에 온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말했다(빌 4:6-7). 예레미야는 과거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억울함을 갚아주셨고 현재의 억울한 형편도 감찰하심을 확신한다. 과거의 체험은 현재의 지침이 되고 해결책이 된다. 과거에 공의로 섭리하신 하나님께서는 현재도 모든 일을 공의로 판단하시고 보응하실 것이 분명하다.

[60-63절] 저희가 내게 보수(報讐)하며 나를 모해함을 주께서 . . . .

예레미야는 또 말한다. “저희가 내게 보수(報讐)하며 나를 모해함을 주께서 다 감찰하셨나이다. 여호와여, 저희가 나를 훼방[훼파](한글 개역성경)하며 나를 모해하는 것 곧 일어나 나를 치는 자의 입술에서 나오는 것과 종일 모해하는 것을 들으셨나이다. 저희가 앉든지 서든지 나를 노래하는 것을 주여, 보옵소서.” ‘모해’라는 원어(마카솨바)는 ‘생각, 계획, 악한 계획’이라는 뜻이다. 전지하신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모든 말과 모든 행위를 다 감찰하시고 들으시며 공의로 보응하신다. 그는 악한 바벨론 사람들이 유다 백성을 향해 원수를 갚고 악한 계획들을 한 것을 다 감찰하셨고 그들이 유다를 비방하는 악한 말들을 다 들으셨고 그들이 앉든지 서든지 유다를 말거리로 삼고 비방거리로 삼는 것을 다 보셨다.

[64-66절] 여호와여 주께서 저의 손으로 행한 대로 보응하사 . . . .

예레미야는 또 말한다. “여호와여, 주께서 저의 손으로 행한 대로 보응하사 그 마음을 강퍅하게 하시고 저주를 더하시며 진노로 저희를 군축(窘逐)하사 여호와의 천하에서 멸하시리이다.”

원문은 네 개의 명령형 동사(미완료시제 단축형)로 되어 있으며 그것들은 다 기도의 내용들이다. 첫째는, ‘보응하소서’라는 말이다. “저의 손으로 행한 대로 보응하소서.” 하나님께서는 행한 대로 갚으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전도서 12:14는,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고 말한다.

둘째는, ‘주소서’라는 말이다. “그 마음을 강퍅하게 하시고 저주를 더하소서.” 직역하면, “그들에게 마음의 강퍅함을, 그들에게 저주를 주소서.” ‘강퍅함’이라는 원어(메긴나)는 ‘덮개, 어두움, 완고함’이라는 뜻이다. 완고함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심판이며 징벌이다.

셋째는, ‘쫓아내소서’라는 말이다. “저희를 진노로 쫓아내소서.”

넷째는, ‘멸하소서’라는 말이다. “저희를 여호와의 천하에서 멸하소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간구한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의 주권자 되심을 인정하자. 37-38절, “주의 명령이 아니면 누가 능히 말하여 이루게 하랴. 화, 복이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입으로 나오지 아니하느냐?” 유다의 멸망은 하나님의 징벌이었다. 주권자 하나님을 아는 것이 참 경건이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 40-41절, “우리가 스스로 행위를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마음과 손을 아울러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들자.” 유다의 멸망은 그들의 범죄함과 패역함 때문에 온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소망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다 해당되는 진리이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부족을 깨닫고 불경건과 부도덕의 모든 죄를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고난 중에 하나님께 기도하자. 55절, “여호와여, 내가 심히 깊은 구덩이에서 주의 이름을 불렀나이다.” 59절, “여호와여, 나의 억울을 감찰하셨사오니 나를 위하여 신원하옵소서.” 성도는 고난 중에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시편 46:1은,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고 말했다.

 

4장: 예루살렘 거민을 낮추심

1-12절, 거름더미를 안았음

[1-2절] 슬프다 어찌 그리 금이 빛을 잃고 정금이 변하였으며 . . . .

예레미야는 말한다. “슬프다, 어찌 그리 금이 빛을 잃고 정금이 변하였으며 성소의 돌이 각 거리 머리에 쏟아졌는고. 시온의 아들들이 보배로와 정금에 비할러니 어찌 그리 토기장이의 만든 질항아리같이 여김이 되었는고.” 금이 빛을 잃고 정금이 변했다는 말은 예루살렘 거민들의 낮아진 형편을 묘사한다. 예루살렘 거민은 금빛이 희미해지고 정금이 변한 것처럼 비천한 상태에 떨어졌다. 성소의 돌들은 길거리에 쏟아지고 버려졌다. 이전에 정금같이 보배로웠던 시온의 아들들은 이제는 토기장이가 만든 질그릇같이 여김을 받았다.

[3-5절] 들개는 오히려 젖을 내어 새끼를 먹이나 처녀 . . . .

선지자는 또 말한다. “들개들은 오히려 젖을 내어 새끼를 먹이나 처녀 내 백성은 잔인하여 광야의 타조 같도다. 젖먹이가 목말라서 혀가 입천장에 붙음이여, 어린아이가 떡을 구하나 떼어 줄 사람이 없도다. 진수를 먹던 자가 거리에 외로움이여, 전에는 붉은 옷을 입고 길리운 자가 이제는 거름더미를 안았도다.” ‘들개들’(탄닌)은 여우와 이리 중간쯤 되는 짐승인 ‘재칼들’을 가리킨다고 한다(BDB, NASB). 재칼들은 자기 새끼에게 젖을 먹이지만, 유다 백성은 잔인하여 광야의 타조같이 자기 자식을 돌보지 않는다. 젖먹는 아기는 목이 말라 혀가 입천장에 붙고 어린아이들은 떡을 구하나 떼어 줄 자가 없다. 맛있는 음식만 골라 먹던 아이들은 이제 거리에서 처량하고, 붉은 옷을 입고 길리우던 자들은 이제 천한 자같이 거름더미를 안았다. ‘거름더미를 안았다’는 말은 그들의 불행을 잘 보인다.

[6절] 전에 소돔이 사람의 손을 대지 않고 경각간에 . . . .

예레미야는 또 말한다. “전에 소돔이 사람의 손을 대지 않고 경각간에 무너지더니 이제 처녀 내 백성의 죄가 소돔의 죄악보다 중하도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그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이었다. 그들의 죄는 예전의 소돔의 죄악보다 더 무거웠다. 전에 소돔이 사람의 손을 대지 않고 순식간에 멸망했듯이, 예루살렘과 유다는 하나님의 징벌로 처참하게 멸망하였다. 예루살렘의 처참한 멸망의 원인은 다른 것 때문이 아니고, 바로 그들의 죄악 때문이었다.

[7-8절] 전에는 존귀한 자의 몸이 눈보다 깨끗하고 젖보다 . . . .

선지자는 말한다. “전에는 존귀한 자의 몸이 눈보다 깨끗하고 젖보다 희며 산호보다 붉어 그 윤택함이 마광한 청옥 같더니 이제는 그 얼굴이 숯보다 검고 그 가죽이 뼈에 붙어 막대기같이 말랐으니 거리에서 알 사람이 없도다.” ‘존귀한 자’라는 말(네지레하)은 ‘그들의 성별된 자들’이라는 뜻이며(BDB, NASB) 그것은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들을 가리키든지(KJV) 그들의 방백들을 가리킬 것이다(NIV). ‘산호’(NASB)라는 말은 ‘홍옥’(KJV, NIV)이라고도 번역된다. 유다의 성별된 자들 혹은 방백들은 그 몸이 눈보다 깨끗하고 우유보다 희며 홍옥보다 붉고 윤택함이 광나는 청옥 같았으나, 이제는 그들의 얼굴이 숯보다 더 검게 되었고 거리에서 알아볼 자가 없으며(원문 순서) 그 가죽이 뼈에 붙었고 막대기같이 말랐다.

[9-10절] 칼에 죽은 자가 주려 죽은 자보다 나음은 토지 . . . .

예레미야는 또 말한다. “칼에 죽은 자가 주려 죽은 자보다 나음은 토지 소산이 끊어지므로 이들이 찔림같이 점점 쇠약하여 감이로다. 처녀 내 백성의 멸망할 때에 자비한 부녀가 손으로 자기 자녀를 삶아 식물을 삼았도다.” 굶어죽어가는 자들의 모습이 처참하기 때문에, 선지자는 차라리 칼에 죽은 자들이 굶어죽은 자보다 낫다고 말한다. 예루살렘 멸망의 가장 처참한 모습은 그 거민들이 너무 굶주려 평소에 인자하던 여인들이 손으로 자기 자녀들을 삶아 먹은 일이었다. 그것은 이미 애가 2:20에서 말한 사실이다: “여호와여, 감찰하소서. 뉘게 이같이 행하셨는지요. 여인들이 어찌 자기 열매 곧 손에 받든 아이를 먹으오며.” 원문은 한 명이 아니고 여러 명이 그러하였음을 암시하기를, ‘여인들’이 ‘그들의 자녀들’을 삶아 먹었다고 증거한다.

이것은 이미 모세의 율법에서, 그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 그 명령을 행치 않고 그것을 멸시하고 싫어하고 그 언약을 배반할 때 내려질 것이라고 경고된 바이었다. 레위기 26:29, “너희가 아들의 고기를 먹을 것이요 딸의 고기를 먹을 것이며.” 신명기 28:53, “네가 대적에게 에워싸이고 맹렬히 쳐서 곤란케 함을 당하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자녀 곧 네 몸의 소생의 고기를 먹을 것이라.” 또 에스겔도 이런 일이 있을 것을 말했다: “그리한즉 너의 중에서 아비가 아들을 먹고 아들이 그 아비를 먹으리라”(겔 5:10).

[11-12절] 여호와께서 분을 발하시며 맹렬한 노를 쏟으심이여 . . . .

예레미야는 또 말한다. “여호와께서 분을 발하시며 맹렬한 노를 쏟으심이여, 시온에 불을 피우사 그 지대를 사르셨도다. 대적과 원수가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갈 줄은 세상 열왕과 천하 모든 백성이 믿지 못하였었도다.” 예루살렘 성의 멸망은 하나님께서 분을 발하시며 맹렬한 노를 쏟으신 일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시온에 불을 피우셨고 그 기초를 삼키셨다(원문의 뜻). 원수들이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 그 성이 그렇게 비참하게 멸망하리라고는 세상의 열왕들과 백성들이 믿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상상하거나 예상하지 못한 일이 현실에서 일어났다. 하나님께서는 일반 사람들의 예상을 뒤엎으시고 예언된 징벌을 그들에게 내리셨다. 예루살렘 성은 멸망하였다.

본문은 무엇을 증거하는가? 본문은 예루살렘 성의 처참한 멸망의 정황을 증거한다. 예루살렘 거민들은 본래 존귀했다. 그 성에서 자란 아이들은 맛있는 음식을 먹었고 모든 아름답고 좋은 것을 누렸다. 그들은 정금에 비교할 만하였다. 그러나 지금 예루살렘 거민들은 매우 비천하게 되었다. 그것은 빛을 잃은 정금과 같았다. 정금 같은 시온의 자녀들은 토기장이가 만든 질그릇같이 취급되었다. 맛있는 음식만 먹던 그들은 거름더미를 안았다. 그들의 희고 고왔던 얼굴은 숯보다 더 검어졌다. 인간의 존귀와 영광은 다 사라졌다. 심지어 평소에 인자하였던 여인들이 자기 자녀들을 삶아 먹는 비극까지 생겼다.

예루살렘 성의 처참한 멸망의 원인은 무엇인가? 6절, “전에 소돔이 사람의 손을 대지 않고 경각간에 무너지더니 이제 처녀 내 백성의 죄가 소돔의 죄악보다 중하도다.” 유다 백성들과 예루살렘 거민들은 그들의 죄 때문에 멸망하였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를 미워하시고 노하시기 때문에 그들이 망한 것이다. 11절, “여호와께서 분을 발하시며 맹렬한 노를 쏟으심이여, 시온에 불을 피우사 그 지대를 사르셨도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혜롭고 존귀하고 선하게 창조되었으나(창 1:31; 시 49:12), 범죄함으로 고생과 수고, 슬픔과 질병과 불행이 가득한 삶을 살게 되었다. 마태복음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로마서 3:16-17,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이 세상의 불행의 원인은 죄이다.

본문은 몇 가지 실제적 교훈을 준다. 우리는 죄를 멀리해야 한다. 죄가 모든 불행의 원인이며 죄를 회개하고 죄씻음받고 이제 후로는 죄를 짓지 않는 것이 모든 행복의 시작이다. 죄를 완전히 짓지 않는 것은 불가능해도 힘써 노력해야 한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해 반드시 벌하시는 자이시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우리에게 거울이 된다. 또 우리는 범죄했을 때 즉시 회개해야 한다. 회개는 결코 뒤로 미룰 일이 아니다. 우리는 내일 무슨 일이 있을지 알지 못한다. 우리는 오늘 회개하기를 힘써야 한다.

 

13-22절, 지도자들의 죄 때문에

[13절] 그 선지자들의 죄와 제사장들의 죄악을 인함이니 . . . .

예레미야는 말한다. “그 선지자들의 죄와 제사장들의 죄악을 인함이니 저희가 성읍 중에서 의인의 피를 흘렸도다.” 유다 나라의 멸망은 백성의 죄악 때문일 뿐만 아니라, 또한 지도자들의 죄악 때문이었다. 실상, 지도자들의 죄악이 더 중요하다. 한 사회는 그 지도자가 어떤 자인가에 따라 그 평안의 정도에 큰 차이가 난다. 유다의 지도자들인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은 성읍 중에서 의인들의 피를 흘리는 가증한 죄를 범하였다. 의와 진리를 선포하고 공의를 시행해야 할 자들이 도리어 의인들의 피를 흘리고 악인들의 악을 용납한 것이다.

[14-15절] 저희가 거리에서 소경같이 방황함이여, 그 옷이 . . . .

예레미야는 또 말한다. “저희가 거리에서 소경같이 방황함이여, 그 옷이 피에 더러웠으므로 사람이 만질 수 없도다. 사람이 저희에게 외쳐 이르기를 부정하다, 가라, 가라, 가라, 만지지 말라 하였음이여, 저희가 도망하여 방황할 때에 이방인이 이르기를 저희가 다시는 여기 거하지 못하리라 하였도다.” ‘저희’는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들은 소경같이 방황했다. 사실상 그들은 영적 소경이었다. 그들의 옷은 피에 더러워져서 사람이 만질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나병 환자에게 ‘부정하다’고 외치며 진 밖에서 살게 하였듯이(레 13:45-46), 그들은 다 부정한 자같이 되었다. 이제 그들은 이방에 포로로 잡혀갈 것이며 이 땅에 다시 거하지 못할 것이다.

[16절] 여호와께서 노하여 흩으시고 다시 권고치 아니하시리니 . . . .

예레미야는 또 말한다. “여호와께서 노하여 흩으시고 다시 권고치 아니하시리니 저희가 제사장들을 높이지 아니하였으며 장로들을 대접지 아니하였음이로다.” ‘여호와께서 노하여’라는 원어(프네 여호와)는 ‘여호와의 얼굴’이라는 뜻이다. 여호와의 얼굴 곧 여호와 하나님 자신께서 유다 백성을 흩으시고 다시 돌아보지 않으실 것이다. ‘권고하다’는 원어(합비타)는 ‘쳐다보다, 존중하다’는 뜻이다. 전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방 나라들과 달리 사랑하셨고 주목하며 귀히 여기셨으나(신 11:12), 지금은 그렇지 않다. 그는 지금 진노의 얼굴을 그들에게 향하셨다. 본절 후반부의 ‘저희’는 유다의 원수들을 가리킬 것이다. 그들은 유다의 존귀한 지도자들, 제사장들과 장로들을 높이거나 대접하지 않을 것이다. 바르게 행하며 백성을 평안케 하는 지도자들은 존중히 여김을 받을 것이지만, 악을 행하며 백성으로 화를 당케 하는 자들은 모욕을 당할 것이다.

[17-20절] 우리가 헛되이 도움을 바라므로 우리 눈이 . . . .

예레미야는 또 말한다. “우리가 헛되이 도움을 바라므로 우리 눈이 상함이여, 우리를 구원치 못할 나라를 바라보고 바라보았도다. 저희가 우리 자취를 엿보니 우리가 거리에 행할 수 없음이여, 우리의 끝이 가깝고 우리의 날이 다하였고 우리의 마지막이 이르렀도다. 우리를 쫓는 자가 공중의 독수리보다 빠름이여, 산꼭대기에서도 쫓고 광야에도 매복하였도다. 우리의 콧김 곧 여호와의 기름 부으신 자가 저희 함정에 빠졌음이여, 우리가 저를 가리키며 전에 이르기를 우리가 저의 그늘 아래서 열국 중에 살겠다 하던 자로다.”

유다 백성들은 그들을 구원치 못할 나라 곧 애굽을 바라보고 헛된 도움을 기대했다. 그러나 유다가 바벨론의 침략을 받았을 때, 애굽은 그들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고 그들의 멸망을 막아주지 못했다. 그들의 외교적 노력과 군사대국과의 동맹이 무용지물이었다.

원수들은 유다 백성을 가까이서 엿보았고 눈으로 볼 수 있는 거리에서 예루살렘 거민들을 관측하고 있었다. 예루살렘의 멸망 곧 유다의 멸망이 가까웠고 그 마지막 날이 이르렀다. 그들을 쫓는 바벨론 군대는 공중의 독수리보다 빨라서 유다 백성은 산꼭대기로도 광야로도 도망칠 수 없고 멸망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20절의 ‘우리의 콧김’은 ‘우리의 코의 호흡’이라는 말로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자 곧 왕을 가리켰다고 본다. 유다 멸망 때의 왕은 시드기야이었다. 유다 백성은 그 왕이 그들을 잘 다스려 열국 가운데서 평안하게 살 줄로 생각했으나, 그는 원수들의 함정에 빠졌고 사로잡혔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모든 헛된 소망과 기대, 헛된 의지물들을 다 파하셨다. 애굽 나라도 그들의 왕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 아닌 모든 인간적 소망과 의지물들은 다 헛되었다.

[21-22절] 우스 땅에 거하는 처녀 에돔아 즐거워하며 . . . .

예레미야는 또 말한다. “우스 땅에 거하는 처녀 에돔아, 즐거워하며 기뻐하려무나. [그러나](NASB) 잔이 네게도 이를지니 네가 취하여 벌거벗으리라. 처녀 시온아, 네 죄악의 형벌이 다하였으니 주께서 다시는 너로 사로잡혀가지 않게 하시리로다. [그러나](NASB) 처녀 에돔아, 주께서 네 죄악을 벌하시며 네 허물을 드러내시리로다.”

에돔은 우스 땅에 거하는 자들이라고 표현된다. 이 ‘우스’는 욥의 고향인 우스(욥 1:1)와 같은 지역일 것이다. 에돔 사람들은 멸망하는 유다를 보면서 기뻐하고 있었다. 예레미야는 이제 에돔에 대해 비꼬며 “에돔아, 즐거워하며 기뻐하려무나”라고 말한다. 그러나 실상 그는 에돔이 슬퍼해야 할 소식을 전하고 있다. 에돔은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죄악을 벌하시며 그들의 허물을 드러내실 것이다. 그러나 반면 유다 백성에게는 그들의 죄의 형벌이 끝나고 다시는 포로로 잡혀가는 일이 없는 날이 올 것이다. 유다와 예루살렘 성의 멸망이라는 고통스런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소망과 위로의 말씀을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세계 열국을 공의로 섭리하신다. 그는 자기 백성 유다라도 범죄할 때 혹독하게 징벌하셨다. 유다의 멸망을 비웃고 기뻐하던 에돔은 장차 하나님의 공의의 징벌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인 유다는 때가 되면 회복될 것이다. 세계 역사는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 가운데 진행될 것이다.

본문은 우리에게 몇 가지 교훈을 준다. 첫째로, 우리는 세계 역사의 진행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섭리자 하나님만 바라보자. 온 세상은 하나님의 섭리의 손 안에 있다. 세계사는 하나님의 손 안에서 진행된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암울하게 보이는 일들까지도 섭리하셔서 그의 뜻을 이루신다. 개인의 일도, 교회의 일도, 국가의 일도, 세계의 일도 다 그러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 세상의 창조자요 섭리자이신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삼위일체 하나님만 바라고 의지하고 섬기자. 이것이 인생에게 가장 귀하고 중요한 일이다.

둘째로, 우리는 헛된 소망을 버리자. 하나님 없이 가진 혹은 하나님을 대적하여 가진 모든 인간적 소망과 기대는 헛되다. 불경건은 가장 근본적 죄악이다. 개인뿐 아니라, 국가의 소망도 하나님께 있다. 국가의 안전은 정치 외교나 경제나 군사력에 있지 않다. 미사일이나 이지스함 같은 최첨단 무기를 몇 대 더 만드는 것이나 한미동맹을 견고히 하는 것이 나라의 평안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허락지 않으시는 모든 인간적 소망과 의지물들은 실상 다 헛되다. 하나님께서는 불경건하고 우상숭배적이고 부도덕한 나라를 지키지 않으실 것이다. 현세의 평안과 형통, 미래의 영생과 천국은 오직 하나님께서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경건과 도덕성을 위해 기도하고 전도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오직 경건하게 살고 의와 선을 행하자.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공의로 섭리하신다. 죄를 짓고 악을 행하는 자는 누구든지 다 엄한 벌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경건하게 살고 의와 선을 행하는 자는 평안과 형통을 누릴 것이다. 참된 믿음은 의롭고 선한 행실로 증거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고 오직 신구약성경에 증거된 그의 모든 명령과 교훈을 힘써 지키고 행해야 한다.

 

 

5장: 이스라엘의 회복을 간구함

[1-5절] 여호와여, 우리의 당한 것을 기억하시고 우리의 수욕을 . . . .

예레미야는 말한다. “여호와여, 우리의 당한 것을 기억하시고 우리의 수욕을 감찰하옵소서. 우리 기업이 외인에게, 우리 집들도 외인[이방인들]에게 돌아갔나이다. 우리는 아비 없는 외로운 자식[고아들]이오며 우리 어미는 과부 같으니 우리가 은을 주고 물을 마시며 값을 주고 섶을 얻으오며 우리를 쫓는 자는 우리 목을 눌렀사오니 우리가 곤비하여 쉴 수 없나이다.”

예레미야는 유다와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인해 당한 비극적 상황과 수욕을 하나님께서 돌아보시고 기억해주시기를 구한다. 이 모든 불행에 대해 탄원할 곳이 하나님밖에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께 아뢸 수 있다는 것은 확실히 그 백성에게 희망적인 일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그들의 땅과 집들은 다 외인들에게로 돌아갔다. 그들은 아비 없는 고아들이며 그들의 어미는 과부 같았다. 각 가정은 실제로 자녀들을 보호하고 지켜주고 책임져줄 어른들이 없었으며 나라 전체가 그러하였다. 그들은 물을 마시기 위해서도 돈을 주어야 하였고 땔감을 얻기 위해서도 값을 주어야 하였다. 기본적인 식생활에 어려움이 있었다. 그들을 쫓는 자들은 그들의 목을 눌렀고 그들은 피곤하며 휴식을 취할 수 없었다.

[6절] 우리가 애굽 사람과 앗수르 사람과 악수하고 양식을 얻어 . . . .

예레미야는 또, “우리가 애굽 사람과 앗수르 사람과 악수하고 양식을 얻어 배불리고자 하였나이다”라고 말한다. ‘악수한다’는 원어는 ‘손을 준다’는 말로서 상대에게 충성을 맹세하거나 복종하겠다는 뜻이다. 에스라 10:19, “저희가 다 손을 잡아 맹세하여[손을 주며] 그 아내를 보내기로 하고.” 역대상 29:24, “모든 방백과 용사와 다윗 왕의 여러 아들이 솔로몬 왕에게 복종하니[손을 주니].” 유다 사람들은 배불리 양식을 얻기 위해 애굽 사람들과 앗수르 사람들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복종하였다.

[7-8절] 우리 열조는 범죄하고 없어졌고 우리는 그 죄악을 . . . .

예레미야는 또 말한다. “우리 열조는 범죄하고 없어졌고 우리는 그 죄악을 담당하였나이다. 종들이 우리를 관할함이여, 그 손에서 건져낼 자가 없나이다.” 그는 그들이 당하는 현실이 그들의 죄 때문임을 다시 말한다. 유다의 선조들은 범죄하였고 지금은 다 죽고 없어졌다. 자녀들은 그 선조들의 죗값을 치루고 있다. 죗값은 당대에 치르든지 그 자손 대에 치르든지 반드시 치뤄야 한다. 바벨론 나라의 종들이 유다 백성을 다스렸다. 유다 백성은 온갖 학대를 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손에서 건져내어줄 자가 아무도 없었다.

[9-11절] 광야에는 칼이 있으므로 죽기를 무릅써야 양식을 . . . .

예레미야는 또 말한다. “광야에는 칼이 있으므로 죽기를 무릅써야 양식을 얻사오니 주림의 열기로 인하여 우리의 피부가 아궁이처럼 검으니이다[탔나이다]. 대적이 시온에서 부녀들을, 유다 각 성에서 처녀들을 욕보였나이다.” 광야에는 바벨론 군인들의 칼이 있기 때문에 양식을 얻기 위해 광야로 나가는 것은 죽을 각오를 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여러 날 먹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피부는 아궁이처럼 탔다. ‘검다’는 원어(카마르)는 ‘달아오르다’는 뜻이다(BDB, NASB, NIV). 또 대적자들은 시온에서 부녀자들을, 유다 각 성에서 처녀들을 학대하고 욕보였다. 전쟁의 결과는 비참했다. 거기에는 인간의 기본적 도덕성도, 양심도, 인정도 없었다.

[12-14절] 방백들의 손이 매어달리며 장로들의 얼굴이 존경을 . . . .

예레미야는 또 말한다. “방백들의 손이 매어달리며 장로들의 얼굴이 존경을 받지 못하나이다. 소년들이 맷돌을 지오며[돌리오며] 아이들이 섶을 지다가 엎드러지오며 노인은 다시 성문에 앉지 못하며 소년은 다시 노래하지 못하나이다.” 방백들의 손이 매어달리기까지 했고 장로들의 얼굴이 존경을 받지 못했다. 이전에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던 자들이 이제는 모욕과 부끄러움을 당했다. 이전에 그렇게 힘든 일을 해본 적이 없는 어린 소년들이 무거운 맷돌을 돌렸고 어린아이들은 땔감을 지다가 힘들어 엎드러졌다. 노인들은 이전처럼 성문에 앉아 담소하거나 성안의 재판사건을 처리하는 일을 하지 못하였고 소년들은 이전처럼 즐거운 노래를 부르지 못하였다.

[15-18절] 우리 마음에 희락이 그쳤고 우리의 무도가 변하여 . . . .

예레미야는 또 말한다. “우리 마음에 희락이 그쳤고 우리의 무도가 변하여 애통이 되었사오며 우리 머리에서 면류관이 떨어졌사오니 오호라, 우리의 범죄함을 인함이니이다. 이러므로 우리 마음이 피곤하고 이러므로 우리 눈이 어두우며 시온산이 황무하여 여우가 거기서 노나이다.” 그들의 마음에 기쁨과 즐거움이 그쳤고 춤이 애통으로 변하였다. 그들의 머리에서 아름다운 면류관이 땅에 떨어졌다. 이스라엘에게서 영광이 떠났다. 예레미야는 이 모든 비극적인 현실이 그들의 죄 때문이라고 말한다. 불행은 죄 때문에 온다. 그것은 개인이나 가정이나 국가나 마찬가지이다. 죄의 결과로, 그들의 마음은 피곤하였고 그들의 눈은 어두웠으며 시온산은 황무해져서 사람들이 거하는 대신 여우들이 뛰노는 곳으로 변하였다.

[19-20절]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오며 주의 보좌는 . . . .

예레미야는 또 말한다.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오며 주의 보좌는 세세에 미치나이다.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잊으시오며 우리를 이같이 오래 버리시나이까?” 예레미야는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을 앙망한다. 그는 하나님의 영원하심과 그의 영원한 통치자 되심을 고백한다. ‘영원히 계신다’는 말은 영원히 통치하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NASB, NIV). 시편 9:7, “여호와께서 영영히 앉으심이여, 심판을 위하여 보좌를 예비하셨도다.” 시편 29:10, “여호와께서 홍수 때에 좌정하셨음이여, 여호와께서 영영토록 왕으로 좌정하시도다.” 선지자는 영원하신 통치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영원히 잊으시고 버리실 것인지 질문한다. 사람들은 현재의 비극적 징벌과 재앙으로 인해 낙심하고 조급해하지만, 선지자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섭리가 그때에도 진행되고 이루어지고 있음을 믿고 있다.

[21-22절]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 . . .

예레미야는 또 말한다.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주께서 우리를 아주 버리셨사오며 우리에게 진노하심이 특심하시니이다[만일 주께서 우리를 아주 버리지 않으셨고 우리에게 진노하심이 특심하지 않으시다면](NASB, NIV).”

선지자 예레미야는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의미심장한 기도의 말씀을 아뢴다.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선지자가 성령의 감동 가운데 올린 이 기도는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하고 무능력해져 있음과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만 가능하다는 귀한 진리를 증거한다. 사실, 선지자 예레미야가 쓴 예레미야서는 이 진리를 밝히 계시하고 강조한 성경이다. 예레미야 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예레미야 13:23,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이 진리는 신약시대에 사도 바울을 통해 밝히 증거되었다. 로마서 8:7-8,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로마서 9: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구원과 회복은 인간의 본래의 복되고 영광스런 상태로의 회복이다. 그것은 성경이 예언하는 바로 그 회복이다. 사도행전 3:21,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여 말씀하신 바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 요한계시록 21:1, 5,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본장의 교훈은 분명하다. 첫째로, 죗값은 크고 무섭다(7, 16절). 하나님께서는 심판자이시다. 그는 죄에 대해 고생과 파멸, 영육의 죽음과 영원한 지옥으로 벌하신다(계 21:8).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류의 죄의 대가를 치루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에 죽으셨다.

둘째로, 그러므로 우리는 범죄치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이며, 구원받은 자는 다시는 죄를 범치 말아야 한다. 죄 없는 인격과 세상이 하나님의 구원의 목표이며 섭리의 목표이다. 구원은 죄사함이며 신앙생활의 일차적 목표는 죄 안 짓는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만 의지하자. 21절,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로마서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로마서 9: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만 의지하고 감사하며 찬송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