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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강해

김효성 목사

2018년 1월 12일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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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주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 바울의 증거대로(마 5:18; 요 10:35; 갈 3:16; 딤후 3:16), 성경은 하나님의 정확무오(正確無誤)한 말씀이며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진술대로(1:8), 성경 원본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고 그 본문은 “그의 독특한 배려와 섭리로 모든 시대에 순수하게 보존되었다.” 이것이 교회의 전통적 견해이다. 그러나 19세기 말 웨스트코트와 호트가 주장한 불확실한 가설에 의해 많은 교회들이 신약성경의 전통적 다수 본문을 버리고 불완전하고 오류투성이의 사본들(א와 B)을 중시하는 잘못을 범하였다. 그러나 신약성경의 전통적 비잔틴 다수 사본들의 본문은 순수하게 보존된 성경 원본의 본문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채택되어야 할 것이다.

성경을 가지고 설교할지라도 그것을 바르게 해석하고 설교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올 것이다(암 8:11). 중세 시대 말, 종교개혁 직전과 같이, 오늘날 벌써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오는 것 같다.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설교와 성경강해가 있지만, 순수한 기독교 신앙 지식과 입장은 더 흐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요구되는 성경 해석과 강해는 복잡하고 화려한 말잔치보다 성경 본문의 바른 의미를 간단 명료하게 해석하고 적절히 적용하는 것일 것이다. 사실상, 우리는 성경책 한 권으로 충분하다. 성경주석이나 강해는 성경 본문의 바른 이해를 위한 작은 참고서에 불과하다. 성도는 각자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성경을 읽어야 하며, 성경주석과 강해는 오직 참고로만 사용해야 할 것이다.

  

제목 차례

 1장: 탄생

 2장: 유아 시절

 3장: 세례 요한의 사역

 4장: 공적 사역을 시작하심

 5장: 완전한 의의 삶

 6장: 참된 경건의 삶

 7장: 행위로 열매 맺는 삶

 8장: 주님의 능력

 9장: 죄를 사하는 권세

10장: 열두 제자를 보내심

11장: 믿음 없는 세상

12장: 성령 훼방죄

13장: 천국 비유들

14장: 떡의 기적

15장: 마음의 더러움

16장: 베드로의 신앙고백

17장: 변화산 사건

18장: 겸손과 용서를 가르치심

19장: 부자는 천국 들어가기가 어려움

20장: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

21장: 예루살렘에 올라가심

22장: 유대의 지도자들과 변론하심

23장: 위선자들을 책망하심

24장: 주의 재림과 세상 종말

25장: 깨어 충성할 것

26장: 잡히심

27장: 죽으심

28장: 부활하심

 

 

서론

‘복음’이라는 원어(유앙겔리온)는 ‘좋은 소식’이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세상에 주신 가장 좋은 소식이다. 복음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생애를 증거하는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이라는 네 권의 책에 적용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다 죄로 인해 멸망받을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

사복음서의 처음 세 권은 공관복음(共觀福音)이라 불린다. ‘공관’이라는 말은 ‘함께 보여진’이라는 뜻이다. 처음 세 권은 ‘대조표’를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비슷한 내용들을 많이 담고 있다. 이와 대조하여, 요한복음은 공관복음들의 내용을 보충하는 성격을 띤다.

본서의 저자는 마태이다.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의 열두 제자들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전에는 직업이 세리이었다(마 9:9; 10:3).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진실한 증인들이었고 이 책에 기록된 내용들은 다 사실이었음을 믿는다.

마태복음이라는 명칭은 매우 오래된 것이다. 그것은 주후 1세기 말 디다케(80-100년경)에서 자주 사용되었고 바나바 서신(70-100년경)에서는 심지어 ‘기록되었으되’라는 표현이 사용되면서 인용되었다. 그 외에도 순교자 저스틴(100-165년경) 등 여러 사람들에 의해 인용 혹은 암시되었다.

초대교회는 만장일치로 본서를 사도 마태가 쓴 책으로 돌린다. 파피아스(60-130년경)는 “마태는 히브리어로 로기아(어록집)를 작성하였다”고 말했다.1) 로기아는 어떤 책이었을까? 그것은 아마 마태가 아람어로 쓴 복음서이며 다른 사람이 그것을 헬라어로 번역했든지(잔), 아니면 마태가 아람어로 쓴 그리스도의 말씀들을 담은 한 책이며 후에 그가 또 헬라어로 그의 복음서를 기록했을 것이다(벵겔, 엘리코트). 이레니우스(130-200년경)는 “마태는 또한 히브리인들의 방언으로 된 하나의 기록된 복음서를 히브리인들 가운데 내어놓았다”2)고 말했다. 오리겐(185-254년)도 본서를 마태의 저작으로 돌린다.3) 마태는 뛰어난 사도가 아니었으므로 그가 본서를 기록하지 않았다면 본서가 그에게 돌려진 것은 이상한 일일 것이다. 로마제국의 세금 공무원이었던 그는 아람어와 헬라어를 잘 알았을 것이다.

마태복음의 저작 연대는 주후 45-50년경이라고 본다. 초대교회는 많은 핍박을 당했고 이런 환경 속에서 신자들의 믿음을 견고케 하고 위로 격려하며, 또 핍박하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이 구약 예언의 성취임을 증거하는 것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전통에 의하면, 사도 마태는 15년간 팔레스틴에서 전도사역을 했고 그 후 이방나라들로 갔다. 그러므로 그는 아마 팔레스틴을 떠나기 전에 유대인들을 위해 본서를 기록했을 것이다. 또 주후 70년의 예루살렘 멸망의 사건이 미래의 일로 예언되어 있는 것을 보면, 본서는 주후 70년 이전에 기록되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마태복음에는 다음 몇 가지 특별한 점들이 있다.

(1) 마태복음은 예수께서 구약성경에 예언된 메시아이심을 강조한다. 마태복음 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 본서에는 ‘다윗의 아들’이라는 표현이 9회 나오고, 구약성경의 인용이나 암시가 약 65회 나온다.

(2) 본서는 왕과 왕국(나라)을 다루는 구약적 요소를 지닌 책이다. ‘천국’(하늘나라)이라는 말이 33회나 나온다.

(3) 본서에는 ‘의로운’(디카이오스 divkaio", 19번)과 ‘의’(디카이오쉬네 dikaiosuvnh, 6번)라는 말이 여러 번 나온다.

(4) 본서에는 복음서들 중에 유일하게 ‘교회’(16:18; 18:17, 17)라는 말이 나온다.

(5) 본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선생으로 강조한다. 물론, 그의 구주 되심은 전제되어 있지만.

(6) 본서에는 6개의 설교들 혹은 교훈들이 있다:

5-7장, 산상설교.

10장, 전도자 파송의 교훈.

13장, 천국에 대한 비유들.

18장, 겸손과 용서에 대한 교훈.

23장, 바리새인들의 위선에 대한 책망.

24-25장, 감람산 교훈.

(7) 본서에는 15개의 비유와 20개의 기적이 나온다.

(8) 본서에는 이방인에 대한 관심도 있다. 1장에는 예수님의 족보에 이방 여인들이 두 명(라합과 룻) 언급되고, 28장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라는 명령이 나온다.

(9) 가룟 유다의 후회, 돌문의 인봉, 보초병의 배치, 성도들의 부활 등의 사건은 본서에만 나온다.

(10) 본서에는 ‘그때’라는 말(토테)이 90회나 나온다. (마가복음에는 단지 6회, 누가복음에는 14회, 요한복음에는 10회 나온다.)

 

 

1장: 탄생

1-17절,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1절]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世系)라.

‘세계’(世系)라는 원어(비블로스 게네세오스)는 ‘족보에 대한 기록’이라는 뜻이다. 복음서들은 세상에 오신 메시아에 대해 증거하는 책이며, 마태복음의 첫 부분은 메시아의 족보에 대해 말한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은 구약성경에 예언되고 약속된 자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라”고 약속하셨다(창 22:18). 그것은 메시아 약속이었다. 또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그의 몸에서 날 자식으로 그 나라를 견고케 하시고 그 나라의 위(位)를 영원히 견고케 하시리라고 약속하셨다(삼하 7:12-13, 16).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호세아 같은 선지자들은 앞으로 오실 메시아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다(사 9:6, 7; 11:10; 렘 23:5; 겔 34:23, 24; 호 3:5).

예수께서 구약성경에 약속된 메시아라는 사실은 세 가지 진리를 보여준다. 첫째로, 하나님의 일에는 때가 있다. 천하에 범사에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다(전 3:1). 하나님의 일에는 때가 있다. 하나님의 때는 일반적으로 긴 세월을 필요로 한다. 아브라함은 주전 2천년경의 인물이고, 다윗은 주전 천년경의 인물이다. 수천년이 지나서 하나님의 때가 되었다. 하나님은 결코 조급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는 천년이 하루 같다(벧후 3:8).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신 것도 벌써 2천년이 지났지만 그는 반드시 오실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시간표를 믿음으로 바라보자. 우리는 조급하지 말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성도가 되자.

둘째로,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신 성실하신 분이시다. 그는 아브라함의 씨를 통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게 하겠다는 약속과, 다윗의 자손으로 영원한 왕위를 얻게 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셨다. 사람에게는 약속을 쉽게 어기는 불성실함이 많다. 시간 약속을 어기는 경우도 있고 돈에 대해 불성실한 일도 있다. ‘배약’(背約) 즉 약속을 어기는 것은 죄악이다(롬 1:31). 그러나 하나님은 성실하시다. 그는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시다. 그는 약속대로 메시아를 보내주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본받아야 한다. 특히 시간과 돈과 말에 있어서 약속을 지키는 자가 되어야 한다. 성도는 약속에 성실해야 한다. 그것이 바른 인격자의 모습이요 하나님의 형상의 모습이다.

셋째로, 하나님은 약속을 이행할 수 있는 능력자이시다.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일을 만세 전에 계획하며 작정하시고 그것을 이루시는 주권적 능력자이시다. 사람은 자신의 능력의 한계성 때문에 약속을 못 지킬 경우가 있으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그에게는 무슨 일이든지 행할 능력이 있으시다. 우리가 이런 하나님을 알고 믿게 된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가! 그러므로 범사에 하나님만 바라고 의지하며 그의 때와 그의 하시는 일을 기다리자.

[2-3절]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유다가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은 일이 언급되어 있다. 유다가 다말에게 들어간 것은 부끄러운 일이었다. 비록 그의 아내가 죽었고 외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을지라도, 그가 다말을 창녀로 알고 그에게 들어간 것은 부끄러운 실수이었다. 그 여자가 바로 자기 며느리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였다. 다말편에서 볼 때에도 시아버지가 옛날 풍습대로 막내아들을 자기에게 주지 않았기 때문에 불평할 말이 있었다 할지라도, 며느리가 시아버지와 관계를 가졌다는 것은 심히 악하고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다말의 이름이 언급된 것은, 하나님께서 유다의 그 부끄러운 실수와 다말의 그 악행까지도 그의 메시아 약속 이행을 위해 사용하셨음을 보인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악한 일까지도 그의 거룩하고 선한 일을 위해 사용하셨다.

이 일은 또 하나님의 구원이 어떠함을 암시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의 구주로 오셨다. 그는 의인을 부르러 오지 않으셨고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셨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죄인임을 아셨기 때문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고, 그로 말미암아 그들의 수치스런 죄악들을 깨끗케 하시기를 원하셨다. 그러므로 사람은 과거의 부끄러운 실수들과 악행들 때문에 뒤로 물러나지 말고 그것들을 하나님께 고백하고 죄씻음을 받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부끄러운 과거 때문에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義)만 믿고 의지하며 이제는 거룩하고 선하게만 살자.

[4-5절]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라합과 룻이라는 두 여인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다. 라합은 여리고 성의 창녀이었고, 룻은 모압 여인이었다. 그 둘은 다 이방인이었다. 한 사람은 부도덕하고 천한 신분의 이방 여인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젊어서 과부가 된 불행했던 이방 여인이었다. 그러나 이 둘의 공통점은 그들이 다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라합은 천한 죄인이 존귀한 성도가 된 경우이고, 룻은 불행한 이방인이 복된 선민이 된 경우이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이었다. 어떻게 여리고 성의 창녀가 메시아의 족보에 오를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가엾은 무명의 이방 여인이 그리스도의 조상으로 언급될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하나님의 감동 가운데 사도 마태가 의도적으로 언급한 것임에 틀림없다. 이것은 분명히 신약시대에 있을 이방인 구원을 예시한 것이다. 우리가 바로 그런 은혜를 받은 자들이다. 비천한 이방 죄인이었던 우리가 존귀한 성도의 회에 들어왔다. 우리가 무엇이기에 이렇게 하나님을 섬기며 그가 약속하신 천국 영광을 바라며 살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찬송하자.

[6절]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는 우리야의 아내라는 여인도 언급되었다. 우리야는 다윗의 충성스런 병사이었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를 범하고 그 죄를 은닉하기 위해 우리야를 전장(戰場)에 내세워 고의로 죽게 한 것은 큰 죄악이었고 다윗의 생애에 지울 수 없는 큰 오점(汚點)이었다. 그것은 비록 실수로 시작되었다고 할지 모르나 결과적으로 고의적 악행이었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의 엄한 징계를 겪어야 했다. 밧세바가 낳은 첫 아기는 죽었고 다윗은 자기의 집에 칼이 영영히 떠나지 않는 징벌을 받았다. 그러나 이런 실수 외에는 다윗은 역사상 보기 드문 경건하고 의로운 사람이었다.

하나님의 섭리는 큰 죄를 범한 경험이 있는 다윗을 통해 이루어졌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죄악된 행위를 인정하신 것은 아니나 인간의 실수와 죄까지도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안에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인간은 죄악되고 실수투성이이지만,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누추하고 연약한 인간을 사용하여 그의 뜻을 다 이루셨다.

이 일은 마치 요셉을 판 형들의 악행이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일이 된 것이나, 가룟 유다의 배신이 인류의 구속(救贖)을 이루는 일이 된 것과도 같다. 악을 행한 자들의 악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갚으실 것이지만, 그 악 때문에 하나님의 일이 좌절되지는 않았다.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긍휼로 그의 일들을 이루신다. 인류의 구원과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찬송하며, 또 어떤 상황에서도 낙망치 말고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자.

[7-11절] 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사를 낳고 아사는 여호사밧을 낳고 여호사밧은 요람을 낳고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 웃시야는 요담을 낳고 요담은 아하스를 낳고 아하스는 히스기야를 낳고 히스기야는 므낫세를 낳고 므낫세는 아몬을 낳고 아몬은 요시야를 낳고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에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를 낳으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는 악한 남자들도 많이 들어 있다. 다윗의 자손들인 유다의 왕들은 대부분 악한 자들이었다. 솔로몬은 노년에 우상숭배에 떨어졌다. 그의 아들 르호보암은 교만한 자이었다. 아사는 경건했으나 말년에 발에 병이 있었을 때 하나님께 구하지 않고 의사에게 구하였다. 여호사밧도 경건했으나 악한 왕 아합과 교제를 끊지 않음으로 그의 자녀들의 타락과 부패의 길을 닦았다. 여호람은 아합의 딸을 취함으로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를 본받았고 말년에는 하나님이 치시므로 창자에 고치지 못할 병이 들어 아끼는 자 없이 세상을 떠났다. 아하시야, 요아스, 아마샤의 이름은 생략되어 있으나 그들도 다 악한 자들이었다.

그 다음, 웃시야는 교만해져 제사장의 일을 하려 하다가 나병이 들어 여생을 마쳤다. 므낫세는 가장 악한 왕이었다. 그의 많은 우상숭배로 유다 왕국은 결국 멸망에 이른다. 아몬, 여고냐(여호야긴) 등도 악하였다. 마침내 유다 왕국은 멸망하였고 70년간의 바벨론 포로생활로 이어진다. 구약 역사 전체가 그러하지만, 특히 유다 열왕들의 340여년의 역사는 인간의 연약함과 죄악됨을 증거하였다.

그러나 메시아의 계보는 그런 연약한 인간들을 통해 흘러내려왔다. 사람들의 많은 부족과 무력(無力)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구원 계획을 이루어 오셨다. 하나님은 주권자시요, 그의 주권적 긍휼은 죄인들을 능히 구원할 구주를 보내셨고 또 그들을 실제로 구원하셨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누가 예측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이나 현대교회들의 배교와 타협과 부패들로 인해 낙심하지 말자. 하나님의 섭리는 지금도 진행되고 있음을 믿자. 악인들은 악을 행할지라도, 구원받은 성도들은 오직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며, 참 교회를 세우고 그 교회를 부흥케 하며, 하나님의 거룩하고 선한 일들을 위해 힘쓰자.

[12-17절]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에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 스룹바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리아김을 낳고 엘리아김은 아소르를 낳고 아소르는 사독을 낳고 사독은 아킴를 낳고 아킴은 엘리웃을 낳고 엘리웃은 엘르아살을 낳고 엘르아살은 맛단을 낳고 맛단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님이 나시니라. 그런즉 모든 대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 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열 네 대요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 네 대러라.

마태복음 1장의 족보는 누가복음 3장의 것과 좀 다르다.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의 법적 부친인 요셉으로부터 올라가면서 헬리, 맛단, 레위로 이어지고, 또 레사에게서 스룹바벨로, 또 나단에게서 다윗으로 이어 올라간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오는 두 족보들의 차이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다음 몇 가지의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첫째로, 옛 시대에나 오늘날에나 한 사람이 두 가지 이상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일이 종종 있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을 배신한 제자 가룟 유다 대신에 한 사람을 뽑기 위해 추천된 자들 중 한 사람은 “바사바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라고 하는 요셉”이었다(행 1:23). 이와 같이 같은 사람이 다른 이름들을 가진 경우가 있었을 것이다.

둘째로, 옛 시대에나 오늘날에나 입양(入養) 제도가 있고, 특히 옛 시대에는 수혼(嫂婚) 제도, 즉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형의 후손이 끊어지지 않게 하는 풍습이 있었다. 신명기 25:5-10은 수혼제도를 율법으로 규정하였다. 이러한 제도들은 혼선 같아 보이는 어떤 족보의 이유일지도 모른다.

셋째로, 여러 유력한 주석가들은 누가복음 3장의 족보가 요셉의 족보가 아니고 마리아의 족보일 것이라는 추측을 제안하였다.4)

비록 우리가 두 족보들 간의 차이의 정확한 이유를 알지 못하지만, 우리는 두 개의 족보가 다 진실하고 정확함을 믿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성경의 진실성과 영감성과 권위성을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마태와 누가의 증언을 둘 다 참되다고 믿는다. 만일 우리가 성경의 어느 한 부분을 부정한다면 우리는 그 나머지도 의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는 신구약성경이 진실한 증거의 책임을 알고 성경의 모든 말씀을 다 믿고 행하고 소망해야 한다.

 

18-25절, 처녀 마리아에게서 나심

[18-25절]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요셉이 잠을 깨어 일어나서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 아내를 데려 왔으나 아들[그 여자의 맏아들](전통본문)5)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18절부터 25절까지는 우리에게 몇 가지의 사실을 증거한다. 첫째로, 본문은 예수께서 처녀 마리아에게서 나셨음을 밝히 증거한다. 그 증거는 여섯 가지 면에서 더해진다. ① 마리아는 요셉과 ‘동거하기 전에’(18절), 즉 아직 육체 관계를 갖기 전에 아기를 임신하였다. ② 그는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다’(18절). ③ 요셉은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였다”(19절). 왜냐하면 약혼녀인 마리아의 임신이 자기와의 관계에서 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④ 마리아와 조용히 헤어지려고 생각하는 요셉에게 주의 천사가 꿈에 나타나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하였음을 증거해주었다(20절).

⑤ 메시아의 처녀 성탄의 사실은 구약성경에 예언된 바의 성취이었다. 이사야 7:14,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자유주의자들이 ‘처녀’라는 말(알마)을 ‘젊은 여자’로 번역하려 했지만, 그 말은 성경에서 사용된 용례로 볼 때 ‘결혼한 젊은 여자’를 가리키지 않고 ‘처녀로 간주되는 젊은 여자, 즉 소녀’를 가리킨다고 본다(창 24:43). 그러므로 헬라어 70인역은 이 단어를 ‘처녀’(파르데노스)라고 번역하였다.

⑥ 예수 그리스도의 법적 부친인 요셉은 천사의 말대로 그 아내 마리아를 데려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않았다(24, 25절).

예수 그리스도께서 처녀 마리아의 몸을 통해 탄생하셨다는 사실은 그의 신적 인격을 증거한다.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신 예수께서 이런 방식으로 사람이 되시는 것은 합당하였다. 신약성경도 이 점을 증거한다. 누가복음 1:35,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예수 그리스도는 단지 한 훌륭한 유대인이거나 어떤 탁월한 종교적 천재가 아니셨다. 우리는 단순히 그의 사상이나 인격을 본받는 자들이 아니다. 물론, 우리는 그를 본받는다. 그러나 그는 우리의 모범 이상이시다. 그는 우리의 찬송과 경배의 대상이시다. 신약성경은 그에게 신적 명칭, 신적 속성들, 신적 사역, 신적 영광을 돌린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동일하고 동등한 분이심을 믿는다. 그의 모든 기적들은 그를 증거한다. 우리는 그의 신성의 영광을 믿는다.

둘째로, 이 부분은 메시아의 사역의 목표를 분명히 언급한다. 21절,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예수’라는 헬라어는 ‘여호수아’라는 히브리어와 같은데, ‘구원’이라는 뜻이다. 메시아의 사역은 구원 사역이다. 그는 죄인들을 구원하는 자 곧 구주로 이 세상에 오셨다.

구원은 단지 병이나 가난이나 자연 재해 등으로부터의 구원이 아니고, 죄로부터의 구원이다. 그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시다. 죄가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요, 그 외의 것들은 죄로부터 파생된 문제들이다. 메시아께서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셨다(눅 5:32; 마 9:13 전통본문). 그의 사명은 죄인을 구원하시는 것이다. 그 외의 문제들은 장차 천국에서 다 해결될 것이다.

그는 엄격히 말해 ‘자기 백성’ 즉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택하신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다. 성경은 선택의 진리를 가르친다. 주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셨다(요 6:37, 39).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자기 백성을 택하셨다고 증거하였다(엡 1:4-5).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그들을 위해 대속제물이 되기 위해 오셨고 그들을 구원하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도 죄인을 구원하시는 일을 계속하신다. 그 일은 지금 참 교회들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전도는 교회의 첫 번째 임무, 곧 교회의 사명이다. 그러므로 참 교회들에 속한 성도들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위해 그들의 몸과 시간과 물질을 거룩하게, 즐거이 드려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법적 부친으로 택하신 요셉에게서도 배울 것이 있다. ① 요셉은 경건하고 의로운 사람이었다(19절).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이었다. 그는 천사의 지시를 즉시 순종하였다(24절).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을 즐거이 따르는 자가 의로운 자이다. 우리는 경건하고 의로운 자가 되어야 한다.

② 요셉은 선한 사람이었다. 그는 마리아를 드러내지 않고 가만히 끊고자 하였다(19절). 그는 마리아를 의심하였을 것이며 또 자신이 받을 억울한 비난이나 벌을 피하기를 원하였을 것이지만, 아직 어떤 확실한 단서를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또 마리아를 위하는 생각에서 그를 드러내지 않고 가만히 끊고자 하였을 것이다. 정확하지 않은 헛소문을 전하는 것은 바르지 못하고 선하지 못한 일이다. 출애굽기 23:1은, “너는 허망한 풍설을 전파하지 말라”고 말한다. 또 전하는 내용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남의 은밀한 단점을 퍼뜨리는 것은 선한 일이 아니다. 잠언 11:13은,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 마음이 신실한 자는 그런 것을 숨기느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선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③ 요셉은 절제심이 있었다(25절). 그는 천사의 지시대로 마리아를 데려왔으나 “그 여자의 맏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않았다”(전통본문). 그는 자기의 육신적 감정과 욕망을 절제하였다. 자기의 감정과 욕망을 절제하는 것은 높은 덕이다. 잠언 16:30은,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낫다고 말하였다. 또 갈라디아 5:22-23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들 중에 절제를 포함하였다. 우리는 절제의 덕을 구하자.

넷째로, 왜 오늘날에는 천사가 꿈에 나타나는 일이 없는가? 물론 오늘날에도 천사가 나타날 수 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고 믿었으나, 우리는 천사의 존재를 믿는다. 단지, 오늘날에 천사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그 필요성이 없기 때문이다. 옛 시대에 천사들이 나타난 것은 하나님의 특별계시를 전달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특별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과 그의 기적들과 그의 십자가의 죽음과 그의 부활로 이루신 속죄사역과 그 진리를 증거하는 신약성경의 완성으로 완료되었다. 하나님의 모든 뜻은 신구약 66권의 성경에 충족하게 다 기록되었다.

히브리서 1:1-2,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누가복음 16:31,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고린도전서 13:8-10,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개혁교회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특별하게 계시하신 이전의 방식들이 중단되었다고 믿는다. 신구약성경이 하나님의 충족한 말씀임을 믿기 때문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1, “. . .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그의 뜻을 계시하시던 이전의 방식들이 지금 중지되었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 22:18-19,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우리는 오직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사는 것으로 충분함을 알자.

 

 

2장: 유아 시절

1-12절,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께 경배함.

[1-3절]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 . . .

헤롯 왕(헤롯 대왕, 주전 40-4년)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셨는데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였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소동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다. 이것은 구약 예언들의 성취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왕이시다. 그는 교회의 머리와 주님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다. 교회는 그의 나라의 시작이다. 그는 지금 영적으로 우리의 심령을 다스리시지만, 장차 영광 중에 다시 오실 때에 온 세상을 영육으로 다스리실 것이다. 신약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께 즐거이 순종하며 그 나라를 위해 즐거이 봉사해야 한다.

[4-8절]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 . . .

헤롯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고 묻자, 그들은 미가 5:2로 대답하였다.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또 유대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모든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메시아의 출생지에 대한 성경의 예언을 잘 알고 있었으나, 동방박사들과 함께 그리스도께 경배하러 간 것 같지 않다. 그들은 성경에 능통하였으나 그들의 지식은 생명이 없는 지식이었던 것 같다. 그들은 위선에 빠져 있었다(마 23장). 믿음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고 전인격적 신뢰이다. 믿는 자는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돌릴 것이다.

헤롯은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말했다.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그러나 헤롯의 속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메시아를 경배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그를 죽이려고 계획하고 있었다.

[9-12절]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쌔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섰는지라. . . .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 때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섰다. 그들은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였다. 그들은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아기 예수님은 구유에서 집으로 옮겨져 있었다. 그들은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갔다.

동방박사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은 자들이었다. 그들은 ‘동방’ 곧 먼 이방나라에서 왔다. 그들은 믿음의 환경에서 자란 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단지 별에 대한 적은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이 주신 계시의 별에 이끌리어 먼 길을 여행하였고 아기 메시아를 찾는 열심을 나타내었다. 그들은 그의 모친과 함께 한 집에 계신 아기께 경배하였고 준비한 황금과 유향과 몰약의 귀한 예물도 드렸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경건한 전통의 특권에도 불구하고 죽은 형식적 종교를 가지고 있었으나, 동방박사들에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진지한 열심이 있었다. 그들이 어떻게 그런 경건의 열심을 가지고 그렇게 먼 길을 달려왔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저 하나님께서 하신 기이한 일에 놀랄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환경을 초월하여 그들에게 은혜를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에도 환경을 초월하여 그가 원하시는 자들에게 긍휼과 구원을 베푸신다. 우리가 다 그런 은혜를 받은 자들이다. 늘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섬기자.

 

13-18절, 헤롯 왕이 아기 예수를 죽이려 함.

[13-15절] 저희가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 . . .

동방박사들이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꿈에 나타나 말하였다.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요셉은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다. 이는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 함(호 11:1)을 이루려 하심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옛 시대에 꿈을 사용하여 그의 뜻을 알리셨다. 요셉이 마리아와 조용히 절교하려고 생각하였을 때에 주의 사자는 꿈에 나타나 마리아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니 그를 데려오라고 말하였다(1:20). 주의 사자는 꿈에 동방박사들에게 헤롯에게 돌아가지 말라고 지시하였다(2:12). 그는 또 꿈에 요셉에게 나타나 일어나 애굽으로 피난하라고 하였다(2:13). 또 그는 헤롯이 죽은 후에 꿈에 나타나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가라고 지시하였고(2:19), 또 꿈에 요셉 가족이 나사렛 동네에 거주하도록 지시하였다(2:22).

뿐만 아니라, 동방박사들이 준 황금 예물은 요셉 가족의 도피생활을 위해 유용하였을 것이다. 실상, 세상의 모든 은금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또 하나님께서는 법적 부친인 요셉으로 하여금 아기 예수와 그의 모친을 위한 보호자의 역할을 하게 하셨다.

악인들은 악한 일들을 계획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종들과 백성들을 위해 비상하게 개입하시고 그들을 보호하시고 위태할 때는 피할 길을 열어주신다. 적어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전까지는 그러하다. 그의 뜻을 좌절시킬 자는 세상에 아무도 없다. 그는 그의 뜻을 이루시는 자이시다. 참새 한 마리도 그의 허락이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마 10:29). 그의 뜻을 이룬 후에는 죽음도, 순교도 가능하지만, 그 전에는 결코 헛된 죽음이 성도에게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염려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기도하며 그가 이루시는 일을 바라보며 참고 기다리자.

[16-18절]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 . . .

헤롯은 박사들에게 속은 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들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들을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 본 그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였다. 그래서 선지자 예레미야로 말씀하신 바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다.

인간은 참으로 악하다. 헤롯이 박사들에게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2:8)고 한 말은 거짓말이었다. 헤롯은 유대인의 왕인 메시아가 자기 아들들의 왕위를 위태하게 한다고 생각하여 그를 죽이려 했던 것 같다. 그러나 박사들이 그에게 알려주지 않음으로 그의 은밀한 계획이 실패했을 때, 그는 베들레헴 부근의 2살 이하 남자아이들을 모두 죽이는 큰 악을 노골적으로 저질렀다. 그의 통치연대가 주전 4년에 끝나는 것을 보면, 헤롯은 이런 악을 행한 후에 죽은 것 같다.

이 세상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 남을 짓밟고 죽이기도 하는 참으로 악한 세상이다. 비록 이 세상은 그러할지라도,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질투하지 않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고전 13:4-5). 참된 신자는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19-23절, 예수께서 나사렛 마을에서 자라심.

[19-23절] 헤롯이 죽은 후에 주의 사자가 애굽에서 요셉에게 . . . .

헤롯이 죽은 후에 주의 사자가 애굽에서 또 요셉에게 꿈에 나타나서 말했다. “일어나 아기와 그 모친을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느니라.” 요셉은 일어나 아기와 그 모친을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아켈라오(헤롯 아켈라오, 주전 4년-주후 6년)가 그 부친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됨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였고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 나사렛이란 동네에 와서 살았다.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었다.

나사렛(나조라이오스 Nazwrai'o")은 구약성경의 나실인(히브리어 네지르 , 헬라어 나지르 Nazivr나제이라이온, Nazeirai'on ‘바쳐진 자, 구별된 자’)이나 ‘가지’(히브리어 네체르)(사 11:1)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예수 그리스도는 나실인 중에 나실인이시며, 이새의 뿌리에서 난 한 ‘가지’이시다.

나사렛 마을은 시골 벽촌이었다. 예수님은 시골 사람이셨다. 그는 어린 시절과 청소년 시절을 시골에서 보내셨다. 거기서 그는 약 30년을 사셨다. J. C. 라일의 말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는 사람이 어디에 사느냐보다 그가 어떠한 사람이냐가 더 중요하다.” 사람의 환경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의 됨됨이이다.

예수께서는 그 시골에서 하나님의 때가 되기까지 겸손히 자신을 감추셨다. 우리는 예수님의 겸손을 본받자. 스스로 자기를 높이고 자기를 선전하는 것은 세상 사람의 모습이며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의 모습은 아니다. 자신을 높이고 드러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고 감추는 자는 높아질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쓰실 때까지 겸손히 자신을 낮추고 감추는 자가 되자.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은 그의 가난해지심이었다. 고린도후서 8: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본래 부요하신 분이셨다. 그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그의 신성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의 영광과 부요를 생각할 수 있다. 하나님처럼 부자가 누구인가? 그러나 그는 자발적으로 우리를 위해 가난해지셨다.

그는 가난한 가정에 태어나셨다. 마리아는 그의 탯줄을 따뜻한 방이나 병원에서가 아니고, 아마 쌀쌀했을 구유에서 끊었다. 얼마 후 요셉은 가난한 자가 드리는 제물인 비둘기를 하나님께 제물로 드렸다. 그가 전도자로 나서셨을 때에도 그는 집을 갖지 않으셨다. 그가 때때로 시장하셨던 것을 보면 드실 음식이 늘 준비된 것 같지 않다. 마침내 그는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제물로 내어놓으셨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은 그의 낮아지심의 절정이었다.

그의 낮아지심과 가난하게 되심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큰 은혜이었다. 왜냐하면 그의 낮아지심과 가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과 부요함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 받은 구원과 부요함이 무엇인가? 우선, 우리는 죽었던 영혼,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아야 했던 우리 영혼이 부활과 영생을 얻었다. 참 소망이 없었던 우리가 부활과 영생 소망을 가지게 된 것이다. 또 하나님 자녀의 자격을 잃었던 우리가 그의 자녀가 되었고, 기도할 줄 몰랐던 우리가 기도하는 특권을 얻었다. 죄로 인해 허무하고 비천하고 무가치했던 우리, 벌레와 같았던 우리가 천국의 기업을 상속받는 존귀한 자들이 되었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자들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만 높이고 그에게 감사하자. 또 하나님을 위해, 교회와 믿음의 형제들을 위해 우리 자신을 감추고 우리 자신을 낮추자.

 

 

3장: 세례 요한의 사역

1-12절, 세례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품

[1-3절] 그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 . . .

그때에 세례[세례주는 자] 요한이 유대 광야에 나타나 전파하기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외쳤다. 그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자이었는데, 이사야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고 하였다(사 40:3).

세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보다 앞서 와서 그의 길을 예비한 자이었다. 그는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였다. 그가 외친 내용은 회개하라는 것이었다. 예수께서도 오셔서 회개를 전파하셨다(마 4:17). 회개는 죄를 인정하고 그것을 미워하고 그것을 청산할 결심을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셨다(눅 5:32). 또 그는 사람이 멸망치 않으려면 반드시 회개해야 한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다(눅 13:3). 또 그는 하나님께서 죄인 한 명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의인 아흔 아홉명보다 더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셨다(눅 15:7).

복음 운동은 회개 운동이다. 예수께서는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다”고 말씀하셨다(눅 24:47). 복음 확장의 역사는 회개 운동의 확산의 역사이었다. 오순절의 성령 강림 후 모여든 유대인들에게 베드로는 “너희가 회개하라”고 외쳤다(행 2:38). 베드로를 통해 고넬료의 가족들이 복음으로 구원받은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의 제자들은,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라고 말했다(행 11:18). 사도 바울은 자신의 전도 사역을 요약하기를,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을 향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고 하였다(행 20:21).

기독교는 회개 운동이다. 죄인이 죄 가운데 머물러 있으면서 구원이나 신앙생활을 말할 수 없다. 죄를 회개하는 것이 구원이며 신앙생활의 시작이다. 우리 교회에 발을 디디는 자마다 참으로 회개하는 자가 되기를 기도하자. 우리 가족들과 교우들 중에 회개치 않은 자가 하나도 없기를 기도하자.

[4절] 이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 . . .

세례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 곧 야생꿀이었다. 이 구절은 세례 요한의 옷차림과 먹는 음식에 대해 증거한다. 약대 털옷과 가죽띠는 검소한 옷차림이다. 세례 요한은 제사장 가정에서 태어났으므로 제사장의 귀한 의복과 생활 환경을 가질 수 있었으나, 모든 것을 버리고 광야 생활을 선택하였다. 그의 복장은 회개를 외치는 하나님의 종다운 복장이었다.

성경은 하나님의 종뿐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검소한 옷을 입으라고 가르친다. 디모데전서 2:9,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라.” 베드로전서 3:3,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라.” 이런 교훈은 어찌 여자에게만 해당하겠는가? 성경은 값진 옷이나 호화로운 단장을 반대한다. 그리스도인의 복장은 검소해야 한다.

요한은 음식도 검소하였다. 물론 광야생활이니 검소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성경은 성도의 식생활이 검소해야 할 것을 교훈한다. 잠언 23:20, “술을 즐겨하는 자와 고기를 탐하는 자로 더불어 사귀지 말라.” 디모데전서 6:7-8,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장차 올 천국에 대한 소망이 없는 자들은 이 세상에서 먹고 마시는 것을 크게 여길 것이다. 그러나 내세의 소망을 가진 성도는 그렇지 않다.

전도와 구제는 주께서 명하신 교회와 성도들의 최대의 임무이다. 우리가 전도와 구제를 위해 돈을 쓰려면 검소하게 먹으며 절약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내세(來世)가 있다. 거기에는 온갖 부요(富饒)와 보화가 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 장망성(將亡城)에 그렇게 애착을 두지 않으며 과도하게 물질을 소모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굳세게 가지고 우리의 생활 방식을 정리하자. 우리는 검소하게 먹고 입으며 선한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되자.

[5-6절] 이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다 . . . .

이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많은 사람이 요한에게 나아와 그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그의 종들의 손에 붙이실 때 구원의 역사가 일어난다. 비록 그는 후에 옥에 갇히고 목 베임을 당할 것이지만, 그의 사역은 얼마 동안이나마 성공적이었다. 사람의 구원이나 교회의 부흥은 하나님의 긍휼에 달려 있다. 그가 긍휼히 여기실 때 영혼이 구원받고 교회가 부흥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바른 말씀을 선포하는 자들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주지 않으시면 영혼들의 구원과 교회의 부흥을 경험하지 못할 것이다. 그 대표적 인물이 선지자 예레미야이다. 그는 약 41년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으나 한 명의 회심자를 얻지 못한 것 같다. 예루살렘성은 의인 한 명이 없어서 마침내 멸망하였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고 성실하게 선포하고 전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사역의 결과에 대해 너무 마음을 쓰지 말자.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사람이지만,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고전 3:6).

그러므로 주의 종들과 교회는 단순히 교인들의 수에 관심을 두지 말자. 우리의 진정한 관심은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충실한 도구가 되어 그의 말씀을 바르고 성실하게 전달하였는가에 있어야 할 것이다. 사람이 수에 관심을 둘 때 불신앙과 오류를 포용하기 쉽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하나님 앞에 바른 교회, 바른 목사, 바른 직분자, 바른 교인이 되기를 원하며, 또한 하나님의 긍휼로 영혼들이 구원을 얻고 교회가 부흥하기를 기도하자.

[7-10절]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 데 . . . .

요한은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 말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바리새인들은 유대인들 가운데 경건하고 보수적인 자들이었고, 사두개인들은 주로 부유한 제사장들이었다고 한다. 요한의 책망을 보면, 그들은 회개하였기 때문에 온 것 같지는 않다. 요한은 그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모든 죄인이 다 마귀의 자식이라는 뜻을 내포할 것이지만(요 8:44; 요일 3:10), 특히 그들이 남을 죽이는 독을 품은 자들이라는 뜻일 것이다.

요한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임박한 진노를 선포하였다. 그는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고 도끼로 나무를 찍듯이 하나님께서 악인들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임박한 진노는 실제로 칼, 기근, 전염병 등이었다. 주후 70년 유대인 반란을 진압하는 로마 군대의 칼날로 예루살렘은 황폐케 될 것이다. 그러나 최종적으로는 지옥불 심판이 있을 것이다.

요한은 또 유대인들의 헛된 확신을 지적하였다.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헛된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참으로 경건하고 죄를 회개하고 의와 선을 행하지 않는다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사실은 그들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것은 헛된 소망에 불과하다. 헛된 소망은 위조수표와 같아서 그것이 수백 장 있어도 아무 소용이 없다.

세례 요한은 특히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말하였다. 회개는 죄에서 돌이키는 것이다. 생각이나 말로만 인정하고 감정으로만 슬퍼하는 것은 부족하다. 참된 회개는 반드시 의지적 결단이 수반되어야 한다. 이전의 죄악된 생활방식을 청산하고 그것으로부터 돌이키는 행동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때 구원의 확신도 얻게 된다. 죄 가운데 머물면서 구원을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회개는 열매로 나타난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거룩케 된 생활이다. 믿음은 마음의 순종이지만(롬 6:17), 그 결과는 변화된 행위이다. 신앙생활은 단순히 이론이나 형식만이 아니요, 인격과 삶으로 증거된다. 전에 악하였던 사람이 이제 선한 사람이 되고, 전에 거짓되었던 사람이 이제 진실한 사람이 되고, 전에 교만했던 사람이 이제 겸손한 사람이 되고, 전에 성격이 거칠고 남을 미워했던 사람이 이제 온유와 사랑의 사람이 되고, 전에 더러운 죄에 빠졌던 사람이 이제 거룩하고 단정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참으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

[11-12절]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 . . .

세례 요한은 또 자기 뒤에 오실 메시아에 대하여 증거하였다.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세례 요한은 자기 뒤에 오시는 이 곧 메시아께서 자기보다 능력이 많으시며 자기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메시아는 과연 요한과 비교할 수 없이 능력이 많으신 분이시다. 그는 단순히 사람이 아니고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신” 분이시며(마 28:18), “신성의 모든 충만을 육체에 가지신” 분이시다(골 2:9). 요한은 메시아의 능력과 영광을 바로 보았고 자신은 그의 신을 들 종이 되기도 감당치 못할 자임을 깨달았다.

세례 요한은 또 메시아의 사역을 두 가지로 증거했다. 첫째로, 그는 메시아께서 성령으로 세례주시는 분이심을 증거하였다. 다수의 전통사본들은 ‘성령과 불로’라는 구절에서 ‘불’이라는 말을 생략하지만, 누가복음 3:16은 ‘성령과 불로’라고 증거한다. 성령과 불의 세례는 죄를 씻으시는 성령의 중생 사역을 가리켰다고 본다. 세례는 죄씻음을 상징하며 불은 더러운 죄악을 태워 깨끗케 하는 것을 상징했다고 본다. 요한은 죄씻음을 상징하는 물세례를 베풀고 있었으나, 메시아께서는 실제로 죄씻음을 주는 성령의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 예수 믿는 자들은 이미 성령의 세례, 즉 중생과 죄씻음을 받았다.

째로, 그는 메시아께서 불로 심판하시는 분임을 증거하였다. 그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완전히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다. 최후 심판 때에 알곡과 쭉정이가 나뉠 것이다. 알곡은 천국에 들이고, 쭉정이는 지옥에 던지울 것이다. ‘꺼지지 않는 불’은 지옥불을 가리킨다. 지옥의 교리는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교리이다(마 10:28; 막 9:43-49). 메시아는 심판자이시며, 그의 심판은 악인들에게 지옥 형벌이다. 죄를 회개치 않는 자가 지옥에 던지울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할 때, 지옥에 대해 침묵하는 것은 사랑도, 친절도 아니다. 우리는 그가 내릴 불 심판, 특히 영원한 지옥 불의 심판을 믿고 두려워하며 또 힘써 전하자.

 

13-17절,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

[13-17절] 이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서 요단강에 이르러 . . . .

이때에 예수께서는 갈릴리로서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셨다. 그러나 요한은 말리며 말하였다. “내가 당신에게 세레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예수께서는 대답하셨다.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그러자 요한은 허락하였다.

예수께서 죄 없으신 의인이라는 점에서나, 비교할 수 없는 능력을 소유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점에서나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는 것은 합당치 않으나, 그는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하여 세례를 받으셨다. 모든 의를 이룬다는 말은, 그가 하나님의 뜻인 세례라는 제도에 순종하심과, 모든 택함받은 자들의 죄를 담당한 자로서 상징적으로 죄사함의 세례를 받으심과, 또 그럼으로써 삼위 하나님의 증거를 받으심을 의미하였다고 본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그에게](전통본문)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오심을 보셨다. 그때 하늘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소리가 있었다. 여기에 삼위 하나님의 나타나심이 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께서 비둘기같이 내려오시고 아버지께서 하늘에서 친 음성을 들려주셨다. 특히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위해 친 음성으로 증거하셨다.

이와 같이, 마태복음 1장부터 3장까지에서 사도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적어도 일곱 가지의 증거를 기록하였다.

첫째는 구약성경의 증거이다. 마태는 메시아께서 구약성경에서 아브라함의 자손과 다윗의 자손으로 예언된 분이심을 증거하였다.

둘째는 천사의 증거이다. 천사는 요셉에게, 마리아가 아기를 성령의 능력으로 잉태하였음을 증거하였다.

셋째는 동방박사들의 증거이다. 먼 동방에서 온 박사들은 유대인의 왕이 탄생하셨음을 증거하였다.

넷째는 별의 증거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초자연적인 징조의 별은 동방박사들로 하여금 유대인의 왕의 탄생을 깨닫게 하였다.

다섯째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증거이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비록 그에게 경배하러 가지는 않았으나, 성경에 근거하여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날 것이라는 것을 증거하였다.

여섯째는 세례 요한의 증거이다. 세례 요한은 메시아께서 성령으로 세례 주실 분이시며 장차 불로 심판하실 분이라고 증거하였다.

일곱째는 하나님의 친 음성의 증거이다. 하나님께서는 친 음성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증거하셨다.

우리는 성경을 좀 단순히 읽고 성경의 충만한 증거들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자. 또 구약시대로부터 약속되고 예언되어 온 메시아를 기쁨으로 환영하고 성심으로 믿자. 그가 누구신지에 대하여 신구약성경에 증거된 대로 바르게 알고 바르게 믿고 그를 섬기며 따르자.

 

 

4장: 공적 사역을 시작하심

1-11절,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심

[1절] 그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 . . .

그때에 예수께서는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셨다. 그는 전도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인류 역사의 실패는 마귀의 시험에 넘어짐으로 시작되었다(창 3장). 그러므로 이제 인류를 구원하실 메시아의 사역이 마귀의 시험을 이기심으로 시작되는 것은 합당하였다. 예수께서는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다.

마귀는 존재한다. 그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주장하듯이 신화나 상징적 존재가 아니고 실재하는 존재이다. 그는 인류 역사의 시초에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범죄케 함으로 온 세상을 죄와 파멸로 이끈 장본인이었다. 사탄은 오늘도 교회를 부패시키고 속화시키고 택한 백성들을 미혹케 하려 한다. 베드로전서 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그러므로 교회와 성도들은 현재 마귀와의 영적 전쟁 중에 있다. 에베소서 6:10-11,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2-4절] 사십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 . .

예수께서는 사십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셨다. 시험하는 자, 곧 마귀가 그에게 나아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말했다. 예수께서는 대답하셨다.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예수께서는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실 때 성경말씀을 사용하셨다. 그는 세 번이나 “기록되었으되”라고 말씀하시며 구약성경을 인용하여 대답하셨다. 그는 다른 사람의 말을 인용하지 않으셨고, 심지어 자신의 신적 권위를 사용하지도 않으셨고, 그 대신, 기록된 성경을 인용하셨다.

성경말씀은 실로 우리의 발에 등이요 길에 빛이며(시 119::105), 우리의 신앙생활에 정확 무오한 법칙이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며,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음성이다. 또 성경은 우리가 마귀의 시험을 받을 때 그 시험을 물리칠 수 있는 무기이다. 그래서 에베소서 6:17은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의 검이라고 말하였다. 성경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그 말씀은 마귀의 온갖 시험에 대한 대답이요 해결책이다.

여기에 성경을 읽어야 할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마귀는 실재로 존재한다. 그는 오늘도 우리와 우리의 교회를 향하여 도전하며 넘어뜨리려 한다. 그러나 거기에 대처할 우리의 방책은 무엇인가? 무엇보다 성경의 정확한 지식이 주요한 방책이다. 우리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말씀을 적절히 인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마귀의 교묘한 시험과 속임수를 격퇴할 수 있다.

마귀는 예수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말하였다. 마귀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개념은 단순한 존칭어가 아니고 하나님의 본질을 가진 자라는 개념이었다. 하나님의 본질을 가진 분이라면 돌에게 명령하여 돌이 떡덩이가 되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성경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를 때 의미하는 바는 심지어 마귀도 알고 있는 바이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말은 단순한 존칭어가 아니고 그가 하나님의 본질을 가지신 분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마귀는 예수님의 이 신분과 거기에 내포된 신적 속성과 능력을 빌미로 그를 시험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마귀의 시험의 말대로 왜 한 번 능력을 사용하지 않으셨는가? 그가 그런 능력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우리는 믿는다. 그러나 그는 왜 그런 능력을 나타내지 않으셨는가? 우선 그는 마귀의 말을 따라 행하실 이유가 없었다. 마귀가 해보라고 한다고 할 이유가 없으셨다. 우리는 마귀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 실상 그는 자기의 유익을 위해 그의 신성을 사용한 적이 없으셨다. 말씀이신 그가 사람이 되신 것은 오직 인간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다.

그가 마귀의 말대로 하지 않으신 더 큰 이유는 육신의 양식 문제가 인간의 삶에 있어서 본질적 문제가 아니라는 데 있다. 떡이 없으면 죽지만 그것은 육신의 죽임일 뿐이다. 예수께서는 몸만 죽일 수 있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몸과 영혼을 함께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셨다(마 10:28).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물질적인 것에 모든 가치를 두고 사는 것 같다. 그들은 영적 생활의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심히 어렵다고 말씀하셨고(마 19:23-24), 또 사도 바울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말하였다(딤전 6:10). 돈이 전부인 줄 아는 자는 결코 하나님을 섬길 수 없고 구원받을 수 없다.

떡이 없으면 육신의 생명을 해할 뿐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보다 중요한 요소는 그의 영혼이다. 영혼은 범죄함으로 죽었었고 하나님의 은혜로 새 생명을 얻는다. 영혼의 새 생명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다. 베드로전서 1: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우리는 영혼의 가치를 알자. 부자나 가난한 자나 그들의 영혼의 가치를 똑같이 귀하게 여기자.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의 영혼이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을 알자. 그러므로 우리는 육신의 양식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귀히 여기자.

[5-7절]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 . . .

마귀가 예수님을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말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마귀도 성경을 잘 아는 것 같다. 그러나 마귀는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거나 바르게 적용하지 못한다. 오늘날도 마귀의 종된 많은 이단들이 성경을 인용하지만, 그것을 바르게 해석하지 않고 바르게 적용하지 않는다.

예수께서는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 마귀가 성경을 잘못 인용하고 잘못 적용할 때 성경의 다른 말씀에 의해 반박하는 것이 필요하다. 예수께서는 그러므로 “또 기록되었으되”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성경을 전체의 빛 아래서 읽어야 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딤후 3:16). 성경의 참 저자는 하나님이시므로 성경에는 통일성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의 전체적 빛 아래서 부분들을 이해해야 하고 명확한 교훈의 빛 아래서 불명확한 문제들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선 성경을 전체적으로 많이 읽어야 한다.

예수께서 인용하신 성경말씀은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는 말씀이다. 성도는 어떤 상황에서도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는 것같이 주를 시험하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고전 10:9).

또 기적을 추구하는 태도도 경계해야 한다. 정상적인 신앙생활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들을 성실히 하는 것이다. 우리는 배고플 때에 먹고 피곤할 때에 쉬고 돈이 필요할 때에 일해야 한다. 신앙생활은 신비적 경험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고(고전 1:22-23), 지극히 평범하고 정상적인 생활이다. 기적 경험을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죄에 떨어지기 쉽다.

더욱이, 기적을 추구하는 것이 자신의 신앙적 교만과 자랑과 명예심에서 나온 것이라면 하나님 앞에서 매우 경계해야 할 악한 일이다. 기적을 행한다고 말하는 자들은 자신을 내세우고 자랑하며 허풍과 과장이 심한 것 같다(벧후 2:18; 유 16). 그것은 하나님께서 성경에 교훈하신 성도의 바른 모습과 다르다. 그러므로 성도는 기적주의에 떨어져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고,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겸손히 하나님을 섬기며 자신을 감추고 은밀히 선한 일을 힘써야 한다.

[8-11절]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 . . .

마귀는 또 예수님을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며 말했다.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마귀가 천하 만국의 영광을 누구에게 줄 수 있는가? 성경에서 마귀가 ‘이 세상 임금’(요 12:31) 또는 ‘세상의 신’(고후 4:4)이라고 불리는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주신 그 능력과 권세 아래서 어느 정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보인다.

그러나 비록 마귀에게 어느 정도 그런 권한이 주어졌다 할지라도,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이 도대체 얼마나 가치가 있는 것이며 또 언제까지 영광스러운 것인가?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은 사람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그것도 그가 그것을 누리는 동안 가치가 있을 뿐이다. 그것은 마지막 심판 때에 다 불타버릴 것이다. 그것들은 참으로 전도서가 모든 것이 헛되다고 말한 그 ‘모든 것’의 범주에 든다. 이 세상과 그 모든 부귀영광은 다 지나간다. 이사야 40:6-7,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더욱이, 마귀가 예수께 엎드려 절할지언정, 예수께서 그에게 엎드려 절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와서 수종들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마귀를 섬길 수 없다. 우리의 경배의 대상은 성삼위일체 하나님뿐이다. 십계명의 1, 2계명은 하나님만 섬기고 그 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 아닌 것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것은 인생의 근본적인 죄악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세상의 부귀 영광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 주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마 6:24).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고 교훈하였다(요일 2:15-17).

인생의 참 본분은 하나님을 바로 알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고 그 계명과 교훈을 순종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상황이나 조건 아래서도 마귀와 세상에 굴복하지 말고 하나님만 높이고 섬기고 영화롭게 하며 그의 명령을 힘써 따르자.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도우시고 지키시고 공급하실 것이다.

 

12-17절,  가버나움에서 전도를 시작하심

[12-17절] 예수께서 요한의 잡힘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 . . . .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의 잡힘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 가셨다가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셨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었다. 이사야는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라고 말하였다(사 9:1-2). 예수께서는 이사야의 예언대로 갈릴리 지방에서 그의 전도사역을 시작하셨다. 이로써 죄와 슬픔의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게 되었다.

이때부터 예수께서는 비로소 전파하시기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이는 천국이 가까웠음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전파하신 내용은 세례 요한의 전파한 내용과 동일하였다.

‘가까웠다’는 말은 완료시제로서 ‘이미 가까이 와 있다’는 뜻이다. 천국은 이미 시작되었다. 구약 다니엘서에는 메시아의 시대에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가 건설될 것이 예언되어 있다. 다니엘 2:44, “이 열왕의 때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하고 영원히 설 것이라.” 이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시작되었다.

천국은 현재적이며 미래적이다. 왕이신 메시아께서 오셨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다. 천국은 씨와 같이 뿌려지고 있고 누룩처럼 퍼지고 있다(마 13장). 예수께서는,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2:28). 이 천국은 전도와 영혼 구원을 통해 계속 확장되고 성장된다. 그러나 영광의 천국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아직 미래에 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신약교회는 주의 재림을 사모하고 기다린다(계 22:20).

회개의 절박성은 특히 천국이 가까웠다는 데 있다.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시작되기 때문에, 모든 죄인들은 회개하고 그를 영접하느냐, 아니면 회개치 않고 그를 거절하느냐 하는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다. 사람이 죄 가운데 살면 영원한 지옥 형벌을 피할 수 없다. 죄를 회개해야 죄와 지옥 형벌에서 구원받고 천국에 들어가 영생 복락을 누릴 수 있다.

회개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살던 사람들, 곧 불경건하고 부도덕하던 자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다. 하나님 없이 사는 것이 죽음이요 불행이었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생명이요 행복이다. 회개는 죄인이 그 불경건과 부도덕의 죄를 깨닫고 그 죄를 미워하고 그 죄로부터 돌이키기로 결심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회개해야만 한다.

 

18-22절, 제자를 부르심

[18-22절]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 . . . .

예수께서는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이었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그들은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았다.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이 그 부친 세베대와 한가지로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셨다. 그들은 곧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았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는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시몬 베드로와 그 형제 안드레,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제자로 부르셨다. 부름을 받은 그들은 다 어부들이었다. 주께서는 이 평범한 어부들을 그들의 일터에서 전도자로 부르셨다.

주께서 공적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하신 첫 번째 주요한 일은 제자를 삼는 일, 곧 전도자를 부르신 일이었다. 이 사실은 전도의 일이 얼마나 중요하며 또 전도자를 불러 훈련시키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보인다. 전도는 하나님의 가장 중대한 일이며, 전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이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전도하기 위해 왔다고 말씀하셨다(막 1:38).

예수께서는 전도자를 ‘사람을 낚는 어부’라고 표현하셨다. 그것은 부름을 받은 그 어부들이 이해하기 쉬운 표현이었다. 사람을 낚는다는 말은 사람을 구원한다는 뜻이다. 죄인의 영혼 구원이 전도자의 임무이며 전도의 목표다.

주께서는 ‘나를 따르라’는 초청의 말로 전도자를 부르셨다. 전도자는 주의 부르심을 통해 세워진다. 오늘날도 주께서는 전도자들을 부르신다. 그러나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단순한 초청 이상이다. 그것은 주의 하시는 일을 보고 배우라는 뜻도 내포되어 있다. 전도자는 주님을 따르는 자, 즉 주님의 발자취를 보고 배우는 자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참된 전도자로서 준비되고 훈련되는 것이다.

부르심을 받은 그들은 즉시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다. 20절, “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22절, “저희가 곧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부르시는 그가 누구이신지, 그리고 부르신 그 일이 무엇인지 안다면 그렇게 응답지 않을 자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전도의 가치, 전도자의 가치를 참으로 알고 그 일을 사모하자. 또 전도의 일을 위해 우리의 몸과 마음을 바치자.

 

23-25절, 예수께서 하신 일

[23-25절]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 . . .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시며 세 가지 일을 하셨다. 첫째로, 그는 회당에서 하나님의 모든 진리들을 가르치셨다. 둘째로, 그는 천국 복음 곧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는 소식을 전파하셨다. 셋째로, 그는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셨다. 그에게는 병자들을 온전하게 고치시는 신적 능력이 있었고 또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으셨으므로, 그는 병자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으셨고 다 고쳐 주신 것이다.

그의 소문은 온 수리아에 퍼졌다.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자 그는 그들을 다 고쳐주셨다.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강 건너편에서 허다한 무리가 그를 따랐다.

오늘날 교회들과 목사들도 주님의 사역과 같은 사역을 해야 할 것이다. 첫째로, 우리는 모든 성경 즉 하나님의 모든 교리와 생활 교훈들을 잘 가르쳐야 한다. 물론 그러기 위해 우리는 성경에 대한 바르고 충만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천국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고 천국에 들어갈 준비를 하라고 전하는 일이다. 이것은 교회와 우리 모두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 곧 교회의 사명이다. 셋째로, 우리는 교회 안의 병환자와 가난한 자와 어려운 일 당한 자를 돌아보는 일을 해야 한다. 비록 우리에게 예수님처럼 병고치는 능력은 없지만, 우리는 예수께서 가지셨던 사랑과 긍휼의 심정으로 병환자나 가난한 자나 어려운 일 당한 자를 돌아보아야 한다. 오늘날도 교회는 이 세 가지 기능을 잘 수행해야 하고 우리는 이 일들을 위해 기도하고 힘써야 한다.

 

 

5장: 완전한 의의 삶

1-12절, 팔복

[1-2절]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 . . .

마태는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고 말한다. 마태는 무리와 제자들을 구분하는 것 같다. ‘무리’는 이런 혹은 저런 관심을 가지고 또 이런 혹은 저런 동기로 예수께 나온 자들이며,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배우고 그를 본받고 그의 교훈을 실천하려는 자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도 교회에 나온 사람들 중에도 두 부류가 있을지 모른다. 우리는 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되기를 원한다.

예수께서는 입을 열어 가르치셨다. 그가 산 위에서 가르치신 말씀이라고 하여 ‘산상보훈’(山上寶訓)이라고 부른다. 그 대상은 제자들이었다고 본다. 본문의 내용은 예수께서 여덟 부류의 복된 자들을 언급하셨다고 하여 흔히 ‘팔복(八福)’이라고 부른다. 처음 네 가지는 구원을 위한 준비이고, 나머지 네 가지는 구원받은 자의 덕이라고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3절]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예수께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다. 심령이 부유한 자는 어떤 사람이고 심령이 가난한 자는 어떤 사람인가? 심령이 부유한 자는 자기 자신이 지식과 지혜와 의와 힘이 있다고 생각하여 하나님을 찾지 않고 구원의 필요를 느끼지 않는 자이며, 심령이 가난한 자는 자기 자신이 지식과 지혜와 의와 힘이 없음을 깨달아 하나님을 찾고 구원의 필요를 느끼는 겸손한 자라고 말할 수 있다.

불신앙과 불순종은 항상 교만과 함께 간다. 그것은 하나님 대신 자기 자신을 높이고 신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라는 것과, 또 자기가 의뢰하는 돈이나 세상의 것들이라는 것이 과연 신뢰할 만한 것인가? 그것들이 환난 날에 자기를 구원하며 장차 지옥의 불못에서 자기를 구원할 수 있는가? 그것들이 영원한 생명과 행복을 보장할 수 있는가? 아니다. 결코 아니다!

믿음은 가난한 심령에서 시작된다. 겸손한 자만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를 믿고 그를 따를 수 있다. 심령이 가난하지 않으면 아무도 믿음의 길에 들어설 수 없다. 심령의 가난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이며 은혜받은 자의 모습이다. 이사야 66:2는,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리라[돌아보리라]”고 말한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천국을 소유하는 복을 얻을 것이다. 성경에 증거된 대로 사람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음으로 천국에 들어간다. 그러므로 주께서 하신 말씀은 사람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으려면 우선 자신의 빈곤을 알아야 한다는 뜻이라고 본다. 우리는 겸손하게 우리 자신이 지식과 지혜가 없고 의가 없고 힘이 없는 부족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주께서는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8:3). 이것은 사람이 겸손한 행위로 구원받는다는 것이 아니고, 구원받는 자 곧 천국에 들어가는 자는 누구나 심령이 교만치 않고 겸손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겸손한 자만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을 진심으로 믿게 된다. 교만한 자는 예수님을 믿을 수 없다.

물론, 구원받은 자는 계속 겸손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부족과 무능력을 늘 인식하고 우리의 우리된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뿐임을 늘 인정하며 살아야 한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잠언 18:12,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

[4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예수께서는 또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다. 어떤 애통을 말하는 것인가? 사람에게 의미 있는 애통은 회개의 애통뿐이다. 죄인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깨달아야 한다. 이것이 아주 중요한 일이다. 사람은 자신의 죄의 심각함, 즉 하나님께서 죄를 미워하시고 노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많은 부족과 죄를 인해 애통해야 한다.

다윗은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라고 말하였다(시 51:17). 요엘은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라고 말하였다(욜 2:12-13). 예수께서 한 동네에 들어가셨을 때 죄인인 한 여자가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그의 뒤로 와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었다. 그것은 회개의 눈물이었다고 본다(눅 7:37-38).

자신의 죄 때문에 애통하는 자는 위로를 받을 것이다. 그것은 죄 문제의 해결을 통해, 즉 죄사함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 앞에 말한 그 여자에 대해 예수께서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라고 말씀하시고 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하셨듯이(눅 7:47, 50), 애통하는 자는 위로를 받을 것이다. 사죄는 지극히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은총이다. 왜냐하면 그 무엇으로도 씻을 수 없고 하나님의 공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는 인간의 더러운 죄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단번에 깨끗케 되기 때문이다.

[5절]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예수께서는 또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다. 온유하다는 말은 겸손하다는 말이다. 그것은 교만함, 완고함, 패역함, 목이 곧음과 반대된다. 교만한 마음은 불신앙과 불순종으로 나아가지만,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은 믿음과 순종으로 나아간다. 온유는 믿음의 품성이다. 믿는 자 또는 믿으려 하는 자는 심령이 온유해야 한다. 사람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하나님과 주 예수님을 믿고 순종할 수 있다.

온유한 사람은 땅을 기업으로 받는 복을 얻는다. 여기의 ‘땅’은 이 세상에서 땅 몇 평을 받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새 하늘과 새 땅 곧 천국을 받는 것을 말한다고 본다. 이 세상에서는 힘센 자나 억센 자가 땅을 차지하겠지만, 천국은 다르다. 천국은 온유한 자가 얻는다. 온유한 자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도 베드로는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고 말했다(벧전 1:3-4).

히브리서 저자는,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고 말했다(히 11:16).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아 천국의 기업을 얻게 될 것이다.

예수 믿고 구원 얻은 자들도 여전히 온유해야 한다. 온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이다. 예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다(마 11:29). 온유는 또한 성령의 열매이다(갈 5:23). 그러므로 바울은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라”고 교훈하였고(엡 4:2), 또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으라”고 했다(골 3:12).

[6절]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예수께서는 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다. 의는 하나님의 계명에 일치하는 것 즉 하나님 말씀대로 믿고 그 말씀대로 사는 것이다. 그것은 참 경건과 도덕성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은 자신에게 의가 없고 죄만 많다는 것을 깨닫는 것을 말한다. 자신이 의가 없는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는 자는 결코 구원을 얻을 수 없다. 그러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구원의 문 앞에 서 있다. 그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배고프면 밥을 찾고 목마르면 물을 찾듯이, 사람이 자신에게 의가 없음을 깨닫고 의를 갈망하면 의를 풍성히 얻을 것이다. 그 풍성한 의란 성경이 증거하는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통해 얻는 완전한 의를 말한다. 바울은,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고 말했다(롬 3:20-22).

[7절]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 . . .

7절부터의 네 가지 복은 구원받은 자의 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첫째는 긍휼히 여기는 것이다. 주께서는 또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다. 은혜와 긍휼은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성품이다. 사도 바울은,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라고 말했다(엡 2:4-5). 예정(豫定)도, 속죄(贖罪)도, 중생(重生)도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에서 시작되고 완성된다. 우리의 우리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러므로 남을 긍휼히 여기는 것은 구원받은 성도의 당연한 태도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권면하였다(엡 4:32).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 주께서는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고 말씀하셨다(마 6:14-15). 더욱이 마지막 심판 때에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여긴 자들을 긍휼히 여기실 것이며, 긍휼히 여기지 않은 자들을 긍휼 없이 대하실 것이다. 야고보는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고 말하였다(약 2:13). 하나님의 크신 긍휼과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는 남을 긍휼히 여겨야 마땅하다.

[8절]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예수께서는 또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다. 아담이 범죄한 이후, 사람의 마음은 태어날 때부터 매우 부패되어 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말했다(렘 17:9). 주께서도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덕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라고 말씀하셨다(마 15:19-20). 사람의 마음이 더러운 것은 물욕, 정욕, 명예욕 같은 욕심 때문이다. 사람의 욕심은 사람으로 죄를 짓게 한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모든 욕심을 다 버리고 죄씻음을 받은 자를 가리킨다. 우리는 깨끗한 마음을 지켜야 한다. 그래야 거룩하신 하나님을 감히 섬길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다. 그것은 장차 천국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을 말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신 영이시므로 마음이 더러운 자, 곧 죄와 탐욕으로 더러운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고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우리가 그를 우리의 육신의 눈으로 뵈올 수 없으나, 우리는 하나님을 알게 되고 그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고 그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며, 또 그의 영광의 형상인 주 예수 그리스도를 뵈옵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끗한 마음을 잘 유지해야 한다.

[9절]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 . . .

예수께서는 또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다. ‘화평케 한다’는 말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고 본다. 첫째로, 그것은 하나님과 화목하게 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죄 때문에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되었다. 로마서 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골로새서 1:20-22,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그러므로 하나님과 화평케 하는 것은 복음 전파로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다. 구원받지 못한 자는 하나님과 원수 관계에 있지만, 구원받은 자마다 하나님과 화목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다고 증거하였다(고후 5:18).

둘째로, 화평케 한다는 것은 사람들 간의 화목도 의미할 것이다. 하나님과 화목한 자들은 서로 간에도 화목하기를 힘쓸 것이다. 서로 화목하는 것은 구원받은 성도들의 마땅한 행위이다. 로마서 12: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갈라디아서 5:19-21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살인[전통사본] 등 아홉 가지를 육체의 일들로 말하였고 또 이런 일들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라고 선언되었다. 야고보서 3:17,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화평케 하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하나님과 인간 간의 불화를 제거하시고 화목하게 하셨기 때문에, 화목하게 하는 성도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기에 합당하다는 뜻이다. 성도다운 행위, 즉 거룩하고 선한 행위는 구원의 표요 확증이다. 특히 죄인들을 하나님과 화목시키는 전도의 일과 하나님 안에서 서로 화목시키는 일은 성도다운 선한 일이다.

[10-12절]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 . . .

주께서는 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 말씀하셨다. 팔복의 처음 네 번째는 의에 주리고 목마름인데, 다음 네 번째는 의를 위해 핍박을 받음이다. 사람은 심령이 가난하고 죄를 애통하고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름으로 하나님께로 나오고 구원을 받지만, 구원받은 후 남을 긍휼히 여기고 마음이 깨끗하고 화평케 하고 의를 위하여 핍박까지 받는다.

의는 하나님의 계명에 일치하는 것이다. ‘의를 위하여’라는 말은 ‘의 때문에’라는 뜻이다. 의 때문에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다. 즉 하나님의 계명대로 산 것 때문에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다. 왜냐하면 천국이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확실히 천국 백성이기 때문이다. 의를 행하는 것이 구원받은 천국 백성의 표라면, 의 때문에 핍박을 받는 것은 더욱 그러할 것이다. 구원받은 성도는 의를 사모하고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받고 의를 위해 살고 의를 전파하고 의를 위해 고난과 핍박과 순교도 당한다.

예수께서는 또,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 ‘나를 인하여’라는 말은 ‘나 때문에’라는 뜻이다. 주께서는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욕과 핍박을 받을 것을 내다보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것은 평탄한 길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길이다(마 16:24-25). 그것은 핍박받을 것도 예상되는 길이다. 마귀는 예수 믿는 자를 미워하고 세상을 충동하여 성도를 핍박하게 한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예수 믿는 자들을 욕하고 핍박하며 거짓으로 모든 악한 말로 비난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말하였다(딤후 3:12).

그러나 주의 제자들은 핍박을 받을 때에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그들의 상이 크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상을 말씀하시며 핍박받을 제자들을 격려하셨다. 이 구절은 또한 천국에서의 상급의 차등을 보인다. 마지막 심판 때에 죄악에 대한 형벌에 차등이 있을 것이듯이, 선행에 대한 상급에도 차등이 있을 것이다.

주께서는 또 “그들이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성경 역사에서 참 선지자들은 많은 핍박을 받았다. 그 이유는 단지 그들이 바른 말을 하였기 때문이고, 그 바른 말이 회개치 않는 악인들에게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오늘날도 회개치 않는 사람들은 참된 목사들의 설교를 미워하고 그들을 핍박하고 거짓말을 동원해서라도 그들을 비난할 것이다. 그러나 공의의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선악간에 공의로 보응하실 것이며 악인들의 악행을 반드시 공명정대하게 보복하실 것이다.

의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때문에 핍박을 받는다는 것은 구원받은 자의 삶에서 가장 복된 일이다. 그것은 참으로 주를 믿고 따르며 섬기는 표가 되며 큰 상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핍박을 당하는 것은 결코 불행이 아니고 오히려 행복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받는 핍박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바르게 힘있게 살지 못한 것을 뉘우치자. 어떤 고난과 핍박이 닥쳐와도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바르게, 충성되게 살자.

본문을 다시 정리해보자. 예수께서 말씀하신 여덟 가지의 복에서 첫 번째부터 네 번째까지는 죄인들의 구원을 위한 준비를 보인 것 같다. 심령의 가난, 애통함, 온유함, 의에 주리고 목마름은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 구원에 이르게 할 것이다. 또 다섯 번째부터 여덟 번째까지는 구원받은 자들의 덕을 보인 것 같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원받은 우리는 남을 긍휼히 여기며, 마음을 깨끗케 하며, 다른 이들에게 전도하며 또 서로 화목하며, 의를 위해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핍박을 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 당신은 심령이 가난하고 죄를 애통하며 온유하며 의에 주리고 목마른가? 또 남을 긍휼히 여기며 마음이 깨끗하며 화목케 하며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가?

 

13-16절,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

[13절]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 . . .

예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 즉 제자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수님 믿고 그의 말씀을 배우고 그를 본받고 그의 말씀대로 살아보고자 하는 자들이다. ‘세상’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 즉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자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예수님도 모르는 자들이며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다. 그들은 성경말씀도 믿지 않는 자들이며 성경말씀을 지키지 않는 자들이다.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이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셨다. ‘소금’은 무슨 의미를 가지는가? 소금은 무슨 역할을 하는 물질인가? 소금의 역할은 두 가지다. 하나는 짠맛이고, 다른 하나는 부패 방지이다.

소금의 첫 번째 역할은 짠맛이다. 소금은 모든 음식에 필수적이다. 만일 소금이 없다면, 우리는 맛있는 음식을 하나도 만들지 못할지 모른다. 소금은 맛있는 음식에 필수적이다. 젓갈, 찌개, 김치를 너무 짜게 먹는 것은 건강에 안 좋다고 하지만, 너무 짜지 않고 너무 싱겁지도 않은 적당한 소금간은 최고의 음식맛을 낸다.

이것은 어떤 영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 같다. 인생의 최고의 맛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의 의미와 가치와 목적에 맞는 삶을 가리킬 것이다. 삶의 의미가 없고 목적이 없고 허무하고 또 도덕적으로도 추하고 더러운 것은 인생의 맛이 없는 삶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의 의미와 가치와 목적과 아름다움은 바로 경건과 도덕성에 있다. 그것이 인생의 참된 맛이다.

소금의 두 번째 역할은 부패의 방지이다. 이것은 짠맛의 부수적 역할이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에 상하기 쉬운 식품들을 오래 보관하는 방법은 햇볕에 말리거나 소금을 뿌려 절이는 것이었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사용되는 중요한 방법이다. 그러므로 이 점에서도 소금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였다.

이것도 영적 의미를 가질 것이다. 참 그리스도인들은 불경건하고 죄악된 사회가 더욱 불경건하고 죄악된 사회로 악화되는 것을 억제하는 요소들이다. 그들은 하나님께 바른 생활교훈을 받은 자들이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만 악을 떠날 것이다. 그들이 그 교훈대로 산다면 세상은 급격하게 타락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죄악된 이 세상에서 도덕성의 최후의 보루이다.

그러나 주의 말씀대로, 만일 그들이 짠맛 곧 경건성과 도덕성을 잃어버리면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들에게 밟힐 뿐일 것이다. 경건과 도덕성을 상실한 교인들은 세상에 아무 유익이 없고 세상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을 무시하고 짓밟을 것이다.

[14-16절]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 . . .

예수께서는 또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빛’은 지식, 의와 진실, 기쁨과 행복, 그리고 생명을 상징한다. 그러나 반대로, 어두움은 무지, 불의와 거짓, 슬픔과 불행, 그리고 죽음을 상징한다. 세상은 어두운 세상이다. 세상에는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참된 지식이 없고 의와 진실이 없고 기쁨과 행복도 없고 영원한 생명도 없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참된 지식과 의와 기쁨과 생명을 주셨다. 그것이 구원이다. 교회는 이제 세상을 밝히는 빛이다.

주께서는 제자들은 ‘산 위에 있는 동네’라고 부르셨다.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표가 있다. 기독교는 밀교(密敎)가 아니다. 기독교회의 모임은 공개된 모임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사도 시대로부터 교회로 모이며 예배를 드렸다. 설교들은 다 공개되어 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다 공개되어 있다.

우리의 삶은 세상 앞에 예(例)가 된다. 그것은 좋은 예 혹은 나쁜 예가 된다. 그것은 주로 인간 관계, 대인관계에서 나타난다. 물론, 사상적으로 적그리스도적인 자들이 있다. 또 기독교를 오해해서 기독교를 비방하는 자들도 있다. 또 진리의 지식의 차이때문에, 기본적인 혹은 중요한 생각의 차이때문에 부득이 헤어지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범사에 정당하게, 의롭게, 선하게, 진실하게 행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서도 기독교인들이 사랑이 없다든지 악하다든지 거짓말쟁이라든지 하는 말을 들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특히 사람들 앞에서 선하게 살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선한 행실이 사람들 앞에 증거가 되게 해야 할 것이다. 성경은 이웃 사랑을 교훈한다(레 19:18). 이웃 사랑은 가난한 자나 외로운 자나 병든 자를 돌아보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은 특히 구제 행위를 강조한다. 굶주리는 자에게 먹을것을 주고 헐벗은 자에게 입을 것을 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탈북자들이나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친절히 대하고 도와 주어야 할 것이다.

주께서는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남겨주셨다. 서로 사랑함은 서로 친절히 대하고 또 서로 용서하는 것을 말한다.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으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고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다(고전 13:4-7). 에베소서 4:31-32,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아내는 자기 남편에게 복종해야 하며 남편은 자기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 자녀는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해야 하며 아버지는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해야 한다. 종들은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주인들에게 순종해야 하고, 주인들은 종들에게 위협하지 말아야 한다(엡 5:22, 25; 6:1-4, 5-9).

욥은 선하게 살았다. 그는 가난한 자와 과부와 고아에게 먹을것과 입을 것 나누기를 아까워하지 않았다. 그는 어려운 사람들에게 고기도 배부르게 먹게 하였고, 숙박할 곳이 없는 나그네에게 유숙할 방도 제공하였다(욥 31:16-20, 31-32).

주께서는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잘 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우리가 잘 못하면 하나님께 욕이 돌아간다(롬 2:23-24).

오늘날에는 어떤 교회의 직분자들이 음행하고 공금횡령을 했다는 소문이 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며 하나님께 욕을 돌리는 아주 좋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죄성이 있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항상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이성관계를 조심해야 하고 돈 욕심을 버리고 돈 거래에 있어서 정정당당하고 깨끗해야 한다. 마귀는 우리의 약점을 주목하며 틈을 노린다. 그러므로 성도는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주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된 우리를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우리에게 소금의 맛을 잃지 말고 잘 유지하라고 암시하셨다. 소금의 짠맛은 음식을 맛있게 하는 필수물이다. 그것 없이는 모든 음식이 맛을 낼 수 없을 정도이다. 인생의 참 맛이 무엇인가? 인간의 삶의 의미와 가치와 목적이 무엇인가? 그것은 경건과 도덕성에 있다. 우리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의 참 의미와 가치와 목적을 알게 되었다. 또 그의 뜻대로 선한 삶, 사랑하는 삶을 가정에서부터 또 모든 인간관계에서 실천할 때 거기에 인간의 아름다움과 참 맛이 있다. 또 소금이 부패 방지에 쓰이듯이, 우리는 불의하고 악하고 거짓된 세상에서 의와 선과 진실을 지키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성도가 도덕성의 수호자가 되지 못한다면 세상은 소망이 없다. 그러나 성도들이 깨어 있다면 세상은 급속히 부패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경건과 도덕성을 지켜야 한다.

주께서는 우리를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도덕성, 특히 우리의 선한 행실을 두고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것은 어두운 세상에서 본이 될 것이다. 우리는 가정에서, 동네에서, 직장에서 이런 삶을 실천해야 한다. 우리는 이기적이게 살지 말고 남을 배려하며 살아야 한다. 그것이 사랑의 원리이다.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고전 13:5). 사랑은 남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는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본이 되는 선한 삶을 삶으로써 그들이 우리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해야 한다.

 

17-20절, 구약성경을 이루려 오심

[17절]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 . .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고 말씀하셨다. ‘율법이나 선지자’는 구약성경을 가리킨다. 구약성경의 핵심은 모세가 쓴 처음 다섯 권의 책이며 그것을 우리는 모세의 율법이라고 부른다. 신약성경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예수님 당시에 어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구약시대의 율법을 폐지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라고 말씀하셨다.

‘완전케 한다’는 원어(플레로오)는 ‘이룬다, 성취한다’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세의 율법과 구약성경을 폐지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고 성취하기 위해 오셨다는 뜻이다. 구약성경과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의 관계, 즉 율법과 복음의 관계는 폐지가 아니고 성취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과 십자가 속죄 사역은 모세의 율법의 폐지가 아니고 성취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도덕법을 성취하셨다. 즉 도덕법이 요구하는 의(義)를 이루셨다. 예레미야는 장차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가 일어날 것이며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고 불리리라고 예언했고(렘 23:5-6) 다니엘은 죄악이 영원히 속량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는 때에 대해 예언하였다(단 9:24). 과연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도덕법의 의를 이루셨다. 로마서 10:4는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고 말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의식법도 성취하셨다. 그는 구약의 상징적 의식들, 제사 제도, 성막 제도, 절기 등의 실체로 오셨다. 특히 구약의 의식법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상징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친히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속죄사역을 이루셨다. 그러므로 바울은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판단]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고 말했다(골 2:16-17).

또 히브리서는 “이 장막[구약의 성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고 말했고(히 9:9-12), 또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고 말하였다(히 10:1).

초대교회의 말시온이라는 이단은 구약의 하나님은 무서운 공의의 하나님이며 신약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으로서 서로 다른 하나님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약을 폐지하기 위해 오셨고, 율법과 복음은 서로 모순되다고 생각하였다. 그것은 큰 오해이었다.

역사상, 율법주의라는 이단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절하고 구약의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한편, 반율법주의라는 사상도 있었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음으로 율법이 폐기되었다고 주장하는 사상이었다. 이 두 사상은 다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오해한 것들이었다.

[18절]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 . . .

주께서는 또, “[이는]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이룰 것임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율법은 구약의 율법뿐 아니라, 구약성경 전체를 가리켰다고 본다. 주께서는 구약성경의 신적, 절대적 권위를 증거하신 것이다.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라는 표현은 성경의 지극히 작은 부분까지도 신적 권위를 가짐을 증거한다. 이 말씀은 성경의 축자(逐字) 영감[단어 영감]을 증거한다. 아니, 단지 축자 영감 정도가 아니고, 축점(逐點) 영감 혹은 축획(逐劃) 영감을 보이는 것이다. 도덕법이나 성경은 결코 폐지되지 않고 남김없이 성취되어야 할 성격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이루셨다.

[19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 . . .

주께서는 또,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다.

마태복음에서 ‘천국’은 두 가지 뜻을 가진다. 첫째는 신약교회를 가리키고(마 11:11-12; 13:24, 31, 33, 44, 45, 47), 둘째는 장차 임할 영광의 천국을 가리킨다. 천국은 신약교회로 이미 시작되었고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루어질 영광의 천국으로 완성된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의 신앙생활의 정도는 각기 다르다. 어떤 이는 성경을 다 믿고 힘써 지키는가 하면, 다른 이는 그렇지 못하다. 그러한 차이가 내세 천국에서의 인격의 차등을 만드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다. 성경은 상급의 차등은 분명히 가르친다. 그러나 우리의 행위의 정도에 따른 내세의 인격의 차등은 분명치 않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으로 말미암은 구원의 완전성, 즉 영화를 믿는다. 그러나 적어도 교회 안에서는 인격의 차등이 있다. 하나님의 계명을 다 지키는 자는 확실히 교회 안에서 큰 자이다. 그러므로 도덕법의 온전한 순종, 작은 부분까지의 순종이 요청된다.

[20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 . . .

주께서는 또, “[이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는 상당한 수준의 의처럼 보였다. 그것은 외적으로 별로 흠 잡을 데 없어 보이는 의이었다. 그들은 안식일을 지키고 십일조 생활을 하는 등의 율법을 준수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주께서는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과 거리가 멀고 온갖 탐심과 거짓으로 차 있다고 지적하셨다(마 15:8; 23:25, 28).

주께서는 천국에 들어갈 자들이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나은 의를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성심의 율법 준행을 가리키셨다고 본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가르쳤다(신 6:5). 주 예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라는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셨다(마 15:8). 우리가 성심으로 율법을 준행할 때 우리의 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나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주께서는 이 말씀에서 그의 대속(代贖)의 완전한 의를 가리키셨다고 본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의가 되셨다. 로마서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 의를 얻었다. 로마서 3:21-24,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성도는 율법을 행하되 단지 외적으로가 아니고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성심으로 해야 한다. 그것은 외적 행위보다 더 나은 행위가 될 것이다. 그러나 실상 천국에 들어갈 성도의 더 나은 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의이다. 그 의는 완전한 의이다. 그 의가 성도가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된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다(요 3:16).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만 의지하고 성심으로 율법을 준행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율법과 복음, 구약과 신약을 충돌시키지 말자. 그 둘은 조화를 이룬다. 복음은 율법의 성취이다. 도덕법의 성취이며 의식법의 성취이다. 그러므로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충돌시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구약성경에 근거하여 신약성경을 이해하고, 신약성경에 비추어 구약성경을 이해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완전한 의를 믿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바로 그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을 믿는 것도 포함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그의 십자가 대속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미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얻은 그 의를 믿고 확신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도덕법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도 소홀히 여기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지만, 여전히 모든 계명과 성경 교훈을 성심으로 준행해야 한다. 그것이 온전함이며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읽는다.

 

21-26절, 살인에 대하여

[21-22절]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 . . .

주께서는 말씀하셨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십계명에서 “살인하지 말지니라”고 말씀하셨다. 살인은 죄악이다. 우리는 사람의 생명을 존귀하게 여겨야 한다. 출산하기 전의 태아도 인간이므로, 낙태도 태아 살해 즉 살인이며, 자기의 목숨을 끊는 자살도 살인이다. 우리는 살인하지 말고 낙태도 하지 말고 자살도 하지 말아야 한다.

[22절]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 . . .

주께서는 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가게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이것들이 제6계명에 포함된 내용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말씀은 그의 율법 해석의 권위를 나타낸다. 주께서는 두 가지를 말씀하셨다. 하나는 형제에게 까닭 없이 노하지 말라는 것이고 둘째는 형제에게 욕하지 말라는 것이다.

주께서는 형제에게 까닭 없이 노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노하는 자마다’라는 구절은 전통본문에 ‘까닭 없이 노하는 자마다’라고 되어 있다.6) 화는 정당한 경우에 낼 수 있을 것이지만, 까닭 없이 내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이유 없이 내는 화는 형제에 대한 미움의 표현일 것이다. 고린도전서 13:5는 사랑은 성내지 않는다고 말한다. 우리는 형제에게 까닭 없이 노하지 말아야 한다.

주께서는 또 형제에게 욕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라가’(rJakav)라는 아람어는 ‘바보, 빈 머리’라는 뜻으로 남을 경멸하는 욕이다. 우리는 형제에게 ‘바보, 빈 머리, 미련한 놈’ 등의 욕을 해서는 안 된다. 고린도전서 6:10은 후욕하는[욕하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 말한다. 욕하는 것은 남을 무시하고 멸시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랑이 없는 것이며 남을 미워하는 행위이다. 그것은 악한 일이다. 우리는 형제에게 욕하지 말아야 한다.

주께서는 형제에게 까닭 없이 노하는 자나 형제에게 바보나 미련한 놈이라고 욕하는 자는 심판을 받게 되고 공회 즉 오늘날 말로 하면 법정에 잡혀가게 되고 지옥불에 들어가게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형제에게 까닭 없이 노하는 것이나 욕하는 것은 하나님의 법정에서 심판을 받고 지옥불에 들어갈 큰 죄악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23-24절]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주께서는 화목하는 생활, 즉 우리의 실생활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예배보다 더 중요한 일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예배의 행위보다 우리의 실생활을 원하신다. 예배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말씀 순종이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삼상 15:22).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살인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런 죄 가운데 있다면 우리는 아직 구원받지 못한 자일 것이다. 구원받은 자의 표는 의를 행하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요한일서 3:9-10,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하나님께로서 난 자가] 아니하니라.” 그러므로 로마서 12:18은,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화목하라]”고 말했다. 우리의 선한 삶은 우리의 인간관계에서 나타난다.

[25-26절]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私和)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주께서는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이 엄격하고 철저할 것을 말씀하신다. 죄는 깨닫는 즉시 철저히 회개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사랑이다. 그것은 율법에 말씀하신 바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며(신 6:5) 이웃을 우리 몸같이 사랑하는 것이며(레 19:18; 마 22:39) 또 주께서 친히 새 계명으로 주신 바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요 13:34). 사랑하는 자는 선한 마음을 품고 살며 남을 존중하며 서로 화목할 것이다.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는다(고전 13:5). 에베소서 5:21은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고 말했다.

선한 삶, 사랑하는 삶은 신약성경에 밝히 증거된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표이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한다(고전 13:4-5). 에베소서 4:29, 31-32는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말했다. 우리는 선한 말을 하고 남을 불쌍히 여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

야고보서 3:13-17은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거슬러] 거짓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라고 말했다. 성도는 거룩하고 화목하며 너그럽고 선한 인격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살인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오늘날 유행하는 낙태나 자살도 포함하는 말이다. 또 그것은 남을 미워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여러 행위들을 포함한다. 우리는 형제에게 까닭 없이 노하지 말고 형제에게 욕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남을 무시하지 말고 남을 존중해야 한다. 우리는 서로 화목하고 사랑을 실천하고 온유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예수님의 마음이며 성령의 열매이며 하나님의 뜻이다!

 

27-30절, 간음에 대하여

[27-28절]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주께서는 십계명의 제7계명, “간음치 말라”는 계명에 대해 말씀하신다. ‘간음’(adultery)이란 결혼한 사람이 자기 배우자가 아닌 자와 성관계를 가지는 것을 가리키며, ‘음행’(fornication)이란 보통 결혼관계가 아닌 두 사람 사이에 합의적 성관계를 가리킨다. 제7계명은 부부관계 외의 성행위, 즉 간음, 음행, 근친상간, 강간, 매춘, 동성애, 수간(獸姦) 등을 정죄하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고 본다.

주께서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그에 대해]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그와] 간음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여자를 보고’라는 말은 우리가 보는 것을 조심해야 함을 보인다. 사람은 보는 데서 감정적 충동이나 소유의 충동을 가진다. 아이들은 마트에서 장난감을 보면 가지고 싶어한다. 사람은 좋은 옷이나 먹음직한 음식을 보면 사고 싶어하고 먹고 싶어한다. 그런 충동을 안 가지려면 안 보는 것이 상책이다.

하와는 뱀의 말을 듣고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이었으므로 그 과일을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니 그도 먹었다(창 3:6). 다윗은 저녁 때에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지붕 위에서 거닐다가 그 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였고(삼하 11:2) 그를 왕궁으로 데려오게 해 동침하는 실수를 범했다.

물론, 안 보고도 상상할 수 있고 또 보고도 충동을 억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보면 충동을 받기 쉬운 것이 인간이다. 그러므로 죄에 떨어지지 않으려면 안 보는 것이 낫고 보아도 잠깐만 보고 두 번 보지 않고 자세히 보지 않는 것이 낫다.

‘그에 대해 음욕을 품는다’는 것은 그를 포옹하거나 뽀뽀를 하거나 그와 함께 눕는 불결한 상상을 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남자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여자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우리는 성도덕이 심히 해이해진 음란한 시대에 살고 있다. 접대 문화, 유흥 문화가 성행하고 매춘 행위가 점점 더 많아지는 것 같다. 또 이런 풍조를 조장하는 음란물들이 인터넷 문명을 통해, 텔레비전과 컴퓨터와 스마트폰 등을 통해 홍수처럼 밀려오며 많은 사람들이 악한 풍조에 영향을 받는 것 같다. 과연 말세이다.

우리가 여성의 미니 스커트나 짧은 반바지, 너무 파진 옷, 짝 달라붙는 옷 등을 반대하며 또 청년들의 은밀한 남녀 교제를 금지하는 것은 상대방에게 성적 충동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경건하고 지혜로운 성도는 그런 점을 깨닫고 그런 일을 피해야 한다.

주께서는 “여자를 보고 [그에 대해]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그와] 간음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 마음에 미움을 품고 까닭 없이 노하고 또 형제를 욕하는 것이 살인에 해당하는 큰 죄악이듯이, 마음에 음욕을 품는 것은 간음에 해당하는 큰 죄악이다. 사람을 죽여야만 살인이 아니고, 간음해야만 간음이 아니다. 마음에 미움을 품는 것도 살인이요, 마음에 음욕을 품는 것도 간음이다.

[29-30절]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지옥은 실재하며 범죄하는 자는 지옥에 던지울 수밖에 없고 그러므로 불구자로 성결하게 살 수 있다면 온전한 몸으로 범죄하며 사는 것보다 낫다는 것이다. 눈으로 범죄한다면 한 눈으로만 보는 자나 장님이 더 낫고, 손으로 범죄한다면 한 손이 없거나 못 쓰는 자가 더 낫다. 불구자가 더 유익할 수 있다는 말씀이다. 사람에게 두 눈이 있는가, 두 손이 있는가 하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그 눈과 손으로 범죄하는가 범죄하지 않는가이다.

이 구절은 또한 범죄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큰복인지를 보인다. 건강한 몸보다 더 복된 것은 깨끗한 인격이다. 물질적으로, 육신적으로 모든 것을 갖추었어도 범죄하는 자는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범죄하지 않는 자는 복되며 천국백성답다. 그러므로 우리는 범죄하지 않기를 기도해야 하며, 반드시 회개해야 하며, 또 그 회개는 죄의 철저한 청산이어야 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 몸의 지체들이 범죄하는 도구가 되지 않고 하나님의 의를 행하는 도구가 되기를 기도해야 한다(롬 6:13). 우리의 눈은 성경을 읽는 눈이 되고, 우리의 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귀가 되며, 우리의 손은 선한 봉사를 하는 손이 되고, 우리의 입은 주를 찬송하고 전도하는 입이 되고, 우리의 발은 선한 일, 곧 전도와 심방과 봉사의 일에 빠른 발이 되기를 기도해야 할 것이다.

본문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의 요지는 무엇인가? 첫째로, 마음에 음욕을 품는 것은 마음의 간음이다. 마음으로 미워함이나 까닭 없이 노함이나 형제에 대해 욕함이 마음의 살인이듯이, 마음에 음욕을 품는 것은 마음의 간음이다. 우리는 마음의 간음을 조심해야 한다.

둘째로, 모든 죄인들은 지옥의 형벌을 받는다. 두 눈과 두 손을 가지고 범죄하여 지옥 가는 것보다 한 눈과 한 손을 가지고 범죄치 않고 천국 가는 것이 훨씬 더 낫다. 하나님의 공의는 매우 두렵고 엄격하고 철저하시다. 죄는 무서운 결과를 가져온다. 계명을 어기는 살인자와 간음하는 자는 지옥 형벌을 받을 것이다. 범죄하는 모든 죄인은, 만일 그들이 회개하지 않는다면, 다 지옥 형벌을 받을 것이다.

 

31-32절, 이혼에 대하여

[31-32절]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증서를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음행한 연고 없이”라는 말씀은 음행이 이혼의 정당한 이유가 됨을 보인다. 이 외에도, 신앙적 이유 때문에 분리하기를 원하는 경우(고전 7:15)나 고의적으로 배우자를 버린 경우도 불가피한 이혼의 경우라고 보이며, 또 구타나 학대 등 심히 비인간적 고통을 당하는 경우나 전쟁으로 인해 오랫동안 분리된 경우도 부득이한 경우가 아닐까 생각된다. 그러나 이혼은 극히 삼가야 할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말라기 2:16에서 “나는 이혼하는 것을 미워하노라”고 말씀하셨다.

또 부당한 이혼이 옳지 않듯이, 부당한 재혼, 예컨대 부당한 이혼자와의 결혼도 옳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그 두 경우를 다 인정치 않으신다. 그러므로 교회도 그러해야 할 것이다. 교회가 하나님보다 더 너그러워서는 안 될 것이다.

 

33-37절, 맹세에 대하여

[33-36절]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맹세를 하지 말고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맹세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엄숙히 무엇을 증거하는 것을 말한다. 참된 맹세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경외하는 표이며 그런 자만 할 수 있다고 본다. 신명기 6:12-13은,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섬기며 그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고 말하였고, 신명기 10:20은,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그에게 친근히 하고 그 이름으로 맹세하라”고 말하였다.

본문에서 예수께서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하늘로나 땅으로나 예루살렘으로나 네 머리로 맹세하지 말라는 뜻이요, 모든 맹세를 다 부정하신 것은 아니라고 본다. 마태복음 26:63-64에 보면, 그는 대제사장이 “내가 너로 살아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고 할 때, “네가 말하였느니라”고 대답하심으로 맹세를 긍정하셨다. 고린도후서 1:23에 보면, 사도 바울도 “내가 내 영혼을 두고 하나님을 불러 증거하시게 하노라”고 말했는데, 그것은 일종의 맹세이다.

이와 같이, 진실한 맹세는 가능하다. 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2:2는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하나님의 이름만이 사람이 그것으로 맹세해야 할 이름이며, 거기서 그것은 모든 거룩한 두려움과 존경심을 가지고 사용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 영광스럽고 두려운 이름으로 헛되이 혹은 경솔히 맹세하는 것이나, 어떤 다른 것으로 맹세하는 것은 죄악되며 매우 미워해야 한다. 하지만, 중대한 일들에서 맹세는 구약 아래서 뿐만 아니라 또한 신약 아래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보증되므로, 그러한 일들에서 합법적 권위에 의해 부과되는 합법적 맹세는 행해져야 한다.”

[37절]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 . .

주께서는 말씀하셨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우리는 맹세할 때 예와 아니오를 명확히 말하여야 한다. 자기가 잘 알지 못하는 일을 주장하거나 증거해서는 안 되고 자기가 할 수 없는 일을 불성실하게 약속해서도 안 된다. 우리는 아는 만큼 주장하고 증거하고, 할 수 있는 만큼 약속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옳은 것은 옳다 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 해야 한다. 우리는 맹세에 대해 바로 알고 행하자.

 

38-42절, 악한 자를 대적치 말라

[38-42절]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우리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보다 더 나은 의를 가져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완전한 의이시다. 그 의를 받은 자는 또한 완전한 의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 의의 삶은 단순히 외적 규례를 지키는 삶이 아니고, 내면적으로 형제를 미워하거나 욕하지 않고 사랑하고, 음욕을 품지 않고 깨끗한 마음을 가지며, 거짓 맹세하지 않으며, 악한 자를 대적하지 않는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율법은 철저한 공의의 보응을 가르친 말씀이다. 이 공의는 마지막 하나님의 심판에서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주께서 구약 율법을 부정하실 수 없으므로, 이 말씀의 뜻은 다른 데 있다.

사실, 구약의 엄격한 공의의 법에 의거한다면, 우리 모두는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아야 마땅한 자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셨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죽으셨고 우리는 그를 믿음으로 죄씻음을 받았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공의의 벌을 거두어주셨으니, 우리가 어떻게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보복할 수 있겠는가?

물론, 이 말씀은 경찰력이나 사형법이나 합법적 전쟁을 부정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로마서 13:4는, 국가 위정자들이 하나님의 사자들로서 악을 행하는 자들을 보응하기 위하여 ‘칼’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였다. 경찰이나 군대, 사형이나 전쟁은 사회와 국가의 질서와 안녕을 위해 불가피하다고 본다. 그런 것들이 없다면 사회와 국가와 온 세상이 얼마나 더 혼란할지 모른다.

그러나, 여기에 주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그리스도인은 적어도 개인적으로는 악한 자를 대적하지 않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주께서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자들을 보복하려 하지 않으셨다. 공의의 보복 자체는 악이 아니다. 단지,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너무 커서 악한 자에게도 선을 베푼다는 것뿐이다. 우리가 이렇게 긍휼과 선을 베풀 때 악인들도 깨닫고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자에게도 선을 베풀자. 그가 악하게 요구하는 그 이상으로 그에게 선을 베풀며 선하게 대하자.

 

43-48절, 원수를 사랑하라

[43-44절]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전통사본에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라는 말씀 다음에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베풀며 너희를 모욕하고”라는 말씀이 있다.7) “너희 원수들을 사랑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베풀며 너희를 모욕하고 핍박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 이것이 원본의 본문이라고 본다. 누가복음 6:27-28에도 비슷한 말씀이 있다. 이것은 “원수를 갚지 말라”는 레위기 19:18을 부정하신 것이 아니고 더 강화하신 것이다. 우리는 원수를 갚지 말고 도리어 원수를 사랑하고 그를 축복하고 그에게 선을 베풀고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45-47절]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주께서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원수 사랑의 행위로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행위구원론을 가르치신 것이 아니고, 원수 사랑의 행위가 하나님의 자녀답고 하나님의 자녀의 표가 된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뿐이다. 원수 사랑의 행위가 하나님의 자녀다운 까닭은 하나님께서 먼저 악인들에게 사랑을 베푸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된 죄인이었을 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 그것은 원수 사랑의 행위이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그의 사랑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악인들에 대해서는 두고라도, 우선 성도들 가운데 낯선 형제들에게 친절히 인사하고 따뜻하게 대하자. 신입교인들이 교회에 들어와서 기존 교인들의 온화한 태도로 말미암아 편안함을 느끼게 하자. 끼리끼리만 인사하지 말고 특히 낯이 익지 않은 분들에게 인사하자.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다운 태도이다.

친한 사람과만 인사하고 대화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도 하는 태도이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도둑들도 자기들끼리는 서로 친하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들보다 나아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교회를 나온 모든 이들에게 친절하지 않다면 세상 사람들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주께서는 성도 상호간에는 물론이고 심지어 원수들에게까지 친절과 선을 베풀라고 가르치신다. 그 자신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 시간에 자기를 못 박은 자들을 향해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말씀하셨다(눅 23:34). 또 스데반 집사도 자기를 돌로 치는 무리들을 위해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 7:60)라고 기도하며 숨을 거두었다. 우리도 주의 은혜로,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렇게 행할 수 있다.

[48절]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 . . .

주께서는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말씀하셨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이라는 말씀은 존재적 완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무한자, 완전자시요 피조물인 우리는 유한자, 불완전자이다. 창조주와 피조물 간에는 혼동될 수 없는 본질적 차이가 있다. 피조물은 아무리 영적으로 성장하고 충만해져도 신이 될 수 없다.

여기에 ‘온전하심’이라는 말은 문맥적으로는 친한 사람들에게뿐 아니라 원수들에게까지도 선을 베푸는 온전, 즉 도덕적 온전을 의미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으므로 하나님의 속성, 특히 그의 도덕적 속성을 본받아야 한다. 우리는 특히 하나님께서 해와 비를 의인과 악인에게 똑같이 주시는 것과 같은 온전함을 본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그러므로 우리는 좁은 마음을 버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너그럽고 친절하게 대하자. 교회 안에서 여러 해 사귄 교우들에게뿐 아니라, 교회에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분들에게도, 또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도 그러하자. 심지어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원수들에게까지도 그러하자. 이것이 주께서 가르치신 온전함의 내용이다.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며 모든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자.

 

 

6장: 참된 경건의 삶

1-4절, 은밀한 구제

[1절]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 . . .

주께서는 또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전통 사본에는 ‘의’라는 말이 ‘구제’라고 되어 있다.8) 구제는 주요한 의의 행위이다. 주께서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외식적 구제를 경계하시고, 은밀한 구제를 강조하셨다. 외식적 구제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상급이 없다.

[2절]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혹은 ‘받고 있느니라].” 외식자들은 자기의 구제 활동으로 사람의 영광과 칭찬을 구한다. 그들은 ‘정말 사랑이 많은 사람이야, 구제를 많이 하는 좋은 분이야!’라는 사람의 칭찬을 이미 상으로 받은 것이다. 그러니 장차 하나님께서 주실 상은 없을 것이다.

[3-4절]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 . . .

주께서는 또,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고 말씀하셨다. 전통사본에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는 말 가운데 ‘드러나게’라는 말이 있다.9) ‘은밀하게’라는 말(엔 토 크륍토)과 ‘드러나게’라는 말(엔 토 파네로)이 대조를 이룬다. 사람 앞에 외식적으로 행한 구제와 선행은 사람의 칭찬을 받았으므로 하나님의 상이 있을 여지가 없지만, 은밀하게 행한 구제는 천부께서 드러나게 갚으실 것이다. 사람은 사람의 드러난 행위만 보고 칭찬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은밀한 행위를 보시고 보상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만 바라보고 은밀하게 선행과 구제를 하자.

 

5-8절, 바른 기도의 태도

[5-6절]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 . .

주께서는 바른 기도의 태도에 대해 두 가지를 말씀하셨다. 하나는 은밀한 기도이며 다른 하나는 중언부언하지 않는 기도이다. 첫째로, 주께서는 기도할 때 은밀하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주께서는 외식적 구제를 경계하심같이 외식적 기도를 경계하셨다. 외식자들은 기도 생활에 있어서도 사람에게 보이려는 기도를 한다. 그래서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사람들은 그들을 보며 “참 기도 많이 한다, 참 경건하다”는 칭찬을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참으로 하나님을 향한 기도라기보다 사람에게 보이려는 기도이며, 이것이 외식이다. 주께서는, 외식자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고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주께서는 또 말씀하신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골방 기도가 가장 이상적 기도이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일대일의 기도이다. 그것은 사람에게 ‘나는 기도한다’고 알리거나 보이려는 기도가 아니고 은밀한 중에 계신 하나님 앞에서 하는 기도이다. 이것은 참으로 기도다운 기도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은밀한 기도를 들으시며 ‘드러나게’(전통사본)10) 갚으실 것이다.

[7-8절]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 . .

둘째로, 주께서는 기도할 때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가르치셨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중언부언’은 헛된 말의 반복이나 주문을 가리킨다.

기도의 간절함에서 나오는 말의 반복은 자연스럽고 정당하다. 그러나 무조건 말이 많으면 하나님이 들어주실 것이라는 생각은 미신이다. 하나님은 인격적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할 때 인격적 태도를 가져야 한다. 바른 마음에서 나온 진실한 기도가 아니라면 기도의 많은 말은 의미가 없고 효력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 중언부언하는 이방인의 태도를 본받지 말아야 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구하기 전에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다 아신다. 사실 그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우리의 영적 유익이 되게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시다(롬 8:28).

만일 우리가 이 사실을 인식한다면, 우리는 인격적이게, 차근하게 기도할 것이며, 기도하기 전에 무엇을 기도할지를 생각하며, 무엇이 중요한 기도 제목일지를 묵상할 것이다. 우리가 사람을 만나 대화할 때, 대화의 주제를 생각하듯이,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드릴 때 기도 제목들을 생각할 것이다.

주의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다 아시기 때문에 기도할 필요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하나님의 일들은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통해 이루어진다. 우는 아기에게 젖을 먹이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부르짖는 기도를 들어주신다.

물론 그는 우리의 구하는 것 이상을 주시며(엡 3:20) 우리가 미처 구하지 못한 것도 주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고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신다. 그러나 기도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또,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 곧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법을 배운다. 기도는 신앙 성장을 가져온다. 기도는 우리를 견고케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우리는 골방 기도와 인격적 기도를 힘쓰자.

 

9-13절,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9절a]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주께서는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라는 말은 앞에서 말씀하신 대로 외식자들처럼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하지 말고, 이방인들처럼 중언부언하지 말고 즉 주문 외우듯이 무의미한 말을 반복하지 말고, 바른 기도를 하라는 뜻이다. 주께서는 제자들과 이방인들을 구별하시는 뜻으로 ‘너희는’이라는 말을 강조하신 것 같다(원문에 인칭대명사 휘메이스가 쓰였음).

주께서는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표현하셨다. ‘하늘’은 문자 그대로 하늘이라는 뜻을 가졌다고 본다. 성경은 종종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내려오시고 하늘에서 기도를 들으신다고 표현하였고 또 엘리야와 예수님 자신께서 하늘로 올라가셨다고 증거하였다. 성경은 땅은 인간에게 주셨지만, 하늘은 여호와의 하늘이라고 말하였다(시 115:16). 그러나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라는 말은 또한 하나님께서 높으신 하나님, 초월자이신 하나님,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이기도 한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이시다. 아버지라는 말은 우리의 창조자, 보호자, 공급자이심을 나타낸다. 그의 피조물인 인류가 넓은 의미에서는 다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하나님을 부정하고 거역하는 죄인들은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을 잃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들만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은 그들의 아버지이시다.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하나님께서는 이제 그를 경외하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우리 모두의 아버지가 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 “모든 거룩한 존경과 확신을 가지고 [그에게] 가까이 나아가야” 할 것이다(소요리문답 100문답).

[9절b] [주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의 내용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는 여섯 가지의 내용을 말씀하셨다. 첫 번째 내용은 “[주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이다. ‘거룩’은 구별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시며 우리는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무한한 구별이 있다. 창조주 하나님의 이름은 거룩하고 영광스런 이름이시다. 그의 이름은 우리가 큰 두려움을 가지고 불러야 할 이름이시다. 우리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섬기며 그를 높이고 찬송하며 그가 창조자와 섭리자이심을 고백하여야 한다.

그러나 세상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며 그를 부정하고 그를 무시하고 경멸하며 그를 대적하고 욕하기까지 한다. 그들은 하나님보다 물질적 부요와 존귀, 세상의 권력, 육신의 쾌락을 더 크게 여기며 살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들도 우상을 섬기며 음란과 거짓과 탐욕으로 행함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비방을 받기도 한다. 로마서 2:24,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 위해 기도해야 한다.

[10절a] 나라이 임하옵시며.

두 번째 내용은 “[주의] 나라가 임하옵소서”이다. ‘나라’에는 백성과 땅과 왕과 법이 있다. 원래, 하나님의 나라의 왕은 하나님이시며 백성은 인류이며 땅은 세상이고 법은 그의 명령이었다. 인류의 시조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잘 지켰더라면, 그 나라에서의 삶은 평안과 행복의 삶이었을 것이다. 거기에는 질병도 가난도 죽음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류의 시조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김으로써 그 나라에 문제가 생겼다. 그것은 하나님의 통치권을 부정한 것이었다. 그 결과, 평안과 행복의 삶도 잃어버렸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옵소서라는 기도는 그의 통치권의 회복을 간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권의 회복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죄인들이 구원을 받을 때 시작된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전도사역을 시작하실 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것이 전도요, 영혼 구원이요, 교회의 설립이다. 신약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의 시작이다. 골로새서 1: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베드로전서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계시록 1:6,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소요리문답 102문답은 이 나라를 ‘은혜의 나라’라고 표현하였다. 죄인들이 사탄의 나라로부터 구출되어 이 은혜의 나라에 들어오고 그 안에서 보호함을 얻는다. 신약 성도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은택을 맛본다. 그들은 하나님께 순종하여 거룩의 열매를 맺으며(롬 6:22) 항상 기뻐하고(살전 5:16; 빌 4:4) 평안하며(요 14:27; 살후 3:16) 또 물질적 공급도 받고(마 6:33) 건강도 누린다(잠 3:7-8; 약 5:14-16).

그러나 신약교회들은 요한계시록 2-3장에 증거된 아시아의 일곱 교회들에서 보듯이 아직 미완성이며 불완전하다. 성도 개인의 성화가 불완전한 만큼, 지상 교회들은 불완전하다. 거기에는 죄가 있고 다툼과 갈등도 있고 분열과 하나님의 징벌도 있다. 비록 지교회와 지교단이 권징을 성실히 시행하여야 하지만(고전 5:13; 계 2:14, 20), 전체교회의 완전 성화는 마지막 심판 때까지 보류된다(마 13:29).

이와 같이 “[주의] 나라가 임하옵소서”라는 기도는 복음이 온 세상에 널리 전파되고 택한 백성들이 죄를 회개하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어 충만하게 교회 안으로 들어오기를 기도하는 것, 즉 전도와 영혼 구원과 참된 교회의 설립을 위한 기도이다.

이 기도는 특히 교회의 말씀 전파의 사명을 위한 기도이다.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은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고 말씀하셨다(마 9:37-38). 우리는 교회에 말씀의 봉사자들이 부족하지 않고 또 그들이 힘있게 말씀을 전하기를 위해 항상 기도해야 한다. 데살로니가후서 3:1, “너희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달음질하여 영광스럽게 되게 하옵소서.”

또 우리는 교회가 종교적으로, 도덕적으로 깨끗케 되기를 기도해야 한다. 교회는 죄 가운데 있는 자들을 회개시키고 회개한 자들을 경건과 거룩함으로 굳게 세우며 깨끗한 예배와 봉사를 늘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가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영광스럽게 이루어질 것이다. 소요리문답은 이 나라를 ‘영광의 나라’라고 부른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부활하고 변화될 성도들이 들어가 영생할 나라이다. 거기에는 죄도 질병도 죽음도 없을 것이다. 마태복음 24:30, “그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마태복음 25:31-33,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러므로 “[주의] 나라가 임하옵소서”라는 기도는 택자들의 구원과 바른 교회의 설립과 성도들의 온전함을 위한 기도일 뿐만 아니라,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영광의 나라를 대망하는 기도이다. 우리는 이 기도를 통해 그리스도의 재림의 시간을 재촉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해야 한다(벧후 3:12).

[10절b]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세 번째 내용은 “[주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이다. 소요리문답 103문답은,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셋째 간구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로 우리를 능력 있게 하시고 즐거운 마음을 가지게 하시사, 하늘에서 천사들이 그러하듯이, 모든 일들에서 그의 뜻을 알며 순종하고 복종하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뜻은 하늘에서 이루어졌다. 그것은 천사들과 죽은 성도들을 통해서이다. 하늘에 있는 악한 천사들은 땅으로 추방되었고 선한 천사들은 하나님을 찬송하며 겸손하고 민첩하게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한다. 완전케 된 죽은 성도들도 늘 하나님을 찬송하며 평안과 안식을 누리고 있다. 그러나 땅이 문제이다.

땅은 마귀의 권세 아래 있다. 사도 바울은 마귀를 ‘이 세상의 신’(고후 4:4)이며 ‘공중의 권세 잡은 자’(엡 2:2)라고 불렀고 우리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공중에] 있는 악의 영들’(엡 6:12)과 싸우고 있다고 말했다. 사도 요한은 그를 ‘온 천하를 꾀는 자’(계 12:9)라고 불렀고 또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해 있다고 말했다(요일 5:19). 땅은 악인들의 세계이다. 그들은 성도들을 핍박하며 하나님을 대적한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뜻하신 바를 이 땅 위에서, 역사 속에서 다 이루신다. 세계사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하나님의 뜻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행하였고 그를 대항하였다. 그것이 죄이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뜻이 땅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중요한 기도 내용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첫째로, 택자들의 구원과 전도와 참된 교회의 건립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내어주신 목적은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었다(요 3:16). 하나님의 뜻은 택자들의 구원이요(요 6:39-40)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요(마 28:19; 막 16:15) 참된 교회의 건립이다(단 2:44; 마 16:18). 둘째로, 죄 없는 삶,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삶이다. 로마서 6:22,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데살로니가전서 4: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디도서 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11절]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네 번째 내용은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이다. 소요리문답 104문답은,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는) 넷째 간구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값없는 은사로 인하여 우리가 현세의 좋은 것들의 적당한 분량을 받으며 그것들과 함께 그의 복을 즐기기를 기도합니다”라고 말한다. 네 번째 기도의 내용은 우리의 육신의 양식을 구하는 것이다. 잠언 30:8도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라는 소원을 두 가지 기본적 소원 중 하나로 증거하였다.

인간은 육신을 가진 존재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먹을것과 입을 것은 필수적인 요소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의 구원과 마음의 위로와 평안을 주실 뿐 아니라, 우리의 육신의 일용할 양식도 주신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메마르고 거친 광야를 통과하는 동안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일용할 양식으로 만나를 내려주셨다. 그것은 비상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일용할 양식을 주심을 잘 보여준다. 시편 104:14-15는, “저가[하나님께서] 가축을 위한 풀과 사람의 소용을 위한 채소를 자라게 하시며 땅에서 식물이 나게 하시고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와 사람의 얼굴을 윤택케 하는 기름과 사람의 마음을 힘있게 하는 양식을 주셨도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신의 양식을 위해 근심할 필요가 없다. 주께서는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天父)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라고 말씀하셨다(마 6:25-26). 또 그는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고 말씀하셨다(마 6:31-32).

우리는 육신의 양식을 위해 근심할 필요는 없고 단지 하나님의 뜻대로 그의 계명에 순종하고 경건하고 의롭게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셨다(마 6:33). 우리가 바로 살 때 그는 우리에게 지혜와 건강과 직장을 주시고, 또 수고의 대가를 누리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만복의 근원이시고 그가 주시는 복은 영적인 복뿐 아니라, 육신적, 물질적 복도 포함된다.

[12절]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다섯 번째 내용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이다. 소요리문답 105문답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다섯째 간구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의 모든 죄를 값없이 용서하시기를 기도하는데; 우리는 그의 은혜로 우리가 마음으로부터 타인들을 용서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구할 용기를 좀 얻게 됩니다”라고 말한다.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는 말에서 ‘우리의 죄’는 구원받은 이후의 죄들을 가리킨다.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었을 때 우리의 옛 죄악들은 깨끗이 씻음을 받았다. 그러나 우리는 남은 죄악성 때문에 때때로 실수하고 범죄한다. 성도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해서, 그런 실수와 죄가 죄 아닌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모든 행위는 여전히 다 죄이다.

죄는 깨끗이 씻음을 받아야 한다. 죄씻음은 하나님의 용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주께서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요 13:10). 목욕했다는 말씀은 우리가 처음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을 때 그의 속죄의 보혈로 죄씻음받음을 말씀한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목욕한 자라도 발이 더러워져서 발을 씻듯이, 예수 믿고 구원받은 성도도 날마다 삶의 현실에서 실수하거나 범죄한 일이 있으면 하나님께 용서함을 받아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그 죄 때문에 하나님과의 교제가 가로막히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근심하시고 우리의 양심도 하나님과의 간격을 가지게 될 것이다. 죄는 하나님과의 교제에 가장 큰 장애물이다.

그런데 주께서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셨다. 그는 우리의 죄의 용서를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다른 이를 용서함에 결부시키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신다(엡 4:32). 그것은 형제 사랑에 있어서 첫 번째로 필요한 일이다. 남의 잘못을 용서함이 없이는 형제 사랑을 바르게 실천하고 완성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실상 주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의 많은 죄와 허물을 용서하셨는지를 일깨우시는 깊은 뜻이 있다. 우리는 우리의 많은 죄와 허물을 용서해주신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깨달을 때 형제의 잘못을 용서할 수 있고 또 그때 하나님 앞에서 담력을 얻고 우리 자신의 잘못에 대해 용서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

[13절a]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여섯 번째 내용은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이다. 소요리문답 106문답,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여섯째 간구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시험을 받아 범죄치 않도록 지키시거나, 우리가 시험을 받을 때에 우리를 붙드시고 건져내시기를 기도합니다.”

세상에는 마귀의 시험이 많다. 마귀는 우리로 불신앙과 낙심과 죄에 떨어지도록 시험한다. 주께서는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다”고 말씀하셨다(눅 22:31). 사도 베드로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도다”라고 말했다(벧전 5:8). 사도 바울은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고 말했다(엡 4:26-27).

주께서는 우리가 마귀의 시험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거나 혹 떨어져도 거기로부터 구원함을 얻도록 도우신다. 그는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고 말씀하셨다(눅 22:31-32).

그러나 우리는 기도하여야 한다.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말씀하셨다(눅 22:46; 마 26:41). 사도 바울은,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교훈하였는데(엡 6:10-11), 그것은 진리의 띠, 의의 흉배, 평안의 복음의 신,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켰고, 그것들과 함께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고 그는 말하였다(엡 6:14-18).

[13절b]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주께서는 또 기도의 맺는 말로서 “[이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이라고 말씀하셨다.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 ‘이는, 왜냐하면’이라는 말(호티 o{ti)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이런 기도를 드리는 것이 하나님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있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소요리문답 107문답은, “(‘이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주께 있사옵나이다. 아멘’이라는) 주기도문의 맺는 말은 우리가 기도에서 오직 하나님께로서만 우리의 격려를 얻을 것과; 우리의 기도들에서 그를 찬송하여, 그에게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돌릴 것을 가르칩니다. 또 우리는 우리의 소원과 들으시리라는 확신의 증거로서 ‘아멘’이라고 말합니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하나님께 영원히 있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며, 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심과 우리의 죄를 사하여주심과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여주심도 그가 하실 수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이런 기도의 제목들을 아뢰는 것이다.

[14-15절]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 . . .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러한 기도를 가르쳐 주신 후에 첨가하여 또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고 하셨다. 주께서는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을 범한 자들을 반드시 용서하라고 교훈하시며, 만일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주께서 이렇게 단호히 선언하실 수 있는 것은 그가 우리에게 베푸시는 용서는 값으로 계산할 수 없이 큰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지옥 갈 만한 죄인들인 우리를 구원하여주셨고 천국 백성이 되게 하셨다. 그는 다른 곳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용서를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그 빚을 탕감받는 것과 같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을 범하는 자를 용서하는 것은 백 데나리온 정도의 빚을 탕감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한 데나리온은 일꾼의 1일 품삯이며, 한 달란트는 6,000데나리온이다. 그러면 1만 달란트는 6,000만 데나리온이다. 1만 달란트와 100데나리온은 그 가치의 차이가 비교할 수 없이 크다. 이처럼 우리가 큰 용서를 받았으므로 우리는 작은 용서를 해야 한다.

 

16-18절, 은밀한 금식에 대하여

[16-18절]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금식은 비상한 경우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효력 있는 기도 방법이다. 예수께서 세 명의 제자들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 그 모습이 영화롭게 변화된 사건이 있은 후에 산에서 내려와 제자들이 고치지 못했던 간질 환자를 고쳐주신 후 금식기도의 효력에 대해, “이런 유의 것은 기도와 금식으로가 아니고서는 나가지 아니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7:21 전통본문). 사도행전 13:2-3은, 수리아 안디옥 교회가 금식하며 최초로 선교사를 파송했음을 증거한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그러나 우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금식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금식할 때 금식하는 모양을 내지 말고 평상시와 같이 행함으로 은밀하게 해야 한다.

 

19-24절,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19절]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거기는 . . . .

예수께서는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보물을 땅에 쌓아두는 것은 자신을 위해 돈이나 재산을 저축만 할 줄 알지 선한 일들에 쓸 줄 모르는 것을 말한다. 보물은 현금이나 금은패물과 오늘날 은행적금이나 주식과 펀드나 집과 땅 같은 부동산을 가리킨다. 땅에 쌓아둔 재물은 좀과 동록이 해하듯이 스스로 손실이 생기기도 한다. 물가상승으로 돈 가치가 하락하기도 하고 금값이 떨어지기도 하고 은행 이자가 낮아지기도 하고 주식값, 펀드값이 하락하고 집값이나 땅값이 떨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또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듯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 손실을 당하기도 한다. 도적질을 당하기도 하고 사기를 당하기도 하며 심지어 악한 자들에 의해 억울하게 돈이나 부동산의 강탈을 당하기도 하는 것이다.

[20절]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거기는 . . . .

예수께서는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는 것은 돈과 재물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선한 일, 즉 전도와 구제를 위해 쓰는 것을 말한다. 주께서는 그것이 우리를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전도자들을 위한 후원은 하나님의 일이다. 주께서는 제자들을 둘씩 전도자로 보내실 때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고 하시며 “이는 일꾼이 저 먹을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0:10).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에바드로디도 편에 자기에게 보내준 선교헌금이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라고 말하였다(빌 4:18). 선교헌금은 우리를 위해 보물을 하늘에 쌓는 것이다.

누가복음 12:33은 주께서 가르치신 이 말씀에서 주머니를 만들어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는 것이 구제하는 것임을 증거하였다. 마태복음 25장의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주께서는 주의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가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고, 벗었을 때 옷을 입히고, 병들었을 때 돌아보고, 옥에 갇혔을 때 와서 보는 것이 곧 주님 자신에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25:35-40). 잠언 19:17은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꾸어드리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고 말하였다. 구제는 보물을 하늘에 쌓는 것이다.

[21절]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예수께서는 또 “[이는]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있음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우리의 보물과 마음은 같이 간다. 우리는 우리가 가치 있게 여기는 일을 위해 마음을 쓰고 돈도 쓰게 된다. 자식을 보물로 여기는 부모는 자식을 위해 쓰는 돈을 아까워하지 않는다. 아내를 보물로 여기는 사람은 그를 위해 쓰는 돈을 아까워하지 않고 처갓집을 위해 돈을 쓰는 것도 아까워하지 않는다. 저는 젊을 때 어려운 유학생활 중에, 비록 먹을것은 많이 사지 못하고 입을 옷은 때때로 헌옷을 사 입었지만, 사명을 위한 신학서적들을 사려고 애썼고 저의 아내는 이 일에 저보다 더 긍정적이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일을 위해, 전도와 교회 설립을 위해, 주의 이름으로 하는 구제를 위해 돈을 쓰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을 것이다. 주 예수보다 귀한 것은 없다. 그는 세상의 부귀영화보다 더 귀하시다. 그는 우리의 가장 귀한 보화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 우리를 지옥 형벌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피흘려 죽으신 그의 사랑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이 크다. 그의 십자가 죽음으로 우리가 얻은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과 천국 기업과 하나님의 자녀 신분의 회복은 돈으로 계산할 수 없이 크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전도를 위해, 영혼 구원을 위해, 참된 교회 설립과 부흥을 위해, 바른 신학교 설립과 운영을 위해, 문서 사역, 인터넷 사역을 위해, 우리의 모든 것을 드릴 수 있다.

[22-23절]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 . . .

예수께서는 또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맑으면(NASB), 좋으면(NIV)]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라고 말씀하셨다. 눈은 몸의 등불과 같아서 우리의 눈이 좋으면 온 몸이 밝을 것이지만,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다. ‘네게 있는 빛’은 우리의 영안(靈眼), 즉 영적 지식, 진리의 지식, 깨달음, 분별력을 가리킨다고 본다. 우리의 마음의 눈이 밝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바르고 힘있게 살 수 있으나, 마음의 눈이 어두우면 우리는 방황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 대신 재물을 가치 있게 여기는 자는 영안이 어두운 자이다.

창세기 13장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잘못된 선택을 볼 수 있다. 그는 아브라함과 헤어질 때 물이 넉넉한 요단 들을 택하고 소돔과 고모라 성으로 이주하였는데, 그러나 소돔 사람들은 여호와 앞에 큰 죄인들이었다. 롯은 외적인 조건만 보고 영적, 도덕적 조건을 보지 못했다. 우리는 직장이나 직업이나 거주지를 택할 때 월급이나 직위나 외적 조건만 보지 말고 먼저 신앙생활, 교회생활을 잘 할 수 있을지 여부를 생각해야 한다. 그것이 바른 생각과 태도이다.

[24절]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사람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그는 한쪽을 더 위하거나 다른 한쪽을 더 소홀히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과 재물을 둘 다 섬길 수 없고,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인가, 재물인가, 즉 하나님인가, 세상인가를 택해야 한다.

주께서는 씨 뿌리는 비유에서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는 세상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기운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씨라고 말씀하셨다(마 13:22). 재물에 대한 애착은 우리의 신앙생활을 결국 실패케 할 것이다. 주께서는 자기에게 찾아온 한 부자 청년에게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셨으나, 그 청년은 재물이 많으므로 근심하며 떠나갔다(마 19:21-22). 주님의 택함을 받아 열두 사도 중에 속하였던 가룟 유다는 결국 돈에 대한 욕심 때문에 실패하였다. 그는 대제사장에게 가서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고 흥정하였고 그들은 그에게 은 삼십 개(아마, 30스타테르 즉 120데나리온, 노동자의 4개월 품삯)을 달아 주었다.

사도 바울은 말세에 고통하는 시대가 올 것인데, 그때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하나님보다 육신의 쾌락을 추구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딤후 3:1-5). 사도 요한은 우리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고 교훈하며 이 세상의 것들은 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뿐이며 그것들은 다 지나가는 것들이며 오직 하나님과 그의 뜻을 구하는 자들만 영원할 것이라고 말하였다(요일 2:15-17). 결국, 사람은 둘 중의 하나를 택한다. 하나님인가, 세상 즉 물질인가, 둘 중의 하나이다.

우리가 하나님만 참 주인으로 섬긴다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다. 재물은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쓸 수단에 불과하며, 우리는 그 재물에 종노릇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재물을 이 땅에 쌓아두는 잘못을 범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 재물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의 뜻을 이루기 위해, 전도와 구제를 위해 언제든지 기꺼이 사용할 것이다.

본문에 나타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은 분명하다. 첫째로, 그는 “너희를 위해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고 교훈하셨다. 우리는 돈을 땅에 쌓아두기만 하는 생활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믿음 없는 생활이다. 예기치 못한 일을 위해, 또 노후의 대책을 위해, 어느 정도의 저축은 필요한 일이라고 본다. 그러나 어떤 이는 은행 저축이든지 부동산 구입이든지 땅에 쌓아두기만 한다. 그는 그것들을 다 못쓰고 죽을 것이다. 자식들에게 남겨두는 것도 큰 의미는 없다. 그것이 자식에게 유익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것은 어리석은 삶이다.

둘째로, 주께서는 “너희를 위해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고 교훈하셨다. 우리는 우리의 돈과 재산을 하나님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 우리는 그것을 전도 사업을 위해, 참된 교회의 건립을 위해, 바른 신학교 사업을 위해, 바른 문서 사역과 인터넷 사역을 위해, 주의 이름으로 하는 선한 구제 사업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 주께서는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사람은 자기가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일에 돈을 쓴다. 우리가 땅의 헛된 일에 가치를 두면 그런 것에 돈을 쓸 것이지만, 우리가 하나님과 그의 선한 사업에 가치를 두면 그것을 위해 돈을 쓸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눈이 밝은 정도대로 살 것이다. 우리의 눈이 어두우면 세상의 헛된 것을 위해 살 것이지만, 우리의 눈이 밝아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그의 선한 사업을 위해 우리의 몸과 마음과, 우리의 시간과 물질과 우리 목숨까지도 드릴 것이다. 또 그것은 주의 말씀대로 참으로 우리를 위하는 일이 될 것이다. 여러분의 주인은 누구인가? 하나님인가, 돈인가?

 

25-34절,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

[25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 . . .

예수께서는 먹을것과 입을 것을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그러므로’라는 말은 앞에서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기지 못하므로 재물을 크게 여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섬겨야 하기 때문에라는 뜻이다. 먹고 입는 것의 관심은 결국 재물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꼭 잘 먹어야 사는 것이 아니고 오래 사는 것도 아니며 행복하게 사는 것도 아니다. 행복지수는 가난한 나라에서도 높다고 하며 장수마을은 반드시 부자 동네가 아니라고 한다.

주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것은 진리이며 유익한 교훈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며 선한 교훈이다.

주께서는 우리가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무엇을’이라는 말에 강조점이 있다고 본다. 우리는 음식의 내용, 옷의 종류에 너무 관심을 둘 것이 아니라는 뜻이라고 본다. 우리는 더 좋은 것, 더 맛있는 음식을 먹으려 하지 말고 더 좋고 아름다운 옷을 입으려 하지 말고 그런 것들에서 인간의 행복을 찾으려 하지 말라는 뜻이라고 본다. 인간의 행복은 그런 데 있지 않다.

우리는 먹을 수 있는 것을 편식하지 말고 골고루 먹는 것이 좋다. 맛있는 음식이 몸에 해로운 경우도 많다. 과자나 빵, 동물성 기름이 많은 음식, 위에 너무 짜거나 맵거나 자극적인 음식, 흰밥 같은 탄수화물의 치우친 섭취 등. 또 과식은 오히려 몸에 나쁘다. 잡곡, 야채, 과일, 견과류, 생선, 계란, 육류 등 골고루 소식하는 것이 좋다.

주께서는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다고 말씀하셨다. 사람이 음식을 위해 존재하지 않고 사람이 옷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음식이 사람을 위해 있고 옷이 사람을 위해 있다. 그러므로 옷도 단정하고 편한 옷이면 좋다. 물론 색깔도 밝고 예쁜것은 나쁘지 않다고 본다. 그러나 옷이 너무 요란하거나 단정치 못한 것은 피해야 할 것이다. 피부에 좋은 옷이 좋은 옷이고 몸에 편한 옷이 좋은 옷일 것이다.

주께서는 그런 것들을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염려는 평안이 없고 근심하며 걱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음이 나뉘는 것이다. 염려하는 사람은 마음이 두근거리고 생각이 많다. 또 심하면 머리가 아프기도 한다. 염려하는 마음은 요동하는 바다, 풍랑 이는 바다 같다. 평안은 마음의 단순함이다. 거기에서 마음의 고요함, 조용함이 생기고 마음의 평정과 평온이 생긴다. 평안한 마음은 잔잔한 호수와 같다. 이런 평안에서 기쁨과 행복이 나온다. 그러나 불안과 염려와 걱정은 우울함, 두려움을 만들고 그런 사람은 행복하지 못하다.

[26절]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天父)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훨씬 더 낫지] 아니하냐?”

하나님께서는 공중의 새들도 기르시는 아버지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까마귀 새끼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먹을 것이 없어서 오락가락할 때에 그것을 위하여 먹을 것을 예비하는 자가 누구냐?”고 말씀하셨다(욥 38:41). 하나님께서는 새 뿐만 아니라 모든 생물들을 기르신다. 시편 104:25-29는, “저기 크고 넓은 바다가 있고 그 속에 동물 곧 대소 생물이 무수하니이다. 선척이 거기 다니며 주의 지으신 악어가 그 속에서 노나이다. 이것들이 다 주께서 때를 따라 식물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주께서 주신즉 저희가 취하며 주께서 손을 펴신즉 저희가 좋은 것으로 만족하다가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저희가 떨고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즉 저희가 죽어 본흙으로 돌아가나이다”라고 말한다.

‘공중의 새’는 ‘부지런히 날아다니는 새’를 가리킨 것 같다. 새들은 먹이를 얻기 위해 부지런한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공중의 새들을 먹이시고 기르신다. 우리는 새들보다 훨씬 더 낫지 않은가?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먹을것을 공급하시고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에게 주시고 우리를 위해 준비하실 것이다.

[27절]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예수께서는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라고 말씀하셨다. ‘키’라는 원어(헬리키아)는 일차적으로 ‘나이, 수명’을 가리킨다. 또 ‘한 자’(페퀴스)라는 말은 시간의 측정에도 사용된다. 근래의 영어성경들은 ‘그 수명을 한 자나 더 연장할 수 있느냐?’라고 번역했다(NASB, NIV). 우리가 염려해도 우리의 키를 조금 더 크게 할 수 없고 우리의 수명을 조금 더 연장할 수 없는 것이라면, 왜 쓸데없이 염려하느냐는 뜻이다. 우리의 염려는 우리의 목숨을 위해, 또 몸의 건강을 위해 아무 유익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해를 준다. 마음의 평안은 건강에 유익하지만, 마음의 불안과 염려는 병이 될 뿐이다.

[28-29절]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아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천 짜는 일]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심지어 솔로몬도 그의 모든 영광으로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주께서는 옷에 대한 염려를 언급하시며 들의 백합화의 아름다움에 대해 말씀하신다. 모든 꽃은 다 아름다운 것 같다. 색깔도 모양도 아름답다. 들판에서 자라는 작은 안개꽃 같은 것도 보잘것없어 보여도 누구에게 보이려고 그런지 예쁘다. 식물의 생명력은 강하고 신기하고 기특하다. 이것은 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다. 들의 백합화는 심는 수고나 천을 짜거나 재단하고 바느질하는 수고를 하지 않았으나 솔로몬의 아름다운 옷보다 더 아름답다.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옷이라도 하나님의 창조의 아름다움에 미치지 못한다. 인간의 솜씨보다 하나님의 솜씨는 훨씬 더 뛰어나고 놀랍다.

[30절]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아름다운 백합화나 다른 들풀들은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것들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렇게 일시적인 들풀들도 그처럼 아름답게 입히셨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어떻게 입히실지 짐작할 수 있다. 인간은 공중의 새나 들의 백합화와 비교할 수 없는 존귀한 존재, 즉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존재이다(창 1:26, 27). 하나님의 자녀된 이스라엘 백성이나 신약 교인들은 더욱 존귀하다. 그러나 주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말씀하셨다. 정말 우리는 믿음이 적다. 하나님은 온데 간데 없고 물질세계만 우리 눈앞에 있는 것이다. 물질세계를 만드신 하나님은 안 보이고 물질세계만 보는 무지하고 믿음 없는 자들인 것이다.

[31-32절]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것임이니라. 이는]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아심이니라].”

주께서는 염려하지 말라고 다시 말씀하시면서 그 이유를 두 가지 드셨다. 첫째로, 물질생활에 대한 염려는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이 하는 일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 없이 사는 이방인들, 하나님을 모르는 그들, 하나님의 보호와 도우심과 공급하심을 온전히 받지 못하는 그들은 미래에 대한 염려가 많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창조자, 섭리자 하나님을 아는 우리들, 또 하나님의 아신 바된 우리들, 세상 끝날까지 그의 보호와 도우심과 공급을 받을 우리들은 달라야 한다는 뜻이다. 둘째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 즉 우리의 먹을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의식주의 필요한 것을 다 알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천부(天父)’ 곧 하늘에 계신 아버지이시다. 그는 우리의 보호자시요 공급자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물질생활에 대해 염려하지 말아야 한다.

[33절]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 . . .

예수께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하나님의]11)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엉뚱한 처방 같고 게으른 자의 처방같이 보일지도 모른다. 사람이 열심히 일해야 잘 먹고 살고 행복할 것 같으나 실상 그렇지 않다. 그래서 공중의 새나 들의 백합화를 예로 드신 것이다. 우리는 그것들을 먹이고 기르시며 입히시는 하나님을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다 주실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 곧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것을 말한다.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계명들을 지키며 행하는 것을 말한다. 죄 짓지 않고 의롭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모든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 중요하다. 첫 사람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짓지 않았더라면 에덴 동산에서 의식주에 부족이 없이 영원히 행복을 누렸을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삶은 이 세상에서는 땀 흘려 일하는 것도 포함한다. 구약성경은 우리가 엿새 동안 힘써 일하라고 가르친다(출 20:9). 성경은 우리가 개미에게 가서 근면함을 배우라고 가르친다(잠 6:6-11). 성경은 게으르지 말라고 가르친다(롬 12:11). 성경은 일하기를 힘쓰며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가르친다(살전 4:11; 살후 3:10). 우리는 다 부지런해야 한다.

주께서는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 곧 의식주의 필요한 것들을 우리에게 더하여 주시리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이다. 우리가 먼저 힘쓸 것을 힘쓰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실 것이다.

[34절]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 . . .

예수께서는 또,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이는]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족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이것은 중요한 교훈이다. 사람이 믿음이 없으면 내일 일을 염려하게 되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아야 한다.

주께서는 “[이는]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고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족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인생은 하루하루 고단한 삶을 살고 있다. 그 날 하루의 괴로움은 그 날 하루로 충분하다. 내일의 것을 오늘 염려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는 하루하루 그가 인도하시는 대로 살면 된다. 사람은 일을 할 때 조금 염려하기도 할 것이나,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면 된다. 우리는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겨야 하고 내일 일을 오늘 염려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염려는 불신앙에 불과할 것이다.

25-34절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의식주의 문제를 염려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아야 한다. 먹는 음식의 내용이나 입는 옷의 종류보다, 우리의 목숨과 몸이 더 중요하다. 우리는 음식을 골고루 조금 먹으면 되고 옷을 편안하고 단정하게 또 겨울에는 따뜻하게 입으면 된다.

우리는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자.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면 된다. 우리는 한 날의 괴로움이 그 날에 족한 줄 알고 살면 된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 믿으면 누가 밥 먹여주냐?’고 우리를 비웃지만,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밥을 먹여주실 것을 확신하자.

둘째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그의 통치권을 인정하는 것이며, 그가 보내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경에 계시하신 하나님의 모든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우리는 천지만물을 지으시고 보존하시고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깨닫고 믿고 의지해야 한다. 우리는 공중의 새들과 들의 백합화들을 보며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공급하심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인간의 불행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범죄한 데서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사람이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이 인생의 바른 길이며 또 행복의 길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의식주의 모든 필요들을 채워주실 것이다.

 

 

7장: 행위로 열매 맺는 삶

1-6절, 비판에 대하여

[1-5절]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주께서는 비판에 대해 말씀하셨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간혹 남을 비판한다. 우리는 남을 비판하는 일을 매우 자제해야 한다. 그러나 주께서는 우리가 남을 비판하는 일을 완전히 금하신 것은 아니라고 본다. 우리는 남의 잘못된 사상이나 행동을 판단하고 비판해야 그것을 따르지 않고 본받지 않을 수 있다. 주께서는 특히 교회의 질서와 거룩을 위해 교리적 오류나 윤리적 오류를 판단하고 비평할 책임을 교회 전체, 특히 목사들과 장로들에게 주셨다. 그는 마태복음 18:18에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교회의 권징의 권세이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 16:17에서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교훈을 거스려[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고 말했고, 또 디도서 3:10에서는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고 했다. 사도 요한도 요한일서 4:1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고 말하였다.

주께서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의 비판의 행위 자체를 정죄하신 것이 아니고 그 비판이 우리 자신에게도 적용되기 때문에 비판을 매우 조심하라는 뜻이다. 우리가 남에 대한 비판을 매우 조심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도 같은 잘못을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더욱이, 주께서는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티’는 작은 결점을 가리키고 ‘들보’는 큰 결점을 가리킨다. 사람은 자신의 결점은 보지 못하거나 보아도 작게 여기고 남의 결점은 잘 보고 또 그것을 크게 여기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자신에게 큰 결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의 작은 결점을 크게 여기고 그것을 비평하기 쉬운 것이다. 자신의 큰 결점을 보지 못하고 남의 작은 결점을 지적하는 것은 모순일 뿐만 아니라, 실상 위선이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자신에게 결점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결점이 없는 자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께서는 그런 사람을 ‘외식하는 자여’라고 부르셨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자신이 옳고 남이 틀렸으며 자신이 선하고 남이 악하다고 생각하는 위선의 기질이 있는 것 같다. 이것은 교만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우리 자신이 더 큰 결함이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주께서는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먼저 우리 자신의 큰 결점을 발견하고 고치지 않고서 형제의 작은 결점을 비평하는 것은 합당치 않다.

또 사람의 품은 마음에 관하여는, 하나님만이 그것을 판단하실 수 있기 때문에 서로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4:5에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 말했다.

[6절]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 . . .

예수께서는 또,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고 말씀하셨다.

거룩한 것과 진주는 하나님의 거룩하고 귀한 진리의 말씀을 가리킨다고 보며, 개와 돼지는 무지하고 악한 자들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들은 복음을 알지 못할 뿐 아니라, 고의로 하나님과 그의 종들과 그들이 전하는 진리를 거절하고 대적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발로 밟을 뿐만 아니라, 전도자들에게 해를 입힌다.

하나님의 진리 속에는 죄의 지적과 정죄, 즉 하나님의 심판과 지옥 형벌의 진리가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죄를 깨닫는 자는 회개하며 구원의 진리를 감사하게 받을 것이지만, 그러나 회개치 않는 악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리가 기분 나쁜 말들에 불과할 것이다. 사도행전에 많이 기록된 대로, 사도들이 두루다니며 복음을 전할 때 악한 자들은 그들을 비방하였고 다른 이들까지 선동하여 그들을 핍박하였다(행 13:45-46; 13:50-51; 19:9). 사람이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으려면, 먼저 하나님을 알고 그를 경외함이 있어야 하고 자신의 죄를 깨닫고 뉘우침이 있어야 한다. 참된 구원은 회개, 즉 겸손히 자신의 죄와 부족을 깨닫고 뉘우치는 것을 동반한다.

 

7-12절, 기도의 응답에 대하여

[7-8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주께서는 기도에 대해 말씀하셨다. 세상 일도 이치가 비슷하겠지만, 이것은 기도에 대한 진리이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말은 더 간절해지는 기도를 나타낸다. 또 ‘그러면’이라는 말의 반복은 기도의 응답을 강조한다. 하나님을 향하여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면 응답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구하지 않으면 무엇을 받을 수 없다.

기도는 단지 우리가 어떤 필요와 부족을 느낄 때가 아니라 하나님을 알고 의지할 때 더 잘할 수 있다. 기도는 우리의 믿음에 비례한다.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께 기도할 수 없으며, 믿음이 적으면 조금 기도할 것이며, 믿음이 강하면 많이 기도할 수 있을 것이다. 주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기도의 본을 보이셨다. 그는 새벽 미명에 기도하셨고 또 밤에 기도하셨으며 때로는 밤새도록 기도하셨다.

주께서는 기도 응답을 강조하시면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실 것이라는 지식과 믿음을 가질 때 낙심치 않고 더욱 잘 기도할 수 있다. 기도의 응답을 알지 못하고 믿지 않는 자는 응답이 더디면 낙심할 수도 있겠으나, 기도의 응답을 믿는 자는 낙심치 않고 더욱 열심히 기도할 것이다.

[9-11절]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주께서는 기도의 응답에 대해 인간적 비유로 설명하셨다. 사람도 무엇을 구하는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려고 한다.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거나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부모는 없을 것이다. 악한 사람도 그러하거든, 하물며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기 자녀들이 무엇을 구할 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는가? 그는 좋은 것으로 주실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도 응답을 믿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좋은 것으로 응답하실 것을 믿어야 한다. 그는 좋으신 아버지이시며 능력의 하나님이시다. 그는 온 세상을 섭리하시며 특히 참된 교회들을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신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말했다(롬 8:28).

[12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 . . .

주께서는,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고 말씀하셨다.

‘황금률’이라고 알려진 예수님의 이 말씀은 물론 인간 관계에도 적용될 수 있다. 우리가 이웃에게 좋은 것을 받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이웃에게 좋은 것을 주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웃에게 받기를 원하는 대로 그에게 주어야 한다. 사랑은 이기적이지 않고 이타적이다. 그것은 무엇을 받는 것이 아니고 주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단순히 인간 관계에 대한 교훈이 아니고 문맥이 보이는 바와 같이 기도의 교훈의 결론이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좋은 것을 받기 원한다면, 먼저 하나님께 좋은 것을 드려야 함을 교훈하신 것이다. 만일 우리가 평소에 하나님을 위해 시간과 돈과 힘을 드린다면, 그는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실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평소에 하나님을 위해 살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 시간과 돈과 힘을 드리지 못하고 드려도 부스러기를 조금 드리고 오히려 그의 미워하시는 것들, 세상의 죄악되고 헛된 것들을 행한다면, 어떻게 그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리라고 기대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좋은 기도 응답을 기대한다면, 우리는 마땅히 그에게 좋은 것, 아니 가장 좋은 것을 드려야 할 것이다.

1-12절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남을 비판하는 일을 매우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먼저 자신의 부족을 성찰해야 한다. 우리는 자신에게 큰 결점이 있는데 남의 작은 결점을 지적하는 잘못을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가 교만하지 않고 겸손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다면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꼭 필요한 경우, 남을 비판할 수 있겠지만, 그것도 매우 덕스럽게 해야 한다. 우리는 먼저 당사자에게 말해야 하고, 또 그 다음에 교회에 말해야 한다. 우리는 결코 뒤에서 남을 비난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둘째로, 우리는 구원의 거룩하고 복된 진리를 지혜롭게 전해야 한다. 우리가 그것을 무지하고 악한 자들에게 그냥 던지듯이 전하면 우리는 핍박을 받을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먼저 그에게 하나님이 계심과 인생이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함을 전하며 깨우쳐야 하며 또 인생은 누구나 죄인임과 그 죄의 심각함을 깨우쳐야 할 것이다. 우리는 사람이 구원을 얻을 때 필요한 이런 준비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실 줄 믿고 열심히 기도해야 한다. 기도는 신자의 특권이다. 하나님을 믿는 자는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고 또 기도하는 자는 하나님께 좋은 것을 받을 수 있으나, 믿음이 없는 자는 기도하지 않을 것이며 또 기도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 좋은 것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가장 좋은 것을 드려야 한다. 우리는 날마다 성경 읽기와 기도, 믿음과 순종으로 살아야 한다.

 

13-14절, 좁은 문, 좁은 길

[13-14절]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 . . .

예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자는 좁은 길을 걸어야 한다. ‘문’은 구원의 도, 종교, 신앙관, 인생관을 가리키며, ‘길’은 생활방식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것은 주님의 모든 말씀과 성경 전체에서 볼 때 예수 그리스도만 믿고 따르라는 뜻이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만 유일한 구주로 믿어야 한다. 이것은 좁은 문이다. 사도 베드로의 증거한 바와 같이(행 4:12),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에게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해 뜨는 곳에서든지 지는 곳에서든지 나밖에 다른 이가 없는 줄을 무리로 알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음이니라”고 말씀하셨다(사 45:6; 45:22). 창조주 하나님만 또한 구주이신 것을 증거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유일한 구주이시라는 말씀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곧 신적 구주이심을 의미한다.

예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요 14:6). 예수 그리스도는 인생이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요 구원의 진리이며 영생이 되신다. 사도 바울도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증거하였다(딤전 2:5).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유일한 중보자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일한 구주이시다. 그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1:28). 모든 사람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께로 나오면, 그는 그들에게 참 안식을 주실 것이다.

예수께서는 또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고 말씀하셨다(요 6:35, 39).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고 마지막 날 부활할 것이다. 우리에게 영생과 부활을 주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

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만 따라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을 순종하고 그의 모범을 따라야 한다. 그것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 좁은 길로 가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0:37-38). 우리는 가족들보다도, 심지어 우리 자신보다도 더 예수님을 사랑하며 우리 자신을 부정하고 그를 따라야 한다.

예수께서는 얼마 후에도 또 말씀하시기를,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고 하셨다(마 16:24-25). 또 누가복음에 기록된 말씀을 보면, 그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고 말씀하셨다(눅 9:23-24).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은 고난의 길이다. 예수께서는 고난의 길을 가셨다. 그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 그러므로 그를 믿고 따르는 자는 고난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큰 희생, 어려운 희생을 요구하셨다. 예수께서는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고 또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다(눅 14:26-27, 33). 사도 요한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고 말했다(요일 2:15).

사도 바울은 소아시아 지방에 복음을 전하여 교회를 세운 후 그들을 돌아보며 그들의 마음을 굳게 하며,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그는 빌립보서에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고 말했고(빌 1:29), 디모데후서에서는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말했다(딤후 3:12). 예수를 믿고 따르는 길은 고난의 길이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삶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서 좁은 길을 걷는 것이다. 그것은 참으로 좁은 문이며 좁은 길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만 믿고 예수 그리스도만 따르며 어려운 희생과 고난도 각오해야 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왜 우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하는가? 왜냐하면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기 때문이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다. 그것은 다원주의, 포용주의의 문이다. 그것은 무슨 종교든지 포용하는 종교다원주의이다. 그것은 무슨 철학 사상이든지 포용한다. 그것은 무슨 인생관, 가치관이든지 포용한다. 그것은 기독교라는 이름을 가진 무슨 신앙관이든지 포용한다. 그것은 자유주의를 포용하고 천주교회를 포용하고 은사주의를 포용한다. 그것은 세속주의, 물질주의, 육신적 쾌락주의를 포용한다. 또 그 길, 즉 그 생활방식도 넓다.

거기에서는 오직 한 가지의 덕만 있다. 그것은 관용과 포용만이 덕이다. 거기에서는 어떤 사상을 가지고 있든지 상대방을 존중해야 한다. 거기에서는 오직 한 가지만 악이다. 거기에서는 기독교 같은 배타주의만 악으로 간주되고 배척을 받는다.

그러나 그 문과 그 길은 멸망으로 인도한다. 다원주의, 포용주의의 사상은 마귀의 사상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와 배치된다. 그것은 오류에 빠져 있는 자들로 하여금 회개치 못하게 만들며 그 죄 가운데 거하게 만든다. 요한계시록 18:2, “힘센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정신]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세상은 각종 더러운 정신들의 집결지이다. 교회들도 배교하며 다원주의적이고 포용주의적이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리로 가는 자들이 많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 많은 종교인들이 그리로 가고 있고 또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많은 교인들도 그리로 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은 참된 신자나 그리스도인이 아닐 것이다.

반면에,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힘들어서 찾는 이가 적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고 말씀하셨다(출 20:3). 하나님께서는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며 그는 우상숭배를 용납하지 않으시며 우상숭배를 가장 큰 죄로 간주하신다. 그것은 배타주의이다. 기독교는 배타주의이다.

예수께서도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셨고(마 10:37-38), 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요 14:6). 또 그는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고 하셨다(막 16:16).

사도 베드로도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말했고(행 4:12), 사도 바울도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말했다(딤전 2:5). 성경적 기독교는 배타주의이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만 구주이시며 다른 구주는 없다고 고백하며 증거한다.

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길은 우리의 주관대로 사는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을 부정하며 자신을 절제하며 성경의 교훈에 복종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얻은 우리에게도 죄성과 죄의 습관이 남아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항상 내면적 싸움이 있다. 우리가 자신을 부정하고 절제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욱이, 오늘날같이 교회가 넓어져서 속화된 때에 옛신앙, 성경적 신앙, 보수신앙을 지키는 것은 좁은 길을 걷는 것이다. 많은 교회들과 목사들과 교인들이 세상을 사랑하면서 예수를 믿는다고 말한다. 이런 배교와 타협과 혼란의 시대에 시대적 풍조를 반대하고 옛길을 붙드는 것은 편협하거나 극단적이게 보이는 외로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오직 성경의 교훈대로 가는 좁은 길을 걸어야 한다. 이 길이 어려운 길, 힘든 길이지만, 이 길은 영생에 이르는 길이다.

그러나 이 문을 찾고 이 길을 걷는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에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했고, 또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 했고, 또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 했다(고전 1:18, 21, 22-24).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는 자는 좁은 문으로 들어갈 것이다.

우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며 좁은 길로 가자. 우리는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구하며 걸어가는 넓은 문으로 들어가지 말고 넓은 길로 가지 말자. 우리는 하나님만 믿고 예수 그리스도만 믿고 성경만 믿고 성경의 교훈대로만 살자. 우리는 특별히 이 혼란한 시대에 연합주의, 신복음주의, 은사주의로 가지 말고, 오직 역사적 기독교 신앙, 배교와 타협과 분리된 근본주의적 개혁신앙, 즉 보수정통신앙을 굳게 지키자.

우리는 죄성과 연약성과 죄의 습관을 가진 자기를 부정하고 인내하며 영광스러운 천국만 바라보고 땅의 좋은 것들을 헛되게 여기며 하나님의 교훈대로, 신구약성경의 가르침대로, 경건하고 거룩하고 의롭고 정정당당하게 살고, 또 주 예수님을 본받아 항상 온유하고 겸손하고 선하고 진실하게 살아가자. 그것이 승리하는 길이다.

 

15-23절,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15절]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 . . .

예수께서는 마지막으로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고 말씀하셨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자, 즉 진리만 전하고 바른 말만 해야 하는 자이다. 오늘날의 목사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거짓 선지자들, 거짓 목사들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을 전하는 자들, 즉 비진리를 전하고 올바르지 않은 말을 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거짓말하는 자들, 자기의 생각을 전하는 자들, 세상적인 이야기를 하는 자들, 자기 자랑이 많은 자들, 세상적 수준의 생각과 도덕을 전하는 자들, 성경의 충실한 본문 해석 대신에 예화를 많이 하는 자들,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는 자들, 성경 진리와 멀어지게 하는 자들, 바른 교회와 멀어지게 하는 자들, 바른 종들을 비방하는 자들, 바른 종들과 멀어지게 하는 자들(고후 12:16-17; 갈 4:17)이다.

주께서는 그들이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고 말씀하셨다. 거짓 목사들은 이중적이며 위선적이며 겉과 속이 다르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죽이려고 와 있는 사탄의 사자들이다. 그러므로 겉만 보아서는 잘 모른다. 그의 인격성을 보아야 알 수 있다. 그들은 사심(私心)이 있고, 물질욕, 명예욕, 권세욕 등이 있다. 그런 자들은 교회 헌금을 불필요한 일과 부당한 일에 과다지출하고 헌금을 남용하고 교회 공금을 부당하게 취하고 헌금을 세상적인 사업에 투자하고 교인들의 투자금을 떼어먹는다. 교회는 이런 거짓 목사들을 분별하여 물리쳐야 한다.

[16-20절]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무는 그 열매로 안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찍혀 불에 던지운다. 이와 같이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 참 목사와 거짓 목사를 구별하는 기준은 그의 행위이다. 우리는 단순히 그의 외모의 훤칠함이나 유창한 말만 가지고 그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 사탄의 사자들도 그런 점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사탄의 종들이 흉내낼 수 없는 것은 그 행위이다. 사람은 그의 행위로 판별된다. 선한 행위라는 말은 경건성과 도덕성을 가리킨다. 그의 행위가 경건한가, 깨끗한가, 의롭고 정직한가, 선한가, 진실한가--이것이 사람을 분별할 수 있는 바른 잣대이다. 참 생명은 단순히 말에 있지 않고 인격과 삶에 있다.

하나님의 종들과 마귀의 종들,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은 명백히 구별된다. 요한일서 3:10은,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고 말한다. 거짓 목사들은 그 행위로 구별된다.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가 찍혀 불에 던지우듯이, 불경건, 사욕(私慾), 불의, 악, 교만, 거짓을 추구하고 행하는 목사들은 천국에서 제외되고 영원한 지옥불에 던지울 것이다. 참된 경건과 도덕성이 없는 자들은 심판을 받고 지옥불에 던지울 것이다.

[21절]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주여, 주여’ 하는 고백은 입술만의 고백이며 입에 발린 말에 불과한 고백이다. 진정한 고백은 마음의 고백이어야 하며, 그것은 행위로 나타나는 고백이다. 인간의 행위는 마음에서 시작되며 마음먹기에 크게 좌우된다. 거짓된 목사들은 입술로는 주님을 부르지만, 그들의 고백이 진실한 마음의 고백이 아니므로 행위가 뒤따르지 않는다. 헛된 고백은 구원받을 수 없는 고백이다.

주께서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라고 부르셨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특별한 의미에서 부자(父子) 관계이시다.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히 믿는 것이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사는 것이다. 

선한 행위가 없는 입술만의 고백은 죽은 고백에 불과하다. 의롭고 선한 행위는 참된 믿음의 표시이다. 사람이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만 받지만, 구원받은 자는 반드시 의롭고 선한 행함이 있어야 한다. 천국에 들어가는 자격자는 선한 행위가 있는 자이다. 행위는 구원의 조건이 아니지만 구원의 증거가 된다. 행위로 천국 가는 것은 아니지만 행위 없이 천국 가는 것도 아니다. 생명은 반드시 인격과 행위의 변화로 나타난다. 입술의 신앙고백이 있어도 선한 행위가 없다면 그는 구원받은 자가 아닐 것이다. 그의 고백은 헛된 고백에 불과할 것이다(마 3:8-10). 행위는 마음의 표현이며, 선한 마음은 반드시 선한 행위로 나타날 것이다.

[22-23절]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못했으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그 날은 심판 날이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그 중에는 거짓 선지자들, 즉 거짓 목사들이 많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일을 열심으로 하시듯이, 사탄도 하나님의 일 방해하기를 열심으로 행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사자들을 일으켜 일하게 하시듯이, 사탄도 그의 사자들을 일으켜 거짓된 운동을 일으킬 것이다.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도 쫓아내고 많은 기적도 행할 것이다. 본문은 사탄도 그의 종들을 통해 기적들을 행할 것을 보인다.

그러나 거짓 목사들의 위선은 그들이 불법을 행하는 데서 드러난다. 주께서는 그들에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도무지’라는 원어(우데포테)는 “내가 너희를 안 적이 없다”는 뜻이다. 이 말씀은 그들의 기적 행위가 주님과 상관없이 행해졌음을 뜻한다. 거짓 목사들이 주님께 거절당한 까닭은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행위가 문제이다. 하나님께서는 행한 대로 심판하신다.

누구든지 악을 행하면서 주께 인정받을 줄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주께서는 악인을 구원하시지만, 그를 악에서 건져 선한 사람을 만드시는 것이지 악한 그대로 버려두시는 것이 아니다. 행위는 사람의 구원을 판별할 수 있는 표이다. 아직도 악을 떠나지 않은 자는 구원받지 못한 자라고밖에 볼 수 없다. 그가 참으로 구원을 받았다면, 그는 모든 죄를 버리고 주 앞에 복종하는 자가 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의롭고 선한 행실로 우리의 믿음의 진실함을 나타내어야 한다.

주께서는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의 실패의 원인은 불법을 행하는 데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들이며 천국과 영생과 상관없는 자들이고 마귀와 상관된 자들이며 지옥과 상관된 자들이다.

[24-27절]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주께서는 그의 산상설교의 결론으로 행위에 대한 강조를 하신다. 계명의 실천이 중요하다. ‘누구든지’는 모든 제자들과 모든 사람에게 해당한다. ‘나의 이 말’은 산상보훈 전체를 가리킨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사람과 같다. 여기에 ‘집’은 그의 인격과 삶을 가리킨다고 본다. 주의 말씀 순종의 행위는 그의 신앙 인격과 삶을 견고하게 만든다. 그런 자는 정말 주님을 믿고 따르는 자이다. 폭우나 폭풍은 우리가 세상에서 당하는 시험과 환난, 질병과 궁핍 등을 상징한다. 순종의 행위로 자기의 신앙을 견고케 한 자에게는 그 어떤 시험과 환난도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시험과 환난을 이기고 또 이길 것이다.

그러나 주의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자는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사람과 같다. 말씀 순종의 행위가 없는 자의 인격과 삶이라는 것은 겉모양은 살아 있으나 실상 죽은 것과 같다. 그가 교회생활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의 교회생활은 형식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는 집을 모래 위에 짓는 어리석은 자와 같다. 이런 자의 집은 폭우와 폭풍이 올 때에 무너지며 그 무너짐이 심할 것이다. 행함이 없는 교인들은 시험과 환난이 닥쳐올 때 크게 흔들리고 넘어질 것이다. 참 믿음은 순종하는 믿음,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다(갈 5:6).

[28-29절]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 . . .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자, 무리들은 그의 가르치심에 놀랐다. 왜냐하면 그의 가르치시는 것은 권세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서기관들은 말의 아름다움으로 가르쳤으나, 주께서는 하나님의 권위와 권세로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15-29절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거짓 선지자들을 조심해야 한다. 거짓 선지자들은 오늘날 거짓 목사들을 가리킨다. 나무는 열매로 알듯이, 참 목사와 거짓 목사를 분별하는 기준은 그들의 인격과 행위이다. 바른 교리와 경건성은 기본이며, 특히 도덕성 즉 선함과 진실의 행위가 그가 참 목사인지 여부를 판단하는 표가 된다. 정통적 교리와 경건성을 갖지 않은 자라면 두말 할 것도 없고, 선하고 진실한 도덕성이 없다면 그는 확실히 거짓된 목사일 것이다.

둘째로, 정직하고 선한 행위는 천국에 들어가는 자들의 한 증표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부르는 입술만의 고백, 즉 입에 발린 고백으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주께서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셨다(21절).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입술의 고백뿐 아니라, 마음의 고백이 필요하고, 그 마음의 고백은 반드시 정직하고 선한 행위로 나타날 것이다.

셋째로, 주의 말씀을 실천하는 자는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자와 같다. 주께서는 주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자이며 홍수가 나고 폭풍이 불어도 그 집이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24-25절). 우리의 믿음은 주의 모든 말씀, 즉 성경의 모든 말씀의 실천 즉 순종의 행위를 통해 성장하고 견고해지며, 그러면 어떠한 시험과 환난이 닥쳐도 넘어지지 않고 굳게 설 것이다.

 

 

8장: 주님의 능력

8장과 9장에서 사도 마태는 예수께서 행하신 능력의 일들에 대해 증거하였다. 8장에서는 예수께서 나병 환자를 고치신 일, 중풍병자를 고치신 일, 열병 환자를 고치신 일, 귀신들린 자를 고치신 일, 또 바람과 풍랑을 잔잔케 하신 일을 증거하였다.

 

1-4절, 나병 환자를 고치심

[1-2절]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니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 . .

5-7장에서 사도 마태는 예수께서 산 위에서 하신 설교를 성령의 도우심으로 자세히 기록했다. 예수님의 설교는 무리들에게 큰 은혜가 되었음에 틀림없었고, 그 결과, 허다한 무리가 그를 좇았다. 마태복음 8-9장은 예수께서 능력의 일들을 행하신 사건들을 기록하였다. 예수께서는 말만 하고 행함이 없고 능력이 없는 자가 아니셨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 즉 신적 능력을 가지신 아들이셨다. 마태는 먼저 예수께서 한 나병 환자[한센병 환자]를 고쳐주신 사건을 증거한다.

한 나병 환자가 예수께 나아와 절하며 말했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나병은 살이 붓고 얼굴, 손, 발이 변형되고 감각이 없어지는 무서운 병이다. 나병 환자는 일반 사람들과 격리되어야 했다(레 13:46). 많은 사람들이 좋은 조건을 갖고도, 아니 그 좋은 조건 때문에, 예수께 나오지 않았고 그에게 절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나병 환자는 겸손해졌고 그의 자존심을 앞세우지 않았고 자신의 누추한 모습 그대로 예수께 나아왔고 그에게 절하였다. 사람은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께 더 나오기 쉬운 것 같다. 시편 119편 저자는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고 고백했다(67, 71절).

그 나병 환자는 예수께 절하며 말했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그는 단순히 예수님께 존칭어로 ‘주여’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고 보인다. 그는 예수께서 원하시면 그의 불치의 병인 나병도 고쳐주실 수 있다는 놀라운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즉 신적인 구주로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주여’라는 말은 하나님께 대한 호칭이라고 보인다. 하나님은 온 우주의 주인이시며 우리의 생명의 주인이시며 우리의 삶과 죽음, 건강과 연약, 복과 재앙을 다 주관하시는 자이시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책에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와 함께 하는 신이 없도다. 내가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 자 없도다”라고 말씀하셨다(신 32:39). 선지자 사무엘의 모친 한나는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라고 바르게 고백하였다(삼상 2:6-7).

참된 믿음은 하나님의 주권과 그의 전능하심을 믿는 것이다. 참된 믿음은 하나님을 창조자와 섭리자 하나님, 곧 전능하신 주권자 하나님으로 믿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는 것이다. 하나님께는 능치 못하심이 없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곧 신적 구주이실진대 그에게도 능치 못하심이 없어야 할 것이다. 놀랍게도 이 나병 환자 속에는 예수께서 원하시면 자기를 깨끗케 하실 수 있다는 지식과 믿음이 있었다. 그가 어떻게 이런 믿음을 가지게 되었는지 우리는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확실히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3절]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진지라.

예수께서는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자신에게 나아와 그의 병고침을 간청한 그 나병 환자의 간청을 물리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구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주께서는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7:7-8).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시자,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해졌다. 이것은 예수님의 신적 능력의 일이었다. 이것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이었다. 이것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부터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이었다. 이것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롬 4:17)의 바로 그 능력이었다.

예수님의 치료는 의학적 치료와 달랐다. 의학적 치료는 대개 점진적이고 많은 경우 불완전하다. 심각한 질병의 경우, 부득이 수술을 실시하지만 그것은 완전한 치료나 회복보다 차선책일 경우가 많다. 그러나 예수님의 치료는 즉각적이고 완전하였다.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졌다.” 그것은 그의 완전한 신적 능력이었다.

[4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 . . .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예수께서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병고침이 그의 주된 임무가 아님을 보인다. 그는 병자들을 고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었고, 죄인들을 불러 회개시키기 위해(마 9:13; 눅 5:32) 또 사람들에게 이 구원의 복음을 널리 전하기 위해(막 1:38; 16:15) 오신 것이었다. 병고침은 단지 부수적이었다.

또 예수께서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그 고침받은 이에게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 사람이 율법의 규정을 지켜야 하는 것과 또 그가 병고침 받았음을 확증하라고 하신 것일 것이다. 예수께서는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고 완전하게 이루기 위해 오셨다(마 5:17).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환난 중에 낙심치 말고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와 간구하자. 고난은 우리에게 쓰지만 유익이 있다. 고난 당할 때가 곧 기도할 때이며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환난 중에 기도하여 응답받자.

둘째로,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 곧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고 겸손히 그에게 경배하자. 많은 사람들이 예수께 나아오지 않았을 때 그 나병 환자는 그에게 나아왔다. 그는 그의 모습 그대로 가지고 그에게 나아왔고 그에게 엎드려 절하였다. 불치의 병인 나병이 그에게는 오히려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오는 계기가 되었다. 고난은 많은 경우 우리에게 유익을 준다. 무엇보다 고난은 우리의 어두운 마음에 깨달음을 주고 우리의 교만한 마음을 깨뜨려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가지게 한다. 그런 마음이 없으면 아무도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오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이다. 불치의 병 나병을 고쳐주신 예수 그리스도는 확실히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고 겸손히 그에게 경배하자.

셋째로, 우리는 나병 치료보다 더 중요한 죄사함을 받자. 나병 치료의 사건은 죄사함의 구원에 비교될 수 있다. 영적으로, 모든 죄인들은 나병 환자와 같다. 죄는 나병보다 더 무서운 것이다. 죄는 모든 죄인들을 영원한 지옥의 멸망으로 이끌어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 구주 예수께서는 원하시는 모든 자들의 모든 죄를 즉시 깨끗케 하실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일을 위해 친히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셨고 삼일 만에 부활하셨다. 그는 믿는 모든 자들의 신적 구주이시다.

 

5-13절, 중풍병자를 고쳐주심

[5-9절]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 . . .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셨을 때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며 말했다.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와하나이다.” 백부장은 100명의 부하를 지휘하는 군대 장교이다. 이 백부장은 자기 자신의 병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나온 것이 아니고, 자기 종의 병 문제를 가지고 나아왔다. 그의 종은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있었고 몹시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그 백부장은 자기의 종에 대해 사랑과 동정심을 가지고 있었다.

주께서 그의 말을 듣고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고 말씀하시자, 그 백부장은 대답하였다.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그 백부장은 예수님의 존귀한 신분과 자신의 천한 영적인 상태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예수께서 자기 집에 들어오심을 감당할 수 없다고 말한 것일 것이다. 그러나 그 백부장의 속에는 예수님의 신적 인격과 능력을 믿는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서 단지 말씀만 해주셔도 자기 종의 질병을 고칠 수 있음을 믿는다고 말하였다. 참으로 놀라운 지식과 믿음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영광을 아는 지식과 작은 믿음을 주셨다.

[10-13절]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 . . .

예수께서는 그 백부장의 말을 들으시고 기이히 여기시며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이스라엘 중에서라도]12)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그 백부장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고 이방인이었으나, 그의 믿음은 이스라엘 중에서라도 찾아볼 수 없는 큰 믿음이었다. 주께서는 동서로부터 많은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을 것이지만 이스라엘 자손들은 천국에서 제외되고 바깥 어두운 곳에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가는 처지가 될 것을 예언하셨다. 사람의 믿음은 반드시 그의 부모가 가진 믿음이나 자녀에게 물려주는 영적 유산에 비례하지 않는 것 같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

예수께서는 백부장에게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그 백부장의 믿음의 간구를 들어주신 것이다. 예수님의 치료는 대체로 치료받는 자의 믿음에 근거하였으나, 때로는 병의 치료가 이 경우와 같이 그에게 관계된 이의 믿음에 근거해 이루어졌다. 예수 그리스도의 치료의 말씀은 즉시 효력을 나타내었다. 바로 그 시간 그 백부장의 하인은 나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능력이었고 그것은 치료의 능력을 포함하였다. 또 그의 치료는 완전하였다. 백부장의 종의 중풍병을 오직 말씀으로 고쳐주신 예수님은 확실히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우리는 그를 믿고 확신하자.

 

14-15절,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주심

[14-15절]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그의 장모가 . . . .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셨다. 마가복음은 그가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셨다고 증거한다. 예수께서는 많은 무리들 중 특히 몇 명의 제자들을 늘 그와 함께 있게 하셨다. 그는 베드로의 집에서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워 있는 것을 보셨다. 누가복음은 시몬 베드로의 장모가 중한 열병에 붙들렸다고 증거한다. 그 여자의 병은 중한 열병이었다. 열병은 높은 열로 고생하는 무서운 병이었던 것 같다.

예수께서는 그 여자를 보시고 그의 손을 만지셨다.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은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예수께 요청하였다고 증거한다. 이번에는 그 환자와 직접 관계된 자의 요청이 아닌 것 같다. 이와 같이, 환자 본인이든지, 그의 주인이든지, 혹은 그와 좀 멀리 관계된 자일지라도 치료를 간청할 때 주께서는 치료해 주셨다. 주께서 그의 손을 만지시자 그의 열병은 떠나갔다. 마가는 예수께서 그의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났다고 증거하였고, 누가는 그가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시자 병이 떠났다고 하였다. 주께서 가까이 서서 그 열병을 꾸짖고 그의 손을 잡아 일으키셨고 그러자 그 열병은 즉시 치료되었던 것이다. 베드로의 장모는 즉시 일어나 예수께 수종들었다. 누가복음은 “그가 곧 일어나서 수종들었다”고 증거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능력은 이와 같이 나병, 중풍병, 열병 등 다양한 병들의 치료에서 나타났고, 치료를 요청한 자들도 환자 자신, 혹은 환자의 주인, 혹은 환자의 이웃 등 환자와 다양한 관계의 사람들이었다. 어떤 때는 주께서 환자에게 손을 대셨고 어떤 때는 단지 말씀으로만 하셨고 어떤 때는 그 병을 꾸짖으셨다. 그러나 주님의 치료는 모든 경우에 동일하게 즉각적이며 완전하였다.

예수께서 병들을 고치신 사건들은 그의 신적 능력과 신적 인격을 증거한다.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자들은 이러한 증거들을 읽고 듣고 그가 누구이신지 깨닫고 그를 믿어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놀라운 신적 구주가 계시다. 그는 죽은 지 삼일 만에 부활하여 지금도 살아계신 구주이시며, 하나님 우편에 계시지만 성령으로 우리 속에서 일하시는 주님이시다. 그는 우리를 죄에서 건지신 구주이시요, 또 우리의 육신의 문제까지도 도우실 수 있는 주님이시다.

 

16-17절, 귀신 들린 자들을 고치심

[16절]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 . . .

날이 저물었을 때, 사람들은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왔다. 귀신들은 타락한 천사들이다. 그들의 왕은 사탄이다. 귀신들은 모든 불경건하고 부도덕한 일들 배후에 활동하고 있고 또 많은 질병들, 재난들, 불행한 일들을 일으킨다. 특히 귀신이 들어와 그를 주장함으로 자신의 마음과 의지를 자신이 통제하지 못하는 자들이 있다. 이들이 귀신 들린 자들이다. 이들은 정신이상자들과 비슷하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들을 많이 데리고 예수님께 왔을 때, 예수께서는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모든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주님의 말씀은 곧 능력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다(창 1장).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말씀에는 능력이 있다. 히브리서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한다”고 말했다(히 4:12). 성경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말씀에 하나님의 능력이 있다. 성경을 열심히 또 규칙적으로 읽는 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을 얻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죄성과 세상의 악과 마귀의 시험을 이길 능력을 얻을 것이다.

[17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 . . .

마태는 예수님의 병고침의 사역에 대해,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고 증거하였다. 이사야 53:4는, 메시아께서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셨다”고 예언하였다. 주께서 짊어지신 것은 우리의 죄악이다. 그러나 죄악의 결과인 모든 질병과 슬픈 일들도 그가 짊어지셨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우리는 아직 모든 질병과 슬픈 일들이 믿는 자들에게서라도 완전히 제거됨을 보지 못한다. 그러나, 죄가 제거되었음으로 그것들도 원리적으로 제거되는 것이 마땅하며, 주께서 남겨두신 것들은 우리의 영적 유익을 위하고 또 우리의 실수와 연약에 대한 징계와 훈련을 위할 뿐임을 안다. 또 우리가 천국에 이를 때면 이 모든 죄의 결과들은 다 사라질 것이다. 주 예수께서는 우리의 모든 연약들을 다 담당하셨고 또 고쳐주실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병들을 다스리는 권세를 가지고 계셨다. 누가복음에 증거된 대로, 그는 열병을 꾸짖으셨다(눅 4:39). 그것은 창조자 하나님만이 가지실 수 있는 권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는 그런 신적 능력과 권세가 있으셨다. 그는 나병을 치료하셨고 중풍병을 치료하셨고 열병을 치료하셨다. 또 그는 귀신 들린 자들을 고쳐주셨다. 그것은 인간의 능력이 아니었다. 그것은 의사의 능력이 아니고 의술이나 의약품의 효능이 아니었다. 그것은 신적 능력과 권세이었다. 그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밝히 증거한다!

본문은 부수적으로, 믿는 자들이 그에게 무엇을 간구하였고 또 그들이 그의 능력을 체험하였음을 증거한다. 기도는 믿음의 증거이며 표현이다. 믿음이 없는 자는 결코 하나님께 기도할 수 없으나, 믿는 자들은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체험할 것이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또 우리의 구주와 주님으로 믿고 확신하는가? 또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는가? 그렇다면, 이제 예수님을 다른 이들에게도 전하자. 또 그의 교훈을 순종하자. 또 어려운 일이 있을 때,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 기도하자. 우리는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고 기도하는 자가 되자.

 

18-22절, 주를 따르려면

[18-20절]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쌈을 보시고 저편으로 . . . .

예수께서는 무리가 자기를 에워쌈을 보시고 저편으로 건너가기를 명하셨다.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말했다.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과 기적 행하심에 큰 감동을 받았음에 틀림없다. 어디든지 따르겠다는 결심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러나 주께서는 그에게 그의 결심을 흔들 만한 말씀을 하셨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노라.” 주께서는 자기 집이나 땅을 가지지 않으셨다.

주의 말씀은 그를 믿고 따르는 제자들의 길이 어떠할 것을 암시한다. 주를 믿고 따르는 길은 경제적 불안정과 심지어 고난과 핍박을 각오하며 따라야 하는 길이다.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했고(행 14:22), 또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말했다(딤후 3:12). 칼빈은 말하기를,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욕과 가난과 핍박과 십자가를 견뎌야 한다. 그들은 가시나무 가운데로 걸어야 하고 끊임없는 환난 가운데서 십자가를 향해 행진해야 한다. . . . 우리가 그리스도의 학교에 들어와서 배우는 첫 번째 교훈은 우리 자신을 부정하고 그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오늘날 교회들이 고난 없는 기독교를 전파함으로 교인수만 늘이고 있다면, 그것은 큰 잘못이다. J. C. 라일은 말했다. “구도자들에게 기독교 신앙의 시련들을 제거하고, 그들 자신의 교파나 교회의 교인수를 불리기 위해 십자가를 감추는, 목사들과 그리스도인들의 행위는 그리스도의 행위와 매우 다르다. 부정확하고 부분적인 진술들로 교인수를 얻는 것은 어떤 기독교인도 해서는 안 될 절차이다. 정직하게 얻은 적은 무리가 잘못된 주장으로 모은 큰 무리보다 낫다.” 그리스도의 제자된 우리는 가난과 고난의 삶을 각오해야 한다.

[21-22절]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 . . .

제자 중에 또 하나가 말하였다.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누가복음에 보면, 주께서는 이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는 초청을 먼저 하셨다(눅 9:59). 하나님의 아들께서 개인적으로 그를 초청하셨으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그러나 그는 먼저 자기 부친을 장사하도록 허락해 주시기를 요청하였던 것이다. 그때 예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죽은 자들’이란 영적으로 죽어 있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주의 말씀의 뜻은 세상 일 때문에 하나님의 일이 중단되거나 지연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구약시대에 대제사장은 부모의 죽음을 인해서도 자신을 더럽히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었다(레 21:11).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군사로 모집된 자들은 자기의 생활에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였다(딤후 2:4). 하나님의 일은 이 세상의 그 어떤 일들보다 중요하다. 그러므로 그 일은 그 어떤 경우에라도 중단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세상의 일들 때문에, 즉 가족 관계나 직장 관계의 일들 때문에, 하나님의 일이 중단되거나 지연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매튜 풀은 말하기를, “우리 주께서 죽은 자를 장사하는 예절 바른 방식을 부정하신 것이 아니고, 사람에 대한 어떤 사랑과 의무의 일도 우리가 우리의 첫 번째 순종을 드려야 할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의무보다 우선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로 알게 하시는 것이다. . . . 합당하고 예절 바른 일들이 그보다 더 큰 임무들을 방해할 때는 죄가 된다”고 했다. J. C. 라일도 말하기를, “장례식, 결혼식, 예의상의 방문 등은 물론 그 자체가 죄는 아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신자의 시간을 빼앗고 신자로 하여금 어떤 분명한 종교적 의무를 못하게 할 때, 그것들은 신자의 영혼에 올무가 된다”고 했다. 또 그는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과 친척들에 대한 사랑이 충돌할 때, 그리스도께서 우선권을 가지셔야만 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또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첫 번째의 순종을 드려야 한다.

 

23-27절, 풍랑을 잔잔케 하심

[23-27절]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좇았더니 바다에 큰 놀이 . . . .

예수께서 배에 오르시자 제자들이 좇았다. 그런데 바다에 큰 놀[풍랑]이 일어나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다. 그들이 예수님을 따라 배에 탔지만 큰 풍랑을 만났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다. 예수께서는 잠이 필요하셨다. 제자들이 그에게 나아와 그를 깨우며 말하였다. “주여, [우리를]13)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그때 예수께서는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며 곧 일어나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바람이 그치고 풍랑이 아주 잔잔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기이히 여기며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나병환자, 중풍병자, 열병 걸린 자, 귀신 들린 자 등을 고치셨을 뿐 아니라, 또한 바람과 파도도 꾸짖어 잔잔케 하셨다. 그는 단순히 사람이 아니시고 신성(神性)을 가지신 사람이셨다. 어떤 사람이 그런 불치의 병들을 고치시고 바람과 풍랑을 꾸짖어 잔잔케 할 수 있겠는가? 오직 하나님께서만 또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께서만 그런 일들을 하실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죄와 지옥 형벌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신적 구주이시다.

이 세상은 종종 풍랑이 이는 바다와 같다. 주를 믿고 따르는 길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의 온갖 풍랑을 제거해 주실 수 있고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시고 우리에게 평강을 주실 수 있다. 세상에 고난은 있지만, 하나님 안에 구원과 평안이 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장에서 아시아에서 많은 환난을 당했고 죽을 지경에 있었으나 하나님만 의지함으로 구원을 받았음을 간증하였다(고후 1:8-10). 그러므로 환난 많은 세상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두려움이 아니고 주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기도하는 것이다.

 

28-34절, 귀신 들린 자들을 고치심

[28-34절] 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 . . .

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14)에 가셨는데,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났다. 마가복음 5:1-20과 누가복음 8:26-40은 이 사건을 더 자세히 증거하지만, 귀신 들린 자가 두 명이라는 말은 마태복음에만 나온다. 복음서들은 서로 보충적이다.

귀신 들린 자 둘은 심히 사나와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만하였다. 이에 그들이 소리질러 말하였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15)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그런데 마침 멀리서 많은 돼지떼가 먹고 있었다. 귀신들은 예수께 “만일 우리를 쫓아내실진대 돼지떼에 들여보내소서” 하고 간구했다. 주께서 그들에게 “가라”고 말씀하시자 귀신들은 나와 돼지들에게로 들어갔고 온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들어가서 물에서 몰사하였다. 마가복음 5:13은 돼지떼가 거의 2천 마리가 되었다고 증거한다. 돼지를 치던 자들은 달아나 시내에 들어가 이 모든 일과 귀신 들린 자의 일을 고하였다. 그러나 온 성의 사람들은 예수를 만나려고 나가서 보고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였다.

본문은 귀신이 실재(實在)하며 그 수가 많음을 증거한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그 귀신의 이름을 ‘군대’라 하였다. 귀신은 타락한 천사 즉 악한 영이다(엡 6:12). 온 세상에서 활동하는 귀신들의 수는 많을 것이다. 또 귀신들은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알아보았고 또 자신들의 멸망할 운명을 알고 있었다. 또 귀신은 매우 사나웠다. 마가복음은 그 귀신 들린 자들을 더러운 영을 가진 자라고 표현하였다. 귀신들은 불경건하고 악하고 부도덕한 세상의 풍조들 배후에 활동하고 있는 영들이다.

본문은 또 사람의 가치가 참으로 큼을 보인다. 귀신 들린 영혼들의 가치는 돼지 2천 마리보다 더 귀하였다. 그러나 가다라[겔게세네] 사람들은 그 귀신 들린 자들의 회복이 얼마나 귀한 일임을 깨닫고 감사하고 기뻐하기보다 예수님께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항상 환영을 받는 자가 아니셨다. 주를 믿고 따르는 길은 항상 사람들의 환영을 받는 길이 아니다.

본문은 무엇보다 예수께서 귀신들도 주관하시는 분이심을 증거한다. 예수께서는 귀신들에게 그 사람들에게서 나가 돼지떼에 들어가라고 명하셨다. 그는 귀신들에게 명령할 수 있는 분이시다. 귀신들은 때가 되면 그들이 멸망을 당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라고 말하였다. 누가복음 8:31은 귀신들이 자기들을 무저갱[지옥]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였다고 증거한다. 예수께서는 장차 귀신들을 지옥에 던져넣으실 수 있는 심판의 권세를 가진 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단순한 사람이 아니시다. 그는 천상천하에 유일하신 신인(神人), 즉 사람이신 하나님 또는 하나님이신 사람이시다. 그는 자연계와 영계를 주관하시는 신성을 가지신 분이시다. 그는 신이시다. 우리가 믿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보다 낮은 존재가 아니고, 바로 참된 신성을 가지신 분이시다. 피조물인 인간은 하나님과 같이 전지하거나 전능할 수 없다. 전지와 전능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는 속성이다. 예수께서 온갖 종류의 질병을 치료하시며 자연계를 명령하시며 또 귀신들을 명령하실 수 있다는 것은 곧 그가 하나님이심을 증거한다. 우리에게는 놀라운 구주, 신적 인격이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다. 그는 능력자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능히 도우실 수 있으시다. 그러므로 그에게 기도하는 자는 복되다. 그분 외에 우리가 기도하거나 의지할 자는 없다. 이 땅의 모든 것은 허무하고 의지할 만하지 못하나, 그는 우리가 참으로 의지할 자가 되시며 우리의 가치가 되시며 우리의 힘과 기쁨이 되신다.

큰 풍랑을 잔잔케 하시고 귀신 들린 자들을 고쳐주신 사건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밝히 증거한다. 우리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확신하자. 또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자는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구원을 받아야 한다.

본문은 주를 믿고 따르는 길이 경제적 안정이 없음을 각오해야 하는 길임을 교훈한다. 우리는 물질적 부요를 바라고 주를 따르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고난을 각오하며 주를 따라야 한다.

본문은 주를 믿고 따르는 길이 우선순위를 주께 두고 따라야 하는 길임을 교훈한다. 가족에 대한 의무는 당연한 일이지만, 그것이 하나님께 대한 의무와 충돌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택해야 한다.

끝으로, 본문은 주를 믿고 따르는 길에 큰 풍랑도 있고 사람들의 배척도 있지만,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길임을 교훈한다. 주를 믿고 따르는 길은 평탄한 길은 아니나, 능력의 주님과 동행하는 길이다.

 

 

9장: 죄를 사하는 권세

1-8절, 중풍병자의 죄를 사하심

[1-3절] 예수께서 배에 오르사 건너가 본 동네에 이르시니 . . . .

예수께서 배에 오르사 갈릴리 호수를 건너가 본 동네, 즉 가버나움(막 2:1)에 이르셨는데,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왔다. 마가복음은, 데리고 온 사람들이 네 명이었고, 또 사람들이 많아서 그들이 예수님께 접근할 수 없었기 때문에 지붕에 올라가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 내렸다고 증거하였다. 그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인격과 능력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그들의 믿음은 의심하는 약한 믿음이 아니고, 끈질긴 열심으로 나타난 확고한 믿음이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그 말씀을 들은 어떤 서기관들은 속으로 “이 사람이 참람하도다”라고 말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그들이 하나님 한 분만 사람의 죄를 사하실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라고 증거하였다.

[4-6절]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너희가 어찌하여 . . . .

예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셨다. 그는 사람의 숨은 생각을 다 아신다. 그는 신적 지혜와 지식을 가지고 계신다. 그는 말씀하셨다.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그것은 그들이 그의 신적 인격의 증거들을 진지하게 생각지 않고 그를 참람하다고 정죄하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장차 오실 메시아는 “기묘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신 아버지라” 불리는 신적 인격이실 것이 이사야 9장에 예언되어 있지 않았던가! 그 서기관들의 생각은 악하고 무지하고 완고하였다.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네 죄사함을 받았다’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는 말은 둘 다 쉬운 말은 아니다. 그러나 육신의 병을 고치는 기적보다 영혼의 죄를 사하는 일은 더 어려운 일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쉬운 말 대신 어려운 말을 택하셨다. 그것은 중풍병뿐 아니라 모든 병이 근원적으로 죄의 결과임을 알게 하시고 또 자신이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사람들에게 증거하시기 위함이 확실하였다.

그 중풍병은 죄와 관련이 있었다. 성경은 죄와 병의 인과 관계를 말한다. 신명기 28장에는, 사람이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면 하나님께서 폐병, 열병, 학질, 종기, 치질, 괴혈병, 개창 등으로 치실 것이라고 말했다(22, 27-28절). 죄가 질병의 주요한 원인이므로 죄사함은 그 병의 치료와 회복의 첫걸음이 된다. 죄사함의 근거는 하나님의 긍휼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이다. 주께서는 마지막 유월절 식탁에서 제자들에게 포도즙을 주시면서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말씀하셨다(마 26:28). 죄가 인생과 세상의 근본문제이므로 죄사함은 인생과 세계의 모든 문제의 해결이 된다.

예수께서는 온갖 질병을 고치시는 능력뿐 아니라, 죄를 사하시는 권세를 가지고 계셨다. 이것이 실상 그의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주님의 관심은 단지 병의 치료나 경제적 안정 정도가 아니고, 사람들의 죄 문제에 관한 것이다. 죄인의 구원과 변화가 예수 그리스도의 주관심이시다. 이를 위해 그가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를 지실 것이다. 죄사함은 그의 중심적 사역이다.

그는 그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주께서는 죄사함만 주시지 않고 죄의 결과로 온 육신의 병도 고쳐주셨다. 주께서는 우리의 몸의 연약과 물질적 부족도 동정하신다. 그는 세상의 온갖 종류의 불행에서 우리를 건져내시고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를 원하시고, 또 그러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7-8절] 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거늘 무리가 보고 . . . .

그 중풍병자는 일어나 집으로 돌아갔다. 얼마나 놀라운 순간들인지! 무리들은 그 사건을 목격하였다. 그들은 그를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세를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의 연약을 고치시고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신적 구주이시다. 그는 지금도 살아계신다.

 

9-13절, 죄인들과 함께 잡수심

[9-11절]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 . . .

예수께서는 거기서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셨다. 마태복음의 저자 마태가 자신의 이름을 밝힌 것은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와 변화된 현재를 간증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마태는 세관에 앉아서 집무 중이었던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일에 성실한 사람을 기뻐하신다. 주께서는 그에게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셨다. 당시 세무 공무원들은 불의한 이익으로 자신을 부요케 하는 자들로 여겨졌다. 그러나 마태에게는 회개하고 믿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주 예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일어나 그를 좇았다. 그는 그의 유여한, 그러나 아마 더러워진, 생활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르는 귀한 결단을 내렸다.

마태는 자기 집을 방문하신 예수께 식사 대접을 하였다. 그때 그는 그의 친구들도 다 청하였다. 예수께서는 마태의 집에 앉아 음식을 잡수셨다.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다. 교제는 목적과 동기가 중요하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구원으로 초청하시기 위해 그들과 함께하셨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그 광경을 보고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12-13절]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 . . .

예수께서는 들으시고 말씀하셨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의사]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불러 회개시키러]16)(눅 5:32) 왔노라.” 병자에게 의사 선생님이 필요하듯이, 죄인에게는 구주가 필요하다. 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남에게 긍휼 베푸는 것을, 단순히 형식적으로 예배드리는 것보다 더 기뻐하신다.

예수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오지 않으셨고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셨다. 회개는 하나님 없이 살고 하나님의 계명을 거역하던 자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다. 회개는 중요하다. 회개는 해도 좋고 안 해도 괜찮은 것이 아니고, 죄인들이 구원받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죄인들을 불러 회개시키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 이것이 그가 하늘의 영광의 처소를 버리고 이 누추하고 죄와 슬픔이 많은 세상에 오신 목적이었다. 이것이 그의 사명이다. 디모데전서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는 일, 곧 전도는 교회의 최대의 사명이다.

그런데 우리가 죄인을 회개시키려면 우리는 죄인들과 접촉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완전히 격리된 삶을 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죄인들을 구원하기 원하는 자는 죄인들의 세계 속에 들어가 그들과 만나야 한다. 물론 여기에 위험성도 없지 않다. 그러나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임에서는 구원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교회의 전도적 접촉은 어떤 대상에게도 개방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우리가 죄인들을 접촉하려면, 우리는 우리 같은 죄인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그 크신 긍휼을 본받아야 한다. 긍휼한 마음이 없이는 죄인들을 접촉할 수 없고 그들을 구원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긍휼한 마음으로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게 대하며 복음을 전함으로 한 명이라도 하나님께 인도하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

 

14-17절, 금식에 관한 질문

[14-15절]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 . . .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말하였다.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율법에 의하면, 7월 10일 속죄일은 자기 영혼을 괴롭게 하는 금식일이다. 또 바리새인들은 한 주간에 이틀씩 금식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결혼 비유로 대답하셨다.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예수께서는 자신을 신랑에 비유하시고 제자들을 혼인집의 손님들에 비유하셨다. 제자들이 신랑 되신 예수님을 모시고 있는 동안 기뻐하는 것은 당연하며 그러므로 지금은 금식할 때가 아니고 기뻐할 때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정죄되어 십자가에 못박히게 내어준 바 되실 날을 가리킬 것이다. 그때는 금식할 것이다. 금식은 특별한 때, 비상한 시기에 하는 것이지, 아무 때나 형식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특히 신약시대에는 더욱 그러하다.

[16-17절]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주께서는 금식을 폐하신 것이 아니고, 단지 율법에 규정된 대로 금식할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고 본다. 생베 조각과 새 포도주에 비유된 복음은 율법 형식에 얽매일 수 없고 새 형식을 필요로 했다. 금식도, 율법대로 행하지 말고 복음의 자유(갈 5:1; 약 1:25) 안에서 행해져야 할 것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을 바로 알자. 예수께서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친히 죄사함의 권세를 가지셨다. 죄는 세상과 인류의 모든 불행의 근본 원인이며, 죄사함은 모든 문제의 해결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그 일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지금도 그 일을 하신다.

둘째로, 죄인들은 다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와 그를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아야 한다. 이것이 구원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의 중심 내용이다. 첫 사람 아담이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인류는 불행과 사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러나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 이미 믿고 구원받은 자들은 하나님께 감사하며 아직 구원받지 못한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 나와 그를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으라.

셋째로, 신약 성도는 복음의 자유와 기쁨 안에서 살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대속 사역으로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셨다. 우리는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믿고 하나님을 섬기며 의와 선을 행하자.

 

18-26절, 직원의 딸을 살리심과 혈루증 여자를 고치심

[18-19절]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한 직원이 와서 . . . .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한 직원이 와서 절하며 말하였다.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으소서. 그러면 살겠나이다.” 예수께서 일어나 따라가시니 제자들도 갔다.

마가복음에 보면, 그는 회당장 야이로이었다. 누가복음에 보면, 이 딸은 열두 살 난 외동딸이었다. 본문에는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라고 말했지만,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보면, 처음에 회당장이 예수께 와서 간구할 때는 그 딸이 아파서 죽어가려고 할 때이었고 예수께서 고쳐주려 가시다가 다시 집에서 통지가 오기를 딸이 죽었다고 하였다. 마가와 누가가 비교적 자세히 기록한 내용을 마태는 간략히 증거하였다고 본다. 이것은 그 두 증거들의 불일치나 성경의 오류가 아니고, 자세한 증거와 간략한 증거의 차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직원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확신했다. 자기 딸이 죽으려 할 때에도 예수께서 자기 딸을 고쳐주실 수 있다고 믿었고 딸이 죽었다는 통지를 받고서도 여전히 예수께서 그를 살리실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이런 확신을 가지고 예수께 나아와 간구했다. 믿는 자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믿음의 기도는 응답을 받을 것이다.

[20-21절]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 . . .

직원의 딸을 살리신 사건 중에 혈루증 여자를 고치신 사건이 있었다. 열두 해를 혈루증을 앓는 한 여자가 있었다. 혈루증은 피가 멈추지 않고 흐르는 출혈병이었다. 이 병을 열두 해나 앓았으니 얼마나 고생이 심했겠는지! 마가복음에는, 그 여자가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라고 기록되어 있다(막 5:26). 그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그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졌다. 그것은 그의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이런 믿음이 생긴 것은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22절]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가라사대 딸아, 안심하라. . . .

예수께서는 돌이켜 그를 보시며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셨고, 그 여자는 그 시간 구원을 받았다. 여기에 ‘구원’이라는 말은 육신의 질병으로부터의 구원 즉 병의 치료를 의미한다. 예수께서는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치료하셨고, 그의 치료는 즉각적이었다. 이것은 의학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 행위이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주의 말씀은 죄인이 믿음으로 구원받는 원리를 보인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도행전 16:31,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에베소서 2:8-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열두 해나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을 고쳐주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이 확실하지 않은가!

[23-26절] 예수께서 그 직원의 집에 가사 피리 부는 자들과 . . . .

예수께서는 죽은 딸을 살려주시기를 요청한 그 직원의 집에 들어가셔서 피리 부는 자들과 시끄럽게 떠드는 무리를 보시고 말씀하셨다.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잔다’는 말씀은 비유적 표현이다. 죽은 자는 자는 자와 겉모습이 비슷하기 때문에 또 자는 자가 깨듯이 죽은 후에는 부활의 때가 있기 때문에, 죽음을 잔다고 성경에 자주 표현한 것이다. 이제 죽은 그를 깨우실 수 있는 분이 오셨다. 사람들은 죽은 아이를 잔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을 비웃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리를 내어보내신 후에 들어가 소녀의 손을 잡으셨다. 마가복음은 그가 “달리다 쿰”(소녀야, 일어나라)이라고 말씀하셨다고 증거한다. 그러자 그 소녀는 일어났다. 그것은 놀라운 기적이었다. 그 소문은 그 온 땅에 퍼졌다.

예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신 것은 그의 신적 능력과 인격을 증거한다. 예수님은 단순히 사람이 아니셨다. 그는 분명히 사람이셨지만, 하나님의 본질을 가지고 계신 사람이셨다. 그가 단순히 사람이시라면, 그는 이런 기적을 행하실 수 없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참 하나님’(요일 5:20)이시다. 우리는 우리에게 신적 구주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그를 믿고 의지하며 따르자!

 

27-31절, 두 소경을 고쳐주심

[27-28절]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가실새 두 소경이 따라오며 . . . .

27-31절은 두 소경을 고쳐주신 사건을 기록한다.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가실 때 두 소경이 따라오며 소리질렀다.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앞을 못 보는 그들은 참으로 불쌍한 자들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들 속에 예수께서 ‘다윗의 자손’ 즉 메시아라는 지식과 믿음이 있었다.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자 소경들이 나아왔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그들은 대답하였다. “주여, 그러하오이다.” 많은 건강한 자들이 교만하고 무지하여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인정치 않았을 때, 이 소경들에게는 겸손한 마음과 깨닫는 마음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불쌍한 처지에 있음을 겸손히 인정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들을 고쳐주실 수 있음을 믿고 간청하였다. 주님께 구하는 자가 무엇을 얻는다. 구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바로 믿지 않는다면, 또 자신의 부족과 필요를 겸손히 인정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주께 구할 수 없을 것이다.

[29-31절] 이에 예수께서 저희 눈을 만지시며 가라사대 . . . .

예수께서는 그들의 눈을 만지셨다. 예수께서는 병자들을 고쳐주실 때 종종 병자들을 만지시면서 고쳐주셨다. 누가복음 4:40은, “해 질 적에 각색 병으로 앓는 자 있는 사람들이 다 병인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셨다”고 기록한다. 여기에 예수님의, 병자들에 대한 관심과 긍휼과 사랑이 있다.

예수께서는 그 소경들에게 “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들의 눈들이 밝아졌다. 이것은 놀라운 기적이었다. 그는 엘리야나 엘리사처럼 하나님께 간구하지 않으셨고 단지 “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능력과 영광이 있다. 참으로 그는, 문제가 많은 죄인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구원하시고 도우시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지금도 살아계셔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고 성도들을 돌보시고 도우신다.

예수께서는 또 “삼가 아무에게도 알게 하지 말라”고 엄히 경계하셨다. 그 까닭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병 고치는 자로 오해하지 않게 하시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병자들을 고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지 않으셨고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 그러나 그 소경들은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그 온 땅에 전파하였다.


32-34절, 귀신 들려 벙어리된 자를 고치심

[32-34절] 저희가 나갈 때에 귀신 들려 벙어리된 자를 예수께 . . . .

그들이 나갈 때에 귀신 들려 벙어리된 자를 예수님께 데려왔다. 자기의 생각과 마음과 뜻을 자유로이 표현할 수 없는 그 벙어리는 얼마나 답답한 삶을 살아왔겠는가? 그러나 그 사람은 주 예수께 와서 귀신이 쫓겨나고 입이 열려 말을 하였다. 무리들은 기이히 여겨 말하였다.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때가 없도다.” 예수님의 기적 행하심은 특별하셨다. 구약시대의 선지자들과 달리, 그는 모든 종류의 병들을, 즉각적으로, 또 완전하게 치료하셨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저가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고 말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의 하신 일을 마귀의 일로 돌렸다. 그러나 하나님의 하신 일을 마귀의 일로 돌리는 것은 매우 악한 일이다. 그들은 무지하고 악하였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영광을 바로 아는 지식을 주셨고, 그에게 합당한 찬송과 존귀와 영광을 그에게 돌리게 하셨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앞에서 못 고칠 병이 없고 해결되지 못할 문제가 없다. 나병도, 중풍병도, 열병도, 소경도, 귀머거리도, 벙어리도 고침을 받았다. 귀신 들린 것도 고침을 받았다. 심지어 죽은 자도 살아났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일을 만나든지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자! 우리의 어려운 사정들을 낱낱이 그에게 아뢰자! 그가 기뻐하시면 무엇이든지 행하실 수 있고, 또 그가 우리를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시고 우리를 도우실 것을 확실히 믿자! 또 우리가 입으로 말을 할 수 있을 때 찬송과 기도와 전도에 더욱 힘쓰자!

 

35-38절,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35-38절]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 . . .

사도 마태는 4:23에 이어 본문에서 다시 예수께서 하신 일들을 세 가지로 요약하여 말했다. 첫째는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며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신 것이고, 둘째는 천국 복음을 전파하신 것이고, 셋째는 사람들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쳐주신 것이다.

또 예수께서는 무리들이 목자 없는 양같이 고생하며 방황함을 보시고 동정하시며 말씀하셨다.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은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영혼 구원의 전도는 추수와 같다(요 4:35). 신약시대는 추수의 때이다. 주께서는 이 일을 위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셨다. 오늘날도 이 일을 위해 많은 일꾼들이 필요하다.

주께서는 추수할 것이 많다고 말씀하셨다. 2천년 동안 구원의 일이 계속되어 왔다. 비록 구원받을 자들이 이제 얼마나 남아 있는지 모르나, 우리는 몇 명이라도(롬 11:14; 고전 9:22) 또 최후의 한 명이라도(눅 15:7) 구원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천국 복음은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어야 하고 땅끝까지 전파되어야 한다(마 24:14; 행 1:8). 우리는 우리 주위에 일할 곳이 없을 때까지 일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무기력함과 게으름을 탄식하면서 성령의 능력을 힘입자.

주께서는 일꾼이 적다고 말씀하셨다. 성도들은 많은 것 같으나, 열심 있는 성도들과 헌신한 전도자들은 많지 않다(빌 2:21-22). 또 바른 지식과 인격을 갖춘 일꾼들은 더욱 더 적다. 오늘날 신학교들도 많고 신학생들도 많으나, 주께서 쓰실 만한, 지식과 인격과 분별력과 능력을 갖춘 신실한 일꾼들은 얼마나 되겠는지 모르겠다.

주께서는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고 말씀하셨다. 추수는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일이다. 그는 친히 추수할 일꾼들을 일으키시고 세우신다. 죄인들을 영생으로 예정하신 이가 그 분이시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속량하신 분이 그 분이시요, 성령의 주권적 은혜로 죄인들을 불러 회개시키시는 이가 그 분이시다. 구원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다. 하나님은 구주이시다(딤전 1:1). 물론 그는 인간 전도자들을 사용하신다. 그는 친히 전도자들을 일으키시고 훈련시키시고 파송하시고 사용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도의 일을 위해, 또 전도자들을 보내주시기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본문의 진리와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본문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한다. 예수께서는 죽은 소녀를 살려주셨다. 예수께서는 열두 해 동안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한 여인을 고쳐주셨다. 예수께서는 두 소경을 고쳐주셨다. 예수께서는 귀신 들려 벙어리된 자를 고쳐주셨다. 예수께서는 그 외에도 많은 병자들과 연약한 자들을 고쳐주셨다. 마태복음 8장과 9장은 예수께서 하신 능력의 일들을 증거하였다. 8장은 그가 나병 환자, 중풍병자, 열병 환자, 귀신 들린 자를 고쳐주셨고, 바다의 큰 풍랑을 잔잔케 하셨음을 증거하였다. 이 모든 증거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한다. 우리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확신하자.

둘째로, 본문은 혈루병 여인이나 두 소경이 믿음으로 병 고침을 받았음을 증거한다. 주께서는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셨고 또 소경에게는 “너의 믿음대로 되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우리의 구원의 이치도 보인다. 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의 구원을 얻는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 아직 구원받지 못한 자가 있다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음으로 죄사함의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셋째로, 본문은 예수님의 하신 일들을 세 가지로 요약하여 증거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치심과 천국 복음을 전파하심과 병자들을 고치심이었다. 그것은 신약교회가 힘써야 할 전도와 설교의 사역과 병환자들을 돌아보아야 할 심방과 구제의 사역을 보인다.

넷째로, 우리는 하나님께 복음의 일꾼들을 보내주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주께서 친히 하신 교훈이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을 위하여 헌신한 신실하고 충성된 일꾼들, 즉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복음 진리와 성경의 바른 교리와 생활 교훈을 가감 없이 선포하고 가르치는 신실한 목사들과 교사들이 많이 요청된다.

 

 

10장: 열두 제자를 보내심

1-15절, 물질을 초월할 것

[1절] 예수께서 그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 . . .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부르셨다. 마가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셨다(막 3:13). 하나님의 일꾼이 되는 것은 사람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다. 그가 일꾼을 일으키시며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고 세우신다. 후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이 그를 택한 것이 아니요 그가 그들을 택하여 세웠다고 말씀하셨다(요 15:16). 교회의 직분자들은 하나님께서 그 직분에 적합한 은사를 주시는 대로 세워진다(롬 12:5-8; 고전 12:4-6; 27-28; 엡 4:11). 그러나 동시에 교회는 그 직분에 자격 있다고 보는 후보자들을 추천하고 선택하는 방법을 사용한다(행 1:21-26; 6:2-6; 14:23).

누가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밤새도록 기도하신 후 열두 제자들을 사도로 택하셨다(눅 6:12-13). 예수께서는 일꾼 선택의 중대한 일을 앞두고 많이 기도하셨던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교훈이 된다. 하나님의 일은 기도 없이 시작되거나 진행되거나 성취될 수 없다. 그 일이 중대하면 중대할수록 더욱 그러하다고 본다. 복음 사역은 주의 종들과 성도들의 진실한 많은 기도가 요구된다.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들에게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셨다. 물론, 그들의 더 중요한 일은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그에게 듣고 배우는 것이며 또 나가서 전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또한 사도들에게 병 고치는 권능을 신분증처럼 주신 것이었다. 마가복음 3:13-15, “또 산에 오르사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이에 열 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병들을 고치며--전통사본]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 그러므로 사도들은 많은 기적을 행하였다(행 2:43; 5:12). 사도 바울의 말대로, 기적을 행하는 것은 사도들의 표이었다(고후 12:12).

[2-4절]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 . . .

사도 마태는 열두 사도의 이름을 기록하였다.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형제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가나안인 시몬과 및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 자 등이었다. 마태는 그들을 ‘사도’라고 불렀다. ‘사도’는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바돌로매는 아마 나다나엘(요 1:45)을 가리키고, 다대오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언급된 야고보의 아들 유다를, 또 가나안인 시몬은 셀롯인 시몬을 가리키는 것 같다(눅 6:15-16; 행 1:13).

가룟 유다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택하신 특별한 은혜를 받았던 자이었고 열두 사도의 명단에 들어 있지만, ‘예수를 판 자’라는 역사상 가장 부끄러운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사람은 시작보다 결말이 중요하다. 시작은 미미하나 결말이 훌륭한 사람이  있고, 시작은 훌륭해 보이나 결말이 부끄러운 자도 있다.

[5-6절] 예수께서 이 열 둘을 내어 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 . . .

예수께서는 이 열 둘을 내어 보내시며 명하셨다.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아직 사마리아 전도나 이방 전도의 때가 아니었다. 먼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어야 하였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에 나타나 있는 전도의 순서이었다. 오늘날도 우리는 교회에 다닌 적이 있는 자들을 먼저 돌아보고 그 후에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아야 할 것 같다. 우리는 교회에 다니다가 시험에 들었거나 낙심한 자들을 먼저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주께서는 친히 제자들을 부르시고 세우시고 능력을 주시고 사명을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친히 교회의 직분자들을 부르시고 세우시고 능력을 주시고 사명을 주실 것이다.

[7-8절]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웠다 하고 . . . .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들에게 “가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전파하라”고 말씀하셨다. 천국은 하나님의 통치하시는 세계이다. 사람이 성령으로 거듭나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인정하고 믿었다면 천국이 그의 심령에 이미 임한 것이다. 그는 사탄이 왕노릇하던 세계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통치에 복종하는 자가 되었다.

예수께서는 또 제자들에게,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병자[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고 말씀하셨다. 사도들에게 주신 병 고침의 능력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일종의 신임장이었다. 사도들의 주된 임무는 병을 고치는 것이 아니고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지만, 그들이 전하는 복음에 대한 하나님의 보증의 표로서 기적들 행함이 수반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능력의 일들은 하나님께서 거저 주신 은혜이므로 또 다른 이들에게 거저 주어야 하였다.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돈벌이의 방법으로 사용해서는 안 되었다.

[9-11절]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 . . .

예수께서는 또,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전도자들은 여비나 옷이나 신이나 먹고 마실 것에 대한 문제로 염려하지 말고 오직 주께서 맡기신 일에 충성해야 했다. 일꾼이 일용할 양식을 얻는 것은 마땅하며 주께서는 그의 필요를 채우실 것이다.

예수께서는 또, “아무 성이나 촌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고 말씀하셨다. 합당한 자란 신앙적으로, 경제적으로 합당한 자라는 뜻일 것이다. “너희 떠나기까지”라는 말씀은 땅의 것을 구하는 자처럼 자기에게 좀더 유리하게 보이는 곳으로 옮겨다니지 말라는 뜻을 포함할 것이다. 주께서 보내신 곳이라면 그가 떠나라고 하시기 전까지 그 곳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또 성도들은 하나님의 종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공급할 의무가 있다.

[12-15절]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그 집이 . . . .

예수께서는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치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전도자는 그가 머무는 집을 위해 평안을 기원해야 한다. 그를 영접하는 그 집이 이 평안을 받기에 합당하면 그의 빈 평안은 그 집에 임할 것이다.

그러나 주께서는 또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고 말씀하셨다.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는 것은 관계의 단절을 상징한다. 어떤 성의 사람들이 사도들의 전도와, 기적들을 통한 확증을 보고도 그들을 영접하지 않고 그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그들은 소돔 사람들보다 더 큰 죄악을 범하는 자들이다. 소돔 사람들은 그런 기적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과 사도들의 기적의 일들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는 사도들과 제자들이 증거한 신약성경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누가 신약성경의 말씀들을 거절하고 믿지 않는다면, 그의 죄악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증거들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오늘날도 전도자들은 물질적인 것들에 얽매이지 말고 오직 주께서 명하신 대로 천국 복음, 곧 십자가의 구원의 복음을 담대히, 가감 없이 만방에 전해야 하고, 또 성도들과 교회는 그들의 전하는 바를 믿고 그들을 따르며 그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야 할 것이다.

 

16-23절, 고난을 받게 될 것

[16절]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 . . .

예수께서는 또,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종들은 순진한 양들이다. 그들을 세상에 내보내는 것은 마치 양들을 이리 떼 속에 보내는 것과 같다. 전도자들은 모든 사람에게 환영을 받으리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세상에서 많은 고난을 당하고 죽임도 당할 것이다.

그러므로 전도자들은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해야 한다. 뱀은 지혜의 비유로 사용되었다. 전도자들은 악한 세상에서 지혜롭게, 신중하고 사려 깊게 처신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비둘기같이 순결해야 한다. 참된 지혜는 순결한 지혜이다. 야고보서 3:17은,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바른 사상과 거룩한 인격은 전도자로서의 합당한 첫 번째 자격 요소이다.

[17-18절] 사람들을 삼가라.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사람들을 삼가라.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저희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또 너희가 나를 인하여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전도자들은 사람들을 조심해야 한다. 사람들은 그들을 공회에 넘겨주며 그들의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공회와 회당이 하나님의 종들을 핍박하는 기관이 될 것이다. 전도자들은 심지어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갈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할 기회가 될 것이다.

[19-20절]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 . . .

주께서는 또,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고 말씀하셨다. 전도자들은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설 때에 무엇을, 어떻게 말할지 염려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 곧 성령께서 그들 속에 계셔서 말씀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성령께서는 모든 전도자들에게 전할 말씀과 능력을 주실 것이다.

[21-22절]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 데 . . . .

주께서는 또,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 데 내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다. 사탄의 역사는 강하다. 성도가 경건과 의에 굳게 서서 악과 타협지 않고자 한다면, 사탄은 심지어 가족들과 이웃들을 통해 전도자의 믿음을 파괴하려 할 것이다. 전도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많은 사람에게 미움과 어려움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건짐을 받을 것이다.

[23절]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 . .

주께서는 또,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고 말씀하셨다. 핍박으로 인한 피신은 정당하고 지혜에 속하는 일이다. 피할 수 있는 데도 피하지 않고 죽는 것이 충성은 아니다. 전도자는 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 순교의 불가피한 때가 오면 즐거이 순교할 수 있다. 그러나 피신하여 다른 곳에서 전도할 수 있는 데도 잡혀 죽으려 해서는 안 된다.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는 말씀은, 오순절 성령강림을 가리키든지, 혹은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가 온 세상에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선택된 모든 사람들이 사는 곳들을 비유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가리킬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주께서는 열두 제자들에게 전도의 사명을 주셨다. 전도는 하나님의 택자들을 구원하는 그의 방법이다. 전도의 사명은 일차적으로 전도자들에게 주어졌지만, 넓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모든 성도에게 주어졌다. 베드로전서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둘째로, 전도자는 물질을 초월하며 살아야 한다. 그것은 모든 성도들에게 모범이 된다. 주께서는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말씀하셨다. 주께서는 무리들에게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다(눅 14:33). 사도 바울도 교훈하기를,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고 말하였다(딤전 6:7-8).

셋째로, 전도자는 핍박을 각오해야 한다. 주께서는 사도들이 옥에 갇히고 채찍에 맞고 핍박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사도 바울은 소아시아의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믿음에 거하라 권하며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행 14:22). 또 그는 빌립보서에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고 말했다(빌 1:29). 우리는 천국 복음을 널리 전하는 자가 되고, 물질을 초월하며 자족하고, 고난과 핍박을 각오하며 살아가자.

 

24-33절, 사람을 두려워 말 것

[24-27절]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 . . .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바알세불은 ‘귀신의 왕’ 곧 사탄을 가리킨다(마 12:24). 악한 사람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알세불이라고 불렀다면 그의 제자들에게 어떤 비난을 할 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전도자들은 사람들에게 악한 비난을 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그런즉 저희를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으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 복음 전도자들과 설교자들은 사람들을 두려워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감추인 진리들은 밝히 전파되어야 하고, 그들이 집안에서 은밀하게 배운 진리들은 집밖에서 공공연히 전파되어야 한다. 오늘날도 설교자들은 골방에서 성경을 묵상하고 연구한 후에 강단에서 담대히 선포해야 한다.

[28-31절]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몸의 죽음이 사람의 끝이 아니다. 사람에게는 불멸적 영혼이 있고, 그 영혼은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을 기다린다. 사람들은 몸은 죽여도 영혼은 죽일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몸과 영혼을 함께 지옥에 멸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세상의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이루어진다. 앗사리온은 16분의 1 데나리온인 값싼 동전이었다(1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다). 지극히 보잘것없는 참새 한 마리라도 하나님께서 허락지 않으시면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참새보다 귀한 인간은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죽지 않을 것이다. 전도자는 그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사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32-33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사람들은 사람 앞에서 그를 시인해야 한다.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그를 부인한다면 그를 믿는 것이 되겠는가? 정말 그를 믿었다면 사람 앞에서 그를 시인해야 한다. 그러므로 전도자들은 사람들의 핍박과 죽음의 위협을 두려워하거나 겁내지 말고 비겁하게 굴복하지 말고, 사람들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하고 하나님의 복음을 담대히 전해야 할 것이다.

 

34-39절, 주님을 가장 사랑할 것

[34-36절]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오신 것이 아니고 검을 주러 오셨다. 그가 오셔서 우리에게 참 평안을 주신 것이 사실이지만(마 11:28), 그것은 구원받은 자들의 심령 속에와 성도들의 교제 가운데 있는 평안이며 화목이다. 그것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주시는 무차별적 평안이 아니고, 또 진리와 비진리, 혹은 선과 악의 화해가 아니다. 복음은 막연한 평화의 개념이 아니다. 성도의 신앙생활은 오히려 죄와 마귀와 세상의 악과 싸우는 영적 전쟁이다.

모든 성도의 삶이 그러하지만, 특히 전도자들의 삶이 그러하다. 하나님의 진리는 우리에게 그에 대한 최고의 헌신과 사랑과 복종을 요구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사랑과 순종의 최고의 대상이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절대적 헌신과 사랑과 복종은 때때로 집안 식구들로부터 미움과 핍박을 일으킬 것이다. 또 미워하고 핍박하던 식구들과 한 번 혹은 여러 번 싸움과 갈등을 치룬 후 그들이 회개하고 주께로 돌이킨 후에야 가정의 참된 평화가 찾아올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나 전도자의 사명의 걸음을 시작했기 때문에 가정에 불화가 생긴다면, 그것은 아마 이상한 일이 아니고 정상적 과정일 것이다. 조금 참고 진행하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은혜와 유익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편에 계시고 그의 위로와 평안이 그의 종들과 백성들에게 있을 것이다.

[37절]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주께서는 또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다”고 말씀하셨다. 모든 성도들에게 그러하지만, 특히 전도자들에게 있어서, 부모님께 대한 사랑과 효도와 순종이 하나님께 대한 의무보다 우선 될 수는 없다. 부모에 대한 의무 때문에 주의 부르심을 거부한다든지 주의 계명을 어겨서는 안 된다. 작은 예로, 부모님을 위한 생신 잔치 때문에 주일 예배를 소홀히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자녀에 대한 사랑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자녀 사랑, 자녀 교육, 자녀 후원이 하나님보다 앞서서는 안 된다. 자녀들 때문에 경건생활이나 사명의 걸음이 지장되어서는 안 된다. 자녀들을 돌보는 것보다, 혹은 같은 원리로, 남편이나 아내를 돌아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도자들도 자기의 가족들을 돌보고 사랑해야 하지만, 주님을 사랑함보다 더 할 수는 없다. 모든 성도는 아무리 피곤하고 바쁜 일상생활일지라도 하나님께 기도하고 성경 읽는 시간을 최우선적으로 구별해야 할 것이다.

또 우리는 먼저 자녀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신앙적으로 교회 안에서 성장하도록 힘써야 한다. 세상적으로 아무리 좋은 교육을 받게 한다 할지라도 그들의 영혼이 죽었거나 병들었다면 어찌 기뻐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우리는 통곡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세상적인 교육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녀들이 먼저 하나님을 알고 그를 경외하는 것을 원하신다. 성경공부는 세상 공부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성도는 세상의 그 무슨 일보다 하나님 섬기는 일을 첫째로 여겨야 한다.

[38-39절]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성도는 심지어 자기 자신을 부정해야 한다. 자기 사랑은 곧 세상 사랑이요, 하나님 사랑과 반대된다. 돈을 사랑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기 사랑이나 돈 사랑인지, 아니면 하나님 사랑인지, 또 세상의 100년 간의 삶을 위할 것인지, 아니면 영생을 위할 것인지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 이 세상의 것을 위해 사는 자는 주님을 따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주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자는 확실히 영생의 복을 받을 것이다. 성도는 참으로 가족관계를 초월하여 하나님을 섬겨야 하며 심지어 자기 자신도 부정하며 섬겨야 한다.

 

40-42절, 전도자의 위로

[40절]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이 말씀은 전도자로 파송되는 열두 제자들에게 위로를 주시는 말씀이다. 주께서는 그들을 주님 자신의 신분이나 심지어 하나님 자신의 신분의 가치에까지 올려놓으신다. 이것은 놀라운 말씀이다.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권위로 파송되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을 영접하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과 같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이 세상에서 고난이 많을 것이나 이런 존귀한 사명과 신분을 가지게 된 것이다.

[41-42절]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사람이 선지자를 선지자로 알아보고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고, 의인을 의인으로 알아보고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다. 또 주의 젊은 종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대접하는 자는 결단코 상을 잃지 않을 것이다. 이 말씀은 주의 제자들을 대접하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지 가르쳐 주신 말씀이다. 이것은 고난받을 전도자들에게 적지 않은 위로가 될 것이다.

우리의 선행이 그 자체로는 상 받을 가치가 없지만 주께서는 그것에 대해 상급을 약속하셨다. 우리의 선행의 첫 번째 동기는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 때문이지만, 상급의 약속도 부수적인 동기는 될 수 있을 것이다. 주께서는 우리의 선행에 대해 상 주실 것이다.

마태복음 10장 24절부터 42절까지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자. 사람의 위협 중에 가장 큰 것은 죽인다는 위협이다. 그러나 사람은 우리의 몸만 죽일 수 있고 우리의 영혼은 죽이지 못한다. 우리의 영혼은 오직 하나님께서만 영원한 지옥의 불못에 던져 넣으실 수 있다. 또 보잘것없는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우리의 목숨은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죽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작정하시고 허락하시는 죽음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피할 수 없고 또 피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자. 우리의 목숨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두려워하자.

둘째로, 우리는 사람들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하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데 무엇을 두려워하고 주저할 것인가?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하지 않는다면, 주께서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어떻게 우리를 시인하실 수 있겠는가?

셋째로, 우리는 우리의 가족들보다, 심지어 우리 자신보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자. 그것은 마땅한 일이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온 세상에서 가장 사랑을 받으셔야 할 분이시다.

넷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 얻은 모든 성도들은 복음을 위해 헌신한 하나님의 진실한 종들과 전도자들을 영접하고 대접하자.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대접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영접하고 대접하는 것이다. 우리는 주 안에서 서로 사랑하며 모든 사람을 사랑하되, 특히 하나님의 종들과 일꾼들을 사랑하고 영접하고 대접하자.

 

 

11장: 믿음 없는 세상

1-15절, 세례 요한의 질문

[1-3절]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명하시기를 마치시고 이에 . . . .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들에게 명하시기를 마치시고 그들의 여러 동네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거기를 떠나가셨다. 예수께서는 전도하는 일에 힘쓰셨다. 그때 세례 요한은 옥에서 예수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물었다. “오실 그 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오실 그 이’란 메시아를 가리킨다. 예수를 메시아로 증거했던 요한이지만(마 3:11-12; 요 1:29-34), 옥중에서 그에 대해 의심이 생긴 듯하다. 이제 그는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서 과연 오실 그 메시아이신지,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될 것인지 묻고 있는 것이다.

[4-6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 . . .

예수께서는 대답하셨다.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예수께서 행하시는 기적들은 그가 메시아라는 확실한 증거이었다. 그는 요한의 제자들이 그것들을 보는 그대로 그 선생에게 전달하라고 말씀하셨다. 네 권의 복음서들에 증거된 예수님의 기적의 행위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성경의 이러한 귀한 증거들을 무시하고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자리에 떨어지지 말아야 할 것이다.

[7-11절] 저희가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 . . .

그들이 떠나자, 예수께서는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는 문자 그대로 풀을 가리킬 수 있지만, 의심하는 사람을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또 말씀하셨다.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려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네 앞에 예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세례 요한은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 즉 메시아보다 앞에 와서 그의 길을 예비하리라고 약속된 하나님의 사자이었다. 선지자들 중에 메시아를 직접 보고 그를 소개한 자는 요한밖에 없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을 회개시켜 메시아를 맞이하도록 길을 준비한 선지자이었다. 그러나 요한은 아직 구약교회에 속해 있었다. 본문의 ‘천국’은 신약교회를 가리킨다. 신약교회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는 자들의 모임이다. 신약교회 교인들은 세례 요한보다 메시아에 대해 더 나은 지식과 굳건한 믿음을 가질 것이다.

[12-15절]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니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들을]17)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세례 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외쳤다(마 3:2).  세례 요한의 때로부터 천국은 침노를 당하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로 남녀노소, 빈부귀천의 차별 없이, 회개하고 믿는 모든 이들이 담대히 천국으로 들어감으로 이것을 ‘침노’라고 표현하신 것 같다. 세례 요한은 구약시대의 끝이다. 구약 마지막 책인 말라기 끝에 예언된 엘리야는 세례 요한이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소개한 이후부터 많은 사람들은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천국에 들어오고 있다. 우리도 그들 중에 속하였다.


16-19절, 이 세대에 대해

[16-19절]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비유컨대 아이들이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친구를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저희가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그 행한 일로 인하여’라는 말은 전통사본에는 ‘그의 자녀들로 인하여’이다.18) 지혜는 예수님 자신을 상징한다.

이 세상은 믿음이 없고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또 하나님의 일에 대해 바르게 반응하지 않고 잘못되게 반응한다.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심히 자기 중심적인 판단과 비난을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 아니시고, 세리와 죄인의 친구가 되어 함께 악을 행하는 자도 아니시다. 지혜의 주님께서는 자기의 자녀들에게는 의로우시다는 인정을 받으실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지혜의 자녀들이 된 것을 감사하자. 우리는 하나님의 원하시는 선하신 일들에 대해 무지하게 불평하지 말고, 지혜의 자녀들로서 그 일들을 이해하고 사모하고 협력하는 자가 되자. 우리는 무지하고 완고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일들을 대적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살든지 죽든지 어떠하든지,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고 그의 섭리의 목표인 교회와 복음 사역을 위하고 복음 진리를 널리 전파하고 전도자들을 훈련시키고 파송하고 후원하는 일을 위해 힘쓰자.

 

20-24절, 회개치 않는 마을들을 책망하심

[20-24절]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 . . .

예수께서는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그때에 책망하여 말씀하셨다. “화가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음부(하데스 a{/dh")는 지옥을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그의 권능의 일들을 가장 많이 베푸셨던 고라신, 벳새다, 가버나움 등의 마을들의 사람들이 회개치 않음을 책망하셨다. 외형적 기적이 내면적 회개를 항상 동반하지는 않는다. 인생의 마음은 얼마나 어둡고 둔하고 완고한지 모른다.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스스로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다. 기독교는 초자연적 은사를 전하거나 추구하는 은사주의가 아니고 죄를 떠나는 회개 운동이며 거룩한 인격과 삶의 운동이다.

마지막 심판날이 있을 것이다. 그 날에는 산 자들과 죽은 자들이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자신의 모든 행위, 즉 옳고 그른 행위와 선하고 악한 행위에 대해 공의로운 심판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의 형벌은 차등할 것이다. 큰 죄인은 큰 벌을, 작은 죄인은 작은 벌을 받을 것이다. 모든 사람은 그 행한 대로 보응을 받을 것이다. 또 기적을 보고도 회개치 않는 완고한 마음은 심판날에 큰 벌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기적을 체험하지 못했어도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적을 구할 것이 아니고, 참된 회개와 믿음, 바른 인격과 삶을 구해야 할 것이다.

 

25-30절, 구원 계시와 초청

[25-26절] 그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 . . .

그때에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천지의 주재자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 세상적으로 똑똑하고 유식한 자들에게 숨기시고 어린아이들, 즉 세상 지식이 적고 비교적 순진한 자들에게 나타내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 그러므로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자랑하지 못하게 하셨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의 영광만 찬송케 하셨다.

[27절]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인류의 구원에 관한 모든 것들을 맡겨주셨다. 사람들 중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 직분과 권세와 영광을 아는 자가 아무도 없다. 오직 하나님만 예수 그리스도를 아시고, 또 사람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예수 그리스도를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자기에 대한 바른 신앙고백을 한 시몬 베드로에게,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말씀하셨고(마 16:17), 또 그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요 6:44). 또 본문에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라는 표현은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보인다. 예수님만 하나님 아버지를 아시고 또 우리로 하나님을 깨닫게 해주신다.

[28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 . . .

예수께서는 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무감각과 불신앙에 빠져 있는 고라신과 벳새다와 가버나움 마을들의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놀라운 구원의 초청을 하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모든 인류를 가리킨다. 모든 사람은 죄로 인해 영육으로 수고롭고 무거운 짐 진 삶을 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인생들에게 그는 편히 쉬게 하시겠다는 구원의 초청을 하신 것이다. 이 초청은 초청자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인격을 보인다. 이 세상에서 누가 이런 초청을 할 수 있겠는가! 누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에게 참된 안식을 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고, 그는 그에게 오는 모든 자들에게 참된 안식을 주신다.

[29-30절]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예수께서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시며 스스로 낮아지셨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고 죽기까지 아버지께 순종하셨다. 예수님 믿는 자들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를 따르며 그를 본받는다. 예수님을 믿는 길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그가 명하신 멍에를 메고 그에게 배우는 제자의 길이다. 그의 멍에는 성도의 직분과 봉사자의 직분을 가리킬 것이다. 그것은 짐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멍에를 메고 그를 따르는 제자들은 마음의 평안을 얻을 것이다. 믿음 안에 들어와 보면, 그의 멍에는 무거운 것이 아니고 가벼움을 알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지식과 믿음을 얻었고 구주께서 주신 구원과 안식을 얻었으므로, 이제 겸손한 마음으로 주 예수를 섬기며 따르며 배워야 한다.

본장의 교훈을 요약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천국 백성이 되었는가? 우리는 참으로 회개했는가? 기독교는 단순히 기적주의나 은사주의가 아니고, 회개 운동이며 거룩한 삶의 길이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행위에 대해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공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심치 않고 믿었는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소원으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알게 되었고 믿게 되었는가?

둘째로, 우리는 참 안식을 누리자. 주께서는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자들에게 참 안식을 주신다. 그것은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평안이다. 우리는 그 평안을 누리자.

셋째로, 우리는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우자. 예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길은 그의 온유와 겸손을 배우는 길이다.

 

 

12장: 바리새인들과 변론하심

1-21절, 안식일 문제

[1-2절] 그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새 . . . .

그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었다. 예수님의 전도 사역은 물질적으로 유여한 사역은 아니었던 것 같다. 주를 따르는 길은 물질적 유여함을 기대하지 말고 가난도 각오해야 하는 길이다. 바리새인들은 주의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먹는 것을 보고 예수께 말하였다.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율법에 의하면, 이웃의 밀밭 사이로 지날 때 이삭을 따먹는 것은 가능하였다(신 23:25). 특히 예수님의 제자들의 행위는 추수의 행위나 노동의 행위가 아니고 배가 고파서 얼마큼 따먹은 것뿐이었으므로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주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였다고 비난한 것이다.

[3-5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한 자들이 . . . .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한 자들이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사무엘상 21:1-6에 보면, 진설병[성소의 떡상에 차린 떡]은 제사장들이 먹는 떡이지만(레 25:9), 다윗의 일행이 몹시 배가 고팠을 때, 그들에게 제공되었다. 또 제사장들은 안식일에도 쉬지 않고 율법에 규정된 제사들을 다 드려야 하였다(민 28:9-10). 그것은 예외적인 일들이었다.

[6-8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예수께서는 성전보다 더 크신 분이시다. 성전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곳이며 하나님께서 친히 거기에 거하시는 거룩한 장소이다. 인간으로서 자신이 하나님의 성전보다 더 크다고 말할 수 있는 자는 세상에 아무도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실상, 구약시대의 성막과 성전은 장차 오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자신이 성전보다 더 크다고 말씀하신 것은 참된 사실이었다.

또 예수께서는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는 호세아 6:6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친히 인용하시면서, 그들이 그 말씀의 뜻을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성전보다 더 크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자유함이 있다. 이 자유는 방종을 위한 자유가 아니고, 다윗의 경우나 제사장들의 경우와 같이 부득이한 일들에서의 자유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단지 예배 의식보다 자비한 마음을 원하신다. 안식일 문제에 대하여, 남을 비난하고 정죄하는 태도보다 남을 이해하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 즉 이 경우 제자들의 배고픈 형편을 이해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마가복음 2:27에 보면, 예수께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규례들은 사람의 유익을 위해 주신 것이다. 신명기 10:13은,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또 “나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놀라운 말씀이다. 구약의 안식일은 여호와의 안식일이다. 출애굽기 20:10, “제7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출애굽기 31:13,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나는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뜻이 된다. 그것은 삼위일체의 신비를 보인다. 예수께서는 단순히 사람이 아니시고 하나님의 아들, 곧 참된 신성을 가지신 하나님이시다.

또 구약시대의 안식일은 장차 오실 메시아를 통해 주실 참된 안식의 예표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일을 이루셨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2:16-17에서,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판단]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고 말하였다. 사람은 범죄한 이후 참된 안식을 잃어버렸다. 죄로 인해 저주받은 세상에는 참 안식이 없다. 그러나 메시아께서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속(代贖)하심으로써 우리는 참 안식을 얻게 된 것이다.

죄는 안식을 잃어버리게 했으나, 죄사함은 참 안식을 회복시킨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고(마 11:28) 또 요한복음 14:27에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받은 자들은 이 세상에서도 참된 평안을 누리며 또 장차 천국에서 충만한 안식을 누릴 것이다.

[9-14절] 거기를 떠나 저희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편 손 마른 . . . .

예수께서는 거기를 떠나 저희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런데 거기에 한편 손 마른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은 예수를 송사하려고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을 비난하려는 자들은 그에게서 비난거리를 찾으려 애썼고 그것을 안식일 문제에서 찾을 것 같았었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예수께서는 그들이 안식일에도 양이 구덩이에 빠지면 그것을 붙잡아 내는 것을 예를 들면서 안식일에 대한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지적하시고 교정하시기를 원하셨다. 사람은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한 존재인데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합당함을 암시하셨다.

그런 후 예수께서는 그 사람에게 “손을 내밀라”고 말씀하셨다. 그가 그 마른 손을 내밀자 그 손은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건강하게 되었다. 또 하나의 기적이었다. 어떻게 마른 손이 그렇게 회복될 수 있는 것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이었다. 그것은 예수님의 신적 능력과 인격을 증거하였다. 말씀으로 마른 손을 고쳐주신 예수님은 확실히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나 그 날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믿기는커녕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였다. 실상 안식일을 범한 자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의논한 바리새인들이었다. 자신들은 안식일을 잘 지키며 예수는 안식일을 범하고 있다고 생각한 바리새인들은 그 날 예수님을 송사할 꼬투리나 찾았고 그를 죽이려 공모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악한 일이었다.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선을 행하신 것이었지만,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악을 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15-21절] 예수께서 아시고 거기를 떠나가시니 사람이 많이 . . . .

예수께서는 아시고 거기를 떠나가시자 많은 사람이 그를 좇았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병을 다 고쳐주셨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는 성경에 자세히 기록되지 않은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성경에 기록된 대표적인 예들 외에도, 예수께서는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병 고침의 사역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한다. 우리는 성경의 진실한 증거에 근거하여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확신하고 그를 따르며 그에게 복종해야 한다.

또 주께서는 병 고침 받은 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경계하셨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바, “보라, 나의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나의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성령을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외치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또한 이방들이 그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었다. (이 인용문은 구약성경 이사야 42:1-3인데, 히브리어 본문에서가 아니고 헬라어 70인역 본문에서 인용되었다.)

주께서는 오늘날 어떤 전도자들과 같이 세속적인 마켓팅 방법을 사용해 자기를 선전하며 떠들썩하게 활동하지 않으셨다. 주께서는 조용한 사역을 하셨다. 겸손한 자는 자신을 감추지만, 교만한 자는 자기를 과시하며 자기를 자랑한다. 예수께서는 겸손하셨고 자신을 나타내지 말라고 경계하셨다. 그에게는 떠들썩한 활동이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소문을 통해 그에게로 모여왔다. 주께서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듯이 연약한 자들을 오래 참으시고 마침내 죄인들의 구원을 다 이루실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본문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한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성전보다 더 큰 자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인간으로서 감히 말할 수 없는 말이다. 인간으로서 누가 자신이 성전보다 더 크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또 그는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셨다. 안식일은 여호와의 안식일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날로 구별된 날이다. 그가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감히 그러한 말을 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된다. 예수께서 참된 신성 즉 참된 신적 본질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시라면 그는 바른 인격자가 아닐 것이다. 그는 거짓말쟁이이든지 미친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런 자가 아니고 그가 주장하신 그대로 성전보다 더 큰 자요 안식일의 주인이시다. 그는 한편 손 마른 사람의 손을 고쳐주셨고 그 외에도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그는 말로만 자신을 증거하신 것이 아니고 친히 병 고침의 능력을 통해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를 믿고 체험하며 그에게 복종하자.

둘째로, 안식일의 의미를 알자. 구약시대의 안식일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된 안식을 상징하였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음으로 참된 안식과 평안을 얻었다. 또 우리는 오늘날 주일을 그리스도인의 안식일로 지킬 때 단순히 예배 의식을 중시하는 데 머물지 말고 참된 경건과 사랑을 실천하자.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기 위해 마음을 열고 사모하며 또 서로 사랑하고 연약한 지체들이나 처음 교회에 찾아온 자들을 기쁨으로 맞자.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교회를 비방하거나 주의 종들을 비방하거나 함께 예배 드리는 교우를 비방하지 말고,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며 교회를 건립하는 자들이 되자. 그것이 성도의 바른 태도이다.

셋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조용한 사역을 본받자. 오늘 교회들은 본래의 순수함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 같다. 교회들은 온갖 떠들썩한 행사들을 도모한다. 교회의 예배들도 더 이상 전통적인 조용한 예배가 아니고 매우 소란스런 축제적 행사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교회는 성경에 가르친 대로 참된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고 성경말씀을 힘써 배우며 서로 교제하고 사랑하고 구제하며 전도해야 한다.

 

22-37절, 눈멀고 벙어리된 자를 고쳐주심

[22-30절] 그때에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된 자를 데리고 . . . .

그때에, 아마 그 안식일에, 사람들이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된 자를 예수께 데리고 왔다. 귀신은 악한 영이며 사람들에게 정신적 연약을 일으킨다. 즉 사람에게 건전한 생각과 건전한 감정과 건전한 의지 대신에 연약한 생각과 연약한 감정과 연약한 의지를 갖게 하며 지나치게 부정적인 생각과 남을 미워하는 생각과 감정이나 음란한 생각과 감정을 갖게 하고 또 거짓말을 하게 한다. 또 귀신은 육체적 연약도 일으킨다. 이 사람은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가 되었다. 그는 시력을 잃었고 아마 청력도 잃었고 벙어리가 되었다.

예수께서는 그 불쌍한 사람을 고쳐주셨다. 그 벙어리[눈멀고 벙어리된 자](전통본문)19)는 말하며 보게 되었다. 그러자 무리들은 다 놀라 말하였다.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다윗의 자손’이라는 표현은 메시아를 가리킨다. 선지자 이사야는 예언하기를,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 “그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고 말하였다(사 35:1-2, 5-6). 사람들은 예수님의 행위가 이런 메시아 예언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느꼈던 것 같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그것을 듣고 말하였다. “이 사람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경건한 보수신앙을 가진 성도들같이 보였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지지 못하였고 도리어 그를 귀신의 왕의 힘을 입은 자로 비난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셨다. 그는 사람들의 모든 생각을 아신다. 그는 말씀하셨다.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사탄이 만일 사탄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저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자명한 일인 것 같다. 예수께서는 “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저희가 너희 재판관이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너희의 아들들’은 귀신을 쫓아내었던  사도들이나 아니면 당시에 자칭 귀신을 쫓아낸다고 말하는 자들을 가리킨 것 같다.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예수께서는 인간의 힘으로 귀신을 쫓아내신 것이 아니었다. 그 안에 계신 하나님의 성령께서, 좀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신인양성(神人兩性)이 한 인격을 이루신 자께서 귀신을 쫓아내신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크신 하나님이시며(딛 2:13) 참 하나님이시다(요일 5:20). 세상은 마귀와 악령들이 활개치는 곳인데, 예수께서 귀신들린 자 속에서 활동하는 귀신 곧 악령을 쫓아내신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그 속에 임한 증거이다. 그 병자는 영육의 회복을 얻었다. 그는 바른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가지게 되었을 것이고 눈멀고 벙어리된 그의 몸도 고침을 받았다. 하나님의 나라가 그에게 임했다.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그가 말씀하신 강한 자는 마귀를 가리키고 마귀를 결박한 자는 사람으로 오신 자신을 가리켰다고 본다. 예수께서는 또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고 말씀하셨다. ‘나와 함께 한다’는 것은 그 생각과 뜻과 입장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한다는 뜻이라고 본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고 그의 교회를 건설하려면,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뜻과 우리의 입장을 그의 생각과 그의 뜻과 그의 입장에 일치시켜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교회를 건설하는 자들이 아니고 파괴하는 자들이 될 것이다.

[31-32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악한 비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비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주께서는 모든 죄와 악한 비방은 사하심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 앞에 용서받지 못할 죄는 없다. 살인과 간음의 죄라도, 또 하나님을 비방한 죄라도 회개하면 용서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성령을 훼방하며 비방하는 죄는 사하심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 성령을 비방하면 성령의 감동으로 이루어지는 회개를 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지금 그런 죄의 경계선에 있다고 보인다. 그들은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내시는 그의 신적 영광을 보고도 그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한다고 비난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른 성경에 말씀한 ‘진리를 안 후 짐짓 범하는 죄’(히 10:26)나 ‘사망에 이르는 죄’(요일 5:16)와 비슷하다.

오늘날 은사운동이나 거짓된 신비주의는 예수님이 보이신 증표를 가지지 않는다. 그 운동은 교리적 교훈적 정통성이 없고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 대신에 사람을 높이고 거룩함과 절제가 없는 것 같다.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실 때도 자신을 높이지 않으셨다. 그는 오늘날 자신을 높이는 세속적 신비주의자들과 완전히 다르시다. 성경은 거짓된 신비주의에 대해서 조심하라고 교훈한다. 마태복음 7:22-23,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태복음 24: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데살로니가후서 2:9-10,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33-35절] 나무도 좋고 실과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 . . .

오늘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나무도 좋고 실과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실과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실과로 나무를 아느니라.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나무와 그 열매는 같이 간다. 좋은 나무에서 좋은 열매가 맺히고 나쁜 나무에서 나쁜 열매가 맺힌다. 우리는 그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안다. 사람도 그렇다. 우리는 사람의 행위를 보고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알 수 있다. 말은 사람의 중요한 행위이다. 우리는 사람의 말을 보고 그가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짐작할 수 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 대해 악한 비난을 내뱉는 것은 그들이 좋은 사람들이 아니고 나쁜 사람들이라는 것을 보일 뿐이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부르셨다. 그것은 마귀의 자녀라는 뜻이다. 마태복음 3:7에 보면, 세례 요한도 그에게 왔던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을 그렇게 불렀었다. 요한복음 8:44에 보면,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다”고 말씀하셨고, 또 마태복음 23:33에 보면, 그는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시며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라고 말씀하셨다.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말은 육신적 의미가 아니고 정신적 의미이다. 사탄은 죄의 근원자이다. 독사의 자식들은 사탄의 죄성을 받은 자들이라는 뜻이다. 사람은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한다.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낸다. 사람은 죄악된 본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선한 말을 할 수 없고 악한 말이 나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36-37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 . . .

예수께서는 또,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다. ‘무익한’이라는 원어(아르고스 ajrgov")는 ‘무익한, 쓸데없는, 부주의한’이라는 뜻이다. 사람의 말은 그 인격의 표현이다. 주의 말씀은, 우리가 쓸데없이 혹은 부주의하게 던진 한 마디 말이라도 심판날에 그 말에 대해 답변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의 말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우리의 말로 의롭다 하심을 얻기도 하고 우리의 말로 정죄를 받기도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르고 참된 말을 하도록 힘써야 한다.

물론, 우리가 선한 말을 하려면 우리는 먼저 중생해야 한다. 중생의 새 생명을 얻은 자만이 선한 말과 행실을 나타낼 수 있다. 사람은 물과 성령으로 다시 나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요 3:5). 성도는 하나님의 긍휼로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을 얻었다(딛 3:4-5). 이제 중생한 자는 평소에 선을 쌓는 인격 훈련을 해야 한다. 특히 우리는 언어생활의 훈련도 해야 한다. 야고보서 3:2는,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말에 온전한 자가 온전한 자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확신하자.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된 자를 고쳐주신 예수님은 확실히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우리는 그에 관하여 성경에 증거된 많은 증거들을 통해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확신하자. 예수님은 죄로 인해 멸망할 인류를 구원시키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 구주이시다. 그는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다. 누구든지 회개하며 그를 믿으면 구원을 얻을 것이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확신하는가?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바로 알자.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세계이다.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주님과 구주로 영접하면 성령께서 우리 속에 거하시며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 안에 들어온 것이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구원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나라 즉 통치권의 회복이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모든 성도는 이제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든 명령에 온전히 순종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이제 선한 말만 하자. 무엇이 선한 말인가?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하나님과 그 모든 진리를 믿는 믿음으로 하는 말이 선한 말이다. 우리는 열 정탐꾼처럼 불신앙적인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고 남을 함부로 비방하지 말고 존중하고 그에게 유익이 되도록 선한 말을 해야 한다.

 

38-50절, 가장 큰 표적

[38-40절] 그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 . . .

그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예수께 말했다.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표적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실상, 그들은 예수께서 행하신 많은 기적들을 이미 들었으나 그것들을 믿지 않았던 것 같다. 예수께서는 대답하셨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예수께서는 세상을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말씀하셨다. 세상은 항상 악하고 음란하다. ‘악하다’는 말은 남을 미워하고 속이고 해치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의 뜻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지만, 세상은 그렇지 못하다. 또 ‘음란하다’는 말은 부부관계의 윤리를 지키지 않고 남편이 다른 여자와 또 아내가 다른 남자와 친밀한 관계를 갖는 것을 뜻한다. 오늘날은 부부관계의 윤리가 흔들리는 시대인 것 같다. 또 음란을 조장하는 문화나 풍조가 많은 것 같다. 매춘(賣春) 행위도 성행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세상의 풍조를 대항해야 하고 경건하고 거룩한 삶을 구하며 지켜야 한다.

예수께 나온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심령에 변화를 받아 예수님을 믿고자 한 것 같지는 않고 단지 기적을 보려는 흥미를 가진 것 같다. 그러나 기독교는 기적을 보이거나 기적을 추구하는 기적주의적 종교가 아니다. 예수께서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사도 바울도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라”고 말했다(고전 1:22-23). 기독교는 기적주의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를 전함으로 그를 믿어 구원을 받고 거룩한 새 삶을 살게 하는 교훈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요나의 표적’이라는 말은 자신의 십자가 죽음과 3일만의 부활을 가리켰음이 확실하다. 예수께서는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속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예수께서 무덤에 묻히신 지 3일 만에 부활하실 것을 암시한다. ‘밤낮 사흘’이라는 말은 3일을 가리키는 대략적 표현일 것이다. 예수께서 무덤에 계셨던 시간은 금요일 저녁부터 주일 새벽까지, 즉 정확히 말하면, 하루 반쯤이었지만, 성경은 그가 3일 만에 부활하셨다고 말한다(마 16:21; 고전 15:4).

[41-42절]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어니와 요나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으며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끝에서 왔음이어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는 선지자 요나보다 더 큰 분이시나 많은 사람들은 그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함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였으나,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도 회개치 않았다. 또 솔로몬 왕 시대에 남방 스바의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의 소문을 듣고 그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심히 먼곳에서 많은 수행원을 이끌고 방문하였으나,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관심이 없고 단지 물질적 차원의 기적에 관심을 두었던 것이다. 예수님을 알지 못한 사람들은 니느웨 사람들보다 못하고 남방 여왕보다 못하다. 그러므로 마지막 심판의 날에 그들은 이 세대 사람들을 정죄할 것이다.

[43-45절]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많은 기적들을 체험하였지만, 그를 영접하지 않았고 그를 믿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많은 귀신들도 내쫓아주셨다. 그러나 당시의 사람들은 마치 빈집과 같이 참된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쫓겨났던 귀신이 악한 귀신 일곱을 더 데리고, 자기가 나왔던 그 집에 들어가 거하듯이, 이 악한 세대의 나중 형편은 더욱 악화될 것이다. 그 세대가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참된 주인으로 영접하지 않는다면, 귀신이 그 세대의 주인 노릇을 할 것이며 더 악한 다른 귀신들과 더불어 그 세대를 더 악화시킬 것이다. 믿다가 타락한 자들, 즉 종교적 배교자들과 이단들은 세상보다 더 악한 것 같다.

[46-50절]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 모친과 . . . .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 모친과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다. 예수께는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 등의 남동생들과 누이들이 있었다(마 13:55-56; 막 6:3). 예수님은 맏아들이셨다(마 1:25 전통본문;20) 눅 2:7). 마리아가 평생 처녀이었으며 심지어 죄가 없이 출생했고 후에 승천했고 기도의 대상이며 하늘의 여왕이라는 천주교회의 교리는 비성경적이며 우상숭배적인 교리이다.

한 사람이 그에게 말했다.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섰나이다.” 예수께서는 말하던 사람에게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고 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말씀하셨다.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예수께는 육신적 가족관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으셨다. 왜냐하면 그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 즉 본래 신(神)이시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나의 동생들”이라고 부르셨다. 부활하신 후에도 그는 제자들을 “내 형제들”이라고 부르셨다(마 28:10). 사도 바울은 로마서 8:29에서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하였다.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또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고 말씀하셨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은 무엇인가? 성경에 밝히 증거된 하나님의 뜻은 사람들이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말씀을 순종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전도사역을 하기 시작하실 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말씀하셨다(마 4:17; 막 1:15). 사도행전에 보면, 바울은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다”고 말했고(행 17:30), 또 자신이 전한 내용을 요약하기를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고 말했다(행 20:21). 또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7:21에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셨고, 사도 바울도 로마서 6:22에서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고 말했다. 사도 요한도 요한일서 3:23에서 “[하나님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고 말했다. 이 모든 말씀들은 하나님의 뜻이 죄의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말씀의 순종임을 밝히 보인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기적들과 부활을 통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확신하자. 특히 그가 주신 ‘요나의 기적’ 즉 그의 부활은 가장 큰 기적이며 믿을 만한 증거이다. 사도행전 17: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둘째로, 우리는 예수께서 요나보다 큰 자이시며 솔로몬보다 큰 자이심을 알자. 그러므로 믿음 없는 세상 사람들처럼 되지 말고 그를 영접하자. 니느웨 사람들처럼 우리의 모든 죄를 회개하고 스바 여왕처럼 그의 말씀을 듣기를 사모하자.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두려움으로 받고 또 그의 말씀을 듣고 배우기를 사모하자.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되자. 하나님의 뜻은 모든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다. 주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하나님의 한 가족들이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육신의 가족관계보다 더 의미 있고 중요한 영적 가족관계이다. 우리는 이미 회개하고 예수님 믿고 구원을 받은 자들이다. 이제 우리는 성경에 가르친 모든 선한 교훈을 듣고 마음에 두고 힘써 실천하자.

 

 

13장: 천국 비유들

본장에서 예수께서는 천국에 대해 여러 가지 비유로 말씀하셨다.

 

1-17절, 씨 뿌리는 비유와 천국의 비밀

[1-9절] 그 날에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사 바닷가에 앉으시매 . . . .

그 날에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셔서 바닷가에 앉으시자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들었다. 예수께서는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섰다. 예수님의 말씀 사역은 갈릴리 바닷가에서 자주 이루어졌다. 그것은 야외 집회이었다. 그는 배에 올라가 앉으셨다. 그것이 그가 설교하신 자세이었다. 사람들은 해변에 서서 그의 말을 들었다. 그것이 그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예수께서는 비유로 여러 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셨다.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 때에,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므로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니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니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니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다. [들을](전통본문)21) 귀 있는 자는 들으라.”

[10-13절]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 . . .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라고 말하자, 그는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천국의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다 허락된 것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천국은 비밀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자들, 곧 선택된 자들만 얻게 된다. ‘있는 자’ 곧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는 하나님의 진리를 더 알게 되지만, ‘없는 자’ 곧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한 자는 그의 아는 지식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14-17절]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해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이것은 이사야의 예언의 성취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이 마음의 완악함으로 하나님의 복음 진리를 깨닫지 못할 것을 예언하셨었다. 하나님의 선택은 진리에 대한 사람의 관심과 이해와 믿음과 순종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버림을 받은 자들은 진리에 대해 관심이 없고 깨달음도, 믿음도, 순종심도 없다. 그들의 마음은 무지하고 완고할 뿐이다. 그러나 천국 복음을 깨닫고 믿는 자는 복되다. 옛부터 선지자들과 의인들이 보기를 원하였고 듣기를 원하였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그의 친 음성을 듣고 그 말씀을 깨닫고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복받은 자들이다.


18-23절, 씨 뿌리는 비유를 설명하심

[18-23절]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아무나 천국 . . . .

주께서는 씨 뿌리는 비유의 뜻을 설명해주셨다.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는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리운 자요,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가 되느니라.”

씨는 천국 말씀을 가리켰다. 씨 속에 생명이 있듯이, 천국의 말씀 속에는 구원의 생명이 있다(요 15:3; 벧전 1:23, 25). 길가에 떨어진 씨는 말씀을 들을 때에 깨달음이 없는 자인데, 악한 영이 와서 그가 들은 말씀을 빼앗아 간다. 돌밭에 떨어진 씨는 천국의 말씀을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날 때 곧 넘어지는 자를 가리켰다. 그의 믿음은 감정적이고 확신이 없다.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는 말씀을 받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 등의 장애물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를 가리켰다. 육신의 쾌락도 그 장애물에 포함된다(눅 8:14).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천국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인내하며 행하여 열매를 맺는 자를 가리켰다. 좋은 땅에 뿌리운 경우 외에 세 경우들은 다 실패한 경우들이다. 그들은 참으로 구원받은 자들이 아니다. 구원받은 자들은 인간 편에서 말씀을 기쁨으로 받고 뿌리를 내리며, 세상 염려나 재물의 유혹을 이기며,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 열매를 맺는 자들이다. 그 열매의 분량 즉 성화의 정도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물론, 이 모든 일들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된다(고전 15:10).

이 비유는 천국이 지금 시작됨을 말한다. 천국은 장차 영광스럽게 이루어질 것이지만, 현재 씨앗처럼 온 세상에 널리 뿌려지고 있고, 택한 자들의 마음 속에 심겨져 열매를 맺는다. 천국의 현재적 단계가 바로 신약교회이다. 그러나 이 천국은 아직 불완전한 상태에 있다. 신약교회 속에는 선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자들도 섞여 있다.

구원받는 자들은 천국 복음을 들을 때에 깨달아야 하고 또 성경의 증거에 근거하여 그것을 확신해야 한다(눅 1:4; 롬 10:17; 딤후 3:14). 모든 신자들은 신앙의 장애물들을 제거해야 한다. 우리는 돈을 사랑하거나 세상을 사랑하거나 육신의 쾌락을 사랑하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딤전 6:9-10; 요일 2:15-17). 우리는 모든 성경을 믿고 인내하는 마음으로 실행하여 100배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마 7:21, 24).

 

24-30절, 곡식과 가라지 비유

[24-30절]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 . . .

예수께서는 또 그들 앞에 한 비유를 베풀어 말씀하셨다.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면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주인이 가로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31-33절,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

[31-33절]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 . . .

예수께서는 또 비유를 베풀어 말씀하셨다.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나물’이라는 원어(라카논)는 ‘채소’를 가리킨다. 그는 또 말씀하셨다.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는 천국의 확장성(擴張性)을 보인다. 천국은 겨자씨 한 알과 같이 작고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시작되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적은 무리”라고 부르셨다(눅 12:32). 그러나 그것은 점점 자라서 장차 큰 나무가 될 것이다. 또 천국은, 비록 작은 것이지만 가루 서 말의 반죽을 전부 부풀게 한 누룩같이 장차 온 세상에 널리 퍼질 것이다. 그것은 신약교회를 가리켰다. 과연 신약교회는 2천년의 역사를 지나오면서 심히 커졌고 온 세계에 널리 세워졌다.

겨자씨 비유에서 자란 후에는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는 말씀은 교회의 부패와 사탄과 악령들의 침입을 암시하는 것 같다. 이것은 교회의 역사와 현실을 볼 때 그러하다. 요한계시록 18:2는 큰 성 바벨론이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말세에 배교한 교회를 암시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작은 데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작다는 것 때문에 낙심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뜻이 세계복음화인 것을 알고 교회의 확장의 자취를 보고 감사하자(마 24:14; 눅 24:47; 행 1:8; 계 7:9). 또 교회의 배교와 부패에 대해서도 생각하자. 거짓 선지자들의 출현과 교회의 배교는 주께서 친히 예언하셨고 사도 바울도 예언한 바이었다(마 24:11, 24; 살후 2:3).

 

34-35절, 비유로만 말씀하심

[34-35절]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36-43절, 곡식과 가라지 비유를 설명하심

[36-43절] 이에 예수께서 무리를 떠나사 집에 들어가시니 . . . .

예수께서 무리를 떠나 집에 들어가시자 제자들이 나아와 “밭의 가라지의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소서”라고 말했다. 주께서는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그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들을’(전통본문)22) 귀 있는 자는 들으라.”

좋은 씨를 뿌리는 자는 인자(人子)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지금도 하나님 보좌 오른편에 계시며 성령으로 전도자들을 통하여 계속 좋은 씨를 뿌리신다. 밭은 세상이다.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다. 씨 뿌리는 비유에서 씨는 천국 말씀이었지만, 곡식과 가라지 비유에서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다. 그들은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자들 곧 중생한 자들이다. 그들이 모여 교회를 이룬다.

‘가라지’라고 번역된 원어(지자니온)는 ‘독보리’를 뜻한다고 한다(BDAG).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을 가리켰다.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이다. 원수가 가라지를 뿌렸다는 것을 보면, 이 가라지는 단순히 세상 사람들을 가리키지 않고 거짓 신자들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들은 사탄의 자식들, 곧 교회 안에 있으나 중생치 못한 자들이다. 41절 말씀대로, 그들은 교회에서 다른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 자들이며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추수 때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심판하시는 마지막 심판 때이다. 추수꾼들은 천사들이다. 세상 끝에 심판 때에 천사들은 하나님의 나라 곧 신약교회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자들과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제거하여 풀무불 곧 지옥 불에 던질 것이다. 그러나 의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날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신자들은 종교적 형식으로 만족하지 말고 내면적 은혜, 곧 참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갖추어야 한다. 이것들은 오직 중생한 자들의 마음 속에 있다. 우리가 가라지가 아니고 참된 곡식일진대, 우리는 경건과 의와 거룩과 선과 진실을 나타내야 한다.

또 우리는 현실 교회의 불완전함을 보고 낙심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교회의 순결성을 보존하기를 힘써야 하고 지교회와 교단은 권징을 성실히 시행해야 하지만, 전체 교회의 완전 정화는 성취할 수 없을 것이다. 세상 끝날까지 교회 안에는 곡식과 가라지가 함께 있을 것이다. 참된 교회에도 중생치 못한, 위선적 교인들이 있을 수 있다. 우리는 교회의 개혁과 부흥을 위해 노력할 것이지만, 그 완전성을 보지 못한다고 낙심하거나 좌절해서는 안 된다.

신약교회는 영적 전쟁터이다. 마귀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운동을 방해하며 교회를 부패시키는 운동을 하고 있다. 배교 운동의 중심에는 마귀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운동은 결실하며 승리할 것이다. 세상 끝날 곧 마지막 심판 때에 교회 안에서 다른 사람들을 넘어지게 하고 불법을 행하던 악한 자들은 영원한 지옥 불못에 던지울 것이다. 그러나 의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며 기쁨과 행복을 누릴 것이다.

 

44-52절, 보화, 진주 장사, 그물의 비유들

[44-46절]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 . . .

예수께서는 또 여러 가지 비유들을 말씀하셨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보화의 비유와 진주 장사의 비유는 천국의 존귀성을 보인다. 천국의 존귀성은 영생과 예수 그리스도의 존귀성일 뿐만 아니라, 또한 천국 백성된 자들의 존귀성이다. 천국과 영생은 우리가 모든 소유를 다 팔아도 살 수 없는 정도의 가치를 가진 나라요 생명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 비유에서 천국 백성의 존귀성을 강조하신 것 같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천국 백성은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고, 극히 값진 진주와 같다(출 28:9, 12, 21). 예수께서는 밭에 감추인 보화를 얻기 위해 또 극히 값진 진주를 얻기 위해, 자기 소유를 다 팔아 그 밭과 그 진주를 사듯이 자기 목숨을 바쳐 그 영혼들을 사셨다. 이것은 구원받은 우리편에서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주께서는 짐승처럼 무지하고 벌레같이 무가치한 우리들을 귀한 보화같이, 극히 값진 진주같이 사랑하시고 존귀하게 여기셨다(눅 15:22).

[47-50절]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버리느니라.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이 비유는 천국의 현재적 단계인 신약교회가 각종 물고기를 모으는 그물과 같음을 보인다. 그물에는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가 다 들어 있듯이, 신약교회에는 의인과 악인이 세상 종말의 때까지 섞여 있을 것이다. 지상의 교회는 불완전할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심판 때에 교회 안에서 의인들과 악인들은 완전히 분리될 것이다. 악인들은 분리되어 지옥 불에 던지울 것이며 거기서 고통 중에 부르짖을 것이다. 천국은 이제 온전한 의인들의 나라, 곧 진선미의 영광스런 세계가 될 것이다.

[51-52절]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 하시니 대답하되 . . . .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고 말씀하시니, 제자들은  “그러하오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예수께서는 또,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 것과 옛 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 오는 집 주인과 같으니라”고 말씀하셨다.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은 신약의 복음사역자들을 가리킨다. ‘새 것’과 ‘옛 것’은 신약성경과 구약성경을 가리킨다고 본다. 교회의 말씀사역자들은 신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영의 양식을 공급한다. 우리에게는 성경이라는 풍부한 말씀 곳간이 있다. 이 곳간을 두고 영적으로 굶주리는 일이 없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성경을 읽고 듣고 배움으로 영의 양식을 풍성히 받아야 한다(시 1:1-3; 119:165; 골 3:16). 또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믿고 행하는 것은 의인의 표가 될 것이다.


53-58절, 고향인들이 예수님을 배척함

[53-58절] 예수께서 이 모든 비유를 마치신 후에 거기를 . . . .

예수께서는 이 모든 비유를 마치신 후에 거기를 떠나서 고향으로 돌아가셔서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셨다. 그들은 놀라며 말했다.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뇨?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모친은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뇨?” 또 그들은 예수를 배척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또 그는 그들의 믿지 않음을 인하여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치 아니하셨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그를 목수의 아들인 한 평범한 사람으로 간주하였다. 그들은 그의 어린 시절이나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 등 그의 남동생들과 또 그의 누이들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그를 낮추어 보았고 배척하였다. 그의 어린 시절에는 그의 신적 영광이 감취어 있었던 것 같고, 그가 기적들을 행하심으로 그 신성(神性)의 영광을 나타내셨으나, 고향 사람들에게는 아직 그것이 가리워져 있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지 않음을 인하여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치 않으셨다.

우리는 직접 본 적도 없는 2천년 전의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은혜로 신약성경에 의거하여 알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리자. 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다른 성도들을 볼 때 그들의 외모나 학력이나 사회적 신분이나 재산을 보지 말고,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와 믿음과 인격을 보아야 할 것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다(고후 5:17). 우리는 주 안에서 형제를 사랑하고 서로 우애하며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해야 할 것이다(롬 12:10).

 

 

14장: 떡의 기적

1-12절, 세례 요한의 죽음

[1-5절] 그때에 분봉왕 헤롯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 . . .

그때에 분봉왕 헤롯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그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이는 세례 요한이라.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으니 그러므로 이런 권능이 그 속에서 운동하는도다.” 이 헤롯은 헤롯 대왕의 아들들 중 하나인 헤롯 안디바이다. 헤롯 안디바는 갈릴리와 요단강 동쪽의 베뢰아 지방을 다스렸다. 다른 아들들로는 팔레스틴 북동쪽의 이두래와 드라고닛을 다스렸던 헤롯 빌립과, 유다와 사마리아를 다스렸던 헤롯 아켈라오가 있었다.

전에 헤롯[헤롯 안디바]은 그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요한을 잡아 결박하여 옥에 가두었다.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당신이 그 여자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고 말하였기 때문이었다. 헤롯 안디바의 처음 아내는 아라비아의 아레타스 왕의 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헤롯은 처음 아내를 버리고 동생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나님의 사람 요한은 헤롯의 이 잘못을 용감하게 바로 지적하였고 그 지적 때문에 그는 옥에 갇히게 된 것이었다.

헤롯은 요한을 죽이려 하였으나 무리들이 그를 선지자로 여기므로 그들을 두려워하였다. 마가복음 6:19-20에 보면, 실상 헤로디아가 요한을 원수로 여겨 죽이고자 하였고 헤롯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였다. 악인들은 자기 양심에 비추어 옳은 일을 하기보다는 사람들의 눈을 더 의식하고 그들의 말과 여론을 더 두려워한다. 일반 대중들이 하나님의 선지자로 인정하는 자를 그 나라의 왕과 왕후가 죽이려 했다는 것은 모순된 일이었다.

[6-8절] 마침 헤롯의 생일을 당하여 헤로디아의 딸이 연석 . . . .

헤롯은 생일을 맞아 잔치를 하였다. 사람들은 자기 생일을 축하하며 잔치를 연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에게 감사함이 없는 생일 축하는 무의미하다. 불경건한 자의 생일은 복이 아니고 지옥을 향한 첫걸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육신의 생일이 영원한 천국의 삶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아니라면 생일 축하는 의미와 가치가 없다.

헤롯의 생일 잔치에서 헤로디아의 딸은 춤을 추어 헤롯을 기쁘게 하였다. 헤롯은 그에게 무엇이든지 달라는 대로 주겠다고 맹세로  허락했다. 헤로디아의 딸은 자기 어머니의 시킴을 듣고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여기서 내게 주소서”라고 요청하였다. 왕은 허세(虛勢)로 한 자기의 맹세에 자기가 걸려 넘어졌다. 헤로디아는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선지자 요한을 미워하여 옥에 가두게 하였을 뿐 아니라, 이제 그를 죽이려 하는 것이다.

[9-11절] 왕이 근심하나 자기의 맹세한 것과 그 함께 앉은 . . . .

왕은 근심하였다. 그것은 군중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맹세한 것과 그 함께 앉은 사람들을 인하여 주라고 명하고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옥에서 목베어 그 머리를 소반에 담아다가 그 소녀에게 주니 그가 그 어머니에게 가져갔다.

헤롯은 공의의 판단과 처리보다 자기의 명예와 체면을 더 중시했다. 그래서 그는 자기 권력을 남용하여 하나님의 사람 요한을 죽이도록 명령했던 것이다. 요한의 목은 잘리웠고 그의 머리는 소반에 담겨 왔다. 사람의 독한 미움과 복수심은 기어코 이런 끔찍한 일을 만들고 말았다. 사람은 만물보다 더 악하고 부패한 존재이다.

세례 요한은 이렇게 옥중에서 목베임으로 그 생을 마쳤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요한을 위해 작정하신 생애의 끝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그에게 결코 수치가 아니고 영광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한번 죽을 것이며, 의로운 순교자의 죽음 후에는 영광과 큰 상급이 있다.

[12절]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고 가서 . . . .

요한의 제자들은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고 가서 예수님께 고하였다. 세례 요한이 죽기까지 그를 따른 제자들이 있었다. 메시아가 오셨으나 그들은 아직 메시아에게 속하지 않은 자들이었다. 요한의 시대와 예수님의 시대는 얼마 동안 중첩되었다. 요한 자신이나 그의 제자들은 아직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요한이 죽은 후부터 그들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을 것 같다. 이제 한 시대는 갔고 한 시대가 왔다. 세례 요한의 시대가 끝났고 메시아의 시대가 왔다.

우리는 헤롯의 악행을 본받지 말아야 한다. 음행하거나 간음하는 자, 하나님의 종들을 핍박하는 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우리는 인간의 생애가 하나님의 작정대로 됨을 알아야 한다. 모두가 다 순교자는 아니지만, 세례 요한처럼 순교로 생을 마치는 자들이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무슨 일을 작정하셨든지 간에, 우리는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기며 오직 믿음과 계명 순종으로 살아야 한다.

 

13-21절, 5병2어(五餠二魚)의 기적

[13-14절]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들에 . . . .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이 옥에서 목베임을 당했다는 소식도 들으셨고 헤롯이 자기를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 아닌가 하고 말한다는 소식도 들으셨을 것이다. 그는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셔서 따로 빈들에 가셨다. 무리들은 그가 어디 계신다는 말을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그를 좇아갔다.

예수께서는 나오셔서 큰 무리를 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구약교회는 부패되어 있었고, 제사장들과 서기관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목자 없는 양들같이 근심하며 방황하고 있었다. 주께서는 그 중에 있는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 그의 신적 능력으로 그들의 병들을 고쳐주신 것이다.

[15-18절]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이곳은 . . . .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나아와 말했다. “이 곳은 빈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먹게 하소서.” 저녁시간이 이미 지났지만 사람들은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예배가 끝나자마자 바삐 집으로 돌아가는 오늘날 교인들과 달랐다. 제자들도 그들을 돌려보내자고 제안하지 않았고, 단지 식사시간이니까 마을에 들어가 음식을 사먹게 하자고 말하였다.

그 방황하며 갈망하는 무리를 위해 주께서는 자리를 피하거나 그들을 강제로 해산시키려 하지 않으셨다. 그는 오히려 그들의 육신적 양식에 관심을 가지셨다. 그는,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말했다.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니이다.” 요한복음에 보면, 그것은 한 아이가 예수님께 드린 것이었다(요 6:8-9). 그 떡 다섯 개는 그 무리들에게 말할 필요조차 없이 부족한 것이었다. 그러나 사람은 무엇을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는 그 보잘것없는 것을 가지고 그 많은 무리들을 배부르게 먹이실 수 있었다.

[19-21절]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 . . .

주께서는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셨다. ‘축사한다’는 원어(율로게오)는 ‘감사한다’는 뜻이다. 주께서는 보잘것없어 보이는 음식물을 하나님께 감사하셨다. 그는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고 제자들은 그것을 무리에게 주었다. 사람들은 다 배불리 먹었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다. 주님의 떡 기적은 겨우 배고픔을 면하는 정도가 아니고 무리에게 배부름을 주는 것이었다.

떡을 먹은 사람들은 여자와 아이 외에 5천명이나 되었다. 즉 장년 남자만 약 5천명이었다. 원문에는 ‘약’(호세이)이라는 말이 있다(KJV, NASB). 오늘날과 같이, 그 당시에도 많은 여자들과 아이들이 거기에 함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무리는 만 명이 족히 넘었을 것이다. 이것은 대단한 숫자이다. 그 많은 무리들이 그 저녁에 놀라운 떡의 기적의 현장에 있었다. 그들은 이 일에 산 증인들이었다.

본문의 내용은 분명히 떡 기적이다. 그것은 다르게 해석할 여지가 없는 문자적으로 떡 기적 사건이었다. 본문은 두 가지 교훈을 준다.

첫째로, 그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한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 이상, 만 명 이상을 먹인다는 것은 이성적으로 불가능하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 우리는 어떻게 한 알의 씨가 수천 혹은 수만 개의 곡식을 만들어 내는지 그 이치를 알지 못하지만 그것을 경험하며 살고 있다.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주신 신비한 법칙에 의해 그렇게 된다. 하나님께는 능치 못함이 없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신이시다(욥 42:2). 예수께서 떡 기적을 행하신 것은 그가 신성(神性)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한다. 예수님은 분명히 사람으로 사셨지만, 그는 또한 하나님이셨다. 우리는 떡 기적을 통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확신하자.

둘째로, 떡 기적은 하나님께서 영육의 양식을 풍성히 공급해주실 수 있음을 증거한다. 창조주 하나님은 온 세계의 생물들을 기르시고 먹이시는 섭리자이시다(시 104:25-29). 그는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신다(마 6:11). 주께서는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셨다(마 6:31-33).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그의 뜻에 순종하며 살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혼의 양식인 성경의 풍성한 교훈과 육신의 양식인 먹을 것과 입을 것과 거처할 곳을 주실 것이다.

 

22-33절, 바다 위로 걸어오심

[22-24절]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 . . .

예수께서는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셨다. 그는 무리를 보내신 후에 육신적으로는 피곤하셨을 것이지만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셨다. 날이 저물었고 그는 아마 여러 시간 아버지께 기도하시며 산에 혼자 계셨다. 그는 신성(神性)을 가지셨으나 기도하기를 힘쓰셨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의 위로와 힘을 얻는 길이다.

제자들이 탄 배는 바다 가운데 있었다. 24절에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서”라는 구절은 헬라어 전통본문에는 “바다 가운데 있어”라고 되어 있다(KJV).23) 갈릴리 바다는 타원형 바다인데, 남북의 직경은 약 21킬로미터 즉 합정동에서 안양까지이며, 동서의 직경은 약 11킬로미터 즉 합정동에서 뚝섬까지인 큰 바다이다.

제자들이 탄 배는 바다 가운데서 거센 바람과 흉흉한 물결로 인해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다. 전날 놀라운 떡 기적을 체험했던 제자들이 그 기적의 감격이 아직 생생히 남아 있었던 때에 어려운 일이 생겼다. 바다는 항상 안정이 없다. 세상은 항상 안정이 없고 평안과 환난이 번갈아 찾아온다.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적 훈련 과정이다.

[25-27절]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 . . .

밤 사경(四更) 즉 새벽 3시부터 6시 즈음에 예수께서는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셨다. 그는 밤새 산에 계셨고 새벽녘에 제자들에게 오신 것이다. 그는 어려움 당한 제자들을 위해 급히 바다 위로 걸어서 오셨다.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오신 것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밝히 증거한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바다 위로 걸어오게 하실 수 있으시다.

제자들은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고 말하며 무서워하여 소리질렀다. 예수께서는 즉시,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잠시라도 그들을 놀라게 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었다. 그는 거센 바람과 물결로 인해 고난당하는 제자들을 도우려고 오신 것이었다.

[28-31절]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 . . .

그때에 베드로는,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라고 청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능력과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믿었던 것 같다. 예수께서는 이 소박한 베드로의 믿음의 요청을 거절치 않으시고 그에게 “오라”고 말씀하셨다. 베드로는 잠시 바다 위로 걸었다. 그는 사람들 중에 유일하게 물 위로 걸어본 자이었다.

그러나 베드로는 얼마 걷지 못하여 ‘거센’(전통본문)24)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갔고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며 외쳤다. 예수께서는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아주시며 그에게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고 말씀하셨다. 성도가 세상의 어려운 현실만 보면 믿음을 잃고 하나님을 의심하고 낙망하며 시험에 빠지기 쉽다. 그러므로 성도는 항상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한다.

[32-33절]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배에 있는 . . . .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함께 배에 오르셨다. 그러자 바람이 그쳤다. 배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께 절하며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라고 말하였다. 그것은 바른 고백이었다. 제자들을 돕기 위해 바다 위로 걸어오신 예수님은 단순한 인간이 아니셨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 곧 신성(神性)을 가진 하나님이셨다.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고 확신하자. 바다 위로 걸어오실 수 있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성경의 진실한 증거들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자. 또 어려운 일이 많은 세상을 사는 동안 하나님과 예수님만 믿고 살아가자. 제자들을 위해 물 위로 걸어서라도 오셨듯이, 주께서는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할 때 결코 우리를 버려두지 않고 오실 것이다(사 41:10; 43:1-2).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굳게 믿고 기도하기를 힘써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산 기도와 철야기도를 힘쓰신 것을 본받아, 연약한 육신을 가진 우리는 기도하기를 힘쓰자.

 

34-36절, 옷가에 손대는 자들을 다 고치심

[34-36절] 저희가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니 그 곳 . . . .

그들은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렀다. 그 곳 사람들은 예수신 줄을 알고 그 근방에 두루 통지하여 모든 병든 자를 예수께 데리고 와서 다만 예수의 옷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였고 손을 대는 자는 다 나음을 얻었다.

예수께서는 영혼을 구원하러 오셨지만, 육신에 병든 자들도 많이 고쳐주셨다. 마태복음 4: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마태복음 9:35,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예수님의 능력은 얼마나 놀라운 능력인지! 12년 동안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그 불쌍한 여인만이 아니고, 많은 병자들이 예수님의 옷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했고 손을 댄 자는 다 나음을 얻었다. 이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실히 증거한다.

 


15장: 마음의 더러움

1-9절, 장로들의 유전과 하나님의 계명

[1-6절] 그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 . . .

그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아와 말하였다.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떡 먹을 때 손을 씻는 것은 좋은 것이다. 그것은 위생적으로 좋은 일이다. 또 장로들의 교훈은 존중하는 것이 옳고 그것이 성경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따르는 것이 덕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제자들이 떡 먹을 때 손을 씻지 않은 것은 그렇게 비난할 만큼 큰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무지한 사람들은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것을 분간치 못하고 자기들의 전통에 맞지 않으면 무슨 대단한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남을 비난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더 중요한 문제점을 지적하시면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거늘 너희는 가로되 누구든지 아비에게나 어미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면 부모님에게는 안 드려도 괜찮다고 가르쳤던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이었다. 하나님께 대한 의무 때문에 인간에 대한 의무를 안 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은 부모를 공경하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사람의 교훈이나 교회의 교훈은 이처럼 잘못을 범할 수 있다.

주께서는 이 지적과 말씀을 통해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절대적 기준과 규칙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보이셨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절대적 규칙은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말씀뿐이다. 우리는 성경이 명하는 것은 해야 하고 성경이 금하는 것은 하지 말아야 한다. 또 성경이 침묵하는 문제에 대해 독단적이지 않는 것이 좋다. 성경만이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절대적 기준이며 최종적 권위이다. 우리는 사람의 전통과 교훈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폐지하여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겨야 하며 그의 말씀인 성경의 교훈을 순종해야 한다.

[7-9절]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공경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말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하고 섬겼지만,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었다.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었다는 증거는 그들이 자신들이 만든 규칙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변경시키고 폐지시킨 것이었다. 이것이 어리석은 외식자들의 종교생활이었다. 그것은 헛된 종교생활이었다.

사람의 전통의 권위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 이 둘 중에 어느 것이 최종적 권위를 가지는가? 예수께서는 바로 그 문제에 대해 말씀하셨다. 주께서는 성경이 우리의 삶에 있어서 최종적 권위를 가진다는 것을 강조하셨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는 성경의 최종적 권위를 알고 그 말씀을 열심히 읽고 듣고 묵상하고 연구하고 믿고 실천하고 전하자. 주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친히 기록된 성경말씀으로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심으로 이 진리를 예증하셨었다(마 4:4).

 

10-20절, 사람을 더럽히는 것

[10-14절] 무리를 불러 이르시되, 듣고 깨달으라. 입에 . . . .

주께서는 무리를 불러 말씀하셨다. “듣고 깨달으라.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사람을 참으로 더럽게 하는 것은 영적, 도덕적 문제이다. 위생적 문제는 죄 문제와는 다르다. 더러운 손으로 먹는 것은 위생적으로는 좋지 못하나 죄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나아와 말하였다. “바리새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걸림이 된 줄 아시나이까?” 예수께서는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심은 것마다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영적 세계에는 두 종류의 씨 뿌림이 있다. 천부께서 심으신 것이 있고, 천부께서 심지 않으신 것이 있다. 천부께서 심으신 것은 영원한 생명, 곧 중생의 새 생명을 얻은 자이다. 그는 구원받은 자이다. 그러나 천부께서 심지 않으신 것은 가짜이다. 그는 구원받지 못한 자이다. 그에게는 중생의 새 생명, 곧 영원한 생명이 없다.

천부께서 심지 않으신 것은 결국 뽑힐 것이다. 그는 환난과 시험의 때에, 또 엄격한 진리 앞에 뽑힐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마지막 심판 때에 뽑힐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바른 말씀, 엄격한 진리의 교훈 앞에 실족하는 자는 그냥 내버려두라. 그러나 참으로 구원받은 자들은 바른 말씀 앞에 실족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15-20절]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 비유를 우리에게 . . . .

베드로는 “이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옵소서”라고 말했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너희도 아직까지 깨달음이 없느냐?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어버려지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나]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마음(카르디아)은 인격의 중심이다. 우리는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신 6:5). 그러나 아담의 범죄로 모든 인류의 마음이 심히 부패하였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렘 17:9). 그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이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 등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구원의 새 생명은 마음의 변화를 수반한다. 구원은 마음의 변화로 나타난다(겔 36:26). 믿음은 마음의 순종이다(롬 6:17). 사람은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롬 10:10).

마음(heart)의 변화는 무엇보다 생각(누스 mind)의 변화를 포함한다. 구원받은 자는 여실하게 그 생각이 변한다. 전에는 사람이 그 생각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했으나, 이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생각의 변화가 일어난다(롬 7:23, 25; 12:2; 고전 2:16; 엡 4:23). 그의 생각은 경건하고 거룩한 것을 추구한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대로 살고 죄악되고 불결한 것을 멀리하기를 원한다.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은 단지 위생상 불결일 뿐이지, 사람을 종교적으로, 도덕적으로 더럽히지는 못한다. 사람의 더러움은 마음 속에서 나오는 악들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외적인 성결보다 내면적 성결, 즉 마음의 성결을 사모하고 그 성결을 지키기를 힘써야 한다. 또 우리는 하나님께서 심으신 자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참된 회개와 믿음으로 나타난다. 그것이 참된 구원이다.

 

21-28절, 가나안 여자의 딸을 고쳐주심

[21-22절]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 . . .

예수께서는 거기서 나가셔서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셨다. 두로와 시돈 지방은 이스라엘 북서쪽 국경지역이다. 그 지역은 원래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기로 약속된 땅이었다(수 13:6).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말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마가복음 7:26에 보면, 그는 헬라인이었고 수로보니게 족속이었다.

그는 예수님을 “주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불렀다. 그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주여’라고 불렀다(22, 25, 27절). ‘주여’라는 말은 신적인 호칭이다. 또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메시아라는 뜻이다. 놀랍게도, 그 여인은 예수님은 신적 메시아로 믿었다고 보인다.

그 여인은 예수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라고 외쳤다. 그의 딸은 귀신으로 인한 정신적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는 죄인이라고 인정하며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부르짖었다.

[23-26절]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 . . .

예수께서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자, 제자들은 와서 요청하였다.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예수께서는 대답하셨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그 여자는 와서 예수께 절하며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말했다. 그 여자는 예수님을, 자기를 도우실 수 있는 신적인 존재로 여겼음이 분명하다. 예수님은 우리를 도우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그는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자녀들에, 그리고 이방인들을 개들에 비유하셨다. 그것은 영적 특권에 있어서 사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모든 민족들 가운데서 특별히 선택하셔서 친 백성이 되는 언약을 맺으셨다(출 19:5-6). 또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의 계명들을 순종치 않는 이방인들은 도덕적으로도 인간의 자격을 상실했다고 볼 수 있다.

[27-28절]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 . . .

그 여인은 자존심이 몹시 상할 만도 한대 다시 말하였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그는 자신이 이방 죄인임을 겸손히 인정하고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 같은 은혜라도 주시기를 간구하였다. 그 여자는 마침내 응답을 얻었다. 주께서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말씀하시자, 바로 그 시각 그의 딸이 고침을 받았고 건강의 회복을 얻었다. 이 기적은 다시 한번 더 예수께서 신적 권능을 가지신 분, 곧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다. 그는 각종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그는 귀신을 쫓아내주셨다. 그는 인간의 영육의 질병, 곧 심신의 문제를 고쳐주셨다.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확신하자. 가나안 여인의 딸을 괴롭히는 귀신을 쫓아내주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각종 질병들에 걸린 병자들을 고쳐주신 예수님, 그는 신적 구주이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확신하자.

또 우리는 무슨 문제든지 간절히 주께 구하자. 기도는 성도의 특권이며, 또 모든 문제의 해결의 길이다. 가나안 여인의 문제는 예수님께 나아와 간구함으로 해결되었다. 그는 자존심을 버리고 겸손히 주께 나아와 간구하였다. 우리가 주 앞에 나올 때 그런 태도를 가져야 한다. 우리는 모든 자존심을 버리고 겸손히 주께 간구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를 얻고 문제의 해결을 얻을 것이다.

 

29-31절, 각종 병자들을 고치심

[29-31절]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사 갈릴리 호숫가에 이르러 . . . .

예수께서는 두로와 시돈 지방을 떠나 다시 갈릴리 지방으로 들어오셨다. 그는 갈릴리 호숫가에 이르러 산에 올라가 거기 앉으셨다. 많은 사람들이 각종 병환자들을 데리고 예수께 나아왔다. 예수님의 사역은 사람들의 회개와 죄사함의 영혼 구원에 있었지만, 사람들은 육신적 질병들에 더 관심이 있었다. 그들은 절뚝발이, 불구자, 소경, 벙어리 등 각종 병자들을 데려와 예수님의 발 앞에 두었다.

예수께서는 그 병자들을 다 고쳐주셨다. 벙어리는 말하고 불구자는 건전하게 되고 절뚝발이는 걸으며 소경은 보게 되었다. 예수님은 다양한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마태복음 4:23-24는 그가 모든 병자들을 고쳐주셨다고 기록한다. 마태복음에서만 언급된 질병의 종류들을 보면, 4장에 귀신들린 병, 간질, 중풍병, 8장에 나병, 열병, 9장에 혈루병, 소경, 벙어리, 12장에 손 마른 병, 그리고 15장에 절뚝발이와 불구자 등이다. 이런 질병들은 오늘날 종합병원의 신경정신과, 신경외과, 피부과, 내과, 비뇨기과, 안과, 이비인후과, 정형외과 등에 해당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 병자들을 다 고쳐주셨다.

예수님의 치료는 거의 즉각적이고 완전하였다. 병 치료의 기적들은 그의 신성(神性), 즉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의 증거와 표이었다. 복음서들을 읽는 자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확신해야 하며 그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의 구원을 얻어야 한다. 무리들은 그가 각종 병환자들을 고치시는 기적들을 보고 기이히 여기며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우리는 성경의 역사적 사실들을 잘 적용하여야 한다. 우선, 성경의 역사적 사건은 그것이 가지는 어떤 분명한 의미가 있다. 우리는 그것을 넘어서 무리하게 영해(靈解)하려 하지 말아야 한다. 역사를 주관적으로, 임의적으로 영해(靈解)하는 것은 불건전한 해석이 된다.

또 역사를 그대로 오늘 현실에 적용하여 오늘날에도 성경의 기적들이 있을 수 있거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하나님의 의도를 곡해하는 오류이다. 물론, 예수께서는 병 고치는 능력을 사도들에게 주셨고(마 10:1), 사도시대에는 스데반이나 빌립 같은 집사들도 기적을 행했고, 일반 성도들에게도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이 주어졌다고 보인다(고전 1:7; 12:28-30). 그러나 예수님과 사도들의 병 고침의 기적들은 그 후 신약교회에 계속 존재하는 은혜가 아니었다.

사도시대에 주신 외적 기적들의 이유는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말씀을 확증하는 데 있었다(히 2:3-4). 마치 모세오경이 기록된 이후, 모세에게 주셨던 것 같은 기적들이 그 후시대에 주어지지 않았던 것과 같이, 신약성경이 기록된 후에는 사도적인 기적들의 필요성이 그 기적들이 정통교회들에서 사라졌다.

주께서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아브라함의 입을 빌어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모세와 선지자들, 즉 구약성경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셨다(눅 16:31). 전도와 교회 확장의 기독교회 2천년 역사는 기적을 통해서가 아니고 기록된 성경말씀을 통해서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진정한 의도를 이해하는 것뿐이다. 외적인 기적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면적 기적, 즉 중생의 기적, 내면적 변화의 기적, 영적 성장의 기적이다. 이것들이 훨씬 더 중요하다. 외적인 기적과 내면적인 기적이 항상 동시에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분명하다. 외적 기적을 경험하는 것과 내면적 기적을 경험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중요한 것을 추구해야 한다.

주께서는 교회 역사에서 외적 기적들을 주로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귀한 내면적 기적은 언제 어디서나 또 누구에게서나 풍성하게 일어났다. 하나님의 진정한 의도는 단지 육신적 질병의 치료가 아니고, 영혼의 구원, 믿음, 회개, 영적 성장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외적 기적을 위해 기도하지 말고 영혼의 구원과 믿음과 회개와 영적 성장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또 우리는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시는 현실에서 참된 믿음의 생활을 하기를 힘써야 한다.

 

32-39절, 두 번째의 떡 기적

[32-33절]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가라사대 내가 무리를 . . . .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불러 말씀하셨다.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무리들은 이미 사흘 동안이나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심취해 있었던 것 같다. 어떻게 사흘 동안이나 그 광야에 거할 수 있었는지 놀랍다. 먹을것은 다 떨어지고 육신의 힘도 다 떨어졌을 것이다. 그냥 해산하면 길에서 기진할 자들이 있을 정도이었다. 이때 예수께서 그 무리를 불쌍히 여기셨다. 그는 단순히 가난하고 배고픈 자들을 위해 이 두 번째 떡 기적을 행하신 것이 아니고, 주와 함께 사흘이나 있었던 무리들을 위해 행하셨던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는 단지 사람의 영적 문제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지지 않으셨고, 또한 육신적 문제, 즉 떡의 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셨다. 주님은 오늘 우리들에 대해서도 그러하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긍휼의 섭리 가운데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신다. 그는 우리의 영혼뿐 아니라 육신도 돌보시고 기르시는 목자이시다.

제자들은 말했다. “광야에 있어 우리가 어디서 이런 무리의 배부를 만큼 떡을 얻으리이까?” 제자들은 얼마 전에 경험한 떡 기적은 잊었던 것 같다. 그들은 잠잠히 주의 능력을 의지하고 기대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성적 계산에만 빨랐다. 만일 그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었다면, 만일 그들이 첫 번째 떡 기적을 기억하였었다면, 그들은 주님께 어떤 해결책을 요청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어려운 현실에서 믿음 없음을 드러낼 뿐이다.

[34-36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 . . .

예수께서 “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고 물으시자, 그들은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나이다”라고 대답하였다. 그것이 제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전부이었다. 떡 일곱 개는 턱없이 모자라는 분량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고 모든 것이 가능하다.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예수께서는 무리를 명하여 땅에 앉게 하셨다. 떡 일곱 개를 가지고 그 많은 무리를 명하여 땅에 앉게 하시는 것은 믿음이 없이는 할 수 없는 행동이셨다. 인간 예수님은 믿음이 충만하셨다. 그의 충만한 믿음은 그의 신성의 도우심에 근거하였을 것이다.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이 한 인격 예수 그리스도 안에 신비하게 결합되어 있으셨다. 그의 인성은 그의 신성으로 인하여 믿음 충만함을 가지셨다.

그는 떡 일곱 개와 그 생선을 가지시고 축사하셨다. 그 앞에 놓인 떡과 생선, 그의 손에 들린 그 음식은 그 큰 무리에 비해 정말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감사하셨다. 그리곤 제자들에게 떼어 주기 시작하셨고 제자들은 주님께 그것을 받아 무리에게 주었다. 그런데 그 보잘것없는 음식은 그의 손에서 신기한 팽창을 하였다. 주께서 떼어 주시는 행위는 확실히 몇 차례로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수없이 반복되었고 마침내 온 무리를 다 배불리 먹일 때까지 계속되었다. 인간의 육신적 필요에 대한 그의 관심은 그 필요가 넘치게 충족될 때까지 그리고 남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37-39절]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일곱 광주리에 차게 . . . .

무리들은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일곱 광주리에 차게 거두었다. 먹은 자들은 여자와 아이 외에 4천명이었다. 예수께서는 무리를 흩어 보내시고 배에 오르셔서 마가단[막달라](전통본문)25) 지경으로 가셨다.

여기에 예수님의 신성(神性)이 또 한번 밝히 증거되었다. 남자만 4천명이니 여자와 아이들을 포함하면 아마도 만 명 이상은 되었을 그 무리를 떡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로 배불리 먹일 수 있는 인간은 세상에 아무도 없다. 이것은 인간의 능력의 한계를 초월하는 사건이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만 행하실 수 있는 능력의 일이었다. 예수께서 떡 일곱 개로 4천명을 먹이셨다는 이 성경의 증거는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분명한 증거이다.

 


16장: 베드로의 신앙고백

1-4절,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함

[1절]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 . . .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였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신앙사상이 서로 달랐으나 예수님을 반대하는 데는 연합하였다. 사탄의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불화할지라도 진리를 대적하는 데는 연합하는 것 같다. 그들은 예수님께 와서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보여주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그 요청은 그들의 믿음을 위해 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단지 사람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다.

믿으려 하는 자는 이미 그가 행하신 기적들을 확인함으로 충분히 믿을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주신 기적들을 확인해 보려 하지 않고 또 다른 하나의 기적을 구하는 것은 확실히 불신앙적이다. 오늘 우리도 성경에 기록된 기적들을 충족하게 여기지 않고 추가적 기적을 구한다면 그것은 믿음의 부족함과 마음의 완고함을 나타낼 것이다.

[2-3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 . . .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중생치 못한 자들은 세상의 지식과 판단력은 있어도 진리의 지식과 영적 판단력은 없다. 메시아가 오셨다는 증거들은 많았다. 구약 예언들은 성취되고 있었다. 메시아의 베들레헴 탄생, 다윗의 자손으로 오심, 나병과 중풍병, 소경과 벙어리와 앉은뱅이 등 많은 병자들의 치료, 죽은 자를 살리심--이것들은 메시아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려주는 표들이었다. 메시아는 확실히 오셨다. 그러나 소경된 지도자들은 시대의 표적들을 분별하지 못했다.

[4절]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밖에는 . . . .

예수께서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시고 그들을 떠나가셨다.

경건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였으나, 악하고 음란한 세대는 표적을 구하였다. 이런 자들은 참교회에 속하지 않고 교회 밖에 있다. 그러나 주께서 이런 자들의 불신앙과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행하실 표적은 없으셨다. 주님의 기적들은 주로 그를 따르며 그를 믿는 믿음을 가진 자들 가운데서 일어났다.

그러나 한 가지 표적은 있다. 그것은 요나의 표적과 같은 것이다. 요나가 삼일 밤낮을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삼일 간 무덤에 있으실 것이다. 요나의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의 모형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삼일만에 다시 사심은 불신앙적 세상을 위해 주시는 마지막 표적이다. 이 표적 앞에 사람은 가부간 결단을 내려야 한다. 예수님을 믿을 것인가, 아니면 그를 거부할 것인가? 또 다른 표적은 필요치 않다.

 

5-12절,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주의하라

[5-10절] 제자들이 건너편으로 갈새 떡 가져가기를 잊었더니 . . . .

제자들이 바다 건너편으로 갈 때 떡 가져가기를 잊었다. 예수께서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시자, 그들은 서로 의논하기를 “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아니하였도다”라고 하였다. 그들은 때때로 주님의 비유적 표현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예수께서는 아시고 말씀하셨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음으로 서로 의논하느냐?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5천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떡 일곱 개로 4천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이던 것을 기억지 못하느냐?”

주께서 제자들과 하신 이 대화는 앞에 기록된 두 차례의 떡 기적을 재확인하는 의미를 가진다. 떡 다섯 개로 5천명을 먹이시고, 떡 일곱 개로 4천명을 먹이신 이 두 차례의 떡 기적들은 지어낸 신화가 아니고 역사적 사건임을 주께서 다시 확증해주신 것이다.

이처럼 성경의 사건들은 이중 삼중적으로 증거되었다. 불신앙자는 그 어떤 증거를 보고 들어도 믿지 않을 것이지만, 믿으려 하는 자는 믿을 만한 증거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믿지 못할 불확실한 어떤 것을 믿으라고 강요하지 않으시고, 믿을 만한 많은 증거들을 성경에 제시해 주시면서 믿으라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권하시는 것이다.

[11-12절]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시기를,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셨다. 그제야 제자들은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았다.

바리새인들은 당시에 보수주의자들이었다. 그들에게는 보수 신앙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사람의 전적 부패성과 무능력을 바로 알지 못했고 자기 의(義)를 의지하고 자랑했다. 그들은 영적으로 교만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종교적 지식도 많고 상당한 열심도 있었으나 종교의 외적 규례들을 중시하고 더 중요한 내면성을 무시했다. 그러나 실상 하나님 앞에 중요한 것은 외적 형식보다 마음이다. 마음의 할례는 경건의 시작이다. 그러나 그들은 형식주의에 떨어져 있었다.

다른 한편, 사두개인들은 그 당시의 자유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모세오경을 존중했으나 다른 성경들은 무시했다. 그들은 구약성경의 많은 부분을 믿지 않았다. 그들은 천사도 영도 몸의 부활도 믿지 않았다. 그들은 인간의 이성과 경험을 중시하는 인본주의자들이었고, 또 세상의 권력과 금력과 결탁한 세속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현실에 잘 적응하였고 잘 타협하였다. 당시의 부유한 고위 제사장들은 이 파에 속하였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누룩, 곧 교훈을 주의하라.” 교훈은 누룩같이 퍼져나가는 힘이 있다. 좋은 교훈은 좋은 영향을 끼치지만, 잘못된 교훈, 이단, 율법주의, 형식주의의 교훈, 혹은 자유주의, 인본주의, 세속주의의 교훈은 참된 경건을 해치는 나쁜 영향을 끼친다. 그러므로 우리는 잘못된 교훈을 분별하여 조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영적으로 큰 손해를 본다. 디모데후서 2:17에는 잘못된 교훈을 독한 창질의 썩어져감에 비교하였다. 그것은 조기 발견, 조기 치료치 않으면 온 몸을 망치게 될 것이다. 자신만 망치지 않고 온 교회를 망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른 교훈을 분별하여 붙들어야 하고 잘못된 교훈을 분별하고 경계해야 한다. 여기에 성경 읽기와 성경 연구의 중요성이 있다.

 

13-20절, 베드로의 신앙고백

[13-16절]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 . . .

어느 날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을 방문하셨다.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은 이스라엘 땅의 가장 북쪽에 있는 헤르몬산 기슭이며 요단강의 발원지이다. 그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인 나를 누구라 하느냐?”(전통본문)고 물으셨다.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의 인성(人性)을 나타낸다.

제자들은 대답했다.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그는 다시 물으셨다.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주는[당신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이며 선지자, 제사장, 왕을 가리킨다. 예수님은 구원과 영생의 길을 전하시는 참 선지자이시며, 하나님 아버지께 자신을 제물로 드리신 참 제사장이시며, 교회와 온 세상을 의로 통치하실 왕이시다.

또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온 세상의 창조주와 섭리자와 주인이신 하나님께 외아들이 계시다. 아버지와 아들은 옷만 바꿔 입으신 것이 아니고, 두 구별된 인격이시다. 이것은 신비이다. 그러나 성경에 계시(啓示)된 만큼이 이러하다.

[17-18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 . . .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바요나[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친근하게 부르시면서, 베드로가 자기에 대해 한 고백이 복되며 그의 깨달음과 지식과 믿음이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고 하늘에 계신 그의 아버지께서 알게 하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그가 우리의 눈을 여시고 우리의 귀를 여심으로써만 가능하다(행 16:14).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또,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다. ‘베드로’는 ‘반석’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남성명사인데, “이 반석 위에”라는 구절에서 ‘반석’은 여성명사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는 구절에서 ‘반석’은 베드로 자신을 가리키지 않고 그의 신앙고백을 가리킨다고 본다. 고린도전서 3:11은 교회의 기초가 예수 그리스도뿐이라고 말한다.

예수께서는 또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말씀하셨다. 교회의 소속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다. 또 그가 친히 그의 교회를 세우신다. 그는 성경의 바른 진리와 성령으로 그의 교회를 온 세계에 세우셨고 오늘도 세우고 계신다.

예수께서는 또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음부’(陰府, 하데스 a{/dh")는 ‘무덤’ 혹은 ‘지옥’을 가리킨다. 죽음은 죄 때문에 왔다. 모든 사람은 죄인이요 모든 사람은 죽는다. 무덤은 죽은 자들의 집이며, 지옥은 죄인들이 죽은 후에 들어가는 집이다. 그러나 주께서 대속제물이 되심으로 그의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의 죄가 깨끗게 되었다. 죄가 제거됨으로 죽음도, 무덤도, 지옥도 극복되었다. 무덤과 지옥의 권세가 구원받은 성도들을 이기지 못한다.

[19-20절]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 . . .

예수께서는 또 베드로에게,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주신 권세를 가리킨다. 하나님의 복음 진리는 영생과 멸망, 천국과 지옥을 나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주께서는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고 말씀하셨다(막 16:15-16). 믿는 자는 천국에 들어간다.

주께서는 또, “제자들을 경계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당시에 사람들은 메시아를 정치적 자유와 물질적 복을 주는 자로 이해했던 것 같다. 주께서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 오신 사실은 아직 잘 이해되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의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반석 위에,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성경의 바른 진리의 반석 위에 굳게 세워지도록 기도하고 함께 노력하자. 목사는 성경의 복음과 진리를 바르게 선포하고 성도들은 성경의 바른 지식 안에서 그 복음과 진리를 믿고 순종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은혜를 감사하자. 우리가 받은 구원은 무덤과 지옥의 권세도 이기지 못하는 영생과 천국의 복이다. 우리는 이 구원의 은혜를 감사하자.

우리는 담대히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는 일은 오직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 전도는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방법이며 전도자는 그 도구일 뿐이다. 하나님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세우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치 말고 분발하여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복음을 담대히 전하자.


21-28절, 자기 부정을 가르치심

[21-23절]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 . . .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3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셨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흘렀고 제자들의 믿음이 어느 정도 분명해졌을 때, 그는 비로소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가르치시기 시작하셨다.

그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간하여[책망하여](KJV, NASB, NIV) 말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그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생각했으나 그가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실 것에 대해 생각지 못하고 그를 영광의 왕으로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는 죄인들의 구원이 메시아의 죽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이치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베드로의 책망을 들은 예수께서는 돌이키시며 그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베드로는 방금 전에 바른 신앙고백을 하여 칭찬을 들었지만, 지금 사탄이라는 책망을 듣는다. 성도가 하나님의 뜻을 생각지 않고 도리어 그것을 방해하면 사탄의 도구가 될 수 있다. 그의 충고는 주님을 넘어지게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뜻은 메시아가 죽는 것인데 베드로는 그것을 가로막았다. 죽는 것을 싫어하는 것은 사람의 생각이며 하나님의 뜻은 자기의 독생자가 인류를 위해 죽는 것이었다.

[24절]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 . . .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그것이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이다. 자기를 부인하라는 것은 자기의 생각, 가치관, 명예, 자존심, 세상적 부귀와 영광을 버리고 그 대신 하나님의 생각과 가치관, 하나님의 영광만 구하라는 뜻이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것은 죽을 각오를 하라는 뜻이다. 사형수는 자기가 달릴 십자가를 지고 사형장에 가서 거기에 달려 죽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는 자는 죽음을 각오할 수 있다.

“나를 좇으라”는 말씀은 주의 말씀을 배우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그의 행위를 본받으라는 뜻이다. 주님은 친히 십자가의 길을 가졌다. 그의 제자들도 그의 길을 따라야 할 것이다.

[25절]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이는]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그것을]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그것을] 찾으리라[찾을 것임이니라].” ‘그것’은 ‘자기 목숨’을 가리킨다. 이것은 자기 희생의 행위로 영생을 얻는다는 뜻이 아니고, 자기 희생의 행위가 영생 얻는 자의 당연한 삶임을 보인다. 성도의 자기 희생적 삶은 그가 영생의 길을 가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이다.

주께서는 두 가지 목숨에 대해 말씀하신다. 하나는 육신의 목숨이고 다른 하나는 영혼의 목숨이다. ‘목숨’이라는 원어(프쉬케 yuchv)는 ‘육신의 생명’이라는 뜻도 되지만, 또한 ‘영혼’이라는 뜻도 된다. 본문은, “누구든지 자기의 육신의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자기의 영혼을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자기의 육신의 목숨을 잃으면 자기의 영혼을 찾으리라”고 번역할 수 있다.

사람의 영혼은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할 때 영생할 수 있지만 그 생명을 소유하지 못할 때 영생할 수 없고 도리어 둘째 사망(계 21:8) 즉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는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있어서 육신의 목숨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영혼의 목숨이다.

성도의 자기 부정과 십자가의 길은 주께서 가신 길과 비슷하다. 그는 십자가에 죽으신 후에 부활하셨다. 그는 죽음으로 죄인을 위한 영생의 길을 여셨고 아버지의 뜻을 완수하셨고 삼일 만에 부활하셨다. 이와 같이, 우리도 주를 위하여 죽으면 확실히 부활할 것이다.

[26절]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 . . .

예수께서는 또,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고 말씀하셨다. 영어성경들은 본절의 ‘제 목숨’을 ‘자기의 영혼’이라는 말로 번역하였다(KJV, NASB, NIV).

본절은 육신의 목숨에 적용될 수 있다. 아무리 세상의 모든 좋은 것을 얻은 자라도 그가 죽으면 그 모든 것이 그에게 아무 유익이 없다. 그러나 본절은 영혼에 더욱 의미심장하게 적용된다. 사람들은 세상의 부귀와 영광을 얻기 위해 믿음을 버리고 죄를 짓지만, 비록 세상의 좋은 것을 누린다 할지라도, 죽어 지옥에 던지운다. 그러므로 수십년의 행복을 위해 영원한 불행을 택하는 것은 결코 유익하거나 지혜로운 삶이 아니다. 영생은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화이다.

[27-28절]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 . . .

주께서는 또 영혼을 잃어버리는 것이 유익이 없는 이유를 말씀하셨다. “[이는]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갚을 것임이니라].” 주께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의 천사들과 함께 오는 날은 그의 재림 때이다(마 24:30; 살전 4:16). 그때 그는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갚으실 것이다. 그 날은 그의 공의로운 심판의 날이다(롬 2:6-7).

예수께서는 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좀 어려워 보이지만, 다음에 기록된 변화산 사건을 가리키지 않는가 생각된다.

본문에서 주께서는 두 목숨에 대해 증거하셨다. 우리는 육신의 목숨도 귀한 것이므로 잘 관리해야 하지만, 천국에서 영원히 누릴, 영광스런 부활의 생명은 비교할 수 없이 더 귀한 것이므로 잘 지켜야 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과 성령의 거듭나게 하심으로 시작되었다. 예수께서는 이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 오셨고 성령께서는 그를 믿는 우리 모두에게 이 생명을 주셨다(요 5:24; 10:28; 11:25-26; 롬 5:18; 요 3:5; 딛 3:4-5). 또 그 영생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과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순종으로 유지된다(롬 6:22). 성경은 우리에게 죄 지으면 죽는다고 여전히 경고한다(롬 8:13). 그러므로 우리는 단지 육신의 목숨을 위하여 살지 말고, 천국에서 누릴 영원한 영광의 삶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딤전 6:11-12). 그것은 믿음과 순종으로 살고 죄를 멀리하는 것이다.


 

17장: 변화산 사건

1-8절, 변화산 사건

[1-2절]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 . . .

마태는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다”고 말한다. 엿새 후라고 날짜를 꼽은 이유는, 바로 앞부분의 예언대로, 그때 세 제자들이 주께서 그의 나라에 임하시는 영광을 미리 보았음을 증거하는 것일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들 앞에서 변형되셔서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본래의 영광, 곧 그의 신성(神性)의 영광이었다. 영광의 주께서 사람의 본질을 취하여 비천한 모습으로 오셨다. 이사야 53: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5절]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 . . .

그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함께 말씀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였다. 모세와 엘리야는 구약을 대표하는 인물들이다. 율법은 모세를 통해 주어졌고, 엘리야는 선지자들 중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산 채로 하늘로 올리운 인물이었다. 그 두 분이 나타나 예수님과 함께 말씀하는 것은 예수께서 구약성경에 예언된 메시아임을 증거한다고 본다.

베드로는 예수께 말하였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그가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났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이것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친 음성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제자들을 위하여 친 음성으로 아들 예수에 대해 증거하여 주셨다. 베드로는 후에 그의 두 번째 서신에서 이 사건을 회고하면서 하나님의 친 음성을 들었다고 증거했다(벧후 1:16-18). 제자들은 예수님의 신성의 영광을 눈으로 보았고 귀로 들었다.

[6-8절] 제자들이 듣고 엎드리어 심히 두려워하니 예수께서 . . . .

제자들은 듣고 엎드리어 심히 두려워하였다. 예수께서는 나아가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일어나라.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니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였다. 신성의 영광의 나타남은 짧은 시간 동안만이었다.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 경험의 반복이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 영광의 주님으로 확실히 믿고 그 믿음대로 그의 계명에 순종하며 그를 위해 사는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도 그것이 필요하다.


9-13절, 엘리야가 먼저 왔음

[9절] 저희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명하여 가라사대 . . . .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명하셨다.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의 영광은 참된 믿음을 위해서만 알려질 필요가 있었던 것 같다. 그러므로 자신의 영광을 오용치 않도록 주께서는 그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기까지 자신이 알려지지 않게 하라고 제자들에게 명하셨다. 그의 신적 영광과 기적들은 단순한 호기심의 만족이나 지상 왕국 건립을 위해 사용되어서는 안 되고, 죄사함으로 말미암은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만 사용되어야 할 것이다. 믿는 자에게는 또 믿으려 하는 자에게는 성경에 증거되고 기록된 이런 일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신 확실한 표들이 된다.

[10절] 제자들이 묻자와 가로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 . . .

제자들이 그에게 여쭈었다.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서기관들, 즉 당시의 성경학자들은 말라기 4:5-6의 예언을 달리 해석할 수 없었다. 거기에 보면,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고 예언되어 있다. 이것은 메시아께서 나타나시기 전에 한 선지자가 나와서 대중들을 회개시킬 것을 예언한 것이다.

[11-13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엘리야가 과연 먼저 . . . .

예수께서는,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고 대답하셨다. 그제야 제자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았다.

엘리야가 먼저 왔다는 것은 사람의 윤회(輪廻)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승천한 엘리야가 다시 어린 아기로 출생하거나 하늘로부터 강림할 수는 없다. 이 예언은 한 선지자가 엘리야의 심령으로 나타나 엘리야 당시와 같이 배교적인 시대의 상황을 거슬러 외로이 그러나 능력 있고 충성되게 사역할 것을 의미한 것이다.

그 선지자가 왔다. 그가 세례 요한이었다. 누가복음 1:15-17에 증거한 대로, 그의 출생을 예언했던 천사는 말하기를, “이는 저가 주 앞에서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서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고 하였다.

그러나 예언대로 오실 자가 오셨으나, 사람들은 그를 알지 못하여 임의로, 자기들의 원하는 대로 대우하였다. 대중들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알아보는 분별력, 공경심, 순종심이 부족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인정하고 그의 가르침에 따라 회개의 세례를 받았으나, 대중의 지도자들은 영적 소경들이었다.

이와 비슷하게, 앞선 자가 증거했던 메시아가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에게도 합당한 대우를 하지 않는다. 메시아로 오신 예수께서는 대중의 지도자들에 의해 많은 고난과 죽임을 당하실 것이었다. 무지한 대중들은 그를 핍박하는 일에 동참할 것이다. 그러나 열린 눈과 열린 귀를 가진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그를 공경하고 따를 것이다. 동일한 인물에 대하여 또 동일한 환경과 상황 속에서, 그 두 부류는 나뉠 것이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좋은 쪽에 속해 있음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뻐하자.

 

14-21절, 간질병 아들을 고쳐주심

[14-16절] 저희가 무리에게 이르매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 . . .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산에서 내려와 무리에게 이르셨을 때, 한 사람이 그에게 와서 꿇어 엎드리어 말하였다.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저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그는 예수님의 신성(神性)과 신적 능력을 인정하였고 예수께서 자기 아들의 불치의 병을 고쳐주실 수 있다고 믿었다.

그의 아들의 병은 간질병이었다.26) 그는 그 병으로 심히 고생하고 있었다. 그는 자주 불에도 넘어지고 물에도 넘어졌다. 몸이 상했고 여러 번 죽을 위험도 당했을 것이다. 그 아버지는 그의 아들을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지만, 그들이 그를 고칠 수 없었다. 열두 제자들은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는 권능을 받았지만(마 10:1), 무슨 까닭인지 그 아들을 고치지 못하였다.

[17-18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고 패역한 . . . .

예수께서는,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라고 대답하셨다. 제자들이 그 병을 고치지 못한 것은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병을 고치려는 제자들도, 병 고침을 받으려는 당사자들도 믿음이 없었다. 믿음이 없으면 병을 고칠 수 없고 병 고침을 받을 수도 없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본문 20절에서 믿음을 강조하셨다.

마가복음 6:3-5에 보면, 예수님의 고향인 나사렛의 사람들이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라고 말하며 그를 배척했으므로, 예수께서는 거기서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소수의 병자에게만 안수하여 고치셨었다.

예수께서는 간질로 고생하는 그 아들을 데려오라고 말씀하신 후, 그 병을 꾸짖으셨고 그러자 그에게서 귀신이 나갔고 그 아이는 그때부터 나았다. 그 아이가 미친 것같이 자주 발작을 한 것은 단지 신체적 이상이 아니고 귀신으로 인해 일어난 현상이었다. 성경은 모든 병이 다 귀신으로 인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지만, 본문의 사건처럼 어떤 병은 귀신으로 인한 것임을 증거한다(눅 13:11의 경우도). 귀신이 나가자 그 아이는 병이 나았다.

[19-20절] 이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 . . .

이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예수께 나아와 말했다.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주께서는 그들에게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믿음이 없기 때문이라](전통본문)”27)고 말씀하셨다.

또 예수께서는,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고 말씀하셨다. 겨자씨는 매우 작은 씨이다. 주께서는 “겨자씨 같은 작은 믿음이라도 있으면” 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것은 제자들에게 겨자씨만한 작은 믿음도 없음을 암시하신 것이다. 우리는 믿음이 없는 자들이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저기로 옮길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주께서는 요한복음 14:12에서도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고 말씀하셨다.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저기로 옮길 수 있다는 말씀이나, 주님을 믿는 자가 주께서 하시는 일을 하며 그보다 큰 일도 할 것이라는 말씀은, 기적주의를 가르치신 말씀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기적주의를 가르치지 않으셨다. 성경은 기적주의를 가르치지 않는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가 무슨 일이나 어떤 동기나 의도를 가지고서든지 믿음을 가지고 명령하면 된다는 뜻이 아니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맞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을 하나님께 구하면 얻을 수 있고 이룰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성경의 일반적 교훈에 맞다.

[21절] 그러나 이런 유(類)는 기도와 금식으로가 아니고서는 나가지 아니하느니라(전통본문).

전통적 헬라어 본문에는, “그러나 이런 유는 기도와 금식으로가 아니고서는 나가지 아니하느니라”는 구절이 있다.28) 이 구절은 원본의 본문이 확실하다. 이 말씀은 마가복음 9:29의 전통본문에도 나온다.29) 주께서는 기도와 금식을 강조하셨다. 금식은 간절한 기도이다.

예수께서는 다른 곳들에서 강청의 기도, 간절한 기도를 가르치셨다. 누가복음 11:8에서 그는 기도에 대해 교훈하실 때 밤에 찾아온 친구의 비유를 하시며,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함[끈질김]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고 말씀하셨다.

또 예수께서는 불의한 재판관에게 끈질기게 탄원한 과부의 비유에서도(눅 18:1-8) 낙심하지 않는 간절한 기도에 대해 교훈하셨다. 그는 불의한 재판관도 과부의 끈질긴 간청을 들어주었는데, 하물며 선하신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들의 부르짖는 간구를 외면하시겠는가, 그가 반드시 들어주실 것이라고 교훈하셨다.

우리는 무슨 문제든지, 특히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를 주님 앞에 가지고 나오자. 본문의 이 사람은 자기 아들의 질병 문제를 가지고 주 앞에 엎드렸다. 건강과 질병의 문제, 경제적 어려움의 문제, 자녀의 문제 등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가진 분들은 그 문제를 하나님 앞으로 가져 나가자. 주 앞에 엎드려 겸손히, 간절히 구하자.

우리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문제의 해결자이심을 알자. 주께서는 간질병을 꾸짖으셨다. 귀신을 복종시키셨다. 불치의 병들도 고치셨다. 그것은, 오늘날도 주님의 이름으로 병을 고칠 수 있다든가 병의 고침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는 일반적으로 의학적 방편을 감사히 사용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그가 하고자 하시면 못하실 것이 없다. 단지 하나님의 뜻은 오늘날 기적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뿐이다.

그러나 그가 허락지 않으시면 의학적 방편도 효험이 없을 것이다. 그가 허락하셔야 모든 것이 유익하다. 그가 허락하셔야 우리가 건강도, 경제적 안정도, 우리 자녀들의 평안도, 우리 사회의 평안도 얻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문제의 해결자이심을 믿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을 의지하자. 우리는 모든 문제를 하나님 앞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뢰자(마 7:7-11; 요 14:13-14).

우리는 비상한 경우에 하나님 앞에 우리의 소원을 기도와 금식으로 아뢰자. 주께서는 “이런 유는 기도와 금식으로가 아니고서는 나가지 아니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전통적 헬라어 본문과 옛날 영어성경(KJV)에 있는 구절이다. 그것은 확실히 성경 원문에 있는 구절이다. 그것은 인간적 해결책이 없어보일 때 우리가 끈질긴 기도, 강청의 기도, 결사적 기도를 올려야 함을 가르치신 말씀이다. 그것이 믿음의 기도이다. 우리가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우리는 기도와 금식으로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께 아뢸 수 있다. 우리는 낙심치 말고 간절히 기도하고, 또 비상한 때에는 금식하며 우리의 소원을 아뢰자.

 

22-23절,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두 번째 예언하심

[22-23절]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 . . .

릴리에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제3일에 살아나리라”고 또 말씀하셨다. 이것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두 번째로 하신 말씀이었다. 그의 말을 들은 제자들은 심히 근심하였다.

 

24-27절, 반 세겔 세금을 내심

[24-26절] 가버나움에 이르니 반 세겔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 . . .

가버나움에 오셨을 때, 반 세겔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나아와 말하기를, “너의 선생이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고 하였다. ‘반 세겔’이라는 말(디드라크몬)은 ‘두 드라크마’라는 뜻의 단어이다. 이것은 성전 봉사를 위한 세금이다. 출애굽기 30:11-16에 보면, 이스라엘의 20세 이상된 모든 사람은 생명의 속전으로 반 세겔을 내어야 하였고 그 금액은 회막 봉사에 쓰게 하였다.

베드로는 그에게 “주께서 내신다”고 대답했다. 그는 주님이 세금을 안 내는 자라는 비난을 받게 되기를 원치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그는 자신과 주님의 돈주머니가 비어 있었음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대답은 주께서 모든 것을 처리하실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한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먼저 시몬에게 말씀하셨다. 그는 베드로가 말하기 전에 그가 당한 일을 알고 계셨다. 그의 지식은 인간의 제한성을 초월한다. 그는 전지(全知)하신 자이시다. 그는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뇨? 세상 임금들이 뉘게 관세와 정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라고 말씀하셨다. 베드로가 “타인에게니이다”라고 말하자, 그는 “그러하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고 말씀하셨다.

관세(텔로스)는 소득세, 통행세, 관세를 가리키고, 정세(켄소스)는 인두세나 주민등록세를 가리킨다고 한다(BDAG). 하나님의 아들에게서 세금, 특히 성전세를 받는 것은 합당치 않다. 성전세가 면제될 자는 바로 그이다. 이 말씀에서 그가 암시하는 바는 자신이 온 세상의 왕의 아들이며 성전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주께서 자신에 대해 증거하신 증거이다.

[27절] 그러나 우리가 저희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 . . .

그러나 주께서는 사람들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하여 세금을 내게 하셨다. 그는,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고 말씀하셨다. 주께서는 세금을 내셨다. 그렇다면, 우리가 국가에 대한 정당한 의무를 회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분명하다.

주께서는 가난하게 사셨다. 그때 그에게는 한 세겔도 없으셨음이 분명하다. 제자들의 주머니도 비었음이 분명하다. 부요하신 주께서 우리를 위해 이 세상에 오셔서 가난한 삶을 사셨다(고후 8:9). 그런데 우리는 왜 주님을 위하여 가난하게 살기를 싫어하는가? 왜 우리는 주님을 위하여 작은 손해도 보기를 싫어하는가?

고기 입에서 한 세겔을 얻은 이 사건은 실로 기적이었다. 주께서는 바다 속에 물고기 입에 물린 한 세겔을 보셨다. 그것은 그의 전지하심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또 그 고기가 베드로의 낚시에 걸린다는 것도 놀랍다. 그는 그 물고기를 보셨고 그 입에 물린 한 세겔을 보셨고 그 물고기가 정확히 바로 그 시각에 베드로의 낚시에 걸리게 하셨다. 이 모든 것이 그의 신적 속성과 능력으로 되어졌다.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의 영광이 다시 한번 더 드러났다. 예수 그리스도 그는 확실히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18장: 겸손과 용서를 가르치심

1-14절, 겸손을 가르치심

[1-3절]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천국에서는 . . . .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여쭈었다.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크다’는 원어(메이존)는 ‘더 크다’ 혹은 ‘가장 크다’는 뜻이다(BDAG, KJV, NASB, NIV).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라는 질문 속에는 제자들 마음 속에 있는 교만, 세상적, 육신적 명예심이 보인다. 그때 예수께서는 한 어린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돌이켜’라는 말은 ‘회개하여’라는 뜻이다. 그는 그들의 교만한 마음을 책망하시듯이 “너희가 회개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어린아이는 아직 교만과 명예심을 갖고 있지 않다. 사람은 교만과 명예심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이 말씀은 겸손한 인격이 구원의 조건이라는 뜻이 아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는 교만하지 않고 자신을 낮추며 그런 사람만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을 수 있다. 겸손은 구원의 조건은 아니지만, 구원의 과정이요 구원받는 자의 표가 되는 것이다.

 [4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 . . .

예수께서는 또,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고 말씀하셨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를 높이려 하지만, 교회는 다르다. 교회에서는 자신을 낮추는 자가 큰 자다. 주께서는 후에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말씀하셨다(마 20:26-27). 겸손은 교회에서 우리가 유념해야 할 매우 중요한 덕이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친히 겸손의 본을 보여주셨다. 그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다(마 11:29). 바울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 . .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고 말했다(빌 2:5-8).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한다. 교회에서 큰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의 이름으로 다른 이들을 많이 섬기는 자이다. 교회는 서로 섬기는 자들의 모임이어야 한다.

[5절]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예수께서는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라”고 말씀하셨다. 교만한 자는 높은 자에게는 아첨하고 낮은 자를 무시한다. 그러나 겸손한 자는 어린아이 하나라도 사랑하고 귀히 여긴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라면 더욱 그러하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이기 때문이다(고전 12:27).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는 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후에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마 25:31-46) 이 진리를 좀더 자세하게 증거하셨다. 그는, 그의 형제들, 곧 그의 종들과 성도들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영접하며, 그가 주릴 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를 때 마시게 하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고 벗었을 때 옷을 입히고 병들었을 때 돌아보고 옥에 갇혔을 때 방문하는 것이 곧 주님을 영접하고 대접하는 것이며, 또 그의 이름을 가진 소자(小子) 하나의 영접 여부가 영원한 구원과 멸망을 나누며, 의인과 악인, 영생에 이를 자와 영벌에 던지울 자를 나눌 잣대가 된다고 말씀하셨다. 행위는 구원의 조건은 아니나, 구원의 표가 된다. 우리는 겸손히 서로를 영접하며 서로를 섬겨야 한다.

[6절]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 . . .

예수께서는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리라”고 말씀하셨다. 예수 믿는 어린아이 하나를 실족케 하는 것, 곧 범죄케 하는 것이 큰 죄가 됨을 말씀하신 것이다. 연자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낫다는 말씀은 얼마나 무서운 경고가? 남을 범죄케 하는 것보다 자신이 죽임을 당하는 편이 낫다는 것이다. 우리는 산즉 남을 살리고 남에게 유익을 주는 자가 되어야지 남을 범죄케 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7절] 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도다. . . .

예수께서는 또, “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세상에는 남을 범죄케 하는 일들이 적지 않고, 그로 인해 세상에 화가 있다. 우리는 남을 죄에서 구원하는 일에 바쳐질지언정, 남을 죄 짓게 하는 데 바쳐져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이단을 가르친다든지, 위선적 말과 행위로 남에게 참 신앙과 교회에 대한 반발심을 가지게 한다든지 술취하고 음란한 풍조를 사회에 조장하는 등의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

[8-9절]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 . . .

주께서는 또,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말씀하셨다. 주의 말씀은 매우 엄격하고 철저하시다.

우리의 손이나 발, 우리의 눈이 우리를 계속 범죄케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찍어버리고 빼어버리는 것이 낫다. 두 손, 두 발, 두 눈을 가지고 계속 범죄하여 지옥가는 것보다 한 손, 한 발, 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지 않아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낫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몸의 불구가 때때로 하나님의 더 큰 은혜일 수 있다. 건강한 몸으로 죄만 짓는 것보다 불구의 몸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면, 그것은 확실히 더 복되다.

만일 우리가 불구의 몸을 원치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사지백체를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거룩하고 선하게 사용해야 할 것을 깨닫자. 내 몸은 내 것이 아니다. 이미 찍어버려야 했을 지체, 뽑아버려야 했을 지체를 가진 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의 손, 나의 발, 나의 눈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서만 사용해야 한다. 고린도전서 6:19-20,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그렇지 못하다면, 차라리 불구자가 되게 하소서! 그것이 우리에게 더 유익이 아니니이까?

[10절]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 . . .

주께서는 또, “삼가 이 소자(小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이 소자’는 그를 믿는 어린아이를 가리킨다. 기독교는 인격적 종교이다. 한 사람의 생명은, 어른의 생명이든 아이의 생명이든, 혹 태아의 생명일지라도, 동등하게 귀하다. 사람을 무시하거나 차별하는 것은 비인격적이고 비성경적이다. 물론 가정이나 교회에서 질서와 직분의 차이는 존중되어야 하고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존중하고 복종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사람의 인격을, 그것이 어린아이의 인격이라 할지라도, 업신여기는 태도는 버려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귀히 여기시고 그들의 천사들은 하늘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항상 뵈옵기 때문이다.

[11절] 인자는 잃은 자를 구원하기 위해 왔노라(전통본문).

통본문에는 11절에 “인자는 잃은 자를 구원하기 위해 왔노라”는 말씀이 있다.30) 남을 범죄케 하는 것은 그의 영혼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구주께서 오신 것은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함이다. 그의 제자된 우리도 같은 사명감을 가져야 마땅하다. 주를 따르는 자들이 어찌 남을 범죄케 하여 그의 구원을 가로막을 수 있겠는가? 또 어떤 이가 심각한 신앙적, 도덕적 결함이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를 거절하거나 업신여길 것이 아니고 오히려 관심을 가지고 전도하고 권면하여 그를 구원하거나 바른 길로 인도해야 할 것이다.

[12-13절]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 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이 말씀은 누가복음 15:3-7의 ‘잃은 양의 비유’와 비슷하다. 아흔 아홉 마리의 양들보다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으려는 것이 목자의 심정이요 그 양을 찾은 목자의 기쁨은 매우 클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어린 한 영혼이라도 우리의 실수로 인해 범죄하게 하고 잃어버려지게 할 수 있겠는가?

[14절]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 . . .

예수께서는 또,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녀들, 어린아이나 청소년 하나라도 잃어버려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우리는 어린아이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그것은 우리가 겸손히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야 함을 보인다. 우리는 어린아이같이 자신을 낮추는 자가 되어야 한다. 겸손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예수 그리스도의 덕이다. 교회에서 큰 자는 형제를 섬기는 자이다. 바울은,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라”고 말했다(롬 12:10).

우리는 어린아이 하나라도 귀히 여겨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를 영접해야 한다.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다. 또 우리는 어린아이 하나라도 실족케 해서는 안 된다. 어린아이 하나라도 실족케 하는 것은 큰 죄를 짓는 것이다. 또 어린아이 하나라도 업신여기거나 무시해서도 안 된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존중해야 한다. 어린아이 하나라도 잃어버려지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우리는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귀히 여겨야 한다. 그러므로 모든 직분자들은 어린 신자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않도록 조심하자. 우리는 한 영혼, 한 어린 생명이라도 귀히 여기고 구원하기 위해 힘쓰자.

 

15-20절, 형제가 네게 죄를 범하거든

[15절]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전통본문에는 “네 형제가 네게 죄를 범하거든”이라고 되어 있다.31) 교회 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사랑의 교제이다. 그런데 우리의 형제가 우리에게 개인적으로 죄를 범할 때가 있다. 그 죄가 말로 우리를 잘못되게 비난하는 것일 수도 있고 혹은 우리의 돈을 떼어먹는 일일 수도 있다. 교회 생활에서 이런 일들이 종종 있다. 사람의 인격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실수할 때가 없지 않다.

형제가 우리에게 죄를 범할 때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주께서는 그 대처 방안을 말씀해 주신다.

첫째로,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책망]하라.” 개인적 책망 혹은 충고가 첫 번째 단계이다. 이것은 우리가 그런 문제를 남에게 먼저 알리지 말아야 함을 내포한다. 이것은 또 우리가 ‘저런 자와는 만날 것도 없어!’ 하고 그를 정죄하고 그와의 교제를 끊어버리지 말아야 할 것도 내포한다. 우리는 먼저 그를 찾아가서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책망하고 충고해야 한다.

이렇게 하려면 시간이 들고 수고가 든다. 또 잘못하면 마음 상하는 말을 한 마디 더 듣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서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책망하고 충고하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그 형제를 사랑하고 그를 아끼는 성도의 바른 태도이다. 만일 그가 들으면 우리는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참된 성도의 교제를 유지하는 것은 중요하다. 이것이 “서로 사랑하라”는 주의 명령이 내포하는 바이다. 이것이 교회의 일체성(一體性)을 보존하려는 노력이다.

[16절]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 . . .

주께서는 또,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두 번째 단계이다. ‘증참한다’고 번역한 말은 ‘확실케 한다,’ ‘확증케 한다’는 뜻이다. 만일 그 형제가 개인적 책망을 듣지 않으면,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모든 말을 확증케 하도록 해야 한다. 신명기 19:15는, “사람이 아무 악이든지 무릇 범한 죄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17절]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 . . .

주께서는 또,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세 번째 단계이다. 이것은 그로 하여금 교회의 목사와 장로들이나 회중 앞에서 판단받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적 판단도 듣지 않으면 그를 이방인과 세리같이 여겨 교회적 교제를 단절해야 한다. 즉 그는 교회의 회원으로 간주하여 사랑의 교제를 나눌 대상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는 교회 밖에 속한 외인(外人)으로 간주될 것이다. 그는 성도의 교제에서 제외될 것이다.

[18절]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이것은 교회적 권징의 효력을 말씀하신 것이다. 매는 것은 권징의 시행이요 푸는 것은 해벌(解罰)을 가리킨다. 이 권징은 비록 땅에서, 즉 지상교회 안에서 시행되는 것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인정되는 것이며 효력을 가진다.

[19-20절]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 . . .

또 주께서는 말씀하셨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이 말씀은 교회적 권징에 관련하여 주신 말씀이라고 보인다. 그것은 두세 사람이라도 바른 판단과 합심된 소원은 효력이 있다는 말씀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또한 합심기도의 일반적 교훈이기도 하다고 본다. 성도들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을 기도하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그것을 이루게 하실 것이다. 주 예수께서는 두세 사람이 그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그들 중에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셨다.

 

21-35절, 용서에 관해 가르치심

[21-22절] 그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 . . .

예수께서 형제의 범죄에 대해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 대처하는 법을 교훈하셨을 때, 베드로는 그에게 나아와,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하고 말하였다. 그때 예수께서는,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고 말씀하셨다.

용서는 상대방이 나에게 무슨 잘못을 범한 후에 그것을 사과하고 회개할 때 하는 것이다. 즉 용서는 사과와 회개를 전제(前提)한 것이다. 만일 상대방이 내게 잘못을 범하고도 그 잘못을 인정하며 사과하거나 회개하지 않는다면, 용서라는 말도 무의미할 것이다. 주께서는 앞부분에서 상대방이 회개하지 않을 경우 권면이나 권징의 절차를 따라 행하고 만일 그가 교회적 권면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와 교제를 끊고 그를 이방인, 즉 불신자로 여기라고 교훈하셨다.

그러나 주께서는 회개하는 형제에 대해서는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셨다. 실상 일곱 번이나 반복해 잘못을 범하고 용서를 비는 사람에게 용서해주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주께서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교훈하셨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은 490번까지만 용서하라는 뜻이라기보다 회개만 하면 무한히 용서하라는 뜻이 분명하다. 상대가 진심으로 뉘우치기만 한다면 그를 언제든지 용서하라는 것이다.

[23절]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주께서는 용서를 가르치시기 위해 천국을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다고 비유하셨다. 이 비유에서 천국은 신약교회를 가리키고, 임금은 하나님을 가리키고, 또 종들은 하나님의 백성, 즉 신약교회 교인들을 가리킨다고 본다. 신약교회는 천국의 시작 혹은 현재적 측면이다. 임금이 종들과 회계 즉 재무 결산을 하듯이,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된 신약교회 교인들의 행위에 대해 판단하신다.

[24-27절]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 . . .

그 임금이 회계할 때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었다. 일만 달란트는 얼마나 큰 액수이었는가? 한 달란트는 환산하면 6,000데나리온이었다(한 달란트는 약 30킬로그램이었고, 한 데나리온은 약 5그램이었다)(NBD). 한 데나리온은 그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는데(마 20:2), 그것을 오늘날 품삯으로 6만원만 치더라도, 한 달란트는 약 3억 6천만원이며, 일만 달란트라면 약 3조 6천억원이 된다. 그것은 엄청나게 큰 금액이다.

그 종이 어떻게 그렇게 많은 빚을 졌는지 모르나 그 빚은 한 개인으로서 갚기에 불가능한 액수이었다. 주인은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였다. 그 종은 엎드리어 절하며 말하였다.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그 종이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가 그 빚을 갚을 수 있는 능력은 전혀 없었다.

주께서 하신 이 비유는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 모두의 과거의 영적 처지를 암시한다. 성도들이 구원받기 전에 가지고 있었던 죄의 빚은 스스로 갚기 불가능한 양이었다. 그 죄 때문에 우리는 죽을 것이고 지옥의 형벌을 받아야 마땅하였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죄의 값은 죽음, 곧 영원한 지옥 형벌이었다.

그 종이 주인의 발 앞에 엎드려 다 갚겠으니 참아달라고 말했지만 실상 그 빚이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재산을 다 팔아도 갚기 어려울 정도의 금액이었듯이, 우리는 우리의 모든 소유를 다 팔아도 죽음과 영원한 지옥 형벌로부터 우리 자신을 구원할 수 없었다. 나의 몸, 나의 아내와 자식들, 나의 재산을 다 팔아도 나의 죄와 형벌을 갚는 데 부족할 뿐이었다. 신약성도는 이 사실을 깨달았다.

그 종의 주인은 그를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 모두에게 주신 구원이다. 구원은 우리의 행위로 얻거나 행위로 이루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주신 선물이다. 그가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으므로 우리를 구원하셨다. 구원의 원인은 하나님의 긍휼에 있다. 하나님께서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아야 마땅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용서해주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며 은혜의 구원이다.

[28-30절]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관이 엎드리어 . . . .

그런데 그 종은 나가서 그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한 데나리온이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니, 백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백일 품삯에 해당한다. 백 데나리온은 물론 적은 금액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만 달란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 종은 그 동료를 붙들어 목을 잡고 “빚을 갚으라”고 말했다. 그 동료가 “나를 참아 달라. 갚으리다”고 말하며 엎드려 간청하였으나, 그 종은 그 동료의 청을 허락지 않고 그가 빚을 갚도록 그를 옥에 갇히게 하였다. 그는 자기가 주인에게 일만 달란트 빚을 탕감받은 것을 기억하지 않았다. 만일 그가 그 큰 은혜를 기억하였다면, 그는 백 데나리온 정도의 빚은 기꺼이 탕감해주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주께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바는 우리가 서로의 허물과 잘못을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께서는 특히 우리가 서로를 용서해야 할 근거를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일만 달란트의 빚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범한 죄를 비유하며, 백 데나리온의 빚은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범한 잘못을 비유한다. 하나님께서 일만 달란트의 빚과 같은 우리의 죄, 곧 지옥 형벌을 받기에 합당했던 죄를 용서해주셨으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잘못을 범한 형제의 잘못을, 그것이 어떠한 잘못이라 할지라도, 용서해야 하는 것이다.

[31-34절] 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 . . .

그 종의 동료들은 그가 용서치 않음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였고, 주인은 그를 불러다가 말했다.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주인은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붙였다.

주인은 그 종에게 그가 베푼 것과 같은 긍휼을 그도 그의 동료에게 베풀었어야 했다고 말했다. 그 종은 주인에게 긍휼을 입은 것과 같이 그 자신도 그의 동료에게 긍휼을 베풀었어야 했다. 주인의 말은 정당한 말이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땅에서 서로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며 살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의 크신 긍휼을 입은 신약교인들은 마땅히 서로 긍휼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며 살아야 한다.

[35절]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 . . .

주께서는 결론적으로,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치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고 교훈을 주셨다. 용서는 우리가 선택사항이 아니고 반드시 해야 하는 필수사항이다. 주께서는 기도에 대해 가르치신 후에도,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치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고 말씀하셨었다(마 6:14-15). 사도 바울도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말했다(엡 4:32).

 

 

19장: 부자는 천국 들어가기가 어려움

1-12절, 이혼에 대하여

[1-2절]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갈릴리에서 떠나 요단강 . . . .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갈릴리에서 떠나 요단강 건너 유대 지경에 이르셨다. 그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죽으실 일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제 그는 갈릴리를 떠나 유대 지경으로 올라가셨다. 그의 갈릴리 중심의 사역이 끝났다. 그에게 남은 사역은 유대 지방에서, 특히 예루살렘에서의 일들이다. 큰 무리가 그를 좇았고 예수께서는 거기서 그들의 병을 고치셨다.

[3-6절]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가로되 . . . .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말했다.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주께서는 창세기 2장의 말씀을 인용하시며 대답하셨다.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나님께서는 한 남자와 한 여자를 만드셔서 결혼시키셨다. 결혼은 일부일처(一夫一妻)의 제도이었다. ‘사람이 부모를 떠나서’라는 말은 결혼이 자녀가 부모로부터 독립된 가정을 이루는 것을 뜻함을 보인다. 결혼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심으로 남녀가 한 몸을 이루는 것이다. 이제는 둘이 아니요 하나이다. 부부간의 관계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관계, 심지어 부모-자식보다도 더 가까운 관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어서는 안 된다.

[7-8절] 여짜오되 그러하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 . . .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이혼법을 들어 반문하였다. “그러하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증서를 주어서 내어버리라 명하였나이까?” 신명기 24:1,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보낼 것이요.”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 가운데는 이 법에서 ‘수치되는 일’(some uncleanness, 에르왓 다바르)이라는 말에 대해 두 가지 견해가 있었다고 한다. 솸마이파는 그것을 부부관계의 불성실, 즉 외도(外道)와 음행을 의미하는 것으로 바르게 해석하였으나, 힐렐파는 그것이 남편 마음에 상하거나 맞지 않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으로 넓게 해석하였다고 한다. 후자에 의하면, 아주 하찮은 구실로도 이혼이 가능하였다.

예수께서는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이혼법을 주신 것은 사람들의 마음의 완악함 때문이었다. 이혼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본래의 결혼 제도의 뜻과 다르다. 결혼은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관계이다. 결혼 서약은 영속적 성격을 가진다. 사람이 그 서약을 파한다고 파해지는 것이 아니다. 사실, 부당한 이혼들 때문에 세상이 얼마나 혼란한가?

[9절]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 . . .

주께서는 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 합당한 이혼은 상대방이 결혼 서약을 저버리고 음행한 경우이다. 상대방이 다른 사람과 정(情)을 통한 것은 부부관계에 있어서 가장 참을 수 없는 일이며, 그 분노는 정당성을 가지며 그 경우 이혼이 허락된다. 그러나 부당한 이혼은 하나님 앞에 간음죄에 해당한다.

전통사본에 보면,32) 예수께서는, “또 그 버리운 여자와 결혼하는 자도 간음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부당한 재혼을 정죄한다. 즉 부당한 이혼이 하나님 앞에서 인정될 수 없으므로 부당하게 버린 자나 버리운 자와의 재혼은 정당화될 수 없다. 그러나 정당한 이혼 후에는 재혼이 가능하다고 본다.

[10-12절] 제자들이 가로되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장가들지 않는 것이 좋삽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사람마다 이 말을 . . . .

제자들이,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장가들지 않는 것이 좋삽나이다”라고 말하자,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 어미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

독신(獨身)은 모든 사람에게 가능한 일이 아니다.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는 말은 “그것이 주어진 자들 외에는”이라는 뜻이다. 그들 중에는 날 때부터 고자(鼓子)된 자들이 있다. 이들은 선천적으로 결혼이 불가능하거나 심리적으로 결혼을 원치 않는 자들이다. 또는 궁중의 내시들과 같이 사람들이 만든 고자들도 있다. 마지막으로,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들이 있다. 사도 바울이 그런 경우일 것이다(고전 7:7).

그러나 이 말은 받을 만한 자들만 받을 수 있다. 독신주의는 강요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보통 결심을 넘어선다. 뿐만 아니라, 독신생활이 결혼생활보다 더 나은 생활방식이라는 생각도 잘못이다. 결혼은 하나님이 주신 신성한 제도이다.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면 결혼도, 독신도 복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은혜 주지 않으시면 그 어느 쪽도 복되지 않을 것이다.

 

13-15절, 어린아이들에게 안수하심

[13-14절] 때에 사람들이 예수의 안수하고 기도하심을 바라고 . . . .

그때에 사람들이 예수의 안수하고 기도하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려왔다. 누가복음은 사람들이 ‘자기 어린 아기’를 데려왔다고 말했다(눅 18:15). 사람들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자기 아이들이 하나님의 복을 받기를 원한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자기 아이들을 데려온 것은 잘한 일이었다. 오늘날도 믿는 부모들은 자기 아이들을 예배 모임에 참석시킬 뿐 아니라, 위하여 기도하고 또 기도받게 해야 한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것을 귀찮게 여겨 그들을 꾸짖었다.

마가복음은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고 분히 여기셨다고 증거하였다(막 10:14). 어린아이들을 무시하는 어른들의 행동은 주님의 분노를 일으키고 책망을 받을 만하다. 주께서는 또 “어린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그가 모든 어린아이에게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은 아닐 것이나, 믿는 가정에 태어난 아이들에게 그러하시다는 것은 분명하다.

신자들의 아이들은, 아직 신앙고백을 못하기 때문에 예수께 나올 수 없고 천국과 상관없는 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용납되고 환영을 받는다. 그들은 참으로 천국백성으로 간주될 만하다. 여기에 구약시대로부터 유아들에게 할례를 베풀므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했던 언약의 원리가 신약시대에도 보인다. 믿는 가정의 아기들은 구원받지 못한 이방인들이나 외인들이 아니고, 언약 안에 있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간주된다. 그들이 커서 하나님을 배반하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15절]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거기서 떠나시니라

예수께서는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거기서 떠나셨다. 마가복음에는 “그 어린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고 증거되어 있다(막 10:16). 그는 이처럼 실제로 어린아이들을 영접하셨고, 그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기도를 해주셨다. 그렇다면, 그의 제자된 우리 부모들이 어떻게 자녀들을 사랑하고 위하여 기도해야 할지 알 수 있고, 우리 믿는 어른들이 어떻게 교회에 나온 어린 생명들을 귀히 여기고 사랑하며 위하여 기도해야 할지를 알 수 있다. 천국에서와 교회에서는 어른이나 어린아이나 생명의 가치는 똑같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린아이 하나를 무시하는 것은 우리의 실수요 부족이다. 우리는 어린아이 하나를 귀히 영접하자.

 

16-22절, 한 부자 청년의 질문

[16-17절]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 . . .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말했다. 누가복음은 그를 ‘한 관원’이라고 말했다(눅 18:18). 마가복음에 보면, 그는 달려와 꿇어앉아 말했다(막 10:17). 아마 많은 사람이 있는 길에서 그러했을 것이다. 그것은 그의 진지함과 열심을 보인다. 전통본문에 보면, 그는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말했다.33) 영생은 인간에게 가장 관심 있는 문제일 것이다. 전도서 3:11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 속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고 말하였다. 사람은 누구나 오래 살기를 원한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전통본문에는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자가 없느니라”고 되어 있다.34) 이것은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의 본문과 같다. 주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신 것은 모든 사람이 선하지 않고 하나님만 선하시기 때문이며, 또 그 사람이 예수님을 단순히 한 선한 선생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실상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며 선한 분이시다.

주님께서는 그에게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구약의 율법의 내용을 반복하신 것뿐이다. 레위기 18:5는, “너희는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고 말했다. 그러나 사실상 계명들을 지켜 영생을 얻을 자는 아무도 없다. 계명들은 우리의 죄악됨을 깨닫게 해줄 뿐이다(롬 3:19-20). 그러나 사람은 율법을 통해 자신의 죄악됨을 깨닫게 된 후 그리스도께로 인도된다(갈 3:24).

[18-22절] 가로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 . . .

그 사람이 “어느 계명이오니이까?”라고 묻자, 예수께서는,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고 대답하셨다. 그는 십계명 중에 인간 관계에 대한 계명들을 주로 말씀하셨다. 사람의 죄성은 계명을 지키려 할 때, 또 지키려 할수록, 드러난다. 그것은 우리 자신을 정죄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과 의(義)가 필요함을 깨닫게 만든다.

그 청년은 말했다.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전통사본에는 “이 모든 것을 내가 어릴 때부터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라고 되어 있다.35) 이 청년은 상당히 착하게 살아왔던 것 같다. 마가복음에 보면,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그를 보시고 사랑하셨다(막 10:21).

그러나 주께서는,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셨다. 그의 요청은 그 청년의 문제점을 드러내었다. 그것은 물질에 대한 애착이었다. 그는 물질적으로 부유한 자이었다. 그의 문제는, 그가 그의 물질적 여유를 포기하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을까, 또 그가 물질적 여유가 있을 때는 비교적 정직하고 선하게 살 수 있었다고 할지라도, 가난할 때에도 그렇게 살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사람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마 6:24). 탐심은 우상숭배이다(골 3:5).

본문은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갔다고 말한다. 그는 겉으로는 착하고 진지하고 유망해 보였지만, 속에는 중대한 결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물질에 대한 애착 때문에 주의 말씀을 참으로 따를 수 없었다. 그러나 물질적 애착의 극복 없이는 사람에게 온전함이 없을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참으로 순종하지 못하였다. 그는 영생을 얻는 방법에 대한 해답을 들었지만, 영생을 얻지 못하고 돌아섰다. 물질에 대한 애착 때문에 그는 영생의 주님을 따르지 못하고 돌아섰다.

 

23-30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 어려움

[23-24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 . . .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천국’과 ‘하나님의 나라’는 동의어(同義語)로 쓰였고 그것들은 ‘영생’(16절)과 ‘구원’(25절)과도 동의어로 쓰였다. 주께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지는 않으셨으나, 그것이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기보다 더 어렵다고 하신 것은 그것이 거의 불가능함을 보인다. 물질이 그에게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부자가 되는 것은 결코 복이 아니다.

[25-26절]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가로되 그런즉 누가 . . . .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심히 놀라며 말했다.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예수께서는 그들을 보시며 말씀하셨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는 거의 불가능하지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면 가능하다는 뜻이다. 하나님께는 구원의 능력이 있다.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욥도 부자이었지만(창 13:2; 26:12-14; 욥 1:3)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경건한 자들이었다.

그러나 사람은 자기 스스로 물질에 대한 애착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예’ 하고 대답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때에 물질에 대한 애착을 버리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다. 그는 자기의 모든 소유를 하나님의 것으로 인식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선한 일에 쓸 수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 물질적 부요는 신앙과 영적 성장과 성화에 걸림돌이 된다.

[27-29절]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 . . .

그때 베드로가 말하였다.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아내나]36)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백 배]37)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은 그물과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랐다(마 4:20, 22). 오늘날도 전도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라야 한다. 주께서는 그렇게 주님을 따른 제자들에게 좋은 것을 약속하셨다. 그는 세상이 새롭게 될 때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는 권세를 그들에게 주겠다고 말씀하셨다. 또 그는, 그들이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아내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렸다면, ‘백 배’를 받고 확실히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백 배를 받는다는 말씀은 현세와 내세에서 받을 것들을 다 포함할 것이다.

영생을 상속한다’는 말씀은 이런 헌신의 대가로 영생을 획득한다는 뜻이 아니고 단지 이런 헌신이 영생을 얻는 확실한 표가 된다는 뜻일 뿐이다. 주님께 자신을 드린 자는 확실히 영생에 이를 것이다.

[30절] 그러나 먼저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주께서는 “그러나 먼저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고 첨가해 말씀하셨다. 주님의 이 말씀은 일차적으로 먼저된 이스라엘 백성이 나중 되고 나중된 이방인들의 다수가 먼저 될 것을 의미했을 것이다. 그러나 동일한 원리가 이방인 교회 안에서도 적용될 수 있다. 신자에게는 믿은 연도가 중요하지 않고 지금 어떻게 믿고 있는가가 중요하다. 비록 늦게 믿기 시작한 자라도 믿음생활에 앞설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안일하고 높은 마음을 버려야 한다. 지금이 중요하다. 지금 우리는 말씀과 기도로 살며 계명들을 지키며 물질에 대한 애착을 버려야 한다. 우리가 이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죄를 깨닫고 회개해야 한다.

16-30절에서 우리가 얻는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그의 계명을 순종하는 것이다. 주께서는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말씀하셨다. 사람이 계명들을 지키는 것은 율법의 뜻이며 어느 시대나 변함 없는 하나님의 뜻이다. 레위기 18:5, “너희는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 신명기 5:32-33, “그런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대로 너희는 삼가 행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모든 도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삶을 얻고 복을 얻어서 너희의 얻은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하나님의 뜻은 변함이 없다. 우리는 그의 계명들을 순종하자.

둘째로,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다. 사람이 하나님의 계명들을 온전히 순종하려 하면 할수록, 자신이 그 계명들을 순종치 못한 부족한 죄인임을 깨닫고 절망하게 된다. 율법은 우리를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며,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로마서 3:21-24,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셋째로, 우리가 참으로 영생에 이르고자 하는 자라면 우리는 물질에 대한 애착과 욕심을 끊어 버려야만 한다.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매우 어렵다. 우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마 6:24). 우리는 자신을 부정해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고(마 10:24-26), 모든 소유를 버려야 주의 제자가 될 수 있다(눅 14:33). 주의 말씀대로, 재물의 욕심은 영생의 길을 방해하는 가시떨기와 같다(마 13:22). 디모데전서 6: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우리는 물질에 대한 애착과 욕심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라야 한다. 그것이 영생에 이르는 성도의 바른 삶이다.

 

 

20장: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

1-16절, 포도원 품꾼 비유

[1절] 천국은 마치 품군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 . . .

주께서는 천국이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주인과 같다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신약교회를 가리킨다. 신약교회는 다니엘 2:44에 예언된 하나님의 나라의 시작이다. 우리는 예수 믿고 구원받음으로 이미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로 들어왔다(골 1:13).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이다(벧전 2:9). 포도원의 집주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집주인이 이른 아침에 나간 것은 포도원에 일할 품꾼들을 구하기 위해서이었다. 추수 시기에는 일꾼이 부족하여 포도원 주인이 사람들이 많은 길거리나 시장터에 나가 품꾼들을 구한다. 이른 아침은 시대적으로는 신약시대 초기를 가리키겠으나, 개인적으로는 사람의 어린 시절을 가리킬 것이다.

[2절] 저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군들과 약속하여 . . . .

포도원 주인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며 포도원에 들여보냈다. 포도원의 일은 포도열매를 따는 것이다. 성도의 일은 교회에 들어와 우선 자신의 영적 성장을 힘쓰는 것이다. 그는 예배에 잘 참석하고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며 봉사의 일을 힘쓰고 다른 이들과 함께 기도하고 헌금도 한다. 또 그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구원의 소식을 전한다.

한 데나리온은 구원과 영생과 천국을 가리킨다. 품삯이라는 표현은 마치 구원이 행위의 대가(代價)처럼 들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다(엡 2:8-9). 주인은 일방적으로 품꾼들을 불렀고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정하였다. 주인이 불러주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그 포도원에서 일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 데나리온은 온종일의 일에 대한 대가가 아니었다. 단 한 시간만 일하고서도 한 데나리온을 받은 자들이 있었다.

[3-7절] 또 제3시에 나가 보니 . . . .

주인은 또 제3시 즉 오전 9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섰는 사람들이 또 있었다. 그는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그들도 포도원에 들어갔다. 주인은 제6시 즉 정오와, 제9시 즉 오후 3시에 또 나가 그같이 했다. 그는 제11시 즉 오후 5시에도 나가 보니 [게으르게](전통본문)38) 섰는 사람들이 또 있었다. 주인이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섰느뇨?”라고 묻자, 그들은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고 대답했다. 주인은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네가 상당하게 받으리라(전통본문)39)”고 말했다.

오후 3시나 5시에 포도원으로 부름을 받은 자들은 하루종일 특별히 하는 일 없이 놀기만 한 자들이었다. 오후 3시나 5시는 시대적으로는 신약교회시대의 마지막에 해당할 것이며, 개인적으로는 인생의 노년기에 해당할 것이다. 주께서는 포도원에 들어오지 않은 자들을 게으르게 노는 자들이라고 표현하셨다. 그가 우리를 부르시는 시점은 다양하지만, 공통점은 우리가 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그의 포도원인 교회에 들어와 일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의 일은 바로 우리 개개인의 신앙생활과 교회생활을 가리킨다.

아직도 날이 저물지 않았다. 아직도 포도원에 일할 일거리가 남아 있다. 주께서는 우리에게 일평생 허송세월하다가 생을 마치겠는가고 물으신다. 그는 우리에게 이제라도 자신의 구원과 영적 유익을 위해, 또 다른 이들의 구원과 영적 유익을 위해, 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다가 생을 마치라고 말씀하신다. 그의 재림이 가까운 이 시대에도 말씀하시고 청년들뿐 아니라, 노인들에게도 말씀하신다.

[8-9절]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 . . .

오후 6시쯤이 되면 날이 저물고 하루 일과가 마친다. 포도원 주인은 청지기에게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품삯을 주라”고 말했다. 제11시 즉 오후 5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았다. 그들은 1시간만 일했지만 하루 품삯인 한 데나리온을 받았다. 그 주인은 참 후한 사람이었다. 한 데나리온은 천국과 영생을 가리켰다.

이 말씀은 천국과 영생이 인간의 수고의 대가(代價)로 얻어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행위주의, 공로주의 관념은 성경 전체의 진리에 반대된다. 사람은 자기 행위의 공로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 우리의 행위는 하나님의 엄격한 요구에 미달한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사역으로만 또 오직 그를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다(롬 3:21-24).

[10-12절]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 . . .

먼저 온 자들이 품삯을 받을 차례가 되었을 때, 그들은 더 받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만 받았다. 그들은 받은 후 집주인을 원망하며 말하였다.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앞장에서 베드로는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라는 물었었다. 이른 아침부터 일한 품꾼들은 처음부터 사도로 부름받은 열두 제자들을 의미했을 것이다. 그들의 수고는 나중에 부름받은 자들에 비해 컸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들이 받는 품삯은 약속된 한 데나리온뿐이지, 그 이상의 것은 아니다. 동일한 한 데나리온이 모든 품꾼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공로주의적 사고방식에 역행한다. 주께서는 모든 진실한 성도들에게 영생과 천국이라는 동일한 선물을 주실 것이다. 먼저 믿는 자에게나 나중 믿는 자에게나 동일한 천국을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름받은 시대나 나이를 관계치 말고, 오직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 충성하면 된다.

[13-15절]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 . . .

주인은 그 품꾼들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했다.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주인의 처사는 공의로운 것이었다. 왜냐하면 주인은 품꾼들에게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약속했기 때문이다. 포도원에 늦게 온 자들에게도 똑같은 품삯을 주는 것은 주인의 뜻에 따른 것이었다. 주인의 재산을 주인의 뜻대로 하는 것은 아무런 잘못이 아니며, 또 포도원에 늦게 들어온 품꾼들에게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주는 것은 선한 일이지 악한 일은 아니었다.

[16절]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 . . .

주께서는,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나중에 일꾼된 자들은 이방인들, 먼저 일꾼된 자들은 유대인들을 가리키며, 또 나중에 일꾼된 자들은 신입교인들을, 먼저 일꾼된 자들은 오래된 교인들을 가리킬 수 있을 것이다. 신앙생활에는 햇수보다 진지함과 성실함이 더 중요하다. 전통본문에는 16절 끝에 “이는 많은 사람이 부름을 입으나 적은 사람이 택함을 입음이니라”는 말씀이 있다.40)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초청을 받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하는 자는 많지 않다.

1-16절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포도원에 빨리 들어가 일하자.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믿고 주님의 뜻에 순종하고 교회의 회원이 되어 예배 모임들에 힘써 참여하고 봉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참된 교회를 분별하여 소속하고 그 교회에 충실한 교인이 되고 그 교회의 모든 집회들에 참석하고 말씀과 기도로 살며 주님의 일에 참여하고 봉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만 감사하며 남과 비교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만 충성하자. 이방인이며 의가 없는 우리를 주께서 구원하셨다. 그는 우리에게 영생과 천국을 약속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서로를 존중하며 오직 하나님만 바라며 충성하자.

 

17-19절,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세 번째 예언하심

[17-19절]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決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박게 하리니 제3일에 살아나리라.

 

20-28절,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함

[20-21절] 그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 . . .

그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자 예수께서 “무엇을 원하느뇨?” 하고 물으셨다. 그는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라고 말하였다. 여기에 어머니들 속에 그리고 모든 사람 속에 있는 욕심이 보인다. 자기와 자기 자녀들이 남들보다 더 나은 자, 더 높은 자가 되기를 원하는 욕심이다. 그것은 세상적 욕심이요 헛된 명예심이다. 그것은 부패된 허영심이다. 사람이 이런 세상적 욕심을 제거하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그러나 성도는 이런 욕심을 품지 않도록 자신의 마음을 단속해야 한다.

[22-24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 . . .

예수께서는 대답하셨다.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들은 말하였다. “할 수 있나이다.” 주께서는 말씀하셨다.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하나님 나라의 명예는 세상적 욕심으로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 자신은 십자가에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심으로 영광을 받으실 것이었다. 그와 같이, 주의 나라에서의 명예는 이 땅의 방식과 다른 방식, 곧 주와 함께 고난을 받는 방식에 의해 얻어질 수 있을 뿐이다. 그들은 그것을 잘 알지 못했던 것 같다.

주의 마시려는 잔을 자기들도 마시겠다고 말한 것을 보면, 그들의 중심은 그 점에서 순진했던 것 같다. 십자가의 고난을 잘 모르는 채 그들은 그 고난의 잔을 마실 수 있다고 용감하게 대답하였다. 주께서는 그들이 주의 고난에 참여할 것을 암시하셨다. 그러나 주의 좌우편에 앉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비하신 자에게 주어질 것이다. 지금 그것은 감추어진 하나님의 작정이며 하나님의 기쁘신 뜻의 일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감추어진 것을 알려고 할 것이 없다. 그런 관심 자체가 올바르거나 선하지 못하다.

열 제자는 그 말을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해 분히 여겼다. 그것은 그들 속에도 같은 욕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남보다 높아지려는 욕심이 없는 곳에는 그런 유의 분노가 있지 않을 것이다.

[25-27절]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 . . .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불러다가 말씀하셨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집권자’는 통치자들, ‘대인’(大人)은 고위 관리들을 가리킨다.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여 그들을 지배하는 것은 세상나라에서 볼 수 있는 일이요 방식이다. 남을 지배하려는 태도는 타락한 인간의 본성적 행위인 것 같다. 이것이 세상 나라의 모습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는 전혀 다른 원리와 방식으로 운영되어야 한다. 교회에는 남을 지배하는 자들이 없어야 한다. 주께서는 그런 유의 권위를 부정하신다. 모든 신자는 왕 같은 제사장들이며 한 목표인 주의 영광을 위해 서로 협력하는 자들이어야 한다.

교회 안에 큰 자가 있다면 남을 섬기는 자가 그러하다. 아, 얼마나 세상과 다른 원리요 방식인가! 그러므로 누구든지 교회에서 큰 자가 되려고 하거나 으뜸이 되려고 하면, 다른 성도들을 겸손히 섬겨야 한다. 교회에서 훌륭한 자는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는 자가 아니고, 자기를 낮추고 겸손히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자이다.

사실, 이렇게 하면 거기에는 갈등이나 분쟁이나 분노가 결코 없을 것이다. 인간 공동체의 갈등과 분쟁과 싸움은 불의와 거짓, 그리고 교만에서 생기는 현상일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하나님의 법을 힘써 지키며 자신을 낮추고 서로 섬기려 한다면, 그런 곳에는 아무 싸움이나 갈등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 곳이 곧 천국의 모형이다.

[28절]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 . . .

주께서는 또,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자신의 모범으로써 그의 교훈의 무게를 더하셨다. 그는 섬김을 받으려고 세상에 오지 않으셨고 도리어 많은 사람들을 섬기시며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기 위해 오셨다. 주님의 사역의 핵심은 대속물로 자신을 주신 것이다. 이것은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의 의미이다. 그러나 그의 사역은 부수적으로 그의 낮아지심과 섬김을 보인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를 믿고 따른다면, 우리도 남을 섬기며 남을 위해 우리의 목숨도 바칠 각오를 해야 하는 것이다.

 

29-34절, 소경들을 고쳐주심

[29-30절] 저희가 여리고에서 떠나갈 때에 큰 무리가 예수를 . . . .

그들이 여리고에서 떠나갈 때 큰 무리가 예수님을 좇았다. 여리고는 예루살렘에 가까운 마을이다. 소경 둘이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질렀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다윗의 자손’은 구약성경에 약속된 메시아를 가리킨다. 그들은 불쌍한 소경이었지만 놀랍게도 예수께서 하나님의 약속된 메시아라는 지식과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아마 들리는 소문을 통해 또 하나님의 은혜로 그런 지식과 믿음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31절]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질러 가로되 . . . .

무리들은 그 불쌍한 소경들을 동정하기는커녕 그들을 꾸짖으며 “잠잠하라”고 말하였다. 그들은 비록 예수님을 좇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었을지라도 그의 동정심을 갖고 있지 못했다. 소경들이 고침을 받는 데는 예수님 측근에 둘러서 있는 사람들이 도움을 주는 자들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방해거리였다. 그러나 그 소경들은 더욱 소리질러 말하였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주께 나아가는 자는 사람의 방해 때문에 낙심치 말아야 한다.

[32절]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희를 불러.

소경들의 낙심치 않는 부르짖음은 마침내 주님의 관심을 끌었다. 예수께서는 머물러 서셨고 그들을 부르셨다. 주께서는 이전에 “구하라, 주실 것이요”라고 가르치셨다. 그때에나 지금에나 기도하는 자가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얻는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무엇을 받을 것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기도하면, 그리고 낙심치 않고 계속 또 더욱 부르짖어 기도하면, 그가 그의 시선을 우리에게 돌리시고 우리의 기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하기를 힘쓰며 기도할 때 낙심치 말아야 한다.

[33-34절] 가라사대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 . .

예수께서는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셨다. 그들은 “주여, 우리 눈뜨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소경들의 소원은 분명하였다. 그들은 눈을 뜨기를 원하였다. 우리는 주님께 나아가 기도할 때 우리의 소원을 분명하게 하여야 한다. 우리는 중언부언하지 말고 명확하고 구체적인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또한 확실한 기도의 응답을 얻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민망히[긍휼히] 여기셔서 그들의 눈을 만지셨다. 그는 인생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기시고 동정하시는 사랑의 주님이시다. 그러자 그들은 곧 보게 되었다. 그는 인생의 연약함을 치료하시고 도우실 수 있는 능력의 주님이시다. 사랑과 능력이 함께할 때 치료와 구원이 가능케 되었다. 주의 능력의 치료와 구원은 신속하고 완전하였다. 여기에 다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신적 영광이 나타났다. 치료받은 그 소경들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랐다.

 

 

21장: 예루살렘에 올라가심

1-11절, 나귀 타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심

[1-3절] 저희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산 벳바게에 . . . .

예수님의 일행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는 두 제자를 보내시며 말씀하셨다.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를 끌고 오라”고 증거한다. 그것은 어미를 떨어질 수 없는 어린 새끼이었다. 주께서는 그의 전지하신 눈으로 그 나귀 새끼를 보셨다. 또 “나귀를 풀어 내게로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고 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무례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것은 주께서 온 세상의 주인이심을 보인다. 그는 온 우주의 큰 주인이시며, 원하시는 대로 무엇을 취하거나 사용하실 수 있는 자이시다.

[4-5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 . . .

마태는,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고 말한다. 그는 주님의 말씀이 스가랴 9:9의 메시아 예언의 성취임을 증거한다.

말은 전쟁의 동물이요 나귀는 평화의 동물이라고 한다. 이방의 왕들은 말을 탔고 나귀를 타지 않았다. 나귀는 경멸을 당하는 짐승이었다. 주께서 나귀를 타신 것은 그의 겸손을 나타낸다. 그것도 어미에게 의존하는 나귀 새끼를 타신 것은 더욱더 그러하다. 그리스도의 왕국은 세상 왕국처럼 외적 영광을 따르지 않는다. 여기에 지극히 비천한 자들에게까지 미치는 은혜의 복음이 있다. 어떤 비천한 자들도 예수께로 나아올 수 있고 그는 그들을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6-7절] 제자들이 가서 예수의 명하신 대로 하여 나귀와 . . . .

제자들이 가서 예수의 명하신 대로 하여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자 예수께서 그 위에 타셨다. 옷을 그 위에 얹은 것은 안장을 대신해서였다. 주께서는 어린 나귀 새끼, 아직 안장도 없는 짐승을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다. 주께서는 자기 소유 혹은 공동 소유의 나귀 한 필도 없으셨다. 그는 가난한 삶을 사셨다. 지극히 부유하신 하나님의 아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그의 소유이셨던 그가 지극히 가난한 자가 되신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제자된 우리의 삶이 어떠해야 할지 분명하다.

[8-11절] 무리의 대부분은 그 겉옷을 길에 펴며 다른 이는 . . . .

무리의 대부분은 그 겉옷을 길에 펴며 다른 이는 나무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질렀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이는 누구뇨?”라고 말하자, 무리가 말했다.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무리가 겉옷을 길에 펼치는 것은 왕에 대한 존경심의 표현이다. 무리의 대부분은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으로 여기며 환영하고 기뻐하였다. 그들은 예수를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로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있었다. 비록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그를 거절했고 죽일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무리들을 감동하여 그를 증거하며고 그를 찬양케 하셨다. 얼마나 감격스런 일인지!

그러나 며칠이 지나면 그들 중 다수는 변절하여 “저를 십자가에 못박으소서”라고 외칠 것이다. 이것이 변태무쌍한 인간의 마음이며 믿을 수 없는 사람의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을 너무 믿어서는 안 된다(사 2:22). 사람들이 우리를 존경한다고 너무 감격할 것도 없고 우리를 멸시한다고 너무 낙심할 것도 없다.


12-17절, 성전을 깨끗게 하심

[12절]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 . . .

예수께서는 [하나님의]41)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셨다. 하나님의 성전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을 위해 쓰여야 할 거룩한 곳인데, 그 곳이 불의의 이익을 얻는 매매의 장소로 악용되었다. 이것은 종교의 타락이었다. 거룩하고 경건한 종교의 이름 아래 자기의 이익을 노리는 이 불의한 종교지도자들은 성전 안에서 돈 바꾸고 비둘기 파는 자들과 결탁되어 있었음이 분명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목표로 삼고 일하기보다 눈에 보이는 땅에 속한 것, 썩어지고 불타 없어질 것을 구하는 가련한 종교가들! 예수께서는, 회개하는 죄인들을 향하여는 동정하였으나, 성전을 더럽히는 자들에 대해서는 격노하셨다. 주님은 온유하며 겸손하시지만, 종교의 타락에 대해서는 분노하셨던 것이다.

[13절]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 . . .

주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주님의 종교 개혁은 종교가 성경의 본래의 가르침대로 환원되어야 한다는 정신에 근거하였다. 성경은, 성전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예배의 처소라고 가르쳤다(사 56:7). 그러나 이러한 순수한 성전 종교가 예배자들의 주머니의 돈을 교묘히 긁어모으는 행위로 변질되었다.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 종교 개혁은 항상 성경에 근거해야만 된다. 요시야의 개혁, 히스기야의 개혁이 그러하였고, 루터와 칼빈의 종교 개혁도 그러하였다. 오늘날의 종교개혁도 오직 성경의 교훈으로 돌아감으로써만 시작될 수 있고 성취될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은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사는 것이다.

[14절] 소경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 주시니.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의 위선적 행위들에 대해서는 격노하고 동정심을 보이지 않으시던 주님이지만, 성전에서 그에게 나아온 소경과 절뚝발이들에게는 긍휼과 능력을 베푸셨다. 그들은 예수께 나아와 고침을 받았다. 주께서는 뻔뻔스런 악인들에게는 노하셨지만, 도움을 구하는 죄인들에게는 긍휼을 베푸셨다.

[15-17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의 하시는 이상한 . . . .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의 하시는 이상한 일들 곧 병고침의 기적들과 또 성전에서 소리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아이들을 보고 분하여 예수께 말하였다. “저희의 하는 말을 듣느뇨?”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그는 그들을 떠나 성밖으로 베다니에 가서 거기서 유하셨다.

주께서는 자신의 신적 영광을 많이 드러내셨지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오히려 그것들에 대해 분노하였다. 이것이야말로 이상한 일이다. 또 성전에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아이들이 있었는데 그들에 대해서도 그들은 분노하였다. 사실, 메시아를 영접해야 할 저 지도자들이 주님을 거부하고 그를 죽이려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어린 아기들을 동원하여 주를 찬송케 하셨던 것이다.

 

18-22절, 무화과를 저주하심

[18절]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예수께서는 시장하셨다. 예수님의 측근에 있던 사람들은 물질적 여유가 있는 부유한 자들이 아니었던 것 같다. 이른 아침이긴 하지만, 예수님 일행에게 아침식사를 제공하는 자가 없었던 것 같다. 이와 같이, 주께서는 비교적 가난한 환경에서 사역하셨다. 그러나 그런 환경은 그의 사역에 아무런 지장이 되지 않았다. 하나님의 사역은 가난 때문에 좌절되지 않는다.

[19절] 길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 . . .

예수께서는 길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셔서 잎사귀밖에 아무것도 얻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시자 무화과나무가 곧 말랐다.

복음서들은 때때로 사건을 간략히 증거한다. 마가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던 날에 성전에 들어가 모든 것을 둘러보시고 때가 저물자 열두 제자들을 데리고 베다니에 나가셨다. 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일이 있었고, 그 날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쫓고 성전을 깨끗게 하셨다. 매일 저물 때마다 그들은 성밖으로 나갔다. 아마 그 다음날 아침, 그들이 지나갈 때에 저주받은 무화과나무가 뿌리로부터 마른 것을 보았다. 마태복음은 이틀 간의 사건을 한 사건처럼 간략히 증거했다. 그러면 여기 ‘곧’이라는 말은 저주를 선언한 지 여러 날이 지나지 않고 하루만에라는 뜻이 될 것이다.

시장하신 예수께서는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있을까 하여 가까이 가셨다. 마가복음에는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것도 없더라”고 증거하였다(막 11:13). 여기에 예수님의 인성의 증거가 있다. 인간 예수님은 배고픔을 느끼셨고 지식의 제한성을 가지셨다. 그는 멀리서 무화과나무의 열매가 있는지 없는지 알지 못하셨다. 그의 인성은 우리의 것과 같은 참된 인성, 즉 육신적 연약성과 지식의 제한성을 가진, 그러나 죄는 없는 인성이셨다(히 4:15).

예수님의 무화과나무 저주는 부당한 그의 감정풀이셨는가? 무화과는 열매가 먼저 생긴 후 잎사귀가 커진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잎사귀가 있다는 것은 열매가 이미 열렸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이 나무의 경우는 비정상적이었다. 열매가 열리지 않은 채 잎사귀만 무성하였다. 이것은 선한 행위의 열매가 없이 종교적 형식들만 가득한 당시의 타락한 종교를 잘 나타내 주는 것 같았다.

[20-22절]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가로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 . . .

제자들은 보고 이상히 여겨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라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주께서는 이 일을 통해 믿음으로 하는 기도의 힘을 가르치셨다. 죽기 위해 올라가셨던 예루살렘에서, 또 이제 며칠 후면 십자가의 형틀을 지실 그가 제자들에게 기도하도록 교훈하며 격려하신 것이다. 물론, 우리는 이 교훈을 오늘날 은사주의자들처럼 기적을 추구하는 근거로 삼아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교회 역사에서 기적들을 주심으로 섭리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주의 교회의 복음 사역이 얼마나 놀라웁게 전진해 왔는지! 복음 사역에 많은 장애물들이 있었지만, 기도하는 종들을 통해, 그들의 믿음의 기도를 통해 그 장애물들은 극복되었다. 때로는 순교의 피를 흘려야 하였지만, 복음 전파의 대행진은 꺾이지 않고 힘차게 진행되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한 기적을 추구하는 자들이 아니지만, 회개와 변화는 언제나 기대한다. 우리는 오늘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고 강건케 하시고 자기 교회를 견고하게 하시기를 기대한다.

 

23-32절, 권위의 근원을 질문함

[23-27절]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새 대제사장들과 . . . .

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 때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또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뇨?”라고 말했다.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권위의 근원에 대해 질문한 것이었다. 이것은 믿어보려는 순수한 동기에서 했다기보다 비난하려는 불순한 동기에서 했다고 보인다.

예수께서는 지혜롭게 되받아 질문하심으로써 그들의 위선의 악을 드러내셨다.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그들은 요한도 인정치 않았고 그가 증거한 예수님도 인정치 않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인정치 않을 뿐 아니라, 그를 죽이려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의논하기를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만일 사람에게로서라 하면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니 백성이 무섭다” 하여, 예수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고 대답하였다. 예수께서도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고 대답하셨다. 예수님의 권위의 근원은 세례 요한과 같이 하나님께로부터이었다. 그러나 저 악하고 위선적인 지도자들은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28-30절]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한 사람이 . . . .

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이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싫소이다 하더니 그 후에 뉘우치고 갔느니라.” 헬라어 전통본문에는, 맏아들이 처음에 싫다고 대답했으나 후에 뉘우치고 갔고, 둘째 아들이 처음에 가겠다고 대답했으나 가지 않았다고 되어 있다.42)

[31-32절]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 . . .

주께서는 계속,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라고 물으셨다. 그들은 “둘째 아들이니이다”라고 대답하였다. 헬라어 전통본문은 여기서도 첫째 아들이라고 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셨다. 포도원은 하나님의 나라 곧 신약교회를 상징하였고, 맏아들은 세리들과 창기들을, 둘째 아들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을 상징하였다.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저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기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종시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세리들과 창녀들은 처음에는 하나님의 뜻을 저버렸으나 요한이 옳은 길을 외칠 때 회개하였다. 그러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 자부하였지만, 요한이 전하는 말씀을 따라 회개하지도 않았다. 누가 하나님의 뜻을 따른 자인가? 겉으로만 종교적이게 보이고 내면적으로 주님과 먼 위선자들이 아니고, 외적으로 죄인처럼 보이나 내면적으로 회개하고 주님을 믿고 그의 긍휼을 바란 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른 자이었다. 신앙생활은 처음보다 끝이 그리고 입술의 고백보다 실생활의 열매가 더 중요하다.

 

33-46절, 포도원 비유

[33-39절] 다시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다시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거기 즙 짜는 구유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포도원은 구약교회 즉 이스라엘을 가리켰고(사 5:2), 포도원을 만든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농부들 즉 포도원 소작인들은 이스라엘 지도자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교회를 위탁받은 일꾼들이다.

주께서는 계속 말씀하셨다. “실과 때가 가까우매 그 실과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거늘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니 저희에게도 그렇게 하였는지라.” 열매는 구원의 열매, 즉 의와 거룩의 삶이다. 주인의 종들은 선지자들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의롭고 거룩한 나라가 되기를 소원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영접하지도, 그들의 말을 듣지도 않았고, 오히려 그들을 핍박하고 죽였다. 하나님께서 많은 종들을 더 보내셨지만, 그 지도자들은 그들에게도 그러하였다.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가로되 저희가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 하고 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어쫓아 죽였느니라.”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종들이지만, 예수님은 그의 아들이시다. 유대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공경하기는커녕 도리어 예루살렘 밖에서 죽일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예언하셨다.

[40-43절]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이 농부들을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이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뇨? 저희가 말하되 이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실과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貰)로 줄지니이다.” 주인은 그 악한 농부들, 곧 위선적 지도자들을 멸하고 포도원을 제 때에 실과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주실 것이다.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예수님은 마치 건축자들의 버린 돌과 같으시다. 유대의 지도자들은 그를 버렸으나 그는 교회의 머릿돌이 되셨다. 이것은 사람이 한 일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하신 일, 곧 기이한 일이다.

이 비유의 요점은, 의롭고 선한 행실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나라를 빼앗기고 의롭고 선한 행실을 가지는 신약교회가 그것을 대신할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의롭고 선한 행실과 삶이며, 참된 구원은 그런 행위와 삶으로 나타난다.

[44-46절]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 . . .

예수께서는 또,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자신을 돌에 비교하셨다(단 2:34-35). 이 돌은 구원의 돌이며 심판의 돌이다. 완고한 자도 이 돌 위에 떨어지면 심령이 부서지고 이 돌이 악인 위에 떨어지면 그를 부술 것이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그를 잡고자 하였으나 무리를 무서워하여 하지 못했다. 그것은 무리들이 예수를 선지자로 알았기 때문이었다.

 


22장: 유대의 지도자들과 변론하심

1-14절,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 비유

[1-3절]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 . . .

예수께서는 다시 비유로 대답하셨다.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앞장의 포도원 비유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 분으로 묘사되었으나, 이 비유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무엇을 주시는 분으로 묘사되었다. 앞의 비유에서 요구하시는 바는 구원에 합당한 행위이지만, 여기에서 주시는 바는 값없이 주시는 구원의 기쁨과 즐거움이다. 혼인잔치는 기쁘고 즐거운 시간이다. 이 비유에서 하나님은 왕으로, 예수님은 왕자로, 천국은 왕자의 혼인잔치로 묘사되었다. 왕은 종들을 보내어 그 혼인잔치에 초청된 자들을 오라고 하였다. 종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전도자들을 가리키며, 먼저 초청된 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킬 것이다. 그러나 왕의 초청을 받은 그들은 그 혼인잔치에 참여하기를 싫어하였다.

[4-5절]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가로되 청한 사람들에게 . . . .

주께서는 계속 말씀하셨다.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가로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저희가 돌아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 차로 가고.” 왕은 한번 더 다른 종들을 보내어 초청하였다. 이것은 왕의 인내요 친절이었다. 이번에는 잔치의 풍성함을 좀더 자세히 설명하며 초청하였다. 그러나 저들은 세상의 일들에만 관심을 두고 왕의 초청에는 관심이 없었다. 아니, 이것은 단순히 무관심이 아니고 왕의 초청에 대한 멸시이었다. 사람들은 세상일 때문에 하나님의 복음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그것을 멸시하는 것이다.

[6-7절]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니 임금이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니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초청을 받은 자들이 그 초청을 멸시하며 자기 일들을 보러 가버렸을 뿐 아니라, 그 남은 자들은 그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였다. 이것은 좀더 악하였다. 이와 같이, 복음의 초청을 먼저 받은 이스라엘 백성은 그 초청을 싫어하고 경멸하였고 심지어 그것을 전한 하나님의 선지자들과 종들을 핍박하고 죽였다. 이스라엘은 국가적으로, 민족적으로 복음을 거절하였다. 마침내 왕은 진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악한 자들을 죽이고 그 동네를 불살랐다. 이것은 주후 70년경 로마 군대에 의한 예루살렘 멸망의 사건을 가리켰을 것이다. 이방의 군대들은 하나님의 징벌의 몽둥이였다.

[8-10절]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잔치는 예비되었으나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잔치는 예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대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 기쁘고 즐거운 메시아의 혼인잔치가 준비되었으나 처음 청함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잔치에 합당치 않았다. 사거리 길에 있는 사람들은 이방인들을 가리킨다. 이번에는 온 세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초청을 받고 있다. 드러난 악인이든지 비교적 선한 자이든지 구별 없이 모든 사람이 초청을 받아 교회로 나아온다. 혼인잔치에 사람들이 가득하듯이, 하나님의 교회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로 가득하게 될 것이다.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구원을 얻을 것이다.

[11-14절]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임금이 손[손님]을 보러 들어올 때에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아무 말이 없거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그런데 예복을 입지 않고 참여한 자가 있었다. 이 예복은 잔치에 참여하는 자가 반드시 입어야 하는 옷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왕이 그것을 문제삼지 않았을 것이다. 이 예복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은 의이다. 이사야 61:10이 말한 ‘의의 겉옷’이다. 신약성경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고 표현하였다(롬 13:14; 갈 3:27). “나의 의는 이것뿐, 예수의 피밖에 없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믿는 믿음으로 얻는다. 사람들은 누가 예복을 입었는지, 누가 입지 않고 교회에 들어와 앉아 있는지 알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의 눈에는 금방 드러난다.

예복을 입지 않은 자는 변명할 여지가 없다. 예복은 자기가 마련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며 그 예복을 입지 않은 자는 단지 교만과 불신앙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의를 거절하고 자기의 행위의 의를 의지하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그 잘못은 주님께 있지 않고 전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있다. 그러므로 예복을 입지 않은 자는 정죄될 것이다. 에수의 의가 아니고서는 아무도 구원을 얻을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롬 10:4). 예수의 의를 힘입지 않는 자는 멸망을 받을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기쁨과 영광으로부터 추방되어 지옥에서 슬피 울며 고통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복음으로 청함을 받은 자들은 많지만, 택함을 입은 자들은 적을 것이다.

 

15-22절, 세금 문제에 대한 질문

[15-7절]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로 말의 . . . .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로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의논하고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였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

하나님의 원수들은 잠시라도 쉬지 않고 활동한다.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은 종교적, 정치적 견해가 서로 다른 자들이었으나, 예수님을 핍박하는 데는 힘을 합하였다. 오늘날도 다양한 사상들과 입장들을 가진 사람들이때때로 하나님의 일을 대적하는 데는 힘을 합한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 진심으로 존경하듯이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예수님의 장점들은 저 악한 자들의 편에서도 부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참되셨고 진리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셨고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셨다.

들은 계속 말했다.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당시 유대인들 가운데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하나는 로마 황제인 가이사에게 세를 바쳐야 한다는 친(親)로마파요, 또 하나는 가이사에게 세를 바칠 필요가 없다는 반(反)로마파, 즉 민족주의파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은가 그른가 하는 변론이 있었을 것이며, 이것은 당시의 중요한 사회 문제이며 예수님께 질문할 만한 문제이었을 것이다.

[18-22절] 예수께서 저희의 악함을 아시고 가라사대 외식하는 . . . .

수께서는 그들의 악함을 아시고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고 말씀하셨다. 그들의 질문의 배후에는 예수님을 올무에 넘어지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예수님의 대답은 ‘예’ 아니면 ‘아니오’일 것이요 그러면 그를 친(親)로마파나 반(反)로마파로 몰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유대 백성과 이간을 붙일 빌미가 되든지, 아니면 로마 정부에 대한 반역자로 비난할 거리가 될 것이었다.

주님의 대답은 시험을 피하는 지혜로운 대답이셨던 것 같다. 그는 “셋돈을 내게 보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이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오자, 그는 “이 형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고 물으셨다. 그것은 가이사의 형상과 글이었다. 유대인들은 로마의 통치 아래 살고 있었고 유대 땅에서는 로마의 화폐가 사용되고 있었다. 그들이 “가이사의 것이니이다”라고 대답하자, 그는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말씀하셨다. 가이사의 것을 가이사에게 바치는 것은 정당한 일이라는 뜻이었다.

성도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두 영역에서 살고 있다. 하나는 하나님의 나라요 다른 하나는 세상 나라이다. 우선, 성도는 하나님의 나라에 속하므로 그 나라의 규범들을 지켜야 한다. 헌금도 그 중에 하나이다.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주인이시므로 이 세상에서 우리의 소유 중에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이 없지만, 성경은 특히 소득의 십일조와 첫열매와 헌물을 하나님의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레위기 27:30, “땅의 십분의 일 곧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께 성물(聖物)이라.” 잠언 3:9,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말라기 3:8-10,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 . .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러나 성도는 또한 세상에 사는 동안 세상 나라의 규범도 지켜야 한다. 베드로전서 2:13,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라.” 그것은 나라가 정한 납세의 의무를 포함한다. 로마서 13:7,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라.

 

23-33절, 부활에 관한 질문

[23-28절]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에 예수께 . . . .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께 와서 질문하였다.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들어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장가들었다가 죽어 후사가 없으므로 그의 아내를 그 동생에게 끼쳐두고 그 둘째와 셋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그런즉 저희가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사두개인들은 당시 합리주의자, 자유주의자이었다. 사도행전 23:8은, “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고 말한다. 합리주의, 자유주의는 곧 불신앙이요 이단이다. 그들이 언급한 형제 결혼의 법은 신명기 25:5-6에 규정된 법이었다. 거기에 보면, “형제가 동거하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가지 말 것이요 그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그 여인의 낳은 첫아들로 그 죽은 형제의 후사를 잇게 하여 그 이름을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고 했다. 사두개인들은 한 독특한 경우를 들어 부활의 불합리성을 증거하려 하였다. 이것은 기발한 착안이었다. 그들은 부활의 관념이 이 율법과 조화되기 어렵다고 생각하여 그것을 부활에 대한 반론으로 제시하였던 것이다.

[29-30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 . . .

예수께서는 대답하셨다.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전통본문)43)사들과 같으니라.” 그는 격한 책망의 어조로 하지는 않으셨으나 육체의 부활을 부정하는 사두개인들의 사상이 비성경적 오류임을 분명히 지적하셨다. ‘오해하다’는 말(플라나오)은 ‘잘못되다’는 뜻이다. 오류에 대한 그의 지적은 조용할지라도 힘이 있으셨다.

부활의 부정은 무엇보다 성경 진리에 반대되었다. 구약성경은 몸의 부활에 대해 분명히 증거하였다. 이사야 26:19는,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를 내어놓으리로다”라고 말하며, 다니엘 12:2는,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라고 말한다.

부활의 부정은 하나님의 능력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생명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다. 그에게는 죽은 자를 살릴 능력이 있으시다. 인간에게는 부활이 어려운 일이지만, 하나님께는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무슨 일이나 하실 수 있다.

결혼관계는 이 세상에 국한된다. 천국에서는 결혼이 없다. 이 점에서 부활한 사람은 천사와 같다. 천사의 세계에는 결혼이 없기 때문이다. 부활 때에는 인간에게 더 이상 자녀의 출산도 필요 없고, 육체의 정욕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죽은 자들의 부활을 부정하는 사두개인들의 사상은 바른 지식이 아니었다.

[31-33절] 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무리들은 듣고 그의 가르치심에 놀랐다.

사실상, 죽은 자의 부활은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라는 말씀에서 증명된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죽고 만 존재라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말은 옛날을 기억하는 일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본래 인간을 불멸적 존재로 만드셨다. 범죄로 인하여 죽음이 왔으나, 구원은 당연히 죽은 자들의 부활과 영생을 내포하였다. 사람이 죽고 만다면, 창조와 구원은 무의미할 것이다. 부활은 창조와 구원의 원리에 부합하는 것이다.

하나님께는 아브라함이라는 존재가 결코 죽고 없어지는 존재가 아니었다. 아브라함뿐 아니라, 모든 인생이 하나님 앞에서 불멸적 영혼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현재 살아 있다. 그러나 이런 정도가 아니다. 인간은 영육의 결합체이다. 의인 아브라함은 지금 영적으로 하나님과 함께 있지만, 장차 다시 육체와 결합하여 영광스런 인간 존재가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부활이요 성도의 소망인 것이다. 성도들은 죽어도 장차 영광스런 몸으로 부활할 것이다.

 

34-40절, 큰 계명들

[34-35절]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 . . .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여 물었다.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율법사는 율법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며 가르치는 사람이다. 마가복음에는 ‘서기관’이라고 표현했다(막 12:28). 모세오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율법들은 그 수가 많다. 그 많은 법들 중에 어느 계명이 큰 계명인가 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하고 흥미 있는 문제이었다.

[37-38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 . . .

수께서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신명기 6:5의 말씀을 가장 큰 계명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마가복음은 예수께서 신명기 6:4부터 인용하셨다고 좀더 자세히 증거한다. 그것은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여호와]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여호와]시라”는 말씀이다. ‘목숨’이라는 말은 신명기 본문에 ‘영혼’(네페쉬)이라고 되어 있다. 또 신명기에는 ‘네 힘을 다하여’라는 구절이 있다. 사람의 첫째 의무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 혹은 영혼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경건은 인생의 삶의 기본적 의무요 가장 중요한 의무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와 지식의 시작이다. 인간의 모든 도덕적 생활은 참된 경건에서 나온다.

[39절]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 . . .

예수께서는 또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라고 말씀하셨다. 이 법은 레위기 19:18의 말씀이다. 이웃 사랑은 모든 인간관계의 법들의 완성이다. 로마서 13:8-10은,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고 말하였다.

[40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예수께서는 또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온 율법과 선지자들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는 뜻이다. ‘율법과 선지자들’이라는 말은 구약성경을 가리킨다. 구약성경의 모든 교훈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으로 요약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성경은 이런 율법적 내용만이 아니다. 사람은 율법으로 구원을 받지 못한다. 율법은 의로운 표준이며 규범이지만, 사람은 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다 지키지 못한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으로 그리고 그를 믿음으로만 받는다. 그러나 율법은 무엇이 하나님의 뜻이며 요구인가, 우리가 얼마나 죄악되며 무능한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이 왜 필요한가를 알려준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는 이제 마음을 다하고 영혼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

 

41-46절, 그리스도는 뉘 자손이냐?

[41-42절]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 . . .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뉘 자손이냐?” 그들이 대답하였다. “다윗의 자손[아들]이니이다.” 그들은 장차 다윗의 자손 중에 메시아가 오실 것이라는 예언에 대한 지식이 있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에 대한 지식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이시라는 것은 믿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43-44절] 가라사대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 . . .

예수께서는,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에서 주께서는 구약성경 시편의 영감성을 증거하셨다. 시편은 성도들의 기도의 글들, 즉 찬양, 감사, 고백, 간구의 글들이지만, 주께서 이런 시편까지도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음을 증거해 주신 것이다.

이것은 그 당시의 정통 유대교의 성경관이었다. 예수께서는 정통 유대교의 성경관을 그대로 받으셨다. 사실, 그는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을 때도 기록된 말씀을 인용하심으로써 그 시험을 물리치셨다(마 4장). 그의 사도들도 동일한 성경관을 가지고 있었다. 사도행전 1:16, “성령이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예수 잡는 자들을 지로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디모데후서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오늘날같이 성경에 대한 믿음이 없는 불신앙과 회의주의의 시대에 우리는 예수님 자신과 그의 사도들이 가졌던 바른 성경관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성경을 열심히 읽고 배우고 믿고 행해야 한다. 성경은 우리의 믿음을 견고하게 만들고 우리의 인격을 온전케 한다.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라는 시편 110:1의 말씀은 메시아의 승천과 그가 하나님 우편에 계실 것을 예언하고 있다. 메시아에게는 원수가 있다. 그는 사탄이다. 그를 발아래 두는 것은 사탄을 최종적으로 영원한 지옥 불못에 던지는 것을 의미한다(마 25:41). 이것이 사탄에 대한 최종적 형벌이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께서는 사탄의 최종적 멸망 때까지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실 것이다. 그가 하나님 보좌 우편으로부터 다시 오실 때는 마귀와 그의 사자들을 심판하여 영원한 멸망에 던져 넣으실 때이다.

[45-46절]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한 말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 . . .

예수께서는 또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고 말씀하시니 한 말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었다. 예수님의 질문은 메시아의 인성(人性)만 아는 유대 지도자들에게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메시아의 신성(神性)도 알아야 했다. 메시아는 다윗의 자손일 뿐 아니라, 다윗의 주, 곧 다윗의 하나님이시다. 다윗 왕도 메시아 왕국에서는 한 신민(臣民)에 불과할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그는 빌립에게 말씀하시기를,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고 하셨다(요 14:9).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4:6에서 말하기를,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 했고 고린도후서 5:16에서는,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 하였다.

믿는 자들은 복되다. 메시아는 참 사람이실 뿐 아니라, 참 하나님이시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사신 사람이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이시요 참된 신성을 가지신 참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놀라운 예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자.

 

 

23장: 위선자들을 책망하심

[1-3절]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 . . .

예수께서는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모세의 자리’는 선지자의 자리이다. 모세는 선지자 중의 선지자이었다(신 34:10).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代言)하고 선포하고 전달하는 자이다. 오늘날 목사도 그러하다. 비록 성경에 전적으로 의거해야 하지만,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의 대언자, 선포자, 전달자의 자리에 있다.

당시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말만 하고 행함이 없는 위선자들이었다. 위선자의 경건은 죽은 경건이다. 디도서 1:16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는 자를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라고 말하였다. 야고보서 2:26은,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고 말하였다. 우리는 그런 위선자의 말은 들을지언정 그들의 행위는 본받지 말아야 한다.

[4절]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 . . .

예수께서는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라고 말씀하신다. 위선적 지도자들은 무거운 짐만 사람들의 어깨에 지운다. ‘무거운 짐’은 하나님의 법들을 자세하게 규례화하는 것을 가리켰을 것이다. 율법의 역할이 죄를 깨닫게 하고 정죄하여 죄인으로 하여금 절망과 좌절을 느끼며 구주께서 나오게 하는 것이지만, 종교가 생명을 잃어버릴 때 규칙과 규례만 무성해질 것이다.

위선적 지도자들은 교인들에게는 무거운 종교적 의무들을 부과해 놓고는 자신들은 한 손가락으로도 그것들을 행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것이 위선이요 죽은 경건이다. 그러나 참 종교는 모범을 보이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라’고 말하였다(딤전 4:12). 또 그는 디도에게 ‘젊은 남자들을 권면하여 근신하게 하되 범사에 네 자신으로 선한 일의 본을 보이라’고 명하였다(딛 2:6-7). 베드로도 장로들에게 교훈하기를,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고 하였다(벧전 5:3). 참된 경건은 모범된 행위로 나타난다.

[5절]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 . . .

예수께서는 그들이 “[자기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라고 말씀하신다. 신명기 6:8에 율법의 말씀을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미간에 붙여 표를 삼으라고 하였는데, 이 말씀에 근거하여 유대인들은 기도할 때 경문을 찼다. 경문(經文)은 이마와 팔과 허리에 차는, 성경구절들이 쓰인 가는 양피지 띠를 가리킨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였다. 그것은 자신을 더 경건하게 보이기 위함이었다. 그것은 칭찬과 높임을 받으려는 마음에서 나왔다. 그러나 참 종교는 형식이 아니고 실질이며, 외모로 함이 아니고 진심으로 함이다(신 6:5; 잠 4:23; 딤후 3:5).

[6-7절]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 . . .

수께서는 그들이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에 앉기를 좋아하는 것은 명예심이요 교만이다. 겸손한 인격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우리를 영원한 지옥 형벌에서 구원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만 높이며 자랑해야 한다.

[8-10절]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 . . .

주께서는 또,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고 말씀하셨다. 전통사본(Byz syrc 등)에는 8절에 “너희 선생은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시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고 되어 있다. 랍비, 아비, 및 지도자라는 명칭은 다 종교적 지도자를 가리켰다고 본다. 우리들의 선생님과 영적 아버지와 지도자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뿐이시다.

물론 바울은 고린도전서 4:15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고 말했다. 영적으로 이렇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항상 이런 칭호로 불리는 것은 합당치 않고 또 우리가 이런 칭호를 사랑하는 것도 합당치 않다. 우리는 겸손히 서로 형제 자매로 인식하고 부르는 것이 가장 좋다고 본다.

교회의 직분자들은 다 봉사자들이다. 우리는 어떤 칭호를 좋아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다 부족한 자들이다. 우리는 자기의 명예나 유익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오직 주님의 영광과 성도들의 유익만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 물론, 서로 존경하고 피차 복종하는 것은 성도의 의무이며, 주께서 세우신 교회 직분자들을 존경하고 복종하는 것도 그러하다. 히브리서 13:17은,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고 교훈하였다.

[11-12절]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 . . .

주께서는 또,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말씀하셨다. 세상에서는 큰 자가 섬김을 받는다. 그러나 천국과 교회 안에서는 그렇지 않다. 천국에서 가장 큰 자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자신을 낮추어 죄인들을 위하여 자기 몸을 희생하셨다(마 20:28). 그러므로 우리는 주를 본받는 자로서 직분이 중하면 중할수록 더욱 자신을 낮추어 주님처럼 남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겠다. 겸손과 섬김은 영적 성숙의 표가 될 것이다.

[13절]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 . . .

예수께서는 또,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일반 대중에게가 아니고 부패한 지도자들에게 노하셨다. 마태복음 5장의 8복(福)과 대조적으로, 본장은 위선적 지도자들에 대한 8화(禍)를 증거하였다(전통본문의 14절을 포함하여).

외식자의 한 특징은 천국문을 가로막는 것이었다. 천국은 인생의 최대의 목표와 소망이다. 하나님은 예로부터 영생과 천국을 약속하셨다(딛 1:2). 예수 그리스도는 이 천국의 문이시다. 그는 ‘양의 문,’ ‘구원의 문’이시며(요 10:8-9) 죄인들이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시다(요 14:6). 그는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허락하셨는데, 이것은 복음사역, 말씀사역을 가리킨다. 그것은 모든 복음 사역자들에게 주신 열쇠이다. 그러나 참된 회개와 예수님 믿음을 전파하는 것은 천국문을 여는 것이지만, 참된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는 것은 천국문을 닫는 것이다. 그러므로 외식하는 그들은 천국의 안내자가 아니고 천국의 방해자 곧 천국문을 가로막는 자가 되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14절]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 . . .

전통본문에는 14절에,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과부들의 집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더 큰 심판을 받으리로다”라는 말씀이 있다.44) 외식자들은 과부들의 재산을 교묘하게 취하였다. 그들은 실상 하나님을 경외하거나 천국과 내세에 소망을 둔 자가 아니고 땅의 것만을 구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외식으로 길게 기도함으로 경건한 겉모양을 가졌지만, 속에는 물질에 대한 욕심이 가득하였다.

이런 외식자들은 장차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이다. 마태복음 11장에 보면, 주께서는 권능을 많이 베푸신 고라신, 벳새다, 가버나움 등의 마을이 회개치 않음으로 두로와 시돈 같은 이방 도시나 심지어 옛날 유황불 심판을 받았던 소돔성보다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11:20-24). 죄에 경중(輕重)이 있듯이, 심판에도 경중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행위대로, 즉 그의 행위의 죄의 경중대로 합당한 벌을 주신다. 위선의 악은 큰 악이다.

[15절]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