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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성 목사

2013년 11월 8일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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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주 예수님과 사도 바울의 증거대로(마 5:18; 요 10:35; 갈 3:16; 딤후 3:16), 성경은 하나님의 정확무오한 말씀이며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진술대로(1:8), 성경 원본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고 그 본문은 ‘그의 독특한 배려와 섭리로 모든 시대에 순수하게 보존되었다.’ 이것이 교회의 전통적 견해이다. 그러나 19세기 말 웨스트코트와 호트에 제시된 불확실한 가설에 의하여 많은 교회들이 신약성경의 전통적 다수 본문을 버리고 불완전하고 오류투성이의 사본들(א와 B)을 중시하는 잘못을 범하였다. 그러나 신약성경의 헬라어 비잔틴 다수 사본들의 본문은 순수하게 보존된 성경 원본의 본문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채택되어야 할 것이다.

성경을 가지고 해석하고 설교할지라도 그것을 바르게 해석하고 설교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올 것이다(암 8:11). 중세 시대 말, 종교개혁 직전과 같이, 오늘날 벌써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오는 것 같다.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설교와 성경강해가 있지만, 순수한 기독교 신앙 지식과 입장은 더 흐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요구되는 성경 해석과 강해는 복잡하고 화려한 말잔치보다 성경 본문의 바른 뜻을 간단 명료하게 해석하고 적절히 적용하는 것일 것이다. 사실상, 우리는 성경책 한 권으로 충분하다. 성경강해는 성경 본문의 내용을 바르게 이해하는 데 작은 참고서에 불과하다. 성도들은 각자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성경을 읽어야 하며, 주석과 강해서는 오직 작은 참고서로만 사용해야 할 것이다.

 

 제목차례

누가복음 서론

1장: 세례 요한의 출생

2장: 예수님의 탄생과 어린시절

3장: 세례 요한의 사역

4장: 예수님의 전도 사역 시작

5장: 죄인을 부르심

6장: 가르치심

7장: 기적들을 행하심

8장: 기적들을 행하심

9장: 제자의 길

10장: 70인 전도자들을 보내심

11장: 기도를 가르쳐 주심

12장: 절대적 신앙

13장: 회개치 않으면 망함

14장: 자신을 버리고 주를 따르라

15장: 한 죄인의 회개를 기뻐하심

16장: 돈을 사랑치 말 것

17장: 인자의 날이 갑자기 옴

18장: 낙망치 말고 기도할 것

19장: 예루살렘에 올라가심

20장: 변론하심

21장: 예루살렘 멸망과 재림 징조

22장: 잡히심

23장: 죽으심

24장: 부활하심

 

 

서론

누가복음은 누가가 기록하였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나타난 어휘, 문체 등의 특징 및 동일한 사람에게 책을 바친 것 등은 두 책의 저자가 동일한 사람임을 나타낸다. 사도행전의 ‘우리’라는 부분들(행 16:10-17; 20:5-21:18; 27: 1-28:16)은 사도행전의 저자가 바울의 전도여행의 동반자이었음을 나타낸다. 누가복음의 저자는 코이네 헬라어에 익숙하였고 어휘가 풍부했다.1) 이 두 책에는 의학적 용어와 질병이나 병자에 대한 관심이 많이 나타난다. 이 모든 사실들은 저자가 바울의 동역자이었던 의사 누가라는 사실을 지지한다.

초대교회의 무라토리 단편(170년경)에는 “바울이 그의 전도 여행에 같이 데리고 다녔던 의사 누가가 자기의 이름으로 세 번째 복음서를 저술하였다”고 써 있다. 이레니우스(130-200년경)는 “바울의 동반자인 누가는 자기가 들은 복음을 하나의 책으로 기록했다”2)고 썼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150-215년경)와 터툴리안(160-220년경)도 이 책을 누가의 저작으로 돌렸다.

누가는 헬라인인 듯하다. 골로새서에서 바울은 누가를 유대인과 구별하여 언급하는 것 같다(4:10, 11, 14). 그러나 그는 구전 자료들과 기록된 자료들을(1:1-4) 성령의 인도 아래 사용했을 것이며 사도들과 기타 증인들과 접촉함으로써 많은 것을 듣고 확인했을 것이다.

사도행전을 61년경에 기록되었다고 본다면, 누가복음은 그보다 일찍 아마 주후 58년경 즉 바울이 가이사랴에 투옥되었을 때 즈음에 사도 바울 곁에서 기록되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누가복음은 신약성경 가운데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즉 그의 말씀들과 행위들을 증거하는 세 번째 책이다. 복음서들의 목적은, 요한복음이 증거하는 대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기 위한 것이요 이를 통해 죄인들이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함이었다(요 20:30, 31). 누가는 이 책의 목적을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데오빌로의 지식을 확실케 하기 위함이라고 썼다(눅 1:1-4). 그리스도에 관한 참 지식은 참 믿음의 요소이다.

누가복음은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로, 누가복음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해 강조한다. 이 책은 복음서들 가운데서 예수님의 탄생, 유년 시절, 성장 과정 등에 대해 가장 자세히 증거하였다. 둘째로, 누가복음에는 기도에 대한 많은 언급과 교훈이 나온다. 사복음서 전체에서 예수님의 기도하심에 대해 15번 나오는데, 그 중 11번이 누가복음에 나온다. 또 누가복음 11장, 18장에는 기도에 대한 비유와 교훈이 기록되어 있다. 셋째로, 누가복음은 찬양과 감사에 대해 많이 언급한다. 넷째로,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의 동정적 사랑이 강조되어 있다. 그것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10장), 탕자의 비유(15장) 등에 잘 나타나 있다.3) 다섯째로, 누가복음에는 여인과 어린이에 대한 관심이 많다. 여섯째로, 누가복음은 복음서들 중에 가장 문학적이고 아름답다고 한다. 일곱째로, 누가복음에는 세계주의적 안목도 나타난다. 이 책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이방을 비추는 빛”으로 묘사되었고(2:32), 그의 족보는 아담에게까지 올라갔으며(3:38), 유대인들을 제치고 선한 사마리아인이 모범으로 제시되었다(10:25-37).4)

 

1장: 세례 요한의 출생

1-4절, 누가복음의 기록 목적

[1절]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말씀의 . . . .

누가는 말한다.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꾼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다.”

누가는 본서의 내용에 대해 증거한다. 그것은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한” 것이다.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이라는 원어5)는 “우리 중에 확실히 믿어진 일들” 혹은 “우리 중에 완전히 확정된 일들”이라고도 번역할 수 있다. 복음서들에 증거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들은 제자들이 지어낸 이야기들이 아니고, 초대 교회 안에서 확실히 믿어진 일들이며 완전히 확정된 일들이었다. 즉 그것들은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들이었다. 기독교는 인간의 창작물에 근거하지 않고 의심의 여지가 없는 확실한 사실들에 근거한다.

누가는 또 본서의 참고 자료들에 대해 증거한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들은 처음부터 그를 보았던 목격자들과 그를 증거한 일꾼들에 의해 전달된 내용들에 근거한 것이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은 다 그런 증인들이었다. 그래서 제자들은 가룟 유다 대신 한 명을 뽑으려 할 때 이렇게 말했다: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리워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행 1:21, 22).

뿐만 아니라, 이런 목격자들과 일꾼들이 전하여 준 대로 예수님에 관하여 글을 쓴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그들의 글들은 복음서들을 위한 참고 자료들이 되었다. 이와 같이, 복음서를 씀에 있어서 자료들의 부족은 없었다. 많은 증인들과 많은 기록물들이 있었기 때문에, 누구든지 그것들을 세밀하게 검토함으로써 정확한 지식을 얻을 수 있었고 정확한 사실을 증거할 책을 충분히 쓸 수 있었다.

누가는 또 본서의 서술 방식에 대해 증거한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내용들을 근원부터 자세히 검토한 후 그것들을 차례대로 쓰게 되었다고 말한다. ‘차례대로’라는 말은 반드시 시간 순서를 의미하지 않고 대략적으로 시간 순서를 포함한 내용들의 정돈을 의미할 것이다. 데오빌로 각하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데오빌로’라는 말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라는 뜻인데, 아마 그 당시의 어떤 고위 공직자에 대한 이름이었던 것 같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배웠고 아마 그를 믿었던 것 같다. 누가는 그에게 글을 써 보내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이 귀한 복음서를 저술하였다.

누가는 또 본서의 목적에 대해 증거한다. 그것은 데오빌로 각하가 이미 배운 내용이 확실하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데 있었다. 즉 누가복음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확실한 지식을 주는 데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확실한 지식은 그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위해 필요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구원을 받고 그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있어야 그를 위해 헌신하고 순종할 수 있다.

우리는 누가복음과 신약성경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확고한 지식과 믿음을 가지고 구원을 얻고 주를 위해 헌신하고 충성하자.

5-25절, 엘리사벳이 요한을 잉태함

[5-7절] 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하나가 . . . .

유대 왕 헤롯 때에6)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하나가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사가랴이며 그 아내는 아론의 자손인데 이름은 엘리사벳이었다. 이 두 사람은 하나님 앞에 의인이었고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였다. 엄격히 말해 세상에 의인은 아무도 없지만(롬 3:11, 20),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의인들은 항상 있었다. 노아나 아브라함이나 욥이나 다니엘 등이 그러하였다. 그들은, 비록 하나님의 법들을 다 지키지는 못했어도, 짐승 제사를 통해 예표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로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이었다.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입은 그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애썼다.

그런데 엘리사벳이 잉태를 못하므로 그들은 자녀가 없었고 그 둘의 나이가 많았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의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부족함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 부족 때문에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며 더 경건하고 의롭게 살았을 것이다. 부족이 없는 사람이 하나님을 찾는 경우보다 부족이 있는 사람이 하나님을 찾는 경우가 더 많다. 노아도, 이삭도, 한나도 자녀가 없었고, 그들은 그 문제로 하나님께 더욱 기도하고 의지했을 것이다. 자녀가 없었다는 사실은 그들의 믿음을 단련시켰고 그들에게 영적 유익을 주었을 것이다.

[8-17절] 마침 사가랴가 그 반열의 차례대로 제사장의 직무를 . . . .

마침 사가랴가 그 반열의 차례대로 제사장의 직무를 하나님 앞에 행할 때에 제사장의 전례를 따라 제비를 뽑아 주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고 모든 백성은 그 분향하는 시간에 밖에서 기도하였는데, 주의 사자가 그에게 나타나 향단 우편에 섰다. 사가랴가 보고 놀라며 무서워하자 천사가 말하였다. “사가랴여, 무서워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남을 기뻐하리니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는 말은 사가랴가 자녀를 위해 기도했음을 보인다. 그는 경건한 사람이었다. 나이가 많도록 기도한 것을 보면, 그는 아마 결혼 후 수십 년 동안 기도했을 것이다. 옛날에 노아는 5백세가 된 후에 세 아들들을 낳았는데(창 5:32), 그렇다면 그도 오랫동안 기도했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75세에 하란을 떠난 후 100세가 되어 아들 이삭을 얻었으니, 적어도 25년간 기도했다. 이삭도 40세에 결혼하여 60세에 쌍둥이를 낳았으니(창 25:20, 26), 약 20년간 기도하였다. 오랜 기도 생활로 그들의 믿음은 단련되었고 그들은 마침내 하나님께로부터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

천사는 엘리사벳에게서 잉태되어 낳을 아들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지으라고 말한 후 그가 큰 자가 되고 포도주나 독주를 들지 않을 자, 곧 하나님께 헌신할 나실인이 되고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얻을 것이며 많은 사람들을 회개케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경건하고 의로운 부모에게서 당신의 귀한 종이 나오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시겠다고 약속하셨었다(출 20:6). 오늘날도 경건한 부모에게서 하나님의 귀히 쓰시는 종들이 나올 것이다.

[18-23절] 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 . . .

사가랴가 천사에게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 많으니이다”라고 말하자, 천사는 대답하였다. “나는 하나님 앞에 섰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입었노라. 보라 이 일의 되는 날까지 네가 벙어리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내 말을 네가 믿지 아니함이어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리라.”

의인 사가랴에게도 믿음의 연약함이 있었다. ‘어떻게’라는 원어(카타 티 κατὰ τί)는 ‘무엇에 근거하여’라는 뜻이다. 사가랴는 천사의 전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나와 나의 아내가 나이가 많은데 무엇에 근거하여 이것을 알 수 있겠는가?’고 반문한 것이다. 이것은 그의 불신앙을 나타낸다. 성도의 믿음의 근거는 오직 하나님 자신이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믿는다면, 우리는 그의 모든 말씀을 의심 없이 다 믿어야 한다. 그러나 사가랴는 천사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했다. 그 때문에 그는 얼마 동안 벙어리가 되어야 했다.

백성들은 사가랴를 기다리며 그의 성소 안에서 지체함을 기이히 여겼고, 그가 나와서 그들에게 말을 못하니 백성들이 그가 성소 안에서 이상을 본 줄 알았다. 그가 몸짓으로 뜻을 표시하며 그냥 벙어리대로 있었다. 그는 그 직무의 날이 다 되자 집으로 돌아갔다.

[24-25절] 이 후에 그 아내 엘리사벳이 수태하고 다섯 달 . . . .

이 후에 그의 아내 엘리사벳은 아기를 잉태하였고 다섯 달 동안 숨어 있으며 말했다. “주께서 나를 돌아보시는 날에 인간에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 여성이 자녀를 잉태치 못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었으나 하나님께서 나이 많은 그에게 잉태하는 복을 주셨다. 과거에 오랫동안 그들에게 자녀를 주지 않으셨던 자도 하나님이셨고, 이제 자녀를 잉태케 하신 자도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의 주권적 섭리자이시며 그가 기뻐하시는 일들을 하늘과 땅에서 다 이루시는 자이시다(시 135:6).

경건하고 의로운 성도에게도 때때로 부족이 있으나, 그들의 기도는 마침내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참고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근심하시고 징책하신다.

26-38절, 마리아가 천사의 방문을 받음

[26-27절]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 . . .

엘리사벳이 요한을 잉태한 후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따라 이스라엘 북부 갈릴리 지방의 한 시골 마을인 나사렛으로 가서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에게 나타났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이었다. 요셉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한 것은 이 일이 메시아에 대한 구약 예언의 성취이기 때문이다. 마리아를 ‘처녀’라고 두 번이나 언급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잉태가 특별한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아직 남자를 알지 못한 순결한 처녀이었다(34절). 하나님께서는 메시아의 탄생을 위해 순결한 한 처녀를 사용하셨다. 마리아가 순결을 지킨 처녀가 아니었다면 그는 하나님께 그렇게 사용되지 못했을 것이다.

[28-31절] 그에게 들어가 가로되 은혜를 받은 자여 . . . .

천사는 마리아에게 들어가 말했다.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하시도다.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도다](전통본문).”7)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가 생각하자, 천사는 말하였다.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마리아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초자연적 잉태와 출산의 도구가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마리아를 포함하여 이 세상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다. 죄 없으신 예수님 외의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다. 그러므로 마리아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않고서는 메시아의 거룩한 출생에 쓰임을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31-33절]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 . . .

천사는 또 말했다.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왕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천사는 마리아에게 잉태될 자의 이름을 지어주며 그가 어떤 자이며 무슨 일을 할 것인지에 대해 알려주었다.

마리아가 잉태하여 낳을 자의 이름은 ‘예수’라고 불리울 것이다. ‘예수’는 ‘구원’이라는 뜻이다. 그는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일컬어질 것이다. 그가 하실 일은 다윗의 왕위를 이어 야곱의 집에서 왕노릇하실 것이며 그의 나라는 영원할 것이다. 이것은 구약성경에 자주 언급된 메시아의 왕의 사역이다.

[34-36절]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 . . .

마리아는 천사에게 말하였다. “나는 사내[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천사가 대답하였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수태하지 못한다 하던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나는 사내[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라는 마리아의 말은 그의 의아함을 나타내지만, 사가랴처럼 불신앙의 말은 아니었다. ‘어찌’라는 원어(포스 πώς)는 ‘어떤 방식으로’라는 뜻으로 그의 말은 어떤 방식으로 이 일이 이루어질 것인가라는 질문이었다. 천사는 성령께서 그에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 곧 하나님의 능력이 그를 덮음으로써 이 일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하였다. 처녀 마리아의 메시아 잉태는 하나님의 전적인 능력으로 될 일이었다. 잉태치 못하던 그의 친척, 늙은 엘리사벳의 잉태보다 처녀 마리아의 잉태는 더 신기한 하나님의 능력의 일이었다.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는 말씀은 처녀 마리아의 몸에 성령의 능력으로 잉태되어 나실 메시아의 두 가지 특별한 점을 증거한다. 첫째는 ‘거룩함’ 곧 무죄성(無罪性)이며, 둘째는 신성(神性)이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처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는 것은 그의 무죄성과 신성에 관계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처녀 성탄의 진리를 부정하는 자는 그의 무죄성과 신성을 믿지 않는 자리로 나아갈 것이다.

[37절]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천사는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이는 하나님께는 능치 못한 일이 아무것도 없음이니라](KJV, NASB, NIV)고 말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증거한다.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사자는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말했었다(창 18:14). 욥은 “주께서는 무소불능하시오며[모든 일을 하실 수 있사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라고 고백했다(욥 42:2). 하나님을 믿는 참된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요 또한 그의 전능하심을 믿는 것이다.

[38절]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 . . .

마리아는 겸손히 말하였다. “주의 계집종(헤 둘레 퀴리우)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마리아의 말은 그의 믿음과 순종을 잘 나타낸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었고 그 앞에 자신을 복종시켰다. 그는 혹시 처녀가 아이를 가짐으로써 생길 비난과 수치와 죽음까지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자신을 온전히 바쳤다. 이것이 마리아의 진실한 믿음과 순종심이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메시아의 모친이 된 처녀 마리아처럼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겸손히 순종하는 자들이 되자.

39-45절,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함

[39-45절] 이 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중에 가서 . . . .

이 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중에 가서 유대 한 동네에 이르러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였다. 마리아의 고향은 팔레스틴의 갈릴리 지방 중남부에 위치한 나사렛이었던 것 같고(눅 1:26), 그는 거기로부터 사가랴가 살았던 남쪽의 유대 산중의 한 동네로 빨리 갔다. 그것은 친척 엘리사벳이 아기를 잉태했다는 기쁜 소식과 자신에게 일어난 잉태의 일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을 때, 아이가 복중에서 뛰놀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감동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가랴도, 엘리사벳도 경건하고 의로운 사람이었다. 엘리사벳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큰 소리로 말하였다.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내 주의 모친이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고?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믿은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주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리라.”

엘리사벳은 젊은 마리아를 ‘내 주의 모친’이라고 불렀다.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된 아기는 엘리사벳의 주가 되시고 또한 우리 모두가 복종해야 할 주가 되신다. 엘리사벳은 또 마리아를 ‘믿은 여자’라고 부르면서 그에게 복이 있다고 말했다. 훌륭한 아들을 둔 어머니는 복되다.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하고 ‘주의 모친’이 될 마리아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후에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눅 11:27-28). 훌륭한 아들을 둔 것도 복이지만,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경건하고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더 큰 복이다.

우리는 마리아에게 잉태된 아기 예수 그리스도를 엘리사벳처럼 우리의 주님으로 고백하며 그 이름에 합당하게 순종하자. 또 세례 요한이 엘리사벳의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듯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해 기뻐하며 즐거워하자. 또 우리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말씀을 행함으로 가장 큰 복을 누리자.

46-56절, 마리아의 찬송

[46-49절] 마리아가 가로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 . . .

마리아는 다음과 같이 찬송하였다.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 계집종[여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빈손으로] 보내셨도다.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및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마리아는 엘리사벳과 석 달쯤 함께 있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마리아는 이 찬송에서 자신을 ‘여종’이라고 부르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비천함을 돌아보셨다고 고백하였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낮고 비천함을 고백하고 자신이 하나님께 순종해야 할 종임을 고백하는 자는 겸손한 자이다. 겸손은 모든 사람에게 요구되는 덕이다.

마리아는 또한 능하신 이가 큰 일을 자기에게 행하셨다고 말했다. 그것은 자신의 초자연적 잉태의 일을 가리킨다. 이것은 사람의 능력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오직 능하신 이 곧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일이었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 전체가 그러하지만, 구주를 세상에 보내시는 일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능력의 큰 일이 이루어졌다.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시작되고 완성되는 일이다.

마리아는 또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시다고 말하며 그의 초월성을 고백하였다. 우리가 하나님을 거룩하시다고 말하는 것은, 단지 그의 성결성 때문만이 아니고, 또한 그의 초월성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피조물과 본질적으로 구별되시는 분이시다. 그는 초월자이시요 무한자(無限者)이시다.

마리아는 또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언급하며 그 긍휼하심이 그를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대대로 있다고 말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자세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태도이다. 어느 시대에나,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는 자는 그의 긍휼하심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그를 두려워하는 것은 긍휼을 얻는 길이다.

마리아는 또 하나님의 능력, 특히 공의로 통치하시는 그의 주권적 능력을 언급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있는 자들을 내리치셨으며 부자들을 빈손으로 보내셨고 비천한 자들을 높이셨고 주리는 자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공의로 보응하시는 주권적 섭리자로 고백한 것이다. 어떻게 이런 바른 지식과 믿음을 가졌는지! 그것은 성경적 하나님 지식의 내용이다(신 32:39). 그것은 옛날 사무엘의 모친 한나의 지식과 믿음이기도 하였다.

또 마리아는 하나님의 종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긍휼을 입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것이며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이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의 집에 석달이나 머문 것을 보면,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매우 가까운 친척, 아마 이모쯤 되었던 것 같다.

마리아는 하나님을 “나의 구주”로, 또 자신을 비천한 여종으로 고백하였다. 또 그는 하나님의 능력, 그의 거룩하심, 그의 긍휼, 그의 공의로우신 심판에 대해 증거하였다. 이것들은 다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할 필수적 내용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도 그의 능력과 긍휼로 구원하셨다. 우리도 마리아처럼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하나님의 능력과 거룩하심과 긍휼과 공의를 고백하고 찬송하자.

57-66절, 세례 요한의 출생과 할례받음

[57-66절] 엘리사벳이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으니 . . . .

엘리사벳은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았고 이웃과 친족들은 주께서 그를 크게 긍휼히 여기심을 듣고 함께 즐거워하였다. 8일이 되자 아이를 할례하러 와서 그 부친의 이름을 따라 사가랴라 하고자 하였는데, 그 모친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아니라. 요한이라 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들은 말하기를, “네 친족 중에 이 이름으로 이름한 이가 없다”고 하고 그 부친에게 형용하여[손짓으로] 무엇으로 이름하려 하는가 물으니 저가 서판(書板)을 달라 하여 그 이름은 요한이라 쓰자 다 기이히 여겼다. 이에 그의 입이 곧 열리고 혀가 풀리며 말을 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니 그 근처에 사는 자가 다 두려워하고 이 모든 말이 온 유대 산중에 두루 퍼지며 듣는 사람들은 다 이 말을 마음에 두며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될꼬?” 하고 말하였다. 이는 주의 손이 그와 함께 하심이었다.

사가랴는 요한이 잉태되어 출산하기까지 벙어리가 되는 징계를 받았었다. 그러나 그 기간은 그에게 있어서 불신앙을 회개하고 믿음을 더욱 굳세게 가지게 된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징계는 사람이 죄를 회개하고 믿음을 견고케 하는 데 매우 유익하다. 우리의 신앙의 성장에는 평안과 형통보다 고난과 환난이 훨씬 더 유익하다. 성도의 신앙은 고난 중에 더 견고해진다.

67-80절, 사가랴의 찬송

[67-71절]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예언하여 . . . .

그 부친 사가랴는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예언하여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아보사 속량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라고 말했다. 참된 찬송은 하나님을 아는 자, 그의 하신 일을 아는 자, 그의 은혜를 체험한 자, 특히 그의 구원을 체험한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찬송은 일반적 노래가 아니다. 찬송은 하나님께 대한 신앙고백이며 기도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간증이다. 사가랴가 하나님을 찬송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셔서 속량(贖良)하시고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기 때문이었다. ‘구원의 뿔’이란 ‘능력의 구원자’를 가리킨다. 뿔은 능력의 상징이다. 구원에는 능력이 필요하다. 성도의 찬송은 구원의 체험에서 나오는 찬송이다.

또 사가랴는 “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구원이라”고 말하였다. 하나님의 구원은 오래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이었는데, 그 내용은 우리 원수들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구원이다. 그 원수들은 역사상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앗수르나 바벨론 같은 주위의 이방 나라들을 가리켰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사람들의 원수는 사탄과 악령들이다. 그들은 사람을 범죄케 하고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는 자들이다. 사람들은 그들로부터 구원을 얻어야 한다.

[72-75절]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신 맹세라. 우리로 원수의 . . . .

사가랴는 또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신 맹세라”고 말하였다. 구원의 근거는 우리 자신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의 긍휼뿐이다. 인간은 다 죄인이다. 하나님을 찾는 자도,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자도 없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주신 은혜가 아니고서는 구원얻을 영혼이 세상에는 아무도 없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긍휼을 언약과 맹세의 형식으로 나타내셨다. 구약과 신약은 하나님께서 긍휼로 사람들에게 주신 구원의 약속이다.

사가랴는 또 “우리로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입고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라고 말하였다. 구원의 목적은 원수들에게서 건짐을 입어 평생토록 하나님 앞에서 거룩과 의로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것이다. 천국은 거룩과 의의 세계이며 불결과 죄가 전혀 없고 하나님의 뜻만 즐거이 순종하는 곳이다. 거기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결코 짐스런 일이 아니고 기쁨과 즐거움의 일이다. 구원받아 천국 백성된 자들은 이 세상에 있을 때에도 거룩과 의로 즐거이 하나님을 섬긴다.

[76-79절]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 . . .

사가랴는 또 말한다.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예비하여 주의 백성에게 그 죄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사가랴는 성령의 감동으로 아들 요한의 사명과 구원의 방법과 의미를 증거했다. 요한의 사명은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메시아 앞에 앞서 가서 그의 길을 예비하여 주의 백성에게 죄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는 것이다. 죄가 인간과 세상의 근본적 문제이었으므로, 죄사함은 모든 문제의 근본적 해결이다. 구원은 죄사함의 일이었다. 사람이 죄사함받지 않고서는 구원과 영생과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 없다.

사가랴는 또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자비의 심정]8)을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아나톨레)[해의 돋음, 새벽]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라고 말했다. 그는 하나님의 구원이 그의 긍휼에 근거함을 다시 증거했다. ‘돋는 해’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의미한다. 구주의 오심은 해가 돋음과 같고 새벽이 옴과 같다.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은 무지와 부도덕, 죽음과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가리킨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어두움 속에서 살던 자들에게 생명의 빛을 비추셨다. 그것이 구원이다. 또 그 결과는 평강이다. 그것은 총체적 행복이다. 구원은 평강의 길이다.

[80절]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 . . .

아이 요한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들에 있었다. 악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진리와 의를 선포하는 설교자가 되려면 심령의 강건함이 필요하다. 요한은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들에 있었다. 그러한 생활은 속화된 제도적 종교 생활보다 많은 장점이 있었을 것이다. 때때로 사람들과 격리되어 오직 성경 말씀과 기도로 훈련된 종들이 배교된 교회의 풍조에 물들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쓰시기에 더 적합할 수 있다.

사가랴는 하나님께서 구원의 뿔, 곧 구주를 주셨음을 찬송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주시며 구주이시다.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의 원수 마귀와 악령들로부터의 구원이며 모든 불행과 죽음과 지옥 형벌로부터의 구원이다. 구원의 근거는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긍휼뿐이다.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 속에는 구원받을 아무런 의(義)도, 조건도 없다.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긍휼이 아니고서는 세상에 구원받을 자는 아무도 없다. 구원의 방법은 죄사함을 통해서이다. 죄가 모든 불행의 근본 원인이므로, 죄사함이 모든 문제의 해답이다. 거기에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으로 오신 이유가 있었고 그가 십자가에 죽으신 까닭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자신의 공의를 만족시키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고 그것이 우리의 구원이 되었다.

구원의 목적은 평생토록 거룩과 의로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위해서, 즉 거룩과 의 안에서 영원히 즐거이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위해서이다. 경건과 의의 삶은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삶이며, 또한 비록 불완전하지만 구원받은 성도의 현재의 삶이다. 구원의 결과는 평강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죄사함의 구원 안에 참된 평안이 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1:28).

여러분은 하나님의 주시는 구원을 받았는가? 하나님의 주시는 구원을 아직 받지 못한 자들은 그의 구원을 사모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주시는 구원을 이미 받은 자들은 구원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를 찬송하며,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고 의롭게 살고 그가 주신 평안 가운데서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살아야 한다.

 

2장: 예수님의 탄생과 어린시절

1-7절, 마리아의 출산

[1-5절] 이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 . . .

이 때에 로마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고 하였다.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에 첫번 한 것이었다. 가이사 아구스도는 옥타비아누스이며 주전 27년부터 주후 14년까지 통치하였다. 구레뇨는 두 번 수리아 총독직을 맡았다고 보인다. 첫 번째는 주전 10-7년경이고 두 번째는 주후 6-9년이다. 황제의 칙령은 구레뇨가 처음 총독이었을 때 내려졌다고 본다.9)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갔고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마 1:16, 20)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해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정혼[약혼]한 [아내](전통본문)10)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갔다. 마태복음은, 요셉을 ‘그 여자의 남편’(1:19), 마리아를 ‘그의 아내’(1:20, 24)라고 표현했다. 마리아는 이미 잉태되었다. 그의 태 안에는 성령으로 잉태된 아기가 자라고 있었다(마 1:18; 눅 1:35).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것이라는 구약의 예언이 이렇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6-7절]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맏아들을 낳아 . . . .

거기[베들레헴에] 있을 그 때에(마 2:1, 8, 16) 해산할 날이 차서 맏아들을 낳아 강보[포대기]로 싸서 구유[소나 말의 먹이통]에 뉘었다. 이는 사관[여관]에 있을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본문은 예수님을 ‘맏아들’이라고 표현한다. ‘맏아들’이라는 원어11)는 ‘그 여자의 맏아들’이라는 말로서 마리아가 예수님 이후에 다른 자녀들을 낳았음을 나타낸다. 전통사본 마태복음 1:25에도 ‘맏아들’이라는 말이 나온다. 마가복음 6:3의 증거대로, 예수님께는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 등의 남동생들과 또 여동생들이 있었다. 마리아가 평생 처녀이었다는 천주교회의 주장은 마리아를 그릇되이 높이는 거짓말이다. 천주교회는 이 외에도 마리아가 승천하였고 중보자요 기도를 들으시는 자라고 그릇되이 높였다. 그것은 심각한 오류이다.

하나님의 아들의 탄생은 심히 비천한 모습으로 이루어졌다. 그의 탄생이 이렇게 낮아진 모습으로 이루어진 것은 그의 성육신(成肉身)과 구속(救贖) 사역의 깊은 뜻을 드러낸다. 구주 예수께서는 세상에서 영광을 받기 위해 탄생하시지 않았고 고난을 받으시고 대속제물로 죽임을 당하기 위해 탄생하신 것이었다. 물론 그는 지금 영광을 받으신다. 그러나 그것은 고난과 죽음 후에 얻으신 영광이다. 이제 그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이 우리의 몫이다. 우리가 천국의 영광을 얻으려면 그를 위해 고난도 받아야 하며, 영원히 복되게 살고자 하면 진리를 위해 죽을 각오도 해야 한다(롬 8:17; 딤후 2:11-12).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는 로마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가 모든 백성들에게 호적하라는 명령을 내렸을 때,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으로 있었을 때, 베들레헴의 한 마굿간에서 탄생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신화적 인물이 아니고 역사적 인물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낮고 비천한 모습으로 탄생하셨다. 그는 베들레헴의 한 마굿간에서 탄생하셨고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이셨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들을 구원하시려고 낮고 천한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하자.

8-14절, 천사의 증거와 찬송

[8-10절]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 . . .

예수께서 탄생하신 그 날 밤, 그 지경에서 양떼를 치던 목자들은 주의 천사를 보았다. 하나님의 천사는 역사상 평소에는 잘 나타나지 않으나 하나님의 특별한 말씀을 전달할 때 종종 나타났다. 오늘날 우리가 천사를 볼 수 없다고 해서 그 존재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 그 날 밤 주의 천사가 그들에게 나타나 그들 곁에 섰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었다. 목자들은 천사들을 보고 크게 무서워하였다. 주의 천사는 그들에게 말했다.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기쁜 소식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과연 온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크게 기뻐해야 할 좋은 소식이다.

[11-12절]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 . . .

천사는 또 말했다.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천사가 전하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은 오늘 다윗의 동네에 구주가 나셨다는 소식이었다. 그 구주는 구약성경에 예언된 메시아 곧 ‘그리스도 주’이시다. ‘주’라는 말은 그의 신성(神性)을 나타내며, ‘그리스도’ 곧 메시아라는 말은 그가 참 선지자, 참 제사장, 참 왕이심을 의미한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죄와 불행과 죽음에서 건져낼 참 선지자, 참 제사장, 참 왕으로 오셨다. 목자들은 가서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볼 것이며 그것이 그들에게 표가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천사를 통해 구주의 탄생 소식을 전해주셨고 또 표까지 주셔서 그 소식을 믿게 하셨다. 기독교는 많은 표적들로 확증된 진리이다.

[13-14절]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 . . .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말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땅 위에서는 평화, 사람들 가운데서는 은혜로다](전통본문).”12)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이다. ‘지극히 높은 곳’은 하나님께서 계신 천국을 가리킨다. 그것은 바울이 말한 ‘셋째 하늘’이나 ‘낙원’과 동일하다(고후 12:2-4). 그 곳은 태양계와 은하계를 넘어 하나님께서 자기의 특별한 영광을 나타내신 곳이다. 또 땅 위에서는 평화와, 사람들 가운데는 은혜가 있을 것이다. 은혜와 평화는 구원과 그 결과이다. 세상에서 사람들은 죄로 인하여 심령의 고통과 육신의 질병과 경제적 궁핍으로 인해 평안을 다 잃어버렸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받을 때 참 평안과 안식을 얻는다. 물론 장차 천국에서 충만한 복과 평안을 누릴 것이지만, 우리는 지금 이 세상에서도 상당한 평안과 기쁨의 삶을 누린다.

15-20절, 목자들의 확인

[15-20절]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 . . .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자, 목자들은 서로 말하였다. “이제 베들레헴까지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그들은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보았다. 그들은 주의 천사를 통해 말씀하신 하나님의 증거를 확인하였다. 또 그들은 이 아기에 대해 들은 것을 다 고하였다. 듣는 자들은 다 목자들의 말하는 것을 기이히 여겼으나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지키어 생각하였다. 목자들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신 날 밤에는 이와 같이 찬송이 있었다. 천사들이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였고 목자들도 하나님께서 주신 표를 확인한 후 하나님을 찬송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구약 예언의 성취이었다. 그는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 곧 신적 구주로 오셨다. 하나님께서는 예언하시고 역사 속에서 그 예언을 이루셨다. 성경은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모든 죄인들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다. 구원은 죄와 불행과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이다. 이 세상에서 이것보다 더 중요하고 복된 일은 없다. 인간에게 의와 평안과 영생은 가장 큰 복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구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얻을 수 있다. 우리는 이미 이 복을 받았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이 복된 소식을 만방에 전하자.

21절, 할례를 받으심

[21절] 할례할 8일이 되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니 곧 수태하기 . . . .

할례할 8일이 되자, 그의 이름을 예수라고 지었다. 그것은 수태하기 전에 천사의 일컬은 바이었다. ‘예수’라는 이름은 ‘구원’이라는 뜻이다. 그는 온 인류의 구원자로 오셨다. 할례는 언약 백성의 표로서(창 17:10-11) 죄로부터의 정결을 상징한다. 또 할례받은 자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다(갈 5:3). 예수께서는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율법을 지킬 의무가 없는 자이시지만, 친히 자신을 낮추시고 세상 죄를 짊어지신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또 하나님의 택함 받은 언약 백성의 대표자로서 친히 할례를 받으셨다.

22-24절, 마리아가 결례의 제사를 드림

[22-23절] 모세의 법대로 결례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 . . .

요셉과 마리아는 모세의 율법을 따라 결례의 날이 찼을 때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27절). 결례의 날이란, 레위기 12장의 규정대로, 남자아이의 경우는 출산 후 7일과 33일, 도합 40일이 지난날을 가리킨다. 그들이 아기 예수를 함께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것은 율법대로 첫 남자아이를 하나님께 거룩하게 구별하여 드리기 위해서였다. 요셉과 마리아는 하나님의 율법대로 살고자 했던 경건한 자들이었다. 인간적으로 말해, 예수께서는 경건하고 복된 가정에서 출생하셨다. 오늘날도 성경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대로 살고자 힘쓰는 가정은 복된 가정이다.

[24절]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비둘기 한 쌍이나 . . . .

또 요셉과 마리아는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비둘기 한 쌍이나 혹 어린 반구 둘로 제사하려 하였다. 그들이 비둘기 한 쌍으로 제사하려 한 것을 보면, 그들은 가난한 자들이었다. 여인의 자녀 출산 후 정결 의식의 일반적인 제물은 어린양 한 마리와 비둘기 한 마리이었다. 그러나 가난한 자는 비둘기 한 쌍 곧 두 마리로 그것들을 대신할 수 있었다. 예수께서는 가난한 가정에 출생하셨다. 부요하신 자가 우리를 위해 가난해지셨다.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 증거했다(고후 8:9).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천국의 상속권과 하나님 자녀의 특권의 회복과 영생의 복을 얻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할례를 받으셨고 율법을 지킬 의무가 있는 자처럼 자신을 낮추셨다. 그는 영광의 주이시며 부요하신 자이셨으나 가난해지셨고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셨다. 또 요셉과 마리아는 율법의 규례대로 행하는 경건한 자들이었다. 그것들은 우리에게 본이 된다. 늘날 우리도 자신을 낮추며 오직 신구약성경의 교훈대로 믿고 행하자.

25-35절, 시므온의 찬송과 예언

[25-27절]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 . . .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 있었다. 당시의 부패된 종교 환경 속에서도 의롭고 경건한 자들이 있었다. 신앙이 항상 환경의 영향을 받는 것은 아니다. 악한 환경 속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진실한 믿음을 소유할 수 있다.

시므온은 또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이었다. ‘이스라엘의 위로’라는 말은 당시에는 일차적으로 로마의 속박으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할지 모르나, 그것은 단지 그런 육신적 의미 뿐만 아니라, 또한 구약성경에 예언된 이스라엘의 완전한 회복, 즉 새 하늘과 새 땅의 임함을 의미할 것이다. 그곳만이 인생에게 참 위로가 될 것이다.

시므온은 또한 하나님과 함께한 사람이었다. 성령께서는 그 위에 계셨고 또 그에게 죽기 전에 ‘주의 그리스도’를 볼 것이라는 특별한 지시를 주셨다. ‘주의 그리스도’는 ‘주께서 보내신 그리스도’라는 뜻이라고 본다. 과연, 요셉과 마리아가 정결 의식을 위해 아기 예수를 데리고 성전에 들어갔을 때, 시므온은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와 아기 예수를 만났다.

[28-33절]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 . . .

그때 시므온은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그 부모[요셉과 그의 모친](전통본문)는 그 아기에 대한 말들을 기이히 여겼다.

시므온의 찬송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놀라운 증거를 담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주의 구원’이며 만민 앞에 예비된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라고 증거되셨다. ‘만민 앞에’라는 말은 ‘모든 백성 앞에’라는 뜻으로 이스라엘 백성뿐 아니라, 땅 위의 모든 백성들을 포함한다. 또 ‘이방의 빛’이라는 말씀은 구약 이사야서에 예언된 바이었다(사 42:6; 49:6). 예수 그리스도는 땅 위의 모든 백성들을 위하여 예비된 구주이시며, 특히 하나님에 대해 무지하고 부도덕한 이방인들을 위해 참 지식과 의와 생명을 주시는 자이시다.

[34-35절]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 . . .

시므온은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말했다.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고 비방을 받는 표적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패하고 흥함을 위하고’라는 말은 ‘넘어지고 일어섬을 위하고’라는 뜻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어떤 이들은 그를 믿어 구원을 받고 어떤 이들은 그를 믿지 않아 멸망을 당함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과 멸망의 갈림길이 되신다. ‘비방을 받는 표적 되기 위하여’라는 말과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는 말은 예수께서 당하실 고난을 암시한다. 예수께서 유대인들에게 미움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셨을 때 이 예언은 그대로 성취되었다. 그의 십자가 곁에 있었던 모친 마리아의 마음은 칼이 찌르는 듯한 고통을 당했을 것이다.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 죽음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의 심히 악함이 잘 드러날 것이라는 뜻이라고 본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간의 죄악의 극치이었다. 사람이 얼마나 악한 존재이면, 저 의로우신 하나님의 아들을 그토록 처참히 십자가에 못박아 죽일 수 있는가! 인간은 참으로 심히 죄악된 존재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만민을 위해 예비된 구주’이시다. 하나님은 모든 백성들의 구원을 위해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예비하셨고 이 세상에 보내셨다. 물론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만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택한 백성들은 모든 민족, 모든 나라 가운데 있다. 우리나라에도 그의 택한 자들이 많이 있다. 출생하신 지 40일 만에 그 부모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을 때 시므온을 통해 증거된 이 신기한 증거는 복음서의 대주제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만민을 위해 준비된 구주이시다. 우리는 그를 찬송하고 의지하며 사랑하고 만민에게 증거하자.

36-38절, 여선지자 안나의 감사

[36-38절]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 . . .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었는데, 그는 나이가 매우 많았다. 그는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 된 지 84년이었다. 결혼을 15세쯤 했었다고 가정한다면, 그는 당시 아마 106세쯤 되었을 것이다. 이 사람은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하나님을 섬겼는데,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하였다.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이라는 말은 전통사본에는 ‘예루살렘에서 구속됨을 바라는’13)이라고 되어 있다. 종교적으로 부패했던 당시에도 예루살렘에는 성경에 약속된 하나님의 구원을 소망하는 경건한 사람들이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그런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던 것이다.

39절, 나사렛으로 돌아가심

[39절] 주의 율법을 좇아 모든 일을 필하고 갈릴리로 돌아가 . . . .

주의 율법을 좇아 모든 일을 마치고 갈릴리로 돌아가 본 동네 나사렛에 도착했다. 누가복음에는 마태복음에 증거된 두 가지 사실들이 생략되어 있다. 첫째는 동방 박사들의 방문이고, 둘째는 애굽으로의 피난 생활이다. 이 두 사건들은 요셉과 마리아가 정결 예식을 행한 지 얼마 후에 일어났을 것이다. 즉, 시간상으로는 본절의 중간 즈음에 해당된다. 그러나 어떤 이유 때문인지 알 수 없으나, 누가는 그 두 사건을 생략하였다. 복음서 기자들은 하나님의 감동과 섭리 가운데 독자적으로 자료들을 선택하고 저술하며 증거하였다.

여선지자 안나는 오랜 세월동안 성전을 떠나지 않으며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하기를 힘쓴 경건한 여인이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지는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이후로 택한 백성들을 줄곧 구원하시고 경건하고 의로운 삶을 살게 하셨고 또 하실 것이다. 세상은 언제나 악하고 음란하고 돈을 사랑하고 육신의 쾌락을 추구하는 세상이지만,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두며 하나님의 참된 구원을 바라며 땅 위에서 경건하고 거룩한 선한 삶을 구하며 실천하는 자들이 항상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런 자가 되자.

40-52절, 예수님의 어린 시절

[40절]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 . . .

누가는 예수님의 유아 시절의 모습에 대해 “아기가 자라며 [심령이](전통본문)14)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고 증거한다. 그것은 네 가지 내용을 담고 있다.

첫째로, 아기 예수님은 자라셨다. 그것은 몸의 성장을 가리킨다. 연약한 아기의 몸은 점점 소년의 몸으로 튼튼하게 자랐다.

둘째로, 아기 예수님은 심령으로 강하여지셨다. 아기 예수님은 몸 뿐만 아니라, 정신과 마음도 강하고 튼튼해지셨다.

셋째로, 아기 예수님은 지혜가 충족하셨다. 이것은 그의 감추인 신성(神性)의 증거이었다. 요한복음의 증거대로, 예수님은 태초부터 계셨던 말씀(로고스)이신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분이시다(요 1:14). 하나님과 사람의 차이는 특히 지혜와 능력의 차이에 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지만,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 아기 예수님께서 지혜가 충만하신 것은 그가 가지신 신성의 당연한 결과이었다.

넷째로, 아기 예수님 위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머무셨다. 인간적 측면에서, 그는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실 만한 자이셨다. 사람들이 보기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확실히 그 위에 계셨다.

[41-47절] 그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을 당하면 예루살렘으로 . . . .

그의 부모는 해마다 유월절을 당하면 예루살렘으로 갔다. 율법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유월절, 맥추절, 초막절 등 1년에 3차례씩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하였다(출 23:17). 요셉과 마리아는 경건한 유대인들이었다. 예수께서 열두 살 될 때에 그들이 이 절기의 전례를 좇아 올라갔다가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머무셨다. 그 부모[요셉과 그 모친]15)는 이를 알지 못하고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들 중에서 찾되 만나지 못해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으며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났는데, 그가 선생들 중에 앉아서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셨고 듣는 자들이 다 그의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겼다.

아이 예수께서 그 삼일 동안 어디에 계셨는지 그가 어디에서 음식을 드셨고 어디에서 밤에 주무셨는지 알 수 없으나, 삼일 후에 요셉과 그 모친이 아이 예수님을 발견한 것은 그가 성전에서 선생들 중에 앉아서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는 때이었다. 본문이 증거하는 바는 그 선생들이 다 아이 예수의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겼다는 사실이었다. 40절과 52절의 ‘지혜’라는 말(소피아)과 비슷한 본절의 ‘지혜’라는 원어(쉬네시스)는 ‘총명’(understanding)이라는 단어이다. 예수께서는 아기 때에도 지혜가 충만하셨고 소년 시절에도 지혜와 총명이 뛰어나셨다. 그것은 다 그의 감추인 신성(神性)을 나타내며, 또 그의 인성도 신성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48-50절] 그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 모친은 가로되 아이야, . . .

그 부모는 보고 놀라며 그 모친은 말했다.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아이야’(테크논)라는 말은 부모가 자식을 부르는 보통의 말이다. 또 마리아는 예수께 ‘네 아버지와 내가’라고 말하였다. 예수님의 아버지는 누구이신가? 예수님의 아버지는 요셉이신가? 요셉이 마리아의 남편이니까 법적으로는 그렇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요셉과 마리아의 관계에서 태어나지 않으셨다. 그는 성령의 능력으로 처녀 마리아의 몸에서 잉태되어 탄생하셨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모친이지만, 요셉은 예수님의 부친이 아니었다.

열두 살 소년 예수님의 대답은 매우 의미심장하였다. 그는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내 아버지 집에’라는 원어(엔 토이스 투 파트로스 무)에는 ‘집’이라는 말(오이코스)은 없고 남성 혹은 중성 복수정관사(토이스)만 있다. 이 정관사가 생략하고 있는 명사는 중성단수명사인 ‘성전’보다 중성복수명사인 ‘일들’(에르고이스)일 가능성이 더 있어 보인다. 이 구절은 영어 흠정역의 번역대로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에 관계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낫다.

‘내 아버지의 집’이든지 ‘내 아버지의 일’이든지 간에 ‘내 아버지의’라는 말이 요셉을 가리키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를 가리킨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아버지이시며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증거한다. 이것은 예수의 신성(神性)에 대한 아이 예수의 증거이다. 아이 예수께서 12살 때에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은 특이한 사실이다. 그 후에도 30세가 되시기까지 그는 또 다시 침묵하셨던 것 같다. 그의 인성(人性)에 감추인 그의 신성의 신비는 참으로 크다. 그러나 아이 예수는 단순히 인간이 아니시고 단지 마리아의 아들이 아니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러나 요셉과 마리아는 아이 예수님의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했었다.

[51절]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 . . .

누가는 또 다시,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모친은 이 모든 말들을 마음에 두니라”고 증거하였다. ‘한가지로’라는 말(메트 아우톤)은 ‘그들과 함께’라는 말이다. 예수님은 어린 시절을 갈릴리 나사렛에서 보내셨다. ‘순종하여 받드시더라’라는 원어16)는 계속하여 순종하심을 보인다. 아이 예수께서는 요셉과 마리아에게 순종하셨다. 그는 하나님의 계명을 친히 지키셨다. 십계명에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고 말씀하셨다(출 20:12). 조물주이신 그가 피조물에게 순종하셨다. 그러나 물론 인성에 있어서 그러하셨다. 아이 예수의 순종은 도덕이 땅에 떨어진 말세를 위한 좋은 모범이 된다. 부모에게 불효하고 있다는 마음이 드는 자녀들은 예수님의 순종을 기억해야 한다.

[52절]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누가는 또,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고 증거하였다. 본절은 예수님의 소년 시절과 청년 시절의 모습에 대한 증거이다. 그 내용은 세 가지이다.

첫째로, 예수님은 그 지혜가 자라셨다. 인간의 지정의(知情意)는 영혼의 활동들이다. 예수님의 신성은 본래부터 지식과 지혜가 충만하시지만(40절), 그의 인성의 지혜는 자라셨다. 예수님은 그의 인성의 기능들의 성장과 더불어 그의 지혜도 자라셨다.

둘째로, 예수님은 그 키가 자라셨다. 그는 어린아이에서 십대의 소년으로, 20대의 청년으로, 그리고 30여세가 되도록 자라셨다.

셋째로,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셨다. 성경이 여러 곳에서 증거하는 대로, 예수님은 죄 없는 인격, 흠과 겸함이 없는 인격, 곧 이상적 인격이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를 기뻐하셨고 당연히 사람들도 그를 사랑스럽게 생각하였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문에서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약간의 증거를 가진다. 첫째로, 그의 신성에 관해, 예수님은 아기 때부터 지혜가 충족하셨다. 또 그는 열두 살 되셨을 때에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는 모친 마리아의 말에 대해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에 관계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고 대답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버지시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친히 증거하셨다. 그러나 요셉도 그 모친 마리아도 아이 예수님의 말을 깨닫지 못했었다. 단지 마리아는 그 모든 말을 마음에 간직해두었다.

둘째로, 그의 인성에 관하여, 예수님은 몸과 키가 자라셨고, 심령이 강해지셨고 지혜도 자라셨다. 또 그의 위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고, 그는 성장하실수록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사랑스러워 가셨다. 또한 그는 계명대로 육신의 부모님에게 순종하셨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두 가지 교훈을 찾는다. 첫째로, 우리는 예수님의 신성을 확신하자. 복음서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한다. 예수님이 단순히 사람에 불과하다면, 그는 우리의 구주가 되지 못하셨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죄인인 가능성이 크고 또 그가 죄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는 많은 사람들을 대신해 속죄제물이 될 자격을 가지시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단순히 사람이 아니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십자가 대속사역을 통해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얻었고 그 결과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신성을 믿어야 한다. 그의 증언들을 통해, 또 그가 행하신 기적들을 통해, 우리는 그의 신성을 믿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구원이 되기 때문이다. 아직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지 못하는 분이 있다면, 그는 복음서들을 통해 그를 믿고 확신하고 구원을 얻게 되기를 바란다.

둘째로, 우리는 예수님의 인성을 본받자. 우리는 예수님처럼 심령이 강해져야 하고, 우리 속에 거하시는 성령과 성경말씀을 통해 점점 더 지혜로운 자가 되어야 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머리 위에 있어서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사랑스러운 자들이 되기를 원한다. 또 자녀들은 예수님의 모범대로 부모님께 순종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흠과 점이 없는 온전한 인격의 모범이시다.

 

3장: 세례 요한의 사역

1-6절, 회개의 세례를 전파함

[1-2절] 디베료 가이사가 위에 있은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왕으로,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세례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의 전도사역은 명확히 역사적 사실이었다. 본문에는 그들의 활동 시대에 대해 구체적으로 증거되어 있다. 로마 황제 디베료 가이사는 주후 14년부터 37년까지 왕위에 있었다. 그가 왕위에 있은 지 15년 되는 해는 주후 28년경일 것이다. 본디오 빌라도는 로마 황제가 파송한 유대의 총독이었고(주후 26년부터 36년까지), 헤롯 안디바스는 예수님 탄생 때의 왕인 헤롯 대왕의 아들로서 갈릴리의 분봉왕(영토의 4분의 1을 통치하는 왕)이었다(주전 4년부터 주후 39년까지). 그 동생 헤롯 빌립은 이두래와 드라고닛의 분봉왕이었고(주전 4년부터 주후 34년까지), 루사니아는 아빌레네의 분봉왕이었다(주후 약 27년부터 28년까지). 가야바는 대제사장이었고(주후 18년부터 36년까지), 안나스는 그의 장인으로서(요 18:13) 역시 대제사장이었다. 그러면, 예수께서는 마태복음이 증거한 대로 헤롯 대왕이 죽은 주전 4년이나 그 이전에 탄생하셨고 주후 28년 초에 공적 사역을 시작하셨던 것 같다.

그때,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 곧 자신이 원하시는 바를 알리시는 말씀이며, 그것은 곧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한 말씀이다. 그것은 영생의 말씀이며,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말씀이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선지자인 증거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사실에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임했을 때, 그들은 비록 그들의 이전 직업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하나님의 선지자가 되었다.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은 신구약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이 말씀을 읽고 연구하고 묵상하는 것은 성도의 큰 특권이며 큰 복이다. 특히 하나님의 일꾼이 될 자는 성경에 정통해야 한다. 즉 하나님의 말씀의 대의를 파악하고 그 심령이 그 말씀으로 불붙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 곧 광야에서 요한에게 왔다. 광야는 비교적 세속 사회에 때묻거나 물들지 않은 곳이다. 그곳은 조용히 하나님과 많이 교제하며 기도할 수 있는 곳이며 고요히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곳이다. 때때로 우리는 광야에서나 조용한 골방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기도하며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 말씀을 많이 묵상해야 한다.

그러나 광야는 먹고 입고 자는 환경이 좋지 않은 거친 들판이다. 마태의 증거대로, 요한은 낙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었다. 그가 제사장의 아들로서 제사장이 되어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광야로 나간 것은 아마 당시의 제사장 사회가 매우 부패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의 종들은 부패된 사회 환경이나 심지어 부패된 교회 환경과 구별된 생활을 해야 한다.

[3절] 요한이 요단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요한은 요단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였다. 그는 노방 전도 혹은 야외 설교를 하였다. 그는 요단강 부근 각처에 와서, 마태의 증거대로(마 3:5-7), 많은 사람들에게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였다. 회개는 죄로부터 돌이키는 것을 말한다. 사회각계각층이 죄악되고 사람의 본성과 삶이 죄악되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회개가 필요하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죄악됨을 깨닫고 그 죄를 미워하고 죄에서 돌아서야 한다.

회개는 죄사함을 얻게 한다. 죄사함의 권한을 가지신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신다. 또 하나님의 긍휼이 아니고서는 사람이 죄사함을 기대할 수 없고 또 회개할 수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회개를 명하셨고 사람이 회개하면 죄를 용서하겠다고 말씀하셨다. 이사야 1: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세례’는 회개한 자에게 베푸는 의식이다. 물론 세례가 죄를 씻는 것은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만 우리의 죄를 씻을 수 있다. 그러나 세례받는 것은 하나님을 믿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마음의 표시요 고백이다. 누구든지 회개하고 믿는 자는 세례받을 수 있고 또 세례받아야 하며 그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

[4-6절]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 . .

이 일은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와 같았다. 거기에 보면,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말하기를,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 질 것이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았다.

세례 요한의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위한 준비작업이었다. 그것은 왕의 행차시 길을 닦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만왕의 왕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이므로, 모든 사람은 마음의 길을 닦아야 한다. 교만하고 높은 마음을 낮추고 불신앙과 회의주의와 허무주의의 깊은 골짜기들을 메우어야 한다. 그것이 회개다. 사람이 자신의 교만과 높은 마음을 버리기 전에는 아직 회개한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게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하나님의 구원이시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만민에게 전파될 구원의 복음이다.

세례 요한은 구체적 역사 상황 속에서 일한 역사적 인물이었다. 그는 신화적 인물이 아니다. 성경의 모든 내용은 신화적 내용이 아니다. 기독교에서 역사는 그 기초요 그 골격이다. 우리는 성경의 모든 역사적 사실들을 확인하고 믿고 확신하자.

기독교의 핵심은 죄사함의 구원이다. 성경이 증거하는 요긴한 진리는 죄가 개인과 가정과 국가와 세계의 불행과 죽음의 원인이며, 죄사함이 이 불행과 죽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처방이요 해결책이라는 것이다.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 곧 죄사함의 구원이다. 모든 사람은 이 구원을 받아야 한다.

사람이 죄사함을 받으려면 반드시 회개해야 한다. 죄사함은 긍휼하신 하나님 앞에 진심의 회개를 통해서만 받을 수 있다. 진정으로 회개치 않고서는 죄사함을 받을 수 없다. 사람은 자신의 교만과 불신앙과 악을 회개해야 한다. 회개하는 자만 죄사함의 구원을 받을 수 있다.

7-14절,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7절]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 . . .

요한은 세례받으러 나오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뱀이 사람을 범죄케 한 후, 모든 사람은 마귀에게 속한 자가 되었다. 예수께서는 그를 믿지 않고 거절했던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요 8:44). 또 그는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라고 책망하셨다(마 23:33). 사도 요한도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한다”고 말하였다(요일 3:8). 이것은 다 영적인 표현이다.

요한은 또 장차 하나님의 진노가 올 것이라고 말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악에 대해 엄하고 철저하게 심판하신다는 것은 인류 초기에 노아 시대의 홍수심판이나 후에 소돔 고모라 성의 심판을 통해 밝히 증거되었다. 또 장차 세상에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은 기독교 복음의 기본적인 한 내용이다. 로마서 2:16,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

[8절]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 . . .

요한은 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고 말했다. 그는 회개하는 겉모습만 가지지 말고 진정으로 회개하라고 말한 것이다. ‘회개’라는 원어(메타노이아)는 ‘생각의 변화’를 의미한다. 그것은 죄를 깨닫고 죄를 미워하고 죄에서 돌이키는 것이다. 그것은 지식과 감정과 의지의 변화이다. 그러므로 참 회개는 변화된 행위를 동반한다. 그것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이다. 불의와 악과 거짓의 삶을 청산하고 의와 선과 진실의 삶을 사는 것이 진정한 회개이다.

참된 회개가 없이 마음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며 우리가 그의 자손이라고 말하는 것은 헛된 일이며 아무 유익이 없고 도리어 큰 해가 된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구원의 확신이 아니고 회개의 열매이다. 회개 없는 구원의 확신은 오히려 그를 멸망시킨다. 하나님께서는 돌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실 수 있다. 그는 원하시는 자들을 구원하실 수 있고 또 구원하신다(롬 9:18). 하나님께서 우리 같은 이방 죄인을 구원하신 것은 이 주권적 처분에 따른 감당할 수 없는 그의 은혜이었다.

[9절]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 . . .

요한은 또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고 말했다. 그는 사람들을 나무에, 하나님의 심판을 그 나무 뿌리에 놓인 도끼에 비유하였다.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은 선한 행위들이 없는 사람들이다. 이미 혹은 이제(에데)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여 있다. 하나님께서는 무가치한 악인들을 마지막 날 지옥불에 던질 것이다. 지옥은 사탄과 악령들 과 회개치 않은 악인들을 위해 준비된 영원한 형벌의 장소이다.

[10-13절] 무리가 물어 가로되 그러하면 우리가 무엇을 . . . .

요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회개할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그들은 물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요한은 대답하였다.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줄 것이요 먹을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먹을것과 입을 것은 생활의 기본적 요소인데, 그것들을 서로 나누라고 가르쳐 준 것이다. 참 회개는 구체적 선행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말이다. 회개는 마음의 변화이며 행위의 변화이다. 남을 돌아보며 없는 자와 나누는 것은 회개의 증거이다.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라고 묻자, 그는 “정한 세 외에는 늑징치[강제로 징수하지] 말라”고 말했다. 세금받는 자들은 나라에서 정한 세금 외에 더 무엇을 징수치 말고 정한 세금만 징수하는 것이 옳고 양심적인 일이다.

[14절] 군병들도 물어 가로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 . . .

군병들도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고 묻자, 그는 “사람에게 강포하지 말며 무소하지[거짓되이 남을 비난하지] 말고 받는 요(料)[봉급]를 족한 줄로 알라”고 말했다. 군인들이 칼의 힘을 의지하여 사람들에게 강포하거나 사람들을 거짓되이 비난하는 것은 불의한 일이다. 그러므로 칼의 힘을 악용하지 않고 받는 봉급으로 만족하는 생활을 하는 것이 그들이 맺을 회개의 열매이다.

이처럼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공의와 선함과 진실의 행위들이다. 오늘날 정치가나 법조인이나 공무원이나 교육자나 사업가나 모든 사람에게 공의와 정직, 선함, 진실이 요구된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가정과 직장 등에서 공의와 정직과 선함과 진실을 실천해야 한다. 우리가 참으로 회개하였고 구원을 받은 자들이라면, 우리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우리의 도덕적인 삶으로 나타내 보이어야 한다.

우리는 회개의 열매가 없는 확신을 버려야 한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구원의 확신이 아니고 회개의 열매이다. 우리는 회개의 열매가 없는 헛된 확신을 다 버리자.

좋은 열매 맺지 않는 자들은 지옥불에 던지울 것이다. 물론 이것은 진실히 주를 믿고 구원받은 자들에게는 경각심을 주는 말씀이다. 주께서도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셨다(마 7:21). 바울도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성령]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고 말했다(롬 8:13).

그러므로 우리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기 위해 힘써야 한다. 우리가 참으로 회개했고 구원받은 자들이라면 그러해야 한다. 모든 불의와 사악과 거짓을 버리고 공의와 정직과 선함과 진실의 삶을 살려고 애써야 한다. 성도는 자기가 받은 구원을 확실하게 하기 위하여 항상 깨어 있고 구원에 합당하게 성실히 달음질해야 한다. 그렇지 못한 자는 자신이 구원을 받았는지 의심해 보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다 회개하고 구원을 받아 그 구원에 합당하게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살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과연 우리가 그러한 자들이 되었는지 항상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실을 점검하고 확인해야 한다.

15-17절, 오실 예수님에 대해 증거함

[15절]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 . . .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은 메시아를 바라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파사 제국과 헬라 제국에 이어 로마 제국의 지배 아래에서 많은 정치적 불만족과 육신적 질병들과 경제적 가난이 있었다. 구약성경에 약속된 메시아는 이스라엘의 회복자요 구주로 인정되었다. 사람들은 그가 이스라엘의 대적자들을 파하시고 사회적 안정과 경제적 풍요와 육신적 건강까지도 주실 것을 기대하였다. 그러므로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전파할 때, 모든 사람들은 요한이 혹시 그리스도이신가 하고 마음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16-17절]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 . . .

요한은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요한은 자기 뒤에 오실 분이 그리스도이심을 분명하게 증거하였다. 그 내용은 세 가지이다.

첫째로, 자기 뒤에 오실 그 분은 자기보다 능력이 많으신 분이시며 자기는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치 못할 것이다. 요한과 장차 오실 분은 그 능력에 있어서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장차 오실 분은 요한과 비교할 수 없이 능력이 많은 분이시다. 특히 그것은 기적을 행하심에 있어서 그러할 것이다. 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 운동은 온 세계에 가득하게 될 것이며 그는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하시며 모든 고난을 이기게 하실 것이다(고후 4:7-12).

둘째로, 자기 뒤에 오실 그리스도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자이시다. 세례는 죄씻음을 상징한다. 물세례는 단지 죄씻음을 외적으로 표시하고 확증한다. 그러나 성령의 세례는 실제로 죄인들의 심령을 새롭게 한다. 그것은 사람을 중생(重生)시킨다. ‘성령과 불로’라는 말은 같은 사실을 가리킬 것이다. 불은 용광로에서 금을 제련하는 데 사용된다. 성령은 죄인을 깨끗케 하신다(고전 6:11; 딛 3:4-6).

셋째로, 그리스도께서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셔서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다. ‘키’는 타작할 때에 곡식을 까불러 알곡과 쭉정이를 고르는 기구이다. 그의 타작마당은 이 세상이다. 이 세상을 창조하신 그는 이 세상의 소유주이시며 또한 심판하실 권한이 있는 자이시다. 하나님께서 심판자로 세우신 자가 그리스도이시다.

주께서는 알곡을 모아 곡간에 들이실 것이다. 알곡은 회개의 열매, 의의 열매를 맺는 성도들을 가리켰다. 그들은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열매가 없는 쭉정이, 즉 회개치 않고 순종치 않은 자들은 꺼지지 않는 불 곧 지옥에 던지울 것이다. 지옥은 영원한 형벌의 장소이다. 예수께서는 지옥에 대하여 “거기는 [악인들의]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막 9:48).

18-20절, 옥에 갇힘

[18-20절] 또 기타 여러 가지로 권하여 백성에게 좋은 소식을 . . . .

요한은 또 기타 여러 가지로 권하여 백성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였으나 분봉왕 헤롯은 그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과 또 그의 행한 모든 악한 일을 인하여 요한에게 책망을 받고 이 위에 한 가지 악을 더하여 요한을 옥에 가두었다. “이 위에 한 가지 악을 더하여”라는 말은 악인들의 회개치 않는 모습을 잘 나타낸다. 악인들은 그들의 죄를 지적하는 설교자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기는커녕 그를 미워하고 그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다. 하나님의 종 요한은 옥에 갇혔고 거기에서 순교를 당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능력이 많으신 분이시다. 그는 신적 능력의 구주이시다. 그는 구원받은 자기 백성을 잘 도우실 수 있다. 이 능력의 주께서 우리와 항상 함께하시므로 우리는 든든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시다. 그는 우리를 성령으로 중생시키신 분,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주신 분이시다. 오늘도 그는 구원하실 자들을 이렇게 구원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며 의탁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마지막 심판자이시다. 알곡은 천국에 들어가지만, 쭉정이는 지옥에 던지울 것이다. 회개하고 진실히 믿고 하나님의 계명대로 바르게 살고자 힘쓰는 자들은 확실히 넉넉히 천국에 들어갈 것이나, 계속 죄 가운데 머무는 자들은 영원한 멸망을 피할 수 없다.

21-22절,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심

[21-22절]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 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 . . .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 때에 예수님도 세례를 받으셨다. 의로우신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까닭은 죄인들의 구주로서 그들을 대신하여 그들의 모든 죄의 짐을 지심을 나타내신 것뿐이다. 그것은 청년 예수께서 메시아의 사명을 수행하시는 첫걸음이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렸고 성령께서 형체로 비둘기같이 그에게 내려오셨다. 그가 세례 받음을 통해 자신의 사명을 인식하며 아버지께 감사의 기도, 간구의 기도를 드렸을 때 하늘이 열렸고 성령께서 볼 수 있는 형체로 내려오셨다. ‘비둘기같이’라는 말은 성령의 순결하심을 나타낸다. 그리스도는 본체에 있어서 성령과 하나이시지만, 두 분 간의 인격적 구별은 있다. 이제 예수께서 전도사역을 시작하려 하실 때 성령께서 오셨다.

그때 하늘로서 소리가 났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이렇게 삼위일체 하나님 즉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께서 함께 나타나셨다. 하늘로서 난 소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친 음성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가 단순히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 아들임을 친히 증거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후에 변화산 위에서 세 제자들에게 한번 더 친히 증거하실 것이다(눅 9:35). 성경의 일차적 목적은 바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는 것이다(요 20:30-31).

23-38절, 예수님의 족보

[23절]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30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의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이상은 헬리요.

예수께서는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30세쯤 되셨고17) 사람들의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셨다. 요셉의 아들이라는 말은 실제상의 사실이 아니고 단지 족보상의 사실이었다. 실제로 예수께서는 성령의 능력으로 처녀 마리아에게서 잉태되어 탄생하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고 그를 요셉의 아들이라고만 생각하였다. 요셉의 부친은 헬리이었다.

[24-27절] 그 이상은 맛닷이요, 그 이상은 레위요, 그 이상은 멜기요, 그 이상은 얀나요, 그 이상은 요셉이요, 그 이상은 맛다디아요, 그 이상은 아모스요, 그 이상은 나훔이요, 그 이상은 에슬리요, 그 이상은 낙개요, 그 이상은 마앗이요, 그 이상은 맛다디아요, 그 이상은 서머인이요, 그 이상은 요섹이요, 그 이상은 요다요, 그 이상은 요아난이요, 그 이상은 레사요, 그 이상은 스룹바벨이요, 그 이상은 스알디엘이요, 그 이상은 네리요 그 이상은 멜기요, 그 이상은 앗디요, 그 이상은 고삼이요, 그 이상은 엘마담이요, 그 이상은 에르요, 그 이상은 예수요, 그 이상은 엘리에서요, 그 이상은 요림이요, 그 이상은 맛닷이요, 그 이상은 레위요, 그 이상은 시므온이요, 그 이상은 유다요, 그 이상은 요셉이요, 그 이상은 요남이요, 그 이상은 엘리아김이요, 그 이상은 멜레아요, 그 이상은 멘나요, 그 이상은 맛다다요, 그 이상은 나단이요, 그 이상은 다윗이요 그 이상은 이새요, 그 이상은 오벳이요, 그 이상은 보아스요, 그 이상은 살몬이요, 그 이상은 나손이요, 그 이상은 아미나답이요, 그 이상은 아니[아람](전통본문)요,18) 그 이상은 헤스론이요, 그 이상은 베레스요, 그 이상은 유다요, 그 이상은 야곱이요, 그 이상은 이삭이요, 그 이상은 아브라함이요, 그 이상은 데라요, 그 이상은 나홀이요 그 이상은 스룩이요, 그 이상은 르우요, 그 이상은 벨렉이요, 그 이상은 헤버요, 그 이상은 살라요, 그 이상은 가이난이요, 그 이상은 아박삿이요, 그 이상은 셈이요, 그 이상은 노아요, 그 이상은 레멕이요, 그 이상은 므두셀라요, 그 이상은 에녹이요, 그 이상은 야렛이요, 그 이상은 마할랄렐이요, 그 이상은 가이난이요, 그 이상은 에노스요, 그 이상은 셋이요, 그 이상은 아담이요, 그 이상은 하나님이시니라.

누가가 증거하는 예수님의 족보는 마태복음에 증거된 것과 많은 차이가 있다. 우리는 그 정확한 이유를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성도의 믿음의 확실함을 위해 주신(눅 1:4) 증거의 책에 불확실하고 부정확한 내용을 허용하셨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마태복음의 족보와 누가복음의 족보가 둘 다 정확한 내용임을 믿는다.

그 둘을 조화시키기 위해 우리는 몇 가지 추측들을 해볼 수 있다. 첫째로, 우리는 족보의 전체는 아니라 하더라도 그것의 어떤 부분을, 같은 사람이 다른 두 이름을 가지는 경우들이 있을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양자(養子) 제도나, 또 구약에 규정되어 있는 수혼(嫂婚) 제도(신 25:5-6)를 고려해야 할 것이다. 셋째로, 여러 주석가들의19) 추측대로 본장의 족보는 아마 요셉의 족보가 아니고 마리아의 족보일지도 모른다. 즉 23절의 ‘헬리’는 요셉의 친아버지가 아니고 장인이라는 말이다. 랍비들의 글에 마리아를 ‘헬리의 딸’이라고 부른 곳이 있다고 한다.20)

예수님의 족보를 다윗과 아브라함에게 연결시킨 것은 그가 구약 시대에 또 구약성경에 약속된 메시아이심을 증거한다. 구약성경은 여러 곳에서 장차 메시아께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것을 증거하였고(사 11:1, 10; 렘 23:5, 6; 30:9; 33:15; 겔 34:23; 37:24; 호 3:5), 또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실 것도 예언하였다(창 12:2-3; 22:18).

더욱이, 누가는 메시아의 족보를 인류의 시조 아담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구약의 메시아 예언은 창세기 3:15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에서 뱀에게 하신 선언에서도 나타나 있다. 창세기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이것은 최초의 메시아 예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그 예언된 ‘여자의 후손’으로 오셨다.

인간의 죄의 형벌은 인간이 받아야 했다. 그래서 구주께서는 여자의 후손으로 오셨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많은 사람들의 죄와 형벌을 대신하기 위하여 친히 사람이 되셨다.

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에서 뱀에게 선언하신 대로 여인의 후손을 보내셨다. 그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대로 또 선지자들을 통해 다윗의 자손을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신 대로 메시아를 보내셨다.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셨다. 그는 신실하시다. 그는 신약성도에게 하신 약속들, 즉 예수님의 재림, 죽은 자들의 부활, 새 하늘과 새 땅의 천국, 복된 영원한 생명 등도 반드시 지키실 것이다.

결론적으로, 21절부터 38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사실을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친히 예수님이 그의 사랑하는 아들, 그의 기뻐하는 아들이심을 증거하셨다. 이것은 하나님 자신의 친 음성의 증거 곧 그의 직접적인 증거이다. 역사상 하나님께서 친 음성으로 무엇을 증거하신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 때에 이 중요한 증거를 하셨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증거를 진지하게 생각하며 받아들여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에 대해 친히 하신 증거의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깨닫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랑하는 외아들을 인류를 위해 보내주셨다. 그것은 실상 하나님의 독생자를 죄인들의 속죄제물로 십자가에 죽도록 내어주신 것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나타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우리의 귀한 것을, 우리의 외아들을, 아니 우리 자신을 드리지 못하였는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이렇게 큰 사랑을 나타내신 것이다.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할 차례이다.

셋째로, 본문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또한 사람의 아들이심을 증거한다. 이것이 예수님의 독특한 인격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친히 증거하신 대로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또한 분명히 사람이셨다. 그는 사람들의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셨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사실이 성경이 예수님에 대해 증거하는 진리이다. 그것은 가장 놀라운 신비이며 기적 중에 기적이다.

넷째로, 예수님의 족보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다시 한번 더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메시아를 보내셨다. 하나님은 신실하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약속을 굳게 믿고 소망을 견고히 해야 한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본받아야 한다.

 

 4장: 예수님의 전도 사역 시작

1-13절,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심

[1절]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 . . .

예수께서는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셨고 광야에서 40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이 모든 날에 아무것도 먹지 않으셨고 날 수가 다하므로 주리셨다.

예수님과 성령님은 신적 본질에 있어서 하나이시지만, 인간 예수께서는 성령의 충만함을 입으신 후 마귀의 시험을 받고 전도 사역을 시작하셨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성령의 충만을 받으신 후에 일하셨다면, 오늘날 성도들과 전도자들에게 성령의 충만하심이 얼마나 더 필요할 것인지는 두말할 필요가 없다. 우리의 신앙생활 전반과 봉사생활, 특히 전도의 일에는 성령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이 필요하다.

마귀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비난하는 자이며 세상의 모든 죄악의 원인자요 후원자이다. 그는 세상의 거짓된 종교들, 헛된 철학과 사상들, 음란하고 죄악된 유행과 풍조들의 배후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이 세상 신’(고후 4:4), ‘공중의 권세잡은 자’(엡 2:2)로 불린다. 그는 지금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하는 자요(고후 4:4)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않는 사람들 가운데 역사하고 있는 영이다(엡 2:2).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해 친히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고 그 시험을 이기셨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 동산에서 마귀의 시험에 넘어져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범죄했었다. 만일 예수께서도 마귀에게 지셨다면 그는 우리를 위한 구주의 자격이 없으셨을 것이다. 범죄치 않는 의인만 구주의 자격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귀의 시험을 이기셨다.

[3절] 마귀가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 . . .

마귀는 말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 첫 번째 시험은 떡 시험, 즉 먹는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먹는 문제는 사람이 사는 데 있어서 기본적 문제이다. 사람은 먹는 것을 위해 일한다. 많은 사람들은 돈을 벌어 대부분 먹는데 쓴다. 세상에는 아직도 먹는 것이 부족하여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다. 마귀는 이 기본적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을 시험하였다.

마귀는 예수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말했다. 마귀의 이 말에서 우리는 마귀가 가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개념이 돌로 떡을 만들 수 있는 신적 능력의 소유자라는 개념인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옳은 개념이다. 사람의 아들이 사람이듯이,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이시다.

예수께서는 돌로 떡을 만들 수 있는 신적 능력을 가진 자이시다. 신약성경의 증거대로, 예수께는 전능하신 신성이 있으시다. 또 그가 40일 동안 음식을 먹지 않아서 몹시 배고프셨기 때문에 기적의 정당성도 있어 보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마귀의 제안을 거절하셨다. 사실, 예수께서 행하신 모든 기적들은 자기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었고,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들의 유익을 위해 부득이 행해진 것들이었다. 물론 그것들은 그의 신성을 확증하였다.

[4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하기를 사람이 떡으로만 . . . .

예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기록하기를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아니요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전통본문)21)”고 하셨다. 예수께서 마귀의 제안을 거절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 때문이었다. ‘기록하기를’(케그랍타이, ‘기록되었으되’)이라는 말은 성경이 우리의 모든 문제에 대한 대답이 되며 특히 마귀의 시험에 대한 대답이 됨을 잘 증거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발에 등이요 우리 길에 빛이시다(시 119:105). 또 하나님의 말씀은 마귀의 시험을 물리칠 수 있는 ‘성령의 검’이다(엡 6:17). 예수께서는 심지어 자신의 권위로가 아니고 기록된 말씀의 권위로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셨다.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육신적 존재가 아니고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사는 영적 존재이다. 사람은 영육의 결합체이다. 사람은 살기 위해 먹으며 행복을 위해 먹지만 여전히 불행하고 결국 늙고 병들고 죽는다. 떡은 몸을 위해 필요하나 영을 위해서는 도움이 되지 못한다. 떡은 사람의 죄 문제, 평안과 생명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의요 생명이며, 그 말씀을 어기는 것이 죄요 죽음이다.

우리는 항상 성령의 충만을 구하며 받자(엡 5:18). 그래야 신앙생활, 봉사생활을 잘 하고 마귀의 시험을 이길 수 있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검으로 마귀의 모든 시험을 물리치자. 또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자. 오직 그 말씀을 다 믿고 그 말씀대로 행하자.

[5-7절]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높은 산으로](전통본문) . . . .

마귀는 또 예수님을 이끌고 [높은 산으로](전통본문)22)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 말하였다.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마귀의 두 번째 시험은 천하 만국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보이며 그것을 주겠으니 내게 절하라는 시험이었다.

그러나 마귀가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고 한 말은 옳지 않다. 물론 성경은 마귀를 ‘이 세상의 신’이요 ‘공중의 권세 잡은 자’로 표현하였고(고후 4:4; 엡 2:2), 또 ‘온 세상은 악한 자[곧 사탄] 안에 처해 있다’고 말씀하였다(요일 5:19). 또 이 세상의 권세, 부귀, 영광은 마귀가 사람들을 멸망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수단들이라고 보여진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권세와 영광은 마귀의 손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다 하나님의 주권적 손 안에 있다. 하나님만이 홀로 세상의 주권자이시다. 모든 것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간다(롬 11:36).

그러나 마귀는 예수께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이것들이 다 네 것이 되리라”고 말하였다. 마귀는 세상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미끼로 자신에게 절하라고 미혹하였다. 이 수법은 그 후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사용하는 마귀의 수법이다. 세상의 권세와 영광을 취하려는 자는 이 시험에 넘어져 하나님 대신 마귀를 섬기게 된다.

그래서 야고보는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고 말하였고(약 4:4), 또 사도 요한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고 말한 것이다(요일 2:15).

[8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 . .

그러나 예수께서는 단호히 그를 물리치시며 대답하셨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전통본문).23)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경건의 순수성을 부패시키는 것보다 더 심각한 시험은 없다.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다. 우리는 삶의 많은 부분에서 온화하고 유순함을 보여야 하지만, 예배 문제만큼은 분명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 우리의 경배의 대상은 하나님뿐이다. 그 외에는, 그 무엇도 우리의 경배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심지어 마리아도 경배의 대상이 아니다.

[9-11절] 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 . . .

마귀는 또 그를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말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 내리라. 기록하였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또한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

마귀의 또 하나의 시험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라는 것이었다. 이 시험은 종교적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즉 기적을 통해 종교적 인기와 명예를 얻으라는 암시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종교적 인기와 명예도 세상적인 것이다. 진실한 교훈과 삶을 통해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명예를 얻는 것은 잘못된 것이 없겠으나 여전히 이 세상에 속한 것으로서 별 의미와 가치는 없다. 인간의 욕심에서 나온 종교적 인기와 명예의 추구는 종종 기적의 추구, 혹은 과장된 기적 체험의 주장과 더불어 나타나는데 그런 것은 다 세상적인 것일 뿐이다.

마귀는 이번에 성경을 두 곳이나 인용하였으나 그것을 잘못 적용하였다.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귀히 여겨야 할 뿐 아니라, 그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고 바르게 적용해야 한다. 성경을 잘못 해석하거나 잘못 적용하는 것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는 생각이 무의미할 정도로 잘못된 것이다.

성경 해석의 건전한 법칙은 세 가지인데, 첫째는 문법적 해석이고, 둘째는 역사적 해석이고, 셋째는 신학적 해석이다. 문법적 해석이란 성경 본문의 각 단어의 뜻과 문장 구성과 문맥을 따라 해석하는 것이고, 역사적 해석이란 성경 본문의 역사적 배경을 생각하며 해석하는 것이고, 신학적 해석이란 성경을 전체적으로, 체계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성경의 각 부분은 성경 전체에 비추어 해석되어야 한다.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이며 참 저자가 성령이심을 믿는다면, 성경의 한 부분을 다른 부분과 충돌시켜 해석하지 않을 것이다.

[12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말씀하기를 주 너의 . . . .

예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말씀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고 하셨다. 성경을 인용하면서 기적을 구하라고 한 마귀의 제안은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성경 다른 부분의 분명한 말씀에 위반되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라도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되고 특히 하나님을 시험하는 방식으로 기적을 구해서는 안 된다. 성경의 기적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확증하는 목적을 가졌다. 하나님의 충족한 말씀들이 역사상 기적들을 통해 다 확증되었고 그것들이 다 성경에 기록되었다. 그러므로 오늘날 사실상 기적의 필요성은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불변적 능력을 믿는다. 그러나 성경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믿고 선한 삶을 사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기적을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시험치 말고 성경 말씀을 믿고 그대로 사는 것으로 만족하자.

[13절]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

마귀는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났다. ‘얼마 동안’이라는 말은 마귀가 이후에도 필요할 때마다 그를 시험할 것을 암시한다. 예수님의 경우가 그러하였다면, 우리의 경우는 두말할 것도 없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고(마 26:41), 베드로는,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으므로 “근신하라, 깨어라”고 교훈하였다(벧전 5:8). 죄와 마귀의 시험이 많은 세상이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깨어 기도하기를 힘써야 한다.

성경은 마귀의 시험을 이길 수 있는 무기이다. 사실, 성경은 우리의 삶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해답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말씀으로 충만함을 얻고 성경말씀으로 잘 무장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항상 성경 읽기와 성경 배우기를 힘써야 한다.

우리는 세상적 권세와 영광을 얻으려고 사탄에게 절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세상 권세와 영광을 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경배하며 섬겨야 한다. 또 우리는 종교적 인기와 명예를 얻으려고 기적을 구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라도 하나님을 시험해서는 안 되고 오직 성경말씀을 믿고 그 말씀대로 의롭고 선하게만 살아야 한다.

14-30절, 나사렛에서 배척을 받으심

[14-15절] 예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 . . .

예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므로 모든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셨다. ‘성령의 권능으로’라는 말은 예수님의 말씀이나 인격에서 나타나는 성령의 감화력뿐 아니라, 그의 기적의 행위들을 뜻하는 것 같다. 회당은 유대인들의 바벨론 포로생활 기간에 생긴 것으로 오늘날 예배당과 비슷하였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예배하고 성경을 배우기 위해 그곳에 모였고 또 공적 문제들도 의논하였다. 예수께서는 갈릴리 지방의 여러 회당들에서 가르치셨다. 가르치는 일은 예수께서 하신 주된 사역이었다.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치는 일은 참된 종교의 첫 번째 요소이다.

[16절]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 . . .

예수께서는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오셨다. 나사렛은 예수께서 자라나신 곳 곧 고향이었다. 그는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 성경을 읽으려고 서셨다. ‘자기 규례대로’라는 말은 예수께서 평소에 안식일에 회당에 가신 습관이 있음을 나타낸다. 신앙 생활에 있어서는 좋은 습관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성수주일, 성경 읽기, 기도하기, 새벽기도 등의 습관은 좋은 습관이다. 당시의 회당에는 예배실(‘바실리카’라고 부름) 앞부분에 강단(‘베마’라 부름)이 있었고 성경을 잘 아는 사람이 거기에 서서 성경을 읽기도 하고 해석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17-19절]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 . . .

예수께서는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받고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셨다.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께서 읽으신 부분은 이사야 61장의 첫 부분이었다. 당시의 책은 오늘날과 달리 두루마리로 되어 있었고 그것을 말아서 보관하다가 펼쳐서 읽었다.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생각과 달리, 누가는 이사야 61장의 말씀을 ‘선지자 이사야의 글’이라고 증거하였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라는 원어는 ‘주의 성령이 내 위에 계시니’라는 뜻이다. 전통본문에는 ‘나를 보내사’라는 말 다음에 ‘마음이 상한 자들을 치료하며’라는 구절이 들어 있다.24)‘가난한 자,’ ‘마음이 상한 자,’ ‘포로된 자,’ ‘눈먼 자,’ ‘눌린 자’ 등의 말들은 영육으로 다 적용된다. 영적 문제는 육적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사람은 죄로 인하여 영적으로 가난하고 마음이 상하고 마귀와 죄에 포로되고 눈멀고 눌린 자가 되었다. 그러나 사람은 또한 죄의 결과로 외적으로, 육신적으로도 가난, 슬픔, 병, 고통 등 불행한 처지에 떨어져 있다. 구주께서는 이런 인생에게 복음을 전파하시고 그를 그 불행에서 건져내시기 위해 오셨다. 그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1:28).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는 오셔서 하나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셨다. 하나님의 은혜의 해는 메시아의 오심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그 전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이스라엘 가운데 없지 않았으나 메시아의 오심으로 그것은 특별한 방식으로 증거되고 주어졌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고 증거하였고(요 1:17), 사도 바울은,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고 증거하였다(고후 6:2).

[20-22절]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 . . .

예수께서 회당에서 그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자  회당에 있는 자들은 다 그를 주목하여 보았다. 이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주께서는 그 날 회당에서 책을 읽기만 하시고 설명은 하지 않으셨던 것 같다. 단지, 그는 앉으신 후 회당에 참석했던 자들이 다 그를 주목하자, ‘이 글(헤 그라페)(혹은 성경)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것은 놀라운 선언이었다. 그것은 자신이 이사야서에 예언된, 구약성경에 예언된 바로 그 사람임을 선포하신 것이었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이 예언하신 메시아, 곧 구약 예언의 성취자로 또 이스라엘과 온 세상의 구주로 오셨다.

모든 사람들은 다 그를 좋게 증거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기이히 여기며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라고 물었다. 마태복음 13:54 이하에는, 그가 고향 나사렛 회당에서 가르칠 때, 사람들은 놀라 말하기를,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뇨?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하고 예수를 배척하였다고 말한다. 그들은 예수님을 인간 목수 요셉의 아들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메시아께서 사람으로 오실 때 목수의 아들로 오시면 안 되는 이유가 있는가? 그들은 그 요셉의 아들이 정말 메시아이신가를 확인할 필요가 있지, 그를 배척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유 없이 그를 의심했고 무시했고 배척하였다.

[23-27절]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원아 . . . .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반드시 의원아 너를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증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의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고 하시고 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다. 마태복음 13:57에도,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는 비슷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나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들이 있었으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느니라.”

예수께서는 구약성경의 사건들이 진실한 역사적 사실들임을 증거하셨다. 성경에 증거된 사건들은 어떤 이들이 잘못 생각하듯이 단순히 교훈을 주려는 우화(寓話)들이 아니고, 믿을 만한 역사적 사건들이다. 또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그의 긍휼을 주권적으로 베푸시되, 우상숭배적이고 패역한 이스라엘을 버려두시고 이방의 한 과부에게와 이방의 한 장군에게 긍휼을 베푸셨음을 증거하셨다. 이것은 불경건하고 교만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불쾌한 일이었을 것이다.

[28-30절]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분이 가득하여 . . . .

회당에 있는 자들은 이것을 듣고 다 분이 가득하여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가서 밀쳐 내리치고자 했으나, 예수께서는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셨다. 그들의 불쾌와 분노는 그를 살해하려는 행동으로까지 발전되었다. 미움은 살인이다. 그러나 위기를 만난 예수께서는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셨다. 그는 권세와 용기가 있으셨다. 아직 하나님의 때가 되지 않았다. 그때가 되면, 그는 스스로 십자가의 죽음을 택하실 것이다.

예수께서는, 죄로 말미암아 영육으로 가난해졌고 상했고 포로되었고 눈멀었고 억눌렸던 인생들에게 죄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 곧 평강과 자유와 기쁨의 구원을 주시는 자로 오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구약성경이 예언한 그 메시아, 곧 인류의 구주로 오신 것이다.

그러나 그의 고향 나사렛 사람들은 그를 배척하고 심지어 죽이려 하였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기이히 여겼고 마침내 분이 가득하여 그를 끌고 나가 낭떠러지에 밀어뜨려 죽이려 했던 것이다. 그들은 무지하고 교만하고 완악했다. 그들은 예수님의 진실과 신성의 영광을 도무지 보지 못했고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를 믿고 영접하며 따르자. 또 오늘날도 성도들은 교회의 말씀의 봉사자인 목사들을 그들의 인간적 약점만 보거나 바른 말씀을 싫어하여서 배척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맡겨주신 직분과 그들을 통해 전달되는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그들을 존중하고 그 말씀을 잘 듣고 배우고 행하며 따라야 한다.

31-37절, 가버나움 회당에서의 일

[31-32절] 갈릴리 가버나움 동네에 내려오사 안식일에 . . . .

예수께서 갈릴리 가버나움 동네에 내려오셔서 안식일에 가르치시자 사람들은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말씀이 권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태복음 7:28-29도,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고 증거한다. 그의 말씀은 매우 권위가 있으셨다.

[33-34절]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크게 . . . .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었다. ‘더러운 귀신’은 더러운 생각들을 일으키는 악령이다. 이 세상의 음란한 풍조는 더러운 영들의 활동으로 더욱 확산되고 왕성하여진다. 그 사람은 크게 소리질러 말했다.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그 더러운 영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고 증거하였다. 귀신 혹은 악령은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와 주님으로 고백하지는 못하나, 그에 대해 바르게 알고 있었다.

[35-37절]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 . . .

예수께서는 꾸짖어 말씀하셨다.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주께서 그에게 잠잠하라고 꾸짖으신 것은 아직 그의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는, 그에 대한 진리가 공개적으로 증거될 것이다. 그때까지는 그 사실이 아직 공적으로 증거되지 말아야 하였다. 귀신은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왔으나 그 사람은 상하지 않았다. 그 사건을 본 사람들은 다 놀라 서로 말했다.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세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 귀신을 복종케 하시는 그의 능력과 권세는 확실히 신적 능력과 권세이었다. 이에 예수님의 소문이 그 근처 사방에 퍼졌다.

38-39절,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심

[38-39절] 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 . . .

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셔서 시몬의 집에 들어가셨는데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에 붙들려 있었다. 시몬 베드로는 독신자가 아니고 결혼한 자이었다(고전 9:5). 어떤 사람이 그를 위해 예수께 구하자 예수께서는 가까이 서서 그 열병을 꾸짖으셨다. 마태와 마가는 그가 시몬의 장모의 손을 잡고 일으키셨다고 증거한다(마 8:15; 막 1:31). 주께서는 그의 손을 잡고 일으키시며 그 열병을 꾸짖으셨다. 그러나 그 열병은 예수께 복종하였다. 그 병은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그들에게 수종들었다.

시몬의 장모가 곧 일어나 그들에게 수종들었다는 말씀은 예수님의 병고침의 일이 즉각적이고 완전했음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무슨 일이든지 즉시 또 완전히 하실 수 있다. 하나님의 치료는 오랜 시간을 요하는 것이 아니다. 이 사건은 확실히 그의 신적 능력과 인격, 즉 그의 신성(神性)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던 것처럼, 열병의 원인이 되는 바이러스 생명체가 그의 말씀에 복종하였다. 하나님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시는 전능자시다. 생물계와 무생물계가 다 그의 말씀 앞에 복종한다.

40-41절, 여러 종류의 병자들을 고치심

[40-41절] 해 질 적에 각색 병으로 앓는 자 있는 사람들이 . . . .

해 질 적에 각종 병으로 앓는 자 있는 사람들이 다 병자를 데리고 나아오니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셔서 고치셨다. ‘일일이 손을 얹으신’ 것은 개개인에 대한 그의 사랑과 관심을 보이며 그들의 병고침 받음이 우연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일임을 확실하게 증거한 것이다. 그것은 치료받는 자나 보는 자들의 믿음을 위해서일 것이다.

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당신은 [그리스도]25)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고 소리질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꾸짖으시며 그들의 말함을 허락지 아니하셨다. 왜냐하면 그들이 자기를 그리스도인 줄 알기 때문이었다. 귀신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있었다. 단지 그들은 그를 믿거나 의지하지 않는다.

예수께서는 그 귀신들이 자기에 대해 증거하는 말을 금하셨다. 그는 귀신들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고 다른 병자들에게도 그렇게 하셨다(마 8:4; 9:30). 그 이유는 아직 그의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고, 또 그가 병고치기 위해 오신 자로 오해될까봐이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의 육신의 병을 고쳐주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고 그보다 더 근원적이고 더 전체적인 문제 곧 죄사함을 위해 오셨다. 그것이 기독교 복음이다. 기독교는 외적 기적을 전하지 않고 내면적 기적, 곧 회개와 믿음, 구원, 인간 변화, 새 사람 됨을 전한다.

42-44절, 전도하심

[42-44절] 날이 밝으매 예수께서 나오사 한적한 곳에 가시니 . . . .

날이 밝자 예수께서 나오셔서 한적한 곳에 가시니 무리가 찾다가 만나서 자기들에게서 떠나지 못하게 말리려 했으나 그는 “내가 다른 동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해야 하리니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고 말씀하시고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이다. 그것은 마귀의 나라와 대조된다. 마귀의 나라는 어두움과 죄의 나라이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빛과 의의 나라이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하나님께 즐거이 순종하고 그의 뜻과 그의 말씀을 지킨다. 자신의 전도 사명을 밝히 증거하신 예수께서는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셨다.26)

귀신들은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에 대해 바르게 증거하였다. 그들은 비록 그를 믿고 구원을 받지는 못하지만, 그가 ‘하나님의 거룩한 자’이시며,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증거하였다.

예수께서는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그는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주셨고,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셨으며, 또 각종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그는 귀신들에게 명령하셨고 심지어 열병에게도 명령하셨다. 그의 명령 앞에 귀신들은 복종하였고 열병도 복종하였다. 그것은 확실히 그의 신성의 능력 곧 그의 신성(神性)을 증거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명은 병고치는 일이 아니고 전도하는 일이셨다. 그는 병고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었다. 그의 사명은 전도이셨다. 오늘도 참 기독교는 인간들의 병고침 곧 육신적 치료나 좀더 넓게 말한다면 밥 문제의 해결을 위해 있지 않다. 참 기독교는 인간들의 완전한 치료, 곧 구원을 위하여, 죄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존재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사함을 주셨고 그것과 더불어 부활과 영생, 곧 영원한 천국의 삶을 약속하셨다. 전도는 예수님의 사명이며 또 우리의 사명이다. 우리는 그 사명을 다하자.

 

5장: 죄인을 부르심

1-11절, 제자들을 부르심

본문의 내용은 마태복음 4:18-22이나 마가복음 1:16-20의 내용과 동일한 사건을 증거한다고 생각된다. 그 둘 사이에 차이점들도 있어 보이지만(마 4:18, 21 참조), 그것들은 부분적 생략과 대략적 묘사나 자세한 묘사에서 생긴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 두 증거는 서로 보완적이다.

[1-2절] 무리가 옹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 . . .

무리가 둘러싸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예수께서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호숫가에 두 배가 있는 것을 보셨고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고 있었다. ‘게네사렛 호수’는 갈릴리 호수의 또 하나의 명칭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이 있었고, 많은 사람들은 그의 말씀을 듣기 위해 그에게 모여들었다. 갈릴리 호숫가에 많은 배들이 있었겠지만, 예수님의 관심은 시몬 베드로의 배와 야고보와 요한의 배에 있으셨다. 그들이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고 있었던 것을 보면 그들은 밤에 고기를 잡고 돌아왔음을 알 수 있다. 마태복음의 증거대로 예수께서는 이 사건 전에 시몬 베드로가 그물로 고기를 잡는 것을 보고 계셨던 것 같다.

[3절]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 . .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이었다. 육지에서 조금 띄기를 청하시고 앉으셔서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셨다. 말씀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 형식은 크게 중요치 않았다. 시몬의 배는 강단이 되었고 호숫가에 앉아 있는 무리들은 청중이 되었다. 그 자신도 앉아서 무리에게 말씀을 가르치셨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장소, 어떤 처지에서도 증거되어야 하고 또 증거될 수 있다. 밤새도록 일하고 돌아온 어부 시몬의 배를 사용하신 것은 그 호숫가에 앉아 있었을 무리들의 유익을 위하심이요, 특히 시몬을 제자로 부르시려는 그의 크신 관심과 배려이셨다.

[4-5절]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 . . .

그는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셨다. 시몬은 대답하였다.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맟도록[밤새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만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베드로는 형제 안드레의 증거를 따라 이미 예수님을 알았던 자이었다(요 1:41-42). 밤새도록 헛수고를 했던 터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쓸데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거부할 수도 있었겠지만, 시몬 베드로의 마음 속에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과 그의 말씀을 순종하려는 마음이 있었다.

[6-7절]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 . . .

시몬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던지자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질 정도이었다. ‘찢어지다’는 원어(디에레그뉘토, 미완료과거)는 ‘찢어지고 있다, 찢어지기 시작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는 다른 배에 있는 친구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고 하였다. 그들은 와서 두 배에 채우자 배가 잠길 정도가 되었다. 이것은 인간의 예상을 초월한 기적적인 사건이었다. 예수께서는 이 일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나타내셨다.

[8-11절]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 . . .

시몬 베드로는 이를 보고 예수님의 무릎 아래 엎드려 말하였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는 자기와 및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을 인하여 놀라고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기 때문이다. 처음에 예수님을 ‘선생이여’라고 불렀던 그는 지금 그를 ‘주여’라고 불렀다. ‘주’라는 말은 ‘선생’이라는 단순한 존칭어를 넘어서서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고백하는 뜻을 가진 것 같다.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을 본 자마다 시몬 베드로처럼 그 앞에서 두려워 떨며 피하려 할 것이다. 이사야 6장에 보면,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영광의 모습을 보았던 구약의 선지자 이사야도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라고 고백했었다.

이 사건에서 예수님은 시몬 베드로와 친밀하게 일대일로 말씀하셨으나 그의 관심은 시몬에게만 있지 않으셨다. 그는 시몬의 동업자들인 야고보와 요한도 이 사건에 참여하여 자신의 영광을 보게 하셨다. 그들은 다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주의 영광을 보고 놀랐다. 그들은 다 그 사건을 목격한 증인들이 되었다.

예수께서는 시몬에게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았다. 예수께서 이렇게 많은 고기가 잡히게 하신 것은 자신의 신적 영광을 나타내시려 함일 뿐 아니라 시몬 베드로와 그의 동업자들을 다 그의 제자로 삼으시기 위함이었다. 시몬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 예수님의 참 목적과 관심은 그들을 제자로 삼는 데 있으셨다. 그들은 다 주의 영광을 보았고 그를 따르기로 결심하였다.

시몬과 그 친구들은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 마태복음은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두고’ 또 ‘곧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증거한다(마 4:20, 22). 예수님을 따르려는 전임(專任)전도자들은 이 처음 제자들의 행동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세상의 것을 구하는 길과 다르다. 세상의 것을 구하는 자는 예수님과 그의 복음을 위해 살 수 없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는 자는 누구든지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그를 따라야 한다.

사실, 전임전도자뿐 아니라 우리 모든 신자들도 이 세상의 것들을 참으로 포기하지 않고서는 천국을 기업으로 받기 어렵다. 주의 말씀대로 우리는 하나님과 재물을 둘 다 섬길 수 없다(마 6:24). 우리는 결국 세상과 천국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허락과 복 주심 속에서 세상의 것들을 누리기도 하지만, 세상을 사랑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세상이 허무한 세상임을 인정해야 하고 하나님과 천국이 이 세상과 돈보다 귀함을 인정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택하신 영혼들에 대해 큰 관심을 갖고 계셨다. 그는 그의 가르치시는 말씀을 들으려고 몰려온 무리를 물리치지 않으셨고 배 위에 앉으셔서 가르치셨고 시몬과 그의 동업자들인 야고보와 요한에게도 관심을 가지셨다. 그는 우리 모두에게 큰 관심을 갖고 계신다.

예수께서는 신기한 고기잡이를 통해 시몬과 그의 동료들에게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셨다.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던졌을 때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두 배나 가득차게 고기를 잡는 기적이 일어났다. 예수님은 갈릴리 바다 속의 물고기떼를 주장하셔서 밤새도록 잡히지 않던 그 물고기들이 잠간 동안에 그렇게 많이 잡히게 하셨다. 그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나타내신 사건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과연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예수께서는 시몬에게 사람을 구원하는 전도자의 사명을 주셨고, 그뿐 아니라 그의 동료들도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오늘날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의 영광을 깨닫고 믿는 자마다 그를 따를 것이다. 그 중에서도 그의 특별한 부르심을 입어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을 맡은 자들은 세상의 모든 것들을 버리고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전적으로 자신의 모든 삶을 드릴 것이다.

12-16절, 나병 환자를 고치심

[12절] 예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에 온몸에 문둥병 들린 . . . .

예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에 온몸에 문둥병[나병, 한센병] 들린 사람이 있어 예수님을 보고 엎드려 구하였다. 나병 혹은 한센병은 피부를 붓게 하고 모양을 보기 싫게 만들고 피부색이 변하는 병이다. 이 병은 얼굴과 팔과 다리 표면의 신경에 영향을 미쳐 감각을 잃게 함으로써 피부가 데거나 상처가 나도 깨닫지 못하게 한다. 그는 ‘온몸에 문둥병이 들린’(플레레스 레프라스)[나병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 병은 온몸에 퍼져 몸을 보기 싫게 만들었고 온몸의 감각을 잃게 만들었을 것이다. 율법에 의하면, 나병 환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거하는 진 밖에서 따로 살아야 했다(레 13:45-46).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만날 만한 때에 그에게 나아갔고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불렀다. 이사야 55:6은,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고 말하였다.

그는 예수님을 보고 엎드려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소원을 말했다. 그가 예수님께 ‘주여’라고 부른 것이나 예수께서 그의 나병을 고쳐주실 수 있다고 믿은 것은 예수님께 대한 놀라운 믿음의 고백이었다. 그가 어떻게, 어디에서 이런 믿음을 가지게 되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아마 그의 믿음은 예수님의 많은 병고침의 사건들이나 베드로가 예수님으로 인해 많은 고기를 잡게 된 사건을 보았거나 들음으로써 생겼을 것이다. 성경 시대의 기적들은 당대와 후대의 구원얻을 자들의 믿음을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이었다. 여하튼 이 나병 환자에게는 놀라운 믿음이 있었고 그는 믿음으로 그의 소원을 예수님께 말하였다.

[13절]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 . . .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시자 나병이 곧 떠났다. 그는 마치 그 일 때문에 그 동네에 들어오셔서 얼마 동안 거기에 머무셨던 것 같았다. 그는 즉시 그 나병 환자의 소원을 들어주셨다. 보통 사람은 나병이 자기에게 옮길까봐 온몸에 나병 환처(患處)가 있는 몸에 손을 대지 않을 것이지만, 예수께서는 그의 몸에 손을 대셨다. 그것은 불쌍한 사람들에 대한 그의 사랑과 긍휼을 나타내며 사람의 병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의 능력을 증거한다.

예수께서는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그 병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으셨다. 모세는 자기를 비방하다가 하나님의 징벌로 나병에 걸렸던 누나 미리암의 회복을 위해 하나님께 부르짖어 구하였었다(민 12:13). 그러나 예수께서는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으시고,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셨다. 그때 나병이 곧 떠났다. 이것은 그의 신적 능력을 나타내며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다. 그의 치료는 즉각적이었고 완전하였다. 하나님의 치료만이 즉각적이고 완전할 수 있다.

[14절] 예수께서 저를 경계하시되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 . . .

예수께서 그를 경계하시며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또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고 말씀하셨다.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는 것은 병고침받은 사실을 선전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것은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하실 주된 임무가 그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지만, 병고치시는 일은 그의 사명이나 임무가 아니셨다. 그의 임무와 사명은 다른 데 있었다.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또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는 말씀은 예수께서 어떻게 구약의 율법을 존중하셨는지를 보인다. 레위기 14장에 보면, 나병 환자는 병이 나으면 제사장에게 가서 그 몸을 보여 확인을 받고 깨끗한 새 두 마리로 정결 의식을 행해야 했다. 그런 후 어린 숫양 하나로 속건제를, 다른 어린 숫양 하나로 속죄제를, 또 어린 암양 하나로 번제를 소제와 함께 드려야 했다. 이것은 나병 환자가 이스라엘 사회에 용납되기 위한 절차이었을 뿐 아니라, 또한 그로 하여금 자기의 병나음이 하나님의 긍휼과 속죄의 피뿌림으로 되어졌음을 깨달아 하나님께 감사케 하는 뜻이 있었다고 본다.

[15-16절]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허다한 무리가 말씀도 . . . .

예수님의 소문이 더욱 퍼지자 허다한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나음을 얻고자 하여 모여 왔으나 예수께서는 물러가셔서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다. 예수님의 사역의 목적은 분명히 병을 고치는 데 있지 않으셨다. 그는 세상적 명예나 인기를 구하는 자도 아니셨다. 그의 하실 일은 다른 것이었다. 그의 기도 생활은 우리에게 본이 된다. 우리는 복잡한 현실 속에서 시시때때로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해 조용한 곳을 찾아 하나님과 교제하며 그의 힘을 얻어야 한다.

나병 환자를 고치신 예수님은 확실히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는 온몸에 나병이 가득한 그에게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셨고 그의 나병은 곧 깨끗해졌다.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이며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증거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주된 임무나 사명은 병고침이 아니셨다. 그는 불쌍한 나병 환자나 기타 병자들을 치료하시는 일을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 이상의 일을 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 그의 주된 임무와 사명은 우리의 죄를 깨끗케 하시는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시시때때로 기도하심으로 그의 사명을 수행하셨다. 그것은 우리에게 본이 된다. 목사들과 성도들은 예수님의 기도 생활을 본받아야 한다. 기도는 하나님과 교제하며 능력을 받는 길이다.

17-26절, 중풍병자를 고쳐주심

[17절]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 각 촌과 유대와 . . . .

하루는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 각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나온 바리새인들과 교법사들이 앉아 있었고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님과 함께하였다.

예수님 앞에는 네 종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첫째는 그를 믿고 따르는 제자들이요, 둘째는 그를 통해 구원을 얻으려는 구도자(求道者)들이요, 셋째는 구경꾼들이요, 넷째는 그에게서 무슨 비난거리를 찾으려는 자들이었다. 오늘날 교회에도 그런 네 종류 사람들이 있다.

예수님 앞에 모여 앉은 많은 사람들 가운데 갈릴리의 각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들과 교법사들이 있었다. ‘바리새인들’은 당시 유대 사회에서 보수적 신앙을 추구하는 사람들이었다. ‘교법사’라는 원어(노모디다스칼로스)는 ‘율법 선생’이라는 뜻으로 성경에 사용된 ‘율법사’(노미코스)나 ‘서기관’(그람마튜스, 본문 21절 참조)이라는 말과 동의어이다. 교법사들은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선생들이다. 예수님 앞에 앉아 있었던 바리새인들과 교법사들은 그에게서 무슨 비난거리를 찾으려는 자들이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참된 경건과 바른 지식과 건전한 인품을 겸비한 지도자들은 보기 드물다. 경건 없는 지식은 사람을 교만케 하고, 바른 지식 없는 경건은 시대의 잘못된 풍조에 쉽게 넘어진다. 참된 경건과 분별력 있는 바른 지식에 겸손하고 온유하고 선하고 진실한 인품을 갖춘 자라면 하나님 앞에서 좋은 일꾼과 지도자일 것이다.

그 날 그곳에서 예수님께 병 고치는 능력이 함께하였다. 예수님 앞에 모여 앉은 자들 가운데 병환자들이 많았다.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가르치시는 예수님께 병을 고치는 능력이 있으셨다. ‘주의 능력’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능력이 신성(神性)의 능력 곧 하나님의 능력임을 가리킨다.

[18-19절]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 . . .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했다. 중풍병은 몸의 일부 혹은 전부가 마비되는 병이다. 사람들이 그를 ‘침상’에 메고 온 것을 보면 그는 전신 마비의 환자이었던 것 같다. 마가복음에는 네 명의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들이 예수께 왔을 때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로 접근할 수가 없었다. 오늘날도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무리들이 사람을 예수께로 인도하지 못하고 오히려 장애물이 되는 경우가 없지 않다.

그러나 그 병자를 데리고 온 그들은 낙심하지 않았다. 그들은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채 무리 가운데로 예수님 앞에 달아 내렸다. 당시의 유대인들의 집 구조는 가운데 뜰이 있고 그 주위로 방들이 있고 뜰 지붕은 천이나 얇은 기와로 되어 있고 지붕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외부에 있었다. 예수께서는 집의 가운데 뜰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계셨고 그들은 외부 계단을 사용하여 지붕으로 올라가 가운데 뜰 위의 기와를 벗기고 예수 앞으로 그 병자를 달아 내렸다고 보인다. 그들에게는 친구에 대한 사랑이 있었고 서로 간의 협력이 있었고 또한 믿음과 수고와 용기가 있었다.

[20절]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 . . .

예수께서는 ‘저희 믿음’을 보셨다. ‘저희’는 그 병자를 데려왔던 네 명을 가리킨다. 아니, 거기에 그 병자도 포함시켜야 될 것이다. 아마 그 병자는 주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자신을 예수께 데려주기를 그들에게 요청했을 것이다. 주께 대한 믿음은 그에게 소원하는 행위로 표현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병자의 믿음뿐이 아니었다. 예수께서는 ‘저희 믿음’을 보셨다. 그들은 예수께서 친구의 이 불치병(不治病)을 고쳐주실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 믿음 때문에, 그들은 수고하였고 용기 있게 행동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중풍병자에게 “이 사람아,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이상한 말씀이셨다. 중풍병과 죄가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 우리는 성경에서 병과 죄의 관련성을 발견한다. 물론 인생의 모든 불행스런 일들이 근원적으로는 죄에서 왔다. 각종 병도 그러하다. 신명기 28장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죄에 대한 징벌로 전염병, 폐병, 열병, 상한, 학질, 종기, 붓는 병, 괴혈병, 옴, 미침, 눈멂, 경심증 등을 열거했다. 우리의 모든 병이 어떤 특정한 죄의 결과라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많은 병이 죄와 관련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여하튼, 병은 근원적으로 죄의 결과로 세상에 있다. 죄가 많은 세상이기 때문에 세상에는 병자들도 많고 병원들도 많다. 그러나 장차 죄 없는 새 하늘과 새 땅, 곧 천국에는 병자들도, 병원들도 없을 것이다.

[21-22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의논하여 가로되 이 참람한 말을 하는 자가 누구뇨?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 . . .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의논하여 말하였다. “이 참람한 말을 하는 자가 누구뇨?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의논한다’는 원어(디아로기조마이)는 ‘논리적으로 생각하다(reason)’는 뜻으로 그들이 마음 속으로 생각하는 것을 나타낸다. 그들은 마음 속으로 의논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마음의 생각을 아셨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는 사람의 은밀한 의논까지도 아신다.

예수께서 그 의논을 아시고 대답하셨다. “너희 마음에 무슨 의논을 하느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마음으로 생각한 것은, 예수의 말이 참람하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님 외에는 죄를 사할 수 있는 자가 없는데, 예수가 사람으로서 그런 말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논리적 생각으로는 예수의 말이 참람하고 신성모독적이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중요한 진리가 있었다. 만일 오직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죄사함의 일을 예수께서 하실 수 있다면, 즉 예수께 사람의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으시다면, 예수님은 단순히 사람이 아니시고 하나님이심이 증명되는 것이다.

[23-24절]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그러시고는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인자(人子)는 그의 인성을 보인다.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걸어가라”고 말하는 것은 물론 쉬운 말은 아니지만,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은 그보다 훨씬 더 어려운 말이다. 그것은 사람이 감히 할 수 없는 말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일어나 걸어가라”는 덜 어려운 말보다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더 어려운 말을 하셨다. 그것은 자신에게 죄사함의 권세가 있음을 증거하기 위해서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한 인격이시지만, 사람이신 그가 참된 신성을 가지신 분이시며 신적 사역을 하셨다.

[25-26절] 그 사람이 저희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 . . .

그 사람이 그들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모든 사람은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말했다. “오늘날 우리가 기이한 일을 보았다.”

예수님의 기적은 은밀한 곳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들은 기적의 증인들이었다. 또 ‘곧 일어났다’는 말은 예수님의 치료가 즉각적이며 완전했음을 증거한다. 이 일은 인간 예수의 일이 아니었고, 하나님의 하신 일이었다.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질 일이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 드러나 있다.

중풍병자의 죄를 사하시고 말씀 한 마디로 낫게 하시는 예수께서는 확실히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을 예수께서 하셨다. 하나님 외에 그 누구도 가질 수 없는 죄사함의 권세를 그가 가지셨다. 그러므로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깨닫고 그를 영접하고 믿어 구원을 얻어야 한다.

우리는 죄와 병의 관련성도 배워야 한다. 우리는 모든 병이 근원적으로 죄의 결과임을 알아야 한다. 물론 예수께서 모든 죄를 사하셨으므로 우리는 천국에서 완전한 건강을 누릴 것이며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뜻에 의지하여 병 낫기를 기도할 수 있다(약 5:16). 그러나 우리는 병과 죄의 관련성을 알고 죄에 떨어지지 않도록 늘 조심해야 한다.

또 우리는 중풍병자를 예수께 데려온 사람들의 믿음도 본받자. 그들에게는 예수께 대한 믿음과 친구에 대한 사랑, 서로 협력함과 수고와 용기가 있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병자를 고쳐주셨다. 오늘 우리도 이런 믿음과 사랑과 용기와 열심을 가지고 사람들을 죄인의 구주이신 예수 앞으로 인도해야 한다.

27-32절, 죄인을 회개시키러 오심

[27절] 그 후에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은 것을 . . . .

예수께서는 그 후에 나가셔서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마태복음 9:9의 증거대로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마태이었다. 그가 세관에 앉은 것은 그가 세금을 받는 관리로서 자기의 일을 성실히 하고 있었음을 보인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일에 성실한 사람을 불러 일꾼을 삼으신다. 하나님께서는 호렙산 부근에서 이드로의 양무리를 치고 있던 모세를 부르셨고(출 3:1-10), 들에서 아버지 이새의 양을 치던 다윗을 불러 선지자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받게 하셨다(삼상 16:11-13).

‘나를 좇으라’는 말은 모든 성도에게 주시는 구원의 초청이 아니고 전임사역자로 부르시는 사명의 부르심이었다. 주께서는 베드로와 안드레, 요한과 야고보도 이렇게 부르셨다(마 4:18-22). 주께서는 그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일꾼들을 부르셨다. 그것은 그의 자유로운 행위이셨다. 그 부르심은 주님의 권한에 속한 일이었다.

[28절] 저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좇으니라.

주의 부르심을 받은 레위는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주를 좇았다. 물론 그는 자기가 맡았던 일을 중단함으로 인해 국가나 타인이 손실을 입지 않도록 뒷정리를 신속히 했을 것이다. 여하튼 레위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은 것은,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의 경우와 비슷하였다(마 4:20, 22; 눅 5:11).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했다.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딤후 2:3-4).

레위는 그의 직업으로 인해 세상적으로 유여한 생활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안정된 직업과 유여한 생활을 포기하였다. 그는 베드로나 야고보보다 더 큰 손실을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그에게 예수님은 자기 모든 것보다 더 귀한 분이셨기 때문에, 그는 세상의 모든 좋은 것을 포기하며 그를 따랐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와 함께 지내며 그를 본받고 그에게서 배우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제자는 그의 인격을 본받으며 그를 통해 밝히 주신 하나님의 뜻과 진리를 배울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사명을 이해하여 장차 그를 대신하여 그 일을 계승할 것이다.

[29절]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 . . .

레위는 자기 집에서 예수님을 위해 큰 잔치를 베풀었다. 그것은 예수님께 대한 존경과 그를 영접하는 기쁨과 사랑의 표시이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존경하는 사람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잔치를 한다. 레위는 그 잔치에 자신의 동료 세리들과 친구들을 많이 초청하였다. 그들은 예수께서 그들을 멀리하는 사람이 아니고 그들과 가까워질 수 있는 사람인 것을 느꼈을 것이다.

[30절] 바리새인과 저희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 . . .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말했다.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아마 그 잔치에 초청받지 않았던 것 같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다는 비난하였다. 그러나 그 비난은 잘못된 것이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죄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신 것은 성도의 교제로서가 아니고 전도적 관심과 사랑에서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남을 비난하는 일을 극히 조심해야 할 것이다. 잘 모를 때는 판단을 보류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일 것이다.

[31-32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건강한 자에게는 . . . .

예수께서는 대답하셨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예수께서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신 것은 성도의 교제의 차원이 아니고 전도적 관심과 사랑의 차원이었다. 이것도 넓은 의미에서 교제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성도의 영적 교제는 아니다. 예수께서는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도 우리가 의롭고 선할 때 하신 것이 아니고, 우리가 심히 불경건하고 무지하고 죄악되었을 때 하셨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 레위가 베푼 큰 잔치에 죄인들과 함께 앉으신 것도 전도적 관심과 사랑에서이었다. 전도를 위해서는, 우리가 그 어떤 죄인과도 만나야 하고 함께 음식을 먹기도 해야 한다. 전도적 차원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여러 가지 죄악에 빠져 있는 자들과 만나야 할 것이다.

우리는 성도의 교제와 전도적 접촉을 구별해야 한다. 우리는 전도하기 위해 죄인들과 만나야 하지만, 그들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까지는 그들과 참된 교제를 나눌 수 없다. 우리가 모든 사람들과 전도적 접촉을 해야 하지만, 우리는 오직 회개하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과만 참된 교제를 나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자유주의자들과 천주교 지도자들과 협력하여 대규모 전도집회들을 여는 빌리 그레이엄 같은 복음주의 전도자들의 방법은 성경적으로 옳지 않다. 왜냐하면 자유주의자들과 천주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바른 진리에서 탈선한 이단자들이며 그런 이단자들은 회개와 전도의 대상이지 결코 전도 활동의 협력자는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사명은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는 일이며, 신약 교회는 그의 사명을 이어받아야 한다. 오늘날 교회의 사명은 영혼 구원의 전도이다. 우리는 죄인 한 사람을 외면하지 말고 그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 힘과 물질을 다 사용해야 한다. 교회는 이 일을 완수해야 한다.

우리는 세상의 귀한 모든 것보다 예수님을 더 귀하게 여겨야 한다. 레위는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그는 세상적 안정과 물질적 여유를 다 포기하였다. 세상은 다 지나가지만, 하나님과 그의 약속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은 영원하다. 그것은 가장 큰 보화이다.

우리는 남을 잘못 비난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잘못 비난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처럼 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무슨 일이든지 일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확인하고 성경적으로, 이성적으로, 양심적으로 바르게 판단하고 말해야 한다.

33-39절, 금식에 대하여

[33절] 저희가 예수께 말하되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 . . .

그들은 예수께 말하였다. “[왜]27)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 ‘저희’는 문맥상 바리새인들을 가리킨다. 바리새인들과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함께 이런 질문을 한 것 같다(마 9:14). 바리새인들은 당시에 한 주간에 두 번씩(눅 18:12),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했다고 한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선생님을 본받아서(마 11:18) 또 더욱이 지금 그들의 선생님이 옥에 갇혀 있기 때문에(마 4:12; 11:2) 자주 금식하였을 것이다.

그들이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한 의도는 아마 예수님과 그 제자들의 경건성을 의심하며 금식을 힘쓰지 않는 그들을 비난하고, 높아지는 그의 명성을 낮추려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의 즐거이 먹고 마심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34절]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 . . .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뇨?” 예수께서는 자신을 신랑에 비유하셨고 제자들을 혼인집 손님들에 비유하셨다. 일찍이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신랑에, 자신을 신랑의 친구에 비유한 적이 있었다(요 3:29). 결혼은 인간의 일들 중에 가장 기쁜 일이다. 그러므로 결혼식에 참여한 사람들이 신랑과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한 기쁜 날에 신랑의 친구들이 금식할 수는 없을 것이다.

[35절]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저희가 신랑을 빼앗기리니 . . . .

예수께서는 또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저희가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신랑을 빼앗길 날이란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못박혀 죽임을 당하시는 날 그리고 그가 마침내 하늘로 올리우시는 날을 가리킬 것이다. 그때 주의 제자들은 금식하며 기도할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예수님의 승천 후부터 재림 때까지의 신약교회 시대에 해당되는 성도들의 어떤 생활 원리를 보이는 것 같다. 그것은 한마디로 극기(克己)와 자기 부정의 삶이다. 신약 성도는 구원으로 인해 또 천국의 소망 중에 항상 기뻐하며 즐거워하며 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핍박과 환난의 현실 가운데서 항상 근신하며 절제하며 자신을 쳐 복종시키며 살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금식을 반대하지 않으셨다. 마태복음 초두에 기록된 산상 설교에서 그는 단지 금식할 때 남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라고 교훈하셨다(마 6:16-17). 또 그는 우리가 극히 어려운 문제에 직면했을 때 금식 기도함으로 대처해야 함을 가르치셨다. 마태복음 17:21, “그러나 이런 유의 것[귀신으로 인한 간질병]은 기도와 금식으로가 아니고서는 나가지 아니하느니라”(전통사본). 초대 교회는 선교사를 파송할 때나 교회 장로들을 장립할 때 금식하였다(행 13:2-3; 14:23). 교회 직분이 고난의 십자가를 지는 일이며 더 많은 봉사와 헌신을 요구한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장립식에 축하의 잔치를 하기보다 오히려 성경의 예대로 금식 기도하는 것이 더 합당해 보인다.

[36-38절] 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 . . .

예수께서는 또 비유하여 말씀하셨다.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합하지 아니하리라.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되리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넣어야 하며 둘 다 보존되리라].28)

이 두 비유는 새 것이 옛 형식에 적합하지 않음을 보인다. 새 옷조각과 새 포도주는 자기 자신에 비유하셨고, 낡은 옷과 낡은 가죽부대들은 금식의 행위에 비유하셨다. 이 비유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일에는 전통적 금식의 관습이 적절치 않고 새 생활 방식, 즉 메시아로 인한 기쁨과 즐거움의 생활이 필요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비유들은 구약과 신약의 차이를 보이는 것 같다. 구약의 내용은 율법이며, 그것은 율법적 제도와 규례와 형식을 필요로 하였다. 그것들 중 대표적인 것은 성전 제도와 제사 제도이었다. 그러나 신약의 내용은 복음이며, 그것은 새 제도와 규례와 형식을 필요로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율법의 옛 생활 방식에 맞지 않고 복음의 새 생활 방식에 맞다. 예를 들어, 구약 시대에는 죄씻음을 받기 위해 하나님께 양이나 소를 제물로 드려야 했으나, 신약 시대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또 시시때때로 그의 이름으로 진심의 회개 기도를 하나님께 드릴 뿐이다.

구약의 정교하고 상징적인 규례들에 비하면, 신약의 형식은 아주 단순하고 영적이다. 로마서 2:28-29,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영]에 있고[혹은 ‘성령으로 말미암고’](NASB, NIV) 의문(儀文)[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로마서 7: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성령]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그러므로 신약 교회에서는 예배 의식이나 예배당 치장이나 신앙생활의 형식보다 신자 개개인의 마음과 정신이 중요하다.

[39절]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 . . .

예수께서는 또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즉시]29)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더]30) 좋다 함이니라”(전통본문)고 말씀하셨다. 옛 전통에 익숙한 자들은 즉시 새 것에 적응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이것은 일반적인 일에서도 그렇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일에서도 그렇다. 율법적 전통과 관습에 익숙한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즉시 이해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하였다. 역사상 그러하였듯이(행 21:21-26)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 간에는 과도기가 어느 정도 필요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주님이시다.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제자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먹고 마셨듯이, 오늘날 그를 믿는 우리는 주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감사함으로 먹고 마실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자들은 이 기쁨을 이해하지 못하고 함께 누리지 못하지만, 그를 아는 자마다 그로 인해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다. 우리는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해야 한다(빌 4:4).

우리는 종교적 규례와 의식에 얽매이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맞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신약 교회의 예배 의식이나 예배당의 구조나 신앙 생활의 형식은 구약 교회의 정교하고 상징적인 것들에 비교하면 아주 단순하다. 우리는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즉 ‘성령 안에서, 진리 안에서, 진심으로’ 예배해야 한다(요 4:24).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경건하게 섬기지만, 또 의와 선과 진실 안에서 기쁨과 자유함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그의 법을 행해야 한다.

 

6장: 가르치심

1-11절, 안식일 문제

[1-2절]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제자들이 . . . .

안식일에[두 번째 첫 안식일에](전통본문)31)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으니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였다.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뇨?”

누가는 예수께서 안식일에 행하신 일에 대해 이미 두 번 언급했다(눅 4:16, 31). ‘두 번째 첫 안식일’이라는 말은 앞에서 언급한 안식일들 말고 두 번째 언급하는 첫 안식일이라는 뜻일 것이다.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은 것을 보면, 그들은 몹시 시장했다. 제자들의 행위는 특별한 상황에서 생긴 일이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에게는 사람의 연약함을 동정하는 마음이 없었다. 그들은 제자들의 행위를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로 규정하였다.

[3-5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한 . . . .

예수께서는 대답하셨다.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다만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집어먹고 함께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는 사울 왕을 피하여 도망치고 있었을 때 놉 땅에 가서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나아가 떡 몇 개를 요청하였다. 아히멜렉에게는 보통떡은 없었고 여호와 앞에 두었다가 물려낸 거룩한 떡만 있었다. 그것은 제사장들만 먹을 수 있는 떡이었다. 그러나 그 특별한 상황에서 그는 시장했던 다윗과 및 함께한 자들에게 그 떡을 주었고 그들은 그 떡을 먹었다(삼상 21:1-6).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행위를 다윗의 그 사건에 비교하셨던 것이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는 말씀은 구약의 안식일이 예수님에게서 완성될 것을 암시한다. 구약의 안식일 계명은 두 가지 요소들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의식적(儀式的) 요소이며, 다른 하나는 도덕적 요소이었다. 안식일 계명의 의식적 요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구약시대에 6일 동안 일하고 제7일에 안식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죄로 인하여 수고로이 사는 인생들에게 예수께서는 참 안식을 주셨다(마 11:28). 이것이 구원이다. 이 안식은 주 안에서 시작되었고 장차 천국에서 완성될 것이다.

안식일 계명의 도덕적 요소는 신약교회에 의해 지켜져 왔고 오늘날도 여전히 필요하다. 안식일 계명의 도덕적 요소란 교회의 공적 예배를 위해 한 날이 필요하다는 것과 그 날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모이기를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안식일 계명은 결코 폐지되지 않았다. 안식일이 주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것은 7일이 다 ‘나의 날’ 혹은 세속적인 날이 되었다는 뜻이 아니고 오히려 7일이 다 하나님의 날이 되었다는 뜻이다.

주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시다. 그렇다면, 우리는 신약의 안식일인 주일을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 할 것이다. 만일 이 날을 내 마음대로 산다면, 그 날의 주인은 주님이 아니고 내가 될 것이다. 그러나 모든 날의 주인이 주님이시요 주일의 주인도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가 주일을 범하고 버는 돈은 결코 복이 되지 못할 것이다.

[6-11절]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사 가르치실새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 . . .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셔서 가르치실 때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송사할 이유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가 엿보았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 마른 사람에게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고 말씀하시자 그가 일어나 섰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멸하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고 하셨다. 그는 무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네 손을 내밀라”고 말씀하셨다. 그가 그렇게 하자 그 손이 회복되었다. 그들은 분기(憤氣)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처치할 것을 서로 의논하였다.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오른손 마른 병자를 고쳐주심으로써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거하셨다. 우리는 오늘날 주일에 병환자들을 심방하거나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반면에 예수님을 비난하고 죽이려는 생각을 품고 분노하며 함께 의논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행위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과는 너무 거리가 멀었다. 누가 참으로 안식일을 범한 자인가?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는 선한 일을 하신 예수님인가, 아니면 예수님을 미워하고 죽이려고 음모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인가?

우리는 예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알자. 이것은 구약의 안식일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됨을 암시한다. 과연 구약의 안식일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우리는 주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린다. 제7일 토요일 안식일은 주께서 부활하신 주일로 변경되었다. 신약교회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주일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육신의 안식과 더불어 하나님께 예배하는 날로 지키며, 그 날에 물건을 사고 팔거나 육신적 오락을 즐기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주일에 부득이한 일과 선을 행하는 일을 할 수 있다고 본다. 우리는 너무 율법적으로만 생각하여, 주일에 부득이한 일을 행하는 자나 선을 행하는 자를 비난하고 정죄하는 잘못을 범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12-16절, 사도들을 택하심

[12절]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맟도록 . . . .

이 때에 예수께서는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셔서 밤이 맟도록[밤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셨다. 열두 사도들을 택하여 세우시기 전날 밤 그는 밤새도록 기도하셨다. 그는 때때로 새벽에 기도하셨고, 밤에 기도하셨고 또 밤새도록 기도하셨다.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친히 기도의 본을 보여주셨다. 그는 아버지와 기도로 교통하기를 힘쓰셨다. 특히 그는 중대한 일을 앞두셨을 때 기도하셨다.

예수께서는 산으로 가셔서 기도하셨다. 집이나 동네는 사람들이 많아 시끄럽고 복잡하지만, 산은 조용하므로 기도하기에 적합하기 때문일 것이다. 죄악되고 부족 투성이인 사람들의 사회는 항상 시끄럽고 복잡하다.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서 조용한 곳이 필요하다. 산은 그러한 곳이다. 그러나 꼭 산이라야만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 조용히 기도할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좋을 것이다. 주께서는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하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의 아들 간의 신비한 관계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의 신비한 관계를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여하튼 그는 시시때때로 기도하셨다. 신성 뿐만 아니라 인성도 가지신 그는 참 인간으로서 진지하게, 밤을 지새우면서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시며 그와 교통하셨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라”고 말씀하셨다(요 14:13). 사도 바울은 믿는 우리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가르쳤다(살전 5:17). 우리는 특히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낙심치 말고 기도해야 한다(빌 4:6, 7).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시시때때로 기도하셨다면, 인간의 아들에 불과한 우리가 얼마나 더 자주 기도하기를 힘써야 하겠는가!

[13-16절]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 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곧 베드로라고도 이름 주신 시몬과 및 그 형제 . . . .

날이 밝자, 예수께서는 그 제자들을 부르셔서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다. 곧 베드로라고도 이름 주신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과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셀롯이라 하는 시몬과,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예수님을 파는 자가 될 가룟 유다이었다.

‘사도’라는 원어(아포스톨로스)는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은 신약교회의 기초석이 될 자들이었다(엡 2:20). 교회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이지만(고전 3:11)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과 십자가 사역의 의미와 모든 구원 교리와 기타 교리들과 종말 예언들은 사도들의 서신들을 통해 증거되었다.

마가복음 3장에 보면, 예수께서는 원하시는 자들을 불러 세우셨고(13절), 그들로 하여금 주와 함께 거하며 나아가 전도하게 하셨고 또 그들에게 병고치는 능력을 주셨다(14, 15절). 여기에 사도들의 직무가 나타나 있고 그들을 세우신 주님의 의도도 드러나 있다. 사도들은 무엇보다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 그의 말씀을 잘 배우고 나아가서 주님과 그의 복음을 전파해야 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6장에 보면,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일곱 집사를 세울 때 사도들은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專務)하리라”고 말하였다(4절).

그러므로 사도들의 직무를 이어받은 교회의 목사들은 무엇보다 사도들을 통해 전수된 복음 진리를 파악하고 보수(保守)하고 증거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젊은 목사 디모데에게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고 말했다(딤후 1:13-14).

하나님의 모든 진리는 신구약 66권의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특히 목사는 일반 성도보다 성경을 더 많이 읽고 연구하고 묵상하고 성경을 더 자세히 배우기를 힘써야 한다. 목사뿐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를 위해 쓰여지기를 원하는 모든 성도들과 직분자들은 다 성경을 읽고 듣고 묵상하고 연구함으로써 온전한 신앙 인격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일반 성도들은 주께서 교회에 세우신 직분자들을 존중하며 복종해야 한다(살전 5:12-13; 히 13:17).

열두 제자들 중 ‘예수님을 팔 가룟 유다’가 있었다. 그는 처음부터 믿지 않은 자요(요 6:64), 돈을 훔쳐가는 도적이요(요 12:6), 죄씻음을 받지 못한 자이었다(요 13:10). 예수께서는 그를 마귀라고 부르셨고(요 6:70), 마침내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감으로써(요 13:27) 주님을 배신하고, 은 30을 받고 악한 자들에게 주님을 넘겨주었다(마 26:15). 어떻게 이런 사람이 열두 제자들 중에 포함되었는지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를 통해 배신의 고통까지 경험하실 것이다.

가룟 유다가 사도들 중에 포함되었다는 사실은, 오늘날 목사들과 장로들 가운데 가룟 유다 같은 이가 있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가 그런 자를 분별할 수 있는 길은 오직 그의 행위를 통해서이다. 주께서는 일찍이 거짓 교사들을 삼가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의 행위로 그들을 알리라고 하셨다(마 7:15-20).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들은 실생활에서 의롭고 선한 행위들로 자신의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진실함을 증거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아 언제나 기도하기를 힘써야 하겠다. 우리는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아뢰며, 쉬지 말고 기도하고, 특히 큰 일을 앞두었거나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시시때때로 기도하기를 힘쓰셨다면, 우리같이 무능하고 연약하고 부족한 종들은 얼마나 더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의 은혜와 능력을 구해야 하겠는가! 또 모든 성도는 기도로 늘 승리적 삶을 살아야 한다.

특히 주께서 교회에 세우신 목사들은 말씀과 기도에 전념해야 한다. 그들은 성경 말씀을 항상 읽고 연구하고 묵상하고 더 많이, 더 자세히 배우기를 힘써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 속에 풍성히 거하고 온전한 인격자가 되어 주의 선한 일을 위해 온전히 준비되고 쓰임 받아야 한다. 또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참된 종임을 자신들의 의롭고 선한 행위를 통해 나타내야 한다. 하나님의 참된 종과 거짓된 종은 오직 그의 행위들을 통해 분별되기 때문이다.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교회에 세우신 종들을 존중하고 그들이 하나님의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그들을 돕고 그들을 따르며 복종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교회는 진리와 은혜와 평강 가운데 힘있게 잘 진행될 것이다.

17-19절, 병자들을 고치심

본장 17절부터 끝절까지 이어지는 말씀이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의 소위 ‘산상 설교’와 같은 때의 말씀인지는 확실치 않다. 많은 주석가들은 그 둘을 같은 때의 말씀이라고 추측하지만, 서로 다른 때의 말씀이라고 보는 자들도 있다.32) 마태복음은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라고 말하지만, 본절은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셔서 평지에 서셨다고 말한다. 또 마태복음의 사건은 예수님의 전도 사역 초기에 되어진 일로 보이지만, 본문의 사건은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 예수께서 제자들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로 세우신 후에 되어진 일이라고 보여진다.

[17절] 예수께서 저희와 함께 내려오사 평지에 서시니 . . . .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내려오셔서 평지에 서셨는데, 그의 제자들의 허다한 무리와 또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병고침을 얻으려고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및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이 있었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이런 저런 동기로 교회에 나오지만,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며 그에게 배우고 그의 교훈을 행하며 그의 인격과 삶을 본받는 참된 제자들이 되기를 원한다.

[18-19절] 더러운 귀신에게 고난 받는 자들도 고침을 얻은지라. . . .

더러운 귀신에게 고난받는 자들도 고침을 얻었다. 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썼다. 왜냐하면 능력이 예수께로 나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하였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모여온 곳에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고통받는 자들도 고침을 받았다. 그를 만지는 모든 사람이 나았다. 예수께서 병자들을 고쳐주신 것은 그가 단지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였다. 그가 행하신 이런 기적들은 그의 신적 인격에 대한 증거들이다.

20-26절, 복 있는 자와 화 있는 자

[20-21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가라사대 . . . .

예수께서는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예수께서는 가난한 자와 주린 자와 우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가난하고 주리고 운다는 것은 물질적이고 육신적인 의미뿐 아니라, 영적인 의미도 가진다고 본다. 사람들은 물질적으로나 육신적으로 가난하고 주리고 울 때 하나님과 자신에 대해 잘 깨닫게 된다. 물질적 가난은 심령의 가난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육신적 가난과 슬픔이 사람에게 불행이 아니고 오히려 복이 되는 경우가 많다.

고린도교회에는 가난한 자들이 많이 있었다. 고린도전서 1:26-29,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야고보서 2:5는,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고 말했다.

가난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받고 주린 자가 배부름을 얻으며 우는 자가 웃게 될 때는 언제인가? 세상적으로 가난하고 주리고 우는 자들은 하나님을 깨닫고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게 될 때 하나님의 나라를 얻으며 영적으로 배부름과 기쁨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내세의 복은 더욱 크다. 주 예수께서 다시 오심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이 시작될 때 그들은 영광스런 부활의 몸을 가지고 거기에 들어가 영원히 배부름과 충만한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22-23절]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저희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제자들에게는 사람들로부터 받는 미움과 배척과 비난도 있었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고 그를 전파한다는 이유 때문에 받는 고난이었다. 악한 사람들은 이유 없이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대적하였고, 또 그의 종들과 제자들을 미워하고 배척하고 비난하고 핍박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예수님 때문에 또 성경의 바른 진리 때문에 받는 고난은 고난당하는 자들에게 복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그들이 고난당할 때에 기뻐하고 뛰놀라고 말씀하신다. 그 이유는 하늘에서 그들의 상이 크기 때문이다. ‘하늘’은 마지막 심판 후에 있을 천국을 가리킨다. 마지막 심판 때에 제자들에게 상급이 있을 것이며 그 상급은 그들의 행위의 정도에 따라 크기가 다를 것인데, 주 예수님과 그의 복음을 위해 고난을 당하는 제자들에게는 큰 상이 주어질 것이 분명하다.

또 제자들이 당하는 고난과 핍박은 그들이 하나님의 참된 종이라는 증거가 된다. 구약 시대에도 참된 선지자들은 사람들에게 많은 고난과 핍박을 당했었다. 세상은 항상 주의 진실한 종들을 미워하고 배척하고 비난하고 핍박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미움과 배척과 비난과 핍박을 당하는 것은 힘들고 고통스런 일이지만, 그것이 주님 가신 길이며 주의 진실한 선지자들과 종들이 간 길이기 때문에 참된 제자들은 그런 고난을 오히려 기뻐해야 할 것이다.

[24-25절]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 . . .

예수께서는 화가 있는 자들에 대해서도 말씀하셨다.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이 말씀도 물질적 의미뿐 아니라, 영적 의미도 가진다고 생각된다. 물질적으로 부요하고 육신적으로 배부르고 웃는 자는 영적으로도 마음이 높고 스스로 만족하여 하나님을 두려워하거나 자신의 죄와 부족을 깨닫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겸손히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은혜와 의(義)를 구하지 않는 부요하고 배부른 자들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그들은 현세에서 더 이상의 위로를 받을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어느 날 주리고 애통하며 울게 될 것이다. 더욱이 마지막 심판 때 지옥의 판결을 받게 될 때, 그들은 영원히 아무 위로를 받지 못하며 주리고 애통하며 울게 될 것이다.

[26절]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진리의 사람은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듣지 않을 것이다. 물론 진리의 사람은 참된 성도들에게 칭찬을 들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칭찬하는 사람은 진리의 사람인 표를 잃어버린 자이다. 그래서 주께서는 그런 자에게 화가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은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런 칭찬을 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종들에게는 항상 두 가지 상반된 반응이 있다. 하나는 그를 인정하고 존중하고 사랑하고 따르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그를 무시하고 미워하고 비난하고 배척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들은 의인에게는 위로와 힘과 기쁨이 되지만, 악인에게는 두려움과 고통과 찔림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 바울은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을 동시에 가졌고(고후 6:8), 또 증거하기를,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를 버렸고 그 중에 부겔로와 허모게네도 있었으나, 오네시보로라는 성도가 그에게 위로와 격려가 되었다고 했다(딤후 1:15-18).

예수께서는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그는 병자들을 공개적으로 고쳐주셨고,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고, 또 각종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그것들은 기적들이었다. 예수께서 병자들을 고치신 사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세상에 오신 구주이심을 확실하게 증거한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세상의 선생들의 가르침과 달랐다. 예수께서는 가난과 주림과 우는 것이 복되며 부요와 배부름과 웃음이 화라고 가르치셨다. 그의 가르침은 현세 중심, 세상 중심이 아니고, 하나님 중심, 내세 중심이었다.

주님의 제자는 육신적 부요와 배부름을 구하지 말고 오히려 육신적으로 검소하고 절제하는 생활을 구해야 한다. 그는 이 세상의 것들에 마음을 두지 말고 하나님과 내세와 천국에 마음을 두고 살아야 한다. 또 그가 예수님 때문에 사람들에게 미움과 배척과 비난과 핍박을 받는다면, 그것은 참 제자의 표시요 장차 천국에서 큰 상급이 있는 일이기 때문에 오히려 기뻐해야 한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듣는 자가 되려 해서는 안 된다. 그는 항상 신구약성경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만 선포하고 실행하는 종이 되어야 한다.

27-36절, 원수를 사랑하라

[27-28절]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의 원수를 대적하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를 미워하고 우리를 저주하는 자를 저주하고 우리를 모욕하는 자를 모욕하는 것은 일반적 생각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람들의 일반적 생각을 뛰어넘는다. 이 세상에 무저항주의를 주장하는 자들이 더러 있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런 생각도 뛰어넘는다. 구약의 율법 레위기 19:18에서 ‘원수를 갚지 말라’고 명하셨으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 율법의 말씀보다 더 나아가 원수를 사랑하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고 우리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고 우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29-30절] 네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 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금하지 말라. 무릇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네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 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금하지 말라. 무릇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지 말며.”

이 말씀은 악한 자를 대적하거나 보복하지 말고, 그에게 끝까지 선을 행하라는 것이다. 이 말씀은 물론 도적질이나 강도질이나 폭력이나 살인을 정당한 일로 허용하라는 뜻은 아니다. 라일(J. C. Ryle)은, 이 말씀은 범죄의 억제를 금하신 것이 아니고 보복 정신을 정죄하신 것이라고 말하였다.33)

사회적으로는 법이 필요하고 범죄의 처벌도 필요하다. 그러나 그때도 가능한 한 사랑의 원리가 적용되어야 한다. 주의 말씀은 사회에 치안 담당자나 경찰이 불필요하다거나 그들의 직분이 부당하다거나, 악을 행하는 자들과 평화와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들에 대한 처벌을 금하신 것이나, 모든 전쟁이 부당하다는 뜻으로 이해할 것은 아니라고 본다. 누가복음 22:36은, 주께서 제자들에게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사라’고 말씀하심으로 칼의 필요성을 인정하였고, 로마서 13:4는 국가 위정자들이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칼을 가지고 사회 정의를 시행함을 증거하였다.

다수의 평안을 위해 범죄자들의 구속과 처벌은 불가피하고 정당하다고 본다. 물론 그 경우에도 범죄자의 인격을 모독하거나 인권을 짓밟지 말고 그를 학대하지 말아야 하며 그에게 자신을 변호할 수 있는 기회를 정당하게 주어야 할 것이다.

또, 패권주의적 침략 전쟁이 아니고 정당방위적인 합법적 전쟁은 불가피하다고 본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진술하기를, “그리스도인들이 국가의 위정자의 직분에 부름을 받을 때 그것을 받아들이며 수행하는 것은 합법적이며, 그것을 수행함에 있어서 그들은 각 국가의 건전한 법들에 따라 특히 경건과 의와 평화를 유지해야 하므로 그 목적을 위해 지금 신약 아래서도 정당하고 필요한 경우들에는 합법적으로 전쟁을 수행할 수 있다”고 하였다(23:2). 그러나 합법적 전쟁의 경우에도, 먼저 평화를 제안하고 불가피한 폭격 외에는 자제하고 기본적으로 상대방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고 그에게 보복하지 말라는 주님의 교훈은 특히 개인의 행위에 적용된다. 주께서는 우리에게 보복 대신에 양보를 요구하신다. 이를 위해 우리는 오래 참아야 하며 정당한 권리도 때로는 포기해야 한다. 사실, 세상의 악은 보복을 통해 제거되지 않는다. 보복은 보복을 불러오고 피는 피를 불러온다. 주께서는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한다고 말씀하셨다(마 26:52).

우리는 악한 자들을 사랑으로 이겨야 한다. 로마서 12:17-21은 이 원리를 잘 교훈한다: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우리가 원수를 사랑해야 할 이유는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십자가에 희생시키셨다(롬 5:6-8, 10). 이것이 기독교 복음의 내용이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이다. 우리는 그 명령을 거절할 자격이 없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 빚진 자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구원을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명령 앞에 ‘예, 노력해 보겠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이 명령이 비록 높아 보이지만,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며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자에게 선을 베풀어야 한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께서는 자기를 못박는 자들을 향해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말씀하셨다(눅 23:34). 스데반도 돌에 맞아 죽으면서 무릎을 꿇고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하였다(행 7:60). 손양원 목사는 자기 두 아들을 죽였던 공산당원을 자기 아들로 삼았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가 밖에서 맞고 들어오면, “잘 참았다. 때리는 것보다 맞는 것이 낫다”고 가르쳐야 한다.

[31절]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마태복음 7:12에 보면, 주께서는 기도에 대한 교훈의 결론으로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또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다 적용된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복의 근원 되신 하나님으로 인정하며 하나님께 복받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먼저 그를 최선으로 섬기며 그의 명령에 순종해야 할 것이다. 대인관계에서도, 우리가 남에게서 이해와 사랑을 받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먼저 그를 이해하고 그를 사랑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남에게 먼저 잘 해주어야 한다. 이것이 사랑의 원리이다.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않고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고전 13:5).

[32-34절]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느니라.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를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는 자들만 사랑한다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구원이 정말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라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다른 무엇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변화된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참됨과 가치 있음을 증거해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빌리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의수(依數)히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빌리느니라.” ‘빌린다’는 말은 ‘빌려준다’는 뜻이다. 주께서는 본문에서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려주라’고 가르치신다. 성도들이 남에게 돈을 빌려줄 때 원금을 받는 것은 정당한 일이지만, 이자를 받는 것은 합당치 않다. 성도들 간에는 장사나 돈 거래를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성도의 교제는 순수한 것이 좋다.

[35-36절]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같이 너희도 자비하라.”

원수를 사랑하며 남을 선대하며 이자를 바라지 않고 빌려주는 자들에게는 상이 클 것이다. 그 상은 천국에서의 상을 가리킨다. 천국에서 성도가 받을 상급은 지상에서 행한 순종과 선행에 따라 차등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상에 대한 약속으로 성도의 순종과 선행을 격려하신다.

또 이런 선한 삶은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이다. 하나님께서는 경건한 자들에게나 불경건한 자들에게나 골고루 햇빛과 비를 내리시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은 자가 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원하시는 바이다.

27절부터 36까지의 말씀은 요약하면 서너 가지의 내용이다. 첫째는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악한 자를 선대하라는 것이다. 둘째는 남이 우리에게 잘 해주기를 바라지 말고 우리가 남에게 먼저 잘 해주라는 것이다. 셋째는 가난한 자들에게 대가 없이 빌려주라는 것이다. 이것이 다 하나님의 자비하신 성품을 본받은 하나님의 자녀다운 행위요 처신이다. 우리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그렇게 살아야 한다.

37-49절, 비판치 말고 선을 행할 것

[37-38절]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비판치 말라’는 교훈은 어떤 경우에도 판단치 말라는 뜻은 아니다. 마태복음 23장에 보면, 주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외식을 신랄하게 비판하셨다. 갈라디아서 2:11에 보면, 안디옥에서 바울은 베드로를 책망하였고,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교회의 여러 문제들을 판단하고 바른 길을 교훈하였다. 디모데전서 5:20은, “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 꾸짖어 나머지 사람으로 두려워하게 하라”고 말한다. 특히 성경이 이단을 배격하라고 가르칠 때 진리와 비진리에 대한 분명한 판단을 전제한 말씀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은 교회적 판단을 금하신 것이 아니고 개인적 판단에 대해 하신 것이며(매튜 풀), 그것도 언제든지 비판치 말라는 절대적 금지라고 보기 어렵다. 우리는 남의 말이나 견해나 행위의 진위(眞僞)와 선악(善惡)을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우리가 그에게 충고하거나 그를 권면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비판이나 정죄 자체가 악은 아니다. 특히 교회를 다스리는 직분을 가진 자들 즉 목사나 장로들은 공적인 문제들에 있어서 교인들을 판단할 수 있고 또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사사로이 혹은 성급하게 남을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그 이유는 몇 가지이다.

첫째로, 우리는 남을 비판할 위치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법을 순종할 위치에 있다. 남이 비판을 받을 만하다면, 우리도 역시 그러할 것이다. 야고보서 4:11-12,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 우리는 실상 다 부족이 많은 자이다. 만일 우리가 남을 비판한다면, 그 비판으로 우리도 비판을 받을 것이다.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둘째로, 우리가 남을 비판하기 어려운 형편도 있다. 특히 우리는 남의 은밀한 마음이나 행위에 대한 동기를 알지 못할 경우가 많다. 고린도전서 4:3-5,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셋째로, 우리가 비판치 말아야 할 경우들도 있다. 예를 들어, 성경이 명백히 가르치지 않은 일들의 경우도 비판치 말아야 한다. 로마서 14:1-5,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 혹은 이날을 저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 또 성경적으로 명백한 잘못인 경우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일이나 교회에 유익을 주지 못할 일은 공개적으로 비판하지 않는 것이 좋고, 단지 개인적으로 은밀히 충고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본문은 또 사사로운 비판과 정죄를 버리고 남을 용서하고 구제하라고 교훈한다.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용서와 구제, 이것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보이신 명확한 뜻이다. 그것은 성도의 중요한 생활 규칙의 하나이다. 특히, ‘준다’는 말씀은 남을 구제하고 후대하는 것을 가리킨다. 원문에는 “주라, 그리하면 그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니”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보상을 받음을 가리킨다.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이라는 표현은 밀가루를 되에 가득히 채워 주는 것 같은 풍성한 보상을 묘사하신 것이다.

[39-40절]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 . . .

예수께서는 또 비유로 말씀하셨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케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

‘소경이’라는 말은 무지한 인도자들을 가리키고, ‘소경을’이라는 말은 무지한 교인들을 가리킨다. 구덩이는 교리적, 윤리적 오류와 그로 인한 낭패를 가리킨다. 진리의 바른 지식과 바른 삶이 없이 남을 인도하는 자는 자신도 망하고 그가 인도하는 자들도 망하게 할 것이다. 우리는 그런 인도자가 되지 말아야 하고 또 그런 자의 인도를 받는 자들도 되지 말아야 한다.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다”는 말은 선한 뜻에서도, 나쁜 뜻에서도 가능할 것이다. 선한 선생에게서는 선한 영향을 받음으로 배울수록 좋으나, 악한 선생에게서는 악한 영향을 받음으로 배우지 않을수록 좋을 것이다.

[41-42절]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

‘티’는 작은 결함을 비유하고 ‘들보(통나무)’는 비교할 수 없이 큰 결함을 비유한다. 사람은 자신의 큰 잘못과 결함은 깨닫지 못하고 남의 작은 결함과 잘못은 지적하기 쉽다. 그러나 주께서는 우리가 자신의 큰 부족을 먼저 깨닫고 그것을 고친 후에 남의 작은 부족에 대해 지적하라고 가르치셨다. 우리는 자신의 부족을 고친 후에 형제를 권면해야 한.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낫지만(잠 27:5), 단지 자신의 큰 결함이 없을 경우에 그러한 책망이 남에게 유익을 줄 수 있다.

37절부터 42절까지의 말씀은 몇 가지의 교훈을 준다. 첫째로, 우리는 사사로이 혹은 성급하게 남을 판단하고 비판하고 정죄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중요한 교회 문제, 진리 문제에 대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은 정당하고 필요한 일이지만, 우리는 사사로이 남을 판단하는 일을 삼가야 한다. 우리는 율법을 지키는 자이지 남을 심판하는 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대신을 남을 용서하고 남에게 선을 베푸는 자가 되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진리의 지식과 실천이 없이 남을 지도하고 권면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다가 둘 다 구덩이에 빠지는 것같이 되어서는 안 된다.

셋째로, 우리는 남의 부족과 실수와 결함을 지적하기 전에 자신의 부족을 먼저 살펴야 한다. 먼저 자신의 큰 부족을 깨닫고 고친 자만이 남의 작은 부족에 대해 지적하고 그것을 고쳐줄 수 있다.

43-49절, 행위의 중요성

[43-45절]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나무와 열매는 사람의 인품과 행위를 비유한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듯이, 좋은 사람은 좋은 말과 행위를 하고 나쁜 사람은 나쁜 말과 행위를 한다.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안다. 사람의 인품과 말과 행위는 같이가기 때문에, 사람의 인품은 그의 말과 행위를 보아 알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평소 훈련을 통해 말과 행위에 있어서 거룩하고 선해야 한다.

[46-49절]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히되 잘 지은 연고로[그것이 반석 위에 세워진 까닭에](전통본문)34) 능히 요동케 못하였거니와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주초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으니 탁류가 부딪히매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니라.”

주께서는 행위의 중요성을 강조하신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할진대, 우리는 그의 가르치신 바들을 행하려 해야 할 것이다. 또 그의 말씀을 행하는 자는 튼튼한 기초 위에 집을 짓는 사람과 같다. 그는 홍수가 나도 흔들리거나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홍수는 환난이나 재난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 말씀을 행하지 않는 자는 튼튼한 기초 없이 집을 세우는 자와 같다. 그는 환난의 날에 낙심케 될 것이다. 사람이 행위로 구원을 받을 수 없으나 행위 없이 구원받는 것도 아니다. 참된 믿음은 반드시 계명 순종의 행위로 증거된다.

주께서는 우리의 행위가 중요함을 교훈하셨다. 우리가 구원받았다면, 우리는 선한 말과 행위로 우리의 구원을 증거해야 한다. 또 순종의 행위는 집을 튼튼히 짓는 것과 같다. 평소에 행함이 없는 자는 환난 중에 실패할 것이지만, 행함이 있는 자는 실패치 않고 승리할 것이다.

 

7장: 기적들을 행하심

1-10절, 백부장의 종을 고쳐주심

[1-3절] 예수께서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들려주시기를 마치신 . . . .

예수께서는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들려주기를 마치신 후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셨다. 가버나움은 예수께서 이미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던 곳이었다. 누가복음 4장에는 가버나움 회당에서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신 일과 시몬의 집에서 중한 열병으로 아파 누워 있던 시몬의 장모를 고쳐주신 일과 해 질 때 집에 모여든 여러 병자들에게 일일이 손을 얹어 고쳐주신 일 등이 기록되어 있다.

가버나움에 있는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는데 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을 보내어 오셔서 그 종을 구원하시기를 청하였다. 백부장(百夫長)은 로마의 군대 조직의 한 지휘관이었다. 이름 그대로, 그는 군사 100명을 지휘하는 장교이었다. 그는 물론 로마 사람이었다. ‘사랑하는’이라는 원어(ἔντιμος 엔티모스)는 ‘소중히 여기는’이라는 뜻이다. 그가 주인에게 소중히 여김을 받았던 것은 충성스런 종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자기의 맡은 일에 충실한 것이 충성이다. 충성된 종은 주인에게 소중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그 종이 병이 들었다. 약간 아픈 정도가 아니고 거의 죽게 될 정도로 아팠다. 그러나 그 종은 결국 고침을 받았다.

이 백부장은 좋은 점들을 가진 사람이었다. 첫째로, 그는 자기의 종을 사랑하였다. 물론 그 종도 주인에게 충성했겠지만, 그 주인은 자기 종을 사랑하였다. 그는 그 종을 소중히 여겼다. 종이 병에 걸렸을 때 그는 그를 잘 돌보았음에 틀림없다. 그 종이 거의 죽게 되었지만 그는 그를 포기하지 않았고 그를 살리기 위해 유대인의 장로들을 예수님께 보내었다. 이 백부장은 종을 사랑하는 동정심과 인간애를 가지고 있었다.

[4-5절] 이에 저희가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가로되 . . . .

그들은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였다.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백부장의 좋은 점 두 번째는 그가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했고 그들을 위해 회당을 지어주었다는 것이다. 회당을 짓는 것은 돈과 시간과 힘이 드는 일이다. 그런데 그는 자기 지위와 자기 재력을 활용하여 유대인들을 위해 회당을 지어주었다. 이것을 보면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회당을 짓기 위해 자기의 돈과 시간과 힘을 그렇게 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은 마음과 사랑이 가는 곳에 돈을 사용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 돈을 기꺼이 사용할 것이다.

[6-8절] 예수께서 함께 가실새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 . . .

예수께서 함께 가실 때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말했다.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저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제 아래에도 군병이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제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백부장의 좋은 점 세 번째는 그가 자신이 심히 부족함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그는 예수께서 자기 집에 들어오심을 감당치 못하겠으며 자기가 그에게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하겠다고 말했다. 그것은 자신의 심히 부족하고 보잘것없음을 고백한 것이다. 사회적으로 부족함이 별로 없어 보이고 높은 마음을 가질 만했던 그 백부장이 자신의 부족함과 보잘것없음을 깨닫고 고백한 것이다.

백부장의 좋은 점 네 번째는 그가 예수님의 지극히 크심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즉 그는 예수님께 대한 바른 지식과 바른 믿음을 가졌던 것이다. 그가 예수님께 ‘주여’라고 고백한 것은 예수님을 자신의 참된 주인으로, 그것도 신적 권세를 가진 주인, 즉 신적 존재로 인정하는 뜻이 있었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라는 원문의 전통본문은 ‘말씀만 하소서, 그리하면 내 하인이 낫겠나이다’이다.35) 자기가 군인으로서 아랫사람에게 무엇을 명령하면 그가 순종한다고 말한 것을 보면, ‘말씀만 하소서’라는 그의 말은 결국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고백한 것이다.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말씀 한마디로 병을 고칠 수 없다. 병을 지배하고 병에게 명령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다. 빛이 있으라는 말씀 한마디로 빛을 창조하셨던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만이 말씀 한마디로 병을 고치실 수 있다.

[9-10절]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를 기이히 여겨 돌이키사 . . . .

예수께서는 들으시고 그를 기이히 여겨 돌이키셔서 따르는 무리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지 못하였노라.” ‘이만한 믿음’이라는 원어36)는 ‘이렇게 큰 믿음’이라는 뜻이다. 예수께서는 세상의 외적인 영광을 보고 경탄하신 적은 없으셨지만, 백부장의 이 큰 믿음을 보고는 놀라셨다. 더욱이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렇게 큰 믿음을 만나지 못하였다’는 말씀을 보면 그 백부장은 이방인이었다. 이방인인 그가 이렇게 큰 믿음을 소유하였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주기를 원하시는 자에게는 누구에게나 은혜를 주시는 것이 분명하다. 보내었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보니 [아팠던]37) 종이 이미 강건하여졌다.

본문이 증거하는 중심 인물은 백부장이나 그의 종이 아니고 바로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백부장이 가진 지식과 믿음의 내용이 되시는 바로 그 주님이시다. 그는 말씀 한마디로 병에게 명령하실 수 있고 병을 고치실 수 있고 과연 고치셨던 신적 구주이신 것이다. 예수님은 그 백부장의 집에 가시지도 않았다. 그는 그의 소원대로 단지 말씀만 하셨다. 그러나 그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은 그 죽을병에서 고침을 받았다. 그 종은 하나님의 은혜로 강건하여졌다.

1절부터 10절까지는 몇 가지 교훈을 준다. 첫째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말씀 한마디로 그 종을 죽을병에서 고쳐주셨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시면, 이런 병고침은 불가능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그가 우리를 죄와 지옥 형벌에서 건져내셔서 영광스런 영생의 천국으로 인도하신다.

둘째로, 백부장의 믿음과 같은 큰 믿음을 사모하자.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신적 구주로 바로 깨닫고 믿고 따르기를 원한다. 우리는 그의 말씀 한마디가 생명의 능력임을 믿고, 그의 모든 말씀의 진실함과 가치를 바로 깨닫고 그 말씀을 존중하며 믿고 행하며 그를 따르기를 원한다. 물론 이러한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오 주여, 우리에게도 이런 큰 믿음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셋째로, 우리는 부수적으로 이 백부장의 인품도 본받자. 우선, 우리는 그의 동정심과 인간애를 본받자. 그는 자기 종을 자기 몸처럼 사랑했다. 또 우리는 그 백부장이 유대인을 위해 회당을 지어준 일을 본받자.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표이었다. 또 우리는 백부장처럼 자신의 부족과 무자격함과 보잘것없음을 깨닫는 겸손한 인격자들이 되자. 하나님을 참으로 경외하는 자는 결코 교만할 수 없고 겸손할 것이다.

11-17절,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심

[11절]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 . . .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 때 [그의 많은]38)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가 동행하였다. 나인성은 갈릴리 지방 남부 이스르엘 평원의 한 작은 마을이다. 나사렛에서 몇 킬로미터 남쪽에 있다. 예수님 곁에 있는 사람들을 ‘그의 많은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로’ 표현한 것은 그 둘을 구별하는 뜻이 있어 보인다. 예나 오늘날이나 예수님 곁에는 항상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하나는 그를 구주로 믿고 따르는 제자들이고, 다른 하나는 영생의 진리를 구하는 관심을 가졌거나 혹은 단순한 호기심을 가지고 따르는 사람들이다.

[12절] 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 . . .

예수께서 성문에 가까이 오셨을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는 장례 행렬이 있었다. 그는 그 어머니의 외아들이었고 어머니는 과부이었다. 그 성의 많은 사람들도 그와 함께 나왔다. 이 장례는 매우 슬프고 불행스런 일이었다. 그 외로운 과부에게 위로와 소망과 의지이었을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장례식이었기 때문이다. 긍휼과 능력을 지닌 예수께서 그 광경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으셨다.

그 마을의 많은 사람들은 그 장례식에 참여하여 죽은 자를 묻기 위해 따라 나오고 있었다. 인간의 일들 중에서 장례식은 큰 일이며 엄숙한 일이다. 이 불행스런 장례식에 사람들은 동정하는 마음으로라도 더 많이 참여하였을 것이다. 그 많은 사람들은 예수께서 행하실 놀라운 기적을 볼 것이며 그 기적의 증인이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기적은 한적한 곳에서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13절]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주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울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복음서 저자가 예수님을 ‘주께서’라고 표현한 것은 그가 행하실 기적을 염두에 두고 한 것 같다. ‘주’라는 말은 세상의 주권자 곧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그는 참된 신성을 가진 신적 구주이시다. 주께서는 슬프게 울고 있는 과부를 불쌍히 여기셨다. 이것이 예수님의 심정이다. 죽음은 인간이 저지른 죄의 형벌로 왔으나, 예수님은 죽을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다. 그는 그 과부에게 울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물론 말로써만 그를 위로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는 그의 눈물을 그치게 하실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으로 인해 슬퍼하는 인간들의 눈물을 그치게 하실 수 있다. 오직 신적 구주께서만 그렇게 할 수 있으시다.

[14절]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 . .

그가 가까이 오셔서 그 관에 손을 대셨다. 당시의 관은 오늘날의 것과 같은 관이 아니고 일종의 침대 같은 것이었을 거라고 한다. 주께서 가까이 오셔서 그 관 혹은 침대에 손을 대시자 그것을 멘 자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께서는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권위를 나타낸다. 구약 시대에 엘리야나 엘리사도 죽은 자를 살린 적이 있지만, 그것은 하나님 앞에 기도함으로써 그 기도의 응답으로 기적을 행한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신의 권위로, 말씀 한마디로 기적을 행하셨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라.’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시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렇게 하셨다.

[15절] 죽었던 자가 일어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 . . .

그 죽었던 청년은 일어나 앉고 말도 하였고 예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주셨다. 기적이 일어났다. 그것은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을 것이다. 예수께서 야이로의 딸과 나사로를 살리신 것은 그 후의 일들이었을 것이다. 그 살아난 청년이 ‘말도 하였다’는 것은 그가 확실히 살아났음을 증거한다. 이 기적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곧 신적 구주이심을 증거한다. 예수님은 단순히 하나님의 능력으로 기적을 행한 것이 아니셨다. 그는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지 않으셨다. 그는 단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사용하셨다. 하나님의 속성을 가지고 계신 그는 바로 하나님이시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이런 일을 행하실 수 없었을 것이다.

[16-17절]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 . . .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고 말하였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고 했다. 그 과부의 기쁨과 받은 위로는 두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졌다.

예수께서는 죽은 자를 말씀 한마디로 살리심으로써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셨다. 죽은 자에게 일어나라고 명령할 수 있는 자는 하나님 외에 아무도 없다. 예수는 확실히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또 예수께서는 죽은 자를 살리심으로 우리의 부활의 보장이 되셨다. 그는 죽은 그 청년에게서 죽음을 내쫓으시고 생명을 회복시켜 주셨다. 이 사건은 장차 주께서 죽은 자들을 부활시키실 것이라는 보장이다. 우리는 사도신경의 고백대로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는다.’ 예수께서는 이와 같이 죽은 자들을 살리셨을 뿐 아니라 죽은 지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부활에 대한 보장이 되셨다.

예수께서는 인간의 불행을 행복으로 변화시키신 구주이시다. 그는 심히 슬퍼하고 절망했던 과부에게 큰 기쁨과 위로를 주셨다. 구원은 좋은 것이다. 예수께서는 죄와 슬픔, 불행과 허무, 죽음과 지옥 형벌로부터 우리를 건져주셨고, 우리에게 기쁨과 위로를 주셨다.

18-23절, 요한의 질문에 대답하심

[18절] 요한의 제자들이 이 모든 일을 그에게 고하니.

요한의 제자들은 이 모든 일을 요한에게 고하였다. 그들은 백부장의 종의 죽을병을 고쳐주신 일과 나인성 과부의 죽은 외아들을 살려주신 일 등을 다 고하였을 것이다. 그 당시에 요한은 옥에 갇혀 있었다. 마태는 같은 사건을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라고 증거하였다(마 11:2).

[19-20절] 요한이 그 제자 중 둘을 불러 주께 보내어 가로되 . . . .

요한이 그 제자 중 둘을 불러 주께 보내어 말하기를, “오실 그 이가 당신이 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라”고 했다. ‘오실 그 이’는 메시아를 가리켰다고 본다. 그들은 예수께 나아가 말했다. “세례 요한이 우리를 보내어 당신께 말하기를 오실 그 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더이다.”

세례 요한이 왜 제자들을 보내어 이런 의심어린 질문을 하게 했는지 알 수 없다. 유력한 주석가들39)은 요한이 의심이 생긴 것이 아니고 단지 자기 제자들의 믿음을 굳게 해주려고 한 것뿐일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질문의 내용이 두 번이나 반복된 것과 22절에 ‘너희는 가서 요한에게 고하라’는 말씀과 23절에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는 말씀을 볼 때, 예수님의 말씀은 요한의 제자들에게보다 요한에게 주어진 것 같다. 그렇다면, 요한은 옥중에서 예수님에 대해 일시적으로 의심이 생겼던 것 같다. 그는 하나님의 뜻이 예수님을 통하여 빨리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의심했을지도 모른다.

[21절] 마침 그 시에 예수께서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 들린 . . . .

마침 그때에 예수께서 질병과 고통과 악귀 들린 자를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소경을 보게 하셨다. 예수께서 병자들을 고치신 사건들은 성경에 자세히 기록된 것들 외에도 수없이 많았다. 예수께서는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고 많은 기적들을 행하셨다. 요한복음 21:25는,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고 말했다.

[22-23절]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 . . .

예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치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고 하셨다. 예수께서 중풍병, 나병, 소경, 앉은뱅이, 귀머거리 등의 병자들을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신 일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밝히 증거한다. 그의 행하신 기적들보다 더 확실한 증거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요한과 제자들에게 확신을 줄 것이다.

24-30절, 요한에 대해 증거하심

[24-25절] 요한의 보낸 자가 떠난 후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 . . .

요한의 보낸 자들이 떠난 후에 예수께서는 무리에게 요한에 대해 말씀하셨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보라 화려한 옷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는 문자적으로 갈대를 가리킬지도 모르나, 문맥상 마음에 확신이 없고 의심하는 인물을 의미한 듯하다.

세례 요한은 유대 광야에서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고 많은 사람들은 그곳으로 나아가 그의 설교를 듣고 회개했었다. 그때의 요한은 확신이 없거나 의심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확신에 넘친 자이었다. 또 그는 외모를 치장하거나 남의 칭찬을 구하는 자도 아니었다. 그는 낙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지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옥중에서 잠시 연약하여져 있는 것 같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아무도 고난의 현실에서 끝까지 믿음을 지킬 수 없다.

[26-28절]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 기록된 바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예비하리라 한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40) 요한보다 큰이[큰 선지자]41)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이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 곧 큰 선지자라고 증거하셨다. 요한은 구약 말라기에 예언된 대로 하나님께서 메시아 앞에 보내실 그 사자이었다. 요한은 구약 선지자들 중에 가장 큰 선지자이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목격하였고 그에게 세례까지 베풀었고 백성들에게 그가 어떤 분인지 소개했다는 점을 생각할 때 그는 구약의 선지자들이 가지지 못했던 특권을 가진 자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돌연히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고 말씀하신다. 마태복음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첨가되어 있다. 마태복음 11:12-13,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니.” 여기의 ‘하나님의 나라’ 혹은 ‘천국’은 다니엘 2장의 예언이나 예수님의 천국 비유(마 13장) 등에 비추어볼 때 신약교회를 가리킨다. 세례 요한은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의 분기점에 서 있었다. 신약교회의 지극히 작은 성도가 세례 요한보다 크다는 말씀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지식과 믿음에 있어서 그러하다는 뜻이다. 신약성도들은 이 점에 있어서 구약성도들보다 그리고 세례 요한보다 더 큰 특권을 누리고 있다. 신약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밝히 듣고 배우고 믿고 확신한다.

[29-30절]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지라. . . .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았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였으나,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그 세례를 받지 아니하였고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렸다.

31-35절, 이 세대의 사람들에 대해 증거하심

[31-35절] 또 가라사대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꼬?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꼬? 무엇과 같은고?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을 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세례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예수께서는 이 세대 사람들을 장터에서 친구들과 노는 아이들의 말의 내용에 비유하신 것이 아니고, 이런 말을 하는 아이들에 비유하셨다. 그 아이들은 친구들에게 “우리가 너희를 향해 피리를 부는데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는데 너희는 울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것은 심히 자기중심적인, 주관적인 판단과 불평과 원망이며 부당한 비난이다.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은 세례 요한에게나 예수님에게 그런 부당한 판단과 비난을 했던 것이다. 그들은 이런 비난만 일삼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참으로 불쌍한 자들이었다.

그러나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들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을 것이다. 지혜는 예수님 자신을 가리킨 것 같고 그의 모든 자녀들은 신약교회의 신자들을 가리켰다고 본다. 신약교회의 신자들은 예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과 믿음과 평가를 가질 것이다.

교회 안에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첫째는 예수님을 부정하는 자들이다.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이 그런 부류에 속한다. 그들은 장터에서 친구들에게 자기중심적 판단과 불평을 늘어놓는 아이들과 같다. 그들은 세례 요한에 대해서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주관적 판단과 불평과 비난을 쏟아놓는다. 그들은 참으로 불쌍한 자들이다.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심하는 자들이다. 세례 요한은 지금 그런 상태에 있는 것 같다. 한 때 예수님을 믿었으나 고난의 현실 속에서 마음과 믿음이 약해진 자들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예수님을 인해 실족하지 않는 자가 복이 있다.

셋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확신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신 것을 분명히 깨닫고 그를 믿은 자들이다. 주의 말씀대로, 그들 중 지극히 작은 자는 현재 의심하는 세례 요한보다 더 큰 자이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지식과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우리는 이 지식과 이 믿음을 굳게 지켜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모든 무지와 완악함, 불신앙과 의심을 다 버리고 성경의 충만한 증거들에 근거하여 예수님을 우리 주와 구주로 확신하고 그를 따르며 성경의 모든 교훈을 실천하자.

36-50절, 많은 죄를 사함 받은 한 여인

[36-39절]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기를 청하니 . . . .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기를 청하였다. 그래서 그는 그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다.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었다. ‘죄인인 한 여자’라고 말한 것을 보면, 그 여자는 그 동네에서 죄인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었던 것 같다. 그는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었다.

그 여자는 자신의 부족을 생각하고 예수님 앞으로 나가기를 부끄러워했던 것 같다. 그가 예수님의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신 것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표이었을 것이다. 또 눈물로 적신 그의 발을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은 것은 자신을 지극히 낮추고 예수님을 지극히 높이고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는 행동이었음이 분명하다. 그 여자가 자신의 죄를 철저히 뉘우치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고 그를 높이고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는 결코 이런 이상한 행동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예수님을 청한 바리새인은 이것을 보고 마음에 말했다.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그는 예수가 평범한 한 인간이며 그 여자가 어떤 자인지 모르고 계시다고 생각하였다.

[40-41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시몬아, 내가 네게 . . . .

그 바리새인의 이름은 시몬이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그가 말했다. “선생님, 말씀하소서.” 그가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부른 것을 보면, 그는 아직 예수를 주님으로 깨닫지 못하고 선생님 정도로만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예수께서는 시몬의 생각과 마음도 또 그 여자에 대해서도 잘 알고 계셨다. 예수께서는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500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50데나리온을 졌다고 말씀하셨다. 그는 사람의 죄를 빚에 비유하셨다. 어떤 이는 500데나리온의 빚을 졌고 어떤 이는 50데나리온의 빚을 졌다고 하신 것은 사람의 죄의 정도와 크기가 각기 다르다는 것을 보인다. 모든 죄가 다 사람을 지옥에 들어가게 하지만, 죄의 정도는 사람마다 각각 다르다.

[42-43절]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그 빚진 자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주인이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이 대답하였다.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주께서는 “네 판단이 옳다”고 말씀하셨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보상할 능력이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 모든 죄의 용서를 받았다. 죄의 크기에 따라 용서의 크기도 다르다. 또 용서의 크기에 따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크기도 달라질 것이다. 큰 죄의 용서를 받은 자는 하나님을 더 크게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죄가 본질상 지옥 형벌을 받을 만한 것일진대 우리의 죄 용서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얼마나 커야 하겠는가!

[44-47절]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 . . .

예수께서는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말씀하셨다.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예수께서는 시몬과 그 여자를 비교하신다. 시몬은 예수님을 식사 초청하고도 당시의 예절대로 발 씻을 물을 주지 않았으나, 그 여자는 눈물로 주의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다. 시몬은 예수님께 존경의 표로 입을 맞추지 않았으나, 그 여자는 주께서 들어와 앉으셨을 때부터 그의 발에 계속 입맞추었다. 시몬은 예수님께 그 흔한 감람유도 붓지 않았지만, 그 여자는 값비싼 향유를 주의 발에 부었다. 시몬과 그 여자의 행위는 그 차이가 너무 컸다.

예수께서 말씀하고자 하는 요점은, 많은 죄를 사함 받은 사람이 하나님을 많이 사랑할 것이고 적은 죄를 사함 받은 사람이 하나님을 적게 사랑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 여자가 주님을 향해 극진한 사랑과 존경을 보인 것은 그의 많은 죄가 용서함 받았다는 표시이었다. 그러나 죄 용서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주님을 적게 사랑할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함은 죄사함의 원인은 아니나 증거는 된다.

[48-50절]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사함을 얻었느니라 . . . .

예수께서는 그 여자에게 “네 죄사함을 얻었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죄는 사람을 불행과 죽음과 영원한 멸망으로 이끌며 죄인이 가지는 죄에 대한 가책도 그를 우울하게 만들고 기쁨도 평안도 용기도 힘도 가지지 못하게 만든다. 그러나 죄사함은 기쁨과 평안, 용기와 힘의 원천일 뿐만 아니라, 거룩한 삶과 성화(聖化)의 기초와 원동력이다.

함께 앉은 자들은 속으로 말하였다. “이 사람이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의심과 의문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사람의 죄의 용서는 하나님의 고유의 일이다. 하나님 외에 그 누구도 죄를 사할 수 없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지고 계셨다는 사실은 바로 그가 하나님의 아들 곧 신성을 가지신 구주이심을 증거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 여자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말씀하셨다. 구원은 믿음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 여자에게는 이 믿음이 있었다. 이 믿음이 그로 하여금 구주 예수 앞에 나아와 회개와 감사의 많은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고 자신을 낮추도록 하였고 하나님과 구주를 극진히 높이며 사랑하게 만들었다.

36절로 50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진리를 배운다. 첫째로, 모든 사람은 먼저 자신의 죄를 깨달아야 한다. 예수님을 식사 초청했던 그 바리새인은 그런 깨달음이 없었다. 그러나 죄인으로 알려진 그 여자는 자신의 죄를 깊이 깨닫고 있었다. 예수님은 죄인을 불러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 자신이 의롭다 생각하는 자는 구주가 필요치 않다고 생각하겠지만,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자는 그를 절실히 필요로 한다.

둘째로, 예수님은 죄를 사하시는 구주이시다. 예수님은 구주이시며 구원의 핵심은 죄사함이다. 죄는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었지만, 죄사함의 구원은 사람의 불행을 행복으로 만들며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 됨과 영생의 복을 가져다 준다. 사실, 예수께서 죄사함을 주시는 구주시라는 사실 자체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증거이다.

셋째로, 죄사함을 많이 받은 사람은 주님을 많이 사랑한다. 죄사함의 크기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함의 크기에 비례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죄의 심각함을 깨달아야 한다.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살인이며 마음으로라도 음욕을 품는 것은 간음이다. 탐심은 돈을 섬기는 우상숭배이며, 불순종은 하나님 대신 자기를 섬기는 우상숭배이다. 또 우리는 죄의 형벌이 죽음이요 영원한 지옥에 던지움이라는 사실도 철저히 깨달아야 한다. 그때 주께서 주시는 죄사함의 깊이를 깨달을 수 있다. 또 이럴 때 우리는 저 여인과 같이 주님 앞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섬기는 자가 될 수 있다.

 

8장: 기적들을 행하심

1-3절, 예수님의 전도 활동

[1절] 이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 . . .

이 후에 예수께서는 각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반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셨다. 전도는 모여 오는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일 뿐 아니라, 찾아가서 전하는 것이며, 전도자들은 어느 한 곳에만 머물 것이 아니고 모든 곳에 두루 다니며 전해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반포하시고 전도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설교의 중심 주제이었다. 그는 처음 설교하셨을 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고 외치셨다(마 4:17).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왕권이 이루어지는 나라를 가리킨다. 온 세상이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이지만,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왕권을 부정하고 그를 대항하고 그의 뜻을 거슬러 우상들을 섬기고 음란하고 부도덕하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선포되었고 그를 통하여 시작되었고 장차 그의 재림으로 완성될 것이다. 그 나라는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시작되었다. 사람은 오직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서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음으로써만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요 3:3, 5).

하나님의 나라는 좋은 나라이다.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죄가 없고 마귀의 시험도 없다. 거기에는 의와 평안과 기쁨이 충만하다(롬 14:17; 벧후 3:13). 거기에는 죽음과 두려움과 눈물과 고통이 없다(계 21:4). 세상에서 악인들이 구원받고 변하여 의롭고 선한 사람이 되어 들어가는 곳이 그 나라이다. 예수께서는 이 일을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3일만에 다시 살아나셨다. 어떤 죄인도 회개하고 예수님만 믿으면 구원받아 그 나라에 들어가기 때문에, 이 나라의 소식은 좋은 소식이다.

예수께서 전도 활동을 하실 때 열두 제자들이 그와 함께하였다. 열두 제자들의 임무들 중 첫 번째는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이었다(막 3:14). 그들은 예수님의 교훈들과 행하신 일들을 듣고 보고 배워야 했다. 제자는 선생님의 말씀을 잘 배우고 그 행위를 본받는 자이다. 그들은 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들과 행하신 일들을 증거할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증인들이 될 것이다. 또 그들은 예수님의 전도 사역의 크고 작은 일들을 도와야 했을 것이다.

오늘날 주의 제자된 자들은 무엇보다 성경책을 자세히, 부지런히 읽고 연구하며 기도하기를 힘써야 한다. 그것이 주님과 함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물론 건전한 신앙 서적들도 유익하지만, 이런 책들은 성경에 비추어 분별하면서 읽어야 할 것이다. 일반 성도들은 무엇보다 건전한 교회의 집회들에 성실히 참석하여 성경 말씀을 잘 배워야 한다. 그것이 바른 신앙생활의 지름길이다. 성경적 설교와 교훈이 있는 교회는 성도들에게 큰 복이다.

[2-3절]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또 헤롯의 청지기 . . . .

또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또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들이 함께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겼다. 예수님과 함께한 자들 중에는 귀신 들림과 병들로부터 고침 받은 많은 여인들이 있었다. 예수께 병고침을 받은 모든 여자들이 다 주님을 따라 다니며 그를 섬긴 것은 아니고 또 그럴 수도 없었겠지만, 병 고침을 받은 후 주님의 전도 활동에 동행했던 여자들이 있었다. 막달라인인 마리아는 그 대표적 인물이었던 것 같다. 그는 일곱 귀신이 들렸던 자이었다. 그의 과거가 어떠했을지 짐작할 만하다. 예수님을 따른 여자들 가운데는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도 있었다. 그는 당시에 고위 관리의 아내 즉 귀부인이었을 것이다. 또 그 외에도 다른 여러 여자들이 있었다.

그 여자들은 자기들의 소유로 예수님과 제자들을 섬겼다. 그 여자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필요한 음식과 물건을 공급했을 것이다. 그들은 전도 후원자들이었다. 주께서는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고 말씀하셨는데(마 6:20), 보물을 하늘에 쌓는다는 것은 전도와 구제를 위해 돈을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헌금은 주께 대한 믿음과 주님과 성도들에 대한 사랑의 표시이다(고후 9:13; 8:8). 우리가 우리를 죄와 지옥 형벌에서 건져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는다면, 또 그가 피흘려 사신 주의 백성들을 참으로 사랑한다면, 우리는 즐거이 헌금할 것이다. 헌금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열매이며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다(빌 4:17-18). 그러나 참 믿음과 사랑이 없이는 풍성한 헌금은 불가능하다.

전도자들을 위한 물질적 후원은 후원자 자신의 믿음에도 유익이 많다. 예수께서는 ‘네 보물이 있는 그 곳에 네 마음도 있다’고 말씀하셨다(마 6:21). 먹고 마시는 일이나 입는 일 등 땅의 썩어질 것을 위해서만 돈을 쓴 자는 땅의 것만 생각하게 되지만,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을 위해 돈을 많이 쓴 자는 항상 하나님과 교제하며 천국을 소망하게 될 것이다. 사람이 돈을 많이 쓴 곳에 사랑과 애착을 두는 것은 당연하다. 헌금은 헌금하는 자의 믿음에 유익이 많다.

1절로 3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얻는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널리 전하자. 전도는 교회의 최대의 사명이다. 그것은 예수님의 사명의 계승이다. 우리는 열심히 전도의 사명을 다해야 한다. 우리는 온 세상에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해야 하며, 하나님의 모든 말씀, 모든 교리적, 윤리적 내용을 가르쳐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전도자들을 양성해야 한다. 예수님과 함께 하였던 열두 제자들처럼, 우리는 성경에 정통한 전도자들을 양성해야 한다. 목사들은 전도자들을 사상적으로, 인격적으로 교훈하고 훈련시켜야 할 것이다. 교회는 전도자 양성의 기능을 성실히 수행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전도자들을 후원해야 한다. 자기의 소유물로 예수님과 제자들을 섬겼던 여인들처럼, 우리는 교회적으로 혹은 개인적으로 전도자들을 도와야 한다. 이 일은 천국에 보화를 쌓는 일이다. 우리는 전도자들을 세워 훈련시키고 파송하고 후원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4-15절, 씨 뿌리는 자의 비유

[4-8절] 각 동네 사람들이 예수께로 나아와 큰 무리를 이루니 . . . .

각 동네 사람들이 예수께로 나아와 큰 무리를 이루었고 예수께서는 비유로 말씀하셨다. “씨를 뿌리는 자가 그 씨를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밟히며 공중의 새들이 먹어버렸고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속에 떨어지매 가시가 함께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외치셨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귀머거리 외에는 들을 귀는 누구에게나 다 있으나, 참으로 듣는 것은 단지 말의 소리만 듣는 것이 아니고 말의 뜻을 깨닫는 것이다. 하나님의 참된 말씀에 대한 깨달음은 모든 사람에게 다 있지 않다.

[9-10절] 제자들이 이 비유의 뜻을 물으니 가라사대 하나님 . . . .

제자들이 이 비유의 뜻을 묻자, 그는 말씀하셨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저희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께서 천국 복음을 ‘비밀’이라고 표현하신 것은 이 진리가 일반 사람들의 생각과 다르고 택자들에게만 이해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될 것이다. 또 장차 영광 중에 나타날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고 감취어 있다.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제자들에게는 허락되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는 말씀은 선택의 진리를 보인다. 선택의 진리는 하나님의 구원이 제한적임을 보인다. 믿음이나 구원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다(살후 3:2). 선택의 진리는 또 인간의 구원이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있음을 보인다. 구원은 하나님이 주셔야 인간이 받을 수 있다. 로마서 9: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인간은 구원을 위해 하나님의 긍휼을 구할 것밖에 없다.

선택의 진리는 또 우리의 구원이 값비싼 구원임을 증거한다. 우리는 구원의 가치를 알아야 한다. 구원의 값은 계산할 수 없이 크다. 구원은 우리가 돈으로 살 수 없고 우리 힘으로 얻을 수 없는 것이며 온 세상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고 말씀하셨다(마 16:25-26).

[11절] 이 비유는 이러하니라.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예수께서는 씨 뿌리는 비유를 설명하셨다. 그는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라고 말씀하셨다. 씨는 신기한 물체다. 씨 속에는 생명이 있다. 죽은 것 같은 씨가 땅에 심길 때 그 속에서 싹이 나서 자란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말씀이며 죽은 영혼들을 살리는 말씀이다. 요한복음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베드로전서 1: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물론, 성경에 증거된 복음 진리만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은 없다. 바른 성경 교훈만 씨가 된다. 그러므로 아름답고 듣기 좋은 인간의 말보다 바른 성경적 설교와 교훈이 귀하고 중요하다.

[12절] 길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 . . .

예수께서는 “길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와서 그들로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라고 말씀하셨다. 구원은 복음 진리를 믿음으로 얻어진다. 말씀을 빼앗기는 것은 말씀을 깨닫지 못하거나 잊어버리는 것을 가리킨다. 마태복음 13:19,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는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리운 자요.” 구원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가치 있는 것인데, 사람들은 그 가치를 깨닫지 못하고 복음을 깨닫지 못하고 그것을 세상의 것보다 크게 여기지 않고 소홀히 여긴다.

[13절]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 . . .

예수께서는 또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 시험을 받을 때에 배반하는 자요”라고 말씀하셨다. 일시적이고 기분적인 믿음은 참 믿음이 아니다. 뿌리가 없다는 것은 복음에 대한 확고한 지식과 믿음이 없다는 뜻이다. 또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이 아닌, 인간 자신이 만들어낸 일시적 믿음은 어려운 시험을 이기지 못한다. 시험은 잘못된 생각과 판단 혹은 이해 부족에서 생긴 마음의 동요뿐 아니라, 또한 믿음 때문에 당하는 환난과 핍박 등을 가리킨다(마 13:21).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확신을 가진 자는 다니엘과 세 친구들처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만 섬기며 우상 앞에 절하지 않을 것이다(단 3:16-18; 6:10).

[14절]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지내는 . . . .

예수께서는 또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리와 일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치 못하는 자요”라고 말씀하셨다. 세상의 염려와 재물과 쾌락은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지 못하게 막는 가시들이다. 이런 가시들을 제거하고 끊어버려야 한다. 생활의 염려는 신앙의 방해물이다. 생활의 염려는 우리의 마음을 복잡하게 하고 우리의 믿음을 약하게 만든다. 재물에 대한 욕심도 신앙의 큰 방해물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 6:24). 또 육신의 쾌락도 신앙의 심각한 방해물이다. 육신의 모든 즐거움이 악은 아니다. 하나님이 주신 정당한 즐거움들도 있다. 우리에게는 먹는 즐거움이 있고 결혼과 가정의 즐거움이 있다(전 5:18; 9:9). 그러나 우리는 모든 즐거움을 하나님이 정해주신 한계 안에서 절제 있게 누려야 하고 그것을 넘어서는 안 된다.

[15절]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 . . .

주께서는 또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고 말씀하셨다. 씨가 좋은 땅에 심어진 경우는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것이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므로(렘 17:9), 이 세상에 좋은 마음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온유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여 받고 그 말씀을 믿고 간직하여 생활에 적용하고 실천하는 자들이 있다. 인내로 결실한다는 것은 말씀의 계속적 실천에는 인내가 필요함을 암시한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바로 알고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로 아는 자는 인내하며 그 말씀을 붙들고 실천할 수 있다. 말씀이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죄인이 구원을 받아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한 인격자가 되고 하나님의 선한 일을 위해 봉사하고 충성하는 것을 말한다(요 15:4-5; 롬 14:7-8; 고후 5:15; 갈 5:22-23; 엡 2:10; 딛 2:14).

4절부터 15절까지에서 몇 가지 사실을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로, 씨가 두루 뿌려지지만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만 열매를 맺지 못한다. 넓은 문으로 들어가고 넓은 길로 행하다가 멸망에 이르는 자들이 많을 것이다(마 7:13-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을 것이다(마 22:14).

둘째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씨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 아니고 땅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변화를 받지 못하는 것은 말씀 자체의 문제가 아니고 심령의 문제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불변적이다. 성경에 밝히 계시된 복음 진리 외에 다른 복음은 없다. 교회는 오직 이 복음을 성실히 선포하고 가르쳐야 한다. 그러나 땅에 문제가 있다. 사람의 심령에 문제가 있다. 사람의 마음은 심히 어둡고 깨달음이 없다. 길과 같이 딱딱하게 굳어진 마음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즉시 기쁘게 받되 확신에 이르지 못하는 자들이 있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확신하지만 세상의 염려와 재물과 쾌락 때문에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자들도 있는 것이다. 이들은 다 신앙의 실패자들이다.

셋째로, 좋은 땅에 떨어진 씨만 열매를 맺는다.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받은 자들만 믿고 행한다. 좋은 마음은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하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하다. 참된 회개도, 믿음도, 순종도 다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하나님의 은혜로 바르게 말씀을 받고 깨닫고 확신하고 자기를 부정하고 그 말씀을 힘써 실천하자.

16-18절, 등불의 비유

[16절]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 두지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평상’은 ‘침상’을 가리키고, ‘등경’은 ‘등잔대’ 혹은 ‘등잔걸이’를 가리킨다. 등불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말씀은 빛과 같다(시 119:105). 빛은 어두운 세계를 밝히며 큰 유익을 준다. 밤에 빛이 꼭 필요하듯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꼭 필요하다. 왜냐하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도 인생의 목적도 알지 못하는 어두움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무지와 죄악에서 건짐을 받을 것이다. 말씀의 빛은 세상에 큰 유익을 준다. 우리는 다 그 유익을 받은 자들이다.

[17절]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 . . .

예수께서는 또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은 공개적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사람에게 비취는 데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다. 기독교 진리는 몇몇 사람들을 위해 은밀히 전해지는 내용이 아니다. 그 보배로운 진리를 짓밟기 때문에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는 말씀이 있지만(마 7:6), 예수님의 말씀들은 모든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말해졌고 가르쳐졌던 것들이다. 요한복음 18장에 보면, 예수께서는 “내가 드러내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의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히는 아무것도 말하지 아니하였도다”라고 말씀하셨다(요 18:20).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사람에게 널리 전파되어야 할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은밀히 주신 교훈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장차 온 세상에 알려져야 할 내용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들은 이 진리를 땅끝까지 널리 전파하고 가르쳐야 한다. 이것이 교회의 사명이다.

[18절]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제자들은 주께로부터 듣고 배우는 말씀의 내용뿐 아니라, 그 내용이 얼마나 진실하고 확실한가를 이해하고 확신해야 한다. 히브리서 2:1,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 혹 흘러 떠내려갈까 염려하노라.” ‘있는 자’와 ‘없는 자’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과 행함에 관계된다고 본다. ‘있는 자’ 곧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행하는 자는 하나님의 더 많은 은혜를 받을 것이지만, ‘없는 자’ 곧 믿음과 행함이 없는 자는 자기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던 것조차도 빼앗길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히 이론이나 지식에 머물 수 없고 반드시 실천되어야 한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19-21절, 모친과 동생들이 찾아옴

[19절] 예수의 모친과 그 동생들이 왔으나 무리를 인하여 . . . .

예수님의 모친과 그 동생들이 왔으나 무리를 인하여 가까이하지 못했다. ‘그 동생들’은 예수님의 친동생들을 가리킨다고 본다. 천주교 학자들은 마리아가 예수님 외에 다른 자녀들을 낳지 않았고 여기에 ‘그 동생들’은 그의  사촌들을 가리킬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우스광스런 주장이다. 성경은 예수님을 마리아의 맏아들이라고 증거하고(마 1:25 전통본문; 눅 2:7), 또 그의 동생들의 이름을 열거한다(마 13:55; 막 6:3). 복음서의 제한된 지면에 예수님의 사촌 동생들의 이름까지 열거했다는 것은 우스광스런 생각이다.

[20-21절) 혹이 고하되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을 . . . .

어떤 이가 말했다.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을 보려고 밖에 섰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 예수께서는 영적 가족을 더 중시하셨다. 육신의 가족을 잘 보살피고 돌보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 의무이다(딤전 5:8). 그러나 우리는 ‘내 가족’, ‘내 식구’라는 육신적 가족의 한계를 넘어 온 세상의 모든 믿는 자들을 포함하는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거대한 가족 개념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은 다 하나님의 영원한 가족이다.

16절로 21절까지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몇 가지 성격을 깨닫는다. 첫째로, 하나님의 말씀은 빛이다. 그것은 어두운 세상을 밝히고 인생의 갈 길을 보인다. 이 빛된 말씀은 세상 사람들에게 얼마나 절실히 필요한지 모른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가치를 깨달아야 한다.

둘째로, 하나님의 말씀은 공개적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은밀히 전해지는 내용이 아니고, 만인들을 위해 공개된 내용이다. 성경은 그것을 사모하고 연구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진 말씀이며 교회가 온 세상에 널리 전파해야 할 말씀이다.

셋째로, 하나님의 말씀은 실천적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지 이론이나 지식에 머물 수 없고, 반드시 실천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 말씀을 듣고 믿고 행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신다.

넷째로, 하나님의 말씀은 교회적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가족들이다. 그들이 바로 신약교회이다. 그들은 이 세상 사는 동안 서로 사랑해야 할 형제 자매들이다. 그들은 장차 천국에 들어가서도 영원히 거룩한 사랑의 교제를 나눌 자들이다.

우리는 이 빛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고 온 세상에 널리 전파하자. 또 그 말씀으로 구원받은 자들을 사랑하는 자들이 되자.

22-25절, 광풍을 잔잔케 하심

[22-23절] 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저희에게 . . . .

하루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셔서 그들에게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말씀하셨다. 그들이 떠나 행선할 때에 예수께서는 잠이 드셨다. 그는 잠이 부족하시도록 바쁜 하루 하루를 보내셨던 것 같다. 또 그것은 그가 사람이심을 증거한다. 물론 그는 성경이 밝히 증거하는 대로 영원전부터 계신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시지만, 그는 또한 참으로 사람이셨다.

그때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쳐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하였다. 광풍의 원인은 다양할 것이다. 그것은 순전히 자연적 현상일 수도 있다. 바람은 때때로 이리 불기도 하고 저리 불기도 하며 때때로 약하게 불기도 하고 강하게 불기도 한다. 또한, 마귀의 장난으로 광풍이 일어날 수도 있다. 우리가 마귀의 존재를 믿는다면 마귀의 장난들이 있을 것이라는 것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일들은 다 하나님의 허락 속에서만 가능하다. 이 세상의 자연 현상들이나 마귀의 장난들은 다 하나님의 섭리 아래서만 일어난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주권적 손길 밖에서 일어나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본문에 나타난 한 사실은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행선했는데도 광풍을 만났다는 것이다. 세상에는 어려운 일들이 많이 있으며 구원받은 성도들에게도 그러하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이 있었듯이, 구원받은 성도들의 삶 속에도 어려운 일들이 많이 있다. 때로는 큰 광풍 같은 일들도 없지 않다. 그러나 성도들에게 닥친 모든 일들은 언제나 유익을 준다. 고난은 성도들게 믿음과 겸손과 성결의 유익을 준다.

[24-25절] 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가 . . . .

제자들은 그에게 나아와 깨우며 말했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예수께서는 잠을 깨셔서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셨다. 그러자 바람이 그쳐 잔잔하여졌다. 그는 제자들에게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고 책망하셨다. 그들은 두려워하고 기이히 여기며 서로 말하였다. “저가 뉘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고.”

예수께서 광풍을 잔잔케 하신 이 사건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한다. 그는 분명히 사람이셨으나 그 이상이셨다. 잠을 자는 자는 분명히 사람이시지만,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는 자는 분명히 사람 이상이시다. 사람은 그런 일을 할 수 없다. 바람과 파도를 향해 명령하여 복종케 할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그것은 사람의 능력의 한계 밖에 있는 일이다. 하나님께서만 바람과 파도를 주장하실 수 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므로 모든 것을 할 수 있으시다. 예수께서 그 일을 하셨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 사건이 성경에 기록된 이유이다.

광풍과 파도를 대하는 제자들의 모습은 믿음 없는 모습이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깨우며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라고 말했다. ‘주여’라고 번역된 원어(에피스타타)는 ‘선생님이여’라는 말이다. 그들은 아직도 예수님을 선생님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가? 여하튼 그들은 심히 불안하여 선생님을 야단스럽게 불렀다. 예수께서는 깨어 일어나셨고 바람과 물결을 잔잔케 하신 후 제자들에게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라고 책망하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했지만 아직 믿음이 부족했고,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당황하고 믿음 없는 모습을 나타냈다. 그들은 그때 믿음으로 잠잠히 하나님을 바랐어야 했다. 우리는 어려운 일을 만날 때에 두려워하거나 당황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하시는 구원을 보며 믿음으로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며 기다려야 한다(출 14:13-14; 시 62:1).

그러나 믿음 없는 모습으로이긴 하지만,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운 것은 당면한 문제의 해결이 되었다. 그들과 함께 계셨던 예수님은 그들을 도우실 수 있는 주님이셨다. 예수님은 그들의 불안과 두려움을 제거하실 수 있는 분이셨다. 과연 그는 그렇게 하셨다.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로 모든 문제는 해결되었다. 극악한 위기 상황은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로 즉시 평온한 환경으로 변화되었다. 성경은 환난 날에 하나님께 간구하라고 교훈한다(시 50:15).

22절로 25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찾는다. 첫째로,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행선했는데도 광풍을 만났다. 이 세상에서는 성도들에게도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이 있다. 심지어 극한 위기의 상황들도 있을 수 있다. 우리는 성도들에게 그런 환난들이 있다는 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자. 우리는 그것들이 하나님께서 뜻 가운데 허락하신 것들이며, 우리에게 결국 유익을 줄 것이라는 것을 믿자.

둘째로, 예수께서는 말씀 한마디로 광풍을 잔잔케 하심으로써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증거하셨다. 바람과 물결을 명하여 순종케 하신 분은 결코 단지 사람이실 수 없다. 그는 사람이시지만, 또한 그 이상이시다. 바람과 파도를 잔잔케 하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하여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더욱 확신하자.

셋째로, 본문은 광풍을 대처하는 바른 방법에 대해 암시한다. 우리는 광풍을 만났을 때에 두려워하거나 당황하지 말고 믿음으로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야 한다. 우리의 목자 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도우시고 인도하실지 생각하며 그의 구원하는 손길을 기다려야 한다. 우리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며 모든 것을 그에게 의탁해야 한다. 믿음과 인내와 간구, 오직 그것만이 이 세상에서 때때로 일어나 광풍에 대처하는 성도의 바른 태도이다. 두려움이나 염려는 우리의 믿음 없음을 드러낼 뿐이다.

26-39절, 귀신들린 자를 고쳐주심

[26-27절] 갈릴리 맞은편 거라사인의 땅에 이르러 육지에 . . . .

예수께서는 갈릴리 맞은편 거라사인[가다라인](전통본문)42)의 땅에 이르러 육지에 내리셨다. 갈릴리 맞은편에는 ‘가다라’라는 마을이 있었다. 그 도시 사람으로서 [오래](전통본문) 귀신들린 자 하나가 예수님을 만났다. 이 사람은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이었다. 그 귀신들린 자의 특징들은, 첫째, 옷을 입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단정치 않았다. 둘째, 그는 집에 거하지 않았다. 즉 안정이 없었다. 인간의 삶에 있어서 집은 휴식과 사랑의 장소인데, 그는 그런 정상적인 삶을 저버렸다. 셋째, 그는 무덤 사이에 거했다. 그는 죽은 자들과 함께 사는 자와 같았다.

[28-29절] 예수를 보고 부르짖으며 그 앞에 엎드리어 . . . .

넷째, 그는 힘이 셌고 사람들이 통제하기 힘들었다. 그는 예수님을 보고 부르짖으며 그 앞에 엎드리어 큰 소리로 그를 부르며 말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그것은 예수께서 이미 더러운 귀신을 명하여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하셨기 때문이었다. (귀신이 가끔 이 사람을 붙잡으므로 그는 쇠사슬과 고랑에 매여 보호되었으나 그 맨 것을 끊고 귀신에게 몰려 광야로 나갔다.) 마태복음 8:28은 그가 심히 사나와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만하였다고 말했고, 마가복음 5:5은 그가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 늘 소리지르며 돌로 제 몸을 상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는 전혀 이성에 지배를 받지 않고 감정에만 사로잡혀 있는 매우 비정상적이고 불쌍한 자이었다.

이러한 특징들에 더하여, 두 가지 내용이 더 첨가될 수 있다. 하나는 그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아보았다는 점이다. 그는 예수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라고 불렀다. 또 하나는 그가 예수님의 권세를 인정하고 그에게 간구했다는 점이다. 28절뿐 아니라, 또한 31절과 32절에도 그가 예수님께 간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을 보면, 귀신들도 예수님에 대한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단지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으며 구원을 받지 못할 뿐이었다.

예수께서는 그 귀신에게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명하셨다. 그가 그렇게 명령하실 수 있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이었다. 사람은 누구도 귀신에게 그런 명령을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그런 명령을 하실 수 있다. 그는 귀신들도 주관하신다. 귀신들은 그의 권세와 능력을 알고 있었고 인정하고 있었다.

[30-31절] 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신즉 가로되 군대라 하니 이는 많은 귀신이 들렸음이라. 무저갱(無底坑)으로 들어가라 . . . .

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시니 그는 “군대라”라고 말하였다. ‘군대’라는 원어(레게온)는 로마 군대 조직의 단위를 가리켰다. 그것은 수백 명의 기병과 5, 6천명의 보병으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그가 그렇게 말한 것은 많은 귀신이 들렸기 때문이다. 그는 보통 귀신들린 사람과 달랐다. 그래서 그렇게 무덤에 살며 사람들이 통제할 수 없이 사나웠고 크게 소리를 질렀던 것이다. 그는 무저갱(無底坑)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였다. ‘무저갱’(無底坑)이라는 원어(아뷔쏘스)는 ‘밑바닥이 없는 곳’ 곧 지옥을 가리킨다. 예수께서 다른 곳에서 증거하신 대로, 지옥은 ‘마귀와 그 사자들[귀신들]을 위해 예비된 영영한 불’이다(마 25:41). 귀신들이 무저갱에 던지울 것을 두려워하는 것을 보면, 그들은 자신들이 장차 거기에 던지울 운명에 처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32-36절] 마침 거기 많은 돼지 떼가 산에서 먹고 있는지라. . . .

마침 거기 많은 돼지 떼가 산에서 먹고 있었다. 마가복음 5:13은 거기에 ‘거의 2천 마리’의 돼지들이 있었다고 말한다(막 5:13). 귀신들은 그 돼지에게로 들어가게 허락하시기를 간구하였다. 그가 허락하시자 귀신들은 그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들에게로 들어갔다. 그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호수에 들어가 몰사하였다. 치던 자들은 그 된 것을 보고 도망하여 성내와 촌에 고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공의로운 재앙을 통해 악한 자를 징책하시고 사람들에게 세상 재물이 헛됨을 일깨우치신다. 사람에게 물질적 큰 손실이 있어도 물질을 의지하고 사랑하는 삶이 허무함을 깨닫는 큰 유익도 있다. 실상, 귀신들린 한 사람의 가치는 그 돼지 2천 마리의 가치보다 더 컸다. 사람의 생명은 천하보다 귀하다(마 16:26).

사람들은 그 된 것을 보러 나와서 예수께 이르러 귀신 나간 사람이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예수의 발 아래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다. 귀신들렸던 자가 구원받은 것을 본 자들이 그들에게 와서 그 일에 대해 말하였다. 예수님의 기적들은 어느 한 곳에서 은밀하게 이루어진 것들이 아니었고 많은 사람들이 보는 데서 이루어졌다. 성경은 그것들을 본 증인들의 증언들이다. 우리는 성경의 이 진실한 증거적 성격을 깨닫고 성경의 모든 내용들을 믿어야 한다.

[37-39절] 거라사인의 땅 근방 모든 백성이 크게 두려워하여 . . . .

거라사인[가다라인]의 땅 근방 모든 백성들은 크게 두려워하여 그에게 떠나가시기를 구하였다. 그들에게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신지 알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다. 이런 놀라운 일이 일어났는데도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깨닫지 못하였다. 그들 속에는 메시아에 대한 갈망, 구원에 대한 갈망이 없었다. 그러나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사마리아 사람들은 달랐다. 그들은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났던 한 여자의 증거를 받고 예수님을 믿었고 예수께 나아와 그들과 함께 유하기를 청하였고 예수께서 거기에 이틀을 유하시며 말씀을 전해주시므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다(요 4:39-42).

예수께서 배에 올라 돌아가실 때 귀신 나간 사람이 함께 있기를 구하였다. 그의 태도는 동네 사람들의 태도와 달랐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를 보내며 말씀하셨다.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 일 행하신 것을 일일이 고하라.” 그는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하신 것을 온 성내에 전파하였다.

26절로 39절까지의 말씀에서 우리는 몇 가지의 교훈을 얻는다. 첫째로, 예수님은 신적 능력과 권세를 가지신 분이시다. 귀신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고 있었고 그의 신적 권세와 능력을 인정하여 그에게 무엇을 간구하였다. 그는 귀신들에게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명하셨고, 또 그들의 간구를 허락하셔서 돼지 떼에 들어가게 하셨다. 이 일은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예수께서는 이 일을 통해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분명히 증거하셨다. 이 사실을 믿고 확신하자.

둘째로, 인간의 구원의 가치는 참으로 크다. 돼지 2천 마리의 손실은 크지만, 귀신들린 자가 고침을 받은 것은 그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이었다. 단정치 못하여 옷을 입지 않았고 안정이 없어 집에 거하지 않았고 죽은 자들처럼 무덤 사이에 거하였고 매우 거칠고 사나워 통제하기 힘들었고 자기의 몸도 상하게 하였던 그 불쌍한 사람이 고침을 받았다. 인간의 가치는 참으로 크고 구원의 가치는 비교할 수 없이 크다. 우리는 인간의 생명, 그것도 영원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함을 알자.

셋째로, 우리는 예수님을 알고 영접하자. 가다라인들은 그를 알지 못하고 떠나시기를 간구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그 귀신들렸다가 고침받은 사람처럼 주 예수님과 함께 있기를 소원해야 한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며 그를 섬기며 그를 증거하기를 소원하자.

40-56절, 두 가지 기적들

[40-42절] 예수께서 돌아오시매 무리가 환영하니 이는 다 . . . .

예수께서 돌아오시자 무리가 환영하였다. 이는 다 기다렸기 때문이다. 회당장인 야이로라 하는 사람이 와서 예수님의 발 아래 엎드렸다. ‘회당장’은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모이던 곳인 회당에서 가장 높은 책임을 가진 사람을 가리킨다. 그는 예수께서 자기 집에 오시기를 간구했다. 그것은 그에게 열두 살 먹은 외딸이 있어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그는 자신의 자존심이나 체면을 생각할 겨를이 없이 겸손히 예수님 앞에 엎드려 간청하였다. 그는 예수님이 자기 딸을 고쳐주실 수 있다고 믿었음에 틀림없다. 그의 간청은 예수님께 대한 그의 믿음의 표현이었다. 예수께서 가실 때에 무리가 그를 옹위하였다.

[43-44절] 이에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중에 아무에게도 . . . .

그때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중에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던 한 여자가 예수님의 뒤로 와서 그의 옷 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쳤다. 혈루증은 피가 멈추지 않는 출혈병이다. 전통본문에는, ‘혈루증으로 앓는 중에’라는 말 다음에 ‘의사들에게 그 가산(家産)을 다 허비하였으되’라는 말이 있다.43) 그는 참으로 불쌍한 병자이었다. 그는 12년이나 투병 생활를 했고 병 치료를 위해 재산을 다 허비했고 심각한 열등감과 좌절과 낙심 속에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는 오랜 고난을 통해 세상을 의지하고 바라는 마음 대신 하나님의 긍휼만 찾고 구하는 겸비한 심령이 되었던 것 같다. 그때 그는 예수님에 대해 들었고 그를 믿었고 그에게 나아왔다. 예수님의 뒤로 온 것은 그의 열등감과 수치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에게는 예수님 앞에 나올 용기조차 없었다. 그는 그의 뒤로 와서 그 옷 가에 손을 대었다. 그것은 예수님께 대한 그의 믿음의 표현 방식이었다. 믿음의 표현 방식은 사람마다 각각 다른 것 같다. 많은 이들은 예수님 앞에 나와 자신들의 소원을 아뢰었다. 그러나 이 여자는 조용히 예수님 뒤로 와서 단지 그 옷 가에 손을 대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의 출혈이 즉시 그쳤다. 12년간이나 누구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했던 그 몸의 출혈이 즉시 멈춘 것이다. 불치의 병이 놀랍게 치료되었다. 이것은 인간의 생각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이것은 확실히 인간의 능력의 한계 밖에 있는 일이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의 일이었다. 예수님의 신적 인격과 능력이 또 한번 드러났다.

[45-47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 . . . .

예수께서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 하시자 다 아니라고 하였다. 그때에 베드로가[베드로와 함께 있는 자들이]44) “주여, 무리가 옹위하여 미나이다”라고 말했다. 예수께서는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고 말씀하셨다. 그 여자는 숨기지 못할 줄을 알고 떨며 나아와 엎드리어 그 손댄 까닭과 곧 나은 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 고하였다. 이 사건도 많은 사람 앞에서 이루어졌고 많은 사람 앞에서 확인되었다. 예수님의 기적들은 항상 그러하였다. 기독교 복음의 성격 전반이 그러하였다. 기독교 복음은 많은 증인들의 진실한 증언들에 근거한 것이다.

[48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 . . .

예수께서는 “[힘을 내라],45)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말씀하셨다. 구원의 이치는 비슷하다. 당시에 많은 병자들이 있었겠지만, 이 여자와 같이 예수님을 알고 믿고 의지한 자만이 예수께로 나올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죄인인 인생은 하나님의 긍휼과 능력을 의지하고 그의 보내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할 때 구원을 받는다.

[49-50절]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 . . .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말했다.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선생을 더 괴롭게 마소서.” 예수께서 들으시고 말씀하셨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주님을 믿고 살아가는 삶의 여정에서도 성도는 기쁘고 즐거운 일도 만나지만 때로는 슬프고 두려운 일도 만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권적 섭리자이며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는 두려워 말고 오직 그를 믿고 의지하고 의탁해야 할 것이다.

[51-53절] 집에 이르러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및 아이의 . . . .

그는 집에 이르러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및 아이의 부모 외에는 함께 들어가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셨다. 모든 사람이 아이를 위하여 울며 통곡할 때 예수께서는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말씀하시자 그들은 그가 죽은 것을 아는 고로 비웃었다. 예수께서는 죽음을 잔다고 표현하셨다. 그것은 그가 그를 깨우실 것이기 때문이었다. 부활의 소망 때문에 죽음은 잔다고 표현될 수 있었다.

[54-55절]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가라사대 아이야 . . . .

예수께서는 아이의 손을 잡고 “아이야(헤 파이스)[소녀야], 일어나라”고 부르셨다. 그러자 그의 영(靈)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났다. 예수님의 말씀은 능력이었다. 마치 죽은 아이가 그의 음성을 듣듯이, 그가 말씀하시자 곧 죽은 자가 살아난 것이었다. 그 소녀가 살아난 것은 즉각적이었다. 사람들의 생각에 불가능하게 보이는 그 생명의 회복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즉시 이루어졌다. 예수께서는 그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명하셨다.

[56절] 그 부모가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경계하사 이 일을 . . . .

그 부모는 놀랐다. 예수께서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경계하셨다. 그가 그렇게 경계하신 이유는 사람들이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을 오해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육신의 병이나 고쳐주고 죽은 자들이나 살려주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보다 더 근본적인 죄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오셨다. 그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기 위해 또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시기 위해 오셨다(눅 5:32; 마 20:28).

40절로 56절까지는 몇 가지 교훈을 준다. 첫째로, 세상에는 불행한 일들이 많이 있지만, 예수께서는 세상의 불행과 그 원인인 죄 문제의 해결을 위해 오신 신적 구주이시다. 그는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고통당하는 한 여인을 고쳐주셨다. 또 그는 회당장의 열두 살된 외동딸을 살려주셨다. 이것은 신적 능력의 일들이었다. 이것들은 예수께서 신적 구주, 곧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확실히 증거한다.

둘째로, 이런 사건들은 구원의 복음 원리를 암시한다. 세상의 모든 불행한 일들의 근본 원인은 죄요 그 마지막은 죽음과 지옥 형벌이지만, 사람은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을 믿으면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과 영원한 생명의 구원을 얻는다. 자신의 부족을 깨닫고 겸손히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와 그를 믿는 자마다 구원을 얻는다.

셋째로, 오늘날에도 우리에게는 크고 작은 문제들이 있지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기도함으로 해결받는다. 주께서는 그 혈루증 여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셨고,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회당장에게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믿음으로 기적을 경험하였다. 오늘날도 믿는 자는 기도함으로 응답받고 문제의 해결을 얻는다.

 

9장: 제자의 길

1-6절, 열두 제자들을 보내심

[1절]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 . . .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불러모으시고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셨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과 권세이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고 영혼들을 구원하는 사역은 단지 사람의 말로 되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役事)가 필요하였다. 사도 바울도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다”고 말했다(고전 4:20).

열두 제자들 가운데는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도 포함되었을 것이며 그도 하나님의 능력을 받았고 그것을 행사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진심으로 주를 믿지 않았고 따르지 않았다.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일은 중생한 믿음 없이도 가능한 것 같다. 주께서는 다른 곳에서 말씀하셨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23).

[2절]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어 . . . .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들에게 그런 능력과 권세를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병든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어 보내셨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임무는 두 가지이었다. 첫째는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제자들에게 주어진 일차적 임무, 곧 사명이었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에서 ‘나라’(바실레이아)는 왕국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나라는 민주국가가 아니다. 흔히, 민주국가는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가라고 표현된다. 민주국가는 주권이 국민에게 있어서 국민에 의해 다스려지며 국민의 행복을 추구하는 국가이다. 이런 개념은 국민을 자존적 존재처럼 가정하는 맛이 있다.

그러나 인간은 자존적(自存的) 존재가 아니고 의존적 존재이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심으로 존재케 되었고 부모가 낳음으로 출생되었다. 인간은 이웃과 함께 살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여기에 민주국가의 관념 속에 근본적으로 부족한 점이 있다.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존재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왕이시며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신정(神政) 국가이다. 그 나라의 궁극적 목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지극히 지혜로우시고 의로우시고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물론 그의 백성의 참된 행복을 위하여 섭리하신다.

사람은 창조주 하나님의 통치권을 인정하고 복종함으로 그 나라에 참여한다. 세상이 하나님의 창조하신 세계임에도 불구하고 죄를 지음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이 되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과 정반대로 불경건하고 우상숭배적이고 부도덕하고 음란한 자들이 되었다. 세상은 사탄과 악령들의 활동하는 곳이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은 사람들이 창조주와 섭리자이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에게로 돌아와 그 앞에 겸손히 순종하며 그의 뜻을 행하라고 선포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두 번째 임무는 병자들을 고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나라의 선포, 회개와 구원이 일차적으로 중요하지만, 몸의 건강도 중요하다. 사람은 영육으로 구성된 존재이며 영육으로 건강해야 행복할 수 있다. 사람의 영은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으로 새 생명을 얻고 성경말씀을 양식 삼아 힘을 얻지만, 몸은 병들지 않고 건강해야 일도 잘 할 수 있다. 가난한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병자들을 돌보아 주는 것은 영혼 구원 다음으로 중요하다.

[3절] 이르시되 여행을 위하여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 지팡이나 . . . .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또 말씀하셨다. “[그러나] 여행을 위하여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 지팡이나 주머니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라.” 그는 그들이 가지지 말아야 할 것들을 몇 가지 열거하셨다. 첫째는 지팡이이다. ‘지팡이’라는 원어(랍도스)는 길 갈 때 의지하는 지팡이와 자기 몸을 방어하는 데 쓰는 호신용 막대기를 포함하는 것 같다. 둘째는 주머니이다. 그것은 물건들을 집어넣을 수 있는 가죽 가방이나 지갑을 가리킨다. 셋째는 양식이며, 넷째는 돈이며, 다섯째는 두 벌 옷이다. 그러나 그가 후에 전대나 주머니 등을 허용하신 것을 보면(눅 22:35-36), 전도자가 평생 그런 것을 가지지 말라는 뜻은 아니라고 본다. 그것은 단지 전도자가 세상 염려나 세상의 물질 생활에 얽매이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4절]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거기서 유하다가 거기서 떠나라.

예수께서는 또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거기서 유하다가 거기서 떠나라”고 말씀하셨다. 전도자는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거기서 만족하며 활동해야지 더 나은 집을 찾아 옮겨 다니지 말아야 한다. 물질적, 환경적 조건을 찾아다니는 자는 전도자답지 못하다. 세상에서도 직장인이 가능하면 한 직장에 오래 근무하는 것을 미덕으로 생각한다. 대우가 더 좋은 곳을 찾아 옮겨다니면 그의 인격에 흠이 될 수 있다. 세상일도 한 우물을 파는 것이 일반적으로 좋다. 전도자는 더더욱 그렇다. 세상의 것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나선 자가 세상의 조건에 마음을 쓴다면 중심이 잘못된 것이다. 그러므로 전도자는 언제 어디서나 자족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5-6절]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거든 그 성에서 떠날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거든 그 성에서 떠날 때에 너희 발에서 먼지를 떨어 버려 저희에게 증거를 삼으라.” 제자들은 나가서 각 마을에 두루 행하여 처처에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쳤다. 세상에는 하나님의 복음을 거절하는 자들이 있다. 전도자는 그런 곳에 오래 머물 필요가 없다. 또 다른 곳에 복음을 전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도자는 여러 곳에 두루 행하며 복음을 전해야 한다. 전도자는 그를 영접지 않는 곳을 떠날 때 그의 발에서 먼지를 떨어버림으로 그들에게 증거를 삼아야 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복음에 제시된 구원의 복이 그들과 상관없다는 것을 생생하게 증거하는 행위일 것이다.

1절로 6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얻는다. 첫째로, 교회의 사명은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통치하시고 백성들이 그에게 순종하는 나라이다. 하나님의 나라에 인생의 행복과 소망이 있다. 교회의 사명은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세상 끝까지 전파하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사명이었고 그가 제자들에게 명하신 일이었고 제자들이 행한 일이었다. 우리는 이 사명을 위해 마음과 힘과 정성을 다 모으며 다 바쳐야 한다. 가난한 자들과 병환자들을 돌보는 일은 단지 교회의 부수적인 일일 뿐이다.

둘째로, 교회는 세상일에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 전도자들은 물론이고 일반 신도들도 하나님의 주신 세계 전도라는 큰 사명을 위해 세상일을 작게 여겨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세상에서 먹을것과 마실 것, 그리고 입을 것과 거처할 곳을 주실 것이며 성도는 그것으로 만족하며 살아야 한다. 성경은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고 말한다(딤전 6:7-8).

7-9절, 헤롯의 당황함

[7-9절] 분봉왕 헤롯이 이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당황하여 하니 . . . .

분봉왕 헤롯은 [그의 행하신]46) 이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당황해 하였다. 왜냐하면 어떤 이는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도 하며 어떤 이는 엘리야가 나타났다고도 하며 어떤 이는 옛 선지자 하나가 다시 살아났다고도 하였기 때문이다. 헤롯은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거늘 이제 이런 일이 들리니 이 사람이 누군고?” 말하면서 그를 보고자 하였다. 사람에게는 양심이 있기 때문에 죄를 짓고는 편안할 수 없다. 잠언에는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니라”고 말했다(잠 28:1).

10-17절, 5병 2어(五餠二魚)의 기적

[10-11절] 사도들이 돌아와 자기들의 모든 행한 것을 예수께 . . . .

사도들이 돌아와 자기들의 행한 모든 일을 그에게 고하자 예수께서는 그들을 데리시고 따로 벳새다라는 고을로[벳새다라고 불리는 성에 속한 한 한적한 곳으로](전통본문)47) 떠나 가셨다. 그가 그들을 따로 한적한 곳으로 데리고 가신 것은 그들에게 쉴 시간을 주기 위함이셨을 것이다. 사람에게는 휴식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무리들은 그것을 알고 그를 따라왔다. 그들의 열심은 대단하였다. 하나님께서 은혜와 부흥을 주시면, 사람들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해 간절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내버려두시면 사람들의 마음은 냉냉하고 거칠고 반항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심히 어둡고 무디어 있다. 구원은 하나님의 긍휼 안에 있고 교회의 부흥도 하나님의 긍휼의 손 안에 있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영접하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야기하시며 병 고칠 자들은 고치시셨다. 그에게는 영혼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있으셨다. 그는 모여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이야기하셨다. 세상 나라는 죄악되며 장차 심판을 받아 멸망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한 나라를 세우실 것이며 그 나라는 영원하며 영원히 멸망치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류의 소망과 기대이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육신의 병들도 고쳐주셨다. 세상에 사는 동안 육신의 건강도 필요하다. 천국에는 병도, 고통도, 죽음도 없을 것이다. 천국에서 우리는 영육으로 건강하게 영생할 것이다. 하나님은 그 나라를 우리에게 약속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에게 가장 복된 소망이다.

[12-17절] 날이 저물어 가매 열두 사도가 나아와 여짜오되 무리를 보내어 두루 마을과 촌으로 가서 유하며 먹을 것을 얻게 하소서. . . .

날이 저물어 가자 열두 사도가 나아와 말하였다. “무리를 보내어 두루 마을과 촌으로 가서 유하며 먹을 것을 얻게 하소서. 우리 있는 여기가 빈들이니이다.” 이것은 갈릴리 호수 부근 벳새다 들판에서 어느 날 날이 저물어 가는 시간에 일어났던 일이었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그들은 말하였다. “우리에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으니 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먹을 것을 사지 아니하고는 할 수 없삽나이다.” 요한복음의 증언에 의하면, 그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도 한 아이가 가지고 있었던 것이었다(요 6:9). 남자가 한 오천 명이나 되었기 때문에 그 작은 떡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게 보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떼를 지어 한 오십 명씩 앉히라.” 제자들이 무리를 오십명씩 질서정연하게 앉혔다. 그러므로 무리의 숫자는 대략적으로 파악될 수 있었다. 예수께서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 앞에 놓게 하셨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저녁에 거기에 있었던 모든 사람이 다 배불리 먹었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나 거두었다. 떡을 먹은 사람들이 남자만 약 5천명이었으니, 여자와 아이들까지 합하면 만 명 이상은 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기적이었다. 이것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다. 이 기적은 사복음서들에 다 기록되어 있다. 두 말할 것 없이, 이 사건은 예수님의 다른 모든 기적 사건들과 더불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되심, 즉 그의 신적 인격과 메시아 사역을 증거한다. 유대인 예수님, 그는 단순히 한 인간이 아니셨고 참된 신성(神性)을 가진 인간이셨다.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의 능력을 믿고 의지하자. 하나님의 나라는 단지 말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에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품 안에 사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능력과 권세를 입혀 주셨고, 친히 떡 기적을 통해 자신의 신성을 증거하셨다. 그는 우리의 필요한 것들을 채워주실 수 있는 능력자이심을 증거하신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놀라운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산다면 무엇이 걱정이며 염려이겠는가? 주께서는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1-33). 사도 바울도 간증하기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하였다(빌 4:11-13). 주 예수 그리스도만 믿고 의지하자.

18-27절, 주님을 따라가는 길

[18-20절] 예수께서 따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이 주와 함께 . . . .

예수께서 따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이 주와 함께 있었다. 그는 그들에게 물으셨다.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들은 대답하였다. “[어떤 이는]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라 더러는 옛 선지자 중의 하나가 살아났다 하나이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 세계적 종교의 창시자나 역사상 뛰어난 선생 정도의 심히 부분적인 견해들을 가지고 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셨다. 그때 베드로는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대답하였다. 그것은 예수님에 대한 바른 견해이었다. ‘하나님의 그리스도’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혹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그리스도라는 뜻이라고 본다. 그것은 아마 신성(神性)을 가진, 즉 신적 본질을 가진 그리스도라는 뜻을 포함할지도 모른다. 그리스도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으로 구약성경에 예언된 자이시다(단 9:24-26).

[21절] 경계하사 이 말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명하시고.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심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명령하셨다. 그 이유는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메시아가 오시면 이스라엘 나라를 로마 제국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키고 또 물질적 가난과 궁핍으로부터 건져내어 줄 것을 기대했던 것 같다. 그러나 메시아의 사명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물론 궁극적으로 메시아 왕국은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풍요함을 가질 것이지만, 그는 정치와 경제의 문제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실 것이다. 그것은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는 것이다. 메시아는 사람들을 죄로부터 건져 주시는 구주로 오셨다. 사람들에게 이런 메시아의 사명을 이해시키는 데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22절] 가라사대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 . . .

예수께서는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3일에 살아나야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에 대해 말씀하셨다. ‘인자’(人子)라는 명칭은 그의 인성(人性)을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신성(神性)으로는 하나님 아버지와 동일한 본질이시며 동등되시지만, 인성으로는 우리와 동일한 본질이시다.

예수께서는 평안을 누리고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취하실 자로 이 세상에 오시지 않았고 많은 고난을 받으실 고난의 종으로 오셨다(사 53장). 그는 부패된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버린 바 되시고 죽임을 당하실 것이다. 부패된 교회는 하나님을 대적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임을 당한 지 3일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이다. 그는 자신의 부활을 예언하셨다. 만일 그가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그는 거짓 예언자일 것이며, 하나님의 그리스도가 아니고 사람들을 속이는 자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과연 자신이 예언한 대로 부활하셨다!

[23절]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 . . .

그는 또 무리에게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주를 믿고 따르고자 하는 모든 신자에게 적용된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첫째로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의 생각과 인생관과 가치관을 부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자신이 본래 갖고 있었던 생각과 인생관과 가치관은 허무하고 죄악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고 올바르지 못한 것들이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둘째로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이다. ‘날마다’라는 말은 ‘꾸준히, 변함 없이’라는 뜻이며 ‘제 십자가를 지고’라는 말은 각자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십자가를 끝까지, 즉 죽기까지 지고 가야 함을 보인다.

[24절] [이는]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이는]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해[혹은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구원할 것임이니라](원문).” 우리가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라야 할 이유는 우리가 육신의 목숨만을 위해 산다면 결국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릴 것이지만, 우리가 주를 위해 육신의 목숨을 잃는다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 때문에’라는 말은 그를 믿는 믿음 때문에라는 뜻이다.

주께서는 두 종류의 생명에 대해 말씀하신다. 하나는 육신의 목숨이고, 다른 하나는 영원한 생명이다. 육신적 생명만을 위해 살려고 하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릴 것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육신의 생명을 잃어버린다면 그는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자가 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친히 고난과 죽음을 거쳐 부활하셨다. 이제 고난과 죽음과 부활은 그를 믿는 제자들 모두의 삶의 과정이다.

[25절] [이는]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이는]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유익할까 함이니라](원문).” 우리가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할 이유는 영생의 가치가 크기 때문이다. 사람이 온 천하를 얻었다 해도 자기의 영혼이 지옥에 던지운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인간이 영생을 얻는 것은 참으로 가치 있는 일이다.

[26절] [이는]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이는]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부끄러워할 것임이니라](원문).” 본문은 계속해서 사람이 자기를 부정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는 길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임을 강조하신 것이다. 인성을 가지신 예수께서는 성경에 예언된 대로 그리고 만국 교회가 믿고 소망하는 대로 눈으로 볼 수 있게, 또 심판주로서 많은 천사들과 함께 영광스럽게 다시 오실 것이다. 그때 예수님과 그의 말씀을 부끄러워하던 자들은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다. 주께서는 그들을 인정치 않으시고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의 수에서 제외하실 것이다.

[27절]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 이 말씀은 다음에 나오는 변화산 사건을 가리킨다고 본다. 그 사건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을 미리 맛보게 하신 사건이라고 본다.

18절부터 27절까지의 말씀에서 우리는 몇 가지 진리를 정리해 본다. 첫째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보내주신 신적 구주이시다. 그 증거는 성경이 증거하는 대로 그의 기적들과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하심이다.

둘째로, 주님을 따르는 길은 자기를 부정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그를 따르는 것이다. 그것은 고난과 죽음을 각오하며 바른 믿음을 지키고 자기의 직무를 다하며 하나님 앞에 충성하는 길이다.

셋째로, 주님을 따르는 길은 영원한 생명의 길이다. 예수께서 고난을 당하셨고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셨으나 삼일 만에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자신을 부정하고 날마다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면 영원한 생명에 이를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이 아니고, 영생에 이르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영생에 이르는 자마다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것이다.

28-36절, 용모가 영화롭게 변화되심

[28-31절] 이 말씀을 하신 후 8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 . . .

이 말씀을 하신 후 8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셔서 기도하실 때에 그의 용모가 변화되고 그의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났다. 그의 얼굴은 영광스러운 얼굴이 되었고 그의 옷도 희고 광채가 나는 옷으로 변화되었다. 흰색은 성결함을 나타내고 그 광채는 그의 영광을 나타낸다. 그것은 그의 인격의 성결함과 그의 신성(神性)의 영광이다.

그때 문득 두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말하는데 모세와 엘리야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환상 중에 모세와 엘리야를 보게 하셨다. 그것은 세 제자들로 하여금 모세와 엘리야가 살아 있으며 천국에서 영광을 누리고 있음을 잠시 동안이라도 보게 하였다.

모세와 엘리야는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에 대해 말하였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예수님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 성경 전체가 증거하는 대로, 그것은 하나님의 택한 자들을 대속(代贖)하기 위한 죽임이었기 때문이다.

[32-33절]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곤하여 졸다가 아주 . . . .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은 곤하여 졸다가 아주 깨어 예수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았다. 그 두 사람이 떠날 때 베드로는 예수께 말했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그는 주의 영광을 보는 것이 너무 좋아서 자기의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며 이런 말을 했다.

[34-36절] 이 말 할 즈음에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는지라. . . .

이 말 할 즈음에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었다. 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에 그들이 무서워하였는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났다.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니]48)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소리가 그치자 오직 예수님만 보였다. 제자들은 잠잠하여 그 본 것을 무엇이든지 그때에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후에 베드로는 그의 서신에서 이 사건에 대해 말했다(벧후 1:16-18).

구름 속에서 들린 음성은 하나님의 친 음성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친 음성으로 예수님에 대해 증거해주셨다. 그의 친 음성의 증거는 예수님에 대한 그 어떤 증거보다 더 확실하고 시원한 증거이다. 그 증거의 내용은 첫째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시라는 것이며, 둘째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안다면 마땅히 그러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해야 할 뿐 아니라, 또한 그의 보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에 순종해야 한다.

28절로 36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의 진리를 본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세 제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친히 보여 주셨다. 이것은 제자들에게 믿음의 견고함과 위로와 격려를 주시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이 경험을 통해 예수님을 더욱 알게 되었을 것이다.

둘째로, 예수님의 죽음은 그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다. 영광 중에 나타난 모세와 엘리야의 대화 주제는 바로 그것이었다. 예수께서는 죽기 위해 오셨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악를 대속하셨다. 그의 부활은 십자가의 죽음 후에 올 것이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친 음성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해주셨다. 그 내용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시라는 것과 우리가 그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친 음성으로 확실하고 시원하게 증거해주셨다. 우리는 그 증거를 통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신하고 그를 따르며 그의 모든 말씀에 복종하자!

37-45절,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심

[37-39절] 이튿날 산에서 내려오시니 큰 무리가 맞을새 . . . .

이튿날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니 큰 무리가 맞았다.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소리질렀다. “선생님, 청컨대 내 아들을 돌아보아 주옵소서. 이는 내 외아들이니이다.”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의 경우나 회당장 야이로의 외딸의 경우처럼, 이 경우에도 어떤 사람에게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 그에게 가장 소중한 것에게 불행의 일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에게 불행을 주심으로써 세상의 헛됨을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신다.

그 아버지는 말하였다. “귀신이 저를 잡아 졸지에 부르짖게 하고 경련을 일으켜 거품을 흘리게 하며 심히 상하게 하고야 겨우 떠나가나이다.” 마태복음은 그 아이의 병을 간질이라고 말하였다. 성경은 자주 질병과 악령의 관련성을 말한다. 이 간질병은 악령의 활동이었다. 악령은 그 아이 속에서 활동하며 소리를 치며 부르짖고 거품을 흘리며 경련을 일으키고 그 몸을 심히 상하게 만들었다. 마태복음은 그가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졌다고 말한다(마 17:15).

[40-41절] 당신의 제자들에게 내어쫓아 주기를 구하였으나 . . . .

그 아버지는 말했다. “당신의 제자들에게 내어쫓아 주기를 구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못하더이다.” 예수께서는 대답하셨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를 참으리요. 네 아들을 이리로 데리고 오라.” 제자들은 그 아이의 병을 고쳐주지 못했다. 제자들도 병을 고치며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를 받았지만 이 아이의 병은 고치지 못했다.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믿음이 적기 때문에 못했다고 말씀하셨다(마 17:20). 귀신의 활동도 정도의 차이가 있고 병을 고치는 권세에도 그러했다. 일반 사람들도, 제자들도 믿음이 없었다.

[42-45절] 올 때에 귀신이 거꾸러뜨리고 심한 경련을 일으키게 . . . .

그 아버지가 아이를 예수께 데려올 때에 귀신은 그를 거꾸러뜨리고 심한 경련을 일으키게 하였다. 예수께서는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시고 아이를 낫게 하셨다. 귀신은 더러운 영이다. 귀신은 범죄하여 타락한 천사이다. 그것은 음란하고 속이고 사악한 영이다. 예수께서는 그 아이를 그의 아버지에게 도로 주셨다. 사람들은 다 하나님의 위엄에 놀랐고 그의 행하시는 모든 일을 기이히 여겼다. 예수께서는 그의 신성의 영광을 다시 한번 나타내셨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두라.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우리라.” 주께서는 자신의 고난과 죽음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것이 그가 이 세상에 오신 이유이었고 이 세상에서 하실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 말씀을 알지 못하였다. 그것은 그들이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하도록 숨김이 되었기 때문이다. 또 그들은 이 말씀을 묻기도 두려워하였다.

37절로 45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의 교훈을 얻는다. 첫째로, 우리는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한 번 더 확인한다. 귀신 들린 외아들을 고쳐주신 이 사건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한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육의 건강을 주신다. 사람은 범죄한 이후, 육신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병든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구주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 육신적 질병들과 정신적 질병들을 다 고쳐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육의 건강을 주실 수 있다.

셋째로, 우리는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을 생각하고 그를 따라가야 한다. 예수님은 친히 고난의 길을 가셨다. 그의 사도들도 고난의 삶을 살았다.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을 부정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를 따르라고 교훈하셨다. 신앙생활은 현세와 내세에서 영육의 복을 받아누리는 삶일 뿐 아니라, 현세에서 고난도 받는 삶이다(빌 1:29).

46-48절, 누가 더 크냐?

[46-48절]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나니 . . . .

제자들 가운데서 누가 더 크냐는 변론이 일어났다. 그런 경쟁심은 인간의 뿌리깊은 죄악성인 교만과 명예심에서 나온 것이며, 그것은 결국 자기를 사랑하며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다. 사람은 이런 것들 때문에 남을 시기하고 다툰다. 그것은 우리를 위해 자신을 주시기 위해 종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는 너무 다르다. 주님과 함께 지내며 많은 말씀들의 가르침을 받았지만, 아직 제자들 속에는 죄성이 그대로 있고 아직 주님을 본받는 제자 되기에 부족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마음에 변론하는 것을 아셨다. 그들이 말로 다 표현하지 않았을지라도 그는 그들의 마음의 욕심과 복잡함을 아셨다. 그는 사람의 중심을 다 아신다(요 2:24). 그는 제자들의 문제점을 고쳐주기를 원하셨다. 그는 그것을 위해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 어린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이는]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 이가 큰 자니라[큰 자임이니라](원문).”

‘내 이름으로’라는 원어(에피 토 오노마티 무)는 ‘내 이름에 근거하여’라는 뜻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어떤 어린아이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영접하든지, 혹은 그 어린아이가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를 영접하는 것은, 우리가 곧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며, 또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면 그를 보내신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 가운데 자신을 낮추고 작은 일 하나를 즐거이 감당하는 그 사람이 큰 자이다. 모든 종류의 명예심과 욕심을 버리고 오직 겸손히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며 그의 이름으로 이웃을 돌아보는 자는 큰 자로 인정을 받을 것이다.

49-50절, 금하지 말라

[49절] 요한이 여짜오되 주여,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 . . .

요한이 말했다. “주여,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보아너게 곧 우뢰의 아들이라는 별명이 있었던(막 3:17) 요한은 성격이 급했던 것 같다. 사도 시대에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쫓는 일들이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가 자기들과 함께 따르지 않기 때문에 그의 행위를 금지하였다. 어떤 이유로 그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쫓게 되었는지, 또 왜 그가 그러면서도 예수님과 제자들을 따르지는 않았는지 알 수 없지만, 제자들이 그의 행위를 금지할 권한은 없었다. 그가 비록 제자들을 따르지 않는다 해도, 제자들이 그를 제재할 권한은 없었다. 만일 그들이 그에게 자기들을 따르라고 강요한다면, 그들은 종파주의적 마음을 가진 자들이 될 것이다.

[50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 . . .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금하지 말라. [이는]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자임이니라](원문).” 전통본문에는 “우리를49)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50) 위하는 자니라”고 되어 있다. 여기에 관용의 정신이 있다. 물론 관용에는 한계선이 있다. 그것은 ‘예수님의 이름 안에서’라는 한계선이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을 가진 자들을 향해 ‘우리 교회에만 속해야 한다’는 종파주의적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을 향해 관용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51-56절, 사마리아인들이 받아들이지 않음

[51-53절]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 가매 예루살렘을 . . . .

예수께서는 승천하실 기약[그의 승천의 날들]이 차 가므로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사자들을 앞서 보내셨다.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셨다’는 표현은 그의 인간적 모습을 잘 나타낸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셔야 했다. 죽음의 길을 향해 기꺼이 나아갈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인간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의 시간이 가까워 올수록 긴장되셨을 것이지만, 아버지의 뜻을 따라 굳게 결심하며 그 길을 가셨다.

그들은 가서 예수님을 위해 예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마을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 것을 알고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그들을 반쯤 이방인으로 여기며 낮추어 보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사마리아인들의 육신적 혈통이나 종교는 순수하지 못하고 혼합되어 있었다.

[54절]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가로되 주여, 우리가 . . . .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말했다.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 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전통본문에는 ‘주여’라는 말 다음에 ‘엘리야도 했듯이’라는 말이 들어 있다.51) 열왕기하 1장에 보면, 엘리야 선지자는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자기를 잡으러 보낸 50명의 사람들을 저주하므로 두 차례나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 그들을 멸하게 하였다. 야고보와 요한은 엘리야의 일을 기억하면서,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하여 그들을 멸하는 것이 어떻겠는가고 주님께 물은 것이다.

[55-56절]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함께 다른 촌으로 . . . .

예수께서는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함께 다른 촌으로 가셨다. 어떤 사본들과 역본들에는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무슨 정신으로 말하는지 모르는도다. 이는 인자가 사람의 생명을 멸하러 온 것이 아니요 구원하러 왔음이니라”는 말이 있다.52) 주께서는 악한 자를 대적지 말고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셨다(마 5:39, 44).

46절로 56절까지의 말씀은 겸손과 관용과 온유를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그것은 자기를 부정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그의 교훈에 첨가될 덕목이다. 겸손과 관용과 온유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이다(마 11:29). 주의 제자된 우리는 명예심, 경쟁심, 교만, 좁은 마음, 보복심 등을 다 버리고 주께서 가르치신 겸손과 관용과 온유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57-62절, 고난 각오, 가족 관계 초월

[57-58절] 길 가실 때에 혹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 . . .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말했다. “[주여]53)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그것은 귀한 결심이며 고백이다. 그것은 ‘주의 인도하심 따라, 어디든지 주를 따라, 주와 같이 가려네’라는 찬송가 가사와 같은 고백이다. 이것은 주를 진실히 믿고 따르는 자들만이 할 수 있는 고백일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예수께서는 그 사람을 격려하는 대신 매우 부담되는 말씀을 하셨다. 그것은, 보잘것없는 들짐승이나 날짐승도 거처가 있지만, 예수님은 안정된 거처가 없다는 말씀이다. 주께서는 세상에서 자신이 소유한 집이 없으셨다. 그는 전도 활동의 마지막 때에 제자들과 함께 가진 유월절 식사도 어떤 사람의 다락방에서 하셨고 그 밤의 휴식도 감람산에서 하셨다. 주님의 전도 사역에는 물질적 안정이 없었다. 주를 따르는 자들은 주의 가신 길을 따라갈 각오를 해야 한다. 그러나 어디든지 주를 따르겠다고 말한 그 사람은 이런 각오가 없었던 것 같다. 우리가 참으로 예수님을 따르려면, 우리는 자신을 부정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또 가난과 고난과 비천함을 각오하며 따라야 한다.

[59-60절]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가 가로되 . . . .

예수께서는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시자, 그는 말했다. “[주여]54)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두 번째 사람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했고 주를 따르겠다는 뜻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먼저 가서 그의 부친을 장사하도록 허락해 주기를 예수께 구했다. 그의 요청은, 그의 부친이 아직 돌아가지 않으셨다면 돌아가실 때까지 그를 보살피겠다는 의미이든지 혹은 그의 부친이 돌아가셨다면 그 장례식의 지루한 미신적 행위들, 예를 들어, 7일 애곡이나 1년간의 애도 등을 포함할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그의 요청은 하나님의 일보다 세상에서 해야 할 인간의 도리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그의 생각을 나타내었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처음의 ‘죽은 자들’이라는 말은 영적으로 죽은 자들 곧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죄 가운데 사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두 번째의 ‘죽은 자들’이라는 말은 육신적으로 죽은 자들 곧 장례를 행해야 할 대상자들을 가리킨다. 부모를 공경하며 그들이 돌아가셨을 때 장례를 잘 행하는 것은 자식으로서 당연한 도리이다. 단지, 주의 말씀은 더 높은 명령, 더 크고 더 중요하고 더 급한 일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구약에 대제사장에게 명한 말씀과 비슷하다(레 21:10-11). 그는 부모로 인하여도 더러워지게 말고 성소에서 나오지 말아야 했다.

주께서는 전임사역자인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는 임무를 주셨다. 그것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명령이며 세상의 그 어떤 일보다도 더 크고 더 중요하고 더 긴급한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전도의 일이 세상의 일 때문에, 심지어 가족관계의 기본적인 일 때문에라도 방해받지 않고 지장되지 않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일이 세상의 모든 일들 가운데서 가장 우선적으로 수행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61-62절] 또 다른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가 주를 . . . .

또 다른 사람이 말하였다.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이 사람도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했고 그를 따르겠다고 말했다. 그것도 귀한 결심이며 고백이었으나, 그는 ‘먼저’ 자기 가족들과 작별하도록 허락해 달라고 주께 요청하였다. 사람이 자기 가족들과 작별하는 것은 매우 당연한 절차일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도 주님의 대답을 보면 그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우선순위의 혼란이 문제이었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그는 그 사람의 마음의 혼란을 보고 계셨다. 그는 밭가는 자가 앞을 바라보며 밭을 갈아야 할 것이라는 비유를 말씀하셨다. 만일 밭가는 자가 밭을 갈면서 자꾸 뒤를 돌아보면 이랑이 비뚤어지고 말 것이다. 손에 쟁기를 잡았다는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맡았다는 뜻이다. 뒤를 돌아보는 것은 세상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나라의 일꾼으로 부름을 받았으면서도 세상의 일에 대해 염려하고 걱정하고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않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는 옛날 롯의 아내와 같다. 롯의 아내가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뒤를 돌아본 것은 세상 애착을 끊어버리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뒤를 돌아보았기 때문에 소금기둥이 되었다(창 19:26). 복음의 일꾼들이 세상의 애착을 끊어버리지 못하면 천국의 직무에 지장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로부터 교회의 직분을 맡은 자들은 그것을 가장 크게 여기고 그 직분에 지장되지 않도록 처신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 세상 염려나 세상 애착 때문에 직분을 다하지 못하는 자는 천국에 합당치 않다.

본문은 먼저 직분자들에게 적용될 것이다. 그들은 일반 신자들보다 더욱 주께서 가신 길을 따라야 한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세상일보다 하나님 나라 일을 더 크고 가치 있게 여기며 주를 따라야 한다.

우리는 특히 주님을 믿고 따를 때 가난과 경제적 불안정과 비난받음을 각오해야 한다. 우리는 단순히 세상에서의 평안을 위해 하나님을 섬기며 주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영원한 생명과 평안을 위해 주님을 믿고 따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에서 가난과 비천함과 고난을 싫어하지 않고 참고 감당하자.

또 직분자들은 가족관계의 기본적인 일들까지도 초월하고 하나님의 일에 전심전력해야 한다. 그것은 가족관계를 무시하거나 경시하라는 뜻이 아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은 하나님의 명령이며 그의 뜻이다(출 20:12; 딤전 5:8). 그러나 복음을 전파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세상의 그 어떤 일보다 더 크고 중요하고 긴급한 일이기 때문에, 복음의 일꾼들과 교회의 직분자들은 세상일 때문에, 심지어 가족관계 때문에 그 일이 지장이나 방해를 받아서는 안 될 것이다.

 

10장: 70인 전도자들을 보내심

1-16절, 70인 전도자들을 보내심

[1-2절] 이 후에 주께서 달리 70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 . . .

이 후에 주께서는 12사도들 외에 또 70인55)을 세우셔서 친히 가시려는 각 동네, 각 처소로 둘씩 앞서 보내셨다. 전도자들을 둘씩 보내신 것은 그들이 확실한 증언으로 증거하고, 또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혹은 권면의 말로 붙들어주게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주께서는 말씀하셨다.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그는 전도를 추수에 비유하셨다. 씨는 이미 뿌려졌다. 유대인들에게는 선지자들에 의해 뿌려졌다. 씨가 심겨지고 자라 추수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였다. 추수할 것, 즉 구원얻을 영혼들이 많다. 그러나 일꾼이 적다. 그러므로 그는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 즉 전도자들을 많이 보내어 주소서 하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추수하는 주인이시다. 그는 천국 백성의 씨를 뿌리게 하셨고 그것을 자라게 하셨고 또 그것을 추수하게 하신다. 오늘날은 세상의 종말이 더 가까우므로, 전도자들이 더 많이 필요하다. 100년 전에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해주었던 서양 선교사들처럼, 우리도 주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해주어야 한다.

[3절]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양을 이리 가운데로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는 3절 이하에서 전도자들의 위험과 고난을 암시하시면서 그들의 임무에 대해 말씀하신다.

첫째로, 전도자들은 가야 한다. 주 예수께서 하늘의 영광의 세계를 떠나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처럼, 전도자들은 복음이 필요한 곳으로 가야 한다(마 28:19; 막 16:15).

둘째로, 전도자들은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 전도자들은 어린양이 이리 가운데 보내짐같이 이 거칠고 악한 세상으로 보내진다. 세상에는 이리 같은 악한 자들과 핍박자들이 많다. 그러므로 전도자들은 고난과 죽음을 각오하며 이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4절] 전대나 주머니나 신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 . . .

셋째로, 전도자들은 물질적 염려를 버려야 한다. 주께서는 “전대나 주머니나 신을 가지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전대나 주머니나 신’ 등은 생활 문제에 대한 염려 즉 물질적 염려를 의미한다. 그런 염려는 우리를 전도자로 부르시고 보내시는 주님께 다 맡겨야 한다.

넷째로, 전도자들은 오직 자기 임무만 생각해야 한다. 주께서는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목적지에 이르기 전에 다른 일에 관여하지 말고, 오직 자기에게 부여된 전도만 생각하고 그 일에 충실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본다.

[5-7절]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 . . .

다섯째로, 전도자들은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그 집의 평안을 기원해야 한다. 주께서는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 빈 평안이 그에게 머물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고 말씀하셨다. 모든 사람에게 평안을 기원할지라도, 하나님의 평안은 평안을 받을 만한 자들에게만 임한다.

여섯째로, 전도자들은 한 집에 유하며 다른 곳으로 옮겨다니지 말아야 한다. 주께서는 “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일꾼이 그 삯을 얻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전도자들은 더 나은 조건을 찾아 이동하지 말아야 한다. 전도자들은 복음을 위해 고난을 자청한 자들이다. 그들은 환경과 조건에 대해서는 초월하는 태도를 가지고 일해야 한다.

[8-12절]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하거든 너희 . . . .

일곱째로, 전도자들은 어떤 동네에 가든지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해야 한다. 주께서는 말씀하셨다.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 놓는 것을 먹고 거기 있는 병자들을 고치고 또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하라.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거든 그 거리로 나와서 말하되 너희 동네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도 너희에게 떨어버리노라.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하라.”

‘하나님의 나라’는 전도자들이 전해야 할 내용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전파하신 주제이며 성경의 대주제이다. 그것은 죄인들의 현재의 구원의 문제이며 구원받은 자들의 장래의 영광, 곧 부활과 천국에서의 영광스런 영생의 문제이다.

그러나 전도에 대해서는 두 가지 반응이 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영접할 것이지만, 다른 이들은 거절할 것이다. 예수님 당시에도, 오늘날에도 그러할 것이다. 하나님의 복음이 전파될 때 사람들은 두 가지 반응으로 나뉜다. 그것을 영접하고 믿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그것을 영접하지 않고 믿지 않는 자들이 있다.

주께서는 전도자들이 전한 복음을 거절한 자들에 대해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 날에 소돔이 그 동네보다 견디기 쉬우리라”고 말씀하셨다. 마지막 날 악인들이 부활하여 심판을 받을 때, 복음을 거절한 자들은 소돔 사람들보다 더 큰 벌을 받을 것이다.

[13-15절]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 . .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심판 때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고라신과 벳새다 사람들은 기적들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았고 믿지 않았다. 그러므로 심판의 날에 고라신과 벳새다 사람들은 두로와 시돈 사람들도 더 큰 벌을 받을 것이다. 기적 체험과 믿음은 별개의 문제이다.

예수께서는 또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고 말씀하셨다. 가버나움 사람들도 천국에 갈 것같이 생각했으나, 지옥의 형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회개치 않는 자는 지옥의 형벌을 피할 수 없다.

[16절]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 . . .

예수께서는 또,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셨다. 전도자들의 말을 듣는 자는 곧 주님의 말씀을 듣는 자요, 그들을 저버리는 자는 곧 주님을 저버리는 자이며 그를 보내신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이다. 여기에 구원과 심판의 갈림길이 있다.

1절로 16절까지에서 몇 가지 교훈을 얻는다. 첫째로, 우리는 전도자들을 위해 기도하자.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다. 우리는 하나님께 세계복음화의 사명의 완수를 위해 일꾼들을 많이 일으켜 주시기를 구하자. 둘째로, 전도자들은 세상 염려를 버리고 오직 하나님 나라만 전파해야 한다. 그들은 어디에든지 가야 하며 자신의 안일을 구하지 말아야 한다. 셋째로, 전도에는 항상 두 가지 상반된 반응이 있음을 알고 낙심치 말자. 영접하는 자들이 있으나, 영접지 않고 거부하는 자들도 있다. 전도는 영생과 멸망, 천국과 지옥을 나누는 엄숙한 사역이다.

17-20절, 70인 전도인들의 보고

[17-18절] 70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 . . .

70인이56) 기뻐 돌아와 말하였다.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영접했던 것 같고 심지어 귀신들도 그들에게 복종했다. 예수께서 말하셨다. “사탄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사탄은 그때까지 하늘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는 의로운 성도 욥을 비난했었다(욥 1-2장). 그는 선지자 미가야 시대에 거짓 선지자들의 입에 거짓말하는 영을 넣었었다(왕상 22장). 하늘에서 활동하던 사탄과 악령들이 하늘로부터 땅으로 떨어졌다. 요한계시록 12장은 사탄과 그 사자들이 하늘에서 내어쫓겼다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사탄과 악령들을 파하고 지옥갈 죄인들을 구원하는 사역이다. 그것은 전도를 통해 이루어진다. 죄인들은 전도를 통해 회개하고 주 예수께로 돌아와 구원받고 사탄의 권세에서 벗어나 거룩하고 선한 삶을 살다가 천국에 들어간다.

[19절]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주었으니’라는 말은 전통본문에는 ‘주노니’라고 현재시제로 되어 있다.57) 그것은 주께서 주신 권세가 현재 효력이 있음을 나타낸다. ‘뱀들과 전갈들을 밟으며 원수들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는 사탄과 악령들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3:15에서 장차 여인의 후손으로 오실 그리스도께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실 것을 예언하셨었다. 과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실 것이며 이제 사탄과 악령들을 제어할 능력을 그의 제자들에게도 주신다.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는 말씀은 그들의 구원과 영생의 보장을 의미한다고 본다.

[20절]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예수 믿는 자는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다. 이 일은 귀신들을 굴복시키는 것보다 더 기쁘고 복된 일이다.

17절부터 20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진리를 깨닫는다. 첫째로, 우리는 전도를 통해 사탄의 권세 아래 있는 자들을 구원해낸다. 악령들의 권세가 아무리 강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는 그보다 더 크시다. 사람들은 죄와 사탄의 권세 아래 살다가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었으나, 전도를 통해 구원받고 천국 백성이 된다. 전도는 세상에서 이웃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귀하고 복된 일이다.

둘째로, 이 세상에서 구원받은 성도를 해할 자는 아무도 없다.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으로 영생을 얻었다. 이것이 구원이다. 그것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겨지는 것이다. 이 세상의 그 무엇도 성도들에게서 이 영원한 생명을 빼앗을 수 없다. 주께서는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요 10:28).

셋째로, 성도의 기쁨의 이유는 그의 이름이 천국에 기록된 것이다. 죄를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들은 그들의 이름이 천국에 기록된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씻음으로써 가능하다. 그것은 우리의 기쁨의 이유가 된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할 수 있다(빌 4:4; 살전 5:16).

21-24절, 구원 지식의 신비와 복

[21절] 이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 가라사대 천지의 . . . .

이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말씀하셨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그리스도를 알고 구원받고 나아가 전도하며 영혼들을 구원한 사실을 성령으로 기뻐하셨다. 구원은 우리 모두의 기쁨의 이유이다. 주께서는 하나님을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라고 부르셨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신 자이시며 주관하시는 자이시다. 인간의 구원은 그의 뜻에 달려 있다. 물론, 인간이 회개하고 믿어야 하지만, 그 근원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지식을 세상에서 지혜로운 자들에게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셨다. 세상에 지혜로운 자들이 하나님의 구원의 지식을 더 잘 또 더 많이 가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순진한 어린아이 같은 자들이 하나님을 더 잘 믿고 구원을 받는다.

그 당시 유대의 나이 든 정치지도자들과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이려 했지만, 어린아이들은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시는 주님을 영접하며 ‘호산나’ 찬송을 불렀다. 오늘날도 유치부 어린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 잘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우리의 어린 자녀들에게 세상 공부나 노래나 춤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가르쳐야 한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지혜로운 자들에게는 구원의 지식을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시는 것은 사람이 자신의 힘으로 구원얻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얻는다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다. 이것은 세상에 지혜 있는 자가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다. 지혜 있는 자도 자신의 지혜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그대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22절]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주께서는 자신과 하나님 아버지와의 특별한 관계를 증거하셨다. 이것은 그의 신성(神性)을 증거하신 말씀이다. 만일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그는 이런 말씀을 하실 수 없었을 것이다.

주께서는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무도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모든 권한을 아들에게 주셨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구원자로 보냄을 받으셨다. 그러므로 이제 구원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소원에 달렸다. 그가 소원하여 그 심령에 깨달음을 주시는 자는 다 깨닫고 회개하고 믿어 구원을 받을 것이다. 구원의 방법만 제시하고 구원의 결정권을 사람에게 맡겨두신 것이라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지만, 그는 죄인들을 실제로 구원하시는 구주이시다.

[23-24절] 제자들을 돌아보시며 종용히 이르시되 너희의 보는 . . . .

예수께서는 또 제자들을 돌아보시며 조용히[은밀히] 말씀하셨다. “너희의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

제자들이 보고 듣는 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에 보내주신 메시아 곧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들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신 것을 깨닫고 그를 보고 그의 말씀을 듣는 자들은 복이 있다. 구약 시대의 많은 선지자들과 경건한 왕들은 메시아의 오심을 고대하였다. 그런데 그들이 고대하던 그가 오신 것이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인류 역사의 가장 절정적 사건이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죄사함과 부활과 영생이며 영광의 천국에 들어감이다. 그것은 참으로 복 중의 복, 곧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복이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그가 누구신지 알지 못하였듯이, 말씀이 온 세계에 전파되고 있는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아는 것이 구원이다. 그를 알지 못하고서는 아무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

21절로 24절까지의 말씀은 구원 지식의 신비와 복을 증거하고 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지식을 세상에서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셨다. 어린아이는 연령적으로 어린아이들도 되겠지만, 영적으로 어린아이처럼 순진한 자들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것은 아무도 자랑치 못하게 하시기 위함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복음을 어린아이처럼 단순하게 받아들이고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하나님께서는 전도의 미련한 방법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다.

둘째로, 구원의 참 지식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에게 주어진다. 예수님은 구원의 방법만 제시하고 구원의 결정권은 사람에게 맡겨두시는 자가 아니고, 실제로 죄인을 죄에서 구원해내시는 구주이시다. 그는 죄인의 어두운 마음에 깨달음을 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죄를 회개하고 그를 믿게 하신다. 구원은 하나님께 달려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의 구주이시다.

셋째로, 구원의 복은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복이다. 구원은 세상의 불행의 근본적 원인인 죄 문제의 해결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죄씻음받음과 그 결과로 얻는 부활과 영생을 포함한다. 그것은 이 세상의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귀한 복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은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복이다.

25-28절, 영생을 얻는 길

[25절]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 . . .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님을 시험하여 말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사람 속에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심어주신 마음이다(전 3:11). 사람은 이 세상의 삶이 허무하다는 사실을 깊이 통감할수록 더욱 영생을 사모하게 될 것이다. ‘사람이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 이것은 실상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하고 절실한 질문이다.

[26-27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 . . .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그는 대답하였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그 율법사는 율법의 내용을 두 가지로 잘 요약하였다. 그 두 가지 내용은 신명기 6:5과 레위기 19:18에 나와 있고, 과연 그 두 가지는 모든 계명과 율법의 요약이라 할 수 있다. 십계명은 결국 그 두 가지 내용으로 요약될 수 있다.

제1계명은 너는 나 외에 혹은 내 앞에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라는 것이다. 제2계명은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는 것이다. 제3계명은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헛되이, 함부로] 일컫지 말라는 것이다. 제4계명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것이다. 십계명의 제1계명부터 제4계명까지는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요약될 수 있다.

제5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이다. 제6계명은 살인하지 말라는 것이다. 제7계명은 간음하지 말라는 것이다. 제8계명은 도적질하지 말라는 것이다. 제9계명은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것이다. 제10계명은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는 것이다. 제5계명부터 제10계명까지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요약될 수 있다. 결국 그 두 가지는 십계명의 요약이다.

[28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 . .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예수님의 말씀의 뜻은 무엇인가? 그는 율법을 행하는 것이 영생을 얻는 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인가? 그러나 그것은 주님의 본심이 아닌 것이 확실하다. 왜냐하면 성경은 사람이 율법의 행위로 영생을 얻지 못함을 밝히 가르치기 때문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한 하나님이시며 거기에는 사상적, 교훈적 일치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사람이 율법을 다 행하면 그것이 그에게 의(義)와 생명이 된다는 것은 성경의 한 기본 진리이다. 모세는 말하기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대로 너희는 삼가 행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모든 도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삶을 얻고 복을 얻어서 너희의 얻은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고 하였다(신 5:32-33).

그러나 문제는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데 있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율법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지 못하고 오직 자신이 죄악됨을 깨닫는다. 로마서 3:20,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인간은 본성적으로 심히 부패된 존재이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렘 17:9).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없듯이, 악에 익숙한 인생은 선을 행할 수 없다(렘 13:23).

그러므로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는 말씀은 사람이 율법을 행함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 아니고, 오히려 그 사람에게 자신의 죄악됨을 깨닫게 하시는 뜻이 있음이 분명하다. 사람은 율법을 지키고자 할 때 자신의 죄악됨과 무능력함을 더욱 깨닫게 된다. 우리는 율법으로 죄와 하나님의 진노를 깨닫는다(롬 3:20; 4:15).

사람이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 율법 안에 성막 제도와 제사 제도를 주셨다. 그 제도는 죄인들이 장차 오실 메시아의 속죄 사역으로 죄씻음받을 것을 암시하였다. 짐승의 피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상징하고 예표하였다. 그것은 하나님의 긍휼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성도는 제사에서 예표된 메시아를 바라고 의지하며 구원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을 행함으로가 아니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와 영생을 얻는다. 그러므로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는 말씀은 율법을 통해 자신의 죄를 깨닫고 제사에서 암시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원한 생명의 구원을 얻게 하시는 속뜻이 있다고 본다.

물론 이렇게 구원을 얻는 자들은 도덕적 규범으로서 율법을 행해야 한다. 죄의 결과는 죽음이었고 의는 생명이다. 영생을 얻을 자는 이제 죄 가운데 살지 말고 의 가운데 살아야 한다. 율법을 저버리는 자는 죽을 수밖에 없지만, 영생에 이를 자는 율법을 즐거이 지킨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확실히 믿자. 우리는 속죄 신앙에 굳게 서자.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救贖)함이 되셨다. 우리는 그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여기에 영생의 길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의 계명들을 힘써 지키자. 우리는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의 이웃을 우리의 몸과 같이 사랑하자.

29-37절,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29-32절]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 . . .

예수님께 영생의 방법을 질문했던 그 율법사는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또 질문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예수께서는 소위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시며 대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여리고는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3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던 마을로서 예루살렘은 해발 800미터나 되지만 여리고는 해면보다 390미터나 낮은 지역이라고 한다.58) 따라서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은 매우 험하고 종종 강도들이 나타났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거의 죽은 상태로 버리고 갔다.

그때 우연히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 강도 만나 죽게 된 자를 보았다. 그러나 그는 아마 자기도 피해를 당할까봐 두려워서 혹은 자기 일이 바쁘다고 스스로를 합리화시키면서 그를 피하여 지나갔다. 한 레위인도 우연히 그곳에 이르러 그 강도 만난 자를 보았다. 그러나 그도 그를 피하여 지나갔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하는 자들이었지만 그 죽게 된 자를 돌보고 살려주려는 긍휼과 사랑의 마음이 없었다.

[33-35절]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 . . .

어떤 사마리아인이 여행하는 중에 거기 이르렀다. 사마리아 사람은 유대인들이 반쯤 이방인으로 여겨서 상종하지 않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이 사마리아 사람은 자신이 유대인에게 그런 취급을 받는다고 해서 그 강도 만난 유대인을 지나치지 않았다. 그는 그를 불쌍히 여겼다. 사랑은 이웃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다. 그는 그에게 가까이 가서 자기가 가지고 있던 기름과 포도주를 꺼내어 그의 상처에 부었다. 그것은 그 상처를 소독하고 부드럽게 하는 응급조치의 방법이었다. 그는 그의 상처를 싸매고 그를 자기 짐승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또 그는 이튿날 노동자의 이틀 품삯이나 되는 데나리온 둘을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그를 돌보아 주기를 요청하였고 비용이 더 들면 그가 돌아올 때 갚아주겠다고 말했다. 그는 자기 시간과 수고와 물질을 아끼지 않았다.

[36-37절]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 . . .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말씀하신 후 그 율법사에게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질문하셨다. 그의 질문은 이상하게 보인다. 그 율법사는 그에게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라고 질문했었다. 우리 생각에는, 주께서 “네 이웃은 강도 만난 자이니라”고 말씀하실 것 같은데,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은 누구인가?”라고 물으신 것이다.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은 그 사마리아인이라고 율법사는 대답하였고 주께서는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셨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단순히 선행을 교훈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물론 주께서는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선행을 교훈하셨다. 그러나 주의 말씀에 그 강도 만난 자는 바로 우리 자신 곧 온 인류이며, 그 사마리아인은 바로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 것 같다.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사마리아인 혹은 귀신들린 자라고 비난하고 배척하였다(요 8:48). 그러나 그는 죄로 인해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게 된 인류를 위해 세상에 내려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셨다. 그는 참 이웃 사랑을 실천하셨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우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사랑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아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이웃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전도하고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를 가진 이웃들을 돌보아야 한다. 구제는 하나님의 명령이다(신 15:7-11). 구제는 하나님께 꾸어드리는 것이요(잠 19:17) 의인의 삶이며(잠 21:26) 복된 삶이다(잠 11:24-25; 28:27). 또 구제는 하늘 창고에 저축하는 일이다(눅 12:33).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의 행복만을 추구하는 이기적 인생관을 버리고 하나님께 우리의 몸을 드려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이웃에게 선을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한다.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된 그 사마리아인은 바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생각된다. 그는 죄로 인해 죽게 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십자가에 죽으셨다. 예수님의 구원적 사랑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우리의 사랑의 동기와 모범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은혜에 보답하고 그를 사랑하고 그를 위해 사는 것은 기본적인 일이다. 사도 바울은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했다(고후 5:15).

또 우리는 예수님의 희생적 사랑을 본받아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주께서는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제사장과 레위인과 같이 되지 말고 참된 사랑을 실천한 사마리아인처럼 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자신을 희생하여 죄인들을 영원한 지옥 형벌에서 구원해주셨다. 우리는 이웃의 구원과 유익을 위해 우리의 시간과 우리의 돈과 우리의 힘을 즐거이 사용함으로써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38-42절, 마르다와 마리아

[38-39절] 저희가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촌에 들어가시매 . . . .

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촌에 들어가셨는데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였다. 마르다가 살았던 마을은 베다니이었다(요 11:1). 그 집에는 마르다와 마리아와 나사로가 살고 있었고 그들은 경제적 여유가 어느 정도 있었던 것 같다. 마르다는 자기 집이 있었고 예수님과 아마 그 일행을 자기 집에 영접하였고 음식으로 대접하였다. 요한복음에 보면, 마리아가 300데나리온 가량의 값이 나가는 지극히 값비싼 순전한 나드 향유 한 근을 예수님의 발에 부었는데, 그것을 보면, 그들이 가난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예수님을 자기 집에 영접한 것은 마르다의 믿음을 나타낸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르다는 그를 영접하였다. 사도 바울이 전도할 때에도 믿지 않는 자들은 그를 핍박하였으나 믿는 자들은 그를 영접하였다. 빌립보에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주 장사 루디아는 바울을 강권하여 자기 집에 며칠 간 머물게 하였다(행 16:12-15). 빌립보 옥의 간수도 밤에 바울에게 전도를 받고 그와 그 집 식구들이 다 세례를 받은 후 바울 일행을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 대접하였다(행 16:33, 34).

마르다에게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그는 주의 발 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오라비 나사로가 죽었을 때 마르다가 예수님 앞에서 그가 마지막 날에 부활할 것을 믿는다고 고백한 것을 보면(요 11:24), 마르다는 믿음이 있는 자이었다. 그러나 그의 동생 마리아는 언니보다 더 믿음이 깊었던 것 같다. 그는 주의 말씀 듣기를 사모하였고, 아마 얼마 후, 값비싼 향유를 그에게 부었다.

[40-42절]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 . .

마르다는 예수님 일행을 대접하기 위해 식사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했다. 세상일이 다 그러하지만, 여자들이 부엌에서 음식맛을 내기 위해 정성을 기울이는 것은 바쁘고 힘든 일이며 마음 쓰이는 일이다. 오늘날과 같은 현대식 부엌일도 그런데 옛날에는 얼마나 더 하며 손님들이 집안에 들어와 있는 형편에서는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마르다는 예수님께 불평스럽게 말했다.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마르다의 이런 불평스런 말은 인간의 이성과 상식에 비추어 볼 때 이해되고도 남음이 있다. 실상, 음식을 준비하고 대접하는 것 같은 외적인 봉사의 일들은 결코 불필요하거나 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성경은 이런 외적 봉사의 일을 선한 것으로 장려한다.

그때 주께서는 대답하셨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는 구절은 전통본문에는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이다”라고 되어 있다.59) 주께서 크게 여기신 그 한 가지 일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일이다. 그것은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일을 포함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일이 가장 중요한 까닭은, 첫째로,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얻게 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영혼 구원은 하나님의 뜻이며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며(요 3:16; 6:39, 40), 하나님께서 성경을 주신 일차적 목적이다(딤후 3:15).

둘째로, 그것이 우리의 믿음의 성장과 인격의 변화를 가져오는 일이기 때문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롬 10:17). 다른 많은 봉사의 일들은 육의 양식과 같다. 육의 양식은 먹어도 결국 죽는 양식이다. 사람이 살기 위해 육의 양식을 먹으나 그 양식을 먹을수록 육체는 점점 늙어가고 죽어간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의 양식이다. 사람은 떡으로만 살지 않고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마 4:4).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믿음을 자라게 하며 우리의 지식과 인격을 선하고 거룩하게 만든다. 우리가 그 양식을 섭취하면 할수록 우리의 영은 더욱 새로워지고 활기를 얻는다. 성경은 영의 양식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우리에게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며 우리로 온전케 하는 말씀이다(딤후 3:16-17).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움으로써 점점 더 거룩하여지며 겸손해지며 선한 인격자가 되어 간다.

38절로 42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얻는다. 첫째로, 우리는 마르다처럼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지 못했고 믿지 않고 영접지 않았고 도리어 배척하고 핍박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의 증언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확신하고 그를 환영하고 그의 종들과 성도들도 영접하자.

둘째로, 주의 종들과 성도들을 대접하는 것은 결코 잘못된 일이거나 불필요한 일이 아니다. 주의 종들과 성도들을 물질로 섬기는 것은 선한 일이며 칭찬들을 일이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고 교훈하였다(롬 12:13). 우리는 할 수 있는 대로 선한 일들을 많이 힘써야 한다.

셋째로,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일은 모든 선한 일들 가운데 가장 귀하고 중요한 일이다. 우리는 그 일을 가장 귀하게 여기고 그 일에 힘써야 할 것이다. 그 일은 우리의 영혼의 구원과 관계되며 우리의 믿음의 성장과 인격의 변화에 관계된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연구하기를 힘쓰자. 또 우리는 모든 공적 집회 시간에 빠지지 말고 참석하여 성경 말씀을 듣고 배우기를 힘쓰자.

 

11장: 기도를 가르쳐 주심

1-4절,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1절]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 . . .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자 제자 중 하나가 말했다.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예수께서는 친히 기도하기를 힘쓰셨다. 신성과 인성이 한 인격 안에 연합된 그 분에게 무슨 기도가 필요하셨겠는가 생각되기도 하지만, 그는 기도하셨다. 그는 새벽에 일찍 일어나 조용한 곳에 나가 기도하셨고 늦은 밤에도 기도하셨으며 또 때때로 밤새도록 기도하기도 하셨다. 신성을 가지신 예수께서 시시 때때로 기도하셨다면, 연약성과 죄악성을 가진 인간뿐인 우리는 얼마나 더 자주, 또 더 많이 기도해야 하겠는가!

[2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예수께서는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라”고 말씀하시며 기도를 가르쳐주셨다.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는 우리의 기도의 모범이 된다. 그 기도는 전체적으로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것을 구하고 그 다음에 우리 자신의 것을 구해야 함을 가르쳐 준다. 또 부차적으로 우리가 먼저 요긴한 것들을 기도하고 또 그 다음에 부차적인 것들을 기도해야 함도 깨닫게 해준다. 우리는 흔히 우리의 건강이나 물질 문제나 자녀 문제, 사업 문제 등을 구한다. 그러나 주께서는 이런 것들에 대한 우리의 기도를 부정하지는 않으실 것이지만, 그것들보다 먼저 구해야 할 것들이 있음을 보여주셨다.

아버지여.

“아버지여”라는 말이 전통본문에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되어 있다.60)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시다는 말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세계를 초월하여 계신다. 주께서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표현하신 것은, 육신의 아버지가 자녀들을 낳고 보호하고 의식주의 문제를 책임지듯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의 창조자이시며 보호자이시며 공급자이심을 나타낸다. 그는 세상 만물을 창조하셨고 우리도 만드셨고, 그는 자신이 만드신 세상을 보존하시고 특히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며 그들의 영육의 필요를 공급하신다. 예수께서는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天父)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고 말씀하셨다(마 6:31-32).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첫 번째 내용은 “주[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라는 것이다. 피조물이 창조주의 이름과 명예를 거룩하게 하고 영화롭게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의무이다. 그러나 인생들이 범죄함으로 하나님의 이름에 욕을 돌렸고 지금도 돌리고 있다. 하나님은 지극히 거룩하시고 의로우시고 선하시고 진실하시지만, 그의 피조물인 인간은 심히 불결하고 음란하며 불의하고 사악하며 거짓되다. 인간은 창조주의 영광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첫 번째 기도 내용은 사람들에 의해 더럽혀진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케 되기를 구한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아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돌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써 이루어지고, 또 그렇지 못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최종적 공의의 심판이 내려짐으로써 그렇게 될 것이다.

나라이 임하옵시며.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두 번째 내용은 “주[당신]의 나라가 임하옵소서”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경의 중요한 주제이다. 이것은 예수님과 사도들의 설교의 주제이었다.61)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나라를 말한다. 범죄한 이 세상은 하나님의 통치권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독립하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피조 세계의 본래의 모습은 그렇지 않았다. 피조물은 마땅히 창조주 하나님의 통치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의 임함은 하나님의 통치권의 회복이다. 소요리문답은 이것을 ‘은혜의 나라’와 ‘영광의 나라’로 표현하였다. 은혜의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의 영적, 현재적 측면을 말한다. 그것은 전도를 통해 영혼들의 거듭남으로 시작된다. 성도는 이미 은혜의 나라에 들어와 있다. 신약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이다. 비록 불완전한 모습으로이지만, 신약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의 현재적 단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의 임함은 복음 전파의 일, 그것을 통한 영혼 구원의 일, 또 그로 말미암아 참된 교회들이 설립되는 일을 가리킨다고 하겠다. 우리는 이 일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또한 영광의 나라를 가리킨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의 미래의 측면을 말한다. 그것은 영육의 구원과 물질 세계의 회복을 포함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한 나라요 의와 기쁨과 평강이 넘치는 나라이다.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거기에 있다. 우리는 지금 세상에서 의와 진리와 순수한 복음과 바른 교회를 위해 때때로 고난을 당하지만, 장차 그 나라에서 기쁨과 위로와 보상을 얻을 것이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전통본문에는 그 다음에, “주[당신]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옵소서”라는 말씀이 있다.62) 이것은 마태복음의 내용과 같다(6:10). 이것은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세 번째 내용이다. 이것은,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듯이, 땅 위에 있는 성도들도 그렇게 하게 하시기를 구한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구원이다. 이 구원은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로 죄로부터 구원을 얻는 것이지만(엡 2:8), 거기에는 세 가지 단계가 있다. 하나는 과거적 단계이다. 그것은 죄로 죽었던 영혼들이 하나님의 부르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공로로 인해 거듭나서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중생(重生)(요 3:5)과 사죄(赦罪)(행 2:38)와 칭의(稱義)(롬 3:23-24)와 양자(養子)(요 1:12)이다. 이 단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이미 이루어졌다.

또 하나는 현재적 단계이다. 그것은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신자들이 실제 생활 속에서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거룩의 열매를 맺고 흠과 점이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온전한 인격자가 되는 것이다(롬 6:22). 이것이 성화(聖化)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거룩함과 온전함이다(살전 4:3; 딤후 3:16-17). 이것은 개인적으로 우리 자신이 죄를 떠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생활이지만, 교회적으로는 교회가 배교(背敎)와 타협하지 않고 그 순수함을 지키는 것이다. 오늘날 근본주의적 장로교회들만이 이러한 순수함을 지키는 교회라고 말할 수 있다.

또 하나는 미래적 단계이다. 그것은 구원받은 신자들이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영광스러운 몸이 되고 영광의 천국에 들어가 영생 복락을 누리는 것이다(롬 8:29-30; 계 21-22장).

우리편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방법은 믿음과 순종을 통해서이다. 사람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롬 3:22; 엡 2:8). 또 구원받은 성도들은 성경의 모든 교훈들을 순종함으로써 점점 더 거룩하여진다. 또 교회들도 모든 인본적, 세속적 생각과 방법을 버리고 오직 성경의 모든 교훈들을 전심으로 믿고 따를 때 순결한 교회가 될 것이다.

또 우리는 개인적으로, 교회적으로 복음을 전하여 영혼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순종해야 한다. 전도는 하나님의 뜻이다. 우리는 이 일을 위해 모든 힘을 쏟아야 한다. 수많은 영혼들이 죄 가운데 죽어가고 있다. 우리는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 책임이 있다. 우리는 이 일을 위해 기도하고 우리 자신을 힘써 드려야 한다.

우리는 기도할 때 먼저 하나님의 일들을 기도하자.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위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위해, 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들뿐 아니라 또 다른 이들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굳게 믿고 신앙 생활을 바르게 잘 하는 것과, 하나님의 교회가 모든 성경적 교훈에 순종하여 바른 교회가 되는 것과, 또 나아가 이 구원의 복음을 모든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것에 대한 소원을 포함한다. 우리는 이 일들을 위해 기도하자.

[3절]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네 번째 내용은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는 것이다. 사람이 영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책을 읽고 묵상함으로 영적 활기를 얻지만, 주께서는 특히 육의 양식을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줄 안다. 사람은 영육으로 구성된 존재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날마다 필요한 육의 양식도 주실 것이며, 우리는 그것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한다.

[4절]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 . . .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다섯 번째 내용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소서”라는 것이다. 죄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끊고 영적 죽음을 가져왔다. 성도에게 있어서 죄는 여전히 하나님과의 교제의 방해물이다. 범죄한 자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를 꺼려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2천년 전 십자가 위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을 때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죄는 다 용서되었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우리가 범하는 실수와 죄는 여전히 죄이며 그것이 하나님을 불쾌하게 만들 것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신앙 생활에 있어서 죄사함은 필수적인 일이다. 그것은 마치 몸에 침투한 병균을 죽이거나 제거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은 여전히 회개에 대해 말씀한다(고후 7:10; 계 2:5; 3:19). 그러나 주께서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사함받기를 원한다면 우리가 서로의 허물과 부족을 용서해야 한다는 사실을 교훈한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하라.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여섯 번째 내용은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것이다. 전통본문에는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말씀이 첨가되어 있다.63) 우리의 큰 문제는 육신적, 경제적 문제가 아니고 죄의 문제이다. 우리는 죄사함도 중요하지만, 죄에 떨어지지 않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기도하자. 우리는 신구약성경에 명백히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지 않는 한, 우리의 모든 필요한 것들을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간구할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특히 우리 자신에게 요긴한 것들, 즉 육신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죄사함을 위해, 시험에 빠지지 않고 악에서 건짐 얻기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5-13절, 기도의 응답

[5-8절]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빌리라[빌려달라]. 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저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함께 나와 침소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 ‘강청함’이라는 원어(아나이데이아)는 ‘끈질김’이라는 뜻이다.

주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께 ‘강청의 기도’를 드려야 할 것을 교훈하셨다. 아무리 친한 친구일지라도 밤중에 무엇을 빌려달라는 것은 무례한 일이지만, 그 사람이 친구의 청을 들어준 것은 친구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강청함 곧 끈질김 때문이었다.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할 때 몇 번 아뢰다가 중단하지 말고 끈질기게 조르듯이 강청의 기도를 올려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사랑하는 아버지이시며 또 그에게는 밤중같이 불편하여 우리의 청을 들어주시기 힘든 때가 없으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하면 들어주실 것이며, 특히 강청의 기도를 드리면 잘 들어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강청의 기도를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이다. 우리는 강청의 기도를 통해 자신의 교만과 자존심을 버리고 자기를 부정하게 되고 겸손해진다. 또 우리는 강청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더 굳세게 의지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유익을 주시려고 우리의 기도를 금방 들어주지 않으시고 우리가 그에게 강청의 기도를 올리기를 기다리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하나님을 의지하며 시시때때로 간절한 강청의 기도를 올리자.

[9-10절]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 . . .

예수께서는 이어서 말씀하셨다.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기도의 응답은 기도하는 자에게 주어진다. 기도하면 응답을 얻는다.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는 반복적이고 점점 강해지는 뜻을 가진 이 말씀은 끈질긴 기도를 묘사한다. 또 ‘그러면, 그러면, 그러면’이라는 말씀은 기도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응답이 뒤따른다는 것을 가리킨다. 원문에는 10절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다. 그것은 기도의 응답에 대한 근거로서 기도는 반드시 응답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더 강조한다. ‘구하는 이마다, 찾는 이가, 두드리는 이에게’라는 표현은 기도하는 당사자가 응답을 받는 것이며 그가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응답을 기대할 수 없음을 나타낸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들을 인도하시는 방법이다. 기도는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길이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동행한다.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의 표현이며 증거이다. 하나님을 믿는 자마다 기도하며 하나님을 굳게 믿는 자는 힘있게 기도하며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는 기도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에 비례한다.

[11-13절] 너희 중에 아비 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너희 중에 아비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에 대해 좋은 것으로 응답하신다. 주께서는 다시 한 번 더 사람의 예를 사용하신다. 전통본문에는 “생선을 달라 하면”이라는 말 앞에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라는 구절이 있다.64) 아들이 아버지에게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줄 자가 없고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자가 없고 달걀을 달라 하면 전갈을 줄 자가 없다. 악한 사람도 그러하다면, 하물며 지극히 선하신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얼마나 더 좋은 것들을 주시겠는가?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는 말씀은 성령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들 중에 가장 귀한 복임을 증거한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시며 하나님 자신이시다. 그는 우리를 거룩한 길로 이끄시는 거룩한 영이시며 우리에게 진리의 지식과 믿음, 또 생명의 활기와 힘, 또 위로와 기쁨을 주신다. 예수 믿는 신약성도는 이미 성령을 받았다(롬 8:9). 그는 이제 성령의 인도하심을 늘 구하며 느끼며 그의 위로와 힘을 받으며 살아가면 된다.

5절로 13절까지는 기도에 대한 교훈이다. 기도는 성도의 특권이다. 그것은 마치 은행에 많은 돈을 저축해 놓고 필요할 때마다 찾아 쓰는 것과도 같다. 우리는 부요하신 하나님께 우리의 필요한 것들을 기도로 요청하며 그의 선하심을 따라 풍성히 받는다. 기도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할 수 있는 길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육신의 눈으로 뵈올 수 없는 분이시지만, 우리는 그가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실 때 그의 존재를 더욱 체험하고 실감하게 된다. 그러나 기도의 응답은 기도하는 자들에게, 때때로 강청의 기도를 하는 자들에게 주어진다. 우리는 겸손히, 믿음을 가지고, 간절히, 낙심치 말고 기도해야 한다. 기도할 때 우리는 모든 좋은 것을 얻을 것이다. 우리는 특히 성령의 충만함을 얻을 것이다. 그것은 매우 복된 일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동행함을 느끼며 체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도하며 응답받는 것은 성도의 특권이다.

14-26절, 벙어리 귀신을 쫓아내심

[14절] 예수께서 한 벙어리 귀신을 쫓아내시니 귀신이 나가매 . . . .

예수께서 한 벙어리 귀신을 쫓아내시니 귀신이 나가며 벙어리가 말하였다. 무리들이 기이히 여겼다. 귀신은 실제로 존재한다. 귀신은 타락한 천사 곧 악한 영이다. 귀신이 사람에게 들어가 그를 벙어리 되게 하였다. 모든 질병이 다 그렇지는 않다고 보지만, 많은 질병들이 정신적 요인으로 발생한다. 그런 경우 그 병은 자신의 영의 결함 때문이든지, 귀신의 영의 활동 때문일 것이다. 본문의 사건에서와 같이 귀신은 어떤 사람의 뇌신경에 나쁜 영향을 줌으로 그로 하여금 언어 기능이 마비된 벙어리가 되게 하였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 벙어리 귀신을 내쫓아 주셨으며 그 벙어리는 말하게 되었다. 그것은 심리 치료 방법이나 반복적 언어 훈련으로 된 것이 아니고 귀신을 쫓아내심으로 된 것이었다. 이런 유의 병의 치료는 병든 영의 치료나 악한 귀신을 내쫓음으로 가능하다. 그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지는 것이다. 특히 귀신을 내쫓는 일은 우리가 기도하고 금식하는 방법으로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마 17:21, 전통사본). 예수께서 귀신을 내쫓으셨다는 사실은 그가 천사들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신 분임을 증거한다. 예수님은 영계와 물질계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15-16절] 그 중에 더러는 말하기를 저가 귀신의 왕 . . . .

그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그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말하였고,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였다. ‘바알세불’은 ‘더러운 것[우상들]의 주’라는 뜻이라고 한다.65)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내신 행위가 모든 사람에게 다 믿음을 주지는 못했다. 기적은 모든 사람에게 자동적으로 믿음을 주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 기적이 어떤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의 근거가 되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순히 기적을 추구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한다.

벙어리 귀신을 내어쫓은 예수님의 기적이 놀라웠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은 그를 비난하기를, 그가 귀신들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악한 벙어리 귀신을 내어쫓으셨는데도, 그를 믿지 못하고 그를 ‘귀신들의 왕’이라고 비난하다니 인간은 참으로 무지하고 악하다.

또 어떤 이들은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였다. ‘하늘로서 오는 표적’이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확인할 만한 기적을 가리킨다. 예수께서 이미 믿을 만한 많은 표적들을 행하셨고 또 이제도 벙어리 귀신을 쫓아내시는 표적을 보이셨음에 불구하고, 그들은 또 다른 신기한 일들을 구한 것이었다. 그것은 믿음의 근거를 구한 것이라기보다 단순히 호기심을 위한 요청이라고 보여진다. 참으로 믿기를 원하는 자들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이미 충분한 기적들을 주셨다. 오늘날 우리가 참으로 믿고자 한다면, 성경에 기록된 기적들은 우리의 믿음을 위해 충분하다.

[17-19절] 예수께서 저희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스스로 . . . .

예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말씀하셨다.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지며 스스로 분쟁하는 집은 무너지느니라. 너희 말이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만일 사단이 스스로 분쟁하면 저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저희가 너희 재판장이 되리라.”

예수께서는 단지 그들의 말에 대해 대답지 않으시고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대답하셨다. 그것은 자신이 귀신들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그런 일을 행할 수 없다는 답변이었다. 주님은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지며 스스로 분쟁하는 집은 무너진다’는 일반적 진리를 들어 말씀하셨다. ‘분쟁한다’는 원어는 ‘나뉜다’는 뜻이다. 한 가정이든지 한 나라든지 분쟁하여 둘로 나뉘어 있다면 그 가정이나 그 나라는 견고하고 평안하게 세워질 수 없고 무너지고 황폐하여질 것이다. 주께서는 이런 일반적 진리를 들어, 사탄이 스스로 나뉜다면 어떻게 그 나라가 서겠는가라고 반문하셨다.

또 주께서는, 만일 내가 귀신들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내쫓는다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그렇게 하는가라고 반문하셨다. 유대인들 가운데는 귀신을 쫓아낸다고 하는 자들이 더러 있었던 것 같다. 예수님을 따르지 않던 어떤 사람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쫓는 일을 행하였었다(눅 9:49). 유대인들은 그런 자들에 대해서 예수께 했던 비난과 같은 비난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들은 자기 아들들에 대해서는 관대하였으나 예수님께 대해서는 그렇지 않았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하여 그들이 바른 판단을 줄 수 있을 것이다.

[20-22절]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더 강한 자가 와서 저를 이길 때에는 저의 믿던 무장을 빼앗고 저의 재물을 나누느니라.”

예수께서는 이제 자신의 행위가 귀신들의 왕을 힘입어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한 것임을 증거하신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비난하는 어떤 이들의 잘못된 말들로 인해 가질 수 있는 예수님과 그의 사역에 대한 오해를 풀고 그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알고 믿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특히 자신이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들을 쫓아내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임함을 나타낸다고 증거하셨다. 이스라엘 사회는 심히 타락하여 사탄과 악령들의 지배를 받는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어두워진 사회가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의 사역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탄과 악령들의 세력이 제거되고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탄과 악령들은 힘이 있는 천사들이다. 그들이 무장을 하고 자기 집과 같은 사회를 지킬 때에는 자기들의 소유물들이 다 그의 손 안에 있다. 그러나 그들보다 더 강한 자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들을 이기실 때 그들의 무장을 빼앗으시고 그들의 소유물들을 구원하실 것이다. 이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들을 통해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23절]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예수께서는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흩어지게] 자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자신을 비난하는 저 악한 자들에 대해 두 가지를 말씀하셨다. 첫째로, 그들은 예수님을 반대하고 예수님의 구원 운동을 방해하고 하나님의 구원하실 백성들을 흩어지게 하는 자들이다. 예수님을 정말 위하는 자들이라면 그와 함께할 것이다. 그들의 생각과 뜻이 예수님과 같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하지 않는 것을 보니 그들은 확실히 예수님을 반대하는 자들이다. 또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모으지 않는다면, 그들은 예수께서 구원하여 모으시려는 사람들을 흐트러뜨리는 자들에 불과하다. 주와 함께 영혼들을 구원하려 하지 않는 자들은 구원 운동의 방해자요 교회를 흩어지게 하는 자들이다. 우리는 결코 그런 자들이 되지 말아야 한다.

[24-26절]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

둘째로, 그들이 만일 예수님을 참으로 영접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마지막 형편은 더 나빠질 것이다. 사탄과 악령들의 지배를 받던 이스라엘 사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사탄과 악령들이 일시적으로 내쫓김을 받았지만, 만일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영접하고 순종치 않으면 사탄과 악령들이 이전보다 더 많이 들어와 활동하게 되어 그 마지막 형편은 더 나빠질 것이다. 복음을 듣고 그 은혜를 체험하고도 그를 진심으로 영접지 않고 순종치 않는 자들의 마지막 형편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전보다 더 나빠질 것이다.

14절로 26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우리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귀신을 내쫓으셨음을 바로 알자. 그는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그렇게 하셨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둘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세상에서 시작되었음을 알자. 사탄과 악령들의 권세는 제거되고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되었다. 참된 교회는 바로 하나님의 나라의 사작이다. 셋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따르며 주와 함께하고 주와 함께 영혼들을 모으자. 우리는 결코 주를 반대하거나 주의 백성을 흩어지게 하지 말고 주를 위하고 주의 백성을 모으는 자가 되자.

27-28절,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복됨

[27절] 이 말씀 하실 때에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 . . . .

이 말씀 하실 때에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도소이다”라고 말했다. 흔히 사람들은 훌륭한 사람들과의 혈육적 관계를 자랑하며 뽐낸다. 천주교회는 마리아와 예수님의 혈육적 관계를 중시하여 마리아가 무죄(無罪)하다든지 승천했다든지 중보사역에 참여한다든지 성도들의 기도를 듣는다는 등 지어낸 말로 마리아를 거의 신적 존재로 만들었다.

[28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 . . .

예수께서는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혈육관계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다. 이 세상에는 인간의 많은 말들과 글들이 있지만 그 가치는 그렇게 크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말들과 다르다. 그것은 곧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구원의 말씀이요 영생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한다는 것은 복음을 듣고 믿어 구원을 얻은 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는 예수님의 혈육관계보다 더 복되다.

29-32절, 솔로몬과 요나보다 크신 분

[29-30절] 무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세대는 . . . .

무리가 모였을 때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

예수님 당시의 세상은 불경건하고 부도덕하였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였다. 그들이 예수께 표적을 구하지만 진심으로 믿으려는 동기에서가 아니고 단지 호기심에서일 뿐이었다. 예수께서는 이미 많은 표적들과 기적들을 행하셨으나, 사람들은 그를 알지 못하고 또 다른 표적들을 구하는 것이다. 이 때 예수께서는 오직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요나의 표적은 예수님을 증거하는 마지막 가장 큰 표적이기 때문이다. 요나의 표적이란, 요나가 삼일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온 것처럼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지낸 바 되신 후에 제3일에 부활하실 것을 가리킨다. 그것은 예수님을 증거하는 마지막 표적이 될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을 최종적으로 확증할 것이다.

[31-32절]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끝에서 왔음이어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으며,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어니와 요나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

주께서는 자신이 솔로몬보다 더 크신 자이며 또 요나보다 더 크신 자임을 증거하셨다. 그것은 인간적 교만이나 자랑의 말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한 인간으로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말씀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진리요 사실 그대로인 것이다. 예수님은 솔로몬보다 더 크시고 요나보다 더 크신 자이시다.

그러나 솔로몬 때에 남방 여왕은 솔로몬의 말을 듣기 위해 먼 곳에서 찾아왔었고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했지만, 이 악한 세대는 솔로몬과 요나보다 더 크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를 사모하지 않고 그 말씀을 들어도 회개하려 하지 않으니 얼마나 악한 것인가!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심판 때에 남방 여왕과 니느웨 사람들이 이 세대 사람들을 정죄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과연 마지막 심판날에 그들이 다 부활하여 예수님의 말씀 듣기를 거절하고 회개하기를 거절한 이 세대의 사람들을 정죄할 것이다.

33-36절, 마음 속에 빛이 밝아야 함

[33-36절]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움 속에나 말 아래 두지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움 속에나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니라.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 네 온 몸이 밝아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의 광선이 너를 비출 때와 같이 온전히 밝으리라.”

주께서는 마음의 눈에 대해 말씀하신다. 그것은 내면적 지식과 사상과 깨달음을 가리킨다. 그것은 마음의 등불과 같다. 그것은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복음과 구원과 영생과 천국을 아는 지식이다. 이것은 성경의 바른 지식이다.

27절로 36절까지의 내용은 혈육관계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복되다는 것과 예수님은 솔로몬과 요나보다 크신 분이시라는 것과 우리는 마음 속의 빛이 밝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세 가지의 내용은 결국 한가지의 교훈을 준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 즉 하나님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바른 지식을 가지고 그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또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죄를 회개하고 의와 선을 행하는 참된 행복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에 대한 바른 지식은 우리의 마음의 등불이며 그것은 우리로 바른 길로 인도한다.

37-54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책망하심

[37-38절]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한 바리새인이 자기와 . . . .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한 바리새인이 자기와 함께 점심 잡수시기를 청하므로 들어가 앉으셨는데, 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하심을 이 바리새인이 보고 이상히 여겼다. 음식을 들기 전에 손을 씻는 것66)은 당시의 관습이었던 것 같다. 주께서 당시의 관습을 따르지 않은 것은 그것이 인간의 전통에 불과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성경에 가르쳐 주신 것들만 권위 있게 여겨야 하고 성경에 가르치지 않은 관습들에 너무 사로잡힐 필요가 없다.

[39절]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 . . .

주께서는,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인즉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필요한 것들을 교훈하셨다. ‘탐욕’이라는 원어(하르파게)는 ‘약탈’(Thayer, KJV, NASB) 혹은 ‘탐욕’(BDAG, NIV)이라는 뜻이 있다. 바리새인들은 거룩한 삶을 말하면서 내면적 성결을 중시하지 않고 외형적 성결만 강조했다. 잔과 대접의 겉을 깨끗이 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들의 마음 속에 탐욕과 악독이 가득한 것이 문제이었다. 외적 불결은 몸에만 해롭지만, 마음의 불결은 하나님을 진노케 하며 자기의 영육을 멸망시킨다. 참된 경건은 내면적 성결로 나타난다. 마음이 바르고 깨끗하고 착한 것이 중요하다.

[40-41절] 어리석은 자들아, 밖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들아, 밖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오직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주께서는 사람이 내면적 성결 없이 외적 성결만 중시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씀하셨다. 인간은 영육의 존재이다. 남에게 보이는 사람의 외형적 부분은 육체요, 남에게 보이지 않는 내면적 부분은 영 혹은 영혼이다. 사람의 겉이 아무리 아름답고 단정해 보여도 그 속, 즉 그의 영혼과 마음이 깨끗하고 바르지 못하면 그는 하나님 앞에서 학하고 무가치한 자이다. 그래서 주께서는 그들의 내면적 불결을 지적하신 것이다.

주께서는 그 해결책으로 “오직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고 말씀하셨다. ‘그 안에 있는 것[들]’이라는 원어(타 에논타 τὰ ἐνόντα)는 옛날 영어성경은 ‘너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이라고 번역하였다. 바리새인들은 지금 마음 속에 물질에 대한 탐욕이 가득하여 가난한 자들에게 구제할 줄 모르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이 탐욕의 죄를 회개하고 탐욕을 버리고 가난한 자들에게 구제해야 한다.

구제는 가난한 자들을 돌아보는 것이다. 물론 규모 없이 살거나 절제 없이 살아서 가난해진 자들 또는 근면하지 않고 게을러서 가난해진 자들은 자신을 반성하고 규모 있고 절제 있게 살고 근면하게 살기를 결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가난한 자들에게 구제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율법에서도 강조하여 교훈하신 바이다(신 15:7-11). 그러므로 구제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의와 선을 행하는 여부를 판별할 수 있는 중요한 표시가 된다. 옛날 멸망을 당했던 소돔성 사람들은 물질적으로 부요하였으나 가난한 자들에게 구제할 줄 몰랐고 그것이 그들이 멸망한 중요한 죄악의 내용들 중 하나이었다(겔 16:49). 그러나 사람이 탐심을 버리면, 남에게 구제할 수 있다.

우리는 외모만 깨끗하고 아름답게 꾸미는 자가 되지 말고 마음 속을 깨끗하고 아름답게 꾸미는 자가 되자. 탐욕과 악독을 버리자. 우리는 우리의 가진 것을 절제 있게 사용하며 가난한 이웃에게 구제하자.

[42-43절]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지니라.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

바리새인들은 율법대로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는 생활을 실천하였다. 십일조는 소득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으로서 성경에 가르치신 헌금의 주요 원리이다(레 27:30-33; 말 3:8-12.). 십일조는 만물이 다 하나님의 것이며 물질의 소득이 다 하나님의 복임을 인정하며 감사하며 고백하는 표시이다. 바리새인들이 십일조 생활을 실천한 것은 잘한 일이었다.

그러나 주께서는 십일조 같은 종교적 규례보다 내면적 도덕성, 즉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교훈하셨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라는 원어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말로서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을 다 가리킬 수 있다. 마태복음 23장에는 “율법의 더 중한 바 의(義)와 인(仁, 자비)과 신(信, 신실함)”이라고 표현하였다. 종교적 규례와 내면적 도덕성은 둘 다 필요하다. 우리는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그 둘 중에 더 중요한 것은 내면적 도덕성이다. 바리새인들은 종교적 규례는 중시했으나 내면적 덕을 버린 것이 큰 죄이었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그들에게 화가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또 바리새인들은 회당에서 높은 자리에 앉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을 좋아하였다. 그것은 그들의 명예심과 교만을 나타낸다. 이것도 역시 큰 죄이므로 주께서는 그들에게 화를 선포하셨다. 겸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덕이다. 미가 6:8은,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仁慈)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고 말한다. 주께서는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말씀하셨다(마 23:11-12).

[44절] 화 있을진저!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 . . .

예수께서는 또 “화 있을진저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전통본문에는 ‘너희여’라는 말 다음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위선자들이여’라고 되어 있다.67) ‘평토장한 무덤’은 겉으로 보기에는 깨끗하지만, 그 속에는 부패되고 더러운 죄성으로 가득한 인간의 마음을 가리켰다고 본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겉보기에는 경건하고 단정하였으나 그들 속에는 탐욕과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였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내면적 성결과 단장이다. 디모데전서 2:9- 10, “이와 같이 여자들도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라. 이것이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 베드로전서 3:3-4,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우리는 마음을 단장해야 한다.

우리는 단순히 종교적 규례를 지키지 말고 공의와 사랑을 실천하고 교만과 명예심을 버리고 겸손과 마음의 성결과 단장을 구하며 힘쓰자.

[45-46절] 한 율법사가 예수께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님 . . . .

한 율법사가 예수께 “선생님, 이렇게 말씀하시니 우리까지 모욕하심이니이다”라고 말하자, 주께서는 말씀하셨다.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 ‘율법사’는 ‘서기관’과 같은 말로서 율법 학자를 가리킨다. 그러나 그들은 말로만 사람들을 가르쳤다. 그들은 지기 어려운 짐들을 사람들에게 지우고 자기들은 한 손가락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전혀 행위의 모범이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의롭고 선한 행위와 삶을 원하신다.

[47-48절] 화 있을진저,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는도다.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화 있을진저,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는도다. 저희를 죽인 자도 너희 조상들이로다. 이와 같이 저희는 죽이고 너희는 쌓으니 너희가 너희 조상의 행한 일에 증인이 되어 옳게 여기는도다.” 그들이 선지자들의 무덤을 가꾸면서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죽이려 한 것은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죽였던 그들의 선조들의 삶과 동일하다. 그것은 큰 위선이다.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는 단지 전시대의 선지자들을 존경하고 그들을 기념하는 것보다 그들의 사상과 인격과 삶을 본받는 것이다.

[49-51절] 이러므로 하나님의 지혜가 일렀으되 내가 선지자와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이러므로 하나님의 지혜가 일렀으되 내가 선지자와 사도들을 저희에게 보내리니 그 중에 더러는 죽이며 또 핍박하리라 하였으니 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되 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과연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 구약 백성들은 하나님의 많은 종들을 핍박하고 죽였었다.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뜰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대하 24:20-21)의 피까지 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의인과 선지자들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할 것이다. 그것은 그 세대가 참된 의인이시요 선지자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핍박하고 마침내 죽일 것이라는 사실에 근거한다. 유대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죄악은 인류 역사와 구약 역사의 모든 죄악들의 절정일 것이다.

[52절]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 . . .

예수께서는 또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율법사들은 성경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에게 주어진 지식의 열쇠를 오용하였다. 그들의 지식은 행위를 동반하지 않은 지식이었다. 행함 없는 지식은 위선자들을 만들어 내며 종교를 부패시킬 뿐이다. 또 그런 위선자들은 죄인들이 하나님께로 나아오는 길을 오히려 방해한다.

[53-54절] 거기서 나오실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맹렬히 . . . .

거기서 나오실 때에[그들에게 이것들을 말씀하실 때에](전통본문)68)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맹렬히 달라붙어 여러 가지 일로 힐문하고 [그를 비난하기 위해](전통본문)69) 그 입에서 나오는 것을 잡고자 하여 목을 지켰다. ‘목을 지킨다’는 원어(에네드류오)는 ‘숨어 기다린다, 올무에 걸리게 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같은 위선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항상 생각하고 그런 위선자가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내면적 성결과 내면적 단장, 즉 거룩하고 선한 인격과 삶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참된 성도가 되기를 힘써야 한다. 우리는 교만과 탐심을 버리고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며 의와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12장: 절대적 신앙

1-12절, 하나님만 두려워하라

[1절]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 . . .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는데, 예수께서는 먼저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셨다. 외식이란 겉과 속이 다른 것을 말한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 같지만, 속으로는 그를 부정하고 그를 무시하는 것이며, 겉으로는 깨끗한 것 같지만, 속으로는 탐욕과 미움과 음란으로 가득한 것이다. 외식은 ‘누룩’과 같이 조용히 많은 심령들에게 악영향을 끼치며, 그래서 교회를 형식적이게 만들고 생명력을 빼앗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형식주의와 외식을 주의해야 한다.

[2-3절]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집 위에서 전파되리라.” 주께서는 다른 경우에 제자들이 예수께 개인적으로 배운 진리들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적으로 전파하라는 뜻으로 이런 표현을 사용한 적이 있으시나(마 10:26-27), 여기서는 바리새인들의 감추인 악들이 다 드러날 것이라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 같다. 감추인 악들은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겨진 것들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다. 바리새인들의 은밀한 탐심과 미움과 음란 등은 다 드러나고 말 것이다. 세상에 은밀한 것이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추인 악들을 버리고 정정당당하게 살아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은밀하게 남을 비난하여 형제의 명예를 손상시키지 말고 밝은 데로 나아와 정정당당하게 충고하는 것이 옳다.

[4절]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 . . .

예수께서는 또,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몸의 죽음으로 사람의 생명이 다 끝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영혼은 불멸적이기 때문에 그것은 몸의 죽음 이후에도 존재한다. 단지 그것이 천국에서 안식을 누리는가,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는가의 차이가 있다. 몸의 죽음 후의 영혼의 상태는 심판자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더 무엇을 할 수 없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5절]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죽인 후 그를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를 가지고 계신다. 지옥은 불의 고통이 있는 곳이다. 지옥의 교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이다(마 5:29-30; 막 9:43-49). 지옥은 하나님께서 악인들에게 최종적으로 내리시는 공의로운 형벌이다. 지옥에 대한 두려움은 죄인들을 회개시키는 정당하고 유익한 방편이다.

[6-7절] 참새 다섯이 앗사리온 둘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참새 다섯이 앗사리온 둘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라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너희에게는 오히려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앗사리온은 데나리온 은전의 16분의 1의 값이 나가는 동전이다. 하나님께서는 보잘것없는 참새 한 마리도 잊어버리지 않으신다. 그것들은 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 존재하고 또 잡혀 죽기도 한다. 인간은 참새보다 귀하다. 사람은 그 머리털까지도 하나님 앞에 다 세신 바 되었다. 그는 우리를 아시고 잊지 않으시고 귀히 여기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의 핍박이나 불안한 장래의 일들을 두려워할 것이 없다.

[8-9절]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人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함을 받으리라.”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시인한다는 말씀은 그를 거부하고 핍박하고 죽이려는 이 세상 속에서 그를 인정하고 증거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 주께서는 마지막 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인정하실 것이다. 우리의 신앙고백은 마음 속으로 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사람들 앞에서 공적으로 하는 것이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공적인 고백을 원하신다.

[10절] 누구든지 말로 인자(人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 . . .

예수께서는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人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신성(神性)은 그의 인성(人性)에 가리어져 있어서 사람들이 그것을 잘 알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사람이 단순히 예수님을 한 인간으로 알고 거역한다면 그는 사하심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신성의 영광이 때때로 드러나고 그의 하신 일이 명백히 성령으로 된 것임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성령의 역사를 거역하는 것은 성령을 모독하는 죄 곧 용서받을 수 없는 죄가 될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의 일들을 보고도 그것을 대적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매우 완악한 자들이요 구원의 가망이 없는 자들일 것이다.

[11-12절] 사람이 너희를 회당과 정사 잡은 이와 권세 있는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사람이 너희를 회당과 정사 잡은 이와 권세 있는 이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 것을 염려치 말라.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초대 교회 시대는 예수님 믿는 일 때문에 핍박을 받았던 시대이었다. 그것은 마치 우리나라 역사에서 일제 시대와 같았고 공산 치하의 때와 같았다. 믿는 이들은 유대교 회당들에서도 심문과 핍박을 받고 세상 권세자들 앞에서도 그러할 것이다. 주께서는 그 일을 예견하시면서, 그들이 어떻게 또 무엇을 변명하며 말할지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성령께서 그때에 마땅히 할 말을 그들에게 가르쳐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심문들을 통해 유대의 무지한 종교지도자들에게나 세상의 위정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이 증거되기를 원하셨다.

1절로 12절까지의 말씀에서 우리는 세 가지 교훈을 얻는다. 첫째로, 우리는 외식을 조심하자. 외식은 누룩과 같아서 다른 이들에게 악영향을 미친다. 교회 안에 외식자들이 많으면 그런 교회는 심히 혼란할 것이다. 우리는 외식을 조심하고 항상 진실을 말하고 진실하게 행하자.

둘째로, 우리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두려워하자. 사람들은 우리의 몸만 죽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의 영혼을 지옥에 던지실 수 있는 분이시다. 우리는 사람을 두려워할 때 시험에 빠지고(잠 29:25), 또 외식하게 되고 심지어 변절하게도 된다. 우리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두려워하자.

셋째로, 우리는 사람들 앞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하자. 우리는 기회 있을 때에 우리의 믿음과 구원을 입으로 간증하자. 또 예배당에 나올 때 성경책을 들고 오는 것이나, 식사 때에 기도하는 것이나, 전철에서나 직장에서 쉴 때에 성경책을 읽는 것이나 전도하는 것 등은 그것의 작은 실천이다. 우리는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시인하자.

13-21절, 탐심을 물리치라

[13-14절]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 . . .

무리 중에 한 사람이 말하였다.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그의 형이 부모의 유산을 다 가지려 했던 것 같다. 율법에 의하면, 부모의 유산은 비록 장자가 동생보다 두 배를 얻지만(신 21:17) 동생도 나누어 가지도록 되어 있었다. 즉 유산의 3분의 1을 가진다. 그런데 형은 그 유산을 다 가지려 한 것 같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의 요청을 거절하시면서 말씀하셨다.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그는 그런 일에 관여하기를 원치 않으셨다. 주께서는 마지막 날 인간의 모든 일을 심판하실 것이다. 그때에는 그 형이 유산을 정당하게 분배했는지도 심판하실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지금 그런 일을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었다. 그는 단지 죄인들을 불러 회개시키는 일과 자신을 속죄 제물로 드리는 일을 위해 오신 것이었다.

오늘날 교회의 사명은 예수님의 사명을 계승하는 것, 곧 전도하는 것이다. 교회는 세속적 문제에 관여하지 않는다. 그 일이 사회 정의를 구현하는 일이든지 선한 일이라 할지라도, 교회는 그런 일을 하는 곳이 아니다. 예를 들어, 교회는 정당을 세운다든지 일반 학교나 병원이나 양노원 등을 만들어 경영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교회는 오직 전도하는 일과 전도자들을 양성하는 일을 해야 한다.

[15절]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형만 탐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동생도 탐심이 있었다. 그에게 탐심이 없었다면 주님께 그런 문제를 가지고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탐심은 부자들에게만 있지 않고 가난한 자들에게도 있을 수 있다. 우리는 탐심이 우리 속에 침입해 들어오지 못하도록 주의하고 경계해야 한다. 돈에 대한 애착은 탐심에 뿌리를 두고 있다. 사람은 탐심이 있을 때 돈을 사랑하게 되고 부하려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성경은 부하려는 마음이 모든 악의 뿌리가 된다고 말했다(딤전 6:9-10). 실상 물질적 부요는 우리에게 큰 시험거리이다. 사람은 부요할 때 마음이 해이해지고 물질을 더 의지하기 쉽고 교만해지고 쾌락에 빠지기 쉽고 외도하기 쉽다. 사람의 생명은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않다.

[16-19절]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 . . .

예수께서는 물질적 부요가 헛됨을 한 비유로 말씀하셨다.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므로 마음으로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생각하며 말했다.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그 부자는 그가 맞은 그 풍년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을 알지 못했다. 그는 하나님께서 적당한 때에 비를 내려주지 않으셨다면 풍년 추수는 불가능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의 관심과 생각은 물질적 부요와 그것을 즐기는 일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20절]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 . . .

하나님께서는 그 농부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나님께서는 그 부자를 어리석은 자라고 부르셨다. 그 부자는 그 물질적 부요가 어디로부터 왔는지, 또 자신의 건강과 생명, 그리고 행복이 어디로부터 오는지에 대해 바른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물질만 많으면 자신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목숨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그 부자의 영혼을 그 날 밤에 불러가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다. 주께서는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고 물으신다. 그가 죽고나면 그의 쌓아놓을 많은 곡식은 그에게 아무 소용이 없게 될 것이며 다른 이가 누리게 될 것이다. 그의 생명은 그의 소유의 넉넉함과 아무 상관이 없을 것이다. 물질은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만 유익할 뿐이다.

[21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 . . .

주께서는 그 비유의 결론으로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고 말씀하셨다. 자기를 위해 돈을 벌고 돈을 모을 줄은 알지만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섬길 줄 모르는 자들은 바로 이 어리석은 농부와 같은 자라고 말씀하셨다. 또 그는 이 비유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가 되어야 한다고 교훈하셨다. 하나님께 대해 부요한 사람이란 하나님을 알며 사랑하고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기도에 힘쓰고 죄를 버리고 온유와 겸손, 사랑과 헌신, 인내와 절제로 자신을 단장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을 가리킨다. 우리는 그런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교회의 사명에 충실하자. 교회는 전도와 개척교회들 설립과 바른 신학교 건립, 문서와 인터넷을 통한 말씀 사역에 힘써야 한다.

우리는 탐심을 버리자. 우리는 부하려는 마음과 물질에 대한 탐심을 버려야 하며, 더러운 이익을 구해서는 안 된다. 부요한 자들은 그 부로 선한 일을 해야 하며, 우리 모두는 힘있는 대로 구제에 힘써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대해 부요한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지식과 사랑, 성경 읽기, 기도, 거룩, 온유와 겸손, 사랑과 헌신, 인내와 절제로 단장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며 주께서 주신 재능을 따라 하나님의 교회에서 각양 봉사의 일에 참여해야 한다.

22-30절, 의식주 문제를 염려하지 말라

[22-23절]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 . . .

예수께서는 또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 의식주 문제는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필수적인 것들이다. 육신을 가진 우리는 먹을것과 입을 것과 거처할 곳이 필요하다. 사람이 그런 문제를 염려하는 것은 미래의 불확실함 때문이다. 우리의 건강이나 경제를 보장할 자는 세상에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의식주 문제를 염려하는 것은 당연하게 보인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의식주 문제를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24-26절]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저장실]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그 생명을 조금 더 연장할 수 있느냐?] 그런즉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능치 못하거든 어찌 그 다른 것을 염려하느냐?” 하나님께서는 모든 새들을 먹이시고 기르신다.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사람은 새들보다 얼마나 더 귀한 존재인가? 더욱이,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救贖)함을 얻었다. 그러므로 보잘것없는 새들도 먹이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먹이시지 않겠는가? 또 우리가 무엇을 염려한다고 우리의 생명의 기간을 조금이라도 더 연장할 수 있겠는가?

[27-28절]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아라. 실도 만들지 않고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아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자연만물 속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창조의 솜씨는 인간이 자기 지혜로 만든 그 무엇보다 뛰어나시다. 오늘 들에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풀들도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입히신다면, 하물며 자기 형상대로 창조된 백성들을 잘 입히지 않으시겠는가?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자연 만물들을 먹이시고 입히시는 것을 보면, 그가 우리를 먹이시고 입히실 것이 분명하다. 더욱이, 우리가 무엇을 염려한다고 이룰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염려하지 말아야 한다.

[29-30절]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될 줄을 아시느니라.” 의식주의 염려는 하나님을 모르는 이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다. 그들은 오직 모든 문제를 자신들의 힘으로만 해결하려고 염려하며 동분서주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주관하시고 다스리심을 아는 하나님의 백성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의식주의 필요한 것들이 우리에게 있어야 될 줄을 알고 계신다. 그는 영의 세계만 창조하신 분이 아니시고 물질 세계도 창조하신 분이시다. 그는 우리에게 영혼의 구원과 천국만 주지 않으시고 이 세상에서 육신의 필요한 것들도 주신다. 그는 우리가 먹을것과 입을 것과 거처할 곳이 필요함을 아시고 주실 것이다.

우리는 먹을것과 입을 것과 거처할 것 때문에 염려하지 말자. 우리는 섭리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주실 줄을 알고 오직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담대히 하루 하루를 살아가자.

31-34절,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

[31절]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을 . . . .

예수께서는 “오직 너희는 그의[하나님의]70)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셨다. ‘오직’이라는 원어(플렌)는 강한 대조를 나타내는 말이다. 의식주의 문제를 염려하지 말고 그 대신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는 뜻이다. 인간의 참된 행복은 하나님 안에 있다. 하나님 없이 사는 것이 모든 불행의 근본 원인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의 통치를 받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고 섬기며 사랑하고 그의 뜻을 즐거이 따르는 것이며 경건하고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사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며 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의식주에 관한 모든 것을 주실 것이다.

[32절]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그는 제자들을 ‘적은 무리[양무리]’라고 부르셨다. 그들은 세상의 많은 사람들에 비해 너무 적은 수의 무리이다. 세상 안에서 그들은 위축될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물질 만능의 시대에, 가난한 자와 부한 자의 격차가 더 심해지는 오늘 시대에 물질을 초월하며 사는 성도들은 세상에서 위축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무서워 말라’고 말씀하신다. 천국은 이 세상과 비교할 수 없이 복되고 가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천국의 행복과 가치를 바로 안다면 우리는 결코 찬란해 보이는 이 세상의 영광으로 인하여 위축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나라를 우리에게 주기를 기뻐하신다. 우리는 하나님과 천국을 확신하고 기쁨과 담대함으로 주님을 믿고 따라야 한다.

[33-34절]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적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삶은 구제하는 삶인 것을 가르쳐주셨다.

주께서는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재산을 자기 행복을 위해 축적만 하지 말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 이 세상만 아는 자들은 자신의 행복과 즐거움을 구하며 살 것이다. 그러나 천국에 소망을 두고 사는 성도는 사는 방식이 달라야 한다. 그는 주의 명령대로 구제의 일에 힘쓰며 살 것이다. 탐심을 버리는 자만이 주의 명령에 복종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물질이 하나님의 것이므로 성도는 이 명령에 복종하고 실천해야 한다.

구제의 대상은 우선 교회 안에 있는 가난한 자들이다. 초대 교회는 이것을 실천하였다. 구약의 십일조 규례의 모범을 따라 신약교회의 전임 사역자들은 세상 직업을 버리고 복음 사역에 전적으로 헌신한 자들인만큼 교회가 그들의 필요를 공급하는 것은 합당한 일이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전도와 구제의 일에 자신의 돈과 재물을 쓰는 것은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하늘나라에 만드는 것과 같다. 우리의 보물이 있는 곳에는 우리 마음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세상의 의식주의 염려를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구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말한다. 또 그런 자들은 주의 명령대로 이 세상에서 구제하기를 힘써야 한다.

35-40절, 예비하고 있으라

[35-36절]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너희는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당시 유대 나라의 결혼식은 밤에 행해졌고 결혼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밤 늦게야 자기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므로 종들은 주인이 돌아오도록 깨어 기다려야 했다. 이와 같이, 주께서는 제자들이 그렇게 깨어 있으라고 하신 것이다. 깨어 있다는 것은 성실한 신앙생활과 봉사생활을 가리킨다. 주께서는 주인이 결혼식에 참여하고 돌아오듯이 자신이 돌아올 것을 말씀하셨다. 천국은 이미 시작되었으나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다. 그것은 장차 주의 재림으로 영광스럽게 이루어질 것이다. 주의 재림은 교회의 소망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언제 오시든지 그를 맞을 수 있도록 성실히 그를 믿고 섬기며 따라야 한다.

[37절]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하리라.” 주의 재림의 때에 깨어 있는 자들은 복되다. 주께서는 우리를 자리에 앉히시고 친히 띠를 띠고 우리를 대접하실 것이다. 이것은 너무 황송한 말씀이다. 어떻게 영광의 주께서 우리를 위해 그런 대접을 하신다는 것인가? 그러나 그는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것은 분명히 그의 성실한 종들과 성도들에게 주시는 큰 복의 약속이며 위로의 말씀이다.

[38절] 주인이 혹 이경에나 혹 삼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의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주인이 혹 이경에나 혹 삼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의 이같이 하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유대인들은 해 질 때부터 해 뜰 때까지의 밤을 넷으로 나누어 일경, 이경, 삼경, 사경이라고 불렀다. ‘이경’은 오후 9시부터 자정까지를 가리키고 ‘삼경’은 자정부터 새벽 3시까지를 가리킨다. 주인이 결혼식에 갔다가 한밤중에 올지라도 종들이 깨어 있다가 주인을 맞으면 복되듯이, 주께서 재림하실 때에 그를 기다리다가 맞이하는 종들과 성도들은 복되다. 주께서는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고 약속하셨다(계 22:20). 그 약속은 신실하다. 그러므로 비록 그가 늦게 오신다고 느껴질지라도 우리는 끝까지 깨어 있어야 하며 성실히 그를 믿고 섬기며 따르고 우리에게 맡겨진 일들에 충성해야 한다.

[39절] 너희도 아는 바니 집 주인이 만일 도적이 어느 때에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너희도 아는 바니 집 주인이 만일 도적이 어느 때에 이를 줄 알았더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그는 자신의 재림을 도적에 비유하셨다. 도적이 집주인이 알 수 없는 시간에 침입하듯이, 그는 우리가 예측하지 못한 시간에 돌연히 다시 오실 것이다. 그러므로 항상 깨어 준비하는 자가 재림의 주님을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는 것이다.

[40절]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 주님의 교훈의 요지는 모든 성도들이 주님의 재림을 확신하고 예비하고 있으라는 것이다. 그것은 성도들의 성실한 신앙생활과 봉사생활을 뜻한다. 주께서는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이다. 그의 약속은 결코 헛되지 않다. 그러나 그 시간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알려고 할 필요가 없다. 그가 확실히 다시 오신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신앙이나 해이함에 떨어지지 말고 주의 재림을 확신하고 예비하며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봉사생활을 하자.

41-48절, 지혜 있는 청지기가 되라

[41-42절] 베드로가 여짜오되, 주께서 이 비유를 우리에게 . . . .

베드로가 말하였다. “주께서 이 비유를 우리에게 하심이니이까? 모든 사람에게 하심이니이까?” 주께서 말씀하셨다.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주님의 말씀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었다. 그들은 지혜 있고 충성된 청지기와 같이 신구약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모든 뜻을 다 설교하고 가르쳐야 한다. 그것이 깨어 주의 재림을 준비하는 태도이다.

그러나 목사와 교인들은 함께간다. 목사가 어떠하냐에 따라 그런 유의 교인들이 모인다. 세속적인 목사들에게는 세속적인 교인들이 모여들 것이다. 오늘날 교회는 부패되어서 교인들이 부담 없는 신앙생활, 편안한 신앙생활을 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것은 곧 해이한 신앙생활이며 세속화된 신앙생활이다. 그것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과 반대된다. 성경은 우리가 주의 재림의 날이 가까울수록 더욱 더 권면하여 모이기를 힘써야 한다고 가르쳤다(히 10:23-25).

[43-44절]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저에게 맡기리라.” 주께서 다시 오실 것인데, 그때 그는 끝까지 깨어 그를 기다리며 맡겨진 일에 충성하는 목사들에게 복을 주실 것이며 자기의 모든 소유를 그들에게 맡기실 것이다. 이것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 주께서는 그의 충성된 종들의 충성된 사역들에 대해 좋은 것으로 보상해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주의 종들은 주의 약속을 믿고 세상에서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주의 일에 더욱 충성해야 할 것이다.

[45-46절] 만일 그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만일 그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노비를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게 되면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이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신실치 아니한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주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깨어 자기가 맡은 일에 충실하지 않고 오히려 교인들을 학대하고 먹고 마시고 취했던 종들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엄히 때린다’는 원어(디코토메세이)는 ‘여러 조각들로 자른다, 극히 엄한 벌을 내린다’는 뜻이다. ‘신실치 아니한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라’는 원어는 ‘불신자들이 받을 몫을 주리라’는 뜻이다. 악한 종들은 극히 엄한 벌을 받고 불신자들과 함께 취급될 것이다.

[47-48절]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주님의 심판은 공정할 것이다. 불성실하고 악한 일꾼들은 그들이 가진 지식의 정도에 따라 그리고 그들이 받은 책임의 정도에 따라 벌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 대해 많이 알면서도 행하지 않은 자들은 잘 몰라서 행하지 못한 자들보다 더 큰 벌을 받을 것이다. 큰 책임을 가지고도 충성치 못한 자는 작은 책임을 가진 자보다 더 큰 벌을 받을 것이다. 직분이 크면 책임도 커진다. 그러므로 직분자는 말과 행실에 있어서 일반 성도보다 더 나은 모범과 열심을 보여야 할 것이다.

목사들은 지혜롭고 충성된 청지기처럼 신구약성경을 적절하게 전하고 가르쳐야 한다. 모든 성도는 다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주의 재림을 맞이할 준비를 하며 항상 깨어 성실한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49-53절, 불을 던지러 오심

[49절]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 . . .

예수께서는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라고 말씀하셨다. 주께서 의미하신 불은 무엇인가? 주께서는 불을 땅에 던지러 오셨다고 말씀하셨고 이 불이 아직 땅에 붙지 않았다고 암시하셨다. 이 불은 복음 전파를 통한 영혼 구원 운동의 불일지도 모르나, 문맥상 복음으로 인해 일어나게 될 분쟁의 불을 가리킨 것 같다. 복음은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을 나누며, 이 때 진리와 비진리, 의와 불의, 성령과 악령의 싸움이 있다. 그것은 불가피한 현상이다. 또 이 싸움은 때때로 핍박으로 나타난다. 신자는 믿음 때문에 세상의 미움과 핍박을 받는다.

[50절]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 . . .

주께서는 또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고 말씀하셨다. 그가 받으실 세례란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가리켰다. 그는 성경 다른 곳에서 ‘세례’라는 말을 그런 뜻으로 사용하신 적이 있다. 마가복음 10:38,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그의 답답하심은 십자가의 고난에 대한 그의 인간적 마음의 고통과 더불어 그 고난을 통해 아버지의 명하신 구원의 일을 이루시려는 그의 간절한 소원을 나타낸다.

[51-53절]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로라. 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아비가 아들과, 아들이 아비와, 어미가 딸과, 딸이 어미와, 시어미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분쟁하리라.”

평강의 왕이시며(사 9:6)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는(마 11:28) 주께서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것이 아니고 분쟁을 주려 왔다”고 말씀하신 뜻이 무엇인가? ‘분쟁’이라는 원어(디아메리스모스)는 ‘분열, 불화’를 뜻한다. 그것은 진리와 비진리, 믿음과 불신앙, 구원과 멸망의 분열과 불화를 가리킬 것이다. 하나님과 사탄, 의와 불의는 화합할 수 없다. 하나님의 진리가 선포되면 항상 그 진리를 따르는 자와 그 진리를 거부하는 자로 나뉘는 것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자들은 적다(마 7:13). 믿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나, 믿지 않는 자는 정죄를 받을 것이다(막 16:16).

그것이 복음의 성격이다. 복음은 분열을 가져온다. 복음은 사람들을 둘로 나눈다. 그것은 믿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로 나누는 것이다. 복음은 때때로 집안 식구들을 둘로 나누며 신앙 문제로 서로 갈등하게 만든다. 그 나뉨과 갈등은 불가피한 것이다. 52절과 53절에 ‘분쟁하리라’는 원어(디아메리스데세타이)는 ‘나뉘리라, 불화하리라’는 뜻이다.

그러나 복음으로 인한 갈등은 가정복음화의 시작과 과정인 경우가 많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우리 가족들이 결국 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며 구원을 받아 영원히 나누어지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다가 영원한 영광의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가족적 구원이다. 사도행전 16:31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했다. 이와 같이 복음으로 인한 갈등은 사회복음화와 세계복음화를 이룬다.

주 예수께서 던지신 복음의 불, 구원의 불이 우리의 가슴 속에 불타오르기를 원하자. 이 불로 인해 갈등과 분열, 또 심지어 핍박이 우리와 우리 주위에 있을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거나 낙심하거나 위축되지 말고 그 싸움이 마침내 구원의 확장으로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자.

54-59절, 이 시대를 분별하라

[54-56절]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구름이 서에서 . . . .

주께서는 또 무리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구름이 서에서 일어남을 보면 곧 말하기를 소나기가 오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고 남풍이 붊을 보면 말하기를 심히 더우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니라.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변할 줄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변치 못하느냐?” 주께서는 사람들이 날씨와 기후를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징조를 분별치 못한다고 책망하셨다. 그것은 자신이 메시아로 온 것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함을 말씀하신 것이라고 본다.

예수께서 메시아라는 사실은 확실한 많은 증거들로 증거되었다. 누가복음 7장에 보면, 주께서는 세례 요한이 옥중에서 그의 제자들을 보내어 질문한 질문에 대답하시면서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말씀하셨다(눅 7:22).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신 증거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거부하였고 그들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비난할 거리를 찾았고 죽이려 하였다. 그들은 메시아 시대의 징조를 분별치 못하는 무지한 자들이었다.

[57절] 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치 아니하느냐?

주께서는 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치 아니하느냐?”고 말씀하셨다.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하나님의 진리는 ‘옳은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악됨을 인정하고 죄에서 돌이키고 죄를 떠나야 하며, 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환영하고 믿고 의지해야 한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시라는 사실은 확실한 많은 증거들로 증거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옳은 것을 알지 못하였다.

[58-59절] 네가 너를 고소할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에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네가 너를 고소할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에 길에서 화해하기를(아펠라크다이 ἀπηλλάχθαι)[놓여나기를] 힘쓰라. 저가 너를 재판장에게 끌어가고 재판장이 너를 관속(官屬)에게 넘겨주어 관속(官屬)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네게 이르노니 호리라도[조금이라도] 남김이 없이 갚지 아니하여서는 결단코 저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이 말씀은 세상에서도 적용될 수 있는 말씀이지만, 특히 우리가 아직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기 전에, 아직 우리의 목숨이 끝나기 전에, 아직 마지막 심판의 날이 오기 전에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함으로써 하나님과 화목해야 할 것을 암시한다. 그렇지 못하면 우리는 우리의 죄값을 완전히 갚기 전에는 영원한 감옥인 지옥에서 나올 수 없을 것이다. 실상 이 말씀은, 사람이 자기 힘으로는 자신의 죄값을 다 갚을 수 없기 때문에 영원한 지옥 형벌을 피할 수 없음을 뜻한다. 그러나 죄인들에게 아직 기회가 있다. 지금은 아직 은혜받을 만한 때이며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때이다.

54절로 59절까지에 나타난 주님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메시아 시대를 분별하여 성경에 증거된 역사적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확실히 알자. 신약성경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을 만한 확실한 많은 증거들로 증거하였다. 사람이 자기 마음의 문빗장을 걸어 잠그고 있지만 않다면, 그는 신약성경에 증거된 예수 그리스도를 확신하고 구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둘째로, 죄인들은 아직 길에 있을 때 하나님과 화목해야 한다. 아직 세상의 종말이 오지 않았고, 아직 구원의 문이 열려 있고, 아직 회개하고 믿을 기회가 있을 때, 그들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음으로써 하나님과 화목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13장: 회개치 않으면 망함

1-5절, 회개치 않으면 망함

[1절] 그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 . . .

그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고하였다. 아마 이 갈릴리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올라와 제사하던 중에 로마 군인들에 의해 체포되는 과정에서 죽임을 당하므로 그들의 피가 그들의 제물에 섞였던 것 같다. 그들은 어떤 큰 죄를 범한 자들이었을 것이다.

[2-3절]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 . . .

예수께서는 대답하셨다.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하나님께서 큰 죄인들을 특별한 방식으로 벌하시는 경우들도 있으나, 오히려 참으시고 내버려두시는 경우들도 많이 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의 당한 재난을 보고 저가 큰 죄를 지었다고 성급히 잘못된 결론을 내리는 것은 매우 조심해야 할 일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당한 재난을 우리 자신에게 적용하여 교훈을 삼고 우리 자신을 점검하고 회개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이것이 주님의 교훈의 중심이다. 구원은 결코 회개 없이 받는 구원이 아니다. 회개는 죄를 깨닫고 버리는 것이다. 구원은 반드시 회개를 동반한 믿음을 통하여 받는다. 회개는 구원에 절대필수적이다. 죄를 회개치 않고서는 아무도 구원을 받지 못한다. 사람이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할 수밖에 없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5장 3절은 바르게 말하기를, “회개는 모든 죄인들에게 매우 필수적이어서 아무도 그것 없이는 용서를 기대할 수 없다”고 하였다.

[4-5절]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시온산 기슭에는 ‘실로에’ 혹은 ‘실로아’라는 이름의 작은 샘이 있다. 거기에 있던 망대가 무너지므로 열여덟 사람이 치어죽었다. 그들은 아마 샘물에 몸을 씻으려고 왔다가 그런 일을 당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사람들이 보기에 우연처럼 보이는 일이었지만, 세상의 모든 일들은 다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 가운데서 일어나는 것이다. 오늘날에 자동차 사고, 열차 사고, 비행기 사고, 화재, 붕괴 사고 등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는데, 그것도 다 그러하다.

우리는 이런 일들로 죽은 자들이 우리보다 죄가 더 많아서 그러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오직 그런 일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회개를 교훈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필립 헨리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회개에 대해 많이 듣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매우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그래서 만일 내가 강단에서 죽는다면 회개를 설교하다가 죽기를 원하며, 만일 내가 강단 밖에서 죽는다면 그것을 실천하다가 죽기를 원한다”라고 했다.71) 모든 사람은 다 회개해야 한다.

회개는 모든 사람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회개하지 않는 자는 다 멸망하고 만다. 사람은 누구나 다 죄를 회개해야 구원을 받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에 어긋한 모든 죄를 다 깨닫고 다 버리자.

6-9절, 열매를 못 맺는 무화과나무의 비유

[6절]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 . . .

예수께서는 비유로 말씀하셨다.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하였다. 이 비유는 앞에서 하신 회개에 대한 말씀과 연결된다. 무화과 열매는 회개의 열매를 가리킨다. 이것은 예수님 전에 일했던 세례 요한도 강조했던 내용이었다. 그는 무리에게 말하기를,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 . .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고 하였다(눅 3:7-9).

회개의 열매는 죄악된 행실을 버리고 경건하고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사는 것을 말한다. 세상은 하나님보다 돈과 쾌락을 더 사랑하고 악하고 음란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단지 경건한 말이나 모습이 아니고, 우리의 마음의 변화와 변화된 삶이다. 좋은 열매는 경건하고 선한 삶을 가리킨다.

[7절] 과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 . . .

주인은 과원지기에게 말하였다. “내가 삼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 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 과원지기는 말씀의 사역자들을 가리킨다. 3년은 하나님께서 각인을 위해 정해두신 기간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기간 동안 그가 회개하기를 기다리신다. 3년은 짧지 않은 기간이다.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가 열매를 맺지 않을 때 땅만 버리도록 계속 그를 그냥 버려두지는 않으실 것이다. 열매를 못 맺는 무화과나무가 땅만 버리듯이, 회개치 않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악영향만 미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그를 심판하실 것이다.

[8-9절] 대답하여 가로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 . .

과원지기는 대답하였다.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 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이어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 버리소서.” 과원지기는 1년의 기간을 더 허락해주시면 그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특별히 관리해보겠다고 요청하였다. 그 특별관리란 그를 향한 더욱 강력한 말씀의 교훈과 책망과 훈련을 가리킬 것이다. 거기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실 육체적, 환경적 시련도 포함될 것이다. 연장된 1년 후에는 두 가지 결과가 남을 것이다. 회개의 열매를 맺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받고 천국에 넉넉히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회개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자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영영히 버림을 당할 것이다.

고린도전서 6:9-10은,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 말했다. 또 갈라디아서 5:19-21은,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라고 말했다.

회개는 열매로 나타난다. 그것은 변화된 삶이다. 불경건과 부도덕에서 경건과 하나님 사랑, 거룩, 의, 선, 진실로 변화된 삶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위해 정하신 기간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시며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신다. 그러나 그 기간이 끝나면 마지막 심판이 있고 천국과 지옥으로 나뉘게 될 것이다.

10-17절, 18년 동안 꼬부라진 병자를 고쳐주심

[10-11절]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18년 동안을 . . . .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셨다. 그는 아직 구약의 안식일을 지키셨다. 장차 구약의 토요일 안식일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고 폐지되며 하나님의 섭리 안에 신약의 주일로 바뀔 것이다. 또 그는 회당 집회에 참석하셨다. 회당은 바벨론 포로 생활 이후에 생긴 유대인들의 예배당이었다. 예수께서나 사도들이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신 때는 아직 구약 교회와 신약 교회가 구별되기 전이며 아직 유대교와 기독교가 명확히 나뉘기 전이었다.

그때 거기에 18년 동안을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었다. ‘귀신들려 앓으며’라는 원어(프뉴마 에쿠사 아스데네이아스)는 ‘질병의 영을 가지고 있었으며’라는 뜻이다. 이것은 이 여인이 18년 동안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한 것이 귀신의 활동이었음을 나타낸다. 악령들은 세상에서 불경건하고 악하고 불행한 일들의 배후에 역사하고 있다. 에베소서 2:2는,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이라”고 말한다. 이 여인은 오랫동안 이 질병으로 고생하였다. 그러나 이제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고침을 받을 때가 왔다.

[12절]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 . . .

예수께서는 그를 보시고 부르셨다.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느니라.” 그 여자가 소원하기 전에 예수께서는 그를 보시고 부르셨다. 물론 이 여자가 마음 속으로 자신의 병고침을 소원했을 것이다. 그는 아마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병고침을 요청할 용기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여하튼 예수께서는 나인성 과부의 죽은 외아들을 살려주셨던 경우처럼 요청받지 않으신 때에 긍휼을 베푸셨다. 많은 경우에는 그가 병자들의 소원을 들으시고 긍휼을 베푸셨으나 이 경우는 그가 말로 표현된 소원을 들음이 없이 긍휼을 베푸신 것이었다.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느니라.” ‘여자여’라는 말(귀나이)은 성인 여자를 부르는 일반적 호칭이었던 것 같다(요 19:26). ‘네가 네 병에서 놓였느니라’는 말씀은 병을 치료하시는 그의 권위있는 말씀의 선언이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을 때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셨던 것과 같은 권위있는 선언이었다. 그 권위 있는 말씀은 곧 그의 신성(神性)의 영광을 드러내었다.

[13절] 안수하시매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

예수께서 말씀하시고 안수하실 때 그 여자는 곧 몸을 폈다. 18년 동안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했던 그의 몸은 즉시 펴졌다. 하나님의 능력은 눈으로 볼 수 있게 전달되었다. 예수님의 치료는 즉각적이었다. 예수께서 중한 열병으로 앓았던 시몬의 장모를 고쳐주셨을 때도 그가 곧 일어났었고(눅 4:39) 친구들이 데려왔던 중풍병자를 고쳐주셨을 때도 그가 곧 일어났었다(눅 5:25). 이 경우도 그 여자는 곧 몸을 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을 보면, 그 여자에게 믿음이 있었던 것 같다. 오랫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되었던 이 여인은 이제 그 매임과 그 질병에서 해방되었다. 이 일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의 영광이 증거되었다.

[14절]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고치시는 것을 분내어 . . . .

회당의 책임자인 회당장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고치시는 것을 분내어 무리에게 말했다.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말 것이니라.” 그의 태도는 겉보기에는 안식일을 존중하며 철저히 지키는 것 같았으나, 그에게는 무지와 완악함이 있었다. 그는 방금 예수께서 메시아이신 증거를 보았으나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완악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회당 예배를 인도하는 그의 수고는 무의미하였다. 사람의 종교적 직분과 활동은 그의 내면적 경건과 직접 관계가 없는 것 같다.

[15-16절]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외식하는 자들아 . . . .

주께서는 대답하셨다.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나 마구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그러면 18년 동안 사단[사탄]에게 매인 바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

그 회당장과 그와 같은 생각을 가진 자들은 ‘외식하는 자들’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안식일에도 자기들의 소나 나귀를 마구간에서 풀어내어 물을 먹이면서 이 불쌍한 여인을 그 오랫동안의 사탄의 매임에서 풀어주는 것을 잘못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탄은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성경은 교회에서 제명출교되는 것을 사탄에게 내어준다고 표현하고(고전 5:5) 또 우리가 예수 믿기 전에 흑암의 권세에서 살았다고 표현하고(골 1:13) 또 온 세상은 악한 자 곧 사탄 안에 처해 있다고 표현하였다(요일 5:20). 그 여인은 소나 나귀보다 귀한 인간 영혼이었고 더욱이 ‘아브라함의 딸’ 곧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었으나 오랫동안 사탄이 준 질병으로 고생하였다. 그러나 이제 그는 고침을 받았고 사탄에게서 놓임을 받았다.

[17절]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매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 . . .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자,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였고 모든 사람들은 그의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였다. ‘그의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들’이란 방금 전에 그가 병을 고치신 일과 그의 바르고 지혜롭고 은혜로운 말씀들을 가리킬 것이다.

이 사건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확신하자. 우리는 과거에 죄와 사탄에게 매여 있었으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구원과 자유함을 얻었다.

18-21절, 하나님 나라를 비유하심

[18-19절] 그러므로[또 그는]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가 . . . .

그러므로[또 그는](전통본문)72)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꼬? 내가 무엇으로 비할꼬? 마치 사람이 자기 채전[정원]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 천국은 하나님의 통치하시는 세계이다. 그것은 사탄과 죄와 죽음의 권세가 없는 세계이다. 그것은 병고침을 받았던 한 여인과 같이 죄인들이 사탄의 속박에서 해방되어 들어가는 세계이다. 비록 이 세상 사는 동안에는 마귀의 시험과 장난이 없지 않지만, 그것까지도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 안에 있으며 신자는 그것을 능히 이긴다(롬 8:35-39). 천국은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목표이며 인류 역사의 한 종착지이다. 그것은 성도들의 소망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정원에 심기운 겨자씨 한 알에 비유하셨다. 그는 심기운 겨자씨 한 알이 자라서 큰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깃들일 정도가 되듯이, 하나님의 나라가 작은 세력으로 시작하지만 점점 자라고 확장되며 마침내 크게 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과연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나라 곧 구원받은 영혼들로 구성된 신약교회는 매우 작은 무리로 시작하여 점점 자라 지금은 온 세계에 가득한 단체가 되었다.

[20-21절] 또 가라사대,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으로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으로 비할꼬?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하나님의 나라는 또 누룩에 비유되었다. 누룩은 보통 악과 그 영향력을 비유하지만 여기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비유되었다. 뱀이 일반적으로 사탄을 비유하지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뱀같이 지혜로워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이(마 10:16), 그는 누룩을 ‘하나님의 나라’에 비유하셨다. 여기에서 누룩은 퍼져나가는 것, 즉 확장성을 가리켰다. 누룩을 반죽된 가루 서 말 속에 두면 반죽 전체가 부풀게 되는 것처럼, 미미하게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는 마침내 온 세계에 퍼져 거대한 교회를 이루며 온 세계를 새롭게 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작게 시작되었으나 점점 켜져서 마침내 온 세상에 퍼지는 큰 나라가 되었다. 그것이 기독교 구원 운동과 교회 운동이다. 그것은 인간적 계획과 수단방법으로 무엇을 이루려는 운동이 아니다. 인류의 구원운동은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 가운데 시작되고 점점 확장되어 온 세계에 충만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얻고 성경 교훈대로 좌우로 치우치지 말고 바르게 믿고 살면서 천국을 사모하며 이 복음을 만민에게 전파하자!

22-30절, 구원받는 자와 제외되는 자

[22-24절] 예수께서 각 성 각 촌으로 다니사 가르치시며 . . . .

예수께서 각 성 각 촌으로 다니며 가르치시고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셨다. 우리도 교회에 모여 오는 사람들에게뿐 아니라, 어디서든지 기회 있는 대로 가서 말씀을 가르쳐야 할 것이다. 어떤 사람이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라고 물었다. 그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그는 이 구절을 포함하여 본문 전체에서 몇 가지 진리를 말씀하셨다.

첫째로, 구원의 문은 좁은 문이며 우리가 그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야 한다. 그 좁은 문은 예수님을 가리킨다. 그는 하나님의 보내신 유일한 구주이시다. 예수님 외에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여 천국으로 인도할 다른 구주가 없다. 요한복음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느니라.” 사도행전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디모데전서 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둘째로, 구원에서 제외될 자들이 많을 것이다. 마태복음 7:13-14에서도 그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고 말씀하셨다.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만인구원설은 거짓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멸망할 것이다. 노아 시대에 노아의 가족 8명 외에 모든 사람들은 다 홍수로 멸망하였다. 이스라엘 나라의 역사에도 여호수아나 갈렙이나 다윗같이 경건하고 의롭게 산 자들은 소수이었다. 오늘날도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진지하게 믿고 따르는 자들은 적은 무리인 것 같다. 많은 이들이 멸망의 길로 가고 있다.

[25-27절]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저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그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하리라.”

셋째로, 구원의 문은 닫힐 때가 올 것이다.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을 때가 올 것이다. ‘집 주인’은 예수님 자신을 가리켰다. 예수님은 구원의 문 곧 천국의 문을 열고 닫는 권세를 가지고 계신다. 그는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 이’(계 3:7)이시다. 천국문은 지금 열려 있으나 항상 그러하지는 않을 것이다. 문이 닫힐 때가 있다. 문이 한 번 닫힌 후에는 아무도 그리로 들어갈 수 없다. 마치 노아 방주의 문이 닫힌 후에는 아무도 그 속으로 들어갈 수 없었던 것과 같다.

넷째로, 구원받지 못하는 자들이 구원받지 못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집주인은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고 말하였다. ‘어디로서’라는 말은 문자적 의미는 장소를 가리키지만, 담겨진 의미는 근원을 가리킨다. 물론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창조물이지만 범죄함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으므로 우리가 천국 가려면 다른 근원이 필요하다. 사람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 3:3, 5). 또 주인은 그들을 ‘행악하는 모든 자들’이라고 표현하셨다. 행악자는 천국에서 제외될 것이다. 사람이 구원받지 못하는 이유, 영원한 멸망을 받는 이유는 회개치 않은 죄 때문이다. 회개는 거듭남의 증거이다. 요한일서 3:10,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사람은 거듭나서 죄를 회개해야 구원을 얻을 것이며 구원받은 자는 의와 사랑으로 그 구원을 증거할 것이다.

다섯째로, 구원받지 못한 자들은 주님을 떠날 수밖에 없다. 구원받은 자들은 하나님과 함께 거할 것이지만, 구원받지 못한 자들은 하나님에게서 떠나야 한다. 구원받은 자들과 구원받지 못한 자들 간의 분리는 불가피하다. 죄인들은 하나님과 함께, 천국에서 살지 못한다. 시편은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유하지 못하며 오만한 자가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하리이다. 주는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며 거짓말하는 자를 멸하시리이다”라고 말씀하였다(시 5:4-6).

[28-29절]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석하리니.”

여섯째로, 구원받지 못한 자들은 큰 불행을 당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선조들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들, 그리고 동서남북에서 온 많은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다. 그들은 천국 잔치의 즐거움에 참여할 것이다. 그러나 구원받지 못한 자들은 밖으로 쫓겨나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분리되고 더 이상 그의 작은 긍휼도 받지 못할 것이며, 그들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슬픔과 고통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영원한 지옥 형벌을 가리킨다.

[30절]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 . . .

예수께서는 또 “보라 나중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일곱째로, 먼저 복음을 받은 자들도 멸망할 수 있다. ‘나중된 자’는 이방인을 가리키며 ‘먼저된 자’는 유대인을 가리키겠지만, 이 말씀은 또한 먼저 믿은 자와 나중에 믿은 자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구원에는 순서가 없다. 복음을 먼저 들었으나 구원받지 못하는 자도 있고, 복음을 나중에 들었으나 구원받는 자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좁은 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는가? 거듭났는가? 우리는 자신의 구원을 점검하고 선행으로 그것을 확인하자. 구원의 문이 닫힐 때가 올 것이며 많은 이들이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을 것이다.

31-35절, 예수님을 죽이려 함

[31절] 곧 그때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이르되 나가서 . . . .

곧 그때에[그 날에](전통본문)73)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 말하였다.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 여기 헤롯은 헤롯 대왕의 아들 분봉왕 헤롯 안디바로서 당시 갈릴리 지방을 관할하고 있었다(눅 23:7). 예수께서는 아직 갈릴리 지방에 계셨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피신시키려 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들도 예수님을 환영치 않으므로 배척한 것인지 분명치 않으나, 헤롯이나 당시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지 않고 배척했다. 그러나 주를 진실히 믿는 자들은 그를 영접하며 가까이 할 것이다.

[32절] 가라사대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 내가 . . . .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예수님은 세상 권력자를 두려워하지 않으셨다. 그는 선지자적 권위를 가지고 헤롯을 ‘저 여우’라고 부르셨다. 여우라는 말은 그 간교함과 잔인함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오늘과 내일’은 ‘명확하지 않은 얼마간의 기간’을 가리킨 것 같다. 즉 ‘헤롯의 죽이겠다는 위협 속에서도 내가 얼마 동안 좀더 나의 일을 계속할 것이다’라는 뜻이다. ‘제3일’은 ‘얼마 있지 않아서 곧’이라는 뜻일 것이다. ‘[내가] 완전하여지리라’는 원어(텔레이우마이)는 ‘내가 완전하여지리라’는 뜻 외에 ‘내가 목표에 이르리라’(NASB, NIV)는 뜻이 있다. 그것은 그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그의 대속(代贖)의 사명을 다 이루실 것을 의미했을 것이다. 그는 이런 의미에서 십자가에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다(요 19:30).

[33절]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 . . .

예수께서는 또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죽으실 것을 아셨다. 그러나 그는 그런 죽음의 위험 앞에서도 가셔야 할 사명의 길을 가셨다. 바울도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말했다(행 20:24). 요한계시록에 보면, 주 예수께서 서머나 교회의 목사에게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말씀하셨다(계 2:10).

[34절]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예루살렘은 많은 선지자들을 죽이고 그에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쳤었다. 이제도 헤롯만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려 한 것이 아니고 예루살렘 성의 사람들, 특히 유대 지도자들은 그를 죽이려 하였다.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여러 번 모으려 하였다’는 말씀은 예수께서 바로 이스라엘의 목자이심을 증거한다. 이스라엘의 목자이신 그는 여러 번 이스라엘을 품으려 하셨지만, 이스라엘은 원치 않고 그를 거절했다.

구약교회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신약교회도 타락하고 배교적이었던 때가 종종 있었다. 중세시대의 로마 천주교회는 하나님의 신실한 많은 종들과 성도들을 고문하고 죽임으로써 하나님을 대적하는 단체가 되었었다. 그러나 천주교회는 과거의 그 죄를 뉘우치고 회개한 적이 없다. 천주교회의 기본적 교리들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오늘날 많은 개신교회들은 또다시 타락하여 배교(背敎)의 길을 걷고 있다. 그들이 포용하고 있는 자유주의 신학들은 역사상 가장 이단적이다. 그러므로 예수님 당시의 교회처럼, 오늘날 교회들은 또다시 하나님의 신실한 종들과 보수 신앙의 증언을 비난하고 정죄하고 있다. 많은 교회들의 신앙의 순수성은 점점더 약화되고 있는 것 같다.

[35절]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내가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그는 예루살렘 성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하셨다. 이 예언은 우리가 아는 대로 주후 70년 로마 장군 디도의 군대가 예루살렘에 들어왔을 때 성취되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죽였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었다. 또 그는 예루살렘의 멸망의 예언과 더불어 자신의 다시 오심에 대해 말씀하셨다.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란 예수님의 재림의 때를 가리켰을 것이다. 사도신경의 고백대로,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려고 다시 오실 것이다. 히브리서 10:37, “잠시 잠깐 후에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요한계시록 1:7,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31절로 35절까지의 교훈은 무엇인가? 우리는 예수님과 그의 교회를 거절하고 핍박하고 죽이는 자가 되지 말자. 예수께서 사랑으로 부르실 때 그의 음성에 응답해 그에게로 나아오자. 거기에 참 평안과 영생이 있다. 또 우리는 세상의 핍박자들을 두려워 말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과 직분을 완수하자.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일을 다 이룰 때까지 우리는 어떤 환경 여건 속에서도 변함 없이 충성해야 할 것이다.

 

14장: 자신을 버리고 주를 따르라

1-6절, 고창병 환자를 고쳐주심

[1절] 안식일에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한 두령의 집에 떡 . . . .

안식일에 예수께서는 바리새인의 한 우두머리의 집에 떡을 잡수시러 들어가셨다. 그는 그 바리새인의 식사 초대를 거절치 않으셨다. 그는 죄인들과 접촉하기를 꺼리지 않으셨다. 그것은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그 영혼을 구원하는 기회가 되기 때문일 것이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고 병자들에게 필요하듯이, 의인들에게는 구주가 필요치 않고 죄인들에게 필요하기 때문이다(눅 5:31).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엿보고 있었다. ‘엿보다’는 원어(파라테레오 παρατηρέω)는 ‘자세히 주시하다’는 뜻이다. 사람이 상대방을 이해하고 사랑한다면 그를 환영하고 영접할 것이지만, 사람이 그를 오해하고 시기하고 미워한다면 그를 거부하고 주시하고 경계할 것이다. 바리새인들에게는 예수님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마음 대신에 오해하고 시기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많이 있었던 것 같다.

[2-4절] 주의 앞에 고창병 든 한 사람이 있는지라. 예수께서 . . . .

거기에 주님 앞에 고창병 든 한 사람이 있었다. 고창병(dropsy)은 수종(水腫) 혹은 부종(浮腫)이라고 하는데 몸이 붓는 병이다. 어떤 사람이 예수께 안식일에 그 병자를 고쳐주실 것인지 질문했던 것 같다. 예수께서는 대답하시며 율법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안식일에 병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고 물으셨다. 그들이 잠잠하자, 예수께서는 그 사람을 데려다가 고치시고 보내셨다.

얼마 전에 예수께서는 18년 동안 귀신들려 앓으며 몸이 꼬부라져 펴지 못하던 여자를 역시 안식일에 고쳐주셨는데(눅 13:15-16) 이번에는 고창병 환자를 고쳐주셨다. 주께서 고창병 환자를 고쳐주신 것은 그의 크신 긍휼 때문이며 또 그가 신성(神性)을 가진 구주이심을 증거한 것이었다. 안식일이라는 종교적 규례를 지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그 뜻대로 사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하나님은 인애(仁愛)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시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신다(호 6:6). 바리새인들은 종교 의식만을 중시하는 무지한 외식자들이 되었다. 그러나 종교적 의식이나 형식보다 의롭고 선하고 진실한 삶이 훨씬 더 중요하다.

[5-6절]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 . . .

예수께서 또 그들에게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나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시니 그들은 이에 대하여 대답하지 못하였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행위의 정당함을 그렇게 표현하셨다. 그는 지난 번 사건에서도,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나 마구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그러면 18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 바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라고 말씀하셨었다(눅 13:15-16).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일은 이렇게 상식적 추론으로도 그 정당성이 이해되는 일이었지만,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을 거룩히 지킨다는 생각 때문에 보다 더 중요한 일을 놓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도 신앙 생활의 더 중요한 내용, 즉 경건과 도덕성을 중시하지 아니하고 단지 종교적 형식만을 붙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안식일 혹은 주일을 지킨다는 생각 때문에 영혼을 구원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돌아보는 더 중요한 일을 빠뜨리거나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된다. 우리는 종교적 형식이나 규례보다 하나님의 도덕적 명령 즉 의와 선과 진실을 더 중요하게 여기며 그것들을 실천해야 한다.

7-11절, 자기를 낮출 것

[7-10절] 청함을 받은 사람들의 상좌 택함을 보시고 저희에게 . . . .

예수께서는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상석 택함을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셨다.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상좌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너와 저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 주라 하리니 그때에 네가 부끄러워 말석으로 가게 되리라.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말석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 영광이 있으리라.” 상석에 앉으려 하는 마음은 일종의 이기심과 명예심이다. 그러나 주께서는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 상석에 앉으려 하지 말고 말석에 앉으라고 교훈하셨다. 그것은 우리가 사람들 가운데서 겸손하게 처신하라는 교훈이시다. 그것은 세상에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존귀케 되는 길이기도 하다.

[11절]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 . . .

예수께서는 또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말씀하셨다. 겸손은 하나님께서 성경에 명하신 성도의 매우 중요한 덕이다. 잠언 18:12는,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고 말했고, 베드로는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고 말했다(벧전 5:6). 교만은 다툼의 원인이기도 하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사람을 낮아지게 만들지만, 사람이 겸손하면 다른 사람과도 화평케 되며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높임과 사랑을 받는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으려 하지 말고, 오히려 자신을 낮추자. 그것이 마땅하며 또 그것이 그가 존귀케 되는 길이기도 하다.

12-14절, 어려운 자들을 대접할 것

[12절]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 . . .

예수께서는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富)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라.” 선을 베푼 후 상대방에게서 그 선의 갚음을 받으면 먼저 베푼 선이 더 이상 칭찬과 상을 받을 선이 되지 못할 것이다.

[13-14절]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잔치를 배설하거든[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불구자들]과 [발을]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 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우리는 세상에서 단순히 베푸는 생활을 힘써야 한다. 그러면 의인들의 부활의 날에 하나님께로부터 칭찬과 보상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보물을 하늘에 쌓는 생활이다(눅 12:33-34).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고 구제하는 것은 하나님께 꾸어 드리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그 선행을 갚아 주실 것이다(잠 19:17). 이렇게 단순히 베푸는 생활은 사람이 내세를 바라볼 때만 가능하다. 내세에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믿고 하나님의 보응과 보상을 바라볼 때, 사람은 이 세상에서 의롭고 정직하고 선하게 살 수 있고 또 다른 사람이 알아주지 않고 심지어 오해와 비난을 받을지라도 낙심하지 않을 수 있다(갈 6:9-10).

우리는 현세의 육신적, 물질적 복만 생각하지 말고 내세에 천국에서의 영육의 영원한 복을 생각하자.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소망하고 그의 뜻과 계명을 즐거이 순종하여 이 세상에서 단순히 모든 사람에게 선을 베풀되, 특히 병약하고 가난한 자들에게 선을 베풀자.

15-24절, 큰 잔치의 비유

[15-17절] 함께 먹는 사람 중에 하나가 이 말을 듣고 이르되 . . . .

함께 먹는 사람들 중에 하나가 이 말을 듣고 말했다.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원문에는 16절 초두에 “그에게 이르시되”라고 되어 있다. 그 식사 자리에서도 예수님의 관심은 단지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고 진리를 가르치시는 일이었다. 주께서는 한 비유를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준비하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다. 이 비유에서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시며 그가 베푼 ‘큰 잔치’는 신약교회로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를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뿐 아니라 세상에 사는 모든 이방인들도 초청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는다. 그것은 성찬 교제이며 성도들 간의 식탁 교제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먹는 즐거움을 누린다. 하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을 그 잔치에 청하셨다. 그는 그 청한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말했다.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주인의 뜻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일꾼으로서 본문에 4번이나 언급되는(17, 21, 22, 23절) ‘종’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 제자들을 상징할 것이다.

[18-20절]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하나는 가로되 나는 밭을 . . . .

초청을 받은 사람들은 다 일치하게 사양하였다. 하나는, “나는 밭을 샀으매 불가불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고 말하였다. 또 하나는,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고 말하였다. 또 하나는, “나는 장가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고 말했다.

그들의 핑계거리는 사람이 세상을 사는데 있어서 필수적인 일들이었다. 성경도 이런 일들에 대해 정죄하지 않고 오히려 장려한다. 그러나 잔치에 초청을 받았던 그들은 먼저 그 잔치에 참여해야 했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일을 앞세우기를 원하신다. 예수께서는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셨다(마 6:33). 이것이 안식일 계명이나 십일조 계명의 정신이다. 성도는 7일 중 하루를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고 나머지 6일을 자신의 일들에 쓰며, 소득의 10분의 1을 하나님께 드리고 나머지 10분의 9를 자신의 일들을 위해 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일을 앞세우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초청을 받은 사람들은 그 주인을 무시하였다. 그들이 그 잔치에 참석한다고 해서 밭의 일을 하지 못하거나 소를 시험하지 못하거나 결혼 생활을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들은 그 초청을 사양하였다. 예수 믿는 자들은 주일을 거룩히 지킨다고 가난해지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안식일을 지키는 자에게는 복된 약속을 주셨다(사 58:14). 믿는 자들은 십일조 헌금을 내기 때문에 가난해지지 않는다. 오히려 십일조 헌금에는 풍성한 복이 약속되어 있다(말 3:10). 그러나 믿음 없는 자는 그 어느 것도 실천할 수 없다.

[21절]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 . . .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말했다.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불구자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이것은 우리의 이웃 사람들 가운데서 육신적으로 혹은 물질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자들을 데려오라는 뜻이다. 건강한 자들과 물질적으로 여유를 가진 자들은 그 주인의 잔치 초청을 거절하였으나, 병약한 자들이나 가난한 자들은 그 초청을 들을 것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물질적으로 가난하고 육신적으로 병약한 자들이 먼저 교회로 인도함을 받고 먼저 천국의 복을 받게 하셨다.

[22-24절] 종이 가로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오히려 . . . .

종이 말했다.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오히려 자리가 있나이다.” 주인이 종에게 말했다. “길과 산울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산울가’라는 원어(프라그모스 φραgμός)는 ‘산울타리 가의 길’을 가리킨다. 여기의 ‘내 집’은 하나님의 나라를 가리키며 현재의 교회를 가리킨다.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는 저절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고 열심히 전도하고 사람들을 강권함으로 된다. 잔치 자리에 오는 것은 바로 회개와 믿음과 순종을 가리킨다. 처음 잔치 초청을 거절하였던 사람들은 그 잔치에 참여하는 즐거움을 빼앗길 것이다.

15절로 24절까지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죄를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고 천국에 들어오라는 하나님의 초청을 거절치 말아야 한다. 우리는 세상일들이 바쁘다고 핑계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 곧 죄를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행하는 일을 세상일들보다 먼저 앞세워야 한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초청을 해야 하고 사람들을 강권하여 하나님의 집을 채워야 한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초청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초청을 거절하는 자들에게 언제까지 연연하지 말고 우리의 초청 대상을 변경하고 확대해야 한다. 우리는 특히 우리 주위에 가난한 자들이나 병약한 자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초청해야 한다. 또 우리는 다른 동네에 있는 사람들도 누구든지 강권하여 하나님의 집을 채워야 한다. 하나님의 집을 채우는 일은 저절로 되지 않는다. 우리 모두는 열심으로 전도하고 영혼들을 강권하여 참된 교회로 인도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복된 잔치 자리로 인도해야 한다.

25-35절,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

[25-27절] 허다한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 . . .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과 함께 갈 때 예수께서는 돌이키시며 말씀하셨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예수님과 함께 간다고 다 그의 제자인 것은 아니었다. 오늘날도 교회에 출석하는 모든 사람들이 다 예수님의 제자는 아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제자와 제자 아닌 자를 분명히 구별하여 말씀하셨다. 그는 그에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그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믿음은 가족 관계를 초월한 절대적 차원의 것이라는 말씀이다.

물론, 주의 말씀은 가족들을 미워하라는 뜻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다른 곳에서 가족을 사랑해야 할 것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에베소서 5: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디모데전서 5:8,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본문에서 ‘미워한다’는 말씀은 하나님께 대한 의무와 가족에 대한 의무가 충돌하거나 하나님의 명령과 가족의 명령이 충돌할 때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택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사용된 것이라고 본다. 우리는 가족의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하고 우리 목숨이 위협 당하는 환경 속에서도 우리는 신앙의 정절과 절개를 지켜야 한다.

신앙은 절대적 차원의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그의 보내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과 영생을 얻는다.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유일한 중보자이시며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는 자이시다. 아무리 사랑스런 가족이라 할지라도 우리에게 영생을 주지는 못한다. 사실상 육신의 생명도 연장시켜주지 못한다. 불치병에 걸린 우리를 도울 수 있는 가족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생명과 구원이시다.

우리가 가족에 대한 의무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예수님을 따르지 못한다면 우리는 구원과 영생을 잃어버릴 것이다. 우리가 육신의 목숨 때문에 하나님을 거역하고 예수님 따르기를 포기한다면 영생을 잃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상황에서도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절대적 차원에서 믿고 순종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참된 제자이며 구원과 영생을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주께서는 우리가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를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십자가를 지고 간다는 것은 현실에서 자기를 부정하며 사는 것을 의미한다. 고난의 현실은 자기 부정의 시험대요 훈련장이다. 성도는 현실에서 자기를 부정하고 주를 따라야 한다. 그것은 주의 말씀과 본을 따라 사는 것을 가리킨다.

[28-30절]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가로되 이 사람이 역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사람은 무슨 일을 하려 할 때 먼저 그 비용을 예산하여 그 일이 가능하다고 판단될 때 시작해야지, 그런 검토가 없이 그냥 시작하면 일을 완수하지 못하고 중도에 그칠 수밖에 없을 것이며 사람들의 비웃음을 당할 것이다.

[31-32절] 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 명으로서 저 이만 명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만일 못할 터이면 저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자신의 군사력이 상대방보다 부족하다고 판단되면 처음부터 전쟁을 시작하지 않고 사신을 보내어 정치적으로 해결하려고 할 것이다. 군사력을 비교해보지 않고 어리석게 전쟁을 일으킬 자는 없을 것이다.

[33절]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예수께서는 또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위의 두 비유가 암시하는 바는, 사람이 자기의 가진 것으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망대를 건립하는 것과 다른 나라와 전쟁하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에 비유되었고, 건축비용을 예산하는 것과 전투력을 비교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모든 소유를 가지고서는 할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것들은 영생을 위해서는 아무 가치가 없다. 사람은 자기의 가진 것으론 구원과 영생을 얻을 수 없다. 시편 49:8은, “저희 생명의 구속(救贖)이 너무 귀하여 영영히 못할 것임이라”고 말한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우리의 가진 것과 힘으로는 불가능한 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을 부정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야 하는 것이다.

버리면 얻는다는 것은 역설적인 진리이다. 우리는 일시적 세상을 버리면 영원한 천국을 얻으며, 잠시 있다가 사라질 세상의 부귀영화를 버리면 썩지도 않고 쇠하지도 않을 영원한 영광의 세계의 행복을 얻는다. 우리는 썩어질 육신의 몸을 버리면 영광스런 부활의 몸을 얻으며, 세상적 기쁨을 버리면 비록 현재는 때때로 주를 위해 눈물을 흘리지만 장차 영원히 눈물 없는 기쁨과 평강의 세계를 얻는다.

[34-35절]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었으면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었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땅에도, 거름에도 쓸데없어 내어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소금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상징하고 소금이 맛을 잃는다는 것은 그들이 성도답게 살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그들이 세상이나 자신을 부정하거나 초월하지 못하고 세상에 얽매이고 자기 욕심에 얽매여 사는 것을 말한다. 그런 자는 실상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세상을 사랑하는 자이며 참된 성도가 아니다. 마태복음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요한일서 2: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가룟 유다는 돈을 사랑하다가 주를 배신하였고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사도 바울을 버리고 떠나갔다(딤후 4:10). 우리는 맛 잃은 소금 같은 교인이 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참된 성도, 참된 제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예수께 나오는 무리 중에 있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참 제자는 자기 가족들과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버릴 각오를 하고 주님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우리 가족을 사랑해야 하지만, 만일 하나님께 대한 의무와 가족에 대한 의무가 충돌한다면, 우리는 하니님께 대한 의무를 택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만 우리의 절대적 가치이시고 우리의 영생이시며 우리에게 영원한 행복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절대적으로 믿고 사랑하며 순종해야 한다. 그것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참 신앙이요 참 제자의 길이다.

 

15장: 한 죄인의 회개를 기뻐하심

1-10절, 잃은 양, 잃은 은전(銀錢)

[1-2절]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 . . .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실 때 많은 세리들과 죄인들이 그에게 가까이 나아와 말씀 듣기를 원하였다. 당시에 죄인들로 알려진 그들 속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관심과 영혼 구원에 대한 갈망이 있었던 것 같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그런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원망하여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고 말했다. 그들은 예수님의 관심과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그가 그들을 영접하고 음식을 함께 먹는 것을 그들의 죄를 용납하고 인정하는 것으로 오해하였다. 그러나 주께서는 단지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과 접촉하셨고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며 그들을 회개시키며 구원하기를 원하셨다.

오늘날 어떤 이들은 예수님의 이런 행위를 가지고 자신들이 자유주의자들이나 천주교인들과 함께 전도대회를 여는 일을 합리화시킨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적용이다.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오는 것은 언제나 기쁜 일이요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배교자들과 함께 집회를 인도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며 그것은 옳지 않은 방법이며 행동이다. 예수님과 사도들은 그런 방법으로 전도하지 않으셨다.

[3-6절]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너희 중에 . . . .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한 비유로 말씀하셨다. 우리는 비유를 이해할 때 그 중심적 진리를 붙드는 것이 중요하다. 비유를 풍유적으로 해석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풍유적 해석은 비유의 모든 세밀한 부분을 해석하는 것이다. 그것은 주관적이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비유 해석에서 지나친 추측이나 상상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성경은 수수께끼 같은 책이 아니고 모든 사람이 읽고 깨달을 수 있는 책이다. 성경에 어려운 구절이 없지 않지만, 그 중심적 주제와 교훈은 명료하여 성경을 읽는 대부분의 사람이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주께서는 말씀하셨다.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잃은 양의 비유라고 부르는 이 비유에서 보이는 바는 세 가지다. 첫째는 양들의 주인이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에 대해 관심을 가졌고 그것을 귀히 여기고 사랑하였다는 것이다. 둘째는 주인이 그 양을 찾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찾도록’이라는 원어(헤오스 휴레 아우토 ἕως εὕρη αὐτό)는 ‘찾을 때까지’라는 뜻이다. 주인은 그 양을 조금 찾아본 정도가 아니었고 찾을 때까지 끈질기게 찾았고 마침내 찾았다. 셋째는 주인이 그 양을 찾은 후 매우 기뻐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는 그의 기쁨을 자기 혼자만 가질 수 없어서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함께 나누었다.

[7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 . . .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이것이 이 비유의 중심적 진리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구원받은 모든 자들보다 죄인 한 명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더 기뻐하신다. 우리도 이런 심령을 가져야 한다.

[8-10절] 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도록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은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두 번째 비유인 잃은 은전(銀錢)의 비유도 동일한 진리를 나타낸다. 드라크마는 헬라 화폐로서 로마 화폐인 데나리온과 같은 가치이며 그것들은 다 은전(銀錢)으로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의 가치이었다. 이 비유에서 한 여인은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귀하게 여겼고 그것을 찾기 위해 열심히 애써 마침내 찾았고 그것을 찾았을 때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모아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했다.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천사들 앞에 기쁨이 된다.

1절로 10절까지의 두 비유 즉 잃은 양의 비유와 잃은 은전(銀錢)의 비유는 죄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심정을 나타낸다. 첫째는 한 사람의 영혼을 귀히 여기시는 것이다. 둘째는 잃어버린 한 영혼 즉 회개해야 할 한 죄인을 열심히, 부지런히, 끝까지 찾으시는 것이다. 셋째는 죄인 한 명의 회개를 크게 기뻐하시는 것이다.

만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하나님의 심정을 알았더라면, 그들은 예수께서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음식 드시는 것을 이해했을 것이며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잃어버린 한 명의 영혼을 귀히 여기시고 그를 찾기 위해 불붙는 심령을 가지고 계시고 그가 회개하고 돌아오면 회개할 것 없는 의인들 아흔 아홉보다 더 기뻐하고 즐거워하신다는 사실을 깨닫자.

여기에 교회의 사명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정을 가지고 잃어버린 영혼들을 귀히 여기고 그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 열심히, 부지런히, 끝까지 힘쓰자. 국내에도 해외에도,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하자. 또 주께로 돌아오는 한 명의 영혼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기뻐하자.

11-32절, 탕자의 돌아옴

[11-13절] 또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 . . .

예수께서는 또 비유로 말씀하셨다. 세 번째 비유는 잃은 아들, 곧 탕자의 비유이었다.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아버지는 그 재산을 각각 나눠주었다. 그런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은 재산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갔고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다 허비하였다.

이 둘째 아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멀리 떠난 인류의 모습를 나타낸다. 인류는 자기의 자유 의지로 창조주 하나님을 멀리 떠나갔다. 그는 하나님의 간섭을 원치 않았고 자신의 생각과 뜻을 따라 살기를 원하였다. 둘째 아들이 허랑방탕하며 재산을 낭비하였듯이, 하나님을 떠난 인류는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좋은 것들, 지혜와 재능, 시간과 건강과 재물을 허비하는 삶을 살고 있다.

[14-16절]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 . . .

둘째 아들은 그가 가진 재산을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비로소 궁핍하게 되었다. 그는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살았다. 집주인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그는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했지만 주는 자가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허랑방탕한 삶을 미워하신다. 그 나라에 큰 흉년이 든 것은 하나님께서 내리신 재앙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불성실한 자들에게 큰 흉년을 내리신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기근이거나 질병, 전쟁, 지진, 화재, 교통 사고, 실직, 가정 파탄 등의 불행을 가리킨다. 그 결과, 인류는 궁핍해지고 낮고 비천하게 되었다. 하나님을 떠난 생활은 얼마 동안 즐거움을 주는 듯했으나 곧 불행으로 드러났다.

[17-19절]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 . . .

그 아들은 스스로 돌이켜 말했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이에 스스로 돌이켜’라는 원문은 ‘그가 자신에게 왔을 때’라는 말로서 제 정신이 들었다는 뜻이다. 큰 흉년은 하나님의 재앙인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그는 궁핍 속에서 제 정신이 들었다. 바른 생각과 깨달음을 가지게 된 것이다. 궁핍이 그에게 불행만이 아니었다. 그는 그 궁핍을 통해 자신의 죄악됨을 깨닫게 되었고 또 자신이 돼지보다 나을 것이 없는 낮고 비천한 존재임을 알게 되었다.

탕자는 또 몇 가지를 더 깨달았다. 첫째로, 그는 자기 아버지 집의 부요하였음을 기억하였다. 둘째로, 그는 아버지께 돌아가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셋째로, 그는 자신이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음을 깨닫고 아버지께 그렇게 고백하겠다고 생각했다. 넷째로, 그는 자신이 아들의 자격이 없고 일꾼으로 여겨달라고 하겠다고 생각했다.

사람은 회개할 때 하나님의 부요하심과 자신의 빈곤함을 깨달으며 또 자신이 하나님을 멀리 떠난 죄인이므로 이제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또 그는 자신이 하나님께 범죄한 자요 하나님의 아들로 여겨지기보다 하나님의 종이 되어야 마땅하다고 깨닫는다. 이런 바른 깨달음은 구원의 정상적 과정이다.

[20절]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걱가 . . . .

그 아들은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갔다. 그는 깨달은 대로 행했다. 바른 생각에서 바른 행동이 나온다. 이것이 회개다. 회개는 자신의 죄와 불행을 바르게 깨닫고 그것을 슬퍼하고 일어나 죄악된 삶을 청산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아직도 상거(相距)[거리]가 먼 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 그것은 아버지의 사랑이 얼마나 컸는지를 나타낸다. 아버지는 그를 겨우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고 뜨겁게 맞아들였다. 그것이 회개하는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다. 회개하는 죄인을 향한 그의 긍휼과 사랑은 지극히 크시다. 하나님의 그 사랑이 자기 독생자를 사람으로 세상에 보내셨고 십자가에 대속제물로 내어주셨다.

[21-22절]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 . . .

그 아들은 말했다.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말했다.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 아들은 아버지 앞에서 자신의 잘못과 죄를 인정하며 고백하였다. 아버지는 그의 뉘우침을 기쁘게 받았다. 그러나 그 아들이 자기는 이제 아들의 자격이 없다고 고백했을 때, 아버지는 그를 아들로 인정한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아버지가 그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긴 것은 그가 그를 종으로가 아니고 귀한 아들로 인정한다는 표시이었다. 아버지를 떠나 아들의 자격을 포기했던 그에게 아들의 자격을 다시 준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 되기를 포기하고 죄와 마귀와 사망에게 종노릇하였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회개한 죄인에게 하나님의 자녀의 자격과 특권을 다시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죄를 씻으시고 의의 옷을 입혀주시고 영광의 천국을 기업으로 주신다.

[23-24절]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 . . .

아버지는 또 말했다. “또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그들은 다 즐거워하였다. 본 비유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 즉 아버지가 돌아온 아들로 인하여 기뻐하였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살진 송아지를 잡게 하여 잔치를 베풀고 먹고 즐거워하였다. 그의 기쁨의 이유는 둘째 아들이 돌아온 것이 마치 죽은 아들이 다시 살아난 것과 같고 잃은 아들을 다시 얻은 것과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죄인 한 명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심히 기뻐하신다.

[25-32절]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왔을 때에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 . . .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왔을 때에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었다. 종이 대답하였다.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그의 건강한 몸을 다시 맞아들이게 됨을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그 아들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였다. 아버지가 나와서 권하자 그는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아버지는,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했다.

본문은 맏아들의 태도를 증거한다. 어떤 이들은 맏아들을 집안에 있는 탕자라고 해석하지만, 그것은 타당해 보이지 않는다. 본문은 그가 그 날도 밭에 있다가 돌아왔다고 표현하고 또 그의 고백에서도 그는 여러 해 아버지를 섬기며 그의 명령을 어김이 없었다고 하였다. 또 아버지의 말에서도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그 아들은 성실한 아들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를 집안의 탕자라고 보는 것은 적절치 않다. 그러나 그는 돌아온 자기 동생을 향한 아버지의 기쁨을 이해하지 못했다.

맏아들의 노한 마음은 이해할 만하였다. 아버지의 명령을 순종하며 성실히 여러 해를 보냈던 그에게는 염소 새끼 하나라도 주어 그의 친구들과 즐기게 한 일이 없었고 근검절약하며 성실하게만 살았던 아버지께서 재산을 탕진한 동생을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은 것은 무언가 잘못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맏아들의 불평에 대해 아버지는 자신의 기쁨이 정당하다고 증거하였다. 아버지가 너무 엄격하고 인간미가 적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버지가 맏아들을 위하지 않았거나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목자가 양우리 안에 남아있는 아흔 아홉 마리의 양들을 미워하지 않았듯이, 또 여인이 주머니 속에 있는 아홉 개의 은전을 미워하지 않았듯이, 아버지는 결코 맏아들을 미워하지 않았다. 사실상 아버지의 모든 소유는 큰아들의 것이었다. 단지, 아버지의 현재의 기쁨은 잃었던 것 같은 둘째 아들을 다시 찾은 기쁨, 죽었던 아들이 다시 살아난 것 같은 기쁨인 것이다. 그 기쁨은 잃어버리지 않은 것에 대한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이었다. 이와 같이, 죄인 한 명이 회개하면 천국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 명을 인해 기뻐하는 것보다 더한 기쁨이 있다는 뜻이다(눅 15:7).

탕자의 비유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모든 사람은 다 회개해야 한다. 그는 하나님을 멀리 떠난 죄로 인해 얼마나 궁핍하고 비천해졌는지를 깨닫고 주께 대한 믿음과 순종의 삶으로 돌아와야 한다.

둘째로, 하나님은 회개하는 죄인들을 측은히 여기신다. 그는 그들을 영접하시고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과 특권을 회복시켜 주신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특히 죄인 한 명의 회개를 매우 기뻐하신다. 교회는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자 교회에 나온 한 명의 영혼을 하나님의 기쁨의 심정을 가지고 기뻐하고 환영해야 한다.

 

16장: 돈을 사랑치 말 것

1-12절, 불의한 청지기

본문은 성경에서 해석하기 어려운 부분들 중의 하나이다.

[1-7절]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 . . .

예수께서는 또 제자들에게 한 비유를 말씀하셨다.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었다. 청지기는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재산 관리인이다. 그런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렸다. 주인은 그를 불러 말했다.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찜이뇨? 네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그 청지기는 해고한다는 말을 듣고 속으로 말하였다.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꼬?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저희가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그는 주인에게 빚진 자를 낱낱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말했다.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졌느뇨?” 그가 “기름 백 말이니이다”라고 말하자,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고 말하였고, 또 다른 이에게 말하되 “너는 얼마나 졌느뇨?” 그가 “밀 백 석이니이다”라고 말하자,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고 말하였다.

그 청지기가 생각해낸 방법이란 주인에게 빚진 자들을 불러 빚을 임의로 감해 주는 것이었다. 그러면 그가 해고된 후에 그들이 그를 그들의 집으로 영접해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주인에게 빚진 자들을 하나씩 불렀고, 기름 백 말을 빚진 자에게는 오십 말로 감해 주었고 밀 백 석을 빚진 자에게는 팔십 석으로 감해 주었다. 이것은 기왕의 그의 불성실에 더하여 주인의 재산에 더욱 더 큰 손해를 끼친 일이었다.

[8절]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 . . .

그러나 예수께서는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고 말씀하셨다. 그 청지기는 주인의 재산을 자기 멋대로 처리했으니 옳지 않은 청지기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비유에서, 그 주인은 그 청지기가 지혜 있게 행하였다고 칭찬하였다. 그것은 주인의 재산을 바르게 잘 관리했다는 뜻이 아니고, 그 청지기가 자신의 미래를 위해 머리를 썼다는 뜻이다. 물론 그 청지기의 지혜는 선한 지혜가 아니고 세상적인 지혜이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고 덧붙여 말씀하셨다고 본다.

[9절]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어려운 구절이다. ‘재물’이라는 원어(마모나스)는 ‘재물, 재산, 부(富)’라는 뜻이다. 주께서는 왜 재물을 불의의 재물이라고 표현하셨는가? 그것은 모든 재물이 하나님의 것인데 사람들이 그것을 자기 것으로 생각하고 사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돈뿐 아니라 시간, 건강, 재능, 생명이 다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내 것처럼 생각하고 내 뜻대로 사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나 주께서는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말씀하신다. 그것은 불의한 청지기와 비교하여 말씀한 것이다. 인간의 세상 생활은 청지기의 생활과 같다. 우리는 어느 날 이 세상을 떠나 심판자이신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그 불의한 청지기는 주인의 재산을 축내는 불의한 방식으로 빚쟁이들에게 선심을 써서 자신의 미래를 준비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재물을 가지고 지혜롭게 미래를 준비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가 재물로 하나님의 일에 힘씀으로써 하나님과 친근해지면 하나님께서 천국에서 우리를 위해 좋은 것을 주실 것이다. 또 우리가 재물로 구제와 선행에 힘씀으로 믿음 안에서 가난한 형제들과 친근해지면, 우리의 구제와 선행으로 도움을 받은 가난한 성도들은 천국에서 우리를 기쁘게 대하며 영접할 것이다. 이것은 미래를 지혜롭게 준비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6:19-21에서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녹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저기는 좀이나 동녹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고 말씀하셨다. 보물을 하늘에 쌓는 것은 전도와 구제를 위해 헌금하며 돈을 쓰는 것을 말한다(눅 12:33; 딤전 6:17-19).

[10-12절]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주의 말씀에, ‘지극히 작은 것’은 세상의 재물을 가리키며, ‘큰 것’은 천국의 보화를 가리킨다고 생각된다. 천국의 보화와 비교할 때 세상의 재물과 부(富)는 지극히 작은 것에 불과하다. ‘불의한 재물’도 땅의 재물을 가리키며, ‘참된 것’은 천국의 보화를 가리킬 것이다. 이 세상의 부와 재물은 헛되지만, 천국의 보화는 참되다.

또 주의 말씀에, ‘남의 것’도 세상의 재물을 가리키며, ‘너희의 것’은 천국에서 받을 부(富)와 영광을 가리킨다고 본다. 세상의 재물은 우리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다. 우리는 단지 청지기처럼 하나님의 것을 맡은 것뿐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장차 천국에서 우리가 영원히 누릴 영광스런 기업을 우리에게 주실 것이다.

주께서 교훈하고자 하시는 바는 이 세상에서의 성도의 바른 물질 생활에 대해서이다. 우리는 불의한 청지기같이 주인의 물질을 낭비하지 말고 충성된 청지기같이 물질을 바르고 성실하게 사용해야 한다. 그것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가 전도와 구제를 위해 물질을 사용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재물을 바르고 성실하게 사용할 때, 우리는 장차 천국에서 더 큰 것, 참된 것, 영원히 우리의 소유가 될 것을 받으며 누리게 될 것이다.

1절로 12절까지의 불의한 청지기 비유는 성도들의 바른 물질 생활에 대해 교훈한다.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우리가 세상에서 소유하고 누리는 모든 물질이 다 하나님의 것이며 우리는 그의 청지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의 돈뿐 아니라, 우리의 시간, 우리의 건강, 우리의 재능, 우리의 생명이 다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을 내 것처럼 생각하고 내 뜻대로 사용하는 것은 낭비하는 것이며 불충성된 일이다. 우리는 그것들을 하나님의 것으로 바로 알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위해, 그의 뜻대로 바르고 성실하게 사용해야 한다.

성경에 계시된 대로, 전도와 구제를 위해 물질을 보관하고 사용하는 것은 바로 사용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힘과 건강으로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고 우리 자신을 위해서는 근검 절약하여 살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재물로 하나님의 복음을 널리 전파하는 일과 우리 주변의 가난한 성도들을 돕는 일에 후하게 사용하며 살아야 한다. 우리는 다 하나님의 선하고 충성된 청지기들이 되어 하나님께서 주신 물질을 바르게, 선하게 사용하자.

13-18절, 온전한 도덕 생활

주께서는 사람의 물질욕과 명예욕과 정욕에 대해 말씀하신다.

[13절]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 . . .

주께서는 말씀하셨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본절은 불의한 청지기 비유의 한 결론과도 같다. 집의 종들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 사람을 사랑하면 다른 한 사람을 미워하는 셈이 되고 한 사람을 중히 여기면 다른 한 사람을 경히 여기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그를 따르려면 자신을 부정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하며 자기를 미워하고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눅 9:23; 14:26, 33). 또 사도 바울은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라고 말했다(딤전 6:9-10). 또 사도 요한은 신자들에게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고 교훈하였다(요일 2:15). 우리는 하나님만 사랑하고 섬겨야지 세상이나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14절]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 이 모든 것을 듣고 . . . .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이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 모든 말씀을 듣고 그를 비웃었다. 물질욕이 그들의 마음을 어둡고 완고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의 말씀이라도 배척하고 멸시했다. 그것은 하나님을 배척하고 멸시하는 악한 태도이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큰 죄이었다. 오늘날도 사람이 물질욕을 가지면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고 배척하게 될 것이다.

[15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주께서는 바리새인들의 마음 속에 돈을 사랑하는 마음뿐 아니라, 또한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옳다고 여기는 마음과 사람들 중에서 높임을 받고자 하는 마음도 있음을 보셨다. 그것은 교만과 명예욕이었다.

그러나 주께서는 그들 속에 있는 각양의 죄악된 마음의 실상을 보셨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보시며 선악 간에 판단하신다(삼상 16:7). 특히 사람들 중에 높임을 받는 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다. 요셉이나 모르드개나 다니엘처럼 하나님께서 자연스런 상황을 주셔서 높임을 받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스스로 높아지려는 마음, 거짓되게 혹은 정당하지 않게 높아지려는 마음은 교만이요 명예욕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높임을 받는 것을 ‘가증한 것’이라고 여기신다. ‘미움을 받는 것’이라는 말은 ‘미워할 만한 것,’ ‘가증한 것’이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정당하게 주시지 않은 명예는 가증한 것이다.

[16절]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 . . .

예수께서는 또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의 구별을 말씀하신다. 율법과 선지자는 구약성경을 가리킨다. 구약시대는 요한의 때까지이었다.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며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듯이 들어간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전도 사역을 시작하실 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외치셨다(마 4:17). ‘나라’ 혹은 ‘왕국’은 ‘통치’를 나타낸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은 사람들의 범죄로 죄와 마귀와 사망이 지배하는 세계가 되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하나님의 통치가 특별한 방식으로 시작되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의와 생명으로 시작되었다.

[17절] 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의 없어짐이 쉬우리라.

주께서는 “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의 없어짐이 쉬우리라”고 말씀하셨다. 신약시대에 율법이 폐지되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주께서는 율법의 한 획이 무효화되지 않고 다 성취될 것을 강조하셨다. 마태복음에서도 주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말씀하셨다(마 5:17-18). 그는 친히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완전한 의를 다 이루셨다(롬 10:4; 고전 1:30). 그러나 구원받은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의롭고 온전한 삶을 살아야 한다(롬 6:13).

[18절] 무릇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도 . . . .

주께서는 또 “무릇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요 무릇 버리운 이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사람의 도덕적 결함의 다른 중요한 한 요소인 정욕의 죄를 지적하신다. 사람의 이 죄악성은 결혼 생활의 불성실로 나타난다. 즉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는 것이다. 그것이 간음의 죄악이다. 또 남편에게 버리운 이와 결혼하는 것도 간음의 행위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결혼 관계는 사람이 나눈다고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물론 모든 이혼과 재혼을 정죄하는 말씀은 아니다.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5:32에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음행한 연고 없이’라는 말씀은 음행이 이혼의 합법적 이유가 됨을 보인다. 이것은 성경이 증거하는 이혼의 합법적 이유이다. 또 사별(死別)한 경우나 합법적 이혼을 한 경우, 재혼은 합법적이라고 본다. 성경은 이혼이 아닌 별거(別居)를 정죄하지는 않는다. 부득이한 경우, 성도는 별거하여 살 수 있을 것이다.

13절로 18절까지의 말씀은 한 마디로 온전한 도덕 생활을 증거한다. 여기에 언급된 세 가지 주제인 돈과 명예와 정욕은 사람들을 죄악과 멸망으로 이끄는 요소들이며 성도들을 실패케 하고 멸망케 하는 것들이다. 우리는 물질욕과 명예욕과 정욕을 버려야 한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돈으로 만족하며 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돈이란 합법적으로 버는 돈, 즉 직장에서 정당하게 받는 봉급 같은 것을 가리킨다.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하며 근검절약하여 살아야 한다. 그 이상의 것을 원할 때 시험에 떨어지기 쉽다. 예를 들어 남편들은 직장에서 불의의 돈을 받게 되고 아내들은 무리한 직장 생활 때문에, 남편을 돕는 집안일이나 자녀 교육의 일을 다하지 못하는 결과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다 불행한 일이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명예로 만족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을 높이려 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들어 높이실 때까지 겸손히 우리의 처한 환경과 위치에서 만족하며 살아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아내와 남편으로 만족해야 한다. 결혼한 이들은 결혼 관계를 복되게, 귀중하게 생각하고 살아야 하며, 결혼하지 않은 자들이나 혼자된 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그 형편과 처지를 기쁨과 감사함으로 받으며 생활해야 한다. 그렇지 못할 때 우리는 범죄하게 되고 마귀의 시험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

19-25절, 부자와 거지 나사로--사람의 죽은 후 상태

[19-21절]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 . . .

한 부자가 있었다. 그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아마포 천으로 만든 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즐기며 살았다. 나사로라고 이름한 한 거지가 있었다. 그는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부스러기들](전통본문)74)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려 하였고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았다. 부자는 그 거지를 동정하지 않았던 것 같다.

[22-23절]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 . . .

어느 날 그 거지는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다. 아브라함의 품은 천국이다. 성도가 죽은 후 그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에는 구약과 신약 성경의 차이가 없다. 시편 73:24,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누가복음 23:43,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어느 날 그 부자도 죽어 장사되었다. 그의 장례식은 매우 거창하고 호화로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 영혼은 음부[지옥] 고통 중에 떨어졌다. ‘음부’는 때때로 ‘무덤’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여기에서는 명백히 ‘지옥’을 가리킨다. 지옥은 악인이 죽은 후 그 영혼이 들어가는 형벌의 장소이다. 그는 지옥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았다.

‘눈을 들어 멀리’ 바라본 것을 보면, 지옥은 낮은 곳에 있고 천국은 높은 곳에 있고 천국과 지옥 간의 거리는 매우 멀다. 선지자 엘리야가 불병거를 타고 하늘로 올리웠고 부활하신 예수께서도 하늘로 올리우신 것을 생각하면, 천국은 높은 하늘 위에 있는 곳이 분명하다. 그러나 지옥은 땅 아래의 어떤 곳이라고 생각된다. 그 곳은 아마 지구 속의 어떤 곳일지도 모른다. 화산을 통해 드러나듯이, 지구 속에는 매우 뜨거운 불이 있다. 지옥은 바로 그런 불못이다.

그 부자는 지옥에서 천국에 있는 나사로를 보았고 또 아브라함과 말하였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지옥에서 천국을, 또 천국에서 지옥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부자가 지옥에서 천국의 광경을 본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허락 때문이었거나 아니면 단지 교훈을 주는 가상적 이야기일 것이다.

[24절]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 . . .

그 부자는 아브라함을 불러 말하였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부자는 지옥에서 불꽃 가운데서 고생을 하고 있었다. 지옥에는 뜨거운 불로 인한 심한 열기와 갈증, 그리고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이 있었다.

[25절]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 . . .

아브라함이 그에게 말했다.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살았을 때’란 육신이 살았을 때를 말한다. 사람의 영혼은 불멸적이기 때문에 육신이 죽은 후에도 의식을 가지고 있다. 부자는 이 세상에 살았을 때 좋은 것들 곧 의식주의 풍요로움을 누렸었다. 그러나 그때 실상 그는 영적으로는 빈곤하였었다. 그는 하나님도, 그 계명도, 인생의 참 목적과 의미도 알지 못하고 단지 죄 가운데 낙을 누리며 살았었다.

한편, 거지 나사로는 세상에서는 고난을 받았었다. 그는 육신적, 경제적 궁핍 속에서 살았다. 그의 몸에는 헌데가 있었고 먹을것도 부족한 거지이었다. 그는 의식주에 있어서 부족함이 있는 자이었다. 그러나 이 비유의 전체 문맥을 볼 때, 그는 모세와 선지자들의 글들 즉 구약성경을 알았고 믿었다. 물론, 세상에서 가난하면 자동적으로 성경을 믿고 내세에서 위로와 안식을 받는 것은 아니다. 거지 나사로는 아마 가난과 질병 속에서 자신의 허무함과 죄인됨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는 겸비하게 하나님을 찾았고 만났고 그를 믿고 의지하였을 것이다. 실상, 외적인 유여함보다 이것들이 인생에게 큰 복이다.

이 세상에서 좋은 것을 누렸던 그 부자는 내세에서 고통과 고민 가운데 있었고, 이 세상에서 고통을 당했던 그 거지 나사로는 내세에서 위로와 안식을 누렸다.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보응이었다. 만일 내세에 공의의 보응이 없다면, 만일 이 세상에 하나님의 공의로운 마지막 심판이 없다면, 인간 생활에서 도덕의 진정한 이유와 가치를 알 수 없고 세상의 도덕 질서는 무너지고 말 것이다.

본문은 사람의 죽은 후의 상태를 분명하게 증거한다. 이것은 예수님의 신적 권위로 증거되었다. 이 세상에서는 의인과 악인이 섞여 살지만, 저 세상에서도 그런 것은 아니다. 그 곳에서는 분리가 있을 것이며 최종 심판 때에도 그러할 것이다. 사람들은 죽은 후에 천국과 지옥으로 분리될 것이다. 의인은 위로와 안식의 천국으로 인도되고, 악인은 고통과 형벌의 지옥에 던지울 것이다. 이 세상에서의 삶은 죽은 후의 상태와 다를 수 있다. 부자는 지상에서 호화로이 살았으나 죽은 후에 고통을 당했고, 나사로는 병약하고 가난했으나 죽은 후에 평안을 누렸다. 천국은 안식과 위로가 있는 곳이지만, 지옥은 고통의 장소이다. 23절, “저가 지옥에서 고통 중에,” 24절,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고통을 받나이다].” 25절, “너는 고민[고통]을 받느니라.” 28절, “이 고통받는 곳에.”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사실은 죄인들이 회개해야 할 이유요, 또한 먼저 믿은 우리가 전도해야 할 이유이다.

26-31절, 전도의 필요성과 방법

[26절]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 . . .

아브라함은 또 말했다.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라는 말은 천국이든지 지옥이든지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암시한다. 지옥에는 천국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넓은 길로 가는 사람은 좁은 길로 가는 사람보다 많다(마 7:13-14).

‘큰 구렁이 끼어 있어’라는 원어는 ‘고정된 큰 간격이 있어’라는 뜻이다. 천국과 지옥 사이의 간격은 아담 이후 변경할 수 없이 고정되어 있다. 이것은 거기에 들어간 영혼들의 상태도 고정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죽음으로 사람의 최종 상태는 고정된다. 지옥에서 천국으로 오는 것도 불가능하고, 천국에서 지옥으로 가는 것도 불가능하다. 죽음으로 고정된 사람의 최종 상태는 아무도 변경할 수 없다.

여기에 하나님의 엄위하신 공의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공의와 선을 행하라고 명령하시고 불의와 죄악에 대해 경고하시지만, 저 세상에서 그는 공의의 보응을 내리실 것이다. 그 보응은 엄위하지만 이미 공개적으로 예고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변하지 않으시며 그의 공의도 변하지 않으신다. 그는 모든 인간에게 선언하신 그대로 공의의 보응을 내리실 것이다.

[27-28절] 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 . . .

그 부자는 말했다.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지옥은 실제로 존재하는 곳이다. 그 곳은 악인들의 형벌의 장소이다. 그 곳은 불이 있는 곳이다. 지옥의 공포는 이방인들도 양심으로 느꼈던 공포이다. 모든 악인들은 그 곳에 가게 될 것이다.

그 부자는 지옥의 고통 중에서 세상에 남아 있는 형제들을 기억하였다. 자기에게 아무런 위로가 없을 것을 깨달은 그는 세상에 남아 있는 다섯 형제들의 장래를 염려하였다. 그래서 그는 아브라함에게 “내 형제 다섯에게 증거하여 저희로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라고 호소했다. 또 그는, 자신은 이 처지를 돌이킬 수 없을지라도, 나사로가 세상에 다시 가서 자기 형제들에게 이 소식을 전해 주어 그들만은 이 곳에 오지 않기를 원하였다. 지옥의 고통을 경험한 자는 당연히 그런 소원을 가질 것이다. 지옥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죄인들이 회개해야 할 바로 그 이유이다. 자기의 죄를 회개치 않는 자마다 그 곳에 들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또 이런 사실들은 우리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전도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29절]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 . . .

아브라함은 말하였다.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모세와 선지자들’은 구약성경을 가리킨다. 성경은 사람의 구원을 위해 충족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들에게 들을지니라’는 말은 ‘성경을 읽고 성경을 들으라’는 뜻이다. 구원을 갈망하는 자마다 성경을 읽고 성경을 들어야 한다. 성경에 기록된 복음을 듣고 믿지 않고서는 아무도 구원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롬 1:16).

[30-31절]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 . . .

그 부자는 말하기를,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라고 하자, 아브라함은 그에게 또 말하기를,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고 하였다.

부자는 아브라함의 말을 인정치 않았고 성경의 효력을 믿지 않았다. 그는 성경을 통해 회개와 구원의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죽은 자가 살아서 그들에게 돌아가 전도하면 그들이 회개하리라고 생각하였다. 그것은 오늘날 오순절파와 그 파의 영향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생각이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성경을 통해 믿지 않는 자는 기적을 보아도 믿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진리이다. 하나님께서는 신약교회 시대에 기적을 통해서가 아니고 십자가의 복음을 통해 사람을 구원하셨고 또 앞으로도 그러하실 것이다. 고린도전서 1:23-24,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기독교는 기적주의나 은사주의가 아니고 성경주의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사람의 구원을 위해 충족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오늘날도 구원은 성경에 증거된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일어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성경을 믿고 행하고 전해야 한다.

사람의 죽은 후의 상태는 변경할 수 없다. 이 고정된 상태는 사람의 죽음으로 확정된다. 사람은 죽기 전에 구원을 받아야지 죽은 후에는 그의 상태를 변경시킬 수 없다. 죽은 후에는 이미 늦다. 더 이상 구원의 기회는 없다. 죽기 전에 회개해야 하고 죽기 전에 전도해야 한다.

사람을 회개시키는 하나님의 방법은 기적을 통해서가 아니고 성경 말씀을 통해서이다. 사람은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해 구원을 받는다. 기독교는 기적주의나 은사주의가 아니다. 성경은 사람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충족한 말씀이다. 우리는 오직 성경을 읽고 믿고 실천하고 전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오늘도 죄인은 성경을 통해 구원을 얻는다.

 

17장: 인자의 날이 갑자기 옴

1-4절, 회개와 용서

[1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케 하는 것이 . . . .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실족케[범죄케]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있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사람이 악하고 무지해서 남을 범죄케 하는 일이 불가피하게 생긴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실족케 하는 자에게는 화가 있다. 죄는 사람을 멸망케 하는 악이다. 자신이 범죄하면 자신이 멸망하듯이, 다른 사람을 범죄케 하면 그를 멸망시키는 것이니, 큰 잘못이 아닐 수 없다.

[2절] 저가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를 실족케 할진대 차라리 . . . .

그러므로 주께서는 “저가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를 실족케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매이우고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 나으리라”고 말씀하셨다.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는 주님을 따르는 무리들 중에 믿음이 약한 자 하나를 가리킨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주님을 믿은 지 얼마 되지 않고 믿음이 약한 자들이 있다. 그런 자들은 작은 시험이 와도 잘 넘어진다. ‘연자맷돌’은 ‘당나귀가 돌리는 큰 맷돌’을 뜻한다. 사람이 그런 맷돌을 목에 걸치고 바다에 던지우면 살 가망이 없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은 단호하시고 강하시다. 마태복음 5장에 보면, 그는 또한 이렇게 말씀하셨다.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마 5:29-30).

주님의 표현이 강한 만큼, 이 말씀은 인간에게 있어서 죄가 얼마나 큰 문제인가를 보여준다. 죄는 사람을 죽음과 지옥에 이르게 한다. 하나님의 구원은 죄사함을 주는 구원이다. 그는 이 구원을 위해 자기의 독생자를 사람으로 보내셨고 십자가에 속죄제물로 내어주셨다. 인간의 죄악들로 인한 대가는 이처럼 매우 컸다. 우리는 범죄가 큰 문제이며 자신의 범죄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범죄케 하는 것도 큰 죄악임을 깨닫자. 우리에게 있어서 죄보다 더 큰 문제는 없다.

[3절]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고 하셨다. 우리는 형제의 범죄를 용납하지 말아야 하지만, 다른 한편 그의 회개를 거절하지도 말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형제의 범죄를 용납하면, 우리는 신앙적, 도덕적 방종과 해이에 떨어질 것이다.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형제를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형제의 회개를 받아주지 않고 거절한다면, 그것은 사랑의 계명을 어기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형제가 우리에게 죄를 범한다면 우리는 그를 책망해야 한다. ‘경계하라’는 원어(에피티마오  ἐπιτιμάω)는 ‘책망하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죄와 잘못을 회개한다면 우리는 그를 용서해야 하는 것이다.

주의 말씀은 만일 우리의 형제가 우리에게 범한 죄를 뉘우치거나 회개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에 대한 용서와 그와의 교제의 회복을 보류할 수 있다는 뜻도 내포한다. 마태복음에 보면, 주께서는 만일 우리에게 범죄한 자가 교회의 권면도 듣지 않고 회개치 않으면 그를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말씀하셨다(마 18:17). 용서는 상대방의 회개 즉 상대방이 자신의 죄와 잘못을 인정하고 뉘우치는 것을 전제(前提)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4절]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 . . .

예수께서는 또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고 말씀하셨다.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라는 말씀은 인간의 부족과 연약을 증거한다. 누구나 할 것 없이 우리는 부족하고 연약하기 때문에 죄와 실수도 자주 하고 회개도 자주 하며 용서도 자주 해야 한다. ‘하루 일곱 번이라도’라는 표현은 용서의 횟수에 제한을 두지 말고 상대가 언제든지 회개하면 그의 잘못을 용서하라는 뜻이다. 또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이라는 말은 회개하는 자의 중심의 진실성 여부를 따지거나 판단하려 하지 말고 단지 그의 사과의 말에 근거하여 그를 용서하고 서로 화해하라는 뜻이다.

성도들의 사랑의 교제에서 매우 요긴한 한가지는 서로의 허물과 잘못을 용서하고 덮어주는 것이다. 우리가 서로 용서하지 않는다면, 서로 사랑하며 일치 단합하여 주를 섬기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시기 전에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심으로써 그들도 서로의 부족과 연약을 용서해야 할 것을 가르쳐주셨다.

우리는 범죄를 큰 문제로 여기자. 자신의 범죄도 그렇고, 특히 다른 사람을 범죄케 하는 일이 그렇다. 계속 범죄하는 자는 하나님의 징벌과 장차 지옥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다.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이다. 죄가 인간에게 가장 큰 문제이다. 죄를 큰 문제로 여기자.

우리는 회개와 용서를 중요하게 여기자. 회개는 복된 일이다. 인간이 연약하여 죄도 자주 짓고 회개도 자주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회개할 때 용서해주신다. 이처럼 우리도 우리에게 잘못을 행한 자가 사과할 때 즉시 그를 용서하고 또 비록 반복해서 그러할지라도 그러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주의 명령이며 사랑의 실천이기 때문이다.

5-6절,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5-6절]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 . . .

사도들은 주님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아뢰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믿음이 부족함을 깨닫고 더 많은 믿음이 필요함을 느꼈던 것 같다. 우리의 작은 믿음은 날마다 자라고 성장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우리에게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이 있다면 큰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큰 믿음은 큰 역사를 가져올 것이다. 그러나 실상 주의 말씀은 우리에게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신다. 우리는 우리에게 좀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믿음이라는 것도 겨자씨보다 작은 믿음이라는 것, 즉 심히 작은 믿음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록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지만 우리의 믿음이 심히 적다는 것을 인정하고 겸손히 주님만 바라야 할 것이다. 우리는 진심으로, “주여, 우리의 믿음이 심히 적사오니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주님께 아뢰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믿음이 꽤 있다는 생각을 버리고 우리 자신의 믿음이 심히 적음을 인정하며 주님을 향해 또 사람들을 향해 항상 겸손히 처신해야 한다.

7-10절, 무익한 종이라는 마음가짐

[7-9절]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감사]하겠느냐?”

종들은 주인의 밭을 갈거나 양을 쳤다. 그들은 하루 일과가 끝나 밭에서 돌아와서도 금방 편안히 상에 앉아 음식을 먹지 못했고 주인의 상을 준비하고 수종들었고, 주인이 음식을 먹은 후에야 먹을 수 있었다. 또 주인은 그의 명령을 다 행한 종들에게 감사하지 않았다.

옛 시대의 주인과 종의 관계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유익하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주인과 종의 관계 이상이다. 하나님은 창조주시요 우리는 피조물이며, 더욱이 우리는 그를 거역했던 죄인들, 즉 그의 진노의 심판을 받아야 마땅했던 죄인들이었다.

[10절]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 . . .

주께서는 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신약 교회의 모든 봉사자들이 가져야 할 정신이다. 우리는 자신을 ‘무익한 종’이라고 생각하고 처신해야 한다. 우리는 봉사의 직무를 행할 때도 우리의 힘과 재능으로 한 것이 아니고 주의 주신 은혜와 힘으로 했고 그때에도 우리에게는 많은 부족과 흠이 있음을 깨닫는다.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의무를 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히 하나님 앞에서 어떤 대접을 받을 것을 기대하지 못한다. 이런 정신과 태도가 오늘날 목사들과 제직들과 주일학교 교사들과 찬양대원들이 가져야 할 봉사의 정신과 태도이다. 우리 모두는 종의 정신으로 겸손히 주님을 섬겨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도 없는 부족한 사람임을 알고 믿음의 성장을 위해 기도해야 하고, 또 우리는 하나님 앞에 종들과 같고 절대순종하고 죽도록 충성해야 하고, 또 그렇게 한 후에도 우리 자신이 무익한 종임을 겸손히 고백하며 처신해야 한다.

11-19절,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1-13절]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 . . .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셨다. 그는 북부 갈릴리 지방에서 중부 사마리아 지방을 지나서 남부 유대 지방의 예루살렘으로 가고 계셨다. 그때 그는 한 마을에 들어가셨는데,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님을 만나 멀리 서서 소리쳤다. 율법에 의하면, 나병환자는 동네 밖에서 살아야 했다(레 13:46). 그래서 그들은 멀리 서서 소리쳤을 것이다.

그들은 소리를 높여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말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들이 예수께 대해 얼마큼 지식과 믿음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그들은 적어도 그가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다는 소문을 들었고 자기들의 병도 고쳐주실 수 있다고 믿었음에 틀림없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하고 외쳤다. 하나님께 긍휼히 여김 받기를 간구하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얻을 것이다.

[14절]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 . . .

예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율법에 의하면, 나병환자들이 병이 나으면 제사장에게 가서 검사를 받아야 했다(레 14장). 그러므로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는 주의 말씀은 그들의 병을 고쳐주시겠다는 뜻을 포함하였다. 예수께서 어떤 때에는 나병환자를 즉시 고쳐주신 경우도 있었으나(마 8:3), 이번에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예수께서 즉시 고쳐주지 않으시고 “가서 제사장들에게 네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들의 믿음과 순종을 요구하신 것이라고 본다. 그것은 옛날 엘리사 선지자가 아람 군대장관 나병환자 나아만에게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고 말한 것과 비슷하였다(왕하 5:10). 이런 말씀들은 우리의 믿음과 순종을 요구한다. 참된 믿음은 순종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 열 명의 환자들은 주의 말씀대로 갔고 가다가 깨끗함을 받았다. 그들은 믿고 순종하였고 그때 그들은 병고침의 은혜를 받았다.

예수께서 열 명의 나병환자들을 고쳐주신 것은 그의 신성(神性)을 증거하는 일이었다. 그는 말씀으로 그 불치의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그의 능력은 신성의 능력이었다. 그는 이 일을 통해 자신이 신성(神性)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우리의 구주로 세상에 보내어주셨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15-16절]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 . . .

그 열 명의 나병 환자들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리어 감사하였다. 그는 사마리아인이었다. 열 명이 다 병고침을 받았으나, 그 중 한 사람만 돌아와 예수께 감사하였다. 다른 이들은 기쁨과 들뜬 마음으로 제사장에게 갔다가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한 사람은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는 자기에게 일어난 일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고 있었다. 또 그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보내신 구주이심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는 예수님께 돌아와 그의 발 아래 엎드려 감사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사마리아 사람은 이방인과 피가 섞인 족속이었다. 주께서는 그를 ‘이방인’이라고 표현하셨다(18절).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이방인으로 간주하며 배척하였었다. 그러나 주께 돌아와 감사한 사람은 그 사람뿐이었다.

오늘날 신약교회의 교인들인 이방인 신자들은 이 사마리아인과 같은 자들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큰 구원을 받았고 또 하나님의 은혜로 그 구원을 감사하며 우리의 몸과 마음을 하나님께, 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드린다.

[17-18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 . . .

예수께서는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유대인은 사마리아 사람들과 달리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주신 치료의 은혜를 감사할 줄 몰랐다. 인간은 참 무지하고 부족한 존재이다. 그는 마땅히 하나님께 돌려야 할 감사도 돌리지 못하는 존재이다.

[19절]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 . . .

예수께서는 그에게,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사람이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이치를 나타낸다. 또 이 말씀은 그가 나병 치료뿐 아니라, 영혼의 구원도 받았음을 암시하는 것 같다. 믿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

12절로 19절까지는 몇 가지 진리와 교훈을 준다. 첫째로, 이 사건은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증거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며 우리의 신적 구주이시다. 그는 수많은 불치의 병들을 고쳐주실 뿐 아니라, 더 눌랍게도 우리를 지옥 불못에서 구원하셨다.

둘째로, 우리는 어려운 일을 당할 때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형식적인 기도가 아니고 부르짖는 간절한 기도를 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해야 한다. 순종은 믿음의 당연한 표현이다. 믿는 자는 순종할 것이다.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자는 그가 주시는 영육의 좋은 것들을 받으며 누릴 것이다.

넷째로, 우리는 하나님께 받은 영육의 은혜에 대해 감사해야 한다. 우리는 감사할 줄 모르는 아홉 명의 나병환자처럼 되지 말자. 우리는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구원과 영육의 모든 복을 감사하고 또 사람들에게도 감사하며 살자.

20-21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음

[20-21절]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 . . .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라고 묻자, 예수께서는 대답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당시의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정치적, 경제적, 육체적 개념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은 로마 제국의 속박에서 해방되고 가난과 질병에서 구원을 얻는 나라를 바랐던 것 같다. 오늘날도 자유주의적 교회는 정치적, 경제적 하나님 나라 개념을 가지고 있고, 오순절파 교회는 육체적, 물질적 하나님 나라 개념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주님의 하나님 나라 개념은 그런 개념들과 달랐다.

주의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가 현재 내면적으로 시작된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신자 개인의 심령 속에 그리고 그들의 공동체 즉 교회 속에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통치의 개념이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통치를 부정하고 있으나 회개하고 예수 믿는 신자들 속에는 그의 통치가 회복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를 믿고 순종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경건하고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삶을 산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들 속에서 이미 시작되었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의 시작이다. 중생하고 구원받은 성도들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었다. 복음 운동은 하나님 나라 확장 운동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영광스럽게 완성될 것이다.

우리는 참된 회개와 속죄 신앙으로 우리의 구원을 확신하자.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통치가 이미 우리 속에서 시작되었음을 깨닫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