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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성 목사

2013년 2월 26일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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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주 예수님과 사도 바울의 증거대로(마 5:18; 요 10:35; 갈 3:16; 딤후 3:16), 성경은 하나님의 정확무오한 말씀이며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진술대로(1:8), 성경 원본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고 그 본문은 ‘그의 독특한 배려와 섭리로 모든 시대에 순수하게 보존되었다.’ 이것이 교회의 전통적 견해이다. 그러나 19세기 말 웨스트코트와 호트에 제시된 불확실한 가설에 의하여 많은 교회들이 신약성경의 전통적 다수 본문을 버리고 불완전하고 오류투성이의 사본들(א와 B)을 중시하는 잘못을 범하였다. 그러나 신약성경의 헬라어 비잔틴 다수 사본들의 본문은 순수하게 보존된 성경 원본의 본문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채택되어야 할 것이다.

성경을 가지고 해석하고 설교할지라도 그것을 바르게 해석하고 설교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올 것이다(암 8:11). 중세 시대 말, 종교개혁 직전과 같이, 오늘날 벌써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오는 것 같다.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설교와 성경강해가 있지만, 순수한 기독교 신앙 지식과 입장은 더 흐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요구되는 성경 해석과 강해는 복잡하고 화려한 말잔치보다 성경 본문의 바른 뜻을 간단 명료하게 해석하고 적절히 적용하는 것일 것이다. 사실상, 우리는 성경책 한 권으로 충분하다. 성경강해는 성경 본문의 내용을 바르게 이해하는 데 작은 참고서에 불과하다. 성도들은 각자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성경을 읽어야 하며, 주석과 강해서는 오직 작은 참고서로만 사용해야 할 것이다.


 

제목차례

로마서 서론

1장: 사람의 죄

2장: 하나님의 심판

3장: 칭의의 방법

4장: 아브라함의 예

5장: 칭의의 결과

6장: 성화의 이유

7장: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8장: 성령의 인도하심

9장: 선택

10장: 신앙 고백

11장: 하나님의 구원 계획

12장: 그리스도인의 생활

13장: 사회 생활

14장: 서로 덕을 세움

15장: 바울의 전도 사역

16장: 인사

 

서론

로마서는 사도 바울이 제3차 전도여행 중에 하나님의 감동으로, 아마 고린도에서, 기록한 편지로서(롬 15:19, 23-26; 16:1; 행 19:21) 바울의 서신들 중에서, 아니 신약성경 전체에서 구원의 복음을 가장 논리정연하게 증거하는 매우 중요한 책이다.

본서의 저자는 사도 바울이다(1절). 1세기 말부터 2세기 초, 로마의 클레멘트, 익나시우스, 순교자 저스틴, 폴리갑 등은 본서를 많이 인용하였고 교회역사상 본서의 바울 저작성을 부정하는 학자들은 거의 없었다. 본서의 저자는 본서 끝부분에서 자신이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마게도냐와 아가야의 북서쪽 해안]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고 이제는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고 있다고 말하였다. 이것은 사도행전에 증거된 바울의 발자취에 일치한다(행 19:21; 20:22; 24:17 등).

본 서신을 받은 로마교회의 기원에 대해서는 몇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로, 천주교회는 사도 베드로가 그 교회를 세웠고 25년간 그 교회의 감독으로 봉사했다고 주장한다.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고린도의 디오니시우스는 베드로와 바울이 로마에서 함께 교회를 설립하였다고 말하였다.1) 이레니우스도 말하기를, 로마교회가 베드로와 바울, 두 영광스러운 사도에 의해 세워졌다고 말했다.2) 터툴리안은 베드로와 바울이 로마에서 순교 당하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오늘날 일반적으로 베드로가 로마를 방문했으며 또 후에 그곳에서 순교 당했다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그가 로마교회를 세웠다거나 25년간 그곳에서 사역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는다. 만일 바울이 로마를 방문하기 전에 베드로가 그곳에서 교회를 세웠고 그곳에서 사역하고 있었다면 바울은 필경 그에게도 문안했을 것이고, 또 남의 터 위에 교회를 세우지 않겠다는 신조(롬 15:20)로 사역했던 그가 그 교회를 방문하려고 계획을 세우지 않았을 것이다.

둘째로,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와서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던 자들이 로마에 돌아가 교회를 세웠을지도 모른다. 셋째로, 아시아와 유럽 여러 곳에서 사도 바울이나 기타 다른 제자들에 의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신자들이 로마로 진출하여 살면서 교회를 세웠을지도 모른다. 이 두 번째와 세 번째의 견해는 다 가능하다고 본다.

본 서신의 저작 장소연대에 관하여, 본 서신에 의하면 바울은 로마교회를 방문하려는 소원을 갖고 있었고(1:10), 또 그들에게 복음을 전함으로 그들을 견고케 하고 열매를 맺게 하기를 원하였다(1:11, 13). 그는 본 서신을 기록할 당시 예루살렘의 어려운 성도들을 위해 모은 헌금을 가지고 그리로 가고 있었다(15:25-27). 또 그가 ‘식주인 가이오’를 언급한 것을 보면, 그는 분명히 고린도에 머물고 있었다(고전 1:14). 그러므로 본 서신은 바울이 고린도에서 주후 56년경에 기록했을 것이다.

로마서의 특징적 주제구원이다. 1장부터 11장까지는 구원의 이치에 대하여 증거하였는데, 1, 2장은 구원의 필요성(죄와 심판)에 대해, 3-5장은 의롭다 하심(칭의, 稱義)에 대해, 6-8장은 거룩하여짐(성화, 聖化)에 대해, 그리고 9-11장은 예정에 대해 증거하였다. 또 12장부터 16장까지는 구원받은 자의 삶에 대하여 증거하였다. 구원받은 자의 삶은 거룩한 삶이며 선한 삶 곧 사랑의 삶이다.

 

1장: 사람의 죄

1-7절, 문안 인사

[1절]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 . . .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다”고 말한다. 바울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소개하였다. 종은 주인에게 복종하는 신분이었다. 그는 주인이 명령하는 대로 순종해야 했다. 바울은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몰랐고 그를 믿는 자들을 핍박했지만,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님으로, 또 자신을 그의 종으로 고백한다.

오늘날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사람들이나 세상이나 돈이나 육신의 정욕에 종이 되는 대신에 예수 그리스도께 종이 되어야 한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다시 사셨다. 우리는 불평하거나 주저하며 그를 따르지 말고 즐거이, 즉시, 온전히, 절대 복종하는 종이 되어야 한다.

바울은 또 자신을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라고 말하였다. 사도(使徒)는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열두 제자들과 바울에게만 적용되는 명칭이다. 누가복음 6:13,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열두 제자들 중 가룟 유다가 배신했으므로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제자들은 가룟 유다 대신 맛디아를 뽑았다(행 1:26). 단지, 사도행전에서 예외적으로 바나바에게도 사도라는 명칭이 두 번 돌려졌다(행 14:4, 14; 원어성경에서).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바르게 해설하고 선포하는 일을 맡은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함을 입었다고 말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성령의 사람들이었고 영감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전달자들이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의 기초를 놓은 자들이었다(엡 2:20).

그러므로 신약시대의 교회들은 하나님의 복음을 바르게 파악하기 위해 사도들에게로, 즉 사도들의 글들인 신약성경에게로 가야 한다. 혼란한 시대에는 더욱 성경만이 하나님의 바른 뜻과 진리를 확인하는 길이다. 종교 개혁 시대에 많은 훌륭한 학자들과 박사들과 교회 지도자들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진리가 혼잡되었었다. 어떤 길, 어떤 노선, 어떤 입장이 바른 것인지 알기 어려웠다. 그러나 루터는, 비록 보잘것없는 일개의 신부이었지만, 성경의 확실한 지식과 확신으로 종교 개혁의 횃불을 들 수 있었다. 다른 개혁자들도 그러했다. 오늘날 배교와 혼돈의 시대에도 교회는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2절]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 . . .

바울은 또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복음의 내용은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것으로서 구약성경에 미리 약속되어 있었다. 구약성경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오래 전부터 약속하였었다. 창세기 3:15에 예언된 ‘여인의 후손’이나 창세기 12장에 언급된 ‘아브라함의 씨’나 창세기 49:10에 예언된 ‘실로’[안식의 사람] 등이 그것이다. 기독교 복음은 구약성경에 근거하고 있다. 구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과 예표의 말씀들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다(요 5:39; 눅 24:27, 44).

[3절]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바울은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씨, 자손]에서 나셨다”고 말한다. 복음의 내용인 예수 그리스도는 참 사람이시요 참 하나님이시다. 그는 참된 인성(人性)과 참된 신성(神性)을 소유하고 계신 분이시다. 본절의 ‘육신’이라는 원어(사르크스 σάρξ)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가리킨다.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으로 참 사람으로 탄생하셨다. 그의 몸만 다윗의 자손으로 나신 것이 아니고, 그의 인성(人性) 즉 그의 영육(靈肉)이 그러하였다.

이것은 구약성경의 예언들의 성취이었다. 예레미야 23:5,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라.” 에스겔 34:23, “내가 한 목자를 그들의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호세아 3:5, “그 후에 저희가 돌아와서 그 하나님 여호와와 그 왕 다윗을 구할 것이라.” 예수 그리스도는 이런 예언들의 성취이시다. 그래서 신약성경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世系)[족보]라”(마 1:1)는 말로 시작된다.

[4절]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 . . .

바울은 또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고 말한다. ‘성결의 영’(프뉴마 하기오쉬네스 πνεύμα ἁgιωσύνης)이라는 말은 그 속에 계신 거룩한 신성의 영을 가리킨다고 본다. 예수께서는 인성으로는 다윗의 자손이요 신성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의 증거는 그가 행하신 기적들과 그의 부활하심이다. 그의 죽음과 부활은 복음의 기본적 사실들이다. 고린도전서 15:1-4,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 . . .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모든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행하신 기적들과 그의 죽음과 그의 부활을 반드시 확인하고 믿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심으로써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 ‘인정한다’는 원어(호리조 ὁρίζω)는 ‘확정한다, 선언한다’는 뜻이다. 영어성경들은 ‘선언되셨다’라고 번역하였다(KJV, NASB, NIV). 그는 본래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부활하심으로써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확실히 인정되고 확정되고 선언되신 것이다.

이 분이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바울은 복음의 내용을 설명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인성과 참된 신성을 먼저 증거하였다.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복음의 중심 인물이며 복음 자체이시다. 그는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 그들의 죄의 대속물로 하나님께서 세상에 보내신 구주이시다. 그는 우리를, 슬픔과 불행이 가득하고 절망과 허무가 가득하고 죽음의 어두운 그늘로 뒤덮인 세상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구주이시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구원이 있고, 그 분 안에 영원한 생명과 기쁨과 소망이 있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이다. 우리는 구약성경에 예언되었고 사도들에 의해 밝히 선포된 예수 그리스도, 참된 신성과 참된 인성을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깨닫고 바로 받고 믿고 온전히 따르자.

[5-6절]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 . . .

바울은 또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의 은혜를 받았다. 은혜는 사도의 직분에도 관계된다. 우리는 직분에 있어서도 무자격한 자들이다. 사도직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는 것이었다. ‘믿어 순종케’라는 원어(에이스 휘파코엔 피스테오스 εἰς ὑπακοὴν πίστεως)는 ‘믿음의 순종을 하게’라는 뜻이다. 성도는 믿고 순종할 뿐만 아니라, 믿음 자체가 순종 곧 마음의 순종이다(롬 6:17). 마음으로 순종한 자는 물론 행위로도 순종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가지고 곳곳에 다니며 사람들로 하여금 믿음의 순종을 하게 하였다.

이 편지를 받는 로마 교인들도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하는 무리 중에 들었다. 그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었다. ‘부르심’은 성령께서 죄인들을 회개시켜 예수님을 믿게 하시는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된다. 이것은 놀라운 특권이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들, 그의 양들, 그리스도께서 피흘려 사신 자들만 그의 사람으로 부르심을 입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된다.

[7절]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 . . .

바울은 또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믿은 자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다. ‘은혜와 평강’ 속에 모든 복이 다 들어 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우리의 구원도 불가능했고 또 우리의 성화도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고 오늘도 거룩한 길을 힘쓰며 주를 섬기는 성도들이 되었다. 평강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결과이다. 그것은 세상이 빼앗을 수 없는 마음의 평안과 몸의 건강과 물질적 여유와 환경적 평안을 포함한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시는 복된 삶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진리를 성경에 증거된 대로 깨닫고 굳게 붙들자. 배교와 타협과 혼돈의 시대에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가고 옛길을 연구하자. 또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 또 성경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자. 우리의 의무는 믿고 순종하는 것뿐이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사모하며 확신하며 또 체험하자.

8-17절, 로마로 가기를 소원함

[8-10절] 첫째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첫째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을 인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어떠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바울은 로마의 교인들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였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그들의 믿음의 소문이 널리 알려졌다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라는 말은 우리의 구원이 전적으로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음을 나타낸다. 오늘날 우리의 감사의 이유도 육적인 것보다 영적인 것이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세상적, 물질적 형통과 번창보다 먼저 우리 자신과 주위의 형제들의 믿음과 믿음의 성장과 믿음의 소문의 퍼져나감을 감사해야 한다.

바울은 하나님을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섬긴다고 표현하였다. 복음은 ‘그의 아들의 복음’ 즉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의 복음으로 구원을 받았고 그 복음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다. 성부와 성자의 신비적 관계는 성부는 하나님으로, 성자는 그의 아들로 묘사된다. 성자는 참된 신성을 가지고 계시지만, 하나님으로 불리기보다는 주로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신다. 그럼으로써 성부와 성자의 인격의 구별이 증거된다.

바울은 또 ‘내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표현한다. ‘내 심령으로’라는 말은 ‘내 영으로’라는 말이다. 영은 인격의 주체이다. 우리의 인격은 우리의 영혼에 자리잡고 있다. 몸은 영의 도구에 불과하다. 기독교는 단순히 몸의 종교가 아니고 영의 종교이다. 몸의 행위도 거룩해야 하지만, 그것은 영의 표현이어야 한다. 우리의 중생한 영의 새 성향이 우리의 마음을 항상 주장해야 한다. 참된 종교는 심령의 종교이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통해 구원을 받아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 생활과 봉사 생활은 우리의 영에서 나오는 진심의 생활이 되어야 한다.

바울은 로마 교인들을 위해 항상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의 뜻 안에서’ 그들에게로 갈 좋은 길 얻기를 원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믿는 믿음이다. 하나님의 허락 없이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은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라면 이것 혹은 저것을 하겠다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약 4:15).

바울은 그의 감사와 쉬지 않는 기도 생활에 대해 하나님께서 증인이 되신다고 말한다. 이것은 사도의 진실한 마음과 진실한 사역을 증거한다. 우리도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항상 진실하게 말하고 행하며 또 감사하고 기도해야 한다.

[11-12절]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니 이는 곧 내가 . . . .

바울은 또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니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서로의 안에 있는](원문) 너희와 나의 믿음을 인하여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고 말한다.

바울이 로마로 갈 좋은 길 얻기를 기도한 이유는 그들을 보기를 심히 원하기 때문이며, 그가 로마 교인들을 보기를 원했던 목적은 그들에게 어떤 신령한 은사를 나눠주어 그들을 견고케 하기 위함이었다. ‘신령한 은사’는 예언, 방언 같은 은사들이라기보다 하나님의 진리의 교훈을 가리킨다고 본다. 사도들의 사역은 말씀 사역이었다. 이것을 통해 성도의 신앙과 소망은 어린아이의 시기를 벗어나 소년기, 청년기, 장년기로 성장하며 견고케 된다(골 1:28-29). 오늘날 목사들의 사역의 목표와 임무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의 바른 강론이다.

바울은 또 서로의 견고한 믿음을 인해 피차 안위함을 얻기를 원하였다. 이것은 사실일 뿐만 아니라, 그의 겸손한 태도를 보인다. 사도는 성도들에게 무엇을 주려고만 하지 않고 그들로부터 위로를 받으려 한다고 겸손히 말하였다. 성도의 교제란 하나님께서 동일하게 은혜로 주신, 서로 안에 있는 믿음을 인해 피차 위로와 힘을 얻는 것이다(살전 5:14). 이것이 영적 교제이며 교제의 유익이다. 우리의 교제는 단순히 먹고 마시는 데 그치지 말고, 이렇게 같은 믿음의 확인을 통해 위로와 격려를 주고 받는 교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13절]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 . . .

바울은 또 말한다.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약간의](원문)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그는 로마로 가기를 원한 또 하나의 목적을 그들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들 가운데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함이라고 표현한다. 그가 의미한 열매는 분명히 로마 성도들의 인격의 변화와 선행을 포함한다. 우리에게는 인격의 변화와 선행의 열매가 필요하다(갈 5:22-23). 또 문맥에 비추어 볼 때에, 그것은 전도와 영혼 구원의 열매를 포함한다. 그는 거창하게 많은 사람의 구원을 목표로 삼지 않고 ‘약간의’ 열매 즉 몇 사람의 구원을 목표로 삼았다. 우리는 한 영혼의 구원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

[14-15절]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 . . .

바울은 또 말한다.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바울은 자신이 모든 사람에게 빚을 졌다고 말하였다. 여기의 ‘빚’은 전도의 빚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영혼들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의 은혜를 깨달았다면, 또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깨달았다면, 우리는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세상 모든 사람에게 전해야 할 의무가 있다. 우리는 배운 자에게나 배우지 못한 자에게나, 부자에게나 가난한 자에게나, 우리나라 사람에게나 다른 나라 사람에게나 차별 없이 복음을 전해야 한다. 택함 받은 자들만 회개하고 믿고 구원받을 것이지만, 우리의 전도 대상에는 어떤 제한이 있을 수 없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죄를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전해야 한다.

[16-17절]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 . . .

바울은 또 말하였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義)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더욱 복음 전파하기를 원하였다. 그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이유는 복음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이었다. 원문은 능력이라는 말을 문장 맨 앞에 두어 강조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 복음을 통해 구원을 받았다. 오늘날도 이 복음은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다. 오늘도 죄인을 구원하는 것은 이 복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이 좋아하든지 싫어하든지 이 복음을 널리 전하기를 힘써야 한다.

복음이 구원의 능력이 되는 까닭은 믿음으로 얻는 하나님의 의(義)가 복음에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의는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과 법을 다 행했을 때 얻을 수 있는 바이었고(신 6:25), 죄는 하나님의 명령과 법을 다 행하지 못한 상태이었다. 이 세상의 근본적 문제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범죄함에 있었다. 그러므로 죄 문제의 해결은 사람과 세상의 근본적 문제의 해결이다. 즉 사람의 근본적 문제는 의의 문제인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사람의 가장 근본적 문제이다.

그런데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과 법을 행함으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은 경험을 통해 너무나 명백하였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그의 의를 복음에 나타내셨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 죽으셔서 우리의 모든 죄의 책임과 형벌을 담당하심으로 이루신 의이었다(롬 10:4). 이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이 의(義)를 주기를 원하신다. 이것이 복음이며,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구원이다.

‘믿음으로 믿음에’라는 말씀은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으로’라는 뜻이라고 본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받는다. 이것이 복음이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되는 이치인 것이다. 어떤 큰 죄인이라도 예수님 앞에 나아와 그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 이것이 하나님의 복음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代贖)을 깨닫고 그를 믿는 것이 속죄 신앙이요 그것이 구원받는 신앙인 것이다.

우리는 우리와 형제들의 믿음과 믿음의 성장을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자. 또 우리는 바른 말씀의 교훈 안에서 견고해지고 서로의 믿음을 인해 안위함을 얻는 교제를 나누고 선한 열매 즉 인격과 삶의 변화를 이루고 빚진 심정으로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기를 사모하자. 우리는 오늘날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구원의 능력이며 그 복음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받은 사실을 깨닫고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이 복음과 이 믿음을 만방에 널리 전파하는 자들이 되자.

18-27절, 우상숭배와 정욕의 죄

로마서 1-2장은 구원에 필요성에 대해 증거하는데, 그것은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것이다.

[18-19절]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 . . .

바울은 말한다. “[이는]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나타남이니]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하나님의 의가 필요한 까닭은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기 때문이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내릴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와 구원이 필요하다.

구원은 인간의 죄 때문에 필요하다. 바울은 죄인을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한다. 죄인은 불의 가운데 살면서 진리를 가로막는다. 사람들에게 진실이 있다면 죄는 죄로 드러나고 죄 문제의 해결이 가능하지만, 죄를 감추는 곳에는 소망이 없다.

바울은 사람들의 죄를 불경건과 불의라고 요약하였다. 불경건은 하나님을 향해 범하는 죄의 통칭이요, 불의는 모든 죄의 통칭이다. 물론 불의는 불경건을 포함한다.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이 의(義)요, 그것을 어기거나 지키지 못한 것이 죄다. 죄들 가운데 불경건의 죄가 있고 이 죄가 근원적 죄다. 다른 모든 죄는 불경건에서 나온다.

바울은 하나님의 진노의 이유를 두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어느 정도 모든 사람 속에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이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그들에게 보이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자신을 어느 정도 알려주셨다. 이것을 일반 계시라고 한다.

[20절]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거대한 천지만물의 시작과 현재까지의 보존을 묵상할 때 사람은 창조주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영원하심을, 즉 그의 신성을 깨닫게 된다. 자연만물은 하나님의 모습을 반영하는 거울과 같다. 이와 같이, 자연 세계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과 신성(神性)의 증거가 확실하므로, 사람은 하나님께서 계신 줄 몰랐다고 핑계할 수 없는 것이다.

[21절]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 . . .

바울은 또,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진노가 하나님께로부터 내리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거나 감사치 않고 도리어 우상숭배에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나님을 알되’라는 말씀은 사실상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의식하고 있음을 보인다. 종교가 없는 민족은 없다. 무신론자도 전쟁 중에는 하나님을 찾는다. 우리 선조들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이 없었으나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고 비록 잘못된 방식으로지만 그 신을 섬겨왔다. 그러나 자연만물 가운데 사는 모든 인생은 하나님의 존재를 어느 정도 의식하며 살지만, 그 하나님을 참으로 영화롭게 하지 않고 또 그에게 감사하지도 않고 있다. 그들의 마음은 미련하고 어리석고 심히 어두워져 있다. 천지만물의 기원에 대한 참된 지식을 가지지 못한 것이 인생의 가장 근본적 무지(無知)요 어리석음이다.

[22-23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둔하게 되어 썩어지지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둔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새들과 짐승들]와 버러지[기는 것]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사람들은 이처럼 무지하고 어리석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지혜롭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창조 세계 속에 살면서 창조주를 알지 못하는 것이 지혜인가? 세상의 시작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세상의 진행 방향과 목적에 대한 지식도 있을 수 없다. 인류 역사에 나타났던 천재적 사상가들의 집합은 바보들의 집합과 결론이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성경은 그 둘을 다 어리석다고 말하는 것이다.

인생의 어리석음의 한 확실한 증거는 우상숭배이다. 우상숭배는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 세계를 혼동함이다. 하나님은 영원자존자시요 그의 영광은 썩어지거나 없어지지 않으신다. 그는 영원히 영광스런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이 세상것들은 다 썩어지는 것이다. 세상은 영원한 영광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은 자들은 우상숭배에 빠져 있다. 우상숭배는 불경건과 무지와 어리석음의 증거이다. 하나님께서 인생의 불경건에 대하여 진노하시며 그의 진노는 정당성을 가진다.

[24절]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바울은 또,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도덕의 근원이시고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 부도덕의 뿌리이다. ‘그러므로’라는 말은 불경건이 모든 정욕의 죄의 원인임을 보인다. 도덕 갱신은 하나님을 두려워함 곧 참 종교의 부흥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악을 떠날 수 있다. 그러니 교회가 부패하면, 그 사회의 미래는 어떠하겠는가? 그런 사회는 부도덕한 사회가 되고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불경건한 자들을 정욕의 죄 가운데 버려두신 이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는 죄인들을 회개시키시고 구원하실 능력이 있다. 그러나 그에게는 또한 죄인들을 버려두실 권한도 있다. 아무도 그에게 왜 당신이 그들을 구원치 않느냐고 항의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본래 스스로 하나님을 떠났던 자들이요, 지금도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있고 자연만물 속에 명백히 나타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감사치 않고 오히려 우상숭배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마음은 인격의 좌소(座所)인데, 하나님은 사람의 불경건한 마음을 더러움에 버려두셨다. 정욕의 죄는 불경건의 죄에서 나온다. 정욕의 죄는 인간의 불경건의 죄 때문에 내리시는 하나님의 추가적 징벌이다. 죄는 죄를 더한다. 불경건의 죄는 음란의 죄를 낳는다. 불경건한 사회는 음란한 사회가 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징벌이다.

[25절]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바울은 또 말하기를,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이라고 하였다.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바른 생각들을 가지고 있다면 우상숭배에 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의 진리’는 하나님에 관한 바른 생각을 가리키고, ‘거짓 것’은 하나님에 관한 잘못된 생각들을 가리킨다. 사람들은 참 하나님을 우상으로 대치했고, 하나님에 대한 참된 생각을 우상의 생각들로 대치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피조물을 조물주 대신 혹은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고 있다.

이것이 현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우상 앞에 절한다. 그러나 우상이 사람을 구원하고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가? 많은 사람들이 죽은 자 앞에 절한다. 그러나 조상신이 후손에게 복을 주는 살아있는 신인가? 인간은 얼마나 어리석은 존재인지 모른다.

이런 우상숭배를 하지 않는 자들도 하나님 대신에 돈을 사랑하며, 하나님 대신에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 그러나 돈이 전능한 신인가? 또 인간이 전능한 신인가?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는 병원 중환자실이나 장례식장에 가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어리석게도 돈의 노예가 되어 아침부터 저녁까지 돈을 위해 살며, 또 자기 자신만 의지하며 씩씩하게 살다가 불쌍하고 허무하게 죽는다. 인간은 이런 헛된 것들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영원히 찬송을 받으실 분은 오직 창조자 하나님뿐이시다. 그는 살아계시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그 하나님을 바로 깨닫고 마음과 힘을 다해 그에게 찬송과 영광을 돌리자!

[26-27절]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 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바울은 또 말하기를,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 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 듯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고 하였다.

정욕의 죄는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이다. 먼저 여자들의 죄에 대해 말한다. 여자들은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쓴다. 여자들이 순리대로 쓴다는 말은 여자들이 성년이 되어 결혼하여 정상적 결혼생활을 하는 것을 말하며, 역리로 쓴다는 것은 정상적 결혼생활을 이탈하거나 거슬러 행하는 것을 가리킨 것 같다. 그것은 여자들의 매춘 행위나 동성애 등을 가리킬 것이다.

여자들뿐 아니라, 남자들도 정상적인 부부관계를 저버렸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부부관계로 만족하지 않고 심지어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였다. 이것은 남자 동성애를 가리킨 것이라고 본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결혼의 질서를 파괴하는 악한 일이다. 그러나 인간의 감정은 이렇게 부패되었다.

동성애의 죄악은 옛날 소돔과 고모라 성 사람들의 죄악이었다(창 19장). 또 옛날 가나안 족속들에게 이런 동성애의 죄악이 있었다(레 18장). 또 고대 헬라와 로마 사람들 가운데도 이런 죄악이 보편적이었다고 한다. 유명한 시세로(Cicero)는, “[동성애의] 행위는 헬라인들 가운데는 보편적이었고, 그들의 시인들과 위인들 및 심지어 그들의 지식 있는 자들과 철학자들도 그런 일을 행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것을 자랑했다. . . . 그것은 어떤 특정한 도시들만의 풍습이 아니라 그리스 전체의 풍습이었다”라고 말하였다.

하나님은 이 악한 일에 대하여 ‘상당한 보응’을 내리셨다. 소돔과 고모라 성은 유황불비로 잿더미가 되었다. 가나안 족속들은 이스라엘 백성에 의해 멸망을 당하였다. 고대 헬라와 로마도 다 멸망하였다. 오늘날 에이즈(AIDS) 전염병은 하나님의 재앙이라고 보여진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우리는 경건한 자들이 되어야 한다. 경건은 하나님을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그에게 합당한 경배와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경건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이다. 하나님을 부정하거나 하나님께 돌려야 할 합당한 영광을 돌리지 않는 것이 불경건이다. 또 하나님보다 돈이나 세상의 것이나 육신의 쾌락이나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는 것이 불경건이다. 오늘날은 심히 불경건한 시대이다. 성도들은 이 불경건한 시대에 참된 경건을 실천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성결해야 한다. 모든 음란의 죄악들을 다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이 씻음을 받아야 한다. 우리는 이 음란한 세상 속에서 우리의 몸과 마음을 깨끗이 지키도록 힘써야 한다. 하나님의 진노와 최종적 심판은 불경건하고 음란한 세상에 임할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과 더불어 멸망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와 우리 자녀들은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고 거룩해야 한다.

28-32절, 여러 가지 죄들

[28절]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죄인들은 세상의 많은 지식은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가지기를 싫어한다. ‘마음에’라는 원어(엔 에피그노세이 ἐν ἐπιgνώσει)는 ‘지식에’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지식이 모든 지식의 근본임에도 불구하고 죄인들은 그 지식을 거절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두셨다. ‘상실한 마음’이라는 원어(아도키모스 누스 ἀδόκιμος νούς)는 ‘실패한, 무가치한 생각’이라는 뜻이다. 죄인의 생각은 하나님의 표준에 미달하고 무가치하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버려두셔서 그들로 합당치 못한 일들을 행하게 하셨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거절하는 자들은 결국 여러 가지 죄악에 떨어진다. 불경건은 모든 죄악들의 뿌리이다.

[29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 . .

바울은 또 말한다.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사람들에게는 모든 불의가 가득하다. ‘모든’이라는 말은 뒤에 나오는 ‘가득한 자요’라는 말과 더불어 여기에 대표적으로 열거된 죄악들의 다양한 종류들에 관계된다. ‘불의’(不義)는 모든 죄악들의 대표적 명칭이다. 의(義)는 하나님의 명령과 뜻에 일치하는 생각과 행위요, 불의는 그의 명령과 뜻에 어긋나는 생각과 행위이다. 하나님은 온갖 종류의 불의를 정죄하시고 우리에게 의로운 삶을 원하신다.

전통본문에는 ‘불의’라는 말 다음에 ‘음행’이라는 말이 나온다.3) 사람들은 온갖 종류의 음행이 가득하다. 음행은 인간 관계의 죄들 중에 가장 크고 심각한 죄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종류의 음행과 불결을 미워하시고 우리에게 거룩하고 단정한 삶을 원하신다.

사람들은 또 ‘추악’(포네리아 πονηρία)[악]이 가득하고, 또 탐욕이 가득하다. 탐욕은 이 세상의 것을 더 많이 원하는 마음이다. 탐심은 하나님 대신에 세상을 사모하는 마음이며 그것은 일종의 우상숭배이다(골 3:5). 성도가 영원한 천국을 참으로 믿고 소망하고 사모한다면 지나가는 이 세상의 것에 대한 탐심을 버려야 한다. 우리의 사모하는 보화와 우리의 영원한 기업은 하나님이요 장차 올 천국이다.

사람들은 또 ‘악의’(惡意)가 가득하다. 악한 마음에서 악한 행위들이 나온다. 사람은 마음과 생각을 지켜야 한다. 악한 마음을 버리고 선한 마음을 간직해야 한다. 사람들은 또 ‘시기, 살인, 분쟁’이 가득하다. 시기는 교만과 함께 싹트고 미움과 더불어 자라서 남과 다투며 남을 죽이는 데까지 나아간다. 우리는 교만과 시기를 버려야 한다. 우리는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남이 나보다 잘되면 축하하고 기뻐해야 한다. 또 꼭 필요한 진리의 싸움이 아닌 모든 다툼과 분쟁을 버려야 한다. 천국은 의와 진리 안에서 화평한 세계이다.

사람들은 또한 ‘사기(詐欺)와 악독’이 가득하다. 사람들은 자기의 유익을 위해 남을 속인다. 이런 이기심에서 온갖 종류의 악한 행위들이 나온다. 그러나 성도는 자기의 이익보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고 거기에 순복해야 한다. 그러할 때 그는 다른 이들을 위해서 선한 마음과 행위를 가질 수 있다.

사람들은 또 ‘수군수군한다.’ 이것은 은밀히 남의 말 하기를 좋아하는 태도를 가리킨다. 남에게 할 말이 있으면 직접 하는 것이 사랑이며, 뒤에서 수군거리는 것은 악한 일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각자의 일에 충실하고 남의 말 하기를 좋아하지 말아야 한다.

[30절]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 . .

바울은 또 말한다.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비방한다’는 말은 공공연히 남을 비난하는 것을 가리킨다. 비방은 교만과 시기와 미움 등에서 나온다. 사랑은 이웃의 허물을 덮지만, 미움은 이웃에 대한 비난으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인간 관계에 금이 가고 크고 작은 공동체들이 파괴된다. 사랑은 건설하는 덕이요, 미움과 비난은 파괴하는 악이다.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라는 원어(데오스튀게이스 θεοστυgείς)는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들’이라는 뜻이라고 본다. 사람들은 왜 하나님을 미워하는가? 빛에 속한 자는 빛을 좋아하나 어두움에 속한 자는 빛을 싫어하기 때문이다(요 3:20). 악인은 하나님을 미워한다.

또 사람들은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이다. ‘능욕하는 자’라는 말은 영어성경에는 ‘멸시하는 자, 오만불손한 자’라고 번역되었다. 능욕, 교만, 자랑, 이 세 단어의 뜻은 서로 가깝다. 교만은 죄악의 근원인 마귀의 죄악이었고, 모든 죄인들의 특성이 되었다. 피조물이 자신을 주인과 왕으로 여기는 것이 교만이다.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주인이시요 왕이시므로, 교만은 어리석고 무지한 일이요 매우 근본적 죄악이다. 거기서 남을 멸시함과 자랑이 나온다.

사람들은 또 악을 도모하며 계획한다. 이것은 실수의 악이 아니고 의도된 악, 계획된 악이다. 이것은 실수의 악보다 더 악하다. 사람들은 또 부모를 거역한다.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되지 않은 많은 자녀들은 부모들을 거역한다. 이것이 부패된 인간성이다. 아이들은 엄한 징계와 훈련을 통하지 않고는 도무지 통제되지 않고 길들여지지 않는다. 그래서 성경은 어릴 때부터 징계의 매로 아이들을 교육하라고 말했다(잠 23:13-14). 사람의 부패된 인간성은 사랑의 징계를 통해 비로소 조금 제어될 수 있다(잠 13:24; 22:15).

[31절] 우매한 자요 배약(背約)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바울은 또 말한다. “우매한 자요 배약(背約)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사람들은 우매하여 참 지식도 깨달음도 없다. 그들은 행복을 추구하면서 스스로 불행을 가져온다. 그들은 많은 지식을 추구하여 얻지만, 참으로 알아야 할 지식, 곧 인생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며 지금 왜 여기 있으며 무엇을 위해 있는지에 대하여는 모른다. 이것이야말로 무지하고 우매한 인생의 모습이다. 이런 인생이 과연 소와 말보다 뛰어나다고 자랑할 수 있을까?

‘배약(背約)하는 자’는 약속을 어기는 자, 불신실한 자를 가리킨다. 사람이 약속을 어기는 데는 부득이한 환경적 요인도 있겠지만, 많은 경우는 자신의 불성실함 때문이다. 사람들은 쉽게 약속하고 그 약속을 쉽게 저버린다. 특히 사람의 불신실함은 시간에 대한 약속과 돈에 대한 약속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신실한 인격, 믿을 만한 인격은 약속을 하는 데도 신중하지만, 약속한 바는 반드시 지키려 한다.

‘무정한 자’는 인정이 없는 자를 가리킨다. 사람들은 어떤 환경에서는 인정이 있어 보이지만, 환경이 조금만 악화되면 무정함을 드러낸다. 사람들은 자기 유익을 위해 부모님을 저버리며 아내를 학대한다. 힘센 자는 약한 자의 것을 빼앗고 강대국은 약소국을 침입한다.

전통본문에는, 그 다음에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는 자요’라는 말씀이 있다.4) 마음 상하는 일이나 원통한 일이 있을 때, 사람들은 그것을 마음 깊이 오래 간직하고 보복하려 한다. 이런 마음 때문에 인간 관계는 허물어진다. 우리는 우리에게 악을 행한 자와도, 그가 사과하면, 언제나, 즉시 화해해야 한다. 우리는 용서하기를 힘써야 한다.

마지막으로, 사람들은 무자비하다. 자비와 긍휼은 하나님의 품성이다. 그러나 타락한 사람들은 이기적(利己的)이게 변하였고 자기 이익을 위해 남을 해치고 남의 것을 교묘히 빼앗는다. 또 그들은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다면 결코 할 수 없을 악을 행하며 또 거칠고 폭력적이고 사악한 자들이 되었다.

[32절]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사람들은 이런 죄악들을 행하는 자가 죽어야 마땅하다는 하나님의 율법과 공의를 알고 있다. 이것은 그들의 양심이 증거하는 바요 그들의 사회의 법들에 나타나 있는 바이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은 사망이다. 죄인은 영적으로, 육적으로, 영원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다. 그것은 지옥의 영원한 형벌을 포함한다(계 21:8).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기만 이런 죄악들을 행할 뿐 아니라 이런 것들을 행하는 자를 옳다고 한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더 가증한 뻔뻔함과 완악함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사람들의 죄악됨은 명백하고 충만하다. 모든 불의, 음란, 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하고, 수근수근하고 비방하고 하나님을 미워하고, 능욕, 교만, 자랑하고, 악을 계획하고 부모를 거역하고, 우매, 배약(背約), 무정, 무자비하다. 이에 덧붙여 이런 악들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는 뻔뻔함과 완악함이 있다. 이런 모든 죄악들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세상에 임한다. 리는 이런 모든 죄악들로부터 구원을 받아야 한다. 우리는 이런 모든 죄악들로부터 깨끗이 씻음을 받아야 한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오직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만 깨끗이 씻음을 받을 수 있다. 사람은 오직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버리기를 결심하고 구주 예수님을 믿고 의지할 때 죄사함의 구원을 받을 수 있다.

 

2장: 하나님의 심판

1-16절, 행한 대로 공의롭게 심판하심

[1-3절]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 . . .

바울은 또 말한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사람은 자기도 악하면서 남의 악함을 판단하기 잘한다. 그러나 그에게 의로운 판단력이 어느 정도 있다는 것이 그를 옳은 자로 만들지는 못한다. 남의 잘못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판단한다고 해서 그가 의로운 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바로 이 판단의 행위에서 그는 자신을 정죄하는 셈이 된다. 그 자신이 동일한 악을 행하기 때문이다. 그의 양심은 자신도 정죄받아야 마땅한 자임을 증거한다.

바울은 또 말한다.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하나님은 사람의 행위를 그대로 판단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악인이든지 그를 판단하는 자든지 혹은 그를 심문하고 벌을 주는 재판관이든지 하나님의 공의롭고 진실한 판결을 피할 수 없다.

[4-5절]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 . . .

바울은 또 말한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남의 죄를 판단하면서 자신은 회개치 않고 하나님의 심판을 무시하는 자는 하나님의 더 큰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는 다른 죄인보다 더 악하다. 장차 하나님의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날이 올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추상적 이야기가 아니고 미래의 한 사건이다. 이와 같이, 사람은 죄인이요 하나님의 심판의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이 두 개의 전제(前提)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의 필요성을 증거한다.

[6-7절]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 . . .

바울은 또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심판은 공의롭다. 그는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 행한 대로 심판하시는 것은 인류역사 시초로부터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원리이었다. 사람은 자기가 원해서 선을 행하고 자기가 원해서 악을 행하고 있다. 사람은 자신의 의지적 결단으로 선이나 악을 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기가 행한 대로 그리고 자기가 행한 만큼 하나님의 보응을 받는다는 사실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불평할 이유가 없다.

바울은 또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영생으로 [보응]하신다”고 말한다. 사람이 선을 행하려면 인내가 필요하다. 한두 번 선을 행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겠지만, 계속 선을 행하는 것은 인내가 필요하다.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은 참으로 가치 있고 영광스러운 영생의 천국과 부활을 가리킨다. 참고 선을 행함으로써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는 복된 몸으로 부활하여 영생에 이를 것이다. 사람은 율법에 계시된 선한 말씀들을 온전히 행할 때 영원히 살 것이다. 그것이 율법에 계시된 공의의 원리이다. 신명기 4:1은, “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준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라고 말하였다. 우리의 행위는 여전히 부족하고 오직 예수님의 의를 믿음으로 구원받지만, 원리는 비슷하다. 우리는 참고 선을 행하며 천국과 부활을 사모하다가 영생을 얻을 것이다.

[8절]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 . . .

바울은 또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고 말한다. 악인들 속에는 자기 중심적이고 세상적인 욕심과 야망이 있다. 그들은 인생의 존귀성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헛된 세상의 것만을 더 가지려 한다. 그래서 그들은 진리에 복종치 않고 당을 지어 진리와 다투며 불의를 좇고 온갖 악을 행한다. ‘당을 지어’라는 원어(엑스 에리데이아스 ἐξ ἐριθείας)는 ‘당파심으로, 다투어’라는 뜻이다. 이들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노와 분으로 보응하실 것이다.

[9-10절]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영혼]에게 환란과 곤고가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혼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 ‘곤고’라는 말(스테노코리아 στενοχωρία)은 ‘곤경, 심한 고생’이라는 뜻이다.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혼에 환난과 심한 고통이 있을 것이다. 육신에도 그러하지만, 그보다 더 근원적이게 그의 영혼에 그러하며, 악인은 죽은 후에도 그 영혼이 지옥에서 고통 가운데 있게 된다(눅 16:23-25). 악에 대한 이러한 보응은 유대인에게나 이방인에게나 동일하다. 그러나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행복도 의인의 심신(心身)에 다 적용되며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다 적용된다.

[11절]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

바울은 또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심판은 보편적이며 세계적이다. 그것은 앞에서 언급된 대로, 유대인에게나 이방인에게나 다 적용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의 역사와 전통과 특권 때문에 그들을 편벽되이 취급하지 않으실 것이다.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가문이나 재산이나 사회적 신분이나 직업이나 학력 등 외적 조건을 보고 편벽되이 그를 판단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공의와 공평의 하나님이시다.

[12-13절]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시는 증거는,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율법 없이 망하고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는 사실에 있다. 율법을 가진 유대인들이나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이나 다 행한 대로 공의롭고 공평하게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바울은 또,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라”고 말한다. 율법을 가진 유대인들은 이방인들보다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 앞에서 더 나은 조건을 가진 것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가지고 있느냐 혹은 율법을 아느냐가 문제가 아니고 율법을 지켰느냐가 문제이다. 왜냐하면 율법에 의하면, 율법을 지킨 자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14-15절]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 . . .

바울은 또 말하기를,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고 말한다. 이방인들은 그들에게 율법이 없었다고 해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에서 면제될 수 없다. 왜냐하면 율법 없는 이방인들도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하며 그 양심으로 옳고 그름을 증거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 안에 있는 양심, 즉 도덕적 분별력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 속에 기록해 두신 율법과 같다.

[16절]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 . . .

바울은 또 말한다.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라는 말씀은 바울이 증거한 복음의 내용 속에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의 진리가 있음을 보인다(히 6:1-2). 심판의 진리는 두려운 진리이지만, 복음의 기본적 내용으로 밝히 증거되어야 할 진리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라는 말씀은 예수께서 심판주가 되심을 보인다. 예수 그리스도는 심판주이시다. 그 날에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공의롭고 철저할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의로우신 판단’이며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는 심판이라는 사실이 5절과 6절에서 이미 증거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드러난 행위들에 대해서만이 아니고 은밀한 행위들에 대해서도 그 행위대로 심판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참으로 공의롭고 철저할 것이다. 여기에 구원의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오래 참으심 앞에서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함의 강퍅을 부리지 말자. 우리는 하나님께서 공의로 심판하실 것을 바로 알자. 그는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며 사람들의 은밀한 행위들까지 다 철저하게 심판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죄를 회개하고 구주 예수께로 나와야 한다. 또 우리는 말씀을 아는 자만 되지 말고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17-29절, 유대인의 잘못

[17-24절]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네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 중에 한 지도적인 인물을 가상적으로 들어 유대인들의 잘못을 지적한다. 그 유대인은 율법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자랑한다. 그는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긴다. 그는 율법 지식과 진리의 형식 혹은 내용을 가진 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고 있다.

바울은 또 말한다.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神社)[신전] 물건을 도적질하느냐?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바울은 남을 가르치는 유대인이 도적질하거나 간음하여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하나님과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은 악을 행하는 그 유대인으로 인해 그의 하나님을 욕하고 있다. 이 말씀은 오늘날 형식적 교인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우리가 교인이라는 이름, 더욱이 직분자의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 어떤 악을 행하면,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욕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다운 인격과 삶이 없이 교인이라는 이름이나 교회의 직분을 자랑하지 말자. 직분보다 중요한 것이 선한 인격과 삶임을 깨닫고 기도하고 힘써야 한다.

[25-29절] 네가 율법을 행한즉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네가 율법을 행한즉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한즉 네 할례가 무할례가 되었느니라.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제도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의문(儀文)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판단치 아니하겠느냐?” 할례를 받은 것은 율법을 행할 때 가치가 있지, 율법을 범할 때는 아무 가치가 없다. 그것은 무할례와 다를 바가 없다. 무할례자인 이방인이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율법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유대인들을 판단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할례와 무할례가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바울은 또 말한다.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성령으로 말미암고](NASB) 의문(儀文)[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함이니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구약도 마음의 할례를 가르쳤다(신 10:16; 렘 4:4). 그것은 마음의 모든 불결과 강퍅함을 베어 내버리는 것이다. 그것은 심령의 거룩한 변화를 가져오는 것 곧 중생(重生)을 가리킨다. 진정한 기독교는 마음과 내면성의 종교이며, 변화된 심령의 종교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마음의 변화, 즉 모든 죄악된 마음의 상태로부터 새로워지고 깨끗해짐을 가져온다. 참된 경건은 마음이 새로워져서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것이다.

우리는 형식적 교회 생활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구원이란 마음의 할례, 즉 마음의 거룩한 변화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깨닫고 심령으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되자.

 

3장: 칭의(稱義)의 방법

1-8절, 유대인의 특권과 하나님의 신실하심

[1-4절]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 . . .

바울은 또 말하기를,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고 한다. 유대인들의 여러 특권들 중 첫째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유대인들을 통해 온 세계 모든 족속에게 전달되었다(시 147:19-20). 모세와 선지자들이 유대인이었고, 예수님 자신과 그의 사도들도 그러했다. 성경의 저자들은 대체로 유대인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진리들을 계시하셨고 그것들을 기록하고 보관하며 전달하게 하셨다.

바울은 또 말한다.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 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 어떤 유대인들이 믿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주신 말씀 보관의 특권에 차질이 생긴 것 같지는 않다. 사람들은 다 거짓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참되시다.

[5-6절]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 . . .

바울은 또 말한다.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만일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 사람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낸다고 하여서 그 불의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 불의에 대하여 진노하시는 하나님은 결코 불의하실 수 없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그가 의롭지 못하고 불의하시다면, 어떻게 심판자가 되실 수 있겠는가? 의롭지 못한 심판자는 참된 심판자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아무리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일지라도, 또 그들의 부도덕이 하나님의 의를 드러낸다 할지라도, 그들이 범죄하는 한 그들은 마땅히 정죄되어야 한다.

[7-8절]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 . . .

바울은 또 말한다.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으면 어찌 나도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저희가 정죄 받는 것이 옳으니라.” 본절은 앞의 5, 6절을 보충 설명한다. 사람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게 드러났을지라도 그의 거짓말이 어떤 선한 역할을 한 것이 아니며 선으로 간주될 수도 없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선을 이루기 위해 악을 행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무슨 일이든지 목표가 선하고 옳을 뿐만 아니라, 방법도 선하고 옳아야 한다.

이 말씀은 오늘날 교회의 화평과 일치를 위하여 자유주의자들을 포용하는 넓어진 교회들과, 대형 전도집회들을 위해 자유주의 교회들과 천주교회 지도자들을 포용하고 협력하는 어떤 복음주의 전도자들의 오류를 잘 증거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선한 목표를 가질 뿐 아니라, 또한 선한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 아무리 목표가 선하다 할지라도 비성경적 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우리는 유대인들을 통해 전달된 하나님의 말씀을 감사하자. 또 우리는 하나님께서 거짓말하실 수 없는 신실한 분이심을 알자. 또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목표도 선해야 하고 방법도 선해야 함을 기억하자.

9-18절, 모든 사람이 죄인임

[9절]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 . .

바울은 또 말한다.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사도 바울은 이미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다 죄인임을 증거하였다. 그는 1장에서는 주로 이방인의 죄를, 그리고 2장에서는 주로 유대인의 죄를 증거하였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특권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이방인과 다를 바가 없이 죄인이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다 구별 없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다.

[10-12절]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 . . .

바울은 또 말한다.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이 세상에 의인은 하나도 없다. 단지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만 예외이시다. 사람들 중에서 그는 유일하게 죄가 없는 자 곧 의인이시다(히 4:15; 벧전 2:22; 요일 3:5). 그 외에 하나님의 뜻과 계명에 완전히 일치하게 산 자, 참으로 의로운 자는 하나도 없다. 노아나 욥이나 다니엘도(창 6:9; 욥 1:1; 겔 14:14) 완전한 의인은 아니다. 또 깨닫는 자도 없다. 하나님께서 누구이시며 인간이 어디서 와서 무엇을 위해 살며 또 장차 어디로 갈 것인지 깨닫는 자는 아무도 없다. 또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 모든 사람은 인생의 정로(正路)를 알지 못함으로 이리 저리 치우쳤고 그들의 삶은 헛되고 무가치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쌓은 선한 업적이라는 것도 실상 무의미하고 무가치하다. 영원히 가치 있고 선한 일을 행하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다.

[13-15절]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열린 무덤은 구역질나게 나쁜 냄새를 낼 것이다.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나오는 것들이 이와 같이 더럽고 악취나는 것들뿐이다. 또 사람들의 혀는 속이는 혀이다. 사람들은 거짓말에 숙련되어 있다. 그 입술에는 남을 죽이는 독이 있고 그들의 말은 남을 저주하는 악독으로 가득하다. 또 그들의 발은 남을 죽이기에 빠르다. 참으로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되고 무능력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인간의] 마음이라”고 말씀하셨고(렘 17:9) 또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는 절망적인 말씀을 하셨다(렘 13:23).

[16-18절]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 . . .

바울은 또,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고 말한다. ‘고생’은 ‘불행’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낫을 것이다. 죄인들의 길 앞에는 파멸과 불행이 있다. 죄인들에게는 평강이 없다. 그들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한다. 이사야 48:22,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또 그들의 눈 앞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 죄인들의 죄악된 삶의 근본 원인은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는 불경건 때문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악에서 떠나게 된다(잠 16:6).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는 자들에게 의도, 선도 없다. 그런 자들에게 파멸과 불행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 없는 세상의 현실이며, 우리가 구원받기 전의 상태이었다.

세상에 의인은 하나도 없고 모두가 죄인이다. 또 그들에게는 평강이 없고 파멸과 불행이 있을 뿐이다. 여기에 구원과 의의 필요성이 있다.

19-31절, 칭의(稱義)의 방법

[19-20절]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 . . .

바울은 말한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사람은 율법을 통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한다. 율법의 역할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죄악됨을 깨닫게 하여 온 세상으로 하나님 앞에서 정죄(定罪)를 받게 하는 데 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공의의 율법 앞에서 죄인으로 판정되고 정죄되므로 하나님 앞에서 항변할 말이 없다. 율법을 행하여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다.

[21절]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기독교 복음은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한 의’에 대한 소식이다. 복음의 중심적 내용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는 일에 관한 것이다. 이제까지 사도는 구원의 필요성에 대해 모든 사람이 죄인인 것과 율법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자가 없음을 해설하였다. 이것은 복음의 대전제이다.

그러면 사람이 어떻게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는가? ‘이제는’이라는 말은 율법으로 특징지어지는 구약시대와 대조하여 신약시대를 가리키는 말이다. ‘율법 외에’라는 원어(코리스 노무 χωρὶς νόμου)는 ‘율법과 별개로, 율법과 관계없이’라는 뜻이다.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義)는 행위의 의, 즉 모든 율법을 항상 행함으로써만 얻을 수 있는 의이었다. 그러나 사람은 율법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었다. 이제 하나님께서 율법과 별개로 주시는 한 의가 복음 안에 나타났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으로 말미암은 의이다.

그러나 율법과 별개로 주어지는 이 하나님의 의는 율법과 선지자들, 즉 구약성경과 관계없는 것이 아니고 구약성경에 이미 증거된 바이었다. 구약성경은 ‘행하라’는 도덕법을 강조하지만, 제사들, 유월절 어린양, 성막 제도 등을 통하여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도 증거하였다. 그 은혜는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하여 밝히 증거될 것이었다.

구약성경은 메시아의 속죄사역으로 인한 칭의(稱義)를 직접 예언하기도 했다. 이사야 53:11,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의롭다 함을 얻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다니엘 9:24,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70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永贖)되며[영원히 속량되며] 영원한 의(義)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

[22절]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 . . .

바울은 또 말한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이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의이다. 율법을 행함으로 얻는 의가 아니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얻는 의인 것이다.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이라는 말은 전통사본에는 ‘믿는 모든 자 안으로[에게] 그리고 모든 자 위에 미치는’이라고 되어 있다.5) 신약시대의 의(義)는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누구나 받을 수 있는 의이며 예수님을 믿는 모든 자들에게 차별 없이 주어지는 의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참으로 중요하고 필수적이다.

[23-24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이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되었음이니라].” 원문에 의하면, 본문은 모든 믿는 사람이 차별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까닭을 보인다. 그 까닭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으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죄인이 단지 그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었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본절은 성경 중에서 가장 명쾌한 기독교 복음의 요약이다.

믿음으로 얻는 이 의(義)는 행위로 얻는 의(義)와 대조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요 값없이 거저 얻는 의이다. 이러한 의가 가능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위하여 구속(救贖)을 이루셨기 때문이었다. ‘구속’(救贖)이란 값을 주고 산다는 뜻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값, 즉 죄책(罪責)과 형벌의 값을 지불하시고 건져내셨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누구나 그의 십자가의 보혈 공로로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25-26절]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그의 피를]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그의 피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이 말씀은 앞절의 말씀을 좀더 설명한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그의 속죄사역을 믿는 것이고 그의 보혈을 믿는 것이다. ‘화목제물’이라는 원어(힐라스테리온 ἱλαστήριον)는 하나님의 진노를 가라앉히는 제물, 즉 유화제물(宥和祭物)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우리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끓어오르는 진노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누구러지셨고 가라앉으셨고 제거되셨다는 의미이다. 그것이 속죄의 성경적 한 의미이다.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라는 말은 예수님 믿기 전에 지은 죄들을 용서하심으로라는 뜻이다. 물론, 사람이 예수 믿고 난 후에 짓는 죄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공로로 씻음을 받는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무조건 의롭다고 간주하신다면 그러한 판단 자체가 불의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죄인들의 죄의 형벌을 대신 담당하신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에 근거하여 예수 믿는 자들을 의롭다고 하셨으므로, 그것은 의로운 판단이시요 의로운 행위이신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사역으로 인한 의롭다 하심(칭의)의 원리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증거할 뿐만 아니라, 또한 예수님 믿는 자들이 받는 의(義)의 정당함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모든 죄를 그리스도께 전가(轉嫁)시키셨으므로 그들을 의롭다고 정당하게 선포하실 수 있다는 말씀이다.

그러나 성도들이 받은 이 칭의는 성도가 실제로 의인으로 변화되었다는 뜻이 아니고, 단지 법적으로 의인으로 간주된다는 뜻이다. 그것은 법정적(法廷的) 의미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늘 법정에서 성도들에게 무죄 판결을 내리심과 같은 것이다. 물론,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는 또한 새 생명을 받기 때문에 실제적으로도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산다. 그러나 성도는 법적으로는 완전한 의인이지만, 실제적으로는 아직 불완전하고 부족이 있다.

[27절]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 . .

바울은 또 말한다.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성도의 의가 자신의 행위에 근거하지 않고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근거하기 때문에, 성도는 자랑할 것이 없다. 율법과 별개로 나타난 의, 복음 안에 나타난 의, 즉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의는 받는 사람 편에서 아무것도 자랑할 수 없는 의이다. 왜냐하면 이 의는 사람의 행위의 법으로 얻는 것이 아니고, 단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의를 믿음으로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28절]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 . . .

바울은 말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다’는 원어는 ‘율법의 행위와 관계가 없다’는 뜻이다. ‘인정한다’는 원어(로기조마이 λοgίζομαι)는 ‘간주한다, 결론을 내린다’는 뜻이다. 본절에서 사도 바울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복음의 기본 원리를 다시 결론적으로 단언하였다.

[29-31절]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 뿐이시뇨? . . .

바울은 또 말한다.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 뿐이시뇨? 또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뇨?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의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는 유대인들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또한 이방인들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구원 진리는 할례받은 유대인들에게나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들에게나 똑같이 적용된다. 이 구원 진리는 어느 시대나 어느 민족에게나 동일하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효력 있는 진리이다. 오늘날도 죄인들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신약의 복음이 구약의 율법을 폐지시키는 것은 아니다. 구약과 신약은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 율법과 복음은 상호 모순되지 않는다. 구약과 신약은 그림자와 실체요 예언과 성취이다. 율법은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여 복음으로 이끄는 선생 역할을 한다. 사실, 복음에 제시된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의 죽음은 율법의 저주를 받으신 죽음이었고 율법의 의를 이루신 것이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을 폐지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율법을 굳게 세우는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복음은 죄인들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소식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구약의 율법 즉 십계명과 별개로 사람에게 주신 의의 방법이다. 이것은 우리의 행위에 근거하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공로에 근거한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 안에 그리고 모든 믿는 자 위에 미치는 하나님의 의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이것이 모든 죄인들에게 기쁘고 복된 소식이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죄와 심판의 문제를 해결했는가? 여러분은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마음에 영접하였는가? 여러분은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원한 생명을 얻었는가?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만 믿고 그 의 안에 거하고 그 의를 감사하며 이제부터는 우리의 남은 여생 과거의 모든 죄악된 행위와 습관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그 의 안에서 의를 행하고 거룩을 이루어야 한다.

 

4장: 아브라함의 예

[1-3절]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 . . .

바울은 또 말하기를,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고 한다. 바울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사실에 대해 아브라함을 예로 들며 창세기 15:6을 인용한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진리는 구약성경이 증거한 바이다. 우리는 성경에 계시된 진리대로 믿고 살아야 한다. 신앙생활의 법칙은 교회의 전통적 교리나 어느 사람의 교훈이 아니고 오직 성경뿐이다. 우리는 성경의 교훈대로 믿고 성경의 교훈대로 살아야 한다.

[4-5절]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이라는 말은 율법을 지키는 행위를 가리킨다. 일하는 자가 받는 삯은 은혜가 아니고 당연히 받아야 하는 것이다. 의롭다 하심이 사람의 의로운 행위에 근거하였다면 그것은 은혜가 아닐 것이지만, 의로운 행위가 없었을지라도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믿음이 의로 간주되었으므로, 그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

이와 같이, 믿음과 행위는 서로 대조되고 구별된다. 믿음은 행위와 다른 무엇이다. 그것은 말 그대로 그저 믿는 것이다. 이것은 성도에게 의로운 행위가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니다. 아브라함은 경건하고 의로운 삶을 살았다. 참 믿음은 경건하고 의로운 행위로 나타난다. 그러나 사람의 행위는 불완전하므로 사람이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사람은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이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 행위로 말하면 우리 모두는 죄인이었고 구원을 받을 만하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시는 구속(救贖)의 은혜로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그것은 율법의 행위와 구별되는 믿음에 근거한 것이며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율법의 행위와 별개로 얻은 의이다.

[6-8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일한 것이 없이’라는 말(코리스 에르곤 χωρὶς ἔρgων)은 ‘행위들과 별개로’라는 뜻이다. 바울은 행위와 별개로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해 증거한 다윗의 시를 인용한다. 사람은 죄가 없어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이 아니고, 죄의 사함과 가리움을 받기 때문에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이다. 이와 같이 칭의(稱義)는 사람의 의로운 행위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이다.

[9-10절]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 . .

바울은 또 말한다.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라 무할례시니라.” 아브라함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은 할례 받기 전인가 후인가? 창세기 15장에는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건이 나오고, 창세기 16장에는 그가 하갈을 취하여 이스마엘을 낳은 때가 86세라고 증거하며, 창세기 17장에는 할례에 대한 언약이 나오고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것이 99세 때라고 증거한다(17:24).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때는 그가 할례를 받기 전, 적어도 13년 전이었다.

[11-13절]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 뿐 아니라[할례 받을 뿐 아니라](원문) 우리 조상 아브라함의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들에게도니라.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後嗣)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아브라함의 할례는 그의 믿음의 의를 확증하는 표였다. 아브라함이 할례자의 조상이라고 할 때, 그 할례자는 육신적 할례를 받았을 뿐 아니라 또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진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아브라함이 열국의 아비가 되고 그 후손이 온 세계에 충만하리라는 약속은 그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14-16절]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이면 믿음은 헛것이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後嗣)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율법은 죄인에게 죄를 깨닫게 하고 그로 하여금 진노하신 하나님 앞에 서게 한다. 그러므로 율법만으로라면 아무도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16절의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라는 원어(카타 카린 κατὰ χάριν)은 ‘은혜에 의거하기 위하여’라는 뜻이다. 여기서 율법과 은혜, 행위와 믿음은 다시 대조된다. 그것들이 모순되도록 대립되는 것은 아니나 혼동되지 않도록 대조된다. 율법을 행하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물론, 믿는 자는 율법에 순종하며 의롭게 행할 것이다. 그러나 믿음 그 자체는 율법 순종의 행위와는 구별된다.

[17-18절]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 . . .

바울은 또 말한다.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바울은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 참 믿음의 성격을 증거한다. 아브라함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믿었다. 즉 그는 부활의 하나님, 전능의 하나님을 믿은 것이다. 믿음은 믿는 자신의 무엇을 의지하지 않고 전적으로 믿음의 대상만 바라며 의지한다. 성도의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무(無)로부터 창조하신 자이시다. 아브라함은 그런 하나님을 믿었다. 그는 바랄 수 없는 중에도 하나님과 그의 약속을 바라고 믿었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라는 말은 직역하면 ‘소망을 거슬러 소망 중에’(against hope in hope)라는 역설적 표현이다. 아브라함은 인간적 소망은 없었으나 하나님께 대한 소망을 붙들었던 것이다. 인간적 소망을 거슬러 하나님께 대한 소망 중에! 이것이 참 믿음의 성격이다. 이것은 다른 말로, 자신에 대한 부정과 하나님께 대한 긍정을 의미한다. 이것이 참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자기에게 무엇이 있다고 생각할 때 하나님을 섬기다가 자기에게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될 때 낙심하고 좌절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그런 사람은 전능하신 하나님 대신에 자기 자신을 신뢰한 것이다. 그러나 참 믿음은 하나님을 그저 믿는 것이다.

[19-22절]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 . . .

바울은 또 말한다.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해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아브라함은 늙었으나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고, 어느덧 나이가 백세가 되어 자신의 몸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았으나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다. 그는 결코 자신의 상태만 바라보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능력과 약속을 믿었다. 그것이 참된 믿음이다. 믿음은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다. 불신앙은 요동하고 비틀거리는 마음이다. 그러나 신앙은 요동치 않고 하나님을 바라며 의지하는 것이다. 그것이 참 믿음이다. 그것은 자신을 의지하거나 환경을 염려하지 않고 자신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내맡기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이루실 수 있음을 확신하였다. 믿음은 하나님을 알고 그의 능력과 신실하심을 믿는 것이다. 그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이 믿음을 의로 간주하셨다. 이 믿음은 인간의 무엇을 내세우거나 자랑하지 않는 믿음이었다. 믿음은 단순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자신을 내맡기는 것이다. 믿음은 나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요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것이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23-25절]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우리의 구원도 같은 원리이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범죄 때문에 십자가에 내어줌이 되셨고 우리의 의롭다 하심 때문에 다시 살아나셨다. 주 예수님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진 자들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적인 죽음과 삼일 만에 부활하심을 믿는 자는 참 하나님을 믿을 수 있으며 또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모든 내용을 믿을 수 있다. 이러한 믿음은 인간의 무엇을 의지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단순히 전능의 하나님, 부활의 능력의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이런 믿음을 가진 자들은 아브라함처럼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된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진리는 옛날 아브라함의 경우를 통해서도 증거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믿음과 행위는 명백히 대조된다. 믿음은 그저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며, 유대인에게나 이방인에게 똑같이 적용된다.

아브라함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믿었다. 그는 부활의 하나님, 전능의 하나님을 믿은 것이다. 이것은 자신을 부정하고 하나님을 긍정하는 것이며,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이것이 믿음이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을 때, 우리는 바로 이런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자! 우리 자신이나 세상의 것들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만 의지하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통해 주신 그의 약속만을 붙들자. 그것이 진정한 구원 신앙이다.

 

5장: 칭의(稱義)의 결과

1-11절, 하나님과의 화목, 즐거움, 구원의 확신

[1절]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 . . .

바울은 또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이라는 헬라어(디카이오덴테스 δικαιωθέντες)는 과거분사로서 칭의가 점진적이거나 반복적이지 않고 단회적(單回的)임을 보인다. ‘누리자’(에코멘 ἔχωμεν)6)는 본문은 어떤 사본들과 역본들은 ‘누리느니라’(에코멘 ἔχομεν)7)고 되어 있다.

칭의의 결과 중 하나는 하나님과의 화목이다. 사람들은 죄 가운데 있었을 때 하나님과 불화(不和)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죄를 미워하고 죄에 대해 진노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되었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선언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것이다. 이제 우리는 담대히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으며,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는 큰 특권이며 복이다. 그것은 에녹과 노아와 욥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과 친밀히 교제하는 것이다(창 5:21-24; 6:9; 욥 29:4).

[2절]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우리가 서 있는 이 은혜’는 칭의의 은혜를 가리킬 것이다.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모든 사람은 이제 칭의의 은혜 안에 서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 은혜 안에 흔들리지 않고 굳게 서 있어야 하며, 결코 이 은혜를 떠나지 않아야 한다. 칭의의 은혜가 곧 구원이요 생명이기 때문이다. 예수 믿고 구원얻는 것은 그를 통하여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였으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칭의의 또 하나의 결과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것이다. 이러한 즐거움은 장차 올 영광스런 천국, 곧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확신과 견고한 소망에서 나온다. 범죄한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지만(롬 3:23),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얻은 성도는 이 영광을 바라보며 소망 중에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이다. 천국의 영광은 성도의 기쁨과 즐거움의 이유인 것이다.

[3-4절]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鍊鍛)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는 평안할 때만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고,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 그것은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기 때문이다. ‘연단’이라는 원어(도키메 δοκιμή)는 ‘연단된 인격’이라는 뜻이다. 환난이 성도의 신앙 인격을 단련하여 그의 소망을 확실하게 만들기 때문에, 성도는 환난 중에도 기뻐할 수 있다. 환난은 성도에게 크게 유익하다.

[5절]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 . . .

바울은 또,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라고 말한다. 성도의 소망은 헛되지 않다. 그것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헛된 꿈이나 망상이 아니다. 성도의 소망이 확실한 까닭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되었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우리 속에 오심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진 것과 같다. 우리 안에 오셔서 영원히 거하시는 성령님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확증이시다.

[6-7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죽으셨음이로다].” 우리가 불경건과 죄 가운데서 연약하였을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을 믿고 성령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진 것이며 그 사랑을 체험한 것이다.

바울은 또 말한다. “[왜냐하면]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그] 선인(善人)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확증하셨음이니라].” 본문은 우리가 연약하고 경건치 않았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이 얼마나 큰 사랑인가를 증거한다. ‘그 선인’(투 아가두 τού ἀgαθού)은 앞에 말한 ‘의인’을 가리킨다고 본다. 죄인들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의 확증이었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일서 4:9-10,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9-11절]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 . . .

바울은 또 말한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는 장차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으로부터 확실히 구원을 얻을 것이다. 이 구원의 확신은 성도의 기쁨의 근거가 된다. 성도가 장래의 구원을 확신하지 못한다면 결코 기뻐할 수 없을 것이며 고난 중에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 성도는 미래의 구원을 확신하므로 고난 중에도 즐거워하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에 근거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은 하나님과의 화목을 가져오고 하나님의 마지막 진노의 심판으로부터의 우리의 구원을 보증하는 것이다.

바울은 또 말한다.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칭의의 결과는 참으로 놀랍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救贖)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는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릴 뿐 아니라, 또한 미래의 구원의 확실한 보증 속에서 소망 중에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 이것이 성도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동행하는 삶이요 천국을 소망하며 항상 기뻐하는 삶인 것이다.

의롭다 하심을 얻은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며 친밀한 교제를 나누고, 천국의 영광을 바라고 고난 중에도 즐거워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우리가 장차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받을 것도 확신한다.

12-21절, 영원한 생명

[12절]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그 안에서’ 혹은 ‘그것에 근거하여’](에프 호 ἐφ’ ᾧ)(원문)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이러므로’라는 말은 21절 전체에 연결되어 “이러므로 한 사람 아담으로 죄와 사망이 들어왔으나,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 의와 영생이 왔다”는 뜻이라고 본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다. 그 한 사람은 아담이다. 이것은 창세기 3장에 기록된 인간의 타락의 사건을 가리킨다. 인류의 죄와 사망은 한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아담의 첫 범죄는 온 인류의 범죄이었다. 후반의 원문에 ‘그 안에서’라는 말은 한 사람 아담 안에서 혹은 그의 범죄에 근거해서라는 뜻 같다. 인류의 대표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인류는 죄인이 되었고 그 죄의 값으로 죽게 되었다.

[13-14절]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13-17절은 논리적 흐름에서 삽입적 성격을 가진다. 인간의 사망의 원인은 죄이다. 모세 이전에도 사람들이 죽은 것은 그들이 다 죄인이었기 때문이다.

[15-16절]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 . . .

바울은 또 말한다.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왜냐하면]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죽었으나],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넘쳤음이니라].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한 사람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죽었으나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많은 사람이 살았고,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인류가 죄와 정죄 아래 있었으나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들의 많은 범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의롭다 하심에 이르게 하였다.

[17절]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 . . .

바울은 또 말한다.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하리로다.” 한 사람 아담의 범죄로 사망이 인류를 지배하였으나,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의의 선물로 말미암아 생명이 많은 사람들을 지배할 것이다. 이것이 칭의의 결과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의의 선물을 풍성히 받아 영생을 얻었다. 예수께서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또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 11:26)고 말씀하셨다.

[18절]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 . . .

바울은 또 말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그런즉’이라는 말은 본절이 이 단락의 요점임을 보인다. ‘한 범죄’는 ‘한 사람의 범죄’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고 ‘의의 한 행동’도 ‘한 사람의 의’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다.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라는 말은 직역하면 ‘생명의 의롭다 하심에’인데, 그것은 의롭다 하심의 결과가 생명임을 보인다. 의와 생명은 함께 간다. 죄는 사망이요 의는 생명이다. 그러므로 칭의는 생명의 칭의이다. 즉 칭의의 결과는 영생, 다시 죽지 않는 영원한 생명인 것이다.

15절부터 18절까지 반복되는 말씀은 한 사람 아담의 죄가 어떻게 온 인류에게 전가(轉嫁)되었는지를 증거한다. 아담의 죄는 온 인류의 죄이었다. 이것이 원죄(原罪)이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난다. 이 원죄는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사실,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 또 모든 사람이 정죄되었다는 사실에서 확증된다.

이와 비슷한 원리로, 그러나 정반대의 내용으로, 이 말씀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의 의(義)가 어떻게 믿는 모든 사람에게 값없이, 은혜로 풍성히 넘치도록 전가(轉嫁)되었는지를 증거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는 ‘많은 사람을 대신한 속죄’이었다. 예수께서는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자기 목숨을 주셨고(마 20:28), 그의 피는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해 흘리신’ 피이었다(마 26:28).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원한 생명을 풍성히 누리게 된 것이다.

[19절]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바울은 또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고 말한다. 죄는 불순종이다. 죄악된 세계의 특징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에 대한 불순종이다. 순종은 의요 불순종은 죄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순종과 의를 요구하신다. 노아는 순종하는 의인이며 아브라함도, 모세도, 여호수아도, 갈렙도 그러하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의 최고의 모범이시다. 그는 창조주로서 피조물인 인간 부모에게 순종하셨고 율법을 주신 자로서 친히 율법을 준행하셨고 마침내 죽기까지 하나님 아버지께 복종하셨다.

그의 순종의 죽음은 우리를 위한 의가 되셨다. 예수께서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고통과 수치와 저주의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를 믿고 따른다면 우리는 그의 겸손한 순종을 본받아야 한다. 우리는 원망하고 불평하며 거역하는 자가 되지 말고 잠잠히 믿고 순종하되 죽기까지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 하나님이 사시고 참되신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며 우리가 가진 진리가 진리일진대, 우리는 하나님께 절대 순종하고 성경 진리에 절대 순종해야 한다. 순종은 그 어떠한 예배 의식보다 더 중요하다.

[20-21절]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 . .

바울은 또 말한다.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율법을 몰랐을 때는 죄가 적었으나 율법을 알게 되므로 우리는 우리의 많은 죄들과 우리 본성의 전적 부패성을 깊이, 철저히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죄가 많은 곳에 죄사함의 은혜는 더욱 크고 넘쳤다. 또 주의 말씀대로, 죄사함을 많이 받은 자는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된다(눅 7:47).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죄와 죄사함에 대한 우리의 깨달음의 정도에 비례한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많은 죄의 사함을 얻었고 하나님의 완전한 의를 얻었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의와 영원한 생명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 영생은 의의 당연한 결과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의와 영원한 생명이 되셨다.

 

6장: 성화(聖化)의 이유

로마서 6장부터 8장까지는 성화(聖化, 거룩하여짐)에 관해 증거하고 있다.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는 죄를 지어도 괜찮은가? 신자가 법적으로 단번에 칭의(稱義, 의롭다 하심)를 얻었고 그 칭의가 영원하고 완전하다면, 신자가 구원받은 후에 짓는 죄 문제는 어떻게 되는가? 죄책(罪責)이 없는 죄이므로 죄를 지어도 괜찮은가? 바울은 칭의가 방종에 떨어질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결코 그럴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가 결코 죄 가운데 거해서는 안 되고 거룩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강조한다.

1-11절, 세례의 원리

로마서 6장은 성도가 거룩해져야 할 이유 두 가지를 말한다. 1절부터 11절까지는 성도가 거룩해져야 할 첫 번째 이유로 세례의 원리를 든다. 세례는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의미가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되는 것이며, 그 연합은 성도들의 거룩한 생활의 원천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는 결코 죄 가운데 살 수 없다는 것이다.

[1-3절]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 . . .

바울은 말한다.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앞장 끝부분에서 바울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고 말했다(5:20). 그러나 성도가 하나님의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즉 하나님의 죄사함의 은혜를 풍성하게 경험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죄에 거할 수는 없다. 그 이유는 성도가 이미 죄에 대해 죽었기 때문이다. 죄에 대해 죽은 자가 어떻게 계속 죄 가운데 살 수 있겠는가?

바울은 말한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에이스 εἰς)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에이스 εἰς) 세례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바울은 세례의 원리를 들어 성화의 당위성을 증거한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참여한 것이다. 세례는 첫째로 죄씻음을 표시하고 확증하지만, 그것은 또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표시하고 확증한다. 죄는 하나님과의 분리를 가져오고, 죄씻음은 하나님과의 영적 연합을 가져온다. 성경에서 ‘세례를 주라’는 명령은 ‘안으로’(에이스 εἰς)라는 전치사와 종종 함께 사용된다(마 28:19; 행 8:16). ‘안으로’라는 전치사는 연합의 의미를 가진다. 오늘 본문도 같은 경우이다. 따라서 우리 말 성경은 그 단어를 ‘합하여’라는 말로 번역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셨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그와 연합하여 그의 죽음에 참여한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죄에 대해 죽은 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가 죄 가운데 거하여 계속 죄를 짓는다면 그것은 구원의 이치에 반대되는 일이 되는 것이다.

[4-5절]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 . . .

바울은 또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장사된 것은, 그가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으로 부활하심과 같이 우리도 새 생명 가운데 살게 하려 함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은 또한 그와 함께 사는 것이며, 그의 부활의 생명이 그와 연합된 이들 속에 역사하여 새 생명으로 살게 하는 것이다. 이치가 그러하다면,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가 죄 가운데, 즉 영적 죽음 가운데서 산다는 것은 모순이 아닐 수 없다. 구원받은 자들은 새 생명을 받아 새 생활을 하도록 되어 있고,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6-7절]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옛 사람’은 죄로 인해 죽었던 옛 자아, 곧 구원받기 전의 자신을 가리킨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을 때 그 옛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 피조물이 되었다(고후 5:17). 옛 사람이 죽은 목적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게 하려 함이었다. ‘죄의 몸’은 ‘옛 사람’과 동의어로서 죄성(罪性)의 주체를 가리킨다고 본다. 이제 죄의 몸인 옛 사람은 죽었고, 의롭다 하심을 얻은 새 사람이 살았다. 우리의 구원은 죄 안 짓게 하는 구원이다. 그것은 죄에 대해 죽는 구원이며 의를 향해 사는 구원이다. 그러므로 구원받았다고 하면서 죄 가운데 산다면 그것은 구원의 목적과 역행하는 것이다. 참된 구원은 죄를 버리고 의를 행하는 것이다. 그것이 구원의 본질이요 목적이며 방향이다.

[8-9절]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만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연합되어 그와 함께 죽은 자가 되었다면, 우리는 또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는다. 그것은 거룩한 삶으로 나타난다. 비록 구원받은 성도의 삶이 완전하지 못할지라도, 거룩함은 구원의 당연한 결론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셨고 영원히 사시고 다시 죽지 않으실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 믿는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으로 살고 다시는 범죄하여 죽을 자로 살지 않을 것이 확실하다.

[10-11절]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 . . .

바울은 또 말한다.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에 대하여 단번에 속죄의 죽음을 죽으셨다. 그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와 그 결과인 죽음은 영원히 제거되었다. 죄와 사망은 설 곳이 없어졌다. 예수 그리스도의 단번 속죄의 사역은 완전하고 영원하다. 또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을 향해 사신 것이었다. 이제 죄와 사망은 끝났고 하나님을 위해 사는 삶만이 그에게 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부활이었다. 성도의 거룩한 삶 곧 성화는 바로 이러한 그리스도의 부활에 근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세례로 상징되는 대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의 연합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된 자로서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고 하나님을 향하여 사신 것처럼 우리 자신도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을 향하여 산 자임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구원받은 성도의 성화(聖化, 거룩하여짐)의 당위성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살았다는 데 있다. 그것은 죄의 몸이 죽고 새 생명으로 산 것을 의미한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로서 죄에 대해 죽었고 하나님을 향해 살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12-23절, 순종의 원리

[12-13절]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 . . .

바울은 또 말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몸의 사욕들을 순종치 말고’라는 말은 전통본문에는 ‘몸의 욕심들로 말미암아 그것에 순종치 말고’라고 되어 있다.8) 죄는 몸의 욕심들을 통해 활동한다. 야고보서 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몸은 중립이다. 그것은 의의 도구가 될 수도 있고 죄의 도구가 될 수도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 헌신할 수도 있고 죄에 굴복할 수도 있다. 성도는 죄에 대해 죽은 자이므로 죄가 몸을 주장치 못하도록 욕심들을 통제하고 절제해야 하고 죄에 복종치 말아야 한다.

구원받은 성도는 자신의 몸을 거룩하게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지체’는 몸의 부분들, 즉 눈과 귀와 입, 손과 발 등을 가리킨다. 성도는 죄에 대하여 죽었고 의에 대하여 살았기 때문에, 이제 몸의 모든 부분을 불의의 도구로 죄에게 내어주지 말고, 의의 도구로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이전에는 우리가 하나님 없이 살면서 더럽고 악한 것을 보고 듣고 말하며 만지고 그런 곳으로 갔을지라도, 이제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 몸을 거룩하게 드리고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것만을 보고 듣고 말하고 행해야 하는 것이다. 성화는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거룩하게 드리는 성실한 노력이 필요하다.

[14절]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성도가 자신의 몸을 죄에게 주지 않고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이유는 죄가 그들을 주관치 못하기 때문이다. 또 죄가 성도를 주관치 못하는 이유는 성도가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기 때문이다. 성도가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는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셨기 때문에 율법이 요구하는 죄의 법적인 책임과 그것에 상응하는 형벌이 제거되었고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을 말한다. 성도는 법적으로 완전한 의를 이미 얻었다. 성도는 칭의(稱義), 즉 법적인 구원을 얻었다.

[15절]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바울은 또 말한다.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그럴 수 없다’는 원어(메 게노이토 μὴ gένοιτο)는 강한 부정을 나타낸다. 바울은 6:1-2에서도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가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계속 머물 수 있는가 하고 질문한 후 ‘그럴 수 없다’고 분명하게 대답했었다. 그는 본절에서도 의롭다 하심을 받은 성도가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고 해서 죄를 지어도 되는가 하고 질문한 후 ‘그럴 수 없다’고 다시 한번 분명하게 대답한다. 그는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가 죄짓는 생활을 할 수 없음을 강조한다!

성화는 성도의 당연한 길이다. 성도는 죄 가운데 거하거나 살아서는 안 된다. 사도 요한도 요한일서에서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계속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하나님께로서 나지] 아니하니라”고 말하였다(요일 3:9-10).

[16절]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성도가 거룩해져야 할 첫 번째 이유로 세례의 원리(6:1-11)를 들었던 바울은 이제 두 번째 이유로 순종의 원리를 든다. 사람은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의 종이라고 할 수 있다. 죄에게 순종하면 죄의 종이 되어 죄 안에 살다가 사망에 이르게 될 것이고, 하나님께 순종하면 하나님의 종이 되고 의 안에 살다가 영생에 이르게 될 것이다.

[17-18절]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 . . .

바울은 또 말한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바울은 성도가 구원받았던 맨 처음 순간을 언급한다. 이것은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순간이다. 우리는 본래 죄에게만 순종하고 죄만 짓고 살았던 죄의 종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음을 듣게 해주셨다. 그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과 부활의 소식이었고 그를 믿는 자에게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을 주신다는 약속이었다.

우리는 그 말씀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구원을 받았다. ‘마음으로’라는 원어(에크 카르디아스 ἐκ καρδίας)는 ‘마음으로부터, 마음에서 우러나서’라는 뜻이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마음에서 우러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영접하고 그에게 순종하는 것이다. 우리는 마음으로 순종한 결과, 즉 마음 중심에서 믿은 결과 죄에게서 해방되고 의에게 종이 되었다. 즉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이다. 우리의 모든 죄는 씻음받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구속에 근거하여 단번에 의롭다는 선언을 받았다. 우리는 죄에게서 자유케 되고 의에게 종이 되었다. 우리는 전에 죄의 종이었으나, 이제 의의 종이 되었다. 이제는 의만 알고 의만 좋아하고 의만 행해야 할 사람이 된 것이다.

[19절]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육신이 연약하다는 것은 우리 속에 남은 죄성을 가리킨다. 성도가 거룩하게 사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에게 죄성이 남아있기 때문에 거룩함에 이르라는 권면이 필요한 것이다. 전에는 우리가 우리 몸의 지체들을 더러운 죄에 내어 주었으나, 이제는 우리 몸의 지체들을 의에게 드려 거룩함에 이르러야 한다는 권면이 필요하다. 성도는 성화(聖化)가 당연한 목표라는 권면과 격려가 필요한 것이다.

[20-22절]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너희가 그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성도가 죄의 종이었을 때는 죄만 지었기 때문에 의에 대해 자유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때에 맺은 열매라는 것은 더러운 죄들이었으므로 부끄러운 것들뿐이었고 그 결국은 사망이었다. 진실로, 모든 죄들은 비록 범죄할 당시에는 혹시 즐거워보일지라도 지나고 보면 부끄러운 것들이다. 의는 칭찬받을 만하지만, 죄는 수치와 후회를 남길 뿐이다. 이제 성도는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으로 인해 죄에게서 해방되었다. 죄의 종이 죄에게서 해방되어 자유인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자유는 하나님께 종이 되는 자유이다. 하나님께 종이 되는 것은 무거운 짐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고 말씀하셨다(마 11:30). 하나님께는 의와 선과 진실, 사랑과 거룩과 행복이 있다. 하나님을 떠난 것은 불행과 죽음이었지만,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은 생명과 행복이다(요 17:3).

거룩함의 열매는 구원받은 성도에게 당연한 열매이다.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이다. 중생과 칭의는 반드시 성화를 동반한다. 법적 구원에 실제적 구원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구원이 아닐 것이다. 출생한 아기가 성장하는 것은 정상적인 일이듯이, 중생한 성도가 지식이 더하고 거룩하여지는 것은 정상적인 일이다. 그러나 이 정상적이고 당연한 성화는 성도의 성실한 순종을 통해 이루어진다. 성도는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의 열매를 맺다가 영생에 이른다. 하나님께 종이 되는 것과 거룩의 열매를 맺는 것은 영생과 한 줄로 연결되어 있고 그것은 끊어질 수 없다.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께 순종하며 거룩한 삶을 이루는 정상적 과정을 통해 영생에 이르는 것이다. 이 과정이 없다면, 그는 구원받지 못한 자일 것이다.

[23절]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이는]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영생임이니라].” 성도가 영생을 확실히 얻을 것이라는 이유는, 죄에 대한 대가가 죽음이지만 하나님의 은사[은혜의 선물]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이기 때문이다. 이 짧은 말씀은 복음 진리의 요약과도 같다.

성도가 거룩해져야 할 이유는 우리가 죄에게서 해방되어 하나님께 종이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속에는 아직도 죄성이 남아 있다. 그러나 성화는 성도의 정상적이고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한 삶을 위해 성실히 힘써야 한다. 이것이 구원의 본질이요 목적이며 방향이다. 우리는 의 안에서 하나님께 순종하여 거룩함을 이루어야 한다.

 

7장: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1-13절,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1-3절]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 . . .

바울은 말한다.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淫婦)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바울은 결혼의 비유를 들어 성도가 율법으로부터 자유케 되었음을 증거한다. 남편 있는 여인은 그 남편이 살아 있을 동안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지만,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자유하게 된다. 그러므로 여인이 그 남편이 살아 있을 때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란한 여자라고 불리겠지만, 남편이 죽은 후에는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란한 여자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부부관계를 벗어난 남녀의 행위가 음란이지만, 이 경우는 한 쪽이 죽었으므로 이전의 부부의 관계 자체가 이미 끝나 있었기 때문이다.

[4절]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 . . .

바울은 또 말한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율법의 저주를 당하시고 율법의 의(義)를 이루셨기 때문에, 예수 믿는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의 저주를 이미 당한 것과 같고,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한 것과 같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율법의 요구를 다 만족시키셨기 때문에, 우리는 율법에서, 즉 율법의 저주와 형벌에서 자유함을 얻었다. 우리가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한 목적은, 부활하신 주님과 연합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선한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함이다. 성도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율법에서 자유케 된 것은 새 생명 가운데서 의와 선을 행하기 위함이다.

[5절]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 . . .

바울은 또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다”고 말한다. ‘육신에 있을 때’는 구원받기 전의 상태를 가리킨다.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깨달아지는 죄의 정욕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는 죄의 정욕들이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몸의 기관들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다.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는 죄성이 우리의 본성 전체를 지배하였었다. 간혹 양심의 가책이 있었을지라도 그것은 무시되고 변명으로 무마되었었다.

[6절]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성령](NASB, NIV)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儀文)[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얽매였던 것’은 율법의 규례들을 가리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는 죄와 사망으로부터 뿐만 아니라, 또한 율법으로부터 자유함을 얻게 되었다. 우리는 율법에 대해 죽임을 당했고 율법으로부터 자유케 되었다. 바울은 6:14에서도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고 말한 바가 있다. 또 그는 갈라디아서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해 강조했었다. 거기서 그는,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으나,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율법] 아래 있지 않다”고 말했고(3:23, 25), 또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율법으로부터]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율법의]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밝히 증거하였다(5:1).

그러나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는 죄와 방종에 떨어지게 하는 자유가 아니다. 그 자유는 율법의 공포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위해 살고 의와 거룩을 행하게 하기 위한 자유이다. 의롭고 거룩한 삶, 이것이 구원의 방향이다. 구원은 죄로부터 건져내어 의롭고 거룩하게 살게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구원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앞에 6:15에서도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고 말했었다. 또 그는 갈라디아서 5:13에서도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고 말했다.

‘영의 새로운 것으로’라는 말에서 ‘영’이라는 말이 언어적으로는 사람의 영이나 하나님의 성령을 다 가리킬 수 있겠으나 내용적으로 성령을 가리킨다고 본다. 또 ‘의문’(儀文)이라는 말은 ‘글자’라는 뜻으로 율법의 조문을 가리킨다. 고린도후서 3:6에서도 성령과 의문이 대조된다: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성령]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성령]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우리가 율법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옛날처럼 율법 조문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긴다.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는 성도에게 성화를 위한 근본적 원동력이 된다. 때때로 성도에게 죄와 연약이 있으나 그가 낙심치 않고 더욱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가고 의와 거룩을 위해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이 자유의 힘 때문인 것이다.

[7절]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 . . .

바울은 또 말한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이제까지 말한 내용이 율법을 정죄하는 인상을 줄지 모르기 때문에, 바울은 ‘율법이 죄냐?’라고 질문하고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그러면 율법의 역할은 무엇인가? 율법은 죄를 알게 하고 죄를 깨닫게 하는 역할을 한다. 율법이 없었다면 사람은 죄를 죄로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율법이 탐내지 말라고 규정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탐심이 죄인 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 자체가 죄는 아니다. 죄를 죄로 깨닫게 해주는 것이 죄일 수는 없다.

[8-11절]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 . . .

바울은 또 말한다.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율법은 그 자체가 죄가 아니지만, 죄가 율법으로 기회를 타서 우리 속에 각양 탐심을 이루었다. 법이 없으면 죄가 죄로 인식되지 못하기 때문에 죄가 없는 것 같고 죄가 죽은 것 같다. 그러나 율법을 통해 우리의 죄악된 성질과 행위들이 드러난다. 전에 율법이 없을 때는 죄에 대한 지식이 없으므로 나 자신의 존재가 살아 있는 것 같았으나, 율법이 이를 때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죄로 인해 죽은 자라는 것이 드러났다.

바울은 또 말한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율법은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는 조건적 약속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가 율법을 완전히 행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율법을 통해 생명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율법을 다 행할 수 없고 율법을 통해 우리 자신이 심히 죄악됨을 깨닫는다. 생명에 이르게 할 율법과 계명이 실제로는 우리를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다. 죄는 율법으로 기회를 타서 사람으로 하여금 죄짓게 하였고 그를 죽게 하였다.

[12-13절]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니라.” 율법 자체는 죄악되지 않다. 율법은 실상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다. 율법은 심지어 신령하다(14절). 디모데전서 1:8, “그러나 사람이 율법을 법 있게 쓰면 율법은 선한 것인 줄 우리는 아노라.” 율법은 바른 정신으로 사용하면 구원받은 성도에게 선하고 유익하다. 그러므로 선한 것이 우리에게 사망이 되었을 수 없다. 단지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해 그 선한 율법으로 우리를 죽게 하였다. 이로써 죄가 심히 죄악됨을 드러낸 것뿐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으로 말미암아 율법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었다. 이것은 우리가 율법의 저주와 형벌로부터 자유함을 얻었다는 뜻이다. 이것은 율법의 공포에서 벗어나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의와 거룩을 행하는 원동력이 된다. 성도는 율법 조문에 따라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이제는 성령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되었다.

14-25절, 내면적 죄성과의 싸움

[14-15절]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 . . .

바울은 말한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내면 속에는 선악간의 싸움이 있다. 바울은 1인칭 대명사를 사용함으로써 자신이 체험한 내면적 싸움을 표현한다. 성도에게는 육신의 연약성이 있다. 이 연약성 때문에 우리는 율법이 요구하는 의를 행치 못한다. 율법은 영적이지만, 나는 영적이지 못하고 육신적이다.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려 있고 때때로 원하는 것을 행치 않고 미워하는 것을 행하고 있다.

[16-17절]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가 율법을 행하기를 원한다는 것 자체는 율법의 선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제는’이라는 말은 6절이나 8:1에도 쓰였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롭다 하심을 받은 후를 가리킨다.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라는 말은 구원받은 성도에게 있어서 범죄의 주체는 참된 자아가 아님을 증거한다. 구원받은 성도의 참된 자아는 ‘속사람’(22절) 혹은 ‘새사람’(엡 4:24)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구원받은 성도의 참된 자아는 의와 생명 안에서 살려 하지만, 성도 속에는 죄성이 남아 있어서 율법을 거슬러 죄를 짓게 한다. 성도가 죄를 짓는 것은 참된 자아의 행위가 아니고 자신 속에 남아 있는 죄성의 행위이다. 그렇다고 하여서, 성도가 범죄의 책임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

[18-20절]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육신’이라는 헬라어(사르크스 σάρξ)는 ‘몸’(소마 σώμα)이라는 말과 동의어로 사용되며, 특히 로마서 7장에서는 사람의 죄악성의 좌소를 가리키는 것 같다. 성도의 남은 죄성은 몸에 있다고 보인다. ‘원함이 내게 있다’는 말은 구원받은 성도의 참된 자아는 의와 선을 원함을 나타낸다. 이것은 새 사람의 소원이요 중생한 영혼의 지배적 성향이다. 구원받은 사람만 이러한 소원을 가진다. 구원받기 전에는 이런 소원이 없었고 단지 때때로 양심의 가책 정도가 있었을 뿐이다. 그렇지만, 구원받은 후에도 원함은 있으나 선을 행하는 능력이 없다. 이것이 성도에게 남아 있는 죄성과 연약성인 것이다. 선을 원하는 것은 참된 자아요, 선을 원치 않고 악을 행하는 것은 내 속에 거하는 죄성이다. 그것이 우리 몸에 남은 옛사람의 성질이다.

[21-23절]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 . . .

바울은 또 말한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성도는 자신 속에 두 가지 모순된 원리가 있음을 깨닫는다. 하나는 참된 자아의 소원으로서 선을 행하려 하는 원리요, 다른 하나는 옛 죄성의 잔재로서 악을 행하려는 원리이다. ‘속사람’은 의롭다 하심을 받은 후의 참된 자아를 가리킨다. 중생한 참 자아는 ‘마음’(누스 νούς) 곧 생각(mind)으로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고 그 법을 지키려 한다. 그러나 우리 속에는 다른 한 원리가 있어 우리를 죄의 법 아래로 사로잡아 온다. 성도 속에는 이 대립된 두 가지 원리 혹은 법이 있어 항상 내면적으로 싸우는 것이다.

[24-25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것이 성도의 현실적 탄식과 신음이다. 마음의 법과 육신의 법의 내적 싸움으로 성도는 피곤하여진다. 성도는 당연히 이 죄와 사망의 몸으로부터 구원을 갈망하게 된다.

바울은 또 말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성도의 거룩한 삶과 성화는 이와 같은 내적 싸움과 탄식 속에서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는 죄에 대해 점점 죽고 의에 대해 점점 산다. 하나님의 구원은 효력이 있고 승리적이다. 비록 구원받은 성도가 마음으로 하나님의 법을 섬기고 육신으로 죄의 법을 섬기지만, 성도가 탄식과 신음 중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칭의(稱義) 때문이다. 성도는 이미 하나님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전한 의인으로 인정받았다. 성도는 때때로 죄에 넘어짐에도 불구하고, 법적인 의를 이미 얻었고 최종적 구원과 영생도 보장되어 있다. 그 구원은 영육의 완전한 구원이다(빌 1:6).

구원받은 성도 속에는 남은 죄성으로 말미암는 내면적 싸움이 항상 있지만, 성도는 탄식과 신음 속에서도 점점 거룩해져 간다. 또 성도는 하나님께 이미 받은 의와 영생과 하나님의 자녀 됨과 천국의 보장으로 인해 탄식과 신음 중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의와 영생과 자유 속에서 의와 선과 사랑을 힘써 실천하자.

 

8장: 성령의 인도하심

로마서 8장은 성화에 있어서 성령의 역할을 강조한다. 성도의 거룩한 인격과 삶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루어진다.

1-14절, 성령을 따라 삶

[1절]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제’는 구원받은 후를 가리킨다. 전통 사본에는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육신을 좇아 행하지 않고 성령을 좇아 행하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되어 있다. ‘육신’은 사람의 죄악된 본성을 가리킨다. 구원받은 성도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거하는 자들이요, 육신을 따라 행하지 않고 성령을 따라 행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형식적으로 ‘주여, 주여’ 하는 자들이 아니고 여실하게 구원의 표를 가진 자들이다. 그들에게는 비록 부족과 연약은 있지만 결코 정죄함이 없다.

[2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은 복음이다. 복음은 성령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시는 생명의 원리이다. ‘죄와 사망의 법’은 율법이다. 율법은 우리에게 죄를 깨닫게 하고 사망을 선고한다. 참된 성도에게 결코 정죄함이 없는 까닭은, 생명의 성령께서 복음으로 우리를 죄와 사망의 율법으로부터 해방시켰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으로 말미암은 칭의와 새 생명 때문에 성도는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다.

[3절]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사람은 본성의 연약성과 죄악성 때문에 ‘어찌 할 수 없는’ 죄인이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과 죄 때문에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으로 이 세상에 보내셨고 그에게 우리의 죄를 담당시키셨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의 짐을 짊어지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이것이 복음이다.

[4절]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는 구원받은 자를 묘사한다. ‘그 영’은 성령을 가리킨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자는 이제 육신의 죄성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산다. 이들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진다. 율법의 요구는 완전한 의(義)이다. 이 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 대신 형벌을 받으심으로 이루신 의이다. 이 의가 진실히 예수 믿는 자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5-6절]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본절의 육신과 영은 사람의 육체와 영을 가리키지 않고 사람의 죄악된 본성과 성령을 가리킨다. 구원받은 자들에게는 몸과 영이 대립된다기보다는 죄악된 본성과 성령이 대립된다. 사람이 죄악된 본성을 따라 산다면 그 결과는 죽음일 것이지만, 성령을 따라 산다면 그 결과는 의와 생명과 평안이다.

[7-8절]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사람의 타고난 본성은 전적으로 부패하였고 무능력하여졌다. 그 부패성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며 하나님의 율법에 복종치 않을 뿐 아니라, 할 수도 없는 정도이다. 그러므로 본성 그대로의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우리의 성화는 본성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성령의 도우심으로 된다.

[9절]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영에 있나니’라는 말은 ‘성령 안에 있나니’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구원은 하나님의 성령의 사역이다. 또 성령께서는 구원 받는 자 속에 오셔서 영원히 거하신다. 이것은 구약성경에 예언된 복이며 신약 성도에게 주신 특권이다. 이렇게 성령께서 그 속에 거하시는 성도는 더 이상 육신 즉 타고난 죄악된 본성 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인지!

그러나 그리스도의 영이 없는 자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영’은 성령과 동일시된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영이실 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시다. 여기에 삼위일체의 신비가 증거되어 있다. 참 성도는 이미 성령을 받은 자요 성령을 받지 못한 자는 참 성도가 될 수 없다. 오순절파는 이 점에 대한 인식이 적다.

[10절]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는 말은 ‘성령은 의를 인하여 생명이시니라’라고 번역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리스도는 지금 하늘에 계시지만, 그는 신성으로 그의 영 곧 성령을 통하여 우리 속에 계신다. 우리의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과 같고 또 어느날 죽게 될 것이지만, 우리 속에 계신 성령께서는 생명이시다. 성령께서 우리 속에 생명을 시작하시고 생명을 유지시키시는 근거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의이기 때문에, 본문은 ‘성령은 의를 인하여 생명이시니라’고 말씀한 것이다. 성도 속에는 생명의 성령께서 계신다.

[11절]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하나님께서는 부활의 하나님이시다. 그는 아들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이 성도 속에 계시다면 부활의 하나님께서는 성도 속에 계신 자신의 영으로 장차 성도의 죽을 몸까지도 다시 살리실 것이 확실하다. 성도의 미래의 몸의 부활은 확실하다. 그리스도께서 빈무덤을 남기고 부활하셨듯이, 예수 믿는 성도도 빈무덤들을 남기고 부활할 것이다. 우리 속에 계시는 성령께서 그것을 보증하신다. 성도는 반드시 영광스럽게 부활할 것이다.

[12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우리는 육신 즉 우리의 죄성에게 빚을 지지 않았다. 우리는 죄성대로 살 의무가 없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께 은혜의 빚을 졌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값없이 은혜로 구원하셨다. 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우리를 죄에서 해방하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시고 새 생명을 주셨다. 이것은 우리가 값으로 계산할 수 없는 큰 빚이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은혜이다. 지옥 갈 죄인을 천국 가게 하신 구원의 은혜의 값을 어떻게 환산할 수 있겠는가?

[13절]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본절은 성도가 육신의 죄성을 따라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 말씀은 중생한 성도가 죄 가운데 살다가 마침내 영원히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구약 율법의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는 말씀이 사람이 율법을 행할 능력이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 아닌 것과 같이, 본문의 경고는 성도의 구원이 중도에 실패하거나 잃어버릴 수 있음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시고 그리스도께서 구속하시고 성령께서 중생시키신 백성은 반드시 다 구원을 받고 영광에 이를 것이다(롬 8:30). 그러나 이러한 경고는 성도에게 필요하다.

‘영으로써’라는 말은 ‘성령으로써’라는 뜻이다. 본문은 성도의 삶을 성령으로써 몸의 죄악된 행위들을 죽이는 삶으로 묘사한다. 그것이 성화의 삶이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성화를 위해 우리 속에 거주하신다. 우리는 성령으로 우리의 죄악된 행실을 죽여야 한다.

[14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본절에서 ‘하나님의 영’이라는 말씀은 앞절에서 ‘영’(프뉴마)이라는 말이 하나님의 성령을 가리키는 말임을 증거한다. 성도는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자들로 묘사되었다. 성도의 거룩한 삶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성도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항상 사모하고 의지해야 한다.

15-17절,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함

[15-16절]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우리를 인도하시는 성령님은 ‘양자(養子)의 영’ 곧 우리를 양자(養子)로 삼으시는 영이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친자(親子)이시고 예수 믿는 우리들은 하나님의 양자(養子)들이다.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에 근거하여 우리를 양자로 삼으셨고 우리 속에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마음을 일으키셨다. 이러한 우리의 영의 고백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된 증거이다.

[17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자녀들이 부모의 기업을 이어받듯이,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기업 곧 천국을 이어받는다. 예수 그리스도는 천국의 상속자로 묘사되었고 우리도 그와 함께 천국의 상속자가 될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는 바로 성도를 위하여 예비되었다. 마태복음 25:34, “그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통하여 영광에 들어가셨듯이, 우리도 고난을 회피하지 말아야 한다. 예수께서 고난을 받으셨듯이 우리도 고난을 받을 것이며, 그가 영광을 받으셨듯이 우리도 영광을 받을 것이다. 실상, 주를 따르는 길에서 고난은 영광에 이르는 한 과정이다.

18-25절, 미래의 영광을 소망함

[18절]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장차 나타날 영광은 새 하늘과 새 땅과 새 예루살렘, 즉 천국의 영광이요 거기에 거할 성도의 영광이다. 요한계시록 21:10, 11,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 고린도전서 15:42, 43,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빌립보서 3:20, 21,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장차 나타날 영광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이 크고 영원하다.

[19-21절]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하나님의 아들들은 영광스런 부활체를 입은 자들을 가리킨다. 모든 피조물들은 그 시간이 오기를 고대한다. 지금은 기다리며 허무한 데 굴복하고 썩어짐에 종노릇하고 있지만, 그 날이 오면 피조물들도 하나님의 자녀들처럼 영광의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다.

[22-23절]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는 중생한 성도를 가리킨다.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라는 말은 최종적 영광의 구원과 비교하는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모든 피조물들과 중생한 성도는 함께 탄식하고 있다. 그것은 성도의 영광스런 몸의 구속(救贖) 즉 부활을 기다리며 사모함으로 가지는 탄식이다. 우리는 다 그 시간, 그 세계를 사모한다. 죄와 죽음과 불행이 영원히 사라질 그 날을 사모하는 것이다. 그것이 구원의 완성이다. 중생과 칭의로 시작된 구원은 성화로 진행되다가 마침내 영화(榮化)로 완성될 것이다. 택함 받은 모든 자들은 다 중생되고 칭의되고 성화되어 영광에 이를 것이다.

[24-25절]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우리의 법적인 구원 곧 칭의와 양자는 영화의 단계에서야 죄로부터의 완전한 구원, 즉 죄가 실제로 전혀 없는 구원이 될 것이다. 지금은 아직 죄의 세력과의 싸움이 있지만, 그때에는 그러한 싸움이 더 이상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영화의 단계는 아직 미래에 있다. 우리는 그것을 단지 소망 가운데서 소유한다. 그 영광은 확실하나 아직 우리의 소망의 내용일 뿐이다. 성도는 구원을 이미 받았으나 이런 의미에서 소망으로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받았다면, 우리는 참음으로 그것을 기다려야 한다. 하나님의 구원이 결코 실패치 않는 완전한 구원이며 그 영광은 확실하기 때문에, 우리는 고난 중에서도 낙심치 말고 참고 기다려야 한다.

26-27절, 성령의 도우심

[26절]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성령께서는 성도의 연약함을 도우신다.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성도는 하나님께 무엇을, 어떻게 기도할 지를 알지 못하지만, 이 때 성령께서는 성도 안에서 탄식하시며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신다. 그것은 성령의 중보 사역이시다. 성령의 중보 사역으로 성도는 실패치 않고, 그의 영적 생활은 쇠잔해지지 않는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의 신앙은 자라며 그의 심령은 힘을 얻는다.

[27절]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은 성령의 생각을 아신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해 간구하신다. 그러므로 그의 중보 사역은 효력이 있다.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는 효력이 있다. 효력 있는 기도는 아름다운 말에 있지 않고 바른 내용과 태도에 있다. 그러므로 성령의 중보 사역이 있는 한, 성도의 믿음은 성장하고 성도의 인격과 삶은 거룩하여질 것이다.

28-30절, 영화(榮化)의 확실성

[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우리가 알거니와’라는 표현은 이 진리가 확실함을 가리킨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성도를 가리킨다.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내면적으로 사람을 회개시키고 믿게 하심을 가리킨다. 성도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모든 것’은 성도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가리킨다. 거기에는 낙심될 만한 일들도 있고 실패한 일들도 있을 것이다. 심지어 실수하고 범죄한 일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 조차도 선을 이루는데 사용된다. ‘선’은 영적 성장을 가리킨다. 성도의 일생은 영적 훈련과 성장 즉 성화의 과정이다.

[29절]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미리 아신 자들’이라는 말은 미리 관심과 사랑을 베푸신 자들이라는 뜻이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회개와 믿음을 미리 아셨기 때문에 우리를 택하셨다는 뜻이라고 해석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선택은 하나님께서 시작하시는 주권적 행위이어야 그 말에 적합하며,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것이 아니고 우리가 하나님을 택한 것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또 예수께서도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자들만 그에게 나아와 그를 믿을 수 있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요 6:37, 44, 65).

하나님께서는 미리 아신 자들을 예정하셨다. 그의 예정의 목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목표이다. 사람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나 범죄함으로 그것을 상실하였고 이제 구원으로 그것을 회복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은 죄 없는 거룩한 형상이다. 그것은 또한 온유하고 겸손하며 사랑이 넘친 형상이다.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우리의 낮은 몸은 그의 영광의 몸과 같이 변화될 것이다(빌 3:21). 이것이 바로 구원의 목표이다. 성도의 영화(榮化)는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바이다. 이리하여 예수께서 많은 형제들 중에 맏아들이 되셨다고 본문은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의 동생들이라고 표현될 수도 있을 것이다.

[30절]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여기에서의 부르심은 하나님께서 내면적으로 사람을 회개시키고 믿게 하심을 뜻한다. 이렇게 사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된다. 이렇게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들은 장차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마침내 성도를 영화롭게 하실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라는 과거형이 사용되었다. 이 과거형은 확실한 미래의 사건을 나타내는 표현법이다. 성도를 영화롭게 하심은 하나님께서 확실히 예정하신 바이며 지금 섭리하시는 바이다. 영광은 하나님의 구원의 목표이다. 이 일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죽으셨고 이제 그를 믿는 자들에게 의가 선언되었고, 또 이 일을 위해 성령께서 성도 안에 오셨다.

31-39절,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자 없음

[31절]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면 우리를 대적할 자들이 없다’는 말씀은 맞는 말씀이다. 세상에서도 권력자가 어떤 이를 위하면 그를 대적할 자가 없을 것이다. 하물며 하나님이 누구신가? 온 우주의 최고 권력자이며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신가? 그렇다면 그 하나님이 위하시는 자를 대적할 자가 누구이겠는가? 인간의 최대의 대적자는 사탄인데 심지어 그도 욥기 1장에 증거한 대로 하나님의 허락하신 한계 안에서만 활동할 수 있었을 뿐이다. 사탄도 성도를 대적할 수 없다.

[32절]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하나님께서 성도를 위하시는 증거는 당신의 아들을 주신 일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이었다(요 3:16; 롬 5:8). 세상에서 가장 큰 선물인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하다면 그 외에 무엇이든지 주실 것이 확실하다.

[33-34절]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의롭다 하신 이’는 ‘의롭다 하시는 이’라고 번역해야 더 낫다고 본다. 그것은 칭의가 과거의 사건이지만, 그 효력이 지금도 있음을 나타낸다. 성도를 정죄할 자는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죄 때문에 죽으셨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속죄를 확증하셨고 승천하셔서 지금 하나님 오른편에서 그들을 위해 간구하시기 때문이다. 그의 간구하심은 그가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완전한 속죄를 계속 적용하시는 행위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이다.

[35-36절]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이와 같이, 성도의 구원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너무 크고 확실하다. 아무도 그 사랑의 줄을 끊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 사랑에 근거한 성도의 구원은 영원한 보장을 가진다. 성도의 삶은 고난과 핍박의 삶이지만, 성도는 어떠한 고난의 현실 속에서도 두려워하거나 낙심치 않을 수 있다. 왜냐하면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赤身, 헐벗음)이나 위험이나 칼이나 그 어떤 것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기 때문이다.

[37절]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우리의 현실이 어렵고 힘들지라도,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승리할 수 있다. 성도의 구원은 빈약한 구원이 아니고 성도의 승리는 추측적인 승리가 아니다. 성도의 구원과 승리는 완전하고 풍성하고 확실하다. 성도는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긴다.” 하나님의 구원은 실패치 않고 끝까지 보존되고 마침내 영광스럽게 완성될 것이다.

[38-39절]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바울이 성도의 넉넉한 승리를 단언한 이유는,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그들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을 것이라는 그의 확신 때문이었다.

여기에 영광에 이르는 구원에 대한 우리의 확신이 있다. 아무것도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 그 사랑은 좀더 분석해 보면, 하나님의 선택과 그리스도의 속죄와 성령의 인치심에서 이미 확증되었다. 하나님의 사랑은 성도에게 부어졌고 그 사랑에서 그들을 끊을 자는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성도는 어떤 고난의 현실 속에서도 낙심하지 말고 담대히 진행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본장은 성도의 성화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이루어짐을 증거한다. 성도는 육신을 좇지 않고 성령을 좇아 행하므로 점점 거룩하여진다. 우리의 본성만으로라면 성화는 불가능할 것이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양자(養子)로 삼으셔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셨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의 천국을 상속받을 자들이 되었다. 성령께서는 또 우리의 현재의 연약함을 도우시며 모든 일들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 특히 하나님의 예정하신 구원의 목표인 영화(榮化)는 확실하게 보장되어 있다. 성도의 승리는 확실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특권과 소망과 확신을 가지고 오직 성령을 따라 거룩한 삶을 힘써 살자!

 

9장: 선택

바울은 9장부터 11장까지에서 하나님의 예정에 대해 증거한다. 그는 이스라엘의 구원 문제를 언급하면서 이 진리를 해설한다. 9장은 선택의 진리에 관한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선택이 사람의 행위에 근거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긍휼에 근거함을 강조한다.

1-5절, 이스라엘을 위해 마음에 큰 고통이 있음

[1-3절]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 . . .

바울은 말한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바울은 자기의 형제들 곧 골육 친척을 향해 크게 근심하며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그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불붙는 사랑의 심령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그들의 구원을 소원한다고 고백하였다. 모든 동물의 세계도 그러하겠지만, 특히 만물의 영장인 사람은 한 부모에게서 난 형제 자매들에 대한 남다른 애정은 자연적인 일이며 친척들에 대해서도 그렇고 또 한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과 동포들에 대해서도 다른 민족이나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자들보다 더 친근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또 그만큼 가족들이나 친척들, 그리고 동족들에 대한 우리의 일차적 사랑의 의무가 있고 그 의무 중에 첫째는 그들을 구원하는 의무이다. 우리가 우리 가족부터 구원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남을 구원할 수 있겠으며, 우리가 우리 민족부터 구원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다른 민족을 구원할 수 있겠는가? 우리도 바울의 심정을 본받아 우리의 가족들과 친척들부터 또 우리 민족부터 구원하고자 하는 불붙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4-5절]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 됨과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養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특별한 민족이었다. 그들은 다른 민족들과 달리 하나님의 자녀로 불리었고 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영광의 표들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언약들을 맺으셨고 그들에게 율법과 성전 예배의 의식을 주셨다. 하나님을 믿고 순종했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그들의 조상들이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도 육신적으로 말하면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나셨다. 바울은 이처럼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을 언급한 후, 그의 신성(神性)도 증거한다. “저는[그리스도께서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이 단순히 평범한 동족(同族)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온갖 특권을 누렸던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더욱이 그들의 구원을 위해 불붙는 심령을 가지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많은 은혜를 입었던 민족인데 지금 하나님을 대적하고 그의 보내신 메시아인 예수를 죽이고 오히려 예수 믿는 자들을 미워하고 핍박하고 죽이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사랑하는 가족들과 친척들과 동족부터 구주 예수께로 인도해야 하겠다. 또 우리는 구약시대에 많은 은혜를 입었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거역한 사실을 기억하고 늘 조심해야 하겠다.

6-13절, 선택된 자들이 참 이스라엘임

[6-9절]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 . .

바울은 또 말한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라.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스라엘의 불신앙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민족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택을 입은 자들이 참 이스라엘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선택의 진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으로 선택된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그 자손으로 여기심을 받았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아브라함의 여종 하갈에게서 난 이스마엘과 그 자손들이나(창 16:1-16), 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죽은 후 아브라함의 후처 그두라에게서 난 여섯 명의 아들들과 그 자손들은(창 25:1-6) 아브라함의 언약의 복을 받은 자손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오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이어서 내려온 자손들, 그들 중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된 자들만 언약의 복을 받은 자손으로 간주되었다.

[10-13절]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하나님의 선택의 진리는 특히 이삭의 아내 리브가가 쌍둥이 아들들, 에서와 야곱을 낳았을 때 더 분명하게 드러났다. 하나님께서는 그 두 아들들이 아직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을 보이셨다. 하나님께서는 리브가에게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고 말씀하셨고, 후에 선지자 말라기를 통해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노라”고 말씀하셨다(말 1:3). 이로써 하나님의 백성은 육신의 혈통을 따라 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의 어떤 선이나 악을 행한 행위에 근거하는 것도 아니며,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의 선택으로 되는 것이 드러났다.

사람의 구원은 사람의 의로운 행위나 선한 행위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의로운 행위나 선한 행위는 그 자체로도 흠과 점이 있는 부족한 행위이다. 우리의 의는 더러운 옷과 같다. 이사야 64:6, “대저 우리는 다 부정(不淨)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義)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사람이 없다(롬 3:20). 사람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 즉 그의 긍휼과 은혜의 선택으로 말미암는다. 디모데후서 1: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에베소서 2:8-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사람의 구원은 그의 행위에 근거하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기인한다. 우리는 예수 믿고 구원받은 것이 우리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의 선택으로 된 것을 깨닫고 감사를 드리자.

14-18절, 하나님의 긍휼은 주권적임

[14-16절]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 . . .

바울은 말한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하나님의 선택이 주권적이라는 사실에 어떤 잘못이 있는가? 있을 수 없다. 창조주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그가 원하는 것을 하시는 주권자이시므로, 그가 구원하실 자를 임의로 선택하신다는 사실은 결코 부당하거나 불의한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에서도 확증된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고 말씀하셨다(출 33:19). 구원은 사람의 소원이나 노력으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는다.

[17-18절]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출 9:16)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사람의 마음을 유하게도 하시고 강퍅케도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구원은 하나님의 손에 있다. 그에게 구원의 능력이 있다. 그는 구원하고자 하는 자를 구원하신다. 사람의 구원은 사람 속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주권적 섭리자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

사람의 구원은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는다. 그는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신다.

19-29절,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항할 수 없음

[19-21절]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 . . .

바울은 또 말한다.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말대답]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선택이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에 근거한다면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정당한가? 이런 반론에 대한 바울의 대답은,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신 자요 사람은 그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대해 인간이 불평하거나 반론할 수 없다는 것이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어리로 귀한 그릇이나 천한 그릇을 만들 권한이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구원에 대해 주권적 결정권을 가질 수 있는 분이시다. 선택은 하나님의 주권의 행사이시다.

[22-24절]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실상, 악인들의 멸망은 그 자신의 죄와 직접 관계가 있다. 하나님은 의로운 자들을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다. 악인들은 스스로 악을 행했고,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악인들을 오히려 오래 참으시고 관용하셨다. 그러므로 악인들의 악에 대해 오래 참으시고 관용하신 하나님께 대해 인간편에서 무어라고 대답할 말이 없다. 또 구원받는 우리도 오직 하나님의 긍휼로 받은 것뿐이다. 인간의 죄악된 본성이나 행위로 말한다면, 우리나 저 악인들이나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속에 죄를 회개함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주셨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긍휼로 인한 것이었다.

[25-29절] 호세아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 . . .

바울은 또 말한다. “호세아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저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이는 그가 그 일을 이루시고 의로 그것을 단축(혹은 제한)하실 것임이라. 이는 주께서 단축된 일을 땅 위에 행하실 것임이니라] (전통본문)9)하셨느니라.” 바울은 선지자들의 글을 인용하면서 은혜의 부르심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 아닌 자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고 또 이스라엘 백성의 남은 자들에게 구원을 제한적으로 혹은 단축하여, 빠르게 주실 것이다.

바울은 또 말한다.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시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긍휼로 남겨진 자들이 있었듯이, 오늘날도 하나님의 은혜로 남겨진 자들이 있으며 오직 그들만 구원을 얻을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지만, 오직 은혜로 선택된 자들에게만 주어진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 말미암는다.

사람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대해 불평하거나 말대답을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구원에 대해 감사해야 한다.

30-33절, 이스라엘의 실패의 원인

[30-33절]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 . . .

바울은 말한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의의](전통본문)10)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실패의 원인은 그들이 믿음으로써가 아니고 행위로써 하나님의 의를 이루려 했기 때문이었다. 사람은 행위로써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 율법 행위로는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며 멸망할 존재이다. 사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을 믿음으로써만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다.

바울은 또 말한다.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사람이 행위로써가 아니고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는 것은 구약 이사야 28:16에서도 암시된 바이었다. 거기에서 하나님께서는 시온에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두실 것인데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 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율법 행위를 의지하는 자는 그 돌에 걸려 넘어질 것이지만,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않을 것이다.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보내어 주신 하나님의 아들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얻을 것이며 결코 부끄러움을 당치 않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율법을 행함으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으려 하다가 실패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이스라엘의 실패를 거울 삼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되고 그 믿음 안에서 의의 율법을 행하는 자가 되자.

 

10장: 신앙 고백

1-8절, 두 종류의 의(義)

[1절]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 . . .

바울은 말한다.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에 관심을 두고 있다. 그들은 당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하나님의 복음을 거절하고 있었다. 바울은 그들의 구원을 마음으로 소원하며 하나님께 간구하였다.

[2-3절]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 . . .

바울은 말한다.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이스라엘의 실패는 바른 지식이 없기 때문이었다. 이스라엘은 바른 지식이 없이 종교적 열심만 가지고 있었다. 지식 없는 열심은 위험하다. 그들은 자신의 의가 참으로 보잘것없고 실상 불의에 불과함을 알지 못하고 종교적 열심으로 어떤 의가 이루어질 줄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지식 없는 열심은 종교적 형식주의 혹은 위선에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두 종류의 의(義)가 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의요 다른 하나는 사람이 자기 노력으로 이루려는 의이다. 이스라엘의 실패의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 했기 때문이었다. 사람의 의는 심히 부족하다. 이사야 64:6, “대저 우리는 다 부정(不淨)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오늘날도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의를 모르고 자기가 이룬 행위의 의를 의지하려 할 때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

[4절]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 . . .

바울은 또 말한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의를 이루셨다. 그는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셨다’(요 19:30)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그의 대속 사역을 가리키며 그 내용은 완전한 의이다. 주 예수께서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해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 고린도전서 1:30,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救贖)함이 되셨으니.” 의가 없었던 죄인들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된다.

[5-8절]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혹 누가 음부[무덤]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율법을 행함으로 이루는 의는 실상은 불가능한 의이었다. 그러나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한 바 되셨다가 삼일 만에 부활하시고 후에 승천하심으로 이루신 의이다. 그것은 복음으로 증거된 의이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셨다.

그러므로 두 종류의 의가 있다. 하나는 율법의 의이며 다른 하나는 믿음의 의이다. 유대인들은 율법의 의를 고집하다가 실패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을 믿는 믿음의 의 안에서 의를 행하자.

9-13절, 구원적 신앙

[9-10절]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구원을 얻는 믿음의 기본적 내용은, 예수께서 주님이신 것과 그가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셨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자는 그의 기적들, 속죄의 죽음, 재림 등을 믿을 수 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할 때 의롭다 하심과 구원을 받는다. 구원에 있어서 신앙고백은 필수적이다. “마음으로 믿어 . . . 입으로 시인하여”라는 원문은 수동태이다. 즉 “마음으로 믿어지며 . . . 입으로 고백되어”라고 되어 있다. 그것은 사람의 믿음과 신앙고백이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짐을 보이는 것 같다. 믿음과 신앙고백은 그리스도인의 자발적인 행위이지만, 실상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이루어지는 것이다(요 6:37, 44).

[11-13절]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구원은 모든 믿는 자에게 주어진다.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11절),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12절),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13절)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과 신앙고백이 중요하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구원을 얻을 것이다.

우리는 예수께서 우리의 주님이시며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셨음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하게 되었음을 감사하자.

14-17절, 전도의 필요성

[14-17절]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 . .

바울은 또 말한다.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가로되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믿음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고, 전도의 말씀을 통하여 생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하나님의](전통사본)11)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말미암느니라].” 또한 전도는 하나님께서 전도자를 파송하심으로써 이루어진다. 예정과 선택은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전도자의 전도를 통해 이루어진다. 하나님은 전도라는 수단을 통해 택자들을 구원하신다. 전도와 믿음은 하나님의 예정을 이루시는 정상적이고 필수적인 방법이다.

그러므로 전도는 교회의 최대의 사명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28:19,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 사도행전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고린도전서 1: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교회는 전도자들을 부르고 훈련시키고 세우고 파송해야 한다.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곳에는 어디든지 파송해야 한다. 전도자들의 발걸음은 귀하고 아름답다.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또 교회는 파송된 전도자들을 기도와 물질로 계속 후원해야 한다. 전도의 필요성은 말씀의 필요성이다. 전도는 말씀 전파이다. 믿음은 말씀의 지식을 통해 생긴다.

18-21절, 이스라엘의 현 상태

[18-21절]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뇨? . . .

바울은 또 말한다.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뇨? 그렇지 아니하다.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뇨? 먼저 모세가 이르되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하였고 또한 이사야가 매우 담대하여 이르되 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내게 문의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하였고 이스라엘을 대하여 가라사대 순종치 아니하고 거스려[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셨느니라”(신 32:21; 사 65:1). 하나님의 말씀은 이스라엘에게 먼저 전파되었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돌아오기를 여러 해 동안 기다리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 말씀에 순종치 않고 그 말씀을 거슬러 행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메시아를 십자가에 죽였고 아직도 그 죄를 뉘우치지 않고 있다. 그리하여 이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던 이방인들을 불러 옛 백성 이스라엘로 하여금 시기나게 하실 것이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믿음으로 얻는다. 그러나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전도자가 나아가 이 복음을 전함으로 사람들이 듣고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러므로 전도는 교회의 사명이며 가장 귀한 일이다.

 

11장: 하나님의 구원 계획

1-12절, 택한 자만 믿음

[1-6절]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 . . .

바울은 말한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인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증거는 그들 중에 믿는 자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초기 신자들이 유대인이었고 바울 자신도 그러하였다. 그들은 다 이스라엘 사람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다 버리신 것은 아니었다. 남은 자들이 있었다.

바울은 또 말한다.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저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송사하되 주여, 저희가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저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뇨?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가운데 믿는 자들을 남겨두셨다는 사실은 마치 엘리야 시대와 같다. 배교적인 그 시대에 엘리야는 자기 혼자만 남은 줄 알고 하나님 앞에 그렇게 고백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대답은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7,000명의 사람을 남겨 두셨다는 것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심히 부패한 그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순결한 백성을 남겨두셨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은혜로 남은 자들을 두실 것이다. 오늘날도 배교(背敎)가 온 교회를 뒤덮고 있지만 은혜로 택하심을 입은 신실한 종들과 성도들이 남아 있을 것이다.

[7-12절] 그런즉 어떠하뇨?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 . . .

바울은 또 말한다. “그런즉 어떠하뇨?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완악하여졌느니라. 기록된 바 하나님이 오늘날까지 저희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 또 다윗이 가로되 저희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옵시고 저희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저희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저희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저희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며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거든 하물며 저희의 충만함이리요?” 이스라엘 중 소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얻었으나, 남은 대다수는 완악하여져서 그를 거절하고 이제껏 믿지 않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성경에 예언된 바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실패는 완전한 실패는 아니다. 그들의 실패는 이방인들의 구원이 되었고 이스라엘이 시기나게 되었다. 이스라엘의 실패가 이방인들의 풍성한 구원이 되었다면, 장차 이스라엘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면 온 세상이 얼마나 더 충만한 구원의 복을 누리는 것이 되겠는가! 하나님은 사람들의 실패까지도 사용하셔서 선을 이루신다. 여기에서 바울은 이스라엘의 미래의 회복을 암시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다 버리지 않으시고 그들 중에 남은 자들은 두셨고, 또 이스라엘 백성의 실패가 이방인들의 구원이 되게 하셨다. 그는 배교의 시대인 오늘날도 남은 자들을 두실 것이다.

13-24절, 이스라엘의 회복의 가능성

[13-16절]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이는 곧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케 하여 저희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저희를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사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 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서 이방인들을 구원함으로 자기 골육 이스라엘 사람들로 시기케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라도 구원하기를 소원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은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과 같을 것이다. 제사하는 곡식 가루의 처음 한 줌이 거룩하면 그 전체가 거룩하며, 나무의 뿌리가 거룩하면 그 가지들도 거룩하다. 이 비유는 이스라엘 조상들과 후손들의 관계에 적용될 수 있고 구약교회와 신약교회의 관계에도 적용될 수 있다. 구약교회인 이스라엘 백성이 본래 하나님 앞에서 구별된 선민이고 하나님께 드려진 자들이었기 때문에, 신약교회인 이방인 신자들은 그 거룩함에 참여하는 것이다.

[17-18절] 또한 가지 얼마가 꺾여졌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또한 가지 얼마가 꺾여졌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은즉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긍하지 말라. 자긍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참감람나무 같은 이스라엘의 불신앙 때문에 가지들 중 다수가 꺾임을 받았고 그 대신 돌감람나무 같은 이방인들이 회개하고 예수 믿어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고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들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방인 신자들은 유대인들을 향해 자랑하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 그들은 참감람나무에 접붙임 받은 가지들이며 뿌리가 가지들을 보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9-24절]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이운 것은 나로 . . . .

바울은 또 말한다.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이운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저희도 믿지 아니하는 데 거하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얻으리니 이는 저희를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네가 원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스려[거슬러]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얻었은즉 원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얻으랴.” 이방인 신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원가지들인 이스라엘 사람들도 아끼지 않고 꺾어버리셨다면 접붙임 받은 가지들인 이방인 신자들도 꺾어버리실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엄위하심을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믿고 순종하는 자는 하나님의 인자 안에 거하지만, 불신앙과 죄 가운데 행하는 자는 하나님의 엄위하신 처분이 있을 것이다. 또 이스라엘 백성은 지금 불신앙 때문에 버림을 받았지만, 그들을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다. 구원의 능력이 하나님께 있다. 돌감람나무의 가지들도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거든 하물며 원가지들은 얼마나 더 잘 접붙임을 받겠는가?

우리는 참감람나무에 접붙임 받은 돌감람나무 가지임을 알고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생각하고 항상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25-36절,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을 것임

[25-26절]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있다 함을 면키 . . . .

바울은 또 말한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바울은 이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한 비밀을 말한다. 그 내용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되지만 마침내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온 이스라엘의 구원’은 이스라엘의 민족적, 국가적 대회심을 가리키는 것 같다. 이스라엘 민족 전체는 아닐지라도, 이스라엘의 선택된 충만한 수의 사람들이 회개하며 예수님 믿게 될 것을 암시한다고 본다. 만일 그렇지 않고 그 말이 단순히 이방인이나 이스라엘의 선택된 총수를 의미한다면 구태여 ‘비밀’이라고 표현할 것이 없을 것이다. 또한 이방인의 충만한 수와 이스라엘의 ‘더러’가 대조되고, 또 이스라엘의 ‘더러’와 ‘온’ 이스라엘이 대조되는 것을 생각할 때도 ‘온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의 민족적, 국가적 회개를 암시하는 것 같다.

[26-29절]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 . . .

바울은 또 말한다.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내가 저희 죄를 없이 할 때에 저희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 복음으로 하면 저희가 너희를 인하여 원수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을 인하여 사랑을 입은 자라.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이스라엘의 민족적 회복은 본문에 인용된 이사야 59:20-21에 예언된 바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현재 복음을 거절함으로 하나님의 원수가 되어 있지만, 하나님의 선택하심으로 말한다면 그들은 이제까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들로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입었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선택의 사랑은 지금도 폐해진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시 회복시키실 날이 올 것이다. 이스라엘의 민족적 회심이 있을 것이다.

[30-32절] 너희가 전에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였더니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너희가 전에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였더니 이스라엘에 순종치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치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저희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긍휼로 말미암는다. 이방인들은 전에는 불순종하였으나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이제 하나님의 긍휼을 입었고, 이와 비슷하게 유대인들은 지금 불순종하고 있으나 훗날에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긍휼이 임할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방인이나 유대인을 불순종 가운데 버려두심은 그들 모두에게 긍휼을 베풀기 위함이시다. 32절의 ‘모든 사람’(2회)이라는 원어(투스 판타스 τοὺς πάντας)는 ‘그 모든 사람’이라는 말이며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통틀어 가리킨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33-35절]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 . .

바울은 또 말한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사도 바울은 성령의 감동으로 구원의 복음 진리를 다 해설한 후에 이제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깊고 부요하심과 그의 판단과 행하심의 깊고 측량할 수 없음을 고백한다. 피조물인 인생이 어찌 창조자를 다 이해하며 다 설명할 수 있겠는가? 실상 억만 분지 일도 못할 것이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서 계시하여 주신 만큼 하나님과 그의 구원의 일에 대하여 알며 이해하며 전하며 설명할 뿐이다. 하나님의 계시하신 그 내용은 오늘날 성경 신구약 66권에 기록되어 있다.

[36절]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 . . .

바울은 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이라고 말한다. 본절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의 진리를 보인다. 이것은 웅대한 일원론적(一元論的) 우주 철학이다. 세상의 모든 일은 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오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으며 마침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다. 그것은 세상의 일반적인 모든 일들에 있어서도 그러하고 특히 사람들의 구원의 일들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일을 계획하시고 처리하시는 주권자이시다.

하나님의 은혜로 택함 받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 구원을 얻을 것이다. 다수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복음을 거절함으로 복음이 이방 세계로 전파되었고 이방인들이 구원의 복을 받게 되었다. 이방인들의 충만한 수가 들어올 때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할 것이나, 마침내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을 것이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민족적 회심을 보인다고 본다. 이것이 역사 속에 펼쳐질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와 긍휼로 된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은 부요하며 그의 판단과 길은 측량할 수 없다. 세상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주권적 계획과 섭리 속에서 되어진다. 엘리야 시대나 사도 시대에도 그러하였지만, 오늘날 배교와 타협으로 심히 부패하고 혼란한 기독교회들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택함을 입은 자들이 있을 것이며 그들은 세속에 물들지 않고 순수한 옛신앙을 소유하고 성경적인 옛길을 굳게 붙들 것이다. 우리는 어떤 자들인가?

   

12장: 그리스도인의 생활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부터 11장까지에서 구원의 복음을 해설하고, 12장부터는 구원받은 자들의 삶에 대해 교훈한다. 즉 11장까지는 교리적인 내용이고 12장부터는 윤리적인 내용이다. 믿음과 행위, 교리와 윤리는 같이 간다. 그 둘은 분리될 수 없다.

1-2절, 헌신(獻身)

[1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 . . .

바울은 말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바울은 구원받은 자들의 삶에 대해 교훈하면서 첫째로 하나님께 대한 헌신에 대해 말한다. 그는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말한다. 복음은 하나님의 크신 자비로 예수 믿는 죄인들을 의롭다 하시는 기쁜 소식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이 자비에 근거하여 성도들에게 헌신을 권면하였다. 헌신(獻身)은 하나님께 우리의 몸을 드리는 것이다. 몸은 우리의 모든 것을 포함한다. 그것은 우리의 손과 발, 우리의 목소리와 재능과 힘, 우리의 시간과 돈, 심지어 우리의 생명까지 포함한다. 우리의 몸이 없으면 이런 것들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몸을 드리는 것은 이 모든 것을 드리는 것이다.

바울은 헌신을 ‘산 제사’라고 표현하였다. 그것은 구약시대의 제사와 대조하는 말이다. 구약시대에는 짐승을 죽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 했으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자신을 십자가에 대속제물로 주신 오늘날에는 우리가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필요할 뿐이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삶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삶이어야 한다. 거룩한 삶이란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죄악된 삶과 구별된 삶, 즉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죄를 짓지 않는 삶이다. 이런 헌신의 삶을 바울은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 예배’라고 불렀다. ‘영적’이라는 원어(로기코스 λοgικός)는 ‘합당한’이라는 의미이다. 하나님께 대한 어떤 형식의 예배보다도, 하나님께 대한 헌신의 삶 그 자체가 하나님께 드리는 가장 합당한 예배인 것이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말산 바와 같이(삼상 15:22),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떤 제사보다도 그의 계명을 순종하는 삶을 원하신다.

[2절]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우리가 하나님께 헌신하려면, 우리는 먼저 이 세상을 본받지 말아야 한다. 세상은 불경건하고 음란하며 심히 죄악된 세상이다. 세상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은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와 너무 거리가 멀다. 그러므로 성도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기려면 우선 세상을 본받지 말아야 한다.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이지만, 그것은 또한 세상으로부터의 구원이다. 왜냐하면 세상은 심히 죄악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는 오순절에 모였던 경건한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고 말했다(행 2:40).

우리가 하나님께 헌신하려면, 우리는 또한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야 한다. ‘마음’이라는 원어(누스 νούς)는 ‘생각’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헌신하려면 우리의 생각이 새로워져야 한다. 구원받기 전의 우리의 생각은 불경건하고 정욕적이며 부도덕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우리의 생각이 새로워져서 성경에 교훈된 대로 경건하고 도덕적인 것만 생각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변화를 받아’라는 원어(메타모르푸스데 μεταμορφούσθε)는 현재 명령형인데, 이것은 생각의 변화가 한번에 끝나는 것이 아니고 계속 점진적으로,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것임을 보인다. 성도의 영적 성장 곧 성화의 첫 단계는 생각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생각이 새로워지고 날마다 더욱 새로워져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고, 그래야 우리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방향으로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거룩하게 드릴 수 있는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라고 표현하였다. 하나님의 뜻은 그 내용이 악하지 않고 선하며 그 결과도 악하지 않고 선하다. 또 온 세상의 왕이신 주권자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뻐하시는 일들을 행하신다. 때때로 그의 뜻은 우리의 뜻과 달라 우리가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신다(시 115:3). 또 우리는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뜻의 일부분을 아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의 모든 뜻에 순종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성경에 밝히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도우셔서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신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에서 성경 읽기와 성경 연구는 필수적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신구약 66권을 열심히 읽고 듣고 연구해야 한다. 하나님께 헌신함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에 복종하는 것이다.

구원받은 성도의 삶은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여 하나님께 우리의 몸을 드림으로 시작된다. 우리는 우리 몸을 거룩한 제물처럼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온전한 뜻을 분별하며 복종해야 한다.

3-8절, 각각 받은 은사대로

[3절]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우리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주신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범사에 지혜롭게 생각해야 한다. ‘지혜롭게’라는 원어(에이스 토 소프로네인 εἰς τὸ σωφρονείν)는 ‘건전한 생각으로’라는 뜻이다. 우리는 무슨 일에 관해서 건전한 생각으로 생각하고 지나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에게는 생각의 통제가 필요하다. 이런 통제는 우리의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사회에서 다 필요하다.

예를 들어, 아들은 아들로서 생각하고 아빠는 아빠로서 생각해야 하며, 아내는 아내로서 생각하고 남편은 남편으로서 생각해야 한다. 아랫사람은 아랫사람으로서 생각하고 윗사람은 윗사람으로서 생각해야 한다. 각각 자기의 위치를 벗어날 때 무질서와 혼란이 생기고 갈등과 싸움이 생긴다. 교회에서도 그렇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직분을 따라 그 직분에 맞게 생각해야 한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서 가정이나 교회 안에서 주신 각자의 위치와 직분에 합당하게 생각해야 하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아야 한다.

[4-5절]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위치에서 건전하게 생각해야 하는 까닭은 우리 모두가 한 몸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다. 몸에 많은 지체가 있듯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 많은 직분이 있다. 여기에 서로 연합하고 협력하며 생각과 뜻을 같이하는 것이 필요하다. 몸의 분열은 각 지체가 자기 위치를 떠날 때 생긴다. 눈이 입을 무시하고 입노릇을 하려 할 때, 손이 발을 무시하고 발 노릇을 하려 할 때 혼란과 고통이 올 것이다. 각 직분자가 자기 위치를 지키고 충성할 때 교회는 발전되고 부흥하지만, 자기 위치를 벗어나는 자들이 생길 때 교회 안에는 시험과 갈등이 생길 것이다.

[6-8절]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권위(勸慰)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각 사람은 하나님의 주신 은혜대로 자기의 일에 충실해야 한다. 예언은 오늘날 설교에 해당된다. 물론 오늘날의 설교는 성경을 연구하고 묵상하여 거기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해설하며 가르치는 일이다. 섬기는 일은 교회의 모든 직분자들에 적용된다. 교회의 모든 직분은 봉사직이다. 가르치는 일과 권위(勸慰)하는 일은 목사들과 교사들, 또 부분적으로 권사들과 권찰들에게 해당된다. 구제하는 일은 집사들에게 해당된다. 그들은 성실함으로 일해야 한다. ‘성실함’이라는 원어(하플로테스 ἁπλότης)는 ‘단순함, 성실함, 너그러움’ 등의 뜻이다. 우리는 구제할 때 단순하게, 성실하게, 너그럽게 해야 한다. 다스리는 일은 장로들에게 해당된다. 그들은 부지런함으로 해야 한다. 긍휼을 베푸는 일은 집사들이나 모든 성도들에게 해당된다. 그들은 즐거움으로 해야 한다.

우리는 목사나 장로나 권사나 집사나 일반 성도나 간에 모든 성도가 한 몸의 지체임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주신 은혜와 믿음대로 자기의 위치를 지키며 지혜롭게 생각하고 각자 자기의 일에 충실해야 한다.

9-13절, 형제 사랑, 근면, 기쁨, 인내, 기도, 구제

[9-10절]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 . .

바울은 또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선을 붙들라]”고 말한다. 바울은 사랑과 선행에 대해 교훈한다. 성도의 삶은 한마디로 서로 사랑하며 선을 행하는 삶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예수님 믿고 구원받고 이 세상 사는 동안에는 서로 사랑하며 선을 행하는 것이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다. 거짓된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악은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물질적으로 남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며 선은 남에게 유익을 끼치는 것이다. 성도는 진실한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여 악을 버리고 선한 일을 힘써야 한다.

바울은 또 말한다.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라.” 성도는 사랑 가운데서 서로 좋은 친구들이 되어야 한다. 또 상대방을 서로 먼저 존경해야 한다. 상대방에게 약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도가 서로 존경할 수 있는 까닭은, 예수께서 그들 모두를 위하여 피를 흘려 대속(代贖)하셨기 때문이다.

[11절]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바울은 또 말한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성도는 부지런하고 근면한 생활을 해야 한다. 성도는 먼저 영적인 일에 부지런해야 한다. 성도는 날마다 성경을 조금씩이라도 읽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성도에게 기본적인 일로 삼아야 한다. 성도는 또 지교회에 소속하여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모임들에 빠지지 않고 열심히 참석하고 전도와 봉사의 일들에 힘써야 한다. 성도는 또 세상일에도 부지런해야 한다. 우리의 직업에서, 직장 일에서, 부인들은 가정의 일에서, 학생들은 학교 공부에서 부지런해야 한다. 결혼한 여성도는 가사에 충실하여 제한된 생활비를 가지고도 음식을 맛있게 만들고 가정을 잘 꾸미는 지혜로운 자가 되어야 한다.

[12절]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바울은 또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라”고 말한다. 성도는 소망 중에 즐거워해야 한다. 성도의 소망은 주의 재림과 천국과 부활과 영생이다. 이것들은 성도의 기쁨과 즐거움의 이유이다. 우리는 이런 것을 소망할 때 기뻐할 수 있다.

또 성도는 환난 중에 참아야 한다. 우리는 세상에서 질병들, 경제적 곤란, 자연적 재난, 핍박 등 여러 가지 환난들을 당한다. 그러나 성도는 환난 중에도 참아야 한다. 왜냐하면 주권자 하나님께서 그 환난을 주셨고, 하나님께서 그 환난 중에서도 우리를 지키실 것이 확실하고, 또 하나님께서 그 환난을 통해 결국 우리의 인격을 단련시키시고 우리의 생활에 유익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또 성도는 기도에 항상 힘써야 한다. 우리는 평안할 때나 환난을 당할 때나 항상 기도에 힘써야 한다. 기도는 성도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방법이다. 또 기도는 하나님의 능력을 공급받는 길이다. 성도가 기도에 항상 힘쓰면 어떠한 어려운 일이 닥쳐와도 낙심치 않고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다.

[13절] 성도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바울은 또 “성도의 쓸 것을 공급하며[필요한 것들을 함께 나누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고 말한다. 성도는 어려운 교우를 구제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힘써야 한다. 구제는 하나님의 뜻이며 사랑의 증표이다(신 15:7-11; 요일 3:17). 또 우리는 어려운 교우나 이웃에 대해 또 손님이나 나그네에 대해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고 후하게 대접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디모데전서 3:2, “나그네를 대접하며.”

우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붙들고 형제를 사랑하고 먼저 상대를 존경하고 범사에 부지런하고 열심으로 주를 섬기며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구제하기를 힘써야 한다.

14절, 핍박자를 축복하라

[14절]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바울은 또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고 말한다. 성도는 심지어 자기를 핍박하는 자들에 대해서도 사랑으로 대하고 그들을 축복해야 하고 저주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주 예수께서 친히 가르치신 내용이다. 마태복음 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베풀며 너희를 모욕하고](전통본문)15)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누가복음 6:27-28,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것은 물론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를 핍박하는 자들을 축복해야 하고 저주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첫째로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지 못해서 그런 행동을 하기 때문이며, 둘째로 우리도 과거에 구원받기 전에는 그런 자들과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며, 셋째로 그들도 어느 날 우리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을지 모르기 때문이며, 넷째로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이라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모든 죄도 십자가 위에서 담당하셨을 것이므로 우리가 그들을 저주하는 것이 합당치 않기 때문이다. 우리 주님 예수께서는 친히 이 일을 실천하셨고 집사 스데반도 그러하였다.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대로 우리를 미워하고 핍박하는 자들까지도 사랑하고 축복해야 하고 저주하지 말아야 한다.

15-16절, 동감(同感), 동정(同情), 겸손

[15절]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바울은 또 말한다.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인간 생활은 희비(喜悲)가 엇갈린 생활이다. 한편에서는 출산, 생일, 결혼 등의 경사스런 일이 있으나 다른 편에서는 사고, 이혼, 죽음과 장례식 등의 슬픈 일이 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성도는 무감각하지 말고 이웃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울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인격의 모습이다. 다른 사람들이 기뻐할 때 함께 기뻐해 줄 줄 모르는 것은 정상적 인격이 아니고, 또 다른 사람들이 슬퍼할 때 함께 슬퍼해 줄 줄 모르는 것도 그러하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마음과 감정을 같이해야 한다.

[16절]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 . . .

바울은 또,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고 말한다. 성도는 겸손히 마음을 같이하고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낮은 데 처해야 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의 가치는 외모나 재산이나 학력이나 사회적 신분에 있지 않고 그의 인격성, 경건성, 도덕성에 있다. 세상에서도 훌륭한 사람은 겸손한 사람이다.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지혜롭고 훌륭한 인격은 경건과 도덕성을 갖춘 인격이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외적 조건들은 다 헛되다. 주 예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다(마 11:29).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자신을 낮추며 겸손한 마음으로 작은 일에 충성할 수 있는 자는 훌륭한 자이다.

우리는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며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겸손하게 처신하자.

17-18절, 선행, 화목

[17-18절]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 5:39-42). 하나님께서 성도들이 악으로 악을 갚는 행위를 허락지 않으신 까닭은 우리 자신이 전에 악인이었으나 하나님의 긍휼을 입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원수 되었던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는 우리에게 악하게 행하는 자에게 보복하지 말고 모든 사람에게 선을 베풀어야 한다.

바울은 또 말한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우리가 상대와 화목하기가 불가능한 때도 있을 것이다. 상대가 내게 악을 행하거나 거짓으로 나를 비난함으로 교제가 끊어졌을 때 무조건 내가 먼저 화해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악인에 대한 교제의 단절은 그가 회개할 때 비로소 교제의 회복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그 동안에도 우리는 우리에게 해를 끼친 상대를 불쌍히 여겨야 한다. 잘못이 내게 있는 경우는, 물론 내가 먼저 가서 사과하고 서로 화목해야 한다. 또 잘못이 상대에게 있는 경우, 그가 용서를 구하면 언제라도 용서할 마음을 가져야 한다. 주께서는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형제를 용서하라고 가르쳐 주셨다(마 18:22).

우리는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해야 하며, 또 할 수 있거든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목해야 한다.

19-21절, 원수 사랑

[19절]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우리는 우리가 직접 우리의 원수를 갚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원수에게 보복하는 것을 허락지 않으셨다. 공의의 심판자이신 그가 우리의 원수를 갚으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원수에게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공의의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기도하면 된다.

[20-21절]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 . .

바울은 또,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말한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뜻을 순종할 자들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그들에게 선을 베푸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에게 선을 베풀며 너희를 모욕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마 5:44, 전통본문). 성도가 원수들에게 선을 베풀면 그것은 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줄 것이다. 만일 원수들이 깨닫고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들의 머리에 숯불을 쌓는 일, 즉 그들에게 큰 해가 될 것이다. 우리의 의무는 모든 사람에게 선을 베푸는 것이다. 우리는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한다.

우리는 직접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겨야 한다. 우리는 원수가 굶주리면 먹이고 목마르면 마시워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우리는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한다.

 

13장: 사회 생활

1-7절, 국가 위정자들에 대한 의무

구원받은 성도는 가정과 교회에서 뿐만 아니라 또한 세속 사회에서도 의롭고 선하게 살아야 한다. 바울은 성도가 세속국가의 위정자들에 대해 가지는 의무에 관해 교훈한다.

[1절]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 . . .

바울은 말한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위에 있는 권세들’은 세속국가의 위정자들의 권세를 말한다. 성도는 세속국가 위정자들에게 복종해야 한다. 왜냐하면 세속국가 위정자들의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왔고 하나님의 정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사회의 질서와 안정을 위해 그들을 세우셨다. 악한 정부라도 무정부상태보다는 낫다. 그는 디도서 3:1에서도, “정사와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라”고 말했다. 베드로도 그의 서신에서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해 순복하되 왕과 통치자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말했다(벧전 2:13-14).

[2절]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 . . .

바울은 또 말한다.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세속국가 위정자들의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므로, 그들을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다. 그러므로 성도가 국가의 법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심지어 악한 국가에서라도 성도는 원칙적으로 위정자들에게 복종해야 한다. 국가의 권세를 거스르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심판을 자취하게 된다.

물론, 국가와 위정자들에 대한 복종은 신앙 문제에 충돌이 없을 경우에만 해당된다. 성도는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는 명령에 복종할 수는 없다. 종교적 의무와 국가적 의무가 충돌할 때 성도는 종교적 의무 행하기를 택해야 한다. 하나님은 세상의 위정자들보다 높으시다. 심지어 핍박을 받더라도 성도는 신앙을 지키고 하나님의 법을 순종해야 한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이 풀무불에 던지우면서도 왕이 내린 우상숭배 명령을 거절했던 것은 옳았다. 또 예수님의 사도들이 매맞음과 옥에 갇힘을 당하면서도 전도를 금하는 유대 지도자들의 명령을 순종치 않은 것은 정당하였다.

[3-4절] 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 . .

바울은 말한다. “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

세상의 관원들은 하나님의 일반은총 아래서 국가와 사회의 최소한의 도덕성 유지를 위해 세워진 자들이다. 만일 세상에 관원들이 없고 사회에 아무 법과 규칙들이 없어 사람들이 자기 마음대로 행동한다면, 사회가 얼마나 더 혼란해지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세속 사회가 극단적으로 악해지거나 혼란해지지 않도록 일반은총으로 보호하시며 이를 위해 세속국가의 위정자들과 그들의 양심과 옛부터 전래되어 내려오는 관습들과 규례들이나 그들이 양심껏 제정한 법들을 사용하신다. 이런 점에서 국가 위정자는 ‘하나님의 사자[일꾼]’이다.

세속국가 위정자들의 임무는 백성들의 선을 격려하고 악을 징벌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을 행하는 자에게는 위정자들이 두려움이 되지 않으나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는 두려움이 된다. 그들은 악을 징벌하기 위해 칼을 사용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칼의 권세, 즉 악한 자들을 징벌하고 죽일 수도 있는 권세를 주셨다. 물론 그들이 이 권세를 남용할 수도 있으나, 하나님께서 이런 권세를 주셨다. 공의의 집행과 사회의 질서를 위해 극악한 죄인에 대해 사형의 선고와 집행은 가능하다고 본다. 또 우리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3장 2절의 진술대로, 이 칼의 권세에 근거해서 국가가 자신의 안녕과 국민의 생명과 재산 보호를 위해 합법적인 전쟁을 수행할 수 있다고 본다. 우리는 사형과 합법적 전쟁의 정당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본다.

[5-7절] 그러므로 굴복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노를 인하여만 . . . .

바울은 또 말한다. “그러므로 굴복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노를 인하여만 할 것이 아니요 또한 양심을 인하여 할 것이라. 너희가 공세를 바치는 것도 이를 인함이라. 저희가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성도는 형벌이 두려워서 뿐만 아니라, 양심을 인해 국가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우리는 국가 위정자들을 하나님의 일꾼으로 존중하고 그들이 정한 바가 하나님의 정하신 것인 줄 알고 복종해야 한다. 그러므로 성도는 국가에 세금을 바치는 일도 법에 정한 대로 순종해야 한다. 국세도 내고 지방세도 내며 재산세도 내고 소득세도 내어야 할 것이다. 국민이 바치는 세금이 없다면, 국가 위정자들은 그들의 정당한 임무를 수행할 수 없을 것이다. 또 성도는 위정자들을 그 직위를 따라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고 존경할 자를 존경해야 한다.

성도는 하나님께서 세속국가 위정자들의 권세도 주셨음을 인식하고 그들을 하나님의 사자로 존중하고 복종하고 정한 세금도 내어야 한다.

8-10절,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 빚도 지지 말라

[8-10절]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 . . .

바울은 말한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우리는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않도록 애써야 한다. 혹시 부득이 빚을 진 경우는 떼어먹지 말고 속히, 반드시 갚아야 한다. 내가 받을 것은 혹 잊어도 괜찮지만, 줄 것은 잊지 말아야 한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 인간 관계의 모든 계명들은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 속에 다 들어 있다. 내게 사랑이 있다면, 나를 낳으시고 기르시느라고 고생하신 부모님을 공경하고 공궤하며 다른 이들의 생명과 정조(貞操)와 재산과 명예를 귀히 여길 것이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않는 것이다. 우리에게 사랑이 있다면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해를 끼치는 말과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천국은 사랑의 나라이다. 하나님께서는 땅 위의 교회도 이런 사랑의 공동체가 되기를 원하신다. 서로 사랑하는 것은 이상적 인간 관계이다. 따뜻한 관심을 가지고 서로를 돌아보며 서로의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는 인간 관계가 우리가 가지기를 힘써야 할 인간 관계이다. 우리에게 이런 사랑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라는 교훈을 주신 것이다.

우리는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자. 우리는 사랑이 율법의 완성인 줄을 알고 서로 사랑하며 선을 행하자.

11-14절, 빛의 옷을 입으라

[11절]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 . . .

바울은 말한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 우리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영광의 구원이다. 그 날은 의인의 부활과 변화의 날이다. 그 날에 우리는 육신의 모든 죄성으로부터 완전히 구원되어 영광에 참여할 것이다. 이 날이 처음 믿을 때보다 더 가까웠다. 이미 사도 시대에 성도들은 종말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 우리에게는 주의 재림의 때가 정말 가깝다. 그러므로 깨어 있어야 한다. 깨어 있는 것은 경건과 순종의 삶,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삶을 가리킨다.

[12-14절]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밤이 깊으면 새벽이 가깝듯이, 세상이 방탕과 술취함과 음란과 호색과 시기와 싸움의 밤이 깊을수록,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천국이 점점 가깝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는 모든 어두움의 일들, 곧 방탕과 술취함과 음란과 다툼의 모든 죄악된 일을 벗어버리고, 빛의 옷, 의의 옷, 곧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옷 입어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경건과 의와 거룩, 그리고 그의 온유와 겸손과 사랑으로 우리의 인격과 삶을 단장해야 한다.

우리는 영적으로 잠들어 있어서는 안 되고 깨어 있어야 한다. 그것은 경건과 의와 거룩, 온유와 겸손과 사랑으로 사는 것을 가리킨다.

 

14장: 서로 덕을 세움

[1-2절]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 . . .

바울은 말한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 교회 안에는 진리를 알고 예수님을 믿어도 믿음이 약한 자들이 있다. 초대 교회에는 음식 문제나 절기 문제에 있어서 그런 자들이 있었다. 구약성경에 규정된 의식법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고 폐지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연약한 자들은 옛습관에 젖어 거기에서 자유하지 못했다. 이 문제에 대해, 바울은 믿음이 연약한 자를 용납하고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신앙적 문제에 있어서, 성경에 명료하게 계시된 진리들이 있고 그렇지 않은 문제들이 있다. 분명한 진리들에 대해서는 다른 생각을 용납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분명하지 않은 문제들에 대해서는, 진리의 지식과 믿음의 정도에 따라 사람마다 이해하는 데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이때 믿음이 있는 자들은 믿음이 연약한 자들의 생각과 행동을 비판하지 말고 그들을 용납해야 할 것이다.

[3-4절]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하나님께](전통본문)16) 있음이니라.” 우리는 음식 문제에 있어서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업신여기거나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 받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를 받으셨다면 우리도 그를 받아야 할 것이다. 모든 성도는 하나님의 종이며 하나님은 그의 주님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믿음이 약한 자들을 판단하는 것은 합당치 않다. 그들의 서고 넘어짐이 그 주인이신 하나님께 있고 그들이 넘어진다 할지라도 그들을 세우실 능력이 그에게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연약한 형제의 부족을 판단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5절]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 . . .

바울은 또 말하기를,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고 한다. 음식의 문제뿐 아니라 날과 절기에 대한 문제도 그러하다. 어떤 이들은 구약의 율법대로 절기들을 지키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실상 그런 의식법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골로새서 2:16-17,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판단]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그러나 바울은 말하기를, 본질적이지 않고 불명료한 문제들에 대해 우리는 각각 자신의 확신을 가져야 한다고 하였다. 22절에서도 그는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하였다.

[6-8절]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날을 중히 여기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지 않고](전통사본)17)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의 의(義)를 믿어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주님을 위해 살 것이다. 음식과 절기에 대한 그들의 확신이 어떠하든지 간에, 그들은 다 주님을 위해 사는 자들이다.

[7-8절]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구원받은 성도는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해 산다. 피조물이 창조주를 위해 사는 것은 당연하다. 더욱이,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으로 구원받은 우리는 주를 위해 살아야 마땅하다. 주를 위해 사는 것이 성도의 삶의 목표이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5:15에서도 말하기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였다.

[9절]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 . . .

바울은 말한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다. 그의 부활은 확실한 사실이다. 그는 죽었다가 다시 사심으로 주와 그리스도로 확증되셨고 이제 산 자와 죽은 자의 주(主)가 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그를 위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성도는 살든지 죽든지 그를 위해 살 것이다. 우리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그가 다시 사신 것처럼 우리도 마지막 날 다시 살 것을 믿기 때문이다.

[10-12절]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그리스도]18)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하나님은 우리 모두의 주님이시요 우리는 다 그의 종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를 판단치 말고 주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우리는 다 하나님의 심판대, 곧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아들에게 다 맡기셨다(요 5:22). 예수 그리스도는 마지막 심판주이시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고백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연약한 형제들을 용납하고 그들을 판단치 말자.

[13-14절]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 . . .

바울은 또 말한다.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

우리는 믿음이 약한 자를 용납할 뿐만 아니라, 또한 다른 형제들에게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을 두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이것이 사랑으로 행하는 태도이다. 우리가 상대를 사랑한다면 그에게 시험과 장애가 되는 일을 하지 않아야 한다. 바울은 먹는 문제에 관하여 무엇이든지 스스로 더러운 것이 없고 더럽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 그것이 더럽다고 확신하였다. 거리낌으로 먹는 음식은 사람의 양심을 더럽게 만든다. 그는 디모데전서 4:4에서도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고 말했다.

[15-16절] 만일 식물을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만일 식물을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 하지 말라.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 식물 자체가 더럽지는 않지만, 우리가 사랑 없이 지식만 가지고 어떤 음식을 먹음으로 믿음 약한 형제를 근심케 하는 것은 좋지 않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믿음 약한 자를 위해서도 죽으셨으므로 우리는 음식 때문에 약한 자의 믿음을 파괴시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한 일을 하되 남에게 오해나 상함이나 거리낌을 주지 말고 유익을 주면서 해야 한다. 아무리 옳고 좋은 일이라도 사랑 없이 하지 말고 사랑으로 행해야 한다.

[17-18절]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 . . .

바울은 또 말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으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천국에서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 중요하다. 구원받은 성도는 성령의 역사로 지금 이것들을 어느 정도 누리다가 장차 천국에서 충만히 누릴 것이다. 또 지금 의와 평강과 희락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시고 사람들에게도 칭찬을 받을 것이다.

[19-21절] 이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이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힘쓰자](전통본문)19). 식물을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말라. 만물이 다 정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하니라.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하거나 마음을 상하게 하거나 약하게 하는](전통본문)20)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

‘덕을 세운다’는 말은 다른 이에게 영적 유익을 주는 것을 말한다. 교회의 교제는 화평의 교제이어야 하고 서로에게 영적 유익을 주는 교제이어야 한다. 우리는 먹는 문제 때문에 하나님의 사업 즉 영혼 구원의 일을 무너지게 해서는 안 된다. 모든 음식은 다 정결하지만, 거리낌으로 먹는 자에게 해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상대에게 거리낌을 줌으로써 그를 범죄케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사랑과 건덕(建德)의 원리이다. 이런 정신에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8:13에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고 고백하였다.

[22-23절]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21) 우리는 신앙에 본질적이지 않은 문제들에 대해 개인적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그래서 거리낌으로 행하지 말고 믿음을 가지고 행해야 한다. 믿음으로 행하지 않고 거리낌으로 음식을 먹는 자는 범죄하게 된다. 믿음으로 하지 않는 모든 것이 죄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범사에 자기 확신을 가지고 행해야 한다.

우리는 신앙의 비본질적 문제들, 예컨대 음식과 절기 같은 문제에 대해 각각 자기 확신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이 약한 자들을 비평하지 말고 용납해야 한다. 또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을 두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오직 화평의 일과 덕을 세우는 일, 즉 서로에게 영적 유익을 주는 일을 힘써야 한다.

 

15장: 바울의 전도 사역

1-13절, 서로 받으라

[1-3절]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 . . .

바울은 말한다.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강한 자’는 지식이 있고 믿음이 강한 자를 가리키고 연약한 자는 그렇지 못한 자를 가리키는 것 같다. 교회 안에는 진리의 지식과 믿음의 정도가 다른 자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강한 자들은 약한 자들을 배려하고 그의 유익을 위하여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다른 이들을 위해 사셨고 사람들의 비방을 받으셨다. 그리스도의 발자취는 우리에게 본이 된다.

[4절]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 . . .

바울은 또 말하기를,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고 한다. 다윗은 사람들의 비방을 체험하였고 그것은 메시아가 당하실 고난을 예표하였다. 하나님께서 여러 일들을 성경에 기록하신 것은 우리의 교훈을 위해서이다. 성경은 일차적으로 우리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게 하는 데 목적이 있지만, 그것은 또한 구원얻은 우리에게 인내와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하려는 목적도 있다. 성도는 세상에서 고난의 긴 세월을 통과한다. 하나님께서는 일들을 조급하게 행하지 않으신다. 우리는 고난의 현실 속에서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을 얻는다. 이와 같이, 우리는 서로를 향해 오래 참고 용납하는 일이 필요하다.

[5-7절] 이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이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인내와 안위를 주셔서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서로 뜻을 같이하고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으심같이 서로 받게 하신다. 교회의 일치는 단지 외형적 일치가 아니고, 생각과 사상의 일치이어야 한다. 교인들의 말과 마음과 뜻이 하나가 되는 것이 진정한 일치이다(고전 1:10).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와 하나님의 진리 안에서만 가능한 일치이다. 우리가 과거에 만가지로 부족한 죄인들이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용납하셔서 구원하심과 같이, 우리도 약점들을 가진 형제들을 용납하고 서로 받아야 한다. 우리가 이단을 용납해서는 안 되지만, 우리는 비본질적인 어떤 문제들이나 지엽적 문제들에 있어서 믿음이 연약한 형제들을 용납해야 한다.

[8-12절] 내가 말하노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내가 말하노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수종자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케 하시고 이방인으로 그 긍휼하심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 바 이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또 가로되 열방들아,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라 하였으며 또 모든 열방들아, 주를 찬양하며 모든 백성들아, 저를 찬송하라 하였으며 또 이사야가 가로되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하였느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으셨으나 조상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견고케 하시고 특히 할례 없는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긍휼을 증거하기 위해 할례를 받으셨다. 이방인들은 할례 없는 자 즉 하나님의 언약에서 제외된 자들이었으나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위해 십자가 위에서 속죄의 피를 흘리심으로 하나님의 크신 긍휼을 입게 되었다. 할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는 그리스도께서 할례의 수종자가 되셨듯이, 우리도 이웃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자신을 낮추고 오래 참음으로 서로 용납해야 하며, 마침내 생각과 사상과 입술의 고백에 있어서 하나가 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13절]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절망은 슬픔과 불안, 근심과 걱정을 가져오지만, 소망은 기쁨과 평강을 준다. 우리는 영광의 천국을 소망한다. 예수님의 재림으로 그 세계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그 소망은 우리에게 큰 기쁨을 준다. 참으로, 성도의 삶은 미래의 것을 소망하는 삶일 뿐만 아니라, 현재 기쁨과 평강을 누리는 삶이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바로 이런 복된 삶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그의 성령을 위로자와 격려자로 우리 속에 보내주셨다. 기쁨과 평강과 소망의 충만--이것이 성도의 정상적 삶의 모습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도 이런 은혜를 충만히 주시기를 바란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믿음이 연약한 교우들을 오래 참음으로 서로 받으며 믿음 안에서 기쁨과 평안과 소망의 충만을 받아 누리자.

14-21절, 바울의 전도 사명

[14-16절] 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 그러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인하여 더욱 담대히 대강 너희에게 썼노니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은 로마의 성도들이 선함이 가득하고 지식이 많아서 서로 권할 수 있는 자들임을 확신하였다. 그는 그들이 복음에 대해 이미 믿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에게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은혜를 인해 담대히 몇 마디 썼다고 겸손하게 표현하였다. 우리는 이미 많은 것을 배웠을지라도 아는 것을 다시 기억하고 복습하는 마음으로 겸손히 서로를 권면하고 또 권면을 듣고 받아야 할 것이다. 바울은 또 자신을 이방인을 위한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라고 표현하며 자신의 사역을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라고 표현하였다. 그는 성령 안에서 이방인들을 구원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일을 힘썼다.

[17-18절]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 . . .

바울은 또 말한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나로 말미암아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바울의 전도 사역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 의존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도 바울을 통해 역사하셨다. 그 목적은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함이셨고, 그 방법은 말과 행위로, 기적들로, 성령의 능력으로이었다. 한마디로 ‘말과 능력으로’이었다. 이것은 감사한 일이었다. 하나님의 복음이 말로만 전파되지 않고 성령의 능력으로 확증되었다. 오늘날도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또 그 말씀과 더불어 활동하신다. 외형적인 기적들은 교회 안에서 오래 전에 사라졌을지라도 사람들의 심령 속에서 일어나는 기적적인 변화의 역사는 교회 역사상 계속되어 왔다. 교회 확장의 역사는 내적 기적의 역사이었다. 우리는 성령의 이 역사를 더 귀히 여기며 사모해야 한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죄인들이 거듭나고 변화되는 것이다.

[19-21절] 이 일로 인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이 일로 인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기록된 바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일루리곤은 마게도냐와 아가야의 북서쪽 해안 지방이며 그 서쪽 바다 너머에 로마가 있었다. 수리아 안디옥 교회에서 파송을 받아 전도 활동을 시작했던 바울은 소아시아는 물론,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에, 또 이제 그 지방의 북서쪽 해안에까지 하나님의 복음을 충만히 전파하였던 것이다. 바울은 복음이 이미 들어간 지역은 피하고 복음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곳을 찾아 개척 전도에 힘썼다. 바울의 전도의 열심과 개척 정신은 오늘날 모든 전도자에게 본이 된다. 교회는 힘을 다해 복음을 전해야 하고 특히 복음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곳들에 전도자들을 파송해야 한다.

신약교회는 복음의 제사장 직무 즉 영혼들을 구원하는 전도의 일을 사명으로 받았으므로 이 일에 전념해야 한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

22-29절, 미래의 전도 계획

[22-24절] 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 . . .

바울은 말한다. “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여러 해 전부터 너희에게 가려는 원이 있었으니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리라](Byz).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교제하여 약간 만족을 받은 후에 너희의 그리로 보내줌을 바람이라.”

바울은 로마로 가려고 소원하였지만, 그의 소원은 여러 번 좌절되었다. 아직 하나님의 때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소원이 성경적이고 우리의 이성의 건전한 판단에 따른 것일진대, 낙심치 말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한다. 바울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그의 처한 일터에서 최선을 다하였다. 자기의 일을 등한히 하며 다른 큰 일만을 꿈꾸는 자는 어리석은 자이다. 자기에게 맡겨진 작은 일에 충성하는 자에게 큰 일이 맡겨질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일터에서 최선을 다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바울은 그의 최선을 다하는 동안에도 줄곧 로마로 가려는 소원을 품고 있었다. 그의 미래의 전도 계획은 로마를 거쳐 당시의 세계의 서쪽 끝인 서바나 곧 스페인까지 가는 것이었다. 이것이 그의 소원이었고 그의 사명의 계획이었다. 그는 로마의 성도들과 교제를 나누며 힘을 얻고 그리로 가기를 원했다. 전도자들에게는 때때로 성도들과의 교제가 필요하다. 그 교제는 피차에게 위로와 힘이 될 것이다.

[25-27절]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 . . .

바울은 또 말한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동정하였음이라.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령한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바울에게는 전도가 가장 중요한 일이지만, 구원받은 성도의 믿음과 사랑의 열매인 구제헌금도 중요하였다. 그것은 돈 자체의 귀함보다 선한 열매의 귀함 때문이었다. 성도의 구제헌금은 그의 믿음과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한다. 우리가 참으로 주를 사랑한다면, 그것은 말뿐 아니라, 시간과 수고와 돈도 포함할 것이다. 마게도냐와 아가야 교인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 돕기를 원하였다. 실상 이방인 교회는 유대인 교회에 빚진 자이었다.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을 통해 구원의 복을 받았다. 그러므로 유대인 교회가 어려울 때 이방인 교회가 물질로 그들을 돕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구원의 가치는 물질보다 비교할 수 없이 크다.

[28-29절]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저희에게 . . . .

바울은 또 말한다.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저희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를 지나 서바나로 가리라. 내가 너희에게 나갈 때에 그리스도의 [복음의]22) 충만한 축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 바울은 마게도냐와 아가야 성도들의 구제헌금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는 그들의 사랑의 열매인 구제헌금을 예루살렘 교인들에게 전달하고 이방인 성도들의 사랑을 확증한 후 로마를 지나 서바나로 가려고 계획하였다. 그때 그는 로마 교인들에게 충만한 축복, 곧 말씀의 축복을 가지고 갈 것을 확신했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우리가 바르다고 생각한 소원이 좌절되었을 때 낙심치 말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자. 둘째로, 우리는 영혼 구원의 복음을 널리 전하는 일을 위해 충성하자. 셋째로, 전도가 가장 중요하지만, 믿음의 열매인 구제헌금도 귀하게 여기자.

30-33절, 기도를 부탁함

[30절]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 . . .

바울은 또 말한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바울은 로마의 교인들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기도를 부탁하였다. 우리는 우리의 권위로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또 성령의 사랑을 힘입어서 피차 권면하고 서로를 위해 기도를 부탁할 수 있다. 이것이 복된 사랑의 교제이다.

바울은 그들이 그와 힘을 같이하여 그를 위해 기도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비록 한 자리에서 기도할 수 없을지라도 합심하여 기도하기를 구한 것이다. 합심 기도는 힘이 있다. 오늘날도 우리는 수요기도회나 금요기도회에 함께 모여 합심 기도하는 일을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그러나 그런 기도회에 못나오는 자들은 그 시간 다른 곳에서라도 또 동일한 시간이 아닐지라도 같은 기도 제목을 가지고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하는 일을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이다.

바울은 특히 자신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해줄 것을 그들에게 요청하였다. 이 세상에 다른 사람의 기도가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부족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의 의(義)는 늘 부족하며 우리의 힘도 부족하여 어려운 현실에 부딪힐 때마다 우리의 연약함을 여지 없이 드러낸다. 우리는 날마다 예수님의 의만 의지하고 하나님의 힘과 도우심을 구한다. 우리의 믿음은 약하고 우리의 기도조차도 부족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필요하며 마음을 모아 함께 기도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31절] 나로 유대에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에게서 구원을 받게 . . . .

바울은 말한다. “나로 유대에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에게서 구원을 받게 하고 또 예루살렘에 대한 나의 섬기는 일을 성도가 받음직하게 하고.” 바울이 요청한 기도 내용은 세 가지이었다. 본절에 두 가지가 나오고 다음 절에 한 가지가 나온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그를 유대의 순종치 않는 자들로부터 구원해주시기를 구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의 목숨이 아까워서이겠는가? 성도에게는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더 낫다. 단지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복음과 교회들을 위해 더 살 필요가 있을 뿐이다. 우리는 반드시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와 하나님의 복음과 그의 교회들을 위해서 살 이유와 의미와 가치가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심지어 하나님께서 그의 뜻 안에서 우리의 목숨을 취하신다 할지라도, 우리는  불평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그 뜻에 순응해야 한다.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살아야 한다고 고집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천국은 이 세상보다 훨씬 더 낫고, 죽음 후의 안식은 이 세상의 수고로움보다 훨씬 더 낫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왜 죽음을 겁내며 왜 육신적 목숨을 보존하기에 급급해야 하겠는가?

둘째는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교인들을 섬기는 일, 곧 바울의 구제헌금 전달의 일이 그들에게 받음직하게 되게 하시기를 구하는 것이었다. 그 구제헌금이 구제하는 자들의 자랑이 되지 않고 구제받는 자들의 자존심이 상하지 않는 방식으로 행해지기를 구한 것일 것이다. 사랑은 예절을 지키는 것이다. 남에게 상함을 주는 선행은 참된 사랑의 행위가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우리가 구제할 때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말씀하셨다(마 6:3-4,).

[32절] 나로 하나님의 뜻을 좇아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 너희와 함께 편히 쉬게 하라.

바울은 또 말한다. “나로 하나님의 뜻을 좇아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 너희와 함께 편히 쉬게 하라.” 바울이 셋째로 요청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좇아 그가 그들에게 나아가게 하시기를 구하는 것이었다. 로마로 가기를 원한 바울의 소원은 몇 번 좌절되었다. 그러나 인간의 소원은 좌절될지라도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의 생애에서도, 가정에서도 교회에서도, 오직 하나님의 뜻만은 이루어질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만은 드러날 것이다. 그는 크시고 광대하신 하나님, 영원하신 하나님, 완전하시고 완벽하신 하나님이시다. 그의 계획은 완전무결하여 반드시 성취될 것이다. 그는 주권자이시며 모든 일을 계획하시고 완전히 남김 없이 이루시는 하나님이시다.

‘기쁨으로’ 나아간다는 말은 바울의 전도 사역이 기쁨과 자원함의 사역임을 증거한다. 우리의 봉사도 그러해야 한다. 억지의 봉사나 억지의 전도나 억지의 헌금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신다. 작은 것이나 큰 것이나, 우리의 봉사나 전도나 헌금이 기쁨과 자원함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만일 우리에게 기쁨과 자원함이 부족하다면, 우리는 이것을 기도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기쁨으로 우리를 위해 자신을 주셨다. 사랑은 기쁨의 봉사, 기쁨의 헌신, 기쁨의 희생을 가져온다.

바울은 로마에 가서 성도들과 함께 며칠간 편히 쉬기를 원하였다. 그것은 그가 육신적 쾌락이나 세속적 오락을 구한 것이 아니었다. 전도자의 휴식은 재충전의 기회이다. 그것을 통해 그는 자신의 행한 일들을 반성하면서 혹은 감사하고 혹은 하나님께 더욱 기도함으로 새 힘을 얻을 것이다. 그러한 휴식과 반성과 기도를 통해 그의 사명은 더욱 명료해지고 그의 소원은 더욱 확실해질 것이다.

[33절]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

바울은 또,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이라고 말한다. 성경에서 ‘평강’이라는 말은 마음의 평안과 몸의 건강과 경제적 안정과 사회적 안정을 다 포함하는 포괄적 개념이라고 본다. 평강과 반대되는 말은 마음의 불안과 슬픔과 우울함, 몸의 질병과 고통, 물질적 궁핍과 곤란, 사회적 불안정과 전쟁, 지진, 기근 등의 불행한 재난들일 것이다. 참된 평안은 죄를 떠난 삶,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삶에서만 기대할 수 있다. 악인들에게는 평강이 없다. 이사야 48:22,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이사야 57:21,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참된 평안은 하나님으로부터만 온다. 하나님은 평강의 하나님이시다. 그는 평강이 충만하시며 우리에게 평강을 나누어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평강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면 그의 평강이 우리와 함께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풍성한 평강의 복을 계속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라고 말씀하셨고(마 11:28-29), 또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셨다(요 14:27). 바울은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노라. 주는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실지어다”라고 말했다(살후 3:16).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다 부족하고 연약한 자들이므로 서로를 위해 마음과 힘을 모아 기도하자. 그러면 하나님의 일이 더욱 힘있게 이루어질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우리의 뜻이 좌절될 때라도 오직 하나님의 모든 뜻이 다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자. 셋째로, 우리는 기쁨과 자원함으로 주를 섬기며 선한 일에 힘쓰자. 넷째로, 우리는 평강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므로 충만한 평강을 주실 줄 믿고 소원하고 기대하자. 그것은 모든 성도들의 큰 특권이며 복이다.

 

16장: 인사

1-2절, 뵈뵈를 소개함

[1절]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 . . .

바울은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천거하노라”고 말한다. 겐그레아는 고린도의 동쪽에 있는 아시아를 향한 항구 도시이었다. 뵈뵈는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이라고 소개된다. ‘일꾼’이라는 원어(디아코노스 διάκονος)는 ‘집사 직분’을 뜻하기도 하지만, 넓은 의미에서 ‘봉사자’를 의미한다. 초대 교회에서 여자들에게 집사 직분이 주어진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여성이 직분을 가지고 있었든지 혹은 가지고 있지 않았든지 간에 그들이 하나님의 교회와 복음 사역에 여러 면에서 참여했고 수고하고 봉사했다는 것은 확실하고 그것이 귀하고 중요한 점이다. 바울이 여성도 뵈뵈를 소개하고 추천하는 것은 그가 직접 로마를 방문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뵈뵈 자매는 바울이 지금 쓰고 있는 이 편지를 로마의 성도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뵈뵈’라는 이름은 그의 부모가 이방인이었음을 나타내는 것 같다. ‘뵈뵈’라는 말은 달이라는 뜻이다. 이방의 시인들은 해를 ‘뵈부스’라고 불렀고, 달을 ‘뵈뵈’라고 불렀다. 그렇다면 그는 이방인이었으나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었고 주 안에서 ‘자매’가 되었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다 주 안에서 형제요 자매이다. 뵈뵈는 주 안에서 믿음의 한 식구가 되었을 뿐 아니라, 또 주의 일에 참여하는 봉사자가 되었다.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인가! 우리 모두가 실상 이런 은혜를 받았다. 우리는 하나님의 한 가족들이며 하나님을 위해 선한 일에 힘써야 할 자들이다. 에베소서 2: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가족들]이라.” 디도서 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救贖)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2절] 너희가 주 안에서 성도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너희가 주 안에서 성도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 줄지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니라.” 뵈뵈는 사회적 신분이나 능력이 있었던 것 같다. 바울은 그를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라고 소개한다. ‘보호자’라는 말(프로스타티스 προστάτις)은 그가 성도들과 바울을 보호하고 돌보았음을 뜻한다. 뵈뵈는 이제 바울이 부탁한 어떤 임무를 가지고 로마로 가고 있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 교회에 그를 소개하며 그를 영접하기를 요청하는 것이다.

“주 안에서 성도의 합당한 예절로 영접하라”는 말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의 은혜를 받아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기 때문에 거기에 합당하게 그를 귀히 여기며 영접하라는 뜻이다. 우리는 서로를 귀히 여기며 영접해야 하며 특히 교회의 충성된 봉사자들에게 그렇게 해야 한다. 바울은 또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주라”고 부탁한다. 그것은 그가 거기에 머물 때에 거처할 방과 음식 등 필요한 것을 제공하기를 요청한 것일 것이다.

우리는 본문에서 바울의 말을 통해 몇 가지 교훈을 얻는다. 첫째로, 오늘날도 뵈뵈같이 주의 종들과 성도들을 보호하며 주의 일을 위하여 헌신하는 일꾼이 필요하다. 둘째로, 우리는 믿는 교우들, 특히 교회의 봉사자들을 귀히 여기며 주 안에서 성도의 합당한 예절로 영접해야 할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그들을 귀히 여기고 영접할 뿐만 아니라, 주의 사랑으로 그들을 돌보며 그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제공해야 할 것이다.

3-16절, 로마에 있는 성도에게 문안함

[3절]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 . . .

바울은 말한다.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브리스가는 브리스길라의 애칭이다. 이들 부부는 로마 황제 글라우디오가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내쫓았을 때 로마를 떠나 고린도에 와서 바울과 함께 지낸 적이 있었다(행 18:2-3). 그들은 지금, 아마 글라우디오가 죽었든지 아니면 그 칙령이 완화되었기 때문에, 다시 로마로 돌아가 있는 것 같다. 바울은 그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바울을 도와 함께 주의 일에 힘썼던 믿음 좋은 부부이었다.

[4절]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 바울의 전도 여정에는 많은 위험한 일들이 있었다. 그는 가는 곳마다 대적자들을 만났다. 세상은 선과 악, 의와 불의, 진실과 거짓의 싸움터이다. 고린도에서도 그는 유대인들의 대적을 당하였었다(행 18:12). 그런데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는 바울을 사랑하고 아꼈기 때문에 바울의 목숨이 위태하였을 때에 그를 보호하거나 구하기 위하여 위험을 무릅썼다. 인간적으로 그들은 바울의 생명의 은인들이었다. 그러므로 바울 뿐만 아니라 또한 바울을 아끼는 모든 교회들과 성도들이 아굴라 부부의 신앙과 행위에 감사하고 있었다.

[5절] 또 저의 교회에게도 문안하라. 나의 사랑하는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또 저의 교회에게도 문안하라. 나의 사랑하는 에배네도에게 문안하라. 저는 아시아에서[아가야에서]23) 그리스도께 처음 익은 열매니라.” ‘저의 교회’라는 원어(텐 카트 오이콘 아우톤 엑클레시안 τὴν κατ’ οἶκον αὐτών ἐκκλησίαν)는 ‘그들의 집에 있는 교회’라는 말이다.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는 경제적으로 유여했고 그들의 집이 넓어 집회 장소로 사용될 만하였고 성도들은 거기에 모여 예배드리며 교제하였던 것 같다. 이와 같이, 초대 교회는 처음에 독립된 건물이 없었고 구원받은 성도의 집에서 모였었다. 실상, 성경이 말하는 교회는 건물이 아니고 성도의 모임을 가리킨다.

에배네도에 대한 언급에서, ‘아시아’라는 말은 전통사본에는 ‘아가야’라고 되어 있고 그것이 원본의 본문인 것 같다. 에배네도는 아가야에서 예수 그리스도께 처음 익은 열매 곧 처음 구원받은 자이었다. 고린도전서 16:15에는 스데바나의 집이 아가야의 첫열매로 언급되어 있다. 에배네도는 개인적으로 처음 구원받은 자이었고 스데바나의 집은 가정적으로 처음 구원받은 가정이었든지, 아니면 에배네도가 스데바나의 가족 중 처음 믿은 자이었을 것이다.

[6절] 너희를 위하여 많이 수고한 마리아에게 문안하라.

바울은 또 “너희를 위하여 많이 수고한 마리아에게 문안하라”고 말한다. ‘너희를 위하여’라는 말은 전통적 다수사본들에는 ‘우리를 위하여’라고 되어 있다. 후자의 본문이 맞을 것이다. 바울이 로마의 성도를 위해 많이 수고한 사람을 언급했다기보다는 자기의 동역자들을 위해 많이 수고한 자를 언급했을 것이다. 이처럼 초대 교회에는 복음 전도자들의 일을 도우며 그들을 섬긴 귀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고, 그 가운데는 마리아 같은 여자들도 있었다.

[7-9절] 내 친척이요 나와 함께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내 친척이요 나와 함께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사도에게 유명히 여김을 받고 또한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 또 주 안에서 내 사랑하는 암블리아에게 문안하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동역자인 우르바노와 나의 사랑하는 스다구에게 문안하라.” 바울은 자기 친척들인 안드로니고와 유니아를 언급하였다. 그들은 바울과 함께 옥에 갇히기도 했다. 그들은 사도들에게 인정을 받은 자들이었고 바울보다 먼저 믿은 자들이었다. 오늘 본문에는 ‘주 안에서’라는 말이 7번,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이 3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말이 한 번 나온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고 영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특권을 누리는 자들이다. 모든 성도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 자매들이다.

[10-11절]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함을 받은 아벨레에게 문안하라. . . .

바울은 또 말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함을 받은 아벨레에게 문안하라. 아리스도불로의 권속에게 문안하라. 내 친척 헤로디온에게 문안하라. 나깃수의 권속 중 주 안에 있는 자들에게 문안하라.” 바울은 아리스도불로에게 속한 자들에게 문안했으나 아리스도불로 자신에게는 문안하지 않은 것 같다. 그 이유는 그가 이미 죽었거나 아직 믿지 않은 자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 가족들은 믿음 안에 있었으므로 문안하였을 것이다. 나깃수의 경우도 그러하였다. 나깃수는 수에토니우스의 증언에 의하면 로마 황제 글라우디오의 큰 호의를 받은 자인데 매우 악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가족 중에 예수 믿는 자들이 생겼다. 이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이었다. 하나님의 구원은 어떤 환경 속에서도 이루어진다. 믿는 이들은 매우 악한 사람의 가정 속에도 있을 수 있다. 그들에게 고통도 있을 것이지만, 그들은 거기에서 그 가정을 복음화시키는 빛이 될 것이다.

[12-16절] 주 안에서 수고한 드루배나와 드루보사에게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주 안에서 수고한 드루배나와 드루보사에게 문안하라.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하고 사랑하는 버시에게 문안하라.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아순그리도와 블레곤과 허메와 바드로바와 허마와 저희와 함께 있는 형제들에게 문안하라. 빌롤로고와 율리아와 또 네레오와 그 자매와 올름바와 저희와 함께 있는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라. 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다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바울은 루포의 어머니를 ‘내 어머니’라고 표현함으로써 그가 주 안에서 성도에게 가지고 있는 사랑을 표현하였다. 또 ‘저희와 함께 있는 형제들,’ ‘저희와 함께 있는 모든 성도’라는 표현 속에는 이름이 언급되지 않은 다른 여러 사람들이 들어 있다는 암시가 있다.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 중에 자신이 아는 사랑하는 성도의 이름을 일일이 언급하며 ‘문안하라’는 말을 17번이나 사용했다. 문안은 성도의 사랑의 교제의 한 표현이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므로 서로 문안해야 하고 서로의 바른 신앙생활의 발전을 위해 힘써야 할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두 가지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위하여 힘써 수고하자.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위해 많이 수고하였다. 그들은 바울의 사역에 협력하였고 어떤 이들은 바울을 위해 목이라도 내어놓으려 하였으며 주의 일들을 위해 많이 수고하였다. 오늘 우리도 주님과 그의 복음을 위해 협력하고 수고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고린도후서 5:15,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둘째로, 우리는 서로의 믿음과 봉사와 수고를 기억하며 서로 문안하고 위로 격려하면서 서로의 바른 신앙생활의 발전을 위해 힘쓰자. 바울은 자신이 아는 로마의 성도들의 믿음과 봉사와 수고를 기억하면서 서로 문안하기를 권하였다.

17-20절, 이단자들에게서 떠나라

[17절]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교훈을 거스려 . . . .

바울은 또 말한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교훈을 거스려[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너희 교훈’이라는 원어(텐 디다켄 헨 휘메이스 에마데테 τὴν διδαχὴν ἣν ὑμείς ἐμάθετε)는 ‘너희가 배운 교훈’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사도들을 통해 전달된 바른 교리와 교훈이다. 오늘날 말로 하면, 전통적, 정통적 교리와 교훈이다. 사도들의 바른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은 이단자들이다. 우리는 그런 이단자들을 살피고 그들과 교제를 끊고 분리해야 한다. 디도서 3:10,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거절하라].” 요한이서 9-11, “지내쳐 그리스도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이 사람이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니라.”

우리가 이단자들과 분리해야 하는 이유는 성도의 교제란 일치된 진리 안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진리의 일치가 사랑의 교제보다 더 중요하다. 우리의 교제가 일치된 진리 안에 있지 않다면, 진리와 비진리의 혼잡이 생기고 비진리와의 타협이 시작될 것이다. 교회가 오류를 포용하면 영적으로 해이해지고 부패하고 속화되기 시작한다. 이단자들과의 교제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교제가 아니다. 그런 교제는 인간의 무지와 연약 때문에든지 마귀의 시험 때문에 생긴다. 진리와 오류는 결코 혼잡도거나 통합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단자들과의 교제를 결코 용납해서는 안 된다.

[18절] 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의 배만 섬기나니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 이단자들은 섬기는 대상이 다르다. 그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지 않고 다만 자기들의 배만 섬긴다. 그들은 성삼위일체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아니고 자기들의 욕심을 따라 사는 자들이다.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대신에,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이 그들의 최고의 선(善)이며 가치인 것이다.

또 이단들은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을 하는 자들이다.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이란 ‘부드럽고 아첨하는 말’을 뜻한다. 이단들은 부드럽고 아첨하는 말을 잘한다. 그들은 말을 잘하는 자들이다. 그들의 말만 들으면 그들은 선하고 온유한 사람 같아 보일지 모른다. 마귀는 지혜롭다. 그래서 이단자들을 분별하기란 쉽지 않다.

이단자들은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한다.’ 이단자는 미혹하는 자, 곧 속이는 자이다. 그 근원은 하나님이 아니고 사탄과 악령들이다. 그러므로 바른 교훈과 이단은 그 뿌리가 전혀 다르고 그 방향이 전혀 다른 두 길이다. 그러므로 이런 미혹의 이단 사상을 교회 안에 허용해 놓으면 그것이 누룩처럼 교회에 퍼져 교회를 부패시킨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이런 이단들을 분별하고 그들과의 교제를 끊어야 하는 것이다. 이 분리는 교회의 거룩과 영광과 능력을 위해 필수적이다. 이것은 권징의 원리와 같다.

우리는 무엇으로 이단들을 분별할 수 있는가? 오직 성경의 바른  교리와 교훈으로만 이단들을 분별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경에 근거한 바른 교리적 지식과 믿음과 윤리적 실천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성경 진리에 확고히 서서 날카롭고 냉철한 마음으로 진리와 비진리, 그리고 바른 교훈과 거짓된 교훈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오늘날 기독교계 안에 있는 대표적 이단들은 첫째로 로마 천주교회이며, 둘째로 여호와의 증인, 몰몬교, 안식교, 통일교 등의 수많은 사이비종파들이며, 셋째로 현대 자유주의 신학이다. 그러므로 참된 성도와 교회들은 이런 이단 사상들과 이단자들을 분별하고 그들을 거절하고 그들과의 교제를 끊고 그들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

[19절] 너희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인하여 기뻐하노니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너희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인하여 기뻐하노니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 로마에 사는 교인들이 하나님을 진실히 믿고 순종한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고 모든 사람에게 들려졌다. 이것은 기쁜 일이었다. 바울도 그 소문을 듣고 기뻐했다. 이 소문은 그들의 믿음의 진실함을 증거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을 볼 때 그들이 참으로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도에게 하나님의 말씀 순종과 실천이 없다면, 누가 어떻게 그 성도의 믿음의 진실함을 알 수 있겠는가?

이단자들과의 분리의 문제도 결국 순종의 문제이다. 이단자들로부터 분리하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도를 통해 주신 명령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확한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단자들로부터 떠나야 한다. 우리는 이단자들을 포용하거나 그들과 무분별하게 교제하는 일을 삼가야 한다. 그러므로 배교와 타협과 혼란의 시대에 지혜로운 성도는 아무 교회에나 가입하지 말고 아무 집회에나 참여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해야 하고 이단자들로부터와 명백한 오류들로부터 떠나야 한다.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이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였다. 선한 것은 하나님의 진리를 믿는 일과 그를 섬기며 그의 뜻을 행하는 일이며, 악한 것은 불경건하고 부도덕한 일이다. 우리는 악한 것, 곧 불경건하고 부도덕한 일에는 미련하고 둔할수록 좋다. 그러나 믿음의 일, 하나님을 섬기는 일, 참된 교회를 세우는 일에는 지혜를 얻어 바른 길을 가고 바른 것을 행해야 한다. 우리가 선한 데 지혜로운 자들이라면 결코 이단자들과 그들의 이단 사상들을 용납하지 않고 그들에게서 떠날 것이다.

[20절]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단을 너희 발 아래서 상하게 . . . .

바울은 또 말한다.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단을 너희 발 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성도를 미혹하는 이단의 근원은 사탄이다. 사탄의 활동이 제거되어야 이단과 미혹이 없을 것이다. 사탄은 모든 거짓말의 원천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진리의 영이시며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

사탄을 성도의 발 아래 상하게 하실 자는 하나님뿐이시다. 하나님만이 사탄을 제어하실 수 있다. 우리의 교리적 싸움을 승리로 인도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적 전쟁에서 대장이 되신다.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성도의 발 아래 상하게 하실 것이다. ‘속히’는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하는 단어이다. 그가 속히 오실 것이다. 히브리서 10:37,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요한계시록 22:20,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비록 2천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이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주 예수께서 속히 다시 오셔서 사탄을 우리의 발 아래 상하게 하실 것이다! 참 평화의 시대가 올 것이다!

우리는 사도들의 바른 교훈, 즉 전통적 정통 교리를 떠난 이단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야 한다. 우리는 로마 천주교회와 자유주의 신학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 이단들은 사탄의 활동에 기인하는 미혹의 운동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들을 분별하고 그것들과 분리해야 한다. 이단들과의 분리는 하나님의 명령이며 하나님의 명확한 뜻이다.

21-24절, 인사

[21-24절] 나의 동역자 디모데와 나의 친척 누기오와 야손과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나의 동역자 디모데와 나의 친척 누기오와 야손과 소시바더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이 편지를 대서(代書)하는 나 더디오도 주 안에서 너희에게 문안하노라. 나와 온 교회 식주인 가이오도 너희에게 문안하고 이 성의 재무 에라스도와 형제 구아도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바울은 그와 함께 일하는 디모데를 언급하였다. 디모데는 바울과 뜻을 같이하여 주의 일에 힘썼던 일꾼이었다(빌 2:20-22). 오늘날도 교회에는 이런 동역자들이 필요하다. 또 바울은 자기 친척들 누기오와 야손과 소시바더를 언급했다. 또 그는 본 서신을 필사한 대서자(代書者) 더디오를 언급했고 식주인 혹은 집주인 가이오도 언급했다. 이런 사람들은 다 바울의 전도 활동에 협력한 믿음 있는 성도들이었고 교회 봉사자들이었다. 오늘날에도 복음 사역에는 이런 협력자들이 필요하다. 오늘날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복음을 널리 전파하고 변호하는 일에 동역자들이 되고 협력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전통본문24)에 보면, 마지막으로,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모든 이에게 있을지어다. 아멘”이라는 기원의 말을 썼다. 그것은 그가 편지를 시작할 때나 마칠 때에 자주 쓴 기원의 말이다. 우리는 날마다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의(義)를 의지하고 그 보혈의 샘에서 씻음받음으로 힘을 얻는다.

오늘날도 교회에는 디모데 같은 충성된 동역자들이 필요하고 또 그 외에도 복음 사역을 위해 각 방면의 많은 협력자들이 필요하다. 또 우리는 항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의와 피의 씻음이 필요하다.

25-27절, 송영

[25-27절]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 . . .

본 서신은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취었다가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좇아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비밀의 계시를 좇아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케 하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이라는 말로 끝난다.25)

본 송영은 복음에 관해 몇 가지 사실들을 언급한다.

첫째로, 복음의 중심 인물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로마서 1:2에서 바울은, “이 복음은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한 것이라”고 말했었다.

둘째로, 복음은 사도들을 통해 증거되었다. “나의 복음과.” 예수께서는 그의 복음을 사도들에게 계시하셨고 그들은 그 복음을 전파하고 해설하였다. 로마서 2:16,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셋째로, 복음은 구약시대에는 감취었다가 이제 계시된 내용이다. “영세 전부터 감취었다가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구약시대에도 복음의 은혜가 암시되어 있었으나, 신약시대에 밝히 계시되었다. 로마서 3: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義)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넷째로, 복음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명령을 좇아 된 것이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좇아.” 복음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친히 영원 전에 작정하신 바이고 어느 사람의 창작물이 아니다. 디모데후서 1: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다섯째로, 복음은 이스라엘 백성뿐 아니라 온 세상을 위한 것이다.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구약시대에는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방인들과 달리 특별히 사랑하셨었다(호 11:8). 그러나 이제 신약시대가 되어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에 있는 택한 백성을 복음으로 구원하신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사도들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명령하셨다(마 28:19).

여섯째로, 복음의 목적은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기 위한 것이다. 로마서 1:5,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믿음은 마음의 순종이다(롬 6:17). 복음은 모든 사람을 회개시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케 하는 말씀이다.

일곱째로, 하나님께서는 믿는 모든 자들을 복음으로 견고케 하신다.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케 하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복음은 우리를 믿음과 소망에 굳세게 서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사도행전 20:32에 보면, 바울은,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고 말했다.

로마서는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구원의 복음을 밝히 증거한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代贖)으로 말미암아 죄인들이 그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소식이다(롬 3:21-22).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롬 1:16). 하나님의 택하신 영혼들은 복음을 통해 구원을 얻을 것이며 또 견고히 설 것이다. 우리는 은혜의 복음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자! 또 이 복음에 합당하게 의롭고 거룩한 삶을 살며, 또 이 은혜의 복음을 땅끝까지 전파하는 자들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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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1) Eusebius, Ecclesiastical History, II. 25.

2) Irenaeus, Against Heresies, III. 3. 2, 3.

3) Byz (itd vg) syr(p) arm (Origenlat 3/6) 등에 있음.

4) Byz arm Origen 등에 있음.

5) Byz itd vgcl syrp Origenlat 1/6 등이 그러함.

6) Byzpt א* A B* C Lectpt itd vg copbo arm Origenlat 등이 그러함.

7) Byzpt 0220vid Lectpt AD vgmss copsa geo 등이 그러함.

8) Byz (p46 D itb Irenaeuslat Tertullian) 등이 그러함.

9) Byz은 그러함. A vg syrp armms 등은 ‘곧 육신을 좇지 않는 자들’이라고 되어 있음.

10) Byz A D itd vg copsa Clement Origenlat Tertullian1/2 등이 그러함.

11) 이 본문이 맞다고 봄. Byz א C D it vg syr copbo 등이 그러함.

12) Byz D itd vg arm Origenlat 등이 그러함.

13) Byz lat syr 등에 있음.

14) Byz A syrp Clement 등이 그러함.

15) Byz D* W itd h syrp copmeg armms 등에 있음.

16) Byz D itb d vg Origenlat Cyprian 등이 그러함.

17) Byz syr 등에 있음.

18) Byz vgcl syrp armms Polycarp Origenlat 1/6 Cyprian 등이 그러함.

19) Byz C D itb d vg copsa bo arm Origenlat 등이 그러함.

20) Byz B D itb d vg copsa arm 등에 있음.

21) Byz A vgmss arm 등에는 16:25-27의 구절이 들어 있다.

22) Byz vgcl syrp 등에 있음.

23) Byz syr 등이 그러함.

24) Byz D itd vgcl 등에 있음.

25) 이 송영의 말은, Byz vgmss 등에는 14:23 후에 놓여 있고, A arm 등에는 14:23 후에와 16:23 후에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