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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강해

김효성 목사

2018년 2월 1일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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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주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 바울의 증거대로(마 5:18; 요 10:35; 갈 3:16; 딤후 3:16),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라는고백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매우 기본적이고 중요하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진술대로(1:8), 성경 원본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고 그 본문은 “그의 독특한 배려와 섭리로 모든 시대에 순수하게 보존되었다.” 이것이 교회의 전통적 견해이다. 그러나 19세기 말 웨스트코트와 호트가 주장한 불확실한 가설에 의해 많은 교회들이 신약성경의 전통적 다수 본문을 버리고 불완전하고 오류투성이의 사본들(א와 B)을 중시하는 잘못을 범하였다. 그러나 신약성경의 헬라어 비잔틴 다수 사본들의 본문은 순수하게 보존된 성경 원본의 본문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채택되어야 할 것이다.

성경을 가지고 설교할지라도 그것을 바르게 해석하고 설교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올 것이다(암 8:11). 중세 시대 말, 종교개혁 직전과 같이, 오늘날 벌써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오는 것 같다.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설교와 성경강해가 있지만, 순수한 기독교 신앙 지식과 입장은 더 흐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요구되는 성경 해석과 강해는 복잡하고 화려한 말잔치보다 성경 본문의 바른 뜻을 간단 명료하게 해석하고 적절히 적용하는 것일 것이다. 사실상, 우리는 성경책 한 권으로 충분하다. 성경주석이나 강해는 성경 본문의 바른 이해를 위한 작은 참고서에 불과하다. 성도는 각자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성경을 읽어야 하며, 성경주석과 강해는 오직 참고로만 사용해야 할 것이다.

 

제목 차례

에베소서 서론

1장: 교회의 기초

2장: 교회의 구성원

3장: 교회의 세계성

4장: 교회의 일체성

5장: 교회의 성결성

6장: 교회의 전투성

 

 

서론

에베소서의 저자는 바울이다. 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은.” 3:1, “. . . 갇힌 자된 나 바울은.” 익나시우스, 허마,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터툴리안, 이레니우스 등은 본 서신을 인용하며 그것이 바울의 서신임을 증거하였다.

본 서신의 수신자는 에베소 교인들이다. 몇몇 고대 사본들에 ‘에베소 교인들에게’라는 구절이 생략되어 있으나, “에베소에 있는”이라는 구절이 있는 사본들과 역본들의 압도적 증거들이 있고,1) 무라토리 단편, 이레니우스, 터툴리안,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오리겐 등 초대 교부들의 증거들도 있다. 본서의 저작 연대는 주후 60년경일 것이며, 사도 바울은 이 편지를 로마 감옥에서 썼다고 본다(3:1; 4:1).

본서의 특징적 주제는 교회이다. 본서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대해 증거한다. 본서에는 ‘교회’라는 말이 9번 나온다(로마서에는 5번, 고린도전서에는 22번, 고린도후서에는 9번, 갈라디아서에는 3번 등).

본서의 각 장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2장, 교회의 본질]

 1장, 교회의 기초

 2장, 교회의 구성원

[3-6장, 교회의 속성]

 3장, 보편성

 4장, 일체성

 5장, 성결성

 6장, 전투성

1장: 교회의 기초

1-14절, 성삼위 하나님의 구원 사역

[1-2절]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되었다. 그가 무지하여 예수님 믿는 자들을 핍박하였을 때, 주께서 그를 부르셨고 사도로 삼으셨다.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위해 세우시고 보내신 자를 가리킨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며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은혜와 평안을 기원하였다. 은혜는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의 은혜이며 평안은 그 은혜에 근거한 마음의 평안과 육신적, 물질적, 환경적 평안을 포함한다.

[3-6절]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을 인해 그를 찬송하면서 그의 구원을 세 단계로 설명하였다. 첫째는 하나님 아버지의 선택과,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救贖)과, 셋째는 성령의 인치심이다. 오늘 우리도 성삼위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찬송해야 한다.

성도가 받은 구원은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다. 그것은 땅에 속한 것 곧 현세적, 육신적, 물질적 복이 아니고 하늘에 속한 것, 즉 내세적, 영적인 복이다. 현세적 복도 복이지만, 우리가 죽으면 다 끝나는 복이다. 그러나 구원은 영생과 영원한 천국의 복이다.

성도의 구원은 하나님의 창세 전 선택에서 시작되었다. 그것은 ‘그의 기쁘신 뜻대로’ 된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에 근거하였다.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그는 그의 기쁘신 뜻대로 인류 중 어떤 이들을 구원하시려고 계획하셨다. 그는 그들을 아셨고 사랑하셨고 택하셨고 구원과 영생으로 예정하셨다.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태초부터 계신’ 자이시며(요 1:1), 그의 근원은 ‘영원 전부터’이시다(미 5:2). 예수께서는 자신이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있었고(요 8:58) 또 ‘창세 전부터 아버지와 영광을 누렸다’고 말씀하셨다(요 17:5). 하나님께서는 한 무리의 죄인들을 선택하시고 그들의 죄의 책임을 그리스도에게 전가(轉嫁)시키셨다. 그는 그들의 죄를 속량하실 제물이 되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었다.

하나님의 선택의 일차적 목적은 택자들을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하나님 앞에서’라는 말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어야 함을 보인다. 죄는 사람 앞에서는 때때로 감출 수 있으나 하나님 앞에서는 그렇지 않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혜롭고 거룩하고 의롭게 지음을 받았으나(전 7:29; 골 3:10; 엡 4:24) 범죄함으로 더러워졌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택자들을 구원하셔서 다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기를 계획하셨다. 그의 구원 계획은 실패치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택자들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 그들은 본질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지만, 양자(養子)로서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을 얻었다(요 1:12; 롬 8:15).

하나님의 선택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선택은 하나님의 무조건적 사랑과 은혜이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죄인들은 지옥 갈 자들을 택하시고 은혜로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할 것밖에 없다.

[7절]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救贖)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

창세 전에 선택된 자들은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救贖)함을 얻었다. 그들의 모든 죄는 사함 받았다. ‘그의 피로 말미암아’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피가 죄를 속(贖)함을 증거한다. 레위기 17:11,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贖)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사도 베드로는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救贖)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고 말하였다(벧전 1:18-19).

[8-10절] 이는(헤스)[그 은혜를]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 뜻의 비밀’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대속(代贖)의 이치를 가리킨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하나님의 비밀이었다. 구약 백성들은 이것을 잘 이해하지 못하였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처음에는 그러했다. 그들은 성령을 받은 후 그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었다. 다른 방법은 없었다. 사도행전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을 위한 구원의 유일한 길이시다.

본문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시간표가 있음을 보인다. 아담 창조 후 6천년의 역사를 위한 하나님의 시간표가 있다. 아담 후 천년 경에 노아라는 인물이 출생하였다. 아담 후 2천년 경에는 아브라함이 출생했다. 아담 후 3천년 경에는 다윗이 출생했다. 아담 후 4천년 경이 되어 ‘때가 찬 경륜대로’ 그리스도께서 오셨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자들 곧 하늘에 있는 자들이나 땅에 있는 자들이 다 통일이 된다. 성경에 밝히 증거된 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류의 유일한 중보자이시다. 그는 지금 천국에 올라간 성도들의 영혼들이나 지상에 있는 성도들이나 다 한 몸, 한 가족, 한 교회, 한 나라를 이루시는 분이시다. 모든 택자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다.

[11-12절]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그리스도를 먼저 바랐던(혹은 믿었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役事)하시는 자’ 곧 주권자이시다. 우리의 예정은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뜻에 근거하였다. 이 하나님의 주권적 예정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기업이 되었다.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는 원어는 6절과 14절의 말과 동일한데, 그것은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으로 하나님의 기업이 된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는 것이다.

[13-14절]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그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救贖)하시고[그 얻으신 것의 구속(救贖)의 때까지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 안에서’라는 말은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뜻이다. ‘너희도’라는 말은 11절의 ‘우리가’라는 말과 대조를 이룬다.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고, 에베소 교인들도 구원의 복음 진리를 듣고 그 복음을 믿었고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 ‘그 안에서 또한 믿어’라는 말은 ‘그것을 믿어’라는 뜻이다. ‘그것’은 바로 앞에 나오는 구원의 복음을 가리킨다. 성령께서는 주께서 약속하신 대로 오셨다. 성령의 인치심은, 예수님 믿고 구원받을 때 성령을 받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선택과 구속(救贖)과 함께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세 번째 단계이다.

14절의 ‘이는’(호스 o{")(남성 관계대명사)이라는 말은 앞절의 성령을 가리킨다. 원어에서 ‘성령’은 중성명사이지만, 남성 관계대명사가 사용된 것은 성령의 인격성의 한 증거이다. 성령의 인치심, 곧 성령께서 구원받은 성도 안에 거하시는 것은 성도가 끝까지 견디는 일에 보증과 보장이 되신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주께서 피흘려 사시고 성령께서 인치신 자들은, 모두 다 끝까지 보존되며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성화를 이루다가 마침내 영광에 이를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안을 사모하며 받아 누리자.

둘째로, 우리는 창세 전에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감사하며 찬송하자. 또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대로 그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가 되도록 실제적으로도 힘써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구속(救贖)함을 얻은 것을 감사하며 찬송하자. 그의 십자가 구속 사역이 아니었으면 우리는 우리의 죄로 영원한 지옥 형벌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넷째로,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로 복음을 깨닫고 믿어 구원 얻게 하신 것을 감사하며 찬송하자.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는 우리의 구원의 보증이시다. 우리의 구원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

 

15-19절, 하나님을 알게 하시기를 기도함

[15-16절] 이를 인하여 주 예수 안에서[주 예수께 대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너희를 인하여 감사하기를 마지 아니하고 내가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하노라.

‘이를 인하여’라는 말은, 앞절에 말한 에베소인들의 구원받은 사실을 인하여라는 뜻이다. 성도의 주 예수께 대한 믿음은 그가 구원받았다는 증거이다. 또한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은 그의 믿음이 순종하는 믿음 곧 참된 믿음이라는 증거이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로 인하여 감사한 것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았기 때문이며 그들의 믿음이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으로 나타난 진실한 믿음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주의 종들과 성도들의 참된 감사가 있다. 성도는 세상의 그 어떤 것을 인한 감사보다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사실과, 그의 믿음이 참되며 자라는 것을 인한 감사를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성도의 참된 감사의 이유가 여기에 있다.

[17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바울은 하나님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라고 불렀다. 본 서신 1:3에서도, 그는 하나님을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과 아버지]라고 말했다. 요한복음 20:17에 보면, 주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무덤에서 시체가 없어졌다고 울고 있던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고 말씀하셨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인성(人性)을 보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경의 증거대로 ‘사람’이시고(딤전 2:5), ‘의인’이시고(행 7:52), ‘마지막 아담’과 ‘둘째 사람’이시다(고전 15:45, 47). 하나님께서는 사람으로 오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영광의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또한 ‘영광의 아버지’이시다. 그는 본질적으로 예수님과 부자(父子) 관계이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는 아버지와 함께 영광을 누리셨다. 예수께서는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다(요 17:5). 성경은 예수님을 ‘영광의 주’라고 말한다(고전 2:8; 약 2:1).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을 위해 기도한 내용은 서너 가지이었다. 우선 본절에서 그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혜를 주시기를 구하였다. 그들은 이미 하나님을 알고 있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서는 죄사함의 구원과 영생을 얻을 수 없다. 요한복음 17:3에서 예수께서는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고 증거하셨다. 그러나 이제 에베소 교인들은 하나님을 더 많이 알아야 한다.

하나님을 알기 위하여 그들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지혜와 계시의 정신[혹은 영]’이 필요했다. 참된 지혜는 하나님을 아는 지혜이다. 잠언 9:10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시작]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고 말하였다. 또 ‘계시(啓示)’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알려주시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알려주셔야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는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1:27). 또 그는 하나님께서 버려두신 자들은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막 4:12). 신앙생활의 시작에도 또 진행에도, 하나님의 주시는 지혜와 지식이 필요하다. 구원받은 자는 하나님의 지식을 이미 얻었으나 그의 지식은 자라고 확고해져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나님을 알고 더 아는 것이 영적인 복이다.

[18절]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라는 말은 앞절에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사’라는 기도 내용과 비슷하다. 사람에게는 육신의 눈뿐 아니라 또한 마음의 눈이 있다. 예수께서는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마음의 눈]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라고 말씀하셨다(마 6:22-23).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에베소 교인들에게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시고 마음 눈을 밝히셔서 세 가지를 알게 하시기를 기도했다. 첫째로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둘째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셋째로 그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19절)을 알게 하시기를 구한 것이다. 첫째와 둘째는 서로 통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부르심의 소망은 부활과 천국과 영생이다. 이것은 우리가 보지 못했고 경험하지 못한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이며 성도의 확실한 소망이다. 하나님의 구원 곧 죄로부터의 구원은 바로 이 소망으로의 초청이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주신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그 기업은 부활한 성도들이 들어갈 천국 곧 새 하늘과 새 땅과 거기서 누릴 영생 복락(永生福樂)이다. 그것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롬 8:18)이며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 (고후 4:17)이며 또 ‘지극히 귀한 보석 같은 영광’(계 21:10-11)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은 저주받은 이 지구에 사는 죄인들을 건져 영광의 천국에 들어가게 하시는 구원이다.

[19절]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라는 구절은 ‘믿는’이라는 말에 연결되는 것 같다. 죄로 인하여 어두워졌고 심히 무감각해졌던 우리를 깨우쳐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役事)는 그의 능력의 일이시다.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죄로 죽었던 우리의 영혼이 다시 살 수 없었을 것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하신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원하시는 자를 은혜로 역사하셔서 자발적으로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신다. 믿음은 하나님의 크신 구원의 능력의 결과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당신은 그리스도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했던 베드로에게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6:17). 구원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능력의 일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극히 크신 능력으로 구원을 얻었다. 또 이 능력이 오늘날도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택하시고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하신 자들을 구원하신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사도 바울의 기도의 내용은 오늘 우리에게도 필요한 내용이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시고 우리의 마음 눈을 밝히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시기를 기도하자. 날마다 하나님을 더욱 아는 복을 누리는 자가 되자.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그의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인지 알게 하시기를 기도하자. 우리의 소망은 이 세상에 있지 않고 영생의 나라인 영광의 천국에 있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알게 하시기를 기도하자. 그는 무지하고 약한 우리를 구원하셔서 예수님 믿게 하셨다. 우리는 그의 능력만 믿고 살아가자.

 

20-23절, 그리스도와 교회

[20절]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하나님의 지극히 크신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역사(役事)하여 그의 부활과 승천과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심으로 나타났다.

능력의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의 지극히 크신 능력의 표현이었다. 죽음은 인류 역사 수천년 동안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권세처럼 보였고, 인생의 절망들 가운데서 가장 강력한 절망처럼 보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가장 큰 절망을 단번에 정복한 하나님의 지극히 크신 능력의 사건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세상에서 참으로 기쁜 소식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昇天)과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심 또한 놀라운 사실들이다. 성경은 이 두 가지 사실을 확실하게 증거하고 있다. 그의 승천에 관하여, 구약성경은 에녹과 엘리야의 사건을 통해 이미 예시한 바 있었다(창 5:24; 히 11:5; 왕하 2:11). 예수께서도 자신의 승천에 대해 언급하셨었다(요 6:62; 16:28). 특히 누가복음 24:51과 사도행전 1:1-2, 9-11은 승천의 사실을 증거하였다. 또 신약성경의 다른 몇 곳에서도 승천의 사실이 분명히 언급되어 있다(눅 9:51; 엡 4:8-10; 딤전 3:16; 히 4:14).

승천하신 그는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셨다. 이 사실도 사도들의 글들과 특히 히브리서에서 밝히 증거되어 있다(롬 8:34; 골 3:1; 벧전 3:22; 히 1:3; 8:1; 10:13; 12:2).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신 의의(意義)는 다음 두 절에 언급되어 있다. 첫째는, 그를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심이고, 둘째는,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시키심이다.

[21절] 모든 정사(政事)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자기 오른편에 앉게 하심으로써 그를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셨다. ‘정사(政事)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는 세상에서 활동하고 있는 천사들을 가리킨다고 본다. 그들 중 어떤 천사들은 선하지만, 어떤 천사들은 악하다. 베드로전서 3:22는 “저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느니라”고 말하였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이 세상과 오는 세상의 모든 이름들 위에 뛰어난 이름이 되셨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말하기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고 하였다(빌 2:9-11).

물론, 이 사실은 아직 다 이루어지지 않았다. 불신자들이나 이방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무시하고 그의 신적 영광을 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셨다는 것은 그의 권세와 그의 영광이 어떠하심을 증거한다. 무지한 세상이 그를 인정하지 않고 그에게 합당한 영광을 돌리지 않는 것뿐이지, 그는 아버지와 함께 동등한 권세를 가지시고 동등한 영광을 누리신다. 그는 지금도 주의 백성을 통해 영광과 찬송을 받으신다.

[22절]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 오른편에 앉게 하심은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심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만유의 주이시다. 만물은 그의 발 아래 있고 그에게 복종해야 한다. 그는 만왕의 왕이시요 만주의 주이시다. 만물 중에는 인류의 원수인 사탄도 포함되며 사탄도 마침내 그리스도의 발 아래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의 발 아래 굴복될 것이다. 시편 110:1은,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라고 말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단을 너희 발 아래 상하게 하시리라”고 말했다(롬 16:20). 사탄이 그리스도의 발 아래 또한 우리의 발 아래 굴복되는 때는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때이다.

지금 모든 이들이 그 앞에 복종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인류의 원수인 사탄을 그 앞에 굴복시키기 위해 다시 오시면, 그는 홀로 높임을 받으실 것이다. 그때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라고 말할 것이다(계 5:13). 장차 만물이 그 앞에 복종할 것이다.

높임을 받으신 그리스도와 교회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첫째로,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의 머리이시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다. ‘머리’라는 말은 ‘우두머리, 통치자, 주’라는 뜻이다. 바울은 다른 곳에서도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라고 표현하였다. 에베소서 5: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골로새서 1: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것은 다 통치적 의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의 주이실 뿐 아니라 또한 교회의 머리이시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에게 순종해야 한다. 교회의 참 지도자는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뿐이시다(마 23:10).

‘머리’라는 말은 또한 유기체적 의미도 가진다. 머리와 몸은 나뉠수 없는 관계이다. 머리가 없는 몸은 죽은 것과 같다. 사도 바울은 본 서신 후반부에서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여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고 표현하였다(엡 4:15-16). 주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는 생명적 관계이다. 그 둘은 잠시라도 분리될 수 없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의 생명이시요 힘이시다.

[23절]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둘째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한 개인이지만, 또한 새로운 인류이시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 인류가 선택되었다(엡 1:4).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며 정돈된다(엡 1:10).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는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 한 새 사람을 이루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다(엡 2:15). 예수께서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요 6:39).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또한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라고 표현된다. ‘충만케 하시는’이라는 원어(플레루메누)(현재 중간태 분사)는 ‘자신을 위해 충만케 하시는, 자신을 위해 완성시키시는’이라는 뜻이다.

교회의 충만과 완성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측면에서 이해될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충만한 성취요 완성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개인적으로, 온 세계적으로 교회를 통해 충만히 이루어지고 있다. 창세 전의 하나님의 선택과 2천년 전의 그리스도의 구속(救贖) 사역과 성령께서 죄인을 중생시키시고 성화시키시고 마침내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이 모든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교회를 통해 충만히 이루어지고 있다. 교회는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는 전도, 곧 지역 복음화와 세계 복음화의 기지(基地)일 뿐 아니라, 또한 그 자체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충만한 성취인 것이다.

교회의 충만과 완성은 수적인 면에서도 이해된다. 하나님의 선택된 자들 전체가 다 구원받을 것이다. 그것은 수적으로 충만한 구원이다. 요한계시록 7:9는,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라고 증거하였다. 성경과 역사가 증거하는 대로, 교회는 쇠퇴하는 단체가 아니고 수적으로 성장하고 충만해져 가는 단체이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구원받은 자들로 충만케 하고 계신다. 그것이 교회의 정체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능력의 역사로 말미암아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지금 하나님의 오른편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아야 한다. 예수님의 이름은 모든 천사들과 모든 인간들의 이름들 위에 뛰어나신 이름이시다. 세상은 그를 모를지라도, 우리는 그의 이름을 높이고 그의 영광을 찬송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되심을 바로 인식하고 그에게 절대 순종해야 한다. 그는 우리의 크신 지도자이시며 왕이시다. 교회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권위를 가진 자가 없다. 그러므로 교회는 오직 신구약성경에 계시된 대로 그의 뜻과 교훈에 겸손히 복종해야 한다. 교회의 본분은 오직 그의 말씀에 복종하는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요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몸의 충만과 완성을 위해 힘써야 한다. 이것은, 우리 개인의 영적 성장과 교회 전체의 영적 성장뿐 아니라, 또한 지역 복음화와 세계 복음화의 사명을 의미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을 건립해야 하고 충만케 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우리로 말미암아 힘있게 완성되도록 그에게 충성해야 한다.

 

 

2장: 교회의 구성원

1-5절, 다시 삶

[1절]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성도의 과거의 상태는 한마디로 ‘죄로 죽었던’ 상태이었다. 여기에 ‘허물과 죄’란, 아담의 첫 범죄로 인하여 모든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태어나는 소위 ‘원죄’(原罪)와, 또 이 원죄의 죄악성 때문에 각 사람이 실제로 짓는 ‘자범죄’(自犯罪)를 다 포함하는 말이다. 죄의 값은 죽음이다(롬 6:23). 죽음이 죄의 형벌로서 사람들에게 주어질 것이라는 사실은 첫 사람 아담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처음 명령에 포함된 경고에서 이미 언급되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명하시기를,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었다(창 2:16-17).

‘허물과 죄로 죽었다’는 말은 영적 의미이다. 구원받기 전의 모든 사람들은, 비록 육신적으로는 아직 죽지 않았을지라도, 영적으로는 다 죽은 자이었다. 영적인 죽음이란, 사람의 영혼이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분리되어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린 것을 말한다. 그 상태는 한마디로 무지와 부도덕의 상태이었다. 영적으로 죽은 모든 영혼들은 하나님을 참으로 알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참된 의와 선을 행하지 못하고 있다. 이 영적인 죽음은 죄 때문에 왔다. 믿지 않는 모든 사람은 죄인이므로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 있다.

[2절]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구원받기 전에 에베소 교인들은 허물과 죄 가운데 살고 있었고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다. 이 세상은 죄악된 세상이며, 세상의 삶의 방식은 곧 죄악된 삶이다. 또 ‘공중의 권세 잡은 자’는 사탄이다. 그는 세상을 주관하는 자이다. 예수께서는 그를 ‘이 세상 임금’이라고 표현하셨고(요 12:31) 바울은 그를 ‘이 세상 신’이라고 했고(고후 4:4) 요한은 온 세상이 악한 자[사탄] 안에 처해 있다고 증거하였다(요일 5:20). 사탄은 지금 불순종하는 아들들 가운데서 활동하고 있다. 바울은,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어둡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라고 말하였다(고후 4:3-4). 성령께서는 우리 속에 믿음과 순종을 주시지만, 사탄은 사람들 속에 불신앙과 불순종을 일으키며 이 세상에 죄악된 풍조를 번성케 한다.

[3절]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그 가운데서’라는 말은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라는 뜻이다. 에베소 교인들만 과거에 그러했던 것이 아니고, 바울의 일행도 그러했다. 우리 모두가 과거에 그러했다. 우리가 다 과거에 몸의 욕심을 따라 살았었다. ‘육체’라는 원어(사르크스)는 ‘죄성을 가진 몸’을 가리킨다고 본다. 야고보서 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악된 욕심들 가운데 대표적인 것들은 돈에 대한 욕심, 이성에 대한 욕심, 세상 권세와 명예에 대한 욕심 등이다. 이것들은 다 세상적이요 죄악되다. 구원받기 전의 우리는 다른 죄인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들이었다. 하나님의 진노! 요한복음 3:36도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고 말하였다.

[4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었던 우리에게 하나님의 긍휼의 구원이 왔다. 우리가 구원받은 원인과 이유는 하나님의 긍휼,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은혜밖에 없었다. 다른 원인과 이유는 없었다. 우리 속에는 어떤 원인도 없었다.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었다. 모든 사람이 다 영적으로 죽어 있었다. 모든 사람이 다 무능력했다. 성경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라고 말했고(렘 17:9), 또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고 말했다(렘 13:23). 사도 바울은 로마서 3:10-12에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고 말하였다.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 때문이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셨다(요 3:16). 하나님의 사랑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 표현되었다. 바울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말했다(롬 5:8).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代贖)의 죽음으로 확증되었다.

[5절]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구원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다시 살리신 것이다. 그것은 영적으로 죽었던 우리에게 영적 생명, 곧 새 생명을 주신 사건이다. 이것을 중생(重生, 다시 남)이라고 말한다. 주 예수께서는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요 3:5).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택자들을 위해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이루신 대속 사역에 근거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에게 새 생명이 되는 사건이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의 죽음이 되었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이 되었다. 우리의 부활은 먼저는 죽었던 영혼의 살아남 곧 중생(重生)이고, 그 다음에는 장차 주의 재림 때에 이루어질 우리의 몸의 영화로운 부활 혹은 변화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이 우리의 얼마나 놀라운 변화를 의미하는지 깨달아야 한다. 구원은 영적으로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사건이다. 그것은 무지와 부도덕으로부터의 구원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죄의 낙을 누리던 자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며 성경 읽고 기도하며 의와 선을 구하는 삶으로의 변화이다.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자라면, 우리는 이 놀라운 구원을 인식하고 확신하고 감사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긍휼과 사랑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과거에 어두움의 권세 아래서 육신의 욕심을 따라 살았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 속에 있는 어떤 원인에 기인하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에 기인하였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의 결과이었다. 우리는 그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죄 가운데 살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이 세상 풍조를 따르지 말고, 사탄과 악령들의 이끌림을 받지 말고, 몸의 죄악된 욕심을 따라 살지 말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아직도 죄 가운데 머물러 있다면, 만일 우리가 계속 범죄하고 있다면, 우리는 아마 구원받지 못한 자일 것이다. 우리는 이제 모든 죄를 버리고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거룩하고 선하게 드리기를 힘써야 한다.

 

6-10절, 은혜의 구원

[6절]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대신하여 죽으셨고 부활하셨고 승천하셨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그와 ‘함께 살리셨고,’ ‘함께 일으키셨고,’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5-6절).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일으키신 것은 중생(重生)의 새 생명을 주시고 미래의 부활을 확증하신 것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히신 것은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을 누리게 하시고 하늘의 기업을 상속받게 하심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승천과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심은 우리의 구원과 그 특권에 대한 상징이요 성취요 확증이었다.

[7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대신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그들을 구원하심은 하나님의 지극히 풍성하신 은혜를 나타내심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피 흘리신 죽음은 순전히 죄인들을 대신하신 것이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우리의 죄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대속물이 아니고서는 우리의 죄가 제거될 수 없었다. 그것은 하나님께는 큰 희생과 손실이며 우리에게는 감당할 수 없고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지극히 풍성한 은혜는 여러 시대 동안, 벌써 2천년이나 온 세상에 전파되어 왔다.

[8절] [이는]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얻었으며]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선물임이니라].

본문은 하나님의 은혜가 지극히 풍성하신 이유를 설명한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긍휼에 기인한다. 구원의 원인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뿐이다. 다른 이유는 없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를 구원하셔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우리를 구원하지 않아도 되셨다. 로마서 9:15-16,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이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디모데후서 1: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구원의 수단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다. 믿음은 전 인격적 신뢰이다. 그것은 지식과 찬동과 의지를 다 포함한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요(요 1:12)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오는 것이다(요 6:35, 37). 믿음은 ‘마음의 순종’이다(롬 6:17). 믿음은 입술의 고백으로 표현된다. 로마서 10:9-10,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물론 참 믿음은 선한 행위로 나타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다(약 2:17).

참된 믿음은 구원의 수단이요 구원에 필수적이지만, 그것은 인간의 어떤 공로적 행위가 아니다. 믿음은 분명히 율법 순종의 행위와 대조되는 어떤 것이다(롬 4:5). 그래서 믿음은 마치 빈손과 같다고 자주 비유된다.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을 받기 위해선 빈손이 필요하지만, 빈손은 자랑할 만한 어떤 공로가 될 수 없다. 회개하는 상한 심령과 진실한 믿음은 구원을 위해 꼭 필요하지만, 회개와 믿음이 공로가 될 만한 무엇은 아니다. 그러나 여하튼 우리는 믿어야 한다(요 3:16). 믿음은 하나님의 긍휼을 얻는 정상적이고 정당한 수단이며, 불신앙은 하나님 앞에서 큰 죄악이며 멸망에 이르는 길이다.

본문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말한다. ‘구원을 얻었다’는 원어(세소스메노이)(완료 수동태 분사)는 믿는 성도가 이미 구원을 얻었다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준다. 이것은 법적인 구원을 가리킨다.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이다. 그것은 더럽고 결함 있는 인격이 거룩하고 완전한 인격이 되는 것이다. 히브리서 10:10, 14,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미래적 표현도 있으나(롬 5:9-10), 그것은 성도가 마지막 심판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것을 의미한다. 또 ‘구원을 이룬다’는 현재적 표현도 있으나(빌 2:12),2) 그것은 성도가 받은 구원에 합당하게 사는 것, 곧 성화(聖化)를 의미할 뿐이다.

[8-9절] . . .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이것’이라는 원어(투토 tou'to)는 ‘구원받은 사실’을 말한다. 구원은 우리 속에서 나오지 않았고 나올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것은 인간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도 구원으로 인하여 교만하거나 자랑하지 못할 것이다. 성도의 미래의 영광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핏값으로 사신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얻게 되는 것이다(롬 3:24; 8:30).

[10절]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선한 일들을 위해서다. 사도 바울은 디도서에서도 말하기를,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救贖)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였다(2:14). 선한 일이란 경건하고 선한 삶이며, 영혼 구원의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삶이다. 구원받은 성도는 이제 선한 삶을 살아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깨닫고 감사하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은 우리의 죽음과 부활과 영광을 상징하고 성취하고 확증하였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객관적으로 나타난 구원의 은혜이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으로써 우리가 죄사함을 얻었고 새 생명을 얻었고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을 누리게 되었다.

둘째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은 구원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임을 깨닫고 감사하자. 구원은 조금이라도 우리의 행위에 근거하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지극히 풍성한 은혜와 긍휼에 기인하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다. 믿음은 구원에 필수적이다. 그러나 이 믿음은 빈손과 같을 뿐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받는 이 구원은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이다.

셋째로, 구원받은 우리는 이제 선한 일을 위해 살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값없이 주신 은혜와 구원을 말하면서 자신의 나태와 불성실을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신구약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계명들과 교훈들에 대한 순종으로 구원의 증거를 나타내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일을 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늘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삶과, 영혼 구원의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11-18절, 하나님과 화목케 하심

[11-12절]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外人)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그러므로 생각하라”는 말씀은,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가 하나님의 크신 사랑으로 살았고 구원을 받았으므로, 과거의 신분과 상태가 어떠하였으며 거기로부터 어떻게 현재의 신분과 상태로 구원을 받았는지 기억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에베소 교인들은 과거에 구원받기 전에 어떤 신분과 상태에 있었는가? 본문은 그들의 구원받기 전의 신분과 상태를 일곱 가지로 표현한다.

첫째로, 그들은 ‘육체로 이방인’이었다. ‘이방인’이라는 말 속에는 하나님의 지식과 소망과 생명이 없는 영적 어두움과 절망과 죽음이 들어 있다. 우리는 과거에 다 이방인이었다.

둘째로, 그들은 전에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었다. 무할례당은 ‘할례받지 못한 자들’이라는 뜻이다. 무할례는 하나님의 언약과 상관없음을 나타낸다. 우리는 과거에 다 무할례자이었다.

셋째로, 그들은 그때에 ‘그리스도 밖에’ 있었다. 그리스도는 구약 백성들에게 율법에 암시된 구주이었다. 구약 백성은 율법 중 제사법에 나타나 있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그리스도 밖에 있었다. ‘밖에’라는 원어(코리스)는 ‘상관없이’라는 뜻이다. 이방인들은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상태에 살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구주가 없었다. 그들은 구주를 알지 못하였고 그의 은혜를 받지 못했다. 우리는 과거에 다 그리스도 밖에 있었다.

넷째로, 그들은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들’이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민이요 그의 언약 백성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나라를 사랑하셨고 그 백성을 긍휼히 여기셨다. 그 나라에는 선지자들과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규례들이 있었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있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특별한 손길들을 체험한 백성이었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과 규례 밖에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과 영생의 복과 상관이 없고 그 복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었다. 우리가 과거에 그러하였다.

다섯째로, 그들은 과거에 ‘약속의 언약들에 대해 외인(外人)’이었다. ‘약속의 언약들’이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등에게 약속하셨던 복을 말한다. 그 핵심적 내용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었다(창 17:7-8; 렘 30:22; 31:33; 겔 11:20; 14:11; 36:28). 그것은 또 영생과 평안의 복을 포함한다(신 5:33; 잠 3:16-18). 할례는 그 하나님의 약속의 표이었다. 할례 없는 이방인들에게는 그런 복이 주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과거에 이와 같이 하나님의 언약들에 대해 외인이었다.

여섯째로, 그들은 구원받기 전에 ‘세상에서 소망이 없었던 자들’이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인생의 늙음과 쇠잔함, 질병들과 죽음 등 인생의 허무함을 극복할 소망이 없다. 과거의 우리들은 이와 같이 슬픔이 많은 인생, 허무한 인생일 뿐이었다.

일곱째로, 그들은 전에 ‘하나님도 없는 자’이었다. 그들은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 신(神)에 대한 약간의 의식이 없지 않았으나, 그들은 헛된 우상들을 신(神)인 줄 알고 섬겼다. 그들은 그 헛된 우상들을 의지하고 바랐던 자들이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참 지식의 시작이지만, 이전의 그들은 참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영적 무지와 흑암 속에 살던 자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이나 돌보심도 받지 못했다. 과거의 우리가 바로 그러하였다.

[13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이제’는 구원받은 후를 가리킨다. ‘전에 멀리 있었다’는 말은 구원받기 전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한 생명과 평안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구원받은 후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의 중보 사역을 통하여,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흘리신 피로 이루신 대속(代贖) 사역을 통해 하나님과 가까워졌고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을 얻었고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관계가 되었고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과 평안을 누리는 자가 되었다. 이것이 구원이다. 오늘 주 예수를 구주로 믿는 우리도 그들과 똑같이 이 구원을 받았다.

[14절] [이는]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화평이심이니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이방인이었던 에베소인들이 하나님과 이스라엘과 가까워진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화평이셔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로 만드셨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하는 ‘중간에 막힌 담’을 허무셨다. 이제 신약교회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영적 특권의 차이는 없다. 하나님을 진실히 부르는 자들은 누구나 차별 없이 하나님께서 받으신다. 이렇게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된 것이 신약교회이다. 신약교회는 참 이스라엘이다. 

[15절]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이방인은 우상숭배적이고 부도덕하므로, 과거에 유대인은 이방인에 대해 정죄적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적대 관계는 율법에 근거한 것이었다. 특히 구약의 의식법들, 예를 들어, 성막이나 제사들이나 절기들 그리고 정(淨), 부정(不淨)의 음식들 등에 대한 법들은 다 이방인과 유대인을 구별시키는 법들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의식법들은 다 성취되었고 따라서 그 법들은 신약 아래서 폐지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유대인과 이방인, 이 둘로 자신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셨다. 신약교회는 이렇게 구성되고 시작되었다. 우리 모두는 다 이 교회에 속한다. 이제는 유대인의 교회가 따로 없고 이방인의 교회가 따로 없다. 이제는 둘을 다 포함하는 한 교회가 있을 뿐이다. 신약교회는 어느 한 민족의 독점물이 아니고, 각 나라, 각 민족, 각 언어를 다 포함하는 세계적 단체가 되었다. 이방인들이 교회 안에 용납되는 일은 구약시대에는 전혀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화평케 하시는 일을 하셨다. 유대인들이 볼 때, 이방인 신자들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들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신약교회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은 적대 관계가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서 화목케 된 관계이다.

[16-18절]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과 사람들은 원수된 상태에 있었다. 이방인들은 물론이고, 유대인들도 이방인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성경 역사의 증거대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 못지 않게 우상숭배적이었고 부도덕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미워하셨고 죄를 지은 인간들도 하나님께로 나아오기를 꺼려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갔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화목케 하신 것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과 사람들을 화목케 하셨다. 그는 자신을 십자가에 희생하심으로써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시키셨다(롬 5:10).

‘먼데 있는 너희’는 이방인들을 가리키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은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막론하고 모두들에게 평안의 복음, 화목의 복음을 전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들은 이제 다 함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 하나님께 나아간다. 그들은 한 성령을 받고 한 성령 안에서 그의 위로와 격려와 권면을 받는다. 구약시대에는 사람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갈 수 없었고 오직 제사장의 중보를 통해서만 나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대제사장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직접 하나님 아버지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히 4:16; 10:19).

에베소 교인들이 구원받기 전 신분과 상태로부터 어떻게 구원받은 신분과 상태로 들어오게 되었는지 기억하는 것이 필요하였듯이,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크신 은혜의 구원을 기억하는 것이 필요하다. 과거에 이방인이며 무할례자이었던 우리가 어떻게 중생하고 세례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는지, 과거에 그리스도 밖에 살았고 이스라엘 나라 밖에 있었던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영적 이스라엘 나라의 백성이 되었는지, 과거에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었던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 안에 들어와 언약 백성이 되어 영생과 평안과 하나님 자녀 됨의 특권을 누리게 되었는지, 과거에 세상에서 소망 없던 우리가 어떻게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산 소망, 곧 천국과 부활과 영생의 소망을 가지게 되었는지, 또 과거에 하나님 없이 살았던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모시고 그의 도우심과 돌보심을 받으며 살게 되었는지 기억하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죄로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케 되었다. 신약교회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이루어 하나님과 화목케 된 자들의 모임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희생으로 이루신 속죄사역의 결과이다. 우리는 이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을 감사하며 찬송하자.

 

19-22절, 신약교회의 구성원, 기초, 목표

[19절]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방인들은 유대인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 곧 동료 시민이며 하나님의 권속[가족]이다. 믿는 자들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다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한 가족이며 신약교회의 구성원이다. 여기에 신약교회의 세계성이 있다. 구약교회는 이스라엘 민족의 교회이었지만, 신약교회는 이스라엘 민족과 이방 민족들을 다 포함하는 세계적인 교회이다. 그것은 모든 민족들 중에서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택하시고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救贖)하시고 성령께서 인치신 자들로 구성된다.

[20절]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신약교회의 기초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이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고 해설한 자들이었다.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증거한 분이시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들이었다. 교회는 그들이 증거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 위에 세워졌다.

이 말씀은 교회의 기초를 증거하는 마태복음 16장과 고린도전서 3장의 말씀과 다르지 않다.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예수께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한 베드로에게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말씀하신 후,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반석]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지옥]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다(18절). 주께서 교회의 기초로 언급하신 ‘이 반석’이란 문맥상 베드로의 신앙고백 즉 그가 고백한 진리를 가리킨다고 본다. 한편, 고린도전서 3장에서,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 교회의 터를 닦은 자이며 다른 사역자들이 그 터 위에 집을 건축하는 자들이라고 비유하면서, 그가 닦아 둔 교회의 터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터 외에 다른 터가 없다고 말했다(11절).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유일한 기초이심을 증거한 것이다. 교회의 기초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증거한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신약성경은 그 내용을 증거한다.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다. 건물의 ‘모퉁이 돌’은 모퉁이에 놓여지는 기초석으로서 건물을 구성하는 모든 돌들의 기준점이 된다. 그것은 한 건물의 가장 중요하고 대표적인 돌이다. 그것은 건물을 지탱하고 결합시키는 역할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의 모퉁이 돌이라고 표현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성도들의 머리이시며 그들의 믿음과 생활의 기준이시며 유대인과 이방인을 막론하고 그들 모두를 결합시키시고 온 교회를 붙드시는 주님이심을 나타낸 것이라고 생각된다.

[21-22절]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본문은 신약교회의 목표를 보인다. 신약교회의 목표는 하나님의 거하실 성전이 되어 가는 것이다. ‘건물마다’라는 말(파사 오이코도메)은 단수명사로서 여러 건물들을 가리키지 않고, ‘하나의 건물 전체’를 가리킨다.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이다(엡 4:4). 교회는 하나이다. 그것은 성전과 같다. 구약의 성전은 일차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켰지만, 또한 신약교회를 가리켰다. 신약시대에 구원받은 성도들은 곧 교회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성전이다.

신약교회의 구성원인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건물 전체가 서로 연결되듯이 큰 성전이 되어 가고 있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고 있다. ‘성전이 되어 간다’는 표현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첫째는 전도요, 둘째는 개인의 성화이다.

교회는 아담 이후 하나님의 택함을 입은 모든 사람들로 구성된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미 구원받은 자들로 만족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한 명의 영혼을 더 기뻐하신다. 하나님의 선택함을 받은 모든 사람들은 다 구원을 받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고 하셨다(요 10:16). 전도는 성전 건립의 일이다. 한 명의 택한 영혼이 돌아오는 것은 건물의 벽돌 한 장이 쌓이는 것과 같다. 모든 영혼들이 다 돌아올 때 이 성전은 완공될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성전 건립은 예배당 건축이 아니고, 한 명의 영혼을 회개시키고 주 앞으로 인도하는 전도의 일이다.

성도 개인의 영적 성장 혹은 성화(聖化)도 필요하다. 성도는 구주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았을 때 이미 법적으로는 완전한 의를 받았다(고전 1:30; 롬 3:23, 24; 10:4). 성도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단번 속죄의 제사로 거룩케 되었고 완전케 되었다. 히브리서 10:10, 14,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그러나 성도는 이 땅에 사는 동안 그 구원을 그의 삶 속에서 나타내어야 한다. 구원받은 성도는 경건과 의와 선함의 도덕성을 그의 인격과 삶 속에서 나타내고 열매를 맺어야 한다. 이것은 복음의 진리성과 구원의 참됨에 합당하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복음은 허상에 불과하며 구원은 이론뿐일 것이다.

우리 성도들이 성전, 곧 하나님의 거하시는 처소가 된다는 사실은 실로 신비한 일이다. 인생이 어떻게 하나님을 영원히 모시고 살겠는가? 그러나 그 일이 지금 이루어지고 있다. 이미 성령께서 우리 속에 오셨다. 성경은 성도들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신비적으로 연합함을 증거한다(요 15:1-8; 고전 6:17). 성령께서 내주(內住)하시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을 누리며 하나님의 영광의 기업을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받는 자들이 된다(롬 8:17).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교회의 세계성을 인식해야 한다. 교회는 온 세상의 각 민족, 각 나라, 각 방언에서 하나님의 택함을 받고 구원을 받은 자들로 구성된다. 교회는 한 민족이나 사회의 한 계층의 사람들에게 국한되지 않는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모든 종족, 모든 언어, 모든 나라, 모든 계층의 사람들로 구성된다.

둘째로, 우리는 교회의 기초가 사도들과 선지자들, 곧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증거한 글들임을 인식해야 한다. 신약성경이 바로 그 글들이다. 교회는 결코 이 기초를 떠나지 말고 이 기초를 다시 닦으려 하지 말아야 한다. 참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제시된 십자가 속죄의 은혜만 붙잡고 진행해야 하며 오직 신구약성경 66권의 말씀만 읽고 묵상하며 배우고 믿고 소망하고 복종하고 실천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교회의 목표와 임무가 영적 성전 건립임을 인식하고 그 일을 위해 힘써야 한다. 영적 성전 건립이란, 전도와 영적 성장을 의미한다. 우리는 우리 주위의 영혼들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죄인 한 명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신다. 전도는 교회의 최대의 임무요 사명이다. 또 우리는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지식과 경건, 그리고 의와 진실과 선함의 도덕성을 우리의 인격과 삶 속에서 나타내기 위해 성실해야 한다. 그것이 성화(聖化)이다. 성도의 영적 성장 또는 성화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의 인도하심으로만 가능하지만, 우리는 그 은혜에 의지하여 성실히 힘써야 한다.

 

 

3장: 교회의 세계성

1-13절,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

[1절] 이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을 위하여 갇힌 자된[너희 이방인들을 위해 그리스도 예수의 죄수가 된](KJV, NASB) 나 바울은.

이방인과 유대인은 한 새 사람을 이루어 하나님과 화목하여 하나님께 나아가게 되었고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요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고 하나님의 거하실 성전이 되어가고 있다. 이것은 이방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큰 은총이었다. 이방인을 향하신 하나님의 이 은혜 때문에, 바울은 이방인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었고 그들을 위해 일하다가 옥에 갇힌 그리스도 예수의 죄수가 되었다.

[2-4절]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오이코노미아)[계획, 직무]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이미 대강 기록함과 같으니 이것을 읽으면 그리스도의 비밀을 내가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이방인과 유대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것을 바울은 ‘비밀’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구약 백성들에게 감취어 있었던 내용이었다. 물론 구약에서도 이방인의 구원은 암시되어 있었다(창 12:3; 시 117:1). 그러나 구약시대에 유대인들은 아무도 이방인들에게 이렇게 큰 은혜가 주어질 것을 기대하거나 상상하지 못했다. 그것은 비밀이었다. 그러나 그 놀라운 사실이 하나님의 계시로 바울에게 알려졌다. 물론, 다른 사도들에게도 알려졌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대인들뿐 아니라 또한 이방인들을 위해서도 은혜의 구주가 되신다고 증거한 내용을 읽는 자마다 그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았다는 사실과 그가 깨달은 그 내용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도 그것을 알았다. 이미 증거한 대로, 이방인이었던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과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복이며 특권이다.

[5절]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셨으니.

여기의 ‘선지자’는 2:20과 4:11에도 나오는 말로 신약시대의 선지자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사도들과 함께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던 자들이었다. 사도 바울이 받고 깨달은 예수 그리스도의 비밀 곧 이방인들에게도 함께 주신 은혜의 복음 진리는 바울 뿐만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도 성령으로 계시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 비밀의 진리는 다른 세대 곧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알게 하지 않으셨던 진리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계시된 교회의 세계성의 진리 곧 교회가 유대인들만의 단체가 아니고 또한 이방인들도 참여하는 단체라는 진리는, 구약성경에 암시된 바는 있지만, 밝히 드러나 있지는 않았던 바이었다. 그 사실은 구약시대에는 비밀과 같았다.

[6절]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

본문은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비밀의 내용을 다시 말한다. 즉 그것은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복에 함께 참여하는 것이다. 이방인 신자들은 유대인 신자들과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다. 이것은 이방인 편에서 볼 때 놀라운 은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이 비밀이 계시된 신약시대에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보다 더 나은 조건을 가지지 않는다. 이제는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동등한 특권을 누린다. 이방인들은 유대인들보다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기업을 이어받는 자들이 되고, 함께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이 되고, 또 함께 복된 약속 곧 부활과 영생과 천국 기업의 약속에 참여하는 자들이 되는 것이다.

[7절]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

바울은 주께로부터 이 복음을 받았고 이 복음을 전파하는 일꾼이 되었다. 그가 복음사역자가 된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는 대로 그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된 일이었다. 바른 직분은 하나님의 은사를 따라 받는다. 인위적인 직분은 덕을 세우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은혜로 부르시고 은혜로 세움을 받은 자마다 그 동일한 은혜의 역사하심을 따라 그 직분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8절]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이 은혜의 복음을 위해 바울을 택하신 것은 바울이 남보다 선하고 의로워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우리가 아는 대로 바울은 무지하여 하나님을 대적하고 예수님 믿는 진실한 성도들을 핍박했던 악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제 바울에게는 자신의 부족함에 대한 깊은 깨달음이 있었다. 그는 자신을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라고 표현한다. 이것은 외식적인 입술의 고백이 아니었다. 바울은 겸손한 자이었고, 과거에 행했던 자신의 실수와 부족을 깊이 깨닫고 회개한 자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자를 들어 쓰신다. 그는 교만한 자를 들어 쓰실 수 없으시다. 그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신다. 자신을 크게 여기는 자는 무지하고 어리석은 자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자신의 보잘것없음을 깨닫게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바울에게 바로 이런 은혜가 임했다. 그래서 그는 오직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전하는 자가 될 수 있었다. 겸손한 봉사자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전하며 그 영광만을 드러내는 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교만한 자는 자기의 이름과 영광에만 관심을 둘 것이며 그리스도의 영광을 자기의 것으로 취함으로써 결국 그의 영광을 가리우는 자가 될 것이다.

[9-11절] 영원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전통사본)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모든 사람이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영원부터’라는 말은 ‘오랜 시대 동안’(NASB, NIV)이라는 뜻이며 ‘감취었던’이라는 말에 걸린다.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이라는 말은 하늘 나라에서 하나님을 수종드는 선한 천사들을 가리킨다고 본다. 그리스도의 비밀은 심지어 하늘의 천사들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다. 피조물들은 심지어 하나님 곁에 있는 선한 천사들이라도 하나님의 깊은 지혜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교회 곧 구원받은 성도들을 통하여 그 천사들에게 하나님의 깊고 넓은 지혜가 알려진다.

이방인들을 포함하는 하나님의 구원의 일은 하나님께서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영원하신 뜻대로 된 것이다. 창세 전 곧 영원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시고 예정하셨다. 우리는 성경에 계시된 대로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 전의 의논을 상상한다. 인류의 구원을 위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원 전의 의논과 작정대로 온 세상에 충만한 이 구원의 일이 시작되었고 진행되고 성취되고 있는 것이다.

[12절]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

복음 안에서 우리 모두가 받은 은혜는 우리의 유일한 중보자 예수께서 단번에 이루신 속죄 사역에 근거한 것이다. 그 은혜 때문에, 우리는 오직 그를 믿음으로 하나님께 담대히, 당당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로마서의 말씀대로,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기 때문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릴 수 있다(5:1). 또 히브리서의 말씀대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다(10:19).

[13절]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치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깨달았다면, 환난의 현실을 인해 낙심치 말아야 한다. 환난은 항상 있는 것이다. 사탄과 악령들은 오늘도 교회 안팎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들은 자기들의 종들을 많이 확보하고 있다. 주의 종들이 당하는 환난은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것이다. 옛날부터 주의 종들은 항상 고난과 핍박을 당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주께서는 그들을 지키시고 도우시고 위로하셨다. 고난과 핍박 중에 가지는 믿음과 충성이 참 믿음과 충성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방인인 우리에게도 값없이 주신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감사하자. 이 일이 사도들을 통해 신약성경에 밝히 계시되었다.

둘째로, 우리는 바울의 겸손을 본받자. 우리가 하나님께 헌신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자기 부족을 깊이 깨닫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자신을 낮추는 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를 사용하신다.

셋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담대함과 당당함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사역을 통해 그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을 얻었기 때문이다.

넷째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를 위해 당하는 고난 때문에 낙심치 말자. 참된 헌신은 남에게 대접을 받으려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과 그의 교회를 위해 모든 것을 드리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며 그러다가 고난을 받을지라도 낙심치 않고 오히려 그것을 영광으로 생각해야 한다.

 

14-21절, 바울의 기도

[14-15절]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3)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이라는 말씀은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가족’이라는 말로서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가리킨다. 하늘에 있는 가족은 이미 천국에 들어가 영광 중에 있는 성도들을 가리키고, 땅에 있는 가족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성도들을 가리킨다. 하늘에 들어간 이들은 승리하여 안식을 누리고 있고, 땅에 사는 우리들은 죄와 세상과 마귀와 싸우며 살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주어져 있다. 모든 성도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요 그의 소유라는 이름이 있다.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은 간절한 기도의 모습이다. 인간은 누구나 다 부족하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 속에서 시작되었거나 우리가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서 시작하셨고 그가 친히 이루시는 일이다. 여기에 우리의 간절한 기도가 필요하다. 바울은 단지 에베소 성도들의 의지에 호소하지 않고 먼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다. 우리의 선한 결심이나 노력은 마땅히 필요하지만,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에게 역사하지 않으시면 우리는 여전히 연약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성도의 신앙생활은 말씀과 기도밖에 없다.

[16절]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바울의 기도의 첫 번째 내용은,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에베소 교인들의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케 하옵소서’라는 것이었다.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과 은혜의 영광의 풍성을 따라’라는 뜻을 포함할 것이다.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라는 말씀은 성도들의 속사람을 강건케 하시는 것이 성령의 사역인 것을 보인다. 성령께서는 성도들 속에 오셔서 그들을 위로, 격려, 권면하실 뿐 아니라, 그들의 속사람을 강건케 하신다. ‘속사람’은 ‘중생한 영혼의 변화된 새 성향’을 가리킨다고 본다. 그것은 구원받은 영혼 속에 심겨진 의와 새 생명의 원리이다.

중생한 성도들의 속사람은 연약의 도전을 받는다. 성도의 연약은 지식과 도덕성에 있어서 그러하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그것을 ‘육신의 연약’이라고 표현하였다(롬 6:19; 7:18, 22-24; 8:3). 이것이 속사람에게 도전한다. 이것은 인간 본성의 타고난 죄악성의 도전이다. 그러나 성도에게 이런 연약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케 하셔서 지식과 믿음, 의와 선과 진실에 굳게 서게 하시는 것이다.

중생한 사람은 갓난아이 같아서 자라가야 한다. 히브리서는,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는’ 영적 어린아이 곧 기독교의 초보적 교리의 확신도 가지지 못한 성도들과, ‘단단한 식물을 먹는’ 영적으로 장성한 자 곧 의의 말씀을 체험하고 선악을 분별하며 완전한 데로 나아가는 성도들을 대조시켰다(히 5:12-13). 베드로는 갓난아이들같이 순수한 말씀의 젖을 사모함으로 자라가야 할 것을 가르쳤다(벧전 2:2). 베드로후서는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고 말하였다(벧후 3:18).

[17-19절]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바울의 기도의 두 번째 내용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에베소 교인들의 마음에 계시게 하옵소서’라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약속하셨다(마 28:20). 구원받은 성도는 이미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연합되어 있어서 그는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께서도 그 안에 계신다. 그러나 성도는 그와 연합되어 있음을 믿음과 순종으로 표현하며 체험해야 한다(요 15:4-5). 성령께서 우리 안에 항상 계심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심과 같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가 성령으로 우리 속에 늘 계심을 의식하며 살아야 한다.

바울의 기도의 세 번째 내용은 요약하면 ‘사랑 가운데 굳게 서 그 사랑을 온전히 알아 충만한 사랑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라는 것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사랑은 하나님의 크신 구속(救贖)의 사랑이다. 하나님께서는 죄 많은 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주셨고 십자가에 희생키시셨다(요 3:16).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롬 5:8).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바울은 그들이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지기’를 구했다. 성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 아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성도는 하나님의 구속(救贖)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속죄의 복음을 확실히 믿고 그 사랑 가운데 확고하게 서야 한다.

모든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어야 한다. ‘그 넓이’란 그 사랑이 각 민족, 각 나라에서 남녀노소, 빈부귀천, 유무식을 막론하고 주어짐을 보이며, 그 ‘길이’란 그가 택하시고 부르신 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심을 보인다. 또 그 ‘높이’란 하나님의 자기희생적 사랑의 고상함과 가치를 보이며, 그 ‘깊이’란 하나님의 사랑의 심오함, 곧 인간의 머리로 다 측량할 수 없고 인간의 가슴으로 다 느낄 수 없는 그의 긍휼의 사랑을 보인다.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났다. 그것은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제물로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그것은 ‘지식에 넘치는’ 사랑이다. 주 예수께서는 실제로 자신의 몸과 생명을 우리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주셨다. 그것은 이론이 아니고 실제이었다. 누가 그 사랑을 다 깨달을 수 있겠는가?

[20-21절]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 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야고보서는 하나님을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표현하였다(약 1:5).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하는 것 이상으로 영육의 것들을 우리에게 넉넉히 주시는 분이시다.

본문은 바울의 기도인데 그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의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케 하시기를 기도하자. 우리는 약한 자들이지만, 성령께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의 속사람은 성령의 충만함으로 강하고 담대한 자가 될 수 있다.

둘째로,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 속에 계시기를 기도하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으로 우리 마음 속에 계신다. 우리는 우리 속에 계신 주님을 항상 인정하고 의지하며 행하자.

셋째로, 우리는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알고 사랑으로 충만한 자가 되기를 기도하자.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하는 것 이상 넘치도록 주실 것을 알자. 우리는 이 세상 사는 동안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성경말씀을 다 믿고 순종하며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아뢰며 간구하자.

 

 

4장: 교회의 일체성

1-3절, 겸손, 인내, 연합

[1절]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그러므로’라는 말은 ‘너희가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심과 구원을 받았으므로’라는 뜻이다. ‘주 안에서 갇힌 내가’라는 말은 주를 위해 또 이방인들을 위해 일하다가 옥에 갇힌 자로서 사심(私心) 없이 말하고 있음을 보인다. ‘권한다’는 말은 권위적으로 명령하는 것이 아니고 사랑과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부드럽게 권함을 나타낸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라”고 권면한다. 우리가 죄악된 세상 속에서 죄악된 삶을 살고 있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셨고 우리에게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주셨다. 이것이 구원이다. 그는 단지 전도자의 음성으로 부르신 것이 아니고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셨고 하나님과 구주 예수를 알고 믿게 하셨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그 구원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야 한다. 우리는 죄를 멀리하고 의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2절]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4-5장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이 사랑과 거룩의 삶임을 증거한다. 그는 본절에서 그것을 겸손과 온유와 인내와 사랑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우리는 모든 겸손과 온유로 행해야 한다. ‘모든 겸손’이라는 말은 모든 면에서 또 항상 겸손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본다. 우리는 과거에 죄로 인해 죽었던 자이었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 나의 나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러므로 복음 진리를 깨달은 자라면 겸손하지 않을 수 없다. 겸손은 실로 예수 그리스도의 덕이다. 마태복음 11:29에서 그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고, 바울은 빌립보서 2:6-8에서 하나님과 동등 되신 예수께서 자신을 낮추어 사람이 되셨고 속죄제물로 죽으셨으므로 우리는 그의 겸손을 본받아야 한다고 교훈하였다.

또 우리는 오래 참음으로 행하여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해야 한다. 오래 참는 것은 사랑의 속성이다. 고린도전서 13:4, 7, “사랑은 오래 참고,” “모든 것을 참으며 . . .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조급한 사랑은 부족한 사랑이다. 사랑은 오래 참고 기다린다. 우리는 상대방의 부족과 허물을 덮어주고 오래 참아야 한다. 잠언 10:12,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 잠언 17:9,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베드로전서 4:8,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심과 사랑으로 우리를 용납하셨다. 탕자를 오래 기다리시며 참으시며 용납하셨던 아버지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용납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본받아 서로의 부족과 허물을 덮어주고 오래 참고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해야 한다.

[3절]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그는 연합과 일치를 말한다. ‘평안’은 또한 ‘화평’이라고 번역되는 말이다. 인간 관계에 있어서 불화와 분열은 좋지 않다. 하나님의 뜻은 일치와 연합이다. 갈라디아서 5:20은 육신의 죄악들 가운데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 등을 말했다.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살인하는 것이다(요일 3:15).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헤노테스)’이라는 말은 ‘성령의 하나이심’이라는 말인데, 한글개역성경대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이라는 뜻을 내포할 것이다. 성령은 한 분이시며 모든 성도는 그 한 성령 안에서 한 몸이 되었고 또 한 몸이 되어야 한다. 고린도전서 12:13에서 바울은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고 말하였다.

본문에 ‘힘써 지키라’는 말은 인간의 연약함을 전제한다. 성도들도 인간이며 교회도 인간들의 모임이므로 교회가 분열하기 쉽고 성도들이 교만과 욕심과 미움에 빠지기 쉬움을 전제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 곧 교회의 일체성을 힘써 지켜야 한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교회의 일치와 연합은 불신앙과 오류를 포용하는 것이 아니고, 믿음과 진리와 의 안에서의 일치와 연합이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6:14에서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사귀리요]”라고 말했고, 또 에베소서 5:11에서는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고 말했다. 우리는 바른 믿음과 진리와 의 안에서 일치하고 연합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와 멸망의 상태로부터 의와 영생의 상태로 부르신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또 항상 겸손과 온유로 행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 안에서 하나됨을 힘써 지켜야 한다. 교회는 성도 각 사람의 겸손과 온유, 인내와 사랑으로써만 일치와 연합을 잘 유지할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 우리는 성령께서 이미 주신 교회의 일체성을 힘써 지켜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부르신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는 일이다. 우리는 거룩하고 선한 삶을 살면서 온전한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으로 교회의 일체성을 힘써 지키자.

 

4-6절, 일곱 가지 하나

[4절]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몸’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가리킨다.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이다. 세상에 교회들이 많고 교파들이 많아도 또 우리가 속한 교회는 각각 달라도,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이며 모든 성도는 그 한 교회의 교인이다. 택함 받은 죄인들은 중생과 회개와 믿음으로 이 한 몸 안으로 들어온다. 우리는 큰 죄를 짓고 회개치 않아 제명, 출교를 받기 전까지 다 그 한 몸인 교회에 속한다.

성령은 하나이시다. 성령은 하나님이시며 인격적 영이시다. 그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속(救贖)을 택자들에게 적용하여 인간의 구원을 실제적으로 이루시는 자이시다. 그는 죄인들을 중생(重生)시켜 믿게 하시고 선하고 거룩하게 살게 하시는 자이시다. 그는 모든 성도에게 보혜사 곧 위로자, 격려자, 권면자이시며 교회를 인도하시며 책망하시고 부흥케 하시는 자이시다.

이 세상에는 성령 말고 다른 영들, 곧 사탄과 악령들이 있다. 그들이 곧 미혹의 영들, 속이는 영들, 거짓말하는 영들, 이단의 영들이다. 오늘날 은사운동에는 성령께서 하시는 일 같지 않은 많은 비진리들과 거짓된 요소들이 포용되고 있다. 성령께서는 진리의 영이시므로(요 14:17) 모든 일을 성경 교훈대로 행하신다. 그는 성경에서 이탈하거나 성경을 넘어서거나 성경에 반대되는 일들을 하지 않으신다. 참된 성령 운동은 에스라 때의 부흥운동처럼 성경의 성실한 연구와 강해와 순종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 성경의 충실한 해석과 순종이 없는 운동은 성령께서 행하시는 일일 수 없다.

우리의 부르심의 소망도 하나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미래의 소망으로 부르셨다. 우리의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의인들의 부활과, 새 하늘과 새 땅 곧 천국에서의 영생이다. 우리는 지금 우리의 눈에 보이는 육신적, 물질적 부귀와 영광과 권세를 바라며 살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장차 영광 가운데 드러날 일들을 소망하며 산다(고후 4:16-18). 모든 성도는 다 이 동일한 소망을 가지고 살고 있다. 우리의 소망은 하나이다.

[5절]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주님도 하나이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오늘날 불신앙적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말하는 예수는 성경이 증거하는 예수가 아닌 다른 예수에 불과하며 그런 예수는 우리의 주님이 아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경에 증거되신 대로 말씀이 육신이 되셨고 처녀 마리아에게서 나셨고 많은 기적들을 행하셨고 십자가에 죽으셨고 죽으신 지 3일 만에 부활하셨고 40일 후에 승천하셨고 장차 하늘로부터 다시 오실 것이다. 우리에게는 성경에 증거된 이 예수님 외에 다른 주님이 없다. 그는 인간들 중에 가장 아름다운 꽃과 같으시고 죄가 없고 사랑과 긍휼이 충만하신 사람이시지만, 그 이상이시다. 그는 신성(神性)을 가지셨고 우리의 경배와 찬송과 기도의 대상이 되시는 주님이시다.

믿음도 하나이다. 물론 이단과 정통 신앙은 다르다. 천주교회의 믿음과 개신교회의 믿음은 다르다. 자유주의적 신앙과 보수주의적 신앙은 다르다. 역사적 기독교 신앙과 각종 이단 사설들은 다르다. 물론 개신교회들 안에도 교파들간에 믿는 내용의 차이가 있고, 심지어 한 교파 안에서도 작은 교리적 문제에 있어서 생각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개신교회들 내에는 신앙의 본질적 내용에 일치가 있다. 역사적 개신교회들은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일치하는 믿음의 내용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처녀 탄생, 그의 대속, 부활, 재림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에 근거한 죄인들의 중생(重生)과 칭의(稱義), 성화, 영화, 마지막 심판, 몸의 부활, 영생, 지옥과 천국 등을 믿는다. 여기에 확실히 역사적 기독교회에 믿음의 일치가 있다.

세례도 하나이다. 세례는 죄씻음을 상징한다. 죄씻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만 가능하다(요일 1:7). 그러므로 세례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마 28:19) 혹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행 2:38) 베풀어진다. 우리의 죄를 씻는 길은 예수님의 피밖에 없다. 그러므로 죄씻음을 상징하고 확증하는 세례는 하나밖에 없다.

[6절]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만유로 말미암으시고] 만유[우리 모두]4) 가운데 계시도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도 하나이시다. 영원자존하신 참 하나님은 한 분뿐이시다. 그는 태초에 온 세상을 창조하셨고 그가 창조하신 세상을 홀로 섭리하신다. 즉 그는 이 세상을 보존하시고 다스리신다. 이방 나라의 모든 신들은 다 거짓이다. 세상에는 오직 한 분 하나님께서 계시다. 그는 성경과 이스라엘 역사를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이시다. ‘만유’는 ‘모든 것’ 혹은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만유의 원천이시며 만유 위에 초월해 계시고 만유를 통하여 일하시고 특히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우리 모두 안에 거하신다.

본문은 교회의 하나됨에 대한 일곱 가지의 근거를 제시한다. 우리는 한 하나님, 한 주님, 한 성령님을 믿고 섬기기 때문에, 또 한 소망, 한 믿음, 한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한 몸을 이루어야 한다. 하나님의 참된 교회들은 이런 일곱 가지 교리적 주제들의 일치에 근거해서 온전한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하는 것이다.

 

7-12절, 목사의 직분

[7-8절]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완성하시기 위해 각 사람에게 다양한 은사들을 주신다. 그는 자신의 권한으로 은혜의 선물을 각 사람에게 다르게 주신다. 이것은 특히 봉사의 직분에 있어서 그러하다. 교회의 직분들은 그가 주신 다양한 은사들에 따른 것이다.

바울은 메시아 사역을 예언한 시편 68편(68:18)을 인용함으로 그 사실을 뒷받침한다.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을 가리키며,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라는 말은 메시아의 원수 곧 사탄과 악령들과 죄와 사망에 대한 말씀이라고 보인다. 시편 본문은 ‘사람들에게서 선물을 받는다’고 표현했으나, 오늘 본문은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고 표현했다. 이것은, 다윗이 원수들에게서 전리품들을 취해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었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탄과 악령들과 죄와 사망을 정복하시고 자기 백성에게 성령의 은사들을 나누어주셨음을 말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9-10절]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먼저]5) 땅 아랫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

‘올라가셨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승천을 가리키고, ‘그가 먼저 땅 아랫곳으로 내리셨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사람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을 가리키든지 그가 무덤 속에 묻히셨던 일을 가리킨다. ‘모든 하늘 위에 오르셨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여 들어가신 천국은 지극히 높은 하늘임을 가리킨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2장에서 천국을 ‘셋째 하늘’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목적은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계획대로 구원을 온 세상에 충만히 이루신다는 뜻일 것이라고 본다.

[11절]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주께서 교회에게 주신 가장 중요한 은사와 직분은 ‘사도’이었다. 사도는 열두 제자와 바울에게 주어진 직분이었다. 원문 성경에서 예외적으로 바나바도 두 번 사도로 불렸다(행 14:4, 14). 사도는 주께서 친히 세우신 자로서 복음의 선포자요 해설자이었다(롬 1:1).

‘선지자’는 사도들처럼 복음 진리의 계시와 은혜를 받은 직분이었다. 유다와 실라 등은 선지자이었다(행 15:32). 선지자의 사역은 주로 미래의 예언보다 현실적 교훈이었던 것 같다. 바울는, 사도들과 더불어 신약시대의 선지자들을 교회의 기초라고 불렀다(엡 2:20). 이것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교훈이 교회의 기초라는 뜻이다.

‘복음 전하는 자’는 빌립, 디모데, 디도 등 복음 전하는 일에 전념했던 직분을 가리킬 것이다. 초대 교회가 뽑았던 일곱 사람 중 하나인 빌립은 ‘전도자’로 불렸고(행 21:8), 바울은 디모데에게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고 말했다(딤후 4:5). 오늘날에도 전도의 특별한 사명을 느끼고 그 일에 전념하는 자들, 국내외 선교사들과 개척 전도자들이 이 부류에 속할 것이다.

원문에서 ‘목사와 교사’라는 말(투스 포이메나스 카이 디다스칼루스)에서 하나의 관사는 그것이 한가지 직분임을 보인다. ‘목사’라는 원어(포이멘)는 ‘(양이나 소를 치는) 목자’라는 말로 양무리를 돌보는 자를 뜻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선한 목자이시다(요 10:14-16). 또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내 양을 치라’고 말씀하셨다(요 21:16). ‘치라’는 말(포이마이노)은 ‘돌보다, 다스리다, 인도하다’는 뜻이다. 사도행전 20:28에 보면,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고 말했다. 오늘날 목사와 장로들은 목양의 직무를 수행한다.

목사를 ‘교사’라고 부른 것은 목사의 중요한 직무를 보인다. 목회에 있어서 설교는 가장 중요하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고 모든 교리적, 윤리적 교훈을 주는 것이다. 목회는 양들을 돌아보고 성경말씀을 충실히 가르치는 일이다. 목사들은 하나님의 모든 진리들과 교훈들을 바르게 이해하고 잘 가르쳐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므로 참 목사들은 어느 시대나 하나님의 계시된 신구약 66권의 성경말씀을 힘써 연구하고 바르게, 충실하게, 가감 없이 가르쳐야 한다.

[12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특히 목사의 직무는 성도를 온전케 하고 봉사의 일을 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이다. ‘성도를 온전케 한다’는 것은 성도의 온전한 영적 성장을 가리킨다. 바울은 골로새서 1:28-29에서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고 말하였다. 성도를 온전케 하는 것은 믿음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는 것이다. 이것은 죄로 인해 어그러진 인격을 완전케 하는 것이다. 이것은 성도들을 하나님의 도덕적 표준에 맞는 인격자가 되게 하는 일이다. 이것이 성화(聖化)의 일이요 목회가 목표로 하는 일이다.

어떻게 이 일이 가능한가? 그것은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가르치는 일을 통해서 가능하다. 오늘날도 설교와 성경공부는 사람을 온전케 하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오늘날도 성경말씀에 정통한 설교자들과 목사들이 필요하다. 오늘도 우리는,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는 말씀을 믿는다(딤후 3:16-17).

목사의 직무는 또 성도들로 봉사의 일을 하게 하는 것이다. 성도들이 온전케 되면 여러 가지 봉사의 일을 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구원하고 그들을 온전케 하시고 그의 여러 가지 일들에 쓰기를 원하신다. 교회는 여러 가지 봉사의 일들을 필요로 한다. 이 일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중요한 일들이다. 예를 들어, 교회 안에는 주일학교 교사들, 권찰들, 찬양대 봉사자들이 필요하다.

목사의 직무는 또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이다. 전도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이다. 한 명의 영혼이 구원받을 때마다 교회라는 건물의 벽돌이 한 장 쌓여져 간다. 하나님의 택한 모든 영혼들이 다 구원받으면 그리스도의 몸은 완성될 것이다. 또 구원받은 성도들의 지식과 인격과 삶을 온전케 하는 것도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이다. 성도들의 성화를 위하는 것이 목회의 일이다.

그러므로 교회들은 신실한 목사후보생들을 일으키며 성경과 신학으로 잘 훈련시켜야 하며, 이것은 교회들의 미래를 위한 좋은 준비가 될 것이다. 이런 준비가 없다면 교회들에는 소망이 없을 것이다.

본문은 목사의 직분과 목표에 대해 증거하고 있다. 목사는 양무리를 돌보며 특히 가르치는 일을 하는 자요, 그의 사역의 목표는 성도들을 온전케 하는 것과 또 그리함으로 성도들로 하여금 여러 가지 봉사의 일들을 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교회들을 위해 의도하신 이 뜻을 감사히 여기면서, 오늘날도 교회들이 목사들을 통해 성경말씀의 바른 가르침을 받음으로 성도들이 온전케 되고 그리스도의 몸이 세워지기를 기도해야 할 것이다.

 

13-16절, 완전한 사람

본문은 12절에 이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을 보충 설명한다.

[13절]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상적인 온전한 인격이시다. 교회는 목사들의 직무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한 자리에까지 자라서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야 한다. 목회의 목표는 단순히 개인들의 성화와 온전함뿐 아니라 또한 교회적 완전에 있다. 교회 전체가 ‘한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이 목사들의 사역의 목표이다.

교인들의 영적 성숙과 완전은 믿음과 지식에 있어서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는 일치된 믿음과 지식을 가져야 한다. 목사들은 성경과 신조들과 신학을 성실하게 연구함으로써 성도들이 일치된 믿음과 지식에 도달하게 해야 한다. 우리의 영적 성장의 목표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함’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의 온전함에 이르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본받을 수 없으나 그의 인성의 온전함은 본받을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인격의 모범이시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와 진실과 사랑을 본받아야 한다.

[14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교인들에게 영적 온전함이 필요한 까닭은 세상에 있는 모든 잘못된 교훈들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우리들은 과거에 어린아이들처럼 사람들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방황하였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신들도 속고 다른 이들도 속인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로 돌아왔다. 그러므로 다시는 사람들의 교리들과 교훈들과 사상들을 따라 방황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자들의 모임인 교회는 바른 지식과 바른 믿음을 가진 온전함이 필요하다. 성도들과 신약교회는 온전해야 한다.

[15절]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라는 말은 온전케 되는 과정을 보인다. ‘참된 것을 한다’는 원어(알레듀오)는 ‘참되다, 참된 말을 한다’는 뜻이다(BDAG). 사랑과 진실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이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본래의 인생의 성품이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범죄함으로 그 본래의 거룩하고 의로운 성품을 잃어버렸고 심히 죄악된 자로 변질되었다. 그러나 구원받은 성도들은 이제 죄악된 옛 성품을 다 버리고 사랑과 진실 안에서 자라서 온전함을 이루어야 한다.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영적 성장의 목표임을 보인다. 교회는 모든 면에서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야 한다. 교회는 말씀을 배우고 영적으로 성장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생각과 마음, 그의 말과 행동, 그의 진실과 사랑, 그의 온유와 겸손, 그의 충성과 인내를 본받아야 한다. 성화는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다.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고 말한 것은, 교회와 성도들의 영적 성장의 이치를 사람의 머리와 몸에 비유한 것이다. 사람의 머리는 몸을 자라게 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이다. 머리가 상하면 몸이 자랄 수 없다. 그러나 건전한 머리는 몸을 성장케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건전한 머리이시다. 그러므로 그의 몸된 교회는 정상적 상태에 있다면 그를 통해 자라 온전케 될 것이다.

[16절]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머리 되신 그리스도에게서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활동하여 자라며 사랑 안에서 건립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한 완전한 사람’으로 세우는 힘의 근원이 되신다. 주께서는 요한복음 15장에서도 자신과 제자들을 참 포도나무와 그 가지들에 비유하시면서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을 때 그 나무로부터 도움을 입음으로 열매를 많이 맺게 되는 이치를 말씀하셨다. 물론 주께서는 그의 영 곧 성령을 통해 이런 일을 이루신다. 참으로 개인이나 교회의 영적 성장과 온전함은 사람의 인위적 행위와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교회의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영, 곧 성령의 도우심으로 되는 것이다.

본문은 목사의 직무의 목표인 성도들을 온전케 하고 봉사의 일을 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을 보충 설명하고 있다. 목사들의 직무는 성도 개개인을 믿음과 지식에 있어서 완전케 하는 것뿐 아니라, 교회 전체 혹은 전체 교회를 자라게 하고 완전케 하는 것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함에 이르러야 한다. 교회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성화의 목표이실 뿐 아니라, 교회의 영적 성장의 목표이시다. 교회는 지식과 도덕성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완전해져야 한다. 이런 온전함은 일치된 믿음과 지식 안에서, 사랑과 진실 안에서, 머리 되신 그리스도와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리고 성도들의 간구로 이루어질 것이다. 이를 위해 모든 목사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신구약성경을 열심히 읽고 연구하고 묵상해야 하고 또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 사람들에게 성경의 모든 진리와 교훈들을 전하며 강론해야 한다.

 

17-24절, 옛사람, 새사람

[17절]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생각]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구원받은 성도들은 이제부터 이방인들처럼 행하지 말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구원받지 못한 이방인들의 특징들을 증거한다.

첫째로, 이방인들은 그 생각의 허망한 것으로 행하고 있다. 이방인들은 참으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허무한 것을 생각하고 있다. 우리도 구원받기 전에 그러하였다.

[18절]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둘째로, 이방인들은 총명이 어두워져 있다. 이방인들은 육신적인 일이나 물질적인 일에는 지혜가 있을지 모르나, 인생이 참으로 알아야 할 바 하나님과 죄와 구원에 대한 깨달음이 없다.

셋째로, 이방인들은 무지함 가운데 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에 살면서도 가장 기본적인 사실들인 창조주 하나님을 모르고 인간의 목적도, 참된 도덕 원리도 모르고 있다.

넷째로, 이방인들은 마음이 굳어져 있다. 이방인들은 마음이 완고하여 자신의 잘못된 생각들에 사로잡혀 있다. 그들은 자기 생각대로만 살며 하나님의 진리를 진지하게 찾지 않는다.

다섯째로,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다. 생명의 원천은 하나님이시므로, 그를 알지 못하고 그를 멀리 떠나 사는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자들이며, 영생의 길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다.

[19절]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아셀게이아)[육욕, 호색,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여섯째로, 이방인들은 감각 없는 자가 되었다. 그들은 옳고 그름과 선과 악을 분별하고 판단하는 도덕적 감각이 없다. 그래서 인간 사회는 심히 비도덕적이며 죄악된 사회가 되었다.

일곱째로, 이방인들은 자신들을 방탕에 방임하고 있다. 부도덕한 인간의 죄악들 중 첫째는 음란이다. 인간은 음란하고 방탕하다.

여덟째로, 이방인들은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고 있다. ‘모든 더러운 것’이란 온갖 죄악들을 가리킨다. 죄 없는 사회는 아름답고 평화로울 것이지만, 죄악된 세상은 정신적, 육신적 상처들로 얼룩져 있다. 의는 깨끗한 옷과 같고, 죄는 더러운 옷과 같다.

이런 여덟 가지 점들이 이방인들의 삶의 모습이다. 이것들은 우리의 구원받기 전의 모습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제 이런 모습들로부터 떠나야 한다. 우리는 이방인들처럼 행하지 말아야 한다.

[20절]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우리가 처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었을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이 모든 죄악된 것들로부터 떠나라고 명하셨다. 우리는 그의 명령을 순종하였다. 우리는 우리의 과거의 죄를 회개했고 하나님께로 돌아왔다. 우리는 그에게서 죄악된 삶으로부터 회개하는 것을 배웠지, 이방인들의 삶을 그대로 살라고 배우지 않았다.

[21절]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그에 대하여]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예수께서는 진리 자체이시며 그 안에 진리가 있다(요 14:6). 에베소 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 직접 듣지는 못했을 것이나 사도들을 통해 그에 대해 많이 들었고 그 진리에 대해 가르침을 받았다. 본절 끝의 ‘받았을진대’라는 말부터 24절까지는, ‘받았으니 곧 . . . 입으라는 것이라’라고 번역하는 것이 정확하다. 즉 22절부터 24절까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로 가르침을 받은 내용을 말한다. 그것은 모든 죄를 벗어버리고 새사람이 되라는 구원의 초청이었다.

[22절] 너희는 유혹의[속이는]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舊習)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이전의 생활 방식에 대하여(KJV, NASB), 너희는 속이는 욕심들을 따라 부패되어 가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욕심들은 처음에는 우리를 행복으로 이끌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우리를 불행으로 이끌기 때문에 속이는 것이다. 옛사람은 구원받기 전의 자아(自我)를 말하며 앞절들에서 말한 이방인들의 모습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속이는 욕심들을 따라 부패되어 가는 삶이었다. ‘벗어버리고’라는 원어(아포데스다이)(과거부정사)는 그 행위의 단회성(單回性)을 보인다. 옛사람을 벗어버리는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받을 때 단번에 이루어진 사실이다. 그것은 반복될 수 없는 구원 사건이다. 구원은 단번에 일어나는 사건이다. 그것이 중생이며 회개와 믿음이다.

[23절] 오직 심령으로[너희의 생각의 영으로] 새롭게 되어.

영의 기능은 지식과 감정과 의지이다. 본절은 그 중에 특히 지식을 강조한다. 사람에게 있어서 생각은 매우 중요하다. 사람은 생각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행동도 달라진다. 바른 생각은 바른 행동으로 나타나고, 잘못된 생각은 잘못된 행동으로 나타난다. 구원은 생각의 변화이다. 우리가 구원받을 때 우리의 생각이 새롭게 되었다.

‘새롭게 되어’라는 원어(아나네우스다이)(현재부정사)는 계속성을 나타낸다. 우리의 구원은 생각의 변화에서 시작되지만, 그 생각의 변화는 한번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적으로 진행된다. 성화는 일차적으로 깨달음의 변화이다. 인간의 연약성은 잘 변하지 않지만, 성도의 생각과 깨달음의 변화는 크다. 하나님을 아는 생각, 자신의 부족을 아는 생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닫는 생각은 세월이 흐를수록 깊어진다. 심령의 새로움은 평생 계속된다.

[24절]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의와 참된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

‘하나님을 따라’ 지으심을 받았다는 말은 새사람의 내용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의 본래의 내용임을 보인다. 하나님의 형상의 내용은 ‘의와 참된 거룩함’이다. 그것을 ‘본래의 의’라고 부른다. 구원은 범죄함으로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 즉 본래의 의를 회복하는 것이다.

‘입으라’는 원어(엔뒤사스다이)(과거부정사)는 단회성(單回性)을 보인다. 그것은 지금 성도들에게 명하는 말이 아니고 예수님 믿기 전에 우리가 받았던 구원 초청의 내용이다.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라는 초청은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으라는 것이었다. 옛사람의 상태에서 새사람의 상태로 옮겨지는 것이 구원이다. 이것은 점진적인 것이 아니고 단번에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가 십자가 대속 사역으로 이루신 의(義)로 옷 입었고 의롭다 하심과 거룩함을 얻었다. 이것이 칭의(稱義)이다. 본문은 칭의(稱義)에 대한 교훈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이방인들의 행위를 버려야 한다. 과거에 우리의 삶은 무지하고 불경건하며 도덕적으로 죄악되고 더럽고 또 허망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삶을 버려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구원의 의미를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배운 구원의 초청은, 속이는 욕심들을 따라 부패되어 가는 옛사람을 버리고 생각이 새로워져서 하나님을 따라 의와 참된 거룩으로 지으심을 입은 새사람을 입으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초청대로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죄를 회개하였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고 의롭다 하심과 거룩함을 얻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이제 날마다 심령으로 새로워져서 의와 거룩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우리는 예수 믿고 구원받아 생각의 변화가 일어났던 그때부터 날마다 성경말씀과 성령의 감동 가운데 변화를 받아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답게 경건하고 의롭고 거룩하고 선하게만 살아야 한다.

 

25-28절, 거짓말, 분, 도둑질에 대해

[25절]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그런즉’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배우고 믿어 구원을 받아 새사람을 입었기 때문에라는 뜻이다. 본문은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되기 때문에 거짓을 버리고 서로 참된 것을 말하라고 교훈한다.

세상에는 거짓말로 물질적 이익을 취하려는 사람들이 많다. 원산지를 속인 식자재나 물건을 파는 자, 인체에 해로운 식품을 파는 자, 이중장부를 쓰는 기업, 가짜 영수증을 만드는 자, 거짓된 추천서를 쓰는 자, 가짜 학위를 팔거나 사는 자, 법정에서 위증하는 자, 취업을 알선한다고 속이는 자, 결혼을 소개한다고 속이는 자, 연예인을 만들어 준다고 속이는 자 등 세상에는 거짓말을 하는 자들이 많다.

거짓말은 나쁜 악이다. 모든 거짓의 근원은 마귀이다. 예수께서는 마귀를 거짓의 아비라고 표현하셨다(요 8:44). 마귀는 에덴 동산에서 하와를 속였었다. 거짓은 마귀의 본성이다. 마귀는 거짓으로 가득한 자이다. 세상은 마귀의 손 아래 있으므로 거짓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거짓말하는 자들을 반드시 철저하게, 엄중하게 심판하실 것이다. 이 세상에는 거짓말하는 자들이 많지만, 그들은 아무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계 21:27; 22:15) 다 지옥에 들어갈 것이라고 성경은 분명하게 말한다(계 21:8).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에게 거짓말은 지극히 합당치 않다. 우리는 선의의 거짓말도 삼가야 한다. 우리의 죄악성은 거짓에 익숙하다. 따라서 우리는 거짓은 그 모양이라도 버리려고 해야 한다. 진실은 하나님의 세계에서 가장 기본적인 덕목이다. 하나님께서는 진리의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 사실 그대로 생각하며 말하며 살아가기를 힘써야 한다. 우리는 서로에게 진실만을 말하려고 해야 하며 항상 참된 것만 말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26절]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우리는 분을 낼 때에 조심해야 한다. 사람이 정당하게 분을 내어야 할 때가 있다. 하나님께서도 사람들의 죄악된 일들에 대해 진노하신다. 주 예수께서도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이 타락하여 성전 제도를 통해 이익을 취하는 것을 보고 격노하셔서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다(마 21:12-13). 우리는 세상의 불의한 일들에 대해 의분해야 한다. 부모들은 자녀들의 잘못에 대해 분노하며 엄히 책망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쉽게 분을 내지 말아야 한다.

또 우리는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 사람은 분을 낼 때 말이나 판단이나 행동에 실수를 하기 쉽다. 과격한 감정, 미움, 지나친 말, 불완전한 판단과 성급한 정죄, 심지어 살인 등의 잘못을 범할 수 있다. 우리는 분노가 날 때 우리의 감정이 지나치고 우리의 생각과 판단이 치우치지 않도록 조금 멈추어 생각하고 혹은 기도하면서 신앙적, 이성적 판단을 하도록 힘써야 하며, 죄악에 대한 미움과 분노라도 형제를 미워하는 데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또 우리는 분을 내어도 그 분을 해가 지도록 품고 있지 말아야 한다. 상대가 깨닫지 못하고 사과하지도 않고 고치지도 않는 때라도, 우리는 그 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다. 원수 갚는 일까지도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롬 12:19). 분노를 계속 가지고 있으면 자기의 몸에도 해롭고 마귀의 시험에 빠지기 쉽다. 사람의 분노의 감정이 미움, 과격한 말, 술취함, 파괴적 행동, 살인 등으로 발전되는 것이 마귀로 틈을 타게 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분노할 때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매우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죄를 미워하지만 죄인을 불쌍히 여길 줄 알아야 하겠다. 우리의 심령은 항상 온유와 평안으로 단장되어야 한다. 불의에 대한 정당한 분노도 신중히 생각한 후에 내어야 하며, 분노 중에라도 마귀가 우리를 범죄케 하지 못하도록 조심해야 한다.

[28절]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도둑질은 남의 돈이나 물건을 부당하게 취하는 행동이다. 그것은 거짓과 탐심, 또 수고하지 않고 살아가려는 불성실한 마음에서 생기는 일이다. 그것은 돈 벌기가 어렵고 땀흘려 일하기는 싫기 때문에 남이 벌어놓은 것을 훔쳐서 쉽게 사용하려는 것이다. 그것은 불의한 이익, 더러운 이익을 구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악한 행위이다.

오늘날 사회 각 분야에는 도둑질과 그와 같은 일들이 많다. 옷 도둑, 책 도둑, 기업주들의 노동 착취, 피고용인들의 근무 태만, 학생들의 부정행위, 남의 글을 자기 것처럼 사용하는 것, 논문 표절, 음악이나 영화의 불법 다운로드, 각종 집 투기, 땅 투기 등. 우리는 남의 것을 도둑질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성도는 남의 것을 도적질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제 손으로 수고하여 수고의 대가를 누리며 빈궁한 자들을 구제하며 선한 일을 하는 자리에까지 나아가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거짓을 버리고 참된 것만 말해야 한다. 거짓말은 성도에게 합당치 않다. 그것은 마귀의 죄이다. 거짓말하는 자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지옥 형벌을 피할 수 없다.

둘째로, 우리는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고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아야 한다. 정당한 분노라도 분노는 지나치거나 치우치기 쉽고 마귀의 시험에 떨어지기 쉽다. 그러므로 노하기를 극히 삼가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도둑질하지 말고 오히려 가난한 자들에게 구제하며 선을 베풀 수 있도록 손으로 일하며 수고해야 한다. 성도들은 이제 의롭고 진실한 자가 되고 선을 행하고 구제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29-30절, 덕스러운 말

[29절]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무릇’이라는 말은 ‘모든 종류의’라는 뜻이다. ‘더러운’이라는 원어(사프로스)는 ‘썩은, 나쁜, 불건전한’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모든 종류의 불건전하고 나쁜 말을 삼가야 한다. 예수께서는 형제에게 ‘라가’[빈 머리, 바보]라고 말하면 공회에 잡혀가고 ‘미련한 놈’이라고 말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가게 되리라고 말씀하셨다(마 5:22). 우리는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쳐야 한다. ‘덕을 세운다’는 말은 ‘건립한다’는 말로서 남의 신앙을 건립하고 그에게 유익을 준다는 뜻이다. 우리는 말을 할 때 남에게 해를 끼치는 말을 하지 말고 유익을 주는 말을 해야 한다. 잠언 10:20-21, “의인의 혀는 천은(天銀)과 같거니와 악인의 마음은 가치가 적으니라. 의인의 입술은 여러 사람을 교육하나 미련한 자는 지식이 없으므로 죽느니라.” 잠언 12:18, “혹은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하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 같으니라.”

[30절]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救贖)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성령에 대해 성경에서 어떤 때는 ‘하나님의 영,’ ‘성령,’ 혹은 ‘영’이라고 표현되지만,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이라는 특이한 표현이 사용되었다. 성령께서는 피조세계를 초월해 계시며 도덕적으로 성결하시다. 또 그는 자신이 거룩하실 뿐 아니라, 또한 죄인들을 거룩하게 하신다. 그것이 구원이다. 그는 우리에게 거룩한 정신과 생각, 거룩한 마음과 거룩하게 살려는 의지를 주신다.

우리는 우리의 몸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을 근심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 성령께서는 인격적 존재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죄를 지으면 근심하신다. 그는 여호와의 증인이나 유니테리안들(일위신론자[一位神論]들--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자들)이나 자유주의 신학자들이나 어떤 은사주의자들이 잘못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히 하나님의 힘이나 기운이 아니다. 그는 인격적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인격적이시며 성령께서도 그러하시다. 그는 기뻐하기도 하시고 근심하기도 하신다. 그가 근심하시면 진노하실 것이다. 이사야 63:10은,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신을 근심케 하였으므로 그가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 친히 그들을 치셨다”고 말한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구속(救贖)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이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은 것이다. 인을 치는 것은 확인하는 뜻이다. 우리는 무슨 문서를 확인할 때 거기에 도장을 찍거나 서명을 한다. 성령께서 우리 속에 오셔서 거하시는 것은 우리가 구원받은 백성이라는 하나님의 확인이다. 그 효력은 ‘구속의 날까지’이다. 우리가 거듭나고 의롭다 하심을 얻을 때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거하시므로 우리의 성화(聖化)와 영화(榮化)를 보장하시는 것이다. 비록 우리에게 부족이 있을지라도, 우리가 진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경말씀대로 살고자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보장하셔서 하나도 멸망치 않고 다 영광에 이르게 하실 것이다(요 3:16; 6:39-40; 롬 8:30).

우리는 모든 종류의 불건전하고 나쁜 말을 우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선하고 은혜로운 말을 해야 한다. 말은 인격의 표현이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경건하고 선하고 진실한 말로 표현되어야 한다. 또 우리는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을 근심케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범죄하면 그는 근심하시며 우리가 죄 가운데 계속 거하면 그는 진노하실 것이다. 또 우리는 성령의 인치심의 뜻을 깨닫고 우리의 성화(聖化)와 영화(榮化)를 확신하고 감사하며 힘써야 한다.

 

31-32절, 악독, 긍휼, 용서

[31절]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모든’이라는 말은 ‘모든 종류의’라는 뜻이다. ‘악독’이라는 원어(피크리아)는 ‘씁쓸함’(bitterness)이라는 뜻으로서 독한 생각을 뜻한다. 독한 생각에서 ‘노함과 분냄’이 나온다. 분노는 또 ‘떠듦과 훼방’으로 나타난다. ‘훼방’은 남을 악하게 비난하는 것을 가리킨다. 말은 사람의 마음을 표현한다. 실상, 말은 사람의 인격의 표현이다. 끝으로 ‘악의(惡意)’라는 말은 남을 해치려는 소원과 계획을 가리킨다. 남에 대한 분노의 감정과 말은 남을 해치려는 의지로 발전한다. 위의 말들은 점점 심해지는 과정이라고 보인다. 처음에는 모든 종류의 악독이요, 그 다음에는 노함과 분냄, 그 다음에는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 그리고 마침내 모든 악의로 발전해 나아가는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구원받은 성도들에게도 아직 남아 있는 죄성 즉 옛사람의 성질들이다. 이것들은 새사람이 된 성도들에게는 합당치 않은 것들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 모든 악들을 다 버려야 한다.

[32절]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인자하다’는 원어(크레스토스)는 ‘자비롭다, 친절하다’는 뜻이다. ‘불쌍히 여기다’는 원어(유스프랑크노스)는 ‘동정적이다, 불쌍하게 여기다’는 뜻이다. 이것이 성도들이 인간 관계에서 취해야 할 태도이다. 우리는 서로 자비롭고 친절하게 대하며, 인정이 있고 동정심이 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

또 본문은 서로 용서하는 자들이 되라고 말한다. 용서는 사랑을 위해 꼭 필요하다. 모든 사람은 도덕적 결함과 실수가 많기 때문에, 서로 용서함이 없다면 서로 사랑하는 관계가 유지될 수 없다.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예수께서는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시기 전에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들을 씻기시고 수건으로 닦아주신 후,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제자들이 서로의 잘못을 용서할 것을 가르치신 것이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심같이 서로 용서해야 한다. 마태복음 18장에 보면, 주께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지은 죄는 1만 달란트의 빚과 같고 우리의 동료가 우리에게 진 빚은 100데나리온 정도와 같다고 비유하셨다. 1만 달란트는 얼마나 큰 액수의 돈인가? 한 달란트는 6,000데나리온이며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으니까, 한 데나리온을 10만원으로만 계산해도 1만 달란트는 약 6조원이다. 지옥 갈 만한 우리의 죄는 1만 달란트와 같았다. 그것은 사람으로서 결코 갚을 수 없는 큰 금액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지옥 갈 만한 우리의 많은 죄를 다 용서하셨다.

우리는 구원받기 전 상태 곧 옛사람의 성질들인 모든 악독, 노함과 분냄, 떠듦과 훼방, 모든 악의를 다 버려야 한다. 그것들은 새사람이 된 성도들에게 합당치 않은 옛사람의 잔재들이다. 우리 속에 참으로 구원의 새 생명이 있다면 우리는 성경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인격과 삶 속에서 모든 옛것들을 다 추방해야 한다.

또 우리는 서로 자비롭고 친절하게 대하고 인정 있는 자들이 되고 서로의 잘못을 용서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에게 마땅하다. 특히, 우리가 하나님께서 지옥 갈 우리의 죄들을 용서하신 것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잘못을 행한 자들을 용서할 마음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 우리 자신이 1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받은 자와 같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100데나리온 정도의 잘못을 행한 자들을 용서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5장: 교회의 성결성

1-7절, 사랑과 거룩함

[1-2절]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우리를 선택하셨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그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구속(救贖)하게 하셨고 하나님의 영, 성령께서는 죽었던 우리의 영혼을 살려 중생(重生)시키셨다. 선택과 구속과 중생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그 사랑을 본받는 자가 되어야 한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해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셨다. 그는 섬김을 받으려 이 세상에 오지 않으셨고 우리를 섬기기 위해,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代贖物)로 주기 위해 오셨다(마 20:28). 그의 죽음은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프로스포라 카이 뒤시아)[예물과 제물]으로’ 하나님께 드리신 죽음이었다. 그것은 우리의 죄를 대속(代贖)하기 위한 제물이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은 크시고 참되신 사랑이었다. 우리는 그의 사랑을 본받아 범사에 사랑으로 행해야 한다.

[3절]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음행’은 합법적 결혼관계 이외의 성행위를 가리킨다. 합법적 결혼관계란 본인들의 동의와 부모들이나 증인들의 인정 아래 이루어진 결혼관계를 말한다. 부부의 성행위는 아름다운 사랑의 방법이지만, 그 외의 성행위는 음행의 죄악이다. 그것은 매춘행위나 근친상간적 행위나 동성애나 짐승과의 성행위를 포함한다.

‘온갖 더러운 것’은 모든 종류의 더러운 악을 가리킨다. 물론 성적 불결을 포함한다. 죄악된 것을 보고 들음으로 생각과 감정이 더러워지는 것부터 말이나 행위의 불결까지 모든 더러운 악들을 포함한다. 언행의 불결은 생각과 마음의 불결에서 나오므로, 주께서는 마음이 깨끗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고(마 5:8), 또 잠언은,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고 말하였다(잠 4:23).

‘탐욕’은 좀더 가지려는 마음이다. 이것은 주로 돈에 대한 욕심이다. 그러나 돈뿐 아니라, 또한 세상 영광, 명예, 권세에 대한 욕심도 있다. 이것들은 다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근본이 다르다. 탐욕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의 마음가짐이다. 하나님 없는 자들에게는 세상과 물질이 그들의 바라는 것 전부이다.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는 말씀은, 실질적으로 마음과 말과 행위에 있어서 이런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런 죄에 대해서 몹시 싫어하는 마음이 없이 말하는 것도 꺼려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성도들에게 마땅한 바’이다. ‘성도’라는 말(하기오스)은 ‘거룩한 자’라는 뜻이다. 거룩은 모든 불경건과 부도덕을 떠나는 도덕적 성결이다. 성도는 말과 행위에서 거룩해야 한다.

[4절]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

‘누추함’이라는 원어(아이스크로테스)는 ‘단정치 못함’이라는 뜻이다. ‘희롱의 말’은 저속하고 상스러운 농담을 가리킨다. 단정치 못한 말, 어리석은 말, 상스러운 농담은 다 성도들에게 합당치 않은 것들이며 성도답지 못한 말들이다. 성도들은 이러한 말들을 버려야 하고 이제는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말’을 해야 한다. 우리는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여 감사해야 하고 또 우리에게 호의와 선을 베푼 자들에게 감사해야 한다.

[5절] [이는] 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못할 것임이니라].

우리가 음행과 더러운 것과 탐욕을 버리고 단정치 못한 말, 어리석은 말, 상스러운 농담을 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가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탐심은 우상숭배이다. 탐하는 자를 우상숭배자라고 표현한 것은 탐하는 자는 돈이나 재물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자와 같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돈이 우상이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 모든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 하지 않는 자들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고린도전서 6:9-10에서도, 바울은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탐하는] 자나 술취하는 자나 후욕하는[욕하는] 자나 토색하는[강제로 남의 것을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 말했고, 또 갈라디아서 5:19-21에서도, 그는 육체의 일들인 여러 가지 죄악들을 열거한 후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라고 말하였다. 우리가 이런 사실을 분명히 인식한다면, 우리는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 등 모든 죄악을 버리고 거룩하고 선하고 의로운 삶을 힘쓸 것이다.

[6-7절]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를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그러므로 저희와 함께 참여하는 자 되지 말라.

‘헛된 말’이란 율법과 복음의 진리에 맞지 않는 말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웬만큼 죄를 지어도 괜찮다,’ ‘그 정도 죄를 지어도 천국은 갈 수 있다’는 등의 말이다. 그것은 헛된 말, 속이는 말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거룩이며 우리가 죄를 떠나는 것이다. 계속 죄 가운데 사는 자들은 아직 구원받지 못한 자들일 것이다. 참으로 구원받은 자들이라면 모든 죄악들을 버리려 할 것이고 거룩한 삶을 살고자 애쓸 것이다. ‘이를 인하여’라는 말은 앞에서 언급한 죄악들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탐심 등의 죄악들 때문에’라는 뜻이다. 이런 죄악들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한다. 하나님께서는 자비와 긍휼이 많으시고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시지만, 끝까지 참고만 계시지 않는다. 그는 마침내 이 세상에 가득한 죄악들에 대해 일어나셔서 그것들을 범한 죄인들에게 진노하시며 그들을 심판하시고 징벌하실 것이다.

우리도 과거에는 불순종하던 자들이었으나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믿은 후로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녀가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순종하는 자들과 함께 죄 가운데 살다가 그들과 함께 그들이 받을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받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거룩하게 살고 하나님께서 주신 현실과 의식주로 만족하며 오직 천국을 소망하며 감사하게 살아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들로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들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을 버려야 하며 단정치 못함과 어리석은 말과 상스러운 농담도 하지 말고 오직 감사하는 말을 해야 한다. 우리가 빨래할 더러워진 옷들을 깨끗한 옷들 중에 두지 않듯이, 죄악된 말과 행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거룩케 된 성도들에게 합당치 않다.

 

8-14절, 빛의 자녀들

낮과 밤, 빛과 어두움은 누구든지 분간할 수 있듯이, 영적 세계에서도 의와 불의, 선과 악, 진실과 거짓은 밝히 분간할 수 있다.

[8절] [이는]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빛임이니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에베소 교인들이 불순종의 아들들과 함께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할 이유는 그들이 전에는 어두움이었으나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기 때문이다. 에베소 교인들은 예수님 믿기 전에는 어두움이었다. 그들은 어두움에 속해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이 어두움이었다. 어두움은 무지와 부도덕을 가리킨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고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온갖 부도덕에 빠져 있었다. 즉 그들은 앞에서 말한 음행, 온갖 더러운 것, 탐욕, 단정치 못함, 어리석은 말, 상스러운 농담 등을 행하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다. 그들은 빛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므로 빛 안에 들어왔을 뿐 아니라 그들은 빛들이 되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다(마 5:14). 어두움과 반대로, 빛은 지식과 도덕성을 가리킨다. 구원받은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었으며, 또 우리 자신을 알고 우리가 어디에서 왔고 무엇을 위해 세상에 있으며 또 장차 어디로 갈 것인지에 대하여 알게 되었다. 이것이 성도들이 가지게 된 지식이다. 뿐만 아니라, 구원받은 우리는 거룩과 의, 선과 진실로 단장되었고 오직 도덕적 삶을 추구하는 자가 되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빛의 자녀처럼 행해야 한다. 그들은 지식과 도덕성을 가진 자들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제 성도들은 하나님 없이 사는 불경건한 삶을 멀리하고 하나님을 우리의 삶의 제일 목표로 삼고 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하고 섬기며 살아야 하고, 또 그의 계명대로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

[9절] [이는]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있음이니라].

문맥상 본절은 보충적 내용이다. ‘빛의 열매’라는 말은 전통사본에는 ‘성령의 열매’라고 되어 있다.6) 성도들이 성령을 따라 삶으로써 맺혀지는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다. 그것은 도덕적인 인격과 행위의 열매이다. 그것은 빛의 열매라고 표현할 수 있다. 구원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의 인도하심을 받으며(롬 8:14), 그 열매는 도덕적인 삶, 즉 의롭고 선하고 진실한 삶이다.

[10절]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우리는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고 주님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지 시험해 보아야 한다. 빛의 자녀다운 삶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다.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지 시험하여 보라”는 말씀은 우리가 주의 기쁘신 뜻을 잘 깨닫지 못할 때가 있음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현실 속에서 우리는 어떤 생각과 행동을 하는 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지 확인하여 그것을 실천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모스를 통하여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고 말씀하셨고(암 5:6), 또 “너희는 살기 위하여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라고 말씀하셨다(암 5:14). 또 그는, “오직 공법[공의]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지로다”라고 말씀하셨다(암 5:24). 하나님을 찾고 경외하고 섬기는 경건한 삶, 또 그의 계명대로 의롭고 선하게 사는 삶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다.

[11절] [또]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사도 바울은 7절부터 계속 명령어로 교훈한다. 7절, ‘저희와 함께 참여하지 말라.’ 8절,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10절,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지 시험하여 보라.’ 11절, ‘또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들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들’이란 어두움의 일들이 열매 없는 일들임을 말한다. 어두움의 행위들은 유익한 열매들이 없는, 사람답지 못한 행위들이다. 죄악을 사랑하고 죄악된 일을 행하는 사람은 짐승보다 나은 것이 없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런 헛된 행위들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그것들을 책망해야 한다. ‘책망한다’는 원어(엘렝코)는 ‘책망한다, 폭로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어두움의 일들의 헛됨과 무가치함과 사악함을 폭로하고 책망해야 하는 것이다.

[12-13절] 저희의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움이라.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나타나지는 것마다 빛이니라.

죄인들은 악을 은밀히 행한다. 그러나 그들이 은밀히 행하는 그 어두움의 일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이다. 그러므로 양심이 있는 사람들은 그것들을 부끄러워하고 그것에 대해 말하기도 부끄러워한다. 공공연하게 뻔뻔스럽게 악을 행하는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악을 행할 때 그 행위의 악함을 느끼면서 행하며 그들의 악이 혹시 드러날 때면 자기 얼굴을 가리우며 부끄러워할 것이다.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들이 빛으로 나타날 것이다. ‘빛으로 나타난다’는 원어(휘포 투 포토스 파네-루타이)는 ‘빛에 의해 나타난다’는 뜻이다. 죄의 죄악됨과 헛됨과 사악함이 책망될 때, 그것과 대조하여 무엇이 옳은 것이며 무엇이 선한 것인지 드러나는 것이다.

[14절]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

‘잠자는 자’는 교인들 중에 바로 살지 못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죽은 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죽었던 영혼이 거듭난 자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영적으로 죽어 있는 불신자들 가운데서 일어나야 한다. 그들은 깨어 불신앙의 세상 속에서 빛된 삶을 살아야 한다. 즉 그들은 경건하고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에 합당하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빛으로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에게 참된 지식과 도덕성의 빛을 비추셔서 우리로 하여금 모든 불경건과 불의와 죄악을 버리고 참된 지식과 도덕성을 갖춘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해서이다. 이것이 구원이다.

본문은 우리에게 세 가지를 교훈한다. 첫째로,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전에는 세상 사람들처럼 어두움이었다. 그것은 무지하고 불경건하고 부도덕하고 악하고 거짓된 삶을 뜻한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주 안에서 빛이 되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그를 섬기며 그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는 자들이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빛의 자녀들처럼 경건하고 정직하고 선하고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

둘째로,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지 시험하여 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어두움의 생활, 즉 불경건하고 부도덕한 삶을 미워하시고, 빛의 생활, 즉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한 삶을 기뻐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한 삶을 살아야 한다.

셋째로,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들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택하심을 입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을 얻은 성도들은 이제는 열매 없는 헛되고 무가치하고 악한 어두움의 행위들에 참여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런 행위들을 드러내고 책망해야 한다. 우리는 빛의 전파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말과 행동과 처신을 통해 빛의 전파자가 될 수 있다. 우리는 불경건하고 부도덕한 일들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그것들을 책망해야 하고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15-21절, 지혜 있는 자

[15절]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자세히’라는 원어(아크리보스)는 ‘정확하게, 신중하게’라는 뜻이다.7) 전통본문에는 ‘자세히’라는 말이 ‘행할 것’이라는 말에 붙어 있다.8) 우리는 어떻게 정확하게, 신중하게 행할 것을 주의해야 한다. 우리의 행동은 우리가 지혜 있는 자인지 아닌지를 나타낼 것이다. 지혜는 구원받은 자다운, 성도다운, 빛의 자녀다운 바른 행동들로 나타나고 그것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다. 그러나 어리석음은 세상 사람들 같은, 성도답지 않은, 어두움의 사람들 같은 그릇된 행동들로 나타나고 그것들은 하나님을 진노하시게 할 것이다.

[16-17절] 세월을 아끼라. [이는] 때가 악하니라[때가 악함이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세월을 아끼라’는 원어(엑사고라조메노이 톤 카이론)는 ‘시간을 사서 건지라’는 뜻인데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가장 잘 사용하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그것은 때가 악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죄악된 유행과 풍조는 교인들을 죄에 빠뜨리려 하며, 물질적 탐욕과 육신적 쾌락은 교인들의 믿음을 변질시키려 한다. 또 세상의 염려들은 교인들의 믿음을 약화시키고 세상의 바쁜 일들은 교인들로 점점 교회의 일에 참여치 못하게 만든다. 게다가, 악한 시대는 때때로 성도들을 핍박한다. 또 이 세상은 전도를 방해한다. 오늘날 대중매체들은 하나님의 지식과 구원의 진리 외의 모든 것을 다 전달하고 있다. 죄악된 풍조들, 복장, 술취함, 음란, 심지어 귀신 이야기들까지 전달하고 있다. 대중매체에서 무엇이든지 다 전달할 수 있으나, 하나님의 구원 진리만은 제외되고 있다. 이상한 현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리석은 자가 되어 세월을 낭비하지 말고 주의 뜻을 이해하고 그 뜻에 맞게 살아야 한다. 주의 뜻은 일차적으로 죄인들의 구원이며, 또 성도가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게 사는 것이다.

[18절]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포도주나 술은 육신적 기쁨과 만족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거나 세상의 근심과 고통을 잊는 수단으로도 사용된다. 그러나 술 취하는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제력을 잃게 만들고 실수하게 하며 방탕에 이르게 하기 때문에(잠 23:29-35) 성도들에게 합당치 않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다른 서신들에서 술 취하는 자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분명하게 말하였다(고전 6:10; 갈 5:21).

성도는 술 취함 대신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구원받은 성도들 속에 오셔서 영원히 거하신다는 사실은 참으로 큰 복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우리와 영원히 함께하시는 것이다. 성령은 ‘보혜사’(파라클레토스)라고 불리는데 그것은 ‘위로자, 격려자’라는 뜻이다. 성도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음으로 풍성한 위로와 격려를 얻는다.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원어(플레루스데 엔 프뉴마티)는 ‘성령으로 계속 충만되어라’는 뜻이다. ‘충만을 받으라’는 명령어(플레루스데)(현재수동태)는 반복적 행위를 가리킨다. 성령의 충만은 한 번만 가지는 일이 아니고 계속 반복적으로 가져야 하는 일이다. 또 ‘충만을 받으라’는 이 명령어는 수동적 의미를 가진다. 성령의 충만에 있어서 우리는 주체가 아니고 대상이며 성령께서 주체이시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충만케 되시는 것이다.

[19절]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영적인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성도의 정상적인 삶은 성령 충만한 삶이요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찬송과 감사의 행위로 나타난다. 본문의 ‘시’는 시편을 가리킨 듯하고, ‘찬미’ 혹은 ‘찬송’은 하나님의 이름과 그의 속성들과 그의 하신 일들을 인정하고 높이는 노래를 가리킨다. ‘영적인 노래들’은 성도들의 신앙생활 속에서 나오는 간증적 노래들을 가리킬 것이다. 그것은 성도들의 감사와 죄의 회개와 선한 결심 등의 내용이다.

‘서로 화답하라’는 말은 ‘서로들에게 말하라’는 뜻인데, 이것은 시와 찬송과 영적 노래들이 하나님께 향할 뿐 아니라, 또한 다른 성도들을 향함으로써 그들의 신앙생활에 교훈과 유익을 주게 하고 그래서 다 함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것을 나타낸다. 본절과 비슷한 교훈인 골로새서 3:16의 원문은 “모든 지혜로, 시와 찬송과 영적 노래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라”고 번역할 수 있다.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라”는 말은 찬송과 영적 노래들이 우리의 입이나 목에서만 나와서는 안 되고 마음 중심에서 나와야 함을 보인다. 그것은 우리가 마음으로 주 예수를 믿고 사랑하고 순종하며 찬송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교회 찬양대는 세상의 일반 합창단과 다르다. 그 의미가 다르고 가치도 다르다.

[20절]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우리는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세상의 모든 일들을 주관하시고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신다는 사실을 믿음으로써 가능하다. 욥은 고난 중에 고백하기를, “내가 모태에서 적신(赤身, 벌거벗은 몸)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라고 하였다(욥 1:21). 사도 바울은 로마서 8:28에서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말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한다는 말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주와 중보자이시며 그의 공로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을 받았고 그의 이름으로 우리의 기도가 응답 받고 우리의 행복이 보장되기 때문에 하신 말씀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32에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라고 말하였다.

[21절]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전통사본들의 일부는 옛날 영어성경처럼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대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라고 되어 있다. 사랑은 남을 섬기며 남에게 유익을 주는 것이며 그것은 피차 복종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피차 복종하면 상대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유익을 줄 것이다.

본문은 여러 가지 교훈을 준다. 첫째로, 어떻게 정확하게, 신중하게 행할 것을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지혜 있는 자같이 하라.

둘째로, 때가 악하므로 세월을 아끼라. 촌음을 아끼며 충성하자.

셋째로,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라. 주의 뜻은 성경에 다 계시되었고 기록되었다. 그러므로 성경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가 복되다.

넷째로, 술 취하는 것은 방탕한 것이니 그리하지 말고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성도는 말씀과 성령의 충만을 사모해야 한다.

다섯째로, 시와 찬미와 영적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마음에서 우러나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라. 우리는 하나님께 찬송하기를 힘쓰자.

여섯째로,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라. 이것이 하나님을 범사에 인정하는 믿음이다.

일곱째로,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이것이 사랑이다.

 

22-33절, 아내와 남편의 의무

[22-24절]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나()[그런즉, 그러므로]9)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아내들은 자기 남편들에게 복종해야 할 의무가 있다. 복종하되 주께 복종하듯이 해야 한다. 아내들이 남편들의 말에 대항하고 남편들과 충돌하고 자기들 마음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아내의 의무를 저버리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님께 대항할 수 없는 것처럼, 아내들은 남편들에게 대항하지 말고 복종해야 한다. 아내들이 남편들에게 복종해야 하는 이유는 남편들이 아내들의 머리가 되기 때문이다. 머리와 몸의 관계는 명령과 순종의 관계이다. 남편들이 아내들의 머리이기 때문에, 아내들은 그들에게 복종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극진히 사랑하셔서 구주가 되셨고 자신을 십자가의 속죄제물로 내어주셨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교회가 이런 친밀한 관계라고 해서 교회가 그리스도께 아무렇게나 행동해서는 안 되고 마땅히 그에게 복종해야 하듯이, 아내들은 범사에 남편들에게 복종해야 한다. 아내들의 복종은 거의 절대적이어야 한다. 단지 한가지 예외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명백히 어긋나는 일 즉 죄 되는 일의 경우이다. 그러나 죄 되는 일 외에는 언제든지 무엇에든지 아내들은 그 남편들에게 복종해야 할 것이다.

[25절]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남편들은 자기 아내들을 사랑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셨다. 우리가 그를 사랑하였기 때문에 그가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니었다. 남편들은 자기 아내들을 그런 사랑으로 사랑해야 한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지 못할 경우란 없어야 한다. 그 어떤 이유도 성립될 수 없어야 한다.

[26-27절]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도 바울은 남편들의 의무를 설명하다가 교회의 거룩함에 대해 말한다. 교회의 거룩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핵심이라고 표현될 수 있다. 교회란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임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교회를 위해 자신을 대속 제물로 드리셨다. 그는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영혼들이 그 구원의 복음의 말씀을 믿음으로 깨끗함을 얻어 거룩하게 되고 티나 주름잡힌 것이 없고 거룩하고 흠이 없는 영광스러운 교회가 되기를 원하셨다. 그의 구원 사역은 하나님의 뜻대로 그대로 다 성취되었다. 주의 피로 구속(救贖)받고 복음으로 깨끗하게 된 교회는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교회가 되었다.

그러나 교회 즉 구원받은 성도들은 실제적으로도 그러해야 한다. 즉 교회는 교리적으로나 윤리적으로 거룩하고 완전한 교회가 되기 위해 힘써야 한다. 비록 지상에서 이런 노력은 불완전하며 우리의 의와 완전은 여전히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밖에 없지만, 우리는 교회들의 거룩함과 완전함, 곧 성도들의 거룩함과 완전함을 위해 힘써야 한다. 왜냐하면 성도들의 성화와 온전함은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성도들이나 교회가 사상이나 생활에 있어서 거룩하지 못하다면 그것은 지극히 성도답지 못하며 교회답지 못한 것이다.

[28절]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남편들은 자기의 아내들을 자기의 몸같이 사랑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남자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셨기 때문이다. 즉 아내는 남이 아니고 남편의 몸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러므로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곧 자기의 몸을 사랑하는 것과 같다.

[29-30절]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우리는 그 몸의[그 몸과 살과 뼈의]10) 지체임이니라.

사람은 누구나 언제든지 자기의 몸을 사랑한다. 자기의 몸의 건강을 위해 음식을 먹고 적절한 운동을 하고 또 옷을 입혀 몸을 보호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그의 몸의 지체인 교회를 이처럼 보살피시고 공급하시고 보호하시고 양육하신다.

[31-32절]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결혼이란 남자가 그 부모를 떠나 아내와 연합하여 한 몸이 되는 일이다. ‘부모를 떠난다’는 말씀은 결혼이 독립 가정을 이루는 일임을 나타낸다. ‘아내와 연합하여 한 몸이 된다’는 말씀은 결혼이 인간 관계 가운데 가장 친밀한 관계임을 나타낸다. 부부의 관계는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보다도 더 가까운 관계이다.

바울은 결혼 관계의 비밀이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상징한다고 말한다. 성경은 과연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결혼의 비유로 종종 표현한다(고후 11:2; 계 19:7-8). 성도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얻고 풍성한 생명(요 10:10)을 얻는 것은 영적인 연합의 신비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신비적으로 연합되었고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이 되었다.

[33절]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

남편들은 자기의 아내들을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같이 해야 하며 또 아내들은 자기 남편들을 경외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기억해야 한다. ‘경외하라’는 말은 존중하고 존경하라는 뜻이다. 아내들은 남편들을 무시하지 말고 존경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본문은 아내와 남편의 의무에 대해 교훈한다. 아내와 남편의 의무는 복종과 사랑이라는 두 단어로 요약된다. 아내들은 남편들에게 범사에 복종해야 한다. 그들은 남편에게 복종하되 주께 하듯이 해야 하며, 그를 무시하지 말고 존중하고 존경해야 한다. 왜냐하면 남편들은 아내들의 머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내들은 죄 되는 일 외에는 항상 남편의 말에 대해 ‘예’라고 말해야 한다.

한편, 남편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자신을 주심같이 또 제 몸같이, 즉 조건 없이 희생적으로 아내들을 사랑해야 한다. 왜냐하면 아내와 남편은 한 몸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남존여비(男尊女卑) 사상을 가르치지 않는다. 성경은 단지 하나님의 창조의 의도와 가정의 질서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초부터 가정에서 남자가 머리가 되고 여자는 그를 돕는 자가 되게 하기를 원하셨다. 가정 단위에 머리는 하나이어야 한다. 그것이 질서이다. 무슨 단체든지 머리가 둘이면 다툰다. 이와 같이 가정이 하나님의 의도하신 대로 이루어질 때 평안하고 행복할 수 있다.

성도들이 주 예수를 잘 믿는다는 것은 그들의 실생활에서 나타나야 한다. 아내들의 믿음은 구체적으로 가정 생활에서 남편들에게 복종하는 삶을 통하여 나타나야 하고, 남편들의 믿음은 구체적으로 아내들을 사랑하는 삶을 통하여 나타나야 한다. 가정 생활에서 복종과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다.

 

 

6장: 교회의 전투성

1-4절, 자녀들과 부모의 의무

[1절]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는] 이것이 옳으니라[옳음이니라].

자녀들은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해야 한다. 이것이 옳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십계명의 제5계명의 내용이며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가르쳐주신 모든 사람이 지켜야 할 생활 규칙이다. 이 규칙을 어기면 엄한 벌로 다스리라고 규정되었다. 신명기 21:18-21에 보면, 부모의 말을 듣지 않는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은 부모가 그를 성읍 장로들에게 내어주고 성읍의 모든 사람은 그를 돌로 쳐죽임으로써 이스라엘 사회에서 악을 제하라고 규정되어 있다.

‘주 안에서’라는 말씀은 자녀들이 부모에게 순종해야 할 이유를 보이고, 부모에 대한 순종의 한계성도 보인다. 자녀들이 부모에게 순종해야 할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전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죄 가운데 방황했으나 이제는 목자 되신 주 하나님께로 돌아왔으므로 그에게 복종해야 한다. 그러므로 자녀는 하나님의 권위 때문에 부모에게 순종해야 한다. 그러나 부모에 대한 자녀의 순종은 주 안에서의 순종이어야 한다. 부모의 명령이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면 자녀들이 부모에게 순종할 수 없다. 그때에는 순종보다 불순종이 하나님 앞에서 바른 행동일 것이다.

[2-3절]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자녀들은 자기들을 낳으시고 기르신 부모님을 무시하지 말고 그들의 사랑과 수고를 인정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들을 공경해야 한다. 그것이 자녀로서 마땅한 일이다. 특히 부모 공경의 계명은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계명에서 “그리하면 내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 20:12)고 약속하셨다. 사람이 잘 되고 땅에서 오래 사는 것은 하나님께서 복 주심으로만 가능한 일이다. 주 안에서 부모를 공경하며 순종하는 자녀들은 하나님의 뜻과 계명을 순종하는 자들이므로 하나님께로부터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 잘 되고 오래 사는 복을 받는 것이 합당하다.

[4절]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본문은 자녀 교육에 대해 교훈한다. ‘아비들아’라는 말씀은 자녀 교육의 주체를 보여준다. 자녀 교육은 정부나 학교에 맡겨진 일이 아니고 심지어 교회에 맡겨진 일도 아니다. 자녀 교육은 부모에게 맡겨진 일, 그것도 아버지에게 맡겨진 일이다. 아버지들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자녀 교육의 책임을 인식하고 그것을 완수해야 한다.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말씀은 자녀들을 비인격적으로 대하지 말라는 뜻을 포함한다. 비인격적 행위는 학대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자녀들을 어리다고 무시하거나 무리하고 부당한 명령을 하거나 강압하고 위협하거나 감정적으로 때리는 행동 등이다. 그것은 자녀 교육에 해가 되며 자녀들을 빗나가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그런 가정에서 자란 자녀들은 부모에게 진심으로 순종하지 않고 겉으로나 가식적으로만 순종하는 이중적 인격이 되기 쉽다.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말씀은, 지나치게 엄격한 규율과 체벌을 가진 소위 스파르타식 교육이나 또는 엄격한 규율과 체벌이 전혀 없는 자유방임적 교육이 다 잘못임을 보인다. 부모는 자녀들을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해야 한다. ‘교양’이라는 원어(파이데이아)는 ‘교육, 훈련 등’의 의미를 가진 말이다. ‘훈계’라는 원어(누데시아)는 ‘경고, 책망 등’의 뜻을 가진다. 우리는 주께서 성경에 가르쳐 주신 말씀을 따라 교훈하고 훈련하고 때때로 잘못을 경고하고 책망해야 한다. 잠언 22:6,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부모는 자녀들이 잘못할 때 징계하고 체벌해야 한다. 잠언 29:15,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하게 버려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 잠언 13:24,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늦기 전에] 징계하느니라.” 잠언 22:15,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 잠언 23:13-14,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치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하리라.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 영혼을 음부[지옥]에서 구원하리라.”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자녀는 주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고 그들을 공경해야 한다. 그것은 자녀로서 마땅한 의무일 뿐 아니라, 장수(長壽)와 번영의 약속이 있는 하나님의 계명이다. 이 계명은 인간 관계의 계명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계명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로, 부모 특히 아버지들은 자녀들을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해야 한다. 자녀 교육은 하나님께서 부모에게 주신 엄숙한 의무인 것이다.

자녀들의 순종과 부모의 바른 교육--이것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아름다운 가정의 모습이다. 죄인들의 가정에서는 이런 아름다운 모습을 기대하기 어렵다. 사람들은 마음이 부패되어 악하고 거역하며 배은(背恩)하며 거칠고 감정적이고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이다. 그러나 구원받은 우리들은 죄악된 상태로부터 심령의 변화를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우리들에게서 아름다운 가정의 모습을 기대하신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도우심으로 부모에게 대해서는 좋은 자녀들 그리고 자녀들에 대해서는 좋은 부모들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 잘 믿는 자들은 가정 속에서 그 믿음과 사랑을 증거해야 한다.

 

5-9절, 종과 주인의 의무

[5-7절]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여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종들은 주인에게 순종해야 한다. 이 교훈은 오늘날 사회의 각 분야에서 직책상 아랫사람들에게 적용된다. 종들은 주인에게 어떻게 순종해야 하는가?

첫째로, 그들은 주인에게 ‘두려워하고 떨며’ 순종해야 한다. 이것은 주인의 권위를 인정하면서 순종하라는 뜻이다. 주인을 존중하지 않고 무시하는 종은 그 주인에게 순종하기 어렵다. 종들은 주인을 향해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져야 참으로 순종할 수 있다.

둘째로, 그들은 주인에게 ‘성실한 마음으로’ 순종해야 한다. ‘성실한 마음’이라는 원어(하플로테티 테스 카르디아스)는 ‘마음의 단순함, 성실함, 진실함’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다른 곳에 두지 않고 맡겨진 일에 성실하게, 진실하게 두는 것을 뜻한다. 그것이 종들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이다. 맡은 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 일을 성실하게, 진실하게 하는 것이다.

셋째로, 그들은 주인에게 ‘그리스도께 하듯’ 순종해야 한다. 이것은 놀라운 교훈이다. 육신의 주인이 그리스도는 아니다. 그러나 종들은 육신적 주인에게 그리스도께 하듯이 순종해야 한다. 가정에서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하되 그리스도께 하듯 해야 하는 것처럼, 사회에서 종들은 주인에게 순종하되 그리스도께 하듯 해야 하는 것이다.

넷째로, 그들은 주인을 ‘단 마음으로’ 섬겨야 한다. 이것은 세 번째 교훈에 대한 보충과도 같다. 우리는 사람에게 순종하고 사람을 섬긴다고 생각할 때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가 될 수 있고 또 불평스러운 마음으로 봉사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주께 순종하고 주를 섬긴다고 생각한다면 진심의 순종과 봉사, 즐겁고 기쁜 순종과 봉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런 교훈대로 사회 생활을 한다면 우리의 생활은 기쁘고 즐거운 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직업의 현실에서 사람들을 섬기는 자들이 아니고 주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되기 때문이다.

[8절]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하는 자나 주에게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니라.

우리의 선행은 주께로부터 보상을 받을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다. 우리의 보상은 단지 종교적 봉사의 행위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또한 세속적 직업에서의 선행에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세상 직업에서 감사하게, 성실하게, 보람되게 선을 행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보상은 마지막 심판 날에 주실 보상일 뿐만 아니라, 또한 이 세상에서도 기대할 만한 보상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경건하게 사는 자들에게 내세의 복뿐 아니라, 현세의 복도 약속하셨다(딤전 4:8).

[9절] 상전들아,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 같이 하고 공갈[위협]을 그치라. 이는 저희와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일방적으로 종들에게만 두려움과 성실과 단 마음의 순종을 요구하신 것이 아니었다. 그는 또한 주인들에게도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종들이 주인에게 그리스도를 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하듯이, 주인들도 종들에게 합당한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을 보인다. 그것은 주인들이 종들에게 이중적으로 행하지 말고 공의롭고 선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대해야 할 것을 암시한다. 종들이 주인에게 정직하고 선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대해야 하듯이, 주인들도 종들에게 그와 같이 대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주인들은 종들을 위협하지 말아야 한다. 주인들은 종들에게 정당한 책망과 경고를 할 수 있다. 종을 어렸을 때부터 곱게 양육하면 그가 나중에는 자식인 체하고 자기의 분수를 모르게 될 수 있다(잠 29:21). 그러나 주인들이 종들에게 부당하고 무리한 책망이나 위협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들은 인정 없는 윗사람이 되어서는 안되며 주인의 권위를 남용하거나 악용해서도 안 될 것이다.

주인들이 종들을 위협해서는 안 될 이유는, 모든 주인들의 주인, 크시고 높으신 주인이 하늘에 계시기 때문이다. ‘저희와 너희의 상전’이라는 말은 전통사본에는 ‘또한 너희 자신의 상전[주]’이라고 되어 있다. 하늘에 참 주인께서 계시다. 그는 공의로 세상을 심판하실 주인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분 앞에 살진대, 어떻게 주인들이 종들 앞에서 교만하고 부당하고 무리한 행동을 할 수 있겠는가?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종들은 주인에게 순종하되 두렵고 떨림으로, 또 단순하고 성실한 마음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 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단 마음으로 해야 한다. 그들은 주인이 보든지 보지 않든지 그렇게 해야 한다. 주께서는 그들의 선행을 갚아주실 것이다.

둘째로, 주인들은 종들을 위협하지 말고 공정하고 선하고 진실하게 다스려야 한다. 주인들은 종들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귀한 영혼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인격적으로 대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늘에 크시고 참되신 주인께서 계시고 그는 공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셋째로, 이 교훈은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사회생활, 직장생활에 적용된다. 아랫사람들은 윗사람들에게 두려움으로, 성실한 마음으로, 그리스도께 하듯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단 마음으로 주를 섬기듯이 순종하고 자기들에게 맡겨진 일들에 충성해야 한다. 또 윗사람들은 아랫사람들에게 위협하지 말고 부당하고 무리한 책망을 하지 말고 공정하게, 선하게, 겸손하게, 진실하게 대하며 그들을 다스려야 할 것이다.

 

10-24절, 교회의 전투성

[10-11절]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대항하여 서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전쟁에서 필요한 것은 힘이다. 전쟁에서 이기려면 강한 군사력이 필요하다. 그리스도인은 영적 전쟁 중에 있다. 우리의 싸움의 대상은 마귀와 악령들과 그들을 돕는 악한 자들이다. 우리는 마귀와의 전쟁에서 힘과 강건함이 필요하다. 겁약한 군인은 작은 어려움에도 불안해하고 낙심하지만, 강하고 용맹스러운 군인은 불안하거나 낙심치 않고 용감히 싸우며 승리할 수 있다.

이 영적 전쟁에서 우리가 강건해질 수 있는 방법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이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다.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시 62:11). 하나님께서는 피곤한 자들에게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들에게 힘을 주신다(사 40:28-29).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만 의지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 마귀는 지혜와 능력이 있어 간교한 계획을 가지고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귀의 궤계를 대적하려면, 우리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하는 것이 필요함은 마귀와의 싸움에서 져서 넘어지지 않고 이기고 서기 위함이다.

[12-13절] [이는]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대함임이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본문은 성도들의 싸움의 대상이 누구이며 그 싸움의 성격이 어떠함을 보인다. 우리의 싸움의 대상은 사람들이 아니고 이 세상 나라들의 권세자들과 그들 배후에 있는 악령들이다. 사탄은 에덴 동산에서 인류의 시조를 범죄하게 한 이래 인류 역사상 계속하여 온 세상을 미혹하여 세상을 죄악되게 하고 사람들을 죄 가운데 빠져 살게 했으며, 또 교회를 부패시키고 혼란시키려고 열심을 다하고 있다.

성도들의 싸움은 영적인 싸움이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는 영적인 무장이다. 우리에게 그런 무장이 필요한 것은 우리의 싸움의 대상이 영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탄과 악령들이 참된 교회들을 대적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악한 날, 곧 배교와 타협과 혼돈의 날 또 환난과 핍박의 날이 올 때, 우리는 마귀의 시험들을 능히 이기고 주께서 명하신 모든 일을 다 완수하고 설 수 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지 않는 자들은 마귀의 시험에 넘어지고 범죄하고 실패하고 낙심하고 좌절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는 모든 성도들은 마귀와 악령들과의 싸움에서 패배치 않고 이기고 굳게 서게 될 것이다.

[14-17절]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火箭)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성도들이 영적 싸움에서 입어야 할 하나님의 전신갑주가 무엇인가? 첫째로, 진리로 허리띠를 띠는 것이다. ‘진리’는 ‘진리’나 ‘진실’을 다 의미할 수 있다. ‘진리’는 ‘진리’ 곧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할 수 있다.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허리띠를 띠어야 한다. 또 ‘진리’는 ‘진실’을 의미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진실하시지만, 마귀는 거짓의 아비이다. 진실은 하나님의 세계의 특징이며, 거짓은 마귀 왕국의 특징이다. 그러므로 마귀와의 싸움에서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우리의 마음의 진실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마음으로 행하면 마귀는 우리를 넘어뜨릴 수 없을 것이다.

둘째로, 의의 흉배를 붙이는 것이다. 의는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것을 말한다. 본문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은 의나 우리의 의로운 행위를 다 의미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 공로로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셨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단번에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은 이제 그 의 안에서 의만 추구하고 의롭게만 행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불의에 넘어지거나 불의와 타협하는 사람들은 마귀와의 전쟁에서 지는 자들이다. 구원받은 성도는 모든 불의와 죄악의 유혹을 물리치고 항상 의롭고 정정당당하게 행동해야 한다.

셋째로,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는 것이다. ‘평안의 복음’이라는 말은 하나님과 화목케 하는 복음이라는 뜻을 가질 것이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으로 죄인들을 하나님과 화목케 하셨다. 또 ‘평안의 복음’이라는 말은 우리에게 참된 평안을 주는 복음이라는 뜻도 가질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음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고 마음에 평안을 얻었다. 또 우리는 이 화목의 복음을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야 한다.

넷째로,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이 속죄 신앙이 중요하다. 이것이 복음 신앙이며 구원 신앙이다. 우리의 행위는 여전히 부족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귀의 불화살을 막아낼 수 있는 방법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밖에 없다. “우리의 의는 이것뿐 예수의 피밖에 없다,” “울어도 못하네, 힘써도 못하네, 참아도 못하네, 믿으면 하겠네.” 이 믿음이 세상을 이긴다(요일 5:4-5).

다섯째로, 구원의 투구를 쓰는 것이다. 이것은 구원에 대한 확고한 지식과 믿음을 가리킨다고 본다. 투구를 쓴 자는 적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하다. 자신의 구원에 대해 확고한 지식과 믿음이 없는 자는 마귀의 시험에 노출되어 있다. 그는 마귀의 밥이다. 그러나 우리가 구원의 견고한 지식과 믿음을 가진다면 승리할 것이다.

여섯째로,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칼과 같다. 그것은 적을 공격할 수 있는 무기이다. 신구약 66권의 성경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오늘날 하나님께서는 이 책을 통해 그리고 이 책을 통해서만 말씀하신다. 예수께서도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을 때 구약성경을 인용하심으로써 마귀를 물리치셨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성경을 읽고 듣고 배우는 일은 참으로 중요하다. 성경을 읽지 않는 자는 칼 없이 전쟁에 나가려는 자와 같다. 그 전쟁의 결과는 보나마나 실패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실패의 삶을 살면서도 성경 읽기의 필요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고 배워야 한다.

[18-20절]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일곱째로, 성령 안에서 항상 기도하는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전신갑주의 마지막 중요한 요소이다. ‘모든 기도와 간구로’라는 말은 어떤 문제에 대해 많이 또 간절히 기도하는 것을 말한다. ‘무시로’라는 원어(엔 판티 카이로)는 ‘항상’이라는 뜻이다. ‘성령 안에서’라는 말은 성령께서 우리의 기도를 도우심을 암시한다. 과연 성령께서는 우리를 도우시는 분으로 우리 가운데 계신다. 그런데 우리에게 필요한 도움 중에 기도보다 더 큰 것은 없다.

기도하지 않는 자는 마귀에게 휴전을 선포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마귀는 결코 휴전하지 않는다. 그에게 휴전이란 없다. 마귀는 결국 기도하지 않는 이들을 자기 밥으로 삼을 것이다. 기도하지 않는 자는 마귀를 결코 이길 수 없다. 그러나 기도하는 성도는 마귀를 이길 것이다. 마귀는 기도하는 성도들을 무서워한다. 왜냐하면 기도하는 성도들의 배후에는 하나님께서 계시기 때문이다. 기도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방법이며 하나님의 능력의 지원을 받는 방법이다.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는 원문은 직역하면, “이를 위하여 모든 성도들을 위한 모든 인내와 간구로 깨어 있으라”이다. ‘모든 인내로’라는 말은 기도에는 많은 인내가 필요함을 보인다. 우리는 기도할 때 낙심치 말고 오래 참으면서 기도해야 한다(눅 18:1-8). 또 ‘깨어 있으며’라는 말은 기도가 곧 깨어 있는 일임을 증거한다. 기도하는 성도는 영적으로 깨어 있는 자이지만, 기도하지 않는 자는 영적으로 잠들어 있는 자이다.

기도의 내용에 관하여, 본문은 “모든 성도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한다. 우리는 자신을 위해 기도할 뿐 아니라, 다른 모든 성도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한다. 이것은 선한 일이다. 우리가 다른 성도들을 위해 도울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기도이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실 것이기 때문에 다른 성도들을 위한 기도야말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지름길이다.

바울은 특히 지금 감옥에 갇혀 쇠사슬에 매인 자신의 전도 사역을 위해 성도들에게 기도를 부탁하였다. 그것은 복음 사역자들로 하여금 마땅히 전해야 할 복음 진리의 내용을 담대히 말하게 해 달라는 기도를 가리킨다. 복음 사역자들을 돕는 방법들 중에 기도보다 더 중요하고 좋은 방법은 없다. 설교는 영혼들을 구원하며 그들의 믿음을 성장시키는 하나님의 방법이기 때문에(고전 1:21; 골 1:28-29),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들을 위한 기도는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귀한 기도라고 할 수 있다.

[21-24절] 나의 사정 곧 내가 무엇을 하는지 너희에게도 알게 하려 하노니 사랑을 받은 형제요 주 안에서 진실한 일군인 두기고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우리 사정을 알게 하고 또 너희 마음을 위로하게 하기 위하여 내가 특별히 저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라.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부터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이 형제들에게 있을지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 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 [아멘].11)

사도 바울에게는 두기고 같은 진실한 동역자들이 있었다. 그는 ‘사랑을 받은 형제요 주 안에서 진실한 일꾼’이며 바울의 모든 사정을 에베소 교인들에게 알리고 그들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보냄을 받은 자이었다. 오늘날에도 이런 충성된 일꾼들이 필요하다.

또 사도 바울은 다른 편지들과 달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안 외에 ‘믿음을 겸한 사랑’을 기원하였다. 그는 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 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축복하였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구원받은 성도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해야 한다.

본문은 교회의 전투성 곧 성도들의 영적 싸움에 관한 것이다. 첫째로, 우리의 싸움의 대상은 마귀와 악령들과 그들에게 속한 자들이다.

둘째로, 우리의 싸움의 목표는 지지 않고 이기고 굳게 서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맡기신 모든 일들 특히 복음 전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 구원받은 모든 성도는 세상에서의 영적 싸움에서 승리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의 싸움의 방법은 주 안에서와 그의 능력으로 강해지고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와 마음의 진실, 예수 그리스도의 의와 정직, 하나님과의 화목과 마음의 평안, 믿음, 구원의 확신,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기도로 무장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성도들을 위해, 특히 복음 사역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택자들의 구원과 참 교회의 건립은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의 기도로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는 이 영적 싸움에서 잘 무장하여 항상 승리하자.

 

미주

1) Byz A itd vg syrp copsa bo arm 등.

2) Matthew Poole, “바울이 여기에서[빌립보서 2:12에서] 강조하는 바는, 우리가 구원의 일에 게으르지 말고 우리가 그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도록 하나님과 함께 일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협력은, 그리스도께만 합당한 구원의 획득이나 공로에 관계되지 않고, 단지 그리스도께서 풍성히 완성하신 것의 적용에 관계된다”(Commentary, III, 691).

3) Byz itd vg syrp arm Origenlat 등에 있음.

4) Byz itd vg syrp arm Irenaeusgr lat 등이 그러함.

5) Byz B 075 vg syrp copsa-mss arm geo 등에 있음.

6) Byz p46 등.

7) 한글개역성경은 이 단어를 모두 ‘자세히’라고 번역하였다(마 2:8; 눅 1:3; 행 18:25; 살전 5:2).

8) Byz A D it(d) vg (arm) copbo-mss 등이 그러함.

9) 보통의 경우는 ‘그러나’라고 번역하지만, 이 경우에는 문맥적으로 ‘그런즉, 그러므로’라는 뜻이 가능하다고 한다(BDAG, KJV).

10) Byz itd vg syr(p) arm Irenaeus 등이 그러함.

11) Byz itd vgcl ww syrp copbo-pt arm eth 등에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