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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강해

김효성 목사

2018년 2월 1일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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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주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 바울의 증거대로(마 5:18; 요 10:35; 갈 3:16; 딤후 3:16),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라는고백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매우 기본적이고 중요하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진술대로(1:8), 성경 원본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고 그 본문은 “그의 독특한 배려와 섭리로 모든 시대에 순수하게 보존되었다.” 이것이 교회의 전통적 견해이다. 그러나 19세기 말 웨스트코트와 호트가 주장한 불확실한 가설에 의해 많은 교회들이 신약성경의 전통적 다수 본문을 버리고 불완전하고 오류투성이의 사본들(א와 B)을 중시하는 잘못을 범하였다. 그러나 신약성경의 헬라어 비잔틴 다수 사본들의 본문은 순수하게 보존된 성경 원본의 본문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채택되어야 할 것이다.

성경을 가지고 설교할지라도 그것을 바르게 해석하고 설교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올 것이다(암 8:11). 중세 시대 말, 종교개혁 직전과 같이, 오늘날 벌써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오는 것 같다.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설교와 성경강해가 있지만, 순수한 기독교 신앙 지식과 입장은 더 흐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요구되는 성경 해석과 강해는 복잡하고 화려한 말잔치보다 성경 본문의 바른 뜻을 간단 명료하게 해석하고 적절히 적용하는 것일 것이다. 사실상, 우리는 성경책 한 권으로 충분하다. 성경주석이나 강해는 성경 본문의 바른 이해를 위한 작은 참고서에 불과하다. 성도는 각자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성경을 읽어야 하며, 성경주석과 강해는 오직 참고로만 사용해야 할 것이다.


제목 차례

1장: 기쁨의 간증

2장: 기쁨의 봉사

3장: 기쁨의 이유

4장: 기쁨의 열매

 

서론

빌립보서의 저자는 바울이다(1:1). 바울이 본 서신의 저자라는 것은 전통적으로 확증된 사실이다. 폴리갑, 이레니우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터툴리안 등은 본 서신을 인용하였다.

본 서신의 저작 연대는 주후 61년 말경일 것이다. 본 서신은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쓴 4개의 옥중 서신(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중에 가장 마지막으로 기록되었던 것 같다.

빌립보서의 특징적 주제는 기쁨이다. 본 서신은 사랑과 기쁨으로 가득찬 서신이다. 이 짧은 서신에 ‘기뻐한다’는 말이 8회, ‘기쁨’이라는 말이 5회나 사용되고 있다. 본서는 기쁨의 서신이다.

 

빌립보서의 각 장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장, 기쁨의 간증 (복음의 진보)

2장, 기쁨의 봉사 (복음을 위한 고난), 일치와 겸손에 대한 교훈

3장, 기쁨의 이유 (예수 그리스도의 의), 유대주의에 대한 경고

4장, 기쁨의 열매 (성도들과 헌금), 기뻐하라는 권면  

 

 

1장: 기쁨의 간증

1-11절, 바울의 기도 제목

[1-2절] 그리스도의 종[종들인]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는]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종들’이라는 말은 사도 바울과 그의 조력자인 디모데가 항상 주님께 순종해야 하는 사역자임을 잘 보인다. 종들은 주인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해야 하는 자들이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것은 오늘날 신구약 성경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열심히 읽고 배우고 묵상하고 연구하여 성경에 정통하고 그 모든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성도들과 일꾼들이 되어야 한다.

이 서신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보내졌다. 빌립보에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은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있었다. 그 수가 많든지 적든지 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거룩하여진 한 명 한 명의 영혼들이 하나님 앞에서는 보배롭고 귀하다. 성경은 그들을 위해 많은 교훈을 담고 있다. 성경은 일차적으로 목사들에게 주신 책이 아니고 성도들에게 주신 책이다. 장로교 표준적 신앙고백서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표현대로, 모든 성도들은 성경책을 날마다 열심히 읽음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들의 심령과 삶 속에 풍성하게 거하게 해야 한다. 또 빌립보 교회에는 감독들과 집사들도 있었다. 감독은 양들을 보살피는 직분이다. 감독과 장로는 같은 직분이다(행 20:17, 28). 장로교회에서 목사는 설교하는 장로라고 불린다. 집사는 헌금 수금과 지출에 관한 일을 하는 직분이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과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안을 기원하였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은혜로 죄씻음과 거듭남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얻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풍성하게 얻어 지식과 믿음이 자라고 인격이 변화하고 실생활이 더 거룩해져야 할 것이다. 또 평안은 일차적으로 마음의 평안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몸의 건강과 물질적 유여함, 그리고 환경적 평화와 안정까지도 내포할 것이다. 이러한 평안은 하나님께서만 주실 수 있다.

[3-5절]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기쁨으로 항상 간구한 이유는 그들이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 안에서 교제함을 인함’이었다. ‘첫날부터 이제까지’라는 말은 사도 바울이 빌립보에 복음을 전한 그때 곧 그들이 그를 통해 예수님을 알고 믿고 구원받았던 그 날부터 로마 감옥에서 이 편지를 쓰는 당시까지, 주후 50년경부터 61년경까지 약 11년간일 것이다.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한다’는 원어(테 코이노니아 휘몬 에이스 토 유앙겔리온)는 ‘복음에 참여한다’는 뜻이라고 본다(NASB). 복음에 참여했다는 말은 빌립보교회가 사도 바울의 전파하는 복음을 듣고 그 말씀을 믿어 구원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협력하는 복음의 협력자가 되었다는 뜻이라고 본다. 빌립보 교인들은 사도 바울의 복음 사역을 위해 기도하였고 또 헌금으로 도왔다.

[6절]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착한 일’은 빌립보 교인들 속에 주신 구원 곧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을 가리킨다고 본다.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구주이시다. 그는 창세 전에 택하신 자들을 때가 되어 구원하신다. 그는 우리 속에 선한 일을 시작하셨다. 히브리서 12:2는 예수님을 ‘믿음의 주(主)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라고 표현하는데, ‘믿음의 주’라는 말은 ‘시작자, 조성자’라는 뜻이고 ‘온전케 하시는 이’는 ‘완성자’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을 주셔서 믿음으로 구원받게 하셨고 그의 재림의 날까지 그 믿음이 자라게 하시고 온전케 되게 하신다.

[7-8절]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 대해 확신을 가진 근거는, 그들이 그의 마음에 있었기 때문이고 또 그가 복음을 변명하고 확정할 때 그들이 그와 함께 입장을 같이 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파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이단사설들로부터 복음을 변호하였다. 그때 빌립보 교인들은 사도 바울과 입장을 같이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믿음을 증거하였고 또 그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되었을 것이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증인이라고 말하면서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랑하고 사모한다고 말하였다.

[9-11절]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사도 바울은 몇 가지 기도 제목을 열거한다. 첫째로, 그는 그들의 사랑이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여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기를 기도하였다. ‘총명’이라는 원어(아이스데시스)는 ‘이해력, 분별력’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되 분별력 있는 사랑을 해야 된다. 지식과 분별력이 없는 사랑은 우리로 잘못된 길을 가게 하고 잘못된 열심을 일으킨다.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우리의 말과 행위가 ‘얼마큼 세속적이어도 괜찮을까?’를 생각지 말고 ‘무엇이 가장 선한 것인가?’를 생각해야 하고 그것을 사랑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선한 일은 하나님을 섬기며 주 예수를 믿는 일이요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영혼들을 구원하는 일이다. 이 세상의 일들 중에 믿음과 영혼 구원의 일보다 더 귀한 일은 없다.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그 일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 우리의 삶 가운데 가장 귀한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하루 중 가장 좋은 시간은 성경책을 읽고 기도하는 시간이며 일주일에 가장 좋은 시간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시간이다. 이 세상의 모든 일은 다 썩는 일이요 예수님을 믿는 일만 썩지 않고 영생하는 일이다. 요한복음 6:27, 29,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그러므로 믿음의 일은 성도의 본업이요 그 외의 일들은 다 부업이다. 세월이 빠르게 지나 우리가 죽음의 문 앞에 서게 될 때에 우리는 이 사실을 실감하게 될 것이다.

둘째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기’를 기도하였다. ‘진실하여’라는 원어(에일리크리네스)는 ‘햇빛에 비추어 입증된, 순수한’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밝은 태양 빛 아래서 한 점의 흠이 없을 정도로 진실하고 흠없는 자가 되기를 기도해야 한다. 사도 베드로도 베드로후서 3:14에서 주의 재림과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는 성도들에게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고 교훈하였다.

셋째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기도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라는 말은 요한복음 15장에 나오는 주님의 포도나무 비유를 생각나게 한다. 주께서는 “너희가 내 안에 거하면 많은 열매를 맺지만,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즉 그가 주신 의(義)와 생명과 힘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의의 열매를 많이 맺을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릴 수 있는 것이다.

본문은 몇 가지 교훈을 준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하자. 하나님께서는 우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셨다. 그것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은 구원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온전하게 이루실 것이다. 그는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으시고 세상 끝날까지 지키시고 함께하실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 사역에 동참하자. 빌립보 교인들은 하나님의 복음으로 구원을 받았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복음 사역에 기도와 헌금으로 동참하였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의 심정은 더욱 깊어졌다. 오늘날도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 사역에 동참하는 자가 되자.

셋째로, 우리는 우리의 온전한 삶을 위해 기도하자.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분별력 있는 사랑을 가지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고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기도하였다. 로마서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우리는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

 

12-19절, 기쁨의 간증

[12절]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나의 당한 일’이란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옥에 갇히게 된 일을 가리킨다. 그것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되었다는 말은 사도 바울이 옥에 갇힘으로 복음 전파의 일이 도리어 진전되고 확장되었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사랑하는 종들에게 닥친 어려운 일들까지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섭리하신다(롬 8:28). 고난은 성도의 인격을 깨끗하고 거룩하게 만들며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만들며 온유하고 겸손하게 만든다. 전도에 있어서도, 만일 우리가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 앞에 참으로 충성하기만 한다면, 고난과 핍박이 전도와 영혼 구원의 일을 중단시키거나 좌절시키지 못하며 오히려 복음의 진전과 확장을 가져올 것이다.

[13-14절]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 안에서 신뢰하므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

‘시위대’(프라이토리온)라는 말은 로마 황제의 시위대 뜰을 가리키는 것 같다(BDAG). 사도 바울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다는 말은 그가 옥에 갇힌 것이 그의 어떤 잘못 때문에가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전하는 것 때문이라는 사실이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다는 뜻이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혔으나 ‘형제 중 다수’는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다. ‘주 안에서’라는 말은 ‘형제 중 다수’에 연결되는 말이라고 본다(KJV, NIV). 담대히 전도한 자들은 주 안에 있는 형제들이었다. 그들은 주님을 믿음으로 주님과 연합된 자들이다. ‘나의 매임을 인하여 . . . 신뢰하므로’라는 말은 형제들이 사도 바울의 매임 때문에 복음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는 뜻일 것이다. 사도 바울의 전한 복음의 진실성은 그의 옥에 갇힘을 통해 확인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겁 없이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다. 복음에 대한 신뢰와 확신은 담력 있는 증거를 낳았다. 이와 같이 한 사람의 고난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하였다. 이것은 확실히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었다.

[15-17절]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질투와 경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명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전도를 하는 데도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다. 어떤 이들은 질투와 경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였다. 그들은 사도 바울을 질투하며 그와 경쟁하는 마음으로 일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였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함으로 또 참으로 영혼들을 불쌍히 여김으로 전도하였다. 전통본문은 16절과 17절의 순서가 반대이다(Byz, KJV).

전자의 사람들은 바울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자들이었다. 그들은 옥에 갇힌 바울에게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였다. 교회 안에 어떻게 이런 자들이 있을 수 있는지 의아스럽지만, 여하튼 그런 자들이 있었다. 그들이 복음을 전한 것은 순수한 동기에서가 아니었다. 그들의 동기는 경쟁심과 이기적 야망이었다. 그들에게는 그리스도가 중요하거나 구원할 영혼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단지 자기들의 이름과 명예가 중요했다. 이런 자들이 진실한 신자일지 우리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후자의 사람들은 바울이 복음을 변명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였다. 복음을 변명하는 것은 갈라디아서에서 보듯이 율법주의 사상을 가진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변호하는 것을 가리켰다. 바울은 복음을 전파할 뿐 아니라, 또한 그 복음을 변호해야 했다. 사탄은 때때로 복음을 정면으로 반대했을 뿐 아니라, 때때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듯하면서 교묘히 그것을 가감하고 변질시키려 했다. 그러므로 전도자는 전파와 변호의 일을 다 감당해야 한다. 교리적 논쟁을 싫어하는 것은 잘못된 태도이다. 복음의 변호가 실패하면 복음의 전파도 헛되게 될 것이다.

이 일을 사랑으로 한다는 말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므로, 또 옥에 갇힌 바울을 사랑하므로, 또 죄와 멸망의 길에서 방황하는 영혼들을 사랑하므로 복음을 전파한다는 뜻일 것이다.

[18절]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어떤 이들은 겉모습으로만 전도했고, 어떤 이들은 진실한 마음으로 전도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어떤 방식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파되시든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파되신다면 기뻐하고 또 기뻐하겠다고 말한다. 감옥이 그의 기쁨을 빼앗을 수 없었고 감옥이 슬픔의 이유가 될 수 없었다. 옥에 갇힌 것이 오히려 복음의 확장을 가져왔다. 그리스도만 바르게 전파된다면, 심지어 잘못된 동기로 그렇게 하는 자들이 있다 할지라도, 그는 기뻐할 수 있었다.

물론, 본문의 말씀은 전도의 방식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으로 오해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주의 종들이 악과 타협하면서 전도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믿지 않는 자와 부당하게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고 가르쳤다(고후 6:14-17). 단지 본문의 뜻은, 비록 잘못된 동기와 방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자들이 있을지라도 그들이 그를 바르게만 전한다면 우리는 그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해지시는 것 때문에 기뻐할 수 있다는 것이다.

[19절] [이는] 이것이 너희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영]의 도우심으로 내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앎이니라].

본문은 앞절에서 말한 그의 기뻐함의 이유를 제시한다. ‘이것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시위대 안에서 전파되는 것을 가리킨다.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도 불리신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관계 곧 삼위일체의 신비를 나타낸다. ‘너희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도우심으로’라는 말은 하나님의 작정된 뜻이 우리의 간구와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짐을 보인다. 기도는 하나님의 선한 일을 이루는 데 필수적이다. ‘내 구원’은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풀려나는 것을 가리킬 것이다. 복음이 시위대 안에 전파됨으로 또 빌립보 교인들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도우심으로 바울은 그곳에서 풀려날 것이다. 바울은 그 일을 내다보며 또한 기뻐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구원 사역에 있어서 실패가 없으시다는 사실을 깨닫자. 하나님의 사도인 바울은 옥에 갇혔지만, 복음이 시위대 안에서 확장되게 하셨고 또 그의 갇힘 때문에 도리어 많은 형제들이 분발하여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둘째로, 우리는 전도할 때 바른 동기로 해야 한다. 우리는 전도할 때 결코 경쟁심이나 외식으로 하지 말고 오직 창조주 하나님과 우리 주님과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또 지금도 멸망하고 있는 수많은 영혼들을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구주와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파되시는 일과 만세 전에 하나님의 택하신 영혼들이 구원을 받는 일 때문에 기뻐하자. 바울은 로마의 감옥 중에서도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는 것으로 인하여 기뻐하였다. 이 세상에서 전도보다 더 귀한 일은 없다. 죄책과 온갖 불행의 멍에 아래 살며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을 영혼을 구원해내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은 없다.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일이다.

 

20-26절, 그리스도를 위하여

[20-21절] [나는]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바울이 말하는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의 내용은 그가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않고 항상 그리스도만을 위해 살고자 하는 것이다.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않다’는 것은 범사에 양심적으로 산다는 것을 말한다. 성도는 진실과 의를 생명으로 여기며 범사에 양심적으로 살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살든지 죽든지 그의 몸에서 그리스도께서 존귀하게 되시게 하기를 항상 아주 담대히 원했다. 그것이 그의 생활 신조이었다. 그것은 모든 성도가 본받을 만한 일이다.

바울이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만 존귀케 하기를 원한 까닭은 그가 사는 것이 그 자신이 사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서, 그를 통해 사시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갈라디아서 2:20에서도 비슷하게 말하였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자신이 그리스도만 위한다면 사는 것뿐 아니라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말한다.

[22-24절]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육신으로 사는 것’은 육신의 생명 연장을 뜻하며, ‘내 일의 열매’라는 말은 그가 살면 주님과 복음 사역을 위해 더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을 의미하였다고 본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사는 것과 죽는 것, 그 두 사이에 끼어 있다고 말하며 또 그 둘 중에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 즉 죽는 것이 더 좋다고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을 알고 영생과 천국의 진리를 아는 모든 사람이 다 동감할 말이다. 이 세상은 수고로운 세상이요 광야와 눈물의 골짜기와 같고 죽음의 그늘진 땅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계신 천국은 참된 안식과 기쁨과 생명의 충만이 있는 곳이다.

그러나 바울은 죽어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을 더 좋아하고 더 사모하지만, 교회를 위하여, 성도들을 위하여 살아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말한다. ‘유익하다’는 원어(아낭카이오스 ajnagkai'o")는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필요하리라.’ 이것은 오늘날 모든 사역자들과 성도들의 인생관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가 하나님의 뜻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그의 교회 곧 성도들을 위하여 살지 않는다면 우리가 반드시 살아야 할 이유는 없다.

[25-26절]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를 인하여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 믿음의 성장과 기쁨을 위하여’--이것이 바울이 살아야 할 이유이다. 그것 외에 다른 이유가 없었다. 만일 그가 해야 할 사명을 다해서 더 이상 성도들의 믿음의 성장과 기쁨을 위할 것이 없다면, 그는 더 이상 살기를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성도들의 유익을 위하여 살 필요성이 있다는 확신이 생겼을 때, 그는 자신이 죽지 않고 살아서 그들의 믿음의 성장과 기쁨을 위해 그들과 함께 거할 것임을 알았다. 26절의 ‘자랑’이라는 원어(카우케마)는 ‘기쁨’으로 번역할 수 있다(KJV). 문맥상 그것이 더 좋아 보인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감옥에서 풀려나서 빌립보교회에 가서 그들과 함께 교제를 나눔으로써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들의 기쁨이 바울로 인해 풍성하게 되리라고 믿고 있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본문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삶에 대해 교훈한다.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야 한다. 우리가 살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리고 성도들의 믿음의 유익과 기쁨을 위해 살 것이며, 우리가 죽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천국에서 거하는 더 좋은 복을 누릴 것이다. 우리에게는 사는 것과 죽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아 영원하고 복된 천국과 영생을 소유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5:8-9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오직 하나님만 위해서 산다. 바울은 로마서 14:7-8에서는 증거하기를,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고 했고, 또 고린도후서 5:14-15에서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하였다.

우리는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는 자들이며 구원받은 자들이 확실한지 우리 자신을 점검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의 진실함과, 우리의 삶의 첫 번째 목적과, 우리의 생각과 행동의 첫 번째 가치를 점검하자. 우리는 오직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며 살든지 죽든지 우리 몸에서 예수 그리스도만 존귀케 되기를 소원하자.

 

27-30절,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27절]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일심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리스도의 대리적 속죄의 죽음으로 죄인들이 그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소식이다. 이것이 십자가 속죄의 복음이며 사죄(赦罪)와 칭의(稱義)의 복음 곧 하나님의 은혜의 구원의 복음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는 데서부터 시작하여 복음 안에서 값없이 주신 의에 일치하게 죄짓지 않고 의롭게 사는 것과 할 수 있는 대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널리 전하고 변호하는 일을 위하여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복음에 합당하게 사는 삶이어야 한다. 바울은 에베소서 4:1에서도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라”고 교훈하였다. 하나님께서 복음으로 우리를 부르신 방향이 있다. 우리는 그 방향을 역행하지 말고 그 방향대로 바르게 나아가야 한다.

특히,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생활로 두 가지를 언급하였다. 하나는 복음을 위한 일치된 협력이다. 우리가 복음을 바르게 이해하고 복음에 합당하게 행한다면, 우리는 복음을 위해 일심으로 서서 한 뜻으로 협력할 수 있을 것이다. ‘일심으로,’ ‘한 뜻으로’라는 말들은 교회가 생각과 뜻에 있어서 일치되어야 함을 보인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10에서도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빌립보서 2:2에서는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으라”고 말했다. 성경은 ‘마음을 같이하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고후 13:11; 벧전 3:8). 예루살렘 교회는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했고(행 1:14),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고(행 2:46),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했고(행 4:32),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였다(행 5:12). 이와 같이, 우리는 일치된 마음으로 복음을 믿고 전파하고 변호하고 복음을 위해 협력해야 한다.

[28절]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않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저희에게는 멸망의 빙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빙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니라.

복음에 합당한 생활의 또 한가지는 대적자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복음을 믿으려 할 때와 복음을 전하려 할 때 항상 대적자들이 나타난다. 그것은 사탄의 방해 때문이다. 사탄은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과 성도들이 믿음에 굳게 서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 그러므로 믿음의 생활과 전도의 생활에는 항상 환난과 핍박이 있다. 그러나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자들과 그 복음에 합당하게 사는 자들은 그런 환난과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고 이겨낼 수 있다.

성도의 환난과 핍박은 그것을 일으키는 자들에게는 멸망의 증표이며, 그것을 당하는 성도들에게는 구원의 증표이다.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니라’는 말은 이렇게 진실히 믿고 핍박까지 당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라는 뜻이다. 우리가 받은 모든 좋은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다(고전 4:7). 우리의 우리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고전 15:10). 우리가 환난과 핍박을 받는 것도, 또 그것을 잘 이겨나가는 것도 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 곧 하나님의 은혜이다.

[29-30절]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성도가 하나님께 은혜로 받은 구원의 삶은 그리스도를 위한 삶이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도 받는 삶이다. 그리스도를 위한 삶 속에는 당연히 그를 위해 고난도 받는 것이 포함된다. 자기를 부정하고 십자가를 지는 삶은 그리스도를 위해 수고하고, 그리스도를 위해 조롱을 당하고, 그리스도를 위해 핍박을 받고, 그리스도를 위해 순교하는 자리에까지 나아가는 삶이다. 주께서는 친히 말씀하시기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고 하셨다(마 5:11-12). 바울에게는 그런 고난과 싸움이 있었다. 고린도전서와 고린도후서에서 그는 자신이 전도의 일을 하면서 당한 고난을 자세히 증거하였다(고전 4:9-13; 고후 6:4-10; 11:23-27). 바울뿐 아니라 빌립보교회도 같은 것을 경험하고 있었다. 초대교회는 많은 고난과 핍박을 경험한 교회이었다. 우리나라의 초대교회도 그러하였다. 모든 시대의 성도들은 고난을 각오하며 살아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자. 그것은 모든 죄를 버리고 경건하게 살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행하는 삶이며 또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를 위해 사는 삶이다. 우리가 복음으로 구원받은 자들이라면 그래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한 마음으로 협력하자. 복음의 핵심적 내용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이며 그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이다. 복음은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우리는 그 일을 위해 한 마음으로 협력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우리를 대적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과 그의 교회를 위해 고난도 받을 각오를 하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은 십자가의 길이었고 사도들의 간 길도 많은 고난과 순교의 길이었다. 오늘날 우리도 예수님을 믿고 따를 때, 고난을 각오하고 주를 위해 죽을 각오도 하며 따라야 한다.

 

 

2장: 기쁨의 봉사

1-11절, 겸손한 마음으로

[1-4절]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있을진대]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빌립보 교인들이 하나님을 진실히 믿고 또 그의 은혜를 참으로 받은 자들이라면 그들 속에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어떤 권면이나 격려나 위로가 있을 것이며 그들은 바울의 권면을 유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면, 이 권면을 유념해야 한다.

바울은 우선 일심단합하라고 권면한다. ‘같이하여,’ ‘같은 사랑,’ ‘합하여,’ ‘한 마음’ 등 같은 뜻의 말이 네 번 반복되었다. 그는 에베소서에서도 그리스도의 몸이 하나임을 강조했다. 분열은 육신의 일이며 천국의 모습이 아니다. 분열하는 자는 회개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물론 교회의 일치는 진리 안에서의 일치이다. 이단과 정통이 하나되는 것을 말하거나 교회와 세상이 하나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교회연합운동은 기독교의 근본적 교리들을 붙들지 않기 때문에 옛날 노아 시대 홍수 심판 후의 바벨탑 운동과 같다. 형제 사랑을 강조한 요한일서도 바른 신앙과 이단을 구별하고 형제 사랑이 바른 믿음 안에서 이루어져야 함을 교훈했다.

바울은 또 아무 일에든지 다툼과 허영으로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라고 권면한다. ‘다툼’이라는 원어는 당파심 혹은 이기적 야망이라는 뜻이다. 주의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지나친 경쟁심은 좋지 않다. 또 우리는 다툼과 허영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세상에 속한 헛된 것들을 추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만 받들며 이루기를 소원해야 한다. 또 사람이 겸손하려면, 자기 자신의 부족을 알고 자기의 자기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아야 한다. 그럴 때 사람은 교만하거나 자랑하지 않을 수 있다. 또 우리는 남의 약점만 보는 자가 되지 말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은혜로 주신 장점을 보고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길 줄 아는 자가 되어야 한다.

바울은 또 성도들이 자기 일만 돌아보지 말고 다른 이들의 일도 돌아보라고 권면한다. 다른 이들의 일이란 다른 이들의 신앙생활에 유익이 되는 일을 가리킨다. 그런 관심을 가지는 것이 참된 사랑이다. 참된 사랑은 다른 사람들을 위하는 이타적 마음가짐이다.

바울은 성도들이 겸손히 일치단합하고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않고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고 다른 사람의 신앙적 유익을 위해 힘쓰는 것을 봄으로 기쁨이 충만하기를 원한다. 목회자들의 기쁨은 성도들이 성경의 진리대로 바로 믿고 바로 사는 것을 보는 것이다. 요한도 성도들이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을 보니 심히 기쁘며 그런 소식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다고 말했다(요이 4; 요삼 3-4).

[5-8절]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므로 하나님과 동등됨을 탈취물로 여기지 않으셨으나](원문 직역)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을 들어 겸손을 교훈하였다. 예수께서는 본래 하나님과 동등된 분이시지, 그의 선행에 대한 보상으로 그것을 얻으신 것이 아니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비우셨다는 말은 그가 그의 신성(神性)을 포기하셨다는 뜻이 아니고, 그가 그의 신적 속성들의 사용을 일시적으로 보류하셨다는 뜻이라고 본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비천한 마구간에서 사람으로 출생하셨고, 인간 부모 밑에서, 목수인 요셉의 돌볾 아래서 30년 동안 조용하게 순종하며 사셨고, 공적 전도 사역을 하실 때에도 죄인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가난한 생활을 하셨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이다(요 1:14). 그는 마침내 십자가에 못박혀 죽기까지 하셨다. 이것이 예수님의 놀라운 겸손이다.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기까지 아버지께 겸손하게 복종하셨던 것이다.

[9-11절]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이것은 인간 예수님의 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이었다. 주 예수의 신성(神性)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사람이 되신 성육신 이전이나 이후나, 부활 전이나 부활 후나 변함이 없으시지만, 그의 인성(人性)은 부활 전과 후에 큰 변화가 있었다. 그는 부활하신 후 지극히 크신 영광 곧 신성의 영광을 받으셨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 2:11-12에서,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노릇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본문은 우리가 겸손한 마음으로 일심단합하고 다툼이나 허영을 버리고 다른 사람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며 다른 사람의 신앙적 유익을 위하는 자가 되라고 교훈한다. 우리 주 예수께서는 겸손의 본이 되셨다. 우리는 그의 성육신과 십자가에 죽으심의 겸손을 깊이 깨닫고 그를 본받아 겸손한 마음으로 일치단합하여 하나님의 일, 곧 복음 전도의 일과 다른 성도들의 신앙적 유익을 위해 힘쓰는 자들이 되자.

 

12-18절, 너희 구원을 이루라

[12절]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항상 복종하여’라는 원어(카도스 판토테 휘페쿠사테)는 ‘너희가 항상 복종했던 바와 같이’라는 뜻이다. 원문대로 다시 읽어보면,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항상 복종했던 바와 같이,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빌립보 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히 믿었고 항상 복종하였다. 사도 바울은 그들의 복종이 지금 그가 떠나 있는 때에도 계속되기를 원하고 있다.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를 보든지 안 보든지 하나님께 항상 복종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복종하되 두렵고 떨림으로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다. 그는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심판자이시다.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는 자들에게는 무서운 저주가 선언되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큰 구원을 받았지만, 죄 가운데 떨어지지 않기 위해 항상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죄는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바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구원’은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을 가리킨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자들은 이미 구원을 받았다. 믿는 이들은 의(義)와 거룩함을 얻었다(롬 3:24; 히 10:10, 14). 우리가 받은 의와 거룩함은 완전하다. 그것은 법적인 의미이다. 그러므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은 어떤 이들이 주장하듯이 우리의 선행이 구원의 공로가 됨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죗값을 다 지불하셨고 의를 이루셨고 그 의는 완전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무엇을 행하여 얻거나 무슨 공로를 쌓을 필요도 없고 쌓을 수도 없다. 오직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의를 감사히 받고 그 의를 우리의 삶 속에서 나타내어야 할 뿐이다.

성경은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임을 밝히 증거한다. 로마서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로마서 4:4-5,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에베소서 2:8-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그러므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은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은 구원, 곧 이미 받은 의(義)에 일치하는 인격과 삶을 현실 속에서 이루라는 뜻이라고 본다. 즉 순종의 생활을 가리킨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구원을 그들의 삶 속에서 나타내어야 한다. 이것이 성화(聖化)의 과정이다. 우리의 성화는 비록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불완전할지라도 하나님의 요구이며 성도들의 마땅한 길이다. 우리는 완전을 목표로 한 성화를 위해 소극적이거나 게으르지 말고 날마다 그 목표를 향해 열심히 달려가야 한다.

[13절] [이는]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하심이니라].

사도 바울은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말한 후에 즉시 우리의 순종 생활 즉 성화의 노력과 과정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하시는 일임을 증거한다. 하나님의 영께서 우리 속에 거하신다. 주의 피로 구속(救贖)받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에게는 성령의 교통하심과 도우심과 인도하심이 있다. 로마서 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그런데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의 활동은 우리의 자발적 소원과 노력으로 나타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자유 의지를 사용하셔서 자신의 뜻을 이루어 가신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소원을 가지고 그 소원을 따라 행한다. 경건해지려는 소원, 거룩해지려는 소원, 의로워지려는 소원, 선해지려는 소원, 그것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원이며 성령의 감동이다. 구원받은 성도에게도 남은 죄악성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경건하고 선한 소원을 따라 행함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이 그의 인격과 삶 속에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14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구원을 실제 삶 속에서 나타낸다고 하는 말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것은, 예를 들어,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는 것을 말한다. 교회에서 주의 일을 할 때 우리는 원망과 시비 즉 불평과 다툼을 삼가야 한다. 주께서는 일보다 우리의 성화된 인격을 더 원하신다. 원망, 불평, 분쟁, 다툼은 인격의 흠과 결함이다. 그것은 죄악이다. 우리는 그런 것들로부터 구원을 얻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그런 흠과 결함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교회에서 주를 위해 봉사할 때 원망, 불평, 분쟁, 다툼을 버리고 항상 사랑과 단결과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행해야 한다.

[15절]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성화의 목표는 한마디로 ‘흠 없는 인격과 삶’이다. 이 세상은 항상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이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바른 표준에서 볼 때 언제나 비뚤어져 있고 하나님의 뜻에 대항한다. 세상은 경건 대신 불경건을 좋아하고, 거룩 대신 더러움을 구하며, 의(義) 대신 불의를, 선(善) 대신 악을 따르며, 진실 대신 거짓을 택하는 세상이다. 하나님 없는 이 세상에 부패되지 않은 곳이 어디 있는가? 사람들은 사회개혁을 부르짖지만, 그것이 정말 가능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성도들은 이런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상에서 구원받은 자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불경건하고 부도덕한 이 세상에서 구원받은 자들답게 경건하고 도덕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성화는 바로 실제적인 경건과 거룩을 의미한다.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기대되는 삶은 이렇게 흠 없고 순전한 삶, 즉 신앙적으로, 도덕적으로 책망할 것이 없는 삶이다. 그런 삶이 바로 세상에서 ‘빛’이 된다. 성경은 하나님을 모르고 부도덕한 세상을 어두운 세상이라고 부른다(요 1:5; 벧전 2:9). 어두움은 무지와 부도덕을 가리킨다. 그러나 구원은 빛이다. 그것은 지식과 도덕성의 회복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알고 그의 뜻대로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사는 것이다. 예수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성도들의 구원받은 삶, 성화의 삶, 흠 없는 삶을 가리키신 것이다.

[16절]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도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나로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밝힌다’는 원어(에페코)는 ‘드러낸다, 나타낸다’는 뜻이거나(Thayer, KJV, NIV) ‘붙든다’(BDAG, NASB)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생명의 말씀’이다. 그것은 죽은 영혼을 살리는 말씀이다. 그것은 불경건하고 부도덕했던 영혼들을 새롭게 하는 말씀이다. 구원은 새 생명이며 새 생활이다. 그러므로 구원받았다고 하면서도 죄악된 옛 습관을 버리고 경건하고 거룩한 새 생활을 하지 않고 옛 생활에 계속하여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구원이 아닐 것이다. 구원받은 성도가 흠 없는 생활을 할 때, 생명의 말씀의 참됨이 드러난다.

뿐만 아니라, 만일 성도들이 구원에 합당한 삶을 살지 않는다면, 복음 전도자들의 수고는 헛되고 그들의 사역은 결실 없는 사역이 될 것이다. 그러나 성도들이 빛의 생활을 하게 될 때, 복음 전도자들의 수고는 헛되지 않으며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온 세상을 심판하시는 날 그 성도들은 전도자들의 기쁨과 자랑이 될 것이다. 바울은 본서신의 끝부분에서 성도들을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불렀다(4:1). 데살로니가전서 2:19-20에서도 그는,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고 말했다. 참된 성도들은 목회자의 기쁨과 자랑이다.

[17-18절]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믿음의 제물과 봉사’란 ‘믿음으로 하는 희생과 봉사’를 가리킨다. 빌립보 교인들은 진실한 믿음을 소유하였고 그 믿음으로 자신을 주께 드리며 주의 일을 위해 즐거이 봉사하였다. 그것은 사도 바울을 기쁘게 한 일이었다. 사도 바울은 그들의 믿음의 희생과 봉사 위에 자신을 쏟아 부을지라도 기뻐하겠다고 고백한다. ‘자신을 관제(灌祭, 붓는 제사)로 드린다’는 말은 그의 순교를 의미하는 것 같다. 사도 바울은 주를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쳤다. 그것은 억지로 하는, 불평스런 봉사가 아니었다. 그것은 기쁨의 헌신과 봉사이었다. 옥에 갇혀 있는 그는 죽을 각오를 하며 이렇게 고백하는 것이다. “오, 빌립보교회여, 참된 믿음과 믿음의 삶만 나타내라. 나는 나의 생명을 그대들 위에 부을 준비가 되어 있다.”

구원은 기쁜 사건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쁨의 원천이시다. 다윗은 시편 16:11에서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다”고 고백하였다. 성령의 열매는 기쁨이다(갈 5:22). 천국은 기쁨의 세계이다(롬 14:17). 사람이 행복하지 않고는 기뻐할 수 없다. 구원은 행복한 일이다. 구원의 복음을 전한 사도 바울은 기쁨의 사도이었다. 그는 옥 중에서도 기뻐하였다. 또 그는 성도들에게 기뻐하라고 권면하였다. 이 기쁨은 오늘 우리의 것이다. 어떤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성도는 하나님으로 인해, 구원으로 인해, 천국 소망으로 인해, 성령 안에서 기뻐할 수 있다. 이것은 구원받지 못한 자들은 느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의 새 생명을 얻고 구원에 합당하게 주께 순종하며 흠 없는 삶을 위해 성실히 노력하는 모든 진실한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항상 이 기쁨을 체험할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주신 법적인 구원, 곧 완전한 의(義)에 일치하는 인격과 삶을 현실 속에서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성화(聖化)이다. 성화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은 의(義)를 우리의 삶 속에서 흠 없는 인격과 삶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얻은 의를 우리의 삶 속에 실제로 실천하고 나타내는 것이다.

둘째로, 그러나 우리의 성화는 이 세상에서 불완전하다. 구원받은 우리 속에는 죄성이 남아 있다. 이것은 과거의 죄악된 습관으로 나타날 수 있다. 또 세상은 악하며 마귀의 시험은 도처에 있다. 성도는 이 세상 사는 동안 영적 싸움을 하며 이 싸움에서 항상 이기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미래에 누릴 영화는 우리의 성화의 정도에 의존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에 의존한다. 그러나 비록 그렇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 세상에서 거룩을 이루어야 한다. 우리는 이 어두운 세상에서 빛들로 살아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또 다른 이들의 구원을 위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셋째로, 성도의 성화의 삶, 곧 순종의 삶은 결코 무겁고 엄숙한 일만이 아니고 매우 기쁜 일이다. 구원에 합당한 삶, 곧 흠 없는 삶을 살고자 순종하며 애쓰는 자들은 이 기쁨을 받아 누리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기쁨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성령의 열매는 기쁨이다.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기뻐할 수 있으며 항상 기뻐해야 한다.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은 우리가 항상 기뻐하기에 충분한 이유가 된다.

 

19-30절,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

[19-20절]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이는 뜻을 같이 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디모데는 사도 바울에게 귀한 동역자(同役者)이었다. 그는 바울과 뜻을 같이할 수 있는 자이었다. 주의 일, 교회의 일을 함에 있어서 뜻을 같이하고 생각과 정신을 같이할 수 있는 자가 있다는 것은 복이다. 아모스 3:3, “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同行)하겠으며.” 또 디모데는 빌립보 교인들의 사정, 곧 그들의 형편과 처지를 진심으로 생각할 수 있는 자이었다. 참된 일꾼은 교인들의 형편과 처지를 살필 수 있는 자이다. 예나 지금이나 일꾼들은 많으나 충성된 일꾼은 드문 것 같다. 옥에 갇힌 사도 바울에게는 지금 뜻을 같이하여 그들의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디모데 외에는 없었다.

[21-24절] [이는]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수고하였음이니라]. 그러므로 내가 내 일이 어떻게 될 것을 보아서 곧 이 사람을 보내기를 바라고 나도 속히 가기를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본문은 디모데가 바울에게 둘도 없는 귀한 동역자인 이유를 말한다. ‘그리스도 예수의 일’은 복음을 전파하고 변호하고 교회를 세우는 일이다. 성도들은 다 자기 일에 바쁘고 그리스도의 예수의 일에는 생각과 마음과 시간을 쓰지 못했다. 그러나 디모데는 그렇지 않았다. ‘디모데의 연단’이라는 표현을 보면, 디모데는 여러 가지 시험과 환난을 통해 인격의 훈련을 받았던 것 같다. 그런 고난은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이제 디모데의 신앙 인격은 진실한 교인들에게 알려졌고 인정을 받았다. 디모데는 마치 자식이 아비에게 행함같이 사도 바울과 함께 복음을 위해 수고하였다. 오늘날에는 누가 사도 바울과 디모데처럼 복음을 위해 수고할 것인가?

사도 바울은 지금 옥에 갇혀 있으므로 자유롭지 못하지만, 그의 수족(手足)이 되어줄 사람이 디모데이었다. 사도 바울은 할 수 있는 대로 속히 디모데를 빌립보 교인들에게 보내어 자신의 소식을 전하며 그 교회의 형편을 살피게 할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그는 자기 자신도 속히 가게 될 것을 주 안에서 확신한다.

[25절]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나의 쓸 것을 돕는 자라.

사도 바울에게는 에바브로디도라는 동역자가 또 한 사람 있었다. 그는 빌립보교회의 사자로서 사도 바울의 쓸 것을 돕기 위해 파송되어 왔던 자이었다. 그는 주 안에서 사도 바울의 형제이었고 바울과 함께 복음을 위해 수고한 자이었다. 사도 바울은 그를 ‘함께 군사된 자’라고 표현한다. 개인의 신앙생활과 영혼 구원의 전도는 마귀와 죄와 세상과의 영적 전쟁이다. 따라서 모든 성도는 영적으로 그리스도의 군병들이다. 특히, 주의 종들과 전도자들이 그러하다.

군인들은 전쟁 때를 위하여 잘 훈련되어야 한다. 성도들의 훈련은 성경말씀들을 읽고 듣고 배우며 그 말씀들을 실천하고 기도하기를 힘쓰는 생활이다. 말씀과 기도로 훈련된 성도는 어려운 일이 닥쳐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군인에게 필요한 것은 철저한 훈련과 죽음을 각오한 정신이다. 군인은 상관의 명령에 절대 복종해야 하며 죽음의 싸움터에도 용기 있게 나가야 한다. 성도들과 주의 종들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그를 위해 죽도록 충성해야 한다.

[26절]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

사도 바울에게 왔던 에바브로디도는 병이 들었다. 그가 병 들었다는 소식이 빌립보교회에 전해졌다.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 교인들을 사랑하고 간절히 사모했기 때문에 자기의 병든 소식 때문에 빌립보 교인들이 걱정할까봐 심히 근심하였다. 사랑은 자기를 먼저 생각하지 않고 상대방을 먼저 생각하며, 사랑은 자기 자신을 위해 염려하지 않고 상대방을 위해 염려하는 것이다. 에바브로디도에게 바로 그런 사랑의 심령이 있었다. 오늘 우리에게도 성도들을 위한 이런 진실한 사랑이 필요하다.

[27절] 저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저를 긍휼히 여기셨고 저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

사람의 육신은 참으로 약하다. 에바브로디도는 병들어 거의 죽게 되었었다. 그것은 사도 바울에게 근심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바울 사도라 하더라도 병을 고칠 수 있는 능력은 없었던 것 같다. 하나님께서 초대교회에 주셨던 병 고침의 은사는 사도시대 말기에 점점 사라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에바브로디도를 긍휼히 여겨주셨다. 병의 치료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에 달려 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기만 한다면, 고치지 못할 질병이 무엇이랴? 그러므로 우리가 병들었을 때는 오직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의 긍휼과 은혜를 구할 것밖에 없다. 야고보서 5:14-16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우리는 병들었을 때 먼저 우리 자신을 살피고 혹시 마음에 거리끼는 실수나 부족이나 죄가 있으면 다 고백하고 버리기를 결심하고 병 낫기를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물론 하나님께서 주신 의약적 치료도 감사히 사용할 수 있다.

[28절] 그러므로 내가 더욱 급히 저를 보낸 것은 너희로 저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하며 내 근심도 덜려 함이니.

사도 바울은 에바브로디도가 하나님의 긍휼로 병이 낫고 건강을 회복하자 그를 급히 빌립보교회로 돌려보냈다. 그것은 그를 봄으로써 빌립보 교인들이 기뻐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럼으로써 빌립보 교인들이 상심할까봐 염려했던 바울의 근심도 덜게 될 것이다. 이처럼 사랑은 상대방을 생각하고 그를 염려하는 마음으로 표현된다.

[29절] 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저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에바브로디도를 영접하라고 부탁한다. ‘모든 기쁨으로’라는 말은 마지못해 하는 영접이 아니고 진심에서 나오는 풍성한 기쁨과 즐거움의 자세로 영접하라는 뜻이다. 그는 에바브로디도에 대해서만 국한하여 말하지 않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고 말한다. 우리는 충성된 일꾼들을 모든 기쁨으로 영접하고 그들을 존귀히 여겨야 한다. 군대에서 좋은 장교들과 지휘관들이 필요하고 중요하듯이,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는 복음을 위해 진실하게 자신을 바친 충성된 일꾼들이 필요하고 중요하다. 만일 그런 자들이 없다면, 교회들은 참된 인도자들을 가지지 못할 것이며 주의 일들은 매우 쇠약해질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충성된 종들을 귀하게 여기신다. 그러므로 성도들도 그런 자들을 모든 기쁨으로 영접하고 귀하게 여겨야 한다.

[30절] 저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

에바브로디도는 어떤 인물이었는가? 에바드로디도는 죽을 병에 걸렸어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한 참으로 충성된 일꾼이었다. 그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놓은 자이었다. 그는 참으로 후대의 교회를 위해 희생적 봉사의 모범이 되었다. 주 예수께서는 그를 따르는 무리에게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명하셨다. 그것은 오늘날도 주를 믿고 따르는 모든 신자들에게 주시는 명령이며 교훈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충성하라고 명하신다. 무엇이 충성인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바르게 살다가 바르게 죽는 것이 참된 충성이다.

본문은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를 통해 교훈을 준다. 첫째로, 우리는 복음의 참된 동역자가 되고 또 함께 군사된 자가 되자.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는 사도 바울에게 그런 자이었다. 오늘날 교회에도 이런 좋은 일꾼들이 필요하다. 오늘날 교회에도 사도 바울 같은 올바른 종들이 필요하고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 같은 좋은 동역자들과 복음의 좋은 군사들이 필요하다. 오늘날에 하나님의 일을 위해 또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 누가 그런 사역과 역할을 감당할 것인가?

둘째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사모하자. 그리스도 예수의 일이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한 일, 곧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고 변호하고 그 복음을 믿은 자들의 모임인 교회를 견고하게 세우는 일이다. 사도 바울은 이 일을 위하여 수고했다. 또 많은 성도들이 자기 일에 바쁘고 주의 일에 관심이 적거나 없었을 때,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는 주를 위해 진실하게 바쳐졌다. 또 에바브로디도는 주님의 일을 하다가 병들었고 죽기에 이르렀으나 자기의 목숨을 돌아보지 않았다. 오늘날도 그리스도 예수의 일, 복음을 전하고 참 교회를 세우는 일을 사모하며 그 일을 위해 바쳐진 진실한 종들과 일꾼들이 필요하다.

셋째로, 교회와 성도들은 하나님의 충성된 종들과 일꾼들을 온전한 기쁨으로 영접하고 귀하게 여겨야 한다. 오늘날도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위해 바쳐진 충성된 종들도 필요하지만, 그런 자들을 온전한 기쁨으로 영접하고 귀하게 여기는 성도들도 필요하다. 교회는 주의 진실한 종들을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며 또 그들에게 복종해야 한다. 주께서는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10:40).

 

 

3장: 기쁨의 이유

1-9절, 내가 가진 의(義)

옥에 갇힌 사도 바울은 육신적으로 고통스러웠을 것이지만 기뻐했고 또 빌립보 교인들에게 기뻐하라고 권면했다. 사도 바울의 기쁨의 이유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의(義) 때문이었다.

[1절] 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교훈은 본서신의 주요 교훈이다. ‘주 안에서’라는 말은 기쁨의 이유와 원천을 보인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기쁨의 이유이시며 원천이시다. 예수님 외에 다른 것들은 우리에게 참된 기쁨의 이유가 되지 못한다. 건강도, 물질도, 육신의 아름다움도, 쾌락도, 세상 권세도 다 일시적이며 어느 날 없어지는 것들이다. 또 그것들을 가지고 있고 누리고 있을 때에도 그것들은 진정한 기쁨이 되지 못한다. 참 기쁨은 우리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평안 가운데 흘러나오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세상적 기쁨은 기쁨 후에, 아니 기쁨 중에도, 고통과 슬픔과 허탈이 있다.

우리의 기쁨은 그런 유의 것이 아니고 오직 예수님의 구원 때문에, 즉 우리의 죄 문제가 해결되었고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천국과 부활과 영생의 확실한 소망을 얻었기 때문에 갖게 되는 기쁨이다. 모든 슬픔은 근본적으로 죄의 결과이다. 죄가 없는 천국은 기쁨 충만한 곳이며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는 거기서 기쁨의 삶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세상에서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 안에서 기뻐할 수 있고 또 기뻐해야 한다.

바울은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너희에게 안전하다고 표현했다. 진리의 교훈은, 비록 이전부터 잘 아는 내용일지라도, 귀하고 안전하다. 새로운 교훈은 잘 분별하지 않으면 잘못된 길에 빠지기 쉽다. 그런 점에서 옛것, 곧 잘 아는 성경적 교훈이 안전하다.

[2절]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할례당을 삼가라.

‘개들’은 도덕성이 없고 남을 물어뜯듯이 해치는 자들을 가리킨다. ‘손(損)할례당’이라는 원어(카타토메)는 ‘절단자’라는 뜻으로 할례의 참 뜻을 알지 못하고 몸만 상하게 한 자, 즉 거짓 할례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것은 할례를 주장하는 유대교인들을 비꼬아 한 말이라고 본다. 그들은 참 경건도 도덕성도 잃어버린 자들이었다. 성도들은 그런 외식자들을 조심해야 한다.

[3절]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예배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

할례의 참 뜻은 마음의 성결에 있었다. 그것은 중생(重生)과 성화(聖化)를 상징했다고 본다. 참으로 중생하고 거룩하게 살고자 힘쓰는 자들이 참 할례당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예배하는 자들이다. 참된 예배는 하나님의 영의 감동과 도우심으로 해야 한다. 또 그들은 육체를 신뢰하지 않고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는 자들이다. 성도는 자신들이 죄악되고 허무하고 무가치함을 아는 자들이므로 그들은 자신의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만 높이고 주 예수 그리스도만 기뻐하고 자랑한다. 왜냐하면 주 예수 그리스도만 우리의 의(義)와 거룩과 완전이시요 주 예수 그리스도만 우리의 위로와 힘과 기쁨이시기 때문이다.

[4-6절]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바울은 저 율법주의 교사들처럼 육신적으로 자랑할 만한 자이었다. 그는 8일 만에 할례를 받은 유대인이며 베냐민 지파 족속이었다. 그는 율법에 정통한 바리새인이었고 외적으로는 흠 없는 자이었고 열심으로 말하면 교회를 핍박하기까지 한 자이었다.

[7-9절]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그리스도 때문에]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사도 바울은 전에 자신에게 유익하던 것들, 즉 유대인이라는 신분과 혈통, 율법을 지키는 행위의 의(義) 등을 다 해로 여기고 배설물로 여긴다고 말한다. 오늘날로 말하면, 외모, 학력, 재산, 건강, 가문, 경력, 사회적 신분 등을 배설물과 같이 여긴 것이다. 그것들의 가치가 과연 무엇인가? 구약 전도서의 말씀과 같이, 헛된 것이 아닌가? 사람들은 전쟁이나 지진이나 무서운 전염병 등으로 죽거나 비천해질 때 그것들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더욱이 그것들은 신앙에 방해거리이다. 그것들은 인간을 교만하게 만들고 영적인 일에 무감각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주 예수께서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유익하던 모든 것을 해로 여기며 배설물과 같이 여겼다. 성도들은 땅의 것들을 배설물과 같이 여길 줄 알아야 한다.

사도 바울이 세상의 것들을 배설물로 여겼던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義)를 최고의 가치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리스도를 위해’(디아 톤 크리스톤)[그리스도 때문에] 또 ‘내 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에’ 그러했다고 말한다. 성도가 가진 의(義)가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義)라는 것이 하나님의 복음의 요점이요 기독교의 진수(眞髓)이다. 이것이 바로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밝히 해설되고 강조된 복음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좋은 것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그 의와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고 무가치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에 오히려 해가 된다. 세상 것들은 결코 자랑거리가 아니다. 이 세상을 사랑하고 이 세상의 것들을 자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요일 2:15-17). 이 세상을 사랑하는 자는 데마처럼 어느 날 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다(딤후 4:10). 아무도 자기 자신을 부정하지 않고서는 진정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자랑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주 안에서 기뻐하자. 성도들의 기쁨은 이 세상의 것들 때문이 아니다. 물론 세상의 것이 있으면 기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기쁨은 그것들이 없어지면 함께 사라질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 것들이 얼마나 헛되고 덧없다는 것을 안다. 성도의 기쁨의 이유와 원천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구원이다.

둘째로, 우리는 세상에 속한 모든 좋은 것들을 배설물과 같이 여기자. 세상의 모든 좋은 것들은 이 세상의 삶을 위해 어느 정도 유익이 있으나 실상 허무하고 무가치하다. 우리의 육신적, 물질적 가치들은 우리가 죽음 앞에 설 때 다 허무하고 무가치하게 된다. 세상의 좋은 것들은 오히려 우리를 교만하게 만들고 참된 경건 생활을 방해한다.

셋째로,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오직 우리의 의(義)가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만 최고 가치로 여기며 고백하며 살아가자. 우리의 의(義)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뿐이며 그를 믿는 믿음뿐이다. 그것만이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고 용납되고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자녀가 되고 기도의 응답과 복을 받을 수 있는 근거이다.

 

10-16절, 부름의 상을 위하여

[10-11절]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를 원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 그의 성육신(成肉身), 그의 독특한 인격, 그의 속죄사역, 그의 은혜와 사랑은 참으로 깊고 신비한 사실들이다. 바울은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을 알기를 원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고통과 수치와 저주의 죽음을 죽으셨으나 3일 만에 부활하셨다. 그의 부활은 죽음을 영원히 이기신 부활이었다. 그의 부활체는 장차 성도의 부활체와 영생할 몸의 모습이었다. 장차 성도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같은 부활을 경험할 것이다. 바울은 복음을 위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했으나 그의 부활의 권능을 알기를 원한다. 예수님 믿는 우리 모두의 삶도 고난의 삶이다. 바울이 고난 중에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을 알고 부활에 이르기를 원했듯이, 우리 모두도 고난의 현실 속에서도 부활의 권능을 체험하기를 원한다.

[12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몸의 부활은 아직 미래의 사건이다. 그것은 육신적, 도덕적 완전 상태, 곧 완전 성화의 상태이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아직 불완전한 성화의 상태에 있다. 성도에게는 아직도 육신의 연약성이 남아 있다. 성도의 기쁨과 평안도 세상에서 때때로 흔들리고 일시적으로 위축된다. 사도 바울은 아직 부활을 얻었거나 완전 성화를 이루지 못했으나, 그것을 향하여 달음질하고 있다고 고백한다.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주시기로 작정하신 구원의 완성인 영광스런 몸의 구속(救贖) 곧 몸의 부활과 영생을 향해 달려간다는 뜻이다. 그것은 성도들에게 작정된 복이다.

성도의 삶은 부활과 영생을 향한 삶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해졌고 도덕적으로 완전한 자로 간주된다. 그 구원은 법적으로 완전하다. 그러나 우리는 장차 나타날 영광을 위해 성실히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우리가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은 의(義)는 장차 우리가 얻을 영광스런 부활과 영생을 보장하지만, 우리는 그 날을 위해 현재 성화(聖化)의 길을 성실히 달려야 한다. 성도들은 천국과 부활과 영생을 향해 달려가야 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로마서 6:22에서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고 말하였고, 갈라디아서 6:8에서는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썩는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고 말하였다.

[13-14절]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한가지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신앙생활에는 많은 일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오직 한가지이다. 누가복음 10:42의 전통사본에 보면, 예수께서는 ‘한가지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마리아처럼 주님의 발 아래 앉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이다. 요한복음 6:27, 29에 보면, 예수께서는 다른 모든 일은 ‘썩는 양식을 위해 일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며 영생하는 양식을 위해 일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사도 바울에게 참으로 중요한 한가지 일은 앞에 있는 푯대 혹은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는 것이었다. 그는 그 목표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1)이라고 표현한다. 그것은 구원의 완성 곧 영광스런 부활과 영생이다. 그것은 이미 법적으로 얻은 의(義)가 완전히 실현되는 것 즉 ‘완전 성화’이다. 사도 바울은 그 목표를 향해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으로 달려간다고 말한다. 성도는 잘한 일이든지 못한 일이든지 과거에 너무 집착하지 않는 것이 좋다. 성도는 지나간 날들에 잘못된 일들을 다 하나님께 고백하고 씻음 받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성도는 오직 완전 성화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야 한다. 우리는 열심히 성경 읽고 기도하며 예배 시간을 귀히 여기고 성경 교훈대로 살기를 힘써야 한다.

[15절]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온전히 이룬 자들’이라는 원어(텔레이오이 tevleioi)는 ‘완전한 자들’이라는 뜻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2:6에서도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한다”고 말했다. 성도의 완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법적 완전이다. 성도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법적으로 완전해졌다. 히브리서 10:14,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테텔레이오켄 teteleivwken).” 물론 이 완전은 실제적인 완전으로 나타나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골로새서 1:28에서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라고 말했다. 성도가 법적으로 얻은 완전한 의(義)는 자만(自滿)이나 나태의 구실이 되어서는 안 된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들은 이미 무엇을 얻었거나 이루었다고 자만하거나 나태하지 말고 뒤의 것을 잊어버리고 앞을 향해, 도덕적 완전을 향해 달려가야 한다.

[16절]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우리는 같은 규칙으로 행하고 같은 생각을 가지자](전통사본).2)

하나님의 진리는 변함이 없다. 시대는 변할지라도 하나님의 진리와 교훈은 동일하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적인 성장과 성화(聖化)의 정도가 어떠하든지 간에, 우리의 인격 형성이 얼마나 이루어졌든지 간에, 우리는 교만하거나 자랑하지 말고 또한 나태하거나 해이해지지도 말고 오직 신앙의 목표인 부활과 영생을 위해, 즉 완전 성화를 위해 진지하게, 성실하게 달려가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우리 모두의 신앙의 목표는 동일하다. 그것은 영광스런 부활과 영생이며 완전 성화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고난과 죽음을 통해 능력으로 영광의 부활에 이르셨다. 우리에게도 그 복되고 영광스러운 부활이 약속되어 있다.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목표는 한가지뿐이다. 그것은 죄 짓지 않고 의를 행하는 완전 성화의 삶이다. 하나님께서는 현재의 우리의 생각과 마음가짐과 삶을 중시하신다. 우리는 지금 의롭고 선하고 진실한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는 뒤에 있는 것들, 즉 과거의 성공과 실패의 자취들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앞에 있는 것, 즉 완전 성화의 목표를 향해, 주께서 부르신 그 부름의 상인 복되고 영광스런 부활을 향해 달려가자. 물론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으로 인해 완전한 의를 얻었고 거룩해졌다. 그러나 우리는 실제로 의롭고 거룩한 인격과 삶을 위해 달려가야 한다.

 

17-21절, 나를 본받으라

[17절]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

‘나를 본받으라’는 말은 두 가지 점을 포함할 것이다. 첫째는 이신칭의(以信稱義) 즉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의 확신이며, 둘째는 완전 성화(聖化)를 향한 성실한 달음질이다. 사람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사실은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며 우리의 구원의 내용이요 성도에게 생명과 같은 진리이다. 또 완전 성화를 향한 성실한 삶은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에게 합당한 일이다. 그것은 바로 경건한 삶이요 의로운 삶이다. 바울은 육체를 의지하거나 자랑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의(義)만 확신하는 복음 신앙을 가지고 있었고, 또 고난 중에도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목표를 향해 힘써 달리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이제 빌립보 교인들에게 그의 믿음과 그의 달음질을 본받으라고 담대히 권면한다.

“우리로 본을 삼은 것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는 말씀에서 ‘보이라’는 원어(스코페이테)는 ‘주목하라’는 뜻이다(NASB). 사도 바울을 본받는 자들이 있었다. 복음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지고 예수님을 믿고 완전을 향해 성실히 달려가는 진실한 성도들이 있었다. 빌립보 교인들은 그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었다. 오늘 우리도 그러하다. 우리는 성경의 교훈대로 믿고 경건하고 거룩한 삶을 위해 힘쓰는 자들을 주목해야 한다. 그들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본이 될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에게 위로와 격려가 될 것이다.

[18절] [이는]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행함이니라].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을 본받아야 할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복음의 원수로 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에 많은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할례를 받고 율법을 행해야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침으로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무효화시키는 잘못을 범하고 있었다. 또 그러면서 저 행위구원론자들은 십자가의 은혜의 복음만을 전파하였던 사도 바울과 그 동료들을 핍박하였다. 저런 거짓 교사들은 실상 예수 그리스도의 종들이 아니고 그의 원수들이었다. 사도 바울은 그런 자들에 대해서 갈라디아서에서 자세히 언급하며 논박하였다.

사도 바울은 교회 안에 있는 저 거짓 교사들과 이단자들에 대해 이미 여러 번 언급했지만,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고 있다. 사도 바울의 전도의 생애는 단지 복음을 전파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았고, 바른 복음을 변호하기 위해 때때로 싸워야 하였다. 이것이 초대교회의 현실이었고 또한 2천년 신약교회의 역사이었다. 오늘날도 그러하다. 오늘날도 교회 안에 배교자들과 또 그들과 타협하는 불성실한 종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참된 종들이 아니고 교회를 어지럽히는 자들이다. 오늘날도 진실한 종들과 성도들은 저 배교자들과 타협자들로 인하여 사도 바울처럼 눈물을 흘린다.

[19절]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사도 바울은 거짓 교사들과 이단자들에 대해 몇 가지로 묘사한다.

첫째로, 그들의 끝은 멸망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을 피할 수 없다. 요한계시록 19:20은 마지막 대 심판 전에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가 지옥 불못에 던지울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이와 같이 거짓 교사들의 결말도 지옥 불못이다.

둘째로, 그들의 신(神)은 그들의 배다. 이것은 그들이 육체적 욕심을 최고 가치로 알고 살고 있음을 암시한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먹는 것이 최고의 가치이며 그 외에도 그들은 물질욕, 정욕, 명예욕, 권세욕 등에 사로잡혀 그것들에 종노릇하는 자들이다. 탐심은 우상숭배이다. 그들은 욕심을 신으로 섬기는 자들이다.

셋째로, 그들의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다. 이 말씀은 그들의 현재의 영광이 결국 부끄러움이 될 것이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거짓 교사들과 이단자들에게 참된 영광을 주지 않으실 것이다. 그들의 영광은 사실상 그들의 수치이다. 마지막 날 그들에게는 큰 고통과 부끄러움이 있을 것이다.

넷째로, 그들은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들이다. ‘땅의 일’이란 썩어질 것, 허무한 것 그리고 죄악된 것을 의미한다. 요한일서 2:16에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고 증거했다. 하나님과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지 않는 모든 자들은 다 헛되고 죄악된 것만을 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20절] [이는]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있음이니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본문도 18절에 이어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을 본받아야 할 이유를 말한다. ‘시민권’이라는 원어(폴리튜마)는 ‘시민권’ 혹은 ‘나라’라는 뜻이다. 거짓 교사들과 달리, 주의 종들과 성도들은 천국 백성이며 천국의 시민권자이다. 이것은 얼마나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사실인가? 사람들은 미국 시민권을 부러워하지만, 천국 시민권은 미국 시민권보다 더 가치 있고 자랑스럽다.

우리는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국으로부터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고 있다. 지금 천국에 계신 주 예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이다(계 22:20). 우리는 그의 다시 오심을 기다린다. 주께서 다시 오시는 목적은 우리를 죄와 불행과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서이다. 구원은 하나이지만, 세 단계가 있다. 중생(重生)과 칭의(稱義)는 과거의 단계이고, 성화(聖化)는 현재의 단계이고, 영화(榮化)는 미래의 단계이다.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이미 얻었고, 성령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으로 거룩함을 이루어가지만, 장차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을 입게 될 것이다. 그때 우리는 실제로 죄와 불행과 죽음이 전혀 없는 삶을 경험할 것이다.

[21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할 수 있는 역사로](원문)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주 예수께서는 친히 만물을 자신에게 복종케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 그는 전능(全能)하신 주님이시다. 그는 다시 오셔서 그의 능력으로 우리의 낮고 비천한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실 것이다. 우리가 영생하기 위해 가질 부활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체와 같이 영광스러울 것이며 또 썩지 않는 강한 몸일 것이다(고전 15:42-44). 사람들은 비싸고 좋은 옷을 부러워하지만, 하나님의 예비하신 부활체는 그 어떤 비싼 옷보다도 더 귀하고 아름다울 것이다. 여기에 성도의 기쁨의 이유가 있다. 부활과 천국과 영생은 성도의 기쁨의 이유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경건한 종들을 본받고 또 우리 자신도 다른 성도들에게 본이 되기를 소원하자. 사도 바울은 “나를 본받으라”고 말했다. 우리는 지식과 도덕성에 있어서 모범이 되자.

둘째로, 우리는 교회 안의 배교자들과 타협자들을 분별하고 그들을 본받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육신적 쾌락과 물질적 이익을 구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그 마지막은 멸망이다. 그들은 수치를 당할 것이다.

셋째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우리는 천국의 시민권을 가진 천국 백성이며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천국 소망을 굳게 가지고 천국 백성답게 경건하고 의롭게 살기를 힘써야 한다.

 

 

4장: 기쁨의 열매

1-3절, 세 가지 권면

[1절]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그러므로’라는 말은, 앞장의 끝에 언급한 대로,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 곧 천국에 있기 때문에, 예수께서 오셔서 우리를 죄와 파멸로부터 완전히 구원하실 것이기 때문에, 또 그가 우리의 낮은 몸을 그의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실 것이기 때문에라는 뜻이다.

바울은 성도들을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부른다. 우리 구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성도들은 함께 하나님의 한 가족이 되었고 함께 천국에 들어갈 자들이 되었다. 천국은 사랑의 공동체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우리가 세상에서도 사랑을 실천하도록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다. 특히, 바울에게 빌립보 교인들은 전도의 열매이었다.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일했고 그 결과, 사랑스런 빌립보교회가 설립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 교회야말로 바울에게는 “나의 사랑, 나의 사모하는 자들, 나의 기쁨, 나의 면류관”이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그렇게 부르면서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고 권면하였다. ‘서라’는 원어(스테케테)는 ‘굳게 서라’는 뜻을 가진다(KJV, NASB, NIV). ‘이와 같이 주 안에 굳게 서라’는 말은 복음의 진리와 그 교훈 안에 굳게 서라는 뜻이다. 우리는 거짓 교사와 달리 천국 소망을 가진 자로서 굳게 서야 한다. 성도들은 ‘주 안에’ 곧 주님의 진리의 지식 안에, 주를 믿는 믿음 안에, 주를 사랑함에, 주의 교훈을 순종함에, 주를 소망함에, 주께 대한 충성에, 주의 진리를 위한 선한 싸움을 싸움에 굳게 서야 한다. 모든 성도는 주 안에 굳게 서야 한다. 이것이 본문에 나타난 첫 번째 권면이다.

[2절]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어떤 인물인지 우리가 알 수 없으나,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는 권면을 보면, 그 두 사람은 서로 생각과 마음이 맞지 않았던 것 같다. 빌립보교회는 좋은 교회이었지만, 그 교회 안에도 서로 생각이 맞지 않은 자들이 있었다. 바울은 이미 빌립보 2:2-3에서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말했다. 교회 안에서 다투는 성도들에게 필요한 교훈이다. 우리는 주 안에서, 주의 진리 안에서, 성경적 교훈에서 일치하여, 같은 생각, 같은 마음을 가지도록 힘써야 한다. 이것이 본문이 보이는 두 번째 권면이다.

[3절]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자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멍에를 같이한 자’라는 원어(쉬쥐고스)는 ‘멍에를 같이한 자’라는 뜻을 가진 사람 이름(‘수주고’)일지도 모른다. 그는 빌립보교회를 대표할 만한 감독 중 하나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복음 사역에 함께 수고한 자이었던 것 같다. 또 빌립보교회에는 사도 바울과 함께 복음의 일에 힘썼던 여자들이 있었다. 바울은 또 글레멘드와 그 외의 그의 동역자들을 언급한다. 그는 그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있다고 말한다. 바울이 그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있음을 확신한 것은 그들의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행위를 보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람의 구원은 그의 행위를 통해 확증된다. 바울은 이제 빌립보 교인들에게 이런 복음의 일꾼들을 도우라고 말한다. 이것이 본문이 보이는 세 번째 권면이다.

우리는 어떻게 복음의 일꾼들을 도울 수 있는가? 첫째로, 우리는 위로와 격려의 말로 도울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방법이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는 위로자, 격려자이시다. 위로와 격려의 말은 모든 일꾼들에게 항상 도움이 된다. 둘째로, 우리는 기도로 도울 수 있다. 기도는 항상 우리가 다른 이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도움이다. 그래서 바울은 성도들에게 기도를 부탁하였다. 데살로니가전서 5:25, “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셋째로, 우리는 물질로 도울 수 있다. 복음의 일꾼들은 세상의 일을 포기하고 오직 교회의 일에만 전념하는 자들이다. 교회의 전임(專任) 사역자들은 교회 일에 매어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들을 물질로 도와야 한다.

본문은 세 가지 권면을 준다. 첫째로, 우리는 주 안에 굳게 서야 한다. 우리는 복음 진리와 교훈 안에 굳게 서야 한다. 즉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진리의 지식과 믿음과 소망 안에 굳게 서고, 그 교훈을 순종하고 주님께 충성하고 복음 진리를 위해 힘써 싸워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주 안에서 같은 생각,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개인의 사사로운 생각을 버리고 신구약성경 66권에 계시된 하나님의 온전한 뜻에 일치하는 생각과 믿음과 소원을 가져야 하고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은 주 안에서 같은 생각과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

셋째로, 교인들은 복음 사역자들을 돕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교인들은 위로와 격려의 말로 그들을 도울 수 있다. 또 교인들은 그들을 위하여 기도함으로 도울 수 있다. 또 교인들은 물질로 그들을 도울 수 있다. 교회는 복음 사역자들이 그 가족들과 함께 의식주 문제로 어려움을 당하지 않고 바른 말씀을 전하고 참 교회를 세우는 일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그들의 의식주의 기본적인 필요를 공급해야 할 것이다.

 

4-7절, 주 안에서의 특권들

[4절]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항상 기뻐하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그리스도인의 복된 특권이다. 슬픔이 많은 이 세상에서 누가, 어떻게 항상 기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항상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주 안에서’라는 말에 있다. ‘주 안에서’라는 말씀은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과 그 안에 포함된 모든 은택들을 가리킨다. 주께서는 우리의 근본적 죄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 그러므로 죄의 결과들인 그 외의 모든 문제들은 주 안에서 이미 다 해결된 것이나 다름없다. 우리는 장차 천국에서 그 완전한 성취를 누리게 될 것이나(롬 14:17), 지금 이 슬픔 많은 세상에서도 항상 기뻐할 수 있는 복을 누린다. 기쁨은 성령께서 구원받은 성도들 속에서 일하셔서 맺게 하시는 복된 열매이다(갈 5:22).

[5절]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관용’이라는 원어(에피에이케스)는 ‘온유함, 친절함, 너그러움 등’의 뜻이다. 사람이 이 세상을 살면서 어떻게 모든 사람들에게 온유하고 친절하고 너그럽게 대할 수 있는가? 혹 가족들이나 친구들에게는 그렇게 할 수 있다 할지라도, 자기와 친분 관계가 없는 모든 자에게, 인격적으로 부족한 자들에게, 심지어 자기를 미워하고 비난하는 자들에게 어떻게 그렇게 대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신다. 우리는 우리의 온유함과 친절함과 너그러움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해야 한다.

성도가 모든 사람에게 온유하고 친절하고 너그럽게 대할 수 있는 까닭은 주께서 오시면 모든 일을 다 공의롭게 판단하시고 선악간에 보응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는 말씀이 그 뜻이다. 장차 온 세상을 심판하러 오실 주 예수께서 가까이 와 계신다. 주의 재림이 심히 가깝다. 그러므로 모든 판단을 그에게 맡기고 우리는 오직 모든 사람에게 온유하고 친절하고 너그럽게 대하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만 알고 이 세상의 것들만 구하는 자들이라면 모르지만, 우리가 장차 오는 천국을 알고 천국의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것을 구하는 참 성도라면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우리 같은 죄인들을 관용하시고 오래 참으시고 큰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그렇게 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 큰 은혜 받은 것을 잊지 말고 다른 이들에게 온유하고 친절하고 너그럽게 대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6절]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염려하고 걱정할 일들이 없지 않다. 학생들은 학교 성적 문제나 진학의 염려, 친구들에게 따돌림 받거나 구타를 당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 청년들은 취직의 염려과 결혼의 염려, 장년들은 직장, 사업, 경제 문제와 자녀들을 인한 염려, 또 건강의 염려, 노년들은 자녀들의 평안, 자신의 건강, 노후의 경제적 대책, 외로움 등의 염려가 있을 것이다. 인생은 염려가 많은 삶이며 이 세상은 염려가 많은 세상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명하셨다. 실상, 우리의 염려거리들 중에 우리가 염려한다고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염려는 우리의 기쁨과 평안과 생활의 활기를 빼앗아 갈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좋다. 그것이 믿음이며 순종이다. 염려하지 않는 삶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시는 특권이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셨으니 또한 하나님께서 보장하실 것이다. 염려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주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6장에서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마 6:25). 그는 공중의 새나 들의 백합화로 예를 드시면서 하나님께서 세상의 만물을 다 먹이시고 입히시는데 하물며 자기 백성의 의식주의 문제를 돌아보지 않으시겠느냐고 교훈하셨다. 그는 다시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셨다(마 6:31-33). 염려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염려하지 말고 그 대신 기도하라고 가르친다. 우리가 살아계시고 전지전능하시고 절대 주권을 가지신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리고 그가 우리를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고 우리를 위하시고 지키시고 도우시기를 원하심을 안다면, 우리는 어떤 환경 처지에서도, 어떤 어려운 문제를 직면했을 때라도 염려하거나 당황하고 낙심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표현이다. 우리는 염려 대신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모든 일’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우리가 기도하지 못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큰 일도, 작은 일도, 정신적인 일도, 육체적, 물질적인 일도, 개인적인 일도, 가정적인 일도, 교회적인 일도, 국가적인 일도 무슨 일이든지 우리는 기도할 수 있고 기도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참 믿음이다. 믿음이 있는 자마다 하나님께 기도한다.

우리는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되 ‘감사함으로’ 그렇게 해야 한다. 감사함이야말로 믿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마음이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하나님께서 가장 선한 길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을 믿는 자가 아니고서는 결코 범사에 감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자는 감사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28에서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말했고, 또 로마서 8:32에서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이런 믿음을 가진 자들은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또 감사함으로 우리의 모든 소원들을 하나님께 낱낱이 아뢸 수 있다.

[7절]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하나님의 응답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금방 오지 않는 경우가 많고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뜻과 다를 경우가 많다. 또 하나님의 시간표는 우리의 시간표와 다를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기도가 금방 응답될 때도 있으나 오랫동안 응답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라도 낙심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가장 선한 길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심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무지하고 조급한 우리도 시간이 지난 후에는 하나님의 최선의 뜻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치 말고 기도하며 조금 참고 기다려야 하고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보게 될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고난의 현실을 피하고 싶어하고 건강이나 물질적 풍요를 복이라고 잘못 생각하지만, 건강이나 물질적 풍요는 복이기도 하지만 때때로 화이기도 하다. 사실상 참된 복은 하나님을 바로 알고 바로 믿고 바로 섬기고 죄 짓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경건하고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삶을 살도록 우리를 인도하시는 고난이나 질병이나 가난의 경험은 하나님의 미움이 아니고 그의 사랑의 증거이며, 하나님의 저주가 아니고 오히려 그의 복이다.

그러므로 기도의 응답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의 현실을 믿음과 평안으로 대처해 나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의 일차적인 응답은 마음과 생각의 평안이다. 마음과 생각의 평안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즉각적이고 가장 고상한 응답이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라는 표현은 ‘모든 이해를 초월한 하나님의 평안’이라는 뜻이다. 마음의 평안을 가질 수 없으리라고 생각되는 현실 속에서도,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여 하나님의 평안이 우리를 지키신다는 말씀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기도 응답의 시작이다.

하나님의 평안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믿고 기도하는 자들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이다. 기도 응답과 그 응답으로서의 마음과 생각의 평안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누리는 성도의 특권이다. 그리스도 예수 밖에서는 이것이 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의 현세와 내세의 모든 삶을 보장한다. 그것은 내세의 천국과 부활과 영생뿐 아니라, 현세의 마음의 평안과 건강과 의식주의 공급을 보장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범사에 우리와 함께하신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본문은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세 가지 특권을 교훈한다. 첫째로, 우리는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해야 한다. 항상 기뻐하는 삶은 오직 주 안에서만 가능하고 세상적인 조건으로는 불가능하다. 주 안에서 죄사함 받고 주 안에 거하고 성령의 내주(內住)하심을 받은 성도들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할 수 있다.

둘째로,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관용과 온유함과 친절함을 나타내어야 한다. 이것은 주님의 재림이 가깝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공의로 심판하시고 상과 벌을 내리실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로, 우리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감사함 가운데 기도함으로 평안을 누려야 한다. 이것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특권이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한 삶이다. 성도에게 주시는 마음의 평안은 기도 응답의 시작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구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약성도들에게 주신 기쁨과 친절과 평안의 삶을 누리자.

 

8-9절, 완전을 실행하라

[8절] 종말로[마지막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존경할 만한 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칭찬]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의 생활 목표를 증거한다. 그것은 한마디로 도덕적 완전이다. 우리에게 어떤 덕이나 칭찬이 있다면 그것이 어떤 것이어야 할 것은 분명하다.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고 추구해야 할 바가 무엇인가는 분명하다. 로마서 8:5-6은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성령]을 좇는 자는 영[성령]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성령]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라고 말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은 육신에 속한 자들이 아니고 성령에 속한 자들이므로 마땅히 성령께서 주시는 생각을 하고 성령께서 주시는 행동을 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그것들을 몇 마디로 표현한다.

첫째로, 우리는 무엇에든지 참되어야 한다. 우리는 범사에 참되고 진실한 삶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위선과 거짓과 속임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매우 미워하시는 악이다. 그것은 마귀의 속성이다. 우리가 비록 타고난 재능이 부족하고 자란 가정적, 사회적 환경이 나빠서 유능한 인물이 못 된다 할지라도 참되고 진실한 인물은 되어야 한다. 성도의 성도다운 덕성은 그의 진실함에 있다.

둘째로, 우리는 무엇에든지 존경할 만해야 한다. ‘경건하다’라고 번역된 원어(셈노스 semnov")는 디모데전서 3:8, 11에서 ‘단정하다’라고 번역된 말로서 ‘존경할 만하다, 품위 있다’는 뜻을 가진다. 성도들은 범사에 존경받을 만한 태도로 무엇을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 그것은 인격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모범이 됨을 가리킨다.

셋째로, 우리는 무엇에든지 옳아야 한다. 옳은 삶, 의로운 삶,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생활 목표이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든지 불의하거나 불법하거나 위법하거나 부당한 것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항상 정직하고 올바르고 정정당당하게 살기를 힘써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무엇에든지 정결해야 한다. ‘정결하다’는 원어(하그노스)는 ‘순결하다, 거룩하다’는 뜻을 가진다. 죄는 더러움이다. 우리는 불의한 일을 멀리하고 부정당한 욕심, 사사로운 욕심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물질 문제나 이성 문제나 명예와 권리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 앞에서 순결하고 흠 없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 다음에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라는 말은 인격의 아름다움을 묘사한다. 진실함, 존경받을 만함, 의로움, 순결함, 사랑할 만함, 칭찬할 만함 등은 인격의 완전함을 잘 드러낸다. 성도들은 도덕적 완전을 생활 목표로 삼고 이런 덕목들에 생각과 마음을 집중하고 실천하기를 힘써야 한다.

[9절]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평안]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빌립보 교인들이 배우고 받고 들은 것들이란 앞에서 언급한 도덕적 완전함이다. 그들은 무엇에든지 참되고 무엇에든지 존경받을 만하고 무엇에든지 옳고 무엇에든지 순결하고 또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고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해야 한다는 것을 지금까지 배웠고 그 교훈을 받았고 그 말씀을 들었다.

또한 그들은 그 도덕적 완전함의 한 본을 바울의 신앙생활 속에서 보았다. 바울은 범사에 모범적 삶을 살았다. 비록 그가 엄격한 의미에서 완전한 모범은 아니었을지라도, 그는 비교적 흠이 없는 인격자로서 성도들 앞에서 행하였다. 그래서 그는 3:17에서도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4:3-4에서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고 간증하였고, 또 고린도전서 4:16에서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 말하였다. 바울의 생활 교훈은 자신이 직접 실천한 바이었다. 가장 효과적 교육은 선생이 직접 실천하며 본을 보이는 것이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완전함을 생활 목표로 삼고 실천하라고 가르친 것이다. 우리는 완전한 삶을 항상 생각하고 완전한 삶을 실행해야 한다. 구원은 생활의 변화이다. 생활이 변하지 않는 구원은 구원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죄인이 변하여 의인이 되고, 더러운 자가 변하여 깨끗한 자가 되는 것, 그것이 진정한 구원이다. 우리가 참으로 구원받은 자라면 바로 그러해야 한다. 그러므로 도덕적 완전은 바로 우리의 삶의 목표요 실천 강령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다(약 2:17).

바울은 또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고 말했다. 그것은 온전한 삶의 결과를 증거한다. 온전한 삶의 첫 번째 결과는 하나님과의 동행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은 특권 중의 특권이요 가장 든든한 보장이며 보증이다. 그것은 각양의 기도 응답을 포함한다. 과연 요한일서 3:21-22에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고 말씀했다. 온전한 삶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의 기도를 늘 들으시는 복된 삶인 것이다.

온전한 삶의 두 번째 결과는 하나님의 평안이다. “평안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평안이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성경에서 ‘평안’이라는 말(에이레네, 히브리어 솰롬)은 포괄적인 개념이라고 본다. 그것은 마음의 평안 뿐만 아니라, 몸의 건강, 물질적 여유, 환경적 평안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다. 그것은 불안, 병, 가난, 전쟁과 반대되는 말이다. 그것은 우리말의 ‘안녕’이라는 말과 같다. 이 평안은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할 때에 오고 사람이 죄를 지을 때에 거두어지는 것이 율법의 기본 정신이다. 이사야 48:18은 말씀하기를, “슬프다, 네가 나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였도다. 만일 들었더면 네 평강이 강과 같았겠고 네 의가 바다 물결 같았을 것이며”라고 하였다. 또 이사야 48:22과 57:21은 악인들에게는 평안이 없다고 말했다(사 48:22). 그러나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평안이 넘칠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도덕적 완전함을 우리의 생활 목표로 삼자. 도덕적 완전함은 진실함과 존경받을 만함, 올바름과 순결함, 사랑할 만함과 칭찬할 만함 등으로 표현된다. 그것은 성경에 교훈된 성도의 생활 규칙이며 우리의 성화의 목표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도덕적 완전함이다. 우리는 흠 없는 인격이 되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본이 되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본이 되셨다. 사도 바울도 우리에게 본이 되었다. 기독교는 단순히 이론의 종교가 아니고, 이론을 가진 실천의 종교이다. 먼저 믿은 자들은 나중에 믿는 자들에게 믿음과 행위에 있어서 본이 되어야 한다. 남에게 본이 되지 못한 자는 영적으로 자랐거나 성숙한 자가 아니다.

셋째로, 우리는 평안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을 믿고 체험하자. 이것은 성경말씀대로 도덕적 완전을 위해 힘쓰는 성도들에게 약속된 놀라운 복이다. 비록 우리의 행위가 완전하지 못할지라도, 우리가 순종 생활을 힘쓸 때 우리는 하나님의 평안을 체험할 것이다. 우리가 범죄하면 하나님의 평안을 잃어버리며 오히려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회개하고 순종할 때 평안을 회복할 것이다.

 

10-14절, 자족하기를 배움

[10절]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사도 바울의 전도 사역 초기에, 빌립보 교인들은 그를 물질적으로 후원하였으나 얼마 동안 그 일이 중단되었었다. 그러다가 그들이 다시 바울에게 물질적 도움을 보내왔다. 사도 바울은 이 일에 대하여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하였다. 왜냐하면 그러한 물질적 도움은 그들이 그의 복음 사역과 그 고난에 동참한 일이었기 때문이다(빌 4:14). 또 그것은 그들의 믿음과 사랑의 진실함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였다(고후 8:8; 9:13).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소득의 10분의 1을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해 드려 성전 봉사의 일에 전념하는 레위인들의 생활비로 쓰게 하셨다(민 18:21; 신 12:19).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0:42). 또 그는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주의 종들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선한 행위가 영생과 영벌(永罰)의 판단 기준이 된다고 말씀하셨다(마 25:31-46).

[11-12절]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사도 바울은 자신의 자족하는 생활 신조를 간증한다. 그것은 아마 그들의 물질적 후원에 대한 그의 기쁨이 그가 단지 물질을 사랑하기 때문이 아님을 말하기 위해서이었을 것이다. 그는 어떤 형편에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말한다. 성도들이 전도자들을 생각하고 물질로 돕는 것이 선한 일이지만, 전도자들은 물질에 속박을 받지 않고 물질을 초월하여 자족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

주께서는 제자들을 전도하러 보내실 때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0:9-10).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복음 전파자들이 복음으로 사는 것이 합당하지만, 복음에 장애가 없게 하기 위해 자신은 그 권리를 쓰지 않았다고 증거하였다(9:12).

자족하는 생활은 전도자들 뿐만 아니라, 또한 모든 성도들이 배워야 할 생활이다. 염려는 탐심에서 나온다. 참된 믿음은 세상의 모든 염려를 버리고 자족하며 살게 한다. 예수께서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교훈하셨다(마 6:31).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에서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고 교훈했다(딤전 6:7-8).

자족하는 생활은 중세의 수도사들의 신조처럼 가난하게 사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자족하는 삶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아는 삶을 말한다. 우리는 배부를 줄도 알고 배고플 줄도 알며, 풍부에 처할 줄도 알고 궁핍에 처할 줄도 알아야 한다. 이 세상의 삶은 잠시 지나가는 나그넷길이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미래의 세계가 있다. 그 세계의 영광을 확신하고 소망하는 성도들은 이 세상의 빈부귀천의 삶에 대해 만족하거나 불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전도자들과 성도들의 의식주의 필요를 아시고 공급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부자 되는 것을 약속하지는 않으셨으나, 우리의 일용할 양식은 보장하셨다(마 6:31-33).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리를 아는 자마다 탐욕도 염려도 버리고 언제나 어떤 형편에서나 먹을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자족하며 살 수 있다.

[13-14절] 내게 능력 주시는 자[그리스도]3)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어떤 어려운 환경여건에서도 낙심치 않고 자족하며 이겨나갈 수 있도록 도우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위로와 힘과 도움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여호와께는 능치 못한 일이 없으시다(창 18:14). 여호와의 손은 짧아지지 않으셨다(민 11:23). 그는 지금도 온 땅을 두루 감찰하시며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신다(대하 16:9). 그러므로 우리는 그 호흡이 코에 있는 사람을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사 2:22). 환난 날에는 돈이나 재물도 더러운 것같이 여겨질 것이다(겔 7:19). 이 세상의 삶은 피곤하고 사람은 무능하지만,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며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려가도 곤비치 않을 것이다(사 40:30-31). 주께서는 우리의 능력이 되신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성도들이 전도자들을 생각하고 물질로 돕는 일은 기뻐할 만한 선한 일이다. 그것은 우리가 복음 사역에 동참하는 일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매우 기뻐하시는 일이다.

둘째로, 우리는 자족하는 삶을 배우자. 인생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의 욕심과 염려를 다 버리고 섭리자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들로 만족하며 살아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우리에게 능력 주시는 그리스도만 의지하자. 그럴 때 우리는 현실의 모든 피곤과 낙망과 어려움을 잘 이겨나갈 수 있다.

 

15-23절, 헌금의 의미

[15-16절]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 두 번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복음의 시초에’라는 말은 바울이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던 초기를 가리키는 것 같다. 사도 바울은 주후 47년경 수리아 안디옥 교회에서 선교사로 파송되었고(행 13:1-3) 주후 50년경 제2차 전도 여행 시 마게도냐 지방으로 건너가 그 지방의 첫 성인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파하였다(행 16:12).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여하였다’는 말은 ‘주고 받는 일로 나와 교제하였다’는 뜻인데, 사도 바울이 마게도냐 지방을 떠나 다른 곳들에서 복음을 전파했을 때 빌립보 교인들은 전도 후원금으로 바울을 도왔음을 가리킨다. 그때 바울을 도왔던 교회는 그 교회뿐이었다. 그가 그들을 떠나 이웃 도시 데살로니가로 가서 전도했을 때(행 17장), 그들은 벌써 그를 돕기 시작했었다. ‘한 번 두 번’이라는 말(카이 하팍스 카이 디스)은 ‘몇 번’ 혹은 ‘여러 번’이라는 뜻이다. 헌금은 전도와 구제를 위해 하나님께 바치는 물질이다. 물론 전도는 국내외의 전도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지교회의 목회 활동을 포함한다. 그러나 교회는 자체의 행사와 교제를 위해서는 헌금을 절약적으로 써야 할 것이다.

[17절]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과실이 번성하기를 구함이라.

본문은 헌금이 성도의 열매임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좋은 행실이 있는 성도가 되기를 원하신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듯이, 구원받은 성도는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한다. 헌금은 좋은 열매이다. ‘너희에게 유익하도록’이라는 말은 헌금이 헌금하는 사람 자신에게 유익이 된다는 사실을 보인다. 헌금은 헌금하는 자의 믿음의 진실성을 증거한다. 우리는 헌금하는 자신을 보고 우리의 믿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헌금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어야 한다. 구약 시대의 헌금의 표준은 소득의 온전한 십일조와 감사예물들이지만(레 27:30-33; 말 3:8), 신약 시대의 헌금의 표준은 ‘풍성하게 드리는 것’이다. 그것은 십일조 이상을 의미한다. 고린도후서 8:7,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같이 이 은혜[헌금]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 구약의 십일조 규례는 의식법으로 신약 아래서는 성취되었고 따라서 폐지되었다고 보지만, 위축된 방식으로가 아니고 풍성한 방식으로 그렇다고 본다. 그러므로 신약 성도들은 우리의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고 소득의 십일조 이상을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이다.

[18절]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본문은 헌금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라고 증거한다. ‘향기로운 냄새’라는 표현은 구약성경 레위기 처음 부분들에 여러 번 나오는 표현이다(레 1:9, 13, 17; 2:2, 9; 3:5, 16). 하나님께서는 번제와 소제[곡물제사]와 화목제에서 제단에 태워지는 제물의 냄새를 ‘향기로운 냄새’라고 말씀하셨다. 사도 바울을 위한 물질적 후원은 곧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향기로운 냄새요 받으실 만한 제물이었다. 번제물과 소제물과 화목제물같이, 헌금은 하나님께 대한 헌신과 순종과 감사의 표시들이다. 하나님께 자신을 온전히 드린 자만이 즐거이 헌금할 수 있다(고후 8:5). 또 헌금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므로, 그것은 예배의 중요한 한 요소이다. 예배의 중요한 요소들은 찬송과 기도와 설교와 헌금이다. 물론 이 요소들 중에서 설교가 가장 중요한 요소이지만, 헌금도 예배의 중요한 한 요소이다(고전 16:2).

[19-20절]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세세 무궁토록 영광을 돌릴지어다. 아멘.

하나님께서는 헌금하는 자들에게 모든 필요한 것을 채워주실 것이다. 이것은 약속의 말씀이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부요하시고 풍성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는 우주 만물의 주인이시다. 시편 24:1,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학개 2:8,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헌금은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대상 29:11, 14).

우주 만물의 주인이시며 부요하시고 풍성하신 우리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살며 성경말씀대로 순종하는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풍성하게 주실 것이다. 마태복음 6:33, “너희는 먼저 그의[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의식주의 필요]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시편 37:25-26,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 잠언 11:24-25,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

엘리야 시대의 사렙다 과부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공급하심에 대한 좋은 예이다. 요단 앞 그릿 시내가 마르자 선지자 엘리야는 시돈 땅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서 한 과부를 만나 떡 한 조각을 요청한다. 그런데 그 과부에게는 떡이 없었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이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가 엘리야의 요청대로 그에게 떡을 주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과부와 그의 아들과 엘리야가 여러 날 먹게 하셨고 그 기근의 기간 동안에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않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않게” 하셨다(왕상 17:8-16).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진실히 믿고 그의 뜻대로 살고자 애쓰는 그의 백성을 결코 버리지 않으시고 그들의 필요를 공급해주실 것이다.

[21-23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에게 각각 문안하라. 나와 함께 있는 형제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모든 성도들이 너희에게 문안하되 특별히 가이사 집 사람 중 몇이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4)

‘성도’와 ‘형제’라는 명칭들은 귀하고 아름다운 명칭들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으로 말미암아 단번에 거룩함을 얻었고(히 10:10)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고 형제 자매가 되었다(엡 2:19; 마 12:50). 이것은 세상 사람들 모두가 누리는 복이 아니다. 이것은 교회가 세상과 구별되게 하나님께 받은 은혜와 복이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의 성도들이 서로 문안하기를 원하며 또 자기와 함께 있는 성도들의 문안도 그들에게 알린다.

“특별히 가이사 집 사람 중 몇이니라”는 말은 놀라운 사실을 보인다. 비록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혀 있었으나, 그가 전한 복음은 가이사 즉 로마 황제의 집안에까지 들어갔다. 로마 황제의 가족들 중에 믿는 이가 생겼다! 이것은 놀라운 전도의 진전과 결실이었다! 바울은 옥에 갇혔으나 복음은 갇히지 않고 확장되고 있었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헌금은 우리의 신앙의 좋은 열매이다. 전도와 구제를 위한 헌금은 확실히 신앙의 좋은 열매이다.

둘째로, 헌금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제물이다. 우리의 봉사의 삶 전체가 그렇지만, 헌금도 하나님의 기뻐 받으시는 제물이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헌금하는 자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풍성하게 채워주실 것이다. 헌금은 확실히 물질적 복을 받을 선한 행위이다.


미주

1) ‘상’이라는 원어(브라베이온)는 경주장에서 이긴 자에게 주는 면류관 같은 상을 가리킨다(고전 9:24). 그것은 신앙의 기본적 달음질의 결과로 약속된 상이다. 성경 다른 곳에서 빈번히 나오는 ‘상’이라는 원어(미스도스)는 ‘보상, 삯, 대가’의 개념이다.

2) Byz (D* itd vg) syr(p) (arm) 등에 있음.

3) Byz syrp Origen(gr) lat 등이 그러함.

4) Byz p46 א A itd vg syrp arm eth 등에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