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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성 목사

2013년 7월 10일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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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리말

예수님과 사도 바울의 증거대로(마 5:18; 요 10:35; 갈 3:16; 딤후 3:16), 성경은 하나님의 정확무오한 말씀이며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진술대로(1:8), 성경 원본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고 그 본문은 ‘그의 독특한 배려와 섭리로 모든 시대에 순수하게 보존되었다.’ 이것이 교회의 전통적 견해이다. 그러나 19세기 말 웨스트코트와 호트에 제시된 불확실한 가설에 의하여 많은 교회들이 신약성경의 전통적 다수 본문을 버리고 불완전하고 오류투성이의 사본들(א와 B)을 중시하는 잘못을 범하였다. 그러나 신약성경의 헬라어 비잔틴 다수 사본들의 본문은 순수하게 보존된 성경 원본의 본문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채택되어야 할 것이다.

경을 가지고 해석하고 설교할지라도 그것을 바르게 해석하고 설교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올 것이다(암 8:11). 중세 시대 말, 종교개혁 직전과 같이, 오늘날 벌써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오는 것 같다.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설교와 성경강해가 있지만, 순수한 기독교 신앙 지식과 입장은 더 흐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요구되는 성경 해석과 강해는 복잡하고 화려한 말잔치보다 성경 본문의 바른 뜻을 간단 명료하게 해석하고 적절히 적용하는 것일 것이다. 사실상, 우리는 성경책 한 권으로 충분하다. 성경강해는 성경 본문의 내용을 바르게 이해하는 데 작은 참고서에 불과하다. 성도들은 각자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성경을 읽어야 하며, 주석과 강해서는 오직 작은 참고서로만 사용해야 할 것이다. 


제목차례

1장: 장로의 자격

2장: 바른 교훈에 합한 삶

3장: 선행

 

서론

디도서의 저자도 사도 바울이다(1:1). 터툴리안은 본 서신을 바울이 디도에게 쓴 것으로 인용하였다. 본서의 저작 연대는 아마 주후 65년경일 것이다. 본서는 사상과 문체에 있어서 디모데전서와 가깝다. 그러므로 바울은 디모데전서를 쓴 직후 본 서신을 썼을 것이다.

디도서의 특징적 주제도 목회 교훈이다. 디도서는 디모데전서와 같이 장로의 자격에 대해 교훈한 후, 구원의 목적으로서의 선행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본서의 각 장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장, 장로의 자격

2장, 각 연령층의 사람들에 대한 교훈, 구원의 목적

3장, 선행에 대한 강조, 이단자들을 거절할 것

  

 1장: 장로의 자격

1-4절, 사도의 직무

[1-2절]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 곧 . . . .

바울은 말한다.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 곧 나의 사도된 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

바울은 자신을 ‘하나님의 종’이라고 고백한다. 바울이 자신을 먼저 하나님의 종이라고 부른 것은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보인다. 그 관계는 복종 관계이다. 구약의 선지자들에게 사용되었던 ‘하나님의 종’이라는 이 명칭은 하나님께 대한 복종을 나타낸다. 바울은 자유자이었지만, 자원하여 하나님의 종이 되었다.

하나님께 대한 복종은 피조물의 마땅한 자세이다. 하나님과 인간은 사실상 친구 관계가 아니고 복종 관계이다. 인간은 피조물이며 흙이요 티끌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대화할 때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라고 고백하였다(창 18:27). 그것이 바른 깨달음이요 바른 고백이다. 그것이 바로 겸손이다. 겸손은 인생이 자신의 피조물 됨을 바로 알 때 생긴다. 인간의 교만은 자신을 모르는 데서 생기는 어리석은 악이다.

더욱이, 구속(救贖)의 은혜를 받은 성도는 하나님께 더욱 복종하며 살아야 한다. 죄로 인하여 영원히 죽어야 마땅했던 자들을 하나님께서 그의 크신 긍휼로 구원하여 주셨기 때문에 이제 나의 생명은 내 것이 아니고 오로지 그의 은혜의 선물이다.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내 뜻대로, 내 마음대로 살 수 있겠는가? 내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기꺼이 복종하며 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복종에는 ‘왜 그렇습니까?’라든가 ‘내 생각에는 다릅니다’ 등의 말이 필요치 않고 합당치 않다. 복종에는 오직 침묵이 필요할 뿐이다.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다면, 우리는 복종해야 한다. 바울만 하나님의 종이 아니고 우리 모두도 하나님의 종이다. 우리는 그의 피조물이요 더욱이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바된 그의 백성이다. 우리는 죄에게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종이 된 자들이다(롬 6:22).

바울은 또한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증거한다. ‘사도’(使徒)는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그는 보내신 자의 뜻을 수행하게 하기 위해 보냄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 생각대로 말하고 자기 뜻대로 행동해서는 안 된다. 그는 오직 그를 보내신 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각대로 말하고 그의 명령대로 행동해야 한다.

바울은 자신이 사도된 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고 말한다. 그가 사도가 된 목적은 세 가지이었다. 첫째로, 그는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을 위하여 사도가 되었다.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자기 백성을 택하셨다(엡 1:4). 그는 오직 자신의 긍휼과 은혜의 뜻을 따라 그들을 택하셨다.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믿게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택한 자들을 위해 피흘려 구속(救贖)하셨고 성령께서는 그들을 다 중생(重生)시키신다. 중생의 증거는 회개와 믿음이다. 그러므로 참으로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속죄의 주로 믿는 믿음이 중요하다. 죄인들은 그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의 구원을 얻는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은 하나도 잃어버림을 당하지 않고 다 영생에 이를 것이다. 그러나 그들만 영생에 이를 것이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생에 이를 것이다. 믿는 자는 영생을 얻으나 믿지 않는 자는 영생을 얻지 못할 것이다. 요한복음 3:36은,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고 말하였다.

둘째로, 바울이 사도가 된 것은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을 위해서이었다. 진리의 지식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 인간이 죄와 심판 아래 있다는 지식,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소식에 관한 지식, 종말에 관한 지식을 포함한다. ‘경건함에 속한’이라는 원어는 ‘경건함에 일치하는’ 혹은 ‘경건함에 이르는’이라는 뜻이다. 진리의 지식은 단순히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지식이 아니고 경건함에 맞는 지식, 경건으로 나타나는 지식이다. 지식이 중요하다. 인생은 하나님의 지식이 없어서 멸망을 당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셨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호 4:6).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곧 영생이 된다(요 17:3). 또 우리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야 한다(벧후 3:18).

셋째로, 바울이 사도가 된 것은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었다. 영생은 인생의 최대의 소원이다. 누구나 장수(長壽)하기를 원한다. 전도서 3:11은 하나님께서 사람 속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고 말한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참으로 허무한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의 근원이시며 생명 자체이시므로 하나님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죽지 않고 영생하게 하실 수 있다. 인간은 본래 영생할 존재이었다. 그러나 죄로 인하여 죽음이 왔다. 그러므로 사람은 죄사함을 통해 영생을 얻게 될 것이다. 이미 원리적으로 성도들은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음으로 영생을 얻었다. 그들은 장차 영광스럽게 부활하여 영생을 누릴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가장 귀한 복이며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소망이다.

[2-3절]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의 명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

하나님께서는 거짓이 없으신, 거짓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진실하시다. 그러므로 그는 믿을 만하시다. 인간에게는 거짓됨이 있지만 하나님께는 지극히 작은 거짓도 없으시다. 만일 하나님께 거짓이 있으시다면, 그는 하나님이 아니실 것이다. 그런 하나님이라면 아무도 공경하지 않을 것이며 좋아하지도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진실하시므로 참 하나님이시다. 그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을 약속하셨다. ‘영원한 때 전부터’라는 원어(프로 크로논 아니오니온)는 ‘오래 전부터’라는 의미도 가진다. 하나님께서는 오래 전부터 아담, 아브라함, 모세, 다윗, 및 선지자들에게 영생을 약속 혹은 암시하셨다.

그러다가 이제 때가 되었다. ‘자기 때에’라는 원어(카이로이스 이디오이스)는 ‘자기 자신의 적절한 때에’라는 뜻이다. 하나님께는 시간표가 있다. 모든 일은 하나님의 시간표대로 이루어진다. 모든 일에는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적절한 때가 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약속을 받았으나 100세에 아들을, 그것도 한 명의 아들을 받았다. 요셉은 17세에 한 계시적 꿈을 꾸었지만, 30세에 애굽의 총리가 될 때에 그 꿈이 실현되었다. 다윗은 아마 15세쯤에 사무엘에게 기름 부음을 받았지만(삼상 17:13), 30세가 되어 왕이 되었다(삼하 5:4, 5). 그러므로 우리는 무슨 일이든지 조급하게 생각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작정하신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다. 그 말씀은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이다. 그 말씀은 진리이며 구원과 영생의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을 ‘전도’(케뤼그마) 곧 선포 혹은 설교라는 방법을 통하여 나타내셨다. 또 이 전도 혹은 설교의 일은 바울에게 그리고 사도들과 목사들에게 맡겨졌다. 이것이 사도들과 목사들의 직무이다. 전도 혹은 설교는 일차적으로 사도들과 목사들에게 맡겨진 직무이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성도에게 어느 정도의 책임이 있는 일이다. 하나님의 뜻은 그의 택한 백성을 다 찾아 구원하는 것이며 그것이 전도의 목적이다. 이것은 전도자들뿐 아니라,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이 다 중요하게 생각하며 책임을 느껴야 할 일이다. 전도는 남의 일이 아니고 우리 모두가 참여하고 협력해야 할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일이다. 우리는 전도를 위해 기도하고 전도를 위해 헌금해야 한다. 예배당도 이 일을 위해 의미가 있을 뿐이며, 그렇지 못하다면 모든 것이 무의미할 것이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아버지의 가장 중요하고 긴급하신 일인 전도에 다 참여하고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4절] 같은 믿음을 따라 된 나의 참 아들 디도에게 편지하노니 . . . .

바울은 또 말한다. “같은 믿음을 따라 된 나의 참 아들 디도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구주로 좇아 은혜와 [긍휼과](전통본문)1)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바울은 우리가 가진 믿음을 ‘같은 믿음’이라고 표현하였다. ‘같은 믿음’이라는 원어(코이네 피스티스 )는 ‘공통적 믿음, 함께 가지고 있는 믿음’이라는 뜻이다. 이 공통적 믿음이 피부 색깔, 언어, 지방, 사회적 신분, 학력, 빈부를 초월하여 모든 그리스도인을 하나로 묶는 끈이다. 이 공통적 신앙이 바로 사도 시대로부터 내려오는 ‘옛신앙’ 곧 성경적 신앙이다. 오늘날에는 이 신앙이 변질되어 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 공통적 믿음은 교회의 기초이므로 이 믿음이 없으면 교회도 없다. 우리는 이 공통적 믿음을 성경 속에서 그리고 바른 신앙의 전통 속에서 확인하고 그 믿음을 굳게 가지고 영생의 소망 안에서 항상 주님을 섬겨야 한다.

바울은 같은 믿음 즉 공통적 믿음을 따라 된 그의 참 아들 디도에게 편지한다고 말하면서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구주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라고 기원하였다. 사도의 서신에서 항상 나오는 이 기원의 말은 의미심장하고 복된 말이다. ‘은혜’는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성화의 은혜이며, ‘평강’ 즉 ‘평안’은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성화에 근거하여 누리는 마음의 평안과 몸의 건강, 그리고 물질적 안정과 환경적 평안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안을 이미 받았고 또 항상 풍성하게 받아 누리며 살기를 원한다.

1절부터 4절까지의 본문이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을 가지자. 그 믿음은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원한 생명을 주는 믿음이다. 그것은 ‘공통적 믿음’ 즉 모든 그리스도인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믿음이다.

둘째로, 우리는 경건한 진리 지식을 가지자. 불경건한 세상 사람과 다를 바 없는 삶으로 나타나는 죽은 지식 말고 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경건함을 가진 진리의 지식을 가지자.

셋째로, 우리는 영생의 소망을 가지자.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큰 복은 영생이다. 그것은 성도의 복된 소망이다. 세상은 늙고 병들고 죽는 절망의 세상이지만, 하나님과 하나님의 약속에는 소망이 있다. 그것은 천국과 부활과 영생의 소망이다. 우리는 그 복된 소망을 가지자.

넷째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안을 이미 받았고 또 항상 사모하며 풍성하게 받아 누리자.

5-9절, 장로의 자격

[5절] 내가 너를 그레데에 떨어뜨려둔 이유는 부족한 일을 . . . .

바울은 말한다. “내가 너를 그레데에 떨어뜨려둔 이유는 부족한 일을 바로잡고 나의 명한 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 본문은 바울이 디도를 그레데에 남겨둔 이유를 말한다. ‘부족한 일을 바로잡는 것’은 교리 사상의 면에서나 교회 행정과 질서의 면에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말씀의 사역자들은 신앙 지식에서나 교회 행정에서 부족한 점들을 보충하기 위해 필요하다. 또 바울은 디도로 하여금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했다. ‘장로’라는 원어(프레스뷔테로스)는 ‘나이가 더 든 사람’이라는 뜻으로서 신약성경에서 신약교회의 감독의 직분자를 위해 사용되었다. ‘장로들’이라는 말은 한 교회에 장로가 적어도 두 명 이상 있을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교회가 한 사람에 의해 독단적으로 운영되는 것을 방지하는 의미가 있다고 본다.

[6절] 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방탕하다 하는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방탕하다 하는 비방이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라야 할지라.” 6절부터 9절까지는 장로의 자격에 대하여 언급한다. 이것은 디모데전서 3장의 말씀과 같다.

무엇보다, 장로는 책망할 것이 없는 자이어야 한다. 이것은 교리사상이나 행위에 있어서 온전한 자를 의미한다. 다른 사람을 인도할 자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나은 인격, 곧 온전한 인격자이어야 한다. 그는 하나님의 진리에 대하여 바른 사상을 가지고 있어야 함은 물론이거니와, 행실에 있어서도 부족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

장로는 또한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한다. 이 말씀은 일부일처(一夫一妻)가 하나님의 뜻임을 암시한다. 처음에 하나님께서 한 남자와 한 여자를 만드신 사실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 있다. 결혼한 자는 부부 관계와 결혼 서약에 충실해야 한다. 가정에서 부부 관계에 문제를 일으키는 자는 좋은 인격이 아닐 것이다.

장로는 또한 신실한 자녀들을 둔 자라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자녀들을 신앙으로 바르게 양육한 자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본문은 그 자녀들을 “방탕하다 하는 비방이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라고 표현하였다. 방탕은 자신의 의무나 책임, 삶의 목표 등을 잊어버리고 술과 음행 등 육신의 쾌락에 빠진 것을 말한다. 불순종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부모에 대해 다 적용된다. 참 믿음은 순종으로 나타나며 그 결과는 경건함과 거룩함, 선함과 진실함과 단정함이다. 바른 신앙교육은 경건하고 순종하는 자녀들을 만들 것이며, 그것은 믿음의 한 증거가 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부모라면 자녀를 성경말씀으로 바르게 충실하게 가르치며 믿음으로 양육했을 것이다. 그러면 그 자녀들은 믿음 있는 자녀가 될 것이다. 자녀를 보면, 그 부모의 신앙생활을 짐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7-9절]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 . . .

바울은 또 말한다.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며 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을 좋아하며 근신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며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스려[거슬러]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 신약성경에서 감독과 장로는 동일한 직분이며 그 둘이 차등하다는 암시는 없다. ‘감독’이라는 말(에피스코포스)은 ‘돌아보는 자, 보살피는 자, 감시하는 자’라는 뜻이다. 감독은 교회를 돌아보고 보살피며 교인들이 바른 믿음에서 탈선하지 않도록 감시하는 직분이라고 볼 수 있다.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 곧 교회의 관리자이다. 그것은 교회의 재산이나 재정을 감독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일차적으로 교인들의 영혼, 즉 그들의 신앙생활의 상태를 감독하고 관리하는 자이다. 그들이 믿음 안에서 바르게 생활하는지 살피는 것이다.

한번 더, 본문은 감독이 책망할 것이 없는 자이어야 함을 언급한다. 그는 사상에서나 행위에서나 결함이 없어야 한다. 그는 흠 없는 온전한 신앙 인격자이어야 한다. 이 점이 반복해서 강조된다.

장로는 또한 제 고집대로 하지 않는 자라야 한다. 바른 신앙인은 자기 뜻대로 무엇을 주장하거나 고집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찾아 성경의 가르침대로 말하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도 존중할 것이다.

장로는 또한 급히 분내지 않는 자이어야 한다. 사람은 성냄으로 실수하기 쉽고 선한 일을 어그러뜨리기 쉽다.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약 1:20). 사람에게 정당한 의분(義憤)은 필요하고 비진리와 불의를 볼 때 분노하는 것은 정당한 일이지만, 깊이 생각한 후에 해야 하며, 오직 진리와 의를 위해서만 해야 하고, 단순히 자기 이익을 위하여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장로는 또한 술을 즐기지 않는 자이어야 한다. 술을 즐기는 자는 술취하게 될 것이다. 술취함은 사람으로 실수하고 범죄하게 한다. 성경은 술취함을 명백히 정죄한다(고전 6:9-10; 갈 5:21; 엡 5:18).

장로는 또한 구타하지 않는 자이어야 한다. 남편이 아내를 때리는 것은 죄악이다. 그것은 어떤 경우에도 허용될 수 없다. 부모가 자녀를 징계하는 것은 성경이 명령하는 바이지만(잠 13:24; 22:15; 23:13, 14; 29:17), 그런 경우에도 격한 감정을 가지고 또 비열한 방식으로 해서는 안 되고 감정을 가라앉히고 인격적이게 해야 한다.

장로는 또한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않는 자이어야 한다. ‘더러운 이’는 정당하지 않는 소득을 말한다. 성도는 고리대금이나 투기성 있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옳다. 우리는 게으르게 먹으려 하지 말고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받으려 해야 한다. 교회의 직분자들은 교회 헌금을 정확하고 깨끗하게 관리하도록 극히 조심해야 한다.

장로는 또한 나그네를 대접하는 자이어야 한다. 그는 이기적이거나 개인주의적이지 않고 남과 나눌 줄 아는 인격자이어야 한다.

장로는 또한 선을 좋아하는 자이어야 한다. 온전한 인격은 선한 인격이며 선을 좋아하는 인격이다. 선행은 참 믿음의 열매이다.

장로는 또한 근신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는 자이어야 한다. 근신하는 것은 정신을 차려 조심하는 것을 말한다. 의로운 것은 성경과 양심에 비추어 정정당당한 것이다. 거룩한 것은 죄와 불결을 버린 것을 말한다. 절제하는 것은 술이나 육신적 쾌락을 절제하는 것을 말한다. 무슨 일이라도 지나치면 좋지 않다. 

장로는 또한 하나님의 바른 말씀을 굳게 붙드는 자이어야 한다. 9절을 다시 번역하면, “가르침을 받은 대로의 신실한 말씀을 굳게 붙들어야 하리니”이다. 그래야 그가 다른 이들을 교훈하고 권면할 수 있고 또 바른 교훈을 거슬러 말하는 자를 책망할 수 있다.

5절부터 9절까지의 교훈은 무엇인가? 장로들 즉 감독들은 교회를 돌아보고 교인들을 보살피는 직분자이다. 그들은 한마디로 책망할 것이 없는 온전한 인격자이어야 한다. 신앙 지식에 있어서나 행위에 있어서나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한다. 특히, 그들은 하나님의 바른 말씀, 신실한 말씀을 굳게 붙들어야 한다. 그래야 다른 이들에게 권면할 수 있고 말씀을 거스르는 자들을 책망할 수 있다. 이런 자가 교회의 장로가 되어야 한다. 이 말씀은 우리 모든 성도의 성화의 목표이다. 우리 모두는 책망할 것이 없는 선한 인격자가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읽고 배우고 믿고 소망하고 실천하자.

10-16절, 복종치 않는 자들

[10-11절] 복종치 아니하고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가 많은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복종치 아니하고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가 많은 중 특별히 할례당 가운데 심하니 저희의 입을 막을 것이라. 이런 자들이 더러운 이를 취하려고 마땅치 아니한 것을 가르쳐 집들을 온통 엎드러치는도다.”

당시 그레데섬의 각 성의 교회들에는(5절) 복종치 않고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들이 많이 있었다. 복종은 성도의 미덕이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바이다. 우리는 성경적 교훈에 복종해야 한다. 복종치 않는 것은 곧 하나님의 권위를 부정하고 대항하는 악이다. 또 헛된 말은 다른 이들에게 유익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해를 끼치는 헛된 말을 가리킨다. 또 속이는 것은 마귀적인 죄악이다. 마귀는 거짓의 아비이다(요 8:44). 모든 거짓말하는 자는 천국에서 제외되고 지옥에 들어갈 것이다(계 21:8; 22:15).

그런데 당시 교회들 안에 이런 자들이 많이 있었다. 그것이 당시 교회들의 현실이었다. 특히 할례당 가운데 심했다. ‘할례당’은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율법에 대한 생각 때문에 은혜의 복음에 대한 지식이 없었고 이해가 부족했던 것 같다. 진리의 지식이 없는 사람들이 때때로 하나님의 뜻에 대항한다. 그러나 진리의 지식이 있는 자는 복종하는 자가 될 것이다. 땅 위의 교회들은 옛부터 문제가 많은 불완전한 교회이었다. 그것은 교회의 구성원인 성도들의 지식과 성화가 불완전하며 사탄의 활동이 맹렬하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오늘날 교회들의 모습도 다르지 않다.

저 복종치 않는 자들은 더러운 이를 취하려고 마땅치 아니한 것을 가르쳐 집들을 온통 엎드러치고 있었다. 진리를 모르는 자들은 세상의 이익이 삶의 전부이다. 돈이 그들의 삶의 중심이다. ‘마땅치 아니한 것을 가르친다’는 말은 ‘가르쳐서는 안 될 것들을 가르친다’는 뜻이다. 참된 교사는 가르쳐야 할 것을 가르치는 자이지만, 악한 교사는 가르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치는 자이다. 그 결과, 그들은 집들을 온통 엎드러쳤다. 즉 그들은 믿는 가정들의 믿음을 어지럽히고 파괴시켰다. 아마 그들은 집집마다 방문하며 그런 일을 했을지 모른다. 말의 영향력은 크다. 좋은 말은 좋은 영향을 주지만, 나쁜 말은 나쁜 영향을 준다. 이단은 누룩같이 퍼진다.

그러므로 바울은 ‘저희의 입을 막아야 한다’고 말한다. 불순종의 말, 헛된 말, 속이는 말, 하지 말아야 할 말을 막아야 한다. 그것은 교회를 어지럽히고 파괴시킬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악한 말이 교회 안에서 퍼지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런 말을 하는 자는 교회에 앞세우지 말아야 하고, 그런 자는 교회의 직분에서 제외되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유익을 위해 오직 순종의 말, 가치 있는 말, 진실한 말, 해야 할 말만 해야 한다.

[12-14절] 그레데인 중에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 . . .

바울은 또 말한다. “그레데인 중에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쟁이라 하니 이 증거가 참되도다. 그러므로 네가 저희를 엄히 꾸짖으라. 이는 저희로 하여금 믿음을 온전케 하고 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와 진리를 배반하는 사람들의 명령을 좇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레데인의 한 선지자가 말한 바와 같이, 그레데인의 풍습과 기질은 좋지 않았다. 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며 남을 해치는 악한 자들이며 먹기를 좋아하고 게으름쟁이였다. 좋은 풍습이든지 나쁜 풍습이든지 사회 분위기는 그 사회의 사람들의 기질을 형성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는 백성이 있는 반면, 신용을 생명처럼 생각하는 백성이 있다. 근면한 백성이 있는가 하면, 게으른 백성이 있다. 그레데인들은 대체로 거짓되며 악하며 게을렀다. 그레데 교인들도 그런 기질을 벗어버리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디도에게 그레데 교인들을 엄히 꾸짖으라고 말한다. 아첨은 상대방의 영혼을 참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지만, 책망은 진정한 사랑의 표현이다. 성경은, 훈계를 듣는 것이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며 목의 금사슬이라고 말했고(잠 1:8, 9), ‘면책(面責)은 숨은 사랑보다 낫다’고 했다(잠 27:5). 우리는 책망을 들을 줄 아는 자가 되어야 한다.

책망의 목적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그들로 하여금 믿음을 온전케 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사람이 책망을 통해 잘못을 고치고 바른 신앙 인격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둘째는, 그들로 하여금 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들과, 진리를 배반하는 자들의 명령을 좇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잘못된 말을 듣는 것은 신앙을 해치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책망을 통해 그런 일에 빠지지 않게 될 것이다.

[15-16절]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 . . .

바울은 또 말한다.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저희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씻음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다. 음식물에 있어서도 더러운 것이 따로 없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아직도 죄와 불결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는 아무것도 깨끗한 것이 없다. 그들은 구약의 율법대로 여전히 음식물들 중에 어떤 것은 깨끗하고 어떤 것은 더럽다고 생각하고 있으나, 실상 그들의 생각과 양심이 더러운 것이다.

저 복종치 않는 자들은 하나님을 안다고 공언(公言)하지만, 행위로 하나님을 부정했다. 그들은 말과 행위, 신앙고백과 생활이 일치하지 않았다. 진실한 믿음은 반드시 선한 행위로 나타난다. 우리는 말과 행위가 일치하고 믿음과 행위가 일치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신앙고백과 행위가 일치하지 않았으니, 그것은 가증한 일이었다. 차라리 하나님을 모른다고 말하였더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입으로는 안다고 말하면서 행위로는 그를 부인하니, 그것은 가증스러운 일이다. 그들은 결국 하나님께 복종치 않는 자들이었다.

또 그들은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이었다. 신앙의 결과는 선행이다. 물론 모든 선행이 다 참된 신앙의 증거는 아니다. 참된 신앙이 없이도 어느 정도의 선행이 가능해 보인다. 슈바이처나 테레사 수녀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고 생각되지만, 많은 선행을 하였다. 그러나 믿는 세계에서는 선행이 신앙의 증거이다. 그러므로 믿는 자라는 이가 선한 일을 버린다면 그는 참으로 믿는 자가 아닐 것이다.

10절로 16절까지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악한 자들을 분별하자. 그들은 진리에 복종치 않고 헛된 말을 하며 속이며 더러운 이를 취하려고 마땅치 않은 것을 가르쳐 집들을 온통 엎드러친다. 그들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는 가증하고 복종치 않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이다. 우리는 그런 자들을 분별하자.

둘째로, 우리는 그들의 입을 막고 그들을 엄히 꾸짖어야 한다. 11절, “저희의 입을 막을 것이라.” 13절, “네가 저희를 엄히 꾸짖으라.” 우리는 악한 자들의 악행을 분별하고 확증하여 공개적으로 책망하고 그들이 그런 악한 말을 사람들에게 퍼뜨리지 못하게 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믿음을 온전케 하고, 진리를 배반하는 이런 악한 자들의 말을 좇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바른 진리의 지식과 믿음을 견고하게 가지고 있으면 모든 헛되고 거짓된 말에 넘어지지 않을 것이다.

 

2장: 바른 교훈에 합한 삶

1-2절, 나이든 남자들에 대한 교훈

[1-2절] 오직 너는 바른 교훈에 합한 것을 말하여 늙은 . . . .

바울은 “오직[그러나] 너는 바른 교훈에 합한 것을 말하라”고 말한다. 이것은 복종치 않는 자들과 대조하여 주는 교훈이다.

‘바른 교훈’이라는 원어(휘기아이누사 디다스칼리아)(1:9; 딤전 1:10)은 ‘건전한 교훈’이라는 뜻이다. 바울은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라’고 말했다(딤후 1:13). ‘바른 말을 본받아’라는 말은 ‘바른 말의 본 혹은 개요’라는 뜻이다. 바른 교훈은 주께서 사도들을 통해 주신 교훈, 곧 성경적 교훈이다.

성경은 우리의 신앙생활의 기준과 규범이다. 하나님께서는 마귀가 다른 말들, 약간 다른 말들, 비슷하게 다른 말들로 진리를 어지럽게 못하도록 이 책을 주셨다. 이사야는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 속에 빛이 없기 때문이라”(원문직역)고 말했다(사 8:20). 성경이 기준이며 규범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성경말씀을 더하거나 빼지 말라고 말씀하셨다(신 4:2; 12:32; 계 22:18-19).

목사들은 바른 교훈 곧 사도들을 통해 성경에 밝히 증거된 교훈에 합한 것을 말해야 한다. 이것이 모든 목사들의 의무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성경을 열심히 읽고 연구하고, 또 성경을 제멋대로 풀지 말고 바르게 조심스럽게 해석함으로 성경에 정통해야 한다.

바울은 또 말한다. “늙은 남자로는 절제하며 경건하며[존경할 만하며] 근신하며[신중하며]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에 온전케 하고.” 바울은 디도에게 당부하기를, 나이든 남자들에게 몇 가지 교훈을 하라고 하였다.

첫째로, 나이든 남자들은 절제해야 한다. ‘절제한다’는 원어(네팔레이오스)는 일차적으로 ‘[술을] 절제한다’는 뜻이지만, ‘깨어 있다, 맑은 정신으로 있다’는 뜻도 있다. 젊었을 때는 술취하기도 하고 무절제하기도 했을지라도, 나이든 지금은 바른 정신, 맑은 정신, 깬 정신으로 절제하며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아직도 절제심이 없다면 나잇값을 못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둘째로, 나이든 남자들은 경건해야[존경할 만해야] 한다. ‘경건하다’는 원어(셈노스)는 ‘존경할 만하다, 엄숙하다, 품위 있다’는 뜻을 가진다(BDAG, Thayer). 영어성경은 ‘엄숙하다’(KJV, ASV), ‘품위 있다’(NASB), ‘존경할 만하다’(NIV) 등으로 번역했다. ‘존경할 만하다’고 번역하는 것을 좋을 것이다. 나이든 남자들은 말과 행동에 있어서 엄숙하고 품위 있고 존경할 만한 인격이어야 할 것이다.

셋째로, 나이든 남자들은 근신해야 한다. ‘근신하다’는 원어(소프론)는 ‘사려 깊다, 신중하다, 절제하다’는 뜻이다(BDAG). 그것은 성숙한 인격자의 모습이다. 인생의 연륜이 헛되지 않아야 한다.

넷째로, 나이든 남자들은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에 온전해야 한다. ‘온전하다’는 원어(휘기아이논)는 ‘건전하다, 건강하다’는 뜻이다. 믿음도 튼튼하고 사랑도 풍성하고 인내심이 많은 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그것은 인격의 성숙함과 온전함을 나타낸다. 나이든 남자들은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이 온전케 되어야 한다.

바울은 디도에게 바른 교훈에 합한 것을 말하면서 나이든 남자들에게 교훈할 바를 말하였다. 우리는 성경의 바른 교훈에 합한 것을 말해야 하고 그대로 살아야 한다. 특히 나이든 남자들은 자신을 절제하며 엄숙하고 사람들이 존경할 만하며 신중하고 사려 깊으며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에 온전한 자, 한마디로 영적으로 성숙한 자가 되어야 한다.

3절, 나이든 여자들에 대한 교훈

[3절] 늙은 여자로는 이와 같이 행실이 거룩하며 참소치 말며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늙은 여자로는 이와 같이 행실이 거룩하며 참소치 말며 많은 술의 종이 되지 말며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고.” 본문은 나이든 여자들에게 몇 가지 교훈을 준다.

첫째로, 나이든 여자들은 행실이 거룩해야[경건해야] 한다. ‘거룩하다’는 원어(히에로프레페스)는 ‘경건하다(reverent), 존경할 만하다(venerable)’는 뜻이라고 본다(BDAG). 나이든 여자들은 그 행실과 처신에 있어서 경건하고 존경할 만해야 한다.

둘째로, 나이든 여자들은 참소치 말아야 한다. 참소하는 것은 남을 거짓되이 비난하는 것을 말한다. 잘못된 비난은 오해에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남을 오해하지 않고 이해하려는 너그러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옳은 비평도 남의 말은 되도록 안 하는 것이 좋다. 특히, 여성의 아름다움은 온유함과 조용함에 있다(벧전 3:4).

셋째로, 나이든 여자들은 많은 술의 종이 되지 말아야 한다. 술은 육신의 쾌락을 구하는 것이며 술취함은 지옥 갈 큰 죄악이다.

넷째로, 나이든 여자들은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선한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바른 것들, 자신과 남에게 유익을 주는 것들일 것이다. 경험으로 확인된 성경 지식이 그런 것들이다. 각종 개인적, 사회적 현실 속에서 혹은 가족 관계, 교우 관계 등의 대인 관계에서 얻은 성경 지식, 특히 수많은 실패의 경험에서 얻은 성경 지식이야말로 남에게 가르칠 만한 선한 것들일 것이다.

나이든 여자들은 행실과 처신이 경건하고 존경할 만하고 함부로 남을 거짓되이 비난하지 말며 많은 술의 종이 되지 말며 자신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 뿐 아니라,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4-5절, 젊은 여자들에 대한 교훈

[4-5절] 저들로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저들로 젊은 여자들을 [신중하게] 교훈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근신하며 순전하며 집안 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 본문은 나이든 여자들이 젊은 여자들을 가르쳐야 한다고 말하면서 가르칠 내용에 관하여 몇 가지 말한다.

첫째로, 젊은 여자들은 자기 남편을 사랑해야 한다. 그들은 자기 남편을 사랑해야 하고 다른 남자들에게 한 눈을 팔지 말아야 한다. 아내들은 남편들을 섬기며 그들의 뜻을 존중하며 순종해야 한다.

둘째로, 젊은 여자들은 자기 자녀를 사랑해야 한다. 이것은 자녀 교육을 포함하는 말이다. 부모에게는 자녀 교육이 중요한 의무이다. 자녀들을 관찰하고 대화하고 함께 기도하고 성경말씀을 가르쳐주고 삶의 모든 문제에 대해 교훈하고 필요하면 책망하며 함께 놀아주고 음식을 포함하여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주고 세상에서 사는 데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하나씩 배우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셋째로, 젊은 여자들은 근신해야 한다. 본문에 ‘교훈한다’는 원어(소프로니조)도 ‘신중하게 교훈한다’는 뜻이며, ‘근신하다’는 원어(소프론)는 ‘신중하다, 사려 깊다, 자제심이 있다’는 뜻이다(BDAG). 우리는 언제나 신중한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잘못된 육신적, 세상적 생각과 말과 행동, 자기 중심적이고 주관적이고 편협한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항상 성경의 교훈과 성령의 감동으로 얻는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해야 하고, 그러할 때 남에게 유익을 주고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데 유익을 주게 될 것이다.

넷째로, 젊은 여자들은 순전해야 한다. ‘순전하다’는 원어(하그노스)는 ‘순결하다, 정숙하다, 단정하다’(BDAG, Thayer)는 뜻이다. 젊은 여자들은 순결하고 정숙하고 단정해야 한다.

다섯째로, 젊은 여자들은 집안 일을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여자를 창조하신 의도는 여자로 하여금 남자를 돕는 자가 되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여자의 첫 번째 역할 혹은 본업은 집안 일을 하는 것이다. 시편 128:3은 여자를 ‘내실에 있는 아내’라고 표현한다. 잠언 31:10 이하에 나오는 현숙한 여인에 대한 묘사에도 “그 집안 일을 보살피고 게을리 얻은 양식을 먹지 않는다”는 말이 나온다(27절).

여섯째로, 젊은 여자들은 선해야 한다. 디도서는 선행에 대하여 많이 강조한다. 1장에서 장로의 자격 요건을 논하면서도 ‘선을 좋아하는 것’을 언급했고, 복종치 않는 자들은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라고 했다. 또 2장에서도 나이든 여자들은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본절 이후에도 선한 일에 대한 언급이 반복된다(2:7, 10, 14; 3:8, 14). 모든 사람은 우선 선해야 한다.

일곱째로, 젊은 여자들은 자기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 남편의 의무는 주께서 교회를 사랑하심같이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지만, 아내의 의무는 교회가 주께 복종하듯이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이다(엡 5:22-25). 하나님의 말씀이 복종을 명하셨기 때문에 여자가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대항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항하는 자가 아니라면, 아내들은 성경의 가르침대로 자기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바른 교훈에 합한 삶을 살아야 한다. 특히, 젊은 여자들은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신중하고 사려 깊으며 순결하고 정숙하고 단정하며 집안 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말씀이 비방을 받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 믿고 구원받았으면, 선하게 사는 자가 되어야 한다.

6-8절, 젊은 남자들에 대한 교훈

[6-8절] 너는 이와 같이 젊은 남자들을 권면하여 근신하게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너는 이와 같이 젊은 남자들을 권면하여 근신하게 하되 범사에 네 자신으로 선한 일의 본을 보여 교훈의 부패치 아니함과 경건함[진지함, 엄숙함]과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하라. 이는 대적하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워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려 함이라.” 본문은 젊은 남자들에 대한 교훈이다.

첫째로, 젊은 남자들은 근신해야 한다. ‘근신하다’는 원어(소프로네오)는 ‘신중하다, 사려 깊다’는 뜻이다(BDAG). 건전한 생각, 신중하고 사려 깊은 생각은 바른 신앙생활에 필수적이다.

둘째로, 젊은 남자들은 선한 일을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는 선한 사람이 되고 선한 일을 많이 하는 것이다.

셋째로, 젊은 남자들은 경건해야[엄숙해야, 진지해야] 한다. ‘경건함’이라는 원어(셈노테스)는 ‘위엄, 엄숙함, 진지함’이라는 뜻이다(BDAG, Thayer). 이것은 경박하지 말아야 함을 내포한다.

넷째로, 젊은 남자들은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해야 한다. ‘바른 말’이라는 원어는 ‘건전한 말, 유익한 말’이라는 뜻이다. 말은 항상 유익해야 하며 남에게 흠 잡힐 것이 없어야 한다.

바울은 디도에게 범사에 그 자신이 본을 보여 교훈의 부패치 아니함을 나타냄으로 대적자로 하여금 부끄러워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교훈은 진리이며 그것은 부패치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행의 본을 통해 그 사실을 증거해야 한다.

우리는 젊은이들이 건전하고 신중하고 사려 깊은 생각을 하고 선한 일을 하며 경박하지 않고 엄숙하고 진지함을 가져야 하며 책망할 것이 없는 건전하고 유익한 말을 하도록 본을 보이면서 가르쳐야 한다.

9-10절, 종들에 대한 교훈

[9-10절] 종들로는 자기 상전들에게 범사에 순종하여 기쁘게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종들로는 자기 상전들에게 범사에 순종하여 기쁘게 하고 거스려[거슬러] 말하지 말며 떼어먹지 말고 오직 선한 충성을 다하게 하라. 이는 범사에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려 함이라.” 본문은 종들에 대한 교훈이다.

첫째로, 종들은 자기 주인들에게 범사에 순종해야 한다. 둘째로, 종들은 자기 주인들을 기쁘게 해야 한다. 셋째로, 종들은 자기 주인들에게 거슬러 말하지 말아야 한다. ‘거슬러 말하다’는 원어(안티레고)는 ‘말대답을 하다’는 뜻이다. 구원받은 성도간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주인과 종 간의 질서가 유지되기를 원하셨다. 이런 교훈은 오늘날 직장생활에 적용된다. 피고용자가 직장에 취직할 때 근무시간과 조건과 봉급 등에 동의했다면, 그는 직장에서의 자기 위치와 고용주와의 관계를 지켜야 한다. 넷째로, 종들은 주인의 것을 떼어먹지 말아야 한다. ‘떼어먹는다’는 것은 주인의 돈이나 물건을 떼어먹는 행위이다. 이것은 일종의 도적질이다. 우리는 직장에서 공과 사를 분명히 구분하고 근무시간에 사적인 일을 하지 말고 허락되지 않은 물품이나 비용을 사적으로 쓰지 말아야 한다. 다섯째로, 종들은 선한 충성을 다함으로써 범사에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해야 한다. 오늘날도 직장에서 아랫사람인 성도는 윗사람이 맡긴 일에 대해 충성스럽게 처리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구원의 교훈이 빛나게 될 것이다. 진실하고 선하고 충성된 인격과 삶이야말로 하나님의 구원의 참됨과 그의 교훈의 참됨을 증거할 것이다.

종들은 주의 교훈의 영광을 위해 범사에 주인에게 순종하여 기쁘게 하고 거슬러 말하지 말고 떼어먹지 말고 선한 충성을 다해야 한다.

11-15절, 구원의 목적--선행

[11-13절]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이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하셨음이니].”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즉 각 연령과 계층의 사람들에게 나타났다. 그들 속에 종들까지도 포함된다. ‘양육한다’는 원어(파이듀오)는 ‘가르친다, 교육한다, 교훈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은혜의 교훈은 몇 가지의 내용이다.

첫째로, 불경건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받은 자는 불경건과 음란과 탐욕을 버려야 한다.

둘째로,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살라는 것이다. 우리는 신중하고 사려 깊어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의롭고 정당하게 살아야 하며 또 늘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살아야 한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재림을 바라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성도의 ‘복스러운 소망’이다.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표현하였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에 대한 놀라운 증거이다. 성경은 예수님을 ‘하나님’(요 1:1)과 ‘참 하나님’(요일 5:20)과 ‘크신 하나님’(본문)이라고 부른다.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복스러운 소망이시다. 그것은 그의 영광스런 재림을 가리킨다. 마태복음 24:30, “그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 . .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14절]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 . . .

바울은 또 말한다. “그가[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구주 예수께서는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으로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셨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셨다. 또 그가 이처럼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셨다. ‘친 백성’이라는 원어(라온 페리우시온)는 ‘특별한 백성’이라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자기 ‘특별한 소유물’로 삼으시겠다는 출애굽기 19:5의 말씀을 생각나게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우리는 하나님의 친 백성 곧 특별한 백성이다. 그런데 그 친 백성은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이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의 삶은 선한 일에 열심을 가진 삶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구원은 죄인을 변화시켜 의인이 되게 하시고, 악한 자를 변화시켜 선한 자가 되게 하시는 것이다. 선한 일에 열심을 가지는 것은 구원받은 성도의 당연한 표이다. 우리는 항상 그 표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모든 성도는 선한 일에 열심을 내는 자이어야 한다.

[15절] 너는 이것을 말하고 권면하며 모든 권위로 책망하여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너는 이것을 말하고 권면하며 모든 권위로 책망하여 누구에게든지 업신여김을 받지 말라.” 목사들은 이상의 말씀들을 사람들에게 말하고 권면하고 모든 권위로 책망하기도 하며 누구에게든지 업신여김을 받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인간적 권위가 아니고, 오직 성경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권위로 말해야 한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받자. 불경건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하고 사려 깊고 의롭고 경건하며 대속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하고 이제는 선한 일에 열심을 가지는 그의 친 백성이 되자.

 

3장: 선행

1-7절, 선행과 구원

[1-2절] 너는 저희로 하여금 정사와 권세 잡은 자들에게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너는 저희로 하여금 정사와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며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예비하게 하며 아무도 훼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

‘정사와 권세 잡은 자들’은 세상의 권세자들 곧 위정자들을 가리킨다. 성도는 세상 위정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해야 한다(롬 13:1).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유익과 질서를 위하여 세우신 ‘하나님의 사자’이며 ‘하나님의 일꾼’이기 때문이다(롬 13:4, 6).

또 성도들은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예비해야 한다. 구원의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다. 선행은 성도의 필수적 열매이다. 또 성도들은 아무도 훼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어야 한다. ‘훼방하는 것’은 그릇되이 남을 비난하는 것이다. ‘관용하다’는 원어(에피에이케스)는 ‘친절하다, 온유하다’는 뜻이다. 성도는 친절함과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어야 한다.

[3절]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치 아니한 자요 속은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이는]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치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각색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한 자요 악독과 투기로 지낸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이었으나.” 본문은 앞에서 교훈한 성도의 선한 삶의 이유를 보인다.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이었다. 바른 생각도, 바른 깨달음도 없었으며, 하나님과 그의 뜻에 대한 바른 지식도 없었다. 또 우리는 ‘순종치 아니한 자’이었다. 우리는 하나님과 그의 뜻에, 곧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치 않았다. 또 우리는 ‘속은 자’이었다. 우리는 마귀의 말에 속았고, 세상의 인생관과 가치관에 속았으며, 심지어 우리 자신의 어리석고 혼란한 생각들에 속았었다.

또 우리는 ‘각색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한 자’이었다. 우리는 정욕과 쾌락의 종이었다. 하나님 없는 자는 세상이 그의 하나님이요 돈과 정욕과 쾌락이 그의 가치이다. 죄는 이와 같이 인간을 어리석고 허무한 데 빠지게 하며 자신을 소모시키고 멸망시키게 한다.

또 우리는 인간 관계에 있어서도 ‘악독과 투기로 지낸 자’이었고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이었다. 이것들이 구원받기 전의 모든 인생의 상태이었고, 구원받은 후에도 때때로 우리 속에서 머리를 드는 죄악성의 내용들이다. 구원받기 전의 인간 관계는 한마디로 서로 싸우는 질투와 미움과 악독으로 얼룩져 있었다.

[4-5절]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하고 무능력해 있었지만, 하나님의 구원이 나타났다. ‘자비’라는 원어는 ‘선하심, 인자하심’이라는 뜻을 가진다.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은 예수께서 세상에 사람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을 때 나타났다. 그러나 경험적으로는 우리가 예수 믿어 구원받았을 때 각자에게 나타났다.

우리를 ‘구원하시되’라는 원어(에소센)는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뜻으로 과거시제이다. 구원은 죄로부터 건져내는 것으로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단번에 이루어졌다. 우리는 이미 법적으로 구원을 받았다. 우리의 죄 문제는 다 해결되었다. 죄인이 변하여 의인이 되었다. 그가 우리의 모든 죄의 형벌을 담당하셨으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거하는 자에게는 정죄함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하지 않으셨다. 실상 우리의 의로운 행위는 누더기 옷에 불과하였다. 이사야 64:6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라고 말하였고, 또 예레미야 17:9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말했다.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되고 무능력하여져 있다. 성경과 인류 역사가 이것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하지 않으시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하셨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을 따라 이루어졌다. 우리의 구원은 그의 긍휼의 결과이었다. 하나님의 긍휼, 그의 은혜, 그의 선하심과 사랑은 우리의 구원의 유일한 원천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구체적으로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이루어졌다. 중생(重生)은 다시 남을 말하며 그것은 죄씻음으로 이루어졌다. 죄로 인하여 영혼이 죽었었기 때문에 죄씻음을 통해 그 영혼이 다시 살아났다. 죄씻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 공로로 이루어진다.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대속사역을 우리에게 적용하셨을 때 우리가 중생케 되었고 죄를 회개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이다. 이것이 곧 ‘성령의 새롭게 하심’이다.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은 동일한 구원 사건이다. 구원은 성령께서 하신 일이다.

[6-7절]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주사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받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주신 결과이었다. 그리스도의 대속사역과 그가 이루신 의에 근거하여 우리에게 오신 성령님은 부족하거나 메마른 영이 아니시다. 그는 은혜와 진리가 풍성하신 영, 은혜 위에 은혜요 진리 위에 진리인 충만하신 영이시다.

성령께서 풍성히 우리 속에 오셔서 이루신 첫 번째 구원의 일은 의롭다 하심이었다. 구원은 칭의 곧 의롭다 하심이다. 또한 구원은 영생과 천국, 곧 영생을 얻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는 아직 소망 중에 영생을 얻었다. 영생의 원리는 우리 속에 이미 심겨졌다. 우리는 이미 영생을 얻었다. 그러나 그 영광스런 누림은 아직 미래에 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를 구원하셔서 천국에서 영광스런 영생의 삶을 살게 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이다.

성도는 선한 인격자가 되어야 한다. 성도는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를 예비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성도는 인간 관계에 있어서 남을 그릇되이 비난치 않고 다투지 않고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은혜로 구원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도 과거에는 어리석고 반항적이며 악하고 이기적이고 남을 미워했던 가증한 죄인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긍휼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과 성령의 역사로 구원을 받았다. 그 구원은 의롭다 하심을 얻는 구원이며 영생을 얻고 천국을 기업으로 이어받는 구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 위에서도 구원받은 자답게 선하고 의롭게 살아야 한다. 이제는 헛된 것을 위해 살지 말고, 정욕과 육신적 쾌락을 위해 살지 말고 세상 욕심 때문에 다투지 말아야 한다. 이제는 하나님의 뜻과 성경말씀에 불순종하지 말아야 한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 복종하여 그 뜻대로, 성경말씀의 교훈대로 선하게 살아야 한다.

8-15절, 선한 일에 힘쓰라

[8절] 이 말이 미쁘도다. 원컨대 네가 이 여러 것에 대하여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이 말이 미쁘도다. 원컨대 네가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

‘이 말’은 앞에서 언급한 선행에 대한 교훈과 그 이유에 관한 말씀이다. ‘미쁘다’는 말은 ‘믿을 만하다’는 뜻이다. 구원하심, 곧 무지와 불순종과 행악과 미움의 상태에서 건져내심과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과, 천국과 영생의 소망과, 이 땅 위에서의 선한 삶에 관한 말씀은 믿을 만한 말씀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이다.

그러므로 디도는 이것들, 즉 방금 말한 교훈 곧 죄로부터 건짐을 받아 의의 삶, 선한 삶을 살라는 성경적 교훈에 대하여 굳세게 말해야 했다. ‘굳세게 말한다’는 원어(베바이오오)는 ‘확신 있게 말한다, 강하게 주장한다’는 뜻이다(BDAG). 하나님의 믿을 만한 이 진리의 말씀들을 확신 있게 말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말해야 할 목적은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었다. 교훈의 목표는 선한 일을 힘쓰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구원의 목표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여 선한 일에 열심내는 친 백성이 되게 하셨다. ‘조심하여’라는 말은 성도가 조심하지 않으면 죄를 짓고 악에 떨어질 수 있음을 암시한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면, 선한 일에 힘써야 한다.

그러면 무엇이 선한 일인가? 디도서에서 많이 나오는 ‘선하다’는 원어(아가도스, 칼로스)는 ‘선하다, 유익하다, 좋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선한 일들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다.’ 성도가 힘써야 할 선한 일은 가정이나 직장이나 사회의 각 방면에 많이 있다. 구원받은 성도는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하고, 그 표는 선한 일에 힘쓰는 것이다. 성도는 남에게 피해를 주지 말고 속이지 말고 뇌물 같은 것을 받지 말고, 남에게 선을 행해야 한다.

[9절]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 . . .

바울은 또 말한다.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을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 확신 있게 말해야 할 말이 있는 반면, 말하지 말아야 할 주제들도 있다.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 등이 그것이다. 그런 것들은 ‘피해야’ 한다. 그것들은 듣는 사람들에게 아무 유익을 주지 못하고 아무 의미가 없는 헛된 것이다. 물론, 논쟁이라고 다 나쁜 것은 아니다. 필요한 논쟁도 있다. 바른 교리를 규명하고 확증하는 교리적 논쟁은 필요하다. 그것은 선한 싸움이다. 오늘날처럼 자유주의 신학과 연합운동과 신복음주의와 은사주의가 교회들 안에 가득한 때에 자유주의를 배격하고 타협주의와 싸우고 은사주의에 대한 경계를 주장하는 것은 필요한 싸움이다.

[10-11절]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 . . .

바울은 또한 말한다.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 이러한 사람은 네가 아는 바와 같이 부패하여서 스스로 정죄한 자로서 죄를 짓느니라.” ‘이단에 속한’이라는 원어(하이레티코스)는 ‘당파적인, 이단적인’이라는 뜻이다. 실상, 교회는 하나이다. 하나님의 진리도 하나이다. 그러나 오류들이 교회에 침입해 들어왔다. 잘못된 생각들이 교회 안에서 지지자들을 얻었고 세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것은 사탄의 미혹이며 인간의 무지와 연약이다. 그래서 이단이 생기고 잘못된 당파가 생겼다.

‘한두 번 훈계한 후에’라는 말은 이단과 당파의 잘못을 먼저 지적하고 가르쳐 주어야 할 것을 의미한다. 그때 거기에 빠진 자가 돌이키면 문제는 없다. 사람은 누구나 사상이나 행위에 있어서 실수와 부족이 있을 수 있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잘못과 부족을 깨달을 때 거기서 돌이키는 자는 깨끗함을 받는다. 그러나 한두 번 훈계한 후에도 돌이키지 않는 이단자와 당파적 인물은 성도가 멀리해야 할 자이다. ‘멀리하다’는 원어(파라이테오마이)는 ‘받아들이지 않다, 거절하다, 피하다’라는 뜻을 가진다. 이단과 오류를 버리지 않는 자들과 계속 교제하는 것은 그 악을 인정하는 것이든지 그 악에 물드는 일이다. 이 경우, 성도 개인과 교회 회중의 순결을 위해 교제를 단절하는 것이 필요하다. 멀리하는 것은 소극주의가 아니다. 이단자들이나 오류에 빠진 자들과 멀리하고 그들을 받아들이지 말고 거절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바른 방법이다.

‘네가 아는 바와 같이’라는 원어는 ‘이러한 사람이 . . . 죄를 짓는다는 것을 알라’라고 번역해야 한다(NIV). ‘부패하다’는 원어(에크스트레포)는 ‘심히 비뚤어지다’라는 뜻이다. ‘스스로 정죄한 자로서’라는 원어(온 아우토카타크리토스)는 ‘스스로를 정죄하면서도, 자책하면서도’라는 뜻이다. 한두 번 훈계해도 고치지 않는 이단자들은 심히 비뚤어져서 스스로를 정죄하면서도 죄를 짓는 자들이다. 그들은 강퍅한 심령을 가진 자들이다. 그들은 무지해서, 실수로 죄를 짓는 자들이 아니고,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완악한 심령으로 죄를 짓는 자들이다. 민수기 15:30는 이런 자를 ‘짐짓 악을 행하는’ 자로 묘사하였고, 히브리서 10:25는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하는’ 것으로 묘사했고, 요한일서 5:16은 ‘사망에 이르는 죄’라고 표현하였다. 이것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성령을 훼방하는 죄’와 같다고 본다. 바로 이단들은 이와 같이 성경 진리와 교훈을 알면서도 그것을 부정하고 고의적으로, 심히 완악한 마음으로 죄를 짓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자들을 멀리해야 한다.

[12-14절] 내가 아데마나 두기고를 네게 보내리니 그때에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내가 아데마나 두기고를 네게 보내리니 그때에 네가 급히 니고볼리로 내게 오라. 내가 거기서 과동(過冬)하기로 작정하였노라. 교법사 세나와 및 아볼로를 급히 먼저 보내어 저희로 궁핍함이 없게 하고 또 우리 사람들도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을 예비하는 좋은 일에 힘쓰기를 배우게 하라.”

바울에게는 아데마와 두기고 같은 동역자들이 있었다. 또 그는 디도가 속히 오기를 원하고 있다. 바울은 지금 니고볼리에 있고 거기에서 겨울을 지내려고 작정하고 있다. 니고볼리는 아가야 지방 서쪽 해안에 있는 도시이었다. ‘교법사’라는 원어(노미코스)는 ‘율법사, 법률가’라는 뜻이다. 세나는 율법을 연구한 자이었던 것 같다. 아마, 세나와 아볼로는 다 성경에 능통한 교사들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가지고 있었던 경비가 다 떨어졌던 것 같다. 바울은 지금 그들로 궁핍함이 없도록 속히 보내라고 디도에게 부탁한다.

바울은 교인들이 선행을 힘쓰기를 배우게 하기를 원하였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악을 행하는 데 익숙해졌다. 그러므로 선을 행해야 할 줄은 알지만, 선을 행하는 방법을 잘 모르고 또 행할 능력도 부족하다. 마치 갓난아이가 홀로 서기나 걷기가 힘든 것과 같다. 그러나 그러나 구원받은 성도는 선행을 배움으로써 선행을 힘쓸 수 있다. 선행은 신앙의 열매이다. 선행이 없는 자는 열매가 없는 자이지만, 선행이 많은 자는 열매가 많은 자이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는다. 구원은 좋은 생명, 새 생명의 씨이다. 이제 이 좋은 새 생명은 좋은 열매를 맺을 것이 기대된다.

무엇이 선행인가? 하나님께서 가장 귀히 여기시는 선행은 복음을 널리 전하는 일이다. 이 전도의 일을 위해 기도하고 헌금하고 전도자를 세우고 훈련시키고 후원하는 것은 가장 귀한 선행이다. 많은 전임(專任) 전도자들이 일어나야 한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십자가의 속죄의 복음을 가감 없이 전파하고 오늘 시대의 배교적 풍조와 타협치 않고 충성되이 일할 일꾼들이 많이 필요하다. 교회는 그들을 훈련시키고 파송하고 기도와 물질로 후원해야 한다. 그것은 진실한 성도들이 맺어야 할 좋은 열매들이다.

[15절] 나와 함께 있는 자가 다 네게 문안하니 믿음 안에서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나와 함께 있는 자가 다 네게 문안하니 믿음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너도 문안하라.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 [아멘.]2)” 성도들의 상호 문안은 아름다운 일이다. 바울과 함께한 자들은 그와 함께 디도에게 문안하였다. 바울은 또 디도도 바울과 함께한 자들에게 문안하라고 말한다. 바울은 자기와 함께한 자들을 ‘믿음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말하였다. 인간 바울은 연약한 자이지만, 그가 받은 사도의 직분과 그가 전하는 하나님의 복음 진리 때문에 성도들은 그를 사랑하였다. 오늘도 진실한 성도들은 진실한 종들을 사랑할 것이다.

우리는 선한 일을 힘써야 한다. 구원의 목표는 선한 사람이 되고 선한 열매를 많이 맺는 것이다. 그래야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고 하나님의 뜻하신 세계복음화가 이루어질 것이다. 전도는 모든 성도가 행해야 할 가장 귀하고 중요하고 선한 일이다. 우리가 구원받은 자라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는 전도 사업에 동참해야 한다.

우리는 이단과 오류를 회개치 않고 고집하는 자들을 멀리하고 거절해야 한다. 그것은 교회의 순결성 때문이다. 이단과 오류에 빠진 자들과의 교제는 개인과 교회를 부패시키는 요인이다. 이단자나 오류에 빠진 자를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는 것은 결코 소극주의적 태도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유일한 바른 방법이다.

1) Byz A copms Origenlat 등에 있음.

2) Byz א C vg syrp copbo armms eth 등에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