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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레몬서 강해

 

김효성 목사

2023년 4월 18일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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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리말

주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 바울의 증거대로(마 5:18; 요 10:35; 갈 3:16; 딤후 3:16),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라는고백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매우 기본적이고 중요하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진술대로(1:8), 성경 원본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고 그 본문은 “그의 독특한 배려와 섭리로 모든 시대에 순수하게 보존되었다.” 이것이 교회의 전통적 견해이다. 그러나 19세기 말 웨스트코트와 호트가 주장한 불확실한 가설에 의해 많은 교회들이 신약성경의 전통적 다수 본문을 버리고 불완전하고 오류투성이의 사본들(א와 B)을 중시하는 잘못을 범하였다. 그러나 신약성경의 헬라어 비잔틴 다수 사본들의 본문은 순수하게 보존된 성경 원본의 본문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채택되어야 할 것이다.

성경을 가지고 설교할지라도 그것을 바르게 해석하고 설교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올 것이다(암 8:11). 중세 시대 말, 종교개혁 직전과 같이, 오늘날 벌써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오는 것 같다.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설교와 성경강해가 있지만, 순수한 기독교 신앙 지식과 입장은 더 흐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요구되는 성경 해석과 강해는 복잡하고 화려한 말잔치보다 성경 본문의 바른 뜻을 간단 명료하게 해석하고 적절히 적용하는 것일 것이다. 사실상, 우리는 성경책 한 권으로 충분하다. 성경주석이나 강해는 성경 본문의 바른 이해를 위한 작은 참고서에 불과하다. 성도는 각자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성경을 읽어야 하며, 성경주석과 강해는 오직 참고로만 사용해야 할 것이다.

 

제목 차례

1장: 자발적인 선행

 

서론

빌레몬서의 저자는 사도 바울이다(1, 19절). 3세기의 교부 오리겐은 본서를 사도 바울의 서신으로 인용했다. 본 서신의 저작 연대는 주후 60년경일 것이다. 본 서신은 골로새서와 연관성이 많으며 아마 골로새서와 거의 같은 때에 로마 감옥에서 쓰여졌다.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 때문에 갇힌 자라고 표현하였다(1, 9, 10절).

빌레몬서는 한 장으로 된 짧은 서신이며 그 특징적 주제와 주요 내용은 자발적 선행이다(14절). 14절,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것도 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自意)로[자발적으로] 되게 하려 함이로라.” 이 교훈은 신약성경 중 본 서신만이 주는 귀한 교훈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억지로가 아니고 자발적으로, 자원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께서 명하신 하나님의 선한 일들을 하기를 원하신다.

          
    

1장: 자발적인 선행

1-7절, 성도의 참된 교제

[1-2절]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데스미오스)[갇힌 자, 죄수]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과 및 자매[사랑을 받는 여자]1) 압비아와 및 우리와 함께 군사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게 편지하노니.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죄수가 되어 감옥에 갇혀 있다(1, 9, 10절).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당하는 고난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참 믿음의 증거요 구원받은 성도의 면류관이다.

바울은 이 편지의 수신자 빌레몬을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라고 부른다. ‘동역자’라는 말은 ‘함께 일하는 자’라는 뜻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며 영혼들을 구원하고 참된 교회를 세우는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여 함께 일하는 자를 가리킨다. 그 일은 전도하고 목회하는 일과 설교하고 말씀을 가르치는 일을 포함한다. 빌레몬은 한 교회의 담임목사 즉 목회자이었던 것 같다. 목사들은 하나님의 동역자들이다. 고린도전서 3:6-9,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심는 이와 물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사랑을 받는 여자 압비아’는 빌레몬의 아내인 것 같다. 아킵보는 ‘우리와 함께 군사된 아킵보’라고 표현된다. 그는 그 교회의 목회의 일에 참여한 사역자이었던 것 같다. 바울은 골로새서 4:17에서 “아킵보에게 이르기를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을 삼가 이루라고 하라”고 말했었다. 모든 성도는 넓은 의미에서 다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들이다. 우리는 사탄과 싸우는 군사들이며, 특히 사탄과 악령들의 손 안에 있는 영혼들을 구원하는 싸움을 하는 군사들이다.

‘네 집에 있는 교회’라는 말씀은 초대교회가 처음에 어떤 성도의 집에서 모였음을 보인다. 로마서 16:5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집에 있는 교회’(원문에), 골로새서 4:15에 ‘눔바의 집에 있는 교회,’ 그리고 본문에 ‘빌레몬의 집에 있는 교회’ 등 초대교회는 어떤 성도의 집에서 모였다. 구약교회와 달리, 신약교회는 성도들의 모임과 교제를 중시한다. 건물은 교회의 모임과 교제와 활동을 위해 편리한 정도면 충분하다. 신약교회가 힘써야 할 일은 설교와 성경강해와 기도를 중심으로 한 성도들의 영적 교제이며, 나아가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일이다.

[3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안’은 성도들에게 큰 복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의 결과이다. 성도는 구원받은 후에도 성화(聖化)[거룩하여짐]를 위해 계속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 또 평안은 마음의 평안과 몸의 건강, 또 경제적 안정과 환경적 평안까지 포함한다. 인생의 참된 복인 은혜와 평안은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만 온다.

[4-5절] 내가 항상 내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를 말함은 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네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음이니.

사도 바울은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는 생활을 하였다. 지금 감옥에서도 그는 감사를 쉬지 않는다. 우리도 환경에 좌우되지 말고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기억하면서 항상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18에서 “범사에 감사하라”고 우리에게 교훈하였다.

사도 바울은 기도할 때 빌레몬을 언급했다. 이것은 기도의 교통이다. 우리도 우리 자신이나 우리 가족 정도만을 위해 기도하지 말고 주의 종들과 사랑하는 성도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기도 중에 서로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의 좋은 점을 감사하고 그에게 필요한 점을 간구하면서 기도로 교통해야 한다. 이것이 성도의 교제이다.

사도 바울이 기도 중에 빌레몬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감사한 것은, “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그의 사랑과 믿음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즉 주 예수께 대한 빌레몬의 믿음과 사랑 그리고 모든 성도에 대한 그의 사랑 때문이었다. 오늘날 우리도 우리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사랑하며 충성해야 하고 그의 명령을 따라, 성도들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은 성도들을 나의 형제와 자매로 여기며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성도의 교제이다.

[6절]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모든]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 [예수]께 미치도록 역사하느니라.

다시 번역하면, “네 믿음의 교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혹은 위하여)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선한 것을 알게 되므로 효력 있게 되기를 원하노라.” ‘네 믿음의 교제’라는 말은 성도의 참된 교제가 무엇임을 보인다. 성도의 교제는 단지 세상적 놀이나 오락을 통해 이루어지거나 운동이나 등산이나 소풍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성도의 교제는 단순히 먹고 마시는 교제도 아니다. 성도의 교제는 ‘믿음의 교제,’ 즉 믿음 안에서 함께 기도하고 대화하며 서로 권면하고 위로하는 교제이다. 사도 요한도 요한일서 1:3에서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고 말했다. 우리의 교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믿음의 교제이어야 한다.

이런 믿음의 교제를 통하여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성취하신 속죄사역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선한 것을 알게 되며, 그것은 우리의 신앙 성장에 큰 도움이 된다.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선한 것’이란 하나님께서 주신 진리, 구원, 새 생명, 경건과 사랑의 새 마음가짐, 의, 영생, 천국 소망 등을 가리킬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을 알면 알수록 우리의 믿음은 더욱 자라고 굳세어진다.

[7절] 형제여,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아나페파우타이)[새 힘을 얻었으니] 내가[우리가]2) 너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감사]3)과 위로를 얻었노라.

성도들의 마음은 빌레몬으로 말미암아 새 힘을 얻었다. 그것은 그의 참된 믿음과 사랑 때문이었다. 성도들의 마음은 참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있는 다른 성도들을 인하여 새 힘을 얻는 것이다. 이것이 성도의 교제의 유익이다. 사도 바울은, 비록 옥중의 고난 가운데서이지만, 성도들의 마음이 빌레몬으로 말미암아 새 힘을 얻었다는 사실 때문에 또 빌레몬의 사랑 때문에 많은 감사와 위로를 얻었다. 오늘날도 진실한 성도들의 소식, 곧 참된 믿음의 열매의 소식과 말씀 순종의 소식을 듣는 것이 주의 종들에게 큰 감사와 위로가 된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사도 바울 일행과 빌레몬 가족들은 하나님과 아름다운 교제를 나누고 있었다. 성도의 교제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는 교제이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1:3에서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함이라”고 말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때문에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 것 때문에 옥에 갇혀 있었다(1절). 빌레몬은 바울과 같이 하나님의 동역자이었고(1절) 아킵보는 바울과 함께 군사된 자이었다(2절). 사도 바울은 빌레몬이 주 예수께 대한 사랑과 믿음이 있다고 증거하였다. 빌레몬은 주 예수님을 믿었고 사랑했다. 또 바울은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모든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 예수께 미치도록 역사하느니라”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모든 선은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과 새 생명을 가리켰다고 본다. 성도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깨닫기 때문에 더욱더 하나님과 주 예수님을 믿고 사랑한다. 또 바울은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빌레몬과 그의 교회에 은혜와 평안을 주시기를 기원했다.

둘째로, 사도 바울은 빌레몬을 사랑하였고 빌레몬은 다른 성도들을 사랑했다. 사도 바울은 빌레몬을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라고 불렀고(1절) 또 아마 그의 아내인 압비아를 “사랑을 받는 여자”라고 불렀다(2절, 전통본문). 사도 바울은 주 안에서 그들을 사랑하였다. 또 사도 바울은 항상 하나님께 기도할 때 빌레몬을 말한다고 말했다(4절). 우리가 형제를 사랑할 때 우리의 기도 중에 그를 말할 것이다. 또 사도 바울은 빌레몬이 주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고 또 모든 성도를 사랑함을 듣고 하나님께 늘 감사하였다(4-5절). 또 바울은 “우리가 너의 사랑으로 많은 감사와 위로를 얻었다”고 말했다. 성도의 참된 교제는 남을 사랑하고 남의 사랑을 받는 사랑의 교제이다. 그것은 우리의 기도 중에 상대를 말하게 되고 또 그의 믿음과 사랑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게 된다.

셋째로, 성도의 참된 교제는 하나님께 많은 감사를 올리게 되고 또 서로에게 큰 위로와 새 힘이 된다. 7절, “형제여,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새 힘을 얻었으니 우리가 너의 사랑으로 많은 감사와 위로를 얻었노라.” 빌레몬의 믿음과 사랑 때문에 성도들은 새 힘을 얻었으며 바울 일행도 하나님께 많은 감사를 올렸고 또 위로를 얻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2:20에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고 말했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1:3-4에서 그의 서신을 통해 그의 기쁨이 충만케 되기를 원한다고 썼다. 하나님 믿고 예수님 믿는 믿음으로 바로 살고 성경에 교훈된 바를 바르게 실천하며 사는 성도들은 전도자들과 설교자들에게 영광과 기쁨이 된다. 성도의 참 교제는 이와 같이 서로에게 큰 위로와 새 힘을 주는 유익이 있다.

 

8-25절, 자발적 선행

[8-10절] 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많은 담력을 가지고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 있으나 사랑을 인하여 도리어 간구하노니 나이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갇힌 중에서 낳은 [나의]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종이었고(16절) 주인에게서 도망쳐 나왔던 것 같으나 바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었다고 보인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위하여 간구한다. 사도로서 무슨 선한 것을 명할 수 있겠으나, 그는 명하지 않고 사랑을 인해 간구한다. 많은 세월을 주를 위하여 수고했고 지금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옥에 갇혀 있는 나이 많은 그가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해 간구하는 그 간구를 빌레몬은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11-14절] 저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네게 저를 돌려보내노니 [저를 받으라](전통본문).4) 저는 내 심복이라. 저를 내게 머물러 두어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것도 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자발적으로] 되게 하려 함이로라.

‘오네시모’라는 원어(오네시모스)는 ‘유익한’이라는 뜻이다. 오네시모는 이전에 빌레몬에게 무익한 종이었으나 지금 바울과 빌레몬에게 유익한 자가 되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은 변화이었다. 복음은 무익한 자를 유익한 자로 만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죄인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 무익한 자이지만,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 유익한 자이다. 과거에는 나쁜 열매를 맺는 나무이었으나 이제는 좋은 열매를 맺는 나무가 되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돌려보내고 있었다. 노예제도에서 종은 주인의 소유물이었다. 출애굽기 21:21, “종은 주인의 금전이라.” 오네시모는 이제 주인에게 돌려보내지고 있다. 전통사본에는 ‘돌려보내노니’라는 말 다음에, “저를 받으라”는 말이 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받으라고 부탁한다. 과거에 오네시모가 한 일을 생각하면 받아들이기 어려울지 몰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더욱이 노사도의 부탁이니 빌레몬은 그를 받아들일 마음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사도 바울은 곧 이어 ‘그는 내 심복이라’고 표현한다. ‘심복’이라는 원어(스플랑크나)는 ‘창자, 마음, 심정’ 등의 뜻이다. 오네시모는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았으며 사도 바울을 위한 충성된 수종자가 되었고 바울도 그를 진심으로 아꼈다. 사도 바울은 그를 자기에게 계속 머물러 두어 그의 복음 사역을 위해 수종드는 자로 삼고자 하였으나, 모든 일을 바르게 처리하려고 하였다.

바울은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것도 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발적으로 되게 하려 함이로라”고 말한다. 본절은 본서신에 계시된 중심 교훈이라고 보인다. 그것은 자발적 선행이라는 교훈이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그의 주인 빌레몬에게 돌려보내고 있다. 오네시모는 바울에게 필요한, 바울이 아끼는, 충성된 조수이었으나, 바울은 그의 소유권이 빌레몬에게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선한 일도 주인의 승낙 없이 하는 것은 선하지 않다. 그래서 바울은 주인의 승낙 아래 오네시모를 자기 곁에 두기를 원했던 것이다. 바울은 빌레몬의 선한 일이 억지같이 되지 않고 자발적으로 되게 하기를 원했다. 억지로 하는 선행도 선행이긴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자발적 선행을 기뻐하신다.

[15-16절] 저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이를 인하여 저를 영원히 두게 함이니 이후로는 종과 같이 아니하고 종에서 뛰어나 곧 사랑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오네시모는 주인 빌레몬의 집을 도망쳐 나온 종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가 잠시 주인을 떠났었으나, 이제 이 일을 인해 빌레몬은 그를 영원히 두게 되었다. 오네시모는 그에게 100년의 이 세상에서 뿐만이 아니고 영원한 천국에서의 형제가 되었다.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안에서 얻게 된 일이었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주 안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가족들이며 형제들이요 자매들이다.

오네시모는 이제 빌레몬에게 종 이상이며 사랑받는 형제로 둘 자가 되었다. 바울에게 그러했다면,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빌레몬에게는 더 그러할 것이다. 여기에 노예제도의 변화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옛 시대의 노예제도를 급격하게 변화시키려 하지 않으셨다. 어떤 사회제도의 개선이든지 혁명은 바람직한 방법론이 아니라고 본다. 혁명이 언제나 더 나은 사회의 보장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점진적 사회의 개선을 원하셨다. 사회개선을 위하여 먼저 주인들, 윗사람들, 가진 자들의 마음가짐의 변화가 필요하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주 안에서 주인과 종의 관계를 사랑하는 형제 관계가 되게 하셨다.

[17-19절]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무[친구]로 알진대 저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저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진 것이 있거든 이것을 내게로 회계하라. 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 너는 이 외에 네 자신으로 내게 빚진 것을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

바울은 오네시모에 대해 좋게 말한다. 그는 빌레몬에게, 네가 나를 친구로 여긴다면, 오네시모를 나처럼 영접하라고 부탁한다. 바울이 주 안에서 형제로 귀히 여기는 오네시모를 그의 친구 빌레몬이 어떻게 외면하거나 박대할 수 있겠는가? 주의 사랑하는 종을 영접하는 것이 주를 영접하는 것이듯이, 바울의 사랑하는 조수 오네시모를 영접하는 것은 곧 바울을 영접하는 것이 될 것이다.

오네시모는 주인에게 잘못을 범하고 그의 재산에 손해를 끼치고 도망쳤던 것 같다. 그러나 바울은 이것까지도 자신이 담당하겠다고 말한다. 바울은 친필로 이 편지를 쓰면서 오네시모가 진 빚이 있으면 자기가 갚겠다고 말한다. 이것은 그의 말에 대해 그가 도장을 찍거나 서명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바울은 빌레몬이 자기에게 빚진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다고 덧붙여 말한다. 그것은 영적인 빚 곧 그를 통하여 받은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기억나게 한다. 그것은 결코 돈보다 못하지 않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은 세상의 금은보석들보다 더 귀하며, 그 말씀의 바른 교훈은 하나님의 큰 은혜와 복이다.

[20-21절] 오 형제여! 나로 주 안에서 너를 인하여 기쁨을 얻게 하고 내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하게 하라. 나는 네가 순종함을 확신하므로 네게 썼노니 네가 나의 말보다 더 행할 줄을 아노라.

빌레몬은 주 안에서 바울의 형제이다. 정말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바울의 선한 뜻을 행함으로 그로 하여금 기쁨을 얻고 마음의 평안과 힘을 얻게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진실한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참된 종들의 소원이다. 그들은 주 안에서 형제된 자들 때문에 마음의 기쁨과 평안을 얻기를 소원한다.

바울은 빌레몬이 그의 말을 순종할 것을 확신한다. 바울은 빌레몬이 그의 말보다 더 행할 줄을 안다고 말한다. 오늘날 동역자들 간의 관계는 어떠하며, 목사와 성도들의 관계는 어떠한가? 진실한 목사들은 어디에 있고, 순종하는 성도들은 어디에 있는가? 또 목사의 가르침보다 더 행할 성도들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오늘날 교회 안에도 좋은 목사들이 많이 있고, 좋은 성도들이 많이 있기를 소원한다.

[22절] 오직 너는 나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라. 너희 기도로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게 하여 주시기를 바라노라.

바울은 자기를 위해 거처를 준비해 줄 것을 그에게 부탁하고, 그들의 기도로 그가 그들에게 나아가게 되기를 바란다. 거처를 준비하는 것은 인간 편에서 할 일이지만, 바울이 옥에서 나가 골로새로 가고 못 가는 것은 하나님께 달린 일이다. 사람이 계획하지만, 일을 이루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잠 16:1, 9). 그러므로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면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할 것밖에 없다(잠 3:6).

[23-25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와 함께 갇힌 자 에바브라와 또한 나의 동역자[동역자들]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하느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과 함께할지어다. [아멘.]5)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와 함께 갇힌 자’라는 표현과 ‘나의 동역자들’이라는 표현은 주 안에서 귀한 말들이다. 주의 피로 구속(救贖)받은 우리는 주의 일을 위해 함께 일하는 동역자가 되기 원하며, 또 필요하다면 그리스도 예수 때문에 옥에 함께 갇히기도 원한다. 이런 고난과 핍박을 당하는 것은 주를 믿는 자들에게 참으로 영광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오네시모는 죄인이었고 무익한 종이었으나 바울을 통해 구원을 받고 변화되었다. 우리는 죄인이었을 때 무익한 자이었으나 구원받아 하나님의 선한 일을 위해 유익한 자가 되었다. 구원은 죄인을 유익한 자가 되게 한다. 우리는 이제 세상에서 무익한 자가 되지 말고 선한 일에 쓰이는 유익한 자가 되어야 한다.

둘째로, 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받으라고 권하였다. 그것은 그의 잘못을 용서하고 그의 빚진 것을 탕감하며 사랑으로 용납하는 것을 포함한다. 주 안에서는 주인도 종도 형제자매이다. 우리는 주 안에서 형제자매로서 서로 용서하며 용납하며 사랑하며 교제해야 한다.

셋째로, 바울은 빌레몬의 선행이 억지가 아니고 자발적이게 되기를 원하였다. 구원의 목표는 선한 삶이고 선행은 자발적이어야 한다. 신앙생활은 성령의 감동 가운데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사랑하고 자발적으로 헌신하고 순종하며 섬기는 것이다. 우리는 무슨 선한 일이든지 억지로 하지 말고 자발적으로, 기쁨과 즐거움으로 해야 한다. 예배도 찬양도 헌금도(고후 9:7) 봉사도 그러해야 한다.

 

미주

1) Byz vgms (syrp) copsa-mss 등에 있음.

2) Byz (D*) syr 등이 그러함.

3) TR UBS4 א A C D latt syr cop; 그러나 Byz는 ‘은혜’ 혹은 ‘감사.’

4) Byz C* itd vgww st (cl) (copsa bo arm) 등에 있음.

5) Byz א C vg syrp copbo armms eth 등에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