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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강해

 김효성 목사

2019년 3월 27일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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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리말

주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 바울의 증거대로(마 5:18; 요 10:35; 갈 3:16; 딤후 3:16),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라는 고백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매우 기본적이고 중요하다.

성경 원본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고 그 본문은 그의 독특한 배려와 섭리로 모든 시대에 순수하게 보존되었다고 본다. 이러한 교회의 전통적 견해를 버릴 타당한 이유는 없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의 헬라어 비잔틴 다수 사본들의 본문은 순수하게 보존된 성경 원본의 본문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채택되어야 할 것이다.

성경은 성도 개인의 신앙생활뿐 아니라, 교회의 모든 활동들에도 유일한 규범이다. 오늘날처럼 다양한 풍조와 운동이 많은 영적 혼란의 시대에,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가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묵상하기를 원하며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든 뜻을 알기를 원한다.

성경을 가지고 설교할지라도 그것을 바르게 해석하고 적용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올 것이다(암 8:11).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오고 있다. 많은 설교와 성경강해가 있지만, 순수한 기독교 신앙 지식과 입장은 더 흐려지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요구되는 성경 해석과 강해는 복잡하고 화려한 말잔치보다 성경 본문의 바른 뜻을 간단 명료하게 해석하고 적절히 적용하는 것일 것이다. 사실상, 우리는 성경책 한 권으로 충분하다. 성경주석이나 강해는 성경 본문의 바른 이해를 위한 작은 참고서에 불과하다. 성도는 각자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성경을 읽어야 하고, 성경주석과 강해는 오직 참고로만 사용해야 할 것이다.

 

제목 차례

야고보서 서론

1장: 시험을 참음

2장: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

3장: 말에 온전한 자

4장: 탐욕, 비방, 자랑을 버릴 것

5장: 인내와 기도

  

 

서론

전통적으로, 공동서신은 7권의 책을 가리키는데, 그것은 야고보서, 베드로전서, 베드로후서, 요한일서, 요한이서, 요한삼서, 유다서이다.

야고보서의 저자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인 것 같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1) 저자는 자신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표현하지 않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1절)이라고만 표현한다. (2) 만일 본서가 사도의 저작이었다면, 그것의 정경성은 초대교회에서 오랫동안 의문시되지 않았을 것이다. (3)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는 일찍이 주후 44년경 순교했다(행 12:2). (4)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는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서 사도적 인물이었다. 그의 발언은 예루살렘 회의의 결정에 주요 역할을 했고(행 15:13-21), 사도 바울은 ‘주의 형제 야고보’를 사도들과 같은 권위를 가진 인물로 언급했고(갈 1:19) 또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이라고 표현하였다(갈 2:9)

야고보서는 2세기에 번역되었다고 보이는 옛 수리아어역에 포함되어 있다. 고대 교부들인 오리겐, 예루살렘의 시릴, 나지안스의 그레고리, 아다나시우스, 제롬, 어거스틴 등은 본서를 성경으로 인정하였다. 본 서신이 로마와 칼타고 등 서방에서는 오랫동안 의문시되었으나 예루살렘과 수리아 등 동방에서는 아주 일찍부터 인정되었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의 죽음에 대하여,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그가 대제사장 아나누스의 명령으로 돌에 맞아 죽었다고 말하지만,1) 기독교회사를 쓴 유세비우스는 그가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뜨림을 당한 후 몽둥이로 맞아 죽었다고 말한다.2) 어느 증거가 맞든지 간에 그는 다른 사도들과 같이 순교하였다.

본 서신의 저작 연대는 주후 45년에서 48년 사이일 것이다. 본서는 야고보가 순교하기 전에(주후 63년 이전), 아마 예루살렘 회의(주후 49년경) 이전에 쓰였을 것이다. 본 서신의 수신자는 동방에 흩어져 살았던 유대인들이었을 것이다.

야고보서의 특징적 주제는 ‘행함이 있는 믿음’이다. 야고보서 2장에 나오는 이행득의(以行得義), 즉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 아니고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말씀은,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와 갈라디아서에서 밝히 증거하는 이신칭의(以信稱義), 즉 사람이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 아니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복음 진리와 겉으로는 충돌하는 것같이 보이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사도 바울은 사람이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救贖)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것을 말한 것이고,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으로는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고 행함이 있는 산 믿음으로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야고보의 표현은 오해를 일으킬 여지가 있어 보이지만, 사도 바울을 통해 증거된 하나님의 복음 진리는 분명하고 야고보가 말하고자 하는 뜻도 분명하다. 사도 바울도 참된 믿음은 의와 선을 행함으로 나타남을 분명히 말하였다(갈 5:6; 살전 1:3; 롬 6장).

야고보서의 각 장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장, 시험을 참음

2장,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

3장, 말에 온전한 자

4장, 탐욕, 비방, 자랑을 버릴 것

5장, 인내와 기도, 병자를 위한 기도

 

1장: 시험을 참음

1-11절, 시험, 지혜, 성도의 자랑

[1절]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본서의 저자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라고 생각된다. 저자가 자신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표현한 것은 예수님을 단지 혈육의 형으로 생각지 않고 주님으로 고백한 것이다. 즉 그는 주 예수님에 대한 자신의 절대적 순종을 고백한 것이다. 예수님은 그의 형이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그가 순종해야 할 주님이심을 믿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동생들은 처음에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 요한복음 7:5,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그러나 후에 그들은 예수님을 믿었다. 사도행전 1:14에 보면,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에 제자들은 여자들과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썼다. 또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1:19에 ‘주의 형제 야고보’를 언급하였고 또 갈라디아서 2:9에는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이라고 표현하였다.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 즉 수리아와 소아시아 등 여러 곳에 살고 있었던 유대인 성도들에게 편지하였다. 유대인들은 유다 왕국의 멸망 후 온 세계에 흩어져 사는 자들이 되었고 이제 예수님 믿는 유대인 성도들은 참으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대표하였다.

[2-4절]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본서에 19번 사용된 ‘형제’라는 말은 초대교회에서 성도 상호간에 사용된 친근한 명칭이다.3) 우리는 모두 주 안에서 형제들이다.

‘여러 가지 시험’이라는 말은 성도에게 닥쳐오는 시험이 다양함을 보인다. 어떤 때는 육체적 질병이 있고, 또 어떤 때는 실직이나 부도, 파산 등의 물질적 어려움이 있다. 어떤 때는 가족들의 질병과 사고와 죽음이 있고, 어떤 때는 친구의 비방과 배신이 있다. 어떤 때는 가정의 파탄이나 국가의 경제 공황이나 전쟁이 있다.

성도는 이런 다양한 시험을 당할 때에 그것을 불평하지 말고 그것을 온전히 기쁘게 여겨야 한다. 그 이유는, 모든 환경이 섭리자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며 또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고 인내를 온전히 이루면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온전한 인격이 되기 때문이다. 로마서 5:3-4도,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인격의 단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고 말했다. 신앙 인격은 시험과 시련을 통해 단련되고 성숙하게 된다. 온전한 인격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우리가 이 세상에서 힘써야 할 성화의 목표이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사람들은 오랫동안 단련을 받은 인물들이었다. 야곱은 20년간 하란에서 외삼촌 밑에서 고된 수고를 하였고, 요셉은 약 13년 가량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였고, 모세는 40년간 미디안 광야에서 양치기 생활을 했고, 다윗은 10여년간 피신 생활을 하였다. 그들은 오랜 고난의 단련을 통해 신앙 인격의 성숙을 가졌다고 본다. 그러므로 우리도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할 때 기쁘게 받아야 한다.

[5-8절]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성도가 이 세상을 살면서 시험을 잘 대처하려면 지혜가 필요하다. 지혜는 하나님의 말씀을 현실에 잘 적용하는 능력이다. 지혜는 참으로 귀하다. 잠언은 지혜의 책인데, 지혜의 중요성을 이렇게 말했다. 잠언 3:13-18, “지혜를 얻은 자와 명철을 얻은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너의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 그 우편 손에는 장수가 있고 그 좌편 손에는 부귀가 있나니 그 길은 즐거운 길이요 그 첩경은 다 평강이니라.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

만일 우리가 지혜가 부족하다고 느낀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여 얻을 수 있다. 주께서는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7:7-8).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면 그는 그것을 후히 주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 지혜를 구할 때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지혜를 구하면서 의심하는 자는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고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이다. 우리가 기도 응답을 믿어야 할 이유는 주께서 기도의 응답을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앞에서 인용한 마태복음 7:7뿐 아니라, 마가복음 11:24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또 지혜를 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며 우리가 그의 뜻에 합한 것을 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요한일서 5:14,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9-11절]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우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사회적 신분이 낮거나 경제적 어려움이 있는 성도들은 존귀하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광스럽고 복된 천국의 시민이 된 것을 자랑할 수 있다. 흔히 성도에게 닥치는 큰 시험거리는 물질 문제이지만, 성도들은 세상 것들이 헛되다는 것과 주 예수님 안에서 얻은 구원과 복이 지극히 크고 가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것으로 만족하며 즐거워하고 자랑한다. 그러나 한편, 사회적 신분이 있거나 물질적 유여함이 있는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적 부요의 헛됨을 인정하고 낮은 형제들과 교제하게 된 것을 자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은 이전에 가치 있게 여겼던 세상의 것들이 풀같이 시들고 아름다운 꽃같이 없어지는 것임을 깨달았고(사 40:6-8) 거기에 더 이상 큰 가치를 두지 않는다. 성도의 가치는 오직 천국과 부활에 있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임을 고백하고 온전히 믿고 순종하자(롬 6:22).

둘째로, 우리는 시험들을 만날 때에 온전히 기쁘게 여기자. 시험은 인내를 만들고 인내는 온전한 인격을 이루는 유익이 있기 때문이다.

셋째로, 우리가 지혜가 부족하면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그것을 구하여 얻자. 믿고 구하는 자마다 지혜를 얻을 것이다.

넷째로, 우리들 가운데 낮은 형제들은 주 안에서 성도의 높은 신분을 자랑하고, 부한 형제들은 세상것들이 헛됨을 깨닫고 자신들의 낮아짐을 자랑하자. 성도의 가치와 소망은 부활과 천국과 영생에 있다.

 

12-18절, 시험의 원인

[12절]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야고보서 1장에서 ‘시험’이라는 원어(페이라스모스)(2, 12-14절)는 ‘시련’이라는 원어(도키미온)(3절)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것 같다. 사람이 환난의 시험을 잘 참으면 온전한 인격자가 되므로 복되다(3-4절).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이라는 원어(도키모스)도 ‘시험을 받은’이라는 뜻이다. 성도들의 시험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시험이다. 그것을 잘 통과하는 자들은 그들에게 참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있음이 증명될 것이다.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은 영생을 가리킨다. 면류관은 승리한 자들에게 주는 상을 의미한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승리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말했다(롬 8:35, 37). 사도 요한도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고 말했다(요일 5:4).

영생은 행위의 대가가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시험을 통과하고 승리하는 신앙생활의 결과라는 뜻에서 상이라고 표현되었다고 본다. 영생은 성도의 정상적 신앙생활의 결과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6:22에서,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고 말했고, 갈라디아서 6:8에서는,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썩는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영생의 영광을 얻을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여러 가지 시험을 잘 참고 이겨야 한다.

[13-16절] [그러나]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시험의 원인은 무엇인가? 물론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작정하셨다는 진리에서 보면 모든 일의 제일 원인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그 진리는 하나님께 악의 책임을 전가시키는 방식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고 말하지 말라고 한 것이다. 이런 뜻에서 하나님께서는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않으시고 친히 누구를 시험하지도 않으신다.

본문은 사람이 받는 시험의 원인이 그의 욕심 때문이라고 말한다. 각 사람은 자기 욕심에 이끌려 미혹될 때 시험에 떨어진다. 사람은 돈과 정욕 때문에 살인하고 간음하고 도적질하고 거짓말한다. 또 돈 사랑이나 명예심이나 생의 애착 때문에 물질적 파산이나 남의 비난이나 몸의 질병으로 인해 낙망한다. 우리에게 욕심이 없다면, 그런 것들이 시험거리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생의 최고 목표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면, 우리가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의 지혜롭고 공의롭고 선한 처분을 믿는다면, 또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의식주의 필요와 우리의 건강을 주실 것을 믿는다면,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들도 우리에게 시험거리가 되지 못할 것이다. 사람의 시험은 오직 자신의 욕심에서 오는 것이다.

욕심은 죄를 낳고 죄의 결과는 죽음이다. ‘장성한다’는 원어(아포텔레오)는 ‘끝까지 마친다’는 뜻이다. 즉 죄가 죄로 끝마치고 사람이 그 죄를 끝까지 회개치 않는다면 죽음에 이른다는 뜻일 것이다. 죄의 결과는 죽음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죽음은 지옥 형벌을 포함하는 것이다. 또 사람의 시험이 욕심에서 나는 것이므로, 우리는 속지 말아야 한다. 사람이 욕심을 낼 때는 그에게 어떤 좋은 일이 있을 것같이 보이지만, 실상 그 결과는 죄이며 죄의 결과는 사망이다.

[17절]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천지만물은 하나님의 창조물이며 천지만물에 있는 모든 좋은 것들은 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고 땅을 정복하고 생물들을 다스리게 하셨기 때문에 사람이 땅을 정복하고 생물들을 다스리는 데 쓰이는 지혜와 능력은 다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들이다. 사람이 발전시킨 음악과 미술, 문학과 과학 등도 다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선물들이다. 이것들은 다 위로부터 즉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왔다. 성경에서 ‘어두움’은 무지와 죄와 슬픔과 불행을 가리키고, ‘빛’은 지식과 의와 기쁨과 행복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빛들의 아버지이시다. 그에게는 참된 지식과 의와 기쁨과 행복이 있다. 하나님께서 빛이시라는 점에 있어서 그는 변함이 없으시며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다.

[18절]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그가 만드신 피조물들 중에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나으신 자들이다. ‘첫 열매’란 중생(重生)의 구원을 가리킨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된 것이었다. 요한복음 15:3,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에베소서 5: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그것은 영광의 천국과 몸의 부활에 비해 볼 때 첫 열매에 해당한다. 로마서 8:23,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救贖)을 기다리느니라.” 영광스럽고 완전한 추수는 아직 미래에,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있다. 앞으로 올 새 세계를 생각할 때에 성도들의 구원은 첫 열매와 같다. 장차 만물이 새로워지고 회복될 것이다. 사도행전 3:21, “만유를 회복하실 때.” 로마서 8:20-21,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영광스런 천국과 부활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우리를 중생시키셨고 첫 열매가 되게 하셨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세상에서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지만, 시험에 지지 말고 잘 참고 이겨서 생명의 면류관을 받자.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음으로 받지만, 중생한 자는 온갖 시험에 지지 말고 잘 이겨야 한다. 우리는 성경말씀과 기도와 성령의 도우심으로 온갖 시험을 잘 이겨야 한다.

둘째로, 사람의 시험의 원인은 자신 속에 있는 욕심이므로, 우리는 돈과 쾌락과 명예 등 이 세상에 속한 모든 욕심을 버림으로 어떤 시험에라도 떨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돈과 쾌락과 명예에 대한 욕심을 다 버려야 한다. 그래야 승리의 생활을 할 수 있다.

셋째로, 우리는 세상의 모든 좋은 것들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임을 알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세상은 창조자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은 세상이었다. 모든 좋은 것들은 다 그에게서 나왔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가진 모든 좋은 것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천국의 첫 열매로 구원하신 것을 깨닫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고 천국만 바라고 모든 시험을 이기고 그의 모든 계명과 말씀을 지켜 거룩과 의와 선과 진실을 행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우리의 참된 소망은 주의 재림과 영광의 천국뿐이다.

 

19-27절,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라

[19-20절]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그러므로](전통사본)4)(KJV)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이는]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우리는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해야 한다. 잠언 10:19,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잠언 17:27, “말을 아끼는 자는 지식이 있고 성품이 안존한 자는 명철하니라.” 우리는 말을 할 때 남에게 유익을 주는 말만 하고 남에게 해를 끼치는 말은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또 우리는 성내기도 더디 해야 한다. 사람이 옳지 않은 일을 보고 화를 낼 수 있겠지만, 화를 내더라도 많이 생각한 후에 내어야 한다. 우리가 성내기를 더디 해야 할 이유는, 우리가 화를 낼 때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화를 낼 때 말로 실수하거나 남을 미워하는 죄를 짓기 쉽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이 지혜이다. 잠언 14:29,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여도 마음이 조급한 자는 어리석음을 나타내느니라.” 잠언 19:11,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 잠언 16:32,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잠언 12:16, “미련한 자는 분노를 당장에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느니라.”

[21절]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버리고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심긴 도(道)를 온유함으로 받으라.

우리는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버려야 한다. 그것이 회개이다. 구원받는 사람은 무엇보다 죄악된 생활을 회개해야 한다. 또 우리는 구원의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아야 한다. ‘도’(道)는 ‘말씀’이라는 뜻이며 그것은 복음을 가리킨다. 그것은 ‘너희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말씀’ 곧 ‘구원의 말씀’(행 13:26)이다. 이 말씀은, 구약시대에 율법이 돌에 새겨졌던 것과 달리, 우리의 ‘마음에 심긴 말씀’이다(고후 3:3). 우리는 구원의 복음을 온유함으로 받아야 한다. 온유함은 순진하고 겸손하고 부드러운 마음가짐을 말한다. 온유한 마음을 가진 자가 참 믿음을 가질 수 있다. 교만한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대항하지만, 온유한 마음은 그 말씀을 잘 받아들인다.

[22-24절] [그러나]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복음을 믿고 구원을 받는 것은 기본적이지만, 야고보가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참 믿음이 행위로 나타나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라”고 강조한다.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자는 실상 믿지 않는 자이며 자신을 속이는 자이다. 그러나 말씀을 행하는 자는 그 행함으로 자신의 믿음과 구원을 증거한다. 여기에서 행함은 우선 성급하게 화를 내지 않고 덕스러운 말을 하고 덕스러운 행동을 하는 것부터 가리킬 것이다.

성경말씀은 거울과 같다. 그 말씀을 듣는 것은 거울로 자신을 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그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것은 거울로 자신의 더러워진 얼굴을 보고 그것을 씻지 않고 잊어버리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듣기만 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고 들은 후에 고칠 것은 고치고, 행할 것은 행하라고 주신 것이다.

[25절]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법]’은 복음을 묘사한 말이다. 구약의 율법은 불완전한 법이었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의 제사 제도나 성막 제도 혹은 성전 제도는 신약시대에 다 폐지되었다. 그러나 신약시대의 복음은 완전한 법이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과 그가 이루신 의(義)를 믿는 자들에게 완전한 구원을 주신다.

복음은 또한 ‘자유하게 하는 법’이다. 그것은 사도 바울의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밝히 증거된 진리이다. 바울은 그 서신들에서 복음 안에 율법으로부터의 자유가 있음을 증거하였다(롬 7:6; 갈 5:1, 13). 그 자유는 죄와 사망과 지옥 형벌로부터의 자유일 뿐 아니라, 율법 제도와 율법의 멍에와 속박과 위협으로부터의 자유이다.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라는 구절에서 ‘있는 자’라는 원어(파라메이나스)는 ‘그 안에 거하는 자’라는 뜻이다(KJV, NASB, NIV). 복음 진리를 믿고 그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고 실천하는 자이다. 즉 참 신앙은 순종의 행위를 동반한다. 로마서에서 믿음을 많이 강조한 바울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가 죄 가운데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강조해서 말했다(롬 6:1-2, 15).

또 말씀을 실천하는 자는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을 것이다. 성도가 범죄하면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것이지만(히 12장), 그가 의와 선을 행하면 하나님의 복을 받아 평안과 형통을 누릴 것이다. 신명기 28장에 계시된 복의 약속은 언제나 동일하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때에 약속된 복이다. 그것은 건강의 복, 자녀의 복, 재물의 복, 평안의 복, 존귀의 복, 승리의 복 등을 포함한다.

[26절]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야고보는 경건과 행위의 관계를 강조한다. 사람이 스스로 경건하고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자기 혀를 통제하지 않아서 조심스런 말을 하지 않고 선한 말, 덕스러운 말을 하지 않는다면, 그는 자신을 속이는 것이며 그의 경건은 헛것이다. 그가 참으로 경건하고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자신의 말부터 고쳐야 한다. 그는 서로 사랑함에 어긋나지 않는 선한 말과 덕스러운 말과 진실한 말을 해야 한다.

[27절]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야고보는 참 경건이 어떤 행위로 나타나야 하는 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두 가지를 말한다. 하나는 고아와 과부에 대해 사랑으로 관심을 가지고 그들이 환난을 당할 때 돌아보는 구제와 봉사의 일이며, 다른 하나는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이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불쌍한 교우나 이웃을 돌아볼 줄 모른다면, 또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세상에 불경건하고 죄악되고 음란한 유행과 풍조를 배격하지 못하고 따르고 있다면, 그 사람의 경건과 믿음은 도대체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참된 경건과 참된 믿음이 아니다. 참된 경건은 선행과 거룩함으로 나타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죄를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것은 성도에게 기본적이다. 우리는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온유함으로 받고 우리를 온전히 자유케 하는 그 복음 진리 안에 거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그가 주신 새 계명을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주께서 주신 계명을 듣고 행치 않는 자의 경건은 헛것이다. 그러나 성경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복이 있다.

셋째로, 우리는 무슨 말이든지 듣기는 속히 하는 것이 좋지만, 말하기는 더디 해야 하고 성내는 것은 더욱 더디 해야 한다. 말은 실수하기 쉽고 사람의 성내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넷째로, 우리는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는 선행에 힘쓰고, 자신을 지켜 이 세상의 죄악된 풍조와 유행에 물들지 말아야 한다. 이 세상은 돈을 사랑하고 음란하다. 우리는 그런 악에 물들지 말아야 한다.

 

2장: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것

1-13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1절]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너희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면서 영광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지지 말라].

‘영광의 주’라는 표현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증거한다. 바울도 고린도전서 2:8에서 예수님을 ‘영광의 주’라고 증거하였다. 영광은 하나님의 속성이다.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복음 신앙이며 구원 신앙이다. 이런 표현은 야고보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 교훈하고 있음을 보인다.

야고보는 우리가 사람을 외모로 취하며 차별하며 편애하면서 영광의 주를 믿는다고 말하지 말라고 말한다. 존귀하신 영광의 주님께서 낮고 비천한 사람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깨닫는 자라면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영광의 주님께서 친히 낮고 비천한 인생의 모습을 취하셨는데, 만일 우리가 이 세상의 낮고 비천한 자를 무시한다면, 우리는 예수님도 무시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2-4절] [이는] 만일 너희 회당(쉬나고게)[assembly, 예배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아니냐 함이라].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고 교훈하는 이유는 당시에 교회 안에 이런 잘못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배당에서 교인들은 금반지를 끼고 좋은 옷을 입은 부자에게는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라고 친절히 대하지만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자에게는 거기 섰든지 내 발판 아래 앉든지 하라고 불친절하게 대했다. 그들은 부자와 가난한 자를 차별하였다. 그들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였다.

교인을 경제적 기준으로 차별하는 것은 악한 일이다. 사람이 소유한 돈의 많고 적음이 그의 인격의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은 부자가 아니셨다. 선지자들도 사도들도 부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다 하나님 앞에서 존귀한 사람들이었다. 사람의 가치는 그의 인격적 덕성 즉 그의 경건과 믿음, 그리고 그의 의와 선과 진실의 도덕성을 가지고 판단되어야 한다. 그것이 성경이 보이는 사람에 대한 가치 판단의 기준이다. 세상 사람들은 경건하고 도덕적인 사람을 무시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은 바른 판단 기준을 가지고 사람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사람을 단지 그의 소유의 많고 적음을 가지고 판단하는 것은 무지하고 악한 일이다.

[5-7절]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세상의]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괄시하였도다. 부자는 너희를 압제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저희는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훼방하지 아니하느냐?

5절부터 13절까지의 내용은 우리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증거한다. 그 이유는 네 가지로 표현된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들을 택하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천국을 기업으로 주셨기 때문이다. 보통, 가난한 자들이 예수님을 더 잘 믿는다. 주께서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며 그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말씀하셨다(마 19:23).

둘째는 부자들이 성도들을 압제하고 훼방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비난하고 법정으로 끌고 가기도 했다. 그러나 가난한 자들은 보통, 성도들에게 그런 악을 행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부자들을 우대하고 가난한 자들을 천대하는 것은 잘못이다.

[8-11절] 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 [이는]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됨이니 이는]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됨이니라].

셋째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것이 하나님의 최고의 법(노모스 바실리코스)[왕의 법]을 어기는 죄가 되기 때문이다. 율법들 중 첫째는 네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지만, 인간 관계의 법들 중 첫째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다(마 22:35-39). 이것은 그 외의 모든 법의 요약과도 같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람을 외모로 취하면 우리는 이 법을 어기는 자가 되는 것이며 죄인으로 정죄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율법을 지키다가 어느 것 하나만 범해도 우리는 모두 범한 자가 된다. 모든 율법은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율법의 어느 하나를 범해도 그는 하나님의 법을 범한 죄인으로 정죄되는 것이다.

[12-13절] 너희는 자유의 율법[법]대로 심판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이는]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있을 것임이니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넷째는 우리가 자유의 법대로 심판을 받을 자이기 때문이다. ‘자유의 법’은 복음을 가리킨다(약 1:25). 복음은 우리에게 죄와 지옥 형벌과 율법의 속박과 위협과 공포로부터 건져내어 자유를 주는 새로운 법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代贖) 사역에 근거한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긍휼과 은혜로 된 것이요 우리가 값없이 받은 것이다. 우리는 이 대속의 복음에 근거하여 장차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이런 큰 은혜와 긍휼을 받은 자라면, 우리가 어떻게 가난한 자를 긍휼한 마음으로 대하지 않고 멸시하고 천대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그렇게 가난한 자를 멸시하고 천대한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서서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을 입을 자가 될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들을 어떻게 물리치지 않으시겠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을 받은 자로서 장차 그 긍휼에 의한 심판을 받을 것이라면 우리도 남을 긍휼을 여겨야 한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는 긍휼 없는 심판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의 긍휼로 우리는 지옥 형벌을 모면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특히 가난한 자들에게 긍휼과 자비를 가지고 대해야 할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기본이다. 그것은 구원 신앙이다. 우리는 모든 죄를 버리고 우리의 의가 되시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만 진심으로 믿고 의지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사람들을 외적 조건들로 차별하지 말아야 한다. 특히 우리는 사람을 그의 외적 조건들로 판단하여 가난한 자들을 무시하고 멸시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오히려 어려운 사람들, 소외된 자들을 배려하고 도와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최고의 법을 지켜야 한다. 인간 관계의 모든 법들은 이 법 안에 다 포함되어 있다. 우리가 이 사랑의 법을 따라 살면 우리는 부모를 공경할 것이고 살인하지 않고 간음하지 않고 도적질하지 않고 거짓말하지 않을 것이다.

넷째로, 우리는 자유의 법을 믿어 구원받은 자답게 남을 긍휼히 여겨야 한다. 복음은 자유의 법이며 그 내용은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이다. 우리는 복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얻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다른 사람들도 긍휼히 여기며 살아야 한다.

 

14-26절,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것

[14-17절]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에르가)[행위들]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믿음이 행함을 수반하지 않는다면 그 자체만으로는 죽은 것이라].

야고보는 본문에서 행함 없는 믿음이 죽은 것임을 교훈한다. 그는 사람이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행함이 없으면 그 믿음이 자기를 구원할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 믿음은 구주 예수님을 믿는 것을 예상하며 ‘행위들’은 선한 행위들을 가리킨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자신의 영혼을 구원할 수 없다. 구원 신앙은 선한 행위로 증거되는 믿음 즉,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5:6에 말한 대로,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다.

야고보는 자신이 강조하는 행위에 대해 구체적 예를 든다. 그것은 입을 것과 먹을 것이 없는 자를 돕는 행위이다.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이라는 말은 우리가 이웃의 몸의 필요한 것도 주어야 함을 보인다. 우리는 이웃에게 죄사함과 영생과 내세 천국만 전하지 말고 그에게 밥과 옷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믿음은 선행과 구제의 행위로 표현되어야 한다. 선행이 없는 믿음은 참 믿음이 아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선한 행위를 수반하지 않는다면 그 자체만으로는 죽은 것이다. 선한 행위들로 표현되지 않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18-20절]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너의 행위들로](전통사본)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죽은 것](전통본문)5)인 줄 알고자 하느냐?

야고보는 믿음과 행위가 분리될 수 없음을 증거한다. 믿는 각 사람은 자신의 믿음을 선한 행위로 증거해야 한다. 참된 믿음이 있다면 선한 행위로 그 믿음을 나타내어야 한다. 야고보는 하나님을 한 분으로 믿는 것이 바른 믿음이긴 하지만 그런 정도의 지식은 귀신들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귀신들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 분명할진대 그런 믿음이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도 분명하다. 그러므로 선한 행위가 없는 믿음은 헛것이며 죽은 것이다.

[21-22절]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그] 믿음이 그의 행함[그의 행위들]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그 행위들로] [그]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야고보는 참 믿음이 행함을 수반한다는 사실을 두 가지 예를 들어 증거한다. 하나는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 한 사건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행함이 있는 믿음이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100세에 얻은 외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 가서 번제물로 드리라고 명령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온전하게 순종했었다. 야고보는, 바울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음’에 대해 강조하였던 것(롬 3:22, 28, 30)과 달리,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표현을 하였다. 또 그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행위들과 함께 일하고 그 행위들로 그 믿음이 온전케 되었다고 말한다.

[23-24절] 이에 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야고보는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성경말씀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아브라함의 의롭다 하심이 그의 순종의 행위로 인해 확고해졌으며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고 불림을 받았다고 말한다. 야고보는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고 다시 말한다. 그것은,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으로는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다는 뜻이다.

[25절]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야고보는 또 하나의 예로 기생 라합을 든다. 여호수아 2장에 보면, 기생 라합은, 가나안 땅을 치기 위해 정탐하러 온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을 숨겨주고 피하게 하였다. 그것은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참 하나님이심을 깨닫고 믿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믿음은 위험을 무릅쓴 그의 선한 행위로 나타났다. 야고보는 21절과 24절에 이어 세 번째로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라는 표현을 썼다.

[26절] [이는] 영혼[영]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것임이니라].

야고보는,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유가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것이라는 말도 17절과 20절(전통사본)에 이어 세 번째로 사용한 표현이다.

야고보가 2장에서 세 번이나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고 표현한 것은, 바울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사람이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교훈한 것과 모순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고 본다. 초대교회는 서로 다르지 않은 한 복음을 받았다(갈 2:9). 신약성경은 성령의 감동 속에서 사도들과 사도적 인물들이 쓴 책이며 그들의 교훈은 서로 모순될 수 없고 모순되지 않는다고 본다.

바울은 사람이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을 대조하면서, 사람이 율법을 행함으로가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야고보는 선한 행위가 없는 죽은 믿음과 선한 행위가 있는 산 믿음을 대조하면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으로가 아니고 행함이 있는 산 믿음으로라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물론,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야고보의 표현은 사람이 율법을 행함으로가 아니고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복음 진리인 바울의 교훈과 충돌하는 것처럼 오해할 소지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야고보가 말하는 뜻을 이해한다. 또 바울도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말했을 때 결코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을 말한 것이 아니고 행함이 있는 산 믿음을 말한 것이다. 로마서 6:15,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갈라디아서 5: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본문의 요점은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것이다. 이 내용은 17절과 20절과 26절에 세 번이나 반복되어 있다. 이 강조된 내용이 주는 실제적 교훈은 우리의 믿음은 선한 행위가 수반되지 않는 죽은 믿음이 되지 말고 선한 행위로 증거되는 산 믿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야고보가 말하는 행위는 어떤 행위인가? 그것은 아브라함과 같은 순종의 행위, 라합과 같은 믿음의 행위를 말한다. 그것은 경건한 삶뿐 아니라, 입을 것과 먹을 것이 없는 형제들과 이웃들에게 선을 베풀고 구제하는 행위를 포함한다. 성경의 요점은 두 가지이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으라는 것이고, 둘째로, 선과 사랑을 실천하라는 것이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이 아니고 행함이 있는 산 믿음이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참된 믿음인지 하나님의 뜻대로 이웃에게 선을 베풀며 구제하기를 힘쓰는지 자신을 성찰해야 한다.

 

3장: 말에 온전한 자

[1절]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성경을 가르치고 영혼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일은 이 세상에서 매우 귀한 일이지만, 성경을 바르게 가르치지 못하면 그 잘못에 대한 책임이 크고 그 벌이 클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무나 가르치는 일을 사모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그 직분을 사모하는 자는 성경에 대한 바른 지식과 믿음과 건전하고 선한 인격을 갖추어야 한다.

[2절] [이는]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많음이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우리가 많이 선생이 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다 실수가 많고 특히 말에 실수가 많기 때문이다. 우리가 말에 실수가 없다면 우리는 온전한 자로 여김을 받을 것이다. 사람의 인격의 온전함은 말의 온전함에서 증거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바른 말, 덕스러운 말, 참되고 진실한 말만 하고 남에 대한 오해의 말이나 잘못된 비난의 말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상당히 성숙하고 온전한 인격일 것이다.

혀는 사람의 몸을 통제하며 말은 그의 인격을 나타낸다. 선한 자는 선한 말을 하며 악한 자는 악한 말을 한다. 예수께서는 그를 비난하는 바리새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2:34-37).

[3-5절] 우리가 말(馬)을 순종케 하려고 그 입에 재갈 먹여 온 몸을 어거(馭車)하며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 사공의 뜻대로 운전하나니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어떻게 작은 불이 어떻게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야고보는 혀의 중요성을 말의 재갈이나 배의 키에 비교한다. 말은 힘이 센 동물이지만, 사람은 말의 입에 재갈 즉 쇠토막을 물려 자기 뜻대로 그것을 이끌고 사용한다. 큰 배도 배 밑에 달려 있는 작은 키로 사공의 뜻대로 운전된다. 또 야고보는 혀를 불에 비교한다. 작은 불이 많은 나무를 태우듯이, 작은 혀가 큰 것을 자랑하며 큰 일을 행한다. 잠언은 의인의 혀가 천은(天銀)과 같고(잠 10:20) 지혜로운 자의 혀가 양약(良藥) 같다고 말하며(잠 12:18), 또 확실한 증인의 말이 힘이 있다고 말한다(잠 21:28).

[6절] 혀는 곧 불이요 불의(不義)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불에서 나느니라.

혀는 불과 같다. 그것은 산불이나 건물 화재처럼 나쁜 결과를 주는 불과 같다. 혀는 또 불의(不義)의 세계이다. 그것은 우리의 몸을 더럽히고 우리의 삶의 과정을 무너뜨린다. 사람은 자기가 쌓은 선을 잘못된 말 한마디로 다 무너뜨릴 수 있다. “그 사르는 것이 지옥불에서 나느니라”는 말은 “그것[혀]은 지옥불에 사루어지리로다”라고 번역되어야 한다고 본다(KJV, NASB, NIV).

[7-8절] [이는]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며 벌레[기는 것=파충류]와 해물은 다 길들므로 사람에게 길들었거니와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다루기 힘든, 길들이기 어려운]6)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것임이니라].

본문은 야고보가 혀를 불의의 세계라고 말한 이유를 말한다. 혀를 불의의 세계라고 말한 것은 혀가 길들여지지 않고 남을 죽이는 독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여러 종류의 짐승들과 새들과 기는 것들과 해물들은 다 길들이면 길이 든다. 우리는 개나 소나 말이나, 또는 비둘기나 뱀이나 물개 등이 어떻게 길들여지는지 알고 있다. 그러나 사람의 혀는 길들일 수 없고 길들여지지 않는다. 그것은 ‘다루기 힘든’ 악이다. 혀는 또 죽이는 독이 가득하다. 사람의 혀는 심히 악하다.

[9-12절] 이것으로 우리가 주[하나님]7)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물과 쓴 물을 내겠느뇨?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뇨? 이와 같이 짠물이 단물을 내지 못하느니라[어떤 샘도 짠물과 단물을 함께 내지 못하느니라](전통사본).

혀의 악함은 성도들에게서도 종종 보인다. 그것은 그들의 이중적인 언어생활에서 나타난다. 성도들은 자신의 혀로 거룩하고 선하고 아름다운 말로 ‘하나님 아버지’를 찬송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 동일한 혀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다른 사람을 저주한다. 한 입으로 찬송도 하고 저주도 하는 것이다. 한 샘물이 단물과 짠물을 낼 수 없듯이, 한 입으로 찬송도 하고 저주도 하는 것은 이중적이고 모순되다. 이것은 성도에게 합당치 않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교훈하기를,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라”고 하였다(엡 4:29, 31).

[13절]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참 지혜는 단순히 이론이 아니고 행위로 표현되되 선함과 온유함으로 표현된다. 참 지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요 성령의 열매인 지혜이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선함]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이다(갈 5:22-23). 전도서는, “사람의 지혜는 그 사람의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하나니 그 얼굴의 사나운 것이 변하느니라”고 말하였다(전 8:1). 참된 지혜는 선함과 온유함으로 표현되며 그 얼굴에 기쁨과 평안으로 나타난다.

[14-16절]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거슬러] 거짓하지[속이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이는]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혼란, 무질서]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

마음에 온유함 대신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는 자는 참된 지혜가 없는 자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이 지혜자인 것처럼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 그는 진리를 거슬러 속이지 말아야 한다. 그가 가지고 있는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 곧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니고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다. ‘세상적’이라는 표현은 세상 사람들에게서 나온 것이라는 뜻이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2:16에서,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고 말했다. ‘정욕적’이라는 원어(프쉬키코스)는 ‘육욕적’이라는 말로서 육신의 죄악된 생각과 감정과 욕망을 따르는 것이라는 뜻이며 ‘마귀적’이라는 말은 ‘귀신들에게서 나오는’ 것이라는 뜻이다. 마음 속에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무질서와 모든 악한 일이 있다. 이러한 지혜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다.

[17-18절]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의의 열매는 화평케 하는 자들에 의해 화평 중에 심어진 것이니라].

이와 대조적으로, 위로부터 난 지혜, 곧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는, 첫째로, 성결하다. 그것은 죄악된 일을 버리고 거룩하고 의로운 것이다. 둘째로,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다. 그것은 한마디로 사랑이다.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말한 성령의 열매들과 비슷하다(갈 5:19-23). 셋째로, 편벽과 거짓이 없다. 그것은 공정하고 진실하다. 신적 지혜는 의로움과 선함과 진실함이다. 잠언은 지혜를 가르치는 책인데, 거기에서 말하는 지혜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떠나는 것이며 하나님의 율법대로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사는 것이다. 잠언의 모든 말씀은 결국 야고보서 본문이 가르치는 ‘위로부터 난 지혜’와 동일하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많이 선생이 되지 말고 말에 온전한 자가 되기를 힘써야 한다. 성경을 가르치는 일은 귀한 것이지만, 잘못 가르치면 벌을 받을 것이다. 사람의 혀는 가장 길들이지 않는 것이지만, 말에 온전한 자가 되기를 소원해야 한다. 작은 불이 많은 나무를 태우듯이, 작은 혀가 온 몸을 더럽히고 우리의 삶의 과정을 허물어뜨릴 수 있다. 성화는 말의 온전함에서 나타날 것이다. 우리는 바르고 선하고 진실한 말을 하고 특히 남을 비난하는 말을 조심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닌 세상적, 정욕적, 마귀적 지혜를 버려야 한다. 세상적, 정욕적, 마귀적 지혜를 가진 자들 가운데는 시기와 다툼이 있고 혼란과 무질서와 온갖 악이 있다. 말에 있어서 악하고 거짓되고 부덕한 것은 다 이런 지혜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은 세상에서는 지혜자인지 모르나 교회를 어지럽히고 파괴시키는 자이다.

셋째로, 우리는 위로부터 나는 지혜를 사모해야 한다. 위로부터 나는 지혜는 성결하고 화평하고 온유하고 양순하고 긍휼과 선함이 가득하며 편벽과 거짓이 없다. 그것은 잠언이 가르친 지혜와 같다.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또 그것은 성령의 열매들과도 같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고 바르고 선하고 진실해야 한다.

 

4장: 탐욕, 비방, 자랑을 버릴 것

1-10절, 겸손히 하나님께 순복하라

[1-2절]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가지려 하여도](KJV, NIV)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사람들 간의 싸움은 대체로 욕심 때문에 일어난다. 때때로 교회 안에서도 성도들 간에 일어나서는 안 되는 싸움과 다툼이 일어나는데, 그 원인도 대체로 욕심 때문이다. 야고보는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라고 말했다. ‘정욕’이라는 원어(헤도네)는 ‘쾌락, 욕망’을 의미한다. 욕심이 분쟁의 원인이다.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이라는 말은 중생한 신자의 본성 속에도 거룩한 마음과 성향을 대항하여 싸우는 육신적 욕망이 있음을 보인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그것을 성령의 원하시는 것과 싸우는 육체의 욕구라고 말했다(갈 5:16-17). 이 둘이 서로 싸운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2:11에서 “영혼을 거스려[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말했다. 여기에 ‘영혼’은 중생한 영혼의 변화된 성향을 가리킨다. 그 성향은 경건과 의와 선과 진실만을 지향하는 성질이다. 중생한 성도들의 이런 변화된 새 성향과 육신의 죄악된 본성의 욕심이 서로 싸운다. 또 구원받은 성도들 속에 남아 있는 이런 죄악된 욕심이 교우들 간의 싸움을 일으키는 것이다.

육신의 죄악된 욕심들이란 세상 중심적인 것들로서 육신의 정욕, 물질욕, 명예심, 자존심 등이다. 천국을 바라는 자는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이런 세상의 욕심들을 버릴 수 있다. 천국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며 성도는 자신을 부정하고 빈 마음으로 그것을 감사히 거저 받는다. 성도의 순종은 결코 대가를 바라는 순종이 아니고 하나님의 크신 은혜에 응답하는 감사의 순종이어야 한다. 그러나 신자가 영적인 눈이 어두워 세상적 이기심과 명예심 등의 욕심을 가진다면 여전히 교회 안에서 성도들 간에도 싸움과 다툼이 생길 것이다. 그러나 각 사람이 자신의 부족을 깨닫고 인정하고 그런 세상적 욕심들을 다 버린다면 서로 다투고 싸울 것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2-3절] . . .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성도는 무엇이든지 더 가지려고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얻지 못한 것은 구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성도는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여 얻을 수 있고, 또 이렇게 기도의 효력을 아는 자들은 시시때때로 또 비상한 때에 기도하기를 힘쓰며 또 기도한 바를 얻으며 따라서 영육의 부족이 조금도 없는 삶을 살 것이다. 다윗은 시편 65:2에서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라고 고백하였다. 주께서는 “구하라 주실 것이요”라고 말씀하셨고 또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라고 말씀하셨다(마 7:7-8). 이것은 놀라운 약속이며 성도의 특권이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할 때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는 것은 응답받지 못할 것이다. 또 악한 동기와 의도를 가진 자들의 기도도 결코 응답받지 못할 것이다. 악을 품은 기도는 결코 응답받지 못할 것이다. 누구든지 세상적 욕심을 품고 그것을 위해 구하는 것은 잘못 구하는 것이며 그는 결코 구한 것을 얻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구한 것은 그 자신에게 해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어린아이가 엄마에게 칼을 달라고 할 때, 엄마가 그것을 그 아이에게 줄 수 없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지혜로우시고 선하신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그에게 구하는 것들 중 우리에게 유익한 것만 주실 것이며, 우리에게 해가 되는 것은 결코 주지 않으실 것이다.

[4절] 간음하는 [남자들과](전통사본)8)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

‘간음한다’는 말은 육신적 의미뿐 아니라, 영적인 의미를 가진다고 보인다. 육신적으로 간음하는 것은 육신적 욕망을 따라 행하는 육체 사랑이요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다. 영적으로 간음한다는 것은 우상숭배, 세상 사랑, 돈 사랑, 쾌락 사랑 등 세상의 것들, 육신적인 것들, 물질적인 것들을 하나님처럼 혹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바울은 탐심을 우상숭배라고 말했다(골 3:5).

간음하는 자들은 세상과 벗된 것이요 그것은 하나님과 원수 되는 일이다. 하나님의 원수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가 되지 말아야 하며 그것은 세상의 욕망을 다 버림으로써만 가능하다. 그러나 이 세상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과 원수가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불행한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2장에서 말하기를,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고 하였다(요일 2:15-17).

[5절] 너희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뇨?

성령께서는 신자들 속에 거하신다. 주께서는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라”고 말씀하셨다(요 14:16). 사도 바울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말했다(롬 8:9). 그런데 우리 속에 거하시는 성령께서는 우리가 하나님보다 세상의 것을 사랑할 때 우리를 향해 시기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서 주신 십계명 중 두 번째 계명에서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 . .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3, 4대까지 이르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출 20:4-5). 그는 자신을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부르셨다. 그는 우리가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하나님처럼 혹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거나 섬기거나 의지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시고 질투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 사랑, 명예 사랑, 돈 사랑, 쾌락 사랑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 사랑하기를 원하신다. 그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참으로 이 세상의 욕망들을 다 버리고 오직 하나님과 내세 천국만을 바라며 살아가야 한다.

[6절]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더욱 큰 은혜’란 이 세상의 것들을 미워하고 자기를 부정하고 세상 욕심을 극복하여 하나님만 사랑하도록 하는 은혜를 가리킨다. 그러나 이 은혜를 받기 위해 우리편에서도 성실해야 한다. 우리는 우선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겸손해야 한다. 교만과 세상 욕망은 친구이다. 교만은 이 세상적인 명예심에서 나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7-10절]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하고 마귀를 대적하며 하나님께 가까이 해야 한다. 우리가 마귀를 물리칠 때 마귀는 우리를 피하여 떠나며,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 할 때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가까이 하신다. 우리는 마귀의 시험과 죄악된 욕심을 물리치고 성경을 더 많이 더 자주 읽고 기도하기를 힘쓰므로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한다.

죄인들은 손을 깨끗이 해야 하고 하나님과 세상을 둘 다 사랑하려는 두 마음을 품은 자들은 마음을 성결케 해야 한다. 우리는 두 주인을 섬겨서는 안 된다(마 6:24). 우리는 이 세상적 욕망들과 명예심을 버리고 하나님만 섬기며 사랑하고 내세 천국만 바라보아야 한다. 또 우리는 이 세상을 사랑함으로써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과거의 삶을 슬퍼하고 애통해야 하며, 이제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낮추는 자들을 높이실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이 세상 욕심들을 다 버리고 이 세상과 벗이 되지 말고 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 세상 사랑, 돈 사랑, 쾌락 사랑은 일종의 우상숭배이다. 또 욕심에서 다툼이 나온다. 우리는 세상 사랑, 돈 사랑, 쾌락 사랑을 경계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교만을 버려야 한다. 교만은 불신앙, 하나님 거역, 불순종을 만들고 겸손은 하나님 인정과 순종을 만든다. 사람이 교만하면 망하고 겸손하면 하나님의 은혜로 존귀케 된다(잠 16:18; 18:12).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께 순복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바는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고 섬기며 그의 모든 명령을 지키고 행하며 또 그에게 친근히 하고 그를 꼭 붙들고 따르는 것이다(신 10:12-13, 20). 우리는 하나님과 천국만 바라자.

 

11-17절, 비방과 자랑을 버리라

[11-12절]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입법자[와 재판자](전통사본에는 없음)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

성도들은 서로 비방하지 말아야 한다. 주께서는,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마 7:1). 야고보는 우리가 형제를 비방하거나 판단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말한다. 첫째로, 그것은 율법을 비방하고 판단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형제를 비방하거나 판단하는 것이 사람을 논단[비방]하지 말고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율법의 말씀(레 19:16, 18)에 어긋난다는 뜻일 것이다. 형제를 비방하고 판단하는 자는 결국 율법을 비방하고 판단하는 자가 될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율법을 지키는 자이지 심판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율법을 제정하신 자는 하나님이시고, 우리가 율법을 지키고 안 지키는 것을 판단하실 이도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단지 율법을 지킬 의무가 있을 뿐이고, 우리의 행위를 평가하시고 판단하실 자는 오직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겸손히 하나님의 법을 지켜야지 남을 판단하거나 비방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 교훈은 하나님의 종들이 해야 할 교회적 판단과 비평의 사역을 금하는 것으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구약의 선지자들이나 신약의 사도들이 그러했듯이, 오늘날 하나님의 종이며 교회의 파수꾼된 목사들은 교회의 성결과 유익을 위해 필요할 때 판단과 비평을 해야 한다. 이런 일은 교회의 권징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목사들은 설교 시에 교인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고치게 해야 한다. 오류를 책망하고 바르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성경말씀을 주신 목적이다(딤후 3:16).

구약시대에 선지자 예레미야나 에스겔이 거짓 선지자들을 책망하였듯이(렘 23장; 겔 34장), 신약시대에도 초대교회 때부터 거짓 목사들에 대한 책망과 경고들이 필요하였다(갈 1:8-9; 벧후 2:1-3). 오늘날 목사들이 교회들의 배교와 타협의 죄악에 대해 책망하지 않는 것은 큰 잘못이다. 성경은 명백한 교리적, 윤리적 오류에 대해서 판단할 것을 분명히 가르친다(롬 16:17-18; 고전 5:11-13; 살후 3:6, 14-15).

[13절]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1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利)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너희 중에’라는 말은 이 교훈이 일차적으로 교인들에게 주신 것이요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주신 것이 아님을 보인다. 물론 교회 밖의 세상 사람들에게도 이 교훈이 필요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교훈을 받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교인들은 하나님을 알며 섬긴다는 자들인데 바르게 살지 못하므로 그들에게 이런 교훈을 주신 것이다. 당시의 교인들 중에는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1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고 말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믿음 없는 헛된 계획이었다. 성도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1년 후의 일을 계획하는 것은 헛된 일이다.

[14절]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이는]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무엇이뇨 함이라.]9) [이는] 너희는[그것은]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안개임이니라](전통본문).

우리는 내일 일을 알지 못한다. 오늘 우리가 살아 있으니까 살아 있는 것이지, 내일 무슨 일이 우리에게 생길지 아는 자는 아무도 없다. 우리의 생명은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다. ‘안개’라는 원어(아트미스)는 ‘수증기’나 ‘김’을 가리킨다. 수증기가 공중에 올라갈 때 무엇이 있는 것 같지만 잠시 후에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없이 사라져 버리듯이, 사람은 살아 있을 때에는 존재하는 것 같지만, 죽으면 땅에 묻을 시체만 남는다. 그러므로 시편 39:4-6에서 다윗은,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 하사 나로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뿐이니이다.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고백하였다. 또 그는 역대상 29:15에 보면 “주 앞에서는 우리가 우리 열조와 다름이 없이 나그네와 우거한 자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머무름이 없나이다”라고 말하였다.

[15-17절]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성도는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처럼 미래를 계획하지 말고 또 그것을 사람들 앞에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주[하나님]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고 말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며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의 주권적 손 안에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사람의 생명의 시작과 마지막, 곧 출산과 죽음은 하나님의 주권적 손 안에 있다.

하와가 가인을 낳았을 때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창 4:1)라고 말한 것은 생명이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한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을 “모든 육체의 생명[‘영들’]의 하나님이여”라고 불렀다(민 16:22). 욥은, “생물들의 혼과 인생들의 영이 다 그[하나님]의 손에 있다”고 말하였고(욥 12:10), 다니엘은 하나님을 “[벨사살] 왕의 호흡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표현하였다(단 5:23). 주께서는 어리석은 농부의 비유에서 하나님께서 그 농부의 영혼을 오늘밤에 도로 찾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눅 12:20). 사도 바울도 하나님을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라고 불렀다(행 17:25).

성도는 또 “주의 뜻이면 우리가 이것저것을 하리라”고 말해야 한다. 성도의 모든 활동들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잠언 3:6은,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고 말했고, 잠언 16:3은,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고 말했다. 우리는 하나님보다 앞서 행하지 말며 항상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과 동행해야 한다. 미가 6:8은 말하기를,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仁慈)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라고 하였다.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자의 바른 태도이다.

헛된 계획은 말로 표현될 때 헛된 자랑이 된다. 헛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주권자 하나님을 무시하며, 또 보장 없는 미래의 일을 자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일은 나의 날이 아니고 나의 시간이 아니다. 우리는 하루 동안에도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성도가 헛된 계획을 하고 헛된 자랑을 하는 것은 악한 일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앞세워야 하고 오직 하나님의 뜻만을 행하기를 힘써야 한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선하게 사는 것이다. 구원의 목적은 우리가 선한 일을 위해 열심히 살게 하기 위함이다. 디도서 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이 인생의 바른 삶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선하게 살아야 한다. 사람이 돈만 벌기 위해 산다거나 돈을 벌어 자신을 위해서나 자기 가족 정도를 위해 사는 것은 헛되고 악한 일이다. 우리는 우리의 일생을 하나님의 선한 일들을 위해 살아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서로 비방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형제를 비방하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율법을 어기고 비방하는 것이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과 율법을 지켜야 할 의무를 가진 자들이며 남을 판단할 위치에 있는 자들이 아니다. 우리의 행위를 평가하시고 판단하실 자는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입법자와 심판자는 하나님 한 분뿐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오직 하나님의 법을 지키기를 힘써야 한다.

둘째로, 그러나, 우리는 본문을 오해하여, 하나님의 종들이 성도들과 교회의 거룩함과 유익을 위해 교회적 판단과 비평을 하는 것을 성경에 위배되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성경은 오히려 주의 종들이 그런 사역을 해야 할 것을 가르친다. 그것은 성도들의 회개와 성화를 위해 유익할 것이다. 오늘날 교회들의 문제는 많은 주의 종들이 바른 분별력을 가지고 교회 안의 잘못된 풍조들을 지적하고 책망하지 않고 침묵하는 데 있다. 오늘날은 교회들의 배교와 타협과 혼란에 대해 지적하고 책망하고 비판하는 일이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하다.

셋째로, 우리는 우리의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 내일은 우리의 날이 아니고 우리의 시간이 아니다.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 사람의 생명은 안개와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일의 일을 내가 관리할 수 있는 것처럼 잘못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주권적 섭리자이심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오직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고 말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을 주권적 섭리자로 바로 알고 믿는 바른 태도이다. 우리는 세상의 복잡한 현실 속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지하며 하나님과 교제하고 동행하며 선을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5장: 인내와 기도

[1-6절]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보라, 너희 밭에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연락하여 도살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지게 하였도다. 너희가 옳은 자를 정죄하였도다. 또 죽였도다.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야고보는 부자들이 그들에게 닥칠 고생을 인하여 울며 통곡하라고 말한다. 그는 부자들의 잘못을 몇 가지로 증거한다.

첫째로, 그들은 말세에 재물을 쌓았다. 그들의  재물은 썩었고 그들의 옷들은 좀 먹었고 금과 은은 녹이 슬었다. 그 녹은 그들의 잘못을 증거하고 불같이 그들의 살을 먹을 것이다. 저축은 필요하고 좋으나 정도것 해야지 지나치면 악이 된다. 돈은 선한 일에 적절히 사용되어야 한다. 세상은 끝나가고 있고 심판 날은 다가오고 있다. 돈의 과도한 저축은 죄이다. 물질적 부요는 사람으로 하여금 교만케 하고 신앙의 해이와 배반을 가져온다. 그러므로 기본적 생활을 위한 저축 외에 돈은 전도와 구제를 위해 선하게 사용되어야 한다.

둘째로, 그들은 그 부의 축적에 불의함이 있었다. 그들은 그들의 밭에서 추수한 품꾼들에게 정당한 임금을 주지 않았다. 그들은 품꾼들에게 돈을 주는 것을 지체했거나 돈을 떼어먹으려 했다. 일꾼들에게 무슨 일이든지 시켰으면 임금을 지체치 말고 즉시, 감사한 마음으로 주어야 하고, 만일 외상으로 시키려 했으면 미리 약속했어야 하였고, 만일 줄 돈이 부족했으면 일 시키는 것을 연기했어야 했다. 임금을 받지 못한 품꾼들의 우는 소리가 하나님께 들려졌다.

셋째로, 그들은 사치하고 연락했다. 사치는 필요 이상의 것을 가지는 것이라고 본다. 그것은 옷, 신발, 가구, 자동차 등 우리의 모든 것에 적용된다. 연락(宴樂)은 하나님께서 주신 정당한 즐거움 이상의 쾌락을 구하는 것이라고 본다. 오락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거기에 빠지면 나쁘다. 가난한 자들이 많은 세상에서 사치와 연락은 죄악이다. 부자들은 사치와 연락으로 그들의 마음을 살찌게 하였다.

넷째로, 그들은 심지어 옳은 자들을 정죄하고 죽였다. 그들은 그들의 힘을 악한 일에 사용했다. 옳은 자들은 그들에게 대항하지 않았다.

[7-8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이는]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가까움이니라].

세상에서는 악한 부자들이 의인들을 핍박할지라도, 주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은 주 예수께서 다시 오시기까지 오래 참아야 한다. 농부가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바라며 씨를 뿌리고 추수의 때를 오래 기다리듯이, 우리는 오래 참고 마음을 굳게 하여 주의 재림과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하고 기다려야 한다. 주의 재림의 날은 점점 가까워 온다. 요한계시록 22장에 보면, 주께서는 “내가 속히 오리라”고 반복해 말씀하셨다. 7절,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12절,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20절,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그의 재림이 지체되는 것은 주께서 우리를 포함해 하나님의 택하신 모든 영혼들을 다 구원하시기 위함일 뿐이다.

[9절]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밖에 서 계시니라.

고난의 현실 가운데서 신자들은 서로 원망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부족함을 인식하고 고난의 원인을 남에게 돌리지 말아야 한다. 고난의 현실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 겸손케 하시고 믿음 있게 하시기 위해 고난의 현실을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을 원망하지 말고, 우리의 모든 현실의 배후에서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10-11절]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

구약의 선지자들은 많은 고난을 당하였다. 그들은 백성에게 배척을 받았고 돌에 맞기도 하고 심지어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많은 고난 중에도 오래 참았다. 인내의 한 예는 욥이다. 욥은 재물의 심히 큰 손실과 자녀들의 죽음과 자신의 건강의 상실이라는 큰 고난 속에서도 인내했고 마침내 승리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욥의 후년에 같은 수만큼의 자녀와 배갑절의 재물을 복으로 주셨다. 주께서는 씨 뿌리는 비유에서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라고 말씀하셨다(눅 8:15). 환난 시대에 성도의 덕은 믿음과 인내이다(계 13:10; 14:12).

[12절]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의 그렇다 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 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죄 정함을 면하라.

맹세(swear, oath)는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 자신의 말과 증언이나 약속의 진실함을 말하는 것이다. 본문은 주께서 주신 교훈과 같다(마 5:33-36). 개혁교회는 이 교훈이 맹세하는 것 자체를 금하는 것이라기보다 하나님의 이름 외에 하늘이나 땅이나 어떤 다른 것으로 쉽게 맹세하고 쉽게 변경하는 당시의 잘못된 풍조를 정죄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만일 본문이 맹세하는 것 자체를 금하는 것이거나 정죄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구약성경의 계명과 어긋나며 예수님과 사도들 자신도 잘못을 범한 자들이 될 것이다(신 6:13; 10:20; 마 26:63-64; 고후 1:23; 갈 1:20). 그러므로 합법적 맹세는 오늘날에도 정당하다고 본다.

[13절]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

우리는 고난 당할 때 낙망치 말고 기도해야 하고 즐거운 일이 있을 때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고 하나님께 찬송해야 한다.

[14절]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우리가 병에 걸리면 교회의 목사나 장로들을 청해야 한다. 본문의 ‘장로들’은 목사와 장로를 포함하는 말이다. 목사와 장로의 첫 번째 직무는 교인들을 돌아보는 것이다. 그들은 병에 걸린 자들을 심방하며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기름을 바르는 것은 초대 교회의 풍습이었던 것 같다. 마가복음 6:12-13,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인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 기름은 당시 의약품으로 사용되었든지 아니면 단순히 성령의 은혜의 상징물로 사용되었던 것 같다. 오늘날 우리는 의술과 약품을 하나님의 치료의 도구로 감사히 사용한다.

[15절]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병의 치료는 하나님께 달려 있다. 병을 주신 이도 치료하실 이도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병의 정확한 원인을 아시며 그것의 완전한 치료 방법도 아신다. 그가 원하시면 우리의 병은 깨끗하게 치료될 것이다.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는 말씀은 죄와 병이 연관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물론 욥의 경우처럼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신명기 28장의 증거대로, 병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로 오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우리는 몸이 병에 걸렸을 때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 앞에 엎드려 자신을 성찰하고 우리의 죄와 부족이 깨달아지면 고백하고 버리기를 결심해야 한다.

[16절]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병 낫기를 위해 기도할 때 우리는 먼저 자신의 거리끼는 죄악들을 하나님께 고백해야 한다. 그런 후 우리는 병 낫기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죄의 고백은 때때로 공개적일 때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다른 이들에게 유익이 되고 자신에게도 유익이 된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다. 의인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고 실제로 의롭게 사는 성도를 가리킨다. ‘간구’라는 원어(데에시스 엔에르구메네)는 ‘힘있는 기도, 간절한 기도’라는 뜻이다. 성도들의 힘있는, 간절한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많다. 병 치료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또한 범사에 기도는 능력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선한 일을 이루는 수단이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 방법이다.

[17-18절]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3년 6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오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

야고보는 기도 응답의 예로 엘리야 선지자를 들었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性情)이 같은 사람이었다. 그는 우리와 다른 초인적(超人的) 존재가 아니었다. 그의 능력의 역사는 단지 그의 기도 생활에 있었다. 그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했을 때 3년 6개월간 땅에 비가 오지 않았고 그가 다시 간절히 기도했을 때 하늘이 비를 주었다. 간절히 기도하는 자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다.

[19-20절]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하여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이니라.

우리가 병자를 위해 기도할 때 때로는 진리를 떠났던 자들을 돌이키게 할 것이다. 이 일은 참으로 귀하다. 육신의 병을 치료하는 것도 귀하지만, 죄인의 영혼을 돌이키게 하는 것은 더 귀하다. 그것은 한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는 것이다. 우리는 병환자 심방과 기도를 통해 한 사람의 심신의 병뿐 아니라, 영혼을 구원하기도 할 것이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는 부자들에 대한 교훈이다. 부자들은 재물을 땅에 쌓지 말아야 한다. 주께서는 재물을 땅에 쌓지 말고 하늘에 쌓으라고 교훈하셨다(마 6:19-21). 또 부자들은 불의의 이익을 취하지 말아야 한다. 불의의 이익을 취하는 것은 도적질하는 것이나 강도질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또 부자들은 사치하고 연락하지 말아야 한다. 가난한 자들이 많은 세상에 사치하고 연락하는 것은 죄악이다. 우리는 근검절약하며 살아야 하며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며 살아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고난의 현실 속에서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하시기까지 오래 참아야 한다. 주께서는 산 자와 죽은 자를 공의로 심판하러 오실 것이다(벧후 4:1). 야고보는 본서 1장에서도 고난 중에 인내함으로 온전케 된다고 말했다(약 1:4). 우리는 특히 고난 중에 서로 원망치 말고 믿음의 선진들을 기억하면서 마음을 굳게 하여 오래 참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도우시며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하늘로나 땅으로나 다른 어떤 피조물로 맹세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이름으로만 맹세해야 하고 또 맹세할 때 경솔히 하지 말아야 한다. 맹세는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 자신의 말의 진실함을 증거하는 것이며 신약시대에도 합법적 맹세는 정당하다고 본다.

넷째로, 우리는 즐거운 일이 있을 때 찬송가를 부르지만, 고난을 당할 때, 특히 병들었을 때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특히 병든 자는 목사들과 장로들을 청하여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게 하는 것이 좋다. 우리는 믿음으로 기도해야 한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일으킬 것이다. 또 우리는 우리의 죄를 서로 고하며 회개하며 기도해야 한다. 질병은 죄 때문에 오는 경우가 많다. 의인의 간절한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많다. 의인은 구주 예수님을 믿고 의롭다 하심을 얻고 실제로 계명에 순종하는 자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의인의 간절한 기도를 잘 들어주신다.

 

미주

1) Antiquities of the Jews, 20. 9.

2) 교회사, 2. 23.

3) 이 말은 신약성경에 346회 사용되었고 사도행전에서는 57회 사용되어, ‘제자들’이라는 말(30회)보다도 더 빈번히 사용되었다.

4) Byz syr(p) 등이 그러함.

5) Byz א A vgcl syrp copbo 등이 그러함.

6) Byz C eth 등이 그러함.

7) Byz vgcl ww copsa bo-pt 등이 그러함.

8) Byz에 있음. 그러나 p100 א* A B vg syrp copsa bo geo 등은 생략함.

9) Byz p100 vg syrp copsa bo 등이 그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