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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강해

김효성 목사

2018년 6월 12일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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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리말

주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 바울의 증거대로(마 5:18; 요 10:35; 갈 3:16; 딤후 3:16),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라는 고백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매우 기본적이고 중요하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진술대로(1:8), 성경 원본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고 그 본문은 “그의 독특한 배려와 섭리로 모든 시대에 순수하게 보존되었다.” 이것이 교회의 전통적 견해이다. 그러나 19세기 말 웨스트코트와 호트가 주장한 불확실한 가설에 의해 많은 교회들이 신약성경의 전통적 다수 본문을 버리고 불완전하고 오류투성이의 사본들(א와 B)을 중시하는 잘못을 범하였다. 그러나 신약성경의 헬라어 비잔틴 다수 사본들의 본문은 순수하게 보존된 성경 원본의 본문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채택되어야 할 것이다.

성경을 가지고 설교할지라도 그것을 바르게 해석하고 설교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올 것이다(암 8:11). 중세 시대 말, 종교개혁 직전과 같이, 오늘날 벌써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오는 것 같다.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설교와 성경강해가 있지만, 순수한 기독교 신앙 지식과 입장은 더 흐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요구되는 성경 해석과 강해는 복잡하고 화려한 말잔치보다 성경 본문의 바른 뜻을 간단 명료하게 해석하고 적절히 적용하는 것일 것이다. 사실상, 우리는 성경책 한 권으로 충분하다. 성경주석이나 강해는 성경 본문의 바른 이해를 위한 작은 참고서에 불과하다. 성도는 각자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성경을 읽어야 하며, 성경주석과 강해는 오직 참고로만 사용해야 할 것이다.

 

제목 차례

1장: 신자의 삶은 빛의 삶

2장: 형제 사랑은 빛 안에 사는 증거

3장: 형제 사랑은 생명에 들어간 증거

4장: 형제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

5장: 형제 사랑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표시

  

서론

요한일서의 저자는 사도 요한이다(1:1). 이 점에 대하여 초대교회의 증거는 일치한다. 저자는 자신을 그리스도의 목격자로 소개한다. 특히, 본서에는 ‘말씀, 빛, 영생, 사랑, 새 계명, 거한다, 생명을 바친다, 죄를 없이하다, 마귀의 행위, 세상을 이기다, 살인자, 죽음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가다, 보혜사, 물과 피, 세상의 구주, 하나님의 독생자, 증거하다’ 등 요한복음에 나오는 것과 같거나 비슷한 단어들이 많다. 2세기의 폴리갑은 본 서신을 인용하였고, 또 2세기의 파피아스와 이레니우스, 3세기의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와 터툴리안 등은 본 서신을 사도 요한의 글로 인용하였다. 초대교회의 전통은 요한일서, 요한이서, 요한삼서의 저자를 사도 요한이라고 본다.

본 서신의 저작 연대는 요한복음을 썼을 주후 85-90년경이거나 그보다 약간 후일 것이다. 초대교회의 전통에 의하면, 사도 요한은 그의 생애의 후년에 에베소에 거주하며 사역하였다. 이레니우스는, “주의 제자 요한은 이 믿음을 전파하고 또 복음을 선포함으로써, 게린두스에 의해 사람들 가운데 유포되었고 이전에 오랫동안 소위 ‘지식’의 분파라고 잘못 불리었던 니골라당이라는 사람들에 의해 유포된 오류를 제거하고 그들을 논파하기를 원한다”고 말하였다.1)

요한일서의 특징적 주제는 형제 사랑이다. 이와 함께, 사도 요한은 우리가 미혹의 영을 분별할 것과 중생(重生)한 자가 죄를 짓지 말고 의를 행하고 형제 사랑을 실천해야 할 것을 교훈하였다. 사도 바울 서신들에서는 칭의(稱義)의 교리가 강조되었으나, 사도 요한의 서신에서는 중생(重生)의 교리가 강조되었다.

 

1장: 신자의 삶은 빛의 삶

1-4절, 사도의 전하는 내용과 목적

[1-2절] 태초부터 있는[계신]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된 자니라.

사도 요한의 사역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부르시고 세우신 모든 사도들의 사역이었다. 사도 요한은 자신이 전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초부터 계신 생명의 말씀’이라고 증거하였다. ‘태초’는 우주의 시작을 가리킨다. ‘있는’[계신]이라는 원어(, 미완료과거)는 ‘있었던[계셨던]’이라는 뜻이다. ‘태초부터 계셨던 자’라는 말씀은 우주가 시작될 때 이미 존재하고 계셨던 자, 우주의 시작 이전부터 계셨던 자, 곧 신적인 존재를 가리킨다. ‘태초부터 계셨던 생명의 말씀’은 영원한 신적인 존재인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에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1:1-4)고 증거했다. 거기서도 ‘계시니라’는 원어(, 미완료과거)는 본문의 ‘있는’이라는 말과 동일하다. 태초부터 계셨던 그 분, ‘말씀’(로고스)이라고 불리는 그는 하나님과 구별되시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으로 증거되는 분이시다. 우주의 시작 때에 이미 존재하고 계셨던 그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그때 존재하고 계셨을 수 없다. 태초부터 계셨던 그 분, 말씀으로 불리신 그는 하나님과 구별되시면서도 그 본질과 본체에 있어서 한 하나님이시다. 여기에 삼위일체의 신비가 있다.

사도 요한은 2절에서 그를 ‘영원한 생명’이라고 표현하였고 또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되었다,’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라고 표현하였다. 태초부터 계셨던 그 분, 모든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 특히 죄로 인하여 죽은 모든 인생들에게 참 생명이 되시는 분,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계시다가 육신으로 나타나신 그는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되신’(요 1:1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되신다. 그러므로 그는 친히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고(요 14:6), 또 창세 전에 아버지와 함께 영화를 누렸다고 말씀하셨다(요 17:5). 또 요한은 본 서신 끝부분에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고 증거했다(요일 5:20). 예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가진 하나님이시다.

요한이 전한 예수님에 대한 내용은 믿을 만한가? 이에 관해 요한은 자신이 그에 대한 목격자임을 고백한다. 그는 1절에서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고 하였고, 2절에서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라고 했고, 3절에서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 전함은”이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 요한은 자신이 전하는 분에 대하여 그의 신적 능력과 영광을 직접 자기 눈으로 보았고 들었다고 반복하여 증거한 것이다. 이런 증인의 증거는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신약성경은 바로 이런 목격자의 증언들의 기록이다. 여기에 기독교 복음의 확실함이 있다. 기독교 복음은 목격자들의 증언들에 근거하고 있다. 신약성경에 기록된 그 증언들은 2천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복음 진리의 확실성을 증거한다.

[3-4절]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함이라.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너희의](전통본문)2)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

사도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한 목적은 전하는 자들과 받는 자들이 서로 교제하기 위함이었다. 성도의 교제가 전도의 목적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교회는 성도들의 모임이며 교제의 회이다. 우리는 성도의 교제가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모든 사람들에게 확장되기를 원한다. 우리의 교제는 과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확장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도들의 참된 교제는 이 세상에 가장 복된 일이다. 그것은 천국에서도 나눌 교제이다.

그런데 본문은 성도의 교제가 단지 육신적 교제가 아님을 증거한다. 성도의 교제는 하나님과 예수님과 우리의 영적 교제이다. 이것이 구원이다. 인생이 하나님을 멀리 떠났다가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와 그를 알고 그와 교제하는 것이 구원이다. 그렇다면, 전도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9에서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의 교제를 나누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찬송과 감사와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의 권면이 있는 교제이다.

사도 요한은 덧붙여 그가 이 편지를 쓰는 목적은 피차간에 기쁨이 충만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진리의 말씀으로 교훈을 주고 받음으로써 피차 기쁨이 충만케 된다. 성도의 기쁨의 이유는 그가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 곧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며, 또 그가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천국의 백성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교훈하였다(빌 4:4). 우리의 기쁨은 구원의 기쁨이며, 우리가 성경말씀으로 서로 권면하고 권면을 받을 때 우리의 기쁨은 더욱 풍성해지는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의 영광을 보아야 한다. 그는 ‘태초부터 계셨던 생명의 말씀’이며 ‘영원한 생명’으로서 이 세상에 오셨다. 그는 천지만물이 창조되기 전부터 계셨던 분, 곧 신적 존재이셨다. 기독교는 한 훌륭한 사람 예수를 추종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우리의 의와 영원한 생명이 되시는 예수, 지금도 살아계신 예수를 믿고 섬기며 따르는 것이다. 우리는 그의 신적 영광을 보아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들의 확실함을 깨닫자. 우리는 비록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의 영광을 우리 눈으로 보지 못했지만 그것을 본 증인들의 증언들을 가지고 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친히 눈으로 보고 그의 목소리를 듣고 그를 주목하고 손으로 만져본 증인들의 진실한 증언들 위에 기초하고 있다. 우리가 믿는 바는 사람들이 상상하여 지어낸 이야기들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진실한 증인들이 증거한 역사적 사실들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실들을 신약성경에서 확인하고 확신하자.

셋째로, 우리는 성도의 교제의 본질을 알자. 교회는 성도의 교제의 회인데, 성도의 교제는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교제이다. 우리의 사랑의 교제는 먹고 마시는 세상적, 육신적 교제가 아니고 믿음과 소망 안에서의 영적 교제이다. 거기에는 찬송이 있고 기도가 있고 하나님의 말씀의 권면이 있다. 그리고 이 교제 속에는 항상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충만한 기쁨과 즐거움이 있다.

5-10절, 빛 가운데 행하라

[5절]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듣고 사람들에게 전하는 소식은 하나님께서 빛이시라는 사실이다. 하나님께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다. 빛은 하나님의 모든 속성과 덕의 완전한 영광을 나타낼 것이지만, 특히 그의 지식과 도덕성을 가리킨다고 본다. 무지와 불의와 악과 거짓은 어두움이지만, 지식과 의와 선과 진실은 빛이다. 하나님께는 지식과 의와 선과 진실이 충만하시다.

[6-7절]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3)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하나님께서 빛이시라는 사실은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도 빛 가운데서 살아야 함을 보인다. 빛 되신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과 교제하는 자들은 어두움 가운데 행해서는 안 되고 빛 가운데 살아야 한다. ‘어두움 가운데 행하면’이라는 원어(엔 토 스코테이 페리파토멘)는 ‘어두움 가운데 계속, 반복하여 행하면’이라는 뜻이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빛의 교제이다. 빛과 어두움은 함께 있을 수 없다. 빛이 오면 어두움이 물러간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면서 어두움 가운데, 즉 불의와 악과 거짓 가운데 계속 행하고 있다면, 우리는 거짓말을 하는 자요 진리를 믿고 행하는 자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빛 가운데 행하면, 즉 우리가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살고자 애쓰면,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다. 다윗은 말하기를,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누구오니이까?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일삼으며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그 혀로 참소치 아니하고 그 벗에게 행악지 아니하며 그 이웃을 훼방치 아니하며 그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를 존대하며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아니하며 변리로 대금치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치 아니하는 자니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이다”라고 했다(시 15:1-5).

사도 요한은 또 우리가 빛 가운데 즉 의와 진실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라고 말한다.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는 원어(현재시제)는 주께서 믿는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하셨고 또 날마다 깨끗하게 하실 것이라는 뜻이며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의 풍성한 교제를 누릴 것이다. 예수께서도,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고 말씀하셨다(요 15:2).

[8-10절]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사람은 누구나 다 죄인이며 또 구원받은 성도들 속에도 죄악성이 있기 때문에, 만일 누가 자신이 죄가 없다고 말한다면, 그는 자신을 속이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않는 자일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의 세계에 들어온 것은 우리의 죄를 인정하고 뉘우치고 버리기를 결심함으로써이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지 않으시면 언제든지 죄에 떨어질 수밖에 없고 또 종종 떨어졌던 존재라는 것을 겸손하게, 솔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신자는 우리의 죄를 인정하고 고백함으로써 빛의 삶을 유지해야 한다. 죄의 인정과 고백은 진실함에서만 가능하며 우리는 죄의 고백과 죄씻음을 통해 의롭고 거룩한 삶을 유지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죄를 인정하고 그 앞에 고백하는 것을 원하신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고백한다면, 그는 약속에 신실하시고 의로우시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성경 이사야서에서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고 말씀하셨다(사 1:18).

그러나 만일 우리가 범죄한 적이 없다고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성경에서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이미 선언하셨기 때문이다. 또 우리가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든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겠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와 상관없는 자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죄인이었고 또 지금도 종종 넘어지며 또 우리 속에 죄성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서 항상 겸손히 인정하고 고백하고 버리기를 힘쓰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빛이시다. 그에게는 바른 지식과 의로우심과 선하심과 진실하심이 있으시다. 그가 빛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는 빛 가운데 행해야 한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빛의 교제, 의와 선과 진실이 있는 교제이어야 한다. 우리는 항상 진리의 지식을 사모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한 삶을 힘써야 한다. 만일 우리가 이런 삶을 힘쓰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그와 교제하는 자가 아닐 것이다. 또 우리는 우리의 죄를 하나님 앞에서 항상 인정하고 고백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그때 우리의 모든 죄는 다 씻음을 받게 될 것이다.

2장: 형제 사랑은 빛 안에 사는 증거

1-6절,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

[1절]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사도 요한은 본 서신에서 그가 편지를 쓰는 교인들을 ‘자녀들아’라고 자주 불렀고(2:12, 28; 3:7; 4:4; 5:21) 본절에서도 ‘나의 자녀들아’라고 친근히 불렀다. 그의 말투를 보면 그는 나이가 많이 든 것 같고 교인들에 대한 사랑이 많았던 것 같다. 그는 본 서신에서 교인들을 ‘사랑하는 자들아’라고도 여러 번 불렀다(2:7; 3:2; 4:1, 7, 11).

그는 본절에서 본 서신을 쓰는 목적을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고 말하였다. 그는 1:4에서는 “우리가 이것을 씀은 너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다”라고 말하였었다. 하나님께서 성경책을 우리에게 주신 중요한 목적은 우리가 죄를 짓지 않게 하려 하심이다. 죄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주된 관심이다. 죄 짓지 않는 삶, 죄 없는 삶,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후에도 때때로 넘어지고 범죄하므로, 요한은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다”고 말한다. ‘아버지 앞에서’라는 원어(프로스 톤 파테라)는 ‘아버지와의 관계에서’라는 뜻이며, ‘대언자’라는 원어(파라클레토스)는 ‘변호자’라는 뜻이다. 범죄하는 문제는 성도의 현실적 문제이며 그 대책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과 그것의 계속적 적용이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은 우리가 연약할 때에 우리에게 효험이 있고 그는 현재 우리의 변호자가 되신다.

[2절]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화목제물’이라는 원어(힐라스모스)는 ‘유화(宥和)제물’ (propitiation), 즉 우리의 죄들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리고 제거시키는 제물이라는 뜻이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 3:25에서,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힐라스테리온)[유화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라고 말했다. ‘유화’라는 것이 성경적 속죄 개념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위한 유화제물이 되셨다. 예수께서는 우리만 위할 뿐 아니고 온 세상의 죄를 위하여 유화제물이 되셨다. 요한복음 1:29,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물론, 여기에 ‘세상’은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택하신 이 세상의 모든 자들을 가리킨다. 예수께서 성도들을 위해 계속 변호하시는 것은 그의 십자가 대속 사역에 근거한 것이다.

[3-4절]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사도 요한은 본 서신의 앞부분에서 구원받은 성도들이 하나님과 교제하는 자들로서 빛 가운데 행하여야 할 것과 그 첫 번째 증거로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고백해야 할 것을 강조하였었다(1:5-10). 이제 그는 주의 계명을 행하는 일에 대해 강조한다. 그것도 빛 가운데 행하는 일이다. 본절은 우리가 주의 계명을 지키면 주를 아는 자임이 증거된다고 말한다. 주의 계명은 곧 주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가리킨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구약성경에 주신 십계명의 요약과도 같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가 하나님을 아는 자이며,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면서 주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않은 자라고 간주된다. 하나님을 아는 자인가, 모르는 자인가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가 아닌가 하는 문제와 같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자이며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다.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 곧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 가운데서 서로 사랑함을 실천하는 자는 하나님을 아는 자요 그의 자녀이다.

[5-6절]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사도 요한은 우리가 주의 말씀을 지키면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우리 속에 온전케 되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가리킨다고 본다. 하나님의 계명들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신명기 6:4-5,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과거에 세상을 사랑하고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육신적 쾌락을 사랑했던 우리들은 변화를 받아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 되었다. 이것이 구원이다. 그런데 정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그의 말씀을 지킬 때 성취된다. 주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하리라”고 하셨다(요 14:21, 23).

사도 요한은 우리가 주의 말씀을 지킬 때 우리가 주 안에 있음이 증거된다고 말한다. 주 안에 있다는 것은 주와의 영적 연합을 의미한다. 그것은 주의 생각과 능력을 공급받는 것이며 또 주의 특권을 함께 누리는 것이기도 하다. 주께서는 포도나무 비유에서 우리가 주 안에 있으면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 15장). 그러나 그는 또 우리가 주 안에 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하고 버림을 받고 불태워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정말 주 안에 있다면 우리는 주의 행하시는 대로 죄를 멀리하고 서로 사랑함을 실천해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주 안에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죄 짓지 않는 생활을 힘써야 한다. 그것이 사도 요한이 본 서신을 쓴 목적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책을 주신 목적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는 그 무엇보다 먼저 우리가 죄 안 짓는 생활, 곧 거룩한 생활을 하는 것이다.

둘째로, 그러나 우리가 죄를 지을 때는 우리의 구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해야 한다. 구원받은 성도도 육신의 죄성을 가지고 있고 때때로 마귀의 시험과 세상과 악의 유혹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그럴 때 우리를 위한 속죄제물이시며 유화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나아가 그의 의를 의지하며 그의 보혈의 샘에서 더러워진 손과 발을 씻음 받아야 한다. 구주 예수께서는 우리의 지난 죄를 다 씻으셨을 뿐 아니라, 또한 우리의 현재의 부족과 연약도 씻어주신다.

셋째로, 우리가 죄를 짓지 않는 생활을 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가 되는 것을 말한다.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가 주를 아는 자요 주를 사랑하는 자요 주 안에 거하는 자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주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다면, 우리가 주를 안다는 것과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일 것이며 우리는 주 안에 거하는 자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사랑하라는 주의 계명을 힘써 지키자.

7-11절, 형제 사랑과 빛

[7-8절] 사랑하는 자들아[형제들아](전통사본),4)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처음부터](전통사본)5)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췸이니라.

사도 요한은 앞에서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라고 말하였는데, 이제 그가 말한 계명이 어떤 새 계명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처음부터 가졌던 옛 계명, 그들이 처음부터 들었던 말씀을 가리킨다고 말한다. 그것은 십계명을 의미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자라면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을 지키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사도 요한은 또 새 계명에 대해서도 말한다. 그가 말하는 새 계명은 분명히 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유언적으로 남겨두신 계명, 즉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가리킨다. 이 계명은 주님 자신에게와 우리에게 참된 계명이다. 요한복음 13:1에 보면, 주께서는 자신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 그는 친히 십자가에 대속 제물로 죽으심으로 사랑의 모범을 보여주셨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고 말했고, 또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고 했다(엡 5:2, 25).

새 계명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행하고 있었던 바이었다. 사도행전 4:32,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물질적 유무상통으로 드러난 서로 사랑함은 구원을 체험한 성도들의 표시이었다. 우리는 과거에 어두움에 속한 자들이었다. 그때에 무지와 죄악이 우리를 지배하였었다. 그러나 참 빛이 우리에게 비추어 왔다. 하나님의 진리의 지식과 의가 우리에게 찾아 왔다. 그것이 우리가 받은 구원이다. 에베소서 5:8,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골로새서 1: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이렇게 구원받은 증거가 바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새 계명은 진실한 성도들에게 참된 것이다.

[9-11절]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

‘그 형제를 미워한다’는 원어는 형제를 계속 미워하는 상태에 있다는 뜻이다. 성도는 거짓 구원과 헛된 확신을 조심해야 한다. 비록 사람이 자신이 하나님을 안다, 구원을 받았다, 빛 가운데 있다,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말할지라도, 만일 그가 자기 형제를 미워하고 있다면 그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이다. 그가 받았다는 구원은 거짓된 구원이요 그의 확신은 헛된 확신이다. 그는 구원받은 표를 가지고 있지 않은 자이다. 그러므로 성도의 신앙고백과 구원의 확신은 형제를 사랑하는 그의 삶을 통해 확증되어야 한다.

형제 사랑은 빛의 증거요 구원의 증거이다. 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들어왔고 구원을 받았다는 증거를 가진 자이다. 그는 자기 속에 걸림돌 혹은 걸려 넘어질 원인이 없다. ‘거리낌’이라는 원어(스칸달론)는 ‘걸림돌, 걸려 넘어질 원인’이라는 뜻이다. 빛은 우리의 길을 밝게 비춘다. 빛 가운데 사는 자는 자신의 행위의 잘못을 밝히 본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잘못된 행위를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맞는 바른 삶을 살기를 힘쓰게 된다.

반면에,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구원받지 못하고 어두움 속에 있고 어두움 가운데 행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사람이 어두운 밤에 산 속을 헤맨다면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잘 모르는 것과 같이, 어두움 가운데 행하는 자는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 ‘갈 곳’이라는 원어(푸 휘파게이)는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라는 뜻이다. 그가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하는 까닭은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했기 때문이다. 어두움 가운데, 즉 무지와 죄악들 가운데 사는 자들이 갈 곳은 오직 한 곳, 곧 지옥뿐이다. 만일 그가 그의 갈 곳이 지옥인 것을 알았더라면, 그는 그의 길을 돌이켰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눈이 멀었기 때문에 그는 그가 지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그곳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사도 요한은 주께서 주신 새 계명 즉 형제를 사랑하는 것에 대해 증거한 후에, 형제 사랑이 빛과 어두움을 구별하는 잣대가 됨을 말했다.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들어온 자이지만,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아직도 어두움 가운데 살고 있는 자이다. 그렇다면 형제 사랑은 참 구원과 거짓 구원을 구별하는 기준도 된다. 우리가 참으로 어두움에서 빛으로 들어온 구원받은 자들이라면, 우리는 형제를 사랑하는 자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주 예수께서 피 흘려 사신 영혼, 곧 주 예수님을 믿는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확실히 아직도 어두움 가운데 있는 자이다. 그러나 주 예수님을 믿는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걸림돌이 없는 자이다.

12-17절,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12-14절]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얻었음](원문)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사도 요한은 이 편지를 받을 교인들을 자녀들, 아비들, 청년들로 구별하여 언급한다. 그것은 그들의 연령을 따라 구별한 것이 아니고 그들의 신앙적 상태를 따라 구별한 것 같다. 교인들에 대한 이러한 묘사는 믿음의 기본적 사실을 나타낸다. 이것들은 다 성도들의 과거의 체험들이며 현재의 증거들이다.

첫째로, 자녀들 혹은 아이들은 믿은 지 얼마 안 되는 교인들을 가리킨 것 같다. 요한은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었고 하나님 아버지를 알게 된 자들이라고 묘사한다. 그것이 구원받은 성도들의 기본적 상태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의 보혈(寶血)로 죄씻음을 받았다. 우리는 세례 의식을 통해서나 천주교 신부(神父)에게 하는 고해성사를 통해서나 마리아를 통해서 죄씻음 받은 것이 아니고, 오직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말미암아 죄씻음을 받았다. 성도는 이렇게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이다.

둘째로, 아비들은 믿은 지 오래된 자들을 가리킨 것 같다. 연령도 많은 자들이었을지 모른다. 요한은 그들을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안 자들이라고 묘사한다. 참된 신앙은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 곧 영원하신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신앙생활은 그 하나님과 교제하는 생활이다. 참되시고 유일하신 하나님을 아는 것이 곧 영생이다(요 17:3). 신앙생활은 그 하나님과 사귀는 것이며 그와 동행하며 그를 섬기며 그의 뜻을 깨닫고 순종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의 성도의 신앙생활의 여정은 바로 하나님과 교제하며 그를 점점 더 아는 과정이다.

셋째로, 청년들은 믿음이 강하여 주를 위하여 일할 만한 자들을 가리킨 것 같다. 그들은 악한 자를 이기었다. 악한 자는 사탄과 악령들과 그의 종들이다. 청년들이 그들을 이긴 방법은 그들이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 속에 거하였기 때문이었다. 성경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자들에게 강해지라고 교훈한다. 고린도전서 16:13,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 에베소서 6:10-11,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하나님의 말씀은 악한 자를 이길 수 있는 무기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검이다. 에베소서 6:17,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성도들은 믿음 안에서 자라가며 강해져서 마귀와 악령들의 음모와 장난과 방해를 다 물리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한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복음 전도와 참된 교회 건립은 영적 전쟁이며 거기에는 영적으로 강한 용사들, 전사들이 많이 요구된다.

[15절]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사도 요한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고 교훈한다. 우리는 왜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하지 말아야 하는가? 그것은 세상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사랑’이라는 말은 ‘아버지께 대한 사랑’이라는 뜻이라고 본다. 하나님께서는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고 말씀하셨다(출 20:3).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모든 계명들 가운데 가장 첫째 되는 계명은 우리의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22:37-38; 신 6:4-5). 또 그는 우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마 6:24). 우리가 하나님만 섬기며 하나님만 전심전력하여 사랑하려면, 우리는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주신 집이나 돈이나 직장은 우리가 감사하게 사용하기는 하지만, 우리는 거기에 애착을 두어서는 안 된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주신 남편, 아내, 자녀들도,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교훈 안에서 그들을 사랑할 뿐이지 그 이상은 아니어야 할 것이다.

[16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우리가 이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께 대한 사랑이 우리 속에 없는 이유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실상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속하는 것들이며, 다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고 세상으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육신의 정욕 즉 음란한 욕망으로 더러워져 있고, 안목의 정욕 즉 눈으로 보는 육신적 아름다움의 추구로 더러워져 있다. 그러나 실상 육신적 아름다움은 그렇게 가치 있는 것이 못된다. 그래서 잠언에는,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잠 31:30). 또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이생의 자랑 즉 이 세상에서의 자기 명예나 권세 등 이 세상의 자랑거리들을 추구하는 것으로 더러워져 있다. 이것들은 한결같이 헛된 것들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것들을 사랑하고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고 천국 소망을 가진 성도들은 헛되고 죄악된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거나 그것들을 추구하며 살아서는 안 된다.

[17절]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참으로 세상의 것들은 지나가고 만다. 또 이 세상과 함께 우리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도 다 지나가고 만다. 그래서 전도서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헛됨을 반복적으로 증거했다. 전도서 1:2,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도서에는 ‘헛되다’는 말(헤벨)이 38번이나 사용되었다. 또 이사야 선지자는 성령의 감동 가운데 외치기를,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고 했다(사 40:6-8).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지만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경말씀을 믿고 성경의 교훈대로 경건하고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게 사는 것이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대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들만 새 하늘과 새 땅, 곧 영원한 영광의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게 될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몇 가지 신앙의 기본적 사실들에 대해 스스로 묻고 대답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씻음을 받았는가? 우리는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알았는가?

둘째로, 교회에는 주 안에서 강하고 하나님 말씀으로 준비되어 악한 자들과 싸워 이길 수 있는 영적인 청년들, 좋은 군사들이 필요하다.

셋째로, 우리는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이 다 헛되고 죄악됨을 깨닫고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만을 행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세상은 참으로 헛되고 죄악되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경말씀을 다 믿고 성경대로 사는 것이며 특히 주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18-23절, 많은 적그리스도가 나타남

[18절]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사도 요한은 사도 시대 말기를 말세라고 보았다. 왜냐하면 많은 적그리스도들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적그리스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고 대적하는 이단들을 가리다. 주께서는 세상의 종말의 징조들로 적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의 출현, 전쟁들, 지진들, 기근들, 악한 질병들, 바른 신앙의 핍박 등을 예언하셨다. 적그리스도들의 출현은 종말 징조의 하나였다. 마태복음 24:5,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종말의 징조들은 이미 사도 시대 말기에 나타났다. 그러므로 신약 성도들은 세상의 종말이 왔다는 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종말의 징조들은 16세기 종교개혁시대에도 어느 정도 있었다. 그 가장 큰 징조는 천주교회 교황이 바른 진리를 대적하고 참된 신자들을 핍박한 일이었다. 종교개혁자들은 교황을 성경이 예언한 적그리스도라고 생각하였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는 종말의 징조들이 더욱 많이 이루어짐을 보고 느낀다. 우리는 특히 많은 개신교회들의 배교(背敎)와 타락을, 그리고 다수의 사이비 기독교 종파들, 즉 이단종파들의 나타남을 보았고, 또 1, 2차 세계대전을 지나 이제 제3차 세계대전이라는 세계적 전쟁의 가능성을 보고 있다. 이 전쟁이 일어나면 그것은 1, 2차 세계대전과 비교할 수 없는 처참한 전쟁이 될 것이다. 그것은 핵무기를 포함하여 화학무기와 생물학 무기 즉 세균 폭탄이 사용되는 전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때가 되었다는 의식은 지난 2천년 동안 교회 속에 항상 있어 왔지만, 오늘 시대는 참으로 말세지말인 것 같다. 우리는 종말의 징조들을 확인하면서 더욱 세상의 마지막이 왔다는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두려워하고 당황하는 마음을 가질 것이 아니고 주께서 예언하신 바들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서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고 말씀 묵상과 기도 가운데서 주의 재림을 기다리며 바르게 살아야 할 것이다.

[19절]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이단들은 처음에 교회에 속해 있었으나 어느 날 교회를 떠나갔다. 교회 역사상 이단의 초기 형태는 분파적이었다. 교회에서 나간 소수파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교회가 전체적으로 부패하여 배교적이게 된 때가 있었다. 16세기 종교개혁의 시대가 그러하였다. 성경 진리를 깨닫고 믿었던 참된 성도들은 소수파가 되어 교회에서 정죄되고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20세기 이후의 교회의 상황은 더욱 그렇게 되고 있다. 세계 교회는 전체적으로 부패하여져 있다. 경건한 선조들이 가졌던 성경적인 신앙, 바른 신앙, 보수 신앙, 옛신앙은 오늘날 소수파가 되어 있다. 오늘날 교회들은 다양성을 좋아하며 넓은 길을 가고 있다. 교회들의 배교와 타협과 혼란을 책망하는 목소리는 극단적 입장이라고 무시와 배척을 당한다. 포용주의 시대에는 비타협적 보수 신앙만 유일하게 배척을 받는다. 그러나 참된 기독교 신앙은 항상 비타협적이었다. 하나님의 진리는 절대적이고 비타협적이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의 상황과 달리, 초기의 이단들은 분파적이었다. 그들은 교회에서 나간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실상 처음부터 참된 교회에 속한 자들이 아니었다. 만일 그들이 참으로 교회에 속한 자들이었다면 그들은 교회를 떠나지 않고 참 성도들과 함께 거하였을 것이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한 몸이지만(고전 12:13, 27), 외형적 교회 속에는 참된 신자들 뿐만 아니라 아직 구원받지 못한 자들도 섞여 있다. 곡식과 가라지가 섞여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 중에 가룟 유다가 섞여 있었던 것과 같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고 따랐으며 주의 말씀으로 죄씻음을 받은 자들이었지만, 가룟 유다는 요한복음이 증거하는 대로 예수님을 믿지 않은 자이며(요 6:64), 돈궤에서 돈을 훔치는 도적이었고(요 12:6), 예수님의 말씀으로 죄씻음을 받지 못한 자이었다(요 13:10). 구원받은 성도들은 다 한 몸이지만, 이단은 그렇지 않다. 실상 그들은 처음부터 소속이 달랐다. 그들은 믿지 않은 자들이요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요 하나님과 천국에 속한 자들이 아니다.

[20-21절]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 못함을 인함이 아니라 너희가 앎을 인함이요 또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음을 인함이니라.

구원받은 성도들은 거룩하신 자 곧 하나님께로부터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았다. 성령은 전지하신 하나님의 영이시므로 그는 우리에게 모든 진리를 가르쳐 주시고 깨닫게 해주신다. 사도 요한은 성도들이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편지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진리를 알기 때문에 그들에게 편지한다고 말하였다. 그가 또 이단에 대해 말하는 것은 모든 거짓이 진리에서 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며 그가 우리에게 모든 진리를 깨닫고 믿게 하셨으므로 우리는 이단에 대해 논하며 이단을 배격해야 할 것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이다.

[22-23절]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없느니라.]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6)

우리는 교리적인 면과 윤리적인 면에서 적그리스도들과 이단들을 정통 교회의 바른 종들과 구별할 수 있다. 이단들은 교리적인 면에서 기독교의 기본적 교리들을 부정하고 또 윤리적인 면에서 음란하고 탐욕적이다(벧후 2:1-3). 그들은 기독교의 기본 교리들을 부정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들이다. 그것은 거짓말들 중에서도 가장 큰 거짓말이다. 그들은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아들을 부인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아들을 부인하는 자는 아버지를 모시고 있지 못하다.

기독교 2천년 역사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적그리스도적인 이단은 천주교회이다. 천주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만 섬기지 않고 마리아를 거의 신적 존재로 추앙하고 찬미하고 그에게 기도한다. 또 천주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만 믿고 따르지 않고 교황의 무오(無誤)한 권위를 주장한다. 또 천주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의 완전함을 믿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복음 진리를 믿지 않고 공적으로 그것을 부정하고 정죄한다. 또 그들은 신부들이 집행하는 미사가 그리스도께서 계속 죽으시는 의식이라고 말하고 또 예수님을 믿는 자들도 ‘작은 죄’가 있으면 연옥(煉獄)에 들어가 불의 시련을 통과한 후에 천국으로 들어간다고 말한다. 이런 점들에 있어서 천주교회는 하나님의 참 뜻을 부인하며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부인하는 이단인 것이다.

오늘날에는 천주교회보다 더 심각한 적그리스도적 이단이 있다. 기존 교회들 속에 들어와 있는 자유주의 신학이 그러하다. 자유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초자연적 기적들, 그의 진노와 심판,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동정녀 탄생, 그의 기적들, 그의 대속 사역, 그의 부활, 그의 승천과 재림 등 기독교의 근본교리들을 부인하는 사상이다. 그것은 실로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적그리스도적 사상인 것이다. 또 성경의 바른 교훈을 넘어서는 은사주의도 심각한 이단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세상의 종말의 징조들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이 세상의 마지막이 가까웠다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 많은 적그리스도들과 이단들이 나타났다. 우리는 20세기에 인류가 경험했던 그 참혹했던 1, 2차 세계 대전에 대해서 알고 있고, 3차 세계 대전은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우리가 사는 현 시대는 참으로 말세지말이라고 생각된다. 우리는 종말 의식을 가지자.

둘째로, 우리는 말세의 한 징조로서 나타나는 이단들의 소속을 바로 알자. 오늘날에는 세계 교회들이 전체적으로 배교적이게 되었으므로 이단들이 건전한 교회인 양 행세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천주교회가 기독교의 한 오래된 파로 잘못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천주교회는 가장 오래된 이단이다. 또 많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역사적 대교단들의 목사양성원인 신학교들의 교수들이 되어 있고, 많은 은사주의자들은 교회 지도자들이 되어 있다. 그러나 그런 이단들은 교회 밖에 있든지 교회 안에 있든지 간에 참 교회에 속한 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참으로 구원받은 자들이 아니고 하나님과 그의 나라에 속한 자들이 아니고, 사탄의 왕국에 속한 자들이다. 우리는 이단의 소속을 바로 알자.

셋째로, 우리는 이단들의 정체를 알고 그들을 분별해야 한다. 이단들은 교리적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며 윤리적으로 부도덕한 자들이다. 우리는 그 두 면을 생각하며 분별해야 한다. 우리는 교리적 지식을 가지고 이단들을 분별해야 한다.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자들이 누구인지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천주교회가 적그리스도적이며 이단적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고, 또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이 기독교 2천년 역사상 가장 파괴적인 적그리스도적 이단이며 은사주의가 기독교를 부패시키고 혼란시키는 매우 무서운 독소인 것을 분별해야 한다. 또 우리는 윤리적으로도 이단을 분별해야 한다. 우리는 거룩과 의와 선과 진실을 항상 구하며 행해야 한다. 우리는 부패되지 않은 심령으로 이단들의 정체를 알고 그들을 분별하고 배격해야 한다.

24-29절, 주 안에 거하라

[24절]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의 안과 아버지의 안에 거하리라.

‘처음부터 들은 것’은 교회가 사도들을 통해 들은 복음 진리를 가리킨다고 본다. 그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며 그의 죽음이 우리 죄를 대속(代贖)하였고 그를 믿음으로 우리가 영생을 얻고(요 3:16)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내용이다(요 1:12). 이것은 교회가 처음부터 들은 바이었다.

사도 요한은 이 내용이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고 말한다.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는 것은 그 진리를 믿고 그것을 지키라는 것이다. 우리는 사도들을 통해 전달된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바르게 깨닫고 굳게 믿고 붙들어야 한다. 그것이 옛신앙이며 보수신앙이다. 우리는 특히 19세기 중엽 이후에 일어난 각종 이단종파들과 현대 자유주의 신학과 교회연합운동과 은사운동 등을 경계해야 한다. 우리가 이렇게 성경의 바른 진리를 믿고 지킬 때,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과 하나님 아버지 안에 거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신비적 영적 연합을 누리게 될 것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아들과의 연합으로 대속의 은택들을 누리며, 하나님 아버지와의 연합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안에 거하게 된다. 이러한 연합은 성도의 정상적 신앙생활이다. 그런데 성도가 이러한 정상적 생활을 하려면, 사도적 복음 진리의 내용 즉 역사적 기독교 진리를 믿고 지켜야 하는 것이다.

[25절]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은 영생 곧 영원한 생명이다. 죄는 죽음을 가져왔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과 그로 인한 죄씻음은 우리에게 영생을 준다. 이 영생은 현재 충만히 누리고 있지는 못하지만, 이미 받았고 장차 충만히 경험하며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말씀하셨고, 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하셨다(요 5:24; 11:25-26).

[26-27절] 너희를 미혹케 하는 자들에 관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사도 요한은 성도들을 미혹케 하는 적그리스도들과 그들의 나타남에 대해 말함으로 성도들을 조심시키려 하고 있다. 적그리스도들, 즉 이단자들은 속이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과 그의 대속(代贖)으로 말미암은 죄씻음과 영생의 복을 부정하는 자들이다. 그 불신앙은 결국 사람을 죄 가운데서 멸망케 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극히 경계해야 하는 것이다.

모든 성도에게는 ‘기름 부음’ 곧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후서 1:21-22에서,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말했다. 성령께서는 완전하고 참된 교사이시기 때문에, 교회에서 인간 교사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에 인간 교사들을 주셨다. 고린도전서 12:28,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세째는 교사요.” 에베소서 4:11,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그러나 우리는 어떤 교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좋은 교사이신 성령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에 그를 통해 하나님의 모든 진리를 배우고 깨닫고 확신할 수 있다. 또 그의 진리는 참되고 거짓이 없으시다. 주께서는 성령께서 오셔서 모든 것을 가르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고(요 14:26) 또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라”고 하셨다(요 16:13).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고 말한다. 성령께서 가르쳐 주신 진리들은 교회가 처음부터 배운 내용과 일치한다. 성령님의 교훈은 예수님의 교훈과 동일하다. 그러므로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라는 말씀은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바’와 동일하다. 신약성도들은 처음부터 사도들을 통해 듣고 배운 복음 진리, 곧 성령께서 가르쳐 주신 그 동일한 진리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지켜야 하며, 그것이 주 안에 거하는 표시가 된다.

[28-29절] 자녀들아, 이제 그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의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의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

사도 요한은 우리가 주 안에 거해야 함을 강조한다. 그것은 요한복음 15장에 기록된 포도나무 비유에서 주께서 말씀하신 바,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하신 것과 같다(15:3-5). ‘주 안에 거한다’는 말은 믿음과 경건과 순종의 삶을 가리킨다고 본다.

사도 요한은 우리가 이렇게 주 안에 거하게 되면, 주께서 재림하실 때 담대함을 얻고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재림 소망은 우리의 최대의 소망이다. 그때 우리는 영광의 부활과 천국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의 소망은 오직 거기에 있다. 성도들의 성실한 신앙생활의 목표는 바로 그 날 주 앞에 담대히 서는 것이다. 베드로후서 3:14,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그러나 그 날에 부끄러움을 당할 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바른 믿음을 가지지 못하였고 순종치 않았던 자들이다. 다니엘 12:2,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

우리가 주의 의로우심을 안다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도 알 것이다. 여기에 중생(重生)의 증거가 있다. 여기에 신앙과 행위의 일치된 증거가 있다. 중생한 자는 바른 신앙, 역사적 기독교 신앙, 옛신앙을 가질 뿐 아니라, 죄를 버리고 의를 행하는 삶을 산다. 다시 말해, 중생의 증거는 바른 믿음과 의로운 삶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사도들에게서 처음부터 들은 내용, 즉 역사적 기독교 진리를 바르게 파악하고 보수해야 한다. 거기에 영생의 약속이 있다. 거짓 교사들이 왜곡시키려는 것이 바로 그 진리의 내용이다. 그러나 성령께서 가르쳐 주시고 깨닫게 해주시는 것이 바로 그 진리의 내용이다. 우리는 그 내용을 믿고 지켜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주 안에 거해야 한다. 이것은 실상 우리가 중생했을 때 이미 이루어진 일이다. 중생의 증거는 바른 믿음과 의로운 삶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의 바른 말씀을 붙들고 믿고 그것을 순종함으로써 주 안에 거함을 확실히 증거해야 한다. 우리가 주 안에 거할 때만 우리는 주의 재림의 날에 담대함을 얻을 수 있다. 참된 믿음과 순종이 없는 자는 그 날에 수치와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참 성도들은 다 주의 재림의 날에 그를 영광 가운데 맞이하게 될 것이다.

 

3장: 형제 사랑은 생명에 들어간 증거

1-6절, 죄를 짓지 말라

[1절]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7)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

우리는 전에 죄인이요 사망 아래 있던 사람이었고 마귀에게 속한 자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께서 지극한 사랑으로 사랑하심으로써 구원을 받아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영원한 생명을 얻었고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을 회복하였다. 이것은 큰 복이며 큰 특권이다. 그러나 이 세상은 우리의 이 복과 이 특권을 알지 못한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얻은 의도, 영생도, 하나님의 자녀 됨도 알지 못한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에 대해 알지 못하고 죄로 인해 영적인 눈이 어둡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을 알았더라면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복, 곧 성도들이 받아 누리고 있는 구원의 복에 대해서 알고 사모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알지 못하고 있다.

[2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하나님의 자녀들의 장래 영광의 모습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그것은 주께서 나타내심이 될 때 즉 그가 다시 오실 때 나타날 것이다. 그때 우리는 그와 같이 영광스런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다. 우리가 그의 영광의 모습을 보듯이, 우리도 그와 같이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고 말했다(빌 3:20-21).

[3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성도들은 주의 재림과 그때 이루어질 영광스런 몸의 구속(救贖)과 변화를 소망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23-25에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救贖)을 기다리느니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라고 말했다. 사도 요한은 성도가 이런 소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주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신을 깨끗하게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표현(직설법)이 더 엄숙한 교훈이 된다. 그는 자신을 깨끗케 하지 않는 자는 이러한 소망이 없는 자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스런 자녀들이라면 죄를 짓지 말고 깨끗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천국을 소망하는 자는 천국 백성답게 살고, 의의 나라를 소망하는 자는 의인답게 죄와 상관없이 거룩하게 산다.

[4-5절]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 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죄는 불법, 곧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계명,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반대하고 거부하고 어기는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바로 우리의 죄를 없이 하시기 위해서이었다. 그의 성육신(成肉身), 즉 말씀이 사람의 본질을 취하여 사람이 되신 목적은 우리의 죄를 대속(代贖)하시기 위함이었다. 그에게는 죄가 없으셨다. 그는 자신의 죄 때문에가 아니라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다. 그러므로 그가 우리의 죄를 없이 하기 위해 오셔서 대속 제물이 되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을진대, 우리는 더 이상 범죄치 말아야 한다.

[6절]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하마르타네이)[계속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하마르타논)[계속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우리가 주 안에 거한다면 우리는 범죄치 않아야 한다. 원문에 ‘범죄하지,’ ‘범죄하는’이라는 단어는 다 현재시제이다. 신약성경의 원어인 헬라어에서 현재시제는 계속적 행위를 의미한다. 즉 이 단어는 구원받은 자가 계속 범죄하고 계속 죄 가운데 머물러 있을 수 없다는 뜻을 가진다(NIV). 만일 누가 계속 죄 가운데 머물러 있다면, 그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요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자일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들은 법적으로, 이론적으로만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또한 실제적으로 구원받은 것이다. 주께서 주신 구원의 새 생명은 거룩한 성향이다. 예수님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는 실제로 행동과 삶에 변화가 일어난다.

본문은 우리가 범죄치 말아야 한다고 교훈한다. 우리가 범죄치 말아야 할 첫 번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장차 영광스런 주의 형상을 본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 예수님의 재림 때 일어날 영광스런 부활을 소망하는 자일진대 우리는 모든 죄와 불결로부터 우리 자신을 깨끗케 해야 한다. 또 우리가 범죄치 말아야 할 두 번째 이유는 주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신 일이 바로 우리의 죄를 없애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우리의 더러운 죄 때문에 십자가의 참혹한 죽음을 죽으셨다. 그의 죽음은 우리의 죄를 깨끗게 하는 대속(代贖)의 죽음이셨다. 우리가 주를 믿고 구원을 받아 주 안에 거하는 자가 되었으므로, 우리는 계속 죄 가운데 머물 수가 없는 것이다. 구원받은 성도는 결코 죄 가운데 머물러 있을 수 없다. 우리는 마땅히 모든 죄를 버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오직 의와 거룩을 행해야 한다.

7-12절,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

[7-8절]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성도는 누구에게든지 미혹받지 말아야 한다. 교회 안팎에는 성도를 속이고 잘못 인도하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잘못된 교훈을 하고 잘못된 행동의 본을 보인다. 그들은 죄를 짓는 자들이며 죄 짓는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자들이다. 그러나 의인은 의를 행하고 의를 행하는 자는 의롭지만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한다.

‘마귀에게 속한다’는 원어(에크 투 디아볼루 에스틴)는 ‘마귀에게서 난 자이다’라는 뜻이다. 그것은 죄를 짓는 자의 근원을 나타낸다.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한 자요 인간을 범죄케 한 자이다. 요한복음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마귀가 인간을 속여 범죄케 함으로 죽게 만들었으니 그것이 살인인 것이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서 난 자이며 마귀에게 속한 자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이라는 말은 성육신(成肉身)을 가리킨다. 태초부터 계셨던 아들, 신성을 가지셨던 그가 육신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 즉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의 본질을 취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다.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에서 뱀에게 “내가 너[뱀=마귀]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었다(창 3:15). 그것은 메시아의 오심과 하실 일을 보인 것이었다.

[9절]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하나님께로서 났다는 말씀은 중생(重生) 곧 거듭남을 가리킨다. 그것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며(요 3:3, 5) 그 표는 사람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 곧 그를 믿는 것이다(요 1:12-13). 사도 요한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 곧 중생한 자는 죄를 짓지 않는다고 말한다. ‘죄를 짓지 않는다’는 원어(하마르티안 우 포이에이, 현재시제)는 현재진행적 의미를 가진다. 중생한 자는 ‘계속 죄를 짓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NIV). 중생한 자도 간혹 아니 자주 실수하고 범죄할 수 있지만, 계속 죄를 짓지는 않고 죄 가운데 거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사도 요한이 본 서신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중생한 성도는 죄를 짓지 않는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생한 자라도 간혹 혹은 자주 넘어지고 실패한다는 것은 모든 중생한 자가 경험하는 바이며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다음과 같이 탄식어린 고백을 했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고 하였다(롬 7:21-25). 중생한 자 속에는 이런 갈등이 있지만, 그는 계속 죄를 짓거나 죄 가운데 머물러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중생한 자가 죄를 짓지 아니하는 이유를 말하기를,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라고 했다. ‘하나님의 씨’는 새 생명의 원리를 가리킨다. 중생할 때 심어지는 이 생명의 원리는 범죄할 수 없는 원리요 의만을 지향하는 원리이다. 중생한 영혼 속에는 이 생명의 원리가 심어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중생한 영혼은 그 지배적 성향에 거룩한 변화가 있다. 전에는 무지와 부도덕이 그를 지배하였었다. 그러나 이제는 지식과 도덕성이 그를 지배한다. 그러므로 중생한 자도 간혹 혹은 자주 넘어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는 법적으로 완전히 거룩하게 되었고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며 또 실제적으로도 죄를 버리고 의를 행하기 위해 힘쓰는 것이다.

[10절]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이러므로’라는 원어(엔 투토)는 ‘이 점에서’라는 뜻이다. ‘이 점’이란 성도가 죄를 짓느냐, 안 짓느냐 하는 점을 가리킨다. 계속적으로 죄 가운데 사느냐 아니면 즉시 회개하고 죄를 버리고 의를 행하려고 결심하고 노력하느냐 하는 이 점에서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의 차이가 드러난다. ‘하나님께 속하지 않는다’는 말은 ‘하나님께로서 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사도 요한은 다시 말하기를, 누구든지 의를 행치 않거나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가 아니고 하나님께 속한 자가 아니라고 한다.

이와 같이, 본 서신에서 사도 요한이 강조하는 바는 중생한 성도가 실제로 죄를 짓지 않는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의 행위는 그의 근원과 그의 소속을 증거한다. 사람이 선을 행한다면 그가 중생했고 하나님께 속한다는 것을 나타내지만, 사람이 악을 행한다면 그가 중생하지 못했고 하나님께 속하지 않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모름지기 죄 안 짓는 생활을 힘써야 하는 것이다. 사람이 구원을 받았다고 자처하면서 계속 죄를 짓는다면, 그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릴 수 있겠으며 또 그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부르는 것이 어떻게 합당한 일이 되겠는가?

[11-12절] 우리가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가인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

요한은 아담의 아들 가인의 예를 들면서 우리가 가인같이 형제를 미워하고 죽이는 악을 행치 말고 서로 사랑해야 할 것을 강조한다. 서로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요 하나님께 속한 자라는 것을 증거하는 표가 된다. 의인과 악인은 그 행위로 드러난다. 우리는 의인이 되어야지 결코 악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본문은 앞의 부분에 이어서 우리가 범죄치 말아야 할 이유를 증거한다. 앞의 부분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스런 자녀이며 장차 영광스런 모습을 입을 자들이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의 대속(代贖) 즉 죄 없이함을 받았기 때문에 범죄치 말아야 한다는 말씀을 들었다. 본문에서는 또 하나의 이유가 더해진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로서 났고 하나님의 씨가 우리 속에 있기 때문에 범죄치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범죄치 말아야 한다는 말씀은 다른 말로 의를 행하고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는 뜻이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계속 범죄치 않는다. 그는 혹 넘어질 수 있으나 곧 일어나 회개하고 죄를 버린다. 그는 의를 행하고 형제를 사랑한다. 여기에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의 차이가 있다.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는 분명하게 구별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의 마음과 입술의 신앙고백과 더불어 그의 행위로 증거되는 차이점이다. 본문이 강조하는 바는 한마디로 우리가 범죄치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중생한 자는 계속 죄를 지을 수 없다. 우리가 구원받았고 중생한 자일진대 우리는 범죄치 말아야 하고 의를 행하고 서로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13-18절, 사랑은 생명에 들어온 표임

[13-15절]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우리는 세상이 신자들을 미워할 때 이상히 여기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미움은 세상의 표이며 사망의 표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죄와 사망 가운데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미워하고 하나님의 백성 된 신자들을 미워하고 또 서로를 미워한다. 그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고 당연한 일이다. 미움은 세상과 사망의 표이다. 그러므로 만일 구원받은 우리가 서로 미워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고 세상에 속한 자일 것이며, 우리는 영원한 생명의 구원을 얻은 자가 아니고 아직도 사망에 거하는 자일 것이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의 구원을 받은 자들은 서로 사랑한다. 사랑은 구원과 생명의 표이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기 때문에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안다고 말하였다. 형제 사랑이 영생의 구원을 얻은 표라는 말이다. 그러나 형제 사랑이 없는 자는 아직도 사망에 거하는 자일 것이라고 그는 말하였다. 그 이유는 자명하다. 그것은,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하는 자요 살인하는 자는 영생이 그 속에 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도는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곧 살인이라고 말한다. 물론 살인은 실제로 사람을 죽이는 행위이다. 오늘날 세계의 어떤 곳에서 보듯이, 자살 폭탄 테러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는 행위는 극악한 살인 행위이다. 혁명이나 폭력 시위가 정당화될 수 없듯이, 테러도 정당화될 수 없다. 사회의 개량과 개선은 합법적인 방법을 통해서만 이루어져야 한다. 비폭력적 시위는 정당한 의사 표현 방식이며 사회 개선을 위해 유익하지만, 무질서한 폭력적 방법은 사회의 개량보다는 악화를 가져오기 쉽다. 또 정당한 이유 없이 이웃나라를 침략하는 전쟁도 역시 극악한 살인 행위이며 결코 정당화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나라의 악한 테러와 부당한 침략에 대한 동맹국들의 연합적 응징과 보복은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이다.

전쟁보다 더 큰 현대적 살인 행위는 낙태 혹은 인공유산이다. 그것은 태아 살해의 행위이다. 사람의 생명은 임신과 더불어 시작되는 것이 분명하다. 시작된 생명을 살해할 권한은 그 누구에게도 없다. 임신된 생명은 반드시 출산되어야 한다. 오늘날 한국이나 세계에서 낙태로 죽어가는 어린 생명의 숫자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것은 1, 2차 세계대전으로 죽은 사람들의 숫자보다 많다고 한다. 낙태는 하나님 앞에서 가장 악한 현대적 죄악이다.

물론 이런 행위들이 다 살인에 해당하지만, 이런 것들뿐 아니라 가정이나 교회에서 형제나 교우를 미워한다면, 그것도 똑같이 살인에 해당한다. 또 모든 살인한 자는 영생을 소유한 자가 아닐 것이다. 그는 구원받지 못한 자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형제나 교우를 미워한 죄가 있으면 그것을 회개하고 버리고 그를 사랑해야 한다.

[16절]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사도 요한은 형제 사랑의 본과 목표를 말한다. 형제 사랑의 본은 예수님이시고 형제 사랑의 목표는 목숨을 버리는 것까지이다. 예수께서는 부족한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셨다. 요한복음 15:13에서 예수께서는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주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십자가에 내어주셨다. 그가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것은 그가 친히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확증한다. 그것은 가장 큰 사랑이었다. 우리가 이렇게 큰 사랑을 받았으니 우리도 형제를 사랑하고 그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

[17-18절]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참된 사랑은 선한 행위로 나타나야 한다. 돈이나 재산이 있는 자가 그것을 가지고 가난하고 궁핍한 형제를 돕는 것은 참 사랑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받은 자라면 우리는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참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우리가 주의 교훈대로 형제를 위해 우리의 목숨까지 버리기를 원한다면 물질로 가난한 형제를 구제하는 것은 그렇게 큰 일이 아닐 것이다. 목숨은 물질보다 훨씬 더 귀중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희생적으로 형제를 사랑하기로 결심하였다면, 우리는 그에게 물질로 구제하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 야고보는“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말했다(약 2:15-17).

본문은 계속 형제 사랑에 대해 교훈한다. 사도 요한은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살인하는 것이요 살인하는 자에게는 영생이 거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형제를 미워하지 않고 사랑한다면 우리는 그 행위를 통해 우리 자신이 사망에서 옮겨 생명에 들어간 줄을 알 수 있다. 사랑의 목표는 우리의 목숨까지 버리는 것이요, 그 실천 방법은 가난하고 궁핍한 형제를 재물을 가지고 돕는 것, 즉 구제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구제가 없으면 사랑이 부족하거나 사랑이 없는 것이다.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으로 구원받은 자라면, 우리는 구제를 통하여 형제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우리 자신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을 증거해야 한다.

19-24절, 순종과 담대함

[19절]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

‘이로써’라는 말은 앞에서 말한 대로 사랑을 실천함으로써라는 뜻이다. 사도 요한은 우리가 형제를 사랑할 때 우리가 진리에 속한 자임을 알게 된다고 증거한다. 그는 앞에서도 진리에 대하여 자주 말했다. 진리를 행함에 대하여(1:6), 진리가 우리 속에 있음에 대하여(1:8; 2:4), 진리를 앎에 대하여(2:21) 말하였다. 그가 말하는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 진리를 가리킨다. 그것이 신약성경이 말하는 진리이다. 우리는 서로 사랑할 때 우리가 진리에 속한 자임을 스스로 알게 된다. 형제 사랑은 성도가 진리에 속한 증거이다.

요한은 또 우리가 형제를 사랑할 때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할 것이라고 증거한다. ‘굳세게 하다’는 원어(페이도)는 ‘확신케 하다, 평안케 하다’는 뜻이다(BDAG).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하여 또 우리 자신의 구원에 관하여 확신케 하고 그 진리와 그 구원 안에서 평안함을 누리는 것을 가리킨다고 본다. 사람은 죄를 지을 때 두려움을 가진다. 첫 사람 아담은 범죄한 후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동산 나무에 숨었었다(창 3:10). 악인에게는 평안이 없다(사 48:22; 57:21). 그러나 우리가 진리를 행하면 우리는 두려움 대신에 확신과 평안과 담대함을 가지게 될 것이다.

[20-22절]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거든 하물며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일까 보냐?[보냐 함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확신과 평안과 담대함을 얻는 이유는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으면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확신과 평안과 담대함을 얻을 수 없지만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아갈 담력을 얻었다(히 10:19). 그러나 우리는 범죄하면서 담력을 가질 수는 없고 하나님의 뜻을 순종할 때 더욱 담력을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잠언은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니라”고 말했다(잠 28:1).

요한은 순종의 또 하나의 결과로서 기도의 응답에 대해 증거한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의 응답에 대해 가르쳐 주시면서 결론적으로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고 말씀하셨다(마 7:12). 이것은, 우리가 기도에 대해 하나님의 응답을 원한다면 먼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의 뜻을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교훈하신 것이다. 우리는 범죄하면서 그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라고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23절]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사도 요한은 우리가 따라야 할 하나님의 계명을 두 마디로 요약한다. 첫째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것이요, 둘째는 그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인생에게 선언하신 가장 중요한 내용은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으라는 것이다. 주께서는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말씀하셨다(막 1:14-15). 사도 바울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했다(행 16:31). 또 하나님께서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모든 자들에게 주시는 중요한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요한복음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롬 13:10).

[24절]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우리가 주 예수님을 믿고 그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때 우리가 주 안에 거하고 주께서도 우리 안에 거하신다. 우리가 주 안에 거하고 주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은 주님과의 영적 연합을 가리키는 말이다. 아가서는 신랑과 신부의 연합과 일체를 신랑이 신부에게 속하고 신부가 신랑에게 속한다는 말로 표현하였다. 아가 2:16,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 이것은 하나님과 자기 백성 그리고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와의 영적 연합을 나타낸다.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예수께서는 이 영적 연합을 포도나무의 비유로 강조하셨다.

요한복음 15:1-5,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우리는 중생할 때 주님과 영적으로 한 몸이 된다. 죄는 하나님과 사람을 분리시켰었다. 그러나 죄인이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받을 때 즉 그의 죽었던 영이 다시 살리심을 받을 때 곧 중생할 때, 그는 주님과 영적으로, 신비적으로 연합되는 것이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받게 되고 주 안에 거하게 된다.

주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표는 성령께서 우리 속에 오신 것이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영이신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시며(롬 8:9; 갈 4:6) 그가 우리 안에 계신 것은 주께서 우리 속에 계신 것과 같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린도후서 13:5에서,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라고 말하였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과 연합되었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는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할 때 더욱 확인되고 확증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은 구원은 실제로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함으로써 확인되고 확증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으며, 우리의 행위, 즉 의와 선을 행하고 형제 사랑을 실천하는 행위는 우리가 받은 그 구원을 확증하는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의 계명의 핵심은 분명하다.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는 것과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본 서신에서 중생한 자들이 죄를 짓지 않고 의를 행하며 형제를 사랑해야 함을 강조했다. 우리가 정말 중생했고 구원받은 자라면, 우리는 죄를 짓지 말고 하나님의 계명 순종의 의와 선을 행하고 주께서 주신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켜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주의 계명에 순종해 형제 사랑을 실천할 때 몇 가지 복된 은혜를 누리게 된다. 첫째, 그때 우리는 마음에 담대함과 평안을 얻게 될 것이다. 둘째, 그때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한 바의 응답을 받게 될 것이다. 셋째, 그때 우리는 주 안에 거하는 자임을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예수님 믿고 구원받는 것뿐이 아니고, 우리가 더 이상 범죄치 않고 의를 행하며 형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우리는 순종을 통해 확신과 평안과 담대함과 기도 응답을 얻는다.

4장: 형제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

1-6절, 영들을 시험하라

[1절]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우리는 영들을 다 믿지 말아야 한다. 영은 정신이다. 그것은 사상 곧 신앙 사상, 교리 사상이다. 그것은 그의 말과 교훈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사람들의 사상과 가르침들을 다 믿지 말고 그것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해야 한다. ‘하나님께 속하였나’라는 원어(에이 에크 투 데우 에스틴)는 ‘하나님께로서 나왔는가’라는 뜻이다. 즉 어떤 사상, 어떤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사상과 교훈인지 아닌지를 시험하고 분별해야 한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많은 거짓 목사들과 교사들이 세상에 나왔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무 사상과 아무 교훈이나 따라간다면 우리는 사탄에게 속아넘어가는 자들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의 영들, 정신들, 그들의 사상들과 말들과 교훈들을 시험하고 분별해야 한다.

[2-3절]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하나님께로서 난] 것이요, 예수를[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8)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하나님께로서 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요한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을 분별하는 기준을 말한다. 그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셨다는 사실을 시인하며 고백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이라는 말은 요한복음 1장에 증거된 대로 태초부터 계신 말씀 곧 하나님이신 그가 사람의 본질을 취하여 사람이 되셔서 세상에 오신 일을 말한다(성육신 成肉身)(요 1:1, 14). 그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태초부터 계셨던 하나님이시고 때가 되어 사람의 본질을 취하여 사람이 되어 오신 자이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하나님이신 동시에 사람이신 독특한 인격이시다. 사도 요한은 본 서신 5:20에서 그의 신성(神性)을 증거하기를, 그는 ‘참 하나님’이시라고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을 고백하는 영은 하나님께 속한 영, 즉 원어의 뜻대로 하나님께로서 난 영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고백하지 않는 영은 하나님께 속하지 않는 영, 즉 하나님께로서 나오지 않은 영이며, 그것이 적그리스도의 영이다.

성육신의 교리는 기독교의 핵심 교리 중 하나이며 단지 그 교리뿐 아니라 성경의 근본교리들을 부정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난 영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적그리스도의 영이며 거짓된 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성경의 근본교리들을 주셨기 때문이다.

주께서 적그리스도의 영을 가진 거짓 목사들이 세상에 올 것이라고 예언하신 대로(마 24:5, 11, 24), 그들이 사도 요한의 당시에 벌써 세상에 있었다. 따라서 사도 요한은 그 당시를 이미 말세가 시작된 것으로 이해하고 말세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요일 2:18).

[4절]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

성도들은 하나님께 속하였고 원어의 뜻대로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 즉 그들은 중생(重生)하였다. 또 그들은 저 거짓 선지자들에게 미혹되지 않았고 그들을 배격하고 이겼다. 성도들 안에 계신 이, 즉 성령께서 세상에 있는 이, 즉 사탄보다 크시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다른 예수와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거짓 사도요 거짓의 역군이라고 말했다(고후 11:4, 13-15). 또 그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는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말했다(갈 1:6-8). 오늘날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지 않은 적그리스도의 영 즉 이단들은 여호와의 증인, 몰몬교, 안식교, 통일교, 신천지 교회 등 수많은 사이비 종파들과 천주교회와 자유주의 신학 등이며, 교회연합운동과 신복음주의와 은사운동 등이다.

[5-6절] 저희는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저희 말을 듣느니라.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저 거짓 교사들은 세상에서 나왔고 세상에 속했기 때문에 세상에서 나온 혹은 세상에 속한 말을 하며 세상 사람들이 저희 말을 듣는다. 세상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들 중에 어떤 이들은 교회에 다니기도 하며 종교 의식을 행할 수도 있으며 또 심지어 세례를 받았을 수도 있고 교회의 직분을 가졌을 수도 있을 것이다. 예수님 당시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그러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지 않았고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바른 교훈, 정통 교리, 역사적 기독교를 듣지 않고 좋아하지 않는다.

주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심지 않으신 자들은 그의 진리의 말씀에 걸려 넘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15:13-1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심은 것마다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 가운데 버려두신 자들이다.

그러나 ‘우리’ 곧 주의 사도들, 하나님의 참된 종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 즉 중생한 자들이며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자들은 우리의 말 곧 바른 말, 정통 교리, 역사적 기독교 교리를 듣는다. 이로써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은 구별된다. 진리의 영은 주께서 사도들을 통해 주신 복음 진리의 말, 곧 전통적 정통 교리를 듣고 믿고 인정하고 고백하지만, 미혹의 영은 우리의 바른 말과 정통 교리를 듣지 않고 인정치 않는 것이다.

1절부터 6절까지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사람의 영들 곧 정신들을 다 믿지 말고 그 영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는지 시험하고 분별해야 한다. 우리는 사람들의 정신들, 사상들, 말들과 교훈들을 다 믿지 말고 그것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왔고 하나님께 속한 바른 것인지 시험하고 분별해야 한다.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고, 우리가 사람들의 아무 정신들, 아무 사상들, 아무 교훈들을 따라가는 것은 사탄의 시험에 빠지는 지름길이다.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둘째로, 우리가 영들을 분별하는 기준은 하나님의 주신 복음 진리이다. 그것은 넓게는 성경이며 그 핵심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진리가 있다. 우리는 어떤 지엽적 문제에서는 이해와 지식의 부족으로 잘못 알 수도 있을 것이지만, 적어도 성경의 근본 진리들과 근본교리들에 있어서는 바른 이해와 지식을 가져야 한다. 진리의 영은 중생한 자들, 곧 참 교회의 회원들, 양들, 알곡들의 영이며 그들은 바른 말, 곧 정통 교리와 역사적 기독교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미혹의 영은 중생치 못한 자들, 적그리스도들, 거짓 선지자들, 거짓된 목사와 교사들, 형식적인 교인들, 가라지들, 쭉정이들, 위선자들, 염소들의 영이며 그들은 바른 말, 곧 정통 교리와 역사적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셋째로, 우리는 중생한 성도로서 진실히 모든 죄를 인정하고 미워하고 버리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만 믿고 하나님의 바른 말씀, 정통 교리, 성경의 근본교리들과 역사적 기독교를 다 믿고 그 진리들을 보수하며 성경에 밝히 증거된 하나님의 교훈대로 경건하고 거룩하게, 온유하고 겸손하게, 의롭고 선하게 순종하며 살아가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7-11절, 서로 사랑함이 마땅함

[7-8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이는]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하나님께로서 나온 것임이라.]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사도 요한은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함을 계속 강조한다. 왜냐하면 이런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 즉 하나님께로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사랑은 육신적 사랑이 아니고 거룩한 사랑을 가리킨다. 거룩한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이며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정당성이 없는 미움과 싸움은 마귀에게 속한 죄악된 성질이며 행위이다. 그러므로 요한은 이런 거룩한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지만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즉 중생(重生)한 표가 되며 하나님을 아는 표가 되는 것이다.

[9절]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일에서 밝히 나타났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께 독생자 곧 외아들이 계시다는 사실과, 하나님께서 그를 이 세상에 보내셨다는 사실과, 그가 그를 이 세상에 보내신 목적에 대해 증거한다.

하나님께는 독생자가 계시다. 요한복음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독생하신 아들, 獨生子]9)이 나타내셨느니라.”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독생자’는 외아들을 가리킨다. 유일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한 아들을 스스로 낳으셨다. 그 외아들은 참된 신성(神性)을 가진 자이시다. 요한복음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한일서 5:20,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의 아들의 관계는 시간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 그것은 영원적 관계이다. 그는 사람으로 태어나시기 전에도 독생자이셨다고 본다. 그는 하나님께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다(요 17:5). 하나님께는 영원하신 외아들이 계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셨다. 세상에 보내셨다는 말씀은 두 가지 뜻이 있어 보인다. 하나는 사람의 본질을 취하여 사람으로 보내셨다는 의미 즉 성육신(成肉身)의 의미이며, 다른 하나는 십자가에 죽게 내어주셨다는 의미이다. 성육신은 신비 중의 신비요, 기적 중의 기적이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사람이 될 수 있으셨는가! 어떻게 신적 본질을 가지신 그가 인간의 본질을 취할 수 있으셨는가! 교회의 정통 신조들의 표현대로, 그의 신성(神性)과 그의 인성(人性)은 혼합됨이나 분리됨이 없이 한 인격 안에서 신비롭게 결합되셨다. 그는 이제 참 하나님이신 동시에 참 사람이시며 영원히 그러하시다. 뿐만 아니라,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그는 십자가에 죽으셨다. 그는 죽기 위해 오셨다. 그는 하나님의 택하신 영혼들을 위해 대속 제물이 되기 위해 오셨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기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시기 위해 이 세상에 보내셨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신 목적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함이었다. 우리가 언제 죽었었는가? 아담의 자손인 온 인류는 그 영혼들이 허물과 죄로 죽었었다(엡 2:1). 죄의 값은 죽음이다. 여기에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이 필요하였다. 그러므로 우리의 죽었던 영혼이 살아나기 위해 메시아의 대속(代贖)의 죽음이 필요하였다. 그는 이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기 위해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에 죽으셨다. 하나님께서 하나뿐인 외아들을 사람으로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신 것은 전적으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의 죽은 영혼들을 살려주시기 위함이었다.

[10절]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본절은 앞절의 뜻을 더욱 분명하게 한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신 사실에서 우리는 참 사랑을 발견한다. 죄인을 이처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 같은 사랑이 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셔서 우리 죄를 위해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주셨다. ‘화목제’라는 원어(힐라스몬)는 ‘유화제물’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우리의 죄들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를 가라앉히게 하는 제물이라는 뜻이다. ‘유화제물’이라는 원어(힐라스모스 혹은 힐라스테리온)는 성경적 용어이며 성경적 개념이다. 로마서 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힐라스테리온)[유화제물, (KJV, NASB)로 세우셨으니.” 요한일서 2:2,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힐라스모스)[유화제물, propitia- tion](KJV, NASB)이니.” 노아 홍수 심판 등에서 성경이 증거하는 대로, 죄는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키며 그의 심판을 가져온다. 죄인들은 속죄의 피가 아니고서는 결코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다. 또 9, 10절에서 세 번 반복된 ‘우리’라는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이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에게 제한됨을 보인다.

[11절]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하나님께서 우리 같은 죄인을 이같이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 우리는 다 하나님과 원수인 죄인이었다. 로마서 5:8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말하였다. 우리의 많은 죄들과 우리의 뿌리깊은 죄악성은 지옥 형벌을 받기에 합당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셨고 1만 달란트 빚진 것 같은 우리의 큰 죄를 용서하셨고 우리를 구원하셨다(마 18:23-35).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께서 주신 큰 구원을 받았으므로, 우리도 우리의 형제들과 이웃들의 부족과 실수를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며 사랑해야 할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거룩한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이다. 정당하지 않은 미움과 싸움은 마귀에게 속한 성질이며 행위이다. 우리가 거룩한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할 때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요 하나님을 아는 자임을 나타낸다. 형제를 참으로 사랑하는 것은 그가 중생하였다는 표시이며 하나님을 안다는 표시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체험한 자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하나밖에 없으신 독생자를 우리를 위해 세상에 보내셨다. 독생자께서는 죄로 죽었던 우리의 영혼을 다시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씻어주시려고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에 속죄제물이 되셨다. 우리의 죽었던 영혼은 독생자의 속죄사역으로 다시 살았다.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체험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큰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을 아는 자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으로 서로 사랑해야 한다.

12-16절,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심

[12-13절]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영이시기 때문에(요 4:24)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딤전 6:16). 하나님께서는 물질적 형체를 갖지 않으신 영이시므로 사람의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으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며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질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은 놀라운 특권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떠나시는 것은 큰 불행이며,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은 큰 행복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가 그 안에 거하는 것은 우리로 그의 선한 품성과 그의 능력과 평안을 누리게 하며 기도의 응답을 얻게 한다. 우리는 서로 사랑할 때 이런 복된 하나님과의 연합을 체험하게 된다.

또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진다는 말씀은 그 사랑이 법적으로 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도 우리 속에 이루어진다는 뜻이라고 본다. 즉 하나님의 사랑이 단지 칭의(稱義)로 이루어지는 것뿐 아니고 또한 성화(聖化)로도 이루어진다는 뜻이라고 본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죄에서 구원받게 하기 위해 독생자를 보내어주신 사랑이기 때문에, 우리가 실제로 죄에서 떠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의 구원이 우리에게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이 된다. 칭의가 구원이지만, 그것이 성화의 과정에서 더 구원답게 된다. 왜냐하면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이기 때문이다.

또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성령으로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사도 요한은 3:24에서도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고 말하였다. 우리는 성령의 감동과 감화, 성령의 위로와 격려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계심을 느끼며 체험하게 되고 또 그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행하며 의와 선을 행한다.

[14-16절]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거하노니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그]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기독교 복음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그의 외아들을 세상에 구주로 보내셨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기독교 복음의 확실성은 그의 사도들이 그 독생자를 직접 보았고 증거하였다는 사실에 있다(눅 24:46-48; 요 21:24; 행 5:32). 이제 누구든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구주로 시인하고 고백하면 하나님께서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할 것이다. 이것이 구원이다. 죄인이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성경의 가장 기본적 진리이다.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로마서 10:9-10,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신자의 참된 신앙고백은 구원받은 증거이다. 그는 하나님과 정신적으로 일체가 된다. 즉 하나님께서 그 안에 거하시고 그가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이다.

우리가 복음에 증거된 대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구주로 믿은 것은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안 것이요 믿은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이시다. 로마서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사도는 위의 사실에 근거하여 다시 반복하기를 “그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신다”고 말한다. ‘그 사랑 안에 거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 사랑하는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하고 실천하는 자가 그 사랑 안에 거하는 자이다. 참된 신앙은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하고 실천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서로 사랑함의 실천은 참 신앙의 증거일 뿐만 아니라, 구원의 증거 즉 하나님과의 연합의 증거가 되는 것이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성도 안에 거하시고 성도가 하나님 안에 거하는 영적 연합의 두 가지 증거에 대해 말한다. 첫 번째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고백하는 것이요, 두 번째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바른 신앙고백이 있고 서로 사랑함이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고 또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함을 알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과 영적으로 연합되었다는 사실은 그의 성령을 통해, 즉 성령의 감동과 감화, 성령의 위로와 격려를 통해 느끼며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우리에게 실제적인 두 가지 질문을 던진다. 첫째로, 우리는 예수님을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하였는가? 참된 신앙고백은 구원받은 표시이다. 둘째로, 우리는 진심으로 서로 사랑하고 있으며 또 계속 그러하고자 하는가?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나의 구주와 주님으로 믿어야 하고 또 그의 명령대로 거룩한 사랑으로 서로 사랑해야 한다. 미움은 구원받지 못한 표이며 사랑은 구원받은 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사랑하기를 힘쓰자.

17-21절,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17절] 이로써 [그]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이로써’라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함으로, 즉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믿고 그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서로 사랑함으로라는 뜻이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지게 된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졌다는 말은 법적인 구원인 칭의(稱義)뿐 아니라 새 생활로 나타나는 성화(聖化)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이 우리 가운데서 온전히 이루어졌다는 뜻이라고 본다. 이 세상에서는 성화까지가 하나님의 뜻이다. 영화(榮化)는 미래에 이루어질 일이다.

이렇게 형제 사랑을 실천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히 이루어질 때 우리는 담대함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요일 3:21).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며(롬 13:8) 사랑 안에 담대함이 있다. 이것은 또한 심판날에 가질 담대함이다. 우리는 서로 사랑할 때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된다. 왜 이런 담대함을 가지게 되는가? 그 이유는,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기 때문이다. 즉 주께서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셨듯이 우리도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며, 주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우리도 죽기까지 형제를 사랑하면, 주께서 죽으신 지 삼일 만에 부활하셨듯이 우리도 영광 가운데 부활할 것이기 때문이다. 주를 믿고 그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는 자는 이 소망의 담대함을 가질 것이다.

[18절]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다. 어린 아기는 엄마의 사랑을 느끼기 때문에 그 품 안에서 편안할 수 있다. 그러나 아기가 다른 이에게 가면 울 것이다.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쫓는다. 왜냐하면 두려움에는 고통이 있기 때문이다. ‘형벌’이라는 원어(콜라시스)는 ‘고통’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는데 그 뜻이 본문에 더 적절해 보인다(KJV). 두려워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받은 자는 그 사랑 안에 거하고 그 사랑을 소유하고 그 사랑을 실천하는 자이며, 그때 그는 두려움과 고통이 없고 평안과 기쁨이 넘칠 것이다.

[19절] 우리가 [그를]10)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경건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은 성경에 계시된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의무이다. 신명기 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우리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이유는 실상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요일 4:10). 하나님께서 자기 독생자를 희생하시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참으로 깨달은 자마다 하나님을 가장 사랑할 것이다.

[20절]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 사랑으로 구원받은 자에게 기본적인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우리의 형제들을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는 일이 자주 있다. 사도 요한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그 형제 곧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자를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라고 말한다. 왜 그런가? 그것은 보는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21절]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본절의 ‘이 계명’은 후반부의 말씀,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는 말씀을 가리킨다고 보인다. 이 계명은 요한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말씀에 나타나 있다. 요한복음 14:21에 보면, 주께서는,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가 될 것이다.

본문은 두 가지 진리를 강조한다. 첫째로, 본문은 우리가 주의 계명대로 형제를 사랑할 때 담대함을 얻고 모든 두려움을 버리게 될 것이라고 강조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여 형제 사랑을 실천할 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진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할 때 우리는 칭의(稱義)의 구원뿐 아니라, 성화의 과정에 있음을 여실히 증거하는 것이다. 그때 우리는 마음에 거리낌이 없어지고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게 되고 또 모든 두려움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 순종은 큰 평안과 믿음의 담력을 가져올 것이다.

둘째로, 본문은 특히 우리가 형제 사랑을 실천할 때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증거될 것이라고 강조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의 계명을 순종하는 것을 포함하며 그의 계명의 내용은 형제를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을 포함한다. 우리의 하나님 사랑은 우리의 순종으로 증거되어야 한다.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이며 그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을 할지라도 그의 말은 거짓말에 불과할 것이다.

5장: 형제 사랑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표시

1-5절, 하나님을 사랑하는 표시

[1절]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다는 증거이다. 요한복음 1:12-13,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성경에 증거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 즉 신적 구주이시다(사 9:6; 미 5:2; 요 20:30-31). 또 우리를 중생케 하신 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들 곧 중생한 성도들을 사랑한다. 우리는 다 하나님의 백성, 천국 백성된 한 식구이며 한 형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상에서 육신의 형제들을 사랑하며 형제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요 그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되듯이, 영적 형제들 간에도 그래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와 천국의 자녀된 형제들은 육신의 가족보다 더 귀하다. 육신의 부모님이 낳으신 형제들도 귀하나 그들은 백년 동안 형제이지만, 하나님 아버지께서 낳으신 형제들, 즉 구원받은 성도들은 영원한 형제들이다.

[2-3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이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것임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게 된다는 것을 안다. 형제 사랑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 가능하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게 되는 것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계명들은 결코 무겁지 않다. 우리가 중생치 않았을 때 즉 죄의 종이었을 때에는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기가 심히 무거웠으나, 우리가 중생한 후에는 하나님의 씨가 우리 속에 심겨졌고 하나님의 영께서 우리 속에 계셔서 역사하시므로 우리는 비록 연약함이 있어 때때로 넘어질지라도 하나님의 법을 즐거이 지키며 또 지킬 수 있다. 로마서 8:4, 14,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그러므로 주 예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고 말씀하셨다(마 11:29-30).

[4-5절] 대저[이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이김이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하나님의 계명이 무거운 짐이 아닌 것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기 때문이다. 세상을 이긴다는 말은 죄와 사망과 마귀의 세력을 이긴다는 뜻이다. 즉 죄 짓지 않는다는 말이다. 요한은 3:9에서도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계속]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고 말하였다. 우리 속에는 성령께서 계시고 또한 그의 생명 원리가 심겨져 있기 때문에 우리는 죄와 세상을 이길 수 있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사역은 우리를 죄와 사망과 사탄의 권세로부터 건져내어주셨다. 바울도 로마서 6:14, 18, 22에서,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고 말했다.

요한은 덧붙여서 말하기를, 성도가 세상을 이기는 방법은 다른 것이 아니고 바로 믿음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믿음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고 영생을 얻었고 부활을 소망하고 확신하게 되었다. 이로써 마귀와 그 세력들은 성도들 앞에 완전히, 영원히 패배하고 말았다. 이 귀한 사실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복음 진리와 그 은혜 안에 다 들어 있다. 죄는 죽음과 불행을 가져왔으나 의는 생명과 영원한 복과 영광을 가져왔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로마서 5:1-2에서 말하기를,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고 하였다. 믿음의 결과는 기쁨과 확신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우리가 거듭나는 은혜를 얻었고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죄와 영원한 지옥 형벌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중생케 하신 다른 형제를 사랑할 수 있고 사랑해야 한다.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의 당연한 의무이다. 우리가 육신의 형제도 사랑한다면, 하나님께서 낳으신 영적 형제들을 더욱 사랑해야 하지 않겠는가?

또 이것은 결코 무거운 짐이 아니다. 이것은 믿음으로 능히 감당할 수 있는 일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세상과 세상의 죄와 사망과 마귀의 권세를 이길 수 있는 자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완전한 의와 거룩을 얻은 자이고 또 그 의와 거룩 안에서 장차 영생과 영광을 누릴 자이다. 주 안에서 형제된 자들을 사랑하는 것은 결코 무거운 짐이 아니다.

6-10절, 물과 피와 성령의 증거

[6절]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물과 피로 임하셨다는 뜻이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님의 인성(人性)을 가리킨 것 같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히셔서 물과 피를 흘리셨다. 요한복음 19:34,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초대교회에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정하는 이단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 사람이셨다. 태초부터 계셨던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때가 되어 인간의 본질을 취하여 사람이 되셨다(요 1:14).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의 말대로, 그 이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계속 그리고 영원히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시다.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다’는 표현은 물과 피라는 말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또한 상징적 의미도 가짐을 나타내는 것 같다. 그러면 물은 죄씻음을, 피는 속죄의 죽음을 가리킬 것이다. 이 둘은 기독교 복음의 핵심적 내용이다. 그것은 세례와 성찬의 의식으로 표현되는 것들이다. 예수께서 사람이 되신 까닭은 속죄제물이 되시기 위함이었다. 그는 우리의 죄씻음을 위해 속죄제물로 죽기 위해 사람으로 오셨다. 그의 대속의 죽음은 우리의 죄씻음의 근거가 되었다. 요한복음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마태복음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태복음 26:28,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7절]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성령께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신다. 즉 성령께서도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며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구주이심을 증거하신다. 성령께서는 참되시며 그가 증거하시는 내용도 참되다. 예수께서는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고(요 15:26) 또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고 하셨다(요 16:13-14). 오늘날도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밝히 증거하시며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얻게 하신다.

[8절]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11)

성령과 물과 피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다. 또한 그 셋의 증거는 하나이다. 그 셋은 공통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주 되심을 증거한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 같은 죄인들의 모든 죄를 대속하셨다는 것이 성경의 증거의 요지이다. 디모데전서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9절]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를 받을진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것이니라.

우리는 사람들의 증거를 받아들이며 세상을 살고 있다. 매일 신문의 뉴스들이 그러하며 법정의 판결도 많은 부분 사람의 진실한 증언들에 의존한다.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의 세상 생활은 지극히 불안정할 것이고 의심으로 가득 찰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와 같이 사람들의 증거를 신뢰한다면,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증거하신다면 그것은 더 확실하고 믿을 만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친 음성으로 자기 아들에 관해 두 번 증거하셨다. 마태복음 3:17,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17: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성경의 모든 말씀은 실상 하나님의 증거의 말씀들이다. 또한 성령의 증거는 하나님의 증거이다. 고린도전서 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저주받은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성경의 모든 말씀들 속에서 자기 아들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에 대해 그리고 그의 속죄사역에 대해 증거하셨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도 또 물과 피도 다 하나님의 아들에 관해 증거한다.

[10절]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그 증거가 있다. ‘증거가 있다’는 원어(에케이 텐 마르튀리안)는 ‘그 증거가 있다’는 말이다. ‘그 증거’는 하나님의 증거를 가리킨다고 본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증거하시는 하나님의 증거를 받아들이며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을 믿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증거대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자들이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관해 증거하신 증거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진리의 하나님이시며 거짓말하지 않으시는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증거를 믿지 않았으므로 그것은 큰 잘못이다.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물과 피로 오셨고 성령께서 그것을 증거하심을 말하였다. 성령과 물과 피는 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다. 그들은 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 그리고 속죄사역을 증거한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그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직접 증거하셨다. 그는 예수님에 대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친히 하늘에서 음성으로 증거하셨고(마 3:17) 또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고 증거하셨다(마 17:5).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이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 곧 그의 신성과 인성을 증거하셨고 또 그의 죽음 곧 그의 속죄사역에 관해 증거하셨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하나님의 증거와 성경의 증거를 믿고 확신하자.

11-13절, 영생을 주심

[11-13절]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께서 증거하신 내용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다는 것과 또 다른 하나는 그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다는 사실을 증거하셨다. 인간은 본래 영생할 가능성이 있는 존재로 창조되었었다. 첫 사람 아담이 하나님의 시험하시는 첫 명령을 어느 기간 동안 잘 지켰더라면 그는 영생을 얻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명령을 어겼고 하나님의 경고하신 대로 죽었다.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된 것이다(시 49:12). 그러나 인간 속에는 여전히 죽지 않고 영원히 살고 싶은 강렬한 소원이 있다. 죽지 않고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 같다. 전도서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고 말한다(3:11).

영생은, 생명의 원천이신 창조주 외에는 아무도 인간에게 줄 수 없다. 그런데 그가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를 약속하셨다. 요한일서 2:25,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사도 바울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음을 증거했다. 디도서 1:2,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영생은 성경에 계시되고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모든 진리들의 중심이다. 영생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삶이다. 그것은 강하고 영광스러운 생명이다(고전 15:42-44). 영생은 이 세상의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고 바꿀 수 없는 귀한 선물이다. 그러므로 주 예수께서는 ‘썩어질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셨다(요 6:27).

또 하나님께서는 그의 약속하신 영생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을 증거하셨다. 사도 요한은 본 서신 1:1-2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심을 증거했고 또 5:20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생’이라고 불렀다.

영생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요한이 쓴 요한복음에서도 밝히 드러나 있다. 요한복음 6:3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 6:47-48,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요한복음 11:25-2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한복음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본래 영원한 생명이시지만 사람이 되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대속(代贖) 제물이 되심으로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다. 죄의 값은 죽음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의 결과는 영생이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로마서에서 잘 증거했다. 로마서 5: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5: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을 믿은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을 믿지 않은 자에게는 생명이 없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썼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매우 중요하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는 영생을 얻지 못한다. 믿음은 영생을 얻는 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영생이 된다는 것은 특히 요한복음에 밝히 증거되어 있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3: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한복음 6: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본문의 교훈은 확실하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생을 약속하셨고 그 영생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 우리는 영생의 가치를 깨닫고 어리석게 그것을 세상의 것들과 바꾸지 말자. 영생과 바꿀 만한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일진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영생이 있음을 알고 감사하며,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만 의지하고 확신하고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말씀에 절대 복종하고 또 모든 사람에게 이 영생의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복음을 널리 전하자.

14-17절, 기도의 응답

[14절]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성도가 하나님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으실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성경에 나타나 있다. 그것은 성경의 어느 한 부분에만 아니라 성경 전체에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 전체를 읽고 연구하고 배움으로써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알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성경말씀을 듣기를 거부하는 자의 기도는 응답되지 않을 것이나, 그 말씀을 듣기 좋아하는 자의 기도는 응답을 받을 것이다. 잠언 28:9는,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고 말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은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살라는 것이다. 우리가 범죄하면 우리는 기도 응답을 기대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버리면 기도 응답을 받을 것이다. 이사야 1:15-16,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라.” 이사야 59:1-2,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회개하며 하나님의 계명들에 순종하면서 기도해야 하며, 그때 기도의 응답을 얻게 되는 것이다.

[15절]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대로 살면서 그의 뜻에 맞게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그의 뜻대로 구한 기도를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것이라는 우리의 믿음도 중요하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실 것이라는 약속을 믿는다면, 우리는 또 우리의 간구의 응답을 믿고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기도의 효력을 믿는다면,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구한 것을 그가 들으실 것이라는 사실을 또한 믿어야 한다. 마가복음 11: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받는 줄로](전통본문)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16-17절]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

죄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이며, 다른 하나는 ‘사망에 이르는 죄’이다. 사도 요한은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라고 말한다. 죄의 값은 죽음인데(롬 6:23)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가 있다는 말씀은 무엇인가? 그것은 구원받은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공로로 영생을 얻은 후에 실수로나 연약성 때문에 범하는 죄를 가리킬 것이다. 사도는 앞에서 중생한 자가 범죄치 않는다고 말했으면서 여기에서는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를 범한다고 말하는 것은, 중생한 자가 계속 죄 가운데서 생활할 수 없다는 뜻이며 중생한 자가 전혀 죄를 짓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중생한 자도 죄를 지을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진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라면 그는 그 죄에 머물러 있을 수 없고 즉시 돌이켜 하나님께로 나아올 것이다. 그는 그 실수 때문에 구원과 영생을 잃어버리고 영원한 멸망에 떨어질 수 없다. 그러므로 성도는 형제가 그런 죄를 범하는 것을 보면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하며 그러면 그는 회개하고 영생을 잃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다. 그것은 구원받은 성도가 범해서는 안 되는 죄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언급하신 ‘성령을 훼방하는 죄’와 같은 죄이다. 그런 죄는 사함을 받을 수 없다. 그것은 성령의 일을 고의적으로 방해하고 대적하며 양심의 감동을 극도로 억압하는 죄로 생각된다. 교회 안에 이런 죄를 짓는 자가 있어서는 안 되겠지만, 종종 이단자들 속에서 이런 유의 죄를 볼 수 있다. 이단은 실수나 무지나 연약의 죄가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 이론적으로 다 아는 자들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부정하는 것은 무지해서가 아니고 순전히 고의적이다. 그들은 고의적으로 그리고 자기 나름대로의 확신을 가지고 진리를 대항하고 부정하고 왜곡하는 것이다. 그들은 인류 역사 초기에 에덴 동산에서의 뱀처럼 확신 있게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하고 대적하는 것이다. 이런 이단과 배교의 죄는 너무 크고 두려운 것이어서 실상 그런 자들을 형제로 여길 수도 없을 것이다. 이들은 구원의 가망이 없어 보인다. 사도 요한은 이제 그런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성경을 열심히 읽고 듣고 연구하고 배움으로써 하나님의 뜻과 교훈을 바로 알고 이해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대로 살면서 그의 뜻대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반드시 응답하실 것이라는 것도 믿어야 한다. 성도는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심을 믿는 것도 중요하다.

셋째로, 우리는 누가 범죄하는 일을 보거든 그가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의 진리를 고의적으로 대항하는 이단자와 배교자를 위해 우리는 기도할 자신이 없지만, 주를 진실히 믿는 형제에 대해서는, 비록 그에게 실수와 연약이 있을지라도 그를 끝까지 사랑하고 그의 회개와 구원과 성화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18-21절, 바른 지식과 삶

[18절]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계속]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자신을 지키며]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우리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계속 범죄치 않는다는 것, 즉 죄 가운데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이 진리는 본 서신 3:6, 9-10에서 이미 말씀한 바이다: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계속]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계속]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계속]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계속]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중생한 성도는 계속 범죄할 수 없다. 중생한 자는 그 영혼 속에 범죄할 수 없는 새 생명의 원리가 심어져 있고 영혼의 지배적 성향이 새로워졌기 때문에 죄 가운데 머물러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중생한 자 속에 심긴 새 생명은 하나님만 향하고 의(義)만 향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역에 근거하여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생명이다.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라는 원문은 전통사본에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자신을 지키며”라고 되어 있다(KJV).12) 중생한 자는 계속 범죄치 않는다고 자신을 방임해서는 안 되고 항상 자신을 지키며 범죄치 않기 위해 힘써야 한다. 사람의 마음 속에는 악한 것들이 많다. 중생한 자에게도 죄악성이 남아 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5:19-21에서 여러 죄악들을 열거하며 그것들을 버려야 할 것을 교훈했고, 고린도후서 7:1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고 말했다. 우리는 이런 죄악들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한다. 그러나 악한 자는 중생한 자를 만지지도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지키시기 때문이다.

[19절]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하나님께로서 났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로서 나서 하나님께 속하여 있다는 것을 안다. 중생(重生) 즉 거듭남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다. 거듭남은 하나님께서 홀로 행하시는 구원 사역이다. 거기에서 사람은 하나님을 돕거나 협력하는 것이 아니다. 중생한 자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하나님께 속한다. 그러나 우리는 온 세상이 악한 자 안에 처해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거듭남은 우리의 영혼이 죄와 허물로 죽었던 어두운 세계에서 생명을 얻어 다시 살아나는 사건이다. 온 세상은 이 두 세계, 즉 하나님의 세계와 죄악된 세계로 나누어진다.

[20절]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또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로 말미암아 참된 자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또 그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안다. 이것은 구원의 길을 나타낸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얻는다. 하나님의 아들을 알고 믿는 것이 중생의 증거요 그를 믿고 그 안에 거하는 것이 구원이다. 사도 요한은 또 예수 그리스도를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고 증거한다.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에 대한 명확한 또 하나의 증거가 있다. 그는 신적인 존재로 높임을 받는 정도가 아니시고, 참 하나님이시라고 증거되었다. 또 그는 우리에게 영생이 되시고 친히 영생을 주시는 구주이시다.

[21절]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하라. [아멘.]13)

성도가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하는 것은 신앙생활의 근본적 요소이다. 우상이란 하나님이 아니면서 하나님처럼 높임을 받는 것이다. 우상숭배는 가장 근본적이고 가장 큰 죄악이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삶에서 모든 우상을 제거해야 한다. 현대인은 돈이나 육신의 쾌락, 인간의 지식과 과학, 아니 인간 자체를 하나님처럼, 혹은 하나님 대신에 높이고 가치 있게 여긴다. 그렇다면 이것들, 돈이나 육신의 쾌락이나 지식과 과학과 인간 자신은 다 우상이다. 우리는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만 경외하고 섬기며 순종해야 하며 모든 우상, 즉 하나님이 아닌 모든 것을 멀리해야 한다. 중생한 성도들은 우상들을 멀리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 만일 우리가 그런 것들을 멀리하지 않고 사랑한다면, 우리는 범죄하는 것이고 그런 자는 멸망할 수밖에 없고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본문은 중생에 대해 밝히 증거하고 있다. 중생 곧 거듭남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부터 나는 일이며 이렇게 중생한 자는 계속 범죄하거나 죄 가운데 머물러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본문은 우리가 중생한 자로서 자신을 죄로부터 또 우상으로부터 지켜야 한다고 교훈한다. 우리는 성령을 따라 행함으로 육신의 죄악된 일들을 다 버려야 한다. 갈라디아서 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또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면서 하나님처럼 혹은 하나님 대신에 높임을 받는 모든 것, 즉 우상들을 다 배척해야 한다. 우리는 오직 성삼위일체 되신 하나님만 경외하고 믿고 의지하며 따르고 신구약성경에 밝히 계시된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계명들만 순종해야 한다. 그것이 인생의 바른 길이요 복된 길이며 영생의 길이다.

 

미주

1) 이단 반박, 3. 11. 1.

2) Byz A C vgcl copbo arm 등이 그러함.

3) Byz A vgcl ww copbo 등에 있음.

4) Byz 등이 그러함.

5) Byz에 있음. 그러나 א A B C latt syr cop Clementlat 등에는 없음.

6) Byz vgms copbo-ms 등은 생략함. 그러나 א A B C lat syr cop Origen, Cyprian 등에는 있음.

7) Byz vgms 등은 생략함.

8) Byz (א vgms syrp arm) eth Origenlat 1/3 (Cyprian) 등에 있음.

9) Byz A ita b e ff2 vg syrc arm Irenaeuslat 1/3 등이 그러함.

10) Byz 등; ‘하나님을’--א 048 vgcl syrp copbo arm 등.

11) 옛날 영어성경(KJV)에는 “하늘에서 증거하는 이가 셋이 있으시니 곧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이시요 이 셋은 하나이니라. 그리고 땅에서”라는 말이 본장 7절 끝과 8절 처음에 있다. 이 본문은 서방교회(로마 천주교회)의 전통적 성경이었던 라틴어 벌게이트역(Vg)과 헬라어 전수사본(TR)에 있다. 만일 이 구절이 사도 요한의 글이라면, 그것은 삼위일체에 대한 놀라운 증거의 말씀일 것이다. 8절에 “또한 이 셋이”라는 표현은 앞에 생략된 부분이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남기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본문의 고대적 사본-역본의 증거는 매우 약하다. 헬라어 사본들에는 14세기 소문자 사본 하나(629번)와 16세기의 소문자 사본 둘(61, 918번), 그리고 18세기 소문자 사본 하나(2318번)에만 있다. 기타 증거들은 7세기의 itl q vgcl armmss lAD (3세기의 Cyprian) 등이 있다. 전통적 헬라어 다수사본들(Byz), 고대사본들(א B A 048vid), 고대역본들(vgww st syrp copsa bo armmss eth geo), 및 Clementlat (Origenlat) Lect 등은 이 구절을 생략하고 있다.

12) Byz א syrp arm Origen 등이 그러함.

13) Byz vgcl에 있음. א A B vgww st syrp copsa bo arm geo는 생략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