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페이지

조직신학    

 김효성 목사

2018년 1월 1일  수정

조직신학(음성)

조직신학(영상)

자료내려받기

책 안내

내용 목차

제1부: 서론

1. 신학의 개념, 성격, 필요성

2. 신학의 방법, 분야들, 역사

3. 하나님의 계시

4. 성경의 정경(正經)

5. 성경의 본문(Text)

6. 성경의 속성

7. 성경의 영감(靈感)과 무오(無誤)

 

제2부: 신론

1. 하나님이 계신 증거들

2. 하나님의 속성들

3. 삼위일체(三位一體)

4. 예정(豫定)

5. 창조

6. 섭리

7. 후대 기적의 문제

 

제3부: 인간론

1. 사람의 기원

2. 사람의 본질

3. 죄의 본질

4. 죄의 구별

5. 하나님의 법

6. 죄의 형벌

7. 하나님의 언약

 

제4부: 기독론

1.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

2.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

3. 예수 그리스도의 일인격성(一人格性)

4.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지심

5. 예수 그리스도의 높아지심

6. 예수 그리스도의 세 가지 직분

7.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

 

제5부: 구원론

1. 하나님의 은혜

2. 부르심, 신비적 연합

3. 중생(重生)

4. 회개와 믿음

5. 칭의(稱義)와 양자(養子)

6. 성화(聖化)

7. 성도의 견인(堅忍)과 영화(榮化)

 

제6부: 교회론

1. 교회의 본질

2. 교회의 속성

3. 참 교회의 표

4. 교회의 권세와 임무

5. 교회의 운영과 조직

6. 은혜의 수단

7. 성례

 

제7부: 종말론

1. 육체적 죽음과 영혼불멸

2. 사람의 죽은 후 상태

3.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4. 죽은 자들의 부활과 휴거

5. 천년왕국(千年王國)

6. 마지막 심판

7. 천국과 지옥

 

복음의 요점

복습문제들

 

 

주요주제 직접가기

 1. '신학'이란 무엇인가?

 2. 신학의 몇 가지 성격

 3. 신학의 필요성은 무엇인가?

 4.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가능한가?

 5. 신학의 방법의 세 가지 원리들

 6. 신학의 잘못된 방법들

 7. 신학의 몇 가지 분야들

 8. 신학과 다른 학문들과의 관계

 9. 신학의 역사

10. 종교와 신학

11. 잘못된 계시 개념

12. 일반계시란 무엇인가?

13. 특별계시란 무엇인가?

14. 구약성경이 39권인 이유는 무엇인가?

15. 신약성경이 27권인 이유는 무엇인가?

16. 신약성경의 두 종류의 본문

17. 신약성경의 전통본문의 타당성

18. 킹제임스(KJV) 영어성경이 무오(無誤)한가?

19. 성경은 왜 필요했는가?

20. 성경의 중심내용은 명료한가?

21. 성경의 바른 번역은 필요하다

22. 성경 해석의 기본적 원리들

23. 성경은 충족한 책인가?

24.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가?

25.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된 책인가?

26. 성경에는 오류가 없는가?

27. 하나님은 존재하시는가?

28.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29. 삼위일체(三位一體)란 무엇인가?

30.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일들을 예정하셨는가?

31.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구원을 예정하셨는가?

32.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셨는가?

33. 하나님의 섭리란 무엇인가?

34. 오늘날에도 기적이 있는가?

35. 오늘날의 은사운동에 대하여

36. 사람은 어디에서 기원하였는가?

37. 인류는 언제부터 존재하였는가?

38. 진화론은 믿을 만한 것인가?

39. 사람에게 영혼은 있는가?

40.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41. 죄가 무엇인가?

42. 원죄(原罪)가 무엇인가?

43. 율법이 무엇인가?

44. 죄의 형벌이 무엇인가?

45. 하나님의 언약이 무엇인가?

46. 왜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셔야 하셨는가?

47.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신가, 사람이신가?

48. '한 인격' 안에서의 2성 연합의 신비에 대해

49.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이 무엇인가?

50. 예수 그리스도의 높아지심이 무엇인가?

51. 예수께서는 육체로 부활하셨는가?

52. 예수께서는 승천(昇天)하셨는가?

53. 예수께서는 지금 하나님 오른편에 계신가?

54. 예수 그리스도의 세 가지 직분이 무엇인가?

55.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은 왜 필요했는가?

56.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57.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은 어떤 성격을 가지는가?

58.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에 대한 잘못된 견해들

59. 예수께서는 택자들만을 위해 속죄하셨는가?

60. 하나님의 일반은혜란 무엇인가?

61. 하나님의 특별은혜란 무엇인가?

62. 하나님께서 불러 구원하셨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63. 예수 그리스도와 신비적으로 연합되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64. 중생(重生)이란 무엇인가?

65. 중생했다는 증거는 무엇인가?

66. 중생한 영은 범죄할 수 없는가?

67. 유아들은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68. 회개란 무엇인가?

69. 믿음이란 무엇인가?

70. 의롭다 하심(칭의 稱義)이란 무엇인가?

71.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양자 養子)은 무엇인가?

72. 성화란 무엇인가?

73. 사람이 성화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74. 성화의 방법은 무엇인가?

75. 성화에는 상(賞)이 따르는가?

76. 구원받은 성도는 다 천국에 들어가는가?

77. 성도의 영화(榮化)의 상태가 무엇인가?

78. 교회가 무엇인가?

79. 교회의 세 가지 속성이 무엇인가?

80. 참 교회의 표가 무엇인가?

81. 현대교회의 중요한 문제들이 무엇인가?

82. 성경적 분리가 무엇인가?

83. 교회는 어떤 권세를 가지고 있는가?

84. 교회의 임무는 무엇인가?

85. 교회는 어떻게 운영되어야 하는가?

86. 장로교회의 운영 원리는 무엇인가?

87. 교회에는 어떤 직분이 있는가?

88.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수단들은 무엇인가?

89. 성례(聖禮)가 무엇인가?

90. 세례의 의미가 무엇인가?

91. 침례만 올바른 세례 방식인가?

92. 유아세례는 정당성이 없는가?

93. 성찬이 무엇인가?

94. 육체의 죽음이 무엇인가?

95. 사람의 영혼은 불멸(不滅)하는가?

96. 사람은 죽은 후 어떻게 되는가?

97. 예수께서 정말 다시 오실 것인가?

98. 예수께서 어떤 모습으로 다시 오실 것인가?

99. 예수께서 언제 다시 오실 것인가?

100. 예수께서 다시 오시기 전에 어떤 징조들이 있을 것인가?

101.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짜를 안다는 주장은 옳은가?

102. 죽은 자들은 부활할 것인가?

103. 휴거(携去, Rapture)란 무엇인가?

104. 천년왕국(千年王國)이란 무엇인가?

105. 무천년설(無千年說, Amillennialism)이란 무엇인가?

106. 후천년설(後千年說, Postmillennialism)이란 무엇인가?

107. 세대주의 전천년설(Dispensational Premillennialism)이란 무엇인가?

108. 역사적 전천년설(Historical Premillinnialism)이란 무엇인가?

109. 마지막 심판이 있을 것인가?

110. 천국은 어떤 곳인가?

111. 지옥은 어떤 곳인가?

 

 

머리말

본서의 목표는 우리가 받은 바른 개혁신학의 윤곽을 제시하는 것이다. 장로교회가 증거하는 개혁신학은 뿌리깊고 오랜 세월 동안 검증된 신학이다. 우리는 개혁신학이 성경적 신학이며 역사적 기독교신앙의 개요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역사적 개혁신학의 윤곽 안에 거하는 것이 필요하고 유익하다고 믿는다.

나는 신학에 대한 올바른 개념과 방법론을 가지고 간명한 조직신학을 정리하기를 원한다. 복잡한 이론들의 나열과 변론을 피하며 인간적 견해들의 제시를 최소화하고, 성경의 교리들을 간단명료하게 해설하며 체계적으로 정리하기를 원한다. 본서는 성경적 신학의 개요를 제시하려는 것이며, 목사들은 여기에서부터 더 깊고 완전한 곳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조직신학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에 기본적이다. 왜냐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복음을 좀더 자세히 체계적으로 해설한 것이기 때문이다. 구원받은 성도에게 있어서 신학과 신앙생활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왜냐면 신학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체계적인 지식이기 때문이다. 지식이 없는 신앙생활이란 불가능하다. 단지 그의 신앙 지식이 얼마나 성경적으로 옳으며 체계적인가 하는 문제가 있을 뿐이다.

신학은 교회의 목회와도 결코 분리될 수 없다. 목사에게 바른 신학의 정립은 필수적이다. 바른 신학에 근거하지 않는 설교나 목회는 무자격하고 무책임하다. 왜냐면 신학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들의 체계적 지식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성경에 대한 바른 지식, 체계적 지식이 없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설교하며 교회를 바르게 목회할 수 있겠는가? 목회의 정로(正路)는 바른 신학을 가지고 설교하고 교인들을 인도하는 것이다. 바른 신학사상을 가지고 목회하는 목회자만 오류와 탈선 없이 하나님의 뜻을 충성되이전하고 가르치며 행할 수 있을 것이다.

개혁신학은 16세기 개신교 종교개혁 이후 상당히 안정되게 정립되어 왔다.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의 표준적 교훈은 고 박형룡 박사에게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아직도 한국 장로교회에서 그의 교의신학을 능가하는 성경적인 체계적 진술서는 없다고 본다. 그는 참으로 경건하고 근면한 신학자이셨다고 한다. 본서는 박형룡 박사의 교의신학1)을 기초로 하여 간략히 정리하고 그 외에 저자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들을 약간 보충하였다.

박형룡 박사는 그의 교의신학 서문에서 자신은 벌코프(Louis Berkhof)의 책을 기본으로 하여 다른 여러 신학자들의 저술들을 참고한 편집자에 불과하다고 겸손히 말했다. 그러나 그가 참고한 서적들과 연구범위가 넓고 깊기 때문에 그는 확실히 편집자 이상이었다. 그가 기본으로 삼았던 벌코프의 책이란 『조직신학 서론』(Introduction to Systematic Theology)과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을 가리킨다.

개혁신학의 역사에서, 조직신학의 기본적 참고서들은 개혁교회의 영속적 표준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대소요리문답을 비롯하여, 존 칼빈의 기독교강요, 촬스 핫지, 윌리암 쉐드, 로버트 댑니, 헬만 훽스마 등의 조직신학들과 제임스 돈웰, B. B. 워필드, J. 그레섬 메이천 등의 신학 저술들이다.

 

1부: 서론

조직신학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들에 대한 체계적 지식이며 또 그것은 다른 말로 하나님의 복음에 대한 자세한 해설이다. 조직신학 서론은 신학의 개념, 방법, 역사 등을 간략히 논한 후, 하나님의 계시와 성경의 정경성(正經性), 본문(text), 속성, 및 영감(靈感)과 무오성(無誤性)에 관한 진리들을 논한다.

 

1. 신학의 개념, 성격, 필요성

2. 신학의 방법, 분야들, 역사

3. 하나님의 계시

4. 성경의 정경(正經)

5. 성경의 본문(Text)

6. 성경의 속성

7. 성경의 영감(靈感)과 무오(無誤)

  

 1. 신학의 개념, 성격, 필요성

신학의 개념

신학(神學)은 ‘하나님에 관한 학문’이다. 학(學)이란 “체계적 연구에 의해 얻어진 사실들이나 원리들에 대한 지식” 즉 체계적 지식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신학은 하나님과 그의 진리들에 관한 체계적 지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을 흔히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이라고 부른다. 엄격한 의미에서 신학은 조직신학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진리들은 하나님의 특별계시들의 기록인 성경에 명확히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신학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들에 관한 체계적인 지식’이라고 정의될 수 있다. 자유주의 신학은 신학을 단순히 신에 대한 인간의 주관적 신앙이나 종교경험의 학으로 정의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관적 개념을 배격하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객관적 성경 말씀에서만 찾는 것이 바른 태도이며 역사적 개신교회의 입장이다. 촬스 핫지는 바르게 서술하기를, “[신학의 목적은] 성경의 사실들을 체계화하고 그것들이 내포하는 원리들이나 일반 진리들을 확증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2)

신학은 교의학(敎義學, dogmatics)이라고도 불린다. 교의(敎義)는 니케야 신조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같이 하나님의 진리에 관한 교회의 공식적 진술을 가리킨다. 이런 의미에서 교의란 교리(敎理, doctrine)와 구별된다. 교리는 말로 표현된 진리를 가리키며 진리와 거의 동일시되지만, 교의는 보다 공식적이고 권위적인 진술이다. 그러므로 교의학은 하나님의 진리들에 관한 교회의 공적 진술들에 대한 체계적 지식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천주교회는 교의가 교회 회의나 전통에서 나온다고 가르치고, 자유주의자들은 그것이 인간의 주관적 신앙이나 종교적 경험에서 나온다고 주장하지만, 역사적 개신교회는 교의가 오직 성경에서 나와야 한다고 확신한다. 코넬리우스 반틸은 말하기를, “교회의 신조들은 그 내용에 관한 한 성경 진리의 조직적 진술에 불과하다”고 하였다.3) 이와 같이, 교의는 성경진리의 체계적 진술이므로, 교의학은 내용적으로 조직신학과 동일하다. 그러므로 헤르만 바빙크는 교의학을 “하나님의 지식에 대한 학문적 체계”로 정의하였고, 박형룡 박사는 “바른 교의신학은 성경이 하나님에 대하여 가르치는 바의 질서 있는 논술을 제출하기를 추구한다. . . . 교의학은, 즉, 성경 진리의 조직적 진술이다”라고 말하였다.4) 이와 같이, 신학, 조직신학, 교의학은 다 동의어로 사용될 수 있는 것이다.

교회 역사상, 기독교 진리들의 체계적 지식을 위하여 여러 가지 용어들(sententiae, summa, loci communes, institutio)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12세기에 아벨라드(Peter Abelard)에 의해 최초로 ‘신학’(데올로기아 theologia)이라는 말이 사용되었다. 종교개혁 후 ‘신학’이라는 말이 루터파와 개혁파 신학자들 가운데서 점차 많이 사용되었다. 17세기부터 ‘교의신학’이라는 말도 사용되었으나 오늘날에는 ‘조직신학’이라는 말이 ‘교의신학’ 혹은 ‘교의학’보다 더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오늘날 흔히 말하는 성경신학(Biblical Theology)은 처음부터 그 연구방법에 있어서 조직신학과 달랐다. 조직신학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들을 주제별로, 논리적으로 정돈하려 하지만, 성경신학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들을 역사적으로, 연대순으로 정돈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 둘은 다 성경의 내용들을 체계적으로 정돈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조직적’ 신학이었고, 그것이 성경만을 자료로 삼고 성경에 충실하려 한다면 ‘성경적’ 신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신학이라는 개념은 즉시 합리주의자들에 의해 채용되었고 그들에 의해 교의학과 대립하고 그것을 비평, 수정하려는 방향으로 진행되어 왔다.

오늘날 성경신학은 때때로 성경의 중심주제도 파악하지 못한 채 초보적 단계에서 방황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성경의 중심주제는, 조직신학이 정리하는 대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이다. 조직신학은 구원이라는 주제 아래 왜 구원이 필요하였는지, 어떻게 구원이 이루어지는지, 구원받은 자들의 삶과 소망은 무엇인지 등을 논한다. 성경은 구주 예수에 대해 증거한다(요 5:39). 바울은 디모데에게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고 말하였다(딤후 3:15). 성경의 중심주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이다.

오늘날에는, 신학이라는 말이 넓은 의미로도 사용된다. 교회사나 목회학에도 역사신학이나 실천신학이라는 명칭이 사용된다. 또 자유주의 진영에서는 정치신학, 흑인신학, 해방신학, 민중신학, 여성신학 등 소위 상황신학의 개념들이 유행하고 있고 심지어 통일신학이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의 ‘신학’은 어떤 특정 주제나 분야에서의 하나님의 지식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신학이라는 말의 정확한 용법은 아니다.

 

신학의 성격

신학을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들에 대한 체계적 지식이라고 정의할 때, 우리는 신학의 몇 가지 성격을 생각할 수 있다.

첫째로, 신학은 성경적이다. 하나님의 진리들은 성경에 계시되어 있고 성경 안에만 명확히 계시되어 있다. 그러므로 신학은 성경에서, 오직 성경에서만 나와야 한다. 성경 밖의 자료들은 단지 성경의 진리들을 확증하는 보조물에 불과해야 하다. 신학은 성경적이어야 한다. 성경적인 신학만이 참된 신학이다. 성경을 떠나서 하나님과 그의 뜻을 논하는 모든 개념들과 사상들은 바른 신학이 될 수 없고 오류에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신학의 자료가 되는 성경을 불신임하는 자유주의 신학은 그 시작부터 잘못이었고 그 결론도 잘못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결코 기독교 신학이 될 수 없다. 성경이 파괴되는 곳에서 신학을 논할 수 없고, 성경 없이 논의되는 신학은 기독교 신학이 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자유주의 신학은 신학을 성경에 기초시키는 대신 신학의 문화적 성격을 강조한다. 그러나 교회가 진리를 표현함에 있어서 혹시 어떤 시대의 철학적 용어들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지만, 그러한 용어들은 표현 형식에 불과하고 그 내용에 관한 것은 아니다. 신학은 순전히 성경의 계시 진리들을 조직화하는 것이어야 하며, 어느 시대, 어느 문화의 사상을 혼합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만일 어떤 이의 신학사상이든지 비성경적 요소가 섞여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비평하고 배제하여 순수한 성경적 신학을 정립해야 할 것이다.

둘째로, 신학은 교회적이다. 하나님의 진리는, 비록 처음에 개인이 깨닫고 믿고 고백하기 시작할지라도, 곧 하나님의 백성들이--구약의 이스라엘 회중이든지 신약교회이든지 간에--공동적으로 믿고 고백하는 진리가 된다. 교회는 하나님의 진리들을 선언하고 체계적으로 진술할 권세를 주께로부터 받았다. 성경은 교회를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부른다(딤전 3:15). 이 교훈의 권세는 단지 어느 시대까지의 교회나 교회 회의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모든 시대의 모든 교회와 모든 교회 회의들이 가지고 있는 권세이다. 그러므로 신학은 어떤 개인의 견해에 그쳐서는 안되며 교회의 공동적 신앙고백이어야 한다.

신학의 교회적 성격은 그것의 공동적 신앙고백의 측면에서 뿐 아니라, 역사적, 전통적 측면에서도 그러하다. 신학적 활동은 모든 시대의 교회들이 많은 힘을 기울여 왔다. 오늘 우리가 가진 신앙고백들은 전시대의 신앙 선조들의 기도와 수고의 결실이며, 우리는 그 배후에 성령의 섭리적 지도와 후원이 있었음을 의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의 역사적 신조들과 신앙고백들을 중시해야 한다.

이와 같이, 신학은 교회적인 성격을 가지며, 따라서 바른 신학의 정립과 성실한 전달은 교회에 주어진 가장 중요한 임무 중의 하나이다. 특히 신학들이 난립하여 성경적인 신학을 알 수 없고, 성경적 믿음과 확신이 없고 신실함과 충성심이 없어 보이는 오늘 시대에, 바른 신학의 정립과 전달은 더욱 절실한 시대적 과제이다.

셋째로, 신학은 권위적이다. 신학이 성경적이라면, 그것은 또한 권위적이다. 기독교회는 성경을 신적 권위를 가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따른다. 성경의 신적 권위성은 성경의 모든 진리들의 신적 권위성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성경의 진리들을 체계적으로 정돈한 신학도 당연히 신적 권위를 가진다. 만일 신학이 성경의 진리들을 바르고 충실하게 제시하고 반영한다면, 그 신학은 성경과 같이 신적 권위를 가질 것이다. 성경이 신적 권위를 가지듯이, 성경적 신학은 신적 권위를 가질 것이다.

물론 우리는 오직 성경만 최종적 권위를 가짐을 믿는다. 우리는 신학이 성경과 달리 오류에 떨어질 가능성이 있음을 인정하며, 또한 오류에 떨어진 부분들은 언제든지 성경에 의해 교정될 수 있고 교정되어야 함을 믿는다. 오직 성경만 교회의 오류 없는 최종적 권위이다. 그러나 신학이 성경에 충실하고 그 진리를 바르게 제시하는 한, 교회는 성경을 신적 권위의 말씀으로 존중하듯이, 신학도 신적 권위의 진술들로 존중해야 할 것이다.

넷째로, 신학은 불변적이다. 물론, 신학의 불변성은 신학의 기본적 내용에 관한 것이고, 그 정돈 방식에 관한 것은 아니다. 신학의 정돈 방식은 변할 수 있으며 역사상 실제로 변해 왔다. 신학의 정돈 방식의 이러한 변화는 신학적 발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점이다. 주후 2세기는 기독교 변증학의 시대이었고, 3세기와 4세기는 신론, 5세기는 인간론과 기독론, 그리고 중세 시대에 이어 종교개혁기에는 구원론과 교회론, 근대에는 종말론에 대한 신학적 토론이 많았다. 이런 과정들을 통해 신학의 정돈 방식은 다듬어져 왔다. 존 칼빈의 기독교강요보다 촬스 핫지의 조직신학은 더 정리되어 있고, 촬스 핫지의 조직신학보다 루이스 벌코프의 조직신학은 더 정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신학의 기본적 내용에 관한 한, 그것이 신적 권위를 가진 한, 그것은 또한 불변적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다. 성경의 내용이 변할 수 없듯이, 성경 진리들의 체계적 지식인 신학의 기본 내용은 변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20세기 말에도 초대교회의 사도신경이나 니케야-콘스탄티노플 신조를 믿고 고백하며, 17세기의 정통적 신앙고백들, 예를 들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대, 소요리문답이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믿고 고백하며 사랑한다. 또 오늘날에도 우리는 칼빈과 핫지 등의 정통적 개혁신학자들의 책들과 글들을 사랑한다.

그러므로 오늘날 유행하는 바와 같이, 신학이 시대마다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유주의적 개념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신학의 근본적 내용의 불변성을 부정하는 것은 성경 진리들의 불변성을 부정하는 것과 같으므로, 그것은 실로 이단적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불변적임과 같이, 성경적 신학은 그 기본 내용에 있어서 불변적이어야 한다. 시대는 변해도, 신앙의 내용은 변하지 않는다. 진리의 정돈 방식 즉 신학의 제시 방식은 변할 수 있을지라도, 그 근본내용들은 결코 변할 수 없다.

 

신학의 필요성

신학은 왜 필요한가? 첫째로, 사람에게 있는 체계적 지식에 대한 기본적 욕구 때문에 신학이 필요하다. 지식의 체계화는 사람의 기본적 욕구이며, 진리의 지식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들의 단편들뿐 아니라 그 전체를 알기 원한다. 신학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들의 체계적 지식을 추구하므로, 그것은 모든 진지한 성도들의 기본적 욕구에 충족이 된다. 반틸은 “성경의 내용을 연구하여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우리의 의무이다”라고 말했다.

둘째로, 하나님의 진리의 효과적 전달을 위해 신학은 필요하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전도할 때나 처음 믿는 자들을 가르칠 때,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진리를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있어야 그것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 하나님의 진리들은 논리정연하다. 그것들은 앞뒤가 모순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혼동의 하나님이 아니고 질서의 하나님이시다(고전 14:33). 논리 정연한 제시는 설교나 강의를 더욱 힘 있고 효과적이게 만들 것이나, 혼란한 개념이나 모순된 논리는 그것의 능력을 감소시킬 것이다. 하나님께서 비록 단순히 사람의 논리로만 활동하시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의 논리를 거스려 활동하신다고 상상해서도 안 된다. 건전한 설교와 교훈은 반드시 건전한 논리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훌륭한 설교가 촬스 스펄젼은 말하기를, “대 신학자들이 있기 전에는 대 전도자들이 결코 있지 못할 것입니다. . . . 천박한 학생들 중에서 영혼을 움직이는 대 전도자들이 나오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셋째로, 교회의 사상적 일체성을 위해 신학은 필요하다. 교회의 일체성은 유형적이기 전에 먼저 영적이며 교리적이다. 교회는 공통적 기독교신앙 위에서 한 몸을 이룬다. 정통신앙을 가진 자와 이단자가 하나를 이룰 수는 없다. 사도 바울은 “다 같은 말을 하라”고 권면하였고(고전 1:10), 또 “믿음은 하나이요”라고 말했다(엡 4:5). ‘같은 믿음’(딛 1:4, 코이네 피스티스, common faith)은 모든 기독교인들의 연합의 기초이다.

비록 신학들의 불완전함과 상호 간의 차이가 교파 형성의 주요 원인이 되었지만, 참된 신학은 교회의 일체성의 방해물이 아니고 오히려 그 매개물이요 접착물이다. 사실, 사상적 일치가 없는 외형적 일치는 공허하며 위선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지한 성경 연구를 통하여 신학적 일치를 추구해야 한다. 사도신경, 니케야-콘스탄티노플 신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같은 교회의 공적 신앙고백과, 촬스 핫지, 루이스 벌코프, 박형룡 등 교회의 인정된 조직신학들은 교회의 일체성의 표시요 증거이다.

넷째로, 이단들을 배격하고 하나님의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 신학은 필요하다. 사실, 이 목적은 역사상 신학 정립과 발전에 매우 중요하였다. 이단들은 성경의 일부분을 부정하거나 잘못 해석함으로써 생기는 경우가 많았다. 이단들이 성경을 완전히 저버리는 경우는 쉽게 식별할 수 있겠지만, 성경을 가지고 잘못 해석하여 강조하거나 적용할 때 그들을 막아내기란 쉽지 않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리들에 대한 체계적인 바른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이단들의 교묘한 오류를 분별하고 폭로하고 배격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단들의 도전 앞에서, 교회는 진리들의 부분적 지식이 아닌, 체계적 지식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목사들 뿐만 아니라, 일반 성도들도 체계적 성경 공부와 교리 공부, 즉 신학 공부가 필요한 것이다.

 

  2. 신학의 방법, 분야들, 역사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가능성

인간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가질 수 있는가? 거기에 대하여 성경은 사람이 하나님에 관해 다 알 수 없다고 대답한다. 사실, 하나님은 창조주시요 완전하고 무한하신 분이시며 사람은 피조물이요 불완전하고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사람이 하나님에 관해 다 알 수 없다. 욥기에 소발이 “내가 하나님의 오묘를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온전히 알겠느냐?”고 말하고(욥 11:7) 엘리후가 “하나님은 크시니 우리가 그를 알 수 없고 그 연수를 계산할 수 없느니라”고 한 것은 정당한 말이다(욥 36:26). 아다나시우스는 “사람은 능히 하나님의 옷자락을 알 뿐이요, 그 나머지는 그룹들이 날개로 가리웠다”고 말했다.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할 수는 있으나 그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사람은 범죄한 이후 하나님에 대해 더욱 제한되고 왜곡된 지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창 1:26-27), 그리고 이제 성경 말씀과 성령의 깨닫게 하심을 통하여, 비록 부분적이고 불완전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가질 수 있다. 그러므로 호세아 선지자는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고 말씀했고(호 6:3), 이사야 선지자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을 예언했다(사 11:9). 주 예수께서도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 17:3).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신을 계시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인간의 이성으로는 하나님의 세계를 알 수 없다고 단정하는 칸트의 지식론이나 인간이 진리를 도무지 알 수 없다고 말하는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들의 사상은 정당하지 못하다. 특히 회의주의자들이 진리를 알 수 없다는 자신들의 지식에 대해 신념을 가지는 것은 자기모순적이다. 진리를 알 수 없다는 그들의 신념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그들의 사상에 반대된다.


신학의 방법--세 가지 원리들

신학의 방법, 즉 하나님의 진리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할 수 있는 방법은 흔히 세 가지 원리로 표현된다. 첫째는 ‘존재의 원리’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자신과 온 세계에 대해 완전한 지식을 가지고 계신 인격적 존재이시다. 그는 학자 중에 학자시요 과학자 중에 과학자이시다. 그는 이 세상의 모든 지식의 원천이시다. 사람의 모든 지식은 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 일반 학문도 그러하지만, 신학은 더욱 그러하다. 하나님께 대한 사람의 지식이란 하나님의 완전한 지식을 닮은 지식이요, 그 지식을 조금 나누어 가진 부분적 지식에 불과하다. 사실상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고 그를 떠나서는 그에 대해 확실하게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예수께서는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1:27). 또 사도 바울은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복음 진리]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 말했다(고전 2:10).

둘째는 ‘지식의 외적 원리’이다. 이것은 성경을 가리킨다. 어떤 이들은 성경을 신학의 유일한 원리로 보나(Francis Turretin, Herman Bavinck 등), 다른 이들은 성경을 신학의 일차적 혹은 중심적 원리로 그리고 자연 계시, 하나님의 섭리, 그리스도인의 경험 등을 신학의 부수적 원리로 본다(B. B. Warfield 등). 하나님께서는 역사상 여러 특별한 방식들로 자신을 계시하셨고, 그 내용을 성경에, 성경에만 기록되게 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특별계시와 그 유일한 저장소인 성경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지식의 객관적 원천이다. 우리가 그것을 충분히 파악하든 못하든 간에, 하나님의 진리들은 성경에 객관적 형태로, 완전하게 제시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라고 말씀하셨다(요 5:39). 또 사도 바울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라고 말씀했다(딤후 3:16).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떠나서는 하나님께 대한 확실하고 충분한 지식을 가질 수 없고 성경을 떠나서는 기독교 진리를 논하거나 기독교 신학을 정립할 수 없다.

셋째는 ‘지식의 내적 원리’이다. 그것은 믿음과 이성을 가리킨다. 죄인은 성령으로 거듭나 예수님을 믿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진리를 이해하게 된다. 믿음은 거듭남의 증거이다. 누구든지 참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의 진리를 이해할 수 없다. 그러므로 참된 믿음은 참지식의 시작이다. 마태복음 11:27,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고린도후서 4:6,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믿음의 지식은 성령의 내적 활동에 의해 생긴다. 성령께서는 우리 속에 말씀과 함께 활동하셔서 그러한 지식을 주신다. 성령의 내적 활동이 없이는 아무도 참된 믿음과 지식을 가질 수 없다. 기독교신앙과 지식은 단순히 인간에게 내어 맡겨진 어떤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거룩하고 은혜로운 사역이다. 성도의 확신의 근거도 성령의 내적 활동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5, “(성경의) 무오한 진리와 신적 권위에 대한 우리의 완전한 납득과 확신은 우리 마음 속에 그 말씀으로 그리고 그 말씀과 함께 증거하시는 성령의 내면적 활동에서 온다.”

예수께서는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고 말씀하셨고(요 14:26), 또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라’고 하셨다(요 16:13). 사도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했고(고전 2:12), 또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저주받은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하였다(고전 12:3). 사도 요한도,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라고 말했다(요일 2:27).

그러나 이미 믿은 자들 즉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에게는 이성(理性)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위해 필요한 수단이다. 첫째, 이성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내용을 이해한다. 하나님에 대한 사실들을 이해하고 파악하는 것은 이성의 활동이다. 백치(白痴)는 하나님에 대한 원만한 지식을 갖기 어렵다.

둘째, 이성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정당성을 판단한다. 성령의 증거는 이성의 판단이나 논증을 배제하거나 배격하는 것이 아니고 일반적으로 그것을 사용하신다. 바울은 전도할 때,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행 17:2-3)고 하였다. 바울은 다른 곳들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하였다(행 18:4; 19:8; 20:7). ‘강론하다, 증명하다’는 말은 이성의 판단이나 논증 등 이성의 활동을 가리키거나 내포한다.

핫지는 말하기를, “성경은 결코 적절한 증거에 근거함이 없이 믿음을 요구하지 않는다”고 했다.5) 워필드(B. B. Warfield)도 말하기를,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그를 믿는 것이 합리적이기 때문이요 불합리할지라도 믿는 것은 아니다. . . . 믿음은 하나님의 은사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이 불합리한 믿음, 즉 정당한 이유에 근거하지 않는 믿음이라고는 조금도 생각되지 않는다”라고 했다.6)

셋째, 이성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내용을 정돈한다. 하나님의 진리들을 논리적으로, 체계적으로 정돈하는 것은 이성의 활동이다. 학문은 정돈된 지식 혹은 지식의 체계화이며, 이성의 작용과 활동이 없이는 어떤 학문도 있을 수 없다.

 

신학의 잘못된 방법들

기독교 역사상 신학의 몇 가지 잘못된 방법들이 있었다. 첫째로, 신학의 잘못된 방법 중 가장 오래된 것은 교권주의이다. 이것은 교회의 권위를 신학의 최고 권위로 보는 방법이다. 그 대표적 예는 로마 천주교회의 입장이다. 로마 교회는 이론적으로 성경과 교회의 전통을 함께 권위 있게 여기지만, 실제적으로는 교회를 성경보다 더 권위 있게 본다. 그들은 교회(교황과 회의들)가 성경을 포함한 모든 진리의 최종적인 무오(無誤)한 해석자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잘못이다. 교회 혹은 교황이 무오(無誤)하다는 교리는 성경적 근거가 없다. 교황들은 실제로 무오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에게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라고 말씀하셨고(마 15:3), 또 “[베드로에게]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책망하기도 하셨다(마 16:23). 이 말씀들은, 교회의 지도자들이 잘못을 범할 수 있음을 증거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성경말씀만을 신앙생활의 표준으로 삼아야 한다.

실상 천주교회의 역사는 교황 무오의 교리에 반대된다. 1854년 교황 피우스 9세가 마리아의 무죄 잉태를 선언했고 1950년 피우스 12세가 마리아의 승천을 선언했으나 이것들은 다 비성경적이다. 또 그레고리 1세(590- 607)는 ‘전 세계의 감독’이라는 칭호를 가지고자 하는 자는 적그리스도라고 불렀으나, 보니페이스 3세는 607년 그런 칭호를 받았다. 또 씩스투스 5세(1585-90)는 성경 읽기를 권장했으나 피우스 7세(1800-23) 등 여러 교황들은 그것을 정죄하였는데 이런 모순된 선언들은 어느 한쪽이 분명히 오류이다.

교회의 권위는 무오하지 않다. 교회의 권위는 오직 성경에 의존한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영감과 배려로 사도들을 통해 신약을 오류 없이 기록되게 하셨다. 성경은 스스로 신적 권위를 증거한다. 그러므로 교회의 교훈은 스스로 권위를 가지는 것이 아니고, 단지 그것이 성경적일 때만 권위를 가진다. 성경만이 교회의 최고의 그리고 최종의 권위이다. 따라서 신학은 단순히 교회와 교회의 교훈들의 권위에 의존해서는 안되고 오직 성경의 권위에 의존해야 한다.

둘째로, 신학의 또 하나의 잘못된 방법은 이성주의이다. 이것은 사람의 이성을 신학의 최고 권위로 보는 것이다. 이 견해에 의하면, 이성은 진리의 최종 판단자로서 이성에 맞는 것은 진리요 이성에 맞지 않는 것은 비진리가 된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다수가 이런 사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생각도 잘못이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가짐에 있어서 사람이 최고 권위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무한하시고 전지 전능하신 창조주이시지만 사람은 유한한 피조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이성은 하나님과 그의 진리를 다 파악할 수 없다. 사람이 우주와 우리 자신의 구조에 대해서도 다 알지 못하는데 하물며 우주와 사람의 창조자이신 완전자 하나님을 어떻게 다 알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욥기 11:7은 “네가 하나님의 오묘를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온전히 알겠느냐?”고 했고, 예수께서는 사두개인들에게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고 책망하셨다(마 22:29).

더욱이, 자연 이성 즉 타고난 대로의 인간 이성은 죄로 어두워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식의 바른 원천이 될 수 없다. 바울은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말했고(고전 1:21), 또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 분별됨이니라”고 했다(고전 2:14). 또 그는 말하기를, “저희[이방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라고 했다(엡 4:18).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을 알기 위해 겸손히 하나님의 특별계시에 의존해야 한다. 사실, 이성주의는 신학을 철학화한다. 그러나 철학은 인간의 이성에 근거하지만, 신학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인 성경에 근거해야 한다.

셋째로, 신학의 잘못된 또 하나의 방법은 경험주의이다. 이것은 사람의 종교적 경험을 신학의 최고 권위로 보는 것이다. 이성주의와 정반대로, 이 견해는 사람이 경험할 수 없는 것을 진리에서 제외한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나머지 다수가 이런 사상을 가지고 있다. 슐라이엘마허는 신학을 영혼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경험하는 감정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릿츨은 신학을 사람의 종교 도덕적 경험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이런 생각도 잘못이다. 유한자 인간이 무한하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원천이 될 수는 없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위해 사람은 하나님의 특별계시를 겸손히 의존해야 한다. 또 사람은 현재 하나님의 진리들을 다 경험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우리는 천지의 창조, 인간의 타락, 그 밖의 과거의 특별계시의 일들, 그리고 장차 마지막 날에 있을 일들 등을 경험할 수 없다. 예수께서는 도마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 20:27-29)라고 하셨다.

더욱이, 사람의 종교적 경험이나 감정은 진리와 오류, 하나님의 계시와 계시 아닌 것을 혼동하기 쉽다. 이방 종교인들도 매우 종교적일 수 있다. 구약의 바알 숭배자들도 매우 종교적이었다. 열왕기상 18:28에 보면, ‘저희가 큰 소리로 부르고 그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 몸을 상하게 하였다’고 말했다. 아덴 사람들도 매우 종교적이었다. 사도행전 17:22에 보면, 바울은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라고 말했다. 종교적 감정이 종교에 필수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가 단순히 종교적 감정에서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얻을 수는 없다.

사람의 도덕의식도 그러하다. 양심이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선하심을 반영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사람의 양심은 죄로 인하여 더러워졌고 무디어졌기 때문에 그 기능을 다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도덕의식에 기초한 도덕적 신관, 도덕적 종교는 완전치 못하다. 성경은 말하기를,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했다(롬 3:10-12). 실상, 신학의 경험주의적 방법은 신학과 종교심리학을 혼동하고 있다. 경험주의가 종교 심리학은 될 수 있으나, 신학은 될 수 없다.

넷째로, 신학의 잘못된 또 하나의 방법은 신비주의이다. 이것은 경험주의의 한 형태로서, 하나님과의 직접적 교통을 신학의 원리로 보는 방법이다. 이 견해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직접 계시하시고 전달해 주신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직접적 계시를 내적인 빛 혹은 내면적 음성이라고 부른다. 교회 역사상, 많은 신비주의자들이 이런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도 잘못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반대되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고 증거했다(딤후 3:16). 또 이사야는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 속에 빛이 없기 때문이라”(원문직역)고 말했다(사 8:20). 신비주의는 이성의 정당한 기능을 무시한다. 그러나 이성은 하나님께서 주신 정당하고 정상적인 인식과 판단의 도구이다. 덧붙여, 신비주의적 방법에서는 하나님의 음성과 마귀의 음성을 명확히 분별하기 어렵다. 따라서 빈번히 탈선하는 데로 나아간다.

 

 신학의 분야들

넓은 의미에서 신학은 다섯 분야로 나뉜다. 첫째로, 구약 분야는 구약원어(히브리어, 아람어), 구약개론, 구약강해 등이 있다. 둘째로, 신약 분야는 신약원어(헬라어), 신약개론, 신약강해, 본문비평학 등이 있다. 셋째로, 교리 분야는 조직신학, 현대신학, 이단종파비판, 기독교 윤리 등이 있다. 넷째로, 역사 분야는 교회사, 교리사 등이다. 다섯째로, 실천 분야는 목회학, 설교학, 기독교 교육학, 교회헌법, 선교학 등이다. 구약과 신약은 성경 자료를, 그리고 교회사는 역사 자료를 제공하여, 교리와 윤리의 체계적 지식을 확립케 한다. 또 구약, 신약, 교리, 역사는 이론적 분야이고, 목회학 등은 실천적 분야이다.

위의 다섯 분야 중에서, 본래 신학이 의미했던 조직신학은 일곱 개의 주제로 구성된다. 첫째로, 서론은 신학의 개념, 성격, 필요성, 방법, 계시, 성경의 정경, 신적 권위성, 본문 문제, 명료성, 해석 원리들, 영감, 무오성 등 기독교 교리의 기초가 되는 성경에 관해 논한다. 둘째로, 신론은 하나님의 속성들, 삼위일체, 예정, 창조, 섭리, 기적 등에 관해 논한다. 셋째로, 인간론은 인간의 기원, 구성 요소, 행위언약, 죄의 본질, 구별, 형벌, 은혜언약 등에 관해 논한다. 넷째로, 기독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일인격성(一人格性), 그의 낮아지심과 높아지심, 그의 선지자직, 제사장직, 왕직 등에 관해 논한다. 다섯째로, 구원론은 하나님의 은혜, 부르심, 중생(重生), 회개와 믿음, 칭의(稱義), 성화(聖化), 성도의 견인과 영화 등에 관해 논한다. 여섯째로, 교회론은 교회의 본질, 속성, 참된 교회의 표, 교회의 권세와 임무, 조직과 정치, 은혜의 수단, 성례 등에 관해 논한다. 일곱째로, 종말론은 육체적 죽음, 죽음 후의 상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죽은 자들의 부활, 천년왕국, 마지막 심판, 천국과 지옥 등에 관해 논한다.

 

신학과 다른 학문들과의 관계

신학과 다른 학문들과 관계는 어떠한가? 신학과 변증학과의 관계는 어떠한가? 그것은 변증학의 성격에 의해 설명된다. 벤쟈민 워필드 같은 학자는 변증학이 신학체계의 서론적 분과로서 하나님, 종교, 계시, 성경 등 기독교의 기초적 원리들에 대한 이성적 변호의 학이라고 이해하였다. 그러나 아브라함 카이퍼와 헤르만 바빙크 같은 학자들은 변증학이 기독교 진리들에 대한 공격에 대항한 성경적 답변의 학이라고 이해하였다. 이 견해에서는, 신학의 내용이 변증학에 그대로 활용될 수 있다.

신학과 철학과의 관계는 어떠한가? 철학과 신학은 우주의 근원, 인간의 존재 의미, 도덕적 선 등의 공통적 주제들을 취급하지만, 그 접근 방식은 전혀 다르다. 철학은 인간의 이성, 경험, 혹은 직관에 의존하지만, 신학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에 의존한다. 그러나 철학이 신학에게 어떤 도움을 주기도 한다. 임마누엘 칸트는 양심에 근거하여 하나님과 영생의 존재를 논증하였다. 또한, 철학은 인간의 이성이 우주의 기본적 난제들을 해결할 수 없음을 말해준다.

신학과 심리학과의 관계는 어떠한가? 심리학은 사람의 행위의 동기와 방식 등 사람의 심리 작용을 연구한다. 심리학도 종교 경험의 현상을 연구할 수 있으나, 빈번히 종교 현상을 단순히 자연적 현상으로 해석하며, 특히 하나님의 존재와 영혼의 죄악성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하나님의 계시 진리들과 일치하는 심리학의 연구 결과들은 신학의 보조적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신학과 윤리학과의 관계는 어떠한가? 윤리학은 사람의 바른 행동 원리를 연구한다. 이것은 무엇이 선인가 하는 철학적 문제와도 관계된다. 칼빈이나 촬스 핫지나 로버트 댑니 등의 신학자는 교리적, 신학적 논술에서 십계명의 해설 등 윤리적 주제들을 다루기도 하였으나, 엄밀한 의미에서 조직신학은 윤리학과 구별된다. 조직신학은 믿음의 내용을 논하고 윤리학은 행위의 원리를 논한다.

 

신학의 역사

구 카톨릭 시대

3세기 초 오리겐의 제일 원리들에 관하여는 교회 역사상 최초의 신학적 문서라고 생각된다. 그가 다룬 주제들은 1권에서 하나님, 말씀, 성령, 및 천사, 2권에서 세계와 사람, 3권에서 죄와 구속, 4권에서 성경 및 전체 요약 등이다. 그러나 오리겐은 대 학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상에는 영원 전의 창조, 인간 영혼의 선재(先在) 및 선재 상태에서의 범죄, 사탄의 회복을 포함한 보편구원론 등 많은 이단적 요소들이 있었다. 또 그의 풍유적(allegorical) 성경해석법은 후대에 큰 해를 끼쳤다.

4세기의 어거스틴은 사상적으로 대체로 건전하였다. 비록 그가 교회에 관한 감독주의적 견해를 가졌고 성례를 구원에 필수적이라고 보는 로마 천주교적 사상의 씨앗을 가지고 있었지만, 인간의 죄악성과 은혜의 구원에 관한 그의 사상은 매우 성경적이었다. 그러므로 신학에서 어거스틴주의는 원죄, 인간의 전적 부패성, 하나님의 절대적, 이중적 예정,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적 단독 사역을 믿는 입장을 가리킨다. 그는 <라우렌티움을 위한 안내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에 관하여> (Enchiridion ad Laurentium: De Fide, Spe, et Caritate)라는 책을 썼다. 그는 이 책에서 믿음의 제목 아래 믿음의 주요 조항들을 논했고, 소망의 제목 아래 기도를, 사랑의 제목 아래 윤리 문제들을 각각 논하였다. 이 외에도, 어거스틴은 삼위일체에 관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관하여 등 교리적 저술들을 남겼다.

8세기 중엽의 다메섹의 요한은 고대 동방교회의 최대의 신학자이며, 그의 <정통신앙정해>는 동방 교회의 가장 중요한 교리책이었다. 이 책은 그의 지식의 원천이라는 책의 제3부인데, 그 주요 주제들은 다음과 같다: 1권--하나님과 삼위일체; 2권--창조, 사람의 본질; 3권--그리스도의 성육신, 죽음, 음부에 내려가심; 4권--그리스도의 부활, 다스리심, 믿음, 세례, 성상 숭배. 그의 책은 고대 동방 교회의 특징을 반영하는데, 사색적이며, 신학적으론 반(半)펠라기우스주의 혹은 신인협력설이며, 성례를 중시하는 입장이다.

 

중세 스콜라 신학 시대

11세기 말의 안셈은 이태리 출생으로 영국 캔터베리의 대주교이었으며 ‘스콜라 신학의 시조’ 또는 ‘제2의 어거스틴’이라고 불리웠다. 그는 경건과 지식을 겸비한 훌륭한 인물이었다. 그의 독백과 대화는 하나님의 존재와 본질에 관해 논한 책이다. 이 외에도, 그는 삼위일체와 성육신의 교리를 다룬 삼위일체의 믿음과 말씀의 성육신에 관하여라는 책과, 예정론을 다룬 조화에 관하여, 그리고 속죄론을 다룬 하나님은 왜 사람이 되셨나? 등의 저서를 남겼다.

12세기 중엽의 피터 롬바드는 이태리 출생으로 파리의 대주교를 지낸 자로서 서방 교회의 최초의 대 교의학자이었다. 그의 <선언서>(Sententiarum Libri IV)라는 책은 스콜라 시대의 최초의 주요한 교의학서로서 중세 시대 여러 세기 동안 신학 교본으로 사용되었다. 그의 책의 주제들은 1권--하나님(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우주론적 증명, 삼위일체 등); 2권--창조 세계, 천사; 3권--기독론, 구속; 4권--성례(최초로 일곱 성례로 분류함), 종말 등이다. 13세기의 알렉산더의 신학대전은 롬바드의 선언서에 대한 주석으로서 많이 읽혀졌다.

13세기 후반의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탈리아의 신학자로서 중세 스콜라 신학의 최대의 인물이며, 천주교회의 대 권위자이다. 그의 신학은 천주교회의 표준적 신학이었다. 그의 <신학대전> (Summa Totius Theologiae)은 미완성 작품이었고, 그것의 성례와 종말에 관한 부분은 다른 곳의 그의 글들 중에서 발췌하여 추가한 것이다. 그 책의 주요 주제들은 1권--하나님과 그의 사역들; 2권--사람, 윤리학; 3권--그리스도, 은혜의 수단 등이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그의 신학의 형식으로 삼았고, 어거스틴주의를 그의 신학의 기본적 내용으로 삼았으나 중요한 많은 점들에서 그것을 수정하였다.

 

종교개혁 및 신조 작성 시대

16세기 중엽의 죤 칼빈은 마틴 루터와 마틴 부처의 영향 아래 어거스틴주의를 부흥시켰다. 사도 바울의 은혜의 복음을 핵심으로 하는 성경적 정통 신학은 고대에 어거스틴을 거쳐 칼빈에게서 밝히 정리되었다. 그의 <기독교강요(綱要)>(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는 개혁교회의 ‘대전’(쑤마)라고 불리웠다. 그의 책에는 특히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 사상이 강하게 흐르고 있고 교리와 윤리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그의 책의 주요 주제는 1권--하나님; 2권--그리스도; 3권--성령과 구원; 4권--교회와 성례 등이다. 칼빈은 또 많은 성경 주석들을 남겼다.

라이덴 대학의 네 명의 교수들이 쓴 <순수신학개요>라는 책이 개혁 교회의 세계에서 많이 읽혀졌다. 17세기 후반의 이태리 출신 스위스 신학자 프란시스 투레틴의 신학은 권위 있는 정통 개혁파 신학이며 그 후 미국의 프린스톤 신학에서 계승되었다. 그의 <논변신학강요>(Institutio Theo- logiae Elencticiae)는 프린스톤 신학교의 중요한 신학 참고서가 되었다. 칼빈의 개혁파 정통 신학의 흐름은 투레틴과 같은 인물을 통해 이어져 내려왔다.

17세기 후반의 코체유스는 전통적 개혁파 신학의 형식과 내용으로부터 이탈하여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맺으신 언약들을 중심으로 진리를 정리하려고 하였다. 그 당시 프랑스의 소우물 신학교의 아미랄더스는 가설적(假說的) 만인구원설을 주장하였다. 개혁교회는 그의 견해를 이단으로 정죄하지는 않았으나 경계할 오류라고 판단하였다. 그의 견해를 아미랄더스주의 혹은 소우물 학파라고 부른다.

이 외에도, 화란에서는 기스베르트 보에티우스, 영국과 스코틀랜드에서는 청교도적 대 신학자 죤 오웬과 리차드 백스터 등이 있었다. 죤 오웬은 가장 엄격하였으나 ‘신학자들의 신학자’로 알려진 자이었고, 리차드 백스터는 가장 자유로웠다. 그러나 그들은 다 경건하고 정통적인 신학자였다.

이 시기에 작성된 주요한 개혁파 신조들로는 프랑스 신앙고백(1559년), 스코틀랜드 신앙고백(1560년), 벨직 신앙고백(1561년),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1563년), 제2 스위스 신앙고백(1566년), 도르트 신경(1619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대요리문답, 소요리문답(1647년), 영국 교회의 39개 신조(1563년) 등이 있다.

16세기 후반의 필립 멜랑톤은 루터의 제자이었고 그의 저서 <신학통의(通義)>(Loci Commu- nes; ‘공통구절’)는 최초의 루터교 신학서이었다. 그는 이 책에서 로마서의 순서를 따라 기독교 교리 체계 속에 성경의 기본 구절들과 그 해석을 모았다. 초판은 루터의 사상과 완전히 일치하며 어거스틴주의적이었으나, 그 후의 판들은 에라스무스의 영향을 받아 반(半)펠라기우스주의로 변질되었다.

17세기 초의 죤 게하르트는 17세기 루터파의 가장 훌륭한 신학자로서 <신학통의(通義)>라는 책을 썼다. 그는 멜랑톤의 입장에 반대하였고, 루터의 사상과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 초판(1530년)의 사상인 어거스틴주의로 돌아갔다.

이 시기에 작성된 주요한 루터파 신조들은 루터의 요리문답(1529년),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1530년), 일치 신조(The Formula of Concord, 1577년) 등이다.

17세기의 에피스코피우스는 화란 라이덴 대학교의 신학교수 제임스 알미니우스의 영향을 받아 그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해설했으나 실상 그의 선생보다 더 나아갔다. 그는 <신학강요>라는 책을 썼다. 그와 그의 동료들은 돌트 대회의 결정들에 항거하였으므로 항론파(Remonstrants)라고 불리웠고 후에는 알미니우스파로 불리웠다.

파우스터스 소시너스의 <라코 요리문답>(1605년)은 소시너스주의의 신학서이다. 그는 삼위일체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성령의 인격성, 타락과 원죄 등을 부정하였고 그리스도의 죽음을 희생적 사랑의 모범으로 보았다. 그는 근대 유니테니안파(Unitarians)의 선조(先祖)였다.

추기경 로버트 벨라민(1542-1621년)은 이 시대에 로마 천주교회의 대변자이었다. <기독교신앙 논쟁에 관한 변론>이라는 그의 책은 로마 카톨릭 신학의 완성된 해설서이었다. 그는 교황지상주의를 옹호했고 인간의 죄와 구원에 관하여는 반(半)펠라기우스적이었다.

 

근세 시대(18세기 이후)

19세기 중엽의 촬스 핫지(Charles Hodge)는 구 프린스톤 신학교의 조직신학자로서 그의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 1871-73년)은 오늘까지 개혁파 신학의 표준적 신학서로 인정받고 있다. 그 책의 주요 주제들은 1권--서론, 1부(신론); 2권--2부(인간론), 3부(구원론; 기독론 포함); 3권--3부(계속)(구원론 계속; 성화론에 십계명 해설과 성례론을 포함함), 4부(종말론) 등이다. 에이 에이 핫지(A. A. Hodge)는 신학 개요(Outlines of Theology, 1879년)라는 그의 책에서 부친 촬스 핫지의 신학 사상을 이어 받아 신학을 평신도들을 위해 평이하게 문답식으로 정리하였다.

19세기 후반 로버트 댑니(Robert Dabney)는 미국 남장로교회의 조직신학자이었다. <조직신학강의>(Lectures in Systematic Theology, 1871년)라는 책은 그의 사후에 그의 강의록을 정리한 것이다. 윌리암 쉐드(William G. T. Shedd)도 탁월한 조직신학자이었다. 그의 <교의신학> (Dogmatic Theology, 1888-94년)은 1권--서론, 성경론, 신론; 2권--인간론, 기독론, 구원론(성례론 포함), 종말론; 3권--보충 설명 및 교리사적 참조 등을 다루었다.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의 <개혁파 교의학>(1895-1901년)은 지금까지 화란에서 표준적 신학서로 인정받고 있다고 한다. 루이스 벌코프(Louis Berkhof)는 훌륭한 <조직신학> (Systematic Theology, 1939년)을 썼는데, 그것은 박형룡 박사의 <교의신학>의 기초가 되었다. 벌코프는 전통적, 정통적 개혁신학을 그의 선배들보다 잘 정돈하여 전달하였다. 헤르만 훽스마(Herman Hoeksema)는 미국 프로테스탄트 개혁교회의 학자로서 <개혁파 교의학>(Reformed Dogmatics, 1966년)이라는 깊이 있는 개혁파 신학서를 남겼다.

박형룡 박사(1897-1978년)는 벌코프의 책을 기초로 하여 여러 개혁파 신학자들의 저서들을 참조하여 <교의신학>(7권, 1964-1973년)이라는 역작을 남겼다. 그는 그의 책 서문에서 그 책의 성격을 ‘편집’이라고 겸손히 표현하였지만, 그의 책은 실로 편집서 이상이다. 그 책은 한국의 장로교회를 위해 남겨진 신앙의 귀한 유산이다.

17세기 말과 18세기 초에 소위 ‘경건주의’라는 한 운동이 일어났다. 스페너, 프랑케, 랑게 등이 대표적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교의학을 스콜라주의적 형식에서 해방하여 성경적 단순성으로 회복시키려고 노력하였다.

19세기 초의 쉴라이엘마허는 근대 자유주의 신학의 시조로서 사람의 종교적 감정과 경험, 특히 하나님을 두려워함을 기독교의 본질로 보았다. 그는 <종교에 관한 강연과 신앙의 교리> 등의 책을 썼다.

19세기 후반의 릿츨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기독교의 본질로 보았으며 윤리적 기독교를 강조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삼위일체 되심을 부정했고 그리스도의 속죄에 관해 도덕감화설을 취하였다. 그의 대표적 저서는 <기독교의 칭의와 화목의 교리>이다.

프란시스 피이퍼(Francis Pieper)의 <기독교 교의학>(Christian Dogmatics, 1950년)은 보수적 루터파 조직신학이다. 루이스 쉐이퍼(Lewis S. Chafer)는 미국의 달라스 신학교 창설자이며 그의 <조직신학>(1947- 48년)은 세대주의적 입장을 반영한다.

바르트는 신정통주의의 시조로서 <교회교의학>(13권, 1936-62년) 등 많은 책들을 저술하였다. 그는 성경을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객관적 기록으로 보지 않으며, 성경의 유오성(有誤性)을 주장하고, 성경의 역사적 사건들의 진실성을 부정한다. 예를 들어, 그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성을 부정한다.

틸리히는 매우 자유주의적 신학자로서 <조직신학>(1963년)을 썼다. 하나님에 대한 그의 개념은 매우 철학적이다. 그는 인격적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부정하며, 하나님을 존재의 근거, 혹은 존재 자체라고 표현한다. 그는 하나님의 형벌적 공의의 속성, 그리스도의 성육신 등을 명백히 부정한다.

에릭슨(Millard J. Erickson)의 <기독교 신학>(Christian Theology, 1983-85년)은 가장 최근에 복음주의 진영에서 쓰여진 조직신학1이다. 그는 신복음주의적 입장을 취해 왔다. 그의 입장에 맞게, 그는 그의 책 첫 페이지에서 그 책을 신복음주의자 버나드 램과, 자유주의자 윌리암 호던과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에게 바친다고 썼다.

 

3. 하나님의 계시

종교와 신학

종교와 계시

참된 신학은 오직 하나님을 믿는 마음으로 연구해야 한다. 즉 신학은 경건하고 종교적이어야 한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지식의 근본이요 시작이다(잠 1:7). 경건 없는 신학은 무의미하며 무가치하다. 종교(religion) 혹은 경건이란 하나님을 알며 두려워하고 그를 믿으며 높이고 그를 섬기며 순종하는 것이다. 칼빈은, 종교란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을 가진 신뢰심이며 그에게 대한 합당한 예배를 포함한다고 말했다.7)

인류 초기의 경건한 선조들은 경건한 삶을 살았다. 아벨, 셋의 자손들, 에녹, 노아 등의 삶이 그러하다.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하나님께 제사드렸다(창 4:4). 셋의 아들 에노스 때의 사람들은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창 4:26). 에녹은 므두셀라를 낳은 후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다(창 5:22). 노아는 의인이며 당세에 완전한 자로서 하나님과 동행하였고 방주를 짓고 거기에 들어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다 준행하였다(창 6:9, 22).

경건한 선조들의 종교는 하나님의 최초의 계시에서 기원되었을 것이다. 그것이 어떤 종류의 계시이었는지는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여하튼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 하나님께서 그들을 에덴 동산에서 내어쫓으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위해 가죽옷을 지어 주셨다(창 3:21). 그것은 그가 그 옷을 위해 짐승들을 죽였음을 의미하며 거기에 짐승 제사의 어떤 암시가 있었던 것 같다. 그 후,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하나님께 제사드렸고(창 4:4), 오랜 후 노아도 여호와를 위해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 번제로 단에 드렸다(창 8:20).

 

 종교의 두 요소

종교는 두 가지 요소를 가진다. 첫째로, 종교는 하나님의 계시와 교훈, 그리고 예배 의식들을 가진다. 이것은 종교의 객관적 요소이다. 구약에서 이런 요소는 ‘율법’(토라)이라는 말로 요약된다(신 1: 5). 그것은 또한 ‘말씀,’ ‘명령,’ ‘법도,’ ‘규례’ 등 여러 말로 표현된다. 구약의 율법은 도덕적 계명들과 교훈들 뿐 아니라, 또한 제사 의식들과 성전 예배 등을 포함한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요구를 표현하기를,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는 것이라고 하였다(신 10:12-13). 신약에서 종교의 객관적 요소는 ‘복음’(福音)이라는 말로 요약된다. 그것은 ‘말씀,’ ‘진리’ 등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에베소서 1:13은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라고 말했다. 신약의 복음은 또한 세례와 성찬 의식을 포함한다(마 28:19; 고전 11:23-26).

둘째로, 종교는 사람이 하나님께 대해 가지는 두려움과 경건을 포함한다. 이것은 종교의 주관적 요소이다. 구약에서 이런 요소는 ‘경외(敬畏)하다’는 말로 요약된다(잠 1:7). 그것은 ‘사랑하다,’ ‘듣다,’ ‘행하다,’ ‘지키다,’ ‘섬기다’ 등으로도 표현된다. 신약에서 종교의 주관적 요소는 ‘믿는다’는 말로 요약된다(요 3:16). 그것은 ‘예배하다,’ ‘섬기다’(요 4:24; 행 13:2; 롬 12:1; 딤전 4:7; 약 1:27)는 말로도 표현된다.

 

종교의 좌소

종교 특히 경건의 좌소(座所, 자리)는 어디인가? 철학자 칸트는 종교를 사람이 그 도덕적 의무를 수행하는 주된 행위로 보았다. 헤겔은 종교를 포함하여 사람의 전(全)생애를 단지 사상 혹은 관념의 과정으로 보았다. 현대 자유주의의 시조 슐라이엘마허는 종교의 본질을 하나님을 의지하는 감정으로 보았다. 이처럼 종교의 본질을 어떤 이들은 의지의 면에, 어떤 이들은 지식의 면에, 다른 이들은 감정의 면에 치우쳐 이해하였다. 그러나 참된 종교 혹은 경건은 단순히 사람의 지식이나 감정이나 의지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세 요소 전체를 가진 ‘마음’(heart)에 있다.

그러므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말했다(신 6:5). 바울은 로마서에서 성도의 믿음을,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라는 말로 표현하였다(롬 6:17). 또 그는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고백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말했다(롬 10:9-10). 마음에서 우러나온 두려움과 믿음이 참된 종교요 참된 경건이다. 다시 말해, 종교는 단순히 지식주의도, 감정주의도, 도덕주의도 아니요, 지식과 감정과 의지의 세 요소를 다 포함하는 마음의 문제 즉 전(全)인격의 문제인 것이다.

 

종교와 신학의 관계

종교는 삶의 문제요 신학은 사상의 문제이므로, 종교의 범위는 신학의 범위보다 더 넓다. 그러나 그 둘은 서로 분리될 수 없이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참된 종교는 건전한 신학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만일 어떤 종교가 건전한 신학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맹목적 종교 혹은 미신(迷信)에 불과할 것이다. 하나님을 바르게 믿고 섬기려는 자는 그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지지 않고 그렇게 할 수는 없다. 예수께서는,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 17:3). 또 베드로 사도는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고 권면하였다(벧후 3:18).

기독교는 단순히 감정주의 혹은 신비주의나 도덕주의가 아니고, 전인격적 마음의 종교이다. 이와 같이, 참된 종교는 반드시 건전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어떤 이들은 바른 지식 없이 신앙 생활과 봉사 생활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물론, 바른 지식이 곧 믿음과 봉사는 아니다. 그러나 실제로 바른 지식 없이 바른 믿음과 바른 봉사는 불가능하다. 교회 목회의 경우도, 목사가 신학 지식만 가지고 목회할 수 있는 것은 아니나, 바른 신학 지식 없이도 바르고 충실하게 목회할 수 있다는 생각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다른 한편, 건전한 신학은 참된 종교 혹은 경건으로 나타나야 한다. 신학은 단순히 지식 활동에 그쳐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죽은 개념들만을 다루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종류의 신학 활동을 요구하거나 기뻐하지 않으신다. 예수께서는 구약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하기를,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라고 하셨다(마 15:8).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지식이 바로 그러하다. 그러므로 신학이 참된 의미를 가지려면 반드시 종교의 일부분이어야 한다. 만일 신학이 참된 경건과 믿음을 가지고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 신학은 이미 신학으로서의 의미와 가치를 잃은 것이다. 경건 없는 신학은 형식주의와 위선에 불과하다. 죽은 자가 어찌 살아계신 하나님을 이해하며 논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건전한 신학은 반드시 참된 종교와 참된 경건으로 표현되며, 건전한 신학자는 먼저 참된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잘못된 계시 개념

기독교는 하나님의 계시에서 시작되며 기독교 신학은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한다. 계시(啓示, revelation)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자신을, 즉 자신의 속성과 뜻을 나타내시는 행위이다.

역사상, 계시에 대해 잘못된 생각들도 있었다. 그 중 하나는 자연신론(自然神論, Deism)이다. 이것은 이신론(理神論) 혹은 초연신론(超然神論)이라고도 불린다. 자연신론이란 하나님께서 그가 창조하신 자연세계를 초월해 계시며 자연질서를 간섭지 않으시고 오직 자연만물을 통해서만 자신을 나타내신다는 생각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인격성을 인정하나 그의 초월성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결국 하나님의 기적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과 속죄 등 하나님의 초자연 계시나 특별계시를 부정하고, 자연 계시나 일반계시만 인정한다. 초기 자유주의 신학은 대체로 이런 입장이었다. 그러나 자연신론은 성경의 계시개념과 명백히 다르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가 창조하신 자연세계를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으셨다. 성경이 증거하는 대로, 그는 역사상 수없이 많이 세상에 내려오셨고 때때로 초자연적 기적들을 통하여 자연질서 속에 직접 개입하셨고 자신을 드러내셨다.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다른 하나의 오류는 범신론(汎神論, Pantheism)이다. 범신론이란 하나님께서 자연만물 속에 충만히 내재(內在)해 계시며 자연만물 자체가 하나님을 나타낸다는 생각이다. 범신론은 하나님과 자연만물 곧 우주를 동일시한다. 또 그것은 인간의 본성을 자연만물의 일부, 즉 하나님의 일부로 보고 인간이 자신의 본성을 묵상함으로써 하나님에 관해 알 수 있고 논할 수 있다고 본다. 범신론은 자연신론과 달리 하나님의 초월성 대신 그의 내재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자연신론과 같이 범신론도 하나님의 자연계시나 일반계시만 인정하고 초자연계시나 특별계시는 부정하고 만다. 범신론에서는 엄격한 의미에서 인격적 하나님의 계시를 생각하기 어렵다. 오늘날 다수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범신론적이다. 그러나 범신론은 성경의 계시 개념과 명백히 충돌된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충만하시지만 동시에 세상을 초월해 계신다. 그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시다(단 2:18; 3:26). 그는 세상이나 인간과 본질상 무한한 차이가 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결코 피조세계와 동일시 될 수 없으시다. 그러므로 인간은 결코 본성을 묵상함으로써 하나님에 관한 확실한 지식을 얻을 수 없다.

 

일반계시

하나님의 계시들에는, 그 방식에 따라, 하나님께서 자연만물과 그 현상들을 통해 자신을 나타내시는 ‘자연 계시’와, 하나님께서 기적들을 통해 자신을 나타내시는 ‘초자연 계시’가 있고, 계시의 목적에 따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창조자와 일반적 섭리자로 나타내시는 ‘일반계시’와, 하나님께서 자신을 죄인들의 구주로 나타내시는 ‘특별계시’가 있다.

일반계시란, 하나님께서 자신을 창조자와 일반적 섭리자로 나타내시는 행위이다. 하나님은 자연만물과 그 현상들을 통하여 자신을 나타내신다. 다윗은 성령의 감동으로 말하기를,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라고 하였다(시 19:1). 사도 바울도,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고 말했다(롬 1:20). 또 그는 하나님께서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통하여 자신을 증거하셨다고 말했고(행 14:17), 그가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않고 우리가 그 안에서 살며 움직이며 존재한다’고 했다(행 17:27-28).

하나님은 또한 사람의 마음을 통하여 자신을 나타내신다.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의식 혹은 생각과, 하나님의 도덕성을 반영하는 양심이 있다. 이런 것을 ‘종교의 씨앗’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고 했다(롬 1:19). 또 그는 양심을 가리켜 ‘마음에 새겨진 하나님의 율법’이라고 표현하였다(롬 2:15).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 자신을 나타내기도 하신다. 대체로, 사람들은 경험적으로 하나님께서 악한 자들을 징벌하신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이것은 역사상 전쟁이나 천재지변,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질병이나 경제적 고난 등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신 결과이다.

이처럼 일반계시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 의와 선 등을 어느 정도 나타낸다. 그러나 일반계시는 제한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주지 못한다. 그것은 죄인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지식을 주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자연만물은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고 혼란과 부패 속에 있다. 땅은 저주를 받았고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되었다(창 3:17-18). 저주받은 땅에는 자연적 재해들과 질병들이 가득하다. 피조세계는 지금 허무한 데 굴복하며 탄식하고 있다(롬 8:20-22). 그러므로 자연만물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하나님의 지식은 매우 불완전하고 불충분할 수밖에 없다.

더욱이, 사람의 마음은 죄로 인해 어두워져 있다. 이사야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을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라고 표현하였다(사 9:2). 사도 바울은 이방인들을 묘사하기를, “저희 총명[이해력]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라고 했고(엡 4:18)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했다(고전 1:21). 그러므로 사람의 마음은 죄로 인해 어두워져 있어서 일반계시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한 제한된 지식조차도 가지지 못하며, 빈번히 헛된 우상숭배에 떨어진다(롬 1:21-23). 이런 점에서 일반계시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지극히 부수적 혹은 보조적 역할을 할 뿐이다.

일반계시에 근거한 하나님의 지식을 ‘자연신학’(natural theology)이라고 부른다. 로마 천주교회는 하나님과 피조물간에 ‘존재적 유사성(類似性)’이 있기 때문에 피조물에 대한 지식을 통하여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천주교 신학에서는 일반계시에 근거한 자연신학이 신학의 한 본질적 부분이다. 즉 천주교 신학은 이층 구조인데 1층은 자연신학이며 2층은 계시신학이다.

사람이 중생하기 전에는 영적으로 어두워 있어서 일반계시를 잘 이해하지 못하지만, 중생한 후에는 성령의 지혜와 깨달음을 받으므로 그것을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중생하지 못한 자에게 일반계시에 근거한 자연신학은 불가능하지만, 중생한 자에게는 그것이 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8) 그러나 로마 천주교회의 생각과 달리, 기독교 신학에서 자연신학은 본질적이지 않고 단지 보조적일 뿐이다. 또한 일반계시는 그 해석이 과장되거나 그 적용이 잘못되기 쉽기 때문에 매우 조심스럽게 취급되어야 한다. 일반계시는 항상 특별계시인 성경의 빛 아래서 통제되어야 한다

 

특별계시

기독교 신학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특별계시에 의존한다. 특별계시란, 하나님께서 자신을 죄인들의 구주로 나타내시는 행위를 가리킨다.

 

 특별계시의 목적

사람이 일반계시만으로는 참 하나님과 자신의 죄악의 심각성과 죄인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특별계시가 필요하였다. 여기에 특별계시의 목적도 있다. 즉 특별계시는 사람으로 하여금 참 하나님을 바로 알고 죄로부터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한 계시, 곧 죄인들을 위한 구원의 계시인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네가 있기 전 하나님이 사람을 세상에 창조하신 날부터 지금까지 지나간 날을 상고하여 보라.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이런 큰 일이 있었느냐? 이런 일을 들은 적이 있었느냐? . . . 이것을 네게 나타내심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네게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4:32-35).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절정은 그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가장 특별한 마지막 계시이시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목적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었다’(요 3:16). 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1은 이렇게 진술한다: “비록 본성의 빛과, 창조와 섭리의 일들이 하나님의 선하심과 지혜와 능력을 나타내므로 사람들로 핑계할 수 없게 하지만, 그것들은 구원을 위해 필요한 하나님과 그의 뜻에 대한 지식을 주는 데 충분치 못하다. 그러므로 주께서 여러 시대에 여러 방식들로 자신을 계시하시고 그의 교회에게 그의 뜻을 선언하시기를 기뻐하셨고.”

 

특별계시의 방식

하나님께서는 인류 역사상 신현(神現), 말씀, 그리고 기적이라는 세 가지의 특별한 방식으로 자신을 계시하셨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육신의 눈으로 뵈올 수 없는 영(靈)이시지만(요 4:24; 딤전 6:16), 사람들에게 종종 자신의 모습을 직접 나타내셨다. 우리는 이것을 신현(神現, theophanies) 혹은 ‘하나님의 나타나심’이라고 부른다.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께서는 첫 사람과 매우 친근히 교제하셨다. 그는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셨다’(창 3:8).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불과 구름으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셨다. 하나님께서 처음 모세를 부르셨을 때, ‘여호와의 사자는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모세에게 나타나셨다’(출 3:2). 또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 도달했을 때, 여호와께서는 연기가 자욱한 가운데, 불 가운데서 시내산에 내려오셨다(출 19:18).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성막을 만들어 드렸을 때도, 구름이 그것을 덮었는데, 성경은 그것을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였다’고 표현하였다(출 40:34). 후에,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봉헌했을 때도 구름이 그 곳에 가득하였다(왕상 8:10).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천사 혹은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 창세기 18:1-2,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오정 즈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았다가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 편에 섰는지라.” 이 세 사람 중 한 분이 하나님이셨다(10, 13절; 19:1 비교). 야곱은 얍복강가에서 어떤 사람과 날이 새도록 씨름한 후에 ‘내가 하나님을 대면하여 보았다’고 증거했다(창 32:24, 29, 30). 선지자 호세아는 그 사건에 대해 ‘야곱이 장년에 하나님과 힘을 겨루되 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겼다’고 언급한다(호 12:3-4).

하나님의 나타나심의 절정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 사건이었다. 요한복음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라고 증거한다(요 1:14). 주 예수께서는 아버지를 보여주시기를 요청하는 빌립에게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라고 말씀하셨다(요 14:9). 바울도 디모데전서 3:16에서 ‘하나님은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셨다’(전통사본)고 증거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최종적, 절정적 계시이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나타나신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지 않으셨다. 그는 말씀하신 하나님이셨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1:1은 하나님을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라고 묘사한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음성으로 말씀하셨다. 모세는 자주 그의 음성을 들었다. 하나님께서 미디안 광야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부르셨을 때, 그는 음성으로 ‘모세야’라고 말씀하셨다(출 3:4). 시내산 앞에서도 ‘모세가 말할 때 하나님께서 음성으로 대답하셨다’(출 19:19). 또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 여호와께 말씀할 때에 증거궤 위 속죄소 위의 두 그룹 사이에서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목소리를 들었다’(민 7:89). 하나님께서는 친히 증거하시기를, ‘모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아니하였다’고 하셨다(민 12:8).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 빈번히 꿈이나 이상(異象)으로 말씀하셨다. 그러한 현상들은 정신 없는 혼미한 상태에서 일어난 애매모호한 사건들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명확한 계시 사건들이었다. 창세기 15:1은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였다’고 증거한다. 야곱은 꿈에 ‘여호와께서 사닥다리 위에 서서 말씀하시는 것’을 보았다(창 28:12-13). 하나님께서는 아론과 미리암에게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이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였다”고 말씀하셨다(민 12:6). 신약시대에도 꿈과 이상은 종종 하나님의 계시의 도구로 사용되었다(마 1:20; 행 9:10).

하나님께서는 더욱 빈번히 성령의 특별한 감동으로 말씀하셨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성령의 특별한 감동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전달하였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는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고 증거했다(벧후 1:21). 우리는 선지자들에게 주신 성령의 특별한 감동의 방식을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선지자들이 자신들의 생각과 하나님의 말씀을 명확히 구별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선지자들은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등의 표현을 빈번히 사용하였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구약시대의 우림과 둠밈도 이와 관련이 있다. 사무엘상 28:6은 ‘사울이 여호와께 묻자오되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지 아니하셨다’고 증거한다. ‘우림과 둠밈’의 말뜻은 ‘빛과 완전함’이다. 그것은 대제사장 아론의 판결 흉배 안에 넣어두는 어떤 물건이었던 것 같다(출 28:30).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판단하는 도구가 되었는지 잘 알 수는 없지만, 그것을 지닌 대제사장은 하나님의 영의 깨닫게 하심을 받았던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의 말씀하심의 절정적 사건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이었다. 히브리서 1:1-2는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고 증거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자신의 특별계시이며, 그의 모습은 하나님의 모습이며, 그의 음성은 하나님의 음성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가장 특별한 마지막 계시이시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기적들을 행하셨다. 기적을 표현하는 세 단어는 ‘기사,’ ‘능력,’ ‘표적’이다. ‘기사’(奇事, wonder)라는 말은 그것이 사람에게 놀라움을 준다는 사실을 나타내며, ‘능력’(power)이라는 말은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을 증거한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기적을 위해 가장 빈번히 사용되는 ‘표적’(表蹟, sign)이라는 말은 그것이 하나님의 진리를 확증하는 표라는 사실을 나타낸다. 이 세 단어 중, 표적이라는 말이 가장 중요하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적[표적]과 기사와 전쟁과 강한 손과 편 팔과 크게 두려운 일로’ 애굽에서 건져내신 것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알게 하기 위함’이셨다(신 4:34-35). 요한은, 자신이 그의 복음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표적들을 몇 가지 증거하는 목적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사람들로 믿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한다(요 20:30-31).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다’고 말한다(행 2:22). 히브리서는 ‘하나님께서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으로 사도들과 함께 복음을 증거하셨다’고 표현한다(히 2:4).

성경에서 기적들이 일어난 시대는 주로 네 시대이었다. 각 시대마다 기적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확증하였다. 첫 번째는 모세와 여호수아의 시대이었다. 그 시대는 하나님의 율법의 전달, 기록 및 확증을 통해 구약 계시의 기초를 확립한 시대이다. 두 번째는 엘리야와 엘리사의 시대이었다. 그 시대는 참종교가 심히 쇠약하고 거짓된 이방신인 바알과 아세라 숭배가 심히 왕성했던 배교의 시대이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기적들을 통해 참된 경건과 진리의 지식을 확증하셨다. 세 번째는 다니엘과 세 친구들의 시대이었다. 그 시대는 이스라엘의 포로 시대로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망하고 이방 나라들의 권세가 극히 우세했던 시대이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여전히 세상의 왕이요 주권자이심을 증거하셨다. 네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시대이었다. 그 시대는 구약이 예언한 메시야가 오신 시대요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절정과 완성의 시대이었다.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많은 기적들을 주신 것은 매우 합당하였다. 그 시대에 성경이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완전하고 충족한 기록물로서 완성되었다.

 

특별계시의 성격

하나님의 특별계시는 몇 가지 성격을 가진다. 첫째로, 그것은 언어적 성격을 가진다. 하나님의 특별계시들의 전달 수단은 인간의 언어이었다. 비록 사건 계시라 하더라도 반드시 그 사건의 설명이 뒤따랐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언어로 특별계시를 주심으로 우리로 그 계시를 잘 이해할 수 있게 하셨다. 여기에서 인간의 언어의 인식적(認識的, cognitive) 기능은 당연한 것으로 전제된다. 만일 누가 인간 언어의 인식적 기능을 부정하고 언어의 불완전성만을 주장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특별계시를 불신하고 부정하는 자가 될 것이다.

신정통주의라고 불리는 신학은, 하나님의 특별계시를 강조하면서도 그것이 객관적으로 기록될 수 없고 단지 주관적으로만 경험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하나님의 특별계시를 불신임하고 결국 그것을 부정하고 있다. 신정통주의는 계시를 단지 하나님과 사람의 인격적 만남에서 일어나는 사건으로 본다. 신정통주의는 단지 하나님의 인격적-경험적 계시를 주장하고, 그의 언어적-명제적(命題的, propositional) 계시를 부정한다. 그러나 신정통주의의 이러한 계시 개념은 비성경적이다. 하나님의 특별계시는 인격적-경험적일 뿐만 아니라, 또한 언어적-명제적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언어로 말씀하셨고 그 말씀들을 객관적으로 명확히 성경책에 기록되게 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시의 객관성을 부정하는 것은 기록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하나님의 진리라는 것을 불신하는 근본적 오류다. 그것은 명백히 이단적 사상이다.

둘째로, 하나님의 특별계시는 역사적(歷史的) 성격을 가진다. 하나님의 모든 특별계시는 역사적 계시사건들이었다. 성경의 절반 가량은 역사이다. 또한 역사가 아닌 내용들, 즉 예언들, 시들, 서신들도 어떤 특정한 역사적, 문화적 상황들 속에서 주어졌다. 예컨대, 이사야가 본 이상(異象)과 받은 예언의 말씀들은 “유다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주어졌다(사 1:1). 또 에스겔이 처음 하나님의 이상을 본 것도 ‘제30년 4월 5일에 그가 그발강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었을 때’이었다(겔 1:1). 하나님은 역사적, 문화적 상황들을 계시의 수단으로 사용하셨다.

자유주의 신학은 성경에 증거된 사건들의 신빙성을 부정한다. 그들이 말하는 계시 사건은 사람들이 경험하는 일상적 역사(Historie)가 아니고, 하나님의 세계의 사건의 역사 혹은 초월적 역사(Geschichte)이다. 그러나 이렇게 두 차원의 역사를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역사적 성격을 혼동시키고 실상 부정하는 것이다. 초월적 역사란 역사가 아니다. 초월적 역사로서 계시 사건들을 긍정하는 것은 성경의 사건들을 긍정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들의 객관적 역사성을 부정하는 것이요 실상 그 사건들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명백히 이단적이다.

셋째로, 하나님의 특별계시는 점진적(漸進的) 성격을 가진다.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점진성은 구약의 역사를 살펴봄으로써 또 특히 구약과 신약을 비교해 봄으로써 분명해진다.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중심 인물인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시대에 예를 들어 ‘뱀의 머리를 밟으실 여자의 후손’으로(창 3:15), ‘아브라함의 씨’로(창 12:7; 22:18), 성막제도와 제사의 규례들로(출애굽기, 레위기), 그리고 ‘다윗의 씨’로 예표적으로 또는 예언적으로 점점 계시되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신약시대가 되어, 그는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인류의 구주로 최종적으로, 절정적으로 밝히 계시되셨다. 하나님의 특별계시에 있어서 구약은 그림자요 신약은 실체이며, 구약은 약속이요 신약은 성취이었다. 하나님의 계시는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에 걸쳐 점진적으로 더 확실하고 풍성하게 계시된 것이다.

 

특별계시의 종결성과 계속성

하나님의 특별계시가 끝났는가 혹은 오늘도 계속되는가라는 문제는, 하나님께서 역사상 주신 특별계시들, 이미 성경에 기록된 그 계시들이 충족한가라는 문제와 관련된다. 만일 하나님께서 역사상 당신의 뜻을 충족히 계시하셨다면, 하나님의 특별계시는 더 이상 필요치 않을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충족성을 말씀하고 있다. 주 예수께서는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에서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다(눅 16:31). 이것은 구약의 충족성을 잘 증거한다. 히브리서는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라고 기록한다(히 1:1-2). ‘이 모든 날 마지막에’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그 내용인 신약 계시가 하나님의 최종적, 절정적 계시임을 증거한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신약 계시에 첨가할 또 다른 어떤 계시가 필요치 않다는 것을 증거한다.

사도 요한도 요한계시록 맨 끝부분에서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고 엄숙히 말하였다(계 22:18-19). 이것은 이 마지막 책에 기록된 하나님의 종말 예언의 말씀이 충분하다는 것을 증거한다. 이상의 모든 말씀들은, 하나님의 특별계시가 충족히 주어졌기 때문에 이제는 그것이 더 이상 필요치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특별계시의 종결성이라고 표현될 수 있다. 그것은 엄격히 말해 특별계시의 이전 방식들의 종결이다. 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1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그의 뜻을 계시하시던 이전의 그 방식들은 지금은 중지되었다”고 진술하였다.

물론 그것은 오늘날 하나님께서 자신을 더 이상 계시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고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고 자신을 계시하신다는 뜻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과거의 특별계시들의 기록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현재의 특별계시의 수단이다. 성경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이다.

 

 

 4. 성경의 정경(正經)

성경은 구약 39권과 신약 27권뿐이다. 이 66권은 신앙생활의 규범이라는 뜻에서 ‘정경’(正經, canon)이라고 불린다.

 

구약의 정경성

정통적 유대교에 의하면, 구약 39권은 최종적으로 주전 5세기경 에스라와 대공회원들에 의해 수집되고 결정되었다. 주후 1세기 경의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증거하기를, 에스라의 생존시 아닥사스다 롱지마누스 통치 때(주전 464-424년) 정경이 완성되었고 그 이후엔 선지적 말씀 사역이 중지되었으므로 성경과 같은 권위를 가진 책들이 없었다고 했다.9) 탈무드는, “후기의 선지자들인 학개, 스가랴, 말라기 후 성령께서는 이스라엘을 떠나셨다”고 기록한다.10)

우리는 정통 유대교의 전통을 받아들인다. 에스라 시대는 율법들과 선지서들과 성문서들을 다 수집하기에 적합한 때이었다. 또 ‘율법에 익숙한 학자’(스 7:6) 에스라는 성경을 수집하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다. 주후 100년경 잠니아 회의에서 정경성의 문제가 토론되었다는 기록에 근거하여 구약 정경이 그 때까지 확정되지 않았다는 추측은 타당하지 않다. 정경성을 의문하는 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정경이 확정되지 않은 증거는 아니기 때문이다.

유대교가 구약 39권만 정경으로 확정한 것은, 그것들만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책들이라는 믿음에 근거한 것이다. 모세와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직접 하나님의 말씀들을 받았고 그 말씀들을 신실하게 전달하였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성령의 특별한 감동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모세와 대면하여 명백히 말씀하셨다(민 12:6-8). 선지자 미가야는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것 곧 그것을 내가 말하리라”고 말했다(왕상 22:14). 참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는 명백히 구분되었다. 참선지자는 경건한 자들에 의해 즉시 인정되었고 그의 글은 신적 권위를 가진 것으로 즉시 인정되었다. 거기에는 오랜 사색과 변론이 필요치 않았다. 신약교회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증거가 추가된다.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은 정통 유대교의 성경관을 그대로 받아들이셨다.

구약 39권 외에, 외경(外經, Apocrypha)이라고 하는 13권 가량의 책들이 있다. 그것들은, 토비트, 유딧, 에스더, 지혜서, 집회서, 바룩, 세 아이들의 노래, 수산나, 벨과 뱀, 마카비 1서, 마카비 2서, 에스드라 1서, 므낫세의 기도 등이다. 외경은 대략 주전 300년부터 주후 100년 사이에 기록된 것들이다. 외경은 신구약 중간 시대의 유대교 사상을 반영한다. 거기에는 우상숭배의 사라짐, 유일신 신앙의 성장, 메시야 소망, 부활과 미래의 보상과 형벌에 대한 신념 등이 나타나 있다.

천주교회는 종교개혁 후 트렌트 회의에서 1546년 구약의 에스드라 1, 2서와 므낫세의 기도를 제외하고 모든 외경들을 정경에 포함시켰고, 제외된 3권은 부록으로 포함되었다. 1870년 천주교회의 제1 바티칸 회의는 트렌트 회의의 결정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개신교회는 외경들을 영감된 성경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3은, “보통 외경(外經)이라고 불리는 책들은 하나님의 영감에서 나온 것이 아니므로 성경의 정경(正經)의 한 부분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교회에서 아무 권위도 갖지 못하며 다른 인간적 글들보다 다른 것으로 인정되거나 사용될 것이 아니다”라고 진술하였다.

개신교회가 외경들을 정경에서 제외시키는 이유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정통 유대교는 외경을 정경으로 인정치 않았으므로 히브리어 성경은 외경들을 포함하지 않는다. 주후 2세기 유대인의 탈무드 바바 바드라(Baba Bathra)는 거룩한 책들의 목록에 오늘날 우리의 39권만 포함하였다. 주후 1세기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그의 아피온 반박에서 동일한 목록을 언급하였다(I. 8; Green, pp. 119-120).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은 정통 유대교의 정경을 받아들였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유대인의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셨고 권위 있게 인용하셨다(마 4:4; 22:29; 요 5:39; 10:35).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맡겨졌다고 말했고(롬 2:1-2) 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고 증거하였다(딤후 3:16). 예수님과 사도들은 구약성경으로부터 많은 구절들을 인용하셨으나, 외경으로부터는 한 구절도 인용하지 않았다.

셋째로, 초대 교회는 구약 39권만을 영감된 성경으로 받아들였다. 주후 2세기, 사르디스의 감독 멜리토는 오늘날 우리의 구약 39권과 거의 같은 목록을 증거하였다. 단지 에스더서가 생략되어 있다. 같은 시대에, 옛 수리아어역은 오늘날 우리의 39권만 가지고 있다(Green, p. 162). 주후 3세기, 헬라 교부 오리겐은 우리와 같은 구약 정경을 증거하였다(Eusebius, Ecclesiastical History, VI, 25). 윌리암 그린은 말하기를, “이와 같이, 우리는 2세기와 3세기에 멜리토에게서와 옛 수리아어역에서 동방 교회의 증거들과, 오리겐에게서 헬라 교회의 증거와, 터툴리안에게서 라틴 교회의 증거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들은 다 합쳐서 개신교회의 정경을 인정하고 외경을 배제한다”고 하였다(Ibid., p. 164). 4세기 이후에는 증거들이 더 풍부하다.

넷째로, 외경은 내용상 역사적 진실성, 성경과의 조화, 도덕적 표준 등에 있어서 결함을 가지고 있다. 토빗과 유딧은 지리적, 연대적 오류들을 가지고 있다. 그 책들은 미신을 조장하고 거짓말을 정당화하며, 구원과 죄 용서를 공로적 행위에 의존시킨다. 솔로몬의 지혜는 유출설(流出說)과 영혼들의 선재, 선재하는 물질로부터의 세상 창조 등을 주장한다. 집회서는 구제가 죄를 속한다고 말하며 노예에 대한 잔인함이나 사마리아인들에 대한 미움을 정당화한다. 바룩에는 잘못된 역사적 진술들과 하나님께서 죽은 예레미야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말이 있다. 마카비 1서에는 역사적, 지리적 오류들이 있고, 마카비 2서에는 전설과 우화, 또 자살의 정당화, 죽은 자를 위한 기도들과 예물 등이 나온다(Green, pp. 195-200; Unger, Introductory Guide, pp. 108-12).

외경 외에 가경(假經, Pseudepigrapha) 혹은 묵시문학(黙示文學, Apocalyptic Literatures)이라고 하는 책들도 있다. 이 책들은 대략 계시, 전설, 시, 교훈 등으로 분류된다. 계시에는 에녹서, 바룩의 계시, 모세의 승천, 이사야의 승천, 스바냐의 계시 등이 있고, 전설에는 아담의 언약, 열두 족장의 언약, 욥의 언약, 솔로몬의 언약, 노아서, 아리스테아스의 편지 등이 있다. 시에는 솔로몬의 시 등이 있고, 교훈에는 모세의 마술서, 마카비 3서, 마카비 4서 등이 있다. 그러나 가경이라는 책들은 교회 안에서 권위 있게 인정받지 못하였다.


신약의 정경성

사복음서들과 바울 서신들 등 신약의 대다수는 기록된 즉시 신적 권위를 가진 영감된 책들로 인정되었으나 어떤 책들은 전체 교회의 인정을 받는 데 얼마간 시간이 걸렸다. 그것은, 그 책들을 직접 받지 않았던 지역들에서 그것들의 사도적 저작성 혹은 승인을 확인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2세기 이전에 수리아 그리스도인들의 성경인 페쉬타 수리아어역은 베드로후서, 요한이서, 요한삼서, 유다서, 요한계시록을 제외한 모든 책(22권)을 포함하였다. 또한 2세기의 옛 라틴어역은 히브리서, 야고보서, 베드로후서 3권만 생략하였다. 주후 325년 유세비우스는 그의 교회사에서 정경 문제에 관계된 책들을 세 부류로 나누었다: ① 보편적으로 인정된 책(호모로구메나)--네 복음서들, 사도행전, 바울 서신들, 요한일서, 베드로전서, 요한계시록, ② 논쟁된 책(안티레고메나)--야고보서, 유다서, 베드로후서, 요한이서, 요한삼서, ③ 거짓된 책(노다)--바울의 행전, 베드로의 계시록, 바나바의 서신 등 많은 수의 외경 복음들, 사도행전들, 서신들, 계시록들(Eusebius, III, 25). 그러나 주후 397년 칼타고 회의에서 모든 서방 교회들은 신약 27권을 정경으로 수납하고 확인하였고, 주후 500년경 동방의 모든 교회들도 그러하였다.

교회가 신약 27권을 정경으로 인정한 근거는 다음 네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내용이다.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대해 증거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의 특별계시 중의 특별계시이며 그의 최종적, 절정적 계시이다. 그는 구약 예언들의 성취로 오셨다. 구약의 특별계시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께 집중되어 있었다. 예수께서는 구약에 예언된 바로 그 메시야이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구약 예언들의 성취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관한 내용인 신약은 하나님의 책으로 인정되었다.

둘째는 사도성(使徒性)이다. 주께서 친히 세우신 사도들은 그로부터 말씀 전파에 대한 특별한 명령을 받았고(마 28:16-20) 또 주께로부터 성령에 대한 특별한 약속을 받았고(요 14:26; 16:13) 또 주께로부터 기적을 행하는 특별한 능력의 표를 받았다(마 10:1). 사도들의 역할과 권위가 이러했기 때문에, 그들이 전한 내용들과 그들이 기록한 책들은 신적 권위를 가졌고 신앙과 행위의 규범이 되었다.

마가복음, 누가복음, 사도행전, 히브리서, 야고보서, 유다서는 사도들이 직접 쓰지 않았지만, 사도들의 인정을 통해 성경으로 받아들여졌다. 마가복음의 저자인 마가는 베드로의 동역자이었다(벧전 5:13). 전해진 바에 의하면, 그는 베드로의 통역자이었다. 마가는 또한 바울의 동역자이기도 하였다(딤후 4:11).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 역시 바울의 동역자이었다(골 4:14; 딤후 4:11). 오리겐에 의하면, 마가는 베드로가 그에게 설명한 대로 복음서를 썼고, 누가복음은 바울이 추천한 복음서이었다(Eusebius, VI, 25). 그들의 책들은 베드로와 바울의 권위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히브리서는 확실히 사도 바울의 권위 아래 받아들여졌다. 히브리서 13:23에 “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인 것을 너희가 알라. 그가 속히 오면 내가 저와 함께 가서 너희를 보리라”는 말씀은 히브리서 저자가 디모데와 가깝고 따라서 바울이거나 바울이 잘 아는 인물임을 보인다. 야고보서의 저자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이었던 것 같다(마 13:55). 그렇다면 그는 예루살렘 교회의 유력한 지도자이었고 사도적 인물이었다(행 15:13; 갈 1:18- 19). 바울은 갈라디아서 2:9에서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라는 표현을 하였다. 유다서의 저자 유다는 자신을 ‘야고보의 형제’라고 표현하였다(유 1). 그 책은 야고보의 권위로 받아들여졌다. 이와 같이, 신약은 사도들이 직접 썼거나 그들의 인정을 받은 책들이었다.

셋째는 영감이다. 사도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얻어 성령으로 가르치고 전파한 자들이었다. 그들의 교훈과 글들은 사람의 견해가 아니고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들이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7:40에서 “나도 또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줄로 생각하노라”고 말했고 고린도전서 14:37에서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고 말했다. 베드로는 베드로후서 3:15-16에서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고 말했다. 그것은 그가 바울의 편지들을 성경과 동등한 권위의 책들로 간주했음을 보인다. 요한은 요한계시록 22:18-19에서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고 썼다. 주후 95년경 로마의 클레멘트는 기록하기를, “복된 사도 바울의 서신을 들고 보라.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한 때에 그가 무엇을 너희에게 썼는가? 그는 참으로 성령의 감동으로 너희에게 썼다”고 하였다.

넷째는 보편성이다. 초대 교회들은 신약 책들을 보편적으로 받아들였다. 비록 몇 권의 책들이 어떤 지역들에서 변론되었지만, 대부분의 책들은 일찍부터 인정을 받았고, 4세기말에 와서 서방 교회는 신약 27권을 정경으로 확인하였고 500년경 동방교회도 그러하였다. 교회의 이러한 보편적 인정은 2천년의 시대적 간격을 가진 오늘 우리들에게 중요한 증거가 된다.

이와 같이, 신구약 66권의 책들은 교회에서 신앙과 생활의 정확무오한 유일한 규칙으로 인정되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10은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그에 의해 모든 종교상의 논쟁들이 결정되어야 하며, 그에 의해 모든 회의들의 작정들, 고대 저자들의 견해들, 사람들의 교리들, 개인의 정신들이 검토되어야 하며, 그의 선고를 우리가 신뢰해야 하는 최고의 심판자는 오직 성경 안에서 말씀하시는 성령뿐이시다.”

  

   5. 성경의 본문(Text)

성경 원본(原本)의 무오성(無誤性)의 교리는 성경 본문(本文, text)의 문제를 제기한다. 이것은 특히 신약성경의 본문에 있어서 오늘날 매우 논쟁적인 주제이다.

 

본문의 자료들

사본들

신약성경의 원본은 아마 두루마리 형태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후 2세기 전반부에 파피러스 묶음인 책 형태가 나타났다. 이것을 코덱스(codex)라고 부른다. 사본 재료로는 1-4세기에는 파피러스를 사용했고, 4세기 이후에는 송아지나 영양의 가죽(vellum)이나 양과 염소의 가죽(parchment)을 사용하였다. 사본의 서체는 초기에는 투박한 대문자(Uncial 혹은 Majuscule)만 사용되었으나, 점차 미끈한 소문자(Cursive 혹은 Minuscule)가 사용되었다.

신약 사본은 2001년 현재 파피러스 사본 116개, 대문자 사본 300개, 소문자 사본 2,818개, 성구집 사본 2,281개로 도합 5,515개이다.11)

파피러스 사본들 중에는, 체스터 베티(p45, p46, p47)와 보드머(p66, p72, p75)가 가장 관심을 끌고 있다. p45는 4복음서와 사도행전의 일부이며 주후 3세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p46은 바울서신 사본으로 주후 200년경의 것으로 추정된다. p47은 요한계시록 9:10-17:2의 사본으로 주후 3세기 후반의 것으로 추정된다. p66은 요한복음 사본으로 주후 200년경의 것이다. p72는 베드로전후서와 유다서 사본으로 주후 3, 4세기의 것이다. p75는 누가복음과 요한복음 사본으로 주후 3세기 초의 것으로 추정된다.

대문자 사본들 중, 시내 사본(א, Codex Sinaiticus)은 신약 전체의 사본으로 주후 4세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바티칸 사본(B, Codex Va- ticanus)은 신약의 거의 전부(히 9:14 이하, 딤전후, 딛, 몬, 계 없음; 공동서신은 포함됨)의 사본이며, 주후 4세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알렉산드리아 사본(A)은 신약성경 전체의 사본으로 주후 5세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마태복음 1:1-25:6; 요한복음 6:50-8:52; 고린도후서 4:13-12:6이 빠져 있다. 에브라임 사본(C)은 데살로니가후서와 요한이서를 제외한 신약의 모든 책의 사본으로 주후 5세기 것으로 추정된다. 베자 사본(D)은 4복음서, 사도행전, 요한삼서 일부의 사본으로 왼쪽 면은 헬라어 본문, 오른쪽 면은 라틴어 본문으로 되었고, 5-6세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고대 역본들

옛 라틴어역(이탈라 it)은 주후 2세기경에 번역되었다고 보며, 약 50개 이상의 사본이 있다. 복음서 사본들 중, ita는 4세기, itb d e ff2 g h i k 등은 5세기 것으로 본다. 라틴어 벌케이트역(vg)은 주후 4세기 말 제롬에 의해 전통본문에 근거해 번역되었고, 오랫동안 서방교회의 표준적 성경이 되었으며, 8,000개 이상의 사본이 있다.

수리아어 페쉬타역(syrp)은 수리아 교회의 표준 성경으로서 주후 2세기경에 번역되었다고 보며,12) 300개의 사본이 있다. 수리아어 시내산사본(syrs)과 큐레토니안사본(syrc)은 4세기 것으로 본다.

콥트어 사히딕역(copsa)(남부방언)과 콥트어 보하릭역(copbo)(북부방언)의 연대는 주후 4-5세기로 본다. 보하릭역은 콥틱 교회의 공식적 성경이다. 아르메니아어역(arm)도 아마 주후 3, 4세기에 번역되었을 것이며 오늘날 사본들은 주후 4-5세기의 것으로 본다.

 

교부들의 글들

2, 3세기의 교부들 가운데서, 헬라어 저자들 중에, Irenaeus (2세기), Diatessaron of Tatian (2세기), Clement of Alexandria (215년 이전), Origen (253/254년) 등과, 라틴어 저자들 중에, Tertullian (220년경), Cyprian (258년) 등이 중요하다고 본다.


두 종류의 본문

신약성경의 헬라어 본문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전통본문이고 다른 하나는 비평본문이다.13)

 

전통본문

전통본문은 헬라어를 사용하는 동방교회[헬라정교회]가 옛날부터 사용해온 본문으로서 비잔틴 본문 혹은 다수 본문이라고도 불린다. 오늘날 이 본문은 주로 9세기부터 11세기의 사본들에 근거해 있다. 현존하는 5,000개 이상의 사본들 가운데서 최소한 85% 이상이 여기에 속한다.14) D. A. 웨이트는 99%가 여기에 속한다고 주장한다.15)

중세시대가 끝나고 문예부흥이 일어나고 인쇄술이 발명되었을 때 교회 안에서도 원문성경에 대한 관심이 일어났다. 1516년 에라스무스는 최초로 헬라어 성경을 출판하였다. 그 후, 로버트 스테파누스가, 또 그 후에 칼빈의 제자 데오도르 베자가 이어서 헬라어 성경을 출판하였다. 그 후, 스테파누스의 제3판(1550년)과 제4판(1551년), 및 베자의 제4판(1598년)은 표준적인 전통본문 헬라어 성경이 되었다. 영어 킹제임스역(KJV)성경(1611년)은 이런 헬라어 성경들에 근거하였다.

1633년에 엘저비어의 헬라어 성경이 나온 이후, 그 본문은 Textus Receptus(TR)(Received Text), 즉 공인(公認)본문 혹은 전수본문이라고 불리었다. 스테파누스판, 베자판, 엘저비어판의 본문은 본질적으로 같으며, 로마서 16:25-27과 요한일서 5:8 등 몇몇 곳의 두드러진 차이점을 제외하고는 헬라어 다수사본의 본문(Majority Text)과도 본질적으로 같다. 우리는 이 전통본문이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도들과 그들의 인가(認可)를 얻은 제자들에 의해 기록된 신약성경의 원본의 본문이라고 믿는다.

 

비평본문

비평본문시내 사본(א)이나 바티칸 사본(B) 등 소수(小數)의 고대사본들에 기초한 본문으로서 현대본문이라고도 불린다. 그것은 라크만, 트레겔레스, 티쉔도르프, 웨스트코트호트에 의해 제안된 본문이다. 그들은 공인본문(TR)을 버리고 소수의 고대사본들을 선호하였다. 1881년 영국교회의 감독인 웨스트코트(B. F. Westcott, 1825-1901)와 캠브리지 대학의 호트(F. J. A. Hort, 1828-1892)는 바티칸 사본과 시내 사본에 근거하여 헬라어 신약성경 개정판을 출판하였다. 그들은 신약성경의 공인본문(TR)을 약 5,337곳, 영어성경(RV)으로는 36,191곳을 고쳤다.16) 이것은 성경역사상 신약성경 본문의 매우 중대한 변화이었다.

이 전통을 받아 내려온 것이 오늘날 연합성서공회(UBS = United Bible Societies) 4판 개정판(1993년; 파피러스 98-116 보충 5쇄, 2001년)과 네슬레(Nestle) 27판 개정판(1993년; 수정 및 파피러스 99-116 보충 8쇄, 2001)이다. 이 성경은 편집자들의 판단에 따라 계속 수정되어 온 본문이다. 1881년의 영어개역성경(RV) 이후, 영어 번역성경들은 거의 전부가 이 비평본문에 근거하고 있으며(ASV, RSV, NASB, NIV 등), 한글개역성경(1938년)도 여기에 속한다.17)

  

두 본문의 검토

우리는 전통본문이 신약성경 원본의 본문이라고 믿는다.18)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전통본문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보존(保存)된 본문이다

첫째로, 전통본문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교회에서 보존(保存)된 본문이다. 그것은 교회에서 옛날부터 사용되어온 인정된 본문이다.

 

(1) 신약성경의 본문에 관해서는 교회 역사상 논쟁된 적이 없었다

교회 역사상, 여러 교리들에 관한 많은 논쟁이 있었지만, 신약성경의 본문 문제에 관해서는 19세기 말 이전까지 오늘날같이 이질적인 두 견해로 대립되어 변론된 적이 없었다. 이것은 참으로 중요한 점이다. 왜냐하면 교회 역사상 신약성경의 본문 문제에 관해 교리적 논쟁이 없었다는 사실 자체가 신약성경의 전통본문의 타당성과 권위성에 대한 유력한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헬라어 신약성경의 전통본문은 교회에서 이의 없이 인정되고 확고하게 보존되어 내려온 본문이었다.19)

사도 바울은 구약성경에 관해 유대인의 장점 중에 첫 번째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것이었다고 말한 바가 있다(롬 3:1-2). 같은 원리가 신약성경에도 적용될 수 있다. 헬라어 신약성경의 본문에 관한 한, 우리는 헬라어를 사용해온 헬라교회의 권위와 역할을 인정하고 중시해야 할 것이다. 유대인들이 구약성경을 보존해왔듯이, 헬라어를 사용한 동방교회(오늘날의 헬라 정교회)는 신약성경을 보존해 왔다. 신약성경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더하거나 감하지 말라는 중요한 말씀이 신약성경의 맨 끝에 기록되어 있음을 생각한다면(계 22:18-19), 우리는 신약성경이 어떻게 조심스럽게 보존되어 왔을지 알 수 있다.

 

(2) 전통본문은 현존하는 헬라어 사본의 절대다수가 지지한다

우리는 또한 다수 사본들의 지지를 중시해야 한다. 현존(現存)하는 신약성경의 절대 다수의 사본들은 전통본문을 증거한다. 비평본문은 소수의 사본들의 지지만 가진다. D. A. 웨이트는 파피러스 사본 88개 중 13개(15%)는 비평본문에 맞고 75개(85%)는 전통본문에 맞으며, 대문자 사본 267개 중 단지 9개(3%)만 비평본문에 맞고 258개(97%)는 전통본문에 맞고, 소문자 사본 2,764개 중 23개(1%)만 비평본문에 맞고 2,741개(99%)는 전통본문에 맞고, 성구집 사본 2,143개 중 100% 전부가 전통본문에 맞고, 종합하면 신약성경 사본 5,255개 중 단지 45개(1%)만 비평본문에 맞고 나머지 5,210개는 전통본문에 맞다고 말한다.20) 또한, 전통본문과 비평본문 간의 차이점들에 비하면 전통본문 사본들(Byz) 상호 간의 차이점은 매우 적다.21) 전통본문은 현존하는 절대 다수의 헬라어 사본들이 지지하는 본문이므로 상당한 객관성과 안정성을 지닌다. 비평본문의 입장에서 보면, 신약성경의 정확한 본문을 확정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전통본문의 입장에서 보면, 신약성경의 본문은 거의 확정적이다.

 

(3) 전통본문은 성경의 축자영감과 무오(無誤) 신앙에 맞는다

더욱이, 전통본문은 보수적인 개혁교회의 성경 축자영감(逐字靈感)과 무오(無誤) 신앙에 맞는다. 우리는 성경의 축자적(逐字的) 영감과 무오(無誤)를 믿으며, 신구약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의 신앙과 생활의 정확무오한 법칙임”을 믿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경 본문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적 보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축자적(逐字的)으로 영감하셨으나 그 본문을 훼손되거나 상실되게 내버려두셨다고 우리는 상상할 수 없다. 성경의 축자적(逐字的) 영감과 무오를 믿는 모든 성도는 성경본문의 건전한 보존을 믿을 수 있고 또 믿을 것이다. 그것은 경건한 성도의 기본적 믿음이다.

장로교회의 표준적 신앙고백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8도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옛 하나님의 백성의 모국어이었던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경과, 기록 당시 여러 나라들에게 매우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었던 헬라어로 된 신약성경은 직접 하나님의 영감(靈感)을 받았으며 그의 독특한 배려와 섭리로 모든 시대에 순수하게 보존되었으므로 믿을 만하다. 따라서 종교상 모든 논쟁들에서 교회는 최종적으로 그 성경들[원어 성경]에 호소하는 것이다.”

비평본문 이론에 의하면, 교회는 신약성경의 원본의 정확한 본문을 4, 5세기 이후 1500년 동안 잃어버렸고 지금까지도 그것을 온전하게 회복할 수 없다는 결론을 피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러한 결론은 우리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생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본문에 관하여 하나님의 섭리적 보호를 믿어야 한다. 신약성경의 본문 문제는 교회 역사상 논쟁된 적이 없었다. 그만큼 신약성경의 전통본문은 교회에서 인정된 본문이었다. 또 그것은 우리의 성경 축자영감과 무오의 신앙에 맞다. 하나님께서 축자영감으로 기록하신 신적 권위의 성경본문을 혼란 중에 내버려두셨다고 말하는 것은 신성모독적이라고 본다.

 

2. 전통본문은 충분한 고대적 증거들을 가지고 있다

둘째로, 전통본문은 충분한 고대적 증거들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결코 웨스트코트와 호트의 주장대로 후대의 사본들에 근거한 무가치한 것이 아니다. 비잔틴 사본들이 주로 9-11세기의 후대 사본들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 사본들에 있는 본문이 후대의 본문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전통본문의 고대성은 2, 3세기의 고대 파피러스 사본들과 역시 2세기에 번역되었다고 보이는 고대 수리아어, 라틴어, 콥트어 역본들, 또한 2, 3세기의 초대 교부들(이레니우스, 터툴리안, 클레멘트, 오리겐 등)의 성경 인용문들에서 충분히 확증되고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

 

(1) 전통본문은 때때로 אB 본문보다 더 많은 고대적 증거를 가진다

마 5:22,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까닭 없이”--Byz D W ita b d h k vgmss syrp c s copsa meg bo arm Irenaeuslat Cyprian

(위의 구절이 생략됨)--UBS p64 א* B vg Origen

마 8:25, “가로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우리를 구원하소서”--Byz W ita b h k vg syrp s copsa meg bo arm

“구원하소서”--UBS א B C copbo-mss

마 12:4,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한 자들이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그가 먹었다”--Byz p70 C D W ita b d h k vg syrp c copsa meg bo arm Diatessaron

“그들이 먹었다”--UBS א B

마 12:25, “예수께서 저희 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스스로 분쟁하는.”

“그러나 예수께서”--Byz C W ita b ff2 h vg syrp copmeg arm

“그러나 그가”--UBS א* B copsa

마 18:15,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네게 죄를 범하거든”--Byz UBS D ita b d e ff2 vg copmeg bo-pt

“죄를 범하거든”--א B

마 20:16,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이는 많은 사람이 부름을 입으나 적은 사람이 택함을 입음이니라”-- Byz C D W itb d e ff2 h n vg syrp c s copmeg bo-pt arm

(위의 구절이 생략됨)--UBS א B copsa bo-pt Diatessaron

마 27:42,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왕이라면”--Byz A ita b ff2 h vg syrp s copmeg bo arm Origenlat

“왕이로다”--UBS א B D itd copsa

마 27:49, “그 남은 사람들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엘리야가 와서 저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

“다른 이가 창을 취하여 그의 옆구리를 찌르니 물과 피가 나왔더라” --א B C vgmss copmeg

(위의 구절이 생략됨)--UBS Byz A D W ita b d ff2 h vg syrp s copsa bo arm Origenlat 

눅 10:42,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그러나 한 가지가 필요하다”--UBS Byz p45 75 A C* vg syrp c copsa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א B

눅 15:21,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א B itd vgmss

(위의 구절이 생략됨)--UBS Byz p75 A W ita b e ff2 i vg syrp c s copsa bo arm

행 16:32,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주의 말씀”--Byz p45 A C D itd vg syrp copsa bo arm

“하나님의 말씀”--א* B itd vg syrp copsa bo arm

“하나님의 말씀”--א* B

 

(2) 전통본문은 때때로 2, 3세기 파피러스 사본들의 지지를 가진다

눅 10:42,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그러나 한 가지가 필요하다”--UBS Byz p45 75 A C* vg syrp c copsa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א B

눅 12:31,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하나님의 나라”--Byz p45 A itb d e ff2 i vgww st syrp c s arm Diatessaronsyr Tertullian

“그 나라”--p75

“그의 나라”--UBS א B D* ita copsa bo

요 12:9,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큰 무리가”--Byz (p66*) p75 A

“그 큰 무리가”--UBS א* B*

행 13:46,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그러나 [너희가 버리고]”(δε)--Byz p46 A C

“[너희가 버리고]”(δε 생략)--א* B

행 16:32,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주의 말씀”--UBS Byz p45 A C (D) itd vg syrp copsa bo arm

“하나님의 말씀”--א* B

고전 10:9,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

“그리스도를 시험하지 말자”--UBS Byz p46 itd vg syrp copsa bo Irenaeuslat

“주를 시험하지 말자”--א B C arm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자”--A

고후 6:16,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너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Byz p46 C vg syr(p) arm Origenlat Tertullian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UBS B itd copsa bo Origengr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들”--א* (Clement)

엡 5: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UBS Byz p46 itd vg syrp arm Clement1/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א* B A copsa bo Clement1/2

벧전 1:16,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내가 거룩하니”(ειμι 생략)--Byz p72 A C

“내가 거룩하니”(ειμι)--[UBS] א B

벧전 5:2,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감독의 직무를 수행하며 [양무리를 치되]”--Byz p72 A vg (syrp) copbo arm

“[양무리를 치되]”(생략)--א* B copsa

벧전 5:10,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UBS Byz p72 A vg syr(p) copsa-ms bo arm

“그리스도 안에서”--א (B) copsa-ms

 

(3) 전통본문은 5세기 이전의 교부들의 글들에서도 많이 인용된다

딘 버건(Dean Burgon, 1813-88)의 거룩한 복음서들의 전통본문 옹호(Traditional Text of the Holy Gospels Vindicated)라는 책에 의하면, 주후 400년 전에 죽은 76명의 교부들의 4,383개의 인용문들 중에, 전통본문의 인용은 2,630개(60%)이었고 비평본문의 인용은 1,753개(40%)이었다. 즉 전통본문과 비평본문의 인용 비율이 3대 2이었다.22) 이것은 전통본문이 결코 후대의 본문이 아님을 입증한다.

 

3. 비평본문은 매우 허약하고 주관적이다

셋째로, 비평본문은 매우 허약하고 주관적이다. 전통본문이 교회에서 인정된 권위 있는 본문이요 고대적 증거들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앞에서 충분히 논증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비평본문이 과연 믿을 만한 본문인지 검토해보자.

 

(1) 고대 사본들 간에 차이점들이 많다

고대 사본들의 본문들 간에는 많은 차이점들이 있다. 시내 사본(א)의 본문과 바티칸 사본(B)의 본문은 서로 많이 다르다. 또 그것들과 파피러스 사본들의 본문들 간에도 그러하고, 파피러스 사본들의 본문들 상호 간에도 그러하다. 예를 들어 보자.

א 본문과 B 본문은 서로 많이 다르다. 허만 호스키어는 א과 B이 마태복음에서 656곳, 마가복음에서 567곳, 누가복음에서 791곳, 요한복음에서 1,022곳, 합하여 네 복음서들에서만 3,036곳에서 서로 다르다고 말한다.23) UBS 4판의 비평각주에서만 272곳이 서로 다르다.

파피러스의 본문도 א와 B의 본문과 많이 다르다. UBS 4판의 사복음서 비평각주에서만, 2-3세기 파피러스가 א와 B 대신에 Byz을 지지하는 경우가 26개이다.24) 파피러스들의 본문들 간에도 서로 다른 점들이 많다. 다수본문 헬라어성경 요한복음 비평각주에서만, p66, p75, p45의 본문들이 서로 다른 경우가 총 98구절이다.25)

파피러스들의 본문들 간에도 서로 다른 점들이 많다. 그 증거로서, 다수본문 헬라어 성경의 요한복음 비평각주에서, p66, p75, p45의 본문들이 서로 다른 경우들은 총 98구절이다.26)

 

(2) 고대 사본들이 부정확해 보이는 경우들이 많다

또한, 고대 사본들이 부정확해 보이는 경우들도 많다. 물론 우리가 확정적으로 무엇을 말하기 어렵지만, 어느 고대 사본이 홀로 떨어져 있고 대다수의 다른 고대 사본들과 증거들(역본들, 초대 교부들의 인용문들)이 다른 편에 있을 때, 우리는 그 고대 사본의 본문이 부정확하다고 판단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UBS 4판 사복음서 비평각주에서, א의 고대적 지지가 매우 빈약한 경우가27) 71개, B의 고대적 지지가 매우 빈약한 경우가 63개, אB이 함께 고대적 지지가 매우 빈약한 경우가 37개나 된다.28)

이상의 예들은 웨스트코트와 호트가 원본에 가장 가까운 중립본문이라고 그렇게 선호했던 א와 B의 본문이 부정확하고 신뢰할 수 없는 본문이라는 사실을 잘 드러낸다. 몇 가지 예들을 들어보자

 

[א 본문이 명확히 부정확해 보이는 예들]

마 14:29,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예수께로 가기 위해 물 위로 걸어가되”--Byz D ita b d e ff2 vg syrp copmeg copbo Origen

“물 위로 걸어갔고 예수께로 가되”--UBS B C*vid syrc s arm

“예수께로 가기 위해 물 위로 걸어갔고 그러므로 갔더라”--א*

눅 24:51, “축복하실 때에 저희를 떠나 하늘로 올리우시니.”

“하늘로 올리우시니”--Byz p75 A B C W vg syrp copsa bo arm

(위의 구절 생략됨)--א* D ita b d e ff2 syrs

고전 7:15,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우리를”--Byz p46 B D itb d vg syrp copsa fay arm Tertullian

“너희를”--א* A C ccpbo

 

[B 본문이 명확히 부정확해 보이는 예들]

요 1: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Byz UBS p66 75 A C ita b e ff2 vg syrp copsa bo arm Irenaeuslat Origen Tertullian

(위의 구절이 생략됨)--B*

요 3:34,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

“하나님이 성령을”--Byz A D ita (d) vg syrp copsa bo Origenlat

“그가 성령을”--UBS p66 75 א C* itb e Origengr

(위의 구절이. 생략됨)--B*

요 9:6,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바르시고”--UBS Byz p66 75 א A C D ita b d e ff2 vg syrp s copsa bo arm Irenaeuslat

“두시고”--B Diatessaron

요 11:2,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마리아”(Μαρια)--Byz p66 א A D W cop

“마리아”(Μαριαμ)--p6vid B

요 11: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주여 주께서”--Byz p66 75 א A C D ita b d e ff2 vg syrp cop arm

(‘주여’가 생략됨)--B syrs

요 12:28,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아버지의[당신의] 이름을”--Byz p66 75 א A ita b e ff2 vg syrp s copsa arm

“나의 이름을”--B

 

[אB 본문이 명확히 부정확해 보이는 예들]

마 12:4,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한 자들이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그가 . . . 먹지”--Byz p70 C D ita b d vg syrp c copsa bo Diatessaron

“그들이 . . . 먹지”--UBS א B

마 18:15,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네게 죄를 범하거든”--Byz UBS D ita b d e ff2 vg copmeg bo-pt

“죄를 범하거든”--א B

행 16:32,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주의 말씀”--Byz p45 A C D itd vg syrp copsa bo arm

“하나님의 말씀”--א* B

마 23:23,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버리지”(현재 부정사)--Byz C D W ita d e ff2 h vg arm Origenlat

“버리지”(오자인 듯. 그런 단어 없음)--א B

 

[파피러스 사본들의 본문들이 명확히 부정확해 보이는 예들]

막 6:21, “헤롯이 자기 생일에 대신들과 천부장들과 갈릴리의 귀인들로.”

“생일에”(εν τοις gενεσιοις)--p45

“생일에”(τοις gενεσιοις)--그 외의 모든 사본들, 역본들

눅 11:12,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떡”(αρτον)--p45

“알”--그 외의 모든 사본들, 역본들

눅 11:27, “이 말씀 하실 때에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 가로되.”

“이 (말씀)”--그 외의 모든 사본들, 역본들

“(그 말씀)”--p75

눅 12:24,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너희는”--그 외의 모든 사본들, 역본들

“너희는”(생략)--p75와 소수의 사본들

 

파피러스 사본들이 명확히 부정확하게 보이는 곳들은 Nestle 27판의 비평각주들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29)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시내 사본과 바티칸 사본은 본문에 있어서 상호 간의 차이점들이 많고, 또 명확히 부정확해 보이는 경우들이 많기 때문에, 그 사본들은 신빙성과 정확성과 권위성을 가지지 못한다. 비평본문을 주장하는 학자들도 이 사실을 인식하기 때문에 UBS 4판은 시내 사본과 바티칸 사본의 본문을 많이 포기하였다. UBS 4판이 시내 사본과 바티칸 사본이 함께 가진 본문을 버린 곳이 마태복음에서 26개, 마가복음에서 20개, 누가복음에서 12개, 요한복음에서 27개, 도합 사복음서에서 85개에 이른다. 또 그 중에 시내 사본과 바티칸 사본을 버리고 비잔틴 사본을 택한 경우가 사복음서에서 52개나 된다.30)

이것은 웨스트코트와 호트가 시내 사본과 바티칸 사본의 본문을 원본에 가장 가까운 중립본문이라고 생각했던 것과 다르다. 이것은 후대의 본문비평학자들이 그 두 사본의 부정확함을 인정한 것이 아닌가?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소위 고대 사본들이 원본의 본문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고 인정할 수 없다. 단지 어떤 사본의 연대가 이르다는 사실이 그것이 원본에 가깝다고 단정할 충분한 이유가 아니며 아주 초기 사본이라 할지라도 교회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버려졌던, 부정확하고 변질된 사본일 수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

 

(3) 비평본문은 매우 주관적이다

더욱이, 비평본문은 매우 주관적이다. 현재의 UBS 4판의 본문과 비평각주를 검토해보면, 우리는 비평본문이 매우 주관적이라고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비평본문은 많은 경우 시내 사본과 바티칸 사본의 본문을 선호하지만, 또 많은 경우 그 본문을 버리고 비잔틴 사본의 본문을 택하기도 하며, 또 고대적 증거들(헬라어 사본이나 고대 역본들이나 초대 교부들의 인용문들의 증거들)이 엇비슷한 경우들에도 시내 사본과 바티칸 사본의 본문을 버리고 비잔틴 본문을 택하기도 하기 때문이다.31) 또 UBS가 고대적 증거들이 매우 약한 본문을 택한 경우들도 있다. 몇 가지 예만 들어보자.

마 12:15, “예수께서 아시고 거기를 떠나가시니 사람이 많이 좇는지라.”

“많은 무리”--UBS Byz C D W itd syrp copsa-ms bo arm Origen

“많은 사람”--א B ita b ff2 vg (syrc s)

마 20:31,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여”--UBS Byz C W it(e) ff2 syrc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א B D itb d vg syrp arm

요 13:32, “만일 하나님이 저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으면.”

“만일 하나님이 저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으면”--UBS Byz A ite vg syrp copsa pbo arm

(생략)--p66 א* B C* D ita syrs copbo-pt Tertullian

요 16:27, “또 나를 하나님께로서 온 줄 믿은 고로.”

“하나님[께로서]”(του θεου)--[UBS] Byz

“하나님[께로서]”(θεου)--p5 א* A ita b e vg syrp s arm Origenlat Tertullian

“아버지[께로서]”(του πατρας)--B C* D itd copsa pbo bo

고전 15:49, “우리가 . . .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입으리라”--UBS B copsa

“입자”--Byz p46 א A C D itd vg syrp copbo Irenaeus

 

이상의 고찰들을 통해, 신약성경의 비평본문이 믿을 만하지 못하다는 것은 너무 확실하다.


결론

결론적으로, 우리는 신약본문문제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신약성경의 본문은 아주 초기부터 사본상의 크고 작은 차이들이 발생했고 그것이 수적으로나 지역적으로 널리 퍼졌다. 그러나 사본들 간의 차이들은 내용상으로 교리적, 윤리적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정도이었다고 본다.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적 보호이었다.

2. 전통본문은 교회가 인정해온 본문이다. (1) 신약성경의 본문은 역사상 변론된 적이 없었다. (2) 신약성경의 전통본문은 절대다수의 사본들이 지지한다. (3) 전통본문을 받아들이는 것은 성경의 축자적 영감과 무오 신앙에 맞다.

 3. 전통본문은 충분한 고대적 증거들을 가지고 있다. (1) 전통본문은 때때로 시내 사본이나 바티칸 사본보다 더 많은 고대적 증거를 가진다. (2) 전통본문은 때때로 2, 3세기의 파피러스 사본들의 지지를 가진다. (3) 전통본문은 5세기 이전의 교부들의 글들에서도 많이 인용된다. (4) 전통본문은 후대의 수정보완된 본문이 아니다. 그러므로 웨스트코트와 호트 이후 교회에 널리 퍼져 있는 바, 전통적 비잔틴 사본들의 본문이 후대에 수정된 것이라는 가정은 타당하지 않다.

4. 비평본문은 매우 허약하고 주관적이다. (1) 고대 사본들 간에는 차이점들이 많다. 시내 사본과 바티칸 사본 상호간의 차이는 물론, 그것들과 파피러스들과의 차이, 또 파피러스들 상호간의 차이가 많다. (2) 고대 사본들이 부정확해 보이는 경우들도 많다. 시내 사본이나 바티칸 사본은 오류가 많은 사본임이 충분히 증명된다. 오늘날 비평본문 편집자들도 이런 사실을 인정하기 때문에 많은 구절들에서 시내 사본과 바티칸 사본의 본문을 버렸다. (3) 비평본문은 매우 주관적이다. 그러므로 비평본문은 원본에 더 가까운 본문이 아니고 오히려 더 먼, 때때로 심각히 손상된 본문이라고 판단된다.

5. 그러므로 헬라교회가 2천년 동안 사용해온 신약의 전통본문은 신약성경의 원본의 본문으로 간주되어야 하며 그것을 수정할 아무런 타당한 이유가 없다. 웨스트코트와 호트가 고대 사본들 특히 바티칸 사본과 시내 사본이 원본에 가깝다는 잘못된 생각에 근거하여 신약성경의 전통본문을 과격하게 수정한 것은 대단히 큰 실수요 신약성경 본문의 혼란의 시작이었다.

비평본문 이론은 처음부터(라크만 때로부터) 전통본문을 버림으로 신약성경의 본문을 혼란시켜 왔고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 그들에 의하면, 많은 교회들은 오랫동안(1500년 가량) 신약성경의 바른 본문을 갖고 있지 않았고 또 지금도 갖고 있지 않다고 추측된다고 한다. 그러나 신약성경의 본문이 보존되어 있지 않다는 것은 경건한 성도들에게는 신성모독적이게 들린다.

전통본문과 비평본문에 대한 검토의 결과가 이러하기 때문에, 우리는 불확실하고 믿을 만하지 못한 비평본문을 단호히 버리고, 교회가 옛날부터 인정해왔고 오늘날까지도 헬라교회가 사용하고 있는 전통적 헬라어 본문, 즉 비잔틴 다수본문을 유지하고 회복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통본문의 회복은 이 문제를 인식하는 주의 종들의 사명이며 성경적 교회의 시대적 주요 과제이다.


[특별주] 킹제임스(KJV) 영어성경이 무오(無誤)한가?

오늘날 어떤 이들은 지나치게 반작용하여 1611년에 번역된 킹제임스 혹은 흠정역 영어성경(KJV 혹은 AV)만 무오(無誤)한 성경이라고 주장한다. 심지어 개역판(RV, 1885년, 신약은 1881년에 번역됨)과 그 이후의 대부분의 영어성경들과 한글개역성경을 이단적이라고까지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지나친 주장이며 과격한 정죄이다.

1611년에 번역된 킹제임스 영어성경은 어떤 무오한 사본에서 번역된 무오한 성경이 아니었다. 그것은 당시의 최선의 사본들에 근거하며 주교성경(the Bishops' Bible, 1568년)을 기본으로 삼고 그 전에 나온 틴데일성경(Tyndale Bible), 매튜성경(Matthew Bible), 대성경(the Great Bible), 제네바성경(the Geneva Bible) 등을 참고하면서 번역된 가장 잘 번역된 성경이라고 보는 것이 옳은 생각일 것이다. 킹제임스 영어성경을 번역할 당시에 갖고 있었던 신약 헬라어 사본들은 제한되어 있었다.32) 오늘날까지 신약원본의 무오한 사본은 없다. 하나님은 교회에 무오한 사본을 주지 않으셨다. 비잔틴 다수사본들 간에도 약간의 차이점들이 있다. 그러므로 킹제임스 영어성경의 무오성을 주장하는 것은 지나친 믿음일 뿐 아니라, 또한 잘못된 믿음이라고 생각된다.

우리는 신약성경의 전통본문이나 비평본문이 둘 다 성경의 기본적 교리들을 부정하거나 그것들에 충돌하지 않는다고 본다. 비록 그것들 상호간의 차이점들이 어떤 부분들에서는 크지만, 전체적으로 그것들은 교리적으로 치명적 결함이 없다. 한글개역성경에 근거한 성경의 교리 체계 혹은 신학은 킹제임스 영어성경에 근거한 것과 다르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두 종류의 성경본문이 내용적으로 전혀 다른 교리적, 윤리적 교훈을 하도록 허용하지 않으셨다.

네슬(Nestle)은, 신약성경에 약 15만개의 변이문이 있으나 그 중에 약 20분의 19는 진정한 권위를 가지지 못한 것이고 그 나머지 7,500개의 변이문 중에 약 20분의 19는 성경의 의미를 변경하지 않으며, 성경의 의미에 관계를 가지는 변이문 약 375개 중에도 얼마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라고 말했는데, 그 말은 타당해 보인다.33) 또 모세스 스튜어드(Moses Stuart)는, “어떤 것은 특수한 구절들이나 표현들의 의미를 변경하며 혹은 단어들과 어구들을 생략하나 변이문 전체를 집합적으로 취하여 볼 때 종교의 교리는 하나도 변하지 않으며 한가지 교훈도 제거되지 않으며 한 건의 중요한 사실도 달라지지 않는다”고 말하였는데, 그것도 맞는 말이라고 본다.34)

우리는 하나님께서 신약성경의 전통본문이든지 비평본문이든지 간에 그것을 지금까지 죄인들의 구원과 성도들의 온전함을 위해 사용하셨고 오늘날도 사용하고 계신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비평본문을 이단적이라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이 그 동안 행하신 많은 구원과 은혜의 역사를 부정하거나 과소평가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신약성경의 전통본문이 다시 회복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이제까지 귀히 사용된 한글개역성경에 대한 과격한 비난과 정죄는 삼가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크신 은혜로 우리나라에 주신 한글개역성경을 존중하면서, 조심스럽게 성경의 바른 본문을 확인하고 확증하는 것이 건전한 태도일 것이다.

 

    6. 성경의 속성

하나님의 특별계시들은 성경에 기록되었다. 하나님의 특별계시와 성경은 기록 혹은 저장(貯藏)이라는 관계가 있다. 물론 하나님의 특별계시들이 다 성경에 기록된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만큼 취사선택되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성경에 기록되었고 성경에만 기록되었다. 성경과 같은 성격의 또 다른 책은 세상에 없다. 성경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유일한 저장소이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고 자신의 뜻을 나타내시며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특별계시와 성경은 동일시된다.


성경의 필요성

성경은 사람에게 꼭 필요한 책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1은 다음과 같이 적절히 진술한다.

그러므로 주께서 여러 시대에 여러 방식들로 자신을 계시하시고 그의 교회에 그의 뜻을 선언하시기를 기뻐하셨고, 그 후에는 그 진리를 더 잘 보존하고 전파하시기 위하여, 그리고 육신의 부패성과 사탄과 세상의 악한 뜻에 대항하여 교회를 더 굳게 세우시고 위로하시기 위하여, 그 동일한 진리를 온전하게 기록되게 하시기를 기뻐하셨다. 이것이 성경을 가장 필요하게 만든다.

위의 진술대로,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특별계시를 더 잘 보존하시고 전파하시기 위해 필요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지혜로운 방법이었다. 물론 성경이 없었더라도 하나님의 특별계시는 사람의 기억력과 구전(口傳)을 통해 어느 정도 보존되고 전파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경우 하나님의 특별계시는 인간의 연약과 실수로 그리고 사탄의 방해로 많이 손상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특별계시가 성경책에 명확히 기록됨으로써 그것은 더 잘 보존되고 더 잘 전파될 수 있게 되었다. 모세는 하나님의 나타나심과 율법들을 책에 기록하였다(출 24:4; 신 31:24). 또한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하시고 행하신 일들을 책에 기록하였다. 기독교는 책의 종교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특별계시들을 책에 기록되게 하셨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진술대로, 성경은 또한 인간의 육신의 부패성과 사탄과 세상의 악한 뜻에 대항하여 교회를 더 견고하게 설립하고 위로하기 위해 필요했다. 우리는 육신의 부패성을 가지고 있고, 이 세상에는 사탄의 활동과 세상의 악한 일들이 많다. 그러므로 만일 하나님이 기록하신 명확한 말씀이 없었더라면 구원받은 자들은 더욱 빈번히 흔들리고 낙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계시의 말씀들을 기록해주심으로 우리는 그것을 통해 더욱 견고히 서고 많은 위로를 받게 된다. 그러므로 누가는 자기가 기록한 복음서의 목적을, ‘데오빌로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표현하였다(눅 1:1-4). 사도 바울은 성경이 성도들에게 위로를 주는 사실을 말하기를,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고 했다(롬 15:4).

 

성경의 명료성

성경은 내용이 명료한 책이다. 성경의 명료성(明瞭性)이란, 성경이 하나님의 구원 진리를 전달함에 있어서 사람들이 이해할 만하게 명료하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목적은 죄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참지식을 줌으로써 구원을 얻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기록이며 구원을 위한 책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성경이 결코 어려운 책일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7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경에 있는 모든 것들이 그 자체에 있어서 똑같이 명백한 것은 아니고 또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분명한 것도 아니지만, 구원을 위해 알고 믿고 지켜야 할 필요가 있는 것들은 성경의 이곳 혹은 저곳에 분명히 제시되고 드러나 있어서, 유식한 자들뿐 아니라 무식한 자들도 일반적 수단을 적절히 사용함으로 그것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특히 성경은 두 가지 점에서 명료하다. 첫째로, 성경은 죄인이 구원받기 위해 알아야 할 내용에 있어서 명료하다. 요한은 요한복음을 쓴 목적을 말하기를, 그 책을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다(요 20:31). 바울은 증거하기를,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고 하였다(딤후 3:15). 사실, 성경은 구원 진리의 기초가 되는 진리 전반에 있어서 명료하다. 시편 19:7은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한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하박국에게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 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고 말씀하셨다(합 2:2). 예레미야는 장차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하나님을 알 것이라고 예언하였다(렘 31:34).

둘째로, 성경은 구원받은 성도에게 주는 생활 교훈에 있어서 명료하다. 그러므로 시편 119:105는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말했다. 불분명한 교훈은 결코 빛이 될 수 없다. 또 바울은, ‘모든 성경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한다’고 말했다(딤후 3:16-17).

 

성경 번역의 필요성

원어 성경은 모든 사람이 읽을 수 있도록 각 나라의 언어로 번역되어야 한다. 성경이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수단이며 하나님의 구원 진리를 전달하는 수단일진대, 성경은 마땅히 모든 나라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언어로 번역되어야 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8은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옛 하나님의 백성의 모국어이었던 히브리어로 된 구약과, 기록 당시 여러 나라들에게 매우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었던 헬라어로 된 신약은 직접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으며 그의 독특한 배려와 섭리로 모든 시대에 순수하게 보존되었으므로 믿을 만하다. 따라서 종교상 모든 논쟁들에서 교회는 최종적으로 그 성경들에 호소한다. 그러나 그 성경들을 읽을 권리와 관심을 가지고 있고 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그것들을 읽고 연구하라는 명령을 받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원어들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 성경들은 그것들이 들어가는 모든 나라의 통속적(通俗的, vulgar) 언어로 번역되어야 하며,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사람 속에 풍성히 거하여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방식으로 그를 예배하고 인내와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성경 번역에는 다음과 같은 원칙이 필요할 것이다. 첫째로, 축자(逐字, 글자) 영감의 진리에 맞게, 성경은 가능한 한 충실하게 직역(直譯, 문자적 번역)되어야 할 것이다. 의역(意譯)(dynamic equivalence)은 바람직하지 않다. 둘째로, 신약 헬라어(코이네 κοινή)가 통속적, 대중적 언어이었듯이, 성경은 쉬운 대중적 언어로 번역되어야 할 것이다. 셋째로,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고려하여 성경은 가능한 한 품위있는 말로 번역되어야 할 것이다. 넷째로, 우리나라에서는 신약의 전통사본(비잔틴 다수사본)의 본문을 따르고 기존의 개역성경의 본문을 가능한 한 유지하는 새 번역 성경이 필요하다.

 

성경 해석의 원리

성경은 바르게 해석되어야 한다. 만일 성경이 바르게 해석되지 않는다면, 성경의 목적이 무의미해지고 말 것이며 성도들은 성경책을 가지고도 하나님의 말씀의 기갈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성경 해석에는 몇 가지의 건전한 원리들이 있다.

첫째로, 성경은 문법적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문법적 해석에서 중요한 것은 단어들의 뜻과 어순과 문맥 등이다. 문법적 해석은 많은 경우 문자적 해석을 의미할 것이다. 그것은 매우 상식적인 해석이다. 성경은 일차적으로 학자들에게 주신 책이 아니고 일반 성도들에게 주신 책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대부분 단순한 문법적 해석에 의해 하나님의 뜻을 잘 드러낸다. 그러므로 비록 성경에 상징적, 시적 표현들이 있지만, 성경의 모든 부분에 대한 영적, 풍유적(allegorical) 해석은 잘못이다. 교회 역사상 초대 교회의 오리겐 이후 이런 해석 방식이 항상 있어 왔고 오늘날도 적지 않은 것 같지만, 그것은 성경의 순수한 뜻을 혼란시키고 성경의 불확실하고 주관적인 해석들만 남긴다. 우리는 이러한 영적 해석을 삼가야 한다.

둘째로, 성경은 역사적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성경의 많은 부분들, 아마 절반 이상은 역사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특별계시들을 어떤 특정한 역사적, 문화적 상황 속에서 주셨다. 그러므로 역사 지식은 성경 해석에 많은 도움이 된다. 따라서 성경 해석자는 성경 역사와 더불어 동시대의 세속 역사에 대해서도 알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그러나 비록 이런 역사 지식이 많지 못하다 할지라도, 우리는 대체로 성경에서 하나님의 의도하시는 뜻을 파악하기에 어렵지 않다고 본다.

셋째로, 성경은 신학적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성경의 참된 저자는 하나님 자신이시므로, 성경 어느 곳의 좀 불분명한 의미는 성경 다른 곳의 보다 분명한 의미에 의해 해석될 수 있다.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9는 바르게 진술하기를, “성경 해석의 정확 무오한 법칙은 성경 자체이다. 그러므로 의미가 여럿이 아니고 단 하나인 어떤 성구의 참되고 완전한 뜻에 관해 문제가 일어날 때에는 보다 더 명백하게 말하는 다른 곳들에 의해 그 뜻을 찾아 알도록 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성경의 각 부분은 성경 전체에 비추어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구약은 신약에 비추어 해석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점진성과 신약 계시의 최종성을 인정하면서, 구약은 신약에 비추어 그리고 신약 계시 안에서, 신약 계시를 넘어서지 말고 해석되어야 한다. 또 신약은 구약 위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신약 계시는 구약 역사의 터 위에 주어졌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전체 내용은 천지 창조와 인류의 타락과 하나님의 심판 그리고 이스라엘의 선택과 거역 및 멸망과 회복이라는 성경 역사의 전체적 맥락에서 바르게 이해될 수 있다. 더욱이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은혜의 복음은 구약 율법을 통해 인간의 전적인 부패성과 무능력이 증거됨으로써 밝히 제시된다. 그러므로 성경 진리를 전체적으로, 체계적으로 정돈한 바른 신학에 의해 성경이 해석될 때, 성경 모든 부분의 뜻은 밝아지고 탈선된 해석은 방지될 것이다.


성경의 충족성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충족히 전달하는 책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1, 6은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 . . .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그의 뜻을 계시하시던 이전의 그 방식들은 지금은 중지되었다. . . . 하나님 자신의 영광과 사람의 구원과 신앙과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들에 관한 하나님의 모든 뜻이 성경에 명백히 기록되어 있거나 혹은 건전하고 필연적인 논리에 의해 성경으로부터 추론될 수 있다. 그 하나님의 뜻에 어느 때든지 성령의 새로운 계시들이나 사람들의 전통들에 의해 아무것도 첨가될 수 없다.

구약은 모세 때로부터 그 충족성을 스스로 증거해왔다. 모세는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고 말했다(신 4:2). 율법에 무엇을 더하는 것은 그것의 불충족성을 의미할 것이다. 구약의 핵심은 율법이며, 선지서와 성문서는 율법에 무엇을 첨가한 것이라기보다 율법을 설명하고 확증하고 적용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시편 저자는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라고 증거하였다(시 19:7). 또 이사야 선지자도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모세의 율법]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이는 그들 속에 빛이 없기 때문이라”(원문 직역)고 증거하였다(사 8:20). 예수께서도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에서 구약의 충족성을 증거하시기를,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고 하였다(눅 16:31).

신약도 구약의 진리와 다른 무엇이 첨가되었다기보다는 구약에 예언되고 증거된 그리스도의 오심을 선포하고 해설한 것이다. 그러므로 신약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족보]라”는 말씀으로 시작된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은 구약에 약속된 메시야라는 뜻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에 관한 일들이 ‘모세와 선지자들의 글들과 시편’에 예언되어 있음을 증거하셨다(눅 24:27, 44; 요 5:39). 성경의 중심 인물과 대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신약교회의 창설자들인 사도들은 구약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가르쳤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최종적, 절정적 특별계시이시다. 히브리서 1:1, 2는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고 증거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사도들을 통하여 밝히 계시되고 해설되고 전달되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고 단언하였고(갈 1:8-9) 또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형제들아, 굳게 서서 우리의 말로나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전통들[전해 들은 내용들]을 지키라”고 말했다(살후 2:15). 주께서는 종말 예언까지 충족히 주셨다. 그러므로 성경의 맨 마지막 부분은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고 엄숙히 경고한다.

이제 사도들을 통해 기록된 신약은 충족한 계시로서 더 이상 무엇이 첨가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인류에게 알리기를 원하시는 그의 모든 뜻을 다 성경에 기록하셨다. 하나님의 특별계시는 신약으로 완성되고 종결되었다. 사도 바울은 방언이나 예언의 은사가 일시적일 것을 말한 후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나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한다’고 말하였다(고전 13:8-10). 하나님의 특별계시에 관한 한, 그 ‘온전한 것’은 곧 성경이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이 완성된 후 성경 외에 또 다른 특별계시들을 주실 필요가 없으셨다. 모든 사람은 성경을 읽고 듣고 배우고 깨닫고 믿고 마음에 새기고 바라고 실천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성도는 성경으로 만족해야 한다.

성경에 명시되어 있지 않은 문제에 관해서도, 성경 교훈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뜻을 추론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담배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담배가 몸에 해롭다는 사실이 살인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므로, 우리는 성도가 담배를 피우지 않는 것이 옳다고 추론할 수 있다. 또 미니 스커트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여자들이 아담한35) 옷을 입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므로(딤전 2:9), 우리는 미니 스커트가 여성도에게 합당한 복장이 아니라고 추론할 수 있다.

 

성경의 신적 권위성

성경은 신적 권위를 가진 책이다. 성경의 신적 권위는 전적으로 그것의 참저자이신 하나님께 의존하며 그에게로부터 나온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적절히 진술하기를, “그것 때문에 우리가 성경을 믿고 복종해야 하는 바 성경의 권위는 어느 사람이나 교회의 증거에 의존하지 않고 그것의 저자이시며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다(1:4).

성경의 권위는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된다. 첫째는 역사적 권위이다. 그것은 성경이 역사적으로 진실하고 믿을 만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의 역사적 권위, 곧 그것의 신빙성은 다음과 같이 확증된다.

첫째로, 진실은 하나님의 속성이며, 거짓은 마귀의 속성이다. 예수께서는 증거하시기를, “[마귀는] 처음부터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고 하셨다(요 8:44). 영생과 영벌의 엄숙한 구원 진리를 증거함에 있어서 그 무엇보다 요구되는 덕은 진실이다. 만일 성경의 증거가 진실하거나 믿을 만하지 않다면, 성경은 하나님의 책이 아니고 마귀의 책일 것이며, 거룩한 책[聖書]이 아니고 심히 악한 책일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마귀의 책일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마귀가 마지막 때에 영원히 지옥에 던지울 것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마 25:41; 계 20:10).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종류의 거짓을 정죄하시며, 거짓 증인을 미워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의 제9계명에서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고 명하셨다(출 20:16). 잠언 6:16-19는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 곧 그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6, 7가지니 곧 . . . 거짓된 혀와 . . .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거짓] 증인과”라고 말했다. 성경 마지막 부분에도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 . .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고 선언되어 있다(계 21:8).

셋째로, 예수께서는 친히 구약의 사건들을 언급하심으로 그것들이 역사적으로 진실하고 믿을 만함을 증거하셨다. 예를 들어, 예수께서는 노아의 때와 롯의 때에 대해 언급하셨고(눅 17:26-29), 모세 때에 광야에서 하늘에서 내린 떡인 만나에 대해 말씀하셨고(요 6:32), 엘리야와 엘리사 때의 일들을 증거하셨고(눅 4:25-27),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사실을 증거하셨다(마 12:39-40).

넷째로, 성경의 인간 저자들, 특히 신약의 저자들은 ‘증인들’로 불리웠다. 요한복음 21:24, “이 일을 증거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줄 아노라.” 사도들은 자신들을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의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고 자처하였다(행 10: 39). 성경에는 ‘증인,’ ‘증거,’ ‘증거하다’는 단어가 200회 이상 나온다.36)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들이 증거한 복음 때문에 핍박을 받았고, 마침내 스데반이나 야고보처럼 순교의 피로 그 증거를 확증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순교적 증언은 성경의 진실성에 대한 가장 힘있는 증거이다.

성경 권위의 다른 한 측면은 규범적 권위이다. 이것은 역사적 권위보다 실질적으로 더 중요한 측면이다. 성경의 규범적 권위란, 성경이 우리의 믿음과 생활에 대해 규범이 됨을 의미한다. 물론, 성경의 규범적 권위가 성경의 모든 내용에 다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성경의 역사적 내용들의 경우, 규범적 권위는 그 내용들에 담긴 진리에만 적용될 수 있다. 또 구약의 율법의 경우, 도덕법은 그 성격상 영속적이지만, 의식법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음으로 신약 아래서는 폐지되었고 재판법도 오늘날 세속 국가들에 그대로 적용되지는 않는다. 여기에 성경에 대한 건전한 해석과 적용의 필요성이 있다.

성경의 규범적 권위는 모든 참된 교회들의 기본적, 공통적 신앙이다. 종교개혁의 세 전통인 루터교회와 영국교회와 개혁교회는 성경의 신적인 권위 즉 성경이 유일한 최고의 그리고 최종의 권위를 가진다고 믿는다. 루터교회의 일치신조는 “모든 교의들과 모든 박사들이 평가되고 판단되어야 할 유일한 규칙과 규범은 구약과 신약의 선지자적이고 사도적인 글들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진술했다.37) 영국교회의 39개 신조도 “무엇이든지 [성경에서] 읽을 수 있고 그것으로 증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면 아무에게도 그것을 신앙의 조항으로 믿도록 요구되어서는 안 된다”고 진술했다.38)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2도 진술하기를, “성경 즉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의 명칭 아래 현재 구약과 신약의 모든 책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 . . 이 모든 책들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믿음과 생활의 규칙이다”고 하였다.

성경의 규범적 권위의 가장 확실한 증거는 성경자체이다. 이것을 ‘성경의 자증(自證, autopistos)’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성경의 신적 권위가 교회나 전통 등의 외적 증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 대한 증거가 하나님 자신에 의해 가장 잘 제시되듯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대한 증거는 성경 자체에 의해 가장 잘 제시되는 것이다.

성경의 규범적 권위에 대한 성경 자체의 증거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5에서 열거한 대로, 다음과 같이 서술될 수 있다.

첫째로, 성경의 내용은 천적(天的)이다. 성경은 단순히 땅의 일들이나 사람의 일들을 기록한 것이 아니고, 주로 하나님의 특별계시들, 곧 하나님께서 직접 나타나시고 말씀하시고 기적을 행하신 일들에 관하여 증거하고 기록한다.

둘째로, 성경의 교훈은 효력이 있다. 성경의 교리적, 윤리적 교훈들은 죄인들을 구원하고 성도들을 새롭게 하는데 효력이 있고 적응성이 있다. 오늘날도 죄인들은 이 말씀을 통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얻으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거룩한 삶을 산다.

셋째로, 성경의 문체는 장엄하다. 성경은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가라사대” 등의 말씀으로 가득하다. 그것은 성경이 과연 하나님의 말씀임을 증거한다. 그 누구도 감히 이런 표현으로 인간의 사상을 전달할 수 없으며, 만일 누가 거짓으로 그런 표현을 한다면 그것은 매우 악한 일이 될 것이다.

넷째로, 성경의 교훈들은 서로 일치한다. 성경은, 1500여년 간 30여 명의 인간 저자들에 의해 저술되었지만, 전체적으로 일치된 교훈을 증거한다.

다섯째로, 성경 전체의 가장 고상한 목표는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어떤 사건들을 사실 그대로 증거하고 사람을 미화(美化)시키지 않는다. 예를 들어, 성경은, 경건한 왕 다윗의 악하고 부끄러운 간음과 살인의 죄를 그대로 기록하였고(삼하 11장), 주의 귀한 종 바울이 주를 알기 전에 행했던 교회 핍박의 일을 세 번이나 자세히 기록하였다. 성경은 인간을 높이는 인간적인 책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만을 높이는 거룩한 책이다.

여섯째로, 성경은 사람들의 구원의 유일한 길을 충족하게 증거하고 있다. 성경은 인간의 근본 문제인 죄 문제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의 길에 대하여 명확하고 풍성하게 증거하고 있다. 세상에 성경 외에 참구원의 길을 증거하는 책은 없다. 죄인들은 이 책을 통하여 구원의 길을 넉넉히 발견할 수 있다.

일곱째로, 성경은 그 외에도 많은 비교할 수 없는 뛰어난 점들을 가지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완전하다. 성경은 윤리적으로 탁월하다. 또 성경은 기적들과 예언들의 성취를 통해 그 신적 권위를 스스로 증거한다. 성경은 율법, 역사, 예언, 시, 교리, 윤리, 종말 예언 등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체적으로 완전하여 교리나 윤리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충분히 계시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의 신적 권위에 대한 우리의 확신은 우리 속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내면적 증거를 통해 올 것이다.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의 어두운 마음을 밝히시고 성경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믿게 하실 때 성경이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임을 확신할 수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증거하였고(고전 2:12) 요한도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라고 했다(요일 2:27).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5는 적절히 진술하기를, “[성경]의 무오한 진리와 신적 권위에 대한 우리의 완전한 납득과 확신은 우리 마음 속에 그 말씀으로 그리고 그 말씀과 함께 증거하시는 성령의 내면적 활동으로부터 온다”고 하였다.

 

  7. 성경의 영감(靈感)과 무오(無誤)

성경의 영감(靈感)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책이다. 영감(靈感, inspiration)이란, 성경의 인간 저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내용들을 잘 이해하고 오류 없이 기록하게 하신 성령의 독특한 감동과 간섭을 가리킨다.39) 이것은 성경 저자가 하나님의 특별계시를 받을 때보다 그것을 기록할 때에 받았던 성령의 감동을 말한다. 성경 영감의 교리는 초대 교회 때로부터 있었던 전통적, 정통적 견해이었다.40)

구약 영감의 증거는, 첫째, 구약을 기록한 모세와 선지자들의 권위와 역할이다. 모세와 선지자들은 자기들의 견해를 전하지 않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였다. 민수기 12:6-8,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이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됨이라.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아니하며.” 열왕기상 22:14, “미가야가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것 곧 그것을 내가 말하리라.” 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성경을 기록하라고 명령하셨거나 성경을 기록하도록 섭리하셨다. 출애굽기 34:2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 말들을 기록하라.” 신명기 31:24, “모세가 이 율법의 말씀을 다 책에 써서 마친 후에.” 예레미야 30:2,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일러 가라사대 내가 네게 이른 모든 말을 책에 기록하라.” 성경을 기록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나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는 하나님의 뜻이 정확하게 기록되도록 성령으로 감동하시고 지도하실 것을 전제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의 기록을 실수투성이의 인간에게 맡겨두셨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특별계시를 주실 때와 같이 그 내용을 기록하게 하실 때도 성령의 비상한 감동과 지도하심을 주셨다고 판단한다.  

둘째, 예수께서는 친히 구약의 영감성을 증거하셨다. 그는, 당시의 정통 유대인들과 같이, 구약이 하나님의 절대적 권위를 가진 영감된 책으로 확신하셨다. 마태복음 4:4, “기록되었으되.” 요한복음 10:35,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마태복음 22:43, “(시편 110:1을 인용하시면서) 가라사대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셋째,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도 구약의 영감을 증거하였다. 디모데후서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이라는 원어(데오프뉴스토스 θεόπνευστος)는 ‘하나님께서 숨을 내쉬신’이라는 뜻으로 성경의 영감, 신적 기원 및 신적 권위를 보인다. 베드로후서 1:21,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사도행전 1:16, “성령이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예수 잡는 자들을 지로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사도행전 4:25,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히브리서 3:7,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신약 영감의 증거는, 첫째, 구약 예언의 성취라는 신약의 성격이다. 구약과 신약은 예언과 성취라는 관계가 있다. 그러므로 예언도 영감되었으면, 성취는 얼마나 더 영감되었겠는가? 마태복음 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世系)라.”

둘째, 신약이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인격이 신약의 영감을 증거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이 되신 하나님이시요 하나님의 특별계시 중의 특별계시이시요 하나님의 최종적, 절정적 특별계시이시다. 히브리서 1:1, 2,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복음 10: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마태복음 24:35,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셋째, 사도들의 역할과 권위는 그들이 쓴 신약의 영감을 증거한다.

(1) 사도들은 주께로부터 말씀 사역에 대한 특별한 명령을 받았다. 마태복음 28:18-20,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2) 사도들은 주께로부터 성령의 내주(內住)하심에 대한 특별한 약속을 받았다. 요한복음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한복음 16: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3) 사도들은 주께로부터 기적 행하는 능력을 받았다. 마태복음 10:1, “예수께서 그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고린도후서 12:12, “사도의 표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 사도행전 2:43,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그러므로 사도들은 교회의 기초라고 불리웠고 신자들은 그들의 전하는 말씀을 잘 지켜야 했다. 에베소서 2: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고린도전서 7:40, “내 뜻에는 그냥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으리로다. 나도 또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줄로 생각하노라.” 고린도전서 14:37,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줄 알라.” 데살로니가전서 2:13,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데살로니가후서 2:15, “이러므로 형제들아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을 지키라.” 요한계시록 22:18-19,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어떤 이들은 성경 영감의 증거가 성경의 영감을 성경 자체에 의해 증거하려는 순환논법이라고 반론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특별계시가 하나님 자신에 의해 가장 잘 그리고 가장 확실하게 증거되듯이, 하나님의 특별계시들의 기록인 성경도 그 자체에 의해 가장 잘 그리고 가장 확실하게 증거된다.

성경 영감의 범위는 성경 전체, 성경의 모든 책들, 또 각 책의 모든 부분, 심지어 글자까지도 포함한다. 이것을 ‘완전 영감’(plenary inspi- ration) 혹은 ‘축자(逐字, 글자) 영감’(verbal inspiration)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라는 말이 한번도 안나오는 에스더나, 겉보기에 남녀 간의 사랑의 노래인 아가서, 또 은혜의 복음 진리와 충돌되는 듯이 표현된 야고보서나, 매우 개인적 편지같이 보이는 빌레몬서 등도 영감되었다고 본다. 또한 성경의 교리적, 윤리적 내용뿐 아니라, 역사적, 지리적, 혹은 과학적 사실들까지도 영감되었다고 본다. 또 성경의 단어까지도 영감되었다고 본다. 사상은 단어들을 통해 표현되고 전달되기 때문에, 성경 영감은 반드시 글자 영감이어야 할 것이다. 단어의 오류는 결국 사상의 오류를 초래할 것이다. 성경에서 글자의 오류를 허용하면 결국 성경의 신적 권위성이 파괴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말씀하셨다(마 5:18). ‘일점일획’이라는 말은 지극히 작은 부분을 가리킨다. 이 표현은 히브리어의 י 요드나 ו 와우 같은 글자를 가리킨다. 비록 이 말씀이 과장적 표현이라 할지라도, 주께서 하신 말씀의 분명한 뜻은 성경의 지극히 작은 부분도 하나님의 섭리와 영감 가운데 주어졌다는 것이다. 또 예수께서는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그리스도를 주라 칭한 사실을 언급하셨고(마 22:43), 또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다’는 시편을 인용하셨다(요 10: 34). 이러한 언급은 성경에서 한 개의 단어도 중요함을 보인다. 즉 성경 영감이 단어에까지 미침을 보이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고 말했다(딤후 3:16). 모든 성경은 성경의 모든 책과 각 책의 모든 부분을 포함한다. 또 그는 갈라디아서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 ‘네 자손들’이라고 표현하지 않으시고 ‘네 자손’이라고 표현하셨음을 언급했다(갈 3:16). 이것은 성경의 단어가 단수명사냐 복수명사냐 하는 문제까지도 중요함을 보인다. 이것은 성경의 영감이 글자에까지 미침을 증거한다.

그러나 성경의 완전축자영감은 성경의 원본(autographa)을 두고 하는 말이며 사본에 적용되지는 않는다. 어떤 이들은, 성경의 완전영감이 성경 원본에만 적용되고 사본들에 적용되지 않는다면, 그리고 사본들에는 실제로 여러 가지 부정확함과 오류들이 있다면, 이런 영감의 교리는 실상 무가치하지 않는가라고 반론하였다. 그러나 성경 원본의 완전영감은 성경의 신빙성과 직접 관계된다. 성경 원본이 완전하게 영감되었다면 사본들의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기본적으로 믿을 만하지만, 그 원본이 완전하게 영감되지 않았다면 성경의 신빙성과 권위성은 확립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성경 사본들 간의 차이점들이란 실제로 매우 작은 것들이며 특히 전통적 다수사본들에 근거하면 원본의 본문은 거의 확정된다.

성경 영감의 방식은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고 다 설명할 수 없는 신비이지만, 그것은 때때로 ‘유기(有機)영감’(organic inspiration)이라고 표현된다. 유기 영감이란, 하나님께서 성경 저자들을 사용하실 때 단순히 받아쓰는 도구가 아니고 인격체로 사용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성경 저자들은 때때로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썼을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단지 기계적으로가 아니고 인격적으로 사용하셨고 그들의 문학적 활동들을 사용하셨던 것 같다. 그러므로 그들이 기록한 성경들은 그들의 독특한 문체, 성격, 타고난 재능, 교육 정도 등을 반영한다. 그러나 그렇다 할지라도 그들이 기록한 내용은 하나님의 생각을 반영한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의 권위로 인쳐졌다.

성경은 스스로 유기 영감을 증거한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는 말과 지식에 능한 모세를 사용하여 처음 다섯 권의 책을 기록하게 하셨고, 시적 재능과 지혜를 가진 다윗과 솔로몬을 사용하여 시편, 잠언, 아가 등을 기록하게 하셨다. 구약의 성문서들(율법과 선지서들 외의 책들)은 인간 저자들의 참된 시들이요 기도들이요 찬양들이었다. 또 성경 저자들은 때때로 다른 기록들을 하나님의 진리를 확증하는 보조 자료로 참조하거나 인용하였다. 예를 들어, 민수기는 ‘여호와의 전쟁기’라는 기록물에서 한 구절을 인용했고(21:14) 또 어떤 시인의 시의 내용을 인용하였다(21:27- 30). 역대기에는 족보들을 언급한 후 “이는 다 옛 기록에 의지한 것이라”고 표현했다(대상 4:22).

어떤 이들은, 모세오경과 이방 법전들의 내용의 유사성을 모세가 이방 법전들을 참고하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으나, 그것은 성경의 신적 권위성과 영감성에 충돌하는 생각이라고 본다. 모세의 법들과 이방 법들의 유사성은, 아마 모세 시대 이전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한 공통적 법들에 기인할 것이다.

신약의 경우에도, 누가는 누가복음 초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 관하여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살폈다”고 증거했고(눅 1:3) 그가 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그의 의학적 지식과 의사다운 세심한 성격을 반영한다. 또 하나님께서는 지식과 논리적 재능을 가진 바울을 사용하여 많은 서신들을 쓰게 하셨는데, 그의 재능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 같은 서신들에서 잘 증거된다. 또 빌레몬서에서 가장 잘 나타나듯이 그의 서신들은 실제의 편지들이었다.

 

성경의 무오(無誤)

성경 영감의 결과는 성경의 무오(無誤)이다. 성경 무오의 교리는 성경적 기독교와 자유주의 이단을 구별하는 기본적 잣대가 되는 매우 중요한 교리이다. 성경에 오류들이 많이 있다는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생각은 기독교의 근본을 파괴하는 이단 사상이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것은 성경이 정확무오한 진리임을 믿는 것이다.

성경 무오(無誤)는 무슨 의미인가? 첫째로, 성경 무오는 일차적으로 성경 원본(原本)을 두고 하는 말이다. 성경의 사본들에는 상이점들이나 부정확한 점들이 있지만, 성경의 원본은 무오하고 그 본문은 하나님의 섭리로 순수하게 보존되었다고 우리는 믿는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8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옛날 하나님의 백성의 모국어이었던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경과, 기록될 당시 여러 나라들에게 매우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었던 헬라어로 된 신약성경은 직접 하나님의 영감(靈感)을 받았으며 그의 독특한 배려와 섭리로 모든 시대에 순수하게 보존(保存)되었으므로 믿을 만하다. 따라서 종교상 모든 논쟁들에서 교회는 최종적으로 그 성경에 호소하는 것이다.

물론, 어떤 사본이 원본의 본문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이지만, 원본의 본문은 사본들의 비교 연구를 통해 거의 대부분 확인될 수 있다. 실상 사본들의 차이점들은 매우 작은 것이어서, 그것들이 성경의 교리나 윤리의 윤곽에 어떤 중대한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둘째로, 성경은 모든 역사적, 교리적, 윤리적 진술에서 무오하다. 성경의 역사적 사실은 성경계시의 기본적 내용이므로, 만일 그것들의 정확성과 신빙성이 부정된다면, 그것에 근거한 성경 교리도 파괴되고 말 것이다. 성경의 교리들과 윤리들도 무오하다. 사도 바울은 '나는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는다'고 증거하였다(행 24:14). 또 그는 "형제들아 굳게 서서 우리의 말로나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전통들[=전해 들은 내용들]을 지키라"고 말했다(살후 2:15).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바를 다 믿고 다 지켜야 한다.

셋째로, 성경에 오류처럼 보이는 난해구절이 없는 것은 아니다. 성경에는 다른 부분과 외형적으로 불일치하는 부분들이 없지 않다. 이것들을 성경의 난제(難題)들이라고 부른다. 오류는 단순히 오류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고, 명확히 잘못이라고 확인되고 증명된 것이어야 할 것이다. 성경에 증명된 오류는 없다. 성경의 난제들에 어떤 가능한 설명들이 있다면, 그것은 오류라고 단정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역사상 성경의 많은 난제(難題)들은 고고학의 발달로 해명되었다. 아직 잘 모르는 부분에 대해서는 믿음과 기도로 겸손히 그 뜻을 찾아나가야 할 것이다.

성경 무오의 증거는 무엇인가? 우리가 성경의 무오성(無誤性)을 믿는 까닭은 첫째로 성경의 신적 권위 때문이며, 둘째로 성경의 축자(逐字, 단어) 영감 때문이며, 셋째로 성경의 독특한 목적 때문이다.

첫째로, 우리는 성경의 신적 권위 때문에 성경의 무오성을 믿는다. 주 예수께서는"성경은 폐하지 못한다"고 친히 말씀하셨다(요 10:35).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을 지키라"고 말하였다(살후 2:15). 또 요한계시록 22:18-19는 기록된 책의 말씀들에 무엇을 더하거나 거기에서 무엇을 빼지 말라고 엄히 경계하였다. 이러한 말씀들은 다 성경의 신적 권위를 증거한다.

만일 성경이 어떤 오류가 있는 책이라면, 그것은 신적 권위를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오류가 있는 책에 신적 권위를 돌릴 수 없을 것이다. 아무리 작은 부분의 오류라 할지라도, 성경에 오류가 있다는 생각은 성경 전체에 악영향을 미치며 성경의 신임성과 권위를 파괴시키고 말 것이다. 사실, 이것이 오늘날의 자유주의 신학이 해온 바이다. 성경의 오류를 말하면서 시작된 자유주의 신학은 마침내 성경의 기본적 사실들과 교리들을 부정하였던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성경의 축자(逐字, 단어) 영감을 믿기 때문에 성경의 무오성을 믿는다. 주 예수께서는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말씀하셨다(마 5:18). 그것은 성경의 일점일획, 즉 작은 부분까지 영감되었음을 잘 나타낸다. 사도 바울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고 말했다(딤후 3:16). 또 그는 갈라디아서 3:16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의 말씀에서 '자손'이라는 단어가 복수명사인가 단수명사인가를 가지고 진리를 해석하고 논하였다. 즉 그는 성경의 영감이 단어에까지, 그것도 그 단어가 복수인가 단수인가에까지 미침을 증거한 것이다.

이와 같이,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책이다. 성경 자체가 모든 성경 곧 성경의 모든 책과 각 책의 모든 부분들이 영감되었음을 증거한다. 성경의 지극히 작은 부분, 심지어 단어까지도 영감되었다. 우리는 성경의 축자적(逐字的, verbal) 영감을 믿는다. 성경의 단어 영감의 사실은 성경에 오류가 있을 가능성을 배제한다.

셋째로, 우리는 성경의 독특한 목적 때문에 성경의 무오성을 믿는다. 시편 19:7-8은 성경의 독특한 목적과 그 목적을 위한 네 가지의 성격 즉 완전성, 확실성, 정직성, 순결성을 증거한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사도 바울은 성경이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주며 또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고 증거했다(딤후 3:15-17). 하나님께서 성경을 주신 첫 번째 목적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함이었다. 구원의 요점은 주 예수를 믿고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칭의 稱義)과, 거룩해지고 온전케 되는 것(성화 聖化)이다. 구원은 진리와 비진리, 의와 불의, 생명과 죽음, 천국과 지옥을 나누는 일이며 영원한 죽음에서 영생으로, 지옥 형벌에서 천국 복락으로 이끄는 것이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숭고하고 중대한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구원을 위해 우리에게 성경책을 주셨다.

성경은 우리의 신앙과 행위, 즉 교리와 윤리의 객관적 표준이 된다. 그러므로 성경에 계시된 구원의 진리들과 생활의 원리들은 확실하고 무오(無誤)할 수밖에 없다. 만일 성경이 오류가 있는 책이라면, 그 구원의 목적은 실패하고 말 것이다. 워필드는 적절히 말하기를, "계시는, 만일 그것이 무오하게 전달되지 않는다면 반(半)계시뿐이요, 또 만일 그것이 무오하게 기록되지 않는다면 반(半)전달뿐이다"고 했다.41) 그러나 성경을 주신 하나님의 목적은 결코 실패할 수 없다. 이 배교와 불신앙의 시대에도, 하나님께서는 이 무오한 성경을 통해 그의 택한 백성을 구원하시고 온전케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의 신적 권위와 무오성을 믿자.

성경 무오의 교리는 역사적 교리이다.

주후 1세기 로마의 클레멘트는, “너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성경을 자세히 상고하였다. 너희는 거기에 아무 불의하거나 거짓된 것이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고 썼다.42)

어거스틴은 제롬에게 쓴 편지에서 “나는 [성경]의 저자들의 어느 누구도 어떤 점에서나 기록상 잘못을 범하지 않았다고 매우 확신합니다”라고 썼다(Letters, 82).

종교개혁자 루터와 칼빈도 성경의 신적 권위와 무오를 믿었다. 개혁교회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진술하기를, “[성경의] 모든 책들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믿음과 생활의 규칙이다”(1:2), “[성경의] 무오한 진리와 신적 권위에 대한 우리의 완전한 납득과 확신은 우리 마음 속에 그 말씀으로 그리고 그 말씀과 함께 증거하시는 성령의 내적 활동으로부터 온다”고 하였다(1:5).

성경에 실제적으로 오류가 있는가?

자유주의자들은 성경에 자연 현상에 대한 어떤 서술을 과학적 오류라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욥기 37:18에 ‘부은 거울 같은 견고한 궁창’이라는 표현을 오류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은 과학적 서술이 아니고 통속적 표현이며 오류라 할 수 없다.

또 자유주의자들은 성경에 많은 역사적 오류들이 있다고 주장했었다. 그러나 그 대다수가 고고학적 발굴로 반증(反證)되었고 오히려 성경의 역사성이 증거되었다. 현재의 매우 제한된 역사 지식으로 성경을 비판하는 일을 삼가야 한다.

또 어떤 이들은 주장하기를, 성경에 기록된 야곱의 일부다처의 생애, 노예 제도, 가나안 족속들을 진멸함, 시편의 저주시들 등을 도덕적 오류라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옛 시대의 도덕적 정도를 보고 임시로 허용하신 것과 그가 선이라고 인정하신 것과는 서로 다르며 또 개인적 보복과 하나님의 공의의 선언과 시행도 서로 다르다.

또 어떤 이는 신약 저자들이 구약을 자유롭게 인용하거나 해석한 것을 오류라고 한다. 그러나 그런 인용과 해석이 원문의 참된 의미를 벗어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오류라고 볼 수 없다.

또 어떤 이는 성경의 역사적 보도의 불일치를 오류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만일 그러한 것이 전체적 서술과 부분적 서술의 차이, 자세한 서술과 간략한 서술의 차이, 혹은 강조점의 차이 등으로 이해될 수 있다면, 그것은 오류라고 볼 수 없다.


 

제2부: 신론

신론(神論, Theology)은 하나님과 그의 사역들에 관해 논한다.

  

1. 하나님이 계신 증거들

2. 하나님의 속성들

3. 삼위일체(三位一體)

4. 예정(豫定)

5. 창조

6. 섭리

7. 후대 기적의 문제

  

 

1. 하나님이 계신 증거들

하나님에 관한 진리들을 말할 때, 우리는 먼저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말해야 할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존재하시지 않다면, 그에 대한 모든 논의는 무의미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저자는 말하기를,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하였다(히 11:6).


 이성과 경험의 증거

역사상, 하나님의 존재하심에 대한 여러 가지 합리적 논증들이 제시되어 왔다. 첫째는 우주 혹은 자연만물 자체에 근거한 논증이다. 세상의 모든 사물은 어떤 원인의 결과이며 어떤 결과가 존재하면 그 원인도 존재한다. 우주의 궁극적 원인 즉 제1 원인을 우리는 하나님이라 부르는데, 우주가 존재하듯이 그 원인이 되는 하나님은 존재하신다. 이것을 우주론적 논증(the cosmological argu- ment)이라고 부른다(아리스토텔레스나 토마스 아퀴나스 등이 제시함).

둘째는 우주 혹은 자연만물의 목적성에 근거한 논증이다. 집이나 시계 같은 모든 설계된 작품들은 그 설계자의 존재를 증거한다. 우주는 인간이 만든 그 어떠한 작품보다 더 탁월하고 놀라운 작품이며43) 그 놀랍고 신비한 질서와 적응성, 예컨대 천체의 질서나 동식물과 사람의 구조 등은 그것을 만드신 지혜로우신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존재를 증거한다. 이것을 목적론적 논증(the teleological argument)이라고 부른다(소크라테스, 키케로, 필로 등이 제시함).

셋째는 하나님의 개념에 근거한 논증이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 개념은 완전자라는 개념이다. 자연만물과 사람은 다 불완전하지만, 하나님은 완전하시다. ‘완전’이라는 개념 속에는 ‘존재한다’는 성질이 포함되며 따라서 하나님은 존재하신다. 이것을 본체론적 논증(the ontological argu- ment)이라고 부른다(안셈이나 데카르트 등이 제시함).

넷째는 사람의 양심 곧 도덕적 분별력에 근거한 논증이다. 사람 속에는 양심 곧 도덕적 분별력이 있는데, 그것은 그것을 주신 도덕적 하나님의 존재를 증거한다. 뿐만 아니라, 인류가 역사 속에서 경험한 바대로 선한 자는 잘되고 악한 자는 천벌을 받는다는 관념도 도덕적 하나님의 존재를 증거한다. 이것을 도덕적 논증(the moral argument)이라고 부른다(칸트 등이 제시함).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에 대한 이상 네 가지의 합리적 논증들은 사람들에게 유익하다. 촬스 핫지는 “[그것들은] 소크라테스 때로부터 현대까지 가장 지혜로운 자들에 의해 건전하고 결정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고 말했고,44) 로레인 뵈트너도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위한 우주론적, 목적론적, 본체론적, 도덕적 변론들은 개방되고 편견없는 마음을 가진 누구에게나 효과가 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45) 박형룡 박사도 “유신논증들은 큰 가치를 가진 것이다. 성경과 기독교 경험에 의하면, 성령이 사람의 심령(心靈)에 확신(確信)과 회심(回心)을 산출하시는 과정에 논증들을 사용하시기를 기뻐하신다. 이 논증들 자체들은 아무 사람도 중생시키지 못하나 오히려 전도의 과정에 기구(器具)로 되어 왔다”고 말했다.46)

 

성경의 증거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증명하려 하지 않고, 그 사실을 전제하고 선포한다. 창세기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그러나 이러한 전제와 선포는 하나님의 존재하심에 대한 강력한 증거이다.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자이시다. 온 우주만물은 그로 말미암아 존재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을 전제하지 않고서 이 세상의 어느 것 하나를 바르게 알고 바르게 논할 수 있겠는가?

창세기 1:1에 계시되고 선포된 하나님은 무엇에 의해 존재케 되신 자가 아니고 영원 전부터 스스로 계신 자, 즉 영원자존자(永遠自存者)이시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라고 말씀하셨다(출 3:14).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라고 번역된 원어(에예 아쉐르 에예)는 직역하면 “나는 ‘나는 있느니라’이니라”이다. 이 말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는 뜻일 것이다. 헬라어 70인역은 “나는 있는 자니라”(에고 에이미 호 온)라고 번역했고, 영어 성경들은 히브리어를 그대로 직역하였다("I am that I am"). 한글성경에 ‘여호와’로 번역된 하나님의 히브리어 명칭(예호와)은 ‘있다’라는 동사(하야의 고어 하와)에서 나온 말로서 ‘존재하시는 자’라는 뜻을 가진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시다.

물론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합리적 논증들을 인정한다. 시편 19편의 저자는 고백하기를,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라고 했다(시 19:1-4). 시편 94편 저자는 “백성 중 우준한 자들아, 너희는 생각하라. 무지한 자들아 너희가 언제나 지혜로울꼬? 귀를 지으신 자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자가 보지 아니하시랴?”라고 말했다(시 94:8, 9).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족속으로 자기의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셨으나 그러나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느니라”고 했고(행 14:16, 17) 또 “그[하나님]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고 했다(행 17:24-28). 또 그는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고 말했다(롬 1:19, 20). 히브리서 3:4는 말하기를,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존재하심에 대한 이런 합리적 논증보다도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특별계시들, 즉 하나님께서 직접 나타나시고 말씀하시고 기적을 행하신 일들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에 대한 더 확실한 증거들이 아닐 수 없다. 신명기 4:32-35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음과 같이 증거하였다: “네가 있기 전 하나님이 사람을 세상에 창조하신 날부터 지금까지 지나간 날을 상고하여 보라.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이런 큰 일이 있었느냐? 이런 일을 들은 적이 있었느냐? 어떤 국민이 불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너처럼 듣고 생존하였었느냐? 어떤 신(神)이 와서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전쟁과 강한 손과 편 팔과 크게 두려운 일로 한 민족을 다른 민족에게서 인도하여 낸 일이 있느냐? 이는 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행하신 일이라. 이것을 네게 나타내심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네게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은 어떻게 나타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사람 속의 본성의 빛 자체와 하나님의 행하신 일들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명백히 선포하지만, 그의 말씀과 성령께서만 사람들에게 그들의 구원을 위해 그를 충분하게 또 효력있게 계시하신다”라고 대답했다(제2문답).

비록 부수적으로이지만, 사람은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하면서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알기도 한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활동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생명은 하나님의 근본적 속성이다.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 그는 생명의 근원이 되신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이 살아계시다고 증거한다. 사무엘하 22:47, “여호와는 생존(生存)하시니.” 시편 36:9, “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예레미야 10:10, “오직 여호와는 참 하나님이시요 사시는 하나님이시요.” 디모데전서 6:16,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살아계신 하나님은 택한 죄인들을 구원하시고 그들을 지키시고 인도하신다. 성도들은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을 체험하며 산다. 특히 하나님은 성도의 기도를 응답하신다. 예레미야 29:12, 13,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그러므로 비록 부수적 증거이지만 우리는 경험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를 알 수 있다.

 

 무신론의 어리석음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무신론(無神論)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많은 증거들, 즉 합리적 논증들과 성경의 증거들과 경험의 증거들을 무시하는 어리석은 생각이다. 그래서 시편 14:1은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라고 말했다. 무신론은 하나님이 없다는 주장에 대해 무슨 증거를 제시하는가? 무신론은 단지 어리석은 사상일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 앞에서 근본적인 죄악이다.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 자체가 큰 죄악이며 또 그것은 인간의 윤리적 죄악들의 뿌리이다. 그러므로 시편 14편은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자들은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다고 말했고(시 14:1) 잠언은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악에서 떠난다고 했다(잠 16:6).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부정하는 사람들을 죄악 가운데 내버려두셨다.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두셔서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다(롬 1:28).

 

 2. 하나님의 속성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완전히 정의할 수는 없으나 그의 속성들에 의해 그를 묘사할 수는 있다. 하나님의 속성들(attributes)이란, 하나님께나 그의 하시는 일들에 돌려지는 성질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본체와 그 속성들은 서로 연관되어 있고 그 둘을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다. 하나님의 본체는 각 속성에 관계되어 있고, 하나님의 모든 속성들은 그의 본체에 관계되어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비록 하나님의 본체 자체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을지라도,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속성들을 통해 그에 대해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가질 수 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4문답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하나님의 열 가지 속성으로 대답하기를, “하나님은 그의 존재와 지혜와 능력과 거룩과 의와 선과 진실에 있어서 무한하시고 영원하시고 불변하신 영이십니다”라고 하였다.

 

 영(靈)이심

첫째로, 하나님은 영이시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영이시라’고 증거하셨다(요 4:24). 하나님께서 영이시라는 말은 그가 물질적 존재가 아니시며 인간과 같은 육체를 가지고 계시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영은 살과 뼈가 없다’고 증거하셨다(눅 24:39). 하나님께서 십계명에서 사람이 그의 모양을 만드는 것을 엄히 금하신 것은 그의 영성(靈性)을 잘 증거한다. 하나님을 피조세계의 어떤 형상으로 상상하거나 그런 형상을 만드는 것은 우상숭배이며 우상숭배는 성경에서 가장 큰 죄로 간주된다.

성경에 하나님의 손, 하나님의 팔, 하나님의 귀와 눈 등의 표현이 나오지만(출 3:20; 6:6; 사 37:17),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속성과 능력과 활동에 대한 상징적 표현으로47)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상징적 표현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형상화(形象化)하는 것은 그런 표현을 오해하는 것이요 성경의 명백한 진리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인간의 육체와 같은 육체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은48) 분명히 잘못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사람은 육신의 눈으로 그를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골 1:15), “보이지 아니하는 자”(딤전 1:17),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볼 수 없는 자”(딤전 6:16)라고 말했다. 사도 요한도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고 증거했다(요 1:18).

성경은 때때로 사람들이 하나님을 보았다고 말한다. 창세기는 아브라함과 야곱이 하나님의 얼굴을 대하였다고 기록한다(창 18장, 창 32장). 출애굽기는 모세와 아론과 이스라엘 장로 70인이 이스라엘 하나님을 보았다고 기록한다(출 24:9, 10). 그러나 이런 말씀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천사나 사람의 형상으로 낮추어 계시하신 모습 곧 그의 영광의 한 면모를 보았다는 의미로 보아야 한다. 성도들이 천국에서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라는 표현(마 5:8)도 성도들이 천국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다 밝아진 영의 눈으로 보게 된다는 뜻이지 하나님의 본체를 본다는 뜻은 아니다. 유한(有限)한 인간은 무한하신 영이신 하나님의 본체를 볼 수 없다.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말은 또한 그가 살아계신 자이심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생명 없는 어떤 개념이나 힘이 아니고 살아계신 영이시다. 그는 인간이 만든 생명 없는 우상들과 다르다. 그러므로 예레미야는 “여호와는 참 하나님이시요 사시는 하나님이시요”라고 증거했고(렘 10:10) 사도 바울은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다”고 말했다(딤전 6:16). 세상의 모든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 하나님은 생명의 원천이시다. 하나님의 손, 하나님의 팔, 하나님의 귀와 눈 등의 상징적 표현들은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활동하심을 잘 증거한다.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말은 또한 그가 인격적 존재이심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인격적 존재이시다. 우주의 완전자 하나님은 절대적 존재이시지만 동시에 그는 인격적 존재이시다. 하나님을 ‘인격적(人格的)’이라고 묘사하는 것은 그가 사람과 같이 지정의(知情意) 즉 지식과 감정과 의지를 가진 자이심을 의미한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감정을 가지시며 스스로 무엇을 결정하시고 행동하시는 인격적 하나님이심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에서부터 사람에게 무엇을 명령하셨고 사람이 그의 명령을 거역했을 때 그를 내어쫓으셨다. 하나님은 역사상 많은 사람들과 교제하셨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손과 팔, 귀와 눈 등의 표현들도 그의 인격성의 증거이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이시다(엡 1: 11). 하나님의 분노와 보응도 그의 인격성의 당연한 한 요소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영적으로 드려야 한다. 예배는 외적인 의식보다 마음이 중요하다. 바른 지식과 믿음의 마음, 죄를 미워하고 통회하는 마음, 거룩한 마음, 순종하는 마음이 중요하다.

 

 무한(無限)하심

둘째로, 하나님은 무한(無限)하시다. 하나님은 본체에 있어서도 무한하시고 그의 속성들에 있어서도 그러하시다. 성경은 하나님의 본체가 무한하심을 증거한다. 시편 145:3은 “여호와는 광대하시니[크시니] 그의 광대하심[크심]을 측량치 못하리로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크심을 재어볼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시편 139:7-10은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고 말한다. 또한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殿)이오리이까?”고 고백한(왕상 8:27) 솔로몬의 고백은 옳은 말이다. 선지자 이사야는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을꼬?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라고 했고(사 66:1), 예레미야는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고 증거했다(렘 23:24).

이와 같이 하나님의 무한하심은 공간적 의미를 가진다. 물론 그것은 하나님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다 합친 것이라는 뜻이 아니지만, 그것들을 다 품으실 수 있다는, 그러나 그것들을 초월하신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물질적 몸을 가진 인간은 공간의 제약을 받으므로 한 장소에 있으면 같은 시간에 다른 장소에 있을 수 없지만, 하나님은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시고 공간을 초월하신다. 하나님은 모든 공간에 충만히 존재하신다.49) 그는 어디에나 계시고(遍在) 안 계신 곳이 없으시다(無所不在).50)

물론 성경은 때때로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신다고 표현한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그 거룩한 처소 하늘에서 하감(下鑑)하신다’고 말했다(신 26:15). 솔로몬도 하나님께서 ‘그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신다’고 말했다(왕상 8:30). 역대하 30:27은 “그 기도가 여호와의 거룩한 처소 하늘에 상달하였더라”고 말한다. 주께서는 우리에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마 6:9).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시므로, 성경은 때때로 그가 땅에 내려오셨다고 표현한다(창 11:5). 또 에녹과 엘리야는 하늘로 승천하였다고 증거되었다(히 11:5; 왕하 2:11). 또 예수 그리스도도 제자들 앞에서 하늘로 올리워가셨다(행 1:9). 이러한 말씀들은 분명히 그들이 하늘 위로 장소적 이동을 하였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시다는 이러한 표현들은 하나님께서 하늘에 그의 영광의 한 처소를 두셨다는 것을 증거할 뿐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곳이 바로 천국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저자는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고 증거하였다(히 11:16).

하나님은 또한 그의 모든 속성들에 있어서도 무한하시다. 그것은 또한 그의 완전하심이라고도 표현될 수 있다. 하나님은 지혜와 지식이 무한하시고 능력이 무한하시고 거룩하심과 의로우심이 무한하시고 선하심이 무한하시다. 즉 그는 완전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는 모든 점에 부족이 없는 완전충족하신 하나님이시다.

그의 완전하심은 그의 영광으로 나타난다. 그는 영광 중에 거하시며 모든 피조물들에게서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 유일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영원히 가장 사모할 만한 분이시다. 그래서 시편 저자는 영감 중에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라고 고백했다(시 73:25). 욥기 35:6-8, “네가 범죄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네 죄악이 관영한들 하나님께 무슨 관계가 있겠으며 네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네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네 악은 너와 같은 사람이나 해할 따름이요 네 의는 인생이나 유익하게 할 뿐이니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2는 하나님의 완전성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그 자신 안에 그리고 그 자신으로부터 모든 생명과 영광과 선과 행복을 가지고 계시며; 또한 홀로 그 자신 안에서 그리고 그 자신을 향해 완전충족하셔서, 그가 만드신 어떤 피조물들도 필요하지 않으시며, 그것들로부터 아무런 영광도 끌어내지 않으시며, 오직 그 자신의 영광을 그것들 안에, 그것들에 의해, 그것들을 향해, 그리고 그것들 위에 나타내실 뿐이다. 그는 모든 존재의 유일한 근원이시며, 모든 것들은 그로부터, 그를 통해, 그리고 그를 위해 존재하며; 그는 그것들 위에 지극히 주권적 통치권을 가지고 계셔서 그 자신이 기뻐하시는 것을 무엇이든지 그것들에 의해, 그것들을 위해, 또는 그것들 위에 행하신다.


 영원하심

셋째로, 하나님은 영원하시다. 그것은 그가 시간적으로도 무한하심을 의미한다. 그는 영원 전부터 계셨고 영원 후까지 계신다. 창세기 1:1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은 천지 만물이 하나님의 창조로 시작되었음을 보이는 동시에,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그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심을 증거한다. 천지를 창조하실 때 이미 존재하셨던 그는 피조세계에 속하지 않으신다. 천지창조 이전에 존재하신 그는 영원하시다. 욥기 36:26은 “하나님은 크시니 우리가 그를 알 수 없고 그 연수를 계산할 수 없느니라”고 말한다. 모세는 시편 90:2에서 성령의 감동으로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하였다.

시간은 피조세계 속에서 사용되는 것이며 사실상 창조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창조주 하나님은 피조세계에 속하지 않으시며 시간에 매이시거나 제약을 받으시지 않고 시간 자체를 초월하는 영원하신 분이다. 하나님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바라보실 수 있는 초시간적이며 비시간적인 분이시다. 그러므로 시편 90:4는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임이니이다”고 말했다. 하나님은 ‘영원한 현재’ 속에 계신다. 엄격히 말한다면, 그에게는 전(前)도 없고 후(後)도 없으며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다. 촬스 핫지는 말하기를, “그에게는 과거, 현재, 미래의 구별이 없고, 모든 것이 그에게 동등으로 또는 항상 현재이다. 그에게 ‘기간’(duration, 시간 흐름의 과정)은 영원한 현재이다”라고 하였다.51)

하나님이 영원하시다는 것은 그가 시작이 없이 영원히 스스로 계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어떤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 ‘절대자’이시다. 하나님은 모든 존재의 제1 원인 혹은 궁극적 원인이시다. 그 자신의 존재의 근거는 자신 이외에 없으시다. 사실,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부터 계신 하나님은 영원자존하신 하나님이 아니실 수 없다. ‘여호와’(예호와 혹은 야웨 )라는 그의 이름도 그의 영원자존하심을 나타낸다. 이 말은 ‘있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동사에서 나왔고52) 그 의미는 출애굽기 3:13, 14의 말씀대로 ‘그가 스스로 계신다’는 뜻일 것이다.

 

불변하심

넷째로, 하나님은 불변하시다. 시편 102:27은 ‘주는 여상(如常)하시다’라고 말했는데, ‘여상(如常)하시다’는 말은 ‘동일하시다’(the same)는 뜻이다. 말라기 3:6은 “나 여호와는 변역지[변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고 말했다. 또 야고보서 1:17은 “[하나님은]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고 말했다.

물론, 하나님의 불변하심은 비(非)활동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며 활동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예수께서는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말씀하셨다(요 5:17). 인류 역사는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의 역사, 즉 그가 활동하시는 역사이다.

하나님의 불변하심은 그의 본체와 속성들의 불변하심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의 뜻과 계획과 작정의 불변하심을 의미한다. 시편 33:11은 “여호와의 도모는 영영히 서고 그 심사는 대대에 이르리로다”라고 증거한다. 또, 이사야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나의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나의 경영한 것이 반드시 이루리라”고 증거했다(사 14:24). 하나님은 그가 뜻하신 바를 변경함 없이 다 성취하시는 주권적 하나님이시다.

물론 성경에 ‘하나님께서 뉘우치신다, 후회하신다’는 표현이 간혹 나오는 것은 사실이다. 예들 들어, 출애굽기 32:14는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고 말했고, 사무엘하 24:16은 “여호와께서 이 재앙 내림을 뉘우치사 백성을 멸하는 천사에게 이르시되 족하다. 이제는 네 손을 거두라”고 말했다. 또 요나 3:10은 “하나님이 그들[니느웨 사람들]의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이런 표현들은 인간편에서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한 비유적 표현, 즉 신인동형동성적(神人同形同性的) 표현이며 하나님의 작정의 불변하심에 대한 말씀과 모순된다고 볼 것은 아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손상시킬 것이다.

무한하심과 영원하심과 불변하심은 피조물에게는 없고 오직 하나님께만 있는 속성들이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독특하신 점들이다. 실상 무한하시고 영원하시고 불변하신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철학적, 종교적 질문들에 대한 해답이시다. 그는 우주와 인간에 대한 유일하고 완전한 대답이시다. 인간은 영원자존하시는 그 분 안에서만 참된 평안과 안식을 찾을 수 있다. 우리는 그 하나님 안에서 살고 있으므로 그를 항상 인정하며 의지하며 살아야 한다.

 

지혜로우심

다섯째로, 하나님은 지혜로우시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은 무한하시고 완전하시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크심은 그의 창조하신 만물에 잘 증거되어 있다. 성경도 그의 크신 지혜와 지식을 증거한다. 욥은 ‘지혜와 권능이 하나님께 있다’고 말하면서(욥 12:13), 하나님을 ‘지혜(다임, 지식)가 온전하신 자’라고 표현하였다(욥 37:16). 한나는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보시느니라”고 말했다(삼상 2:3). 시편 139:1, 2는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라고 말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머리털까지 다 세신다고 표현하셨다(마 10:30). 히브리서 4:13은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고 말하였다.

지식은 어떤 대상에 대해 이해하는 내용이라고 볼 수 있다. 지식의 대상은 현실적인 것뿐 아니라 가상적인 것도 포함된다. 하나님의 지식의 성격은 직각적이며(욥 34:23) 독립적이고 총괄적이며 동시적이며 개별적이고 명확하고 완전하며 불변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또 하나님의 지식은 그 범위가 전(全)포괄적이므로 전지(全知)라고 표현된다. 하나님의 지식은 인간의 모든 지식의 원천이며 원형(原形)이다. 사람의 지식은 하나님의 지식을 본받은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의 한 요소이다. 사람의 지식의 성격은, 하나님의 지식의 성격과 달리, 점진적이며 의존적이고 부분적이며 제한적이고 불명확하고 불완전하며 가변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지식과 구별되는 지혜는 지식을 응용하는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지식을 응용하여 최선의 방법으로 최선의 목적을 이루시는 지혜의 하나님이시다. 로마서 11:33은,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고 증거하였다.

하나님은 전지하시므로 인간이 그를 속이려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행동은 없다. 인간은 전지하신 하나님 앞에 진실하고 솔직해야 한다. 또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완전하심을 깨닫고 인정한다면, 우리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고 그를 의지하며 그의 인도하심과 다스리심에 순응해야 할 것이다.

 

능력이 있으심

여섯째로, 하나님은 능력이 있으시다. 구약에서 ‘하나님’으로 번역된 말(엘 혹은 엘로힘)은 하나님의 위엄과 능력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위엄과 능력이 있으시고 그의 능력은 전능(全能)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전능자’(솻다이) 혹은 ‘전능하신 하나님’(엘 솻다이, 창 17:1)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고 말씀하셨다(창 18:14). 욥은 “주께서는 무소불능(無所不能)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며”라고 고백했고(욥 42:2), 예레미야는 “주께서 큰 능과 드신 팔로 천지를 지으셨사오니 주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으시니이다”라고 했다(렘 32:17). 천사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나타나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하나님께 불가능한 일은 아무것도 없음이니라]”고 말했다(눅 1:37).

하나님의 전능은 측량할 수 없는 무제한적 능력이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뜻 안에서 스스로 능력의 사용을 제한하기도 하신다. 그러므로 기적은 항상 일어나지 않는다. 또 하나님은 자기 자신의 성질에 모순된 일들을 행하실 수 없다. 예를 들어, 그는 죽으실 수 없고 변하실 수 없고 범죄하실 수 없고 거짓말을 하실 수 없다. 그러므로 바울은 ‘하나님께만 죽지 아니함이 있다’고 말했고(딤전 6:16) 또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고 했으며(딤후 2:13)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라고 말했다(삼상 15: 29).

전능하신 하나님은 기뻐하시는 뜻대로 무엇을 행하실 수 있고 또 그렇게 행하시는 하나님, 즉 주권적 하나님이시다. 주권성을 표현하는 하나님의 이름이 ‘주’라는 말(아도나이)이다(창 15:2). 모세는 “여호와는 신의 신이시며 주의 주시요”라고 고백했다(신 10:17). 다윗은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主權)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 . .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라고 말했고(대상 29:11), 여호사밧은, “주의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능히 막을 사람이 없나이다”고 말했다(대하 20:6). 사람의 구원 문제에 있어서도 하나님은 주권적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사람의 구원에 관해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9: 26).

하나님을 믿는 자는 그의 크신 능력을 믿으며 어떤 처지, 어떤 환경에서도 두려워하거나 낙망하지 않고 그에게 기도하며 모든 일을 맡기고 잠잠히 그를 바라볼 수 있다. 그에게는 우주와 인생의 모든 문제의 해답이 있다.


거룩하심

일곱째로,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모세는 고백하기를,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에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 누구니이까?”라고 했다(출 15:11). ‘거룩하다’는 히브리어(카도쉬)는 ‘구별됨, 분리됨’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그가 모든 피조세계와 구별되며 분리되어 계심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존재의 이 엄위하심은 모든 피조물이 그를 찬송하고 경배하는 이유가 된다. 그러므로 다윗은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라고 고백했고(시 22:3), 이사야의 환상 가운데 천사들은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라고 외쳤다(사 6:3).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또한 하나님께서 도덕적으로 모든 죄와 불결로부터 떠나 계심을 의미한다. 도덕적 의미에서의 거룩은 의(義)와 비슷한 개념이다. 하나님의 이 도덕적 성결은 인간의 도덕적 모범이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라고 말씀하셨다(레 11:45).

 

 의로우심

여덟째로, 하나님은 의로우시다. 에스라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의롭도소이다”라고 증거했고(스 9:15), 시편 145:17은 “여호와께서는 그 모든 행위에 의로우시며”라고 말했다. ‘의로운’(찻디크) 혹은 ‘의’(체다카)라는 히브리어는 본래 ‘어떤 기준에 맞는다’는 의미를 가진다. 의의 기준은 하나님 자신이다. 그는 도덕적으로 완전하시며, 자신의 도덕적 완전성에 항상 일치하는 의로운 분이시다. 하나님의 의의 속성은 그가 제정하신 법에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의 법에 일치할 때 의로운 자가 된다. 그러므로 모세는 “우리가 그 명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고 말했다(신 6:25).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지극히 의로우실 뿐만 아니라, 또한 피조물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지극히 의로우시다. 그는 피조물을 다스리시고 그들의 행위들을 판단하심에 있어서 의로우시다. 이것을 ‘통치적 의’라고 한다. 하나님은 온 우주에 의로운 통치자시며 의로운 재판장이시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이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신다’고 고백했고(시 9:8),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라고 불렀다(딤후 4:8).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그가 선한 자에게 상을 주시고, 악한 자에게 벌을 내리시는 데서도 나타난다. 이것을 ‘보응적 의’라고 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 . .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않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고 말했다(롬 2:5-8).

특히, 악한 자들에게 벌을 내리는 하나님의 형벌적 의의 속성은 복음 진리를 이해하는데 매우 필수적 요소이다. 하나님께 이러한 공의의 속성이 없었다면,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 구주 예수께서 반드시 십자가에 죽으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벌적 의’ 때문에, 구주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의로운 율법의 저주를 받으셨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고 증거했다(갈 3:13).

자유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형벌적 공의를 부정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그것을 가르친다. 범죄한 아담과 하와는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고 땅은 그들로 인해 저주를 받았고 그들은 죽음과 온갖 불행을 맛보게 되었다. 노아 시대의 홍수 심판이나 그 후 악하고 음란했던 소돔 고모라 성의 유황불 심판은 하나님의 공의의 형벌이었다. 구약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과 이방 나라들에 대한 징벌은 그것을 증거한다. 특히 지옥 진리는 그것을 밝히 증거한다. 마가복음 9:43,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ㅇ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그 외에 성경의 많은 말씀들은 하나님의 공의의 형벌을 가르친다. 그 몇 구절들을 들어보자. 시편 7:11,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예레미야 30:23, 24, “보라, 여호와의 노가 발하여 폭풍과 회리바람처럼 악인의 머리를 칠 것이라. 나 여호와의 진노는 내 마음의 뜻한 바를 행하여 이루기까지는 쉬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말일(末日)에 그것을 깨달으리라.” 예레미야 애가 2:1-4, “슬프다, 주께서 어찌 그리 진노하사 . . . 진노하신 날에 . . . 노하사 . . . 맹렬한 진노로 . . . 처녀 시온의 장막에 노를 불처럼 쏟으셨도다.” 나훔 1:2, 6, “여호와는 투기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리는 자에게 보복하시며 . . . . 누가 능히 그 분노하신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 진노를 감당하랴? 그 진노를 불처럼 쏟으시니.” 히브리서 12:29,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

 

선하심

아홉째로, 하나님은 선하시다. 시편 106:1은, “할렐루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고 말씀했다. ‘선(善)하다’는 개념은 ‘이상(理想)에 맞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인간들의 이상에 완전히 부합하시는 분이시다. 그는, 철학자들이 표현했던 대로, ‘최고선’(最高善)이시며 모든 선의 원천이시다. 성경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사랑, 은혜, 인자(仁慈)와 긍휼, 오래 참으심 등으로 표현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성적 피조물인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선한 자와 악한 자에게 모두 선하시다. 하나님은 태양을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신다(마 5:45). 그러나 하나님은 특별한 의미로 그의 택한 백성을 사랑하신다. 그 사랑은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어 십자가에 죽게 하신 데서 나타났다. 요한복음 3:16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했다.

하나님의 은혜란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구속적(救贖的)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다’고 말했고(롬 3:24) 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다(엡 2:8).

하나님의 인자(仁慈)와 긍휼은 하나님께서 죄의 형벌과 고통 중에 있는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심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에서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케세드, 자비, 인자)를 베푸느니라”고 말씀하셨다(출 20:6). 또 그는 모세에게 자신을 ‘자비롭고(라쿰)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케세드)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고 증거하셨다(출 34:6).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은 하나님께서 노하기를 더디하심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악인들과 불순종자들에 대하여 오래 참으시고 기다리신다. 그는 자신을 ‘노하기를 더디하는’ 하나님으로 증거하셨다(출 34:6).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라고 썼다(롬 2:4).

하나님께서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심지어 생물들에 대해서도 선하시다. 그러므로 시편 145편에서 다윗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는 만유[모든 생물들]를 선대(善待)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 . . . 중생(衆生, 모든 것들, 모든 피조물들)의 눈이 주를 앙망하오니 주는 때를 따라 저희에게 식물을 주시며”라고 했다(시 145:9, 15).

 

진실하심

열째로, 하나님은 진실하시다. 진실이란, 이름과 실질, 속과 겉, 말과 행위가 같은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이름 그대로 참 하나님, 곧 참되고 완전한 신성을 가진 하나님이시다. 그는 그의 중심과 외적인 표현, 그의 말과 행위가 항상 동일하시다. 그는 문자 그대로 참되시다. 그에게는 어떤 거짓도 없으시다. 또 그는 그의 약속에 대하여 성실하시며 약속한 것을 반드시 지키신다. 약속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신실함은 성도들의 믿음과 소망의 근거요 기쁨의 원인이다.

그러므로 모세는 “[여호와는] 신실한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그 언약을 이행하시며”라고 말했다(신 7:9). 다윗은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고 주의 성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쳤으며”라고 말했다(시 36:5). 시편 89:14는 “의와 공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라, 인자함과 진실함이 주를 앞서 행하나이다”라고 말했고, 시편 92:2는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나타내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베풂이 좋으니이다”라고 했다. 사도 바울은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라고 말했고(롬 3:4) 또 “우리는 미쁨[신실함]이 없을지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항상 신실하시니]”라고 말했다(딤후 2:13). 히브리서 10:23은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으라’고 교훈하였다. 심지어 이방인 선지자 발람도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食言)치[거짓말하지] 않으신다’고 말했다(민 23:19).

이와 같이, 영(靈)이심, 무한하심, 영원하심, 불변하심, 지혜로우심, 능력이 있으심, 거룩하심, 의로우심, 선하심, 진실하심은 성경에서 하나님께 돌려진 속성들이다. 이 열 가지 중, 무한하심, 영원하심, 불변하심은 하나님께만 있는 속성들, 즉 하나님의 ‘비공유적(非共有的)’ 속성들이라고 부른다. 나머지 일곱 가지의 속성들, 즉 영이심, 지혜로우심, 능력이 있으심, 거룩하심, 의로우심, 선하심, 진실하심은 피조물들에게도 어느 정도 나누어 주신 속성들, 즉 하나님의 ‘공유적(共有的)’ 속성들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은 피조물인 우리가 본받을 수 없지만, 공유적 속성은 우리가 어느 정도 나누어 가진 것들이며 또 본받아야 할 것들이다. 특히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의로우심과 선하심과 진실하심 등 하나님의 도덕적 속성들을 본받아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한 인격자가 되어야 한다.

 

  3. 삼위일체(三位一體)

하나님은 삼위일체(三位一體)되신 하나님이시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6문답은 “하나님께는 세 인격 즉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계신데 이 셋은 본체에 있어서 동일하고 능력과 영광에 있어서 동등한 한 하나님이십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성경이 증거하는 하나님의 삼위일체 되심은 다음과 같은 요점들을 포함한다.

 

한 하나님

첫째로,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신구약성경은 온 세상에 오직 한 하나님이 계심을 증거한다. 출애굽기 20: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신명기 6:4,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이사야 44:24,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나와 함께한 자 없이 홀로 하늘을 폈으며 땅을 베풀었고.” 고린도전서 8:6,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 디모데전서 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5문답은 “한 분 이상의 하나님들이 계신가?”라는 질문에 대해, “살아계시고 참되신 오직 한 하나님이 계신다”라고 대답했다.

하나님의 유일하심은 그의 본체 혹은 본질의 단일성이라고 이해된다. 하나님의 본체 혹은 본질이란 하나님의 모든 속성들과 활동들의 공통적 주체가 되는 객관적 존재를 의미한다. 우리 말에 본체와 본질은 약간 다른 뉘앙스를 가지는 것 같다. 본질은 하나님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모든 것을 가리키는 비교적 추상적 개념이며 본체는 그러한 본질을 가진 구체적 존재를 가리키는 맛이 있는 것 같다. 하나님은 본질 혹은 본체에 있어서 하나이시다.

초대교회의 니케야 신조는 성부와 성자는 같은 본질을 가지신다고 진술했다. 촬스 핫지의 논평대로, 니케야 신조의 ‘같은 본질의’(호모우시오스)라는 말은 단지 종류적 동일성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수적인 동일성(numerical identity)도 의미하는 것이며, “만일 호모우시오스가 종류적 동일성의 의미로 해석된다면, 니케야 신조는 삼신론(三神論, Tritheism)을 가르칠 것이다”(Hodge, I, p. 460). 또한 초대교회에 작성된 아다나시우스 신조는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말한다: “아버지는 영원하시고 아들은 영원하시고 성령은 영원하시다. 그러나 그들은 세 영원자들이 아니고 한 영원자이시다. . . . 이와 같이 아버지는 전능하시고 아들은 전능하시고 성령은 전능하시다. 그러나 그들은 세 전능자들이 아니고 한 전능자이시다. 이와 같이 아버지는 하나님이시고 아들은 하나님이시고 성령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그들은 세 하나님들이 아니고 한 하나님이시다.”53)

 

 세 인격

둘째로,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의 아들과 성령이 계시며 이 삼위(三位) 혹은 세 인격은 서로 구별되신다. 인격(person)이란 자의식(自意識)을 가지고 자신의 신분을 인식하는 이성적 존재를 가리킨다. 하나님께 있는 세 인격은 서로 구별되는 세 개체적 존재이다. 칼빈은 “내가 의미하는 인격은 신적 본체 안의 한 실존 즉 다른 둘과 관계되어 있으나 함께 나눌 수 없는 특성들에 의해 구별되는 실존이다”라고 말했다(기독교강요, 1. 3. 6).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3은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한 하나님 안에 한 본질과 능력과 영원성을 가진 세 인격 즉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이 계시다. 아버지는 아무에게서 나시지도 나오시지도 않고 아들은 영원히 아버지에게서 나시고 성령은 영원히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오신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구별된 세 인격이시다. 마태복음 3:16, 17은,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고 증거한다. 또 요한복음 14:16에서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영원한 본체는 동일하게 세 인격들에 공통적이며 이런 의미에서 그 셋은 하나이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본체는 인격적 특성에 의해 구별되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 영원히 존재하시며 이런 의미에서 그 셋은 셋이다. 그러나 세 인격은 하나님의 본체와 나란히 있는 어떤 존재들이 아니고 그 본체 안에 있으며 하나님의 본체의 존재 양식이다. 아버지는 참 하나님이시요 아들도 참 하나님이시요 성령도 참 하나님이시다. 각 인격은 하나님의 본체와 동일하고, 만일 두 인격을 합한다 할지라도 하나보다 더 크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각 인격에 하나님의 본체 전체가 있기 때문이다. 교회 역사상,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구별을 부정한 자들이 있었으나 그들은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그들의 사상은 사벨리우스주의 혹은 양태론적 단일신론이라고 불리웠다. 아버지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다는 소위 ‘성부(聖父) 수난설’은 이런 사상에서 나온 오류이었다.

 

아버지

아버지는 세 인격을 대표하는 분으로서 단순히 하나님으로 표현된다. 고린도후서 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고린도전서 8:6,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

그러나 그는 아들과 관계하여 아버지로 언급된다. 요한복음 1:14, “아버지의 독생자.” 요한복음 5:17,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요한복음 8:54,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이시라.” 요한복음 17: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에베소서 1:3,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아들

아들은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이해된다. 하나님의 아들은 그의 신성(神性)을 나타내는 명칭이다. 그것이 메시야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될 때에라도 그것은 그의 신성을 증거한다. 아들은 아버지와의 존재적 관계에서 아들이시다. 로마서 8: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갈라디아서 4: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특히 ‘독생자’(모노게네스 μονοgενής)라는 명칭은(요 1:14, 18; 3:16, 18; 요일 4:9), 비록 그것이 신약성경에서 사람의 외아들이나 외동딸에게도 사용되었지만(눅 7:12; 8:42; 9:38), 아버지와 아들의 독특한 관계를 나타낸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증거하는 다른 여러 구절들도 아버지와 아들의 독특한 관계를 암시한다(마 11:27; 요 5:18-25 등). 신성(神性)은 인격성을 내포하고, 그것은 아버지와 아들 간의 인격적 관계에서 가장 잘 이해된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1:1의 ‘말씀’(로고스 λόgος)은 인격성을 가진 신적 존재로 인정되어야 하며 따라서 그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로 가장 잘 이해된다.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아들은 참된 신성을 가진 자로 이해되기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즉 아들의 출생은 영원하다고 이해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3은 “아들은 영원히 아버지에게서 나시고”라고 진술한다. 예수께서는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다(요 17:5). ‘창세 전’은 시간 세계 이전이며 영원이라는 말로만 표현될 수 있다. 물론 영원 전의 출생이라는 생각은 하나님만큼이나 신비하다.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시간 세계 속에서 생각하는 것은 아들의 신성에 결함을 주고 결국 그 신성을 부정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의 출생 관계는 영원적이라고 표현되어야 하며 아들의 영원 출생을 부정하거나 포기하는 것은 잘못이다.

아들의 참된 신성에 대한 성경의 증거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아들에게 돌려지는 신적 명칭들은 그의 신성을 증거한다. 이사야 9:6, “그 이름은 . . .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요한복음 1:1,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디도서 2:13,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 요한일서 5:20,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둘째로, 그가 가지신 신적 속성들은 그의 신성을 증거한다. 마태복음 18: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골로새서 2:9,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요한계시록 22: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셋째로, 그가 행하시는 신적 사역들은 그의 신성을 증거한다. 요한복음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한복음 14: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그 외에도 그가 행하신 모든 기적들이 그러하다.

넷째로, 그가 받으시는 신적 존영이 그의 신성을 증거한다. 마태복음 28:19,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요한계시록 5:12, 13,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은 이처럼 성경에 풍성히 증거되어 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참되고 완전한 신성을 부정하는 초대교회 시대의 아리우스주의나 오늘날의 일위신론(一位神論, Unitarianism)이나 자유주의는 명백히 이단이다.

 

성령

제3위이신 성령은 성경에서 ‘영,’ ‘성령,’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등으로 불린다. ‘영’(루아크, 프뉴마)은 바람같이, 호흡같이 일하시는 그의 사역의 양식을 나타낸다. ‘성령(聖靈)’은 그의 거룩하심을 나타낸다. 그는 거룩하시며 거룩한 일을 이루신다.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그리스도의 영’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나타낸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영원함같이, 아버지와 성령의 관계도 영원적이라고 본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원하심과 성령의 참된 신성에 근거한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는 참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그의 영이 하나님이신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성령의 참된 신성에 대한 성경의 증거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성령은 하나님과 동일시되신다. 사도행전 5:3, 4, “네가 성령을 속이고 . . .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사도행전 28:25,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로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사 6:9,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둘째로, 성령께서 가지시는 신적 속성들은 그의 신성을 증거한다. 고린도전서 2:10,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히브리서 9:14, “영원하신 성령.”

셋째로, 성령은 신적 사역을 하신다. 창세기 1:2, “하나님의 신[영]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욥기 26:13, “그 신[영]으로 하늘을 단장하시고.”

넷째로, 성령께서는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경배와 영광을 받으신다. 마태복음 28:19,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고린도전서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교회 역사상, 성령의 신성과 인격성을 부정하는 자들이 있었다(단일신론, 소시너스주의, 일위신론 등). 그들은 성령께서 인격적 하나님이심을 부정하였다. 그러나 성경은 성령의 신성을 증거하며 신성은 그의 인격성을 내포한다. 더욱이 그의 인격성은 성경에서 그에게 사용된 인격적 명칭과 인격적 특성에서 확증된다.

첫째로, 성령은 인격적 명칭으로 불리우신다. 예수님은 성령께서 오시면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라고 말씀하셨다(요 16:14). 영은 헬라어에서 중성명사이지만, 여기 ‘그가’라는 말은 남성 지시대명사이다. 바울은 성령에 대해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라고 말했다(엡 1:14). 여기의 ‘이는’도 남성 관계대명사이다. 이 말들은 성령의 인격성을 증거한다.

둘째로, 성령은 인격적 특성들을 가지신다. 예수께서는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고 말씀하셨고(요 14:26) 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라고 말씀하셨다(요 15:26). 사도행전은 성령께서 신자들에게 말씀하심을 증거한다(행 8:29; 10:19; 13:2). 사도행전 16:7은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고 말한다. 바울은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신다’고 말했고(롬 8:16) 또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고 말했다(롬 8:26). 또 그는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고 교훈했다(엡 4:30).

초대교회는 성령께서 아버지로부터 나오실 뿐 아니라 ‘아들로부터도’(filioque = and from the son) 나오신다는 사실에 대해 논쟁하였다. 이것은 후에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분열의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동방교회는 성령께서 아들로부터도 나오신다는 사실을 부정하였다. 그러나 성령께서 ‘하나님의 영’으로 뿐만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의 영’ 혹은 ‘아들의 영’으로도 불리우신다는 사실은 성령께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나오실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아들로부터도 나오신다는 말할 수 있는 근거이다. 로마서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갈라디아서 4:6,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빌립보서 1:19,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 요한계시록 5:6, 어린양의 일곱 눈은 하나님의 일곱 영 곧 성령이시다.


 세 인격 간의 관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서로 어떤 관계를 가지시는가? 세 인격은 신적 본체에 있어서 동일하고 그 능력과 영광에 있어서 동등하시지만, 그 인격적 특성과 사역에 있어서 어떤 종속적 관계를 생각할 수 있다. 삼위 간의 논리적 순서는 아버지-아들-성령이며, 아들은 아버지에게 속하시고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에게 속하신다. 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3은 “아버지는 아무에게서 나시지도 나오시지도 않고, 아들은 영원히 아버지에게서 나시고, 성령은 영원히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오신다”고 말한다. 아버지는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고 아버지와 아들은 성령을 보내셨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다’고 말씀하셨고(요 3:17), 또 성령에 관하여는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라고 표현하셨다(요 15:26).

세 인격은 사역에 있어서도 구별되신다. 아버지는 아들을 낳으신다. 낳으시는 일은 성부만의 독특한 사역이다. 아들은 낳으심을 받을 뿐이다. 또 아버지와 아들은 성령을 보내신다. 성령은 그들로부터 나오신다. 또한 세 인격은 구원의 사역에 있어서도 구별되신다. 아버지께서는 만세 전에 택자들을 예정하셨고, 아들께서는 2천년 전에 십자가 위에서 택자들의 구속(救贖)을 이루셨고, 성령께서는 그 구속을 택자들에게 적용하셔서 그들을 실제로 구원하신다. 중생(重生)과 성화는 주로 성령께 돌려진다.

결론적으로, 삼위일체 진리는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기독교 체계의 중심과 같아서 신학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만일 이 진리가 버림을 당한다면, 속죄와 중생 같은 다른 중요한 교리들도 큰 손상을 당할 수밖에 없다.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사상은 항상 인간의 전적 부패성과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를 부정하는 자력(自力) 구원사상과 같이 갔다.

그러나 하나님의 삼위일체는 매우 신비하다. 하나님의 삼위일체에 대한 교리적 진술은 하나님의 신비를 만족하게 설명하려는 시도라기보다 단지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생각들(단일신론, 양태론, 삼신론 등)을 방지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삼위일체는 사람이 이해하기 어려운 신비이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에 명백하게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이다. 그러므로 박형룡 박사는 말하기를, “우리가 이것을 믿음은 우리가 이것을 이해하는 때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자신을 이렇게 계시하신 때문이다”라고 말했다(교의신학, 2권, 202쪽).

  

4. 예정

하나님께서는 무슨 일을 하셨고 또 하시는가? 하나님의 하시는 일들은 예정과 창조와 섭리라는 말로 요약된다. 그 중, 예정(豫定)은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세상의 모든 일과 특히 사람들의 구원을 미리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다는 것을 말한다.


 세상의 모든 일들을 예정하심

하나님은 만세 전에 세상의 모든 일들을 미리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다.54)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3:1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가장 지혜롭고 거룩한 자신의 뜻의 계획에 의해 모든 일어날 일들을 자유롭고 불변적이게 정하셨다. 그러나 그것에 의해 하나님은 죄의 창조자이지 않으시며 피조물의 의지가 침해되지도 않으며 또한 제2 원인들의 자유나 우연함이 제거되지도 않고 오히려 확립된다

 

 증거

성경은 하나님의 영원불변적 작정과 의지에 대해 명백하고 충분하게 증거한다. 시편 115:3,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 시편 135:6, “여호와께서 무릇 기뻐하시는 일을 천지와 바다와 모든 깊은 데서 다 행하셨도다.” 이사야 14:24, 27, “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나의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나의 경영한 것이 반드시 이루리라. . . . 만군의 여호와께서 경영하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폐하며 그 손을 펴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돌이키랴?” 이사야 37:26, “이 일들은 내가 태초부터 행한 바요 상고부터 정한 바로서 이제 내가 이루어.” 이사야 41:4, “이 일을 누가 행하였느냐? 누가 이루었느냐? 누가 태초부터 만대(萬代)를 명정(命定)하였느냐? 나 여호와라.” 이사야 46:10-11,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내가 말하였으즉 정녕 이룰 것이요 경영하였은즉 정녕 행하리라.” 다니엘 4:35, “땅의 모든 거민을 없는 것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사에게든지, 땅의 거민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로마서 11:36, “이는 만물[모든 것]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이성적으로도, 사람이 무슨 일을 하기 전에 자세한 계획을 세우는 것을 생각한다면, 전지전능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실 때 완전한 계획을 가지셨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더욱이, 모든 일을 미리 아시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은 그 일들이 확실히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내포하며, 이 확실성은 단순히 우연이나 인간의 자유에 근거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의 주권자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선하심의 진리도 그의 영원한 작정을 후원한다. 우주의 창조 때에 하나님께서 그것의 진행과 미래를 인간의 자유나 불확실한 우연에 맡겨두셨다고 상상하는 것은 그의 선하심에 명백히 배치된다.

 

 성격

하나님의 작정은 어떤 성격을 가지는가? 우선, 하나님의 작정은 영원적이다. 창조와 섭리는 논리적으로 작정 후에 그리고 시간 세계 속에서만 생각될 수 있다. 또한 하나님의 작정은 주권적이다. 하나님의 작정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다. 그것은 피조물의 어떤 조건에 의존하지 않는 그의 절대적 행위이다. 또한 하나님의 작정은 불변적이다. 하나님의 작정은 어떤 확고히 정해진 계획을 의미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작정은 도덕적이다. 하나님의 작정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마음대로 아무렇게나 행하신 어떤 전횡적 행위가 아니고 그의 가장 지혜롭고 거룩하고 선한 뜻에 근거한 행위이다. 하나님의 작정은 지극히 거룩하고 선하다.

하나님의 작정의 진리는 세상의 숙명론 혹은 결정론과 다르다. 숙명론은 세상의 모든 일이 미리 결정된 어떤 운명이며 인간의 어떤 노력으로도 그것을 변경할 수 없다고 믿는 매우 소극적이고 현실도피적인 사상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작정은 인간의 자유롭고 자발적인 행위들과 그것들에 따르는 도덕적 책임을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긍정한다. 잠언 16:33,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에스겔 36:37,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마태복음 7:7,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빌립보서 2:13, “너희 안에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요한계시록 22:12,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또 성경은 사람편에서 볼 때 세상에 우연한 일들이 있음을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긍정한다. 룻기 2:3, “[나오미의 며느리 모압 여자 룻은]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 열왕기상 22:34, “한 사람이 우연히 활을 당기어 이스라엘 왕[아합]의 갑옷 솔기를 쏜지라.”

 

범위

하나님의 작정의 범위는 어떠한가? 하나님의 작정은 우주의 모든 일들을 포함한다. 로마서 11:36,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에베소서 1:11,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심지어 인간의 죄 문제까지도 하나님의 작정 속에 포함된다. 하나님의 뜻과 사람의 죄와의 관계는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이지만, 성경은 사람들의 죄까지도 하나님의 작정 속에 포함시킨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뜻과 작정 밖에 있지 않다.

창세기 45:8, [요셉이 형들에게 말함]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사무엘상 2:25, “[엘리의 아들들이] 그 아비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음이었더라.” 잠언 16:4,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누가복음 22:22,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로마서 9:17, 22,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죄에 대한 하나님의 작정은 흔히 ‘허용적 작정’이라고 표현된다. 이 말은 피조물의 죄까지도 하나님의 주권적 작정 속에 있으나 죄의 책임은 하나님께 돌릴 수 없음을 나타낸다. 지극히 거룩하시고 죄를 벌하시는 하나님께서 죄의 원인자가 되실 수는 없다. 죄는 오직 피조물에게서 나온다. 하나님께서는 마귀의 존재와 그 활동들도 그의 예정 속에 두셨으나, 마귀를 마귀되게 한 자는 하나님이 아니시고 마귀 자신이다. 마귀는 스스로 타락하였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용하셨으나 그 허물과 책임은 하나님께 돌려질 수 없다. 인간의 범죄와 타락도 마찬가지이다.

 

목적

하나님의 작정의 목적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작정은 궁극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함이다. 이사야 48:11, “내가 나를 위하며 내가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에베소서 1:6, 12, 14, “[예정과 구속과 중생은] 그의[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로마서 11:36, “이는 만물[모든 것]이 주[하나님]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창조와 구속과 심판의 궁극적 목적도 그러하다. 시편 19:1,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요한계시록 4:11,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이사야 43:7, 21,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사람들의 구원을 예정하심

하나님께서는 만세 전에 사람들의 구원을 미리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3:3, 4는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하나님의 작정에 의해 그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어떤 사람들과 천사들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예정되었고, 다른 이들은 영원한 죽음에 이르도록 예정되었다,” “이렇게 예정된 이 천사들과 사람들은 개별적으로 그리고 불변적으로 계획되어진 것이며 그들의 수는 매우 확실하고 명확해서 더해지거나 감해질 수 없다.”

 

선택

사람들에 대한 예정은 선택과 버려두심의 두 요소로 구성된다. 예정의 첫 번째 요소는 선택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3:5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인류 중에서 생명에 이르도록 예정된 자들을 세상의 기초가 놓이기 전에 그의 영원하시며 불변하신 목적과 그의 은밀한 계획과 기쁘신 뜻에 따라 오직 그의 값 없는 은혜와 사랑으로 영원한 영광에 이르도록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셨고; 신앙이나 선행들이나, 혹은 그것들 가운데서 끝까지 견딤이나, 혹은 피조물 안의 다른 어떤 것을 조건들로나 그를 그것으로 이끄는 원인들로 미리 아심이 없이 하셨으며; 모든 것이 그의 영광스러운 은혜를 찬송하게 하셨다.

 

증거

성경은 하나님의 선택에 대해 밝히 증거한다. 요한복음 6:39, “내게 주신 자.” 요한복음 17:6,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 . .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요한복음 17:9,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주신’이라는 헬라어들은 완료시제이며 하나님의 선택이 확정되어 있음을 보인다.55) 사도행전 13:48,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작정된 자’(테타그메노이 τεταgμένοι)라는 헬라어도 완료시제이다. 로마서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에베소서 1:3-5,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 . .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성격

하나님의 선택은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행하신 일이다. 에베소서 1: 4, “창세 전에 . . . 우리를 택하사.” 하나님의 선택은 불변적이다. 요한복음 6:39,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사도행전 13:48,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로마서 8:30,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디모데후서 2:19,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하나님의 선택은 또한 주권적, 무조건적이다. 요한복음 6: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예수께 오는 자 곧 예수 믿는 자가 하나님께서 예수께 주시는 자 곧 하나님의 선택을 받는 자가 아니고, 하나님이 예수께 주시는 자 곧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가 예수께 나아와 믿는다. 요한복음 10:26, “너희는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유대인들은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의 양이 아닌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양이 아니므로 예수님을 믿지 않은 것이었다. 로마서 9: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로마서 9:15, 16,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로마서 9: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에베소서 1: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에베소서 1:11,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디모데후서 1: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만일 선택이 사람들의 회개나 믿음에 대한 하나님의 미리 아심(豫知)에 근거한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택하신 것이 아니고 사람이 하나님을 택한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위의 인용된 많은 구절들은 사람이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택하신 것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그러므로 로마서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라는 말씀이나, 베드로전서 1:2,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라는 말씀은 소위 예지 예정을 보이는 것이 아니고 단순히 ‘하나님의 호의’를 나타내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의 다른 명백한 구절들이 주권적 선택을 증거하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님의 선택 안에는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구원의 수단들도 포함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3:6은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자들을 영광에 이르도록 정하셨을 때 그의 뜻의 영원하고 가장 자유로운 계획에 의해 그것을 위한 모든 수단들도 예정하셨다. 그러므로 아담 안에서 타락하였으나 택하심을 입은 그들은 그리스도에 의해 구속(救贖)되고; 정한 때에 활동하시는 그의 영에 의해 효력 있게 부르심을 받아 그리스도를 믿고; 의롭다 하심을 얻고 양자(養子)가 되고 거룩해지고 그의 능력으로 믿음을 통해 구원에 이르도록 보존된다. 오직 선택된 자들 외에는, 아무도 그리스도에 의해 구속(救贖)되거나 효력 있게 부르심을 받거나 의롭다 하심을 얻거나 양자(養子)가 되거나 거룩해지거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특히 하나님의 선택은 그리스도 안에서 즉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에 근거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죄인들의 구원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에 근거한 하나님의 은혜이다. 에베소서 1:4,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디모데후서 1:9,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의 선택은 택함받은 죄인들이 자동적으로 구원받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과 성령의 거듭나게 하시고 거룩케 하시는 사역과 인간편에서 전도, 회개와 믿음, 순종 등의 자발적 행위들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점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에 대해 오해하기도 한다.

 

타락과의 관계

선택과 타락의 관계는 어떠한가? 시간적으로, 하나님의 선택이 창세 전이므로 타락 전이라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하나님이 사람들을 선택하셨을 때 그들을 죄 없는 상태의 사람들로 보셨는가, 아니면 타락할 자들로 보셨는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된다.

선택을 창조와 타락의 허용보다 앞에 두어, 하나님이 사람을 선택하셨을 때 그를 무죄 상태의 사람들로 보셨다는 견해를 전택설(前擇說, supra-lapsarianism)이라고 한다. 이 견해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강조하며 하나님께서 어떤 자들을 선택하지 않고 버리심을 하나님의 기쁘신 뜻으로 간주한다. 이 견해는 바울의 토기장이의 비유(롬 9장) 등에 나타난 하나님의 절대주권의 진리에 근거하며 그 진리에 비추어 다른 견해보다 더 논리적이게 보이고 천사들의 경우에는 적절해 보인다. 그러나 이 견해는 죄 없는 사람들의 일부를 영원한 멸망에 버리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에 조화되는가 하는 어려운 문제를 안고 있다.

다른 한편, 선택을 창조와 타락 허용의 작정 후에 두어, 하나님이 사람을 선택하셨을 때 그를 장차 타락할 자로 보셨다는 견해를 후택설(後擇說, infra-lapsarianism)이라고 한다. 이 견해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어떤 자들을 선택하지 않고 버리심은 하나님의 공의의 행위로 간주된다. 이 견해는 선택이라는 것이 죄로부터의 구원의 선택이므로 타락을 전제해야 한다고 본다. 에베소서 1:4,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이 견해는 하나님의 주권에 비추어 논리적으로 약해 보이는 점이 있으나 전택설의 어려운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것 같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후택설을 취하는 것 같다. 3:7,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나머지 사람들을 지나쳐버리시고 그들의 죄로 인한 수욕과 진노에 이르도록 작정하셔서.” 개혁파 신학의 주류는 후택설이다. 그러나 전택설과 후택설의 문제는 하나님의 깊은 신비에 관계되는 것 같다.

 

다른 파들의 견해

선택에 대한 다른 파들의 견해는 어떠한가? 루터파는 루터의 바른 견해를 저버렸다. 루터 자신은, 칼빈과 동일하게, 인간의 전적 부패와 더불어 하나님의 절대적, 이중적 예정을 믿었다. 그러나 루터파 전통은, 그들의 일치신조에 진술된 대로, 어거스틴의 절대 예정의 교리도, 신인(神人)협력설(semi-Pelagianism)도 부정한다. 루터파는 인간의 전적 부패와 무능력, 그리고 중생에서의 성령의 주권적, 단독적 사역을 긍정하면서도 사람이 하나님의 이 은혜를 거부하고 저항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한편, 17세기 초 화란에서 정죄된 알미니우스파(Arminianism)는 로마 천주교회의 입장이었던 신인협력설로 돌아갔다. 그 파는 인간의 전적 부패와 무능력을 부정하고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에 협력함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한다. 그 후에 나타난 웨슬리-알미니우스주의(Wesleyan Arminianism)는 인간의 전적 부패와 무능력을 긍정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보편적 속죄사역으로 인해 모든 사람의 원죄의 죄책과 무능력이 제거되어 이제는 모든 사람이 성령의 구원 사역과 협력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 알미니우스주의의 오류와 비슷한 결론에 도달했다.56) 이들은 다 하나님의 주권적, 무조건적 선택을 부정하는 것이다.

 

버려두심

하나님의 예정의 두 번째 요소는 버려두심(reprobation)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3:7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기뻐하시는 대로 긍휼을 베풀기도 하시고 거두기도 하시는 그 자신의 뜻의 측량할 수 없는 계획에 따라, 그의 피조물들 위에 가지는 그의 주권적 능력의 영광을 위해, 인류의 나머지 사람들을 지나쳐버리시고 그들의 죄로 인한 수욕과 진노에 이르도록 작정하셔서 그의 영광스런 공의를 찬송하게 하기를 기뻐하셨다.

버려두심의 교리는 천주교회, 루터교회의 다수, 알미니우스주의, 웨슬리주의 등의 심한 반대를 받아왔으나, 어거스틴, 루터, 칼빈,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도르트 신조 등이 밝히 주장하였다. 칼빈의 설명과 같이, “선택 자체는 버려두심과 대조시키지 않고는 생각할 수 없다”(기독교강요, 3. 23. 1).

 

증거

선택은 논리적으로 버려두심을 내포한다. 하나님께서 어떤 이들을 선택하셨다는 것은 그가 나머지 사람들을 내버려두셨다는 것을 내포한다. 뿐만 아니라, 악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증거하는 성경의 많은 말씀은 버려두심에 대한 명백한 증거들이다. 출애굽기는 반복하여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다고 증거한다(출 4:21; 7:3; 9:12; 10:27; 11:10). 신명기 2:30, “여호와께서 그[헤스본 왕 시혼]를 네 손에 붙이시려고 그 성품을 완강케 하셨고 그 마음을 강퍅케 하셨음이라.” 여호수아 11:20, “그들의 마음이 강퍅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러 온 것은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 사무엘상 2:25, “그들[제사장 엘리의 아들들]이 그 아비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음이었더라.” 잠언 16:4,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지으셨느니라.” 이사야 6:9-10,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여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이 말씀은 신약성경에 6번이나 인용되었다.57)

마태복음 7:6,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마태복음 13:11, “천국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 요한복음 17:9,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로마서 9:22,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데살로니가후서 2:11-12,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희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베드로전서 2:8,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유다서 4, “저희는 옛적부터 이 판결[정죄]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두 측면

버려두심에는 두 측면이 있다. 즉 지나쳐 버리심과 정죄하심이 그것이다. 지나쳐 버리심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을 선택하지 않고 지나쳐 버리신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이며, 그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 정죄하심은 적극적 행위인데, 하나님께서 지나쳐 버리신 자들을 그들의 죄에 대해 공의로 정죄하시고 벌하시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하나님의 법정적(法廷的) 행위이며, 그 이유는 그들의 죄 때문이다. 이리하여 하나님께서 버리신 자들은 그의 진노와 형벌 아래 있게 된다. 사실상, 모든 자들이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 아래 있었으나, 그 중 일부는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로 구원되고, 나머지는 그들의 죄 가운데 그냥 버려져서 그 죄의 형벌을 받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크신 긍휼과 은혜를 감사하고 찬송할 것밖에 없고, 하나님의 지나쳐 버리심을 받고 정죄된 자들은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에 대해 불평할 수 없다. 선택된 자들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긍휼의 영광이, 버려진 자들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공의의 영광이 드러난다.

유기의 진리는 두려운 사실이지만, 모든 사람이 죄 아래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결코 불평거리가 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를 다 버리셨을지라도 인류는 불평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유기의 진리는 비록 기쁨을 주는 진리가 아닐지라도 모든 신자가 마땅히 믿어야 할 진리이다.

결론적으로, 예정의 교리는 사람의 구원이 궁극적으로 사람 자신에게서 나왔느냐 아니면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느냐라는 근본적 문제에 관계된다. 역사적으로 이 문제는 어거스틴주의 혹은 칼빈주의 신학 체계와 기타 신학 체계들을 구분하는 주요 논점이 되었다. 이것은 단순히 사색적 문제나 지엽적 문제가 아니고, 실제적 문제요 근본적 문제이다. 하나님께서 참으로 그의 기쁘신 뜻 가운데 어떤 이들을 영생에 이르도록 선택하셨는가? 하나님께서 참으로 사람을 구원하시는가? 구원의 능력이 참으로 하나님께 있는가? 우리는 성경에 근거하여 ‘확실하게 그렇다’고 대답한다. 우리는 또한 이 심오하고 신비한 교리가 바르게 가르쳐지고 강조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예정의 진리는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큰 유익을 준다. 이 진리는 구원받은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의 긍휼을 찬송하게 하고 하나님의 공의 앞에 두려움을 가지게 하며 또 그에게 참된 겸손과 흔들리지 않는 위로를 준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변덕스럽고 변화무쌍한 결심에 근거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원하신 불변적 예정에 근거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예정을 믿는 자들은 또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의롭고 선한 삶을 위해 부지런하고 성실히 힘써야 한다.

 

 

5. 창조

세상 창조는 우주와 인류 역사의 시작이다.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에 모든 일을 계획하시고 작정하신 대로 세상을 창조하셨다.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으로 시작된다(창 1:1).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4:1은 진술하기를, “아버지, 아들, 성령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지혜와 선하심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 태초에 육일 동안에 세계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 곧 보이는 것이든지 보이지 않는 것이든지 간에 다 무(無)로부터 창조하기를 기뻐하셨는데, 그것들은 다 매우 좋았다”라고 하였다.

창세기 1장과 2장은 창조에 대해 자세히 기록한다. 창세기 1장과 2장의 내용은 비유적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창세기 1, 2장은 시(詩)나 비유의 문체가 아니고 명백히 역사적 서술이며, 또한 역사적 서술의 책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창조는 이성이나 과학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성경 계시에 의존하여 깨닫고 믿어야 할 주제이다.

 

창조주--“하나님”

창조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행위이었다. 삼위 하나님은 창조에서 함께 활동하셨다. 천지만물은 성부에 의해 성자로 말미암아 성령 안에서 창조되었다고 표현할 수 있다. 성경이 창조사역을 주로 성부께 돌리는 것이 사실이지만, 성자와 성령께도 돌린다. 고린도전서 8:6,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 요한복음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골로새서 1:16, “만물이 그에게[그에 의해] 창조되되 . . .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창세기 1:2, “하나님의 신[영]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창조하신 때--"태초에"

창세기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태초에’라는 히브리어(베레쉬드)는 단순히 ‘맨 처음에’라는 뜻이다. 이 말은 우주와 인류 역사의 시작을 가리킨다. 우주와 인류 역사는 창조로부터 시작되며 인간의 시간 개념도 창조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므로 태초는 시간의 시작이다. 태초 이전은 시간의 시작 전이며 그것은 곧 영원이다. 어거스틴의 말대로, 세계는 ‘시간 안에서’ 창조되었다기보다 ‘시간과 함께’ 창조되었다.58)

창조하신 때를 영원 전이라고 말하는 자들이 있었으나 그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창조하셨다고 말하지 않고 ‘태초에’ 창조하셨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세상 창조 전에 오랜 세월 동안 아무 활동도 하지 않으신 상태로 계셨다고 상상할 필요는 없다. 하나님의 영원하심은 단순히 시간의 무한한 연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무(無)시간 혹은 비(非)시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과거도 미래도 없이 영원한 현재로 존재하신다.

창세기 1장에 언급된 창조의 6일은, 비록 어떤 이들이59) 지질학의 진화론적 가설들의 영향 아래 그것들을 ‘긴 시대들’로 보았지만, 24시간의 ‘하루들’로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그 이유는, 첫째로 ‘날’(욤 םוֹי)이라는 말의 기본적 의미가 24시간의 하루이며, 둘째로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라는 6번이나 반복되는 표현이 24시간의 하루에 가장 적합하며, 셋째로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창조하신 후 안식하신 제7일이 문자적 하루이므로 그 전의 6일도 문자적 하루로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창세기 2:3,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출애굽기 20:11,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7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창세기 1장의 6일을 24시간의 문자적 하루들로 해석한다면, 천지 창조와 인간 창조 사이에 긴 시대적 간격이 없으며 따라서 창세기 1:1의 ‘태초에’라는 시간은 성경에 근거한 문자적 연대 계산에 의해 추정될 수 있다. 창세기 5장과 11장에 근거하여 아브라함의 생애는 아담 후 1948-2123년경이라고 추정된다.60) 야곱이 130세에 애굽에 내려갔으므로(창 47:9) 그 때는 아담 후 2238년경이다. 출애굽 사건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 지 430년이었므로(출 12:40) 그 때는 아담 후 2668년경이다. 열왕기상 6:1에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지 480년이요, 솔로몬의 이스라엘 왕이 된 지 4년 시브월 곧 2월에 솔로몬이 여호와를 위하여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였더라”고 증거했으므로, 솔로몬의 성전 건축의 시작은 아담 후 3148년경이 된다. 솔로몬의 통치 연대를 보통 주전 970-931년경으로 보기 때문에, 솔로몬 통치 4년은 주전 967년경이 된다. 그렇다면 세상의 창조 연대는 거꾸로 계산하면 3148년과 967년을 더한 숫자 곧 주전 4115년경이 된다. 이렇게 계산하면, 창세기 1:1의 “태초에”는 주전 4115년경이다.


 창조의 방법--"무(無)로부터의 창조"

창조는 무(無)로부터의 창조이었다. 무로부터의 창조란 하나님께서 아무 기존 재료의 사용 없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셨다는 뜻이다. 모든 것이 창조되었으므로 창조 이전에는 하나님 외에 아무도, 아무것도, 아무 재료도 없었다. 요한복음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히브리서 11: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보이는 세계는 그 자체가 영원하거나 다른 어떤 영원한, 물질적인 것에 의해 존재케 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무로부터 천지 만물을 창조하실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전지(全知)하심과 전능(全能)하심 때문이다. 창조는 하나님의 크신 지혜와 능력을 증거한다. 예레미야 10:12, “여호와께서 그 권능으로 땅을 지으셨고 그 지혜로 세계를 세우셨고.” 로마서 1: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神性)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로마서 4:17,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 . .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하나님은 무로부터 온 세상을 창조하실 수 있는 능력자이시다.

하나님께서 능력의 말씀으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다. 창세기 1장에는 ‘하나님이 가라사대’(1:3, 6, 9, 11, 14, 20, 22, 24, 26, 29) 혹은 ‘하나님이 이르시되’ (1:28)라는 표현이 11번이나 나온다. 시편 33:6,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요한복음 1:3, “만물이 그[말씀]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창세기 1장에 하나님의 창조의 방법으로 증거된 하나님의 말씀은, 요한복음 1장 초두에 ‘말씀’(로고스 λόgος)으로 묘사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이 있다고 본다.

 

 창조의 대상--"천지 만물"

창세기 1:1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은 단지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대한 제목이 아니고, 창조의 시작이다. 즉 그것은 제1일 창조에 포함된다. 원문 2절 초두에 웨 (‘그리고, 그런데’)라는 말과 또 2절에 언급된 땅과 물(‘수면’)은 창세기 1:1의 말씀이 단지 제목이 아니고 첫째날의 실제 창조에 대한 언급임을 증거한다. 또 창세기 1:1을 3절 이하와 분리시켜 생각할 것도 아닌 것은 성경이 천지 만물을 6일 동안에 창조되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출 20:11).

어떤 이들은 창세기 1:1에 창조된 천지가 천사들의 타락으로 파괴되어 2절의 언급대로 혼돈하고 공허하게 되었으므로 3절 이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재(再)창조 혹은 회복 하신 것을 가리킨다고 말한다. 이것을 ‘회복설’(restoration theory)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근거 없는 추측에 불과하다.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6일을 살펴보면, 첫째 날에 하나님께서는 하늘 공간, 땅의 원소들과 물, 그리고 특히 빛을 창조하셨다. 아마 천사들도 이 날 창조되었을 것이다(욥 38:4, 7). 창세기 1:2의 땅의 혼돈과 공허, 흑암, 수면 등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의 처음 상태의 모습을 묘사하는 것일 것이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먼저 빛(오르 רוֹא)을 창조하셨다.

둘째 날에 하나님께서는 궁창 곧 하늘을 창조하셨다. ‘궁창 위의 물’이라는 말씀은 오늘날 과학적으로도 이해할 만하다. 지구 대기층에 있는 수증기의 양은 약 54조 4,600억 톤이며, 지구면에 내리는 비와 눈의 매년 총량은 약 30만 km3이어서 지구면을 3미터 깊이로 덮기에 충분하다고 한다(박형룡, 신론, 374쪽).

셋째 날에 하나님께서는 땅과 바다와 각종 식물을 창조하셨다. 식물들은 풀과 채소와 과목(果木)으로 분류되었다. “각기 종류대로“(레미노) 혹은 ”그 종류대로“(레미네후)라는 표현이 3번 반복된다.

넷째 날에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궁창에 광명들(메오로드, ‘빛들’) 즉 해와 달과 별들을 창조하셨다. 어떤 이들처럼 천체(天體)가 첫째 날에 창조되었다고 추측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 과학적 ‘가설들’에 조화시키려고 성경의 단순한 보도들을 수정해서는 안 될 것이다.

다섯째 날에 하나님께서는 바다에 물고기들과 하늘에 새들을 창조하셨다. “그 종류대로”(레미네후 혹은 레미네헴)라는 표현이 2번 더 나온다.

여섯째 날에 하나님께서는 땅에 각종 동물들, 즉 가축들, 기는 것들, 들짐승들을 만드셨다. “종류대로”라는 말이 5번(레미나흐 4번, 레미네후 1번) 더 나오며, 이와 같이 창세기 1장에서 그런 표현은 모두 10번이나 반복해 사용된다. 모든 동식물들은 각기 종류대로 창조되었다. 맨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만드셨다.

창세기 1장의 내용과 2장의 내용은 서로 충돌되거나 모순된 것이 아니고 서로 보충적이다. 1장은 천지 만물의 창조를 전체적으로 서술하고, 2장은 사람의 창조에 초점을 두어 그것을 자세히 서술한다. 또한 2장은, 1장에 보충하여, 사람 뿐만 아니라 각종 들짐승들과 새들도 흙으로 창조되었음을 알려준다(7, 19절).

하나님께서는 6일 동안의 창조 사역을 다 마치셨다. 창세기 2:1,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창세기 2:2,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께서 행하신 창조 사역은 다 끝났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창조 활동이 오늘날도 계속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성경과 조화되지 않는다.

 

 천사들

천지 만물은 영과 물질의 세계를 다 포함한다고 본다. 시편 148:2, 5는 천사들도 창조되었음을 보인다: “그의 모든 사자여 찬양하며 모든 군대여 찬양할지어다. . . . 그것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 것은 저가 명하시매 지음을 받았음이로다.” 사도 바울은 “만물이 그에게[그에 의하여]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라고 말한다(골 1:16). ‘보이지 않는 것들’은 천사들의 세계를 가리키고 ‘보좌들, 주관들, 정사들, 권세들’이라는 명칭들도 천사들을 가리킨다고 본다.

천사들은 하늘의 거주자이므로 아마 첫째날 하늘과 함께 창조되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땅을 창조하실 때 천사들은 이미 하나님 주위에서 찬양하고 있었다. 욥기 38:7,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새벽 별들이 함께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쁘게 소리하였었느니라.” 천지 창조 이전은 영원이므로, 천사들이 창조의 6일 이전에, 즉 영원 전에 창조되었다고 볼 근거나 이유는 없다.

천사는 영적 존재, 즉 영이다. 히브리서는 모든 천사들이 봉사하는 ‘영’이라고 증거한다(1:14). 천사는 영이므로 물질적 몸이 없고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고 남녀의 구별도 없고 결혼하는 일도 없다. 누가복음 24:39,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골로새서 1:16, “보이지 않는 것들과.” 마태복음 22:30,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물론 이 말씀은 사람이 영이 된다는 뜻은 아니다. 역사상 천사가 때때로 사람처럼 나타나 말하고 행동한 것은 하나님께서 계시로 주신 임시적, 초자연적 사건이었다. 또 천사는 제한된 공간 안에도 많은 수가 들어갈 수 있다. 마가복음 5:9,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그 귀신들이 한 사람에게서 나와 2천 마리 돼지떼 속에 들어간 것을 보면, 한 사람 속에 2천 명의 천사들이 들어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천사들은 뛰어난 지혜와 지식을 가지며 도덕성을 가진다. 이성적, 도덕적 성격은 영의 특질이다. 마태복음 24:36, “그 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누가복음 4:34,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베드로전서 1:12,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마가복음 8:38,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에베소서 6:12,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

특히 천사들은 능력이 많다. 시편 103:20, “능력이 있어 여호와의 말씀을 이루며 그 말씀의 소리를 듣는 너희 천사여.” 베드로후서 2:11, “더 큰 힘과 능력을 가진 천사들이라도.” 데살로니가후서 1:7,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나타나실 때.” 사도행전 5:19,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사도행전 12:7, “홀연히 주의 사자가 곁에 서매 옥중에 광채가 조요하며 . . .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 에베소서 1:21,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엡 3:10; 골 1:16도 비슷함). 에베소서 2:2, “공중에 권세 잡은 자.” 요한계시록 13:2, “용[사탄]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

천사들의 수는 매우 많다. 그들은 천군(天軍) 즉 하늘의 군대이다. 요한계시록 5:11, “둘러 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그들은 몇 부류로 나뉘는 듯하다. 그룹(케룹)은 하나님을 호위하는 천사로 나타난다. 창세기 3:24,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출애굽기 25:18, “금으로 그룹 둘을 속죄소 두 끝에 쳐서 만들되.” 시편 18:10, “그룹을 타고 날으심이여.” 스랍(세라핌)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천사들로 나타난다(사 6장). ‘보좌들이나 주관자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드로노이 θρόνοι, 퀴리오테테스 κυριότητες, 알카이, 엑수시아이) 등의 명칭들(골 1:16)은 천사 세계의 어떤 권위의 등급을 보이는 것 같다. 가브리엘과 미가엘 등은 천사들 가운데 어떤 개인을 가리키는 듯하다. 가브리엘은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고 해석하는 직무를 가진 듯하며(단 8, 9장; 눅 1장), 미가엘은 천사장으로 불리운 자로서 하나님의 원수들과 싸우는 천사로 나타난다(단 10장; 유 9; 계 12:7). 요한계시록 12:7,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새.”

천사의 직무는 첫째로 하나님께 경배하며 찬송하는 일이다. 이사야 6:3,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또 천사는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일을 한다. 시편 103:20-21, “능력이 있어 여호와의 말씀을 이루며 . . . 여호와를 봉사하여 그 뜻을 행하는 너희 모든 천군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특히, 천사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집행한다. 스가랴서에는 여러 번 ‘내게 말하는 천사’라는 표현이 나온다(1:9, 13, 19; 2:3; 4:1, 4-5; 5:5, 10; 6:4). 또한 하나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기 위해 천사들을 보내셨다. 창세기 19:1,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 창세기 19:13, “여호와께서 우리로 이 곳을 멸하려 보내셨나니.”

또한 천사들은 성도들을 섬기는 일을 한다. 히브리서 1:14,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봉사하는] 영으로서 구원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 시편 34:7, “여호와의 사자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치고 저희를 건지시는도다.” 시편 91:11,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마태복음 18:10,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천사들이 성도들을 위한 봉사자이므로 사람이 그들을 숭배하는 것은 옳지 않다. 요한계시록 22:8-9, “이것들을 보고 들은 자는 나 요한이니 내가 듣고 볼 때에 이 일을 내게 보이던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렸더니 저가 내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또 이 책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 된 종이니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하더라.”

 

 창조의 목적--"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심"

창조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함이었다. 완전 충족하신 하나님께서는 피조물들을 통해 영광을 받기를 원하셨을 뿐 아니라, 또한 자신의 영광을 온 우주에 나타내기를 원하셨다. 이사야 43:7,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이사야 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이사야 60:21, “네 백성이 다 의롭게 되어 영영히 땅을 차지하리니 그들은 나의 심은 가지요 나의 손으로 만든 것으로서 나의 영광을 나타낼 것인즉.” 로마서 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골로새서 1:16,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요한계시록 4:11,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피조물들의 행복, 특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의 행복은 단지 창조의 부수적 목적이 될 수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영광의 선포라는 목적만이 실제로 창조 세계의 현실에 맞다. 피조물들의 일부는 현실적으로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신다는 사실은 피조물의 행복과 불행에 다 적용될 수 있다. 의인들의 구원과 악인들의 심판은 각각 하나님의 긍휼과 공의의 영광을 나타낸다. 창조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함이라고 해서, 창조가 단순히 하나님의 이기적 행위이거나 그의 어떤 결핍을 보충하는 행위는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충만한 영광 가운데 계신 완전 충족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창조를 부정하는 이론들

창조를 부정하는 몇 가지 이론들이 있다. 첫째로, 물질이 영원 전부터 존재했다는 생각이 있다[물질영원설]. 우주의 근원을 물질에서 찾는 유물론(唯物論)이나 우주에 하나님 혹은 정신과 물질의 두 영원한 존재가 있다고 가정하는 이원론(二元論) 등이 여기에 속한다. 그러나 신적이지도 자존적(自存的)이지도 못한 물질이 영원하다고 보는 것은 이성적으로도 불합리하다. 성경은 물질 세계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음을 밝히 가르친다.

둘째로, 영의 세계와 물질의 세계를 포함하여 우주가 신(神)에게서 유출(流出)되었으며 그 둘은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있다[유출설]. 그러나 하나님과 피조 세계는 질적으로 다르다. 무한자와 유한자의 차이는 무한(無限)하다. 유출설은, 만물이 신이라는 일종의 범신론(汎神論)에 불과하다.

셋째로, 물질영원설에 근거하여 생명이 자연 발생하여 가장 단순한 종류로부터 점점 더 복잡한 종류들로 진화(進化)되었다는 생각이 있다[진화론]. 그러나 앞에서 말한 대로 물질영원설은 이성적으로도 불합리하며, 또 생명의 자연 발생이나 진화의 생각들은 결코 확실한, 객관적 근거를 가진 과학적 이론이 아니고 가설적 신념들에 불과하다. ‘종(種)들의 기원’에 관한 촬스 다윈의 명제들은 어느 것 하나도 증명된 것이 없다. 한 종에서 다른 종으로 진화했다는 가정은 단 하나의 실례도 없다. 더욱이, 인간의 독특성인 인격성, 도덕성, 종교성 등은 진화의 개념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 우주와 생명들의 기원과 그 움직임은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큰 신비이다(박형룡, 352쪽).

넷째로, 하나님께서 진화의 방법을 사용하여 자연만물을 창조하셨다는 생각이 있다. 이것은 하나님과 진화론을 둘 다 믿어보려는 타협적 생각이다. 이것을 유신진화론(有神進化論, theistic evolutionism)이라고 한다. 그러나 성경이 증거하는 창조는 진화의 개념과 결코 조화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진화론 자체도 증명되지 않은 혹은 증명될 수 없는 순전한 가설에 불과하다. 유신진화론이란 박형룡 박사의 표현대로 ‘매우 위험한 잡종’에 불과하다(박형룡, 385쪽). 우리는 성경을 믿고 성경이 밝히 증거하는 창조를 믿는다.

 

6. 섭리

섭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보존하시고 통치하시는 것을 말한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1문답은 “하나님의 섭리의 일들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하나님의 섭리의 일들은 그의 모든 피조물들과 그들의 모든 행위들에 대한 그의 가장 거룩하고 지혜롭고 능력 있는 보존하심과 통치하심입니다”라고 대답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5:1은 진술하기를, “만물의 크신 창조자 하나님은 그의 가장 지혜롭고 거룩한 섭리에 의해 그의 무오(無誤)한 예지(豫知)와 그 자신의 뜻의 자유롭고 불변적인 계획을 따라 모든 피조물들과 그 행위들과 일들을 가장 큰 것부터 가장 작은 것까지 붙드시고 지도하시고 처리하시고 통치하셔서 그의 지혜와 능력과 의와 선과 자비의 영광을 찬송케 하십니다“라고 하였다.

 

 섭리의 요소와 범위

하나님의 섭리하심의 두 요소는 보존하심과 통치하심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연 만물을 보존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자연 만물을 단순히 자연법칙에 맡겨두시는 것이 아니고 적극적으로 또 계속적으로 보존하신다. 느헤미야 9:6은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라고 고백한다. 또 시편 36:6은 “여호와여 주는 사람과 짐승을 보호하시나이다”라고 증거한다. 예수께서도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신다고 말씀하시고(마 5:45), 또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공중의 새를 먹이시고 들의 백합화를 입히신다고 말씀하신다(마 6:26, 28). 사도 바울은 만물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말하고(골 1:17), 히브리서 1:3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신다고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자연 만물을 통치하신다. 구약성경에서 빈번히 하나님을 ‘주’61) 혹은 ’왕‘62)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의 주권과 통치권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섭리를 잘 증거한다. 시편 103:19는 “여호와께서 그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 정권으로 만유[모든 것]를 통치하시도다”라고 증거한다. 또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는 예수의 말씀(마 10:29)은 심지어 보잘 것 없는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 같은 지극히 작은 일까지도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음을 증거한다. 하나님의 섭리는 세상의 모든 일들을 포함한다. 하나님의 섭리에 포함되지 않는 일은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특히, 하나님의 보존하심과 통치하심은 모든 사람들에게 관계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과 그들의 행위들과 일들을 가장 큰 것부터 가장 작은 것까지 붙드시고 인도하시고 처리하시고 통치하신다. 다니엘 4:17은 “인생으로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며 또 지극히 천한 자로 그 위에 세우시는 줄을 알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말한다. 잠언 16:9는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고 말한다.

 

 섭리의 방식

일반 섭리

하나님께서는 일반적으로 필연적 법칙들과 인간들의 자유와 심지어 우연한 일들까지도 사용하여 섭리하신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5:2는 진술하기를, “비록 모든 일들은 제1원인이신 하나님의 예지(豫知)와 작정과의 관계에서 불변적이고 무오하게 일어나지만, 동일한 섭리에 의해 그는 제2원인들의 성질에 따라 그것들을 필연적으로 혹은 자유롭게 혹은 우연하게 일어나게 정하십니다”라고 했다.

하나님께서는 자연 법칙과 자연적 수단들을 사용하여 섭리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다(창 8:22). 잠언 10:4의 증거대로,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된다.’ 또한, 사도행전 27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의 종 바울을 구원하시는 방법은 뱃사공들을 사용함으로써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백부장과 군사들에게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고 말한다(행 27:31).

또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자유로운 계획과 소원과 행동을 사용하여 섭리하신다. 사람들은 기계가 아니고 자유로운 인격자들이다. 잠언 16:9는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고 말한다. 잠언 21:1은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보(洑, 강)의 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고 한다. 또 사도 바울은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느니라’고 말한다(빌 2:12-13).

하나님께서는 심지어 우연한 일도 사용하여 섭리하신다. 룻기 2:3은 모압 여자 룻이 우연히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다고 말하는데, 그로 인해 룻은 메시야의 족보에 오르게 되었다. 또 열왕기상 22:34에 보면, 한 사람이 우연히 활을 당기어 이스라엘왕 아합의 갑옷 솔기를 쏘았는데, 그로 인해 아합은 죽고 엘리야 선지자에게 주신 하나님의 예언은 성취되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자연 법칙과 자연적 수단들이나 사람들의 자유로운 계획과 소원과 행동이나 심지어 우연한 일들까지도 사용하여 섭리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것은, 자연 법칙들만 믿는 생각(자연신론)이나 모든 일을 우연으로 돌리는 생각(우연론)과는 전혀 다르다. 그러한 생각들에는 인격적 하나님이 없다. 또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부정하고 모든 것이 맹목적 운명의 지배를 받는다는 생각(운명론)과도 전혀 다르다.

기독교는 결코 소극주의나 정적주의(靜寂主義)가 아니다. 섭리는 인간의 자유를 부정하는 개념이 아니다. 인간의 자발적 노력과 하나님의 섭리는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신자는 기도하며 일하고, 일하며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믿지만, 또한 동시에 열심히 일해야 한다. 우리는 주 하나님을 믿는 동시에 현실 생활에 충실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를 바로 아는 자의 태도이다.

 

 특별 섭리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류 역사상 특별한 방식으로 섭리하기도 하셨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5:3은, “하나님께서는 그의 일반적 섭리에서 수단들을 사용하시지만 그의 기쁘신 뜻대로 그것들 없이, 그것들을 초월하여 그리고 그것들을 역행하여 자유롭게 활동하십니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이러한 특별 섭리를 기적이라고 부른다. 즉 기적이란 하나님께서 물질세계에서 제2원인들이나 자연 법칙을 사용하지 않고 직접 자신의 능력으로 행하시는 일을 가리킨다.

기적은 가능한 일이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므로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 기적은 결코 이상하거나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단지 기적이 자연 법칙을 어긴다는 이유 때문에 그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은 전혀 전능하신 하나님을 고려치 않는 잘못된 생각과 태도이다. 비록 현재 우리의 제한된 지식으로는 기적이 어떤 미지의 고등한 자연 법칙에 의한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무(無)로부터 말씀으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사실을 생각한다면, 기적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많은 기적들을 증거한다. 기적을 표현하는 성경의 세 단어는 능력63)과 기사64)와 표적65)이다. 사도행전 2:22,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능력’은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신적 능력이 나타났다는 뜻이며, ‘기사(奇事)’는 사람에게 놀라움을 준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엘리사는 나무가지를 베어 물에 던져 물에 빠진 도끼를 떠오르게 하였다(왕하 6:6).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풀무불에 던지웠으나 불이 그들의 몸을 해하지 못했고 머리털도 그슬리지 않았고 옷 빛도 변하지 않았고 불탄 냄새도 없었다(단 3:27). 예수께서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여자들과 아이들 외에 오천 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을 먹이셨다(마 14:18-21). 이것들은 다 자연 법칙들로는 불가능하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놀라운 일들이었다.

하나님께서 인류 역사상 기적들을 주신 목적은 무엇인가? ‘표적’(표, sign)이라는 말의 뜻대로, 기적은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확증하기 위한 것이었다. 신명기 4:35는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그리고 출애굽한 후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많은 기적들을 주신 목적은 여호와 하나님이 유일하신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기 위함이라고 증거한다. 사도행전 2:22는,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고 말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한 것이었다. 사도들이 행한 기적들도 하나님의 진리를 증거하는 일들이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2:4는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복음을] 증거하셨느니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인류 역사상 주로 네 시대들에 기적들을 주셨다. 첫째는 하나님의 사람 모세와 그의 후계자 여호수아의 시대로서 이스라엘 종교와 구약교회의 기초가 확립된 시대이었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율법들을 주셨고 그것들을 책들에 기록하게 하셨다. 모세가 쓴 다섯 권의 책들은 구약성경의 기초가 되었다. 둘째는 선지자 엘리야와 엘리사의 시대로서 구약교회인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진리를 떠나 배교(背敎)했던 시대이었다. 하나님께 대한 신앙은 심히 쇠약해졌고 이방인들이 의지하고 섬기는 바알과 아세라 숭배가 이스라엘 사회 속에서 널리 유행하던 시대이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기적들을 통해 자신의 참 하나님 되심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증거하셨다. 셋째는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의 시대로서 이스라엘 나라와 유다 나라가 멸망하여 바벨론 나라에 포로로 잡혀가 생활하던 시대이었다. 또 다시 하나님의 지식이 쇠하고 이방인들의 신들이 참 하나님보다 크게 보였던 시대이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기적들을 통해 자신이 온 세상의 주관자요 참신임을 증거하셨다. 마지막인 넷째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의 시대로서 하나님께서 구약에 예언하신 메시야를 보내신 시대이다. 메시야께서 친히 사람으로 오셨다. 이보다 더 큰 계시는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특별계시 중의 특별계시이었다. 또 그의 제자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들과 그에 관한 사실들, 즉 그의 신성과 속죄사역이 기록되었다. 이로써 하나님의 특별계시는 완성될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 때 하나님의 기적들이 가장 많이 나타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섭리와 죄 문제

하나님의 섭리는 세상의 모든 일들에 관계된다.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다고 주께서는 말씀하셨다(마 10:29). 하나님께서는 심지어 사람들의 죄까지도 섭리하신다. 이 사실은 신비한 일이어서 우리가 다 이해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권자로서 인간의 죄 문제까지도 섭리하신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창세기 45:5-8,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 . .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출애굽기 4:21, “그러나 내가 그의[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한즉 그가 백성을 놓지 아니하리니.” 열왕기상 22:23, “여호와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왕의 이 모든 선지자의 입에 넣으셨고.” 욥기 1:12,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데살로니가후서 2:11,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희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그러나 이 문제에 있어서 죄의 책임이 사람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도 또한 부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지극히 거룩하시므로 결코 죄의 조성자가 되실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죄들을 그의 주권적 섭리로 허용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과 사람들의 책임을 둘 다 긍정해야 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5:4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과 측량할 수 없는 지혜와 무한하신 선이 그의 섭리에 크게 나타나, 섭리는 심지어 최초의 타락과, 천사들과 사람들의 다른 모든 죄들에까지 미치는데, 단순한 허용에 의해서가 아니고 그와 함께 자신의 거룩한 목적들을 위해 다양한 처리 방식으로 지극히 지혜롭고 강력하게 그것들을 제한하시고 다른 경우들에는 그것들을 정하시고 통치하심으로써입니다. 그러나 그 죄악성은 오직 피조물로부터 나오며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지 않습니다. 그는 지극히 거룩하시고 의로우셔서 죄의 조성자나 승인자이시지도 않고 이실 수도 없습니다.

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5:6은 이렇게 말한다:

    의로우신 심판자로서 하나님께서 이전의 죄들 때문에 어둡고 강퍅케 하신 저 악하고 불경건한 사람들에 관하여는, 그가 그것으로 그들의 이해를 밝히시고 그들의 마음에 역사하셨을지도 모를 그의 은혜를 단지 그들에게 주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또한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은사들을 때때로 거두어 가시고 그들의 부패성이 죄의 기회로 삼는 대상들에게 그들을 드러내시며; 게다가 그들을 그들의 정욕들과 세상의 시험들과 사탄의 권세에 내어 주십니다. 그래서 그들은 심지어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 사용하시는 수단들 아래서도 자신들을 강퍅케 하는 일이 생깁니다.

 

섭리의 목적

하나님의 섭리는 일차적으로 택한 백성들의 구원을 위한다. 하나님께서는 택한 백성들을 위해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십자가에 죽음으로 속죄사역을 이루게 하셨고 성령으로 그들을 부르셔서 중생케 하시고 회개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고 심령으로 거룩하게 되도록 변화시키신다. 로마서 8:30,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때때로 성도의 죄를 허용하심도 그의 유익을 위함이다. 성도는 이러한 죄와 실수를 통해 자신의 죄악성이 얼마나 크고 강한지를 깨닫고 겸손히 하나님만 더 의지하게 된다. 그러므로 로마서 8:28은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말한다. 택함받은 자들의 구원과 영적 성장이 가장 큰 선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택한 자들의 연합체인 세계적 교회를 완전하게 세우신다. 하나님께서는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그의 교회를 보살피며 모든 일을 그것에 유익하도록 처리하신다. 로마서 11:25, 26은,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놀라운 예언을 한다. 이것은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구원을 포함한 하나님의 세계적 구원 계획을 보인다. 하나님의 섭리는 세계적으로 모든 택한 자들의 구원을 목표로 한다. 세계 복음화는 하나님의 섭리의 중요한 한 목표이다.

하나님의 섭리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함이다. 세계와 인류 역사의 종말에, 하나님께서는 택한 백성의 구원을 통해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그러므로 로마서 11:36은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이라고 말한다.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창조주 하나님에게서 나왔고 세상의 모든 일은 다 섭리하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으며 세상의 모든 일은 다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는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알고 믿어야 한다. 잠언 3:5, 6,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잠언 16:3, 9,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우리는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범사에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모든 일을 하나님께 의탁하고 그의 인도하심을 기대하며 사는 자가 되어야 한다.

 

7. 후대 기적의 문제

하나님께서는 사도 시대에 주셨던 기적들을 그 후의 시대에도 계속 주셨는가? 기적들은 신약 교회 시대에 계속되었는가? 오늘날도 기적은 가능한가?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은 영속적인가?

후대 기적의 문제는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 전반의 영속성 문제와 관계된다.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이란, 고린도전서 12:8-10에 열거된 대로,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침, 능력 행함, 예언함, 각종 방언 말함, 방언들 통역함 등을 가리킨다. 그것들은, 로마서 12:6-8에 증거된, 섬기는 일, 가르치는 일, 권위(勸慰)하는 일, 구제하는 일, 다스리는 일, 긍휼을 베푸는 일 등 소위 자연적 은사들과 구별된다.

하나님의 모든 은사들이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주어졌지만(고전 12:7),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은 특히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전달과 확증을 위하여 주어졌다. 예를 들어,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예언, 방언, 방언 통역 등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전달에 관계되고, 병고침, 능력 행함 등은 그 특별계시의 확증에 관계된다.

성경 역사에서 말씀과 기적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주된 방법들이었다. 그것은 구약시대에 모세와 선지자들에게서 잘 증거되고 신약시대에 사도들에게서도 그러하다. 특히 기적들은 하나님께서 선지자들과 사도들에게 주신 말씀이 진리임을 확증하는 의미가 있었다(출 4:8, 30; 요 20:30, 31). 마가복음 16:17-20에 증거된 대로, 주께서는 귀신을 쫓아냄이나 방언이나 뱀을 집거나 독을 마셔도 해를 받지 않음이나 병 고침 등의 기적들을 통해 사도들이 증거하는 복음의 진리성을 확증하셨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2:3, 4는 하나님께서 기적들과 성령의 은사들을 통해 복음을 확증하셨다고 말씀한다. 이런 의미에서 기적은 ‘표적’(sign)이라고 불린다.

사도행전 2:43과 5:12에 보면, 기적들은 주로 사도들을 통해 일어났다. 사도들은 신약교회의 기초를 닦는 자들이었다(엡 2:20). 주께서는 그가 세우신 사도들에게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을 많이 주셔서 자신의 뜻을 밝히 전달하고 확증하게 하셨다. 그러므로 고린도후서 12:12는 기적 행함을 사도들의 표라고 말한다. 워필드는 말하기를,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은 특별히 사도들의 증명서이었다. 그것들은 교회를 설립하는 하나님의 권위적 도구들로서의 사도들의 신임장의 일부분이었다”66)라고 했다.

그런데, 사도 시대에 충만했던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과 기적들은 교회 역사상 일찍이 사라졌다.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과 기적들이 역사상 사라졌다는 것은 교회가 경험한 바이었고 따라서 그것은 교회의 전통적 견해가 되었다. 주후 4세기말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수장(首長, Patriarch) 크리소스톰은 고린도전서 설교에서 방언은 이미 그쳤고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했고, 주후 5세기초 유명한 어거스틴도 요한일서 설교에서 방언은 유대 기독교인에게 주신 초기 표적이었고 이전 시대에 이미 사라졌다고 가르쳤다.67) 칼빈도 사도행전 10:44 주석에서 “방언의 은사와 및 그 밖에 그와 같은 것들은 교회에서 오래 전에 중지되었다”고 말했다.

교회 역사는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과 기적들이 사도 시대의 특징이며 오직 사도 시대 교회에 속하고 그 후시대에는 그것들이 사라졌음을 증거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과 기적들이 사도 시대와 함께 끝났음을 인정하고 그렇게 가르쳐 왔다. 그러므로, 이것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누구든지 고린도전서 12-14장 같은 성경말씀에 근거해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과 기적들에 대한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반대하려 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역사상 그렇게 섭리하셨다면, 우리는 그 사실을 겸손히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러면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과 기적들이 사라진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성경에 근거하여 두 가지로 대답할 수 있다. 첫째로,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과 기적들은 그 독특한 목적 때문에 사라졌다.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과 기적들의 독특한 목적은 하나님의 특별계시들의 전달과 확증이었으며 그 목적은 사도 시대에 신약성경이 다 기록됨으로써 성취되었다. 요한계시록 22:18, 19는 하나님의 특별계시들이 성경에 충족하게 기록되었음을 증거하기를,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신약성경의 완성으로 하나님의 특별계시가 더 이상 주어질 필요가 없게 되었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과 기적들을 거두어가셨다는 말이다. 워필드의 표현대로, “그것들의 기능이 그것들을 특별히 사도 시대의 교회에 제한시켰고 그것들은 필연적으로 그 교회와 함께 사라졌다.” 이것은 과거 수천년 동안 자신의 뜻을 나타내신 하나님의 방식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하여 자신의 뜻을 계시하신 후에 그것을 책에 기록하게 하셨는데, 그것이 구약성경이었다. 모세에게 주셨던 기적들은 그 후시대에 반복되도록 의도된 것이 아니었고, 단지 모세에게 계시되었던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에 기록되어 후시대에 전달되도록 의도된 것이었다.

둘째로,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은 그것들의 일시적, 초보적 성격 때문에 사라졌다.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의 독특한 목적은 그것들의 일시적, 초보적 성격을 보인다. 그 은사들은 영속적인 무엇이 아니고, 또 하나님의 계시에 관한 한 온전한 무엇도 아니었다. 그것들은 단지 일시적이고 부분적이며 초보적이었다.

고린도전서 13:8-12는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의 이런 성격을 자세하게 증거하였다: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이는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나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여질 것임이니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들을 버렸노라.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내가 알려진 것같이 내가 알리라”(직역). 특히, 이 은사들은 ‘온전한 것’이 오면 사라질 것이었다. 여기에 이 ‘온전한 것’은 적어도 하나님의 계시에 관한 한 신약성경의 완성과 관계 있다. 신약성경은 하나님의 충족한, 온전한 계시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에 대한 충족하고 온전한 계시인 신약성경이 완성되었을 때,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 곧 일시적이고 부분적이고 초보적인 성격의 것들은 자연히 폐지되고 사라지게 된 것이다.

이것은 마치 건물을 지을 때 비계목들을 설치하는 것에 비교할 수 있다. 비계목들은 건물을 짓기 위해 일시적으로 설치하는 것에 불과하다. 일단 건물이 완성되면 비계목들은 철거되어야 한다.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과 기적들도 그러했다. 유명한 설교자 스펄젼은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과 기적들의 일시적, 초보적 성격을 나무의 지지대에 비유하여 말하기를, “만일 과수원에 나무를 심는다면 흔히 그 곁에 큰 지지대를 세워 붙들게 한다. 그러나 아무도 과거 50년 간 있었던 사과나무를 지지하기 위해 기둥을 세우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늘날 하나님의 교회는 기적과 이상(異像)의 지지가 필요치 않는 나무다. 여러분은 이상보다 나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이나 기적들과 신구약성경 말씀과의 관계는 마치 유치원과 대학교의 관계와 같다. 성령의 그 은사들과 기적들은 마치 유아들을 위한 것이나 유아시절의 것과 같다. 그러므로 만일 신구약성경의 충만한 계시 진리들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그러한 일시적, 초보적 은사들을 구한다면, 그것은 마치 대학생이 유치원에 등록하여 무엇을 배우려는 것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이나 기적들을 구할 것이 아니라, 신구약성경을 읽고 배우고 묵상함으로써 그 말씀에 정통하고 충만하려고 힘써야 할 것이다.


 오늘날의 은사운동에 대하여

오늘날 기독교회에는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과 기적들이 교회 역사상 계속 존재했고 오늘날도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20세기 초엽에 오순절 교단들을 형성한 자들뿐 아니라 전통적 교단들 내의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러하다. 기독교계 안의 이러한 움직임을 통틀어 은사운동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러한 은사운동은 다음 몇 가지 요점으로 비평되어야 할 것이다.

 

 성경의 충족성과 종결성에 모순됨

첫째로, 은사운동은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이 계속 존재한다거나 회복되었다고 주장함에 있어 성경의 충족성과 종결성에 모순된다. 하나님께서 과연 성경 외에 또 다른 계시들과 예언들을 주셨고 또 주신다는 말인가? 우리는 그것을 신뢰할 수 없다. 우리는 신구약성경을 하나님의 충족한 말씀, 최종적 권위의 말씀으로 믿고 있다. 신구약성경은 우리의 신앙과 생활의 정확무오한 유일의 규범이다.

어떤 이는 하나님께서 성경과 동일한 내용을 누구에게 계시하신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계시의 필요성이 있는지 반문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도 시대 후 1,800년 동안 성령의 내면적 활동을 통해 그의 종들과 백성들에게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믿고 행하게 하셨다. 그러므로 성령의 새로운 계시 활동들을 통해 동일한 성경의 내용을 또다시 받는다는 것은 전혀 불필요한 일이다.

누가복음 16장에서 예수께서는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통해 성경책이 인간의 구원을 위해 충족하다는 사실을 밝히 증거하셨다. 그는 아브라함의 입을 빌어 말씀하시기를,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고 하셨다(눅 16:31). 또한 앞에서 인용한 요한계시록 22:18, 19도 성경의 충족성과 종결성을 분명히 증거한다. 성경말씀에 무엇을 더하거나 빼는 것에 대하여 엄중한 징벌이 선언되어 있다.

물론, 아무도 하나님의 주권을 부정할 수는 없다. 주시는 이도 하나님이시요, 거두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면 교회 역사상 거두신 은사들일지라도 다시 주실 수 있음을 부정할 자는 아무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유가 있어서 1,800년 동안 거두어 가신 은사들의 계속성이나 회복을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의 방식을 반대하는 일이 된다.

사도 시대 이후의 기독교 역사는 기적 행함의 역사가 아니고 십자가의 말씀을 전파한 역사이었다. 사도 바울은 증거하기를,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하였다(고전 1: 22, 23). 물론 중생과 회개 같은 내면적 기적은 늘 일어났지만, 외적인 기적들은 교회 안에서 오랫 동안 사라졌었다. 특별한 경우 기도의 응답으로 병고침을 받는 것이나 선교지에서 신기한 일들을 체험하는 것 등은 예외적이게 보인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의 충족한 말씀으로 그의 원하시는 뜻을 이루어오셨다. 성경은 사람의 구원과 새 생활을 위해 충족한 수단이었다. 성경을 믿고 성경대로 사는 삶은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삶이었다. 말씀을 통한 성령의 잔잔한 내면적 활동은 어느 시대든지 하나님의 백성들을 떠난 적이 없었고, 하나님의 그러한 섭리 속에 그리스도인들은 만족을 누렸다.

그러므로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의 계속을 주장하는 은사운동은 성경의 충족성과 종결성에 모순되며 성경을 통해 역사하신 하나님의 섭리의 방식에 반대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은사들이 아니고, 성경말씀에 대한 바른 지식과 성실한 순종이다.


 초자연적 은사들의 실재성이 의문됨

둘째로, 은사운동은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이 교회 역사상 계속 존재하였고 오늘날 교회에도 실제로 존재한다고 주장하지만 과연 그러한가? 교회들은 성경에 증거된 계시와 예언, 방언, 병고침 등의 모든 은사들을 역사상 계속 경험하였고 지금도 경험하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신실한 성도들과 종들에게 그런 은사들을 항상 주셨는가? 또 오늘날 은사주의자들이 받았다고 주장하는 것들이 참으로 하나님이 주신 은사들이라는 증거가 있는가? 교회 역사는 은사주의자들의 주장에 오히려 반대되는 것 같다.

첫째로 계시와 예언에 대하여, 은사운동은 성경 외의 계시와 예언을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은 기록된 책의 내용 외에 다른 것을 더하지 말라고 엄히 명령한다. 요한계시록 22:18,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그러므로 오늘날 성경 외에 계시와 예언을 말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역사상, 초대교회에 몬타누스파는 초자연적 은사들을 주장하였으나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18세기 에드워드 어빙이 세운 카톨릭 사도교회는 모든 사도적 은사들을 주장했고 예언도 했으나 어떤 예언들이 성경과 충돌하고 또 성취되지 않았으므로 정죄되었다. 19세기에 들어와서도, 안식교, 몰몬교, 및 신비주의 집단들이 성경 외의 하나님의 계시와 예언들을 말했지만, 다 이단들로 간주되었다.

둘째로 방언에 대하여, 은사운동은 성령을 받은 증거가 방언이라고 주장하며 방언이 모든 성도들의 필수적 은사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 방언은 외국어이었으나, 오늘날의 방언 현상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방언’이라는 헬라어 글로싸는 단순히 ‘언어’를 가리킨다.68) 또한 이 단어는 빈번히 글로싸이라는 복수형으로 사용된다.69) 이것은 방언들이 여러 개의 언어들임을 나타낸다. 방언을 통역한다는 사실도 방언이 언어적 성격을 가졌음을 암시한다. 언어가 아닌 소리를 통역한다는 것은 불합리하다. 또 고린도전서 14장에 언급된 방언들이 사도행전에 증거된 방언과 다른 성격의 것이라고 추측할 정당한 이유는 없다. 고린도교회가 경험한 방언은 사도행전에 언급된 방언 사실들과 동시대의 현상이며, 따라서 사도행전에 나타났던 방언 은사와 동일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오히려 더 자연스럽다.

그런데 오늘날의 방언 현상들은 대체로 외국어의 성격을 갖지 않는 것 같다. 도날드 버딕은 오늘날의 방언의 특징들을 열거하기를, ① 반복이 매우 심하다, ② 방언과 방언하는 사람의 언어적 배경이 비슷하다, ③ 한두 개의 모음을 지나치게 많이 사용한다, ④ 언어적 구조가 부족하다, ⑤ 방언에 비해 통역이 두드러지게 너무 길다, ⑥ 동일한 구절의 통역이 일치하지 않는다, ⑦ 방언의 영어 통역 시 주로 17세기 초의 킹제임스 역 문체가 사용된다고 하였다.70) 미쉬간 대학교의 케넷 파이크와 미국 성서공회 관계의 유진 나이다 등의 언어학자들도 오늘날의 방언들이 언어학이 다룬 어떤 실제 언어와도 비슷하지 않다고 지적했다.71)

더욱이, 방언 같은 현상들은 역사상 기독교의 이름을 가진 이단적 종파들 속에도 있었고 심지어 기독교 밖에도 있었다. 초대교회의 몬타누스파는 방언을 했다. 그 후 17세기 말까지 방언 현상은 교회 역사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다가 1776년 미국 뉴욕주 트로이 부근에 앤 리가 설립한 쉐이커 공동체는 남녀가 나체로 춤추면서 방언을 했다. 이단적인 카톨릭 사도교회에서도 방언을 했다. 몰몬교의 장로들도 미국 유타주의 그들의 성전을 봉헌할 때 방언을 했다.72) 그러므로 방언 같은 현상들이 다 하나님께서 주신 참된 방언의 은사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특히, 오늘날 은사운동에서 인위적 방언 훈련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분명히 비성경적이며 마귀적이다. 예를 들어, 1987년 7월 미국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에서 모인 ‘성령과 세계전도에 관한 북미 대회’에 관한 한 보도에 의하면, 한 저녁 집회 후 성령세례 받을 자들을 위한 집회에서 인도자는 자기의 ‘기도 방언’을 따라하게 함으로써 참석자들로 하여금 방언 현상을 체험케 했고 그들에게 그것이 성령세례이며 하나님이 주신 방언임을 믿도록 강요했다. 이러한 행위들은 제재되지 않았다.73) 그러나 성경의 방언 사례들은 결코 훈련을 통한 것이 아니었고 심지어 방언하기를 구한 것도 아니었다. 사도 시대의 신자들은 성령이 오신 표로서 방언을 하는 경험을 했었다. 그러므로 방언 훈련은 명백히 성경의 모범을 벗어난 행위요, 성령의 은사를 인간적 훈련으로 받게 하려는 거짓되고 마귀적인 행위이다. 그런 행위가 하나님의 일일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면, 오늘날의 방언 현상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라는 증거가 없다면, 그 현상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물론 그것들 중 일부는 하나님이 주신 방언들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도 시대 이후 1,800년 동안 거두어 가셨던 은사들을 그 후에 정말 다시 주실 것인가? 하나님의 섭리의 방식과 성경의 충족성에 비추어 볼 때, 그러한 가능성은 매우 작아 보인다. 오히려, 오늘날의 많은 방언 비평가들은 현대의 방언 현상들이 심리적 현상이거나 가짜(위조품)거나 혹은 마귀에게서 기원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74) 특히, 오늘날 방언 현상들의 비(非)언어적 성격이나 방언운동 안의 인위적 요소들은 그것이 성령의 역사가 아님을 보인다.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서도 그렇게 불같이 일어나는 것은 악령의 역사가 아니라면 무슨 영의 역사이겠는가?

셋째로, 병고침(신유)에 대해서도, 우리는 단순히 병고침의 현상들이 그것들이 성령의 은사임을 확증하지 않는다는 점을 말해야 할 것이다. 병고침의 현상들은 기독교 안팎의 신비주의적 집단들에서 있어 왔다. 신비주의 연구가 쿠르트 코흐(Kurt Koch)는 악령에 의한 신비적 치료의 많은 사례들을 제시한다.75)

더욱이, 성경에서 병고침의 사례들은 즉각적이고 비제한적이었는데, 오늘날의 병고침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어떤 이는 예수님과 사도들의 병고침의 특징들을 열거하기를, ① 한마디의 말씀이나 한번의 만짐으로 치료하셨다(막 8:22-26에서 소경에게 두 번 안수하신 예외적 경우는 있었으나), ② 즉시 치료하셨다, ③ 완전히 치료하셨다, ④ 모든 사람을 치료하셨고 치료하실 수 있었다, ⑤ 신체 기관의 질병들도 고치셨다, ⑥ 죽은 자들을 일으키셨다고 하였다.76) 그러나 오늘날 은사운동의 병고침과 신유의 은사들은 이러한 특징들을 가지는 것 같지 않다.

 

말씀보다 경험에 의존시킴

크게 셋째로, 은사운동은 성경적 기독교의 말씀 중심의 신앙생활에 불만족하며 성령의 체험을 강조한다. 즉 은사운동은 체험적 기독교를 강조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신앙생활의 중심을 성경 교훈의 실천보다 신비 체험에 둔다. 강조점이 말씀에서 경험으로 이동된다. 성경말씀으로 만족하던 신앙생활이 경험의존적인 신앙생활로 변한다.

그러나 개혁교회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바른 지식과 그 진리대로 사는 바른 삶을 강조해 왔다. 그것은 옛길이다. 우리는 그것이 성경적인 건전한 길이라고 확신한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참된 영성(靈性)의 표는 그리스도인다운 인격과 삶이지, 어떤 은사 체험이나 은사 시행이 아니다. 은사는 결코 그리스도인의 영성의 표나 척도가 될 수 없다.

이 사실에 대한 성경의 예는 고린도교회이다. 고린도교회는 성령의 은사들을 많이 경험하고 소유한 교회이었음에도 불구하고(고전 1:7) 영적 어린아이와 같았다. 고린도전서 3: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이와 같이, 1987년과 1988년에 미국 사회에 물의를 일으켰던 미국의 짐 배커와 지미 스웨거 같은 어떤 은사주의 T. V. 전도자들의 사치스럽고 부도덕한 생활들은 기독교계의 수치이었고, 그리스도인의 영성(靈性)이 은사 경험에 있지 않고 거룩한 인격과 생활에 있음을 많은 이들에게 다시 깨닫게 하였다.

성경은 초자연적 은사들의 경험보다 바른 인격과 삶을 더욱 중시하고 강조한다. 신명기 13:1-5,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네게 말하기를 네가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좇아 섬기자 하며 이적과 기사가 그 말대로 이룰지라도 너는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순종하며 그를 경외하며 그 명령을 지키며 그 목소리를 청종하며 그를 섬기며 그에게 부종(附從)하고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는 죽이라.”

이사야 8:20,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 속에 빛이 없기 때문이라”(원문 직역).

마태복음 7:22-23,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니[알지 못했으니--원문]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고린도전서 13:1-7은, 성령의 어떤 은사보다도 중요한 것이 사랑의 인격과 생활임을 밝히 증거한다. 또한, 고린도전서 13:8-12는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이 초보적이고 부분적이며 어린아이 시절의 것이고 장차 ‘온전한 것’이 올 것을 증거하였다. 신구약성경은 바로 그 온전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초자연적 은사들이 있든지 없든지 간에, 성도들에게 중요한 것은 성경에 계시된 객관적 하나님의 말씀이다.

데살로니가후서 2:9-12,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희 가운데서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을 크게 생각하지도 말고 그것들을 구하지 도 말고 그것들을 사모하지도 말고, 오직 성경 말씀을 연구하고 그 말씀을 믿고 순종하며 그것을 전파하는 것으로 충분한 줄 알자. 오늘날 성경의 교훈을 믿지 않는 자들은 비록 기적을 볼지라도 믿지 않을 자들이다. 예수께서는 누가복음 16장에 기록된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에서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다(눅 16:31).

 

 교회연합운동과 함께감

넷째로, 은사주의자들은 전통적 교회의 목사들이 체험치 못한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을 체험했고 소유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바른 교리들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다. 은사운동은 오늘날 배교적인 자유주의 교회들이나 우상숭배적인 천주교회를 배격하지 않는다. 은사운동은 오히려 오늘날 모든 세계 교회들이 성령 안에서 하나됨을 강조하고 있다. 1987년 성령과 세계전도에 관한 북미 대회에서 한 예언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개신교회와 천주교회의 통합을 선언하였다. 이 미혹의 예언은 그 대회에서 제재되지 않았다.77) 우리나라의 은사주의자들도 분별력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은사주의적 순복음 강남 신학원 교수진에는 자유주의적 한신대, 감신대, 연대신대의 교수들이 포함되어 있다.78) 이렇게 은사운동은 오늘날 잘못된 교회 연합 운동의 촉매로서 나타나 그 운동을 촉진시킨다. 이것이 어떻게 하나님께서 오늘날 교회에 주신 부흥의 표가 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오히려 오늘날 교회의 영적 무지와 혼란을 추가시키는 일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성령의 일이 될 수 없다.

물론 우리는 영적으로 메마른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되고 성령의 충만함 속에 살아야 한다. 성경은 신자의 삶이 성령에 이끌림을 받는 성령충만한 삶이어야 함을 가르친다. 로마서 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에베소서 5:18,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에베소서 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러나, 오늘날의 은사운동은 앞에서 지적한 대로 하나님의 성령의 활동이라는 증거를 갖지 않는다. 도리어, 그 운동의 여러 가지 잘못된 요소들과 경향들은 그 운동에 대해 부정적 평가를 하게 만든다. 은사운동은 어떤 이들이 말하는 것처럼 결코 현대 교회의 영적 부흥의 표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현대 교회에 불어닥친 추가적 영적 혼란의 일이다. 그러므로 참된 교회들과 신자들은 마땅히 은사운동의 위험성을 인식하고 그것을 경계해야 한다.

만일 현대 교회에 영적 침체가 있다면, 그것은 ‘전통적인 경직된 성령론’ 때문이 아니라, 목사들과 신도들의 죄와 불순종, 특히 세상과 분리되기보다는 세상을 따라가며 죄악을 용납하고 죄악과 타협하는 죄악된 삶에 기인한다.

요한일서 2:15-17,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 즉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왔음이니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그러므로, 교회의 영적 부흥은 신자들의 성령세례 경험 같은 어떤 단회적 혹은 반복적 사건들에 있지 않고, 성경 말씀에 근거한 철저한 회개와 진실한 믿음, 그리고 일상 생활 속에서 성경 말씀대로 사는 온전한 순종의 삶에 있다.

 

 

 

제3부: 인간론

인간론(Anthropology)은 사람과 죄에 관한 진리들을 정리한다. .

 

1. 사람의 기원

2. 사람의 본질

3. 죄의 본질

4. 죄의 구별

5. 하나님의 법

6. 죄의 형벌

7. 하나님의 언약

   

 

1. 사람의 기원

하나님께서 창조하심

구약 창세기 1, 2장은 사람의 기원에 관하여 밝히 증거하고 있다. 창세기 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세기 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이 증거대로, 사람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은 창세기 1, 2장의 진실성을 부정하고 성경의 창조 기사를 비역사적인 신화로 본다. 자유주의 신학의 한 예는 소위 ‘문서설’이다. 자유주의자들은 창세기 1장의 창조 순서와 창세기 2:5, 7, 19, 22을 비교하면서 창세기 1장과 2장의 내용들이 창조의 순서에 있어서 서로 모순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구약의 처음 다섯 권의 책들을 하나님의 종 모세가 하나님의 특별한 감동 가운데 쓴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 않고, 후대의 익명의 저자들이 쓴 소위 J, E, D, P 등의 문서들에 의해 편집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은 성경의 신적 권위를 부정하는 이단이다. 우리는, 비록 모세가 전승된 구전(口傳)들이나 토판(土版)들을 사용했을 가능성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창세기가 하나님의 종 모세의 율법서들 중의 한 부분이며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말씀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모세가 죽은 후, 그의 후계자 여호수아는 모세가 기록한 율법책을 전달받았고,79) 여호수아 24:2-4에서 그는 창세기의 내용을 ‘여호와의 말씀’으로 언급하였다.

창세기 1장과 2장은 사람의 기원에 관한 바른 진리를 증거한다. 그 내용들은 서로 보충적이다. 1장은 우주 창조 전반에 관해 증거하였고, 2장은 사람의 창조, 특히 남녀의 창조에 대해 좀더 자세히 증거하고, 또 하나님께서 첫 사람 아담에게 주신 처음 명령에 대해 기록하였다. 사람의 기원은 하나님께 있다.

사람 창조에 있어서 몇 가지 특별한 점들이 있다. 첫째로, 사람은 삼위 하나님 즉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의논 속에 창조되었다. 창세기 1:26,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둘째로, 사람은 하나님의 직접적 손길로 창조되었다. 창세기 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창세기 2:21, 2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셋째로, 사람은 몸과 영혼이 다 창조되었다. 하나님께서는 흙으로 사람의 몸을 만드셨고, 또 영을 창조하셨다. 창세기 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라는 말씀은 사람의 영혼의 창조를 보인다. 창세기 2:7은 창세기 1:27에 대한 좀더 자세한 보충적, 추가적 설명이다. 하나님께서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셨다’고 해서, 사람의 영혼이 하나님께로부터 유출(流出)되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성경은 사람의 영혼이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다르고 신적 속성들을 소유하고 있지 않음을 분명히 증거한다. 하나님은 범죄할 수 없는 영이시다. ‘생령’이라는 원어(네페쉬 카야)는 ‘생명체, 산 존재’라는 뜻이다. 그것은 창세기 1:20과 24에서 물고기와 땅의 짐승에게도 사용된 ‘생물’이라는 단어이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의 몸을 만드셨고 또 직접 영혼을 창조하여 그 코 속에 생명의 기운으로 넣으셨고 그래서 사람은 산 존재가 되었던 것이다.

넷째로, 여자는 남자에게서 창조되었다. 창세기 2:21, 2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여자는 남자를 돕는 자로 창조되었다. 창세기 2:18,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돕는 배필’이라는 말은 ‘돕는 자’라는 뜻이다. 이것은 여자의 역할을 증거한다. 남자를 돕는 자로 여자를 창조하신 것이 하나님의 본래의 의도이었다. 여기에 남녀에 대한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가 분명히 드러나 있다.

 

 인류의 단일성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류의 시조는 하나이다. 맨 처음에 하나님은 한 남자와 한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인류의 부모가 되었다. 온 인류는 한 부모로부터 나왔고, 넓은 의미에서 한 가족들이며 친척들이다.

인류의 단일성에 대한 성경 진리에 반대하여, 아담 이전에도 세상에 사람들이 있었다거나, 아담과 동시대에 사람들이 다른 곳들에 또 있었다거나, 아담이 인류의 시조가 아니고 유대인의 시조에 불과하였다는 추측들이 있었다. 어떤 이들은 성경에 아담의 첫 아들 가인이 사람들이 자기를 죽일까봐 두려워했다는 사실과 그가 결혼할 대상이 있었다는 사실(창 4:14, 17) 등에서 그런 추측의 근거를 찾으려 하였다. 그러나 인류의 단일성은 성경이 밝히 증거하는 사실이며 특히 원죄의 교리에 기초가 되므로 중요하다.

성경은 여러 구절들에서 인류의 단일성을 증거한다. 창세기 1:27, 28,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창세기 3:20,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더라.” 창세기 9:19, “노아의 이 세 아들로 좇아 백성이 온 땅에 퍼지니라.” 창세기 10:32, “이들은 노아 자손의 족속들이요 그 세계와 나라대로라. 홍수 후에 이들에게서 땅의 열국 백성이 나뉘었더라.” 사도행전 17: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성경 뿐만 아니라, 또한 일반 학문들도 여러 각도에서 인류의 단일성에 대하여 증거한다.

첫째로, 역사학은 여러 인종들의 전설들에 근거하여 인류가 공통적으로 중앙 아시아에서 기원하였을 것이라고 증거한다. 유럽의 민족들은 아시아로부터 이주(移住)한 것으로 인정된다. 또한 아메리카 인디언들도 동부 아시아의 몽고족 중에서 폴리네시아(오스트렐리아 동북부 태평양의 섬들)를 경유하거나 알류시안 군도(알래스카와 러시아를 잇는 베링 해협의 섬들)를 밟아서 이주하였다고 일반적으로 인정된다.

둘째로, 비교언어학은 인류의 언어들의 공통적 기원을 증거한다. 특히, 고대 언어들의 어근의 유사성이 그것을 확증한다. 예컨대, 곰은 애굽어로 뎁, 히브리어로 돕, 알메니안어로 뎁바, 아라비아어로 둡이라고 한다.

셋째로, 심리학은 인류의 영혼들의 공통적 특질들을 증거한다. 예를 들어, 인류는 공통적으로 식욕과 성욕 등의 본능적 욕구들과 더불어 도덕성과 종교성 등을 소유하고 있다. 특히, 인간은 공통적으로 신을 찾고 신에게 기도하며 또 영생을 소망한다.

넷째로, 생리학은 인류가 단일 종류임을 증거한다. 예를 들어, ① 모든 종족들의 두뇌, 골격, 치아의 성질이 같다. ② 종족들 간의 결혼과 자녀 출산이 가능하다. ③ 몸의 온도, 맥박수, 혈액의 특질이 같다.

다섯째로, 생물학은 인류의 단일성을 증거한다. 진화론 학설을 발표했던 다윈 자신도 그 사실을 시인하여 말하기를, “나는 오늘날의 인류가 하나 이상의 부부들로부터 발생하였다고 말하게 할 아무 증거도 없다고 믿는 자들 중의 하나다. 나는 하나 이상의 인종이 있다고 믿을 만한 아무 좋은 근거도 혹은 아무 유지될 수 있는 증거도 보지 못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80) 인류는 한 부모의 자손이다.

 

인류의 연대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언제 세상과 사람을 창조하셨는가? 지구는 얼마나 오래된 것인가? 세상의 많은 과학자들은 진화론적 신념을 가지고 지구와 인류의 오랜 연대를 상상하고 주장한다. 지구의 나이를 수십억년 그리고 인류의 연대를 수십만년으로 보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지구와 인류의 참된 연대가 아니다. 성경은 지구와 인류가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음을 증거한다.

성경에 근거한 지구와 인류의 연대를 계산해보자. 우선, 천지 창조를 문자적 6일 창조로 보면, 아담의 창조는 지구의 창조와 같은 해이다. 창세기 5장에는 아담의 자손들의 수명이 나오는데, 그것들에 근거하여 그들의 연대를 대략 계산할 수 있다. 그것에 의하면, 아담은 930년까지 살았고, 노아는 아담 후 1056경에 출생하여 2006년경에 죽었고, 노아 시대의 홍수 심판은 노아 600세 때 즉 아담 후 1656년경에 있었다. 물론 이런 연대들은 숫자를 그대로 더하거나 뺀 것이므로 대략적인 것이다.

창세기 11장에는 또한 셈의 자손들의 수명이 나오는데, 그것에 근거하여 그들의 연대를 계산할 수 있다. 셈은 아담 후 1558년경에 출생하여 2158년경에 죽었고, 데라는 아담 후 1878년경에 출생하여 2083년에 죽었다. 창세기 11:26은, 데라가 70세에 아브람[아브라함]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다고 증거했는데, 그것이 데라가 70세에 아브라함을 낳았다는 뜻이면, 아브라함은 아담 후 1948년경에 출생하였고 175세를 살았으므로(창 25:7) 아담 후 2123년경에 죽었다는 말이 된다.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날 때 나이 75세이었으므로(창 12:4) 그 때 데라는 145세로서 아직 죽기 전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창 11:32 비교).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은 아담 후 2048년경에 출생하여 180세를 살았고(창 35:28) 아담 후 2228년경에 죽었고, 이삭의 아들 야곱은 아담 후 2108년경에 출생하여(창 25:26) 147세를 살았고(창 47:28) 아담 후 2255년경에 죽었다. 야곱이 애굽에 내려간 나이가 130세이었고(창 47:9) 그 때는 아담 후 2238년경이었다.

출애굽기 12:40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애굽에 거주한 지 430년에 애굽에서 나왔다고 증거하고 있으므로, 출애굽 사건은 아담 후 2668년경에 있었다. 또한, 열왕기상 6:1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지 480년이요 솔로몬이 이스라엘 왕이 된 지 4년 시브월 곧 2월에 솔로몬이 여호와를 위하여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였더라”고 증거한다. 그러므로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한 연대는 아담 후 3148년경이다. 그런데 솔로몬의 통치 연대는 세속 역사와 비교하여 주전 970-931년경으로 어느 정도 확정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면 성전 건축의 연대인 아담 후 3148년경은 주전 967년경이 되고, 따라서 아담의 창조 연대 및 세상의 창조 연대는 3148년+967년 즉 주전 4115년경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성경에 근거한 지구와 인류의 창조 연대는 주전 4천년 남짓하며, 인류의 역사는 이제까지 6천년 가량임을 알 수 있다.

17세기 영국교회 대주교 제임스 어숴81)는 신구약의 연대기82)라는 책에서 아담의 창조 연대를 주전 4004년으로 보았다. 근대에 보수적 구약 학자이었던 바톤 페인(J. Barton Payne)은 인류의 창조 연대를 주전 4175년으로 보았다.83) 이들은 다 성경에 근거하여 인류의 연대를 계산한 것이었다.

성경에 근거한 이런 짧은 연대와 다르게, 오늘날 많은 과학자들은 지구와 인류의 오랜 연대를 상상하고 주장한다. 그들의 연대 측정의 대표적 방법은 우라늄(U-238)에 의한 측정 방법과 방사성 탄소(C-14)에 의한 측정 방법이 있다. 전자는 암석의 연대 측정에 주로 사용되고, 후자는 생물체의 연대 측정에 사용되는데, 그 두 방법의 원리는 동일하다. 방사성 탄소에 의한 측정 방법은 리비(W. F. Libby)가 발표한 방법으로서 가장 많이 사용되며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이것은 화석이나 오래된 생물체의 연대를 측정하는 거의 유일한 과학적 방법으로 알려져 있다.

방사성 탄소에 의한 연대 측정 방법은 다음과 같은 원리에 근거한다:

① 우주에서 지구로 밤낮 없이 들어오는 높은 에너지의 미립자와 그 방사선들--그것을 우주선(宇宙線)이라 부름--은 공기 중에 있는 질소(N-14)에 흡수되어 방사성 탄소(C-14)를 만들어 낸다.

② 이 방사성 탄소는 공기 중에 있는 산소와 반응하여, 이산화탄소(CO2)가 되어 동물들과 식물들 속에 들어간다.

③ 그런데 생물체들이 죽으면, 그 생물체들 속에 있던 이 방사성 탄소는 매우 천천히 붕괴되어 그 양이 줄어들게 되며, 그 양이 반으로 줄어드는 기간[반감기]은 약 5,700년이다. 따라서, 이 반감기에 근거하여 어떤 생물체의 화석의 연대를 측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방사성 탄소에 의한 연대 측정 방법은 두 가지 증명할 수 없는 가설들에 근거하고 있다는 문제점이 있다.

① 지구에 들어오는 우주선의 양, 공기 중에 있는 질소의 양, 그리고 그들 간의 반응으로 만들어지는 방사성 탄소의 양이 언제나 동일하다는 것은 증명할 수 없는 가설이다. 옛날의 생물체들 속에도 오늘날과 똑같은 양의 방사성 탄소가 들어 있었다는 것을 누가 증명할 수 있겠는가?

② 방사성 탄소의 반감기는 어떤 환경 조건에서도 항상 동일하다는 것도 증명할 수 없는 가설이다. 이 두 가지 가설들은 객관적 확실성을 가질 수 없는 것들이므로, 이 연대 측정 방법은 객관적 확실성을 가질 수 없다.

더구나, 이 측정 방법이 불확실하다는 과학적 증거들도 있다. 예를 들면, 살아 있는 달팽이 껍질이 2,300년 된 것으로 나타난다거나, 산 나무의 일부가 10,000년 된 고목으로 나타난다거나, 갓 잡은 물개가 1,300년 된 것으로 나타나는 우스광스러운 결과들도 있었다고 한다. 또한, 어떤 이들은 방사성 탄소의 생성 속도와 붕괴 속도가 시간에 따라 변한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였고, 어떤 이는 “대기 중으로 유입되는 우주선의 양, 물리적 압력, 화학 결합 상태, 전기 및 다른 외적 요인들에 의해서도 방사성 탄소를 포함한 모든 방사성 원소들의 붕괴 속도가 달라짐을 입증하였다”고 한다.84)

다른 한편, 지구의 나이가 오래되지 않았다는 과학적 증거들도 여러 가지 제시되어 있다.85) 그 중에 몇 가지를 들어보자.

첫째는 지구의 자기(磁氣) 능률의 감소이다. 나침판의 지침이 항상 일정한 방향을 가리키는 데서 입증되듯이 지구는 하나의 자장(磁場)인데, 지구의 자기 능률이 점점 줄어들고 있고 그 붕괴 속도의 반감기가 1,400년임이 알려졌다. 그러나 자장의 붕괴시 높은 온도가 생기므로, 만일 지구의 연대를 2만년으로 가정할지라도 큰 자장의 붕괴를 상상해야 하고 그 때의 고온 때문에 지구는 액체로 변했을 것이며, 100만년을 가상한다면 지구는 완전히 기체가 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또 자장이 크면 클수록 우주선(宇宙線)의 유입은 작아진다고 하며, 그렇다면 수천 년 전의 방사성 탄소(C-14)의 생성량은 오늘날에 비해 매우 작았을 것이다.

둘째는 지구의 회전 속도의 감소이다. 지구의 회전 속도는 점점 느려진다고 알려졌다. 만일 지구의 연대가 10억년이고 그 때의 자전 속도를 현재와 같이만 보아도, 현재 지구의 자전은 멈추었을 것이고, 만일 지구의 현재 자전 속도에서 거꾸로 더해가면 10억년 전의 지구는 상상할 수 없이 빨리 돌아 지구의 모양은 구형이 아니라 빈대떡 모양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셋째는 우주진(宇宙塵)의 두께이다. 우주진(cosmic dust)이란, 우주 공간에 흩어져 있는 미세한 석질(石質) 혹은 철질(鐵質) 미립자들[먼지들]을 가리키는데, 이러한 우주진이 지구에 연간 약 1,400만 톤이나 떨어진다고 한다. 특히 니켈의 함량은 지구의 물질 속에 있는 것보다 매우 많다고 한다. 만일 지구의 나이가 10억년이라면, 지구는 지금 약 15m 이상의 우주진으로 뒤덮혔을 것이지만, 현재 지구와 달에 있는 우주진의 양은 단지 몇 천년의 역사에 해당한다고 한다.

넷째는 방사성 탄소(C-14)의 생성 속도와 붕괴 속도의 차이이다. 방사성 탄소의 생성 속도와 붕괴 속도는 다르며, 그 차이를 계산한 결과 지구는 약 8,000년 전에 시작된 것이라고 한다.

다섯째는 지구상의 지표흙의 두께이다. 지구상의 평균 지표흙의 깊이는 약 20센티미터라고 한다. 여러 실험 조사에 의하면, 지표흙이 2.5센티미터 쌓이는데 약 300-1,000년이 걸린다고 추산되는데, 이 추산에 의하면, 지구의 나이는 수천년에 불과하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지구와 인류의 연대에 대한 성경의 증거를 포기할 이유가 없다. 그리스도인 과학자 헨리 모리스는 말하기를, “어숴의 일반적 방법, 즉 성경의 자료들에만 의존한 방법은 창조의 때를 결정하는 유일 합법적인 방법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 . . 사실, 전통적인 주전 4004년 연대의 완전한 불가능성이나 불합리성은 없다”고 한다.86) 우리는 성경의 연대를 믿음으로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진화론 비평

오늘날 유행하는 진화론은 사람의 기원에 관한 성경 진리를 대항하고 도전한다. 진화론의 영향은 교회 안에도 매우 커서, 많은 신학자들과 청년들이 그 영향 때문에 창조의 기본적 신앙을 잃어버리고 있다. 오늘날 세상과 교회에 강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진화론은 도대체 무엇이며 과연 확실한 이론인가?

진화론(進化論)이란 영국의 박물학자 촬스 다윈(1809-1882)의 종들의 기원87)이라는 책에 의해 널리 퍼진 생각이다. 다윈은 그의 책에서 다음 몇 가지 점들을 가정하였다:

① 생명은 무생물에서 자연 발생하였으며, 그것은 역사상 단 한번만 일어났다.

② 바이러스, 박테리아, 식물들, 그리고 동물들은 모두 서로 연결되어 있다.

③ 단세포 동물(아메바 등)에서 모든 동물이 진화되어 나왔다.

④ 무척추 동물에서 척추 동물이, 척추 동물에서 양서류(물과 육지 양쪽에서 사는 것들, 개구리 등)가, 양서류에서 파충류(뱀 종류)가, 파충류에서 조류나 포유류가 진화되어 나왔다.

⑤ 사람은 고릴라, 침팬지, 오랑우탄, 기번 등 소위 유인원(類人猿)의 자손이거나 그들과 공통의 조상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진화론은 불확실한 가설(假說)에 불과하다. 그것은 확실한 객관적 사실들에 근거한 것도 아니고 확실히 증명된 것도 아니다.88) 다윈의 가정들을 살펴보자.

다윈이 가정했던 생명의 자연발생설에 대하여, 오늘날 과학자들은 오히려 부정적이다. 1862년 파스테르는 실험을 통해 생명체의 자연발생론을 반박하고, 생물은 생물에게서 생긴다는 소위 ‘생물발생론’이 타당성을 증거하였다. 또 가장 간단한 생명체 하나가 우연히 생성될 확률은 한계점인 10의 50제곱분의 1보다 휠씬 작다고 하고 이 사실은 그것의 불가능성을 보인다. 더욱이, 생명의 신비를 담고 있다고 오늘날 알려진 DNA의 매우 복잡하고 정교한 구조와 작용은 고도의 지적인 존재, 즉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증거하고 있다.

생물학적 변론에 대하여, 다윈이 가정하는 대로 바이러스, 박테리아, 식물들, 동물들, 그리고 사람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 즉 한 종에서 다른 종으로 변이하는 것은 결코 생물학적으로 관찰되지 않는다. 어떤 종이 그 종 안에서 가지는 작은 변이[그것을 ‘소진화’라고 함]는 보통 인정되지만, 한 종에서 다른 종으로의 변이[그것을 ‘대진화’라고 함]는 결코 생물학적으로 관찰되지 않는다.

또한 후천적으로 얻어진 형질들은 유전되지 않는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19세기 말, 바이스만은 생쥐꼬리 실험을 통해 후천적으로 얻어진 형질이 유전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돌연변이의 유전도 한계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같은 종 안에서는 변이의 유전은 가능하지만, 종과 종 사이의 유전 변이는 일어나지 않는다. 멘델은 돌연변이가 결코 새 종이 되지 못함을 발견하였다. 또한, 뮬러는 돌연변이가 대부분 해로운 방향으로 일어난다는 사실도 알아내었다. 이러한 사실들과 결론들은 진화의 개념과 반대되는 것이다.

또한, 생물들 간의 유사성, 특히 해부학적 유사성이나 태생학적 유사성은 진화를 증명하지 않는다. 그 유사성은 하나님의 창조의 방식으로 얼마든지 설명된다. 또한 그것은 물건들이나 기계들의 유사성이 서로간의 진화를 증명하지 않는 것과 같다. 특히, 최근의 혈액 시험은 사람의 피와 동물의 피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증명하였다.

또 퇴화 기관들이 진화의 증거라는 주장도 타당치 않다. 오래 전에는 학자들이 사람의 신체에서 180여개의 퇴화 기관들을 말하였으나, 최근에는 모두 6개뿐이라고 한다. 그것은 의학의 발달로 그 기관들의 기능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즉 주장된 퇴화 기관들은 그 기관들의 기능들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 잘못된 가정들이었다. 예를 들어, 이전에는 맹장이 쓸데없다고 생각되었으나, 오늘날에는 그것이 창자에 염증이 생기지 않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화석학적 변론에 대하여, 화석학적 증거들은 전혀 진화론을 증명하지 못한다. 화석이란 퇴적암 지층에 보존되어 있는 생물의 유해나 자취를 말한다. 화석들의 연대를 측정하는 한 방법에 의하면, 이미 생물들의 긴 시대 동안의 진화를 가정하고 화석들을 여러 지층으로 분류하고, 어떤 지층에 있는 화석의 종류에 따라 그 지층의 연대를 측정한다. 이것은 순환적 논리이므로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한다. 특히, 종과 종 간의 연결 고리가 될 수 있는 중간 형태의 생물들의 화석들은 발견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진화의 화석학적 증거는 없다.

유인원과 사람의 중간 형태라고 주장된 화석들이 있었지만, 그 어느 것도 무엇을 증명하지 못했다.

① 인도에서 발견된 1,400만년 전의 것이라고 주장된 라마피테쿠스는 몇 개의 치아와 턱 조각들인데, 예일 대학의 데이빗 R. 필빔은 그것이 멸종된 원숭이에 불과하다고 말하였다.

② 동부 아프리카에서 발견된 200-300만년 전의 것이라고 주장된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 대해서, 영국의 유명한 해부학자 솔리 로드 쥬커만은 그것이 원숭이에 불과하다고 진술하였다.

③ 쟈바에서 발견된 50만년 전의 것이라고 주장된 쟈바인 혹은 피테칸트로푸스 에렉투스(직립 원인)는 그 뼈들을 발견하고 발표했던 듀보아 자신에 의해 긴 팔 원숭이라고 선언되었다.

④ 북경 부근 주구점에서 발견된 북경인 혹은 신안트로푸스 페키넨시스는 치아 두 개를 제외한 모든 자료가 분실되어 확인이 불가능한 경우이다.

⑤ 미국 서부 네브라스카에서 발견된 네브라스카인 혹은 헤스페로피테쿠스 헤롤드쿠키는 치아 한 개에 근거하였는데, 후에 그것은 멸종된 멧돼지로 판명되었다.

⑥ 영국 필트다운 근처에서 발견된 50만년 전의 것이라고 주장된 필트다운인 혹은 이안트로푸스 도소니는 턱뼈와 두개골의 일부에 근거하였는데, 그것은 후에 완전히 조작된 작품임이 드러났다.

⑦ 독일 뒤셀돌프 부근 네안데르 계곡의 한 동굴에서 발견된 네안데르탈인 혹은 네안데르탈렌시스는 관절염으로 인한 불구와 및 비타민 D 부족으로 인한 곱추병 환자이었거나 미토콘드리아 DNA가 오늘날의 인류와 전혀 다른 것을 보면 인간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한다.

⑧ 독일 마우어에서 발견된 25만년 전의 것으로 주장된 하이델베르그인은, 그러한 턱뼈를 가진 종족이 오늘날에도 뉴 칼레도니아 지방에 있고, 그러한 두개골 형태를 오늘날의 흑인들 중에서 발견할 수 있으므로 유인원이라 볼 수 없음이 판명되었다.

⑨ 프랑스 크로마뇽의 바위 밑에서 발견된 크로마뇽인은 현대인으로 밝혀졌다.

진화론은 이같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과학적으로 반박되고 있다. 특히 진화의 개념은 물리학의 열역학 제1, 2 법칙에 배치된다. 열역학(熱力學, thermodynamics)이란 다양한 형태들의 에너지(힘)와 그 변화에 관한 학문인데, 열역학의 제1 법칙은 보통 ‘에너지 보존 법칙’으로 알려져 있다. 그것은 단순한 물건이든지 복잡한 기계이든지 한 조직체 속에 있는 에너지는 생성되거나 파괴될 수 없고, 단지 한 조직체에서 다른 조직체로 이전되거나, 한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변환될 수 있을 뿐이며, 에너지의 총량은 불변적이라는 법칙이다. 이 법칙에 의하면, 최초의 물질이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되었다는 것은 가능하지만, 진화론으로는 최초의 물질의 존재를 결코 설명할 수 없다.

열역학의 제2 법칙은 보통 ‘에너지 감소 법칙’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것은 에너지의 질적 쇠퇴 현상을 말한다.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모든 현상은 그 자유 에너지를 가장 낮은 상태로 유지하는 방향으로 진행한다고 한다. 열 에너지는 자연적으로 더 뜨거운 것으로부터 더 차가운 것으로 흐른다. 증기 기관에서의 열 에너지의 일부는 주위의 차가운 것들에 이전되므로 연료의 모든 열 에너지가 기계적 에너지로 변환되지 못한다. 이 때 감소된 에너지의 양을 ‘엔트로피’(entropy)라고 부른다. 이 ‘엔트로피’는 물체의 내적 무질서의 정도를 나타내기도 한다. 열역학 제2 법칙에 의하면, 우주는 시간이 감에 따라 쓸 수 있는 에너지가 감소되고 ‘엔트로피’가 증가되고 있다고 한다. 다시 말해, 우주는 낡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법칙은 성경 말씀에 정확히 일치하지만, 진화의 개념에는 정면으로 반대된다. 시편 102:26, 27,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같이 낡으리니 의복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여상(如常)하시고[동일하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

무엇보다, 진화론은 성경 진리에 명백히 반대된다.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증거한다(창 1:1). 또한 창세기 1장은 하나님께서 식물들, 물고기들, 동물들을 ‘각각 그 종류대로’ 창조하셨음을 10번이나 반복하여 증거한다. 특히 사람의 창조에 관하여,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흙으로 만드셨고 그의 영혼을 직접 창조하셨음을 증거한다(창 2:7). 성경의 이러한 증거에는 진화의 여지가 도무지 있을 수 없다. 또한 성경은 사람의 몸과 동물의 몸이 질적으로 다름을 말한다. 고린도전서 15:39,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또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죄의 형벌을 선언하실 때에도, 동물의 상태로 돌아가라고 하시지 않고, 흙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셨다. 창세기 3:19, “. . .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근래에는 ‘유신 진화론’(有神進化論, Theistic Evolutionism)이라는 사상까지 나타났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되 진화의 방법으로 하셨다는 이론이다. 이것은 창조와 진화를 조화시켜 보려는 생각이다. 유신론적 진화론은 흔히 무기물과 유기물 사이에, 또 비이성적 동물들과 이성적 인간 존재 사이에 하나님의 특별한 활동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러한 유신론적 진화론은 진화론도, 창조론도 아닌 괴이한 잡종이며, 성경을 믿는 교회들에서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사상이다. 우리는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에 의해 기원했음을 성경의 증거대로 바로 믿고 확신하자.

  

 2. 사람의 본질

사람이란 무엇인가? 성경에 계시된 사람에 대한 진리 중에 가장 중요한 내용은 첫째로 사람이 몸과 영혼으로 구성되었다는 것과 둘째로 사람이 본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이다.

 

몸과 영혼으로 구성됨

역사상 사람의 구성 요소에 대해서 두 가지 견해가 있었다. 하나는 사람이 몸과 영과 혼의 세 실체로 구성되었다고 하는 ‘삼분설(三分說)’이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고대의 헬라 철학자들은 사람이 이성적 영, 동물적 혼, 그리고 몸의 세 실체들로 구성되었다고 생각하였다. 초대 교회에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오리겐, 닛사의 그레고리, 다메섹의 요한 등의 교부들이 이러한 견해를 취하였다. 삼분설은 초대 교회의 어떤 이단자들과도 관련이 있었는데, 그노시스주의는 사람의 영이 신적 본질의 일부분이므로 범죄할 수 없다는 주장을 하였고, 아폴리내리스는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혼만을 가지셨고 신적 로고스가 그의 영을 대신했다고 생각했다. 사람의 구성 요소에 대한 다른 한 견해는 사람이 몸과 영혼의 두 실체로 구성되었다는 ‘이분설’(二分說)이다. 이것은 교회의 전통적 견해이다. 초대 교회의 터툴리안과 어거스틴, 중세의 안셈, 종교개혁 시대의 루터와 칼빈 등은 다 이 견해를 가졌고 그 후 개신교회들의 절대 다수가 이 견해를 취하였다.

이분설의 근거는 영이라는 말(루아크, 프뉴마)과 혼(네페쉬, 프쉬케)이라는 말이 성경에서 구별 없이, 교대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데 있다. 확실히, 성경에서 그 두 말은 한 실체를 나타내는 두 개의 용어에 불과하다.

첫째로, 성경은 인간 전체를 묘사할 때 어떤 때는 몸과 영이라고 말하고 어떤 때는 몸과 혼이라고 말함으로써 영이라는 말과 혼이라는 말을 구별하지 않는다. 전도서 12:7,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영]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고린도전서 5:3, 5,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마태복음 10:28, “몸은 죽여도 영혼[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둘째로, 성경은 인간의 죽음을 묘사할 때 어떤 때는 영이 떠난다고 표현하고 어떤 때는 혼이 떠난다고 말한다. 누가복음 23:46, “아버지여, 내 영혼[영]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사도행전 7:59, “주 예수여, 내 영혼[영]을 받으시옵소서.” 창세기 35:18, “그가 죽기에 임하여 그 혼이 떠나려 할 때에.”

셋째로, 성경은 죽은 자의 회생(回生)을 묘사할 때도 어떤 때는 영이 돌아온다고 말하고 어떤 때는 혼이 돌아온다고 말한다. 누가복음 8:55,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 열왕기상 17:22,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고 살아난지라.”

넷째로, 성경은 죽은 자를 묘사할 때도 어떤 때는 죽은 자들의 영들이라고 표현하고 어떤 때는 죽은 자들의 혼들이라고 표현한다. 히브리서 12:23,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 요한계시록 6:9, “죽임을 당한 영혼들[혼들].” 요한계시록 20:4,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

다섯째로, 흔히 삼분설에 의하면, 영은 보다 더 고상한 기능을 하고, 혼은 보다 더 저급한 기능을 하는 것이라고 주장되지만, 성경은 동물에게도 영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하나님께도 혼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그런 구별을 인정하지 않는다. 전도서 3:21, “인생의 혼[영]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영]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시편 11:5, “여호와는 (악인을) . . . 마음[혼]에 미워하시는도다.” 이사야 1:14, “내 마음[혼]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이사야 42:1, “내 마음[혼]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예레미야 6:8, “예루살렘아, 너는 훈계를 받으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 마음[혼]이 너를 싫어하고.” 예레미야 9:9, “내 마음[혼]이 이런 나라에 보수하지 않겠느냐?” 아모스 6:8, “주 여호와가 자기를 가리켜[자기의 혼으로] 맹세하였노라.” 또한, 성경은 사람의 종교적 활동들을 영에게만 돌리지 않고 혼에게도 돌림으로써 영과 혼의 기능에 차별을 두지 않는다. 신명기 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영혼]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누가복음 1:46-47, “내 영혼[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영]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성경에 삼분설을 가리키는 듯한 구절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구절들은 성경의 전체적인 그리고 보다 명확한 빛 아래서 해석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데살로니가전서 5:23의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는 말씀은 인성(人性) 전체의 성화를 강조하면서 영과 혼을 반복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히브리서 4:12의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 . .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는 말씀도 하나님의 말씀이 영혼의 깊은 곳을 꿰뚤어 감찰하심을 강조하면서 영과 혼을 반복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영혼의 활동

그러면 영혼의 활동은 무엇인가? 몸은 비생명적, 물질적 실체이며, 영혼과의 결합으로만 생명체로서의 기능을 한다. 죽음은 몸에서 영혼이 떠나는 현상이며, 죽은 몸은 몸의 특질을 잘 나타낸다. 영 혹은 영혼의 특질은 생명과 인격성이다. 사실, ‘영’이라는 원어는 ‘영’이라는 뜻 외에 ‘호흡, 생명의 기운’을 의미하며, 또한 ‘혼’이라는 원어도 ‘혼’ 외에 성경에서 빈번히 ‘생명’을 가리킨다. 인간의 생명 원리인 영혼은 또한 인간의 인격적 요소를 형성한다. 일반적으로 영혼의 활동은 마음(레브, 카르디아 καρδία)이라고 표현된다. 사람의 마음은 지식, 감정, 의지의 요소들로 구성되며, 그것에 양심이 덧붙여질 수 있다. 영혼은 어떤 외적 세력에 억압받지 않고 자발적으로 활동한다는 의미에서 자유로우며 따라서 자신의 행위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가진다.

양심이란 사람의 마음에 있는 도덕적 분별력과 선한 경향성이다. 그것은 사람의 영혼에 심겨진 하나님의 율법이요 하나님의 음성이다. 그것은 사람의 영혼의 법정(法庭)이다. 로마서 2:14-15, “양심 . . .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 그러나 양심은 선하고 깨끗한 마음이지만 더러워질 수 있고 심지어 완전히 마비될 수도 있다(고전 8:7; 딤전 4:2).

마음은 몸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지식은 뇌와 감각 기관들의 활동과 연결되어 있다. 감정도 대개 몸의 감각 기관들과 분리시켜 생각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음이라고 할 때, 그것은 몸과 분리된 영혼의 순수한 활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영육의 결합 상태에서의 영혼의 활동을 의미한다. 마음은 몸에 영향을 주고 몸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마음이 기쁘면 몸도 힘이 나고 마음이 슬프면 몸도 약해진다. 잠언 18:14는 “사람의 심령은 병을 능히 이기려니와 심령이 상하면 그것을 누가 일으키겠느냐?”고 말한다. 또 몸이 아프면 마음도 약해지지 쉽다.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한다(잠 15:13).

특히, 사람이 구원받은 후 성화(聖化)의 불완전함은 단순히 중생한 영 자체의 문제이거나 몸의 문제가 아니고, 몸과 결합된 영혼 즉 영육의 통일된 인격의 문제이다. 로마서 7:25, “. . .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중생한 자의 심령은 본성의 남은 부패성과의 끊임 없는 싸움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과 성령의 도우심 속에서 성도는 조금씩 선한 인격으로 변화된다. 성도는 영적 성장을 위해 힘써야 한다.

 

 개인 영혼의 기원

각 사람의 영혼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교회 역사상, 개인 영혼의 기원에 관해 세 가지 견해들이 있었다.

첫째로, 어떤 이들은 개인의 영혼이 세상에 출생하기 전부터 존재했다고 보았다.89) 이것을 선재설(先在說)이라고 한다. 이 견해를 취하는 자들은 보통 각 개인의 영혼이 이전 세상(前世)에서 범죄하였다고 본다. 그러나 선재설은 성경적 근거가 없으며 성경에 반대된다. 말라기 2:15, “여호와는 영이 유여하실지라도 오직 하나를 짓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지으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니라.” 더욱이, 선재설은 인류의 단일성과 원죄의 교리에 충돌한다. 사도행전 17: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로마서 5: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더욱이, 사람은 전세(前世)에 대한 아무 기억도 갖고 있지 않다. 물론 범죄에 대한 기억도 없다. 이러한 사실들을 생각할 때, 선재설은 명백히 잘못이다.

둘째로, 어떤 이들은 개인의 영혼이 부모로부터 출생되었다고 보았다.90) 이것을 유전설(遺傳說)이라고 한다. 유전설을 주장하는 이들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1) 성경에는 자손들이 조상의 허리에 있다고 표현하는데, 이것은 개인의 영혼이 조상에게서 유전됨을 암시한다. 창세기 46:26, “이는 다 야곱의 몸(야레크, 넓적다리, 허리)에서 나온 자며.” 히브리서 7:9, 10,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고 할 수 있나니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오스퓌스, 생식기관의 자리)에 있었음이니라.” (2) 성경에는 자손들이 죄 중에 출생한다고 표현하는데, 이것은 개인 영혼의 기원과 그것의 죄악성이 부모에게서 나옴을 보인다. 욥기 14:4,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서 낼 수 있으리이까? 하나도 없나이다.” 시편 51: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요한복음 3: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그 외에도, (3) 자녀의 출산은 사람에게 맡겨졌다. 창세기 1:27, 28,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4) 성경이 하와의 영혼 창조에 대해 침묵한다. 창세기 2:2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고린도전서 11:8,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5)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창조의 6일 이후 중지되었다. 창세기 2:2,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 . . 마치니.” (6) 가정의 정신적 특성들은 자손들에게 유전된다.

그러나 이러한 그럴 듯한 점들에도 불구하고, 유전설에는 다음과 같은 어려운 점들이 있다. (1) 개인의 영혼의 전달 방식에 대한 적절한 대답이 가능해 보이지 않는다. 자녀의 영혼이 부모로부터 어떤 방식으로 전달되는가? 부모가 자녀 영혼의 창조자인가? 혹은 자녀의 영혼이 부모의 영혼으로부터 물질처럼 분할(分割)되는가? 자녀의 영혼이 부모의 영혼 안에 선재(先在)하였는가? 그 어느 대답도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부모는 자녀들의 영혼들의 창조자가 아니다. 또 인간의 영혼이 물질처럼 분할될 수 있다는 생각도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또 자녀의 영혼이 부모의 영혼 안에 존재해 있었다는 것도 매우 부자연스럽다.

(2) 인류가 첫 사람 아담 안에 실제로 존재했다는 가정은 불합리해 보인다. 사람은 부모나 자식의 마음을 아는 공통적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또 각 사람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책임을 지는 독립적 인격이며, 성경이 원죄에 대해 말할지라도 선조들의 누적된 죄책(罪責)의 전가(轉嫁)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3) 그리스도의 무죄성(無罪性)을 설명하기 어려워 보인다. 그리스도의 참된 인성에서 마리아의 원죄의 죄책과 부패성을 어떻게 배제할 수 있을까?

셋째로, 대다수의 개혁신학자들은 개인의 영혼이 하나님에 의해 직접 창조되었다고 본다.91) 이것을 창조설(創造說)이라고 한다. 이것은 초대교회의 동방교회의 견해이었고, 서방교회도 제롬과 힐러리 이후 거의 보편적으로 이 견해를 수납하였다. 중세교회도 일반적으로 이 견해를 취하였다. 종교개혁 이후, 개혁신학자들 대다수는 이 견해를 가졌다.

창조설을 지원하는 성경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민수기 16:22, “모든 육체의 생명[영들]의 하나님이여”(민 27:16도 같음). 전도서 12:7,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영]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이사야 42:5, “땅에 행하는 자에게 신[영]을 주시는 하나님.” 스가랴 12:1, “사람 안에 심령[영]을 지으신 자.” 히브리서 12:9, “모든 영의 아버지.” 예레미야 38:16, (시드기야 왕의 말) “우리에게 이 영혼을 지으신(아사)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이 외에도, 성경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창조하셨다고 증거한다. 욥기 31:15, “나를 태 속에 만드신 자가 그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우리를 뱃 속에 지으신 자가 하나가 아니시냐?” 시편 100:3,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잠언 14:31,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 사람의 몸뿐이겠는가?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몸만 창조하셨고 그들의 영혼들은 부모로부터 나왔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창조설에도 다음과 같은 어려운 점들이 있다. (1) 창조설은 죄의 책임에 대한 문제를 일으킨다. 하나님께서 죄악된 영혼을 창조하실 수는 없으나 깨끗한 영혼을 창조하여 즉시 원죄의 죄책과 부패성을 갖는 죄인이 되게 함으로써 죄악의 간접적 책임자가 되시는 것은 아닌가? (2) 창조설은 원죄(原罪)의 진리와 조화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창조된 영혼은 어떻게 원죄의 죄책과 부패성을 가지게 되는가? 특히, 원죄의 부패성은 부모에게서 자녀들에게 어떻게 전달되는가? 그것이 단지 자녀들의 몸에만 전달된다고 볼 수 있겠는가? 만일 그것이 자녀들의 영에도 전달된다면, 언제,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3) 가정의 정신적 유전도 어려운 문제의 하나이다.

결론적으로, 개인 영혼의 기원에 관하여 선재설(先在說)은 성경적 근거가 없고 성경 진리들에 배치되므로 받아들일 수 없으나 유전설(遺傳說)과 창조설(創造說)은 둘 다 상당한 성경적인 또한 합리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창조설이 더 성경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자녀의 출생 과정에서 하나님과 인간 부모의 역활이 신비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인정한다.

 

하나님의 형상

사람은 몸과 영혼의 두 요소로 구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창세기 1:26, 27,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형상’과 ‘모양’이라는 말은 의미상 차이가 없다(창 1:27; 5:1; 9:6; 고전 11:7; 골 3:10; 약 3:9).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은 어떤 물질적 형상이나 모양을 의미할 수 없고 하나님의 영의 특성들을 가리킴이 분명하다.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가장 중요한 특성은 지식과 도덕성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4:2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그 자신의 형상을 따라 지식과 의와 참된 거룩을 부여하셨고”라고 진술한다. 지식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창조하신 세계를 아는 것을 말하며 그 지식을 적절히 활용하는 지혜를 포함한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땅을 정복하고 땅의 생물들을 다스리라고 명령하셨을 때,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에게 지식과 지혜가 있음을 증거한다. 과연 첫 사람 아담은 하나님이 만드신 들짐승들과 새들의 이름을 지음으로써 그의 지식과 지혜를 잘 나타내 보였다(창 2:19, 20).

도덕성이란 이성적 판단과 의지적 자유를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며 그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사람이 본래 가졌던 거룩과 의(義)이다. 흔히 이것을 ‘본래의 의’(original righteousness)라고 부른다. 전도서 7:29는 증거하기를, “나의 깨달은 것이 이것이라. 곧 하나님이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은 많은 꾀를 낸 것이니라”고 하였다.

아담이 창조되었을 때 도덕적 중립 상태에 있었다는 추측은 타당하지 않은 것 같다. 아담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느 기간 동안 지켰다.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킨 동안 그의 행위는 하나님 앞에 의로운 행위이었다. 첫 사람은 얼마 동안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살았다.

하나님의 형상의 내용인 지식과 도덕성은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상실되었다. 사람이 다른 생물들에 비해 여전히 지혜롭고 상당한 지식을 갖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사람이 알아야 할 가장 기본적인 사실인 창조주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사람에게 참지식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또 도덕성은 두말 할 것도 없다. 사람은 본래의 그 거룩과 의를 다 잃어버렸다. 사람은 지금 심히 죄악된 상태에 있다. 그러므로 구원은 지식과 의의 회복을 포함한다. 골로새서 3:10은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고 말씀했고, 에베소서 4:24는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증거했다.

아담이 범죄한 이후에는 사람들이 더 이상 하나님의 형상이 아닌가? 그렇지는 않다. 성경은 사람들에 대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창세기 9:6은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고 말한다. 또 고린도전서 11:7은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고 말하고, 야고보서 3:9는 “이것[혀]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라고 말한다.

아담의 타락 이후에도 사람들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이 단지 지식과 도덕성뿐 아니라 그 외의 요소들도 포함하는 포괄적 개념임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형상에 포함시킬 수 있는 요소들이란 다른 피조물들과 달리 사람들에게만 있는 독특한 점들일 것이다. 그것들은 사람의 영혼의 불멸성, 인격성, 양심 등을 포함하며 영혼의 활동 기관 혹은 표현 기관으로서의 몸도 거기에 포함될 것이다. 특히 창세기 9:6에 살인을 하나님의 형상을 해치는 것으로 정죄한 것을 보면, 몸도 하나님의 형상에 포함시키는 것이 타당하다. 또 창세기 1:26-28이 하나님의 형상과 생물 통치권을 연관시키는 것을 보면, 생물 통치권도 하나님의 형상의 요소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교회 역사상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 여러 견해들이 있었다. 천주교회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구별하여 하나님의 형상은 사람의 영성, 의지의 자유 등 자연적 재능들을 가리키고 하나님의 모양은 사람의 욕망들을 통제할 수 있는 하나님의 초자연적 은사를 가리킨다고 본다. 헬라 정교회는 하나님의 형상이 사람의 이성적 성질뿐이며 도덕성은 제외된다고 본다. 루터교회는, 하나님의 형상이 사람의 본래의 의뿐이라고 본다. 펠라기우스주의와 알미니우스주의는, 하나님의 형상이 사람의 이성적 성질, 의지의 자유, 및 종교적, 도덕적 성질을 가리킨다고 본다.

 

 사람의 본래의 상태

사람의 본래의 상태 즉 타락 전 사람은 성숙한 인격이었다. 아담과 하와는 어린 시절이 없는 성인이었고, 불멸적 영혼을 가진 존재이었다. 그들은 지정의를 조화 있게 조절하는 인격자들이었고 도덕적으로 거룩하고 의로운 상태에 있었다. 그들이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동안 그들은 확실히 하나님과 더불어 충만한 기쁨과 평강을 누렸을 것이다.

또한 타락 전 아담과 하와의 몸은 완전하고 아름답고 건강하였음에 틀림 없다. 그들의 몸에는 허약과 피곤과 질병과 고통이 전혀 없었을 것이다. 그런 것들은 사람의 범죄한 이후 형벌로 내려진 것들이었다. 또 비록 죽음의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몸은 죽지 않을 수 있는 몸이었다. 아담과 하와는 이러한 몸으로 에덴 동산에서 얼마 동안 즐거운 삶을 살았을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건강한 몸으로 생물들을 다스리는 그의 직무를 잘 수행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타락하기 전 사람의 본래의 상태는 최종적으로 완전한 상태는 아니었다. 아담과 하와의 의(義)는 이미 그들이 미칠 수 있는 최상의 상태에 도달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에덴 동산에서의 인간의 상태는 예비적 시험 단계이었다. 만일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기간 동안 그 시험하신 첫명령(창 2:16, 17)에 순종하였다면, 그들은 더 큰 존귀와 영광에 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즉 그들은 다시는 범죄할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는 영원한 생명을 누렸을 것이다. 그러나 첫 사람 아담과 하와는 범죄함으로 본래의 상태에서 떨어졌다.

 

 

3. 죄의 본질

첫 사람 아담과 하와의 본래의 상태의 영광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던 것 같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내어 보냄을 받은 후 가인과 아벨을 낳았고, 가인이 아벨을 죽인 후 아담이 130세에 셋을 얻었기 때문에, 아담의 무죄 상태는 최대한 100년 내지 110년 가량을 넘지 못할 것이다(창 4:1-3, 25; 5:3).

 

 천사들의 타락

세상의 악은 궁극적으로는 천사들의 타락에서 기원하였다. 에덴 동산에 들어와 하와를 유혹한 뱀은 사탄이었다(계 12:7-9). 천사는 언제 타락하였는가? 성경은 천사들이 언제 타락하였는지에 대하여 분명하게 계시해 주지 않으나, 천사들의 타락이 인류 역사의 초기에 있었다는 암시가 신약에 있다. 요한일서 3:8는 증거하기를, “죄를 짓는 자마다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고 하였다. ‘처음부터’라는 말은 ‘인류 역사의 시초부터’라는 의미로 볼 수 있다. 마귀는 인류의 역사 초기에 범죄하였고 그 후 오래지 않아서 아담과 하와를 범죄케 하는 데 성공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천사들의 타락이 천지 창조의 6일이 끝나기 전의 어느 때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천사의 세계를 포함하여 천지 만물이 6일 동안에 창조되었다고 보며, 창조된 세계는 모두 선하였기 때문이다(창 2:1; 1:31).

천사는 어떻게 타락하였는가? 천사들의 타락은, 비록 하나님의 뜻 안에서 되어진 일이지만, 하나님께 직접적 원인이나 책임을 돌릴 수는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피조세계를 선하게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 자신이 악의 창조자가 되실 수 없기 때문이다. 천사들의 타락은 그 자신들 밖에서 원인을 찾을 수 없다. 성경은 사탄의 죄를 교만이라고 암시한다. 디모데전서 3:6,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 그렇다면, 천사 타락의 원인은 그들의 우두머리인 사탄이 고의적으로 하나님께 반역하고 다수의 천사들이 그를 따랐기 때문일 것이다. 유다서 6절에는,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어떤 이들은 이사야 14:12-15과 에스겔 28:12-16의 말씀을 사탄의 타락을 묘사한 것으로 이해하지만, 그 구절들은 바벨론 왕과 두로 왕에 대한 예언일 뿐이라고 본다.

타락한 천사들(영들)은 사탄과 그의 사자들로 분류된다. 사탄은 타락한 천사들의 두목이다. 그는 ‘사단’(욥 1:6, 대적자), ‘마귀’(계 12:10, 디아볼로스 διάβολος, 참소자), ‘바알세불’(마 12:24, 더러움의 주), ‘벨리알’(고후 6:15, 무가치한 자, 악한 자), 아바돈 혹은 아폴뤼온(계 9:11, 파괴자), ‘귀신[들] (demons)의 왕’(마 12:24), ‘이 세상 임금’(요 12:31), ‘이 세상 신’(고후 4:4), ‘공중의 권세 잡은 자’(엡 2:2), ‘악한 자’(요일 5:19), ‘큰 용, 옛 뱀’(계 12:9; 20:2) 등의 명칭들로 불린다.

그 외의 타락한 천사들은 ‘그[마귀의] 사자들’(마 25:41),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엡 6:12), 혹은 빈번히 ‘귀신들’로 불린다. ‘귀신’(다이모니온)이나 ‘악한 천사’나 ‘악한 영’은 다 동일한 존재를 가리킨다. 타락한 천사들의 일부는 이미 지옥에 던지워져 있는 것 같다. 베드로후서 2:4,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타타로스 τάρταρος)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그러나 나머지 천사들은 지금도 사탄의 지휘 아래 하나님을 대항하여 활동하고 있다. 에베소서 6:12,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政事)와 권세와 이 세상의 어두움의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요한계시록 12:7-9,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쫓기니라.”

타락한 천사들의 활동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고 혼란시키고 대항하는 것이다. 그들은 온 세상에 사상적 오류들, 정신적 문란 및 도덕적 불결을 일으킨다. 타락한 천사들은 본래의 거룩하고 선하고 진실한 성품을 잃어버렸고 더럽고 악하고 거짓된 영들이 되었다. 마태복음 10:1, “더러운 귀신(들)을 쫓아내며.” 열왕기상 22:22, “내가 나가서 거짓말 하는 영이 되어 그 모든 선지자의 입에 있겠나이다.” 디모데전서 4:1,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속이는] 영(들)과 귀신(들)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요한일서 4:1, 3,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하나님께로부터 왔는가] 시험하라. . . . 적그리스도의 영.” 에베소서 2: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또 타락한 천사들은 육체의 질병들과 환경적 재난들도 일으킨다. 욥기 1, 2장을 보면, 욥에게 임한 재난들, 즉 재산의 큰 손실과 자녀들의 죽음과 몸에 난 악창은 사탄이 준 것들이었다. 누가복음 9:42, “예수께서 더러운 귀신[영]을 꾸짖으시고 아이를 [간질병으로부터] 낫게 하사.” 누가복음 13:11, 16, “18년 동안을 귀신들려 앓으며[연약의 혹은 질병의 영을 가지고]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 . . 18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 바 된.” 고린도후서 12:7, “내 육체의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모든 타락한 천사들은 최종적으로 지옥 불못에 던지울 것이다. 마태복음 8:29, “[귀신들이 가로되]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마태복음 25:41,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성경은 타락한 천사들이 본래의 상태로 회복될 수 있을 것이라고 암시하지 않는다. 그들의 어두운 미래의 상태는 고정되어 있다고 보인다. 이 점에 있어서, 천사의 타락과 사람의 타락은 성격상 크게 다르다.

 

인류의 타락

인류의 타락은 마귀의 유혹에 넘어진 첫 사람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이루어졌다. 오늘날 불신앙적 신학자들은 아담의 첫 범죄를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고 생각하나, 그것은 매우 잘못이다. 창세기 3장은 역사적 문체(文體)로 기록된 역사적 내용을 담은 책의 한 부분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전체와 분리시켜 비(非)역사적 내용으로 간주하는 것은 분명히 부정당하다. 또 신약의 여러 구절들은 첫 사람의 범죄 사건을 언급한다. 로마서 5:12, 18, 19,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 . . 한 범죄로 . . .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고린도전서 15:21,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고린도후서 11:3, “뱀이 그 간계로 이와를 미혹케 한 것같이.” 디모데전서 2:14,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이러한 말씀들은 창세기 3장 사건이 역사적 사건임을 당연히 전제하고 있다. 만일 그것이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면, 위에 인용된 신약의 구절들은 의미를 잃어버릴 것이다. 또 성경은 인간의 죄와 마귀가 실제로 관련이 있음을 가르친다. 요한일서 3: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만일 창세기 3장의 사건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었다면, 죄와 마귀의 관련은 성경적 근거를 갖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증거대로, 죄와 마귀는 관련이 있다.

첫 사람 아담의 범죄의 내용은 무엇이었는가? 아담의 범죄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불순종이었다. 하와는 뱀[사탄]의 유혹에 빠져, 그리고 아담은 아내의 권함을 받아, 하나님의 명령(창 2:16, 17)을 어겼다. 창세기 3:6, 11, 17,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 . .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 . . .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그러나 첫 사람의 불순종의 행위는 교만과 불신앙에도 관계가 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는 마귀의 말은 인간의 교만을 부추키는 말이었다. 하와는 마귀처럼 교만의 죄에 빠져들어갔다. 또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고 뱀[마귀]의 말을 따랐고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고 아내의 말을 따른 것은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대한 불신앙과 불신임이었다. 교만과 불신앙은 불순종을 낳을 수밖에 없다. 이것은 영적 공식(公式)과 같다. 불순종은 교만과 불신앙에서 나오며, 순종은 겸손과 신앙에서 나온다.

아담과 하와의 첫 범죄의 결과는 무엇이었는가? 첫째로, 아담과 하와는 창조될 때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던 지혜와 지식과, 거룩과 의를 잃어버렸다. 그들의 본성은 죄악된 경향성 곧 부패성을 갖게 되었다. 둘째로, 그들은 그들에게 본래 없었던 죄 의식과 수치감을 갖게 되었다. 창세기 2:25,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창세기 3:7, “그들이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 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창세기 3:8,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셋째로, 그들은 영적으로 하나님과 분리되고 하나님을 떠나게 되었다. 그들과 하나님과의 복된 교제는 크게 손상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는 자가 되었다. 창세기 3:8,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또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에덴 동산에서 내어 보내실 수밖에 없으셨다. 창세기 3:23, 24,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 . .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넷째로, 그들은 세상에 사는 동안 많은 수고와 고통을 경험하리라는 선언을 들었다. 창세기 3:16, “내가 네게[하와에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창세기 3:17, 19, “너는[아담은]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 . .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다섯째로, 땅은 그들로 인하여 저주를 받았다. 창세기 3:17, 18,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 . .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여섯째로, 그들은 마침내 죽으리라는 선언을 받았다. 창세기 3:19,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서 왜 사탄의 시험을 허용하셨는가? 하나님께서 사탄의 시험을 허용치 않으셨더라면 인류의 불행도 없었을 것이 아닌가?’라고 질문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기계적으로가 아니고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선택하고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원하셨다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인격적 존재로 대우하셨다. 시험 자체는 악이 아니다. 더욱이, 사람은 이 시험에서 자발적으로 순종하였다면 더 영광된 상태로 나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또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서 왜 사람의 범죄를 허용하셨는가? 그는 주권으로 그 일을 막으실 수도 있지 않았는가?’라고 질문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주권으로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죄를 허용하셨다고 대답할 수 있다. 잠언 16:4,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로마서 9:22,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물론 우리는 하나님의 높으신 뜻을 다 헤아리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주권자이시며 그의 모든 일은 다 정당한 목적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함부로 하나님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 로마서 9:14, 20,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 . .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말대답]하느뇨?”

 

 죄에 대한 성경적 개념

역사상, 죄에 대한 잘못된 생각들이 많이 있었다. 예를 들어, 죄를 물질적 몸의 특질, 진화되지 못한 동물성, 존재의 부정 혹은 제한, 단순한 결핍, 실재(實在)하지 않는 착각, 정신의 불건전한, 병적 상태, 선에 대한 필요한 대립 원리, 사람의 이기심, 하나님 의식에 대한 인간 자아 의식의 투쟁,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 등으로 보는 것들이 그러하다. 그러나 죄에 대한 바른 개념은 오직 성경에서 찾아야 한다. 그것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로, 죄는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다. 첫 사람 아담의 범죄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불순종이었다. 요한일서 3:4,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죄’라는 히브리어(핫타트)는 ‘표적을 맞히지 못한 행동’이라는 뜻이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4문답, “죄는 하나님의 법을 순종함에 부족한 것이나 혹은 어기는 것이다.”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것(commission)이나 그 법을 지키지 못한 것(omission)이나 둘 다 실상은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것이다.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것이 죄이므로, 죄는 하나님 앞에서의 문제 혹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이다. 특히, 하나님의 법은 하나님의 인격과 속성과 권위을 반영하므로, 죄는 그 성격상 하나님의 인격과 속성을 모독하는 것이요 그의 권위를 침해하는 것이다. 여기에 죄의 사악성과 심각성이 있다. 창세기 39:9,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시편 51:4,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또한 죄는 항상 적극적 성격을 가진다. 소극적 죄, 불이행과 태만(ommission)의 죄도 결국 하나님의 법을 어긴 죄가 된다. 또한, 죄와 죄 아닌 것 간의 선이 분명하다. 그 둘 사이에 중립지대는 없다.

둘째로, 죄는 죄책(罪責)과 부패성으로 구성된다. 죄책이란, 하나님의 법을 어겼다는 법적 책임을 가리키는데, 좀더 분석하면, 그것은 첫째로 도덕적으로 비난 받아야 마땅하다는 사실과 둘째로 하나님의 공의에 따라 형벌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포함한다. 죄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죄책이다. 부패성이란, 죄인이 가지고 있는 죄악된 성질(죄성, 罪性), 죄를 향한 경향성 혹은 연약성을 가리킨다. 우리가 흔히 ‘나는 죄인이다’고 느끼는 것은 이 부패성 때문이다. 예레미야 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셋째로, 말과 행동 뿐만 아니라, 죄악된 마음의 상태와 습관도 죄로 간주된다. 특히 이 점에서 잘못된 견해들이 있다. 반(半)펠라기우스주의는, 죄가 항상 인간 의지의 의식적 행동이어야 하며 부모에게서 유전되는 죄악된 성질과 습관은 죄로 간주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인간의 죄악된 욕구(concupiscence)는 죄의 기회일 뿐이며 그 자체가 형벌 받을 죄는 아니라고 본 것이다. 알미니우스주의도, 죄가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인간의 자발적 행위라고 보며, 비(非)자발적 범죄는 인성의 자연적 결과로서 죄책을 돌릴 수 없으며 엄밀히 말해 죄가 아니라고 보았다. 이 견해들은 공통적으로 죄악된 마음의 상태와 습관을 죄로 간주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은 죄악된 마음의 상태와 습관도 죄라고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출애굽기 20:17,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 잠언 21:4, “눈이 높은 것과 마음이 교만한 것[은] . . . 다 죄니라.” 예레미야 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마태복음 5:22, 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 . .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마태복음 15:19, 20,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로마서 7:17, “내 속에 거하는 죄.” 요한일서 3: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사람은 이 죄에서, 즉 죄책과 부패성, 그리고 죄악된 마음의 상태와 습관으로부터 구원을 받아야 한다.

 

4. 죄의 구별

모든 사람들의 죄는 원죄(原罪)와 자범죄(自犯罪)로 구별된다.

 

원죄(原罪)

원죄란, 아담의 범죄로 인해 모든 사람이 갖고 태어나는 죄책과 부패성을 가리킨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6:3, “그들은 모든 인류의 뿌리이었으므로, 그들로부터 일반적 출생법으로 태어나는 모든 후손들에게 이 죄의 죄책이 전가(轉嫁)되었고, 죄로 인한 그 동일한 죽음과 부패성이 전달되었다.”

 

죄책의 전가(轉嫁)

우선, 아담의 첫 범죄의 죄책이 모든 인류에게 돌려졌다. 그러므로 아담의 후손인 인류는 죄책을 가진 죄인의 신분으로 출생한다. 아담의 죄책이 모든 인류에게 전가되었다는 사실은 로마서 5장이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고 많은 사람이 정죄되었고 많은 사람이 죄인되었음을 강조할 때 밝히 증거되었다. 15, 17절,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하리로다.” 16, 18절,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9절,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뿐만 아니라, 성경과 경험이 증거하는 죄의 보편성, 정죄(定罪)의 보편성, 그리고 죽음의 보편성은 그 사실을 확증한다.

죄는 보편적 현상이다. 열왕기상 8:46,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 욥기 14:4,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에서 낼 수 있으리이까? 하나도 없나이다.” 시편 51: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시편 58:3,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전도서 7:20,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않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 로마서 3:10, 23,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 . .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죄의 보편성은 인간의 이성과 경험으로도 인정된다. 플라톤, “눈 멀고 머리 많은 맹수와 같은 만가지의 악이 네 속에 있다.” 이방 종교들에서 볼 수 있는 고행(苦行)이나 금욕주의는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는 강력한 증거이다. 괴테, “나는 나 역시 범하지 않을 수 있는 허물을 보지 못한다.”

또한 모든 인류는 하나님의 심판과 정죄(定罪) 아래 있다. 로마서 3:19,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에베소서 2:3, “우리도 다른 이들과 같이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모든 사람에게 구원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모든 사람이 정죄 아래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 요한복음 3:5, 6,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또한 모든 인간이 죽는다. 로마서 5: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92) 심지어 자신의 의지로 죄를 지을 수 없어 보이는 유아들까지도 죽는다.

죄의 전가의 사실은 분명하지만, 죄의 전가의 방식에 대해서는 역사상 일치된 이해가 없었다. 첫째로, 어떤 이들은93) 모든 인간이 하나의 통일체로서 아담 안에 존재하였고 그가 범죄하였을 때 그 안에서 함께 실제적으로 혹은 실체적(實體的)으로 범죄하였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을 ‘실재론’(實在論)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인간의 공통적 실체’라는 개념은 성경적 근거와 합리적 타당성을 가지는 것 같지 않다. 또한 로마서 5장에서의 원죄와 칭의의 대조가 실재론의 생각에 부합하지 않아 보인다. 또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들의 관계가 실체적(實體的) 관계라기보다 언약적 관계라고 생각된다. 또 아담의 최초의 범죄 외의 다른 죄들에 대한 책임은 어떻게 되는가? 특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인간으로서 죄가 없으셨다는 사실은 실재론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워 보인다.

둘째로, 다른 이들은 모든 인간이 출생할 때 아담의 부패성을 전달받으며 그 부패성에서 실제적 죄가 나오므로 죄책이 전가된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을 ‘간접 전가론’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부패성의 전달은 죄책이 이미 전가된 결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즉 죄책의 전가가 없이 부패성의 전달이 허용될 수 없을 것이다. 또 로마서 5장은 모든 인간의 죄와 정죄와 죽음을 한 사람 아담의 죄에 기인한다고 말하지, 그 자손들의 실제적 죄에 기인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또 로마서 5장의 원죄와 칭의의 대조는 이 견해에 부합하지 않아 보인다. 즉 성도의 칭의는 그리스도의 의로운 성질을 전달받아서 의롭게 살므로 받는 의가 아니다.

셋째로, 대다수의 개혁신학자들94)은 아담이 모든 인간의 언약적 대표자로서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었으므로 아담의 죄책은 모든 인간에게 즉시 전가되었고 부패성은 그 자손들에게 유전되었다고 생각한다. 이것을 ‘직접전가론’ 혹은 ‘언약론적 견해’라고 부른다.

이 견해의 근거들은 로마서 5장에서 한 사람 아담의 죄와 많은 사람들의 죄와 정죄와 죽음이 직접 관련된다는 점과 아담의 죄의 전가와 그리스도의 의(義)의 전가가 직접 대조된다는 점에 있다. 또 성경에는 이러한 연대적(連帶的) 책임과 형벌의 예들이 있다. 출애굽기 20:5, 6,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3, 4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민수기 14:33, “너희 자녀들은 너희의 패역한 죄를 지고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40년을 광야에서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여호수아 22:20, “세라의 아들 아간이 바친 물건에 대하여 범죄하므로 이스라엘 온 회중에 진노가 임하지 아니하였었느냐?”

신명기 24:16에 아버지의 죄로 아들이 죽임을 당하지 않는다는 말씀이 있으나, 그것은 사회의 공적 재판 규례를 가리킨 것이며, 에스겔 18:4에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는 것도 죄 없이 죽는 법이 없다는 하나님의 공의를 변호하는 말씀이다. 이 말씀들은 성경 다른 곳에서 증거된 죄의 전가의 진리와 모순되지 않는다.

 

 부패성의 전달

아담의 첫 범죄의 죄책이 모든 인류에게 전가되었을 뿐 아니라, 또한 그 범죄로 인한 부패성이 그들에게 전달되었다. 아담의 첫 범죄로 인한 인간 본성의 부패성은 흔히 전적 부패성과 전적 무능력이라 불린다. 원죄로 인해, 사람은 지정의(知情意) 전체에 있어서 전적으로 부패되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잃어버리고 그 대신 육신적이고 세상적인 욕망들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사람은 때때로 사람의 표준에서 선하게 보이는 일들을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회개와 믿음이나, 구원에 이르게 할 선과 의를 행하기에 무능력해졌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6:2는 말하기를, “이 죄(원죄)로 말미암아 그들은 그들의 본래의 의와, 하나님과의 교제로부터 떨어졌고, 그래서 죄로 인하여 죽게 되었으며, 영혼과 몸의 모든 기능들과 부분들에 있어서 전적으로 더러워졌다”고 했다.

성경은 사람의 전적 부패성을 밝히 증거한다. 대표적 성경 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창세기 6: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이사야 64:6,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義)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예레미야 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아누쉬, '절망적이게 사악한'[KJV], ‘치료할 수 없는’[NIV]) 것은 마음이라.” 시편 58:3,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로마서 3:10-12,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고린도전서 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 분별됨이니라.” 에베소서 4:18, 19,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성경은 또한 사람의 전적 무능력도 증거한다. 구약의 역사 전체가 이 사실을 증거한다. ① 창세기는 노아 시대의 세상이 결국 홍수 심판으로 멸망했음을 증거한다. ② 민수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40년 동안 계속 하나님을 불신앙했고 하나님께 불평하고 불순종했음을 증거한다. ③ 사사기는 그 시대에 이스라엘의 반복된 실패의 역사를 증거한다. ④ 왕국의 역사서들은 이스라엘의 왕국이 결국 멸망했음을 증거한다. ⑤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는 바벨론 포로 생활로부터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이 또 다시 범죄했음을 증거한다. ⑥ 말라기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구약의 맨 마지막 때까지 여전히 하나님께 범죄하고 불순종했음을 증거한다.

특히, 다음의 여러 성경 구절들은 사람의 전적 무능력을 직접 언급하고 있다. 예레미야 13:23,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斑點)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진대[만일 할 수 있다면]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비교] 신명기 30:11, 14,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 . . 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와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말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뜻이며,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다’는 말은 ‘네가 이를 행하도록 [네 마음에 있다]’는 뜻이다.

요한복음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로마서 5: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로마서 7: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로마서 8:7, 8,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에베소서 2: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로 모든 선에 대하여 전혀 싫증나며 무능력하며 반대하게 하고 모든 악으로 전적으로 기울어지게 하는 이 본래의 부패성에서 모든 실제적 범죄들이 나온다(6:4).

사람은, 죄의 상태로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수반하는 어떤 영적 선에 대한 의지의 모든 능력을 전적으로 잃어버렸으므로; 본성적 사람으로서는, 그 선을 완전히 싫어하며 죄로 죽었기 때문에, 그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회개시키거나 그것을 위해 자신을 준비시킬 수 없다(9:3).

본성의 이 부패성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중생한 자들 안에 남아 있고; 비록 그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용서되고 극복된다 할지라도, 그것 자체와 그것의 모든 활동들은 참으로 그리고 정확히 죄다(6:5).

펠라기우스주의

초대 교회의 펠라기우스는 원죄를 부정하였다. 그의 사상은 다음과 같다.

① 아담은 본래 도덕적 중립 상태로 창조되었다.

② 아담의 타락 후에도, 모든 사람은 선을 행할 수 있는 본성적 능력, 즉 자유 의지를 부여받았다. “만일 내가 해야 한다면, 나는 할 수 있다(If I ought, I can).”

③ 죄는 사람의 의지의 개별적 행동이며, ‘죄악된’ 성질이나 습관이라는 것은 없고, 사람은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에만 책임을 진다.

④ 원죄(原罪)나 부패성의 유전(遺傳) 같은 것은 없다.

⑤ 어린아이는 죄 없이 출생하므로 유아세례는 죄씻음과는 상관이 없고 단지 유아를 하나님께 드리는 표일 뿐이다.

⑥ 죄의 보편성은 죄악된 본(本)에 의한 것이다.

⑦ 육체적 죽음은 죄의 형벌이 아니고 자연적 현상이다.

⑧ 사람은 누구나 죄 없는 생활을 할 수 있고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는 필요하지 않다.

한마디로, 펠라기우스의 사상은 “인간의 본성은 건전하다”는 것이다. 이 사상은 종교개혁 시대에 소시너스에 의해, 그리고 오늘날에는 자유주의 신학에 의해 주장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은 명백히 비성경적이요 이단적이다.

 

 자범죄(自犯罪)

자범죄(自犯罪)란, 원죄의 부패성을 가진 모든 사람이 실생활 속에서 짓는 죄를 가리킨다. 원죄와 자범죄는 몇 가지 측면에서 서로 구별된다. 첫째로, 그 둘은 인과(因果) 관계가 있다. 원죄는 원인이요 자범죄는 그 결과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6:4는 “우리로 모든 선에 대하여 전혀 싫증나며 무능력하며 반대하게 하고 모든 악으로 전적으로 기울어지게 하는 이 본래의 부패성에서 모든 실제적 범죄들이 나온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원죄는 하나이지만, 자범죄는 여러 개이다. 둘째로, 원죄와 자범죄는 인식의 측면에서도 서로 다르다. 원죄는 모든 사람에게 다 인식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불신앙자들은 빈번히 그것의 존재를 부정하지만, 자범죄의 존재는 일반적으로 인정된다. 물론 오늘날 진화론의 영향으로 사람들은 죄 의식을 많이 잃어버렸다. 진화론자들은 사람의 죄를 동물성의 잔재(殘在) 정도로 간주하기 때문에 그것을 하나님께 대한 악으로 보기보다는 단순히 다른 사람들에 대한 악 정도로 생각한다. 셋째로, 원죄와 자범죄는 죄책의 측면에서도 서로 다르다. 원죄는 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본성의 죄이며 죄책을 포함하지만, 자범죄는 자신의 의지적 악행이기 때문에 더 큰 죄책을 가진다.

자범죄들은 다 똑같은 무게를 가지는 것이 아니고, 그 종류에 따라 죄책의 경중(輕重)이 있다. 모든 죄가 다 죽음의 형벌을 받을 만하지만, 모든 죄가 다 똑같이 극악한 것은 아니다.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제150문답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법에 대한 모든 범죄들이 똑같이 극악한 것은 아니고, 어떤 죄들은 그 자체에 있어서 그리고 몇 가지 더 가중된 이유로 하나님 앞에서 다른 죄들보다 더 극악하다”고 하였다. 성경은 죄와 심판에 정도의 차이가 있음을 증거한다. 예수께서는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고 말씀하셨고(눅 12:47, 48) 또 자신을 빌라도에게 넘겨준 자의 죄가 더 크다고 표현하셨다(요 19:11).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행한 대로 보응하실 것이라고 증거한 사도 바울의 증거도 죄와 심판의 차등(差等)을 전제한다(롬 2:6).

자범죄들은 죄책의 정도에 따라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알지 못하거나 연약하여서 짓는 죄이다. 레위기 4:2, “누구든지 여호와의 금령 중 하나라도 그릇 범하였으되.” 레위기 4:22, “만일 족장이 그 하나님 여호와의 금령 중 하나라도 부지(不知) 중에 범하여 허물이 있었다가.” 레위기에서 여러 번 ‘그릇’ 혹은 ‘부지 중에’ 등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비쉐가가 )는 ‘실수로, 부주의하여, 무심코, 부지 중에’ 등의 뜻이다. 누가복음 12:47, 48, “주인의 뜻을 . . .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둘째는 고의적으로 짓는 죄이다. 민수기 15:29, 30, “이스라엘 자손 중 본토 소생이든지 그들 중에 우거하는 타국인이든지 무릇 그릇 범죄한 자에게 대한 법이 동일하거니와, 본토 소생이든지 타국인이든지 무릇 짐짓 무엇을 행하면 여호와를 훼방하는 자니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질 것이라.” ‘짐짓’이라는 히브리어(베야드 라마)는 문자적으로 ‘높은 손을 들고’라는 말로서 ‘뻔뻔스럽게, 도전적이게, 반항적이게’라는 뜻이다. 시편 19:13, “주의 종으로 고범죄(故犯罪)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치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여기에 ‘고범죄’라는 말도 ‘뻔뻔스런 죄,’ ‘고의적인 죄’를 가리킨다.

신약은 또한 사망에 이르는 죄에 대해 말한다. 이것들은 고의적 범죄의 극단적 형태라고 생각된다. 모든 고의적 죄가 다 결코 용서받지 못할 죄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아래의 네 구절들에 언급된 죄는 특별한 죄로 보인다. 마태복음 12:31, 32,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히브리서 6:4-6,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히브리서 10:26, 27,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헤쿠시오스, 고의적으로)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요한일서 5:16, 17, “. . .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

위의 네 구절들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① 어떤 이들은 성령 훼방의 죄가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계실 동안에만 사람들이 범할 수 있었던 죄로서 사람들이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기적 행하심을 사탄의 일로 돌린 죄만을 가리킨다고 보았다(제롬과 크리소스톰). 그러나 성경 다른 곳에 나오는 죄, 예를 들어 요한일서 5:16의 죄는 무엇을 가리키는가?

② 어떤 이들은 위의 죄들을 ‘끝까지 회개치 않는 죄’라고 보았다(어거스틴과 찰머). 그러나 위의 네 구절에 나타난 죄들은 일반적 성격의 죄가 아니고 특수한 성격의 죄를 가리킨 것 같다.

③ 다른 이들은 이것을 거듭난 사람들이 범하는 죄라고 보았다(후기의 루터파 신학자들). 그러나 거듭난 사람들도 죄를 범하지만 그들의 범죄를 성령에 대항하는 죄 또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죄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④ 우리는, 칼빈이나 투레틴과 더불어, 위의 네 구절의 죄가 다 동일한 죄로서 성령의 사역을 고의적으로 멸시하고 훼방하는 죄, 혹은 하나님의 복음의 핵심적 내용을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그것을 부정하며 대항하고 참된 신앙으로부터 완전히 돌아서는 배교(背敎)의 죄를 가리킨다고 본다. 이단자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우리는 이러한 죄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5. 하나님의 법

 율법은 도덕법과 의식법(儀式法)과 재판법으로 구성되어 있다.95)

 

 도덕법(moral laws)

도덕법은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관계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지켜야 할 도덕적 규범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도덕적 속성에서 나온 것으로서 사람들을 위한 하나님의 뜻이다. 도덕법은 인간의 양심에 기록되어 있으며 모세의 율법으로 성문화(成文化)되었다. 그것은 십계명에 요약되어 있는데 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5장에 기록되어 있다. 사람은 도덕법을 통해 죄를 깨닫는다.

십계명의 구분에 대하여, 역사상 몇 가지 의견들이 있었다. 유대인들은 출애굽기 20:2을 제1계명으로, 우리의 제1, 2계명을 제2계명으로 보았다. 천주교회와 루터교회는 우리의 제1, 2계명을 제1계명으로, 그리고 우리의 제10계명을 둘로 나누어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는 것을 제9계명으로, ‘네 이웃의 아내 등을 탐내지 말라’는 것을 제10계명으로 본다. 그러나 개혁교회는 현재 우리의 구분대로 구분한다.

 

십계명에 대한 간략한 해석

십계명의 해석 원리는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99문답에 잘 진술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은 요점들을 포함한다. ① 하나님께 대한 의무가 사람에 대한 의무보다 우선된다. 즉 1-4계명은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5-10계명은 사람에 대한 의무를 보인다. ② 같은 종류의 죄들을 대표적으로 간결히 표현하였다. 십계명은 도덕법 전반의 요약이다. ③ ‘하라’는 명령과 ‘하지 말라’는 금지를 다 고려해야 한다. 즉 무엇을 하라는 명령은 무엇을 하지 말라는 금지의 내용을 포함하고, 무엇을 하지 말라는 명령은 무엇을 하라는 명령을 포함한다. ④ 행위 뿐만 아니라, 또한 생각과 마음에도 적용된다. 율법은 영적이다(롬 7:14).

1계명: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제1계명은 여호와 하나님의 유일하심을 증거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무신론은 물론,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 외에 다른 신과 우상을 인정하는 모든 생각을 정죄한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마리아와 성인들과 천사들에게 기도하고 종교적 경의를 표하게 하는 천주교의 가르침을 정죄한다.

2계명: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 . .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제2계명은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하나님을 물질적 존재로 형상화하는 것은 큰 오류요 죄악이다. 예수님이나 마리아의 상이나 그림을 만드는 것도 비록 그것이 제2계명을 어기는 죄는 아닐지라도 삼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또한 예배당 안 강단 뒷벽에 십자가를 세우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그런 것은 연약한 성도들에게 우상이 될 수 있다.

3계명: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제3계명은 우리가 일상 생활이나 종교 의식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불러서는 안 된다고 명한다. ‘망녕되이’라는 말은 ‘헛되이, 함부로, 무의미하게’라는 뜻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찬송할 때와 기도할 때는 더욱 그러하다. 특별히,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이나 성경구절을 농담거리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그런 것들은 하나님께 대한 큰 죄이다.

4계명: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 . .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7일에 쉬었음이라.”

제4계명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날에 대해 명령한다. 구약시대에는 한 주간 가운데 제7일을 안식일로 성별하여 지키라고 명령되었다. 그 날을 거룩하게 구별하기 위하여 미리 구울 것은 굽고 삶을 것은 삶아야 했다(출 16:23). 안식일을 더럽히는 자나 그 날에 일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해야 했다(출 31:14, 15).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에서 지낼 때 안식일에 나무가지를 줍던 한 사람은 실제로 죽임을 당했다(민 15:32-36).

‘오늘날 안식일 계명이 문자 그대로 유효한가?’라는 문제는 십계명의 안식일 계명이 도덕법인가 의식법인가 하는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 루터나 칼빈은 안식일 계명을 도덕적 교훈을 가진 의식법으로 보았다. 칼빈은 안식일 계명의 의식적(儀式的) 부분은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폐지되었으나, 교회의 공식적 집회와 휴식을 위한 필요성은 오늘날도 유효하며 따라서 신약교회는 열심히 주일을 공식적 집회의 날로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기독교강요, 2. 8. 28, 31-34).

1618-19년 화란에서 열린 개혁교회의 도르트 대회는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하나님의 율법의 제4계명에는 의식적 요소와 도덕적 요소가 있다. 의식적 요소는 창조 이후 제7일의 휴식과, 특별히 유대인들에게 부과된 그 날의 엄격한 준수이었다. 도덕적 요소는 어떤 특정한 날이 종교를 위해 적합하다는 사실과, 그 목적을 위해 종교와 그것의 거룩한 묵상을 위해 필요한 만큼의 휴식이 요구된다는 사실에 있다. 유대인들의 안식일이 폐지되었으므로, 주일은 마땅히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엄숙하게 성별되어야 한다. 사도들의 시대 이후, 그 날은 이미 원시 카톨릭 교회에 의해 지켜져 왔다.96)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1:7은 안식일에 관하여 “. . . 그것은 세상의 시초부터 그리스도의 부활 때까지는 주간의 마지막 날이었고; 그리스도의 부활 때부터는 주간의 첫째 날로 바뀌었으며, 성경에서 주의 날로 불리우고, 그리스도인의 안식일로서 세상 끝날까지 계속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스도인들이 주일을 공식적 집회의 날로 구별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 참된 안식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기념하는 데서 비롯되었다. 사도 시대에 이미 안식 후 첫날인 주일이 구별되기 시작하였고 집회의 날이 되었다. 주께서는 주일에 부활하셨고 그 다음 주일에 또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요 20:19, 27). 성령께서는 주일에 처음으로 제자들 가운데 내려오셨다(행 2:1-4). 사도 요한이 성령의 감동 중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은 날은 주일이었다(계 1:10). 드로아의 성도들은 주일에 모여 떡을 떼며 바울의 설교를 들었다(행 20:7).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게 매 주일 정기적으로 헌금하라고 교훈하였다(고전 16:1, 2).

사도시대 직후의 교부들도 주일 집회에 대해 증거했다. 바나바 서신의 저자는 “그러므로 또한 우리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제8일을 기뻐하기 때문에 그 날을 지킨다”고 썼다(15). 익나시우스는 “만일 옛 습관들로 살았던 자들이 새로운 소망에 이르러, 더 이상 안식일들을 지키지 않고 주의 날[주일]을 따라 그들의 삶을 산다면 . . . 만일 그러하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를 떠나 살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마그네시아 사람들에게 보낸 서신, 9). 순교자 저스틴도 “그 도시에 사는 자들뿐 아니라 그 나라에 사는 자들도 다 일요일이라고 불리는 날에 성경 읽기와 기도와 권면과 성찬을 위해 모이곤 하였다. 그 회중은 일요일에 모였는데, 그것은 이 날이 하나님께서 어두움을 변화시켜 세상을 창조하신 첫째날이기 때문이며 우리 주 예수께서 이 날에 부활하셨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트리포와의 대화).

그러므로 우리는 구약의 모범과 장로교회의 예배 모범대로 주일에 온 가족이 세속적 직업의 일들을 중단하고 매매(賣買)를 금하며 오락을 금해야 할 것이다(느 13:15-22; 사 58:13, 14). 신약 성도들은 복음적 자유를 가지고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되 구약 성도보다 못하게가 아니고 더 풍성한 방식으로 지켜야 할 것이다.

5계명: “네 부모를 공경하라.”

제5계명은 자녀들이 부모에게 대해 가져야 할 태도를 가르친다. 이것은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물론, 또한 노인과 청년, 스승과 제자, 고용주와 피고용인, 정부와 국민의 관계 등 연령적, 지위적 상하 관계에도 적용된다. 레위기 19:32, “너는 센 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베드로전서 2:13, 14,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장[칭찬]하기 위하여 그의 보낸 방백에게 하라.”

6계명: “살인하지 말지니라.”

제6계명은 사람의 생명의 중요성을 가르친다. 이것은 결투, 폭동, 자살, 낙태, 안락사 등의 모든 살인 행위를 금한다. 출애굽기 21:22- 25,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아이 밴 여인을 다쳐 낙태케 하였으나 다른 해가 없으면 그 남편의 청구대로 반드시 벌금을 내되 재판장의 판결을 좇아 낼 것이니라.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데운 것은 데움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 또 성경은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곧 살인이라고 말한다(요일 3:15).

그러나 사형, 정당 방위, 정당한 전쟁, 동물의 살해 등은 성경적으로 허용된다. 출애굽기 22:2, “도적이 뚫고 들어옴을 보고 그를 쳐 죽이면 피 흘린 죄가 없으나 해 돋은 후이면 피 흘린 죄가 있으리라.”

7계명: “간음하지 말지니라.”

제7계명은 사람의 순결성 곧 정조의 중요성을 가르친다. 부부 관계를 벗어난 모든 성 행위는 간음이다. 또 행위로 간음하는 것뿐 아니라, 마음에 음욕을 품는 것도 간음으로 정죄된다(마 5:28). 또한 간음의 이유 외의 이혼와 중혼(마 5:32), 근친 상간, 동성애 등의 모든 부당한 성적 탈선 행위를 정죄한다.

8계명: “도적질하지 말지니라.”

제8계명은 사유 재산의 권리를 가르친다. 이것은 절도, 강도 뿐만 아니라, 또한 사기, 횡령, 과분한 빚, 땅이나 집 등의 계약 위반, 거짓된 저울과 되, 투기, 고리 대금 등의 부정당한 경제 활동을 금한다. 레위기 19:35, 36, “너희는 재판에든지 도량형에든지 불의를 행치 말고 공평한 저울과 공평한 추와 공평한 에바와 공평한 힌을 사용하라.” 시편 15:5, “변리로 대금치[고리대금하지] 아니하며.”

9계명: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제9계명은 다른 사람의 명예의 중요성을 가르친다. 이것은 다른 이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거짓된 비난, 중상 모략, 위증, 불공정한 판결, 아첨, 과장 등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거짓말을 금한다. 출애굽기 23:1-3, “너는 허망한 풍설을 전파하지 말며 악인과 연합하여 무함[모함]하는 증인이 되지 말며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며 송사에 다수를 따라 부정당한 증거를 하지 말며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편벽되이 두호하지 말지니라.”

10계명: “네 이웃의 집이나 아내나 기타 소유물을 탐내지 말지니라.”

제10계명은 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 증거 등의 죄의 근원을 지적하고 있다. 탐심 즉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남의 것을 더 가지려는 욕심은 그 여러 죄들의 뿌리이다. 야고보 1:15는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는다’고 말씀했다. 모든 불평과 불만, 색욕이나 부정한 욕망, 그리고 물질로 인한 지나친 근심 등도 탐심의 결과이다. 성경은 탐심을 우상숭배의 죄라고 말한다(골 3:5). 탐심은 하나님 대신에 결국 물질이나 육신의 쾌락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것이다. 성도는 탐심을 버리고 하나님이 주신 환경 처지에서 만족하며 살아야 한다.

 

 도덕법의 목적

도덕법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도덕법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려준다. 로마서 7:12, 14, “율법은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 . .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둘째, 도덕법은 우리 자신의 죄악됨을 깨닫게 해준다. 로마서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로마서 4:15,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로마서 5:20,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로마서 7:7,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도덕법은 마치 거울과 같다. 셋째, 도덕법은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한다. 갈라디아서 3: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파이다고고스 paidagwgov", 교사)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도덕법의 영속성

도덕법은 영속성을 가진다. 그것은 오늘날도 폐지되지 않았다. 성화의 목표는 의(義)와 거룩, 즉 죄 없는 성결의 상태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이며, 구원은 그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다. 그러므로 도덕법은 구원받은 자에게도 유익하다. 로마서 7:12, 14, “율법은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 . .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줄 알거니와.” 디모데전서 1:8, “그러나 사람이 율법을 법 있게 쓰면 율법은 선한 것인 줄 우리는 아노라.” 마태복음 5:17, 19,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 . .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9:5, 6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도덕법은 모든 사람들, 즉 다른 이들 뿐만 아니라, 또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들도, 영원히 그것을 순종할 의무 아래 두는데; 그것은 단지 그것에 담긴 내용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또한 그것을 주신 창조주 하나님의 권위를 생각해서도 그러하다. 그리스도께서도 복음 안에서 어떤 방식으로도 이 의무를 해제하지 않으시고, 크게 강화하신다.

비록 참신자들이 행위언약으로서의 법 아래 있어서, 그것에 의해 의롭다 하심을 얻거나 정죄되는 것이 아니지만; 그것은 다른 이들에게 뿐만 아니라 또한 그들에게도 유익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생활의 규칙으로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뜻과 그들의 의무를 알려 줌으로, 그들이 그에 따라 행하도록 지도하며 속박하고; 또한 그들의 본성과 마음과 삶의 죄악된 부패성들을 드러냄으로, 그들이 그로 인해 자신들을 살펴 죄를 더 깨달으며, 죄 때문에 겸손해지며, 죄를 미워하게 하고; 그것들과 함께, 그들이 그리스도와 그의 순종의 완전함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더 분명하게 보게 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그것은 중생한 자들이 그들의 부패성들을 제어하는 데도 유익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죄를 금하기 때문이며; 또 그것의 경고들은, 비록 그들이 법 안에 경고된 저주로부터 자유함을 얻었을지라도, 심지어 그들의 죄들도 마땅히 무엇을 받아야 하며, 그들이 이 세상에서 그것들 때문에 어떤 고난들을 기대할 수 있는지를 보여 주기 때문이다. 같은 방식으로, 그것의 약속들은 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인정과, 그것을 행한 경우에, 비록 행위언약으로서의 법에 의해 그들에게 당연한 것으로서는 아니지만, 어떤 복들을 그들이 기대할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따라서, 법이 선을 장려하고 악을 제지하기 때문에, 사람이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는 것은 그가 법 아래 있고 은혜 아래 있지 않다는 증거는 아니다.

 

의식법(儀式法, ceremonial laws)

둘째로, 의식법은 할례, 성막제도, 제사들, 절기들, 정(淨) 부정(不淨)의 음식, 십일조 등에 대한 법들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9:3은 의식법에 대해 다음과 말했다:

보통 도덕법이라고 불리는 이 법 외에, 하나님께서는 미성년의 교회로서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몇 가지 모형적 규례들을 담고 있는 의식법들을 주시기를 기뻐하셨는데; 그것들은 부분적으로 그리스도와 그의 은혜들, 행위들, 고난들, 은택들을 예시(豫示)하는 예배에 관한 것들과; 부분적으로 도덕적 의무들에 대한 여러 가지 교훈들을 제시하는 것들이다. 이 모든 의식법들은 이제 신약 아래서 폐지되었다.

의식법들의 한 부분은 예배에 관한 것들인데, 그것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들을 예표한다. 예를 들어, 성막제도에서 번제단은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물두멍은 그의 성결함을, 떡상은 그가 생명의 떡 되심을, 촛대는 그가 세상의 빛 되심을, 향단은 그의 중보 기도를, 속죄소는 그의 십자가 대속 사역을 예표한다. 제사들에서 번제는 그의 완전한 순종과 속죄사역을, 소제는 그가 자신을 즐거이 드리심을, 화목제는 그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케 하심을, 속죄제와 속건제는 그의 속죄사역을 예표한다.

절기들에서 안식일은 그가 우리에게 참안식을 주셨음을, 유월절은 그가 친히 우리에게 유월절 어린양 되심을, 보리 초실절은 그의 부활을, 맥추절은 그의 속죄사역에 근거하여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가운데 구원의 열매들이 맺힘을, 나팔절은 그의 십자가 대속의 복음을 전파함을, 속죄일은 그의 십자가 단번 속죄의 사역을, 수장절은 그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자들이 천국에 들어감을, 안식년은 그의 대속 사역으로 인한 참안식을, 희년은 그의 대속 사역으로 인한 만물의 회복을 예표한다. 도덕법은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며, 의식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으로 말미암은 죄 씻음의 길을 보여주는 것이다.

의식법은 또한 도덕적 교훈도 준다. 예를 들어, 할례는 언약에 당연히 내포된 성결과 순종을 교훈한다. 제사들은 일차적으로 속죄를 예표하지만 또한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순종과 헌신과 감사와 교제의 삶도 교훈한다. 절기들은 모든 시간이 하나님의 것임을 교훈하며, 또 십일조는 모든 물질이 하나님의 것임을 교훈한다. 정 부정의 음식에 관한 법은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삶을 교훈한다.

의식법들이 보이는 도덕적 교훈들은 신약 아래서도 여전히 중요하고 강조되어야 한다. 우리는 눈과 귀와 마음의 할례를 받아 거룩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는 순종과 헌신과 감사와 교제의 제사를 하나님께 항상 드려야 한다. 우리는 날마다, 순간마다 하나님을 기억하며 섬겨야 한다. 우리는 물질적 소득의 십분의 일뿐 아니라 그 이상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어야 한다. 소득의 십일조는 구약성경이 보여주는 헌금에 대한 최소한의 규정이다. 구약보다 더 풍성한 은혜를 받은 신약 성도는 소득의 십일조 이상을 하나님께 드리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또 우리는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나 구약의 의식법 자체는 신약 아래서 폐지되었고 그것은 더 이상 신약의 성도들을 속박하지 않는다. 신약 성도들은 더 이상 구약의 의식법들의 의무 아래 있지 않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9:3, “이 모든 의식법들은 이제 신약 아래서 폐지되었다.” 특히 신약 히브리서는 의식법의 폐지, 더 정확히 말해, 율법제도의 폐지에 대해 분명히 가르쳤다.

히브리서 7:18, 19, “전엣 계명이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폐하고 (율법은 아무것도 온전케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 히브리서 8:13,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 히브리서 10:1,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골로새서  2:16, 17,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안식일들]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판단]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로마서 14:5, 6,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날을 중히 여기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지 아니하고--전통사본]97)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그러므로, 예를 들어, 어떤 이가 오늘날 유월절을 지키는 것이 성경에 명령된 바라고 주장한다면, 그 주장은 잘못이다. 성경에는 유월절만 지키라고 명령하지 않고 10가지의 절기들에 대해 다 명령하였으며 그뿐 아니라 할례와 제사에 대해서도 명령하였다. 우리가 의식법을 지키지 않는 것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 아니고 순종하는 것이다. 구약의 의식법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약의 절기들을 지키는 것이 성경적인 것이 아니고 지키지 않는 것이 성경적이다.

그러면 신약교회에서 부활절이나 맥추절, 추수감사절, 성탄절 등을 지키는 것은 잘못이며 무의미한 일인가? 우리는 그렇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그것들을 지킨다면, 그것은 그것들이 성경에 명령되었기 때문이 아니고 단지 그것들이 가지는 신앙적 의미와 유익 때문이다. 부활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감사의 뜻이 있고, 맥추절은 겨울이 지난 후 처음 한 추수에 대한 감사의 뜻이 있고, 추수감사절은 가을에 하는 모든 추수에 대한 감사의 뜻이 있다. 성탄절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에 대한 감사의 뜻이 있다. 그런 절기들은 교회들이 스스로 정하여 지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절기들을 지키거나 안 지키는 것 때문에 서로를 판단하거나 정죄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재판법(judicial laws)

셋째로, 재판법은 신정(神政) 국가로서의 이스라엘에서의 민법, 상법, 형법 등 사회 생활에 관한 법들이다. 출애굽기 21:1의 ‘율례’라는 원어(미슈파팀)는 ‘판단들’이라는 뜻으로 재판법을 의미한다. 재판법의 한 예는 출애굽기 22:1, “사람이 소나 양을 도적질하여 잡거나[죽이거나] 팔면 그는 소 하나에 소 다섯으로 갚고 양 하나에 양 넷으로 갚을지니라.” 구약의 어떤 법이 도덕법에 속하는지, 재판법에 속하는지 판단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지만, 구약의 어떤 법이 신약에서 인정되거나 혹은 그 이유가 영구적이면 신약에서도 유효한 도덕법이라고 보고 그 외에는 재판법으로 볼 수 있다(박형룡, 인간론, 312쪽).

구약의 재판법들은 신약 아래서 역시 폐지되었다. 신정 국가에서 사용되었던 법들은 오늘날 세속 사회들에 그대로 적용되기 어렵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9:4, “또한 한 정치적 집단으로서의 그들에게, 그는 여러 가지 재판법들을 주셨는데, 그것들은 그 백성의 국가와 함께 끝났고, 지금은 다른 아무에게도, 그것들의 일반적 정당성이 요구할 수 있는 것 외에는, 의무를 지우지 않는다.”

이와 같이, 모세의 율법은 도덕법, 의식법, 재판법 등 세 가지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세 가지 중, 도덕법은 사람의 죄를 확정한다. 자범죄는 도덕법을 어긴 죄들이다. 사람은 도덕법을 통해 죄를 깨닫는다. 그것들은 곧 하나님을 바로 섬기지 못한 죄, 하나님을 첫째로, 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 죄, 부모를 공경하고 섬기지 않은 죄, 이웃을 미워한 죄, 사람을 죽이는 죄, 결혼 관계 이외의 모든 성적 범죄들, 남의 물건을 부당하게 취하는 죄, 거짓말 하는 죄, 남의 것들에 대해 탐심을 품는 죄 등이다.

성경에서 도덕적 죄들을 열거한 대표적 두 구절을 들어보자. 로마서 1:29-31, “곧 모든 불의, 음란(전통사본),98)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는 자요(전통사본)99) 무자비한 자라.” 갈라디아서 5:19-21,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간음과(전통사본)100)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살인과(전통사본)101)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모든 사람은 이러한 죄악들로부터 구원을 받아야 한다.

 

  6. 죄의 형벌

형벌의 목적

하나님께서는 왜 죄인들에게 벌을 내리시는가? 죄의 형벌의 목적은 무엇인가?

 

죄인들의 개선을 위함인가?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벌하시는 목적이 그들의 개선(改善)을 위함이라고 말한다. 이런 생각에서 사형 반대론이 나온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엄격한 형벌과 징계를 혼동하는 잘못된 생각이다. 징계 혹은 권징은 죄에 대한 벌이기는 하나 그 정도가 약하며 대략적이다. 그것은 징계받는 죄인들의 개선을 위할 것이다. 징계는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삶을 위해 유익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엄격한 형벌은 다르다. 그것은 죄인들의 개선을 위한 것이 아니다. 노아 시대의 홍수 심판이나 소돔 고모라 성의 유황불 심판 같은 역사적 사건들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이 죄인들의 개선을 위함일 수 없다는 것을 증거한다. 또 하나님의 최종적 지옥 심판이 죄인들의 개선을 위한 것일 수 없다는 것도 자명하다. 물론 노아 시대의 홍수 심판이나 소돔 고모라 성의 유황불 심판 사건들이 후대의 사람들에게 도덕적 교훈이 되며 그들의 회개에 도움이 될 것이지만, 심판 당한 당사자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그러므로 죄의 형벌이 죄인들의 개선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은 바른 생각이 아니다.

 

 범죄의 예방을 위함인가?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벌하시는 목적이 사람들의 범죄를 예방하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도 죄에 대한 하나님의 엄격한 형벌과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를 혼동하는 잘못된 생각이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는 징계 당하는 본인들에게 앞으로의 범죄 예방을 위해 유익이 있을 것이나,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은 당사자들에게 최종적이다. 심판 받아 죽었는데 무슨 범죄 예방의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물론, 죄의 형벌이나 징계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범죄 예방의 효과와 유익을 줄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완전한 대답이 될 수 없다.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 내리시는 하나님의 형벌은 더 이상 범죄 예방과 관계가 없다. 그러므로 죄의 형벌이 범죄 예방을 위함이라는 생각도 바른 생각이 아니다.

 

 하나님의 공의의 만족을 위함

성경에 밝히 계시된 대로,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은 하나님의 공의의 만족을 위함이다.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공의로우시므로 죄는 엄격한 공의의 처벌을 필요로 한다. 하나님께서 구약 율법에서 보이신 의는 엄격한 보응의 의이었다. 출애굽기 21:23-25,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데운 것은 데움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 신명기 19:21, “네 눈이 [그 거짓 증인을] 긍휼히 보지 말라.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니라.”

하나님의 공의는 적당한 형벌로 결코 만족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사야 선지자는 이사야 9장에서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노가 쉬지 아니하며 그 손이 여전히 펴지리라”는 말을 세 번이나 반복했다(12, 17, 21절). 또 예레미야는 대언하기를, “보라 나 여호와의 노가 발하여 폭풍과 회리바람처럼 악인의 머리를 칠 것이라. 나 여호와의 노는 내 마음의 뜻하는 바를 행하여 이루기까지는 쉬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말일에 그것을 완전히 깨달으리라”라고 했다(렘 23:19, 20; 30:23, 24). 또 성경은 하나님의 심판을 ‘각 사람의 행한 대로 보응하시는 것’으로 표현하였다. 시편 62:12,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시나이다.” 전도서 12:14,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로마서 2:5, 6, “하나님의 의로운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 . .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리라.” 이러한 말씀들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이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는 행위임을 나타낸다.

 

 형벌의 내용--죽음

그러면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의 내용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역사상 인간의 죄에 대한 여러 가지 형벌을 내리셨으나 그것들은 죄에 대한 엄격한 형벌이 아니었다. 성경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엄격한 형벌을 죽음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에서 첫 사람 아담에게 처음 명령을 주실 때에 하신 경고의 말씀 속에 들어 있었다. 창세기 2:16, 17,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범죄하면 ‘정녕 죽으리라’고 경고하셨었다. 그런데 아담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범죄하였으며 그 결과 죽음이라는 하나님의 형벌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왔다고 말한다. 로마서 5: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고린도전서 15:21, 22,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이와 같이, 죄에 대한 형벌은 한마디로 죽음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죄의 삯은 사망이요”라고 말한 것이다(롬 6:23). 그런데 이 죽음은 단순히 육체적 죽음을 의미하지 않고 보다 더 깊고 포괄적인 의미를 가진다.

 

 영적인 죽음

죄의 형벌로서의 죽음은 우선 하나님과 교제가 단절되고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 하나님을 떠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우리는 영적 죽음이라고 표현한다. 영적 죽음 혹은 영적으로 죽었다는 말은 사람에게 영혼이 없다거나 영혼이 아무 기능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고 그의 영혼이 하나님과 단절되어 있다는 뜻이다. 물론 하나님과 단절된 자가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지 못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레미야는 대언하기를, “내 백성이 두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고 하였다(렘 2:13). 하나님은 생수의 근원 곧 생명의 근원이시다. 또 주께서는 요한복음 15장에서 사람이 주 안에 거하지 못하면 마치 포도나무에서 잘리운 가지와 같이 생명이 없다고 비유로 말씀하셨다(요 15:4, 6).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참으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죽은 자들’이라고 표현하셨다. 누가복음 9:60,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여기에서 처음 말씀하신 ‘죽은 자들’은 일반 사람들을 가리켰다. 또 탕자의 비유에서 그는 아버지의 품을 떠났다가 돌아온 그 아들을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고 표현하셨다(눅 15:24). 또 주께서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것은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 거듭날 것을 의미하셨다고 생각된다(요 5:25).

이러한 의미에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2:1에서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라고 말했고, 또 에베소서 2:5에서도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다 영적으로 이전에 죄 가운데서 죽어 있었던 자들이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새 생명을 얻었다. 또 바울은 에베소서 4:18에서는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라고 말했다. 구원받지 못한 일반 사람들은 지금 영적으로 하나님과 떠나 있고 그를 알지 못하고 그를 섬길 줄도 모르고 하나님 없이 살고 있다. 사람의 정신적인 모든 문제들, 예를 들어 양심의 가책과 고통, 공허함, 우울증, 슬픔, 공포 등은 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된 영적 죽음의 결과들이라고 볼 수 있다.

 

 육체적 죽음

둘째로, 죄의 형벌로서의 죽음은 물론 육체적 죽음을 포함한다. 육체적 죽음은 성경적으로 말하면 사람의 영혼이 그의 몸을 떠나는 것을 말한다(창 35:18; 왕상 17:22; 눅 8:55). 그것은 본래 결합되었던 흙과 생기가 분리되어 흙은 다시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창 2:7; 3:19; 전 12:7).

인간의 육체적 죽음은 어떤 불신앙적 학자들의 주장대로 자연적 현상이 아니고 인간의 범죄함 때문에 왔다. 첫 사람 아담이 범죄한 후,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선언하시기를,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고 하셨다(창 3:19). 그것은 그가 아담에게 첫명령을 주시면서 이 명령을 어기면 ‘정녕 죽으리라’고 경고하셨던 말씀 그대로이었다. 죽음은 아담의 범죄 때문에 왔다. 그러므로 창세기 5장은 아담으로부터 노아까지 아담의 후손들의 명단을 기록하면서 ‘죽었더라’는 말을 8번이나 반복함으로써 사람이 하나님의 경고하신 말씀대로, 즉 죄의 형벌로 죽게 되었음을 증거하였다. 아담의 범죄로 그와 그 후손들은 다 죽게 되었고 그 죽음은 육체적 죽음을 포함했다. 로마서 5:12,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육체의 노쇠, 각가지 질병들, 자연적 재난들로 인한 육체의 고통들 등은 육체적 죽음의 전조(前兆)들이라고 볼 수 있다.

 

 지옥 형벌--'둘째 사망'

셋째로, 죄의 형벌로서의 죽음은, 성경에 의하면, 이 정도가 아니고 또한 영원한 지옥 형벌을 포함한다. 이것을 성경은 ‘둘째 사망’이라고 말한다. 사람의 영혼은 육체가 죽을 때 멸절(滅絶)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의인들의 부활이나 악인들의 지옥 형벌은 무의미한 말이 되고 말 것이다. 주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하셨다(마 10:28). 이 말씀은 첫째로 영혼의 불멸성을 증거하며 또한 둘째로 지옥의 교리를 증거한다. 지옥 교리는 주님 자신의 입에서 나온 진리이다. 이것이 왜 우리가 우리 마음대로 이 교리를 변경해서는 안 되는이 하는 이유이다.

지옥 교리는 마가복음 9:43-49에서 가장 강하게, 그리고 명백하게 증거되어 있다. 특히 한글개역성경에 생략되어 있는 44절과 46절은 전통본문에는 분명히 들어 있고 이 구절은 고대 사본들과 역본들의 충분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102)

43절,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44절, “거기는 그들의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45절,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전통사본]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46절, “거기는 그들의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47절,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불의--전통사본]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48절, “거기는 [그들의]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49절,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함을 받으리라.”

주께서는 또 마태복음 25장에서도 지옥의 영영한 불에 대해 증거하셨다. 41절,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46절, “저희는 영벌(永罰)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영생과 대조되는 영벌 곧 영원한 형벌은 지옥을 가리킨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후서 1장에서 영원한 멸망에 대해 증거했다. 1:8, 9,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여기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은 지옥을 가리킴이 분명하다.

사도 요한도 요한계시록 마지막 부분에서 지옥에 대해 밝히 증거했다. 요한계시록 19:20, “짐승[적그리스도]이 잡히고 그 앞에서 이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이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 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지우고.” 20:10,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20:13-15,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21:8,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이와 같이, 죄의 형벌로서의 죽음은 깊고 포괄적인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첫째로 영적 죽음 곧 하나님과의 교제의 단절과 그 결과로 오는 영원한 생명의 상실과 온갖 정신적 문제들을 포함하며, 둘째로 육체적 죽음 곧 육체의 생명 원리인 영 혹은 영혼이 육체를 떠남으로 육체가 생명을 잃는 것을 포함하며, 셋째로 영원한 지옥 형벌 곧 ‘둘째 사망’을 포함한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엄격한 공의는 바로 이러한 죽음이었다. 우리는 원죄와 자범죄를 가진 죄인으로서 이런 죽음을 죽어야 했었다. 특히 우리는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아야 마땅했던 자들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우리를 죄와 영원한 지옥 형벌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셨고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시고 완전한 의를 이루셨다(롬 10:4; 고전 1:30). 하나님께서는 죄를 알지도 못하신 그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심으로 우리가 그 안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셨다(고후 5:21).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저주의 죽음을 죽으심으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건져내셨다(갈 3:13).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의롭다고 간주하심으로써 자신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셨다(롬 3:23-26).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얻은 구원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죄의 형벌로부터 구원함을 얻는다. 구원받은 자는 죄로부터의 구원, 죄의 형벌로부터의 구원을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자.

 

 

7. 하나님의 언약

행위 언약

사람에 관한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첫 사람 아담에게 한 명령을 주신 것이었다. 창세기 2:16, 17,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다른 피조물들에게는 주시지 않고 오직 사람에게만 주신 독특한 명령이었다. 이것은 사람이 자유 의지를 가지고 순종 혹은 불순종을 선택할 수 있는 인격적 존재임을 증거한다.

 

첫 명령의 언약성

하나님께서 사람을 다루시는 방법은 언약(계약)의 방법이었다. 성경은 구약과 신약, 즉 언약의 책이다.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언약은 두 가지인데,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신 처음 명령을 흔히 ‘행위언약’이라고 부른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7:2는 말하기를, “사람과 맺으신 [하나님의] 첫 번째 언약은 행위언약이었는데, 그 언약에서 아담 자신의 완전한 순종을 조건으로 그와 그 안에서 그의 후손들에게 생명이 약속되었다”라고 하였다.

이 첫 명령을 ‘행위언약’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그 명령이 언약의 요소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즉 그 명령에는 언약의 두 당사자, 언약의 조건, 언약의 내용, 언약의 벌칙 등이 있다. 그러므로 호세아 6:7은 “저희가 아담처럼(케아담) 언약을 어겼다”고 말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이 첫 명령이 하나의 언약이었음을 증거한다. 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은혜언약은 행위언약을 전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가 행위로 구원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구주 예수께서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 즉 은혜언약은 행위언약의 실패에 근거한 것이었다. 또한 로마서 5:15-21의 아담과 그리스도의 대조는 행위언약을 전제하며 행위언약의 개념을 증거한다. 그 구절은, 한 사람 아담이 인류를 대표하였으므로 그의 죄가 온 인류의 죄가 되었으나, 한 사람 그리스도가 모든 택함받은 자들을 대표하였으므로 그의 의의 행위가 모든 택함받은 자들의 의가 되었다는 것을 대조적으로 증거하는 것이다. 즉 한 사람 아담이 온 인류의 대표의 위치에 있었던 사실은 행위언약을 증거하는 것이다.

 

  행위언약의 요소들

행위언약의 요소들을 좀더 살펴 보자. 언약의 두 당사자는 하나님과 아담이었다. 물론, 그 하나님의 언약은 일방적이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하신 명령이며 하나님의 주권적 조치이었다. 행위언약의 당사자인 하나님과 아담의 관계는 삼중적이었다. 피조물인 아담은 창조주 하나님께 절대 순종해야 할 위치에 있었다. 이것은 본질적 관계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본질적 관계 위에 약속의 한 명령을 주심으로 그와 언약을 맺으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낮추심으로써만 가능한 관계이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7:1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과 피조물의 차이는 매우 크기 때문에, 비록 이성적 피조물들이 그들의 창조주로서 그에게 마땅히 순종할 의무가 있을지라도, 그들은 하나님께서 언약이라는 방식으로 표현하기를 기뻐하신 하나님 편에서의 어떤 자원적인 낮추심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그에게서 나온 어떤 성과도 그들의 행복과 상급으로 결코 가질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은 단지 아담 개인과의 언약이 아니고, 인류 전체와의 언약이었다. 아담은 이 언약에서 온 인류를 대표한 언약의 대표자로 서 있었다.

언약의 조건은 순종이었다. 그 순종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완전하고 무조건적인 순종이어야 하였다. 이 원리는 구약의 도덕법에서 다시 강조되었고 신약에서도 다시 확증되었다. 신명기 27:26,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실행치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갈라디아서 3: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야고보서 2:10,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이 순종의 명령은 시험의 일정한 기간에 제한되었을 것이다. 만일 그 시험이 일정한 기간에 제한되지 않았다면, 아담은 비록 그 기간 동안에 범죄치 않았다 할지라도 우리가 장차 누릴 것과 같은 영생 즉 다시는 죽을 수 없는 영생을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다시 잃어버릴 수 없는 완전한 생명을 주시기를 의도하였음을 보이며, 그 의도는 일정한 시험 기간을 요구한다.

언약의 내용은 생명, 곧 영원한 생명이었다. 이것은,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벌칙의 경고 속에 암시되어 있다. 만일 아담이 하나님의 정하신 시험 기간 동안 하나님의 금하신 열매를 먹지 않았다면, 그는 영원히 살았을 것이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생명이 아담이 본래 소유한 생명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약속된 생명이 다시 범죄하거나 죽을 수 없는 생명이라는 데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하신 생명은 아담이 이미 소유한 생명보다 더 영광스러운 생명이었다.

언약의 벌칙은 죽음이었다. 그 죽음은, 성경 전체가 증거하는 대로, 영적 죽음 곧 하나님과 분리됨과, 육신적 죽음 곧 영혼과 몸의 분리와, 영원적 죽음 곧 둘째 사망이라고 불리는 지옥 형벌을 다 포함한다.

언약의 표는 생명나무이었다. 동산 중앙에 있었던 생명나무는 약속된 생명을 상징하였다. 생명나무의 열매 자체가 어떤 효능을 가졌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며, 사람이 타락 전에 그 열매를 먹었는지도 단정키 어렵다.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는 창세기 3:22의 말씀은 문자적으로 혹은 풍유적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행위언약의 영속성 문제

하나님께서 첫 사람 아담과 맺으신 행위언약은 오늘날도 유효한가? 행위언약의 영속성의 문제는 이중적으로 관찰된다. 우선, 행위언약은 구원의 방법으로서는 폐지되었다. 세상에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자는 아무도 없다. 사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로마서 3:21, 22,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 . .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로마서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믿는 자는 이제 은혜 아래 있고, 율법 아래 있지 않다. 로마서 6:14,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그러나 다른 한편, 행위언약은 하나님의 공의의 법으로서는 영원하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사람의 순종의 기본적 의무를 보이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불순종하는 자들, 즉 택함받지 못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최종적 심판의 정당성을 증거해 준다. ‘죄의 값은 죽음이라’는 대 명제는 폐기될 수 없는 진리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얻은 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우리의 모든 죄의 형벌을 짊어지셨고 우리를 위해 완전한 순종과 완전한 의가 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지막 심판 때에 그 공의의 법은 믿지 않는 죄인들, 회개치 않은 죄인들을 심판할 것이다. 죄인들은 그 공의의 법에 따라 영원한 지옥 불못에 던지울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의 법는 결코 폐지되지 않았다.

 

은혜 언약

모든 사람은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서 다 죄인이며 죄의 형벌을 받기에 합당한 자들이었다. 그러나 긍휼의 하나님께서는 죄인들 중에 일부분을 구원하기를 기뻐하셨고 그 구원의 방법은 은혜의 언약이라는 방법이었다. 은혜언약이란, 하나님께서 그의 택한 자들을 그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으로 구원하시고 영생을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7:3, “사람은 타락으로 그 언약[행위언약」에 의해 생명을 얻을 수 없게 되었으므로, 주께서는 은혜언약이라고 불리는 두 번째 언약을 맺기를 기뻐하셨는데, 그 언약으로 그는 죄인들에게 구원을 얻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요구하시고, 영생에 이르도록 작정된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즐거이 믿을 수 있도록 그들에게 그의 성령을 주실 것을 약속하시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생명과 구원을 죄인들에게 값없이 주신다.” 로마서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마태복음 26:28, “이것이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새 언약--전통사본」의 피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획됨

하나님께서 택자들을 구원하시는 일은 만세 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획되어진 것이었다. 에베소서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에베소서 3:11, “곧 「복음의 은혜는」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계획하신 영원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디모데후서 1: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하나님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救贖) 사역에 근거하여 택자들에게 영생을 주는 것이었다. 요한복음 6:38-40,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요한복음 17:2, 4,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 . .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디도서 1:2,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택자들의 구원을 위해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언약을 맺으셨음을 나타낸다. 학자들은 이것을 ‘구속언약’이라고 부른다.103) 여기에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택자들을 대표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이 택자들을 위해 구속(救贖) 사역을 이루기를 원하셨다. 이 일을 위해 아들께서는 죄 없는 사람으로 태어나시고 율법에 복종하시고 택자들의 죄의 형벌을 받으심으로 완전한 의(義)를 이루셔야 하였다.

마태복음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태복음 26:28,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갈라디아서 4:4, 5,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로마서 5:18, 19,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義)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로마서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히브리서 5:8, 9,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속 사역을 통해 얻을 복은 택자들의 영생이었다. 요한복음 6:38-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또한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 일을 이루셨고 3일 만에 부활하시고 40일 후에 승천하심으로 영광을 받으셨다. 요한복음 17:5,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빌립보서 2:9-11,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主)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은혜언약의 요소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救贖)에 근거하여 택자들을 은혜로 구원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은혜언약의 당사자들은 하나님과 그의 택하신 사람들이다. 은혜언약의 조건은 택하신 사람들의 믿음이다. 그러나 이 믿음은 결코 구원을 위한 공로가 아니고 단지 구원을 위한 수단과 방편에 불과하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로마서 3: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믿는 모든 자에게 그리고 모든 자 위에--전통사본」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에베소서 2:8, 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은혜언약의 중보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디모데전서 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히브리서 8:6, “그러나 이제 그가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이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시라.”

은혜언약에 담긴 약속의 내용은 택자들의 영생이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영생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의 회복에 근거한다. 인류는 아담이 범죄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깨어졌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그 관계가 회복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생을 얻는 것이다.

예레미야 31:3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에스겔 36:28, “내가 너희 열조에게 준 땅에 너희가 거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요한복음 1:12, “영접한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한계시록 21:3, 7,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은혜언약의 두 측면

은혜언약에는 법적 측면과 생명적 측면이 있다. 은혜언약에는 법적 측면이 있다. 신자의 자녀들은 구약시대에 합법적으로 은혜언약 안에 참여하였다. 이것은 할례의 규례에서 잘 증거된다. 창세기 17:7, 10, 12,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대대로 남자는 . . . 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신명기 29:10-12, “오늘날 너희 곧 너희 두령과 너희 지파와 너희 장로들과 너희 유사와 이스라엘 모든 남자와 너희 유아들과 너희 아내와 및 네 진중에 있는 객과 무릇 너를 위하여 나무를 패는 자로부터 물 긷는 자까지 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선 것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에 참여하며.”

은혜언약의 이러한 법적 측면은 신약 아래서도 계속 유지된다. 사도행전 2: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사도행전 16:31,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고린도전서 7:14,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

법적 측면에서 볼 때 은혜언약 안에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주로 진실히 믿는 성인들이며,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자녀들이고, 셋째는 법적으로 언약 안에 들어와 있는 비(非)중생자들이다. 이 세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형식적 교인들이거나 위선자들이다. 예를 들어, 구약시대에 이스마엘이나 에서나 불신앙적 유대인들은 다 은혜언약의 규례들에 참여하고 그 언약의 책임 아래 있었고 어느 정도 그 언약의 특권을 누렸으나 참된 의미에서 은혜언약의 백성이 아니었다.104)

그러나 은혜언약에는 생명적 측면이 있다. 참으로 택함 받은 모든 사람은 중생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실제로 새 생명을 얻고 새 삶,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삶을 산다. 형식적 교인들과 중생한 성도들은, 비록 우리가 그들을 정확히 구별할 수는 없어도, 그들의 행위를 통해 확인된다. 데살로니가전서 1:3, 4, “너희의 믿음의 역사(役事)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 . . 기억함이니,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요한일서 3:10,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하나님께로서 나지」 아니하니라.” 우리는 단지 법적으로만 아니고 생명적으로 언약 백성이 되어야 한다.

 

 은혜언약의 시대들

은혜언약은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에 다르게 집행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언약의 집행 방식의 차이일 뿐이며, 두 언약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먼저, 구약시대를 살펴보자. 은혜언약은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께서 뱀 곧 사탄에게 하신 선언에서 제일 처음 암시되었다. 창세기 3:15,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이 구절은 죄인들의 구원을 암시하는 ‘원시 복음’이라고 보통 불린다. 어떤 이들은 ‘여자의 씨’를 인격체적 의미가 아니고 비인격체적, 집합체적 의미로 보지만, 그것은 일반적으로는 메시야 예언으로 이해된다.105)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4:4에서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라고 말했을 때 그는 이 원시 복음을 염두에 둔 것이 확실하다. 또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에덴 동산에서 내보내실 때 가죽옷을 입히신 것(창 3:21)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예표하는 것이 분명하다. 구약의 짐승 제사는 이 때 계시되었을 것이다.

은혜언약은 또한 노아와의 언약에서도 나타났다. 노아와의 언약은 두 가지이었다. 첫 번째는 홍수 심판으로부터의 구원의 약속이었다(창 6:17, 18). 그 구원은 방주를 통해 이루어질 것이었다. 그 방주는 분명히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은혜의 구원을 예표한다. 두 번째는 홍수 심판 후,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더 이상 홍수로 멸망시키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약속이었다(창 9:8-13). 그 언약의 표로 하나님께서는 무지개를 주셨다. 이 언약은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 후손들 및 모든 생물들과 맺으신 언약이었고 흔히 ‘자연 언약’이라고 불린다. 이 자연적, 전세계적 복(福)은 은혜언약의 첨가물이었다.

은혜언약은 또한 아브라함과의 언약에서도 아주 명료하고 충분하게 나타났다. 아브라함과의 언약은 몇 가지 특징들을 가진다.

① 이 언약은 하나님과 정식으로 맺어졌고 그 표로서 할례의 규례가 주어졌다(창 17:9-14). 이로써 할례는 언약 백성의 공식적 표가 되었다.

② 이 언약은 아브람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얻은 의(義)에 근거하였다. 창세기 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이것은 이 언약이 은혜언약임을 잘 증거한다.

③ 이 언약은 민족적이며 또한 세계적이었다. 창세기 12:2, 3,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 . .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창세기 22:18,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④ 이 언약은 물질적이며 또한 영적이었다. 이 언약의 영적 성격은 그것이 신약교회에도 적용된다는 사실에서 나타난다. 창세기 17:8,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로마서 4:16,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갈라디아서 3:29,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은혜언약은 또한 시내산 언약에서도 나타났다. 시내산 언약은 구약을 대표한다. 구약(舊約, 옛언약)은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과 맺으신 언약으로 정의된다. 모세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책에 기록하고 그 책을 백성 앞에서 낭독하였으며 그 책을 ‘언약서’라고 불렀고 또 제물의 피를 백성 앞에 뿌렸는데 그 피를 ‘언약의 피’라고 불렀다(출 24:1-8).

시내산 언약은 율법[법]의 형식으로 주어졌다. 모세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법은 도덕법, 재판법, 의식법으로 구성되었는데, 여기에서 특히 도덕법과 의식법이 중요하였다.

도덕법은 외적으로는 행위언약적 요구를 강조하는 듯하였다. 도덕법의 요구는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는 말로 요약된다. 그러나 도덕법의 의도(意圖)는 행위언약의 갱신이 아니고 은혜언약을 위한 보조이었다. 사람이 율법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한다. 로마서 3:20,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로마서 4:15,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한편, 의식법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 구속(救贖)의 은혜를 증거한다. 예를 들어, 제사제도와 성막제도, 특히 지성소의 법궤와 속죄소의 규례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예표하였다. 여기에 시내산 언약 혹은 구약의 은혜언약적 성격이 증거된다. 레위기 4:20, “제사장이 그것[속죄 제물]으로 회중을 위하여 속죄한즉 그들이 사함을 얻으리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7:5, “그들[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그 약속된 메시야로 말미암아 완전한 죄사함과 영원한 구원을 얻었었다.”

 

신약(新約, 새언약)이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를 믿는 사람들과 맺으신 언약이다. 예레미야 31:31은 신약시대를 예언하였었다: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지막 만찬 때에 새 언약을 선포하셨다. 누가복음 22:20,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고린도전서 11:25,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율법 시대와 복음 시대를 ‘구약’과 ‘신약’(새 언약)이라는 말로 구별하였다. 고린도후서 3:6, 14, “우리를 새 언약의 일군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 . . 구약을 읽을 때에.”

신약시대의 특징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구약에 예표(豫表)되고 암시되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단번 속죄사역이 실제로 이루어졌다. 히브리서 7:27,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 히브리서 9:11, 12,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그러므로 구약은 예표적, 그림자적, 임시적, 가변적이었다면, 신약은 성취적, 실체적(實體的), 최종적, 영원불변적이다.

둘째로, 구약은 인간의 율법적 행위가 강조되었으나, 신약은 복음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은혜가 강조되었다. 요한복음 1: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로마서 3:21, 22, “이제는[신약시대에] 율법 외에[율법과 별개로]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그러나 율법은 신약 아래서도 유익하다. 디모데전서 1:8, “그러나 사람이 율법을 법 있게 쓰면[정당하게 사용하면] 율법은 선한 것인 줄 우리가 아노라.”

셋째로, 구약은 외적이고 의식적(儀式的)인 면이 많이 있었으나 신약은 내적이며 영적이다. 예레미야 31:31, 33,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 . .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 . .” 고린도후서 3:6,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군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儀文)「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성령]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성령은 살리심이니라].”

넷째로, 구약은 민족적이었으나 신약은 세계적이다. 이스라엘 민족에 국한되었던 선민(選民) 사상은 사라졌고, 은혜의 복음이 온 세계의 모든 나라들과 족속들에게 전파되고 있다. 마태복음 28:19,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요한계시록 7: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 물론 신약에도 하나님의 선택의 진리는 여전하고 오히려 더 분명하게 증거되어 있다.106) 요한복음 17:9,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로마서 9: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로마서 11:5,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에베소서 1:4,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구약과 신약의 본질적 동일성

역사상 교회 안에는, 구약과 신약을 전혀 별개의 언약으로 이해하려는 견해가 있었다. 종교 개혁 시대에, 소시너스파는 구약에는 영생의 약속이 없었고 구원의 조건도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재세례파도 구약에는 복음의 내용이 없다고 보았다. 오늘날 어떤 세대주의자들도 구약과 신약의 시대적 특성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구약과 신약을 대립시키고 구약의 은혜성을 부정하였다.

그러나 구약과 신약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우선, 택자들을 구원하시는 중보자 혹은 구주가 동일하시다. 요한계시록 13:8,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사도행전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디모데전서 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히브리서 13: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진리가 동일하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창 15:6). 출애굽은 하나님의 은혜의 사건이었다. 구약의 의식법, 특히 제사와 성막제도는 사람이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그리고 하나님의 예비하신 속죄 제물로 구원얻는다는 사실을 잘 증거한다. 구약의 성도들은, 히브리서 11장이 증거하는 대로, 믿음의 사람들이었다. 선지자들도 의인이 믿음으로 살 것을 말씀하였다. 이사야 7:9, “만일 너희가 믿지 아니하면 정녕히 굳게 서지 못하리라.” 하박국 2:4,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한다. 율법은 사람의 죄를 깨닫게 해줄 뿐이다.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공로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구약과 신약은 본질적으로 서로 다른 두 개의 언약들이 아니고, 본질적으로 동일한 한 언약, 즉 은혜언약의 두 가지 표현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7:6, “본질이 다른 두 개의 은혜언약들이 있는 것이 아니요, 다양한 시행들 아래 있는 동일한 한 언약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이 은혜언약으로 구원을 얻었다. 죄인들은 어느 시대나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그리고 유일하신 중보자와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으로 구원을 받는다. 구약시대에는 오실 메시야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고 신약시대에는 오신 메시야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 구원받은 모든 성도는 항상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거해야 한다. “우리의 의는 이것뿐 예수의 피밖에 없다!” 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완전한 의(義) 안에서 의의 삶을 구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서로 사랑하기를 실천해야 한다.

 

 

제4부: 기독론

기독론(Anthropology)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에 관한 진리들을 정리한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

2.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

3. 예수 그리스도의 일인격성(一人格性)

4.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지심

5. 예수 그리스도의 높아지심

6. 예수 그리스도의 세 가지 직분

7.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

  

 

1.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의 중심 인물이시다. 요한복음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예수 그리스도는 또한 기독교 복음의 중심 내용이시다. 로마서 1:2,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예수 그리스도는 또한 전도의 중심 내용이시다. 고린도전서 1:23,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고린도전서 2:1, 2,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가?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하여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말로 증거했다(요 1:14). ‘말씀’은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요 1:1)을, ‘육신’은 인간의 본질을 가리킨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이 한 인격 예수 그리스도 안에 결합된 신비를 잘 증거한다. 본래 하나님이신 그가 인간의 본질 즉 인성(人性)을 취하셨다. 초대 교회의 정통적 신조들은 성경에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진리들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는 참하나님이시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는 참사람이시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는 한 인격 혹은 한 분이시다. 이와 같이 우리의 구주는 신적 구주이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의 필요성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는 왜 사람이셔야 했는가? 그것은 무엇보다 사람들의 죄의 형벌을 담당하셔야 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범죄했으므로 사람이 죽어야 마땅하였다. 더욱이, 그는 죄 없는 사람이셔야 하였다. 만일 그가 죄가 있으셨다면, 그는 자신의 죄값으로 죽으셔야 했을 것이다. 그가 다른 사람들의 죄를 대신하는 대속(代贖)의 제물이 되시려면 그는 당연히 죄 없는 사람이셔야 하였다.

성경은 과연 그가 죄가 없으셨고 택자들의 죄를 짊어지신 속죄의 제물이 되셨다고 증거한다. 히브리서 4:15,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요한일서 3:5,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고린도후서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갈라디아서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예수 그리스도의 무죄성(無罪性)은 그가 성령의 능력으로 처녀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어 탄생하심과 관계된다. 누가복음 1:35, “이러므로 나실 자는 거룩한 자요.” 만일 그가 요셉과 마리아의 관계에서 출생하셨다면, 그가 아담에게서 전가(轉嫁)되고 유전되어 내려오는 원죄로부터 제외되신 것은 합당하지 않을 것이다.

또 부수적으로 그는 사람으로 오셔서 마귀의 권세를 폐하셨다. 히브리서 2:14,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그가 사람의 연약성을 체험하셨기 때문에 그는 연약한 우리를 동정하시고 도우실 만한 구주이시다. 히브리서 2:18,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의 필요성

그러면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는 왜 하나님이셔야 했는가? 구주가 단순히 사람이시면 안 되는가? 그것은 그가 죄 없는 대속 제물로서 속죄 사역을 완수하셔야 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죄인이다. 그러나 사람이 되신 그는 우리와 똑같이 죄의 유혹과 시험을 받으셨으나, 그의 신성의 도움으로 그는 범죄치 않고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히 순종하실 수 있었다. 그의 인성이 범죄 가능한가 불가능한가의 문제는 변론의 여지가 있을지라도, 그 자신이 범죄하기 불가능하다는 것은 확실하다. 왜냐하면 그는 신성을 소유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의 신성은 그의 속죄 사역이 많은 사람들을 위한 가치가 있는 사역이 되게 하셨다. 신적 인격이신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가치는 인류 전체의 가치보다, 모든 순교자들의 죽음의 가치를 합한 것보다 더 가치가 있었다. 여기에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많은 사람들의 죄, 곧 죄책과 죄의 형벌을 담당하실 수 있었는가 하는 이치가 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선택하신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은 또한 그의 속죄 사역을 택자들에게 실제로 적용하는데도 필요하였다. 다시 사신 예수께서는 지금 그의 영 곧 성령을 보내심으로 죄인들을 죄에서 실제로 불러내시고 실제로 구원하신다. 즉 신적인 구주께서는 죄인들의 ‘실제적’ 구주이신 것이다. 그는 피흘려 사신 백성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시지 않고 다 구원하시는 것이다(요 6:39, 40).

  

  2.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신성(神性) 또는 인성(人性)이라는 말에서 성(性, nature)이라는 말은 ‘속성들의 총체’를 가리킨다. 신성은 하나님의 속성들의 총체이며, 인성은 사람의 속성들의 총체이다. ‘본질’이라는 말이 그 개념을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신성은 하나님의 본질이며 인성은 사람의 본질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

성경은 예수께서 참 하나님이심을 밝히 증거한다. 우리는 성경의 충만한 증거들에 근거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神性)을 확신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은 다음 4가지 점에서 증명된다.

첫째로, 신적 명칭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돌려진다. 우선, 예수께서는 매우 자주 ‘주’라는 명칭으로 불리우신다. 신약성경에서 ‘주’라는 명칭이 예수님께 약 667회 사용되었다. 신약의 ‘주’라는 명칭(퀴리오스 κύριος)은 구약의 ‘여호와’라는 명칭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우주와 인간의 참주인이시요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명칭이다. 고린도전서 2:8, “영광의 주.” 로마서 10:9,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빌립보서 2: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그는 또한 빈번하게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우신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칭은 신약에서 예수께 125회 가량 사용되었는데, 그것은 단순히 존칭어가 아니고, 신성(神性)을 가진 분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4:3, “(마귀가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마태복음 11:27,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마태복음 14:33, “(제자들이 예수님 앞에 엎드려 말하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요한복음 1:14, “아버지의 독생자.” 뿐만 아니라, 요한복음 5:17-18에 보면,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부름으로 자신이 하나님과 동등함을 주장했다고 이해하였다.

그는 특히 ‘하나님’으로 불리우셨다. 요한복음 1:1,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요한일서 5:20,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이사야 9:6,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디도서 2:13,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 이 외에도, 요한복음 20:28; 로마서 9:5을 참고할 수 있다. 만일 예수께서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그를 ‘하나님,’ ‘참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크신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명백히 오류요 가장 심각한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께서 참 하나님이심을 확실히 증거하고 있다.

둘째로, 신적 속성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돌려진다. 예를 들어, 예수께서는 자신이 제자들과 함께 항상 있겠다고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18: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마태복음 28:20,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승천하신 예수께서 땅 위의 제자들과 항상 함께 계신다는 것은 피조물의 속성이 아니고 하나님의 속성이다. 피조물은 장소의 제약을 받지만,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다.

또한, 구약의 선지자들은 메시야의 영원하심에 대해 증거하였고 또 예수께서도 자신의 영원하심을 증거하셨다. 이사야 9:6, “영존하시는 아버지.” 미가 5:2,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요한복음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맨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107).” 요한복음 17:5,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창세 전’은 영원을 가리킨다. 요한계시록 22: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이 표현은 그의 영원하심을 증거한다.

또 그는 신적 지식을 가지셨다. 마태복음 9:4, “예수께서 그 생각「자신을 참람하다고 판단하는 생각」을 아시고.” 요한복음 2:24, 25,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친히 사람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마태복음 17:27,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요.” 예수님의 지식은 초인간적이요 신적이다.

또 그는 신적 능력을 가지신 자로 증거되었다. 요한복음 10:37, 38,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이와 같이 성경은 한마디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속성들을 가지고 계심을 밝히 증거하는 것이다. 골로새서 2:9는 이 사실을 요약하여 “그[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셨다”고 표현하였다.

셋째로, 신적 사역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돌려진다. 우선,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일에 관여하신 자 곧 창조자로 증거한다. 요한복음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골로새서 1:16,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이] . . . 다 그로 말미암고.” 창조는 피조물의 사역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역이다.

또 성경은 예수께서 만물을 붙드시고 천지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자로 증거한다. 히브리서 1:3,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고.” 마태복음 11: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마태복음 28:18,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이것도 피조물의 사역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역이다.

또한 그는 신적 권위를 가지신 자로 말씀하시고 교훈하셨다. 마태복음 5:22, 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 . . .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특히 그는 땅 위에 계실 때 많은 기적들을 행하셨다. 그는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고(문둥병, 중풍병, 열병, 혈루병 등에 걸린 자들, 소경, 벙어리, 앉은뱅이 등) 죽은 자들을 살리셨고(나인성 과부의 외아들, 회당장 야이로의 외동딸, 나사로) 떡 기적들을 행하셨고 바다의 풍랑을 잔잔케 하셨다. 그것들은 다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일들이었다. 요한복음 10:37, 38,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예수께서는 또한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셨고 그들을 죄에서 자유케 하신다고 말씀하셨다. 마가복음 2:5, 7, 10,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 . . (유대인들이 말하되)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 . .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히브리서 1:3,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요한복음 8:36, “아들이 너희를 「죄에서」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또 그는 사람들에게 참된 안식을 주신다. 마태복음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하나님 외에 인간에게 참안식을 줄 수 있는 자가 누구이겠는가? 피조물 중에는 없다.

또 그는 우리들의 기도를 들어주신다. 요한복음 14:13, 14,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 . .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기도의 응답은 피조물의 영역에 있지 않다. 그것은 확실히 하나님의 일이다.

또 그는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신다. 요한복음 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요한복음 16:7, “내가 그를[성령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하나님의 영을 보내실 수 있는 자는 하나님뿐이시다.

그는 마지막 날 세상의 모든 사람을 심판하실 것이다. 요한복음 5: 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마태복음 25: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디모데후서 4:1,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넷째로, 신적 영광이 예수 그리스도께 돌려진다. 예수께서는 아버지와 나란히 언급되심으로 신적 영광을 받으신다. 마태복음 28:19,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고린도후서 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예수께서는 친히 자신의 신적 영광을 선포하셨다. 마태복음 12:6,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요한복음 10: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요한복음 16:15,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자신을 하나님이라 주장한다고 그를 돌로 치려 하였다(요 10:31-33).

그는 아버지와 함께 찬송과 영광을 받으실 자시다. 빌립보서 2:10, 11,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특히 요한계시록은 주 예수께 아버지와 동등한 영광을 돌린다. 요한계시록 5:12, 13,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이와 같이,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 하나님의 명칭들, 하나님의 속성들, 하나님의 사역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돌림으로써 예수께서 참 하나님이심을 증거한다. 우리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영광을 알고 확신하자. 신적 구주께서 벌레와 같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 아, 이것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놀라운 사실이며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이다! 이 사실과 이 은혜를 깨닫는 자마다 우리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신 그를 위해 살게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이 되셨다. 그는 사람처럼 보이신 것이 아니고 참으로 사람이 되셨다. 성경은 예수께서 참하나님이심을 증거할 뿐 아니라, 그가 참사람이심을 또한 증거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사람이심,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은 다음 3가지 점에서 증명된다.

첫째로, 인적 명칭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돌려진다. 구약성경은 메시야가 오실 것을 예언하면서 그를 “여자의 후손”(창 3:15), “아브라함의 씨”(창 22:18), “한 아기”(사 9:6), “이새의 줄기”(사 11:1) 등으로 불렀다. 그것들은 다 그가 사람으로 오실 것을 예언한 것이다.

또한 예수께서는 자신을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라고 자주 부르셨다. 이 명칭은 복음서들에 약 84회 나오는데 일차적으로 그가 사람이심을 증거한다. 또 성경은 예수님을 ‘사람’이라고 직접 표현하기도 한다. 디모데전서 2:5,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 로마서 5:15,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 고린도전서 15:21,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둘째로, 인적 속성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돌려진다. 우선, 예수께서는 사람으로 출생하셨다. 그는 어린 아기로 출생하셨고 그 지혜와 키가 자라셨다(눅 2:40, 52). 또 그는 몸의 연약하심도 보이셨다. 그는 40일 금식하셨을 때 주리셨고(마 4:2; 21;18) 갈릴리 호수를 지날 때 배에서 주무셨고(마 8:24) 길을 걸으실 때 피곤하여 우물곁에 앉으셨고(요 4:6) 십자가에 못박혀 달리셨을 때 목마르셨다(요 19:28).

또 그는 영과 몸을 가지고 계시다고 증거된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여기의 ‘육신’이라는 헬라어(사르크스 σάρξ)는 ‘인간 본질 즉 인성(人性)’을 가리킨다. 히브리서 2:14,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누가복음 23:46, “아버지여, 내 영혼[영]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그는 창으로 옆구리를 찔렸을 때 피와 물을 흘리셨다(요 19:34).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타나 손과 발을 보이셨고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셨다(눅 24:39-43).

또 그는 지식의 제한을 보이셨다. 마태복음 8:10,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마가복음 11:13,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것도 없더라.” 마가복음 13:32,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셋째로, 인적 행위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돌려진다. 예를 들어, 그는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셨다(마 4:1). 히브리서 4:15는 증거하기를,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고 하였다.

또 예수께서는 하나님께 자주 기도하셨다. 마가복음 1:35,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누가복음 6:12,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맟도록[마치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마태복음 14:23,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누가복음 22: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같이 되더라.” 히브리서 5: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3. 예수 그리스도의 일인격성(一人格性)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을 가지고 계시지만, 한 인격, 즉 한 분이시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21문답, “그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로서 사람이 되셨고, 그래서 두 구별된 본질(성, nature)에 있어서 하나님과 사람이시며 한 인격이셨고, 영원히 계속 그러하십니다.” 인격(person)은 지식과 감정과 의지를 가진 행동 주체를 가리킨다. 그러나 지정의(知情意)의 특질 자체는 인격에 속한다기보다 성(nature)에 속한다고 본다.

 

일인격성(一人格性)의 증거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분이시라는 사실은 몇 가지 점에서 증거된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항상 단수 인칭대명사가 사용된다. 즉 성경에서 그를 위하여 ‘나는, 나의, 나를, 당신은, 당신의, 당신을, 그는, 그의, 그를’ 등의 단수 인칭대명사가 사용되지, ‘우리는, 우리의, 우리를, 당신들은, 당신들의, 당신들을, 그들은, 그들의, 그들을’ 등의 복수 인칭대명사가 사용되지 않는다.108)

둘째로,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사이에 어떤 인격적 구별이나 교제의 증거가 없다.

셋째로,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은 다 한 분 예수께 돌려진다. 로마서 1:3, 4,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인성]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신성]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넷째로,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속성과 사역이 인적 명칭에 돌려지는 경우가 있고, 또 반대로 그의 인적 속성과 사역이 신적 명칭에 돌려지는 경우도 있다. 마가복음 2:10, “인자(人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요한복음 3: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하늘에 있는(전통본문) 인자 외에는.” 고린도전서 2:8,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으리라.”

 

'한 인격' 안에서의 2성 연합

예수 그리스도는 본래 신적 인격이셨고, 신적 인격이신 그가 인성(人性) 혹은 인적 본질을 취하신 것이다. 요한복음 1:1, “태초에 말씀(로고스 λόgος)이 계시니라.”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은 인격이신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은 하나의 독립적 인격이 아니시고, 신적 인격이신 말씀과 결합함으로 그 인격 안에서 인격이 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비인격’109)이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고, 신적 인격과 결합하자마자 인격이 되셨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것을 초대 교회의 레온티우스와 다메섹의 요한 같은 이들은 ‘내(內)인격’110)이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그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이 신적 인격 내에서 인격이 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정의(知情意)는 성(性, nature; 본질)에 속한 특질이라고 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신적 의지뿐 아니라 인적 의지도 가지고 계셨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신적 의지와 그의 인적 의지는 조화를 이루셨고 그의 인적 의지는 그의 신적 의지에 항상 복종하신다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주후 680년, 제3 콘스탄티노플 회의는 이러한 내용을 진술하였다.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 신인적(神人的, theanthropic) 인격, 즉 신인(神人, God-man)이시며 영원히 그러하시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21문답] 그는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로서 사람이 되셨고, 그래서 두 구별된 본질(성)들에 있어서 하나님과 사람이시며, 한 인격이셨고, 영원히 계속 그러하십니다. 히브리서 13: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2성 연합의 결과--삼중적(三重的) 전달

신성과 인성이 한 인격 안에 연합된 결과, 삼중적 전달이 있다. 첫째는 속성의 전달이다. 예수께서는 신적 속성과 인적 속성을 함께 갖고 계시지만, 그것들은 한 인격에게 전달된다. 마가복음 13:32,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요한복음 2:24,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요한복음 3: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하늘에 있는(전통본문) 인자 외에는.” 로마서 1:3, 4,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둘째는 사역의 전달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사역들과 인적 사역들은 다 한 인격 예수 그리스도께 돌려진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은 신인적(神人的) 성격을 가진다. 마가복음 2:10,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요한복음 5: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고린도전서 2:8,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으리라.”

셋째는 은혜의 전달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은혜와 영광은 한 인격 예수 그리스도께 돌려진다. 그 결과,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은 존귀하게 된다. 그러므로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날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며 우리의 찬송과 경배를 받으신다. 요한복음 14: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사도행전 7:59,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요한계시록 5:12,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여러 가지의 오해들 

역사상,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해 여러 가지의 오해들이 있었다.

 

에비온파(Ebionites)와 알로기파(Alogi)

에비온파와 알로기파는, 예수가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로서 단순히 사람이었고, 그가 세례 받을 때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내려오셔서 그에게 메시야 의식을 주셨으나, 그가 십자가에 죽었을 때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떠나셨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예수와 그리스도를 분리시킴으로써 예수께서 하나님이심을 부정하는 것이며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분이심을 부정하는 것이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요 1:14)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요한복음 1:14는 분명히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고 증거한다.

 

도케테파(Docetism)

도케테파 혹은 가현설(假現說)은 그노시스주의자들(Gnostics), 게린더스(100년경), 말시온, 사벨리우스파 등의 생각으로서, 위의 견해와 비슷하지만,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의 입장에서, 예수는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로서 단순히 사람이었고 신적 그리스도께서 그의 세례 받을 때 내려 오셨다가 십자가에서 그를 떠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인성은 하나의 환영(幻影, phantasm)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도 역시 예수와 그리스도를 분리시킴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참사람이심을 부정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인격이심도 부정하는 것이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이 육신이 되셨음을 분명히 증거하고(요 1:14)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고백하지 않는 영은 적그리스도의 영이라고 말했다(요일 4:2, 3; 요이 7).

 

 아리우스파(Arianism)

아리우스(250-336년경)는 육신이 되신 ‘말씀’(요 1:14)이 하나님이 아니시며 사람보다 나은 첫 피조물, 즉 하나님도 아니고 사람도 아닌 반신반인(半神半人)이라고 주장하였다. 초대 교부 오리겐은,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하나님이 아니시며 영원 전에 하나님께로서 나신 하나님이시며 그의 본질이 하나님 아버지께 종속되어 있다고 보았는데, 아리우스는 오리겐의 이런 견해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 것이었다. 결국, 아리우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되고 완전한 신성(神性)을 부정한 것이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참하나님’(요일 5:20)이시요 ‘크신 하나님’(딛 2:13)이라고 증거했다.

아리우스는 아다나시우스의 반박을 받았다. 아다나시우스는 예수께서 아버지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이심을 주장했다. 주후 321년 니케야에서의 세계 종교회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이시라(호모우시오스)는 사상을 바른 견해로 선언하였다. 성경이 풍성히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은 그 외의 혹은 그 이하의 어떤 말로 표현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편, 중도적 입장을 취했던 반(半)아리우스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비슷한 본질이시라(호모이우시오스)고 주장했다. 비록 호모이우시오스라는 말이 호모우시오스와 이 ι자 하나만 다른 말이지만, 그러나 그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을 표현하지 못한다. 즉 반(半)아리우스파도 예수 그리스도의 참되고 완전한 신성을 부정하기는 마찬가지이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은 성경이 명백히 증거하는 기본적 진리이다.

 

 아폴리내리우스파(Apollinarianism)

아폴리내리우스(310-390년경)는, 사람이 영과 혼과 몸의 3실체로 구성되었다고 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실 때 신적인 ‘말씀’이 사람의 영의 자리에 들어오셨고 단지 사람의 본질 중 혼과 몸만을 취하셨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것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사람이심을 부정한 것이었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바대로, 성경은 예수께서 참사람이심을 밝히 증거한다.

 

 네스토리우스파(Nestorianism)

네스토리우스(451년경 사망)는, 신적 ‘말씀’이 인성과 한 인격체로 유기적 결합을 하신 것이 아니고 단지 사람 속에 거하셨다고 주장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연합이, 비록 정도에 있어서는 다르지만, 그리스도인들 속에 성령께서 내주(內住)하심과 비슷하였다는 말이다. 네스토리우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두 인격 곧 ‘사람 안에 계신 하나님’으로 이해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인격이심을 부정하는 것이요 또 참된 성육신을 부정하는 것이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인격이심을 밝히 증거한다.

 

 유티커스파(Eutychianism)

유티커스(378-454년경)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심으로 신성과 인성이 하나로 혼합된 제3의 본질 혹은 성(性)이 되셨으며, 이 때 인성이 신성에 압도되지만 동시에 신성도 이전과 같지 않았다고 보았다. 이 견해는 ‘일성설’(一性說, monophysitism)이라고 불린다. 이러한 견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구별을 부정한 것이다. 그러나 신성과 인성의 구별은 성경의 기본 진리이다.

 

 일의설(一意說, Monothelitism)

일의설(一意說)은, 일성설(一性說)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의지(意志)만 가지고 계신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주후 680년 제3 콘스탄티노플회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별된 신성과 인성을 가지고 계시며, 의지는 성(性, nature)에 속하므로 그가 또 신적 의지와 인적 의지를 가지고 계시다고 선언하였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두 본질(신성과 인성)과 두 의지를 고백한 것이었다.

 

  양자설(養子說)

비잔티움의 데오도터스(주후 2세기)는, 예수께서 처녀 마리아에게서 난 사람이며 세례 받을 때 성령의 초자연적 능력을 받으셨고, 그의 훌륭한 인품과 업적들에 대한 상급으로 부활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과 성육신을 부정한 것이었다.

그 후, 스페인의 감독 펠릭스(818년 사망)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신성에 있어서는 본래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그의 인성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아들로 입양(入養)되셨다고 주장하였다. 그도 참된 성육신을 부정한 것이요, 두 아들을 말함으로써 두 인격을 말할 위험을 가지고 있었다.

 

 속성 전달설

다메섹의 요한(675-745년경)이나 루터파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말미암아 신성의 속성들(전지, 전능, 편재 등)이 인성에 전달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혼합을 가져오는 일성론적 오류이다. 복음서들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에는 신성과 인성의 구별이 있다.

 

 인성 중심의 기독론

칸트(1724-1804)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상적인 윤리적 완전을 실현하셨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우실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예수님의 인격에 대한 신앙은 무의미하고, 그의 도덕적 교훈을 따르는 것이 구원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는 사상이다.

헤겔(1770-1831)은, 인류 역사가 절대자의 자기 전개의 과정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그 과정의 절정이며, 그의 성육신은 하나님과 사람의 하나됨을 나타내는 것뿐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범신론적 사상에 불과하다.

슐라이엘마허(1768-1834)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의 끊임 없는, 완전한 연합 의식을 가지고 계셨고, 하나님께서 그 안에 완전히 거하셨고, 이런 의미에서 그는 하나님이셨다고 주장하였다. 또 그는 예수께서 무죄 완전한 인격으로 이상적 인간성을 충분히 실현하셨다고 보았고, 예수님의 처녀 탄생, 부활, 승천, 재림 등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과 성육신을 부정하는 것이다.

릿츨(1822-89)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순히 사람이셨으나,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나타내시고 그것에 죽기까지 순종하셨음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우셨고, 예수님의 선재(先在), 성육신, 신성과 인성의 연합 등의 교리들은 종교적으로 무가치하며 신앙에 방해거리가 될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는 도덕주의에 불과하다.

 

 게노시스설(Kenoticism)

19세기 어떤 루터파 학자들이 주장한 게노시스설은 빌립보서 2:7의 “자기를 비어(에케노세)”라는 말씀의 잘못된 해석에서 나왔다. 이 견해의 주장자들은, 이 말씀에 근거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으로 신적 속성들의 일부 혹은 전부를 포기하셨으나, 부활하여 승천하신 후 그 모든 속성들을 회복하셨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 견해는 하나님의 불변성에 충돌된다(말 3:6; 약 1:17). 또한 이 세상에서 생활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빌립보서의 ‘자기를 비어’라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셨을 때 그의 신성의 영광을 감추시고 신적 속성들의 사용을 포기하심으로써 마치 신성이 없으신 자처럼 행동하셨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점진적 성육신설

I. A. 도르너(1885)는, 게노시스설에 반대하여 성육신을 순간적 사건이 아니고 점진적 과정이라고 보았다. 그는, ‘말씀’(로고스)께서 인성의 수용성의 성장에 따라 점점 더 많이 인성과 연합되셨고, 그 연합이 부활 때에 완성되었고, 그 이후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의식과 한 의지를 가지신 신인(神人)이 되셨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성육신을 부정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한 성경적인 바른 개념 혹은 사상은 역사적 신조들에 잘 진술되어 있다.

니케야-콘스탄티노플 신조(주후 381년), “. . . 또 우리는 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그는 모든 세상이 있기 전에 하나님에게서 나신 하나님의 독생자, 빛에서 나신 빛, 참하나님에게서 나신 참하나님이시고, 창조되지 않으시고 나셨으며, 아버지와 동일한 본질을 가지셨고, 그를 통해 만물이 있게 되었고, 우리 인간들을 위해 그리고 우리의 구원 때문에 하늘에서 내려오셨고 성령과 처녀 마리아에 의해 성육신하셨고 사람이 되셨다. 본디오 빌라도 아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으며 고난을 당하셨고 장사되셨고 제3일에 성경대로 부활하셨고 하늘에 오르셨고 아버지의 오른편에 앉아계시고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기 위해 영광 중에 다시 오실 것이다.”

칼케톤 신조(주후 451년),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한 선조들을 따라 모든 한 마음으로 사람들이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도록 가르치니, 그는 신성(神性)에 있어서 완전하시며 인성(人性)에 있어서도 완전하시고; 참으로 하나님이시고 참으로 이성적 영혼과 몸을 가진 사람이시고; 신성에 있어서 아버지와 동일한 본질이시며(호모우시온), 인성에 있어서 우리와 동일한 본질이시고(호모우시온);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와 비슷하시되 죄는 없으시고; 신성에 의하면 만세 전에 아버지에게서 나셨으며, 인성에 의하면 이 마지막 날에 우리를 위해서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처녀 마리아에게서 나셨고; 2성에 있어서 혼동 없이(아슁퀴토스 άσυgcύτως), 변화 없이(아트렙토스 άτρέπτως), 분할 없이(아디아이레토스 άδiaiρέτως), 분리 없이(아코리스토스 άcωρίστως) 인정되실 유일한 그리스도, 아들, 주, 독생자이시고; 성들의 구별은 그 연합에 의해 결코 제거되지 않고 오히려 각 성의 특성이 보존되고 한 인격과 한 실존(위, 位) 안에서 동시에 발생하므로 두 인격들로 나누이거나 분리되지 않고 유일하신 아들이시요, 독생자, 말씀이신 하나님,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니, 처음부터 선지자들이 그에 대해 선언했고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셨고 거룩한 선조들의 신경이 우리에게 전달해준 대로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8:2, “삼위일체의 제2위이신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영원하신 참하나님이시요 아버지와 한 본질이시며 그와 동등하신데 때가 차서 성령의 능력으로 처녀 마리아의 태에서 그의 본질을 받아 잉태되심으로 그 모든 근본적 특성들과 공통적 연약성들을 가진, 그러나 죄는 없는, 인성을 취하셨다. 그래서 두 개의 전체적, 완전한, 구별된 본질들 즉 신성과 인성이 한 인격 안에 변화나 혼합이나 혼동 없이 분리할 수 없이 결합되었다. 그 분은 참하나님이시요 참사람이시며 그러나 한 그리스도 즉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시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21문답, “하나님의 선택하신 자들의 유일한 구속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그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로서 사람이 되셨고, 두 구별된 본질들에 있어서 하나님과 사람이시며, 한 인격이셨고, 영원히 계속 그러하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한 이상의 신조적 진술들의 요지는 ① 그의 참된 신성, ② 그의 참된 인성, ③ 그의 일인격성(一人格性)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참으로 놀라운 구주이시다. 그는 참하나님이시며 또한 참사람이시다. 그러나 그는 한 인격이시다. 이것은 놀라운 신비일 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주와 중보자는 이와 같이 놀라운 신인적(神人的) 인격이시다. 그는 놀라운 구주이시며 능력의 주이시다.

 

4.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지심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성경 진리의 한 주제는 그의 생애에 관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는 그의 낮아지심과 그의 높아지심으로 정리될 수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 곧 신적(神的) 인격이신 영광스러운 선재(先在) 상태에서 자신을 낮추셔서 사람으로 이 세상에 탄생하셨고 율법에 복종하셨고 많은 고난을 당하셨고 마침내 십자가 위에 못박혀 죽으셨고 무덤에 묻히셨다.

그러나 그는 죽은 지 삼일 만에 부활하셨고 40일 만에 승천하셨고 지금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계시며 장차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재림(再臨)하실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본래 영광스런 상태에 계셨으나 자신을 낮추셔서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 그의 낮아지심은 사람으로 탄생하심부터 율법을 지키심, 고난당하심과 죽으심, 및 무덤에 묻히심을 포함한다.

고린도후서 8: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빌립보서 2:6-8,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형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그는 하나님의 형체로 존재하셨고 하나님과 동등됨을 탈취물(획득물, 상급)로 생각지 않으셨으나]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선재(先在)하심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사람으로 탄생하시기 전부터 존재하셨다. 그는 태초부터 계셨다. 미가 5:2, “그의 근본은 태초에, 상고에니라.” 요한복음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요한복음 8:58,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요한복음 17:5,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 . .” 요한계시록 22: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태초부터 계신 그는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다. 요한복음 1:1-3,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계셨더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골로새서 1:16, “만물이 그에게[그에 의하여]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 . .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탄생하심

본래 신적 인격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때가 되어 사람으로 탄생하셨다. 이것을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이라고 부른다.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은 구약 시대에도 암시되었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 시대에 때때로 사람의 모습 혹은 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한 암시로 이해된다. 창세기 17:22,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그를 떠나 올라가셨더라.” 창세기 18:1, 2,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오정 즈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았다가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섰는지라.” 창세기 35:13, “하나님이 그와 말씀하시던 곳에서 그를 떠나 올라가시는지라.” 또한 구약에는 신적 메시야의 탄생이 예언되어 있다. 이사야 7:14,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사야 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미가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뿐만아니라, 구약의 성막 제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암시했다(출 25-40). 성막은 일차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증거한다.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을 밝히 증거한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복음 3: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요한복음 16:28, “내가 아버지께로 나와서 세상에 왔고.” 갈라디아서 4: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빌립보서 2:6-8,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그는 하나님의 형체로 존재하고 계셨고 하나님과 동등됨을 탈취물(상급)로 생각지 않으셨으나]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디모데전서 3:16, “그는(‘하나님은’)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처녀 마리아의 몸을 통해 탄생하셨다. 마리아는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하였다. 신약의 복음서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 독특한 탄생의 사실을 밝히 증거한다.

마태복음 1:18-25, ① 18절,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② 19절, “그 남편 요셉은 . . .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③ 20절,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④ 22, 23절,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 . .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⑤ 25절,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누가복음 1:26-38, ① 27절,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정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② 34절,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③ 35절,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④ 37절,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에 대해 직접 증거하지는 않지만, 그의 탄생의 독특성을 증거한다. 요한복음 3: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요한복음 3:31, “위로부터 오시는 이.” 요한복음 8:23,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처녀 마리아를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기독교의 초자연성을 증거하는 중요성을 가진다. 오늘날 기독교회에 들어온 자유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부정하는 사두개파적 사상이다. 자유주의적 불신앙이 기독교회에 널리 퍼져 있는 오늘날, 처녀 마리아를 통한 탄생의 사실은 하나님의 초자연적 능력을 믿는 믿음의 시금석이 된다. 뿐만아니라, 내용적으로도 처녀 마리아를 통한 그리스도의 탄생은 그의 신성을 확증한다. 예수께서 요셉과 마리아의 정상적 부부 관계에서 출생하셨다면, 그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은 더욱 증거되기 어려울 듯하다. 그러나 그가 처녀 마리아를 통해 성령의 능력으로 잉태되고 탄생하셨으므로 그의 신성과 인성은 가장 적절하게 증거되었다. 성경도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증거하였다. 누가복음 1:35,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율법을 지키심

사람으로 탄생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친히 율법을 다 지키셨다. 율법을 내신 하나님 자신이신 그가 친히 율법에 복종하셨다. 그래서 그는 나신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으셨고, 어릴 때부터 부모에게 순종하셨다. 누가복음 2:21, “할례할 8일이 되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니.” 누가복음 2:51, “예수께서 한가지로[부모님과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또 그는 공적 전도의 일을 시작하실 때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누가복음 3:21,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예수께서 율법을 다 지키신 것은 우리의 의를 이루고 우리를 율법의 저주로부터 건져내시기 위함이었다. 마태복음 3:15,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갈라디아서 4:4, 5,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고난 당하심과 죽으심

예수 그리스도의 전(全)생애는 고난의 생애이었다. 신적 인격이신 그가 사람이 되신 것 자체가 큰 고난이셨다. 또한 그는 그의 공생애 기간 동안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거절과 배척을 당하시고 많은 비난을 받으셨다. 그러나 특히 그의 십자가 위에 달려 죽으심은 그의 고난의 절정이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37문답, “땅 위에 사신 모든 시간에, 그러나 특별히 그 생애의 끝에, 그는 영육으로 전인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담당하셨다.”

예수께서는 신성으로가 아니고, 인성으로 죽으셨다. 즉 그는 하나님으로서가 아니고 사람으로서 죽으신 것이었다. 그러나 비록 그의 신성과 그의 인성이 분리될 수 없고 항상 연합되어 있었지만, 예수께서는 십가가 위에서 사람이 측량할 수 없는 고난, 즉 하나님께 버림을 받는 하나님의 극심한 진노를 경험하셨다.111) 마태복음 27:46, “제9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갈라디아서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서방 교회의 사도신경에는 ‘그리스도께서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말이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당하신 극심한 고통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음부에 내려 가시사’라는 말은 왜 첨가되었는가? (그것은) 가장 큰 시험 중에서도 나로 하여금 나의 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와 그 전에 그의 영혼으로 당하신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아픔과 공포로 말미암아 나를 지옥의 고통과 괴로움에서 구속하셨음을 확신하게 하기 위함이다”고 진술하였다(44문답). 또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도, “그리스도의 죽음 후의 낮아지심은 장사되심과 죽은 상태에 머무심과 제3일까지 죽음의 권세 아래 있으심인데, 그것은 다른 말로 ‘지옥에 내려가시사’라고 표현된다”고 진술하였다(50문답).

천주교회는 그리스도께서 구약 성도들의 영혼들이 머문 곳인 ‘선조 림보’에 내려가 그들을 구원하셨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그러한 가르침은 성경의 명확한 근거를 가지지 않는다. 루터교회는 그가 음부에 내려가 승리를 선포하셨다고 해석하지만, 그것도 성경적으로 확실하지 않다. 그들의 주장의 근거로 제시하는 베드로전서 3:19,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는 말씀에서 ‘영으로’라는 말은 문맥상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의 영을 가리키지 않고 그의 신성의 영 곧 성령을 가리킨다. 또 ‘전파하시니라’는 원어112)는 ‘가셔서 전파하셨느니라’라는 말로서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노아 시대의 사람들에게 회개를 전파하셨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무덤에 묻히심

예수 그리스도는 마침내 무덤에 묻히셨다. 무덤은 범죄한 인간이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내려가는 곳이다. 그곳은 죄의 결과로 주어진 감옥과 같다. 고린도전서 15:3,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예수께서 무덤에 묻히셨다는 사실은 그가 참으로 죽으셨음을 증거하는 동시에, 또한 영광의 주께서 세상에서 가장 비천한 곳까지 내려가셨음을 보인다. 무덤은 죄의 결과로서 세상에서 가지는 인간의 불행의 가장 마지막 단계이다. 존귀하게 보이는 인간의 몸은 거기에 묻혀 썩으며 냄새가 난다. 예수 그리스도는 친히 바로 그곳에까지 묻히셨던 것이다.

 

5. 예수 그리스도의 높아지심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높임을 받으셨다. 빌립보서 2:6-11,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부활하심

부활(復活)이란 죽었던 몸이 다시 살아남을 뜻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어떤 이들이 생각하듯이 단순히 정신적인 사건이 아니고 십자가 위에서 상하셨고 무덤에 묻히셨던 바로 그 몸의 부활이었다. 그의 부활은 그의 무덤이 빈 무덤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물론, 그의 몸은 단순히 회생(回生)하신 것이 아니고 영광스럽게 변화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확실성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경에 확실히 증거되어 있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네 권의 복음서들에 확실히 증거되어 있다. 마태복음 28장, 마가복음 16장, 누가복음 24장, 요한복음 20장, 21장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천사들의 증거(마 28:6,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② 여자들의 빈 무덤 확인. ③ 베드로와 요한의 빈 무덤 확인(눅 24장, 요 20장). ④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심(막 16장, 요 20장). ⑤ 여자들에게 나타나심(마 28장). ⑥ 두 제자에게 나타나심(막 16장, 눅 24장). ⑦ 베드로에게 나타나심(눅 24장). ⑧ 제자들에게 나타나심(막 16장, 눅 24장, 요 20장). ⑨ 또 나타나심(요 20장). ⑩ 갈릴리에서 또 나타나심(요 21장, cf. 마 28장).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사도행전에 확실히 증거되어 있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이렇게 증거했다. 사도행전 1:3,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40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사도행전에 의하면, 베드로 사도는 전도할 때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밝히 증거했다. 사도행전 2:22-24,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대로 내어 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사도행전 2:32,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사도행전 3:14, 15,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다.” 사도행전 5:30-32,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 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사도행전 10:39-41,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의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그를 저희가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신 후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사도 바울도 전도할 때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밝히 증거했다. 사도행전 13:30, 31, “. . . 후에 나무에서 내려다가 무덤에 두었으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저를 살리신지라.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에 함께 올라간 사람들에게 여러 날 보이셨으니 저희가 이제 백성 앞에 그의 증인이라.” 사도행전 17: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바울 서신들에도 밝히 증거되어 있다. 로마서 1: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로마서 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고린도전서 15:3, 4,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특별히, 고린도전서 15:5-8에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들의 목록이 기록되어 있다: ① 게바, ② 12제자들, ③ 500여 형제들, ④ 야고보, ⑤ 모든 사도들, ⑥ 바울 자신. 고린도전서 15:14,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넷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추가적 증거들도 있다. 우선, 예수께서는 제자들 앞에서 공적으로 자신의 부활을 친히 예언하셨다. 마태복음 16: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3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마태복음 17:22, 23,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제3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심히 근심하더라.” 마태복음 20:17- 19,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 열 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하리니 제3일에 살아나리라.” 누가복음 24:5-9, “. . .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3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저희가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무덤에서 돌아가 . . . .” 마태복음 27:63, “. . .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가로되 주여 저 유혹하던 자가 살았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하심은 그의 부활을 전제하며 증거한다. 그가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그가 하늘로 올리우신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그의 부활과 승천은 연결되어 있다. 덧붙여, 그의 재림의 약속도 그의 부활을 증거한다. 그의 재림도 그의 부활, 그의 승천과 연결되어 있다. 그의 부활과 그의 승천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그의 재림은 무의미하게 되고 만다. 그는 다시 사셔서 하늘로 올리우셨기 때문에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다시 오실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몇 가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의 속죄 사역이 참되다는 것을 확증한다. 로마서 1: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선언]되셨으니.” 사도행전 17: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인의 영적 부활 즉 중생을 상징하며 몸의 부활을 확증한다. 베드로전서 1:3,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고린도전서 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열매가 되셨도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인의 구원을 실제로 이루시는 과정이었다. 로마서 4:25,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잘못된 설명들

역사상,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잘못된 설명을 하는 자들이 있었다.

첫째로, 어떤 이는 예수가 기절했다가 회생(回生)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께서 창으로 옆구리를 찔렸다고 증거하고 있다(요 19:34-35). 부상자가 무덤문을 열 기력이 있었겠는가? 더욱이 예수의 제자들이 그 연약한 부상자를 생명의 주로 전파할 수 있었겠는가? 또한 예수님은 그 후 어디로 가셨는가?

둘째로, 어떤 이는 예수의 제자들이 그의 시체를 훔쳐내어 숨겨두고 거짓말로 부활을 전파했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군병들에 의하여 유대 사회에 널리 퍼뜨려진 소문이기도 하였다(마 28:11- 15). 그러나 유대의 지도자들은 이런 염려를 하였기 때문에 군병들을 동원해 무덤을 굳게 지켰었다(마 27:62-66). 또한 성경은 무덤 안에 세마포와 수건이 있었다고 증거한다(눅 24: 12; 요 20:6, 7). 뿐만아니라, 만일 수비하던 군인들이 모두 잠들어 있었다면, 그들은 예수의 제자들이 그의 시체를 훔쳤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가? 더욱이, 그의 제자들은 부활을 증거하다가 핍박과 순교를 당했는데, 그들이 자기들이 지어낸 거짓말을 위해 핍박과 순교도 당할 수 있었다는 말인가?

셋째로, 어떤 이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그의 제자들의 환상이나 착각에 불과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의 부활의 유력한 증거로 ‘빈 무덤’을 제시한다. ‘빈 무덤’은 환상이나 착각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 또한 예수님의 제자들은 선생님의 부활을 기대하지 않았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환상이나 착각이 일어나겠는가? 더욱이, 예수님의 제자들 500여 명이 동시에 주님의 부활을 목격했다(고전 15:6).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동일한 환상이나 착각을 경험할 수 있겠는가? 덧붙여,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신들을 증인들로 자처하였다. 진실한 증인들이 환상이나 착각을 부활의 ‘사건’으로 증거할 수 있겠는가?

넷째로, 오늘날 많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신화(myth)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께서 장사되신 지 제3일에 무덤에서 부활하셨고 그의 무덤이 비어 있었음을 증거한다. 빈 무덤에 대한 증거들은 단순히 신화로 설명되기 어렵다. 또한, 예수님의 제자들은 진실한 증인들이었다. 그들은 그들의 증거를 위해 핍박을 받았고 순교도 당하였다. 그들의 증거의 진실성은 모든 종류의 의심에 대한 강력한 반증이다.

 

 승천(昇天)하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신 지 40일 후에 하늘로 올리우셨다. 승천은 성경에 밝히 증거된 사실이며 진리이다. 구약시대의 에녹과 엘리야의 승천 사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에 대한 모형적 예시(豫示)이었다(창 5:24; 히 11:5; 왕하 2:11). 또 예수께서는 친히 자신의 승천(昇天)을 여러 번 언급하셨다. 요한복음 6:62, “그러면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 요한복음 16:28, “내가 아버지께로 나와서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의 승천을 밝히 증거하였다. 누가복음 9:51,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누가복음 24:51, “축복하실 때에 저희를 떠나 하늘로 올리우시니.”113) 사도행전 1:1-2,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사도행전 1:9-11,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 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 보고 있는데 흰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 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에베소서 4:8-10, “. . .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디모데전서 3:16,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 히브리서 4:14,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시라.”

승천의 성격에 관하여,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이 눈으로 볼 수 있었던 사건임을 증거한다. 사도행전 1:9, “저희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은 분명히 땅에서 하늘로 올리우신 장소적 이동의 사건이었다. 루터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을 단순히 장소적 이동으로보다 상태의 변화로 본다. 즉 승천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은 신성화(神性化) 되어 온 세상에 편재(遍在)하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을 단순히 장소적 이동으로 증거한다. 그것은 구약시대의 에녹과 엘리야의 승천과 같다. 더욱이, 인성의 신성화는 진리의 일반적 원리들을 어긴다고 본다. 그리스도의 신성은 온 세상에 편재하시지만, 그의 인성은 그렇지 않다고 본다.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승천하신 후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셨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예수께서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셨다는 것은 문자적 의미가 아니고 신인동형주의적(神人同形主義的), 즉 비유적 표현이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계심을 증거한다. 시편 110:1,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내 우편에 앉으라.” 로마서 8:34,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에베소서 1:20,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골로새서 3: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히브리서 1:3,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브리서 8:1, “이제 한 말의 중요한 것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 그가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히브리서 10:12,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히브리서 12:2,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베드로전서 3:22, “저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느니라.”

예수께서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셨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과 동등한 권위와 영광을 받으시며 또한 교회와 우주에 왕권을 행사하심을 의미한다. 예수께서는 지금 하나님 오른편에서 선지자와 제사장의 일을 계속하실 뿐만 아니라, 특히 왕으로서 일하신다. 즉 그는 그의 영 즉 성령을 통하여 선지자의 사역을 계속하시고, 또 대제사장으로서 아버지 앞에 나아가 자기 백성들을 위해 중보의 기도를 하시며, 특히 교회의 머리로서 교회를 세우시고 다스리고 보호하시는 것이다.

 

 재림하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종말에 하늘의 영광의 처소로부터 이 땅에 다시 내려오실 것이다. 그것이 성도의 소망인 주의 재림이다. 사도신경,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주의 재림은 확실하게 이루어질 사건이다. 그것은 주님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24:30,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요한복음 14:1-3,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사도들도 주의 재림에 대해 분명하게 증거하였다. 데살로니가전서와 후서는 매장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증거한다.114) 데살로니가전서 4:16, “주께서 친히 외치는 소리와 천사장의 목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하늘로부터 내려오시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요한계시록 1:7,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눈으로 볼 수 있게, 영광스럽게, 갑작스럽게 이루어질 것이다. 이것은 성경에 밝히 증거된 진리이다. 사도행전 1:11,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마태복음 24:30, “그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마태복음 24:36-39, 42-43,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 . .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을 알았더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6. 예수 그리스도의 세 가지 직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가장 중요한 일은 죄인의 구원이다. 마태복음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마태복음 9:13,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마태복음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디모데전서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구주’라는 명칭에서 잘 나타난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라고 질문할 때, 그의 ‘그리스도’라는 명칭이 그것을 잘 나타낸다.115) 그리스도 혹은 메시야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이것은 구약시대에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에게 해당하는 명칭이었는데, 구약시대의 이 세 직분은 장차 오실 한 인물을 예표하였다. 그는 참선지자, 참제사장, 참왕으로 오실 자이었다. 이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잘 나타낸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참선지자, 참제사장, 참왕이시다.

 

 선지자직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참된 선지자이시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대변자로서 하나님의 뜻, 특히 우리의 구원을 위한 그의 뜻을 하나님의 백성에게 전달하는 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에 계실 때 친히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다 가르치셨고 지금도 하나님 오른편에서 그 일을 계속하신다. 소요리문답 24문답,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계시하심으로써 선지자의 직분을 수행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선지자의 일을 하실 것이라는 것은 구약성경에 이미 예언된 바이었다. 신명기 18: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 사도 베드로는 모세의 이 말씀을 메시야 예언으로 이해하며 인용하였다(행 3:22, 23).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선지자직을 밝히 증거한다. 예수께서는 세상에 계실 때 많은 무리들을 가르치셨다. 그의 가르치신 말씀들은 하나님의 뜻을 밝히 전달하였다. 그는 자신을 선지자라고 표현하기도 하셨다. 누가복음 13:33, “. . .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또 그는 자신의 가르침이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직접 받은 것임을 강조하셨다. 요한복음 8:26, 28,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게 말하노라. . . . 내가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요한복음 12:49, 50,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 . .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요한복음 15:15,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제사장직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참된 제사장이시다. 제사장은 하나님 백성의 대표자로서 그 백성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제사와 기도를 드리는 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에 오셔서 친히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셨고 지금도 하나님 오른편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다. 소요리문답 25문답,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키시고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시키기 위하여 자신을 단번에 제물로 드리심으로써 그리고 우리를 위해 계속 중보사역을 하심으로써 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하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에 대한 성경적 증거는 많다. 구약성경은 장차 오실 메시야께서 제사장이 되시고 제사장의 일을 하실 것을 예언하였다. 시편 110:4,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모습]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스가랴 6:13, “그가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고 영광도 얻고 그 위에 앉아서 다스릴 것이요 또 제사장이 자기 위에 있으리니[자기 보좌에서 제사장이 되리니].” 이사야 53:10, 12,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 . . .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신약성경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속죄의 제사를 올리셨음을 밝히 증거한다. 로마서 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힐라스테리온, 유화[宥和]제물)로 세우셨으니.” 에베소서 5:2,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프로스포라 προσφορά)과 생축(뒤시아 θυσία)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요한일서 2:2,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힐라스모스, 유화제물)이니.”

특히 히브리서는 예수님을 ‘제사장’으로 부르고(히 5:6; 7:15, 17, 21; 10:21) 또 더 빈번히 ‘대제사장’으로 부른다(히 2:17; 3:1; 4:14; 5:10; 6:20; 7:26; 8:1; 9:11). 또한 그의 십자가에 죽으심을 제사 혹은 제물이라고 증거한다. 히브리서 9:26, “자기를 단번에 제사(뒤시아 θυσία)로 드려.” 히브리서 10:10,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프로스포라 προσφορά, 몸의 예물)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히브리서 10:12,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히브리서 10:14,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또한, 제사장이 백성을 위해 기도하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도 우리를 위해 중보의 기도를 아버지께 드리신다. 로마서 8:34,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엔튕카네이, 탄원하시는) 자시니라.” 히브리서 7:25, “그는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히브리서 9:24, “그리스도께서는 참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요한일서 2:1,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왕직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참된 왕이시다. 왕은 자기 백성을 다스리고 보호하는 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백성 곧 교회를 다스리시고 보호하신다. 소요리문답 26문답,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그 자신에게 복종시키심으로써, 우리를 보호하심으로써, 그리고 그와 우리의 모든 원수들을 제압하시고 정복하심으로써 왕의 직분을 수행하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왕직에 대한 성경적 증거는 많다. 구약성경은 장차 한 왕이 오실 것을 예언하였다. 예언된 그가 오셨는데, 그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민수기 24:17,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사무엘하 7:16, “네 집과 네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이사야 9:6, 7, “(그 이름은)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시편 110:1, 2, 5,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홀을 내어 보내시리니 주는 원수 중에서 다스리소서. . . . 주의 우편에 계신 주께서 그 노하시는 날에 열왕을 쳐서 파하실 것이라.” 다니엘 7:13, 14, “(인자 같은 이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 . .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미가 5:2,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스가랴 9:9, “시온 딸아 크게 기뻐하라.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신약성경은 예수께서 왕으로 오셨고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를 다스리는 머리 곧 주(主)가 되심을 증거한다. 누가복음 1:32, 33,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마태복음 2:2,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계시뇨?” 마태복음 27:11,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이 옳도다.” 요한복음 18:37,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마태복음 28:18,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에베소서 1:22,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케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요한계시록 1:5,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 요한계시록 11:15,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하시리로다.” 요한계시록 17:14, 19:16, “만왕의 왕.” 요한계시록 22:1, 3,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

예수 그리스도의 왕직은 주로 교회 안에서 나타난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로서 그를 믿는 자들의 심령과 삶을 주관하신다. 그는 우리의 주시요 왕이시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에게 해당된다. 소요리문답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 왕권을 ‘은혜의 나라’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이것은 세속적, 정치적 왕권이 아니고, 교회적, 영적 왕권이다. 주 예수께서는 칼과 창으로가 아니고 말씀과 성령으로 교회를 다스리신다. 요한복음 3:3, 5,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한복음 18:36,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골로새서 1: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은 교회 안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그는 온 세계, 온 우주의 왕이시다. 그는 오늘도 온 세계 안에서 참된 교회를 설립하시고 보호하신다. 그의 왕권은 온 세계, 아니 온 우주에 미친다. 마태복음 28:18,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에베소서 1:22, “만물을 그[예수 그리스도의] 발 아래 복종케 하시고.” 고린도전서 15:25, “저가 모든 원수를 그[예수 그리스도의] 발 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노릇하시리니.” 요한계시록 1:5,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요한계시록 11:15,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하시리로다.” 요한계시록 17:14, “어린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유대인의 왕으로 세상에 오셨으나 유대인들이 그를 거절하므로 십자가에 죽으셨고, 따라서 그가 재림하실 때 왕으로 오실 것이지만, 지금 교회 시대에는 왕이 아니시라고 말한다.116) 그러나 성경은 그가 지금 왕이심을 증거한다. 교회는 현재 그리스도의 나라이다. 또한 그는 지금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계신다. 그는 지금 그의 백성들을 다스리시며 능력으로 보호하신다. 물론 그의 보호의 강조점은 육적인, 물질적인 것보다 영적인 것에 있다. 누가복음 17:20, 21,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골로새서 1:13, “그가[하나님께서]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요한복음 18:36,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은 현재 다 드러나 있지 않다. 그것은 장차 그가 영광 가운데 재림하실 때 완전히 드러날 것이다. 그는 미래에 영광의 왕으로 나타나실 것이다. 그의 은혜의 나라도 장차 영광의 나라로 드러날 것이다. 마태복음 25: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베드로후서 1:11,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요한계시록 11:15,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하시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참선지자시요 참제사장이시요 참왕이시다. 우리는 그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배우고 깨다고 그를 통해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가고 그를 통해 환난 많은 세상과 악과 사탄의 시험을 이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도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심으로 의지하며 그에게 기도하고 그를 통해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자.

 

7.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의 중심은 속죄 사역이다. 속죄의 진리는 하나님의 복음의 핵심이다. 고린도전서 1:23,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고린도전서 15:3, (복음의 내용) “. . .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박형룡 박사는 말하기를, “속죄 교리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며 초점이다”라고 하였다.

 

속죄 사역의 필요성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은 왜 필요하였는가? 그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기인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쁘신 뜻 가운데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하셨다. 갈라디아서 1:4는 말하기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라고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 때문에 필요하였다. 첫째로,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은 하나님의 공의 때문에 필요하였다. 하나님의 공의는 죄인들의 죄에 대한 형벌을 요구한다. 출애굽기 34:7, “. . .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 신명기 27:26,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실행치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어떤 이는 사람의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의 속죄가 반드시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우리 죄의 형벌을 받으셔야 했음을 증거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죄의 형벌을 받지 않으셨다면, 우리에게 구원의 가망성은 없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는 속죄의 죽음이었음을 분명히 증거한다. 로마서 3:25, 26,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갈라디아서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고린도후서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둘째로,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은 또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필요하였다.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속죄의 죽음을 죽으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절정적 표현이었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로마서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요한일서 4:9, 10,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속죄의 의미

속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경은 그것을 네 개의 단어로 표현한다. 첫 번째 단어는 ‘제사’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제사’라고 표현한다. 히브리서 10:12,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구약 제사의 기본적 의미는 제물이 죄인의 죄를 대신 담당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속상(贖償, expiation; 죄책과 형벌의 보상)이라고 부른다. 레위기 1:4, “그가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지니 그리하면 열납되어 너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 속죄일의 아사셀 염소에 대한 규례는 안수가 죄의 전가를 의미함을 증거한다. 레위기 16:21, 22, “아론은 두 손으로 산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고하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두어 미리 정한 사람에게 맡겨 광야로 보낼지니 염소가 그들의 모든 불의를 지고 한적한 곳에 이르거든 그는 그 염소를 광야에 놓을지니라.” 이 ‘산 염소’는 ‘아사셀’(아자젤)이라고 불리웠는데(레 16:10), 그것은 ‘내어놓는 염소’라는 뜻으로서 죄의 완전한 제거와 용서를 상징하였다.

예수께서는 선택된 자들을 위하여 한 영원한 속죄 제사를 드리심으로 그들의 죄책과 형벌을 담당하셨고,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셨다. 고린도후서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갈라디아서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성경이 그리스도의 속죄를 표현하는 두 번째 단어는 ‘구속’(救贖)이다. ‘구속’이라는 단어는 속전(贖錢)을 내고 건져낸다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선택된 자들의 죄값을 다 지불하시고 그들을 사셔서 그들의 죄책과 형벌로부터 건져내셨다. 마태복음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代贖物)117)로 주려 함이니라.” 사도행전 20:28,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 로마서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아포뤼트로시스)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고린도전서 6:19, 20, “. . .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디모데전서 2:6,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贖錢, 안티뤼트론)으로 주셨으니.” 디도서 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救贖)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성경이 그리스도의 속죄를 표현하는 세 번째 단어는 ‘유화’(宥和, propitiation)이다.118) ‘유화’란 진노를 가라앉힌다, 누그러뜨린다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가라앉히셨다. 로마서 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유화제물](힐라스테리온)로 세우셨으니.” 히브리서 2:17,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유화하려; 힐라스케스다이) 하심이라.” 요한일서 2:2,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유화제물](힐라스모스)이니.” 요한일서 4:10,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유화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성경이 그리스도의 속죄를 표현하는 네 번째 단어는 ‘화목’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와 하나님과의 적대 관계를 좋은 관계로 회복시키셨다. 로마서 5:10,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로마서 5:11,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고린도후서 5:18,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에베소서 2:16, “또 십자가로 이 둘[유대인과 이방인]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속죄 사역의 성격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은 몇 가지 중요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첫째로, 그것은 역사적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은 2000년 전에 유대 땅에서 이루어진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 역사적 사건이 기독교 진리에 있어서 생명과 같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가 인류의 구속(救贖)을 이루신 사건이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이 역사적 사건을 되돌아보며 이 사건을 믿고 이 사건을 전파한다. 고린도전서 1:23,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음을] 전하니.” 고린도전서 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디모데전서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히브리서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은 객관적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하여 이루어진 일이었다. 아직 죄인들의 심령에 그 사실이 알려지기 전에, 아직 죄인들 자신에게 구원이 적용되기 전에, 아직 죄인들의 심령 속에 그 죽음의 효력이 미치기 전에, 그가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셨다. 그가 십자가 위에서 택자들을 위한 구속(救贖)을 다 이루셨다. 요한복음 19: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요한복음 1:29,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로마서 5:8,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앞에서 고찰한 속죄의 네 가지 의미들은 다 속죄의 객관성을 증거한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은 대리적(代理的)이었다. 한 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택된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죽으셨다. 그의 대속의 공로는 많은 죄인들을 구원하기에 충족하였다. 그의 속죄의 대리적 충족성은 그의 신성(神性)에 근거한다. 그의 신인(神人)적 인격은 그의 속죄사역을 무한한 가치를 가진 행위로 만들었다. 이사야 53:5, 6,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 . .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마태복음 20:28, “많은 사람의 대속물(代贖物).”119) 마태복음 26:28,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고린도후서 5:14,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고린도후서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갈라디아서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베드로전서 3:18,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넷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은 완전하였다. 그것은 더 이상 속죄의 제사가 필요치 않을 정도로 완전하였다. 그것은 다른 어떤 것이 덧붙여질 필요가 없을 정도로 완전하였다. 죄인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만 구원을 받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택자들을 위한 속죄를 다 이루셨다. 그 속죄사역은 택자들의 죄값의 완전한 지불이며 그들의 죄책과 죄의 형벌의 완전한 보상이었다.

다니엘 9:24,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70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永贖)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요한복음 19: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고린도전서 1: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거룩하여졌고]120)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고린도전서 1:30,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로마서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