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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교회문제    

김효성 목사

2018년 7월 20일  수정

『자유주의 신학의 이단성』

『에큐메니칼 운동 비평』

『복음주의 비평』

『현대교회문제 자료집』

현대교회문제 (음성)

현대교회문제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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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현대교회는 이단적 자유주의 신학의 포용, 우상숭배적 천주교회와의 친교, 교리적 분별력 없는 에큐메니칼 운동, 심지어 종교다원주의적 경향, 또한 보수적 신앙을 가졌다는 목사들의 타협적 태도, 절제되지 않는 무질서한 은사운동, 잘못된 선교 개념, 낙태와 동성애의 포용, 여자 목사와 장로의 안수, 세속주의적 교회음악과 예배 방식의 도입 등 여러 가지 심각한 문제들을 안고 있다.

현대교회에 이러한 심각한 문제들이 있지만 그것들을 직시하고 교회를 바르게 세우려는 노력이 주의 종들에게 얼마나 있는지 심히 염려된다. 주께서는 아시아의 일곱 교회들에게 편지하게 하시면서 교회들의 문제들을 지적하셨다(계 2-3장). 바른 교회의 건립은 주께서 원하시는 바이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셨다”고 증거하였다(엡 5:26-27).

오늘날 교회의 정로(正路)는 성경의 근본 교리들을 보수하고 이단적 자유주의 신학을 배격하고 천주교회를 포용치 않는 것이다. 또 자유주의 신학과 천주교회를 배제함이 없는 교회적 교제와 협력과 연합은 옳지 않다. 또 참 기독교는 은사 체험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고 신구약 66권의 성경말씀으로 만족하며 그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믿고 순종하는 것이다. 그것이 옛 길이다. 우리는 이 시대의 잘못된 풍조들을 분별하고 옛 길, 바르고 선한 길을 구해야 한다.

예레미야 6:16,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하였으며.” 디모데후서 4:3-5,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성경은 또한 사도적 교훈을 고의적으로 불순종하고 무질서하게 행하는 자들과도 교제치 말라고 교훈한다: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규모 없이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살후 3:6, 14).

오늘날이 엘리야 시대 같고(왕상 18:21-22) 미가야 시대 같고(왕상 22장) 예레미야 시대 같을지라도(렘 5:1),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생각지 말고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성경이 무어라 말하는지를 생각하고 바른 길을 구해야 하며, 비록 그 길이 외롭고 힘든 길일지라도 그 길을 붙들어야 한다.

과연 오늘날 교회의 중요한 문제가 무엇인가? 과연 교회의 정로(正路)는 무엇인가? 저자는 지식도, 말과 글의 힘도 부족한 자이지만, 오늘날 바른 경고의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것 같아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 글을 정리한다. 하나님의 모든 뜻은 신구약성경 66권에 그리고 오직 신구약성경 66권에만 밝히, 충분히 계시되어 있다.

저자는 이 부족한 글들이 오늘 시대에 교회들의 잘못된 풍조들을 분별하여 교회의 정로(正路)를 지키고 참 교회를 보존하고 설립하고 회복하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신실한 종들과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참고와 도움이 되기를 원한다.  

 

 

내용 목차

1. 자유주의 신학이 무엇인가?

2. 배교의 시대

3. 자유주의 신학은 이단이다 (1)

4. 자유주의 신학은 이단이다 (2)

5. 잘못된 교회연합운동

6. 천주교회는 참 교회인가?

7. 종교다원주의의 비판

8. 복음주의의 문제 (1)

9. 복음주의의 문제 (2)

10. 은사운동이 무엇인가?

11. 성령의 세례와 초자연적 은사

12. 은사운동 비평

13. 선교 개념의 변질

14. 낙태가 가능한가?

15. 동성애를 용납할 수 있는가?

16. 여자 목사는 옳은가?

17. 현대 기독교 음악(CCM)의 문제

18. 열린 예배의 문제

19. 성경적 분리의 원리

20. 교회의 바른 진로(進路) 

1. 자유주의 신학이 무엇인가?

현대교회가 직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신학의 변질이다. 신학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체계적 지식을 말한다. 다수의 현대 신학들은 교회가 전통적으로 믿고 고백해온 하나님의 진리들을 버리고 표류하고 있다. 우리는 그것들을 통틀어 자유주의 신학이라고 부른다. 자유주의 신학은 한마디로 이단1)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 역사적 대교단들의 신학교들은 이런 자유주의 신학 사상들을 포용하거나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지배하고 있는 실정이다.

비평적 변론의 필요성

우리가 자유주의 신학에 대해 논하는 까닭은 그것이 기독교 역사상 가장 이단적 사상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이단을 분별하고 배격하라고 분명히 가르친다. 만일 우리가 자유주의 신학에 물든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죽고 말 것이다. 신자의 신앙 사상이 부패하면, 그의 경건하고 도덕적인 삶도 부패할 것이다. 교회가 세상과 별로 다르지 않다면, 죄 씻음을 받고 지옥 형벌로부터 구원받는 감격이 없다면, 사람이 구태여 교회에 나올 이유가 없을 것이다.

사탄은 교회들로 하여금 자유주의 신학을 배격하지 않고 은근히 받아들이게 하고 또 목사들의 사상을 변질시켜 마침내 교회 전체를 변질시키려 하고 있다. 우리는 사탄의 이러한 교묘하고 치밀한 배교(背敎) 운동을 분별하고 물리쳐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유주의 신학이 얼마나 이단적이며 적그리스도적인 사상인가를 잘 분별하고 비판해야 한다. 하나님의 진실한 자녀들은 이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대처해야 한다.

자유주의 신학의 근원과 성장

자유주의 신학은 성경의 비평적 연구 방식에서 나왔다. 중세 시대의 사람들은 교회의 권위에 맹종했었다. 그러나 시대의 변화 속에 개인의 자유와 이성의 권위를 발견한 사람들은 성경에 대해서 비평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고등비평이라고 불리는 잘못된 성경연구방식이다. 또 경험할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이성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한 철학자 칸트(Kant)의 지식론은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게다가, 과학의 발달이나 다윈의 진화론 등의 사상은 사람들로 하여금 성경을 더욱 의심과 불신앙의 눈으로 보게 하였다. 자유주의 신학은 이런 배경에서 시작되고 성장하였다.

기독교와 자유주의 신학의 차이

기독교와 자유주의 신학은 지엽적 문제들에서가 아니라 본질적 문제들에서 서로 다르다. 1924년 1월 한 자유주의 잡지는 기독교와 자유주의 신학을 근본주의와 현대주의라는 말로 표현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근본주의에 의한 기독교는 한 종교요, 현대주의에 의한 기독교는 다른 한 종교이다. . . . 근본주의자의 하나님은 한 하나님이요, 현대주의자의 하나님은 다른 한 하나님이다. 근본주의자의 그리스도는 한 그리스도요, 현대주의자의 그리스도는 다른 한 그리스도이다. 근본주의의 성경은 한 성경이요, 현대주의의 성경은 다른 한 성경이다. 교회, 하나님의 나라, 만물의 종말--이것들이 근본주의자에게와 현대주의자에게 의미하는 바가 각각 다르다.2)

성경적 기독교와 자유주의 신학의 차이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성경적 기독교는 기독교를 바른 교리들에 근거한 생활과 경험이라고 이해하며 그 교리들은 확실하고 불변적이라고 보지만,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를 교리들과 별개의 어떤 경험이나 생활로 보며 교리들은 시대마다 변할 수 있고 변해야 한다고 본다.

자유주의 신학은 교리를 경시함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 교리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교리를 경시하는 이런 태도는 자유주의 신학의 초기로부터 볼 수 있었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쉴라이엘마허는 종교의 핵심이 이성적 증명과 토론이 아니고 감정이며 하나님을 한 경험, 한 살아있는 존재라고 주장하였다. 릿츨도 종교는 이론적이어서는 안 되며 구원받는 것은 새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하르낙도 사람이 경험한 종교만 고백될 수 있고 다른 모든 신조나 신앙고백은 예수님의 견해에 의하면 위선적이고 파멸적이라고 주장하였다.3) 그는 예수님의 기적들을 부정하며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을 역사적 기록으로 간주하지 않았다.4) 그에 의하면, 기독교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의 아버지시요 모든 사람이 서로 형제라는 데 있다고 한다.

쉴라이엘마허, 릿츨, 하르낙은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선구자들이었다. 이처럼, 자유주의 신학은 처음부터 기독교의 본질을 교리와 별개의 경험이나 생활에서 찾으려고 하였다. 이들에 의하면, 기독교의 전통적 교리는 중요하지 않고 현대의 철학적, 과학적 도전 앞에 변경될 수 있는 것이었다. 예컨대, 자유주의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교리는 변경될 수 있고 단지 하나님이 악의 세력을 이기실 것이라는 신념이 기독교의 본질이라고 본다.5)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에 대한 과학적 반론을 염려하여 기독교의 독특한 교리들을 버리고 종교의 일반적 원리들을 기독교의 본질로 삼으려 하였다.6)

성경적 기독교는 교리를 중시함

그러나 성경적 기독교는 교리를 중시한다. 우리는 기독교가 바른 교리들에 근거한 생활과 경험이라고 이해한다. ‘교리’는 진리를 말로 표현한 것을 말한다. 교리는 기독교에 본질적이다. 또 기독교 교리들은 확실하고 불변적이다. 그것은 시대마다 변할 수 없다.

교리가 기독교에 본질적이라는 사실은 기독교의 기원을 살펴볼 때 분명하다. 처음 기독교 전파자들은 어떤 경험이나 생활 교훈을 전하지 않았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사실들을 전했고 이 사실들의 설명이 곧 교리이다. 사도 바울은 지혜의 말이나 기적을 전하지 않고 오직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였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전하였다(고전 1:22-23; 15:3-4).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은 하나의 역사적 사실이지만, 그가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은 속죄의 교리이다. 이와 같이, 기독교는 처음부터 교리적 내용을 가지고 있었다.

또 교리가 기독교에 본질적이라는 사실은 바른 교리를 보수하고 이단을 배격하라는 성경 교훈들에서도 증거된다. 디모데후서 1:13, “너는 . . .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라.” 로마서 16:17,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디도서 3:10,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

기독교 교리의 확실성과 불변성

더욱이, 기독교 교리들은 확실하고 불변적이다. 이 사실은 그것들이 하나님의 속성들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진실하시며 거짓 증거를 미워하시고(출 20:16; 잠 6:16-19) 또 불변하시다(시 102:26-27).

또한 기독교 교리들의 확실성과 불변성은 기독교 복음의 성격에 의해서도 확증된다. 기독교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들에 기초하였고 그 사건들이 실제로 일어났다면 그 내용은 확실하고 불변적일 수밖에 없다. 또 기독교 복음은 많은 기적들과 목격자들의 증언들에 의해 확증되었다(행 2:22; 요 21:24). 기적은 어떤 진리를 확증하는 표가 되기 때문에 ‘표적’(sign)이라고 불린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자신이 보고 전한 바를 순교의 피로 확증하였다. 그러므로 복음의 내용인 기독교 교리들은 확실하고 불변적이다.

성경은 복음 진리의 확실성과 불변성을 분명하게 선언한다. 갈라디아서 1:8-9,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기독교 복음은 명확하고 고정된 내용이며 아무도 거기에 무엇을 더하거나 뺄 수 없다. 교회의 의무는 단지 성경에 밝히 계시된 그 내용을 바르게 파악하고 후시대에 전하는 것뿐이다. 

자유주의 신학의 본질

그러면, 자유주의 신학의 본질은 무엇인가? 자유주의 신학은 결국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지 않는 사상이다. 자유주의 신학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초자연적 계시들을 인정치 않고 성경에 기록된 모든 기적을 인정치 않는다. 자유주의 신학은 성경에 계시되고 증거된 모든 교리들을 인정치 않는다. 한마디로, 자유주의 신학은 성경을 인간이 쓴 오류투성이의 책, 신화적인 책으로 보는 것이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자 중 비교적 보수적이라고 알려진 칼 바르트도 아담의 창조와 타락의 이야기가 그 자체로는 거짓이라고 말하였고7) “아브라함과 모세와 같은 인물들이 후대의 신화 제작의 산물들이든지 아니든지 무슨 문제가 되는가[!]”라고 했다.8) 또 그는 성경에 오류가 있다고 말하였다.9) C. H. 다드는 성경의 외적 권위는 절대적이지 않으며10) 하나님의 계시 진리는 객관적 형태로 주어지지 않는다고 단언하였고11) 심지어 성경의 무오성을 주장하는 것은 종교와 공중 도덕에 위험물이라고까지 하였다.12)

성경 자체의 증언들

그러나 이러한 사상은 성경 자체의 증언들과 정반대이다.

시편 19:7-8,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본문은 성경말씀의 완전하고 확실함을 증거한다.

누가복음 1:1-4,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혹은 확실하게 믿어진 일들)에 대하여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꾼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certainty)을 알게 하려 함이로라.” 성경은 확실하게 이루어진 내용들이며 목격자들의 증언이며 우리의 믿음의 확실한 근거이다.

요한복음 20:30-31,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sign)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복음 21:24, “이 일[요한복음의 내용들]을 증거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 줄 아노라.”

사도행전 2:22,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들은 은밀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공개적으로 이루어졌다.

히브리서 2:3-4,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느니라.” 기독교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들과 하나님께서 주신 초자연적 기적들로 확증되었다.

마태복음 5:18,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예수께서는 친히 성경의 축자적(逐字的, 단어적) 영감을 증거하셨다.

요한복음 10:35, “성경은 폐할 수 없나니.” 예수께서는 친히 성경의 신적, 절대적 권위를 선언하셨다.

디모데후서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하나님의 감동으로’라는 원어는 ‘하나님께서 숨을 내쉼으로’라는 뜻이다. 이 말은 성경의 영감뿐 아니라, 성경의 신적 기원과 권위도 증거한다.

데살로니가후서 2:15, “이러므로 형제들아,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遺傳)[전해 들은 바]을 지키라.” 이 말씀은 사도들의 권위, 즉 신약성경의 신적 권위를 증거한다.

요한계시록 22:18-19,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주께서는 신약 계시를 가감할 수 없는 신적 권위로 인치셨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 곧 신적 권위의 말씀이며 우리의 신앙생활의 표준이라는 것은 대표적 개신교회들, 즉 개혁교회와 루터교회와 영국교회가 공통적으로 믿는 기본적 신념이다. 심지어 천주교회도 형식적으로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물론, 그들은 성경 외에 교회의 전통과 교황 무오성을 믿지만). 바른 성경관은 기독교 신앙의 가장 기본적 요소이다. 성경이 우리의 신앙생활의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라고 믿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기초이다.

그러므로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가 포용할 수 있는 한계를 넘은 사상이다. 그것은 예수님 당시에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믿지 않았던 사두개파적 불신앙과 같다(마 22:29). 그것은 한마디로 이단이다. 우리는 성경을 믿는 자가 되어야 하고 이단을 배격해야 한다.  

2. 배교의 시대

자유주의 신학은 20세기 초만 해도 작은 세력이었으나 20세기 말에는 큰 세력이 되었다.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의 문제는 단지 몇몇 신학자의 문제가 아니고 대교단들의 목사들 다수의 문제이다. 유럽의 교회들은 일찍이 배교적이었고 미국의 교회들도 1920년대 이후 점점 포용적이게 되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은 자유주의를 포용하는 넓어진 교회들이며, 성경말씀을 믿고 자유주의 신학을 배격하는 보수적 교회들은 수적으로 소수인 것 같다.

100년 전에 주로 미국교회의 선교사들에 의해 시작된 한국교회는 세계교회들의 영향을 받아 왔고 지금도 받고 있지만, 특히 미국교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러면 자유주의 신학은 오늘날 미국교회들과 한국교회들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신학자들

자유주의 신학은 유명한 신학자들에게서 뿐만 아니라, 또한 그 외의 여러 신학자들에게서도 볼 수 있다.

1985년, 미국에서 약 125명의 개신교와 천주교 신학자들이 ‘예수 세미나’를 시작하였다. 1994년 초까지 이 세미나의 대략적 결론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포함한다. (1) 예수의 말들의 20%만 실제로 그의 말로 생각되며, 요한복음에서는 오직 한 구절만 그에게 돌려진다. (2) 예수는 자신을 메시아라고 공적으로 주장하지 않았다. (3) 예수는 자신을 하나님과 매우 가깝다고 느꼈지만, 자신을 신적인 존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4) 예수는 결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지 않았다. (5) 예수는 자신의 재림(再臨)을 약속하지 않았다.13)

1999년, 예수 세미나의 주도적 인물인 로버트 펑크는 미국의 한 연합그리스도교회의 강연에서 ‘예수 세미나’의 결론인 21개의 명제들을 배부하였는데 그 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1) 물질 세계 바깥에는 신(神)이 존재하지 않는다. (2) 다윈의 사상은 창조의 교리를 영원히 말살시켰다. (3) 신적인 기적들은 하나님의 공의와 완전에 대한 모욕이다. (4) 저 밖에 있는 신에게 말해지는 기도는 무의미하다. 기도는 명상이다. (5) 예수는 신적 존재가 아니다. (6) 예수를 구속자(救贖者)라고 하는 것은 낡아빠진 생각이다. (7) 예수가 처녀에게서 나셨다는 것은 현대 지성에 대한 모독이며 여성에 대한 모욕이다. (8) 속죄의 교리는 이성적이지 못하고(subrational) 또한 윤리적이지 못하다(sub-ethical). (9) 예수는 부활하지 않았다. (10) 모든 계시적 요소들은 기독교 주제에서 삭제되어야 한다. (11) 예수 자신은 기독교 신앙의 적절한 대상이 아니다. 예수의 비전이 그를 대치해야 한다. (12) 성경은 객관적 행동기준을 담고 있지 않다.14) 이러한 예수 세미나의 결론들은 지극히 배교적이며 이단적이다.

우리나라의 목원대 은퇴교수인 송기득(조직신학) 교수는 기독교 사상 2001년 1월호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성경 교리들, 즉 성육신(成肉身)과 신인양성(神人兩性)과 대속의 진리들은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고 심지어 부정할 수 있는 주제로 보았다. 또 그는 한신대 대학원장이었던 안병무 박사가 위의 교리들을 명백히 부정하였고 예수를 민중해방운동을 펼치다가 실패한 사람이며 단지 그가 민중해방운동의 길을 열었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보았다고 말했다.15) 

신학생들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은 신학자들에게서 뿐만 아니라, 또한 목사가 되기 위해 신학교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1976년, 노엘 홀리필드(Noel Hollyfield)는 미국의 남침례교 신학교 신학석사 논문에서 남침례교 신학생들의 신앙 상태에 대한 다음과 같은 설문조사 결과를 발표하였다.16)

 

M.Div.

1학년

M.Div.

3학년

Th.M.

&Ph.D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없이 믿는다.

74%

65%

63%

마귀의 존재는 확실하다.

66% 

42%

37%

기적들이 성경의 증거대로 실제로 일어났음을 믿는다.

61%

40%

37%

예수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은 확실하다.

66%

33%

32%

예수께서 물 위로 걸으셨음은 확실하다.

59%

44%

22%

예수께서 신적인 하나님 아들이심을 의심치 않는다.

87%

63%

63%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것은 구원에 절대필수적이다.

85%

60%

59%

성경을 하나님의 진리로 믿는 것은 구원에 절대필수적이다.

42%

33%

21%

죽음 너머의 삶이 있음은 확실하다.

89%

67%

53%

예수께서 어느 날 실제로 지구로 돌아오실 것을 확신한다.

79%

56%

53%


이 설문조사는 비교적 보수적이라고 알려진 남침례교회의 학생들에게까지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이 미쳤음을 보인다.

헬라정교회 대주교 드미트리 로이스터는 연합감리교 소속 퍼킨즈 신학교에서 헬라어를 가르칠 때의 일을 회고하며 말하기를, “나는 학생들에게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해 믿는지 물었다. 내가 말뜻을 정의하여 예수께서 단지 하나님의 감동을 받은 선생이 아니고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뜻임을 분명히 하자, 그 반의 학생들 중 한 명도 그것에 동의하지 않으려 하였다”고 했다.17)

교회 지도자들

자유주의 신학은 또 교회의 지도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몇몇 인물들을 예로 들어보자. 미국 감독교회(Episcopal Church)에 소속한 존 스퐁(John Spong) 감독은 인격적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으며 기도의 대상으로서의 하나님은 ‘죽었다’고 말하였다.18) 1999년 4월 26일자 뉴 아메리칸지에 의하면, 그의 판단에, 기독교가 생존하려면 기독교는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 성육신(成肉身), 처녀 탄생, 부활, 승천, 및 기적들과 같은 교리들을 치워버려야 한다. 또 스퐁은 “나는 자기 아들의 희생을 요구한 신을 숭배하기보다 증오하는 편을 택할 것이다”라고 말했고19) 모든 도덕은 시간과 장소에 따라 상대적이라고 단언했다.20) 그는 6백명 이상의 감리교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성경에서 읽는 모든 내용을 다 믿지 말라고 강조했다.21) 감독교회에서 감독은 목사보다 높은 고위 성직자인데, 미국 감독교회의 감독인 자의 사상이 이렇게 자유주의인 것이다!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예를 들어보자. 기독교대한감리회에 속한 박대선 감독은 1974년 6월 14일 고(故) 홍종철 특별보좌관 장례식 설교에서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때에 에녹이나 엘리야가 다른 사람들과 같이 육신으로 죽었을 것입니다”라고 말하였고, 성경이 그들을 죽지 않고 승천했다고 표현한 것은 그들의 이미지가 그들의 제자들과 가족들에게 생생하게 심어졌다는 뜻이라고 하였다.22) 이것은 성경의 증언에 대한 불신앙이다.

한국기독교장로회 소속 조향록 목사는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그 사건 자체를 사건적으로 입증하든지 부정하든지 하는 논란은 큰 의미를 거두지 못한다,” “그리스도 부활 사건은 신앙의 창문을 열고야만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고23) 이화여대 신약학 교수 허혁 교수는 “저는 성서에 부활의 사실을 가지고 있다고 하기보다는 부활의 보도를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 . . 이것을 학자들은 신앙의 표현이라고 하더군요. . . . 그것은 신앙을 사건으로 보는 입장이지요. . . . 저는 내가 믿는다는 것을 하나의 사건으로 보는 것이 좋지 않느냐 하는 생각입니다”라고 말하였다.24)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그 사건 자체가 중요하다.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말하지 않고 단지 부활 신앙만 말하는 것은 그의 부활을 믿지 않는 것이다.

역사적 대교단들

자유주의 신학은 미국의 역사적 대교단들 속에서도 볼 수 있다. 미국의 장로교회의 배교의 역사는 오래 되었다. 1923년 12월 26일, 미 북장로교회에 속한 150명의 목사들이 뉴욕주 어번시에 모여 한 문서를 발표하였다. 후에 어번 선언서(Auburn Affirmation)로 불린 이 문서는 곧 1,293명 목사들의 서명을 받았다. 그 내용은, 총회가 1910년에 선언하고 1916년, 1923년에 재확인한 내용을 반대하는 것이었다. 총회가 1910년에 선언한 내용이란, 성경의 무오성(無誤性),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 그의 대속(代贖), 그의 육체 부활, 그의 기적들의 사실성 등의 다섯 가지 교리가 성경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본질적이라는 것이다. 어번 선언서는 이 교리들을 ‘성경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본질적이지 않고 단지 이론들일 뿐’이라고 말하였고, 특히 성경 무오의 교리는 성경 숭배에 빠지기 쉬운 교리라고 했다. 그런데 이 선언서는 1924년 총회에서 채택되었다.

1967년, 미 연합장로교회(오늘날의 미합중국 장로교회)는 새로운 신앙고백서를 채택하였는데, 그 신앙고백서는 “하나님의 유일 충족한 계시는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다. . . . 성경은 기록된 하나님 말씀으로 수락되고 순종된다. . . . 성경은 성령의 인도 아래서 주어진 것이지만 역시 사람들의 말이며, 그것들이 기록된 장소와 시대의 언어, 사상 형식, 문학 형태들의 지배를 받는다. 성경은 그 당시에 유행하던 인생관, 역사관, 우주관을 반영한다”고 진술하였다(1. 3. 2).25) 그것은 성경의 초시간적 진리성을 부정하는 자유주의 사상이다.

미 연합장로교회는 목사의 임직 서약도 변경하였다. 변경된 임직서약에서는, 성경이 더 이상 신앙과 행위의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으로 선언되지 않고, 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대소요리문답을 받아들이는 대신 그 지도 아래 행한다고 선언된다. 1965년 5월 17일자 자유주의 잡지 크리스챠니티 앤드 크라이시스(Christianity and Crisis)는 말하기를, “새 신앙고백서는 1924년 어번 선언서의 교리적 노선으로 내려간다. 40년 전에 겨우 허용되었던 소수파 견해가 이제는 교회의 공식적 교리로 제안되고 있다”고 하였다.26)

1981년, 미 연합장로교회 총회재판국은, 그 총회 내에서 사역하던 연합그리스도교회 소속 맨스필드 케이스맨(Mansfield M. Kaseman) 목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 무죄성(無罪性), 대리적 속죄, 육체 부활을 부정함에도 불구하고, 지노회가 케이스맨의 견해를 새 임직 서약에 의해 허용된 ‘용납할 만한 해석의 범위 안에’ 있는 것으로 간주함에 있어서 옳았다고 판결하였다.27) 미 연합장로교회는 이단을 제거할 뜻이 없음을 명백히 드러낸 것이다. 이것이 교회의 배교가 아니고 무엇인가?

미 연합감리교회(UMC)는 일찍부터 자유주의적이었다. 그 교단의 자유주의적 문제점들은 수없이 많이 열거될 수 있겠지만, 최근의 한 예를 보자. 미국 시카고의 연합감리교회 감독 스프라그(C. Joseph Sprague)는 2002년 덴버 신학교 강연에서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의 신화는 역사적 사실로 의도된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의 물질적 몸의 회생을 내포했다고 믿지 않는다”고 말함으로 물의를 일으켰다. 그러나 그에게 그의 견해를 취소하든지 그의 직책을 사임하라고 요청하는 그 교단 내의 28명의 보수주의자들의 고소를 다룬 위원회는 그 고소가 잘못이며 그는 이단이 아니라고 판결하였다.28) 그것은 그 교단이 배교적임을 나타내는 것이 아닌가?

영국의 런던 주말 텔레비젼의 ‘크리도우(Credo)’ 프로그램은 1984년 영국교회 39명의 주교들 중 31명에게 질문한 결과를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1)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하나님인 동시에 사람으로 간주해야 한다(11명),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하나님의 최고 대리자로 생각하는 것으로 충분하다(19명). (2) 신약성경의 기적들은 후대의 삽입이다(15명). (3) 예수의 부활은 그의 제자들에게 “그가 그들 가운데 살아계시다”고 확신시켰던 그의 죽음 후의 ‘일련의 경험들’이다(9명).29) 이것은 영국교회의 배교적 상황을 보인다.

캐나다 연합교회(UCC)는 일찍부터 자유주의적이었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자유주의 신학 사상은 캐나다 연합교회가 파송한 서고도(William Scott) 선교사 같은 이의 영향이 컸다.30) 그러나 최근의 한 예를 보자. 캐나다 연합교회의 총회장 빌 핍스 목사는 1997년 10월 24일자 오타와 시티즌지와의 대담에서 “나는 예수께서 하나님이셨다고 믿지 않는다,” “나는 예수께서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시라고 믿지 않는다. 나는 그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과학적 사실로 믿지 않는다”라고 하였다.31)

우리나라의 감신대학의 학장이었던 변선환과 조직신학 교수이었던 홍정수는 기독교대한감리회 교단의 좌경된 모습의 생생한 증거이다. 변선환은 기독교의 유일성과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구원의 길 되심을 부정했다. 그는 기독교 사상에 기고한 글에서 “그리스도만이 보편적으로 유일한 구속자이신 것이 아니라”고 하였고 “저들의 종교[타종교들]도 그들 스스로의 구원의 길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299호, 155쪽). 또 그는 “그리스도는 힌두교 안에 있다”고 주장했다(같은 책, 156쪽). 그는 크리스챤 신문 1990년 12월 8일자에 기고한 글에서도 “기독교 밖에 구원이 없다는 교리는 신학적인 토리미의 천동설에 지나지 않는다,” “종교의 우주는 기독교도 다른 종교도 아니고 신을 중심하여서 돌고 있다는 것을 기독교는 인정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또 그는 “예수를 절대화, 우상화시키며, 다른 종교적 인물을 능가하는 일종의 제의의 인물로 보려는 기독교 도그마에서 벗어나 . . . 신 중심주의로 전환되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32) 그러나 이런 사상은 명백히 종교다원주의의 이단이다.

홍정수는 첫째로 신의 존재를 부정했다. 그는 “만일 신은 계신가 하고 누가 묻는다면 ‘신은 없다’고 잘라 말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베짜는 하나님, 52, 56쪽). 둘째로,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하나님의 아들의 대속적 죽음으로 보지 않는다. 그는 한 정기 간행물에 기고한 글에서 “[예수의 십자가는] 신의 아들의 죽음이 아니다”라고 하였고 또 “예수의 죽음이 우리를 속량한 것이 아니라, 그의 삶이 우리를 속량하는 것이다”라고 했다(한 몸, 7권, 16, 17쪽). 또 그는 그의 저서에서도 “[예수의 죽음은]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이 아니라 특정한 메세지를 전하고 있던 한 설교자의 죽음을 증언하고 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베짜는 하나님, 190쪽). 셋째로, 그는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하였다. 그는 크리스챤 신문 1991년 3월 30일자에 기고한 글에서 “부활 신앙은 이교도들의 어리석은 욕망에 불과하다”고 하였고, 같은 신문 6월 8일자의 글에서는 “[예수의 부활 사건은] 빈 무덤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또 그는 한 잡지에서 “나는 단연코 육체의 부활을 부정한다”고 말했다(우먼 센스, 1991. 12월호).

1992년 5월 7일 기독교대한감리회 서울 연회 재판위원회는 이들에게 출교를 선고했지만, 어떻게 이런 신학자들이 감신대학의 학장이 되고 조직신학 교수가 될 수 있었단 말인가. 또 이런 자들에 대해 감신대학의 교수들 중에는 비평하는 자들이 없는 것 같다. 한국의 감리교회는 신학적으로 너무 넓어졌고 변질되었다고 보인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통합)는 신학적으로 자유주의화 되어 있다. 그 교단의 신학교인 장로회신학대학이 신정통주의적인 입장을 취해왔다는 것은 한국교계에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신정통주의’란 칼 바르트, C. H. 다드, 라인홀드 니이버 등의 사상에서 보듯이 성경의 근본 교리들을 부정하는 자유주의 신학의 한 파이다. 장로회신학대학은 오래 전부터 성경의 무오성(無誤性)과 모세오경의 모세 저작성을 부정하고 이사야 40장 이하를 이사야가 아닌 후대의 어떤 익명의 저자가 썼다는 사상을 용납한다는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통합측 신학교의 분위기는 합동측 신학교와 다르다고 알려져 왔다.

1977년, 예장합동측 기관지 기독신보의 주필이었던 채기은 목사는 “필자가 진단하기에는 . . . 통합측은 반반으로 나뉘어 자유주의 신학 사상을 가진 이들이 있다고 본다. 그리고 기장측은 절대 다수가 자유주의 신학에 근거하고 있다고 본다”고 증거하였다.33) 1984년 이동렬은 “한국교회와 신정통주의”라는 장로회신학대학 석사학위 논문의 결론에서 말하기를, “우리 입장은 신정통주의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에 멈추지 않고 계속 표류 중이다”라고 했다.34) 1994년 통합측 총회는 701대 612로 여성안수안을 통과시켰다. 그 총회는 사도적 교훈을 부정하고 성경이 명백히 금하는 여자 목사를 세우는 오류를 택한 것이다. 장로회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교수 김명용은 1997년에 쓴 열린 신학 바른 교회론이라는 그의 책에서 성경의 축자영감설과 성경무오설을 옛시대의 신앙 사상이라고 주장하며 오늘날의 개혁신학은 바르트와 브룬너와 라인홀드 니이버 등의 차원높은 신학을 따라야 한다고 말하였다.35)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 교단은 자유주의적이다. 물론 그 교단에도 성경을 믿는 많은 목사들과 평신도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교단의 목사 양성원인 장로회신학대학이 자유주의적이며 그 교단의 지도자들의 다수가 자유주의적이라면, 그 교단은 자유주의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예장통합측은 건전한 교단이 아니다.

전반적 상황

미국교회의 전반적 상황을 증거하는 두 가지 자료가 있다. 첫째는 제프리 해든(Jeffrey Hadden)의 설문조사다. 1967년, 제프리 해든은 미국의 성직자 10,0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를 실시하였고 거기에 응답한 7,441명의 응답 결과를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36)

(1) ‘귀하는 예수님의 처녀 탄생을 믿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감리교회(UMC) 성직자들의 60%는 ‘아니오’라고 대답하였고, 감독교회(ECA) 성직자들의 44%, 연합장로교회(UPC) 성직자들의 49%, 침례교회(ABC) 성직자들의 34%도 ‘아니오’라고 대답했다.

(2) ‘귀하는 예수님의 육체적 부활을 사실로 받아들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감리교회 성직자들의 51%는 ‘아니오’라고 대답하였고, 감독교회 성직자들의 30%, 연합장로교회 성직자들의 35%, 미국 침례교회 성직자들의 33%도 ‘아니오’라고 대답했다.

(3) ‘귀하는 오늘 세계에 악한 귀신들이 존재한다고 믿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감리교회 성직자들의 62%는 ‘아니오’라고 대답하였고, 감독교회 성직자들의 37%, 연합장로교회 성직자들의 47%, 침례교회 성직자들의 33%도 ‘아니오’라고 대답했다.

(4) ‘귀하는 성경이 신앙과 역사와 세속문제들에 있어서 하나님의 영감된 무오(無誤)한 말씀임을 믿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하여, 감리교회 성직자들의 87%는 ‘아니오’라고 대답했고, 감독교회 성직자들의 95%, 연합 장로교회 성직자들의 82%, 미국 침례교회 성직자들의 67%, 미국 루터교회 성직자들의 77%도 ‘아니오’라고 대답했다.

둘째는 바나 연구회(Barna Research Group)의 설문조사다. 바나 연구회는 2004년 미국 개신교회 목사들의 49%가 다음과 같은 성경의 핵심적 신념들을 거부한다고 보고했다: (1) 성경에 기초한 절대적인 도덕적 진리가 있다, (2) 성경의 교훈은 정확하다, (3) 예수는 죄가 없으셨다, (4) 사탄은 실제로 존재한다. 그것들을 믿는 목사들의 비율은 감리교회가 27%로 가장 낮았고 남침례교회가 71%로 가장 높았다.37) 이 설문조사들은 미국교회들이 자유주의 신학의 큰 영향을 받았음을 증거한다. 이것이 배교(背敎)가 아니고 무엇인가?

주께서는 말세에 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리라고 예언하셨다(마 24:11, 24). 바울은 주의 재림 직전에 먼저 배교, 즉 신앙의 변절이 있을 것을 예언했다(살후 2:3). 특히 신학자들과 목사들과 역사적 대교단들의 배교는 참으로 심각한 일이다. 자유주의는 누룩같이 온 교회에 많이 퍼졌다. 이 누룩은 제거되지 않을 것이다. 말세에 배교가 있으리라는 예언은 그대로 성취되고 있고 또 다 성취될 것이다.

단지, 하나님의 신실한 종들이 깨어 현대교회의 배교를 직시하고 책망하고 구별하고 분리하여 참 교회들을 세우고 돌보는 것이 필요하다. 주의 참된 종들은 배교와 타협과 혼란의 시대 풍조를 분별하고 옛 길, 바른 길을 붙들고 성경의 모든 말씀에만 순종하고 진실한 성도들과 교제하면서 하나님 앞에 충성해야 할 것이다.  

3. 자유주의 신학은 이단이다 (1)

자유주의 신학은 이단이다. 왜냐하면 한마디로 말해 그것은 성경의 핵심적 교리들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대표적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책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과 처녀 탄생을 부정한다

자유주의 신학은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 즉 ‘말씀이 육신이 되셨음’을 부정한다. 라인홀드 니이버는 비극을 넘어서라는 그의 책에서 “영원이 시간 속에 들어온다는 개념은 지적으로 불합리하다. . . .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진리는 진리가 보통 판단되는 모든 규범들을 어긴다”고 말했다.38) 또 폴 틸리히는 조직신학이라는 그의 책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주장은 역설적(逆說的)이 아니라 부조리한(non-sensical) 말이다”라고 했다.39)

그러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그리스도에 대한 기본적인 사실이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정함은 바로 그를 부정하는 적그리스도적 사상이다. 요한일서 4:2-3,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지 않는 영마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원문). 요한이서 7, “이는 미혹하는[속이는] 자들이 많이 세상에 나왔음이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들이라. 이것이 미혹하는[속이는] 자요 적그리스도니라.”

그리스도의 성육신 진리와 밀접한 또하나의 진리는 처녀 탄생의 진리이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처녀 마리아에게서 나셨음을 증거한다. 그러나 자유주의 신학은 그것을 부정한다. 칼 바르트는 교회교의학에서 “그의 모친이 젊은 부인으로 불리는가 혹은 처녀로 불리는가 하는 옛 논쟁은 그 진정한 의미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말했다.40) 라인홀드 니이버는 비극을 넘어서라는 책에서 “사람들은 처녀 탄생의 원시적 신화에 속임을 당하고, 바로 역사 너머를 가리키기 때문에 의미 있는 그것을 하나의 순수한 역사적 사실로 이해하려고 할 것이다”라고 말했고,41) 자아(自我)와 역사의 드라마라는 다른 책에서도 “‘처녀 탄생’과 같은 기적들은 후대에 삽입된 생각이다”라고 말했다.42)

그러나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은 복음서에 밝히 증거된 내용이다. 마태복음은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으며, 남편 요셉이 마리아에게 잉태된 자가 성령으로 된 것이라는 천사의 말을 들었으며, 요셉이 마리아가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않았다고 증거했다(마 1:18, 20, 25). 누가복음은 처녀 마리아가 아들을 잉태하여 낳으리라고 전언(傳言)한 천사에게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라고 반문했고 천사는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고 말했다고 증거했다(눅 1:34-35).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은 초자연적 사건에 대한 믿음의 시금석이 되기 때문에 중요하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는 자는 처녀 탄생을 믿을 수 있다. 또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은 그의 신성(神性)과 연관되어 있다. 누가복음 1:35,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자유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초자연적 능력을 믿지 않는 불신앙이다. 그것은 예수님 당시에 부활이나 천사나 영을 믿지 않던 사두개파 사람들의 사상이다. 주께서는 그들에게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한다고 책망하셨다(마 22:29).

그리스도의 기적들을 부정한다

자유주의 신학은 또한 그리스도의 기적들을 부정한다. 자유주의 신학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초자연적 계시나 기적을 의심하는 성경의 비평적 연구에서 시작되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루돌프 불트만은 요한복음이라는 책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다는] 그 이야기가 이방의 전설에서 취해져 예수께 돌려졌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고 말했다.43) 폴 틸리히는 그의 조직신학에서 그리스도의 행적 전반에 대해 말하기를, “모든 역사적 지식과 같이, 이 사람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단편적이고 가설적이다. 역사적 연구는 이 지식을 방법론적 회의주의에 굴복시키고 본질적인 부분들뿐 아니라 각개의 부분들에서도 계속적인 변화에 굴복시킨다”고 했다.44)

요아킴 예레미아스는 신약신학이라는 책에서 말하기를, “또 우리는 특히 헬라주의적 환경으로부터 당시 유행하는 작품에서, 귀신의 추방, 병 고침, 죽은 자들을 일으킴, 풍랑을 잔잔케 함, 포도주 기적의 이야기들을 발견한다. 이 기적 이야기들의 어떤 것들은 복음서들의 그것들과 매우 밀접한 접촉을 보이기 때문에, 우리는 기독교적 전통이 그 주변 환경에서 빌려왔으며 적어도 그것에서 어떤 개별적 주제들을 이어받았다는 결론을 거의 피할 수 없다”고 했다.45)

그러나 예수님의 기적들은 모든 사람 앞에 드러나게 이루어진 것들이었다. 사도행전 2:22,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 또 제자들은 주께서 행하신 기적들의 목격자들이요 증인들이었다. 그들은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의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고 말했다(행 10:39). 성경에 기록된 사건들은 진실한 증인들에 의해 증거된 내용들이다(요 20:30-31; 21:24). 예수께서 사두개인들에게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마 22:29)라고 하신 말씀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에게 합당하다.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부정한다

또 자유주의 신학은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부정한다. C. H. 다드는 로마서라는 책에서 “유화(宥和, propitiation)라는 번역은, 진노하신 하나님을 가라앉힘을 암시하기 때문에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으며, 비록 이것이 이교적(異敎的) 용법에는 맞을지라도 성경적 용법에는 생소하다”라고 말했다.46) 라인홀드 니이버는 비극을 넘어서라는 책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 위에서 속죄의 죽음을 죽으셨다는 교리는 많은 신학적 오류들로 인도하는데 그 중에는 인간의 도덕 의식을 모욕하는 대리적 속죄의 이론들이 포함된다”고 말했다.47) 루돌프 불트만은 예수 그리스도와 신화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가 성령으로 잉태하여 동정녀에게서 탄생하셨다고 할 때 그의 인격은 신화(神話)의 빛으로 관찰되며, 이것은 그가 형이상학적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 즉 우리의 구속(救贖)을 위해 사람이 되셨고 스스로 고난, 그것도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위대한 선재(先在)하신 천적(天的) 존재로 이해되는 헬라주의 기독교 공동체들에서는 한층 더 분명하게 된다. . . . 특히 인류를 구속하기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내려오신 선재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개념은 영지주의적 구속 교리의 일부분이며, 아무도 이 교리를 신화적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48)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많은 사람을 대속(代贖)하기 위한 죽음이었다. 속죄는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다. 성경적 속죄 개념은 속죄제물이 택함받은 자들의 죄책과 형벌을 담당함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시고 하나님의 진노를 가라앉힌다는 것이다. 많은 성경 구절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분명하게 증거한다.

마태복음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로마서 3:24-25,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힐라스테리온 iJlasthvrion)[유화제물]로 세우셨으니.” 고린도후서 5:14, 21,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義)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갈라디아서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히브리서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히브리서 10:10, 12, 14,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베드로전서 1:18-19,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들에게서 유전된 망령된 행실로부터 구속(救贖)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요한계시록 5:9,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우리를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정한다

자유주의 신학은 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정한다. 칼 바르트는 하나님의 말씀과 사람의 말이라는 책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이나 그의 재림은 동일한 것인데 역사적 사건이 아니다”고 말했다.49) 또 그는 로마서라는 책에서, “부활은 역사 안에서 일어난 어떤 일(an occurrence)이다. . . . [그러나] 부활이 역사상의 사건(an event in history)은 아니다”라고 말했다.50) 또 그는 교회교의학에서 말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 역사적으로 발생하였다는 사실에 대해 아무런 증거도 없고 어떤 증거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 명백하다,” “실제로 성경 역사에 결정적 요소들인 창조 이야기와 및 다른 많은 이야기들과 공통적으로, 부활의 역사는 현대 학자들의 사고형식들과 용어로 신화(saga)나 전설로 간주되고 묘사되어야 한다는 것을 대항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확실히 현대적 의미에서 역사로 생각될 수 있지만, 부활은 그렇지 않다”고 했다.51)

루돌프 불트만은 그의 신약신학에서 “바울이 여전히 그것에 관해 아무것도 알고 있지 못한 빈 무덤의 이야기들은 전설이다”라고 말했고,52) 또 다른 토론에서 말하기를, “부활절 사건이 어떤 의미로든지 십자가 사건에 첨가된 역사적 사건이라면, 그것은 부활하신 주에 대한 믿음의 발생 이외의 다른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사도들의 설교를 이끌어낸 것은 바로 이 믿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활 자체는 지나간 역사의 사건이 아니다”라고 했다.53)

폴 틸리히는 그의 조직신학에서 말하기를, “십자가의 이야기들은 아마 역사적 관찰의 충분한 빛 안에서 발생했던 한 사건을 가리킬 것이지만, 부활의 이야기들은 그 사건 위에 깊은 신비의 베일을 덮는다,” “역사 연구는, 그것의 주위에 있는 전설적이며 신화적인 자료에 근거하여 이러한 사실적 요소를 찾아내려고 함에 있어서 정당하다. 그러나 역사적 연구는 결코 개연적 대답 이상의 것을 줄 수 없다”고 했다.54)

판넨베르크는 예수: 신인(神人)이라는 책에서 말하기를, “복음서들에 보도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나타나심들을 바울은 언급하지 않았는데, 그것들은 강하게 전설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속에서 그 자체의 역사적인 알맹이를 거의 찾을 수 없다”고 했다.55)

그러나 이런 사상은 신약성경의 명백한 증거를 부정하는 이단이다. 사복음서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충분하게 증거한다. 사도행전은 예수께서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40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고 기록한다(행 1:3). 사도 바울은 예수께서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고 썼고(롬 1:4),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고 썼다(롬 10:9). 또 그는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복음의 핵심적 내용이며(고전 15:3-4) 장차 죽은 자들의 부활의 근거임을 강조했다(고전 15:12-13, 16, 19).

덧붙여,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의 승천과 재림과 관련된다. 만일 우리가 그의 부활을 부정한다면, 우리는 그의 승천이나 재림도 부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것은 매우 기본적 신앙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않는 자가 구원을 받으리라고 생각할 수 없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않는 자를 그리스도인이라고 인정할 수 없다.

이와 같이, 자유주의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 곧 그의 신성(神性)과, 처녀 탄생을 부정하고 그의 기적들을 부정하고 그의 속죄사역을 부정하고 그의 육체적 부활을 부정한다. 자유주의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한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말할지라도 그것은 성경에 증거된 역사적 예수가 아니고 다른 예수에 불과하다(고후 11:4). 그러므로 자유주의 신학은 확실히 이단이다. 

4. 자유주의 신학은 이단이다 (2)

자유주의 신학이 성경의 핵심적 진리들을 부정한다는 사실을 몇 가지 더 살펴보자.

사람의 영혼 불멸을 부정한다

자유주의 신학은 사람의 영혼이 불멸하다는 성경의 기본적 진리를 부정한다. 예를 들어, 라인홀드 니이버는 비극을 넘어서라는 책에서 말하기를, “영혼 불멸이라는 개념이 몸의 부활보다 더 믿을 만하다는 선입견은 단지 교회 안에 있는 헬라 사상의 유산에 불과하다”고 했다.56) 폴 틸리히도 그의 조직신학에서 말하기를, “인간의 자연적 특질로서의 불멸성은, 비록 그것이 플라톤의 교리일 수는 있어도, 기독교적 교리는 아니다”라고 했다.57) 또 오스카 쿨만도 영혼 불멸인가 죽은 자의 부활인가라는 책에서 말하기를,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이 개념[영혼 불멸의 개념]은 기독교에 대한 가장 큰 오해들 중의 하나이다”라고 했다.58)

그러나 성경은 사람의 영혼의 불멸을 밝히 증거한다. 영혼 불멸에 대한 성경적 증거들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사람의 죽음에 대한 묘사이다. 성경은 사람의 죽음을 영혼이 몸을 떠나 하나님께로 가는 것으로 묘사한다(전 3:20-21; 12:7). 또 성경은 죽은 자의 영혼을 “조상들에게로 돌아갔다”고 묘사한다(창 15:15; 25:8). 이것은 죽음 후 영혼의 계속적 존재를 증거한다.

둘째, 사람의 죽은 후 상태에 관한 말씀이다. 시편 73:24는 성도가 죽은 후 영광 중에 영접되리라고 말한다. 주께서는 회개한 강도가 죽은 후 함께 낙원에 들어갈 것을 말씀하셨다(눅 23:43). 특히, 누가복음 16:19-31의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는 이 문제에 대해 잘 증거한다. 거지 나사로는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었는데 그는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았다(22-23절).

셋째, 부활에 관한 말씀이다. 성경은 죽은 자의 부활을 증거한다.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의인과 악인의 부활을 믿는다(행 24:15). 죽은 자의 부활은 사람의 영혼의 불멸을 전제한다.

넷째, 심판에 관한 말씀이다. 악인에 대한 심판은 영혼의 불멸을 전제한다. 마태복음 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히브리서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영혼 불멸은 성경적 진리이다.

그리스도의 재림(再臨)을 부정한다

또 자유주의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부정한다. 예를 들어, 칼 바르트는 하나님의 말씀과 사람의 말이라는 책에서 말하기를, “그리스도의 부활이나 그의 재림은 동일한 것인데 역사적 사건이 아니다”라고 했다.59) 라인홀드 니이버는 비극을 넘어서라는 책에서 말하기를, “기독교 교리 중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소망보다 더 속임과 착각으로 인도한 교리는 없다”고 했다.60) 폴 틸리히도 그의 조직신학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하나의 상징으로 보았다.61) 상징은 신화와 비슷한 개념이며 역사적 사건과 구별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성경의 근본적 교리이다. 주 예수께서는 친히 자신의 재림에 대해 밝히 증거하셨다. 마태복음 24:30, “그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사도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명백히 증거하였고, 특히 데살로니가전서와 후서에서 그는 매 장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언급하였다. 데살로니가전서 4: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데살로니가후서 1:7-8,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불의 형벌을 주시리니”(원문).

사도 베드로는 말세에 주의 재림을 부정하는 거짓 교사들이 나타날 것을 경고하였다. 베드로후서 3:3-4,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사도 요한은 주 예수의 재림과 그 전에 있을 사건들을 예언한 책을 저술하였다. 요한계시록 1:7,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또 그는 자신의 재림을 증거하신 주 예수의 말씀에 진실히 화답하는 말로 그 책을 마쳤다. 요한계시록 22:20,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사도신경에 고백된 대로 모든 정통적 기독교회가 고백하는 성경적 진리요 복된 소망이다. 디도서 2:13,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부정하는 것은 명백히 이단이다.

죽은 자의 부활을 부정한다

또 자유주의 신학은 죽은 자의 부활을 부정한다. 라인홀드 니이버는 비극을 넘어서라는 책에서 말하기를, “몸의 부활이라는 개념은 문자적으로 참될 수 없다”고 했다.62) 판넨베르크는 사도신경이라는 책에서 말하기를, “이런 식으로 죽은 자의 부활 개념의 긍정적 타당성을 인식하고 주장함은 우리가 그것의 상징적이고 비유적인 성격에 관해 분명히 이해한다는 조건에서 가능할 뿐이다”라고 했다.63)

그러나 죽은 자의 부활은 성경이 밝히 가르치는 진리이다. 우리는 사도신경의 고백대로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는다. 의인들은 부활하여 천국에서 영생을 누릴 것이며 악인들은 부활하여 지옥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의인과 악인의 부활을 분명히 증거하셨다. 요한복음 5:28-29,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그는 또 부활을 부정하는 사두개인들에게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고 책망하셨다(마 22:29).

사도 바울은 모든 사람의 부활을 믿었다. 사도행전 24:15, “저희의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 그는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근거하여 죽은 성도들의 영광스러운 부활을 논증하였다. 고린도전서 15:12-13, 51-52,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마지막 심판과 지옥을 부정한다

또 자유주의 신학은 마지막 심판과 지옥을 부정한다. 라인홀드 니이버는 인간의 본질과 운명이라는 책에서, “비록 문자주의적 정통파는 그 몰아냄을 정당하게 보지 않았던 것 같지만, 현대 기독교 안에 있는 도덕 감정이 아마 심판 개념의 중요성을 몰아내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64) 폴 틸리히는 그의 조직신학에서 말하기를, “사람들은 ‘영원한 정죄’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신학적으로 유지될 수 없는 단어들의 결합이다. . . . 그러므로 ‘영원한 정죄’라는 말은 신학 용어에서 제거되어야 한다. . . . 사람은 존재의 기반으로부터 결코 잘리워버리지 않으며, 심지어 정죄의 상태에서도 그러하다,”65) “[천국과 지옥은] 상징들이지 장소들의 묘사가 아니다”라고 했다.66)

그러나 마지막 심판의 진리는 성경의 기본 진리이다. 성경은 마지막 심판에 대해 밝히 증거한다. 주께서는 마지막 심판에 대해 밝히 증거하셨다. 마태복음 13:39-40,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을 해설하면서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을 증거하였다. 로마서 2:5-6, 16,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 또 히브리서 저자는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이 그리스도의 도(道)의 초보에 속하며 그런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가라고 교훈하였다(히 6:1-3).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 20:11-15에서 마지막 대심판에 대해 밝히 증거하였다.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데 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또 지옥 교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온 진리이다. 마태복음 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특히 마가복음 9:43-48에는 주께서 지옥에 대해 증거하신 내용이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43절). 그 외에도 그는 마태복음 25:41, 46에서 ‘영영한 불’ ‘영벌’에 대해 증거하셨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후서 1:9에서 ‘영원한 멸망의 형벌’에 대해 증거하였다.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 21:8에서 악인들이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할 것을 증거하였다.

이와 같이, 마지막 심판과 지옥에 대한 진리는 두려운 진리이지만, 분명히 성경적 진리이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로 인쳐진 진리이며 또 사도들이 밝히 증거한 진리이다. 그러므로 그 누구도 주께서 말씀하신 이 진리들을 부정하거나 변경하려 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진리를 부정하거나 변경하는 것은 분명히 이단이다.

결론적으로, 자유주의 신학은 성경의 신적 권위성과 무오성(無誤性),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과 처녀 탄생, 그의 기적들, 그의 속죄사역, 그의 부활, 사람의 영혼의 불멸,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죽은 자들의 부활, 마지막 심판과 지옥 등 성경의 핵심적 진리들을 부정한다. 그러므로 자유주의 신학은 확실히 이단이다. 성경의 핵심적 진리들을 부정하는 사상은 확실히 이단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유주의 신학이 이단임을 바르게 인식하고 그 사상을 용납하지 말고 단호히 배격해야 하고, 그런 사상을 가진 자들과 교제하지도 말아야 한다. 그런데 앞에서 언급한 배교의 증거들에서 보았듯이,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자유주의 신학을 포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를 분별해야 하고 성경의 교훈대로 교제를 조심해야 한다. 디도서 3:10,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 요한이서 10-11,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니라.” 

5. 잘못된 교회연합운동

역사와 세력

오늘날 교회의 또 하나의 중대한 문제는 에큐메니칼 운동이다. 에큐메니칼 운동은 세계의 모든 기독교회들을 재연합시키려는 운동, 곧 교회연합운동이다. 1910년 영국 에딘버러 세계선교대회는 현대 에큐메니칼운동의 시작이 되었다. 1925년 사회정치문제에 대한 기독교적 원리의 적용에 관심을 가지고 일어난 생활과 봉사(Life and Work) 운동과, 1927년 교회의 일체성(一體性, unity)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일어난 신앙과 직제(Faith and Order) 운동은 연합하여 1948년 세계교회협의회(WCC)를 조직하였다. 이와 같이, WCC는 선교, 사회 문제, 교회의 일체성 등의 관심을 가지고 출발하였다. 이 단체는 오늘날 교회연합운동의 주요 결실인 동시에 주요 수단이다.

교회연합운동의 세력은 대단히 크다. 2016년 9월 현재, WCC는 세계의 110개국 이상의 348개 교단을 회원으로 두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기독교대한감리회(기감), 성공회 등도 WCC의 회원이다.

한 세계교회를 지향함

교회연합운동은 하나의 세계교회를 지향하고 있다. 1954년 WCC 에반스톤 총회는 “우리의 의도는 연합하는 것”이라고 말했고, 1961년 뉴델리 총회는 “교회의 유형적 일체는 완전히 묶인 하나의 교제에서 나타난다”고 했다. 1975년 나이로비 총회는 “우리는 한 세계적 공동체를 갈망하며 그것을 위해 싸운다”고 말했고, 1983년 뱅쿠버 총회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목표는 한 거룩한, 세계적, 사도적 교회의 유형적 일체를 이루는 것이다”라고 했다. 이런 진술들은 하나의 세계교회를 만드는 것이 그들의 뜻임을 보인다.

1993년 5월, 한국장로교협의회는 예장통합, 기장, 예장대신, 예장개혁, 예장고신 등 다섯 개 교단의 이름으로 교회 일치를 위한 공동선언문을 발표하였다. 그 선언문은 한국교회의 분열이 신학적 정당성을 갖지 않는다고 하면서 말하기를, “우리 한국의 장로교단들은 신앙의 본질적인 항목들에 있어서 결코 분열될 만큼 의견의 차이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남은 문제는 우선 협의회를 통하여 다양성 속에서 일치를 지향해야 하고, 결국은 하나의 한국 장로교가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67)

신학적 포용주의

비록 WCC 헌법이, “WCC가 성경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구주로 고백하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신 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들의 공동적 부르심을 함께 성취하기를 추구하는 교회들의 교제이다”라고 진술하지만, WCC나 교회연합운동은 교회 안의 다양한 신학들을 비평 없이 포용하는 신학적 포용주의의 입장을 취한다. 사실, 그것이 이 운동의 근본적 문제점이다.

교회연합운동의 신학적 포용주의는 WCC와 그 지도자들이 다양한 신학들을 용납하는 데서 드러난다. WCC 전 총무 에밀리오 카스트로는 말하기를, WCC의 공식적 신학이란 것이 없으며 또 결코 있을 수도 없고 우리는 신학적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했다.68) 2000년 2월, 우리나라의 제1회 에큐메니칼 포럼에서 WCC 중앙위원인 박종화 목사는, 교회의 영적 측면을 강조하는 부류와 교회의 사회참여적 역할을 강조하는 부류는 한 동전의 양면과 같으며 이 둘을 포함하는 통합적 에큐메니즘이 크게 강조되어야 한다고 말했다.69)

교회연합운동은 그러므로 서로를 인정하고 성찬 교제를 나누기를 제안한다.70) 1993년 12월, 한국장로교협의회는 1994년 사업 계획으로 강단 교류, 연합 예배 등을 결의하였다.71) 교회연합운동가들은 심지어 교회의 일체성을 위해 교리를 포용적이게 작성하기를 제안한다.72) 이것이 신학적 포용주의이다.

실제적 예들

WCC의 신학적 포용주의의 실제적 예들을 몇 가지 들어보자.

WCC는 성경: 에큐메니칼 운동에서의 그것의 권위와 해석73)이라는 책을 내었다. 거기에 보면, WCC는 세 개의 성경관을 제시하며 그 중에 성경은 입구가 여럿인 기독교 진리의 종합관에서의 한 요소에 불과하다는 성경관이 있다고 하면서, “우리는 이 입장들 중 어느 것도 배타적으로 주장할 수 없다”고 진술한다.74) 또 WCC는 성경에 대한 문학적, 역사적 비평 방식을 공인된 것으로 받아들이고75) 또 성경 속에 신학의 다양성과 상호충돌의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며76) 성경 사건들의 순수한 역사적 성격을 부정한다.77) 그러나 이것은 성경의 영감성과 신적 권위성을 부정하는 자유주의 사상이다.

또 신조에 관해서도, 니케아 신조가 시대 제약성을 가진다고 주장하거나78) 그것이 부적절하고 부정확하다고 말하며79) 심지어 하나님에 대한 언어적 표현이 부적절하다고 주장하는 자들도 있다.80) 또 복음에 관해서, 복음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항상 변한다는 주장이나,81) 또 믿음에 관해서, 믿음의 내용이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주장이 포용된다.82) 이런 주장들은 다 자유주의 신학 사상이다.

기구적 연합

교회연합운동은 1948년에 WCC라는 세계적 협의체를 구성하였고 각 나라의 교회협의회(NCC)들과 지역적 협의체들을 가지고 있다. 또 미국에는 9개 교단들의 교회연합협의회(CUC=Churches Uniting in Christ)가 있다.

우리나라의 개신교회 17개 교단의 대표들은 한국 개신교 전체를 대표하는 연합기구를 만들기 위해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한국교회 연합을 위한 교단장협의회가 제안한 ‘한국교회의 통일된 연합체 구성 추진’ 헌의안은 거의 모든 교단들에서 통과되었다. 교단장협의회 소속 23개 교단 중 2002년 10월 2일까지 예장합동, 예장통합, 기장, 기성, 예성 등 16개 교단들이 총회 결의로 그것을 채택했다.83) 

복음주의자들의 적극적 참여

오늘날에는 복음주의자들도 교회연합운동에 적극적이다. 1983년 WCC 제6차 총회에서 “뱅쿠버의 복음주의자들”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된 복음주의자들의 다수파 선언문은, 교회연합운동가들이 복음의 핵심을 믿는 자들이며 ‘하나님께서 명백히 받으신’ 자들이므로, 복음주의자들이 그들로부터 물러나지 말고 그들을 기쁘게 영접해야 한다고 하면서,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의 일치와 갱신을 추구하는 모든 노력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할 우리의 결심을 공적으로 선언할 압박을 느꼈다”고 결론을 내렸다.84)

WCC도 복음주의자들에게 호의적 손짓을 보이고 있다. 1998년 12월 짐바브웨 하라레에서 열린 WCC 제8차 총회는 세계복음주의협의회(WEF) 죠지 반더벨드를 주요 연사로 세웠다.85) 또 2000년 미국교회협의회(NCC)는 새 조직체의 시작을 탐구하기 위해 천주교인들과 복음주의자들과 함께 만나고 있다.86)

바른 교리는 기독교에 본질적임

그러나 교회연합운동의 신학적 포용주의는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바른 교리와 바른 신학은 기독교에 본질적이다. 하나님의 진리들에 대한 체계적 지식인 신학의 중심적 내용은 시대마다 변할 수 없다. 더욱이, 교회연합을 위해 서로 모순되는 다양한 신학들을 포용하는 것은 교회가 스스로 모순을 범하는 명백한 잘못이다.

교회의 일체성은 교리적 성격을 가짐

또 교회의 일체성(一體性, unity)은 교리적 성격을 가진다. 성경은 교회의 일체성이 영적, 교리적, 유형적임을 말한다. 교회는 영적으로 이미 하나이며 그 일체성은 결코 파괴될 수 없다. 또 교회는 가능한 한 유형적으로도 일체성을 표현하고 유지하기를 힘써야 한다(고전 1장, 엡 4장). 그러나 오늘날 보다 중요한 점은 교회의 일체성이 교리적이라는 것이다. 교회는 바른 진리 안에서 하나이어야 한다.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은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 17:11, 21),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3)는 성경 구절을 인용하며 교회연합운동이 성경적이라고 말하지만, 요한복음 17장과 에베소서 4장에 계시된 교회의 하나됨은 하나님께서 아들에게 주신 자들의 일체성, 즉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그리스도께서 구속하시고 성령께서 인치신 자들의 하나됨이며(요 17:9; 엡 1:3-14), 또 하나님과 그의 진리 안에서의 하나됨이다(요 17:11, 21). 그러므로 워필드는 말하기를, “신약의 그리스도인의 하나됨은 신자들의 공통적 기독교 신앙에 기초했다. 그리스도 안의 하나됨은 그리스도 안의 진리에 대한 불신실함 위에 세워질 수 없다”고 했고,87) 마틴 로이드-죤스도, “진리와 교리를 떠난 하나됨은 없다”고 말했다.88)

교회는 바른 교리를 보수해야 함

더욱이, 교회는 복음 진리를 보수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다. 데살로니가후서 2:15,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遺傳)을 지키라.” 디모데후서 1:13,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라.” 교회가 받은 사도적 교훈들은 개신교회들이 공통적으로 믿고 있는 근본 교리들을 포함하며, 그 교리들은 만국 교회의 일체성의 기초이다.89) 그러므로 성경의 근본 교리들을 보존하지 않는 신학적 포용주의는 명백히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다.

교회는 이단을 배격해야 함

교회는 또한 이단들을 배격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 로마서 16:17, “너희의 [배운]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디도서 3:10,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 유다서 3,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 그런데 오늘날 교회 안에는 익히 알려진 이단 종파들 외에 자유주의 신학이라는 중요한 이단이 있다.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의 초자연적 사실들과 성경의 절대적인 권위를 부정하고, 그리스도의 신성(神性), 그의 형벌적 대속(代贖), 그의 육체적 부활, 그의 재림 등을 부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교회 역사상 어느 이단 종파보다도, 심지어 천주교회보다도 성경으로부터 크게 탈선한 이단이다.90) 그러므로 자유주의 신학을 배격하지 않는 신학적 포용주의는 이단을 포용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며 그것은 명백히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다.

여기에 교회연합운동의 문제의 핵심이 있다. 건전한 교리와 정치원리에 입각한 연합운동이라면 반대할 이유가 없다. 불필요한 분열을 극소화하고 필요한 연합을 극대화하는 연합운동은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들 안에 가장 중요한 두 이단은 자유주의 신학과 천주교회이다. 그런데 교회연합운동은 기독교계 안의 배교적 요소인 자유주의 신학과 천주교회를 배제하지 않고 연합과 일치를 추구하기 때문에 잘못인 것이다. 교회들의 배교와 혼란의 상황 속에서, 교리적 순결성을 무시한 연합은 결코 용납될 수 없다. 교회 일치라는 명분이 이단을 포용하는 구실이 되어서는 안 된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라고 하였다(고후 6:14-16). 칼빈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거짓이 종교의 성채 속에 침입해 들어오자마자, 요긴한 교리의 요점이 뒤집어지자마자, 교회의 죽음이 초래된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 . . . 교회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교리 위에 세워져 있다면 . . . 그 교리가 파괴될 때 교회가 어떻게 계속 존속할 수 있겠는가?”91)

초교파적 교회는 바람직한가?

덧붙여서, 교파적 확신의 차이를 무시하는 초교파적 연합 교회가 과연 바람직한가 하는 문제도 생각해야 한다. 많은 교회가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 그리스도의 속죄의 범위, 세례의 대상과 방식, 목사의 성격, 교회의 운영방식, 그리스도의 재림의 시기와 방식, 천년왕국과 휴거 등의 교리에 대해 심각한 견해 차이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비록 교회 연합의 과정에서 이단적 요소를 배제한다 할지라도, 또 지리적, 언어적 간격으로 인한 불편은 놔두고라도, 이러한 교리적 견해의 차이를 무시한 연합 교회가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

물론, 교리적 견해 차이는 주로 진리에 대한 무지나 오해에 기인할 것이다. 그러나 여하튼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이러한 교파들 간의 차이점들을 고려할 때, 초교파적 교회는 하나님의 모든 진리에 대한 충실한 고백이나 증거를 포기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만일 어떤 설교자가 한 특정 교리에 대한 확신 있는 설교를 한다면 그것은 교회의 어떤 회원들의 양심에 불편함을 줄 것이다. 또한 목사 양성을 위한 신학교는 온전한 교리적 확신을 가르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교파적 차이를 무시한 초교파적 한 교회는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며 한 신앙고백이 없는 한 교회는 참으로 하나가 아니다. “단지 하나의 외면적 조직체 때문에 그들이 ‘하나’라는 인상을 주는 것은 단지 교회 밖에 있는 세상을 오해케 할 뿐만 아니라 또한 거짓말하는 죄를 범하는 것이다”92)라고 로이드-죤스는 바르게 말했다.

전제주의적 교회를 경계해야 함

또 우리는 중세의 천주교회와 같은 전제주의적 교회를 두려워한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여하튼 하나를 만드는 세계적 조직체는 모든 회원을 그것의 통제 아래 놓는 전제주의 교회가 될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사람은 교만하여 남을 지배하려는 경향이 있다. 교회의 일체성보다 중요한 것은 신앙의 자유, 양심의 자유이다. 우리는 전제주의적 천주교회로부터 신앙의 자유를 위해 피흘려 싸웠던 선진들의 투쟁의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신앙의 자유라는 종교개혁의 귀한 유산을 잘 보존해야 한다.

6. 천주교회는 참 교회인가?

오늘날 교회연합운동은 천주교회에 대해 포용적이다. 실상, 기독교계의 재연합이라는 비전은 천주교회를 포함하지 않고는 수적으로 큰 결함이 있을 것이다. 천주교인수가 개신교인과 헬라정교인수를 합한 것보다 많기 때문이다. 미국해외선교연구센터(OMSC)의 2013년 1월호 국제선교통계보고서(IBMR)에 의하면, 세계 인구 71억명 중에 기독교인은 23억 5,400만명이며 그 중에 천주교인은 12억명이며 개신교인은 4억 3,900만명, 독립교회 3억 6,900만명, 정교회 2억 7,900만명, 성공회 9,100만명이라고 한다.93)

천주교회와의 우호적 관계의 예들

세계교회협의회(WCC) 초대 총무이며 명예회장인 빌렘 비셜트 후프트는 WCC와 천주교회의 적극적 협력관계에 대해, “우리가 반복해 말하는 바는, WCC 내의 교회들과 천주교회는 이제 모두 한 동일한 교회연합운동의 일부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충분치 않다. 우리는 그것을 증명해야 한다”고 말하였다.94) WCC의 전 총무인 에밀리오 카스트로도 말하기를, “현재 WCC와 천주교회 간의 관계는 매우 긍정적이며 모든 종류의 우호 관계들이 있다”고 하였다.95)

천주교회는 1959년까지 교회연합운동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교황 요한 23세와 바오로 6세의 노력으로 연합운동에 적극적이게 되었다. 1962년에 시작된 제2 바티칸회의는 그 특별한 전환점이었다.96) 천주교회는 아직 WCC의 회원이 아니고 회원권을 구하고 있지도 않지만 그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1968년 이후, 10-15명의 천주교 신학자들이 WCC 신앙직제위원회에 정회원으로 참여해왔다. 천주교회는 정규적으로 WCC의 주요 대회들에 참관인이었고 WCC의 프로그램 작성 간사 중에도 들어 있다.97) 1993년, WCC 신앙직제위원회 세계대회의 120명 회원 중 26명은 천주교인이었다.98)

1997년 8월 미국복음주의 루터교회(ELCA)는 수세기 동안의 천주교도들과의 분열의 싸움이 끝났고 과거의 정죄들이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다고 선언하였다.99) 그 교회의 에큐메니칼 담당자 프랭크 센 목사는, “우리는 16세기에 분리되어 나간 자들이며, 우리는 다시 함께 돌아가야 할 자들이다”라고 말했다.100)

1998년 1월 우리나라의 성공회 대성당에서 열린 기독교 일치주간 연합예배에 개신교회, 성공회, 천주교회, 정교회 등이 참여했다.101)

1999년 현재, 천주교회는 56개국 교회협의회들의 정회원이다.102)

1999년 5월 12일 ‘영국교회-천주교회 국제위원회’는 “로마 주교는, 교회의 세계적 수위권(首位權)의 표현으로서, 진리를 분별하고 밝히는 특별한 사목(司牧) 활동을 한다”고 명시했다.103) 교회연합운동에서 모종의 교황 제도를 받아들이려는 경향은 처음부터 있었다.104)

미국의 교회협의회와 천주교 주교대회는 매년 문안과 사절단을 교환하는데, 그런 협력의 한 상징으로, 교회협의회 회장이며 미국의 전 유엔 대사 앤드류 영이 1999년 9월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의 한 천주교 성당에서 그의 취임식을 거행할 것이라고 보도되었다.105)

1999년 10월 31일, 루터교 세계연맹 크리스티안 크라우제 주교와 교황청 일치위원장 에드워드 카시디 추기경은 신교와 구교의 500년 만의 화해 사건으로 ‘칭의의 교리’에 관한 공동선언에 서명했다.106)

2000년 1월 18일 로마의 바티칸 베드로 대성당에서 열린 2000년 대희년 교회일치기도회에 천주교회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영국교회(성공회) 수장 조지 커레이 캔터베리 대주교와 동방정교회 대표 헬리오폴리스 수석대주교 등이 참여하였다.107)

2000년 4월 앨버타 에드몬튼에서 열린 캐나다 교회협의회는 천주교회 온타리오 주교인 안드레 발리를 새 지도자로 선출하였다. 천주교인을 회장으로 뽑은 것은 그 협의회 창립 56년 만에 처음이다.108)

또 오늘날의 은사운동은 천주교인과 개신교인 간의 접착제로 나타난다. 1983년 미국에서만 60만명 이상의 천주교인들이 은사주의적 기도회에 참여하고 있고, 온 세계에서는 약 5천만명이 참여하고 있다고 한다.109)

교회연합운동은 이처럼 개신교회와 천주교회의 연합을 향해 전진하고 있다. 심지어 복음주의 지도자들 가운데 천주교회를 용납하는 경향이 있다. 그 예들은 복음주의에 대해 논할 때 살펴볼 것이다.

천주교회의 치명적 오류들

그러나 천주교회는 개신교회가 교제할 만한 교회인가? 천주교회는 16세기의 모습과 달라졌는가?

교황의 권위에 관한 교리

천주교회는 교회와 전통의 권위를 성경의 권위와 동등히 여기며 로마 교회의 우위성과 교황의 사도 베드로 계승성을 주장하며, 심지어 1870년 바티칸회의는 로마 교황이 그 직분에 따라 믿음과 윤리에 관한 교리를 정의할 때 그는 무오(無誤)하다고 선언했다. 소위 교황무오설을 선언한 것이다. 1964년 제2 바티칸회의도 교황을 “베드로의 계승자, 그리스도의 대리자요 전체교회의 유형적 머리라 부르면서” 교황의 머리됨과 무오한 교훈의 직분에 관한 교리를 “모든 신실한 자들이 확고히 믿어야 할” 교리로 변함 없이 강조하였다.110)

그러나 천주교회의 교황의 권위와 무오성에 대한 교리는 성경에 근거가 없을 뿐 아니라, 모든 기독교 교리들의 기초인 성경의 신적, 절대적, 최종적 권위에 대한 교리에 가장 모순된다. 또 교황 무오의 교리는 교황의 칙령들의 실제 역사에도 모순된다. 역사상 교황들의 사상들과 선언들 간에는 차이점들과 심지어 상호 충돌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그레고리 1세(590-604)는 누구든지 ‘전 세계의 감독’이라는 칭호를 가지려 하는 자는 적그리스도라고 말했으나, 보니페이스 3세(607)는 황제로 하여금 그에게 그런 칭호를 주도록 만들었다. 또한 씩스투스 5세(1585-1590)는 성경 읽기를 권장하였으나, 피우스 7세(1800-1823)와 여러 다른 교황들은 그것을 정죄하였다.

더욱이, 교황들 중에는 두드러지게 부도덕한 자들이 있었다. 요한 12세(955-964)는 살인, 위증, 신성 모독, 간음, 근친 상간 등의 죄로 로마 황제에 의해 처형되었다. 또 알렉산더 6세(1492-1503)는 여섯 아이를 낳았는데, 그 중 둘은 그가 교황이 된 후에 태어났다. 또한 교황들이 상당한 정치 권력을 가지는 것도 주님의 모습과 다르다. 주께서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요 18:36)고 말씀하셨고,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고 하셨다. 그는 정치적 권력을 소유하지도 행사하지도 않으셨다.

그러므로 천주교회의 교황은 하나님의 교회의 참된 머리나 무오한 지도자가 아닐 뿐만 아니라, 참되고 유일한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와 영광을 부당하게 탈취한 자이다.

마리아에 관한 교리

또 천주교회는 예수의 모친 마리아에 대해 여러 가지 교리를 선언하였다. 우선, 천주교회는 마리아의 무죄한 잉태와 승천을 선언하였다. 1854년 교황 피우스 9세는 마리아의 무죄한 잉태를, 1950년 피우스 12세는 마리아의 승천을 선언하였다. 제2 바티칸회의도, “마침내 원죄의 모든 더러움 없이 보존된 그 순결한 동정녀는 . . . 그의 지상 생애가 끝났을 때 몸과 영혼이 하늘의 영광 속으로 들림을 받았다”고 선언하였다.111)

또 천주교회는 마리아에게 기도할 것을 가르친다. 카톨릭 교리서는, “하느님의 어머니이시며 우리의 어머니이신 마리아는 항상 우리를 돌보아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리아에게 신뢰하는 마음으로 각별한 공경과 기도를 드리고 모든 위험과 어려움에서 도와주시기를 청해야 한다”고 가르친다.112) 성자로 추앙된 알폰스 드 리구오리 주교는, “많은 것들을 하나님께 구하고 받지 못하지만, 마리아에게 구하여 받는다,” “우리는 흔히 우리의 구하는 바를 예수께 기원함으로보다 마리아의 이름을 부름으로 더 신속히 얻는다”고 말했다.113)

또 천주교회는 마리아에게 부당한 칭호들을 돌린다. 제2 바티칸회의는, “[마리아는] 그의 지상 생애가 끝났을 때 몸과 영혼이 하늘의 영광 속으로 들림을 받았고 주님에 의해 만물 위의 여왕으로 존귀케 되었다”고 선언하였다.114) 카톨릭 교리서도, “마리아는 . . . 하늘에 오르시어 천상과 지상의 모후(母后)가 되셨다”고 가르친다(114쪽).

또 제2 바티칸회의는, “하늘로 올림을 받은 후 그는 이 구원하는 직책을 버리지 않으셨고 여러 가지 중보사역에 의해 계속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의 선물들을 가져다 주신다. . . . 그러므로 그 복된 동정녀에게 우리는 교회에서 변호자[보혜사], 돕는 자, 은혜 베푸는 자, 그리고 중보자의 명칭들로 빈다”고 선언하였다.115)

알폰스 드 리구오리 주교는 심지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죄인들은 마리아를 통해서만 용서받는다”(83쪽), “마리아에게 의지하지 않는 자는 실패하고 잃어버려진다”(94쪽), “마리아는 하늘의 문이라고 불린다. 왜냐하면 아무도 그를 통하지 않고는 저 복된 나라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160쪽), “구원의 길은 마리아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에게도 열려져 있지 않다”(169쪽), “하늘과 땅의 모든 능력이 그에게 주어졌으므로 마리아의 명령에 모두가 순종한다. 심지어 하나님도 순종하신다. . . . 이와 같이, 하나님은 온 교회를 마리아의 통치 아래 두셨다”(180-181쪽), “그는 우리의 구원, 우리의 생명, 우리의 소망, 우리의 모사, 우리의 피난처, 우리의 도움이시다”(257쪽).

그러나 우리는 성경이 밝히 가르치는 대로 삼위일체 하나님께만 경배하고 기도해야 하며, 그 어떤 피조물에게도 신적 경배와 기도를 올려서는 안 된다(출 20:3; 마 4:10). 또 우리의 구주와 중보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요한복음 14:6,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사도행전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디모데전서 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마리아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필요한 죄인에 불과하다. 누가복음 1:38,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 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마리아에 대한 특별한 높임을 볼 수 없고 도리어 그 반대의 예를 본다. 마태복음 2:11, “[동방박사들은]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무리 중 한 사람이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도소이다’고 예수께 말하였을 때, 그는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고 말씀하셨다(눅 11:27-28). 또 그의 모친과 형제들이 그를 찾아왔을 때 그는 그의 모친을 다른 제자들보다 달리 높이지 않으셨고 오히려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2:50).

그러므로 천주교회의 마리아 교리는 비성경적이며 우상숭배적이다. 마리아에게 기도하고 그를 ‘보혜사, 중보자, 천국의 문, 구원의 길, 천상 천하의 어머니와 여왕’이라고 부르는 행위는 우상숭배이다. 촬스 핫지는, 천주교회가 이론적으로는 마리아를 하나님처럼 섬기지 않는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피조물에게 전지와 전능의 신적 속성들, 및 기도 응답의 신적 사역을 돌리기 때문에 우상숭배적이라고 바르게 지적하였다.116)

칭의(稱義)에 관한 교리

또 천주교회는 칭의(稱義, 의롭다 하심)에 대해 우리와 다르게 가르친다. 천주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복음 진리를 부정한다. 1563년 트렌트 회의는 선언하기를, “누구든지 사람이 공식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이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는다고 말하면, 그는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하였고,117) 또 “누구든지, 사람이 그리스도의 의(義)의 전가(轉嫁)에 의해서만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고 말하면, . . . 혹은 심지어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는 은혜는 오직 하나님의 호의뿐이라고 말하면, 그는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하였다.118)

또한 칭의와 관련하여, 천주교회는 신자들의 죄들의 속죄가 남아 있다고 가르친다. 여기에서 선행과 기도를 통한 속죄의 교리와 연옥의 교리 등이 나온다. 카톨릭 교리서는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고백의 성사로 지옥의 벌은 언제나 사함을 받으나, 세상과 연옥의 벌까지 사함을 다 받는 것은 아니다. 이 유한한 벌의 사함을 받기 위해서 신부는 보속을 정해준다. 고백 성사를 받는 사람은, 우리 죄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죽으신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자기 죄에서 오는 벌을 보상해야 한다(148쪽).

제2 바티칸회의도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죄는 속죄되어야 한다. 이것은 세상에서 이생의 슬픔과 불행과 시련의 일들을 통해서 그리고 무엇보다 죽음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 속죄는 내세에서 불과 고통들 혹은 정결케 하는 형벌들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119)

그러나,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가 완전하며 오직 그 공로에 근거하여 죄인이 죄씻음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사실을 가르친다. 로마서 3:21-22,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 . .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이것은 일한 것이 없이도 은혜로 받는 의이다. 로마서 4:4-5,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한 사람의 의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었다(롬 5:18).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의(義)이시다(고전 1:30).

또 사죄와 칭의는 완전하다. 로마서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로마서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히브리서 10:10,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히브리서 10:14,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성도들의 기도와 선행은 사죄와 칭의의 수단이 아니고 그 결과요 열매이다. 그러므로 천주교회의 칭의론은 복음의 왜곡이며 변질이요 이탈이다. 그것은 다른 복음이다. 사도 바울은,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분명히 말하였다(갈 1:8-9).

미사(Mass)에 관한 교리

또 천주교회는 성찬 교리가 우리와 다르다. 천주교회에서는 성찬을 미사라고 부른다. 천주교회는, 미사가 속죄 제사로서 거기에서 빵과 포도주가 실제로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하며 그리스도께서 미사 때마다 반복하여 죽으신다고 주장한다. 트렌트 신앙고백은, “나는 미사에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위한 참된, 적절한 속죄 제사가 하나님께 드려진다고 고백한다”고 말했다(6조). 또 트렌트 회의는, “누구든지 미사에서 참되고 적절한 제사가 하나님께 드려지지 않는다고 말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선언했다.120)

제2 바티칸회의도, 미사는 “십자가의 제사가 계속되는 제사”이며 “미사의 제사에서 우리 주님은 제물로 죽임을 당하신다”고 선언하였다.121) 우리나라의 카톨릭 교리서도, “미사 성제는 예수님이 바치신 십자가의 제사를 새롭게 하고 되풀이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사제의 손으로 당신 자신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제물로 드리신다. . . . 따라서 미사 성제는 십자가의 제사와 완전히 같으며, 가장 완전한 신약의 제사이다”라고 설명한다(135-136쪽).

그러나 이러한 천주교회의 미사 교리는 그리스도의 단번 속죄의 사역에 대한 왜곡이요 모독이다. 주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다(요 19:30). 그리스도의 이 말씀은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성취하셨음을 나타낸다. 칼빈은 말하기를, 이 말씀은 미사라는 가증스러운 것을 정죄한다고 하였다.122)

히브리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단번에’ 완전한 속죄를 이루셨음을 강조하였다(히 7:27; 9:12, 26, 28). 히브리서 7:27,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 그러므로 우리의 죄를 위해 더 이상 속죄의 제사가 필요치 않다. 히브리서 10:18,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

이상 네 가지의 비성경적, 이단적 오류들을 볼 때, 우리는 천주교회가 참 교회가 아니며 신약교회 2천년 역사상 대표적인, 가장 강력한, 또 지금도 세계적으로 매우 활동적인 이단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천주교회를 적그리스도적이며 우상숭배적 단체라고 말하였다. 루터는 교황 제도를 마귀적이라고 하였다.123) 칼빈도 천주교인들을 그리스도의 치명적 대적자로 간주했고, 천주교회는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왕 때보다 더 불순한 교리와 더 큰 우상숭배를 가지고 있고 다니엘과 바울이 예언했던(단 9:27; 살후 2:4) 바로 그 적그리스도이며124) 교황의 복음을 바울의 복음의 ‘무서운 변질’로 간주하였다.125)

천주교회의 기본 교리들은 지금까지 변하지 않았고 그것은 분명히 비성경적이며 반기독교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천주교회에 대한 종교개혁자들의 태도는 오늘날도 여전히 정당하고 유효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연합운동의 천주교회에 대한 우호적 관계와 포용적 태도는 종교개혁의 귀한 유산을 저버림이며 분명히 성경적 교제의 원리에 위반된다. 성경은 교리적 오류를 분명히 배격하라고 말한다. 우리는 천주교회와의 교제를 끊어야 한다.  

7. 종교다원주의의 비판

오늘날 교회연합운동은 심지어 종교다원주의 경향을 띤다. 종교다원주의란 모든 종교가 같은 하나님을 섬기는 다양한 길이며 결국 다 천국에 이르게 한다는 사상이다. 종교다원주의는 자유주의 신학의 한 결과이다. 폴 틸리히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기독교 자체는 최종적이지도 않고 보편적이지도 않다. 단지 그것이 증거하는 바가 최종적이고 보편적일 뿐이다. 기독교의 이 심오한 변증법을 잊어버리고 교회적인 혹은 정통적인 자기 주장들로 기울어져서는 안 된다. 그러한 자기 주장들에 대항하여, 소위 자유주의 신학은 한 종교가 최종성이나 심지어 우월성을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함에 있어서 옳다.126)

이러한 사상은 종교다원주의의 길을 열어 놓았다.

특히, 오늘날의 교회연합운동은 종교적 다원주의의 경향을 보인다. 1983년 WCC 뱅쿠버 총회는 WCC 35년 역사상 최초로 힌두교, 불교, 유대교, 이슬람교, 시크교 등 다섯 개 세계 종교들의 지도자들을 초청하여 공식적으로 연설케 하였다.

WCC 뱅쿠버 총회는, “우리는 우리가 증거하는 예수의 탄생, 생애, 죽음, 부활의 독특성을 주장하는 한편, 다른 종교들을 가진 사람들 가운데서의 종교적 진리의 추구에 하나님의 창조적 사역이 있음을 인정한다”고 선언하였다.127)

WCC 종교간의 대화위원회의 지도자인 죤 테일러(John Taylor)는 대표자들에게 말하기를, 모든 종교는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데 협의회 회원들 가운데 일치가 있다고 하면서, “이슬람교도들과의 대화가 이슬람교도들에 대한 선교 활동이 계속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 방해된다. 우리는 이슬람교도들 가운데서의 모든 선교적 노력을 중지해야 한다. . . . 많은 유대교인들이 제발 우리를 그냥 놔두라고 말한다.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태도는 그것을 존중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라고 하였다.128)

더욱이, WCC 인사들 중에는 기독교의 절대성을 명백히 부정하는 자들이 있다. WCC 종교 간의 대화위원회의 의장인 더크 멀더(Dirk C. Mulder)는 “당신은 불교인이나 힌두교인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기자의 질문에 대해 “물론이죠! 물론이죠!”라고 대답하였다.129)

WCC의 타종교들과 이념들과의 대화위원회 의장인 웨슬리 아리아라자(S. Wesley Ariaraja)는 1985년 WCC를 통해 출판된 성경과 타종교인들(The Bible and People of Other Faiths)이라는 그의 책에서 기독교의 절대성을 명백하게 부정하였다. 그는 절대적 의미의 진리는 아무도 파악할 수 없다고 말한다(p. 27). 그가 기독교의 절대성을 부정하는 이유는, 성경이 서로 다르고 모순된 기독론을 가지고 있고(pp. 21, 22, 67) 성경의 언어가 신앙의 언어이기 때문이라고 한다(pp. 6, 9, 24, 26). 또 그는 말하기를, “타종교인도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우리는 형제 자매이며 순례자이지 이방인이 아니다. . . . 힌두교인은 회개의 대상이 아니다. 그는 동료 순례자이다”라고 한다(pp. 9-11, 56). 심지어, 그는 “만일 당신이 나에게 참된 증거의 가장 큰 방해거리이었던 한 가지 요인을 골라내라고 요구한다면, 나는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에 대해 주장하는 절대적 주장들이 그것이라고 말할 것이다”라고 말한다(p. 53).

1990년 1월, WCC의 살아 있는 종교들에 속한 사람들과의 대화위원회의 스위스 바아르에서의 모임은 15개국에서 온 21명의 헬라정교회, 개신교회, 천주교회 신학자들과 전문가들이 참여하였고 ‘종교적 다원성: 신학적 관점들과 선언들’이라는 제목의 문서를 작성하였다.130) 그 문서는 선언하기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길 외의 다른 길들의 추종자들 가운데서 선함과 진실과 거룩을 보고 경험했기 때문에 . . . 우리는 우리 자신이 구원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명백한 인격적 의탁에 제한시키는 신학을 넘어서서 나아갈 필요성을 인식한다는 것을 발견한다”라고 하며 십자가와 부활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구원적 신비는 “하나님의 계획이 그 성취를 향해 펼쳐질 때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들로 매개(媒介)되고 표현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우리 밖에 있는 자들이 그들의 구체적 상황 속에서 그리고 그들을 지도하고 감동하는 종교적 전통들의 구조 안에서 성실하고 진실한 삶을 살 때,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방법들로 그들에게 주어질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한다.131)

1991년 호주 캔버라에서 열린 WCC 7차 총회에서 한국의 정현경은 주제 강연에서 한(恨)을 안고 죽어간 영들, 예를 들어 하갈의 영, 우리아의 영, 입다의 딸의 영, 헤롯에게 죽임 당한 어린아이들의 영, 잔다크의 영, 십자군 파병 때 죽어간 백성들의 영, 지구상의 토착민들의 영, 나찌 시대에 가스실에서 죽은 유태인들의 영, 히로시마와 나카사끼에 투하된 원자폭탄으로 죽임 당한 자들의 영, 광주에서, 천안문에서, 리쿠니아에서 죽은 자들의 영, 심지어 인간의 탐욕으로 파괴되고 착취된 땅과 공기와 물의 혼 등을 부르는 샤마니즘적 행위인 초혼(招魂)적 행위를 하였다.132)

감신대학 전 학장 변선환 교수는 기독교 사상에 쓴 글에서 “저들의 종교[타종교들]도 그들 스스로의 구원의 길을 알고 있다”고 말하고,133) 또 그는 “그리스도만이 보편적으로 유일한 구속자이신 것이 아니다,” “우주적 그리스도는 마리아의 아들 예수와 동일시할 때 거침돌이 된다”고 했다.134) 심지어 그는 “그리스도는 힌두교 안에 있다”고 주장하였다.135) 또 그는 크리스챤 신문 1990년 12월 8일자에 기고한 글에서 “기독교 밖에 구원이 없다는 교리는 신학적인 토리미의 천동설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고 또 “종교의 우주는 기독교도 다른 종교도 아니고 신을 중심하여 돌고 있다는 것을 기독교는 인정해야 한다”고 했다. 또 그는 “예수님을 절대화, 우상화시키며, 다른 종교적 인물을 능가하는 일종의 제의의 인물로 보려는 기독교 도그마에서 벗어나 . . . 신 중심주의로 전환되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또 그는 현대사조라는 정기간행물에 기고한 글에 말하기를, “교회가 말하지 않아도 이미 선행[先行]하여 그리스도를 섬기고 있으며 기독교의 선교사가 하나님 나라를 비기독교 세계에 가지고 오지 않아도 이미 하나님 나라는 거기서 역사하고 있다”고 말했다.136)

한신대학의 김경재 교수는 조선일보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유일신(monotheism)’ 개념을 올바로 이해하면 자연스럽게 다른 종교들을 인정하게 됩니다. 기독교에서 신(神)이란 모든 것을 통섭(統攝)하고 근원지우는 존재를 말합니다. 여호와, 야훼 등은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이 체험한 신의 모습을 일컫는 것입니다. 로고스(Logos), 법(法), 도(道), 이(理)는 모두 진리를 가리키는 용어들로 문화권에 따라 달리 표현한 것입니다. 이중 로고스만이 옳다고 주장할 근거는 없는 것이지요”라고 말했다.137) 또 그는 그의 저서 이름 없는 하느님이라는 책에서, “각 역사적 종교는 서로 다양한 구체적 삶의 자리에서 형성된 고백된 ‘구원의 길들’을 열고 있다”고 전제한 뒤, “타종교에 대한 열린 마음과 존경심을 갖되 자기가 귀의하는 종교에 깊이 헌신한 것, 이것이 신앙의 자세다”라고 말하며, 또 “하느님은 이름 없는 존재로 인간이 자신이 살아온 역사와 문화와 풍토와 환경 속에서 자신에게 가장 적실한 언어로 붙인 이름들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하나님이기도, 알라이기도, 비로자나불이기도, 브라만이기도, 한울님이기도하며 신, 로고스, 태극이거나 혹은 이름 없이 가슴 속에 담아두며 흠모하는 우주적인 어떤 존재이기도 하다”라고 하였다.138)

그러나 이런 종교다원주의 사상은 비성경적이며 이단적이다. 그것은 오늘날 교회의 배교적 상황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구약시대에도 교회가 속화되었을 때마다 그런 현상이 나타났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불성실하였고 바알과 아스다롯이나 또 다른 이방신들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여호와 종교를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여호와도 섬기며 다른 이방신들도 섬겼다(왕하 17:33). 이것은 종교다원주의적 태도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에 관한 진리는 결코 애매모호하지 않고 명확하다. 출애굽기 20: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신명기 4:39, “그런즉 너는 오늘날 상천 하지에 오직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다른 신이 없는 줄을 알아 명심하라.” 이사야 43:10,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 이사야 45:6, “해 뜨는 곳에서[동양에서]든지 지는 곳에서[서양에서]든지 나 밖에 다른 이가 없는 줄을 무리로 알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 시편 96:5, “만방의 모든 신은 헛것이요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

또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도 결코 애매모호하지 않고 명확하다. 요한복음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사도행전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디모데전서 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더욱이, 성경은 이방 종교들이 모두 헛됨을 밝히 가르친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앞에 인용된 성경말씀들은 다 이 사실을 내포한다. 특히, 시편 96:5, “만방의 모든 신은 헛것이요.” 예레미야 10:11, “너희는 이같이 그들에게 이르기를 천지를 짓지 아니한 신들은 땅 위에서, 이 하늘 아래서 망하리라 하라.”

심지어 성경은 이방 종교가 마귀적이며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음을 말한다. 예레미야 51:44, “내가 벨을 바벨론에서 벌하리라.” ‘벨’은 단지 하나님에 대한 바벨론적 이해가 아니라, 거짓신이다. 고린도전서 10:20,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에베소서 2:2-3,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요한일서 5:19,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그러므로 여기에 전도의 필요성이 있다. 마태복음 28:19,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 디모데후서 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요한복음 8:24,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그러므로 종교다원주의는 이단이다. 오늘날 교회연합운동이 종교다원주의적 경향을 가지는 것은 대단히 잘못이다. 교회연합운동은 매우 비성경적인 운동이다. 하나님의 교회들이 진리 안에서 하나 되는 것은 좋지만, 오늘날의 교회연합운동은 실제로 자유주의 신학과 천주교회를 포용하는 방식으로 하나됨을 추구하고 있다. 자유주의 신학은 명백히 이단이며 또 천주교회도 분명히 기독교의 변질과 이탈이다. 그러므로 그런 이단 사상을 포용하는 연합과 일치는 하나님 앞에서 매우 큰 잘못이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교회연합운동은 심지어 이방 종교들까지 포용하려는 종교다원주의적 경향을 보이고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현대적 바벨탑 운동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믿는 신실한 교회들과 성도들은 종교다원주의의 오류와 또한 오늘날 교회연합운동 전반의 문제점들을 깨닫고 그런 운동이나 활동들에 참여하지 말고 그것들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 신실한 목사들은 성경적이고 보수적인 교회들을 세워야 하고 신실한 성도들은 그런 교회들에 가입해야 한다. 고린도후서 6:14,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 에베소서 5:11,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16세기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말하기를, “하나님의 말씀이 위태하게 되는 그런 사랑과 일치는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하였다. 

8. 복음주의의 문제 (1)

오늘날 교회의 또 하나의 중대한 문제는 복음주의의 문제이다.

복음주의가 무엇인가?

복음주의는 16세기의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회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개신교회를 복음주의라고 부른 것은, 신약성경에 밝히 증거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을 왜곡시키고 복음 대신 성례나 신자의 공로적 선행을 가르쳐왔던 천주교회와 구별하기 위함이었다. 이와 같이, 복음주의는 역사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을 믿는 입장, 곧 성경적 기독교를 가리키는 용어이었다.

20세기 초 자유주의 신학이 미국교회에 퍼지기 시작하고 1940년대에 소위 ‘신복음주의’ 운동이 일어나기 전까지도 복음주의는 전통적 개신교회의 입장을 대변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의 근본 진리들을 수호하는 전투적 입장을 취했던 근본주의도 복음을 믿고 옹호한다는 점에서 복음주의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자유주의 신학이 역사적 개신교회들 속에 들어와 교회들을 부패시키고 변질시켰던 20세기 중엽 이후, 복음주의적 교회들은 두 입장과 진영으로 나뉘었다. 하나는 자유주의자들에 대해 포용적이고 타협적인 입장이었고, 다른 하나는 자유주의자들과의 교제의 단절을 주장하는 입장이었다. 전자는 신복음주의139) 혹은 복음주의라고 불리었고 후자는 근본주의라고 불리었다.

미국에서 1920년대의 소위 보수주의(근본주의)와 자유주의(현대주의) 간의 신학적 논쟁에서 자유주의가 외형적 승리를 거둔 후, 1930년대에 성경적 교회들이 자유주의적 혹은 포용주의적 대교단들로부터 분리되는 일이 있었고, 1940년대에 와서 ‘신복음주의’라는 새 경향이 일어났다. 그들은 진리를 위해 계속 싸우기보다 평화와 안정을 더 좋아하였다. 그들은 성경을 그대로 믿는 보수적 교회들 간의 교제와 협력보다 자유주의 교회들을 포함하는 넓은 교제와 협력을 추구하였다.

이런 입장을 처음으로 대변했던 인물은 미국의 풀러신학교 초대 교장이었던 해롤드 오켕가140)이었다. 그는 풀러신학교 교장 취임시 분리를 주장하는 근본주의자들을 비난하면서 자기 신학교는 대교단들의 목회자들을 훈련시킬 것이라고 선언했다.141) 그는 1948년 풀러신학교 강연에서 ‘신복음주의’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그는 1957년의 한 소식지에서 “신복음주의는 그 전략을 분리에서 침투로 바꾸었다”고 말했고,142) 또 후에 그는 “신복음주의는 분리를 거절함에 있어서 근본주의와 달랐다”고 회고하였다.143)

1942년 미국복음주의자협회(NAE)가 조직되었고, 1947년 미국의 풀러(Fuller)신학교가 설립되었다. 1951년 20개국의 복음주의자협회들이 모여서 세계복음주의협의회(WEF)를 만들었다(2001년 WEA로 개명함). 1956년 크리스챠니티 투데이(Christianity Today)지가 창간되었다. 이것들은 모두 신복음주의의 대표적 기관들이 되었다.

역사적 대교단들이 자유주의 신학을 포용하는 ‘넓어진’ 교회들이 된 후, 거기에서 분리되어 나온 소수의 보수적 교회들이 과연 기독교회의 참된 계승자가 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제기되었다. 신복음주의자들은 그렇지 못하다고 느꼈다. 그러므로 그들은 분리의 입장을 포기하고 대교단들 속으로 다시 돌아가서 그것들을 개혁시키고 회복시키기를 원하는 소위 ‘침투’의 입장과 전략을 가지게 되었다.

신복음주의자들은 ‘근본주의’라는 용어를 싫어하였고 ‘복음주의’라는 말을 전유물처럼 사용하였다. 각국의 ‘복음주의자협회’(NAE)나 ‘세계복음주의협의회’(WEF)는 다 ‘복음주의’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죠지 마스든의 관찰과 판단대로, 신복음주의자들은 점차 자신들을 단순히 복음주의자로 부르기 시작하였고 신복음주의는 오늘날 흔히 단순히 ‘복음주의’로 불린다.144) 이와 같이 오늘날 ‘복음주의’는 신복음주의와 거의 동의어이며 신복음주의적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윌리엄 애쉬브룩은 복음주의를 근본주의에 대해 혹평하면서 자유주의에 대해 동정적인 ‘신중립주의’라고 표현했다.145) 개리 코우언은 신복음주의를, 자유주의자가 이단이 아니고 견해가 다른 형제이며 따라서 그를 전도의 일에 참여시킬 수 있다는 입장이라고 표현했다.146) 박형룡 박사는 신복음주의를, 근본주의에 대해 가혹히 비판하고 어떤 전통적 교리들에 대해 양보하고 WCC의 사회복음운동에 따라가고 자유주의자들과 우호적, 협력적 관계를 가지고 배교적인 교단을 떠나지 않고 거기 머무는 입장이라고 비평했다.147) 

자유주의 포용의 예들

복음주의의 자유주의 포용의 대표적 예는 빌리 그레이엄의 전도 활동이었다. 빌리 그레이엄의 본래 입장은 건전하였다. 그는 1951년 4월 파일롯지에 “우리는 어떤 형태의 현대주의도 너그럽게 보거나 교제하지 않는다”고 썼고, 밥 죤스에게 보낸 1952년 6월 3일자 편지에서도 “현대주의자들은 어디에서나 우리를 후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린스보로와 슈립포트 외에 어느 도시에서나 교회협의회(NCC)의 후원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라고 썼다.

그러나 그는 그 후 뉴욕, 샌프란시스코, 필라델피아, 시카고, 로스앤젤레스, 컬럼버스 등에서의 전도 집회들에서 자유주의적 교회협의회의 후원을 공공연히 받았다.148) 그는 로스앤젤레스에서 전도집회시 제랄드 케네디 감독을 명예대회장으로 임명했는데, 케네디 감독은 하나님의 좋은 소식이라는 그의 책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명확히 부정한 자이었다.149)

데이빗 클라우드는 빌리 그레이엄의 문제점에 대해, 성경이 무오(無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변호하지 않는 점,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이 기독교 신앙의 필수적 부분이 아니라고 말하는 점,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는 구원을 강조하지 않는 점, 지옥이 불 붙는 고통의 장소라고 믿지 않는 점, 구원받지 못한 이방인들이 지옥에 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점, 신학이 더 이상 자기에게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고 말한 점, 이단적인 로버트 슐러의 복음에 대한 잘못된 개념들에 동의한 점,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자유주의자들을 칭송한 점, 수천명의 회심자들을 배교적 자유주의 교회들에 넘겨준 점 등을 열거하였다.150) 컬럼비아 국제대학교 명예총장 로벗슨 맥퀼킨은 빌리 그레이엄이 근본주의자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 즉 천주교인, 헬라정교인, 자유주의자에게 따뜻한 에큐메니칼 포용주의적 신념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151)

신복음주의 기관인 미국복음주의자협회(NAE)는 처음부터 자유주의적 대교단들의 지교회를 회원으로 받아들였다. 성경의 무오와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 교리를 포함한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부정하는 마틴 마티는 1992년 미국복음주의자협회에서 강연하였다.152) 또 그 협회 회장 돈 아규는 그 협회가 창설된 이래 최초로 자유주의적 미국교회협의회(NCC) 총회에서 연설하였다.153)

풀러신학교는 처음부터 대교단들의 목회자들을 훈련시키기를 원했다. 그 학교는 프린스톤 신학교 전 교장인 신정통주의자 죤 매케이를 연사로 초청하였었다. 그 학교의 1984-85년 요람은 자유주의적  천주교 신부 레이몬드 브라운을 강사로 열거하였다.154) 아더 후크는 1999년 7월 27일 풀러신학교를 방문하여 죤 골딘게이 교수의 강의에 참석했는데, 골딘게이 교수가 “여리고성이 있었고 그 성벽들이 무너져내렸다는 고고학적 증거는 없다. . . . 아마 이것은 비유일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증거하였다.155) 이 학교는 처음에는 성경의 무오를 옹호했으나 오늘날에는 이 교리를 거부하고 은사운동을 조장하며156) 여성 안수를 강하게 지지한다.157)

세계복음주의협의회(WEF) 회장 데오도르 윌리암스는 WEF 뉴스레터 1993년 8월호에서 “세계교회협의회(WCC) 소속 교단 내의 복음주의자들은 그대로 머물러 복음주의 입장을 취하고 그 교회 안에서 복음주의적 영향을 끼치려고 해야 한다”고 말했다.158)

신복음주의 대변지인 크리스챠니티 투데이 1998년 9월 7일자는 레이몬드 브라운의 신약개론을 높이 추천하였다. 그러나 브라운은 예수께서 전지(全知)하신 하나님이 아니고 오류를 범하였다고 말한 자유주의적 천주교 신부이다. 그는 WCC에서 활동적이고 1971년 미국 뉴욕의 자유주의적 유니온 신학교에서 처음으로 종신직 천주교 교수가 되었다.159)

오늘날 복음주의가 자유주의를 포용하는, 우리나라에서의 예들을 보자. 1986년 9월 8일 한국장로교협의회는 새문안교회에서 노춘경씨 수세 100주년 기념 행사로 예장통합, 예장합동, 기장, 예장고신, 예장대신 등 5개 장로교단 연합성찬예배 및 강연회를 가졌다.160)

1990년 11월, 한국복음주의협의회는 홍콩 국립경기장에서 개최되는 빌리 그레이엄 홍콩 전도대회의 한국 위성중계 전도대회의 장소로 부산 수영로교회, 대구 서문교회, 대전 중앙교회 등 예장합동측의 큰 교회들을 채택하였다.161)

1991년,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총회는 “기감과 기장의 가입 문제는 일단 긍정적인 방향으로 추진되고 있음을 거듭 밝혔다.”162) 이 단체는, 자유주의 교단인 기감과 기장을 배제할 의사가 없다.

1993년, 한국장로교회 일치를 위한 특별좌담에서 예장통합 박성원 목사는 “개인 구원, 사회 구원을 각기 외치면서 교회가 진보, 보수로 나뉘어지는 것은 원칙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고, 한국의 진보교회와 보수교회가 일치하려면 타협이 필요하며, 예컨대 보수측에서 ‘성경이 유일한 계시이다’는 입장을 고수하면 장로교 일치는 대단히 어렵다고 주장했다. 기장 신학연구소장인 김원배 박사는 교회 일치는 진정한 교회 회복 운동인데, 교회 일치를 위해 도그마에서 벗어나 봉사의 자세를 가져야 하며 교리만 따진다면 끝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예장대신 총회 총무 김재규 목사도 한국교회가 교리를 따지지 말고 선교에 함께 참여함으로 일치를 이루자고 말하며 “신학에 대한 고집이 곧 한국장로교회 일치의 저해요인”이라고 주장했고, 또 과거엔 김재준 목사를 이단이라고 정죄했으나 오늘날 보수 신학에서 그를 이단이라고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163)

1993년, 한국장로교협의회 소속 5개 장로교단 총회장 공동선언문은 한국 장로교회들이 한 교회가 되기를 소원하면서 “우리 한국의 장로교단은 신앙의 본질적 항목들에 있어서 결코 분열될 만큼 의견의 차이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라고 선언하였다.164)

1994년, 한국기독교총연합회는 3·1절 기념예배 설교를 자유주의자로 알려진 강원용 목사에게,165) 3월 8일 임원취임예배 설교를 기장측의 조향록 목사에게 부탁했고,166) 또 4월 9일 남북교회협력을 위한 세미나 강사 명단에 강원용 박사를 포함하였다.167)

1995년, 한국복음주의협의회는 광복 50주년 기념 국제심포지움의 강사 중에 기장측 조향록 목사를 포함하였다.168)

1996년, 한국복음주의협의회 발표회에서, 홍순우 목사는 진보적 교회와 보수적 교회가 다 반성하고 한국교회 전체 정서에 맞는 연합운동을 전개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며, “앞으로 NCC나 한기총 등의 연합기관이 합력하여 대통합을 이루어야 한다”고 제안했다.169)

1996년, 한국복음주의협의회 월례발표회에서 한명수 목사(한기총 전 총무, 당시 합동측 기독신보 주필)는 진보와 보수는 동전의 양면과 같으며 어느 한 쪽을 강조하면 기독교의 기본 진리를 완전히 충족시킬 수 없다고 말하면서 한기총과 교회협[NCC]이 새로운 이름을 가진 단체로 우뚝서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한국복음주의협의회 부회장 김명혁 목사(합동신학교 교수, 강변교회 목사)도 “양기구는 기구적 통합을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70)

1997년 3월, 예장통합, 예장합동, 예장고신, 예장대신, 예장개혁, 기장 등 장로교 9개 교단이 참여하고 있는 한국장로교협의회 토론회에서 예장합동측의 한명수 목사는 “개신교계의 분열은 하나님의 뜻보다 사람들의 생각을 앞세운 데서 생긴 결과”라고 말했다.171)

1997년, 예장대신측 전 총무 조순태 목사는 사회가 정치적, 경제적, 윤리적으로 위기상황일 때 교회연합이 ‘해결책’이라고 주장하면서 “내가 마땅치 않게 여기는 교파도 같은 사도신경을 믿고 있으며 . . . 교리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172)

1997년, 예장고신 총무 심군식 목사는 사회 문제와 사이비 이단이 판치는 현실에서 한국교회는 보수와 진보를 구별하여 힘을 약화시키지 말고 일치단합된 연합운동으로 대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173)

1997년 7월, 예장합동, 예장고신, 예장통합 등 3개 교단의 전국남전도회 혹은 남선교회 연합회 임원들은 교단 간의 화합과 일치운동에 앞장설 것을 다짐하는 결의문을 채택하였다.174)

1998년 2월,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지 덕 대표회장은 기자회견에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와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의 차이가 이제는 그다지 크지 않다고 말했다.175)

1998년 6월, 예장합동, 예장통합, 예장고신, 기장의 목회자로 구성된 한국장로교목회자협의회(회장: 옥한흠 목사)는 “교회의 대사회적 영향력의 약화가 한국교회가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와 한국기독교협의회(교회협)로 나눠진 것에서 연유한다”고 말하며 “한국교회 일치와 연합은 늦출 수 없는 긴박한 과제”라고 주장했다.176)

1998년, 한국장로교총연합회의 회원교단 신임총회장과 총무 임원 축하예배에서 길자연 목사(예장합동 총회장)는 “장로교회가 하나되지 못하고 자기 입장만 고집해 심심한 유감을 표한다”며 “이제라도 우리 모두 하나 되기 운동에 적극 참여하자”고 말하였다.177)

1999년 1월, 예장통합측 총회(총회장: 유의웅 목사)의 신년하례회에 초청된 예장합동측 총회장 길자연 목사(서울 신림동 왕성교회)는 “통합과 합동이 이심전심으로 장로교 연합과 일치 운동을 벌여 올해는 하나로 되어가는 분기점이 돼야 한다”고 강조하였다.178)

1999년, 복음주의 장로교단인 예장합동측 총회총대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응답자의 80% 이상이 예장통합과의 강단교류와 신학교류, 연합사업을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고, 또 64%가 통합측과의 교단 통합에 대해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179)

1999년 6월 27일, 예장합동측의 역사적 승동교회(박상훈 목사)와 예장통합측의 대표적 교회인 영락교회(이철신 목사) 간의 강단교류가 양교단의 분열 40년 만에 승동교회에서 이루어졌다.180)

2000년 3월, 한국기독교교단총무회는 교회연합운동에 최선을 다하기로 하고 교회협과 한기총의 연합에 적극 협력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교단총무회는 예장통합, 예장합동, 예장고신, 예장합동보수, 예장개혁합신, 침례교, 감리교 등이 속해 있다.181)

이상의 예들은 우리나라의 보수적 교단들이 자유주의 신학에 대해 무지하거나 고의적으로 타협하고 있음을 증거한다. 이것이 복음주의의 문제이다. 오늘날 복음주의는 단지 복음을 믿는 입장이 아니고 이단적 자유주의 신학이나 자유주의적 혹은 포용주의적 교단들과 교제를 끊지 않고 서로 교제하고 협력하는 포용적 입장을 나타낸다. 오늘날 보수적, 복음주의적 교회들은 자유주의 신학을 배격하지 않고 포용함으로써 신학적으로, 신앙적으로 점점 더 해이해지고 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단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고 교훈하였다(딛 3:10). 복음주의는 성경의 이러한 교훈을 저버린다. 복음주의의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은 잘못된 교제의 문제이다. 그것은 사도들을 통해 전달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것이요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명백히 반대된다.  

9. 복음주의의 문제 (2)

오늘날 복음주의의 문제는 자유주의 신학을 포용하는 것뿐 아니라, 또한 은사운동과 천주교회를 포용하는 것이다.

은사운동과 천주교회 포용의 예들

오늘날 복음주의는 은사운동에 대해 포용적이다. 아니, 포용적인 정도가 아니고 많은 은사주의자들을 포함한다. 1993년, 카리스마지는 오순절파가 미국복음주의자협회(NAE) 회원교회들의 약 51%를 차지하고 있다고 말하고, 어떤 보고서는 약 80%라고 한다. 또 미국복음주의자협회 회장 케빈 매노이아는 자신이 복음주의 운동에서 은사주의자들과 비은사주의자들 간에 일치의 다리를 놓기를 원한다고 말했고,182) 또 그는 복음주의자협회가 존 윔버의 빈야드 운동 같은 은사운동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183)

오늘날 복음주의는 천주교회에 대해서도 포용적이다. 이런 사실은 대표적인 복음주의자들의 말들과 행위들에서 확증된다. 1993년 6월, 빌리 그레이엄은 미국 피츠버그에서 1,050개의 교회들과 65개 교단들이 협력한 세 번째 전도대회를 개최하였는데, 이 대회는 여섯 명의 천주교인들을 실행위원에 포함시켰다.184)

1993년 빌리 그레이엄 전도협회 이사 스털링 허스턴은 말하기를, “지난 10-15년간 그레이엄 전도대회에서 천주교회의 참여가 크게 늘어났으며 소수의 천주교회 지도자들은 이제 전도대회 계획위원회들의 공식적 대표자들로 봉사한다. 천주교회 신자들은 안내위원들, 성가대원들, 심지어 상담위원들로 환영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185)

휴스턴 크로니클(Houston Chronicle) 1997년 3월 30일자는 빌리 그레이엄의 알라모도움에서의 전도집회에 대한 보도에서, “그 지역 천주교회도 중심적 역할을 했는데, 그것은 교황의 1987년 성안토니오 방문 기간에 보인 그 침례교인의 후원에 대한 일종의 보답이었다”라고 말했다.186)

복음 전파(Proclaiming the Gospel) 1997년 6월호는 말하기를, “천주교는 이제 빌리 그레이엄의 전도대회들에 참여하고 있다. 전도대회를 선전하고 촉진시키고 천주교 상담자들을 사용하는 대가로, 빌리 그레이엄은 믿음을 고백하며 앞으로 나오는 모든 천주교인들을 그들의 천주교회로 돌려보내겠다고 그 지역의 주교와 약속한다”고 하였다.187)

크리스챠니티 투데이 1998년 8월 10일자는 이렇게 말했다: “인구 약 백만명의 [오타와] 지역을 위한 지난 6월 25-28일 빌리 그레이엄의 전도 활동에서, 천주교인들과 개신교인들 간의 간격이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그 전도대회를 후원한 470개의 지역 교회들 가운데, 60개는 천주교회이었다. 천주교회의 참여는 모든 그레이엄 전도대회 가운데 가장 중대하였다.” 또 그 잡지는, 새 신자들 중 얼마는 천주교회에서 데려갔다고 말했다.188)

데이빗 클라우드는 빌리 그레이엄의 문제에 대해, 그가 천주교의 복음이 자기가 전하는 복음과 동일하다고 말했고 수천명의 회심자들을 천주교에 넘겨주었고 천주교 주교들을 강단에 초청하고 그의 결신 초청시 앞으로 나오는 사람들을 축복하게 하였다고 말한다.189)

대학생 선교회(CCC)의 창설자요 총재이었던 빌 브라잇은 1969년 천주교회에 대해 말하기를, “우리는 천주교회를 공격하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교회 안에서 힘있는 역사를 하고 계심을 믿으며 세계를 복음화시키는 일을 돕기 위하여 수백만의 천주교인들을 사용하실 것을 의심치 않는다”라고 하였다.190) 대학생 선교회에는 이미 1970년대에 간사들 가운데 천주교인들이 있었고191) 1973년의 ‘키(Key) ’73’이나, ‘여기에 생명 아메리카가 있다’는 주제의 1976년 집회들에는 천주교인들의 참여와 협력이 있었다.192)

빌 브라잇은 촬스 콜슨(교도소 선교회), 제임스 패커 등과 함께 “복음주의자들과 천주교인들과 함께”(ECT)라는 상호 인정과 협력을 선언한 1994년의 선언서에 서명한 일로 비난을 받고 그의 입장을 취소하라는 요청을 받았지만, 그는 천주교인들 가운데 수천만명의 참된 신자들이 있다고 말하면서 그 요청을 거절하였다.193)

또 빌리 그레이엄뿐 아니라, 리버티 대학의 제리 팔웰, TV 전도자 잭 반 임페, TV 전도자 제임스 로빈슨, 에드 답슨 등의 복음주의자들은 천주교회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대해 찬사를 보냈다. 1985년, 에드 답슨은 말하기를, “교황 제도가 적그리스도적이라고 말하는 극단주의자들은 . . . 그리스도의 사랑이 없다”고 했다.194)

달라스 신학교 교장 척 스윈돌은 1997년 10월의 한 서신에서 테레사 수녀를 ‘주목할 만한 여자’라고 불렀다.195) 가정사역 전문가 제임스 답슨은 테레사 수녀를 그리스도인으로 인정했고 그것은 “그가 그의 생애에서 성령의 열매를 나타내었기 때문이다”고 말하였다. 잭 반 임페는 그녀가 구원받지 못한 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자들을 꾸짖었다.196) 그러나 빌 잭슨은 바르게 말하기를, “테레사 수녀는 누구와 사진을 찍을 때마다 영혼이 연옥을 떠나기를 기도하였고, 성찬떡에 대한 사제의 축복이 아니면 예수를 소유할 수 없다고 말하였고, 교황에게 마리아를 ‘그리스도인의 협력구속자, 협력중보자 및 보혜사라고 부르기를 공공연하게 간청하였다”고 하였다.197)

크리스챠니티 투데이 1998년 3월 2일자에 의하면, 잭 반 임페는 최근에 교황을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변호하는 데 그의 전체 방송을 사용하였다. 또 그는 다음번 교황이 요한계시록의 그 거짓 선지자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대해 경고하면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의 형제 자매들로서 결합되었다”고 말했다.198)

‘복음주의자들과 천주교인들과 함께’(ECT)라는 문서는 복음주의자들과 천주교인들 간의 다리 놓기의 한 예이다. 미국복음주의자협회(NAE)의 전 회장 존 화이트는 그 문서에 서명하였고 천주교인들을 복음주의자들 가운데 ‘가장 가까운 친구들’이라고 불렀다.199) 

타협은 큰 잘못이다

복음주의의 문제는, 비록 20세기 중엽 미국교회에서 일어난 문제였지만, 어느 시대, 어느 지역에서나 경험될 수 있는 문제이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많은 보수적 교회들은 복음주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복음주의의 문제는 신학적 변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제에 있다. 그것은 그들의 자유주의자들과 천주교인들과의 교제의 문제이다. 복음주의자들의 다수는 자유주의자들과 천주교인들을 비평하거나 배격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교단들이 고의적으로 그들을 포용할 때도 그 교단들 안에 머물러 있으며 그들과 교제하고 협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매우 잘못된 일이다.

구약시대의 유다 왕 여호사밧은 신복음주의자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성경은 유다 왕 여호사밧을 전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행한 경건한 왕으로 증거하지만(대하 17:6), 그는 부귀와 영광이 컸을 때 우상숭배자인 이스라엘 왕 아합과 더불어 교제하였고 서로 사돈 관계까지 맺었다(대하 18:1). 또 그는 아합을 도와 길르앗 라못에서 아람과 전쟁하는 일에 참여하였다. 그런 일이 있자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예후를 보내셔서 그를 책망하셨다. “왕이 악한 자를 돕고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이 가하니이까? 그러므로 여호와께로서 진노하심이 왕에게 임하리이다”(대하 19:2).

여호사밧 왕의 이러한 잘못된 교제와 연혼(連婚)으로 인해 북쪽 이스라엘의 우상숭배가 남쪽 유다 왕국에도 들어왔고(왕하 8:18; 대하 21:6) 그것이 유다 왕국의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 교제의 문제는 작은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결국 유다 왕국의 멸망을 가져왔다. 이것이 오늘날 복음주의의 근본적인 문제이다. 복음주의적 목사들의 넓은 교제는 교회들을 점점 해이하게 만들고 사상적으로 부패시키고 마침내 배교에 이르게 할 것이다.

오늘날 많은 보수적 교회들이 복음주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분별력 없는 많은 보수적 목사들은 화평과 일치와 사랑을 말하면서 성경의 교훈을 실행하려 하는 자들을 오히려 비난한다. 많은 목사들이, 다른 여러 일들에 열심이 있으나, 교회의 교리적 순결성에 대해서 무관심하다. 그들은 하나님이 순결한 교회를 원하시고 그것을 구원 계획의 목표로 삼으셨다는 것(엡 5:25-27)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교회의 교리적 순결에 대한 진지한 노력을 저버리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매우 큰 잘못이다.

성경은 이단을 분별하고 책망하라고 말하며 또 이단을 주장하거나 전파하는 자로부터 분리하라고 말한다. 에베소서 5:11,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유다서 3,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 우리는 진리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한다.

고린도후서 6:14-17,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 . .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분리하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우리는 잘못된 교제를 피해야 한다.

로마서 16:17, “너희 교훈을 거스려[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디도서 3:10,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 요한이서 10-11,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니라.” 우리는 이단자들과 교제하지 말아야 한다.

데살로니가후서 3:6, 14,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규모 없이[무질서하게]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우리는 믿는 교우라도 성경 교훈을 불순종할 때 그와 교제를 끊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주의는 다음과 같이 평가할 수 있다. 첫째로, 복음주의는 성경에 밝히 계시되고 전통적으로 믿어온 성경의 근본 진리들에 대한 확신이 없다. 둘째로, 복음주의는 자유주의 신학이 무서운 이단이라는 바른 인식이 없다. 셋째로, 복음주의는 진리를 위해 싸우려는 거룩한 의지와 열성이 없다. 넷째로, 복음주의는 교제와 절교 혹은 분리에 대한 성경의 교훈에 순종함이 없다.

잠언 28:4는 “율법을 버린 자는 악인을 칭찬하나 율법을 지키는 자는 악인을 대적하느니라”고 말했고, 잠언 17:15는 “악인을 의롭다 하며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자는 다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느니라”고 말했다.

자유주의 신학과 천주교회는 명백히 이단이다. 그러므로 성경적 교회는 마땅히 자유주의 신학과 천주교회를 배격해야 하며, 자유주의 신학 사상을 가진 자들을 교회의 교제로부터 제명하고 출교해야 하고 천주교회와의 교제를 끊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들을 포용하는 복음주의는 성경의 귀한 진리들을 양보하고 이단과 배교와 불신앙에 타협하는 비성경적 입장이다. 그것은 분명히 사도들을 통해 전달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것이요 분명히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반대된다. 그것은 분명히 주 예수께 대한 불충성과 불순종이다. 배교와 타협이 점점 가득해지는 때에, 하나님의 뜻은 분명히 배교와 타협으로부터의 분리이다.

10. 은사주의가 무엇인가?

오늘날 교회의 또 하나의 중대한 문제는 은사주의이다. 은사주의란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이 오늘날도 있다고 주장하는 입장이다. 은사주의는 한국의 보수적 장로교회들 안에서 흔히 볼 수 있다.

현대 은사주의의 역사와 세력

현대 은사주의는 20세기 초에 시작된 오순절주의에 뿌리를 두지만, 역사적으로 그런 경향을 가졌거나 성령의 특별한 체험을 강조하는 인물들이나 활동들이 있었고 그런 것들은 현대 은사주의와 비슷했든지 아니면 은사주의의 성령론, 특히 성령세례에 대한 생각에 영향을 주었다. 예를 들면, 초대교회에 몬타누스파와 종교개혁시대에 신령주의자들(spiritualists), 또 종교개혁이후에도 퀘이커교도들, 웨슬리와 감리교회, 에드워드 어빙, 촬스 피니, 성결운동과 케즈윅 운동, R. A. 토레이의 성령론 등이 그러하였다.200)

1896년에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에서 방언 같은 현상이 나타났었고, 1901년 미국 캔사스주 토피카의 베델 성경대학에서 촬스 팔햄(Charles F. Parham, 1873-1929)의 지도 아래 애그니스 오우즈맨이라는 여학생이 성령세례를 사모하다가 방언 같은 현상을 경험하였다. 그는 감리교 배경을 가졌고 성결교 운동에 참여했던 학생이었다. 1906년 4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성결교 설교자 윌리암 시무어(William Seymour, 1870-1922)의 아주사 거리 집회를 통해 방언 현상이 확산되었고, 이것이 오순절주의의 시작이었다. 여기에서 오순절 교회들이 나왔다.200-1) 20세기 중엽, 이러한 움직임은 오순절 교회를 넘어 다른 교파들 속에 퍼졌고 1960년 말에는 천주교회에까지 들어갔다. 이것을 신오순절주의 혹은 은사주의라고 부른다.

은사주의의 최근 형태는 신사도운동이다..201) 그러나 예언, 환상, 기적과 병 고침 등의 강조는 20세기 중엽부터 나타났다. 1947년, 윌리엄 브래넘(William M. Branham, 1909-65)은 오순절 교단에서 분열되어 나와 늦은비 운동이라는 것을 일으켰고 환상과 예언을 강조했다. 그는 사도와 선지자직의 계승과 임파테이션(impartation, 은사 전가 轉嫁)을 주장했고 기적 집회를 열었다. 그는 삼위일체와 사람의 원죄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필요성 등 정통신학을 부정했다.202) 이즈음, 캐서린 쿨만(Kathryn Kuhlman, 1908-76)이 병 고치는 집회들을 인도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참여하였다. 또 오럴 로버츠(Oral Roberts, 1918-2009)도 병 고치는 사역자로 나타나 활동하였다.

1982년, 폴 케인(Paul Cain, 1929- ), 마이크 비클(Mike Bickle), 밥 존스(Bob Jones, 1930?-2014)203) 등 캔서스시티 그룹(KCF=Kansas City Fellowship)은 늦은비 운동과 같이 환상과 예언 등을 강조했다.

존 윔버(John Wimber, 1934-97)는 80년대 찬양사역으로 시작하여 빈야드 운동을 일으켰다. 그는 병 고침, 귀신 쫓아냄, 진동, 거꾸러짐 등의 현상이 성령의 임하신 표라고 주장했다.204) 1989년에 밥 존스, 마이크 비클, 폴 케인이 연합함으로써 예언, 환상, 병 고침, 기적 등이 함께 강조되었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와 이영훈 목사는 빈야드 운동을 인정하고 추천하였다.205)

1994년, 랜디 클락(Randy Clark)은 캐나다 토론토에 있는 존 아놋(John Arnott)의 교회에서 토론토 블레싱(Toronto Blessing)이라 불린 빈야드 현상[웃음 운동]을 일으켰다. 그는 로드니 하워드-브라운(Rodney Howard-Browne)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 1995년부터 미국 플로리다주 펜사콜라 브라운즈빌에서 존 킬패트릭(John Kilpatrick, 1950?- )에 의해 빈야드 현상들이 또 나타났다.

1999년, 마이크 비클은 국제기도의 집(IHOP=Inernational House of Prayer)을 세웠고 중보기도 운동을 일으켰다. 신디 제이콥스(Cindy Jacobs, 1942?- ) 등은 예언자라고 자칭하였고 밥 베켓, 피터 와그너, 존 도우슨(예수전도단 총재), 신디 제이콥스, 조지 오티스, 루이스 부쉬 등은 영적 도해(spiritual mapping)를 주장하였다. 영적 도해란 귀신들이 지배하는 지역들을 지도로 표시하는 것인데, 이런 사상은 땅 밟기와 선포기도로 귀신을 쫓아내어야 한다는 사상과 함께 간다.

풀러 신학교 교회성장학 교수이었던 피터 와그너(Peter Wagner, 1930-2016)는 1900년대 초의 미국 아주사 방언운동을 제1의 물결, 1960-70년대에 일어난 은사운동을 제2의 물결, 1980년대의 빈야드 운동을 제3의 물결이라고 불렀다.206) 그는 1999년 이후에 ‘예언하는 장로들의 사도협의회’라는 것을 개최했고, 2000년 과테말라시에서 12명을 사도로 선포하는 위임식을 거행하고 ‘사도의회’를 구성하였고,207) 2001년, 국제사도연맹(ICA=International Coalition of Apostles)을 조직하고 신사도개혁(New Apostolic Reformation) 운동을 일으켰다. 그는 사도들은 계시를 받으며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는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2008년부터 플로리다 레이크랜드에서 타드 밴틀리(Todd Bently, 1976?- )는 병 고침과 죽은 자의 살아남 등을 주장하였다(그 해에 피터 와그너와 체 안 등이 거기서 밴틀리를 사도로 안수하였다).

알파 코스(Alpha Course)는 은사주의 단체들 중의 하나이다. 알파 코스는 1990년 영국 런던의 성공회 소속 성삼위일체 브럼턴교회에서 니키 검벨 신부에 의해 시작되었다. 브럼턴교회는 은사주의적 대교회이다. 알파 코스는 영국에서 시작되어 천주교인들, 침례교인들, 및 그 밖의 사람들 중에서 산불처럼 퍼지고 있고 미국을 휩쓸고 있다. 1998년 4월 27일자 크리스챠니티 투데이는 레이톤 포드, 루이스 팔라우, J. I. 패커, 앨리스터 맥그래스 등 복음주의자들의 서명과 함께 알파 코스에 대한 전면광고를 실었다. 1999년 8월 한국의 여러 기독교 신문들도 ‘21세기 교회영성 목회를 리드할 성경공부!’, ‘60개국 65개 교파 46,000여 교회지도자 세미나 참석’ 등의 선전 문구를 사용하면서 제2회 알파코스 세미나 광고를 실었다. 그 세미나 강사는 워싱턴 새문안교회 조병철 목사, 한국의 교회성장연구소장 명성훈 목사, 우석교회 김철영 목사이었다.

프로미스 키퍼즈(Promise Keepers) 운동도 은사주의 운동 중 하나이다. 그 운동은 1991년 콜로라도대 축구 코치 빌 맥카트니와 랜디 필립스에 의해 시작되었는데, 그 두 사람은 모두 불더밸리 빈야드 교회의 교인들이다. 그 교회의 제임스 라일 목사는 극단적 은사주의자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말씀하시기를, 비틀즈는 하나님의 손으로 은사를 받았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기름 부으셨고 하나님께서는 온 세계에 음악적 부흥을 통한 은사주의적 갱신을 시작하실 목적으로 그렇게 하셨다고 했다. 그는 하나님께서 오늘날도 자기 백성에게 음성으로 말씀하심을 확신한다고 말했다.208) 또 이 집회는 연합주의적이다. 그것은 자유주의적 교단들을 문제삼지 않고 심지어 천주교회도 포용한다. CCC의 빌 브라잇, 빌 하이벨즈, 무디 성경학교 교장 조셉 스토웰, 척 스윈돌, 척 콜슨, E. V. 힐 등 에큐메니칼 인사들이 집회 연사들이다. 이 운동의 한국 본부는 이사장에 김의환 박사(전 총신대 총장), 이사에 김장환, 김상복, 김삼환, 전호진 목사, 박형용 박사 등을 세웠었다.209) 카리스마(Charisma)지 발행인 스티븐 스트랭은 “오순절-은사주의 동향”이라는 제목의 1999년 7월호 사설에서, “프로미스 키퍼스는 1990년대 초에 갑자기 등장하였고, 은사주의적 형태의 찬양과 예배 음악뿐 아니라, 일부 은사주의 연사들을 세웠다”고 말하였다.210)

앞에 언급된 단체들과 인물들 외에, 은사주의 내지 신사도운동에 속했거나 영향을 받은 단체들과 인물들은 크리스쳔센터(베니 힌), CI(Christian International)(빌 해몬), 국제추수선교회(HIM=Harvest Internation- al Ministry)(체 안), The Call(루 잉글),211) G-12(카스텔라노스, 로렌스 콩), 국제예수전도단(로렌 커닝햄),212) 교회성장연구소(CGI)(조용기, 피터 와그너, 베니 힌), 중국 백투예루살렘(수 형제), 아이리스 미니스트리(하이디 베이커) 등이고, 또 우리나라의 단체들과 교회들과 인물들은 CI Korea-아가페신학연구원(김태진),213) 한국 와그너 사역학교(WLI)-하베스트 샬롬교회(피터 와그너, 홍정식214)), 한국기독교 영성운동연합회-서울엠마오 신학대학원(예영수),215) 영동제일교회(김혜자), 에스더 기도운동(이용희),216) 치유사역(HTM= Heavenly Touch Ministry)(손기철, 온누리교회 장로), 뉴와인/원띵하우스(손종태),217) 인터콥-비젼스쿨(최바울),218) 라이즈업 코리아, HIM Korea(이성대), 한국기도의집(KHOP)(한성진), 더데이 미니스트리(Theday), 국제사역자학교(HIS), 예수전도단(문희곤),  온누리 월요 어노인팅집회(김성진), 레위지파(다윗의 장막, 스캇 브레너), 24시간 기도의집(YDFC), 아가선교회(이현숙, 홍의봉) JMI선교회(김희준), 뉴라이프미션(NLM), 아이리스 미니스트리(김승환), 한이 성경연구소(KIBI), 이스라엘 사역네트워크(IMN), 의로운해 선교회(서원석, 다니엘 박), ‘제3시/하늘의 언어’(김우현 PD), 영화 ‘회복’(김종철 감독), 하나님의 대사(김하중, 온누리교회), 메누하(윤남옥), 천국은확실히있다(토마스 주남), 여의도순복음교회(조용기, 이영훈),219) 성락교회(김기동), 온누리교회,220) 큰믿음교회(사랑하는교회)(변승우), 오륜교회(김은호), 두날개-풍성한교회(김성곤), 선한목자교회(유기성), 열방교회(김민호), 광림교회, 순복음성서교회/마하나임 ISOM(정바울), 주님의 교회(김용두), 늘기쁜교회(문대식), 포도나무교회(여주봉), 은석교회(고충진), 부천 기쁨의 교회(이종선) 등이다. 또 21세기 교회성장의 지각변동을 번역한 홍용표는 한국에서 대표적 신사도교회로 일산 한소망교회(예장 통합, 류영모), 분당 새에덴교회(예장 합동, 소강석), 연세중앙교회(윤석전), 목동 지구촌교회(조봉희), 대전 중문침례교회(장경동), 새안산교회(김학중), 부천 삼광교회(심원용), 원주 영강교회(기장, 서재일) 등을 들었다.221)

그 외에, 외국에 있는 한인교회들은 엘리야킴 미니스트리(김종필), 사랑과진리 교회(뉴욕, 밴자민 오), 가스펠펠로우쉽 교회(뉴저지, 성현경), 인터내셔날 갈보리교회(워싱턴, 이성자), 워싱톤 드림교회(버지니아, 이근호), 신시로 교회(일본 나고야, 다키모토 준) 등이고, 국내의 출판사들은 더 갈망, 베다니출판사, 나단, 순전한나드, 큰믿음출판사, WLI Korea, 쉐키나 기획, 믿음의 말씀사, 두란노, 서로사랑, 죠이선교회 등이다.222)

오늘날 복음주의적 교인들의 다수가 은사주의를 받아들이고 있다. 복음주의 목사 존 맥아더는 은사주의자 잭 헤이포드가 1997년에 쓴 책 유망한 목사들(Pastors of Promise)에서 극단적 은사주의자 헤이포드를 칭송하였다. 로버트 슐러, 빌 하이벨즈, 척 콜슨, 빌 브라잇, 그렉 로리 등도 추천사에서 그를 칭송했다. 이전에, 맥아더는 은사주의적 혼돈(Charismatic Chaos)이라는 그의 책에서 “헤이포드는 그리스도를 본다고 거짓말을 한다”고 말했었다.223)

대학생선교회(CCC)의 빌 브라잇도 은사주의를 용납한다.224) 대학생선교회에서 온 1998년의 한 소식지는 ‘예수님’이라는 그들의 전도용 영화를 통해 “하나님께서 여전히 표적들과 기사들을 행하시고 계시다”고 보도하며, 한 소식지는 인도의 16살된 한 소녀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그 소녀는 몇 시간 동안 죽어 장사되려고 했는데 나사로처럼 기적적으로 다시 살아났다고 말한다. 그 소녀는 죽은 자들이 거하는 곳에 갔었으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7일 동안 돌아가라고 말씀하셨다고 주장했고 그는 다시 산 지 7일 후에 죽었다고 한다.225) 빌 브라잇은 IHOP과 협력하겠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선언했고 한국 CCC는 에스더기도운동에 참여하고 있다.226)

카리스마지에 의하면, 1993년에 미국복음주의자협회의 회원 교회들의 약 51%가 오순절파라고 한다. 어떤 보고서에 의하면, 80%가 그러하다고 한다.227) 미국복음주의자협회(NAE) 회장인 케빈 매노이아는 자유 감리교회 감독인데 은사주의자이다. 그는 자신이 복음주의 안에서 은사주의자들과 비은사주의자들 간에 일치의 다리를 놓기를 원한다고 말한다.228)

오늘날 은사주의의 세력은 매우 큰 것 같다. 오순절교회는 세계에서 가장 급성장하는 교회로 알려졌다. 은사주의는 오늘날 오순절교회 밖에서도 매우 활발하다. 그것은 때때로 천주교와 개신교에 이어 기독교의 ‘제3세력’이라 불린다. 피터 와그너는 전세계에 은사주의자들이 약 1억 9천만명인데, 그 중에 오순절교인들이 8천 5백만명, 개신교 은사주의자들이 천 6백만명, 천주교 은사주의자들이 5천만명, 중국의 은사주의자들이 약 4천 2백만명이라고 한다.229) 오늘날 은사주의는 전통적 교회들에 속한 교인들에게서 많은 세력을 얻었고 또 여러 단체들을 통해 활발히 퍼지고 있다.

은사주의의 특징

은사주의는 몇 가지 특징적 주장을 한다.

성령세례

은사주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들이 성령의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성령 받는 경험을 강조한다.

방언

은사주의는 성령세례를 받은 증거로 방언을 강조한다. 은사주의는 방언 운동이었던 오순절주의에서 기원하였고 방언 은사를 강조한다. 북미오순절협회 헌법 제5항은, “충만한 복음(full gospel)은 . . . 성령의 세례와 그것의 최초 증거로서 방언을 포함한다”고 말한다.

알파 코스에서 성령 충만에 관한 한 강의 내용의 절반이 방언에 관한 것이었고,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 오셨지만 은사주의적 알파 코스에서는 성령께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시며, 전체적 강조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주목의 중심이 되는 성령에 의해 대치되신다고 지적된다.230)

오순절파 교인들과 은사주의자들은 방언 기도를 권장한다.

체 안은 “한국어로 하면 몇 분만 하면 기도가 끝난다. 그러나 방언으로 하면 몇 시간이고 할 수 있다. 3년 전에 조용기를 만나 집회를 인도한 바 있다. 그 사람도 8-90%를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한다. . . . 무슨 내용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러분의 믿음이 자라도록 도와준다”고 말했다.231)

그러나 방언 기도의 권장은 성경적으로 바른 교훈이라고 보이지 않는다. 주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6:7,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성도들이 하나님께 기도할 때 인격적이지 못하게 주문 외우듯이 무의미한 말을 반복하는 것은 잘못된 방식이다. 기도는 인격적 감사와 고백과 간구이어야 한다. 방언이 있었던 사도시대라 하더라도, 성도들은 인격적 기도에 힘써야 했다고 본다.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

은사주의는 방언이나 방언 통역뿐 아니라, 예언, 병 고침 등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이 오늘날에도 있다고 주장한다.

신사도운동은 윌리엄 브래넘의 은사주의, 캔서스시티 예언그룹(폴 케인, 마이크 비클, 밥 존스), 존 윔버의 빈야드 운동 등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들은 예언, 방언을 비롯하여, 병 고침, 귀신 쫓아냄, 죽은 자를 살림, 기적 행함 등을 행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특히 임파테이션(impartation, 은사 전이)을 강조한다.232)

은사주의는 오늘날 전통적 장로교회 안에서도 볼 수 있다.

미국기독교개혁교회(CRC)는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을 사도시대에만 제한시킬 성경적, 신학적 근거가 없다고 주장하였다.233)

안영복 고신대 전 교수는 은사주의에 성령의 역사하심을 의심할 수 없다고 말하며, 개혁교회의 침체의 주된 원인은 경직된 전통적 성령론으로 인해 성령을 소멸시키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234)

J. I. 패커는 은사주의를 하나님의 일로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235)

나용화 개신대학원대학교 전 총장은 전통신학의 계시종결론과 은사중지론을 비평하면서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계시들이 있고 신유, 방언, 축사 등의 성령의 능력의 은사들도 있다고 주장하였다.236)

계시

은사주의자들은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계시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신학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특별계시를 의미한다. ‘계시’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시는 행위를 말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특별계시들의 기록이다. 성경이 완성된 이후에도 하나님의 계시 활동을 말할 수는 있어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록된 책을 통해 자신을 나타내시는 행위로 이해해왔다. 그것은 ‘조명’(깨달게 하심)이라는 말로 표현되었다. 그러나 은사주의자들이 말하는 ‘계시’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직접 자신들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특별계시를 의미함이 분명하다.

밥 존스, 릭 조이너, 신디 제이콥스, 빌 해몬 등은 오늘날의 대표적 자칭 선지자들이다.

1983년 3월, 밥 존스는 마이크 비클이 성령의 권능을 받은 특별한 운동, 새로운 질서의 주역이 된다고 예언하였다. 그래서 마이크 비클은 1999년 신사도운동의 기관인 ‘기도의 집’(IHOP)을 세웠다.237)

피터 와그너는 2000년 12명의 사도들을 세웠고 2001년 국제사도연맹을 조직하다. 그는 사도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다고 말했다.238) 즉 그는 사도직과 선지자직의 회복을 공적으로 선언한 것이다.

체 안은 방언, 예언, 병 고침, 기적 등이 성령세례의 증거이며 성령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239)

김혜자 서울 영동제일교회 목사는 헨리 블랙가비와 클로드 킹의 책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이동원, 정필도, 오정현 목사 등이 추천)을 가지고 강의하며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아직도 그의 사람들에게 말씀하신다.” “천사들을 통해, 환상을 통해, 꿈을 통해, 우림과 둠밈을 사용하여, 비유를 통해, 세미한 소리를 통해, 기사와 표적을 통해, 기타 다른 방법을 통해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계시하시지 않으면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니시다”라고 말했다.240)

변승우 큰믿음교회 목사는 예언, 계시, 방언 통역을 주장하였다.241) 그는 신학생 때에 한 여전도사가 그에게 한 다음과 같은 예언을 말했다. “나는 이 시대의 많은 나의 종들에게 말씀의 은사를 주었다. 그러나 성경 저자들이 성경을 쓸 때에 임했던 그런 영감을 준 사람은 이 종 하나뿐이다.” “이것은 그가 다시 성경을 기록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성경은 이미 완성되었다. 그러나 그는 성경을 정확하게 해석할 것이다. 그가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틀림이 없을 것이며, 내가 직접하는 말과 같을 것이다.” 변승우는 이어서 말한다. “이것이 바로 제가 그동안 그렇게 담대하게 제 책들을 집회 때마다 권고해왔던 이유입니다.” “지금도 예언과 계시는 존재합니다.”242)

변승우 목사는 또 말하기를, “우리 교회는 말씀이 너무 충만해서 탈인 교회다. 그러니 내 앞에서 말씀 타령은 그만 하라.” “말씀 말씀 병에서 치유되지 않으면 희망이 없다. 설교, 성경공부로도 안 된다.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사람들 속에는 성령에 대한 목마름이 있다. 성경 보는 것보다 직접 들어야 한다”고 했다.243)

그는 또 “강해설교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계시가 있어야 합니다.” “성경만 해석 잘 해봐야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244) 또 자칭 선지자 샨 볼츠는 변승우를 거들며 사도 바울이 서신을 쓸 때 곁에 있었던 그 높고 강력한 천사가 변승우 목사 곁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밝히는 책들을 쓰도록 할 것이라고 말하였다고 예언했다.245)

그는 또, “여러분, 밥 존스의 예언은 KS마크입니다. 대부분 예언자들의 예언이 안 이뤄진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번도 틀리지 않은 사람이 밥 존스입니다,” “예언과 계시 분야에서는 밥 존스가 전 세계에서 제일입니다”라고 말했다.246)

손종태 원띵하우스-진행교회 목사는247) 오늘날에는 누구나 예언을 할 수 있고 또한 그래야 하고248) 앞으로는 모든 사람이 예언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249)

소강석 분당 새에덴교회(예장 합동) 목사는 장모 정금성 권사가 하나님의 음성들을 들었다는 간증을 긍정적으로 증거하였다.250) 

병 고침과 기타 기적들

존 윔버는 늦은 비 운동을 일으켰던 은사주의자 윌리엄 브래넘, 신유 사역자 캐드린 쿨만(Kathryn Kuhlman, 1907-76), 오순절 신유 부흥사 오럴 로버츠(Oral Roberts, 1918-2009) 등의 영향을 받았다. 오럴 로버츠는 질병이 마귀에게서 온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알파코스는 주말수양회 때 치유 은사집회를 한다. 한국 알파코스 이상준 대표는 “알파코스에서 성령사역을 빼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들은 쓰러뜨림, 금이빨 변화 등 ‘능력전도’라는 빈야드식 성령체험을 강조한다. 알파코스는 체 안 저, 그리스도인의 권세와 치유와, 찰스 프란시스 헌터 저, 치유핸드북 (간질, 감기, 암 등의 치유법; 병균에게 명령하라고 가르침) 등을 추천한다. 그들은 모든 병들의 치료를 주장하며 치아 교정, 금이빨로 변화, 비만, 시력 교정 등을 말하고 또 능력 전도를 주장한다.251)

베니 힌은 자신이 병 고침의 은사를 받았다고 말한다. 그는 미국의 TBN 방송프로에서, 사람들은 TBN을 보다가 죽은 자들이 살아날 것이며 장례식들을 취소할 것이며 죽은 자들을 관째 가지고 와 텔레비젼 앞에 두고 하나님의 능력이 그들을 만지기를 기다릴 것이며 수천명씩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말하였다.252)

변승우 큰믿음교회(사랑하는교회) 목사는 병 고침, 귀신 쫓아냄 등이 성경적 사역이라고 말했다.253) 큰믿음교회는 수요일마다 병 고치고 귀신 쫓아내는 사역을 하였다.254)

손종태 원띵하우스-진행교회 목사는255) 사람들이 암도 치유되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은사를 구해야 하고256) 모든 사람이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이 일어날 것이며, 심지어 어떤 병원 전체가 텅텅 비는 역사가 일어날 것이며,257) 또 주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며 예수님 당시의 기적과 이적이 오늘날에도 일어나는 것을 믿어야 한다고 말했다.258)

은사주의자들은 예배 시간에 금가루가 얼굴과 손과 옷에 나타났다고 말하며259) 또 크라운들과 전체 이들이 금으로 변한 초자연적 치아 치료들도 말한다.260) 손종태는 자기의 사역 중 많은 사람들의 썩은 치아가 금으로 바뀌는 기적이 수백 번 일어났으며 어떤 이는 10개가 금니로 변했다고 말하였다.261)

김성곤 두날개 세미나-풍성한교회 목사는 두날개 세미나 과정 중 군사훈련에서 직접 안수기도를 하고 은사 전이(임파테이션)를 주장하고 방언, 진동, 입신 등을 행하고 병 고치는 실습을 한다.262)

소강석은 장모 정금성 권사가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 많은 병들을 고쳤고 많은 귀신들을 쫓아냈다고 소개된 그의 간증집을 그의 교회의 전교인들 앞에 추천하며 행사를 벌였다.263)

피터 와그너는 이런 기적들이 새로운 것이 아니고264) 이런 일을 반대하는 자들의 배후에는 마귀의 세력이 있다고 주장하며265) 그런 교회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의 교회라고 정죄하였다.266)

은사 체험의 강조와 감정적 경향

은사주의는 은사 체험을 강조하고 때때로 그 체험은 매우 감정적 경향이 있다. 은사주의자들은 주로 CCM을 사용한다. 오늘날 이런 풍조는 은사주의 교회들뿐 아니라, 많은 교회들이 영향을 받고 있다.

빈야드 운동을 시작하였던 존 윔버는 원래 재즈/락 음악가이었고 1980년대 찬양사역으로 시작하여 빈야드 운동을 일으켰다. 신사도운동은 드럼, 기타, 키보드를 사용하는 찬양사역으로 사람들의 감정을 몰입시킨다. 그들의 집회들에서는 웃고 미친 듯이 뛰고 구르고 소리지르는 등의 현상들이 나타난다. 교회가 사탄의 놀이터가 되었다. 존 윔버는 그것을 성령 임재의 증거라고 주장했고 피터 와그너는 빈야드 운동을 성령의 제3의 물결이라고 포장한다.267)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경배와 찬양 운동은 CCM운동으로 발전하였고 존 윔버의 빈야드 집회를 온누리교회에서 본받으면서 시작되었다고 보인다. 1990년대에 미국 LA에서 열린 빈야드 세미나의 한국인 목사와 평신도 수료자는 2천명 이상으로 추산되었다.268)

은사주의의 무절제한 감정적 경향은 특히 빈야드 운동과 신사도운동에서 드러나 있다. 존 윔버는 병 고침, 귀신 쫓아냄, 진동, 거꾸러짐 등의 현상이 성령의 임하신 표라고 주장했다.269)

캐시 우드는 브라운스빌 현상에 대해 말하기를, 사람들은 “성령 안에서 죽임을 당하여 복도들에 쓰러졌고 심한 울부짖음과 신음 속으로 들어갔다,” “번갯불 같은 것이 나를 쳤다. 나는 벽을 쳤고 미끄러져 넘어졌고, 얼마 동안인지는 몰라도 통제할 수 없도록 몸을 흔들었고 경련을 일으켰다. 숨이 거의 끊겼고 계속 심히 헐떡거렸다. . . . 나의 머리는 경련을 일으켰다”고 썼다. 또 그는 “[킬패트릭 목사가] 나를 향해 숨을 불었을 때 그것은 나를 완전히 때려눕혔다”고 말했고 또 다음 날 아침, 예배가 마친 후에도, 빈야드 음악이 연주된다면, 그는 “깊숙이 구부르고, 좌우로 흔들거리고, 비틀거리고, 반대쪽으로 뛰며, 때때로 바닥에 엎어지며 . . . 찬송하며 경배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270)

알파 코스는 묽게 된 죄책감 없는 복음과 유약한 그리스도를 제시할 뿐 복음의 도구로서 쓸모가 없고 그 핵심적 강조는 토론토 타입의 은사주의적 경험에 있다고 지적된다.271)

1990년대 초, 예태해 목사는 백봉산 기도원에서 성도들을 쓰러뜨리는 집회를 인도하기도 하였다.

변승우 목사는 존 윔버의 빈야드 사역에서 사람들이 넘어지고 쓰러지는 현상은 바로 주님이 하시는 일이라고 말하면서, “우리 교회에서는 기도 받고 쓰러지는 것이 일상화되었습니다”라고 말했다.272) 

11. 성령세례와 초자연적 은사

은사주의는 예수님 믿고 구원 얻은 신자가 성령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감리교와 성결교의 교리 사상과 비슷하고 D. L. 무디의 협력전도자 R. A. 토리의 사상과도 통한다.

오순절 사건

성령세례는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과 관계된다. 그 사건은 이중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특수한 의미

오순절 사건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과정에서 시대적 분기점을 이루는 몇 가지 특수한 의미를 가진다.

첫째, 오순절 사건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의 성취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 성령 강림을 약속하셨다. 이사야 32:15, “필경은 위에서부터 성신을 우리에게 부어주시리니.” 에스겔 36:27,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요엘 2:28-29,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니,” “그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줄 것이며.”

예수께서도 공생애 말기와 승천 직전에 성령 강림을 약속하셨다. 요한복음 14:16-17,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사도행전 1:4-5,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오순절 사건은 바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약속의 성취이었다.

둘째, 오순절 사건은 성령께서 오셔서 교회 가운데 거하시는 사건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속죄사역에 근거하여 성령께서 세상에 오셔서 신약교회 속에 영원히 거하시게 되었다. 신약교회는 구약교회가 경험하지 못했던 성령의 영원한 내주(內住)하심을 경험하게 되었다. 요한복음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셋째, 오순절 사건은 성령께서 일하시는 시대의 시작이었다. 사도행전에 보면, 교회 시대에, 부활하신 주께서 직접 일하기도 하셨지만(행 9:4-5, 10, 34; 18:9), 특히 성령께서 주로 일하셨다. 4:8,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8:29,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8:39,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간지라.” 10:19, “성령께서 저더러 말씀하시되.” 13:2, “성령이 가라사대.” 15:28, “성령과 우리는.” 16:6,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16:7,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 18:5, “바울이 성령에 이끌리어(전통본문).” 20:28,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이런 의미에서, 오순절 사건은 단회적이다. 헤르만 바빙크는 다음과 같이 적절히 말하였다:

오순절에 발생했던 성령의 이러한 보내심은 기독교회의 역사상 독특한(unique) 사건이다. 창조와 성육신같이, 그것은 오직 한번 발생하였다. 중요성에 있어서, 그것과 동등한 성령의 어떤 허락하심이든지 그 전에도 그 후에도 없었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잉태 시에 인성을 취하셨고 결코 그것을 다시 버리지 않으시듯이, 성령께서도 오순절에 교회를 그의 거처와 성전으로 택하셨고 결코 거기서부터 다시 분리되지 않으신다.273) 

일반적 의미

그러나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사건은 제자들이 처음 성령을 받은 사건이라는 일반적 의미도 가진다. 성령께서는 이 날 신자들 속으로 처음 들어오셨다. 성령께서 신자들 속으로 처음 들어오신 사건이라는 의미에서 오순절은 반복된다. 즉, 죄인들이 구원받을 때마다 성령께서는 그들 속에 들어가시고 그들을 인치신다. 성령께서는 베드로의 전도를 듣고 믿는 고넬료의 가족들에게 내려오셨고 그들 속으로 들어오셨다(행 10:44). 에베소의 제자들도 사도 바울의 전도를 듣고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 받고 안수 받을 때 처음으로 성령을 받았다(행 19:6). 이와 같이, 이미 지상에 오신 성령께서 교회의 새 회원이 되는 이의 심령 속으로 들어가시는 것이다.

성령세례

성령세례의 의미

그러면 성령세례란 무엇인가? 성령세례란 전통적으로 생각해 온 대로 성령께서 신자들 속에 처음으로 들어오시는 사건인가, 아니면 오순절파나 은사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이미 믿어 구원받은 자들이 처음으로 성령 충만함을 얻는 것인가?

성령세례라는 말은 신약성경에 사도행전 1:5와 11:16과 고린도전서 12:13에서만 나온다. 사도행전 1:5의 성령세례는 오순절 사건을 가리켰다. 오순절의 성령세례는 성령께서 신자 속에 처음 들어오신 사건인 동시에 충만히 부어지신 사건이었다(행 2:4). 사도행전 11:16의 성령세례는 성령께서 고넬료의 가족들에게 처음 들어오신 사건이었다. 이 경우에는, 사도행전 1:5의 경우와 달리,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믿는 자들에게 일어났다. 마지막으로, 고린도전서 12:13의 성령세례는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을 의미한다. “[우리가]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동일한 사건이다.

이상의 세 구절을 다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은 성령세례가 성령께서 신자들 속에 최초로 들어오시는 사건이라는 전통적 개념이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오순절 사건의 일반적 의미와 동일하다. 성령세례란 성령께서 신자들 속에 처음 들어오시는 사건이다. 그것은 곧 신자의 중생 사건과 동일하다. 신자는 중생 시 성령을 받으며 그것이 성령세례인 것이다. 중생 시 받는 성령을 성령세례라고 부르는 것은 그 시간 성령께서 우리의 더러운 죄를 씻으시고 우리의 죽었던 영혼을 살리시기 때문이다. 그것은 성령의 구원하시는 사건이다.

오순절파는 사도행전 1:5에 근거하여 신자가 두 번째의 경험으로 성령세례를 받는다고 주장하지만, 오순절 이전의 제자들과 오늘날 우리는 상황이 다르다. 오순절 이전의 제자들은 성령을 받기 전이었지만, 오늘 우리는 믿을 때 이미 성령을 받았다.  

성령세례의 시간

성령세례의 시간에 관해서는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사건 이전과 이후를 구분해야 한다. 오순절 사건 전에는, 사람들이 예수님 믿은 후에 성령을 받았다. 제자들은 성령을 받기 전에 예수님을 믿었고 이미 중생하였다. 요한복음 13:10,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요한복음 15:3,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그러나 제자들은 아직 성령을 받지 못했었고(요 7:39) 오순절 때에, 즉 주께서 승천하신 지 10일 후에야, 성령을 받았다. 그들의 경우 예수님 믿는 때와 성령 받은 때가 달랐다.

그러나 오순절 사건 이후에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을 때 성령을 받는다. 사도행전 10-11장의 고넬료의 경우에, 예수 믿는 것과 성령 받는 것 즉 성령세례는 동시적이었다. 그것들은 별개의 사건들이 아니었다. 사도행전 19장에 기록된 에베소 제자들의 경우도,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듣고 믿고 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안수 받을 때 성령을 받았다. 고린도전서 12:13도 성령세례와 중생 사건을 동일한 사건으로 증거한다. “우리가 . . .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우리는 중생함으로 한 몸이 된다.

더욱이, 신약성경은 예수 믿는 자들이 다 성령을 받았다고 가르친다. 로마서 8:9,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성령]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에베소서 1: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성령의 내주(內住)하심이 인치심이다. 요한일서 2:20, 27,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고린도전서 12:3,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또 세례(洗禮)는 죄씻음을 뜻하는데, 신약성경은 예수님 믿는 자들이 성령 안에서 씻음을 얻었다고 말한다. 그것은 성령세례와 같은 뜻이다. 고린도전서 6:11,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디도서 3:5,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단지, 사도행전 8:15-17에 기록된 사마리아 교인들은 예외적이었다. 오순절파는 이 구절에 근거하여 예수 믿는 것과 성령세례 받는 것이 다르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도행전 8:16은 사마리아 교회의 경우가 예외적임을 보인다: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라.”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이라는 표현은 사마리아 신자들이 성령 받지 못한 것이 통상적 일이 아니었음을 나타낸다. 이 구절은 오순절 사건 이후에는 일반적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세례 받을 때 성령을 받는 법인데 사마리아 신자들은 예수님을 믿고 세례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성령을 받지 못했다는 뜻이다.274)

사마리아 교인들의 경우가 예외적이었던 이유는, 사마리아인들의 특별한 신분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마리아인은 유대인과 오래도록 종교적 간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유대인 보기에 반쯤 이방인이었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만일 처음부터 사도들이 그곳에 내려가 전도해서 예수님 믿는 자들을 얻었다면, 성령 강림도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한 자는 사도가 아니고 집사 빌립이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사마리아인에게 성령 내리시는 일을 지연시키셨던 것 같다. 그러나 예루살렘에서 사도들이 내려와 그들을 위해 기도할 때 성령께서 강림하셨고 사마리아 교회와 유대 교회와의 영적 일체성이 확립되었다.

사도시대에 이 한가지 경우 외에, 신약성경은 전체적으로 오순절 사건 이후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때와 성령받는 때 곧 성령세례의 때를 분리시키지 않는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은 신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든가 성령세례를 받으라고 명령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들이 예수를 믿었을 때 즉 중생했을 때 이미 성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자는 다시 성령받기를 구하거나 성령세례 받기를 간구할 필요가 없다. 단지 이미 오신 성령께서 우리 속에서, 우리의 영육의 각 부분과 각 기능에서 충만히 역사하시도록 그에게 겸손히 복종하고 그를 의지해야 한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다음과 같이 적절히 말한다.

오순절에 성령의 부으심은 그가 교회 속으로 최초로 그리고 실제로 오심이었다. . . . 그리스도의 몸의 새 부분들은 외부로부터 교회에 추가되며, 성령께서는 몸으로부터 새 지체들 속으로 부어지듯이 그 새 부분들 속으로 부어지셨다. . . . 이것은 또한 오늘날 왜 새 회심자들이 오직 일상적인 방식으로 성령을 받는가 하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 . . 또한, 성령의 다른 하나의 부으심이나 세례를 위한 기도가 부정확하고 참된 의미가 없다는 것이 명백하다. 그러한 기도는 실제로 그 오순절 기적을 부정한다. 왜냐하면 오셔서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그 분은 우리에게 더 오실 수 없기 때문이다.275)

H. C. G. 무울도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서신서들이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성령세례를 구하라고 가르치지 않는 것은 중요하다. . . . 보다 더 효과적 봉사를 위해 성령세례를 기다리는 행위는 잘못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이미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을 이루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우리가 이미 소유한 것으로 충만해지기 위해 가장 겸손한 신앙으로 우리 영혼과 삶의 모든 길과 부분들을 여는 것이다.276)

레만 스트라우스도 같은 신념에서 말하기를, “성령세례를 중생 경험과 별개로 보는 가르침은 성경과 일치하지 않는다. . . . 성령세례는 봉사의 능력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가족으로 다시 태어난 자들로 그리스도의 지체를 이루게 하는 것과 관계된다”고 하였다.277) 이와 같이, 성령세례는 신자가 예수 믿을 때 성령께서 그 속에 들어오셔서 그의 죄를 씻으신 사건이며, 신자는 예수 믿을 때 이미 성령를 받았고 또 성령세례도 받은 것이다.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

은사운동은 성령세례뿐 아니라, 성령의 은사, 특히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를 강조한다.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란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치는 은사, 능력 행함, 예언, 영 분별, 방언들, 방언 통역 등을 말한다(고전 12:8-10).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의 목적

사도시대에 주신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의 목적은 무엇이었는가? 성경 역사에서 기적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한 방편이었다. 이와 같이 사도시대에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전달과 확증을 위한 것이었다.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예언, 영 분별, 방언들, 방언 통역은 계시 전달에 관계되고, 믿음, 병고침, 능력 행함은 계시 확증에 관계된다. 마가복음 16:17-20은 주께서 제자들에게 귀신을 쫓아냄, 방언, 뱀을 집거나 독을 마셔도 해를 받지 않음, 병 고침 등의 표적을 주심으로 친히 복음 진리를 확증하셨다고 말한다. 또 히브리서 2:3-4는 하나님께서 기적들과 성령의 은사들을 통해 복음을 확증하셨다고 말한다.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의 성격이 그러했으므로, 그것들은 비록 사도 시대의 성도들에게 어느 정도 경험되고 그들에 의해 행해졌을지라도 주로 사도들에 의해 행해졌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2:43과 5:12는 사도들을 통해 기적들이 많이 일어났다고 증거하였고 고린도후서 12:12는 기적 행함을 사도의 표라고 말하였다. 사도들은 신약 교회의 기초를 닦은 자들이었으므로(엡 2:20),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과 기적 행하는 능력을 주심으로 하나님의 특별계시들을 전달하고 확증케 하셨던 것이다. 워필드는 적절히 말하기를,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은 특별히 사도들의 증명서이었다. 그것들은 교회를 설립하는 하나님의 권위적 도구로서의 사도들의 신임장의 일부분이었다”라고 하였다.278)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의 사라짐

언제 사라졌는가?

교회 역사는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이 사도시대의 교회의 특징이며 그 후 시대에는 사라졌음을 증거한다. 따라서 교회들은 전통적으로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의 중단 혹은 폐지를 인정하고 가르쳐 왔다. 우리는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에 대해 증거하는 신약성경의 말씀들을 들어 역사적 사실에 반론하려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역사상 그렇게 섭리하셨다면, 우리는 그것을 겸손히 인정해야 한다.

주후 4세기 말 콘스탄티노플교회의 대주교장이었던 크리소스톰은 고린도전서 설교에서 방언은 이미 그쳤고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하였고, 주후 5세기 초 유명한 어거스틴도 요한일서 설교에서 방언은 유대 기독교인에게 주신 초기 표적이었고 이전 시대에 이미 사라졌다고 말하였다.279) 칼빈도 사도행전 10:44 주석에서 “방언의 은사와 및 그 밖에 그와 같은 것들은 교회에서 오래 전에 중지되었다”고 말하였다. B. B. 위필드는 말하기를, “종교개혁 이후의 신학자들은 은사들이 사도시대와 함께 중지되었음을 매우 밝히 가르쳤다. . . .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은 사도시대 교회의 특징이었고 오직 사도시대에 속하였다. . . . 18세기 초에는, 은사들이 [교회 역사의] 처음 3세기 동안 계속되었고 4세기경에 사라졌다는 견해가 지배적이었지만, 이 견해는 사실과 조화되지 못한다”고 하였다.280) 

왜 사라졌는가?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이 사라진 까닭은 두 가지 때문일 것이다.

첫째,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은 그 독특한 목적 때문에 사라졌다.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의 독특한 목적은 하나님의 특별계시들의 전달과 확증이었다. 그런데 그 목적은 사도시대에 신약성경의 기록이 완성됨으로써 성취되었다. 요한계시록 22:18-19는 하나님의 특별계시들이 성경에 충족히 기록되었음을 증거한다. 신약성경의 완성으로 하나님의 특별계시가 더 이상 주어질 필요가 없게 되었으므로,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은 사라지게 되었다. 워필드의 표현대로, “그것들[초자연적 은사들과 기적들]의 기능이 그것들을 특별히 사도교회에 제한시켰고 그것들은 필연적으로 그 교회와 함께 사라졌다.”

사실, 이것은 과거 수천 년 동안 자신의 뜻을 나타내신 하나님의 방식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하여 자신의 뜻을 계시하신 후 그것을 책에 기록하게 하셨다. 그것이 구약성경이었다. 모세에게 주셨던 기적들은 그 후에도 반복되도록 의도된 것이 아니었고, 단지 모세에게 계시되고 확증된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에 기록되어 후시대에 전달되도록 의도된 것이었다.

둘째,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은 그것들의 일시적, 초보적 성격 때문에 사라졌다.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의 독특한 목적은 그것들의 일시적, 초보적 성격을 보인다. 초자연적 은사들은 영속적인 것이 아니고, 또 하나님의 계시에 관한 한 온전한 것도 아니었다. 그것들은 일시적이었고 부분적이었다. 고린도전서 13:8-12는 그것들이 어느 날 폐지될 것이며 부분적이며 어린아이의 일같이 초보적이며 놋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다고 증거하였다.

특히 그것들은 ‘온전한 것’이 올 때 사라질 것이었다. ‘온전한 것’은 하나님의 계시에 관한 한 신약성경의 완성을 가리킨다. 사도시대의 초자연적 은사들을 통한 계시의 단편적 내용들에 비교하면, 신약성경은 하나님의 충족하고 온전한 계시의 책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온전한 계시의 저장소인 신약성경이 완성되었을 때,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 곧 일시적이고 부분적이고 초보적인 성격의 것들은 자연히 폐지되고 사라지게 된 것이다.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은 건물을 지을 때 설치하는 비계목들에 비교할 수 있다. 비계목들은 건물을 짓기 위해 일시적으로 설치하는 것이다. 일단 건물이 완성되면 그것들은 철거되어야 한다.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도 그와 같았다.

유명한 설교자 스펄젼은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의 일시적이고 초보적인 성격을 나무의 지지대에 비유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일 과수원에 나무를 심는다면 흔히 그 곁에 큰 지지대를 세워 붙들게 한다. 그러나 아무도 과거 50년간 있었던 사과나무를 지지하기 위해 기둥을 세우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늘날 하나님의 교회는 기적과 이상(異像)의 지지가 필요치 않는 나무다. 여러분은 이상보다 나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다.281)

그러므로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과 성경과의 관계는 마치 유치원과 대학교의 관계에 비유할 수 있다.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은 영적인 유아들을 위한 것이요 교회의 유아 시절을 위한 것이었다. 신구약성경을 가진 자들이 그러한 은사들을 구하는 것은 마치 대학생이 유치원에 등록하려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우리는 초보적인 일들을 구하려 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영적으로 성숙한 단계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전달과 확증을 위한 것이었고 사도 시대 이후에 사라졌다고 본다.  

12. 은사주의 비평

은사주의는 예언, 방언, 병고침 등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가 역사상 계속 있었고 오늘날도 있다고 주장한다. 오늘날 오순절파뿐 아니라 또한 전통적 교단들 내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견해를 가진다. 그러나 은사주의는 다음과 같이 비평되어야 한다.

성경의 충족성과 종결성을  부정함

첫째로,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이 계속 있었다거나 회복되었다는 주장, 특히 하나님께서 성경 외에 다른 계시들과 예언들을 주셨고 또 주신다는 주장은 성경이 하나님의 충족한 말씀, 최종적 권위의 말씀, 즉 우리의 신앙과 생활의 정확무오한 유일의 규범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물론 그들이 말로는 부정하지 않으나 행위로 부정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계시와 예언을 말하기 때문이다.

신사도운동은 오늘날 사도들이 있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특별계시가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도’라는 말은 넓은 의미에서 ‘보냄을 받은 자’를 가리키지만, 엄격한 의미에서는 주 예수께서 친히 택하신 자들만을 가리킨다. 누가복음 6:13,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 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갈라디아서 1:1,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 바나바 한 사람이 예외적으로 바울과 함께 사도로 불렸으나(행 14:4, 14), 사도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친히 본 자들이었고(행 2:21-22; 고전 9:1), 또 사도의 표는 기적을 행한 것이었다(막 3:13-14 전통본문; 행 2:43; 5:12; 고후 12:12).

선지자들도 사도 시대에만 있었다고 보아야 할 이유는 요한계시록 22:18-19가 증거하는 대로 더 이상 하나님의 특별계시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초대교회는 사도들이 직접 썼거나 사도들의 권위로 보증된 신약성경 27권만 하나님의 권위를 가진 정경(正經)으로 인정했고 교회에서 읽혀져야 할 책으로 보았다. 즉 신약성경 27권만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책으로 인정한 것이다.

어떤 이는 하나님께서 오늘날 성경과 동일한 내용을 계시하신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계시의 필요성이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사도 시대 후 1900년 기독교 역사상 성령의 내면적 활동을 통해 그의 종들과 백성들에게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기억나게 하셨다. 그러므로 성령의 새로운 계시 활동을 통해 동일한 내용을 받는다는 것은 전혀 불필요한 일이다. 성경은 충족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신사도운동가들은 성경 외의 계시를 말하며 성경의 건전한 교훈에서 이탈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주께서는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에서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눅 16:31)고 말씀하심으로 성경이 사람의 구원을 위해 충족하다는 사실을 증거하셨다.

또 요한계시록 22:18-19는 이 책에 가감하지 말라고 교훈했다: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이것은 성경 외의 추가적 예언의 부당성을 증거한다.

물론, 하나님의 주권을 부정할 자는 없다. 주신 이도, 거두신 이도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면 그가 거두신 은사도 다시 주실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1900년 동안 거두어 가신 것은 그의 섭리의 방식이었다.

사도 시대 이후 기독교 역사는 기적 행함의 역사가 아니고 십자가의 말씀을 전한 역사이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말하였다(고전 1:22-23). 중생과 회개의 내면적 기적은 늘 있었지만, 은사로서의 외형적 기적은 오랫동안 사라졌었다. 특별한 경우, 기도의 응답으로 병고침을 받는 것은 예외적인 일이라고 본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의 충족한 말씀으로 일해 오셨다. 성경은 사람의 구원과 변화된 삶을 위해 충족한 수단이었다. 성경을 믿고 성경대로 사는 삶은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삶이었다. 성경말씀을 통한 성령의 잔잔한 내면적 활동은 어느 시대든지 하나님의 백성을 떠난 적이 없었고, 신자들은 그 속에서 만족을 누렸다.

그러므로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의 계속을 주장하는 은사운동은 성경의 충족성과 종결성에 모순되며 성경을 통해 역사하신 하나님의 섭리의 방식에 반대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이 아니고, 성경말씀에 대한 바른 지식과 성실한 순종이다.

기독교의 본질을 왜곡함

둘째로, 은사주의는 기독교의 본질을 왜곡한다. 은사주의는 말씀 중심의 신앙생활을 무시하고 성령 체험을 강조한다. 즉 신앙생활을 성경말씀의 바른 지식과 실천보다 은사 체험에 의존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기적 체험에 근거하지 않고 십자가 속죄의 복음에 근거한 새 생활이다. 사도 바울은 기적을 전하지 않고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했다(고전 1:22-23). 사도 시대의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은 하나님의 진리들을 전달하고 확증하기 위함이었고 부분적, 일시적, 초보적 성격의 것들이었고 그에 비해 성경은 하나님의 온전한 계시의 말씀이다. 또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교훈한 대로, 방언, 예언 등의 은사보다 중요한 것은 사랑의 인격과 삶이다.

전통적으로 개혁교회는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바른 지식과 믿음, 또 진리대로 사는 바른 삶을 강조해 왔다. 그것이 옛 길이며 건전한 길이다. 그것이 성경적 기독교이다. 고린도교회는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을 소유한 교회이었지만(고전 1:7) 영적으로 어린아이이었다(고전 3:1). 신자의 영성의 표는 그리스도인다운 인격과 삶에 있지, 어떤 은사에 있지 않다. 은사는 영성의 표나 척도가 될 수 없다.

신구약성경은 초자연적 은사들의 경험보다 성도들의 바른 지식과 바른 인격과 삶을 더욱 중시하고 강조한다.

신명기 13:1-5,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네게 말하기를 네가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좇아 섬기자 하며 이적과 기사가 그 말대로 이룰지라도 너는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순종하며 그를 경외하며 그 명령을 지키며 그 목소리를 청종하며 그를 섬기며 그에게 부종하고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는 죽이라.” 기적보다 중요한 것은 바른 교리 사상이다.

이사야 8:20,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 속에 빛이 없기 때문이라”(원문 직역). 우리는 성경의 바른 교리들과 교훈들에 맞지 않는 예언들은 거짓된 것이며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마태복음 7:20-23,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못하였으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불법을 행하는 자들은 다 거짓된 자들이다.

고린도전서 13:1-2, 8, 13,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은사보다 중요한 것은 사랑이다.

데살로니가후서 2:9-12,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희 가운데서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거짓 기적들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이나 기적들을 사모하거나 구하거나 중요하게 여기지 말고, 오직 신구약 66권의 성경을 읽고 연구하고 그 바른 교리들을 믿고 순종하고 전파하는 것으로 충분한 줄 알자. 오늘날도 그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역사와, 교회를 새롭게 하시고 부흥케 하시고 성장케 하시는 역사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확신하자. 교회의 참 부흥은 다른 것을 통해서가 아니고 오직 신구약 성경의 성실한 강론과 전파를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다. 누가복음 16:31,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초자연적 은사들의 실재성이 의문됨

셋째로, 은사주의는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이 교회역사상 계속 있었고 오늘날 교회들 안에도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교회는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을 계속 경험하였고 또 지금도 경험하고 있는가? 그러나 은사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의 그 실재성이 의문된다.

계시와 예언

초대교회에 몬타누스파는 초자연적 은사들을 주장했으나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18세기 에드워드 어빙이 설립한 카톨릭 사도교회도 사도적 은사들을 주장하고 예언도 했으나 어떤 것들이 성경과 충돌하고 또 성취되지 않았으므로 정죄되었다. 19세기에, 안식교, 몰몬교, 및 여러 신비주의 집단들이 성경 외의 하나님의 계시와 예언들을 말했지만, 다 이단 혹은 불건전한 단체로 간주되었다.

오늘날 은사주의자들은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을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만일 있지도 않은 은사를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작은 잘못이 아니다. 거짓말은 마귀의 종인 표이기 때문이다.

폴 케인, 마이크 비클, 밥 존스의 캔서스시티 예언그룹과 함께 7년간 사역했던 오순절 은사운동가인 어니 그루엔(Ernie Gruen) 목사는 1990년, 캔사스시티 예언그룹의 예언사역이 조작된 가짜들이며 속임수에서 나온 이단이라고 폭로하였다. 그는 그 후에 ‘마지막 날에 나타나는 거짓 속임수들’에 대한 증언문서를 내놓았다.282) 그의 폭로 이후, 캔사스시티 예언그룹은 해체되었다.283)

1997년 신년 첫날, 릭 조이너와 그의 동료들은 아홉 달 안에 재난이 미국의 남부 캘리포니아를 강타할 것이라고 예언하였고 또 테러범들의 공격과 거대한 지진에 대한 암시를 가진 몇 가지 경고들도 하였다. 두려움이 남부 캘리포니아주의 은사주의 교회들을 휩쓸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284)

마이크 비클과 여러 자칭 선지자들은 중풍으로 몸이 마비된 마이크 비클의 동생 팻 비클이 어느 날 완전히 나을 것이라고 예언했으나 그는 수년간의 장애인 생활 후 2007년 5월 사망했다. 더욱이, 이 중요한 사건은 은폐되었다.285)

피터 와그너는 2001년 10월 1일 유럽과 영국에서 광우병은 사라지라고 선포했으나, 2007년경에도 영국에서는 광우병으로 사망한 여성이 있었다고 한다.286)

변승우는, “여러분, 밥 존스의 예언은 KS마크입니다. 대부분 예언자들의 예언이 안 이뤄진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번도 틀리지 않은 사람이 밥 존스입니다,” “예언과 계시 분야에서는 밥 존스가 전세계에서 제일입니다”라고 말했다.287)

그러나 밥 존스의 예언들은 거의 대부분 조작된 것이라고 지적된다. 예를 들어, 그는 1983년 5월 말에 “앞으로 [캔사스 지역에] 3개월간 비가 오지 않을 것이며 8월 23일 오후 6시에 3-4인치의 비가 내릴 것이다”라고 예언했으나, 국가 기상청과 지역 신문의 날씨 보도에 의하면, 6월의 강수량이 적지 않았고, 8월 23일은 겨우 0.32인치가 내렸을 뿐이라고 한다. 또 그는 “1976년, 6개월 내에 자기를 배척한 교회에 속한 30세 이하 여섯 명이 죽을 것이다”고 예언했으나, 그가 출석했던 베뢰아 침례교회 담임목사는 그를 배척한 일도 없고 그 교회에서 청년들이 그렇게 죽은 일들도 없었다고 증언하였다.288)

방언

은사주의는 성령세례의 증거가 방언이라고 주장하며 방언의 은사를 모든 성도에게 필수적인 은사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 방언은 외국어이었다. ‘방언’이라는 원어 글로싸 glw'ssa는 ‘언어’를 가리킨다(계 5:9; 7:9; 10:11; 11:9; 13:7; 14:6; 17: 15; 구약 헬라어 70인역에서도, 창 10:5, 19, 31; 11:7; 단 7:14 등). 또 그 단어는 흔히 복수명사로 사용된다. 마가복음 16:17, “새 방언들을 말하며.” 사도행전 2: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방언들]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이런 구절들은 방언들이 여러 개의 언어임을 나타낸다.

또한 고린도전서 14장에 언급된 방언이 사도행전에 증거된 방언과 다른 성격의 것이라고 추측할 정당한 이유는 없다. 고린도교회가 경험한 방언 은사는 사도행전에 언급된 방언과 동시대의 현상이며, 따라서 사도행전의 방언과 동일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또, 방언을 통역한다는 사실도 방언이 언어적 성격을 가졌음을 암시한다. 언어가 아닌 소리를 통역한다는 것은 불합리하다.

그러나 오늘날 방언 현상은 외국어의 성격을 갖지 않는 것 같다. 도날드 버딕은 현대 방언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열거한다: ① 반복이 매우 심하다, ② 방언과 방언하는 사람의 언어적 배경이 비슷하다, ③ 한두 개의 모음을 지나치게 많이 사용한다, ④ 언어적 구조가 부족하다, ⑤ 방언에 비해 통역이 현저히 너무 길다, ⑥ 동일한 구절의 통역이 일치하지 않는다, ⑦ 영어 통역시 주로 17세기 초의 흠정역(KJV) 문체가 사용된다.289) 미쉬간 대학의 언어학자 케넷 파이크와 미국 성서공회의 언어학자 유진 니다 등은 오늘날의 방언이 언어학이 다룬 어떤 실제적 언어와도 비슷하지 않다고 지적하였다.290)

더욱이, 방언 현상은 역사상 기독교의 이름을 가진 어떤 불건전한 단체나 이단 종파에도 있었고 심지어 기독교 밖에도 있었다. 2세기의 몬타누스파는 방언을 하였다. 그 후 17세기 말까지 방언현상은 교회역사에 나타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다가 1776년 미국 뉴욕주 트로이 부근에 앤 리가 설립한 쉐이커 공동체는 남녀가 나체로 춤추며 방언을 했고, 카톨릭 사도교회에서도 방언을 했다. 몰몬교 장로들도 유타주 성전을 봉헌할 때 방언을 했다.291) 그러므로 방언 같은 현상들이 다 하나님께서 주신 방언 은사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덧붙여서, 오늘날 은사주의자들은 흔히 방언 훈련을 시키는데, 그것은 분명히 인위적이며 비성경적이다. 사도시대의 방언은 훈련을 통한 것이 아니었고 심지어 방언하기를 구한 것도 아니었다. 방언 훈련은 명백히 인위적인 일이다.

그러면 오늘날의 방언 현상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섭리의 방식과 성경의 충족성에 비추어 볼 때,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일 가능성은 매우 작다. 오히려, 많은 비평가들은 오늘날 방언 현상이 심리적 현상이거나 위조품이거나 심지어 마귀에게서 기원한 것일 것이라고 생각한다.292) 특히, 오늘날 방언 현상의 비(非)언어적 성격이나 방언운동의 인위적 요소들은 그것이 성령의 역사가 아님을 보인다.

병 고침과 기적 행함

성경에서 주 예수님과 사도들의 병 고침의 사례들은 즉각적이고 비제한적이었다. 죤 맥아더는 예수님과 사도들의 병고침의 특징을 이렇게 열거한다: ① 한마디의 말씀이나 한번의 만짐으로 치료하셨다(막 8:22-26에 소경에게 두 번 안수하신 예외는 있었지만). ② 즉시 치료하셨다. ③ 완전히 치료하셨다. ④ 모든 사람을 치료하셨고 하실 수 있었다. ⑤ 신체 기관의 질병들도 고치셨다. ⑥ 죽은 자들을 일으키셨다.293) 그러나 오늘날 은사주의의 병 고침의 은사들은 이런 특징을 가지지 않는 것 같다.

제이미 버킹햄은 40권 이상의 책을 저술 혹은 공동저술한 카리스마지의 자유 편집인이었다. 그는 1990년 4월 카리스마지에서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세미한 목소리로 “적어도 다른 하나의 50년의 삶을 네게 주는 것이 나의 소원이다”고 속삭이셨다고 하였고 “나도 하나님께서 내가 적어도 100살까지 살 수 있도록 약속하셨다고 믿는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1990년 6월 그는 수술 불가능한 신장암이라는 진단을 받았고 7월 신장 수술 후 기적적 치료를 주장하였고 은사주의자 오랄 로버츠도 버킹햄이 치료받는 환상을 봤다고 주장했으나 1992년 2월 사망하였다.294)

레이클랜드의 부흥강사이며 체 안이 브래넘의 기름부음이 그에게 있다며 극찬했던 타드 벤틀리는 병을 고쳤다는 수십 명의 사람들의 가짜 전화번호를 언론에 내줬음이 드러났고,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32건의 보고서도 허위로 드러났다.295)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같이 일했던 로버트 리처델리는 레이클랜드의 가장 큰 문제점이 하나님의 위엄에 대한 두려움이 없고 회개와 겸손이 없다는 것이며 처음부터 사람이 기획한 것이고 악령들에게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보았고 또 노스캘로라이나의 한 교회에서 암, 백혈병, 당뇨병 등으로 고생하는 27명의 환자들이 찾아와 한 주간을 머물렀지만 단 한 명도 고침 받지 못하였고 귀가했을 때 더 악화되어 있었다고 한다. 또 한 목사는 카리스마지 팀과 함께 조사한 결과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경우들에 다양한 검증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화나 이메일로 오간 제보일 뿐 구체적으로 입증된 것이 하나도 없었다고 말했다.296)

남아공의 한 알파코스 집회 시 안수 받은 여성이 사망한 사건이 있었고, 베니 힌의 집회에서도 사망 사건이 있었다. 2009년 1월 30일, 호주 시드니에서의 손기철 장로 치유집회 중 한 여성도가 졸도하였고 여러 시간 집중적으로 기도했으나 결국 숨졌다.297) 병 고침의 은사를 받았다는 자들에게 이런 일이 있어도 되는가?

또 병 고침의 현상 자체가 성령의 은사임을 증거하는 것은 아니다. 병 고침의 현상은 기독교 안팎의 신비주의적 집단들에서 있어 왔다. 신비주의 연구가 쿠르트 코흐는 사탄의 전술전략이라는 그의 저서에서 악령에 의한 신비적 치료의 많은 사례들을 제시하였다.298)

또 기적을 행하는 일이 있다고 해도, 그것이 반드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것은 아니다. 이방종교에서도 기적을 행할 수 있다. 애굽의 술사들도 기적을 행했다(출 7:11; 8:7). 사탄과 악령들도 어느 정도 신비한 일을 할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오늘날 은사주의자들과 신사도운동가들이 그들의 주장대로 예언, 방언, 병 고침 등의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매우 의심스럽다.

하나님께서는 거짓 선지자들을 경계하라고 말씀하셨다.

신명기 13:1-5,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네게 말하기를 네가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좇아 섬기자 하며 이적과 기사가 그 말대로 이룰지라도 너는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순종하며 그를 경외하며 그 명령을 지키며 그 목소리를 청종하며 그를 섬기며 그에게 부종(附從)하고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는 죽이라. 이는 그가 너희로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며 종 되었던 집에서 속량하여 취하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케 하려 하며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행하라 명하신 도에서 너를 꾀어내려고 말하였음이라. 너는 이같이 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할지니라.” 우리는 거짓 목사들의 기적 행함을 분별해야 한다.

신명기 18:20-22는 거짓 선지자에 대해 이렇게 경고하였다. “내가 고하라고 명하지 아니한 말을 어떤 선지자가 만일 방자히 내 이름으로 고하든지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면 그 선지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느니라. . . . 만일 선지자가 있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방자히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 말지니라.”

이사야 8:20,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히 아침 빛을 보지 못하고[그들 속에 빛(=지식)이 없음이며].”

마태복음 24: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주께서는 거짓 목사들이 큰 기적들을 행할 것을 예언하셨다.

데살로니가후서 2:9-12,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희 가운데서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베드로후서 2:1, “그러나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말세에 이단들이 많이 나타날 것이다.

요한계시록 13:13, 15, “[거짓 선지자가]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저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하리라].” 말세에 주의 재림 직전의 중요한 한 징조로 적그리스도의 권세를 받아 거짓 선지자들이 나타날 것이며 놀라운 기적을 행할 것이다. 즉 은사주의에 대한 예언이다. 은사주의를 조심해야 한다.

교리적, 윤리적 탈선이 있음

넷째로, 은사주의자들은 때때로 교리적, 윤리적 탈선을 한다.

은사주의자들과 신사도운동가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해 풍유적 성경해석(영해)을 선호한다.299) 그러나 풍유적 해석은 성경의 바른 교리와 윤리의 교훈을 이해하고 파악하는 데 유익이 없고 오히려 방해가 되고 혼란을 준다.

초기의 은사주의자 윌리엄 브래넘은 삼위일체, 원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필요성을 부인했고 인간은 스스로 완전해질 수 있는 작은 신이라고 믿었다.300) 1949년 미국 오순절 교단조차도 브래넘의 사상과 활동을 이단이라고 발표하였고 특히 사도와 선지직의 복원, 임파테이션[은사 전이] 주장, 성경의 왜곡된 해석들 등을 정죄하였다.301)

1980년대 초 마이크 비클과 함께 교회를 개척했던 쥴리 부부는 마이크 비클이 십자가와 부활을 설교하지 않는다고 증언하였다.302)

제임스 보이스는, “존 윔버는 기적은 설교하지만, 복음을 무시하였다”고 말했다.303)

변승우는 “구원을 죄사함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사하시고 다 이루셨다는 것은 성경을 왜곡하는 겁니다”라고 말했고,304) 또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교리는 사탄의 교리라고 말했다.305) 그것은 복음의 정면적 부정이다. 또 변승우는 십일조와 주일성수를 해야 구원받는다고 율법주의를 가르친다.306)

밥 존스는 9세에 천사를 보았고,307) 자신은 한번 죽었다가 살아난 적이 있고 그때 환상을 보았는데 그리스도인들 중 2%만 천국에 간다고 했다.308) 이런 것은 아무 근거 없는 허탄한 주장이다.

신디 제이콥스는 또 하나님께서 기도 수건을 통하여 치유하신다고 하는 헛된 주장도 하였다.309)

또 변승우는 케네스 해긴의 진짜 구원받은 사람도 진짜 버림받을 수 있다는 책을 추천하고 구원받은 사람도 버림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310) 이런 주장은 비성경적 알미니안 신학사상이다.

피터 호로빈은, 서울 영동제일교회에서 보급하는 축사와 치유 2라는 그의 책에서, 귀신들이 불신자들 안에서보다 믿는 자들 안에서 더욱 역사한다고 주장했고, 또 성령 충만을 구한 성별된 물을 마시게 하면 귀신들린 자들에게 효과가 있다고 했고, 또 가계(家系)를 타고 내려오는 귀신들이 있고 건물이나 물건들에도 귀신이 붙어 있다고 했다. 이것들은 다 비성경적인 사상들과 행위들이다.311)

또 빌 존슨은 예수의 권세를 땅에 풀어 놓아라는 그의 책에서 우리가 하늘의 풍성한 자원들의 상속자이며 기도하면 부(富)가 우리에게 몰려온다고 헛된 주장을 한다.312) 체 안은 “100만원을 충실히 사용하면 1억원도 주실 것이다”라고 사람들에게 헛된 탐심을 조장한다.313)

또 은사주의자들과 신사도운동가들은 중보기도를 강조하며 기도 시 ‘ . . . 할지어다’라고 명령을 하도록 가르친다.314) 이것은 이용희의 에스더 기도운동과 손기철의 HTM 치유사역 등에서 볼 수 있다. 알파코스에서도 명령하는 기도를 가르친다.315) 그러나 이런 기도 방식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명령할 위치에 있지 않다. 우리에게는 신적 권위나 사도적 권위가 없다. 기도는 하나님께 인격적으로 아뢰는 행위이다. 기도 중에 명령을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매우 무례하고 건방진 일이다.

또 은사주의자들과 신사도운동가들은 영적 도해(圖解)를 말하며 거기에 근거해 어떤 지역을 발로 밟으면서 기도하면 그 지역의 귀신들의 권세가 꺾이고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된다고 주장하였다.316) 그러나 이것은 매우 비성경적이고 미신적이다.

또 은사주의자들과 신사도운동가들은 중보기도와 땅 밟기 사상을 통해 젊은이들에게 높은 마음과 헛된 야망을 심어준다. 잘못된 영향을 받은 젊은이들은 자신들을 크게 여기며 자신들이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할 것처럼 헛된 꿈을 가지는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함부로 단정하는 허상(虛想)에 불과하다. 성경은 우리에게 헛된 야망을 품지 말라고 교훈한다. 시편 131:1-2,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고 내 눈이 높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실로 내가 내 심령으로 고요하고 평온케 하기를 젖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중심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또 은사주의자들과 신사도운동가들이 바르고 선한 행위의 열매가 없는 것도 그것의 이단성을 보인다. 거짓 선지자들은 그들의 행실로 분별된다. 마태복음 7:15-16, 23,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내가 본 천국이라는 책의 저자이며 십 수년 전 한국의 대형집회의 강사이었고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을 받았다고 주장했던 펄시 콜레 박사의 한국 비서 전미란 씨는 콜레 박사가 주일에 교회에 가지 않으며, 식사 기도는 물론, 성경조차 오랫동안 읽지 않아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다고 말하였고 “펄시 콜레 박사가 주장하던 2천명 교인의 ‘하나님의 성경 교회’나 750명의 학생이 선교 훈련을 받고 있는 선교대학도 모두 거짓말”이라고 밝힌 바가 있다.317)

할렐루야 기도원 김계화 원장과 함께 6년 동안 사명자로 있었던 김정희 전도사는 『할렐루야 기도원 김계화의 정체』(기독교 이단문제 연구소, 1998년)라는 그의 책에서, 그는 남산 도깨비 무당과 의형제를 맺은 자이며 그의 성령 수술은 속임수요 주술행위이며 영화배우 남정임의 성령수술 치료는 거짓이었고 그는 헌금 갈취와 재물에 눈이 먼 자이며 병자 안수를 가장하여 재산을 갈취하였고 언어폭력, 행동폭력을 지령하였고 사명자들의 노동력을 착취하였고 백원짜리 동전을 하나님이 주신 세뱃돈이라며 장사를 하였고 한약을 불법으로 제조하여 판매하였고 지하수를 능력의 생수로 속여 장사를 하였고 현재도 유부남과 불륜을 맺고 있다고 증거하였다.318)

은사주의자들과 신사도운동가들은 때때로 자신을 대단한 지도자로 높이고 교만해 보인다. 벤틀리는 암을 고칠 때 사람들을 치거나 부츠를 신은 발로 걷어차는 등의 행위를 한다.319) 소강석 분당 새에덴교회(예장 합동) 목사는 성경보다 목사의 강단 설교가 위에 있으며 성도들의 존재 목적이 목사를 기쁘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320) 성경은 이단자들의 특징으로 교만을 들었다(벧후 2:10; 유 8, 11, 14).

또 은사주의자들과 신사도운동가들은 때때로 음행 문제로 몰락했다. 1991년 가을, 밥 존스의 부도덕한 섹스 행위가 폭로되었다.321) 2004년 폴 케인은 동성애와 알콜 중독에 빠져 있음이 동료들(마이크 비클, 릭 조이너, 잭 디르)에 의해 폭로되었다.322) 2008년, 타드 벤틀리는 여자 문제로 몰락하였다. 2016년, 라이즈업 코리아 대표이었던 이동현 목사는 오랫동안 여고생을 성추행한 사실이 드러났고 공개사과하고 사임하였다. 성경은 이단자들의 한 특징이 음란함이라고 말하였다(벧후 2:2, 14; 유 4, 8, 16).

또 은사주의자들과 신사도운동가들 중에 탐심을 보이는 자들도 있다. 마이크 비클의 아내 다이안 비클은 부동산 회사의 사장이며 IHOP의 모든 재산도 총괄하고 있다. 그들 부부는 모든 재산의 소유자이기도 하다.323) 존 킬패트릭과 동료들은 많은 분량의 토지를 얻었고 부요한 집들을 지었거나 짓고 있다고 보도되었다. 킬패트릭은 31만불짜리 호화 자동차로 여행을 하고 34만불짜리 호화 주택을 지었다. 스티븐 힐 전도협회는 약 85만불짜리의 40에이커[약 5만평] 땅을 샀다.324) 브라운스빌의 학교 사역 책임자 마이클 브라운은 그 신문이 약 72만불의 값이 나갈 것이라고 말한 집을 지었다.325) 성경은 이단자들의 한 특징이 물질적 탐욕에 있다고 말하였다(벧후 2:3, 14; 유 11, 16).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삼가 탐심을 물리치라고 교훈하셨고(눅 12:15), 사도 바울은 부하려는 마음과 돈을 사랑하는 마음을 버리고 자족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교훈하였다(딤전 6:6-10).

또 은사주의는 교회연합운동과 함께 가고 있다. 은사주의자들은 성령을 받았다고 자부하면서 자유주의 교회들과 천주교회를 배격하지 않고 오히려 세계교회들이 성령 안에서 하나됨을 강조하고 있다.

1993년 순복음 강남 신학원 교수진에는 자유주의적 한신대, 감신대, 연대 신대의 교수들이 포함되어 있었다.326)

한국의 순복음교단은 한국교회협의회(KNCC)에 가입했고 또 WCC와 에큐메니칼 운동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다.

은사주의자 조용기 목사, 폴 크라우취, 잭 헤이포드, 죤 윔버 등은 로버트 슐러의 자서전에 추천사를 실었는데,327) 로버트 슐러는 자유주의적이고 혼합주의적이고 연합주의적 인물이다. 그는 기독교를 조롱하는 기독교 일치 학교의 뉴에이지 연례대회에서, 또 문선명과 함께 통일교회 행사들에서, 또 몰몬교 성전에서의 종교간 조찬기도회의 주강사이었다.328) 뉴에이지 운동가들과 몰몬교인들과 천주교인들은 그의 교회당에서 연설하였다.329) 그는 오래 전에 죄에 대한 바울의 교훈과 결별했고,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자신을 힌두교인과 이슬람교인과 단절시키기 때문에 더 이상 그런 이름으로 불리기를 원하지 않는다.330) 그는 그리스도께서 천국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요 기독교가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고 설교하지 않는다.331) 그러나 은사주의자들은 이런 인물을 위해 추천사를 쓴 것이다!

1987년 성령과 세계전도 대회에 관한 북미 대회에서 한 예언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심지어 개신교회와 천주교회의 통합을 선언하였다.332) 이러한 미혹의 예언은 그 대회에서 제재되지 않았다.

카리스마지 1998년 4월호에 의하면, 선교사 마틴 롬바도는 그의 동료 은사주의자들과 함께 이태리 로마에서 천주교인들과 개신교인들을 연합하기 위해 활동하고 있다. 롬바도는, “우리는 지금 하나님께서 그의 영광을 천주교인들에게 부으시는 것을 본다. 천주교 은사주의 무리들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말했다.333) 이와 같이, 은사주의는 잘못된 교회연합운동을 촉진시키고 있다.

미국복음주의자협회(NAE)나 세계복음주의연맹(WEA)의 상당수는 자유주의 교단에 속한 교회들뿐 아니라, 또한 은사주의 교회들이다.

성경은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을 대적하고 참된 교회를 핍박하는 배교적 교회가 혼합주의적, 연합주의적 교회라고 예언하였다. 요한계시록 18:2,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결론

사도시대에 주셨던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이 오늘날에도 있다고 주장하는 은사주의와 신사도운동의 견해는 비전통적일 뿐만 아니라, 또한 비성경적이다. 신약성경에 기록된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은 특별히 사도시대에 주신 현상이었고 사도시대가 끝나고 신약성경이 완성되었을 때 사라졌다.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의 중단은 하나님의 뜻이었다. 오늘날 은사주의와 신사도운동은 가짜 부흥 운동이며 이상한 영의 역사이다. 그것은 사탄과 악령들의 미혹이다.

제임스 보이스(James M. Boice)는 빈야드 운동은 “거짓 종교”이므로 반드시 피해야 한다고 말하였고,334) 이인규는 신사도운동이 “이단종합백화점과 같다”고 평가했다.335)

행크 해너그라프는 빈야드와 신사도의 가짜 부흥운동이라는 책을 썼는데, 그 책의 서문에서 존 윔버의 빈야드 운동에 속했다가 그 허상을 파악하고 돌아온 톰 스타이프 목사는 그 예언자들이 지교회 목사들 위에서 지교회 직원을 교체하라고 명하기도 하고 지교회들을 마음대로 휘두르려 하였고, 꿈을 노트에 적었고 이루어지기를 기다렸으나 대부분 헛되었고, 성경 연구보다 직통계시에 의존했고, 몸을 떨고 눈을 깜빡임 등이 성령이 임한 증거로 여겨지기도 했다는 것 등을 들어 그것이 가짜 부흥운동임을 증거하였다.336) 오늘날 은사주의와 신사도운동은 잘못된 운동이다. 그것은 사탄과 악령들의 활동이다.

그러나 우리는 영적으로 메마른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 되고 성령의 충만하심 속에 살아야 한다. 에베소서 5:18,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데살로니가전서 5:19, “성령을 소멸치 말라.”

만일 현대교회에 영적 침체가 있다면, 그것은 어떤 이의 주장처럼 ‘전통적인 경직된 성령론’ 때문이 아니고, 역사상 자주 그러했듯이, 목사들과 신도들의 죄와 불순종, 세상과 분리되기보다는 세상을 따라가며 세상과 타협하는 인본주의적 삶에 기인한다. 그러므로, 교회의 참된 부흥은 신자들의 성령세례나 은사 체험 같은 어떤 단회적 혹은 반복적 사건에 있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과 성경의 모든 교훈들에 근거한 철저한 회개와 진실한 믿음과, 그 말씀의 교훈대로 사는 온전한 순종의 삶에 있다.

기독교 2천년 역사는 하나님께서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을 통해 일하신 역사가 아니고, 신구약 성경말씀을 통해 일하신 역사이었다. 사도 바울의 증거대로, 기독교는 기적이나 지혜의 말을 전하지 않고 오직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파한다(고전 1:22-23).

주 예수께서는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다(눅 16:29, 31).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기록된 성경말씀과 그 중심 내용인 속죄의 복음을 통해 자기의 택한 백성들을 구원하시고 신구약 성경을 통해 그들을 거룩케 하시고 온전케 하신다. 성경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을 통해 죄인들을 회개시키고 예수님 믿고 구원 얻게 하시고 또 성경의 교훈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하시고 온전케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방법이다!  

13. 선교 개념의 변질

오늘날 교회의 또 하나의 중요한 문제는 선교 개념의 변질 문제이다. 전통적으로, 선교(宣敎, mission)는 주 예수께서 교회에 명하신 전도의 사명을 가리켰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로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에게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여 구원 얻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교회가 이 세상에서 수행해야 할 가장 귀하고 중대한 임무이다. 그러나 오늘날 선교에 대한 이 전통적이고 성경적인 개념이 변질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선교를 죄인들의 영혼 구원의 활동으로만 보지 않고, 교회가 세상 속에서 행할 사회적, 정치적 책임과 활동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선교 개념의 변질에 대한 증거들

오늘날 선교 개념의 변질에 대해 몇 가지 예들을 들어보자.

1967년, 미국 연합장로교회(지금의 미합중국 장로교회[PCUSA])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다른 소위 ‘1967년 신앙고백’을 채택했는데, 그 고백서는 교회의 사명[선교]에 대해 이렇게 진술하였다:337)

하나님과 화목되는 것은 그의 화목케 하시는 공동체로서 세상 속에 보내지는 것이다. 이 공동체 곧 세계적 교회는 하나님의 화목의 메시지를 위탁받았으며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를,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분리시키는 적의(敵意)를 고치시려는 하나님의 수고에 참여한다(2.1.1).

교회의 회원들은 화평의 밀사(密使)들이며 정치, 문화, 경제면에서 세력 있는 자들이나 집권자들과 협력하여 인간의 행복을 추구한다. 그러나, 바로 이 세력들이 인간의 안녕을 위태롭게 하는 경우에는 가장(假裝)과 부정(不正)에 대항하여 싸워야 한다(1.3.1).

인간을 향한 그의[그리스도의] 봉사는 교회가 모든 형태의 인간 복리를 위하여 일할 것을 위탁한다. 그의 수난은 교회가 인류의 모든 고통에 대해서 민감하여 각종 궁핍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도록 만든다(2.1.1).

교회는 모든 민족 차별의 폐지를 위하여 노력하며 그것으로 인해서 상해를 받은 자들을 위하여 봉사한다(2.1.4).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구속 사업은 인간생활 전체 곧 사회와 문화, 경제와 정치, 과학과 기술, 개인과 단체, 전부를 포괄한다(3.1.1).

오늘날 에큐메니칼 운동에서 강조되는 선교 개념도 이런 개념이다. 1980년 멜본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세계선교 및 전도대회는 말하기를, “인권을 위한 투쟁에의 참여는 그 자체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사신 그리스도를 말과 행위로 선포할 교회의 전체적 선교의 중심적 요소이다”라고 하였다.338) WCC의 전 총무 필립 포터도 주장하기를, “우리는 경제적 정의와 정치적 자유와 문화적 갱신을 위한 투쟁을 하나님의 선교를 통한 세계의 전체적인 해방의 요소들로 본다”고 했다.339) 심지어, 에밀리오 카스트로는 사회적인 전도 개념을 말하기를, “복음 전도에서 우리는 개인적 문제의 해결뿐 아니라, 창조세계 질서 전체의 변혁을 목표한다”고 하였다.340)

WCC 1983년 선교와 전도 선언도,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은 개인의 회개를 요청할 뿐만 아니라, 사회의 구조에 대한 도전이다. . . . 복음 전도는 이 세상의 구조들, 즉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제도들에 대해 말한다”고 말하였다.341)

WCC의 이러한 선교 개념은 특히 1961년 국제선교협의회(IMC)가 WCC 세계 선교 및 전도위원회로 통합된 후 그 위원회의 위원장이었던 필립 포터의 지도 아래 나타났다. 그 후에, 그 개념은 1968년 WCC 웁살라 총회에서 공적으로 제안되었고, 1973년 방콕에서의 세계 선교 및 전도 대회에서 강조되었다. 이것이 소위 ‘하나님의 선교’ (Missio Dei) 혹은 ‘전체적(holistic) 선교’ 개념이다. WCC의 현재의 선교 개념은 이전 역사의 계속일 뿐이다.342)

미국의 9개 교단의 통합을 추구하는 교회연합 협의회(COCU)도 선언하기를, 교회의 공동적 선교(사명)는 “개인적인 동시에 사회적이다”라고 했다.343) 레온 왓츠 같은 이는 심지어 사회 활동을 교회의 일차적 사명[선교]이라고 강조하였다.344)

이런 넓어진 선교 개념은 우리나라에도 많이 퍼져 있다고 보인다. 1990년 9월 예장 합동측이 주최한 서울 세계선교대회에 참석한 선교사 100명 중 설문에 응답한 64명 중에, 선교가 전도를 뜻한다고 대답한 자들은 50%뿐이었고, 전도와 문화적 사명을 함께 감당하는 것이지만 전도가 우선이라고 대답한 자들이 32.8%, 우선 순위를 두지 말고 둘 다 감당해야 한다고 대답한 자들도 14%이었다.344-1)

1996년, 한국 개혁신학회 제1회 정기학술심포지엄에서 장로회신학대학(예장통합)의 이형기 교수는 “한국 개신교의 나아갈 방향: 선교신학의 입장에서”라는 제목의 강연에서, 불신자들을 회심시키는 일에 초점을 두었던 19세기 선교 개념이 20세기 에큐메니칼 운동에서는 교회의 사회 참여 측면을 포함하게 되었다고 전제한 후, 이 두 흐름의 선교 개념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전체적(whole)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345) 이것이 소위 ‘전체적 선교 개념’ 혹은 ‘넓어진 선교 개념’이다.

1996년, 한국 개혁신학회 제1회 학술심포지엄에서 장로회신학대학(예장통합)의 이형기 교수는 "한국 개신교의 나아갈 방향: 선교신학의 입장에서"라는 제목의 강연에서, 믿지 않는 자들을 회심시키는 일에 초점을 두었던 19세기 선교 개념이 20세기 에큐메니칼 운동에서 교회의 사회 참여 측면을 포함하게 되었다고 전제하면서, 이 두 흐름의 선교 개념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전체적(whole)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345) 이것이 오늘날 유행하는 '전체적 선교 개념' 혹은 '넓어진 선교 개념'이다.

 

오늘날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이러한 ‘넓어진 선교 개념’을 받아들인다. 1974년 복음주의자들의 로잔 언약은 교회의 사명에서 전도가 일차적이라고 표현하면서도 전도와 사회정치활동의 불가결의 연관성을 강조함으로 선교 속에 두 요소를 포함시키는 경향을 이미 보였다. 로잔 선교대회의 지도적 인물인 죤 스토트는 고백하기를, “예수님의 마지막 부탁[마 28:19]의 결과들뿐 아니라 그 실제의 부탁 자체가 전도의 책임뿐 아니라 또한 사회적 책임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함을 나는 지금 더 분명하게 본다”고 하였다.346)

개혁주의에큐메니칼협의회(RES) 총무 폴 슈로텐보어도 말하기를, “전도는 일차적이지만 또한 예비적이다. 전도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개인적 회심과 구조적 개혁을 요청해야 한다”고 하였다.347) 그는 선교가 아니고, 심지어 전도에 대해 ‘전체적 개념’을 주장한 것이다!

사회정치적 행동주의

우리는 오늘날 교회들에서 선교 개념의 변질뿐 아니라, 사회정치적 관심과 행동주의적 태도를 볼 수 있다. WCC 헌법은 그 단체의 한 기능을 진술하기를, “인간의 필요에 대한 봉사, 사람들 간의 장벽들의 제거, 및 한 인류 가족의, 정의와 평화 증진에 있어서의 교회들의 공동적 관심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하였다.348) 데이빗 스토우는 1980년 WCC 멜본 세계선교와 전도대회에 관해 말하기를, “멜본 대회는 사회 활동에 관한 대회보다 훨씬 더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문제들에 집중하였다”고 하였다.349)

교회연합운동가들은 사회적 관심과 활동이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방식이라고 한다. 그들은 또한 가난과 경제적 불평등이 사회의 근본 문제이며, 따라서 이상적 사회는 모종의 사회주의적 사회라고 암시한다. 데이빗 스토우는 말하기를, “멜본 대회가 불평등한 경제 구조를 천국에 반대되는 주요 표현으로 인식했으므로, 그 대회는 경제적으로 평등한 사회와 같은 어떤 이상, 즉 어떤 형태의 사회주의를 불가피하게 안출하였다. 약간 부드럽게 명명되는 ‘중앙설계경제’는 여러 방식으로 새 세계의 선구자로서 그리고 하나님의 인류 역사에 새 장으로서 암시되었다”고 하였다.350)

또 에큐메니칼 운동가들은 가난한 자들에게 우월권을 주며 그들의 투쟁에 연대의식을 가지고 동참할 것을 요청한다. 그들은 단지 이론적 변론이 아니라, 투쟁의 행위를 강조한다. 1968년 WCC 웁살라 총회는 말하기를, “인류의 갱신은 지역사회에서 인종과 계급의 모든 배타성을 찾아내고 폐위시킴으로써 또 인간의 모든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강등과 착취에 대항해 싸움으로써 시작되어야만 한다”고 하였다.351) 에밀리오 카스트로도 말하기를, “하나님 나라의 복음의 선포는 그 나라에 참여하는, 그 투쟁에 참여하라는 초청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전도는 혁명적 참여가 된다”고 한다.352) 감리교 목사요 짐바브웨 대통령인 케이넌 버내너는 그의 연설문에 쓰기를, “오늘날 요구되는 것은 자본주의적 착취에 대한 분명한 정죄와 그것을 전복시키는 힘찬 행동이다”라고 하였다.353)

WCC 인종차별투쟁 프로그램(PCR)은 그 단체의 사회정치적 관심과 행동주의의 대표적 예이다. 그 단체의 인종차별투쟁 프로그램은 1970년 이후 남아프리카의 ‘아프리카 국가회의’(ANC)와 나미비아의 ‘서남 아프리카 인민기구’(SWAPO) 등 과격한 마르크스주의 폭력단체들에게 1992년 9월말 현재 1,007만불 이상을 지원했다.354)

근래에 에큐메니칼 운동과 공산주의와의 연관을 증거하는 자료들이 드러났다. 소련의 통신사이었던 타스 통신은 러시아 비밀경찰 요원들과 동독의 비밀경찰이 유럽 교회들의 대회와 WCC에 침투하였으며 1984년에 에밀리오 카스트로의 WCC 총무 선출에 영향을 끼쳤다고 보도하였다.355) 3천명이나 되는 많은 교직자들이 공산주의자들을 위한 정보제공자들로 행동했으리라고 하며, 일부의 러시아 정교회 신부들과 지도자들은 위험이 없이 그들의 일들을 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감시하는데 그들의 성직자의 복장을 사용하였다고 한다.356) WCC는 1961년 이후 공산세계의 교회와 러시아 비밀경찰인 성직자 회원들을 가지고 있었다.357)

1986-1987년 미국 연방수사국(FBI) 보고서에 의하면, 소련 사람들은 미국교회협의회(NCC)나 WCC를 그들의 선전 목적들에 사용했고 공산 정부의 통제 아래 있는 러시아 정교회는 이것을 조종하였다. 유에스 뉴스 앤드 월드 리포트는 보도하기를, 러시아 정교회는 공산주의 아래의 정부의 도구이며 “어떤 정교회 신부들은 단순히 비밀경찰의 협력자들로서가 아니고 실제적 요원들로서 활동하였다고 보인다”라고 하였다.358) 특히, 게하르트 베지에르, 아르민 보이엔스, 게하르트 린데만 등 독일의 학자들은 WCC가 동유럽의 정보기관들에 의해 침투를 당했고 전 회장들 중의 한 사람인 메트로폴리탄 니코딤(Nikodim)이 러시아 비밀경찰요원이었음을 확증하였다.359)

넓어진 선교개념의 오류

그러나 오늘날 자유주의자들과 교회연합운동가들과 또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넓어진 선교 개념’ 즉 ‘전체적(holistic) 선교 개념’은 정당한 것인가? 교회의 사명(mission)은 복음 전도 외에 사회정치활동을 포함하는가?

우선 ‘교회의 선교’라는 말을 정의해보자. 교회란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얻은 성도들의 모임을 가리킨다. 즉 교회는 하나의 단체이다. 또 선교(宣敎)란 문자적으로는 ‘교(敎)를 선전하는 것’이라는 뜻이지만, 영어의 미션(mission)은 ‘특수한 임무’ 즉 ‘사명(使命)’이라는 뜻이다. 웹스터 영어사전은 그것을 “어떤 개인이나 단체가 맡은 특수한 임무”라고 정의한다. 그러면 교회의 선교란 단체로서의 교회의 사명이 무엇인가라는 문제이다. 성도들의 모임인 단체로서의 교회의 사명이 영혼을 구원하는 전도뿐 아니라 사회정치활동도 포함하는가? 이것이 문제의 초점이다.

전통적 신학의 정리대로, 교회의 삼대 임무는 예배와 영적 건립과 전도이다. 예배는 교회가 하나님을 향해 가지는 기본적 임무이다. 교회 즉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임은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감사하면서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과 경배를 드려야 한다(요 4:23; 엡 1:14). 영적 건립은 교회가 자체를 향해 가지는 임무이다. 교회는 교인들을 영적으로 성장시켜 온전케 해야 할 임무를 가진다. 이를 위하여, 주께서는 교회에 직분자들을 주셨고, 교훈, 기도, 권징, 교제, 봉사, 구제의 일을 하게 하신다(마 28:20; 행 2:42; 엡 4:11-12). 특히 초대 교회에서 헌금의 용도인 구제는 교인들 중에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것이었다(행 6:1-2; 고전 16:1-2; 고후 8:4; 9:1).

전도는 교회가 세상 속에서, 세상을 향해 가지는 임무이며 이것이 주께서 세상에 남겨두신 제자들 즉 교회에 주신 특수 임무, 즉 사명(使命, mission)이었다. 마태복음 28:19,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 마가복음 16:15,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요한복음 20:21,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사도행전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또 교회의 사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의 계속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죄인들을 구원하는 전도의 일이었다. 마태복음 9:13,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전통 본문). 마태복음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6:38-40, “내가 하늘로서 내려 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마가복음 1:38,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어떤 이들은 주께서 병자들을 고치신 일이 사회봉사활동에 해당하며 그것이 주의 사명의 일에 포함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께서 병자들을 고쳐주신 것은 그의 가르치심과 전파하심의 일과 분리된 것이 아니고 그 일에 종속된 부차적인 것이었고, 더욱이 주께서는 병자들을 고치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단지, 긍휼과 능력이 많으신 구주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전파하실 때 불쌍한 병자들을 버려두지 않으시고 고쳐주신 것이었고, 또 그러한 치료의 기적들을 통해 자신의 신성(神性)을 증거하셨던 것이다.

또한, 병고침을 받은 자들은 대부분의 경우 믿음을 가지고 예수께 나아왔던 자들이었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는 병자들을 고치기 위해 찾아다니신 것이 아니고 그에게 찾아온 자들을 고치셨고, 또 그에게 나아왔던 자들은 대부분 그를 믿었던 자들이었다(마 8:2, 5, 10, 16; 9:2, 22, 29). 그러므로 예수께서 병자들을 고치신 일은, 오늘날 교회가 교회 안에 병든 성도들을 돌아보는 일이나 혹은 복음을 전파하는 과정에서 병자들을 치료하는 행위에 해당하지, 독립적인 의료 활동이나 교회의 사회정치활동을 의미하지 않는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자신의 사명 즉 선교에 대한 정확한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J. 그레셤 메이천은 말하기를, 선교란 살아계시고 참되신 한 분 하나님과 인류의 보편적 죄악성과 하나님의 진노, 그리고 죄인들을 위하여 죽으시고 다시 사신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이라고 하였다.360) 로버트 홀 글로버도 이렇게 말했다:

교회의 참 사명은 주님의 사명과 동일한 것, 즉 국내에서나 먼 나라에서나 간에 잃어버린 자들이 있는 곳에는 어디서나 그들을 찾아 구원하는 것이었고 또 언제나 계속 그래야 한다. . . . 초대교회는 오늘날과 근본적으로 다를 바 없는 사회적, 도덕적, 정치적 상황들과 문제들을 직면하였지만, 사회 복음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고, 오직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어떤 변명도 없이 개인 구원의 유일한 복음을 전파하였다.361)

해롤드 린젤은 “선교와 전도는 중심에서 동의어이다”라고 말했고, 알랜 티펫도 선교를 “잃어버린 자들을 그에게로 인도하여 구원얻게 하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이라고 정의하였다.362) 또 1970년 프랑크푸르트 선언은, 선교가 영원한 구원을 증거하고 제시하는 것이라고 말했다.363) 그 선언의 초안자 피터 바이엘하우스는 “고전적, 전통적 선교 개념은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364)

더욱이, 사회정치활동이 교회의 임무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첫째, 주 예수께서는 사회정치활동에 관여하지 않으셨다. 도리어 그는 형의 유업을 나누어 달라는 어떤 이의 요청을 거절하셨고 자기를 억지로 왕으로 삼으려는 사람들을 피하셨다. 누가복음 12:13-14,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요한복음 6:15,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또 그는 빌라도 총독 앞에서 그의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음을 증거하셨다. 요한복음 18:3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둘째,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회정치활동을 명령하지 않으셨다. 그 대신, 그는 그들에게 영혼 구원을 위한 전도를 명령하셨다. 복음서들의 마지막 부분들과 사도행전의 첫부분은 이 사실을 밝히 증거한다(마 28:19; 막 16:15; 눅 24:47-48; 요 20:21; 행 1:8).

셋째, 주의 제자들 즉 초대 교회는 사회정치활동에 관여하지 않았다. 이것은 사도행전과 서신서들이 확증하는 바다. 사회정치문제에 대한 신약성경의 교훈은 소극적이고 온건하다. 신약성경은 성도들이 사회의 질서를 존중하고 위정자들에게 복종하고 규정된 세금을 바치고 또한 위정자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칠 뿐이다(롬 13:1-7; 엡 6:5-9; 골 3:22-4:1; 딤전 2:1-2; 벧전 2:13-20). 구약성경에 나오는 선지자들의 대 사회적 말씀들은 신정 국가인 이스라엘에게 해당되었던 것이므로, 오늘날의 세속사회에 직접 적용되지 않고 일차적으로 교회에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선교(宣敎, mission)는 주 예수께서 교회에 명하신 전도의 사명을 가리킨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에게 주 예수의 복음을 전파하여 구원얻게 하는 사명이다. 그것은 교회가 세상에서 수행해야 할 가장 귀하고 중대한 임무이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교회들 가운데서 선교에 대한 이 전통적이고 성경적인 개념이 변질되었다. 선교를 단지 죄인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활동으로 보지 않고, 교회가 세상 속에서 행해야 할 사회적, 정치적 책임과 활동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소위 넓어진 선교 개념은 잘못된 개념이다. 그것은 교회의 사명에 대한 심각한 오해이다. 이와 같이 많은 교회들이 자신의 사명을 이해함에 있어서 성경적, 전통적 입장에서 크게 이탈하였다. 교회의 사명에 대한 개념의 변질은 매우 심각한 문제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복음에 무엇을 첨가하려는 생각은 하나님의 뜻에서 이탈하는 중대한 오류이다.

많은 순진한 성도들이 선교를 위해 헌신하고 선교를 위한 후원자가 되지만, 우리가 선교에 대한 순수한 성경적 개념을 가지지 못한다면, 우리는 마귀의 속임수에 넘어가는 어리석은 자가 될 것이다.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고 역사적 기독교가 믿고 행해온 대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전파함으로써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다 구원해내어야 한다. 사회정치활동은 아무리 좋은 일일지라도 주께서 주신 이 숭고한 전도의 임무에 첨가될 수 없다. 교회의 사명은 오직 이 한가지, 즉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원하는 것이다! 이것이 선교다.

사회정치적 행동주의의 오류

또한 이와 더불어 오늘날 교회들의 사회정치적 관심과 행동주의는 다음 몇 가지 점에서 옳지 않다.

첫째, 사회적 관심과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것은 별개 문제이다. 사회적 관심과 행동이 그리스도인의 영적 생활의 척도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여러 부분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둘째, 가난과 경제적 불평등은 사회의 근본 문제가 아니다. 사회의 근본 문제는 단지 물질적인 것이나 자본주의적 사회 구조 같은 외적인 것이 아니다. 사회의 근본 문제는 그보다 더 깊은 곳에 있다. 사회의 근본 문제는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 있고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고 있는 죄악된 상태에 있다.

셋째, 가난은 항상 사회 구조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니다. 게으르고 낭비하는 자가 가난해지는 경우도 많다. 잠언 6:10-11,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 하면, 네 빈궁이 강도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 잠언 10:4,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넷째, 가난한 자들에게 무조건 우월권을 주는 것은 정당치 못하다. 오히려, 성경은 가난한 자들을 두호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출애굽기 23:3,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편벽되이 두호하지 말지니라.” 레위기 19:15, “너희는 재판할 때에 . . .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다섯째, 이 세상에서 공평하고 평화로운 사회를 만드는 것은 실상 불가능하다. 먼저 사람의 죄악성이 제거되지 않고서는 이상적 사회는 불가능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으로 세상에서 악인들이 다 제거되기 전까지 이상적 인간 사회의 건설은 사실상 불가능한 꿈에 불과하다.

여섯째, 오늘날 공산주의 사회에서의 인간의 자유, 특히 종교적 자유의 박탈과 탄압은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보다 더 큰 사회적 문제이다. 또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공산주의 혁명과 같은 폭력적 행위를 인정할 수 없다.

그러면, 사회의 개선을 위한 그리스도인들의 대책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복음 전도를 통해 먼저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켜야 한다. 사회의 근본 문제는 인간의 죄악된 마음에 있다. 그러므로 사회의 진정한 개선은 단지 사회 구조의 개선이 아니고 인간 개조이어야 한다. 마음의 변화가 사회 구조의 변화보다 앞서야 참된 사회 개선이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므로 전도를 통한 영혼구원과 인격의 변화는 사회문제에 대한 기독교의 근본적 대답이다.

둘째로, 우리는 먼저 우리의 집과 교회를 모범적 사회로 만들어야 한다. 구원받은 자들의 공동체를 모범적이게 만들지 못한 채 사회 개혁을 위해 활동하는 것은 주제넘는 일이다. 중생한 공동체가 이상적이게 되지 못한다면, 중생치 못한 세속사회가 어떻게 이상적 사회가 되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셋째로, 우리는 우리의 직업과 시민으로서의 의무의 수행을 통해 사회 정의의 실현과 사회 개선을 위해 힘써야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정치, 경제, 법률, 과학, 교육, 신문 방송, 예술 등 그의 직업의 모든 분야에서 모범적으로 활동함으로써 그가 책임 있는 윗사람일 경우에는 직접적으로 혹은 그가 아랫사람일 경우에는 간접적으로 다른 이들에게 선한 영향을 끼쳐야 할 것이다.

또 모든 그리스도인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다른 동료들을 겸손히 설득하며 그들의 양심에 호소함으로써 사회 정의 실현과 사회 개선을 위해 힘써야 한다. 또 우리는 시민으로서 우리의 사회가 허용하는 합법적 방법을 통해 점진적인 사회 개선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다수의 사람들, 특히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의와 선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할 때, 우리는 그들의 생활의 방식을 변화시키려고 물리적으로 강압해서는 안 될 것이다. 실상, 하나님을 모시지 않는 심령들에게 참되고 온전한 도덕적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우리는 인내하며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구할 것밖에 없다.  

14. 낙태가 가능한가?

현대교회문제는 교리적 배교와 타협과 혼란에서 뿐만 아니라, 또한 윤리적 부패에서도 심각하게 나타난다. 그 중 하나는 교회들이 낙태를 용납하는 것이다.365) 낙태는 가능한 일인가?

오늘날 인공임신중절수술 즉 낙태는 성적 문란과 더불어 행해지는 매우 심각한 사회악이다. 낙태로 죽어가는 어린 생명은 셀 수 없이 많다. 1990년의 한 보고서는 “전세계적으로 인공유산은 매년 5천 5백만건에 이르고 있는데, 이 중 소련이 가장 많아 연간 650만건이고 미국이 150만건에 달한다”고 말하면서 “진짜 놀라운 것은 한국이 150만건(1985년)에 달하고 있어 인구 비례로 따지면 세계 최고”라고 말했다. 특히 우리나라의 통계는 1960년도의 10만건에 비해 25년 만에 15배나 급속하게 증가한 것이라고 한다.366)

우리나라에서는 한 아기가 태어날 때 약 2.5명의 태아가 낙태로 죽어간다. 한 해에 60만명이 태어나고 150만명이 낙태당한다. 이것은 세계 제2위의 낙태율이다. 한 해에 150만건, 하루에 4,000건, 20초당 1건이다. 기혼 여성의 59.3%와 18세 이상 여성의 38.8%가 낙태를 경험하였다. 전체 낙태 건수의 30%는 미혼 여성의 경우이고, 이들 중 50%는 2회 이상 낙태 경험을 가진 자들이었고, 85%는 10대이었다. 낙태의 이유로는 태아의 건강 문제는 2.7%에 불과하였고 피임 실패나 원치 않는 임신이 대부분이었다.367)

알란 구트마허 연구소(Alan Guttmacher Institute)의 1980년 보고서에 의하면, 미국의 합법적 낙태건수 중 79%는 미혼자에 의한 것이고 30%는 청소년에 의한 것이며 심지어 1%는 15세 이하의 경우라고 하였다. 미국의 남북전쟁에서 사망한 군인들의 수는 약 50만명, 1차 세계대전에서 미군의 사망자수는 약 12만명, 2차 세계대전에서는 약 41만명, 한국의 6․25전쟁에서 미군의 사망자수는 약 5만명, 베트남 전쟁에서는 약 6만명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낙태가 합법화된 1973년부터 1985년까지 미국에서 낙태된 유아들의 수는 약 1,500만명이라고 하며, 또 세계적으로는 연간 5,500만명이라고 하니, 이는 유아 대학살이 아닐 수 없다.368) 낙태는 현대사회의 가장 심각한 죄악이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낙태를 용납하고 있다. 1970년대 초 낙태를 합법화한 미국의 대법원 판결이 있기 전, 미국 연합감리교회(UMC) 총회는 낙태가 더 이상 범죄가 아니며 여성이 자유롭게 택할 수 있는 문제라고 결론을 내렸었다. 1986년에 미합중국 장로교회(PCUSA) 총회도 낙태에 관해 281대 266으로 ‘각자의 자유의사에 맡긴다’(pro-choice)는 입장을 재확인하였다.369) 미국 연합그리스도교회(UCC)도 공식적으로 낙태를 지지하였다.370)

그러나, 낙태는 ‘살인하지 말라’는 제6계명을 범하는 죄, 즉 살인죄이다. 출산 이전의 인간 태아는 인간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1) 태아는 ‘아이’라고 불린다. 누가복음 1: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브레포스 brevfo", child)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2) 또 태아를 가리킬 때 인칭대명사가 사용된다. 예레미야 1:5,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371) (3) 또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출생하기 전에 그를 택하시고 부르신다. 갈라디아서 1:15,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4) 특히, 출애굽기 21:22-25는 명백히 낙태가 살인임을 증거한다: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아이 밴 여인을 다쳐 낙태케 하였으나 다른 해가 없으면 그 남편의 청구대로 반드시 벌금을 내되 재판장의 판결을 좇아 낼 것이니라.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 . . 갚을지니라.

본문에서 ‘낙태케 하였다’는 원어(웨야체우 옐라데하)는 ‘그 여자의 아이들이 나온다’는 뜻이다(KJV). 이것은 유산(流産) (NASB)이 아니고 조산(早産)(NIV)을 의미한다. 낙태를 가리키는 일반적인 히브리어는 쉭켈(유산하다)과 네펠(유산[流産], 낙태)이다. 그러므로 ‘다른 해가 없으면’이라는 구절은 엄마에게나 아기에게나 다 적용된다.372) 다시 말해, 만일 조산된 아기가 죽었으면 살인죄가 적용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처럼 태아는 인간 생명으로 간주되며 따라서 낙태는 분명히 살인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낙태는 태아 살해 즉 살인이다.

의학적으로도, 인간 생명이 임신되는 순간 시작된다는 것이 의학자들의 일반적 신념이다.373) 유전학적으로도, 수정란은 정상적 인간의 특징을 가진다. 남성의 정자와 여성의 난자는 각각 23개의 염색체를 가지고 있고 임신이 된 수정란은 46개의 염색체를 가진다. 이것은 정상적 성인의 염색체 수와 같다.374)

실제로, 임신 3주째면 벌써 태아의 심장 근육은 움직이고 머리, 팔, 다리가 나타나기 시작하며, 40일에서 42일이면 뇌파가 감지되고, 2개월이면 코, 눈, 귀, 발가락이 나타나며, 심장이 뛰며 혈액이 흐르고 뼈가 형성되고 모든 육체 기관들이 존재하며 활동한다. 3개월이 되면 태아는 곁눈질하고 주먹을 쥐고 혀를 움직이며 손가락을 빨 수 있고 육체적 고통을 느낄 수 있으며, 4개월이 되면 몸무게는 6배로 늘어나 출산 시 몸무게의 약 2분의 1이 되고 엄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고, 5개월이 되면 피부, 머리털, 손톱이 생기고 꿈을 꿀 수 있고 공기가 있다면 울 수 있고 자궁 밖에서도 살 수 있다고 한다.375)

그러므로 낙태는 성경적으로나 의학적으로 허용될 수 없는 태아 살해의 죄악이다. 낙태를 위한 불가피한 경우란 있을 수 없다. 강간이나 근친상간으로 인한 임신의 경우나, 어머니가 태아로 인해 생명의 심각한 위험을 받는 경우도 낙태는 정당화 될 수 없다. 그런 경우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에 모든 일을 맡겨야 한다. 시작된 생명을 죽일 수 있는 권한은 어머니나 의사나 누구에게도 없다. 낙태는 살인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스스로 조심하고 자녀에게 바르게 교훈해야 한다. 또 오늘날 교회들이 낙태를 용납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잘못된 일이다.

15. 동성애를 용납할 수 있는가?

현대교회의 윤리적 문제들 중 또 다른 하나는 교회들이 동성애를 용납하는 것이다.376) 동성애(同性愛)는 동성 간의 성행위를 말한다. 오늘날 사회에는 동성애를 용납해야 한다는 소리가 강해지고 있고 교회들 안에서도 동성애를 용납하려는 움직임이 널리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377) 교회가 동성애를 용납할 수 있는가?

1972년, 미연합그리스도교회(UCC)는 윌리암 존슨의 안수를 허락하였다. 그는 대교단에서 안수받은 첫 번째의 공공연한 동성애자이었다.378) 1980년, 미연합그리스도교회는 현행적 남녀 동성애자들을 목사로 봉직하도록 공식적으로 허용한 최초의, 유일한 대교단이 되었다.379) 1985년, 2년마다 모이는 미연합그리스도교회 총회는 동성애자들을 목사로 허락하는 것을 압도적 표수로 결정하였다.380)

1988년, 카나다 연합교회(UCC)는 카나다에서 동성애자들의 목사 안수를 합법화한 최초의 교단이 되었다.381)

1993년 11월, 세계교회협의회(WCC)는 미국 미네아폴리스에서 리-이메이징 대회를 후원하였다. 그 대회 연사 중 다수는 여성 동성애를 조장하였고 약 100명의 여성 동성애자들은 동성애를 자축하기 위해 앞으로 나아와 기립 박수를 받았다. 그 대회에서 미장로교회에서 스스로 동성애 여목회자라고 공언한 제인 스파는 말하기를, 그의 신학 지식은 무엇보다도 그의 동성애 파트너인 “코니와 사랑을 함”으로써 얻었다고 하였다.382)

1997년 9월, 미국 네브라스카주 오마하의 제일연합감리교회의 지미 크리치 목사는 그의 교인들 중 두 명의 여자 동성애자들을 위해 결혼식을 거행하였다.383) 1998년 1월, 연합감리교회(UMC) 목사들 일부가 동성애를 옹호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384)

1999년 1월 16일, 한 여성 동성애 부부가 미국 캘리포니아주 새크라멘토에서 1,500명의 사람들 앞에서 95명의 연합감리교회 목사들에 의해서 ‘축복’을 받았다.385) 그들은 그 의식을 동성애자의 권리를 옹호하고, 동성애자들의 결합에 대한 그들 교단의 금지 조치에 항의하기 위해 사용하였다.386)

미국의 대표적 동성애교회인 메트로폴리탄 커뮤니티교회 세계협회의 지도자 그윈 깃보드는 1999년 미국교회협의회(NCC) 총회에서 연사로서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회집된 교회협의회 대표들 중 최소한 절반은 서서 그 여자에게 갈채를 보내었다.387) 2001년, 그 여자는 캘리포니아 교회협의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388)

1999년, 미합중국장로교회(PCUSA)는 동성애 전도자 제인 스파를 그 해의 ‘신앙의 여성’ 수상자로 지명하였다. 두 명의 자녀를 둔 이 이혼모는 그 교단을 섬기는 첫 번째 공공연한 동성애자이었다.389)

1999년, 미합중국장로교회 총회는 동성애자 안수금지를 규정한 ‘정절과 순결’ 헌법조항 삭제를 주장하는 교회직제 목회위원회의 ‘다수파’ 보고서 대신, 동성애자에 대한 목사 장로 집사 안수 여부를 놓고 2년간 연구와 토론을 하자는 ‘소수파’ 보고서를 지지하였다. 다수파 보고서 지지 총대는 198명(38%)이었고 소수파 보고서 지지 총대는 319명(61%)이었다.390) 두 파가 다 잘못되었다.

미합중국장로교회 총회재판국은 2000년 5월 노스이스트 대회재판국의 판결에 불복하여 올라온 두 건의 상소 사건을 다루면서, 목사의 동성애자 결합식 주례를 인정하며 동성애자 목사후보생을 인정하는 대회 재판국의 판결을 정당하다고 판시하였다.391)

2001년 6월, 미합중국장로교회 총회는 동성애 성직자 안수에 관한 금지조항을 제거하도록 317 대 208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 결의안은 전국노회 투표에서 부결되었다.392) 이 교회는 위험수위를 넘었다.

2000년 2월 12일, 미감독교회(ECA)의 올림피아 교구 세인트 마크 대성당에서는 공공연한 동성애자 로버트 테일러 주교의 수석주교 임명식이 거행되었다. 200명에 달하는 교구 대표들과 세계 각지에서 온 수백명의 성직자와 교회 대표들이 그 의식에 참석하였다.393)

2003년 6월 7일, 미국 뉴햄프셔주 관구는 미감독교회 역사상 최초로 공공연한 동성애자 진 로빈손을 주교로 선출하였다. 로빈손은 13년 전, 결혼서약을 깨뜨리고 그의 아내와 두 어린딸을 버리고 그의 남자 파트너와 함께 이사한 자이었다.394)

심지어, 일부 복음주의자들도 동성애를 옹호한다. 랄프 블레어가 인도하는 ‘관심 있는 복음주의자들’이라는 친(親)동성애 단체는 연례 여름수련회들을 가진다. 여러 해에 걸쳐서 그 단체의 주요 강사들의 명단에 풀러신학교 윤리학 은퇴교수 루이스 스미즈 등도 포함되었다.395)

1992년 11월, 라틴아메리카선교회(LAM)의 토마스 행크스는 복음주의신학회 연례 모임에서 회원들에게 동성애에 관한 그들의 부정적인 사고를 수정하라는 도전적 강연을 하였다.396)

그러나, 오늘날 교회들 안에 동성애를 용납하는 경향은 현대교회의 배교의 한 증거일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동성애를 사형에 해당하는 가증한 죄로 여기신다. 그것은 다른 큰 죄와 같이 하나님의 교회에서 결코 용납될 수 없고 오직 철저히 회개해야 할 죄이다.

성경에서 맨 처음 동성애를 말한 것은 소돔과 고모라성의 이야기에서이다(창 19장). 소돔성의 사람들은 그 날 저녁에 롯의 집에 들어온 사람들과 성관계를 갖기를 원하였다. 어떤 이는 소돔성의 이야기가 동성애 문제가 아니라고 하지만 그것은 명백히 잘못된 해석이다. 그 성 ‘남자들’(안쉐) 곧 소돔 ‘남자들’(안쉐)은 “네게 온 그 ‘남자들’(하아나쉼)이 어디 있느냐? ‘그 남자들을 이끌어내라’(호치엠ה). 우리가 ‘그 남들과’(오담) 상관하리라”고 말했다(창 19:5). 이것은 분명히 남자들이 다른 남자들과 성관계를 갖겠다는 뜻이다. ‘상관한다’는 말(야다)은 성경에서 17번 이런 의미로 쓰였다(BDB).

사사 시대에도 소돔성의 일과 비슷한 일이 있었다. 그것은 기브아의 이야기이다(삿 19장). 기브아의 불량배들은 거기 살던 노인의 집에 유숙하기 위해 들어온 레위인을 내어놓으라고 요구하며 우리가 그를 상관하리라고 말했다(삿 19:22). 그 구절을 다시 번역하면, “벨리알의 ‘아들들’(베네)인 그 성의 ‘남자들’(안쉐)은 . . . 말하기를, 네 집에 들어온 ‘남자’(하이쉬)를 끌어내라. 우리가 ‘그 남자와 상관하리라’(웨네다엔누)”이다. 그들이 동성애 관계를 원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동성애는 하나님 앞에서 분명히 큰 죄악이다. 그것은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셔서 연합케 하신 하나님의 창조 원리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또한 “간음하지 말라”는 제7계명을 위반하는 음란죄이다. 하나님께서는 심히 악하고 음란했던 소돔 고모라를 유황불로 심판하셨다. 또 사사 시대에 심히 음란했던 기브아와 베냐민 지파 전체는 거의 전멸되었다.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심판과 징벌이었다.

율법은 부부 관계를 벗어난 성 행위, 즉 결혼 전 혹은 결혼 외의 성 행위를 음란으로 정죄하며, 특히 동성간 성 행위를 가증한 죄악으로 간주한다. 레위기 18:22, “너는 여자와 교합함같이 남자와 교합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 신명기 23:17, “이스라엘 남자 중에 미동(美童, 카데쉬, 동성애자)이 있지 못할지니.” 열왕 시대에도 남색(男色, 동성애)은 큰 악으로 정죄되었다(왕상 14:24; 15:12; 22:46; 왕하 23:7). 동성애 죄에 대한 형벌은 사형이다. 레위기 20:13, “누구든지 여인과 교합하듯 남자와 교합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신약성경도 동성애를 큰 죄로 간주하며 그 죄를 짓는 자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분명히 증거했다. 로마서 1:26-27,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매춘, 동성애),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듯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고린도전서 6:9-10,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디모데전서 1:10, (죄의 예들) “음행하는 자며 남색하는 자며.” ‘탐색하는 자’(말라코스 malakov")는 남색의 상대자를 가리키고, ‘남색하는 자’(아르세노코이테스 ajrsenokoivth")는 ‘남자 동성애자’를 가리킨다. 이와 같이, 동성애가 죄악이라는 것은 신구약성경에서 너무나 명백하다.

또한 오늘날 동성애를 통해 에이즈 전염병(AIDS, 후천성 면역결핍증)이 많이 퍼지고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징벌로 받아들여야 한다. 1985년의 한 보도에 의하면, 미국의 에이즈 환자 12,067명 중에 남성이 92%인데, 그 중 78%가 동성애자라고 한다.397) 유엔 에이즈 계획(UNAIDS)에 의하면, 2011년 현재 에이즈 바이러스(HIV) 감염자수는 세계적으로 약 3,400만명이라고 한다.398) 이것은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시대적 재앙이다. 동성애는 죄악이다. 참 교회는 이 죄로부터 성별되어야 한다.  

16. 여자 목사는 옳은가?

오늘날 교회들 안에 있는 또 하나의 중대한 문제는 여자 목사와 여자 장로를 세우는 일이다. 세상의 남녀평등주의 사상이 교회 안에 들어와 있고 여자 목사와 여자 장로를 세우는 일로 나타나고 있다.

미국 커버넌트 신학교 변증학 교수요 프란시스 쉐퍼 연구소 소장인 제람바즈 교수는, 1997년 라브리 청년대학생 수양회에서 “세상 속의 일그러진 성”이라는 제목으로 강의하면서, 성경의 어느 곳에서도 남성이 해야 할 일과 여성이 해야 할 일에 관해 구분하고 있지 않으며, 돕는 자로서의 여성이라는 성경말씀은 남성과 여성의 역할을 구분하는 의미가 아니고 동등한 위치의 남성과 여성으로서 서로 협력하는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며, 남녀는 동등한 관계를 맺어가야 한다고 강조하였다.399)

유에스 뉴스 앤드 월드 리포트(U. S. News & World Report) 1998년 8월 10일자는 “하와에 의한 성경”이라는 특별 기사에서 말하기를, “여성들은 약 80개의 기독교단들에서 목사직에 그리고 보수파와 개혁파와 재건파 유대교에서 랍비직에 용납된다. 여성들은 신학교 과정들 안에 있는 모든 학생들의 3분의 1에 이른다”고 하였다.400)

미연방노동청 통계에 의하면, 미국에서 자신을 ‘성직자’라고 묘사하는 여성들의 숫자는 1983년과 1996년 사이에 27,134명 증가하였다. 1983년에는 그 숫자가 16,408명이었으나, 1996년까지 여성 ‘성직자’의 숫자는 43,542명으로 늘었다. 이것은 여성이 미국의 모든 성직자들의 12퍼센트 이상을 차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401)

1997년에, 229개의 북미 신학대학원 학생들의 30퍼센트는 여성이었는데, 그것은 1972년의 10퍼센트와 비교할 때 크게 증가된 것이다.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개신교 감독교회 신학교와 디스트릭에 있는 연합감리교회 웨슬리 신학교는 학생들의 절반이 여성이다.402)

1994년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총회는 701대 612로 여성 안수안을 통과시켰다. 이로써 예장통합은 기독교대한감리회(기감)와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와 더불어 한국에서 자유주의적 교회들의 노선을 다시 한번 더 드러내었다.

2003년 4월, 예수교대한성결교회 총회는 여목사 안수허용 문제를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403) 이로써 그 교단은 예장통합, 기장, 기감, 기하성, 성공회와 더불어 여목사 안수를 인정하는 교단이 되었다.404)

2004년 6월,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총회는 여성 안수 문제에 대해 총대 665명 중 559명의 찬성으로 통과시켰다.405) 이것은 그 교단의 자유주의적 경향과 입장을 다시 한번 더 분명히 확인시킨 일이다.

그러나, 여자 목사와 여자 장로에 대한 주장은 성경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남녀 평등을 주장하는 세속사회의 영향이다. 여자 목사와 여자 장로를 세워야 한다는 생각이 복음주의 신학교들 안에서 가르쳐지고 기독청년들에게 퍼진다는 것은 대단히 슬픈 현상이다.

여성 안수를 주장하는 자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점들을 든다. (1)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 여성 사역자들이 있었다는 점, 예를 들면, 여선지자 미리암(출 15:20), 여선지자 드보라(삿 4:4), 전도자 빌립의 예언하는 딸들(행 21:9) 등, (2) 갈라디아서 3:28의 말씀(“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이 남녀 평등의 원리를 가르치는 것 같다는 점, (3) 세속 사회도 남녀 평등을 주장하는데 하물며 교회가 시대 조류를 역행할 수 없다는 점, (4) 교회 내의 여성들의 은사를 활용하는 것이 유익하다는 점.

그러나 우리는 사람의 모든 생각들을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 우리는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게 생각하고 믿고 행동해야 한다. 또 우리는 하나님께서 임시적으로, 예외적으로 허용하신 것과 교회의 영속적 규범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성경은 여성 직분자 문제에 대해 밝히 가르치고 있으며 지금까지 성경을 믿는 교회들은 그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왔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인간적, 시대적 생각을 버리고 과연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창세기에 증거된 사람의 창조 기사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만드시고 그가 혼자 있는 것이 좋지 못하여 그를 위해 돕는 배필 즉 돕는 자를 지으셨다(창 2:18). 여기에서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남녀를 동시에 만드셨거나 혹은 여자를 만드신 후 그를 위해 남자를 만드신 것이 아니고, 남자를 만드신 후 그를 위해 여자를 만드셨다는 사실이다. 즉 여자는 남자를 위해 돕는 자가 되도록 창조된 것이다. 여기에 남녀의 역할의 구분이 있다.

물론 이것이 남편이 아내를 마음대로 지배하고 학대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여자는 남자의 갈빗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그 둘은 한 몸이요 참 사랑의 관계이다. 남편은 자기 아내를 아끼고 사랑해야 하며 아내는 남편을 존중하고 사랑해야 한다. 그러나 그 둘의 관계는 또한 한 편이 다른 편을 위하며 순종해야 하는 관계이다.

이런 원리에 일치하게, 신약성경은 여자 목사와 여자 장로를 허용하지 않는다. 디모데전서 2:11-14과 고린도전서 14:34-37은 이 문제에 대해 가르치는 주요 구절이다. 이 두 구절은 여자 목사직과 여자 장로직을 금하는 다섯 가지의 이유를 제시한다.

디모데전서 2:11-14,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이 구절은 여자의 가르치는 일(목사직)과 다스리는 일(장로직)을 명백히 금하고 있다. 이렇게 금하는 이유는 두 가지인데, 첫째 이유는 창조의 질서 때문이다. 즉 여자는 남자의 협력자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창세기 2:18,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돕는 자)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둘째 이유는 범죄에 대한 징벌 때문이다. 즉 인류의 타락 시 여자가 남편에게 선악과를 주어 먹게 함으로 범죄케 하였기 때문이다. 창세기 3:6,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그러므로 이제 여자는 또다시 나서서 일을 그르치지 않도록 제약을 당한다는 뜻이 있다. 이 두 이유들은 다 어떤 시대적, 환경적 요인들이 아니고, 역사적, 불변적 사실들이다.

고린도전서 14:34-37,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너희의 아내들]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임이라.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

이 구절도 여자들이 교회 앞에 나서서 말하고 가르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세 가지이다. 첫째 이유는 율법의 말씀 즉 성경말씀 때문이다. 34절, “율법에 이른 바와 같이.” 어떤 말씀을 가리키는가?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구절들일 것이다. 창세기 2:18,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창세기 3:16,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창세기 18:12,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둘째 이유는 주의 명령, 즉 성경에 주신 주의 명령 때문이다. 37절, “주의 명령인 줄 알라.” 에베소서 5:22,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베드로전서 3:1, 5-6, “아내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같이.” 사도들의 교훈은 곧 주의 교훈이다.

셋째 이유는 교회의 보편적인 규례 때문이다. 34절,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이러한 규례는 어느 한 시대, 어느 한 지역의 교회의 풍습이 아니고 모든 시대, 모든 교회의 일반적 규례이다.

위의 두 성경 구절은 다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문제에 대한 성경적 교훈을 옛 시대의 사고방식과 풍습에 제약을 받은 인간 사도의 말로 보는 것은, 그 교훈에 제시된 다섯 가지의 이유들의 정당성을 무시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사도들의 글인 신약성경의 신적 권위에 대항하는 큰 오류이며 큰 죄악이다. 데살로니가후서 2:15, “형제들아,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을 지키라.” 그러므로 박형룡 박사는 여성에 대한 이러한 규례가 2천년 전의 한 지방 교회의 풍습이 아니고 만고불변의 진리라고 강조하였다.406)

남녀 평등을 주장하며 인용하는 성경 구절들이 있다. 고린도전서 11:11,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갈라디아서 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그러나 이런 구절들은 앞에서 증거한 성경의 명백한 진리와 교훈에 비추어 이해되어야 한다. 이런 성경 구절들은 직분에 있어서의 남녀 평등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이신칭의(以信稱義)의 은혜와 구원의 복을 받음에 있어서 남녀가 동등하다는 뜻이다. 신약성경에 계시된 만인제사장 진리(벧전 2:5, 9)도 가정과 교회 안에서 남녀 역할의 차등의 진리와 배치되게 이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사도시대에 여성도들은 복음 사역에 큰 역할을 하였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누가복음 8:2-3,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또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예수님과 12제자들]를 섬기더라.” 또 로마서 16장에는 뵈뵈, 브리스길라, 마리아 등 복음을 위해 많이 수고한 여자들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다.

여성도들에게는 복음을 위한 이러한 봉사와 수고의 일뿐 아니라, 또한 자녀의 출산과 양육이라는 큰 일이 있다. 그것은 남자들이 할 수 없는 특별한 일이며 여성에게만 주어진 귀한 일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다스리는 것을 허락지 않는다고 교훈한 후 덧붙여 말하기를,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다(딤전 2:15). 이 구절은 여자가 해산을 통해 그의 낮은 지위가 회복된다는 뜻일 것이다. 훌륭한 남자의 배후에는 대체로 훌륭한 어머니가 있다. 여성들은 이 고귀한 직무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될 것이다.  

17. 현대 기독교 음악(CCM)의 문제

오늘날 교회들 안에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윤리적 문제는 현대 기독교 음악(CCM)의 문제이다.407) 오늘날 많은 교회들에서 음악이 급속하게 변하고 있다. 이전에 세상에서 듣던 종류의 음악이 오늘날 교회 안에서 연주되고 있다. 기독교 방송국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들, 기독교 서점들에서 파는 찬송 테이프들 가운데 그런 것이 적지 않다. 교회 음악이 세속 음악과 너무 비슷해졌다. 기도원에서 연주되는 밴드나 전도 집회시 세우는 밴드들은 완전히 세상적인 기분이 든다. 심지어 신학교들에서도 그런 유의 밴드가 연주되고 그런 유의 노래가 불려진다. 교회 음악의 이런 변화는 그 증거를 수집할 필요가 없을 정도이지만, 근래의 몇 가지 예만 들어보자.

1994년 죤 비새그노 박사의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 제일침례교회(남침례교단)는 그 교회의 솔리드 록 카페에서 엘비스 대회와 비틀즈 음악 연주회를 가졌다. R. L. 하이머즈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단지 이 저녁 예배가 완전히 은사주의적이라고 묘사할 수 있을 뿐이다,” “안내 위원들은 귀걸이를 하고 짧은 바지와 모자를 쓴 남자들이었다,” “우리는 나이트 클럽이나 록 컨서트나 마약 소굴에 들어왔을 때 느꼈을 것처럼 부적절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그 교회는 남침례교단 안에서 ‘보수적’ 교회들 중의 하나라고 간주된다.”408)

1998년 7월 25일 밤, 유명한 W. A. 크리스웰 목사가 원로목사로 있는 달라스 제일침례교회(남침례교단 소속)의 하드코어-어돈 연주회에서 청년들은 떠들석하게 춤을 추었다. 그 지역 신문은 보도하기를, “떠들석한 춤과 천둥 같은 기타들과 크리스챤의 경건으로 어울러진 연주회로 인하여 그 교회의 부속건물인 장엄한 스펄젼 해리스 빌딩은 흔들린 것 같았다”고 하였다.409)

미국 남침례교단에서는 2000년 신년 전야제가 ‘유스링크 2000’의 일곱 지역들에서 삼일 밤, 이틀 낮 밀레니엄 축제로 치루어졌다. 네 개의 남침례교 기관들에서 후원한 이 행사는 남침례교 역사상 가장 큰 청년 모임이었다.410) 그 모임은 4만 6천명 이상의 남침례교 청년들을 모았고 그들은 미국 내에서 알려진 ‘기독교’ 록 밴드들에 의해 귀가 찢어지는, 심장이 두근거리는 찬양과 예배 음악을 즐겼고 약 새벽 2시까지 웃으며 노래하며 소리치며 춤추었다고 한다.411)

현대 기독교 음악(CCM)의 다수는 록 음악이다. 록 음악은 1950년대에 생긴 것으로서 50년대에 엘비스 프레슬리와 60년대에 비틀즈로부터 80년대 마이클 잭슨까지를 포함하는 포괄적인 음악 형태를 가리킨다. 록(rock)이라는 말은 로큰롤(rock and roll, ‘흔들고 굴리라’)의 줄인 말이다. 이 말은 미국의 방송 음악 진행자인 알란 후리드(Aland Freed)가 처음 사용했는데 육체적, 성적 움직임을 표현한 말이라고 한다.412) 시카고 대학의 알란 블룸 교수는 말하기를, “록 음악은 성적 욕망이라는 오직 한가지에 마음을 끈다”고 했다.413)

록 음악414)의 한 특징은 드럼이나 씸벌즈나 기타를 사용한 반복적이고 자극적인 비트에 있다. 촬스 브라운은 말하기를, “아마도 록 음악을 규정짓는 가장 중요한 것은 비트이다. 록 음악은 비트 때문에 다른 음악들과는 구별된다”고 했다.415) 반복적인 비트는 사람의 감정을 강하게 몰아대고 자극한다. 록 음악의 다른 한 특징은 당김음(약약강격)를 많이 사용하고, 불협화음이나 단조(短調)를 빈번히 사용하는 것이다. 그것은 음악의 질서와 안정을 파괴한다. 록 음악의 또 하나의 특징은 고음(高音)과 시끄러운 소리이다. 대형 제트기는 이륙시 약 120데시벨(db)의 소음을 내며, 천둥소리의 최고 기록은 약 125데시벨인데, 록 콘서트에서의 고음은 약 130-140 데시벨이라고 한다.416) 고음은 사람의 감정을 사로잡고 어지럽히고 흥분시키고 격화시킨다. 또 록 음악의 가사들은 폭력, 반항, 자살 권면, 마약, 음란, 사탄 숭배 등의 나쁜 내용들을 많이 담고 있다.

현대 기독교 음악(CCM), 특히 기독교 록 음악은 세속적 록 음악과 매우 비슷하다. 현대 기독교 음악의 곡은 세속 음악과 거의 구별되지 않는다. 그것의 작곡 형식은 전통적 형식과 매우 다르다. 그것은 전통적 음악이 가지는 질서와 조화, 안정성, 아름다움 등을 중시하지 않는다. 그것은 반복적, 자극적 비트와 리듬을 사용하며 당김음이나 불협화음과 단조도 자주 사용한다. 따라서 현대 기독교 음악은 매우 육감적이다.

O. T. 스펜스417)는, 거의 모든 복음성가에 록 음악의 형식이 들어있으며 그것들은 대부분 은사주의자들이 만들며 주로 사람의 감상적 체험과 느낌에 근거한다고 말한다. 그는 이러한 가스펠 록 음악은 육신적 음악이라고 평가한다. 또 그는 사람이 “현대 기독교 음악에 젖으면 몇 년 후에 록 음악으로 갈 것이다”라고 경고한다.418)

하나님께서는 거룩하고 존귀하시다. 그는 무질서와 혼돈의 하나님이 아니고 질서의 하나님이시다(고전 14:33). 우상숭배자는 오락적 춤과 노래를 좋아하지만(출 32:6, 19), 성도는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하나님께 경배해야 한다(시 96:9). 성도의 노래는 하나님 앞에서 부르는 것이므로 경건하고 질서와 안정성이 있고 조화와 아름다움을 가져야 한다. 성도의 노래는 세상의 것과 구별되어야 한다. 사도들은 말하기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롬 12:2),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요일 2:15)고 했다. 성도의 노래는 결코 세상 노래처럼 자기만족적이거나 자기도취적이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현대 기독교 음악은 육신적 즐거움과 만족을 줄지는 모르나, 확실히 성도들의 찬송이나 노래로는 부적합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노래에 영향받은 현대 기독교 음악(CCM) 특히 크리스챤 록 음악과 그런 유의 복음성가들을 경계해야 한다. 우리는 세상 문화 속에 있는 죄악된 요소들을 경계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을 위해 현대 복음송들의 곡과 가사를 신중하게 검토하며 선별해야 한다. 무엇보다, 우리는 우리 자녀들에게 옛날부터 즐겨 불렀던 찬송가들을 부르도록 권장해야 한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기쁨과 즐거움으로 하나님을 찬송하고 노래해야 하지만, 그 노래들은 경건하고 조화롭고 안정적이고 아름다워야 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라”고 말한다(빌 1:10). 우리는 오늘날 교회 음악의 변질과 세속화를 매우 염려한다. 우리는 교회 음악에 있어서도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해야 한다.  

18. 열린 예배의 문제

오늘날 교회의 윤리적 문제 중 하나는 열린 예배의 문제이다.419)오늘날 교회들이 전통적 형식을 버리고 예배 시간에 멀티비젼, 드라마, 무용, 세속적 형식의 성가와 밴드를 도입하는 경향이 있다. 또 어떤 교회들은 ‘문화학교’를 개설하여 영어 회화, 꽃꽂이, 바이올린 등을 가르친다. 이런 경향은 예전부터 자유주의적 교회들에서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복음주의적이라고 하는 교회들에서도 볼 수 있다. 이것이 ‘영성’이 있는 활동이라고 선전된다. 또 교회들은 이런 방식으로 많은 청중을 모으는 데 어느 정도 성공하고 있는 것 같다. 대형교회가 목회의 성공이라는 인식 속에, 많은 목사들은 ‘여하튼 교회가 수적으로 커지고 봐야 한다’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열린 예배’는 미국의 윌로우크릭 교회의 빌 하이벨스 목사에 의해 처음 구상되었고 새들백 교회의 릭 워런 목사에 의해 인기를 얻고 있는 예배 형식으로 구도자들(seekers)을 위해 밴드와 현대음악, 멀티미디어와 드라마 등을 사용한 예배이다.420) 1988년 하이벨스는 대예배의 하나로 토요예배를 추가하여 드리기 시작하였고 현재 그의 교회는 똑같은 형식으로 토요일과 주일에 각각 두차례씩 4번의 예배를 드리고 있다고 한다. 미국의 윌로우크릭 교회, 새들백 교회, 월드하비스트 교회, 갈보리 채플 등과 한국의 온누리교회, 사랑의 교회, 소망교회, 만나교회 등이 이런 예배를 드린다. 열린 예배의 한 특징은 시청각적 효과와 축제적 분위기이다.421)

죠지는 열린 예배를 보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열린 예배에 방해가 되는 모든 장애물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422) 열린 예배를 주장하는 이들은 교회의 외형적 구조 변경을 강조한다. 강대상을 큰 강대상 대신 작은 이동식 탁자로 대치한다. 의자는 등받침 없는 것을 놓고 거기에 걸터앉는다. 강단을 무대로 전환하여 노래나 춤이나 연극을 할 수 있도록 요란스런 조명 세트를 장치한다. 조화 또는 생화로 강대상 좌우를 가득채운다. 대형 자막이나 전광판을 세우고 고도의 방송용 음향 장비를 설치한다.

에드 답손은 열린 예배가 형식에 매이지 말 것, 현대적일 것, 강요하지 말 것, 편안하게 해줄 것 등을 주장하였다. 그에 의하면, 형식에 매이지 않기 위해 목사나 안내 위원이나 성가대원은 모두 청바지나 가벼운 옷들을 입으며, 현대적이기 위해 전자 기타, 드럼, 심벌즈, 키보드 등을 사용해 기독교적 록 음악을 연주한다. 또 강요하지 않기 위해 공개적으로 초청하거나 앞으로 나오도록 하는 부담을 주지 않는다. 또 편안하게 해주기 위해 강대상 주변을 단장하여 교회강단처럼 보이지 않게 한다.423)

새들백 교회의 릭 워런은 1998년 한 세미나에서 전통적 교회를 극적으로 성장하는 교회로 변형시키려면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나야 한다고 가르쳤다: (1) 현대적 스타일의, 비(非)위협적 ‘구도자(求道者) 집회’가 전통적 일요일 예배를 대체해야 한다. (2) 복장은 평상복이어야 한다. (3) 음악은 현대적이어야 한다. (4) 설교는 구원받은 자들과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 똑같이 자신들에 대해 좀더 기분 좋게 생각할 수 있도록, 종종 심리학과 격려적 성경본문을 섞는 설교와 더불어, 오직 긍정적 내용이어야 한다. (5) 교회의 사역들은 대중의 필요를 충족시키도록, 우울증, 무절제한 식사, 불임(不姙), 동성애자들의 가족이나 친구, 낙태 후의 일, 별거(別居) 등을 위한 후원 그룹들을 가지고 준비되어야 한다. (6) 교리적 교훈은 일요일들에 교회 전체에게 주지 말고, 예배 시간과 별도로 소그룹에서 받을 수 있도록 한다.424)

열린 예배를 보는 교회들은 찬송 대신 현대 기독교 음악(CCM), 곧 기독교 록 음악을 부른다. 릭 워런은 크리스챤 록 음악을 새 노래라고 말하며 새 노래를 부르라고 강조하면서 주장하기를, “음악은 현대적이어야 한다. 음악의 가사가 더 근래의 것이어야 할 뿐 아니라, 음악의 스타일도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날마다 듣는 것이어야 한다”고 했다. 새들백 교회의 음향시설, 밴드, 노래하는 이들과 연주 등 오락구성물은 어떤 세속적 록 연주회의 것과도 경쟁할 만하다. 릭 워런은 교회가 해야 할 첫 번째 일 중의 하나가 오르간을 밴드로 대체하는 것이며, 교회 찬양대는 독창 연주자를 배경 음악으로 후원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또 그는 말하기를, 몰아대는 비트를 가진 큰 소리의, 쉰 목소리의 음악이 그의 회중이 듣는 종류의 음악이라고 하였다. 또 그는 말하기를, “우리는 주말 집회 때 정말, 정말 소리가 크다. . . . 나는 말한다, ‘우리는 그것을 낮추지 않을 것이다.’ 자 그 이유는, 어린아이 같은 대중은 음악을 느끼기를 원하지, 단지 그것을 듣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그는 심지어 전통적 음악의 사용을 주장하는 것을 우상숭배의 죄와 동일시하였다.425)

릭 워런은 “여러분은 여러분의 음악을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교회가 전도하기를 원하시는 종류의 사람들에게 맞춰야 한다”고 말하며 “우리는 클래식, 칸츄리, 재즈, 록, . . . 심지어 랩 음악을 사용했다”고 한다.426) 또 그는 말하기를, “우리는 우리 교인(people)의 96퍼센트가 자기들이 중도적 성인 현대음악을 듣는다고 말하는 것을 발견했다. . . . 우리는 우리가 전도하고 있는 자들을 설문조사한 후 우리의 구도자 집회들에서 찬송가를 부르지 않기로 전략적 결정을 내렸다”427)고 한다. 이와 같이, 열린 예배는 기독교 2천년 역사에 일찍이 없었던, 지금까지의 전통적 예배 의식과는 전혀 다른 예배이며 현대의 세속적 문화와 표현 방법을 도입한 새로운 예배 형태이다.428)

그러나, 열린 예배를 주장하는 자들의 말이 옳은가? 열린 예배가 과연 오늘 시대에 바람직한 예배 형식인가? 우선, 열린 예배가 정말 오늘 시대에 바람직한 예배 형식이라면, 먼저 기도와 성경 연구와 신중한 토론을 통해, 목사들과 장로들이 임직서약 때 하나님 앞에서 수락했던 예배 모범을 고쳐야 할 것이다.429) 어떻게 목사들이 하나님 앞에서 서약했던 예배 모범과 역행하는 예배 형식을, 신앙 양심의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고 사용할 수 있는가?

더욱이, 성경에 비추어볼 때, 열린 예배와 이런 전도나 목회방식은 비성경적이다. 성경은 찬송과 기도와 설교가 예배 순서이며 그 중에 설교가 가장 중요함을 보이며 또 예배가 엄숙하고 질서 있게 드려져야 하고 예배 음악이 아름답고 안정되어야 함을 계시한다. 사도행전 2:42,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고린도전서 14:26,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시편 96:9,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고린도전서 14:33,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빌립보서 1:9-10,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그러나 열린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경건한 예배가 아니고 충실한 설교가 빠진 인간 중심적이고 흥미 위주, 의식 위주의 예배이다. 그러므로 이런 예배는 비성경적이다. 그것은 사람들에게는 기쁨을 줄지 모르나 하나님께는 근심과 불쾌함을 드릴 것이 분명하다.430)

또한 교회의 문화적 행사들도 성경 교훈들과 초대 교회의 모범에 맞지 않는다. 교회는 본연의 임무가 있다. 그것은 예배와 영적 성장과 전도다. 특히 전도는 주님 자신의 사명이었고 그가 제자들에게 부탁하신 일이었다. 초대 교회는 이 일에 충실하였다. 어느 시대든지 교회는 오직 이 일에 충실해야 한다. 교회는 이 일에서 벗어나는 세속적 일들이나 그런 방식을 계획하거나 행해서는 안 된다.

성경은 개인의 신앙생활뿐 아니라 교회의 목회에서도 정확무오한 법칙이다. 혼란스런 오늘날의 교회의 현실 속에서도,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지시하는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인간적 지혜와 방법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지 말고 성경의 교훈대로 예배드려야 하고, 또한 목사들은 인간의 지혜와 방법으로 목회하지 말고 성경의 교훈대로 목회해야 할 것이다.  

19. 성경적 분리의 원리

우리는 현대교회의 여러 문제들을 지적하였고 그것이 왜 잘못인지에 대해서도 성경적으로 살펴보았다. 그러면 이제 남은 것은 우리가 이러한 교회의 현실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것은 교제(交際)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교제의 원리, 특히 교제의 단절, 즉 분리의 원리에 대해 정리해보자.

여기에서 말하는 ‘교제’란 교회적 교제 즉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나누는 영적 교제를 말한다.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나누는 이 교제는 성찬식에 함께 참여할 때 잘 표현된다. 성경은 성도의 사랑의 교제를 강조하지만 또한 어떤 이들과의 교제의 단절, 즉 분리에 대해서도 가르친다. 전통적으로 개혁교회는 참 교회의 한 표지로서 ‘권징의 성실한 실행’을 강조해왔다.431) 우리가 살펴볼 ‘성경적 분리의 원리’는 바로 권징에 대한 성경 교훈 속에 들어 있는 원리이다.

분리의 대상들

우선, 성경은 우리가 어떤 자들과 교제하지 말라고 가르치는가?

첫째로, 성경은 우리가 불신자와 교제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고린도후서 6:14-17,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분리하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는 절교(絶交)에 대해 밝히 교훈한다. 에스라 10:11, “이 땅 족속들과 이방 여인을 끊어버리라.” 느헤미야 9:2, “모든 이방 사람과 절교하고”(느 10:28; 13:3). 교회와 세상,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사이에는 명확한 선이 있다.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의 교제에는 어떤 선이 있다. 누구든지 주께로 나오라고 초청되지만, 믿는 자들만 참된 성도의 교제를 나눌 수 있다.

둘째로, 성경은 우리가 이단자와 교제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로마서 16:17-18,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교훈[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이 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의 배만 섬기나니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 디도서 3:10,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거절하라].” 요한이서 7, 11,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니라.” 유다서 3-4,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 들어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뜻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오늘날 이단 중 대표적인 것은, 천주교회를 비롯하여, 여호와의 증인, 몰몬교, 안식교 등의 이단종파들과, 현대 자유주의 신학이다. 천주교회는 개신교가 전통적으로 적그리스도적이요 우상숭배적이라고 간주한 이단으로서 역사가 가장 오래되었고 세력이 가장 큰 교회이다. 또한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의 근본 교리들, 예를 들면, 성경의 신적 권위와 무오(無誤), 하나님의 형벌적 공의,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 처녀 탄생, 신성(神性), 대리적 속죄, 육체적 부활, 재림, 지옥 등을 부정하는 무서운 이단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자유주의 신학을 결코 용납해서는 안 되며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목사들을 권징 출교해야 한다. 그러므로 자유주의자들과의 교제와 협력을 주장하는 신복음주의 혹은 복음주의의 입장은 잘못이다.

셋째로, 성경은 우리가 드러난 죄를 짓고 회개치 않는 자와 교제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또한 교회도 그런 자를 포용해서는 안 된다. 고린도전서 5:11-13,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람하거나 우상숭배를 하거나 후욕하거나 술취하거나 토색하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외인들을 판단하는 데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중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치 아니하랴. 외인들은 하나님이 판단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 쫓으라.” 이런 점에 비추어 볼 때, 오늘날 참된 교회들은 윤리적으로 공공연하게 심히 부패한 교회들과의 교제를 끊어야 할 것이다.

넷째로, 성경은 우리가 사도들의 교훈 곧 신약성경의 교훈을 고의적으로 어김으로 교회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들과 교제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데살로니가후서 3:6, 14-15,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규모 없이[무질서하게]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지 말고 형제같이 권하라.”

이 말씀은 이 편지가 쓰이던 당시에는 성실하게 일하지 않는 자들과의 교제에 대한 교훈이었지만, 그 원리는 다른 경우에도 적용된다. 특히, 이 말씀은 오늘날 이단을 배격하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어기고 자유주의 신학이나 자유주의 신학자들을 용납하고 그들과 교제하는 소위 신복음주의자들에게 적용될 수 있다. 비록 신복음주의자들의 다수가 신학 사상이 변질된 이단이 아니고 우리와 같이 복음을 믿는 참된 성도요 우리의 형제라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그들의 불순종과 타협을 용납해서는 안 되고 그것을 지적하고 책망하고 만일 그들이 그 행위를 고치지 않는다면 그들과의 교제를 끊어야 할 것이다.

마크 시드웰은 다음과 같이 바르게 말했다:

공적인 인물이 범하는 공적인 죄는, 속임을 당하는 자들을 위해 공적으로 책망되어야 한다. 예를 들면, 배교와의 교제를 옹호하고, 거짓 교사들과 불신자들과 협력하는 자는 하나님의 명령에 공적으로 도전한 죄가 있다. . . . 어떤 사람이 비성경적 입장의 주된 선동자요 조장자요 옹호자일 때, 우리는 그가 조장하는 그 죄를 비난하면서 그 사람을 폭로하지 않을 수 없다.432)

페이스 복음주의 루터교회 신학교의 교수인 데오도르 슈브케겔은 신복음주의를 ‘치명적 악’이라고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근본적 문제는 . . . 교회 내에서 오류와 잘못된 가르침을 어떻게 취급할 것인가이다. 옛방식은 . . . 오류에 빠진 사람을 책망하고 그를 교정하는 것이다. 만일 그가 그의 잘못된 가르침을 고집하면, 우리는 그가 회개하고 그의 길의 잘못에서 돌아서기까지 그를 우리로부터, 혹은 우리 자신을 그로부터 분리시킨다. 이것이 성경적 방법이다. . . . 그러나 신복음주의자들은 이런 분리의 방침을 내버리고 그 대신에 오류를 포용하는 침투라는 방침을 취하였다.433)  

분리의 이유들

우리가 이런 사람들과 교제를 끊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그 첫 번째 이유는 교회의 본질 때문이다. 교회는 근본적으로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임이며, 참된 성도라면 성경적 교리를 믿고 성경적 교훈에 순종할 것이 기대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의 이러한 성격에 배치되는 요소들, 곧 불신앙, 이단, 회개치 않는 죄, 고의적인 불순종 등을 교회에서 제거해야 한다. 예를 들어, 오늘날 자유주의자들이나 자유주의 교회들과 협력하는 전도활동들은 겉보기에 큰 결실이 있는 것 같을지라도 그것의 잘못된 교제가 옳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구실도 용납지 말고 그런 활동을 반대해야 한다. 우리의 일차적인 관심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결코 물량주의, 숫자주의, 실용주의가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성경주의, 진리주의이다.

두 번째 이유는 교회의 순결성 때문이다. 교회는 거룩한 교회이며 또 거룩해야 한다(엡 5:26-27). 교리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그러해야 한다. 이단은 저주받을 사상이며 멸망케 할 사상이다. 갈라디아서 1:8,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베드로후서 2:1,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그러므로 교회는 이단이나 고의적 죄악을 포용해서는 안 된다. 비록 지상에 완전한 교회가 없겠지만, 우리는 순결한 교회, 흠 없는 교회를 건립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교회는 뻔뻔스런 불신앙이나 고의적 불순종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

세 번째 이유는 악의 전염성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교회에 들어온 교리적 오류를 책망하면서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고 말했다(갈 5:9). 또 그는 디모데에게 이단자를 조심하라고 말하면서 “저희 말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진리에 관하여는 저희가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하므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고 했다(딤후 2:17-18). 또 그는 고린도교회가 윤리적 악을 포용한 것을 책망하면서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말했다(고전 5:6). 교리적 오류이든지 윤리적 오류이든지, 죄악은 누룩처럼 혹은 독한 창질처럼 교회 안에 나쁜 영향을 끼친다. 그러므로 악의 전염성 때문에 교회는 악을 제거하고 악의 영향을 차단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는 조만간 부패되고 말 것이다.

네 번째 이유는 하나님의 명예 때문이다. 교회가 윤리적 죄악을 포용하면, 세상 사람은 교회를 비난할 뿐 아니라, 또한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도 비난하고 조롱할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 2:24에서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악행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명예를 위해서도 그 거룩함을 지켜야 한다.

분리의 방법들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 교제를 끊어야 하는가?

우선, 교회 지도자들의 잘못된 교훈과 입장과 활동들은 지적되고 비평되어야 한다. 어떤 이들은 ‘교훈들을 비평하고, 교훈하는 자들을 비평하지는 말라’고 말하지만, 교훈과 교훈하는 자는 분리되기 어렵다. 밴가드지는 다음과 같이 적절히 말하였다:

첫째, 사람의 이름을 드는 것은 성경적이다. 사도 바울도 사도 요한도 사람의 이름을 들어 비평하였다.

둘째, 우리가 사람을 칭찬하기를 좋아한다면, 사람을 책망하는 것도 논리일관한 일이다.

셋째, 사람의 이름을 드는 것은 실제적인 문제이다. 슬프게도, 사람들은 흔히 설교들보다 설교자들을 따른다.

넷째, 사람의 이름을 드는 것은 역사적 후원이 있다. 교회역사상, 사람들은 그들이 반대하는 내용에 대해서뿐 아니라 반대하는 인물에 대해서도 분명히 말하기를 겁내지 않았다.434)

성경이 가르치는 분리는 일차적으로 교회적 교제의 단절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 교제를 끊어야 할 대상자들이 있을 경우, 성도들은 성경이 가르친 대로 또 교회 헌법의 권징의 규칙을 따라 권계(권면과 충고), 수찬정지(성찬식에서 제외), 제명출교의 절차를 행해야 할 것이다(마 18:15-17).

비록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사람들 간의 막힌 담뿐 아니라 인간들 상호 간의 막힌 담도 허무신 위대한 화해자이시지만, 비록 그들 중 어떤 이들이 우리와 똑같이 예수의 피로 구속받은 진정한 형제요 자매이겠지만, 비록 그들 중 어떤 이들이 우리와 함께 천국에 들어갈지도 모르지만, 불신앙, 이단, 회개치 않는 악, 고의적인 불순종에 대한 적절한 권징과 교제 단절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과 명령이다. 고린도전서 5:11-13, “사귀지도 말고 . . . 함께 먹지도 말라 . . .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 쫓으라.” 데살로니가후서 3:14,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그러므로 교회는 합법적 권징과 교제의 단절을 실행해야 한다.

특히, 교회는 성경의 근본 교리들을 부정하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이나 목사들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교회에서 출교되어야 할 이단자들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신학교 교수를 청빙할 때 이사들은 먼저 청빙할 자들의 신학사상이 건전한지를 신중히 심사해야 한다.

또 성경적 교회들은 자유주의 교회들이나 포용주의적 교회들과 교제하지 말아야 한다. 오늘날 기독교계는 대교단들이 자유주의화된 상황이므로, 세계교회협의회(WCC)와 각 나라 교회협의회(NCC)는 잘못된 단체들이다. 그러므로 성경적 교회들은 이러한 단체들과 관련된 활동들을 반대해야 하고 거기에 참여치 말아야 한다.

또 빌리 그레이엄의 전도활동과 같이 자유주의자들이나 자유주의 교회들(기장, 기감, 예장통합)과 협력하는 전도활동은 명백히 비성경적이고 인본주의적이므로 우리는 그런 활동을 인정하지 말고 거기에 참여하거나 그것을 후원하지 말아야 한다. 또 부활절 연합예배나 연합성찬식같이, 보수주의적 교회들과 자유주의적 교회들을 망라한 초교파적 연합집회들이나, 성서공회, 기독교 방송국, 찬송가공회 등의 연합활동들은 옳지 않다. 성경의 기본적 교리들을 믿는 교회들 간의 초교파적 연합활동은 가능하고 필요하지만, 보수주의적 교회들과 자유주의적 교회들 간의 연합활동은 확실히 비성경적이다.

덧붙여서 생각할 바는, 한 교회 혹은 교단이 자유주의화되었거나 자유주의자들을 고의적으로 포용할 때, 보수적 신자들 혹은 목사들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 우선, 그는 그 교회와 교단이 자유주의자들을 쫓아내고 성경적 교회와 교단이 되도록 말과 글로써 또 합법적 절차를 따라 노력함으로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러나 그 교회나 교단이 자유주의자들이나 혹은 그들을 옹호하는 세속적 교권주의자들의 손에 장악되어 있어서 자유주의자들의 권징 출교나 교회 정화 혹은 개혁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될 때, 그는 그 교회와 교단을 떠나야 하며 바른 입장을 가진 성경적 교회를 찾아 거기에 속하거나 그러한 교회 혹은 교단을 설립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너희는] 거기서 나와서 따로 있으라”고 말했고(고후 6:17) 또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고 했다(엡 5:11).

물론, 우리는 교회적 교제를 끊어야 할 대상자들과 개인적 교제를 가지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 때때로 그런 자들과의 개인적 교제를 완전히 끊기 어려운 상황이 있을 것이다. 그런 자가 우리의 가족들 중에나 우리의 친구들이나 이웃들 가운데 있을 수 있다. 그런 경우, 우리는 조심해야 한다. 무분별한 교제로 악을 용납하거나 승인하는 인상을 주위에 주어서는 안 될 것이다.

구약시대 유다 왕국에 경건했던 여호사밧 왕은 이스라엘 왕국의 악한 아합 왕과 교제함으로써 하나님의 책망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 후손에게 이스라엘 왕국의 우상숭배의 씨를 뿌리는 결과가 되었다. 선견자 예후는 여호사밧에게 “왕이 악한 자를 돕고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이 가하니이까?”라고 책망하였다(대하 19:2). 사도 요한은 요한이서 7-11절에서 “[이단자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니라”고 말했다.

그러나 우리는 잘못을 범한 자들과 교제를 끊을 때, 매우 신중해야 한다. 우리의 교제 단절은 먼저 우리의 성실한 노력을 전제해야 한다. 우리는 상대의 잘못의 교정을 위해 먼저 개인적으로 진지하게 권면하고 교회적으로 성실히 노력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교제를 끊어야 할 때에도 지금이 불가피한 분리의 때인지 신중히 생각하고 판단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성급한 분리가 교회의 개혁과 갱신에 유익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해를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신자 개인의 경우에는 교회적 대책이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그가 떠나야 할 교회 대신에 그가 속할 만한 건전한 보수적 교회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이 점에서 때때로 어려움이 많이 있는 것 같다.

분리에는 항상 지나친 태도의 위험성이 있다. 건전한 성경적 확신보다 개인적 해석이 분열의 문제점으로 부각될 수도 있다. 죤 애쉬브룩의 말과 같이, “분리는 배교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다. 또 분리는 배교로부터 분리하기를 원치 않는 불순종하는 형제들의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다. 그러나 분리가 형제들 간의 모든 불일치에 대한 대답은 아니다.”435)

또 우리는 이런 교회적 갈등과 결단의 때에 겸손과 온유와 사랑을 잃지 말아야 한다. 미움이나 교만은 그 어떤 죄 못지 않은 큰 죄다. 사람이 성경적 분리의 명령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좋은 성품을 가지는 것은 더 중요하다. 더구나 우리의 우리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른 이들보다 영적 분별력을 좀더 가지게 되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며 따라서 우리는 어떤 경우에라도 교만해서는 안 된다. 갈라디아서 6:1,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으라.” 디모데후서 2:25,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하라.” 데살로니가후서 3:15, “그들[무질서하게 행하는 자들]을 원수같이 생각지 말고 형제같이 권하라.”

이와 같이 ‘성경적 분리의 원리’를 고찰해 볼 때, 자유주의적 배교와 신복음주의적 타협을 반대하고 성경의 교훈대로 순수하게, 성실하게 행하고자 하는 것이 바른 입장이다. 그것이 성경에 계시되고 교훈된 하나님의 뜻에 일치한 입장이다. 우리는 인본주의적 관념의 넓은 길을 버리고 성경 진리대로 좁은 길을 구하며 확신하며 그 길로 진행해야 한다. 두드러진 교리적, 윤리적 오류의 묵인은 하나님께 대한 불성실과 불순종이며, 참된 성도들과 교회는 당연히 그런 오류와 타협지 말고 그것으로부터 떠나야 한다. 이러한 입장을 근본주의라고 부르는데, 그것이 성경적으로 옳은 입장이다.

배교와 타협으로부터의 분리는 정당하다. 1999년 10월, 미국 기독교회 협의회(ACCC)는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근래의 수년 간 우리는 복음주의자들과 천주교인들이 하나님께서 친히 두신 분리의 벽을 제거하기 위하여 서로 간의 일치의 문서들에 서명하는 것을 보아 왔다. 자칭 근본주의자들과 신복음주의자들은 또한 함께 설 공통적 기반을 찾고 있다. 그러나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 따로 있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계속 견고하다. 진리와 오류가 하나로 함께 거하는 것은 여전히 금지되어 있다. 분리의 교리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은 성령의 중생케 하심으로 그에게 속한 자들을 보호하시기 위함이다. 아모스 3:3은 ‘두 사람이 의합(意合)하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느냐?’고 질문한다. 가룟 유다는 그리스도와 제자들 가운데 행하였지만 그들에게 속한 자가 아니었다고 성경은 가르친다. 바울은 유대주의자들을 ‘흉악한 이리’라고 말했는데(행 20:29), 그것은 그들이 은혜의 복음에 무엇을 더했기 때문이었다. 중생한 신자가 주께 불성실함 없이 불신자들이나 타협자들과 멍에를 같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불순종은 죄이다. . . . 분리의 교리에 대한 성실한 고수(固守)는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들에게 요구하시는 거룩과 순결을 보존시킨다.436)

캘버리 컨텐더437)는 다음과 같이 잘 말했다:

쥐를 죽이는 것은 98퍼센트의 햄버거 속에 혼합된 2퍼센트의 독약이다. 진리와 거짓의 혼합물은, 격리되고 분간될 수 있는 순수한 거짓보다 보통 훨씬 더 치명적이다. 하지만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흔히 “그러나 그 안에 좋은 점이 매우 많다”고 말한다. 모든 거짓 사상 체계들은 진리의 요소를 담고 있다. 실상, 더 많은 진리가 치명적 오류와 섞일수록, 그것은 속임을 위해 더 많이 위험하다. 속임수는 효력이 있으려면 내용적으로 참되게 보여야 한다. 목표를 향해 전달되는 내용의 90퍼센트 이상은 참되어야 한다. 그러나 미혹의 시대라도 그리스도인들은 속임당함에 대해 핑계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께서는 우리 시대의 오류나 오류자들을 폭로하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사 8:20).438)

오류에 대해 침묵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잘못이다. 캘버리 컨텐더지는 다음과 같이 바르게 말했다:

스스로 기독교적이라고 주장하는 개인이나 단체가 정통적 기독교의 역사적 성경적 교리들로부터 심각하게 떠날 때, 우리는 게으르게 침묵하며 서 있어서는 안 된다(딛 1:9-11). 말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 욕을 돌리는 것이며 오류의 전파자들과 그것을 듣는 자들을 사랑하지 않는 일일 것이다.439) 말없는 파수꾼들은 없는 것보다 더 위험하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파수꾼들이 의무를 다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안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유다 나라의 목자들을 ‘눈 먼 파수꾼들’이라고 부르셨고 또 그들을 ‘벙어리개요 능히 짖지 못하는 자’라고 말씀하셨다(사 56:10).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그릇된 교리를 비난하지 않으셨고, 오직 그들이 경고했어야 할 때 잠자고 있었음을 비난하셨다.440)

여러 문제들로 혼란스러운 오늘날 교계의 현실에 사랑과 관용만을 부르짖는 것은 하나님의 원수들을 이롭게 하는 것뿐이다! 교회 내의 오류들은 지적되고 제거되어야 한다. A. W. 토저는 말하기를, “사랑을 가장한 소심함 때문에, 많은 교회들에서 헛된 형식들과 비성경적 행위들이 계속 허용되었고, 그것들은 결국 점점 교회의 생명을 질식시켰고 교회를 황폐케 만들었다,”441) “타협은 압박을 제거할 것이다. 사탄은 싸우기를 그친 사람을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중지의 대가는 평화로운 침체의 삶일 것이다”442)라고 하였다.

테리 아놀드(Terry Arnold)도 다음과 같이 적절하게 말했다:

오늘날 ‘관용’이라는 말은 새 사고방식으로 칭찬을 받는다. 기독교 세계에서와 기독교 교리에서 관용에 대한 점점 더 많은 요구가 있다. 그러나 실제로 의미한 바와 성취된 바는 관용이라기보다 흔히 ‘타협’이다. . . .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과 그의 말씀을 타협하는 것은 죄이다! 중요한 교리들을 타협하는 것도 또한 죄이다! 거짓 교사들과, 사람을 건전한 교리에서 떠나게 하는 자들과 타협하는 것도 죄이다. 성경은 때때로 일치보다 분리에 관하여 말한다. . . . 예수께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에 대해 관용하셨지만 결코 타협하지 않으셨다. 사실 그는 흔히 논쟁에 휘말리셨다! . . . 나는, 그들이 뒤에 더 큰 것들에 대해 타협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지금 작은 것들에 대해 타협하는 소위 ‘화평케 하는 자들’을 주의한다. 많은 목사들은 사람들이나 그들 자신의 지위나 인기를 잃어버릴까봐 두려워서 어떤 문제들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취하지 않을 것이다. . . . 진리를 희생하는 관용은 타협에 이른다.443)

역사적 후원

16세기 종교개혁은 20세기 근본주의 운동의 모본이 된다. 일반적으로 권징은 회개치 않는 범죄자를 교회로부터 배제하는 행위이지만, 16세기 종교개혁 당시에는 서방의 천주교회가 전체적으로 변질, 부패되어 있었기 때문에, 종교개혁자들은 그 교회로부터 분리되어 나와야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분파주의자들이 아니었다. 종교개혁은 분파운동이 아니었다. 오히려 부패된 교회 속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악한 일이었다.

21세기 기독교계의 상황은 16세기 종교개혁 당시보다 더 어둡고 혼란스럽다. 역사적 대교단들은 자유화되었거나 자유주의를 고의적으로 포용하는 넓어진 교회들이 되었다. 다수의 교회들은 자유주의자들을 권징하거나 출교시킬 의사가 없다. 보수적인 교회들도 자유주의적 혹은 포용주의적 교회들과 점점 더 자유로이 교제하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참된 성도들과 목사들은 배교적 혹은 포용적 교회들 안에 그대로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그들의 속한 교회들이 어떤 방향으로 가든지 우리만 보수적으로 믿으면 된다고 안일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그 교회들에서 나와야 하고 그런 잘못된 교제와 협력에서 분리되어야 한다. 이것은 분파주의적 관념이 아니고 성경이 명령하는, 또 우리가 순종해야 하는, 정당한 분리이다. 참된 성도들이 죽은 교회, 배교적인 교회로부터 떠나는 것은 그들의 자유이며 또한 의무이다.

침례교 연맹의 교리적 탈선을 지적하면서 1887년 그 단체로부터 탈퇴했던 촬스 스펄젼(Charles Spurgeon)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가 아는 한 하나님의 진리를 전파했고, 그 독특한 내용들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나는 나의 증거를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 신앙이 잘못된 자들로부터 또 심지어 그들과 교제하는 자들로부터 내 자신을 분명하게 단절시켰다. . . . 오류가 확립되었음을 내가 보았거나 내가 보았다고 생각하자마자, 나는 심사 숙고하지 않았고 즉시 그 단체와 결별했다. 그때 이후 나의 한가지 조언은 ‘그들로부터 나오라’는 것이었다. . . . 오류에 연루되는 것은 가장 훌륭한 사람들에게서 그 오류를 성공적으로 저항할 능력을 빼앗아 갈 것이다.444)

유명한 캠벨 모간(Campbell Morgan) 목사도 잘못된 관용이 선한 영향력을 잃게 만든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배신 행위인 관용이 있다. 마비 상태를 낳는 화평이 있다. 교회가 일을 할 때 타협에 근거한 교제를 요청하는 자들에게 ‘아니오’라고 말해야 할 때들이 있다. 그렇게 떨어져 서 있는 것은 추방과 핍박을 낳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능력과 영향력을 유지할 것이다. . . . 오늘날 교회는 타협에 의해 그 자신의 영향력을 파괴시켰다.445)

20세기 초에 미국 북장로교회의 배교에 대항해 싸웠던 인물이며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설립자의 한 사람이었던 메이천(J. G. Machen)은 자유주의자들과의 분리의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역설했다:

한가지 사실이 완전히 명백하다. 즉 자유주의자들이 기독교인이든지 아니든지 간에, 자유주의가 기독교가 아니라는 것은 여하튼 완전히 분명한 것이다. 또한, 그것이 그러하다면, 자유주의와 기독교가 계속 같은 조직체 안에서 전파된다는 것은 지극히 바람직하지 못하다. 교회 안에 있는 그 두 부류들의 분리는 이 시대의 절실한 요구이다.446)

그는 배교적 교회로부터의 분리의 정당성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만일 자유주의파가 실제로 교회의 기관들을 완전히 장악한다면, 복음주의적 그리스도인은 그 교회의 활동을 계속 후원할 수 없을 것이다. . . . 만일 자유주의파가 실제로 교회를 장악한다면, 복음주의적 기독교인들은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물러설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447)

메이천은 또한 신복음주의적 타협의 죄에 대해 “오늘날 가장 나쁜 죄는 당신이 기독교 신앙을 동의하고 성경을 믿는다고 말한 다음, 기독교의 기본적 사실들을 부인하는 자들과 협력하고 타협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448)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조직신학 교수였던 죤 머리(John Murray)는, 자유주의자들과 협력하는 신복음주의적 전도 방법에 관해, 자유주의자들에게 전도하는 것과 그들과 함께 전도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고 말하면서 자유주의자들과 협력하는 전도 방법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다고 분명하게 비평하였다. 또한 그는 신자의 교회 소속 문제에 관해, 우리가 소속한 교회의 집단적 증거는 곧 우리의 증거이며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께 신실한 교회에 소속해야 한다고 말했고 또 집단적 관계와 책임을 무시하는 것은 악이라고 부언하였다.449)

웨스트민스터신학교 변증학 교수였던 코넬리우스 반틸(Cornelius Van Til)은 신복음주의의 신학적 약점들, 타협적 전도 활동, 신복음주의 잡지들 등을 비평하였다.450) 그는 타협적 전도 활동을 반대한 메이천의 입장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메이천은 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을 주장하는 자들과 협력함으로 이루어지는 협력선교, 협력전파, 협력전도를 반대했다. 메이천에게 그러한 협력은, 사도 바울에게 유대주의자들과의 협력이 불가능했던 것처럼 불가능하였다. . . . 그는 자신의 교회에서 선교에 있어서 자유주의자들과 협력하는 것을 생각할 수 없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독립선교부를 조직하지 않았을 것이다. . . .  그는 협력전도 개념이 그에게 그리스도께 대한 충성의 배신임을 명백히 하였다.451)

웨스트민스터신학교 구약 교수였던 E. J. 영(Edward J. Young)은 신복음주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실, 그것[신복음주의]은 매우 중요한 교회의 교리와 신앙을 위한 활기찬 투쟁의 필요성 외에 모든 것을 강조한다. . . . 그러면 신복음주의가 오늘날의 상황에 대한 해답인가? 우리는 아니라고, 강조해서 아니라고 대답한다. 여기에 한 일시적 현상이 있다. 또 그것이 빨리 지나갈수록 교회를 위해 더 유익하다. . . . 근본주의 안에는 훌륭한 많은 점들이 있고, 만일 우리가 근본주의와 신복음주의,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강요를 당한다면, 우리는 어떤 주저도 없이 근본주의를 택해야 할 것이다. 근본주의는 신앙의 변호에 관심을 가지고 있고, 그러한 관심은 참으로 성경적이다. . . . 그것[근본주의]은 실수들을 범했으나, 외쳐야 할 적절한 때가 오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저 조심성 있는 중도파들이 범한 것과 같은 그렇게 큰 실수는 아니었다.452)

기독교 신학자요 변증가인 고든 클락(Gorden H. Clark)은 배교적인 교회로부터의 탈퇴의 정당성을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했다:

모든 교회는 약간씩은 다 허물이 있으므로 교적을 바꾸는 것은 결코 옳지 않다고 하는 그럴 듯한 변론은 루터와 칼빈이나 청교도들에게 결코 통하지 않았던 변론이다. 방종한 촬스 2세가 반기독교적 법령을 제정하여 강요한 까닭에 약 2,000명의 목사들이 1660년 영국 국교를 탈퇴했던 것을 기억하라. 이렇게 탈퇴함으로 그들은 생활비를 받을 수 없게 되었고, 어떤 경우에는 옥고를 치루기도 하였다. . . . 금일에 작은 형벌이라도 기꺼이 받고자 하는 목사들이 과연 몇명이나 있을까? 그리고 약간의 방해 외에는 전혀 아무런 형벌을 가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과연 평신도 중에 몇명이나 배교적 조직체를 탈퇴할 만한 확신을 갖고 있을까?453)

앞에서 인용한 주의 종들이 취한 입장은 성경적 입장이다. 성경은 성도들 간의 사랑의 교제를 가르치는 동시에, 이단자들이나 고의적인 불순종자들과 교제를 끊을 것도 가르친다. 이런 입장을 근본주의라고 부르며 그것은 성경적으로 옳다. 배교와 타협으로부터의 분리를 주장하는 입장이 성경적으로 옳다. 우리는 배교와 타협으로부터 분리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충성하고 그가 주신 성경교훈에 온전히 순종해야 한다.  

20. 교회의 바른 진로(進路)

오늘날 교회 문제 해결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는 교제에 있다. 그것은 교회 속에 들어온 자유주의 신학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라는 문제이다. 이 점에 대해 복음주의는 포용적 태도를 취한다. 이것은 진리를 양보하고 이단을 용납하는 것이다. 이것은 무지이든지 타협이다. 자유주의 신학은 확실히 이단이며 따라서 그것은 기독교회 속에 용납될 수 없고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성경적 기독교가 자유주의 신학과 분리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절실한 시대적 요구이다. 이런 입장과 확신을 근본주의라고 부른다.

그러나 근본주의의 분리의 확신은 많은 오해와 비난을 받아왔다. 자유주의자들의 불신앙적 비난은 놔두고라도, 어떤 보수적 인사들은 근본주의를 세대주의로 오해하였고,454) 또 지식과 분별력 없는 다수의 복음주의 목사들은 잘못된 사랑과 화평을 말하면서 근본주의를 비난하였다. 그러나 근본주의를 비난하는 자들은 교회의 순결성에 대해 무관심함을 드러낼 뿐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순결한 교회를 원하셨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음이 분명하다.

근본주의는 역사적으로 기독교의 근본교리를 고수하는 입장이었다. 19세기말 미국의 나이아가라 예언사경회는 ‘나이아가라 신조’라고 불리는 14개 조항의 신조를 선언하였다.455) 또 20세기초 성경의 근본교리들을 옹호하는 근본 교리들: 진리에 대한 증언이라는 12권으로 된 책자들이 무료로 약 300만부 배포되었다.456) 또 미국 북장로교회 총회는 다섯 가지의 중요한 교리들을 ‘성경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본질적 내용’이라고 선언하였다.457)

자유주의자 커솝 레이크(Kirsopp Lake)는 말하기를, “근본주의를 하나의 새롭고 이상한 사상 형태라고 상상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것은 그런 유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한때 모든 기독교인이 보편적으로 주장했던 신학의 잔존물이다”라고 하였다.458) 박형룡 박사는 말하기를, “근본주의는 별다른 것 아니라, 정통주의요 정통파 기독교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근본주의는 기독교의 역사적 전통적 정통적 신앙을 그대로 믿고 지키는 것 즉 정통 신앙과 동일한 것이니만치, 이것은 곧 기독교 자체라고 단언하는 것이 가장 정당한 정의일 것이다. 근본주의는 기독교 자체다”라고 하였다.459)

근본주의는 기독교 근본교리를 고수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역사적 교단들이 자유주의를 제거하지 않고 자유주의를 포용하는 ‘넓어진 교회’가 되었을 때, 근본주의는 포용적인 교단들로부터 분리하는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즉, 근본주의는 ‘분리’라는 특징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것은 자유주의의 포용, 자유주의자와의 교제를 용납할 수 없었던 신앙 양심에서 나온 것이다. 어떤 이들은 스스로 모교단들을 떠났고 다른 이들은 모교단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그 후 ‘신복음주의’라는 한 경향이 일어났다. 이것은 소수파로 드러난 근본주의자들 가운데서 일어났다. 어떤 이들은 진리를 위해 끝까지 싸우기보다 평화와 안정을 더 좋아하였다. 또 그들은 신실한 소수의 보수주의자들과 보수주의 교회들 간의 교제와 협력보다 더 폭넓은 교제와 협력을 추구하였다. 그들은 성경적 분리의 교훈을 따르기보다 일치와 화합을 원하였다.

근본주의는 이런 자들의 행위를 진리를 양보하고 악과 타협하는 행위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근본주의는 자유주의자들과의 교제뿐 아니라, 신복음주의자들과의 교제도 합당하지 않다고 보았다. 근본주의는 기독교의 근본교리들을 보수하고, 배교와 타협으로부터 분리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기독교의 근본교리들의 범위 문제는 쉬운 문제가 아니며 그것이 교파들이 생긴 한 주요 원인이었지만, 적어도 역사적 개신교회들이 공통적으로 믿는 교리들이 근본교리들 안에 포함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또 그 공통적 신조들은 기독교회들의 일치의 기초이다. 그러므로 존 칼빈이나 존 오웬은 기독교의 본질적 교리들을 그리스도인의 일치의 기초로 간주하였다.460)

기독교의 근본교리들을 보수하려는 움직임은 초교파적으로 이루어졌다. 근본주의는 초교파적 성격을 띠었다. 그러므로 근본주의를 역사적으로 정의한다면, 근본주의는 기독교의 근본교리들을 보수하고 배교와 타협으로부터 분리하려는 초교파적 입장이었다.

이와 같이, 근본주의와 신복음주의 혹은 복음주의의 차이는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태도에 달려 있었다. 근본주의는 자유주의 신학을 용납할 수 없는 이단으로 간주하고 그것으로부터 분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신복음주의 혹은 복음주의는 그것을 용납하고 그런 사상을 가진 자들과 교제하고 협력하였다.

그러나 무엇이 성경적으로 옳은 태도인가? 구약시대에 노아는 어떠했으며 모세는 어떠했는가?(벧후 2:5; 출 32장) 엘리야는 어떠했으며 미가야는 어떠했는가?(왕상 19:10; 22:5-14) 에스라는 어떠했으며(스 9, 10장) 느헤미야는 어떠했는가?(느 2, 6, 13장) 신약시대에 바울의 태도는 어떠했는가?(고후 11장; 갈 1장; 딤후 1-4장) 이단자들과 교제를 끊으라는 성경의 교훈은 너무 분명하다(롬 16:17; 딛 3:10; 요이 7-11; 유 3; 갈 1:8; 벧후 2:1; 딤후 2:17-18). 아무리 오늘날 기독교계가 포용적일지라도 주의 바른 종들과 교회들이 가야 할 길은 분명하다.

어떤 이들은 말하기를, “우리 입장은 근본주의가 아니고 개혁주의 혹은 칼빈주의이다”라고 한다.461) 그러나 그것은 근본주의가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무지에서 나온 말이다. 개혁주의는 루터파와 대조된 하나의 신학 체계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것은 주로 장로교회의 신학 체계이다. 그러나 근본주의는 자유주의 신학에 대해 반대하는 초교파적 입장이다. 그러므로 근본주의를 개혁주의와 대립시켜 말하는 것은 무지에서 나온 것이다.

근본주의는 성경적으로 바른 입장이다. 자유주의 신학은 명백히 이단이다. 참 교회는 마땅히 자유주의 이단을 배격하고 자유주의자를 제거해야 한다. 자유주의자를 포용하는 것은 악에 대한 타협이며 주께 대한 불충성이다. 그러므로 자유주의의 배교와 신복음주의의 타협으로부터 분리를 주장하는 입장은 성경적으로 바른 입장이다. 근본주의는 바른 입장이다. 오늘날 배교와 타협과 혼란이 점점 심해지는 때에, 하나님의 뜻은 배교와 타협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이다.

우리가 근본주의를 옹호하는 까닭은 근본주의가 바른 입장이기 때문이며, 또 사람들이 근본주의를 잘못 알고 잘못 비난하기 때문이며, 또 근본주의라는 용어 외에 오늘날 바른 입장을 나타낼 적절한 말이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나라에는 참으로 근본주의 교회들이 필요하다. 근본주의 장로교단과 근본주의 초교파협의체가 필요하다. 또 근본주의 정신을 가진 신학교, 성경공회, 방송국, 선교 단체, 신문사, 출판사가 필요하다. 근본주의적 신념을 가진 목사들과 평신도들은 단합하여 배교와 타협의 이 악한 시대에, 작을지라도 바르고 순수한 하나님의 교회를 건립하고 하나님의 일을 바르고 충성되게 수행해야 할 것이다. 성경의 교훈들에 대한 확신과 현시대에 대한 분별력과 하나님께 대한 충성심을 가진 종들은 뜻을 합해 하나님의 뜻을 행해야 한다.

현대교회는 위기에 처해 있다. 개신교의 전통적 대교단들의 지도층은 자유주의 신학을 배제할 의지가 없고 오히려 그것을 용납하고 그들 자신이 자유주의화되어 있다. 이것이 현대교회의 배교(背敎)가 아니고 무엇인가? 이것이 주께 대한 배신과 변절이 아니고 무엇인가? 자유주의 교단들 안에 있는 보수적 인사들이 배교에 대해 침묵하며 배교와 타협하고 협력하고 있는 것은 확실히 잘못이다.

복음주의 교회들의 타협은 더욱 가슴 아픈 일이다. 복음주의 교회들의 다수는 자유주의적 교단들과 지도자들과 교제하고 협력하고 있다. 포용주의가 오늘날 복음주의 교회들의 특징이 되었다. 우리는 신실한 개혁교회들과 신학교들을 찾기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많은 고난 중에도 낙심치 않았듯이, 하나님의 종들과 자녀들은 언제나 낙심치 않는다(고후 4:7-8).

결론적으로, 성경적 교회는 다음 몇 가지 점들을 힘써야 한다.

첫째로, 우리는 옛신앙을 파수하고 전파해야 한다.

옛신앙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이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음”을 전파했던 것과 같이, 오늘날 목사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 그것은 영원불변의 복음이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다. 그뿐 아니라, 교회는 옛부터 믿어온 교리 체계를 지키고 후대에 전해야 한다. 바른 신앙의 보수와 전파는 이 혼란한 시대에 더욱 요구된다. 속죄의 복음을 믿고 그것을 전파하는 참 교회들이 처처에 세워져야 한다. 여기에 천국의 소망을 가진 사랑의 공동체가 있고 죄와 죽음을 정복한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가 있다.

둘째로, 우리는 오직 말씀과 기도로만 진행해야 한다.

우리의 힘은 신비적 은사체험에 있지 않고, 선진들이 하던 대로 성실한 성경 연구와 날마다의 진실한 기도에 있다. 우리가 성경말씀대로 믿고 그 말씀대로 살기로 굳게 다짐한다면, 현대교회의 문제들은 다 해답을 얻을 수 있다. 우리가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받은 자들이라면, 우리가 하나님의 참된 교회라면, 모든 불신앙과 불순종을 회개하고, 또한 땅의 것을 구하기 때문에 오는 인간적 변명과 타협을 깨끗이 털어버리고, 성경에 밝히 제시된 하나님의 뜻에 겸손히 복종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성경적 분리의 원리에 충실해야 한다.

물론 우리는 먼저 자신이 속한 교회의 순결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하며 성급한 분리를 피해야 한다. 또 배교와 타협에 대한 책망이나 분리의 권면은 눈물과 동정으로 행해져야 한다. 그러나 교회가 자유화되었을 때, 성경을 믿는 목사들과 신자들은 거기 머물지 말고 거기서 분리되어 나와야 한다. 또한 보수적 교회들은 무분별한 연합활동을 중지하고 자유주의 교단들과 분리해야 한다. 또 오늘날 사회정치 활동을 선교라고 생각하는 선교 개념의 변질을 배격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을 그대로 증거해야 한다. 또 보수적 교회들은 예배와 교회음악의 타락, 낙태와 동성애의 용납 등 윤리적 부패에 대해 확실히 반대해야 하고 은사운동에 대해서도 경계해야 한다.

오늘날 중요한 것은 교제의 문제다. 보수적 교회들은 보수적 교회들과만 교제해야 한다.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진다.” 참된 교회들은 교회의 영광을 교인수나 건물 크기나 헌금 액수 등에서 찾지 말고, 그들이 고백하고 선포하는 복음 진리와 거룩한 순종의 삶에서 찾아야 한다. 우리는 이 땅에 속한 것들을 바라지 말고 저 하늘에 속한 것들을 바라보아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바른 신학교들을 세워야 한다.

신학교는 제자 훈련의 장소가 되어야 한다. 거기에서 목사 후보생들은 경건과 거룩의 훈련과 더불어 성경의 전체적, 기본적 지식을 얻어야 하고, 기독교 교리들에 대한 사상을 체계적으로 정립해야 한다. 그들은 또 사도시대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의 교회의 역사에 대한 바른 지식과, 특히 현대교회문제들에 대한 바른 분별력을 얻고 바른 입장을 확립해야 한다. 거기에 덧붙여, 그들은 또 목회와 전도의 실제 문제들에 대한 지식과 훈련도 쌓아야 한다.

바른 신앙과 건전한 인격과 실력을 구비한 충성된 교수들의 채용은 바른 신학교 건립을 위해 매우 중요하다. 디모데후서 2:2,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교회는 공정하고 성실한 시험과 면접을 통해 그들을 선별하여 채용하고 그들이 신학 연구와 교수의 일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기도와 물질로 후원해야 한다.

다섯째로, 우리는 분열의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자유주의 이단들과의 분리는 정당한 일이지만, 교권 쟁탈을 위한 분열, 지방색을 따른 파벌, 이권과 명예심으로 인한 분쟁 등은 죄악된 일들이다. 욕심, 교만, 미움은 옛 사람에 속한 것이다. 갈라디아서 5:19-21,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청결한 마음과 겸손과 사랑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다른 이들을 섬기는 것은 성도의 초보적 생활 원리이다. 우리는 동역자들 간의 단합을 중요히 여겨야 한다. 마태복음 20:26,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에베소서 4:1-3,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하나님의 진실한 종들과 성도들과 참된 교회들은 배교와 타협과 혼란의 시대에 잠들지 말고 깨어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며 죽도록 충성하자! 하나님의 말씀을 보수하고 전파하고 실천하자!

디모데후서 1:13,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라.”

디모데후서 4:2-5,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고린도전서 15: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마치는 말

땅 위에 완전한 교회 즉 완전히 순결한 교회는 없다. 세상에 완전히 성화된 신자가 없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인격적으로 성숙한 신자들도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 목적은 세상에 완전히 순결한 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에베소서 5:26-27,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개인적으로 성숙하고 온전한 신자가 되어야 할 뿐 아니라, 순결한 교회를 세워야 한다.

우선, 교회의 기초는 무엇인가? “당신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은 예수께서는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6:16, 18). 주께서 말씀하신 그 반석은 베드로가 고백한 신앙고백을 가리킨다. 사도 바울은 교회의 터를 예수 그리스도라고 증거하였고(고전 3:11) 또 교회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졌다고 말하였다(엡 2:20). 교회의 기초는 사도들을 통하여 전파된 예수 그리스도와 그에 관한 진리, 즉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 죄를 대속하신 그리스도라는 진리이다. 그 진리가 복음이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진리가 교회의 기초이며 그 외의 다른 기초가 없다. 참 교회는 그 복음 진리를 믿는 자들의 모임이다. 사도 바울은 이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으라고 선언했다(갈 1:8-9).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속죄 복음, 즉 신약성경에 기록된 사도들의 교훈들과 그 전통에 굳게 서야 한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의 참 기초이기 때문이다.

참 교회의 표는 무엇인가? 그것은 먼저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전파되는 것이다. 강단 즉 설교의 순결성이 그것이다. 설교의 전달 방식도 좋아야 하지만, 그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그 내용이다. 교회는 섞인 것을 전하지 않고 순수한 성경 진리를 전해야 한다.

사도 베드로는 성도들에게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순수한 말씀의 젖]을 사모하라”고 권면하였다(벧전 2:2). 사도 바울은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고 말했다(딤후 4:3-4).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진리를 쉽게 전달하려 애써야 하지만 진리의 내용을 변경하여 부드럽게 하려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바른 말씀은 ‘개혁신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그것은 16세기 종교개혁자들과 그 후 개혁교회의 유산이다. 그것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대소요리문답에 나타나 있고 핫지나 벌코프나 박형룡의 조직신학 같은 데 잘 제시되어 있다.

하나님의 바른 말씀에 의하면, 천주교회의 교훈은 바른 진리가 아니다. 천주교회는 성경말씀을 넘어서거나 벗어나기 때문이다. 그들의 교황 무오설, 마리아 교리, 연옥 사상, 미사 교리 등이 그러하다.

하나님의 바른 말씀에 의하면, 자유주의 신학은 분명히 이단이다. 어떤 신학자의 글을 보니까, 신정통주의가 자유주의 신학이 아니라고 썼는데, 그것은 틀린 말이다. 칼 바르트, C. H. 다드, 라인홀드 니이버 등의 신정통주의도 기독교의 근본 교리를 부정하는 자유주의 신학에 속하며 그것은 분명히 이단이다.

하나님의 바른 말씀에 의하면, 자유주의와 로마 천주교회와 교제하는 복음주의자들, 즉 신복음주의자들은 분명히 잘못이다. 성경은 이단자들과 교제하지 말라고 분명히 말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바른 말씀에 의하면, 은사주의는 성경적 기독교가 아니다. 은사주의는 바른 교리에 대한 믿음과 바른 삶을 무시하고 신비적 은사체험만 강조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기독교의 변질이다.

하나님의 바른 말씀에 의하면, 오늘날 교회연합운동은 잘못이다. 그것은 바른 교리와 신학 안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자유주의 신학과 로마 천주교회를 포용하고 심지어 이방 종교들을 포용하는 경향을 띠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운동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의 바른 말씀에 의하면, 오늘날 어떤 교회들이 낙태와 동성애를 인정하는 것은 심히 죄악되고 가증한 일이다. 또 오늘날 교회들에서 도입되고 있는 현대기독교음악(CCM)과 ‘열린 예배’는 잘못이다. 성경은 그런 방식의 예배를 인정치 않기 때문이다.

참 교회는 하나님의 바른 말씀을 전해야 하고 그 말씀을 실천해야 한다. 강단의 설교와 회중의 삶은 일치해야 한다. 정통적 신앙고백과 그것을 고백하는 신자의 삶은 일치해야 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다(약 2:17, 26).

개혁교회가 참 교회의 표로 권징의 성실한 실행을 첨가하는 것은 바로 그런 신행일치의 정신이다. 그러므로 참 교회는 고의적 이단을 포용할 수 없고 고의적 불순종과 범죄를 포용할 수 없다. 그런 자들은 마땅히 지적을 받고 책망을 받아야 한다. 그들이 만일 그 잘못을 인정치 않고 회개치 않는다면 그들은 교회에서 제명되어야 한다. 그것이 성경이 교훈하는 권징이며 참 교회를 세우는 방식이다.

교회의 기능과 임무는 무엇인가? 교회는 우선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한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고 말씀하셨다(요 4:23-24).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예배를 원하시며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성령과 진리로, 또 심령과 진심으로 드려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 드릴 때 예수 그리스도의 의만 의지하며 드려야 하고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드려야 하며 또 오늘날 열린 예배와 같이 하지 말고, 경건하고 인격적인 예배를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교회는 또한 하나님의 양들을 양육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명령하셨다(마 28:20). 사도 바울은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고 말했다(엡 4:11-12). 목사는 이를 위해 있는 직분이다.

교회는 성도 개인을 성숙하고 온전한 신자로 만들어야 한다. 성도 개인도 성숙하고 온전한 신자가 되는 것을 신앙생활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 마태복음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히브리서 6:1-3,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골로새서 1:28-29,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또 교회는 교회 자체를 온전하게 만들기 위해, 즉 순결한 교회를 세우기 위해 성실히 노력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순결한 교회, 완전히 순결한 교회를 세우기를 원하셨다. 에베소서 5:26-27,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순결한 교회는 바른 말씀을 전파하며 바른 입장과 분별력을 가지고 바른 말씀을 순종하는 교회이다. 순결한 교회는 자유주의 신학를 포용치 않고 로마 천주교회와 교제하지 않는다. 순결한 교회는 은사운동도 경계한다. 순결한 교회는 잘못된 교회연합운동과 타협적 신복음주의 혹은 복음주의를 경계한다.

고의적 불신앙이나 불순종을 포용하는 것은 확실히 하나님 앞에서 잘못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음행한 자를 포용하는 일에 대해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고 책망하며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쫓으라”고 말했다(고전 6:2, 13). 이런 정신은 교리적 오류와 윤리적 오류에 다 적용된다.

그러나 주께서는 일치와 순결을 함께 교훈하셨다. 서로 미워하고 분열하는 것도 악하고 불결한 일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신 후(요 13:34) 하나님 안에서 하나가 되기를 기도하셨다(요 17:11, 21). 주께서는 또 그들이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되고 진리로 거룩케 되기를 기도하셨다(요 17:15-17).

교회는 특히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 우리는 믿지 않는 가족들에게 전도해야 하며, 전도대를 파송하여 가가호호 전도해야 한다. 우리는 전도자들을 세우고 훈련시키고 파송하며 그들을 기도와 물질로 후원해야 한다. 마태복음 28:19-20,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사도행전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사도행전 5:42,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 디모데후서 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우리는 참 교회의 표를 가진 교회를 세워야 한다. 참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하나님의 바른 말씀, 세상의 것들과 섞이지 않은 순수한 말씀이 전해지고 그 말씀대로 믿고 그 말씀대로 실천하는 교회가 참 교회이며 순결한 교회이다. 우리는 바른 진리와 교훈의 지식을 가지고 그대로 믿고 행하며, 특히 바른 분별력을 가지고 이 시대의 배교적이고 타협적인 혼란한 일들에 가담하지 않고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순종하는 개인과 교회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참 교회이며 그것이 순결한 교회이다.

성경의 교훈을 실천하는 일에는 교회의 기능과 임무를 실천하는 것도 포함된다. 우리는 예배와 양육과 전도의 임무를 잘 수행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오늘날 유행하는 세속적 방식의 열린 예배를 배격하고 경건하고 인격적인 예배를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또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일치하라는 하나님의 뜻도 힘써 실천해야 한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며 겸손히 서로를 존중하며 상대방의 부족과 연약을 볼 때에라도 쉽게 분열하지 말고 기도하며 인내하며 많이 기다려야 한다. 또 부득이 나누일 때라도 상대가 이단이 아니라면 원수같이 여기지 말아야 한다. 또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을 온 세상에 널리 전파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가정복음화를 위해 힘쓰고 교회의 전도활동에 힘써 참여하고 국내외의 전도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물질적 후원에 동참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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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1) ‘이단’(heresy)이라는 말은 ‘교회의 인정된 교리와 다른 신념’이라고 정의되지만(웹스터 영어사전), 통상적으로는 그보다 좀더 좁게 쓰인다. 즉 이단은 기독교의 근본적 교리에서 이탈한 신념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New Dictionary of the Theology (IVP, 1988), pp. 291-292.

2) "Fundamentalism and Modernism: Two Religions," Christian Century, 3 January 1924, pp. 5-6.

3) Adolf von Harnack, What Is Christianity?, p. 159.

4) Ibid., pp. 21-22.

5) William E. Hordern, A Layman's Guide to Protestant Theology, rev. and expanded ed., p. 74.

6) J. G. Machen, Christianity and Liberalism, p. 6.

7) Karl Barth, Christ and Adam, pp. 54-55.

8) Karl Barth, The Word of God and the Word of Man, p. 65.

9) Karl Barth, Church Dogmatics, I. ii, 528-529.

10) C. H. Dodd, The Authority of the Bible, p. 14.

11) Ibid., p. 289.

12) Ibid., p. 13.

13) Christian News, 2 November 1987, p. 24; 2 January 1989, pp. 1, 21-22; Christian News, 9 October 1989, pp. 1, 10; Calvary Contender, 1 May 1991; Christian News, 17 Janury 1994, pp. 1, 20-22.

14) Wanderer, 30 December 1999; Christian News, 3 January 2000, p. 12.

15) 크리스챤 신문, 2001. 1. 15, 7쪽.

16) David O. Beale, S.B.C.: House on the Sand? (1985), pp. 44-46.

17) Calvary Contender, July 2002.

18) Christian News, 13 July 1998; Huntsville Times, 29 January 2000.

19) Christianity Today, 15 June 1998; Calvary Contender, 15 May 1999.

20) Huntsville Times, 29 January 2000; Calvary Contender, 15 Febru- ary 2000.

21) Christian News, 15 April 2002.

22) 친필 원고에서 인용함.

23) 조향록,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미,” 주간조선, 1976. 4. 26.

24) 허 혁, “부활 사실과 부활 신앙,” 기독교 사상, 1973. 4월호.

25) 미국 연합장로교회 헌법: 제1부 신앙고백집,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교육부 발행 (1968), 251-265쪽; 킥, 띠 깐지, 헨리 공저, 1967년 신앙고백서 비판, 임택권 역 (1967) 참조.

26) Carl McIntire, The Death of a Church (1967), p. 129.

27) Time, 16 February 1981; Christian News, 27 July 1983, p. 5; James R. Mook, "The Validity of the Kaseman Case Verdicts in the Confessional/ Subscriptional Context of the United Presbyterian Church in the U.S.A." (Th.D. diss., Dallas Theological Seminary, 1985).

28) Christian News, 24 February 2003, pp. 1, 4.

29) Daily Telegraph, 25 June 1984; The Revivalist, July-August 1984, p. 13에서 재인용.

30) 김양선, 한국기독교해방십년사(1945-1955)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종교교육부, 1956), 186-187쪽; 간하배, 한국장로교신학사상 (실로암, 1988), 45-46쪽에서 재인용.

31) Christian News, 8 December 1997, pp. 1, 12; 기독신문, 1997. 12. 3, 16쪽.

32) 기독교 연합신문, 1992. 5. 17, 6쪽.

33) 채기은, 한국교회사 (1977), 231쪽.

34) 이동렬, “한국교회와 신정통주의” (미간행 신학석사학위논문, 장로회신학대학원, 1984), 63쪽.

35) 김명용, 열린 신학 바른 교회론 (장로회 신학대학교 출판부, 1997), 200-201, 208-209쪽.

36) Trans-Action [of Washington University], July-August 1967; Christian News, 3 March 1969; 27 June 1983, p. 5; Pulpit Helps, De- cember 1987; Christian News, 23 November 1987, p. 2.

37) World, 7 February 2004; Calvary Contender, March 2004.

38) Reinhold Niebuhr, Beyond Tragedy, pp. 13-14.

39) Paul Tillich, Systematic Theology, II, 94.

40) Karl Barth, Church Dogmatics, IV. i, 5, footnote.

41) Reinhold Niebuhr, Beyond Tragedy, p. 17.

42) Reinhold Niebuhr, The Self and the Dramas of History, p. 66.

43) Rudolf Bultmann, The Gospel of John, pp. 118-119.

44) Paul Tillich, Systematic Theology, II, 107.

45) Joachim Jeremias, New Testament Theology, p. 88 footnote.

46) C. H. Dodd, The Romans, p. 55.

47) Reinhold Niebuhr, Beyond Tragedy, pp. 17-18.

48) Rudolf Bultmann, Jesus Christ and Mythology, pp. 16-17.

49) Karl Barth, The Word of God and the Word of Man, p. 90.

50) Karl Barth, The Epistle to the Romans, p. 30.

51) Karl Barth,Church Dogmatics, IV. i, 335-336.

52) Rudolf Bultmann,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I, 45.

53) Hans Werner Bartsch, ed., Kerygma and Myth: A Theological Debate by Rudolf Bultmann and Ernst Lohmeyer, Julius Schniewind, Helmut Thielicke, and Austin Farrer, p. 42.

54) Paul Tillich, Systematic Theology, II, 153, 155.

55) Wolfhart Pannenberg, Jesus--God and Man, p. 89.

56) Reinhold Niebuhr, Beyond Tragedy, p. 290.

57) Paul Tillich, Systematic Theology, II, 66.

58) Oscar Cullmann, Immortality of the Soul or Resurrection of the Dead?, p. 15.

59) Karl Barth, The Word of God and the Word of Man, p. 90.

60) Reinhold Niebuhr, Beyond Tragedy, p. 21.

61) Paul Tillich, Systematic Theology, II, 163.

62) Reinhold Niebuhr, Beyond Tragedy, p. 290.

63) Wolfhart Pannenberg, The Apostles's Creed, p. 104.

64) Reinhold Niebuhr, The Nature and Destiny of Man, II, p. 294.

65) Paul Tillich, Systematic Theology, II, 78.

66) Ibid., III, 418.

67) 기독교연합신문, 1993. 5. 30, 3쪽; 크리스챤 신문, 1993. 5. 29, 3쪽.

68) One World, January-February 1986, p. 5.

69) 교회연합신문, 2000. 2. 13, 8쪽.

70) Covenanting toward Unity, pp. 9-20.

71) 기독교보, 1993. 12. 11, 7쪽.

72) Ecumenical Trends, 15 (1986), 181.

73) The Bible: Its Authority and Interpretation in the Ecumenical Movement, ed., Ellen Flesseman-van Leer (Geneva: WCC, 1980).

74) Ibid., pp. 38-39.

75) Ibid., p. 31.

76) Ibid., pp. 31-32.

77) Ibid., p. 48.

78) Towards Visible Unity (Geneva: WCC, 1982), pp. 34, 40.

79) Apostolic Faith Today (Geneva: WCC, 1985), pp. 250-51.

80) Ibid., p. 252.

81) Ibid.

82) The Roots of Our Common Faith (Geneva: WCC, 1984), pp. 42, 20.

83) 기독신문, 2002. 10. 2, 1쪽.

84) M. H. Reynolds, The World Council of Chruches: The Cup of the Lord or the Cup of Devils?, pp. 16-20.

85) Calvary Contender, 15 October 1999.

86) Calvary Contender, 15 June 2000.

87) B. B. Warfield, Selected Shorter Writings, p. 302.

88) Martin Lloyd-Jones, The Basis of Christian Unity, p. 50.

89) Calvin, Institutes, 4. 1. 12; The Works of John Owen, XV, 106.

90) 메이천의 평가대로, 자유주의는 기독교의 특질을 부정하는 자연주의적, 비(非)속죄적 종교이며, 단순히 하나의 이단이 아니라 전혀 기독교가 아니다. J. Gresham Machen, Christianity and Liberalism..

91) Institutes of Christian Religion, 4. 2. 1.

92) D. Martyn Lloyd-Jones, The Basis of Christian Unity, p. 61.

93) 국민일보(인터넷) 미션라이프, 2013. 1. 24; http://missionlife.kukinews.com/article/view.asp?gCode= 0000&sCode=0000&arcid=0006836102&code=23111115.

94) The Ecumenical Review, 37 (1985), 336.

95) One World, January-February 1986, p. 6.

96) 교황 요한 23세는 1962년 제2차 바티칸회의를 시작했고, 바오로 6세는 1965년 그 공의회를 마쳤다. 또 그는 1967년 기독교일치촉진사무국을 교황청 상설기관으로 만들었다. John J. McDonnell, The World Council of Churches and the Catholic Church, pp. 129-221.

97) Apostolic Faith Today, p. 9.

98) Calvary Contender, 15 September 1993.

99) Calvary Contender, 15 September 1997.

100) Calvary Contender, 1 August 1997.

101) 기독교신문, 1998. 1. 11, 1쪽.

102) Calvary Contender, 1 February 1999.

103) 기독신문, 1999. 5. 19, 16쪽; Calvary Contender, 1 August 1999.

104) The Ecumenical Review, 37 (1985), 336.

105) Christian News, 21 June 1999; Calvary Contender, 15 July 1999.

106) 조선일보, 1999. 11. 2, 8쪽.

107) 조선일보, 2000. 1. 22, 23쪽.

108) 크리스챤신문, 2000. 5. 22, 2쪽.

109) Ignatius Catanello, "The Effects of the Charismatic Movement on Local Ecumenism" (Ph.D. dissertation, New York University, 1983), p. 1.

110) Documents of Vatican II, ed. Austin P. Flannery, pp. 370, 380.

111) Ibid., VIII. 59.

112) 카톨릭 교리서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1967), 114쪽.

113) Alphonse de Ligouri, The Glories of Mary, pp. 127, 254.

114) Ibid., VIII. 59.

115) Ibid., VIII. 62.

116) Systematic Theology, III, p. 281.

117) Canons of Trent, Session VI, Canon X.

118) Ibid., Session VI, Canon XI.

119) Indulgentiarum Doctrina, I. 2.

120) Canons of Trent, Session XXII, Canon I.

121) Eucharisticum Mysterium, Introduction C, Section 1, 2.

122) Commentary 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pp. 235-37.

123) Martin Luther, Church and Ministry, III, p. 363.

124) John Calvin, Institutes of Christian Religion, IV. ii. 4, 9, 12.

125) Commentary on the Galatians, p. 32.

126) Paul Tillich, Systematic Theology, Ibid., I, pp. 134-135.

127) Gathered for Life, p. 40.

128) Province [of Vancouver], 27 July 1983; Christian News, 5 September 1983, p. 7.

129) M. H. Reynolds, The World Council of Churches: The Cup of the Lord or the Cup of Devils? (1986), p. 8.

130) Marlin VanElderen, "Consultation Speaks on Plurality," Christian News, 5 February 1990, p. 1.

131) VanElderen, p. 15.

132) 기독교 연합신문, 1991. 3. 17, 7쪽; 1991. 3. 24, 7쪽; 1991. 3. 31, 7쪽.

133) 기독교사상, 제27권 제5호 (1983. 5), 155쪽.

134) 위의 책, 156쪽.

135) 위의 책.

136) 현대사조, 2권; 기독교연합신문, 1992. 1. 5, 20쪽과 국민일보, 1992. 6. 27, 2-3쪽에서 재인용함.

137) 조선일보, 2000. 10. 21, 21쪽.

138) 크리스챤 신문, 2003. 2. 24, 1쪽.

139) 어떤 이는 신복음주의를 성경 무오를 부정하거나 유신론적 진화론을 받아들이는 것 정도로 생각하지만, 신복음주의는 그런 개념이 아니다.

140) 그는 1930년 보수적인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졸업했지만, 1936년 교회의 분리시 작은 무리를 따르기를 거부했다. 그는 1942년 미국복음주의자협회(NAE)를 조직하여 초대 회장이 되었고, 1947년 풀러신학교의 초대 교장이 되었다. 그는 33년간 보스톤의 파크스트릿 교회의 담임목사이었고 25년간 신복음주의의 대변지인 크리스챠니티 투데이지 이사장이었다. 그는 빌리 그레이엄의 절친한 친구이며 신학적 조언자이었다.

141) William Ashbrook, Evangelicalism: The New Neutralism, p. 5.

142) Ibid., p. 4.

143) Foreword to Harold Lindsell's The Battle for the Bible.

144) George M. Marsden, "fundamentalism," in New Dictionary of Theology, p. 268.

145) Willia Ashbrook, Evangelicalism: The New Neutralism.

146) Gary G. Cohen, Biblical Separation Defended, p. viii.

147) 기독교 현대신학 난제 선평 (1975년), 445-471쪽.

148) William Ashbrook, Evangelicalism: The New Neutralism., p. 9.

149) Charles Woodbridge, The New Evangelicalism (1969), pp. 34-39.

150) Calvary Contender, 15 September 1999.

151) Christianity Today, 11 August 1997; Calvary Contender, 15 Sep- tember 1997.

152) Calvary Contender, 15 May 1999.

153) Calvary Contender, 1 March 1998.

154) Calvary Contender, 15 October 1984.

155) Calvary Contender, 15 September 1999.

156) Christian News, 29 June 1998.

157) Calvary Contender, 1 August 1998.

158) Calvary Contender, 15 December 1993; 2001년 WEF는 그 명칭을 세계복음주의연맹(World Evangelical Alliance)으로 바꾸었다.

159) Christian News, 14 September 1998.

160) “5개 교단 연합성찬예배,” 크리스챤신문, 1986. 9. 14, 1쪽.

161) “위성중계 전도대회 실시,” 기독신보, 1990. 11. 3, 10쪽.

162) “교단 부담금 비중 늘릴 계획,” 기독교 연합신문, 1991. 1. 13, 15쪽.

163) 크리스챤신문, 1993. 5. 1, 3쪽.

164) 기독교 연합신문, 1993. 5. 30, 3쪽.

165) 교회연합신문, 1994. 2. 19, 10쪽.

166) 기독교보, 1994. 3. 12, 7쪽.

167) 한국기독공보, 1994. 4. 2, 4쪽

168) 크리스챤신문, 1995. 8. 5, 2쪽.

169) 기독교보, 1996. 7 13, 5쪽.

170) 기독신보, 1996. 9. 14, 19쪽.

171) “장로교 ‘일치(一致)운동’ 활발,” 조선일보, 1997. 4. 5, 15쪽.

172) 기독교보, 1997. 6. 21, 3쪽.

173) 기독교보, 1997. 7. 5, 3쪽

174) 기독교보, 1997. 7. 12, 1쪽.

175) 기독교신문, 1998. 2. 22, 15쪽

176) 기독신문, 1998. 6. 24, 23쪽.

177) 크리스챤신문, 1998. 11. 9, 14쪽.

178) 기독교연합신문, 1999. 1. 10, 15쪽.

179) 기독신문, 1999. 3. 3, 1쪽.

180) 기독신문, 1999. 6. 30, 19쪽.

181) 기독교연합신문, 2000. 3. 19, 1쪽.

182) Calvary Contender, 15 March 1993; Charisma, May 1999; Calvary Contender, 15 May 1999.

183) Christianity Today, 5 April 1999.

184) Christianity Today, 19 July 1993; Calvary Contender, 1 August  1993.

185) Calvary Contender, 1 December 1993.

186) Calvary Contender, 1 May 1997.

187) Calvary Contender, 15 June 1997.

188) Calvary Contender, 1 September 1998.

189) Calvary Contender, 15 September 1999.

190) The Post and Times Star (Cincinnati, Ohio), 30 August 1969; David W. Cloud, "Bill Bright Joins Hands with False Gospels," Christian News, 3 January 2000, p. 18.

191) James Hefley, "A Prejudiced Protestant Takes a New Look at the Catholic Church," 1971, p. 122; Cloud, Ibid.

192) Cloud, Ibid.

193) Christianity Today, 14 July 1997; Calvary Contender, 15 June 1997; 1 August 1997.

194) Calvary Contender, 1 December 1992.

195) Calvary Contender, 1 February 1998.

196) C.E.C. Journal, February 1998.

197) Calvary Contender, 1 March 1998.

198) Calvary Contender, 15 March 1998.

199) Calvary Contender, 15 May 1994.

200) F. D. Bruner, A Theology of the Holy Spirit, pp. 35-47.

200-1) F. D. Bruner, A Theology of the Holy Spirit, pp. 47-55.

201) 기독교이단사이비연구대책협의회, “신사도운동 이단 규정,” 교회와 이단, 2010년 5월호, 41-61쪽; 이인규, “신사도운동의 유래와 기원,” http://ikccah.org/NAR/2502; 김재성. “I.H.O.P.[국제기도의집]과 신사도의 자칭 선지자들의 문제점들.” 종교와 진리, 2012년 7월호, 8월호, 9월호, 10월호, 11월호, 12월호; 2013년 1월호, 2월호, 3월호, 4월호.

202) 이인규, “신사도운동의 유래와 기원”; 김 삼, “드러나는 신사도운동의 치부--피터 와그너와 벤틀리,” 교회와 이단, 2011년 7월호, 92쪽.

203) 밥 존스 대학교의 설립자인 밥 존스 목사와는 다른 인물임.

204) 1990년대에 미국 LA에서 빈야드 세미나의 한국인 목사와 평신도 수료자는 2천명 이상으로 추산됨. 정이철, “한국교회 신사도운동의 현황,” http://christiantoday.us/sub_read.html?uid=18280; http://christ- ian-today.us/sub_read.html?uid=18283; 크리스찬투데이, 2011. 1. 15.

205) 이영훈 목사는 펜사콜라 기적의 현장 브라운스빌 교회 (국민일보 발행)라는 책을 썼고 추천사에서 조용기 목사는 펜사콜라 부흥이 자신의 예언이었다고 말했다. 오명옥, “펜사콜라 대부흥(?), 오순절 교단의 사기극!,” 교회와 이단, 2008년 10월호, 39쪽.

206) 이인규, “신사도운동의 유래와 기원.”

207) 그 12명 중에, 체 안, 죠지 바나, 라이스 브룩스, 데이빗 캐니스트라치, 잭 디어, 존 엑카트, 테드 헤거드, 신디 제이콥스, 로렌스 콩, 척 피어스 등이 포함된다. 오명옥, “아가페 신학연구원 신사도운동 요충지!,” 교회와 이단, 2010년 2월호, 29-30쪽.

208) John MacArthur, Reckless Faith, pp. 178-179

209) 크리스챤 뉴스위크, 1999. 10. 16, 2쪽

210) Calvary Contender, 1 August 1999.

211) 루 잉글은 체 안과 함께 HIM을 시작했고 부흥을 위한 강력한 기도와 금식 운동,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예언적 중보기도 등을 강조했다.

212) 그 지도자들은 공개적으로 IHOP을 지지하고 협력한다는 것을 선언했고 땅 밟기 기도에 동참했다. 정이철, “한국교회 신사도운동의 현황.”

213) 이 단체는 자칭 사도 미쉘 코렐(천주교 평신도)과 그의 임파테이션 행위를 떠받든다. 교수 및 강사진에는 빌 해몬, 손종태, 이윤호, 예영수 등이 들어 있다. 오명옥, “아가페 신학연구원 . . . ,” 28-45쪽.

214) 홍정식은 2007년 1월 올림픽체조경기장에서 열린 ‘2007 트랜스포메이션 대회’에서 여러 장로교 목사들과 함께 강단에서 무릎을 꿇고 조용기 목사에게 그를 비난하고 은사주의를 정죄했던 잘못의 용서를 구했다. 그 대회에 강사는 피터 와그너, 로렌 커닝햄, 체 안, 벤 토레이, 조용기, 박종순, 김상복, 홍정길, 정필도, 이동원, 오정현 등이며 준비위원장은 홍정식이었다. 오명옥, “아가페 신학연구원 . . . ,” 44-45쪽.

215) 교수, 초빙강사는 장광영, 베니 힌, 오랄 로버츠 등을 포함한다. 오명옥, “아가페 신학연구원 . . . ,” 33쪽.

216) 죄인들을 대신해 회개기도를 하면 사탄의 권세가 무너진다고 하며, 또 어떤 곳에 관광객으로 위장해 들어가 그 땅을 밟으면서 ‘땅 밟는 기도’를 하면 사탄과 귀신들의 권세가 무너진다고 한다. 정이철. “에스더기도운동(대표: 이용희)의 신사도운동,” 종교와 진리, 2012년 9월호, 55-62쪽.

217) 오명옥, “원띵하우스(진행교회) 손종태 목사, 기독영성을 농락하다!,” 종교와 진리, 2012년 6월호, 30-45쪽.

218) 한국교회와 이민교회에 신사도운동을 유입시키는 가장 영향력이 큰 선교단체라고 한다. 백투 예루살렘 운동을 외치고 땅 밟기 등을 시행하고 있다. 최바울[최한우]은 1996년 온누리교회 장로로 임직했고 김기동의 베뢰아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 사도직의 현재성 주장하고 모든 것의 이면에는 감기귀신, 이혼귀신, 당뇨귀신, 사고귀신 등이 있다고 하고 귀신 추방을 강조한다. 김의원, 전호진, 김상복, 강승삼, 하용조, 이동원, 최성규 목사 등이 최바울 선교사 저서들을 추천하였다. 정이철, “한국교회 신사도운동의 현황”; 오명옥, “인터콥 최바울의 이단사상,” 종교와 진리, 2012년 7월호, 86-92쪽; 8월호, 89-95쪽; 기독교이단사이비연구대책협의회, “인터콥 최바울(본명: 최한우) 이단규정!,” 종교와 진리, 2013년 2월호, 22-45쪽.

219) 1992년 12월 5일, 조용기(다윗) 목사 세계오순절하나님의성회연합회 초대총재 피선축하예배는 주최자가 민족복음화운동본부, 세계복음화중앙협의회, 세계성신클럽, 한국기독교부흥협의회 등이며, 후원자는 여의도순복음교회,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국민일보사, 극동방송국, 기독교방송, 기독교연합신문, 크리스챤신문 등이며 초청인은 김장환, 김준곤, 나겸일, 이성택, 피종진 목사 등을 포함했다. 1996년 3월 14일, 조용기 목사 설교전집 출판기념회의 순서자 중에는 최 훈, 김의환 등이 있었고, 참석자 중에는 김창인, 정진경, 신신묵, 김장환, 김상복 목사 등이 있었다. 오명옥, “펜사콜라 대부흥(?), 오순절 교단의 사기극!,” 교회와 이단, 2008년 10월호, 30-31쪽.

220) 존 윔버의 찬양 사역은 온누리교회의 목요 경배와 찬양 사역으로 우리나라에 처음 도입되었고 사도신경, 교독문, 주기도문을 생략하고 예배인도자가 가벼운 복장을 하는 새로운 예배 형식도 도입되었다. 열린예배의 시조인 셈이다. 정이철, “한국교회 신사도운동의 현황.”

221) 오명옥, “아가페 신학연구원 . . . ,” 32-33쪽.

222) 이인규, “신사도운동의 유래와 기원”; 정이철, “한국교회 신사도운동의 현황”; 오명옥, “하베스트샬롬교회 신사도개혁? 사람 죽어나가는데도?” 교회와 이단, 2010년 4월호, 30-61쪽.

223) Calvary Contender, 1, 15 September 1999.

224) Christianity Today, 14 July 1997; Calvary Contender, 1 August  1997.

225) Calvary Contender, 1 August 1998.

226) 정이철, “한국교회 신사도운동의 현황.”

227) Calvary Contender, 15 December 1992.

228) Charisma, May 1999.

229) Kenneth Foreman, "Pentecostals, the Largest Protestant Family," World Pentecost, December 1987; Christian News, 28 December 1987, p. 16.

230) Australian Beacon, May 1999; Evangelical Times, May 1999; Calvary Contender, 1 November 1999에서 재인용.

231) 오명옥, “늦은 비 운동 재부활, 이단 신사도운동의 만행!,” 교회와 이단, 2011년 7월호, 48-49쪽.

232) 오명옥, “늦은 비 운동 재부활, 이단 신사도운동의 만행!,” 교회와 이단, 2011년 7월호, 29-36쪽.

233) 데이빗 할워다, “성령과 목회사역,” 기독신보, 1988 8. 6, 5쪽.

234) 안영복, 성령론의 바른 이해, 3, 137, 131쪽.

235) Calvary Contender, 1 August 1992.

236) 나용화, “교회를 슬프게 하는 신학 논리: 계시종결론과 은사중지론,” http://chtimes.co.kr/lib/37896.

237) 김재성, “I.H.O.P.[국제기도의집]과 신사도의 자칭 선지자들의 문제점들,” 종교와 진리, 2012년 8월호, 86쪽; 2013년 1월호, 81쪽; 3월호, 95-96쪽.

238) 오명옥, “늦은 비 운동 . . . ,” 교회와 이단, 2011년 7월호, 35쪽.

239) 오명옥, “늦은 비 운동 . . . ,” 교회와 이단, 2011년 7월호, 43-45쪽.

240) 오명옥, “늦은 비 운동 . . . ,” 교회와 이단, 2011년 7월호, 46-47쪽.

241) 사랑하는교회(舊큰믿음교회) 이단시비 종결되다! (거룩한진주, 2017), 46, 52쪽.

242) 오명옥, “큰믿음교회 변승우 목사 빈야드 이단 집회,” 교회와 이단, 2007년 9월호, 47쪽.

243) 오명옥, “큰믿음교회 변승우 목사 . . . ,” 43쪽.

244) 오명옥, “큰믿음교회 변승우 목사 . . . ,” 57쪽.

245) 오명옥, “큰믿음교회 변승우 목사 . . . ,” 43-44쪽.

246) 오명옥, “큰믿음교회 변승우 목사 . . . ,” 58쪽.

247) 원띵(one thing)은 시편 27:4,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가지 일(one thing) 그것을 구하리니”라는 말씀을 말하며, 진행(眞行, real acts) 교회란 진정한 사도행전적 교회를 뜻한다. 손종태는 다윗의 장막인 기도의 집, 신랑의 친구의 영성, 중보 기도, 도시 전체의 변혁(Transformation)을 추구한다. 한국기독교영성총연합회의 빈야드주의자 예영수가 창간한 카리스월드를 이어받아 뉴와인으로 개명하고 발행인이 되었다. 오명옥, “원띵하우스(진행교회) 손종태 목사, 기독영성을 농락하다!,” 종교와 진리, 2012년 6월호, 32-34쪽.

248) 오명옥, “원띵하우스(진행교회) . . . ,” 36쪽.

249) 오명옥, “원띵하우스(진행교회) . . . ,” 41쪽.

250) 기독교이단사이비연구대책협의회, “새에덴교회 소강석과 정금성 권사 이단 사이비 규정!” 교회와 이단, 2009년 10월호, 28-43쪽.

251) 오명옥, “빈야드가 알파코스라는 옷을 입고,” 교회와 이단, 2007년 1월호, 44-66쪽.

252) Christian News, 22 November 1999.

253) 사랑하는교회(舊큰믿음교회) 이단시비 종결되다! (거룩한진주, 2017), 52쪽.

254) 오명옥, “큰믿음교회 변승우 목사 빈야드 이단 집회,” 교회와 이단, 2007년 9월호, 55, 60쪽.

255) 오명옥, “원띵하우스(진행교회) 손종태 목사, 기독영성을 농락하다!,” 종교와 진리, 2012년 6월호, 32-34쪽.

256) 오명옥, “원띵하우스(진행교회) . . . ,” 38쪽.

257) 오명옥, “원띵하우스(진행교회) . . . ,” 41쪽.

258) 오명옥, “원띵하우스(진행교회) . . . ,” 42쪽.

259) Charisma, November 1999.

260) Calvary Contender, 15 June 1999.

261) 오명옥, “원띵하우스(진행교회) . . . ,” 44쪽.

262) (1) 목사에게 맹종케 함, (2) 은사주의, (3) 예배를 CCM으로 타락시킴, (4) 성경 대신 훈련교재와 프로그램을 중시함, (5) 교회의 성경적 구조를 혼란시킴 등이 지적됨. 안수기도를 하고 은사 전이를 주장하고 방언, 진동, 입신 등을 행하고 병 고침 실습을 함. “김성곤 목사의 두 날개는 중단되어야 합니다: 한국, 미국, 호주, 캐나다 목회자들과 신자들, 해외선교사들의 공동호소문,” 기독교개혁신보, 2015. 9. 26, 5쪽; 정승환, “두 날개 양육시스템에 대한 연구보고” (계약신학대학원 Th.M. ‘교회론’ 강의 보고서, 2013).

263) 기독교이단사이비연구대책협의회, “새에덴교회 소강석과 정금성 권사 이단 사이비 규정!” 교회와 이단, 2009년 10월호, 30-38쪽.

264) Calvary Contender, 15 November 1999.

265) 오명옥, “아가페 신학연구원 . . . ,” 32쪽.

266) 오명옥, “늦은 비 운동 . . . ,” 교회와 이단, 2011년 8월호, 52쪽.

267) 오명옥, “늦은 비 운동 . . . ,” 교회와 이단, 2011년 7월호, 32쪽.

268) 정이철, “한국교회 신사도운동의 현황.”

269) 오명옥, “펜사콜라 . . . ,” 교회와 이단, 2008년 10월호, 39쪽.

270) Calvary Contender, 15 October 1998.

271) CRN Newsletter; Calvary Contender, 1 April 1999에서 재인용.

272) 오명옥, “큰믿음교회 변승우 . . . ,” 55쪽.

273) Herman Bavinck, Our Reasonable Faith, p. 386.

274) J. A. Alexander, Acts, p. 332.

275) A. Kuyper, The Work of the Holy Spirit, pp. 115, 126, 127.

276) H. C. G. Moule, Person and Work of the Holy Spirit, pp. 222, 223.

277) 레만 스트라우스, 성령론, 132-134쪽.

278) B. B. Warfield, Counterfeit Miracles, p. 6.

279) David O. Beale, "Lecture on the History of Doctrines," Bob Jones University, 1986.

280) Warfield, pp. 6-10.

281) 박형룡, 교의신학. 제2권: 신론, 491쪽에서 재인용.

282) 김재성, “I.H.O.P. . . . ,” 종교와 진리, 2012년 7월호, 81-82쪽.

283) 김재성, “I.H.O.P. . . . ,” 종교와 진리, 2012년 11월호, 68-71쪽.

284) Calvary Contender, 15 April 2001.

285) 김재성, “I.H.O.P. . . . ,” 종교와 진리, 2013년 4월호, 91-92쪽.

286) 오명옥, “늦은 비 운동 . . . ,” 교회와 이단, 2011년 7월호, 36쪽.

287) 오명옥, “큰믿음교회 . . . ,” 교회와 이단, 2007년 9월호, 58쪽.

288) 김재성, “I.H.O.P. . . . ,” 종교와 진리, 2013년 3월호, 90-93쪽.

289) Donald W. Burdick, Tongues: To Speak or Not to Speak, p. 65.

290) Richard C. Schwab, Let the Bible Speak about Tongues, p. 108.

291) Robert G. Gromacki, The Modern Tongues Movement, pp. 5-29; Schwab, pp. 4-7.

292) Schab, pp. 104-108; Burdick; Gromacki, pp. 44-49.

293) John MacArthur, The Charismatics, p. 151.

294) Calvary Contender, 15 May 1992.

295) 김 삼, “드러나는 신사도운동의 치부--피터 와그너와 벤틀리,” 교회와 이단, 2011년 7월호, 91-92쪽.

296) 김 삼, “드러나는 신사도운동 . . . ,” 교회와 이단, 2011년 8월호, 79-81쪽.

297) 기독교이단사이비연구대책협의회, “신사도운동 이단 규정,” 교회와 이단, 2010년 5월호, 60쪽.

298) 쿠르트 코흐, 사단의 전술전략, 22-101쪽.

299) 김재성, “I.H.O.P. . . . ,” 종교와 진리, 2012년 7월호, 85쪽; 10월호, 94-95쪽.

300) 김 삼, “드러나는 신사도운동 . . . ,” 교회와 이단, 2011년 7월호, 92쪽.

301) 김재성, “I.H.O.P. . . . ,” 종교와 진리, 2013년 1월호, 83-84쪽.

302) 김재성, “I.H.O.P. . . . ,” 종교와 진리, 2012년 7월호, 82쪽.

303) 김재성, “I.H.O.P. . . . ,” 종교와 진리, 2012년 11월호, 70쪽.

304) 오명옥, “큰믿음교회 . . . ,” 57쪽.

305) 정이철, “한국교회 신사도운동의 현황.”

306) 오명옥, “큰믿음교회 . . . ,” 41쪽.

307) 김재성, “I.H.O.P.[국제기도의집]과 신사도의 자칭 선지자들의 문제점들,” 종교와 진리, 2012년 8월호, 87쪽.

308) 오명옥, “큰믿음교회 . . . ,” 58쪽.

309) 오명옥, “늦은 비 운동 . . . ,” 교회와 이단, 2011년 7월호, 45쪽.

310) 오명옥, “큰믿음교회 . . . ,” 48-51쪽.

311) 오명옥, “늦은 비 운동 . . . ,” 교회와 이단, 2011년 7월호, 41-42쪽.

312) 오명옥, “늦은 비 운동 . . . ,” 교회와 이단, 2011년 7월호, 40-41쪽.

313) 오명옥, “늦은 비 운동 . . . ,” 교회와 이단, 2011년 7월호, 53쪽.

314) 정이철, “에스더기도운동(대표: 이용희)의 신사도운동,” 종교와 진리, 2012년 8월호, 57-58쪽.

315) 오명옥, “빈야드가 알파코스라는 옷을 입고,” 교회와 이단, 2007년 1월호, 44-66쪽.

316) 오명옥, “늦은 비 운동 . . . ,” 교회와 이단, 2011년 8월호, 54쪽.

317) 기독신보, 1990. 10. 13, 4쪽.

318) 기독신문, 1998. 2. 25, 15쪽.

319) 김 삼, “드러나는 신사도운동의 . . . ,” 교회와 이단, 2011년 7월호, 90쪽.

320) 기독교이단사이비연구대책협의회, “새에덴교회 소강석과 정금성 권사 이단 사이비 규정!” 교회와 이단, 2009년 10월호, 40, 42쪽.

321) 김재성, “I.H.O.P. . . . ,” 종교와 진리, 2012년 12월, 72쪽.

322) 정이철, “에스더기도운동(대표: 이용희)의 신사도운동,” 종교와 진리, 2012년 9월호, 64쪽; 김재성, “I.H.O.P. . . . ,” 종교와 진리, 2012년 10월호, 95-96쪽.

323) 김재성, “I.H.O.P. . . . ,” 종교와 진리, 2013년 4월호, 92쪽.

324) Pensacola News Journal; BJU's What in the World.

325) Calvary Contender, 1 December 1998.

326) 크리스챤 저널, 1993년 5월호, 96쪽.

327) Christian News, 20 May 1996, p. 3; Gist, Spring 1996.

328) Vantage Point, November 1998.

329) Calvary Contender, 1 January 1999.

330) The Discerner, June 1999.

331) Christian News, 19 July 1999; Calvary Contender, 15 August 1999.

332) Foundation, July-September 1987, pp. 16, 27.

333) Calvary Contender, 1 July 1998.

334) 김재성, “I.H.O.P. . . . ,” 종교와 진리, 2012년 11월, 70쪽.

335) 이인규, “신사도운동의 유래와 기원.”

336) 김재성, “I.H.O.P. . . . ,” 종교와 진리, 2012년 11월, 72-74쪽.

337) “1967년 신앙고백,” 미국 연합장로교회 헌법 제1부: 신앙고백집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교육부 발행, 1968년), 251-265쪽; 킥, 띠 깐지, 헨리 공저, 1967년 신앙고백서 비판, 임택권 역 (1967년).

338) Your Kingdom Come: Mission Perspectives. Report on the World Conference on Mission and Evangelism, Melbourne, Australia, 12-25 May 1980, p. 186.

339) Your Kingdom Come, p. 17.

340) International Bulletin of Missionary Research, 5 (1981), 109.

341) Mission and Evangelism: An Ecumenical Affirmation, p. 28.

342) Harvey T. Hoekstra, WCC and the Demise of Evangelism, pp. 66-67.

343) Covenanting toward Unity, p. 14.

344) Ecumenical Trends, 14 (1985), 10-13.

344-1) 기독신보, 1991. 8. 17, 3쪽.

345) 기독교보, 1996. 10. 12, 5쪽.

346) John R. W. Stott, Christian Mission in the Modern World (London: Falcon Books, 1975), p. 23.

347) International Bulletin of Missionary Research, 6 (1982), 152.

348) Gathered for Life, p. 324.

349) Missiology, 9 (1981), 26.

350) Ibid., pp. 33-34.

351) Apostolic Faith Today, p. 120.

352) Your Kingdom Come, p. 34.

353) Ibid., p. 116.

354) Christian News, 23 November 1992, p. 2.

355) Moody Monthly, April 1992.

356) Christian News, 16 March 1992.

357) Calvary Contender, 1 July 1988.

358) US News &World Report, 2 March 1992; Calvary Contender, 15 April 2000.

359) Gerhard Besier, Armin Boyens, Gerhard Lindemann, National Protestantism and the Ecumenical Movement: Church Activities During the Cold War. 그들은 1074쪽짜리의 이 책을 1992년에 공개된 러시아 KGB 자료들에 근거하여 썼다. Christian News, 20 March 2000; Calvary Contender, 15 April 2000; 1 May 2000.

360) J. Gresham Machen, 'What Is Christianity' and Other Addresses, pp. 148-155.

361) Robert Hall Glover, The Bible Basis of Missions (1946), pp. 34, 40.

362) Harold Lindsell, "The Biblical Basis of Missions and Evangelism," Baker's Dictionary of Practical Theology (1967), p. 148; Alan R. Tippett, "Mission(s)," Baker's Dictionary of Christian Ethics (1973), p.426.

363) Christianity Today, 19 June 1970, pp. 5-6.

364) Peter Beyerhaus, Mission: Which Way?--Humanization or Re- demption (1971), p. 17.

365) 김효성, 기독교 윤리 (서울: 옛신앙, 2007), 107-111쪽에서 가져옴.

366) ‘새생명 사랑회’가 주최한 “인간생명의 존엄성과 낙태문제”라는 주제의 세미나에서 발표한 장병숙 간사의 “낙태실태에 대한 보고”에 의한 것임. 기독신보, 1990. 6. 16, 7쪽; 한국 인구보건연구원의 조사에 의한 통계도 동일함. 크리스챤 신문, 1990. 11. 3, 5쪽.

367) 교회연합신문, 1995. 11. 19, 9쪽; 1998년의 한국 보건사회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15-44세 기혼 여성의 44퍼센트가 한번 이상 낙태 경험을 한 것으로 조사되었다고 함. 조선일보, 2001. 11. 17, 21쪽.

368) Haven B. Gow, "Is Abortion in America Like the Holocaust?" Christian News, 24 June 1985, p. 8; 교회연합신문, 2002. 5. 26, 11쪽.

369) Religious News Service, 18 June 1986.

370) Calvary Contender, 1 January 1999.

371) 원문에서 본절에 네 번 나오는 ~카라는 말은 남성 2인칭대명사 어미이다.

372) Calvin, Matthew Poole, Keil-Delitzsch도 그렇게 생각한다.

373) 1981년 미국 의회 청문회에서 Dr. Micheline M. Matthews-Roth, Dr. Jerome Le Jeune, Dr. Hymie Gordon 등의 의학자들은 이 같은 사실을 증언하였다. 가이슬러, 기독교 윤리학, 190쪽.

374) 가이슬러, 189쪽.

375) 가이슬러, 190-191쪽.

376) 김효성, 기독교 윤리, 146-151쪽에서 가져옴.

377) 김효성, 현대교회문제 자료집, 100-122쪽.

378) Christian News, 27 October 1997, p. 5.

379) Christian News, 13 April 1992.

380) Christian News, 29 April 1985, p. 3.

381) Christian News, 27 October 1997, p. 5.

382) Christian News, 27 October 1997, p. 5.

383) Christian News, 24 November 1997, p. 11.

384) 크리스챤신문, 1998. 1. 26, 2쪽.

385) Christianity Today, 1 March 1999.

386) Calvary Contender, 15 March 1999.

387) National Liberty Journal, February 1999; Calvary Contender, 15 February 1999.

388) Calvary Contender, 15 April 2001.

389) Calvary Contender, 1 April 1992.

390) 기독신문, 1999. 6. 30, 16쪽.

391) 기독신문, 2000. 5. 31, 8쪽.

392) Huntsville Times, 16 June 2001; Calvary Contender, 1 July 2001; 크리스챤 신문, 2002. 3. 4, 2쪽.

393) 기독신문, 2000. 3. 15, 8쪽.

394) ENI, 10 June 2003; Friday Church News Notes, 13 June 2003; Christian News, 23 June 2003, p. 2.

395) Calvary Contender, 15 August 1998.

396) Calvary Contender, 1 July 1993.

397) Times, 12 August 1985.

398) 조선일보, 2012. 11. 22, A16쪽.

399) 기독교연합신문, 1997. 1. 19, 15쪽.

400) Calvary Contender, 1 September 1998.

401) David Cloud, "Number of Ordained Women Grows Phenomenally," in Christian News, 10 August 1998, p. 26.

402) Ibid.

403) 기독교보, 2003. 5. 3, 11쪽.

404) 크리스챤 신문, 2004. 5. 3, 12쪽.

405) 기독교연합신문, 2004. 7.4, 1, 3쪽.

406) 교회론, 145-148쪽

407) 김효성, 기독교 윤리, 37-41쪽에서 가져옴.

408) R. L. Hymers, Jr. Preaching to A Dying Nation; Calvary Con- tender, 15 October 1999.

409) Dallas Morning News, 1 August 1998; Fundamentalist Digest, July-August 1998; Calvary Contender, 1 September 1998.

410) Sword of the Lord, 18 February 2000.

411) Calvary Contender, 15 March 2000.

412) Webster's New World Dictionary, 3판, p. 1161; O. T. Spence, Straightway, vol. 25, p. 3.

413) Allan Bloom, The Closing of the American Mind (1987), p. 73.

414) 조영엽 박사의 록 음악에 대한 논평을 참고하라. 조영엽, 왜 열린 예배는 잘못되었는가? (미스바, 2001), 19-114쪽.

415) Charles T. Brown, The Art of Rock and Roll (1983), p. 42.

416) Frank Garlock and Kurt Woetzel, Music in the Balance, p. 153.

417) 고(故) Dr. O. Talmadge Spence는 피바디 음악학교를 나왔고 음악에 조예가 깊었고 미국의 Foundation 성경대학과 신학교의 창설자이다.

418) O. Talmadge Spence, 1993년 10월 24일, 서울 잠실동교회 설교에서.

419) 김효성, 기독교 윤리, 41-45쪽에서 가져옴.

420) “열린 예배, 찬․반 앞서 분명한 이해 요구,” 기독교연합신문, 1999. 11. 7.

421) 위의 글; 기독신문, 1999. 8. 11, 17쪽; 조영엽, 왜 열린 예배는 잘못되었는가? (미스바, 2001), 19-114쪽; Carl F. George, The Coming Church Revolution; Prepare Your Church for the Future; Robert Logan, Beyond Church Growth.

422) Carl F. George, How to Break Growth Barriers. part 3.

423) Ed Dobson, Seeker Sensitive Service.

424) Foundation, March-April 1998, pp. 4-5.

425) Ibid., pp. 8-9.

426) Rick Warren, The Purpose Driven Church, p. 280.

427) Ibid., p. 285.

428) 조영엽, 왜 열린 예배는 잘못되었는가?, 19쪽.

429)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예배당에서 연극이나 유희를 하는 것이 합당치 않다고 결의한 바 있다(1923년 제12회 총회록, 35쪽; 1953년 제33회 총회록, 235쪽).

430) Calvary Contender, 15 June 1998.

431) 스코틀랜드 신앙고백(1560년), 제18항; 벨직 신앙고백(1561년), 제28항, 제29항; Hermann Hoekse- ma, Reformed Dogmatics, pp. 617-621; Heinrich Heppe, Reformed Dogmaics, pp. 668-671.

432) Mark Sidwell, The Dividing Line: Understanding and Applying Biblical Separation; Calvary Con- tender, 1 November 1998.

433) Christian News, 31 May 1999; Calvary Contender, 1 July 1999.

434) Vanguard, June 1999; Calvary Contender, 1 September 1999.

435) Calvary Contender, 1 November 1998.

436) Calvary Contender, 15 December 1999.

437) 편집자: Jerry Huffman, 홈페이지: home.hiwaay.net/~contendr.

438) Calvary Contender, 15 March 2000.

439) Vantage Point, July 1998.

440) Calvary Contender, 1 September 1995.

441) A. W. Tozer, Berean Call, July, 1998; Calvary Contender, 1 August 1998.

442) Calvary Contender, 1 April 1999.

443) Calvary Contender, 15 April 1999.

444) William Ashbrook, Evangelicalism: The New Neutralism, p. 44.

445) Calvary Contender, 15 August 1998.

446) Christianity and Liberlism, p. 160.

447) Ibid., p. 166.

448) Ashbrook, p. 45에서 재인용.

449) John Murray, "Cooperation in Evangelism," in Collected Writings of John Murray, I, 161-162, 273- 279.

450) The New Evangelicalism.

451) Ibid., pp. 23-24, 28.

452) "Where Are We Going?" The Presbyterian Guardian, 10 April, 1959, pp. 187-188.

453) 장로교인들은 무엇을 믿는가?, 291쪽.

454) 박윤선, “개혁주의 소고,” 신학지남, 1979년 가을, 13-24쪽.

455) David O. Beale, In Pursuit of Purity: American Fundamentalism since 1850 (1986), pp. 23-33, 375-379.

456) C. T. McIntire, "Fundamentalism," Evangelical Dictionary of Theology, p. 433.

457) 그 다섯 가지 교리란, ① 성경의 무오성(無誤性), ②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 ③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④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 ⑤ 그리스도의 기적들의 사실성 등이다. Margaret G. Harden, ed., A Brief History of the Bible Presbyterian Church and Its Agencies, p. 15.

458) Kirsopp Lake, The Religion of Yesterday and Tomorrow (1925), pp. 61-62.

459) 박형룡, “근본주의,” 신학지남, 25권 1호 (1960), 16쪽.

460) John Calvin, Institutes of Christian Religion, 4. 1. 12; John Owen, The Works of John Owen, XV, 106.

461) 김의환, 도전받는 보수신학 (1970), 114-11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