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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비평

김효성 목사

2018년 6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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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본서는 저자가 이전에 쓴, 그러나 지금은 절판된, 현대교회문제: 배교, 타협, 혼란이나 현대교회문제자료집 등에 있는 ‘복음주의’와 ‘근본주의’에 관한 자료들을 다시 정리하고 또 그 동안 수집한 기타 자료들을 첨가하여 논술한 것이다.

저자는 복음주의의 문제가 오늘날 보수적 교회, 특히 보수적 장로교회가 반드시 다루어야 할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개혁교회는 전통적으로 권징의 성실한 실행을 참된 교회의 세 가지 표지 중의 하나로 여겨왔다. 권징은 교리적, 윤리적 오류들에 관한 것이지만, 그것은 또한 교제의 문제에 관계된다. 참된 교회는 교리적, 윤리적 오류를 가진 자들을 책망해야 하고, 또 만일 그들이 회개치 않는다면, 그들을 교회의 교제에서 제외시켜야 한다.

현대 교회는 교리적으로, 윤리적으로 여러 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다. 자유주의 신학, 에큐메니칼 운동, 천주교회와의 교제, 은사주의, 넓어진 선교 개념, 여자 목사, 열린 예배와 현대기독교음악(CCM), 낙태, 동성애 등의 문제가 그것이다. 복음주의의 치명적 오류는 이런 오류를 가진 자들에 대한 권징을 포기하고 폭넓게 교제하는 데 있다. 교회가 권징을 시행하지 않는다고 해서 당장에 심각한 문제가 있어 보이지는 않겠지만, 그것은 결국 교회의 해이와 점진적 변질을 가져오고 교회는 영적인 능력을 잃고 마침내 죽고 말 것이다.

부디, 독자들, 특히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섬기고 있는 목사들은 복음주의가 성경이 가르치는 교제의 원리를 부정하고 불순종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바른 분별력과 입장을 가지게 되기를 기원하는 바이다. 주여, 주의 종들에게 크신 긍휼과 은혜를 베푸소서!



내용 목차

 1. 복음주의가 무엇인가? 

 2. 복음주의 협의체들

 3. 복음주의 잡지와 학교들 

 4. 복음주의 인물들  

 5. 복음주의 교단들  

 6. 근본주의에 대한 역사적 고찰 

 7. 근본주의의 바른 개념  

 8. 성경적 평가: “분리의 원리” 

 9. 근본주의에 대한 역사적 후원 

10. 근본주의에 대한 잘못된 비평들  

결론      



 

1. 복음주의가 무엇인가?

복음주의는 역사적으로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회들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1) 마셀러스 킥은, “역사적으로, 복음주의자는 신앙과 행위의 법칙으로서 성경의 절대적 우위성(sola scriptura)과 값없는 은혜로(sola gratia) 믿음으로 얻는 의롭다 하심을 믿는 사람을 가리킨다”고 말했다.2) 성경의 절대적 권위와 이신칭의(以信稱義)의 복음을 믿는 개신교회들을 복음주의라고 부른 것은, 신약성경에 밝히 증거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을 부정 혹은 왜곡시키고 성례나 신자의 공로적 선행을 강조했던 천주교회와 구별하기 위해서이었다. 이와 같이, 복음주의는 성경에 증거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을 믿는 입장, 곧 성경적 기독교를 가리키는 용어이었다.

20세기 초 자유주의 신학이 개신교회들에 퍼지기 시작하고 미국에서 1940년대에 ‘신복음주의’ 운동이 일어나기 전까지도 복음주의는 전통적 개신교회의 입장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그런 의미에서는 성경의 근본교리들을 지키기 위해 전투적 입장을 취했던 ‘근본주의’도 복음주의이었다. 조지 마스든은, “미국에서의 근본주의는 전투적으로 반현대주의적인 복음주의적 개신교 운동으로 가장 잘 정의된다”고 말했다.3) 그러나 오늘날 복음주의라는 용어는 다른 개념으로 쓰이고 있다. 그것은 더 이상 단순히 복음을 믿는 개신교회를 의미하지 않는다. 복음주의는 교회들의 자유주의 신학과의 싸움에서 오늘날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면, 복음주의는 오늘날에 무엇을 뜻하는가? 자유주의 신학이 교회들 속에 들어와 교회들을 부패시키고 변질시켰던 20세기 중엽 이후, 미국의 복음주의적 개신교회들은 두 입장과 진영으로 나뉘었다. 하나는 자유주의자들을 포용하는 입장이었고, 다른 하나는 자유주의자들을 배척하는 입장이었다. 처음에는, 전자의 입장을 신복음주의라 불렀고 후자의 것을 근본주의라 불렀다. 그러나 신복음주의라는 용어는 점차 사용되지 않고 복음주의라는 말로 대체되었다.

오늘날 교회 안에 ‘신복음주의’라는 말이 더러 사용되지만, 다른 개념으로 사용된다. 어떤 이들은 신복음주의를 성경 무오를 부정하거나 유신론적 진화론을 받아들이는 것 등 부분적인 신학적 탈선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신복음주의는 역사적으로 그런 개념을 가진 것이 아니었다. 신복음주의의 본질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미국에서 1920년대의 소위 근본주의와 현대주의 간의 논쟁에서 외형적으로 현대주의가 승리하고 근본주의가 패배한 이후, 1930년대에 성경적 교회들이 포용적인 대교단들로부터 분리되는 일이 있었다.4) 그런데 1940년대에 와서 그 분리된 교회들 가운데서 ‘신복음주의’라는 한 새로운 경향이 일어났다. 그것은 진리를 위해 끝까지 싸우기보다 안정을 더 좋아하는 인간의 보편적 심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입장을 주창했던 이들은 성경을 믿는 보수적 교회들 간의 교제와 협력보다 포용적 교회들에 속한 자들을 포함하는 폭넓은 교제와 협력을 추구하였다. 그들은 성경이 가르치는 교제의 원리를 따르기보다 단순히 넓은 교제를 좋아하였다.5)

이런 입장을 처음으로 대변했던 인물은 미국의 풀러(Fuller) 신학교 초대 교장이었던 해롤드 오켕가이었다. 1948년 그는 풀러 신학교 강연에서 ‘신복음주의’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그는 1930년 보수적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졸업하였지만, 1936년 북장로교회의 분리시 메이천을 따르기를 거부했었다. 그러나 재능이 탁월한 그는 1942년 미국 복음주의자협회(NAE)를 조직하여 초대 회장이 되었고, 1947년 풀러 신학교의 초대 교장이 되었다. 그는 33년간 보스톤의 파크 스트릿 교회의 담임목사이었고, 25년간 크리스챠니티 투데이지의 이사장이었고, 빌리 그레이엄의 친구이며 조언자이었다.

오켕가는 풀러 신학교 교장 취임시 분리를 주장하는 근본주의자들을 비난하면서 자기 신학교는 대교단들의 목회자들을 훈련시킬 것이라고 선언했었다.6) 그는 1957년 한 소식지에서 “신복음주의는 그 전략을 분리에서 침투로 바꾸었다”고 말했고7) 후에 “신복음주의는 분리주의를 거절함에 있어서 근본주의와 달랐다”고 말하였다.8) 신복음주의 기관들로, 1942년 미국 복음주의자협회가 조직되었고, 1947년 풀러 신학교가 설립되었고, 1951년에는 20개국의 복음주의협회들이 모여서 세계복음주의협의회(WEF)가 조직되었고, 1956년에는 크리스챠니티 투데이(Christianity Today)지가 창간되었다.

신복음주의는 그 용어를 처음 만들어냈던 해롤드 오켕가의 생각대로 근본주의의 분리의 입장을 반대하는 것을 본질로 했다. 대교단들이 자유주의 신학을 포용하는 ‘넓어진’ 교회들이 되었다는 것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그 ‘넓어진’ 교회들을 ‘배교’라고 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변론의 여지가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미국에서의 1920년대의 근본주의와 현대주의(자유주의)의 갈등은 여하튼 외형적으로는 현대주의의 승리로 끝났고 그 결과 대교단들은 ‘넓어진’ 교회가 되었고 그 후 대교단들 안에는 더 이상 자유주의를 배제하려는 운동이 일어나지 않았고 일어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대교단들에서 분리되어 나온 소수의 보수적 교회들은 자신들이 과연 기독교회를 계승할 수 있는가 스스로 묻게 되었다. 신복음주의자들은 이 질문에 대해 확신 있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오켕가의 말대로, 분리의 입장을 포기하고 ‘침투’의 입장을 취하고 그 입장을 정당화하면서 넓어진 대교단 속으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그들은 대교단으로 들어가 그 교단를 개혁시키고 회복시키기를 원한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와 같이, 신복음주의는 자유주의자들과의 분리를 반대하는 입장에서 시작된 운동이었고, 그것이 신복음주의의 본질이었다.

그러나 신복음주의자들이 복음주의라는 말을 자신의 전유물처럼 사용하게 되었을 때, 복음주의는 전통적 의미와 다른 현대적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죠지 말스든의 말대로, 신복음주의자들은 점차 자신들을 단순히 복음주의자로 부르기 시작하였고 신복음주의는 오늘날 단순히 복음주의로 불리는 것이다.9) 각국의 복음주의자협회(NAE)나 세계복음주의협의회(WEF)는 다 신복음주의적 입장을 취하였으나, 복음주의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이와 같이, 오늘날 복음주의는 성경적 교제의 원리를 지키려는 근본주의와 구별되고, 신복음주의와 거의 동의어로 쓰이고 있고 신복음주의적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이다.

윌리엄 애쉬브룩은 오늘날의 복음주의를 근본주의에 대해 혹평하며 자유주의에 대해 동정적인 ‘신중립주의’로 묘사했다.10) 그 증거들로 그는 이 입장의 주창자 해롤드 오켕가의 반(反)분리주의적 발언과 행위들을 들었다. 또 그는 신복음주의의 확신과 이념의 대변자로 여겨진 빌리 그레이엄의 전도 방침의 변경을 다른 한 증거로 든다. 그에 의하면, 빌리 그레이엄의 본래 입장은 건전했다. 빌리 그레이엄은 1951년 4월 파일롯(Pilot)지에 “우리는 어떤 형태의 현대주의도 너그럽게 보거나 교제하지 않는다”고 말했고, 1952년 6월 3일자 밥 죤스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현대주의자들은 어디에서나 우리를 후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린스보로와 슈립포트 외에 어느 도시에서나 교회협의회(NCC)의 후원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 후 그는 자신의 입장을 바꾸었다. 그는 뉴욕, 샌프란시스코, 필라델피아, 시카고, 로스앤젤레스 등의 전도집회에서 교회협의회의 후원을 받았다.11) 애쉬브룩은 또 복음주의의 포용적 증거의 예들로 크리스챤 라이프지 1957년 4월호가 넬스 페레, 라인홀드 니이버, 해롤드 피 등의 자유주의자를 정통 기독교인과 거리가 멀지 않은 자들로 묘사한 것이라든가, 에드워드 카넬이 칼 바르트에 대해 매우 동정적이라는 것 등도 들었다.

촬스 우드브릿지는 신복음주의를 자유주의자들의 포용과 그들과의 협력을 주장하는 입장으로 정의했다.12) 그는 그 증거로 풀러 신학교가 프린스톤 신학교 전교장 신정통주의자 죤 매케이를 강사로 초청하는 것과 같은 빈번한 일들, 또 크리스챤 라이프, 무디 먼슬리, 크리스챠니티 투데이, 이터니티 등이 자유주의자들의 책이나 집회 광고를 싣는 일, 에큐메니칼 운동에 참여하는 일, 또 빌리 그레이엄의 협력 전도와 같은 포용적 방법을 채택하는 것 등을 들었다. 특히 그는 빌리 그레이엄이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의 전도집회시 제랄드 케네디 감독을 명예대회장으로 임명했는데, 케네디 감독은 하나님의 좋은 소식이라는 그의 책에서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명확히 부정한 자라고 지적하였다.13) 우드브릿지는 또한 이러한 타협적 태도의 결과로서 성경의 정경성, 완전 영감, 무오(無誤)에 대한 회의와 진보적 창조 개념의 수납 등의 신학적 변질과, 춤, 영화 등에 대한 개방적 태도에서 볼 수 있는 윤리적 세속화도 지적하였다.14)

개리 코우언은 신복음주의 혹은 복음주의의 입장을 전도활동의 측면에서 정의하기를, “자유주의자들이 이단이 아니고 견해가 다른 형제들이며 따라서 그들을 주님의 일, 특히 전도의 일에 참여시킬 수 있다는 입장” 즉 자유주의자들과의 협력적 전도를 주장하고 정당화하는 입장이라고 하였다.15)

박형룡 박사는 “신복음주의는 미국에서 20세기 초에 자유주의가 득세(得勢)하고 근본주의가 실세(失勢)한 데 대한 반발로 어떤 보수주의 신학교육을 받은 소장 신학자들이 자유주의 신학과의 타협을 감행하기로 발족한 새 신학 운동”이라고 말한 후, 다음과 같은 요지로 논평하였다.

첫째로, 신복음주의는 근본주의에 대해 학문성 결여, 반교파주의, 세대주의, 부정주의 등의 말로 가혹히 비판한다. 그러나 근본주의에 대한 가혹한 비평은 비평자의 정통성을 의문케 한다.

둘째로, 신복음주의는 신정통주의와 타협하는 경향이 있다. 신정통주의는 성경의 파괴적 비평을 받아들이는데, 과연 어떤 신복음주의자들은 성경 무오(無誤)를 부정하고 성경을 파괴적으로 비평한다.

셋째로, 신복음주의는 유신론적(有神論的) 진화론을 받아들이고 이적 부인의 경향을 띤다. 어떤 신복음주의자들은 천지 창조와 인간 창조에 대해 진화론적 개념과 긴 지질학적 연대를 받아들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의 교리를 중요치 않게 여긴다.

넷째로, 신복음주의는 세계교회협의회의 사회복음운동에 따라간다. 오켕가는 말하기를, “신복음주의는 근본주의가 회피한 사회적 난제들을 취급하기를 의욕함에서 근본주의와 다르다. . . . 개인 복음과 사회 복음 사이에 이분설이 있을 필요가 없다. 참된 기독교 신앙은 구원의 개인적 초자연적 경험과 사회 철학이다”라고 했다. 그래서 신복음주의자들은 민권 투쟁, 빈민 행진 등 과격한 사회정치활동에 참여한다.

다섯째로, 신복음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들과 우호적, 협력적 관계를 가지고 배교적 교단을 떠나지 않고 그 안에 머문다. 그들은 자유주의자들과 신학적 대화를 원하고 그들을 강사로 초청한다. 또 빌리 그레이엄의 경우와 같이, 자유주의자들이나 자유주의 교회들과 협력하여 전도대회를 연다.

박형룡 박사는 결론적으로 신복음주의자들을 잘못 아는 형제들이거나 열렬하지 않은 이단자들이라고 논평하였다.16)

신복음주의 혹은 복음주의에 대한 이상의 진술들은 오늘날 복음주의가 자유주의자들이나 자유주의적 교단들과 분리하지 않고 그들을 포용하고 그들과 교제하고 협력하는 입장이라는 사실을 확증한다. 복음주의가 신학적 탈선들의 문제점을 보이고 있으나, 그것은 자유주의자들과의 교제와 협력에서 생긴 당연한 결과들이라고 본다. 그러나 신복음주의 혹은 복음주의의 본질은 교제의 문제에 있다.

이와 같이, 오늘날의 복음주의는 자유주의자들과 자유주의 혹은 포용주의 교단들과의 분리를 반대하고 그들을 포용하고 인정하고 그들과 교제하고 협력하는 입장이라고 정의될 수 있다. 복음주의는 신정통주의를 포함하여 기독교의 근본 교리들을 부정하는 자유주의 신학을 이단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유주의 신학을 이단이라고 생각한다면, 어떻게 그런 자들과 교제하고 협력할 수 있겠는가?

이단은 죄 중에 큰 죄이며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성경의 교훈에 순종하는 교회들은 자유주의 이단을 용납하거나 포용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교회들이 이단을 용납한다는 것은 그 교회들이 배교한 교회들이든지 심히 무지하거나 해이해진 교회들이 아니라면 생각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이단들을 용납하는 것은 구약성경뿐 아니라, 신약성경이 밝히 가르치는 교훈, 특히 교제의 원리를 가르치는 교훈을 거역하는 매우 잘못된 일이다.

신명기 13:1-3,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네게 말하기를 네가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좇아 섬기자 하며 이적과 기사가 그 말대로 이룰지라도 너는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 디도서 3:10,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

 

2. 복음주의 협의체들

복음주의가 자유주의자들과 자유주의 혹은 포용주의 교단들과의 교제의 단절을 반대하고 그들을 포용하고 인정하고 그들과 교제하고 협력하는 입장이라는 사실을, 근래에 수집된 사례들을 열거하며 구체적으로 확인해 보자.

먼저, 복음주의 협의체들의 타협적 문제점들을 열거해보자.

한국복음주의협의회(KEF)

우리나라 복음주의의 대표적 기관의 하나는 한국복음주의협의회(KEF)이다. 이 단체는 세계복음주의연맹(WEA=World Evangelical Alliance)17)의 정회원이다. WEA는 각국의 NAE(복음주의협회)들의 세계적 연합체이다. 한국복음주의협의회는 세계 복음주의 운동과 호흡을 같이하고 있다.

1990년 11월, 한국복음주의협의회는 홍콩 국립경기장에서 개최되는 신복음주의의 대표적 인물인 빌리 그레이엄의 대전도대회 한국 위성 중계 전도대회를 실시했는데, 부산 수영로교회, 대구 서문교회, 대전 중앙교회 등 우리나라의 보수적 장로교단인 예장합동측 교회들이 장소로 사용되었다.18)

1995년 한국복음주의협의회의 광복 50주년 기념 국제심포지움의 강사 중에는 기장측의 조향록 목사가 포함되었다.19) 한국복음주의협의회는 기장측 인사에 대해 거리낌이 없는 것 같다.

1996년 한국복음주의협의회의 “교회협의회(NCC) 개혁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주제발표회에서, 한국복음주의협의회의 홍순우 목사는 진보적 교회와 보수적 교회가 모두 자기 반성을 해야 하고 한국교회 전체 정서에 맞는 연합운동을 전개해 나가야 한다고 말하면서, “앞으로 NCC[교회협]나 한기총[한국기독교총연합회] 등의 연합 기관이 합력하여 대통합을 이루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또한 그 발표회에서 전호진 박사는 “보수적 관점에서 한국교회의 연합운동이 과거 어느 때보다도 활발한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고 말했다.20) 그러나 한국의 자유주의적 교회들의 협의체인 NCC와 보수주의적 교회들의 연합체인 한기총의 연합을 말하는 것은 정신 없는 일이다. 이 단체의 인사들에게는 자유주의와 보수주의에 대한 바른 개념이 없는 것 같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우리나라 복음주의의 대표적 기관은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이다. 이 단체는 세계복음주의연맹(WEA)에 가입하였고21) 2014년 세계복음주의연맹의 세계대회를 우리나라 서울에서 개최하도록 초청하였다. 우리나라의 보수적 교단들의 거의 대부분은 이 단체에 속해 있다. 그러나 이 단체는 한국복음주의협의회 못지 않게 분별력이 없다.

1991년 한 기독교 신문에 의하면,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제2회 정기총회는 “기감과 기장의 가입 문제는 일단 긍정적인 방향으로 추진되고 있음을 거듭 밝혔다.”22) 기감과 기장은 우리나라에서 대표적인 자유주의 교단들인데, 이 단체는 그 교단들을 배제할 의사가 없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는 1994년 3‧1절 기념예배 설교를 자유주의자로 널리 알려진 강원용 목사에게 부탁하였고,23) 3월 8일 임원 취임 예배 설교를 기장측 조향록 목사에게 부탁했다.24) 또 4월 9일 남북교회협력 세미나 강사 명단에 강원용 박사가 포함되었다.25) 그러나 강원용 목사는 내가 믿는 그리스도라는 그의 책에서 성경을 무오한 절대 계시의 경전으로 믿는 신앙을 혹평하였고(22, 24쪽),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탐욕을 버리고 사랑의 심정으로 행하는 것이라고 했고(353쪽), 교회가 해야 할 가장 큰 일은 모든 분야의 대립을 화해시키는 것이라고 했다(336-338쪽). 또 그는 에큐메니칼 운동을 적극 인정하였다. 그러나 이런 사상과 입장은 모두 다 비성경적이고 잘못된 것들이다.26)

1996년 “한기총은 어디로”라는 주제의 한국복음주의협의회 월례발표회에서 발제자 한명수 목사(전 한기총 총무, 창훈대교회 목사, 기독신보 주필)는 진보와 보수는 동전의 양면과 같으며 어느 한 쪽을 강조하면 기독교의 기본 진리를 완전히 충족시킬 수 없다고 말하면서 한기총과 교회협[한국교회협의회, NCC]이 새로운 이름을 가진 단체로 우뚝 서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논찬자로 나선 정진경 목사(신촌성결교회 원로목사, 전 한기총 대표총무) 역시 개신교계 대표성을 띤 연합기관이 존재해야 한다고 지적, 한기총과 교회협의 하나됨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한국복음주의협의회 부회장 김명혁 목사(합동신학교 교수, 강변교회 목사)도 “한기총 대표회장 최 훈 목사도 하나 되는 소망을 갖고 일한다”며 “양 기구는 기구적 통합을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27) 한기총의 지도자들은 자유와 보수에 대한 분별력이 없다. 이것이 신복음주의 정신이다.

1998년 2월,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지 덕 대표회장은 기자 회견에서 한국교회가 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연합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히면서, 특히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의 차이가 이제는 그다지 크지 않다고 말하였다.28) 한기총 대표회장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다니 놀라울 뿐이다. 한국의 보수 교회들은 정신을 차려야 한다. 자유주의는 죽지 않았다. 자유주의 교단들은 자유주의 신학을 포기하지 않았다. 자유주의의 신학은 이단이다.

2000년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에 선임된 이만신 목사(중앙성결교회)는 그 동안 껄끄럽게 여겨왔던 교회협[NCC]과의 관계를 대화를 통해 풀어나가겠다고 밝히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현재 교회협의 모습은 보수권에서 보기에도 매우 만족스럽습니다. 한국교회의 발전을 위해서라면 한기총과 교회협의 통합을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한기총과 교회협이 기구적으로 하나 되는 것을 모색하되 그것이 여의치 않다면 사업 동조를 통해 동반자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29)

그러나 자유주의 신학의 이단성을 인식지 못하고 자유주의와 보수주의의 연합을 가능하다고 보는 것보다 더 큰 무지와 혼란은 없다. 

2000년 6월 4일, 한국기독교총연합회(회장: 이만신 목사)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회장: 이성덕 구세군사령관)와 ‘평화통일을 위한 한국교회 특별연합예배’를 드렸다. 이만신 목사는 “[이] 연합예배가 한국교회가 하나 되고 통일의 문을 여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고, 교회협의회 김동완 총무는 “이번 연합예배를 시초로 앞으로도 교회협과 한기총이 좋은 프로그램을 통해 같이 협력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30) 이것은 잘못된 교제와 협력이다.

2005년, 예장고신의 허순길 박사는 다음과 같이 썼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는 보수교회들의 연합기구라고 한다. 신학의 보수 노선을 걷는 교회들은 일반적으로 여성 목사, 장로 제도를 성경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종교의 다원주의를 배격한다. 그런데 근래에 한기총은 본질적으로 신학과 생활을 달리하고 있는 진보교회 연합기구인 한국교회협의회와의 통합을 논의하였다. 이것은 정통교회 교단들이 그 정체성을 잃고 있다는 분명한 증거이다. 특별히 한기총에서 주도 역할을 하고 있는 보수측 장로교 교단들이 교회분열까지 초래했던 WCC 회원교회 문제, 신학의 문제를 더 이상 심각한 문제로 보지 않게 변해 버린 것이다.31)

한국장로교총연합회

1986년 9월 8일 한국장로교총연합회의 전신인 한국장로교협의회는 새문안교회당에서 노춘경 씨 수세 100주년 기념 행사로 5개 장로교단 연합성찬예배 및 강연회를 가졌다. 그 5개 교단들은 예장통합, 예장합동, 기장, 예장고신, 예장대신이었다. 그 행사에 참석한 교회 지도자들은 150여명이었다.32)

1993년 한국장로교회 일치를 위한 특별좌담에서, 예장통합 부산진교회 박성원 목사는 교회가 “과거 분열하는 과정에서 비롯된 허위 구조 즉 정통성 수호라는 미명 아래 교인들에게 강요해온 모든 허위구조를 과감히 떨쳐버리고 하나가 되기 위한 노력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때”라고 주장하였다. 또 그는 “개인 구원, 사회 구원을 각기 외치면서 교회가 진보, 보수로 나뉘어지는 것은 원칙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고, 한국의 진보교회와 보수교회가 일치하려면 ‘타협주의’가 필요하며, 예를 들면 보수측에서 ‘성경이 유일한 계시다’는 입장을 고수하는 한 장로교 일치는 대단히 어렵다고 주장했다. 또 그 좌담에서 기장 신학연구소장 김원배 박사는 교회 일치는 진정한 교회 회복 운동인데, 교회 일치를 위해 도그마에서 벗어나 봉사의 자세를 가져야 하며 ‘교리’만 따진다면 끝이 없다고 주장했다. 한편, 예장대신 총회 총무 김재규 목사도 한국교회가 교리를 따지지 말고 선교에 함께 참여함으로 일치를 이루자고 제의했다. 또 그는 “신학에 대한 고집이 곧 한국장로교회 일치의 저해 요인”이라고 주장하면서, 과거엔 김재준 목사를 이단이라고 정죄했으나 오늘 보수신학에선 그를 이단이라고 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33) 예장통합이나 기장 같은 자유주의 교단들의 목사들은 바른 지식과 분별력이 없다 하더라도 예장대신 같은 보수 교단의 총무라는 목사의 사상과 분별력이 이런 정도인 것은 참으로 슬프고 통탄할 일이다.

1993년 한국장로교협의회 소속 5개 장로교단 총회장 공동선언문은 궁극적으로 하나의 장로교회가 되기를 소원한다고 말하면서 “우리 한국의 장로교단은 신앙의 본질적인 항목들에 있어서 결코 분열될 만큼 의견의 차이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라고 진술했다.34) 예장통합, 예장합동, 기장, 예장고신, 예장대신의 총회장들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니 참으로 슬픈 일이다. 기장과 예장통합에는 자유주의가 있다. 또 한국장로교협의회는 1994년 사업 계획에 각종 강단교류, 신학생 예배강단교류, 세계장로교와의 교류 등도 포함했다.35)

1997년 3월, 예장통합, 예장합동, 예장고신, 예장대신, 예장개혁, 기장 등 장로교 주요 9개 교단이 참여하고 있는 한국장로교협의회는 “장로교 연합운동의 과거, 현재, 미래”란 주제로 토론회를 가졌다. 이 모임에서 예장합동의 한명수 목사는 “개신교계 분열은 하나님의 뜻보다 사람들의 생각을 앞세운 데서 생긴 결과”라고 말했고, 예장통합의 김순권 목사는 “권위주의와 신학교 난립, 감정 대립 등이 장로교 분열의 원인”이라고 말하였다.36) 예장합동, 예장고신, 예장대신, 예장개혁 등 보수주의 교단들이 예장통합과 기장 등의 자유주의 교단들과 어울리는 것 자체가 신복음주의적이다.

1997년 5월 15일, 우리나라의 대표적 두 장로교협의체인 한국장로교협의회[한장협]와 대한예수교장로회협의회[예장협]는 합동총회를 열어 통합하기로 했다. 양측 합동위원회 모임은 ‘조건 없는 합동’을 결정하였고 두 단체의 회장들은 “두 단체가 따로 있을 이유가 전혀 없다”는 데 동의했다. 한국장로교협의회는 예장통합, 예장합동, 예장고신, 기장, 예장대신 등의 교단으로 구성되어 있고, 대한예수교장로교협의회는 34개 교단들로 구성되었는데 보수적인 많은 군소교단들을 포함하고 있다.37) 예장협도 분별력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1998년 10월 29일 한국장로교총연합회(대표회장: 기장 총회장 서정래 목사)는 회원교단의 신임 총회장과 총무 임원 축하예배에서 장로교회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노력에 매진키로 결의하였다. 예장통합, 예장합동, 예장고신, 기장, 예장대신, 예장개혁 등 회원교단들 가운데 이날 참석한 신임 임원 120여명은 공동기도문에서 “지난날 장로교회가 분열된 아픔을 깊이 회개한다”면서 “장로교회가 하나로 연합해 이 땅에 바로 서서 주님의 정의를 아름답게 꽃 피우자”고 강조하였다. 예장통합 전 총회장 민병억 목사는 ‘한 이름 이스라엘로’라는 설교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로 똘똘 뭉친 것처럼 우리 장로교도 하나 돼야 한다”며 “하나된 장로교가 이 나라와 민족의 통일, 번영에 선구자가 되야 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길자연 목사(예장합동 총회장)는 “장로교회가 하나 되지 못하고 자기의 입장만 고집해 심심한 유감을 표한다”면서 “이제라도 우리 모두 하나 되기 운동에 적극 참여하자”고 말했다.38) 정신 없는 교제와 일치 추구이다.

1999년 1월 7일 한국장로교총연합회는 24개 회원 교단 총회장들과 총무들 등 120여명이 참석한 신년하례회를 가졌는데, 거기에서 대표회장인 예장통합 총회장 유의웅 목사는 ‘장로교 연맹’의 결성을 제안하였고, 그것을 120여개의 장로교단들이 하나 되는 꿈을 꾸면서 현재의 총회들의 질서와 기본틀을 유지하면서 보다 협력과 결속이 강화된 조직으로 묘사했다. 그것은 장로교 연맹을 만들어 3년 내지 5년 후 하나의 장로교회 혹은 ‘연합장로교회’를 만들자는 것이며, 그 장로교 연맹은 하나의 장로교회를 위한 전 단계가 되는 것이다.39)

한국장로교총연합회(대표회장: 예장통합 유의웅 목사)는 2000년 회원교단들의 총회 개시일을 9월 25일로 통일시켜 이를 ‘한국장로교의 날’로 선포하기로 했다. 이 날 30개 회원 교단 임원과 대의원들은 한 자리에 모여 개회예배를 올리고 성만찬, 축하 공연 등을 함께 갖게 된다. 한장총은 또 총회 직전 주간과 일요일을 각각 ‘한국 장로교 주간’, ‘한국 장로교 주일’로 지정, 장로교 여러 교단이 형제 자매임을 고백하고 일치 의식을 확인하는 행사를 개최할 예정이다.40)

2000년 2월 한국장로교총연합회(대표회장: 김도빈 목사)는 한국 장로교 연합과 일치 간담회를 열었다. 그 모임에서 “한국 장로교회의 연합과 일치 모색”이라는 제목의 주제 강연에서 전병금 목사는 “처음부터 기구적인 통합을 모색하려고 하기보다는 우선 연합 교회의 형태를 갖춰가면서 점진적인 통합을 이뤄가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한국 장로교회 연합과 일치를 위한 과제로 △ 교단간의 강단교류 활성화, △ 총회에 상호사절단 파견, △ 2000년 장로교 총회 개회예배 함께 드리기, △ 같은 지역 안에서의 연합예배와 성찬식, △ 세계개혁교회연맹(WARC) 참여로 국제교회와의 연합 강화 등을 제안했다. 논찬자 김재규 목사(대신 총회장)는 “한국교회에서 사상 논쟁이 사라졌다는 발제에 동감을 표하고, 열린 보수와 열린 진보가 대화하면 사상 논쟁은 무너질 것”이라고 밝혔다. 또 그는 일치를 위해 “우선 실현 가능한 선교, 예배에 대한 것만이라도 구체적으로 실천해 가자”고 주장하였다.41)

한국장로교총연합회(대표회장: 예장합동 김도빈 목사) 2000년 한국장로교대회 준비위원회는 5월 1일 장신대 대회의실에서 가입교단 신학대학원 원우회장 제2차 회의를 갖고 한국장로교회는 한 형제, 자매임을 확인하는 자리를 가졌다. 그 회의에서 신학대학원 원우회장들은 한국장로교회의 화해와 협력, 연합과 일치를 위한 계기를 마련코자 실시되는 2000년 한국장로교대회에 적극 참여하기로 결의했다. 이 날 참석한 원우회장들은 예장통합측, 예장합동측, 예장고신측, 기장측, 예장개혁측 등 11개 교단 신학대학원 원우회장들이다.42) 교단들의 지도적 목사들뿐 아니라, 배우는 신학생들도 바른 분별력이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런 교단들의 희망은 없어 보인다.

2012년 11월 30일, 한장총의 제30회 대표회장이며 예장합신 총회장을 역임한 권태진 목사(군포제일교회)는 정기총회에서 “2013년은 무엇보다 분별력과 신앙의 절개가 필요한 해가 될 것 같다”며 “한장총은 보수와 진보의 두 날개를 가지고 있는데 무엇보다 극진보와 극보수를 아우르는 일에 힘쓸 것”이라고 말하였다.43) 이것이 전형적인 신복음주의 정신이다. 박윤선 목사의 지도력 아래 세워진 예장합신의 총회장이 이렇게 분별력 없는 사상을 가지고 있다니 놀랍다!

2013년 7월 10일, 한장총은 올림픽홀에서 제5회 장로교의 날 행사를 하며 200여개로 분열된 장로교회의 연합과 하나 됨을 다짐하였다. 3천여명이 모인 그 대회에서 예장합신의 전 총회장 권태진 목사는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이며 십자가의 은혜로 자유함을 입은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그 모임에는 고신 부총회장 주준태 목사, 합신 총회장 이철호 목사, 한영 총회장 한영훈 목사, 예장통합 방지일 목사, 기장 전병금 목사, 통합 이종윤 목사, 백석 장종현 박사 등이 참여하였다. 또 그 모임은 한국장로교회비전선언문을 낭독하였고 또 ‘한교단 다체제’를 향한 연합과 일치를 다짐하였다.44) 이런 혼합 속에서 자유주의 신학의 배격은 사라졌다.

한국기독교 목회자협의회

예장합동 ‘교회갱신을 위한 목회자협의회’(회장: 옥한흠 목사)를 비롯하여 예장통합 ‘바른목회 실천협의회’(회장: 손인웅 목사), 예장고신 ‘고신정신잇기 목회자협의회’(회장: 윤희구 목사), 기장 ‘21세기 목회자협의회’(회장: 전병금 목사) 등 한국의 장로교단들 중 대표적인 네 교단의 목회자협의회들이 1997년 11월 서울교육문화회관에서 ‘미래 한국교회를 위한 장로교 목회자 모임’을 갖고 “장로교라는 같은 뿌리를 갖고 있으면서도 서로 분열된 모습을 보인 것을 참회하는 한편 한국교회의 미래를 위해 목회자들이 일치와 연합된 모습을 보이도록 최선을 다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선언문을 발표했다.45) 이들에게는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어 보인다.

예장합동, 예장통합, 예장고신, 기장 등 4개 장로교단의 개혁성향의 목회자 그룹들로 구성된 한국장로교 목회자협의회(회장: 옥한흠 목사)는 1998년 6월 ‘교회개혁을 위한 선언문’을 발표하고, 교회의 도덕적 타락현상과 대 사회 영향력 약화 현상을 뿌리뽑기 위해 목회자 개혁과 한국교회 일치가 시급하다고 천명했다. 특히, 교회의 대 사회적 영향력의 약화 현상에 대해 “한국교회가 한국기독교총연합회와 한국기독교협의회로 나눠진 것에서 연유한다”고 말하고 “한국교회 일치와 연합은 늦출 수 없는 긴박한 과제”라고 진단하였다.46)

그러나 오늘날 교회 개혁의 첫 번째 과제는 단순히 윤리적 문제의 해결이나 교회의 대 사회적 영향력의 증가가 아니고, 신학적 순수성의 회복, 즉 기독교 정체성의 회복 문제이다. 오늘날 교회들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많은 교회들이 자유주의 신학을 포용하고 있다는 것과, 또 보수적 교회들이 그런 자유주의적 교회들과 아무 문제의식이 없이 교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주요 교단들에서 교회갱신을 목표로 활동하고 있는 목회자협의회들은 1998년 11월 26일 ‘한국기독교 목회자협의회’를 조직하였다. 창립 총회에 참여하는 협의회들은 다음과 같은 14개의 교단들에 소속해 있다: 예장합동, 예장통합, 예장고신, 기장, 예장대신, 예장합신, 기감, 예성, 기성, 기침, 나사렛, 기하성, 구세군, 성공회. 한목협의 설립 취지는, 비신학적, 비정치적 한도 내에서 한국교회의 일치와 연합을 도모하며 특히 성직자와 교회의 윤리성 회복을 통해 대 사회적 영향력을 강화해 나가는 데까지 서로 협력하고 연대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창립기념강좌에서는 이원규 교수(감신대)와 이성구 목사(고신정신잇기 목회자협의회 총무)의 강의가 있고, 창립헌신예배에서는 전병금 목사(기장측)의 사회, 옥한흠 목사(예장합동)의 설교, 박경조 신부(성공회)의 창립 선언문 낭독, 유의웅 목사(예장통합측 총회장)와 장 상 총장(이화여대)의 축사, 정철범 주교(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대표회장, 성공회)와 지 덕 목사(한국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의 격려사 등이 있을 예정이다. 창립선언문 초안 작성에는 김원배 목사(기장측) 등이 참여할 계획이다.47)

기독신문에 의하면, 한국기독교 목회자협의회(회장: 옥한흠 목사)는 1999년 6월 전국 목회자 연합수련회를 개최하고 교회 일치, 교회 갱신, 섬김 등 3대 개혁과제 달성에 최선을 다해 나갈 것을 다짐했다. 그러나 그 단체는 오늘날 하나님 앞에서 가장 중요한 개혁 과제인 바른 신학의 재확인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것 같다. 바른 신학에 근거하지 않는 교회 일치의 추구는 비성경적 연합운동에 불과하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명백히 반대된다.48)

전 고려신학대학원장 허순길 교수는 기독교보에 “한목협은 어디로?”라는 제목의 글을 다음과 같이 썼다.49)

△ ‘한목협’의 정체

한국기독교 목회자협의회(이하 한목협)는 현재 전국 14개 교파에 속한 목회자협의회들로 구성되어 있는 초교파 협의단체이다. 이 협의회는 1998년 11월 26일 예수교 장로회(합동) 사랑의 교회에서 13개 교파에 속한 주로 40, 50대 중견목회자들이 모여 창립하고, 교회의 일치, 갱신, 사회 책임을 내용으로 하는 창립선언문을 발표했다. 이 협의회에는 여섯 장로교단(합동, 고신, 통합, 기장, 대신, 합신)과 성공회, 감리교, 하나님의 성회, 성결교(예성, 기성), 나사렛교, 침례교 등에 속한 목회자 협의회들이 포함되어 있다(“창립총회 자료집,” 1998. 11. 26). 그러니 역사와 신앙고백을 달리하는 교회들의 목회자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이 협의회가 창립될 당시 국민일보는 이 기관을 이끄는 구성원들이 40, 50대 중견 목회자들로서 그 중에는 각 교단에서 규모도 크고 대표성도 있는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분들이 많기 때문에 정치집단화 할 가능성이 있고,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한국기독교총연합회를 대체하려는 또 하나의 세력이 될 수도 있다는 시각이 교계에 있음을 보도했었다(1998. 11. 26, 27쪽).

그런데 이런 시각은 차츰 현실화되는 것으로 보인다. 지난 5월 29일자로 발표된 선언문이나(교계 신문), 이 협의회 회원들이 각종 모임에서 발언하는 내용들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협의회가 표방하고 있는 여러 선한 취지와 목적에도 불구하고, 그 지향하는 바가 참으로 한국교회건설에 유익을 줄 수 있을 지 우려를 갖게 한다. 이 협의회가 “종교개혁자들이 세운 개혁되었고 항상 개혁되는 전통에 서서, ‘오직 믿음’, 오직 말씀‘, 오직 은혜’로만의 역동적 신앙을 실천해 갈 것”을 다짐하고 있으나(“창립선언문”), 개혁보다는 한국개신교 교회일치를 위한 하나의 혁명을 기도하고 있는 정치적 압력단체처럼 비쳐지고 있다. 특히 이 협의회가 보수와 진보, 각 교회가 가진 역사적인 신학과 교리의 벽을 넘어서는 교회일치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보수신학과 신앙을 파수해 온 교단들로 하여금 깊은 우려를 갖게 하고 있다.

△ 교회분열에 대한 양비론적 입장

한목협은 그 창립선언문 서언에서 “갖가지 그럴듯한 이유와 변명에도 한 몸인 교회가 여러 교파로 나누어진 것을 회개해야 한다”고 하며, 일곱 가지 결의를 다짐하는 가운데, 첫째로 “그 어떤 이유나 변명에도 교회의 분열은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에게 요청되고 있는 것은 ‘하나의 교회’이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이 협의회 선언문은 이유를 물을 필요 없이 분열은 정죄의 대상됨을 선언하고 있다.

반세기 전 하나의 교회 공동체였던 장로교회가 현재 백여 교단으로 분열된 현실을 고려할 때, 어느 정도 이런 정죄에 대한 이해를 하게 된다. 교회 분열은 매우 슬픈 일이다. 그러나 한목협이 분열에 대한 책임 소재를 묻지 않고, 양비론(兩非論) 입장에서 무조건 정죄를 선언하는 것은 ‘프로테스탄트’답지 않은 일이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 신앙과 행위의 절대표준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스스로 심판자로 군림하는 듯 보여진다. 수백년 동안 개혁교회가 고백해 온 신앙고백은 참 교회가 있고, 교회라는 이름은 가졌으나 교회라 할 수 없는 거짓 교회가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벨직신앙고백 제29조). 이 양자는 하나가 될 수 없다. 참 교회란 교회의 주이신 그리스도의 말씀과 사도적인 신앙고백의 터전 위에 서 있는 교회를 지칭한다. 지난날의 교회사를 뒤돌아 볼 때, “어떤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라 하기보다 사탄의 회가 될 정도로 타락했었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5장 5절). 지상에서의 교회가 이렇게 될 가능성이 언제나 있음을 개혁주의 신앙고백은 경고하고 있다. 이렇게 타락한 교회는 엄밀한 의미로 교회라 할 수 없다.

이럴 때 개혁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사도적 가르침과 신앙을 파수하고 계승하기 위한 운동이 일어나게 될 뿐 아니라 새로운 교회 조직이 불가피한 경우가 있어질 수 있다. 이 새로 조직정비된 교회공동체가 외형상으로는 주류로부터 분열된 작은 공동체로 보일 수 있으나 실제로는 역사적, 사도적인 하나의 거룩한 보편교회(a holy catholic Church)에 속해 있는 참 교회인 것이다. 지난날 종교개혁시 개혁자들도 이런 사도적 신앙에 근거한 참된 교회 건설을 위해 선한 싸움을 싸우다 부패한 로마교회로부터 추방당해 다른 교회조직체를 형성했던 것이다. 분열은 죄이다. 그런데 이 분열의 죄는 언제나 부패 타락한 교회편에 있는 것이다. “주의 교회는 하나”라는 사실을 모르는 이 없다. 그러나 말씀에 불순종을 유도함으로 교회의 파괴를 노리는 사탄이 역사하고 있는 이 역사 세계에서는 기존의 제도적 교회가 부패할 가능성이 언제나 있으며, 사도적인 교회의 전승을 위해서는 사탄이 지배하는 세계로부터 벗어나야만 할 때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종교개혁 이후에 신실한 우리의 선진들이 걸어온 길이었다. 한국교회 특별히 장로교회 분열의 대부분이 교회의 왕이신 주님 앞에 떳떳하지 못하고, 그러기에 그의 몸된 교회를 찢는 죄를 범하는 결과를 가져온 일들이 있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분열에 대한 책임을 양자에게 묻는 양비론적 입장을 취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을 좇는 태도가 아닐 뿐 아니라, 개혁주의 입장의 교회관과 역사관에도 배치된다. 교회의 전통적인 신학과 신앙과 교리의 파수를 위한 투쟁은 이따금 불행한 분열의 결과를 가져 왔다. 한국 장로교회의 역사를 돌아볼 때도 이 협의회의 분열에 대한 무조건 정죄는 지난날 일제시 신사참배로 무너져버린 한국교회 개혁과 재건을 위해 선한 싸움을 싸우다 부패한 교권의 횡포로 축출당한 후 개혁주의 참 교회건설을 위해 교회조직을 새로 정비해야 했던 신실한 종들과 자유주의에 오염되어 가는 한국교회를 정통적 개혁주의 신학의 터전 위에 세우려 선전하다 결과적으로 분열의 슬픔을 겪게 되었던 종들을 정죄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 새로운 신학의 추구

한목협은 보수 진보를 흡수할 수 있는 새로운 신학수립을 원한다. 1998년 11월 창립 총회시에 발표한 선언문에는 신학문제에 있어서 다음과 같이 모호하게 표현을 했다. “우리의 지평을 세계로 넓혀 세계교회의 흐름과 신학의 사조을 익히고 우리 것으로 만들어 가는 일에 있어서 게으르지 않고, 서로를 격려하면서 한국 개신교의 일치된 역량을 복음의 능력으로 불타오르게 하고자 다짐한다”고 했다. 여기 “세계교회의 흐름과 신학의 사조를 익히고 우리 것으로 만들어 간다”는 말은 한국적인 새로운 신학의 생산을 시사하는 듯 들린다. 그런데 이 협의회의 창립회원 단체들의 각각의 창립 발기문들과 창립총회 자료집에 실린 논문들을 살펴보면 이 협의회가 신학문제에 있어서 어떤 공통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지 드러나게 된다. 몇 예를 들면 예장통합측 ‘바른목회실천협의회’는 신학선언에서 지난 한 세기동안 한국교회에는 첫째 보수적 근본주의 신학. 둘째 진보적 급진주의 신학, 셋째 문화적 자유주의 신학, 넷째 실용주의적 교회성장주의 신학이라는 네 줄기 흐름이 있어 왔는데 “이 신학들은 제각기 한국교회의 발전에 공허한 바가 적지 않았지만 많은 문제점을 야기시켰다. 그러므로 여기에 바른 신학이 요청되는 것이다”라고 한다(위 자료집, 64쪽). 기독교장로회측 ‘21세기 목회자협의회’는 창립취지문에서 “열린 신학의 정신과 새로운 영의 눈으로 복음과 상황을 해석하고 응전함으로써 교회의 일치와 성장 그리고 갱신을 추구”한다고 한다(위 자료집, 87쪽). 그리고 전국감리교목회자협의회 창립선언문에는 “특정한 교리나 신학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한 성령은 우리가 진리 안에서 자유하게 되기를 바란다”고 한다(위 자료집, 72쪽). 여기 언급한 소위 ‘바른 신학’, ‘열린 신학’, ‘특정 교리에 매이지 않는 신학’, 등은 모두 전통적인 신학과 역사적인 신앙고백들의 폐기를 의미라는 것으로 이해된다. 고신측의 고목협과 합동측의 목회자협의회는 그 창립선언문에서 신학문제에 있어서는 언급을 피하고 있다. 이는 교계의 예민한 반응을 예견한데 있는 것으로 추단된다. 유의웅 목사(당시 예장통합 총회장)가 행한 한목협 창립총회 축하 메시지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또한 하나님의 온 백성들이 원하는 대로 진보와 보수의 벽을 넘어 교회가 하나되는데 하나의 거대한 전기가 되기 바란다”고 했다(위 자료집, 19쪽). 이 모든 것은 한목협이 신학과 교리면에서 어디를 지향해 가고 있는지 잘 말해 주고 있다. 지난 5월 29일 한목협의 대표회장인 옥한흠외 회원 목회자 일동 이름으로 선언한 ‘한국교회의 화합과 일치를 위한 선언’에서 신학자들에게 ‘교회화합과 일치를 위한 신학수립’에 나설 것을 호소했다. 이로써 한목협은 실상 신학자들에게 보수, 진보의 신학,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등이 가진 다양한 신학과 교리를 다 포기하든지, 저 다양한 신학과 교리를 다 수용하여 혼합 용해하든지 하여 모든 교회가 받을 수 있는 새 신학을 주조해 내라고 요구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를 볼 때 한목협은 교회일치를 위해 신학적인 영역에서도 하나의 혁명을 일으키고자 하는 대범한 길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한국교회의 분열상이 아무리 슬프게 보여도 교회일치를 위한 이런 혁명적 기도는 성공의 가능성도 없거니와 한국교회의 안녕과 발전에 도움을 주게 되리라 생각되지 않는다. 명분이 뚜렷한 교회들은 일반적으로 신학 교리면에서 과거로부터의 전통적 역사의 맥을 이어오고 있다. 교회일치를 위해 이 역사의 맥을 단절케 하고 새로운 신학과 교리를 창출하려는 혁명적 운동은 교회에 큰 불안만을 야기하게 될 것이다. 신학은 교회의 초석이다. 한목협은 신학의 혁명을 통해 교회의 터를 흔들려 하고 있다. 교회일치란 쉬운 일이 아니다. 먼저 모든 장로교회 교단간의 일치를 이룬다는 사실 자체가 허상일 수밖에 없다. 신학적으로 출발부터 진보입장을 취해 온 기독교장로회와 보수적 입장을 지켜온 고신이나 합동측 장로교회가 어느 한편에서 자기의 신학적 입장을 포기하지 않는 한 일치에 이를 수 있는 길이 있으리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혹 교권이나 다수의 세력을 가지고 교회의 일치를 강행한다고 하자. 그 때는 더 많은 분열이 있게 될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교회일치를 누구 못지 않게 주장해 온 민경배 교수가 지난 5월 29일 한국장로교연합을 위한 평신도초청간담회에서 ‘장로교연합운동과 과제’라는 발제강연 중 “교회연합운동에 있어서 인위적인 일치는 의미도 없고 불가능한 일이므로 장로교연맹 형태의 협조적 협동적 기구의 활성화와 장로교협의회 같은 협의체 형태의 연합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한 말은 오히려 현실적이라 할 수 있다. 교회일치를 현실성 있게 추구하려면 신학과 신앙고백과 신앙이 같은 교단들끼리의 일치운동에 나설 것이다. 한목협의 일치운동은 너무도 혁명적인 것이다. 한목협의 교회일치를 위한 새 신학의 생산을 주장함으로 이상 더 교회를 혼란으로 몰아가지 않아야 한다.

△ 침묵하는 보수교계

한목협은 신학적으로 진보적 교계를 대표하는 당시 대한기독교교회협의회(NCC) 회장 정철범 대주교와 보수적인 교계를 대표하는 한국기독교 총연합회 대표회장 지덕 목사의 격려 메시지로 축복을 받으면서 창립되었다(위 자료집, 22-25쪽). 이로서 진보와 보수 양 연합기구는 정체성과 그 구별된 존재의미를 잃어버렸다. 그러기에 한목협은 앞서 언급한 5월 29일의 ‘한국교회 화합과 일치를 위한 선언’에서 “한국의 사회와 민족을 향하여 기독교를 대변할 수 있는 단일 기구를 기다린다”고 했다. 그런데 무엇보다 진보 보수교회들의 무조건적 교회일치를 부르짖는 한목협의 선두주자들이 한국장로교계에서 신학적으로 가장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해온 합동과 고신측 교회에 속한 목회자들(목회자협의회)이라는데 상당한 당혹감을 갖게 된다. 그리고 이 양 교단의 지도자들이 지금까지 한목협이 추구하는 보수 진보 신학을 뛰어넘을 뿐 아니라,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를 뛰어넘는 새 신학의 생산, 모든 교파를 포괄하는 일치운동에 대해 별 반응을 나타내지 않고 있음을 보면서 한국 보수교회의 위기 의식을 갖게 된다. 화해 통일을 부르짖는 한국의 현 정치적 사회적 환경 속에서 교회도 화해와 일치라는 힘찬 물결에 맥없이 휩쓸려 가고 있지 않는가 여겨진다. 교회는 본직적으로 세상과 다르다. 교회는 세상의 거센 흐름 속에서도 주어진 진리를 파수하고 참 교회로서의 모습을 굳건히 지켜갈 때 그 나라와 민족에게 복이 되는 것이다.

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대표회장: 김경희 목사) 2000년 1월 신년하례회의 예배 설교는 김의환 목사가 하였다.50) 그러나 김의환 목사는, 자유주의자들과 협력하는 빌리 그레이엄의 전도 방법을 비평하지 않는 신복음주의 정신을 가진 자이다. 예장연은 바른 분별력을 가진 것 같지 않다.

각종 연합모임들

한국 기독교 교단 총무회(회장: 김상학 목사)는 2000년 3월 7일 한국교회 백주년 기념관에서 회의를 열고 교회 연합운동에 최선을 다하기로 하고, 교회협과 한기총의 연합 움직임에 적극 협력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교단 총무회는 회장에 김상학 목사(예장통합), 부회장에 서성수 목사(예장합동), 총무 심군식 목사(예장고신), 서기 한창영 목사(예장합동보수), 회계 박봉규 목사(예장 개혁합신), 감사에 양회협 목사(침례교), 이요한 목사(감리교)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51)

한국장로교 총연합회(대표회장: 예장합동 김도빈 목사) 2000년 한국장로교대회 준비위원회는 5월 1일 장신대 대회의실에서 가입교단 신학대학원 원우회장 제2차 회의를 갖고 한국장로교회는 한 형제, 자매임을 확인하는 자리를 가졌다고 한다. 그 회의에서 신학대학원 원우회장들은 한국장로교회의 화해와 협력, 연합과 일치를 위한 계기를 마련코자 실시되는 2000년 한국장로교대회에 적극 참여하기로 결의했다. 이 날 참석한 원우회장들은 예장통합측, 예장합동측, 예장고신측, 기장측, 예장 개혁측 등 11개 교단 신학대학원 원우회장들이라고 한다.52) 보수적인 예장합동, 예장고신, 예장개혁 등의 신학생 원우회장들이 이런 유의 잘못된 교제와 협력에 분별력 없는 선배 목사들을 뒤따라 합세하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한국 장로교단들에 속한 총회신학대학원, 장로회신학대학원, 한국신학대학원, 고려신학대학원, 합동신학대학원, 기독신학대학원, 국제신학대학원, 대한신학대학원, 중앙신학대학원, 합동중앙신학대학원, 개혁신학대학원 등 11개 신학대학원 학생들은 2000년 9월 20일 기독신학대학원에 모여 ‘한국 장로교 신대원생 협의회’를 결성하였다. 그들은 다양한 신학적 색채를 반영하기 위해 1인 대표체제를 지양하고 총회신학대학원 이재윤, 장로회신학대학원 고창준, 기독신학대학원 김상민 등 3명을 공동대표로 하는 복수지도체제를 출범시켰다. 이 단체는 한국 장로교회의 일치와 연합을 위한 공동사업에 힘쓸 것이라고 한다.53) 이것은 잘못된 교제와 협력이다.

한국장로교 총연합회는 9월 18일 한국교회 100주년 기념관에서 “2000년 장로교대회 선언문”을 발표하고 “한국 장로교회는 만국 교회 앞에 하나”라고 천명했다. 또 그 선언문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 위에 특정 시대의 인간의 교리나 세속 이념을 두어 온 죄와 교권을 가지고 그것을 구실로 분열해 온 죄를 뉘우치자”는 말이 있다.54)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위에 특정 시대의 인간의 교리를 둔다’는 말이 성경적, 역사적 기독교 근본교리들을 지키려는 보수신학을 비난하는 자유주의적 사상을 반영한 것이라면 단호히 반대해야 한다.

2002년 6월, 예장통합, 예장합동, 기장 등 21개 교단 신학자들로 구성된 장로교 신학회가 창립되었는데, 초대회장에 선출된 이종윤 목사는 취임소감에서 “장로교가 수많은 교파로 분열된 것은 한국교회의 부끄러운 현실적인 자화상이다”고 말하며 “이번 장로교 신학회의 창립을 통해 장로교가 분열을 극복하고 선교 초기처럼 하나가 되어 새 시대에 복음전파에 주역이 됐으면 한다”고 했다.55) 이종윤 목사가 예장합동에 소속했다가 예장통합으로 옮긴 것부터가 옳지 않다. 또 30여명의 신학자들이 참석한 창립대회에서 선출된 임원진 중에 황창기 고신대학교 총장, 오덕교 합동신학대학원 교수, 김인환 총신대학교 교수 등이 섞여 있다. 예장통합, 합동, 기장 등이 모여 무슨 공통적 장로교 신학을 추구한다는 말인가? 자유주의 신학은 이단이므로 그런 신학사상을 가진 자들과 함께 장로교 신학을 논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옳지 않다.

2002년, 한국교회 연합을 위한 교단장 협의회가 각 교단에게 제안했던 ‘한국교회의 통일된 연합체 구성 추진’ 헌의안이 23개 회원교단 중 15개 교단의 총회에서 통과되었다. 통과시킨 총회는 예장합동, 예장통합, 기장, 예장고신, 예장 개혁(광주), 예장 개혁(국제), 예장 대신, 예장 합신, 예장합동정통, 기성, 예성, 기침, 기하성, 그리스도의 교회 한국교역자회, 하나님의 교회 등이다. 나머지 8개 교단 중, 구세군, 예수교 복음교회,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협의회, 나세렛 성결교회는 임원회 등에서 결의되어 총회 인준만 남겨두고 있고, 기감, 기독교 대한복음교회, 기독교 한국루터회, 예장 순장은 불명확하나 무난히 통과될 전망이라고 한다.56) 그러나, 오늘날 가장 파괴적인 이단은 예수 그리스도의 기본적 사실들을 부정하는 자유주의 신학이다. 이것이 바로 기장, 기감, 예장통합 등에서 가르치는 신학이다. 성경은 이단을 포용치 말라고 말하였고 성경의 명백한 교훈을 무시하고 규모 없이 행하는 자들도 포용치 말라고 엄히 경계하였다.

복음주의자협회(NAE)

박형룡 박사는 NAE에 대해, NAE는 세계복음주의협의회(WEF, 오늘날 세계복음주의연맹[WEA])의 각국 지부의 명칭으로서 “WCC 에큐메니칼 이단을 묵인하고 신복음주의를 선포하며 배도교단 안에 머무는 자유주의 타협자들의 집단행동이요 한국 정통장로교단에서는 총회의 금령에 위반하는 불법행동이다”라고 말하며57) 다음과 같은 요점으로 비평하였다.

NAE는 신복음주의자들을 중심으로 한 운동이다. 해롤드 오켕가가 미국 NAE의 초대회장이었다. 그는 “금일에 NAE는 일반적으로 신복음주의자들로 알려진다”고 말하였다.58) 1957년 해롤드 오켕가는 자신이 신복음주의라는 말을 처음 만들었고 그 후 약 26개국의 NAE 결합하여 WEF를 조직하였다고 말했다.

NAE는 이단을 묵인하고 선포하며 배도교단 안에 머무는 타협자들의 집단이다.59) NAE 창립자들의 절대다수는 비평에 기초한 연합에 흥미를 가지지 아니하였다. NAE는 교리적으로 타락한 교회 안에, WCC 에큐메니칼 협의회 밑에 머물러 있으면서 자유주의 이단을 묵인 내지 선포하는 사이비 보수주의자들의 단체이다.

NAE는 세계전도대회에서 용공적 태도를 취했고 그 지도자들이 친공적 활동을 하였다.60)

박형룡 박사는 “NAE 운동비평”이라는 글의 결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우리 교단 교역자들이 NAE에 가담하여 활동하는 것은 총회결의에 위반하는 불법행동인 동시에 신자유주의 내지 신이단인 신복음주의에 따라감으로 우리 교단의 신학노선을 자유주의화하는 악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악에 참여하지 말고 멀리 피해야 할 것이다. 우리 총회 산하 교역자들 중에서 방금 실행되고 있는 NAE 불법운동을 그대로 묵과하여 두면 멀지 않은 장래에 우리 교단 안에도 미국에서와 같이 신복음 자유주의 이단신학의 창궐, 각종 이단이설의 허용, 용공친공활동의 성행으로 인하여 우리 교회 본래의 정통신학노선은 잃어지고 말 것이다. 우리 교회의 파수꾼들은 정신차려 일어나 이 위험한 NAE 불법운동을 하루 바삐 물리쳐야 한다.61)

그러나 박형룡 박사의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다. 오늘날 예장합동 교단과 목사들은 한국기독교총연합회나 한국복음주의협의회에 속해 있고 세계복음주의연맹(WEA)에 연관되어 있다. 오늘날 예장합동 내에서는 박형룡 박사의 입장과 분별력을 지키려고 애쓰는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 같다.

NAE의 첫 번째 문제는 자유주의적인 NCC와 WCC와 회원들이 중복된다는 점이다. 미국 NAE는 오래 전부터 자유주의 교단들에 속한 지교회들을 회원으로 받아들였다.62) 미국 NAE의 사무총장인 빌리 멜빈은 1982년에 한 인터뷰에서 “우리의 20명의 역대회장들 중에서 6명은 대교단 출신이었다”고 말했다.63) 성경 무오와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 교리를 포함한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부정하는 자유주의 신학사상을 가진 마틴 마티는 1992년 미국 NAE에서 강연하였다.64) 미국 NAE 회장 돈 아규(Don Argue)는 그 단체가 생긴 이래 처음으로 한 이슬람교 지도자와 함께 자유주의적 미국교회협의회(NCC) 총회에서 연설하였다.65) 이것은 잘못된 교제이다.

미국 NAE 회장이며 자유감리교회 감독인 케빈 매노이아(Kevin Mannoia)는 경계선을 넓혀서 전통적 복음주의 영역 밖에 있는 양립할 수 있는 견해들을 가진 자들을 포함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많은 복음주의적 연합감리교인들이 NAE에서 편안함을 느낄 것이라고 언급했다.66) 또 그는 “우리는 판별 시험법들을 찾을 필요가 없다. 우리는 벽돌담들을 말뚝 울타리들로 대치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NAE 이사장 레이머 베스트는, NAE가 기독교를 적절하게 만들 새로운 도전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67)

미국 NAE는 이제 자유주의적 교회협의회 소속 교단들을 회원으로 받아들인다. 그 단체는 최근 회원 교단들이 자유주의적 교회협의회에 이중 회원권을 갖지 못하게 금하는 규정을 취소하였다. 그러자 교회협의회에 소속한 미국 개혁교회는 미국 NAE에 회원권을 신청하였다. NAE 회장 케빈 매노이아는 NAE의 존재 이유가 자유주의를 대체하는 단체를 제공하는 데서 교회들을 일깨워 변혁시키는 데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크리스챤 뉴스 편집자 헤르만 오턴은, “NAE 안에 있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NAE가 NCC 교회들을 용납하는 것을 강력히 항의해야 한다. 만일 그 단체가 그 방침을 변경하기를 거절한다면, 그들은 그 단체를 떠나야 할 것이다”라고 조언했다. 무디 성경학교 교장 죠셉 스토웰은 몇 년 전 NAE에 가입했었다.68)

NAE 회장 케빈 매노이아는, “계속 우리 자신을 자유주의적 단체들과 반대되는 것으로 정의하는 것은 자유주의자들의 중요성을 합법화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정체성을 없어져 가는 한 이유에 묶어 놓는 것이다,” “지금은 쇠해가는 대적(예를 들어, NCC)과의 부수적 싸움을 싸울 때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자유주의자들과의 싸움은 단지 ‘부수적’ 싸움이 아니고 매우 중요한 싸움이다.69)

미국 NAE는 배교자이며 보편구원론자인 로버트 슐러를 초청하여 2004년도 대회에서 연설하게 하게 하였다. NAE의 신임회장인 테드 해가드는 다음 대회는 대형교회를 다룰 것이며 슐러의 수정교회가 그런 교회라고 말했다.70) NAE 제61차 연례대회가 콜로라도 스프링스의 뉴라이프 교회에서 열렸는데, 주강사 중 하나는 로버트 슐러이었다. 그는 자기 존중(self-esteem)에 대해 전한 그의 설교 전에와 후에 기립박수를 받았다. 이런 인물을 강사로 세우는 것을 보면 미국 NAE는 확실히 심각하게 병들어 있다.71)

로버트 슐러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의 자아 존중 철학(self-esteem philosophy)에 맞추어 재해석한다. 그의 복음은 부정적 자아 개념을 긍정적 개념으로 바꾸는 것이다. 죄는 단지 자아 존중의 결여이다. 슐러에게 가장 큰 악은 사람들을 죄인이라고 부르며 그럼으로 그들의 자아 존중을 손상시키는 것이다. 슐러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믿는 보편구원론자이다. 자아 존중: 새 종교개혁이라는 그의 책에서 슐러는, “인간 영혼의 중심은 악이라고 말하지 말라. . . . 긍정적 기독교는 인간의 부패성을 주장하지 않고 단지 인간의 무능력을 말한다”(67쪽), “다시 난다는 것은 우리가 부정적 자아상으로부터 긍정적 자아상으로 변화되는 것이다”(68쪽), “죄는 나 자신이나 다른 인간 존재에게서 그의 자아 존중을 빼앗는 모든 행위나 생각이다”(14쪽), “지옥이 무엇인가? 그것은, 자연히 하나님과의 분리를 가져오는 자부심의 상실이다”라고 말하였다(14-15쪽).72)

2003년 미국 기독교회협의회(ACCC)는 다음과 같은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가든 그로우브의 크리스탈 대성전의 목사요 180개국 이상의 수백의 방송국에서 2천만명 이상의 시청자를 가진 첫 번째 TV 설교자 로버트 슐러는 2004년 3월 콜로라도 스프링스에서 열릴 복음주의자협회(NAE) 제62차 연례 모임의 강사일 것이다. 슐러 씨의 참여는 NAE의 해로운 포용 정책을 한층 더 증명한다. 수년 동안 그 단체는 그 프로그램들을 위해 많은 강사들을 접촉하였지만, 내년은 다르다. 로버트 슐러는 거짓 선지자, 양의 옷을 입은 늑대이다! ‘내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서 자기 존중을 빼앗는 모든 것’이 죄라고 보는 그의 잘못된 죄의 정의는 그로 하여금 은혜의 복음을 부정하고 왜곡하게 하였다. 사람의 가장 큰 필요는 자기 존중이 아니고 거듭남이다. 우리 주님은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고 말씀하셨다(마 7:15). 슐러의 가능성 사고는 노만 빈센트 피일의 적극적 사고와 다르지 않고 그것들은 둘 다 오류이다(벧후 2:1; 요일 4:1)! . . . 우리는 구원이 은혜로만 오며 믿음을 통해서만 얻고 그리스도 안에만 있음을 믿는다!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배교(슐러)로부터의 또 배교와 타협하는 자들(NAE)로부터의 성경적 분리에 대한 우리의 확신을 재확인한다. 우리는 또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NAE의 위험, 특히 거짓 선지자를 그 연례 모임에 강사로 초청하는 이런 최근의 타협을 상기시키는 바이다.73)

또 미국 NAE는 은사주의를 포용한다. 1993년 카리스마지는 NAE 회원교회들 중에 오순절파 교회들이 약 51퍼센트를 차지한다고 말했고, 어떤 보고서는 80퍼센트를 차지한다고 했다.74) NAE 회장이며 자유감리교회 감독인 케빈 매노이아(Kevin Mannoia)는 NAE는 죤 윔버의 빈야드 같은 은사운동들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고,75) 또 자신은 ‘보다 넓은 복음주의 운동 안에서’ 은사주의자들과 비은사주의자들 간에 일치의 다리를 놓기를 원한다고 했다.76)

1999년 7월 미국 복음주의 협회 회장이 된 케빈 매노이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복음주의자’라는 말은 보통 인정되는 것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적용된다. 한편에서는 미합중국 장로교회 등의 자유주의적 대교단들이 있다. 그 다음에 은사주의적인 천주교인들과 감독교인들이 있다. 나는 그들이 다 편안하게 받아들여지기를 원한다. 프로미스 키퍼스와 웃는 부흥을 낳은 빈야드 같은 기타 단체들도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복음주의자라고 믿지만 그렇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고 느낀다. . . . 우리는 포용적이기를 원한다. 물론 절대적 진리들이 있다. 우리는 성경의 권위를 타협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더 많은 교회들과 지도자들을 포함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찾고 있다.77)

미국 NAE의 가장 최근의 회원교단은 은사주의적인 빈야드 교회 연합회이다.78) 미국 NAE 제61차 연례대회가 콜로라도 스프링스의 뉴라이프 교회에서 열렸다. 그 교회는 은사주의적 대형교회이며 그 교회의 목사인 테드 해가드는 그 협회의 회장이다.79)

미국 NAE는 천주교인들도 포용하기를 추구하는 것 같다. 콜슨/뉴하우스가 만든 ‘복음주의들과 천주교인들과 함께’(ECT)라는 문서는 복음주의자들과 천주교인들 간의 다리 놓기의 한 예이다. 미국 NAE의 전 회장 존 화이트(John White)는 그 문서에 서명했고 천주교인들을 복음주의자들 가운데 ‘가장 가까운 친구’라고 불렀다.80)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이 사후에 멸절한다고 믿는 안식교가 미국 NAE의 정회원으로 있다. 또 1997년 미국 NAE는 ‘전세계 하나님의 교회’(Worldwide Church of God)라는 교단을 회원교회로 받아들였는데, 그 교단이 여러 방면에서 복음주의적이게 보이며 허버트 암스트롱(Herbert W. Armstrong)의 어떤 이단적 교리들을 버렸고 이제 삼위일체 신앙을 고백한다고 소개되었다. 그러나 그 교단은 여전히 영원한 지옥 형벌의 교리를 거절하고, 유대교적 안식일 준수를 고집하며, 사람이 죽은 후 구원의 두 번째 기회가 있다는 비성경적 가르침을 받아들인다.81) 지옥에 대한 그들의 결함 있는 가르침에 대한 추가적 증거는 크리스챠니티 투데이(Christianity Today) 1997년 8월 12일자에서 그 교단의 교역자 양성원의 한 이사의 견해를 통해서도 찾아볼 수 있다.82)

세계복음주의연맹(WEA)

세계복음주의연맹(World Evangelical Alliance=WEA)은 1951년 각국의 복음주의협의회(NAE)들이 모여 조직된 세계복음주의협의회(World Evangelical Fellowship=WEF)가 2001년 명칭을 변경한 것이다. 2013년 현재, 이 단체는 세계 128개국에 속한 복음주의협의회들과 104개의 국제적 기관들이 가입된 조직이라고 한다.83) 한국에서는 한국복음주의협의회와 한국기독교총연합회가 가입되어 있다. 그러므로 앞에 말한 NAE의 문제점들은 곧 WEA의 문제점들이다.

1980년 3월, WEF 제7차 정기총회에서 사무총장 얼드론 스코트는 실행위원회의 허락 아래 두 명의 로마 천주교회 대표에게 개회인사를 하도록 초청하였다. 이 일로 인해 WEF에 속했던 이탈리아 복음주의협회는 회원권을 취소하였고, 스페인 복음주의협회는 WEF의 참여를 중지하였다.84)

세계복음주의협의회 회장 데오도르 윌리암스(Theodore Williams)는 세계복음주의협의회 뉴스레터 1993년 8월호에서 이렇게 말했다: “세계교회협의회(WCC) 소속 교단 내의 복음주의자들은 그대로 머물러 복음주의 입장을 취하고 그 교회 안에 복음주의적 영향을 끼치려고 해야 한다.”85) 이것이 바로 신복음주의-복음주의적 정신이다. 자유주의 신학을 고의적으로 포용하고 자유주의자들에 의해 교단이 장악되어 있는 교회들 안에 그대로 머무르라는 권면은 교제의 단절 즉 분리에 대한 성경의 교훈에 위배된다.

2011년 6월 28일, WCC와 WEA와 로마 교황청은 “다종교 세계에서의 기독교 증거”라는 공동선교문서를 발표했다.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선교는 교회 존재의 중심에 있다. 선교를 위한 교회는 선교적인 교회여야 한다. 즉 종교들 서로간의 대화를 통하여 진정한 우주적인[세계적인] 교제를 이끌어내는 교회여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 크리스천들은 기독교의 주체성과 신앙을 강화하도록 서로 격려는 하되 타종교에 대한 이해와 지식을 두텁게 하고 타종교가 지지하는 시각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다른 종교 단체들과 함께 정의와 공익을 위하여 범종교적 시민단체활동에 참여하고 여러 상황에 처한 사람들과 연합하는 일에 협력하여야 한다.”86)

“타종교에 대한 이해와 지식을 두텁게 하고 타종교가 지지하는 시각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하니, 이것이 올바른 사상인가? 신명기 12:30은, “너는 스스로 삼가서 네 앞에서 멸망한 그들의 자취를 밟아 올무에 들지 말라. 또 그들의 신을 탐구하여 이르기를 이 민족들은 그 신들을 어떻게 위하였는고 나도 그와 같이 하겠다 하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성경은 분명히 이방종교들이 헛됨을 가르치며(시 96:5; 렘 10:11), 그것들이 마귀적이며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고 증거한다(렘 51:44; 고전 10:20; 엡 2:2-3; 요일 5:19).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와 구원의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2012년 10월 22일, WEA와 WCC가 기독교학술원(원장: 이종윤 목사) 주최로 국제심포지엄을 열었다. WEA 신학위원장 토마스 슈르마허는 대화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도 연합과 대화에도 주의할 점이 있다고 말하며 “교회의 진리를 양보하거나 세계 선교를 포기하게 하는 대화는 기독교 자체를 부정하게 만든다”면서 “예수 그리스도, 복음,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절대적인 진리를 유보하는 대화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못박았다. WCC 프로그램위원장 마틴 로브라 박사는 “WCC가 과거와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면서 특히 우리의 관심이 선교와 전도로 옮기고 있어 복음주의권과의 교류가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WEA 김상복 회장은 연합을 강조하며 “복음 안에서는 모든 형제라는 것을 인정하자”고 말했다. 또 그는 조직이 다를 수 있으나 “세계 선교를 위해서는 연합이라는 하모니를 이뤄야 한다”고 말하였다.87) 그는 WCC나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심각한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고 모두가 다 동일한 복음을 가지고 선교 활동을 할 수 있는 것같이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기독학생회(IVF)

미국과 캐나다의 IVF[기독학생회]가 후원하는 3년마다 모이는 2000년 12월 27일-31일의 집회를 위해 거의 2만명의 대학생들과 젊은이들이 어바나-샴페인의 일리노이 대학교에 모였다. 거기 참여한 거의 90개의 교단들은 자유주의, 에큐메니칼, 신복음주의 및 은사주의 등 뒤섞인 단체들의 일부이었다. 학생들은 풀러, 베델, 애즈베리, 고든-콘웰, 덴버, 비올라, 그레이스, 그랜드 래피즈, 무디, 위튼, 웨스트민스터, 미국 침례교회(American Baptist), 그리고 하나님의 성회 등 타협적 단체들의 많은 학교들을 대표하였다. 기관들은 감독교회, 복음주의 루터교회, 미합중국 장로교회, 미국장로교회, 침례교회 등을 대표하였다. 대학생선교회, 어린이 전도협회, 새 종족들(New Tribes), 티임(TEAM) 등의 종교 단체들은 청년들을 자기들의 기관들로 모집하려고 애썼다. . . . 어떤 부분들에서는 복음이 성경적으로 정의되었지만, 다른 부분들에서는 그 핵심으로 사회적 행동 계획들과 인종 화해를 포함하는 것으로 정의되었다. 토니 에반스는 한 비디오에서, “백성들이 먹을것을 공급받지 못하는 곳에서 부정(不正)의 문제에 대해 말하지 않는 복음은 복음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새 개정표준역(NRSV) 성경이 모든 참석자에게 주어졌다. 예배팀 밴드는 큰 소리의 CCM/록음악을 제공하였다.88)

이것이 오늘날 IVF뿐 아니라, CCC나 다른 대학생 선교단체들의 거의 공통적 현상이다. 무분별한 타협주의가 기독교의 모든 영역에 창궐하고 있는 것 같다. 주의 신실한 종들과 교회들이 이 점에 대해 심각한 문제의식을 갖지 않으면, 성경을 믿는 교회들도 급속히 속화하게 될 것이며 교회의 거룩한 능력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며 교회들은 더 이상 참된 교회가 되지 못할 것이다.


3. 복음주의 잡지와 학교들

자유주의와 천주교회에 대한 포용적 태도는 복음주의 잡지들과 학교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현상이다.

크리스챠니티 투데이(Christianity Today)

크리스챠니티 투데이지는 빌리 그레이엄에 의해 신복음주의 정신을 가지고 창간되었고 빌리 그레이엄이 이사장이며 신복음주의의 대변지로서 계속 활약해 왔다.

복음주의 잡지 크리스챠니티 투데이 1981년 10월호 사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들(가톨릭 교인들과 복음주의자들)이 복음의 의미와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를 주는가를 토의할 때, 우리는 공통 신앙을 소유했다는 것이 넘치게 자명해졌다. . . . 전통적 로마 가톨릭 교인들은 은혜만의 교리를 받아들이고 있다. . . . 그들(가톨릭 교인들과 복음주의자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받으셨다는 그분의 약속을 서로 나누고 있으며, 그러므로 그들은 곧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서로를 용납하는 것이 옳다.89)

크리스챠니티 투데이 1998년 4월 6일자에는 ‘여섯 개의 영감 있는 비디오 세트’에 대한 전면광고가 실렸고, 그 중의 하나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라는 제목이다. 이것에 관한 광고문은 다음과 같다: “이 영감을 주는 비디오 선집은 가장 사랑받는 종교지도자들 중의 한 사람과 연합하도록 여러분을 초청한다.”90) 천주교 교황이 오늘날에도 참된 기독교에 가장 혼돈을 주는 인물 중 하나라는 것을 아는 자들은 이런 유의 광고가 얼마나 나쁜 일인가 잘 알고 있다.

크리스챠니티 투데이 1998년 9월 7일자는 레이몬드 브라운 신부의 신약개론을 높이 추천했고 “그는 오늘날 신약학의 탁월한 종합적 지식을 제공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브라운은 예수께서 전지(全知)하신 하나님이 아니셨고 오류를 범하셨다고 말한 천주교 자유주의 신학자이었다. 또 그는 성경의 무오성을 거부했고 세계교회협의회에서 활동적이었고, 1971년 미국 뉴욕의 자유주의적 유니온 신학교에서 최초로 종신직 천주교 교수가 되었다.91) 그러나 이것이 복음주의이다. 그런데 크리스챠니티 투데이지의 자문편집위원들 속에는 무디 성경학교의 죠셉 스토웰, 워런 위어스비, 미국 근본주의 독립교회(IFCA)의 에드 답슨 등이 천주교인들과 더불어 들어 있다.92)

드류 대학교 교수이며 크리스챠니티 투데이지 실행편집인인 토마스 오우덴(Thomas Oden)은 2002년 8월 5일자 크리스챠니티 투데이지에서 일치를 옹호하며 말하기를, 세계교회의 거의 절반은 자유주의적이지 않고 복음주의적이며 은사주의적이고 오순절파적이라고 한다. 그는, “소수의 복음주의자들이 WCC 위원회에 보이지만, 이들은 [WCC의] 제네바 사무실에 대해 실제적인 비판을 하지 않을, 그리고 그들의 참석으로 인해 WCC가 복음적으로 받아들일 만하게 보이는, 전형적으로 ‘안전한’ 복음주의자들이다”라고 썼다. 오우덴은 이것이 목적을 달성치 못할 것이며, “WCC가 중도파 복음주의자들을 동등한 파트너로 받아들이기 전에는 건설적 참여가 있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왜 복음주의자들은 배교적 WCC와 ‘멍에를 같이하려’ 하는가? 하나님께서는 분리를 명하신다.93)

2003년 실행편집자 토마스 오우덴은 WCC가 세계복음주의연맹(WEA)을 ‘동반자’로 받아들이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세계적 기독교 포럼은 WCC를 넘어서 복음주의자들, 오순절교인들, 천주교인들, 헬라정교인들을 포함하는 것 같다.94) 또 그는, “이상하게도, 자유주의자들과 복음주의 개신교인들 간보다 복음주의자들과 천주교인들 간에 대화가 더 많다”고 말한다.95

미국, 풀러(Fuller) 신학교

미국의 풀러 신학교는 초창기부터 신복음주의 정신으로 운영되었다. 1950년대에 교장 E. J. 카넬은 “참 제자의 표는 사랑이요 교리가 아니다”라고 말했다.96) 그러나 교리와 생활을 분리시키는 것은 잘못이며 바른 교리를 버리는 것은 참 제자의 표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풀러 신학교의 1984-85년 요람은 천주교 레이몬드 브라운 신부를 강사로 열거하였다.97) 그러나, 브라운은 예수께서 전지(全知)하신 하나님이 아니셨고 오류를 범하셨다고 말한 자유주의 신학자이었다. 또 그는 성경의 무오성(無誤性)을 거부했고, 세계교회협의회(WCC)에서 활동적이었다. 그는 1971년 미국 뉴욕시의 자유주의적 유니온 신학교에서 최초로 종신직 천주교 교수가 되었다.98)

풀러 신학교는 처음에는 성경의 무오성을 옹호했으나, 어느 날 이 교리를 거부하였고, 또 은사운동을 조장하기 시작하였다.99) 이 학교는 오늘날 여성 안수를 강하게 지지하고 있다.100)

풀러 신학교에서 설교를 가르치는 여자 목사요 저술가인 마가렛 서스터는 1999년 4월 20일 안식교가 후원한 위성 생중계 ‘대화식 세미나’를 위한 초청 설교자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101)

아더 후크는 1999년 7월 27일 풀러 신학교를 방문하고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그는 신학부의 인기 있는 죤 골딘게이 교수의 강의실에 참석했는데, 골딘게이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여리고성이 있었고 그 성벽들이 무너져 내렸다는 고고학적인 증거는 없다. . . . 아마 이것은 비유일 것이다.” 그것은 성경에 대한 불신앙이다.102)

미국의 풀러 신학교의 포커스(Focus)지는 한 천주교 수녀의 풀러 신학교 학생으로서의 경험에 관해 인터뷰를 했다. 그녀는 말하기를, “나는 풀러가 여성으로서 심각히 목회에 쓰임받기를 원하는 천주교 여성이 공부하기에 좋은 곳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조지 마스든은 풀러 신학교가 100개 이상의 신학적 전통들을 포용하며 “복음주의적 에큐메니칼 성격에 대한 놀라운 성취”에 있어서 유명하다고 말했다. 풀러 신학교는 성경 무오의 교리를 더 이상 주장하지 않고103) 여자 목사 안수를 권장하며 현대 은사운동에 대해 개방적이다.104)

2013년 8월 13일자 크리스천포스트에 의하면, 풀러 신학교(총장: 마크 래버튼)는 심지어 동성애자, 양성애자, 성전환자 등 성소수자로 구성된 동아리인 원테이블(One Table)을 공식 승인하였다.105)

미국, 달라스(Dallas) 신학교

1992년 2월 4일부터 7일까지,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의 브루스 메츠거 교수는 달라스 신학교에서 강연하였다. 그러나 메츠거 교수는 성경의 진실성과 역사성을 믿지 않는 자유주의 신학자이다.106)

달라스 신학교는 위클립(Wycliff) 성경번역 선교회와 협력하는데, 위클립 성경번역 선교회는 오래 전부터 천주교인들, 자유주의 교단들, 및 신복음주의자들과 친근하다.107) 그것이 교제의 문제이다.

빌리 그레이엄 전도협회와 관계하여 31년간 봉사했고 세계복음화 로잔위원회 명예 평생회장인 레이턴 포드는 1997년 5월 달라스 신학교 졸업식 연사이었다. 크리스챠니티 투데이지 협동편집자 앨리스터 맥그레이스는 1997년 달라스 신학교 경건회에서 그리피스 토마스 기념강연을 하였다. 달라스 신학교 교장 척 스윈돌은 1997년 10월의 한 서신에서 테레사 수녀를 ‘주목할 만한 여인’이라고 불렀다. 사람들을 잘못된 종교체제로 인도하는 자를 ‘주목할 만한 자’라고 칭송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달라스 신학교 교수들은 1997년에 프로미스 키퍼즈 집회에서 그리고 휘튼 대학, 무디 성경학교 및 브라이언 대학에서 강연하였다. 오늘날 달라스 신학교가 신복음주의적 궤도 안에 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108)

2001년 12월, 미국 복음주의 신학회의 회장인 달라스 신학교 교수 대럴 보크는 ‘열린 유신론’(open theism)의 교리를 거부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토론 중 복음주의 신학회 앞에서 한 연설에서 “복음주의 운동을 위해 날카로운 경계선들이 그어져서는 안 된다,” “복음주의는 경계선들에 의해서보다 중심에 의해서 더 정의되는 ‘초원 위의 마을’에 비교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열린 유신론’이란 하나님께서 미래에 일어날 모든 일들을 다 아시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잘못된 사상이다. 보크는 미국 복음주의 신학회가 채택한 ‘열린 유신론’을 정죄하는 구속력 없는 결의문도 반대하였다.109)

오하이오 성경협의회는 달라스 신학교에 대한 다음과 같은 결의안을 통과하였다. “달라스 신학교는 그 설립 때부터 배교한 교단들 안에 머무는 것을 옹호하였고, 단순히 ‘적극적 진리를 제시함’으로써 교회적 분리와 전투성을 거부하였고 . . . 그것의 교수들과 경건회 설교자들과 출판물들을 통해 목사들과 그 신학생들에게 신복음주의를 가르친다.”110)

미국, 무디(Moody) 성경학교

무디 성경학교 교장 죠셉 스토웰은 1996년 5월 1일 미국 워싱턴 D.C. 부근에서 모인 전국 전도협의회에 참석하였고 거기에서 그는 참석자들에게 하나님께서 그의 몸이 연합될 때만 역사적으로 움직이셨음을 상기시켰다. 당시 전도협의회의 회장이었던 죠 앨드리히도 연합은 모든 영적인 질병을 위한 보편적 치료약이라고 주장하였다.111)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연합을 진리보다 더 높이지 않는다. 오류 안에서 연합하는 것보다 진리 때문에 나뉘는 것이 더 낫다.112)

무디 동창회보(Moody Alumni)에 의하면, 무디 성경학교장 죠셉 스토웰의 1999년 9월부터 2000년 2월간의 순회설교 일정은 프로미스 키퍼스, 빌 하이벨즈의 윌로우 크릭 커뮤니티 교회, 빌리 그레이엄의 코우브(The Cove), 미국 종교 방송협회, 달라스 신학교, 생명의 말씀사, 시다빌 대학(정규침례교회 총협의회의 인준학교) 및 루이지애나 침례교대회 등을 포함한다. 스토웰은 조용한 전진으로 에큐메니칼 유산을 건립하고 있다.113)

죠셉 스토웰과 침례교회세계연맹의 데니스 로츠는 빌리 그레이엄 전도협회의 이사회에 추가되었다.114) 그는 빌리 그레이엄이 설립자요 이사장인 크리스챠니티 투데이지의 자문편집인이다. 스토웰은 빌리 그레이엄 훈련센터에서 강연하였고, 그레이엄은 무디 성경학교의 100주년 기념행사에서 강연하였다. 스토웰은 미국복음주의자협회(NAE)의 회원이며 프로미스 키퍼즈와 남침례교회에 관련된 행사들에서 강연하였다. . . . 죠셉 스토웰이 수년 동안 무디 성경학교를 신복음주의와 에큐메니칼 운동 안으로 인도한 것은 슬픈 일이다.115)

미국, 고든-콘웰(Gordon-Conwell) 신학교

척 콜슨과 루이스 팔라우는 1999년 5월 1일부터 유효한 미국 고든-콘웰 신학교의 이사들로 선출되었다. 친(親)천주교적 교회연합운동가들로서, 그들은 고든-콘웰의 신복음주의적 입장에 잘 맞을 것이다. 빌리 그레이엄은 고든-콘웰의 이사장으로 일해 왔고 고든-콘웰은 지난 5년에 걸쳐 빌리 그레이엄 전도협회로부터 4백만불의 장학금을 받았다. 고든-콘웰의 힐탑(Hilltop)지는 죤 암스트롱, 앨리스테어 벡, 그리고 케이 아서 등의 교회연합운동가들을 가을학기 강사들로 열거한다. 지난 여러 해들에 고든-콘웰은 미국 유니온 신학교의 제임스 포브즈 등 자유주의 연사들을 강단에 세웠었다.116)

미국, 베델 신학교

미국의 베델 대학 및 신학교의 신학 교수이며 우드랜드 힐즈 침례교회의 목사인 그레고리 보이드 박사는 하나님의 예지(豫知)와 전지(全知)에 의문을 던지는 열린 유신론 논쟁의 핵심에 있다. 보이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오하이오 바이블 펠로우쉽 비지터지 2002년 8월 2일자에 인용되었다:

우리는 무엇을 결정함으로써 우리의 결정들의 실재를 창조한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하기까지, 그것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 . .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도록 그것을 결정하기까지 알 수 있는 아무것도 단순히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창조하시고 그 다음에 그들이 그들의 결정들을 창조하기까지 그가 창조하시는 사람들의 선하거나 악한 결정들을 미리 아실 수 없다.117)

비손 신학부

샘포드(Samford) 대학교의 비손 신학부(Beeson Divinity School)와 옥스포드의 위클립 홀은 2003년 10월 미국 알라바마주 버밍햄에서 “성 삼위일체 하나님: 신앙과 기독교 생활에 관한 대회”라는 에큐메니칼 대회를 후원하고 있다. 비손의 학장인 티모시 죠지는 다음과 같이 쓴다: “이 대회는 로마 천주교회, 정교회, 그리고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을 모아 성경적 신앙의 가장 근본적인 실재, 즉 거룩과 사랑의 한 하나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찬양하려는 것이다. 과거의 자유주의 신학들에서, 삼위일체는 빈번히 영성이나 현재의 교회 생활에 별로 적응성이 없는 낡은 교의로 간주되었다.” 연사들은 죠지, 애버리 카디날 둘레스[로마 천주교회 예수회], J. I. 패커, 코넬리어스 플란틴가 2세[칼빈 신학교 총장], 앨리스 맥그레이드 등을 포함한다. 비손 신학부는 미국복음주의협회(NAE)의 회원기관이다. 샘포드 대학교는 최근까지 남침례교단의 학교이었다.118)

미국, 리버티(Liberty) 대학교 및 신학교

제리 팔웰 박사의 1998년 4월호 내쇼널 리버티 저널은 다음과 같이 썼다: “리버티 침례교신학교는 하워드 핸드릭스 박사가, 게리 콜린스, [‘성경으로 돌아가자’ 프로그램의] 우드로 크롤, 죤 맥스웰, 스티븐 올포드, 제리 바인즈 및 죤 월보어드를 포함하는 우리의 탁월한 방문교수 명단에 들게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팔웰은 케이 아더와 다른 이들과 함께 ‘예수 2000 성지순례단’을 위한 연사로 사진으로 보도되었다. 그의 1998년 대집회 연사들은 달라스 신학교 교장 척 스윈돌과 죤 맥스웰(로버트 슐러 연사)을 포함한다. 리버티의 방문교수들로 언급된 사람들은 다 에큐메니칼 연사들이다.119)

제리 팔웰이 이끄는 리버티 대학교는 남침례교단과 관련을 맺었다. 그 학교는 1999년 11월 버지니아 남침례교 보수주의자 모임에 공식적으로 가입하였다.120) 새로운 관계는 남침례교회 학생들로 하여금 리버티 대학교에 다니도록 격려하고 그 학교에 대한 47,000개의 남침례교 교회들의 재정적 후원을 가능하게 만든다. 남침례교단 총회장 페이지 패터슨은 리버티 대학교의 남침례교단 가입은 “우리 모두에게 기도의 응답이다”라고 말했다.121)

미국, 칼빈대학

예장고신의 허순길 박사는 “북미개혁교회(CRC)가 직영하는 칼빈대학 현실”이라는 글에서, 전통적 개혁주의 가르침에 대한 칼빈대학의 열심은 사라져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며 기원, 여성신학, 동성애 등의 문제에서 성경에서 멀리 벗어나 있다고 말한다. 20여년 전에 ‘기원’ 문제에 있어서 이미 진화론과의 싸움이 중단되었고 유신진화론을 가르치는 것이 허락되었다. 북미개혁교회에서는 10여년 전에 여목사, 여장로 제도가 도입되었다. 동성애의 문제는 문화행사라는 이름으로 캠퍼스에 자리잡았다. 2001년 학교가 공개적인 여성동성애 가수들(Indigo Girls)을 캠퍼스에 초청하여 콘서트를 가졌을 때 상당한 반대를 받았으나 지난해 다시 여성동성애 가수들이 칼빈대에 와서 콘서트를 가졌을 때는 어떤 논쟁도 없었다. 교무 담당 카펜터는 동성 성교가 죄이지 동성애하는 것은 죄가 아니라는 것이 학교의 입장이라고 말한다. 2002년 이후 칼빈대학은 ‘리본주간’을 지켜 오는데, 이 주간에는 동성애 학생들이 서로를 분별하여 자기 짝을 택할 수 있게 하기 위해 리본을 단다고 한다.122)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설립자들은 근본주의라는 용어를 좋아하지는 않은 것 같다. 그 이유는 그 용어가 개혁주의보다 축소주의의 기분이 들고 또 근본주의가 알미니우스주의와 세대주의를 포용한다고 보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의 정신은 근본주의적이었다. 즉 메이천을 비롯하여 반틸과 죤 머리와 에드워드 영 등은 배교와의 분리를 분명히 함에 있어서 근본주의와 동일한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입장은 신복음주의 쪽으로 기울어 있는 것 같다. 그 학교의 교장이었던 에드몬드 클라우니는 신복음주의의 대표자 빌리 그레이엄을 지지했다고 알려졌었다. 그 학교의 운영이사들은 정통장로교회(OPC)와 미국장로교회(PCA)와 기독교개혁교회(CRC) 소속 인사들로 구성되었는데, 미국장로교회(PCA)는 신복음주의적 단체인 미국복음주의 협회(NAE)에 가입되어 있고 기독교개혁교회(CRC)는 진화론이나 여성안수 등 신학적, 윤리적 문제가 많은 것 같다. 오늘날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와 교수들은 현대교회의 배교와 타협에 대해, 특히 신복음주의에 대해 비판하지 않고 오히려 신복음주의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 같다.

2002년 6월 크리스챤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미국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행정 부총장 스탠포드 카슨은 자유주의적 프린스톤 신학교와의 관계에 대하여 “내년 학기에 우리 교수 한 사람이 프린스톤에서 가르치기로 했다”며 “상호 교류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고 전했다.123) 그러나 두 학교의 활발한 상호 교류를 긍정적이고 고무적이게 소개한 것은 매우 슬픈 일이며 그것은 오늘날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방향이 어떠함을 나타내고 있다.

프린스톤 신학교와 미국 북장로교회는 1920년대 후반에 분명히 자유주의 신학을 포용하는 방침을 택했었고 그러한 방침에 대항하였던 자들이 1929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설립했었다. 1920년대 후반 두 신학교는 포용주의와 보수주의라는 분명히 다른 입장과 방향을 가지고 있었고 그 이후 오늘날까지 그렇게 진행되어왔다. 그런데 오늘날 두 신학교의 활발한 상호 교류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프린스톤 신학교가 성경적 입장으로 돌아왔다는 뜻인가? 아니다. 오히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가 설립 당시의 교수들의 입장을 버린 것이다. 이것은 그 동안 웨스트민스터 신학교가 취하여 온 미지근한 태도가 가져온 결과이다. 신복음주의는 자유주의와 교제하는 유화적 정책을 취하다가 마침내 자유화되고 만다. 그것은 미지근한 타협주의자들의 말로이다. 우리나라에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출신들이 많은데, 그들은 이런 타협에 대해 통탄하고 있는지, 혹은 그들 자신이 이런 타협을 좋아하고 있는지 스스로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합동신학교

1995년 합동신학교 학우회는 개교 15주년 기념 찬양 축제에 총신대, 장신대 신대원 학우를 초청하였는데, 그 자리에서 그 신학교의 김명혁 교수는 “그 동안 분리에 분리를 거듭했던 총신과 장신, 그리고 합신의 학생들이 한 자리에 모여 마음을 모으고 목소리를 합해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을 보니 감격스러울 뿐 . . . 역사는 종종 젊은이들의 순수한 헌신에 의해 이루어지는데 한국교회 안에 이미 새로운 역사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하였다.124) 이것이 과연 바른 말인가? 총신과 장신의 분열이 정당성 없는 분열이었는가? 장신이 신정통주의를 수용하고 있다는 널리 알려진 사실을 무시하고 이런 혼란스러운 말과 활동을 해도 되는 것인가?

1995년 11월 23일, 감신, 성공회, 연대신, 이화, 장신, 한신, 협성신 등 8개 신학대학원 학생들의 연합 단체가 결성되어 각 교단 청년 신학도간의 교류와 한국교회의 일치 등을 다짐하였다. 이 단체의 출범 선언문에는 “비본질적이고 비생산적인 경쟁과 신학적 대립을 지양하고 다양한 신학적 입장을 존중하면서 . . . 궁극적으로 한국 신학과 교회를 갱신하고자 노력할 것”이라고 진술되어 있다.125)

합동신학교는 예장합동측의 1979년 주류, 비주류 논쟁의 결과로 박윤선 박사와 합동측 신학교 교수들에 의해 세워졌다. 그러나 그들에게 이 배교적이고 혼란한 시대를 분별하는 영적 분별력이 있는가? 그들은 어찌하여 자유주의 신학교들의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고 성경이 가르치는 교제의 원리를 따르지 않는가? 성도들의 교제는 아름답고 귀한 것이지만, 자유주의적 단체들과의 교제는 하나님이 분명히 금하시는 것이다. 오늘날 주의 종들이 배교적 자유주의 사상에 대항하여 선한 싸움을 싸우기를 중단해서는 안 된다.

총신대학교

1997년 5월 3일 총신대학교(총장: 김의환 목사)와 장신대학교(총장: 서정운 목사) 교직원 친선 체육대회가 장신대에서 열려 학교간 친선을 도모하는 시간을 가졌다고 한다. 이날 행사에는 양교에서 150명이 참가했다고 한다.126) 이것이 과연 바람직한 친교인가? 장신의 신학적 자유주의는 무시해도 될 만한 사소한 문제인가?

기독신문 2006년 4월 5일자(1쪽)는 “‘47년’ 만의 만남”이라는 제목으로 장로회신학대학교 김중은 총장이 3월 28일 총신대학교를 방문하여 채플에서 설교한 사건을 보도하였다. 총신대학교 김인환 총장이 “말씀을 사랑하는 분”이라 소개한 김중은 총장은 이 날 채플에서 열왕기하 5:8-14을 본문으로 설교했다. 김중은 총장의 방문은 지난해 10월 총신대학교 김인환 총장이 장신대학교를 방문하고 채플에서 설교한 후 두 번째의 교제이었고 두 총장은 지속적 만남과 협력을 다짐했다.

김중은 총장의 이번 방문에는 장신의 학우회 대표 6명도 동반했다. 총신 원우회와 장신 원우회 임원단은 4월 4일 장신대에서 다시 만나 구체적 교류 방안을 논의했다고 한다. 총신대학교 총장이나 총신 원우회 임원들의 생각과 행동은 신복음주의의 전형이다.

1959년 예장통합과 예장합동이 분열된 후 예장합동은 헌법에 선교사 서약문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포함했다: “귀하는 신학상으로 말하는 신신학 및 고등비평이나 신정통주의 내지 자유주의 신학을 잘못된 것으로 알며, 역사적 기독교의 전통을 항시 이와 투쟁적인 처지에서 진리를 수호해야 하는 줄 생각하느뇨?”, “귀하는 1959년 제44회 본 총회가 의결한 본 총회의 원칙 및 정책을 시인하며 이러한 조치는 WCC 및 WCC적 에큐메니칼 운동이 비성경적이고 위태로운 것이므로 이에서 순수한 복음 신앙을 수호하려는 것인 줄 생각하느뇨?”

예장통합 신학교는 신정통주의 신학을 개혁주의의 현대적 모델로 가르치거나 옹호해왔고 지금도 그러하다. 그런데 어찌하여 총신대학교 총장이 아무런 문제 의식이 없이 이런 잘못된 교류를 하는 것인가? 교단의 지도적 목사들이 무지하고 신학적 분별력이 없어서 그런 일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을 지적하고 교정해야 할 신학교수들이 오히려 스스로 무분별한 교제를 할 수 있는 것인가?

예장합동 교단의 지도적 목사들이나 신학교 교수들이 신정통주의를 분별치 않고 포용하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교제하고 있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이미 교회적으로 그런 교제들이 있었고 지금 신학교도 공개적으로 그런 교제를 하고 있다. 이것이 잘못된 교제임을 깨닫고 고치지 않는다면, 합동 교단은 더 이상 건전한 보수 교단은 아닐 것이다. 만일 고 박형룡 박사가 살아계셨더라면, 그는 오늘날의 상황을 심히 통탄했을 것이다. 오늘날 예장합동 교단을 바르게 세울 자들, 바른 분별력과 지도력을 가진 목사들이 아무도 없단 말인가?

[특주] 미국의 학교들 분류

죠지 달라(George W. Dollar, Ph.D.)는 미국의 기독교 대학들, 성경대학들, 및 신학교들을 다음과 같이 분류하였다.127)

1. 전투적 근본주의 -

Baptist Christian College, Bob Jones University, Calvary Baptist Seminary, Central Baptist College, Cincinnati Baptist College, Denver Baptist Seminary, Faith Baptist Bible College, Fundamental Bible Institute, Heritage Baptist College, Independent Baptist College, Indiana Baptist College, Landmark Baptist College, Maranatha Baptist Bible College, Maranatha Bible Institute, Northwest Baptist Seminary, San Francisco Baptist Seminary, Tabernacle Baptist Bible College 등.

2. 온건한 근본주의 -

Calvary Bible College, Cedarville College, Central Baptist Seminary of Minneapolis, Christian Heritage College, Clearwater Christian College, Covenant Seminary, Dallas Theological Seminary, Emmanuel College, Grace Theological Seminary, Grand Rapids Baptist Seminary, Liberty Baptist Schools, Midwestern Baptist College, Moody Bible Institute, Northeastern Bible College, Pensacola Christian College, Philadelphia College of Bible, Talbot Theological Seminary, Tennessee Temple University,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 등.

3. 수정된 근본주의(=신복음주의) -

Asbury College, Bethel Seminary, Biola College, Bryan College, California Christian College, California Graduate School of Theology, Columbia Bible College, Conservative Baptist Seminary, Fuller Theological Seminary, Gordon-Conwell Divinity School, Institute of Creation Research, John Brown University, King's College(NY), Northwestern College, Nyack College, Taylor University, Trinity College(IL), Trinity Divinity School(IL), Wheaton College(IL) 등.

 

4. 복음주의 인물들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

빌리 그레이엄이 신복음주의의 대표적 인물이라는 것은 복음주의의 정의와 역사를 서술하면서 이미 언급하였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예들을 좀더 들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특히 근래에 그는 천주교회와 교제하고 협력하는 행보를 보여 왔다.

1967년 빌리 그레이엄은 예수회 소속 벨몬트 애비 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으면서 “이 학교를 설립한 복음과 오늘밤 나를 이곳에 오게 한 복음은 여전히 지금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그런 복음이다”라고 말하였다.128) 천주교의 복음이 개신교와 같은 복음이라니!

빌리 그레이엄은 또, “나는 나의 신앙이 정통 로마 가톨릭 교인들의 신앙과 본질적으로 같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말한 적이 있고,129) 또 교황을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복음전도자”라고 불렀다.130)

1993년 6월 전도자 빌리 그레이엄은 미국 피츠버그에서 세 번째 전도대회를 개최했는데, 1050개의 교회들과 65개 교단들이 협력하였다. 이 대회에서 여섯 명의 천주교인들은 실행위원에 포함되었다.131)

빌리 그레이엄 전도협회 이사 스털링 허스턴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난 10-15년 동안 그레이엄 전도대회에서 천주교회의 참여가 크게 늘어났고 약간의 수의 천주교회 지도자들은 이제 전도대회 계획위원회들의 공식적 대표자들로 봉사한다. 천주교회 신자들은 안내위원들, 성가대원들, 심지어 상담위원들로 환영을 받고 있다.132)

빌리 그레이엄은 또 천주교회와 개신교회의 신학적 상이점들이 “개인의 영혼 구원에 관한 한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였다.133)

휴스턴 크로니클(Houston Chronicle) 1997년 3월 30일자는 빌리 그레이엄의 알라모도움에서의 전도집회에 대한 보도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지역 천주교회도 중심적 역할을 했는데, 그것은 교황의 1987년 성안토니오 방문기간에 보인 그 침례교인[빌리 그레이엄]의 후원에 대한 일종의 보답이었다. . . . 기독교 지도자로서 빌리 그레이엄은 신학적 차이점들을 초월하는 존경을 얻었기 때문에 침례교인들과 천주교인들과 장로교인들이 그레이엄 전도집회 준비를 위한 수개월 전의 계획 모임들과 훈련 회의들에 함께 모인다.134)

복음 전파(Proclaiming the Gospel) 1997년 6월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천주교회는 이제 빌리 그레이엄의 전도대회들에 참여하고 있다. 전도대회를 선전하고 촉진시키고 천주교회 상담자들을 사용하는 대가로, [빌리] 그레이엄은 믿음을 고백하며 앞으로 나오는 모든 천주교인들을 그들의 천주교회들로 돌려보내겠다고 그 지역의 주교와 약속한다.135)

빌리 그레이엄의 내 모습 그대로(Just As I Am)라는 책의 서평에서, 컬럼비아 국제대학교 명예총장 로벗슨 맥퀼킨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빌리 [그레이엄]의 접근 방식이 모든 사람들, 즉 로마 천주교인, 그리스 정교회 교인, 자유주의자에게 열려 있고 따뜻하다는 것은 . . . 분명하다. 근본주의자들 외의 모든 사람에게[!]. 에큐메니칼 포용주의에 대한 그의 흔들리지 않는 신념이 중심 주제이다. 그래서 그의 신학적 혈육인 근본주의자들은 그를 따르기를 원치 않는다. 그들이 그레이엄과 분리된 것은, 한 부류로서의 근본주의자들이 다른 이들보다 더 위선적이고 사랑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부정직하다. 그들이 방법론에 관하여 그렇게 엄격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도 공정하지 않다. 그들은 영적 사역에서 불신자들과 협력하는 것은 죄악된 불순종이라고 믿는다. . . . 빌리는 기독교계를 나누는 많은 교리들을 힘써서 무시하고, 연합하는 것을 전공한다. . . . 그의 강조점은 신앙의 순결성보다 그것의 일체성에 있다. . . . 빌리는 신학적 차이점들을 의식적으로 피하거나 낮춘다.136)

로버트 슐러와의 1997년 5월 31일 텔레비젼 대담에서 빌리 그레이엄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나는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 혹은 그리스도를 아는 모든 사람이, 그들이 그것을 의식하든지 못하든지 간에,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라고 생각한다. . . . 그들이 심지어 그리스도의 이름을 알지 못할지도 모르나 그들은 그들의 마음 속에 그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어떤 것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빛으로 향하며, 나는 그들이 구원을 받았고 그들이 우리와 함께 천국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 . . 그들은 그들의 마음 속으로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었고, 그들은 주위의 사회와 전혀 다른 삶을 살려고 노력하였다.137)

로버트 코팔(Robert Kofahl)은 그의 발언을 이렇게 논평하였다:

그레이엄 박사가 표현한 교리는 . . . 정확히 교황과 로마 천주교회의 에큐메니칼 연구소가 수년 동안 가르쳐 왔던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우상숭배를 행하고 성경이나 은혜의 복음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이름과 구속 사역에 대한 지식이 조금도 없는 어떤 이교도도, 만일 그가 ‘좋은 사람’이고 그가 믿는 바가 무엇이든지 그 믿는 바에 있어서 신실하다면, 자동적으로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는다’는 관념이다.138)

크리스챠니티 투데이 1998년 8월 10일자는 이렇게 썼다.

인구 약 백만명의 [오타와] 지역을 위한 지난 6월 25-28일 빌리 그레이엄 전도활동에서, 천주교인들과 개신교인들 간의 간격--그리고 어느 정도 프랑스인들과 영국인들 간의 간격--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 전도대회를 후원한 470개의 지역 교회들 가운데, 60개는 천주교회들이었다. 천주교회의 참여는 모든 그레이엄 전도대회 가운데 가장 중대하였다.139)

그 잡지는 새 신자들 중의 얼마는 천주교회에서 데려갔다고 말했다.

빌리 그레이엄은 1999년 한 대담에서 자기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금세기의 인물로 뽑겠다고 말했다.140) 그는 말하기를, 현교황은 “지난 200년 중의 교황들 가운데서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 나는 그의 용기, 결정, 지적 재능, 및 천주교회, 개신교회, 헬라 정교회의 차이점들에 대한 그의 이해, 그리고 어떤 형식의 화해에 대한 시도에 감탄한다”고 하였다.141)

오 디모데(O Timothy)의 편집자 데이빗 클라우드는 빌리 그레이엄의 문제점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빌리 그레이엄은 천주교 대학들에서 명예학위들을 받았고 천주교회의 복음이 자기가 전하는 복음과 동일하다고 말하였다. 그는 수천명의 회심자들을 배교적 교회들[천주교회와 자유주의 교회들]에 넘겨주었다. 그는 교황이 전도자요 도덕적 지도자라고 생각한다. 그는 천주교회 주교들을 그의 강단에 청하고 그의 결신 초청시 앞으로 나오는 사람들을 축복하게 한다. 그는 유아세례 시 기적이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그는 지옥이 문자적으로 불붙는 고통의 장소라고 믿지 않는다. 그는 구원받지 못한 이방인들이 지옥에 가지 않을 것이라고 허용한다. 그는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현대주의자들[자유주의자들]을 칭송한다. 그는 변질된 성경 번역본들을 장려한다. 그는 동정녀 탄생이 기독교 신앙의 필수적 부분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성경이 무오(無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변호하기를 거절한다. 그는 이단적인 로버트 슐러의 복음에 대한 잘못된 개념들에 동의한다. 그는 신학이 더 이상 자기에게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는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는 구원을 강조하지 않는다.142)

샌트루이스 디스패치지는 다음과 같은 빌리 그레이엄의 말을 전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도 바울의 태도와 다르다!

나는 한 교회의 목사가 아니다. 그것은 나의 책임이 아니다. 나의 책임은 복음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고, 그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교회를, 그것이 천주교든지 개신교든지 [헬라] 정교회든지 무엇이든지 선택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는 그것은 한 개인과 교회와 하나님 사이의 문제이다.143)

R. L. 히머스 박사는 크리스토퍼 케이건 박사와 함께 쓴 죽어가는 국가를 위한 설교라는 책에서 “통계에 의하면, 그레이엄 박사의 전도대회들의 결실로서 교회들에 등록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숫자들은 거짓말하지 않는다”라고 썼다. 히머스와 케이건은 그레이엄의 전도대회에서 그리스도를 믿기로 결심했다고 주장하는 자들 중에 어떤 교회에 교인이 되어 머무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다양한 통계 조사들을 인용한다. 그들은 또한 주장하기를, 그레이엄의 전도대회들은 그 대회들이 열린 지역들의 도덕적 분위기를 도와주지 못했다고 한다.

히머스는 한 때 그레이엄의 열렬한 후원자이었다. 그러나 그레이엄은 낙태와 같은 죄에 대해 강한 공적 입장을 취하지 않았다. 그는 동성애에 대해 사람이 동성애자로 태어난다고 말함으로써 변명했다. 마침내 히머스는 그레이엄의 촬스 피니 스타일의 ‘결심’ 신학과, 유대인들과 회교도들과 다른 비기독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구원적 신앙 없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그레이엄의 견해로 인하여 큰 실망을 느끼게 되었다.

히머스는 위의 책에서 이렇게 쓴다:

나는 빌리 그레이엄의 사역을 믿었다. 나는 그를 위해 매일 기도했다. . . . 나는 빌리 그레이엄의 추종자이었다. . . . 나는 빌리 그레이엄을 신뢰했다. [그러나 결국] 나는 속임을 당했다.

그레이엄 박사가 교황을 위대한 도덕적 지도자요 전도자라고 찬양하고 테레사 수녀와 그 동료들을 기독교의 고상한 모범들로 말했을 때, 나는 이 천주교인들을 바라보고 그들이 결국 좋은 그리스도인들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빌리 그레이엄은 그들이 그렇다고 말했다. 우리는 결코 그의 판단이나 지도력을 의심하지 않았다.

나는 각별히 빌리 그레이엄을 만났고 그와 대화하였다. 나는 심지어 그와 함께 전문적 사진들을 몇 장 찍기도 하였다. 나는 내가 신복음주의의 결심주의(decisionism, 사람이 결심하면 믿었다고 간주하는 생각)의 오류들을 깨닫기 시작하기 전까지 매우 확실하고 매우 강하게 그레이엄 박사의 영향 아래 있었다.144)

2000년 1월 2일 폭스(Fox) 뉴스 인터뷰에서, 토니 스노우는 빌리 그레이엄에게 질문했다: “귀하께서 천국에 도착하실 때, 누가 먼저 말씀하실 것입니까, 귀하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십니까?” 그레이엄은 대답했다: “제가 거기 도착할 때, 예수께서 저를 환영한다고 말씀하실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가 ‘잘하였다, 우리의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말씀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혹은 그가 ‘너는 잘못된 곳에 있구나’라고 말씀하실지도 모릅니다.” 스노우: “귀하는 귀하가 잘못된 곳에 있다는 말씀을 들을지도 모른다고 정말 염려하십니까?” 그레이엄:

예, 왜냐하면 저는 의로운 사람이지 못했고 지금도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제가 제 개인의 삶에서 속하지 않는 대(臺) 위에 저를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저를 실제의 저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사람들이 저를 생각하는 것 같은 착한 사람이 아닙니다. 신문들과 잡지들과 텔레비젼은 저를 성자로 만들었습니다.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테레사 수녀가 아닙니다. 그리고 저는 그렇게 매우 많이 느끼고 있습니다.145)

우리가 성자가 아니며 심히 부족한 사람이며 하나님 앞에서 칭찬받을 만하지 못한 종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은 옳다. 그러나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마치 우리의 행위에 근거하듯이 표현된 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우리의 의는 이것뿐, 예수님의 피밖에 없다. 예수님이 우리의 의요 우리의 구원이시다!

유에스 뉴스 앤드 월드 리포트 2000년 1월 31일자에 의하면, 빌리 그레이엄은 지옥의 불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빌리 그레이엄의 암스테르담 2000 대회가 2000년 7월 29일부터 8월 6일까지 화란 암스테르담에서 열렸다. 그 대회에서 천주교회의 한 대주교가 연설하였고 이어서 화란 교회협의회 회장도 연설하였다. 교회협의회 회장은 참석자들에게 교회협의회와 복음주의 연맹이 기도하기 위해 연합하는 것을 상기시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개인적 신앙과 사회적 행동은 같이 가기 때문에 우리는 동일한 사람들이다. 복음주의자들과 에큐메니칼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다.” 빌리 그레이엄 전도협회는 이 대회를 위하여 4천만불을 사용했다. 척 콜슨은 그 대회에서 ‘복음주의자들과 천주교인들 함께’ (ECT)라는 운동을 옹호하였다.146)

빌리 그레이엄은 요한 바오로 2세: 바치는 글이라는 책의 서문을 썼고 가끔 교황을 찬양하였다. 데이브 헌트(Dave Hunt)는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천주교인이든지 개신교인이든지 누구나 빌리 그레이엄이 교황과 로마 천주교회를 참 신앙이라고 칭찬함으로써 개신교 종교개혁을 암시적으로 부정하였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의 천주교 용납은 천주교 주교들이 실제로 그들의 희생자들과 성경적으로 일치하였고 오늘날 복음주의자들이 전파하는 것과 동일한 복음을 전파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들은 개신교인들에게 저주를 선언하였고 그들을 불태웠고 로마 교황청은 그들이 그렇게 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명예를 주었다. . . . 만일 빌리 그레이엄이 로마 천주교회가 영혼들을 구원하는 참된 복음을 전파한다고 생각함에 있어서 옳다면, 모든 종교개혁자들은 잘못이었을 것이다. . . . 선택하라, 빌리 그레이엄이 옳은지, 아니면 종교개혁자들이 옳았는지, 그러나 그들이 둘 다 옳은 것은 아니다. 더욱이, 만일 천주교회가 참된 복음이라면, 로마 천주교인들 가운데 지난 5백년 이상 그 교회의 복음이 거짓되다고 확신하였고 참 복음을 믿었고 그 교회를 떠났던 수천만명의 사람들에 대해 무어라고 말해야 하겠는가? 만일 빌리 그레이엄이 옳다면, 그들은 완전히 바보들일 것이다. 그들은 천주교회에 머물렀어야 했을 것이다--과연 빌리 그레이엄은 전도대회들에서 믿겠다고 앞으로 나온 모든 천주교인들을 바로 그 교회로 돌려보낸다.147)

빌 브라이트(Bill Bright, CCC 총재)

대학생 선교회(CCC)의 창설자요 총재인 1969년 천주교회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천주교회를 공격하지 않는다. 우리가 믿기는, 하나님께서 그 교회 안에서 힘있는 역사를 하고 계시며 세계를 복음화시키는 일을 돕기 위하여 수백만의 천주교인들을 사용하실 것을 의심치 않는다고 했다.148)

빌 브라잇이 창설한 대학생 선교회에는 1970년대에 간사들 가운데 천주교인들이 있었다.149) 또한 그의 지도 아래 열린 ‘키(Key) ’73’과 1976년의 ‘여기에 생명 아메리카가 있다’는 집회들을 위해 천주교인들이 참여하였다.150)

1986년 빌리 그레이엄의 암스테르담 대회에서, 빌 브라잇은 또 이렇게 말했다.

개신교인들과 천주교인들이 서로 많이 관계하고 싶어하지 않은 때가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하나님의 영께서는 천주교회 뿐만 아니라 또한 개신교회의 교제들과 교통들에서 이와 같이 크게 역사하고 계시기 때문에 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곳마다 매우 편안함을 느낀다.151)

빌 브라잇은 오늘날 은사주의자들을 따뜻하게 용납한다. 어떤 이들은 그가 1994년 “복음주의자들과 천주교인들과 함께”(ECT)라는 상호 인정과 협력의 문서에 서명한 것 때문에 그를 비난했고 ECT에 대한 그의 입장을 취소하라고 요청했지만, 빌 브라잇은 “천주교인들 가운데 수천만명의 참된 신자들이 있다”고 말하면서 거절하였다.152)

1998년의 ‘금식과 기도’ 집회는 미션 아메리카와 대학생 선교회의 공동후원을 받았다. 참석자들은 에큐메니칼 유명인사들인데, 빌 매카트니(프로미스 키퍼스), 프랭클린 그레이엄, 돈 아규(미국복음주의자협회[NAE]), 폴 시더, 케이 아서, 빌과 보넷 브라잇, 애드리안 로저스, 팻 로벗슨, 토마스 트래스크(하나님의 성회) 및 데이빗 브라이언트가 포함되어 있다. 빌리 그레이엄과 존 퍼킨스와 빌 브라잇은 명예공동회장이다. 위에 열거된 다른 이들은 실행위원회에 속해 있다. 스티브 그린, 로벗슨, 시더 또 브라잇은 한 시간을 인도하였다. 다른 시간은 로저스와 매카트니에 의해 인도되었다. 그것은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에서 위성중계로 미국 전역에 생방송되었다.153)

제이 아이 패커(J. I. Packer)

제이 아이 패커는 1994년 기본적으로 서로의 양무리를 ‘개종시키지’ 않기로 천주교회 지도자들과 함께 합의한 “복음주의자들과 가톨릭교인들과 함께”(ECT)라는 공동선언문에 서명했다.154) 그는 1997년 9월 ‘복음주의자들과 천주교인들 함께’(ECT)“구원의 선물”이라는 두 번째 진술서에도 서명하였다. 그 두 번째 진술서는 예수님 외에는 구원 얻는 다른 길이 없고 의롭다 하심이 인간의 선행으로 말미암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며 오직 그리스도의 의에만 근거한다고 바르게 말하지만, 천주교회의 공로 개념, 연옥, 마리아 경외 등의 문제에 대하여 ‘다양한 이해들’이 있다고만 언급하고 그것의 옳고 그름에 대해 말하지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는 모든 사람은 주 안에서 형제 자매이다”라고 말한다.155)

제이 아이 패커는 “2천년대 문앞에서의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1995년 대회에서 근본주의자들을 다음과 같이 비평하였다:

보수적 개신교인들과 동방 정교회 교인들과 주류 로마 카톨릭 교인들은 내가 말한 모든 사람들에게 증거하기 위하여 연합할 수 있는가? 구원 과정의 세부 사항들과 그 과정에서의 교회의 위치에 관한 우리가 이미 아는 그리고 계속되는 차이점들에도 불구하고, 나는 우리가 연합할 수 있다고 강력히 주장하는 바이다. . . . 확실히, 우리의 세 전통들 내에서 근본주의자들은 이 일에 우리와 연합할 것 같지 않다. 왜냐하면 마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긍휼이 개념적으로 정확한 사람들 위에 자동적으로 머물며, 개념적 정확성에 미치지 못하는 자들로부터 자동적으로 보류되는 것처럼, 논쟁적 정통주의(contentious orthodoxism)의 길을 따르는 것이 근본주의자들의 길이기 때문이다.156)

근본주의를 이렇게 비꼬는 그의 말에서 그는 자신의 타협적, 포용적 노선을 밝히 드러내었다.

포커스 언 미션즈의 회장 레이 아담스는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패커의] 욕설어린 비난은 이 유명한 신학자와 성경강해자를 위하여 좋은 징조는 아니다. 슬프게도, 그는 오류와 분리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의 분명한 가르침을 따르기보다 많은 무리와 함께 행하기를 선택한 것 같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은 ‘논쟁적 정통주의의 길’이라고 정의될 수 없다.157)

에프 에프 브루스(F. F. Bruce)

스코틀랜드 신학자 에프 에프 브루스는 복음주의자로 칭송을 받았으나, 많은 자유주의 신학적 견해들을 가지고 있었다고 알려진다.158) 그는 신정통주의자 칼 바르트를 루터와 칼빈과 웨슬레와 동등하게 ‘그리스도의 종’으로 보았다. 그는 바르트의 하나님이 성경의 하나님이라고 말했다. 그는 성경의 어떤 파괴적 고등비평을 받아들였고, 바울이 여성의 지도자 역할들을 제한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브루스는 “신복음주의자들이 그것 때문에 비평되는 포용주의, 예를 들어 빌리 그레이엄의 포용적 전도대회들에서 아무런 잘못도 발견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무디 먼슬리 1986년 6월호는 그를 ‘복음주의’ 지도자로 높여 말하였다.159)

제리 팔웰(Jerry Falwell)

제리 팔웰은 자신을 근본주의자라고 말하는 미국의 한 유명인사로서 리버티 대학교와 신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근래에 그는 신복음주의자들과 친근히 지내왔고 빌리 그레이엄과도 가까워졌다. 1997년 5월 3일 리버티 대학교 제24회 졸업식에서 빌리 그레이엄은 연설하였다.160)

주의 검(Sword of the Lord) 편집자 쉘톤 스미스는 빌리 그레이엄과 제리 팔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 둘은 다 근본주의자들로 시작하였다! 그 둘은 다 큰 성공을 이루었고 국제적 인물로 부상되었다! 그 둘은 다 그들의 사역의 거점을 그들의 근본주의적 기지로부터 보다 넓은 복음주의자들의 진영으로 변경하였다. 표준과 분리의 원리들은 사라졌다! 타협은 규범이 되었다! (50년대에) 그레이엄에 의해 채택된 에큐메니칼 태도는 이제 리버티 대학교에서 기정화된 경기 방법이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 진리와 오류는 자유로이 섞인다. 바른 교리는 교제를 위하여 보류된다. 한때 성경적 권위의 강한 목소리가 있었던 곳에, 이제는 적응과 편의의 정신이 우세하다.161)

제리 팔웰은 최근에 스티브 윙필드의 전도대회 천막이 오는 가을 리버티 대학교 건너편 토마스 로드 침례교회의 새 부지에 처질 것이라고 광고하였다. 윙필드는 이전의 리버티 대학교 학생으로서 “메노나이트 교회에 출석하는 웨슬리파 감리교회 목사”이다. 1991년 미국 펜실베니아주 렌즈데일에서의 전도대회에 관하여, 윙필드는 에큐메니칼 사고방식으로 말하기를, “나는 우리를 분리시키는 것들을 제쳐놓기로 작정하였다”고 하였다. 여러 교단들로부터의 약 75개 교회들이 그 전도대회에 참여하였고 그 대회에 랩 그룹과 록 그룹이 특별 출현하였다.162)

2002년 5월 11일, 제리 팔웰의 리버티 대학교는 “그들의 괄목할 만한 기독교적 봉사” 때문에 빌 브라잇과 그 아내 보넷 브라잇에게 명예 학위들을 수여하였다.163) 졸업생들에게 학위를 수여하는 의식들 직전에, 팔웰은, “내 견해로는, 빌 브라잇은 사도 바울 이후 가장 위대한 기독교 선교사이십니다”라고 말했다.164)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빌 브라잇은 천주교인들과 은사주의자들을 따뜻하게 포용하였고 자신을 과다한 에큐메니칼 활동들과 연계시켰기 때문에 그의 사역은 칭찬할 만하기보다 불순종의 사역이라고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제리 팔웰의 위의 발언과 행위는 자신이 신복음주의적임을 분명히 나타내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실한 종들은 빌 브라잇 같은 타협적 활동의 인물을 칭찬하지 않고 오히려 책망할 것이다.

씨 에스 루이스(C. S. Lewis)

1963년 씨 에스 루이스의 죽음 이후, 그의 책들의 판매는 연간 2백만불에 이르렀고, 그는 크리스챠니티 투데이지의 일부 독자들에 의해 최근에 가장 영향력 있는 저술가라는 등급을 얻었다. 크리스챠니티 투데이 1998년 9월 7일자는 그의 사상의 ‘약한 점들’로서 속죄에 대한 그의 개념, 그가 죄의 용서에 대해 논의할 때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언급을 한 적이 없다는 점, 세례중생론에 대한 그의 환대, 또한 성경 영감에 대한 그의 비(非)무오적(無誤的) 견해, 거기에 덧붙여 연옥과 및 불신자로 이 세상을 떠난 일부 사람들의 최종적 구원의 가능성에 대한 그의 긍정 등을 열거하였다. 루이스의 가장 친한 친구들은 천주교인들이었다. 그는 또한 몰몬교인들에게 환영을 받았다. 그는 선하게 됨으로써 구원을 얻는다는 중세 시대의 개념을 가르쳤다. 즉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구원을 받기에 충분할 만큼 선하게 되도록 도우실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그러한 주입된 은혜에 의한 구원은 전혀 은혜가 아니다.165) 루이스의 신학은 치명적 결함이 있다.166)

그러나 크리스챠니티 투데이지 2001년 4월 23일자는 “신화 문제들”이라는 논설에서 C. S. 루이스를 칭송하였다. 그 글은 그가 현대와 현대 이후(post-modern) 세계와 복음을 함께 나눌 방법과 언어를 우리에게 유산으로 남겨주었다고 말했다. 그 글은 루이스를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기독교 변증가”라고 불렀고 그의 신화적 책들을 칭송하였다. 그의 나니아의 연대기는 기독교와 이방 전통들에서 나온 이야기들을 결합하며 비유들과 상징들을 혼합한다(예를 들어, 애슬란은 ‘그리스도의 상징’이지만 또한 진짜 사자이다). 크리스챠니티 투데이지는 “애슬란에서 그리스도는 만질 수 있고 알 수 있고 실제적이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 잡지는, “루이스는 이방종교의 뿌리들을 파고들고 그 뿌리들이 기독교의 것들과 양립할 수 있는 곳을 적당히 할당하는 데 능숙하였다”고 말했다. 이런 것이 신복음주의와 그 대표적 한 인물의 혼란스러운 묵상들의 일부이다! 루이스는 성경의 무오성을 부정하였고 진화론과 연옥설을 받아들였고 자기를 “매우 카톨릭적이다”라고 표현했다. 그의 가장 친한 친구들은 천주교인들이었고 그는 몰몬교인들에게도 즐거이 환영을 받았다. 마틴 로이드-죤스는 심지어 C. S. 루이스가 기독교인인지도 의심하였다.167)

클락 피나크(Clark Pinnock)

유에스 뉴스 앤드 월드 리포트 2000년 1월 31일자에 의하면, 클락 피나크는 지옥 형벌에 대해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아무리 그의 피조물들이 죄악될지라도 그들에게 영원한 고통을 부과하는 그런 잔인하고 보복적인 신을 고안할 수 있을까?”라고 말한다. 피나크는 또 그런 일을 하는 하나님은 “하나님보다는 사탄에 더 가깝다”고 한다. 죤 스토트는 성경적 비유인 불의 주된 기능은 멸망시키는 것이며, 지옥의 불이 영원하고 꺼지지 않을지라도 “만일 거기에 던져진 것이 멸망치 않는다고 판명된다면 매우 이상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지옥은 영원한 불의 고통이 있는 실제 장소이다.168)

2001년, 미국 복음주의 신학회는 회원들 약 70퍼센트의 찬성으로 ‘개방적 신론’에 반대하는 다음과 같은 결의문을 통과시켰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유적 도덕적 행위자들의 미래의 모든 결정과 행위을 포함하여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사건들에 대한 완전하고 정확하고 무오한 지식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분명히 가르친다고 우리는 믿는다.” 개방적 신론은 하나님의 미리 아심을 부정한다. 개방적 신론의 대표적 주창자들은 죤 샌더스(헌팅톤 대학), 그레고리 보이드(베델 대학), 클락 피나크(맥매스터 신학대학) 등이다.169) 미국 복음주의 신학회의 약 30퍼센트가 개방적 신론에 대해 반대하지 않았다는 것은 결코 대수롭지 않게 여길 문제가 아니다.!

1960년대의 클락 피나크는 남침례교 복음주의자이었고 성경 무오의 옹호자이었다. 그러나 근래에 그는 매우 자유주의적이다. 피나크는 지금 ‘개방적 신론’을 옹호하고, 하나님께서 새 지식을 얻을 때 때때로 생각을 바꾸신다고 주장한다. 그는 심지어 예수께서 한가지 점에서 잘못이었으며,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제한적 지식 때문에 그는 때때로 잘못된 예언을 하신다고 주장한다. 그는 성취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일련의 예언들을 인용한다.170)

토니 캠폴로(Tony Campolo)

미국 CNN 방송의 크로스파이어(Crossfire) 프로그램에서, 토니 캠폴로는 예수께서 천국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하기를 거절했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예수께서 오직 그리스도인들 속에만 살아계신다고 확신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오늘날 복음주의자들 중의 한 대표적 인물이다.171)

김의환 박사

1997년 5월에 열렸던 고(故) 박형룡 박사의 신학을 평가하는 ‘제1회 죽산 세미나’에서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총장 한철하 박사는 박형룡 박사의 신학을 기독교의 정통적 교리 사상을 전승한 ‘사도적 신학,’ ‘바른 신학’이라고 평가하였다. 한편 총신대학교 총장이었던 김의환 박사는 “박 박사는 선교사들이 전수한 신학을 보다 체계화하고 한국교회의 현장에서 보수신학을 수호하고 전수했으며 메이천의 ‘교회론적 취약점’을 극복, 결과적으로 우리 교단[합동측 교단]을 만들고 지켜왔다”고 평가하였다.172) 늦게나마 박형룡 신학의 의의와 가치를 인식하는 기회가 되었다면 하나님께 감사한 일이다. 박형룡 박사는 하나님의 진리를 체계적으로 정립하기 위하여 노력한 주의 충성된 종이었고 자유주의와 에큐메니칼 운동 그리고 신복음주의 경향에 대처하여 바른 분별력을 가지고 선한 싸움을 힘써 싸웠던 분이셨다.

그러나 “메이천의 ‘교회론적 취약점’”이라는 표현은 무슨 의미인가? 박형룡은 ‘한국의 메이천’이라고 불리었다. 그것은 그가 메이천처럼 자유주의를 철저하게 비평하고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보수하고 변호하였기 때문이다. 메이천이나 박형룡의 사상을 아는 자라면 그들에게 있어서 교회론은 어느 분야보다 중요했다. 박형룡은 메이천처럼 자유주의에 대한 비평 뿐만 아니라 또한 복음주의의 타협적 입장에 대해서도 강하게 비평했다. 그는 신복음주의자들이 자유주의자들과 우호적 관계를 가지고 빌리 그레이엄과 같이 그들과 협력적 전도활동을 하며 배교적인 교단들을 떠나지 않고 머물고 있음을 날카롭게 비판하였다.173) 그러므로 박형룡 신학에 대한 평가는 그가 매우 중요하게 여긴 이런 점을 바르게 다루지 않고서는 바르게 이루어질 수 없다. 오늘날 예장합동 목사들이 박형룡 박사의 제자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정작 그 교단과 신학교에서는 그의 보수주의 정신, 분별력 있는 바른 입장은 사라져가고 있다.

이성구 교수

2002년 9월 7일, 고신측 기관지인 기독교보의 교단 설립 50주년 기획특집에서 고려신학대학원의 이성구 교수는 “한국교회 연합운동과 고신”이라는 글에서 연합운동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분명히 노출하였다.174) 그러나 그의 견해는 비성경적이다.

우선, 그는 한국의 초대 선교사들의 교파적 확신을 무시하고 매우 불필요한 것들이 한국에 이식된 것처럼 생각한다. 그는 한국교회가 여러 교파로 나누인 것을 억울하게 생각하면서 “서방의 교회전통이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옮겨졌을 따름이다. 얼마든지 하나의 ‘한국기독교회’가 탄생할 수 있었으나 이미 여러 갈래로 나누어진 . . . 루터교, 장로교, 감리교 등의 달라져 있던 전통의 교회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의 말은 마치 우리가 교파적 차이가 없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처럼 들린다. 교파적 차이는 역사상 불가피하였다. 교파적 차이점들을 극복하려는 노력은 계속 필요하지만, 그 사실을 무시하고 한 교회가 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은 순진한 그러나 무지한 생각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교리적인 일치가 없이 하나 되는 것은 겉보기의 하나에 불과하고 내면적 갈등은 여전할 것이기 때문이다. 교파가 나뉘거나 새 교파가 형성되는 것은 단순히 인간적 연약 때문이 아니었다. 적어도 루터교,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순복음 등의 교파는 분명한 교리적 확신의 차이 때문에 생겼다. 신학 교수가 그런 교파적 확신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어떻게 그런 발언을 할 수 있는지 매우 의아스럽기만 하다.

또 그는 예장합동과 통합의 분열을 교회 정치 혹은 교권 장악을 위한 싸움의 결과라고 본다. 그는 말하기를, “고신과 기장이 떼밀려 나가고 남은 장로교가 다시 승동측과 연동측으로 분열된 것을 두고 흔히 교회 정치와 관련된 것으로 설명한다. WCC에의 가담여부가 분열의 원인이라는 것이 밖으로 알려진 분열의 이유이다. 그러나 ‘총신 90년사’를 쓴 김요나는 승동측(합동)과 연동측(통합)의 분열의 이유를 네 가지로 들고 있고, 그 중에 WCC와의 관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적인 계략을 동원하여 교권을 장악하기 위한 싸움의 결과 일어난 분열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자유주의적 안목을 가졌거나 흐려진 보수주의적 안목을 가진 자의 발언과 같다. 자유주의자들은 WCC 문제가 문제될 것이 없기 때문에 그것을 문제삼은 보수주의적 합동측 인사들의 주장에 결정적 중요성과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또 오늘날 분별력 없는 보수주의자들도 WCC 에큐메니칼 운동을 수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으므로 그들에게는 WCC가 분열의 정당한 명분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고신의 입장이었는가? 보수주의의 본질은 교리의 순수성을 생명처럼 여기는 것이다. 고신의 보수적 입장은 어디로 갔는가? 어찌하여 보수주의적 교단의 신학교수가 교회의 순결성을 지키기 위해 투쟁했던 선진들의 투쟁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는가?

그 다음, 더욱 본격적으로, 이 교수는 자신의 연합의 생각을 피력한다. 그는 최근 고신의 인사들이 연합운동에 적극 참여함에 대해 매우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는 말하기를, “최근 들어 우리 고신은 한기총, 한장연(한국장로교연합회) 등에서 상당히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 . . 최해일 목사가 사상 처음으로 한기총 대표회장에 출마하고, 여러 교회들이 회장에 당선되면 활동을 후원하기로 합의하면서 연합운동에 핵심적인 역할을 감당하려 했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 아닐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오히려 고신이 연합운동의 주류에서 멀리 있는 것을 안타갑게 생각한다. 그는 말하기를, “대한성서공회가 ‘개역개정판 성경’과 ‘표준새번역’을 발간할 당시 우리 교회에서 파송한 오병세 박사를 위원장으로 세우기도 했지만, 여전히 KNCC 비가맹 교단인 고신은 소위 한국교회의 주류적 흐름과 상관이 없다고 말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 한계성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는 또한 100주년 기념사업회의 사무총장을 맡았던 김경래 장로, 한국 시민운동의 대부격인 손봉호 교수, ‘한국기독교회사를 정리하고 민족통일에 대한 건전한 기독교적인 이론을 집성해 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만열 교수 등 연합운동에 기여한 개별적인 고신인들의 활동을 칭찬한다. 또 더 나아가, 2001년 11월 한목협을 통해 창설된 22개 교단장 연합기구와, 그 기구를 통해 시작된 ‘한국교회 대표기구 단일화’ 운동에 고신의 젊은 목회자들이 많이 참여하고 있는 것, 또 각 지역에서 고신의 목회자들이 지역교회 연합운동, 연합사업에 활발하게 동참하고 있는 것을 매우 고무적인 일로 열거한다.

그러나 만일 이 교수의 사상이 오늘날 고신의 사상이라면, 그것은 성경적으로 비평받아야 마땅하다. 연합운동에는 원리가 있어야 한다. 오늘날의 가장 큰 문제는 자유주의 신학의 문제이다. 자유주의는 교회 역사상 전무한 가장 파괴적인 이단사상이다. 자유주의 신학은 세계적으로 역사적 대교단들 속에 심각히 침입해 들어와 있다. 자유주의 신학을 포용하는 에큐메니칼 운동이 비성경적이라고 강력히 비평하였던 것이 성경적인 보수교회들의 입장이었고 고신의 입장도 그러하였다. 그런데 자유주의 신학이 죽었는가? 교회들이 자유주의 이단을 제거하고 새로워졌는가? 어떻게 보수교단의 인사들과 신학교수가 정신 없는 말을 하고 행동을 하는가?

김상복 목사

기독교보 2002년 1월 19일자(11쪽)에 의하면, 한국복음주의협의회(회장: 김명혁 목사)의 월례조찬기도회 및 발표회에서 김상복 목사(할렐루야교회)는 “복음주의 운동의 활성화”라는 제목의 주제발표에서 “신정통주의가 신학적 자유주의에 대한 최근의 표현이라면, 신복음주의는 정통주의에 대한 최신의 옷이다. 신복음주의는 근본주의가 기피한 사회적 문제들을 다루겠다는 의도에 있어서 근본주의와 다르다. 개인적 복음과 사회적 복음 사이에 이원론의 필요가 없다. 진정한 기독교 신앙은 초자연적 개인의 구원 경험과 사회적 철학이다. 교리와 사회 윤리는 둘 다 기독교 학문이다. 근본주의가 리더십과 사회라는 영역에서의 책임을 포기하고 사회를 변혁하거나 사회적 문제들을 해결하기에는 무능해졌다. 신복음주의는 근본주의가 믿는 모든 전통적 교리를 신봉하나 사회적 철학을 포함시켰다”고 주장했다.

위의 보도에 의하면, 김 목사는 신복음주의를 정통 기독교 교리의 신봉과 적극적 사회적 철학을 가진 최신의 정통주의로 정의한 셈이다. 그러나 만일 그것이 그의 사상이라면, 그는 신복음주의나 근본주의에 대한 바른 개념을 가지지 못하고 있고 또 사회 문제에 대한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책임과 교회의 단체적 책임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신복음주의는 그렇게 아름답게 묘사될 그런 입장이 아니다. 신복음주의의 보다 본질적 내용은 자유주의를 포용하거나 자유주의화된 교단들로부터의 분리를 거절하고 그 안에 머물고 자유주의자들과 교제하고 그들과 협력하는 입장이다. 그것은 이단과 분리하라는 성경의 교훈과 명령을 어기는 타협적 죄악이다.

또 사회적 책임에 관하여, 전통적 개혁교회나 근본주의가 공통적으로 주장하고 확신했던 바는 교회가 공적으로 사회적, 정치적 문제들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개혁교회의 표준적 신조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31:4에는 “[교회의] 대회들과 협의회들은 교회적 문제 외에는 아무것도 다루거나 결정해서는 안 되며; 비상한 경우들에 겸비한 청원의 방식으로나; 국가의 위정자들로부터 요구된 경우에 양심의 만족을 위해 충고의 방식으로 외에는, 국가와 관계되는 세속적 사건들에 간섭할 것이 아니다”라고 진술되어 있다.

개혁교회는 전통적으로 지교회적으로나 교단적으로나 간에 사회적, 정치적 문제들에 직접 관여하지 않는 것이 성경적으로 옳다고 믿어 왔다. 그래서 교회가 직접 학교나 고아원이나 양로원을 운영하지 않았다. 물론 교인들 가운데에는 하나님의 주신 은사를 따라 정치가나 교육가나 자선사업가 등이 있을 수 있고 또 교회가 정신적으로 그들을 측면에서 후원할 수 있을 것이지만, 교회가 직접 그런 일을 경영하거나 관여하는 것은 교회의 본연의 임무와 사명을 저버린 일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교회의 사명은 세상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이것은 주님 자신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었고(막 1:38) 또 그가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특별한 임무이었다(마 28:19; 막 16:15; 행 1:8).

물론 교회는 교회에 속한 교인들 가운데 가난한 자나 병든 자를 돌아보았고 그것은 사랑의 당연한 표현이었다(행 2:45; 갈 2:10). 또 교회 밖의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돌아보는 것은 언제나 선한 일이긴 하다. 그러나 교회의 제한된 시간과 힘과 물질을 가지고 교회는 힘써야 할 사명을 주께로부터 받았다. 그것은 영혼을 구원하는 전도의 일이다. 주께서는 그의 전능을 가지시고도 병고치는 일을 주로 하신 것이 아니었고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는 일을 주로 하셨다(마 9:13).

근본주의가 사회 문제에 대해 무관심하다는 것은 바른 말이 아니다. 근본주의가 주로 관심을 가지는 것은 교회들이 자유주의 이단 신학을 포용하는 것에 대한 것이다. 오히려 현재 세계적인 근본주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인 북아일랜드의 이안 페이슬리는 목사로서 유럽 의회의 국회의원이며 북아일랜드 내에서 카톨릭 세력에 대항하여 싸우는 개신교 지도자로서 그 누구보다도 전도와 사회 문제에 적극적이다. 우리는 그의 활동을 북아일랜드의 특수 상황이라고 이해하려 하지만, 여하튼 그것은 근본주의자가 사회 문제에 무관심하다는 잘못된 비난에 대한 충분한 반박의 예가 될 것이다. 단지 근본주의나 전통적 개혁교회가 확신하는 바는 하나의 단체로서의 교회가 사회적, 정치적 문제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것뿐이다.

한국의 소위 교회지도자들은 신복음주의와 근본주의에 대한 바른 개념을 가지고 활동해야 할 것이며 그것들이 관심을 두는 문제들을 바르게 직시하고 성경적으로 판단하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 특히 신복음주의의 타협적 죄악을 어떤 말이나 글로든지 가리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큰 죄악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자유주의 이단 사상들이 없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유주의 신학들을 포용하거나 자유주의적 혹은 포용적 교단들과 교제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불신실 혹은 배신이다. 적은 누룩은 온 덩어리에 퍼진다. 교제의 작은 오류는 마침내 온 기독교계를 부패시키고 말 것이다. 유다 왕 여호사밧은 경건하였을지라도 이스라엘 왕 아합과의 잘못된 교제는 마침내 유다 왕국을 우상숭배의 나라로 부패시키고 말았다는 성경의 역사와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

김경원 목사

2001년 7월 22일자 기독교연합신문에 실린 “한국 교회의 일치와 연합”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예장합동의 김경원 목사는 한국 교회의 연합의 필요성에 대해 말하기를, “한국 교회가 연합과 일치를 이루어야 함은 우선 대 정부적인 대표성을 가진 단체가 없어 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기에 기독교의 소리를 하나로 하는 것이 절대필요하기 때문이며 사회 선교나 특히 앞으로 북한 선교를 앞둔 시점에서 ‘하나의 한국 교회’를 절대필요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또 그는 한국 교회의 분열 원인에 대하여 인간우상화와 신학을 원인으로 보는 견해에 공감을 표했다. 또한, 그는 교회 연합을 위한 바람직한 방향에 대하여 말하기를, “교단장들이나 교계 지도급 인사들이 교제를 나누며 연합을 위해 뜻을 모으고 특히 가까운 교단끼리는 상호 인정하고 교류 협력하는 운동이 필요하다. 나아가서는 궁극적으로 현 KNCC와 한기총이 통폐합하여 모든 한국 교회를 총괄하는 하나의 연합체를 만들어 내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그의 글을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지적하신 것과 같이 하나가 되라는 이 명제를 한국 교회는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라는 말로 맺었다.175)

한국 교회들의 일치와 연합에 대한 그의 열망은 순수하여 보이며 그러한 순수한 소원 자체를 비평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자유와 보수의 대립적인 견해가 있어 왔던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는 교회의 일치와 연합에 대해 신중히 생각하고 성경적으로 바른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이다.

첫째로, 교회의 일치와 연합의 필요성에 대해 생각해보자. 한국 교회들이 대 정부적 한 목소리를 내는 것이 교회 일치를 위해 그렇게 절대 필수적 이유가 되는가? 물론, 모든 교회들이 진리 안에서 하나가 되어 있다면 그런 일치된 목소리가 힘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신학적으로 자유주의와 보수주의의 현격한 차이를 가지고 있는 오늘날의 상황에서 교회들이 한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따라서 그런 바램은 사실상 허상에 불과하다. 구약의 역사나 교회사를 볼 때, 진리의 증거는 오히려 다수의 교회들이나 교인들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나님의 바른 길은 때때로 소수의 오해받고 따돌림당하고 핍박받는 자들에 의해 선포되고 증거되었다. 대 정부적 목소리나 북한 선교를 위한다면, 차라리 자유와 보수의 선을 분명히 나누는 것이 하나님을 위해서 그리고 남한 교회나 북한 교회의 건전한 장래를 위해서 더 필요하고 유익할 것이다.

둘째로, 교회 분열의 원인에 대해 생각해보자. 김 목사가 인간 우상화를 교회 분열의 원인으로 공감한다는 것은 고신 총회가 한상동 목사의 우상화 때문에 생겼고 합동 총회가 박형룡 박사의 우상화 때문에 생겼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 같다. 물론 그는 그의 글에서 단지 ‘한모 목사, 박모 목사’라고만 표현하였다. 그러나 만일 그의 글이 위의 인물들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의 신앙 사상과 입장에 대해 심한 의혹을 느낀다. 그가 인간 우상화를 교회 분열의 원인으로 공감한다는 것은 결국 진리를 위해 싸우고 간 신앙의 용사들과 그들을 진심으로 존경하며 따랐던 수많은 신앙의 선진들을 단순히 인간 우상숭배자들로 몰아버린 셈이 아닌가? 바른 보수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런 입장을 취할 수 없을 것이다. 한국의 보수교회들이 교회일치운동을 경계해 온 것은 자유주의 신학 때문이었다. 에큐메니칼 운동은 초창기부터 자유주의 신학을 포용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포용적 입장에 반대하는 운동들이 일어났었다. 기독교인들의 교제는 진리 안에서의 교제이어야 한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자유주의 신학을 포용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어찌 바른 교리들의 강조 없이 교회 일치만을 부르짖을 수 있겠는가?

셋째로, 교회 연합의 바람직한 방향에 대해 생각해보자. 김 목사는 “궁극적으로 현 KNCC와 한기총이 통폐합하여 모든 한국교회를 총괄하는 하나의 연합체를 만들어 내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발언 속에는 오늘날 교회들 안에 널리 들어와 있는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심각한 문제 의식이 보이지 않는다. 그의 말은 예전에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이 하던 말과 같다. 이단적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회들 안에서 결코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적은 누룩은 온 덩이에 퍼지는 법이다. 한국기독교회협의회(KNCC)가 과거 여러 해 동안 자유주의적 입장에서 활동해왔던 것은 모두가 주지하는 바이다. 그러므로 KNCC와 한기총의 통합을 추구하는 것은 진리와 오류를 섞는 일을 추구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런 혼합적인 일치 운동은 성경을 진실히 믿는 모든 신자들이 가장 반대해야 할 바이다.

에큐메니칼 운동과 가까이 하는 사람들

오늘날 복음주의자들은 이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에큐메니칼 운동에 참여하고 있고 에큐메니칼 운동도 복음주의 교회들을 포용하려고 애쓴다. 1983년 WCC 제6차 뱅쿠버 총회시 “뱅쿠버의 복음주의자들: 공개 편지”라는 제목으로 발표된 복음주의자들 다수의 선언문은, 에큐메니칼 운동의 지도자들이 복음의 핵심을 신봉하는 자들이며 ‘하나님께서 명백히 받으신’자들이므로, 복음주의자들이 에큐메니칼 지도자들로부터 물러나지 말고 기쁘게 그들을 영접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의 일치와 갱신을 추구하는 모든 노력들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할 우리의 결심을 공적으로 선언할 압박을 느꼈다.”176) 이 공개편지의 서명자들은 풀러신학교의 선교학 교수이며 미국장로교회(PCA) 목사인 아더 글라서, 세계복음주의협의회(WEF)의 전 총무이었던 월드론 스카트, 세계복음주의협의회 간사인 로버트 영블러드, 고든-콘웰 신학교 교수인 리차드 러블레스, 개혁주의 에큐메니칼 협의회(REC)의 총무인 폴 슈로텐보어 등 200여명이었다.

1998년 12월 짐바브웨의 하라레에서 열린 WCC 제8차 총회는 세계복음주의협의회(WEF)의 지도자인 죠지 반더벨드를 주요 연사로 내세웠다. 또 WCC 지도부는 WCC 중앙위원회에 파송된 월드 비젼의 공식적 대표인 독일 루터교회의 쿠르트 방게르트 목사에게 특별한 호의를 보였다.177) WCC가 복음주의자들에게 친근히 하고 복음주의자들도 에큐메니칼 인사들과 교제하고 있다.

진화론 포용하는 사람들

크리스챤 뉴스 1998년 7월 6일자는 신비주의(occult)에 대한 데이브 헌트의 최근의 책을 여러 곳 인용하면서, 천주교회, 교황, 크리스챠니티 투데이, 빌리 그레이엄, 프로미스 키퍼즈 등 기타 많은 교회 단체들이 오늘날 진화론(進化論)과 보조를 함께함을 보여준다. 오늘날 6일 창조를 옹호하는 자들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제임스 답슨 같은 복음주의자 조차도 유신론적 진화론(창조와 진화론을 함께 믿는 견해)을 위해 문을 활짝 열어 놓은 휴 로스의 책들을 선전하여왔다.178)

은사주의를 포용하는 자들

잭 헤이포드의 유망한 목사들이라는 1997년 책에서, 미국의 인기 있는 저술가요 연사인 죤 맥아더는 은사주의자 헤이포드를 칭송한다. 로버트 슐러, 빌 하이벨즈, 척 콜슨, 빌 브라잇, 그렉 로리 등도 추천의 글들에서 그를 칭송하였다. 잭 헤이포드는 프로미스 키퍼스 운동을 장려하고 그 이사회에 참여하고 그 단체의 주요 행사들에서 연설한다.179)

파운데이션지 2001년 7-8월호는 다음과 같이 쓴다: “창조학회의 설립자인 헨리 모리스와 베레아의 외침(Berean Call)지의 편집자인 데이브 헌트가 최근에 ‘영원한 지혜’ 사경회에 갈보리 채플 설립자 척 스미스와 연합하였다는 것을 보도하는 것은 실망을 주는 일이다.” 여러 해 동안 모리스와 헌트의 유익한 경고의 사역들을 언급하면서, 그 글은 “이 슬픈 타협은 갈보리 채플 운동의 은사주의 신학과 에큐메니칼 노력들에 신임을 준다”고 말했다. 파운데이션지는 말하기를, 이 사람들이, “방언과 다른 계시적 은사들을 포용하고 은사주의와 신복음주의 진영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척 스미스와 함께 사역적 노력에 연합했을 때 타협이 일어났다고 했다. 헌트와 모리스는 성경적 분리 외의 다른 거의 모든 영역들에서는 탁월한 분별력을 보인다.180)

로버트 슐러(Robert H. Schuller)를 포용하는 사람들

다수의 복음주의자들이 로버트 슐러에 대해 포용적이며 단상에 같이 선다. 크리스웰, 조용기, 폴 크라우취, 잭 헤이포드, 죤 윔버 등은 그의 자서전에 추천사를 썼다. 그러나 로버트 슐러는 자유주의적이고 혼합주의적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자기 존중의 철학에 일치시키기 위해 여러 성경교리들을 재해석하였다. 그의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 자기 존중을 제공하는 예수이다. 그의 복음은 부정적 자기 개념들을 긍정적 개념들로 대치하는 것이다. 슐러에게, 죄란 단순히 자기 존중의 결핍이다. 그에게 가장 큰 악은 성경적 방식으로 사람들을 죄인이라고 부름으로써 그들의 자기 존중에 상처를 입히는 것이다. 슐러는 예수 그리스도가 천국 가는 유일한 길이요 기독교가 유일한 구원 신앙이라고 설교하지 않는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임을 믿는 보편구원론자이다. 그의 목표는 각 사람으로 하여금 이 사실을 이해하고 누리도록 돕는 것이다. 그는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주창한 노만 빈센트 피일의 제자이다. 그는 기독교를 조롱하는 뉴에지의 기독교 일치학교 연례대회에서, 문선명의 통일교 행사들에서, 또한 몰몬교 성전에서의 종교간 조찬 기도 모임에서 주강사로 나타났다. 뉴에이지 운동가들, 몰몬교인들, 또 천주교인들은 그의 교회당에서 연설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자신을 힌두교인과 이슬람교인과 단절시키기 때문에 그 이름으로 더 이상 불리기를 원치 않는다.181) 그러나 1999년 1월 로버트 슐러의 ‘성공적 교회 지도자 학교’는 다음과 같은 연사들을 세웠다: 토니 캠폴로, 빌 하이벨즈, 루이스 팔라우, 죤 맥스웰, 윌리엄 베네트(천주교인), 마이클 모인한 신부, 그리고 한국의 김선도 감독 등이다.182)

2001년 로버트 슐러의 성공적 교회 지도자 학교의 강사들 가운데 복음주의자 토니 캠폴로와 빌 하이벨즈, 자유주의적인 클락 피나크 등이 포함되어 있다.183) 슐러는 최근에 그의 수정(水晶) 대성전에 ‘무신론자’ 고르바초프를 세웠다. 수정 대성전은 교회가 아니고 단지 관광객의 호기심을 끄는 곳이 되었다. 로버트 슐러는 ‘이단자’이며 그의 신학은 성경적 신학이 아니다.184) 그런데 어떻게 복음주의자들이 그런 곳에 설 수 있는가?

천주교회와 가까워지는 자들

남침례교단의 전 회장이었던 W. A. 크리스웰은, “내가 아는 범위에서 가톨릭 교인들보다 기독교의 위대한 근본 교리들에 더 헌신적인 사람들은 없다”고 말했다.185)

복음주의 잡지 크리스챠니티 투데이 1981년 10월호 사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들(가톨릭 교인들과 복음주의자들)이 복음의 의미와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를 주는가를 토의할 때, 우리는 공통 신앙을 소유했다는 것이 넘치게 자명해졌다. . . . 전통적 로마 가톨릭 교인들은 은혜만의 교리를 받아들이고 있다. . . . 그들(가톨릭 교인들과 복음주의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받으셨다는 그분의 약속을 서로 나누고 있으며, 그러므로 그들은 곧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서로를 용납하는 것이 옳다.186)

빌리 그레이엄 뿐만 아니라, 또한 제리 팔웰, 잭 반 임페, 제임스 로빈슨, 에드 답슨 등의 복음주의자들은 다 천주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대하여 찬사를 보냈다. 1985년, 에드 답슨은 “교황 제도가 적그리스도적이라고 선언하는 극단주의자들은 . . . 그리스도의 사랑이 없다”고 말했다. 케넷 칸써는 크리스챠니티 투데이 1985년 9월 6일자 사설에서 교황을 ‘성 베드로의 계승자’라고 불렀고 복음주의자들에 대한 그 ‘자신의 호소’에 대한 이유들을 열거하였다.187)

미국 대형 기독교 TV 방송국인 트리니티 방송국(TBN) 창설자 폴 크라우치(Paul Crouch)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본질적인 것들에 있어서, 우리들의 신학은 근본적으로 동일하다. 소위 교리상 상이(相異)라고 불리는 것들도 보면 실은 단순한 언어상의 문제에 불과한 것들이다. . . . 따라서 나는 비판자들과 신학적으로 침소봉대하는 자들을 향해 “예수의 이름으로 꺼져라”고 말하는 바이다. 사랑과 일치의 정신으로 우리 함께 갑시다. (방청객들의 갈채소리).188)

또 크라우치는 말하기를, “나는 나의 사전에서 프로테스탄트라는 단어마저 삭제해버리고 있다. . . . 나는 아무것에 대해서도 프로테스트(항의)하지 않는다. . . . 이제는 가톨릭인들과 비가톨릭인들이 다함께 성령 안에서 하나되어, 주 안에서 하나되어 모일 때이다”라고 하였다.189)

무디 먼슬리 1993년 11월호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오늘날, 선이든 악이든, 복음주의자들과 천주교인들을 분리시키는 선들이 사라지고 있다. 양쪽에서 더욱 많은 사람들이 함께 활동하고 있다.” 촬스 콜슨은 말하기를, “지금은 그리스도인인 우리 모두가 우리의 신앙고백들과 우리의 전통들의 차이점을 무시하고 함께 모일 적절한 때이다”라고 했다. 빌리 그레이엄과 루이스 팔라우와 월드 비젼 같은 단체들이 천주교인들을 포함한다.190)

유명한 복음주의자들은 1994년 기본적으로 서로의 양무리를 ‘개종시키지’ 않기로 천주교회 지도자들과 함께 합의한 “복음주의자들과 가톨릭교인들과 함께”(ECT)라는 공동선언문에 서명하였다. 그 문서에 서명한 사람들로는 팻 로벗슨, 척 콜슨(교도소 선교회), 존 화이트(제네바 대학 총장, 미국 복음주의자 협회[NAE] 전 총재), 빌 브라잇(대학생선교회[CCC] 총재), 마크 놀(위튼대학 교수), 리차드 무(풀러신학교 총장), J. I. 패커 등이다.191) 그 문서에 서명한 존 화이트는 천주교인들을 복음주의자들 가운데 ‘가장 가까운 친구들’이라고 불렀다.192)

1997년 9월 ‘복음주의자들과 천주교인들과 함께’(ECT)라는 모임에서 “구원의 선물”이라는 두 번째 진술서를 발표하였다. 그 글은 예수님 외에 구원 얻는 다른 길이 없고 의롭다 하심이 인간의 선행으로 말미암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며 오직 그리스도의 의에만 근거한다고 바르게 말하지만, 천주교회의 공로 개념, 연옥, 마리아 경외 등의 문제에 대하여 ‘다양한 이해들’이 있다고만 언급하고 그것의 옳고 그름에 대해 말하지 않으며 또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는 모든 사람은 주 안에서 형제 자매이다”라고 말한다. 그 진술서에 서명한 자들은 대학생 선교회(CCC) 총재 빌 브라잇,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교의 해롤드 브라운과 죤 우드브릿지, 위튼 대학의 마크 놀, 카나다의 리전트 대학의 제임스 패커 등이다. 이들은 다 오늘날 유명한 복음주의자들이다.193)

달라스 신학교 교장 척 스윈돌은 1997년 10월의 한 서신에서 테레사 수녀를 ‘주목할 만한 여인’이라고 불렀다.194) 제임스 답슨 박사는 고(故) 테레사 수녀를 그리스도인으로 인정하였는데, 그것은 “그가 그의 생애에서 성령의 열매를 나타내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잭 반 임페는 이 ‘상냥한 40킬로그램 몸무게의 숙녀’가 구원을 받지 못한 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자들을 꾸짖는다.195) 그러나 빌 잭슨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는 누구와 사진을 찍을 때마다 그의 영혼이 연옥을 떠나기를 기도하였다. 그는 성찬떡에 대한 사제의 축복이 아니면 예수님을 소유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그는 교황에게 마리아를 ‘그리스도인의 협력 구속자, 협력 중보자 및 보혜사’라고 부르기를 공공연하게 간청하였다.196)

크리스챠니티 투데이 1998년 3월 2일자는, 잭 반 임페가 최근에 교황을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변호하는데 그의 전체 방송을 사용하였다고 언급하였다. 그는 다음 번 교황이 요한계시록의 거짓 선지자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대해 경고했고, “우리는 그리스도 안의 형제 자매들로서 결합되었다”고 말했다.197)

1998년, 사업가이며 천주교인인 마이클 티미스(Michael Timmis)는 국제 교도소 선교회(Prison Fellowship International)의 회장으로 지명되었다. 그의 전임 회장이며 설립자인 척 콜슨은 명예회장으로 이사회에 남아 있다.198) 티미스는 또 프러미스 키퍼스의 이사로 있고,199) 지난 10월에는 미국 워싱턴, D.C.에서 모인 제4회 프러미스 키퍼스 총회에서 연설하기도 했다.200)

1998년 12월 미국의 무디 성경학교 교장 죠셉 스토웰은 위튼 대학교 총장 듀안 리트핀(Duane Litfin)과 트리니티 국제대학교 총장 그레고리 웨이브라잇(Gregory Waybright)과 함께 천주교 추기경 프랜시스 죠지의 집에서 열린 만찬에 참석하였다.201) ‘친분 관계’가 형성되었고 ‘동반자 관계’가 논의되었다.202)

최근의 한 책에서 척 콜슨은 말하기를, “오늘날 모든 기독교 지도자들 가운데 가장 희망적 말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로부터 나왔다”고 하였다.203) 많은 복음주의 단체들이 천주교인들과 함께 일하고 있다. 그것들 중에는 월드 비젼, 빌리 그레이엄 전도협회, 촬스 콜슨의 교도소선교회, IVF, CCC, 순복음실업인회, 청년선교회(Youth with Mission), 위클리프 성경번역회 등이 있다.204) 기독교도서협회(Chriatian Booksellers Association)의 서점저널(Bookstore Jour- nal) 1992년 2월호는 가톨릭 고객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자매”로 여기라고 권고하였다.205)

유명한 복음주의자들에 의한 최근 성명서들(예를 들어, ECT 1과 ECT 2)은 천주교인들을 그리스도인들로 인정하였다. 잭 반 임페는 심지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근본주의자라고 선언했다(빌 잭슨 박사). 다른 개신교 지도자들도 더 근래에 비슷한 견해들을 말했다. 1999년 7월 5-8일 미국 사우스 캐롤라이나주 그린빌에서 모인 세계 근본주의자 대회는 다음과 같은 결의문을 통과시켰다:206)

최근 소위 개신교회 지도자들이 로마 천주교회 교황을 세계 교회의 우두머리로 받아들이기를 제안하는 성명서들이 있어 왔기 때문에, 그리고 교황의 권위를 모든 교회들에 주신 ‘은사’로 받아들이려는 이러한 준비가, 로마 천주교회는 분명히 그 해로운 교리들, 그 우상숭배적인 행위들이나 그 신성모독적인 예배들을 변경시킨 적이 없기 때문에 교회라고 자처하는 교회들이 얼마나 속임을 당하게 되었는가를 나타내기 때문에, 이 대회의 대표자들은 이 배교를 통탄하며, 강탈자요 속이는 자인 교황을 거절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참되신 유일한 우두머리이심을 재천명한다. 우리의 충성은 그에 대한 것이며 우리는 오직 그에게만 순종하기를 원한다.

척 콜슨의 교도소 선교회의 목사들의 70페센트 이상이 천주교인들이다. 콜슨은 최근에 교도소 선교회의 책임을 천주교인인 마이클 티미스에게 넘겨주었다. 달라스 신학교는 ‘미국을 위한 천주교 캠페인’의 설립이사인 윌리엄 베넷을 1999년 9월의 주강사로 세웠다.207) 빌리 그레이엄, 빌 브라잇, 로벗슨, 답슨 및 기타 복음주의자들은 천주교회 지도자들을 형제들로 간주하고, 제리 팔웰과 잭 반 임페도 그들과 함께 교황에게 찬사를 보내고 전도대회들과 기타 행사들에서 천주교회 지도자들과 함께 활동한다. 이단들은 전도의 대상이며 전도자들의 동료가 아니다. 만일 어떤 천주교 평신도들이 구원받는다면, 그들은 천주교회 안에 머물러 있지 않을 것이다.208)

트리니티 리뷰지에서 죤 W. 로빈스는 “[미국] 남침례교인인 촬스 콜슨은 미국에서 로마 천주교회를 위한 가장 효과적인 선전자이다”라고 말한다. 로빈스는 33가지 이유들을 열거한다.209)

천주교회가 성경에서 멀리 이탈한 우상숭배적이고 적그리스도적인 단체인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오늘날 복음주의 목사들이 천주교회와 교제하는 것은 악과 타협하는 일이다. 그것은 종교개혁의 귀중한 유산을 저버림이며, 분명히 하나님 앞에서 죄악이다.

프로미스 키퍼스 창설자 빌 매카트니는 나이트 리더 뉴스 서비스의 리챠드 쉐이닌(Richard Scheinin)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당신은 천주교회를 합법적인 기독교회라고 간주합니까?’라는 질문에 대하여 ‘물론이죠’라고 답변하였다.210) 매카트니는 천주교회가 거짓된 복음을 전파한다는 것을 믿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211)

질 사운더스는 카나디안 리바이발리스트 2003년 3-4월호에서 J. R. R. 톨키엔(Tolkien)의 천주교 신앙에 대해 증거하였다. 그의 아들 마이클에게 보낸 편지에서, 톨키엔은 “매우 좌절되었던 나의 삶의 어두움 속에서, 나는 땅에서 사랑할 만한 하나의 위대한 것을 네 앞에 둔다. 그것은 복된 성례식[미사]이다”라고 말했다. 톨키엔의 아내는 그들이 결혼한 다음에 천주교회로 전향해야 했고 그들의 아들 죤은 임직받은 사제가 되었다. 사운더스는 다음과 같이 부언한다:

C. S. 루이스가 톨키엔을 통해 기독교로 전향하였다는 것은 흥미 있는 일이다. 그들은 거의 평생 친한 친구이었고 매주 옥스포드 선술집에 모여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서로의 이야기들을 나누었던 ‘더 잉클링스’라고 부르는 문학 모임에 속해 있었다. 루이스는 영국교회 교인이었지만, 연옥과 미사의 교리를 포함하여 어떤 천주교 견해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또한 임종시에 로마 천주교회의 ‘임종 의식’을 요청하였다.

톨키엔의 반지의 주님이라는 책은 기본적으로 천주교적인 작품이다.212)

 

5. 복음주의 교단들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1995년 예장합동 기관지 기독신보는 총회임원회가 예장통합과 함께 8․15 연합예배를 드리기로 했다고 보도하면서 “우선 양교단이 화합을 도모해 . . . 교단 교류와 관련해 총회정서를 고려 단회적 행사임을 분명히 밝히고”라고 부언하였다.213) 또 동(同)신문은 두 교단이 37년만에 한국기독교 연합회관 대강당에서 함께 예배드렸음을 보도하면서, “양교단의 우호증진은 물론 한국교회연합에도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하였다.214) 그러나 예장통합은 분명히 자유주의적 교단이므로 예장합동 같은 보수교단이 예장통합과 교제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1997년 5월 3일, 총신대학교(총장: 김의환 목사)와 장신대학교(총장: 서정운 목사) 교직원 친선 체육대회가 장신대에서 열려 학교간 친선을 도모하는 시간을 가졌다고 한다.215) 그러나 이러한 행사는 성경의 교훈과 역행하는 잘못된 행사이다.

1997년 5월 30일, 예장합동 총신 양지 캠퍼스에서 고(故) 박형룡 박사의 신학을 평가하는 ‘제1회 죽산 세미나’가 열렸다. 박형룡 박사가 소천한 지 19년 만에 있은 일이었다. 그 세미나에서 아세아연합신학대학 총장 한철하 박사는 박형룡 박사의 신학을 기독교의 정통적 교리 사상을 전승한 ‘사도적 신학,’ ‘바른 신학’이라고 평가하였다. 또 총신대학교 총장 김의환 박사는 “박 박사는 선교사들이 전수한 신학을 보다 체계화하고 한국교회의 현장에서 보수신학을 수호하고 전수했으며 메이천의 ‘교회론적 취약점’을 극복, 결과적으로 우리 교단[예장합동 교단]을 만들고 지켜왔다”고 평가하였다.216)

그러나 “메이천의 ‘교회론적 취약점’”이라는 표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박형룡은 ‘한국의 메이천’이라고 불리었다. 그 까닭은 그가 메이천처럼 자유주의를 철저하게 비평하고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보수하고 변호하였기 때문이다. 메이천이나 박형룡의 사상을 아는 자라면 그들에게 있어서 교회론은 어느 분야보다 중요했다. 박형룡은 메이천처럼 자유주의에 대한 비평뿐 아니라 신복음주의의 타협적 입장에 대해서도 날카롭게 비평했다.217) 그러므로 박형룡에 대한 평가는 그가 중요하게 여긴 이 점을 바르게 다루지 않고서는 바르게 이루어질 수 없다. 오늘날 예장합동과 그 신학교에서는 그의 분별력 있는 바른 입장이 사라져가고 있다. 그 교단과 신학교가 박형룡이 그토록 조심하기를 원하며 경고했던 바로 그 신복음주의적 오류의 방향으로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1997년 7월, 예장합동, 예장고신, 예장통합 3개 교단의 전국 남전도회 혹은 남선교회 연합회 임원들은 대구에서 제4차 연석회의를 열었는데, 그들은 결의문에서 서로 사랑할 것을 다짐하면서 첫 번째 내용으로 교단간의 화합과 일치운동에 앞장설 것을 다짐했다.218) 각 교단들의 지도적 장로들이 오늘날 기독교계의 배교의 문제를 알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슬픈 일이다.

예장합동과 통합 총회장들은 1998년 12월말 간담회에서 1999년 3월경 총신대학교와 장신대학교 교수들이 참여하는 신학 포럼을 열고, 7월에는 교단 지도부 뿐만 아니라 일선 교회 목회자들까지 포함하는 연합 구국 기도회를 열기로 합의했다. 이것은 두 교단의 분열 이후 40년 만에 처음 마련되는 일이다.219) 신학자들이 토론회를 가지는 것은 언제든지 좋은 일이라고 본다. 그러나 연합 구국 기도회의 계획은 옳지 않다. 성경은, “규모 없이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遺傳)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라고 분명히 명령했다(살후 3:6). 오늘날 이단적 자유주의 신학을 포용하는 교단들은 명백히 ‘규모 없이’ 행하는 자들이다. 참된 교회들은 그런 교단들을 책망하고 그들에게서 떠나야 한다.

예장합동(총회장 길자연 목사)과 예장통합(총회장 유의웅 목사)은 1999년 9월 제84차 총회시 개회예배를 함께 드리고 성찬식을 합동으로 거행하기로 계획하였다. 또 양교단은 이에 앞서 양교단 화해와 연합의 상징으로 내년 중 구국기도회를 공동으로 개최했다. 양교단 임원진은 이외에도 합동, 통합의 신학 교류를 위해 ‘총신대-장신대 신학포럼’을 열자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이것의 실현을 위해 소속 교단에서 서로 노력키로 했으며, 1999년 1월에 개최되는 양교단의 신년하례회에는 상대방 총회장을 초청하여 축사를 하도록 했다.220) 그러나 예장통합은 불신앙적이고 파괴적인 자유주의 신학을 포용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교단 소속 다수의 목사들은 그런 신학 입장에 서 있다. 그러므로 예장합동 목사들은 바른 분별력을 가져야 한다. 무분별한 교제는 보수교단의 순수성을 변질시키고 말 것이다.

1999년 1월 예장통합 총회(총회장: 유의웅 목사)는 예장합동 총회장 길자연 목사(서울 신림동 왕성교회)를 초청한 가운데 신년하례회를 가졌다. 3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된 이날 하례회에서 총회장 유의웅 목사는 설교에서 “우리가 하나 되는 것은 믿음과 사랑을 녹여 연합과 일치로 모일 때만 가능하다”면서 “앞으로 합동측과 함께하는 여름 구국기도회와 가을 총회 개회예배를 통해 한국장로교 일치와 연합에 도움이 되며 세계 선교와 봉사에 헌신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축사에 나선 예장합동 길자연 총회장은 “하례회 초청에 감사하고 장족의 발전이 있기를 바란다”면서 “통합과 합동이 이심전심으로 장로교 연합과 일치 운동을 벌여 올해는 하나로 되어가는 분기점이 돼야 한다”고 강조하였다.221) 그러나 예장합동 총회장의 이런 발언과 행동은 교회를 혼란시키는 매우 잘못된 것이다. 교회 연합과 일치는 바른 진리 위에서만 이루어져야 한다.

1999년 예장합동 총회 제83회기 총대를 대상으로 한 전화설문조사 결과, 응답자의 80%이상이 예장통합과의 강단 교류와 신학 교류, 연합 사업을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고, 또 64%가 예장통합과의 교단 통합에 대해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222) 그러나 예장합동의 총회 총대들의 분별력과 입장은 매우 실망스럽다. 예장통합은 1959년 예장합동과 분리된 이후 계속 자유주의 신학에 대해 배격하지 않고 포용하는 입장을 취해 왔고 특히 신정통주의적 입장을 취해 왔다는 것은 잘 알려진 바이다.223)

1999년 6월 27일 주일오후예배 때에 예장합동의 역사적 교회인 승동교회(박상훈 목사)와 예장통합의 대표적 교회인 영락교회(이철신 목사) 간의 강단교류가 양교단의 분열 40년 만에 승동교회에서 이루어졌다. 영락교회의 이철신 목사와 장로 30여명과 성가대원 100여명이 승동교회의 오후 3시 예배에 참석하여 예배를 인도하였다. 또 8월 22일에는, 승동교회가 영락교회를 방문하고 예배를 인도할 예정이다.224)

이런 일이 있기 얼마 전, 예장합동 총회장 길자연 목사의 왕성교회와 예장통합 총회장 유의웅 목사의 도림교회가 이미 이런 식으로 강단교류를 한 바가 있었기 때문에, 이것은 새로운 일이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예장통합이 신학적인 문제가 없는 교단인가? 예장합동이 총회적으로 불건전한 교단과 강단교류를 금한다는 결의를 한 바가 있고 지금까지 그것을 지켜왔기 때문에, 지난번의 총회장의 행위나 이번 승동교회의 행위는 거룩한 총회의 결의를 무시한 무질서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만일 그러한 강단교류가 합당한 일이라면, 먼저 총회적 논의를 통해 총회 결의를 수정해야 했을 것이다.

1999년 9월 6일 전주서문교회(예장 합동측)에서 결성된 전북장로교회연합회는 12월 12일 익산실내체육관에서 창립기념예배 및 찬양축제를 열었다. 전북장로교회연합회는 전라북도 내의 예장합동, 예장통합, 예장개혁, 기장 등 7개 장로교단 소속 교회들의 연합체이다. 이날 예배는 연합회 공동의장인 정복량 목사(전주전성교회) 사회로 공동회장 김종석 목사(군산개복교회) 기도, 기장 총회장 이중표 목사 설교, 예장통합 총회장 이규호 목사와 예장개혁 총회장 고병학 목사 격려사, 예장고려 총회장 양문화 목사 선언문 낭독, 공동회장 서은선 목사(전주서문교회) 축도로 진행되었다. 한편 목포지역에서는 1999년 12월 6일 보수교회를 대표하는 목포시 기독교연합회와 진보진영이 모인 목포시 기독교교회협의회가 통합하여 목포시 기독교교회협의회를 결성했다.225) 자유주의 신학이 죽지 않았음에 불구하고, 한국교회 내의 자유주의와 보수주의의 구별은 점점 더 흐려지고 있다. 한국의 보수교회는 분별력을 잃었고 영적 혼란 속에 있다.

2000년 3월, 한국기독교 교단총무회(회장: 김상학 목사)는 한국교회 백주년기념관에서 회의를 열고 교회연합운동에 최선을 다하기로 하고,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의 연합 움직임에 적극 협력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교단총무회는 회장에 김상학 목사(예장통합), 부회장에 서성수 목사(예장합동), 총무 심군식 목사(예장고신), 서기 한창영 목사(예장합동보수), 회계 박봉규 목사(예장개혁합신), 감사에 양회협 목사(침례교), 이요한 목사(감리교)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226)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이 없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보수교단 목사들의 입장은 이전보다 더욱 흐려졌다.

예장합동 기관지 기독신문 2002년 1월 23일자(1쪽)는 미국의 개신교 9개 교단이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하는 교회’(CUIC)라는 명칭의 단체를 형성한 일을 보도하면서 ‘아름다운 연합’이라는 큰 글자의 제목을 붙여 보도하였다. 그 9개 교단 속에는 미합중국 장로교회, 미국 연합감리교회, 미국 성공회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40년 전에 조직된 ‘연합하는 교회협의회’(COCU)라는 단체가 좀더 발전적 형태를 취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연합이 ‘아름다운 연합’인가? 물론 이 글을 쓴 김지연 기자는 신학적 분별력이 없는 평신도 기자이기 때문에 그렇게 잘못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교단 신문의 편집국이 그것이 아름다운 연합인지, 배교자들의 연합인지 구별하지 못하고 신문이라는 막대한 영향력을 가진 매체를 취급하는가? 이것이 개혁신앙의 보수라는 사시(社是)에 맞는 일인가? 신문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 차라리 없는 것보다 못한 큰 악을 행하고 만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 9개 교단의 연합은 아름다운 연합이 아니다. 그것은 배교자들의 연합에 불과하다. 그것은 오늘날 자유주의적 에큐메니칼 운동의 일환에 불과하다.

2002년 6월, 1950년대 말 에큐메니칼 운동에 따른 교단의 분열의 여파로 1961년 분열의 아픔을 맛보게 되었던 서문교회와 제이교회는 40년만에 설립 90주년 첫 강단교류를 하였다고 한다. 서문교회의 이성헌 목사와 이상민 목사, 그리고 제이교회의 강홍준 목사는 성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서로 부둥켜안고 함께 찬양을 드리기도 했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서문교회와 제이교회는 더 이상 남남의 교회가 아니라 형제교회가 되기를 약속했고, 이들 교회는 올해 연합 체육대회와 성가대 교류 등을 실시하기로 했으며, 현재 교육관을 건축하고 있는 제이교회를 위해 서문교회는 헌금을 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하였다.227)

그러나 이것은 예장합동 교회들의 잘못된 강단 교류의 또 하나의 예가 되었다. 예장합동과 예장통합의 분열은 이유가 있는 분열이었고 그 이유는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고 오히려 더 분명해졌다. 예장 합동은 적어도 보수신학과 신앙을 지켜오기 위해 애써왔다. 그것은 고 박형룡 박사와 박윤선 박사의 수고의 결실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예장통합은 그 노선이 달랐다. 그들은 신정통주의 신학을 용납했고 성경 유오설과 모세 오경의 문서설 등을 용납하였다. 그들은 미국의 자유주의적 장로교단인 미합중국 장로교단과의 교류를 계속해왔다. 우리는 예장통합 교단이 이단이라고 정죄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 교단은 자유주의를 포용하는 불건전한 교단이라는 것을 말해야 할 것이다. 거기에 분열의 이유가 있고 교제나 강단 교류가 불가능했던 이유가 있었다. 그런데 그런 이유가 여전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서로 교제하고 강단교류를 시행하는 것이 옳지 않다. 교단의 지도적 교회와 인물이 그런 일을 앞서 행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런 중대한 일을 행함으로써 파급되는 교단의 급격한 해이에 대한 책임을 누가 질 것인가? 예장합동의 깨어 있는 목사들은 바른 분별력을 가지고 이런 문제를 판단하고 대처해야 할 것이다.

대구 서문교회와 제이교회의 ‘강단 교류’에 대해, 한 신문의 보도에 의하면, 제이교회를 방문했던 서문교회 이성헌 원로목사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법’이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만약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지금 온다면 종교개혁을 일으키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어느 신부의 말을 인용하면서 “43년 전 우리가 나누어진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요 사람의 생각이었음을 고백하고 이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교회 일치를 향하여 가자”고 역설했다고 한다.228)

정말 1959년의 합동과 통합의 분열이 사람의 생각이었는가? 물론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분열을 원치 않으시고 온전한 일치를 원하신다. 그러나 참된 일치는 신앙 사상과 입장에 있어서의 일치이어야 하고 거기에는 용납할 수 있는 것과 용납할 수 없는 것이 있다. 합동과 통합의 분열 당시에는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또한 좀더 깊이 들어가면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사상과 입장의 첨예한 차이와 대립이 있었다. 세계 교회는 이미 자유주의와 보수주의에 대한 첨예한 차이와 대립을 경험하고 있던 터이었다. 이 논쟁은 미국에서는 이미 1930년대에 겪어야 했던 논쟁이었고 우리나라에서는 뒤늦게 그런 싸움을 겪어야 했던 것이다.

이 두 상이한 신앙 색깔은 화합할 수 없었고 과거나 현재나 미래에도 화합할 수 없다. 성경을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역사적 기독교의 근본 교리들을 믿는 자들은 그것들을 부정하는 자들과 일치를 추구하는 에큐메니칼 운동을 용납할 수 없었다. 합동과 통합의 분열은 불필요했던 인간적 싸움이 아니라 불가피하였던 진리의 싸움이었다. 그러므로 그것을 단지 인간의 생각으로 돌려버리는 것은 당시의 진리의 싸움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만일 오늘날 고 박형룡 박사가 살아계셨더라면 그는 참으로 통분하며 이런 발언을 반박하셨을 것이다.

합동 교단을 세웠던 보수적 선진들의 노력과 수고가 과연 인간적 생각을 위한 일들이었단 말인가? 오늘날 합동 교단의 지도적 인사들이 왜 이런 변질된 신앙 입장을 보이고 있는가? 합동측은 정신을 차리고 깨어야 한다. 예장통합은 초창기부터 교단 신학교에서 자유주의 신학을 용납해왔다. 이미 그 교단의 상당수 목사들은 자유주의 신학을 받아들이고 있다고 보인다. 문제는 자유주의 신학이 용납할 만한 것인가, 아니면 이단인가에 달려 있다. 자유주의 신학이 이단이라면 자유주의를 용납하는 예장통합 교단은 교제와 일치의 대상이 되기에 합당치 않다. 그런데 현대 자유주의 신학은 교회 역사상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악한 이단이다. 그러므로 통합측 교단에 대한 무분별한 용납은 매우 심각한 오류이다.

2002년 6월 26일, 예장합동 기관지 기독신문에서 노충헌 기자는 협력선교에 관하여 논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쉽게도 국내에서도 해외에서도 협력사역에는 인색하다. 한 예로 선교사 자녀수련회가 있다. 최근 예장통합 선교부에서 예장총회측과 선교사 자녀수련회를 합동으로 열자고 제안한 바 있다. 그러나 특별한 이유 없이 거절했다. 선교사 자녀수련회를 교단의 특색에 맞춰 따로 할 필요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교사 자녀수련회를 독자적으로 열 수 있는 단체가 국내에 거의 없다는 실정을 감안할 때 수련회 대상을 좀더 개방할 수는 없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229)

그러나 협력선교에는 분명한 원리가 있어야 한다. 그것은 무엇보다 선교를 포함하여 교회의 모든 활동이 신학적 건전성의 기초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예장통합과의 교류 문제는 그 교단이 신학적으로 건전한가라는 문제에 달려 있다. 통합측은 1959년 합동측과 분리된 이후 미국의 자유주의 장로교단인 미합중국 장로교회(PCUSA)와 계속 교류를 가져왔고, 성경유오설, 문서설, 바르트의 신정통주의 등 자유주의 신학사상을 용납해왔다. 그러므로 통합측은 신학적으로 건전한 교단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 교단과의 협력선교는 물론, 선교사 자녀수련회 등도 옳지 않다.

2002년 겨울, 총신대학교 정기간행물인 신학지남에서 총신대학 신학대학원의 서철원 교수는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230)

자유주의는 성경비평으로 시작하여 기독교의 완전부정에로 결말하였다.

자유주의자들의 본래 목표가 기독교의 해체이었는데 20세기 중반에 완전히 그 뜻을 이루게 되었다. 교회들이 기독교를 기독교 되게 하는 모든 교리를 다 버리므로 교회이기를 그치게 되었다. 우리 합동교회와 총신은 평양신학교에서 시작된 전통적 역사적 기독교의 신학을 지키므로 바른 교회로 남기로 작정하므로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 동안 교수를 영입할 때 아무런 심리 없이 영입하므로 우리도 배도를 완료한 신학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성경이 창작이라는 문학비평, 정치신학, 종교다원주의, 또 틸리히의 신학 등을 가르쳤다.

이런 신학들을 교정하고 전통적인 역사적 개혁신학을 보존하고 가르치기 위해서 이사회에서 일부 교수들을 교정하는 일을 결정하고 시행하였다. 그런데 큰 목사님들 다섯 분이 이 모든 것을 번복하여 전통적인 신학과 최첨단 신학 곧 배도를 완료한 신학들을 함께 가르치도록 총회의 결정을 유도하였다. 화합이란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렇게 하였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예장합동의 신학교에서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이다. 신학교가 해이해지면, 교회는 급속히 해이해질 것이다.

2003년, 예장통합 총회는 총회 직원들의 신년하례회 및 시무예배를 위해 기장 총회장 전병금 목사를 청하여 설교하게 하였고 예장합동 총회장 한명수 목사로 축사하게 하였다. 그들은 올해 본격화될 한국교회의 일치와 연합에 파란불을 켜자고 강조했다고 한다. 한편, 기장 시무예배에 초청받은 예장통합 총회장 최병곤 목사는 설교에서 “기장교단은 숫자는 작지만 영향력은 큰 교단이다”고 강조한 뒤, “기장 교단은 특히 과거 어두운 시절 한국교회와 사회를 향해 예언자적 목소리와 제사장적 역할과 소임에 충실히 감당, 타교단의 좋은 본보기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231)

오늘날 한국교회는 분별력이 없는 혼란 그 자체이다. 한국기독교장로회는 김재준 씨의 자유주의 사상을 옹호함으로 시작된 교단이다. 예장통합은 1959년 합동측과의 분열 이후 계속 자유주의 신학을 가르쳐왔다. 합동측은 경성해야 하며 신앙의 순수성을 지켜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먼저 교제의 원리를 잘 지켜야 한다. 잘못된 교제는 신앙의 분별력과 입장을 흐트러뜨린다.

예장합동 기독신문 2003년 4월 2일자(18쪽)는 “3개 교단 총회장 강단교류가 시작됐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예장총회 총회장 한명수 목사와 예장통합 총회장 최병곤 목사, 기장 총회장 전병금 목사는 3월 30일 최병곤 목사가 시무하는 청주동산교회에서 ‘한국 장로교 일치를 위한 총회장 초청예배’를 드리고 한국 장로교 연합과 일치를 기원했다.

각기 교단의 성례복을 갖춰 입은 한명수 목사, 최병곤 목사, 전병금 목사가 차례로 입장하며 시작된 이날 예배는 최병곤 목사가 인도하고, 한명수 목사가 설교했다.

동산교회 교인들의 환대 속에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제하 설교한 한 목사는 “교파를 초월한 교회 연합과 일치는 그리스도의 간곡한 가르침”이라며 “보수적인 신앙을 견지하면서도 배타성과 독선을 버리고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에 힘을 모으는 교회연합운동이 일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예배는 설교 후 교단장 환영인사와 전병금 목사의 축도 등으로 마무리됐다.

한국 장로교 역사상 처음으로 예장총회와 예장통합, 기장 3개 교단 총회장이 교류한 이날 예배는 시종일관 일치와 협력을 강조하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으며, 3개 교단장은 “각 교단의 다양성을 인정하며 민족통일과 교회의 선교 과제를 이루기 위해 협력하는 일치운동을 전개해 나가겠다”는 공동성명서를 발표, 강단교류의 취지를 밝혔다. 교단장들은 또 “합동과 통합, 기장 교단장의 강단교류가 한국 장로교회 전체 연합의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이 같은 강단교류는 4월 13일 전병금 목사가 시무하는 강남교회와 5월 4일 한명수 목사가 시무하는 수원 창훈대교회로 이어질 예정이며, 교단장협의회 등 연합운동 기구를 통해 일치를 위한 논의와 실천을 더욱 강화해나간다는 방침이다.

과연 그의 말대로 ‘교파를 초월한 교회 연합과 일치는 그리스도의 간곡한 가르침’인가?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예장합동은 1959년 통합측과 나뉘인 이후 43년이 넘도록 ‘그리스도의 간곡한 가르침’에 불순종한 교단이 될 것이다. 여하튼 합동측 총회장의 이 발언은 합동측의 신앙 선배들의 반(反)에큐메니칼 정신과 입장을 단숨에 짓밟는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의 말은 확실히 비성경적이다. 교회의 연합과 일치는 ‘바른 신앙의 기초’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신앙의 일치가 없는 교회 연합은 오히려 성경의 교훈에 불순종하는 일이 된다. 현대 세계교회는 역사상 가장 이단적인 자유주의 신학으로 인해 치명적 도전과 갈등을 겪고 있다. 이런 때에 아무런 조건을 달지 않은 채 ‘교파를 초월한 교회 연합과 일치는 그리스도의 간곡한 가르침’이라니 그 무슨 망언(妄言)인가? 더욱이 그가 자유주의 신학을 공공연히 받아들이고 있는 예장통합과 기장측 총회장과 더불어 예배하면서 그런 발언을 했으니 그것은 통합측과 기장측과의 연합을 포함하는 뜻으로 이해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말은 확실히 잘못인 것이다.

진정한 교회 연합은 신학의 일치가 없는 단순한 외형적, 기구적 연합이나, 그의 표현대로 단지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에 힘을 모으는’ 정도의 연합이 아니다. 참된 교회 연합은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께서 하나가 되는 것과 같은 연합(요 17장), 곧 사상적 일치를 가진 연합이어야 한다. 사상의 일치가 없는 외형적 일치는 일치가 아니다. 그러므로 예장통합과 기장측이 자유주의 신학을 따르거나 포용하는 것이 분명한 한 그들 교회와의 연합과 일치는 있을 수 없다. 그들과의 연합을 논하기 전에 먼저 그들 교단의 신학적 정화를 권해야 한다. 예장합동 총회장의 발언은 참으로 큰 문제이다!

2009년 7월 12일 주일오후, 예장통합 총회장 김삼환 목사는 총회임원들과 함께 예장합동 총회장 최병남 목사가 시무하는 대전중앙교회 성도들의 열렬한 환영 속에 주일오후예배 설교와 축도를 하였다. 김삼환 목사는 “교단이 갈라진 이후 올해 희년을 맞이했다”며 “앞으로 50년은 우리 두 교단이 하나 되어 한국교회가 하나되고 남북통일까지 이뤄지는 역사가 있길 원한다”고 말했다. 양총회장들은 예배 도중 서로를 향해 축복송을 부르며 감격스러운 포옹을 나누었고 예배 후에도 교단 관계자들과 함께 만찬을 나누며 선물과 덕담을 주고받았다.232)

2009년 7월 26일 주일오후, 예장합동 총회장 최병남 목사는 총회임원들과 함께 예장통합 총회장 김삼환 목사가 시무하는 명성교회를 방문하여 저녁예배에 설교하였다. 최 목사는 설교 중에 “분열과 분리가 횡행하는 이 세상에서 양교단이 협력하는 차원에서 하나 됨의 예배를 갖게 됨을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설교 후, 최 총회장 부부는 단 위에서 꽃다발과 환영의 박수를 받았다. 김삼환 목사는 축사에서 “지난 50년은 분열이었으나 앞으로 50년 후는 교단이 하나 되고 한국교회가 하나 되고 남북통일도 이뤄질 것”이라고 말하였다. 예장합동 강자현 부총회장은 “합동과 통합의 차이는 점 하나 정도밖에 없는데 무려 50년을 헤어져 있었다”면서 “양교단장의 의지로 선한 일을 이뤘으니 이제 힘을 합해 한국교회 앞에 좋은 일들을 도모하자”고 강조하였다.233)

예장통합은 이 두 교단뿐 아니라, 기장(서재일 총회장)과 예장합동정통(장원기 총회장)과의 강단교류도 실시하였다.234)

그런데, 예장통합과의 강단교류가 아무 문제가 없는 일인가? 예장통합은 신학적으로 자유주의적 교단이다. 이 사실은 여러 증거들을 통해 너무 분명하다.235) 예장통합은 소위 신정통주의 신학을 오늘날의 건전한 개혁신학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신정통주의 신학이 이단적 자유주의 신학이라는 사실은 그 대표적 신학자들인 칼 바르트, C. H. 다드, 라인홀드 니이버의 글들을 검토할 때 분명하다.236)

어떻게 성경에 명백히 오류가 있다고 하고, 성경의 역사적 사건들을 실제 역사로 보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임을 부정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의 재림을 동일한 사건으로 보고, 성경이 윤리의 객관적 규범이 아니라고 말하는 칼 바르트의 사상이 이단이 아니란 말인가? 어떻게 성경의 신빙성을 부정하고, 성경의 객관적, 신적 권위를 부정하고, 하나님의 형벌적 의의 속성을 부정하고, 아담을 신화적 인물로 보고, 예수 그리스도의 형벌적 대속 진리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의 형벌을 담당하셨다는 성경 진리를 부정하는 C. H. 다드의 사상이 이단이 아니란 말인가? 어떻게 천지 창조와 아담의 타락을 신화라고 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불합리하다고 하며, 그리스도의 처녀탄생 진리를 신화라고 하며, 그리스도의 대리적 속죄를 신학적 오류라고 말하며, 그리스도의 재림을 가장 크게 속인 교리라고 말하는 라인홀드 니이버의 사상이 이단이 아니란 말인가?

예장통합의 장로회 신학대학원 교수들은 이런 이단적 신정통주의 신학을 이단이 아니고 오히려 건전하다고 말하고 있다. 즉 그 교단은 신정통주의 신학을 허용하는 정도가 아니고 그런 신학 사상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장로회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교수 김명용은 1997년에 쓴 열린 신학 바른 교회론이라는 그의 책에서 성경의 축자영감설과 성경무오설을 옛시대의 신앙 사상이라고 말하며 오늘날의 개혁신학은 바르트와 브룬너와 라인홀드 니이버 등의 차원높은 신학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였다.237) 그것은 예장통합이 신정통주의적 즉 자유주의적 교단임을 증거하는 것이다.

예장통합의 신학사상의 문제점은 예장합동의 선배들이나 현재의 적지 않은 진실한, 지식 있는 목사들이 오래 전부터 이미 알고 있는 바이다. 그런데 어떻게 오늘날 예장합동의 총회장과 임원들이 아무 문제의식 없이 예장통합과 강단교류를 하고 서로를 인정하고 교제하는 것인가? 오늘날 예장합동에서 일어나고 있는 자유주의 교단과의 강단교류는 하나님 앞에서 매우 잘못된 일이다. 한국의 대표적 보수교단의 지도자들이 이런 잘못을 범하고 그 일을 잘못으로 인식하지도 못하고 있으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예장합동 속에는 이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식하고 항거하는 목사가 하나도 없는가? 예장합동은 참으로 넓어진 길, 연합주의적인 길로 가려는가? 한국교회 안에는 참으로 바른 장로교단이 없는가?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

1997년 예장고신 총무 심군식 목사는 “연합운동의 자세와 방향”이라는 글에서 사회적 문제와 사이비 이단이 판을 치고 있는 현실에서 한국교회는 보수와 진보의 두 성향을 구별하여 힘을 약화시키지 말고 일치단합된 연합운동과 사업으로 현실에 대처하여야 한다고 강조했다.238) 그러나 심군식 목사는 2천년 교회 역사상 전무한 현대 자유주의 교회들의 사상적 변절을 알면서 하는 말인가? 사회문제를 위해서는 배교자들과도 연합할 수 있는가? 더욱이 오늘날 교회 안의 가장 심각한 사이비가 자유주의 신학임을 아는가? 성경은 이단자들과 교제하지 말고 물리치라고 교훈한다(롬 16:17; 유 3). 고신 교단은 초기에 가졌던 바른 분별력을 회복해야 한다.

예장고신 총회임원회(총회장 조긍천 목사)는 2000년 9월 서울에서 개최될 한국 장로교 대회에 교단적으로 참가하기로 했고 한국의 장로교가 함께하는 연합 행사에 교단이 적극 참여하여 장로교 연합과 성장에 이바지하기로 하였다.239) 그러나 고신 총회 임원회의 이러한 결정은 비(非)성경적 에큐메니칼 운동의 입장이다. 고신 총회는 자유주의 신학을 배격하는 본래의 순수한 입장을 지켜야 한다.

예장고신 총회임원회(총회장: 조긍천 목사)는 2000년 9월 서울에서 개최될 한국 장로교 대회에 교단적으로 참가하기로 했고 한국의 장로교가 함께하는 연합행사에 교단이 적극 참여하여 장로교 연합과 성장에 이바지하기로 하였다.240)

예장고신 총회의 교단신문인 기독교보 2002년 1월 12일자 사설에서 “연합운동에서 고신의 위상”이라는 제목의 글을 쓴 이는 작년 12월 28일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의 대표회장 선거에서 고신의 후보가 패배한 것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는 이번 선거를 통하여 고신이 연합운동에서 해야 할 일과 한계를 분명 자각하고 반성해야 한다. . . . 고신은 신학적으로 다른 보수교회처럼 교회의 연합적 인식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이것이 대단히 심각한 문제인 것은, 신학적으로 우리의 교회관은 교부들의 신학적 전통을 그대로 계승한다. 교부들의 신앙고백은 우리는 하나의 거룩한 사도적 공교회를 믿는다고 고백한다. 이 고백 속에 교회관의 핵심이 담겨있다. 교단은 많으나 영적으로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이다. 우리는 ‘분열주의자’도 ‘분열주의적’도 아니라는 것을 말로 할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그런데 아직도 고신 목사 중에 연합에 인색한 자들이 있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개선해야 한다. . . . 우리는 연합운동에 내놓을 만한 리더십[지도력]도 돈도 없다는데 참으로 안타까움을 금치 못한다(3쪽).

나는 위의 글을 읽고 연합에 대한 고신 교단신문의 정신이 잘못되었음을 느끼며 심히 통탄한 마음을 가진다. 우리나라의 진실한 많은 목사들은 총신이 넓은 길로 갈지라도 고신만은 성경 교훈에 바로 선 좁은 길을 걷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 나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 그러나 종종 고신의 목사들이 잘못된 연합운동에 관련된 것을 볼 때에 실망적이었으며 이제 이런 교단신문의 사설을 읽게 되니 더욱 실망이 크다.

고신 교단에게 참으로 필요한 것은 연합적 인식 혹은 연합 정신의 부족이 아니고 잘못된 연합 정신을 버리고 바른 연합 정신을 가지는 것이다. 사설을 쓴 이는 오늘날 교회들이 하나 되는 것이 바른 교회관이라고 믿는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교회관이다. 자유주의 신학은 천주교회보다 더 배교적이다. 자유주의는 교회가 전통적으로 믿어온 성경의 신적 권위,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대속(代贖), 육체적 부활, 승천, 재림, 마지막 심판과 지옥, 죽은 자들의 부활 등을 믿지 않는 이단이다. 천주교회로부터의 분리가 단순히 ‘분열주의’가 아니듯이, 자유주의 신학을 고의적으로 포용하는 배교적 교단들로부터의 분리는 분열주의가 아니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오늘 시대에 요구하시는 바이다. 바른 교회 연합은 자유주의 신학와 천주교회를 배제한 연합이다.

예장통합은 자유주의 신학을 고의적으로 포용하는 교단이다. 그 교단은 건전한 교단이 아니다. 그런데 고신 교단은 어찌하여 그런 교단과의 교제를 문제 있는 교제로 보지 않고 오히려 간절히 사모하는 것이며 그들에게 인정받기를 원하는 것인가? 고신 교단은 어찌하여 ‘분열주의’라는 잘못된 생각 때문에 자유주의 교단들과의 교제의 단절을 오히려 악으로 간주하는 것인가? 고신 교회들을 도왔던 초기 선교사들은 메이천파 선교사라고 불리었다. 메이천은 기독교와 자유주의의 분리는 시대적 요청이라고 확신하였었다.

오늘날 고신 교단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잘못된 교제를 청산하고 한국 교계 안에서 자유주의 신학을 배제한 교단들 간의 교제를 주도하는 것이다. 한기총은 한국의 보수교단들의 연합체가 아니다. 그것이 한국의 보수교단들의 연합체가 되려면 예장통합을 배제해야 한다. 그러나 그 지도자들은 그것을 배제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며 오히려 오래 전부터 기장과 기감 같은 자유주의 교단들까지 받아들이려는 생각을 보여왔다. 이런 한기총이 어찌 보수교단들의 연합체일 수 있겠는가? 고신은 한기총을 갱신하든지 참신한 보수교단들의 협의체를 만드는 일에 중심이 되어야 한다.

2002년 9월, 예장고신 총무 전호진 목사는 교단기관지인 기독교보의 교단 설립 50주년 기획 특집의 “외국 교회와 고신”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그의 신앙 사상과 입장을 나타내었다.241)

첫째로, 그는 현대교회의 연합운동과 오순절 운동의 문제에 대한 비평적 인식이 없어 보인다. 그는 20세기 기독교회의 주요한 특징과 현상을 선교운동과, 연합운동 혹은 에큐메니칼 운동과, 오순절 운동 등 세 가지로 요약하면서, “그런데 복음적 개혁주의 기독교는 선교운동은 나름대로 발전시키지만 신학적 정통성을 강조한 나머지 연합운동에 인색하였고 오순절 운동을 멀리하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20세기의 특징으로서의 연합운동 혹은 에큐메니칼 운동은 자유주의자들을 포용하는 운동으로 진행되어 왔으며 그것은 건전한 성경적 연합운동이 아니다. 그러므로 보수 교회들이 그런 유의 연합운동에 대해 경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또 오순절 운동도 성령의 역사에 대한 바른 이해에 기초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 개혁교회의 일반적 입장이다. 그런데 이런 입장을 ‘연합운동에 인색하였고 오순절 운동을 멀리하였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인가?

둘째로, 그는 국제기독교협의회(ICCC)를 신학적으로 편협하다고 평가한다. 그는 “ICCC는 너무 지나친 신학적 편협성으로 인하여 대중적 지지를 얻는 데 문제가 많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그가 ICCC의 신조나 강령을 알고 있는지 의문스럽다. ICCC의 신조와 강령은 지극히 성경적이고 정통적이다.242) 거기에 ‘너무 지나친 신학적 편협성’이 있다는 것은 자유주의자나 신복음주의자가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표현이다. 그것이 그의 말대로 ‘대중적 지지를 얻지 못했다’면 그것은 부분적으로는 엘리야나 미가야가 그러했듯이 대중의 사상이 해이해져 있었기 때문이고, 부분적으로는 그 지도자 칼 매킨타이어 개인의 부족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ICCC의 입장을 ‘너무 지나친 신학적 편협성’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옳지 않다. 성경적 교회는 근본교리들을 보수하고 자유주의자들로부터 분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근본주의자들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감해야 한다.

셋째로, 그는 진리 운동의 규모에 대해 인간적 위축감을 보인다. 그는 고신 총회가 국제개혁파교회대회(ICRC)에 가입한 것에 대해 자부심을 보이기보다는 “그런데 ICRC는 너무나 적은 개혁파교회의 대회인지라 세계적 연합기구라 하기에는 너무나 미흡한 것도 사실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세계의 기독교계의 현실을 보는 눈을 가져야 할 것 같다. 세계 기독교회는 지금 배교와 혼란의 와중에 있다. 많은 교회들이 이미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저버렸다. 이단적인 자유주의 신학사상은 대교단들의 신학교들에 침입해 들어와 있고 그 신학교들을 주장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작은 연합기구라 할지라도 바른 정신, 바른 입장에 서 있는 기구라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매우 귀한 것이다. 성경 역사나 교회 역사에서 진리 운동은 그 수와 규모의 크고 많음에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작은 것이라도 귀하게 여기는 태도가 필요하다. 그렇지 못할 때 악을 포용하고 악과 타협하는 인본주의적 태도가 나오는 것이다.

넷째로, 그는 미국의 자유주의 신학자를 교회 활동의 한 모범으로 제시한다. 그는 말한다.

50년대 미국 프린스톤 신학교 교장을 30여년간 봉사한 존 매카이 박사는 명예박사를 무려 25개나 받았는데, 그는 세계적 신학자로, 선교학자로 나아가서는 WCC[세계교회협의회]를 조직하는데도 큰 역할을 하였다. 앞으로는 고신 교단도 세계적 안목을 가진 지도자가 절대 필요하다.

그러나 50년대의 미국의 프린스톤 신학교는 자유주의 신학교이며 존 매카이는 자유주의 신학자이다. 또 WCC는 자유주의를 포용하는 불건전한 단체이다. 어떻게 한국의 대표적 보수 교단의 총무가 자유주의 신학교의 자유주의 신학자를 모범으로 들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 보수적 교회들에 인재가 없으면 인재 발굴, 인재 양성을 힘써야 하고 그 동안 없는 대로 가야 하며, 자유주의 교회들에게서 모범을 찾을 필요가 없고 찾아서도 안 된다. 하나님 앞에서는 세계적인 활동가가 필요한 것이 아니고 바르고 신실한 지도자가 필요하다.

예장고신 교단은 정신을 차려야 한다. 교단 지도자들과 특히 교단 총무는 고신의 보수적 신앙 입장을 바르게 이해하고 지킬 만한 자가 되어야 한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예장고신의 순교자적 뿌리는 무의미해지고 말 것이다. 고신은 본래 그런 교단이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 고신은 실망적인 일이 많다. 고신은 본래의 정신과 분별력과 입장을 회복해야 한다.

2003년 9월, 예장고신 총회는 경기노회가 청원한 “타교단과의 강단 교류에 관한 건”은 “당회에 맡기기로” 결정하였다고 한다. “고신 신학을 하고 헌법을 알고 신조를 안다면 당회가 알아서 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것”이 그 주요 이유라고 한다.243) 그러나 이것은 총회가 지교회들의 강단 교류에 대해 지침을 주어야 할 직무를 고의적으로 회피한 것이 아닌가? 오늘날 교회의 현실은 무분별한 연합 활동으로 인해 자유와 보수의 선이 흐려지고 있다. 이런 때에 이런 중요한 문제를 지교회의 당회에 맡긴다고 하는 것은 총회가 지교회들의 잘못된 강단 교류에 대해 통제할 의지가 없음을 나타낼 뿐이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고 충성된 태도가 아니다.

2003년 9월, 예장 고신 총회에서는 고려신학대학원 이성구 교수의 신학 사상이 논쟁되었다. 총회의 신학교육부는 이 교수가 “아모스 예언에 나타난 선택과 윤리”라는 학위 논문에서 아모스의 예언을 그 이전의 독립된 다양한 전통들이 결합되어 형성된 것으로 봄으로써 그것이 신적 영감을 받은 하나님의 계시임을 부정하며 또 모세오경의 단일 저작성을 부인한다고 보고하였다. 총회는 찬반 토론 후 투표를 실시해 가 197표, 부 135표, 기권 3표로 신학부 보고를 받기로 가결하였다. 그러나 신학위원장이 청원한 이성구 교수의 고려신학대학원 교수직 수행이 부적절하다는 건은 “인사 문제이기 때문에 신학교육부에서는 기각하기로” 가결했다고 한다.244)

신학교육부가 연구하여 보고한 대로 이성구 교수의 사상이 그러하다면 당연히 지적되고 제재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총대들 가운데 상당수가 이 교수를 옹호하려 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고신은 선배들이 가졌던 바른 신학의 보수에 대해 열심과 충성심을 버렸는가? 이것은 매우 실망스러운 사실이다. 더욱이 신학위원장이 청원한 건에 대한 총회의 결정이 무엇인지 모르나, 만일 그를 교수직에 그대로 둔 것이라면 그것은 크게 잘못한 일이라고 본다. 마땅히 그것에 대해서도 조치가 있었어야 할 것이다. 고신은 한국교회의 보수신학의 남은 보루와 같은 사명을 느끼며 충성해야 할 것이다.

2004년, 예장고신 총회는 고려신학대학원 이성구 교수의 자유주의 신학 문제를 확인하고 바르게 처리하였다. 다음은 기독교보에 실린 보도내용이다.245)

고려신학대학원 이승미 교수가 질의한 ‘이성구의 자유주의 신학사상의 건’에 대해 신학위원회는 이근삼 박사, 오병세 교수, 허순길 교수, 최덕성 교수에게 신학적인 판단을 의뢰하여 그 견해를 소책자를 통해 발표함으로 상정됐다. 43페이지 분량의 소책자에 담긴 내용은 △ 이성구 교수의 자유주의 신학사상에 대해 이승미 교수의 글, △ “내 혈관에는 개혁주의 피 흐른다”는 제하의 인터넷 N신문 인터뷰 기사 전문(지난해 11월 이성구 교수의 신학사상 검증을 거론한 근거자료용), △ 기사에 대한 이승미 교수의 해명요청, △ ‘이승미 교수가 열거하는 주장에 대한 반론’이라는 제하의 이성구 교수의 소명서, △ 이근삼 교수, 오병세 교수, 허순길 교수, 최덕성 교수 등의 의견이 실렸다.

이근삼 박사는 “자기(이성구 교수) 논문에 대한 이해가 없다고 하면서 자기가 받은 보수, 정통적 해석과 방법을 그냥 무시해도 되는 것입니까? 여기에 자기가 섬기고 있는 신학이 갖는 역사적, 객관적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신학적 태도를 다시 가지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는 견해를 나타냈고, 오병세 박사는 “이성구 교수의 ‘소명서’에 기록된 글을 보아서는 그의 주장이 그 동안 우리 신학대학원에서 가르쳐 온 교리의 핵심과 동일하다고 할 수 없는 요소들이 많다고 판단된다”는 견해를 피력했으며, 허순길 박사는 “1) 자신이 신학적 자유주의자요, 진보적 자유주의의 신학을 넓게 포용하는 입장에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2) 사도신경 외에 ‘나머지 고백이 사변(신학)’이라고 분명하게 말함으로 고신 장로교회가 공식적으로 받아 고백하는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을 경시 내지 부정하고 있다. 3) ‘기장’이 자유주의자를 용납하는 것을 좋게 보고 있다. 4) 고신교회가 WCC와 동질성을 가진 ‘세계개혁교회 연맹에 참여하지 않고 있는 것을 유감스럽게 여기며, 책하고 있다. 5) 현 고신 교회의 목사요, 고신교회 직영신학대학원 교수이면서, 현 고신 교회의 역사적 존립가치와 당위성을 부인하고 있다”는 의견을 냈다.

이에 따라 신학위원회는 세 박사들과 최덕성 교수의 평가를 종합할 때 “이성구 교수는 1) 신학적인 자유주의와 진보적 자유주의 신학을 넓게 수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2) 고신 교회가 공식적으로 받은 교회의 신앙고백(웨스트민스터 교리표준)을 부정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3) WCC적 교회 일치운동의 이념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4) 교단의 존립가치와 정당성을 부인한다고 볼 수 있다”는 결과를 신학교육부에 보고했으며, 처리에 대해서는 “1) 중부산노회 이성구 교수 목사직은 해노회에서 처리하도록 지시하고, 2) 강의 및 모든 보직을 중지하도록 신대원에 처리토록 지시하고, 3) 교수직 해임은 학교법인 이사회에 맡겨 처리하기로 하고 차기 총회에 결과보고를 받기로” 했다. 이 보고서는 총회에서 그대로 채택됐다. 고신 총회의 이번 결정은 바로 되었다.

2009년 7월 19일 주일저녁, 예장고신 총회장 이용호 목사는 총회임원들과 함께 예장통합 총회장 김삼환 목사가 시무하는 명성교회를 방문하여 저녁예배 설교를 하였고 예배 후 교단 임원들의 간담회를 가졌다. 이 목사는 “저와 여러분은 서로 다르지만, 예수 그리스도 가운데 한 가족이기 때문에 이렇게 자유롭게 평화롭게 은혜롭게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있다”면서 “천국에는 통합도 고신도 없다. 땅에서 잠깐 필요한 이름이다. 교파 이름을 다 떼고 교회 이름을 다 떼면 모두가 하나님의 교회”라고 말하였다.246)

2009년 7월 29일 수요일, 예장통합 총회장 김삼환 목사는 총회임원들과 함께 예장고신 총회장 이용호 목사가 시무하는 서울영천교회를 방문하여 수요저녁예배에서 설교하였다. 이 시간 이용호 목사는 “통합과 고신의 교류는 교회행사이면서 교단의 행사이자 한국교회의 행사로 오늘 전하는 모든 메시지가 한국교회를 향한 메시지가 될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하고 “내년에도 양교단 강단 교류가 이어지길 바란다”고 인사하였다.247)

예장통합은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신정통주의적이다. 그런데 예장합동보다 더 보수적 뿌리를 가진 예장고신의 총회장들과 임원들이 아무 문제의식 없이 예장통합과 강단교류를 하고 서로를 인정하고 교제하는 것인가?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매우 잘못된 일이다. 한국의 대표적 보수교단들의 지도자라는 자들이 이런 잘못을 범하고 있고 그 일을 잘못으로 인식하지도 못하고 있으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예장고신 속에는 이런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식하고 항거하는 목사가 하나도 없는가? 예장고신은 참으로 넓어진 길, 연합주의적인 길로 가버리려는가?

대한예수교장로회(합신)

2012년 11월 30일, 한장총의 제30회 대표회장이며 예장합신 총회장을 역임한 권태진 목사(군포제일교회)는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에서 열린 정기총회에서 소감을 밝히면서 “2013년은 무엇보다 분별력과 신앙의 절개가 필요한 해가 될 것 같다”며 “한장총은 보수와 진보의 두 날개를 가지고 있는데 무엇보다 극진보와 극보수를 아우르는 일에 힘쓸 것”이라고 말하였다.248) 이것이 전형적인 신복음주의 정신이다. 바른 분별력과 입장을 가지지 못한 목사가 예장합신 교단의 총회장이었다니 놀랍고 탄식스럽다.

대한예수교장로회(대신)

1997년 예장대신의 전 총무인 조순태 목사는 “한국교회 연합운동”이라는 글에서 사회가 정치적, 경제적, 윤리적으로 위기상황일 때 교회연합이 ‘해결책’이라고 주장하면서 “내가 마땅치 않게 여기는 교파도 같은 사도신경을 믿고 있으며 . . . . 교리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고 말했다.249) 그러나 그의 주장은 심히 정신 없고 무책임하고 잘못된 것이며, 그런 글이 소위 한국의 보수교단들로 알려져 있는 예장대신 교단의 직전 총무에 의해서 쓰여졌고, 또 예장고신 교단의 기관지에 실렸다는 것은 예장대신과 예장고신의 넓어진 노선의 증거로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예장고신의 허순길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보수 교단이라 자처하는 대신교단과 합동정통교단 지도자들이, 근년에 한국교회협의회에 속한 교회들이 회원교회가 되어 있고 WCC와 동질성을 가지고 있는 세계개혁교회연맹(WARC)에 참석하여 가입했다는 소식은 믿기조차 어렵다. 한국의 보수교회들은 더 이상 보수교회라 할 수 없을 만큼 그 정체성을 잃었고, 방향도 잃었다.250)

미국, 남침례교회

미국 남침례교단은 침례교세계연맹(BWA)에서 가장 큰 회원교회이다. 침례교세계연맹 회원 교회들의 다수가 세계교회협의회(WCC)와 관계가 있다. 세계교회협의회에서 침례교세계연맹의 회원교회들은 약 15퍼센트에 이를 것이다. 빌리 그레이엄은 여섯 번의 침례교세계연맹 대회에서 연설하였고 모든 사람에게 그 단체를 후원하라고 격려하였다. 또 1995년 침례교세계연맹은 그에게 특별상을 수여하기도 하였다.251) 그러나 세계교회협의회나 침례교세계연맹은 자유주의 이단을 배격하지 않고 포용하는 배교적 단체들이다.

1998년 3월 실행위원회 모임에서, 침례교세계연맹 총재 닐슨 패니니는, “신학은 때때로 우리를 분열시키지만, 선교와 전도는 우리를 연합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252) 빌리 그레이엄이 수년 전에 그와 비슷한 말을 했었다. 데스몬드 투투는 1998년 침례교세계연맹 모임에서 연설했다.253)

빌리 그레이엄과 코리타 스카트 킹은 1999년 1월 9-11일에 미국 애틀란타에서 열릴 ‘인종차별반대 국제침례교회 지도자회의’의 공동회장이 될 것이다. 미국에서 근본주의자라고 알려진 제리 팔웰은 최근에 남침례교단에 가입한 바 있다.254) 1995년에 40,039교회, 1,566만 교인을 가진 세계 제1의 대교단인 미국의 남침례교단 안에 많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있다는 사실과 그 교단이 배교적 침례교세계연맹의 회원교단이라는 사실은 슬픈 일이다.

뿐만 아니라, 수천명의 남침례교회 목사들과 수십만명의 남침례교회 평신도들은 프리메이슨(Freemason)의 회원들이라고 한다. 프리메이슨은 삼위일체를 부정하고 행위구원을 가르친다. 프리메이슨은 몰몬교와 똑같이 반(反)기독교적이다.255)

침례교세계연맹의 1999년 10월-12월호 뱁티스트 월드(Baptist World)는 빌리 그레이엄을 “금세기의 가장 위대한 전도자”라고 높여 말한 글을 실었고, 급진적 자유주의자 본훼퍼와 마틴 루터 킹과 오스카 로메로와 같은 이들을 “20세기의 선지자들”이라고 불렀다. 빌리 킴[김장환 목사]은 2000년부터 2005년까지 침례교세계연맹의 회장으로 지명되었다.256) 혼란스러운 일들이다.

보수주의자들이 인도하는 남침례교단의 타협적 경향은 늘어나고 있고 줄어들고 있는 것 같지 않다. 2000년 6월 11일 버밍햄에서 열린 ‘오순절 2000’ 행사는 에큐메니칼 사건이었다. 7월 13일 앨러배머 뱁티스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것은 한 신앙 가족으로서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모인 많은 교단들의 가수들, 무용수들 및 기타 연주자들을 포함했다. 버밍햄 침례교회 협회와 기타 몇 지역의 침례교회들이 참여했다.” 버밍햄의 사우스사이드 침례교회의 그리스도인의 성장담당 부목사 페기 샌더포드는 말하기를, “우리의 신앙 체제들이 다르지만 우리는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신앙에서 연합되어 있다”고 했다. 참여자들은 침례교인들, 천주교인들, 그리스도의 교회와 자유주의적인 대교단들의 대표자들을 포함하였다. 워터 버가트 신부는 말하기를, “교리는 분리시키나 봉사는 연합한다. 우리는 감히 경쟁자들처럼 행동하지 않는다”고 하였다.257)

새 바나 연구(Barna Research) 설문조사에 의하면, 남침례교 목사들의 약 30%는 ‘성경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지 않다. 성경적 세계관은 성경 교훈의 정확성, 그리스도의 죄 없는 본성, 사탄의 실제적 존재,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전지하심, 오직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 개인적으로 전도해야 할 책임으로 정의된다. 어떤 사람이 참으로 성경을 믿는 자인지를 확정하는 가장 단순하고 불충분한 기준인데도, 남침례교 목사들의 거의 3분의 1이 실패했다. 물론 다른 교단들은 훨씬 더 나쁜 상황이다.258)

미국장로교회(PCA)

미국장로교회(PCA)는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장로교단이다. 그 교단은 1973년 자유주의적인 합중국 장로교회(남장로교회)로부터의 분열로 시작되었고, 1986년 신복음주의적 미국복음주의협회(NAE)에 가입하였다. 미국장로교회는 지난 7월 연례 회의에서 군대에서의 여성들의 역활에 대해서와, 창조 기사가 문자적 24시간의 6일로 구성되었는지를 결정하기 위한 연구위원회를 조직하였다.259) 한 통계에 의하면, 미국장로교회는 1995년에 1,299교회와 21만 세례교인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와 있다. 이 교단은 미국에서 장로교단으로서는 자유주의적인 미합중국 장로교회(PCUSA, 1995년에 11,361교회, 세례교인 266만명) 다음으로 크다. 또 이 교단은 한국 장로교회들에 많은 영향을 끼치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카버넌트 신학교, 리폼드 신학교 등과 연관되어 있다. 우리는 미국장로교회가 건전한 입장을 취하고 건전한 방향으로 진행하기를 바라지만, 1986년 NAE에 가입한 이후 그 방향이 더욱 포용적이게 되고 있다고 느껴왔다. 그 교단의 지도자들은 더 이상 빌리 그레이엄의 포용적 전도 방법을 비판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승인하고 거기에 동참하여 왔다.

미합중국 장로교회(PCUSA) 안의 보수적 인물들

미합중국 장로교회의 보수주의자들은 그 교단을 “회복할 수 없게 배교적”이라고 표현하였다. 다섯 명의 미합중국 장로교 목사들은 “고백과 회개를 요청함”이라는 문서를 최근에 켄터키주 루이즈빌의 장로교 센터 입구의 벽에 붙였고 그 옆에 그 문서를 긍정하는 100명의 장로교인들의 서명 종이도 붙였다.260) 그 문서는 미합중국 장로교회가 “짐승의 뱃속에서 썩어가고 있고 죽어가고 있으며” “현재의 관리 하에서 회복할 수 없게 배교적이다”라고 말했다. 여러 해 동안, 그 교단은 동성애자의 안수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인지 아닌지 같은 문제들로 논쟁하였다.

하지만 이 보수주의자들은 그 교단을 떠나기를 거절하고 자신들을 이 “회복할 수 없게 배교적인” 교단과 동일시하기를 택한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비성경적이며 또한 비논리적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잘못된 교리와의 모든 동일시로부터 분리하기를 요구한다. 그 교단의 활동에 조금이라도 시간과 돈을 바치는 자들은 실상 그 교단의 모든 비성경적 활동들을 돕고 후원하는 것이다.261)

 

6. 근본주의에 대한 역사적 고찰

오늘날 근본주의라는 말은 말하는 이의 분별력이나 입장에 따라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자유주의 진영에서는 일찍부터 한국의 보수주의 교회를 근본주의적이라고 비난해 왔다. 감리교 신학교장이었던 홍현설 박사는 ‘극단적 근본주의’가 한국 교회 내의 지배적인 신학적 추세이었다고 말했다.262) 김재준 박사는 한국의 ‘엄격한 근본주의’ 신학 교육을 지적하고 공격하면서 “객관적 비판의 여지가 없이 일정한 근본적인 신조들의 주입이요 . . . 교회 지도자들의 시야(視野)는 극히 타계적(他界的)이며, 강한 율법주의와 신비주의적 경향을 띠었다”고 말했고,263) 장로회 신학대학장이었던 이종성 박사는 근본주의를 ‘신바리새주의’라고 불렀다.264)

보수주의 진영에서도 근본주의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볼 수 있다. 박윤선 박사도 근본주의자들이 하나님의 영광보다 인간의 구원을 더욱 강조하며, 성경을 비교적 단편적으로 보고 체계적으로 깊이 보지 못하며,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의 교리를 깊이 보지 못하며, 권위주의적이고 반지식주의적 경향이 있다고 비평한 적이 있다.265)

근본주의가 과연 이런 사상인가? 만일 그렇다면, 보수적 장로교회들은 근본주의를 단호히 거부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근본주의에 대한 박윤선 박사의 비평은 실상 침례교 신학이나 세대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근본주의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근본주의자들 가운데 침례교인들도 있고 세대주의자들도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런 자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근본주의자들 가운데는 많은 장로교인들도 있다. 근본주의는 결코 침례교회 신학이나 세대주의와 동일시 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근본주의는 그것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무엇이다. 근본주의의 본질은 다른 데 있다.

근본주의의 시작

‘근본주의’는 19세기말 미국 교회에서 시작되었다. 1875년 제임스 브룩스를 중심으로 시작되었던 성경공부모임은 예언 사경회로 발전했다. 이 모임은 1883년부터 1897년까지 1884년을 제외하고 매년 나이아가라에서 모였으므로 ‘나이아가라 예언사경회’로 알려지게 되었다. 강사들 중에는 제임스 브룩스 외에 윌리암 어드만, 아도니람 고든, A. C. 딕슨, 허드슨 테일러, A. T. 피얼슨 등이 있었다.

이 예언사경회는 1878년 부룩스의 지도 아래 14개 조항의 신조를 선언하였는데, 그것은 후에 ‘나이아가라 신조’라 불리었다. 그 내용은 ① 성경 영감, ② 삼위일체, ③ 아담의 타락과 전적 부패, ④ 원죄와 사람의 전적 부패성, ⑤ 중생의 절대 필요성, ⑥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은 구속, ⑦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죄책(罪責)으로부터의 완전한 구원, ⑧ 구원의 확신은 모든 신자의 특권, ⑨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중심 되심, ⑩ 교회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모든 자들로 구성됨, ⑪ 성령은 우리들의 영속적 위로자이심, ⑫ 성령을 따라 삶, ⑬ 신자와 불신자의 죽은 후 상태와 최종적 부활, ⑭ 심판의 때가 가까움과 그리스도의 전천년적 재림 등이었다.266)

그 후, 1910년 미국 북장로교회 총회는, ① 성경의 무오성(無誤性), ②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 ③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④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 ⑤ 그리스도의 기적들의 사실성의 교리들을 ‘성경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본질적 내용’이라고 선언하였다. 이 선언은 1916년과 1923년 총회에서 두 번이나 재확인되었다.267)

이러한 선언은, 19세기 후반 신학교들과 교회들에 불신앙적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 자유주의 신학에 대항한 것이었다. 자유주의 신학은 이 다섯 가지 교리들을 부정하였다. 1890년, 촬스 브릭스가 독일 유학 후 당시 북장로교 소속 유니온 신학교 교수로 들어와 공공연히 성경의 오류를 주장했을 때, 1892년 미국 북장로교회 총회는 그를 징계했었다. 그러나 유니온 신학교는 총회에서 독립하여 브릭스를 계속 두었다. 그러므로 장로교회 총회는 이런 자유주의 신학 사상에 대한 경고로 다섯 가지 근본교리들을 천명한 것이었다.

또한, 1910년부터 1915년까지 근본교리들: 진리에 대한 증언이라는 12권으로 된 책자들이 무료로 약 300만부 배포되었다. 이 일은 캘리포니아주의 부유한 석유 자본가 형제 리만 스튜어트와 밀톤 스튜어트의 약 20만불의 헌금으로 가능하였다. 이 책자들의 내용들은 주로 진화론과 성경의 고등 비평에 대항하여 성경의 근본적 교리들을 변호하는 것들이었다.268)

1920년 7월 1일, 커티스 리 로즈는 미국 뉴욕의 침례교 주간신문 워치먼 이그재미너(Watchman-Examiner) 사설에서 ‘근본주의자’라는 말을 최초로 사용하였다. 그는 기독교의 근본교리들을 위해 싸우는 자를 ‘근본주의자’라고 묘사한 것이었다.269)

1920년대의 근본주의

미국 교회에서 1920년대는 근본주의와 현대주의의 신학적 논쟁의 시대이었다. 메이천은 1923년에 출간한 책에서, “특히 종교의 영역에서 현대는 논쟁의 시대이다. 항상 기독교로 알려져 왔던 저 위대한 속죄적 종교가 완전히 다른 형태의 종교적 신념과 싸우고 있는데, 그 종교적 신념은 전통적 기독교 용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에 일층 더 파괴적일 뿐이다. 이 현대적 비(非)속죄적 종교는 ‘현대주의’ 혹은 ‘자유주의’라고 불린다”고 말했다.270)

예를 들어, 1923년 미국 북장로교회 안에는 소위 ‘어번 선언서’라는 것이 작성되었고 곧 1293명의 목사들의 서명을 받았는데, 그것은 1910년, 1916년, 1923년 3차례나 총회가 선언하고 재확인한 5개의 근본교리들을 성경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본질적이지 않고 단지 이론들(학설들)일 뿐이라고 선언한 것이었다. 어번 선언서는 또한 성경 무오(無誤)의 교리가 성경 숭배에 빠지기 쉽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이, 장로교회 총회 안에는 서로 상반된 두 개의 입장이 있었고 서로 대립하고 갈등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해 총회는 이 문제를 신중하게 다루지 않았으며 또 어번 선언서의 서명자들을 징계하지도 않았다. 교회들은 영적으로 잠들어 갔고, 진리를 위한 싸움보다 평화를 더 원하였다.

1924년과 1925년 미국 북장로교회의 보수 신학의 마지막 보루였던 프린스턴 신학교 안에서는, 자유주의자들을 포용한 중부 대서양 신학교 협의회와 관계를 단절하고, 보수적 복음주의 학생연맹 결성에 참여하는 문제로 갈등과 논쟁이 일어났다. 메이천과 다수의 학생들과 운영이사회는 보수주의적 강경 입장을 취하여 학생회의 그러한 조치를 환영하였으나, 교장 로스 스티븐슨은 그것에 불만하였고 스티븐슨의 동료 교수들과 특히 학생처장 촬스 어드만, 그리고 재단이사회는 스티븐슨의 온건하고 포용적인 입장을 지지하였다고 한다. 이 때, 포용주의적 총회 정치가들은 신학교의 운영이사회와 재단이사회를 통합시킴으로써 자유주의적 세력을 우세하게 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프린스턴 신학교는 포용주의자들의 손에 넘어갔던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1929년 메이천, 로버트 딕 윌슨, 오스왈드 앨리스, 코넬리어스 반틸 등은 프린스턴 신학교를 떠났고 다른 이들과 함께 필라델피아에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설립하였다.271)

1930년대의 근본주의

근본주의와 현대주의의 싸움은 외적으로 근본주의의 패배로 끝났다. 미국 내의 역사적 대교단들은 자유주의를 제거하지 않고 자유주의를 포용하는 ‘넓어진 교회’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1930년대의 근본주의는 포용적이고 자유화되고 변절된 대교단들로부터 분리(分離)하는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즉, 1930년대의 근본주의는 ‘분리’라는 특징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 분리는 자유주의의 포용, 자유주의자와의 교제를 양심적으로 용납할 수 없었던 신앙적 동기에서 나온 것이었다. 소수의 신실한 목사들은 대교단들의 입장과 방향에 찬동할 수 없었기 때문에 모(母)교단들을 떠나기도 하였고 또 어떤 이들을 모교단으로부터 쫓겨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이 시기에 미국에 많은 독립 교회들과 작은 새 교단들이 생겨났다. 1930년에 조직된 미국 근본주의 독립교회 협의회(IFCA), 1932년의 정규 침례교회 총회(GARBC), 1936년의 미국 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 of America) 등이 그러하다.

미국 장로교회의 설립을 잠시 살펴보자. 1932년 미국 북장로교회에서는 “선교를 재고함”이라는 보고서가 출판되었는데, 그 내용은 매우 자유주의적이었다. 그 보고서는 19세기의 선교 방법의 전면적 수정을 주장했고, 선교사들이 피선교지의 문화나 종교를 비판하지 말고 존중하며 타협적으로 선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933년 메이천과 그의 동료들은 총회의 선교 정책이 성경적으로 바르게 되기를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장로교 해외 독립선교부’(IBPFM)를 설립했다.

그러나 1934년 총회는 독립선교부에 관련된 자들에게 그 선교부로부터 탈퇴할 것을 명령했고, 1934-35년 동안 총회의 명령에 복종치 않았던 7명의 목사들이 각 노회에서 면직을 당하였다. 그러나 1936년, 미국 북장로교회 총회는 메이천과 그 동료들에게 변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은 채 그들의 상소를 기각하였다. 그러므로 1936년은 보수적 전통을 가졌던 미국 북장로교회가 실로 ‘배교적(背敎的)’ 교회가 된 해이었다.

그 해, 미국 장로교회라는 분리된 작은 교단이 설립되었다. 그러나 그 다음해인 1937년, 전천년설의 옹호와 금주(禁酒), 금연(禁煙)의 미국 장로교회 전통을 지키기 원한 목사들이 미국 장로교회에서 나와 따로 성경장로교회(Bible Presbyterian Church)와 페이스 신학교(Faith Theological Seminary)를 세웠다. 1939년, 미국 장로교회는 정통장로교회(Orthodox Presbyterian Church)로 이름을 바꿨다.272)

신복음주의의 출현 

1940년대에 들어와 ‘신(新)복음주의’(New Evangelicalism)라는 한 경향 혹은 운동이 일어났다. 이런 경향은 소수파로 드러난 근본주의자들 가운데서 일어났다. 근본주의자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진리를 위해 끝까지 싸우기보다 평화와 안정을 더 좋아하였다. 또 그들은 신실한 소수의 보수주의자들과 보수주의 교회들 간의 교제와 협력보다 더 폭넓은 교제와 협력을 추구했다. 그들은 성경적 분리의 교훈을 따르기보다 일치와 화합을 원했다. 1948년 풀러 신학교의 강연에서 해롤드 오켕가(Harold Ockenga)는 ‘신복음주의’(New Evan- gelicalism)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신복음주의적 기관들로서, 1942년에 미국복음주의자협회(NAE)가 조직되었고, 1947년에 풀러 신학교가 설립되었다. 1951년에는 20개국의 복음주의자협회들이 모여 세계복음주의협의회(WEF)를 형성하였다. 또 1956년에는 신복음주의의 대변지와도 같은 크리스챠니티 투데이(Chritianity Today)지가 창간되었다.

배교와의 분리를 주장한 근본주의자들은 1941년 미국기독교회협의회(ACCC)를 조직하였고, 그 단체를 중심으로 1948년 국제기독교회협의회(ICCC)가 형성되었다. 국제기독교회협의회는 그 헌법 서문에서 현대를 이교적 현대주의의 물결이 범람하는 배교(背敎)의 어두운 시대라고 언급하고 “그의 백성에게 모든 불신앙과 부패로부터 분리하라는 하나님의 명령들은 분명하고 적극적이다”라고 진술한 후에, 다음과 같은 요지의 교리적 선언을 채택하였다:

(1) 성경의 완전한 영감, 무오성, 최종적 권위, (2) 하나님의 삼위일체, (3) 예수 그리스도의 참되고 영원하신 신성과, 그의 참되신 그러나 죄 없으신 인성, (4) 그의 처녀 탄생, (5) 그의 대리적, 속상적(expiatory) 죽음, (6) 그의 육체적 부활, (7) 동일하신 그 분의 영광스런 재림, (8) 사람의 타락과 전적 부패, (9) 성령으로 말미암은 중생과,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얻는 구원, (10) 구원받은 자들의 영원한 복과, 잃어버린 자들의 영원한 형벌, (11) 그의 보혈로 구속받은 모든 자들의 영적 일체성, (12) 하나님의 말씀대로 교리와 생활에 있어서 교회의 순결성 보존의 필요성.273)

1950년대 이후의 근본주의 

신자들이 자유주의 교회들로부터 분리해야 한다는 것은 비교적 쉽게 이해되었으나, 거기에 뒤따르는 보다 어려운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신복음주의자들과의 교제 혹은 절교와 분리의 문제이었다. 자유주의적 교회들에 머물거나 자유주의자들을 포용하고 교제하는 신복음주의자들과 계속 교제해야 할 것인가? 그들의 잘못된 교제를 계속 용납해야 할 것인가? 그들을 책망하고 그들과의 교제를 단절해야 하지 않겠는가?

어떤 이들은 신복음주의자들과의 분리를 ‘2차적 분리’라고 불러 그 중요성이나 당위성을 낮추어 평가하려고 했으나, 칼 매킨타이어(Carl McIntire), 밥 죤스(Bob Jones) 2세, 이안 페이슬리(Ian R. K. Paisley) 같은 대부분의 근본주의자들은 신복음주의자들과의 분리를 필요하고 정당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1976년 ‘세계근본주의자대회’(WCF)가 밥죤스 대학교의 명예총장이었던 밥 죤스 2세와 북아일랜드의 보수적 교회 지도자 이안 페이슬리 등을 중심으로 모였다. 또 1987년 ‘성경을믿는교회 국제협의회’가 근본주의적 지도자들에 의해 조직되었고, 1990년 그 단체는 ‘세계성경적교회협의회’(WCBC)로 그 명칭을 바꾸었다.

세계근본주의자대회는 다음과 같은 신조를 선언하였다.

우리는, 근본주의자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중생(重生)한 신자로서 다음과 같은 자라고 믿는다: 첫째, 무오(無誤)하며 글자까지 영감된 성경에 대해 요동치 않는 충성심을 가지는 자. 둘째, 성경이 말하는 바는 무엇이든지 다 그러하다고 믿는 자. 셋째, 성경에 의해 모든 것을 판단하고 오직 성경에 의해서만 판단을 받는 자. 넷째, 다음과 같은 역사적 기독교 신앙의 근본적 진리들을 확언(確言)하는 자: ① 삼위일체의 교리, ②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 동정녀 탄생, 대속(代贖), 육체적 부활과 영광스런 승천, 및 재림(再臨), ③ 성령의 중생(重生)케 하심을 통한 새로운 출생, ④ 성도들의 부활과 영생, ⑤ 불경건한 자들의 부활과 최종적 심판과 영원한 죽음, ⑥ 그리스도의 몸인 성도들의 교제. 다섯째, 이러한 신앙에 대한 충성을 실천하며 그것을 모든 사람에게 전파하려고 애쓰는 자. 여섯째, 이러한 신앙에 대한 모든 단체적(교회적) 부인과, 오류와의 타협과, 진리로부터의 배교(背敎)를 폭로하며 그것들로부터 분리하는 자. 일곱째, 단번에 주신 믿음을 위해 힘써 싸우는 자.

한편 1980년대 이후에, 근본주의자로 자처하는 제리 팔웰이 신복음주의자들과 교제하고 협력함으로써 근본주의 진영에 다시 적잖은 파문을 일으켰다.274) 그러나 그의 입장은 ‘가짜 근본주의’(pseudo- fundamentalism)로 불린다. 그는 칼 매킨타이어의 옷을 입고 해롤드 오켕가의 목소리를 내는 자라고 묘사된다.


7. 근본주의의 바른 개념

우리는 앞에서 근본주의의 역사를 간략히 정리해보았다. 그러면 근본주의는 무엇인가? 근본주의의 바른 개념은 무엇인가?

자유주의자 커솝 레이크는 말하기를, “근본주의를 하나의 새롭고 이상한 사상 형태라고 상상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것은 그런 유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한때 모든 기독교인이 보편적으로 주장했던 신학의 잔존물이다”라고 하였다.275) 근본주의에 대한 커솝 레이크의 개념은 정당하다.

예일 대학교의 교회사학자 케넷 라투렛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14년 얼마 전에 [자유주의, 사회복음, 성경의 고등비평, 진화론 등에] 반대하는 자들은 그들이 기독교 신앙의 근본교리들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보수하는 것 때문에 자신들을 ‘근본주의자들’이라고 불렀고 다른 이들로부터도 그렇게 불리기 시작하였다.276)

해롤드 쿤은 근본주의를, “기독교 체계의 기초적 원리들을 보존하고 현대주의라 불리우는 운동에 있는 위험한 신학적 경향들로 간주된 것들을 저항하기 위해 의도된 최근 수십년 동안 일어난 신학적 운동”이라고 정의하였다.277)

죠지 마스든은, “미국에서의 근본주의는 전투적으로 반(反)현대주의적인 복음주의적 개신교 운동으로 가장 잘 정의된다”고 말하였다.278)

트리니티신학교 학장이었던 케넷 칸쩌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원래 근본주의자들은 정통 개신교 신앙을 고수하는 복음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후에 모더니즘[현대주의=자유주의]과의 투쟁과정에서 모더니스트[현대주의자]들과 결별하기 위해 분리를 택하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죠. 만약 누군가 나를 ‘성경을 의지해 전통적인 복음주의 신앙을 고수하는 자’라는 의미에서 근본주의자라고 부른다면 나는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할 것입니다.279)

복음주의와 근본주의에 대한 그의 개념은 역사적으로 정확하다. 그러나 그는 자유주의자들로부터 분리하는 것이 성경적으로 정당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한국 장로교회의 보수적 지도자이었던 박형룡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근본주의는 별다른 것 아니라, 정통주의요 정통파 기독교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근본주의는 기독교의 역사적 전통적 정통적 신앙을 그대로 믿고 지키는 것 즉 정통 신앙과 동일한 것이니만치, 이것은 곧 기독교 자체라고 단언하는 것이 가장 정당한 정의일 것이다. 근본주의는 기독교 자체다.280)

근본주의에 대한 이러한 정의들은, 비록 부족하긴 하지만, 상당히 역사적 정당성을 가진다. 근본주의는 새로운 것이 아니고 옛날부터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기독교의 근본교리들을 성경에 계시된 대로 믿고 따르고자 하는 역사적 기독교 신앙의 입장인 것이다. 참으로, 그것은 박형룡 박사의 말대로 “정통 기독교요 기독교 자체”인 것이다. 성경은 기독교의 기본적 교리를 굳게 보수하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위의 역사적 고찰에서 증거된 대로, 근본주의에 대한 정의는 이런 근본교리들에 대한 보수성(保守性)과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전투성에 덧붙여 배교적 교단들과 타협적 신복음주의자들로부터의 분리(分離)의 입장이 첨가되어야 한다. 1930년대 후 미국 교계의 상황이 대교단들의 배교(背敎)로 진행되었고 1940년대에는 신복음주의가 출현했기 때문에, 성경적 보수주의는 배교된 교단들로부터 분리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성경적 교회들은 타협적 신복음주의를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근본주의에 대한 바른 정의는 (1) 근본교리들의 보수와, (2) 배교와 타협으로부터의 분리라는 두 요소를 포함한다. 즉, 근본주의는 ‘기독교의 근본교리들을 보수(保守)하고, 자유주의의 배교와 신복음주의의 타협으로부터 분리하는 입장’이라고 정의된다.

세계 근본주의자 대회(WCF)는 1976년 다음과 같은 진술을 채택하였다:

우리는, 근본주의자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중생(重生)한 신자로서 다음과 같은 자라고 믿는다: (1) 무오(無誤)하며 글자까지 영감된 성경에 대해 요동치 않는 충성심을 가지는 자, (2) 성경이 말하는 바는 무엇이든지 다 그러하다고 믿는 자, (3) 성경에 의해 모든 것을 판단하고 오직 성경에 의해서만 판단을 받는 자, (4) 삼위일체의 교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 동정녀 탄생, 대속(代贖), 육체적 부활과 영광스런 승천, 및 재림(再臨), 성령의 중생(重生)케 하심을 통한 새로운 출생, 성도들의 부활과 영생, 불경건한 자들의 부활과 최종적 심판과 영원한 죽음, 그리스도의 몸인 성도들의 교제 등의 역사적 기독교 신앙의 근본적 진리들을 확언(確言)하는 자, (5) 이런 신앙에 대한 충성을 실천하며 그것을 모든 사람에게 전파하려고 애쓰는 자, (6) 이런 신앙에 대한 모든 단체적(교회적) 부인과, 오류와의 타협과, 진리로부터의 배교(背敎)를 폭로하며 그것들로부터 분리하는 자, (7) 단번에 주신 믿음을 위해 힘써 싸우는 자.

이 진술은 1980년, 1983년, 1986년, 1990년에 계속 확인되었다.

미국 기독교회 협의회(ACCC)는 근본주의자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참된 근본주의 그리스도인은--비록 그것이 오늘날 반대로 표현되지만--하나님의 영감되고 무오한 말씀에 대한 견고한 충성을 주장하며 모든 것들을 성경의 잣대로 판단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중생한 신자이다. 근본주의자는 역사적 기독교 신앙의 근본적 진리들을 확신한다. . . . 참된 근본주의자의 다른 하나의 중요한 확인할 수 있는 표시는--그것은 실상 근본주의자와 신복음주의자를 실제로 구별짓는 표시인데--그가 교회의 배교(背敎)와 및 성경적 분리를 실천하지 못하는 타협하는 개인들과 단체들을 폭로하고 그들로부터 분리하는 것이다. . . . 근본주의의 적(敵)들은 자유주의, 에큐메니칼 운동, 천주교회, 은사운동, 인본주의, 및 신복음주의이다. 성경에 대한 순종은 근본주의자들의 표어이며, 구주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의 참된 증거이다.281)

북미 독립침례교협의회(Independent Baptist Fellowship of North America)도 동일한 내용의 결의안을 채택했다.282)

미국 기독교회 협의회(ACCC)는 다음과 같은 결의문을 채택했다:

신복음주의자들은 자신들을 세상의 여러 표준들에 적응시킴으로써 그리스도를 배신하였다. 그들은 근본주의자들을 ‘바리새인들,’ ‘사랑 없는 자들’, ‘분열을 조장하는 자들’ 등으로 표현한다. 그들은 가르치기를, 사람이 하나님의 일에 성공하기 위해 배교적 교회와 협력하여 일해야 한다고 한다. 그들은 성경의 무오(無誤), 진화론, 심지어 교회의 사명을 재검토하는데 개방되어 있다. 그러나 성경만이 오늘과 내일의 일들을 위해 충족하다고 가르치는 신실한 근본주의자들이 아직도 남아 있다.283)

비록 정통적 교리들은 교파적 확신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역사적 개신교회들의 교리적 신념에는 상당한 공통점이 있다. 물론 성경의 근본교리들을 어디까지로 볼 것인가라는 근본교리의 범위의 문제는 쉬운 문제가 아니며 그것이 교파들이 생기게 된 한 주요한 원인이었지만, 역사적 개신교회들의 공통적 신념이 근본교리 안에 든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이런 공통적 근본교리들의 공동적 고백은 현존하는 참된 교회들의 일치의 기초가 될 수 있다. 죤 칼빈이나 죤 오웬은 기독교의 근본적 혹은 본질적  교리들을 그리스도인의 일치의 기초로 간주했었다.284)

근본주의는 적어도 기독교의 이런 공통적 근본교리들을 보수하고자 하는 동기에서 출발되었기 때문에 그 성격상 초교파적이었다. 그러므로 근본주의를 좀더 정확히 정의한다면, 근본주의는 기독교의 근본교리들을 보수하고 오늘날 교회들의 배교와 타협으로부터 분리하는 초교파적 입장 혹은 운동이다.

근본주의와 복음주의의 차이는 자유주의에 대한 태도에 달려 있다. 근본주의는 자유주의를 용납할 수 없는 이단으로 간주하고 그것으로부터 분리해야 할 것을 주장하는 반면, 복음주의는 그것을 용납하고 그런 사상을 가진 자들과 교제하고 협력한다. 자유주의자들을 용납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근본주의와 복음주의 문제의 초점이다. 그러나 우리는 현대 자유주의 신학이 이단이라고 확신한다.285)

 

8. 성경적 평가: “분리의 원리”

성경은 성도간의 사랑의 교제를 강조하지만 또한 어떤 이들과의 교제의 단절 곧 절교와 분리에 대해서도 밝히 가르치고 있다. 전통적으로 개혁교회는 ‘권징의 성실한 실행’을 참 교회의 한 표지로서 가르쳐왔다.286) 우리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성경적 분리’는 바로 성경에 계시된 권징의 교훈 속에 들어 있는 원리이다.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분리의 원리를 고찰함으로써 오늘날 근본주의 입장이 성경적으로 바르고 신복음주의 혹은 복음주의의 입장이 성경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분리의 대상들

성경은 성도들에게 어떤 자들로부터 교제를 끊으라고 가르치는가? 성경이 가르치는 분리의 대상들은 다음 네 부류이다.

불신자들

첫째로, 성경은 성도들에게 불신자들과 교제를 끊으라고 가르친다. 여기에서 말하는 ‘교제’란 교회적 교제 즉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나누는 영적 교제를 가리킨다. 그리스도의 한 몸의 지체로서 나누는 이 교제는 특히 성찬식에 함께 참여함으로써 잘 표현된다. 바울은 교훈하였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 . .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분리하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고후 6:14-18). 세상과 교회, 믿지 않는 자와 믿는 자 사이에는 명확한 선이 있다. 교회는 성도들의 교제이므로, 교회적 교제에는 어떤 한계선이 있을 수밖에 없다. 누구든지 주께로 나오라고 초청되지만, 믿는 자들만 성도로서의 영적 교제를 서로 나눌 수 있다.

이단들

둘째로, 성경은 성도들에게 이단들과 교제를 끊으라고 가르친다. 로마서 16:17-18,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교훈을[너희가 배운 교훈 혹은 교리를] 거스려[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이 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의 배만 섬기나니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 디도서 3:10,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거절하라].” 요한이서 7-11,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 . .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니라.” 유다서 3-4,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 들어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뜻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더욱이, 이단의 성격을 생각할 때, 성도와 이단간의 교제의 단절이 필요함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첫째, 이단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사상이다. 갈라디아서 1:8,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둘째, 이단은 멸망케 하는 사상이다. 베드로후서 2:1,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셋째, 이단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 감과 같다. 디모데후서 2:17-18, “저희 말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진리에 관하여는 저희가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하므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

오늘날 이단에 속하는 것은, 우선 개신교회가 전통적으로 적그리스도적이요 우상숭배적이라고 간주했던 천주교회를 비롯하여, 주로 19세기 이후에 많이 일어난 각종 이단 종파들, 예를 들어, 여호와의 증인, 몰몬교, 안식교, 크리스챤 사이언스, 통일교, 천부교 등과, 특히 현대 자유주의 신학이다. (신복음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들에 대해 포용적일 뿐만 아니라, 천주교회에 대해서도 호의적이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태도이다. 천주교회는 근본적으로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특히, 현대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의 근본교리들, 예를 들면, 성경의 신적 권위와 무오성, 하나님의 형벌적 공의,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 처녀 탄생, 신성(神性), 대속(代贖), 육체의 부활, 승천 및 재림을 부정하는 무서운 불신앙적 이단 사상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자유주의 이단을 결코 용납해서는 안되며,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목사들은 마땅히 교회의 교제에서 배제되어야 하고 정통 교회로부터 출교되어야 한다. 이와 같이 자유주의자들과의 교제의 단절이 성경적이라면, 자유주의자들과의 분리를 주장하는 근본주의 입장이 바르고 그들과의 분리를 반대하고 그들과 교제, 협력을 주장하는 신복음주의 혹은 복음주의 입장이 잘못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범죄자들

셋째로, 성경은 성도들에게 윤리적으로 드러난 죄를 짓고 회개치 않는 자들과 교제를 끊으라고 가르친다. 성경은 그런 자들을 교회에서 내어쫓으라고 가르친다. 고린도전서 5:11-13,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람[탐]하거나 우상숭배를 하거나 후욕[욕]하거나 술취하거나 토색하[강제로 빼앗]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 . . 외인(外人)들은 하나님이 판단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쫓으라.” 이런 교훈에 비추어 볼 때, 오늘날 참된 교회들은 윤리적으로 심히 부패한 교회들과의 교제를 단절해야 할 것이다.

불순종자들

넷째로, 성경은 성도들에게 사도들의 교훈 곧 신약성경의 가르침을 고의적으로 순종치 않음으로 교회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들과 교제를 끊으라고 가르친다. 데살로니가후서 3:6, 14-15,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규모 없이[무질서하게]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 . .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이 교훈은 이 편지가 쓰이던 당시에는 성실하게 일하지 않는 자들에 대한 교훈이었지만, 그 원리는 다른 일에서도 적용된다. 특히, 이 말씀은 오늘날 이단과 교제하지 말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고의적으로 순종하지 않고 자유주의 이단을 용납하고 신복음주의자들에게 적용될 수 있다. 비록 신복음주의자들의 대다수는 신학 사상의 변질이 있는 이단이 아니고 우리와 같이 복음을 믿는 참된 성도요 우리의 형제일지라도, 우리는 그들의 고의적 불순종과 타협을 묵인하거나 용납해서는 안되고, 마땅히 그것을 책망하고 만일 그들이 그런 행위를 돌이키지 않는다면 그들과의 교제도 끊어야 할 것이다.

페이스 복음주의 루터교 신학교의 데오도르 슈브케겔 교수는 신복음주의를 ‘치명적 악’이라고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근본적 문제는 . . . 교회 내에서 오류와 잘못된 가르침을 어떻게 취급할 것인가이다. 옛 방식은 . . . 오류에 빠진 사람을 책망하고 그를 교정하는 것이다. 만일 그가 그의 잘못된 가르침을 고집하면, 우리는 그가 회개하고 그의 길의 잘못으로부터 돌아서기까지 그를 우리로부터 혹은 우리 자신을 그로부터 분리시킨다. 이것이 성경적 방법이다. . . .  그러나 신복음주의자들은 이 분리의 방침을 내버리고 그 대신 오류를 포용하는 침투라는 방침을 취하였다.287)

마크 시드웰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공적인 인물이 범하는 공적인 죄는, 속임을 당하는 자들을 위해 공적으로 책망되어야 한다. 예를 들면, 배교(背敎)와의 교제를 옹호하고, 거짓 교사들과 불신자들과 협력하는 자는 하나님의 명령에 공적으로 도전한 죄가 있다. 그가 잘못 인도하고 있거나, 또는 만일 성경으로부터 적절히 경고를 받지 못한다면 그에 의해 잘못 인도함을 받을 수 있는 자들을 위해, 그리스도의 충성된 목사는, 비록 그 사람이 복음을 전파하는 체하고 또 아마 어느 정도 그러할지라도, 그에 대해 경고해야 한다. 기껏해야, 이것은 불순종하는 그리스도인이 거짓 교사처럼 행동하고 있는 상황이다. 사람들이 입장들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불행스럽다. 우리가 오직 입장에만 집중하고 성경적 불순종이나 타협의 문제를 다룰 수 있다면 좋겠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비성경적 입장의 주된 선동자요 촉진자요 옹호자일 때, 우리는 그가 촉진하고 있는 그 죄를 비난하면서 그 사람을 폭로하지 않을 수 없다.288)

분리의 이유들

성경이 우리에게 위의 네 부류의 사람들과 교제하지 말라고 가르치 이유들은 무엇인가? 네 가지 이유들 때문이다.

첫 번째 이유는 교회의 본질 때문이다. 교회는 근본적으로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임이며, 참된 성도라면 성경적 교리를 믿고 성경적 교훈에 순종할 것이 기대된다. 그러므로 교회의 이러한 본질적 성격에 배치되는 요소들, 곧 불신앙, 이단들, 회개치 않는 죄들, 고의적 불순종 등은 교회에서 마땅히 배격되고 제거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오늘날 자유주의자들이나 자유주의 교회들과의 연합전도활동이 겉보기에 큰 결실이 있는 것 같으나, 성경이 그러한 잘못된 교제를 금하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구실도 용납하지 말고 그런 활동을 반대하고 배격해야 한다. 우리의 일차적 관심은 주의 명령에 대한 순종에 있다. 기독교는 물량주의, 숫자주의, 실용주의가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 순종하는 성경주의, 진리주의이다.

두 번째 이유는 교회의 순결성 때문이다. 교회는 거룩하며 또한 거룩해야 한다. 이것은 교리적으로 뿐만 아니라 윤리적으로도 그러해야 한다. 에베소서 5:26-27,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비록 지상에 흠이 없는 완전한 교회가 없겠지만, 우리는 순결한 교회, 흠 없는 교회를 건립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뻔뻔스런 불신앙이나 고의적 불순종을 교회 안에 용납해서는 안 된다.

세 번째 이유는 악의 전염성 때문이다. 교리적 오류이든지 윤리적 오류이든지 간에, 죄악은 누룩처럼 교회 안에 나쁜 영향을 끼친다. 그러므로 악의 전염성 때문에 교회는 악을 제거하고 악과의 교제를 단절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는 곧 부패되고 속화될 것이다. 고린도전서 5:6,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갈라디아서 5:9,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디모데후서 2:17, “저희 말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네 번째 이유는 하나님의 명예 때문이다. 교회가 윤리적 죄악을 포용하면, 세상이 교회를 비난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도 비난하고 조롱할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명예를 위해서도 그 성결성을 유지해야 한다. 로마서 2:24,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분리의 방법들

성경은 성도들에게 교리적으로 또 윤리적으로 오류가 있는 자들과 어떤 방법으로 교제를 끊으라고 가르치는가? 성경이 가르치는 분리의 원리는 어떤 방식으로 바르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

오류를 지적해야

우선, 교회 지도자들의 잘못된 교훈과 활동들은 지적되고 비평되어야 한다. 어떤 이들은, “교훈들을 비평하고, 교훈하는 자들을 비평하지는 말라”고 말하지만, 교훈과 교훈하는 자는 분리되기 어렵다. 밴가드(Vanguard) 1999년 6월호는 다음과 같이 적절히 말했다.289)

첫째로, 사람들의 이름들을 드는 것은 성경적이다. 바울은 긍정적으로 활동들을 추천하기 위해 사람의 이름을 들었고(고전 16장; 빌 2:25; 골 4장), 부정적으로 활동들을 경고하기 위해서도 그렇게 하였다(딤전 1장, ‘후메내오와 알렉산더’; 딤후 2장, ‘후메내오와 빌레도’; 딤후 4장, ‘알렉산더’). 요한도 또한 구체적으로 사람의 이름을 들었다(요삼 9, 10, ‘디오드레베’).

둘째로, 만일 우리가 사람들을 긍정적으로 칭찬하기를 기뻐한다면(예를 들어, 루터, 스펄전, 웨슬리 등), 부정적으로 사람들의 이름들을 드는 것은 논리일관한 일이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도구가 되는 사람들에 대해 분명하게 말하는 것은 똑같이 정당하다. 더구나 우리가 글을 쓸 때, 우리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을 미워하라고 사람들의 이름을 밝히는 것이 아니고 그들을 조심하라고 하는 것이다(딤후 4:15).

셋째로, 사람들의 이름들을 드는 것은 실제적인 문제이다. 슬프게도, 사람들은 흔히 설교들보다 설교자들을 따른다. 그러므로 그러한 사람들에게 경고하기 위해, 우리는 사람들의 이름들을 들어야 한다.

넷째로, 사람들의 이름들을 드는 것은 역사적인 후원이 있는 일이다. 교회 역사를 통해 볼 때, 사람들은 그들이 반대하는 내용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반대하는 인물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진술하기를 겁내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는, 사람들의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는 것이 사랑 안에서 진실을 말하는 것보다 흔히 더 중요한 것처럼 보인다.

미국의 비교적 보수적인 정규 침례교 총협의회(GARBC)가 인준한 침례교 성경대학 및 신학교의 교장 밀로 톰슨 박사는 그 교단의 최근 연례대회에서 캘버리 컨텐더 같은 현대교회문제들을 지적하는 소식지들을 ‘남들을 중상이나 하는 종이들’(scandal sheets)이라고 표현하고 그것들을 목욕시킬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고 말했다.

거기에 대하여, 캘버리 컨텐더(Calvary Contender) 편집자인 제리 허프만 씨는 다음과 같이 답변하였다:

우리는 보도되고 있는 ‘타협’이 그것을 보도하는 것보다 ‘목욕’시킬 필요가 더 있다고 느껴야 한다. 보기를 원치 않는 자들처럼 눈 먼 자들은 없다! 그렇다. 캘버리 컨텐더지는 하나님의 백성이 속지 않게 하기 위하여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문제들’(scandals)을 보도하거나 폭로한다는 의미에서 ‘문제의 종이’이다. 우리 시대의 가장 수치스런 문제들 중의 하나는 ‘근본주의자들’이 신복음주의의 궤도 안으로 집단적으로 변절하는 것이다. 많은 보수주의자들이 에큐메니칼 자유주의자들이나 포용주의자들과 교제하고 강단 교류를 한다. 이런 유의 타협이야말로 20세기 말의 가장 큰 ‘문제들’ 중의 하나이다. 하나님께서 힘주시는 대로, 우리는 심지어 개인적으로 조롱을 받을지라도 계속 진리를 위해 서서 이러한 ‘문제들’의 나타남들을 보도할 것이다.290)

교회적 교제를 단절해야

성경이 가르치는 분리는 일차적으로 교회적 교제의 단절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 교제를 끊어야 할 대상자들이 있을 경우, 성도들은 성경이 가르친 대로 그리고 교회 헌법의 권징의 규칙을 따라 권계(勸戒, 권면과 충고), 수찬정지(受餐停止, 성찬식에서 제외함), 제명출교의 절차를 행해야 할 것이다(마 18:15-17).

비록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사람들간의 막힌 담 뿐만 아니라 또한 인간들 상호간의 막힌 담도 허물어뜨리신 위대한 화해자이시지만, 비록 그들 중 어떤 이들이 우리와 똑같이 주의 피로 구속받은 자들 곧 우리의 진정한 형제들이요 자매들이겠지만, 비록 우리가 그들 중 어떤 이들과 함께 천국에 들어갈지도 모르지만, 성경적 분리는 성경적 원리요 성경적 교훈이다.

불신앙, 이단들, 회개치 않는 악들, 고의적 불순종들에 대한 적절한 권징과 교제의 단절은 성경에 밝히 계시된 하나님의 뜻이요 명령이다. 고린도전서 5:11-13, “[이런 자와는] 사귀지도 말고 . . . 함께 먹지도 말라 . . .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쫓으라.” 데살로니가후서 3:14,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그러므로 성경적 교회는 합법적인 권징과 교제의 단절을 성실히 실행해야 한다.

특히, 교회는 성경의 근본교리들을 부정하는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목사들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마땅히 출교(黜敎)되어야 할 이단들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교단의 신학교를 위해 교수를 청빙할 때 신학교 이사들은 먼저 청빙할 교수들의 신학 사상이 건전한지를 신중하게 심사해야 한다.

또한 성경적 교회들은 자유주의적 교회들이나 포용주의적 교회들과 교제하지 말아야 한다. 오늘날 기독교계는 대교단들이 자유주의화된 상황이므로, 소위 세계교회협의회(WCC)와 각 나라의 교회협의회(NCC)들은 잘못된 단체들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바로 믿는 교회들은 이러한 단체들에 속하지 말고 그런 단체들과 관련된 활동들을 반대해야 하고 거기에 참여치 말아야 한다.

특히, 빌리 그레이엄의 전도활동과 같이 자유주의자들이나 자유주의 교회들과 협력하는 전도활동은 명백히 비성경적이고 인본주의적이므로 우리는 그러한 활동을 인정하지 말고 또 거기에 참여하거나 그것을 후원하지도 말아야 한다.

또한, 자유주의와 보수주의를 망라한 초교파적 연합집회들, 예를 들어 부활절 연합예배, 연합성찬식, 그리고 성서공회, 기독교 방송국, 찬송가공회 등의 연합활동들도 옳지 않다. 성경의 기본적 교리들을 믿는 교회들간의 초교파적 연합활동들은 가능하고 또 필요하지만, 보수적 교회들과 자유적 교회들간의 연합활동은 명백히 비성경적이다.

덧붙여서 생각할 바는, 한 교회 혹은 교단이 자유주의화 되었거나 자유주의자들을 고의적으로 포용할 때, 보수적 신자들 혹은 목사들은 어떻게 처신해야 하겠는가? 우선, 그는 그 교회와 교단이 자유주의자들을 내어쫓고 성경적 교회와 교단이 되도록 말과 글로써 그리고 합법적인 절차를 따라 노력함으로써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교회나 교단이 자유주의자들이나 혹은 그들을 옹호하는 세속적 교권주의자들의 손에 장악되어 있어서 자유주의자들의 권징 출교나 교회 정화 혹은 개혁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될 때, 그는 그 교회와 교단을 떠나야 하고 바른 입장을 가진 성경적 교회를 찾아 거기에 속하거나 그러한 교회 혹은 교단을 설립해야 한다. 에베소서 5:11,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고린도후서 6:17, “거기서 나와서 따로 있으라”(계 18:4에도 같은 말씀이 있음).

마크 시드웰은 제리 팔웰과 잭 반 임페의 ‘신근본주의’에 대해 경고한다. 그는 또 성경 무오성을 옹호하며(린젤), 신학적 타협에 항거하며(쉐퍼, 웰즈) 은사주의에 대해(죤 매카더) 그리고 천주교회에 대해(스프라울) 경고하는 인기 있는 복음주의자들에 대해서도 경고했다. 근본주의자들이 그들의 비평서들을 읽고 큰 유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나 이 저자들이 여전히 분리에 관해서는 근본주의자와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하면서, 시드웰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들은 거짓된 교훈과 잘못된 실천의 관용을 용납하고 촉진하는 기관들과 연맹들의 네트워크의 한 부분으로 남아 있다. 어떤 위험에 대한 공통적 반대가 근본주의적 복음주의자들과 비(非)근본주의적 복음주의자들 사이의 일치를 위한 근거가 된다고 추정하는 것이 신근본주의적 오류의 한 부분이었다. 그러나 참된 일치의 근거는 오류에 대한 공통적 반대가 아니라 성경적 진리와 성경적 실천에 대한 공통적 신념이어야 한다.291)

개인적 교제를 조심해야

물론, 우리는 교회적 교제를 끊어야 할 대상자들과의 개인적 교제도 조심해야 한다. 때때로 그런 자들과 개인적 교제를 완전히 단절하기 어려운 상황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자들이 우리의 가족들 중에나 우리의 친구들이나 이웃들 가운데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경우, 우리는 조심해야 한다.

무분별한 교제로 악을 용납하거나 공적으로 악을 승인하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구약시대에 유다 왕국의 경건했던 여호사밧 왕은 이스라엘 왕국의 악한 아합 왕과 교제함으로써 하나님의 책망과 진노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 후손에게도 이스라엘 왕국의 우상숭배의 씨를 뿌리는 결과가 되었다. 역대하 19:2, “하나니의 아들 선견자 예후가 나가서 여호사밧 왕을 맞아 가로되 왕이 악한 자를 돕고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이 가하니이까? 그러므로 여호와께로서 진노하심이 왕에게 임하리이다.” 요한이서 7- 11, “. . . 그[이단자]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덕을 잃지 말아야

그러나 우리는 오류를 범한 자들과 교제를 끊을 때 매우 신중해야 한다. 우리의 교제의 단절은 먼저 우리의 성실한 노력을 전제해야 한다. 우리는 상대의 잘못의 교정을 위해 먼저 개인적으로 진지하게 권면하고 교회적으로 성실히 노력해야 한다. 또 교제를 끊어야 할 때에도 지금이 불가피한 분리의 때인지 신중히 생각하고 판단해야 한다. 우리의 성급한 분리는 교회의 개혁이나 갱신에 유익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해를 끼칠 수 있다. 더욱이, 신자 개인의 경우에는 교회적 대책이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떠나야 할 교회를 대체할 건전한 보수적 교회가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이 점에서 때때로 어려움이 많이 있다.

분리에는 항상 극단적 태도의 위험이 있다. 건전한 성경적 확신에서라기보다는 개인적 해석들이 분열의 문제점으로 부각될 수도 있다. 죤 애쉬브룩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분리는 배교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다. 또 분리는 배교로부터 분리하기를 원치 않는 불순종하는 형제들의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다. 그러나 분리가 형제들 간의 모든 불일치에 대한 대답은 아니다.”292)

그 뿐만 아니라, 우리는 언제나, 그리고 특히 이러한 교회적 갈등과 결단의 때에, 겸손과 온유와 사랑을 잃지 말아야 한다. 미움이나 교만은 그 어떠한 죄와 오류 못지 않은 큰 죄악이다. 사람이 성경적 분리의 명령을 지키느냐 지키지 않느냐도 중요하지만, 그에게 좋은 성품과 삶이 있느냐 없느냐는 더 중요하다. 더욱이, 우리의 우리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른 이들보다 영적 분별력을 좀더 가지게 되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일 뿐이며, 따라서 우리는 어떤 경우에라도 결코 교만할 수 없다. 갈라디아서 6:1,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범죄자]를 바로 잡고.” 디모데후서 2:25,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데살로니가후서 3:15, “그들[무질서하게 행하는 자들]을 원수같이 생각지 말고 형제같이 권하라.”

이상의 ‘성경적 분리의 원리’를 고찰해 볼 때, 근본주의는 자유주의적 배교와 신복음주의적 타협을 반대하고 성경의 교훈대로 순수하게, 성실하게 행하고자 하는 바른 입장이다. 근본주의는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입장이다. 우리는 인본주의적 관념의 넓은 길을 버리고 성경 진리대로의 좁은 길을 구하며 확신하며 그 길로 진행해 나아가야 한다. 드러난 교리적, 윤리적 오류의 묵인은 주께 대한 불성실과 불순종이며, 그 오류와 타협하지 않고 그것들로부터 떠나는 것은 참된 성도들의 당연한 의무이다.

분리의 정당성

앞에서 우리가 정리한 바와 같이, 배교와 타협으로부터의 분리는 정당하다. 미국 기독교회 협의회(ACCC)는 1999년 10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정당하게 진술하고 결의하였다:

근래의 수년 동안 우리는 복음주의자들과 천주교인들이 하나님께서 친히 두신 분리의 벽을 제거하기 위하여 서로 간의 일치의 문서들에 서명하는 것을 보아 왔다. 자칭 근본주의자들과 신복음주의자들은 또한 함께 설 공통적 기반을 찾고 있다. 하지만,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계속 견고하다. 진리와 오류가 하나처럼 함께 거하는 것은 여전히 금지되어 있다. 분리의 교리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은 성령의 중생케 하심으로 그에게 속한 자들을 보호하시기 위함이다. 아모스 3:3은 “두 사람이 의합(意合)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느냐?”고 질문한다. 가룟 유다는 그리스도와 제자들 가운데 행하였지만, 그들에게 속한 자가 아니었다고 성경은 가르친다. 바울은 유대주의자들을 ‘흉악한 이리’라고 말했는데(행 20:29), 그것은 그들이 은혜의 복음에 무엇을 더했기 때문이었다. 중생한 신자가 주께 불성실함 없이 불신자들이나 타협자들과 멍에를 같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불순종은 죄이다. . . . 분리의 교리에 대한 성실한 고수(固守)는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들에게 요구하시는 거룩과 순결을 보존시킨다.”293)

어떤 운동이나 교회가 어떻게 배교에 떨어지는가? 클레이 나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역사는 배교(背敎)가 한 시대에 걸쳐 일어나고 하룻밤에 일어나는 것이 아님을 증명한다. 여러분은 “교회가 오직 두 명의 목사를 거치면 자유주의화 될 수 있다”는 말을 들었을 것이다. 첫 번째 목사는 그 교회를 무디게 하고 그 다음은 그것을 배교로 인도한다. 자유주의를 향해 움직이는 교회들을 확인하는 길들이 많이 있지만, 그 길에 있는 자들은 친구들로부터의 경고들을 듣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들이 이와 같이 배교를 향해 움직이는 것은 그들이 거기로 인도되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심지어 여러분이 그들에게 그들의 교단이 장소적 천국과 지옥불이 없다고 하는 자유주의 교리들을 신임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줄 때에라도 그 명백한 사실에 직면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충성된 경고자들을 향하여 그들이 거짓 교리를 취급하고 있기보다는 개인적 문제를 논하고 있다고 본다. 그들은 우리를 ‘사랑이 없다,’ ‘천박한 정신을 가졌다’고 표현한다. 사람이 어떻게 배교에 도달하는가? 사사기 2:10은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라고 말씀한다.294)

캘버리 컨텐더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느지쥐를 죽이는 것은 98퍼센트의 햄버거 속에 넣어진 2퍼센트의 혼합물인 독약이다. 진리와 거짓의 혼합물은 격리되고 분간될 수 있는 순수한 거짓보다 보통 훨씬 더 치명적이다. 하지만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그러나 그 안에 좋은 점이 매우 많다”고 흔히 말한다. 모든 거짓 사상 체계들은 진리의 요소들을 담고 있다. 사실상, 더 많은 진리가 치명적 오류와 섞여 있을수록, 그것은 속임을 위해 더 많이 위험하다. 효력이 있으려면, 속임수는 본질적으로 참되게 보여야 한다. 목표 지점을 향해 전달되는 내용의 90퍼센트 이상은 참되어야 한다. 그러나 심지어 미혹의 시대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은 속임 당함에 대해 핑계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은 우리 시대의 오류나 오류자들을 폭로하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사 8:20).295)

죤 애쉬브룩은 다음과 같이 썼다.

오늘날 근본주의를 공격하는 거대한 오염 세력은 신복음주의 즉 안으로부터의 공격이다. . . . 신자와 불신자를 연합하는 에큐메니칼 전도가 있다. 은사주의와 비은사주의의 혼합이 있다. 개신교인과 천주교인의 연합에 대한 제안이 있다. 대교회와 구도자 운동이 있다. 복음에 대한 심리학적 접근이 있다. 현대기독교음악 운동이 있다. 천국과 지옥의 문자적 이해에 대한 공격이 있다. 하나님에 대한 개방적 견해가 있다. 이 모든 슬픈 광경이 근본주의 안에서 ‘제자들을 끌어 . . .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남으로 생겼다. 우리는 우리가 신복음주의자들과 친구가 되고 그런 책들을 읽고 그런 대회들에 참석하고 그런 연사들의 말을 들으나 그런 어그러짐 속으로 이끌려 들어가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할 때 치명적 잘못을 범한다.296)

타협의 잘못

촬스 우드부릿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복음주의는 가장 치명적인 신학적, 도덕적 타협이다. 그 입장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교활한 공격이다. 개신교 종교개혁 이후, 그리스도의 교회가 이보다 더 간교한 위협에 직면한 적은 없다. . . . 그 입장은 몇 가지 이유에서 치명적이다. 첫째로, 그것은 신학적 부패의 한 형태로서 복음주의 진영 밖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고 또 그 진영들 밖으로부터가 아닌 안으로부터의 공격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그것은 어떤 경우들에서 수년 동안 성경을 믿는 복음주의자로 알려진 자들에 의해 옹호되기 때문이다. 이들 중 어떤 이들은 참으로 한때 신앙의 변호자들이었다. 그들은 무리의 신임을 얻었기 때문에 저들은 그들의 견해들이 바뀌었다는 것을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며 그들을 따라 그들의 타협들에 동참하게 될 것이다. 셋째로, 그것은 성경을 믿는 신자들이 명확히 반박할 수 있는 분명하게 정의된 다른 신학 체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의 음흉한 성격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분별력이 필요하다. 넷째로, 그것은 교리를 희생시키면서 사랑을 강조하고 복음의 사회적 측면들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그것의 거짓된 가르침을 반대하는 정통 신자들은 사랑이 없거나 반(反)사회적이라고 간주될 위험이 있다. . . . 다섯째로, 그것은 자유주의 진영의 신학적 지식층의 비위를 맞추고 요구를 만족시키며, 자기의 견해들을 가지지 않는 자들은 전(前)근대적이라고 암시하기 때문이다. 정식적인 학구적 훈련을 조금밖에 받지 못한 목사들은 이것이 낙심시키는 일로 생각될 것이다. 여섯째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의 잘못된 그러나 그럴듯한 견해들로 세뇌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로, 교리적 윤리적 쇠퇴가 교회 생활의 여러 영역들에서 보여진다. 일곱째로, 신복음주의라는 낙타의 코는 이미 기독교 천막 속에 있기 때문이다. 낙타는 그 전체를 차지하려고 힘써 밀고 들어오고 있다.297)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류에 대해 침묵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잘못이다. 자칭 기독교적이라고 주장하는 개인이나 단체가 정통적 기독교의 역사적 성경적 교리들로부터 심각하게 떠날 때, 우리는 게으르게 침묵함으로 서 있어서는 안 된다(딤 1:9-11). 말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 욕을 돌리는 것이며 그 오류의 전파자들과 그것을 듣는 자들을 사랑하지 않는 일일 것이다.”298)

캘버리 컨텐더지는 이렇게 말한다.

침묵하는 파수꾼들은 없는 것보다 더 위험하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파수꾼들이 의무를 다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안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유다 나라의 목자들을 ‘눈 먼 파수꾼들’이라고 부르셨고 또 그들을 ‘벙어리 개요 능히 짖지 못하는 자’라고 말씀하셨다(사 56:10).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그릇된 교리를 비난하지 않으셨고, 오직 그들이 경고했어야 할 때 잠자고 있었음을 비난하셨다.299)

여러 가지 문제들로 혼란스러운 오늘날 기독교계의 현실에 사랑과 관용만을 부르짖는 것은 하나님의 원수들을 이롭게 하는 것뿐이다! 교회 내의 오류들은 지적되고 제거되어야 한다.

A. W. 토저는 ‘관용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썼다.300)

오늘날의 유행은 우리가 도량이 좁다는 평판을 얻지 않으려고 무엇이든지 관용하는 것이다. 부드러운 마음을 가진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죽이라고 명령하셨던 아말렉의 왕 아각이 죽임을 당하는 것을 참아 볼 수 없으며(삼상 15장), 그래서 그들은 오류와 악을 용납함으로써 오는 시대를 위해 교회의 건강을 희생시키는 길을 택하며, 이것을 그들은 그리스도인의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행한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악의 자리들을 소란시킬 의무가 있으며, 이것이 하나님과 사람들을 위한 신실한 사랑에서 행해지는 곳에 큰 유익이 따를 것이다. 하나님의 참된 일은 성령 충만한 사람들이 기도하면서 하는 심사(審査) 때문에 손해를 입지는 않을 것이다. 사랑을 가장한 소심함 때문에, 많은 교회에서 쓸데없는 형식들과 비(非)성경적 행위들이 계속되도록 허용되었고, 그것들은 마침내 점점 교회의 생명을 질식시켰고 교회를 황폐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정신으로 . . . 교회 문제들을 심사하기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결점을 찾는 자가 되지 않고서는 결점을 찾기가 어렵다. . . . 그러나 우리가 악한 시대에 하나님의 일이 순수하게 보존되기를 바란다면 우리는 그렇게 해야 한다.”

캘버리 컨텐더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참된 기독교적 일치는 공통적으로 믿는 고정된 성경 진리들을 믿고 주의하는 것을 포함한다. 오늘날 에큐메니칼 운동의 거짓된 일치는 ‘다양성 속의 일치,’ 다원주의, 그리고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을 섞는 것이다. 그러나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다’(약 3:17). “외적 일치와 복음 진리 사이에 양자 선택을 해야 한다면, 진리를 위해 일치를 양보해야 한다. 오류 안에서 연합하는 것보다 진리에 의해 분리되는 것이 더 낫다.” 그러한 분열의 책임은 진리를 떠난 자들에게 있다. A. W. 토저는 말하기를, “타협은 압박을 제거할 것이다. 사탄은 싸우기를 중지한 사람을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중지의 댓가는 평화로운 침체의 삶일 것이다”라고 했다.301)

테리 아놀드도 다음과 같이 적절하게 썼다.

오늘날 ‘관용’이라는 말은 새로운 사고방식으로 찬미를 받고 있다. 기독교 세계에서와 기독교 교리에서 관용에 대한 점점 더 많은 요구가 있다. 그렇지만, 실제로 의미한 바와 성취된 바는 흔히 관용이라기보다 ‘타협’이다. . . .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과 그의 말씀을 타협하는 것은 죄이다! 중요한 교리들과 타협하는 것도 또한 죄이다! 거짓 교사들과, 사람들을 건전한 교리에서 떠나게 하는 자들과 타협하는 것은 죄이다. 성경은 때때로 일치보다 분리에 관해 말한다. . . . 예수께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에 대해 관용하셨지만 결코 타협하지는 않으셨다. 사실 그는 흔히 논쟁에 휘말리셨다! . . . 나는, 그들이 뒤에 더 큰 것들에 대해 타협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지금 작은 것들에 대해 타협하는 소위 ‘화평케 하는 자들’을 주의한다. 많은 목사들은 사람들이나 그들 자신의 지위나 인기를 잃어버릴까봐 두려워서 어떤 문제들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취하지 않을 것이다. . . . 진리를 희생하는 관용은 타협에 이른다. 타협은 항상 본래의 표준을 낮춘다. 진리는 경계선을 가지고 있지만, 오류는 경계선이 없다. 불행하게도 타협은 오늘날 덕(德)이고 많은 사람들에게 진리는 감정 상하는 일이 되었다.302)

캘버리 컨텐더는 다음과 같이 썼다.

오늘날은 타협의 시대이다. 명료성을 위한 단순함보다 혼란함을 위한 복잡함이 있다. . . .나는 목회하는 어떤 친구들이, 우리는 ‘옛 자유주의’를 두려워할 게 아무것도 없다, 그것은 힘없는 흔적이라고 말한 것을 기억한다. 그들은 자유주의와 근본주의의 충돌을 옛 문제로 보았다. 지금 그들 중 다수가 자유주의적 교리를 그들 속에 품었거나 그것에 대해 그들의 눈을 닫았다. 이 사람들 중 대다수는 자신들을 근본주의자라고 부를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의 행위들은 배교의 요소들을 포함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는가? . . . 그 대답은 참으로 매우 분명하다. 그들은 그들을 돌아가게 허용할 다리들을 파괴하지 못했기 때문에 되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사실, 그들은 그 다리들의 일부를 황폐케 했으나, 지금 그것들은 재건되고 있다. 그렇다, 우리의 선조들에 의해 건립된 어떤 담장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 담장들은 인기가 없고 ‘에큐메니칼 복음주의’에 장애물이 되어 있다. 그것들은 파괴되고 말 것이다. 담장들은 미움을 받고 조롱을 받고 멸시를 받는다.303)

오늘날은 배교와 타협의 기이한 시대이다. 그러나 진리의 사람들은 이런 세상 속에서도 진리를 지키고 오류들을 정죄하고 배격해야 한다. 참된 교회들과 종들은 결코 자유주의 신학과 천주교회의 배교와 타협하지 말아야 한다.

 

9. 근본주의에 대한 역사적 후원

16세기 종교개혁은 20세기 근본주의 운동의 모본이 된다. 일반적으로 권징은 회개치 않는 범죄자를 교회로부터 배제하는 행위이지만, 16세기 종교개혁 당시에는 서방교회 즉 천주교회가 전체적으로 변질되어 있었기 때문에, 종교개혁자들은 그 교회로부터 분리되어 나와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분파주의자들이 아니었다. 종교개혁은 분파 운동이 아니었다. 오히려 부패된 교회 속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악한 일이었다.

20세기 기독교계의 상황은 16세기 종교개혁 당시보다 더 어둡고 혼란스럽다. 역사적 대교단들은 자유화되었거나 자유주의를 고의적으로 포용하는 넓어진 교회들이 되었다. 다수의 교회들은 자유주의자들을 권징하거나 출교시킬 의사가 전혀 없다. 또 보수적인 교회들도 자유적 혹은 포용적 교회들과 점점 더 자유로이 교제하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참된 성도들과 목사들은 배교적 혹은 포용적 교회들 안에 그대로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그들의 속한 교회들이 어떤 방향으로 가든지 자신들만 보수적으로 믿으면 된다고 안일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마땅히 그 교회들로부터 나와야 하고 그런 잘못된 교제와 협력으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 이것은 분파주의적 관념이 아니고 성경이 명령하는, 그리고 우리가 순종해야 하는, 정당한 분리이다. 참된 성도들이 죽은 교회, 배교적인 교회로부터 떠나는 것은 그들의 자유이며 또한 의무이다.

침례교 연맹의 교리적 탈선들을 지적하면서 1887년 그 단체로부터 탈퇴했던 촬스 스펄젼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내가 아는 한 하나님의 진리를 전파했고, 그 독특한 내용들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나는 나의 증거를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신앙이 잘못된 자들로부터 그리고 심지어 그들과 교제하는 자들로부터 내 자신을 분명하게 단절시켰다,” “오류가 확립되었음을 내가 보았거나 내가 보았다고 생각하자마자, 나는 심사 숙고하지 않았고, 즉시 그 단체와 결별했다. 그때 이후 나의 한가지 조언은 ‘그들로부터 나오라’는 것이었다,” “오류에 연루되는 것은 가장 훌륭한 사람들에게서 그 오류를 성공적으로 저항할 능력을 취하여 갈 것이다.”304)

유명한 캠벨 모간 목사도 잘못된 관용이 선한 영향력을 잃게 만든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배신 행위인 관용이 있다. 마비 상태를 낳는 화평이 있다. 교회가 일을 할 때 타협에 근거한 교제를 요청하는 자들에게 ‘아니오’라고 말해야 할 때들이 있다. 그렇게 떨어져 서 있는 것은 추방과 핍박을 낳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능력과 영향력을 유지할 것이다. . . . 오늘날 교회는 타협에 의하여 그 자신의 영향력을 파괴시켰다.305)

20세기 미국 북장로교회의 배교에 대항하여 싸웠던 보수적 지도자이며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설립자의 한 사람이었던 메이천은 자유주의자들과의 분리의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역설하였다.

한가지 사실이 완전히 명백하다. 즉 자유주의자들이 기독교인이든지 아니든지 간에, 자유주의가 기독교가 아니라는 것은 여하튼 완전히 분명한 것이다. 또한, 그것이 그러하다면, 자유주의와 기독교가 계속 동일한 조직체 안에서 전파된다는 것은 지극히 바람직하지 못하다. 교회 안에 있는 그 두 부류들의 분리는 이 시대의 절실한 요구이다.306)

그는 배교적인 교회로부터의 분리의 정당성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일 자유주의파가 실제로 교회의 기관들을 완전히 장악한다면, 복음주의적 그리스도인은 그 교회의 활동을 계속 후원할 수 없을 것이다. . . . 만일 자유주의파가 실제로 교회를 장악한다면, 복음주의적 기독교인들은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물러설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307)

메이천은 신복음주의적 타협의 죄에 대해, “오늘날 가장 나쁜 죄는 당신이 기독교 신앙을 동의하고 성경을 믿는다고 말한 다음, 기독교의 기본적인 사실들을 부인하는 자들과 협력하고 타협하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308)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조직신학 교수이었던 죤 머리는, 자유주의자들과 협력하는 신복음주의적 전도 방법에 관하여, 자유주의자들에게 전도하는 것과 그들과 함께 전도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고 말하면서 자유주의자들과 협력하는 전도 방법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다고 분명하게 비평하였다.309) 또 그는 신자의 교회 소속 문제에 관하여, 우리가 소속한 교회의 집단적 증거는 곧 우리의 증거이며,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께 신실한 교회에 소속해야 한다고 말했고, 집단적 관계와 책임을 무시하는 것은 악이라고 부언하였다.310)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변증학 교수이었던 코넬리우스 반틸은 신복음주의자들의 신학적 약점들, 타협적 전도활동, 및 신복음주의적 잡지들을 비평했다.311) 예를 들어, 그는 타협적 전도활동을 반대하는 메이천의 입장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메이천은 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을 주장하는 자들과 협력함으로 이루어지는 협력 선교, 협력 전파, 협력 전도를 반대했다. 메이천에게 있어서 그러한 협력은, 유대주의자들과의 협력이 사도 바울에게 불가능했던 것처럼 불가능하였다. . . . 그는 그 자신의 교회에서 선교에 있어서 자유주의자들과 협력하는 것을 생각할 수 없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독립 선교부를 조직하지 않았을 것이다. . . .  그는 협력 전도의 개념이 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께 대한 충성의 배신임을 명백히 했다.312)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구약교수이었던 에드워드 영은 근본주의와 신복음주의 문제에 대하여, 신복음주의가 전도와 학문과 교육을 강조한다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사실, 그것은 매우 중요한 교회의 교리와 신앙을 위한 활기찬 투쟁의 필요성을 제외하곤 모든 것을 강조한다. . . . 그러면 신복음주의가 오늘날의 상황에 대한 해답인가? 우리는 아니라고, 강조해서 아니라고 대답한다. 여기에 한 일시적 현상이 있다. 그리고 그것이 빨리 지나갈수록 교회를 위해 더 유익하다. . . . 근본주의 안에는 훌륭한 많은 점들이 있고, 만일 우리가 근본주의와 신복음주의, 둘 중의 하나를 택하라고 강요를 당한다면, 우리는 어떠한 주저도 없이 근본주의를 택해야 할 것이다. 근본주의는 신앙의 변호에 관심을 가지고 있고, 그러한 관심은 참으로 성경적이다. . . . 그것[근본주의]은 실수들을 범했으나, 외쳐야 할 적절한 때가 오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저 조심성 있는 중도파들이 범한 것과 같은 그렇게 큰 실수는 아니었다.313)

훌륭한 기독교 신학자요 변증가인 고든 클락은 배교적인 교회로부터의 탈퇴의 역사적 정당성을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하였다.

모든 교회들은 약간씩은 다 허물이 있으므로 교적을 바꾸는 것은 결코 옳지 않다고 하는 그럴 듯한 변론은 루터와 칼빈 또는 청교도들에게는 결코 통하지 않았던 변론이다. 방종한 촬스 2세가 반기독교적인 법령을 제정하여 강요한 까닭에 약 2,000명의 목사들이 1660년 영국 국교를 탈퇴했던 것을 기억하라. 이렇게 탈퇴함으로 해서 그들은 생활비를 받을 수가 없게 되었고, 어떤 경우에는 옥고를 치루기도 했다. . . . 금일에 적은 형벌이라도 기꺼이 받고자 하는 목사들이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 그리고 약간의 방해 외에는 전혀 아무런 형벌을 가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과연 평신도 중에 몇 명이나 배교적인 조직체를 탈퇴할 만한 확신들을 갖고 있을까?314)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근본주의적 입장은 종교개혁자들의 입장이었고 촬스 스펄젼, 캠벨 모간, 제이 그레셤 메이천, 죤 머리, 코넬리우스 반틸, 에드워드 영, 고든 클락의 입장이었다. 그들에게 근본주의와 복음주의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요청한다면, 그들은 분명히 근본주의를 택하였을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사상과 입장에서 분명해 보인다. 근본주의는 결코 새로운 사상이나 입장이 아니다. 근본주의는 성경의 교훈이요 역사상 하나님의 신실한 종들이 취한 입장이었고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믿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모든 진실한 성도들의 입장이다. 근본주의는 바른 입장이다. 특히, 그것은 신복음주의 혹은 복음주의와 대조해볼 때 분명해진다. 복음주의는 이 시대를 분별하고 성경의 교훈대로 순종하는 입장이 아니다. 바른 입장은 근본주의라는 말밖에 다른 적절한 말이 없다. 그것은 배교와 타협하는 않는 입장이다.

 

10. 근본주의에 대한 잘못된 비평들

끝으로, 우리는 앞에서 복음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 대안으로 근본주의가 성경적인 바른 입장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근본주의에 대해 잘못된 개념을 가지고 비평하는 자들이 적지 않은 것 같다. 자유주의자들의 비평은 말할 것도 없고, 많은 보수주의적인 목사들이 근본주의를 비평한다. 그들 중에는 근본주의에 대한 무지와 오해 때문에 비평하는 자들도 있겠으나, 대다수는 자신들의 타협적이고 불순종적인 태도와 활동들에 대해 지적을 받기 때문에 반발적으로 근본주의를 비평하는 자들인 것 같다.

명칭보다 중요한 것은 바른 개념과 정신이다.

우리가 어떤 사상이나 운동을 논할 때 명칭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명칭이 의미하는 바가 중요하다. ‘근본주의’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근본주의’라는 명칭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 성경의 근본적 교리들의 보수와 배교적 교회들(자유주의 교회들과 천주교회)로부터의 분리라는 그 본질적 정신이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근본주의이다,’ ‘우리는 근본주의가 아니다’를 말하기 전에 우선 근본주의에 대한 바른 개념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근본주의에 대한 잘못된 개념을 가지고 그 입장이나 운동을 옹호할 필요도 없고 또는 그것을 비평해서도 안 될 것이다. 만일 근본주의에 대한 잘못된 개념을 가지고 그것을 비평한다면 허수아비를 놓고 비평하는 것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한국 교계에 유행하는 근본주의 비평의 말들은 대개 근본주의에 대한 무지에서 나왔거나 아니면 신복음주의적 편견에서 나왔다고 보인다. 역사적으로 정의된 근본주의는 성경적 입장이며 바른 입장인데, 동일한 정신을 가진 일부 보수적 목사들이 근본주의에 대한 무지와 몰이해로 인하여 근본주의를 비평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근본주의라는 명칭에 대한 시비를 잠깐 접어놓고 그들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하기를 원한다. 진실한 목사들은 양심적으로 이 질문들에 스스로 대답해 보기를 원한다.

첫째로, 당신은 성경의 근본교리들을 참으로 믿으며 옹호하고, 그것들을 부정하는 자들과 힘써 싸워야 한다고 인정하는가?

둘째로, 당신은 오늘날 대교단들(기장, 기감, 예장통합 등) 속에 성경의 근본교리들을 부정하는 이단적 자유주의 신학 사상을 가진 신학자들과 목사들이 있다는 사실을 심각한 문제로 생각하는가?

셋째로, 당신은 그 교단들이 포용주의적이어서 이런 사실을 통분히 여기지 않고 그런 자유주의 신학자들을 배제하려는 진지한 의지가 없다는 사실을 심각한 문제로 생각하는가?

넷째로, 당신은 그런 자유주의적 혹은 포용주의적 교단들이 바른 말씀을 지키고 이단을 배격하라는 주의 명령을 저버린 배교적 혹은 불충성된 교회라는 사실을 인식하는가?

다섯째로, 당신은 그런 교단들 속에 있는 참된 목사들과 성도들이 교단의 갱신을 위해 성실히 싸워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가?

여섯째로, 당신은 성경을 그대로 믿는 보수 교단들(예장합동, 예장고신 등)이 그런 배교적 혹은 포용적 교단들과 무분별하게 교제하거나 교류하지 말고 그런 교단들을 오히려 책망하고 그들과 교제를 단절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가?

근본주의의 문제는 첫째로 기독교의 근본교리들의 보수(保守)와 옹호에 대한 문제요, 둘째로 배교적 혹은 포용적 교단들과의 교제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근본주의에 대한 변론은 바로 이 핵심적 문제에 대한 논의이어야 한다. 그 외의 것들은 본질의 문제가 아니고 주변의 문제이다. 누가 그 외의 것들을 열렬히 거론하고 비평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핵심적 문제는 남아 있다. 근본주의라는 명칭이 문제가 아니고 그것이 본질적으로 갖고 있는 정신이 문제이다.

기독교의 근본교리들의 보수와 옹호라는 첫 번째 문제에 대하여는, 성경을 믿는 진실한 신자라면 아무 반론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분명히 말하기를,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라”고 했다(딤후 1:13). 이것은 우리가 사도들로부터 전달되어 내려온 “바른 교훈의 본을 지키라”는 뜻이다. 또 유다는 말하기를,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 들어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뜻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라”고 하였다(유 3).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의 바른 말씀 곧 근본교리들을 지키고 그것들을 위해 힘써 싸워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며 하나님의 명백한 뜻이다.

근본주의의 두 번째 문제인 배교적 혹은 포용적 교단들과의 교제 문제는 어떠한가? 사실, 여기에 오늘날 복음주의자들과 근본주의자들 사이에 입장의 차이가 있다. 오늘날 복음주의자들은 신복음주의 입장을 취한다. 그들은, 박형룡 박사의 말대로, 자유주의자들과 우호적 관계를 가지고 WCC 에큐메니칼 운동과도 우호적이며 자유주의자들과 협력하는 전도활동을 펼친다. 많은 이들이 배교적 교단 안에 머무는 타협자들이며 그렇지 않은 자들도 배교를 지적하거나 책망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기에는 기독교계가 이미 너무 넓어졌고 혼합적이게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계의 현실이 어떠하든 간에 무엇이 성경적으로 옳은 태도인가는 분명하다. 구약시대에 노아는 어떠하였으며 모세는 어떠하였는가?(벧후 2:5; 출 32장) 엘리야는 어떠하였으며 미가야는 어떠하였는가?(왕상 19:10; 왕상 22:5-14) 또 에스라는 어떠하였으며 느헤미야는 어떠하였는가?(스 9, 10장; 느 2, 6, 13장) 또 신약시대에 바울의 태도는 어떠하였는가?(고후 11장; 갈 1장; 딤후 1-4장) 성도들이 이단자들로부터 교제를 단절해야 한다는 성경의 가르침은 너무 분명하다(롬 16:17; 딛 3:10; 요이 7-11; 유 3; 갈 1:8; 벧후 2:1; 딤후 2:17, 18). 아무리 오늘날 기독교계가 포용적이게 되었다 할지라도 주의 바른 종들과 교회들이 가야 할 길은 분명하다.

근본주의는 개혁주의와 대립되는 신학체계가 아니다.

어떤 이들은, “우리의 입장은 근본주의가 아니고 개혁주의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런 말은 근본주의가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무지에서 나온 것이다. 개혁주의라는 말은 역사상 루터파의 신학적 입장과 대조해서 사용된 말이었다. 그것은 하나의 신학체계를 가리킨다. 그것은 장로교회의 신학체계이다. 반면에, 감리교회나 성결교회는 웨슬리-알미니우스주의라는 신학체계를 채용하고 있다. 그러나 근본주의는 그런 유의 신학 체계가 아니다. 근본주의는 20세기초 기독교계 전반에 걸쳐 강하게 불어닥친 자유주의 신학에 대해 강경하게 반대한 초교파적 태도와 입장이었다. 근본주의는 장로교회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었고 감리교회나 침례교회 등 각 교파들에서도 일어난 하나의 초교파적 운동이었다. 개혁신학을 따른다고 자칭하는 장로교 목사들 가운데서도 자유주의에 대한 태도가 서로 달랐다. 어떤 이들은 강하게 반대하였으나 다른 이들은 포용적이었다. 물론, 어떤 이들은 자유주의이었다. 그러므로 근본주의를 개혁주의와 대립시켜 말하는 것은 무식의 소치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개혁신앙을 가진 자들은 단지 개혁주의를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별별 개혁주의가 많기 때문이다. 물론 자유주의적 개혁주의는 진정한 개혁주의가 아니다. 또 신복음주의적 개혁주의도 진정한 개혁주의가 아니다. 개혁교회가 전통적으로 이해해온 대로 권징이 없는 교회는 참된 교회가 아니다. 자유주의 신학이나 천주교회가 이단인데 그것을 포용하고 무분별하게 교제하는 것은 진정한 개혁주의가 아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의 바른 노선을 말한다면, 그것은 근본주의적 개혁주의 혹은 근본주의적 장로교회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배교와 타협과 분리하는 노선이 성경적으로 바른 노선이다. 그것이 바로 근본주의가 지향하며 추구하는 바인 것이다.

김의환 박사의 비평에 대한 비평

김의환 박사는 도전 받는 보수신학315)이라는 책에서 근본주의를 비평하면서 “우리의 입장은 근본주의도 아니요 신복음주의도 아니다. 우리의 입장은 역사적 칼빈주의 신앙 노선을 따른다. 역사적 칼빈주의는 근본주의적 요소도 있고 신복음주의적 요소도 있다”고 말했다.316) 또 그는 “칼빈주의자는 근본주의를 받아들일 수는 있어도 근본주의자는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칼빈주의는 근본주의보다 훨씬 광범한 신학체계이기 때문이다”고 말하였다.317)

그러나 우리가 그의 논의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은 근본주의에 대한 그의 개념이다. 그는 근본주의 운동의 시작을 기독교의 근본적 교리들을 주장하는 운동으로 보나,318) 곧 신복음주의에 대해 논의하면서, 근본주의에 대한 신복음주의의 비평을 수용하는 것 같다. 그것은 근본주의 운동이 교리적 축소주의, 방법적 편협주의, 소아병적 부정주의, 고양이와 개의 싸움 같은 지엽적 논쟁, 학적 수준의 저조, 사회 도피적 경향, 독립주의의 위험 등을 가졌다는 비평들이다.319)

무슨 문제의 논의에서나, 용어의 정확한 개념은 기본적으로 중요하다. 그는 먼저 근본주의와 신복음주의에 대한 개념을 명확히 말했어야 했다. 신복음주의자들이 지적하는 점들은 어떤 근본주의자들의 약점들일지는 몰라도 근본주의 운동의 본질이 아니며 근본주의 대회들이 지향하는 바도 아니다. 그렇다면 몇몇 약점들을 들어 어떤 운동이나 입장을 비평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오히려 바른 비평의 태도는 그 운동이 주장하고 지향하는 바에 대해 성경적으로 논의하는 것일 것이다.

“우리의 입장이 근본주의가 아니요”라고 그가 말했을 때 만일 그 근본주의가 소위 그런 약점들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오늘날 근본주의자들도 그런 입장을 취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는 곧 이어서 “역사적 칼빈주의는 근본주의적 요소도 있다”고 말하며 더욱이 “칼빈주의자는 근본주의를 받아들일 수는 있어도 근본주의자는 될 수 없다”고 말하니 도대체 그의 ‘근본주의’는 무엇을 말하는가?

만일 그가 근본주의를 기독교의 근본교리를 받아들이는 입장이라고 이해하는 것이라면, ‘우리의 입장은 근본주의가 아니요’라는 말은 틀린 것이고, 그는 ‘우리의 입장은 근본주의이요’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만일 그런 것이 아니고 그가 근본주의를, 신복음주의자들이 비난하는 어떤 약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라면, ‘칼빈주의자는 근본주의를 받아들일 수는 있어도’라는 그의 말은 틀린 말일 것이다.

또 ‘근본주의를 받아들이는 것’과 ‘근본주의자가 되는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 이것도 독자들을 혼동케 한다. ‘근본주의자’라는 말의 일반적 정의가 ‘근본주의를 받아들이는 자’를 가리킨다는 것은 상식적이다. 그런데 그의 발언은 혼란스럽다.

이와 같이 근본주의에 대한 개념이 분명하지 않으면서도 그는 계속 말하기를, “극단의 근본주의 편에서 볼 때는 웨스트민스터나 커비난트 신학교의 입장이 신복음주의적으로 보여질 수도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근본주의만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그는 ‘극단의 근본주의’가 무엇인지 먼저 개념을 분명하게 해설해야 했다. 또 ‘우리는 근본주의만을 따르지 않는다’고 말할 때 근본주의는 무엇을 의미했는지도 분명히 해야 했다.

만일 근본주의가 성경의 근본적 교리들을 믿는 입장을 가리켰다면, 그는 성경의 근본적 교리들을 따르는 입장을 왜 비난하는가? 그런 근본주의의 입장은 완전히 옳은 입장이 아닌가? 만일 그것이 아니고 근본주의가 어떤 인간적 약점들을 의미하는 말이라면 ‘우리는 근본주의를 따르지 않는다’고 말했어야 정당하지 않겠는가?

이런 모든 혼란과 모순이 생기는 것은 그의 논의에서 근본주의와 신복음주의에 대한 기본적 개념 혹은 정의가 없기 때문이라고 본다. 근본주의에 대한 모든 논의는, 근본주의 역사에서 고찰되고 확인되듯이, 근본주의가 기독교의 근본적 교리들을 보수하고 자유주의적 배교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초교파적 운동 혹은 입장이라는 사실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김의환 박사는 또한 근본주의의 결함들을 열거하면서 신복음주의자 칼 헨리의 생각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첫째로, 그는 근본주의가 교리적 축소주의의 약점을 갖고 있다고 말하였다.320) 그는 논평하기를, “미국의 근본주의는 이와 같은 다섯 가지 교리만을 안고 성경학교로만 돌아가 그것만 되풀이하면서 지나는 동안 오늘의 신학적 판도에서 보수 신학을 위해 싸울 수 있는 학자를 기르지 못하고 말았다”고 하였다.321)

그는 또 말하였다.

과학에 대한 혐오, 지식에 대한 반감, 세속에 대한 기피, 이와 같은 근본주의의 경향은 필경 학적 세계에서 경원되고 신학 운동의 주류에서 배제되고 칼빈주의자들에게서 격리되게 하고 말았다. . . . 근본주의가 신학적 ‘이니시아티브’를 신정통주의에게 빼앗기게 된 것은 근본주의 신학 자체의 신학적 빈혈증 때문이었다.322)

그러나 이것은 근본주의의 핵심적 논의가 되지 못한다. 또 근본주의의 초교파적 성격을 이해하면 왜 근본주의 운동에서 근본교리들에 대한 언급이나 강조가 있는지 이해할 수 있다. 더욱이, 근본주의 운동에 속한 교파들은 자기들의 신학 체계를 가지고 있지 몇 가지의 근본교리만 믿는 자들이 아니다. 또 과학에 대한 혐오나 지식에 대한 반감은 불경건한 과학과 지식에 대한 것이지 진정한 과학, 진정한 지식을 누가 반대하는가? 대부분의 근본주의자들은 1920, 30년대에 훌륭한 신약신학자이었던 J. 그레셤 메이천 박사를 그들의 모범으로 존경하고 있다.

가난하고 빈약한 집을 가난하고 빈약하다고 비난하는 것은 옳은 태도가 아니다. 누가 가난하고 싶어서 가난하며 누가 빈약하고 싶어서 빈약한가? 근본주의자들의 중심이 바르다면 그들의 약점을 가지고 그들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 오늘날 신학계에 학자로 말한다면, 단연히 자유주의적 학자들이 다수가 아닌가? 우리가 쓰는 히브리어 사전(BDB, KB)이 그러하며 신약신학사전(Kittel)이 그렇지 않은가? 약점들을 비난하지 말고 본질적 주장을 성경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둘째로, 김의환 박사는 근본주의가 방법적 편협주의의 경향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323) 이것도 그가 신복음주의자들의 생각을 그대로 채용한 것이다. 그는 근본주의가 부정적 사고 방식이 체질화된 운동이라고 비난한다. 그는 근본주의가 교리 문제가 아닌 지엽적인 문제나 시행 방법의 차이 때문에 교파를 분열시켰고 불필요한 분쟁을 일으켰다고 주장한다.

더욱이, 그는 신복음주의자들이 묘사하는 대로 근본주의자를 ‘신학적 깡패, 연합운동의 방해자, 문화의 낙후자, 반과학-반지식주의자, 극단적 세대주의자, 강단 위주의 선풍주의자, 과격한 감정주의자, 사회적 은둔주의자, 열광적 찬송주의자’ 등으로 가혹하게 비난한다.324) 그의 말이 옳다면 아무도 근본주의자가 되기를 원치 않을 것이며 근본주의 가까이도 가기를 원치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이야말로 논점을 흐려놓고 하나님의 귀한 종들과 사역을 순전한 독설로 비난하는 악한 일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근본주의의 그 중심적 주장과 입장을 논의함이 없이 단지 어떤 근본주의자들의 약점들을 마치 그것들이 근본주의의 본질인 것처럼 평하는 것은 논점을 흐려놓는 일이다. 설령 신복음주의자들의 비난이 다 옳다고 하더라도, 근본주의가 주장하는 ‘배교로부터의 분리’라는 외침은 여전히 중요한 요점으로 남아 있다. 그러므로 논점을 흐려놓지 말고 배교의 문제와 배교로부터의 교제의 단절 혹은 분리의 문제를 성경적으로 진실하게 논의하고 확정해야 한다.

사실, 근본주의는 신복음주의자들이 독하게 비난하는 그런 점들을 옹호하지 않는다. 근본주의자들은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들은 혹 자신들에게 어떤 약점들이나 실수들이 있었다면 그것들을 뉘우치며 고치려 하는 자들이다. 약점과 실수는 누구에게나 있다. 또 많은 경우, 그 책임은 어느 한 쪽에만 있지 않다. 더욱이, 오늘날 배교의 물결이 너무 크기 때문에, 사탄의 활동이 너무 교묘하게도 교회들과 신학교들 안에서 힘있게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진실한 종들과 성도들이 바른 길 가고 좁은 길 간다는 것은 단순하고 쉬운 일이 아니다.

성경의 근본교리들을 지키고 배교로부터 떠나야 한다고 외치는 자들을 ‘신학적 깡패, 연합운동의 방해자’로 몰아붙이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옳은 일이 아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열심히 설교하고 기도하고 찬송하는 자들을 ‘강단 위주의 선풍주의’니 ‘과격한 감정주의’니 ‘열광적 찬송주의’니 하고 비난하는 것은 형제 사랑을 실천해야 할 진실한 성도들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김의환 박사는 또 그의 책에서 1936년에 미국 북장로교회에서 면직되었던 보수적 신학자요 지도자인 J. 그레셤 메이천이 분리주의적 근본주의자가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반틸의 글을 인용하였다.325) 그러나 그는 메이천 당시의 북장로교회가 종교개혁 당시 칼빈이 떠난 천주교회보다 성경의 기본적 교리를 더 불신앙하였다고 말함으로써 메이천이 모교단을 떠난 것이 정당한 것이었음을 옹호하였다.326)

물론, 메이천은 1930년대 미국의 상황에서 먼저 교단 내에서 진리의 선한 싸움을 싸웠었다. 그러나 그때에도 그는 이렇게 썼었다.

만일 자유주의파가 실제로 교회의 기관들을 완전히 장악한다면, 복음주의적 그리스도인은 그 교회의 활동을 계속 후원할 수 없을 것이다. . . . 만일 자유주의파가 실제로 교회를 장악한다면, 복음주의적 기독교인들은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물러설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327)

이것이 성경적 분리의 정신이 아니고 무엇인가? 더더욱, 교단이 자유화되고 배교적이게 된 이후에 그 교단을 떠나고 그 교단과 교제를 끊는 것이 성경적으로 바른 태도가 아니고 무엇인가? 만일 그가 메이천의 행동을 정당한 것으로 참으로 생각한다면, 그는 근본주의 입장에 동의해야 할 것이다. 근본주의는 성경에 가르친 대로 배교로부터 떠나야 한다는 입장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근본주의는 오늘날의 배교와 혼동의 시대에 성경적인 바른 입장과 태도이다.

간하배 교수의 비평에 대한 비평

한국교계에 근본주의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 큰 영향을 준 또 다른 한 사람은 간하배(Harvie M. Conn) 교수이었다. 그는 미국 정통장로교회 선교사로서 한국에 나와서 10여년간 활동했고 예장합동측 총신대학 신학연구원에서 강의하였다. 그는 그 후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실천신학 교수로 재직하였다. 그는 1973년 현대신학해설이라는 책을 출간하였다. 이것은 그가 예장합동측 기관지이었던 기독신보(기독신문)에 여러 번 기고한 글들을 모은 것이었다.

그는 그의 책에서 1930년대 이후의 근본주의를 ‘신근본주의’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이들을 중심으로 나타나고 있는지 언급하지 않는다. 그는 칼 매킨타이어 같은 인물을 거기에 포함시키지 않는다.328) 그는 근본주의의 문제점들을 열거하면서 체계적인 교리 작성에 대한 무관심, 하나님의 전체적 뜻을 축소함, 비성경적 부정주의와 독고(獨孤)주의로 빠질 위험 등을 언급하였다.

그러나 첫째나 둘째의 문제는 초교파적 운동 일반이 갖는 특성이며 근본주의의 약점이나 문제점이 될 수 없다. 초교파적인 운동은 교파적 신학 체계를 추구하는 운동이 아니다. 체계적인 교리 작성이나 하나님의 전체적 뜻의 추구는 각 교파의 신학, 특히 장로교 신학에서 계속 추구되어 왔고 또 추구되어야 할 바이다. 또 셋째의 문제 즉 ‘비성경적 부정주의와 독고주의로 빠질 위험’은 어디까지나 위험성이지 그것이 그 운동의 본질이 아닌 한 그 운동 자체의 문제점으로 열거되어서는 안 된다. 근본주의자들도 그런 위험성을 인식하고 그런 오류에 빠지지 않기를 구한다. 하나님의 참된 종들로서 비성경적 오류에 떨어지기를 원하는 자는 없을 것이다.

간하배 교수는 후기의 근본주의 곧 신근본주의에 대하여 논하면서 그 운동을 세대주의와 동일시하려는 경향을 보인다.329) 그러나 그것은 정당하지 않다. 근본주의는 초교파적 운동이었고 그 구성원들 중에 세대주의자들이 많았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운동이 세대주의와 동일시되는 것은 옳지 않다. 단적인 반증으로, 오늘날 달라스 신학교나 바이올라 대학교(탈봇 신학교) 등은 강한 세대주의적 경향을 보이지만, 근본주의로 불리지는 않는다. 근본주의자들 가운데 세대주의자들이 많이 있다는 것 때문에 근본주의가 세대주의와 동일시된다고 보는 것은 잘못된 판단이다.

간하배 교수는 신근본주의의 위험한 특징들을 다음과 같이 열거한다: 과도히 부정적인 자세, 사사로운 다툼, 질책의 언어, 기독교의 사회적, 문화적 명령의 무시, 과학 일반에 대한 불신적 태도, 반교파주의 등.330)

그러나 이것들이 근본주의의 본질적 특징들인가? 아니다. 혹 어떤 근본주의자들이 이런 저런 잘못을 범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불완전에서 온 실수들이요 그런 것 때문에 그 운동이 주장하는 본질적 입장이 흐려지거나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배교의 문제는 자유주의 신학이 교회들 안에서 없어지지 아니하는 한 없어질 수 없는 문제이다. 그러므로 주의 진실한 종들은 배교의 문제의 논점을 흐리지 말고 배교에 대한 바른 태도를 가져야 한다. 그것은 ‘분리’의 태도이다. 배교와는 어떤 협력이나 타협이 있을 수 없다. 배교와는 오직 교제의 단절 즉 분리가 필요할 뿐이다.

그 외의 여러 문제들에 대해서는, 주의 모든 진실한 종들은 성경적 사상과 덕을 갖추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이다. 아무도 잘못된 것을 좋아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그리스도인이 지나치게 부정적인 자세를 좋아하며, 어떤 이가 사사로운 다툼을 좋아하며, 누가 은혜로움과 예의를 저버리고 질책만 좋아하겠는가? 어떤 그리스도인이 기독교의 사회적, 문화적 명령, (만일 그것이 성경적이라면) 그것을 무시하겠으며 누가 참된 과학을 무시하겠는가? 어떤 이가 건실한 교파적 확신을 무시하며, 교회가 가능한 한 외적으로도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반대하겠는가? 건전한 정신을 가진 성도라면 이 모든 점들에 대해 부정적일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점들은 근본주의의 본질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들이다.

간하배 교수는 근본주의 혹은 신근본주의를 논하면서 정작 중요한 ‘분리’의 문제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논의하지 않고 신복음주의자들이 열거하는 어떤 근본주의자들의 약점들에 대해서만 언급하였다. 이것은 어떤 운동을 공정하게 평가하는 방법이나 태도가 될 수 없다.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실수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사람의 실수들이나 약점들을 그 사람의 사상이나 입장이라고 묘사하지는 않는다. 비록 그 실수들조차도 하나 하나 그것들이 정말 사실이며 얼마나 그러한지를 살펴보아야 하겠지만, 설사 그것들을 다 인정한다 할지라도 여전히 ‘배교로부터의 분리냐 아니냐’는 태도와 입장의 문제는 남는다. 거기에 근본주의의 본질이 있는 것이다.

박아론 교수의 비평에 대한 비평

한국교계에서 근본주의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 영향을 끼친 또 한 사람은 박아론 교수이다. 그는 고(故) 박형룡 박사의 아들로서 부친의 사상과 입장을 잘 알며 다른 이들보다 더 보수적 입장을 가지고 있다고 보이지만, 1985년에 쓴 보수신학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책에서 근본주의에 대해 부정확하고 잘못된 견해를 드러내었다.

그는 1930년대에 메이천의 동료들이 미국의 북장로교회를 떠나 새 교단을 설립한 것을 언급한 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와 같은 ‘이탈과 분리’가 그 후의 미국 근본주의 운동의 특징처럼 되어 버렸다. 투쟁하기보다는 자유주의화해 가고 있는 신학교들과 교회들로부터 이탈하여 그들의 신학교들과 교회들을 별도로 세우는 것이 그들의 대(對) 자유주의 전략의 패턴이 되어 버렸다. 이와 같은 대 자유주의 전략을 채택함으로써 대교단들과 신학교들을 자유주의자들의 손에 넘겨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매우 애석한 일이다.”331) 그의 글에는 제리 팔웰의 근본주의 현상이라는 책을 참고하라는 각주가 붙어 있다. 제리 팔웰은 근본주의자로 자처하지만, 신복음주의 정신을 가지고 활동하는 자로 알려져 있다.

박아론 교수가 근본주의자들이 성경적 분리의 원리를 좇아 불가피하게 행한 분리를 무책임한 오류로 매도하는 것은 잘못이다. 특히 1936년 북장로교회의 작은 분열은, 각 노회가 메이천과 그의 동료들을 면직시키고 총회가 그들의 상고를 기각했을 때 이루어졌다는 것을 생각하면 분명히 그러하다. 또 다른 경우들에서도 자유주의자들 혹은 포용주의자들이 교권을 장악했을 때 개인적으로, 단체적으로 분리가 이루어졌다면 그 분리는 무책임한 오류로 비난될 수 없다.

오히려 이런 경우에 보수주의자들이 그 배교적 혹은 포용적 교단들 안에 머물며 침묵하고 있는 것은 악에 대한 타협이며 주께 대한 불신실함이다. 사실, 근본주의 운동은 대교단들이 자유주의화 혹은 포용주의화되었을 때 분리의 운동으로 진전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에 저 배교적 혹은 포용적 교단들이 더 이상 어떤 용감한 목사들의 도전을 받지 않았다는 것은 침묵이 곧 타협임을 잘 보여준다. 배교에 대한 성경적 바른 태도는 ‘분리’이다.

박아론 교수는 또한 근본주의 운동에서 세대주의에 대해 포용적 태도를 가지는 입장을 가리켜 ‘신근본주의’라고 부르면서 미국에서 칼 매킨타이어 박사, 페이스 신학교, 성경장로교회, 밥 죤스 대학교 등이 거기에 속한다고 말한다.332)

그러나 이것은 그가 근본주의 운동이 초교파적 운동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데서 나온 발언이다. 물론 우리가 교파적 확신을 가지고 교리적 토론을 하고자 할 때 초교파적 운동은 우리에게 거리낌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자유주의가 현대교회가 직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이므로, 우리는 교파적 토론을 넘어서 자유주의에 대처하는 공동 전선을 필요로 한다. 여기에 근본주의의 초교파적 성격이 있다.

20세기 초 미국의 보수적 신학자요 지도자이었던 J. 그레셤 메이천도 초교파적 교제와 협동이 완전히 가능하다고 보았다.333) 그는 기독교와 자유주의라는 그의 책에서 교회들 간에 천년왕국, 성례, 목사직의 성격과 특권, 알미니안주의 등의 교리적 견해의 큰 차이가 있는 것이 현실이지만, 교회들 간의 참된 복음주의적 교제가 가능하다고 말하였다.334) 단지 천주교회는 기독교의 왜곡이며, 자유주의는 전혀 기독교가 아니므로335) 그런 교회들과 교제하고 협력하는 것이 옳지 않음은 암시하였다.

박아론 교수는 또 신근본주의를 비평하면서 다음의 몇 가지 점들을 열거하였다: (1) 분리주의적 사고의 심화(深化), (2) 신학 연구와 문화적 관심의 쇠퇴, (3) 주제 의식이 불분명한 인물 본위의 운동, (4) 독고적 근본주의자들로 둔갑.

첫째로, 그는 신근본주의가 분리주의적 사고를 심화시킨 운동이라고 비평했다.336) 그는 신근본주의 지도자 칼 매킨타이어가 부정당한 분리의 원인자라고 비난하며, “분리하라는 경고는 불신에서 분리하라는 것뿐 아니고 신근본주의 환상에 동참치 않는 자들로부터 분리하라는 요구가 되었다”는 간하배 교수의 논평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또 그는 신복음주의자 칼 헨리가 근본주의의 한 특징이 ‘부정적 사고 방식’이라고 비난한 것을 “일리가 있다”고 긍정한다.337)

그러나 이러한 논평은 정당하지 않다. 만일 어떤 근본주의 지도자들에게 부족이나 약점이 있어서 부정당한 분열의 부분적 원인이 되었다면 그것을 옹호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분열이 그 운동의 본질인가? 또 커버넌트 신학교의 분리가 순전히 칼 매킨타이어 박사의 잘못인가? 그렇다면, 커버넌트 신학교나 그 학교가 속한 교단(처음엔 RPCES, 지금은 PCA)이 왜 신복음주의적인 미국복음주의협의회(NAE)에 속하였는가?

둘째로, 박아론 교수는 신근본주의가 신학 연구와 문화적 관심에 있어서 쇠퇴하고 있다고 비평하였다.338) 그는 신근본주의가 “다섯 가지 교리만을 안고서 성경학교로 돌아가 그것만 되풀이하면서 지나는 동안 오늘의 신학적 판도에서 보수 신학을 위하여 싸울 수 있는 학자를 기르지 못하고 말았다”고 비난한 김의환 박사의 말을 그대로 인용한다.339)

그러나 이러한 논평도 정당하지 않다. 이것이 근본주의 혹은 신근본주의의 본질인가? 그들은 다섯 가지 교리만 안고서 성경학교에 돌아가 그것들만 되풀이하는 자들인가? 그것은 부당한 비난이다. 그의 부친인 고(故) 박형룡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근본주의자들은 기독교 교리 체계를 축소하였다고 비난하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부적당한 비난이니 금일의 시대론자들이라도 다섯 가지만을 믿는 것이 아니라 다른 전통적인 신조들도 여전히 믿는 것이 많으리라고 생각된다.340)

셋째로, 박아론 교수는 신근본주의가 주제 의식이 불분명한 인물 본위의 운동이라고 비평하였다.341) 그는 말하기를 “오늘날의 ‘신근본주의 운동’은 주제보다는 인물을 중시한 결과 신학적 노선보다는 밥 죤스나 칼 매킨타이어와 같은 특출한 인격에 그 닻을 내리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342) 심지어 그는, “이런 점에 유의할 때 에드워드 죤 카넬이 근본주의를 ‘고전적’(classic)인 것과 ‘종파적’(cultic)인 것으로 나누고 ‘신근본주의’ 또는 ‘후기 근본주의’ 운동을 후자에 해당시킨 것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나 우리는 한국의 보수적 신학자라는 분이 어떻게 하나님의 귀한 종들과 바른 운동에 대해 이런 무지하고 무책임한 비난을 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오늘날 근본주의 운동의 주요 인물들이 밥 죤스나 칼 매킨타이어뿐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무지한 말이다. 오늘날 미국과 세계에 흩어져 있는 근본주의자들 가운데는 국제기독교협의회(ICCC) 외에도 세계근본주의자대회(WCF)와 세계성경적교회협의회(WCBC)에 속한 수많은 지도자들이 있다. 북아일랜드의 자유장로교회의 지도자 이안 페이슬리 박사나 파운데이션즈(Foundations) 성경대학과 신학교의 설립자인 O. 탤매쥐 스펜스 박사 등도 거기에 속한다.

더욱이, 그가 근본주의에 대한 에드워드 카넬의 악한 비난에 동감을 표현하였다는 것에 대하여 우리는 놀라운 실망을 금할 수 없다. 에드워드 카넬은 신복음주의 신학교인 풀러 신학교의 교수이었고 신복음주의의 대변자로 짧게 활약했다가 별세한 분이다. 그가 후기의 근본주의를 ‘종파적’이라고 표현한 것은 매우 부적절하다. ‘종파적’(cultic)이라는 영어 표현은 이단종파 혹은 사이비 종파라는 의미이다. 만일 근본주의가 그런 운동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당연히 그리고 단호히 거절하고 반대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근본주의가 그런 운동이 아니라면, 카넬과 박아론 교수의 그런 비난은 하나님 앞에서 매우 큰 죄악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 신학자들 혹은 교회 지도자들이 근본주의에 대하여 이런 유의 비난을 하는 것에 대답하여, 탤매쥐 스펜스 박사는 근본주의: 이단 종파가 아님343)이라는 책을 썼다. 그는 그 책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근본주의자들인 우리는 ‘옹고집들’로부터 ‘웃기는 자들,’ ‘생각 없는 자들,’ ‘변두리의 미치광이들,’ ‘이단종파자들’까지 온갖 명칭들로 불려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사람이 아니다. 우리는 이단종파자가 아니다. 만일 어떤 사람들이 우리를 그런 사람이라고 말한다면, 그들은 글을 읽을 수 없거나 읽기를 거절하는 자들, 혹은 들을 수 없거나 듣기를 거절하는 자들일 것이다. 우리는 이단종파자가 아니다!344)

넷째로, 박아론 교수는 신근본주의자들이 ‘독고적(hyper) 근본주의자들’로 둔갑했다고 비평하였다.345) 그가 어떤 뜻으로 ‘독고적’이라는 말을 사용했는지 분명치 않으나, 영어의 ‘하이퍼’라는 접두어는 ‘과도한, 지나친’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극단적 근본주의자’라는 말로 이해된다. 그의 이 표현은 제리 팔웰의 근본주의 현상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박아론 교수는 신근본주의의 마지막 문제점을 이렇게 표현해 놓고서는 그 구체적인 점들을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독고적 근본주의자들’이 제리 팔웰에 대해 신복음주의적 경향이 있다고 비평한 것에 “극단적이며 무리한 면이 없지 않다”고 말하면서도 어떤 점에서는 “공감이 간다”고 말했다.346) 박아론 교수의 입장은 분명치 않은 것 같다.

칼 매킨타이어 박사나 밥 죤스 박사의 무엇이 편협하며 극단적이란 말인가? ‘신근본주의’의 무엇이 극단인가? 이단적 자유주의 신학과 교회의 배교에 대항하여 성경적인 교제와 분리의 원리를 주장하는 것이 편협한 일이며 극단인가? 옳고 그른 것을 분명히 하려는 것이 편협함이며 극단인가? 오히려 사실을 정확히 검토하고 판단함이 없이 주의 귀한 종들을 비난하는 것이 편협함과 극단이 아닌가?

박아론 교수는 근본주의자로 자처하는 제리 팔웰이 해롤드 린젤이나 W. A. 크리스웰 등의 신복음주의자와 교제하는 ‘처신’을 정당하다고 보든지, 아니면 다른 근본주의자들의 표현대로 제리 팔웰이 ‘근본주의자의 옷을 입었으나 신복음주의자의 목소리를 내는 자’라고 비평하든지 해야 할 것이다.

O. 탤매쥐 스펜스 박사는 팔웰에 대하여 이렇게 논평했다.

팔웰은 그가 쓴 근본주의 현상이라는 책과 근본주의 저널에서 근본주의를 ‘폭넓은 복음주의적’ 연합과 기초로 확대시키려고 노력했다. 물론 그의 ‘폭넓은’ 기초는 분리와 전투성에 대한 거부이었고, 또 이전의 근본주의자들, 신복음주의자들, 자유주의자들, 그리고 은사주의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무시해 버리는 타협이었다. 팔웰은 근본주의와 그 역사적 유산에 새로운 변화를 일으키려 했지만, 결코 그것을 완수할 수 없었다. 결국 우리는 그의 조합을 통하여 신복음주의자들, 개조적 신근본주의자들, 남침례교인들, 풀러 신학교의 자유적 복음주의, 에큐메니칼 은사주의자들 등과의 어떤 친척 관계를 볼 것이다.347)

이상에서 살펴본 대로, 근본주의에 대한 비평들은 주로 무지에서 나온 것이든지, 아니면 신복음주의적 입장에서 나온 것들이다. 그 비평들은 전혀 정당성을 가지지 못한다. 근본교리의 보수는 지극히 성경적이므로 비평의 여지가 없다. 또 자유주의나 천주교회로부터 분리해야 한다는 것도 성경이 가르치는 교제의 원리에 맞는다. 근본주의는 이상한 사상이나 입장이 아니고 치우쳤거나 극단적인 어떤 사상이나 입장도 아니다. 근본주의는 지극히 성경적인 입장이다. 우리는 근본주의적 장로교회를 추구해야 한다.

 

결론

신복음주의 혹은 복음주의의 문제는, 비록 20세기 초엽과 중엽에 미국교회에서 일어난 문제이지만, 어느 시대, 어느 지역에서나 경험될 수 있는 문제이다. 오늘날 한국의 많은 보수적 교회들은 신복음주의 혹은 복음주의의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복음주의는 어떤 신학적 탈선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복음주의자들의 신학적 탈선들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한 신학적 탈선들은 이미 자유주의적이며 그런 의미에서 고 박형룡 박사는 신복음주의를 ‘신자유주의 내지 신이단운동’이라고 혹평하기도 했던 것이다.348)

복음주의에 대한 바른 개념은 그러한 신학적 변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제의 문제에 있다. 그것은 자유주의자들과의 교제의 문제이다. 오늘날 복음주의는 자유주의자들을 강하게 비평하거나 배격하지 않는다. 복음주의자는 자신의 교단이 고의적으로 자유주의자들을 포용할 때도 그 교단 안에 머물며 그 자유주의자들과 교제하고 협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복음주의는 성경에 밝히 계시되고 전통적으로 믿어온 진리들에 대한 확신이 없고, 자유주의 신학의 이단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더욱이, 복음주의는 하나님의 진리를 위해 싸우려는 마음이 약하며, 성경적 분리의 교훈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 교훈을 순종하려고 하지 않는다. 복음주의의 이런 태도는 분명히 성경적 분리의 교훈을 어기는 일이요 주께 대한 불충성됨과 불순종이다. 그러므로 복음주의는 현대교회의 배교와 불신앙에 대해 타협하는 비성경적 입장에 불과하다. 잠언 17:15, “악인을 의롭다 하며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자는 다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느니라.” 잠언 28:4, “율법을 버린 자는 악인을 칭찬하나 율법을 지키는 자는 악인을 대적하느니라.”

잭 스티븐스는 오하이오 바이블 펠로우쉽 비지터지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내가 신복음주의자의 마음가짐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복음으로 세상을 접촉하는데 관심을 가지며 그것이 더 빠를수록 더 좋다고 본다. 또 그는 그것을 하기 위해 그 밖의 거의 모든 것을 희생하려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함에 있어서, 그는 너무 지나치게 많은 것을 포기하며, 그가 진전시키려고 하는 바로 그것을 파괴한다. 그는 외적인 성공을 거두며 참으로 형통한 것처럼 보인다. 그는 매우 진실하며 자기가 바르다고 생각한다. 그는 우리의 형제이다. 그러나 그는 매우 잘못되어 있다.349)

오늘날 우리나라의 많은 보수교회들은 신복음주의 혹은 복음주의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분별력 없는 많은 보수적 목사들은 화평과 일치와 사랑을 표방하면서 오히려 성경적 분리의 교훈을 확신하고 지키려 하는 자들을 비난한다. 많은 목사들이, 비록 하나님의 다른 일들에 대해 열심이 있어 보이나, 교회의 교리적, 윤리적 순결성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순결한 교회를 구원 계획의 목표로 삼으셨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매우 큰 잘못이다.

성경의 근본교리들을 부정하는 현대신학 전반을 우리는 자유주의 신학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명백히 이단이다. 그러므로 기독교회는 마땅히 자유주의 이단 사상을 배격해야 하며, 자유주의자들을 참된 교회의 교제로부터 제명 출교해야 한다. 자유주의자들을 포용하며 교제하고 협력하는 신복음주의 혹은 복음주의는 악에 대한 타협이며 주께 대한 불충성이다. 오늘날 배교와 타협이 점점 가득해지는 때에, 하나님의 뜻은 배교로부터의 명백한 분리이다.

성경은 분명히 이단과 오류로부터의 분리를 명한다.

로마서 16:17, “너희 교훈[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스려[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고린도후서 6:14-17,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 . .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에베소서 5:11,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디도서 3:10,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거절하라].”

요한이서 10, 11,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니라.”

유다서 3,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

우리가 근본주의를 옹호하는 이유는 근본주의가 성경적으로 바른 입장이기 때문이며, 사람들이 근본주의를 잘못 알고 잘못 비난하기 때문이며, 근본주의라는 말 외에 오늘날의 바른 입장을 나타낼 적절한 말이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나라에는 배교와 타협하지 않는 근본주의적 장로교회들이 필요하다. 또 넓게는 근본주의적 초교파 협의체가 필요하다. 또 이러한 단체들에 근거하여 신학교, 출판사, 신문사, 방송국, 선교단체, 성경공회 등이 필요하다.

배교와 타협하지 않는 근본주의에 대한 바른 신념을 가진 목사들, 평신도들, 교회들은 대동 단결하여 이 악한 배교와 타협의 시대에 작을지라도 바르고 순수한 하나님의 교회들을 건립하고 하나님의 일들을 바르고 충성되게 수행해야 할 것이다. 바른 확신과 분별력을 가진 종들은 뜻을 모아 하나님의 일을 함께 행해야 할 것이다.

현대교회는 한마디로 위기에 직면해 있다. 세계적으로 개신교회의 전통적 대교단들은 그 지도층이 자유주의 신학을 배제할 의지가 없고 오히려 그것을 용납하고 그들 자신이 자유주의화되어 있다. 이것이 현대교회의 배교(背敎)가 아니고 무엇인가? 이것이 도대체 주께 대한 배신과 변절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자유주의 교단들 안에 있는 소수의 보수적 목사들은 이 배교를 대항하기는커녕 침묵하면서 배교와 타협하고 협력하고 교제하고 있으니, 이는 무분별함 때문인가, 불충성 때문인가, 아니면 연약 때문인가?

더욱 가슴 아픈 일은, 보수교회들의 타협이다. 보수교회의 지도자들의 다수는 자유주의 교단들 안에 있는 신실한 성도들에게 거기로부터 나오라고 외치지 않는다. 그들 자신은 오히려 자유주의 교회들과 그 지도자들과 교제하고 협력하고 있다. 이 포용주의적 풍조가 현대 보수교회의 특징이 되어 가고 있다. 이 타협, 이 불충성을 누가 고발할 것인가? 누구에게 고발할 것인가? 무엇을 통해 고발할 것인가? 오늘날 신실한 개혁교회들과 교단들을 찾아보기가 심히 어려운 실정이다. 미국의 어느 장로교단이 모범적인가? 한국의 어느 장로교단이 모범적인가? 우리는 신실한 교회들과 신학교들이 외적 영광을 상실한 시대에 살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바른 분별력과 입장을 가진 신실한 지도자들을 꼽아보기 힘든 시대에 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주의 종들과 자녀들에겐 낙심이 있을 수 없다.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을 홀로 주권적으로 섭리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는 능력의 하나님이시다. 그는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자이시다(롬 8:28). 고린도후서 4:1, “이러하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고린도후서 4:7-8,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고린도후서 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는 주의 은혜로 힘을 내어 이 배교와 타협의 어둡고 혼란한 시대에 참 교회의 건립과 사역을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결론적으로 보수교회들이 힘써야 할 몇 가지 점들을 정리해 본다.

옛신앙을 파수하고 전파해야

첫째로, 우리는 옛신앙을 파수하고 전파해야 한다. 옛신앙의 핵심은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속죄의 복음이다. 사도 바울께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음”을 전파하셨던 것과 같이(고전 1:22-23), 오늘날도 참된 교회들과 목사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의 복음만을 전파해야 한다. 십자가 속죄이 복음은 영원한 복음이며, 20세기 말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다.

그 뿐만 아니라, 교회는 옛부터 믿어온 성경의 근본교리들을 포함한 교리 체계를 지키고 전파해야 한다. 우리는 그것이 개혁신학에 잘 증거되어 있다고 본다. 그것은 초대교회에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 칼케톤 신조, 및 어거스틴의 사상과 종교개혁시대에 루터와 칼빈의 사상을 통해 전달되어 왔고, 그 후에 벨직 신앙고백,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도르트 신경,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대소요리문답 등의 개혁교회의 신조들에 잘 나타나 있다고 본다.

역사적 기독교 신앙 곧 옛신앙의 보수와 전파는 말세에도 교회가 지켜야 할 기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을 믿고 속죄신앙을 고백하고 그 속죄의 복음만 전파하는 참 교회들이 곳곳에 세워져야 한다. 여기에 죄와 죽음을 정복한 하나님의 나라가 있고, 여기에 확실한 천국 소망을 가진 참된 사랑의 공동체가 있다.

오직 말씀과 기도로만 진행해야

둘째로, 우리는 오직 성경말씀과 기도로만 진행해야 한다. 교회의 바른 진행의 힘은 오늘날 유행병처럼 강조되는 신비적 은사 체험에 있지 않고, 신앙의 옛 선조들이 행하던 대로 신구약성경의 성실한 연구와 날마다 하나님을 우러러 보며 올리는 진실한 기도의 무릎에 있다. 성경말씀대로만 믿고 성경말씀대로만 살기로 굳게 다짐한다면, 현대교회의 여러 가지 문제들은 즉시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받은 자들이라면, 우리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라면, 온갖 종류의 불신앙, 불순종을 회개하고, 또 땅의 것을 구하기 때문에 오는 인간적인 변명과 타협을 깨끗이 떨어버리고, 겸손히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 앞에 복종해야 한다. 그 뜻은 신구약 성경말씀에 밝히 기록되어 있고 제시되어 있다.

성경적 분리의 원리에 충실해야

셋째로,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교제와 분리의 원리에 충실해야 한다. 이것은 오늘날 매우 중요한 점이다. 현대교회문제의 핵심은 교제의 문제에 있다고 본다. 현대교회문제는 로마서 14장에 언급된 것과 같은(1-5절, 13절) 포용하고 관용할 수 있는 어떤 지엽적 문제가 아니다. 현대교회문제는 이단과 오류를 포용하는 중대한 문제이다. 현대교회문제는 교제의 문제이다. 그것은 성경적 분리의 명령을 어떻게 순종하며 현실에 어떻게 바르게 적용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과격한 분리나 정죄는 피해야 한다. 인간적 교만은 이단의 포용만큼이나 큰 죄악이다. 우리의 주장들은 하나님의 교회들과 종들과 성도들에 대한 눈물과 동정을 가진 것이어야 한다. 배교와 타협의 악에 대한 책망이나, 하나님의 바르고 온전한 뜻에 대한 우리의 확신과 입장을 천명하는 일도 어지러워진 교회들에 대한 눈물과 동정을 가지고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대교단들이 자유주의화되었거나 배교(背敎)된 상황에서, 성경대로 믿는 목사들과 신자들은 자유화된 교단들 안에 머물러 있지 말고 분리되어 나와야 한다. 또 보수교회들은 기독교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무분별한 연합활동들을 중지하고 마땅히 자유주의자들이나 자유주의적 교단들과 분리해야 한다. 왜냐하면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 역사상 찾아볼 수 없는 가장 무서운 이단이기 때문이다.

또 오늘날 선교의 개념이 변질되어 사회정치적 활동들도 선교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경향도 단호히 배격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의 옛 복음을 그대로 증거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또 보수적 개혁교회들은 예배의 세속화와 교회 음악의 타락, 낙태와 동성애의 용납 등 교회의 윤리적 부패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반대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성경적 교회들과 주의 참된 목사들은 은사운동의 혼란에 대해서도 진실한 성도들에게 경고해야 한다.

오늘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교제의 원리이다. 성경적 보수교회들은 성경적 보수교회들만 교제해야 한다.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진다.” 보수적 교회들은, 비록 자신들의 모습이 연약하고 보잘것없을지라도, 교회의 영광을 교인수나 교회 건물의 크기나 헌금 액수 등의 외적인 데서 찾지 말고, 자신들이 고백하고 선포하는 복음진리와 거룩한 순종의 삶 등의 내면적인 데서 찾아야 한다. 성경적 교회는 땅에 속한 것들을 바라지 않고 하늘에 속한 것을 바라야 한다.

바른 신학교들을 세워야

넷째로, 우리는 바른 신학교들을 세워야 한다. 그것은 근본주의적 장로교 신학교들이어야 한다. 신학교들은 옛 선지학교와 같이 제자훈련의 장소가 되어야 한다. 거기에서 목사와 선교사 후보생들은, 경건과 거룩의 훈련과 더불어,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기본적, 또한 전체적 지식을 얻어야 하고, 기독교 교리 사상을 체계적으로 정립해야 한다. 그들은 또 사도시대로부터 오늘 시대에 이르기까지의 교회 역사에 대한 바른 입장에서의 개괄적 지식과, 특히 현대교회문제들에 대한 바른 분별력과 입장을 가져야 한다. 거기에 덧붙여, 그들은 설교와 목회와 전도의 여러 가지 실제적 문제들에 대한 필요한 지식과 훈련도 쌓아야 한다.

신앙과 인격과 실력을 구비한 충성된 신학교수들의 채용은 바른 신학교 건립을 위해 매우 중요하다. 디모데후서 2:2,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교회는 공정한 시험과 면접을 통해 교수들을 선별하여 채용해야 하며, 또한 그들이 신학연구와 교수의 일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기도와 물질로 후원해야 한다.

분열의 죄를 범하지 말아야

다섯째로, 우리는 분열의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자유주의자들이나 신복음주의자들과의 분리는 성경적인 정당한 분리이지만, 교권 쟁탈 싸움으로 인한 분열, 지방색을 따른 파벌, 이권과 명예심으로 인한 분쟁 등은 하나님 앞에 죄악된 일들이다. 욕심, 교만, 미움은 옛사람에 속한 것들이다. 갈라디아서 5:19-21,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고 단합하는 것은 성도의 초보적 생활 원리이다. 요한복음 13:34-35,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마태복음 20:26,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에베소서 4:1-3,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야고보서 3:17,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참된 교회들과 하나님의 진실한 종들과 성도들이여, 배교와 타협과 혼란의 잠에 빠지지 말고 깨어 있어라! 혹시 그런 잠에 빠졌을지라도, 어서 깨어 일어나라! 신구약 66권의 책에 밝히 증거된 하나님의 바른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오직 그 말씀에 굳게 서자!

 

                            


미주

1) The Oxford Dictionary of the Christian Church, ed. F. L. Cross (London: Oxford University Press, 1958), p. 477.

2) J. Marcellus Kik, Ecumenism and the Evangelical (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57), p. v.

3) George M. Marsden, "Fundamentalism," Eerdmans's Handbook to Christianity in America, ed. Mark A. Noll and Others (Grand Rapids: Eerdmans, 1983), p. 384.

4) David O. Beale, In Pursuit of Purity: American Fundamentalism since 1850. (Greenville, S. C.: Unusual Publications, 1986), pp. 5-8.

5) Ibid., pp. 8-9.

6) William E. Ashbrook, Evangelicalism: The New Neutralism (1975), p. 5.

7) Ibid., p. 4.

8) Foreword to Harold Lindsell's The Battle for the Bible (Zondervan, 1976).

9) George M. Marsden, "fundamentalism," in New Dictionary of Theology, ed. Sinclair B. Ferguson and David F. Wright (IVP Press, 1988), p. 268..

10) William Ashbrook, Evangelicalism: The New Neutralism.

11) Ibid., p. 9.

12) Charles Woodbridge, The New Evangelicalism (Bob Jones University Press, 1969), p. 15.

13) Ibid., pp. 34-39.

14) Ibid., pp. 47-57.

15) Gary G. Cohen, Biblical Separation Defended: A Biblical Critique of Ten New Evangelical Arguments (The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 1966), p. viii.

16) 박형룡, 신복음주의 비평 (보수신학서적간행회, 1971), 25-58쪽; 기독교 현대신학 난제선평, 개정증보판 (은성문화사, 1975), 445-471쪽.

17) 1951년 각국의 복음주의협회(NAE)들이 연합하여 설립된 세계복음주의협의회(World Evangelical Fellowship)가 2001년 이름을 바꿈.

18) 기독신보, 1990. 11. 3, 10쪽.

19) 크리스챤신문, 1995. 8. 5, 2쪽.

20) 기독교보, 1996. 7. 13, 5쪽.

21) 조선일보, 2010. 7. 16, A23쪽.

22) 기독교연합신문, 1991. 1. 13, 15쪽.

23) 교회연합신문, 1994. 2. 19, 10쪽.

24) 기독교보, 1994. 3. 12, 7쪽.

25) 한국기독공보, 1994. 4. 2, 4쪽.

26) 주영훈, “강원용 목사의 <내가 믿는 그리스도>에 대한 비평,”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 160 (2005. 7); “故 강원용 목사, 그가 남긴 씁쓸한 여운,” 바이블파워, 2006. 8. 18.

27) 기독신보, 1996. 9. 14., 19쪽.

28) 기독교신문, 1998. 2. 22, 15쪽.

29) 기독교 연합신문, 2000. 2. 13, 3쪽.

30) 교회연합신문, 2000. 5. 14, 1쪽.

31) 허순길, “방향 잃은 한국 장로교 보수교회 교단들,” 기독교보, 2005. 1. 1, 2쪽.

32) 크리스챤신문, 1986. 9. 14, 1쪽.

33) 크리스챤신문, 1993. 5. 1, 3쪽.

34) 기독교연합신문, 1993. 5. 30, 3쪽.

35) 기독교보, 1993. 12. 11, 7쪽.

36) “장로교 ‘일치(一致)운동’ 활발,” 조선일보, 1997. 4. 5, 15쪽.

37) 기독교연합신문, 1997. 5. 11, 1, 3쪽.

38) 크리스챤신문, 1998. 11. 9, 14쪽.

39) 기독교신문, 1999. 1. 17, 2쪽; 교회연합신문, 1999. 1. 17, 1쪽.

40) 조선일보, 1999. 8. 21, 18쪽.

41) 기독교보, 2000. 2. 12, 10쪽.

42) 교회연합신문, 2000. 5. 14, 1쪽.

43) http://www.newspower.co.kr/sub_read.html?uid=21036.

44) 기독교개혁신보, 2013. 7. 27, 3쪽.

45) 기독신문, 1997. 10. 29, 22쪽.

46) 기독신문, 1998. 6. 24, 23쪽.

47) 기독신문, 1998. 11. 11, 23쪽; 기독교연합신문, 1998. 11. 15, 1쪽.

48) 기독신문, 1999. 6. 23, 1쪽.

49) 기독교보, 2000. 8. 19, 6쪽. 의미 있는 글이라고 판단되어 거의 전문을 싣는다.

50) 교회연합신문, 2000. 1. 30, 10쪽.

51) 기독교연합신문, 2000. 3. 19, 1쪽.

52) 교회연합신문, 2000. 5. 14, 1쪽.

53) 기독신문, 2000. 9. 20, 2쪽.

54) 기독신문, 2000. 9. 20, 1쪽; 크리스챤신문, 2000. 9. 25, 1쪽.

55) 크리스챤신문, 2002. 7. 1, 14쪽.

56) 기독신문, 2002. 10. 2, 1쪽; 기독교연합신문, 2002. 10. 6, 9쪽.

57) 박형룡, 신복음주의비평 (서울: 보수신학서적간행회, 1971),48쪽.

58) 위의 책,49쪽.

59) 위의 책, 50-53쪽.

60) 위의 책,53-56쪽.

61) 위의 책, 57-58쪽.

62) Calvary Contender, 15 April 1993.

63) 존 E. 애쉬브룩, 신중립주의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4), 46쪽.

64) Calvary Contender, 15 May 1999.

65) Calvary Contender, 1 March 1998.

66) Christianity Today, 5 April 1999.

67) Calvary Contender, 15 April 1999.

68) Review, June 2000; Baptist Bulletin, June 2000; Calvary Contender, 15 April 2000; 1 July 2000.

69) Christianity Today, 21 May; Calvary Contender, 1 June 2001.

70) Calvary Contender, October 2003.

71) Calvary Contender, 5 September 2004.

72) David W. Cloud, Friday Church News Notes; Christian News, 8 December 2003에서 재인용.

73) Calvary Contender, December, 2003.

74) Calvary Contender, 15 March 1993; 15 April 1993.

75) Calvary Contender, 15 April 1999.

76) Charisma, May 1999; Calvary Contender, 15 May 1999.

77) Religion Today, 21 July 1999; Calvary Contender, 15 August 1999.

78) Review, June 2000; Baptist Bulletin, June 2000; Calvary Contend- er, 15 April 2000; 1 July 2000.

79) Calvary Contender, 5 September 2004.

80) Calvary Contender, 15 May 1994.

81) Fundamental Digest, October 1997.

82) Calvary Contender, 1 November 1997.

83) http://www.worldea.org.

84) 애쉬브룩, 신중립주의, 48쪽.

85) Calvary Contender, 15 December 1993.

86) 기독교개혁신보, 2013. 8. 10, 5쪽.

87) 기독교신문, 2012. 10. 24, 6쪽.

88) Calvary Contender, 15 January 2001.

89) "What Separates Evangelicals and Catholics?" Christianity Today, October 1981; 헌트, 짐승 위에 탄 여자, 318-19쪽에서 재인용.

90) Calvary Contender, 15 April 1998.

91) Christian News, 14 September 1998.

92) Calvary Contender, 15 October 1998.

93) Calvary Contender, September 2002.

94) Christianity Today, 5 August 2003.

95) Calvary Contender, September 2003.

96) Calvary Contender, 1 May 1996.

97) Calvary Contender, 15 October 1984.

98) Christian News, 14 September 1998.

99) Christian News, 29 June 1998.

100) Calvary Contender, 1 August 1998.

101) Fundamental Digest, July-August 1999; Calvary Contender, 15 September 1999.

102) Calvary Contender, 15 September 1999.

103) Christian News, 7 October 2002.

104) Calvary Contender, November 2002.

105) 기독신문, 2013. 8. 7, 18쪽.

106) Calvary Contender, 1 September 1992.

107) Calvary Contender, 15 September 1993.

108) Calvary Contender, 1 February 1998.

109) David W. Cloud; Calvary Contender, 1 January 2002.

110) Calvary Contender, January 2005.

111) Voice, May-June 1998.

112) Calvary Contender, 15 July 1998.

113) Calvary Contender, 15 November 1999.

114) Alabama Baptists, 11 November 1999.

115) Calvary Contender, 15 December 1999.

116) Calvary Contender, 15 March 1991; 15 September 1999.

117) Calvary Contender, October 2002.

118) Calvary Contender, August 2003.

119) Calvary Contender, 15 April 1998.

120) Religion Today, 17 November 1999.

121) Calvary Contender, 15 December 1999.

122) 기독교보, 2004. 1. 17, 2쪽.

123) “21세기 웨스트민스터, 목회자 양성--현장 바탕으로 한 실천적 사역에 관심,” 크리스챤 신문, 2002. 6. 24, 7쪽.

124) 기독신보, 1995. 11. 18, 17쪽.

125) 기독신보, 1995. 12. 2, 17쪽.

126) 기독신문, 1997. 5. 14, 21쪽.

127) George W. Dollar, Facts for Fundamentalists, rev. ed. (Sarasota, FL, 1983).

128) Gastonia Gazette, 22 November 1967; Dave Hunt, A Woman Rides the Beast, 정태윤 역, 짐승 위에 탄 여자 (서울: 누가, 2007), 313쪽에서 재인용.

129) McCall's, January 1978; 헌트, 299쪽에서 재인용.

130) Time, 15 October 1979; Christianity Today, 3 November 1979; Saturday Evening Post, January-February 1980; 헌트, 짐승 위에 탄 여자, 301쪽에서 재인용.

131) Christianity Today, 19 July 1993; Calvary Contender, 1 August 1993.

132) Calvary Contender, 1 December 1993.

133) "Catholics, Protestants Work for Graham Crusade," Cleveland Plain Dealer, 27 March 1994; 헌트, 짐승 위에 탄 여자, 301쪽에서 재인용.

134) Calvary Contender, 1 May 1997에서 재인용.

135) Calvary Contender, 15 June 1997에서 재인용.

136) Christianity Today, 11 August 1997; Calvary Contender, 15 Sep- tember 1997.

137) Foundation, May-June 1997.

138) Calvary Contender, 15 October 1997.

139) Calvary Contender, 1 September 1998에서 재인용.

140) Religion Today, 20 December 1999.

141) Calvary Contender, 1 January 2000.

142) Calvary Contender, 15 September 1999.

143) St. Louis Dispatch, 10 October 1999; Foundation, May-June 2002; Calvary Contender, August 2002에서 재인용.

144) Christian News, 27 September 1999, 1, 18쪽.

145) Calvary Contender, 15 January 2000.

146) Calvary Contender, 15 August 2000.

147) Berean Call, 1 May 2001; Calvary Contender, 1 June 2001.

148) The Post and Times Star, Cincinnati, Ohio, 30 August 1969; David W. Cloud, "Bill Bright Joins Hands with False Gospels," Christian News, 3 Jaunary 2000, p. 18.

149) James Hefley, "A Prejudiced Protestant Takes a New Look at the Catholic Church," 1971, p. 122; Cloud, 위의 책에서 재인용함.

150) Cloud, Ibid.

151) Foundation, July-August 1986; Cloud, Ibid.

152) Christianity Today, 14 July 1997; Calvary Contender, 1 August 1997.

153) Calvary Contender, 1 October 1998.

154) 헌트, 15쪽.

155) Christianity Today, 8 December 1997, pp. 35-37; Foundation, January-February 1998, pp. 21-25에서 재인용함.

156) Calvary Contender, 15 September 1998.

157) Ibid.

158) Calvary Contender, 15 November 1990.

159) Calvary Contender, 1 August 1999.

160) National Liberty Journal, June 1997.

161) Calvary Contender, 15 June 1997.

162) National Liberty Journal, February 2001; Calvary Contender, 1 November 1991; 15 February 2001.

163) National Liberty Journal, 2 June 2002.

164) Calvary Contender, July 2002.

165) Christian News, 29 June 1998.

166) Calvary Contender, 15 September 1998.

167) Calvary Contender, 15 September 1998; 1 May 2001.

168) Calvary Contender, 15 February 2000.

169) Christian News, 26 November 2001; Calvary Contender, 1 January 2002.

170) Ibid.

171) Calvary Contender, 15 August 1999.

172) 기독신문, 1997. 6. 4, 7, 21쪽.

173) 박형룡, 신복음주의 비평 (1971), 26-58쪽.

174) 기독교보, 2002. 9. 7, 6쪽.

175) 기독교연합신문, 2001. 7. 22, 4쪽.

176) M. H. Reynolds, The World Council of Chruches: The Cup of the Lord or the Cup of Devils?, pp. 16-20.

177) Calvary Contender, 15 October 1999.

178) Calvary Contender, 1 August 1998.

179) Calvary Contender, 15 September 1999.

180) Calvary Contender, 15 September 2001.

181) Christian News, 30 May 1996, p. 3; Gist, Spring 1996; Calvary Contender, 15 July 1998; Vantage Point, November 1998; Christian News, 19 July 1999; The Discerner, June 1999; Calvary Contender, 1 January 1999; 15 August 1999.

182) Christianity Today, 4 October 1999; Calvary Contender, 15 No- vember 1999.

183) Christian News, 24 July 2000, p. 3.

184) Christian News, 22 January 2001; Calvary Contender, 15 November 2000; 15 February 2001.

185) Dallas Morning News, 19 August 1978; David Beale, S.B.C.: House on the Sand? (Greenville, SC: Unusual Publications, 1985), 142-43쪽에서 재인용.

186) "What Separates Evangelicals and Catholics?" Christianity Today, October 1981; 헌트, 318-19에서 재인용.

187) Calvary Contender, 1 December 1992.

188) "Praise the Lord"(TBN), 17 October 1989의 테이프로부터; 헌트, 짐승 위에 탄 여자, 312쪽에서 재인용.

189) 위의 테이프; 헌트, 317쪽에서 재인용.

190) Calvary Contender, 1 December 1993.

191) 헌트, 15쪽.

192) Calvary Contender, 15 May 1994.

193) Christianity Today, 8 December 1997, pp. 35-37; Foundation, January-February 1998, pp. 21-25에서 재인용함.

194) Calvary Contender, 1 February 1998.

195) C.E.C. Journal, February 1998.

196) Calvary Contender, 1 March 1998.

197) Calvary Contender, 15 March 1998.

198) Moody Monthly, August 1998.

199) Calvary Contender, 1 September 1997.

200) Calvary Contender, 15 July 1998.

201) Moody Student, 2 February 1999.

202) Calvary Contender, 15 March 1999.

203) Proclaiming the Gospel, January-February 2000; Calvary Contender, 15 February 2000에서 재인용.

204) 헌트, 짐승 위에 탄 여자, 311쪽.

205) 헌트, 312쪽.

206) Calvary Contender, 1 August 1999.

207) Berean Call, October 1999.

208) Calvary Contender, 15 November 1999.

209) Christian News, 16 October 2000.

210) Daily Oklahoman, 15 September 2001.

211) Calvary Contender, 1 October 2001.

212) Calvary Contender, July 2003.

213) 기독신보, 1995. 7. 29, 1쪽.

214) 기독신보, 1995. 8. 19, 1쪽.

215) 기독신문, 1997. 5. 14, 21쪽.

216) 기독신문, 1997. 6. 4, 7, 21쪽.

217) 박형룡, 신복음주의 비평 (보수신학 서적 간행회, 1971), 26-58쪽.

218) 기독교보, 1997. 7. 12, 1쪽.

219) 기독교연합신문, 1999. 1. 24, 1쪽.

220) 기독교보, 26 December 1998.

221) 기독교연합신문, 1999. 1. 10, 15쪽.

222) 기독신문, 1999. 3. 3, 1쪽.

223) 김효성, 자유주의 신학의 이단성 (서울: 옛신앙, 2008), 99-103쪽.

224) 기독신문, 1999. 6. 30, 19쪽.

225) 기독신문, 1999. 12. 15, 19쪽.

226) 기독교연합신문, 2000. 3. 19, 1쪽.

227) 기독신문, 2002. 6. 26, 10쪽.

228) 기독교 연합신문, 2002. 7. 7, 18쪽.

229) 기독신문, 2002. 6. 26, 9쪽.

230) 서철원, “한국교회도 전세계적인 배도에 동승할 것인가?” 신학지남, 2002 겨울호, 4, 8-9, 10쪽.

231) 크리스챤신문, 2003.1.13, 13쪽.

232) 기독신문, 2009. 7. 15, 1쪽; 기독교보, 2009. 8. 8, 7쪽.

233) 기독신문, 2009. 8. 5, 1쪽.

234) 기독신문, 2009. 8. 5, 8쪽.

235) 김효성, 자유주의 신학의 이단성, 99-103쪽.

236) 김효성, 위의 책, 17-32쪽.

237) 김명용, 열린 신학 바른 교회론 (장로회 신학대학교 출판부, 1997), 200-201, 208-209쪽.

238) 기독교보, 1997. 7. 5, 3쪽.

239) 기독교보, 2000. 4. 1, 1쪽.

240) 기독교보, 2000. 4. 1, 1쪽.

241) 기독교보, 2002. 9. 7.

242) ICCC는 그 헌법 서문에서 현대를 이교적 현대주의의 물결이 범람하는 배교(背敎)의 어두운 시대라고 언급하고 “그의 백성에게 모든 불신앙과 부패로부터 분리하라는 하나님의 명령들은 분명하고 적극적이다”라고 진술한 후에, 다음과 같은 요지의 교리적 선언을 채택하였다: (1) 성경의 완전한 영감, 무오성(無誤性), 최종적 권위, (2) 하나님의 삼위일체, (3) 예수 그리스도의 참되고 영원하신 신성과, 그의 참되신 그러나 죄 없으신 인성, (4) 그의 처녀 탄생, (5) 그의 대리적, 속상적(expiatory) 죽음, (6) 그의 육체적 부활, (7) 동일하신 그 분의 영광스런 재림, (8) 사람의 타락과 전적 부패, (9) 성령으로 말미암은 중생과,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얻는 구원, (10) 구원받은 자들의 영원한 복과, 잃어버린 자들의 영원한 형벌, (11) 그의 보혈로 구속받은 모든 자들의 영적 일체성, (12) 하나님의 말씀대로 교리와 생활에 있어서 교회의 순결성 보존의 필요성. "Constitution of the International Council of Christian Churches," in Program and General Information: The Ninth World Congress of the International Council of Christian Churches, Nairobi, Kenya, 16-27 July 1975, p. 39.

243) 기독교보, 2003. 10. 4. 6쪽.

244) 기독교보, 2003. 10. 4, 6쪽.

245) 기독교보, 2004. 10. 9, 6쪽.

246) 기독교보, 2009. 7. 25, 1쪽.

247) 기독신문, 2009. 8. 5, 8쪽; 기독교보, 2009. 8. 8, 1쪽.

248) http://www.newspower.co.kr/sub_read.html?uid=21036.

249) 기독교보, 1997. 6. 21, 3쪽.

250) 기독교보, 2005. 1. 1, 2쪽.

251) Baptist World, July-September 1997.

252) Baptist World, July-September 1998.

253) Calvary Contender, 15 August 1998.

254) Calvary Contender, 15 August 1998.

255) Christian News, 1 June 1998.

256) Calvary Contender, 15 December 1999.

257) Calvary Contender, 1 August 2000.

258) David W. Cloud, Friday Church News Notes, 23 January 2004; Christian News, 16 February 2004, p. 3.

259) Calvary Contender, 1 August 1998.

260) PCUSA News, 28 October 2002.

261) Foundation, November-December 2002, p. 45.

262) Harold S. Hong, "General Picture of the Korean Church, Yesterday and Today," Korea Struggles for Christ (Seoul: CLS, 1966), pp. 22-23; 간하배, 현대신학해설 (서울: 한국개혁주의신행협회, 1973), 153쪽에서 재인용.

263) Ibid., p. 32; 위의 책, 153쪽에서 재인용.

264) Rhee Jong-sung, "Trends of Modern Theology," Theological Forum, V (Seoul: Yonsei University, 1959), pp. 85 이하; 위의 책, 153쪽에서 재인용.

265) “개혁주의 소고,” 신학지남 (1979. 가을), 13-24쪽.

266) David O. Beale, In Pursuit of Purity: American Fundamentalism since 1850 (Greenville, S.C.: Unusual Publications, 1986), pp. 23-33, 375- 379.

267) A Brief History of the Bible Presbyterian Church and Its Agencies, ed. Margaret G. Harden (Collingswood, N. J.: Bible Presby- terian Church, n. d.), p. 15.

268) C. T. McIntire, "Fundamentalism," Evangelical Dictionary of Theology, p. 433.

269) 박형룡, “근본주의,” 신학지남, 25권 1호 (1960), 13쪽.

270) J. Gresham Machen, Christianity and Liberalism, p. 2.

271) A Brief History of the Bible Presbyterian Church and Its Agencies, ed. Margaret G. Harden, pp. 14-23.

272) Beale, In Pursuit of Purity: American Fundamentalism since 1850, pp. 317-19.

273) "Constitution of the International Council of Christian Churches," in Program and General Information: The Ninth World Congress of the International Council of Christian Churches, Nairobi, Kenya, 16-27 July 1975, p. 39.

274) Jerry Falwell, Ed Dobson, and Ed Hinson, eds., The Fundamentalist Phenomenon: The Resurgence of Conservative Christianity (1981).

275) Kirsopp Lake, The Religion of Yesterday and Tomorrow (1925), pp. 61-62.

276) Kenneth S. Latourette, A History of Christianity, vol. 2, p. 1264.

277) Harold B. Kuhn, "Fundamentalism," Baker's Dictionary of Theo- logy, p. 233.

278) George M. Marsden, "Fundamentalism," Eerdmans' Handbook to Christianity in America, p. 384.

279) Christianity Today, 16 September 1996; 기독교연합신문, 1996. 11. 10, 7쪽.

280) 박형룡, “근본주의,” 신학지남, 25권 1호 (1960), 16쪽.

281) Calvary Contender, 1 December 1993.

282) Calvary Contender, 15 July 1993.

283) Calvary Contender, 15 November 1998.

284) 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IV. i. 12; John Owen, The Works of John Owen, ed. William H. Goold (Johnstone & Hunter; Edinburgh: The Banner of Truth Trust, 1965), XV, 106.

285) J. Gresham Machen, Christianity and Liberalism, reprint. (Grand Rapids: Eerdmans, 1974); 박형룡, 기독교현대신학난제선평 (서울: 은성문화사, 1975); 김효성, 자유주의 신학의 이단성 (서울: 옛신앙, 2008); http:// www.oldfaith.net/03modern/01자유주의신학.htm.

286) 스코틀랜드 신앙고백 (1560년), 제18항; 벨직 신앙고백 (1561년), 제28항, 제29항; Hermann Hoeksema, Reformed Dogmatics, pp. 617-621; Heinrich Heppe, Reformed Dogmaics, pp. 668-671.

287) Christian News, 31 May 1999; Calvary Contender, 1 July 1999.

288) Mark Sidwell, The Dividing Line: Understanding and Applying Biblical Separation; Calvary Contender, 1 November 1998에서 재인용.

289) Calvary Contender, 1 September 1999.

290) Calvary Contender, 1 August 1998.

291) Mark Sidwell, The Dividing Line: Understanding and Applying Biblical Separation; Calvary Contender, 1 November 1998에서 재인용.

292) Calvary Contender, 1 November 1998.

293) Calvary Contender, 15 December 1999.

294) Shepherd's Staff, 8 January 2000; Calvary Contender, 1 February 2000에서 재인용.

295) Calvary Contender, 15 March 2000.

296) OBF Visitor, November-December 2000; Calvary Contender, 1 February 2001.

297) Gospel Standard, October 2001; Calvary Contender, 15 October 2001.

298) Vantage Point, July 1998.

299) Calvary Contender, 1 September 1995.

300) A. W. Tozer, Berean Call, July 1998; Calvary Contender, 1 Au- gust 1998에서 재인용.

301) Calvary Contender, 1 April 1999.

302) Calvary Contender, 15 April 1999.

303) Calvary Contender, 1 September 1999.

304) William E. Ashbrook, Evangelicalism: The New Neutralism, p. 44; Calvary Contender, 15 September 1998.

305) Calvary Contender, 15 August 1998.

306) J. Gresham Machen, Christianity and Liberlism, p. 160.

307) Ibid., p. 166.

308) Ashbrook, p. 45.

309) John Murray, "Cooperation in Evangelism," in Collected Wri- tings of John Murray, I, 161-62.

310) "Corporate Responsibility," ibid., pp. 273-79.

311) Cornelius Van Til, The New Evangelicalism.

312) Ibid., pp. 23, 24, 28.

313) E. J. Young, "Where Are We Going?" The Presbyterian Guar- dian, 10 April 1959, pp. 187-188.

314) Gorden H. Clark, 장로교인들은 무엇을 믿는가? (서울: 개혁주의신행협회, 1980), 291쪽.

315) 김의환, 도전받는 보수신학 (서울: 서광문화사, 1970).

316) 위의 책, 114-115쪽.

317) 위의 책, 115쪽.

318) 위의 책, 96-100쪽.

319) 위의 책, 100-114쪽.

320) 위의 책, 116-117쪽.

321) 위의 책, 116쪽.

322) 위의 책, 117쪽.

323) 위의 책, 117-119쪽.

324) 위의 책, 118-119쪽.

325) 위의 책,123쪽.

326) 위의 책, 124쪽.

327) Christianity and Liberalism, p. 166.

328) 간하배, 현대신학해설 (서울: 한국개혁주의신행협회, 1973), 159쪽.

329) 위의 책,163쪽.

330) 위의 책, 165-169쪽.

331) 박아론, 보수신학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서울: 총신대학출판부, 1985), 22쪽.

332) 위의 책, 28-29쪽.

333) Christianity and Liberalism, pp. 71-75.

334) J. Gresham Machen, Christianity and Liberalism, pp. 48-52.

335) Ibid., p. 52.

336) 박아론, 29-30쪽.

337) 위의 책, 30쪽.

338) 위의 책, 30-31쪽.

339) 위의 책, 31쪽.

340) 박형룡, 신복음주의 비평 (서울: 보수신학서적간행회, 1971), 23쪽.

341) 박아론, 33쪽.

342) 위의 책.

343) O. Talmadge Spence, Fundamentalism: Not a Cult (Dunn, N. C.: Foundations Press, 1993).

344) Spence, Ibid., p. 22.

345) 박아론, 32-35쪽.

346) 박아론, 34쪽.

347) Spence, p. 26.

348) 박형룡, 신복음주의 비평, 47쪽.

349) Calvary Contender, 1 March 1998에서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