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 분리의 원리

김효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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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현대교회의 여러 문제들을 지적하였고 그것이 왜 잘못인지에 대해서도 성경적으로 살펴보았다. 그러면 이제 남은 것은 우리가 이러한 교회의 현실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것은 교제(交際)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교제의 원리, 특히 교제의 단절, 즉 분리의 원리에 대해 정리해보자.

여기에서 말하는 '교제'란 교회적 교제 즉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나누는 영적 교제를 말한다.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나누는 이 교제는 성찬식에 함께 참여할 때 잘 표현된다. 성경은 성도의 사랑의 교제를 강조하지만 또한 어떤 이들과의 교제의 단절, 즉 분리에 대해서도 가르친다. 전통적으로 개혁교회는 참 교회의 한 표지로서 '권징의 성실한 실행'을 강조해왔다. 우리가 살펴볼 '성경적 분리의 원리'는 바로 권징에 대한 성경 교훈 속에 들어 있는 원리이다.

 

분리의 대상들

성경은 우리가 어떤 자들과 교제하지 말라고 가르치는가?

첫째로, 성경은 우리가 불신자와 교제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사도 바울은 교훈하기를,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 . .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분리하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고 하였다(고후 6:14-18). 교회와 세상,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사이에는 명확한 선이 있다. 교회는 성도들의 모임이며 교회적 교제에는 어떤 선이 있다. 누구든지 주께로 나오라고 초청되지만, 믿는 자만 성도로서의 영적 교제를 나눌 수 있다.

둘째로, 성경은 우리가 이단자와 교제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로마서 16:17-18,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교훈[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이 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의 배만 섬기나니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 디도서 3:10,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거절하라]." 요한이서 7, 11,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니라." 유다서 3-4,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 들어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뜻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오늘날 이단 중 대표적인 것은, 천주교회를 비롯하여, 여호와의 증인, 몰몬교, 안식교 등의 이단종파들과, 현대 자유주의 신학이다. 천주교회는 개신교가 전통적으로 적그리스도적이요 우상숭배적이라고 간주한 이단으로서 역사가 가장 오래되었고 세력이 가장 큰 교회이다. 또한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의 근본 교리들, 예를 들면, 성경의 신적 권위와 무오(無誤), 하나님의 형벌적 공의,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 처녀 탄생, 신성(神性), 대리적 속죄, 육체적 부활, 재림, 지옥 등을 부정하는 무서운 이단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자유주의 신학을 결코 용납해서는 안되며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목사들을 권징 출교해야 한다. 그러므로 자유주의자들과의 교제와 협력을 주장하는 신복음주의 혹은 복음주의의 입장은 잘못이다.

셋째로, 성경은 우리가 드러난 죄를 짓고 회개치 않는 자와 교제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또한 교회도 그런 자를 포용해서는 안 된다. 고린도전서 5:11-13,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람하거나 우상숭배를 하거나 후욕하거나 술취하거나 토색하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외인들을 판단하는 데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중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치 아니하랴. 외인들은 하나님이 판단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 쫓으라." 이런 점에 비추어 볼 때, 오늘날 참된 교회들은 윤리적으로 공공연하게 심히 부패한 교회들과의 교제를 끊어야 할 것이다.

넷째로, 성경은 우리가 사도들의 교훈 곧 신약성경의 교훈을 고의적으로 어김으로 교회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들과 교제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데살로니가후서 3:6, 14-15,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규모 없이[무질서하게]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지 말고 형제같이 권하라."

이 말씀은 이 편지가 쓰이던 당시에는 성실하게 일하지 않는 자들과의 교제에 대한 교훈이었지만, 그 원리는 다른 경우에도 적용된다. 특히, 이 말씀은 오늘날 이단을 배격하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어기고 자유주의 신학이나 자유주의 신학자들을 용납하고 그들과 교제하는 소위 신복음주의자들에게 적용될 수 있다. 비록 신복음주의자들의 다수가 신학 사상이 변질된 이단이 아니고 우리와 같이 복음을 믿는 참된 성도요 우리의 형제라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그들의 불순종과 타협을 용납해서는 안 되고 그것을 지적하고 책망하고 만일 그들이 그 행위를 고치지 않는다면 그들과의 교제를 끊어야 할 것이다.

마크 시드웰은 다음과 같이 바르게 말했다:

공적인 인물이 범하는 공적인 죄는, 속임을 당하는 자들을 위해 공적으로 책망되어야 한다. 예를 들면, 배교와의 교제를 옹호하고, 거짓 교사들과 불신자들과 협력하는 자는 하나님의 명령에 공적으로 도전한 죄가 있다. . . . 어떤 사람이 비성경적 입장의 주된 선동자요 조장자요 옹호자일 때, 우리는 그가 조장하는 그 죄를 비난하면서 그 사람을 폭로하지 않을 수 없다.

페이스 복음주의 루터교회 신학교의 교수인 데오도르 슈브케겔은 신복음주의를 '치명적 악'이라고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근본적 문제는 . . . 교회 내에서 오류와 잘못된 가르침을 어떻게 취급할 것인가이다. 옛방식은 . . . 오류에 빠진 사람을 책망하고 그를 교정하는 것이다. 만일 그가 그의 잘못된 가르침을 고집하면, 우리는 그가 회개하고 그의 길의 잘못에서 돌아서기까지 그를 우리로부터, 혹은 우리 자신을 그로부터 분리시킨다. 이것이 성경적 방법이다. . . . 그러나 신복음주의자들은 이런 분리의 방침을 내버리고 그 대신에 오류를 포용하는 침투라는 방침을 취하였다.

 

분리의 이유들

우리가 이런 사람들과 교제를 끊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그 첫번째 이유는 교회의 본질 때문이다. 교회는 근본적으로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임이며, 참된 성도라면 성경적 교리를 믿고 성경적 교훈에 순종할 것이 기대된다. 그러므로 교회의 이러한 성격에 배치되는 요소들, 곧 불신앙, 이단, 회개치 않는 죄, 고의적 불순종 등을 우리는 교회에서 배격하고 제거해야 한다. 예를 들어, 오늘날 자유주의자들이나 자유주의 교회들과 협력하는 전도활동은 겉보기에 큰 결실이 있는 것 같을지라도 그것의 잘못된 교제가 옳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구실도 용납지 말고 그런 활동을 반대하고 배격해야 한다. 우리의 일차적 관심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물량주의, 숫자주의, 실용주의가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 순종하는 성경주의, 진리주의이다.

두 번째 이유는 교회의 순결성 때문이다. 교회는 거룩한 교회이며 또 거룩해야 한다(엡 5:26-27). 교리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그러해야 한다. 이단은 저주받을 사상이며 멸망케 할 사상이다. 갈라디아서 1:8,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베드로후서 2:1,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그러므로 교회는 이단이나 고의적 죄악을 포용해서는 안 된다. 비록 지상에 완전한 교회가 없겠지만, 우리는 순결한 교회, 흠 없는 교회를 건립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교회는 뻔뻔스런 불신앙이나 고의적 불순종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

세 번째 이유는 악의 전염성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교회에 들어온 교리적 오류를 책망하면서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고 말했다(갈 5:9). 또 그는 디모데에게 이단자를 조심하라고 말하면서 "저희 말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진리에 관하여는 저희가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하므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고 했다(딤후 2:17-18). 또 그는 고린도교회가 윤리적 악을 포용한 것을 책망하면서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말했다(고전 5:6). 교리적 오류이든지 윤리적 오류이든지, 죄악은 누룩처럼 혹은 독한 창질처럼 교회 안에 나쁜 영향을 끼친다. 그러므로 악의 전염성 때문에 교회는 악을 제거하고 악의 영향을 차단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는 조만간 부패되고 말 것이다.

네 번째 이유는 하나님의 명예 때문이다. 교회가 윤리적 죄악을 포용하면, 세상 사람은 교회를 비난할 뿐 아니라, 또한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도 비난하고 조롱할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명예를 위해서도 그 거룩함을 지켜야 한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2:24에서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악행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분리의 방법들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 교제를 끊어야 하는가?

우선, 교회 지도자들의 잘못된 교훈과 입장과 활동들은 지적되고 비평되어야 한다. 어떤 이들은 '교훈들을 비평하고, 교훈하는 자들을 비평하지는 말라'고 말하지만, 교훈과 교훈하는 자는 분리되기 어렵다. 밴가드지는 다음과 같이 적절히 말하였다:

첫째, 사람의 이름을 드는 것은 성경적이다. 사도 바울도 사도 요한도 사람의 이름을 들어 비평하였다.

둘째, 우리가 사람을 칭찬하기를 좋아한다면, 사람을 책망하는 것도 논리일관한 일이다.

셋째, 사람의 이름을 드는 것은 실제적인 문제이다. 슬프게도, 사람들은 흔히 설교들보다 설교자들을 따른다.

넷째, 사람의 이름을 드는 것은 역사적 후원이 있다. 교회역사상, 사람들은 그들이 반대하는 내용에 대해서뿐 아니라 반대하는 인물에 대해서도 분명히 말하기를 겁내지 않았다.

성경이 가르치는 분리는 일차적으로 교회적 교제의 단절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 교제를 끊어야 할 대상자들이 있을 경우, 성도들은 성경이 가르친 대로 또 교회 헌법의 권징의 규칙을 따라 권계(권면과 충고), 수찬정지(성찬식에서 제외), 제명출교의 절차를 행해야 할 것이다(마 18:15-17). 비록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사람들 간의 막힌 담뿐 아니라 인간들 상호 간의 막힌 담도 허무신 위대한 화해자이시지만, 비록 그들 중 어떤 이들이 우리와 똑같이 주의 피로 구속받은 진정한 형제요 자매이겠지만, 비록 우리가 그들 중 어떤 이들과 함께 천국에 들어갈지도 모르지만, 성경적 분리는 성경의 교훈이다.

불신앙, 이단, 회개치 않는 악, 고의적 불순종에 대한 적절한 권징과 교제 단절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과 명령이다. 고린도전서 5:11-13, "[이런 자와는] 사귀지도 말고 . . . 함께 먹지도 말라 . . .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 쫓으라." 데살로니가후서 3:14,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그러므로 교회는 합법적 권징과 교제의 단절을 실행해야 한다.

특히, 교회는 성경의 근본 교리들을 부정하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이나 목사들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교회에서 출교되어야 할 이단자들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신학교 교수를 청빙할 때 이사들은 먼저 청빙할 자들의 신학사상이 건전한 지를 신중히 심사해야 한다.

또 성경적 교회들은 자유주의 교회들이나 포용주의적 교회들과 교제하지 말아야 한다. 오늘날 기독교계는 대교단들이 자유주의화된 상황이므로, 세계교회협의회(WCC)와 각 나라 교회협의회(NCC)는 잘못된 단체들이다. 그러므로 성경적 교회들은 이러한 단체들과 관련된 활동들을 반대해야 하고 거기에 참여치 말아야 한다.

또 빌리 그레이엄의 전도활동과 같이 자유주의자들이나 자유주의 교회들과 협력하는 전도활동은 명백히 비성경적이고 인본주의적이므로 우리는 그런 활동을 인정하지 말고 거기에 참여하거나 그것을 후원하지 말아야 한다. 또 부활절 연합예배나 연합성찬식같이, 보수주의적 교회들과 자유주의적 교회들을 망라한 초교파적 연합집회들이나, 성서공회, 기독교 방송국, 찬송가공회 등의 연합활동들은 옳지 않다. 성경의 기본적 교리들을 믿는 교회들 간의 초교파적 연합활동은 가능하고 필요하지만, 보수주의적 교회들과 자유주의적 교회들 간의 연합활동은 확실히 비성경적이다.

덧붙여서 생각할 바는, 한 교회 혹은 교단이 자유주의화되었거나 자유주의자들을 고의적으로 포용할 때, 보수적 신자들 혹은 목사들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 우선, 그는 그 교회와 교단이 자유주의자들을 쫓아내고 성경적 교회와 교단이 되도록 말과 글로써 또 합법적 절차를 따라 노력함으로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러나 그 교회나 교단이 자유주의자들이나 혹은 그들을 옹호하는 세속적 교권주의자들의 손에 장악되어 있어서 자유주의자들의 권징 출교나 교회 정화 혹은 개혁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될 때, 그는 그 교회와 교단을 떠나야 하며 바른 입장을 가진 성경적 교회를 찾아 거기에 속하거나 그러한 교회 혹은 교단을 설립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너희는] 거기서 나와서 따로 있으라"고 말했고(고후 6:17) 또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고 했다(엡 5:11).

물론, 우리는 교회적 교제를 끊어야 할 대상자들과 개인적 교제를 가지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 때때로 그런 자들과의 개인적 교제를 완전히 끊기 어려운 상황이 있을 것이다. 그런 자가 우리의 가족들 중에나 우리의 친구들이나 이웃들 가운데 있을 수 있다. 그런 경우, 우리는 조심해야 한다. 무분별한 교제로 악을 용납하거나 승인하는 인상을 주위에 주어서는 안 될 것이다.

구약시대 유다 왕국에 경건했던 여호사밧 왕은 이스라엘 왕국의 악한 아합 왕과 교제함으로써 하나님의 책망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 후손에게 이스라엘 왕국의 우상숭배의 씨를 뿌리는 결과가 되었다. 선견자 예후는 여호사밧에게 "왕이 악한 자를 돕고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이 가하니이까?"라고 책망하였다(대하 19:2). 사도 요한은 요한이서 7-11절에서 "[이단자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니라"고 말했다.

그러나 우리는 잘못을 범한 자들과 교제를 끊을 때, 매우 신중해야 한다. 우리의 교제 단절은 먼저 우리의 성실한 노력을 전제해야 한다. 우리는 상대의 잘못의 교정을 위해 먼저 개인적으로 진지하게 권면하고 교회적으로 성실히 노력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교제를 끊어야 할 때에도 지금이 불가피한 분리의 때인지 신중히 생각하고 판단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성급한 분리가 교회의 개혁과 갱신에 유익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해를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신자 개인의 경우에는 교회적 대책이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그가 떠나야 할 교회 대신에 그가 속할 만한 건전한 보수적 교회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이 점에서 때때로 어려움이 많이 있는 것 같다.

분리에는 항상 지나친 태도의 위험성이 있다. 건전한 성경적 확신보다 개인적 해석이 분열의 문제점으로 부각될 수도 있다. 죤 애쉬브룩의 말과 같이, "분리는 배교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다. 또 분리는 배교로부터 분리하기를 원치 않는 불순종하는 형제들의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다. 그러나 분리가 형제들 간의 모든 불일치에 대한 대답은 아니다."

또 우리는 이런 교회적 갈등과 결단의 때에 겸손과 온유와 사랑을 잃지 말아야 한다. 미움이나 교만은 그 어떤 죄 못지 않은 큰 죄다. 사람이 성경적 분리의 명령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좋은 성품을 가지는 것은 더 중요하다. 더구나 우리의 우리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른 이들보다 영적 분별력을 좀더 가지게 되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며 따라서 우리는 어떤 경우에라도 교만해서는 안 된다. 갈라디아서 6:1,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으라." 디모데후서 2:25,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하라." 데살로니가후서 3:15, "그들[무질서하게 행하는 자들]을 원수같이 생각지 말고 형제같이 권하라."

이와 같이 '성경적 분리의 원리'를 고찰해 볼 때, 자유주의적 배교와 신복음주의적 타협을 반대하고 성경의 교훈대로 순수하게, 성실하게 행하고자 하는 것이 바른 입장이다. 그것이 성경에 계시되고 교훈된 하나님의 뜻에 일치한 입장이다. 우리는 인본주의적 관념의 넓은 길을 버리고 성경 진리대로 좁은 길을 구하며 확신하며 그 길로 진행해야 한다. 두드러진 교리적, 윤리적 오류의 묵인은 하나님께 대한 불성실과 불순종이며, 참된 성도들과 교회는 당연히 그런 오류와 타협치 말고 그것으로부터 떠나야 한다. 이러한 입장이 근본주의라고 불리우며, 그것은 성경적으로 옳은 입장이다.

배교와 타협으로부터의 분리는 정당하다. 1999년 10월, 미국 기독교회 협의회(ACCC)는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근래의 수년 간 우리는 복음주의자들과 천주교인들이 하나님께서 친히 두신 분리의 벽을 제거하기 위하여 서로 간의 일치의 문서들에 서명하는 것을 보아 왔다. 자칭 근본주의자들과 신복음주의자들은 또한 함께설 공통적 기반을 찾고 있다. 그러나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 따로 있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계속 견고하다. 진리와 오류가 하나로 함께 거하는 것은 여전히 금지되어 있다. 분리의 교리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은 성령의 중생케 하심으로 그에게 속한 자들을 보호하시기 위함이다. 아모스 3:3은 '두 사람이 의합(意合)하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느냐?'고 질문한다. 가룟 유다는 그리스도와 제자들 가운데 행하였지만 그들에게 속한 자가 아니었다고 성경은 가르친다. 바울은 유대주의자들을 '흉악한 이리'라고 말했는데(행 20:29), 그것은 그들이 은혜의 복음에 무엇을 더했기 때문이었다. 중생한 신자가 주께 불성실함 없이 불신자들이나 타협자들과 멍에를 같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불순종은 죄이다. . . . 분리의 교리에 대한 성실한 고수(固守)는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들에게 요구하시는 거룩과 순결을 보존시킨다.

캘버리 컨텐더지는 다음과 같이 잘 말했다:

쥐를 죽이는 것은 98퍼센트의 햄버거 속에 혼합된 2퍼센트의 독약이다. 진리와 거짓의 혼합물은 격리되고 분간될 수 있는 순수한 거짓보다 보통 훨씬 더 치명적이다. 하지만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흔히 "그러나 그 안에 좋은 점이 매우 많다"고 말한다. 모든 거짓 사상 체계들은 진리의 요소를 담고 있다. 실상, 더 많은 진리가 치명적 오류와 섞일수록, 그것은 속임을 위해 더 많이 위험하다. 속임수는 효력이 있으려면 내용적으로 참되게 보여야 한다. 목표를 향해 전달되는 내용의 90퍼센트 이상은 참되어야 한다. 그러나 미혹의 시대라도 그리스도인들은 속임 당함에 대해 핑계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은 우리 시대의 오류나 오류자들을 폭로하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사 8:20).

오류에 대해 침묵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잘못이다. 캘버리 컨텐더지는 다음과 같이 바르게 말했다

스스로 기독교적이라고 주장하는 개인이나 단체가 정통적 기독교의 역사적 성경적 교리들로부터 심각하게 떠날 때, 우리는 게으르게 침묵하며 서 있어서는 안 된다(딛 1:9-11). 말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 욕을 돌리는 것이며 오류의 전파자들과 그것을 듣는 자들을 사랑하지 않는 일일 것이다. 말없는 파수꾼들은 없는 것보다 더 위험하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파수군들이 의무를 다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안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유다 나라의 목자들을 '눈 먼 파수꾼들'이라고 부르셨고 또 그들을 '벙어리개요 능히 짖지 못하는 자'라고 말씀하셨다(사 56:10).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그릇된 교리를 비난하지 않으셨고, 오직 그들이 경고했어야 할 때 잠자고 있었음을 비난하셨다.

여러 문제들로 혼란스러운 오늘날 교계의 현실에 사랑과 관용만을 부르짖는 것은 하나님의 원수들을 이롭게 하는 것뿐이다! 교회 내의 오류들은 지적되고 제거되어야 한다. A. W. 토저는 말하기를, "사랑을 가장한 소심함 때문에, 많은 교회들에서 헛된 형식들과 비성경적 행위들이 계속 허용되었고, 그것들은 결국 점점 교회의 생명을 질식시켰고 교회를 황폐케 만들었다," "타협은 압박을 제거할 것이다. 사탄은 싸우기를 그친 사람을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중지의 대가는 평화로운 침체의 삶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테리 아놀드(Terry Arnold)도 다음과 같이 적절하게 말했다:

오늘날 '관용'이라는 말은 새 사고방식으로 칭찬을 받는다. 기독교 세계에서와 기독교 교리에서 관용에 대한 점점 더 많은 요구가 있다. 그러나 실제로 의미한 바와 성취된 바는 관용이라기보다 흔히 '타협'이다. . . .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과 그의 말씀을 타협하는 것은 죄이다! 중요한 교리들을 타협하는 것도 또한 죄이다! 거짓 교사들과, 사람을 건전한 교리에서 떠나게 하는 자들과 타협하는 것도 죄이다. 성경은 때때로 일치보다 분리에 관하여 말한다. . . . 예수께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에 대해 관용하셨지만 결코 타협하지 않으셨다. 사실 그는 흔히 논쟁에 휘말리셨다! . . . 나는, 그들이 뒤에 더 큰 것들에 대해 타협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지금 작은 것들에 대해 타협하는 소위 '화평케 하는 자들'을 주의한다. 많은 목사들은 사람들이나 그들 자신의 지위나 인기를 잃어버릴까봐 두려워서 어떤 문제들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취하지 않을 것이다. . . . 진리를 희생하는 관용은 타협에 이른다.

 

역사적 후원

16세기 종교개혁은 20세기 근본주의 운동의 모본이 된다. 일반적으로 권징은 회개치 않는 범죄자를 교회로부터 배제하는 행위이지만, 16세기 종교개혁 당시에는 서방의 천주교회가 전체적으로 변질, 부패되어 있었기 때문에, 종교개혁자들은 그 교회로부터 분리되어 나와야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분파주의자들이 아니었다. 종교개혁은 분파운동이 아니었다. 오히려 부패된 교회 속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악한 일이었다.

20세기 기독교계의 상황은 16세기 종교개혁 당시보다 더 어둡고 혼란스럽다. 역사적 대교단들은 자유화되었거나 자유주의를 고의적으로 포용하는 넓어진 교회들이 되었다. 다수의 교회들은 자유주의자들을 권징하거나 출교시킬 의사가 없다. 보수적인 교회들도 자유주의적 혹은 포용주의적 교회들과 점점 더 자유로이 교제하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참된 성도들과 목사들은 배교적 혹은 포용적 교회들 안에 그대로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그들의 속한 교회들이 어떤 방향으로 가든지 우리만 보수적으로 믿으면 된다고 안일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그 교회들에서 나와야 하고 그런 잘못된 교제와 협력에서 분리되어야 한다. 이것은 분파주의적 관념이 아니고 성경이 명령하는, 또 우리가 순종해야 하는, 정당한 분리이다. 참된 성도들이 죽은 교회, 배교적인 교회로부터 떠나는 것은 그들의 자유이며 또한 의무이다.

침례교 연맹의 교리적 탈선을 지적하면서 1887년 그 단체로부터 탈퇴했던 촬스 스펄젼(Charles Spurgeon)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가 아는 한 하나님의 진리를 전파했고, 그 독특한 내용들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나는 나의 증거를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 신앙이 잘못된 자들로부터 또 심지어 그들과 교제하는 자들로부터 내 자신을 분명하게 단절시켰다. . . . 오류가 확립되었음을 내가 보았거나 내가 보았다고 생각하자마자, 나는 심사 숙고하지 않았고 즉시 그 단체와 결별했다. 그 때 이후 나의 한가지 조언은 '그들로부터 나오라'는 것이었다. . . . 오류에 연루되는 것은 가장 훌륭한 사람들에게서 그 오류를 성공적으로 저항할 능력을 빼앗아 갈 것이다.

유명한 캠벨 모간(Campbell Morgan) 목사도 잘못된 관용이 선한 영향력을 잃게 만든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배신 행위인 관용이 있다. 마비 상태를 낳는 화평이 있다. 교회가 일을 할 때 타협에 근거한 교제를 요청하는 자들에게 '아니오'라고 말해야 할 때들이 있다. 그렇게 떨어져 서 있는 것은 추방과 핍박을 낳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능력과 영향력을 유지할 것이다. . . . 오늘날 교회는 타협에 의해 그 자신의 영향력을 파괴시켰다.

20세기 초에 미북장로교회의 배교에 대항해 싸웠던 인물이며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설립자의 한 사람이었던 메이천(J. G. Machen)은 자유주의자들과의 분리의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역설했다:

한가지 사실이 완전히 명백하다. 즉 자유주의자들이 기독교인이든지 아니든지 간에, 자유주의가 기독교가 아니라는 것은 여하튼 완전히 분명한 것이다. 또한, 그것이 그러하다면, 자유주의와 기독교가 계속 같은 조직체 안에서 전파된다는 것은 지극히 바람직하지 못하다. 교회 안에 있는 그 두 부류들의 분리는 이 시대의 절실한 요구이다.

그는 배교적 교회로부터의 분리의 정당성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만일 자유주의파가 실제로 교회의 기관들을 완전히 장악한다면, 복음주의적 그리스도인은 그 교회의 활동을 계속 후원할 수 없을 것이다. . . . 만일 자유주의파가 실제로 교회를 장악한다면, 복음주의적 기독교인들은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물러설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메이천은 또한 신복음주의적 타협의 죄에 대해 "오늘날 가장 나쁜 죄는 당신이 기독교 신앙을 동의하고 성경을 믿는다고 말한 다음, 기독교의 기본적 사실들을 부인하는 자들과 협력하고 타협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조직신학 교수였던 죤 머리(John Murray)는, 자유주의자들과 협력하는 신복음주의적 전도 방법에 관해, 자유주의자들에게 전도하는 것과 그들과 함께 전도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고 말하면서 자유주의자들과 협력하는 전도 방법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다고 분명하게 비평하였다. 또한 그는 신자의 교회 소속 문제에 관해, 우리가 소속한 교회의 집단적 증거는 곧 우리의 증거이며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께 신실한 교회에 소속해야 한다고 말했고 또 집단적 관계와 책임을 무시하는 것은 악이라고 부언하였다.

웨스트민스터신학교 변증학 교수였던 코넬리우스 반틸(Cornelius Van Til)은 신복음주의의 신학적 약점들, 타협적 전도 활동, 신복음주의 잡지들 등을 비평하였다. 그는 타협적 전도 활동을 반대한 메이천의 입장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메이천은 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을 주장하는 자들과 협력함으로 이루어지는 협력 선교, 협력 전파, 협력 전도를 반대했다. 메이천에게 그러한 협력은, 사도 바울에게 유대주의자들과의 협력이 불가능했던 것처럼 불가능하였다. . . . 그는 그 자신의 교회에서 선교에 있어서 자유주의자들과 협력하는 것을 생각할 수 없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독립 선교부를 조직하지 않았을 것이다. . . . 그는 협력 전도 개념이 그에게 그리스도께 대한 충성의 배신임을 명백히 하였다.

웨스트민스터신학교 구약 교수였던 E. J. 영(Edward J. Young)은 신복음주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실, 그것[신복음주의]은 매우 중요한 교회의 교리와 신앙을 위한 활기찬 투쟁의 필요성 외에 모든 것을 강조한다. . . . 그러면 신복음주의가 오늘날의 상황에 대한 해답인가? 우리는 아니라고, 강조해서 아니라고 대답한다. 여기에 한 일시적 현상이 있다. 또 그것이 빨리 지나갈수록 교회를 위해 더 유익하다. . . . 근본주의 안에는 훌륭한 많은 점들이 있고, 만일 우리가 근본주의와 신복음주의,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강요를 당한다면, 우리는 어떤 주저도 없이 근본주의를 택해야 할 것이다. 근본주의는 신앙의 변호에 관심을 가지고 있고, 그러한 관심은 참으로 성경적이다. . . . 그것[근본주의]은 실수들을 범했으나, 외쳐야 할 적절한 때가 오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저 조심성 있는 중도파들이 범한 것과 같은 그렇게 큰 실수는 아니었다.

기독교 신학자요 변증가인 고든 클락(Gorden H. Clark)은 배교적인 교회로부터의 탈퇴의 정당성을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했다:

모든 교회는 약간씩은 다 허물이 있으므로 교적을 바꾸는 것은 결코 옳지 않다고 하는 그럴 듯한 변론은 루터와 칼빈이나 청교도들에게 결코 통하지 않았던 변론이다. 방종한 촬스 2세가 반기독교적 법령을 제정하여 강요한 까닭에 약 2,000명의 목사들이 1660년 영국 국교를 탈퇴했던 것을 기억하라. 이렇게 탈퇴함으로 그들은 생활비를 받을 수 없게 되었고, 어떤 경우에는 옥고를 치루기도 하였다. . . . 금일에 작은 형벌이라도 기꺼이 받고자 하는 목사들이 과연 몇명이나 있을까? 그리고 약간의 방해 외에는 전혀 아무런 형벌을 가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과연 평신도 중에 몇명이나 배교적 조직체를 탈퇴할 만한 확신을 갖고 있을까?

앞에서 인용한 주의 종들이 취한 입장은 성경적 입장이다. 성경은 성도들 간의 사랑의 교제를 가르치는 동시에, 이단자들이나 고의적인 불순종자들과 교제를 끊을 것도 가르친다. 우리가 근본주의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런 입장이며, 그것은 성경적이고 옳은 입장이다. 배교와 타협으로부터의 분리를 주장하는 입장이 성경적으로 옳다.